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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J Med Hist > Volume 31(3); 2022 > Article
사육(飼育)의 정치: 근대 일본의 광견병 방역과 인간·개 관계의 재편†

Abstract

Rabies prevention has become a vital part of public health administration owing to the high incidence of rabies in Japan in modern times. The rabies prevention system in Japan, which was gradually established based on the rabies knowledge and prevention policies from Europe and the United States, was centered on livestock dog control, wild dog culling, and vaccination. This epidemic prevention system was based on two premises. First, though rabies is a zoonotic infectious disease, the focus of epidemic prevention administration was to protect humans, not dogs. Second, this system attempted to eliminate the rabies hazard at its source by reducing the number of all dogs—livestock dogs included. Under this epidemic prevention mechanism, the survival space of dogs as an object of public health administration was significantly eroded. In contrast, during wartime, the Japanese Empire encouraged people to donate their dogs to the military so their fur could be used to make military coats, and in the name of existing rabies prevention programs, extended the target of culling from wild dogs only to all non-military dogs. This administrative model of epidemic prevention, which attempted to hide the violence and arbitrariness of dog killing by creating artificial distinctions among dogs, is a metaphor for the power training mechanism in modern society.

1. 머리말

개는 다른 동물에 비해 인간과 더욱 특별한 관계를 맺는다. 동서양의 역사를 막론하고 개는 수천 년 전부터 인간의 사육을 받기 시작하였고, 소, 돼지, 말 등의 가축과는 달리 집 내부에서 인간과 함께 친밀하게 생활할 수 있다. 또한, 같은 애완동물인 고양이와 달리 개는 주인을 위해 보안, 안내, 구조 등 다양한 역할을 맡을 수 있는 충성스러운 이미지로 표상화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개와 인간과의 관계는 항상 원만하지만은 않았다. 인간은 개에게 감정을 투영하기도 하지만, 필요에 따르면 개를 유기하거나 살처분하기도 한다. 특히 개는 치사율이 거의 100%에 달하는 인수공통전염병인 광견병(Rabies)1)의 주된 숙주인 만큼 실제 광견병의 이환율과 상관없이 인간에게 늘 잠재적 위험의 대상으로 간주되었다. 달리 말하면 인간은 개를 친근하게 생각하면서도 광견병으로 인해 개에 공포감을 느낄 때도 적지 않다는 것이다.
근대에 접어든 후 광견병이 유행하자 개가 사회적 공포의 대상이 되면서 국가권력은 광견병 방역이라는 대의명분을 내세워 개의 사육과 처분에 대대적으로 관여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개를 둘러싸고 사육주, 공권력, 애견가, 동물보호단체, 대중 언론의 경합전이 벌어지기도 하였다(Neil Pemberton and Michael Worboys, 2007:2). 이러한 가운데 기존에 느슨하였던 인간과 개의 관계에 변화가 일어나, 동물의 주체성과 감수성이 간과된 억압적 관계가 형성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는 단순히 동물에만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니라, 동물이라는 제3자적 매개체를 통해 인간 사회를 규율하고 차별화하는 근대 권력 지배 메커니즘의 은유이기도 하였다.
지금까지 광견병에 관한 역사적 연구는 주로 19세기 말 20세기 초 영국, 프랑스, 폴란드를 비롯한 유럽 국가, 미국 및 식민지였던 남부 아프리카, 마다가스카르 등의 지역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다(A.A.King, A.R.Fooks, M. Aubertand A.I. Wandeler, 2004; Neil Pemberton and Michael Worboys, 2007; Philip M. Teigen, 2007: 141-170; John Douglas Blaisdell, 1995; Bert Hansen, 1998: 373-418; Jessica Wang, 2019; Kathleen Kete, 1994; Théodoridès, 1986; Eva Plach, 2013: 391-416; Karen Brown, 2011; Lancevan Sittert, 2018: 111-143; Eric T. Jennings, 2009: 263-282). 이러한 연구들은 광견병에 관한 지식 축적 및 방역 체제를 밝혔을 뿐만 아니라 광견병을 둘러싼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함의를 탐구하는 데도 힘을 기울였다. 특히 개의 박살과 입마개 착용 등을 둘러싼 정치적 논쟁, 그리고 가축용 백신 접종 및 개의 위상 변화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에 비해 동아시아 국가들의 광견병 역사 연구는 상대적으로 산발적이며 체계적이지 못한 실정이다.2)
서양과 달리 내부에서 식민지배와 피지배 관계로 얽힌 동아시아의 광견병 역사는 나름의 독특한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한다. 우선, 근대 동아시아의 광견병 지식 수용과 대응 방식에는 서양으로부터 유래된 외부 지식이 상당히 크게 작용한 것은 사실이었으나, 현지의 사회·문화적 맥락 역시 중요한 변수로 작용하였다. 이는 서양의 광견병 방역 조치를 동아시아 각지에 적용하였을 때 겪었던 변용과 우여곡절을 통해 충분히 설명될 수 있다. 또한 광견병이 빈번하게 발생하였던 동아시아는 연구 데이터 제공과 백신 개발에도 기여하였다. 무엇보다 내부적으로 식민지배 구조에 놓여 있었으며 오늘날 여전히 탈식민·탈냉전의 역사적 과업에 매달려 있는 동아시아에서는 광견병 역사에 관한 해석에 대해 논의가 분분하다. 예를 들어 한국의 경우, 반식민·반제국주의 시각으로 인해 식민당국이 일본으로부터 이식한 광견병 퇴치 조치에 대한 민간의 반발과 방역 효과의 한계에 집중한 나머지, 근대적 광견병 대응에 내포된 폭력과 규율을 간과한 면이 있다.3)
이에 본 연구는 동아시아 삼국 중에 가장 이른 시기에 자주적이며 또한 체계적으로 광견병 방역 체제를 확립한 일본의 사례를 주된 연구 대상으로 삼고자 한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일본의 방역 체제는 식민지였던 조선과 대만에도 이식되었기 때문에 대표성이 강하다. 식민지 광견병 방역의 문제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기 위해서라도 일본의 상황을 꼭 짚고 넘어가야 한다. 둘째, 중국은 영미 조차지를 중심으로 광견병 방역 체제가 도입된 데다가 지역마다 차이가 있기에 일본 및 조선, 대만과 아울러 다루기에는 범위가 커서 단편 논문으로는 불가능하다.
근대 국가나 공권력에 의한 광견병 방역의 목적은 개를 위한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인간을 광견으로부터 보호하고자 하는 데 두어졌다. 최근 20년간 서양 역사학계에서 “동물로의 전환(The ‘Animal Turn’)”이 제기된 만큼 동물사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기존의 인간 중심의 역사 서술을 성찰하고 동물을 역사의 또 다른 주체로 호명하여 동물의 능동성(agency)을 재발견하는 것이 그것의 취지이다.4) 물론 여기에는 늘 논리적 쟁점이 전제되고 있다. 즉, 동물의 능동성, 혹은 동물의 권리는 어떻게, 또는 어디까지 주장해야 하는가라는 것이다.5) 이 글은 동물해방론자인 피터 싱어(Peter Singer)처럼 동물도 인간과 동등하게 다루어져야 한다는 동물 윤리에 관한 어떤 특정한 주장을 옹호하거나 내세우기 위한 것이 아니다.6) 다만 기존의 인간 중심의 역사적 연구 시각에 충분히 문제가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특히 인수공통전염병인 광견병은 인간뿐만 아니라 개로 대표된 동물과도 밀접히 관련되기 때문에 동물의 시각을 완전히 배제하기가 어렵다고 사료된다. 뿐만 아니라 동물은 근대 지배관계 속의 최말단의 무력한 존재인 만큼 인간과 동물의 지배와 피지배 관계는 인간 사회 내부의 지배 관계를 극단적으로 반영할 수도 있다.7) 따라서 이러한 연구는 결코 동물사에 매몰되지 않고 결국 근대의 지배 관계를 이해하는 데에도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본 연구는 동물사 연구의 시각을 염두에 두고 근대 일본의 광견병을 둘러싼 인간과 동물의 길항관계와, 광견병을 매개로 하는 근대적 규율과 훈육의 정치학을 독해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근대의 사회적 통제와 정치적 지배의 메커니즘을 더욱 깊이 조명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2. 근대 일본의 광견병 방역 체제 수립과 인간·개 관계의 변화

