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tractHow did the Japanese establish a medical welfare system? In answering this question, historians of modern Japan have accentuated the assertive role of state bureaucrats, especially from those of the Home Ministry (naimushō). Historians of Japanese medicine also emphasized the role of the state. William Johnston, in his pioneering work on tuberculosis in Japan, explored the rise of a hygiene administration on this disease as a state enterprise. In the medical history of Japan, scholars highlighted the significance of the wartime period in the birth of this system. The emphasis on the Japanese wartime state is justified. The Japanese government managed to establish a national health insurance in 1935, while the United States government has not been able to establish a medical insurance for every citizen to this day. However, these scholars have not explored how welfare benefits were distributed to members of Japanese society. This article seeks to fill this historiographical gap by looking at the Student Health Center of Tokyo Imperial University (Tōdai), Japan’s first state-established university founded in 1886. This university, I contend, was a critical locus in the birth of medical welfare in Japan. At this university were the most privileged medical facilities and practitioners who could provide medical services, as well as students without stable incomes of their own, thus in need of welfare support. The demand of staff of Tōdai’s Student Association to establish a Student Health Center was accepted and realized in 1926, and Tōdai students became the beneficiaries of state-managed medical support. The Tōdai Student Health Center was different from other medicare facilities in that its role was not limited to save students from poverty. Student Health Center practitioners helped students check health for university admission, campus life, and job placement to be white-collar elites. Student Health Center practitioners evaluated students’ health when they tried to enter Tōdai and get jobs and inculcated students in how to manage living as mental-worker “gentlemen,” in coping with tuberculosis, venereal diseases, and neurotic breakdown. Also, they produced statistics about the health condition of Tōdai students, which immediately stimulated further investment in the facilities of Tōdai authorities for the center. Based on statistical data, Tōdai authorities developed a hygiene campaign against tuberculosis so that students could take advantage the of state-of-the-art treatments inexpensively. As such, Tōdai students became among the biggest beneficiaries of this process. In other words, the Student Health Center had a dual significance at Tōdai: a medicare institution as well as part of privileged campus culture. Tōdai was a symbolic locus that reveals the uneven diffusion of medical welfare benefits in Japanese society. Through the lens of this facility, this article seeks to explore the paradox of welfare in meritocracy that contributed to the formation of the elite class in modern Japan.
1. 서론다른 나라에서처럼 일본에서도 의료인들은 의학교육과 면허의 제도화를 통해 독점적 지식을 보유한 전문가로 거듭났다[1]. 1886년 설립된 도쿄제국대학(약칭, 도쿄제대) 의과대학(1918년부터 의학부로 개칭)은 근대사회의 전문가로 격상된 의사의 지위를 상징하는 시설인 바, 이 학교의 졸업장은 사실상 의사면허증과 같은 효력을 가지는 것으로 인정받았다. 도쿄제대 의학부를 졸업한 의료전문가들은 내무성 위생국 등의 관청에 진출하여 의료행정에 종사하거나 또는 개업의로 나서 일본인들에게 공인받은 엘리트 의료서비스를 제공했고, 위생, 방역은 물론 교육과 징병에 관여하면서, 시민의 일상생활에 광범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그런데, 의료서비스의 수혜자 층을 넓히는 데는 중대한 난점이 존재했다. 19세기 말엽은 물론 20세기 초반에도 여전히 의료비는 고가였고(明治시대 병원비에 대한 개괄은 후쿠나가, 2017: 170; 青柳, 1996: 340-80), 의료비를 지불할 수 있는 사람은 소수였다. 일본정부로서는 많은 사람들이 의료서비스의 혜택을 받도록 한다는 것은 곧, 사회복지제도를 정비하는 일에 다름 아니었다. 그렇다면 의료 복지혜택은 누구에게 어떤 식으로 확대되었을까?
이 글은 전간기 고등교육기관의 학생진료소, 특히 도쿄제국대학의 학생진료소를 축으로 이 문제에 접근한다. 도쿄제대 학생진료소는 1925년 도쿄제대의 학생회인 학우회(学友会) 측이 대학당국에 학생복지로서 의료서비스를 요구했을 때, 대학당국이 의학부의 젊은 의사들을 활용하여 설립한 약식 병원과 같은 시설이다. 도쿄제대 학생진료소의 설립과정에서 국가의 재정적 지원 외에 도쿄제대 의학부의 존재가 결정적으로 중요했던 바, 이 시설을 통해 국가 주도로 구축되는 의료복지제도의 혜택이 의료 자원이 풍부한 엘리트 대학교 학생들에게 우선적으로 제공되는 과정을 추적하고, 고등교육의 발전에 따라 대학생이 보호받으며 관리되어야할 대상으로 변모하는 양상을 점검하는 것이 이 글의 목표이다.
일본의 복지제도사 연구는 그 자체로 국가기관의 연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국가와 관료의 역할을 강조해왔다(Garon, 1998; Frühstück, 2003; Johnston, 1995; 高岡, 2011). 실제로 의료보험을 포함한 사회보험, 우편저축, 주택영단(住宅営団) 등 굵직굵직한 복지제도의 형성과정에서 일본 국가기관, 특히 내무성 관료들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株本, 2010: 155-209). 그런데, 연구자들은 복지제도의 혜택이 일본사회의 구성원들 중 누구에게 돌아갔으며, 그 혜택의 사회적 의미가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주목하지 않았다. 이 글은 엘리트 학생들이 내무성의 빈민을 대상으로 한 의료복지제도가 아닌, 문부성의 학교보건행정에 의지하여 빈민보다 높은 확률로 복지혜택을 누리게 되는 과정을 추적한다.
도쿄제국대학은 1886년 설립된 일본최초의 대학으로, 도쿄제대 학생은 경쟁적인 입학시험을 거쳐 이 학교를 졸업하면, 문학부의 경우 중등학교 교원자격증을 발급받는 등 전공에 맞는 직업적 특권을 부여받아 엘리트의 지위에 오를 확률이 매우 높았다. 곧, 이 학교는 사회복지제도 형성과정에서 엘리트 대학생들이 누린 혜택과 그 사회사적 의미를 살펴볼 수 있는 프리즘이다. 고정적 수입이 없이 교육기관에 적을 두던 도쿄제대 학생들은 의학부와 부속병원 덕분에 국가가 제공하는 의료복지제도의 수혜자가 되었다. 그런데, 학생진료소의 역할은 다른 복지시설과는 달리 학생들을 가난에서 구제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이 시설은 자신의 노력과 가족의 후원을 동원해서 높은 학력과 존경받는 직업을 얻도록 노력하는 능력주의 시대에 학생들이 화이트칼라 엘리트로 성장해나가는 핵심적 관문, 즉, 입시, 졸업 및 취직을 도왔다. 요컨대, 도쿄제대 학생진료소는 보호시설인 동시에 특권적 학생문화의 일부라는 이중적 의미를 갖고 있던 바, 필자는 학생진료소를 프리즘으로 엘리트들이 자신들의 성장과정에서 가난한 사람들보다 더 높은 확률로 복지혜택을 수혜하는 역설적인 상황을 해명하고자 한다.
