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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J Med Hist > Volume 27(2); 2018 > Article
식민지기 윤일선의 일본 유학과 의학 연구*

Abstract

In this article, I looked at the life of Yun Il-sun, a representative medical scientist of modern Korea, and examined the following problems.
First, I took note of the position of the Korean people in the academic system of the Japanese colonial empire and restored the life of Yun Il-sun as specifically as possible. Yun was educated among Japanese people from elementary school to university. Although he received the best education at Old System High School and Imperial University and grew to be a prominent medical scientist, he could not overcome his identity as a colonized. Yun Il-sun, who moved from Keijo Imperial University to Severance Union Medical College, involved in activities founding of the Korean Medical Association and the Korean Medical Journal.
Second, I the meaning of ‘culture’ to the intellectuals in the periphery. Old System High School and Imperial University where Yun Il-sun was educated were the hotbed of ‘culturalism.’ Yun’s college days were the heyday of Taisho Democracy, and students were attracted to Marxism, Christian poverty movement, Buddhist cultivation movement and so on. Yun sought to overcome the ideological of young people through the acquisition of ‘culture.’ The ‘culture’ emphasized by Yun had an enlightenment characteristic that emphasized education, but it also functioned as a‘identity culture of educated elites.’
Third, I used the concept of ‘colonial academism’ and examined the aspects and characteristics of the colonial-periphery academic field, focusing on medicine. Yun Il-sun was a Korean professor at the Keijo Imperial University. He founded an academic society and published an academic journal for Koreans. He attempted to reproduce scholarship by doctoral dissertations. At the same time, several facts show that he was also in the affected area of ‘colonial academism’: the fact that he was kicked out of the Keijo Imperial University, the fact that the Korean Medical Association and the Korean Medical Journal were banned by Governor General, the fact that his students asked for doctoral degrees from Kyoto Imperial University where he studied. Yun Il-sun crossed the limits of ‘colonial academism’ and acted as the agent of empire. This was made possible by the characteristics of the academic discipline of medicine, the environment of the Severance Union Medical College, and personal traits of superior ability and indifference to politics.
I the postcolonial evolution of the ‘colonial academism’ and ‘culturalism.’ The mix of continuity and discontinuity from ‘colonial academism’ and the hybrid of Japanese academism and American academism, the Korean characteristics of ‘postcolonial academism.’ Yun tried to harmonize the American academism with the Japanese academism and the purity of academism. This effort was revealed as an emphasis on basic medicine and natural sciences. As combined with culturalism and indifference to politics, he was recognized as the symbol of ivory tower and academism.

1. 머리말

이 글에서는 근현대 한국을 대표하는 의학자인 윤일선(尹日善, 1896~1987)의 생애를 식민지기의 일본 유학과 의학 연구에 초점을 맞춰 살펴보고자 한다. 교토(京都)제국대학에서 배운 뒤 경성(京城)제국대학 조교수를 거쳐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교수를 지낸 윤일선은 식민지 조선에서 가장 이름난 의학자였다. 해방 후에도 서울대학교 총장을 지내고 초대부터 6대에 걸쳐 학술원장을 맡는 등 명실상부하게 한국 학술을 대표하는 지식인의 자리를 지켰다. 하지만 윤일선의 생애와 활동에 초점을 맞춘 연구는 충분하지 않다[1]. 윤일선의 화려한 경력에 압도되어 그의 삶에서 최고 엘리트의 밋밋한 성공담 이상을 끌어내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지레짐작해 버린 탓인지도 모르겠다.
이 글에서는 식민지라는 시대 조건에 유의하면서 윤일선이라는 걸출한 지식인의 삶과 한국 근대 학술의 모습을 음미하고자 한다. 그를 위해 다음 세 가지 점에 주목하겠다. 첫째, 윤일선의 생애를 가능한 한 구체적으로 복원하겠다. 자칫 굴곡 없어 보이는 삶에 돋보기를 들이대어 구석구석 배어 있는 시대상을 읽어내겠다. 제국 일본의 학제 속에서 최고의 지식인으로 자란 윤일선의 인생 여정에는 피식민자의 좌절과 제국의 지식인으로서의 영광이 교차하였다. 이 글에서는 다소 신변잡기적으로 비칠지라도 윤일선의 삶에 대한 전기(傳記)적인 서술을 시도하였다. 사소한 일화 하나하나가 윤일선이라는 문제적 인물의 삶을 이해하고 나아가 식민지라는 시대상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실마리가 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아울러 교토제국대학 기독교청년회 기숙사 일지에 남겨진 윤일선의 자필 메모를 새로이 발굴하여 식민지 지식인의 내면에 접근하고자 하였다.
둘째, 식민지-주변부 지식인에게 교양이 가지는 의미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윤일선이 교육을 받은 구제 고등학교와 제국대학은 ‘교양주의’의 산실이었다[2]. 근대 일본 사회는 서구 문명의 지적 산물을 자신의 시각에서 압축하고 선별하여 정전(正典)화된 교양을 만들어내었다. 일본의 근대화가 기본적으로 서구 따라잡기였다는 점을 떠올린다면, 엘리트 양성 기관인 구제 고등학교와 제국대학에서 교양이 강조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교양주의’는 철학, 문학, 역사 등 인문학 습득을 통한 인격 완성을 도모하였지만, 동시에 ‘학력엘리트의 신분문화’를 낳았다[3]. 윤일선은 일생을 통하여 교양과 독서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이 글에서는 일본인 엘리트 사이에서 교육을 받은 윤일선이 접한 교양의 내용과 그것이 그의 삶에 미친 영향을 살펴보겠다. 서구의 주변부인 일본에서 나름의 필요에 따라 구성된 교양이 다시 일본의 식민지였던 한국에서는 어떤 의미를 지녔는지에 대한 물음이 될 것이다.
셋째, 식민지-주변부 학문의 양태와 특징을 의학을 중심에 놓고 검토하겠다. 식민지 조선의 학술 혹은 학계를 설명하기 위해 ‘식민지 아카데미즘’이라는 개념이 제안된 바 있다. 학회나 학술지가 안정적이지 못하고 심지어 언어의 사용조차 자유롭지 못했던 조선의 상황을 아카데미즘의 결여로서가 아니라 ‘식민지 아카데미즘’으로서 파악하는 이유는, 근대 사회에서 아카데미즘이 가지는 불균등성과 비대칭성을 드러내고자 함에 있다[4]. 다만 기존 연구에서 주목한 ‘식민지 아카데미즘’의 특징은 역사학이나 경제학의 사례에서 추출된 것이다. 이 글에서는 윤일선의 활동에 초점을 맞춰 의학 연구에 ‘식민지 아카데미즘’ 개념을 적용할 수 있는지를 검토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의학 연구 그 중에서도 윤일선의 실천이 가지는 특징이 드러날 것이다.
