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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J Med Hist > Volume 30(1); 2021 > Article
조선 의관 허준의 두창 의학과 ‘변증(辨證)’†

Abstract

In this research, I have tried to overview the diagnosis and treatment of smallpox performed by Heo Joon, a representative physician of Joseon (朝鮮) dynasty. In order to accomplish this, I analyzed the smallpox related contents shown in the Essentials of Smallpox translated in Korean (諺解痘瘡集要) and a comprehensive medical book Treasured Mirror of Eastern Medicine (東醫寶鑑), both written by Heo Joon. In examining these sources, I found out that Heo Joon used a medical method called ‘Syndrome differentiation (辨證)’ in treating smallpox. Next, I compared the medical cases of smallpox left behind by physicians before and after Heo Joon, so as to shed light on the meaning Heo Joon’s smallpox medicine has in the history of medicine.
Heo Joon read the Compendium of Smallpox (瘡疹集) published by the Joseon government and medical books newly imported from Ming (明) China, in order to write the Essentials of Smallpox. His goal was to concentrate all the knowledge related to smallpox in just one book. One aspect that was considered was that this book’s target reader did not know anything about smallpox and could not read the Chinese letters. Heo Joon, to solve this problem, collected and organized the essentials of previous medical information and at the same time provided Korean translations.
For Heo Joon, the main point of smallpox medicine was to discriminate the good or bad state of prognosis through the looks and colors of the smallpox, and to distinguish the lightness or heaviness of the symptoms through the concomitant symptoms. And such thoughts materialized into judging deficiency and excess, distinguishing concomitant symptoms, and discriminating similar symptoms. Not long after the Essentials of Smallpox was published, Treasured Mirror was published. As a comprehensive medical book that covered many diseases, Treasured Mirror had to have a coherent theoretical system on diagnosing diseases and treating them. What Heo Joon regarded as the most important content, namely discrimination and distinguishment of the looks and symptoms of smallpox, was included in Treasured Mirror in the name of ‘Syndrome differentiation (辨證)’. There are not any specific Heo Joon’s medical case left today, so we do not know how much his smallpox medicine contributed to uplifting the cure rate of smallpox in reality. However, comparing the case in the Compendium of Smallpox to case recorded by later physicians such as Park Jinhee (朴振禧), Ryu Sang (柳瑺), syndrome differentiation proposed by Heo Joon was not only succeeded by physicians of later generations but also contributed greatly to the success in treating smallpox.
Heo Joon did not know about the pathology, causes of the smallpox, discovered by biomedicine. Even considering this, his medical contribution is clear. Based on the visible symptoms of smallpox and medical accomplishments of the previous eras, he organized and compactly proposed the causes, progression, distinguishing concomitant symptoms, treatments for symptoms development, etc. of the smallpox. In addition, in order to overcome the limit of simple symptomatic treatment, he entitled the chapter of medical thought of analysis symptoms ‘syndrome differentiation’ present in the previous medical books. It was the advent of Joseon’s edition of smallpox medicine based on syndrome differentiation.

1. 시작하는 글

2020년 3월 세계보건기구(WHO)는 코로나 19(COVID-19)의 세계적 대유행, 펜데믹(pandemic)을 선언했다. 2019년도 12월 중국 우한(武漢)에서 시작한 유행병의 기세가 1년이 넘도록 이어지고 있다. 백신이 개발됐고 접종이 시작됐다는 낭보가 들려오지만 언제쯤 일상이 회복될지 알 수 없다. 전염병은 과거에도 있었다. 상한(傷寒), 온역(瘟疫), 대두온(大頭瘟), 하마온(蝦蟆瘟), 두창(痘瘡), 마진(麻疹) 등 갖가지 전염병이 유행했다. 유행병이 돌면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그 중 일부는 끝까지 살아남았다. 누군가가 살아남았다는 것은 전염병을 치료한 의사가 있었음을 시사한다. 그는 누구였으며 어떻게 전염병을 치료했을까?
조선을 대표하는 의사로 허준(許浚, 1539-1615)을 꼽는다. 허준은 정1품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라는 최고 관직에 추증된 실력 있는 의사였을 뿐 아니라 『신찬벽온방(新纂辟溫方)』, 『벽역신방(辟疫神方)』 등과 같은 수권의 의서를 편찬한 의학자이기도 했다. 1590년 12월 허준은 두창, 곧 천연두에 걸린 왕자를 마주했다. 치료 도중 세 번이나 의식을 잃었지만 세 번의 투약으로 위기를 넘겼으며 결국 평소대로 회복시킬 수 있었다.1) 성공적이었던 왕자의 두창 치료는 허준에게 당상관(堂上官)의 지위를 가져다주었다. 뿐만 아니라 두창 전문 의서, 『언해두창집요(諺解痘瘡集要)』의 편찬 계기를 마련해주기도 했다. 허준의 두창 치료는 우연이었을까 아니면 재현 가능한 의학적 치료였을까?
주지하다시피 현대 의학의 지배 담론은 생의학(biomedicine)이다. 생의학은 세균이나 바이러스 등과 같은 특정 물리적 원인이 질병을 일으킨다는 질병관을 가지고 있다(최종덕, 2020: 195). 이에 따르면 천연두, 두창을 일으키는 원인 물질은 바리올라 바이러스(Variola virus, VARV)이며 백신 접종을 통한 예방과 말보란(Marboran) 등의 항바이러스제를 활용한 치료가 가능하다. 1979년 12월, 세계보건기구는 1967년부터 개시된 전 지구적인 퇴치 프로그램에 힘입어 천연두의 종식을 선포했다(Antonio Alcami, Bernard Moss, 2010: 3-4; John W Huggins, Nina Tikunova, 2010: 106). 천연두 퇴치의 기반이 된 제너(Edward Jenner, 1749-1823)의 우두 접종은 두창 의학의 전환점이었을 뿐 아니라 두창에 대한 의학의 승리를 견인한 중요 계기였다(재컬린더핀, 2006: 229-230). 한국 두창 의학 역사에 있어서도 지석영(池錫永, 1855-1935)의 우두 접종, 대한 제국 정부의 종두 규칙 선포, 일본 식민 정부의 강제적인 우두 접종을 통한 두창 억제 등은 집중적인 조명을 받고 있다.2)
두창은 홍역, 콜레라와 함께 조선 시대를 통틀어 가장 관심을 받았던 질병이자 정부에서 집중적으로 관리하던 질병이었다.3) 일찍부터 두창 전문 의서 『창진집(瘡疹集)』(1457)이 편찬되어 의관 선발에 활용됐으며 중종 무렵에는 한글로 풀이되어 배포되기도 했다(三木栄, 1973: 56-57). 심지어 세조 2년(1456)에는 전국적으로 두창에 걸린 사람을 조사해 잡역(雜役)을 면제해 주기도 했다.4) 두창은 조선 전역 뿐 아니라 왕실 안에서도 유행했다. 태종의 아들 성녕대군 이종(李褈, 1405-1418)은 두창에 의해 사망한 첫 번째 왕족으로 『조선왕조실록』 중에 기재되어 있다.5)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조선 전기의 세종, 세조, 연산군, 중종 뿐 아니라 후기의 선조, 숙종, 영조의 아들과 딸, 심지어 숙종 본인과 숙종의 부인 역시도 두창에 걸렸다. 그 중 선조의 삼남 의안군과 신원이 밝혀지지 않은 두 딸 그리고 광해군의 아들은 두창에 걸려 사망했지만, 영창군과 신원이 밝혀지지 않은 아들 한 명은 가까스로 살아남았다. 반면 숙종 이후에는 두창에 걸린 대부분의 왕족들이 살아남았다. 숙종 본인과 두 번째 중궁, 숙종의 세자, 아들 연잉군과 연령군 뿐 아니라 영조의 세자, 세손, 영조의 딸 화평옹주와 화완옹주 등은 모두 살아남았다.6) 『조선왕조실록』은 방대한 역사 기록물이지만 모든 왕족의 진료 기록을 수록하고 있지 않을 뿐 아니라 두창(瘡疹)과 돌림병(疫)을 엄격히 구분하지 않아 의학 기록으로서의 신뢰성은 높지 않다. 그렇지만 두창에 걸린 왕족 다수가 사망한 선조 무렵과 달리 숙종 이후에는 대부분이 호전됐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어 모종의 의학적 조치가 존재했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갖게 한다.
생의학 도입 이전의 두창 의학은 어떻게 살펴져야 할까? 야마다케이지의 지적대로 중국 의학은 기(氣)의 자연 철학 중에 그 이론적 기초가 위치 지어져 있다. 현대 의학에서 적용되는 의학적 진단과 치료 기준을 그대로 적용하면 해당 내용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는 곤란함을 마주할 수 있다(야마다케이지, 2018: 13-14). 따라서 중국 또는 한반도에서 이뤄진 두창과 관련된 의학 경험이나 의학적 논의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당대인의 관점을 견지할 필요가 있다. 한반도 질병의 역사를 선구적으로 살펴보았던 연구자는 미키사카에(三木榮, 1903-1992)였다. 그는 온역은 티푸스(typhus), 두창은 천연두(variola vera), 마진은 홍역(morbilli)에 대한 기록으로 간주했으며, 당독역에 대한 허준의 설명은 성홍열(scarlatina)에 대한 보고로 특정했다(三木榮, 1962: 1-123). 과거의 전염병 기록을 현대의 그것과 동일시하는 그의 접근 방식은 어느 정도 성과를 거뒀지만, 현재의 관점에서 역사적 사실을 재단하는 문제점을 지니고 있던 만큼 적극 계승되지는 않았다. 최근에는 김성수, 김호에 의해 당대인들의 관점에 기반한 한반도 질병의 역사가 새롭게 서술됐으며(김성수, 2009: 113-210; 김호, 2009: 211-317), 신동원은 질병 개념의 변천이라는 문제 의식을 토대로 ‘근대성(modernity)’에 대한 논의를 끌어내기도 했다(신동원, 2013: 216-264). 한편 조선 전기의 관찬 두창 의서 『창진집』 외에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두의(痘醫) 박진희(朴振禧, ?-?)와 류상(柳瑺, 1643-1723) 그리고 인두술을 도입한 이종인(李鐘仁, 1759-1823)의 의학에 대한 검토는 한의학 전공자들에 의해 시도됐다(김성수, 2010; 김상현, 2016; 김상현, 2020; 고대원 외, 2012; 김동율, 조학준, 2017; 박훈평, 2019). 안타깝게도 『창진집』과 박진희, 류상, 이종인을 매개하는 허준의 두창 의학에 대한 검토가 이뤄지지 않아 상호 간의 연관성이나 조선 시대 두창 의학의 전체적인 모습은 파악되지 못한 실정이었다. 김중권, 심현아, 김민수 등에 의해 『언해두창집요』의 서지학적 특징, 주변 의서와의 관계가 분석됐지만(김중권, 1994; 김민수, 2003; 심현아, 2017) 허준의 두창 의학이 지닌 특징이나 역사적 의미 등은 충분히 발굴되지 못했다.
이번 연구에서는 두창 전문 의서 『언해두창집요』와 종합 의서 『동의보감』 중에 담긴 두창 관련 기록을 토대로 허준의 두창 의학에 드러난 특징을 분석해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먼저 허준과 당대 의사들이 수행했던 두창 치료의 실제 기록을 살펴본 뒤 그들의 두창 진료가 어떤 식으로 이뤄졌는지 관련 의서를 토대로 분석했다. 이어 허준의 두창 의학에서 드러나는 주된 특징을 증상에 대한 변별(辨)과 구분(分) 또는 변증(辨證) 중심으로 살펴보고,7) 그 성과가 『창진집』과 어떤 차이를 보이는지 그리고 후대 의가들에게 어떻게 계승되어 갔는지 확인했다. 두창의 종식이 선언된 지금, 허준의 두창 의학이 지닌 의학적 효용성은 거의 없다. 다만 두창을 일으키는 바이러스의 존재를 인식하고 이를 예방하는 백신이 등장하기 이전, 한반도에서 이뤄졌던 두창에 대한 진단과 치료를 반추해봄으로써 코로나 펜데믹 하에 고군분투하는 현대 의학의 모습을 되짚어 보는 계기로 삼고자 한다.

