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tractIn the 15th century, Joseon dynasty’s goal for the stabilization of the ruling system, the ideological freedom of the era, and the necessity of medicine due to the introduction of Jin and Yuan dynasty’s medicine led to the increased interest in medicine by the nobility along with tolerant practice. The practice of reading medical books is a good example of this institutional demonstration. However, by the end of the 15th century, a noticeable change had taken place. Within the nobility, there was an ideological rigidity regarding technology other than those of Confucianism, as the nobility became concentrated on the principles of
Neo-Confucianism. In addition, as the publication of large-scale editions such as Ŭibangyuch'wi (the Classified Collection of Medical Prescriptions) came to an end, they have become less inclined to nurture talent at the level of the central government as in the previous period. In addition, as the discrimination against illegitimate children became stronger, technical bureaucrats such as medical officials, which were open to illegitimate children, came to be seen in increasingly disdainful and differentiated manners.
From the late Sejong period to the early Seongjong period, the entrance of illegitimate sons into the medical bureaucracy solidified the negligence of medicine by the nobility. After then, the medical bureaucracy came to be monopolized by illegitimate sons. As for illegitimate sons, they were not allowed to enter society through Confucian practices, and as such, the only way for them to enter the government was by continuing to gain experience as technical bureaucrats. Technical posts that became dominated by illegitimate sons became an object of contempt by the nobility, and the cycle reproduced itself with the social perception that legitimate sons of the nobility could not become a medical official. Medical officials from the Yi clan of Yangseong had been legitimate sons and passers of the civil service examination in the 15th century. However, in the 16th century, only illegitimate sons became medical officials. The formation of Jungin (middleclass) in technical posts since the middle of the Joseon period is also related to this phenomenon. The Yi clan of Yangseong that produced medical officials for 130years over four generations since Yi Hyoji, a medical book reading official, is an exemplary case of the change in the social perception in the early Joseon period regarding medical bureaucrats.
1. 머리말의학은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고자 하는 당대 의가(醫家)의 해석과 방법이므로 특정 시기 의학에는 그 시대의 요구가 반영되어 사회적 함의(含意)가 담겨진다. 그러나 현존하는 문헌과 유물로서 당대 상황을 온전히 이해하고 결론을 도출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그나마 조선 후기 의학에 관한 자료는 다른 시기에 비해 비교적 풍부하게 남아있지만 조선전기 의학은 『조선왕조실록』과 편찬 의학서적의 기록 정도 외엔 관련 자료가 거의 없다. 그런 까닭으로 이 시기는 의료 제도와 편찬 의서, 그리고 이에 관련된 인물을 중심으로 연구되어 왔다. 이 가운데 의학 인물은 의료 제도의 입안자이자 의료 행정의 집행자, 그리고 의술의 시술자로서 조선 전기의 의료 상황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중요한 소재이다. 그러나 이 역시 자료의 한계로 의학적 소양을 지닌 일반 관료가 주 대상이었고, 실제 의학을 담당했던 의학 관료에 대한 탐구는 거의 이루어지지 못하였다(한국한의학연구원, 2015: 1-544). 따라서 조선 전기 의학에 대한 탐구는 그간 국가와 국왕 중심의 주제로 귀결되어왔다. 편찬 의학 서적이 대부분 정부의 의도가 반영된 관찬 의서이고, 의학적 소양을 가진 문신 관료들도 그 정책을 생성하는데 공헌한 이들이 다수이기 때문이다[1].
그러나 의료의 실제 수행자는 의학 관료이다. 따라서 이들에 대한 분석은 지배층에 경도된 선행 연구의 미비점을 보완할 수 있다는 면에서 가치가 있다. 또한 의학 관료는 의료를 시술하는 직군일 뿐 아니라 관료로서 국가의료정책의 입안과 실무를 담당하고 있기도 하다. 따라서 그들에 대한 연구는 국가의료의 성격과 실제를 조명하는 데 기초 자료가 된다. 아울러 의학 관료들이 일정 부분 국정 철학의 담지자인 점은 분명하나, 이들이 속한 신분이나 배경 등은 의학에 대한 당시 사회적 인식 변화를 살필 수 있는 자료가 된다.
의학 관료에 대한 기존 연구는 17세기 이후로 한정되며, 기술직 중인 가계의 형성과 유지라는 측면에서 이루어졌다. 이들 가계는 대부분 고위직 관료의 서얼로부터 시작하는데, 이들은 연산조에 이르러 의과 서얼 허통(許通)의 수혜를 입었다. 이후 전의감과 혜민서 생도의 완천(完薦)[2] 제도와 상호간의 혼인을 통하여 19세기 후반까지 일부 가문이 배타적으로 중앙 의료 관청의 관직을 독점하였다(박훈평, 2013a: 4-6; 2013b: 162-173; 2018b: 222, 227-228). 직역에 따라 우세 가문의 차이가 있지만 이러한 모습은 여러 기술직 중인 직군에서 유사하게 나타난다(김현목, 1994: 97; 김두헌, 2004: 237-274; 2008: 156; 2013: 80-116). 이중에서도 특히 역관과 의관은 종사자에게 허락된 높은 사회적 지위와 많은 관직 수로 인하여 다른 직군에 비해 그 양상이 두드러진다. 16세기에 처음으로 맹아를 보인 이런 흐름은 임진왜란을 거쳐 일부 가계가 탈락되지만 17세기 중반 이후에는 큰 변화 없이 19세기 후반까지 주요한 가계가 유지된다(박훈평, 2013a: 4-6; 김두헌, 2013: 80-116). 이러한 가계 내 세전의 결과 형성된 전문 기술직 관료 중심의 중인 네트워크 및 문화가 조선 후기 의학 관료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임도 지적되었다(이기복, 2013: 492-497).
연산조 이전에 의과 등의 잡과는 문무과와 동일하게 양인 적출만이 응시가 가능한 시험이었다. 따라서 조선 전기 의과 출신 의학 관료라면 문무 관료, 의서습독관과 신분이 겹치기도 하였다. 다만 문과 급제자로만 임명되는 관직이 존재하여 잡과 출신자의 한계는 있었고, 잡과의 경우 적출이지만 모두 사대부의 자제만은 아니었다. 예를 들어 지방 아전의 아들 출신도 잡과 응시가 가능하였다[3]. 따라서 조선전기 의관의 신분 연구는 이후 시기와는 다르게 접근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조선 전기의 의과 출신도 조선 후기와 동일한 신분으로 보는 오류가 최근 연구에서도 발견된다. 예를 들어 세종대 기술관을 평하면서 이들 대부분을 잡과를 통해 등용된 중인들로 묘사하거나(구만옥, 2016: 117), 『진휘속고(震彙續攷)』[4]를 분석하면서 의원을 단순히 중인계층의 인물로 도식화(정은진, 2018: 34)하는 연구들이 있었다. 이러한 논의는 기술직 중인 가계 형성 시기에 대한 반론을 떠나, 잡과 출신자는 모두 중인이라는 단단한 선입견을 보여준다[5].
