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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J Med Hist > Volume 33(1); 2024 > Article
‘자생자멸’에서 ‘자력갱생’으로: 1950~60년대 홍콩의 중의약 발전 재검토†

Abstract

This paper examines the supply and utilization of traditional Chinese medicine (TCM) in Hong Kong during the influenza epidemics of the 1950s and 1960s. Existing narratives of TCM in Hong Kong have predominantly framed with within the dichotomy of Western medicine “Xiyi” and Chinese medicine “Zhongyi,” portraying TCM as marginalized and nearly wiped out by colonial power. Departing from this binary opposition, this study views TCM as an autonomous space that had never been subjugated by the colonial power which opted for minimal interventionist approach toward TCM. By adopting diachronic and synchronic perspectives on Hong Kong's unique environment shaped by its colonial history and the geopolitics of the Cold War in East Asia, particularly its relationships with “China,” this research seeks to reassess the role and status of TCM in post-World War II Hong Kong.
In Hong Kong, along with other countries in East Asia, traditional medicine has ceded its position as mainstream medicine to Western medicine. Faced with the crisis of “extinction,” Chinese medical professionals, including medical practitioners and merchant groups, persistently sought solidarity and “self-renewal.” In the 1950s and 1960s, the colonial authorities heavily relied on private entities, including charity hospitals and clinics; furthermore, there was a lack of provision of public healthcare and official prevention measures against the epidemic influenza. As such, it is not surprising that the Chinese utilized TCM, along with Western medicine, to contain the epidemics which brought about an explosive surge in the number of patients from novel influenza viruses. TCM was significantly consumed during these explosive outbreaks of influenza in 1957 and 1968.
In making this argument, this paper firstly provides an overview of the associations of Chinese medical practitioners and merchants who were crucial to the development of TCM in Hong Kong. Secondly, it analyzes one level of active provision and consumption of Chinese medicine during the two flu epidemics, focusing on the medical practices of TCM practitioners in the 1957 epidemic. While recognizing the etiologic agent or agents of the disease as influenza viruses, the group of Chinese medical practitioners of the Chinese Medical Society in Hong Kong adopted the basic principles of traditional medicine regarding influenza, such as Shanghanlun and Wenbingxue, to distinguish the disease status among patients and prescribe medicine according to correct diagnoses, which were effective. Thirdly, this paper examines the level of folk culture among the people, who utilized famous prescriptions of Chinese herbal medicine and alimentotherapy, in addition to Chinese patent medicines imported from mainland China. In the context of regional commercial network, this section also demonstrates how Hong Kong served as a sole exporting port of medicinal materials (e.g., Chinese herbs) and Chinese patent medicines from the People’s Republic of China to capitalist markets, including Hong Kong, under the socialist planned or controlled economy in the 1950s and 1960s.
It was not only the efficacy of TCM in restoring immunity and alleviating symptoms of the human body, but also the voluntary efforts of these Chinese medical practitioners who sought to defend national medicine “Guoyi,” positioning it as complementary and alternative medicine to scientific medicine. Additionally, merchants who imported and distributed Chinese medicinal materials and national “Guochan” Chinese patent medicine played a crucial role, as did the people who utilized Chinese medicine, all of which contributed to making TCM thrive in colonial Hong Kong.

1. 머리말

냉전기 홍콩은 국공 대립의 정치적 불안 속에서도 전례 없는 번영을 일구고, 아시아의 세계도시의 하나로 거듭났다. 대륙으로부터 이주한 자본가의 자본과 골칫거리로 여겨졌던 난민의 노동력이 결합되면서 도시의 수출주도형 경제성장을 견인했던 덕이 크다. 또한 1950년대부터 본격화되기 시작한 감염병 통제와 공공의료 확충 이외에도 도시빈민을 위한 공공 주택사업, 물과 식량 자원을 확보하기 위한 노력 등 주민들의 삶과 직결된 여러 가지 사업이 추진되면서 홍콩은 건강한 도시로 거듭났다(Yip, Wong, 2016: 55-62; Museum of Medical Sciences Society, 2006: 49-53; 김민서, 2022a; Smart, 2004; 2006; Cheung, 2014; Lee, Choi, 2020; Pong, 2022). 이러한 점진적인 복지로의 전환은 홍콩인들의 삶을 개선시켰을 뿐더러 당국의 ‘식민지 통치의 정당성’ 위기를 불식시키는 데 커다란 도움이 되었다. 특히 시장경제 체제 아래 발전한 선진적인 의료 기술 및 공공의료 서비스의 유산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다.1) 이와 같은 서양의학(서의)의 발전은 특히 전후 예방백신은 물론 항생제와 만성질환을 치료하는 다양한 약물의 발전에 힘입은 바가 크다. 하지만 이들 강력한 무기 덕분에 전후 홍콩에서 전통의료는 거의 전멸하였다(wiped out)고 평가할 수 있을까(Chan-Yeung, 2019: 285).
홍콩에서 중의학이 법률상 등장하게 된 것은 1884년으로, 당시 제정된 서의사 면허에 관한 규칙인 의생주책조례(Medical Registration Ordinance, 醫生注册條例)의 면제 대상으로서 언급되었다. 즉, 이 법안이 “순수한 중국식 방법에 따라 의학과 수술을 시행하는 화인의 진료나 수술, 또는 그러한 행위에 대해 합리적인 비용을 수수하거나 요구, 만회할 권리를 제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고 명시함으로써 ‘법외’의 영역에서 중의학의 자율성을 보장하였다. 하지만 식민지 의학/권력에 의해 자율성은 크게 침식되었으니, 그간 홍콩 중의학의 역사에 관한 연구는 홍콩 의정권력의 개입에 의한 중·서의 지위의 역전(Sinn, 2003; 楊祥銀, 2018) 제도 안팎 중의학의 지위(Chu et al., 2005 Ma, 2012; Yu, 2017), 중의학의 ‘과학화’ 과제가(Fan, 2010) 주요한 연구테마가 되었던 까닭이다. 중심 연구 소재를 꼽자면 단연 동화의원(東華醫院)으로, 1872년 정부 지원 아래 화인 엘리트의 주도로 수립된 이 병원은 화인들을 위한 최초의 근대식 중의병원이자 대표적인 자선기구로서, 당시 중국 및 화교사회 곳곳의 중의병원 모델이 된 바 있다(帆刈浩之, 2015). 하지만 1894년 홍콩 페스트 유행을 계기로 식민지 의학/권력의 개입이 관철되며 동화의 의료공간은 중의와 서의가 공존하는 ‘혼종적’ 공간으로 재편되었고(신규환, 2020: 69, 79-91), 1908년 자문위원회(Advisory Board)에서 나아가 1938년에는 재정위기 해결의 대가로 의료위원회(Medical Committee)가 두어지며 위생행정 당국의 개입이 강화되었다. 그 결과 전전까지 수술과 외상 환자를 제외하고는 중약의 무료 제공이 중단되었고(Hsu, 1949: 13-14), 입원치료의 경우 서의가 중의를 완전히 대체면서 서의 문화패권이 관철되기에 이르렀다(楊祥銀, 2018: 184-244). 이러한 변화는 홍콩페스트 팬데믹 이후 병원 바깥으로의 서의 확장으로도 이어졌다. 동화의원은 중·서의 병원 광화의원(廣華醫院)과 서의병원인 동화동원(東華東院)을 건립하며 동화삼원(東華三院) 체제가 되었고, 뿐만 아니라 홍콩 화인엘리트가 설립한 서의진료소 ‘화인공공진료소(華人公共診所)’와 유기적인 관계를 맺어 나가며(Chaun-Yeung, 2018: 176-177) 서의가 기층에 뿌리내리는 데 있어서도 중추적 역할을 했다.
이러한 동화삼원의 역사를 본다면 중의학은 식민권력을 뒤에 업은 서양의학에 완전히 패배했음에 다름 아니다. 처음부터 중의사는 출생·사망신고 권한이 없었고, 이후 지속적인 위생당국의 개입으로 시차를 두고 주요 감염병과 조산, 치과, 안과 부문의 수술 및 치료에 제약을 받게 되었다. 비록 당국은 중의학을 비공식적으로 승인했으나, 중의학을 인정하거나 고취하려는 뜻이 없었다. 즉, 어떠한 공식적이고 제도적인 지원과 혜택이 주어지지 못하며 중의학은 주변화의 위기에 처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양의학의 확장이 중의학을 완전히 대체했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식민당국의 ‘최소한의 개입’ 지향은 역사의 분기마다 당국이 의도하였던 또는 의도하지 않았던 ‘자생자멸’의 바람과는 다른 결과를 가져왔다.
전후 중의학은 서의 중심의 위생의료체계 발전 속에서도 오히려 중의약 업계 화인들의 ‘자력갱생’을 통해 성행하고 발전하였다. 이에 대해서 당대 인류학·사회학자들은 화인들의 중의약에 대한 신뢰와 관습과(Topley, 1975; Lee, 1980: 345), 중의사의 의료행위에 법적 통제가 없고, 누구나 원하면 중의사가 될 수 있는 최소한의 개입 정책을 중의학이 성행하고, 중의사 숫자가 증가하는 주요 원인으로 꼽았다(Lee, 1974: 7; 1980: 351). 한편 식민당국이 의료체계의 재정부담을 완화하기 위하여 가정과 책임을 분담하는 과정에서 중의학을 보호하였음을 주장한 논자(Wong, 1999: 12), 전후 ‘의료적’ 기준과 규범으로 중의약 관행을 통제하려는 시도들이 화인들의 전통문화 존중의 필요성, 감정 등 ‘비의료적’ 요소에 맞닥뜨려 협상되고 양보 되었음을 검토한 연구도 있다(김민서, 2019). 이들 연구는 식민/서의 패권의 균열 지점에 착목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적지 않다. 위와 같은 같은 의미에서 현대 홍콩 중의학의 역사를 살펴봄에 있어 중의학의 상징으로서 동화삼원을 벗어나 실제 민간에서의 중의약의 공급과 소비라는 더 큰 구조와 구성 주체를 살펴보아야 홍콩의 중의학에 대한 전체상을 그릴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전후 동아시아 냉전이라는 특수 상황 아래 홍콩과 중국의 관계 변화를 염두에 두고 새로운 변화가 중의약 성행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에 본고에서는 1957년과 1968년 발생한 두 차례 팬데믹 인플루엔자(流行性感冒) 유행을 확대경으로 삼아 홍콩에서의 중의약의 공급·소비를 살펴본다. 1957년과 1968년 두해에는 신종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의 출현으로 갑작스럽게 환자가 폭증하였고, 예방백신이나 치료제가 없는 상황에서 중·서의 병의원마다 환자가 가득 찼고, 또한 예방과 치료 목적으로 중의약의 소비가 성행하였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 당시의 신문 기사와, 1957년 중의계의 인플루엔자 대응에 관한 홍콩 중국의약학회(中國醫藥學會)의 자료를 주요하게 검토할 것이다. 기존 연구는 전후 홍콩의 중의사 및 중의약 단체에 대한 깊이 있는 천착이 부족했고, 더군다나 인플루엔자 유행기 중의약의 공급과 소비를 다룬 연구도 전무하다. 이에 먼저 2장에서는 전후 중의약의 발전에 주도적 역할을 하는 중의약 단체는 어떤 단체가 있었던가 전전기와의 연속과 단절을 염두에 두고 살펴보도록 한다. 3장과 4장에서는 1957년과 1968년 인플루엔자 유행기 홍콩의 중의약의 공급·소비를 중의사의 진료와, 중국 대륙의 약재 및 매약(賣藥)의 유통과도 긴밀히 연관되는 민간의 다양한 중의약 소비 관행의 층위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한다.