2. 허준과 당대 의사들의 두창 치료 그리고 『언해두창집요』

  • “지난 해, 왕자가 두창에 전염되어 병세가 순조롭지 않았음에도 세속의 금기에 얽매여 감히 약을 쓰지 못했습니다. 의관들은 손을 놓은 채 증세가 다하기만을 기다렸습니다. 성상께서는 왕자가 비명에 돌아가신 것을 가슴아파하고 약을 쓰지 않은 것을 후회하셨습니다. 경인년(1590) 겨울, 왕자가 다시 이 병에 전염되었습니다. 성상께선 지난 일을 기억하시고 특별히 신에게 명하시어 약으로 치료하게 하셨습니다. 당시에는 한사가 맹위를 떨치고 있었고 열독이 한곳으로 몰려 험악한 증상이 잇따라 발생했습니다. 조정 안팎의 사람들 모두 약 때문에 그리되었다고 손가락질 했습니다. 병세는 점점 더 위급해지고 사람들의 비난은 흉흉해졌지만 성상의 결단은 더욱 확고하여 보다 시급히 조치할 것을 질책하셨습니다. 신은 성상의 뜻을 받들어 신령스러운 영약(靈藥) 몇 가지를 찾아냈으며 서둘러 세 번을 투여해 세 번 모두 일어나도록 했습니다. 순식간에 험악한 증상이 사라지고 정신이 맑게 돌아왔으며 오래지 않아 완전히 회복했습니다.”8)

