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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J Med Hist > Volume 32(1); 2023 > Article
콘택트렌즈에서 ‘드림렌즈’까지 - 시력교정기술의 문화사†

Abstract

This paper traces how medical technologies to correct vision were introduced and changed in Korean society until the introduction of Orthokeratology called ‘Dream Lens’ in the late 1990s. First of all, I outlines the historical background of the introduction and spread of the relatively unfamiliar and expensive Orthokeratology, which is said to “cure” myopia and astigmatism by pressing the cornea. ‘Dream Lens’, a ‘lens for correcting corneal refractive error’, was a popular vision correction technology in terms of its name, treatment method, and effect. Not only was it introduced with a name similar to contact lens used instead of glasses from decades ago, but the way it was attached to and removed from the cornea was also similar. On the other hand, the public was already familiar with the principle of correcting the refractive index by pressing the cornea and improving visual acuity in the long term, just like LASIK which became popular in the mid-1990s. The use of contact lens which was similar in terms of the name ‘lens’ and the effect of ‘correcting vision’, and the trend of LASIK which was similar in principle of controlling corneal refraction, was a historical stage that helped soft landing of orthokeratology. However, from contact lens, vision correction technology did not settle down without any conflict. There was a conflict between medical experts traditionally responsible for optometry and production of spectacles and lens, and opticians who were newly in charge of that area. Ophthalmologists who have been in charge of optometry and prescriptions for a long time had no choice but to hand over some of the inspection areas to opticians due to the rapidly increasing number of opticians and the implementation of the optician system in 1989. And they had no choice but to watch the expansion of the business of opticians who manufactured glasses based on their own vision tests and sold them together with contact lens. Instead, corneal resection, which is not a technique for correcting visual acuity due to corneal refractive error, but a surgical technique for treating the corneal refractive error itself, has become an ophthalmologist's unique task. In addition, Dream Lens, which corrects corneal refractive error using a similar principle, has also become an object of professional medical practice because it required more precise examination and treatment than eyeglasses or contact lenses. By understanding the process by which vision correction technologies, from contact lens to dream lens, have been introduced into Korean society over the past few decades, this paper gives a new understanding how different medical technologies with the same or similar purposes are settling down, and the tension between experts in charge of them.

1. 들어가며

저녁 10시 30분.
세척액 한 방울을 렌즈에 떨어뜨려 20회 정도 부드럽게 문지른 후, 생수로 5분 동안 깨끗하게 세척한다.
아이의 눈에 렌즈를 착용한 뒤 잠자리에 든다.
다음날 오전 7시 30분.
아이의 눈에서 렌즈를 빼고 전날 저녁과 똑같은 방식으로 세척한다.
보존액에 넣어 저녁 착용 전까지 보존한다.
일주일에 하루 단백질 제거제에 1시간 정도 넣어 두었다가 깨끗하게 세척한다.
드림렌즈를 착용하는 어린아이 혹은 그 부모라면 매일 겪는 일상이다. 일주일에 하루 정도는 렌즈를 착용하지 않아도 무방하지만, 이런 일상은 보통 수년 동안 반복된다. 가끔 렌즈가 깨지거나 분실되면, 한쪽 렌즈당 수십만 원을 지불하고 새로 맞춰야 한다. 파손, 분실되지 않아도 보통 3~4년이 지나면 새 렌즈로 교체할 것을 권유받는다. 수년 동안 렌즈를 착용한 이후에는 안경이나 콘택트렌즈를 다시 이용할 수도 있다. 성인도 사용할 수 있지만, 보통은 안구가 급격하게 커져 근시가 빠르게 진행되는 성장기 어린이들이 많이 이용한다. 이 시기에는 안경을 쓰더라도 시력이 나빠지는 것 자체를 막기 어려울 수도 있고 그렇다면 더 높은 도수의 안경으로 계속 바꿔야 하는데, 드림렌즈는 수년 동안 일정한 시력을 계속 유지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 때문이다. 성장기가 지나고 더이상 근시가 심각하게 진행되지 않을 것으로 판단되면, 안경을 쓰거나 라식, 라섹을 받게 된다.
드림렌즈의 정식 명칭은 Orthokeratological lens(줄여서 Ortho-K lens)이며 각막굴절교정렌즈, 각막교정렌즈 등으로 부르거나 간단히 OK 렌즈라고도 한다.1) 각막굴절교정술(Orthokeratology)은 라식이나 라섹처럼 각막을 깎아서 시력을 회복하는 수술(각막절제술)보다 훨씬 간단한데, 특수 제작된 콘택트 렌즈로 각막의 중심을 눌러주어 일시적으로 근시와 난시를 교정한다. 드림렌즈의 원리 즉 각막 자체에 힘을 가해 시력을 교정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는 1950년대부터 알려지기 시작했고, ‘초점굴절교정’(orthofocus)이라는 용어로 학술논문이 제출된 것은 1962년이었다. 이후 각막굴절교정술이라는 이름으로 정착되면서 렌즈의 디자인과 재질, 제작기술이 꾸준하게 발전해 왔다(최진석, 2017: 672-674).
우리나라에 OK 렌즈가 들어온 것은 1990년대 초반이었다. 시력을 교정하기 위해 예전부터 사용되어 온 안경 외에 1950년대 후반 새로운 기술인 콘택트렌즈가 국내에 소개되었고, 1970년대 후반부터는 수술적 요법이 도입되었다. 방사상각막절개술과 엑시머레이저 수술 그리고 우리에게 익숙한 라식 등이 순차적으로 소개되었고, 1990년대 초 각막 곡선을 완만하게 눌러주어 시력을 회복하는 ‘치료’할 수 있다는 OK 렌즈가 들어온 것이다.2) 그리고 수년 뒤 ‘드림렌즈’라는 별칭으로 3세대 OK 렌즈가 소개되었다. 초창기 1, 2세대 OK 렌즈를 착용했을 때 간간이 생겼던 각막저산소증이나 각막염 등의 부작용을 줄이고, 안구 마사지 기능을 강화한 신제품이었다. 이때 드림렌즈는 특히나 근시가 계속 진행 중이라 라식을 받을 수 없는 ‘20세 이하의 학생이나 어린이’에게 더 유용할 것으로 묘사되었다.3) 2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비슷한 연령대의 어린이에게 특히나 도움이 된다고 소개되고 있다.4)
안경 이래 다양한 시력교정기술에 대한 인문학적 연구는 찾기 어렵다. 그렇지만 최근 들어 의료현장에서 검사, 진단, 치료하는 데 사용되는 여러 의료기술에 관한 연구가 발표되었고, 이들 연구를 바탕으로 시력교정기술의 역사 및 최신 각막굴절교정술의 도입 과정을 이해할 틀을 고민할 수 있다. 이들은 1950~60년대 대뇌반구적출술이나 1970년대 이후 유전자 산전진단기술, 복강경, 체외수정, 갑상선암 초음파기기 등의 의료기술이 도입, 확산되는 과정에서 한국적 맥락에 맞게 변용되는 모습과 그 기술을 둘러싼 다양한 행위자들의 긴장 관계, 그리고 그 기술의 사회적 효과 등을 다루었다. 구체적으로는 의료기술을 둘러싼 전문가 내부의 갈등부터 전문가와 일반인(기술의 대상이 되는 환자, 보호자 혹은 소비자) 사이의 이견, 정부 정책과의 관계, 관련된 담론의 변화까지 의료기술의 역사를 다양한 시각에서 분석했다(박지영 외, 2011; 김희원, 2016; 정세권, 2020; 박승만, 2021; 최은경, 2022).5)
본 논문은 1950년대 콘택트렌즈부터 ‘드림렌즈’로 불리는 각막굴절교정술이 1990년대 후반에 소개될 때까지 안경 이후 시력을 교정하는 새로운 의료기술이 한국 사회에서 어떻게 도입, 변해왔는지를 신문 기사 및 관련 자료를 통해 추적한다.6) 동일한 효과를 가지고 있는 안경이라는 기술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대신하거나 혹은 경쟁할 수 있는 새로운 기술로서 콘택트렌즈, 엑시머레이저술과 라식, 드림렌즈가 한국 사회에 들어오는 과정을 살핀다. 오래된 기술이 여전히 사용되고 있는데도 명칭과 원리는 다르면서 효과는 같은 새로운 의료기술이 어떻게 한국 사회에 받아들여지고, 이를 둘러싼 다양한 행위자들의 갈등을 분석하는 것이다.7) 우선 각막을 눌러 근시와 난시를 ‘치료’한다는 비교적 낯설고 값비싼 각막굴절교정술이 큰 거부감 없이 도입, 확산된 역사적 배경을 개괄한다. 이를 통해 ‘렌즈’라는 명칭과 ‘시력 교정’이라는 효과라는 측면에서 예전부터 사용되었던 콘택트렌즈의 익숙함 그리고 각막의 굴절을 조절한다는 원리가 흡사했던 각막절제술의 유행이 각막굴절교정술의 정착을 도운 역사적 무대였음을 보일 것이다. 그렇지만 콘택트렌즈부터 시력교정기술이 아무런 갈등 없이 정착한 것은 아니었는데, 전통적으로 검안과 안경 및 렌즈 제작을 책임졌던 의학 전문가와 그 영역의 일부를 새롭게 담당하게 된 안경사 사이의 갈등과 타협이 오늘날 각막굴절교정술 시행에 투영되어 있음을 보일 것이다. 이를 통해 본 논문은 다양한 명칭과 원리를 지닌 시력교정기술이 도입되고 정착하는 과정을 이해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할 것이다.