2. 전후 홍콩의 중의약 단체

전후 새롭게 생겨난 중의약 단체들은, 무자격 돌팔이 안과의사의 실명 사고를 계기로 이뤄진 중의사의 안과 수술·치료 자격 박탈이나, ‘웅황사건’2) 등 당국의 개입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전례 없이 결집하였고, 언론을 지원군 삼아 당국의 협상 대상으로 거듭났다. 과연 이들은 누구인가? 기존 홍콩의 중의사나 중의약 단체에 관한 연구는 개인과 단체의 이름, 단체의 구성, 활동 등을 정리한 몇몇 연구가 있지만(余泱川, 刘小斌, 2014; 劉小斌, 陳永光, 2020; 2021; 陳永光, 2021; 林麗群 외, 2023) 단순 열거에 그치고 있다. 하지만 전후 중의학 발전을 추동하는 데 있어 가장 주체적인 집단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홍콩에서는 중의사의 상호 연대와 부조 등을 목적으로 1919년 교항중의공회(僑港中醫公會, 창립자 유례(尢列, 1865~1936))가 수립되었다.3) 최초의 중의사 단체였다. 학술성 단체로는 1930년(민국 19) 화인정무사서(華人政務司署, Secretariat for Chinese Affairs)의 비준을 받아 홍콩 중화국의학회(中華國醫學會, Chung Wah Medical Association)와 뒤이어 1935년 침구학술단체로 중화침구학연구사 홍콩분사(中國針灸學硏究社 香港分社)가 정식 발족하였다.4) 알려져 있다시피 1920년대 후반~1930년대 전반 난징 국민정부 위생부 중앙위생위원회가 제출한 ‘국의(國醫) 폐지안’에 따라 대대적으로 촉발된 전국적인 반대운동은, 폐지 반대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중의학의 국가공인을 목적으로 중의사들을 결집시키고 ‘중앙국의관’을 탄생시켰다(황영원, 2019: 117-128). 중화국의학회의 조직 역시 그 결과이다. 유례(간사장)를 비롯한 13인을 발기인으로, 1930, 1931년 각각 화민정무사서와 중앙국의관의 비준을 받았고, 국의잡지 창간 등을 통해 해내외 선전에 힘썼다(區少軒等, 1947: 1). 광동과 접한 홍콩은 혁명가의 피난처이자 중일전쟁기까지도 줄곧 애국 화교의 관심과 후원이 모여드는 핵심 장소였다. 홍콩의 중의사들은 중화민족문화의 정수(精髓)인 ‘국의’를 수호하고, 해외 화교들의 관심을 환기하는 목적으로 결집하였다. 하지만 이는 단순히 고국의 중의학 지위를 사수하는 문제에 국한되지 않았다. 광동과 홍콩은 1949년 이전까지 줄곧 하나의 생활 권역으로 광동 나아가 중국 대륙의 화(禍)는 홍콩에도 미친다. 때문에 중화국의학회의 중의사들은 광동국의분관의 영도 하에 국의운동과 항일전쟁기 국의구호 활동에 연대하였던 것이다(區少軒等, 1947: 1).
또한 홍콩은 광동으로부터의 중의약 자원의 주요 소비와 유통 거점으로도 활용되었다. 1926년 회원 300여 명으로 창립된 홍콩중약연상회(香港中藥聯商會) 이외에도(香港中藥聯商會, 1978: 16) 1926년 이전부터 홍콩남북행가(香港南北行街)에서 약재 수입 및 유통을 담당한 18개 행호들로 조직된 동업조직 홍콩남북약재행이의당상회(香港南北藥材行以義堂商會)가 1927년 탄생했다(香港南北藥材行以義堂商會, 2013: 13). 이러한 중의약 단체수립이 의미하는 것은 식민당국의 최소한의 개입주의는 광동과 홍콩을 정치적·상업적으로 연결하는 화인 사회의 자율적 의약 공간을 창출했다는 점이다.
1937년 중일전쟁의 발발과 1941년 홍콩 함락 후 상황은 급변했다. 중일전쟁 발발로 다수 근대적 중의학교에서 교육을 받거나 봉직한 명의 또는 중의교육가의 홍콩 도항이 고조되었다(余泱川, 刘小斌, 2014: 55). 하지만 일제 점령기 일본이 홍콩의 화인들을 대거 귀국시키면서 많은 수의 중의사가 다시 고국으로 되돌아가며 중의학의 보급률은 자연히 떨어지기도 하였다(林麗群 외, 2023).
8년간의 긴 전쟁이 끝나며 홍콩의 사회경제는 차츰 회복되었는데, 하지만 곧이어 국공 내전이 발발하고, 중국 공산당이 승기를 잡아가며 이전과는 다른 상황이 연출되었다. 1946년 홍콩에서는 국민정부 사회부 속하 교항국의연합회(僑港國醫聯合會, The Hong Kong Chinese Medical Union)와 앞서 언급한 홍콩 중화국의학회만이 활동하고 있었다. 이중 교항국의연합회 회장(루저궁(呂哲公))은 중앙국의관 홍콩분회의 회장으로 임명되며, 그를 비롯한 몇몇 인사는 이 기구를 유일한 중의사단체로 공인할 것을 식민당국에 청원하였다. 하지만 이를 중앙국의관의 정치공작으로 여긴 당국은 소위원회를 조직해 ‘동화삼원’이 악영향에 직면할 것이라는 우려를 표명하고, 어떠한 방식으로도 중의학을 승인하지 않을 것임을 확인하였다.5)
한편 홍콩과 구룡에서는 전례 없이 많은 단체가 조직되어 화인정무사서에 등록되었다. 이미 1940년대부터 특히 1949년 전후로 광동중의약전문학교(廣東中醫藥專門學校) 출신의 명의 우줘치(伍卓琪, 1914~?). 광동 명의로서 홍콩 중국의약학회 이사장을 지내는 양르차오(楊日超, 1911~?), 난징 중앙국의관 특별연구반에서 수학하고 1947년 홍콩중국국의학원(香港中國國醫學院)을 창립한 탄바오쥔(譚寶鈞, 1918~1998), 상하이 명중의로 ‘3.17’ 중의폐지 반대운동을 발기하고, 전국의약단체연합회 난징청원단의 다섯 대표 가운데 한 명이기도 했던 천춘런(陳存仁, 1908~1990)6) 등 일군의 중국 대륙 출신 명의가 다수 홍콩에 도항한 것과도 관계가 깊다(陳永光, 2021). 홍콩 중화국의학회의 경우 회무를 회복하고, 1946년 12월 홍콩국의공회(香港國醫公會)와 조직을 합병해 책임자를 루줴페이(盧覺非, 1895~1952)로 하는 홍콩중의사공회(香港中醫師公會)를 설립하였다.7) 그 밖에도 구룡지역의 중의사들 역시 구룡중의사공회(九龍中醫師公會)를 조직해 홍콩의 화인정무사서에 단체 등록을 하였을 뿐 아니라, 각각 국민정부 위생부, 교무위원회, 그리고 국의관에 등록을 완료하였다(區少軒等, 1947: 1-2). 한편 1947년 학술성 단체로 홍콩 중국의약학회가 조직되었다. 이 밖에도 우후죽순으로 단체가 조직되었는데, 그러자 홍콩중의계 내에서는 분산성에 대한 우려가 나타났다. 이에 1950년 회원수가 가장 많던 홍콩중의사공회와 구룡중의사공회, 그리고 토론을 거쳐 추가로 홍콩중화의사회(香港中華醫師會), 교항중의공회(僑港中醫公會), 교항국의연합회(僑港國醫聯合會)를 합쳐 홍콩구룡중의사공회(港九中醫師公會)를 발족하였다.8) ①홍콩구룡중의사공회, ②홍콩중의사공회, ③구룡중의사공회, ④중국의약학회가 가장 활발한 네 개 단체였고, 이 밖에도 ⑤교항중의공회, ⑥홍콩중화중의사공회(香港中華中醫師公會)가 1960년 웅황사건시 의무위생서(醫務衛生署, Medical and Health Department)와의 교섭에 참여한 중의사 단체로 확인이 된다.9)
이처럼 광동을 비롯한 대륙으로부터 이주한 중의사의 홍콩 유입과 함께 신생 중의사 단체가 우후죽순 수립되었는데, 대개 중의사 면허 유무와 회원의 종족 차이로 나뉜 것이었다(Topley, 1976: 544). 하지만 그 중 다수가 중화민국 대륙시기 중국에서 면허를 취득한 중의사들로서, 이들 단체는 국민당 교무위원회에도 등록이 되었으며, 결과적으로 대다수의 홍콩 중의사들은 심정적으로 우파였다. 또한 국민당 정부는 전후 정규 중의사 양성교육을 받지 못한 중의사에게 면허 기회를 주는 중의사특종고시(中醫師考試特種考試) 제도와 함께, 1988년 이전까지 ‘중의사검핵판법(中醫師檢覈辦法)’의 규정에 근거하여, 홍콩을 비롯한 교민의 거주지에서 중의사로서 5년 이상 개업하였고, 그 명망이 뛰어난 자에게 필기시험을 면제하고 (‘타이종즈(台中字)’와 구분하여) ‘차오종즈(僑中字)’ 면허증(僑中字及格證書) 발급을 먼저 허가하여 교민의 거주지에서 행의(行醫)에 사용하도록 제공하기도 했다(김민서, 2019: 216). 곧 중의사와 중의약 단체들은 자신의 합법적 지위를 홍콩 바깥에서 구하였고, 그 발전은 오직 ‘자력갱생’에 의지한 것이었다(陳存仁, 1978: 26-27). 이들은 동업조직과 학회를 조직하고, 민간 중의학교를 수립하는 등 식민당국의 보조 없이 자신들의 미래를 모색해 나갔다.10)
한편 공산 중국의 수립과 함께 인구등기조례와 신분증 제도의 도입, 대륙으로부터 홍콩으로의 입경 통제 정책 등 새로운 인구관리 시책이 도입되었다(鄭宏泰, 黃紹倫, 2018). 이에 더해 한국전쟁의 발발로 국제사회의 대중국 금수(禁輸) 조치와 입경 제한에 상응하는 중국 정부의 통행허가증 제도가 더해지며 한때 홍콩-중국간 무역과 인구이동이 경색되었다. 1951년 공산 중국 역시 입(출)경에 홍콩마카오동포통행증(港澳同胞通行證) 이후 회향증(回鄕證)을 요구했다. 하지만 1954년 영·중간 공식적인 외교관계 회복과 뒤따른 금수조치 회복을 통해 중국은 자본주의 세계와 다시 접속되었다(Tang, 1994: 317-337). 중국은 변계에서 작성하는 ‘홍콩마카오동포회향소개서(港澳同胞回鄕介紹書)’ 제도를 통해 지역 공안기관이나 향, 진 인민위원회에 호적 신고와 말소를 통해 입출경을 관리했기에(鄭宏泰, 黃紹倫, 2018: 228-232) 고향 방문이나 상업적 목적으로 상시로 인구가 오갔고, 홍콩은 중국의 중요한 수출입 교두보로 거듭났다.11) 이때 중약의 교역·유통을 담당한 상회로서 전전에 수립된 두 개 단체 ①홍콩중약연상회와 ②홍콩남북약재행이의당(상회)의 역사가 전후로도 이어졌다. 특히 후자의 경우 공산당의 사회주의 계획경제로의 돌입과 함께, 내지의 약재·매약 유통 방식에서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다.
중국 공산당 정부는 국무원 하위의 중화인민공화국 대외무역경제합작부(현 상무부) 아래 화윤(집단)유한공사(華潤(集團)有限公司, China Resource (Holdings) Company Limited)를 두고, 이들로 하여금 1950년 덕신행(德信行, Teck Soon Hong)을 홍콩에 설립하도록 하여, 홍콩과 세계에 내지의 약재(熟藥) 수출을 담당하도록 하였다. 또한 베이징, 톈진, 상하이, 광저우 중국 대륙 각지의 제약공장에서 생산된 중의 매약 소위 ‘중성약(中成藥)’을 현지 제약공장과 공급 계약을 맺고 있던 소위 ‘국화(國貨)’ 공사를 통해 홍콩으로 유통 시켰고 그 종류는 수백여종에 이르렀다(德信行有限公司代理, 1977). 홍콩으로 들어온 중초약(中草藥)에서 중성약(中成藥)과 중약주(中藥酒)에 이르는 상품은 덕신행을 총대리로, 독점판매 협약을 체결한 이의당상회 속하 회원 행호의 협조, 안배 아래 위탁판매 되었다. 이러한 신중국 정부의 통일수매-판매 원칙은 매입 가격이 일정하게 보증되기 때문에, 약재 방면에서 행호는 (거액의 자금으로) 다량을 입화해 이윤을 창출하기에 유리했다. 또한 외지 상인이 홍콩에서 상품 매입시 원산지와 가격이 보증될 수 있었고, 일원적인(통일) 수출 덕분에 품질과 규격 등이 엄격히 보장되는 장점이 있었기에 절대적 신뢰를 얻었다고 한다(香港南北藥材行以義堂商會, 2013: 61). 하지만 문화대혁명의 발발로 내지의 약재 수입에 차질이 빚어진 1966년 상인들은 이의당 측의 일방적인 권익 취소를 감내해야 하기도 했다(香港中藥聯商會金, 1978: 16). 이외에도 정부와의 웅황 사건 교섭에 참여한 중약상회로 ③홍콩삼용약재행보수당상회(香港蔘茸藥材行寶壽堂商會) ④홍콩구룡중화숙약상회(港九中華熟藥商會)가 있었다.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 중국-홍콩, 홍콩-중국 간 경제교역은 결국 회복되었으나, 홍콩과 공산 중국 사이 정치적·학술적인 내왕이 거의 불가능했던 것과 마찬가지로12) 사실상 정치, 경제로부터 일상생활에 이르기까지 이전과 같은 홍콩-광동 관계를 유지하기 매우 어려워졌다. 냉전기 이들 중의약 단체들은 더 이상 고국 중국의 중의학이 아니라, 홍콩 중의학이 맞닥뜨린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며 발전을 모색하게 되었다. 정부의 간섭이나 사회적(과학화) 요구에 대응하고, 홍콩 화인 사회의 복지를 위한 기여13) 및 중화문화의 수호자로서 중의약 발전을 위해 애썼다고 평가할 수 있다. 한편 상업적으로도 전후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신중국의 사회주의 계획경제의 진전과 함께 전매 기구 덕신행을 총대리로 하는 약재 및 매약 공급 방식에 변화가 생겼다. 이러한 변화 속에 1950~60년대 인플루엔자 유행기의 사례는 다양한 층위에서 전개된 중의약의 공급과 소비를 보여주는 창이 될 것이다. 자율적인 중의약의 공간은 활성화되었고, 그곳은 식민 패권 또는 서의 패권으로 침식될 수 없는 영토였다.

