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tractThis paper intends to examine the realities of modern hygiene and medical institutions making their appearance in the rural Honam Plain (often called the “rice basket”) of colonial Korea in terms of organizing local units and spreading colonial ‘sanitary discipline’ throughout the region. In the Honam area, modern medical staff and facilities tended to concentrate on the cities in plain region (Kunsan, Jeonju, and Iri), while in the counties in mountainous region they were placed in the township where head office of each county was located. The case of Iksan County in plain region represented this pattern, which was closely associated with the behavior pattern of local Japanese immigrants as well as population growth (i.e., urbanization). The colonial city of Iri in Iksan County with burgeoning population of Japanese immigrants witnessed an early case of hygiene association right after Japan’s annexation of Korea in 1910. The Iri hygiene association was a product of organizational restructuring of the pre- annexation Japanese resident association into the school association after the annexation, under which it was subordinated. It stands as an interesting contrast to the Jeonju hygiene association organized ‘autonomously’ under the official (police) auspices in the mid-1930s, which did not undergo the stage of school association. Yet, both cases represented the urban ‘autonomous’ (civil) organizations’ effort to transplant colonial ‘sanitary discipline’ into the colonial local societies without recourse to the hygiene police apparatus. On the other hand, the sanitary project in rural areas was carried out on the basis of model hygiene village, with the identical purpose of raising awareness of hygiene and prohibiting epidemics just as the hygiene association in cities. However, considering the low level of epidemic inspection of Korean patients, the effect of the Japanese colonial sanitary project in Korean local societies was disappointing. There was an ever-widening gap in the colonial hygiene and medical services between Koreans and their colonizers as well as between urban and rural areas.
1. 머리말: 식민지 지역사회에 대한 관점러일전쟁(1904~1905) 이래, 일본인 식민자의 대륙 진출과 ‘조선척식(朝鮮拓植)’에 의해 한반도 최대의 곡창지대인 호남평야는 식량 식민지로서의 새로운 운명을 맞고 있었다. 제국주의로 면모를 일신한 일본은 구래의 식민지 농촌사회에 새로운 환경을 조성하려 했는데, 당시 ‘내지(內地)’, 즉 일본 본국에서 ‘조선열(朝鮮熱)’로 대변되는 지역개발 바람이 그 실체였다. 호남 농촌에서는 이른 시기부터 일본인 이민자 사회가 형성되었고, 재래 농촌을 식민지에 적합한 형태로 재편하기 위한 다양한 ‘농촌-인프라’ 사업이 전개되었다(Matsumoto and Chung, 2009; 2015; 정승진, 2018). 그 동력은 식민통치 하의 동화주의 혹은 내지연장주의에 있었다고 생각된다.
서구의 ‘문명화사명’을 답습하려한 일제는 근대화의 구호 아래 산업화, 도시화, 교육, 위생·의료 등에서 일정한 ‘성과’를 전시하였다. 이는 제국주의를 경험한 선진국의 ‘식민지근대화론’이 말하는 그대로이다(見市雅俊, 2001; 김낙년, 2012). 그러나, 에드워드 사이드가 말한 제국주의적 ‘프로젝트’가 초래한 제국 ‘내지’와 식민지 간 문명도의 격차도 뚜렷했다(Edward Said, 2005). 근대화에 능동적으로 대응해간 소수의 협력자들(collaborateurs)이 있기는 했지만, 새로운 근대화 내지 ‘문명화’에 적응하지 못한 다수의 농민들이 존재했던 것이다. 그 만큼의 간극 사이에서 일제의 식민정책 즉, 동화주의 정책과 사업은 표류하고 있었다.
식민지기 호남평야 일대에서는 미곡증산과 함께 놀라운 인구증가 및 인구이동이 연출되었다. 이와 동시에 농민 궁핍화도 병존하였다. 일본인의 이입이 빈발하면서 새로운 식민도시가 출현하였다. 구래 식량문제의 해결 및 공중보건·위생의 진전 등이 당시 인구팽창 및 도시화의 요인이었음은 기존 연구사가 지적하는 그대로이다(신동원, 1997; 박윤재, 2005; 황상익, 2015). 흥미로운 사실은 제국주의적 ‘개발사업’에 따라 호남에서는 기존의 개항장인 군산(群山)뿐 아니라, 신설된 호남선을 따라 이리(裡里)와 같은 신흥 읍내 등이 우후죽순 등장하고 있었다(정승진, 2012). 남궁봉에 따르면, 만경강(萬頃江) 및 동진강(東津江) 중하류 일대의 촌락들은 자연지리적 조건 때문에 마을의 형성 기간이 상대적으로 짧다는 특징을 보이고 있는데, 이러한 환경은 오히려 일본인들이 식민 초기부터 ‘척식’하기 순조로운 조건을 제공하고 있었다(남궁봉, 1990). 따라서 이 글에서는 이러한 지역적 환경을 고려하여, 형성과정에 있는 식민도시와 그것을 둘러싼 배후 농촌지역을 하나의 단위로 묶는 ‘식민지 지역사회’라는 개념을 구사하고자 한다(松田利彦, 2013; 이형식, 2013). 이는 제국의 ‘내지’와 달리 식민지 지방사회에서는 도시의 역사가 상대적으로 짧거나 여전히 형성과정에 있었고, 서구의 상업적 도시와 달리, 농업적 기반을 가진 ‘준(準)도시·준읍내’ 등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동남아시아나 남미, 아프리카 등지에서 볼 수 있는 ‘농업도시’ 또는 ‘근접지·준읍내’라는 일견 모순된 개념도 성립한다.
호남평야 일대에 주목할 때, 일제의 ‘개발을 통한 동화’ 즉, 지역개발을 통해 제국의 ‘내지’와 식민지간 문명도의 격차를 줄여 궁극적으로 ‘내선융화(內鮮融和)’를 도모하고자 한 일제의 식민정책은 다수 확인된다. 최근 ‘식민지근대성론’ 또는 ‘식민지공공성론’에서 제기하고 있듯이(松本武祝, 2005; 신동원·장석만 외, 2006; 윤해동·황병주, 2010), 동화주의 ‘개발’정책은 토지개량(수리·치수), 철도부설, 미곡증산, 학교증설, 위생·의료시설을 비롯한 생활편의시설 및 각종 문화시설 설치 등 실로 다양한 차원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동시에 지역 ‘개발’ 과정에서 신흥 읍내를 중심으로 인구증가와 인구이동이 빈발하면서, 호남농촌에서는 이례적으로 ‘내선잡거(內鮮雜居)’라는 흥미로운 사회현상이 일본인 ‘농장촌’(이민촌)을 중심으로 포착되었다[1]. 이는 ‘내선융화’를 촉진하기 위한 인적 기초구조를 제공하고 있었다. 이론적으로 미셀 푸코(Michel Foucault, 2003; 1994)의 등장 이래 근대 규율권력이 개인의 신체와 그를 둘러싼 공동체를 미시적·비공식적 차원에서 관통한다는 사실은, 직접 식민통치하 동화주의 식민지에서는 보다 선명하게 나타나고 있다(조형근, 1997; 小野芳朗, 1997; 松本武祝, 1999). 결론을 앞세운다면, 호남과 같은 인구밀집지역에 있어서 ‘내선잡거’ 양상은 다양한 형태의 ‘인프라 개발’을 둘러싸고 지역 단위의 조직화 사업을 통해 ‘위생규율’을 식민지 농촌사회에 침투시키고 있었다. 당시 교육 사업이나 위생·의료 문제를 둘러싼 농촌 조직화 사업은 전술한 ‘문명화사명’과 관련해 ‘민도(民度)’의 척도로서 주목받던 ‘개발’ 시책의 일환이었다(小野芳朗, 1997; 見市雅俊, 2001).
