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스토텔레스 vs 갈레노스: 고대 생명발생론의 중세적 수용과 변용 -13세기 실체적 형상의 단/복수성 논쟁에서 중세의학의 역할*
Aristotle vs Galen: Medieval Reception of Ancient Embryology - Medieval Medicine and the 13th Century Controversy over Plurality/Unicity of Substantial For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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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In their embryology, Aristotle and Galen greatly disagreed on the role of human derived materials like menstrual blood and vaginal secretion (called by them female sperm or semen). This gap made those two ancients also disagree on their understanding of mother’s role in the generation of the human body in her womb.<br> During the Middle Ages, especially during the thirteenth century, the scholastics drew on those two ancient thoughts for some rational underpinnings of their philosophical and theological doctrines. However, the manners of adoption and assimilation were varied. For example, Albert the Great strived to reconcile the two in the image of Avicenna, one of the main and the most important sources of Galenist medicine in the thirteenth Century. By contrast, those scholastics who played an important role in the controversy over plurality/unicity of the substantial form, drew on their disagreements. For example, pluralists like Bonaventure, William of la Mare, and Duns Scotus appealed to Galenist medical perspective to underpin their positions and paved ways to decorate Virgin Mary’s motherhood and her active contribution to the Virgin birth and to the manhood of her Holy Son. in contrast a unicist like Thomas Aquinas advanced his theory in line with Aristotelian model that Mary’s role in her Son’s birth and manhood was passive and material. Giles, another unicist, while repudiating Galenist embryology with the support of Averroes’s medical work called Colliget, alluded to some theologically crucial impieties with which might be associated some pluralists’ Mariology based on the Roman physician’s model.<br> In this processus historiae, we can see not only the intertwining of medieval medicine, philosophy, and theology, but some critical moments where medicine provided, side by side with philosophy, natural settings and explanations for religious marvels or miracles such as the Virgin birth, the motherhood of Mary, the manhood of Christ, etc. Likewise, we can observe two medieval maxims coincide and resonate: “philosophia ancilla theologiae” and “philosophia et medicina duae sorores sunt.”
1. 머리말
고대와 중세의 철학 및 의학 사상가들이 생물의 발생기전(發生機轉) - 그 중 인간의 태(胎) 안에서 생명이 발생하는 현상 - 에 기울인 관심은 지대했다. 하지만 그들의 관찰 범위는 육안 관찰 수준을 넘어서지 못했다. 이들이 육안 관찰이 가능했던 정액과 여성의 생리혈 및 질내 분비물에 철학적 사변과 추론을 입혀 생명발생론을 전개했던 까닭은 여기에 있다(Van der Lugt, 2004: 76-77). 이렇게 사변의 옷을 입고 발전했던 생명발생론 전통으로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기원전 384-322)의 전통과 히포크라테스(기원전 460-370?)와 갈레노스의 전통 - 특히 갈레노스(129-200?)로부터 이어졌던 - 을 꼽을 수 있다. 두 전통은 고대시대부터 상호 대립과 경쟁을 거듭하며 발전했다. 그리고 중세에 이르러 생명발생론의 중요한 두 원천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두 전통은 중세인들의 문제의식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수용 및 변용의 과정을 거쳤다. 본 논문은 이렇게 전승되었던 두 고전 생명발생론 전통이 중세시대에 수용되고 변용된 양상을 실체적 형상의 단/복수성 논쟁의 맥락에서 살펴보려 한다.
그렇다면 중세 중에서도 굳이 두 전통의 전승과 역할, 그리고 의의를 실체적 형상의 단/복수성 논쟁의 맥락에서 조명해야할 당위는 어디에 있을까? 그 당위는 먼저 이 논쟁의 확산성과 포괄성에서 찾을 수 있다. 이 논쟁은 애초에 인간의 본질적 구조에 대한 이해방식의 충돌로부터 시작했다. 하지만 이내 그리스도론, 교회론, 구원론까지 아우르는, 그래서 13세기와 14세기 스콜라사상가들의 사상적 총력전으로 확장되었다. 이런 면에서 실체적 형상의 단/복수성 논쟁은 다양한 당대 관심사들이 수렴했던 논의의 장(場)이었다. 무엇보다도 과거의 권위들로부터 합리적 근거를 확보하려 했던 중세 스콜라 사상가들의 성향을 염두에 둘 경우, 이 논쟁에서 두 고전적 전통의 수용 및 활용방식을 이해함으로써 이 시대의 사상과 사상가들을 이해하는 더 너른 전망을 확보할 수 있다. 둘째, 이 논쟁에서 확인 가능한 스콜라 사상가들의 역동성 역시 이 논쟁에 주목해야 할 당위를 제공한다. 실체적 형상의 단/복수성 논쟁은 스콜라 사상가들이 사상적 충돌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예컨대 이 논쟁의 과정에서 교회가 주도했던 일련의 대규모 단죄들은 이 논쟁에 사회·정치적 함의까지 들어 있음을 시사한다. 그래서 이 논쟁을 통해 13-14세기의 고전적 사상의 수용과 관련된 사상사적 맥락은 물론, 정치·사회적 맥락까지 짚어 볼 수 있다.
이런 까닭에 실체적 형상의 단/복수성 논쟁은 19세기 말 이후 현대 중세 연구자들의 주된 관심사로 떠오를 수 있었다. 이 논쟁에 천착하여 스콜라 철학과 신학의 관계로부터 당대 신학자들의 철학에 대한 시각에 이르기까지 중세사상계의 여러 모습을 밝혀냈다는 점에서 현대 중세철학사 연구자들의 공헌은 지대했다[1,]. 하지만 중세철학사 연구자들 중 이 논쟁에서 의학 및 의학담론의 역할과 위상에 관심을 기울였던 경우는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었다. 그리고 그 관심도 대개 논쟁 당사자들의 개인감정이나 정치적 역학관계를 추정하는 수준에 머무르곤 했다[2,]. 한편 중세의학사 연구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와 갈레노스 생명발생론의 경쟁과정 및 중세적 수용과 변용의 양상에 대한 연구를 진행했다. 이를 통해 그들은 스콜라 신학과 의학의 관계를 규명하는 데 큰 공헌을 하였다. 그 중 니담의 고전적 연구들은 기존 연구의 미비점을 보완할 초석을 제공해주었다. 그리고 이후 연구자들이 수행한 갈레노스의 생명발생론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생명발생론 전통에 대한 연구는 그 초석 위에서 스콜라사상 일반을 바라보는 새로운 길을 개척해주었다[3]. 본 논문은 두 전통의 중세적 수용과 변용에 대한 의학사 연구가 개척한 길의 연장선에 서있다. 그리고 그 연장선에서 실체적 형상의 단/복수성 논쟁에 대한 기존의 철학사적 연구와 이해의 맹점 및 미비점을 새로이 조명하고 보완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다.
이에 따라 이어지는 2장에서는 스콜라철학자들이 수용하고 변용시키게 되는 두 전통의 근간인 아리스토텔레스와 갈레노스의 생명발생론과 이후 중세의 담론에 영향을 준 교부들의 이 두 전통에 대한 수용 및 이해방식을 다룰 것이다. 이를 위해 2장은 두 전통의 특징과 쟁점을 중심으로 중세까지의 전승과정을 간략히 정리하는 데 할애할 것이다 그리고 3장의 전반부(3.1과 3.2)에서는 두 전통에 대한 아비첸나와 알베르투스의 종합작업을 중심으로 13세기에 아리스토텔레스와 갈레노스가 수용되고 이해된 방식 및 배경을 조명할 것이다. 이어서 3장의 후반부(3.3과 3.4)에서는 본격적으로 실체적 형상의 단/복수성 논쟁의 과정에서 두 전통이 활용된 방식을 대표적 복수성론자들과 단수성론자들의 마주섰던 철학적/신학적 난제들을 중심으로 다룰 것이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아직까지 철학사 연구의 맹점으로 남은 에지디우스 로마누스(Aegidius Romanus, 1243?-1316)의 파리대학 복귀 이후의 모호한 입장을 그의 의학서 『인간육체형성론』(De formatione humani corporis in utero)을 중심으로 조명하면서, 동시에 13세기 의학이론과 담론에 대한 연구가 스콜라사상사 이해에 유효한 이해틀을 제공할 수 있음을 확인할 것이다. 결론에서는 본론 내용의 정리와 함께 고대 사변에서 비롯한 생명발생론 전통의 중세적 발전과 전승과정에 비추어 생명발생에 대한 현대의 이해를 되짚어 보려 한다.
2. 아리스토텔레스와 갈레노스
1) 두 종류의 정액
아리스토텔레스는 고등생명체의 발생을 작용하는 원리인 남성정액과 남성정액의 작용을 받아들이는 질료의 역할을 맡은 생리혈로 설명했다. 형상-질료론의 구도를 남성정액과 생리혈에 적용한 것이었다[4,]. 한편 그는 생리혈 외에 여성이 성교 시 분비하는 체액[5,]의 존재와 이것을 ‘정액’(sperma)이라 일컫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는 성적 쾌락을 느낄 때 남성이 사정하는 것처럼 여성도 이 체액을 분비한다는 점에서 비교 가능하다고 생각했다[6,]. 하지만 이 체액이 성행위를 용이하게 하는 데 필요할 뿐, 생리혈에 능동적으로 작용하는 엄밀한 의미에서 정액 역할은 못한다고 여겼다(Pouderon, 2008: 160).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생명체의 발생에 여성정액(이라 불리는 질내 분비물)의 역할은 없다고 여겼다. 이는 형상-질료론의 구도 상 각 사물의 발생에 형상 역할을 하는 능동원리와 질료 역할을 하는 수동원리가 하나씩만 있으면 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여성에게는 이것[=생리혈]이 남성의 씨앗에 해당하는 것이고 두 정액의 동시 분비는 이치에 닿지 않기에, 발생과 관련하여 여성은 정액으로 기여하는 바가 없다[=여성은 정액을 배출하지 않는다]. 만약 <여성에게> 정액이 있다면 어쨌든 <여성들은> 생리를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7].
위 인용문처럼 아리스토텔레스는 여성정액을 발생의 원리로 제시하는 것이(능동적/형상적 원리로든 수동적/질료적 원리로든) 원리의 불필요한 중첩이라 여겼다. 그래서 생명체의 발생에서 남성과 남성정액에 능동적/형상적 역할을, 그리고 여성과 여성의 생리혈에 수동적/질료적 역할을 투사했다[8].
한편 남성에게만 능동적/형상적 역할을 투사할 경우 자손과 아버지의 닮음은 설명할 수 있었지만 어머니를 닮는 현상을 설명하기 어려웠다. 이에 따라 히포크라테스 이래로 고대 의학자들과 철학자들은 자식이 어머니를 닮는 현상이 남성정액에 상응하는 능동원리가 여성에게도 있기에 가능하다고 생각했다(Pouderon, 2008: 159). 갈레노스는 이런 문제의식을 계승하여 여성과 여성정액에 능동적인 힘과 원리, 그리고 역할을 투사한 대표적 사상가였다.
물론 방금 말했던 것처럼 여성정액은 운동과 관련하여 불완전하다. 그리고 남성<의 정액>은 참으로 더 완전한 <운동을> 일으킨다. …… 그러므로 <여성은> 남성정액을 필요로 함이 명백하다. 경우가 이러하다면, <여성정액은> 그것[=남성정액]과 반드시 섞여 양쪽 정액이 하나의 운동에서 함께 할 것이다[9].
갈레노스는 여성정액의 힘이 남성정액에 비해 불완전하다고 여겼던 점이나 여타 여성의 체질을 다루며 아리스토텔레스와 의견을 공유하기도 했다(Van Der Lugt, 2004: 46). 한편 그는 성교 시 남성의 쾌락과 사정의 관계와 여성의 쾌락과 여성정액 분비 사이의 관계를 상동기관들의 유사기능과 작용이라는 견지에서 이해했다. 그래서 남성기의 기능과 작용의 산물인 남성정액에 능동적인 힘과 원리가 있듯 여성기의 기능과 작용의 산물인 여성정액에도 남성정액에 상응하는 능동적인 힘과 원리가 있다는 입장에 이른다(Van Der Lugt, 2004: 47). 이에 따라 갈레노스는 위 인용문처럼 자손의 발생을 남녀가 각각 산출한 두 능동적 작용자와 원리의 상호작용으로 설명했다. 이렇게 갈레노스의 남녀역할 이해는 형상-질료론에 따른 남성:여성 = 능동:수동 = 정액:생리혈의 구도인 아리스토텔레스의 이해와 차별화된다.
2) 교부시대의 아리스토텔레스와 갈레노스 이해
최소한 3세기까지 남성에게 능동성을, 그리고 여성에게 수동성을 투사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전통은 발생론의 주도적 담론이었고 초기 교부들의 성자(聖子) 인성론에도 영향력을 행사했다(Pouderon, 2008: 157-183, 특히 162-165; Jordan, 1988: 242). 일례로 테르툴리아누스(Tertullianus, 155?-240?)를 꼽을 수 있다. 그의 철학에 대한 태도는 “아테네와 예루살렘이 그래서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Quid ergo Athenis et Hierosolymis?)라는 물음으로 요약가능하다. 그러나 그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치즈 응고 비유를 활용하며 그리스도의 육체 형성을 논했다.
그분이 혈통에서 태어나지 않았다는 것은 그분 육신의 실체 자체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거품의 형태로 되어 있으며 여인의 피를 응고물로 변화시키는 (남자의) 피의 열기인 씨의 재료를 거부하는 것이다. 사실 치즈의 경우에도, 압축의 방법을 통해 응고된 것의 실체는 다름 아닌 우유이다. 그러므로 “육욕이나 남자의 욕망에서 태어나지 않았다”는 말은 성교를 통해 주께서 태어나셨다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지 모태에 계셨다는 것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라는 뜻으로 우리는 이해한다[10].
이렇듯 테르툴리아누스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을 피할 수 없었다. 한편 에메사의 주교 네메시우스(Nemesius de Emesa, 390년 경 활동)는 드물게 갈레노스의 저작을 직접 접했으며, 아리스토텔레스를 거부하는 가운데 갈레노스를 따랐던 예다.
남성과 여성은 동일한 <생식> 기관을 보유한다. 단지 <여성의 기관은 몸> 밖이 아니라 안에 있을 뿐이다. 아리스토텔레스와 더불어 데모크리토스는 자식을 생산하는 데 여성정액이 기여하는 바가 전혀 없다고 여긴다. 왜냐하면 여성들로부터 나오는 것이 정액이라기보다는 기관<이 흘리는> 땀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갈레노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잘못을 지적하며 여성이 참으로 정액을 분출하며 양 측[=남성과 여성]의 정액의 섞임이 잉태라는 결과를 맺는다고 말한다[11].
