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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J Med Hist > Volume 30(1); 2021 > Article
「고려시대 밀교 치유 문화의 양상과 특징」

Abstract

This study focused its investigation on esoteric Buddhist treatment methods during Goryeo. In Goryeo, they published dharani scriptures related to illness. Beomseo-chongji-jip (梵書摠持集), a collection of dharanis, contains few dharanis for treatment. The publication of a dharani scripture was a precondition of dharani-based Buddhist prayers. There had been cases of treating illness through Buddhist prayers based on a dharani since ancient times, and Hyetong (惠通) of Samgukyusa (三國遺事) is a good example. The religious sect of esoteric Buddhism that inherited the line of Hyetong in Goryeo was Chongji-jong (摠持宗), which seems to have been partially responsible for royal medicine and engaged in relief activities for people to end an infectious disease. During the period of Yuan (元)’s interventions, Yeom Seung-ik (廉承益) became a favorite of the king for his ability of treating illness through his spells. He was not a Buddhist monk, and his case reflects the wide spread of disease-treating spells among common people those days.
The establishment of a ritual was one of the traditional therapies. In Goryeo, various esoteric Buddhist rituals were held for therapeutic purposes. Marijicheon-doryang (摩利支天道場), Gongjakwang-doryang (孔雀王道場), and Buljeongsim-doryang (佛頂心道場) were established to expel infectious diseases, and Sojae-doryang (消災道場) and Boseong-doryang (寶星道場) were established to treat the illness of kings and queens. They were intended to treat illness by eliminating the causes of epidemics and diseases by the virtue of dharanis.
Esoteric Buddhist therapies containing Taoist elements were also developed. The utilization of Eight-Gate Transformation (奇門遁甲) and talismans are the exampels. In early Joseon, Buddhist monks of Chongji-jong were said to have contributed to the treatment of diseases by using Eight-Gate Transformation. They were used to predict a good direction for the treatment of a patient. This practice of Chongji-jong Buddhist monks in early Joseon seems to have inherited the heritage of Goryeo, which suggests that Eight-Gate Transformation was one of the therapies practiced by esoteric Buddhist monks in Goryeo. Talismans are commonly known to be used in Taoism and shamanism, but Buddhist scriptures, especially esoteric Buddhist scriptures, contain a variety of talismans. Buljeongsim-darani-gyeong has talismans on its last page and records that one can treat his or her illness by burning the talisman and taking its ash. This therapy proposed by this scripture seems to have enjoyed considerable popularity in Goryeo, when its simplified versions comprised only of dharani phrases and talismans were made.
These various esoteric Buddhist therapies demonstrate that human beings made utmost efforts to overcome their personal and social crises. Therapies are a total reflection of a society’s contemporary politics, religion, ideas, and culture. Esoteric Buddhist therapies may seem like superstitions in the eyes of modern people, but they must have been reliable treatment methods whose efficacy was guaranteed within the thinking system of people during Goryeo.

1. 머리말

질병은 개인적·사회적으로 인간사에서 매우 중요한 사항이다. 개인이 병에 걸리면 가볍게는 몸이 아프고 삶의 질이 저하되며 무겁게는 사망에까지 이르게 된다. 질병이 사회적으로 확산되는 전염병은 사회 구조를 붕괴시키고 국가를 위기에 몰아넣을 수 있는 심각한 문제이다. 질병이 차지하는 비중이 무거웠던 만큼, 치료법을 찾으려는 노력은 다방면에 걸쳐 오랫동안 이루어졌다. 그 과정에서 의학이나 약초학 등 의술을 활용한 생물학적 치료뿐 아니라 사상과 종교를 통한 치유 방법도 모색되었다.
대부분의 사상과 종교에서는 나름의 질병 치료 방법이 있다. 불교도 마찬가지이다. 중국에 불교가 전파될 때 인도의 불교 의학이 함께 유입되었는데, 이 불교 의학은 일종의 선진 치료법으로서 기존에 무속에서 담당하고 있던 치유 역할을 일정 부분 대체하였다. 특히 불교 보살이 반드시 지녀야 하는 다섯 가지 지혜[五明] 가운데 의방명(醫方明)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김두종, 1966: 38; 김성순, 2014: 348), 불교 고승은 의학 지식을 지니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 결과 삼국시대에 불교가 전래된 이래로 불교 의학과 의승(醫僧)들은 전근대 의학의 한 축을 담당하게 되었다.
신라에서는 불교 공인 이전인 눌지왕 때 고구려에서 온 승려 묵호자(墨胡子)가 왕녀의 병을 치료하는 행적을 보였다.1) 중국에서 고구려로 전파된 불교 의학이 신라에까지 전파된 것이다. 고려시대가 되면 의술을 익혀 의사와 같은 치료 방식을 취하는 승려들의 사례도 보인다. 이러한 의승으로 고종대 문양공 조간(文良公 趙簡)의 악성 종기를 수술해 치료한 승려 묘원(妙圓)과 충혜왕대 궁인 황씨의 임질을 치료한 승려 복산(福山) 등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2) 한편 당시 이들과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즉 주문과 부적, 술법 등을 사용해 질병을 치료하던 이들이 있었다. 이러한 치료 방식들은 고려 사회에 널리 받아들여졌던 듯하다. 12세기 초에 고려를 방문한 북송의 사신 서긍(徐兢)은 고려의 치료 문화에 대해 병에 걸리면 약을 복용하지 않고 오로지 귀신에 빌며 주문을 외우는 것만 일삼았다고 서술하였다.3) 현대적 관점에서는 주문과 술법 사용이 플라시보 효과 외의 어떤 효과를 가져 오는지 의문일지 모르지만, 당시 사람들에게는 중요한 치료 행위였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 의학사는 일찍이 의학의 전개와 의서 간행, 의료 제도 및 외국과의 의학 지식 교류 등에 관한 종합적인 연구가 이루어진 이래로(三木榮, 1963; 김두종, 1996), 많은 연구 성과가 축적되었다. 다양한 연구가 이루어진 만큼 밀교 관련 치병 활동을 언급한 연구들도 적지 않다. 승려들의 의술 활동을 전반적으로 소개하는 가운데 언급하기도 하였고(三木榮, 1963; 김두종, 1996; 최병철, 2001; 김성순, 2014 등) 외에도, 고려시대 밀교 종파로 질병 치료 활동이 두드러졌던 총지종(摠持宗)에 대한 연구 속에서 사례들을 소개하거나(서윤길, 2006; 김수연, 2012 등), 전염병에 대처하기 위한 다라니 염송이나 의례 개설 사례들을 연구하기도 하였다(김영미, 2010; 김수연, 2012 등). 아울러 고려시대인들의 질병관을 연구하면서 밀교 치유 문화가 언급되기도 하였다(박경안, 2006). 한편 고려시대에 유행했던 밀교 경전인 『불정심다라니경』에 소개된 치병법을 한의학적으로 살피고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이나 『동의보감(東醫寶鑑)』 등 한의서에 수록된 치료법과 비교하여 밀교 의학의 의미를 도출한 연구도 있다(이유진·안상우·김동율, 2019). 이렇게 다양한 방면에서 연구들이 이루어져 왔으나, 고려시대 밀교 치유 문화에 대한 종합적인 고찰이 이루어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고려시대에는 밀교 신앙이 소위 기저신앙으로 사회·문화적으로 널리 확산되어 있었다. 밀교 종파인 총지종, 신인종(神印宗)이 활동하고 있었으며, 수 많은 밀교 경전들이 간행되었다. 국가적 위기 상황이 닥쳤을 때에는 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다양한 의례를 개설하였는데, 그 가운데 밀교 의례도 적지 않게 포함되어 있었다. 또한 승속(僧俗)을 초월하여 밀교의 다라니 신앙이 확산되어 있었다. 재난을 쫓고 복을 빌기 위하여, 혹은 죽은 후 극락에 가기 위하여, 나아가 죽은 일가친척의 극락왕생을 빌기 위하여 다라니를 염송하고 불사(佛事)를 하였다. 밀교 신앙이 국가적으로나 개인적으로 다양한 어려움이 닥쳤을 때 극복의 방법 가운데 하나로 채택되어 왔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질병이라는 위기에 대처하는 밀교적 치료 방식은 고려인의 질병관과 치료 문화를 탐구할 수 있는 중요한 소재이다.
본고에서는 이러한 부분에 주목하여, 고려시대에 이루어졌던 밀교의 치료 문화를 경전의 간행, 다라니 염송, 의례 개설, 둔갑술(遁甲術)과 부적의 활용 등으로 유형을 구분하고 세부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우선 치병 관련 밀교 경전을 살펴볼 것이다. 이들 경전은 밀교 치유 문화의 이론적 근거를 제공할 뿐 아니라 경전을 통해 치유 방법이 확산되고 전승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단, 본고에서는 실제 활용 사례와 활용 방법 등을 확인할 수 있는 단본(單本) 간행 밀교 경전만을 검토의 대상으로 삼을 것이다.
다음으로 다라니를 염송하고 밀교 의례를 개설하여 질병을 치료한 사례들을 검토하고자 한다. 의례는 개설 근거가 되는 소의경전(所依經典)들이 있다. 의례 개설 상황과 소의경전을 분석하면 어떠한 논리로 어떠한 의례가 개설되었는지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둔갑(遁甲)과 부인(符印) 등 도교 사상과의 연결점이 보이는 밀교 치유 문화를 살펴보겠다. 불교는 기존에 중국에서 믿어졌던 도교나 무속의 요소들을 흡수하며 신앙의 폭을 확장시켰다. 치유 문화 속에서 그러한 면모를 보이는 지점이 둔갑과 부인을 활용한 치료 방식이다. 특히 둔갑은 기존에 크게 주목받지 못했던 치료 방법이었다. 둔갑이 치료와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살핌으로써 고려시대 종교적 치유 문화의 지평을 넓힐 수 있을 것이다. 이상의 연구를 통해, 고려시대 밀교가 지니는 사회·문화적 의미 속에서 밀교적 치료가 활용되는 양상과 그 치료 논리를 궁구해 보고자 한다. 고려시대 치유 문화와 그에 투영된 사유 방식에 대한 이해가 깊어질 수 있기를 기대한다.

