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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J Med Hist > Volume 33(1); 2024 > Article
일제강점기 경성 지역 한의원 이용 실태: 1931년도 보춘의원(普春醫院) ‘장부’ 분석을 통해 본 경우†

Abstract

This article analyzes the “account book” of Kim Young-hoon (1882-1974), which summarizes information about patients at his Bochun Clinic in Seoul (then Gyeongseong) in 1931. Kim Young-hoon was a pivotal figure in the medical scene throughout the Korean Empire, the Japanese occupation, and the early years of the Republic of Korea. He left behind a large amount of documentation during his 60 years of practice at the Bochun Clinic, which he opened in the spring of 1909. In particular, the 1931 “account book” offers an insight into the daily life histories of his patients.
Among the patient-visitors recorded in the account book, there were many influential people of the time, ranging from privileged individuals to anti-Japanese independence activists, from those in political and economic fields to those in academic and entertainment fields. At the same time, a significant number of lower-class people also visited the Clinic. Geographically, patients were centered in the city center of the capital, Gyeongseong, but were also widely distributed throughout the country. There are indications that those from the rural areas stayed in the homes of their acquaintances in Seoul. As such, the account book provides a tangible, concrete picture of the clinic’s management for the year 1931, including visitor demographics, visiting diagnoses, telephone consultations, and the total cost of medicinal prescriptions.
Because the account book is a one-year statistic, it has its limitations; however, it is the smallest unit that can be analyzed statistically. It provides insights into how many people came in over the course of a year and how much they spent. The expenditures are kept per individual family. The patient's name, prescribed medication, and the price of the medicine are mandatorily included, and in many cases, the place of residence and family relationships are also noted. The account book shows several layers of householders, servants, and employees in the extended family; it also shows people in various occupations. A few privileged families accounted for nearly half of the total expenditures, and the powerful visited frequently, utilizing Oriental medicine for many of their daily needs. For some, the Bochun Clinic is reminiscent of the royal temples of the dynasties. Patients come from the center and suburbs of Seoul, as well as from all over the country.
In one year, more than one thousand types of prescriptions are issued and the total cost of medicines is about 33 seom (≒180 liters of rice). Although there is a concentration of high-frequency prescriptions, more than a thousand prescriptions are prescribed only once, which shows that the practice is specialized for each individual. Patient visits, consultations, and telephone use are observed, and the use of new drugs, quinine, and special ginseng as one-herb medication (danbang) are also noticeable.
The statistical analysis of the 1931 Bochun Clinic “account book” can serve as a milestone for comparative analysis of the patterns of herbal medicine use before and after that year. Meanwhile, the Bochun Clinic “account book” shows the continuation of traditional practices of herbal medicine by both the powerful and the masses. On the one hand, Koreans responded to the coercive tide of modernity symbolized by the Imperial Governorate of Japan, but on the other hand, they were unwilling to let go of tradition and their own authority. While actively embracing the tide of civilization, Koreans also internalized their own rationality and sought to open a new path forward, a sentiment discernible between the lines of the “account book.”

1. 서론

현재 대한민국의 의료는 대체로 현대의학이라고 일컬어지는 ‘서양의학’이 중심이 되어 운용되고 있다. 의학교육, 의료보험, 진단과 투약 등의 전반적 과정과 제도가 그러하다. 이에 대해 전통시기 주류의학의 지위를 가졌던 한의약은 이제 ‘주변적’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일부 수요자들에게 유통되는 정도로 내려앉아 있다.1) 이는 근대문명의 세계적 보편화 과정의 일부로 자연스럽게 인정되는 측면이 크다. 그렇지만 현대의학-전통의학, 또는 서양의학-한의학으로 대별되는 중심-주변의 통념이 어떤 시기를 거치면서 이같은 모습으로 정착했으며 그 과정은 어떠했을까? 중심적 주류는 아니지만 의료법적 지위를 보장받고 있는 한의약은 여전히 한국 의료의 한 부분을 담당하고 있는데, 이는 미래에도 계속 유효한 것일까? 이러한 일반적 의문을 한 걸음 나아가 논구하려면 전통의학의 근대적 변용의 구체적 실상을 살펴봐야 할 것이다.
본고는 1931년 한 해 동안 경성 보춘의원 내원자 정보가 담긴 ‘장부’를 분석한 글이다. 선행 연구에서 알려졌듯이 보춘의원을 운영한 청강 김영훈(金永勳, 1882~1974)은 대한제국기와 일제강점기, 그리고 대한민국 초기의 의료 현장을 관통하는 인물이다(차웅석, 2001: 167). 강화 출신으로 인천에서 의술을 배운 그는 고종이 후원한 동제의학교의 교수로 활동할 만큼 조선의 학 전통을 철저히 익혔다. 이후 1909년 봄 자신이 개원한 보춘의원에서 60여 년간에 걸쳐 진료하면서 대량의 자료를 남겼다(차웅석, 2004: 280). 그의 평생은 우리나라 의료에 근대적 변화가 시작되면서 의학교 설립, 면허제도 실시, 처방전 보존 의무화, 진단서 작성, 의원 광고 등의 조치가 본격적이고 전면적으로 이루어진 시기이자 현대 의료제도의 윤곽이 선명하게 갖추어진 시기다(신동원, 2002: 336).
이 시기와 겹치는 연구논문이 몇 편 있다. 일제강점기 일기를 통한 연구는 오재근의 의생 김광진의 황달 투병기인 『치달일기(治疸日記)』 분석 연구가 있다(오재근, 2019: 429-432). 의생의 전문적 시선으로 본인의 질병에 대한 예민한 관찰과 함께 황달을 직접 치료해가는 과정을 보인 것이 매우 특별하다. 다만 약가 등의 경제를 포함하는 의료생활 일반을 보이는 데는 제한이 있다. 박훈평은 대구 달성지역의 의생 전석희(全錫熺, 면허번호 1097번)의 연구에서 그가 남긴 환자 176례에 대해 기록한 100여 장에 해당하는 진료부를 통해 지방의원의 당시 진료상황을 파악하는 데 다가서고 있다. 현재 알려진 영년의생 진료부는 3명에 불과한데 충청도 예산군에 활동했던 영년의생 고윤현(高允鉉)과 전석희, 그리고 김영훈이라고 했다(박훈평, 2019: 73).2) 한편 본 연구와 짝하는 것으로는 강진 병영 지역 박약국의 장부를 다룬 연구 오직 1편만이 눈에 띈다(김덕진, 2022: 11-20). 전통시대 환자의 치료와 약재 유통이 이원화된 것에 주목하여 민간에서 직업적으로 경영하는 약국의 실제를 파악하는 데 큰 기여를 하였다. 의료와 매약이 엄연히 구분되어 이루어짐에도 현재 ‘의학사’라는 카테고리 속에 뭉뚱그려 취급되고 있는 점을 주의했으며, 중앙·공공분야의 경우는 비교적 자세한 연구논문이 제출되어 있지만 지방의 의약실태 연구는 매우 소략한 상태임을 상기시켰다. 18세기 이후 변화의 기운이 보인다는 연구가 속속 나왔지만 체감하는 효과는 높지 않았고 19세기에 들어서야 의약업에 뛰어드는 사람이 크게 늘었다고 했는데, 김덕진은 약국 운영에 뛰어든 이들을 3부류로 나누고 있다. 양반사대부, 지방 영현의 실무자들, 몰락양반이나 평민 등이다. 그중 전라 강진병영의 장교층집안 사람이 설립한 박약국의 사례는 전국 각처에서 약재를 매입하여 약재와 처방의 형태로 일반인에게 판매한 과정을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곧 의와 약이 이원화된 상황 속에서 전문적 치료와는 거리를 둔 판매업이 주종이었는데, 이들이 남긴 자료를 통해 약국의 경영 상황, 의료실태를 살폈다. 생활사 자료로도 요긴하다. 영업망, 약재수요 양상, 계절적 변동, 물가의 파악, 구매층, 전국 시장의 네크워크와 도소매업을 통한 이익 창출, 처방전 주문장을 통한 당시 질병의 이해, 의약소비, 회계실상, 상거래관행 등을 조목조목 보여주었다. 보춘의원 설립 약 30년 전 1890년 후반 전라도 강진의 약방이라는 점에서 본 연구와 성격이 많이 다르지만, 개항기/일제강점기, 서울/지방, 의원/약방이라는 비교를 가능케 해준다는 점에서 값지다.
그간 청강 김영훈의 진료 기록부 등의 자료는 특히 한의학 전공자에게서 활발하게 연구되었지만, 모두가 질병과 처방의 한의학적 탐구였으며, 사회성과 경제성에 주목하지는 않았다. 경희대 한의과대학에서는 김영훈의 후손으로부터 1999년 그가 남긴 일체의 자료를 기증받았으며, 이후 본격적인 정리 작업이 시작되었다. 차웅석은 김영훈의 생애와 한의원 운영, 김영훈이 남긴 기록 전반에 대해 연구했다. 6만 건에 육박하는 진료부 전체의 규모(차웅석, 2004; 2006), 성별, 주요 증상별 환자 비율(차웅석, 2007), 진료부의 특성, 내원 환자의 양상에 관한 여러 사례, 환자의 병증과 그에 대한 김영훈의 처방 등 전반적인 모습을 연구해 보고했다(차웅석·박래수, 2008). 신동원은 보춘의원 환자의 주요 병증 즉 30대 범주에 대해 검토했다(신동원, 2014: 850-855). 보춘의원 진료부의 한의학적 연구는 김동율의 박사논문 「청강 김영훈의 진료기록 분석 연구-병명, 병인, 처방명을 중심으로」(김동율, 2016)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이 논문에서는 그의 처방 전체를 대상으로 병명, 병인, 처방적 특성을 전면 분석했다. 그렇지만 이상의 연구는 병증과 처방이라는 의학적 범위를 넘어 사회성과 경제성으로 나아가지는 않았다. 본고는 ‘구체적으로 병에 걸린 사람 누가 아팠고 어떤 경로를 거쳐 내원하였고 또 머물렀으며 누가 얼마나 돈을 지불하였는가?’ 이런 질문에 대해 생생한 대답을 듣고자 하였다. 1931년 전체 내원자를 정리한 자료, ‘장부’를 근거로 내원자 인물군, 거주지, 약가 결제양상, 개별-가족 또는 내원-왕진 진료양상을 구체적으로 짚어본다. 이는 현재까지 이루어진 적이 없는 연구다.
김영훈의 이력과 시대 상황을 염두에 두고 그가 기록한 보춘의원의 ‘장부’를 확인해 보면 당시 내원자들에게 이루어지는 한의 진료의 생활사적 측면이 은근히 드러나 보인다. 한의의 정점에 올랐던 위상 덕에 그의 환자군에는 당대 유력 인사들이 즐비하다. 기득권층에서부터 항일독립운동가까지, 정치 경제 분야 인사에서 학술 예능 분야 인물까지 망라한다. 하층 민중의 모습 역시 심심찮게 보인다. 유명 한의원이기는 했지만 약가가 낮은 경우 문턱이 높지 않았기 때문이다. 공간적으로 서울의 중심지(현재 탑골공원 근처)에 자리 잡았기에 경성 도심 지역 환자가 주축을 이뤘지만, 지방 군·면에서 온 내원 환자도 있었고 그들은 한동안 서울의 지인 댁에 머물렀다는 징표가 ‘장부’에 나타나 보인다. 보춘의원 1년의 ‘장부’ 기록은 이렇게 다양한 내원자의 실명과 그들의 주소지, 내원 빈도, 처방 약의 종류, 분량, 가액 등을 담고 있으며 환자의 직업이나, 가족의 정보 역시 일반적으로 드러나 있다. 왕진 치료, 전화 진료 등 흔치 않은 사례를 실증하고도 있다. 진료와 처방 비용은 상당수 외상으로 처리되는 경우가 많았기에 결제가와 결제일을 정확히 적는 것은 매우 중요했다. 이렇듯 1931년 1년 동안의 병원 운영에 대해 손에 잡힐 듯 구체적 상을 보여주고 있다.