이 글은 식민지 지역사회의 전형적 사례로서 호남의 평야부 벼농사지대에 주목하는 가운데, 근대 농촌위생에 대한 미시적인 관찰을 주요한 목적으로 한다. 먼저, 20세기 동아시아지역의 일반적 특징으로서 인구증가, 인구이동 및 도시화를 논의의 전제로 삼아, 인구팽창이 초래한 새로운 사회문제로서 공중위생·의료문제를 전술한 지역 단위의 조직화 사업의 차원에서 살펴보고자 한다[2]. 이는 농업지대에서의 지역 ‘개발’과 농촌사회의 위생문제를 종합적으로 취급함으로써 식민지기 농촌 모순의 실태를 보다 실질적인 차원에서 다루고자 하는 학제간 융복합연구의 일환이다. 식민지 ‘조선척식’은 지역 ‘개발’을 둘러싼 새로운 사회문제, 가령 환경, 보건·위생, 교육, 종교 방면의 문제들을 초래하고 있었다. 여기서는 식민지 규율권력의 행위패턴과 관련해 ‘위생규율’ 개념을 통해 지역 단위 내지 직능 단위로 이루어진 조직화 사업의 실체에 다가가고자 한다(조형근, 1997; 松本武祝, 1999; 이형식, 2013). 특히, 기존 연구사가 주목했던 위생경찰의 사례에서 나아가(박윤재, 2004; 신동원, 2007; 정근식, 2011), 위생조합이나 모범위생부락에 관한 새로운 사례를 발굴함으로써, 일제가 모색한 근대적 위생규율과 그것의 지역사회에 대한 침투 양상을 미시적 레벨에서 조명하고자 한다.
한편, 식민지기에 들어서 새롭게 확대, 재편된 근대적 공중위생·의료 제도는, 구래 농촌사회에 ‘전통과 근대의 병존(竝存)’이라는 과도기적 사회현상 즉, 근대적 제도의 확산과 병행하는 ‘전통적 요소의 강고한 잔존’이라는, 일정 기간 양자가 공존하는 새로운 현상을 연출하고 있었다(신동원, 2004; 신규환, 2007). 식민도시 및 신흥 읍내를 중심으로 근대적 의료기관과 재래의 의생 및 약종상이 병존한 양상은 조선 농촌 읍내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흥미로운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3]. 이는 마치 지방의 정기시(定期市)인 5일장에서 근대적 상설점포와 전통 난전(보부상)이 병존하고 있는 모습을 연상시키고 있다. 이 글에서는 근대적 의료와 대비되는 의생 및 약종상 등 전통적 의료에도 관심을 기울임으로써 거시적 차원에서 발생하는 ‘전통과 근대의 병존’ 문제의 일단에 접근해보고자 한다[4]. 이는 근대 전환기에 나타난 전통적 요소의 ‘자기재편’ 또는 시대적 변화상과 관련된 거시적인 사회변동의 일환이라고 생각된다.
2. 호남의 인구증가와 도시화식민지기에 들어서 전북의 인구는 팽창 일로에 있었다. 인구이동의 폭도 상대적으로 높았음이 당시 식민도시의 부상에서 드러나고 있다. 1930년 『동아일보』에 따르면, “인구 최다는 경북, 인구밀도는 전북, 도시부 가운데 수위는 경성, 최저로는 군산, 면(面)으로는 전주가 최고”를 기록했다[5]. 손정목의 지방자치사 연구에 따르면, 개항장인 군산을 중심으로 이른바 식민도시 내지 신흥 읍내가 철도선을 따라 우후죽순 부상하고 있었다(손정목, 1992)[6]. 1912년 호남선의 전북 개통은 도시발달을 촉진하는 인구이동의 기폭제가 되었다고 평가된다. 최근의 재조일본인사 연구는 이러한 신흥 식민도시를 소재로 한 새로운 연구 경향을 대변하고 있다(이규수, 2007; 松田利彦, 2013; 이형식, 2013). 다음의 <표 1>은 전라북도의 인구증가 추이 및 일본인의 인구 동향을 제시한 것이다.
<표 1>에 의하면, 호남지역에서는 “산간부”보다 “평야부”에서 인구밀도 및 인구증가율이 높은데, 도시부(부·읍)가 주로 평야부에 편중되어 있었던,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이다. 그 요인은 주로 도시부의 높은 일본인 비율과 깊은 관련을 갖고 있다(Matsumoto and Chung, 2015). 평야부에서는 만경강 및 동진강 일대에 대규모 소작제농장 및 수리조합이 이른 시기부터 창설되어, 수리·치수를 비롯한 지역 ‘개발’이 농업부문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던 사실과 함께, 영세 소농의 빈궁화에 따른 평야부로의 인구이동에 기인한 것으로 추정된다[8]. 평야부 농촌지역 중 군산부 배후의 옥구군과 함께 익산군에서 일본인 비율이 각각 3.0%와 3.7%로 이례적으로 높은 수준을 기록하고 있음이 위의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 다음의 <표 2>는 익산군 지방지에 등장한 호남의 주요 읍내 및 도시지역의 인구 실태를 민족별로 제시한 것이다.
<표 2>에서는 호남의 신흥 도시로 부상한 군산부와 이리에서 일본인 호수의 비율이 각각 35.8%와 45.4%로 높고, 이리를 포함한 익산면 또한 30%에 육박하고 있음이 인상적이다. ‘전통도시’인 전주면의 일본인 호수 비율도 21.7%로 결코 낮은 수준이라고 볼 수 없다. 자료가 기초하고 있는 간이국세조사(1925)의 결과, 당시 이리의 인구는 전조선의 도시 가운데 26위를 기록할 정도로 높은 증가세를 보여주었다[10]. “익산군 전체”의 일본인 호수 비율이 5%를 상회하는 가운데, 이리는 익산군 내에서도 여타 농촌지역 비해 상당한 격차를 연출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대체로 호남지역의 평야부에서는 일제가 내세운 ‘내지연장주의’가 식민지 지역사회의 인구 구성으로서 실현되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이는 일본적 동화주의 정책의 인적 토대를 형성했다(이규수, 2007; 정승진, 2013).
3. 지역사회의 의료시설 실태1) 도·군 단위 의료시설 분포먼저, 전국적 단위의 의료시설을 개괄하는 가운데, 전라북도의 위치 설정을 시도하고자 한다. 전술한 인구동향을 의식하면서 1930년 현재 의사, 의생 등 도별 의료종사자 분포를 제시하면 <표 3>과 같다.
“인구 10,000명당 의료종사자 수”라는 관점에서 보면, 전국적 차원에서 전북의 위치는 상대적으로 낮은 수준이다(의사 0.59, 한지개업의 0.12, 의생 1.33). <표 3>에서는 근대적 의료종사자(의사 및 한지개업의)에 한정하면 경기, 평남, 경남, 함북 순으로 인구 10,000명당 의료종사자 수가 높게 나타나고 있다. 인구 10,000명당 근대적 의료종사자 수가 상대적으로 낮은 충북, 경북, 강원 등지의 존재를 고려한다면, 근대적 의료종사자 수에 관해서는 전북은 당시 조선 남부 농촌사회의 평균적 상황에 유사한 지역이라고 할 수 있다.
<표 3>에서는 근대적 의료종사자인 의사 및 한지개업의보다 전통적 의료종사자인 의생이 인구 대비 높은 비율을 보이고 있다(의사 0.86, 한지개업의 0.11 대 의생 2.27). 조선 전체의 경향으로서 근대적 의료종사자의 ‘결핍’을 전통적 의생이 보완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흥미로운 현상으로서, 의사 및 한지 개업의 등 근대적 의료종사자가 많은 곳에 전통적 의료종사자인 의생도 빈출했음이 이 표에서 확인된다. 당시의 사정에 대해 『조선위생요람(朝鮮衛生要覽)』은 산간벽지에 개업한 의생의 ‘도시부 이동·집중 현상’을 우려하는 가운데(조선총독부, 1929; 38), 그 대책으로서 1921년 12월 『의생규칙』이 개정되었던 저간의 사정을 토로하고 있다. 요컨대, 전통적 의료종사자인 의생도 시세에 따라 평야부 도시로 이주 및 개업해 일본인 의료종사자처럼 읍내에서 영업했던 것이다. 제도적으로 의생은 『의생규칙』(1913)에 의해 행정 권력에 의한 규제를 받고 점차 후대로 가면서 감소경향에 있었다. 또 근대의료서비스에 대한 수요 및 도시부에서 구매력의 우위라는 ‘시장원리’에 기초한 경제적 변화도 나타나고 있었다. 따라서 여기서 나타난 근대적 의료종사자와 전통적 의생의 병존 현상은 일종의 과도기적 사회현상으로서, ‘전통’의 역할은 제한적 의미로 해석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분석 단위를 보다 미시적 레벨로 낮추어 전북 도내 각 군별 의료종사자 분포를 제시한 것이 다음의 <표 4>이다. 여기에는 공의 및 전통 약종상도 추가되어 있다.