2. 질병 관련 다라니경의 간행

경전은 부처의 교설을 전하는 매개체이다. 그 중에서도 다라니경은 신비한 주문인 다라니와 그 효험, 다라니를 염송하는 방법과 순서 등을 설한다.4) 성불과 성불에 이르기 위한 다라니 작법을 설하는 밀교 경전도 있으나, 재화(災禍)를 없애고 복덕(福德)을 구하는 현세이익적 내용을 담고 있는 경전들도 많다. 후자의 경우 효험과 목적이 명확하고 구체적으로 명시되어 있는데, 그 속에는 질병 치유도 포함되어 있다. 현재 확인되는 고려시대 간행 질병 치유 관련 다라니경은 『불설장수멸죄호제동자다라니경(佛說長壽滅罪護諸童子陀羅尼經)』, 『불정심관세음보살대다라니경(佛頂心觀世音菩薩大陀羅尼經)』, 『불설범석사천왕다라니경(佛說梵釋四天王陀羅尼經)』, 『불설천존각온황신주경(佛說天尊却溫黃神呪經)』 등 총 4종류이며, 다라니 모음집인 『범서총지집(梵書摠持集)』에 질병 치유를 위한 다라니가 포함되어 있기도 하다.5) 이를 차례대로 살펴보자.
『불설장수멸죄호제동자다라니경』(이하 『장수멸죄경』으로 약칭)은 계빈국(罽賓國) 승려 불타파리(佛陀波利)가 번역한 경전으로 알려져 있으나 사실 여부는 명확하지 않다. 북두칠성이 수명을 관장한다는 등 중국 전통 사유의 영향을 받은 대목들이 많은 점 때문에 중국 찬술 경전으로 분류되기도 한다(남희숙, 2002: 50). 경전의 내용은 크게 세 가지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첫 번째 이야기는 전도(顚倒) 여인의 이야기이다. 문수보살이 여래에게 중생의 악업을 없애는 방법을 묻자, 여래는 보광정견여래(普光正見如來)와 전도의 이야기를 한다. 전도가 임신한 태아를 낙태한 죄로 아비지옥에 떨어지게 되자 보광정견여래가 이 경전과 12연기, 6바라밀 등을 설하였다. 이에 전도는 수명이 길어지고 지옥에 떨어질 죄를 면하게 되었다. 두 번째로 30명의 자식 중 29명을 1살이 되기 전에 잃고 막내도 병에 걸린 여인을 위해 파사닉왕(波斯匿王)이 경전을 구하는 이야기를 소개한다. 그리고 아기를 잉태했을 때, 낳을 때, 아이가 병들었을 때 이 경전을 수지(受持) 독송하면 중병(重病)과 전생의 업장(業障)이 모두 소멸될 것이라는 공덕을 설한다. 마지막으로 석가모니 입멸 후 벌어지는 14가지 폐단을 이야기하며, 그 결과 받을 단명(短命)하는 업보를 이 경전을 수지, 독송, 사경함으로써 막아낼 수 있다고 설한다. 14가지 폐단은 국왕, 관료, 부모된 자, 자식된 자, 4부대중 등이 지켜야 할 본분을 잘 지키지 못해 일어나는 폐단들이다(남희숙, 2002: 52-55). 본문 끝에서 여래는 이 경을 『장수멸죄십이인연불성경(長壽滅罪十二因緣佛性經)』이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이 경에서 말하고자 하는 장수와 멸죄, 십이인연 및 불성의 문제를 축약하는 표현이라고 하겠다.
고려시대 『장수멸죄경』의 가장 이른 시기 유물은 11세기 판본의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密經)』과 함께 전해져 오는 묵서본이다.6) 무신 집권기의 유물로는 고종 28년(1241)에 동북면병마부사 겸 상서이부시랑 이모(東北面兵馬副使兼 尙書吏部侍郞 李某)가 최이(崔怡)의 수복무강(壽福無疆)을 빌기 위해 간행한 판본이 있다(천혜봉, 1990: 190). 원 간섭기 이후의 『장수멸죄경』은 총 10종이 남아 있어, 고려시대에 왕성하게 신앙되었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불정심관세음보살대다라니경』(이하 『불정심다라니경』으로 약칭)은 3권의 소경(小經)이 하나의 경전을 구성하는 체제의 경전이다. 제1권은 『불정심관세음보살대다라니경』으로 다라니와 그 공덕을 설하는 부분이다. 제2권은 『불정심관세음보살료병최산방(佛頂心觀世音菩薩療病催産方)』으로 다라니의 구체적 활용 방법을 소개하고 있다. 난산이거나 병에 걸렸을 경우에 다라니를 외우고 비자인(秘字印)을 태워 향수(香水)에 섞어 마시는 등의 처방을 소개하고 있다. 마지막 제3권은 『불정심관세음보살구난신험경(佛頂心觀世音菩薩救難神驗經)』으로 네 종류의 영험담이 실려 있다.
첫 번째 이야기는 전염병과 관련된 내용이다. 계빈타국(罽賓陁國)에 전염병이 돌았을 때 관세음보살이 백의거사(白衣居士)로 화하여 이 다라니경을 서사(書寫)해 주어 전염병이 진정되었다고 한다. 두 번째는 한 장자(長者)가이 다라니경을 서사하여 아들의 수명을 연장시킨 이야기이다. 아들이 16세에 사망한다는 예언에 고민하던 어떤 장자가 선지식을 만나 이 다라니경을 서사하면 90세까지 수명이 연장된다는 해결책을 듣는다. 이에 다라니경 1천 권을 서사하여 배포하고 매일 공양하였다고 한다. 세 번째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어떤 여인이 숙세(宿世)에 어떤 이의 목숨을 빼앗아 원망을 샀다. 목숨을 빼앗긴 자는 악귀가 되어 여인을 해코지하려고 하였으나, 그 여인이 항상 『불정심다라니경』을 수지하였기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어떤 관리가 임지에 부임하기 위해 사찰에서 돈을 빌렸는데 주지승이 사미(沙彌) 한 명을 붙여 부임지까지 따라가 돈을 받아오게 하였다. 관리는 돈을 갚기 싫어 도중에 그 사미를 죽이고자 물에 빠뜨렸다. 2, 3일 후 부임지 관아에 도착해보니 그 사미가 이미 와 있어 놀라며 까닭을 묻자, 사미는 본인이 품속에 『불정심다라니경』을 지니고 있어서 살 수 있었다고 하였다. 앞의 두 이야기는 질병 치유, 수명 연장과 관련된 설화이고, 뒤의 두 이야기는 경전을 수지하여 몸을 지킨 이야기이다. 권말에는 일자정륜왕다라니(一字頂輪王陀羅尼)와 자재왕치온독다라니(自在王治溫毒陀羅尼) 및 세 개의 부적이 실려 있다. 세 개의 부적은 권2에 나오는 비자인으로 추정된다.
조선 성종 16년(1485)에 간행된 『불정심다라니경』의 발문에 의하면 이 경전은 당대(唐代)의 역경이라고 한다.7) 그러나 당대의 목록집이나 개보대장경(開寶大藏經), 고려대장경에는 입장되어 있지 않다. 이 다라니경이 유행한 것은 중국은 송대(宋代), 한국은 고려 이후인 것 같다. 송의 홍매(洪邁, 1123~1202)가 수집한 설화집인 『이견지(夷堅志)』의 「제의가구모(齊宜哥救母)」에서는 이 경전이 난산을 극복할 최고의 방책 가운데 하나로 소개되고 있다. 그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제삼(齊三)의 처 구씨(歐氏)는 출산을 할 때마다 어려움을 겪었다. 아들인 의가(宜哥)가 어머니를 위해 어떤 노인에게 자문을 구하여 도가(道家)의 『구천생신장(九天生神章)』과 불교의 『불정심다라니』가 최상이라는 답을 들었다. 의가는 이 경들을 구해 2년 동안 매일 아침 열 번씩 외웠고, 소희(紹熙) 원년(1190)에 그 어머니가 다시 임신을 하였을 때에는 열 달 뒤에 어려움 없이 출산할 수 있었다고 한다.8) 숭녕(崇寧) 원년(1102)에 절첩본 형식으로 조성된 것과(張樹棟 等, 2004: 207) 절강성박물관(浙江省博物館) 소장 건도(乾道) 8년(1172)본 『불정심다라니경』이 송대 유물로 현존한다. 요(遼)의 방산석경에도 두 질의 『불정심다라니경』의 석각이 편입되어 있다.9) 고려와 송, 요에서 비슷한 시기에 이 경전의 판본과 경전에 대한 신앙이 눈에 띄게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이다. 당시 동아시아에서 치료 문화가 빠르게 공유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불설범석사천왕다라니경』은 『불설다라니경(佛說陀羅尼經)』, 『사천왕주경(四天王呪經)』 등에서 여러 여래, 보살, 신들의 명호만 뽑아서 만든 일종의 축약 경전이다. 약사여래와 좌우 협시인 일광·월광보살(日光·月光菩薩) 및 사천왕과 여러 신격에게 질병, 기근, 병란 등이 소멸되기를 기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리고 제일 마지막에 이러한 기원을 이룰 수 있는 다라니가 설해져 있다(남권희, 2002: 52).
『불설천존각온황신주경』은 전염병의 일종인 온황(溫黃=瘟黃)을 치료하는 방법을 설하는 경전이다. 석가가 왕사성 죽림정사(竹林精舍)에서 설법할 때 유야리국(維耶離國)에서 온황이 맹위를 떨쳐서 무수한 사망자가 나오자 아난이 구제를 요청하였다. 이에 석가가 이 병마는 일곱 귀신이 내습하여 발병하게 된 것이라 말하고 그 일곱 귀신의 명호를 불러 퇴치하였다는 내용과 세존이 준 주문을 담고 있다(남권희, 2002: 54). 두 종류의 현존본이 있는데, 양자 모두 1판 2장의 목판이며 합천 해인사의 서사간전에 보관되어 있다.
위의 네 종류의 질병 관련 다라니경의 현존 양상을 보면, 안전한 출산과 아이의 건강을 효험으로 내세우는 다라니경의 간행 사례가 두드러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난산으로 인한 죽음은 사인이 명확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근대 사회의 의술로는 안전한 출산을 충분히 보장할 수 없었기 때문에 많은 산모들이 난산으로 목숨을 잃었다. 불보살의 가피력과 다라니의 신통에 기대어 난산을 피하려는 신앙이 널리 퍼졌던 것이다. 한편 전근대 사회는 영유아 사망률이 매우 높다. 인구가 노동력이고 재산이었던 사회에서 영유아의 사망을 막는 것 역시 당면한 중요한 과제였다. 이에 어린 아이의 건강을 보장해 주는 다라니경이 유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단본 다라니경 뿐 아니라, 다라니 모음집에 질병 치료 관련 다라니가 수록된 경우도 있다. 현재 연대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민영규 구장본 『범서총지집』10)에는 질병 치료와 관련된 다라니가 몇 종류 실려 있다. 제일체질병다라니(除一切疾病陀羅尼), 정제일체안질병다라니(淨除一切眼疾病陀羅尼), 개안광명진언(開眼光明眞言) 등이 그것이다. 이 가운데 개안광명진언은 진언의 출처를 확인할 수 없으나, 진언의 명칭에서 맹인의 눈을 뜨게 하는 효험을 가진 진언일 것으로 추정된다.
제일체질병다라니는 당 불공(不空)이 번역한 『제일체질병다라니경(除一切疾病陀羅尼經)』(K.1300, T.1323)에 수록되어 있다. 부처님이 급고독(給孤獨) 장자의 동산, 즉 기원정사(祇園精舍)에서 아난다에게 세간의 모든 질병을 없앨 수 있는 이 다라니를 전하였다고 한다. 이 다라니를 염송하거나 수지하면 소화불량[宿食不消], 곽란(癨亂), 풍(風), 황달[黃], 가래[痰癊], 치질[患痔], 부스럼[瘻], 임증[淋], 상기(上氣), 기침[嗽], 학질[虐], 오한과 발열[寒熱], 두통[頭痛], 복통[背痛/半痛], 귀신들림[著鬼魅] 등을 치유할 수 있다고 설하고 있다.11)
정제일체안질병다라니는 불공이 번역한 『능정일체안질병다라니경(能淨一切眼疾病陀羅尼經)』(K.1301, T.1324)에 실려 있다. 부처님이 가비라위국(迦毘羅衛國)에 있을 때 눈병에 걸려 앞을 볼 수 없는 석가 종족이 눈이 청정해지도록 기원하자 아난을 보내 다라니를 전해주었다. 이 다라니는 눈병[眼垢], 풍병[風垢], 황달[黃病], 담병(痰病), 삼초병(三焦病)이 발병했을 때 효험이 있다고 한다. 눈병이 발생하면 많은 경우 눈곱이 끼고 뚜렷이 보이지 않는 증상을 동반하며, 황달은 눈의 흰자위가 누렇게 변하게 된다. 풍은 신경 장애로 인해 눈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이러한 안질환을 청정하게 없애 준다는 것이다. 또한 이 다라니를 지니는 자는 눈병이 나서 야차, 나찰, 구반다, 죽은 시체 등 헛것이 보이지 않을 것이라고도 설하고 있다. 아난이 다라니와 부처님 말씀을 받아 석가 종족의 걸쇄마가(乞曬摩迦)에게 건네주었더니 눈의 혈관이 청정해지고 눈의 모든 떼가 없어졌다고 한다.
이들 다라니는 『범서총지집』의 여러 판본 가운데 민영규 구장본의 후반부에만 수록되어 있다. 현존하는 여러 종류의 『범서총지집』 판본 가운데 민영규 구장본의 후반부에는 다른 판본에는 보이지 않는 다라니 120여 종이 수록되어 있다. 기존의 『범서총지집』 뒤쪽에 당시 고려에서 유통되었던 다라니들을 추가해 넣은 것으로 생각된다(김수연, 2016: 171). 즉, 경전 상으로만 보이는 것이 아니라 당시 고려시대 사람들이 실제로 활용했을 가능성이 큰 주문들인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안과 질환과 직접 관련된 다라니가 수록되어 있다는 점이다. 고려 후기 문집을 통해 드러나는 일상 질환 가운데 빈도 높게 등장하는 것이 안과 질환이라고 한다. 책을 읽고 글을 써야 하는 문인들에게 안과 질환이 많이 나타날 수밖에 없었고 치명적인 문제였기 때문에 이에 관한 시문이 많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이현숙, 2008, 181). 물론 안과 질환이 글을 접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큰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범서총지집』의 다라니를 지니고 다녔거나 읽을 수 있었던 사람들은 고위층이나 식자층, 혹은 승려로 추정되기 때문에 안과 질환이 고통스러운 일상 질병이었을 수 있다. 이 때문에 안과 질환을 치유해 주는 다라니를 많이 주송하는 등 빈번히 사용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3. 다라니 염송과 의례 개설