2. 시력교정기술의 略史: 콘택트렌즈, 라식, 그리고 드림렌즈

1990년대 후반 도입된 각막굴절교정술은 그 당시에도 백만 원에 가까운 값비싼 기술이었다. 시력 저하나 난시가 심각한 질환도 아니고 다른 시력교정기술도 있었는데, 이렇게 값비싸고 낯선 기술이 쉽게 도입되고 정착하게 된 과정은 어떠했을까? 이는 전통적인 시력교정기술인 안경을 대신하거나 경쟁할 새로운 기술들이 소개되고 도입되는 과정을 통해 알 수 있다.
시력을 교정하는 기구 중 하나인 콘택트렌즈가 우리나라에 도입된 것은 1950년대 후반이었다. ‘공안과’ 원장으로 유명했던 공병우가 1958년 미국으로부터 콘택트렌즈를 도입했는데, 처음에는 외국에서 주문해서 사용했지만 몇 년 뒤 자체적으로 렌즈를 제작할 수 있는 연구소를 세워 국산 제작에 성공했다.8) 당시 콘택트렌즈는 “직경이 90미리 내외, 두께가 2미리, 무게가 14그람”의 플라스틱에 “임의로 도수를 넣어서 각자의 눈에 꼭 맞게” 제작되었다.9) 콘택트렌즈에 대한 문의에 답하면서 공병우는 당시 이 렌즈를 사용하고 있는 사람이 약 70명이며, 처음부터 온전히 혼자 사용할 수 없기에 3~4일 동안 연습을 해야 하고 주기적으로 병원에 와서 검사를 받아야 한다고 적었다.10) 근시나 난시를 교정할 수 있는 안경이 있는데도 굳이 새롭게 콘택트렌즈가 주목받은 이유는 “안경을 쓰기 싫어하는 여성들과 안경의 불편을 느끼는 남녀 배우,” 군인과 운동선수 그리고 “부인들이 부엌에서 일할 때 안경에 김이 서려서 잘 보이지 않을 때”나 추운 곳에서 더운 방으로 들어갔을 때 잘 보이지 않는 불편함 등이 제시되었다. 시력을 교정하는 효용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안경을 썼을 때의 불편함이 없다는 것이 콘택트렌즈의 가장 큰 장점이었던 것이다.11)
초창기 콘택트렌즈를 끼기 위해서는 안과전문의로부터 검안을 받아 시력뿐 아니라 안질환 여부를 확인받고, 각막의 곡률까지 정밀하게 측정해야 했다. 그리고 작성된 검안표를 렌즈 제작 기술자에게 전달하여, 각막의 곡률과 두께를 정확하게 세공한 제품을 받아 착용했다. 12) 안과와 연계되어 렌즈 제작을 전담하는 별도의 연구소들이 있었는데, 1960년부터 이런 연구소는 자체적으로 신문광고를 내고 안경과 대비되는 콘택트렌즈의 효용을 대대적으로 홍보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콘택트렌즈가 도입된 지 10여 년이 지난 1969년에 그 착용자는 10만여 명에 다다랐다.13) 중간중간 잘못 착용하거나 관리해서 부작용을 겪었다는 기사도 심심찮게 등장하기는 했다. 완전히 시력을 잃거나 안구에 영구적인 상처가 남았다는 조사 결과가 보도되었고, 콘택트렌즈로 인해 세균성 결막염이나 각막염을 유발될 수 있다는 경고도 이어졌다.14) 때문에 한때는 인기가 있었으나 “안경보다 월등히 편리하지 못”하다는 평가도 있었다.15)
그렇지만 성능이 개선된 새로운 제품들이 연달아 출시되면서 콘택트렌즈는 그 수명을 이어갔다. 예전 딱딱한 플라스틱 재질은 수분을 포함하지 않아 어쩔 수 없이 이물감이 크고 눈물이 나며 눈이 충혈되는 단점이 있었다. 이런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사람의 피부처럼 부드러운 플라스틱으로 제작된 콘택트렌즈가 1969년 개발되었고, 고무처럼 훨씬 더 탄력성이 좋고 수분을 더 많이 함유하고 있어 착용감이 뛰어나다고 알려졌다. 몇 년 뒤 서독의 렌즈 제작회사에서 눈물을 흡수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두 손가락으로 접거나 추잉껌처럼 늘어나도 곧 원형을 되찾을” 정도로 뛰어난 제품을 개발했다고 전해졌다.16) 과거 딱딱한 재질과 비교하여 ‘소프트렌즈’라고 불린 이들 콘택트렌즈는 소독하기가 까다롭고 가격이 비싼 흠은 있지만, 훨씬 더 편하게 그리고 오랜 시간 동안 착용할 수 있는 장점이 강조되었다.17) 이제 콘택트렌즈는 단순히 안경의 불편함을 대신하는 대체재로서가 아니라, 그 자체의 부작용을 줄이고 종래의 것보다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기술로 홍보되었다. 이는 1970년대 중반 ‘국제콘택트소프트렌즈’, ‘한일콘택트렌즈’, ‘세브란스안경콘택트’, ‘보광당 콘택트렌즈’, ‘한국소프트렌즈’ 등 콘택트렌즈 제작소의 신문광고에 그대로 투영되었다.
1970년대 후반이 되면 안경이나 콘택트렌즈로 시력을 교정하는 것을 넘어, 수술적 요법으로 시력을 높이는 기술들이 소개되기 시작했다. 이 기술들은 안경이나 콘택트렌즈를 착용하여 일시적으로 시력 교정 효과를 얻는 것보다 더 장기적으로 시력을 개선할 수 있었다. 그중 첫 번째는 1979년 미국안과학회와 국제각막굴절학회에 참석한 가톨릭의대 이상욱 교수의 말을 빌어 소개된 ‘각막표층절개술’이라는 방법이었다. 우연히 각막에 상처를 입어 각막이 변형된 환자가 시력을 회복한 사례를 바탕으로 미국과 소련의 안과의사들이 개발한 이 시술은, 각막을 절개하여 인공적인 변화를 줌으로써 각막의 굴절율을 조절하고 시력을 높이는 방법이었다.18) 실제로 1982년부터 강남성모병원 김재호 교수팀에서 이 수술법을 시행했는데, 1982년 2월부터 9월까지 11명을 대상으로 시술한 결과, 중도 근시환자는 모두 시력이 개선되었고 고도 근시환자 중 20% 사례에서 시력이 나아졌다고 밝혔다. 그리고 수술을 받은 11명이 그 결과에 만족했다(김재호, 1983). 이들을 포함하여 1984년까지 강남성모안과에서는 130여 명의 근시 환자가 수술을 받았는데, 그중 90% 정도가 수술 결과에 만족했다고 전해졌다.19)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각막을 직접 절개하고 그 부위가 아물면서 굴절율이 바뀌는 시술(방사상각막절개술, Radial keratotomy)과 달리, “엑시머레이저”라는 의료장비를 이용하여 원하는 만큼 각막을 절제하여 시력을 개선하는 기술이 소개되었다. 1988년 강동성모병원에서 처음 도입한 이 의료장비는 뜨거운 열로 태우는 것이 아니라 각막의 분자결합을 분쇄하여 절제하는 방식이었다.20) 방사상각막절개술보다 더 정교하고 더 나은 효과를 얻을 수 있는 엑시머레이저 수술은 특히나 중등도 이하의 근시의 시력을 교정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알려졌다. 그렇지만 이 수술은 각막상피를 벗겨내기 때문에 상처가 아무는 데 시간이 걸리고 그동안 일상생활의 불편이나 통증을 참아야 하는 불편함도 있었다(한국보건의료연구원, 2011: 3). 이런 단점을 줄이면서도 고도 근시 환자에게도 적용할 수 있는 수술법이 라식(LASIK)이었다. 엑시머레이저 수술이 유행한 지 몇 년 뒤에 바로 소개된 라식은 각막의 윗부분을 얇게 잘라 절편을 만들고 남은 각막을 원하는 만큼 엑시머레이저로 절제하는 방법이었는데, 예전 엑시머레이저 수술로는 충분히 효과를 거둘 수 없었던 고도 근시 환자들에게 그 효과가 높다고 알려졌다(한국보건의료연구원, 2011: 4). 라식은 수술 시간이 조금 더 오래 걸렸고 비용이 두 배 정도 비싼 단점이 있었지만, 눈부심이나 눈물이 나는 증상은 덜했고, 안대를 착용할 필요가 없었으며, 시력이 회복되는 시간도 더 빨랐다.21)