<표 4>를 통해 전라북도 각 부·군별 의료종사자의 분포를 보면, ① 의사는 도시부(군산, 전주, 이리)를 가진 평야부 지역에서 인구10,000명당 의사 비율이 높고, 산간부에서는 상대적으로 낮다. 정책적으로 농촌에서의 배속을 목적으로 했던 한지개업의를 고려하더라도 마찬가지의 경향이다. ② 공의는 제도적으로 각 군에 최소 1명씩은 배치하도록 고안되었는데, 익산, 김제, 부안과 같은 평야부 ‘거읍(巨邑)’의 경우 2명 이상 배치되었다. 호남선 개통에 따른 당해 군소재지의 도시화와 일정한 관련이 있다고 생각된다. ③ 의생은 전술한 전국 통계와 마찬가지로 그 종사자수가 의사의 2배 이상을 기록하고 있다. 평야부와 산간부에서 인구 10,000명당 의생 수의 격차는 의사의 경우보다는 심하지 않다. ④ 약종상은 전통적 의료종사자인 의생보다도 인구 10,000명당 비율이 한층 높다. 여기서는 인구밀도와의 상관관계는 포착되지 않으며, 평야부이든 산간부이든 지역별 격차도 크지 않다. 약종상은 압도적인 비율로 의사와 한지개업의를 상회하고 있음이 인상적인데, 이는 전술한 근대적 의료의 한계를 상쇄·보완하는 ‘근대와 전통의 병존’ 양상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2) 익산군내 면별 의료기관 실태호남지역의 평야부에 위치하는 익산군은 1914~1917년 행정구역의 확대 및 개편 이후 기존의 4개 군이 합병해 18개 면의 ‘거읍’으로 재편되었다. 합방 직후 개설된 호남선과 전북경편철도(구 전라선)가 군내 이리에서 교차하고 군소재지가 여기로 옮겨오면서 이리(1931년 읍승격)는 신흥 식민도시로서 집중 ‘개발’되었다(정승진, 2012; Matsumoto and Chung, 2015). 익산군은 러일전쟁 직후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대장촌(춘포면), 오산리(오산면), 황등리(황등면) 등 이른바 ‘근접지’가 조기에 ‘척식’된 지역사를 보유하고 있다. 지역내 일본인의 농장창업 및 수리개발을 계기로 이리는 당시 호남 수리·치수 사업의 중심지로서 팽창 일로에 있었던 것이다. 이후, 호남선을 따라 평야부인 김제, 신태인(정읍) 등이 차례로 ‘개발’되고 있었는데, 동진강 중하류 일대 일본인의 진출이 지역 ‘개발’의 주요한 계기를 이루기는 군산 및 익산과 마찬가지의 상황이었다.
위의 <표 5>는 익산군내 18개면 전체의 의료종사자의 분포 상황을 인구 및 여타 공공시설과 관련시켜 제시한 것이다. 여기서 제시된 의료기관 또한 여타 기관과 마찬가지로 근대적 의미의 공공시설로 등장하고 있는 셈이다. 그 분포 상황은 구(舊) 군소재지(익산, 여산, 함열, 용안)와 일정한 관련이 있다. 익산군의 총 의사 수는 일본인과 조선인이 각각 5명으로 동일한 가운데, 일본인 의사의 거주지는 모두 익산면(이리)이고, 조선인 의사는 익산 및 철도역 소재면(황등, 함열) 또는 인구가 많은 구 군청소재면(용안)에 분산 거주하였다(함열의 조선인 의사는 공의를 겸했다). 한지개업의 중 1명도 철도역 소재면(춘포면 대장촌)에 거주하였는데, 일본인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춘포면(대장촌)의 일본인 한지개업의는 공의를 겸하고 있었는데, 전술한 경편철도선을 따라 의료종사자의 진출이 이루어졌던 당시의 정황을 보여주고 있다.
의생의 총 수는 의사(한지개업의, 공의 포함)의 것을 상회할 뿐 아니라, 모두 조선인으로 대부분의 지역(面)에 소재했다는 점에서 일본인 의료종사자의 분포와 크게 다르다. 그러나 다른 한편, 의생은 익산면(이리)에 집중되는 경향이 보이는데, 이는 식민지기 도시에 근대적 의료시설이 증가함에 따라 전통 의료인인 의생도 동시에 활황을 띄는, 일종의 과도기적 사회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혼종적’ 현상은 거시적 레벨의 분석에서도 확인된 사실이지만, 평야부 지역(주로 도시)에서 ‘의료시장’을 둘러싸고 양자(전통-근대) 간에 일정 부분 분업관계를 형성하며 당해 지역의 인구 대비 의료종사자 비율을 높였던 주요한 요인이었다.
4. 호남 도시부의 위생조합군산의 개항(1899)과 호남선의 전북 개통(1912)은 인구팽창에 따른 식민도시의 출현과 함께 호남 지역사회에 커다란 변화의 물결을 일으켰다. 전술한 공공시설 및 근대적 교육·문화시설 등이, 새롭게 건설된 신작로, 철로, 수로 등과 더불어 당시의 시대적 변화상을 표상하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근대적 위생·의료제도로서 등장하는 것이 이른바 위생조합(衛生組合)이다. 위생조합은 당시 우후죽순으로 등장한 일본식 조합의 형태를 취했으며, 위생·의료 문제가 비로소 집합적 공공재로서 본격적으로 취급되었음을 보여준다. 합방이래 일본인이 주도한 위생조합은 다음의 두 가지 경로를 통해 식민지 지역사회에 정착하고 있었다. 하나는 개항장 주변의 일본 거류민단이 합방 이후 학교조합으로 개편되면서 그 하부 조직으로서 위생조합이 탄생한 경우이고(정승진, 2015), 다른 하나는 학교조합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관(官)의 지도·감독 하에 주민 ‘자치기구’의 형태로 위생조합이 설치·운영된 경우이다. 기존 연구가 주로 후자의 경로에서 위생경찰의 폭력성에 주목한 바 있는데(조형근 1997; 박윤재 2004; 신동원 2007; 정근식 2011), 이하에서는 두 개의 사례를 통해 일제 ‘위생규율’의 지방침투 과정에서 학교조합 및 관(경찰)이 어떠한 역할을 담당했는지를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전라북도에서 위생조합의 활동은 이리와 전주에서 관찰되고 있다. 익산(이리)의 지방지는 식민초기의 흥미로운 지방 상황을 담고 있는데, 여기서는 먼저 이리 배후의 농촌지역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14]. 먼저 익산군 오산리(오산면 면사무소 소재지)에서는 학교조합, 소방조합 등과 함께 위생조합이 등장했다. 이 오산면은 ‘조선의 수리왕(水利王)’으로 알려진 후지이 간타로(藤井寬太郞)가 세운 불이농장(不二興業) 소재지이자 동척(東拓)의 이민처로서 각광받던 일본인 농장촌이었다. 그 보다 먼저 ‘모범적 이민촌’으로 널리 알려졌던 익산군 대장촌(춘포면)에서는 이례적으로 의원 개업도 확인되었다. 전술한 일본인 공의(限地開業医)라고 추정된다. 호남선이 통과하는 황등리에서는 정기시(定期市)가 활성화되는 가운데, 학교조합, 수리조합 등과 함께 의료시설로서 보생당의원출장소(保生堂醫院出張所)가 등장했다. 이와 같이 일본인 이민자사회가 형성되어 학교조합이 가동되고 있던 농촌 지역에서는 소방조합 등과 함께 위생·의료기관이 등장하고 있음이 호남의 지역적 특징으로 확인된다.
호남선의 이리역 개통을 계기로 발간된 『이리안내(裡里案內)』는 당시 신도시로서 개발되고 있던 해당 지역을 일본 ‘내지’에 홍보·선전하기 위한 ‘팜플렛’이었다. 이 책자의 제5장 위생편에 공중위생 및 의료 관련 사회기반시설로서 ① 이리위생조합, ② 도축장[屠獸場], ③ 격리병사[避疫舍], ④ 공동묘지, ⑤ 의원·산파, ⑥ 약종·매약점, ⑦ 목욕탕[湯屋] 등이 소개되어 있었는데, 주요한 사항만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먼저, ① 이리위생조합에 대한 다음의 언설을 주목해보자.