3. 인플루엔자 유행기 중의사의 진단과 치료

홍콩에서는 최소 1957년 4월 셋째주 무렵과 1968년 7월 초부터 두 차례 중국 대륙에서 유입된 것으로 추정되는 A형 인플루엔자 바이러스가 유행하였으며, 세계로의 확산을 매개했다. 각각 아시아 인플루엔자(A/H2N2)와 홍콩 인플루엔자(A/H3N2)로 알려진 두 팬데믹의 평균적인 치명률은 약 0.2%로, 홍콩정부는 1957년과 1968년의 인플루엔자 이환자 숫자를 각각 전체 인구의 10%인 약 27만 명과 38만 명으로 추산하였다. 하지만 언론에서는 이 수치는 축소된 것으로 실제 약 20%에 이르는 최대 50만 명과 76만 명에 이를 것으로 보도하였다.14) 두 유행의 공통점은 원인 바이러스가 신종인 까닭에 사람들 대다수가 면역력이 없어 단시간에 유행 수준으로 확산하였던 것과, 중의약이 화인 사회에서 위기 대응에 크게 도움을 주었다는 것이다.
홍콩에서 인플루엔자는 법정감염병이 아니었고, 위생당국은 1957년 유행에 대해 인플루엔자 바이러스가 언제 어떻게 발생했는지 제대로 알지 못했으며, 바이러스 분리를 위한 실험실조차 가지고 있지 못했다(김민서, 2020: 114, 126-130).15) 미국을 비롯한 세계 보건계의 관심과 요청으로 그제서야 국립인플루엔자센터(National Influenza Centre) 수립을 통해 WHO 글로벌 인플루엔자 감시 네트워크에 편입되었지만, 1968년 유행에도 여전히 위생당국의 변함없는 입장은 ‘효과적인 공중보건 조치는 없다’는 것이었다(김민서, 2022b: 91-93). 당국의 주장은 인플루엔자는 예방백신이 없을 뿐 아니라,16) 치명률이 높은 여타 전염병과는 다르다는 것이었다. 이를 구실로 적시의 경보 조치가 없었던 안이한 행정은 폭발적인 이환자의 증가를 가져왔고, 당국은 뒤늦게 공공진료소의 연장 진료라는 임기응변적인 조치로 대응하였다.
의무위생서는 사람이 모이는 곳은 피하고, 기침 예절을 지킬 것을 당부했고, 강제적인 격리나 마스크 쓰기는 제안되지 않았다.17) 치료 수단의 경우 첫 번째로 대증치료에 효과를 볼 수 있던 아스피린, 나아가 차, 레몬 음료, 취향에 따라 위스키 또는 브랜디 등 민간요법을 제시했다.18) 만약 상태가 좋지 않을 경우 반드시 가까운 병원을 찾을 것을 당부했는데, 환자에게는 필요에 따라 페니실린 등 항생제가 처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의사(서의)들 역시 언론 인터뷰를 통해 전염을 피하기 위해 바이러스와의 접촉을 피하고, 저항력을 키우는 것 즉 면역력 강화와 컨디션 유지를 강조하였다. 치료 방법으로는 온욕과 약물을 복용하여 땀을 배출하는 것과 역시 가장 믿을만한 것으로는 의사를 찾아가 치료를 받고 주사를 맞아 합병증을 막고 고통을 줄일 것을 권장하였다.19) 하지만 홍콩은 만성적인 공립병의원 부족을 겪고 있었기에 단시간에 폭증하는 환자를 감당하기 어려웠고, 민간 병의원은 높은 진료비와 약값으로 일반인들이 쉽게 찾을 수 없었다(김민서, 2022a: 62-64). 또한 항생제는 독성이 있다고 여겨졌다(Topley, 1975: 511). 중의약이 환영받았던 이유이다. 인플루엔자 유행과 함께 중의사를 찾는 이들이 많았고, 내지의 중의 약방(藥方)뿐 아니라 중의 매약은 중국공산당을 지지하는 좌파 언론의 적극적인 소개를 통해 활발히 소비되었다. 본 장에서는 먼저 중의사의 진료가 어떻게 이뤄졌는지 살펴본다.
중의사들은 이 전염병이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로 인해 발생한다는 과학사실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인플루엔자에 관한 전통의 이해 방식인 상한(傷寒)과 온병(溫病)으로 진단하고 치료를 전개하였다. 전통적인 기후-질병 이론인 운기설(運氣說)로부터 태동한 상한론 외에도(김성수, 신규환, 2017: 30, 41), 중의학에서는 청말 무렵이면 인플루엔자를 비롯한 여러 가지 풍토성 전염병이 ‘온병(溫病, warm disease)’과 그 하위 ‘열풍역(熱風疫, hot-wind disorder)’이라는 질병 카테고리로 분류되며 풍부한 임상 경험이 있던 것이다(Leung, 2010: 31, 42; 신규환, 2020: 93-104).
이 전염병은 19세기 말엽 서구/일본을 경유한 인플루엔자(influenza) 또는 플루(flu)에 관한 새로운 의학지식의 유입과 함께 ‘유행성감모(流行性感冒)’ 또는 ‘시행감모(时行感冒)’라고 불리기 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20) 또한 1957년 4월 인플루엔자 유행과 함께 홍콩의 지면에서는 ‘연호린사(燕虎鱗沙)’라는 괴이한 이름이 처음 나타났다(吳昊, 2013).21) 이는 영어 ‘인플루엔자’를 음역한 것으로 인플루엔자 바이러스가 홍콩을 습격함과 함께 ‘바이러스’에 대한 새로운 과학 지식도 함께 유입되었음을 알 수 있다.22)
20세기 들어 1918~1919년의 인플루엔자 팬데믹은 중국과 홍콩 역시 빗겨가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지만, 발병 상황에 대한 기록은 충분치 않다(Iijima, 2003). 중의학계의 ‘이단아’로 치부되기도 했던 황싱산(黃省三, 1882~1965)의 경우(嚴家森, 2008),23) 일찍이 이 스페인 인플루엔자에 대해 서의의 청진과 타진 등을 통해 인플루엔자로 인한 폐렴 합병증을 진단하고 전통 중약 방제를 통해 치료한 ‘중서의결합’의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黃省三, 1951: 35-36). 홍콩에서 발행된 그의 독창적인 저작 『유행성감모실험신요법(流行性感冒實驗新療法)』(1951)은 이와 같은 수십 년 경험의 결과물로서 전통적인 음양오행의 세계관을 폐기하고,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의 기원에서부터 증상의 진단에 이르기까지 당시 최신의 서의 학설과 기술·방법을 전부 수용하면서도, 치료를 목적으로 효능과 안정성 면에서 우월한 중약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여러 전문서적을 참고하여 중국의 약용식물을 조합한 효과적인 방제를 발명·제시한 것이었다.24)
1957년 인플루엔자 유행에 대해 당대 홍콩 유일의 중의학 학술단체 중국의약학회는 1957년 인플루엔자에 관한 첫 번째 학술회의를 개최하고 자료를 남겼다.25) 비록 주민들이 얼마나 중의약을 이용했는지 정확한 수치는 알 수 없지만, 중의사들과 환자들의 경험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이에 따르면 중의학 치료는 신뢰를 얻어 “(지난달) 중의원은 문전성시를 이루지 않은 곳이 없었다.” 다수 업계의 보도에 따르면 대다수가 2~3일 사이에 치유될 수 있었고, 합병증 발생을 억제할 수 있었으며, 치유 이후에도 매우 적은 숫자만이 후유증을 겪었다(中國醫藥學會學術部, 1957: 1-2). 증상은 일반적인 단순형(單純型) 이외에 호흡형(呼吸型), 위장형(胃腸型), 신경형(神經型), 풍습병형(風濕病型), 중독형(中毒型) 또는 장상한형(腸傷寒型) 다섯 가지 계통의 증상이 혼합·교차하여 발생하였고, 이에 환자의 상태에 따라 기본적인 ‘상한론’과 ‘온병학’의 방제 위에 약재를 가감하는 것을 기본으로, 일부 침구(鍼灸) 치료를 병행하였다.
물론 중의사의 진단과 처방, 그리고 치료 방식은 학회 동인들 안에서도 천차만별이었다. 일반적으로 중의사는 오한, 발열 외에 맥부(脈浮)의 주요 증상이 긴한가(兼緊), 삭한가(兼數), 완한가(兼緩), 현한가(兼弦) 따지고, 혀의 질(質), 설태(舌苔)의 색과 광택을 살펴 진단을 내렸는데(中國醫藥學會學術部, 1957: 7, 22), 그 가운데 일부는 상한·온병의 증후를 구체적으로 변증(辨證)해 치료원칙을 결정하고 방을 선택해 약을 배합하였고, 일부 중의사는 다만 두통, 고열, 현기증, 골통, 인후통, 기침, 구토, 변비 등 증상에 맞는 처방만을 제시하였다. 침구 치료를 시행했던 중의사도 있었다. 진료는 개별 중의원뿐 아니라, 평시처럼 중약방(中藥房)에서 이뤄지기도 했고,26) 환자가 침상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경우 중의사가 직접 방문해 진단하고 약방(藥方)을 써주기도 했다(中國醫藥學會學術部, 1957: 13-14; 韞華, 1960). 환자의 가족들은 이렇게 처방받은 약방을 가지고 약재를 구매해 약을 달였다.
중의학 치료는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나 세균을 억지하는데 주안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신체 전반의 진단과 치료 원칙 아래 “병체의 저항력을 운용 및 부조하는 것을 규율로” “증후를 변별하고 약을 써” 신체 증상을 정상화하는 치료법이다. 이에 대해 보완·대체의학의 일종인 서양의 ‘자연요법’과 유사하며, 서구의 학자들에게도 그 진리가 알려졌다고 강조되었다(中國醫藥學會學術部, 1957: 卷首語). 중의사들은 합병증인 폐렴이나, 기관지염, 흉막염에서부터 중이염, 결막염까지 합병증을 모두 이 질병에 속하는 경미한 증상(分症)으로 여기고 진료에 임했다(中國醫藥學會學術部, 1957: 7).
천춘런의 진료 경험은 유행의 최고조기였던 1957년 4월 20일 홍콩구룡중의사공회가 주최한 의학강좌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27) 그 역시 인플루엔자가 발병하는 과학적 이해를 수용하면서도,28) 증상별로 발열과 기관지 염증의 정도에 따라 인플루엔자를 ①가벼운 기관지의 불편감과 두통을 동반하는 상풍형(傷風型) ②현대의학에서의 호흡기형으로 볼 수 있고, 풍열(風熱)을 동반하는 풍온형(風溫型)으로 나누었으며, ③신체 증상이 고열 외에 몸살이 심하며 회복되는데 일주일 이상으로 지연되는 중한형(中寒型), 그리고 ④발열과 기침 외에 오심·구토가 나타나며 회복에 가장 장시간이 필요한 식적형(食積型) 총 네 가지로 유형화하여 분류하였다. 상풍형의 경우, 초기에 당근산람탕(紅蘿蔔山欖煲湯)을 써 후부(喉部)를 윤택(潤澤)하게 하도록 했으나, 이것이 모든 병증을 치료하는 효과는 없기에 담두(淡豆)를 써서 열이 내리도록 북돋웠고, 풍(風)이 표(表)에 침습함을 막거나 풍사(風邪)를 없애고 기관지 염증 발생을 방지하기 위해 전호(前胡)를 썼다. 기관지염 치료에는 특효가 있는 마황(麻黃)을 썼고, 그밖에 길경(桔梗), 천패(川貝), 원지(遠志)를 이용해 등 쪽의 가래(厚痰)와 토가 윤활하게 나오게 했다. 이런 경우 병증이 비강(鼻腔) 및 호흡기 부분에 제한되면서 병세가 극히 약해졌다.
그 역시 학회 동인들과 마찬가지로 병증에 대한 강조와 효과있는 치료법을 통해 질병을 바라보았다. 1930년대 위기 이래로 중국 중의계는 서양의학과 ‘병인(病因)’의 존재론을 가지고 싸울 것이 아니라, ‘가치 있는 치료법’ 즉 중의의 치료 효과를 강조하는 전략을 취하였다. 그 과정에서 중의의 병증 개념의 보전이 제안되었던 바 있다(레이샹린, 2021: 189). 물론 이는 인체에 풍(風), 온(溫) 또는 열(熱), 한(寒) 등 외사(外邪)의 침입에 따라 사람마다 병증이 다르게 나타난다는 전통적 관점을 폐기하지 않는 것이기도 하였다.
중의학의 치료법은 상당히 완비되고 그 치료 효과 역시 뛰어나다고 자평되었다. 중국의약학회 이사장 양르차오는 실습생의 기록을 바탕으로 그 효과를 객관화하였다. “내가 치료한 천여 병례 가운데, 상술한 각 방약을 채용하여 약 30/100의 환자가 일제(一劑)로 치유되었고, 약 50/100 이상은 꼬박 이틀을 치료했으며, 3~5일에 걸쳐 비로소 완전히 치유될 수 있었던 사람이 약 10/100 이상이었고, 일주일 이상을 치료한 사람이 100명 가운데 10명에 미치지 못하였다. 일제에 치유된 환자 외에 초기 투약이 효과가 없을 경우 다른 중의사(他醫)에게 치료받도록 하였다(中國醫藥學會學術部, 1957: 18).” 사실상 환자마다 증상의 정도나 양상이 다르게 나타나기 때문에 빠르게 치유된 것이 환자의 증상이 심각하지 않아서인지 중의학의 치료 효험이 뛰어나서인지는 쉽게 판단하기 어렵다. 중의사의 인플루엔자 치료에 대해 홍콩·마카오의 대표적인 청소년잡지 『중국학생주보』에 게재된 단편 소설에서 중의사는 - 청진기가 상징하는 - 과학적 진단 없이 효험 없는 약방을 제시하는, 반백의 두꺼운 근시 안경을 쓴 고루함의 이미지로 표상되기도 했다는 점 역시 함께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韞華, 1960).
이상 1957년 인플루엔자 유행기 중의사의 인플루엔자 진단과 치료에 대해 살펴보았다. 홍콩 중국의약학회가 학회 동인의 진단과 상세한 처방을 취합한 것은 신종 인플루엔자의 폭발적인 유행에 대한 중의계의 적극적이고 효과적인 대응을 계기로, 중의학의 강점을 적극적으로 해명하고 국의 발양의 기회로 삼고자 한 의도가 있었다. 이 같은 노력은 1968년 홍콩 인플루엔자 팬데믹 유행기 또한 차례 경주되었다는 점에서 일회성의 학술 이벤트였다고 볼 수 없을 것이다.29)