광견병은 사람과 동물을 공통 숙주로 하는 병원체에 의해 일어나는 인수공통 전염병으로서, 광견병 바이러스(Rabies virus)의 침입으로 인해 발생하는 중추신경계 감염증이다. 사람이 광견병 바이러스를 가진 야생 동물에게 직접 물리거나 그런 야생 동물에게 물린 개나 고양이에게 다시 물리면, 광견병 바이러스가 물린 상처 부위로부터 신경을 타고 중추신경까지 올라가 발병한다. 사람이 광견병에 걸려 중추신경계에 이상이 생기면 물을 무서워한다고 하여 ‘공수병(恐水病)’이라고도 한다. 광견병은 결국 반신불수를 일으켜 의식불명과 사망으로까지 이어진다. 이 병은 오늘날 여전히 치료약이 없으며 발병 시 치사율이 거의 100%에 달한다(中國協和醫科大學出版社編, 2018:196-198; 문운경, 2013:71).
광견에 물려 병을 일으켜 사망에까지 이른다는 사실을 인간들은 이미 수천년 전부터 인지하였다(Waterson Ap, 1978:1-3, 53-59; Steele JH, 1975:1-29). 동아시아의 경우, 중국의 『좌전(左傳)』에 이미 기원전 556년 노(魯)나라 사람들이 미친개(瘈狗)8)를 내쫓았다는 최초의 기록이 등장하여 2,500년 전의 중국인들은 광견의 위협을 알고 있으며 개를 피하거나 내쫓는 물리적 대책을 취하였음을 말해준다. 한편, 기원전 5~6세기에 편찬된 의서 『오십이병방(五十二病方)』을 비롯하여 광견병에 관한 의학적 지식은 꾸준히 축적되어 갔다(王輝·王偉, 2014:188). 명청시대에 이르러서는 외부에서 들어온 독기로 인해 개가 발광하여 사람을 문다는 것, 광견병은 일정한 잠복기가 있다는 것 등의 인식이 이미 일반화되어 있었다(丁柔克撰, 宋平生·顔國維等整理, 2002: 301; 金武祥, 2017).
질병의 인식과 더불어 광견병에 대한 법적 대응도 일찍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중국 당나라 법령에 보면 광견을 단속하는 규정이 이미 등장하였다.
“개가 사람을 무는데도 표지(標識)하고 묶어두는 것을 법대로 하지 않거나, 미친개가 있는데도 죽이지 않으면 태형 40대이다. 이로 인하여 사람을 살상(殺傷)하면 과실(過失)로 논한다. 고의로 풀어놓아서 사람을 살상하게 하면 사람을 살상한 죄(鬪殺傷)에서 1등급을 줄여 논한다.”9)
위 법령에서 보듯이 당시 국가에서 이미 광견을 문제시하고 있으며 사회적 피해를 일으키지 않도록 광견을 단속하거나 박살(撲殺)하는 책임을 개 주인에게 요구하였다. 이 법령은 그 이후 송대를 거쳐 명청시대까지 그대로 유지되었다(天一閣博物館·中國社會科學院歷史硏究所編, 2006: 372; 伊桑阿等編著, 2016: 1563).10)
상술한 중국의 광견병 관련 의학지식과 법적 대응은 일본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중국 전통의학의 영향을 받은 일본은 10세기에 편찬된 의서 『의심방(醫心方)』에서 중국 의서를 인용하면서 광견병 증상과 처치법을 제시하였다.11) 법적 대응 면에서는, 우선 8세기 제정된 일본의 『양로율령(養老律令)』은 상기한 당나라 법령의 단속 규정을 그대로 따랐다(井上光貞,1976: 480). 그리고 에도시대 겐로쿠(元祿) 5년(1692) 제5대 장군 도쿠가와 쓰나요시(德川綱吉)가 한 때 반포, 실시한 「살생금지령(生類憐みの令)」에서는 광견을 계류시키는 의무를 규정한 바가 있다(唐仁原景昭, 2002: 15).12)
이처럼 전근대 일본에서 광견병은 이미 동아시아 전통의학의 틀에서 인식되고 있었으며 광견으로 인한 사회적 피해를 일으키지 않기 위해 주인에게 광견을 단속하거나 박살하는 법적 의무를 부여하도록 규정하였다. 물론 이렇다고 해서 당시 광견병이 큰 역병이나 대유행으로 발전한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는 광견병의 최초 대유행은 1732년 나가사키(長崎)에서 발생한 것이었다(唐仁原景昭, 2002: 16). 1756년 의사 노로 겐죠(野呂元丈)가 펴낸 광견교상치방(狂犬咬傷治方)에 의하면 “광견이 사람을 무는 것은 우리나라에서 예로부터 들어본 적이 없었으나”, “근세에 이르러 광견의 화가 끊어지지가 않는다”고 하는데, 1732년 나가사키에서 발생한 일본 최초의 광견병 대유행이 관서 및 관동 지방에 전파되어 사회적 공포감을 불러일으켰다(野呂元丈,1756: 서문 및 3쪽). 이를 역으로 해석하면 그 이전까지 광견병은 인간과 개의 관계에 크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요인이 되지 못하였으며 사회적 문제로까지 부상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국면은 근대 이후 광견병 문제가 대두됨에 따라 새로운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광견병은 근대 동물학, 수의학 그리고 축산학에서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았던 개가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된 계기이기도 하였다.13) 이는 광견병이 가진 특징과 무관하지 않다. 광견병은 인간과 친밀하게 접촉하는 개를 주된 숙주로 하고 치사율이 높은 데다 치료제가 부재하며, 또한 잠복기가 길어 당사자를 매우 불안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에 그에 대한 사회적 공포감이 늘 실제 이환율 및 치사율과 상관없이 과잉되었다는 것이다(Neil Pemberton and Michael Worboys, 2007: 1; 山脇圭吉, 1936: 556).
메이지 시대 이후 교통의 발달과 인구의 도시 집중, 그리고 외국과의 교류가 활성화됨에 따라 광견병은 대대적으로 유행하기 시작하였다.14) 특히 외국인이 거주하는 대도시와 개항장을 중심으로 서양 견종이 유입되면서 광견병 감염의 우려가 갈수록 커졌다(故佐藤悠次郞紀念會編, 1920: 269). 이와 동시에 서양에서 형성된 광견병 지식이 전래됨에 따라, 광견병을 생물의학과 공공위생의 시각으로 접근하는 시도가 이루어졌다.
서양에서는 19세기 중후반부터 광견병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영국의 경우, 18세기에 산발적으로 발생하였던 광견병은 19세기에 접어들면서 점차 빈번해졌다(Neil Pemberton and Michael Worboys, 2007: 18).15)특히 1860년대 이후 도시화에 따른 노동자 계급의 개 사육이 증가하면서 광견병에 대한 사회적 공포감이 커지자 이에 관한 연구와 논의가 활발해졌다. 그러한 가운데 1880년대 프랑스 미생물학자 루이 파스퇴르(Louis Pasteur)가 광견병 바이러스의 존재를 입증하고 인공면역의 원리를 바탕으로 토끼를 이용한 약독화 백신으로 광견에 물린 9세 소년을 치료하는 데 성공하면서 광견병 인체 접종 백신을 개발하였다(Neil Pemberton and Michael Worboys, 2007: 58). 이로써 광견병은 예방 가능한 질병이 되었다.
하지만 서양에서 19세기까지만 해도 광견병 바이러스의 실체와 병인에 대해 여전히 의견이 분분한 상태였다. 환언하자면 당시 광견병에 관한 지식이 아직 완비되지 않았던 것이다(Neil Pemberton, and Michael Worboys, 2007: 13). 이는 광견병 지식이 동아시아에 유입되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가령 1879년 일본에서 출판된 『광견병설(狂犬病說)』은 유럽의 각종 학설을 수록하였는데, 여전히 의문스러운 주장들도 동시에 포함되어 있었다(陸軍文庫,1879).
예를 들어 19세기 광견병 지식이 가장 많이 축적된 영국에서는 광견병의 병인에 대해 내인설과 외인설 두 가지 학설이 한때 팽팽하게 대립하였었다. 병인론에 대한 인식차는 광견병 방역 대책의 차이로 이어졌다. 내인설은 광견에 물린 상처를 통해 바이러스가 전파되는 것을 인정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계절 변화, 폭염, 가뭄, 음식, 성교의 좌절, 인간의 학대 등 외부 자극이 개의 광기를 유발한 것임을 강조하였다.방역 조치로는 민간의 축견을 제한하고 개 학대를 방지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이와 달리 외인설은 광견병은 자생적인 것이 아니라 외부 유입에서 발생한 동물유행병성(epizootic) 질병으로 보고 이에 따라 국내 전염원과 전파 경로를 차단하고 외부 전염병의 유입을 저지하는 것을 방역의 핵심으로 삼았다. 구체적인 대책은 축견 등록, 납세, 표패에 의한 신분표기와 광견병 여부 명시, 광견 박살, 그리고 검역제도의 실시 및 외래종 동물의 수입 금지 등이었다(呂富淵, 2017:141-142). 비록 내인설과 외인설의 주장이 서로 다르지만, 개를 지저분하고 언제나 질병을 유발할 수 있는 잠재적 위험 요소로 보는 데에는 차이가 없었다고 볼 수 있다. 19세기 후반에 들어선 후 외인설은 의학계의 변두리에서 점차 중심으로 진입하여 주류 학설로 자리 잡게 되었다(呂富淵,2017:142). 이로써 외인설에 입각한 각종 조치 역시 광견병 방역의 매뉴얼로 정착하게 되었다(陸軍文庫,1879: 37-38).16)