위생에 관한 사항은, 1913년까지 내지인에 대해서는 학교조합에서, 조선인에 대해서는 면사무소에서 각각 처리해왔지만 (중략) 내선인은 물론 외국인 누구라도 조합원으로 편입해 이리위생조합을 조직하고, 학교조합과 면사무소에서 취급해오던 위생사무를 총괄해 이를 계승하고, 1914년부터 오물의 소제, 하수거 준설, 기타 공중위생의 보전 등을 장려하고자 (후략)[15]
당시 학교조합에 가담했던 일본인 ‘유력자’들이 신설된 위생조합의 조합장 및 평의원으로 선임·겸직되었던 정황으로 보아, 양 조합 간의 연관성은 긴밀했다고 추정된다. ② 도축장 또한 당초엔 이리번영조합에서 건설했다가 학교조합에 제공된 경우인데, 그것이 다시 위생조합으로 이관된 사실이 후술된다. 먼저, 일본인 유력 지주 및 상인이 참여했던 별도의 이리조합이 1914년 설립되어, “토목, 위생, 소방 사무를 처리하고, 기타 이리의 번영 상 필요한 시설 경영을 위한 자치기구”라는 학교조합과 유사한 사업목적을 밝히고 있다[16]. 그 사무소는 학교조합 내에 설치하고, 조합장 및 평의원은 학교조합의 위원이 겸직하도록 했다. 전술한 학교조합의 위생 업무가 신설된 위생조합으로 이관되었던 것으로 보아 이리조합의 경우도 동 업무가 위생조합으로 이관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다. 문제의 이리번영조합은 1911년 “이리 공공의 사무를 처리하기 위해 자치조직으로서……이리개발을 위해 진력한 것은 일일이 열거할 수 없는 정도인데, 그 중 중요한 것만을 열거하면, 시가의 신설, 교사의 건축, 도축장의 권리매수 및 건설, 소방조합의 조직, 피역사의 건설 등” 공중 보건 및 위생과 관련된 흥미로운 보고를 남기고 있다[17]. 여기서 도축장과 피역사는 후일 위생조합의 소관 사항으로 승계되었는데, ③ 피역소의 경우 1913년 이리학교조합에서 건설해, 위생조합으로 그 업무가 이관되었다. ④ 공동묘지는 일본인들만의 공동묘지로서, 그 위치 및 소관 부처는 불명하다. ⑤ 의원·산파로서 “고지의원(高芝醫院)(철도 촉탁의), 보생당의원(保生堂醫院)(조선총독부 공의), 신이치과전문원(新井齒科專門院), 궁천의원(宮川醫院)(전(前) 경찰의) 등” 일본인계 의료기관이 차례로 소개되고 있다. ⑥ 약종매약점 2개소, ⑦ 목욕탕 4개소 등이 당시 보건위생·의료관계 공공시설로 선전되고 있음이 이색적이다[18]. 대체로 신흥 식민도시 이리에서 위생·의료서비스를 둘러싼 사회적 분업이 일본인 중심의 자치조직을 통해 개시되고 있던 1910년대 전반의 정황을 엿볼 수 있는데, 문제의 학교조합뿐 아니라 번영조합(후일, 상업회의소)도 당해 위생업무를 신설된 위생조합으로 이관했던 사실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단, 여기서는 기존 연구가 강조한 경찰의 개입 즉, 위생경찰과의 관련 양상은 포착되지 않는다.
1927년에 개정·증보된 『이리안내』는 제4장에 위생기관 편을 담고 있는데, 그 내용은 전편(1915)보다 소략할뿐더러 위생부문이 없어지고 의료부문에 대한 소개만이 이루어지는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현재(1927년) 위생에 관한 기관으로서는 의원, 치과의원, 격리병사, 간호부회, 산파, 욕탕, 기타 이발업 등”이 망라되는 가운데, 이리철도병원 이외에 개인 의원 5개소, 안과의원 1개소, 치과의원 2개소, 간호부회 2개소(간호부 12명), 산파 5명, 목욕탕 4개소, 이발소 13개소 등이 보고되고 있다[19]. 위생조합에 대한 후일담이 없는 것이 1910년대와의 커다란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를 고려한다면 1915~1927년간 이리에서 공중보건·위생 문제는 도시화의 진전에 따라 위생문제에서 의료부문으로 이동하는, 시대적 변화상이 나타나고 있다고 추정된다.
호남 평야부 지대에서 여타의 지방지를 살펴보면, 근대적 지방지인 『김제발전사(金悌發展史)』(1934)에는 위생 관련 항목이 익산의 사례와 달리 전혀 확인되지 않는다. 한편, 전통 읍지인 『정읍지(井邑志)』(1918)에는 “약재”편에 봉밀과 인삼을 비롯한 23종의 전통 약재명이 보고되었고, 별도로 “산약(山藥)”편에 27종이 소개되었다. 전술한 전통 한의약 관련 약종이다. 또 전통 읍지인 『부안읍지(扶安邑志)』(연도미상)는 전통 약재 편뿐 아니라 위생 관련 항목 자체가 『김제발전사』처럼 없다. 후대로 내려와 해방 이후 1957년에 중간된 『부안군지(扶安郡志)』에도 관련 사항은 전무한 형편이다. 그런데, 1931년에 읍, 1935년에 부로 승격되는 전주의 지방지 『전주부사(全州府史)』(1942)에서는 제6장 사회편에 ‘화장장 및 공동묘지’ 항목이 등장하고, 제7장 보건 편에서 위생관련 사항이 본격적으로 서술되고 있다. 여기서는 먼저, 1930년대 후반의 전염병 발병이 인상적으로 보고되고, 이어서 상수도(제2절), 하수도(제3절), 오물제거(제4절) 등이 열거되는 가운데, 제5절에 위생조합편이 별도로 등장하고 있다. 다음의 인용문을 통해 1930년대 중반의 상황을 살펴보자.
전주경찰서에서는 전주부민의 보건위생에 관한 당국의 시행에 충실히 따르게 할 뿐만 아니라 위생사상을 철저히 보급해 각 호가 자발적으로 청결을 유지하고 나쁜 질병을 예방케 하는 등 모든 일에 만전을 기하기 위해 부내를 30구역으로 나누고, 각 구당 위생조합을 조직해 각 호가 형편에 따라 비용(위생조합비)을 부담토록 하고 있다. 그 창설은 1935년으로 1936년 4월 현재 가입 호수는 일본인 1,221호, 조선인 5,464호, 외국인 79호, 합계 6,850호로서 조합 수는 30개소. (조합의 주요 사업을 일람하면) 전염병 신고, 불결한 장소의 소독 및 청결, 파리 발생 예방 및 구제 보급, 구내 청결유지 및 청소의 날 준수, 기타 위생시설, 위생사상의 보급, 당국 지시사항의 주지엄수. 그리고 이 30개 조합의 통제·지도 기관으로 전주부 위생조합연합회를 설치하고 (중략) 사무소는 전주경찰서 안에 두었다. 회장은 전주경찰서장이 맡으며, 전주 부윤 및 도위생과장을 고문으로 두고, 이사·간사는 부·경찰서의 담당 직원으로 충당하고 있다. (주요 사업을 보면) 위생사상의 보급, 전염병 예방, 청결 및 소독 역행, 소독약품 공동구입, 각 조합의 연락 협조, 기타 필요한 사항[20]
이상의 사실을 하나의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표 6>
개별 조합당 조합원(호수)은 약 225호, 1명의 조합장 및 부조합장이 선임되고, 평균 8명의 평의원 및 8명의 위원이 위촉되었으며, 조합 사무소는 조합장의 가택에 두었다. 무엇보다 위생조합연합회를 통해 경찰서의 지도, 감독을 받는다는 점이 이리 사례와의 커다란 차이점이었다. 그러나 전주의 사례에서도 도시화 및 인구팽창에 따른 전염병의 예방과 관리, 위생사상의 함양이라는 위생조합의 기본 취지는 재차 확인되고 있으며, 무엇보다 일본식 자치조직의 형태를 취한다는 점에서 모종의 유사점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외에 『전주부사』(1942)에는 살수(撒水, 제6절), 격리병사(제7절), 의료·약료·건재국(제8절), 도축장(제9절) 등이 수록되어, 당시 위생 및 의료 문제가, 부로 승격한 전주의 도시문제에서 어느 정도로 주요한 관심사였는가를 가늠케 해주고 있다[22]. 그것은 근대적 시가지 구획에 걸맞는 사회기반시설의 확충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흥미로운 의료시설로서 “전주 약령시가 개설된 이후부터는 건재약종상도 상당한 호황을 구가”하고 있다는 언설이 눈길을 끌고 있다(『전주부사』, 1942: 500). 1920년대부터 개시되는 전주약령시는 전술한 약종상 및 의생과 관련해, 시대적 변화를 담고 있는 ‘전통의 부활’이자 ‘근대와의 공존’ 양상이지 않았을까 생각된다[23]. 다른 한편, 이상과 같은 활동에도 불구하고 지역사회에서 확산 일로에 있던 아편과 모르핀(morphine) 중독자의 실태는[24], 인구증가 및 도시화에 따른 근대적 변화가 이전에는 예상하지 못했던 심각한 사회문제를 초래할 수 있다는 사실을 경고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군산의 사례를 보면, 『군산부사(群山府史)』 제27장에 ‘위생 및 의료기관’이 보고되고 있다. 