위의 인용문은 허준이 편찬한 두창 치료 전문 의서 『언해두창집요』 발문 중에 실려 있다. 그에 따르면 1588년 한 왕자가 두창에 걸렸다. 두창신을 자극하지 않도록 약물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무속적 금기에 휘말려 투약은 시도조차 하지 못했다.9) 10살을 갓 넘긴 채 세상을 뜬 왕자는 선조의 삼남 의안군(義安君) 이성(李珹, 1577-1588)이었다.10) 2년 뒤 또 다른 왕자가 두창에 걸렸다. 의안군 뿐 아니라 그 여동생까지도 두창으로 잃은 상황이었다.11) 두창신의 위세에 눌려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선조는 의관 허준에게 치료를 요구했다. 주변의 따가운 시선을 뒤로한 채 투약을 해보았지만 병세는 점점 더 악화되어 갔으며 주변 분위기 역시 흉흉해져갔다. 인용문에서 허준은 겨우 찾아낸 약물로 병세를 호전시켰다고 기재하고 있지만 어떤 약물을 투여했는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지 않다. 발문 후반부 중에 기재된 저미고(猪尾膏)와 용뇌고자(龍腦膏子)를 사용하면 두창에 걸린 환자를 기사회생시키는 것이 그림자나 소리보다 빠를 것이라는 설명을 근거로 두 개 방제가 활용됐을 수 있음을 추측할 뿐이다. 왕자는 세 번의 위기를 무사히 넘기고 드디어 회복됐다. 소문은 금새 퍼져나갔다. 이후 허준의 처방은 수많은 두창 환자들에게서 효과를 거뒀으며 왕자와 공주 뿐 아니라 셀 수 없는 사람들의 생명을 보전했다.12)
인용문에 등장하는, 허준이 살려낸, 왕자가 누구였는지 대해서는 확실히 밝혀져 있지 않다. 광해군(光海君, 1575-1641) 또는 신성군(信城君, 1578-1592)일 것이라는 추측이 제시되어 있지만 근거는 부족하다. 만일 정탁(鄭琢, 1526-1605)의 『약포집(藥圃集)』 중에 수록된 광해군의 반진(癍疹) 치료 기록을 두창으로 간주하면 광해군은 배제된다. 전쟁이 한창이던 1592년 12월 15일, 세자 광해군의 병세가 수상했다. 의관 이공기(李公沂), 남명응(南應命), 김중부(金仲孚)가 진찰을 해보니 두통, 발열, 기침이 있었다. 삼소음(蔘蘇飮)이 투여됐다. 광해군이 아직 ‘반진(癍疹)’을 겪지 않았다는 사실은 의관들로 하여금 두창을 의심케 했다. 그리고 16일부터 발진이 시작됐다. 의관들이 바빠졌다. 매일 같이 세자의 병세를 진찰했으며 두창의 독을 해소하는 삼두음(三豆飮), 희두토홍환(稀痘兔紅丸) 등의 방제들을 투여했다. 다행히 얼굴로 옮겨갔던 발진의 수는 많지 않았다. 삼일째 되는 날부터 얼굴 발진은 가라앉기 시작했으며 21일에는 전신에 퍼져있던 발진의 절반이 감소했다. 25일이 되자 발열, 목소리 이상, 발진 등이 완전히 해소됐다. 그런데 세자의 증상이 가라앉자마자 빈궁의 증상이 심상치 않았다. 두통, 발열, 기침, 그리고 발진이 시작됐다. 세자와 마찬가지로 발진은 조밀하지는 않았다. 광해군에게 투여했던 것과 동일한 방제가 다시 한번 투여됐다. 빈궁의 발진은 5일이 지나자 안정되어 갔으며 무탈하게 회복됐다.13)
허준은 약물을 활용해 두창에 걸린 왕자를 치료했다. 왕자가 어떤 증상을 보였는지 또 어떤 약물을 투여됐는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제시되어 있지 않다. 한편 허준과 함께 의관으로 활동하던 이공기 등은 광해군의 반진을 치료했다. 발열과 인후통이 발생하고, 두면부, 가슴, 복부, 사지 등에 발진 증상을 보였지만 이환 기간이 짧고 ‘두진(痘疹)’이 아닌 ‘반진(癍疹)’으로 기재되어 있는 만큼 두창인지 여부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반진은 두창을 설명할 때도 사용되던 증상 표현이었으며14) 특히 광해군에게 투여된 방제는 반진이 아닌 두창을 전문적으로 치료하는 방제였다. 이로 미뤄볼 때 당시 의관들은 광해군의 반진을 두창으로 간주하고 치료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허준과 당시 의관들이 두창 또는 반진 치료에 사용했던 의학 지식은 어떤 것이었을까? 왕자는 의식 상실에 저미고나 용뇌고자가 활용된 것은 의학적으로 어떤 의미를 지닐까? 반진으로 판단된 광해군과 빈궁에게는 왜 두창 치료 전문 방제가 투여됐을까?
허준의 『언해두창집요』 첫머리는 두창 발생 이유로부터 시작한다. 대상 질병의 특성을 알아야 치료 대책을 세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가 지목했던 두창의 발생 이유는 태독(胎毒)과 운기(運氣)였다. 허준은 명문(命門)에 들어 있던 태독이, 소음(少陰)과 소양(少陽)이 사천(司天)하여 군화(君火)와 상화(相火)가 그 해 대부분을 주도하는 바람에, 열독(熱毒)이 유행하는 해를 만나면 두창이 발생했다고 생각했다.15) 소음과 소양의 사천, 군화와 상화의 치성함은 하늘과 땅을 채우고 있는 오운육기(五運六氣) 사이에서 발생한 자연스러운 편향이었으므로16) 뾰족한 대처 방안은 존재하지 않았다. 결국 가장 적극적인 대응책은 두창을 일으키는 소인인 태독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쓰디쓴 황련으로 태아의 입을 씻어내거나 수세미 덩굴 달인 물로 태아를 목욕시키는 것, 태아에게 탯줄을 태운 재 등을 복용시켰던 것은 모두 태독을 제거하기 위함이었다. 태독이 제거되면 두창이 발생하지 않거나 발생하더라도 목숨을 위협하는 발진은 희소하게 나타날 것이라고 생각했다.17)
두창이 시작되면 발열 초기, 붉은 점이 올라오기 전에 장부 중의 태독(胎毒)과 외부에서 들어온 사기(邪氣)가 흩어지도록 발한을 시켜야 했다.18) 문제는 일반적인 감기 뿐 아니라 상한(傷寒), 온역(瘟疫), 두창, 반진의 발열 양상이 모두 유사하다는 것이었다. 광해군 사례에서도 그랬듯이 가장 먼저 나타나는 증상은 발열이었다. 열이 올랐다가 식었다가 하는 증상을 두고 단순 감기로 치부할 것인지, 상한, 두창, 반진 중 어떤 것으로 간주하고 대응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했다.19) 환자가 하품을 하는지, 재채기를 하는지, 귓불이 차가운지, 눈이 까칠한지, 자다가 갑자기 놀라는지 등 일상의 증상을 면밀히 살펴보거나, 귀·코·엉덩이·발끝에 붉은 핏줄이 보이는지, 심장과 가슴 사이에 좁쌀과 같은 작은 점이 돋아났는지 등 신체상의 변화를 파악하거나, 데우지 않은 맑은 술을 아이 몸에 발라 벼룩에 물린 듯한 자국이 있는지 여부를 확인하는 것은 모두 두창을 빨리 감별해내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20)
두창의 변화는 3일 간격으로 기술됐다. 열이 나는 발열(發熱), 발진이 체표로 돋아나는 출두(出痘), 발진이 팽창되는 기창(起脹), 고름이 차는 관농(貫膿), 딱지가 잡히는 수엽(收靨)의 순서대로 발진의 변화상은 구분되었으며, 목소리의 변화와 통증, 허리와 배의 통증, 경련, 구토, 설사 등은 꼼꼼하게 따져졌다. 발진 이후에도 딱지가 우그러지는 도엽(倒靨), 두창이 검게 변하며 함몰되는 흑함(黑陷) 등이 나타나는지에 대해서도 빠뜨리지 않고 살펴졌다(그림 1).
치료는 시기에 따라 두창 예방, 발진 시기별 대증 치료, 수반 증상 치료, 후유증 치료로 구분됐다. 주된 치료 원칙으로 첫 번째 발진이 희소하게 올라오도록 유도할 것, 두 번째 발진이 잘 돋아날 수 있도록 비장 기운을 따뜻하게 유지할 것 등이 제시됐다.21) 발진이 희소하게 올라오도록 하기 위해서는 6일 이전에 서늘한 성질의 약물을 활용해 열을 내려주고 태독을 몸 바깥으로 몰아내는 해독의 방법을 취해야 했다.22) 앞서 광해군을 치료했던 의관들이 발병 초반에 삼소음을 적극 투여했던 것 역시 혹시나 모를 두창의 독을 해소하기 위함이었다.23) 발진이 시작된 뒤에는 두창이 충분히 돋아나 부풀어 오르고 고름이 충분히 채워질 수 있도록 관리되어야 했다. 이를 위해 성질이 따뜻하고 평탄한 약물로 비장, 위장의 기운을 북돋워 줄 것이 요구됐다. 인삼과 황기로 이뤄진 보원탕(保元湯)은 두창의 처음부터 끝까지 활용되어야 할 기초 방제였다.24) 광해군에게 투여됐던 진미음(陳米飮), 원미진미음(元米陳米飮) 역시 찬물은 절대 먹이지 않으면서 비장과 위장의 기운을 북돋으라는 치료 원칙에 입각해 처방된 치료 약물이었다.25)
허준은 저미고와 용뇌고자를 강조했다. 이 둘은 용뇌와 돼지 심장 또는 꼬리의 피를 활용해 만든 방제로 모두 두창이 검게 변하며 함몰되는 흑함 증상에 활용하는 것들이었다. 특히 저미고는 강력한 방향성으로 소통을 시키는 용뇌(龍腦)와 쉬지 않고 움직이는 돼지꼬리의 성질을 취해 두창의 독을 바깥으로 몰아내고 정신을 일깨우기 위해 조성됐다.26) 독열(毒熱)이 한쪽으로 몰려 위험한 증상이 잇따라 나타나고 의식까지 잃었다는 『언해두창집요』 「발문」 중의 기록과 저미고와 용뇌고자의 효능으로 보아 왕자가 두창이 새까맣게 함몰되는 흑함의 상황에 내몰렸고 그 때 위의 방제들을 투여해 회복시켰던 것으로 보인다. 허준과 비슷한 시대를 살았던 이수광(李睟光, 1563-1629) 역시 저미고는 두창의 함몰 상황을 치료하는 기사회생 시킬 수 있는 성약으로 허준이 처음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이후 민간에 전래되어 많은 사람들을 살려냈다는 기록을 남긴 바 있다.27)
요컨대 허준과 그 동료들은 반구진(斑丘疹, maculopapular rash)이 발생하고 유체가 채워진 수포를 생성하는 두창을 체내에 존재하던 태독(胎毒)이 외부에서 들어온 열독에 의해 발작하여 체외로 배출되는 과정이라고 간주했다. 체표에 드러나는 증상을 근거로 상한, 반진, 두창의 감별을 시도하고, 두창 증상의 변화를 근거로 발열, 출두, 기창, 관농, 수엽 등의 시기 경과를 구분했으며, 목소리 변화, 인후통, 두통, 기침, 흑함 등의 수반 증상도 빠뜨리지 않고 살폈다. 이어 대증 치료(symptomatic treatment) 방식에 입각해 개별 증상에 대응하는 약물을 투여하며 두창에 대응했다. 일부에서는 병을 일으킨 두창신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섣불리 치료하지 말고 달래서 내보내야 한다는 무속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했지만, 의관들의 두창에 대한 접근은 나름대로 의학적인 논리를 지니고 있었다.

3. 『창진집』, 『언해두창집요』, 『동의보감』 그리고 변증

1601년, 선조는 궁궐에 소장 중인 의서를 기반으로 전란으로 없어진 『태산집』, 『창진집』, 『구급방』을 다시 편찬해낼 것을 명령했다. 허준은 1년 만에 3권의 의서를 편찬하며 선조의 기대에 부응했다.
  • “신은 재주는 없으나 외람되이 성상의 명을 받들어 정성을 다해 고금의 의서를 섭렵하고 그 정수(精髓)를 가려냈습니다. 드러나는 모습과 색깔의 좋고 나쁨을 변별하고(辨) 증후의 가벼움과 무거움을 구분했으니(分), 책을 펼쳐 비춰보면 물거울처럼 환히 드러날 것입니다. 두창을 앓고 있는 집에서 이 책 하나를 얻는다면 위급함을 구하는 작은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28)

