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세 동아시아세계 약용식물 인삼(人蔘)의 가공과 유통 -조선의 대명(對明) 진헌인삼을 중심으로-†
Abstract
Ginseng started to emerge as an international medicinal material during the Joseon Dynasty. This paper examines ginseng as a tribute presented to the Ming royal family by Joseon Dynasty. Joseon Dynasty presented peeled and dried ginseng (white ginseng, 白蔘) to the emperor. The Ming Dynasty demanded chosam (natural ginseng, 草蔘) with no peeling in 1602. By the request of Joseon Dynasty during the period of Lord Gwanghae, the presented ginseng was again changed to pasam (boiled and dried ginseng, 把蔘, 煮蔘). Although Nurhachi of the Jurchen (女眞) is known to have invented this method of processing pasam, Joseon was exporting pasam to the Ming Dynasty earlier than that. As such, the Nurhachi theory of the invention of the pasam should be reexamined. Joseon Dynasty presented ginseng to each emperor and heir to the throne through its envoys. The total amount of ginseng sent to the royal family of the Ming Dynasty during the Joseon Dynasty is estimated to be approximately 664 to 880 geuns (斤) per year in the fifteenth century, 300 to 500 geuns in the sixteenth century, and about 160 to 360 geuns in the 17th century. When the Japanese Invasion of Korea occurred in 1592, the Joseon government informed the Ming Dynasty of the miserable situation of the Joseon people and chose to reduce the tribute. However, even after the war, the amount of tribute ginseng in Joseon continued to be small. This is because the medical industry in the Ming Dynasty grew significantly, and medical books prescribing Joseon ginseng increased, and the rich people of the Ming Dynasty loved ginseng so much that they imported Joseon ginseng at high prices. Local residents of Guangdong (廣東), China, a major customer base of Joseon ginseng, also used ginseng as a preventive medicine for JangGi (瘴氣). From the fifteenth to the seventeenth centuries, the amount of ginseng that Joseon tributed to the Ming Dynasty continued to decrease, and the ginseng processing method also moved in the direction of reducing the burden of processing. This was caused by changes in the environment surrounding the use of ginseng, including changes in the international situation at the time, growth of the medical industry, increasing interest in ginseng by the people of the Ming, and economic considerations of the Joseon government. The two countries sought changes in the ginseng tribute through an agreement.
색인어: 인삼, 조선, 명, 후금, 누르하치, 조공, 사행, 장기(瘴氣), 백삼(白蔘), 초삼(草蔘)
Keywords: ginseng, Joseon, Ming, Jurchen(女眞), Nurhachi, tribute, envoy, white ginseng(白蔘), natural ginseng(草蔘), boiled and dried ginseng(把蔘)
1. 머리말
조선시대 향약(鄕藥)으로 가장 각광받은 약재는 단연 인삼이다. 경험의학으로나, 임상학적 측면에서 인삼이 축적해온 약용의 가치와 위상은 조선시대뿐 아니라, 현재도 유효하다. 『본초강목(本草綱目)』에는 인삼이 ‘오장의 기운을 더해주고 정신을 안정시키며 눈을 밝게 하고 장과 위의 냉증을 치료한다. 기억력도 좋아지게 하며, 오랫동안 복용하면 몸이 가벼워지고 수명이 늘어난다.’고 기록하고 있다[ 1].
한국 인삼의 효능에 대해서는 삼국시대부터 중국에 알려졌지만( 양정필·여인석, 2004), 고려 말 유통량이 증가하였고, 조선 시대 폭발적인 인기를 구가하게 되었다. 당시 동아시아 경제의 중심지였던 명에서 인삼을 장생약(長生藥)으로 여기면서 수요가 크게 증가하였고 자연스레 조선 인삼의 위상이 널리 알려졌다. 명나라 시기 중국인은 조선 인삼을 대량 수입하기 시작하였고, 이는 바다 건너 일본에까지 확산되었다( 박평식, 2008a; 유승주·이철성, 2002; 양정필, 2017). 도쿠가와 시대 일본은 인삼을 조선 최고의 고귀한 물품이라 여겼고, 4대 쇼군은 인삼을 영약(靈藥)으로 극히 존중했다[ 2]. 이 시기 인삼은 모두 산에서 채취하는 산삼(山蔘)이었는데, 국내외적으로 쏟아지는 인삼 수요를 대응하면서 17세기 후반~18세기 초 인삼 재배도 성공하였다( 유승주·이철성, 2002; 염정섭, 2003; 정은주, 2012). 조선 인삼이 동아시아 최고의 의약품이 되고, 재배까지 성공하게 된 동력은 외국의 막대한 수요로 인한 것이었다.
조선 인삼은 중국과 일본을 거쳐 서구 유럽에까지 알려졌다. 근래 ‘인삼의 세계사’를 고찰한 연구 성과가 발표되었는데( 옥순종, 2016; 설혜심, 2020), 이 연구는 아시아 지역에서만 주목했을 것으로 여겨지는 인삼이 중국과 일본을 거쳐 유럽과 미국 등 서구세계에 전달되어 그 인기를 누렸고, 또 은폐되기까지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장구한 문명교류사만큼이나 아시아에서 서구 세계로 건너가 문명에 지대한 역할을 한 상품은 적지 않다. 그럼에도 유럽과 북아메리카 지역의 인삼 역사를 한국에서 주목하는 이유는 인삼이 한국 최고의 국제 상품 중 하나인 것은 물론 ‘아시아의 약초’로서 상징성을 갖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조선 인삼의 세계사까지 회자되고 있는 지금, 과연 조선 인삼의 한국사 연구는 어느 정도 와 있는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그간 인삼 연구는 조선 후기의 인삼 무역과 정책, 재배 등의 연구가 다대하게 이루어져 왔다[ 3]. 반면 조선 인삼이 본격적으로 주목되고 성장하기 시작했던 조선 전기 인삼사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관심이 소홀했다. 조·명 관계 시기의 인삼 연구는 다음과 같다. 동아시아 인삼의 역사를 살피면서 조선 전기인삼 무역이 일부 언급되었고[ 4],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를 통해 한반도의 인삼 산지가 검토되었다( 양정필·여인석, 2004). 박평식은 상업사적 관점에서 조선 전기 국내 인삼 유통 정책을 확인하고, 15세기에 대외 유통된 인삼 수량을 추정하였으며( 박평식, 2008a), 선조대 이후 인삼 수출 양상에 대해서도 살폈다( 박평식, 2008b). 스지 야마토와 양정필은 17세기 초 조·명 관계에서 이루어진 인삼 무역의 정황과 개성상인을 분석했고( 양정필, 2017; 辻大和, 2018.), 구도영은 조선 인삼 수출이 1570년대부터 증가하였다는 점을 밝혔다( 구도영, 2018).
이와 같이, 유의미한 연구들이 진행되었으나 연구가 많지 않아, 명대 조선 인삼 수출의 큰 윤곽을 이해하는 데 머무른 아쉬움이 있다. 이제 인삼의 여러 분야에 대한 좀 더 깊이 있는 분석이 필요하다. 그 중 조선 조정이 동아시아 질서 최정점의 권력층에 진헌한 조공 인삼은 조선 약재로서의 위상을 확인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명을 지성으로 사대했던 조선이 명 황제에 진헌한 인삼은 의학사적으로나, 외교적인 측면에서 특별한 의미가 있었을 것으로 짐작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진헌 인삼에 대한 연구가 제한적으로 이루어져, 진헌 수량을 명확히 파악하기 어렵고, 그 위상에 대한 언급 또한 근거가 미약하다. 일례로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전매국 촉탁으로, 방대한 양의 동아시아 인삼 연구를 추진한 바 있던 이와 도무라는 ‘조선은 의약적으로 최상품의 인삼을 중국에 진헌했다’고 주장한 바 있는데(今村鞆, 1935), 그 실증적 근거는 밝히지 않았다.
본 연구는 15~17세기 조선이 명에 진헌한 인삼을 종합적으로 고찰한다. 조공의 진헌 행위는 국가 간 이루어진 의례적이고 상징적인 행위여서, 변화가 극소했을 것으로 여긴다. 그러나 당시 의약업의 성장 속에 인삼 거래와 보관법이 발전했고, 진헌 인삼 역시 이러한 시대적 변화에 조응했다. 본고의 분석 내용은 첫째, 15~17세기 조선이 어떠한 인삼을 진헌 인삼으로 선별했는지 살핀다. 진헌 인삼의 산지가 본초학적으로 유의미한 변수였는지도 고려한다. 둘째, 인삼 가공법의 시기적 추이를 확인한다. 가공 방식은 인삼의 효능을 보존 또는 강화시켜준다는 점에서, 한의약 발전과정과 상응한다 하겠다. 가공 방식이 발전되지 않으면 의약이 유통될 수 없고, 유통되지 못하면 의약의 혜택을 입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한편 본고는 이 가공법의 변화를 조선-명-후금 세 나라의 관계도 고려하며 살펴볼 것이다. 지금까지 인삼사 연구는 ‘조선과 명’, ‘후금과 명’ 등 단선적 쌍방관계로만 이루어졌다. 그래서 동북아시아 세계 내에서 인삼의 유통과 가공법이 각 지역 간 어떠한 관련성을 가졌는지 이해하는 데 일정한 한계가 있었다. 중국사에서는 17세기에 누르하치가 새로운 가공법을 개발한 것으로 기술하고 있는데, 이에 대해 좀 더 검토가 필요하다. 셋째, 명에 진헌한 인삼 수량도 확인한다. 조선이 명에 진헌한 인삼 수량을 추정한 연구들이 있지만 진헌 대상을 명확히 가름하지 않았고, 시기적 변화도 고려하지 않았다. 본고는 황제와 황태자로 진헌 대상을 구분하고, 이것이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어떻게 변화해 가는지 확인한다. 넷째, 자료를 폭넓게 두루 살핀다. 『조선왕조실록』을 통한 제한된 분석에서 나아가 사행록, 명대 의학서, 조선에서 명에 보낸 외교문서집, 중국인의 문집 등도 살핀다. 이를 통해 당시 인삼업 성장에 대한 이해를 보완하고, 당시 중국의 주요 고객층이 인삼의 어떠한 측면을 주목했는지 의학적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엿보고자 한다.