2. 의생 김영훈에 대한 배경적 이해

김영훈은 보춘의원 개원 직후 1914년 때부터 한의계의 주요한 오피니언 리더임이 확인된다. 조선총독부령으로 조선의생규칙이 반포되는 시점의 일이다. 조선의 많은 의료 종사자들은 총독부 조처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면허 발급을 놓고 그 필요성에 대해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다. 조선의 전통적 관행과는 이질적인 제도였기도 하거니와 근대적 (서양) 의사와 비교하여 한의에 대한 차별적 요소 역시 다분했기 때문이었다(신동원, 2003: 112-114). 하지만 김영훈은 달리 생각했다. 한편으로 총독부 사업이 결국 이전부터 의업을 이어오던 조선의 한의(漢醫)들을 ‘의생(醫生)’으로 격하시켜 새 의료제도에 편입시키려는 시도이기는 하지만, 다른 한편 그것은 부득이한 세계상의 조류로 여기고 속히 받아들여 의생 면허를 취득하여 의업의 내실을 기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봤다. 그는 1914년 『매일신보』에 면허취득을 독려하는 기고문을 올리면서(<그림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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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하여 의업자가 신묘한 의술을 가졌다고 한들 면허가 없으면 개업을 할 수 없는 것은 만국의 공통된 법례라면서, 한의학이 서의학보다 나은 점이 있다손 치더라도 형이상학에 관계된 것이라 만국의학회에서 동의를 얻지 못하고 있다고 냉정한 판단을 내리고 있다. 하지만 그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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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하여 의생면허를 취득하는 것을 계기로 다시 한번 한의학 발전의 동력으로 삼자고 말하고 있다. 나아가 동서의학을 상호 참조하는 형식의 연구를 행하여 서로 의학지식을 충분히 섭렵하고 숙달한다면, 만국의학회로 대변되는 세계 의학에서 우리의 한의학이 인정받는 날이 있을 거라는 염원을 나타냈다. 김영훈의 이후 행적을 보면 이는 단순히 말로 그친 것이 아니라 줄기찬 실천이 동반되었던 점이 확인된다.5)
표면상 그는 일제 당국과 큰 마찰이 보이지는 않는다. 기고에서 보듯 기본적으로 총독부가 주도하는 의료의 근대성에 대한 진보적 면을 평가하고 있다. 또한 서양의학의 발전을 쫓아가고 수용하는 공부를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하며 스스로 학술강연을 활발히 벌였다.6) 대한제국기 고종이 지원한 동제의 학교 교수로서의 정체성과 이후 시대적 조류의 수용이라는 입장의 혼합 과정 등이 그를 복합적 인물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7)
김영훈의 보춘의원은 서울의 중심부 종로 낙원동에 2층 40평 규모로 지은 최신식 건물이었다(차웅석, 2006: 280). 의료 공간의 명칭도 이 시기에는 지금 보편화된 이름인 ‘한의원’이 아니라 ‘의원’을 사용했다. 이는 당시 『동양의약』에 실린 광고를 통해서도 확인된다.8) 김영훈은 동제의학교 시절 전후로 서양의학의 기본을 습득하려 노력한 흔적이 보이며, 자신의 의학 지식과 의술을 의학강습소 운영으로 후배 의생들에게 전수하는 데 힘을 기울였고 의생 동료들과는 동서의학연구회를 창립하는 등의 활동을 다양하게 펼쳤다(차웅석, 2006: 279-280). 그의 총독부령 면허취득 권고는 이와 같은 실천의 진정성 위에서 살펴야 할 것이다. 표면에서 당국 정책를 수용하는 태도와 함께 이면에서 비치는 지향과 포부 등을 통해 김영훈의 상당한 주관과 융통성이 감지되는 지점이기도 하기에 그렇다.

3. 1931년도 보춘의원 ‘장부’ 속 환자 인물군

김영훈은 진료비와 약값의 결제 대금의 출입 상황을 본인이 알기 쉽게 체계적으로 요약해 1931년 신미년 ‘장부’를 만들었다. 여기에는 환자 정보와 약가 등이 그 집안의 가장(家長)을 중심으로 체계적으로 재정리되어 있기에 의학적 측면 뿐만 아니라 사회경제적 측면까지 담아내어 당시의 의료생활을 재구할 수 있는 단서가 된다.9) 이제 20세기 초반 경성의 한 진료 공간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환자 진료의 사정과 의약 생활의 경제적 측면을 캐어 보려 한다. 먼저 그는 왜 이 ‘장부’를 남겼을까? 어떤 효용이 있기에 진료부와 처방전이 이미 상세하게 있음에도 이런 별도의 정리가 또 필요했던 것일까? 일차적으로 병원 운영을 치밀하고 합리적으로 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진료비와 약가의 정확한 결제 상황과 시일별 추이를 파악하는 것은 모든 사업 운영의 기본이다. 더구나 외상 거래가 많고 신원 추적이 쉽지 않은 상황에서 진료부-처방전에서 산출된 정보를 회계상 필요에 의해 재정리하는 작업은 없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한마디로 통계적 분석이 가능한 최소 단위로서의 의미가 있다. ‘장부’에서 그는 1년 열두 달 매일 매일의 정보를 기입하고, 적절한 시점(대체로 열흘에서 한 달)마다 결제와 미결제 상황을 수시로 중간 정리하였으며 연말에는 가급적 결제를 완료하고자 하였다. 부득이 그렇게 하지 못했을 경우 이월하여 다음 해 회계로 이어갔다. 이 ‘장부’가 오늘날 당시 한의약 이용의 시간적 추이를 더듬어 볼 최소한의 근거가 된 것이다.

1) ‘장부’를 통해 본 내원자 실태

‘장부’의 실제 모습을 보자(<그림 2>). 표지 오른쪽에 ‘昭和六年 辛未度’라고 연도가 씌어 있고 중앙에 ‘帳簿’가 제목을 나타내는 큰 글씨로 보이고 그 아래 작은 글씨로 ‘第二十三’이라는 일련번호가 매겨진 모습이다.10) 그림 5의 민병주 가(家)의 예를 보면, ‘장부’ 속에 각 집안의 대표자(곧 가장)가 표의 윗단에 큰 글씨로 이름(민병주(閔丙疇))이 쓰여 있고 그 옆에는 주소(경운동(慶雲洞) 64)가 적혀있다.11) ‘장부’에는 민병주 가와 같은 이런 형식의 기록이 분량의 차이를 보이는 채로 850여 개가 들어있다.
그 아래 본문에는 신미년의 1월부터 12월까지 월일별로 그 집안의 식솔이나 관계자가 내원하여 받은 처방명(단방 포함)과 분량(첩, 봉, 푼 등의 단위)이 기재되었다. 그 다음 중요한 정보로서 약가가 한 단락 칸을 띄어 적혀있고 최하단에 그 집안의 실제 환자 또는 약 수령인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그림 3>). 환자명, 처방명, 약가는 필수요, 거주지, 수령인, 가족관계 등은 옵션인 셈이다. 이렇게 매일 기록된 내원 환자의 진료 정보가 총 4,854항에 이른다.
한편 이와 별도로 ‘장부’의 맨 앞머리에 일괄 정리해 둔 293명의 항목이 있다(<그림 4>). 이들은 모두 실제 약가의 결제를 책임져야 하는 이들이다. 성명 위에 점이 찍혀진 타점법(打點法)으로 판단하건대 이것은 이전 연도에서 결제가 되지 않고 이월된 것을 포함하여 1931년도 ‘장부’에 다시 옮겨 결제를 해 나간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도 직업, 주소 또는 거주지, 인맥 등으로 신상 정보를 표기해 놓고 있어서 좀 더 새겨볼 만하다고 보았다. 특히 직업과 뚜렷이 관련된 정보가 약 15% 정도 나타난다. 우리는 위 두 종류의 인물 정보 묶음(<그림 3>, <그림 4>)을 바탕으로 보춘의원에 내원한 사람들의 인물군을 좀 더 구체적으로 분석하여 아래 표에 정리했다(<표 1>).
먼저 가장(대표자)으로 보이는 이가 대감, 영감, 대방, 본인 등의 이름으로 나온다. 이들이 실제 식솔들과 관계인들의 약가를 결제하는 주체가 된다. 다음으로 여성 친족이 많이 보인다. 한약 처방의 실제 수요자와 관련하여 눈여겨볼 부분이다. 정부인, 부인, 대부인, 부실, 뒤댁, 뒤댁마님, 뒤댁아씨, 뒤댁네, 뒤방뒤댁마님, 마마, 마마형님, 맏며느리, 며느리, 모친, 부인, 새아씨, 서모, 딸, 손녀 등의 명칭이 나오는데, 특히 ‘부실(副室)’이라는 이름이 많다. 부실은 ‘장부’에서 한자 표기 옆에 ‘작은댁’이라고 기록한 곳이 있어 그 뜻이 첩실임을 명확히 해주고 있다. 뒤댁, 뒤댁마님, 뒤댁네 등의 명칭도 이와 관련 있다. 이에 비해 남성 친족은 부친, 장인, 조부, 외조부, 아들, 손자, 새방, 새서방, 매부 등으로 여성에 비해 적은 편이지만, ‘아들’의 경우 211회나 표기되어 비교적 나이 어린 층이 주요 한약 수요자로 여겨진다. 한편 ‘장부’에서 보이는 ‘직업인’이 여러 종류가 있는데 그중 순사, 배달부, 연탄가게, 자동차, 인쇄소, 병원, 이발관, 발갑, 이왕직(李王職),12) 의사, 의생, 병풍수리인, 고물상 등이 직종이 눈에 띈다. 인력거부(人力車夫) 곧 인력거꾼이 8회나 보이는데, 이들이 상당한 직업군으로 존재했음을 알려주는 증표다. 보춘의원 내원 환자군에 이처럼 다양한 계층이 포괄되어 있다는 실증이기도 하다. 한편 의사(1)와 의생(3)이 보이는데, 의사 이승렬(李承烈), 의생 이완규(李完珪), 전광옥(田光玉) 등이 진료 또는 업무로 드나들었다(<부록 5>). 특히 전광옥은 동제의학교에서 교수직을 함께 수행하기도 했던 동료였다. 마지막으로 하인/고용인 그룹이 나타나는데 상노(上奴), 하인(下人) 등이 보이고 여성으로 바느질을 해주는 침모(針母), 반찬거리를 준비하는 ‘반비앗치’(곧 찬모(饌母))도 내원 환자로 기록되고 있었음을 확인해준다.
이제 1931년 보춘의원의 총내원자 수와 총지출 자료를 바탕으로 내원자 유형을 일별해보자(<부록 1>). 장부에 의하면, 보춘의원에 진료비(약가 포함)를 결제한 293인이 총 3,969원 26전을 지출했다. 여기에는 당시 유력 인물들 곧 정계, 재계, 문화예술계, 학계 인사들이 눈에 띈다. 이름만으로 누구인지 금방 알 수 있는 이도 상당수다.13) 경성에서 동제의학교 교수 출신 김영훈이 운영하는 보춘의원이라는 곳이 가지는 격이 드러나 보인다. 1931년 자료에는 특히 민병주를 위시한 민씨 일족 곧 민병주, 민대식, 민병석은 이 해 내원자 중 진료비 대금 상위 3위를 모두 점하고 있다.14) 이 중에서도 민병주는 2, 3위와도 단위를 달리하는 현격한 차이를 보이며, 무려 30.63%를 차지한다. 이들 3인을 합한 수치는 43.49%가 된다. 상위 5위까지 합이 49.71%가 되어 이들 집안이 1931년도 보춘의원 진료 수입 총액의 절반을 책임지고 있는 것이다. ‘장부’로 보면 보춘의원은 민병주에게 왕조시대 왕실의 원찰(願刹)과 유사한 역할을 한 듯하다.15)
민병주는 일제강점기 작위를 받아 큰 부를 쌓았던 민영휘(閔泳徽, 1852~1935)의 적손으로 많은 재산을 가졌지만 그 자신은 특별한 사회적 활동으로 이름을 남기지는 않은 듯하다. 민대식(閔大植, 1882~1951)은 민영휘의 차남이다. 민병석(閔丙奭, 1858~1940) 역시 민씨가의 유력 인물이었다. 민대식의 친자였던 민병도(閔丙燾, 1916~2006)는 오세창(吳世昌, 1864~1953)을 따르면서 문화적 소양을 길렀던 이력으로 해방 후 한국은행의 초대 총재를 역임하였고 을유문화사, 새싹문고 등을 만들며 많은 문화 활동을 했고 선유도 공원화 등 환경 분야에서도 주목할 만한 업적을 남겼다. 민씨 일가 이외 경일은행(慶一銀行)을 설립한 거부 장길상(張吉相, 1874~1936)이 보인다. 문화계 인물로는 동인지 『폐허』의 발행인이자 편집인인 고경상(高敬相, ?~?), 벽초 홍명희(洪命憙, 1888~1968), 위창 오세창(吳世昌, 1864~1953), 영화배우 최영완(崔榮玩), 이왕직 아악(雅樂) 연주자 김진환(金振煥),16) 구미 한국문학의 선구 서두수(徐斗銖, 1907~1994) 등의 인물도 보인다(<부록 1>).17) 간단한 메모 정도의 기록이라는 한계가 있지만, 보춘의원을 이용한 인물들에 친일인물, 독립운동인물, 재계인물, 문화예술계인물 등이 모두 포함되어 매우 복합적 구성을 보인다. 이들 유력 인물 중 상당수는 자신과 가족들의 안위와 건강을 세심하게 건사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었는지 모른다. 이와 관련하여 1928년(昭和 3년) 1월 3일 보춘의원이 『경성일보』에 낸 광고를 보자(<그림 5>).
여기서 김영훈은 보춘의원에 내세우는 주요 진료 병증을 상한(傷寒), 중풍(中風), 부종(浮腫), 노채(勞瘵)와 함께 탈영실정(脫營失精)을 올렸다.19) 특히 눈길을 끄는 탈영실정이라는 병은 어떤 것일까? 『동의보감』에 탈영(脫營)은 이전에는 귀한 신분이었다가 나중에 지위를 잃고 천해진 경우를 말하고, 실정(失精)은 부유했던 사람이 재산을 잃고 가난해진 경우를 말한다고 한다.20)
세상의 풍파처럼 누구나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이라고는 하나, 보춘의원이 신문광고에 이 문구를 넣은 것은 이러한 사례로 내원하는 환자가 상대적으로 많았으리라는 정황으로도 읽힌다. 주요 고객이 부귀영화를 누리다가 갑자기 실각하는 경우를 당할만한 기득권 계층이었음을 뒷받침하는 것이다. 실제로 위에 본 바와 같이 보춘의원에는 유력한 가문과 인물이 다수 출현한다. 김영훈은 의생 대상 교육이나 일반인 대상 강좌를 활발히 전개했는데, 정신질환을 주제로 강연한 원고 중에서 그는 정신병이 생기는 실제 사례를 일곱 가지로 제시했다.21) 제일 첫 번째로 탈영실정을 들면서 말하기를 “(탈영실정이란) 사람이 한세상 살아가는 동안에 모든 일이 순순히 잘 되어 나가다가 하루아침에 큰 변괴를 당하여 신분이 몰락해지고 재산을 박탈당하여 알거지가 되었을 때 일어나는 소위 화병”이라고 하였다.22) 탈영실정을 명료하게 ‘화병’이라고 한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익히 들어온 ‘화병’ 곧 탈영실정이 보춘의원의 주요 진료과목이라는 점은 조선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한국인의 질병의 연속성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있다.23)