그 추이를 보면, “군산부의 위생시설은 시가의 발전에 수반해 착착 시행·개선되고 있는데, 근년(1930년대 전반)에 이르러서는 거의 완비되기에 이르렀다. 특히, 상하수도의 완공에 따라 유행병이 현저히 감소하고 있다”[25]. 군산에서 상수도공사는 1913년 준공, 1915년 완공, 이후 확장공사를 거듭해, 1932년까지 완공됨으로써, 약 3만 명이 급수 가능했다고 알려져 있다. 하수도공사는 도로개수공사와 병행해, 1920년대에 대대적으로 시행되어, 1930년대에 들어서는 “근년 유행병이 현저하게 감소한 것은 이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있다[26]. 한편, 의료기관으로서 기존의 도립회생병원이 확장되어 1932년 도립군산병원에 위탁 관리되고, 군산자혜의원이 도립군산의원으로 전환되고 있는 상황을 소개하는 가운데, 여타 부대시설로서 행려병자구호소의 신축(1933년)을 보고했다. 여기서는 특히 오물류, 오물(주로 인분) 소거 등 1930년대 전반 시가지 확장·정비에 따른 위생시설의 구비가 인상적으로 강조되고 있는데, 전술한 전염병 방제와 깊은 관련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상, 도시화(의 진전)에 수반한 ‘위생 인프라’ 시설, 근대적 의료기관 등이 소개되고 있지만, 전주나 이리의 사례와 같은 위생조합이나 위생경찰 업무는 별도로 확인되지 않는다. 아마도 1930년대의 변화상을 담고 있는 군산 지방지의 특질이자 한계라고 생각된다.
5. 호남 농촌지역의 모범위생부락위생조합이 일본인 이민자들을 중심으로 도시 및 읍내 지역에서 1910년대라는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조직되었다면, 호남 농촌에서는 모범위생부락(模範衛生部落)이 1920년대 말부터 등장했다. 이 모범위생부락 사업은 1920년대 모범부락장려정책 및 1930년대 농촌진흥운동이라는 조선총독부 농촌정책의 일환으로 등장하고 있었다. 마쓰모토 다케노리(松本武祝, 2005: 83)에 따르면, 위생부락은 전조선 가운데 전북에서 이례적으로 성행했으며, 1930년대 지역 단위의 직능단체로서 농촌위생을 둘러싼 조직화 사업을 담당하였다. 기존 연구가 주목했던 위생경찰의 역할을 고려한다면(박윤재, 2004; 정근식, 2011), 여기서 다루는 위생부락 사업은 위생경찰 및 위생조합과 함께 식민지기 위생조직화를 담당한 사회적 분업화의 한 축으로서 새롭게 조명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다음의 <표 7>은 지역 레벨에서 확인되고 있는 위생부락의 구체상을 제시한 것이다.
전라북도에서는 1929년부터 모범위생부락이 지정되어, <표 7>에서 보는 바와 같이, 1934년까지 1개 면당 평균 0.88개소의 위생부락이 설치되었다. 이 사업은 전북에서 선행적으로 실시되어, 그 성과 위에서 조선총독부가 1933년부터 각 도(道)에 명해 자력갱생운동과 교류시키는 형태로 장려했던 것이다[28]. 이 때문에 이후 전국적 단위에서 실시되었지만 이례적으로 전북지역에서만 활발한 활동이 확인되고 있다. 구체적 활동을 보면, 동리 단위의 우물수리, 변소개량, 공동목욕탕, 청소 등 전염병 예방이 주된 사업이었으며, 이와 같은 방역사업을 통한 청결 유지와 근대적 위생관념의 계몽·선전이 주요한 사업목적을 이루고 있었다. 표에서 보는 한, 전술한 도시부를 중심으로 분포했던 의료종사자와 달리 위생부락은 “산간부” 지역에도 다수 설치되어, 평야부와의 격차는 거의 없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후술하는 “은사구료상(恩賜救療箱)” 수의 추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은사구료상은 1930년대 농촌진흥운동기에 개시된 궁민의료구제 사업의 일환으로서, 의료서비스로부터 배제된 최하층 농민들에게 의약품을 무상으로 교부하는 제도이다[29]. <표 7>에서는 평야부보다 산간부에서 은사구료상수가 상대적으로 높은 수준에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은사구료상은 제도적으로 평야부나 산간부와 상관없이 지역적으로 균등하게 배치하도록 고안되었지만, “1면당 설치수” 및 “약품이용자율”을 보면, 산간부의 상대적 우위가 두드러진다. 전술한 인구 10,000명당 의료종사자 수(<표 4> 참조)와 약품이용자율 간에는 통계상 약한 음(-)의 상관관계가 연출되어[30], 은사구료상이 근대적 의료기관의 부재를 어느 정도 보완하고 있었다고 추정된다. 주지하다시피, 산간부 지역은 근대적 의료의 사각지대로서 주로 약종상 등 전통 의료에 의존했던 만큼 관(官)으로부터의 의료시혜는 이와 같이 지역단위 위생조직화의 일환으로 시행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10% 미만의 “약품이용자율”을 볼 때, 산간부의 의료시설에 대한 접근성의 한계상 그 구체적 이용 실태가 양호한 것이었는가는 여전히 의문거리이다. 또한 조선인의 입장에서는 은사구료상이 비치된 경찰주재소 및 학교라는 식민권력의 말단기구로 향하는 것에 대해 부담감(이나 거부감)도 일정 부분 작용했다고 생각된다. 다음의 <표 8>은 모범위생부락에 대해 익산군 내에서의 구체적 상황을 제시한 것이다.
<표 8>에서는 모범위생부락이 익산군 내 18개면 가운데 성당면 이외 모든 지역에 배치된 것으로 확인된다. 이례적으로 황등면과 여산면에서는 위생부락이 2개소 지정되었다. 여기서 주목하는 것은 그것의 공간적 위치관계이다. 군내 총 19개 사례 중 7개 위생부락(36.8%)은 면사무소 소재지(행정리) 내에 지정되었고, 8개 부락(42.1%)은 면소재지에 인접하는 행정동리에 배치되었다. 나머지 4개 부락(21.1%)은 인접하지 않은 원격지에 소재한 것으로 확인된다. 19개 사례가 속해있는 면 전체의 평균을 보면, 면사무소 소재 행정동리, 면사무소 소재 동리와 인접한 행정동리, 그와 인접하지 않은 행정동리의 구성비는 각각 12.8%(1/7.8), 45.3%(3.5/7.8), 41.9%(3.3/7.8)이다. 이러한 구성비에 비하면, 19개의 사례에서는 면사무소소재행정동리의 비율이 높고, 인접하지 않은 행정동리의 비율이 상대적으로 낮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같은 통계적 결과는 농촌위생을 둘러싼 지역단위 조직화 사업이 동리라는 말단부의 지방단위에까지 미치고 있지만, 여전히 면사무소라는 식민지권력의 행정소재지 및 그 인접지에 한정되었다는 공간적 한계를 여과 없이 드러내고 있다. 요컨대, 모범위생부락은 호남 농촌사회에서 위생사업의 계몽·실천을 표방하고 이를 조직화하는데 일정한 성과를 거둔 듯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농촌말단부 행정권력의 근방(인접지)에서만 실시되었고, 공간적 분포(내지 확대)라는 관점에서는 여전히 그 효과가 한정적이었다는 사실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6. 식민지 위생·의료의 실태와 한계전술한 도시지역의 위생조합이나 농촌지역의 모범위생부락 사업은 궁극적으로 ‘문명화사명’을 내걸고 공중보건·위생 사상을 함양함으로써 농촌사회에 만연해 있는 전염병을 예방 및 퇴치하려는 방역사업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러한 일제의 위생조직화 사업 내지 ‘위생규율’의 관통은 식민지 지역사회에서 어느 정도의 ‘성과’를 올리고 있었는가? 기존의 통설은 지방 농촌지역에서 근대적 위생·의료서비스의 제도적 낙후성과 위생경찰로 상징되는 식민지적 폭력성을 강조하고 있지만(신동원 1997; 조형근 1997; 박윤재 2005), 이상의 위생조합과 모범위생부락의 사례는 ‘자치조직’의 외관을 취하면서 일견 ‘소프트한’ 차원에서의 ‘위생규율’의 침투 양상을 연출하고 있다. 지역사회 레벨에서 그 구체적 실태를 검토하기 위해 제시한 것이 다음의 <표 9>이다.