양성이씨(陽城李氏)는 경기도 안성시 양성면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로[6], 양성이씨 일시중파 가운데 조선 전기 의학 관직을 세전한 보기 드문 사례가 포착된다[7]. 이 가계에 대한 분석은 기존 담론과 더불어 생각꺼리를 제공하는 자료이다. 본고에서는 15-16세기 이들의 의학 관료 진출 양상과 그 특징, 관직의 가계 내 세전을 고찰하였다. 이 사례 분석을 통하여 조선 전기 의학 관료의 신분과 이에 내포된 사회적 인식의 변천을 조망하고자 한다. 본고는 조선 전기 의학 관료에 대한 내용이지만, 신분이나 관련된 제도의 유사성 때문에 조선 전기 다른 기술관 가계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킬 단서이다[8]. 다만 본 논문은 한 특정 가계에 대한 연구이므로 이 가계로서 조선 전기 의학 관료의 신분 특성을 일반화할 수는 없으나 앞으로 이 주제를 고찰하는데 중요한 한 일면을 제공하리라 기대한다.
2. “의학 관료”에 대한 사회적 인식1) “의(醫)”, 사대부의 출사로15세기 전반 세종은 의학을 비롯해 역산학(曆算學), 천문학 등 여러 과학기술 진흥책을 펼친다. 이 가운데 의약학 분야에 대한 진흥은 당시의 여러 요인에 기인한다. 첫째, 구만옥의 주장처럼 “조선전기의 과학정책은 집권체제의 사회경제적 안정화라는 문제와 관련”(구만옥, 2004: 220)되어있다. 의약학 분야의 연구는 “농민층의 생활을 안정시키고 재생산 기반을 보장하기 위한”(구만옥, 2004: 221) 목적으로 국가 주도로 이루어졌던 것이다. 둘째, 유학 일변도로만 치닫지 않았던 15세기 사대부 계층의 사상적 자유로움도 일면 기여하였다[9]. 당시 관료들의 내면의식 속에 이미 불교 이념의 자취가 용해되어 있었고(김윤섭, 2016: 215-216), 조선 건국초의 완고한 배척 논리에서 후퇴하면서 도교에 대해서도 온정적 태도를 취하게 되어 처세나 정치관을 일부 수용하는 변화가 있었다(김윤경, 2014: 29)[10].
의학 진흥을 위해 세종은 다양한 노력을 펼쳤는데, 대표적인 것으로 의서습독관의 운영과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 및 『의방유취(醫方類聚)』 등 대형의방서의 편찬을 들 수 있다. 특히 의서습독관과 『의방유취』의 집필은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11].
의서습독관의 운영은 국가의 의학 진흥책을 제도적으로 보여주는 예이다[12]. 의서습독관은 “유능한 의원과 유의(儒醫)를 양성하기 위한 조치”였다(손홍렬, 1988: 203). 세종이 이 제도를 만든 것은 의학서 읽기를 돈독하게 권장하기 위해서였다[13]. 당시 전의감, 혜민국, 제생원의 의료 관청에서 의학 생도를 두어 장래 의원에 대한 의학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었다[14]. 따라서 단순히 의원 양성을 목적으로 별도로 의서습독관 제도를 만든 것은 아니다. 김성수가 논했듯이 “무엇보다 국가가 주도하는 의학의 진흥을 위해 우선 의서들을 정리하고, 그 이면에 담겨있는 이치를 꿰뚫어 이해할 수 있는 인력의 배출이 시급하였다”(김성수, 2015: 108).
의서들을 정리하는데 식자층이 필요했던 이유는 당시 조선에 금원 사대가(四大家)[15] 의학이 유입되었기 때문이다. 금원의학은 단순히 증상과 치법을 기록했던 이전 시대 의서와는 달리 병인과 병기를 체계적으로 설명하고 이론적으로 정리하였다. 의학 내적으로 조선 전기는 이 금원의학의 결실을 흡수하는 시기였다. 금원의학의 수용은 15세기 중반에 제도적으로 시작되었다. 1430년(세종 12)에 이고(李杲), 장원소(張元素) 등 보토파(補土派)의 주요 저작들과 주진형의 『활법기요(活法機要)』가 집성된 『제생발수방(濟生拔粹方)』이 의학 취재과목의 하나로 정해졌고, 1464년(세조 10)에 장종정의 『장자화방(張子和方)』이 의원 취재과목으로 정해졌다(박훈평, 2016: 4-7). 금원의학의 진정한 조선화를 이루었다고 평가받는 『동의보감』은 이러한 토대 위에서 완성될 수 있었다.
세종은 이론으로 무장된 중국의 의서들을 조선에 안착시키기 위해 식자층의 개입을 원했고, 이를 구현하기 위한 정책으로 의서습독관 제도를 시행하였다. 의서습독관 제도는 1421년 세종이 궁중에서 최초로 의서를 읽게 하면서 시작되었는데, 이 때 거론된 이가 양성이씨 이효지였다[16]. 의서습독관의 정원은 9인으로 유지되다 1454년(단종 2)에 15인[17], 1462년(세조 8)에는 30인으로 그 수가 늘었다[18]. 이 수는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명문화되고[19] 계속 유지된다. 정원 확대 뿐 아니라 권장 조치들이 계속적으로 행해질 만큼 의서습독제도는 국가적으로 주요한 의학제도로 여겨졌다.
국왕의 의지로 의서습독관은 사족 가문의 자제로만 뽑혔고[20] 이에 힘입어 의서습독관은 의학을 사대부의 학문 범위로 인식시키는데 기여하였다. 습독관은 유의들의 활발한 활동이나, 잡과를 거친 기술관의 현관직[21] 진출이 적은 양상과도 관련된다. 김성수는 16세기 전반부터 유의의 활동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원인 중 하나를 15세기 후반부터 계속된 성종의 의서습독 강화책으로 보았다(김성수, 2015: 109). 의서습독관을 중심으로 의학 분야를 운영하게 되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신분이 낮은 다른 의학 관료들은 정책에서 소외된(최이돈, 2017: 76-77) 반면 신분상 제약이 없는 의서습독관 출신들은 습독관 이후 조정의 관료로 출사하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 이효지는 아산현감, 교서관교리를 지냈고, 공조판서를 지낸 권찬(權攅)처럼 고위직으로 출사하는 사례도 있었다(박훈평, 2018a: 38).
그렇다면 조선에서 의학 관료에 대한 천시는 어느 시기부터 나타났을까. 1430년(세종 12) 전의감 제조의 상소에 “의과 출신자들이 벼슬을 받은 뒤에 모두 시골에 돌아가서 한가하게 놀고 있다”라는 내용이 있다[22]. 이는 의과를 관직으로 출사하는 도구로 삼고, 실제 의학에 종사하지 않는 세태를 드러낸다. 하지만 유학(대과)을 본업으로 삼는 이들에게 의업이 우선의 관심사가 아닌 정도만 알 수 있을 뿐 이 내용만으로 의학을 천시했다 보기는 어렵다. 천시대상이라면 조선후기처럼 의과 자체를 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1458년(세조 4) 의학제조의 상소를 보면 “평소 생각이 의술을 천한 것으로 여기어, 습독관 등이 요행히 관직을 받고 나면 쉽게 태만한 마음이 생겨서 연고를 핑계하고 면하기를 엿본다”라 하였다[23]. 당시 습독관은 동반(東班) 등 다른 관직을 받고나면 의학 직역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그러나 이 또한 유학을 우선시하는 사대부 계층의 특성을 나타낼 뿐이다. 즉 사대부가 의업을 하지 못할 건 아니었다. 그런 까닭으로 의학으로 출신한 사람이 있어도 같은 사대부이므로 용인되었다.