네메시우스는 4세기 후반까지 지배적이었던 아리스토텔레스를 거부하고 갈레노스를 수용한 교부의 존재를 입증하는 중요한 사례다(Pouderon, 2008: 165)[12]. 이외에도 두 전통을 대립시켜 보여준 경우로 12세기 굴리엘무스 데콩키스(Gullielmus de Conchis, 1120-1154에 활동)의 작품을 꼽을 수 있다. 13세기 스콜라 사상가들은 생명체의 발생을 둘러싸고 이렇게 대립하며 전승된 두 전통을 그들의 고유한 문제의식으로 재해석하며 철학적·신학적 입장을 전개하는 기반으로 활용했다.
3. 의학과 철학, 그리고 신학
1) 아리스토텔레스와 갈레노스의 대립?
갈레노스는 남성과 여성 성기의 유사성에 착안하여 남성정액과 여성정액 모두 성적 쾌락의 순간에 내놓는다고 추론했다. 이를 접한 중세인들은 갈레노스를 여성의 성적 쾌락이 잉태의 필수조건이라고 제시한 대표적 사상가로 받아들였다. 12세기 굴리엘무스 데 콩키스는 갈레노스가 발생에 필수적인 능동원리로 제시한 여성정액 및 그 분비의 필수조건(성적 쾌락)과 관련하여 중세적 문제의식과 수용과정을 추적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굴리엘무스는 생명발생론에서 아리스토텔레스와 갈레노스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대립시켜 제시했다.
군주: 나는 그대가 방금 여성정액 없이는 결코 잉태할 수 없다고 말했던 것을 기억한다. 하지만 참된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저항하고 울면서 난폭함을 겪은 성폭행 피해 여성들이 수태하는 것을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이 그런 행위 중에 쾌락을 얻었다고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쾌락 없이는 정액을 내어 놓을 수 없지 않은가?
철학자: 성폭행을 당한 <여인은> 처음엔 불쾌감을 느낄 것입니다만 결국 육신의 나약함으로 인해 쾌감을 느낍니다. 또한 인간에게는 두 가지 의지, 즉 이성적인 의지와 자연적인 의지가 있는데 우리는 이들이 우리 안에서 상충함을 느낍니다. 왜냐하면 종종 육신을 즐겁게 하는 것이 이성을 불쾌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폭행을 당한 여인에게는 이성적 의지가 아니라 육신의 쾌락이 있는 것입니다[13].
이렇게 정식화된 대립상은 중세사상가들을 일종의 양자택일 상황으로 이끌어갔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와 갈레노스 사이에 중세인들이 투사했던 양자택일 상황은 역사적 두 인물 사이의 대립, 혹은 철학자와 의학자의 대립이 실제로 투영된 것이라 보기 어렵다. 갈레노스가 아리스토텔레스를 비판한 경우도 많지만(Siraisi, 1981: 186-202 참조) 아리스토텔레스에게 공감하거나 호의적 시선에서 그를 보완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나아가 갈레노스에 대한 스콜라사상가들의 정보는 직접 정보보다는 주로 아비첸나(Avicenna, 980?-1037) 등 아랍 저자들의 저서 번역본을 통한 간접 정보가 주를 이뤘다. 이에 따라 13세기까지 갈레노스에 대한 정보와 이해 수준은 12세기 초까지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중세인들의 수준과 크게 다르지 않았으며, 이는 중세 의학자들도 예외가 아니었다(Siraisi, 1980: 390-392; Van Der Lugt, 2004: 393-394; Jordan 1988: 241-243, 245). 이런 면에서 중세인들이 두 사상가 사이에 투사한 대립은 대개 갈레노스에 대한 제한된 접근성에 기인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13세기 신학자들과 의학자들은 철학, 그 중에서도 아리스토텔레스가 주된 커리큘럼이었던 인문학부 교육을 거쳐야했다. 나아가 이 시기의 갈레노스에 대한 정보는 대개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을 짙게 받은 아비첸나에게 의존하고 있었다. 따라서 호의적이었든 비판적이었든, 13세기중세의 갈레노스 이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 하에 있었다(Crisciani, 2014: 34-38). 이런 까닭에 13세기 사상계에서 갈레노스에게 철저히 충실한 입장이나 순수 의학적 입장을 기대하기 어렵다(Cadden, 1993: 121). 따라서 양자의 중세적 대립은 소위 철학과 의학, 혹은 철학자와 의학자의 대립으로 단순화되지 않는다(Cadden, 1993: 117-119). 이런 면에서 두 사상가의 중세적 대립은 13세기의 풍토에서 변용(變容)한 아리스토텔레스와 갈레노스, 즉 중세 아리스토텔레스주의(Medieval Aristotelianism)와 중세 갈레노스주의(Medieval Galenism)의 대립으로 보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Siraisi, 1980: 390-392).
2) 종합의 시도 : 아비첸나와 알베르투스
아비첸나는 13세기 중세인들의 갈레노스 수용과정에서 중요한 원천자료였다[14]. 또한 그의 갈레노스 이해는 알베르투스 등 13세기 사상가들이 의학담론을 철학적 문제의식 속에서 이해하는 데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 먼저 갈레노스에 대한 ‘철학자’로서 아비첸나의 시각을 살펴보자.
의학자가 학문의 뿌리는 모르는 채 가지에 대해서는 많은 것을 안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그들이 실상> 아무 것도 말한 것이 없으면서 무엇인가를 말한다고 여기며 아리스토텔레스를 거슬러 말하는 것을 목도할 수도 있으리라[15].
『동물에 관하여』에서 아리스토텔레스를 따르는 ‘철학자’ 아비첸나는 의학자의 한계를 지적했다. 반면 의학서 『의학규범』에서 아비첸나는 『동물에 관하여』와 다른 태도를 드러낸다.
이 두 가지 입장 중 하나에 대한 분명한 앎은 실로 자연학에 속한다. 그래서 그에 대한 무지가 의학자에게 흉이 되지는 않는다[16].
나아가 아비첸나는 철학적으로 갈레노스의 입장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과 충돌하는 경우를 다른 문제에서도 확인했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철학자’ 갈레노스는 비판하지만 ‘의학자’ 갈레노스를 비판하지 않았다[17,]. 이런 태도는 『의학규범』의 목표, 즉 큰 그림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구성한 체계와 함께 갈레노스의 의학적 경험을 보존하려했던 그의 의도(Vico, 2008b: 28)를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18,]. 그리고 의학의 모든 경험적 맥락에 적용 가능한 원리들을 철학적으로 도출하려던 아비첸나의 포부(Siraisi, 1987: 33)는 이렇게 드러난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금 말한다. 기관들 중에서 정액으로부터 발생하여 살과 지방을 제외한 그런 부분들로 이루어진 기관들은 지방과 살처럼 피로부터 발생한 기관과 다르다. 왜냐하면 이 둘을 제외하고 두 정액, 즉 남성정액과 여성정액으로부터 발생한 것이기 때문이다. 지혜로운 사람들에게 참을 알려준 그 분[=아리스토텔레스]의 가르침에 따르면 치즈가 응고제에 의해 발생하듯이 남성정액으로부터 <자손이> 발생하고 치즈가 젖으로부터 발생하듯이 여성정액으로부터 자손이 발생한다. 그래서 마치 <치즈를 만들 때 치즈의> 응고 작용의 원리가 응고제에 있듯이 <생명체가 형성되는> 응집 작용의 형상적 원리는 남성정액에 있다. 그리고 치즈의 생산에서 응고의 원리가 젖 안에 있는 것처럼 [=응고가 젖 안에서 시작하는 것처럼], 형상에 의해 질료가 응집하는 작용의 원리, 즉 수용하는 힘의 원리는 여성정액에 있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 둘, 즉 응고제와 젖 각각은 그들로부터 나온 치즈의 실체의 부분인 것처럼 양성의 정액 각각은 태아의 부분이다. 이 말이 불충분하지는 않다. 그러나 참으로 갈레노스의 말과는 참으로 많이 상충된다. 그는 양쪽 모두의 정액이 제각기 응집시키는 힘과 응집을 받아들이는 힘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로 인해 그는 응집시키는 힘은 남성의 <정액> 안에서 더 강하고 응집을 받아들이는 힘은 여성정액에서 더 강하다고 말하기를 삼가지 않았다[19].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상-질료론의 구도에 따라 생명체의 발생 원리로 형상에 해당하는 능동적 작용자로 남성정액을, 그리고 남성정액의 작용을 수용하는 질료에 해당하는 수동적 수용자로 생리혈을 꼽았다. 그런데 아비첸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을 설명하면서 생리혈 대신 여성정액을 질료적·수동적 원리로 제시했다. 이로써 아비첸나는 두 사상가 사이의 큰 차이를 밝히는 동시에 그 차이를 좁히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아리스토텔레스와 갈레노스의 차이를 좁혀 종합하려던 시도는 알베르투스 마그누스(Albertus Magnus, 1200?-1280)의 경우에서도 확인가능하다. 일단 ‘주석가’ 알베르투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을 정확히 제시했다.
온당히 말해서 여성은 사정(射精)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정액이 완전히 소화된 양분의 최종적 부산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소화의 완결은 강력한 열에 의해서 야기되는 반면, 여성은 단지 약한 열기만을 보유하고 있다. 이런 까닭에 여성에게는 정액을 생산할 충분한 힘이 없다. 대신에 남성 안에서 강력한 열기가 정액을 만들 듯, 여성의 약한 열기는 생리혈을 만든다. 왜냐하면 생리혈은 덜 정제되고 소화되지 않은 혈액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여성에게 정액이 어떤 방식으로는 있을 수 있다는 것은 이해해야 한다. ……그럼에도 여성에게서 확인되는 정액은 온당한 의미에서 발생에 부합하는 정액은 아니라는 것에 대해서는 유념해야 한다. 왜냐하면 온당한 의미의 정액에는 능동적인 힘과 기관을 형성시키는 힘, 그리고 영혼을 이끄는 힘이 있는데 이런 힘은 오로지 남성정액에만 있기 때문이다. 결국 여성은 오직 자신의 생리혈에 의해 발생에 부합한다[20].
이상 알베르투스의 인용문은 뒤에 다루게 될 에지디우스 로마누스의 아리스토텔레스주의 생명발생론과 일맥상통한다. 하지만 보론(digressio)에서 그는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미묘하게 벗어난다. 다음 구절은 그런 예 중 하나다.
남성정액의 힘에 의해 여성이 자궁에 내놓은 체액 혹은 액체는 붙잡혀 지배당하고 응집된다. 그래서 응고제에 의해 응고된 우유가 되는 그런 <상태>[=태아]에 이른다. 우유가 응고할 때 우유를 한데 모으고 그것을 유지하는 정기의 열기는 우유 안에 있다. 그리고 우유와 피의 본성이 동일하기 때문에 이와 유사하게 남성정액도 생리혈에서 작용한다[21].
알베르투스가 아리스토텔레스를 충실히 좇을 의도였다면 “체액 혹은 액체(humor sive gutta)”라는 불분명한 표현 대신 “생리혈(menstruum)”만을 언급하는 것만으로 충분했을 것이다(Reynolds, 1999: 258). 나아가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했다.
이 열기에 아래 놓이며 양식을 제공하는 종자적 체액은 실로 이중적인데 이것은 세 종류의 체액들, 즉 남성 종자의 체액과 여성 종자의 체액, 그리고 생리혈의 체액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이들 중 작용하고 만드는 것은 남성정액이다. 한편 여성정액은 만들어지고 작용을 받는다. 그리고 생리혈의 체액은 보충과 성장의 과정에서 흡수되는 것이다[22].
이렇게 생명체의 발생에 대해 논하면서 남성정액과 생리혈 외에 여성정액을 추가했다는 점에서 알베르투스의 삼원구도[23,]는 형상-질료론에 기초하여 두 체액, 즉 남성정액과 생리혈로만 생명체의 발생을 설명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이원구도와 분명히 다르다[24]. 그런데 이 인용문에서 흥미로운 것은 알베르투스가 아비첸나의 입장을 소개하는 과정에서 이 삼원구도를 갈레노스의 입장이라 언급한다는 점이다.
…… 이에 대한 갈레노스의 말은 동물의 발생 원리인 정액이 둘이라는 것이다. <둘 중> 하나는 남성의 <정액>으로 그 자체로서 그 점액질 안에 품은 여러 정기로 인해 작용하고 형상을 부여하는 것으로, 이런 연유로 형성시키는 힘을 가졌다고 일컫는다. 한편 다른 것은 여성정액으로 다른 것에 의해 움직이고 흥분하는 기관처럼 작용하면서 형성시킨다. 그래서 형성시키는 힘이 아니라 형성되는 힘을 갖는다고 일컫는다. <그밖에> 세 번째는 생리혈인데 이것으로부터는 오직 근본 기관들 사이의 빈자리를 채우는 태아의 살만 나온다[25,]. 이들 중 첫 번째[=남성정액] 것은 단지 움직이며 형성시키는 것인 반면, 두 번째 것은 움직여져서 움직인 것이고 형성되어 형성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세 번째 것은 단지 움직여지고 형성된 것이다. 이것이 갈레노스의 말이다[26].
일단 위 인용문에서 볼 수 있듯 알베르투스가 갈레노스의 입장을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에 가깝게 다가서도록 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이 인용문의 내용은 형상-질료론의 틀은 유지했으되 아리스토텔레스의 맹점을 갈레노스로 보완했던 아비첸나의 종합 혹은 아비첸나의 여과를 거친 갈레노스의 입장과 유사하다[27]. 그렇다면 알베르투스가 갈레노스주의를 수용했다고 할 수 있을까?
일단 알베르투스가 의학에 관한한 갈레노스를 더 신뢰한다고 피력했던 것은 사실이다[28,]. 하지만 알베르투스는 갈레노스주의의 요체 중 하나인 여성정액에 능동적 힘을 투사하는 입장을 단호히 거부했다(Jacquart & Thomasset, 1981: 79)[29,]. 이런 면에서 그의 입장은 기본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틀을 벗어나지 않았다. 나아가 알베르투스는 갈레노스와 달리 생리혈을 생명발생의 필수요소로 간주했다(Vico, 2008b: 34). 또한 여성이 여성정액의 방출시에 성적 쾌락을 느낀다는 갈레노스와 갈레노스주의자들의 입장도 거부했다. 그는 여성의 성적 쾌락은 남성정액이 자궁에 닿거나 음경(陰莖)이 여성의 성기에 닿을 때 발생한다고 주장했다(Cadden, 1993: 121)[30,]. 이렇듯 알베르투스의 입장은 갈레노스 및 갈레노스주의자들과 결이 달랐다[31].