동아시아 삼국 중 가장 먼저 서양으로부터 광견병 방역책을 도입한 나라는 일본이었다. 일본은 에도 막부(幕府) 말기 서구에 파견한 사절단을 통해 영국의 축견 행정을 접하게 된 이후 서양의 축견 행정을 국내에 소개하면서 이식하기 시작하였다(仁科邦男,2015:186). 메이지 정부는 1868년에 「도쿄번인규칙(東京番人規則)」을 제정하였는데, 그중 제32조에서는 “길에 광견이 있으면 이를 박살하여 호장(戶長)에게 고하여 기각 수속을 밟도록” 규정하였다(唐仁原景昭, 2002:19). 1871년 이후 도쿄부(府)를 비롯하여 각 부, 현에서 순사(巡卒)제도를 도입하였고 순사는 불량한 개를 압수하고 지방관의 지시에 따라 사람을 문 개를 죽일 수 있다고 규정하면서 공권력이 축견 행정을 본격적으로 착수하기 시작하였다(仁科邦男, 2015: 186-187). 곧이어 1873년 도쿄를 시작으로 각 지방 정부가 「축견규칙(畜犬規則)」을 잇따라 반포하였다(警視局書記課編纂, 1879: 407-408; 古屋宗作編, 1885: 495-498; 山形縣警察本部, 1888: 496; 和歌山縣警察本部, 1889: 107; 北海道廳, 1891: 378).
각 지방의 「축견규칙」은 주된 내용이 대동소이한 것으로 보인다. 첫째, 축견의 등록과 신고에 관한 규정이다. 개를 사육하고자 할 경우, 반드시 경찰에 신고해야 하며 주인의 이름과 주소가 명시된 목줄을 착용하는 것이 의무화되었다. 만약 이행하지 않을 경우에는 야견으로 취급하였다. 둘째, 광견병에 걸린 축견에 관한 조치이다. 축견이 광견병과 같은 전염병에 걸릴 경우 주인은 마땅히 개를 박살해야 한다고 규정하였다(和歌山縣警察本部,1889:107).
「축견규칙」의 반포, 실시에는 두 가지 요인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나는 근대 일본의 문명화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에도시대 후기 부터 일본에서는 일부 귀족계층을 중심으로 애완동물로 개를 사육하기 시작하였다(中塚圭子, 2013: 49-50). 하지만 이는 매우 제한적인 현상일 뿐이었다. 당시 일본에서 개는 개인이 사육하는 범주가 아니었으며 이른바 “동네 개(里犬[さといぬ], 혹은 町犬[まちいぬ], 村犬[むらいぬ])”, 즉 특정한 가정에 속하지 않고 자유롭게 돌아다니면서 한 동네나 지역 주민의 가정에서 배출한 음식물을 먹고 생존하는 사회적 존재였다(中塚圭子, 2013:51-52). 하지만 개항 후 일본 국내에 들어와 있는 서양인들의 눈에는 주인이 없고 외국인을 보자마자 크게 짖는 동네 개는 야만적인 일본의 표상으로 비추어졌다. 이에 서구식 근대화를 추구하는 데 급급하였던 메이지 정부는 이른바 개의 “문명화” 시도를 전개하였다(仁科邦男, 2019: 7, 237-246). 물론 이보다 더욱 직접적인 요인은 광견병 방역을 위한 것이었다. 가령 1873년 도쿄부에서 「축견규칙」을 반포하였을 때 내린 공문에서는 이 법령 제정의 의도를 아래와 같이 분명히 밝히고 있다.
“동네 개의 광병(狂病,광견병)은 짧은 시간에 여러 개에게 옮기고 또 사람을 교상한다. 이 독에 감염되면 죽음에 이르는 경우도 있어 가히 무서운 일이다. 근래 주인이 없는 야견이 널리 퍼져 있어 자연재해가 날로 증가하는 바이므로....”(警視局書記課編纂, 1879: 407).
이를 통해 「축견규칙」의 반포에는 광견병 방역의 목적이 가장 핵심적이고 직접적인 요인이었음을 충분히 알 수 있다.
「축견규칙」은 공공위생과 문명화의 명분 하에 반포, 실시되었지만 개의 존재 양태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이 법령은 개인이나 특정한 가정에서 사육하는 축견에 법적 지위를 부여하여 그 범주를 명확하게 하는 동시에 기존의 주류였던 동네 개를 야견으로 내몰아 점차 없어지게 하였다(仁科邦男, 2015: 186; 2019: 6-7). 개의 사육은 이제 국가의 관리와 통제 하에 이루어져야 하며 그 범위에서 들어가지 않는 개는 문명과 상반된 야만적인 “악견(惡犬)”으로 규정하여 죽어야 할 부류로 전락해 버렸다. 실제로 「축견규칙」의 반포와 더불어 순사에 의한 이른바 “악견사냥(惡犬狩り)”이 주요 도시에서 전개되었다(仁科邦男, 2019: 246-248). 그리고 1881년 도쿄부의 경시청에서 축견취체규칙(畜犬取締規則)(개정)을 반포하여 축견 단속에 대한 경찰의 권한을 명시하였다.
한편, 광견병은 점차 국가 공공위생의 관리 대상으로 편입되었다. 1893년 3월 일본 정부가 「수역예방법(獸疫豫防法)」(법률 제6호)을 제정, 반포함에 따라 광견병은 처음으로 우역과 탄저 등 기타 가축전염병과 같이 법정전염병으로 지정되었다. 이에 따라 국가는 광견의 판정과 예방을 책임지는 주체가 되었으며 해당 경비와 수당금까지 국고로 부담하게 되었다. 이는 광견병이 기존에 주로 축견 주인이 책임졌던 것에서 국가가 관리, 통제하는 공공위생 문제로 전환되었음을 의미한다(山脇圭吉, 1935: 118).그 결과, 광견병의 주된 숙주인 개에 대한 통제 역시 강화되었다. 광견으로 판단되는 축견에 대해서는 소유자나 관리인이 경찰관, 수의사 또는 검역위원의 지휘 아래 박살하도록 규정하여 광견의 살처분을 철저화하였다(山脇圭吉, 1935: 118).
이 법은 1922년 4월 「가축전염병예방법(家畜傳染病豫防法)」(법률 제29호)으로 개정되어 광견병에 관한 조치가 더욱 강화되었다. 우선, 개뿐만 아니라 광견병에 걸린 모든 가축을 박살 대상으로 포함하였다. 무엇보다 축견 관련 규정으로 “지방장관이 광견병 예방상 필요가 있다고 판단할 경우, 경찰·관리에게 도로, 공원, 신사·사찰, 묘지 등 기타 장소에서 배회하는 개들을 억류하도록 명할 수 있으며 경찰, 관리가 이 규정에 따라 개를 억류할 경우, 개의 소유자나 관리자에게 수령할 것을 통보해야 하고…(소유자나 관리자가) 해당 기간 내 개의 반환을 청구하지 않을 때, 지방장관이 개를 처분할 수 있다.” 등의 내용을 새로 추가하였다(山脇圭吉, 1937: 24-25, 32-33). 이는 광견병 방역의 명목으로 주인이 없거나 명확하지 않은 유랑견에 대한 단속을 한층 강화하는 것이었다(山脇圭吉, 1937: 47-48).
한편, 1893년 나가사키에서 시작되었던 광견병 유행17)을 계기로, 나가사키병원 내과의장 쿠리모토 토우메이(栗本東明)의 주도하에 파스퇴르의 인체 백신 접종을 시행하기 시작하였다(田中丸治平, 1917: 28). 동년 8월, 쿠리모토는 파스퇴르 백신법에 따라 25명의 환자에게 백신을 접종한 결과, 단 한 명도 발병하지 않았다. 이는 일본의 광견병 백신 접종의 효시가 되었다. 하지만 파스퇴르 백신은 어디까지나 인체 백신이고 광견에 물린 자에 대한 사후 조치로 광견병의 주된 숙주인 개에게는 주사할 수 없어 인수공통전염병인 광견병을 원천적으로 예방하기 어렵다는 한계가 있었다. 게다가 백신 접종이 전국적으로 널리 보급되지 않았기 때문에 뚜렷한 효과를 보이지 않았다(故佐藤悠次郞紀念會編, 1920: 256).
이런 한계를 돌파하기 위해 일본 수의학계는 연구를 계속 진행하였는데, 1915~1921년 사이에 오시다 도쿠로(押田德郞), 우메노 신키치(梅野信吉), 곤도 쇼이치(近藤正一, 농림성 수역조사연구소 기사) 등이 가축용 광견병 백신 개발에 성공하면서 일본은 개에 대한 백신 접종도 가능하게 되었다. 특히 곤도 쇼이치의 백신은 토끼를 사용하는 기존의 방식과 달리 개의 뇌척수에서 바이러스를 채취하는 것으로 더욱 안전하며, 보다 저렴한 가격으로 대량 생산이 가능하였기 때문에 서양으로도 많이 수출되었을 만큼 세계적으로 유명하였다고 평가되었다(山脇圭吉, 1935: 20-28).
가축용 광견병 백신의 등장은 일본 광견병 방역 체제의 틀이 형성되었음을 의미한다. 당시 서양 각국의 상황을 종합하여 볼 때 광견병에 관한 대응책으로는 크게 세 가지 조치가 있었다. 첫째, 광견병의 잠재적 위험을 감소시키기 위해 축견의 등록, 납세 등 제도를 통해 축견의 수를 줄이고, 주인이 없는 개를 야견으로 간주하여 광견병의 위험이 있다고 판단할 경우 가차 없이 박살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둘째, 목줄과 입마개의 착용을 의무화함으로써 개의 활동을 제한하고 이에 따른 광견병 전파를 차단하는 것이었다. 셋째, 인간과 개를 대상으로 각각 해당 백신 접종을 실시하는 것이었다. 1920년을 전후하여 가축용 광견병 백신의 접종을 실시하면서 일본은 상술한 모든 방법을 동원한 전방위적인 방역 체제망을 구축하였다(李若文, 2013: 48). 이처럼 일본에서 형성된 광견병 지식과 방역 체제는 일본의 대외 확장에 따라 대만과 조선 등 식민지로도 이전되었다.18)
앞서 지적한 것처럼 근대 일본의 광견병 방역 체제는 자생한 것은 아니었다. 사실상 일본은 1902년에 광견병을 이미 근절시킨 이른바 “광견병의 청정국(淸淨國)”인 영국을 모델로 삼고 독일과 프랑스 등의 제도를 참조하면서 방역 체제를 점차 구축해 나간 것이었다.19) 환언하자면 일본에서 실시되었던 조치들은 보편적인 것들이었다(田中丸治平, 1917: 153, 158). 단적으로 일본의 식민지가 아닌 중국에서도 19세기 후반부터 상하이(上海), 광저우(廣州) 등 영미, 프랑스의 조차지를 중심으로 결국 비슷한 광견병 방역체제를 수립하였다(王鵬·楊祥銀, 2018: 124-132; 張二剛, 2021: 122-132; Chien-Ling Liu Zeleny, 2022: 21-40). 이는 이러한 근대 광견병 방역 체제가 가지는 보편적 문제점을 거시적 차원에서 보다 깊이 있게 논의할 필요가 있음을 말해준다.