4. 인플루엔자 유행기 민간의 중약 소비 및 유통

1) 민간의 약방과 식이요법 이용

중의사의 진료 이외에도 민간에서는 자가처방이나 식이요법, 매약 이용 등 다양한 방식으로 중의약을 소비했는데, 인플루엔자 유행시 중의약은 기본적으로 ‘약방(藥方)’을 통해 소비되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원칙적으로는 중의사를 만나 약방을 처방받는 것이 권장되었는데, 통상 처방을 받을 수 있는 곳은 개별적인 중의원 이외 다수의 중약방에서도 관례적으로 중의사의 진료가 이뤄졌다. 헌데 민간에서는 효험이 있다는 약방을 가지고 첩약을 조제하는 일도 빈번했다. 청룡 백호탕(靑龍白虎湯)이라 이름 붙은 약방도 회고되지만(吳昊, 2013), 당시 언론에서 대대적으로 홍보된 광동의 약방이 대표적 사례이다. 홍콩 『대공보』는 1957년 4월 10일 광저우 취재를 바탕으로 광동성중의실험의원(廣東省中醫實驗醫院)이 최근 유행성감모 약방을 이용해 2백여명의 환자를 치료하였다고 보도하고 효험이 있다는 약방을 함께 제시했다. “대다수의 환자는 첫 번째로 달인 한약 제1제를 복용한 후 즉각 해열 효과가 나타났고, 제2제와 3제를 복용하자 바로 치유되었다. 이 경험방(驗方)은 맑은 물 세 사발에 소엽(小葉) 2전(錢), 방풍(防風) 전반(錢半), 구등(勾藤) 3전, 황금(黄芩) 3전, 국화(菊花) 3전, 상엽(桑葉) 3전, 감초(甘草) 7분(分), 영산(靈仙) 3전, 연교(連翹) 3전, 길경(桔梗) 3전, 은화(銀花) 4전을 넣고 한 사발이 되도록 달여 복용하는 것이다. 어린아이와 노약자는 약을 적정하게 줄여 사용”하라고 하였다.30) 하지만 “일반적인 병세는 동일하게 전염된 후 각 사람의 상황이 다르기 때문에, 한 장의 약방으로 함께 치료하기 쉽지 않다”는 것이 천춘런을 비롯한 중의사들의 생각이었다.31) 양르차오 역시 이 처방에 대해 “신문에 실린 대륙의 인플루엔자(流感) 처방의 경우, 그것을 이용해 제2류의 증상을 치료하면 아마도 효과가 있을 수 있으나, 만약 그것을 이용해 제3류의 증상을 치료할 경우, 환자가 스스로 고한 바에 따르면, 복용 후 병이 감퇴함을 보이지 않았을 뿐더러 가슴이 답답하고 머리가 어지러운 좋지 않은 반응이 있었다”고 지적하였다(中國醫藥學會學術部, 1957: 18).
광동성중의실험의원의 역사는 전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13년 광동의 저명한 교육가 루나이통(盧乃潼, 1849~1927)을 주석으로 중의약학교성항주비처(中醫藥學敎省港籌備處)가 만들어진 이후 1924년 광동중의전과학교(廣東中醫專科學校)가 정식 개교하였는데, 이후 1933년 홍콩중약연상회(香港中藥聯商會)를 비롯해 광동-홍콩의 중의계 인사가 광동 9대 선당(九大善堂)의 역량을 모아 이 전문학교의 실습병원으로서 광동중의원(廣東中醫院)을 설립하였다. 중일 전쟁 발발과 일본 점령으로 홍콩 이전과 운영 중단 등 부침을 겪었으나 1953년에는 국유화가 진행되며 광동성 위생청의 영도를 받는 광동성중의실험의원으로 바뀌었고,32) 1956년 광저우중의학원(현 광저우중의약대학) 부속병원으로서 중의학 치료와 연구, 교학의 장이 되었다. 1958년 정식으로 광동성중의원이라 명명되었다.33) 1957년 인플루엔자를 계기로 광동 지역의 중의학 대응의 면면이 홍콩인들에게 전해지고, 특히 언론이 소개한 광동성중의실험의원의 처방을 홍콩의 중의사가 거론하였다는 사실은 홍콩 민간에서의 대중적인 중의약 소비가 변경 너머 공산 중국(광동)의 영향을 받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1968년 인플루엔자 유행시에도 우파 신문인 『공상만보』에 독자의 ‘특별한’ 기고에 의거해 이미 고인이 된 명중의 황싱산의 감모 전문 처방이 게재·공유되었다.34) 그는 일찍이 인플루엔자의 치료에 관해 탁월한 명성을 얻었는데, 1968년 인플루엔자 유행시 홍콩에서 회자된 약방은 그가 저술한 전문서 『유행성감모실험신요법』의 네 가지 처방 가운데 첫 번째 ‘황씨유행성감모유효탕방(黃氏流行性感冒有效湯方)’으로, 이것은 한 장의 약방이 대대로 전해져 내려져 오는 명의의 탕방으로서 이해되고 활용되었던 민간 문화의 일면을 보여준다.
한편 홍콩 화인들은 병과 음식과의 관계를 중시하는 고유한 전통(食療文化)을 발전시켜왔다. 앞서 천춘런은 의학강좌를 통해 약 이틀간의 바이러스의 잠복기에 양파탕(洋葱湯), 파마늘탕(葱蒜湯), 골파두부탕(胡葱豆腐湯), 파마늘두시탕(葱蒜豆豉)을 혹은 후추면·양파면을 넣어 전부 뜨거울 때 복용하도록 했다. “왜냐하면 마늘류는 호제식물(葫劑植物)로 매운 요소(辣素)를 풍부하게 함유하고 있고, 비강, 구강, 기관 부분의 병균과 염증이 생기는 것을 없애는 효능이 있기” 때문이다. “뜨거운 것을 먹은 후, 입과 코에서 열이 다 없어지고, 땀과 콧물이 모두 빠지는 것은, 입과 코에 병균이 발전할 여지를 없앤다. 따라서 병환을 없애고, 개개인의 체력과 경제적 소모에 모두 막대한 도움이 된다”고 하였다.35)
이와 같은 식이요법은 조기 치료의 방법에서 나아가 식사 방식까지 관계되었다. 한 중의사의 견해에 비추어 볼 때 밥을 먹지 않는 것이 좋다고 전해져, 병을 앓는 심히 많은 사람들이 고구마를 대용하여 그 판매가가 한 근에 8각(角)까지 오르고 샤우케이완(筲箕灣, Shau Kei Wan) 일대 시장에서는 고구마가 동이 나기도 하였다.36) 당근산람탕의 인기로 당근과 올리브의 시가는 10배 이상 올라 올리브는 매 가지(枚)당 1.5~2호(毫), 당근은 매 1근(斤)에 2~3원(元)에 팔려 모두 유사 이래 보기 드문 현상으로 지적되었다.37)
단, 이러한 민간 식이요법 역시 어디까지나 보조적인 수단일 뿐, 홍콩 중의계는 『대공보』 등에서 대대적으로 보도한 민간요법, 특별히 당근산람탕에 관한 무분별한 신뢰를 경계하였다. “병이 유행할 때, 본항의 신문은 홍당무, 청람(그린올리브)을 끓여 복식하면 예방 작용이 있다고 크게 전하였다. 하지만 대다수 병자가 구진(求診) 시 보고한 바에 따르면 모두 효과가 없었다”(中國醫藥學會學術部, 1957: 8). 서의계에서도 이 요법을 회의적으로 보았다. 한 의사는 대중이 중의사(herbalist)의 치료법에 의지하는 것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며, 보도된 ‘당근과 올리브’ 약방은 치료법이 될 수 없다고 하였다. 이들을 몇 시간 동안 끓이면, 당근과 올리브 안의 비타민이 얼마 남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38) 서의사의 눈에 중의사의 전문처방과 민간요법의 경계는 모호했던 것을 알 수 있다.

2) 중의 약재·매약의 수입과 소비

중의학에서 꼭 필요한 것은 바로 중약 조제를 위한 각종 약재이다. 그중 큰 부분이 중국 내지로부터 전매기구(統銷機構)인 덕신행을 통해 일괄 배급되었다. 덕신행의 모회사 ‘화윤’의 역사는 항일전쟁기 해외화교와 홍콩·마카오 동포로부터의 자금 모금과 물자 운반을 원활히 수행하기 위해 만들어진 연화행(聯和行, Liow & Co.)으로 거슬러 올라간다(吳學先, 編委會, 2010: 4-5). 연화행은 전후 중국 공산당의 주요 근거지 동북 지방과 홍콩 간에 무역 루트를 개척하고 동북 해방구의 양식(糧食)과 토특산품(土特産品)을 홍콩에 수출하며 발전하기 시작하였다(吳學先, 編委會, 2010: 37-39). 이후 새로운 이름을 얻은 화윤공사는 1949년 12월 중공중앙의 지시로 공사 내에 ‘홍콩관리위원회(港管委)’를 설립하고 이를 통해 홍콩 내 ‘당산(黨産)’ 공사라 불리는 중국 공산당 속하의 상사(商社)들을 지도 관리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한편 화윤공사는 1950년 4월 1일 새롭게 덕신행을 수립하고 광동, 광시, 푸지엔 등 연해 성시(省市)의 농부토특산품(農副土特産品), 식품, 공예품 등의 홍콩 수출과 동남아지역 중계 업무를 담당하도록 했다. 그러던 것이 1954년 중국이 사회주의 계획경제를 채택하면서 전국의 수출 상품을 당국의 통일적인 계획 아래 안배하게 된다. 이에 화윤공사는 국무원 산하 대외무역경제합작부(약칭 외무부(外貿部))의 영도를 받으며 업무 전체를 장악하게 되었다(吳學先, 編委會, 2010: 234-238). 수출 상품의 경우 산지에서 각 성시의 지사, 총공사, 그리고 해관을 거쳐 홍콩 화윤을 통해 전 세계 시장으로 수출 시키는 구조였는데,39) 덕신행 역시 (차례로) 중국 토산(土産), 차엽(茶葉), 축산(畜産) 세 개 총공사의 위탁을 받아 총대리업무를 수행하게 되었다(吳學先, 編委會, 2010: 87).