이 작업은 근대 일본 대학 학생진료소의 역사상에 접근하는 사실상 최초의 연구이며, 학생진료소 중 가장 먼저 생겨났고 자료도 부족하나마 있는 편인 도쿄제대 학생진료소에 집중한다. 1920년 학교에 근무하는 보건전문가들의 단체로 설립된 제국학교위생회는 개칭을 거듭하면서도 전후에도 명맥을 유지, 1973년 전국적인 학교 보건행정의 백년사를 편찬하기도 했다(財団法人学校保健会, 1973). 반면, 전간기 의학부 혹은 의학전문부를 보유한 제국대학과 사립대학들이 대체로 학생진료소 설비를 갖췄음에도 불구하고, 그 인력을 대학의 의학부에 의존하며 기관으로서의 독자성이 약했기 때문인지 대학의 학생 진료소는 기록물이 체계적으로 남아있지 않으며, 대학 의학부의 공식 역사서에도 비중있게 다뤄지지 않았다. 도쿄제국대학 학생진료소의 경우에도 『도쿄대학 백년사』에 간략히 기술이 있을 뿐(東京大学百年史編集委員会, 1986), 의학부 백년사에도 기술 자체가 없다(東京大学医学部百年史編集委員会, 1967). 그럼에도, 도쿄제대의 신문인 『제국대학신문(帝国大学新聞)』, 졸업생 인명록, 학생과가 발행한 팜플렛, 그리고 문부성에서 발행하는 『문부성직원록』처럼 도쿄제대 학생진료소를 추적할 수 있는 사료가 부족하나마 남아있다. 이렇게 남아있는 자료들을 모아 이 연구는 학생진료소의 역사상을 사회복지사의 맥락에서 복원해보도록 하겠다.
2. 근대일본 학교보건 행정의 시작근대교육이 시작된 이래, 학생들의 건강은 사회적 관심의 대상이었다. 1878년 일본정부는 하버드 의학교를 갓 졸업한 미국의 의사 조지 애덤스 리랜드(George Adams Leland)를 초빙해서 체조전습소(体操伝習所)를 세워, 학생들의 체조법을 연구하도록 했다. 체조전습소의 교육자들은 개발한 체조법을 문부성의 직할학교인 도쿄사범학교, 도쿄여자사범학교 학생들에게 하도록 하고, 그 체조법의 효과를 측정하기 위해 학생의 신체검사, 당시 용어로는 활력검사(活力検査)를 고안했다. 리랜드는 1881년 대장대신(大蔵大臣) 마쓰카타 마사요시(松方正義)가 긴축정책을 실시, 당시까지 고연봉의 외국인 전문가들을 해고하는 시점에서 계약이 끝나 미국으로 돌아갔지만, 1886년 폐지되기까지 체조전습소는 초중등학교에 군대식 체조를 도입하는 과정에서 문부성에 자문을 하는 등, 일본 학교체육의 기초작업을 담당했다. 문부대신 모리 아리노리(森有礼)도 1886년 학생 건강을 우려하며 군대식체조를 학교 교과과정에 도입하고, 1888년 12월 문부성 훈령으로 활력검사에 관한 규정과 초보적인 서식을 만들어 제국대학을 제외한 관립학교들에서 활용하도록 했다(財団法人学校保健会, 1973: 38-39)[2].
의료전문가가 아니었던 고등교육기관의 교육자들도 학생들의 건강에 관심이 있었다. 예를 들어, 도쿄대학의 예과 학장이던 마쓰야마 세지(松山誠二)는 1883년 『학교위생론』에서, 학생들이 정신적 육체적 건강을 등한시하는 데 대해 우려를 표시했다[3]. 마쓰야마가 입론한 근거는 유럽의 학교위생 전문가, 학교건축가들의 연구들이었다. 게이오 기주쿠(慶応義塾)의 창립자 후쿠자와 유키치(福沢諭吉) 또한 도쿄대학 학생들의 건강에 우려를 표했다. 그는 도쿄대학을 “소년 건강의 도살장”으로 비난하고, 게이오 교육과정에 체조를 도입했다(慶応義塾, 1970: 234-235, 286-287).
이들의 학교보건에 관한 논의는 때로는 도덕의 영역에까지 미쳤다. 역사가 시부야 도모미(澁谷知美)가 지적했듯, 1880년대 교육자들, 기노시타 히로지(木下広次, 제일고등중학교 학장이자 도쿄제대 법과대학의 강사), 후쿠자와 유키치(福沢諭吉), 도쿠토미 소호(徳富蘇峰)는 사창가에 출입하는 학생들을 비난했다. 그들은 매춘을 학생의 입신에 걸림돌로, 그리고 외국인 보기에 창피한 일로 이해했다(澁谷, 2013: 147-284). 전간기에 이르면, 이 매춘반대운동은 학교위생의 분과학문에 포섭되었다. 잡지 『학교위생』을 통해, 때로는 일반교육자도 매춘반대운동을 의학의 언어로 지지했다. 도쿄여자고등사범학교의 교수 시모다 지로(下田次郎)는 “성적 타락”이 “인간의 정수를 부패시키고 정력을 낭비하게 하는” 결핵과 같다고 일갈했다[4]. 이는 학생스포츠에 대한 요구로 귀결되기도 했다. 1925년 아베 이소오(安部磯雄)는 체육시설의 건설을 통해 학생들이 “유락시설”로 빠지지 않게끔 돕는 여가활동을 구상했다[5].
학교 보건행정은 국가와 의료전문가들에 의해 1890년대에 전문적인 학문분야가 되었다. 도쿄제대 의과대학 학사 미시마 미치요시(三島通良)는 문부성 촉탁 연구원이 되어(1891) 전국적인 조사여행을 통해 학교 보건행정을 위한 자료를 수집했다. 아울러, 그의 저서 『학교위생학』에서 학교의 위치, 학교건물 및 교실의 구조, 조명, 환기, 난방시설의 중요성을 거론했고, 체조와 체육, 학업과 휴식의 균형을 강조함으로써, 학생의 정신적, 육체적 단련을 추구했다[6].
미시마는 사실상 마쓰야마와 비슷한 제언을 하고 있지만, 학생건강관리에 의료전문가의 역할을 강조했다. 체력검사를 관장하는 학교의(学校医)의 설치야말로, 미시마를 마쓰야마와 차별화하는 주장이었다. 도쿄제대시절 미시마의 은사였던 미야케 히이즈(三宅秀) 또한 이 성장기 분과학문에 힘을 보탰다. 도쿄제국대학 의과대학 교수로 일본 정신의학의 건설자라고 할 수 있는 미야케는 1896년 출판된 『학교위생』에서, 신경과민과 같은 “학교병”에 학생들이 걸리지 않게 할 방법을 토론했다[7]. 이 두 저작에서, 저자들은 건강을 의료전문가의 지도 아래 가용자원을 적절히 투자해서 관리하는 대상으로 이해했던 것이다.