글의 순서는 다음과 같다. 2장 1절에서는 15~16세기 조선이 명에 보낸 인삼 산지와 가공법을, 2절에서는 사행 파견 수와 명 황태자 존재 여부를 고려하여, 조선이 명에 보냈던 진헌 인삼의 규모를 추정할 것이다. 3장 1절에서는 16세기 중반 명 의약서 편찬, 의약 시장의 확대 등을 검토하여, 16세기 인삼 수요 증가와 가격 급등의 정황을 확인할 것이다. 2절에서는 임진왜란 이후 조선의 조공 인삼 수량이 감소하는 경향과 이유를 살펴보고, 3절에서는 임진왜란 이후 진헌 인삼 가공법의 변화와 동북아 삼국의 정황을 파악할 것이다.
조명관계 속에 이루어진 진헌 인삼 약재의 유통과 가공법을 동북아 의약업의 성장 속에 규명함으로써 조선 전기 인삼사 연구가 일보 진척되는 하나의 토대가 마련되기를 기대한다.
2. 15~16세기 진헌 인삼의 가공 방식과 수량
1) 진헌 인삼의 산지와 가공 방식
인삼은 아시아의 극동지역에서 자생하는 약용식물로, 강한 직사광선과 고온을 싫어하고, 한랭하고 습윤한 기후를 좋아하며, 지력(地力)이 충분해야 한다. 생장 조건이 매우 까다로운지라 현재 지구상에서 인삼이 자랄 수 있는 환경 조건을 갖춘 곳은 두 곳 뿐이다. 하나는 한국·중국·러시아 연해주 등의 북위 30~48° 지역이며, 이 극동지역 외에 서경 70~97°사이의 북아메리카 지역이 있다( 이한구 외, 2004).
조선에서는 한반도 전 지역에서 인삼이 자생하였고( 양정필·여인석, 2004), 평안도에서 가장 많은 양의 인삼이 산출되었다[ 5]. 국초에는 명 황제에게 보낼 인삼을 한양에서 준비하지 않았다. 중국 사행 비용의 상당 부분을 감당하고 있는 평안도에서 인삼 준비부터 포장까지 모두 직접 준비하여, 명으로 가는 사행단에 인계하고 있었다[ 6]. 서울에서 진헌 인삼을 까다롭게 검수했을 것으로 여겨지겠지만 그렇지 않았다. 그러다가 1421년(세종 3) 평안도에서 인삼수량을 다 마련하지 못하여 사행의 조공품 마련에 차질이 발생하였다. 후술하겠지만, 조선 전기 동안 인삼 진헌 수량은 세종대가 가장 많았고, 이에 인삼준비에 차질이 생겼던 것이다. 이를 계기로 서울의 제용감(濟用監)에서 진헌인삼을 마련하고, 인삼을 포장할 때 정부와 육조, 사헌부 관리들이 합동하여 검수하게 하였다[ 7]. 같은 해 포장 방식도 정비되었다. 기존에는 진헌 인삼을 포대에 넣어 가져갔는데, 먼 길을 가는 동안 인삼이 부서지기도 했다. 따라서 이후로는 인삼을 나무로 만든 궤짝에 담아 가도록 하였다[ 8].
1421년 이후 제용감에서 진헌 인삼을 준비 포장하였지만, 진헌 인삼의 다수는 계속 평안도에서 공납한 인삼으로 충당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 평안도 북부의 인삼 산출량이 많았고, 인삼 공납량이 가장 많은 지역도 평안도 북부였기 때문이다[ 9]. 조선 초 평안도와 황해도에서 매년 960근의 인삼을 공납하였고, 함경도와 강원도에서 540근을 납부하였다. 평안, 함경, 황해, 강원도에서만 매년 1,500근을 공납하였던 것이다. 1435년(세종 17) 조선 조정은 평안, 황해, 강원, 함경도의 인삼 공납량을 전체적으로 500근 감해 주었고, 이후 이 지역에서는 매년 인삼 1,000근을 공납하였다[ 10]. 1603년(선조 36) 인삼을 제대로 공납하지 않은 도의 관찰사를 추고하였는데, 이때 평안도, 함경도, 강원도 관찰사만 언급하였다[ 11]. 하삼도 지역의 인삼 공납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는 것으로 보아, 진공 분량의 비중이 그다지 크지 않았던 것으로 판단한다.
그렇다면 평안도 인삼의 품질이 다른 지역보다 특별히 뛰어났던 것일까. 인삼은 생장 조건이 매우 중요해서 인삼 산지와 그 산지에 따른 약성의 차이가 본초학(本草學)적 측면에서 많은 의학자들의 관심 분야이기도 하다. 이에 필자는 조선 전기 최고 품질의 인삼 산지가 어느 곳일까 추적했지만[ 12], 유의미한 해답을 찾을 수 없었다. 사료에 평안도 인삼의 품질이 좋다는 언급은 아예 없었고, 최고 품질의 인삼 산지에 대한 언급도 백제 지역, 함경도, 경상도, 강원도 등 사료마다 다양하게 나타났다. 더욱이 인삼 채집이 증가하면 인삼이 쉽게 절종되어 산지가 자주 바뀔 수 있다는 점 역시 고려해야 하므로 조선 후기의 인삼 품질을 조선 전기에 바로 대입하기도 곤란하다. 이마무라는 ‘조선 최고의 인삼을 명 황제에 진헌했다’고 주장했지만(今村鞆, 1935), 이에 대한 어떠한 근거도 제시하지 못했다. 시기적 차이가 있지만 18세기 영조, 정조시기에는 조선에서 가장 품질이 좋은 인삼인 나삼(羅蔘, 경상남도산), 그 다음 등급인 관동삼(강원도산)을 조선 국왕이 복용했고, 사대교린 관계에는 그보다 품질이 낮은 평안도 인삼을 사용했다[ 13]. 요컨대 명에 진헌하는 인삼의 품질이 나쁘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어떠한 근거나 설명도 없이 명에 최고 품질의 인삼을 보냈다고 단정하는 것 역시 주의해야 한다. 오히려 평안도가 중국 사행 비용을 마련하는 거점 지역이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유승주·이철성, 2002; 구도영, 2019). 평안도에서 가장 많은 인삼이 산출되었고, 그러한 외교 행정의 구조 속에서 명에 진헌할 인삼 역시 평안도산으로 구성되었다고 보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해석일 것이다.
한편 인삼은 수분을 다량 함유하고 있어 보관기간이 길지 못하다. 따라서 인삼을 채집하고 나면, 인삼의 약효를 잃지 않으면서 장기 보관할 수 있도록 적절한 조치를 취해야 했으며, 그 관리 방법은 시기마다 변화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조선 전기 진헌 인삼의 가공 방식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지금껏 가공법에 대한 명확한 답을 확인할 수 없었는데, 1577년(선조 10) 사은사 서장관 김성일(金誠一)이 남긴 사행록(使行錄)을 통해 황제에 진헌한 인삼의 가공법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은 채취한 인삼의 ‘껍질을 살짝 벗긴 뒤 건조’시킨 백삼(白蔘)을 진헌하고 있었는데, 이는 아래의 내용과 같다.
A) 이날 홍수언(洪秀彦)이 볼일이 있어 예부(禮部) 주객사(主客司)에 갔더니, … 상서가 … 인삼을 가져오라고 하고는 손으로 두어 뿌리를 꺾어 보고서 말하기를, “인삼은 색이 누런 것이 좋은데, 이는 필시 가짜 삼일 것이다.”하자, 우시랑(右侍郞)이 말하기를, “이것은 껍질을 벗긴 것입니다. 껍질이 없는 것은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기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벌레가 파먹기도 쉽고 약성(藥性)을 잃는 경우도 많으며, 2년만 지나면 검게 변하여 쓸 수가 없습니다.” 하였습니다. 이에 해당 관리가 “지난번에 낭중(郞中)도 이런 사유를 가지고 그 나라의 통사에게 물어보니, (조선)통사가 말하기를, ‘피삼(皮蔘) 200근을 가지고 백삼(白蔘) 6, 70근을 겨우 만드는데, 공력이 몹시 많이 들어가면서도 쓰는 데에는 조금도 관계가 없습니다. 소방(小邦)에서도 황삼(黃蔘)이 좋다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나, 당초 진공(進貢)할 때에 이와 같이 하였으므로 감히 함부로 고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 소방이 어찌 감히 명령대로 따르지 않겠습니까.’ 하였습니다.’…” 하였다[14].