2) 유력자들의 의약 생활 양상

<부록 1>에서 유력 인물들 4인의 의약 수요 양상을 좀 더 세부적으로 살펴보자. 민병주의 경우 1931년 이해 1월 2일부터 12월 29일까지 거의 빠짐없이 약을 수령했다. ‘장부’에서 그와 보춘의원의 관계는 매우 특별하다. 1월을 예로 들면, 1월 1일과 1월 13일만 처방기록이 없을 뿐 나머지는 매일 모두 평균 3~5건 정도의 약이 처방되었다. 1월 3일에는 11건, 1월 7일에는 12건이었다. 이 해 모두 1,487건이 처방되었다. 이는 보춘의원 한해 전체 환자대상 처방건 4,854건의 30.63%에 이른다. 약값 총액에서의 비율 29.83%(<부록 1>)와 대략 비슷한 수치로, 처방건수와 처방액수는 정비례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는 민병주 가의 처방 성격이 특별히 고가약이거나 그 반대의 경우가 아님을 말해주는 것이기도하다. 식솔의 숫자도 ‘장부’ 중에 가장 많고, 주요 내원자는 참판영감 곧 민병주 본인, 앞댁아씨, 뒤댁아씨, 뒤댁마님 등이다. 특히 부실(곧 작은댁)의 경우가 많이 나타나는데, 뒤댁, 뒤댁네, 뒤댁아씨, 뒤댁 아씨, 뒤댁마님, 앞댁, 앞댁네, 앞댁아씨, 앞댁마님, 새아씨 등 역시 이에 해당되리라 본다. 특히 새아씨는 모려분말, 백부근, 대황, 특천인삼, 가미황련탕 등이 처방되는 것으로 보아 미용에 관심을 많이 두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자녀들로 추정되는 효기, 호기, 현기, 성기, 승기와 그들의 모친 효기모친, 호기모친, 그 외의 인물로 진골아씨, 누이, 산정 등이 보인다. 민병주 가는 가장 많은 식솔, 인물이 나타나며 여러 약물을 다양하게 포함하고 있는데, 단방으로 지출되는 것 역시 상당하다(후술).
민대식 또한 당대의 유력자로서 책임지고 있는 가족은 상당수에 이른다. 그리고 그가 보춘의원의 진료를 받고 약을 구매해 간 가족들의 대금을 책임진 사람이었다. 대가족을 이룬 구성원들은 ‘장부’에서 매우 다양하게 나타난다. 먼저 환자로 분류된 사람의 명목을 살펴보면 직계가족들도 많았지만, 그 외 방계 자손도 폭넓게 나타난다.24) 대감으로 지칭되는 민대식의 본인과 뒤댁마님, 월방, 위방, 뒤방으로 지칭되는 처첩이 나온다. 앞댁색씨(가미이경탕, 해부산), 앞댁아씨, 새방(키니네 2회, 30전), 해주안씨(가미보폐탕 10첩 2원)가 이러한 범주다. 다음 아들 항렬로서 병옥(가미지황탕 20첩 5원), 병옥부인, 병완, 병선, 병선유모(딸 혜유), 병서, 병길부인, 형길, 형길부인 등이 보인다. 손자 항렬로서 덕기(손자), 덕기부인, 정기, 영기, 순기, 덕기, 상기 등이 나타난다. 이 외에도 가족 중 벼슬이 있는 경우 벼슬을 붙여 부르거나 동네 이름을 병기하는 방식이 보이는데 참령(參領), 참령부인, 참령댁 침모, 대방, 대방 안재규, 대방 병수부인이나, 삼청동 승지(承旨), 삼청동 영감(令監), 삼청동 민병서, 삼청동 민규식, 삼청동 민규식딸 병순, 홍일동, 박동(朴洞) 승지, 규식부인(박동 승지부인) 등이 이러한 경우다. 집안에서 부리는 이들은 하인 김성인(金成仁), 상노(上奴) 문용득(文容得) 등과 같이 분명한 직분과 이름을 적었다. 특히 ‘電話去상로’ 라고 기재해 둔 곳도 확인되는데, 이를 보면 이 시기 이미 전화상으로 간접 진료하고 심부름꾼이 약을 대신 타 가는 관례도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25) 한편 민대식은 50세 된 이해 금강산 여행을 떠난다. 1931년 8월 16일에 ‘金剛山行 ㅣ감 旅行豫備 普通人用件(금강산행 대감 여행예비 보통인 용건)’ 으로 기록하고 가미□금산, 가미양위탕(加味養胃湯)을 각각 5첩(75전)씩 준비시키고 있다. 통관산(通關散), 우황청심원, 가미성향정기산(加味星香正氣散)도 포함된다. 이때가 금강산 가는 도로 여건이 정비되어 한동안 금강산 여행의 붐이 일었던 시절이다(이민희, 2021: 313). 초로의 남성이 며칠의 일정으로 산을 오르는 여행에 준비해야 할 약처방 세트가 이렇게 드러나 있다. 또 9월 2일에는 온양온천을 가는데 역시 가미정기산, 가미양위탕을 각각 3첩(45전)씩 준비하고 있다.
민병석의 경우 ‘본인’과 함께 처첩으로 마마, 정부인, 심옥경(본처 왕조실록에 심씨), 원동마마, 마마 차씨에서부터 그와 관련된 명칭으로 조중구(원동 마마댁), 김영원(정부인 측근), 심기홍 등이 보이며 가속들로 민대식(원대식), 민준식, 홍기, 홍기(승지), 성기, 승기, 딸 필원, 숙기 딸, 필안, 외손녀, 통곤부인, 민통곤, 민씨 노인, 민병수 모친 등이 나타나며 집안일을 돕는 이들로 침모, 유모강씨, 복단, 금순할멈, 대모, 부관 등이 보인다. 그 외 청주 박승동, 황훈, 계원, 계희(희계), 김황수, 이정선, 영랑, 조병구, 한감이, 박춘후, 신재근, 경운, 진현댁 등의 경우도 모두 민병석이 대금을 지불하는 주체가 된다. ‘반비앗치’라는 명칭의 찬모(饌母)도 여기에 나타난다.
장길상의 경우 부실, 마마, 유모 등이 보이고 직계가족으로 아들 병조, 아들 병룡, 병복(사향소합원 2환/1원), 병복 외조모, 병복 모친, 딸 병수, 딸 병서, 병서 조모, 병하, 병교 등이 나타난다. 그 밖에 이원창(키니네 5봉/1원, 왕진 2원), 변정순처럼 성명을 기입하기도 하고 때로 정애, 간난, 명숙 등과 같이 이름만 보이는 경우도 있으며 박대진 모친, 장수빈 조모 또는 서씨, 서병승, 서씨 부인, 서병승 부인, 강씨, 김씨, 고용인딸 이씨, 김향사 등 혼합형 명칭을 쓰기도 했다. 특히 ‘벙어리여자’와 같이 신체적 특징만으로 환자를 기록한 경우도 있다. 이상과 같이 보춘의원 1931년 ‘장부’의 내용에는 당시 유력가문의 한약 이용 양상을 엿볼 수 있는 정보가 담겨있다.
한편 이들 유력 가문들이 보춘의원의 주요 내원자로 진료 수입의 큰 비중을 담당했다고 한다면, 과연 앞서 보았던 다양한 직업군의 일반 내원자의 진료 상황과 어떻게 조화를 이루었을지 궁금해진다. ‘장부’의 내용으로 비추어 볼 때 이들 유력가문의 한약 이용 방식은 다만 그 활용이 더 빈번할 뿐 그들이 활용하는 약의 종류와 약값이 다르지는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보춘의원의 내원자 누구에게나 병원 문턱이 높지 않았던 점을 근거로 들 수 있다. 당연하게도 인근 주민이나 경성의 가까운 곳 내원자가 많았고, 나아가 전국의 각 지방에서 올라오는 사람 역시 상당하였다. 이들이 상경하여서는 경성의 인척, 지인들 집에 머무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 역시 ‘장부’ 기록 속에서 확인 가능하다. 다음을 보자.