1896년 미시마는 문부성의 학교위생주사(学校衛生主事)가 되어 근대일본의 학교 위생행정을 시작했고, 이듬해인 1897년 3월 15일 문부성은 학교에서 신체검사를 실시할 수 있도록 『학생생도 신체검사 규정』을 배포하며, 1888년의 문부성령을 폐기했다. 미시마가 직접 집필한 이 규정의 해설서에 의하면, 1888년에 규정된 활력검사는 의무가 아니었고, 항목도 정해진 바 없었으며, 의사의 감독 아래 이루어지지도 않았다. 반면, 1897년에 규정된 신체검사는 의사의 감독 아래 매년 4월과 12월에 시행되며 신장, 체중, 가슴둘레, 폐활량, 시력, 청력을 측정했고, 눈과 귀의 질병, 치아 질환을 진단했다[8]. 학교에 의사가 필요해지자, 1898년 모든 수준의 학교가 의료전문가를 학교의(学校医)로 고용했다. 1890년대 후반 학생건강에 관한 통계가 학교 신체검사를 통해 축적되면서 학교위생이라는 분과학문의 연구재료가 되었다.
곧 학교에 배속된 의료전문가들의 전국적 네트워크가 생겨났다. 학교의들은 학교위생주사회의라는 전국과 현(県) 단위의 지역단위의 조직을 창출했고, 마침내 1920년 경, 학교의회(学校医会)가 일본 전역에 촘촘히 조직되기에 이르렀다(澁谷, 2013: 442)[9]. 1920년 규슈제국대학 의과대학 출신으로 당시 가나가와현 학교위생주사였던 이와하라 타쿠(岩原拓)는 제국위생회라는 조직의 설치를 제창, 동료 주사들의 만장일치 지지를 얻었다. 곧 미야케 히이즈 등 도쿄제대 교수들이 지도적 역할을 담당, 1920년 12월 발회했다. 제국위생회의 지도급인사들은 학교위생의 목적을 “일본국민의 건강과 체력을 증진하는 것”으로 규정했다[10]. 이 새로운 이해방법에서, 건강은 관리와 증진의 대상으로 개념화되었고, 학교는 국민들의 건강관리에서 핵심적인 공간이 되었다.
3. 도쿄제대 학생진료소의 성립학교 보건행정이 발전하면서, 학교에 의사가 배치되었는데 학생들을 치료하는 의료시설이 딱히 없다는 사실이 부각되었다. 학생들은 값비싼 학외 의료시설을 이용하기가 어려웠다. 1925년, 문부관료들은 1907년 영국의 케임브리지와 울리치(Woolwich)에서 설립된 학생의료시설에 영감을 얻어 학생 의료시설의 설립에 관심을 보였으나, 정부의 재정 부담이 지나치게 커지는 것이 문제였다[11].
근대 일본 의업계의 주축은 민간병원이었다. 의사들은 각지에서 의사회를 조직, 지역의 의료수가를 결정했기 때문에, 전간기에도 여전히 의료수가는 높았다. 1913년 미야자키현 의사회의 의료수가를 보면, 환자들은 진단을 받는 데만 50전을 지불해야했다. 복용약을 처방하면 12전을 추가로 내야했다(青柳, 1996: 388, 452). 1913년의 62전이라면 2020년 현재 약 5만원 정도로, 당시 제사(製絲)여공의 일당 평균인 45전보다도 많은 금액이었다(甲賀忠一 외, 2008: 450)[12]. 제사여공은 하루일당으로 의사에게 진단받는 것조차 힘들었던 것이다. 1910년대 중반 인플레이션 때에는 의료수가 역시 가파르게 상승했다. 앞서 살핀 미야자키현 의사회는 1920년 진단료를 1엔으로 올렸다. 의료수가는 1930년대 후반까지도 높은 상태로 유지되었던 것 같다. 1936년에 행해진 한 의료비조사에 따르면, 교토의 급료생활자는 한달 평균 12엔을 지출해야했는데[13], 이는 한달 월급이 100엔 남짓인 고등교육을 받은 화이트칼라 노동자로서도 무시할 수 없는 경제적 부담이다.
이런 상황 아래, 저렴한 의료서비스는 근대일본 사회정치의 핵심의제로 떠올랐다. 1945년 이전 정부가 운영하는 국립병원은 국립대학의 부속병원들, 육해군 병원, 역시 군인을 주로 진료하는 일본적십자사 병원, 특수질병을 치료하는 전문병원뿐이었으며, 현립병원도 1920년대 말까지 야마나시, 효고, 히로시마, 오이타의 네 곳뿐이었다(후쿠나가, 2017: 214). 1911년 대역사건 직후, 천황은 “의료를 통해 생명을 구하는 길을 넓”힐 것을 주문하고 하사금 150만엔을 기탁했다. 이에 당시 수상 가쓰라 다로(桂太郎)는 기부금을 모집, 2400만엔을 모아 은사재단 제생회(済生会)를 설립했는데, 이 재단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시료권을 교부, 일반 의료기관에 환자의 진료를 위탁했다[14](菅谷, 1978: 176면. 제생회의 진료위탁에 대해서는 후쿠나가, 2017: 235). 또한, 1911년 내무성 관료들은 해군성의 허가를 얻어, 교바시(京橋)의 해군 의학교 옆에 도쿄시 자선병원을 설립한다. 해군의 의사들이 이 시설에서 사람들을 치료하는 것에 동의했다. 1920년 경, 직원층, 노무자층을 막론하고 만 명 이상의 시민들이 이 병원을 찾았다[15].
사회운동가들도 더 저렴한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려는 국가의 노력에 동참했다. 1879년 의사 다카마쓰 료운(高松凌雲) 등이 주도한 빈민의 자선병원 동애사(同愛社)의 설립 이래, 유지공립도쿄병원(有志共立東京病院, 1882), 미쓰이 자선병원(1896) 등 몇몇 자선병원이 생겨났다(후쿠나가, 2017: 242). 저렴한 의료서비스를 위한 사회운동은 단지 극빈층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1911년 사회운동가이자 의료전문가인 가토 도키지로(加藤時次郎)와 스즈키우메시로(鈴木梅四郎)는 도쿄에 사단법인 실비진료소를 창립했는데, 설립자들은 이 의료시설의 고객을 극빈층이 아닌 “하급관료, 사무직노동자, 교사, 경찰, 노무자, 도제 등 중간계급 하층에 속하는 일종의 빈자”로 규정했다(菅谷, 1978: 350-351). 이에 1915년 의사회의 구성원들은 이 저렴한 의료서비스가 “사회 중류(中流)에까지 퍼지고 있다”며 우려하기도 했다[16]. 이 실비진료소의 서비스 가격은 다른 민간병원의 1/3 정도였다.