한편 앞서 보았듯 알베르투스는 생리혈과 더불어 여성정액도 남성정액의 힘을 받아들이는 생명발생의 필수적인 질료적 원리로 간주했다[32,]. 또한 그는 여성정액이 질료(생리혈)를 준비시켜 작용자, 즉 남성정액의 작용을 받아들일 수 있게 만든다는 의미에서 여성정액에도 힘(virtus)이 있다는 갈레노스의 입장을 수용할 수 있음을 시사했다[33,]. 이런 면에서 알베르투스 스스로 아리스토텔레스를 따른다고 주장했을지라도[34,] 엄밀한 의미에서 그의 입장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을 중심으로 갈레노스주의를 수용한 종합이론 혹은 절충이론으로 간주하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35].
이렇게 양자를 종합한 제3의 입장으로 알베르투스는 네메시우스 이래 정형화된 두 사상가의 대립을 해소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의 입장은 이후 아리스토텔레스주의로 철저하게 회귀하고자 했던 에지디우스 로마누스와 같은 후대 사상가들의 비판에 노출된다.
3) 종합에서 분열로: 철학적·신학적 난제에 마주서서
가) 실체적 형상의 복수성 vs 단수성: 갈레노스 vs 아리스토텔레스
실체적 형상의 단/복수성 논쟁은 13세기 중반 이후 스콜라사상가들이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질료론을 물질적 실체, 특히 인간 영혼과 육체의 관계 문제에 적용하여 설명하는 과정에서 일어났다. 단수성론자들은 실체를 완성/완결시키는 능동적 원리인 실체적 형상(예컨대 지성혼)이 완성을 수용하는 수동적 원리인 제일질료와 직접 결합한다는 입장을 취했다(그림 1 참조). 반면 복수성론자들은 모든 형상에 무차별적으로 그 자체 개방된 제일질료개념에 주목했다[36,]. 그래서 인간의 경우 최종형상인 지성혼이 제일질료와의 결합에 앞서 제일질료를 최종형상을 받아들이기에 적합한 중간적 완성으로 이끄는 능동적 원리인 매개 실체적 형상 혹은 그에 상응하는 매개형상 혹은 원리(mediating formal principle)가 하나 이상 필요하다는 입장을 취했다(그림 2 참조).
두 이론에는 제각기 장단점이 있었다. 단수성론은 영혼과 육체가 합일한(uniri) 인간의 실체적 통일성(substantial unity)을 형상-질료론의 구도에서 일관되게 설명하는 데 용이했다. 단수성론의 대표자로는 토마스 아퀴나스와 에지디우스 로마누스가 있었다. 반면 단수성론은 사체, 즉 실체적 형상인 영혼과 분리된 육체에 대한 직관적 경험이나 일반 정서와 충돌했다. 예컨대 A라는 인물이 사망했다고 가정해보자. A의 사체는 생전의 육체와 상당시간 동일한 외양을 유지한다. 그러나 단수성론에 따르면 실체적 형상과 결합했던 생전의 육체와 실체적 형상(영혼)이 떠난 사체는 상이한 실체적 형상을 갖는다. 즉 생전의 육체와 사체는 외양상 유사할지라도 다른 실체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사체는 엄밀한 의미에서 ‘A의’ 사체라고도 말할 수 없다.
반면 복수성론은 직관적 경험이나 일반 정서에 부합하는 설명이었다. A의 최종 실체적 형상인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어 A가 죽음을 맞는다. 그런데 A의 생전 육체든 사체든 제일질료에 작용하여 A의 영혼을 받아들이기 적합하도록 A의 육체로 만드는 매개형상을 공유한다. 이 매개형상은 복수성론자들이 A의 생전의 육체와 사체의 동일성을 설명하는 근거가 된다. 이에 단일성론자들은 복수성론이 영혼과 육체의 관계를 영혼과 다른 형상(영혼과 구분되는)에 의해 이미 현실화된 육체 사이의 관계로, 즉 두 실체 사이의 관계로 설명할 수밖에 없기에 영혼과 육체의 실체적 합일(substantial union)과 인간 존재의 통일성(unity)을 철학적으로 약화시킨다고 비판했다. 반면 복수성론에 따르면 제일질료는 모든 형상에 대해 무차별적 결합 가능성을 갖는다[37]. 그래서 제일질료가 최종형상에 결합할 필연성을 갖도록 하여 최종형상의 도래를 예비하게 만드는(dispose) 매개 원리가 반드시 필요하다. 이에 따라 복수성론자들은 오히려 최종형상과 제일질료의 직접 결합을 논하는 단일성론자들의 입장이 사실상 합일해야할 필연적 이유가 없는 두 원리의 결합을 논하는 데 그친다고 비판했다. 즉 복수성론자들에게 단수성론은 철학적으로 영혼과 제일질료, 나아가 영혼과 육체의 합일과 통일성을 보장하지 못하며 인간의 통일성을 실체적 통일성이 아닌 우유적(accidental) 통일성으로 제시하는 이론이었다.
나아가 복수성론자들은 단수성론을 신학의 영역에서도 공격했다. 단수성론에 따르면 서로 다른 실체적 형상을 가진 생전의 육체와 사체의 수적 동일성(numerical identity)은 없다. 그런데 복수성론자들은 단수성론의 수적 동일성 부정이 생전 성자(聖子)의 육체와 3일간 무덤에 있었던 그의 육체의 수적 동일성의 부정으로 이어진다고 이해했다. 이에 따라 복수성론자들은 단수성론이 성자의 부활로부터 최후의 심판에 이르는 그리스도교의 핵심 신앙을 파괴한다고 공격했다.
실체적 형상의 단/복수성 논쟁이 철학에서 신학의 영역으로 이전되자 단수성론자였던 토마스와 에지디우스 및 그들의 동료와 추종자들은 곤혹스런 상황에 몰렸다[38]. 이렇게 단일성론을 철학은 물론 신학의 영역에서도 몰아 세웠던 복수성론자들의 입장은 라마레의 굴리엘무스(Guillelmus de la Mare, 1270년대 중반 활동)의 구절에서 함축적으로 확인가능하다.
이 실체적 형상의 단수성에 대한 입장은 첫째, 그 입장으로부터 보편 교회의 신앙에 상충되는 수많은 입장이 도출되며, 둘째, 철학과 모순되고, 셋째, 성서에 어긋나기 때문에 학자들이 논박한 바 있다[39].
그런데 굴리엘무스는 이에 그치지 않았다. 그는 단수성론이 철학과 신학은 물론 의학에도 파괴적이라고 몰아붙였다.
만약 지성혼 만이 <다른 형상의> 매개 없이(immediate) 제일질료의 완성이라면, 그럴 경우 인간에게는 철학에서 수도 없이 논한 요소들의 형상이나 결합물의 형상도 없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의학연구도 사라지게 될 것이다[40].
굴리엘무스가 의학을 거론하며 누구 혹은 무엇을 생각했는지는 분명치 않다[41,]. 하지만 당시 복수성론자들을 비롯하여 실체의 최종완성 원리와 제일질료 사이에 양자를 매개하는 능동적 원리들, 예컨대 매개 실체적 형상 내지는 성향(dispositio)이나 종자적 원인(ratio seminalis) 혹은 형상의 시원(inchoatio formae) 같은 매개 원리가 있다고 주장했던 사상가들[42]이 ‘의학자’ 갈레노스의 생명발생론을 호의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음은 주목할 만하다.
또한 그림 3과 그림 2에서 확인할 수 있듯 궁극적 완성 원리인 최종형상의 역할과 남성정액의 역할, 그리고 이들에 대해 수동성을 갖는 제일질료와 생리혈에 모종의 능동적인 작용을 하는 매개적 형상의 역할과 여성정액의 역할 사이에는 무시하기 어려운 유사성이 있다. 이런 구도에서 확인 가능한 유사성은 복수성론자들이 형이상학적 인간이해를 뒷받침하는 기초로 갈레노스주의를 수용했던 까닭을 추정케 한다.
나아가 그리스도의 육체와 관련하여 복수성론이 성자의 사체를 설명하는데 강점이 있었다면, 그들이 수용한 갈레노스주의 생명발생론은 성자의 인성(人性)을 자연적 원리를 통해 설명하는 강점으로 이를 보완해주었다. 일례로 갈레노스주의의 여성정액의 능동적 역할에 대한 이해는 예수의 잉태과정과 관련하여 난제 중 하나였던 성자의 모친이자 인성의 근간인 성모[43,]의 능동적/적극적 역할에 대해서까지 보편적 설득력을 가진 담론을 구성할 길을 확보해 주었다. 나아가 성모의 상징성, 즉 성자의 탄생으로부터 시작하는 구원의 기획에서 신의 적극적 조력자, 나아가 성자를 품었다는 의미에서 교회를 상징하는 성모의 위상도 보편적 설득력을 갖추고 설명할 길을 열었다[44,]. 이렇게 갈레노스주의 의학은 13세기에 복수성론과 맞물리면서 그들의 철학은 물론 신학도 뒷받침하는 기저 담론을 제공했다[45].
나) 신학적 난제: 성모의 동정성과 갈레노스주의
한편 갈레노스주의를 수용했던 13세기 스콜라 사상가들은 성자 잉태 과정에서 성모의 역할과 관련하여 난제에 맞닥뜨렸다. ‘그들이 이해한’ 갈레노스에 따르면 태아의 몸은 남성정액과 여성정액의 결합물이며 생리혈은 태아에게 양분을 제공한다. 물론 아리스토텔레스주의처럼 갈레노스주의에서도 남성정액은 태아 형성에 주도적인 원리다. 하지만 갈레노스주의는 여성정액에도 그 못지않은 역할을 투사했다. 예기치 못했던 난제는 여성정액을 단지 다의적으로만 ‘정액’이라 부를 수 있다고 생각했던 아리스토텔레스 전통이든 여성정액에 남성정액 못지않은 능동적인 역할을 투사했던 갈레노스주의든 정액의 방출과 육체적 쾌락의 관계를 밀접하게 보았다는 데 도사리고 있었다. 여성정액을 발생의 필수 조건으로 간주했던 갈레노스주의 생명발생론을 끝까지 밀고 나갈 경우 성모가 성령에 의한 수태 시 성적 쾌락을 느꼈다는 불경(不敬)한 결론을 피해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Van der Lugt, 2004: 422)[46]. 하지만 이를 피하려고 갈레노스주의를 포기할 경우 성자의 인성에 대한 효과적인 자연적 설명 방식과 그들이 강조하고자 했던 신의 적극적 조력자이자 예수의 어머니인 성모의 위상 및 모성이 흔들린다. 이 난제 앞에서 갈레노스를 채용했던 사상가 중 하나인 보나벤투라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아가 동정녀께서 성령에 의해 <성적으로> 흥분하여 사정을 하셨는가? 즉, 모태의 그 곳에 정액을 내어 놓으셨는가? 비록 어떤 이들은 그렇게 말할지라도 그런 말을 입에 담아서는 안 된다. 그런 <말은> 저속함과 얽혀 있으며 인간이라면 그런 사안과 관련하여 입술을 정결히 해야 하기에 그런 것은 물론, 그 사안이 그 자체로서 분명한 것도 아니고 성인들의 말씀과 잘 맞아 들어가지도 않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런 것들에 대해 단지 호기심만으로 면밀히 다루고자 함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저 이렇게, 즉 성처녀께서 육으로 하느님 아들의 발생에 꼭 맞는 재료를 제공하셨다고 말하는 것만으로 충분할 것이다[47].
보나벤투라는 성적 쾌락과 여성정액등을 연상시킬 표현을 피하며 “신의 아들의 발생에 꼭 맞는 재료(materia apta generationi Filii Dei)”라는 모호한 표현을 사용했다. 그에 따르면 이 질료는 성자를 즉각 잉태하도록 신이 준 힘의 도움을 받아 여전히 성모가 자연적 능력으로 마련한 질료다. 이 신이 준 힘은 보통 여성이라면 태아의 몸을 이루는 질료를 만들기 위해 거쳤을 성교→성적쾌락→여성정액 방출로 이어지는 시간적/순차적 과정을 단축시켜 성모가 성자를 잉태하게 해준다[48]. 이렇게 보나벤투라는 성모가 “신의 아들의 발생에 꼭 맞는 재료”를 제공하기 위한 자연적 과정을 단축시키는 신의 개입을 논했다. 즉 자연적 과정을 다 거치되 신의 개입이 그 과정에 필요한 시간을 압축 혹은 단축시켜 성모가 성적 쾌락을 느낄 순간을 없앴다는 논의로 성모의 동정성을 훼손하지 않으려 했다. 동시에 보나벤투라는 신의 개입, 즉 성모로 하여금 즉각 성령으로 잉태하기에 적합한 재료를 마련하는 데 신의 도움이 성모가 어머니로서 갖는 자연적이며 능동적인 역할과 능력을 방해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다른 여성들의 경우라면 시간적 단계를 통해 그리 되도록(ad esse) 이끌어 가셨을 과정을 하느님께서 그 힘으로 촉진시켰다고 해도 이로써 성처녀의 <위상과 힘을> 덜하게 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따라서 성처녀께 다른 여성보다 덜한 능력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훨씬 더 큰 능력이 있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성모께서는> 자연적인 능력과 자연을 넘어서는 능력을 보유하셨기 때문에 그분 혼자서도 <남성과 살을> 섞은(commixta) 여성들처럼 질료를 제공하실 수 있으셨기 때문이다. 우리가 올바르게 여기고 말하고자 생각한다면, 이런 연유로 성처녀께서는 다른 어머니가 아들의 어머니인 것보다 더 참된 방식으로 그리스도의 어머니시라고 <여기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성모마리아는 성자의 잉태와 관련하여, 즉 능동적인 힘으로 꼭 맞는 재료를 제공하는 데 모종의 도움을 받으셨는데 그 <능동적인 힘은> 당신의 능력을 넘어서도록 무한한 힘에 의해 촉진되어 보강되기에 이르렀음에 틀림없다[49].