1) 다라니 염송을 통한 치유

일본 헤이안[平安]시대의 궁중 의관이었던 침박사(鍼博士) 탄바노 야스요리[丹波康賴]가 편찬한 『의심방(醫心方)』에는 현재 일실된 『신라법사방(新羅法師方)』을 인용하여 약을 복용할 때 외웠던 다라니를 소개한 구절이 있다.12) 직접적으로 병을 치료하기 위한 다라니는 아니지만, 약을 복용할 때 효과를 높이기 위한 목적으로 염송되었던 것이었다. 이 다라니는 치료를 전문적으로 하는 의승이나 밀교승들만 외웠던 것이 아니라, 약을 복용하는 사람은 누구나 사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치병과 관련된 다라니의 염송이 상당히 이른 시기부터 광범위하게 활용되어 왔음을 확인할 수 있다.
밀교 다라니를 통한 치병 활동은 『삼국유사』 신주편에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밀본최사(密本催邪)」조의 밀본은 『약사경』을 독송하여 선덕여왕과 김양도(金良圖)의 병을 치유한 인물이다. 그가 독송한 『약사경』은 『관정경(灌頂經)』의 제12권인 『관정발제과죄생사득도경(灌頂拔除過罪生死得度經)』일 것으로 추정된다.13) 『관정경』은 전체적으로 업설(業說)을 중심으로 치병과 제액(除厄)의 주술을 전개한 경전이다. 이 경전에 입각해 강력한 치병 주술을 행한 밀본은 신라 최초의 본격적 밀교 승려라 평가받는다(고익진, 1989: 399). 『관정경』의 제12권에는 약사여래의 12대원과 그 정토인 유리광정토(琉璃光淨土)에 대한 묘사, 약사여래의 위신력과 속명법(續命法), 즉 수명 연장법이 설해져 있다.
같은 신주편 「혜통항룡(惠通降龍)」조의 주인공인 혜통 역시 주문을 활용해 치병 활동을 전개한 인물이다. 혜통은 입당하여 무외삼장(無畏三藏)에게 수학하고, 삼장의 추천으로 당 고종의 공주의 병을 치유하였다. 공주의 병은 독룡의 소행으로,14) 혜통은 흰 콩과 검은 콩을 신병(神兵)으로 바꾸어 용을 쫓았다. 그는 후에 신라로 와서 주문을 외워 신문왕의 등창[疽]을 치료하였으며, 속세를 두루 다니며 사람들을 구제하고 만물을 교화하여 밀교의 교풍을 크게 떨쳤다고 한다. 이러한 혜통의 활동은 불교의 주술적 치료를 확산시키고 친숙하게 하였을 것이다. 『삼국유사』 「김현감호(金現感虎)」조에 의하면 신라 하대부터 고려시대에 이르기까지 호랑이에게 입은 상처에는 흥륜사(興輪寺)의 장을 바르고 나발 소리를 들으면 낫는다는 속설이 있었다고 한다. 신라시대에 흥륜사는 주술적 치료로 유명하고 권위가 있던 곳이었다.15) 주술적 치료가 가지는 권위와 그 효험에 대한 믿음이 민간요법이라는 형태로 드러났다고 해석할 수 있다.
「혜통항룡」조에서는 고려시대 천마산(天磨山)의 총지암(摠持嵓)과 모악(母岳)의 주석원(呪錫院)이 혜통의 뒤를 잇고 있다고 전한다.16) 이것이 고려시대의 밀교 종파 가운데 하나인 총지종이다. 혜통의 맥을 잇는 총지종의 활동 가운데 가장 특화된 것은 질병 치료 활동이었다. 대각국사 의천(大覺國師義天)은 병에 걸렸을 때 총지사에서 요양을 하였으며, 그는 결국 총지사에서 생을 마감하였다.17) 총지사는 「혜통항룡」조에 나오는 천마산 총지암이다. 병에 걸린 의천이 총지종 소속의 총지사를 찾았던 이유는 총지종이 왕실의 치료 활동에 관여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의종대에는 총지사 주지였던 회정(懷正)이 주금(呪噤)을 잘 해서 왕의 총애를 받았다고 한다.18) 여기에서 등장하는 주금이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주금과 관련된 최초의 기록은 『일본서기(日本書紀)』에서 찾아볼 수 있다. 비다츠[敏達] 6년(백제 성덕왕 24년, 577)에 백제왕이 율사(律師), 선사(禪師), 비구니(比丘尼), 조불공(造佛工), 조사공(造寺工) 등과 함께 주금사(呪噤師)를 일본에 보냈다고 한다. 이때 주금사는 주문과 기도를 통해 질병을 치유하는 일을 하던 불교 승려로 생각된다.19) 당의 경우 태의서(太醫署)에 주금박사가 소속되어 있었다. 『당육전(唐六典)』에 실려 있는 설명에 의하면 주금박사는 주금생들을 육성하는 역할을 하는데, 이들은 주금으로 사악한 귀신 때문에 일어나는 근심을 물리쳤다.20) 이들이 태의서에 소속되어 있다는 것은 주금이 치병 활동의 한 종류였음을 의미한다. 즉, 사악한 귀신이 일으키는 병, 혹은 병마를 퇴치하는 일을 하였던 것이다. 『고려사』 선거지(選擧志) 등에 의하면 고려시대에도 주금사가 있었다.21) 고려시대 주금사가 주술적 치료를 했는지의 여부는 확실하지 않으나, 의료 집단으로서 주금사가 있었다는 점에서 고려시대 ‘주금’이라는 단어에 치료 의미가 포함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의종의 총애를 받았던 회정도 단순한 주술보다는 치료 기능이 포함된 주술에 능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총지종의 치료 활동은 고종대에 활동한 지념업(持念業), 즉 총지종 승려인22) 조유(祖猷)의 승계를 선사(禪師)에서 대선사(大禪師)로 올려 임명하는 교서 및 관고에서 더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이에 의하면 그는 낙산사 주지였는데, 고종 13년(1226)에 최이의 병을 고친 것을 계기로 대선사에 임명되었다.23) 당시 최이는 발에 부스럼이 나는 종(瘇)을 앓고 있었는데,24) 조유가 용주(龍呪)를 외워 이를 치유한 것이다. 이 용주는 『천수경(千手經)』의 소룡다라니(召龍陀羅尼)였을 것으로 추정된다(김영미, 2010: 171-172).
나아가 그는 법력으로 여귀(癘鬼)를 쫓아 없애서 사람들을 구제하였다. 여귀는 전염병을 이르는 것인데, 최이가 정권을 잡은 전후 기간 동안에 고려에서는 여러 차례 전염병이 돌았다.25) 이 때 조유가 주술로써 전염병에 걸린 사람을 도운 것으로, 서민까지 포함하는 대민 치료 활동을 전개하였다고 보인다. 이규보가 한림원 시절에 쓴 「동림사행 역병기양 소룡도량문(東林寺行疫病祈禳召龍道場文)」과 「역병기양 소룡도량문(疫病祈禳召龍道場文)」을 보면 역병을 물리치기 위해 소룡도량을 개설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조유가 역병을 물리치기 위해 사용한 것이 소룡다라니 혹은 소룡도량이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소룡다라니를 활용해 최이의 병을 고쳤던 조유가 역병을 물리칠 역량이 충분했을 것이다. 개경의 총지사는 도성에 있었던 만큼 왕실 의료에 관여하였으며, 지방에 거처하던 총지종 승려들은 다라니를 염송하여 대민 치료활동을 펼쳤다고 생각된다.
승려가 아닌 이들도 병을 치료할 때 주술을 활용하였다. 고려 후기의 염승익(廉承益)의 사례이다.
  • A-1. 염승익은 … 일찍이 나쁜 병에 걸렸는데 불교의 신축(神祝)을 외우고 손바닥을 뚫어 동아줄로 꿰며 정성스럽게 노력해 질병이 나았으므로, 드디어 다른 사람들의 질병을 푸닥거리해서 낫게 해주는 것을 직업으로 삼았다.26)