도쿄제대 학생진료소는 극빈자가 아닌 사람들도 그 대상으로 포괄하는 의료복지운동의 일각을 이룬다. 도쿄의 사단법인 실비진료소 방문자의 10퍼센트가 학생이었는데(菅谷, 1978: 357), 관동대지진 이후 도쿄제대를 포함한 대학교의 학생진료소들이 그 수요에 대응하기 시작했다. 1925년 이전, 도쿄제대에는 학생감실 의국이 있었으나, 병원처럼 다수의 의료전문가가 상주하는 형태는 아니었다. 1925년 도쿄제국대학 학우회(学友会) 임원들은 도쿄제대 의학부 측에 건강진단, 내과, 외과, 안과, 치과, 이비인후과의 각과 전문가 한명씩을 파견할 것을 요청했다. 나아가 그들은 진료소 안에 약국을 설치하고, 실비로 약을 판매할 것을 희망했다[17]. 대학 당국은 학우회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1925년 학생감실 의국은 도쿄제대 학생진료소로 확대, 개편되었다. 1920년대를 거치며 의학부를 보유한 제국대학과 사립대학들은 규모는 편차가 있지만 대체로 학생진료소 시설을 갖추게 되었다. 일례로 1925년 와세다대학교 당국은 와세다 학생진료소를 세워, 와세다의 의학전문부(당시 와세다의 의학교는 그 교격이 대학이 아니라 고등전문학교였다)에서 세 명의 의사를 파견, 일주일에 한번 학생 환자를 받았다[18]. 이렇게 해서 규모가 작은 중등교육기관에서는 보기 힘든 전문화된 진료시설이 일본의 대학들에 설치되게 되었다.
1932년도 학생진료소 스케줄을 보면, 각 분과마다 전문가를 파견하라는 학우회 측의 요구 또한 대체로 실현된 것 같다. 내과의사가 네 명, 외과, 안과, 이비인후과, 방사선과, 치과를 담당하는 의사가 각각 한두 명 정도 배치되었다. 이들은 대체로 도쿄제대 의학부 출신의 젊은 의사들이었다. 학생진료소에 근무한 의사들의 성씨만을 영문으로 표기한 명부(표 3)가 게재된 1932년도 『도쿄제국대학 공학부 학생편람』을 1932년도 의학부의 직원명부와 대조해보면 의학부에 소속된 진료소의 의사 중 몇 명의 직위를 알 수 있는데, 진료소장을 비롯한 추적 가능한 의사들은 정교수, 조교수가 아니라 강사였다. 1932년에 편찬된 인명사전에 의하면, 당시 내과를 담당했던 의학박사 가세 교지(賀瀬恭治)는 1919년 의학부를 졸업한 뒤 도쿄제대 의학부의 물리요법 내과교실에서 연구하며 학생진료소장(의국장)을 담당하고 있었는데, 의학부에서 그의 신분은 강사다[19]. 역시 내과 의사인 모자이 아키라(茂在照)는 1917년 도쿄제대 의학부를 졸업한 뒤 내과 약리학교실에서 연구하며 의학부의 강사로 근무했다[20]. 그보다 좀 더 젊은 의사들도 학생진료소의 의사로 합류했다.
문부성이 발간하는 『직원록』의 1932년도 기록을 보면, 이들이 어떤 신분으로 도쿄제대 학생진료소에 고용되었는지도 알 수 있다. 1932년도 10월 당시 모자이 아키라와 가세 교지 등 도쿄제국대학 학생진료소의 의사들은 학생과의 촉탁(嘱託), 즉 비정규직 직원이었다[21]. 이들은 비정규직인 만큼 정해진 임기가 없었던 것 같다. 모자이 아키라는 1927년부터 1939년까지 문부성 『직원록』에 이름을 올리고 있으며, 가세 교지는 1931년부터 1934년까지만 촉탁으로 재직했다[22].
학생진료소에서 어떻게 사람들을 채용했는지는 추적하기 어렵지만, 의사들은 대체로 도쿄제대 의학부를 졸업하고 학사 졸업 직후 도쿄제대 의학부의 연구실이나 도쿄에서 일하는 사람들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1932년에 학생진료소에서 치과를 담당했던 사이토 가즈오(斎藤一男)와 안과 진료를 담당했던 하세가와 신로쿠(長谷川信六), 그리고 방사선과 담당 아이카와 다케오(相川武雄)는 각각 1926년, 1927년, 1927년에 도쿄제대 의학부를 졸업하고 모두 1927년에서 1930년 사이에 학생진료소의 촉탁직원이 되었다[23].
1932년 당시 학사 학위만을 가지고 있는 의사들은 의학부 소속이 아니었다. 1932년도 『직원록』에 등재된 학생과 촉탁직원 중 다자와라는 성씨를 가진 사람은 다자와 지로(田沢二郎)지만, 그의 이름은 1933년도 『도쿄제대 졸업생 씨명록』에 나오지 않아 학생진료소 의학부 학사의 이름이 과연 다자와 지로였는지 특정하기 어렵다. 역시 학사 하마베라는 인물은 성씨만 알 수 있을 뿐 이름조차 확인이 불가능한데, 직원록에 하마베라는 인물은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하마베라는 학사 의사는 비공식적으로 학생진료소의 일을 도왔던 것 같다.
대학당국은 학우회의 요청을 받아들여, 학생과 의국을 학생진료소로 확대, 개편함으로써, 도쿄제대 학생들은 정부가 운영하는 의료복지제도의 수혜자가 되었다. 이는 군인과 빈민들만 받을 수 있던 의료복지 혜택이 엘리트 학생에 제공됨을 의미했다. 도쿄제대 학생진료소의 의사들은 학생에 한해 진료는 무료로 했고, 약을 처방하는 경우에만 약값을 실비로 받았다. 이는 외부의 실비진료소보다도 저렴한 서비스였다. 물론, 이 진료소에서 수술을 받거나 중병을 치료하는 것이 가능했던 것 같지는 않으며, 도쿄제대 학생들이 의료비 부담에서 해방되었다거나, 결핵에 대한 걱정을 내려놓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40년 제국대학신문의 어느 필자는 학생진료소를 “학생을 위한 하늘에서 내려온 구원”이라고 예찬했다[24]. 1925년에서 1931년까지, 학생진료소의 연간 방문자 숫자는 1,422명에서 4,794명으로 증가했고, 방문횟수는 2,416회에서 15,086회로 늘어났다. 도쿄제대 학생 절반이 넘는 숫자가 이 학생진료소를 연평균 3회 방문한 것이다. 이 수치는 1930년대에도 큰 변동 없이 유지되었다[25].
도쿄제대 학생과 측은 필요한 경우 학생진료소에 과감하게 설비를 투자했는데, 1929년 방사선 관련장비를 구비한 것이 그 예이다. 이 구매를 통해, 집단적 결핵진료가 행해지는 전시 상황보다 한발 앞서, 도쿄제대의 엘리트들이 방사선 진단을 받을 수 있었다. 이 설비의 경제적인 가치는 상당했다. 『제국대학신문』에 의하면, 방사선 진단은 학외에서 10엔(2020년 현재 한화 약 20만원 정도)이 드는 서비스였지만, 학생들은 이 설비를 무료인 체격검사 때에는 공짜로 쓸 수 있었고, 개인적으로 진료를 받을 때만 1엔 50전의 필름값을 추가로 냈다. 1931년 하루 평균 약 7명의 학생들이 방사선진료설비를 이용했다. 1930년, 각지 제국대학의 학생주사들이 각 대학의 학생과 의국을 확장하기로 결의했을 때, 방사선설비를 갖춘 유일한 곳이었던 도쿄제대 학생진료소가 타대학 학생진료소들의 모델이었던 같다. 1930년 4월, 다른 제국대학의 총장들이 도쿄제대 학생진료소 방사선진료설비를 시찰했다[27].