3) 보춘의원 내원자의 지역 분포

이제 1931년 보춘의원 ‘장부’에 수록된 주소를 통해 내원자의 지역 범위를 알아보자. ‘장부’ 수록 내원자 중 외상을 포함하여 약가가 청구된 1,210명 중 주소가 기록된 734건을 대상으로 지역과 횟수를 <부록 2>의 표에 나타냈다. 전국 각지에서 내원자가 있으나, 통계상 대체로 인근 지역에 우선순위가 있는 것이 보인다. 예외적으로 강화가 2순위에 올라 있는 것은 원래 김영훈의 고향 마을인 강화에서부터 그를 알던 내원자가 많았으리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많은 수가 내원한 지방은 강화(71)를 비롯하여 고양(19), 양주(12), 시흥(11), 인천(11), 개성(4) 등이다. 그 외 충청도 청주 아산 충주, 경상도 의성, 전라도 김제, 황해도 해주 등지에서도 내원환자가 이르고 있다(37). 이들 지방 내원환자는 총 22.48%(165/734)에 달한다.
이번에는 경성 내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내원자 지역 범위를 살펴보자. 우선 1936년 제작된 경성지도 위에 낙원동에 위치한 보춘의원을 중심으로 반경 1km의 동심원을 그려보았다(<그림 6>).26) 그 안에는 서울 중심부 동네인 낙원동, 익선동, 종로, 돈의동, 경운동, 인사동, 운니동, 관훈동, 관철동 등이 포함되어 있다. <부록 2>의 표에 있는 동네별 내원환자의 수 정보를 바탕으로 1936년 제작된 경성지도 위에 올려보았더니 이들 서울 중심부 동네에서 온 환자가 37.75%를 차지했다. 반경 1km의 동심원을 벗어나 보다 넓은 지역, 곧 황금정 등 인접 지역까지 포함하는 서울 지역은 당시 교통수단으로 이용되던 전차 노선과 연관을 가질 것으로 추정된다. 확장된 지역까지 대상으로 하면 25.75%가 추가되어 서울 전체로는 도합 63.50%에 이른다.
한편 ‘장부’에 내원객의 신원이나, 직업, 거주지가 임의로 표기된 곳은 대체로 김영훈 본인이 기억하고 확인하기 편한 형태로 되어있는 것이 많다. 그렇기에 모든 주소가 동리 명칭이나 지번으로 되어있지 않고, 때로는 일상적으로 편의상 알기 쉬운 건물명이나 지역명, 또는 지인 누구의 집에 머물고 있다는 식으로 기재된 곳도 상당하다. 이런 점은 엄밀한 통계 자료보다는 당시 사람이 기록한 당시 사정을 엿보는 창구로 활용될 수 있는 것이다. <부록 2>에 보춘의원 내원자의 직업/거주 정보 추출표를 올렸다. 여기에 기타 항목으로 분류된 사람들은 사실 상당수 서울 지역 내에 포함될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까지 들어가면 서울 지역의 내원자 비중이 더 높아질 것이다(*). 다른 한편 주목할 부분은 ‘◯◯◯방’이라고 거처를 표시한 곳인데, 대체로 지방에 거주하는 이들이 서울의 지인이나 친척에 유숙하면서 보춘의원을 들린 경우로 짐작된다. 여관에 입주하여 진료를 받기도 했다. 아무래도 보춘의원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민씨 일가, 민병주, 민대식, 민영찬 등에 머문 사람이 많은데 민병주방에는 김인환, 민건식, 이창성(상노), 최씨3, 안시영 등이 나오고, 민대식방에는 안재규, 홍일동이 이름을 올렸으며, 민영찬방에는 남상세, 심상순, 함창섭, 최운선이 나오고, 민장관으로 표기된 곳에는 박씨3, 전경덕의 이름이 있다. 그 외 윤달영 방에는 오경은, 이충근이 보이는데, 이 둘은 고양군 숭인면 장위리라는 동일한 주소가 표기된 것으로 보아 같은 마을에 사는 사람이 함께 서울로 와 윤달영의 집에 기거한 것으로 짐작된다. 홍익표방도 윤석영, 이응주 등 2명이 기거한다는 표시가 나타난 곳이다. 나머지 30명에서는 각각 1인의 이름이 보인다(<부록 2>).

4. ‘장부’ 속 처방 약가(藥價) 및 진료·결제

보춘의원의 진료 형태는 기본적으로 내원자 진료였다. 하루에 평균 100명 이상이 왔고 5명의 직원이 쉼 없이 움직여야 했다고 전한다. 1931년 ‘장부’에 간간이 왕진이 보이기는 하지만 대개가 외래였음을 보여준다. 1931년 경성 보춘의원의 내원자들은 어떤 질병을 가지고 찾아왔고 또 어떤 처방을 받았을까? 비용은 얼마였고, 결제는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졌을까? 과정은 순조롭게 진행되었을까? ‘장부’를 통해 살펴볼 수 있는 질문들이다. ‘장부’에는 내원자의 처방과 함께 그에 따라 대금이 명시되어 있기 때문에 약가에 기반한 경제 관계를 추적해 볼 수 있는 것이다.27)

1) 보춘의원 처방과 약가 개요

우선 전체적 통계를 살펴보자(<표 2>). 1931년도에 비용이 발생된 처방의 종류가 1,057개이고, 반복되는 처방되는 횟수까지 모두 합하면 총 4,613회 처방되었다.28) 이에 따라 한 해 총 진료비 수입, 곧 결제 대금은 약 893원 30전에 이른다. 1930년 7월 28일자 『조선일보』의 기사에 백미 1석에 26~27원이라고 한 것에 따르면 한 해 총수입은 백미로 약 33~34석이 된다.29) 1,057개 중 상위 30개 처방이 전체 진료비의 41.57%(371,31.9/893,30.2)로 높은 비중을 차지한다. 이처럼 주요 처방이 높은 빈도로 집중 처방되면서도 동시에 천여 가지가 넘는 매우 넓은 범위에서 다양한 종류의 처방이 선택되고 있다. 단 1회만 처방된 약방이 전체의 절반이 넘는 559개(52.89%)에 이른다는 점과 대비해보면 이런 경향이 뚜렷하다.
표 2에서 상위 30개 처방 중에는 중기를 보하고 기운을 조화롭게 하는 데 치중하는 약들이 많다(김동율, 2016: 21-31; 차웅석, 2008). 보춘의원에서 가장 많이 처방된 약은 상한(傷寒)에 사용한 가미보정산(加味普正散)으로 횟수로도 299회이고 그에 따른 대금도 48원 53돈으로 최고액이다.30) 이 약은 원래 보구정기산(普救正氣散) 곧 보정산(普正散)에 가미방이 붙어 가미보정산으로 정착된, 김영훈의 최빈출 약방이다. 다음으로 사향소합원, 가미화위탕, 가미온위탕, 윤장환, 가미화정전, 통청산, 가미온중탕 등이 거명된다.31) 100회가 넘게 처방된 상위 3종 처방과는 달리, 우황청심원은 단위 가격이 3원이나 하는 고가여서 총 9회밖에 처방되지 않았는데도 총액 순위 4위에 올라 있다.32) 우황청심원, 관음고(觀音膏) 등 단위 가격이 상위에 있는 처방은 구성 약재들 가격 역시 높다. 또 말라리아 약으로 새로이 도입된 키니네(금계랍)가 이 해에 31회 처방되어 상당한 횟수로 쓰인 것이 확인된다.33)
약가 상위에 올라 있는 우황청심환, 사향소합원 이외에 관음고, 가미화위탕, 가미온위탕, 가미이음전, 가미귀비탕, 가미지황탕, 가미화위전, 가미온중탕 등은 귀한 구급약이거나 또는 비위(脾胃)의 중기(中氣)를 보하거나 간신(肝腎)의 기운을 보하는 비싼 보약들이다. 반면 가장 낮은 가격대의 처방(약재)으로는 형응단(螢應丹), 형응환(螢應丸) 그리고 일청단(一淸丹), 일청환(一淸丸) 등이 보였다. 이들은 단과 환으로 이름을 달리했지만 모두 같은 약재 구성이었는데, 상 비해 두고 복용하기 좋은 제형의 약들이다. 가격이 3~6전 정도의 낮은 가격이지만 각각 20회에 가까운 활용도를 보였다. 저렴한 약재로 만들고, 자주 나타나는 감기 몸살 피로 같은 증상에 쓰이는 것으로 이 시기에도 여전히 널리 애용되고 있다. 여기에 쌍화탕(雙和湯)이 보이기도 했는데, 본디 쌍화탕은 값이 나가는 중요한 보약이지만 보춘의원에서 활용된 것은 일청단, 형응환처럼 어떤 보급용의 형태로 제형된 것이 아닐까 짐작된다.34)