  • A-2. 왕의 병이 조금 차도를 보여 천효사(天孝寺)로 이어(移御)하였다. … 당시 정랑 염승익이 불교의 주술로 왕으로부터 총애를 얻어 병을 간호하고 있었다.27)

  • A-3. 염승익이 조금 있다 병으로 사직했으며 또 얼마 안 되어 모친상을 당하였다. 제국대장공주가 병이 들자 상복을 벗고 궁궐로 들어오라는 명령을 받으니, 법석을 열고 손바닥을 뚫고 부처에게 기도하였다.28)

위의 인용문 A는 충렬왕의 총애를 받았던 염승익과 관련된 기사들이다. A-1은 병에 걸린 염승익이 불교의 신축을 통해 나았다는 내용이다. 신축은 신주(神呪)와 같은 것으로,29) 신주를 외움에 줄로 손바닥을 꿰면서 용맹하게 정진한 결과 질병이 나았다는 것이다.30) 이렇듯 신주, 즉 다라니 염송을 통한 치유에 능통해 이를 업으로 삼았고, 그 효험이 좋았던지 충렬왕의 눈에 들게 되었다.
A-2는 충렬왕 3년(1277) 7월의 상황이다. 같은 달 초에 충렬왕이 갑자기 병에 걸렸는데, 당시에는 제국대장공주가 과도한 궁실 정비를 추진하였기 때문에 왕이 병에 걸렸다고 파악했던 것 같다. 이날 관후서(觀候署)에서 『도선비기(道詵密記)』의 내용을 인용하며 공주가 추진하는 다층 누각 궁실 조성이 고려의 기세를 약하게 만들기 때문에 재앙이 발생할 수 있다고 진언하였다. 오윤부(伍允孚)도 공주에게 근래 천변이 여러 차례 나타나고 가뭄이 지속되므로 궁실 정비를 늦추고 덕을 닦아 재앙을 누그러뜨리라는 간언을 하였다. 같은 날 왕이 갑자기 병이 나자 재추들은 건축 공사를 중지하고 매를 놓아주기를 청하였고 공주는 이를 따랐으며, 왕은 김방경의 집으로 피병을 갔다. 김방경의 집에서 요양을 하던 왕은 차도를 보였고, 이에 천효사로 이어를 하였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염승익은 왕을 시종하며 병구완을 하였다. 불교의 주술로 총애를 얻었다는 표현으로 보아, 염승익의 역할은 다라니 염송과 기도를 통한 치유였던 것 같다.
이러한 염승익의 활동을 말년에도 이어진다. A-3은 충렬왕 23년의 일이다. 제국대장공주는 동왕 22년(1296)에 원에 갔다가 이듬해 5월 귀국 후 병에 걸렸다. 충렬왕은 공주가 병에 걸리자 법회를 열고 연비의식을 행하며 빈민들에게 내고의 쌀을 내려 덕을 베풀고 원에 의원 파견을 요청하는 등 노력을 다하였다. 이러한 급박한 상황에서 염승익도 본인의 상복을 벗고 능력을 살려 공주의 치병 기도에 전력을 다하는 모습이다. 법회를 열고, 정성을 보이기 위해 손바닥을 뚫고 기도를 하였으나, 효험이 없었는지 공주는 귀국 후 보름 만에 사망하고 말았다.
인용문에 제시한 염승익의 일련의 치병 활동을 보면, 그는 밀교 승려가 아니지만 다라니 염송을 치유 방편으로 삼고 있다. 그는 충렬왕과 공주의 총애를 받아 항상 대궐 안에 거처하였다고 하며, 당시 세간에서는 그를 노주(老呪)라 하였다고 한다.31) 다라니 염송을 주특기로 하였던 염승익의 치유 방식이 왕과 공주의 총애를 얻을 수 있는 자산이었을 것이다.
이는 앞서 언급한 『고려도경』의 서술과 맥이 닿는다. 즉, 서긍은 고려 사람들은 병에 걸리면 약을 복용하지 않고 귀신을 섬기고 주문과 압승을 일삼을 줄만 안다고 하였다. 왕실 구성원이 병에 걸렸을 때 의약 차료가 기본이 되었겠으나, 다라니 염송 등의 치료 방법도 병행되었다. 염승익이 큰 총애를 받았던 점은 주술을 활용한 치병의 효과에 대한 믿음이 전제되어 있다. 승려가 아닌 염승익의 주술적 치유 방법이 통했다는 것은 전 시기부터 이어져 오던 주술적 치료법이 고려 후기까지도 유효했으며 더 보편화되었음을 시사한다. 즉 주술의 전문가가 아닌 인물이 행한다는 점에서 주술적 치유에 대한 인식이 보편화, 확산되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2) 밀교 의례의 개설

의례의 개설은 전통적인 불교적 질병 치유 방식의 하나였다. 치료에 효험이 있다고 설해지는 존격들에게 치유를 기도하는 것다. 그 가운데 밀교 의례에 해당하는 사례를 살펴보자.32)
질병 치료를 위해 개설된 밀교 의례로는 우선 마리지천도량이 있다.
  • B. 계미에 왕이 묘통사(妙通寺)에 행차하여 마리지천도량(摩利支天道場)을 열었다. 이날 수창궁(壽昌宮)에 돌아와 명인전(明仁殿)에서 72성(星)에 초제를 지냈다. 또 천황대제(天皇大帝)와 태일(太一) 및 16신(神)에게 초제를 올려 역질을 물리쳐 달라 기도하였다.33)