세계시장에 상품을 수출하기 위해 화윤공사는 1955~1956년의 예비단계를 거쳐 1957년 봄부터 광저우에서 ‘국가급’ 중국수출상품교역회(中國出口商品交易會, 약칭 광교회(廣交會))를 정식으로 개최하였다. 1956년 중국토산수출공사(中國土産出口公司)가 제시한 견본상품은 이미 약재류 100여 종, 성약 54종을 포함했는데, 광교회 덕분에 안정적으로 홍콩·마카오 및 해외의 화상(華商)·교상(僑商)의 발주가 이뤄질 수 있었다(吳學先, 編委會, 2010: 267-273).
이와 같은 중국 공산당의 수출 정책은 정치적 격동과 거리를 두고 비교적 안정적으로 유지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1966년 여름부터 고조된 문화대혁명의 여파에도 불구하고 중국과 홍콩 간의 교역에는 큰 차질이 없었다고 이야기되며, 1968년 4월부터 5월 사이 홍콩 약재상은 직접 광저우 춘계 교역회에서 약재를 발주하기도 했다.40) 또한 “(지난주) 한커우(漢口), 우저우(梧州), 샤먼(夏門), 톈진(天津), 상하이(上海) 각 노선(線)이 모두 약재를 운송해 들여왔고, 그중 우저우와 샤먼 두 노선의 품종은 감모 약재시장(感冒藥市) 수요에 때맞춰 제공됐다”고 평가되었다.41) 단, 반대로 문화대혁명의 혼란으로 약재 공급이 제때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유사 약재가 진품으로 둔갑하고, 가격이 급등하는 등의 폐단으로 홍콩과 동남아의 도매와 영업이 크게 위축되며 중약을 취급하는 홍콩 중개상 및 무역업자들의 불만을 초래하기도 했다.42) 중약의 소비가 서의에 비견할 정도로 돌출했던 것에 대해 화인들은 한결같이 “약성이 온화하고 복용 후 부작용이 나타나는 일이 없으며 그 치료 효능이 철저히 병의 뿌리를 없애주는 것이 중약의 특별한 장점이 되는 까닭에, 환자들의 추앙과 존숭을 받고 있다”는 점에 있다고 보았다.43)
한편 약재는 물론 다양한 중의 매약 소위 ‘중성약’이 중국으로부터 제조되어 유통되었다. 곧 주민들은 약방을 가지고 각종 약재를 달여 복용하는 방법 이외에도 예방과 치료에 중성약을 이용했다. 흥미로운 것은 공산 중국의 중성약 수출 정책에 따라 소비 내용에 큰 변화가 있었다는 점이다. 내지 북방의 중성약이 홍콩에 수입되기 시작한 것은 1950년대 초부터로, 이전 홍콩에서 판매되는 중성약은 다수가 남방 광동 상품 위주였다. 그러던 것이 1949년 신중국 수립 후, 북방의 중성약이 홍콩에서 판매되기 시작했다. 과거 광동-홍콩은 하나의 경제권 및 생활권이었기에 광동지역의 상품이 홍콩에 수출된 것이 자연스러웠다면, ‘북방’의 중성약이 수출되기 시작했다는 것은, 신중국 수립을 기점으로 홍콩이 대륙산 중성약의 수출 통로가 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초기 중국산 중성약에 대한 홍콩인들의 인식이 깊지 않고 그 반응은 냉담해 북방의 중성약을 판매하는 것에 큰 어려움을 겪었으나, 일련의 보급과 선전을 통해 발전 속도가 점차 빨라졌다. 그리하여 1960년대 후반이면 일반가정 대부분이 중국 내지산 중성약을 구비하고 있었다(香港南北藥材行以義堂商會, 2013: 93). 이러한 변화는 인플루엔자 유행기 중성약의 소비에서도 확인된다.
『대공보』는 인플루엔자의 “기세가 재앙과 같이 확산”하기 시작한 4월 14일, 인플루엔자 예방을 위해 내지의 중약 환약(丸藥)과 산약(散藥)을 대서특필했다. 이에 따르면 “유행성감모를 예방하는 중약방(中藥方)은 현재 가장 큰 대중들의 관심사이다. 믿을만한 정보에 따르면 내지의 중약 ‘은교해독환(銀翹解毒丸)’으로 유행성감모를 예방할 수 있으며, 만약 유행성감모 환자를 접촉했지만 아직 불편함을 느껴지지 않는 경우 이 환약을 매일 2회, 매회 두 알(枚)을 복용할 수 있다. 이미 불편함이 느껴지기 시작했다면 ‘영교해독환(羚翹解毒丸)’을 매일 2~4회, 매회 두 알을 아침저녁으로 복용할 수 있다. 만약 병세가 고열로 발전하면 ‘영교해독환’을 복용하는 것에 더하여 ‘자설산(紫雪散)’을 복용하며, 열이 내린 후 만약 코피가 나면 다시 ‘하엽환(荷葉丸)’ 혹은 ‘우황청심환(牛黃淸心丸)’을 복용할 수 있는데 한 알로 바로 열을 내리고 코피를 멈출 수 있다. 단, 12세 이하의 아동의 복용은 반드시 절반으로 줄여야 하며, 신중을 기하기 위해 마땅히 의사의 지도 아래 복용한다”라고 하였다.44) 그리고 후속 기사를 통해 톈진 달인당(天津 逹仁堂), 베이징 동인당(北京 同仁堂), 광저우 성군(星羣) 등 내지의 제약공장에서 생산되는 중성약의 복용 방법과 효능·가격을 자세히 소개하고, 소위 ‘국산’ 상품을 취급하는 중개 대리점들을 소개하는 등 상세하게 홍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45) 한편 우파 언론인 『공상만보』가 소개하는 중성약은 싱가포르(星港) 륭카이푹약행(梁介福藥行, Leung Kai Fook Drug Store)에서 생산한 부표구풍유(斧標驅風油)에 그치고 있다.46)
좌우 언론의 이들 기사는 선전성을 띄지만 단순 광고로 보기는 어렵다. 실제로 이들 기사는 본문 말미에 ‘광고’라고 게재된 광고성 기사와 차이가 있다.47) 또한 지면의 하단 광고와도 차이가 있는데, 상하이의 대표적인 제약공장인 신아약창(新亞藥廠)과 광저우의 대표적 중성약 제약공장인 성군약창(星羣藥廠)의 광고가 그것이다.48) 곧 이들은 효과가 뛰어난 항인플루엔자 중성약에 관한 정보성 기사이면서, 정치적인 함의를 갖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중국 공산당에게 ‘홍색 자본가’들은 ‘애국자’이자 ‘동지’였고, 중공을 지지하는 홍콩 『대공보』가 이들 ‘국산’ 중성약 자체는 물론 그 중개 및 판매에도 열렬히 호응한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49) 일차 사료의 제약으로 홍콩 주민들이 중성약을 얼마나 소비하였는지 절대적인 판매 수치를 확인하기는 어렵지만, 홍콩에서 아시아 인플루엔자 유행 당시 병의원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하였고, 또한 홍콩 당국으로부터 조기 경보나 예방대책이 부족했음을 고려할 때 이들 매약이 큰 호응을 얻었음을 쉽게 예상할 수 있다. 이렇게 내지에서 생산된 ‘국산’ 중성약은 각급 중개상을 통해 각 약포에서 판매되었다.
1968년 7월 다시 한번 신종 인플루엔자가 유행하기 시작했을 때, 문화대혁명의 영향으로 촉발된 1967년의 소위 ‘67 폭동’의 여파가 지속되는 가운데서도 1957년과 마찬가지로 내지로부터 중성약이 수입되었고 인기를 끌었다.5) 이때에도 내지 제약공장으로부터 생산된 ‘국산’ 중성약은 가격과 효능에서부터 취급 대리점까지 자세히 선전되었다. 특히 내지의 “중국명의사 스진모(施今墨)의 경험방에 따라 베이징 동인당에서 조제한” 감모특효약 ‘감모편’이나, “은교, 영교편의 처방에 근거하여 과학방법을 이용해 제련(製鍊), 배제(配劑), 합성(合成), 제제(製劑)한” 약인당(藥仁堂)의 ‘통선리폐편(通宣理肺片)’의 사례와 마찬가지로, 홍콩의 주민들은 대대로 내려오는 ‘명의사’의 유효한 처방을 ‘과학적’ 방법으로 제련, 배합 및 합성한 매약을 통해 너무나도 간편하게 소비할 수 있었다.51) 그것이 가능했던 까닭은 1968년에도 이들 상품들이 소위 ‘국화(國貨)’ 대리점 여럿을 통해 홍콩에 독점적으로 배급되어 각 매약포를 통해 판매되었던 덕분이다.52) 이처럼 홍콩은 냉전에도 불구하고 또는 냉전으로 인해 공산 중국으로부터 수입된 중성약의 소비처이자, 동남아 및 구미로의 상품 수출을 담당한 (유일한) 중계무역지가 되었다.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 민간에서 중의약은 약방과 식이요법, 매약 등 다양한 방식으로 소비되었다. 기본적으로 홍콩의 화인들의 중의약에 대한 믿음은 강력했다고 보인다. 특히 당시 항생제가 독성이 있다고 믿어졌다면, 반대로 중약은 서의의 항생제를 대체하여 질병의 뿌리인 세균과 심지어 바이러스를 없애거나 약화하는 살균과 항생소 기능을 하면서도 온화한 약성을 지녔다고 여겨지기도 했다(黃省三, 1951: 66).53) 물론 앞서 살펴본 것처럼 홍콩 중의사들은 자신들의 처방이 특정 신체 부위의 바이러스나 세균을 직접 겨냥한 것이 아닌 신체 전반의 회복에 방점이 있다고 강조하였으나, 염증을 가라앉히는데 즉각적인 효과를 보이는 중약에 대해서 이것이 살균과 항생의 기능을 한다는 발상은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졌다고 볼 수 있다.