위의 A) 기사는 1577년 사은사 서장관 김성일의 『조천일기』 내용 중 일부이다. 위의 기사에서 명 예부 상서는 조선에서 진헌한 인삼이 황색이 아니라 흰색이라는 점에 의아해 하면서, 가짜 인삼일 것이라고 하였다[ 15]. 그가 인삼시장에서 흔히 보아왔던 인삼과 달랐기 때문일 것이다. 이에 예부 우시랑은 예부 상서에게 ‘조선이 보낸 인삼은 가짜가 아니며 껍질을 벗긴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다만 우시랑도 껍질을 벗기면 진위를 가리기 어렵고, 보존성과 약성(藥性)에 문제가 생긴다고 여겼다. 이에 조선 통사는 조선이 진헌하는 인삼제조법에 대해 설명해야 했다. 조선 통사는 국초부터 껍질을 벗긴 백삼을 진헌해 왔다고 언급하였다. 껍질을 벗기는 이유는 알지 못했고, 단지 관행이라고 하였다. 통사는 조선 입장에서도 인삼의 껍질을 벗기지 않고 납부하는 것이 훨씬 경제적인 일이라고 해명하였다. 150년간 지속된 조선 인삼 가공법을 16세기 중후반에 명 관료가 새삼 문제제기한 것은 후술되겠지만, 이 시기 명사회에서 인삼에 대한 관심과 인기가 증가하고 있던 점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위의 기사 중 또 하나 주목되는 것은 조선에서 껍질을 벗기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피삼 200근으로 백삼 60~70근을 만들고 있다는 부분이다[ 16]. 이를 통해 조선의 인삼 가공 정황을 헤아려 볼 수 있다. 조선은 생삼 200근으로 백삼 60~70근을 만들고 있었고, 무게 비율이 약 3:1이다. 인삼 내 함수량 30% 정도를 감소시킨 것이다. 조선의 인삼 건조 수준을 짐작하기 위해 청대 인삼 공납의 사례와 비교해볼 필요가 있다. 청나라는 인삼을 자체 조달하여 황제에 공납했는데, 성경(盛京)에서 장기보존을 위해 인삼을 건조시켰다. 청에서는 1668년(강희 7) 생삼 615근을 건조시켜 143근을, 1670년 생삼 419근을 말려서 96근을, 1675년 생삼 368근을 말려서 75근을, 1680년 생삼 101근 8냥을 말려 20근을, 1687년의 생삼 1,1917근 8냥을 말려 건삼 303근 8냥을 얻었다. 사례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생삼과 건삼의 무게 비율이 약 5:1 수준이었다( 佟永功, 2000: 44). 함수량 80%를 감소시킨 것으로 굉장히 바싹 말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선과 청의 인삼 건조 방식을 비교하면, 조선은 청보다 상대적으로 인삼을 바싹 건조시키지 않았다. 인삼의 껍질을 벗기거나 건조하게 되면 인삼 무게가 감소하게 되고, 그것은 고스란히 조선 조정의 부담이 된다. 진헌 인삼의 수량은 가공된 후의 무게이므로 인삼을 많이 건조시켜 무게가 감소하면, 그만큼 더 많은 인삼을 확보해야하기 때문이다. 청나라와 비교했을 때 조선인들은 인삼 무게 감소를 감안하여, 바싹 건조하지 않은 인삼을 명 황실에 진헌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선 후기에도 백삼 제조법은 각 지역마다 차이가 있었다. 황해도 개성에서는 수삼(水蔘)에 붙은 흙을 씻어내고, 작은 대나무 칼 등으로 껍질을 얇게 벗겨낸 뒤, 물로 씻은 다음 소쿠리에 7~10일 동안 햇볕에 건조시키는 방법을 사용했다. 전라도 금산에서는 인삼의 껍질을 벗겨내지 않고, 물로 씻은 뒤 그늘에서 1~2일 간 건조시켰다. 인삼이 굽혀도 부러지지 않을 정도로 건조되면 수염뿌리를 제거한 다음, 하부를 굽히고 왕골로 묶어서 햇볕에 말린 뒤 왕골을 제거하여 유통했다. 이 제조법은 원거리 수송할 때 작은 뿌리가 부러지지 않도록 고안한 방법으로 보인다. 풍기와 화순에서도 인삼의 외피를 벗기지 않고 꼬리를 굽히는 방식으로 제조했다( 今村鞆, 2015, 卷5). 이러한 점들을 검토했을 때 조선 전기 명 황실에 진헌한 인삼은 개성의 백삼 제조법과 유사한 방식으로 제작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2) 진헌 인삼의 유통 규모
앞 장에서는 조공 인삼의 산지와 포장, 장기 보관을 위한 가공법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이 인삼을 명에 얼마나 진헌했는지, 정기사행과 비정기 사행으로 구분하여 확인하고자 한다.
(1) 정기사행의 인삼 진헌 규모
명은 국초부터 대외관계를 조공체제로 운영했으므로 조선과 명의 외교관계는 사행(使行) 을 통해 이루어졌다. 조선은 매년 정기적으로 정기사행을 파견했고, 특별한 외교 사안이 발생하면 이를 해결하기 위해 비정기사행을 파견했다. 조선의 정기사행은 정조사(正朝使), 성절사(聖節使), 그리고 천추사(千秋使)가 있었다[ 17]. 정조사는 음력 설날을, 성절사는 황제의 생일을, 천추사는 태자의 생일을 축하하는 사절단이었다. 사행은 실질적인 외교활동의 주체로서, 국가 간 친선관계를 도모하며, 명과 각종 선물을 주고받았다. 이 때 조선이 명 황제에 진헌한 예물을 방물(方物), 또는 조공품이라 부른다. 조선과 명의 조공관계가 지속하면서 정기사행의 방물 수량도 정해졌는데, 그 중에서 인삼의 수량은 다음과 같다.
위의 < 표 1>을 보면, 국초 인삼의 연간(年間) 조공 액수를 알 수 있다. 인삼방물의 주체는 황제와 태자 2명인데, 명나라의 존속기간 동안 태자는 지속적으로 존재했던 인사가 아니기 때문에, 태자의 유무에 따라 진헌 규모가 달라졌다. 따라서 정확한 방물 수량을 추정하기 위해 태자의 유무를 구분해서 표기했다. 새해 인사를 하러 가는 정조사의 경우에는 황제와 태자에게 모두 인삼을 보냈다. 황제에게는 인삼 50근, 태자에게는 20근이다. 성절사는 황제의 생일 축하 사절단이므로 황제에게만 50근, 천추사는 태자의 생일 축하 사절단이므로 생일 당사자인 태자에게만 인삼 20근을 보냈다. 이렇게만 보면, 매년 조선이 140근씩 인삼 방물을 보냈을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렇지만 천추사에 유의해야 한다. 천추사는 황제가 황자를 낳고 그 황자들 중에서 태자를 책봉해야만 파견하게 되는데, 황제가 어린 나이에 제위(帝位)에 오르거나 자식을 낳지 못하는 경우도 있어서, 천추사가 파견되지 않았던 시기가 적지 않았다. 한 해도 거르지 않고 늘 존재했던 정기사행은 정조사와 성절사였다. 따라서 이 시기 정기사행의 방물로 매년 100~140근의 인삼이 중국에 유통되었다. 황후나 태후에게 보내는 예물에는 인삼이 포함되지 않았다.
그런데 1429년(세종 11) 조공품목 중 가장 부담이 컸던 금(金)과 은(銀)을 제외하면서( 유승주, 1994), 그 대신 인삼을 일부 추가하였다[ 18]. 조선이 정기사행에서 납부하게 된 인삼 수량은 아래의 표와 같다.
위의 < 표 2>와 같이, 1430년(세종 12) 이후 정조사 파견시에 태자에게 20근 → 40근을, 천추사 파견 시에 태자에게 20근 → 40근을 더 보내기로 하였다. 황제에게 인삼을 추가 납부하지 않고 태자에게만 20근을 보내기로 한 것은 결과적으로 인삼을 덜 보내는 데 효과적이었다. 15세기에 태자가 없는 시기가 종종 있었으며[ 19], 특히 16세기 동안 명에 태자가 있었던 시절은 겨우 10여 년에 불과했다[ 20]. 그러다보니 16세기 정기사행으로 명에 보내진 인삼은 대개 연간 100근 수준이었다.
요컨대 조선의 정기사행은 국초~1430년까지는 연간 100근 또는 140근을, 1430년~1592년(임진왜란) 무렵 까지는 연간 100근 또는 180근의 인삼을 명에 보냈다. 인삼 근수의 차이는 황태자 유무에 따라 달라졌다. 16세기에는 황태자가 존재하던 시기가 겨우 10여 년에 불과하여, 조공 인삼이 연간 100근 수준으로 최소화되었다.
(2) 비정기 사행의 인삼 진헌 규모
비정기 사행은 조선에서 특정한 외교 사안이 발생하여 이를 해결하거나 명측에 고마운 일이 생겼을 때 감사의 표시로 보내는 사행이다. 그 규모의 범위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정기사행의 조공품처럼 일정하지 않았다. 비정기 사행의 조공품 규모는 조선이 해당 외교 사안을 얼마나 중시하는지 여부에 따라 달라졌다.
국초부터 성종대까지는 비정기 사행의 물목이 일부나마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어 있어서 15세기 비정기사행의 방물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연산군 이후부터는 조공품 수량이 실록에 기록되지 않았다. 15세기 후반 비정기 사행 파견 횟수가 크게 감소하고, 조공품 마련 역시 관례대로 유지되면서, 이제 조선 관료들은 비정기 사행의 방물 규모를 실록에 기록할만한 사안으로 인식하지 않았던 것이다.
15세기 비정기 사행의 방물이 조선왕조실록에 모두 기록된 것은 아니어서, 비정기 사행의 인삼 진헌 총량을 정확히 통계 낼 수는 없지만, 그 범위는 추정할 수 있다. 우선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인삼 진헌 액수를 정리하면 아래의 표와 같다.
위의 < 표 3>을 통해 비정기 사행의 인삼 진헌에 대해 몇 가지를 확인할 수 있다. 외교 사안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황제에게는 인삼 100근, 태자에게 50근을 보내는 경우가 가장 많았다. 황제에게 인삼 200근 또는 1,000근을 보낼 정도로 많이 보낸 경우는 대부분 세종대였고, 진헌 총액수가 가장 많았던 시기도 세종대였다[ 21]. 인삼 200근을 보냈던 사행은 대개 사은사(謝恩使)로, 조선이 명에 외교적으로 감사하다는 인사를 할 때였다[ 22]. 반면 사망한 황제의 시호(諡號)를 올리거나, 황후와 태자 책봉에 대한 진하사를 파견할 때에는 황제에게도 50근의 인삼을 보낼 뿐이었다[ 23]. 성종대에는 명에서 태자를 책봉했는데, 태자에게 아예 방물을 보내지 않는 사례도 있었다[ 24]. 조선의 입장에 따라 인삼 진헌 수량에 격차가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요컨대 비정기사행의 인삼진헌 수량이 정기사행(1회 50~90근)보다 약 2배가량 더 많았다.