먼저, 예비적 고찰로서 <표 9>의 인구 10,000명당 의료종사자 수는 도시·읍내를 가진 평야부에서 상대적 우위를 보이고(군산, 전주, 익산), 산간부에서는 전통적 중심지였던 남원군이 높은 비율을 보였으며, 나머지 지역은 어느 군에서나 그 밀도가 2명 미만에서 낮은 수준임을 재차 확인할 수 있다(도평균 2명). 이 표에서는 일제가 내세운 ‘내선간 평등·융화’ 및 동화주의 정책의 관점을 의식하면서 민족별 동향과 지역별 분포 간의 상관관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인구 10,000명당 전염병 이환자 수는 조선인에 비해 일본인이 압도적으로 높은 수준을 보이고 있는데, 여기서 당시 통계상의 특질과 한계를 여실히 확인할 수 있다(황상익, 2015: 263~268, 274~275). 전절에서 고찰한 근대적 의료종사자나 위생조합 및 모범위생부락 등을 고려한다면, 인구 비례 상 조선인의 전염병 환자 수는 일본인의 그것을 압도적으로 상회해야 한다.
일본인의 경우, 인구 10,000명당 의료종사자 수와 인구 10,000명당 전염병리환자수 간의 상관관계는 통계상 거의 없는 것으로 확인된다[33]. 일본인들이 주로 거주하는 도시부에는 의료시설이 상시 존재하고 스스로 검진하는 습관(규율)과 검진을 가능케하는 경제력이 있었으므로, 인구 10,000명당 전염병 환자 수는 조선인에 비해 압도적으로 높은 수준을 보이고 있었다(77.8명대 1.2명). 일본인의 경우 실제의 전염병환자수와 <표 9> 상의 수치 간에는 큰 차이가 없었을 것이다. 이것에 대해서 조선인의 경우 실제의 전염병환자수는 <표9> 상의 수치를 크게 상회할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조선인에게 있어서 근대적 의료기관에 대한 접근은 용이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는 물리적 비용(거리), 경제적 비용(빈곤), 심리적 거부감(언어, 식민지 의료기관에 대한 괴리), 상대적으로 높은 이환자사망률에 대한 공포(격리병사의 빈약함), 서양의학 지식의 결여·불신 등이 작용했을 가능성이 높았다고 추정된다[34]. 이러한 요인 때문에 조선인의 ‘수진율(收診率)’이 낮고, 그 결과 전염병 이환자의 ‘발견율’도 낮았다고 볼 수 있다[35].
대체로 조선인의 낮은 ‘검병(檢病)’ 수준을 고려할 때, 그 성과는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실망스러운 수준이었다고 평가할 만하다. 따라서 조선인-일본인 간에 위생·의료 서비스를 둘러싼 제도적 격차는 더욱 커지고 농촌지역으로 갈수록 한층 심화되고 있었다고 추정된다. 단, 조선인의 경우, 인구 10,000명당 의료종사자 수가 낮았음에도 불구하고 10,000명당 전염병환자수가 많았던 금산군의 경우를 이상치(outlier)로서 예외로 한다면, 양자 간에는 약한 양(+)의 상관이 연출되고 있다[36]. 근대적 의료시설에 대한 접근(공간적 근접성)이 그나마 조선인 전염병환자의 ‘발견율’을 높이는 효과를 어느 정도 갖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다른 한편, 전염병의 경우 행정측이 유행병을 인지하게 되면 개별 ‘호구조사’가 위생경찰에 의해 실시되고, 이를 통해 ‘발견’되는 경우도 있었다. 이 점은 전술한 상관도가 낮은 요인 가운데 하나라고 볼 수 있다.
식민지적 위생규율 내지 조직화 사업이 주로 일본인 거주지인 도시부를 중심으로 주변의 농촌부로 확산되고 있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식민지지주제를 배경으로 농촌부에도 일본인의 거주가 빈발했던 호남지역에서는 전술한 ‘내선잡거’와 관련해 보다 흥미로운 사실도 확인되고 있다. 1920년대 전라북도 옥구군 개정면(開井面)에는 구체적인 농촌위생 통계가 존재한다. 1935년 4월, 전북 유수의 대지주인 구마모토 류헤이(熊本農場主)가 옥구군 개정면(철도역소재지)에서 구마모토자혜진료소(熊本慈恵診療所)를 설립하고, 이영춘(李永春)박사를 소장으로 초빙했다는 사례연구가 있다(소순열, 1992; 1994). 여기서 발굴된 의료종사자료(『보건사회백서』, 1965)는 상기 병원(진료소)과 어느 정도 관계가 있다고 추정된다(박윤재, 2009: 172). 단, 1924년까지 소급되고 있는 이 자료가 존재하는 경위에 대해서는 불명하다.
1950년대까지를 시야에 담고 있는 개정면의 사례에 주목해보자. “1924년부터 1953년 사이의 30년간을 10년 간격으로 집계해 관찰하면, 이 기간 중무(無)치료 사망이 약 50%를 점하였고 보건사업 실시 후 1956~1961년간 비록 감소되기는 하였으나 아직도 30.9%의 무치료 사망이 있다 함은 일견 기이감이 없지 않다”는 다소 충격적인 사실을 보고하고 있다. 이 보고서의 저자는 “무치료 사망”의 원인으로서 당시 농촌에 만연해있던 빈곤(궁핍상)과 관습상의 ‘미신’[37]을 지적하고 있다[38]. 그 실태를 구체적으로 살피면, 다음의 <표 10>과 같다.
무엇보다, 1920~1930년대에 51%를 점했던 “무치료” 사망자가 해방 이후 40%, 30%대로 점점 하락하는 양상이 포착되고 있다. 그 감소분만큼 “병원치료”의 비중은 7% 대에서 35% 대로 꾸준히 상승하고 있다. 1956~61년간에 들어서야 “병원치료”는 “무치료”의 비중을 상회하기 시작했다. “한방치료”는 20% 대에서 점감 추이를 보이나 해방 이후에도 10% 대에서 강고하게 잔존하고 있는 양상이다. 1920~1930년대에는 “무치료” 사망 이외 사망자의 반수(26.0%~23.4%)가 여전히 전통 “한방의치료”에 의존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여타 “미신행위, 미신 및 한방의 겸용, 매약치료, 민간요법” 등의 잔존 양상은, 역으로 근대적 의료서비스가 농촌 일대에서 어느 정도로 더디게 진행되고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더구나 개정면이 호남선(군산지선)의 철도역 소재지(준읍내)였음을 감안한다면, 근대적 의료의 상대적으로 낮은 수준은 결코 용이하게 극복 가능한 것이 아니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7. 맺음말을 대신하여이 글에서는 식민지기 농촌사회에 등장한 근대적 위생·의료 제도에 대해 지역단위의 조직화 사업 내지 제국주의의 ‘위생규율’로 규정하고, 그 실태를 일본인의 진출이 상대적으로 활발했던 호남지역을 사례대상으로 삼아 구체적으로 살펴보았다. 식민지지주제가 고도로 발달했던 전라북도 호남지역에서는 러일전쟁 이래 일본인의 조기 진출과 그에 따른 농촌‘개발’이 특히 수리·농업 부문을 중심으로 나타났다. 당시의 인구팽창 및 도시화는 군산을 필두로 호남선을 따라 평야부 지역에 이리와 같은 새로운 식민도시들을 탄생시키고 있었다. 이하, 여기서 확인된 몇 가지 사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인구증가 및 도시화에 따라 근대적 의료종사자(의사, 한지개업의)의 일반적 확대라는 기존 연구사의 성과 위에서, 호남평야와 같은 식민지 지역사회에서는 그것이 주로 평야부 도시(군산, 전주, 이리)에 집중되는 지역적 경향성을 보이고, 농촌의 여러 지역(주로 산간부)에서는 군청소재지인 읍내에 소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면소재지와 같은 ‘준읍내’도 포함). 이 점에 있어서는 전통적 의료종사자인 의생도 의사와 유사한 분포를 보이고 있었다. 산간부 농촌 지역에는 전통적 의료기관인 약종상(한약재상)이 다수 소재해 평야부와의 지역적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둘째, 호남 평야부에 속하는 익산군의 사례에 주목하는 한, 근대적 의료종사자는 주요 공공시설과 함께 군청소재지(이리) 및 구(舊) 군 소재지(함열, 여산, 용안)에 집중되는 경향을 읽을 수 있다. 당시 호남의 수리·치수 및 철도의 중심지였던 이리는 군산을 경유한 일본인의 진출이 상대적으로 활발한 신흥 식민도시였다. 여기서는 근대적 의료종사자와 함께 의생과 같은 전통적 의료종사자도 다수 확인되고 있는데, ‘근대와 공존하는 전통의 잔존’ 양상을 여과 없이 노정하고 있다. 단, 전통적 의생·약종상은 이후 감퇴 경향에 들어선다는 한계점에도 유의할 필요가 있다.