5. 맺음말

본고에서는 1950~60년대 홍콩에서 활발히 활동을 전개한 중의약 단체에 관해 밝히고, 두 차례 팬데믹 인플루엔자 유행기 중의약 공급과 소비의 다층적 양상을 확인하였다. 혹자는 과연 인플루엔자 유행기라는 특수한 상황의 사례를 홍콩의 중의약 공급 및 소비의 패턴으로 일반화시킬 수 있는지 궁금해할지 모른다. 하지만 평시에도 중의약업계 규모와 이용률이 상당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충분히 일반화가 가능하리라 본다.
물론 홍콩 식민당국은 중의학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았던 까닭에 중의약의 규모에 대해서 공식적인 기록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하지만 위생당국이 당대 ‘웅황사건’ 이후 약방·독약조례 개정 과정에서 중의약 단체들과 접촉 과정에서 파악한 바 1966년경 중의원 이외에도 중의사의 진료가 이루어지는 중서의 진료소와 중약방, 그리고 중약상까지 더하면 대략 4천여 개소에, 거기에 고용된 인원만 약 5만 명이라고까지 이야기되었다.54) 1969년 홍콩 중화의학회에서 홍콩인구통계처의 협조 아래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1970년 면허가 부여된 의사 통계는 총 2,317명인 반면, 중의사는 총 4,506명으로 거의 두 배이며, 일반의 (Herbalist)(약 70%), 접골사(약 20%), 침술사(약 10%)를 포함했다(Lee, 1980: 351). 중의사 단체 역시 1971년까지 최소 16개 약 3천 명 회원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었는데, 다만 여기에는 중의 전문학교에서 정식 훈련을 받지 않은 사람, 서의와 중의를 결합한 사람 역시 다수 포함되었다(Topley, 1976: 524).
한편 홍콩에서 최초로 공공의료에 대한 책임을 천명한 의료백서가 간행된 것이 1964년이다. 이 시기에도 여전히 많은 사람이 치료 목적으로 중의약을 이용하고 있음이 의무위생서 중의 이용 실태 조사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이에 따르면 공립병원인 퀸메리병원 일반병동 입원환자들의 경우 150명(남성 100명, 여성 50명)의 환자들 가운데 약 41%의 환자가 발병시점(19%)과 서의 치료중(22%) 중의를 이용하였다(Choa, 1967: 32). 즉, 1960년대 말, 1970년대 초면 대부분 주민이 서의사에게 구진하는 것이 보편화되었지만 또 많은 사람이 질병을 초기에 자각했을 때 중약과 중약 연고를 사용하고, 또 서의사에게 구진하더라도 동시에 중의사에게 진료를 받는 등 중의약이 널리 이용되었던 것이다(Lee, 1974: 15). 의무위생서 내에서도 중의학이라면 무조건 경시하던 풍조가 바뀌어, 1960년대 말이면 중의학이 자기한정성 또는 자가회복 질환(self-limiting diseases)을 다루는 데 있어 서양의학의 부담을 일부 경감시켜주었다는 것에 대한 공감대가 생겨났다(Hong Kong. Committee Appointed to Review the Doctor Problem in the Hong Kong Government Service, 1969: 7).
본고 2장에서는 인플루엔자 유행기 중의약의 공급·소비를 살펴보기에 앞서, 전후 홍콩에서 중의사협회나 중약상회가 새롭게 등장 또는 재등장한 경위와 단체들의 인적 구성, 그들이 ‘중국’과 맺고 있던 여러 정치·경제적 관계가 어떻게 변화하였는가 중점적으로 다루었다. 전전 중의약 단체를 살펴보면 이들은 정치적으로, 상업적으로 중국 광동과 긴밀히 연동되었다. 하지만 전후 커다란 변화가 발생하였다. 특히 신중국 수립을 전후하여 대륙으로부터 이름난 중의사가 도항하였고, 다양한 중의약 단체가 수립되어, 새로운 환경과 식민당국의 개입에 대해 주체적으로 결집 및 발전을 꾀하였다. 종래 홍콩과 중국 대륙 사이의 정치적·학문적 교류는 단절되었고, 경제적 관계는 갱신되었다.
이어서 인플루엔자 유행이라는 확대경 또는 창을 통해 홍콩의 중의약이라는 자율적 공간을 떠받치는 중의약의 공급·소비를 검토하였다. 3장에서는 1957년 아시아 인플루엔자 유행기 홍콩 중의사의 인플루엔자의 진단과 치료 경험을 살펴보았다. 이들 중의사들은 서의의 병인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거나 승인하면서도 전통 방식의 진단을 통해 환자 개개인의 신체에 발현되는 증후를 변별해 그에 적합한 상한과 온병의 방약을 처방하였고, 이는 상당한 치료 효과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4장에서는 1957년과 1968년 두 차례 인플루엔자 유행기 민간에서의 다양한 중의약 소비 관행을 화인들의 약방 및 민간요법의 활용과 약재 및 매약의 공급·유통과 이용이라는 측면에서 살펴보았다. 그중 광동의 최신 약방이나 중국(대륙)산 중성약의 소비는 베이징을 지지하는 좌파 언론, 그리고 내지로부터 약재와 매약의 수입·유통을 담당하였던 중약상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또한 대중의 중의약 소비에 –대륙 출신 명의 천춘런, 중국 명의사 스진모 등- 전통의학의 권위 또한 계속적으로 영향을 미쳤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홍콩 식민당국의 중의학 정책이 차별적이었다는 점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중의약은 주변화되었을지언정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 여전히 활발히 공급·소비되었다. 실상 식민지 위생당국이 화인들의 전통의학을 용인하고 상당한 자율성을 부여하였던 것은, 화인들이 지켜온 민족적·문화적 정체성을 존중하기 위함보다는 고도의 식민 통치 전략이었을 것이다. 중의 전통문화에 대한 존중과 관용의 제스처는 화인들의 정치적 지지를 얻어내는 훌륭한 수단이었고, 일상 정치에 대한 관심 또는 정치비판을 거두는 효과도 가져왔다. 그뿐만 아니라 중의학은 적절히 통제만 된다면 서의 중심의 보건의료체계를 보완할 수 있는 훌륭한 가용 자원이었다. 이러한 태도의 기저에는 ‘자생자멸’의 무관심이 깔려있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중의약업계는 ‘자력갱생’하며 활발히 공급되고 이용되었다. 그 속에는 서의의 헤게모니 속에 민족의학 나아가 보완·대체의학으로서 ‘국의’의 보전과 발양을 모색했던 일군의 중의가들, 중국(대륙)으로부터 홍콩과 동남아, 세계로의 약재 및 소위 ‘국산’ 중성약의 수입·유통을 담당했던 중약상, 그리고 중의약을 신뢰한 홍콩 화인들이 있었다.