보나벤투라의 입장을 요약하면 초자연적 개입에 의한 자연적 과정의 촉진(促進)이라고 할 수 있다. 그에 따르면 성모에게는 두 능력이 있다. 우선 자식의 몸을 제공하는 여성이라면 누구나 갖춘 자연적 능력이 있다. 그런데 신은 그 외에 다른 여인들에게는 없는 특별한 능력을 성모에게 부여했다. 이 능력은 성모의 자연적 능력을 촉진시켜 모든 여성이 거치는 자연적 과정을 즉각, 그리고 압축적으로 거치게 한다(Van Der Lugt, 2004: 434-435). 이 능력은 신으로부터 직접 온 것이라는 면에서는 초자연적이다. 하지만 자연적 질서를 파괴하거나 무시하지 않고 여성이 태아의 몸을 이루는 재료를 제공하는 자연적 과정이 더 원활하게 진행되도록 촉진시키는 방식으로 작동했다. 즉 자연적 질서에서 불가능한 일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 가능했으되 여태 일어나지 않았던 일이 일어나게 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의 요체다. 이에 따라 성모가 성자의 몸을 이루는 재료를 제공하는 과정에서 성모의 자연적/능동적인 힘은 배제되지 않는다. 이렇게 보나벤투라는 갈레노스주의 생명발생론을 수용하며 맞닥뜨렸던 성모의 절대적 동정성과 관련된 난제를 우회하는 가운데 성모의 자연적 모성과 적극적 역할을 논할 길을 마련했다(Van Der Lugt, 2004: 434-435)[50].
대표적 복수성론자였던 둔스 스코투스 역시 아리스토텔레스보다 갈레노스의 생명발생론을 선호했다(Van Der Lugt, 2004: 442)[51,]. 하지만 성모의 잉태를 다루는 방식은 달랐다. 그는 보나벤투라처럼 신의 개입을 논하는 것이 성모의 자연적 모성은 물론, 성자의 잉태 과정에서 성모가 자연적 본성에 따른 능동적 작용자이자 성령의 공조자임을 설명하는 데 적합지 않다고 여겼다(Van Der Lugt, 2004, 445).
<어떤 이는> 그녀[=성모]에게 성령과 즉시 협력할 수 있도록 하는 초자연적 힘이 부여되었다고 논한다. 이에 반하여 답하자면 그런 초자연적 힘은 이런 종류의 본성의 우유에 해당하는 우유일 것이다[=초자연적 본성을 가진 것에 속하는 우유일 것이다]. 그러나 만약 성모가 그런 우유에 의해 그리스도의 몸의 형성을 위해 작용한 것이라면 그녀[성모]는 자신의 본성에 따라 그들의 후손의 몸을 형성하기 위해 작용한 어머니들처럼 당신에 의해, 참된 의미에서, 그리고 자연적으로 이 몸의 형성을 위해 작용하시지 않으셨을 것이다. 돌에 속하는 낙하하는 <특성>이 돌의 본성에 의해, 혹은 돌의 본성적 우유로서 돌에 속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돌의> 흼에 의해 돌에 속하는 반짝임은 참된 의미에서 돌에 속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52].
나아가 스코투스에 따르면 제일원인(causa prima)인 신은 철저히 자유롭다. 그렇기에 신은 필연성, 즉 자신의 본성에 정확히 상응하는 방식으로만 힘을 발휘해야 한다는 필연성에 구애받지 않는다. 신은 자신의 본성에 상응하는 방식뿐만 아니라 그의 본성에 비해 격이 떨어지는 제이원인(causa secunda)에 맞추어서도 힘을 발휘한다. 그러므로 신은 자연적인 아버지의 힘을 제공하며, 심지어 <보통의> 아버지가 그 작업에서 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효과적으로 그 힘을 발휘한다[53,]. 그래서 스코투스는 제일원인인 신이 개입하고 나아가 신과 공동작업을 할지라도 성모가 자신에게 고유한 인과성에 따라 활동하는 독립적/자연적/능동적 작용자라고 다음과 같이 힘주어 강조했다(Van der Lugt, 2004: 444).
성모께서는 당신의 인과성에 따라 <성령과> 공조할 수 있으셨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성모에게 장애를 주지 않는 가운데 성모로부터 어떤 것도 박탈하지 않는 방식으로 당신의 원인지음(causatio)을 행사하셨기 때문이다. 심지어 성모께서 성령과 더불어 원인이 되실(concausare) 수 있도록 다른 것의 인과성을 탁월하게 보완하셨다고 할지라도 말이다[54].
이렇게 둔스 스코투스는 신이 부여한 능력을 배제하고 성모의 자연적 능동성과 모성만을 논하면서 성모의 역할과 작용이 실상 다른 여인들과 다르지 않다고 주장했다(Van Der Lugt(2004), 445-446). 나아가 그는 발생 초기단계를 지나 수태 과정에서 남성의 힘보다 여성의 힘이 더 강해짐을 논하며 성모의 자연적 모성을 설명하는 과정에서도 갈레노스를 길잡이로 삼았다(Van Der Lugt, 2004: 442-444). 그럼에도 스코투스는 보나벤투라의 조언처럼 이 “입술을 정결히 해야” 할 사안, 즉 성모의 성적 쾌락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침묵했다(Van Der Lugt, 2004: 422-423). 이 스코투스의 침묵은 이 문제에 마주섰던 갈레노스주의 옹호자들의 고심의 무게를 가늠케 한다.
4) 단수성론과 에지디우스 로마누스의 『인간육체형성론』
에지디우스 로마누스가 『인간육체형성론』(De formatione humani corporis in utero)를 작성한 시기는 분명치 않다. 연구자들은 1285년 이후로 추정한다. 이 작품이 1285년부터 유포된 아베로에스의 의학서 『의학통론』(Colliget)의 라틴어 번역본을 인용하기 때문이다[55,]. 그리고 이르게는 그가 파리대학 신학부에서 활동을 마친 1293년 가을(Briggs, 2016: 13-14) 이전에, 늦게는 교황 보니파키오 8세의 명으로 부르쥬(Bourges) 대주교로 영전하기 전에 이 작품을 마무리 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Vico, 2008b: 22-24).
『인간육체형성론』, 그 중 6장의 논의를 사상사적 배경에서 확인하는 일은 흥미롭다. 에지디우스는 단수성론의 대표자였다. 그는 1277년, 단수성론을 포함하여 그의 저서에서 발췌한 51개 항목에 대한 문제제기에 변론을 했지만[56,] 단죄를 받고 파리대학을 떠나게 된다. 그럼에도 그는 단수성론을 포기하는 대신 이전[57,]보다 더 강한 입장을 개진했다. 예컨대 단죄 이듬해인 1278년, 에지디우스는 『형상의 등급과 복수성 반박』(Contra gradus et pluralitatem formarum)이라는 논쟁적 저서에서 단수성론이 이성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교 신앙에도 어긋나지 않음을 강력하게 주장하며 자신에 대한 단죄 조치에 항변했다(Wielockx, 1985: 90-91). 하지만 결국 단죄의 주도자 중 하나였던 교황 마르티노 4세가 선종하고 새 교황(호노리오 4세)이 즉위한 1285년에야 파리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리고 교황의 지원 하에 파리대학 신학부에서 단죄 당했던 입장들을 일부 철회하는 조건으로 사면을 받은 후 1287년부터 1293년까지 파리대학 신학부 교수로 활동했다(Wielockx, 1985: 110-113).
에지디우스의 사면에서 볼 수 있듯 새 교황은 토마스 아퀴나스와 에지디우스에 대한 단죄 조치를 조사한 뒤 이를 거두었다. 그리고 단수성론이 이단이나 신앙을 거스르지 않는다고 논했던 파리대학 신학교수들도 적지만은 않았다(Wielockx, 1985: 215-223). 하지만 단수성론자들에 대한 복수성론자들의 적대감과 공격은 여전히 수그러들지 않은 상태였다[58,]. 이런 상황에서 에지디우스는 이전처럼 단수성론을 적극 옹호하지는 않았지만 비판에 동조하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단수성론을 견지했던 것으로 보인다(Wielockx, 1985: 112, 174, 220-221).
가) 아베로에스: 새로운 의학의 권위
『인간육체형성론』에서 에지디우스가 아베로에스의 의학서 『의학통론』 (Colliget)을 길잡이로 삼았던 점은 주목할 가치가 있다. 아베로에스는 중세의 아리스토텔레스 이해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으며 가장 뛰어난 아리스토텔레스 주석자라는 의미에서 “주석가(Commentator)”라는 별칭을 얻기도 했다(Martin, 2014: 12-15). 이에 걸맞게 그의 생명발생론은 아리스토텔레스에 충실했다. 이런 면에서 그는 여성정액을 생명발생의 원리로 제시하며 갈레노스를 아리스토텔레스와 화해시키려 했던 아비첸나나 알베르투스와 차별화된다[59].
여성정액이 배아의 질료나 형상이라는 것을 믿어서는 안 된다. 남성정액은 형상의 지위를 점하며 여성의 생리혈은 질료의 자리를 점한다. 그리고 여성정액은 발생에서 독자적인 역할(inventio)을 보유하지 않는다[60].
또한 중세에 정식화된 갈레노스주의의 특징 중 하나는 성적 쾌락을 여성정액의 분비와 불가분의 관계로 확인하는 데 있었다. 그런데 『의학통론』은 갈레노스주의의 생명발생론으로 설명하기 어렵지만 아리스토텔레스주의 생명발생론으로 설명하기 용이한 경험적 관찰사례들을 제공했다. 다음의 두 인용문은 각각 아베로에스의 입장과 그것이 중세에 어떻게 활용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들을 읽고 나는 많은 여성들에게 이 <문제>에 대해 물어보았다. 그리고 많은 여성들이 답하기를 사정(射精)하지 않고도, 그리고 심지어 성교에서 불쾌함을 느꼈음(displicere)에도 임신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들 중 상당수는 남성들에 의해 강제로 범해진 이후에 임신하게 되었다는 것을 확인했다. 나아가 내 이웃 중 한 여인은 더운 물이 담긴 욕조에서 예기치 않은 임신을 했는데 그 욕조에서 사악한 남자들이 목욕을 하다가 그곳에 사정을 했다고 자신의 영혼을 걸고 맹세했다. 그녀의 맹세에 따른 증언은 철저히 신뢰할 수 있는 것이었다[61].
아베로에스도 그의 이웃이었던 신실한 어떤 부인에 대해 동일한 사안을 증언하고 있는데, <그녀가 신실하였기 때문에> 그는 그녀의 맹세를 믿을 수 있었다고 말한다. <아베로에스에 따르면> 그녀는 어떤 목욕탕의 뜨거운 물에서 예기치 못하게 임신을 하게 되었는데 그 물은 같은 장소에서 목욕한 사악한 사내들이 정액을 뿌려놓은 물이었다며 자신의 영혼을 걸고 맹세했다고 한다. 따라서 여성 쪽에서 사정할 필요가 없으며 능동인인 남성정액과 이 정액의 힘에 이끌리는 작용의 수용자이며 질료의 자리에 드러나는(se exhibere) 생리혈만 필요하다[62].
에지디우스가 인용한 목욕탕 수태는 여인이 남성의 이부자리를 치우다 이불에 묻은 몽정(夢精)의 흔적(pollutio nocturna)에 의한 수태사례[63,]와 더불어 여성이 성교에 따른 육체적 쾌락 없이 수태한 경우로 중세인들이 갈레노스주의 생명발생론을 반박하며 애용했던 경험적 관찰사례였다(Van Der Lugt, 2004: 104-106, 374-376)[64,]. 그런데 에지디우스가 이 작품을 썼던 당시는 가장 폭넓은 의학적 경험의 정전(正典)이자 권위자로 아비첸나가 군림하던 시점이었다. 반면 이 시점의 아베로에스는 그의 여러 철학적 입장들, 예컨대 인간 영혼과 지성 문제로 인해 보나벤투라와 토마스 아퀴나스, 그리고 심지어 에지디우스를 포함한 주요 중세사상가들의 호된 비판의 표적이었다[65,]. 그런데 놀랍게도 에지디우스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를 경험적으로 확증하는 의학적 경험[66,]의 원천이자 권위로 ‘주석가’ 아베로에스를 부각시켰다. 이는 에지디우스가 의학적 경험의 실례를 제공하는 ‘탁월한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 아베로에스를 의학의 새로운 권위[67]로 복권시켜 갈레노스주의 및 이를 대변하는 아비첸나의 의학적 경험과 권위에 맞섰음을 시사한다.
나아가 아비첸나와 알베르투스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시한 남성정액과 생리혈의 구도에 갈레노스가 제시한 여성정액을 추가하여 양자의 약점을 보완하는 종합이론을 구축하려 했다. 하지만 에지디우스는 아베로에스의 권위를 좇아 여성정액을 어떤 방식으로든(적극적인 원리로서든 질료적 원리로서든) 생명 발생의 필수 원리로 간주하려는 입장을 철저히 배제하며 아리스토텔레스주의를 고수했다[68,]. 이런 면에서 『인간육체형성론』에서 ‘주석가’ 아베로에스가 의학의 권위로 부각된 것은 13세기 갈레노스주의, 특히 아비첸나와 알베르투스가 종합 혹은 절충의 과정에서 시도했던 아리스토텔레스화(化)한 갈레노스 혹은 갈레노스화한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저항이자, ‘순수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 즉 형상-질료론에 기반한 남성정액-생리혈 구도의 생명발생론의 유효성 및 타당성을 뒷받침하려 했던 에지디우스의 의도를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69].
나) 아리스토텔레스주의 생명발생론과 단수성론
그렇다면 왜 에지디우스는 당대 의학을 지배하던 갈레노스주의 대신 아리스토텔레스주의를 옹호하게 된 걸까? 이에 답할 실마리 중 하나는 『인간육체형성론』의 집필기에도 여전히 중요한 철학적/신학적 쟁점이었던 실체적 형상의 단/복수성 문제에서 확인가능하다. 먼저 분명하게 짚어야 할 사실은 에지디우스가 열렬한 실체적 형상의 단수성론자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최소한 『형상의 등급과 복구성 반박』을 집필했던 1278년 이후로 단수성론에 대해 유보적인 입장을 취하기 시작했다[70]. 또한 『인간육체형성론』에서도 실체적 형상의 단/복수성과 관련된 사안들을 직접적으로 거론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가 여전히 이 사안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정황은 확인가능하다.