제2장과 제3장에서는 윤일선의 삶에 대한 전기적 서술 방식을 기본으로 하면서도 각각 ‘교양주의’와 ‘식민지 아카데미즘’의 문제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맺음말에서는 해방 이후 윤일선의 활동을 간단히 소개한 뒤, 한국 근현대를 대표하는 지식인의 삶의 궤적을 되짚어보고, 본론에서 살핀 ‘교양주의’와 ‘식민지 아카데미즘’에 대해서도 그것이 식민지 이후(postcolonial) 어떻게 전개되었는가를 포함하여 다시금 곱씹어보겠다.

2. 제국 일본의 학제 속에서 최고의 교육을 받다

1) 구제 고등학교와 제국대학의 ‘교양주의’

윤일선은 1896년 10월 도쿄(東京)에서 아버지 윤치오(尹致旿)와 어머니 이숙경(李淑卿)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할아버지 윤영렬(尹英烈, 1854∼1939)은 대한제국의 무관이었다. 아버지 윤치오(1869∼1950)는 종형 윤치호(尹致昊)로부터 신학문을 접하고 1894년 도일(渡日)하여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가 세운 게이오기주쿠(慶應義塾)에서 수학하였다. 어머니 이숙경도 1년 뒤인 1895년 도일하였다[5]. 윤일선은 1903년 프랑스인 신부가 운영하는 교세이(曉星)소학교에 입학하였다. 도쿄 시바(芝)구의 셋방에 살았지만 부친의 교육열로 ‘요즘으로 치면 이름 있는 사립 국민학교’에 다니면서 ‘어려서부터 불어를 배울 수 있는 행운’을 누렸다[6].
1906년 7월 가족과 함께 귀국하여 충남 아산(牙山)군에서 조부모와 생활하며 우리말을 공부하였다[7]. “처음에는 우리나라 말도 잘할 줄 몰라 많은 애로를 겪었”다고 한다[8]. 같은 해 8월 서울로 올라와 저동(苧洞)에 거주하였다[9]. ‘신여성’[10]인 어머니 이숙경의 뜻에 따라 정동(貞洞)제일교회에 나가 세례를 받고 이후 80년간 같은 교회에 몸담게 된다. 어머니 이숙경은 1907년 1월 사망하였는데, “일선이는 책을 좋아하고 공부하기를 좋아하니 대학까지 보내 학자가 되도록 하”[11]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아버지 윤치오는 1908년 3월 주미공사관에서 근무하던 김윤정(金潤晶)의 딸인 고려(高麗)와 재혼한다[12]. 윤일선은 새어머니 ‘윤고려’에게 영어를 배웠다[13]. 다만 새어머니도 1913년 12월에 스물세 살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떴다[14].
윤일선은 1907년 지금의 퇴계로 3가에 있던 일본인 학교인 히노데(日出)소학교에 4학년으로 들어갔다[15]. 1910년에는 역시 일본인 학교인 경성중학교에 입학하여, 1915년에 졸업하였다. 같이 졸업한 63명 중 조선인은 윤일선 혼자였다[16]. 윤일선과 마찬가지로 히노데소학교와 경성중학교를 다닌 구용서(具鎔書)는 다음과 같은 회고를 남겼다. “매일같이 일인 아이들과 어깨를 견주어야 하고 어린 마음에 몹시 신경을 가냘프게 하였다. 당시 나와 같은 경우의 한인 생도가 4명가량 있어 소위 조선인 아동이 그들 시험대에 오른 격이다. 일어가 서툴어 과외를 하였으나 진급에는 무난하였고 졸업 후 경성중학교에 입학하여 일인 특수교육의 시련을 받았다. 상급생으로 4년에 윤일선 박사가 계셨다.”[17] 구용서의 회고를 통하여 윤일선의 소학교, 중학교 생활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윤일선은 어린 시절을 철저하게 일본인 사이에서 보낸 셈이다. 아울러 어려서부터 불어와 영어를 배울 기회를 누린 점도 이후 학자의 길을 걸은 사실과 관련하여 기억해 둘 만하다.
윤일선은 중학교 5학년 때 물리, 화학을 좋아하게 되었다. 자연계 현상과 법칙 등에 흥미를 느껴 뉴턴의 법칙과 다윈의 진화론, 멘델의 법칙 등 객관적인 자연의 진리에 심취하였다[18]. 1915년 중학교 졸업 후 “길러준 할머니에게 대학 진학의 뜻을 밝히자 (중략) 진학을 만류”[19]했지만, 윤일선은 배움을 향한 꿈을 꺾지 않았다. 1915년 6월 일본으로 건너간 윤일선은 오카야마(岡山)의 제6고등학교 시험을 치렀으나 결과는 불합격이었다. 결국 도쿄의 스루가다이(駿河臺) 학원에서 한 해 재수한 끝에[20], 1916년 9월 제6고등학교에 입학하였다. 당시 일본의 학제가 소학교 6년(6세 입학)에 중학교 5년인 데 반해, ‘제1차 조선교육령’(1911∼1922) 시기 조선인을 대상으로 한 학제는 보통학교 4년(8세 입학)에 고등보통학교 4년이었다. 따라서 조선인이 일본의 상급학교에 진학하려면 교육연한이 짧은 것이 문제가 되었지만[21], 일본인 학교를 나온 윤일선에게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당시 일본에서 소학교와 중학교를 마친 이를 위한 최고의 교육기관으로는 고등학교 3년과 대학 3년(의학부 4년)이 기다리고 있었다. 구제(舊制) 고등학교는 대학 예과로서 졸업생은 원칙적으로 제국대학 입학이 보장되었다. 그 중에서도 초기에 설립된 제1고등학교에서 제8고등학교까지는(이른바 ‘넘버스쿨’) 대표적인 엘리트 교육기관으로서, 1945년 이후에는 대부분 구 제국대학의 교양학부로 편입되거나 새로운 국립대학으로 발전하였다. 당시 제6고의 학과 편제를 보면, 제1부는 ‘법과대학 및 문과대학 지망자’, 제2부는 ‘의과대학의 약학과, 공과대학, 이과대학, 이공과대학 및 농과대학 지망자’, 제3부는 ‘의과대학 지망자’로 나뉘어 있었는데[22], 윤일선은 제3부에 입학하였다.