안경이나 콘택트렌즈처럼 착용했을 때에만 시력이 교정되는 기술이 아니라, 수술을 통해 장기간 시력 교정 효과를 볼 수 있는 방사상각막절개술, 엑시머레이저술, 라식은 1990년대 후반 대대적인 인기를 끌었다.
안경을 벗어 던져라. 최근 근시교정수술을 받아 안경이나 콘택트렌즈를 벗는 사람들이 크게 늘어나고 있다. 특히 20~30대 젊은 여성들 사이에서 ‘유행’이라고 할만큼 인기가 높다. 근시교정수술은 최근 2~3년새 1만 5천여건이 시술된 것으로 추정된다. 불편한 안경과 콘택트렌즈를 벗을 수 있다는 장점 덕분에 이 수술은 계속 확산되고 있다.22)
입시를 앞둔 수험생이나 스튜어디스, 운동선수, 미혼 여성들처럼 “안경을 벗고 싶으신” 사람들을 대상으로 근시교정수술을 설명하는 단행본이 출판되었고, 당시 대단한 인기를 끌었던 여자 연예인과 국가대표 운동선수들도 라식을 받았다는 기사가 연일 보도되었다. 몇몇 일간지는 몇 주에 걸쳐 전국에서 엑시머레이저술, 라식이 가능한 병원의 명단을 소개할 정도였다.23)
추후에 성인남녀 10,000명을 선별하여 근시교정수술 경험 여부 및 만족도 등을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엑시머레이저 수술이나 라식을 받은 환자(302명)의 수술 후 만족도는 10점 만점 기준으로 평균 8.52점이었으며, 특히 10점이라고 대답한 비율도 39%에 달할 정도로 높았다. 또한 다른 사람에게 이 수술을 추천할 것인지를 묻는 추천지수도 평균 7.98점이었고, 35.76%의 응답자는 10점을 부여했다(한국보건의료연구원, 2011: 111-120). 이런 긍정적인 평가는 수술 이후 시력이 교정된 사례가 평균 89%라는 다른 조사 결과와 상응하는 것이었다(박근성, 심완섭, 1997).24)
이처럼 엑시머레이저술이나 라식을 통한 근시 교정이 각광을 받고 있을 즈음 OK 렌즈 즉 각막굴절교정술이 국내에 소개되었다. 1993년 8월부터 6개월 동안 근시환자를 대상으로 특수하드렌즈 일명 OK 렌즈를 시험한 안과전문의 김용란은 평균 1.73 디옵터의 시력 향상 효과를 봤다고 밝혔다. 각막 중심부를 누르고 주변부를 올려 주도록 고안된 이 렌즈는 가벼운 근시나 난시를 가진 환자를 대상으로 효과를 더 볼 수 있다고 알려졌다. 교정 효과가 엑시머레이저술이나 라식에 비해 떨어지기는 하지만, 근시가 진행 중인 학생들에게 이를 방지하는 효과가 있으며 무엇보다 수술이 필요 없다는 측면에서 주목받았다.25) 그리고 1993년에 처음 소개되고 1995년 말 전국 50여 곳에서 시술되던 OK 렌즈는 1998년 미국 FDA의 승인을 받은 제3세대 렌즈 즉 ‘드림렌즈’가 들어오면서 더욱 인기를 끌었다.26)
당시 드림렌즈를 소개한 안과전문의는 “일반렌즈와 라식수술의 중간 정도로 보면 된다”고 언급했다. 이는 그동안 널리 사용되던 콘택트렌즈와 이름이 유사하기에, 각막절제술과 같은 “수술에 대한 부작용을 염려하는 사람”을 안심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하루 정도만 밤에 렌즈를 끼고 자면 1~10일 정도 시력이 개선된다”면서 콘택트렌즈보다는 더 뛰어난 효과를 강조했다.
그는 약한 근시나 난시 환자는 앞으로 더 좋은 근시교정방법이 나올 때까지 임시적으로 사용이 가능할 것이면서 밤에만 착용하면 돼 일반 렌즈를 끼는 것보다 편리하고 부작용도 적다고 강조했다.27)
1990년대 후반 국내에 도입된 각막굴절교정술은 OK 렌즈 혹은 드림렌즈라는 이름으로 더 널리 소개되었다. 가령 “드림렌즈는 꿈의 렌즈?”, “잘 때 끼는 드림렌즈 OK”, “자고 나면 딴 세상”처럼 홍보되었는데, 이런 용어의 사용은 한편으로는 수십 년 전부터 사용되어 온 콘택트렌즈의 익숙함에 기댄 것이었다. 각막굴절교정술이라는 이름에서 상상되는 수술적 요법이 아니라 콘택트렌즈처럼 간단하게 착용하고 뺄 수 있다고 소개됨으로써, 수술적 방식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나 거부감이 상쇄되었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당시 유행했던 엑시머레이저술이나 라식처럼 각막의 굴절률 자체를 바꿔주어 제법 오랫동안 시력 개선 효과를 볼 수 있고 나아가 성장기 어린이의 근시 진행을 막아준다는 측면에서 콘택트렌즈보다는 나은 시력교정기술이었다.28)
2000년대 내내 드림렌즈는 특히나 성장기 어린이를 위한 시력교정기술로 긍정적으로 묘사되었다. 오남용으로 인한 부작용을 우려하면서도 학부모들 사이에서 인기를 끈다는 뉴스가 보도되었고, 신문에서는 안경의 불편함, 미용 목적, 가격 대비 시력 개선 효과 등을 언급하는 학부모의 인터뷰를 직접 싣기도 했다.29) 드림렌즈의 효용을 강조하는 안과전문의의 신문 칼럼도 이어졌다. 안과에서 드림렌즈를 얼마나 처방하는지 혹은 드림렌즈 시장이 어떠한지 확인할 수 있는 통계자료는 없지만, 2007년과 2008년 안과전문의를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는 드림렌즈의 인기가 일회성으로 끝나지는 않으리라는 것을 짐작하게 했다. 드림렌즈가 도입된 지 10여 년이 지난 시점에 실시된 이 설문조사에 따르면, 조사에 참여한 안과전문의 중 80%가 드림렌즈를 처방하고 있었고, 향후 전망에 대해서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근시의 진행을 억제하는 드림렌즈의 효과에 대해서는 59.7%가, 라식과 같은 시력교정수술을 대체할 가능성에 대해서는 89.3%가 긍정적으로 답변했던 것이다(박신혜 외, 2009). 다른 조사에 따르면 근시 진단을 받은 후 드림렌즈를 착용 전후로 근시 진행 정도가 –1.1D/year에서 –0.3D/year로 완화되고, 난시의 진행도 억제한다고 알려지기도 했다(이원희 외, 2011: 정호길 외, 2019). 안과전문의들의 호의적인 평가, 그리고 익숙한 명칭이었지만 효과는 더욱 뛰어난 것으로 소개된 ‘드림렌즈’는 이렇게 한국 사회에 정착했다.
1950년대 후반에 도입된 콘택트렌즈는 기존에 사용되던 안경과 같은 효과를 지니면서도 안경의 불편함을 극복할 수 있는 기술로 소개되었다. 그렇지만 각막에 직접 닿는 콘택트렌즈의 부작용 그리고 장기적으로 시력을 교정할 수 있는 수술적 기법의 장점이 알려지면서, 1990년대 초반부터 엑시머레이저 수술이나 라식이 인기를 끌었다. 이런 수술적 기법은 그 장점에도 불구하고 안구가 커지고 근시가 계속 진행되는 성장기 어린이에게는 적극적으로 권유될 수 없었는데, 이런 곤란함을 해결할 수 있는 기술로서 OK 렌즈가 1990년대 후반 도입되었다. 이처럼 오래된 기술인 안경이 계속 사용되는 가운데서도, 이를 대신하거나 경쟁할 수 있는 새로운 기술들이 고유한 장단점을 지니고 순차적으로 자리잡았다.