상술한 근대 광견병 방역 체제의 전제는 두 가지였다. 우선, 광견병이 인수공통전염병임에도 불구하고 방역의 목적은 결국 인간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점은 1927년 4월 광견병 방역 업무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일본 내무성(위생국)과 농림성간에 벌어진 논쟁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개도 가축이고 광견병은 가축 전염병이므로 당연히 농림성에서 주관해야 한다는 농림성의 주장과는 반대로, 내무성은 광견병의 예방 목적은 주로 사람에 대한 피해를 줄이기 위한 것으로 사람의 위생을 주관하는 내무성에서 맡아야 마땅하다는 입장으로 맞섰다(山脇圭吉, 1936: 552-553). 결국 논쟁에서 이긴 내무성이 주장하는 핵심은 광견병은 우역 등 기타 가축 전염병과는 달리 실제 축산에 미치는 경제적 영향이 적기 때문에 사람에 대한 보호를 당연히 우선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山脇圭吉, 1936: 557).이런 인간 중심의 사고 방식에 대해 앞서 말한 일본의 내무기사 겸 농상무기사인 사토 유지로는 1910년대에 이미 지적한 바가 있다. 그는 광견병의 예방책으로 실시되는 개에 대한 입마개 착용과 야견 박살은 동물 학대이며 교화상 문제도 있다는 항간의 비판을 의식하면서 “애초 개들의 느낌을 감안하지 않은 채 오직 인류에 끼칠 폐해를 고려한 바람에, 불쌍한 축견을 보호할 것을 망각한 결함이 존재한다고” 토로하였다(故佐藤悠次郞紀念會編, 1920: 260).
그리고 다른 하나의 전제는 방역 대책의 기조로 가능하면 개의 전체수를 줄임으로써 광견병의 위험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것이었다. 특히 해당 치료제가 없는 상황에서 광견병에 대한 사회적 공포감이 지속되는 가운데 광견병을 근절하기 위해 최대 위험요소로 여겨지는 개를 없애는 것이 근본적인 대책으로 간주되었다. 이런 논조는 일찍이 19세기 말 쿠리모토 토우메이의 발언에서 이미 보였다. 그는 1895년에 발표한 논문에서 “광견병이 발병한 것으로 판단되면 축견이건 야견이건 할 것 없이 모두 박살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20) 1920년대 이후 수의학자이자 홋카이도제국대학(北海道帝國大學) 교수인 이치카와 고이치(市川厚一)가 제기한 “축견망국론(畜犬亡國論)”은 더욱 강력한 입장을 제기하였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광견병뿐만 아니라 개를 숙주로 하는 각종 기생충 질환의 전파를 차단하기 위해 축견을 목줄로 단단히 묶고 옥외 활동을 금지하는 것이 공공위생상 당연한 의무이고 이를 어길 경우 야견으로 간주하여 박살해야 한다고 하였다. 또한 정부가 주인이 없는 야견에 대해 광견병이 유행할 때뿐만 아니라 평상시에도 철저히 박살할 것을 호소하였다(中山孝一, 1923: 286-287).
축견을 야견과 구분하는 것에 관해 주인이 있는 개에 법적 신분 지위를 부여하는 긍정적 조치로 평가하는 주장도 있지만, 그 구분의 궁극적 목적은 축견이든 야견이든 수를 모두 줄이는 데 있었다(農商務省農務局編, 1921: 32). 즉, 축견에 대해서는 등록, 축견세 부과, 목줄과 입마개 착용, 활동 제한 등 일련의 조치를 통해 주인이 개의 사육을 포기하도록 하는 반면, 야견에 대해서는 개로서 생존하는 정당성을 부정하여 대규모로 박살함으로써 광견병의 잠재적 위험요소를 최소화하자는 것이었다. 결국 이는 겉으로는 축견의 법적 신분을 부여, 보장하였던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공공위생을 명분으로 개가 생존할 권리를 약화시키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특히 주인이 없거나 축견 등록 관련 수속을 밟지 않은 개는 야견으로 규정되어 당국에 의해 박살 당하는 운명을 면치 못하였다. 또한 일각에서는 대규모 야견 박살의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축견세를 충실히 징수해야 한다고 호소하였는데, 실제로 많은 가정이 축견세를 부담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축견세의 부과 자체가 축견의 수를 제한시키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즉, 상술한 일련의 조치는 결국 개 자체의 생존 공간을 좁히려는 방향으로 귀결되고 말았다.21)
물론 이에 대해 당시 애견가들을 중심으로 이의가 제기되기도 하였다. 가령 1908년~1911년 가메이 에이자부로(龜井英三郞)가 경시청감(警視廳監)으로 지냈을 당시 도쿄부에서 축견에게 입마개의 착용을 실행하도록 명하자 애견가들은 이는 개가 입을 벌리고 호흡하는 것과 음식을 섭취하는 데 지장이 있어, 개의 정서와 생리에 부작용이 크다고 심하게 반발하여, 결국 경시청감의 교체에 따라 해당 조치가 중단되었다(警視廳衛生部編, 1938: 146-147; 中山孝一, 1923: 92; 山脇圭吉, 1936: 494).뿐만 아니라 수의 전문가들 역시 일본과 서양 사정의 상이함을 지적하면서 서양의 조치들을 그대로 적용하기 어렵다고 주장하였다. 특히 일본은 서양과 달리 예로부터 개를 목줄로 묶어 키우지도 않고 특정한 가정에 한정시켜 생활하도록 하지도 않으며 풀어서 자유롭게 이동하게 하는 경향이 강하였다고 지적하였다. 이는 목줄과 입마개의 착용에 대한 거부를 초래하였을 뿐만 아니라 야견을 축견으로부터 선별하여 박살하는 데도 많은 어려움을 주었다(山脇圭吉, 1936: 494-495).결국 이러한 상황의 ‘개선’은 정부의 강력한 행정력과 재원 투입에만 기댈 수밖에 없었다.
1925년 농림성에서 주최한 전국가축위생주임자회의를 계기로 일본 정부는 개에 대한 백신 접종, 거세, 민간개의 매입, 광견병예방주간의 실시 및 야견 박살 등 일련의 조치들을 보다 강력하게 전면적으로 추진함으로써 광견병 방역에 박차를 가하였다. 특히 광견병예방주간이라는 캠페인 실시기간 동안 가축 사육 신고, 매상, 포획, 약살·박살·무상제공률은 각각 11%, 81%, 35%, 43%나 증가하였으며 예방주사 접종률 역시 가파르게 늘어났다(唐仁原景昭, 2002: 26). 그결과, 광견 수는 1926년부터 3,000두에서 급격하게 감소하여 1934년 이후 1943년까지 매년 10마리 안팎으로 유지하였다[그림 1].
이런 ‘성과’를 거두는 데에는 가축용 백신 접종이 기여한 바가 분명히 있었다. 실제로 일본의 광견병 주무 부서나 전문 인사들은 백신 접종이 기존의 야견 박살과 축견 단속을 골자로 하는 방역 정책에 새로운 국면을 열어줄 것으로 기대하였다(故佐藤悠次郞紀念會編, 1920: 276; 農商務省農務局編, 1921: 40, 48-49). 현재 접종률과 발병률에 관한 체계적 통계 수치가 확보되지 않은 상황에서 백신 접종의 효과를 단정하기는 어렵다. 다만 간토(關東) 지방의 한 수치에 따르면 1917년~1929년 사이에 예방 주사를 맞은 축견 69만 7,957 마리 가운데 발병 사례는 231건에 그쳤으며 발병률은 0.033%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宮島幹之助, 1936: 104). 이 수치만으로 미루어 보면 가축용 백신 접종의 효과가 상당히 양호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리고 아래 <표1>에서 보듯이 특히 1920년대 중반 이후 축견의 백신 접종 두수가 급증하였는데, 당시 축견의 총 두수가 20~30만인 것을 감안하면 상당히 많은 축견이 접종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22)
비고: 괄호 밖의 수치는 전체 가축의 접종 두수, 괄호 안의 수치는 개의 접종 두수임.
하지만 주의해야 할 것은 가축용 백신의 접종은 어디까지나 축견에 한정되었을 뿐, 축견이 아닌 야견에는 실시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환언하자면 축견에 대한 접종만으로는 광견병 방역의 효과를 기대하기 어려웠다. 1925년 농림성에서 주최한 지방가축위생주임관회의록에 의하면 각 지방 위생 주무 부서가 구상한 방역 대책안은 백신 접종의 확대보다 야견 박살의 철저화에 더욱 중점을 찍었던 것으로 확인된다(農林省畜産局編, 1926: 71-97). 실제로 1926~1928년 3년간 축견에 대한 백신 접종이 광범위하게 진행되는 동시에 야견 박살도 각각 297,296마리, 200,129마리, 201,959마리를 기록하여 <표1>의 백신 접종을 받은 축견의 두수와 거의 비슷하였다(山脇圭吉, 1936: 583-585). 그리고 1928년 7월 1일~7일 전국연합광견병예방주간인 일주일 만에 매상, 포획, 약살 등의 방식을 통해 정리한 개는 무려 7만 2,759마리에 달하였다(山脇圭吉, 1936: 518-521).야견 박살에 대한 강조는 만주사변 이후까지도 지속되었다(警視總監官房文書課統計系編, 1937: 147).
이처럼, 1920년대 가축용 백신 접종의 확대는 결코 야견 박살의 대체나 축소를 의미하지 않았다. 오히려 양자는 서로 보완적인 관계로 설정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축견은 백신 접종을 받아 마치 광견병으로부터 보호받는 존재가 되고 야견은 광견병 전파의 잠재적 매개로 지목되어 무자비하게 박살을 당해야만 하는 이분법적 구도를 만듦으로써 대규모의 야견 박살을 정당화하였다. 결국 1920년대 중반 이후 이루어진 광견병 방역 ‘성과’의 이면에는 수많은 야견의 죽음이 수반되었던 것이다.