의과를 선택한 이유에 대하여 윤일선은 두 군데서 언급하였다. 먼저 “어려서부터 약질인 데다가 모친을 일찍 병마에 빼앗긴 그는 자연 인간을 질병으로부터 지켜주는 의학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되었고 우리나라에는 대학 출신 의사가 전무한 때였던 만큼 의사의 사회적 희소가치라는 점에도 눈을 뜨고 있었다”[23]는 회고가 있고, 또 다른 곳에서는 “내가 중학교 때였다. 서울엔 이름 있는 의사라고 해야 서양인 몇 사람과 한국인 의사는 고작 3, 4명에 불과했다. 어쩌다 집안 식구가 병이 나면 의사가 왕진을 왔는데 이럴 때마다 집안어른들은 의사를 선생님 이상으로 극진히 대접했다. 어린 나는 이 때부터 마음속으로 의사를 우러러보고 부럽기까지 했다. 새삼 돌이켜 보니 중학교 때부터 물리·화학 등 자연과학 공부에 취미가 있었던 나로선 의학 전공이 우연이 아닌 듯싶다”[24]라고도 회고하였다.
1916년 당시 제6고의 조선인 학생은 제3부 1학년인 윤일선과 제1부 3학년인 김준연(金俊淵) 두 사람뿐이었다[25]. 9월 입학을 앞두고 ‘호열자’(콜레라)가 크게 번졌다. 가족이 만류한 탓에 추위로 ‘호열자’가 잦아든 11월에야 도일(渡日)하여, 3학년 선배 김준연에게 책을 빌려 뒤쳐진 독일어를 공부하였다고 한다[26]. 김준연과는 1년간 함께 하숙하기도 하였다[27]. 그 밖에 오카야마에서는 훗날 의사로서 활약하게 되는 김형달(金炯達), 이갑수(李甲洙) 등과 교유하였다[28]. 당시 이갑수는 오카야마(岡山)의학전문학교 재학 중이었다[29].
졸업 후 제국대학 입학이 보장되므로 구제 고등학교 학생들은 입시에 대한 부담 없이 외국어, 문학, 역사, 철학을 폭넓게 학습하면서 교양을 넓히는 기회를 누렸다. 고등상업학교, 고등사범학교 역시 엘리트 학교였지만, 전문 과목의 비중이 높은 탓에 졸업생은 ‘전문지식’은 있지만 ‘교양’이 없다고 여겨졌다. 구제 고등학교는 문과의 경우 수업의 80%가 이과도 50%가 인문주의 교양교육이었다[30]. 특히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등 외국어 교육이 중시되었다. 외국어 교육은 단순한 어학 교육이 아니라 텍스트를 통해서 근대 서구의 사상·문화·사회 등을 배우는 교양 교육이었다[31].
윤일선의 경우도 고등학교에서 처음 독일어를 배웠으나, 수업이 주당 13시간이었고 독일인 교수가 직접 강의하는 수업도 많았기 때문에 1937년 6월에 독일을 방문했을 때 별다른 불편이 없었다고 한다. 또한 고등학교 시절 괴테, 쉴러 등 독일 문학과 일본 문학을 탐독하고, ‘인간과의 대화’가 들어있는 문학작품을 읽음으로써, ‘나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고 회고하였다[32]. 고등학교 시절은 학자 윤일선의 삶을 뒷받침한 인문적 소양 즉 ‘교양’을 갖추는 계기가 된 셈이다.
고등학교 재학 중에는 금강산 여행에서 마사무네 겐케이(正宗嚴敬, 1899∼1993)를 우연히 만나 같은 오카야마에서 학교를 다닌다는 인연으로 친구가 되었다. 윤일선은 정월에 마사무네의 고향인 해안가의 시골 마을에 놀러가 며칠 지내기도 하였다. 마사무네는 1929년 도쿄제대 이학부 식물학과를 졸업하고 타이베이(臺北)제대 이농학부 교수가 된다. 1937년 대만의학회에 참가한 윤일선은 마사무네를 찾았으나 마침 그가 양행(洋行) 중이라 만나지 못하였다[33]. 일본의 아시아 침략이 열어젖힌 공간 위를 제국의 지식인으로서 종횡하는 윤일선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윤일선은 1919년 9월 교토(京都)제국대학 의학부에 입학하였다. 같이 입학한 78명 중 역시 유일한 조선인이었다[34]. 제6고등학교 선배로 교토제대를 졸업한 김우영(金雨英)을 통해 기독교청년회(YMCA) 기숙사 입사를 신청하였다. ‘위원’인 경제학부 학생 이토 스케유키(伊藤祐之) 등이 주관하는 면접 시험을 치러야 했다[35]. 『교토제국대학 기독교청년회 기숙사일지(京都帝國大學 基督敎靑年會 寄宿舍日誌)』를 보면[36], 1919년 9월 13일 열린 ‘사생(舍生)총회’에서 새롭게 ‘입사허가’를 받은 다섯 명 중 한 사람으로 윤일선이 등장한다. 기숙사에서는 매일 기도회를 열고 성서를 읽었다. 윤일선을 포함한 15명 안팎의 기숙사생이 돌아가며 사회를 본 뒤 일지를 작성하였다. 윤일선으로서는 정동제일교회에서 시작한 신앙생활을 이어간 셈이다. 일지에는 주로 기도회 내용을 기록했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조금 길게 개인의 감상을 적기도 하였다. 윤일선은 1920년 5월 1일 일지에, 청량한 공기와 마찬가지로 ‘정신상의 양식’도 우리에게 자연스러운 갈망이라고 적었다. 경건한 태도가 엿보인다.
기숙사는 국제 교류의 장이기도 하였다. 1920년 5월에는 베이징(北京)대학 학생들이 방문하여 함께 만찬을 즐겼다. 윤일선은 동양인끼리 영어로 이야기를 나눈 것을 ‘골계(滑稽)’라고 표현하였다(1920.5.29)[37]. 1921년 12월에는 미국인이 방문하여 환담하였다(1921.12.4). 일지에 적힌 내용에 따르면 1920년도에는 종교강연부, 운동부, 사교집회부, 회계부, 도서부, 경조부를 두고 한 부에 2∼3명 씩 소속되었다. 윤일선은 운동부에 소속된 외에 기숙사 위원도 맡았다. 1920년 크리스마스 축하회에서 의학부 학생들은 「파우스트」 독일어 극을 선보였다. 감독은 동기생으로 후일 타이베이제대 교수가 되는 가나세키 다케오(金關丈夫)였고, 윤일선은 주인공 파우스트 역을 맡았다[38]. 윤일선은 그밖에도 당구, 바둑, 정구 등도 즐겼다[39]. 다만 많은 학생들이 귀성하는 정월의 기숙사는 쓸쓸했다고 한다[40]. 윤일선은 3년간의 기숙사 생활[41]에 대해, “청년회 기숙사에서 지내면서 많은 유익한 벗들을 얻을 수 있던 것에 감사하고 지금도(1941년-인용자) 여전히 두세 명과는 늘 소식을 받고 그 후로도 여러 가지로 지도를 받고 있다”[42]고 회고하였다. 현재 확인되는 윤일선이 마지막으로 작성한 일지는 1921년 12월 18일이다.
