1. 머리말
2. 아리스토텔레스와 갈레노스
1) 두 종류의 정액
이와 같이 여성에게는 이것[=생리혈]이 남성의 씨앗에 해당하는 것이고 두 정액의 동시 분비는 이치에 닿지 않기에, 발생과 관련하여 여성은 정액으로 기여하는 바가 없다[=여성은 정액을 배출하지 않는다]. 만약 <여성에게> 정액이 있다면 어쨌든 <여성들은> 생리를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7].
물론 방금 말했던 것처럼 여성정액은 운동과 관련하여 불완전하다. 그리고 남성<의 정액>은 참으로 더 완전한 <운동을> 일으킨다. …… 그러므로 <여성은> 남성정액을 필요로 함이 명백하다. 경우가 이러하다면, <여성정액은> 그것[=남성정액]과 반드시 섞여 양쪽 정액이 하나의 운동에서 함께 할 것이다[9].
2) 교부시대의 아리스토텔레스와 갈레노스 이해
그분이 혈통에서 태어나지 않았다는 것은 그분 육신의 실체 자체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거품의 형태로 되어 있으며 여인의 피를 응고물로 변화시키는 (남자의) 피의 열기인 씨의 재료를 거부하는 것이다. 사실 치즈의 경우에도, 압축의 방법을 통해 응고된 것의 실체는 다름 아닌 우유이다. 그러므로 “육욕이나 남자의 욕망에서 태어나지 않았다”는 말은 성교를 통해 주께서 태어나셨다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지 모태에 계셨다는 것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라는 뜻으로 우리는 이해한다[10].
남성과 여성은 동일한 <생식> 기관을 보유한다. 단지 <여성의 기관은 몸> 밖이 아니라 안에 있을 뿐이다. 아리스토텔레스와 더불어 데모크리토스는 자식을 생산하는 데 여성정액이 기여하는 바가 전혀 없다고 여긴다. 왜냐하면 여성들로부터 나오는 것이 정액이라기보다는 기관<이 흘리는> 땀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갈레노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잘못을 지적하며 여성이 참으로 정액을 분출하며 양 측[=남성과 여성]의 정액의 섞임이 잉태라는 결과를 맺는다고 말한다[11].
3. 의학과 철학, 그리고 신학
군주: 나는 그대가 방금 여성정액 없이는 결코 잉태할 수 없다고 말했던 것을 기억한다. 하지만 참된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저항하고 울면서 난폭함을 겪은 성폭행 피해 여성들이 수태하는 것을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이 그런 행위 중에 쾌락을 얻었다고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쾌락 없이는 정액을 내어 놓을 수 없지 않은가?
철학자: 성폭행을 당한 <여인은> 처음엔 불쾌감을 느낄 것입니다만 결국 육신의 나약함으로 인해 쾌감을 느낍니다. 또한 인간에게는 두 가지 의지, 즉 이성적인 의지와 자연적인 의지가 있는데 우리는 이들이 우리 안에서 상충함을 느낍니다. 왜냐하면 종종 육신을 즐겁게 하는 것이 이성을 불쾌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폭행을 당한 여인에게는 이성적 의지가 아니라 육신의 쾌락이 있는 것입니다[13].
의학자가 학문의 뿌리는 모르는 채 가지에 대해서는 많은 것을 안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그들이 실상> 아무 것도 말한 것이 없으면서 무엇인가를 말한다고 여기며 아리스토텔레스를 거슬러 말하는 것을 목도할 수도 있으리라[15].
이 두 가지 입장 중 하나에 대한 분명한 앎은 실로 자연학에 속한다. 그래서 그에 대한 무지가 의학자에게 흉이 되지는 않는다[16].