2) 보춘의원 특수 단방과 특징 진료

한편 보춘의원에서 복합 처방 뿐 아니라 단일 약재도 여러 종류가 제공되고 있다. 약재를 여러 가지 종류를 많이 쓰기만 한다고 좋은 것은 아니고 때로는 적은 약재로 병을 다스릴 수 있다는 관념은 오래도록 한약 사용의 일면을 지켜온 흐름이다(오재근, 2013: 19-25). 서울에서뿐만 아니라 전국에서 다양한 환자들이 내원하는 보춘의원에서 수천의 약방을 활용하고 있는 것을 볼 때 단방(單方)의 활용 여지는 충분하다. 그런데 단방이 민병주 가에서 특별히 많이 쓰이고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본인 용도에서부터 부인, 부실, 아씨 등의 경우까지 다양하다. 사인, 인동, 백복령, 특천인삼(特天人蔘) 등이 자주 보이는데 한 번 구매할 때 대량으로 구입하는 것도 있어, 집안에 비치해두고 상당 기간 지속적으로 활용하려고 한 점도 읽힌다. 이름을 간단히 살펴보면 갈근, 백부근, 녹용각, 곽향, 사인, 향부자, 당귀, 천궁, 산치자, 도인, 마자인, 비파자, 행인, 용안육, 진침향, 경면수비주사(鏡面水飛朱砂), 다료(茶料), 생지황, 익모초, 백복령, 애엽, 비자, 창출, 인동, 귤피, 석창포, 대황, 황기, 관중, 삼칠근 등이다. 이들 중 특천인삼은 총 249회나 쓰였는데 단일 약재로 쓰인 것 중 가장 많다. 특천인삼(特天人蔘) 이라는 용어도 어떤 유래가 있는지 불명확한데 다만 1927년 개성의 고려삼행이 낸 인삼 광고물에 특천인삼을 지칭한 점이 확인된다. 여기서 개성인삼을 등급과 편수에 따라 세자표(世字表), 특천품(特天品), 갑천품(甲天品), 을천품(乙天品), 송곡삼(松曲蔘)으로 나누었는데 특천품은 두 번째 순위에 해당하는 상급품으로 나타나 있다(오훈일, 2022; 108-109). 특천인삼은 1931년 보춘의원에서 여러 환자에게 많이 활용되었다. 특히 민병주 가에서 본인과 함께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위아래 가솔들이 두루 쓰고 있는 점도 확인된다(<부록 2>). 민대식 가(家) 역시 비슷한 모습이 나타난다. 익히 알려진 바이지만 인삼의 활용이 광범위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학질을 치료하는 금계랍(金鷄蠟) 곧 키니네(quinine)는 1931년에 보춘의원에서 12가계 총 17명에게 84회 쓰였다. 유력가문에서 자주 나타났고 실사용자는 여성이거나 연소자가 많았다(<부록 3>). 키니네(キニネ)의 표기는 카타카나로 킨네(キンネ)라고 기록되어 있다. 약의 단위는 봉(封)이라고 하여 1봉으로 처방했음을 알려준다. 키니네 1봉의 가격은 10전에서 20전으로 나타나는데 제조사에 따른 약가의 차이를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민씨 일가에서는 주로 손자들이 많이 사용했으며 약가는 10전 또는 20전인 경우가 많았는데, 때로 50전으로 표기된 경우도 있었다. ‘후지산표키니네’는 180전으로 나타나 있어 그 양태가 다양하였다(<부록 4>). 1930년 경 조선 사람들에게 이 약이 매우 인기가 있어 때로 만병통치약으로 오해되는 경우도 있었다고 했는데(황지혜, 2020: 74) 우리는 보춘의원 ‘장부’에서 이 약을 유력가문에서 적극 사용하고 있다는 점과 실사용자의 인적 구성까지 확인하게 된다.
한편 보춘의원 ‘장부’에서 유독 눈에 띄는 것이 왕진료다. 왕진료는 29건 총 55원으로 단일 건수로는 실제 처방약인 가미보정산의 총처방액 48.53원을 넘어섰다. 단가로 따지면 우황청심원 다음으로 높이 나온다(<표 2>). 왕진료가 이렇게 높은 이유가 무엇일까? 우선 민병주 등의 유력가문 인물들의 왕진 수요 또는 왕진료가 높았을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하지만 실제로 그렇지는 않았다. 비교해 볼 수 있는 자료가 있다. 1932년 경성 적십자병원의 경우 원장의 왕진비가 10원, 과장 3원, 의원 2원으로 잡힌 기록이 있고, 세브란스의원 역시 시내 3원이라고 하였다(김지수, 2021: 43). 보춘의원의 경우 김영훈 본인이 왕진을 갔을 것이 분명한데, 그에 비한다면 왕진비 1.89원은 경성의 유명 병원의 과장이나 의원 정도에 못 미치는 것이다. 이 정도는 당시 화폐 가치로 노동자의 하루 임금보다 웃도는 수준이다.35) 보춘의원 김영훈의 왕진료는 당시 의사에 비해 큰 차이가 나지 않았으나, 필요한 경우 거리에 관계없이 진료를 나갔다. 전차를 이용하는 왕진도 기록되어 있다. 1931년 9월 6일 김성흠(金成欽, 주소는 고양 숭인면 휘경리)의 경우 “在徽慶里 電車來往費 二十戔 先生往診時(휘경리에 있다. 전차 왕래비 20전. 선생 왕진시)”라고 표기되어 있다. 고양의 숭인면 휘경리로 전차를 타고 갔음을 나타내고 별도로 왕진비를 책정하여 기록한 것이다. 종로 3정 ‘조아기(趙阿只)’의 경우 소아를 왕진한 것으로 보이는데 성명보다 ‘아기’를 그대로 사용했다. 6월 26일 보유청량음(保幼淸凉飮) 2첩을 20전에 처방하면서, ‘왕진료 1회 1원(往診料 一回 一員)’이라고 명기하였다. 앞의 김성흠의 경우와는 달리 가까운 지역에서 이동이 어려운 아기 환자를 왕진한 사례이다.
한편 민대식의 경우 ‘電話去상로(전화를 하고 상로가 약을 가져감. 상로는 上奴 文容得을 지칭)’라고 기재해 둔 곳에서 확인된 바 익숙한 내원자의 경우 전화상으로 진료하고 약을 처방하는 방식도 충분히 가능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1930년대 경성에서는 병원이나 의원이나 모두 왕진을 다녔고, 의사의 직급에 따라 왕진비도 차등이 있었다. 보춘의원 김영훈 역시 왕진을 나갔고 교통비를 별도로 책정하고 있을 정도로 그에 대한 비용 기록도 세밀하게 하고 있다.

3) 1년 주기 이용 패턴과 결제 양상

이제 구체적으로 ‘장부’에 적힌 내용을 한 가족의 1년 전체 진료 사례를 통해 알아보자. 보춘의원을 자주 이용한 사람 명단에도 올라 있는 김윤동의 경우, 1년 12월간 가족들이 복용한 약의 패턴이 비교적 잘 드러나 있다. 4~5월과 9~10월에 온 가족이 집중적으로 처방약을 지었다. 이처럼 한 가족이 모두 건강을 체크하고 그에 따른 처방을 받아 복약하는 모습은 매우 전형적이다. 더구나 4월 하순과 9~10월 초경에는 집중적으로 약을 복약하는 특징 역시 여름과 겨울이라는 혹독한 계절을 지내기 전에 몸을 추스르고 예방하는 한의학적 건강 관념이 스며있는 것으로 읽힌다.36) 특히 조선에서 이어지던 전통적 부유층들이 건강 유지를 위하여 이어오던 관습적 패턴, 곧 철 따라 보약을 짓고, 가족 전체가 각각의 약을 쓰고 하는 방식이 일반적이다. 이와 같은 방식은 돈이 충분한 경우 건강 증진에 한약 처방을 선호한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특정한 해의 단면적 기록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현재도 관행적으로 남아 있는 한약 복용법의 하나로 지속되고 있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한국인들에게 매우 일관된 하나의 의약 생활패턴임을 짐작할 수 있다. 민병주 가와 장길상 가 역시 이와 다르지 않았고 한의약과 거리가 먼 윤치호 가의 경우에서도 소극적이기는 하지만 그러한 패턴의 여지를 남기고 있었다.
1931년도 보춘의원에서 진료와 약재 대금 결제는 지금처럼 현장에서 결제가 바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드물었다. 대개 1년 단위 또는 그 이상의 외상 거래가 일반적이었다. 이러한 결제 방식은 서울의 보춘의원의 경우나 지방 전라 강진의 박약국의 경우(김덕진, 2022: 225-230), 구례의 유씨 일기에 보이는 경우 모두 유사하다.37) 그에 따라 회계 정리 역시 즉시 결제, 곧 ‘즉상(卽上)’이 드물고 일부만 지불하여 외상을 달아두었다가 연말에 모아서 결제하는 경우가 가장 많았다. 장부 정리 방식 역시 결제가 마무리되면 기역(ㄱ)자로 쭉 내려그어 표기하는 ‘열기법(列旗法)’, 다른 별도의 장부로 내용을 모두 옮긴 것을 표기하는 ‘타점법(打點法)’ 등이 그대로 쓰이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그림 7>, <그림 8>). 보춘의원의 ‘장부’는 1931년도의 것이기는 하지만, 실상 거의 모든 해의 경우 이러한 패턴이 반복될 것이었다. 이전의 거래가 1931년에 계상되고 1931년의 거래결제 역시 그다음 해에 이루어지는 패턴이므로, 실제로 다음 해에 결제가 이루어진다고 해도 그 결과를 1931년이라는 회계에 합산하는 것이 전체 흐름에서 결과에 큰 차이를 보이지는 않을 것이라고 전제했다.

5. 결론

출발선에서부터 동제의학교 교수로 시작하여 당대 최고의 실력을 인정받은 김영훈은 여기에 더하여 서양의학의 기본 지식 습득과 활용에도 노력하여 조선의 동료 의생들 모두 동서 의학을 겸비하면서 수준 높은 한의 진료가 이루어지기를 바랐다. 그의 당대 사회적 위치는 주류의학 주변에 머무는 마이너 의학이 아니었으며 유력가문의 가족 주치의처럼 활용되기도 했음을 보았다. 현대적 건물로 완비된 보춘의원은 또한 경향 내외의 내원자가 드나들면서 정밀하고 엄격한 진료기록으로 환자 정보와 진료 자료를 복기해 볼 수 있게 한 복합적 성격의 의료 공간이었다. 1910년대 초 근대성을 외피로 하여 밀어붙인 조선총독부의 의생규칙에 대한 김영훈의 입장 역시 복합적이고 실천적이었고, 1930년대 한의학 부흥논쟁의 분위기에서도 그는 구미와 일본 그리고 조선의 의료인 숫자가 태부족임을 강조하면서 한의의 육성과 지원을 촉구했다(김영훈, 2001: 461).
청강 김영훈의 보춘의원 1931년도 ‘장부’ 자료를 통해 다음의 내용을 알아보았다. 보춘의원 이용자는 진료비 총액으로 근거해 볼 때 유력층이 지배적인 비율을 차지하고 있었다. 집안 단위로 대가족이 빈번하게 또 다양한 처방을 응용했다. 특히 민씨 일가 민병주, 민대식, 민병석 등 3개 가가 40%를 넘는 비율을 보이고 경일은행장 장길상이 뒤를 이었다. 민병주의 경우 1년 365일 중 며칠을 제외하고 거의 매일 약을 처방하고 있어 마치 조선시대 왕실의 원찰과 유사한 기능을 하는 것 같다는 인상을 준다. 이들 집안에서 실제로 약 처방을 받는 많은 식솔들과 하인 또는 고용인들의 이름과 관계, 직책 등을 구체적으로 기술해 두고 있어 이 시대의 실제 의약 수요자의 면면을 더 깊이 들여다 볼 수 있었다. 특히 첩실을 뜻하는 부실에 해당하는 이들도 많고 또한 이들이 많은 약처방을 상용하고 있는 것을 확인하였으며 이들 통해 유력자들의 가족과 의약 사용 실상에 대해서 충실하게 접근할 수 있었다. 민대식의 경우 여행을 떠날 때 챙겨야 하는 상비약 처방을 받아 준비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장부’에는 친일과 독립운동까지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이는 인물군과 함께 재력가와 문화예술가들 역시 두루 나타나 있다는 점도 확인되었다. 뿐만 아니라 유력가문 이외 일반 대중 내원자 역시 전국적으로 또 상시적으로 존재했다는 점이 나타나 있다. 1931년도 내원자들의 지역 분포를 분석한 결과 보춘의원의 낙원동에서 반경 1km 내에 다수가 존재하지만 강화, 개성 같은 곳도 적지 않았고 심지어 경상도 전라도 황해도에서 오는 원거리 내원 환자도 있었다. 서울 이외 지방 내원 환자가 22%를 상회했다. 이들은 서울의 친척 지인들의 집에 기거하면서 보춘의원 진료를 받은 것으로 나타나는데 여기서도 민씨 일가에 기거한 이들이 상당수 보였다. 이들이 실제 무슨 약을 얼마의 가격에 구입하고 사용했는가를 알 수 있는 것은 내원자의 주소와 처방의 종류, 약가 정보를 기록하여 담아둔 ‘장부’ 덕이다. 한 해에 1천여 종이 넘는 처방을 내리면서 다양한 질병을 치료했는데, 진료 처방 역시 주요 기본방 수십 가지가 빈번하게 쓰였지만 1회만 쓰인 약 역시 52%를 넘을 정도로 처방 선택의 범위는 넓었다. 보춘의원에 내원한 직업군으로 인력거꾼, 순사, 고물상, 미종상, 인쇄식자공 등이 보였다.
보춘의원에서 많이 처방된 약을 총액 순과 빈도순으로 살펴본 결과 청심환, 소합원 같은 귀한 구급약, 또는 관음고, 가미화위탕, 가미온위탕, 가미이음전, 가미귀비탕, 가미지황탕, 가미화위전, 가미온중탕 등 비위를 보하거나 간신을 보하는 보약들이 많았지만 반대로 낮은 가격대의 형응환, 일청환 등 역시 상비약으로 많이 처방되었다. 특별한 단방으로 특천인삼이 대량으로 사용되었는데 1930년대 금산 개성 등에서 인삼회사가 활발하게 활동하는 시기와 맞물리기도 하며 그 외로도 많은 종류의 단방을 유력가 집안에서 활용하고 있음을 보았다. 또한 키니네 등 새로운 신약 제재 역시 한의 진료에 허용되는 한 편입되어 적절히 사용되는 점 등을 확인하였다. 여성과 소아를 중심으로 널리 쓰이는 모습이 ‘장부’에 나타나 있는 것이다.
김영훈은 당시 다른 의사와 비슷한 비용으로 왕진을 갔었고 거리와는 별 상관없이 필요한 경웅 도보로 또는 전차를 이용하여 이동했음을 확인했다. 때로는 전화상으로 진료를 하고 지인이 약을 가져간 경우도 ‘장부’를 통해 실제 살펴볼 수 있었다.
서두에서 한의약이 미래에도 계속 유효한 역할을 담당할 수 있을까라는 일반적 의문을 제기했는데, 1931년 보춘의원 ‘장부’는 한 해 동안 내원자 장부 기록을 통해 소박하지만 중요한 단서를 얻을 수 있었다. ‘장부’에서는 지금까지 이어오는 한약 사용 관행이 남아있는 부분이 많다. 1년 단위로 봄, 가을에 가족이 모두 예방 차원에서 보약을 지어 먹는 것, 경제적 여유가 있을 경우 다른 무엇보다 충분한 구급약 보약을 선택하고 확보하는 데 적극적인 점, 주요 내원자층이 확실히 존재하면서도 일회성 내원자의 비율 또한 커서 그에 대한 처방 종류와 범위를 확보하고 있는 점 등이다. 김영훈이 ‘장부’에서 보인 위와 같은 진료 실행이 가능한 배경에는 상당수 내원자들이 김영훈으로 대표되는 한의의 상징 곧 기존의 왕실 전통에서부터 오래 활용되어 온 한의약에 대한 높은 신뢰를 바탕에 두고 있었고, 내외에서 인정받는 한의로서 그 의술의 깊이를 인정한 덕일 것이다. 여기에 대한제국 동제의학교 교수의 신분에서부터 전통지식을 넘어 신문물을 수용하는 노력을 적극적으로 전개해 간 점도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총독부의 지도에 일면 응하면서도 이면에서는 주관을 놓으려 하지 않았고, 문명의 조류에 적극 올라타면서도 그 자체의 합리성을 내면화하여 새로운 우리 앞길을 열어가려 한 것이다. 그것이 보춘의원의 자료를 통해 본 근 100년 전의 우리 모습이었다.
이렇게 보춘의원 1931년도 ‘장부’를 분석한 내용을 정리해 보았다. 이 ‘장부’ 속 자료는 보춘의원의 운영상 필요한 내용을 메모 형식으로 기입한 것이므로 애초 당대의 의료 또는 한의 진료의 사회적 양상을 전반적으로 그려보는 데는 근본적 한계가 있다. 하지만 여기에 나타난 정보의 분량과 나름의 일관된 체계를 바탕으로 최소한의 통계적 의미 부여가 가능하다고 보았다. 앞으로 지금까지 연구에 더해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 확장하여 의미 있는 유관 자료와 연계해 나간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전통을 딛고 서서 새로운 시기를 대처해야 하는 시점에 김영훈이 남긴 자료는 더욱 의미가 커질 메시지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Notes