조선인 학생들과도 교류하였다. ‘상당한 민족주의자’인 김우영을 중심으로 조선인 유학생들은 다양한 사회운동에 참여하였지만, 윤일선은 독서회나 학생회에 일체 관계하지 않고 공부에 전념했다고 스스로 회고하였다[43]. 기숙사에서 나온 후, 김연수(金䄵洙), 이관구(李寬求), 최현배(崔鉉培) 등과 함께 1년간 자취를 하기도 했다. 동갑인 김연수와는 생일까지 같아(음력 8월 25일) 공동으로 생일축하를 하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44]. 교토부립의학전문학교 학생이던 김두종(金斗鍾)과도 교유가 있었다[45]. 그밖에 윤일선은 1922년 4월에 조선인 유학생 김진태(金鎭兌)가 교토제대 YMCA 기숙사에 제출한 입회신청서에 보증인으로 등장한다.
윤일선은 “교토제국대는 도쿄대학보다 학교 분위기가 매우 자유”[46]로웠다고 기억하였다. 신문에 연재한 회고록에는 한복을 입고 갓까지 차려 쓴 의학부 생리학 강좌의 이시카와 히데쓰루마루(石川日出鶴丸) 교수와 함께 찍은 사진이 실려 있다[47]. 윤일선의 교토제대 시절은 이른바 ‘다이쇼(大正) 데모크라시’의 전성기와 겹친다. 다이쇼 연간(1912∼1926) 특히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적으로 평화와 민주주의 그리고 반제국주의 기운이 높아지면서 일본에서도 정당정치가 자리를 잡고 ‘개조(改造)’와 ‘혁신(革新)’이 시대를 상징하는 말이 되었다.
교토제대의 자유주의 학풍과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기운은 YMCA 기숙사에도 충만하였다. 기숙사 선배인 이토 스케유키는 “가와카미 하지메(河上肇), 가가와 도요히코(賀川豊彦), 니시다 덴코(西田天香) ― 당시의 새로운 개조 일본의 밝은 별이었던 그러한 이들의 감화 영향이 우리나라의 일반 사회와 더불어 우리 청년회 생활에도 미쳤던 것을 놓쳐서는 안 된다”[48]고 회고하였다. 가와카미 하지메는 교토제대 교수로서 당대 일본을 대표하는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였고, 가가와 도요히코는 기독교 사회주의자로서 저명한 빈민운동가였으며, 니시다 덴코는 교토를 거점으로 삼아 불교계 수양단체 잇토엔(一燈園)을 이끌던 인물이었다. 이토는 마르크스주의 경제학, 빈민운동, 그리고 니시다의 수양론에 공명한 셈이다. 특히 이토는 니시다 덴코를 YMCA 기숙사로 초대해 강연회를 열었을 때 윤일선도 참가했다고 회고하였다[49]. 윤일선 본인도 이토의 권유로 여럿이 모여 니시다 덴코의 이야기를 들었다고 기숙사 일지에 기록을 남겼다(1920.10.10). 다양한 사상적 편력을 통하여 윤일선의 기숙사 생활에 많은 영향을 끼친 이토는 후일 무교회주의(無敎會主義) 전도자로서 활약하게 된다[50].
당시 교토제대 경제학부 학생으로 윤일선과 같이 자취를 하기도 한 이관구(李寬求)도 비슷한 사상적 모색을 벌였다. 이관구는 가와카미 하지메의 마르크스주의 경제학 강의를 수강하고, 니시다 덴코의 잇토엔을 방문하고, 고베(神戶) 빈민굴로 가가와 도요히코를 찾아가고, 한 동안 홋카이도(北海道) 수도원에 들어가 생활하기도 했다. 이관구는 “윤일선(尹日善)·황종희(黃鐘禧) 두 분도 나와 함께 니시다(西田) 씨를 자주 심방(尋訪)하였다. 그리고 윤일선형과 더불어 규슈(九州)의 일향촌(日向村)으로 무샤노코지 사네아쓰(武者小路實篤)씨의 이상촌을 찾아 수일 묵기도 하였다”[51]고 회고하였다. 마르크스주의 시대는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교양주의’의 뒤를 이어 찾아왔다[52]. 다만 서양 근대 문물에 대한 숭배라는 점에서는 ‘교양주의’와 마르크스주의는 상보적인 관계에 있었다고 평가된다[53]. 이토 스케유키나 이관구의 사상적 모색에서도 이러한 시대상을 엿볼 수 있다.
기숙사 일지에는 젊은 날 윤일선을 괴롭힌 고민의 편린이 엿보인다. “스스로 한번 스스로를 돌아보면 늘 그렇게 생각은 하지만 정말로 깊이 없는 천박한 종이와 같은 생활을 하고 있다”(1920.11.17). “오래 동안 게으름을 피우다가 지난 20일 돌아와 처음 사회였다. 모두와 함께 기도하면서도 스스로도 전통과 형식의 쇠사슬에 끌려 다니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해서 깨뜨릴 정도의 힘은 없다. 스스로도 잘 알고 있다. 스스로는 그저 끌려 다니면서 살고 있는 것처럼 생각되어 한심하다. (중략) 하느님이 우리에게 즐거운 날을 주시지 않는 걸까 아니면 스스로 즐거운 날을 받지 않는 것일까”(1921.11.23). 1921년 여름에서 가을에 걸쳐 윤일선은 조선에 돌아와 있었던 듯하다. 이관구의 회고에 따르면 윤일선은 1921년 2월 “장결핵으로 피골이 말라붙은 채 히가시야마(東山)병원에 입원”하여 “7월말 경에 완쾌되어 귀성”[54]하였다고 한다.
윤일선은 사상적 고뇌를 독서와 교양의 체득으로 헤쳐 나가고자 했다. 일지에도 “교양이 없는 것이 부끄럽다”면서 “모두가 함께 교육을 받고 함께 모두 진실로 인생을 맛보고 우주를 알고 함께 나아가야 한다”고 적었다(1920.6.11). 윤일선은 “기독청년회 기숙사에 같이 있는 친구와 종교, 철학, 미술강좌도 듣고 교양서적을 많이 읽으며 의학 공부에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55] 문학, 철학, 음악, 미술 분야의 책을 섭렵하고, 일본을 찾은 인도 시인 타고르의 특강을 듣고 감동하였다. 당시 월 50엔의 조선총독부 장학금을 받았는데[56], 한 달 생활비의 절반인 25엔을 주고 1주일 치 음악회 입장권을 사기도 했다[57]. 윤일선이 졸업한 이후지만 1925년 10월말 현재 조선총독부 ‘급비생(給費生)’은 일본 전역에 71명 있었다[58].