인용문에서와 같이 허준은 두창 전문 의서, 『언해두창집요』를 편찬하기 위해 먼저 옛날과 지금의 의서를 섭렵했다. 『언해두창집요』에 앞서 편찬된 조선의 두창 전문 의서로는 『창진집』이 있었다. 『창진집』은 두창과 관련된 모든 내용을 모아 한권의 책으로 만들라는 세종의 명령에 의해 편찬된 의서로 세조 무렵 임원준(任元濬) 등에 의해 수정 보완됐다.29) 원본 『창진집』의 모습을 확인할 수 없지만 임원준 등이 재편한 『창진집』이 『의방류취(醫方類聚)』 「두진(「疹痘」)」을 토대로 편찬되어 있는 만큼 원본 역시 『의방류취』의 틀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30) 현전본 『창진집』의 특징은 예방(豫防), 발출(發出), 화해(和解), 구함(救陷), 소독(消毒), 호안(護眼), 최건(催乾), 멸반(滅瘢), 통치(通治)의 항목에 따라 방약을 재구분했다는 점이다. 방약을 세밀하게 분류했다는 점에서 병론-방약-금기의 순서대로 여러 의서 중의 논의를 전재한 『의방류취』의 수준을 넘어서고 있었지만,31) 『창진집』은 분량이 많을 뿐 아니라 편찬자의 주된 관심이 방제와 약물의 정리에 있었다. 두창 치료에 두루 사용한다는 통치지제(通治之劑) 만하더라도 『태평성혜방』, 『소아약증직결』 등 28권 의서에서 뽑은 방제가 100여개에 달했다. 『창진집』의 편찬자가 방약에 대한 세밀한 구분을 시도했던 것은 뛰어난 의술을 지녔더라도 짧은 순간 다양한 증상을 보이며 변해가는 두창에 섣불리 손을 대기 어렵다는 세종의 고민을 해결하기 위함이었다.32) 그러나 전체 내용을 숙지하고 있지 않거나 방제 간 차이를 구별할 수 없다면 활용할 수 없는 전문적인 의학 정보였다. 허준 역시 백성들이 달갑게 여기지 않아 쓸모없는 글이 되어버렸다며 아쉬워했다.33)
허준은 두창 의학을 정리하기 위해 『창진집』 뿐 아니라 중국, 명의 의가 리찬(李梴), 주전헝(朱震亨), 러우잉(樓英), 위퇀(虞摶), 궁신(龔信)·궁팅셴(龔廷賢) 부자의 의서들을 섭렵했다. 그가 절대적으로 의존한 의서는 1596년, 『동의보감』 편찬 직전에 입수된 최신 의서 『의학입문(醫學入門)』(1575년 간행)이었다.34) 『의학입문』의 저자 리찬은 두창을 의학의 요체로 평가하며 소아편의 절반 가량을 두창에 할애했을 뿐 아니라 두창 부분 편찬을 위해 종합의서 『의학정전』(1531년 간행), 소아과 전문 의서 『인재직지소아방론(仁齋直指小兒方論)』, 두창 전문 의서 『문인씨두진론(聞人氏痘疹論)』, 『진씨소아두진방론(陳氏小兒痘疹方論)』, 『두진전서박애심감(痘疹全書博愛心鑑)』 등을 검토했다(이천, 2017: 2393, 2463). 허준이 접할 수 있던 최고의 두창 의서였던 셈이다. 『의학입문』 두창 부분의 핵심은 두창의 증상 분류였다. 리찬은 두창 발진의 변화 뿐 아니라 수두와 같은 유사 증상(類證), 두창에 수반되는 잡다한 증상(雜證), 두창이 변화하여 생겨난 증상(變證), 위험한 증상(壞證), 후유증(瘥證) 등을 구분하며 두창과 관련된 다양한 증상을 포섭했다. 리찬의 성과는 허준에게 그대로 승계됐다. 『언해두창집요』에서 허준은 두창의 발진 양상을 설명하는 「출두」, 「기창」, 「관농」, 「수엽」 뿐 아니라 두창의 형태를 구분하는 「변형색선악(辨形色善惡)」 대부분이 『의학입문』에서 인용됐다(김중권, 1994: 115-118). 백발백중의 효력을 자랑했던 방제 저미고의 출처 역시 『의학 입문』이었다.35) 『의학입문』 다음으로 허준이 참고한 의서는 궁신·궁팅셴 부자의 『고금의감(古今醫鑑)』이었다. 태독을 발병 원인으로 간주하고 두창을 예방하는 방법으로 태독을 해소를 제시했던 것, 두창의 증상을 발열, 출두, 기창, 관농, 수엽 등으로 구분한 뒤 그 변화를 3일 단위로 끊어 살펴보자고 했던 것, 두창의 기본 처방으로 보원탕을 제안했던 것 모두 『고금의감』을 인용한 것이었다(부록 1).36)
『창진집』과 같은 예전 의서 뿐 아니라 『의학입문』, 『고금의감』 등과 같은 당대의 의서들을 섭렵하는 것은 두창 전문 의서를 편찬하는 저자가 당연히 수행해야 할 책무였다. 그러나 의관들의 치료율을 끌어올리기 위해 전문 의학 정보를 집대성하기 원했던 세종과 달리 선조는 깊숙한 규방에 자리한 부녀자라도 그 내용을 읽고 증상에 맞춰 자유롭게 대처할 수 있길 바랬다. 한글로 의서를 풀이할 것을 요청했던 것 역시 선조였다. 전문적이면서도 대중적인, 효과적인 치료 대책을 담지하고 있으면서도 백성들에게 외면 받지 않는 의서를 편찬하기 위해 허준은 『언해두창집요』 단 한 권 중에 두창에 대한 모든 지식을 압축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서는 고금 의서의 단순한 섭렵을 넘어 두창 의학의 정수를 확보해야만 했다. 두창은 여느 전염병과 달랐다. 역기(疫氣)나 열독(熱毒)이 몸 겉에 자리하다가 안으로 들어가는 온역이나 당독역과 달리37) 두창은 체내에 존재하던 태독이 외부에서 유래한 열독으로 인해 몸 바깥으로 배출되는 질병이었다. 외과·상한 뿐 아니라 내상과 잡병, 부인의 임신과 출산(胎産), 소아의 경풍과 식적(驚積)까지도 겸하고 있었다.38) 복잡한 병증이니만큼 치료 방법 역시 다양했다. 아무리 좋은 의약 정보를 소개하더라도 구별해 낼 수 없다면 쓸모없는 글에 불과했다. 허준은 독자들이 각각의 경우에 가장 적합한 방제를 골라낼 수 있도록 복잡한 두창의 병증을 분명하게 보여줄 수 있는 ‘물거울(水鏡)’을 제공하고자 했다. 그가 포착한 두창 의학의 정수는 두창의 모습과 색깔을 통해 예후의 좋고 나쁨을 변별하고 그리고 수반되는 증후를 통해 증상의 가볍고 심함을 구분해내는 변별(辨)과 구분(分)이었다.39)
허준이 제시한 두창 변별과 구분의 방식은 첫 번째, 허실의 판단, 두 번째, 수반 증상의 구분, 그리고 세 번째, 유사 증상 마진과의 감별이었다.
먼저 발진이 시작되면 먼저 병증의 길흉(吉凶), 순역(順逆), 선악(善惡)을 구분해야 했다. 생존 여부를 파악한 뒤 치료 개입 여부를 판단하기 위한 사전 조치였다. 본격적인 치료는 허실(虛實) 구분으로부터 시작됐다. 보다 정확한 허실 판별 위해 병증 위치를 겉과 속으로 구분하고(表裏), 치료 대상이 기운인지 혈인지를 파악하고(氣血), 전반적인 성격이 음적인지 양적인지(陰陽) 분석하기를 요구하기도 했지만, 그가 제시한 허실 판단 기준은 매우 단순했다. 토하고 설사하며 밥을 먹지 못하는지 여부, 발진이 움푹 꺼졌는지 여부, 발진의 색깔이 잿빛 같이 어두운지 여부가 판단의 기준이었다.40) 두창과 상한, 모두 외부 요인에 의해 발생한 열성 전염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의학입문』, 『의학강목』 등에서 제시한 고전적인 상한(傷寒) 이론에 의거한 삼음증(三陰證) 및 삼양증(三陽證)의 분별 그에 따른 방제 운영 방침은 모두 배제됐다.41) 두창과 상한의 유사성은 발열부터 발진이 올라오는 시기로만 국한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42)
두창의 수반 증상은 상세하게 기술됐다. 쉰 목소리, 인후통, 요복통, 경련 등 21개의 항목이 제시된 뒤 해당 증상이 발생하는 기전과 함께 적절한 치료 방제를 소개했다. 수반 증상 외에 두창을 앓은 뒤에 나타날 수 있는 예막(瞖膜), 옹절(癰癤), 이질(痢疾) 등의 증상과 기전, 치료 방제 등에 대해서도 별도 기술됐다(부록 1).
발진을 보이는 대표적인 유행병은 두창 외에 마진이 있었다. 팽창되며 고름이 차오르는 두창과 그렇지 않은 마진은 발진 양상에서 차이를 보이지만, 발열 증상만 나타나거나 발진이 뚜렷이 돋아나지 않은 발병 초반에 두 증상을 구분해내기란 쉽지 않았다. 『언해두창집요』 끝부분에 추가되어 있는 마진에 대한 논의 중에서도 두창과의 감별 방법은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했다.43) 두창과 마진을 구분해야 하는 이유는 치료 방법이 달랐기 때문이었다. 따뜻하고 평탄한 성질의 약물을 사용해야 하는 두창과 달리 마진은 처음부터 끝까지 성질이 차갑고 서늘한 약물을 사용해야 했다.44)
『언해두창집요』에서 시도했던 두창에 대한 변별(辨)과 구분(分)은 종합 의서 『동의보감』으로 넘어가면서 변증(辨證)으로 체계화됐다. 두창 만을 다루었던 『언해두창집요』와 달리 허준은 『동의보감』을 편찬하며 내상과 외감을 포함한 온갖 병의 증상들을 채집해두고자 했다.45) 이를 위해 『동의보감』 「잡병편」 앞머리에 「천지운기(天地運氣)」, 「심병(審病)」, 「변증(辨證)」, 「진맥(診脈)」, 「용약(用藥)」을 편성하며 질병의 진단과 치료에 대한 정합적인 이론 체계를 갖췄다. ‘변증(辨證)’이라는 단어는 『의학입문』에서도 사용됐지만 의사가 수행하는 진료 행위의 예시로써 잠시 언급됐을 뿐이었다.46) 본격적으로 개별 질병에 대한 논의를 전개하기 앞서 「변증」을 별도 항목의 표제어로 부각시킨 것은 순전히 허준의 의도였다. 질병 발생 이유를 설명한 「천지운기」와 약물 활용법을 설명한 「용약」 사이에 배치된 「심병」, 「변증」, 「진맥」은 모두 질병을 진단하는 방법과 내용을 다루고 있었다. 배치 순서상 진단 과정은 환자가 어떤 질병을 앓고 있는지 진찰하고(「심병」), 허실, 음양, 한열, 오장 등을 매개로 환자가 앓고 있는 병증의 속성을 분별한 뒤(「변증」), 맥진으로 병증의 구체적인 변화상을 확인하는(「맥진」) 것으로 이뤄졌다. 그 중 「변증」은 병증의 근원과 그 기전을 밝히는 과정에 해당했다.47)
『언해두창집요』가 편찬되고 2년이 지난 1610년에 편찬 작업이 마무리된 『동의보감』과 『언해두창집요』의 두창 부분은 내용상 큰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 다만 「변두증(辨痘證)」, 「두창치법(痘瘡治法)」, 「변두음양증(辨痘陰陽證)」, 「통치(通治)」, 「두후제질(痘後諸疾)」 등이 추가되며 변증과 치료에 대한 내용이 강화됐다(부록 1). 「변두증」에서는 상한(傷寒), 상식(傷食), 창진(瘡疹) 간의 증상 감별 내용이 제시됐고, 「두창제질」에서는 잡증, 상증, 변증, 류증, 괴증 등의 증상 분류 기준이 제시됐다. 「변두음양증」은 『언해두창집요』 「변허실증」을 「변두허실」과 「변두음양증」으로 구분한 것에 불과했지만, 「변두음양증」이 추가되면서 『동의보감』「변증」에서 이야기한 「모든 질병에 대해 유여와 부족, 곧 허실을 변별할 것(凡病辨有餘不足)」 그리고 「음증인지 양증인지를 변별할 것(辨陰陽二證)」이라는 논의가 서로 합치됐다.48) 『동의보감』에서 허준은 질병 치료를 위한 여덟 가지 요소로 표리한열허실사정(表裏寒熱虛實邪正)을 제시한 바 있다.49) 두창의 발병 기전은 체내의 태독이 체표로 배출되는 것이라고 인식된 만큼 표리에 대한 변별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결국 「변두음양증」의 추가는 허실 이외에 음양 곧 한열을 변증 기준으로 제시한 것이었으며, 전문 의서이자 종합 의서인 『동의보감』의 전체 논지에 맞게 두창의 변증 체계를 강화한 것이었다.
현재 중국 중의학의 핵심 내용으로 손꼽히는 ‘변증론치(辨證論治)’와 그 모델, 육경변증(六經辨證), 장부변증(臟腑辨證), 십사강요변증(十四綱要辨證) 등은 1950년대에 제시된 것이다(邓铁涛, 2005: 1-4, Volker Scheid, 2002: 209-289). 허준이 변증에 대한 논의를 서술하기 위해 주로 참고했던 명대의서 『의학입문』이나 『의학강목』 등에서는 의학 전반을 관통하는 변증 모델은 확인되지 않는다. 두창에 국한해 살펴보더라도 『의학강목』에서는 한전(寒戰), 발열 등 두창에 수반되는 증상을 분류 제시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으며, 『의학정전』에서도 오장, 내외, 형기, 삼음삼양, 표리허실 등 다양한 분석 기준이 제시 및 나열되어 있을 뿐이었다(부록 1). 『동의보감』 중에서 허준은 외감과 내상을 구분하지 못하면 의사의 자격이 없다고 강조하며 외감 병증의 분류 기준으로 풍한서습조화(風寒暑濕燥火), 내상 병증의 분류 기준으로 음식상과 노권상 그리고 오장 등을 제시했다.50) 이외에도 변증의 기준으로 음양, 한열, 허실, 정신(精神), 형기(形氣), 표본(標本), 삼초(三焦), 남녀노소, 비수장단(肥瘦長短), 용겁(勇怯), 유형무형 등을 제시했다.51) 표리한열허실사정(表裏寒熱虛實邪正)과 같은 단일한 기준이 일관되게 적용되지 못한 점은 아쉽지만 여러 가지 질병을 다루는 종합 의서였던 만큼 다양한 변증 기준을 제시하고 상황에 맞춰 응용하기를 기대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두창에 대해서만큼은 허실 또는 음양이라는 단일한 변증 기준이 적용됐다. 허실에서는 표허(表虛), 리허(裏虛), 표실(表實), 리실(裏實), 폐기(肺氣) 부족, 심혈(心血) 부족, 음양에서는 허한(虛寒, 陰), 실열(實熱, 陽)에 대한 구분과 함께 이공산(異功散), 양격산(凉膈散), 보원탕, 사군자탕(四君子湯), 궁귀탕(芎歸湯), 사물탕(四物湯) 등의 처방이 연계되어 소개됐다.52) 두창을 구분하는 주요 항목 중에 변증 기준을 명시적으로 도입한 것은 시기 경과에 따른 두창의 증상 변화, 두창과 별도로 나타나는 다양한 수반 증상, 그리고 그에 부합하는 여러 가지 치료법을 매개하여 일반 사람들이 효과적으로 접근할 수 있도록 유도하기 위함이었다. 두창을 파악하는 도구로 허실, 음양 등을 제시하는 것은 기존 조선 의서 뿐 아니라 동시대 중국 의서 중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신선한 병증 이해 방식이었다.
허준의 변증 체계는 두창 뿐 아니라 다른 질병에도 적용됐다. 『동의보감』 간행 작업이 진행되던 1613년, 당독역(唐毒疫)이라는 미지의 열성 전염병을 마주했던 허준은 병리 기전 설명을 위해 상한(傷寒)의 육경(六經) 이론을 끌어왔다. 그러나 육경 중에서 수소음(手少陰), 수태음(手太陰), 족양명(足陽明)과의 관련성만을 인정했다. 당독역을 한사에 손상 받아 발생한 질병이 아니라 오로지 심화(心火)가 주관하는 질병이라고 인식했기 때문이었다.53) 상한을 설명하는 육경 변증 체계의 변용이었다.
요컨대 기존의 두창 의서 『창진집』이나 『의학입문』은 치료 중심 또는 증상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대중적이면서도 전문적인 의서 편찬을 요구 받았던 허준은 두창의 복잡한 증상과 다양한 치료법을 매개하기 위해 골몰했다. 그리고 이에 대한 타개책으로 증상에 대한 변별과 구분을 적극적으로 도입했다. 『언해두창집요』에서 시도된 두창 발진 양상을 통한 예후의 변별과 수반 증후 분석을 통한 증상의 정도 구분은 종합 의서 『동의보감』의 편찬 과정에서 보다 체계화됐다. 이어 『동의보감』 두창 부분에서는 증상의 분류와 유사 증상 간 감별이 별도의 항목으로 구성됐을 뿐 아니라 허실을 넘어 음양까지도 변증 기준의 하나로 포괄됐다. 『언해두창집요』에서는 구체적인 분석 행위의 표상어 수준에 머물러 있던 변별(辨)과 구분(分)이 『동의보감』 「잡병편」의 중요 표제어, 변증(辨證)으로 강조되며 모든 병증에 적용되는 분석 도구로 등극했던 것이다.