그렇다면 비정기 사행은 연간 얼마나 파견되었을까. 비정기 사행은 15세기 전반에 가장 자주 파견되었다. 비정기 사행은 태조~예종(1492~1469) 시기 평균적으로 약 4회, 성종~인조 14년(1469~1636)까지 약 2회 파견되었다(박성주, 2004). 16세기에는 비정기 사행의 파견 숫자가 절반으로 감소한데다 태자가 없던 시기가 대부분이어서, 비정기 사행이 전헌한 인삼 수량도 15세기에 비해 절반 이하로 감소했다.
사행파견 수를 고려하여 비정기사행의 인삼 진헌 수량을 대략적으로 가늠하자면, 태종~예종대까지 < 표 3>의 1회 평균 인삼 방물수량은 황제에 141근, 태자에 34근, 도합 175근이다. 사행 파견 수, 태자 유무를 고려하면, 국초부터 예종대까지는 연간 564~700근 내외의 인삼을, 성종대는 명에 태자가 계속 있었으므로 약 320근 내외의 인삼을 명 황실에 보냈을 것이다. 16세기에는 태자가 존재하던 시절이 10년뿐이고 성종대 이후 황제 100근, 태자 50근을 보내는 것이 관례가 되었던 것으로 보여, 연간 약 200~300근 내외의 인삼이 비정기사행을 통해 명 황실에 유통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명 황실로 가는 인삼 수량은 15세기 전반에 가장 많았고, 16세기에 이르면 절반 이하로 감소했다.
3. 조선의 진헌 인삼 변화
1) 명 의약업(醫藥業)의 성장과 인삼 처방
지금까지 한국의 인삼 연구에서는 조선 인삼의 가장 큰 수요처였던 중국 내 인삼 가격 추이를 주목하지 않았다. 막연히 조선 초부터 인삼이 국제 상품으로 인기가 많았을 것이라고 짐작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렇지 않았다. 15~16세기 중반까지 인삼은 명 시장에서 그다지 수요가 높은 물품이 아니었고, 그랬기에 가격도 그리 비싸지 않았다. 따라서 조선 인삼은 주로 조선 내부에서 소비되었다.
인삼 가격은 16세기 중반 무렵 급등하기 시작하였다. 인삼 값 추이를 살펴보면, 15세기 말 조선인이 북경에서 인삼을 거래할 때 인삼 1근이 3전이었다(『老乞大』 1483년 刪改本). 1550년 중국의 동북 지역에서는 인삼 1근이 銀 1전 5푼이었는데, 1584년 은 1냥, 1609년에는 11냥 6전, 명 말기(1640년 전후) 25냥까지 가격이 올랐다( 叢佩遠, 1989). 인삼 값이 약 80~90년 만에 약 150배 폭등한 것이다. 지역과 시기, 품질에 따라 인삼 가격에 일정한 차이가 있었을 것이고, 물가 상승도 감안해야 하지만, 엄청난 가격 상승임에 틀림없다. 중국 동북지역보다 명의 강남 지역에서는 인삼이 더 고가로 거래되었는데, 1620년 무렵 절강성(浙江省)에서 인삼 1근이 은 40냥에 거래되기도 했다( 邱仲麟, 2008).
16세기 중반부터 명에서 인삼 가격이 가파르게 상승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를 이해하려면, 중국사에서 16세기부터 명·청 교체에 이르는 시기(17세기 전반)가 주요한 전환점이라는 점을 파악해야 한다. 첫째, 16세기 국제무역의 호황과 함께 국내 상품 화폐 경제가 발전하면서 이를 배경으로 사회적 유동성이 증대되었고, 약재도 그 중 하나로 각광받기 시작했다. 명 중엽 이후 북경에는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전체 인구의 30%에 달할 정도로 상업이 활성화되었다. 가정 황제 시기(1521~1566)에 동업조합이라 할 수 있는 ‘약항상회(藥行商會)’도 설립되었다. 거상으로 알려져 있는 동체림(董棣林)은 동북 지역에서 채취한 인삼을 상해에서 판매하여 부를 쌓았고, 중국의 대표적인 휘주 상인도 인삼 무역에 진출하여 큰 이윤을 남겼다. 이 시기 약재 거상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은 16세기 중반 약재만을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전업약시(專業藥市)가 출현하였고, 화폐경제의 발전으로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긴 도시민이 증가하면서 민영 약업(民營藥業)이 급속도로 성장했기 때문이다. 약재업의 성장과 판매구조의 발달은 중국의 전국적인 인삼 판매를 용이하게 했다( 이민호, 2008; 이민호·안상우, 2009)
둘째, 의약업이 성장하며 의학서적 역시 다수 편찬되었는데, 인삼의 효능을 언급한 의학 서적들이 명대 출판업의 발달로 중국 각지에 보급되면서, 인삼 수요가 증가하게 되었다. 의학서에서 인삼을 배합하는 처방도 증가했다. 단계(丹溪)학파에서도 인삼 활용 폭이 넓었는데( 성지영·윤창열, 2013; 은석민, 2015: 52), 명대 온양(溫陽)과 보허(補虛)를 위주로 하는 온보(溫補)학이 성행하면서 따뜻한 성질을 가진 인삼이 주목되었다. 인삼 처방 관련 의서는 왕기(汪機)의 『석산의안(石山醫案)』, 손일규(孫一奎)의 『의지서여(醫旨緖餘)』, 이언문(李言聞)의 『인삼전(人蔘傳)』, 공정현(龔廷賢)의 『수세보원(壽世保元)』, 주진형(朱震亨)의 『格治餘論』, 장개빈(張介賓)의 『경악전서(景岳全書)』, 이중재(李中梓)의 『의종필독(醫宗必讀)』과 『본초통원(本草通元)』, 양기(楊起)의 『간편방론(簡便方論)』 등이 있다. 양기는 『간편방론』에서 인삼이 비싸다는 이유로 처방전에 넣지 않는 경우를 크게 비판하였다. 인삼을 처방에 넣으면 원기를 보호하여 여러 약의 효능을 증가하게 하므로 기를 보하는 모든 약에 인삼을 사용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今村鞆, 1935, 권5; 박재정·윤창열, 2005; 은석민, 2015: 52). 『본초강목』은 물론이거니와[ 25], 우단(虞摶)의 『신편의학정전(新編醫學正)』에서도 인삼이 폐를 보(補肺)하며[ 26], 폐의 기운을 원활히 해주고, 비장을 건강하게 해주는 약이라 했다[ 27]. 인삼이 기운을 보해주는 대표적인 약재라는 점은 중국 사회에 널리 알려졌다( 李漁, 2018).
중국에서 인삼이 원기 회복과 각종 약재의 보조제로 활용되면서 그 수요가 크게 증가하였는데, 특히 이러한 인기를 견인했던 곳 중 하나가 강남 지역이었다. 중국에서도 강남 지방은 막강한 경제력을 가지고 있는 지역인데다 온보학파의 의학이 가장 성행한 곳이었다( 박재정·윤창열, 2005). 이들은 인삼이 장기(瘴氣)를 이기고, 충독(蟲毒)을 낫게 해준다는 점을 주목하고 있었다[ 28]. 장기는 어떤 질병일까. 장기는 축축하고 더운 땅에서 생기는 기운이라는 의미로, 기온이 높고 습기가 많은 중국 강남지역에서 많이 발생하였다. 조선에서도 남쪽 바닷가 지역을 보통 장기가 있는 땅이라 여겼다[ 29]. 명대 대표적 의서 중 하나인 『경악전서』에서는 장기가 중국의 동남(東南)지역에서 발생한다고 하였다. 이곳은 땅의 기운이 축축하고, 안개가 많고 바람이 적은데다, 겨울에는 온난하고 여름에는 서늘하여 양기는 고르지 않고 양중(陽中)의 음사(陰邪)가 쉽게 상하기 때문에 일을 많이 하는 사람들은 쉽게 장기에 걸린다고 하였다. 장병에 걸리면 열이 나고 두통이 생기며, 구토하고, 복창(腹脹) 등의 증세가 있었다. 증상이 심하면 상한(傷寒), 가벼울 때는 학질(瘧疾)같은 경우를 남쪽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장(瘴)’이라 하였다는 것이다[ 30]. 『경악전서』에서는 광동 지역에서 주로 발생하는 이 풍토병을 치료하기 위해 아래와 같이 인삼의 중요성을 언급하고 있다.
瘴氣가 있는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節愼起居’를 말하지만, 부득이 人蔘ㆍ附子ㆍ乾薑ㆍ當歸ㆍ熟地ㆍ紫金錠ㆍ蘇合丸ㆍ不換金正氣散 등의 예방약을 미리 준비해야 하니, 모두 잠시도 없어서는 안 된다. 이 땅에 관리들은 政事가 매우 복잡하여 上下로 交際하고 장사로 왕래하는 사람들은 무역에 바빠서 편히 쉴 수가 없으니, 다소 불쾌감을 느끼면 즉시 이 藥들을 복용해서 解해야 한다. 이렇게 하면 微邪가 쉽게 제압되어 病을 일으키지 않는데, 微邪를 막지 못하면 세력은 반드시 점차 盛해진다[31].
위는 『경악전서』 내용 중 일부이다. 장기를 이기기 위해서는 예방약을 미리 준비해야 한다 하였고 인삼을 처방전의 첫 번째로 일컫고 있다. 『본초강목』에서도 장기로 인한 학질, 임산부의 학질에는 음양을 구분하지 않고 인삼 1냥을 물에 달인 다음 식혀서 복용해야 한다고 하였다[ 32]. 이러한 내용이 17세기 초 명 사회에 널리 알려져 있었고, 조선 상인들은 중국 강남 지역에서 장기 예방약으로 인삼을 더욱 중히 여긴다는 사실을 이미 듣고 알고 있었다[ 33]. 충독 역시 장기, 학질과 유관한 질병으로 남방 지역에서 주로 발생했고, 인삼과 백출로 치료했다[ 34]. 이처럼 인삼은 기를 보하고 각종 약의 효과를 증진시켜준다는 점에서 처방 범위가 넓었으며, 강남 지역민들의 풍토병 예방약 측면에서도 널리 활용되었다.