이렇게 형성된 교양과 독서 습관은 오래도록 이어졌다. 1937년에 쓴 수필에서는 “내가 최근 보는 엽에 노혀 있는 서적을 들어 보겠다. 야마오카(山岡) 저 『화학사전(化學史傳)』, 홍자성(洪自誠) 『채근담(菜根譚)』, 쓰지무라(辻村) 저 『스위스(瑞西)의 일기(日記)』, 「슈라이엘맛헬」의 『독상(獨想)』, 「몬테뉴」의 『수상록(隨想錄)』, 기노시타(木下) 저 『예술한보(藝林閑步)』 등이다. (중략) 끗으로 다시 한 번 문자(文字)는 우리에게 준 위대한 보물이요, 서적은 인류의 최대의 걸작품이요, 독서는 우리의 최고의 복락(福樂)이라고 말하고 붓을 노켓다”[59]고 교양을 과시하였다. 윤일선의 열거한 책을 보면 중국 고전인 채근담도 눈에 띄지만, 역시 정전화된 서구의 지적 산물과 일본의 문학작품 등이 대부분이었다.

2) 후지나미 교수와 병리학 연구

윤일선은 “임상의학을 하느냐 기초의학을 하느냐”의 선택은 의학도라면 누구나 한 번은 부딪치게 마련인 결단의 고민이라면서, 기초의학과 임상의학을 ‘나무의 뿌리와 꽃의 관계’에 비유하였다. 실은 스스로도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가라는 고민에 신경 쇠약에 걸릴 지경이어서, “이관구 씨와 이 문제를 놓고 토론을 하다가 얘기가 철학적인 차원으로 번져 인생의 목적을 논하느라고 밤을 새운 일도 있었다”고 한다[60]. 교토제대 의학부에서는 1∼2학년 때 기초의학을 배우고, 3∼4학년 때 임상의학을 배우는데, 스스로는 “기초의학이 학문 같이 여겨졌다”고 한다[61]. 거슬러 올라가면, 고등학교 화학 시간에 유명한 화학자들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학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품게 된 것이 병리학을 택하게 된 계기의 하나였는데[62], “자질이나 사명감 등을 고려해서 결국 병리학을 택할 결심을 굳혔다”[63]고 회고하였다.
윤일선이 기초의학 그 중에서도 병리학을 택한 데는 ‘독실한 기독교인’[64]으로서 YMCA 기숙사 생활에도 깊게 관여한 의학부 병리학교실의 후지나미 아키라(藤浪鑑) 교수의 영향도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교토제대 기독교청년회 이사장이던 후지나미 교수는 매주 수요일 기숙사를 찾아 학생들과 점심을 같이하며 환담하였고, 매주 금요일 저녁에는 학생들 특히 타지에서 온 유학생들을 집으로 불러 저녁 식사를 같이하였다[65]. 후지나미 교수는 자신의 스승이자 ‘병리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독일인 루돌프 칼 피르호(Rudolph Carl Virchow, 1821∼1902)에 대해 기숙사에서 강연을 열기도 하였다[66]. 윤일선은 “후지나미 교수는 또 의학도는 임상의가 되어 질병을 고쳐주는 일도 중요하지만 이보다는 기초의학을 발전시키고 나아가서 훌륭한 임상의를 길러내는 일이 인류에 보다 봉사하는 길이라고 역설”하였다고 기억하였다[67].
윤일선은 1923년 6월 교토제대 의학부를 졸업하였다[68]. 다만 졸업과 동시에 조선총독부 장학금이 끊긴 탓에 대학원 등록금이 없어 병리학교실의 부수(副手)로 들어갔다. 의학부 교실의 ‘직원’은 교수-조교수-강사-조수로 구성되었다. 무급인 부수는 20명이나 있어 앉을 자리도 없었다고 한다. 다행히 1년 후 후지나미 교수가 대학원 등록금을 대납하고 월 90엔의 장학금을 알선해 주었다[69]. 1924∼25년도 대학원생 명부에는 윤일선 이름이 올라 있다[70]. 후지나미 교수가 준 첫 연구테마는 ‘임상진단과 병리해부학적 진단의 대비’였다. 윤일선은 교토제대 의학부에 병리학교실이 생긴 이래 실시한 모든 부검 기록을 검토하는 성실함을 보였다. 그밖에 ‘피로와 종양발육과의 관계’, ‘라놀린 사육이 가계육종에 미치는 영향’ 등의 연구를 후지나미 교수와 함께 진행하였다[71].
대학원 시절 세브란스의전 부교장에게 교수 초빙 제의를 받기도 하였다. 어렵게 공부하던 처지에 월급 2백 원이라는 조건에 마음이 끌리기도 했지만, 아직 남을 가르칠 실력이 없다는 이유로 거절하였다. 그러자 후지나미 교수는 ‘속으로 윤 박사가 거절하기를 바라고 있었던지 무척 반가와 하면서’ 연구실을 하나 마련해 주고 아울러 ‘제국학사원’ 연구비 3천 엔을 알선했다고 한다[72]. 다만 윤일선은 심한 설사병 탓에 1925년 9월 자퇴원을 내고 귀국하게 된다[73]. 1934년 11월 후지나미 교수가 사망하였다. 윤일선은 『후지나미선생 추도록(藤浪先生追悼錄)』(1935)에 실은 「후지나미 선생과 나(藤浪先生と私)」에서 “병리의 구두시문 때 암에 대해 질문을 받은 것은 지금도 뇌리에 남아 있어 종양 연구로 자신을 이끌었다”고 회고하였다. 또한 서울로 돌아온 후에도 여러 일로 편지를 통해 지도를 청했으며, “학문과 인격 그리고 신앙을 선생님으로부터 배울 수 있었다”고 밝혔다[74].
윤일선이 1941년에 남긴 회고를 보면 많은 학생들이 후지나미 교수에게 감화를 받아 병리학교실을 택한 것을 알 수 있다. 윤일선은 교토제대 병리학교실의 모리 시게키(森茂樹), 스기야마 시게테루(杉山繁輝) 양 교수를 비롯해, 역시 의학자가 된 아오야기 안세이(靑柳安誠), 가나세키 다케오(金關丈夫), 미야자키 마쓰키(宮崎松記) 등이 모두 기숙사 출신이라고 밝혔다[75]. 후지나미 교수의 뒤를 이어 1938년부터 교토제대 의학부 병리학교실 제1강좌 주임교수를 맡은 스기야마 시게테루와 1940년 같은 교실 제2강좌 주임교수에 오른 모리 시게키[76]가 모두 YMCA 기숙사 출신이었음을 알 수 있다. 기숙사에서 열린 크리스마스 축하회에서 윤일선과 함께 연극 「파우스트」를 공연했고 후일 타이베이제국대학 의학부에서 인류학자로 명성을 떨치게 되는 가나세키 다케오도 역시 같은 병리학교실 출신이었다. 교토-경성-타이베이를 잇는 ‘제국의 병리학’의 배경으로서 후지나미-YMCA 인맥이 존재한 셈이다.