2) 15세기 중반, 서얼의 의사(醫司) 진출세종조 말에 이르러 의학 관료에 대한 기존 인식에 큰 변화가 나타난다. 이는 의료제도의 변화와 맞물려 분명해진다. 1446년(세종 28) 10월, 전교에 의하여 2품 이상 관료의 천첩의 큰 아들과 큰 손자, 양첩의 큰 아들이외의 아들과 손자에게 전의감·제생원·혜민국에 입속하게 하고 예에 따라 취재를 가능하게 하였다[24]. 즉 의학 관료로 서얼이 진출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이는 서얼의 현관(顯官)직 금지와 동류끼리 결혼하게 하는 조치 등이 시행되면서 적서 차별이 공고해져가는 과정에서 나온 2품 이상 대신들에 대한 우대정책이었다[25]. 이후 서얼의 의학 관청 진출은 『경국대전』에서 천첩과 양첩의 구분 없이 조문화되었다[26]. 세종 말에서 성종 초기까진 서자 뿐 아니라 얼자들도 제도적으로 의학 관료로 진출하였다[27].
서자의 의과 허통까진 허락되지 않았으나[28], 서얼들의 출사는 사대부 출신들이 의학 관직 출사를 기피하는 계기가 되었다. 성종조 사대부 관료의 의학 관료에 대한 인식은 상소 내용에 명확하게 나타난다[29]. 당시 삼사(三司)에선 의학 관료를 “미천한 계급의 출신”[30], “사람이 한미하고 일이 천함”[31], “방기(方技)에 불과하고 조사(朝士)와 구별”[32]이라 평하였다.
성종조는 사회정치 제도적으로 성리학적 질서가 자리를 잡는 시기이다. 적서 차별 같은 성리학적 원리와 질서가 사회적으로 용납되고 굳건해질수록 의학에 대한 사족의 관심도 인정(仁政)에서 허용되는 수준으로 점차 감소한다. 이는 현실에서 의학 관직이 서얼 출신들에 의해 점유되면서 강화되었다. 조선 후기 의학 관직이 서얼 출신의 가계들에 의해 독점화되면서 이런 현상은 더욱 심화된다. 19세기 후반 실용적 기술에 관심을 보였던 정조나 정약용의 의학에 대한 태도도 이런 면에서 해석된다. 효와 애민을 실천하는 수단으로 의학을 바라보았을 뿐, 사대부가 직업적 의사가 되는 것을 극도로 꺼리게 되었다(김선형·김달래, 2009: 122-124; 신동원, 2007: 206-208).
효와 애민의 실천 수단일 뿐 사대부가 몸담아야 할 것은 아니라는 의학에 대한 태도는 성리학을 기반으로 하는 사대부들에게 보편성을 지니는 가치로 조선 전기에도 동일하게 적용되었다. 그러나 세종·세조조에는 의학 관직이 사대부에게도 출사하는 하나의 방편이었다[33]. 국왕의 적극적인 진흥과 권장 정책으로 인하여 의학에 일부 사대부가 참여하였던 것이다[34]. 하지만 이후 점차 서얼들의 사회 진출 수단으로 바뀌어 갔다. 세종조 말에 서얼에 대한 의사(醫司) 취재가 가능해진 상태에서 성종조에 적서 차별이 더욱 엄격해지자 서얼들의 기술관 진출이 활발해졌다. 동시에 사대부 내에서 성리학적인 원리론에 몰두하면서 유학 외의 학문과 기술 등에 대한 사상적 경직이 찾아왔다. 또한 『의방유취』와 같은 대형 의방서의 편찬과 간행이 일단락되면서 국가적으로 인재 양성에 몰두하지도 않게 된 점도 이전 시기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안상우는 『의방유취』 같은 거대 의학서 편찬에 대해 “의학 인재양성과 상호되먹임 관계를 형성하였다”고 평하였다(안상우, 1999: 44). 성종조 이후는 이러한 상호되먹임 기전이 더 이상 작동되지 않았다[35].
3) 16세기, 서얼 독점의 맹아『의방유취』 이후 의학계의 숙제는 집대성된 백과사전식 의학 지식을 임상을 통해 조선에 응용될 수 있는 수준으로 바꾸는 것이었고 이제 의학이론가 보다는 임상의들의 실천과 경험이 요구되었다. 성종 때 이후 의학 강서에선 그 이전 시기와 비교하여 대형 방서들이 빠지고, 금원사대가의 저작들이 모두 제외되는 등의 차이가 있다. 의학 지식의 집적보다는 추려서 보완해가는 과정과 분과의학의 조선화 작업이 점진적으로 진행된다(박훈평, 2016: 7-8). “『의방유취』를 통해 조선 의학계는 중국의학 전통의 전모를 일목요연하게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신동원, 2015: 49). 이제 의학적 소양을 갖춘 관료보다는 실제 임상가의 역할이 강화되었다. 의학 관료가 된 사대부들은 어디까지나 유학을 우선시하였고 전문적인 의사가 되기는 어려웠다. 반면 서얼들은 유학을 통한 사회 진출이 허락되지 않았고, 이에 따라 기술관으로서 지속적으로 경험을 쌓아 입신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연산군은 서얼들이 잡과에 응시할 수 있도록 잡과에 대한 서얼허통을 허락하게 된다. 연산조에 이칭수가 상언(上言)하여 잡과 보기를 청하였고 연산군은 정승들과 논의하여 허통시켰다[36]. 이를 계기로 의과를 거쳐야만 임용될 수 있었던 관직까지 모두 서얼에게 허락되게 된다. 언제 그런 규례가 생겼는가는 특정하기가 어려우나[37], 『경국대전』에는 전의감주부 이상은 의과 출신자로만 명문화 되었으므로[38], 서얼들은 전의감에서 주부 이상이 될 수 없었다. 하지만 의과가 허통 이후 서얼 또한 전의감주부가 가능해졌다.
연산군의 결정은 적서 차별 규정이 법전에 명문화되면서 기존에 서얼이 임명되었던 관직들을 정식화 시키는 면도 있다. 기술관은 기존에도 서얼들이 임명되었던 전례가 있었고 수교(受敎)를 통해서도 여러 차례 확인된 바 있기 때문이다. 또한 서얼허통은 적자의 몫을 확실하게 지켜내면서 서얼들에게 일부 관직과 기회를 할당해 주었다. 그리하여 서얼들에게는 그들이 가진 사회적 불만을 불식시키고 적자들에게는 서얼들과 차별화시킨다는 명분을 세울 수 있었다. 즉 기술관을 서얼의 몫으로 돌림으로 청요직(淸要職)[39]과 현관에 대한 적자들의 독점을 정당화하였다.