셋째, 16세기 중반 명에서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계층을 중심으로 사치 풍조가 확대되고, 건강에 대한 관심 역시 크게 증대되어, 고가인 인삼 수요가 증가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巫仁恕, 2019). 당시 명의 부유층들은 연회에 북쪽의 곰 발바닥, 동해의 전복 구이, 서역의 말 젖까지 갖추었다. 연회 한번 여는 비용이 중간층의 가산을 다 털어도 마련할 수 없을 정도였다[ 35]. 산해진미를 구해먹는 상류층들이 건강에도 관심을 적극적으로 가지면서, 장수약 인삼의 수요가 크게 증가하였다. 당시 명나라 입장에서 인삼은 모두 수입 약재였기 때문에 이에 대한 사대부들의 비판 역시 존재했다. 아래의 글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초목(草木)의 약(藥) 중 장수하게 하는 것이 많은데, 세속에서는 오직 인삼을 귀하게 여긴다. … 부귀하고 풍요로운 집안의 자제, 부인은 생활에 절제가 없고 식사 상태가 조화롭지 못하여, 번번이 인삼과 출(朮)의 효과에 의존하여, 멀리까지 비싼 것을 구한다[36].
위의 기사는 17세기 초 명의 관료 사조제(謝肇淛)가 남긴 기록이다. 당시 장수약으로 좋은 약들이 없지 않은데, 세속에서 인삼을 최고로 귀하게 여기고 있었으며, 명의 재력가들이 비싼 인삼을 수입해서라도 구해 먹고 있던 상황을 확인할 수 있다. 명 관료 사조제는 인삼이 고가의 수입품인데도 인삼을 자주 수입해서 섭취하는 사치풍조에 비판적인 입장을 나타내었다. 이는 한편으로 그 역시 인삼의 효능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던 것을 알게 해준다.
16세기 명 국내외 상업 발달로 의약업이 성장하고, 출판업의 발달 속에 의약서가 널리 보급되면서 경제력을 갖춘 명의 사대부들은 의학에도 많은 지식을 쌓게 되었다. 『본초강목』 등의 의서 내용 역시 두루 터득하고 있었다. 명 강남 지역의 부유층들은 음식을 통한 보양에 관심이 많았고, 고영양 음식의 수준을 평가할 때 ‘인삼’과 비교했다( 李漁, 2018: 322, 326). 인삼이 기운을 보충해주는 대표적인 약재로 알려졌기 때문에 보양식이나 다른 약재의 효험 수준을 평가할 때 ‘인삼’에 빗대었다.
1607년(선조 40) 조선 국왕 선조는 명에서 인삼을 ‘불로초’ 수준으로 여겨 공경(公卿)은 물론 일반 서민까지 인삼을 구입하고자 하여, 조선인의 ‘인삼판매 수익이 백배나 된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37]. 16세기 중후반 이후 명나라 내부의 인삼 가격 폭등과 인삼 수요의 증가 경향을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1618년 누르하치가 명에 칠대한(七大恨)을 공표하며 전쟁을 선언한 점도 인삼 가격 상승을 부추겼다. 당시 아시아에서 인삼 수출국은 조선과 후금뿐이었다. 명은 그 중 한 나라인 후금과 전쟁을 하게 되자 후금의 인삼을 수입할 수 없었고, 인삼을 공급받을 곳이 조선으로 제한되었다. 국제상황의 악화로 1620~1640년 간 인삼 가격은 더욱 오를 수밖에 없었고, 명 말기에 조선 인삼은 더 귀한 몸이 되었다[ 38].
이 같은 변화로 명에서 인삼 수요가 폭증하고 국제 가격이 급등하자, 조선 내부에서는 수익이 큰 인삼 물량을 확보하기 위해 엄청난 지각변동이 벌어지게 된다. 인삼 사무역은 큰 수익을 얻을 수 있는 일이었기에, 조선 상인들은 인삼 물량을 최대한 확보하여 인삼 수출에 적극 가담하였으며[ 39], 이는 조선 인삼 유통 전반에 영향을 주게 된다.
2) 임진왜란 이후, 진헌 인삼 규모의 감소
1550년 무렵 인삼 값이 들썩이는 가운데 1592년 동아시아 국제전쟁, 임진왜란이 발생했다. 이 전쟁은 조선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는데, 진헌 인삼도 예외는 아니었다.
인삼 조공의 변화는 진헌 수량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조선이 전쟁을 겪으며 평시처럼 다양한 물건들을 구비하는 일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임진왜란이 발생한 이듬해 1593년(선조 26)까지는 정기사행 성절사 파견시 인삼 50근을 모두 확보했다[ 40]. 그러나 1594년(선조 27) 성절사 파견 시 제용감이 확보하고 있는 인삼은 10근뿐이었다[ 41]. 군량미를 마련하며 전쟁을 치르기도 벅찼던 상황에서, 백성들이 산 속에서 인삼을 확보하여 조정으로 공물을 바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조선 조정은 무리하게 조공품을 모두 마련하는 방식을 취하지 않고, 그때마다 최선을 다하는 수준에서 조공품을 마련해서 보냈다. 명조정은 조선의 어려운 사정을 이해해 주었고, 조선의 인삼 진헌 규모는 자연스럽게 감소하였다[ 42].
주목되는 것은 임진왜란이 끝난 이후에도 인삼 진헌 수량이 15~16세기 수준으로 회복되지 못한 것은 물론, 임진왜란으로 감소된 분량마저도 구비하지 못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는 점이다[ 43].
위의 기사는 1600년(선조 33)의 일이다. 호조는 임진왜란 시기 정기사행동지사의 방물 수량이 감소된 이후 ‘이미 규례가 되었다’고 언급하고 있다. 전란으로 부득이 방물 수량이 감소되었는데, 이것이 임시 조치로 끝나지 않고 정례화된 것이다.
그렇다면 인삼 조공 수량은 얼마나 감소했을까. 1592년(선조 25)~1608년(광해군 즉위) 동안 조선의 외교문서가 수록되어 있는 『事大文軌』를 통해 조선의 진헌 인삼 수량을 확인할 수 있다. 1596년(선조 29) 동지사 30근[ 45]과 성절사 30근[ 46], 1597년(선조 30) 동지사 30근[ 47], 1598년(선조 31) 동지사 30근[ 48], 1599년(선조 32) 동지사 30근[ 49]을 명에 보냈다. 본래 태자가 없는 시기의 정기 사행으로 인삼 50근을 보내는 것이 정례인데, 이 시기에 이르면 계속 30근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다만 태자가 책봉되었던 1603년(선조 36) 동지사가 100근을 진헌해야 한다는 언급도 있다[ 50].
비정기 사행은 1597년(선조 30) 사은사 30근[ 51], 같은해 진위사 30근[ 52], 1599년(선조 32) 정월 사은사는 70근을[ 53], 같은 해 7월 사은사는 30근을[ 54], 1603년(선조 36) 4월 사은사는 30근을[ 55] 보냈다. 사은사의 인삼 방물 수량이 동일한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30근을 보내고 있다.
B-1) 호조가 아뢰기를, “사은사가 떠날 날이 겨우 2순(旬)이 남았는데, 다른 방물들은 거의 모두 준비했습니다마는, 인삼은 90근 중에 25근을 아직도 받지 못했습니다. 양계(兩界)의 인삼 차사원이 서울에 들어온 지 이미 오래이므로 본조가 날마다 바치도록 독촉하고 있습니다[56].
B-2) 예조가 아뢰기를, “진헌하는 예물에는 본디 항식(恒式)이 있으나, 난리를 겪은 이래 물력이 고갈되어 한결같이 횡간(橫看)대로 하지 못하니, 매우 미안합니다. 이번 사은사의 예물은 대신에게 의논하여 병오년 예에 따라 마련하되 그 가운데서 어전 인삼(御前人蔘)은 70근 중 20근을 줄이고 잡색마(雜色馬)는 10필에서 10필을 더하기로 결정하여 계품해서 윤허받았습니다[57].
B-1)은 1603년(선조 36) 호조에서 비정기사행 사은사가 가져갈 물건을 정하는 내용이다. 당시 사은사의 인삼 조공 수량이 90근이라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17세기 명에 태자가 책봉되어 있었으니, 황제와 태자에 진헌한 인삼 수량의 합산이 90근이라는 얘기가 된다. 조선 전기(150근 내외)에 비해 인삼 수량이 절반 가까이 줄어들었지만, 임진왜란 직후 황제에 진헌한 30근과 비교해 보면 약간 증가했다고 볼 수 있다. B-2)는 1606년(선조 39) 기사로, 사은사는 황제에게 인삼을 70근 보내기로 하였다[ 58].
인조대 사은사의 인삼 방물 수량이 더욱 적었던 사례를 찾을 수 있다. 1635년(인조 13) 조선은 사은사 방물로 파삼(把蔘) 30근을 보냈다. 이번 사은사 방물 근수가 많지 않았다고 언급한 것으로 보아, 당시 기준으로도 이번 사행의 인삼 방물이 적다는 점을 인정하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30근을 보낸다고 결정했다는 것 자체가 당시 인삼 방물 수량이 적었다는 실상을 확인하게 해준다[ 59]. 심지어 1635년 시점에는 명에 태자도 있던 시기였다. 앞서 15세기에 사은사가 황제에게 인삼 100~200근을, 황태자에게 50~100근을 각각 보냈던 것과 비교된다.