3. 전시하 동물의 군사자원화와 방역 명분하의 개의 죽음

근대광견병 방역 정책의 핵심은, 개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숙주인 개라는 전염원을 인간사회로부터 추방하는 데에 중점을 두었다. 이는 광견병 방역 대책에 있어 개는 보호 받아야 할 주체가 아니라 인간의 건강을 지키기 위해 통제 내지는 배제해야 할 대상으로 설정되었음을 의미한다. 특히 축견을 포함한 모든 개의 수를 원천적으로 제한하는 것이 광견병 방역 정책의 기조로 자리 잡고 있었다. 이것은 소, 돼지 등 경제적 가치가 높은 가축의 전염병 대책과 양상이 달랐다. 하지만 1930년대 만주사변 이후 개의 군사적, 경제적 가치가 중요시되면서 이런 상황에 변화가 일어났다.
여기서 말하는 군사적, 경제적 가치는 군용견으로의 사역과 견모피의 활용을 뜻하는 것이다. 개가 전쟁에서 군용견으로 투입, 사용된 것은 19세기부터였는데, 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군용견에 대한 세계 각국의 관심이 늘어나는 가운데 일본 역시 부국강병의 차원에서 개를 국가적 군사자원으로 중요시하기 시작하였다(山脇圭吉, 1936: 493). 일본 육군은 조사차 유럽으로 인원을 파견하여 1919년부터 군용견 연구에 착수하였으며 독일의 견종 셰퍼드(shepherd)를 수입, 개량하여 전투력이 뛰어난 군견을 확보하는 데에 힘을 기울였다(溝口元, 2018: 127; 鄭麗榕, 2014: 87). 이런 움직임은 1931년 만주사변 이후 가속화 되었다(警視總監官房文書課統計系編, 1937: 146). 일본은 1933년 지바(千葉)현에 소재하는 육군보병학교(陸軍步兵學校)와 만주 관동군에 군용견육성소를 설립하여 군용견을 중국 침략에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데 박차를 가하였다(溝口元, 2018: 54). 군이 직접 군용견을 사육하는 이외에 민간으로부터 최대한 더 많은 양질의 군용견을 확보하기 위해 1932년 군용견 전문 사육 단체인 제국군용견협회(帝國軍用犬協會)가 설립되었다. 제국군용견협회의 회원들은 군용견으로 적합한 개를 사육, 훈련하고 구매회에 출품하는데 육군이 구매회에서 매입한 개는 군용견이 된다. 이 단체는 일본 국내의 토카이(東海), 한신(阪神), 교토, 시코쿠(四國), 해외의 조선, 칭다오(靑島), 대만 등 지역에 지부를 두어 광범위한 우량종 군용견 공급망을 구축하였다(川西玲子, 2018: 25). 그리고 만주 침략 최전선에 있었던 관동군 역시 1933년 7월 다롄(大連)에 군용견협회를 설립하고 이 단체의 협조 아래 독일, 일본, 만주, 조선 등으로부터 군용견을 대량 구입하였다.23) 한편 1933년부터 각 부대에 군견반이 편성되면서 군용견을 통일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1934년 육군성 마정과(馬政課)에서 「군견관리규칙(軍犬管理規則)」을 제정하여 군용견의 보관, 보충, 구매, 번식, 육성, 운송, 관리 등 제반 업무 관련 규정을 마련하였다.24)
개가 군용견으로 활용되는 가치 이외에, 견모피의 가치 역시 갈수록 주목받았다. 일본에서는 예로부터 견모피를 방한 용도로 사용해 왔는데 이런 수요를 공급하는 전문인력으로서 이누토리(犬取り)라는 피차별민 그룹이 있었다(川西玲子, 2018: 175). 근대 이후 견모피의 활용 가치가 본격적으로 발견된 것은 1904년 러일전쟁 당시, 육군 군의관 기무라 야스오(木村泰雄)가 군대 방한 용품 생산을 위한 개가죽 가공 방법을 개발하면서부터였다. 견모피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대량의 개를 죽여야 하는데 이때 동원된 하나의 명분은 바로 기존의 광견병 방역 정책의 핵심으로 자리 잡고 있던 야견 박살이었다. 이러한 가운데 주인이 없는 개는 광견병 방역이라는 공공위생의 명분 아래 경제적 이익 추구의 타깃으로 더욱 주목받았다. 이는 일본뿐만 아니라 식민지 조선에서도 마찬가지였다. 1920년대 후반부터 인천과 평양을 중심으로 많은 견피가 일본뿐만 아니라 중국, 영국, 미국 등 해외 지역으로 수출되었다.25) 이러한 경제적 이익을 노리고 일각에서는 광견병 방역 수단의 하나로 야견 박살을 철저히 실시할 것을 주장하기도 하였다(溝口元, 2018: 54).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이후 일본은 ‘군견보국’, ‘모피보국’ 등의 구호를 내걸어 군국주의 이데올로기에 입각하여 개를 일본 제국에 봉사하는 충직한 용사로 표상화하여 개의 군사자원화를 대대적으로 추진하였다. 특히 전시하 물자의 결핍으로 인해 일본은 1938년 6월 「피혁사용제한규정(皮革使用制限規定)」, 「피혁제품판매취체규칙(皮革製品販賣取締規則)」 및 「피혁배급통제규칙(皮革配給統制規則)」을 제정, 실시하여 소, 말, 양, 돼지, 고래, 상어의 가죽에 관하여 원료의 집화, 판매, 배급 및 사용을 전면 통제하기 시작하였다.26) 다음 해는 사슴과 더불어 개의 모피 역시 사용 통제 대상으로 추가하였다.27)
이처럼 전시하의 개는 군용견으로의 사역과 모피 공급에서 모두 중요한 군사자원으로 호명되었다. 이는 개의 사회적 지위 변화를 가져왔다. 그 이전까지 개는 소, 말, 양, 돼지와 같이 가축으로 취급되었지만 그의 경제적 가치와 사회적 기여도는 기타 동물에 비해 낮았다고 간주되어 왔다(故佐藤悠次郞紀念會編, 1920: 277). 하지만 이제 개는 일본 제국을 위해 헌신하는 용사이자 충직한 제2 국민인 것처럼 인격화되었다. 다만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일본의 제국주의 전쟁에 휘말려 공연히 목숨을 잃은 것처럼, 일본 군국주의에 호명된 개들도 죽음과 희생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일제는 사회적 거부감을 고려하여 “모피헌납(毛皮獻納)”과 “군견보국” 등의 캠페인을 통해 민간의 협조를 적극적으로 끌어내도록 하는 한편 위령제의 거행, 충견(忠犬) 미담의 생산, 그리고 영웅개 기념시설의 조성 등을 통해 국가를 위한 개의 희생을 합리화하도록 하였다. 이런 작업은 일본 국내뿐만 아니라 조선을 비롯한 식민지에서도 전개되었다. 예를 들어 일본에서는 1935년부터 토종개인 아키타(秋田)견 ‘충견 하치코(忠犬ハチ公)’를 민족주의와 애국주의의 상징으로 신격화하여 대대적으로 선양하였다.28) 아키타견은 원래 군용견으로 적절하지 않다고 여겨져 왔는데 전시하 이런 관념이 깨진 것이었다(川西玲子, 2018: 113). 이처럼 일본에 충견 하치코가 있었다면 조선에는 전라북도 임실군의 이른바 “충견보국”(忠犬報國)의 미담이 있었다.