그러나 이 결정은 역사적으로 서얼의 기술관 독점, 그로 인한 기술직 중인 계급의 형성, 사회적인 기술직 천시 풍토의 신호탄이 되었다[40]. 서얼들은 이를 계기로 더욱 본격적으로 기술관으로 진출하였고, 이는 서얼의 기술관 독점화를 초래한다. 서얼에 의해 점유된 의료 관직은 사대부들에겐 천시대상이었고 의과에 서얼 허통되는 양상으로 흘렀다. 결국은 사대부가 의학 관료를 할 수 없다는 사회적 인식으로 재생산되었다.
3. 양성이씨 가계 사례 고찰이상 시대에 따른 의학 관료에 대한 사회적 시선 변화와 그 배경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번 장에서는 양성이씨 가계 내에서 그 변화가 어떻게 구체적으로 실천되고 반영되는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조선시대 양성이씨 가계의 의학 관료와 의학 인물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표 1, 표 2).
세종대에 이르러 유학을 본업으로 삼은 사족 가문은 국왕의 의지와 사상적 자유로움에 힘입어 의학을 포함하여 유학 이외 학문에 대한 넓은 관심을 보일 수 있었다. 이러한 양상은 양성이씨 인물 내에서도 발견된다. 관찰사 이맹상(李孟常, 일시중파 9세. 파조의 손자)[41]의 5남 이순지(李純之 ?-1465)는 문과 출신임에도 천문(天文)과 역산(曆算) 분야에 있어 세종대를 대표하는 전문가로서 『칠정산(七政算) 내외편』, 『제가역상집(諸家曆象集)』, 『천문유초(天文類抄)』 등을 저술하였고, 천문기기 제작과 동활자 주조, 양전(量田) 사업에도 공을 세웠다(구만옥, 2016: 146-150). 남문현은 이순지를 “산학, 천문, 지리, 역법, 측후, 풍수에 정통한 테크노크라트”라 평하였다(남문현, 2013: 16)[42].
세종이 중요한 의학정책으로 실시한 1421년의 첫 의서습독관은 이맹상의 3남이자 이순지의 형인 이효지였다[43]. 이효지는 종2품 관찰사를 지낸 관료의 적자이다. 이러한 배경의 인물을 선택하여 첫 의서습독관으로 삼았다는 점은 의학진흥에 대한 세종의 강력한 의지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의방유취』의 편찬은 의학 발전을 위해 세종이 추진했던 또 다른 중요한 사업이었다. 이순지와 이효지의 조카 이예(李芮)는[44] 집현전 부교리로서 『의방유취』 세종조 초고본(1448년) 편집에 참여했다[45]. 의관들이 편집에 참여한다고 하여도 의학에 대한 지식이 없고는 의서 편찬에 관여하기 어렵다. 안상우는 『의방유취』 편찬자들을 “의관들이 실무 작업을 하고 통유(通儒)로서 의방을 아는 사람으로 하여금 감독하게 했다”라고 분석했다(안상우·홍세영, 2011: 7). 이예 역시 숙부 이효지처럼 유의로서의 의학 소양을 갖추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처럼 세종대 양성이씨 가계의 의학 관련 인물들은 모두 사대부의 적자들로서 세종의 과학기술 진흥 정책에 적극적으로 협력하여 관료로서 경력을 쌓았고 제도권 내에서 맡은 역할들을 수행한다. 당시 사대부 층의 의학에 대한 관심과 관대한 활용은 당대의 사상적 자유로움과 국가의 목적, 의학 내적인 필요성 등이 서로 맞물려 나타난 결과로 이해된다.
그러나 이후 세종 이후의 시기에 의학 관직은 점차 서얼들의 사회 진출 수단으로 바뀌어 갔다. 이러한 현상은 성종조 이후 양성이씨 가계에서 의학 관료가 된 이들을 살피면 모두 서얼이라는 점에서 잘 드러난다. 그 이전 인물들의 배경과는 확연하게 차이가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이인석(李引錫 1444-?)으로 그는 양주목사를 지낸 이백상(李伯常)의 서자이다[46].(그림 1) 이인석은성종의 전교로 의학 관청에 소속되었는데[47], 내의원으로 출사하였고[48], 정5품 사직(司直)이 되었다[49](박훈평, 2018a: 355). 『양성이씨세보(陽城李氏世譜)』에는[50] 이인석의 왕자사부(王子師傅) 관력만 기록되었는데[51] 성종조에 내의원에서 출사하면서 지낸 겸직이다[52]. 이인석이 의학 관료로 출사하게 된 이유는 어머니가 첩이라 하여 과거시험이 정거(停擧)된 까닭으로[53], 의료 관청에 근무한 이후로도 점마별감(點馬別監)이나 호송관(護送官)과 같이 의학과 관련없는 직임에 임명되었다[54]. 당시 의료 관청 종사자도 신분 배경이 있다면 일반 관료처럼 활용되었다.
이인석이 국왕의 특별전교를 받고 왕자사부까지 임명되게 된 이유는 그의 첩이 박중선(朴仲善)의 서녀였기 때문이다[56]. 박중선의 장녀는 월산대군의 부인이므로 성종에게는 형수가 된다. 『순천박씨세보(順天朴氏世譜)』에서도[57] 이인석이 박중선의 서녀와 혼인하였음이 확인된다(그림 2). 족보 내용에 소양공은 박중선이며 임사홍(任士洪)이 1490년에 저술한 박중선 신도비문 첫 부분에 “승평부부인 박씨가 서제(庶弟)의 남편인 소위장군 이인석을 내게 보내어 내게 말한다”라 하였다[58]. 이인석이 서녀 사위지만 장인의 신도비문에 관련할 만큼 처가와 관계가 돈독했음을 알 수 있다. 박중선의 다른 사위로는 중종의 장인인 윤여필(尹汝弼)과 예종의 차남인 제안대군(齊安大君)이 있으며 박중선 본인도 문종, 세조와 사촌 관계이기도 하였다. 순천박씨는 왕실과 중첩하여 혼인을 맺음으로서 당시 조선에서 가장 권세 있는 가문이었다.
양성이씨 의학 관료의 신분을 살펴보면 사회적 시선이 국가제도에 의해 크게 영향을 받으며 그 속도도 전격적임을 엿볼 수 있다. 의학에 대한 사회적 인식 변화는 여러 요인에 의해 발생할 수 있겠으나 제도적 측면이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이는 한일병탄이후 일제강점기 하에서 전통의학 종사자에게서도 발견된다. 제도적으로 의사(醫士)에서 의생(醫生)으로 지위가 격하되고 부정된 측면이 있으나(신동원, 2002: 347), 1930년대 이후 의료인 확충이라는 현실적 필요에 따라(신동원, 2003: 110-128) 식민지 당국에 의해 의생강습소가 설치되는 등 정책 변화가 있었다. 이는 한의업에 새롭게 종사하고자 하는 후속세대에겐 기회가 되었다(황영원, 2018: 46-47).