1) 2010년 이후 자료에는 대체로 한의 이용은 전체 의료에서 4~5% 내외를 점한다고 하였으며, 가장 최근 보건복지부 보도자료(한의약정책과/한의약기술과, 2024)에 의하면 우리 국민은 질병 치료 시 대부분 병의원(86.5%)을 이용하고 한방의료기관 이용은 6%(한의원 5.0%, 한방병원 1.0%)로 응답하였다.

2) 이들은 모두 각자 자신만의 진료부 양식을 만들었으나 큰 차이는 없다. 고윤현의 진료부를 보면 住所, 名氏, 年齡, 職業, 病名, 始痛歲日, 證候及診療, 處方藥名, 服法及一日用量, 診療 年月日, 豫后方 식이다(박훈평, 2019: 73).

3) 「寄書: 警告同業諸君(校洞 普春醫院長 金永勳)」, 『매일신보』, 1914년 2월 5일.

4) 「寄書: 警告同業諸君(校洞 普春醫院長 金永勳)」, 『매일신보』, 1914년 2월 5일.

5) 김영훈의 활동은 1915년 전국의생대회 개최, 잡지 『동의보감』 창간, 1924년 동서의학연구회 설립. 1937년 경기도립의생강습소 운영 등을 들 수 있다(차웅석, 2006).

6) 이런 점에서 스스로 황달을 치료하면서 일기를 써 『치달일기』를 남긴 대구 의생 김광진과 차이가 보인다. 김광진은 서양의학의 내과 치료를 불신하였는데, 실상 일제 시기 다수의 의생들은 한의학은 내과 질병 치료에 효과적이고 서양의학은 외과 질병 치료에 효과적이라고 확신한 듯하다(오재근, 2019: 446).

7) 보춘의원의 진료부의 양식은 총독부가 제시한 진료부 양식을 기본적으로 따르고 있으나, 세부에서는 변용과 가감이 있다(김동율, 2016).

8) 『동양의약』 제1호, 1935, 77쪽.

9) 가장이라고 편의상 표현하였지만, ‘장부’에서는 실제로 식솔이나 관계인들의 약가를 부담하고 책임지는 주체라는 의미로 쓰인 것이다.

10) 신미년(곧 1931년) 이전부터 오랫동안 ‘장부’를 작성해 왔음을 알 수 있는데, 현재 남아 있는 ‘장부’는 이것이 유일하다. 앞의 주 참조.

11) ‘장부’에는 민병주 가와 같은 이런 형식의 기록이 분량의 차이를 보이는 채로 850여 개가 들어있다.

12) 이왕직(李王職)은 일제강점기 이후 격하되어 유지된 조선 왕가 곧 이왕가의 직제 이름이다.

13) 이런 사실은 강진 병영 박약국의 기록과는 크게 대비되는데 지방과 서울의 차이가 극명한 대목이기도 하다. 지방의 강진 박약국의 경우 약재와 처방의 매매 내역이 구체적으로 상술되었지만 사용자의 신원은 대개 미상이었다(김덕진, 2022).

14) 차웅석의 연구에 의하면 1915년 8월 16일부터 12월 31일까지 약 5개월간의 ‘진료부’를 분석한 결과 빈번하게 내원한 집안으로 이근택 가문과 이해승 가문이 있다(차웅석, 2006: 285-287). 이근택은 1919년 사망하였으므로 본 ‘장부’(1931년)에는 나타나 있지 않고, 이해승은 이때에도 여전히 내원하고 있다.

15) 제자 이종형의 구술에 의하면 경운동의 민모, 윤모의 경우나 왕가 친척인 김모, 조모의 경우 보춘의원의 김영훈은 마치 가족주치의와 같은 역할로까지 언급되었다고 전하는데, 실제 기록과 부합되는 면이 많다. 김영훈 저, 이종형 편, 『晴崗醫鑑』 (서울: 성보사 부설 전통의학연구소, 1984), 475-477쪽.

16) 1931년 6월 29일 창덕궁 인정전에서 촬영한 이왕가 고전 조선무악 '향령무(영화필름)'의 동영상자료가 현재에도 남아있다(5분 59초 분량). 김진환(金振煥)은 이왕직 아악부원 양성소 4기생인데 피리 연주로 이에 참여한 것으로 나온다. “향령무(영화필름)”(소장품번호 보유-000513-00000), 국립국악원, https://www.gugak.go.kr/site/program/searchrelic/view?menuid=001013003002003&category=%EC%9D%8C%ED%96%A5&seq=2513. 검색일: 2024.4.11.

17) 비슷한 시기 일기 기록을 남긴 윤치호의 경우를 살펴보면 흥미롭다. 윤치호와 그 가족, 주변 인물의 경우 매우 풍족한 의료생활을 누렸다. 비록 윤치호는 서양의학을 선호하여 한의약을 활용한 예가 거의 없지만 서양의학과 한의학이라는 나뉨을 빼고 나면 보춘의원의 민씨 일가와 유력인물들의 경우와 오히려 공통점이 많다. 윤치호 본인은 한의약을 멀리하였으나, 가족의 경우는 또 달랐다(김지수, 2021: 24-27).

18) 電光 二○四九는 ‘광화문 지역 전화’임을 표현한 것이다. 1935년 『동양의약』 제1호 광고면에서 ‘電話光化門’이라고 표기된 곳이 보인다.

19) 상한(傷寒)은 감기와 독감 등을 총칭하는 병세요, 중풍(中風)은 뇌졸중을 말한다. 부종(浮腫)은 비뇨기 순환기의 질병으로 주로 몸이 붓는 증상을 말하며 노채(勞瘵)는 만성소모성 폐질환과 관련이 깊다.

20) “脫營失精證 內經曰 嘗貴後賤名曰脫營 嘗富後貧名曰失精”. 허준 저, 동의보감국역위원회 역, 『對譯 東醫寶鑑』 (서울: 법인문화사, 1999), 201쪽.

21) 1936년 4월 18일 YMCA 회관에서 행해진 “정신병에 대하여”라는 강연 초록 자료에 보면 “우리 인체에 질병이 404종이나 되는 중에 하필이면 정신 뇌병을 들고 나오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면서 그 이유를 정신병을 앓고 있는 사람이 점점 많아지기도 하거니와 사회가 발전할수록 더 늘어날 염려가 있는 질병이라고 적시하였다. 김영훈, 「정신병에 대하여(강연초)」, 이종형 편, 『청강의감』 (서울: 성보사 부설 전통의학연구소, 2001), 470쪽.

22) 일곱 가지는 탈영실정(脫營失精), 소원불수(所願不遂), 유지미득(有志未得), 과부사니(寡婦師尼)의 병, 심기불만(心氣不滿), 공포기절(恐怖氣絶), 폭노발궐(暴怒發厥) 등이다. 김영훈, 「정신병에 대하여(강연초)」, 이종형 편, 『청강의감』 (서울: 성보사 부설 전통의학연구소, 2001), 470쪽.

23) 홧병은 영조 대의 의관 이수귀의 의약 에세이 『역시만필』에도 주요한 질병으로 나타나고 그에 대한 의안이 다수 출현한다(신동원 외, 2015: 44-78).

24) ‘장부’에서 나타난 민영휘의 아들은 형식, 대식, 천식, 규식 등이고 민영휘의 손자로 적손 병주 외에 병수, 병유, 병도가 있으며, 증손자로 인기, 욱기, 덕기, 웅기, 헌기, 성기 등의 유력 후손이 보인다.

25) 보춘의원의 전화번호는 “광화문 2049”였다.

26) 1936년 경성지도는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제공받음.