4. 허준이 거둔 두창 의학 성과의 계승

허준의 두창 의학이 거둔 효과를 확인해줄만한 허준 또는 당대 의가들의 두창 환자 치료 기록은 거의 전해지고 있지 않다. 앞서 살펴보았던 『언해두창집요』의 발문 중에도 허준의 방제를 통해 두창에서 회복된 백성이 셀 수 없었다는 개략적인 표현만이 실려 있을 뿐이다. 이하에서는 『동의보감』 간행 이후 한 세대를 지나 활동한 두창 전문 의가, 박진희(朴振禧, ?-?)와 류상(柳瑺, 1643-1723) 등이 남긴 의료 기록을 통해 간접적으로 허준 의학의 성과를 확인해보고자 한다.
박진희는 현종(顯宗, 재위 1659-1674) 연간에 활동한 의가로 수십년 동안 두창을 치료하다가 명성을 얻어 의관이 됐다.54) 그리고 수천 명의 두창 환자를 보면서 축적한 자신의 의료 경험을 토대로 『두창경험방(痘瘡經驗方)』을 편찬했다.55) 『두창경험방』 중에 수록되어 있는 두창에 대한 논의와 진행 경과 등은 『동의보감』에서 인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김상현, 2016: 50), 박진희의 의안 중에서 활용된 화독탕, 보원탕, 신해탕, 월경수 등의 방제 역시 『언해두창집요』 중에 수록되어 있거나 그 중의 방제를 가감한 것들이었다.
  • 8세 여자아이가 두창 발진이 시작된지 8일이 되도 발진이 돋아나지 않아 괴로워했다. 고치에서 짜낸 솜(雪綿子) 약간을 태워 재를 만든 뒤 자기에 곱게 갈아 새로 길어온 물에 따서 복용시켰다. 9일째 되는 날 온 몸에 발진이 돋고 통증이 약간 가라앉았다. 3일이 지나자 발진이 함몰되어 신음 소리를 내며 이빨을 부딪혔다. 쥐며느리(鼠婦) 3개를 즙을 낸 뒤 물에 타서 복용시켰다. 복용하자마자 잠이 들었고 통증이 가라앉았으며 두창 발진이 돋아났다. 15-6일이 되자 딱지가 앉으면서 나았다.56)