셋째, 군산과 함께 호남평야의 도시부를 대표하는 이리에서는 위생조합의 사례가 1910년대의 이른 시기부터 나타나고 있다. 이리의 사례는 기존의 일본인 거류민단이 합방 이후 학교조합으로 개편되어 그 하부 조직으로 당해 조합이 탄생한 경우인데, 이리(번영)조합과 같은 자치조직도 그 모체로 등장하기도 하고, 소방조합도 이 때 같은 경로를 통해 설립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반면, 1930년대 중반의 상황을 보여주는 전주의 사례는 전술한 학교조합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관(官)의 지도하에 조합이 ‘자치적으로’ 조직·운영된 경우이다. 여기서는 ‘경찰서-위생조합연합회-(단위)위생조합-조합원’이라는 위계적 구조가 확인할 수 있다.
넷째, 호남 농촌의 위생조직화 사업은 도시지역과 달리 모범위생부락 및 은사구료상(도비구급상)을 통해 시행되었다. 사업목적은 위생조합과 마찬가지로 위생사상의 보급과 전염병 예방·퇴치에 있었다. 전북의 지역 레벨에서 판단하는 한 모범위생부락은 근대적 의료시설과 달리 산간부 지역에도 다수 배치되었고, 평야부와의 격차는 거의 확인되지 않는다. 오히려, 산간부에서 은사구료상수·이용률은 상대적으로 높은 수준을 기록하였다. 요컨대, 익산군의 사례에 주목한다면, 모범위생부락(사업)은 식민지 ‘위생규율’의 지방농촌에 대한 침투·관통(농촌위생을 둘러싼 지역 조직화 사업)을 보여주는 실증적 근거이다. 단, 위생부락의 공간적 분포(또는 밀도)는 여전히 규율권력의 말단기구인 면사무소 소재지나 인근 동리였다는 공간적 한계도 엄존했다.
다섯째, 인구비례 상 조선인 전염병리환자의 낮은 ‘검병(檢病)’ 수준을 고려할 때, 식민지 지역사회를 대상으로 한 일제의 위생조직화(사업)는, 그 성과 면에서 실망스러운 수준이었다고 평가할 만하다. 위생·의료 서비스를 둘러싼 민족간 격차는 더욱 벌어지고, 도시부에서 농촌지역으로 갈수록 한층 심화되고 있었다. 그 요인은 주지하다시피 영세 소농의 빈곤, 의사에 대한 심리적 거부감 또는 서양의학지식의 부재 등에 기인한 것이다. 당시 호남 일대의 농촌빈곤상은 이른바 “무치료”사망의 고위성이라는, 어찌 보면 당연한 사실로 귀결되었다. 전북 옥구군 개정면의 사례는 “무치료”사망과 함께 오히려 전통 “한방의치료”의 강고한 잔존이라는 식민지적 정황(전통과 근대의 과도기적 병존)을 여과 없이 노정하였다.
식민지 농촌사회에 대한 일제 ‘위생규율’의 침투 즉, 지역단위의 위생조직화 사업과 관련해서는, 다음과 같은 잠정적 사실만을 도출할 수 있을 뿐이다. 위생조합, 모범위생부락 등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일제가 주도한 근대적 ‘위생규율’은 호남 지역사회에서 공간적 배치 상 제도적으로 정착한 것으로 확인되고, 또 어느 정도의 ‘문명화’ 효과를 발휘할 것으로 기대되었지만, 그것에 대한 실질적 성과는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의문시되는 수준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대체로 호남평야를 배경으로 한 식민지 농민사회는 여전히 농촌빈곤과 의료분포의 편중성 등에 기인해 ‘문명화된 근대’로의 ‘적응 불충분’과 심리적 거부감 사이에서 배회하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Notes1) ‘내선잡거’는 호남의 식민지 농촌사회에서 일본인 이민자와 현지 조선인이 혼재해 거주하는 양상을 일컫는다. 특히, ‘내선잡거’는 유력 일본인 대지주의 ‘농장촌’(이민촌)에서 소작제농장의 운영방침 속에 일종의 ‘이민자거주지침’으로서 확인되었다(Matsumoto and Chung, 2009; 2015). 이 현상이 중요한 이유는 식민도시사 연구에서는 일반적으로 ‘내지인’과 현지인 사이에 공간적 분리 내지 격리 현상만을 강조한 반면, 호남 농촌사회의 사례에서는 지역에 따라 동화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거주원칙’으로서 ‘내선잡거’가 권장되기도 했기 때문이다. 2) 의학사의 관점에서 위생과 의료는 별개의 개념이다(이 점에 대한 사실 환기는 신동원 교수(전북대)의 귀중한 지적에 의거한다). 이 글은 ‘농촌위생’이라는 여전히 형성 단계에 있는 위생개념에 중점을 두고 논의를 전개하는데, 그 주요한 논거를 이루는 호남의 지방지들은 보건, 위생, 방역, 의료 등의 개념을 혼용해서 사용하는 경우가 빈번할 뿐만 아니라, 위생이라는 언설에 대해 의료 등 여타 개념을 포괄하는 용례도 빈발하고 있다. 이는 당시 ‘위생과 의료의 미분리’라는 ‘의료근대화’의 발전단계와 깊은 연관이 있다고 생각된다. 후술하겠지만, ‘농촌위생’ 문제라는 동일한 사안에 대해 “위생”보다는 “의료” 개념의 사용 빈도가 1910년대에서 1930년대로 갈수록 높아지고, 의료기관(병원, 의원)의 중요성은 한층 중요해지고 있다는 사실도 이 글의 논점과 관련된 주요한 개념·용례 상의 변화였다고 생각된다. 기존 연구에서 양자를 동시에 사용한 사례로는 松本武祝(1999), 신규환(2006)을 참조하라. 3) 의생의 경우 「의생규칙」, 약종상의 경우 「약품급약품영업취체령규칙」이라는 ‘근대적’ 제도에 의거해, 총독부 및 도지사의 감독 하에 관리·통제되었다. 그 위에서 총독부는, 서양의사 부족을 보완하기 위해 의생을 공공위생업무에 동원할 필요성에서, 당해 면허·시험제도를 통해 의생에 대한 서양의학의 수용을 강요했다. 이것에 대해 의생측에서는,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동서병존’ 및 ‘동서절충’이라는 다양한 반응·대응이 나타났다(신규환, 2007). 이 글에서는, 신규환이 제기한 논점에 의거하면서, ‘근대와 전통의 병존’이라는 문제를, 총독부가 추진했던 ‘근대적’ 의료제도·시설의 영향력과 의생·약종상이라는 ‘전통’측의 주체적 대응 간의 상호관련성이라는 관점에서 파악하고자 한다. 4) 이 글에서 구사하는 ‘전통과 근대의 병존’이라는 개념은 에릭 홉스봄의 근대전환기 ‘전통의 부활(invented tradition)’ 개념으로부터 응용된 것이다(Eric Hobsbawm, 2004). 8) 재해나 기근 시에 산간부의 영세한 농민들이 평야부(읍내·도시)로 향하고 있음이 당시 『동아일보』기사에 빈출하고 있다(손정목, 1992; 이규수, 2007). 이들이 옥구나 익산 근교의 일본인 농장에 소작인으로 등장함으로써 이후 소작지 차지(借地)경쟁을 유발했음은 당시의 새로운 인구이동 현상으로서 주목할 만하다(소순열, 1994; 홍성찬, 2006). 9) ① 상기 자료에는 “1925年 국세조사에 나타난 것을 정리했다”는 부기가 있음. ② 행정구역상 “익산군 이리”는 “익산군 익산면”의 하부 행정리(법정리)로서 그 수치가 후자에 합산되어 있음. 이리의 읍승격은 1931년임. 