위의 B) 사료에서 또 하나 주목되는 것은 조선 조정이 줄어든 인삼 진헌 수량마저도 확보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점이다. B-1)에서 조선 조정은 사행이 떠날 날이 20일밖에 남지 않았는데 인삼 90근 중 25근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었다. 호조판서를 역임한 바 있던 김수(金睟)는 조공품 중에서 가장 마련하기 어려운 상품이 인삼과 표범 가죽이라고 아뢰었다[ 60]. 이 사은사 파견 시, 결국 인삼 방물 90근을 모두 채우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B-2)에서도 황제에 보낼 인삼 70근을 확보하지 못해 결국 50근만 보내고, 그 대신 말을 10필 추가하기로 했다. 인삼 대신 말을 보내기로 한 것이다. 같은 해 정기사행인 동지사도 정해진 인삼 근수에서 40근이 부족해 난색을 표했다[ 61]. 요컨대 임진왜란을 거치며 비정기사행의 인삼 방물 수량은 그 전에 비해 약 15~60% 수준으로 크게 감소하였지만, 그마저도 다 마련하지 못해 다른 상품으로 대체하기도 했다.
1598년 임진왜란이 끝났음에도 진헌 인삼 규모를 전쟁 이전 수준으로 회복하지 못한 것은 임진왜란 시기 진헌 규모가 감소한 것이 관례가 되었다는 측면도 있다. 그렇지만 무엇보다 명에서 인삼 값이 등귀하여, 조선 상인들이 조선 정부에 공납하기보다 명에 파는 것이 훨씬 큰 이익이었기에 인삼 물량을 확보하는 대로 모두 외국(명)에 사적으로 판매하여, 국내에서 좋은 인삼을 찾기 어려워졌던 이유가 컸다. 이는 아래의 글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장령 이충양(李忠養)이 계하기를, 인삼이 우리나라의 토산품이지만, 중강(中江)에서 무역하고, 북경에 갈 때 사사로이 가져가는 일이 있고부터는 도리어 귀해져서 얻기 어려운 재화가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진헌에 합당할 만한 것은 한 근의 값이 은 스무 냥이 되므로 방납하는 폐단과 모리하는 염려가 날로 더하고 달로 더합니다[62].
위의 기사는 1606년(선조 39) 장령 이충양의 의견이다. 당시 조·명 국경무역소인 중강개시에서 상인들이 인삼을 수출하고, 사행원들이 북경에 인삼을 가져가 수출하는 바람에, 이제는 조선 정부가 황제에 진헌할 인삼도 확보하기 어려워진 기현상이 벌어진 것이다[ 63]. 이에 조선 조정은 인삼을 중국으로 수출하지 못하도록 법안을 마련했다[ 64]. 그렇지만 조정의 노력에도 사무역 시장의 수출 열기는 개선되지 못했고, 명 말까지 계속된다( 박평식, 2008b; 辻大和, 2018). 인조대에도 인삼을 채취하는 심마니들은 상인과 매매하는 것을 좋아했지만 관가와의 무역을 어떻게든 피하고 있었다[ 65]. 그 때문에 조선 조정은 시장 가격에 따라, 즉 심마니들이 상인에게 파는 가격 수준으로 인삼을 사들였다[ 66]. 정부가 공적으로 사용할 인삼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시장 논리에 적극 동참해야 했다.
3) 명의 선호도와 진헌 인삼 가공법의 추이
국초 조선은 평안도에서 공납한 인삼을 백삼 형태로 가공하여 명 황실에 진헌해 왔다. 그런데 16세기 중반 명 사회에서 인삼 시장이 크게 성장하면서, 인삼의 수요자이기도 한 명의 고위 관료들은 새삼 조선이 바쳐오던 조공 인삼에 대해서도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앞서 2장의 A) 자료를 다시 보자.
1577년(선조 10) 명의 외교관계를 총괄하는 예부 상서는 조선의 진헌 인삼이 황삼(黃蔘)이 아니라는 사실에 문제제기하였다. 그는 인삼의 껍질을 벗기면 진위(眞僞)를 구별하기 어렵고, 벌레 먹기도 쉬우며, 약성(藥性)을 잃는 경우도 많다며 탐탁지 않아 하였다. 껍질을 벗기지 않은 인삼을 진헌하는 것이 더 좋다는 의견이었다. 그러자 조선 통사 역시 ‘인삼의 껍질이 있는 피삼(皮蔘)을 바치면, 조선 입장에서도 인삼 가공에 공력을 들일 필요도 없고, 껍질을 벗기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인삼 손실도 없어지므로 조선 입장에서는 환영할 만한 일’이라고 전하였다. 조선과 명 측 모두 인삼의 껍질을 벗기지 않는 제조 방식을 선호하였다.
하지만 국초부터 약 200년 가까이 지속된 방식을 바꾸는 것은 몇몇 관리의 생각이나 말로 해결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번거로운 행정절차가 진행되어야 하는 일이기에 이 논의는 더 진전되지 않았다. 다만 16세기 후반 명 관리가 조선의 인삼 방물에 관심을 갖고 문제제기한 것은 당시 명 사회에서 인삼에 대한 관심과 정보가 증가하고 있었다는 정황을 보여준다.진헌 인삼의 가공 방식이 변화된 것은 임진왜란 이후, 17세기 초이다.
우의정 유영경(柳永慶)은 “초삼은 자연 그대로 온전한 것이고 파삼은 본성을 잃은 것이니, 약용으로 말한다면 초삼을 취하고 파삼을 버려야 할 듯하지만, 중국인이 파삼을 독촉하고 이를 간절하게 구합니다[ 67].”
위의 기사를 통해, 1602년(선조 35) 명 예부의 뜻을 받아 진헌 인삼의 가공방식을 백삼에서 초삼(草蔘)으로 바꾸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68]. 여기서 말하는 초삼은 껍질을 벗기지 않은 온전한 형태의 생삼(生蔘)을 말한다. 당시 인삼을 채취시기에 따라 초삼과 정삼(正蔘)으로 구분해서, 7월에 붉은 열매가 보일 때 캔 것을 초삼, 8월에 누런 잎이 보일 때 캔 것을 정삼이라 부르기도 했다[ 69]. 그렇지만 이 시기에 명 예부가 조선에 요구한 초삼은 정삼과 대비되는 채취시기에 따른 구별이 아니다. 표현은 다르지만 앞서 A)자료에서 1577년 예부 상서와 조선 통사가 언급했던 황삼 또는 피삼과 같은 생삼을 말한다. 즉 조선은 1602년 명의 입장을 반영하여, 껍질을 벗기지 않고 건조시키지 않은 생삼, 즉 자연 그대로의 초삼을 진헌하게 되었다. 초삼은 별도의 가공처리를 하지 않아도 되었기에 조선의 부담이 줄어드는 한편 보관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단점도 있었다.
그런데 초삼을 바치게 된 이듬해(1603년, 선조 36), 조선 관료들은 황제에게 파삼(把蔘)을 진헌하는 것이 어떠할지 의논하게 된다. 이 시기 중국인들이 파삼을 가장 선호하고 있었고, 파삼을 진헌하는 것이 조선의 이익과도 부합했기 때문이다. 이는 위 C)기사의 우의정 유영경의 언급을 통해서 확인되며, 아래의 D) 기사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D-1) 예조가 아뢰기를, “…행 판중추부사 이원익(李元翼)과 오성부원군 이항복(李恒福)은 ‘…공상(貢上)하는 인삼을 양각삼으로만 하게 되면 10에 1∼2도 취할 수 없지만, 파삼은 대소 장단을 모두 취해 다발로 묶으면 가부를 논할 것 없이 캐낸 즉시 적절하게 쓸 수 있으니 만 배는 편리하게 될 것이다. 그전에 알지 못했던 것을 이제 터득하게 되었으니, 예부에 자품할 적에 어찌 변명할 말이 없는 것을 걱정하겠는가.…’.했습니다. 우의정 유영경(柳永慶)은 ‘…중국 사람들이 파삼을 귀중히 여겨 간절하게 요구하고 있다. …’했습니다[70].
D-2) 관반 이호민이 아뢰기를, “…양각삼은 10여 두(斗)를 캐어야 겨우 1~2냥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갑자기 마련할 수 없고, 명삼(明蔘)은 비록 작은 인삼이라도 합쳐서 만드는 것이기에 마련하기가 퍽 쉽습니다. 중국인들이 이것을 매우 좋아한다고 하니 명삼을 준비하는 것이 좋겠습니다[71].”
위의 기사처럼, 조선 관료들은 파삼 진헌을 적극 주장했다. 파삼을 명에서 요구하는 가공법이라 해서 명삼(明蔘)이라고도 불렀다. 그렇다면 파삼이 어떤 가공법이고, 동아시아 삼국이 파삼을 어떻게 인지하고 있었는지도 살펴보자. 그간 연구들마다 파삼에 대한 내용이 불일치하거나 오류가 있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이다. 파삼이란 인삼을 살짝 삶아서(烹) 건조한 뒤, 이 인삼 여러 뿌리를 하나로 묶은 형태를 말한다[ 72]. 명과 조선에서는 인삼을 삶았다는 행위보다 ‘인삼 여러 개를 묶었다’는 의미를 강조하여 ‘파삼’이라고 불렀는데, 그 제조법은 삶은 것, 정확히는 살짝 데친 것이었다. 파삼은 끓는 물에 한번 익히고 건조한 것이기에 백삼보다 장기보관이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었다. 더욱이 파삼은 여러 인삼을 하나로 묶어 둔 것이기에 그 무게만 맞추면 되지, 인삼 각 뿌리마다 크기나 품질이 균질하지 않아도 되는 장점이 있었다. 즉 파삼을 진헌하게 되면 선물의 품격에 맞는 잘생긴 인삼을 선별해야 하는 수고가 없기 때문에, 조공 인삼을 준비하기가 훨씬 수월해진다. D-1)에서 행 판중추부사 이원익과 오성부원군 이항복이 ‘파삼을 보내면 만 배는 편리하게 될 것’ 이라는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조선 관료들은 인삼을 물에 데치면 인삼의 약효가 물로 빠져나간다고 봤기 때문에 파삼 방식은 좋은 가공법이 아니라고 여겼다[ 73].