의종 6년 4월~6월에는 가뭄과 기근, 역병이 함께 발생하였다. 산천과 신사에 비를 빌고 기근과 역병에 고통 받는 사람들을 구휼하는 기사가 보인다. 마리지천도량은 『불설대마리지보살경(佛說大摩里支菩薩經)』, 『불설마리지천보살다라니경(佛說摩利支天菩薩陀羅尼經)』, 『다라니집경(陀羅尼集經)』 권 10의 「불설마리지천경(佛說摩利支天經)」 등을 소의경전으로 개설된 의례이다. 특히 『다라니집경』에서는 역병으로 사망하는 사람이 끊이지 않는 경우 강변의 진흙으로 100개의 귀신 형상을 만들어 의례를 거행하는 방법을 자세히 언급하고 있다(김영미, 2010: 155-156). 귀왕과 아흔 아홉의 귀신들이 역병의 원인이 되는 귀신을 붙잡아 영원히 나올 수 없도록 땅 속에 파묻는 관념으로, 이 작법을 다 행하면 마리지천이 와서 질병을 치료한다고 설하고 있다.34) 고려시대에 마리지천도량은 전염병 기양 외에 외적 기양을 위해 주로 개설되었다. 『다라니집경』 외의 다른 『마리지천경』에는 전염병 치료에 대한 언급이 없거나 소략한 것으로 보아, 적어도 전염병 기양을 목적으로 한 마리지천도량은 『다라니집경』을 바탕으로 개설된 것으로 생각된다.35)
공작명왕도량과 불정심도량도 질병이나 전염병을 물리치고자 개설된 밀교 의례였다. 공작명왕도량은 예종 5년(1110) 4월에 개설되는데, 같은 달에 사천대(司天臺)에서 전염병이 크게 돌아 길거리에 사람들의 뼈가 가득하니 매장하도록 하자는 요청을 올렸다. 공작명왕도량도 이를 의식하여 개설되었다고 생각된다. 고려시대에는 공작명왕 관련 의례 개설이 이 사례 한 건밖에 보이지 않지만, 조선시대에 질병 치료를 위하여 사찰이나 불당에서 공작재(孔雀齋)를 개설한 사례들이 보인다.36) 조선 왕실의 불교 의례는 고려 왕실의 유제 혹은 고려 사회를 거쳐 형성된 기저 신앙의 발현일 것이므로, 『공작명왕경』을 소의경전으로 하여 개설된 공작명왕도량도 치병 의례였을 것이다.
불정심도량은 『불정심다라니경』을 소의경전으로 하는데, 고종 42년(1255) 전염병 기양을 위해 개설되었다. 앞서 언급했듯이 『불정심다라니경』에는 전염병이 퍼졌을 때 이 경전의 효험으로 진정되었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고종 42년 당시에 전염병이 돌았다는 직접적인 기사는 없으나, 이해 3월부터 7월까지 청주 이남에 큰 가뭄과 기근이 들어 백성들이 많이 사망하여 진휼하였다는 기사가 나온다.37) 기근으로 인한 전염병의 유행을 유추할 수 있다.
개인의 질병으로 인해 밀교 의례가 개설되기도 하였다. 보성도량과 소재도량이 대표적이다.
  • C-1. 무자에 왕비 임씨(任氏)가 병을 앓자 대관전(大觀殿)에서 5일간 소재도량을 열었다. 경인에 태자에게 명하여 수문전에서 3일간 보성도량(寶星道場)을 열었다.38)

  • C-2. 5월 우왕이 병이 들어 서연청(書筵廳)에서 소재도량을 개설하였다.39)

위의 인용문 C-1의 왕비 임씨는 인종비 공예태후(恭睿太后) 임씨이다. 소재도량은 『불설치성광대위덕소재길상다라니경(佛說熾盛光大威德消災吉祥陀羅尼經)』과 『불설대위덕금륜불정치성광여래소제일체재난다라니경(佛說大威德金輪佛頂熾盛光如來消除一切災難陀羅尼經)』 등을 바탕으로 개설된 의례이다. 불교의 천문성수신앙과 관련된 치성광여래(熾盛光如來)가 의례의 주존으로, 성변(星變)이나 천재지변 등 오행의 운행 이상을 해소하기 위해 개설되었다. 고려시대에는 왕이나 왕비의 질병도 성변 때문으로 보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에(김수연, 2013: 175), 성변을 기양하기 위한 소재도량이 치유 목적으로 개설되었던 것이다.
인용문 C-1의 보성도량도 마찬가지이다. 경인일 기사에 왜 보성도량이 개설되었는지는 나타나 있지 않으나, 이 날은 소재도량을 시작한 무자일의 이틀 뒤이다. 따라서 역시 왕비 임씨의 치병을 위해 개설한 것이었다. 보성도량은 『보성다라니경(寶星陀羅尼經)』을 소의경전으로 개설된 의례이다. 이 경전은 우바저사(優波底沙)와 구리다(俱利多), 즉 사리불과 목건련이 출가하려고 할 때 그것을 방해하는 마왕을 제압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마왕은 결국 부처님에게 항복을 하는데, 그 과정에서 마왕을 제압할 수 있는 다라니를 제시함으로써 모든 재난과 불행 막고 복덕을 가져올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고 있다. 병이 나게 한 악귀를 물리치고자 보성도량을 개설한 것이다.
병의 원인을 외부 악귀나 원귀에게서 찾는 인식은 전근대 사회의 전형적인 질병관 가운데 하나이다. 같은 인종대에 개설된 「속리사 점찰회소(俗離寺占察會疏)」에서는 인종이 병에 걸린 이유를 죽은 이들의 원혼 때문으로 보고 있다. 인종이 병에 걸려 무당과 의원을 불러 여러 번 치료를 받았으나 효험이 없어, 부처의 가피력을 빌어 치료를 하고자 한 것이다. 인종의 병은 조부인 숙종 때 죽은 이들과 이자겸이 정권을 잡았을 때 죽거나 귀양간 사람들의 원혼 때문에 발생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병을 치료하는 방식으로 원혼의 넋을 위로하고자 점찰회를 개설하였다는 것이다.40) 점찰회 자체가 질병 치료에 효험이 있는 것이 아니라, 병의 원인을 제거하기 위한 방편인 것이다.
앞서 소개한 밀교 의례들도 유사한 치료 방식을 취하고 있다. 병이 낫는 방식이 구체적으로 서술되어 있는 부분을 살펴보자. 마리지천도량에서는 역병의 원인이 되는 악귀를 붙잡아 땅에 파묻어 영원히 나오지 못하게 봉쇄한다. 소재도량에서는 성변을 일으키는 오행의 불순을 해소함으로써 병인을 제거하거나 병을 치유하고자 하였다. 보성도량에서는 마왕을 제압할 수 있는 다라니로써 재앙을 막는 방식이다. 의례 개설의 바탕에는 위기의 원인을 제거하여 위기를 극복하려고 하는 지극히 합리적인 사고가 깔려 있었다. 다만 불교가 주도 종교였던 고려 사회에서 원인을 제거하는 데에 신앙심에 바탕을 둔 종교·사상적 방식을 취하였던 것이다.

4. 둔갑(遁甲)과 부인(符印)의 활용

1) 둔갑과 피병(避病)

총지종 승려들은 다라니 염송 외에도 ‘둔갑’을 치료에 활용하였다. 이는 『조선왕조실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 D. 전지(傳旨)하였다. “총지종은 오로지 밀원(密員)의 술법으로써 둔갑하고 사람을 구료(救療)한다고 하여 설치한 것인데, 위의 종파의 승려들이 그 직임을 알지 못한다. 이제부터 그 직책과 사찰 주지직을 주지 말도록 하라.”41)

위의 인용문 D는 조선 초 태종대의 기록이다. 조선 초의 사람들은 고려 말을 살았던 사람들이기도 하다. 또한 숭유억불을 표방했던 조선왕실 내 남아 있는 불교문화이기 때문에 고려 왕실의 전통을 계승한 것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위의 기사는 총지종이 밀원의 술법으로 둔갑하고 사람을 구료하기 위해 설치된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당시 총지종의 승려들은 밀원으로서, 내도량(內道場)의 일종인 밀원(密院)에 소속되어 있었다.42) 그리고 둔갑을 통한 구료의 역할이 기대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말하는 둔갑으로 사람들을 구료한다는 것은 어떠한 치료법인 것일까. 우선 당시에 둔갑의 용례를 통해 확인해 보자.
  • E-1. 임금과 양녕·효령이 대비를 모시고 개경사(開慶寺)에 가서 피병(避病)하였다. 술사둔갑술(術士遁甲法)을 써서 시위(侍衛)를 다 물리치고, 밤에 환관 2인, 시녀 5인, 노비 14인만 데리고 대비를 견여(肩輿)로 모시어 곧장 개경사로 향하였다. 밤이 이미 삼경[三鼓]이라, 절에 가까이 이르러 임금이 한 사람만 데리고 먼저 절에 가서 있을 방을 깨끗이 쓸고 돌아와 대비를 맞았다. 절에 머문 지 나흘이 되도록 사람들에게 알리지 아니하고 낙천정(樂天亭) 시위를 평상시와 같이 하니, 안팎에서 그 향방을 알지 못하였다. 임금이 친히 약사여래에게 가서 정성껏 부지런히 불공하고 반승을 하였으나 병세는 나아지지 않았다.43)

  • E-2. 임금과 양녕·효령이 대비를 모시고 도류승(道流僧) 해순(海恂)에게 먼저 둔갑술을 행하게 하고, 풍양(豐壤) 오부(吳溥)의 집으로 향하려 하였다가 잘못 길을 잃어 다른 집에 이르니, 집이 심히 좁고 누추하였다. 또 풍양 남촌 주부(注簿) 최전(崔詮)의 집을 찾아 가서 머무르며 기도하였으나, 병이 낫지 아니하였다.44)

  • E-3. 상왕이 남모르게 피병소(避病所)에 거둥하여 대비의 병을 보고, 바깥 행랑에 나아가 오찬을 갖추어 임금과 양녕·효령에게 먹기를 권하였다. … 상왕이 말하기를 … 대비의 병이 학질임은 의심할 것이 없고, 최근 둔갑하여 피방[遁甲避方]하는 것도 종시 효험이 없어서 사람들을 왕래하게 한 것이다.45)