3. 시력교정기술을 둘러싼 갈등: 안과전문의 vs. 안경사

1950년대 말 콘택트렌즈부터 1990년대 드림렌즈까지 각각의 시력교정기술이 순차적으로 도입되는 과정 자체가 아무런 갈등 없이 진행된 것은 아니었다. 검안부터 안경과 렌즈의 제작과 판매, 수술까지 시력을 교정하기 위한 전 과정의 각 단계를 누가 관할할 것인지를 둘러싼 갈등이 있었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콘택트렌즈가 도입되었던 초창기 누가 시력검사를 하고 렌즈를 제작, 판매할 것인가가 논란이 되었다. 당시 콘택트렌즈는 「약사법」 제2조 제9항에서 규정한 ‘의료용구’였기에 아무나 함부로 취급할 수 없었다.30) 실제로 1970년 무허가로 제조된 콘택트렌즈를 전국 안과병원에 판매한 메이커 대표 4인이 입건된 사건도 있었다.31) 심지어 1975년 보건사회부는 콘택트렌즈를 만들어 고객의 눈에 끼워주는 행위 자체를 ‘의료행위’로 규정, 허가 없이 이런 행위를 한 사람들을 「의료법」 위반으로 고발하기도 했다. 당시 「의료법」에 따르면 의료행위를 할 수 있는 의료인은 의사, 치과의사, 한의사, 조산원, 간호원 등 면허를 받은 사람이었고,32) 도지사가 자격을 인정한 간호보조원과 종전 규정에 의해 자격을 인정받은 의료유사업자(접골사, 침사, 구사)도 의료 업무를 보조하거나 시술 행위를 할 수 있었다.33) 이에 따르면 의료행위로서 콘택트렌즈를 고객에서 “끼우는” 것은 「의료법」상 의료인에 해당되는 안과의사의 영역이었으며, 아무리 안과의사의 처방에 따라 만들었다고 하더라도 콘택트렌즈 제작소라는 간판 아래 비의료인이 이를 끼워주는 것은 불법인 셈이었다. 34)
비의료인이 렌즈를 불법으로 끼워 발생한 사건 사고와는 별개로, 콘택트렌즈를 무분별하게 제작하고 사용하는 것이 시력을 교정하는 데 방해가 될 뿐만 아니라 부작용을 낳을 수 있다는 우려가 더해졌다. 사실 이런 걱정은 안경에 대해서도 이미 제기되고 있었는데, 1970년 대한안과학회에서 준비한 제16회 ‘눈의 날’ 행사 표어가 “올바른 검안으로 정확한 안경을 쓰자”였을 정도였다. 안경을 맞출 때 안과전문의로부터 정확한 검안을 하지 않고 안경점에서 간단한 검사를 받은 후 안경을 제작하면 부정확할 뿐 아니라, 그렇게 되면 눈이 충혈되고 두통이 생기며 어지러운 증상이 나타날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35) 신문에는 전문의의 진찰을 받아서 눈의 생리와 굴절상태에 맞는 정확한 도수를 처방받아 안경을 만들어야 한다는 전문의의 칼럼이 자주 실렸다. 특히나 눈의 조절 근육이 수축하고 긴장해서 나타나는 ‘가성근시’의 경우, 무턱대고 안경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안과에서 조절마비제를 점안하고 긴장을 풀어서 자세히 검사를 받아 확인해야 한다는 전문의의 조언도 실렸다.36) 정확하게 눈의 상태를 점검하고 가성근시 여부를 판단하거나 굴절상태를 확인하여 안경을 맞추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어린이의 경우 눈에 일시적으로 조절 경련이 생겨 일어나는 가성근시일 수도 있는데 가성근시는 약물로 치료할 수 있다. 이때 무조건 안경을 씌우게 되면 진짜 근시가 되어 버린다. 안경이 필요해지면 전문의의 처방에 따라 렌즈의 정밀도 등이 신용있는 안경점에서 마춘 후 전문의에게 다시 찾아가 시력과 안경을 체크받아야 한다.37)
그렇지만 1976년 대한안경인협회가 창립될 정도로 안경 판매점이 대폭 늘어나면서 안경을 맞추기 위해 안과전문의를 반드시 거치는 것은 일종의 번거로움으로 여겨졌고, 그 부작용을 우려하는 전문의의 우려도 지속되었다.38)
비의료인에 의해 시력교정기술이 함부로 사용된다는 걱정은 콘택트렌즈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과거 하드렌즈에 비해 낫다고는 하지만 콘택트렌즈 자체가 갖는 부작용 즉 이물감, 충혈, 불편함에 더해서 각막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더욱 구체적인 위험이 제기되었다. 각막에 산소가 공급되지 않거나 미생물에 감염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5년 이상 사용하면 각막 이상이 생길 수 있다거나 각막이 굳어져 촉각을 둔화시킬 수 있다는 외신 보도가 이어졌다.39) 이런 증상이 계속되면 실명에 이를 수도 있기 때문에 무턱대고 안약을 사서 넣을 것이 아니라, 안과전문의에 보여야 한다는 충고가 뒤따랐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이렇게 위험할 수도 있는 콘택트렌즈를 안과의사의 처방 없이 마음대로 구입하는 것이었다. 콘택트렌즈 자체의 부작용이나 “환자의 부주의도 문제”이지만 “국내 콘택트렌즈의 제조과정과 아무데서나 콘택트렌즈를 구입할 수 있는 상황이 더 큰 문제”라는 것이었다.40) 여전히 현행법상 콘택트렌즈는 의사 면허소지자만 취급하도록 되어 있었지만, 콘택트렌즈를 판매하는 서울 시내 안경점 가운데 안과 검진을 할 수 있는 간이의원을 개설한 곳이 10~20곳에 불과하다는 보도는 이런 불합리하고 위험한 상황을 대변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심지어 변두리의 안경점은 간단한 시력 검사만으로 콘택트렌즈 도수를 맞춰 판매하기도 했다.41) 게다가 밤에 끼고 잘 수 있거나 한 달을 계속 끼어도 부작용이 없다는 새로운 렌즈들이 계속 소개되면서,42) 그렇지 않아도 각종 눈질환과 부작용이 우려되던 차에, 안과전문의의 감독을 벗어난 콘택트렌즈는 더 위험한 기술이었다.
서울 시내 초등학교 학생 중 굴절이상을 겪는 아이가 전체 47%에 달한다는 조사 결과나 중고생 중 63%, 대학생 중 80%가 이상 시력이라는 통계는43) 그만큼 시력교정기술인 안경이나 콘택트렌즈의 수요가 증가하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시계점포나 귀금속상에서도 한켠에 안경을 두고 무분별하게 판매하는 현실은 시력 교정은커녕 부작용을 더할 뿐이었기에, 안과전문의가 보기에 안경과 콘택트렌즈는 의료인이 처방하고 관할해야 할 의료기구였다.
안경은 일종의 의료기구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안경을 마출 때는 안과에 가서 정확한 안과적 검사를 받은 후 안경 처방에 따라 지정된 안경점에서 맞춰야 하는 것이 사실이다.44)
안경인협회에서 전체 안경 상인의 일부인 가입 회원을 대상으로 기술향상을 위해 교육을 하고 있고 그런 회원증을 가진 안경점은 그나마 믿을 수 있겠지만, 외국처럼 검안사가 없는 현실에서 안과전문의의 처방이 더욱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안경이나 콘택트렌즈를 누가 취급할 것인가의 문제는 1987년 안경사 제도가 시행되면서 더욱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안경사 국가면허제도가 도입되기 전에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안경이나 콘택트렌즈는 의료용구였고 이를 위해 검사, 처방하는 것은 의사의 몫이었다. 안경점은 「약사법」 제42조 제1항에 근거하여 시장, 군수나 구청장에게 판매업으로 등록하고 “판매”만 할 수 있었다.45) 「의료법」상 의료인이 아니었고 1973년에 제정된 「의료기사법」에 의해서도 의화학적 검사를 할 수 없었던46) 안경상인은 당시 안경을 제작하고 팔기 위해 암묵적으로 불법적인 시력 검사를 하고 있던 셈이었다. 안경 쓰는 인구가 늘면서 전국의 안경점은, 당시 대한안경인협회에 따르면, 회원점 1,563개를 포함 3천여 곳에 달했다. 협회 회원점은 안경 제작기술을 높이기 위해 안과전문의들의 도움을 받아 통신교육을 실시하고 있었지만, 상당수 안경점은 마구잡이로 시력을 검사하고 안경을 만들어 팔았다. 이에 보건사회부는 「의료기사법」을 개정하여 1986년 3월 전문대학에 안경학과를 설치하고 국가시험으로 면허를 받는 안경사 제도를 실시하겠다고 발표했다.47) 그리고 이듬해 11월 18일 일부 개정된 「의료기사법」에는 기존 의료기사에 더하여 “시력 보정용 안경의 조제 및 판매를 주된 업무로 하는 자(이하 “眼鏡士”라 한다)”가 포함되었다.48) 그리고 동법 제13조의3에는 안경사가 되고자 하는 자는 “전문대학 이상의 학교에서 대통령령이 정하는 안경광학 분야의 학과를 전공하고 졸업한 자”나 “보건사회부 장관이 인정하는 외국의 안경사 면허를 받은 자”가 안경사국가시험에 합격하여 보건사회부 장관의 면허를 받아야 한다고 규정했다.49)
여기서 문제는 「의료기사법」 개정에 맞추어 1989년 4월 개정된 「의료기사법 시행령」에서 규정한 ‘안경사의 업무 범위’였다. 개정된 시행령에 따르면, 안경사는 “시력 보정용 안경의 조제(콘텍트렌즈의 조제를 제외한다) 및 판매 업무에 종사”할 수 있으며, “이 경우 기존 안경도수를 조정하기 위한 시력검사(약제를 사용하는 시력검사 및 보건사회부령이 정하는 시력검사를 제외한다)”를 할 수 있었다.50)
안경을 조제하고 판매하는 것을 안경사의 업무에 포함하는 데에는 안경사와 안과전문의 모두 이견이 없었지만, 안경을 조제하기 이전 시력검사를 어디까지 허용할 것인지가 쟁점이었다. 안경점에서 진행되는 시력검사는 대부분 한쪽 눈을 가린 상태에서 시력표를 보거나 컴퓨터에 한쪽 눈을 대고 선명하게 보이는 선과 그림을 맞추어 시력을 확인하는 방식이었다.51) 그리고 검사된 결과에 근접한 도수의 시험 렌즈을 번갈아 쓰면서 교정시력을 다시 확인하는데 이를 보통 ‘자각적 검사’라고 불렀다. 반면 안과에서는 자동굴절검사기를 비롯한 여러 기계를 이용하여 환자 각막의 굴절이상을 객관적으로 확인하거나 약제를 넣어 시력을 측정했는데, 이를 ‘타각적 검사’라고 불렀다. 1989년 시행령에서는 ‘보건사회부령이 정하는 시력검사’를 안경사 업무에서 제외했는데, 이에 대해 「의료기사법 시행규칙」 제1조의2 제2항에는 “굴절이상을 측정하기 위한 타각적 굴절검사”라고 명시했다.52) 자동굴절기기를 포함하여 기계를 사용한 굴절이상 검사는 모두 타각적 검사에 해당되기 때문에 1989년 시행령에 의하면 안경사는 이런 검사를 할 수 없었다.