연산군에게 잡과 보기를 청하여 이 서얼허통을 이루어낸 이칭수는 또 한 명의 양성이씨 가계 인물이다. 이칭수는 이순지의 서손(庶孫)이 된다(그림 3)[60]. 연산조에 이칭수가 상언(上言)하여 잡과 보기를 청하였고 연산군은 정승들과 논의하여 허통시켰다[61]. 다음해인 1498년 이칭수는 식년시 의과에 급제하였고[62], 이후 종9품 경기심약으로 재임명되었다(박훈평, 2018a: 383)[63]. 의과에 대한 서얼 허통은 이칭수의 누이가 연산군에게 총애 받던 나인이라는 사실과 관련이 있다[64]. 이는 연산군이 잡과 허통에 더 적극적으로 나섰던 배경이다[65]. 또한 현재까지 알려진 자료로는 양성이씨처럼 다수의 의학관료를 배출한 가계는 없을뿐더러 그 가계에는 왕실 인척과 고위직 문무관료들이 존재했다. 그렇다면 당시 삼의사 내에서 양성이씨 출신 의학관료는 상당한 지위를 누리면서 의학관료를 대표하는 역할을 했을 가능성도 있다. 예를 들어 중종반정이후 서얼허통이 철회되자 상소를 올린 전의감주부 신희호(申希浩)는 상의원정을 지낸 신환(申渙)의 서자인데(박훈평, 2018a:238), 신환은 신숙주의 조카이다.
이칭수의 동생 이형수 역시 의학 관료로 계공랑, 전의감직장을 지냈다. 이러한 사실은 아들 이거(李蕖)의 『의과방목』을 통해 확인된다(박훈평, 2018a: 395). 중종조의 『의과방목(醫科榜目)』이 실전된 경우가 많으므로 이형수의 등과 여부는 불확실하다. 아버지가 가선대부였으므로 이형수는 2품 이상의 첩자에 해당되어 의과출신이 아니어도 의학 관청에 의원으로 종사 가능하였다. 현존 『양성이씨세보』에는 이칭수는 없고 이형수만 있다.
이거(李蕖)는 『양성이씨세보』를 보면 이형수의 외아들이며, 『의과방목』을 보면 전 봉사의 전력(前歷)으로 1540년(중종 35) 식년시 의과에 장원하여 이후 내의원정이 되었다. 이거는 『태의원선생안(太醫院先生案)』에도 내의로 기록되었다(박훈평, 2018a: 290).
한편, 집현전 부교리로서 『의방유취』에 참여했던 이예의 경우, 아들 이삼길과 손자 이척에 걸쳐 3대가 모두 의학과 직접적인 관련을 맺고 있다. 이예는 적자가 없이 서자만을 남겼다(그림 4)[67]. 둘째 서자가 1507년(중종 2) 식년시 의과에 장원한 이삼길(李三吉)로 『의과방목』을 보면 급제 전에 이미 전의감 부봉사였다(박훈평, 2018a: 320)(그림 5)[68]. 『양성이씨세보』를 살펴보면 이삼길은 상당부원군 한명회(韓明澮 1415-1487)의 사위로 나온다. 그런데 『청주한씨대동보(淸州韓氏大同譜)』를 보면 한명회의 사위에 이삼길이 없는데, 아내 역시 이삼길과 같은 서출이었기 때문에 기록되지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 『양성이씨세보』를 보면 이삼길은 두 아들을 두었는데 장남이 첨정(僉正)을 지낸 이척(李倜)이다. 이척은 1542년(중종 37)에 편찬된 『분문온역이해방(分門瘟疫易解方)』 저술에 참여한다. 이 책에는 이척의 관직을 전 전의감첨정이라 하였다(박훈평, 2018a: 379)(그림 4). 중종조 방목은 일실된 경우가 있어서 이척의 의과 등제여부는 명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그가 종4품 첨정에 오른 것으로 보아 의과 등과자로 추정된다[69]. 이척은 『묵재일기』를 쓴 이문건(李文楗)과 교류하기도 하였다[70].
연산군의 서얼허통 이후 의과 출신자는 기존의 의과 출신자와는 신분과 관직 진출로에 있어 큰 차이가 있다. 서얼에 의해 점유된 의학 관직은 사대부들에겐 천시대상이었고 결국은 사대부가 의학 관료를 할 수 없다는 사회적 인식으로 재생산되었다. 양성이씨 내 의학인물도 15세기에는 적자와 문과 급제자였지만 16세기 넘어서는 모두 서얼로 신분이 바뀌게 된다. 조선 중기 이후 기술직 중인의 형성은 이런 배경에서 설명된다.
기술직 중인 계급의 형성은 의학 관직 내 세전 양상으로 관찰된다. 양성이씨 가계에서도 의학 관직이 세전되는 모습은 연산군 이후에 분명하게 나타난다. 조선 전기에 부자 관계를 벗어나 세전이 나타나는 모습은 현재까진 이 가계가 유일한 사례로, 16세기 이전, 가계 내에서 역관 등 다른 기술관의 세전 양상은 보이지 않는다. 이는 의학습독관 이효지 이후 4대, 130여년에 걸쳐 내려온 가문 내 의학 전통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
조선 전기 양성이씨 가계에 의학 관련 종사자가 많은 까닭은 가계 내 의학 소양 습득의 전통으로 볼 수 있다. 양성이씨 가계는 의서습독관을 지낸 이효지에서 가문의 의학 소양 기원이 있다. 이효지 이전에 의학과 관련된 가계 내 인물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자료를 통해 이효지의 가계 내 영향 등이 확인되지 않아 추정에 불과하다. 그의 조카 이예의 경우 『의방유취』 초고본에 관여했을 뿐 아니라 1466년(세조 12)에는 왕명에 의해 역(易), 천문, 지리, 의학, 복서(卜筮), 산법(算法) 등에 대한 제서(諸書)의 유취(類聚)를 간선하므로[72], 이 분야들에 대한 그의 소양을 짐작케 한다[73]. 이예는 과거가 금지된 서자만을 두었다. 이예와 같은 2품 이상의 관료는 서얼 아들을 의학 관청으로 출사시킬 수 있는 특별대우를 받았으므로, 이예의 서자 이삼길이 어렵지 않게 의학 관료가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16세기 다른 기술직 가계에서도 습독관 선조를 두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특정 기술에 대한 소양을 사대부가 자발적으로 취득하고 후손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쳤을까 하는 질문도 든다. 그러나 다른 가계에 대한 자료부족으로 이는 후속 연구주제로 남겨둔다.
이인석이나 이칭수의 사례처럼 왕실의 인척이라는 가문의 배경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의학 관료가 되는 것은 양성이씨 가계만의 특징이다. 2품 이상 대신의 서자가 의학 관청에 출사하거나 의과에 합격한 사례는 다른 가계에도 종종 있으나 그들 가문에선 양성이씨 가계만큼 세전 양상이 두드러지진 않는다. 이 역시 이효지, 이예 등 의학적 소양을 갖춘 선대 인물들의 영향이 아닐까 추정되지만 명확한 인과관계는 알 수 없다.