“황군의 방한을 위하여 임실군민들은 자기들의 사랑하는 개를 조금도 아까운 마음 없이 헌납(獻納)하게 되어 그 견피가 1,588매에 달하여 당군 농회에서는 지난 5일에 육군창고로 발송하였다. 그리고 보국충견희생(報國忠犬犠牲)에 있어서 박 군수(朴郡守)는 이러한 계획이 있다. ‘개는 짐승이지만 주인에게 충성이 많아 절개를 끊지 아니하며 주인을 위하여는 헌신적 희생을 아까워하지 아니한 짐승이니 요번에 나라를 위하여 임실군내에서 1,600여 마리가 희생되었으나 개의 본질적 정신에 비추어서 살해가 아님으로 그대로 둘 수가 없어 개무덤(犬塚)을 만들어 비를 세워 기념코자 하며, 또 임실에는 오수(獒樹)라는 곳이 있어서 개의 유명한 전설이 있는 곳이니 오수의 뜻이 일층[한층] 더 새로워질 것도 사실이다.’”29)
1938년 전북 임실군에서 모피헌납의 배당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약 1,600마리의 개를 박살하였다. 이에 임실군 측에서는 이는 “살해가 아니”라, 개가 지니는 인간에 대한 충성심이라는 본질적 정신에서 비롯된 결과라며 이런 행위를 합리화하기 위해 “희생”된 개들을 기리는 개무덤을 만들고 추모비를 세웠다. 뿐만 아니라 고려시대부터 전해 내려온 오수의견(獒樹義犬)30)의 설화를 재발견함으로써 대규모 학살 행위에 대해 개의 충의를 실현하는 의로운 장거로 의미를 부여하였다.
한편, 개를 군사자원으로 활용하는 물결과 반대로, 전시하 개, 고양이와 같은 반려동물의 무용설을 주장하는 목소리도 제기되었다. 대표적인 예로는 1940년 2월 일본 제75회 제국의회 중의원 예산위원회 석상에서 기타 레이키치(北皊吉) 의원이 “견묘무용론(犬猫無用論)”을 제기하였던 것이다. 기타 레이키치는 1차 세계대전 시기 독일의 사례를 예로 들면서 군용견 이외의 개와 고양이를 모두 박살하자고 주장하였으며 이렇게 하면 모피의 확보는 물론 음식도 절약할 수 있다고 이유를 들어 설명하였다(川西玲子, 2018: 129).31) 비록 기타의 주장은 당시 하타 슌로쿠(畑俊六) 육군대신과 농림성의 반대로 기각되었지만 그 파장은 쉽게 잠잠해지지 않았다.32) 1941년 4월 식량난이 심각해지자 일본에서 메이지 이후 거의 근절되었던 개고기 식용이 공식 허가를 받게 되었다(川西玲子, 2018: 153). 무엇보다 미곡배급의 실시에 따라 개의 생존 공간이 더욱 위축되어 갔다. 따라서 일각에서는 가치 있는 개와 가치 없는 개를 구분하고 후자를 박살할 것을 주장하였다.
아래 <그림 2>는 당시 군견헌납을 독려하는 홍보 만화이다. 그림에서 보듯이 군용견으로 선정되어 출진에 나서는 개는 애완견보다 훨씬 더 크고 위풍당당하게 그려졌다. 이는 개 생존 가치의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은 주인이나 개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국가에 도움이 되느냐에 달려 있었음을 은유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처럼 희생과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고 전선에 끌려가는 것이야말로 그나마 개의 무용설을 반박하고 살아남을 정당성을 입증하는 유일한 길이었다.
하지만 군용견은 아무나 쉽게 얻을 수 있는 신분이 아니었다. 품종과 특성에 대한 요구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정원 역시 제한적이었다. 따라서 군용견 선정 대상에서 제외된 수많은 개들은 박살될 운명에 처할 수밖에 없었다. 개의 대규모 박살을 정당화하는 이유로 모피헌납이라는 국가주의적 요구뿐만이 아니라 기존에 작용해 왔던 광견병 방역이라는 공공위생의 대의명분이 교묘하게 활용되었다.
전쟁 말기인 1943년부터 일본에서 그간 10년 동안 잠잠하였던 광견병이 다시 기승을 부렸음에도 불구하고 당국은 인력과 물자의 궁핍으로 방역 조치를 제대로 취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식량난에 시달려 있었던 축견 주인이 개를 많이 유기하였기 때문에 방역 상황이 심각하였다. 그 이외에 전쟁말기의 공습 위험 역시 광견 피해에 대한 우려와 공포를 가중시켰다. “공습시 폭격의 충동으로 인해 축·야견이 발광하여 시민에게 위해를 가하는 경우가 적지 않을뿐더러 광수병(狂水病, 즉 공수병), 광견병 예방제 등은 점점 부족해지고 있는 현상임으로”33) 공습을 대비하기 위해서도 대책이 필요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모피헌납과 더불어 광견병 방역의 일환으로 1944년 12월 군수성과 후생성으로부터 내려진 명령에 의해 야견뿐만 아니라 군용견을 제외한 축견에 대해서도 집단 공출과 박살이 대대적으로 이루어졌다(真辺将之, 2015: 27). 즉, 기존의 광견병 방역 정책은 축견과 야견을 구분하여 야견을 박살의 대상으로 설정하였다면 이제는 군용견을 제외한 축견도 가치 없는 개로 간주하여 야견과 더불어 박살 대상으로 포함한 것이었다. 결국 전시에 수많은 개들은 광견병 방역 논리와 군국주의의 이데올로기가 교착되는 가운데 떼죽음을 당해야만 하였다.
전시하의 이런 변화는 겉으로 보기에는 박살 대상의 확대로 해석할 수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축견을 비롯한 모든 개의 수를 제한시키는 근대 일본 광견병 방역 대책의 연장선상에서 비롯된 결과에 불과하다고 볼 수 있다. 환언하자면, 광견병 방역 대책은 공공위생의 명분을 내걸었지만 어디까지나 인간 보호를 중심으로 작동하였으며 개 생존권의 보장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축견과 야견의 구분, 그리고 전시하 군용견과 비군용견의 구분은 비록 범주에 변화는 있지만 특정 기준에서 배제된 수많은 개의 죽음을 정당화하고 도외시한 것이었다. 결국 개의 생사는 인간의 필요에 따라 결정되었으며, ‘축견’·‘야견’·‘군용견’·‘비군용견’의 구분은 인간과 동물 관계에서 드러나는 폭력성을 오히려 은폐하였다.