이에 대해 안경사협회는 이미 관행적으로 안경점에서 컴퓨터나 자동굴절검사기를 이용하여 시력검사를 해오고 있기 때문에, 현실을 반영하여 시행령에 명문화하는 것이 당연하고 주장했다. 반면 안과전문의들은 굴절검사 자체가 환자의 눈 상태를 객관적으로 확인하는 일종의 의료행위이기 때문에 안경사에게 맡길 수 없다고 항의했다. 사람 눈의 구조와 기능은 절묘하기 때문에, 풍부한 의학 지식과 임상경험이 없으면 잘못된 안경 처방을 할 수 있으며, 자동굴절검사기에서 나오는 수치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대한안과학회 김재호 이사장은 언론 인터뷰에서 “가성근시를 잘못 판정하거나 각막염, 홍체이상, 백내장 등의 질병을 고려하지 않은 채 시력을 측정, 시력 건강을 악화시킬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굴절검안은 전문의가 현재처럼 전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53)
1989년 「의료기사법 시행령」 개정을 두고 일었던 논란은 일단 안과전문의의 손을 들어주는 방향으로 결론 났지만, 1990년 개정된 시행령에는 자동굴절검사기를 이용하는 굴절검사를 안경사에게 허용하는 방향으로 바뀌었다. 새롭게 시행령을 개정하는 배경에 대해 보건사회부는 “거의 모든 안경점에서 자동굴절검사기기를 사실상 사용하고 있으며”, “안경조제를 위한 예비적 정보를 얻기 위해 사용하는 것은 가능하다는 유권해석도 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안과 시술을 위한 검사는 아니더라도 눈의 굴절 각도에 대한 기초 정보를 얻어 안경 제조에 참고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또한 보사부는 전국 상당수 시군에 안과의사가 없기 때문에 국민의 편의를 위해서라도 안경점에서 굴절검사를 할 수 있도록 허용할 필요가 있다고도 밝혔다. 이런 방침에 대해 대한안과학회와 대한의학협회는 각 일간지에 “국민들에게 드리는 호소문”이라는 광고를 내고, 보건사회부의 방침이 “국민의 시력을 위협하는 처사”라고 비판했다. 이에 대해 안경사협회는 ‘안과 치료나 수술에 의한 사고나 실명은 있어도 안경 착용에 따른 실명은 한번도 없었는데, 안과학회의 주장이 국민을 오도하는 것’이라며 반발했다.54) 1990년 8월 시행령이 개정된 이후에도 이 논란은 지속되었고 대한안과학회는 보건사회부 장관을 상대로 헌법소원까지 제기했지만, 1993년 11월 헌법재판소가 이 청구를 기각하면서 일단락되었다.55)
굴절검사만큼은 아니었지만 「의료기사법 시행령」을 개정하는 과정에서 논란이 된 또 다른 주제는 콘택트렌즈에 관한 것이었다. 시행령에는 콘택트렌즈의 제조에 대해서만 금지하고 있을 뿐 안경의 제조나 판매, 콘택트렌즈 판매는 허용했다.56) 이에 대해 대한안과학회는 의학적 교육을 받지 않은 안경사들에게 “콘택트렌즈 판매 및 굴절검사까지 합법적으로 허용할 때 발생하는 근시, 백내장, 및 망막염 등의 오진과 콘택트렌즈에 의한 각막 손상 등으로 발생하는 실명에 대한 책임은 누가 지겠느냐”면서 비판했다.57) 그리고 1992년 헌법소원을 제기할 당시에 콘택트렌즈 판매를 안경사에게만 허용하는 것에 대해서도, “안과 의사에 대하여서는 콘택트렌즈 장착 여부를 검진하는 의료행위에 당연히 수반되어야 하는 판매행위를 금지하고 있는바,” 이는 헌법 제11조의 평등권을 침해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58) 여기에 대해서도 헌법재판소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기각했다.
안과의사(眼科醫師)는 그들의 진료행위(診療行爲)에 병행(竝行)·수반(隨伴)하여 당연히 환자에게 콘택트렌즈를 장착(裝着)시킬 수 있는 것이며, 그러한 범위 내의 콘택트렌즈의 판매행위(販賣行爲)는 진료행위(診療行爲)에 포함되는 것이라 할 것이므로, 심판대상규정이 안경사(眼鏡士)의 독점적(獨占的)인 업무범위(業務範圍)에 콘택트렌즈의 판매행위(販賣行爲)를 포함시킴으로써 안과의사에 대하여 진료행위와 관련이 없는 콘택트렌즈만의 판매행위는 이를 금지하고 있다고 하여도 안과의사인 청구인의 평등권(平等權)이 불합리하고 자의적(恣意的)으로 침해되었다고 할 수 없다.59)
결국 1989년 안경사 제도가 도입되고 「의료기사법 시행령」이 개정되는 과정에서 안경 제작을 위한 굴절검사 중 일부는 안경사의 업무로 인정되었다. 그리고 법적으로는 안과전문의도 콘택트렌즈를 판매할 수는 있었으나, 현실에서는 대량생산된 콘택트렌즈를 대부분 안경점에서 판매했다. 전문적 자격을 갖춘 안경사 제도가 도입됨에 따라, 전통적인 시력 교정 분야에서 안과전문의가 전담했던 역할이 축소된 셈이었다.
그렇지만 안과전문의들은 콘택트렌즈 판매 문제 대신 올바른 사용을 지적하면서 전문가의 역할을 계속 강조했다. 다양한 콘택트렌즈가 시판되는 만큼 부작용도 끊임없이 소개되었는데,60) 안과전문의들은 이에 대해 경고하면서 전문가의 도움을 받으라고 조언했다. 정확한 검사 없이 콘택트렌즈를 구입, 착용할 때 안질환이 생길 가능성이 크며, 부작용이 없더라도 정기적인 안과 검진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61)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콘택트렌즈를 장착하는 것 자체는 여전히 의료행위인데, 안경사가 이를 불법으로 시행했을 때 실명이나 각막궤양과 같은 피해가 발생할 수 있다고도 비판했다.62)
1990년대 중후반이 되면 안과전문의들은 전문교육을 받고 자격시험을 통과했다고 하더라도 안경사가 담당할 수 없는 새로운 기술인 각막절제술을 도입했다. 엑시머레이저와 같은 고가의 의료장비를 이용하여63) 각막을 절개하거나 절제하는 것은 전문적인 의학지식과 훈련이 필요한 수술이었다. 안경이나 콘택트렌즈처럼 착용했을 때 일시적으로 효과를 보는 것이 아니라, “수술 한 번으로 다시는 안경이나 렌즈를 낄 필요가 없게 되는” 것이며, 따라서 의사의 숙련도가 성공 여부를 판가름하는 열쇠였다.64))
엑시머레이저, 라식이 대대적으로 유행할 즈음, 명칭이나 시술 방법에서 더 간단해 보이지만 각막의 굴절률을 조절한다는 원리는 똑같은 OK 렌즈가 소개되었다. 특히나 OK 렌즈는 각막절제술을 받을 수 없거나 그 효과가 크지 않은 경도 근시의 성장기 어린이에게 안성맞춤인 기술이었다. 그리고 어린아이의 경우 근육이 일시적으로 수축, 긴장하는 가성근시의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조절 마비제와 같은 약물검사 및 눈의 상태를 확인할 수 있는 정밀검사가 반드시 선행되어야 했다.65) 이런 검사는 안경사가 담당할 수 없는 전문적인 의료행위였다.
시력교정렌즈는 레이저수술과 마찬가지로 각막 형태를 변형시키는 굴절 교정술 원리를 이용한다. 따라서 병원에서 정밀 검사를 받은 뒤 처방받는 것이 바람직하다. 각막 형태나 안압, 각막염 검사 등을 통해 정확한 도수를 측정하고, 각막 지형도 검사를 통해 각막의 모양을 정확히 파악한 뒤 샘플렌즈로 효과를 측정해야 하기 때문이다.66)
이처럼 드림렌즈는 각막굴절교정술보다는 더 친근한 이름으로 소개되고 홍보되었지만, 그 원리와 효과 자체는 안경이나 콘택트렌즈와 달리 각막절제술과 유사한 것으로 강조되었다. 다시 말해 각막의 굴절이상에 따른 시력 저하 현상을 일시적으로 교정해주는 안경, 콘택트렌즈와 달리, 드림렌즈는 라식처럼 각막의 형태 자체를 변형시켜 시력을 개선해주는 것이었다. 따라서 안경사와 달리 의학지식을 지닌 안과전문의가 정밀 검사를 진행한 뒤 착용해야 하고, 정기적으로 렌즈의 청결 상태와 부작용 여부를 확인해야 하는 전문적인 시력교정기술로 자리잡았다.
이는 시력을 교정하기 위한 전 과정의 업무영역이 구분되어 각각의 전문가에게 할당되어 있는 외국과는 다른 한국적인 상황이 반영된 것이기도 했다. 시력 교정을 포함하여 눈에 대한 진료 행위는 크게 나누면 네 가지 영역이 있는데, ① 안경을 조제, 가공하고 소비자에게 맞추는 것, ② 그 전 단계로서 눈의 굴절이상을 검사하고 확인하는 것, ③ 약물 등을 사용하여 간단한 안과 질환을 치료하는 것, ④ 안과수술 등을 통해 눈의 질환을 치료하는 것으로서 여기에는 라식 등 각막절제술도 포함된다. 미국의 경우 안과의사는 첫 번째 단계를 제외한 나머지 업무를 담당할 수 있지만, 검안사라는 직역이 따로 있어 통상적으로 두 번째 단계를 전담하고 있다. 안경사는 첫 번째 안경의 조제와 가공만을 맡는다(김달영, 2014; 345-346). 영미권 국가들의 경우 대부분 안경사-검안사-안과의사의 역할 구분이 분명한 편이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검안사라는 독립된 직역이 존재하지 않고 안경사라는 제도 자체가 뒤늦게 마련되었기에, 그동안 검안부터 수술까지 전 영역을 안과의사가 전담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안과의사의 처방을 받지 않고 검안과 안경 조제를 담당하는 안경점이 암묵적으로 늘었고 새로운 기술인 콘택트렌즈까지 판매하게 되면서, 검안부터 시력교정수술까지 전 과정의 역할을 누가 맡을 것인지가 논쟁이 된 것이었다. 결국 검안의 일부 영역 및 안경의 제조와 판매, 콘택트렌즈의 판매는 안경사의 업무로, 약물을 사용하는 검사를 포함한 검안의 일부 및 수술적 요법의 시력 교정은 안과의사의 영역으로 분담되었다.