위의 인용문 E는 세종의 어머니이자 대비인 원경왕후 민씨(元敬王后 閔氏)의 치병을 위해 둔갑법[術士遁甲法, 遁甲之術]을 사용한 사례이다. 우선 E-1에서 어머니인 원경왕후의 병에 차도가 없자, 세종은 치료 방법으로 원경왕후를 개경사로 옮겼다. 여전히 차도가 없었던지 며칠 후 해순에게 둔갑술을 행하도록 한 후 어머니를 모시고 오부의 집으로 가려고 하였다(E-2). 얼마 후에는 상왕, 즉 태종이 원경왕후의 피병소를 방문해 둔갑으로 피방(避方)하는 것도 효험이 없다는 말을 한다(E-3). 이상의 사료에서 공통적으로 읽어낼 수 있는 것은, 둔갑이 자리를 옮기는 것과 관련이 있다는 점이다. 즉, 둔갑으로써 치료를 한다는 것은 병이 낫는 지점으로 환자를 옮기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46)
이상의 인용문 E에 나오는 둔갑은 도교의 기문둔갑(奇門遁甲)을 가리킨다. 기문둔갑은 한 대(漢代)의 『역위건착도(易緯乾鑿度)』에서 시작된 것으로, 남북조 시대에 크게 성행하였다. 기문의 기(奇)는 삼기(三奇)를, 문(門)은 팔문(八門)을 말하는 것이며, 둔(遁)은 숨거나 도망가는 것이고 갑(甲)은 십간(十干)의 시작이자 우두머리인 갑을 가리킨다. 즉 기문둔갑에서 ‘기문’은 핵심적인 구성요소를, ‘둔갑’은 점복 방식의 학문적 본질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오청식, 2016: 30). 십간 가운데 을(乙)·병(丙)·정(丁)을 삼기, 무(戊)·기(己)·경(庚)·신(辛)·임(壬)·계(癸)를 육의(六儀)라고 하는데, 삼기와 육의는 구궁(九宮)에 각자 위치가 있다. 갑은 정해진 위치가 없다. 한편 팔문은 구궁에 맞춰 길흉을 판단하는 여덟 가지 문으로, 팔괘가 변화하는 모습인 개(開)·휴(休)·생(生)·상(傷)·두(杜)·경(景)·사(死)·경(驚)을 가리킨다. 갑을 삼기, 팔문, 육의, 구궁 위로 움직이며 길흉화복을 점치고 나아가고 피함을 결정하는 것이 기문둔갑이다. 기문둔갑은 초창기에는 군사(軍事)나 병법과 관련되어 나타난다. 그러나 병법에 국한되지 않고 천시기상과 인사의 길흉화복을 광범위하게 점친다고 한다(상기숙, 2001: 55-56).
둔갑법은 삼국시대에 한반도에 들어왔던 것 같다. 백제 승려 관륵(觀勒)이 스이코[推古] 10년(602) 10월에 역본(曆本)과 천문·지리서 및 둔갑·방술서를 일본에 전했다는 기사가 있기 때문이다.47) 한반도의 승려들이 일찍부터 역법과 천문, 지리 및 둔갑술 등을 공부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전통은 고려까지 이어졌다. 『고려사』에는 문종 11년 7월에 송 귀화인 장완(張琬)에게 그가 공부한 둔갑삼기법과 육임점(六壬占)을 시험하고, 태사감후(太史監候)로 임명하게 하였다는 기사가 있다.48) 둔갑삼기법이란 십간을 삼기와 육위로 나누는 기문둔갑을 지칭하는 것이다. 이 기사를 통해, 당시 고려 사회가 장완을 시험할 만큼 기문둔갑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지니고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기문둔갑을 활용한 치료는 기문둔갑의 술법을 써서 병이 나을 수 있는 지점을 점쳐 그곳으로 옮기는 것이다. 즉, 의학적인 치료나 다라니·주술을 통한 치료 방식이 아니라, 병의 추이를 점치거나 피병소를 찾는 데에 활용되었다고 생각된다. 전근대 사회에서 병을 치유하기 위한 방편으로 피병을 하는 것은 드물지 않은 일이다. 사찰이나 신하의 집으로 피병을 위해 자리를 옮기는 사례는 자주 등장한다. 지금까지는 불보살의 위신력으로 병마를 물리치고자 사찰로 이어하거나 환경에 변화를 주어 치료를 돕고자 한 것으로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이러한 피병의 많은 경우, 길방(吉方)으로 거처를 옮겨 병마를 물리치고자 하는 기문둔갑이 배경으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2) 치료용 부인의 활용

흔히 부적은 도교나 무속에서 사용한다고 알고 있지만, 불교 특히 밀교 경전에도 부적이 수록되어 있다. 밀교와 도교는 현세이익이라는 측면에서 유사성을 보이며, 중국에서 4~6세기에 형성된 부록파(符籙派)의 부주(符呪)와 방술, 치병 등의 방편을 밀교에서 받아들였다(강대현, 2020: 119). 부인법은 밀교 수행법인 호마법과 맥이 통한다. 다만 호마법은 세간·출세간, 즉 현세구복과 보리증득을 막론한 성취법인 반면, 부인의 경우는 일체의 재앙 및 병고를 극복하고 수명을 연장하기 위한 현실적인 효용을 주로 취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강대현, 2020: 143). 밀교 경전에 수록된 부적의 효험 가운데 하나가 치병으로, 고려시대에 유행했던 『불정심다라니경』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 경전은 3권의 소경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가운데 경전의 제2권에서는 비자인, 즉 부적을 사용하는 처방이 등장한다. 난산일 때, 뱃속에서 태아가 죽었는데 모체 밖으로 나오지 않아 산모의 목숨이 위험할 때, 병에 걸려 오랫동안 누워있으면서 약도 효과가 없을 때 등의 상황에서 다라니와 비자인을 주사(朱砂)로 써서 향수와 함께 복용하라고 설하고 있다.49) 예로부터 난산은 산모와 아기의 목숨을 앗아가는 흔한 사망 원인이었다. 『불정심다라니경』의 비법은 출산 시 신적인 존재의 가호를 물리적 표현으로 가시화함으로써 산모의 마음을 안정시키는 역할을 했던 것 같다(이유진·안상우·김동율, 2019: 72). 한편 주사는 경련과 발작을 진정시키는데 사용되는 광물이며, 주사로 글을 쓰게 되면 벽사(辟邪)를 상징하는 붉은 색이 나타난다. 또 향수는 그 자체가 약리 상 효과가 있기도 하고, 복용하는 사람에게 신성한 느낌을 들게 한다. 즉 주사로 다라니와 부적을 써서 향수와 복용하는 방식은 심리적 치료와 약리적 치료를 병행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김수연, 2012: 110).
현재 다양한 고려판 『불정심다라니경』이 남아 있으나, 그 가운데 가장 신앙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합천 해인사에 소장되어 있는 판본(보물 제734-10호)이다. 이 『불정심다라니경』은 세 권 전체를 각인한 것이 아니라 중요한 부분만을 1판 1장에 새긴 축약본이다. 발원자는 어매현(御梅縣)에 거주하는 남아(男兒)이다.50) 거주지와 남아라는 것만 밝히고 있는 것으로 보아, 지배층이 아니라 일반 민이 발원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여기에 새겨진 내용은 간략한 다라니 공덕 소개와 한자로 된 다라니 문구, 그리고 부인이다. 제2권에서 제시된 처방들로, 치료에 직접 활용되는 다라니와 비자인만 독립시켜 판각한 것이다. 더구나 이 판은 상당히 많이 사용된 듯, 목판의 발원문 부분이 마멸되어 제일 마지막 세 줄은 글자를 거의 알아볼 수 없다. 이 판본에 대한 선호도가 높았음을 알 수 있다. 고려사회에서 다라니와 부적을 활용한 치병에 주목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보물 제734-10호본은 최소비용을 들여 최대 효과를 노린 것이라 평가할 수 있다(김수연, 2012: 109).
축약본 다라니경에서 더 나아가, 불정심다라니와 권말의 부적이 독립되어 다른 경전의 권말에 수록되기도 하였다. 화성 봉림사 목조 아미타불좌상의 복장 유물인 보물 제1095-1호 『금강반야바라밀경』의 권말에는 범자로 쓰여진 다라니와 부적이 실려 있다. 불정심다라니를 필두로 소재진언(消災眞言), 보루각진언(寶樓閣眞言), 준제다라니(准提陀羅尼) 등 다양한 범자 진언에 이어, 여의인(如意印), 생정토인(生淨土印), 염제귀부(厭第鬼符), 퇴열부(退熱符), 퇴온부(退溫符) 등과 함께 구난산부(救産難符)라는 이름으로 『불정심다라니경』의 권말 부적이 실려 있다. 이 판본은 충선왕 3년(1311)에 각원(覺圓)이 비구 달현(達玄), 영흥(永興) 및 신도 이기(李琦), 전대동(田大同) 등과 함께 발원하여 판각하였고, 충숙왕 복위 8년(1339)에 진성군 강금강(晋城君 姜金剛)이 시주하여 인출(印出)한 것이다. 호신이나 독송을 위하여 소매에 넣고 다니던 수진본이다(김수연, 2017: 226, 232).
흥미로운 점은 이 판본에서는 다양한 질병 치유를 설하던 『불정심다라니경』의 역할을 출산을 도와주는 역할로 축소시킨 측면이 있다는 점이다. 경전에서 부인을 사용하도록 처방을 하는 경우는 난산이나 사산으로 산모의 목숨이 위험할 때뿐 외에도, 약도 안 듣는 병에 걸린 경우, 가슴앓이를 해 말을 못하는 경우 등도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부인으로 인출된 경우, 그 아래에 ‘구산난부’라고 명칭을 제시함으로써 부적 활용 범위를 난산으로 한정시키고 있다(김수연, 2017: 242-244). 이는 이 부인의 효험을 난산으로 특화시킨 것이다. 다양한 질병에 보편적으로 효험이 있다는 것보다 전문성을 부각시켜 신뢰를 높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이후 ‘구산난부’는 불교의 대표적인 부인으로 계속 인출되었다.
앞서 『불정심다라니경』은 전염병에도 효험이 있다고 여겨져, 고려 후기에 불정심도량이 개설되었음을 언급하였다. 일정한 내용 요소들이 가시적으로 표현되어야 하는 의례와 부인을 태워 마시는 치료 행위는 질병에 대한 대책이라는 점에서는 같지만 성격이 전혀 다른 치유 행위로 보아야 한다. 고려시대 사람들은 『불정심다라니경』을 통해 치병이라는 현세구복적 이익을 얻고자 하였으며, 현세구복적인 측면을 더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방향으로 형태를 바꾸어 나간 것이다.