그래서 우리는 다시금 말한다. 기관들 중에서 정액으로부터 발생하여 살과 지방을 제외한 그런 부분들로 이루어진 기관들은 지방과 살처럼 피로부터 발생한 기관과 다르다. 왜냐하면 이 둘을 제외하고 두 정액, 즉 남성정액과 여성정액으로부터 발생한 것이기 때문이다. 지혜로운 사람들에게 참을 알려준 그 분[=아리스토텔레스]의 가르침에 따르면 치즈가 응고제에 의해 발생하듯이 남성정액으로부터 <자손이> 발생하고 치즈가 젖으로부터 발생하듯이 여성정액으로부터 자손이 발생한다. 그래서 마치 <치즈를 만들 때 치즈의> 응고 작용의 원리가 응고제에 있듯이 <생명체가 형성되는> 응집 작용의 형상적 원리는 남성정액에 있다. 그리고 치즈의 생산에서 응고의 원리가 젖 안에 있는 것처럼 [=응고가 젖 안에서 시작하는 것처럼], 형상에 의해 질료가 응집하는 작용의 원리, 즉 수용하는 힘의 원리는 여성정액에 있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 둘, 즉 응고제와 젖 각각은 그들로부터 나온 치즈의 실체의 부분인 것처럼 양성의 정액 각각은 태아의 부분이다. 이 말이 불충분하지는 않다. 그러나 참으로 갈레노스의 말과는 참으로 많이 상충된다. 그는 양쪽 모두의 정액이 제각기 응집시키는 힘과 응집을 받아들이는 힘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로 인해 그는 응집시키는 힘은 남성의 <정액> 안에서 더 강하고 응집을 받아들이는 힘은 여성정액에서 더 강하다고 말하기를 삼가지 않았다[19].
온당히 말해서 여성은 사정(射精)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정액이 완전히 소화된 양분의 최종적 부산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소화의 완결은 강력한 열에 의해서 야기되는 반면, 여성은 단지 약한 열기만을 보유하고 있다. 이런 까닭에 여성에게는 정액을 생산할 충분한 힘이 없다. 대신에 남성 안에서 강력한 열기가 정액을 만들 듯, 여성의 약한 열기는 생리혈을 만든다. 왜냐하면 생리혈은 덜 정제되고 소화되지 않은 혈액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여성에게 정액이 어떤 방식으로는 있을 수 있다는 것은 이해해야 한다. ……그럼에도 여성에게서 확인되는 정액은 온당한 의미에서 발생에 부합하는 정액은 아니라는 것에 대해서는 유념해야 한다. 왜냐하면 온당한 의미의 정액에는 능동적인 힘과 기관을 형성시키는 힘, 그리고 영혼을 이끄는 힘이 있는데 이런 힘은 오로지 남성정액에만 있기 때문이다. 결국 여성은 오직 자신의 생리혈에 의해 발생에 부합한다[20].
남성정액의 힘에 의해 여성이 자궁에 내놓은 체액 혹은 액체는 붙잡혀 지배당하고 응집된다. 그래서 응고제에 의해 응고된 우유가 되는 그런 <상태>[=태아]에 이른다. 우유가 응고할 때 우유를 한데 모으고 그것을 유지하는 정기의 열기는 우유 안에 있다. 그리고 우유와 피의 본성이 동일하기 때문에 이와 유사하게 남성정액도 생리혈에서 작용한다[21].
이 열기에 아래 놓이며 양식을 제공하는 종자적 체액은 실로 이중적인데 이것은 세 종류의 체액들, 즉 남성 종자의 체액과 여성 종자의 체액, 그리고 생리혈의 체액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이들 중 작용하고 만드는 것은 남성정액이다. 한편 여성정액은 만들어지고 작용을 받는다. 그리고 생리혈의 체액은 보충과 성장의 과정에서 흡수되는 것이다[22].
…… 이에 대한 갈레노스의 말은 동물의 발생 원리인 정액이 둘이라는 것이다. <둘 중> 하나는 남성의 <정액>으로 그 자체로서 그 점액질 안에 품은 여러 정기로 인해 작용하고 형상을 부여하는 것으로, 이런 연유로 형성시키는 힘을 가졌다고 일컫는다. 한편 다른 것은 여성정액으로 다른 것에 의해 움직이고 흥분하는 기관처럼 작용하면서 형성시킨다. 그래서 형성시키는 힘이 아니라 형성되는 힘을 갖는다고 일컫는다. <그밖에> 세 번째는 생리혈인데 이것으로부터는 오직 근본 기관들 사이의 빈자리를 채우는 태아의 살만 나온다[25]. 이들 중 첫 번째[=남성정액] 것은 단지 움직이며 형성시키는 것인 반면, 두 번째 것은 움직여져서 움직인 것이고 형성되어 형성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세 번째 것은 단지 움직여지고 형성된 것이다. 이것이 갈레노스의 말이다[26].