  • 7세 아이가 두창을 앓았다. 얼굴빛은 한조각 연지 같았지만 두창이 돋아난 것은 분명하지 않았다. 푸른 듯 검은 듯 하며 손에 걸리지도 않았다. 눈동자를 치켜뜨고 이갈이를 심하게 하면서 한시도 멈추지 않았다. 숨이 가쁘고 헐떡거리며 목구멍에 가래 끓는 소리가 톱을 켜는 것 같았다. 집안 사람들이 당황해하며 잠시도 견디지 못 할 것이라고 여겨 의원을 불러 치료를 요청했다. 의원은 조용히 한참을 바라보더니 일어나서 가버렸다. 내가 생각하기에 두창이 돋은 것이 손에 걸리지 않는 것은 잘 돋지 않았기 때문이고 색이 푸른 듯 검은 듯하고 눈을 치켜뜨며 이를 가는 것은 모두 열이 심하기 때문이다. 화독탕에 도적산을 합하여 쓰되 모두 감초가 있어 한쪽 방제에서는 감초를 빼고 술로 볶은 황금 1돈을 넣어 급히 달였다. 한 첩을 먹이자 바로 소생했다. 화독탕은 발진이 돋아나지 않는 것을 잘 치료하고 도적산은 소변으로 열을 흘려보내기 때문이다.57)

제시한 두 개 의안 중 첫 번째는 『창진집』, 두 번째는 『두창경험방』 중에 수록된 의안이다. 『창진집』에 수록된 의안 중 8세 여자아이를 치료한 사람은 누구인지 확인되지 않는다. 조선 전기 관찬 의서에 수록된 의안인 만큼 의관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첫 번째 의안과 두 번째 의안 중에 기록된 두 아이는 모두 두창에 걸린 뒤 발진이 돋아나지 않아 괴로워했으며 서로 다른 약물이 투여됐다. 증상을 자세히 파악하고 있는지 여부, 사용하는 약물이 단방인지 복방인지 여부로 두 의안 간의 차이를 확인할 수도 있겠지만, 증상은 관찰자에 따라 달리 기술될 수 있으며 약물은 상황에 따라 충분히 변통 가능하다. 두 의안의 결정적인 차이는 의사의 증상에 대한 분석, 이른바 변증의 유무다. 첫 번째 의안에서는 A 증상에 A′ 약물을 투여하는 이른 바 대증 치료가 이뤄진 반면, 두 번째 의안에서는 B, C 증상과 D+E 약물 사이의 연관성을 설명하기 위해 ”모두 열이 심하기 때문에 발생했다”는 증상 분석이 시도됐다. 『언해두창집요』에 따르면 발진의 색깔이 푸른 듯 검은 듯 한 것, 호흡이 급한 것, 이를 가는 것 등은 모두 열과 관련되어 있었으며,58) 도적산은 열을 내리기 위해, 화독탕은 발진이 잘 돋아나도록 하기 위한 방제였다. 대증 치료와 변증 치료의 결합으로 이뤄진 방제 조합이었던 것이다(표 1).
1711년 이세항(李世恒)이 작성한 『두창경험방』 발문 중에는 국사(國師)가 이 방서를 조종으로 삼아 여러 번 치료했으며 한 번도 실패하지 않았다는 문장이 실려 있다.59) 이세항이 지칭하는 국사가 누구인지 특정할 수는 없다. 다만 1683년 숙종에 이어 1699년 왕세자 이윤(李昀), 1711년 왕자 연잉군과 연령군, 그리고 1711년 중궁 인원왕후의 두창을 실패 없이 모두 성공적으로 치료했던 의관은 다름 아닌 류상이었다(고대원 외, 2017: 210). 1683년 10월 13일부터 11월 24일까지, 한 달 남짓한 기간 동안 의관 류상은 숙종(肅宗, 재위 1674-1720)의 두창을 치료했다. 두창이 시작된 뒤 14일 째인 10월 27일, 숙종의 환후는 가장 위급했다. 우의정 김석주(金錫冑, 1634-1684)가 맥을 살펴보고 소리 내어 안부를 물어도 혼미한 상태로 턱만 끄덕일 뿐이었다.60) 위급한 순간, 류상은 사성회천탕(四聖回天湯)을 꺼내들었다. 사성회천탕은 인삼과 황기로 기운을 보충하고 당귀로 혈을 보충하며 석웅황으로 비위를 편하게 하면서 창독(瘡毒)을 다스리는 효능을 지닌 방제였다.61) 사성회천탕 이전에 투여된 방제는 보원탕과 이공산이었다. 보원탕은 고름이 차고 가라앉는 단계에서 원기를 보충하기 위해 그리고 이공산은 열기는 조금 가라앉았지만 입맛을 북돋기 위해 투여됐다. 이공산을 복용해도 음식을 피하며 구역을 일으켰다. 좋지 않은 신호였다. 다시 한번 증후의 허실(症候虛實)을 살펴보아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됐다. 변증 결과 최종적으로 사성회천탕이 선택됐다. 이공산의 약력이 미약하다는 것이 교체 이유였다.62) 발열이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서 따뜻한 성질로 기운까지 보충하는 인삼이나 황기를 지속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다소 위험한 선택이었다. 『동의보감』 두창 부분에 기재된 이공산의 용법 설명 중에는 두창이 수렴되는 기간에 열이 나면 사용하지 말라는 안내가 부가되어 있기도 했다.63) 기재되어 있지는 않지만, 위기의 상황이니만큼, 변증 결과를 두고 실열증(實熱證)과 허열증(虛熱證) 또는 청열(淸熱)과 온보(溫補) 사이에서 의관들 간의 논란이 팽팽하게 전개됐으리라 여겨진다. 다행히 복약 다음 날인 28일, 딱지가 자리를 잡았으며 증세는 점차 호전되어 갔다. 노랫말이 절로 나올 성공적인 두창 치료였다.64)
숙종의 치료를 주도한 류상의 의술은 박진희로부터 유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윤이후, 2020: 1104). 숙종에게 투여된 승마갈근탕, 화독탕, 보원탕 등의 방제는 『동의보감』 중에 수록되어 있었지만 사성회천탕은 그렇지 않았다. 박진희가 조선 의가 전유형(全有亨)이 활용하던 방제를 발굴한 것으로 『두창경험방』이 그 출처였다.65) 류상의 의서로 알려진 『고금경험활유방(古今經驗活幼方)』 중에는 앞서 언급한 박진희의 임상 사례 대부분과 함께 사성회천탕 그리고 박진희가 스스로 만들었다고 밝힌 연교석고탕까지 그대로 수록되어 있어66) 류상이 박진희, 결국 허준의 두창 의학을 계승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요컨대, 허준 이후 두창 치료로 가장 이름난 의가는 박진희와 류상이었다. 두창의 병증 분석, 진단 방법, 방제 운용 등 다양한 측면에서 이들은 허준의 의서 『언해두창집요』, 『동의보감』에 의존하고 있었다. 그 중 가장 주목해야 할 것은 이들의 두창 의학이 대증 치료 수준을 넘어 병증을 분석하고 그 결과에 따라 방제를 선택하는 변증 의학으로 전환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허준이 제시했던 변증을 활용한 두창 의학의 계승이었다.

5. 에필로그

두창은 전염병이었다. 두창 진단에 변증이라는 새로운 접근 방법이 제안되고, 그 내용을 담은 한글판 두창 의서가 보급되었으며, 두창을 전문적으로 치료하는 두의(痘醫)가 분화되기도 했지만67) 이것만으로 두창의 유행을 잠재울 수는 없었다. 백신 접종 등과 같은 전염과 유행을 막는 적극적인 예방법이 도입되지 않는 이상 허준의 두창 의학, 치료 의학이 지닌 한계는 명확했다. 허준 역시 사람을 통해 온역 등의 유행병이 전염이 이뤄진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세균이나 바이러스 등과 같은 생물학적 병인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그저 “열병이 전염되는 원인은 땀을 흘릴 때 더러운 독기를 맡았기” 때문이라는 ‘기(氣)’ 의학의 수준에서 전염의 기전을 파악할 뿐이었다.68) 초기 대응 방법, 증상별 대응 방법, 후유증 대처 방안, 환자 간호 방법, 음식 및 금기에 이르기 까지 세세한 내용을 제시해두었지만 두창을 몰아내기 위한 양법(禳法)은 벽예산을 태우거나 고수를 매달아 나쁜 기운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는 수준에 불과했다.69) 사람 사이의 물리적 접촉 차단 방법은 아직 제안할 수 없었다. 실질적인 두창 예방을 위해서는 정약용(丁若鏞), 박제가(朴齊家) 등이 입수한 인두술이 이종인(李鐘仁, 1759-1823)에게 전해져 보급되기를 또 지석영이 입수한 종두술이 확산되기를 기다려야만 했다.
허준의 두창 의학은 생의학이 아닌 ‘기’ 의학 패러다임에 속해 있었다. 두창의 생물학적 발병 원인이나 병리 기전에 대해 알지 못했으며 두창 치료 약물의 작용 기전에 대해서도 충분히 알지 못했다. 그것을 감안하더라도 그의 의학적 공헌은 분명했다. 먼저 과거 조선 정부가 편찬한 두창 전문 의서 『창진집』과 새롭게 중국, 명으로부터 들여온 의서들을 섭렵해 두창과 관련된 모든 지식을 단 한권의 의서, 『언해두창집요』 중에 집약했다. 그 중에는 두창의 발병 원인, 발진의 경과, 수반 증상, 후유증 등과 함께 적용 가능한 방제와 약물들이 차례대로 수록됐다. 다만 이 책의 대상 독자가 두창에 대해 잘 알지 못할 뿐 아니라 한자도 읽지 못할 수 있다는 점이 감안되어야 했다. 이를 위해 완벽한 내용 정리와 함께 한글 번역을 제공했다. 허준이 생각했던 두창 의학의 핵심은 두창의 모습과 색깔을 통해 예후의 좋고 나쁨을 변별하고 수반되는 증후를 통해 증상의 가볍고 심함을 구분해 내는 것이었다. 이후 이 내용은 변증이라는 이름으로 『동의보감』 중에 포섭됐다. 조선판 두창 변증 의학이었다. 구체적인 허준의 진료 기록은 전해지고 있지 않다. 후대에 그의 의학을 계승한 박진희, 류상 등의 진료 기록으로 미뤄볼 때 허준의 두창 의학 역시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었을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2021년 현재, 코로나 19는 여전히 유행 중이다. 백신과 항바이러스 치료제가 속속 소개되고 있지만 효능이 검증되고 충분히 적용되기 전까지 가장 보편적인 치료 방법은 여전히 대증 치료다. 두창이 유행하던 시기, 허준 역시 대증 치료 방식에 입각해 당대의 유행병에 대응했다. 다만 변증이라는 개념을 활용해 대증 치료의 번잡함을 포섭하고 일관된 설명 방식을 제시해보고자 했다. 위기를 마주한 현대 의학 역시 새로운 이론 또는 치료 방법을 개발해 낼 것이라 기대한다. 시간이 단축되기를 고대할 뿐이다.