5. 맺음말

질병이나 전염병은 개인적으로나 국가·사회적으로 큰 위기를 가져온다.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인간은 가능한 모든 방법을 취하기 때문에 질병에 대한 이해와 치료 방법은 사회·문화적 의미를 지닌다. 본고는 고려시대 밀교적 치유 문화의 유형과 성격을 분석함으로써, 고려 사회가 질병을 대하는 태도와 치료관, 나아가 고려시대인들의 사유 방식을 살펴보았다.
고려시대에는 질병 관련 다라니 경전의 간행이 이루어졌다. 『장수멸죄경』, 『불정심다라니경』, 『범석사천왕다라니경』, 『천존각온왕신주경』 등의 질병 치료와 관련된 다라니경들이 단본으로 간행되었다. 한편 다라니 모음집인 『범서총지집』에도 제일체질병다라니, 정제일체안질병다라니 등이 수록되어 있다. 특히 『범서총지집』에 수록된 다라니들은 고려 사회에서 주목도 높게 활용하였던 다라니들이다. 안과 관련 질환의 비중이 높은데, 인출된 다라니를 지닐 수 있던 식자층, 고위층이 책을 많이 읽고 글을 많이 써 안과 질환이 나타날 가능성이 컸기 때문으로 보인다.
다라니경의 간행은 다라니 염송의 전제 조건이라고도 할 수 있다. 다라니 염송에 의한 치병은 고대부터 보이는데, 『삼국유사』의 혜통이 대표적이다. 혜통의 맥을 잇는 고려시대 밀교 종파가 총지종이었다. 대각국사 의천이 총지종의 종찰인 총지사에서 사망한 점에서, 총지종은 왕실 의료의 일부분을 담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총지종 승려 조유는 주문을 외워 전염병을 물리치기도 하고, 당시 최고 집정이었던 최이의 질병을 고치기도 하였다. 원 간섭기 염승익은 주문을 통한 질병 치료 능력이 뛰어나 왕의 총애를 받았다. 그는 승려가 아니었음에도 주문을 사용한 치료에 전문성을 보여 주었다. 이는 일반인에게까지 치병 주문이 널리 퍼져 있었던 당시 모습을 반영하는 사례이다.
의례의 개설은 전통적인 치병 방법 중 하나이다. 고려시대에는 치병을 위한 밀교 의례도 다양하게 개설되었다. 전염병의 기양을 위해 마리지천도량, 공작왕도량, 불정심도량 등이 개설되었고 왕과 왕비의 질병 치료를 위해 소재도량, 보성도량 등이 개설되었다. 다라니의 공덕으로 역병이나 질병의 원인이 되는 요소들을 해소함으로써 치유를 도모했던 것이다.
한편 도교적 요소가 보이는 밀교 치유 방식도 보인다. 둔갑과 부인의 활용이 그것이다. 조선 초 총지종 승려들은 둔갑을 써서 질병 치유에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둔갑은 도교의 기문둔갑인데, 환자의 치료에 좋은 길방을 점치는 것을 말한다. 조선 초 총지종 승려들의 이러한 모습은 고려의 유산으로 보이기 때문에, 둔갑도 고려시대의 밀교 치료 방식 가운데 하나였다고 할 수 있다. 부적은 흔히 도교나 무속에서 사용하는 것으로 알고 있으나, 불교 경전, 특히 밀교 경전에도 다양한 부적이 수록되어 있다. 『불정심다라니경』은 권말의 부적을 태워 복용하면 병이 낫는다는 내용을 설하고 있다. 이 경전에서 제시하는 치병 방법은 고려시대에 상당히 인기가 있었던 듯, 다라니 문구와 부적만을 새긴 축약본이 제작되기도 하였다. 효율성을 극대화시킨 현실적 치료 방법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이상과 같은 다양한 밀교 치유 방식들은 개인적 사회적 위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인간이 최대한의 노력을 행하였음을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치유 방법은 당시 사회의 정치, 사상, 문화 등을 종합적으로 보여주는 요소이다. 밀교적 치유 방식이 현대인의 시각에서는 미신으로 치부될 치료 행위일지 모르나, 고려시대 사람들의 사유 체계 안에서는 효험이 보장된 신용할 만한 방법이었을 것이다.

Notes

1) 『三國遺事』 권3, 興法 제3, 阿道基羅

2) 『高麗史』 권106, 열전 제19, 趙簡; 권36, 세가 제36, 충혜왕 2년 5월 계미; 李齊賢, 『益齋亂藁』 권10

3) 『宣和奉使高麗圖經』 권16, 官府, 藥局, “高麗舊俗, 民病不服藥, 唯知事鬼神, 呪咀厭勝爲事.”

4) 다라니(陀羅尼, dhāranī), 진언(眞言, mantra), 주(呪, vidyā)는 원래 별개의 어원을 가지고 성립되었으나 보통은 동일한 의미로 사용한다. 또한 다라니는 어의(語義)를 살려 총지(摠持)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본고에서는 주문의 명칭을 서술할 때 원전 자료의 표현이나 관습적 명칭 등을 따르며, 다라니·진언·주(문)·총지를 구분하지 않고 동일한 의미로 혼용하고자 한다.

5) 이하 4종류 다라니경의 고려시대 간행 상황과 판본에 대하여는 다음 연구들을 참고하였다. 남권희, 2001; 2002; 2005; 우진웅, 2010; 김수연, 2012.

6) 이들 두 경전과 함께 전해져 오는 『불설도액경(佛說度厄經)』의 말미에는 ‘신유(辛酉)’라는 간지가 보이는데, 이는 문종 35년(1081) 신유년으로 추정된다. 이 판본은 ‘신해 7월(辛亥 七月)’이라는 필사기(筆寫記)가 있어(남권희, 2002: 349) 『장수멸죄경』의 조성 연대는 문종 35년과 가까운 동왕 25년으로 생각된다.

7) 『佛頂心陀羅尼經』(보물 제1108호, 성보문화재단 소장), “命工人効唐本, 詳密而啚之, 楷正而寫之, 鏤而刊之.”

8) 洪邁 撰, 『夷堅志』 卷2

9) 방산석경 No.1078과 No.1080이다. 탁본은 中國佛敎協會, 2000: 617-620; 623-626 참조.

10) 민영규 구장본 『범서총지집』은 고종 5년에 혜근대사(惠謹大師)가 발원하여 금산사(金山寺)에서 개판을 하였고, 개태사(開泰寺)의 인혁대사(仁赫大師)가 각판한 것이다. 발문이 있어 개판 연대를 확실히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현재까지 확인된 『범서총지집』 가운데 유일하게 서문(序文)이 있는 판본이다. 연세대 도서관 국학자료실에 소장 중이며 현전하는 『범서총지집』 가운데 가장 많은 수인 597종의 다라니를 수록하고 있다. 고려시대 『범서총지집』의 판본과 민영규 구장본의 성격에 대하여는 김수연, 2016 참조.

11) 不空 譯, 『除一切疾病陀羅尼經』(T.1323, 489c20~22), “宿食不消, 癨亂, 風, 黃, 痰癊, 患痔, 瘻, 淋, 上氣, 嗽, 虐, 寒, 熱, 頭痛, 半痛, 著鬼魅者, 悉得除差.” 위의 질병 가운데 곽란은 토하고 설사하는 증상이 동시에 일어나는 병을 포괄하며, 임증은 빈뇨, 급뇨, 배뇨장애, 배뇨 시 통증과 소변이 찔끔찔끔 나오는 등의 증후를 통칭한다. 상기는 날숨이 많고 들숨이 적어져 호흡이 급해지는 것을 가리킨다.

12) 『醫心方』 권2, “服藥頌. 新羅法師方云, 凡服藥呪曰, 南無東方藥師琉璃光佛, 藥王藥上菩薩, 耆婆醫王, 雪山童子, 惠施阿竭. 以療病者, 邪氣消除, 善神補助, 五臟平和, 六府調順, 七十萬脈, 自然通張, 四體强健, 壽命延長, 行住坐臥, 諸天衛護. 莎訶(向東誦一遍乃服藥).”

13) 『약사경』은 양대(梁代)에 『관정경』의 제12권으로 편입되어, 크게 유행하였다. 따라서 그 영향이 신라에 미쳤을 가능성이 높을 뿐 아니라 후에 명랑의 문두루비법(文豆婁秘法)이 『관정경』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밀본이 독송한 『약사경』은 『관정경』 제12권으로 추정된다(고익진, 1989: 397).

14) 「혜통항룡」조의 독룡을 전염병으로 보는 연구도 있다. 독룡이 혜통에게 쫓겨나 신라로 오고, 신라 내에서 지역을 옮겨 다니며 해를 끼친 것을 전염병이 당에서 신라로, 신라 내에서도 각지로 확산된 것으로 파악하였다(노중국, 2011: 48-49).