학생진료소의 설립은 양대전간기 도쿄제대 학생상의 전환과정과 맞닿아 있다. 1925년 도쿄제대 학우회의 조사에 의하면, 학자금 전부를 부모에 의지하는 학생의 비율은 전체 2/3에 지나지 않았으며, 나머지 1/3의 학생들은 친척, 독지가, 장학재단에서 지원받거나, 아르바이트 일자리를 통해 학창생활을 이어나갔다. 1925년 이미 8%의 도쿄제대 학생들이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28]. 화이트칼라 노동자나 전문직 아비를 둔 학생들도 등록금과 생활비의 압박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다. 1930년의 생계조사에서는, 의사, 변호사들의 아들들도 부모가 도쿄제대에 다니는 자신의 학비를 내는 것이 힘들다고 대답했다[29]. 1938년에도 전체 학생의 단 30%만이 가족에게 전적으로 수업료와 생활비를 의존했다. 1938년도 조사에서, 35.76퍼센트의 학생들만 가족들에게 학비, 생활비 전부를 의지하는 데 부담이 없었으며, 44.49퍼센트 학생들은 그렇게 하는 것이 가능하지만 빠듯하다고 대답했고, 16.38%는 그렇게 하기 어렵다고 대답했다[30]. 이런 상황에서 도쿄제대 학생과는 학생들에게 과외 일자리와 싼 숙박시설을 소개하는 일을 제도화하고, 장학금 제도를 정비했다. 엘리트로 안착하기까지 소득없이 견뎌야하는 학창시절이 길어지자 학생들은 경제적 지원이 필요했고, 학생진료소의 정비는 학생 복지제도가 자리잡는 과정의 일환이었다.
도쿄제대 학생들이 국가가 마련한 의료복지제도의 유일한 수혜자는 결코 아니었다. 1920년 내무성에 파악된 시료기관은 전국적으로 151개나 되었고, 1927년에는 무료진료, 실비진료를 제공하는 의료시설이 351곳에 달했다. 그러나, 이 시설만으로 일본의 가난한 사람들 전부를 감당할 수는 없었던 것 같다. 이들 기관에서 진료를 받은 외래환자가 1927년 전국적으로 47만명에 불과했는데, 1930년 경 5백만의 도쿄시민 중 30만 명 정도가 빈민들이었던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高橋, 2016: 58-59). 전국적인 빈민 통계가 존재하지 않아 확언은 어렵지만, 엘리트 교육기관에 적을 두는 학생들은 가난한 사람들보다 훨씬 높은 확률로 시료시설을 이용할 수 있었음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게다가, 국가가 제공하는 도쿄제대의 의료복지는 사설 복지시설에 비해 눈에 띄는 이점이 있었다. 도쿄제대 학생진료소는 대부분의 직원이 도쿄제대 의학부에서 파견되고 국가에서 봉급을 받는다는 점에서, 자치체에서 후원하는 영국의 학생진료소나, 개인적 사회운동으로 운영된 실비진료소와는 달랐다. 사설기관으로서 재정압박을 받던 실비진료소는 환자들에게 무료로 진료를 제공하는 것이 어려웠지만, 국가가 재정적으로 뒷받침하는 도쿄제대 학생진료소의 의사들은 무료진료를 실시하는 데 재정적 부담을 느낄 필요가 없었다. 게다가, 의사회의 주축을 이루고 있는 도쿄제대 의학부의 양해를 얻었기 때문인지, 학생진료소 의사들의 무료진료에 대해 의사회가 비판하는 경우는 없었다. 의사회는 의료수가를 지키지 않는 사단법인 실비진료소를 거세게 비난했지만[31], 도쿄제대 학생진료소는 그와 같은 갈등을 겪지 않았던 것이다. 또한, 도쿄제대 의학부는 학계와 병원의 최고권위자는 아니지만 의학부 출신의 젊은 엘리트를 학생진료소의 의사로 제공했다. 이러한 의미에서, 도쿄제국대학의 학생들은 일본 의료복지제도가 뿌리내리는 과정에서 상당한 행운아들이었다.
4. 보건행정에 통합된 엘리트의 성장과정도쿄제대 학생진료소는 학생들에게 무료진료를 제공하는 복지시설이지만, 그 진료의 대상이 엘리트 학생들이라는 점에서 빈민들을 치료하는 시료시설과는 달랐다. 대학의 의료행정을 전담하는 시설이던 이 기관은 설립 후 신속하게 대학당국이 구상하는 엘리트 학생문화의 일부가 되었다. 요컨대, 이 시설은 수입 없는 학창시절을 견뎌야하는 일본 최고의 엘리트였던 도쿄제대 학생의 두 면모를 반영했던 것이다.
학생진료소가 학생들의 삶 속으로 파고든 계기는 고등교육기관의 입학과 졸업과정에서 통과의례가 된 체격검사였다. 체격과 질병유무를 체크하는 체격검사가 정례화된 1897년 이래 도쿄제대 학생감실 의국에서 검사를 진행해왔으나, 학생들의 참여는 저조했던 것 같다. 1925년 학생진료소가 정비되며 도쿄제대 당국은 입학시험에 체격검사를 포함시켰다. 도쿄제대 최고의사결정기구인 평의회(評議会)의 해당년도 의사록이 아직 연구자들에게 공개되지 않았고 학생진료소나 병원의 편년사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자료의 한계로, 대학당국이 왜 체격검사를 입학시험에 포함하게 되었는지 알 수 없다. 다만, 참여율이 낮은 체격검사가 “학교 당국의 두통거리”였다는 1924년 제국대학신문 기사[32]로 보아, 대학당국이 체격검사의 참여율을 높이려는 의지를 갖고 있었다는 점은 추정할 수 있다.
1925년 도쿄제대 공학부는 입학시험 220점 만점 중 30점을 체격검사에 할당했다. 대학 당국에 의하면, 체격검사에서 우수하다고 평가된 학생들은 30점 중 25점을 얻은 데 반해, 학생들은 보통 15점을 얻었다[33]. 공학부 지원자들은 건강하다는 이유로 다른 학생보다 10점을 더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의학부도 “체력이 약한 학생은 입학할 수 없다”고 선언하고, “학생들이 고등학교를 다닐 때 체력관리에 힘써야한다”고 제언했다[34]. 학교위생 전문가들의 오랜 노력의 결실로 대학입학과 취업을 앞둔 학생의 건강을 점수화한 것이다.
또한 많은 기업체 고용주들이 1928년 채용지원자들에게 체격검사증을 제출하게하자, 체격검사는 취직시장에 나가는 3학년 학생들에게 필수가 되었다. 이즈음부터 기업체의 채용심사자들이 격무를 견딜 수 있는 건강한 지원자를 선호한다는 인터뷰가 잡지에 실리고, 도쿄제대 학생들이 취직을 위해 스포츠클럽에 가입한다는 농담이 제국대학신문에 소개되었다(Choi, 2013: 3). 체격검사 지원자들은 비약적으로 늘어나, 1929년 한해 1,648명이 체격검사를 받았고 이듬해에는 2,500명에 이르렀는데, 이는 전체 학생수의 1/3에 해당한다[35]. 이 과정을 거쳐, 도쿄제대 학생진료소는 엘리트의 성장과정에서 위생을 관리하는 기관으로 거듭났던 것이다.