3. 식민지 조선에서 의학을 연구하고 가르치다

1) 경성제대 의학부에서 세브란스의전으로

1925년 귀국한 윤일선은 약 1년간 요양 후, 후지나미 교수의 소개로 경성제대 의학부장 시가 기요시(志賀潔) 교수를 만났다. 그리고 병리학교실의 도쿠미쓰 요시토미(德光美福) 교수와 면담을 거쳐 부수(副手)로 채용되었다. 후지나미 교수는 시가 교수와 도쿄제대 의학부 졸업 동기였다. 윤일선은 조교수로 추천을 받았으나 경성제대 사정상 부수로 채용되었고 그 대신 특별히 월 50원을 지급 받았다고 회고하였다[77]. 1929년에 박사학위 청구를 위해 교토제대에 제출한 이력서에는 1926년 6월에 경성제대 의학부 ‘부수’로 임명된 후 1927년 2월에 다시 ‘조수’로 임명되었다고 적었다[78]. 다른 회고에서는 조수로 임명된 시기를 1927년 12월로 적기도 하였다[79].
대학일람 등의 공적 기록을 보면 1927년 4월 현재 경성제대 의학부 ‘병리학 제이강좌 부수’[80]로 근무하였고, 1928년 3월 30일 관보 기사 ‘경성제국대학 조수 윤일선 임(任) 경성제국대학 조교수 서(敍) 고등관 칠등’[81]에 보이듯 조교수로 임명되어, 1928년 4월 현재 ‘병리학 제이강좌 조교수’[82]로 재직 중인 것이 확인된다. 1929년 6월의 기록에는 ‘구(舊)직원’으로 분류되어 1928년 3월 30일에서 1929년 4월 18일까지 ‘조교수’로 근무한 것으로 나와 있다[83]. 윤일선이 경성제대 조교수로 임용된 사실은 『동아일보』에 「윤일선씨, 경대(京大) 교수 신임, 조선인으론 처음」이라는 기사가 실리는 등 사회적으로 화제가 되었다[84]. 1945년 해방까지 조선인 가운데 경성제대에서 조교수 이상 전임교원으로 근무한 이는 실질적으로 윤일선 한 사람이었다[85].
윤일선은 조교수 월급이 본봉 120원에 직무수당 30원을 더해 150원이었다고 회고하였다. 일본인은 60%의 가봉이 있었다. 참고로 제6고 선배인 동아일보 편집국장 김준연의 월급은 100원이었고, 당시 쌀 한 가마는 12원이었다고 한다. 당시 윤일선은 윤보선(尹潽善)의 가족과 함께 안국(安國)동 8번지에 거주하였다. 현재 문화재로 지정된 ‘윤보선 가옥’이다. 경성제대 취직 후 집안에서 결혼 재촉을 받은 끝에, 1927년 10월에 정동제일교회에서 조마가렛(趙榮淑, 1902∼2003)과 결혼식을 올렸다. 조마가렛은 이화(梨花)학당 대학부를 나와 감리교 계통인 평양 정의(正義)학교 교장을 지낸 재원으로 당시는 이화여전 재학 중이었다[86].
경성제대 병리학교실에서는 외국어 논문을 요약 발표하는 초독회(抄讀會)를 매주 열었는데, 윤일선은 물론 도쿠미쓰 교수, 우메다(梅田) 조교수 모두 영, 불, 독어에 능통하여 매우 효율적으로 진행되었다. 윤일선은 경성제대 의학부 기요에 주요 논문을 투고하는 한편, 조선의학회, 일본병리학회 등에서 연구 결과를 발표하였다. 이렇게 발표된 논문은 해외 유수 잡지에도 초록이 실리거나 인용되는 형태로 소개되었다[87]. 실험의학에 조예가 깊은 도쿠미쓰 교수의 도움을 받아, 과민증과 내분비선의 관계 특히 고환과의 관계를 연구하여[88], 논문 “On the Interrelationship between Anaphylaxis and Hormones: Especially, researches on Anaphylaxis and Testicular Hormones”를 가지고 1929년 1월 교토제대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박사학위 심사료는 100원이었다. 윤일선에 따르면 한국인으로서는 여섯 번째 의학박사였다고 한다. 당시 강사로 나가던 세브란스의전 2학년 학생들이 명월관에서 축하연을 베풀어 주었고[89], 신문에도 대서특필되었다[90].
한편 학감(學監) 오긍선(吳兢善)의 권유로 1926년부터 세브란스의전에 출강하였는데[91], 1929년 4월에는 아예 세브란스의전으로 적을 옮겼고[92], 1년 후인 1930년 5월에는 교수로 승진하였다[93]. 영, 불, 독어로 된 전문서적과 최신 의학 잡지가 구비된 경성제대 중앙도서실과 달리 세브란스의전에는 도서실이 없었다. 윤일선은 교장 에비슨(Oliver R. Avision)과 학감 오긍선을 설득해 중앙도서실을 설치하고, 마루젠(丸善)서점 경성지점을 통해 양서(洋書)를 구입하였다[94]. 무엇보다 큰 변화는 윤일선이 병리학교실 주임교수가 됨으로써 세브란스의전에도 일본식 교실제도가 도입된 것이다[95]. 윤일선은 “내가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의학 교육에 본격적인 연구 시스템을 도입”[96]하였으며, “일본서 내가 배웠던 대학교육제도와 교육과정을 최대한 활용하여 우리나라 실정에 맞도록 학생들 하나씩하나씩 지도해 나갔다”[97]고 회고하였다.
‘일본에서 독일식 실험실 의학을 배운 유능한 의학자’인 윤일선이 세브란스로 옮김에 따라 미국식 실용주의 의학의 학풍이 강하던 세브란스에 독일식 실험실 의학이 접목되었다. 이후 윤일선의 지도를 받아 세브란스에서도 많은 기초의학 연구들이 이루어졌는데, 이러한 ‘세상적 기준’에서의 발전이 초기에 설정된 소박한 선교 이념과 갈등을 일으키는 요인이 되었다는 평가도 있다[98]. 윤일선 스스로도 “당시 세브란스의전에는 미국, 캐나다, 영국 등에서 파견되어 온 여러 명의 교수가 있었는데 이중 일부는 내가 병리학과 주임교수가 되자 처음에는 다분히 비판적”[99]이었다고 회고하였다. 물론 나중에는 이들로부터 ‘전폭적인 지원’[100]을 받았다고 한다.