그림 4와 5에서 확인할 수 있듯, 실체적 형상의 단수성론과 아리스토텔레스주의 생명발생론은 능동적 원리(실체적 형상과 남성정액)와 수동적 원리(제일질료와 생리혈)의 이원구도로 생명체의 발생을 설명한다. 예컨대 에지디우스와 함께 대표적 단수성론자였던 토마스 아퀴나스도 아리스토텔레스를 따라 남성정액은 능동적인 힘(vis activa)을 가진 능동적인 원리(principium motivum)로, 그리고 여성의 생리혈은 (수정되어 생겨난 생명체의) 질료적 원리로 제시했다[71,]. 그리고 복수성론의 매개형상을 거부했듯 남성정액과 생리혈을 매개하는 제3의 원리인 여성정액이 생명체의 발생에 반드시 필요하다는 입장을 아리스토텔레스를 내세우며 거부했다[72]. 즉 갈레노스주의 생명발생론이 복수성론을 의학과 자연학의 영역에서 뒷받침했다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생명발생론은 단수성론을 의학적/자연학적으로 뒷받침했다. 물론 에지디우스는 파리대학 교수로 복귀한 즈음 실체적 형상의 단/복수성 문제에 유보적 태도를 취했다. 그럼에도 『인간육체형성론』에서 단수성론을 지지하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를 내세워 복수성론을 지지하는 갈레노스주의를 공격한다는 점에서 그가 복수성론에 대한 적대적 문제의식을 계속 유지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에지디우스가 여성의 사정과 성적 쾌락, 그리고 임신의 관계에 대해 전개한 논의는 갈레노스주의를 수용한 복수성론의 신학적 급소와 연관되어 있었다. 복수성론자들은 임신과 여성의 성적 쾌락(여성의 사정을 동반하는) 사이에 필연적 관계를 정초했던 갈레노스주의 생명발생론을 수용했다. 이로 인해 복수성론자들은 성모의 동정잉태를 설명하면서 난제에 직면해야 했다.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를 수용한 에지디우스나 토마스 같은 단수성론자들은 성적 쾌락 및 여성정액이 생명발생의 필수조건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우리는 남성에게 모든 것을 만드는 하나의 어떤 것, 즉 정액이, 그리고 여성에게 모든 것으로 만들어지는 하나의 어떤 것, 즉 생리혈이 있다고 말한다. 따라서 여성정액은 <자손의> 발생에 어울리지 않으며 작용자도 아니다. 그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정액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질료도 아니다. 왜냐하면 엄밀한 의미에서 생리혈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자체로서 <자손의 발생에> 어울리지 않으므로 이런 정액 없이도 <자손의> 발생은 일어날 것이다[73].
<자손의> 발생을 위해서는 두 <성(性)의> 정액이 합쳐져야 한다고 말하는데 그 까닭은 이런 식으로 <두 성의 정액이 합쳐져야 자손의> 발생이 훨씬 더 용이하며 <발생에> 훨씬 더 적절한 <조건이 되기> 때문이지 이와 다른 방식으로 일어나는 것이 전적으로 불가능하다거나 이런 방식의 결합이 <자손의> 발생에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은 아니다. 왜냐하면 자궁이 자신의 정액을 빨아들이면서 남성정액을 함께 빨아들인다고 말한 동일한 사람들은 종종 여성은 성교 시 쾌락을 경험하지 않고서 임신하며, 또한 성교에서 쾌락을 얻을 때도 임신한다고 잉태와 성교를 경험한 여성들이 주장한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성의 경우 사정이 쾌락과 연결되기에, 만약 여성이 성교의 쾌락 없이 임신한다면, 사정하지 않고 임신한 것이다. 물론 <성교>에 저항하여 쾌락을 얻지 않고 사정하지 않은 여인도 잉태를 할 수는 있다는 것은 분명히 밝혀진 사실이다[74].
이렇듯 단수성론자들에게 여성정액은 생명발생의 필수원리가 아니었다. 이에 따라 단수성론자들은 복수성론자들처럼 ‘성모가 성령으로 성자를 잉태할 때 성적 쾌락을 느꼈는가?’ 따위의 질문에 냉가슴을 앓을 이유가 없었다. 이런 면에서 에지디우스의 『인간육체형성론』은 다음과 같은 신학적 입장과 관련하여 성모에게 정욕이나 성적 쾌락을 투사하는 불경에 대한 고민을 덜어주는 동시에 그 입장을 확증하는 기저담론을 제공했던 셈이다.
여성정액은 발생과 긴밀히 연관된 것(aptum)이 아니며 정액의 계열에서 어떤 불완전한 것으로 여성의 힘의 불완전성으로 인해 정액으로서 완결적 완성에 다다르지 못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런 정액[=여성정액]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동물발생론』(1권)에서 말하듯 잉태에 필수적인 질료가 아니다.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의 잉태과정에 여성정액은 없었다. 왜냐하면 정액의 계열에서 <여성정액이> 불완전하다 할지라도 남성정액이 그렇듯 모종의 정욕이 <사정에> 개입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동정 잉태에는 정욕이 자리 잡을 수 없다. 그런 까닭에 다마스케누스는 그리스도의 몸이 정액에 의해 잉태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75].
이렇게 에지디우스는 『인간육체형성론』에서 실체적 형상의 단/복수성의 문제를 전혀 거론하지 않으면서도 의학담론으로 복수성론자들의 취약점을 공격할 길과 단수성론을 정당화할 길을 동시에 열었다. 한편 의학담론으로 복수성론자들의 취약점을 공략할 우회로를 여는 에지디우스와 의학 및 신학에 호소하며 단수성론자들을 공격했던 라 마레의 굴리엘무스의 모습이 겹치기도 한다. 물론 에지디우스가 『인간육체형성론』을 집필할 당시 굴리엘무스를 의식했다는 문헌적 근거는 없다. 그럼에도 에지디우스의 논의들은 1277년 이후 복수성론의 승리를 확신하며 던진 여유로운 끝내기 수처럼 보였던 굴리엘무스의 호소에 대한 통렬한 답이자 반격으로 손색이 없다. 아리스토텔레스와 아베로에스의 권위를 빌어 복수성론자들이 선호했던 갈레노스주의의 한계를 비판하고 신학적 난제까지 암시함으로써 의학의 영역에서 단수성론의 타당성과 유효성을 확증할 길을 열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에지디우스의 『인간육체형성론』은 아리스토텔레스주의 생명발생론을 기초로 복수성론자들이 수용했던 갈레노스주의를 공격함으로써 논쟁의 새로운 영역을 모색한 현실적 타개책이자, 20여년 후 비엔 공의회(Council of Vienne, 1311-1312)에서 그가 얻을 성과[76]를 예고하는 효과적 포석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이상과 같이 에지디우스의 『인간육체형성론』은 13세기 중반부터 14세기까지 서유럽 중세를 뜨겁게 달구었던 실체적 형상의 단/복수성 논쟁의 여러 단면 중 하나를 확인할 수 있게 해준다. 무엇보다도 이 논쟁으로부터 파생한 중세철학과 신학의 문제들과 관련하여 중세 의학담론들이 유용한 이해의 열쇠가 될 수 있음을 이 작품은 잘 보여주고 있다. 예컨대 『인간육체형성론』에 등장하는 의학담론으로부터 우리는 고대의학 전통의 중세적 수용과정에서 드러나는 차이가 그리스도교 신앙의 요체를 이루는 여러 신학적 난제를 타개해가는 과정에서 어떤 결과로 이어졌는지를 추적할 단서를 제공한다. 에지디우스의 『인간육체형성론』과 이 작품에서의 논의가 13세기 중세의학사는 물론 중세철학사를 포함한 중세사상사 일반의 흐름을 이해하는 데 품은 중요한 가치 중 하나가 바로 여기에 있다.
4. 맺음말
아리스토텔레스와 갈레노스 생명발생론의 중세적 수용과 변용은 중세인들의 관심사를 명료화하고 고대 그리스와 아랍의학 전통이 중세사상의 발전과정에서 수행한 역할을 보여준다. 무엇보다도 주목할 것은 중세인들이 두 전통의 수용과정에서 각 전통의 특징과 차이를 확인하는 가운데 때로는 종합 혹은 절충하며 상호보완을 꾀하거나, 때로는 양자를 첨예하게 대립시키며 그들 입장의 기반으로 활용했다는 점이다. 두 전통의 차이는 자손이 어머니를 닮는 현상을 설명하는 문제에서 비롯되었다. 하지만 중세에 이 차이는 인간의 수태 순간으로부터 죽음에 이르는 모든 자연적 과정을 포함하여 이 세상에서의 삶 이전과 이후를 아우르는 초자연적인 과정에 대한 이해의 차이로, 즉, 인간 생명의 궁극적 의미와 목적에 대한 신학적 입장의 차이로까지 확장된다. 이는 대표적으로 실체적 형상의 단/복수성 논쟁과 그 논쟁의 연장선에서 펼쳐진 신학적 논의들에서 확인가능하다. 복수성론자들은 갈레노스를 원용하여 그들의 철학적 입장은 물론 성자의 몸과 인성의 문제와 관련하여 신의 조력자로서 성모의 적극적 역할을 강조하는 신학적 입장을 정당화하려 했다. 반면 에지디우스와 같은 단수성론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를 바탕으로 그들의 입장을 정당화 하는 것은 물론, 복수성론자들이 맞닥뜨린 신학적 난제(성모의 성적쾌락의 문제)를 극복하며 성모의 동정성을 보존할 대안적 논의를 전개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 논쟁에 뛰어들었던 주요 사상가들이 그들의 신학적 입장을 철학적 사변 외에도 의학의 풍부한 실증적·경험적 사례를 동원하여 확증하고자 했다는 점이다. 중세의 경구(警句), 즉 “철학은 신학의 시녀다(philosophia anchila theologiae)”[77,]와 “철학과 의학은 두 자매다(philosophia et medicina duae sorores sunt)”[78]는 이렇게 실체적 형상의 단/복수성 논쟁의 과정 속에서 공명(共鳴)했다. 이런 의미에서 실체적 형상의 복수성/다수성 논쟁은 중세의학이 당대 철학과 신학의 주요 쟁점과 관련하여 활용된 방식과 당대 지성계에서 의학담론의 영향력 및 위상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하는 사례라 볼 수 있다.
한편 19세기 이후 과학과 의학은 생명체의 수정과 발생에 대한 이해를 대폭 확장시켰다. 이 과정에서 “여성정액”과 “생리혈”의 역할에 대한 고대와 중세 생명발생론은 틀린 것으로 판명났다. 그리고 현대인은 고대인과 중세인들이 여성의 몸과 생리작용에 투사한 ‘판타지’를 이론으로 치장하는 과정에서 성모의 성적 쾌락의 문제에 직면하여 당혹하는 모습에 실소를 금치 못한다. 하지만 현대인들이 이런 판타지에서 자유롭다고 할 수 있을까? 최소한 우리는 고대와 중세의 ‘과학적’ 판타지에서 자유롭다고 할 수는 있다. 하지만 과연 모든 ‘판타지’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고 보기는 어렵다. 아직도 아리스토텔레스의 남성:여성=정액:생리혈=능동:수동의 구도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우리는 생명체의 발생과정에서 정자가 거친 수억 대 일의 경쟁을 종종 거론한다. 반면 배란된 난자가 약 수백만 대 일의 경쟁을 이겨낸 성과임을 거론하는 경우는 드물다. 나아가 배란을 위해 난포들이 벌인 치열한 화학전과 정보전에 대한 언급은 더욱 드물다. 이렇게 정자와 난자의 분투과정에 대한 묘사의 균형은 깨져 있다. 지난 30여 년 동안 물리적으로 섬모운동만으로는 정자가 난막을 뚫을 수 없으며[79,] 이에 따라 정자에 대한 난자의 물리적/화학적 원호(援護)가 없다면 수정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밝혀졌음에도 말이다[80]. 새로운 과학적 발견들은 더 이상 그냥 두면 죽어 사라질 수동적인 난자를 그리지 않는다. 또한 새 생명을 부여하는 영웅적이며 능동적인 정자를 그리지 않는다. 새 과학적 발견들은 길 모르고 헤매다 제풀에 지쳐 죽게 될 정자들과 그 중 하나를 선택하여 구원하는 적극적이며 능동적인 난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럼에도 생명의 소중함과 생명활동의 치열함을 논할 때 수억 대 일의 경쟁을 뚫은 정자의 영웅담이 우리에게 더 익숙하게 다가오는 까닭은 무엇일까? 혹여 새로운 관찰결과를 체화하려 하지 않기 때문은 아닐까? 힐먼은 이렇게 말한다.
세계관은 판타지에 의해 구성되며, 심지어 판타지의 구조로부터 벗어나 철학의 추상적 개념들로 정식화되는 경우에도 판타지적인 틀을 갖는다 ……인간의 몸에 대한 모든 이론은 언제나 판타지의 일부다[81].
아리스토텔레스의 생명발생론은 오늘날 과학의 영역에서 판타지가 되었다. 하지만 그는 그 시대의 관찰결과를 최대한 활용하여 생명의 발생을 합리적으로 설명하려 했다. 물론 아리스토텔레스는 당대 문화와 습속의 영향으로 여성 측에 수동적인 역할만을 투사했다. 그럼에도 아리스토텔레스에겐 여성이 생명체 발생에 필수원리를 제공한다는 이론을 제시한 공(功)은 있다. 최소한 ‘씨앗을 뿌리는 자만이 부모이며 어머니는 어린 생명을 양육하는 이방인에 지나지 않는다’는 입장(아이스퀼로스, 『에우메니데스』, 658-659)보다 진일보한 입장이기 때문이다[82,]. 또한 갈레노스도 여성보다는 남성 측에 방점을 뒀다. 그럼에도 그에게는 여성의 능동적인 역할을 드러냈다는 공을 돌릴 수 있다. 그렇다면 이미 중학교 교과과정에도 반영된 정보를 아직도 소화하지 못한 우리는 미래 세대에게 어떻게 보일까? 우리의 현주소는 “생식과 여성의 열등함에 대한 아폴론적 판타지는 서구 과학의 전통에 충실하게 재현”[83,]되고 있으며 “아폴론적 여성관은 판타지들을 입증한다고 여겨지는 방법론처럼 의식의 바로 그 구조 안에 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84]”는 힐먼의 진단을 떠올리게 한다. 이렇게 의식구조 자체에 내재한 문제를 해결할 근본적 방안을 이 자리에서 논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우리의 모습을 엄혹하게 진단했던 힐먼의 인용구로 우리가 가져야 할 문제의식을 되새기며 본 논문의 결론을 대신하고자 한다.