Notes

1) 하지만 식민당국이 추구해 온 낮은 조세부담율이 홍콩인들의 ‘복지’에 대한 관점을 왜곡시켜 왔고, 공공부문의 지출규모 제한(GDP의 20% 이내)은 오늘날 필요한 복지개혁을 가로막고 있다는 주장은 1997년 홍콩 회귀 이전의 식민시기 공공의료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에 관해 시사점을 준다(Yu, 2021).

2) 웅황사건이란 1959년 가을, 중의사의 디프테리아 치료 과정 중 아동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하자, 식민당국이 치료에 사용된 ‘후산(喉散, Throat Powder)’에서의 1~5%의 비소 검출을 문제 삼아, 제138장 약방·독약조례(藥房及毒藥條例, Cap. 138 of 1937 Pharmacy & Poisons Ordinance)의 제1부 독약(First List Poison)인 비소를 숨긴 혐의로 중약방(中藥房) 사리(司理)들을 기소한 사건이다. 웅황의 사용은 물론 소지와 유통을 금지시키려는 당국의 시도는 중의학에 대한 심각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졌고, 중의약계와 화인사회의 대대적인 반발에 맞닥뜨리게 되었다. 하지만 후산에 포함된 황화비소(arsenic sulfide) 웅황은 실제 병리학연구소의 과학실험 결과 독성이 매우 적어 부작용을 일으키지 않을뿐더러, 화인사회의 전통문화의 일부로서 중의약 관행을 승인해온 관행과 화인사회의 감정을 고려해, 중의 약물에 대한 제재는 철회되었다(김민서, 2019: 206-215).

3) 僑港中醫公會特刋, 『明報』 B6, 2003년 9월 7일. (劉小斌, 陳永光, 2020에서 재인용)

4) 劉小斌, 陳永光, 2020은 1929년 수립(1931년 비준)된 홍콩 중화국의학회가 1931년 홍콩 최초의 중의사 조직인 ‘홍콩중의사공회(香港中醫師公會)’로 개칭하였다고 적고 있지만 이 기술은 사실관계의 오류로 보인다.

5) HKRS41-1-162, (1)-1 From. Acting D.M.S. to C.S., 25 May 1946. 하지만 이듬해 회장 루저궁은 해외부와 교무위원회에 제3당 인사로 무고되어, 중앙국의관으로부터 자동 사직 처리되었다(HKMS175-1-424, 「香港中醫師公會有關中央國醫館香港分館及僑港國醫師聯合會被誣爲第三黨人致中央的代電」, 1947.4.). 홍콩 중의계에서는 루씨의 혐의를 부정하였고, 그는 1949년 조직된 홍콩구룡중의사공회(港九中醫師公會) 회장을 역임하였다.

6) 천춘런(陳存仁, 1908~1990)은 상하이 출신의 저명한 중의사이자 문인으로, 제1차 중화민국국민대회 대표(1947)로 당선되기도 하였으나 1949년 홍콩으로 도항하여 의업을 행하면서, 1951년 잡지 『現代中醫藥』를 창간하는 등 중의학 발전을 위해 헌신하였다. 1957년 홍콩구룡중의사공회 상무이사와 중국의약학회 감사를 역임하였고, 같은 해 동화삼원의 총리로 선출되기도 하였다. 「中醫師公會讌賀陳存仁」, 『華僑日報』, 1957년 4월 14일; 「順德聯誼總會慶賀胡兆熾等榮膺 中國醫藥學會讌賀存仁榮任三院總理」, 『華僑日報』, 1957년 4월 30일.

7) 학회의 연혁, 창립 시말 등은 香港中醫師公會, 1947: 27-35을 참고하라.

8) 港九中醫師公會, 『港九中醫師公會十周年紀念特刊』 (香港:港九中醫師公會,1959), 1쪽. (劉小斌, 陳永光, 2020에서 재인용) HKRS852-1-77, (49) 警務處社團註冊官 신고 내용에 따르면 단체의 창립 시기는 1949년이다. HKRS852-1-77 港九中醫師公會 폴더에는 1958~1981년 단체의 활동 기록이 남아있어 일부 회기의 임직회원 목록(이름과 출신, 주소지)과 활동에 관해 알 수 있다. 위생당국과의 교섭이나 인플루엔자 대응에서 활발한 활동을 보여주게 되는 우줘치(1958, 1961년 외), 천춘런(1962년) 모두 회장(Chairman)을 역임하였으며, 공회의 대표적인 활동으로는 홍콩중약연상회와 함께 개최한 중의약전람회(1972, 1973, 1978년 외)가 있다.

9) ⑥홍콩중화중의사공회는 교섭 초기(1960년 2월 22일) 교항국의연합회로 알려졌다. HKRS410-10-13, (7) 中醫公會·中藥行商會目錄; (8) 致各中醫公會·中藥行商會.

10) 홍콩의 중의 교육의 역사에 관한 개략적 서술은 劉小斌, 陳永光, 2021을 참고하라.

11) 아시아태평양전쟁 시기부터 문혁기까지 냉전을 넘어서는 국제 자본주의의 상업적 연결망과 의미를 해명한 최근의 연구로 Kelly, 2021을 참고하라.

12) 일례로 천춘런이 상하이로부터 홍콩에 이주한 1949년으로부터 30여 년 동안 홍콩에서 의서란 살 수 있는 것이 겨우 수십 종밖에 되지 않았다고 한다. 때문에 오직 한국, 타이완 및 일본에서 수집할 수밖에 없었고 이들 국가에서 구입한 명저만 만여 종에 이르렀다고 한다(陳存仁, 1978: 26). 이는 혁명의 격랑에 휩싸인 중국 대륙과 홍콩의 지적 교류가 빈곤했음을 보여준다.

13) 중의약 단체는 자선사업을 통해 화인 커뮤니티 내에서 빈곤계층의 건강 증진을 돕고, 진료영역을 확보하려는 노력을 적극적으로 지속하였다. 예를 들어 1951~1955년 홍콩중약연상회는 홍콩과 구룡의 8대 단체들과 함께 하계 증의시약(贈醫施藥)을 주최해 호평을 얻었다고 한다. 1953년에 섹깁메이(石硤尾) 대화재시 긴급 지원에 나서기도 하였다(香港中藥聯商會, 1978: 16). 이후로도 완차이(灣仔) 홍콩구룡중의사공회는 연례적으로 자선연예대회를 열어 기금을 모금하여, 그 수익으로 주민들에게 무료 증의시약 서비스를 제공하였다(HKRS852-1-77 港九中醫師公會).

14) 「港府醫務處發言人說流行性感冒會再來 雖然尚無徵象但相信有此可能 上次患者約五十萬死了四十人」, 『大公報』, 1957년 6월 10일; “The ‘Hong Kong Flu’ Began in Red China,” The New York Times, 15 December 1968.

15) 1957년 3월 홍콩에서 사람간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의 전파 즉 ‘발병’이 확인되는 상황 변화를 감지한 미해군 극동함대장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홍콩당국이 많은 정보를 밝히기를 꺼렸던 것은(吳昭儀, 2020: 59) 사실상 식민당국이 발병 상황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16) 이는 사실이 아니다. 미군을 시작으로 영국과 미국, 일본 등 일부 선진국에서는 백신 제조 기술을 갖고 있을 뿐 아니라 모두 상용화하였다. 다만, 기존 백신으로는 예측 불가능한 변이형 바이러스를 선제적으로 예방하는 것이 불가능했고, 또한 홍콩이 바이러스를 배양해 단시간에 대량의 백신을 만들어내기 어려운 물리적 한계가 존재했다. 영국의 경우 치명률이 높지 않은 임상경과가 온화한 인플루엔자의 경우 전 국민 예방접종이 필요하지 않다고 여겼다(Central and Scottish Health Services Councils, Joint Committee on Poliomyelitis Vaccines, “The Application and Use of Influenza Vaccine(Not for Publication),” August 1957, FD 23/1296, NA).

17) 당시 세계 전문가 집단이나 대중의 인식 모두 바이러스는 마스크 필터를 통과하기에 마스크 착용은 효과가 없다고 여겨졌다. 「(迅報特稿)流行性感冒及其豫防」, 『大公報』, 1957년 4월 17일.

18) “Influenza Outbreak: Medical Authorities Expect a Decline within Few Days, Prevention Advice Given,” SCMP, 18 April 1957; “Thousands down with Asian flu. Your friends may have it but you don't have to catch it too,” SCMP, 24 July 1968.

19) 「(迅報特稿)流行性感冒及其豫防」, 『大公報』, 1957년 4월 17일.

20) 중국과 화인 문화권에서 언제부터 인플루엔자를 ‘유행성감모’로 불렀는가에 관해서는 사료를 면밀히 검토할 필요가 있으나, 중국에서 전염병에 대한 근대적 개념 정립이 일본의 의학용어 수입과 더불어 진행되었음을 고려할 때(Lei, 2010: 89, 93, 96), ‘유행성감모(약칭 유감(流感))’ 역시 일본의 개념을 그대로 수입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산업화 이후 최초의 팬데믹으로 알려진 것은 1889~1894년 유행한 소위 ‘러시아 인플루엔자’이다. 이 무렵인 1890년(明治 23) 일본에서는 인플루엔자를 유행성감모로 부르기 시작하였다. 1918~1919(大正 7~8)년 스페인 인플루엔자 유행시 일본 신문에서는 ‘유감’이라는 용어가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岡部信彦, 2009).

21) 「流行性感冒未戢 巴士亦受影响」, 『工商晩報』, 1957년 4월 16일; 「(迅報特稿)流行性感冒及其豫防」, 『大公報』, 1957년 4월 17일.

22) 1950년대 중반 무렵 ‘인플루엔자’와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의 변이에 관한 새로운 과학 지식들이 신문은 물론 과학잡지 등을 통해 소개되기 시작했다. 馮鉅華, 「關於流行性感冒」, 『中國學生周報』 152 (1955); 新丁, 「流行性感冒襲港中談過濾性毒素」, 『中國學生周報』 304 (1958); 「燕虎倫沙」, 『中國學生周報』 358 (1959); 司徒華, 「關於流行性感冒」, 『中國學生周報』 495 (1962); 曙光, 「流行性感冒」, 『中國學生周報』 712 (1966); 蔣文, 「談流行性感冒」, 『伴侶』 172 (1970); 倪茜, 「感冒和流行性感冒」, 『伴侶』 205 (1971).