그렇다면 인삼의 주요 수출국인 후금은 명나라가 선호하는 이 파삼법을 어떻게 인지했을까. 『청 태조실록』에는 17세기 초 여진의 누르하치가 인삼을 삶는(熟) 가공법을 개발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74]. 『청실록』의 원문은 “上教以製法 令熟而乾之”으로, ‘熟’은 조선이 표현한 ‘湯’과 같은 의미이다. 인삼을 삶는 것이다. 그런데 일부 인삼사 연구와 국역서에서 ‘熟’ 또는 ‘烹’을 ‘찐 인삼’ 또는 ‘증조법(蒸造法)’이라 번역하고 있다[ 75]. 그러나 『해동역사』에서 ‘숙삼(熟蔘)’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숙삼은 끓인(湯) 뒤 건조한 인삼’이라고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으며[ 76], 청나라 양빈(楊賓)의 『유변기략(柳邊紀略)』에서도 누르하치가 만든 가공법을 자(煮), 즉 삶는 것이라고 하였다[ 77]. Symons Van Jay도 누르하치가 만들었다는 가공법을 ‘Boiled and dryed’라고 표현하였고( Symons, Van Jay, 1981: 9), 총패원(叢佩遠)도 누르하치 시기에 자쇄법(煮晒法)으로 바뀌었다고 하였다( 叢佩遠, 1989: 49). 물에 넣어 삶는 방법과 증기로 찌는 방법은 큰 차이가 있고, 가공법 출현 시기도 다르므로 주의해야 한다. 증조법에 대해서는 좀 더 긴 검토가 필요하겠지만, 조선과 청에서 모두 18세기에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78]. 정리하면, 17세기 조선과 후금 모두 인삼을 데쳐서(湯, 熟, 煮) 건조하는 방식으로 이행하고 있었고, 명나라가 이 가공법을 매우 선호했다. 조선인이 말하는 파삼은 인삼을 ‘묶는다’는 점을 강조했고, 여진인이 말하는 숙삼과 자삼은 ‘삶는’ 제조법을 강조했을 뿐, 모두 같은 인삼 가공과정에서 일어나는 일이었다.
파삼과 관련해서 또 하나 확인해야 할 부분은, 17세기 전후 이 파삼 제조 방식이 어느 나라에서 시작되었냐는 것이다. 『청실록』에는 청 태조 누르하치의 영웅적인 면모를 강조하기 위해, 인삼을 삶는 가공법을 누르하치가 처음 고안한 것으로 서술하고 있지만, 인삼을 데치는(熟) 가공법은 고려에서 시작되었다. 1123년에 이미 고려인들이 인삼을 삶는 숙삼 가공법을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79]. 이러한 사실은 송나라 사신 서긍(徐兢)의 고려 견문록이라 할 수 있는 『고려도경』의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숙삼 가공법의 시초는 고려라고 볼 수 있다.
다만, 고려에서 숙삼 가공법을 사용했다고 하더라도, 조선시대에는 이 방법을 사용하지 않고 있었다는 점이다. 고려인의 숙삼법이 조선시대 단절된 이유를 정확히 알 수는 없다. 하지만 17세기 초 선조는 ‘우리나라에서는 예부터 파삼이라는 것이 없었다’고 주장하였으며[ 80], 조선 관료들 역시 ‘인삼을 끓이면 그 약 성분을 손실하게 된다’고 명나라의 파삼법을 비판했다. 또한 조선 조정이 숙삼법을 ‘임진왜란 시기 명 상인에게 배웠다’고 명나라에 설명하였다는 점을 보면[ 81], 숙삼이 조선시대 일반적인 인삼가공법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17세기 전후 동북아 3국이 사용했던 숙삼(파삼) 가공법을 조선의 것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럼 17세기 이 파삼 가공법을 누가 사용하기 시작한 것일까. 『청 태조실록』에서는 1605년 여진의 누르하치가 인삼을 삶아(熟) 건조하는 방법을 처음으로 개발했다고 기록하고 있어서[ 82], 중국사학계에서는 후금에서 숙삼법을 개발한 것으로 여기고 있다( Symons Van Jay, 1981; 叢佩遠, 1989; 김선민, 2008). 그렇지만 조선에서는 그보다 3년이나 앞선 1602년 이미 조선 상인들이 파삼을 제조해 명에 판매하고 있었고[ 83], 1603년에는 위의 D)기사와 같이, 파삼을 명 황실에 조공하자는 논의까지 하고 있었다. 따라서 파삼 또는 숙삼의 제조 방식을 누르하치가 만들었다는 기존 연구는 재고되어야 할 것이다.
17세기 파삼 가공법은 인삼 판매자인 조선, 여진이 아니었고, 인삼의 적극적인 구매자였던 명나라 측에서 적극 요구하고 있었다. 이는 앞의 C), D) 기사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으며, 임진왜란 시기 명 상인이 조선인에게 파삼법을 전했다는 기록도 있다[ 84]. 중국인들이 파삼을 귀하게 여긴 것은 인삼을 묶었기 때문이 아니라, ‘삶는’ 가공법때문이었다. 인삼의 적극적인 구매자들이 보통 중국 강남지역 부유층들인데, 멀고 먼 조선으로부터 인삼을 안정적으로 공급받기 위해 장기 보관법에 관심이 많았던 것이다. 요컨대 조선은 여진보다 더 앞선 시기에 이미 명에 파삼(숙삼)을 판매하고 있었고, 그 요구는 명으로부터 왔다.
현대 한의학 연구에 따르면, 백삼보다 파삼의 ginsenoside 함량이 더 많은 것으로 확인되는데( 이강선 외, 2013), 당시 조선 관료들은 파삼이 약용의 측면에서 그다지 좋지 않다고 생각했다. 인삼을 물에 끓이면 영양분의 일부가 물에 우러나오기 때문이다[ 85]. 그럼에도 조선 관료들은 중국인들이 귀하게 여긴다는 이유로 파삼을 황제 방물로 보내자고 주장하는데, 이는 상술한 바와 같이, 당시 인삼 확보가 정말 쉽지 않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1601년(선조 34) 인삼 1근 가격이 면포 16필이었는데[ 86], 1603년(선조 36) 황제 진헌에 사용할 만한 양각삼 1근은 면포 30필을 주고도 살 수 없을 정도였으며, 그마저도 구하기 어려웠다[ 87]. 이에 조선 관료들은 조선 입장에서 경제적이면서, 명 관료들도 선호하는 파삼을 진공품으로 보내자고 제안한 것이다. 그렇지만 국왕 선조는 파삼을 진헌하게 되면 혹시라도 이익을 탐하는 자가 묶어놓은 파삼 속에 쇠꼬챙이를 넣는 등 속임수를 쓸 가능성이 있고, 그 때문에 괜한 외교문제가 발생할 염려가 있다고 판단하였다. 결국 파삼으로 바꾸어 진헌하자는 논의는 선조대 더 이상 진척되지 못하였다[ 88].
그렇지만 인삼을 마련하는 일은 조선 정부의 지속적인 고민거리였다. 조선 조정이 국내 인삼 가격을 안정화시키기 위해 파삼 수출을 금지하고, 파삼을 제조하면 사형에 처하겠다는 규정을 만들었지만, 인삼 사무역의 열기를 막지못했다[ 89]. 그러한 가운데 인삼 공납의 부담으로 압록강 연안 고을의 백성들이 파산하고 있었다. 조선 상인과 심마니가 결탁하여 인삼을 중국으로 곧바로 수출하는 바람에, 조선 조정에 인삼을 공납해야 하는 백성들은 인삼을 고가에 구입해서 바쳐야 했기 때문이다[ 90]. 조선 조정은 인삼 공납으로부터 백성들을 구제하는 방안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광해군대 들어서면 조선 조정이 사용할 인삼이 더욱 증가했다. 명 사신들이 광해군 책봉 등의 이유로 조선에 와서 인삼 수백 근을 뇌물로 요구했기 때문이다[ 91]. 인삼 확보에 골머리를 앓던 상황에서, 선조 말년 중단되었던 파삼진공 문제가 광해군대 다시 제기되었다. 조정 내에서 반대 의견도 있었는데, 이는 아래와 같다.
정원이 아뢰기를, “토산물을 올리는 것은 옛부터 통행된 예입니다. 본국에서 생삼을 중국 조정에 조공한 2백 년 동안 폐단이 없었습니다. 지금 사은사의 행차에서 파삼으로 바꾸어 진상하는 일을 주청하려하는데, 이는 묘당(廟堂, 의정부)이 이미 결정한 사안이어서 감히 무어라 말할 수 없기는 합니다. 그러나 진헌이란 중대한 일입니다. 조종조의 금석과 같은 규정을 경솔히 고쳐서는 곤란하고, 또 중국인들이 파삼 얻기를 좋아한다고 한 것은 일반 백성의 필부(匹夫)나 중외의 상인들을 말한 것입니다. 당당한 천자는 온 천하를 소유하고 있는데, 어찌 신기(新氣)를 생성하고 천성을 보존하는 약을 마다하고, 가공하여 진면목을 상실한 물품(파삼)을 좋아하겠습니까[92].
위의 기사는 1610년(광해 2) 7월 승정원이 아뢴 내용 중 일부이다. 승정원은 명 시장에서 파삼을 선호한다고 하여, 황제에 바치는 인삼까지 파삼으로 보내는 것은 옳지 않다는 의견을 제기하였다. 그러나 조선은 조공 인삼을 파삼으로 바꾸고 싶다는 주청을 곧바로 진행했고[ 93], 그 해 11월 명에서도 이를 받아들였다[ 94]. 1611년(광해 3)부터 명 말까지 조선은 명에 파삼을 진헌하게 된 것이다[ 95].