우리는 생식의 생리학과 관련하여 남성적 과학(male science)에서 이론적 과실과 관찰 오류의 장구하고도 놀라운 역사에 직면하고 있다. 이와 같은 판타지 같은 이론과 판타지 같은 관찰은 오해도 과학적 진보의 노정에 의례적이며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실수도 아니다. 이들은 당대 과학의 의심의 여지를 허락하지 않는 객관적 언어로 써내려간 여성에 대한 반복적인 비하다[85].
Notes
이 논쟁에 대한 20세기 이후 현대 중세철학사 연구의 기초를 제공한 인물로 로탱(Lottin, 1932)과 페지스(Pegis, 1934), 칼루스(Callus, 1946)를 꼽을 수 있다. 로탱은 이 논쟁에 접근하는 철학적·문헌학적 작업의 기초를 제공했으며, 칼루스는 1270년대를 전후한 일련의 단죄 및 이 단죄와 연관된 여러 인물들의 입장에 대한 입체적 조망의 주춧돌 역할을 했다. 그리고 이 논쟁에 대한 현대 연구 가운데 단수성론의 철학사적 함의의 경우는 바잔(Bazán, 1969)을, 복수성론의 경우는 자발로니(Zavalloni, 1951)를 대표적으로 꼽는다. 이미 출간 시점부터 고전의 위상을 획득한 두 연구는 현재까지 이 논쟁 연구자들 사이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필독자료로 남아 있다. 한편 마이클(Michael, 1992)과 맥컬리어(McAleer, 1999)는 페지스 이래 토마스 아퀴나스의 입장을 중심으로 이 논쟁을 조명하던 흐름에서 벗어나 아베로에스의 영향과 라틴아베로에스주의의 발전사 맥락에서 접근했다는 면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그리고 라거룬트(Lagerund, 2004)는 13세기의 맥락과 14세기의 맥락을 예리하게 구분하면서 이 논쟁의 흐름을 조명한 중요한 성과다. 이 밖에 국내에서 번역 출판된 칼데라, 2016은 이 논쟁의 철학적/신학적 쟁점과 맥락을 짧은 분량으로 잘 정리하고 있다. 국내에서는 이 논쟁을 박승찬이 토마스 아퀴나스를 중심으로, 그리고 정현석이 보나벤투라를 중심으로, 그리고 유대칠이 13-14세기로 이어지는 시기의 사상가들을 중심으로 다룬 바 있다(박승찬, 2010b: 72-77; 정현석, 2010; 2015; 유대칠, 2008: 261-275). 유대칠, 2008은 향후 이 논쟁을 14세기 맥락에서 연구할 국내 연구의 기초를 제공하는 중요한 국내 연구성과다.
본 논문의 각주 41 참조.
스콜라사상가들의 철학적·신학적 인간학에 미친 고대 생명발생론의 영향과 관련하여 조셉 니담의 고전적 연구(Needham, 1931: 103-106)는 이후 연구에 중요한 영감을 제공했다. 니담은 이 작품에서 스콜라 신학에 미친 고대 생명발생론의 영향에 접근하는 표준적 시각을 제공했다. 이후 뵈렌센(Børresen, 1971, 70-90)은 성모론(Mariology)과 연관된 스콜라신학의 인간학적 담론을, 그리고 반데르루크트(Van Der Lugt, 2004: 371-446)는 니담 이후 축적된 문헌학과 중세과학사, 중세철학, 중세신학 연구의 성과를 반영하여 13-15세기에 이르는 중세 스콜라 담론의 추이를 고대 생명발생론 전통의 수용과 변용을 중심으로 분석함으로써 스콜라 사상에서 의학담론의 역할에 대한 새로운 이해 지평을 열었다. 본 논문 역시 뵈렌센과 반데르루크트의 대가적 연구, 특히 후자의 작업과 문헌분석에 큰 빚을 지고 있다.
Aristoteles, De generatione animalium, 1, 19, 740b25-26: “Materiam quidem igitur exhibet femella, principium autem motus masculus.”(본 논문에서는 고대와 아랍 사상가의 작품을 인용할 때 중세인들이 활용했거나 접했을 문헌의 원천에 해당하는 라틴어 번역본의 현대 판본(Aristoteles Latinus)을 활용할 것이다).
여성의 질내 분비물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Aristoteles, De generatione animalium, 1, 20, 727b34 이하.
Aristoteles, De generatione animalium, I, 19, 727a25-30: “Quoniam autem hoc est quod fit femellis ut genitura masculis, duas autem non contingit spermaticas simul fieri segregationes, manifestum quod femella non confert sperma ad generationem, Si enim sperma esset, menstrua nom utique essent.”
Aristoteles, De generatione animalium, I, 20, 728a26 ff, 729a25ff.
Galenus, De usu partium, 14, 7: “Verum (ut nuper diximus) quod quidem semen est imperfectius in motu, foemina, quod vero perfectius, mas efficitur. …… constat ergo quod omnino semen maris flagiat. Quod si ita est, misceatur cum eo est necesse, atque ita utrumque semen in unum motum conspiret(C. G. Kuhn, 1822: 165-166).”
테르툴리아누스, 『그리스도의 육신론』, 19, 3: “Neque enim, quia ex sanguine negavit, substantiam carnis renuit se materiam seminis quam constat sanguinis esse calorem, ut despumatione mutatum in coagulum sanguinis feminae. Nam et coagulum in caseo ejus est substantiae quam medicando constringit, id est lactis. Intelligimus ergo ex concubitu nativitatem domini negatam, quod sapit et non ex voluntate viri et carnis, non ex vulvae participatione(테르툴리아누스, 1994: 194-197, 강조는 필자).” 그리고 테르툴리아누스가 사용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치즈 응고의 비유는 Aristoteles, De generatione animalium, I, 20, 729a10-14: “masculus quidem exhibet speciem et principium motus, femella autem et corpus et materiam, velut in lactis coagulatione corpus quidem lac est, formans coagulum principium habens et constare faciens, sic quod a masculo in femella partitum est.”
Nemesius de Emesa, De Natura Hominis, 25: “Mulieres quoque omnia eadem, quae et viri, habent membra, sed intus et non deforis. Aristoteles itaque et Democritus nihil volunt conferre semen mulieris ad generationem filiorum. Nam quod procedit a mulieribus magis desudationem membri, quam semen esse volunt. Sed Galenus reprehendens Aristotelem dicit mulieres quidem semen effundere et mixturam utrorumque seminum conceptum efficere(Burkhart, 1917: 142.7-12).”
한편 네메시우스의 저작은 니사의 그레고리우스(Gregorius de Nyssa)의 작품으로 13세기에 잘못 알려져 있었다. 그래서 알베르투스 마그누스와 토마스 아퀴나스도 그를 그레고리우스의 이름으로 인용했다(Jordan, 1988: 242).
Gullielmus de Conchis, Dragmaticon philosophiae, 6. 8. 8-10: “Dux: Ad memoriam uenit michi quod nuper dixisti, sine semine feminae nichil concipi; quod non est uerisimile. Videmus enim raptas, reclamantes et plorantes uiolentiam passas, concepisse. Vnde apparet illas nullam in illo opere habuisse delectationem. Sed sine delectatione non potest sperma emitti. /Philosophus: Etsi raptis in principio opus displicet, in fine tamen ex carnis fragilitate placet. Iterum sunt in homine duae uolutates, ratiocinatiua et naturalis, quas saepe in nobis repugnare sentimus; displicet enim saepe rationi quod placet carni. Etsi igitur in rapta non est uoluntas rationis, est delectatio carnis(Ronca et als., 1997: 209-210).”
13세기와 14세기 의학계에서 가장 중요한 저술로는 『아르티첼라』(Articella)와 새로 라틴어로 번역된 갈레노스의 작품들(New Galen), 그리고 아비첸나의 『의학규범』(Canon)을 꼽을 수 있다. 그 중 아비첸나의 『의학규범』은 무질서하게 전개된 『아르티첼라』의 내용을 정연하게 설명하거나 새로 라틴어로 번역된 갈레노스 작품들에 들어 있는 다양한 논의들을 관통하는 흐름의 파악에 유용하게 활용되었다(French, 2001: 2-3, 특히 note. 4 참조).
Avicenna, De animalibus, 9, 1: “Et videamus quid dixit ille medicus contra Aristotelem, putans se aliquid dicere cum nihil dixerit, licet sciverit multum de ramis, ignorans radices scientiae(de Forlivio, 1500: 41rA).”
Avicenna, Canon Medicinae, 3, 20, 1, 3: “Cognitio vero certitudinis unius harum duarum intentionum pertinet ad scientiam naturalem: et non nocet medico ignorantia eius(Iunta, 1608: 888).”
Avicenna, Canon Medicinae, 1, 1, 1, 1: “non debet aggredi, in quantum est medicus, sed in quantum est philosophus(Iunta, 1608: 8).”
실제로 중세 유럽의 사상계에서 아비첸나는 철학적으로 인간의 활동과 능력 중 가장 비물질적인 것을 논할 경우라도 가장 구체적이며 현실적인 차원에서 인간 신체에 대한 깊고 정확한 지식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는 학문적 당위를 체현한 인물로서 존경받았다. 중세 사상가 중 그의 영향을 받은 대표적 인물로는 13세기 의학자이자 철학자로서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교황 요한 21세(1276-1277년까지 재위)로 널리 알려진 페트루스 히스파누스(Petrus Hispanus, 1215?-1277)를 들 수 있다.
Avicenna, Canon Medicinae, 1, 1, 5, 1: “Et etiam denuo dicemus quod membrorum alia sunt quae generantur ex spermate que sunt similium partium membra praeter carnem et adipem, et alia sunt quae ex sanguine generantur, sicut adeps et caro. Quod enim est praeter haec duo ex duobus generatur spermatibus, masculorum spermate et spermate mulierum Sed secundum sermonem eius qui de sapientibus verificavit, de spermate masculi generatur sicut generatur caseus, de coagulo, et de spermate mulieris generatur sicut caseus generatur de lacte. Et sicut principium coagulationis est in coagulo, ita principum coagulationis formae est in spermate viri. Et, sicut principium coagulationis est in lacte, ita principium coagulationis materiae formae, scilicet virtutis patientis est in spermate mulieris Et quemadmodum unumquodque duorum, coaguli videlicet et lactis est pars substantiae casei qui sit ex eis, ita unumquodque duorum spermatum est pars substantiae embrionis. Hoc autem verbum non parum, immo multum verbis Galeni est contrarium. Sibi namque videtur quod cuique duorum spermatum inest virtus coagulativa et virtus coagulationem suscipiens: Et propter hoc non se prohibet, quin dicat quod virtus coagulativa in masculis est fortior et virtus coagulationem suscipiens est fortior in foeminis(Iuntas, 1608: 31).”
Albertus Magnus, Quaestiones Super De Animalibus, 15, 19: “Dicendum, quod proprie loquendo femina non spermatizat. Et huius ratio est, quia sperma est super fluitas ultimi cibi complete digesti; sed completio digestionis est ex calore forti, feminae autem sunt debilis calorie, et ideo in femina non est virtus sufficiens generandi sperma. Immo sicut calor fortis sperma facit in mare, sic calor debilis menstruum facit in femina, quia menstruum est sanguis crudus et indigestus. Intelligendum tamen est quod aliquo modo sperma potest esse in femina……Advertum tamen est quod sperma repertum in feminis non est conveniens generationi secundum propriam rationem spermatis, quia in spermate proprie est virtus activa et formativa membrorum et inductiva animae, et talis virtus solum est in spermate maris. Unde femina non convenit generationi nisi per suum menstruum(Geyer, 1955: 271.54-62).”
Albertus Magnus, De animalibus, 16, 2, 1: “Per virtutem autem spermatis viri tenetur et regitur et coagulatur humor sive gutta quae exit a femina in matrice: et accidit ei quod accidit lacti quod coagulatur per coagulum: quando enim coagulatur lac, est in lacte calor spiritualis qui adunat lac et sustentat ipsum. Et similiter facit sperma maris in menstruo, quoniam natura lactis et sanguinis menstrui est eadem(Stadler, 1916-1920: 1114).”
Albertus Magnus, De morte et vita, 2, 6: “Humor autem qui est subjectum et pabulum hujus calidi, principaliter quidem est duplex, seminalis scilicet, qui constituitur ex tribus humoris, seminis scilicet maris, seminis foeminae, et sanguinis menstrui. Sed in his semen masculinum est operatorium et factivum; foeminium autem factum et operatum; et humor sanguinis menstrui est assumptus in supplementum et augmentum(Vivès, 1890: 359).”
이와 같은 삼원구도는 페트루스 히스파누스의 『아리스토텔레스의 『동물에 관하여』의 문제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Petrus Hispanus, Quaestiones super libro De animalibus Aristotelis, 10, 1: “Tertia causa est quia a parte mulieris requiruntur duo, scilicet sperma et menstruum, a parte autem ipsius uiri solum sperma et propter hoc citius deficit generatio in mulieribus quam in viris(Sanchez, 2015: 258.54-56).”
니담(J. Needham)은 이와 관련하여 그의 기념비적 작품 Chemical Embryology에서 알베르투스에 대한 갈레노스주의의 영향을 다루는 현대 연구의 기본틀을 제공했다(Needahm, 1931: 98, 102).
간, 심장, 뇌 및 생식기관등 다시 재생이 되지 않는 기관들. 그밖에 membra deservientia는 정맥과 동맥, 그리고 신경계를, membra officialia는 손과 발 장소이동과 관련되는 기관들을 지칭한다.(Reynolds, 1999: 261 참조). 한편 반트란트(Van’t Land, 2012)는 14세기 의학을 중심으로 중세의학자들이 남성적 원리, 즉 정액으로부터 나온다고 여겼던 기관들로 생명활동에 필수불가결한 기관들을 거론하는 반면, 생리혈, 즉 여성적 원리로부터 나온다고 여겼던 기관들로 재생 및 대체 가능한 기관들을 거론하고 있음에 주목하면서, 이를 중세의 남성우월론이 의학적 사유에 반영된 사례로 다루었다.
Albertus Magnus, De animalibus, 9, 2, 1: “……dictum Galieni ad hoc quod duo sint spermata quae sunt principia generationis animalium: unum quidem maris, quod per seipsum est faciens et formans propter multum spiritum, qui intra viscositatem eius continetur: et hoc ideo dicitur habere virtutem formativam. Alterum autem quod est sperma mulieris agens et formans sicut organum motum ab alio et excitatum: et ideo non formativam, sed informativam dicitur habere virtutem. Tertium autem est sanguis menstruus, ex quo non sumitur nisi caro fetus, quae sup<p>let vacuitates quae sunt inter membra radicalia. Primum igitur istorum principiorum est movens tantum et formans: secundum autem est movens et motum et formans informatum: et tertium est motum et formatum tantum. Haec igitur est sententia Galieni(Stadler, 1916-1920: 710).”