괄호 안은 전체에 대한 비율. 10) 식민지기 인구 1만 이상 40대 도시(읍내)를 열거하면(괄호안은 인구), 다음과 같다. 1 경성(306,363명), 2 평양(109,285명), 3 부산(106,323명), 4 대구(77,263명), 5 인천(53,741명), 6개성(45,037명), 7 원산(35,435명), 8 함흥(32,095명), 9 진남포(28,096명), 10 목포(27,521명), 11 신의주(23,893명), 12 군산(23,071명), 13 마산(22,901명), 14 광주(22,102명), 15 전주(21,851명), 16 청진(21,549명), 17 통영(19,334명), 18 진주(18,002명), 19 해주(17,960명), 20 사리원(17,241명), 21 경주(16,828명), 22 대전(15,904명), 23 경성(15,132명), 24 진해(15,252명), 25 여수(14,991명), 26 이리(14,735명), 27 회령(13,067명), 28 나남(12,612명), 29 철원(12,586명), 30 수원(11,965명), 31 청주(10,584명), 32 공주(10,029명), 이하 강경, 송정리, 성진, 춘천, 웅기, 영등포, 논산, 겸이포 순이다 (『익산군사정』, 1928: 100). 굵은 글씨는 저자 강조. 12) ① “부·군”에서 군산부는 옥구군, 전주부는 완주군을 포함한 것임. ② 원자료에서 한지개업의 총 수는 17명으로 표기되어 있지만, 여기서는 군별 당해 수치의 합계를 제시한 것임. ③ “약종상”은 읍내에서 상설 점포를 갖추고 주로 전통 약재를 취급하는 약재상을 지칭하지만, 도시지역의 경우 일부 양약이 포함될 수 있음에 유의할 필요가 있음. 22) 『전주부사』(1942)에서는 보건, 위생, 방역, 의료문제가 별개의 범주로서 비교적 상세히 취급되고 있음이 인상적이다. 1930년대 사회적 분업의 진전에 따라 상기 사항을 파악하는 인식 수준도 한층 제고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후술하는 『군산부사』(1935)에서는 위생과 의료 등이 여전히 동질적인 차원에서 취급되고 있는데, 전술한 호남 지방지들과 유사한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서두에서 언급된 사실이지만, 이는 당시의 사회발전 단계상 여전히 양자(위생·의료)가 완전히 분리되지 못한 상태에 있었던, 식민지의 시대상을 표상하고 있다. 23) 1920년대 『동아일보』에 등장하는 전주약령시 관련 기사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전주약령시 계획 착착 진행중」, 『동아일보』, 1923.9.21; 「전주약령시 개시, 금 5일부터」, 『동아일보』, 1926.12.5; 「전주약령시 후보」, 『동아일보』, 1927.1.1; 「전주약령시 개시, 작년보다 민원 감소」, 『동아일보』, 1927.2.3; 「약력 개시 준비, 전주 후보」, 『동아일보』, 1927.11.19; 「전주약령시 임박」, 『동아일보』, 1927.12.2. 24) 1920년대 『동아일보』에는 이에 대한 고발 기사가 속출하고 있었는데, 이를 간추려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모르히네’ 중독자 대검거, 군산에서 9명, 동시에 밀매자도 검거」, 『동아일보』, 1921.9.23; 「중독자를 소멸하고자 전북 줄포경찰서장의 발기로 ‘모르히네’ 폐해 막을 귀성회」, 『동아일보』, 1922.2.26; 「(완주군) 고산에도 연침자 환자 1명 검거」, 『동아일보』, 1922.3.4; 「익산 연침 환자, 10여명이 출몰해」, 『동아일보』, 1922.4.8; 「전주방독단 조직, 아편 및 ‘모르히네’ 중독자가 다수이므로」, 『동아일보』, 1922.4.16; 「전주 아편 방독단 주최 강연회: 방독의 3요소(해각), 모르히네와 사회의 전도(김창희), 모르히네 중독 근치 방법(高橋), 모르히네 해독의 진상(김장문)」, 『동아일보』, 1922.4.19; 「고창 아편중독자 박멸시위 행렬」, 『동아일보』, 1926.9.23. 27) ① “지역별”에서 전주는 완주군, 옥구는 군산부를 포함한 수치임. ② 읍·면수는 1934년의 수치임. ③ 약품이용자율은 1932年 군인구에 대한 약품배포인수의 비율임. ④ 약품배포인 수는 1932년 10월~1933년 9월의 1개년간 수치임. 29) 도립병원과 공의가 설치되지 않은 전북 도내 165개면에 1932년부터 은사구료상이 설치되었다(『전라북도요람』, 1933: 278~229). 그에 앞서 1926년부터 이미 도비(道費)에 의해 구료상을 경찰주재소(파출소) 및 소학교·보통학교 등에 배치하였다. 은사구료상의 설치 이래 내용약품은 “은사구급상”에, 외용약품은 “구급상”에 각각 별도로 배치하는 방침을 채택했다(『전라북도요람』, 1934: 388~389). 30) 군별 인구 10,000명당 의료종사자(의사, 한지개업의, 의생)를 x, 군별 약품이용률을 y로 놓으면, 그 회귀선과 상관계수는 다음과 같다. y=-0.0176x+0.085(R2=0.258). 31) ① 인접관계는 『익산군사정』(1928) 부록의 지도에 의거 판정했음. ② 부락명과 행정동리의 대조는 『신구대조조선전도부군면리동명칭일람』(1917)에 의거함. ③ 여산면 가재리는 현재의 지도를 통해 판단했음. 32) ① 인구와 의료종사자 수는 1930년도의 수치를 이용했음. ② 의료기관수는 의사, 한지개업의, 의생 등을 합산한 것임(약종상은 제외). ③ 조사대상 전염병은 콜레라, 이질, 장티프스, 파라티프스, 천연두(마마), 발진티프스, 성홍열, 디프테리아, 유행성뇌척수막염. 33) <표 9>에 제시한 군별 인구 10,000명당 의료종사자(의사, 한지개업의, 의생)를 x, 군별 일본인 10,000명당 전염병 이환율을 y로 놓으면, 그 회귀선과 상관계수는 다음과 같이 도출된다. y=5.92x+57.5(R2=0.0088). 34) 愼蒼健은 의사와 조선민중 간에 신체·정신의 변조(変調)에 즈음해 그 주소(主訴)를 말하는 문화가 공유되지 못했던 저간의 사정을 위와 같이 지적하고 있다(愼蒼健, 2010: 42~43). 35) 愼蒼健은 앞의 논문에서 1930년대 경성에서는 전염병(이질, 장티푸스)의 조선인 ‘환자발생률’이 일본인의 그것을 대폭 하회하고 있었던 경성부·경성제대의 공동연구를 소개하는 가운데, 경성의 조선인은 전염병에 감염되더라도 ‘환자’화하는 비율이 낮았던 점을 지적하고 있다(愼蒼健, 2010: 31~33). 36) <표 9>에 제시한 군별 인구 10,000명당 의료종사자를 x, 군별 조선인 10,000명당 전염병 이 환자 수를 y로 놓으면, 그 회귀선과 상관계수는 다음과 같이 도출된다. y=0.631x+0.192(R2=0.333)(금산군은 제외). tablesTable 1.Table 2.Table 3.Table 4.Table 5.Table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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