Notes

1) 『諺解痘瘡集要』 卷下, 諺解痘瘡集要跋. 이하 『諺解痘瘡集要』 원문은 규장각 소장본을 영인한 김신근 편, 『한국과학기술사자료대계 의약학편』 37 (서울: 여강출판사, 1988)을 활용했다. 번역문은 권오민, 안상우 역, 「국역 언해두창집요」 『의성 허준 저작집 5』 (세종: 보건복지부, 2011)을 대본으로 활용했으며 필요에 따라 저자가 수정했다.

2) 지석영의 우두 접종 이후 한반도에서 진행된 종두술과 그 성격에 대해서는 이꽃메, 신동원, 박윤재, 이꽃메, 최규진 등의 연구 참조(이꽃메, 1993: 256-260; 신동원, 1997: 204-218; 박윤재, 2009: 29-54; 박윤재, 2012: 377-401; 최규진, 2014: 31-175).

3) 김두종과 한승련은 『조선왕조실록』에 근거해 두창 유행을 50여회로 계상한 바 있다. 그러나 어떤 단어를 검색어로 활용했는지는 제시해두지 않았다(한승련, 1963: 63). 『조선왕조실록』 중에서 두창 여부를 분명히 확인할 수 있는 창진(瘡疹)과 두(痘)를 검색어로 활용하면 두창 유행은 33회 정도로 파악된다. 다만 대역(大疫)을 두창으로 간주할 경우 그 횟수는 늘어날 수 있다.

4) 『世祖實錄』 卷4, 世祖2年 5月 20日 戊子. 『朝鮮王朝實錄』은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홈페이지 제공 원문을 활용했다(http://sillok.history.go.kr/).

5) 『太宗實錄』 卷35, 太宗18年 4月 4日 甲申.

6) 최규진은 조선 왕실에서 두창에 걸린 인명의 수를 22명으로 파악하고 그 중 4명이 사망했다고 기술한 바 있다(최규진, 2014: 30). 그러나 『조선왕조실록』과 『언해두창집요』의 발문을 다시 한번 분석해보니 총 44명이 두창에 걸렸으며 그 중 10명이 사망한 것으로 파악됐다.

7) 변증론치(辨證論治)는 현대 중의학의 핵심 내용으로까지 강조되고 있는 일종의 개념어다. 허준이 제시한 변증(辨證)은 변증론치와 동일한 용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그 내용이 소략할 뿐 아니라 지향하는 바에 있어서도 다소 차이를 보인다. 레이샹린이 지적한 것처럼 ‘변증론치’는 오래도록 그 자리를 지켜온 개념이라기보다 특정한 역사적 맥락에서 진행된 분투의 산물이기 때문이다(레이샹린, 2021: 190). 동일한 용어를 사용하는 변증론치와 변증 사이에 혼란이 발생할 수도 있지만 허준이 『동의보감』 중에서 변증을 표제어로 활용했음을 감안해 그대로 기재했다.

8) 『諺解痘瘡集要』 卷下, 諺解痘瘡集要跋. “昔歲, 王子染痘證, 勢不順而拘於俗忌, 未敢下藥, 醫官之輩, 袖手待盡. 自上痛念非命, 悔不用藥. 歲在庚寅之冬, 王子又染此疾. 聖上追憶往事, 特命臣施藥救療. 于時寒威正肅, 毒熱被鬱, 險惡之證, 疊見層出, 中外之人, 莫不指藥爲咎. 及其病勢漸危, 衆口洶洶, 而聖斷愈確, 責用益急. 臣仰稟聖旨, 俯索靈丹幾乎, 奄忽三投藥而三起之. 斯須之間, 惡證犀散, 精神蘇爽, 不多日而平復焉.”

9) 조선 시대에 성행했던 두창 관련 풍속에 대해서는 김옥주, 신동원의 연구 참조(김옥주, 1993: 44-53; 신동원, 2013: 169-172).

10) 『宣祖實錄』 卷22, 宣祖21年 2月 24日 丁丑.

11) 두창으로 사망한 의안군 여동생의 신원은 밝혀져 있지 않다(『宣祖實錄』 卷25, 宣祖24年 1月 4日 辛丑).

12) 『諺解痘瘡集要』 卷下, 諺解痘瘡集要跋.

13) 『藥圃集』 卷5, 避難行錄下. 『藥圃集』은 한국 고전 종합DB 제공 원문을 활용했다(https://db.itkc.or.kr/).

14) 『諺解痘瘡集要』 卷上, 痘癍疹形色.

15) 『諺解痘瘡集要』 卷上, 痘瘡源委.

16) 『東醫寶鑑』, 雜病篇 卷1, 天地運氣, 運氣之變成疫. 이하 『東醫寶鑑』은 순조 14년 중간본을 영인한 김신근 편, 『한국과학기술사자료대계 의약학편』 (서울: 여강출판사, 1988) 수록본을 활용했다. 운기학과 의학에 대해서는 야마다케이지의 연구 참조(야마다케이지, 2018: 23-131).

17) 『諺解痘瘡集要』 卷上, 解毒免痘方.

18) 『諺解痘瘡集要』 卷上, 發熱三日.

19) 『벽역신방』에서 허준은 당독역이 1613년부터 유행했다고 서술하고 있다. 따라서 『언해두창집요』나 『동의보감』을 편찬하던 당시 당독역에 대한 분석은 아직 이뤄지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20) 『諺解痘瘡集要』 卷上, 發熱三日.

21) 『諺解痘瘡集要』 卷上, 痘瘡通治.

22) 『諺解痘瘡集要』 卷上, 發熱三日.

23) 『諺解痘瘡集要』 卷上, 發熱三日.

24) 『諺解痘瘡集要』 卷上, 痘瘡通治.

25) 『諺解痘瘡集要』 卷上, 起脹三日; 『諺解痘瘡集要』 卷下, 飮食.

26) 『東醫寶鑑』 內景篇 卷1, 氣, 單方, 龍腦; 『諺解痘瘡集要』 卷上, 貫膿三日; 『諺解痘瘡集要』 卷下, 黑陷.

27) 『芝峯類說』 卷19, 食物部. 『芝峯類說』은 한국고전종합DB 제공 원문을 활용했다(https://db.itkc.or.kr/).

28) 『諺解痘瘡集要』 卷下, 諺解痘瘡集要跋. “臣以不才, 叨承聖命, 罄竭心肝, 蒐獵今古, 採掇精髓. 辨形色之善惡, 分證候之輕重, 披卷相對, 皎若水鏡. 患病之家, 得此一本, 恐不無救急涓埃之助矣.”

29) 『瘡疹集』, 瘡疹集序. 이하 『창진집』은 이우성 편, 『瘡疹集外一種』 (서울: 亞細亞文化社, 1996)을 활용했다.

30 『창진집』과 『의방류취』 간 비교는 김성수의 연구 참조(김성수, 2010: 36-38).

31) 『醫方類聚』 卷263, 疹痘. 『의방류취』는 『의방류취』 일본 간본을 전사한 『醫方類聚』 (서울: 동양의과대학, 1965)를 활용했다. 『의방류취』의 구성과 그 특징에 대해서는 이경록의 연구 참조(이경록, 2017: 26-32).

32) 『瘡疹集』, 瘡疹集序.

33) 『諺解痘瘡集要』 卷下, 諺解痘瘡集要跋.

34) 김중권의 분석에 따르면 『의학입문』 인용 횟수는 132회, 『고금의감』 61회, 『의학정전』 36회, 『의학강목』 17회, 『만병회춘』 16회 등이다. 『단계방』이나 『단계부록』은 각각 3회, 8회에 지나지 않지만 그의 자(字)인 주언수(朱彦修)로 인용 표기된 문장이 15회에 달한다. 『동의보감』으로 재편되면서 『언해두창집요』의 출전 표기가 일부 달라지지만 위의 인용서들은 여전히 출전으로 많이 활용되고 있다(김중권, 1994: 115-118, 135-138).

35) 『언해두창집요』에서는 저미고의 출처로 『의학입문』과 『활인서』를 언급하고 있다. 저미고에 대해서는 신동원, 오재근의 연구 참조(신동원, 2015: 262-263, 오재근, 2015: 603-605).

36) 『古今醫鑑』 卷14, 痘疹. 『古今醫鑑』은 李世华, 王育学 主编, 『龚廷贤医学全书』 (北京: 中国中医药出版社, 1999) 수록본을 활용했다.