학생진료소 의사들은 정신노동자로서 학생들이 유의해야할 건강에 대한 지식을 보급하는 데 힘썼다. 1932년 진료소 의사들은 『학생건강의 요점』이라는 팜플렛을 배포했다[36]. 이 팜플렛은 냉수마찰, 일광욕, 음식물 저작(咀嚼), 여가, 그리고 올바른 식사 등 생활의 전반적인 안내서이자 결핵, 신경쇠약, 성병의 원인과 치료법의 해설서이다.
학생진료소의 의사들은 이 팜플렛에서 흔히 “문명병”으로 불린 신경쇠약을 화이트칼라 노동과 결부지어 설명했다. 신경쇠약을 화이트칼라 남성의 “정신노동”에서 발원한다고 규정한 학생진료소의 의사들은 시험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학생들을 그 가장 흔한 희생양으로 인식했다. 또한, 안구의 건강과 수면을 이 정신노동 질병에 관련지었다. 안구의 피로 및 불편감은 환자의 읽기 능력에 영향을 미치고 신경쇠약을 일으켜 환자로 하여금 정신노동을 견디기 어렵게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문부관료들의 지론, 즉, 지식 교육에 집중한 나머지 체육을 등한시하는 경향이 신경쇠약을 초래한다는 논리를 지지한 셈이다[37].
이 팜플렛에서 의사들은 “학생병[38]”으로 불리던 결핵에 대한 해설도 제공했는데, 이 또한 학교위생이 정신노동의 일상과 직결되어있음을 보여준다. 의사들은 책상, 의자, 손수건, 침대시트의 청결을 강조했고, 그 전염을 막기 위해 청정한 공기를 확보하기 위한 환풍시설을 강조하고, 스포츠, 여가, 산책 등을 권했다[39].
팜플렛의 저자는 “상당한 지위를 누리는 존경받는 신사들”인 학생들이 앓고 있는 성병에 대해서도 관련 지식을 소개했다[40]. 매독, 연성하감, 임질 등의 감염경로에 대한 진료소 의사들의 분석은 매춘반대 운동가들의 계급적 언어를 닮아있다. 그 질병에 성적 접촉이 결정적이라는 점을 감안, 그들은 “카페 여급, 하숙집 여중(女中), 파출부, 무용수”와 성관계를 갖지 말라고 경고했다[41]. 결핵과 신경쇠약에 대한 그들의 해법이 정신노동의 부하를 줄여주는 스포츠 활동이었다면, 성병에 대한 조언은 계급적으로 열위에 있는 여성과의 접촉을 피하라는 것이었다.
이후에도 학생진료소 의사들은 학생들의 수요에 맞는 의학상식을 보급하는 데 열심이었다. 1937년 말, 학생진료소는 제국대학신문 지면에 위생에 대한 지상강의를 출판했다. 이 지상강의에 학생들은 체격검사나 질병에 대한 질문을 던져 답을 구했다. 예를 들어, 한 학생이 고등학교 시절 체격검사에서 A를 맞았는데 왜 대학 체격검사에서 자신은 B수준으로 분류되느냐는 질문에, 학생진료소의 의사는 폐활량, 영양, 시력 등에 대한 검사기준을 설명하는 식이었다[42].
나아가, 그들은 학생들이 여가로 즐기는 스포츠 활동에도 개입했다. 스포츠의학은 도쿄제대 의학부에 갖춰지지 않은 전공이었다[43]. 의학부 교수들은 건강관리를 위해 스포츠를 장려하는 문부관료의 입장에 회의적이었는데, 어느 의학부 교수는 “스포츠맨은 일찍 죽는다”고 비죽거리기도 했다[44]. 도쿄제대의 스포츠클럽인 운동회(運動会)의 지도자들도 문부성 관료들의 스포츠 장려책에 대체로 비판적이었다. 운동회에서 지도적 역할을 했던 법학부 교수 스에히로 이즈타로(末広厳太郎)는 스포츠는 스포츠 그 자체로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며, 스포츠를 건강을 증진시키는 수단으로 여기는 문부관료의 생각을 경계했다(Choi, 2013:4). 이러한 분위기를 거슬러, 1932년 도쿄제대 학생진료소는 스포츠의학과를 신설, 스포츠로 인한 부상을 치료하고 상담 서비스를 제공했다[45]. 1934년 학생진료소 의사들은 학생들을 상대로 스포츠 의학강좌를 개설, 여가를 즐길 때 알아두어야 할 의학지식을 보급했다[46]. 요컨대, 학생진료소 의사들은 책상물림 노동을 견디는 정신노동자들에 맞춰 독자적으로 진료과를 신설, 적절한 생활습관의 형성을 촉구함으로써, 건강이 캠퍼스 생활의 일부로 자리잡도록 노력했던 것이다.
보건행정에 통합된 엘리트 학생의 성장과정은 그 자체로 엘리트 보건행정의 추가적인 발전을 위한 동력이었다. 학생진료소의 의사들은 학생들을 진료하며 통계자료를 축적했고, 그 통계는 학내 결핵의 진단설비를 보강하고 진단을 정례화하는 데 일조했기 때문이다. 1929년 이래, 학생진료소 측은 방문자와 그들에 대한 진단기록을 해마다 공개했고, 이를 통해 학생들이 빈번하게 결핵에 감염되었다는 점이 드러났다. 1929년, 학생진료소 의사들은 723명의 학생들이 호흡기계 질병을 앓고 있는 것으로 진단했는데, 그 중 80명은 심각한 상태였다. 1930년 5월, 도쿄제대 총장, 교수들, 학생과 직원들은 요양원 건설 계획을 세웠으나 재정적 문제로 무산되자, 1932년 대학당국은 대신 학생진료소에 2,000엔을 투자해서 인공 조명등을 구매, 결핵 환자들의 회복을 돕기로 했다. 또한, 1932년 학생과 직원들은 점심시간마다 캠퍼스에서 위생체조 프로그램을 시작, 상대적으로 운동할 기회가 없는 학생들의 건강유지를 도왔다[47].
1930년대 초반 이래의 통계자료는 이 정도의 노력으로는 결핵을 퇴치할 수 없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1931년부터 1933년까지 결핵환자들의 숫자는 오히려 늘어났고, 학생진료소의 의사들과 도쿄제대 당국은 약 10퍼센트의 학생들이 호흡기 질환을 앓고 있다는 사실에 우려했다. 1934년에는 50명의 도쿄제대 학생이 사망하고, 약 5%의 학생들이 병으로 휴학했다[49]. 1935년 1월, 도쿄제대 의학부 교수와 학생들은 총장 나가요 마타로(長与又郎)에게 학내 요양원의 건설을 요구하는 등, 보건 행정은 대학 구성원들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대학당국은 재학생과 입학생의 체격검사 기준을 강화하는 형식으로 이 요구에 부응했다. 1935년부터, 도쿄제대의 모든 2학년과 3학년 학생들은 해마다 의무적으로 체격검사를 받게 되었다. 1939년부터는 모든 학부의 재학생에게 방사선 검사를 제공했다. 방사선검사의 파격적인 확대는 학계의 기술적 혁신에 기인한 것이었다. 1938년 도호쿠제대 의학부의 교수 고가 요시히코(古賀良彦)는 “간접촬영”이라고 불리는 새로운 X선 촬영기법을 개발, 단 50전의 비용으로 방사선촬영을 가능하게 했다. 센다이(仙台)의 제2고등학교 학생들을 상대로 한 임상실험 뒤, 이 기술은 도쿄제대로 수입되었다. 1939년 모든 도쿄제대 학생이 연례 체격검사에서 방사선진단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50].