27) 김영훈의 진료기록부를 근거로 질병 분류와 질병-처방의 관계에 대한 선행 연구가 있으므로 본고에서는 약가 정보에 집중하여 서술하려 한다. 김영훈의 처방은 『동의보감』, 『의학입문』, 『방약합편』을 근간으로 하였지만 시간이 갈수록 본인의 가미방, 창방이 늘어나는 추세였다고 한다. 김영훈이 의학 이론에 있어서는 국적을 불문하고 정밀하고 수준 높은 방론을 취했고, 환자를 대하여 실제 진료에 임해서는 특히 조선에서 경험을 축적해 온 약방을 선호했다고 평가된다. 그의 『청강의감』에는 입문, 보감, 합편에 보이지 않는 처방이 다수 나타나는데, 가미보정산, 지당화중음, 가미분리음, 제습순기탕 등이 그런 예이고 모두 보춘의원에서 자주 활용되던 기본 처방들이다. 시대별로 거서화중탕, 보구정기산(보정산), 계강온위탕 등의 처방도 매우 빈번하게 활용되고 있다(김동율, 2016: 21-31; 차웅석, 2008). 특히 거서화중탕에 관해서는 승정원일기에도 전해지는 처방으로 숙종대부터 활용되어 온 것을 청강이 새롭게 재구성하였음을 밝히기도 하였다(김동율·정지훈·차웅석, 2015: 146-150). 이 또한 중견 의원의 경우 거의 모든 사례에서 확인되는 사실인 만큼 한국 한의학의 특징으로도 언급된다. 앞서 달성 의생 전석희의 경우 역시 감기에 상용하는 청신산(淸神散)과 인복통(蚓腹痛)에 상용하는 정진탕(正眞湯)의 용례로 상황에 따라 처방을 응변(應變)해간 것을 확인한 바 있다. 지역의 의생 역시 한의서에 나오는 기존처방을 단순 답습하지 않았다(박훈평, 2019: 71-76).

28) 신동원은 김영훈의 1914~1935년까지 22년분의 진료부를 조사하여 총 59,334명의 내원자를 대상으로 5대 질환, 10대 질환, 30대 질환 등으로 분류 정리했다. 감기(감모) 환자가 가장 많아 전체 1/5에 달했으며 설사, 복통, 해수, 장벽, 식적, 비만, 협력통, 뇌통, 내음상한, 허로 등이 뒤를 이었다(신동원, 2014: 850-855).

29) 「여주지역 홍수 피해로 백미 1석당 26~27원이 33원으로 폭등」, 『조선일보』, 1930년 7월 28일. 1석은 보통의 성인 1년 식량 곧 식비로 산정한다.

30) <표 2>에서 왕진료가 제일 높이 나와 있지만 이는 직접 약재가 아니기에 제외한다.

31) 이는 선행연구에서 진료기록부 대상으로 다빈도 처방을 통계로 낸 것과 비교하여 일부 변동을 포함하면서 큰 틀에서 대체로 비슷한 기조를 유지한다(김동율, 2016: 21-31).

32) 한편 김덕진의 논문에서 분석한 강진 박약국의 경우에는 (지역, 시기가) 명시된 약재 130종 중 많이 팔린 약은 패독산 208회, 사물탕 208회, 쌍화탕 119회, 대보탕 52회, 금계랍 68회 등이었다(김덕진, 2022: 276-278).

33) 그 중에서도 후지산표 키니네는 1회에 1원 80돈이라는 가격으로 책정되어 있어 눈길을 끈다. 학질(말라리아) 치료약으로 인기가 높았던 금계랍(金鷄蠟, 키니네)은 『윤치호 일기』에서 본 윤치호의 경우에도 상비약처럼 이용하고 있다(김지수, 2021: 43).

34) 쌍화탕이란 이름을 걸고서 다양한 약재 구성의 예로써 1930년 고려삼정사월보의 쌍화탕은 특 1원 20전으로 표시되었으나, 매약의 경우 ‘人蔘入’과 같은 표기로 신뢰를 높이는 광고가 동반되었다(황지혜, 2020: 51-54).

35) 1934년 4월 조선인의 임금은 최저 70전에서 최고 3원, 일반적으로 조선인 남자 임금은 99전이라 하여 여자 임금은 49전에 불과하다고 한다(김지수, 2021: 15).

36) 김덕진이 분석한 강진 박약국의 경우에는 월별판매현황을 보면 성묘 동제 거행하는 1월과 이앙하는 5월, 그리고 수확하는 10월 등이 적고 2~4월이 고객이 많았다. 또 100년 전 한국인 사망률이 높은 월이 2~4월이라고 하였다(김덕진, 2022: 269-272).

37) 유씨 가의 일기에서 한약국은 모두 14곳이 나오고, 비용은 96냥 74전 24푼, 164원 400전, 속미粟米 2되 50전으로 상당한 금액이었다. 약값은 매 건마다 결재하는 방식이 아니라 연말이나 약국 요청에 따라 몇 차례 나누어 계산하는 방식이었다(손경희, 2022: 349).

그림 1.
『매일신보』 1914년 2월 5일 기사
Figure 1. Maeil Shinbo article on February 5, 1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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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장부’ 표지
Figure 2. Cover of the “account 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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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
‘장부’ 민병주 가(家)
Figure 3. Min Byeongju family in the “accont 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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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4.
‘장부’ 첫머리
Figure 4. Beginning of the “account 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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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5.
보춘의원 신문광고
Figure 5. Bochun Clinic newspaper advertise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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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6.
1936년 경성지도에서 본 보춘의원(낙원동 240) 반경 1km 범위
Figure 6. Viewed from Seoul Map in 1936, 1km radius of Bochun Clinic(240 Nakwon-d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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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7.
보춘의원 장부 정리 예1: 열기법
Figure 7. Accounting method of Bochun Clinic account book: Marking by angled l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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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8.
보춘의원 장부 정리 예2: 타점법
Figure 8. Accounting method of Bochun Clinic account book: Marking by d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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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 1.
People who visited Bochun Clinic in 1931 according to the account book(numbers indicate the frequency)
대구분 소구분 비고
본인 대감61, 영감255, 대방26, 본인106 가문별 내원 환자 정보 4,854항 중 가솔/관계자
남성친족 부친15, 장인(춘장)2, 조부2, 외조모3, 아들211, 손자23, 새방6, 새서방6, 매부7,
여성친족 정부인54, 부인342, 대부인1, 부실79, 뒤댁32, 뒤댁마님123, 뒤댁아씨107, 뒤댁네39, 뒤방뒤댁마님1, 마마46, 마마형님3, 맏며느리5, 며느리7, 모친172, 새아씨7, 서모17, 유모11, 딸145, 손녀22,
지인/직업인 순사4, 여관9, 양복점4, 양화점1, 배달부1, 연탄가게1, 군청공무원5, 자동차2*, 신문사 속자인1, 인쇄소1, 병원3, 이발관2, 과일상2, 미곡상2, 제과점1, 은행2, 생명보험1, 교사1, 학생3, 발갑1, 이왕직1, 의사1, 의생3, 병풍수리인1, 고물상1, 버스기사1, 인력거부8. 위 4,854항과 이월 293항에 포함된 직업군
하인/고용인 상노2, 하인3, 식모1, 침모1, 반비앗치1

(김영훈, 1931)

Table 2.
List of total amounts by each herbal medicine prescription in the 1931 Bochun Clinic account book(number in brackets indicates the ranking of total amounts)
횟수 평균 단가(전) 총금액(전) (1원=100전) 비율
1 왕진료 29 189.7 (2) 5,500.0 6.16%
2 가미보정산 299 16.2 4,853.1 5.43%
3 사향소합원 111 34.1 (5) 3,787.5 4.24%
4 우황청심원 9 300.0 (1) 2,700.0 3.02%
5 가미화위탕 152 16.0 2,427.0 2.72%
6 가미온위탕 95 18.5 1,755.0 1.96%
7 특천인삼 249 6.73 1,675.0 1.88%
8 관음고 43 37.7 (4) 1,619.0 1.81%
9 윤장환 67 19.8 1,328.3 1.49%
10 가미화정전 57 19.3 1,101.0 1.23%
11 통청산 78 13.2 1,027.0 1.15%
12 가미온중탕 37 21.5 795.0 0.89%
13 가미화담전 38 19.7 750.0 0.84%
14 가미군자탕 27 27.5 742.5 0.83%
15 가미오적산 37 18.6 690.0 0.77%
16 가미양영탕 24 28.4 (7) 682.0 0.76%
17 보청금단 35 18.0 630.0 0.71%
19 보중산 57 10.7 610.0 0.68%
20 가미금수전 26 22.7 590.0 0.66%
21 가미이음전 11 52.5 (3) 578.0 0.65%
22 증손오적산 27 20.0 539.0 0.60%
23 가미도평산 36 14.6 527.0 0.59%
24 가미팔진탕 22 23.5 518.0 0.58%
25 가미승갈탕 52 9.9 517.0 0.58%
26 가미대보탕 24 20.7 497.0 0.56%
27 가미보익탕 23 21.0 482.0 0.54%
28 가미귀비탕 15 32.0 (6) 480.0 0.54%
29 가미화중음 45 10.7 480.0 0.54%
30 가미지황탕 18 26.2 (8) 472.0 0.53%
31 가미양위탕 31 14.7 454.5 0.51%
그 외 1000여 방 3,088 52,198.3 58.43%
총합(1057) 4,613 89,330.2 100.00%

(김영훈, 1931)

참고문헌 REFERENCES

1. 『辛未年 帳簿 第二十二』.

2. 『東醫寶鑑』.

3. 『黃帝內經素問』.

4. 『경희 한의학 전통과 미래: 청강 김영훈 진료기록물 등록문화재(503호) 등록기념 특별전』 (경희대학교 중앙박물관, 2014).

5. 김덕진, 「한말 醫藥需要를 통해 본 약값과 질병 -전라도 강진의 朴藥局 사례-」, 『인문학연구』 60 (2020), 100-106쪽.

6. 김덕진, 『전라도 강진 병영의 박약국 연구』 (서울: 선인, 2022).

7. 김동율, 「청강 김영훈의 진료기록 분석 연구 : 병명, 병인, 처방명을 중심으로」, 경희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6.

8. 김동율, 「청강 진료기록을 통해 살펴본 가미보정산의 기원 및 명칭 변화」, 『한국의사학회지』 33(1) (2020), 157-185쪽.

9. 김동율·정지훈·차웅석, 「청강 김영훈의 거서화중탕 임상 활용에 대한 연구 - 1915~1924 김영훈 진료기록을 중심으로」, 『한국의사학회지』 28-1 (2015), 146-150쪽.

10. 김영훈, 「정신병에 대하여」, 이종형 편, 『晴崗醫鑑』 (서울: 성보사 부설 전통의학연구소, 1984), 483-513쪽.

11. 김지수, 「윤치호의 서양의료 수용과 의료생활」. 서울여자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21.

12. 박지현, 「유교 지식인 해악 김광진의 醫生 활동과 그 의미」, 『역사학보』 229 (2016), 157-185쪽.

13. 박훈평, 「일제강점기 달성의생 전석희의 진료기록 연구」, 『한국의사학회지』 32-2 (2019), 71-76쪽.

14. 박훈평 편저, 『일제 강점기 의생 총목록 2 限年醫生. 上』 (대전: 한국한의학연구원, 2017).

15. 서희원, 「1918년 인플루엔자와 문학에 남겨진 감염의 흔적들」, 『한국학연구』 63 (2021), 111-141쪽.

16. 오훈일, 「일제강점기 중 1920-1930년대 신문에 실린 인삼 광고 분석」, 『인삼문화』 4 (2022), 107-108쪽.

17. 이민희, 「19세기 말~20세기 초 서양인 여행자의 금강산 여행기 연구」, 『한국문학연구』 67 (2021), 291-343쪽.

18. 이병욱·김동율·차웅석, 「感冒처방 晴崗醫鑑 '加味普正散'의 의학역사적 이해」, 『한국의사학회지』 24-2 (2011), 79-82쪽.

19. 이선영, 「청강 김영훈의 『수세현서』 연구」, 경희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8.

20. 신동원, 「한국 근대 보건의료체제의 형성, 1876-1910」,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6.