아비첸나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을 소개하며 갈레노스의 여성정액을 제3의 필수요소로 추가했다면, 이 인용문에서 알베르투스는 갈레노스의 입장을 소개하며 아리스토텔레스의 생리혈을 제3의 필수요소로 거론하고 있다.
Albertus Magnus, Commentaria in Librum Secundum Sententiarum, 13, 2, ads 2-5: “Unde sciendum, quod Augustino in his quae sunt de fide et moribus plusquam Philosophis credendum est, si dissentiunt. Sed si de medicina loqueretur, plus ego crederem Galeno, vel Hipocrati: et si de naturis rerum loquatur, credo Aristoteli plus vel alii experto in rerum naturis(Vivès, 1894: 247)” 참조(강조는 필자).
Albertus Magnus, De animalibus, 9, 2, 3; 9, 2, 1; 15, 2, 11 (Stadler, 1916-20: 714, 710, 1056) 참조.
Albertus Magnus, De morte et vita, 15, 19(Vivès, 1890: 271).
이런 그의 입장은 중세 갈레노스주의자가 여성의 성적 쾌락과 여성정액의 방출 및 수태 사이 밀접한 관계를 정초함으로써 맞닥뜨린 난제들, 예컨대 굴리엘무스 데 콩키스 등에서 확인할 수 있는 성폭행을 당한 여성의 문제나 이후에 본 논문에서 다룰 성모의 동정성 같은 신학적 난제 등을 피해가게 한다(Van Der Lugt, 2004: 421).
본 논문의 각주 21, 그리고 Albertus Magnus, De animalibus, 16, 1, 10: “recipit ibi sperma feminarum primo et postea etiam sanguinem menstruum aut illud quod est loco sanguinis menstrui, in quo sigillando imprimit formam creaturae et membrorum eius: quia sic operatur conceptum(Stadler, 1916-20: 1090).” 참조
Albertus Magnus, De animalibus, 9, 2, 2(Stadler, 1916-20: 710-714).
Albertus Magnus, De animalibus, 15, 2, 11: “Cum igitur secundum sententiam Aristotelis superius diximus quod generatio fit ex spermate et cibatio a sanguine menstruo, oportet accipere quod generatio materialiter est ex eo quod vocatur sperma mulieris et cibatio a menstruo sicut iam diximus(Stadler, 1916-20: 1057).”
니담은 그의 고전적 연구에서 알베르투스의 입장이 아리스토텔레스를 떠나 에피쿠로스 학파의 입장을 수용한다고 말했다(Needham, 1934: 68). 하지만 위에서 보는 바처럼 알베르투스의 생명발생의 필수원리들에 대한 이해에 가장 많은 영향을 주었을 원천자료는 그가 비판적 거리를 두고 탐독했던 아비첸나다.
참조 Bonaventura, Commentaria in Librum Secundum Sententiarum, 3, 1, 1, 3, res.: “……illa <materia> est unitas magis possibilitatis, quae adeo ampla est ut sustineat receptionem majoris multitudinis diversitatis formarum superadiectarum quam unitas formae alicuius unversalis, etiam generis generalissimi; et hoc est propter summam possibilitatem(Quaracchi, 1882: 90).”
Ibidem.
토마스 아퀴나스와 그의 추종자들의 단일성론은 1277년과 1286년 옥스퍼드 대학에서 단죄를 받았다. 에지디우스 역시 단수성론을 지지한 사실로 인해 219개 항목에 대한 대대적 단죄 조치가 있었던 1277년 3월 7일과 3월 28일 사이에 별도의 단죄를 받고 파리대학을 떠나게 된다. 에지디우스에 대한 단죄가 3월 7일과 3월 28일 사이에 있었다는 추정은 헨리쿠스 데 간다보(Henricus de Gandavo)가 1277년 3월 28일에 열린 위원회에 대한 회상에 근거를 둔다. 헨리쿠스는 이날 실체적 형상의 단수성 문제와 관련하여 당시 교황 특사였던 시몬 드 브리옹(Simon de Brion, 교황 마르티노 4세, 1281-85 재위)의 명(命)으로 소집한 위원회가 열렸으며, 이 위원회 며칠 전에 단수성론을 지지했던 사람들이 이미 단죄를 당했다는 증언을 남겼다. 한편 에지디우스는 이렇게 파리대학을 떠난 이후 1285년에 이르러서야 파리대학 교수로 복권(復權)된다. 이에 대해서는 Wielockx, 1985: 81-96 참조.
Guillelmus de la Mare, Correctorium Fratris Thomae, a. 31: “Haec positio de unitate formae substantialis reprobat a magistiris, primo quia ex ipsa plura sequuntur contraria fidei catholicae; secundo, quia contradicit philosophiae, tertio, quia repugnat sacrae scripturae(Glorieux, 1927: 129).”
Guillelmus de la Mare, Correctorium Fratris Thomae, a. 31: “Si enim anima sola intellectiva immediate est perfectio materiae primae tunc non esset in homine forma elementi, nec forma mixti de quibus philosophia multa dicit. Cessabit etiam studium medicinae(Glorieux, 1927: 130-131, 강조는 필자).”
알랭 부로(Alain Boureau)는 굴리엘무스의 호소가 토마스 아퀴나스를 공격하면서 당대 최고의 의학자 였던 교황 요한 21세(페트루스 히스파누스)에게 아첨하고자 하는 정치적 의도를 담은 표현이라 추정하기도 했다(Boureau, 1999: 85-86). 부로의 추정은 굴리엘무스가 『수정집』(Correctoriumm Fratris Thomae)을 작성한 시점을 파리대학의 단죄와 옥스퍼드대학의 단죄가 있었던 1277년 3월부터 1279년 사이로 가정할 경우 개연성이 있다. 그리고 요한 21세 역시 갈레노스주의 의학의 영향을 받았다는 점에서(본 논문의 각주 18과 23 참조) 부로의 추정과 주장은 매력적이다. 하지만 오늘날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1278년 이후로 『수정집』의 작성 시기를 추정하고 있다. 여기에 요한 21세가 1277년 5월 20일에 사망했음을 고려한다면 굴리엘무스가 살아있는 권력을 의식하며 의학에 호소했다고 단정하기엔 무리가 따른다. 『수정집』의 연대에 대한 가장 상세한 연구로는 Oliva, 2005: 423-464 참조.
앞의 셋은 보나벤투라를 비롯한 다수의 프란체스코회 사상가들, 세 번째는 알베르투스.
아울러 영적·정신적(spiritual) 원리나 작용자와 물질적(material) 원리 사이에서 선악 이원론의 대립구도를 설정했던 이원론 이단(카다리파 등)을 논파하는 과정에서 질료와 자연, 그리고 여성을 신과 신의 의도 및 계획에 공조하는 자로 제시하는 이론적 바탕도 확보할 수 있게 된다.
굴리엘무스의 의학연구(studium medicinae)에 대한 우려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 가능할 것이다.
가톨릭 교회가 성모에게 투사하는 동정성은 육체적 성행위의 부재만 아니라 여하간의 성욕과 의도까지 철저히 배제한다. 즉 성모의 동정성은 육체적 동정성과 정신적인 동정성을 모두 포함한다. 이와 같은 성모의 동정성을 가톨릭교회는 649년 제1차 라테란 공의회에서 예수의 “출산 전에도 출산 시에도, 그리고 출산 후에도 유지한 동정성(virginitas ante partum, in partu et post partum)”이라는 표현으로 천명한다(Van Der Lugt, 2004: 371-372; 조규만, 1998: 325-342).
Bonaventura, Commentaria in Librum Tertium Sententiarum, 4, 3, 1, ad 2: “Utrum autem Virgo excitata a Spiritu sancto seminaverit, hoc est, ad locum matricis semen emiserit: quamvis aliqui dixerint, non est verbum illud frequenter in ore versandum, tum quia turpitudinem habet annexam, et homo habere debet munda labia in tali materia; tum etiam, quia certitudinem non habet ex se, nec verbis Sanctorum videtur multum consonare. Unde stultum est in talibus velle ita curiose singula pertractare. Hoc tamen sufficiat dixisse, videlicet quod Virgo ministravit materiam aptam generationi Filii Dei secundum carnem(Quaracchi, 1882, 112).”
Bonaventura, Commentaria in Librum Tertium Sententiarum, 4, 3, 1, res.: “…… beata Virgo habuit virtutem sibi divinitus datam, per quam administraret materiam illi conceptui: materiam, inquam, quae non solum habuit rationem materiae sive potentiae passivae, sed etiam sufficientiam et virtutem ad prolis productionem. Illa tamen virtus per se non poterat prodire ad perfectum actum nisi per successionem in tempore. Sed quoniam non decebat carnem Christi formari successive…… ideo Spiritus Sacntus sua infinita produxit illam materiam ad actum completum(Quaracchi, 1882, 112).”
Bonaventura, Commentaria in Librum Tertium Sententiarum, 4, 3, 1, res.: “Et per hoc in nullo Virgini derogatur, si Deus sua virtute acceleravit quod in aliis mulieribus successive producit ad esse. Non enim fuit minor potentia in Virgine quam in alia muliere, immo multo maior, quia potentiam naturalem et supra naturalem habuit, per quam subministrare poterat materiam ipsa sola adeo sicut mulier viro commixta; unde tota substantia Christi fuit de matre sua. Et ideo, si recte velimus sentire et loqui, veriori modo fuit Virgo Mater Christi quam sit aliqua mater filii sui.…… Et sic patet, quod Virgo maria aliquo modo fuit in conceptione Filii cooperata, videlicet subministrando sufficientem materiam virtute activa, quae tamen supra posse suum fuit et ad complementum perducta per virtutem infinitam(Quaracchi, 1882, 112).”
Ibidem.
참조: Iohannes Duns Scotus, Ordinatio, 4, 1: “Ad Philosophum-exponitur quod mater non est causa principalis agens; ipsa enim principalius ministrat materiam, quia plus corpus prolis formatur de materia ministrata a matre quam de materia ministrata a patre, et si aliter intelligat Philosophus, negatur quia Galens sentit oppositum, sicut recitat Avicenna, et in istis magis credendum est expertis(Iohannes Duns Scotus, 2012: 104 재인용).”
Iohannes Duns Scotus, Ordinatio, 4, 1: “…… dicitur, quod collata sibi fuit vis supernatiralis, secundum quam potuit cooperari Spiritu sancto in instanti. Contra: Ista vis supernaturalis esset accidens et accidens per accidens huius naturae; sed si mater solo isto accidente egit ad formationem corporis Christi: ergo non ita per se et vere et naturaliter egit ad formationem huius corporis, sicut aliae matres, quae ex natura sua agunt ad formationem corporum suae prolis. Non enim ita vere convenit lipidi disgregare, quod convenit ei per albedinem, quae est ei accidens per accidens, sicut convenit ei descendere deorsum, quod convenit ei per naturam suam vel sicut accidens naturale.(Iohannes Duns Scotus, 2012: 88에서 재인용).”
Iohannes Duns Scotus, Ordinatio, 4, 1: “Spiritus sanctus libere agit, ergo non necessario agit secundum ultimum suae potentiae; igitur potest ad aliquid se extendere causalitate causae secundae cooperante secum, et ita potest supplere virtutem patris naturalis, vel etiam efficacius operari quam pater, si esset(Iohannes Duns Scotus, 2012: 96 재인용).”
Iohannes Duns Scotus, Ordinatio, 4, 1: “…… poterit Maria cooperari secundum causalitatem suam, quia nihil ab ea aufertur per hoc quod Spiritus sanctus habet causationem suam, qui non eam tollit praeveniendo, licet suppleat eminenter causalitatem alterius causae cum qua posset concausare (Iohannes Duns Scotus, 2012: 96 재인용).”
『의학통론』은 Kitāb al-kulliyāt fi’ l-tibb이라는 제목으로 아베로에스가 작성했으며 1285년에 이탈리아 파도바(Padova)에서 처음 라틴어로 번역되면서 kulliyāt의 라틴어 음차인 Colliget으로 소개되었다. 가장 오래된 수사본(手寫本)은 MS. Cesena Biblioteca Malatestiana, D XXV, 4, ff. 28ra-63rb으로 초입(Incipit)에 유대인 번역자 이름(Bonacosa), 그리고 번역 장소와 일자가 적혀 있다. 에지디우스의 『인간육체형성론』은 『의학통론』의 라틴어 번역본을 인용한 현전 최고(最古) 문헌이다(Vico, 2008b: 22-23; Jacquart, 1998: 222 참조).
이 변론은 『변론』(Apologia)이라는 제목으로 현전한다. 로베르 비엘록스(Robert Wielockx)가 편집한 현대 비판본의 서지사항은 참고문헌 참조.
『변론』을 통해 볼 때, 『명제집』을 주해하던 당시(1271년 전후) 에지디우스는 인간에게도 단수성론을 적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1274년에 작성한 『그리스도의 육체에 대한 정리들』(Theoremata de Corpore Christi)에서는 단수성론이 확실하지는 않지만 “매우 개연성 있는(valde probabilis)” 설명이라 밝혔다. 1276년경에 작성한 것으로 알려진 『영혼론 주해』 (Super De Anima)에서는 일반적으로는 단수성론에 수긍해도 인간이라는 특별한 경우에 적용하는 데는 동의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가 파리로 복귀한 이듬해인 1286년, 단수성론을 포함한 여러 토마스 아퀴나스의 입장을 옹호했던 리카르두스 냅웰(Richard Knapwell, ?-1288)과 요하네스 퀴도르(Johannes de Soardis, c.1255-1306) 등이 각각 옥스퍼드와 파리대학에서 단죄를 받는 등 단수성론자들의 입지는 여전히 불안한 상황이었다. 한편 분명히 해야 할 것은 리카르두스나 요하네스 등이 토마스의 입장을 옹호했다는 사실로부터 그들이 충실한 토마스 아퀴나스의 추종자(Sectatores Thomae)였다거나 토마스주의자(Thomistae)였다고 보는 것은 무리다. 이와 관련하여 유대칠은 이들을 토마스주의자로 분류해야 한다면 “토마스에 우호적이며, 많은 부분 그의 철학에 의존하지만, 동일하지 않은 논리구조를 가진 ‘구별되는 철학자들’이라는 보다 넒은 의미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며 이들이 단수성론을 옹호하는 과정에서 토마스를 옹호한 것 역시 “토마스의 이론이 오류가 아니라는 것을 옹호하려 한 것” 정도로 보는 편이 옳을 것이라 말한다(유대칠, 2007: 256-257). 에지디우스 역시 토마스와 단수성론자였다는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그는 여러 면에서 토마스와 다른 입장을 드러냈던 지극히 독립적인 사상가였다.