37) 『新纂辟瘟方』, 火運之歲多疫癘; 『辟疫神方』, 毒疫形證. 이하 『新纂辟瘟方』과 『辟疫神方』은 1613년 내의원 간행본을 영인한 김신근 편, 『한국과학기술사자료대계 의약학편』 (서울: 여강출판사, 1988) 수록본을 활용했다.

38) 『醫學入門』 卷6, 小兒門, 小兒病機, 痘. 이하 『醫學入門』은 이천 저, 진주표 역, 『개정증보 신대역 편주의학입문』 (서울: 법인문화사, 2017)을 활용했다.

39) 『諺解痘瘡集要』 卷下, 諺解痘瘡集要跋.

40) 『諺解痘瘡集要』 卷上, 辨虛實證.

41) 『醫學入門』 卷6, 小兒門, 小兒病機, 痘; 『醫學正傳』 卷8, 痘疹, 辨三陰三陽經候. 『醫學正傳』은 张丽君 等 校注, 虞抟 著, 『医学正传』 (北京: 中国医药科技出版社, 2011)을 활용했다.

42) 『諺解痘瘡集要』 卷上, 發熱三日.

43) 『諺解痘瘡集要』 卷上, 出痘三日; 『東醫寶鑑』 雜病篇 卷11, 小兒, 附斑疹.

44) 『諺解痘瘡集要』 卷下, 附斑疹.

45) 『東醫寶鑑』, 集例.

46) 『醫學入門』 卷4, 雜病提綱.

47) 『東醫寶鑑』, 雜病篇 卷1, 辨證, 療病式.

48) 『東醫寶鑑』, 雜病篇 卷1, 辨證.

49) 『東醫寶鑑』, 雜病篇 卷1, 用藥, 治病八要.

50) 『東醫寶鑑』, 雜病篇 卷4, 內傷.

51) 『東醫寶鑑』, 雜病篇 卷1, 辨證, 『의학입문』의 저자 리찬은 위급한 환자라도 병증을 구별할 수 있는 제강(提綱)을 통해 증상을 변별한다면 문제없을 것이라고 이야기하며 외감과 내상에 대한 구별을 강조했지만, 외감의 판별 기준으로 풍한서습조화(風寒暑濕燥火) 내상의 판결 기준으로 숙식(宿食), 기혈담울(氣血痰鬱), 허실(虛實)을 제안하는데 그쳤다(『醫學入門』 卷4, 雜病提綱). 『의학강목』의 저자 러우잉 역시 혈기(血氣)와 표리상하(表裏上下), 장부(臟腑)를 분별한 뒤 허실(虛實)과 한열(寒熱)의 사기를 살펴서 치료해야 한다며 위치와 속성에 입각해 병증을 파악할 것을 요청했을 뿐 현대의 장부변증과 같은 구체적인 모델을 제시하지는 못했다(『醫學綱目』 「自序」. 『醫學綱目』은 阿静 等 校注, 楼英 编撰, 『医学纲目』 (北京: 中国医药科技出版社, 1996)을 활용했다).

52) 『東醫寶鑑』 雜病篇 卷11, 小兒, 辨痘虛實; 『東醫寶鑑』 雜病篇 卷11, 小兒, 辨痘陰陽證.

53) 『辟疫神方』, 毒疫形證.

54) 『承政院日記』 178冊. 顯宗 4年 4月 20日 丁巳. 『承政院日記』는 국사편찬위원회 승정원일기 홈페이지 제공 원문을 활용했다(http://sjw.history.go.kr/).

55) 『痘瘡經驗方』, 貫膿三日. 이하 『痘瘡經驗方』의 원문과 번역문은 박진희 저, 김상현 역, 『두창경험방』 (대전: 한의학연구원, 2019)을 활용했다.

56) 『瘡疹集』, 本朝經驗方. “女兒年八歲, 發瘡疹至八日, 未得快透苦痛. 雪綿子少許燒灰, 磁器細硏, 新水調和服之. 九日, 滿身快透, 其痛稍歇. 後三日, 又陷入, 呻吟扣齒. 鼠婦三介取汁, 和水與之. 因此入睡, 疼痛已歇, 瘡疹透徹, 至十五六日, 成痂差愈.”

57) 『痘瘡經驗方』, 出痘時變証經驗. “有七世男兒患痘, 面如一片臙脂色, 而痘顆隱暎於皮膚之間, 或靑或黑, 亦不碍指. 目睛上竄, 咬呀太甚, 無一時暫止, 氣促喘急, 喉間痰響, 如引鉅聲. 擧家蒼黃, 莫保晷刻, 固請醫者, 願施藥治, 則黙視良久起而走之. 余意以爲痘不碍指者, 不快出也, 形色靑黑, 目竄咬呀, 皆由熱極也. 用化毒湯合導赤散, 亦有甘草, 故代以酒芩一錢, 急煎, 灌下一貼卽甦. 盖化毒湯全治不快出, 而導赤散滲熱於小便故也.”

58) 『諺解痘瘡集要』 卷上, 辨形色善惡; 『諺解痘瘡集要』 卷下, 黑陷; 『諺解痘瘡集要』 卷上, 出痘三日, 『諺解痘瘡集要』 卷下, 咬牙.

59) 『痘瘡經驗方』, 痘瘡經驗方跋.

60) 『肅宗實錄』 卷14, 肅宗9年 10月 27日 甲子.

61) 『痘瘡經驗方』, 收靨三日.

62) 『承政院日記』 301冊, 肅宗9年 10月 27日 甲子.

63) 『東醫寶鑑』, 雜病篇 卷11, 小兒, 泄瀉.

64) 『游齋先生集』 卷5, 優遊錄, 聖痘歌幷序. 『游齋先生集』은 한국고전종합DB 제공 원문을 활용했다(https://db.itkc. or.kr/). 류상이 숙종의 두창을 치료하는 과정에 대해선 고대원 외의 연구 참조(고대원 외, 2012: 43-51).

65) 『痘瘡經驗方』, 收靨三日.

66) 『古今經驗活幼方』, 收靨三朝症治門. 『古今經驗活幼方』은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을 활용했다. 『고금경험활유방』의 의학적 성과 및 특징에 대해서는 김동율, 조학준의 연구 참조(김동율, 조학준, 2017: 119-130).

67) 박진희, 류상 외에 『승정원일기』 중에 언급되는 두의로는 조석부(趙錫孚), 이엽(李燁), 현제강(玄悌綱), 김후(金垕), 정찬교(鄭纘僑), 최시륜(崔始崙), 이수정(李壽鼎), 류중림(柳重林) 등이 있다. 『흠영(欽英)』 중에 기재된 의업의 분화와 관련해서는 김성수, 신동원의 연구 참조(김성수, 2014: 113; 신동원, 2014: 569-570).

68) 『新纂辟瘟方』, 瘟疫辟法, 不傳染法. 중국 의학과 ‘기’와 관련된 논의는 장립문 외, 가노우요시미츠의 연구 참조(장립문 외, 1992: 107-122; 가노우요시미츠, 1999: 111-161).

69) 『諺解痘瘡集要』 卷下, 禳法. 중국 의서 중에 나타난 전염에 대한 분석은 張嘉鳳의 연구 참조(張嘉鳳, 2005: 397-418).

Figure 1.
그림 1. 『의방류취(醫方類聚)』 소아문(小兒門) 중에 실려 있는 두창 모식도
Smallpox Images in Classified Assemblage of Medical Prescriptions
kjmh-30-1-35f1.jpg
Table 1.
표 1. 『두창경험방』에 수록된 박진희의 두창 치험 사례
Park, Jinhee’s Smallpox cases in Prescriptions for Smallpox
분류 환자 증상 변증 처방 경과 비고
출두 7세 아이 발진이 잘 돋지 않음. 눈을 치켜뜨고, 이갈이를 심하게 하며, 숨은 가쁘고 헐떡이고, 가래가 끓음. 열이 극심함 화독탕 합 도적산 호전 변증+대증치료
30세 부인 발진이 잘 돋지 않음. 눈을 치켜뜨고, 숨은 가쁘 며, 목구멍에 가래가 끓음. 팔다리를 움직이지 못함. - 화독탕 호전 대증치료
17세 남자 발진이 잘 돋지 않음. 딱지가 지고 떨어졌으나 7-8개월 뒤 요통과 함께 재발함. - 신해탕 가감 호전 대증치료
기창 17세 남자 평소 땀을 많이 흘림. 두창이 부풀어 오르는 시 기에 설사를 동반함. 기운 허약 보원탕 가감 호전 변증
발진이 터져 진물이 흐르 나 딱지가 앉지 않음. 윗입술이 문드러짐. 기운 허약 보원탕 가감 / 찰 아산 합 용석산, 패초산 호전
관농 30세 남자 진물이 흐르고 딱지가 앉 는 즈음에 고열이 발생함. 화열 월경수/보호자 가 권한 육군자탕 복용 사망 변증
수엽* 20세 남자 딱지가 않는 시기에 윗속 눈썹이 뻗침. 윗속눈썹 안 에 붉은 살이 늘어짐. 비장과 위장의 열 연교석고탕 호전 변증

*수엽 시기의 의안은 『고사촬요』 중에 수록되어 있음

References

『宣祖實錄』 『世祖實錄』 『太宗實錄』 『承政院日記』.

『藥圃集』 『游齋先生集』 『芝峯類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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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ENDICES

Appendix 1.

부록 1. 조선과 중국, 명 의서 중에 기재된 두창 관련 소제목
Titles of Smallpox from the Medical texts of Joseon and Ming Dynas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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