21. 신동원, 「1910년대 일제의 보건의료 정책 -한의학 정책을 중심으로-」, 『한국문화』 30 (2002), 333-370쪽.

22. 신동원, 「조선총독부의 한의학 정책 –1930년대 이후의 변화를 중심으로-」, 『의사학』 12-2 (2003), 110-128쪽.

23. 신동원, 『호환 마마 천연두』 (파주: 돌베게, 2013).

24. 신동원, 『조선의약생활사』 (파주: 들녘, 2014).

25. 신동원 외, 『조선 어의 이수귀의 동의보감 실전기, 역시만필』 (파주: 들녘, 2015).

26. 오재근, 「약 하나로 병 하나 고치기(用一藥治一病)」, 『醫史學』 22-1 (2013), 1-39쪽.

27. 오재근, 「일제시대 ‘의생(醫生)’ 김광진의 황달 투병기 - 김광진의 『치안』, 『치달일기』 분석」, 『의사학』 28-2 (2019), 427-468쪽.

28. 차웅석, 「청강 김영훈과 수세현서」, 『한국의사학회지』 14-2 (2001), 167-169쪽.

29. 차웅석, 「晴崗診療簿 자료현황 보고」, 『대한한의학회지』 25-2 (2004), 119-126쪽.

30. 차웅석, 「청강 김영훈 진료기록 데이터베이스모형 개발연구」, 『동의생리병리학회지』 20-2 (2006), 279-291쪽.

31. 차웅석·박래수. 「청강 김영훈 진료기록 복원연구」, 『동의생리병리학회지』 22-1 (2008), 1-12쪽.

32. 황지혜, 「일제강점기 동아일보 매약 광고를 통해 살펴본 한의학 이용 변화」, 경희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20.

APPENDICES

Appendix 1.

Visitors to Bochun Clinic(in order of total expenditure in the account book of 1931)

순위 약값지불자 약값 총액(돈) 비율(%) 비고
1 민병주 118,390 29.83 민영휘 장손
2 민대식 29,828 7.51
3 민병석 24,386 6.14
4 장길상 13,482 3.40 장택상 형, 경일은행
5 조정환 11,207 2.82 외무부장관 曺正煥?
6 문익상 10,495 2.64
7 윤정희 7,529 1.90
8 전동댁 5,945 1.50 민병주 일가
9 이기원 5,234 1.32
10 최억 5,013 1.26
11 최영완 4,958 1.25 아리랑 영화배우
12 김진환 4,725 1.19 장악원 전악 또는 이왕직아악
13 고숙희 3,955 1.00
14 정종두 3,915 0.99 독립운동가
15 문규상 3,910 0.99
16 이풍한 3,880 0.98
17 유홍종 3,700 0.93 간성군수
18 민병도 3,675 0.93 초대한국은행
19 정순교 3,641 0.92 정헌교 제, 가평지역 독립운동
20 김성흠 3,619 0.91 오케 레코드, 조선악극단
21 윤건영 3,597 0.91
22 윤영희 3,576 0.90
23 민붕호 3,245 0.82
24 이해승 2,838 0.71 일본은사금, 친일
25 김한병 2,835 0.71 영주지역 독립운동
26 이강암 2,569 0.65
27 김의진 2,535 0.64
28 민병섭 2,535 0.64
29 김윤동* 2,450 0.62 김석진(오천실기)-김영한(급우재집)-김윤동
30 이종성 2,380 0.60 법조인 또는 기업인
31 이능세 2,282 0.57 이정로-이능세 부자 일본은사금, 작위
32 홍재묵 2,260 0.57
33 민병용 2,074 0.52
34 김인준 1,960 0.49
35 박승봉 2 1,762 0.44
36 이상의 1,760 0.44
37 문희상 1,757 0.44
38 정원봉 1,740 0.44
39 안철홍 1,700 0.43
40 홍성춘 1,680 0.42
41 전씨 1,675 0.42
42 서두수 1,615 0.41 경성제대, 미국 한국학 선구
43 고경상 1,592 0.40 폐허 발행인 편집인, 시림.
44 황태성 1,590 0.40
45 민용규 1,510 0.38
46 서홍석 1,435 0.36 아버지 서정세 『달재문집』
47 오태근 1,426 0.36
48 고씨 1,400 0.35
49 유이삼대 1,320 0.33 일본인
50 김학제 1,300 0.33
51 임병철 1,300 0.33
52~293 그 외 61,741 15.56
합계 293인 396,926 100
Appendix 2.

Visitors to Bochun Clinic(in order of total expenditure in the account book of 1931)

순위 주소 내원자 수 비율(%) 비고
1 낙원동 78 10.63% 경성. 보춘의원 소재지
2 강화 71 9.67% 원거리 청강 김영훈의 고향 마을
3 익선동 23 3.13% 경성
4 인사동 23 3.13% 경성
5 고양 19 2.59% 원거리
6 경운동 17 2.32% 경성
7 돈의동 16 2.18% 경성
8 종로(통) 16 2.18% 경성. 전차노선
9 관훈동 15 2.04% 경성
10 관철동 13 1.77% 경성
11 양주군 12 1.63% 원거리
12 원동 12 1.63% 경성. 낙원동의 이칭
13 권농동 11 1.50% 경성
14 시흥 11 1.50% 원거리
15 인천부 11 1.50% 원거리, 경인선, 스승 서도순의 거주지
16 운니동 9 1.23% 경성
17 황금정 9 1.23% 경성. 전차노선
18 계동 8 1.09% 경성. 가회동 옆
19 숭인동 8 1.09% 경성. 창신동 뒤
20 창신동 8 1.09% 경성
21 통의동 8 1.09% 경성. 체부동 앞
22 안국동 7 0.95% 경성
23 서린동 6 0.82% 경성
24 청진동 6 0.82% 경성
25 가회동 5 0.68% 경성
26 삼청동 5 0.68% 경성
27 수창동 5 0.68% 경성
28 승익동 5 0.68% 경성
29 와룡동 5 0.68% 경성
30 제동 5 0.68% 경성
31 체부동 5 0.68% 경성
32 개성 4 0.54% 원거리
그 외 서울지역 189 25.75%
그 외 지방 37 5.04%
기타(인명/건물명) 52 7.08% 인명이나 건물명으로 주소 대체*(본문상술)
총합 734 100.00%
Appendix 3.

Quinine usage in Bochun Clinic account book of 1931

가장 부인(2) 가격(전) 비고
이기완 부인(2) 20
김행영 미기록(8) 20
김성훈 미기록(3) 10
김웅한 아들(3) 10
정순교 부인(4) 10
민병섭 부인(2), 필안(15) 10
민병주 앞댁아씨(2), 뒤댁아씨(2), 호기(5), 성기(12), 산정(8) 10, 20, 50 후지산표키니네 180
민대식 새방(2) 15
전동댁 병완부인(8) 10
홍재설 미기록(5) 10
장길상 원창(5) 20
문익상 병도(8) 10
(84)
Appendix 4.

Quinine usage for Min byung-joo’s family

가장 약방 수량 금액 (환자정보)
민병주 4 27 키니네 1 50 호기
민병주 4 29 키니네 2 20 호기
민병주 5 3 키니네 3 30 산정
민병주 5 4 키니네 2 20 산정
민병주 5 5 키니네 2 20 산정
민병주 5 9 키니네 2 20 호기
민병주 5 17 키니네 2 20 앞댁 아씨
민병주 6 3 키니네 2 20 뒤댁 아씨
민병주 6 14 키니네 3 30 성기
민병주 6 30 키니네 2 20 성기
민병주 8 12 키니네 4 40 산정
민병주 10 26 후지산표 키니네 1 180 산정
Appendix 5.

Occupation/residence information of visitors to Bochun Clinic

No. 내원자명 직업/거주 정보
1 갈덕근 순사 박영진
2 강영욱 김오방장 대리
3 강태산 중림동 31, 고유상 부관 대리
4 고정상 경운동 연탄가게
5 권정석 인천 안전은행 지점
6 길영숙 일본 북해도
7 김건길 청운학교 훈도
8 김경호 김포군청 내
9 김대현 조선일보사 속자인
10 김돌몽 인력거부
11 김부경 청운학교 교사
12 김씨 2 월편 미곡상
13 김영완 광동서관
14 김우식 전 발갑
15 김원춘 안거? 인력거부
16 김원희 이왕직
17 김윤인 학생
18 김익용 익선동 97, 조의덕 방
19 김인환 민병주 방
20 김정수 양주군 화도면 차산리, 김영완 대리
21 김정숙 강화군 신문리, 평양 수학여행
22 김치운 문전 과일상
23 김해식 낙원동 109 실무부기 학교생
24 남상세 민영찬 방
25 남세희 최영원 방
26 남영희 임진용 방
27 류덕근 죽동 하인
28 박경의 황금정 1정목 97, 만선 산업주식회사
29 박씨 2 천덕여관
30 박씨 3 민장관 방
31 박원흥 홍제병원
32 박재순(박인교) 대동인쇄소
33 박제찬 함경북도 남목정 675 학무국과내, 경운동 민태판 방
34 박희도 협성실업학교
35 손영숙 낙원동 무럭상, 공중변소 전
36 송태식 인천부 외리 206, 동일여관 주인
37 신성여관 낙원동, 투숙객 이동열
38 신씨 장위리 김순동댁 하인
39 신학 민보국댁 인력거부
40 신현기 인천 외리 164 대일 양조장
41 심복용 와룡동 17, 원평 자동차
42 오귀동 월편 인력거부
43 오원근 낙원동 이발관
44 오흥영 낙원동 이발관
45 우건명 통동 44, 김나윤 사위
46 원정순 예지동 109, 김성창 딸
47 유철상 창신학교
48 유한조 순사
49 유홍종 경운동 홍0병원
50 이건문 윤해 여관
51 이건옥 쌀중개상
52 이병숙 측후소 임가 부인
53 이봉기 관철동 108, 순사
54 이상유 개성군 임한면 하조강리, 이종은 손자
55 이상익 종로 3정목, 다원자동차
56 이상진 관철동 대성여관
57 이선봉 김영수 배달부
58 이숙석 장교정 63, 한판서댁 하인
59 이승렬 의사
60 이승복 관훈동 108 형흥여관
61 이씨 3 측후소 입구 양화점
62 이씨 4 익선동 165 행랑
63 이씨 5 시흥군 장하리, 강씨 대리
64 이완규 청진동, 의생
65 이용지 강소서원 전주 이씨
66 이용환 삼청동 병풍수리인
67 이재현 인력거부
68 이제민 문화양복점
69 이제민 조일양복점
70 이종우 계동 127, 문화양복점
71 이지영 스님
72 이창성 민병주 방 상노
73 이치오 철수네 행랑
74 이태영 남대문 1정목 과일상회 주인
75 이택구 미종상
76 이학서 인력거부
77 임경천 죽동 하인
78 임태호 관훈동 화신양복점
79 장명준 인사동 고물상
80 장용서 숭일동 2, 보성고교 기숙사
81 장정원 동신제과장
82 전광옥 (동제의학교 부교수)*필자 추가
83 전한영 태평생명보험
84 정광옥 장교정 한판서댁
85 정기원 천덕여관
86 정복길 태평통 1정목 312, 윤오영 하인
87 정영식 장교동 한규설댁 인력거부
88 조경재 인력거부
89 조문창 안국동 223, 왕진료
90 조병구 원동 민장관 방
91 채기홍 미곡상
92 최상복 인천 최여관 아들, 학생
93 최씨 2 관훈동 198, 죽동궁 옆문 우물 옆
94 최씨 3 경운동 민병주 방
95 최준상 보창의원 왕진료
96 홍현규 순사
97 황규연 의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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