광해군은 진헌 인삼을 파삼으로 보내도록 관련 부서에 명하는 한편, 파삼제조에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특별히 강조했다. 진공품에 문제가 발생하면 파삼 주청을 주도했던 국왕 자신에게 그 책임이 물어질 수 있는 것이었다. 이에 파삼을 정밀하게 제조하지 않으면 사형에 처하도록 하는 강력한 처벌을 지시했다[ 96]. 1612년(광해 4) 광해군은 파삼 주청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고 돌아온 사신 유대정(兪大禎), 정사신(鄭士信)에게 각 숙마(熟馬) 1필, 서장관 김시언(金時言)은 반숙마(半熟馬) 1필을 내리고, 통사 강즙(姜濈)·이운상(李雲祥)에게 각각 한 자급을 더하는 등 상을 내렸다[ 97].
약 250년 동안 조선의 대명관계에서 황제에게 진헌하는 인삼은 평안도산 인삼이었고, 제조법은 백삼에서 초삼, 그리고 파삼의 형태로 변화되었다. 이는 중국 민간 사회의 인삼 수요 파장이 황제 방물에도 영향을 미친 결과였다.
4. 맺음말
인삼은 한반도를 대표하는 약재로서, 조선시대 동아시아 최고의 상품적 가치를 점하였다. 그러나 그간 인삼사 관련 연구는 조선 인삼의 위상이 크게 알려지게 된 조선-명 관계 시기를 구체적으로 주목하지 않았다. 더욱이 명 황실로 보내는 조공품 중 빼놓을 수 없는 약재였던 조선인삼의 관리와 유통은 본초학 측면이나, 외교관계 측면에서 기본적으로 다루어야 할 주제인데, 아직 연구가 충분히 이루어지지 못했다. 본고는 이러한 문제인식을 토대로 조선 전기 인삼사를 확인하기 위해 조선이 명 황실에 진헌했던 인삼의 여러 양상들을 살펴보았다.
국초 이래 조선 조정은 ‘인삼을 깨끗이 씻고, 껍질을 얇게 벗겨 건조시킨 백삼’을 조공품으로 보냈다. 그런데 인삼을 조공한지 150여 년이 훌쩍 지난 1570년대 명 예부 관료들은 새삼 인삼의 가공방법에 문제를 제기했다. 껍질을 벗기면 약효도 떨어지고, 인삼이 진짜인지 알 수 없다는 이유였다. 중국인들은 인삼 껍질의 약성을 중시했다. 이 시기 명 사회에서 인삼 수요가 급증하면서, 예부 관료들은 새삼 조선이 황제에 진헌하는 인삼에 대해서도 재검토하기 시작했다.
임진왜란 이후 1602년 조선은 명나라의 뜻을 받아 인삼의 껍질을 벗기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초삼을 진헌하게 되었다. 인삼 가공 방식이 변경되자, 이듬해 조선 조정은 조금 더 욕심을 내어 명에서 인기 있는 파삼으로 진헌하자는 논의를 하기에 이르렀고, 광해군대 실현되었다. 파삼은 인삼을 데친 뒤 건조하여, 크고 작은 인삼을 하나로 묶어 진헌하는 방식이었다. 장기보존을 위한 또 다른 제조법이었는데, 인삼 한 뿌리 각각의 모양을 가지런히 정돈할 필요 없이 무게만 맞추면 되었기 때문에 조선 입장에서 매우 편리한 제조법이었다. 다만 인삼을 삶는다는 점에서, 조선인들은 파삼을 약성이 상실된 것이라 여겼다. 그럼에도 17세기 초 인삼 확보가 어렵던 상황을 타개하고자, 명에서 선호하는 파삼을 황제 진헌 인삼으로 보낼 수 있게 요청한 것이었다. 조선 전기 동안 백삼에서 초삼, 다시 파삼으로 진헌 인삼의 가공법이 변경된 것인데, 이는 조선 조정이 명 사회의 인삼 선호도를 활용하여, 조선의 인삼 부족 현상을 타개하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한편 장기보관을 위해 인삼을 데치는 파삼 가공법은 고려에서 처음 개발한 것으로 보이지만, 조선시대에는 이미 단절되어 있었다. 기존 연구에서 17세기 숙삼 또는 자삼이라 기록된 가공법이 후금의 누르하치가 처음 개발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으나, 자삼은 파삼과 동일한 가공법이며, 조선이 후금보다 먼저 이 가공법을 활용하고 있었다. 이 인삼 가공법은 인삼의 적극적 구매자인 명 상인이 확산시켰다.
조선은 이러한 인삼을 사행단을 통해 황제와 태자에게 각각 진헌했다. 정기사행과 비정기사행을 모두 합하여 조선이 명 황실로 보낸 인삼 총 수량을 가늠해보면, 국초부터 예종대까지는 연간 약 664~880근 내외, 15세기 말인 성종대부터 16세기 동안에는 연간 약 300~500근 내외, 17세기에는 약 160~360근 내외의 인삼을 명 황실로 보냈을 것으로 추정한다. 15~17세기 조선이 명 황실에 진헌한 인삼은 15세기, 그 중에서도 세종대가 가장 많으며. 16세기에는 명 황실에 태자가 없고 사행 파견 횟수도 감소하여 인삼 진헌 수량도 절반 가까이 줄었다. 16세기 말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조선 조정은 억지로 조공품을 모두 마련하기보다, 조선의 비참한 상황을 명 조정에 알려, 조공품을 감소시키는 방법을 선택했다. 진헌 인삼을 마련하기 위해 무리하게 백성들을 책징(責徵)하기보다, 조공 수량을 줄인 것이다. 이후 비정기사행의 인삼 진헌 수량은 또다시 절반 이상 감소하였다.
주목되는 것은 전쟁이 끝난 17세기에도 15~16세기 수준으로 회복되지 못했다는 것인데, 이는 조선 인삼이 죄다 명으로 수출되어, 조선 정부의 인삼 확보가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명나라에서 인삼 수요가 증가한 것은 16세기 중반 무렵인데, 명의 국내외 상업이 크게 발달하면서 약재 산업이 전국적인 규모를 갖추어 나갔다는 점이 주효했다. 인삼을 처방한 의학 서적도 크게 증가한데다, 출판업이 발달하며 의서도 널리 보급되었다. 당시 부유층들이 건강과 보양에 관심을 갖으며 인삼 수요도 증가하였다. 인삼은 기를 보하는 장수약으로 널리 알려졌는데, 주요 고객층인 중국 강남 지역민들은 인삼을 장기(瘴氣) 예방약으로도 주목했다.
15세기부터 17세기에 이르기까지 명 황실에 진헌하는 인삼 수량은 지속적으로 줄어들었고, 인삼 제조법 역시 백삼에서 초삼을 거쳐 파삼으로 바뀌면서 제조 부담이 경감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는 당시 국제 정세 변동과 의약 산업 전반의 성장, 인삼에 대한 명의 관심 확대, 조선의 경제성 고려 등 인삼 활용을 둘러싼 환경의 변화 속에서 양국이 합의를 통해 인삼 진헌의 방향을 모색해 나아간 길이었다.
Table 1.
정기사행의 연간 인삼 방물 수량(국초~1430년)
The Quantity of Annual Ginseng Tribute by Regular Envoys(early Joseon period-1430)
정기사행
|
正朝(설날)
|
聖節(황제 생일)
|
千秋(태자 생일)
|
계 |
|
진헌대상 |
皇帝 |
太子 |
皇帝 |
太子 |
태자 유무 |
|
태자 有 |
50근 |
20근 |
50근 |
20근 |
140근 |
태자 無 |
50근 |
- |
50근 |
- |
100근 |
Table 2.
정기사행의 연간 인삼 방물 수량(1430년~1592년 임진왜란)
The Quantity of Annual Ginseng Tribute by Regular Envoys(1430-1592)
정기사행
|
正朝(설날)
|
聖節(황제 생일)
|
千秋(태자 생일)
|
계 |
|
진헌대상 |
皇帝 |
太子 |
皇帝 |
太子 |
태자 유무 |
|
태자 有 |
50근 |
40근 |
50근 |
40근 |
180근 |
태자 無 |
50근 |
- |
50근 |
- |
100근 |
Table 3.
실록에 기록된 비정기사행의 인삼 방물 수량(태종~성종)
The Quantity of Ginseng Tribute of Non-regular Envoys Recorded in the Annals of Joseon Dynasty (Taejong~Sungjong era)
|
태종
|
세종
|
문종
|
단종
|
세조
|
예종
|
성종
|
진헌 횟수 |
황제 |
태자 |
황제 |
태자 |
황제 |
태자 |
황제 |
태자 |
황제 |
태자 |
황제 |
태자 |
황제 |
태자 |
20근 |
|
|
|
|
|
|
|
|
|
1 |
|
|
|
|
30근 |
|
|
|
2 |
|
|
|
|
|
|
|
|
|
|
50근 |
|
|
4 |
23 |
|
5 |
|
1 |
1 |
5 |
|
|
|
6 |
100근 |
|
|
41 |
3 |
4 |
|
|
|
18 |
1 |
2 |
|
10 |
|
150근 |
1 |
|
1 |
|
|
|
|
|
1 |
|
1 |
|
|
|
200근 |
|
|
20 |
|
2 |
|
1 |
|
2 |
|
|
|
1 |
|
1000근 |
|
|
1 |
|
|
|
|
|
|
|
|
|
|
|
진헌 총횟수 |
1 |
|
67 |
28 |
6 |
5 |
1 |
1 |
22 |
7 |
3 |
0 |
11 |
6 |
진헌 총액(근) |
150 |
0 |
9450 |
1510 |
800 |
250 |
200 |
50 |
2400 |
370 |
350 |
0 |
1200 |
300 |
1회평균 진헌액(근) |
150 |
0 |
141 |
53 |
133 |
50 |
200 |
50 |
109 |
52 |
116 |
0 |
109 |
50 |
Refer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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