임진왜란 이후 양성이씨 가계에선 의학 관료를 전혀 배출하지 못하였다. 다만 이승길(李承吉)이 1616년(광해 8년) 증광시 역과에 급제한 이후로 동생들이 역관이 되고 후손들이 사역원과 관상감으로 출사한다. 15세기 전반 형성되기 시작한 서얼 출신의 기술직 가계들은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이후로 계승되지 못한 경우가 많은데 양성이씨 가계도 그러한 사례이다. 17세기 중반, 15세기 전반처럼 다시금 서얼에서 시작되어 세전되기 시작한 가계들이 이후 250여년 의학 관료를 독점하게 된다.
4. 맺음말조선의 15세기는 집권체제의 안정화라는 국가적 목적, 당대의 사상적 자유로움, 금원사대가 의학 도입에 따른 의학 내적인 필요성 등이 서로 맞물려 사대부 층이 의학에 대해 관심을 보이고 의학을 관대하게 활용하는 결과를 만들었다. 의서습독관의 운영은 제도적으로 이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이다.
그러나 15세기 후반에 이르러 두드러진 변화가 나타났다. 사대부 내에서도 적서 차별처럼 성리학적인 원리론에 몰두하면서 유학 외의 기술 등에 대한 사상적 경직이 찾아왔다. 또한 『의방유취』같은 대형 의방서의 편찬과 간행이 일단락되면서 이전 시기처럼 국가적으로 인재 양성에 몰두하지도 않게 되었다. 『의방유취』 이후 의학계의 숙제는 집대성된 백과사전식 의학 지식을 임상을 통해 조선에 응용될 수 있는 수준으로 바꾸는 것이었고 이에는 의학이론가 보다는 임상의들의 실천과 경험이 요구되었다. 또한 적서 차별이 굳어지면서 점차 사족들이 서얼들에게 개방된 의학 관료를 비롯한 기술관을 경시하고 구별하게 되는 인식이 공고해진다. 세종 말 이후 성종 초기까지 이어진 얼자들의 의학 관청 입속은 사대부들의 의학 경시를 확고하게 만드는 계기였다. 이후 연산조 의과의 서얼허통은 의학 관직에 대한 서얼의 독점화를 초래하게 된다. 서얼들은 유학을 통한 사회 진출이 허락되지 않았고, 이에 따라 기술 관료로서 지속적으로 경험을 쌓아 입신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일견 소양 있는 서얼들의 의학 관료 진출은 시대적 요구에 부합하는 면도 있다.
의학습독관 이효지 이후 4대, 130여년에 걸쳐 의학 인물을 배출한 양성이씨 가계는 조선 전기 의학 관료에 대한 사회적 인식 변화를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전술한 바와 같이 서얼에 의해 점유된 기술직은 사대부들에겐 천시대상이 되었고 의과에 서얼이 허통되는 양상으로 흘렀다. 결국은 사대부가 의학 관료를 할 수 없다는 사회적 인식으로 재생산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양성이씨 내 의학인물의 등장 모습에서 분명하게 확인된다. 15세기에는 국가 주도로 이루어진 의학 진흥 정책에 힘입어 이효지, 이예 등 의학적 소양을 갖춘 선대 인물들이 배출되었다. 이후 이인석이나 이칭수의 사례처럼 왕실의 인척이라는 가문의 배경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의학 관직을 세전하게 된다. 주목해야 할 점은 이러한 세전의 주체가 15세기는 적자와 문과 급제자였지만 16세기 넘어서는 모두 서얼로 신분이 바뀌게 된다는 점이다. 양성이씨 외에 16세기 다른 기술직 가계 또한 습독관에서 기인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은 자료부족으로 후속 연구주제로 남겨둔다.
본고를 통해 기존에 통설로만 논의되던 조선 전기 의학에 대한 사회적 인식 변화를 양성이씨라는 구체적 사례를 가지고 확인할 수 있었다. 이는 그간 제도와 의서 중심으로 이루어져왔던 조선 전기 의학사 연구를 의학인물 연구를 통해 검토하거나 확장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시도이기도 하다. 이후 더 많은 인물 관련 자료의 발굴로 조선전기 의학에 대한 논의가 더 풍성해졌으면 한다.
Notes1) 조선 초 중기 관찬 서적이 지배계층의 특정목적을 전달하고 관습을 만들고자 하는 의도였음은 『삼강행실도』의 간행과 내용 수정 사례가 여실히 보여준다(전경목, 2008: 65-99). 인력과 물력을 동원해 국가가 출판을 독점하고 이데올로기를 관습화하려는 노력은 『삼강행실도』에만 국한되진 않는다(이재정, 2008: 19-48, 199-294). 5) 조선전기 역관의 경우도 성종조 역과 출신이라면 모두 양인출신이다. 정광의 연구서에서 최세진을 역과출신이라 하여 중인으로 보는(정광, 2015: 422) 것은 오류이다. 조선 후기에도 모든 기술직 관료를 중인으로 보기는 무리가 있다. 내의원 의원과 함께 왕실 진료를 담당하는 의약동참의와 내침의에서도 사족 적자 출신이 다수 발견된다(박훈평, 2018b: 207-234). 6) 시조 이수광(李秀匡)은 중국 송나라인으로 고려에 와서 벼슬이 삼중대광보국(三重大匡輔國)에 이르렀고, 양성을 식읍으로 받아 양성군(陽城君)에 봉해졌으므로 그 후계가 관향을 양성으로 하였다. 시조로부터 7세에 이르러 여러 소파로 분파하는데 특히 이춘부(李春富) 후손인 일시중파(一侍中派)가 가장 흥성하였다. 파조 이춘부의 장남이 이옥(李沃), 차남이 이한(李澣)이다. 이옥이 이성계의 휘하 장수로서 원종공신이 되었고 새 왕조에서 절제사를 지냈다. 본관 설명은 양성이씨 대종회(http://www.yangsung.or.kr)의 문중의 역사 유래를 요약 인용하였다. 7) 평원해(平原海), 평순(平順)처럼 부자가 함께 의학 관료인 사례도 알려졌지만(박훈평, 2018a: 544) 이런 경우는 가계 내의 세전의 증거라기보다는 예외적인 사례로 여겨졌다. 즉 의학 관료 개인 연구는 가계로 확대되진 못했다(이민호, 2008: 1-10). 