1934년 에비슨에 이어 조선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오긍선이 교장에 취임하자, 윤일선은 “시간표를 짜고 교수의 강의시간을 배당하는 등 학교의 운영에 관여하는 직책”인 학감을 맡게 되었다. 윤일선의 가장 큰 업적은 세브란스의전을 문부성 ‘지정학교’로 만든 일이다[101]. 당시 세브란스의전 졸업생은 총독부의 의사면허증을 받아 조선에서만 의료행위가 가능했는데, 문부성 ‘지정학교’가 됨으로써 1935년 졸업생부터 조선은 물론 일본, 만주에까지 가서 의료행위를 할 수 있게 되었다[102]. 윤일선은 ‘일본 문부성을 내 집 드나들다시피’하면서 교섭에 임했다고 당시를 회고하였다[103].
1937년 봄에는 오긍선의 권유로 이용설(李容卨), 조동수(趙東秀)와 함께 구미 의학계 시찰에 나섰다[104]. 학교에서 제공한 3천 원에 집안(윤치호 등)에서 모아준 5천 원을 보태 여비 8천 원(당시 환율로 약 4천 달러)을 마련한 윤일선은, 1937년 4월 14일에서 11월 8일까지 7개월간 구미 여러 나라를 시찰하였다. 일본-상해-홍콩-카이로-이탈리아-스위스-오스트리아-독일-스웨덴-덴마크-프랑스-영국-미국-하와이-일본의 여정으로 ‘세계 병리학계를 순례’한 것이다[105]. 훗날 윤일선은 ‘세브란스 의전에서 보낸 17년’을 ‘80평생 중 가장 보람 있는 시기’였다고 회고하였다[106].

2) ‘식민지 아카데미즘’을 넘어

식민지에서 학문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보편성과 가치중립성을 지향하는 학문은 제국의 중심과 식민지라는 불균등하고 비대칭적인 조건 속에서 어떠한 양상을 띠었을까. 백남운(白南雲), 김광진(金洸鎭) 등 주로 경제학자나 역사학자의 사례를 분석하여 ‘식민지 아카데미즘’이라는 개념을 제시한 연구에서는 그 특징으로서 아래 다섯 가지를 든 바 있다.
첫째, 검열과 탄압이다. 학술 논문에 대해서도 검열은 일상적이었다. 잡지와 도서에 대한 발행금지 처분도 수시로 내려졌다. 급기야는 1938년에 일어난 ‘연희전문 적화사건’에서 보듯 일상적인 연구와 교육 활동에 대해 치안유지법 위반이라는 혐의를 덧씌우는 일도 일어났다. 둘째, 언어의 위계이다. 우리말을 학술용어로 끌어올리기 위한 노력은 계속되었지만, 일본어와 격차는 컸다. 나아가 1930년대 중반이 되자 조선총독부는 각종 강연회를 일본어로 진행할 것을 강요하였고, 식민지 말기에는 조선인이 경영하는 전문학교에서도 우리말을 교수용어로 사용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셋째, 학문 재생산의 부재이다. 경성제대 20년 역사에서 조선인 교원은 실질적으로 윤일선 한 사람 뿐이었다. 조선인은 제국대학 아카데미즘의 대상은 될 수 있어도 주체는 될 수 없었다. 조선인이 경영하는 연희전문학교나 보성전문학교 교원도 대부분 유학파였다. 스스로 연구자를 재생산하지는 못한 셈이다. 넷째, ‘미디어 아카데미아’이다. 대학이나 전문학교가 전통적인 의미의 아카데미즘을 담보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조선인의 지식 활동은 신문, 잡지 등 미디어에 크게 의존하였다. 다섯째, 중앙학술단체 창설 시도와 좌절이다. 학회 등 학술 단체를 세우려는 노력은 계속되었다. 예컨대 1936년 1월에 백남운은 전문학교, 학회, 신문사 등에 산재해 있는 조선인의 학술 역량을 결집하여 ‘중앙 아카데미’를 창설하자고 제안했다. 민족국가의 뒷받침이 없는 식민지 상황을 민간 역량의 결집을 통해 극복하려는 시도였으나 실현되지는 못했다[107].
이와 같은 ‘식민지 아카데미즘’의 특징은 자연과학 특히 윤일선이 몸담은 기초의학에도 과연 적용될 수 있을까. 윤일선의 학술 활동에 초점을 맞춘다면 ‘식민지 아카데미즘’의 한계를 넘어서는 측면이 눈에 들어온다. 무엇보다 윤일선은 경성제대의 실질적으로 유일한 조선인 교수였다. 세브란스의전으로 옮긴 뒤에는 박사학위 논문 집필을 지도함으로써 학문 재생산을 꾀하였다. 첫 제자인 이영춘(李永春)은 1935년에 교토제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당시 신문에서는 ‘철두철미 우리 힘으로 길러낸 최초의 박사, 윤일선 박사의 지도하에 연구, 문화조선에 새 광명! 당당한 논문에 경대(京大)에서도 놀라, 병리학회석에서 세 번 강연, 감격에 넘치는 사제’[108]라고 보도하였다. 이어 1939년에는 ‘윤일선 박사의 지도로 제이의 박사’[109] 김성식(金聖湜)과 ‘순조선 의박의 모태 윤일선 박사 지도로 삼차 의박’[110] 조동수(趙東秀)가 잇달아 박사학위를 받았다. 1945년까지 10명 이상이 윤일선이 지도한 논문으로 교토제대 의학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것이 확인된다. 그밖에 교토제대로 직접 유학가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제자도 최재유(崔在裕)[111] 외 다수 존재하였다. 나아가 이렇게 지도한 제자들은 구미 학계에서 인정받는 연구 성과를 내었다. 윤일선은 1937년 구미 시찰 중, 비인 대학의 우르바 교수에게서 받은 『알레르기성 질환』이라는 책에 이영춘, 최재유의 논문이 인용된 것을 확인하고 감동하였다고 회고한 바 있다[112].
학회를 결성하여 성공적으로 운영하고 아울러 학회지를 안정적으로 발행한 사실도 주목할 만하다. 윤일선은 세브란스의전으로 이적 후 조선인 의사들만의 단체 결성을 구상한 끝에 경성제대 의학부 이갑수(당시 조수, 후일 강사) 등과 협의하여 ‘조선의사협회’를 창설하였다. 회원은 400여 명이었다[113]. 1930년 2월 21일 명월관에서 열린 창립총회에서 간사장은 박계양(朴啓陽)으로 결정되었고, 윤일선은 임원을 맡았다[114]. 1930년 3월 6일 간사회를 열어 부서를 결정하였는데, 서무부, 경리부, 사회부 중 윤일선은 사회부에 속하였다[115]. 1935년 9월 총회에서 제정된 장학상(獎學賞) 심사위원으로 백인제(白麟濟), 이갑수와 더불어 활동하기도 하였다[116]. 1936년 9월 총회에서는 사회부장을 맡았다[117]. 조선의사협회는 학술강연회도 개최하였다. 1935년 9월 세브란스의전에서 열린 제2회 학술강연회에서는 모두 22편의 연구발표가 이루어졌는데, 그 중 16편이 세브란스의전 각 교실 소속 연구자에 의한 것이었다[118].