3) 종합에서 분열로: 철학적·신학적 난제에 마주서서
가) 실체적 형상의 복수성 vs 단수성: 갈레노스 vs 아리스토텔레스
이 실체적 형상의 단수성에 대한 입장은 첫째, 그 입장으로부터 보편 교회의 신앙에 상충되는 수많은 입장이 도출되며, 둘째, 철학과 모순되고, 셋째, 성서에 어긋나기 때문에 학자들이 논박한 바 있다[39].
만약 지성혼 만이 <다른 형상의> 매개 없이(immediate) 제일질료의 완성이라면, 그럴 경우 인간에게는 철학에서 수도 없이 논한 요소들의 형상이나 결합물의 형상도 없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의학연구도 사라지게 될 것이다[40].
나) 신학적 난제: 성모의 동정성과 갈레노스주의
나아가 동정녀께서 성령에 의해 <성적으로> 흥분하여 사정을 하셨는가? 즉, 모태의 그 곳에 정액을 내어 놓으셨는가? 비록 어떤 이들은 그렇게 말할지라도 그런 말을 입에 담아서는 안 된다. 그런 <말은> 저속함과 얽혀 있으며 인간이라면 그런 사안과 관련하여 입술을 정결히 해야 하기에 그런 것은 물론, 그 사안이 그 자체로서 분명한 것도 아니고 성인들의 말씀과 잘 맞아 들어가지도 않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런 것들에 대해 단지 호기심만으로 면밀히 다루고자 함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저 이렇게, 즉 성처녀께서 육으로 하느님 아들의 발생에 꼭 맞는 재료를 제공하셨다고 말하는 것만으로 충분할 것이다[47].
그런데 다른 여성들의 경우라면 시간적 단계를 통해 그리 되도록(ad esse) 이끌어 가셨을 과정을 하느님께서 그 힘으로 촉진시켰다고 해도 이로써 성처녀의 <위상과 힘을> 덜하게 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따라서 성처녀께 다른 여성보다 덜한 능력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훨씬 더 큰 능력이 있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성모께서는> 자연적인 능력과 자연을 넘어서는 능력을 보유하셨기 때문에 그분 혼자서도 <남성과 살을> 섞은(commixta) 여성들처럼 질료를 제공하실 수 있으셨기 때문이다. 우리가 올바르게 여기고 말하고자 생각한다면, 이런 연유로 성처녀께서는 다른 어머니가 아들의 어머니인 것보다 더 참된 방식으로 그리스도의 어머니시라고 <여기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성모마리아는 성자의 잉태와 관련하여, 즉 능동적인 힘으로 꼭 맞는 재료를 제공하는 데 모종의 도움을 받으셨는데 그 <능동적인 힘은> 당신의 능력을 넘어서도록 무한한 힘에 의해 촉진되어 보강되기에 이르렀음에 틀림없다[49].
<어떤 이는> 그녀[=성모]에게 성령과 즉시 협력할 수 있도록 하는 초자연적 힘이 부여되었다고 논한다. 이에 반하여 답하자면 그런 초자연적 힘은 이런 종류의 본성의 우유에 해당하는 우유일 것이다[=초자연적 본성을 가진 것에 속하는 우유일 것이다]. 그러나 만약 성모가 그런 우유에 의해 그리스도의 몸의 형성을 위해 작용한 것이라면 그녀[성모]는 자신의 본성에 따라 그들의 후손의 몸을 형성하기 위해 작용한 어머니들처럼 당신에 의해, 참된 의미에서, 그리고 자연적으로 이 몸의 형성을 위해 작용하시지 않으셨을 것이다. 돌에 속하는 낙하하는 <특성>이 돌의 본성에 의해, 혹은 돌의 본성적 우유로서 돌에 속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돌의> 흼에 의해 돌에 속하는 반짝임은 참된 의미에서 돌에 속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52].