8) 조선 후기 기술관 가계들은 서로 통혼하여 계급을 유지시켜 나감으로 인해 가문 간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 조선 전기의 경우는 그런 밀접함은 확인되지 않는다. 세종조에 시작된 습독관 제도를 비롯해 여러 잡학의 권장책과 제도는 유사한 면이 있다. 따라서 양성이씨 가계를 분석하여 다른 기술직 가계에 적용해볼 여지가 있다. 9) 조선 건국초의 사상적 경직은 유교를 건국가치로 내세운 조선에선 고려와 구별 짓기 위해 필연적 선택이었다. 정도전 등의 일부 강경론자들을 제외하면 왕실이나 주요 대신들도 불교 등의 가치에 포용적인 인물이었다. 다만 시대의 추세에 따라 사상에 대한 포용성을 감추었다가 왕권이 안정화 된 이후 다시 드러낼 뿐이다. 그러나 성종 때 이후로 찾아오는 사상적 경직은 건국 초와는 다르다. 이 시기의 신진 관료들은 고려가 아닌 조선에서 태어나 유교적 소양으로 길러진 이들이다. 10) 이 두 요인 중 국왕의 의지가 우선된다고 생각된다. 고려 말의 사상적 자유로움에도 불구하고 의약학 분야의 학문적 성취는 적었고, 영정조 르네상스의 과학진흥정책에도 불구하고 그 다음 이어진 순조대의 침체기도 집권층의 의지 결여로 설명된다. 14) 『세종실록』 세종 7년(1425) 5월 3일 (임신). “三司各立醫生房, 令習劑藥讀方書, 通曉醫術, 然後許令赴試 ” 이후 혜민국은 혜민서로 바뀌고, 제생원은 혜민서에 통합되었다. 24) 『세종실록』 세종 28년(1446) 10월 19일 (계축). 개국원종공신으로 세종 때까지 활동한 천인 출신 양홍달(楊弘達)처럼 모든 의한 관료가 양인출신은 아니었다. 그러나 세종 28년의 조치는 서얼들이 제도적으로 기술관으로 종사할 수 있는 길을 보장한 제도사의 변곡점이었다. 26) 『경국대전 이전』 한품서용조. 『성종실록』 성종 2년(1471) 6월 8일 (기유). 『경국대전』 주석에서 “문무관 2품 이상의 첩 자손을 전의감, 혜민서에 재주를 따라 서용한다”라는 규정에 의거한 것이었다. 30) 대사헌 채수(蔡壽) 등은 “의자(醫者)와 역자(譯者)의 무리는 모두 미천한 계급의 출신으로 사족이 아닙니다”라 하였다. 『성종실록』 성종 13년(1482) 4월 13일 (신해). 31) 대사헌 채수는 “비록 의술에 뛰어남이 화타와 같은 무리라도, 이전 역사에서는 모두 방기(方技)에 배치하고 열전(列傳)에는 넣지 않았습니다. 그 얼마나 사람이 한미하고 그 일이 천하여서 사대부에 열기할 수 없겠습니까?”라 하였다. 『성종실록』 성종 13년(1482) 4월 15일 (계축). 32) 대사간 이평(李枰)은 “원래 의인(醫人)이란 방기(方技)에 불과하여 벼슬아치와 나란히 서지 못하는데, 이제 서얼이 의인이 될 수 있으므로 조사(朝士)와 더욱 구별이 된다” 하였다. 『성종실록』 성종 20년(1489) 7월 15일 (신미). 35) 의서습독관제도의 경우, 대형방서 편찬을 위한 인력양성 필요가 없어지면서 우대책도 적극적이지 않았고, 의학 관료에 대한 사대부의 태도가 점차 경시하는 방향으로 바뀌면서 습독관은 더욱 기피되어 유명무실화되었다. 40) 『연산군일기』 연산 3년(1497) 7월 3일 (임인). 이칭수의 서얼허통에 반대하면서 상호군 송흠(宋欽)은 “근년에 사류들이 수치로 여기어 소속되기를 원하지 않는 것은 까닭이 있습니다. - 중략 - 반드시 앞으로 총괄하여 지목하기를 저 의원 직업을 가진 자는 모두 서얼의 부류이다” 하였다. 즉 허통 이전에는 의과 출신은 모두 양인이고 의학 관청의 고위직은 반드시 출신자라야 했으므로 양인이었으나 허통 이후 연공승차에 따라 양인 출신이 서얼보다 아래 자리에 있을 수 있으므로 결국은 사대부는 응시 자격이 됨에도 불구하고 의과를 기피하게 되었다. 실제로 전의감과 혜민서의 의학관료는 중인 계급의 전유물처럼 되어갔다. 41) 이맹상의 아들 5명 중에 4형제가 세종조에 문과에 급제함으로서 가문을 중흥시켰다. 장남 이전지(李全之)가 1432년(세종 14) 식년시 병과, 차남 이겸지(李謙之)가 1423년(세종 5) 식년시 동진사, 3남 이효지(李孝之)가 1429년(세종 11) 식년시 동진사, 5남 이순지가 1427년(세종 9) 친시 을과에 급제하였다. 42) 세종조로 국한하여 말하면 적절한 사례는 아니지만 양성이씨 일시중파 11세(파조의 현손) 이승소(李承召 1422-1484)도 그러한 경우이다. 이승소는 1447년(세종 29)에 식년시 을과에 장원해 출사하였으므로 양성이씨 가계의 전통과 세종조 학문 분위기를 수혜 받은 이이기 때문이다. 이승소의 문집 『삼탄집(三灘集)』을 보면 “공의 학문은 여러 서책을 두루 보고 정밀하게 기억하였다. 이에 예악, 병형(兵刑), 음양, 율력, 의약, 지리 및 노가(老家)나 불가의 서책에 대해서도 관통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라 평가되었다(이승소, 2008: 5-10). 45) 『세종실록』 세종 27년(1445) 10월 27일 (무진). 이경록은 편찬 참여자들의 관직을 분석하여 기존에 초고본 완성 연도로 알려진 1445년이 편찬 착수 해이고 1448년 말에 완성된 것으로 보았다(이경록, 2017: 6-7). 『의방유취』 편찬에 참여한 관료에서 본인이 의학관료인 경우를 제외하면 가계 내에 의학관료가 있는 사례는 이예가 유일하다.(박훈평, 2018a: 1-622) 이는 조선 전기 의학관료 다수의 가계를 파악하기 아렵다는 한계를 반영하지만 양성이씨 사례만이 가지는 자료적 희소성도 같이 보여준다. 58) “昇平府夫人朴氏介庶弟之壻昭威將軍李仁錫謂余曰” 승평은 전라도 순천의 옛이름이며, 소위장군은 정4품 하계의 서반계이다. 이 신도비문에 근거하여 『순천박씨세보』에 이인석 관련 내용이 추가되었다. 64) 이들은 중종반정 이후 1506년에 동복 누이인 이정이(李貞伊)가 종4품 숙원으로 연산군의 나인인 까닭에 함경도 갑산으로 정배된다. 『중종실록』 중종 1년(1506) 9월 6일 (임오), 중종 7년 8월 7일 (무신), 중종 9년 9월 10일 (기사). 65) 서얼의 잡과허통은 중종반정 이후에 한 차례 또 변화가 있었다. 