15) 선덕여왕이 병에 걸렸을 때 치료를 위해 밀본 전에 초청된 인물이 흥륜사의 법척(法惕)이었다. 또 최치원이 쓴 「신라 수창군 호국성 팔각등루기(新羅壽昌郡護國城八角登樓記)」에 의하면 흥륜사에는 융선주사(融善呪師)라는 인물이 있었다고 한다. 이 인물은 주문을 주로 하고 잘 하였기 때문에 ‘주사’라는 호칭으로 불렸을 것이며, 주술적 치료 활동을 했을 가능성도 있다. 주술 치료와 흥륜사의 관계는 이현숙, 2019: 204-211 참조.

16) 『삼국유사』 권5, 신주 제6, 혜통항룡, “密教之風, 於是乎大振, 天磨之捴持嵓, 毋岳之呪錫院等, 皆其流裔也.”

17) 『고려사』 권11, 세가 제11, 숙종 6년 9월 갑신; 권90, 열전 제3, 종실1, 대각국사 후

18) 『고려사』 권18, 세가 제18, 의종 11년 8월, “乙卯, 幸摠持寺, 召住持懷正, 遊賞林亭, 留題祈福詩二絶, 宣視宰樞侍臣. 扈從百官軍卒, 露宿林壑, 頗多愁嘆. 懷正唯以呪噤得幸, 恩寵無比, 凡僧徒求職賞者, 皆趣附賄賂, 貪鄙無厭.”

20) 『唐六典』 권14, 太常寺 太醫署

21) 손홍렬에 의하면 고려시대 주금사는 기도를 하던 당의 주금사와 달리 ‘외과의’로 직능이 변하였다고 한다(손홍렬, 2013: 135-136).

22) 지념업과 총지종의 관계는 서윤길, 2006: 49-51 참조.

23) 崔滋, 「官誥(持念業禪師祖猷爲大禪師敎書)」, 『東文選』 권27, 制誥, “法不自立因言而立, 眞乘揔攝於眞言. 德無常師主善爲師, 大號宜加於大善. 洛山寺住持禪師祖猷, 以頌持三昧力, 能攝伏一切魔. 當晉陽公累旬而未寧, 自洛伽山千里而忽至, 呪龍鉢下, 才揚金杵之音, 映蛇盃中, 旋覺角弓之影. 灑然和氣之遄集, 屹若泰山之復安.”

24) 崔滋, 「持念業禪師祖猷爲大禪師敎書」, 『東文選』 권27, 制誥, “某, 以總持法力, 驅除虐癘, 凡救活幾人耶. 况我社稷重臣, 方寇於陰陽, 而師之一喝, 轉作和倪.”; 『고려사』 권129, 열전 제 42, 崔怡, “十三年, 怡患瘇, 自兩府至掾吏, 爭祈禱設齋作䟽, 都下爲之紙貴.”

25) 고려후기 전염병의 발생 상황에 대해서는 이현숙, 2010: 40-59 참조.

26) 『고려사』 권123, 열전 제36, 廉承益

27) 『고려사절요』 권19, 충렬왕 3년 7월

28) 『고려사』 권123, 열전 제36, 염승익

29) 『세종실록』 권120, 30년 6월 21일[을해]에 승려들을 거느리고 한 소리로 대불정만행수능엄신축을 외웠다[謹率僧侶, 同音風演大佛頂萬行首楞嚴神祝]는 내용이 있다. 여기에 나오는 대불정만행수능엄신축은 수능엄주로, 신축과 신주를 같이 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30) 『삼국유사』 「욱면비염불서승(郁面婢念佛西昇)」조에도 유사한 묘사가 나온다. 욱면이 염불을 할 때 마당 좌우에 긴 말뚝을 세우고 두 손바닥을 뚫어 노끈으로 꿰어 말뚝 위에 매어 놓고 합장하여 좌우로 움직이면서 스스로 격려하였다[庭之左右竪立長橛以繩穿貫两掌繋於橛上, 合掌左右逰之激勵焉]는 것이다. 이는 신체적 고통을 감내하며 용맹하게 정진하는 모습에 대한 묘사로 이해할 수 있다. 한편 노비가 염불하는 것을 못마땅해 하는 주인이 내린 체벌로 보는 등의 다른 해석도 있다. 이 구절에 대한 다양한 해석은 진경환, 2018 참조.

31) 『고려사』 권123, 열전 제36, 염승익, “承益得幸兩宮, 常居禁中, 希至都堂. 一日, 子藩先出, 仁規語承益曰, 國人謂洪公眞宰相, 謂我爲老譯, 謂公爲老呪.”

32) 이하 밀교 의례에 대한 소개는 다음 글들을 바탕으로 정리하였다. 김형우, 1992; 홍윤식, 1994; 서윤길, 2006; 김영미, 2010; 김수연, 2012; 조승미, 2016.

33) 『고려사』 권17, 세가 제17, 의종 6년 6월 계미

34) 阿地瞿多 譯, 『陀羅尼集經』 권10(T.901, 872c24~873a17)

35) 마리지천도량은 강화도 천도 이후에는 개설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한편 『다라니집경』을 소의로 한 공덕천도량이 새롭게 개설되기 시작하였다. 여기에서 마리지천도량 역시 『다라니집경』을 근거고 개설된 의례이며, 『다라니집경』의 경전 비중이 유지되면서 신앙 대상이 마리지천에서 공덕천으로 옮겨간 것으로 보기도 한다(조승미, 2016: 244-245).

36) 『세종실록』 권127, 세종 32년 1월 22일(무술), “上不豫, 移御于興仁門外孝寧大君第, 世子乘轎隨行, 諸大君及大小侍衛軍士皆步從. 遣左參贊鄭苯, 左副承旨李季甸, 設孔雀齋于佛堂. 都承旨李思哲, 觀音精勤于興天寺, 分遣諸臣, 禱于畿內名山大川神祠佛宇.”; 『세조실록』 권 8, 세조 3년 7월 28일(기축), “以世子病, 聚僧二十一人於慶會樓下, 設孔雀齋. 竟夜作法, 命議政府堂上六曹判書以上及承旨, 入齋所祈禱.”

37) 『고려사』 권54, 지 제8, 五行2, 金; 권80, 지 제34, 食貨3, 賑恤

38) 『고려사』 권17, 세가 제17, 인종 21년 6월

39) 『고려사』 권133, 열전 제46, 우왕 원년

40) 金富軾, 「俗離寺占察會疏」, 『東文選』 권110, 疏, “竊恐自肅祖有爲之年, 及李氏用事之際, 誅流人物, 擾動幽明, 憤氣欝陻, 寃對封執. 今欲載其營魄, 安其遊魂, 不作彭生之夭, 長消伯有之癘, 更無他道.”

41) 『태종실록』 권35, 태종 18년 2월 10일(신묘)

42) 『태종실록』 권1, 태종 원년 5월 26일(갑인), “除密院入番. 初摠持宗僧十人皆受料, 輪番入三殿誦眞言, 謂之密員. 至是, 三司請只給番入僧料, 命竝除之.” 밀원(密院)은 내도량의 일종으로 생각이 되는데, 여기에는 총지종 승려 10명이 소속되어 궁중에서 다라니를 독송하였다. 어떤 종류의 다라니를 외운 것인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순서를 정해 돌아가며 다라니 독송을 행한 것으로 보아 액막이를 위해 행해지는 일상적인 다라니 염송으로 생각된다.

43) 『세종실록』 권8, 세종 2년 6월 6일(계묘)

44) 『세종실록』 권8, 세종 2년 6월 10일(정미)

45) 『세종실록』 권8, 세종 2년 6월 13일(경술)

46) 원경왕후의 피병 과정에서 행한 둔갑술이, 병을 일으키는 귀신이나 기운이 대비를 알아보지 못하게 은닉하거나 위장하는 방법이었다는 해석도 있다(정다함, 2009: 148-150). 한편 태종은 왕 6년(1406)에 하늘의 견책을 피해 이어해 있는 동안 사냥 구경을 나가려고 하다가 중신들과 의견 충돌을 일으켰다. 그때 “피방하여 거처하는 것은 둔갑하여 몸을 숨기는데 비할 것이 아니다[避居乎此, 非遁甲藏身之比也]”라고 하며 자숙하라는 중신들의 건의에 반박을 한다. 이러한 태종의 표현을 통해, 당시 기문둔갑에는 ‘둔갑피방’과 ‘둔갑장신’의 두 가지 측면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둔갑의 의미가 갑이 숨거나 도망가는 것임을 감안하면, 둔갑피방과 둔갑장신은 둔갑의 구체적 양상을 드러내는 표현으로 보인다.

47) 『日本書紀』 권22, 豐御食炊屋姬天皇 推古天皇 10년, “冬十月, 百濟僧觀勒來之, 仍貢曆本及天文地理書, 幷遁甲方術之書也. 是時, 選書生三四人, 以俾學習於觀勒矣. 陽胡史祖玉陳習曆法, 大友村主高聰學天文遁甲, 山背臣日立學方術, 皆學以成業.”

48) 『고려사』 권8, 세가 제8, 문종 11년 7월

49) 『불정심다라니경』에 수록된 질병 상황과 해결 방법은 김수연, 2012: 109-111; 이유진·안상우·김동율, 2019: 70-72.

50) 어매현은 고려시대 상주목의 어모현(禦侮縣)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임기영, 2009: 81).

51) 각 사진의 출처는 다음과 같다. ① 방산석경 No.1078 『불정심다라니경』 (中國佛敎協會, 2000: 62), ② 방산석경 No.1080 『불정심다라니경』(中國佛敎協會, 2000: 626), ③ 충숙왕 복위8년본 『금강경』(보물 제1095-1, 화성 용주사 소장)

Figure 1.
talismans on the last part of Buljeongsim-darani-gyeong
그림 1. 『불정심다라니경』 권말 수록 부적 사례들 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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