4. 나가며

20세기 중반 이후 발전해 온 의료기술에 대해서는 그동안 의료사회학 분야에서 활발히 논의되어 왔다. 그 흐름을 개관한 연구에 따르면, 의료기술은 의료의 모습 자체를 새롭게 변화시키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전문가와 비전문가의 자율성을 막거나 환자의 상태를 악화시키는 것으로 비판받기도 했다. 또한 의료기술은 불필요한 의료화, 의료의 시장화를 조장하거나 젠더 권력관계를 강화하는 것으로 이해되기도 했다(김재형, 이향아, 2020). 의료사회학 분야만큼은 아니지만,67) 앞서 언급한 것처럼, 역사적으로 한국적 맥락에 맞게 의료기술이 도입, 확산되는 과정에서 어떻게 변하는지, 그리고 그 기술을 둘러싼 다양한 행위자들의 긴장 관계, 그리고 그 기술의 사회적 효과 등을 분석한 연구들도 발표되고 있다.
그런 맥락에서 시력교정기술처럼 하나의 혹은 유사한 효과를 위해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는 의료기술 및 이를 둘러싼 행위자들의 관계 역시 한국 사회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실마리를 제시한다. ‘각막 굴절이상을 교정하기 위한 렌즈’인 ‘드림렌즈’는 그 명칭과 시술 방식, 효과 모두 대중적인 시력교정기술이었다. 수십 년 전부터 안경 대신 사용된 콘택트렌즈와 유사한 명칭으로 소개되었을 뿐 아니라, 각막에 붙였다가 빼는 방식도 유사했다. 한편으로는 1990년대 중반부터 유행하기 시작한 각막절제술처럼 각막을 눌러 굴절률을 교정하고 장기적으로 시력을 높여준다는 원리 역시 대중들에게는 이미 익숙했다. 그래서 안경이나 콘택트렌즈보다 훨씬 고가였으나 한편으로는 라식과 비슷한 가격이었기에 쉽게 수용될 수 있었다.
그러나 다양한 형태의 시력교정기술을 누가 담당할 것인지는 별개의 문제였다. 오래전부터 검안과 처방을 전담했던 안과전문의들은 우후죽순 늘어나는 안경점과 1989년 안경사 제도의 시행으로 인해 시력교정기술의 첫 단계인 검사 영역 중 일부를 안경사에게 넘겨줬다. 그리고 의사의 개입 없이 자체적인 시력 검사를 바탕으로 안경을 제작하고 콘택트렌즈와 함께 판매하는 안경사 업무의 확장을 막을 수 없었다. 대신 각막 굴절이상에 따른 시력 저하를 단순히 교정하는 기술이 아니라, 각막의 굴절이상 자체를 수술적 기법으로 치료하는 각막절제술은 안과전문의의 고유한 업무가 되었다. 그리고 비슷한 원리로 각막의 굴절이상을 교정하는 드림렌즈 역시 안경이나 콘택트렌즈보다 더욱 정밀한 검사 및 시술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전문적 의료행위의 대상으로 자리잡았다. 이처럼 콘택트렌즈에서 드림렌즈까지 시력교정기술이 지난 수십 년 동안 한국 사회에 도입되는 과정을 이해함으로써, 동일한 혹은 비슷한 목적을 지녔으나 조금씩 이질적이었던 의료기술이 어떻게 정착하는지, 그리고 이를 담당하는 전문가들의 긴장 관계는 어떠한지를 새롭게 이해할 수 있다.

Notes

1) 대한안과학회의 [2016년 안과학 용어개정판]에서는 orthokeratology를 각막(굴절)교정(술), orthokeartological lens를 각막(굴절)교정렌즈로 지칭하고 있다. https://www.ophthalmology.org/terminology/term.html?start=15&lang=&keyword=ok&mod=search&sort=& (2023. 1. 12. 최종접속)

2) 「콘택트렌즈로 근시 고친다」, 『조선일보』, 1994년 5월 29일; 「콘택트렌즈로 근-난시 치료」, 『조선일보』, 1995년 12월 3일; 「가벼운 근시-난시 교정 ‘렌즈’ 나와」, 『동아일보』, 1995년 12월 8일.

3) 「어두침침한 ‘노안’ - ‘라식’ 안되는 청소년 근시 간편한 수술로 “보인다 보여”」, 『동아일보』, 1998년 9월 16일; 「두 안과의사의 눈건강 이야기 김진국-이종호씨 ‘밝히는 남자’ 펴내」, 『동아일보』, 1999년 1월 27일.

4) 「아이 근시 치료하는 드림렌즈, 보호자의 관리와 관심 필요」, 『의학신문』, 2020년 10월 27일; 「“엄마, 라식하고 싶어요” 중학생 아이의 말, 들어줘도 될까」, 『머니투데이』, 2023년 3월 9일.

5) 박지영 등은 1950~60년대 신경외과 의사 심보성이 도입하고 시술한 대뇌반구적출술이 단순히 미국 등에서 수입한 선진기술을 적용한 것이 아니라, 당시 뇌폐흡충증을 치료하기 위한 과정에서 한국적 맥락에 맞게 고유하게 발전했다고 제시했다(박지영 외, 2011). 김희원은 1970년대 말부터 한국 의료계에 초음파 진단기가 보편화되는 양상을 분석했는데, 초음파 진단기가 널리 보급되면서 그 검사 결과에 대한 이해가 증진되었고 나아가 검사방식 및 갑상선암에 대한 의학적 지식도 함께 생산되었다. 그 과정에서 갑상선암에 대한 적극적인 진단과 치료를 강조하는 전문가 집단과 통계역학적 증거를 바탕으로 이를 비판하는 집단 사이의 논쟁이 촉발되었는데, 김희원은 의료기술의 보급 및 이와 관련된 지식이 발전하면서 서로 다른 규범과 방법론을 지닌 전문가 사이에 과학적 논쟁이 심화될 수 있음을 보였다(김희원, 2016). 정세권은 1970년대 이후 한국에서 체외수정을 통한 시험관 아기가 미완의 기술에서 현실 속 기술로 바뀌는 상황, 그 속에서 언론보도의 변화를 추적했다. 그는 초창기 미완성의 체외수정 기술이 상상의 산물이나 부정적인 것으로 묘사되고 과거의 유사한 개념과 중첩되다가, 1976년 실제로 시험관 아기가 태어나면서 점차 과학적이고 긍정적인 것으로 표상되었다고 강조했다(정세권, 2020). 박승만은 1970년대 이후 한국에서 복강경 기술이 도입되고 확산되는 과정과 그것이 한국에 미친 영향을 분석한 바 있다. 그에 따르면 1970년대 다른 피임기술의 한계와 부작용, 심리적 저항감을 극복할 수 있는 복강경이 주목받았고, 정부의 가족계획사업의 일원으로 성장한 병원이라는 환경에서 널리 시술되었다. 이렇게 확산된 복강경은 남성보다는 여성의 신체를 대상으로 하였기에 젠더 질서를 심화하는 데 일조했으며, 의학자 집단 특히 산부인과학계는 복강경을 이용해 외국의 난관복원수술이나 체외수정 기술을 추격하는 기반으로 활용할 수 있었다(박승만, 2021). 최은경은 1970년대 이후 국내에 유전자 산전진단기술이 도입, 정착되는 과정을 다루었다. 그에 따르면 이 시기 산전진단기술이 보급, 확산된 데에는 태아의 성 감별을 원하는 수요, 기형아에 대한 일반적인 공포, 그리고 다운증후군을 대표적 사례로 삼아 기형아 출산의 위험을 일반인에게 더욱 각인하고 산전진단기술로 미리 확인할 수 있다고 주장한 의학자들의 노력이 큰 영향을 미쳤다(최은경, 2022).

6) 이 논문의 제목으로 ‘문화사’라는 명칭을 사용한 것은 다음과 같은 김명진의 문제의식에 공감하기 때문이다. 김명진은 ‘기술의 문화사’에 대해 기술의 발명, 등장, 확산에 주요한 역할을 한 주체(발명가, 엔지니어, 기업가, 자본가 등)보다는 “그 기술의 수용자 혹은 소비자가 실제로 경험하고 느끼는 기술의 모습을 그려내는 것”이라고 제시한 바 있다(김명진, 2018: 21). 이에 따르면 기술의 문화사는 대중매체, 언론, 광고 등에 담긴 기술의 모습을 중요한 분석대상으로 삼을 수 있는데, 이 논문 역시 신문기사나 광고를 주요 사료로 활용할 것이다. 이에 대해, 문화사가 이런 종류의 사료만 활용하는 것이 아니며 그래서도 안된다는 심사의견이 있었다. 사료로 남기 힘든 소비자의 경험을 최대한 추적할 수 있는 개인의 일기, 블로그, 카페의 자료나 관련된 통계 자료를 적극 활용해야 한다는 지적이었다. 이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만, 그런 자료를 이용하기 위해 개인 혹은 해당 카페의 동의를 받는 것이 쉽지 않았으며, 관련된 통계 자료가 많지 않아 본 논문에서 활용하지 못했음을 밝혀둔다.

7) 본 논문은 시력교정기술의 通史가 아니며, 오래전부터 지금까지 사용되어 온 안경 이후 이를 대신하거나 이와 경쟁하는 새로운 기술들이 도입, 정착하는 과정을 다룬다. 따라서 ‘안경’이라는 기술 자체에 대해서는 따로 다루지 않는데,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이유도 고려되었다. 첫 번째는 안경이 발명되어 우리나라에 도입, 사용된 역사가 본 논문에서 다루는 시기보다 훨씬 오래되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1947년 설립된 대한안과학회가 한국전쟁 이후 재건되어 학술지를 발행하는 등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때가 1950년대 후반이었고, 안과전문의들이 조직적으로 자신들의 진료영역을 구축하던 그즈음에 새로운 시력교정기술인 콘택트렌즈가 국내에 도입되고 활용되었기에, 본 논문에서 안경 이후 시력교정기술의 도입과 정착 과정을 서술하는 것도 의미 있다고 판단했다.

8) 「콘택트렌즈」, 『매일경제』, 1968년 9월 10일.

9) 「眼鏡 대신 쓰는 ‘콘택트렌즈’의 效用」, 『동아일보』, 1959년 11월 3일. 신문기사에는 “직경 90미리 내외”라고 적혀 있는데, ‘9미리 내외’의 오타인 것으로 판단된다.