『중종실록』 중종 4년(1509) 4월 1일 (임술) 기사에 전의감주부 신희호 등이 서얼로서 잡과 응시를 청(以庶孽, 欲赴雜科陳疏)하는 내용이 나온다. 신희호는 중종 2년(1507) 식년시 의과에 급제한 이로 이 시험에 서자인 이삼길이 장원한다. 급제당시 신희호는 전 전의감직장의 관력이고 전의감주부는 과거급제자만 가능하므로 1509년의 상소는 신희호 본인이 과거를 보기 위한 명목은 아니었다. 1507년 이후 잡과는 1510년에야 식년시이므로 실제 중종조 서얼의 잡과금지로 불이익을 받은 서얼은 없다. 『연산군일기』은 반정세력에 의해 기술되었으므로 연산군의 실정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기술되었다. 연산조 서얼허통 관련한 일련의 과정도 사관의 비판이 깃든 자료의 수집일 수 있다. 중종반정 이후의 허통철회도 그렇게 해석될 소지가 있다. 66) 공, 호조참판이다. 옛 족보에는 문과, 참판으로 되어있는데 과거일은 빠져있다. 아내는 봉화 금씨인데 현령 이문(以問)의 여식이다. 1남 원수. 2남 인수, 생원이다. 3남 흠수. 4남 형수. “拱, 戶曹參判, 舊譜作文參判而榜日無放, 室奉化琴氏縣令以問女. 元守. 仁守, 生員. 欽守. 亨守”. 71) 예(芮)는 자 가성(可成) 호 눌재(訥齋)이며 태종기해년(1419)에 태어나 무오년(1438년)에 진사(進士)가 되었고 신유년(1441년) 문과, 정묘년(1447년) 중시(重試), 세조 병술년(1466년) 발영(拔英)과 등준시(登俊試)에 급제했하였다. 형조판서, 홍문관제학이 되었고 경자년에 문질공(文質公)으로 시호를 받았는데, 『여지승람』에 해동의 이름있는 신하 여덟 사람의 하나이다. 묘는 아버지 묘 동남쪽의 골짜기에 있는데, 묘표는 서하군 임원준(任元濬)이 찬하였다. 아내는 죽산안씨(竹山安氏) 공주목사 철석(哲石)의 여식이다. “芮, 可成, 號、訥齋, 太宗己亥生, 戊午進士, 辛酉文科, 丁卯重試, 世祖丙戌拔英登俊試. 刑曹判書, 弘文館提學, 庚子贈諡文質公, 八海東名臣《輿地勝覽》, 墓考塋東丙坐洞, 墓表西河君任元濬撰. 室竹山安氏公州牧使哲石女”. References『經國大典』, 『國朝榜目』, 『分門瘟疫易解方』, 『順天朴氏世譜』(朴良鎭, 1931), 『陽城李氏世譜』(李炳喆, 1946), 『醫科榜目』(국립중앙도서관 소장. 古朝 26-19), 『正德二年三月二十六日 文科別試榜目』(충재 권벌 후손가 소장전적), 『朝鮮王朝實錄』, 『淸州韓氏大同譜』, 『太醫院先生案』(중국 절강성도서관 소장).
구만옥, 「조선왕조의 집권체제와 과학기술정책」, 『동방학지』 124 (2004)..
구 만옥, 『세종시대의 과학기술』 (파주: 들녘. 2016).
김두헌, 「사자청선생안과 조선시대 사자관의 신분」, 『고문서연구』 24 (2004)..
김두헌, 「19세기 운학완천합격자와 그들의 가계」, 『전북사학』 33 (2008)..
김 두헌, 『조선시대 기술직 중인 신분 연구』 (서울: 경인문화사. 2013).
김선형·김달래, 「정조의 의학관」, 『의사학』 18-2 (2009)..
김성수, 「조선시대 유의의 형성과 변화」, 『한국의사학회지』 28-2 (2015)..
김윤경, 「조선 전기 도가사상 연구」, 『한국철학논집』 43 (2014)..
김윤섭, 「조선전기 관료문인들의 불교적 내면의식에 관한 연구」, 『禪文化硏究』 20 (2016)..
김현목, 「조선후기 역학생도의 피천과 역과 진출」, 『인하사학』 2 (1994)..
남문현·남종진, “이순지와 『제가역상집』,” 이순지, 『국역 제가역상집 상』 (서울: 세종대왕기념사업회, 2013)..
박훈평, 「19세기 후반 전의감 의학생도에 대한 고찰」, 『한국의사학회지』 26-1 (2013a)..
박훈평, 「족보를 통한 조선 중기 삼의사 의관 가계배경 연구」, 『한국의사학회지』 26-2 (2013b)..
박훈평, 「조선시대 의학교과서 연구」, 『한국의사학회지』 29-2 (2016)..
박 훈평, 『조선시대 의관 총목록』 (대전: 한국한의학연구원. 2018a).
박훈평, 「조선후기 의약동참과 내침의 신분 연구」, 『장서각』 39 (2018b)..
손 홍렬, 『한국중세의 의료제도연구』 (서울: 수서원. 1988).
신동원, 「1910년대 일제의 보건의료 정책」, 『한국문화』 30 (2002)..
신동원, 「유의의 길 - 정약용의 의학과 의술」, 『다산학』 10 (2007)..
신동원, 「조선 총독부의 한의학 정책」, 『의사학』 12-2 (2003)..
신동원. 『동의보감과 동아시아 의학사』 (파주: 들녘, 2015)..
안상우, 「『醫方類聚』의 서지학적 고찰」, 『한국의사학회지』 12-2 (1999)..
안상우, 「『醫方類聚』 편찬과 조선전기 의서」, 『한국의사학회지』 14-2 (2001)..
안상우·홍세영, 「拭疣 金守溫의 『醫方類聚』 」, 『한국의사학회지』 24-2 (2011)..
이경록, “『의방유취의 편찬』과 그 함의,” 김예몽 외, 『국역 의방유취 1』 (서울: 세종대왕기념사업회, 2017)..
이기복, 「18세기 의관 이수기의 자기인식」, 『의사학』 22-2 (2013)..
이민호 외, 「세종대의 의관 노중례의 삶과 의사학에의 공헌」, 『한국한의학연구원논문집』 14-2 (2008)..
이 재정, 『조선출판 주식회사』 (파주: 안티쿠스. 2008).
이승소 저, 정선용 역, 『국역 삼탄집 1』 (서울: 한국고전번역원, 2008)..
전경목, “『삼강행실도』의 편찬배경과 조선 초중기 사회의 변화,” 한국학중앙연구원, 『조선시대 책의 문화사』 (서울: 휴머니스트, 2008)..
정 광, 『한글의 탄생』 (파주: 김영사. 2015).
정은진, “『진휘속고』 해제,” 김혈조 외, 『스스로 역사가 될 수 없었던 사람들 - 진휘속고』 (경산: 영남대학교출판부, 2018)..
최 이돈, 『조선 전기 특권신분』 (파주: 경인문화사. 2017).
한 국한의학연구원, 『한국 한의학을 만든 사람들 2』 (서울: 문사철. 2015).
황영원, 「일제시기 한의학 교육과 전통 한의학의 변모」, 『의사학』 27-1 (2018)..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