4. 맺음말

본 연구는 인간 중심의 역사 쓰기에 대한 성찰을 바탕으로 근대 일본의 인수공통전염병인 광견병의 방역 체제를 재검토하여 그 안에 노정(露呈)된 인간·동물 관계의 억압과 폭력의 메커니즘을 밝히고자 하였다. 동물은 역사 쓰기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어려운 여성이나 소수자보다 행위 주체로서 조명하기 더욱 힘든 대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인간 중심적 시각과 의도적으로 거리를 두어 본다면, 인간과 동물, 그리고 인간과 환경이 상호작용한 역사 풍경을 새로 조명할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생각된다.
일본은 다른 동아시아 나라와 마찬가지로 광견병에 대한 인식과 사회적 대응에 관해 오래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전근대시기에는 중국의 영향으로 전통의학의 틀에서 광견병 병인과 치료에 대한 지식이 축적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개 주인에게 광견을 단속하거나 박살하도록 하는 법적 대응도 존재하였다. 하지만 18세기 이전까지 광견병은 보편적이지도 심각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지 못하였다.
19세기 후반부터 개항에 따라 일본에서 광견병이 갈수록 빈발하게 발생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광견병은 사회적 이슈화가 되면서 개의 지위 변화와 인간·개 관계의 재편에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일본은 서양의 광견병 지식과 방역책을 바탕으로 본국의 방역 행정 및 광견병 백신 개발 실천을 통해 축견에 대한 통제와 관리, 야견 박살, 그리고 백신접종을 골자로 하는 방역 체제를 구축하였다. 일본의 광견병 방역 체제는 두 가지 전제가 있는데, 첫째, 개가 아니라 인간을 보호하는 것을 방역의 목적으로 삼는다는 것, 둘째, 축견을 포함한 모든 개의 수를 줄임으로써 광견의 위험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려는 것이었다. 이러한 방역 체제는 기존에 주류였던 동네 개를 근절시킨 대신에 국가가 통제하는 축견이라는 새로운 범주를 만들어 냈으며, 이에 배제된 수많은 개들은 광견병의 위험한 전파 매개인 야견으로 내몰려 방역의 명목으로 박살당하였다. 결국 이는 개 자체의 생존 공간을 좁히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일본의 광견병 방역 정책은 1926년 이후 뚜렷한 성과를 거두었으며 1934년 이후 광견병을 근절시키는 목표를 거의 달성하였다. 이러한 ‘성과’의 취득에는 축견에 대한 백신 접종의 확대가 기여한 바도 있었지만 이와 동시에 야견 박살로 인해 수많은 야견의 죽음이 수반되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중일전쟁 발발 이후, 일본의 광견병 방역 정책에는 변화가 일어났다. 전쟁으로 인해 개는 군견과 모피의 제공자로서 중요한 군사자원이 되었다. 이러한 배경하에, 개는 군국주의에 봉사하는 충직한 제2국민으로 표상화되어 호명 받았다. 하지만 개들에게 이는 죽음을 의미하였다. 전시 식량난과 방공(防空) 등 시국적 원인으로 군용견으로 선정된 개를 제외하고 축견이든 야견이든 모두 기존에 내걸어 오던 광견병 방역이라는 공공위생의 명분과 전시하의 군국주의 이데올로기가 교착되는 가운데 박살을 당해야만 하였다.
이런 상황은 전시하라는 특수 시기에 벌어진 사정인만큼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지적을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유의해야 할 것은, 전쟁 이전 축견이 아닌 야견에 대한 박살과 전시하 군용견을 제외한 축견·야견의 박살은, 비록 대상이 달라졌지만, 축견과 야견, 군용견과 비군용견의 차별 구조를 만듦으로써 수많은 개에 대한 학살의 폭력성과 임의성을 정당화하려는 수단은 같았다는 사실이다. 이처럼 일정한 차별화의 장치를 통해 결국 온 사회를 집단무의식 상태로 무력화시키는 근대 권력 규율의 메커니즘은 오늘날 여전히 경계할 필요가 있다.

Notes

1) 한국에서는 개의 광견병만을 ‘광견병’이라고 부르고, 다른 동물에 관해서는 ‘소 광견병’, ‘너구리 광견병’처럼 해당 동물 이름에 광견병을 붙여 부르고 있다. 그리고 광견병에 감염된 환자가 물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사람이 걸린 경우에는 ‘공수병(hydrophobia)’으로 부르거나 또는 광견병 바이러스의 속명을 따서 ‘Lyssa’라고 부르기도 한다(문운경, 2013: 71참조). 이 글에서는 특정한 사료 인용 부분에서만 ‘공수병’을 쓰고 나머지는 모두 ‘광견병’으로 통칭하고자 한다.

2) 대표적인 연구는 다음과 같다. 唐仁原景昭, 「わが国における犬の狂犬病の流行と防疫の歴史」, 『日本獸醫史學雜誌』 39 (2002), 14-30쪽; Brett L. Walker, The Lost Wolves of Japan(Seattle: University of Washington Press, 2005), ch.3; アーロン·スキャブランド, 『犬の帝國」: 幕末ニッポンから現代まで』(東京: 岩波書店, 2009), 제2장(영문판, Aaron Herald Skabelund, Empire of Dogs: Canines, Japan, and the Making of the Modern Imperial World(New York: Cornell University Press, 2011), ch.2); Shuk-Wah Poon, “Dogs and British Colonialism: The Contested Ban on Eating Dogs in Colonial Hong Kong,” Journal of Imperial and Commonwealth History42(2014), pp. 308-328; Ying-kit Chan, “The Great Dog Massacre in Late Qing China: Debates, Perceptions, and Phobia in the Shanghai International Settlement,” Frontiers of History in China 4 (2015), pp. 645-667; 王鵬·楊祥銀, 「疾病構造史: 廣州狂犬病的社會起源」, 「學術硏究」 6 (2018), 124-132쪽; 張二剛, 「近代上海狂犬病防疫下的犬類管控」, 『曁南學報(哲學社會科學版)』 2 (2021), 122-132쪽; Chien-Ling Liu Zeleny, “From Chi-gou 瘈狗 to Chi-bing 瘈病(From ‘Mad Dogs’ to Rabies) Pastorians and Public Health in Republican China,” International Review of Environmental History 8 (2022): pp. 21-40; 천명선, 「일제강점기 광견병의 발생과 방역」, 『의사학』 27-3 (2018), 323-355쪽. 그중 일본 광견병의 전문적 연구로는 唐仁原景昭의 연구가 대표적인데,이 연구는 통시적 사실을 확인하는 데 도움이 되지만 뚜렷한 문제의식이 보이지 않는다. 한편, 중국의 연구는 아직 상하이, 광저우, 홍콩 등 조차지인 항구 도시를 중심으로 한 사례 연구에만 머물고 있어 전체상을 확인하기가 아직 어려운 실정이다.

3) 「한반도 동물도 일본의 잔혹함에 눈물을 흘렸다」, 『한국일보』, 2019년 8월 17일,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201908081095352304; 「‘일제가 민족정기 끊기 위해 조선 토종개 말살’ 주장은 거짓」, 『한국일보』, 2019년 5월 17일,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201908081095352304. 검색일: 2022. 9. 12.

4) 서양의 동물사 연구는 1980년대 이후 등장하기 시작한 것으로 역사학계의 70년대 ‘문화로의 전환(the cultural turn)’과 80년대 ‘언어학으로의 전환(the linguistic turn)’의 뒤를 이은 새로운 패러다임 전환의 산물이었다. 특히 2016년 11월 미국의 대표적 동물사학자인 Dan Vander-sommers가 미국역사학회(AHA) 기관지 Perspectives on History에 “The ‘Animal Turn’ in History”라는 글을 게재하여 사학계의 ‘동물로의 전환(Animal Turn)’을 공식적으로 선언 하였다(Dan Vandersommers “The Animal Turn in History,” Perspectives on History, November issue (2016)). 동물사 연구는 사회사, 정치사, 경제사, 도시사, 환경사, 사상사, 문화사, 의료사, 지구사 등 많은 영역에 걸쳐 이루어지고 있다. 관련 연구 성과는 Mieke Roscher, André Krebber and Brett Mizelle ed, Handbook of Historical Animal Studies (Berlin:De Gruyter Oldenbourg,2021)를 참조할 것. 최근 한국에서도 동물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지만 동물사 연구는 아직 소개, 시작 단계에 머물러 있는 상황이다(송충기, 2018: 212-241 참조).

5) 서양에서 고대로부터 동물 윤리에 관한 다양한 논의가 있었다. 이와 관련하여 Tom Regan and Peter Singer ed, Animal Rights and human obligations (Englewood Cliffs, N. J.: Prentice Hall, 1976)를 참조할 것.

6) 싱어는 이익 평등 고려의 원리를 동물에게까지 일관되게 적용함으로써 육식, 공장식 축산, 동물 실험 등을 종차별주의로 규정하고, 그런 관행으로부터 동물을 해방할 것을 주장한다. 그리고 그러한 동물 해방의 실천 방안의 하나로서 윤리적 채식주의를 제창한다(류지현, 2022: 95). 싱어의 주장이 유명한 만큼 그에 대한 비판도 적지 않다.