23) 광동 판위(番禺) 출신 황싱산(黃省三, 1882~1965)은, 중서의 회통(匯通)을 실천한 홍콩 영남학파의 의가 가운데 하나로(陳永光, 2016), 홍콩에서 거의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名中醫黃省三返穗懸壺問世」, 『文匯報』, 1955년 7월 5일). 황싱산은 1955년 통일전선공작의 일환으로 중국 공산당 광동성위 서기 겸 광동성 성장 타오주(陶鑄), 임시 중공중앙동남국(中南局) 서기의 권유를 받고 마카오를 통해 대륙으로 귀국해 광동성중의약연구위원회, 중산의학원 교수 등을 역임하였다(嚴家森, 2008; 「名醫黃省三在廣州任醫學研究部主任」, 『大公報』, 1955년 9월 2일).

24) 홍콩 황숭본당(黄崇本堂)에서 출간한 그의 연구서들은 인플루엔자 이외에도 디프테리아, 결핵, 신장염 등을 다루었다. 귀국 이후 광동인민출판사 광동중의약연구총서로 관련 저작들이 새롭게 출간되거나 수정·재판되어, 중의학 교재로 사용되었다. 그중 일부는 1970~1980년 홍콩 상무인서관(商務印書館)에서 홍역을 다룬 신간과 함께 재출판되었다.

25) 학술회의는 유행병 발발후 한달이 채 지나지 않은 1957년 5월 12일 오후 8시 홍콩만국대반점(香港萬國大飯店)에서 개최되었다. 양르차오(이사장)와 천춘런(감사)을 포함하여, 총 45명이 출석하였다. 그 결과가 『流行性感冒治療之檢討』 제목의 중국의약학회 학술토론집이다.

26) HKRS410-10-13, Traditional Herbal Medicine, M.6, From AU Wai-sum to SCA; (7) Memo of 署理華人政務司, 18 February 1960.

27) 「陳存仁演講流行感冒處置方法」, 『大公報』, 1957년 4월 20일.

28) 기침과 재채기에 의한 바이러스의 전파라는 근본적 원인 이외에도, 인구 과밀과 쇠약, 영양 불량, 아동의 낮은 면역성 등 신체의 저항성 악화를 발병 원인으로 꼽고 있다. 이에 추위에의 노출(한기), 과중한 노동을 피하는 것 이외에는 실제 예방약이 없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29) 「中醫人士開學術會」, 『大公報』, 1968년 12월 23일. “流行性感冒治療之檢討”를 주제로 하는 홍콩중국의약학회 주최 학술토론 대회는 1968년 12월 29일 오후 3시 완차이 록하트 로드(洛克道) 293호 5층 회의실 개최 예정으로, 회원 외 비회원 중의계 인사 가운데 만약 체득한 바나 혹은 경험방이 있는 사람은 대회 3일 전까지 서면으로 제출하도록 홍보되었다. 아쉽게도 남아 있는 자료의 유무는 확인할 수 없었다.

30) 「治流行性感冒症廣東中醫有驗方 穗設診療站免費診治」, 『大公報』, 1957년 4월 13일.

31) 「陳存仁演講流行感冒處置方法」, 『大公報』, 1957년 4월 20일.

32) 입원병동, 엑스레이실, 인화설비를 갖춘 완전한 신식 중의병원의 자세한 면모는 廣東省中醫實驗醫院, 『大公報』, 1956년 4월 18일 기사를 참고하라.

33) 광동성중의원 구 홈페이지. https://web.archive.org/web/20200710013222/http://www.gdhtcm.com/sitecn/lsyg/index.html.검색일: 2024년 3월 3일.

34) 「已故名中醫黃省三 醫治感冒 一條良方」, 『工商日報』, 1968년 7월 26일.

35) 「陳存仁演講流行感冒處置方法」, 『大公報』, 1957년 4월 20일.

36) 「紅蘿蔔煲山欖可以預防感冒 病人多食番薯市價高過白米」, 『工商晩報』, 1957년 4월 15일. 밥을 먹지 말라는 것은 병을 앓는 동안 비위(脾胃)의 기능이 떨어져 체기가 쉽게 생길 수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중국의약학회 동인은 맑고 담백한 유동식 혹은 반유동식을 먹도록 하였고, 음료는 생율무를 달인 탕을 대용으로, 갈증이 심할 경우 신선한 배 주스 혹은 귤 주스를 추천했다(中國醫藥學會學術部, 1957: 8).

37) 「西藥門市 甚爲熱閙 治流行症藥沽出量最多」, 『工商日報』, 1957년 4월 17일.

38) “Influenza Epidemic: Sickness Spreads to Inmates of Hongkong Prisons The Army Also Affected,” SCMP, 17 April 1957.

39) 중국정부는 화윤공사로 하여금 1955년까지 총 13개의 수출입 총공사(總公司)와 대리계약을 맺어 독점적으로 중국 전역의 생산품을 유통·배급 및 수입하도록 하였다. 13개 공사는 중국수출입공사, 중국식품수출공사, 중국양곡유지(油脂)수출공사, 중국차엽수출공사, 중국기계수입공사, 중국오금(五金)수입공사, 중국토산품수출공사, 중국잡품수출공사, 중국축산수출공사, 중국광산공사, 중국의기(儀器)수입공사, 중국사주(絲綢)공사, 중국운수기계수입공사이다(吳學先, 編委會, 2010: 236).

40) 「流行性感冒中西药銷量突增 西药本銷生意平穩大陸中药來貨銳減」, 『工商晩報』, 1968년 7월 21일.

41) 「流行感冒猖獗熟藥異常暢銷 蓮篷 乾冬瓜仁 連翹 價均扳高」, 『大公報』, 1968년 7월 29일.

42) 「流行性感冒中西药銷量突增 西药本銷生意平穩大陸中药來貨銳減」, 『工商晩報』, 1968년 7월 21일. 여기에는 베트남 전쟁도 한몫했다. 이 기사에 따르면 “중국산 약재 중계의 절반을 차지하는 남베트남(南越)에서는 지급 가능한 외환 부족으로 약재 수출이 크게 줄었다.”

43) 「受流行性感冒蔓延影响 各業生意普遍退縮 祗有中西藥材物業一枝獨秀」, 『工商晩報』, 1968년 7월 28일; 「流行感冒猖獗熟藥異常暢銷 蓮篷 乾冬瓜仁 連翹 價均扳高」, 『大公報』, 1968년 7월 29일.

44) 「港澳同苦惱 其勢近乎災流行性感冒猖獗 傳染迅速患者多醫院診所有人滿之患 內地中藥丸散可治療及預防」, 『大公報』, 1957년 4월 14일.

45) 「四公立醫局今起增夜診包括中區東區紅磡油麻地由晚六時至午夜十二時止 治流行性感冒內地丸散香港有售」, 『大公報』, 1957년 4월 16일.

46) 「澳邊共區時症流行 斧標驅風油可避免感冒」, 『工商晩報』, 1957년 4월 21일.

47) 예를 들어, 태평단(太平丹)의 치유 효과에 대한 기사는 말미에 그것이 ‘광고’임을 밝히고 있다. 「流行性感冒未已太平丹治愈甚衆」, 『工商晩報』, 1957년 4월 23일; 24일; 「太平丹治愈甚衆」, 『工商日報』, 1968년 7월 27일; 29일.

48) 「天時不正 流行性感冒流行 淸服 新亞藥廠出品 百咳妥」, 『大公報』, 1957년 4월 24일; 「中國 星羣藥廠 : 中藥製劑 單味275種 古方成藥35種; 感冒發熱良藥; 銀翹散片 桑菊飮片 五積散片; 公私合營廣州藥材出品公司經營出口」, 『大公報』, 1957년 4월 24일; 「港九總代理益新行 九龍柯士甸路112號」, 『大公報』, 1957년 4월 24일. 이상은 모두 4면 하단에 실린 전면광고이다.

49) 특별히 공산중국의 비공식적 외교채널이자 대홍콩 지하공작의 거점으로 활용되었던 기구는 1947년 수립된 홍콩 신화사(新華社)로, 신화사의 주요 활동은 바로 대자본가와의 협력적 관계(통일전선)를 구축하는 것이었다. 신화사는 1937년 중국 공산당의 공식 대변기구로 출발하였다(Chu, 2010: 35-36).

50) 「流行性感冒猖獗 國産成藥大畅銷 經銷商現貨銷通新貨將趕來」, 『大公報』, 1968년 7월 26일; 「流行性感冒藥 國産貨近日搶手」, 『大公報』, 1968년 7월 27일. 감모편, 은교해독편, 서령해독편, 우황해독편, 상국음편, 연교해독편, 영교해독편 등 독감 예방에 일정한 약효를 갖춘 국산 매약이 수입되며 일부 제품의 품귀현상까지 나타났다.

51) 「感冒者佳音 新成藥感冒丹應時抵港適應目前流行感冒各症」, 『大公報』, 1968년 7월 26일; 「通宣理肺片治感冒咳嗽」, 『大公報』, 1968년 7월 27일.

52) 중국에서 수출한 중의 매약은 “고금 명의의 진단과 결론에 근거한 처방으로 명산지의 약재를 선별해 사용하고, 과학적 방법을 이용해 제련과 배합을 통해 제조”하였으며, 복용이 쉽도록 환(丸), 편(片), 설탕코팅편(糖衣片), 캡슐제(膠囊劑), 결정제(結晶劑), 농축액(膏滋藥), 구복액(口腹液)으로 되어 있으며, 치료효과가 현저하고 적용 범위가 넓다고 선전되었다. 수백 종의 중국 매약을 열람이 편하도록 과목을 나누어 수록한 책자(1977년 발간)에서는 ‘상풍감모(傷風感冒)’에 효과적인 고방(古方)과 역대 명의와 민간 경험방(經驗方)에 바탕해 만들어진 여러 가지 매약에 관해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1968년 홍콩 인플루엔자 유행시 인기를 끈 감모편, 은교해독편, 서령해독편, 감모단, 은교단, 상국음편 등 여러 매약에 관한 정보도 확인할 수 있다(德信行有限公司代理, 1977: 前言, 139-160).

53) 「流行感冒猖獗熟藥異常暢銷 蓮篷 乾冬瓜仁 連翹 價均扳高」, 『大公報』, 1968년 7월 29일.

54) HKRS410-10-13, (70)-1 Petition to H.E. the Governer in the matter of the Pharmacy and Poisons Bill 1966: Letter dated 10th June 1966, from the H.K. Chinese Patent Medicine Manufacturers’ Assn., Ltd. 이와 같은 숫자는 다수 과장된 수치로 보이나, 중의계 측에서도 역시 중약방(Chinese herb shops)은 2천 곳이 넘으며, 그곳에 고용된 사람들과 중의사 숫자가 1만 명 이상이라고 이야기했다(HKRS410-10-13, (72) English Summary of (71) Letter dated 5.7.66 from the Chairman, Society of Practitioners of Chinese Medicine in Kowloon re: the Pharmacy and Poisons Bill 1966).

그림 1.
사회주의 계획경제 시기 중화인민공화국 생산품 수출 흐름도
Figure 1. Export Flowchart: Products of China under Socialist Planned Economy
kjmh-33-1-191f1.jpg

참고문헌 REFER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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