성모께서는 당신의 인과성에 따라 <성령과> 공조할 수 있으셨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성모에게 장애를 주지 않는 가운데 성모로부터 어떤 것도 박탈하지 않는 방식으로 당신의 원인지음(causatio)을 행사하셨기 때문이다. 심지어 성모께서 성령과 더불어 원인이 되실(concausare) 수 있도록 다른 것의 인과성을 탁월하게 보완하셨다고 할지라도 말이다[54].
4) 단수성론과 에지디우스 로마누스의 『인간육체형성론』
가) 아베로에스: 새로운 의학의 권위
여성정액이 배아의 질료나 형상이라는 것을 믿어서는 안 된다. 남성정액은 형상의 지위를 점하며 여성의 생리혈은 질료의 자리를 점한다. 그리고 여성정액은 발생에서 독자적인 역할(inventio)을 보유하지 않는다[60].
나) 아리스토텔레스주의 생명발생론과 단수성론
우리는 남성에게 모든 것을 만드는 하나의 어떤 것, 즉 정액이, 그리고 여성에게 모든 것으로 만들어지는 하나의 어떤 것, 즉 생리혈이 있다고 말한다. 따라서 여성정액은 <자손의> 발생에 어울리지 않으며 작용자도 아니다. 그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정액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질료도 아니다. 왜냐하면 엄밀한 의미에서 생리혈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자체로서 <자손의 발생에> 어울리지 않으므로 이런 정액 없이도 <자손의> 발생은 일어날 것이다[73].
<자손의> 발생을 위해서는 두 <성(性)의> 정액이 합쳐져야 한다고 말하는데 그 까닭은 이런 식으로 <두 성의 정액이 합쳐져야 자손의> 발생이 훨씬 더 용이하며 <발생에> 훨씬 더 적절한 <조건이 되기> 때문이지 이와 다른 방식으로 일어나는 것이 전적으로 불가능하다거나 이런 방식의 결합이 <자손의> 발생에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은 아니다. 왜냐하면 자궁이 자신의 정액을 빨아들이면서 남성정액을 함께 빨아들인다고 말한 동일한 사람들은 종종 여성은 성교 시 쾌락을 경험하지 않고서 임신하며, 또한 성교에서 쾌락을 얻을 때도 임신한다고 잉태와 성교를 경험한 여성들이 주장한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성의 경우 사정이 쾌락과 연결되기에, 만약 여성이 성교의 쾌락 없이 임신한다면, 사정하지 않고 임신한 것이다. 물론 <성교>에 저항하여 쾌락을 얻지 않고 사정하지 않은 여인도 잉태를 할 수는 있다는 것은 분명히 밝혀진 사실이다[74].
여성정액은 발생과 긴밀히 연관된 것(aptum)이 아니며 정액의 계열에서 어떤 불완전한 것으로 여성의 힘의 불완전성으로 인해 정액으로서 완결적 완성에 다다르지 못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런 정액[=여성정액]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동물발생론』(1권)에서 말하듯 잉태에 필수적인 질료가 아니다.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의 잉태과정에 여성정액은 없었다. 왜냐하면 정액의 계열에서 <여성정액이> 불완전하다 할지라도 남성정액이 그렇듯 모종의 정욕이 <사정에> 개입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동정 잉태에는 정욕이 자리 잡을 수 없다. 그런 까닭에 다마스케누스는 그리스도의 몸이 정액에 의해 잉태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75].
4. 맺음말
세계관은 판타지에 의해 구성되며, 심지어 판타지의 구조로부터 벗어나 철학의 추상적 개념들로 정식화되는 경우에도 판타지적인 틀을 갖는다 ……인간의 몸에 대한 모든 이론은 언제나 판타지의 일부다[81].
우리는 생식의 생리학과 관련하여 남성적 과학(male science)에서 이론적 과실과 관찰 오류의 장구하고도 놀라운 역사에 직면하고 있다. 이와 같은 판타지 같은 이론과 판타지 같은 관찰은 오해도 과학적 진보의 노정에 의례적이며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실수도 아니다. 이들은 당대 과학의 의심의 여지를 허락하지 않는 객관적 언어로 써내려간 여성에 대한 반복적인 비하다[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