또한, 1935년부터 도쿄제대 당국은 결핵을 진단하기 위해 입학시험 체격검사에 방사선 진료를 포함하기 시작했다. 1935년에는 일단 의학부의 지원자들만 방사선진료를 받았는데, 이들은 입학 시험료에 2엔을 추가적으로 납부했다. 이듬해, 대학당국은 도쿄제대 모든 학부의 지원자들에 대해 체격검사의 내용과 날짜를 통일했다. 부속병원 원장의 지도 아래, 도쿄제대 병원과 의학부 내과의들이 캠퍼스 전체의 체격검사에 참여한 바[51], 이로써 도쿄제대 학생진료소를 넘어 부속병원의 내과 의사들이 학내행정에 동원되기 시작했다.
정부 관료들도 도쿄제대당국의 강화된 보건행정을 승인했다. 1935년 내무성 위생국의 체육과 관료들은 도쿄제대의 움직임이 유효한 결과를 내리라 예상하며, 그 원동력으로 의학부를 꼽았다. 또한, 학생들이 더 이상 “부잣집 출신만이 아니기 때문에”, 결핵치료를 위한 시설이 꼭 필요하다고 역설했다[52]. 바꿔 말하면, 1935년 관료들은 학생의 건강을 부유하지 못한 학생들이 겪는 사회적 문제로 이해했으며, 대학당국이 보유한 자원, 즉 의학부의 의사들을 활용해서 이에 대처하도록 독려했다. 그런데, 전술했듯이 국가가 승인한 도쿄제대 학생진료소의 역할은 단순히 학생들이 경제적 압박에서 벗어나도록 돕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학생진료소 의사들은 학생들이 엘리트 정신노동자로서 건강을 관리해 안정적으로 취직하도록 도왔으며, 축적한 통계자료들은 대학당국이 더 많은 자원을 입학하고 취직하는 엘리트 학생들을 위한 보건행정에 투자하는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5. 결론도쿄제대는 건강이 입신출세 과정에서 유용한 하나의 자산이라는 관념이 만들어지고 제도화되는 상징적인 공간이었다. 도쿄제대에는 의학지식을 생산하고 학교위생행정을 제도화하는 데 불가결한 의료전문가들이 있었다. 또한, 도쿄제대 학생진료소의 운영을 뒷받침할 수 있는 국가의 재정적 뒷받침이 있었다. 이러한 자원을 기반으로 설립된 도쿄제대 학생진료소는 학생들이 입학하고 졸업할 때 학생들의 건강상태를 검진함으로써, 엘리트로 성장하는 학생들의 가치의 일부로 자리매김한 건강을 관리하는 행정기구로 거듭났다. 이러한 상황이 도쿄제대 학생들로 하여금 보건행정을 자신들의 삶 속으로 받아들이게 된 소이연(所以然)이었다.
도쿄제대 학생진료소는 사회적 약자를 위한 의료복지가 엘리트 교육기관에 도입되는 과정의 산물이기도 했다. 학생들은 더 싼 의료서비스가 필요했고, 학우회 간부와 학생운동가들은 도쿄제대 당국에 학생진료소의 설립을 요구했다. 이러한 의미에서, 도쿄제대 학생진료소는 의학부라는 학내의 특별한 자원과 19세기 말엽 이래 국가와 사회운동가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정비한 의료복지제도의 결절점과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이 시설의 성립은 고등교육과 정신노동자의 취직이 하나의 제도로 굳어지고 능력주의 시대 엘리트가 귀속지위에서 성취지위로 변화하는 과정과도 맞물려있다. 학생들이 엘리트의 지위에 도달하기 위해 고등교육의 관문을 통과하게 되자, 무시할 수 없는 숫자의 학생들이 수입 없는 학창시절 경제적 압박에 노출되었다. 이러한 상황에 처한 학생들은 대학당국에 의료복지를 요구, 일본에서 가장 특권적인 의료복지의 대상자가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도쿄제대 학생이 엘리트의 지위를 잃어버린 것은 결코 아니었다. 학생진료소는 학외 무료진료시설과 달리 엘리트 진료시설로서의 성격도 지니고 있었다. 엘리트가 되는 과정이 힘들어지기는 했으나, 전간기 일본에서 대학졸업장을 가진 사람은 여전히 손꼽히는 엘리트였다. 학생진료소는 도쿄제대 의학부의 네트워크를 보유한 덕에 높은 수준의 의료 인력을 확보할 수 있었고, 그들의 환자들이 도쿄제국대학의 입학과 졸업, 그리고 취직이라는 인생의 관문을 통과하는 것을 도왔다. 이 과정에서 통계가 축적되고 설비투자가 이루어짐으로써, 도쿄제대는 성장기 엘리트를 보호하고 평가하는 보건행정의 기구로 거듭났던 것이다.
도쿄제대 학생만이 국가가 제공하는 의료복지제도의 수혜자였던 것은 물론 아니다. 1920년대에 이르면, 일본에 가난한 사람들을 상대로 한 시료시설은 상당수에 달했다. 그러나, 도쿄제대 학생들이 도쿄제대 학생이라는 자격만으로 무료진료를 받을 수 있었던 데 반해, 1920년대까지 일본에서 가난은 의료복지의 수혜를 보장하는 자격이 아니었다. 빈민의 숫자와 그들이 분포하는 지리적 범위를, 무료로 진료해주는 의료기관이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일본정부는 전쟁 중이던 1940년에야 국민체력법을 제정하여 방사선진단과 결핵치료를 의무화했다. 앞서 언급했듯이, 도쿄제대 학생들은 이미 중국, 미국과의 전면전쟁이 시작되기 전에 그 혜택을 받았다. 의료복지가 하나의 사회적 의제로 떠올랐을 때, 도쿄제대 대학생들은 의료전문가들과 병원시설 곁에 있었고, 상대적으로 소수의 엘리트였던 덕분으로 손쉽게 그 수혜자가 될 수 있었다.
이는 도쿄제대 학생들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돌아갈 복지혜택을 가로채는 이기적인 사람들이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도쿄제대 학생들의 상당수는 실제로 경제적 압박에 노출되었다. 의료복지를 통해 얻어진 통계는 다른 학교의 학생들에 대한 관심을 촉발시켜, 1934년 문부성은 고등학교, 고등전문학교, 그리고 대학의 학생건강에 대한 조사에 착수했다[53]. 별고에서 다루겠지만 의학부 학생들의 일부는 봉사활동을 통해 빈자에게 의료서비스를 제공했으며, 전쟁 때에는 일본국가의 소중한 의료 인력으로 전국을 다니며 보건행정의 주체로 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리트의 성격변화를 둘러싸고 일어난 의료복지제도의 확산과정에서, 고등교육기관의 학생들이 혜택을 쉽고 빨리 입게 되었다는 점은 부정하기 어렵다. 학생들은 내무성의 의료복지제도가 아니라 문부성의 학교보건행정에 입각한 복지혜택을 누리며 의료서비스가 부족한 상황에서 의료복지의 혜택을 우선적으로 제공받은 특권 집단이었던 바, 도쿄제대 학생진료소는 복지제도의 이 불균등한 확산을 보여주는 상징적 공간이었던 것이다.