10) 「甚한 近視 고칠 길 없나」, 『조선일보』, 1959년 7월 26일. 공병우는 실제로 무료로 안과수술을 해주거나 콘택트렌즈를 배포하기도 했다(김태호, 2013: 787).

11) 「眼鏡 대신 쓰는 ‘콘택트렌즈’의 效用」, 『동아일보』, 1959년 11월 3일.

12) 「콘택트렌즈의 使用法」, 『조선일보』, 1962년 11월 2일; 「콘택트렌즈」, 『매일경제』, 1968년 9월 10일.

13) 「눈에 맞는 안경을」, 『매일경제』, 1969년 11월 4일.

14) 「콘택트렌즈 危險 視力喪失 등 많아」, 『동아일보』, 1966년 3월 15일; 「病院에서 얻어지는 病 醫因性 질환」, 『경향신문』, 1970년 11월 17일.

15) 「안경」, 『매일경제』, 1966년 12월 5일.

16) 「절찬받는 새 안경」, 『동아일보』, 1969년 3월 11일; 「새 ‘콘택트렌즈’ 開發. 고통, 異物感 전혀 없어 西獨 렌즈 製造會社」, 『매일경제』, 1974년 5월 6일.

17) 「使用이 간편하나 비싼편」, 『동아일보』, 1975년 12월 20일; 「醫學界 權威들의 臨床노트 <273> 콘택트렌즈」, 『경향신문』, 1976년 3월 5일.

18) 「手術로 視力 높인다」, 『경향신문』, 1979년 12월 11일.

19) 「近視 ‘수술교정’ 國內서도 定着」, 『동아일보』, 1984년 10월 2일.

20) 「서울 강동성모병원의 이하범 안과과장이 엑시머레이저에서 발생하는 레이저를 이용해 근시교정수술을 하고 있다」, 『매일경제』, 1988년 12월 23일; 「레이저로 近視 교정 첨단장비 국내 도입」, 『매일경제』, 1991년 3월 13일; 「엑시머레이저 이용 角膜절제술」, 『매일경제』, 1991년 11월 28일; 「엑시머레이저로 手術 근시, 난시 간단히 치료」, 『매일경제』, 1991년 12월 28일.

21) 「‘라식’ 각막절삭레이저술 고도근시 치료효과 높아」, 『매일경제』, 1996년 6월 9일; 「근시 및 난시 교정」, 『경향신문』, 1997년 2월 27일.

22) 「최근 2~3년새 1만 5천여건 시술」, 『조선일보』, 1997년 9월 2일.

23) 「엑시머, 라식수술」, 『경향신문』, 1998년 7월 16일; 「여자농구 국가대표 유영주 시력회복 위한 라식수술, ‘열린의사회’ 무료봉사로」, 『한겨레』, 1998년 9월 16일; 「국가대표 선수들에게 무료 라식 시술」, 『한겨레』, 1998년 11월 2일. 이 당시 근시교정수술을 보도하는 기사 중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남자보다 여자가 이 수술을 훨씬 더 선호한다는 점이었다. 한 일간지의 조사에 따르면, 여성이 라식을 받은 이유로 “안경이나 렌즈가 불편해서”(45%), “안경이 어울리지 않아서”(22%), “승무원, 비서직 등 직업상”(16%), “결혼할 때 눈이 나쁘면 흠 잡힐까봐”(10%)였다. 라식으로 시력을 높이는 것뿐 아니라 “외모를 살리고”, 나아가 여성들 사이에서 하나의 “혼수”로 뜨고 있다는 기사도 실렸다. 「뉴스그래픽」, 『동아일보』, 1998년 6월 24일; 「안경 벗고 결혼할래요」, 『동아일보』, 1999년 2월 26일; 「시력교정 라식수술 외모 살리고 시력 높여 ‘일석이조’」, 『경향신문』, 1999년 12월 14일.

24) 이 조사는 근시 환자 48명을 대상으로 세 그룹(-2.0~-3.75D, -4.0~-5.75D, -6.0~-9.0D)으로 구분한 뒤, 라식 이후 시력 개선 효과를 분석한 것이다. 이에 따르면 Ⅰ군(-2.0~-3.75D)과 Ⅱ 군(-4.0~-5.75D)의 환자 중 시력이 개선된 비율이 각각 93.7%, 89.6%였고, Ⅲ군은 84%였다.

25) 「콘택트렌즈로 근시 고친다」, 『조선일보』, 1994년 5월 29일; 「콘택트렌즈로 근-난시 치료」, 『조선일보』, 1995년 12월 3일; 「가벼운 근시-난시 교정 ‘렌즈’ 나와」, 『동아일보』, 1995년 12월 8일.

26) 「어두침침한 ‘노안’ - ‘라식’ 안되는 청소년 근시 간편한 수술로 “보인다 보여”」, 『동아일보』, 1998년 9월 16일; 「시력교정 ‘드림렌즈’ 각광.. 잠잘 때 8시간 정도 착용」, 『한국경제』, 2002년 2월 22일.

27) 「주목받은 새치료법(3) 각막굴절 교정술」, 『매일경제』, 1999년 3월 19일.

28) 「드림렌즈는 꿈의 렌즈?」, 『매경이코노미』, 2002년 8월 2일; 「잘 때 끼고 낮에 빼면 수술없이도 시력회복」, 『문화일보』, 2004년 8월 26일; 「근시 ‘잘 때 끼는 렌즈’ 딱!」, 『파이낸셜뉴스』, 2005년 9월 21일.

29) 「“끼고 나면 시력 교정” 드림렌즈 인기, 부작용 우려도」, 『JTBC』, 2014년 11월 5일; 「드림렌즈, ”여보, 옆집 애는 그거 낀대”」, 『코메디닷컴』, 2017년 7월 16일.

30) 당시 「약사법」은 의료용구를 “사람 또는 동물의 구조, 기능에 영향을 주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되는 기구, 기계 또는 장치”라고 규정했는데, 안경과 콘택트렌즈 역시 의료용구로 지정되어 있었다(「약사법」, 1963년, 제2조 제9항 제2호).

31) 「콘택트렌즈 모두 無許品」, 『조선일보』, 1970년 2월 10일.

32) 「의료법」, 1973년, 제5조, 제6조, 제7조.

33) 「의료법」, 1973년, 제57조, 제59조.

34) 「保社部 콘택트렌즈 揷入도 醫療行爲로 規定」, 『동아일보』, 1975년 9월 26일.

35) 「家庭醫學. 眼鏡과 視力」, 『매일경제』, 1970년 10월 31일.

36) 「醫學에세이 <121> 眼鏡과 美容」, 『동아일보』, 1974년 9월 13일; 「常識의 虛實 눈(573) 잘 보인다고 반드시 정확한 안경은 아니다」, 『조선일보』, 1975년 5월 23일; 「醫學界 權威들의 臨床노트 <248> 假性近視」, 『경향신문』, 1976년 2월 4일.

37) 「어린이 近視가 늘어간다」, 『조선일보』, 1977년 2월 26일.

38) 「眼鏡 어린이 많다」, 『조선일보』, 1984년 5월 17일.

39) 「콘택트렌즈의 有害」, 『경향신문』, 1978년 5월 3일; 「콘택트렌즈는 角膜의 촉각을 둔화」, 『조 선일보』, 1978년 6월 22일.

40) 「콘택트렌즈 副作用 많다」, 『동아일보』, 1981년 3월 5일.

41) 「연속착용 소프트 콘택트렌즈 3일에 한번씩 세척을」, 『경향신문』, 1985년 1월 28일; 「콘택트렌즈 사용법부터 알고 끼자」, 『동아일보』, 1985년 8월 7일.

42) 「한달 계속 끼어도 副作用 없는 새 콘택트렌즈 나와」, 『동아일보』, 1982년 9월 30일; 「한달 계속 착용가능 콘택트렌즈 미서 개발」, 『경향신문』, 1983년 7월 9일.

43) 「情報化시대 「안경人口」, 激增과 對策 「눈의 건강」을 되찾자」, 『동아일보』, 1984년 4월 2일; 「眼鏡 어린이 많다」, 『조선일보』 ,1984년 8월 27일.

44) 「眼鏡은 醫療기구다」, 『동아일보』, 1983년 10월 12일.

45) 「약사법」 제42조 제1항은 “약국개설자 및 의약품판매업자가 아닌 자로서 의료용구 또는 위생용품의 판매업을 하고자 하는 자는 보건사회부령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시장ㆍ군수 또는 구청장에게 등록하여야 한다. 등록된 사항을 변경하고자 할 때에도 또한 같다”고 규정하고 있다(「약사법」, 1986년).

46) 1973년 제정된 「의료기사법」에서 의료기사는 “의사ㆍ치과의사의 지시 및 감독하에 진료 또는 의화학적 검사에 종사하는 자”이며, “임상병리사ㆍ방사선사ㆍ물리치료사ㆍ작업치료사ㆍ치과기공사 및 치과위생사”가 이에 해당한다고 규정했다(「의료기사법」, 1982년, 제1조, 제2조).

47) 「국민視力 제도적으로 보호한다. 내년 1월 실시되는 眼鏡士 제도」, 『매일경제』, 1986년 3월 29일; 「안경사 vs. 안과의사, 안경사법 승자는?」, 『헬스포커스』, 2015년 11월 12일.

48) 「의료기사법」, 1987년, 제1조.

49) 「의료기사법」, 1987년, 제13조의3.

50) 「의료기사법 시행령」, 1989년, 제2조 제1항 제8호.

51) 「컴퓨터로 視力 측정하는 自動視力 검사기 國內첫선」, 『동아일보』, 1979년 11월 13일.

52) 「의료기사법 시행규칙」, 1989년, 제1조의2, 제2항.