7) 이와 관련하여 프랑스혁명시기 동물 권리 관련 사회적 논의를 다룬 피에르 세르나(Pierre Serna)의 L’Animal en République:1789-1802, Genèse du Droit des Bêtes (Paris: Anacharsis, 2016)를 참조할 것.

8) 중국 전근대 문헌에서 개의 발광을 가리키는 한자로는 ‘瘈’, ‘狂’, ‘癲’, ‘瘋’, ‘猘’, ‘狾’ 등의 글자가 있다.

9) “諸畜産及噬犬有觸蹹齧人, 而標識羈絆不如法, 若狂犬不殺者, 笞四十. 以故殺傷人者, 以過失論. 若故放令殺傷人者, 减鬪殺傷一等.” (劉俊文撰, 1996, 畜産觸蹹齧人).

10) 「大明律」, 卷第十六, 兵律, 廐牧, 1723.

11) 丹波康賴, 「醫心方」, 卷第十八, 治凡犬嚙人方第二十五. 물론 일본이나 조선의 의서들은 본국의 임상 경험과 상관없이 중국의 것을 그대로 반영한 경우가 많았다(唐仁原景昭, 2002:16).

12) 「살생금지령」은 1709년 도쿠가와 쓰나요시가 사망하자마자 곧 폐지되었다. 「살생금지령」과 관련하여 仁科邦男, 『「生類憐みの令」の眞實』(東京: 草思社, 2019) 참조.

13) 메이지시대 초기 서양으로부터 근대 동물학, 수의학, 축산학이 전래되었지만 개는 말, 소, 돼지, 닭과 달리 이러한 학문의 연구 주제가 되지 못하였다. 개가 세간의 관심을 끌게 된 이유는 광견병 대책에서 비롯된 것이다(溝口元, 2018: 54).

14) 광견병은 시골에서도 발생하지만 주로 개와 야생동물 간의 전파에 한정되기 때문에 큰 유행으로 번지지 못하였다. 이와 달리 인구가 밀집하고 교통이 발달한 도회지에서는 개와 사람 간의 전파경로를 쉽게 차단하기 어려웠다(田中丸治平, 1917: 22).

15) 이는 미국, 남미 등 지역도 마찬가지였다(源宣之, 2007: 28).

16) 1910년대 일본의 내무기사 겸 농상무(農商務)기사였던 사토 유지로(佐藤悠次郞)도 일본의 광견병 근원은 해외에서 유입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故佐藤悠次郞紀念會編, 1920: 269).

17) 나가사키에서 1893년 2월부터 광견병이 발생하여 2월 2일~5월 14일 사이에 광견에 물린 자가 76명으로 그중 사망자가 10명에 달하였다. 이에 5월 17일까지 야견 687마리, 광견 48마리를 포함하여 총 735마리의 개를 박살하였다(山脇圭吉,1935:102).

18) 식민지 조선과 대만의 광견병 방역 체제의 형성에 대해서는 각각 천명선(2018:323-355)과李若文(2013: 31-71)의 연구를 참조할 것.

19) 山脇圭吉, 1936: 371; 「巴里犬稅丿收額」, 『官報』, 1890年 12月 5日; 「畜犬稅」, 『朝日新聞』, 1897年 12月 9日; 田中丸治平, 1917: 1, 153-158.

20) 栗本東明, 「狂犬病毒動物試驗及人體注射治療成績(承前)」, 『中外医事新報』 373(1895), 26쪽.

21) 栗本東明, 「狂犬病毒動物試驗及人體注射治療成績(承前)」, 『中外医事新報』 373(1895), 26쪽; 「畜犬稅」, 『朝日新聞』, 1897年 12月 9日; 李元善譯, 「癲豊狗之硏究」, 『同濟雜誌』 4(1922), 30쪽.

22) 농림성의 한 통계에 의하면 1927년 일본의 축견 수는 270,666만 마리인 것으로 확인된다(山脇圭吉, 1936: 594-595).

23) ‌‌ 「日僞政情: 日軍用犬協會, 分配軍用犬服務(大連特訊)」, 「東北通訊」 2-6 (1934), 8쪽; 「日僞在德購到大批軍用犬: 雙方合購二千餘頭」, 「東北消息匯刊」 1-1 (1934);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 Ref. C01003422300, 「軍犬整備に關する件」(防衛省防衛硏究所), 1938年 2月.

24)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Ref. C01001343100, 「軍犬管理規則制定の件」(防衛省防衛硏究所), 1934年 1月.

25) 「仁川港から犬の皮の輸移出, 八月までに四萬圓」, 『朝鮮新聞』, 1928年 9月 21日; 「平壤の犬の皮非常な勢で輸出, 滿洲狼の皮の化けて對外貿易の主要地位」, 『朝鮮新聞』, 1930年 1月 10日; 「工商部訓令: 准外交部函送駐仁川領事館報告仁川港犬皮輸出情況足賢參考令仰知照由」, 『檢驗月刊』 3 (1930), 39-40쪽.

26)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Ref. A05032337100, 「皮革需給調整に関する件」(臨時物資調整局第5部長より)(国立公文書館), 1938年 6月 29日;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 Ref. A16110344600, 「一.皮革使用制限規則改正ニ関スル件」(国立公文書館), 1939年 7月 21日.

27)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Ref. A16110344600, 「一.皮革使用制限規則改正ニ関スル件」(国立公文書館),1939年 7月 21日.

28) 충견 하치코(1923~1935)는 아키타현(秋田縣) 오다케시(大館市)의 아키타견으로 충견으로 알려진 개다. 1924년 도쿄제국대학 농학부 교수 우에노 히데사부로(上野英三郞)가 기르기 시작하여, 우에노 교수 생전 현관문 앞에서 우에노 교수를 배웅하거나 때에 따라 시부야(渋谷)역까지 배웅을 나가곤 하였다. 우에노 교수 사망 후 도쿄의 시부야역 앞에서 약 9년 동안 주인을 기다린 것으로 알려졌다. 관련 논의는 溝口元, 2018: 49-57 참조.

29) 「毛皮獻納에犧牲된 개무덤(犬塚)을 建設,任實의 忠犬報國佳話」, 『每日申報』, 1938년 2월 11일; 「毛皮報國犠牲의 犬魂碑除幕式」, 『每日申報』, 1938년 4월 27일.

30) 거령현(居寧縣) 사람 김개인(金蓋仁)이 외출하였다가 술에 취해 길가에 쓰러져 잠이 들었는데 들에서 난 불이 점점 번져오자 개가 몸에 물을 묻혀서 주변의 불을 끄고 죽었다. 김개인이 잠에서 깨 개가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것을 고맙게 여겨 묻어주고 지팡이를 꽂아서 표식을 해 두었는데, 이 지팡이에서 싹이나 나무가 되었다. 그래서 이 땅이름을 오수(獒樹)라고 하였다(「次義狗行」, 「東埜集卷之三· 歌行」, 한국고전종합DB, https://db.itkc.or.kr/dir/item?itemId=MO#/dir/node?dataId=ITKC_MO_1101A_0040_020_0160. 검색일: 2022. 9. 16.

31) 1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에서도 EvanO’Neil Kane 박사가 비슷한 주장을 제기하여 커다란 사회적 파장을 불러일으켰다(United States. Congress, Congressional Record 56-2, U.S. Government Printing Office, 1918; 羅羅, 「論豢犬者之應課稅」, 『東方雜誌』 16-12 (1918), 83-84쪽).

32) 당시 중국 언론도 이 사건을 보도하였다(「日本議會的幽黙」: 日本議員創議殺盡全國猫犬以節民食」, 「良友」154(1940), p.27; 「日本議員提議殺盡全國犬猫」, 『東方雜志』.

33) 「畜野犬撲殺施行」, 『每日新報』, 1945년 4월 12일; 「畜野犬撲殺施行」, 『每日新報』, 1945년 4월 18일.

그림 1.
일본 전국 광견 발생 두수 추이(1897~1957)
Figure 1. Change in Number of Rabid Dogs in Japan (1897~1957)
kjmh-31-3-579f1.jpg
그림 2.
견과 견
Figure 2. Dog and Dog
kjmh-31-3-579f2.jpg
표 1.
1919~1927년 일본 가축(개)용 광견병 백신 접종 두수(단위: 마리)
Table 1. Number of Domestic Animals (Dogs) Vaccinated against Rabies in Japan from 1919 to 1927 (number of head)
연도 접종 두수
1919 41,720 (41,718)
1920 26,103 (26,103)
1921 51,745 (51,744)
1922 58,221 (58,141)
1923 88,554 (88,470)
1924 194,177 (194,177)
1925 254,096 (254,067)
1926 234,689 (234,680)
1927 209,035 (209,033)

(農林省畜産局编, 1939: 32)

비고: 괄호 밖의 수치는 전체 가축의 접종 두수, 괄호 안의 수치는 개의 접종 두수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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