Notes1) 의료의 전문화에 대한 대표적인 연구는 미국의 경험을 다룬 폴 스타의 『미국 의학의 사회구조적 변용』이며, 일본의 경험에 대해서는 이카이 슈헤와 후쿠나가 하지메의 연구를 참조(Starr, 1982; 猪飼周平, 2010; 후쿠나가, 2017). 7) 三宅秀, 『学校衛生講義』 (東京: 同文館, 출판년미상). 출판년은 미상이지만, 이 강의는 『東京茗渓会雑誌』 185호(1896)에서 200호(1897)에 걸쳐 연재된 바 있다. 17) 「学生監室医局革新の声あがる: 中央部より総長へ, 具体案を提出す」, 『帝国大学新聞』, 1925년 10월 5일, 2면; 東京大学百年史委員会, 『東京大学百年史』 通史 2 (東京: 東京大学出版会, 1984), 454-456면. 18) 「二万の学徒のために健康相談所の設置: 疾病健康診断の求めに応じ追々病院も立てる」, 『早稲田大学新聞』, 1925년 4월 22일, 3면. 「学生に複音! 健康相談所常設」, 『早稲田大学新聞』, 1935년 5월 15일, 2면. 19) 東京帝国大学工学部, 『東京帝国大学工学部便覧』 (東京: 東京帝国大学工学部, 1932), 118면; 校友調査会 編, 『帝国大学出身名鑑』 (東京: 校外調査会, 1932), カ항 3면. 23) 東京帝国大学 編, 『東京帝国大学卒業生氏名録』 昭和8年3月末 現在 (東京: 東京帝国大学, 1933), 162-164면; 文部大臣官房秘書課, 『文部省職員録』 昭和2年10月1日 現在 (東京: 文部省官房秘書課, 1927), 75면; 文部大臣官房秘書課, 文部大臣官房秘書課, 『文部省職員録』 昭和5年10月1日 現在 (東京: 文部省官房秘書課, 1930), 77면. 26) 「学生監室医局革新の声あがる」; 「学生監室医局を利用せよ」, 『帝国大学新聞』, 1928년 2월 27일, 3면; 「呼吸器病が10パーセント」, 『帝国大学新聞』, 1932년 1월 18일, 7면. 27) 「健康相談所でX線を装置」, 『帝国大学新聞』, 1929년 6월 24일, 7면; 「好評のX線診療: 毎 回十名内外に申込」, 『帝国大学新聞』, 1929년 10월 14일, 7면; 「肺尖の診断に貢献するX線課」, 『帝国大学新聞』, 1930년 1월 27일, 7면; 「呼吸器病が10パーセント」, 『帝国大学新聞』, 1932년 1월 18일, 7면; 「議題は主として体育の増進を: 過日の学生主事会議」, 『帝国大学新聞』, 1930년 4월 21일, 2면; 「四帝大総長が本学を視察: 学生食堂, 売店を始め健康相談所等を」, 『帝国大学新聞』, 1930년 4월 10일, 2면. 32) 해당 기사는 낮은 참여율이 학생들이 “신사처럼 행동해서”, 즉 자신의 육체를 드러내는 것을 쑥스러워하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体格検査, 例年の如く施行」, 『帝国大学新聞』, 1924년 5월 2일, 5면). 35) 「気づかずにいる呼吸器患者が多い: 一般に栄養は向上した, 最近体格検査の結果」, 『帝国大学新聞』, 1928년 7월 9일, 5면; 「神経衰弱症患者は文学部に一番多い: 診断を受ける人は年々 増加, 健康相談者の調査」, 『帝国大学新聞』, 1929년 6월 3일, 7면; 「本学部学生の体質依然と して貧弱: 腺病質の者が非常に多い」, 『帝国大学新聞』, 1930년 7월 7일, 7면. 37) 東京帝国大学学生課 編, 『学生健康の栞』, 21-25면, 27-30면, 2-3면. 신경쇠약을 문명병으로 부른 사례로는 三宅鉱一·宮川米次·村山達三, 『医学常識』 제2권 (東京: 東西医学社, 1929), 11면. 47) 「工学部学生に多い呼吸器系の患者」, 『帝国大学新聞』, 1930년 1월 27일, 7면; 「学生保健の ため療養所設置に決す: 来月中旬に審議会を開いて具体案に付き協議」, 『帝国大学新聞』, 1930년 9월 15일, 2면; 「呼吸器病絶滅に太陽灯を使ふ: サナトリウムに代わる学生課医局 の新計画」, 『帝国大学新聞』, 1932년 2월 8일, 7면; 「国産の太陽灯: 愈々四月開設」, 『帝国大学新聞』, 1932년 3월 14일, 7면; 「昼休みに徒手体操: けふから学内で開始」, 『帝国大学新聞』, 1932년 1월 25일, 7면; 「徒手体操を一層奨励する: 休学志望者の調査も報告, 九日の 衛生委員会」, 『帝国大学新聞』, 1932년 3월 14일, 7면. 50) 「上級生ほど虚弱, 休学者が激増: 医学部の健康調査」, 『帝国大学新聞』, 1935년 3월 4일, 9면; 「来春から全学的にレ線検査を実施」, 『帝国大学新聞』, 1937년 7월 12일, 11면; 「三年間 に休学者半減」, 『帝国大学新聞』, 1937년 7월 12일, 11면; 「僅か五銭で結核透視, 一分間で パチリ! 全学的なレ線検査に飛躍」, 『帝国大学新聞』, 1938년 10월 3일, 11면. 51) 「結核と予防: 本学学生の体格検査 (上)」, 『帝国大学新聞』, 1936년 6월 1일, 2면; 「厳重になる体検: 東大では全学部を統制」, 『帝国大学新聞』, 1936년 2월 10일, 8면; 「体格検査を充実 し健康向上に乗出す: 入試でも胸部検査を重視, 衛生委員も増員す」, 『帝国大学新聞』, 1936년 3월 4일, 9면. 1936년, 학생진료소의 의사들은 200명의 학생들이 결핵보균자로 의심되어 방사선 진료를 시행했고, 2명이 공부와 캠퍼스 생활에 부적절한 건강상태인 것으로 판정했다. 진료소의 의사들은 이 두 학생이 지원한 학부에 이 사실을 알렸다. 「恐るべき結核病, 以外今年は減少, 一般に健康状態も向上を示す: 入試体格検査の結果」, 『帝国大学新聞』, 1936년 3월 21일, 2면. Table 1.
Table 3.Table 4.ReferencesChoi, Jamyung. “Envisioning the amateur masses: The Sports Purification Movement and the fashioning of middle-class identity in leisure at Tokyo Imperial University,” Asia Pacific Journal of Sports and Social Science vol.2, no.3 (2013): 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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