53) 「굴절視力 검사 資格 싸고 醫師-안경사 對立」, 『동아일보』, 1989년 3월 22일; 「<건강에세이> 眼科 시력측정과 굴절검사」, 『매일경제』, 1989년 4월 25일.

54) 「「안경점 시력검사」 분쟁 재연」, 『동아일보』, 1990년 4월 16일; 「眼科醫-안경인 눈싸움 장기전」, 『동아일보』, 1990년 5월 26일; 「眼科醫-안경사 밥그릇 싸움 아니다」, 『조선일보』, 1990년 7월 12일.

55) 「憲裁, “안경사의 시력 검사, 適法”」, 『동아일보』, 1993년 12월 10일; 「의료기사법 시행령 제2조에 대한 헌법소원」 (1993. 11. 25. 92헌마87 전원재판부).

56) 실제로 당시 시행령에는 “콘택트렌즈를 판매할 수 있다”는 문구가 명시적으로 포함되어 있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이미 안경과 함께 콘택트렌즈가 ‘의료용구’에 포함되어 있었고, 「약사법」 제42조에 의거하여 안경점에서 이를 판매할 수 있었기 때문에, 안경사가 콘택트렌즈를 판매하는 것이 불법은 아니었다. 시행령에 콘택트렌즈 판매가 명시적으로 포함된 것은 2012년 5월 23일 일부개정 되던 때였다.

57) 대한안과학회, 대한의학협회, 「국민에게 드리는 호소문」, 『동아일보』, 1990년 4월 16일.

58) 인용은 「의료기사법 시행령 제2조에 대한 헌법소원」 (1993. 11. 25. 92헌마87 전원재판부). 헌법 제11조 제1항은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누구든지 성별, 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ㆍ경제적ㆍ사회적ㆍ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59) 「의료기사법 시행령 제2조에 대한 헌법소원」 (1993. 11. 25. 92헌마87 전원재판부).

60) 「소프트 콘택트렌즈 곰팡이균 온상」, 『경향신문』, 1991년 5월 30일; 「콘택트렌즈 부작용」, 『한겨레』, 1991년 11월 13일; 「콘택트렌즈 착용 특히 임신부 유해」, 『경향신문』, 1993년 2월 19일.

61) 「長期間 콘택트렌즈 조심」, 『경향신문』, 1991년 9월 9일; 「콘택트렌즈 착용 전 眼科 검사 받도록」, 『매일경제』, 1991년 11월 14일

62) 「안경사 콘택트렌즈 장착 불법」, 『한겨레』, 1996년 11월 9일.

63) 초창기 대형병원에 수입된 엑시머레이저의 가격은 4억 원에 가까웠다고 한다. 「病院 장삿속에 밀리는 仁術」, 『동아일보』, 1991년 7월 10일.

64) 「라식 의사 숙련도 수술 ‘성공의 열쇠’」, 『한겨레』, 1998년 9월 9일.

65) 「자녀 시력 관리 50분간 독서 – TV 시청 뒤 10분 정도 휴식 취하도록」, 『동아일보』, 1999년 2월 10일.

66) 「근시 ‘잘 때 끼는 렌즈’ 딱!」, 『파이낸셜뉴스』, 2005년 9월 21일.

67) 얼마 전 『의학사의 새물결』이라는 제목으로도 번역된 Locating Medical History(2006)는 지난 백여 년 동안 서양에서 연구되어 온 의학사 혹은 의료사를 소개한 방대한 저서이다. 20세기 초반부터 시작된 전통적인 의학사부터 20세기 중반 ‘새로운 사회사’ 및 푸코와 캉킬렘이 의학사에 미친 영향, 열대의학사, 그리고 ‘문화적 전환’ 이후 의료지식의 사회적 구성, 의료문화사 등 다양한 흐름을 소개했다. 이 가운데 의료기술에 대한 역사는 거의 포함되지 않았는데, 집필에 참여한 저자들의 관심사와 연구 이력을 상기하면 이례적이라고 여겨질 정도였다. “대중을 위한 의학사”라고 명명된 챕터에서도 의학 전문가나 동료 역사가를 위한 논문이 아니라 대중과 ‘공유되어야 할 지식’으로서 의학사를 서술해야 한다고 강조했지만, 대중들이 직접 경험하고 사용하는 의료기술의 역사는 여기에 포함되지 않았다(프랭크 하위스만, 존 할리 워너, 2021).

그림 1.
콘택트렌즈 제작소 광고
Figure 1. Advertisement for Contact lens factory
(「안경 대신에 콘택트렌즈」, 『동아일보』, 1960년 9월 1일; 「콘택트렌즈」, 『경향신문』, 1961년 12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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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1970년대 콘택트렌즈 광고
Figure 2. Advertisement for Contact lens in 1970s
(「국제콘택트렌즈연구소」, 『조선일보』, 1975년 2월 2일; 「한일콘택트렌즈연구소」, 『조선일보』, 1975년 3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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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
근시교정수술 광고 및 국가대표 운동선수가 라식을 받았다는 기사
Figure 3. Advertisement for myopia correction surgery and an article about a national athlete who underwent LASIK
(「엑시머레이저와 라식 수술」, 『한겨레』, 1997년 4월 26일; 「신진식, 시력 찾았다」, 『한겨레』, 1998년 8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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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 1.
Table comparing 1989 and 1990 amendments of Enforcement Decree of the Medical Technician Act
1989년 4월 4일 일부개정 1990년 8월 8일 일부개정
「의료기사법 시행령」 제2조 제1항 제8호 「의료기사법 시행령」 제2조 제1항 제8호
8. 안경사는 시력보정용 안경의 조제(콘택트렌즈의 조제를 제외한다) 및 판매 업무에 종사한다. 이 경우 기존 안경도수를 조정하기 위한 시력검사(약제를 사용하는 시력검사 및 보건사회부령이 정하는 시력검사를 제외한다)를 할 수 있다. 8. 안경사는 시력보정용 안경의 조제(콘택트 렌즈의 조제를 제외한다) 및 판매 업무에 종사한다. 이 경우 안경도수를 조정하기 위한 시력 검사(약제를 사용하는 시력검사 및 자동굴절 검사기기를 사용하지 아니하는 타각적 굴절검사를 제외한다)를 할 수 있다. 다만, 6세이하의 아동에 대한 시력보정용안경의 조제ㆍ판매는 의사의 처방에 의하여야 한다.

참고문헌 REFERENCES

1. 「의료법」.

2. 「약사법」.

3. 「의료기사법」, 「의료기사법 시행령」, 「의료기사법 시행규칙」.

4. 『동아일보』, 『조선일보』, 『매일경제』, 『한겨레』, 『경향신문』.

5. 「의료기사법 시행령 제2조에 대한 헌법소원」 (1993. 11. 25. 92헌마87 전원재판부).

6. 김달영,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중반까지 미국 검안학의 발전 과정에서 나타나는 물리학의 영향에 관하여」, 『의사학』 23-2 (2014), 343-372쪽.

7. 김명진, 『20세기 기술의 문화사』 (서울: 궁리, 2018).

8. 김재형, 이향아, 「의료사회학의 연구동향과 전망: 개념의 전개와 의료사와의 접점을 중심으로」, 『의사학』 29-3 (2020), 843-902쪽.

9. 김재호, 「근시교정을 위한 방사상각막절개술(RK)의 임상경험」, 『대한안과학회잡지』 23-4 (1983), 53-60쪽.

10. 김태호, 「“독학 의학박사”의 자수성가기: 안과의사 공병우(1907-1995)를 통해 살펴본 일제 강점기 의료계의 단면」, 『의사학』 22-3 (2013), 759-800쪽.

11. 김희원, 「한국의 초음파 기반 의료사회적 환경과 갑상선암 지식의 공동생산」, 서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6.

12. 박근성, 심완섭, 「근시안에서 엑시머레이저 굴절교정각막절제술의 효과」, 『충남의대잡지』 24-2 (1997), 339-346쪽.

13. 박승만, 「복강경의 기술사: 1970-1980년대 한국의 복강경 기술 도입과 보급, 영향」, 연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21.

14. 박신혜, 나경선, 권형구, 이현수, 주천기, 「국내 각막굴절교정학용 렌즈의 처방 현황에 대한 첫 설문조사」, 『대한안과학회지』 50-4 (2009), 505-509쪽.

15. 박지영, 미야가와 타쿠야, 홍정화, 김옥주, 「1950-60년대 한국의 뇌폐흡충증과 심보성의 대뇌반구적출술」, 『의사학』 20-1 (2011), 119-161쪽.

16. 이원희, 박영기, 서종모, 신종훈, 「각막굴절교정학 콘택트렌즈가 근시 및 난시의 진행에 미치는 영향」, 『대한안과학회지』 52-11 (2011), 1269-1274쪽.

17. 정세권, 「‘시험관 아기’에서 ‘체외수정’으로? - 1970~80년대 새로운 과학기술에 대한 언론 보도 변화」, 『역사비평』 136 (2021), 462-496쪽.

18. 정호길, 이경용, 배지현, 「각막굴절교정렌즈 착용 전후 근시 진행의 변화」, 『대한안과학회지』 60-7 (2019), 620-626쪽.

19. 주천기 외, 『근시교정술 장기간 안전성과 안정성』 (서울:한국보건의료연구원, 2011).

20. 최진석, 「각막굴절교정렌즈 처방의 원리와 치료효과」, 『대한의사협회지』 60-8 (2017), 672-677쪽.

21. 최은경, 「1970~1990년대 한국 유전자 산전진단기술 도입 – 성 감별에서 기형아 공포로」, 『사회와 역사』 135 (2022), 81-109쪽.

22. 프랭크 하위스만, 존 할리 워너 편저, 『의학사의 새물결 – 한눈에 보는 서양 의료 연구사』 (서울: 모시는사람들,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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