아베로에스는 여러 면에서 갈레노스의 의학과 상충되는 입장을 갖고 있었다. 이 점에 대해서는 Temkin, 1973: 121 참조.
Averroes, Colliget, 2, 10: “non est credendum quod sperma mulieris sit materia vel forma embrionis: sed sperma viri fiat loco formae et sanguis menstruus loco materiae, et sperma mulieris non habet inventionem in generationem(Iunta, 1560: fols. 25rD, 강조는 필자).”
Averroes, Colliget, 2, 10: “Et postquam legi libros Aristotelis, ego quaesivi a multis mulieribus de hoc, et responderunt quod plures impregnatae fuerunt absque spermatizatione et etiam si displicuisset eis coitus. Et etiam vidi quam plures ex istis impraegnatas, quae fuerant a masculis violatae. Et vicina quaedam mea, de cuius sacramento confidere multum bene poteramus, iuravit in anima sua quod impraegnata fuerat subito in balneo lavelli aquae calidae, in quo speramtizaverunt mali homines, cum essent balneati in illo balneo(Iunta, 1560: fols. 24vF-25rA).”
Aegidius Romanus, De formatione humani corporis in utero, 6: “Recitat etiam idem Averroys de quadam matrona, fide digna, vicina eius, de cuius sacramento, ut ait, multum bene confidere poterat, que iuravit sibi in anima sua quod impregnata fuerat subito in quodam balneo aue calide in quo spermatizaverant mali homines qui fuerant balneati ibidem. Non ergo est necessaria emissio spermatis in femina, sed sufficit sperma maris tamquam agens et menstruum attractum virtute huius spermatis tamquoam actionem recipiens et loco materie se exhibens(Vico, 2008a: 100.15-22).”
예컨대 토마스 아퀴나스도 동정성을 다루는 자유토론의 과정에서 이런 방식의 수태를 논한다. 단 여기에서 그의 논의의 초점은 한 남성이 동정이면서도 아버지가 될 수 있는지 여부에 맞춰져 있다. Thomas de Aquino, Quodlbet 6, 10, 1, res.: “Vir autem, salua tali virginitate posset esse pater naturaliter propter pollutionem nocturnam, que quocunque casu ad matricem mulieris perueniret(Leonina, 1996a: 313.85-314.88).”
알베르투스 역시 이 문제에서는 갈레노스주의보다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입장을 그 가 청취한 여성들의 증언들을 거론하며 따랐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의 구절들을 참조: Albertus Magnus, De animalibus, 15, 2, 6: “Cuius signum est quod mulieres expertae in conceptu et coitu dicunt quod multotiens impraegnatur mulier sine delectatione coitus tempore: sicut etiam impraegnatur quando habet delectationem in coitu(Stadler, 1916-1920: 1038-1039)”; Albertus Magnus, De animalibus, 15, 2, 11: “quaedam mulieres dicunt se impraegnatas a coitu non habuerunt delectationem(Stadler, 1916-1920: 1056).”
1270년과 1277년의 단죄에 대한 국내 연구로는: 이재경, 2010; 손은실, 2011; 김율, 2012; 서병창, 2013; 이경재, 2011; 박승찬, 2011: 127-129; 박승찬, 2010a: 134-136 등 참조.
오늘날이라면 도시괴담으로도 치부되지 못할 황당한 ‘경험담’이다. 하지만 이를 결정적으로 반증할 계기는 1872년 카를 에른스트 폰 베어(Karl Ernst von Baer)가 최초로 인간의 난자를 관찰하고, 1876년 오스카 헤르트비히(Oscar Hertwig)가 난자가 정자와 결합하여 수정된다는 사실을 최초로 관찰했던 시점까지 오지 않았다.
아베로에스의 『의학통론』은 아비첸나의 『의학규범』에 100년 이상 늦은 1286년 서유럽에 라틴어로 번역되어 소개되었다. 중세 서유럽에서 『의학통론』 역시 의학서로서 성공을 거두기는 했다. 하지만 그 영향력은 결코 『의학규범』에 미치지 못했다.
Aegidius Romanus, De formatione humani corporis in utero, 6 (Vico, 2008a: 104.125-106.185). 이와 관련하여 자카르와 토마셋은 에지디우스가 내세우는 ‘의학자’ 아베로에스로부터 의학담론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갖는 약점을 보완하고 중세의 대표적 갈레노스주의의 권위자 아비첸나를 배제하려는 의도를 확인한다(Jacquart & Thomasset, 1988: 66-67 참조)
아베로에스는 갈레노스와 갈레노스의 추종자들의 입장을 특정하며 이들은 논리 정연하지 못하고 적확하지 못하지만(nec propria nec ordinata) 아리스토텔레스와 그를 따르는 자연철학자들은 훨씬 더 철학적으로 적확하며 정연한 증명들(demonstrationes propria et ordinata)을 제공한다고 말한다(Averroes, 1560: fol. 17rB-C).
『존재와 본질에 관한 정리들』(Theoremata de esse et essentia)은 에지디우스가 파리대학 교수직 복귀(1287년)를 준비하며 작성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작품에서 에지디우스는 1271년에서 1276년 그가 단죄당하기 이전에 취했던 유화적인 태도로, 즉 일반적으로는 단수성론을 취하지만 인간의 경우까지 확장시키려는 의도는 없다면서 자신의 입장을 정리했다. 이 시기의 에지디우스의 입장에 대해서는 본 논문의 각주 57과 Wielocx(1985), 256 및 note 72의 『존재와 본질에 관한 정리들』의 인용문 참조.
Thomas de Aquino, Scruptum Super III Sententiis, 3, 5, 1, co.: “Similiter etiam ostendit quod semen mulieris nihil facit ad generationem…… sanguis qui menstruum dicitur, est in mulieribus loco seminis in viris(Moos, 1933: 142)”; Ibid., 4, 1, qc. 1, 3, ad 1: “…… in naturali conceptione hominis, semen habet rationem activi, et iterum rationem termini(Moos, 1933: 161)”; Thomas de Aquino, Summa Contra Gentiles IV, cap. 45: “Semen enim viri requiritur in generatione humana tanquam principium activum, propter virtutem activam quae in ipso est(Marc et als., 1961: 335.3817).”; Ibidem: “…… secundum Aristotelis positionem, dicentis quod semen maris non intrat materialiter in constitutionem concepti, sed est solum activum principium, materia vero corporis tota ministratur a matre(Marc & als., 1961: 335.3821)”; Quodlibet 5, 5, 1, res.: “Dicendum, quod cum in generatione hominis, sicut et aliorum animalium, semen patris sit agens, materia vero a matre ministrata sit sicut patiens, ex quo corpus humanum formatur…… (Leonina, 1996b, 373.42-46)”; In duodecim libros Metaphysicorum Aristotelis expositio, 5, 3: “…… sperma vim habet activam, menstruum autem mulieris cedit in materiam concepti(Cathala & Spiazzi, 1950: 215.780)”; Ibid., 5, 21, 6: “sicut puer dicitur fieri ex patre, sicut principio motivo, et matre sicut ex materia; quia quaedam pars patris movet, scilicet sperma, et quaedam pars matris est materia, scilicet menstruum(Cathala & Spiazzi, 1950: 283.1090).”
Thomas de Aquino, Scruptum Super III Sententiis., 4, 2, 2, co.: “semen mulieris non est de necessitate conceptionis, quia quandoque contingit impraegnari mulierem emissione seminis, per hoc quod sanguinem menstruum ministrat, qui est materia conceptionem((Moos, 1933: 168)”; In III Sent., 4, 2, 1, ad 2: “secundum philosophum, semen mulieris non est de necessitate generationis, sed sanguis quem femina ministrat ad conceptionem(Moos, 1933: 169)”; Ibid., 3, 2, 1, co.: “Quidam enim in materia quam mater ministrat, ponunt esse virtutem activam principaliter: tum quia ex commixtione seminum conceptionem fieri ponunt; unde sicut semen viri est activum in generatione, ita et semen mulieris, quamvis non sit in ea tanta efficacia ad agendum: tum etiam quia ponunt conceptam prolem sensificari et vegetari per animam matris, ut sic etiam principalior inveniatur in generatione mater quam pater. Hoc autem philosophus reprobat in 15 de animalibus(Moos, 1933: 112).”
Aegidius Romanus, De formatione humani corporis in utero, 6: “Dicamus quod in maribus est unum aliquid quod est omnia facere, ut sperma, et in femina unum aliquid quod est omnia fieri, ut menstruum. Non ergo sperma femineum est conveniens generationi, nec sicut agens, quia non est proprie sperma, nec sicut materia, quia non est proprie menstruum. Et quia non est per se conveniens generationi, poterit sine tali spermate fieri generatio(Vico, 2008a: 150.154-159).”
Aegidius Romanus, De formatione humani corporis in utero, 6: “…… dicatur quod oportet duo spermata concurrere ad generationem quia magis faciliter et magis apto modo secundum talem concursum habet generatio fieri; non quod omnino sit impossibile aliter esse et quod omnino sit necessarium ad generationem talis concursus. Nam illi idem qui dicunt quod matrix suggit proprium sperma ut cum illo attrahat sperma viri, dicunt quod mulieres experte in conceptu et coitu asserunt quod multotiens impregnatur mulier sine delectatione tempore coitus, sicut etiam impregnatur quando habet delectationem in coitu. Cum ergo emissio spermatis in muliere habeat delectationem annexam, si mulier impregnatur sine delectatione coitus, im pregnatur sine emissione spermatis. Immo compertum est mulierem renitentem nec delectationem habentem nec sperma emittentem, conceptionem suscepisse. Immo compertum est mulierem renitentem nec delectationem habentem nec sperma emittentem, conceptionem suscepisse(Vico, 2008a: 102.69-80).”
Thomas de Aquino, Summa Theologiae, 3, 31, 5, ad 3: “dicendum quod semen feminae non est generationi aptum, sed est quiddam imperfectum in genere seminis, quod non potuit produci ad perfectum seminis complementum, propter imperfectionem virtutis femineae. Et ideo tale semen non est materia quae de necessitate requiratur ad conceptum, sicut philosophus dicit, in libro de Generat. Animal. Et ideo in conceptione Christi non fuit, praesertim quia, licet sit imperfectum in genere seminis, tamen cum quadam concupiscentia resolvitur, sicut et semen maris; in illo autem conceptu virginali concupiscentia locum habere non potuit. Et ideo Damascenus dicit quod corpus Christi non seminaliter conceptum est(Studium Generale O. P., 1941: 2618b-2619a).”
이 공의회에서는 대표적 복수성론자 중 하나인 페트루스 요한니스 올리비(Petrus Johannis Olivi)가 단죄를 당했다(덴칭거, 2017, 1312.900-1313.904). 그런데 이단 혐의가 있는 내용(복수성론과 예수의 인성과 신성(神性), 세례의 효과)을 페트루스의 작품에서 발췌하여 단죄 목록을 작성한 인물 중 하나가 바로 에지디우스였다. 한편 복수성론을 뒷받침했던 의학이론인 갈레노스의 생명발생론을 설파했다는 이유로 단죄당한 경우는 이 공의회에서는 물론 그 이후에도 드물었다. 그리고 중세와 르네상스를 지나 베살리우스(Vesalius)나 윌리엄 하비(William Harvey) 등이 활동하던 시기까지도 갈레노스주의 생명발생론은 그 영향력과 추종자의 수에서 아리스토텔레스주의를 압도했다. 이 점은 데카르트에게서도 확인가능하다(Descartes, 1974: 253.7-21 참조). 이런 양상은 14세기 이후로 심지어 파리대학처럼 신학부가 강세였던 교육기관에서도 의학부가 신학부와 교양학부의 영향을 벗어나기 시작했던 것, 그리고 비슷한 시기에 라틴어로 번역된 갈레노스의 저작(New Galen)이 유럽에 퍼지면서 의학부의 정규교육과정의 주교재가 되었고, 이에 따라 그에 대한 이해가 증진되었던 것과 무관해보이지 않는다. 한편 갈레노스주의의 쇠락에 대해서는 Tempkin, 1973: 135-192 참조.
중세에 신학이 학문들의 여왕(regina scientiarum)의 지위를 누렸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중세시대에 여왕의 시녀는 단순한 몸종만을 의미했던 것이 아니다. 왕실의 시녀 혹은 시동으로는 기사계급 이상, 특히 영주급(級) 가문의 자제들이 선발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이들 중에는 왕 혹은 여왕의 최측근으로서 국가 대소사 및 주요 업무를 담당하는 고위 관료, 예컨대 오늘날 대통령 비서실장의 역할을 수행했던 경우도 적지 않았다. 물론 ‘시녀’라는 표현을 근거로 신학이 여타 학문에 비해 우월한 지위를 점했다고 논할 수는 있다. 그럼에도 이를 근거로 중세에 철학과 의학이 신학에 몸종처럼 예속(隸屬)되어 있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템프킨(Tempkin, 1977: 187)은 고대 알렉산드리아 학파가 이 경구를 아리스토텔레스의 것이라 인용하지만 이에 해당하는 구절은 없으며, 고대인들이 종종 문법(grammar)을 의학의 자매라고 표현한 것이 원천일 것이라 추정했다. 그리고 프렌치는 이 구절이 아리스토텔레스의 De sensu et sensato 1부에서 자연에 대한 앎의 절정이 인간과 건강에 대한 연구에 있음을 함축하는 구절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라 추정하고 있다(French, 2003: 19, n.31). 하지만 여인석과 루크리글로바가 밝혔듯 이 경구의 원천자료는 히포크라테스에게 보낸 위(僞) 데모크리토스의 서간문(Hippocrates, 1994: 395)으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여인석, 2018: 4; Rukriglova, 2010: 11).
예컨대 Jay M. Baltz & als., 1988: 643-54.
T. Strunker & als., 2011: 382-6; P. V. Lishko & als., 2011: 387-91.
Hillman, 1972: 220.
Tress, 1999: 338, 354-355(n.25).
Hillman, 1972: 225.
Hillman, 1972: 222.
Hillman, 1972: 224-2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