조선의사협회는 우리말로 된 학술지 『조선의보(朝鮮醫報)』를 발행하였다. 계간지로서 제1권 제1호(1930년 11월)에서 제7권 제4호(1938년 2월)까지 발행되었는데, 윤일선은 창간호부터 제3권 제4호(1934년 3월)까지 ‘편집자’를 맡았다. 제1권 제1호 이래 판권지에 표시된 발행소는 ‘조선 경성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 병리학교실내 조선의사협회’였는데, 이는 윤일선이 편집자에서 물러난 뒤에도 바뀌지 않았다. 조선의사협회 운영과 조선의보 발행에서 윤일선이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식민지 조선에는 이미 1911년에 일본인 의사가 중심이 된 조선의학회가 창립되어 『조선의학회잡지(朝鮮醫學會雜誌)』를 꾸준히 내고 있었고, 윤일선도 몇 차례 논문을 게재한 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인이 중심이 된 학회를 세우고 우리말 학술지를 발간한 일은 ‘우리나라의 국적 있는 의학 및 병리학을 위하여 진력’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119]. 더욱이 예컨대 1933년 6월 창설되어 ‘학술부대의 참모본영’으로 주목 받은 ‘조선경제학회’가 학회지조차 발간하지 못하고 1936년경부터 사실 상 활동정지에 들어간 것을 생각해 보면 커다란 차이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120].
물론 윤일선의 학술 활동은 ‘식민지 아카데미즘’의 자장을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었다. 윤일선의 실천을 위에 언급한 ‘식민지 아카데미즘’의 다섯 가지 특징과 관련지어 생각해 보자.
윤일선이 검열과 탄압을 받은 흔적은 뚜렷하지 않다. 다만 경성제대를 그만두는 과정은 석연치 않다. 경성제대 의학부 제1회 졸업생으로 1927년 윤일선이 조수로 있을 때 ‘병리실습강의’을 듣기도 했던 김성진(金晟鎭)의 회고에 따르면, 윤일선은 1928년 조교수로 승진했으나 ‘본(本)강의’가 허용되지 않아 “울분과 비육지탄(髀肉之嘆, 髀은 脾의 오기-인용자)을 금치 못하면서 묵묵히 연찬(硏鑽)을 계속”하였지만 끝내 “경원추방(敬遠追放) 당하다시피” 경성제대를 떠났다고 한다[121]. 명백한 민족 차별이 존재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언어의 위계라는 점에서는 윤일선은 특수한 경우였다. 일본에서 태어나 자란 탓에 어린 시절에는 오히려 우리말이 서툴 정도였고, 이후 소학교에서 대학까지 교육 배경을 고려하더라도 일본어 사용에 불편을 느꼈을 거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게다가 불어, 영어, 독어를 불편 없이 사용한 것은 학자로서 큰 장점이었다. 하지만 언어의 위계는 개인적인 능력 유무를 넘어서는 사회적 문제였다. 태평양전쟁 발발 이후 세브란스의전에서도 한국어/영어 대신 일어/독어 사용이 강제되었다[122]. 윤일선이 중심이 되어 꾸려가던 우리말 학술지 『조선의보』도 1937년부터 일본어 논문이 등장하더니, 1938년에는 끝내 폐간되기에 이르렀다.
학문 재생산의 부재와 관련해서는 무엇보다 식민지 조선에서 연구자를 길러내고 박사학위를 수여할 수 있는 유일한 대학이었던 경성제대를 떠나게 된 상황 자체가 문제적일 수밖에 없다. 세브란스의전으로 옮긴 뒤 여러 명의 박사를 길러 냈지만, 일본 대학에 논문 심사와 학위 수여를 의존했다는 점에서 ‘철두철미 우리 힘으로 길러낸’이라는 수식어에도 불구하고 개운치 않은 면이 있다. 학문 재생산 부재라는 현실은 예나 지금이나 ‘유학’이라는 사회적 장치와 굳게 결합되어 있다. 윤일선의 제자는 대부분 윤일선이 배운 교토제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더욱이 윤일선은 일본병리학회 참석시 교토제대 기요노(淸野) 교수에게 제자들의 논문 심사를 부탁했다는 회고를 남기고 있다[123]. 윤일선 자신의 유학 경험이 제자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친 셈이다.
전문학교와 신문사 등이 연계하여 개최한 각종 강연회도 일종의 ‘미디어’라고 볼 수 있다. 강연회의 강사 및 청중은 신문 학예면 혹은 종합잡지의 필자 및 독자와 겹친다[124]. 1935년 여름 동아일보는 민간의 여섯 개 전문학교와 연계하여 ‘하기순회강좌(夏期巡廻講座)’를 실시하였다. 모두 6개 팀(關北隊, 關西隊, 中央隊, 南部隊, 湖南隊)을 꾸려 한 팀당 4∼5명씩 모두 20여 명의 전문학교 교수와 신문사 기자를 강사로 동원한 대규모 기획이었다. 윤일선(世專, 위생)은 김두헌(金斗憲, 佛專, 철학), 정인섭(鄭寅燮, 延專, 문예), 김광진(金洸鎭, 普專, 경제)과 더불어 원산, 함흥, 청진을 도는 관북대에 속하였다[125]. 윤일선의 강연 제목은 예컨대 청진에서는 「최근 의학의 진보」였다[126]. 윤일선 역시 ‘미디어 아카데미아’에서 활약한 식민지 지식인의 한 사람이었다.
윤일선이 관여한 중앙학술단체로는 조선의사협회가 있었다. 10년 가까이 안정적으로 운영되었으나 조선총독부의 탄압으로 1939년 11월 끝내 해산되고 말았다. 해산의 빌미가 된 건 그 해 가을 하와이에서 열린 ‘서태평양지역 외과학술대회’에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1937년 세브란스의전 교수를 사임한 이용설(李容卨)을 조선 대표로 파견한 일이다. 이 사실이 같은 회의에 참가한 일본의사회 대표를 통해 조선에 알려지자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교수회에서까지 논란이 되었다고 한다[127]. 이후 일본인이 운영하던 조선의학회도 해체한 뒤, 1942년 12월 16일 통합단체로서 새로이 ‘조선의사회’가 결성되었다[128].
윤일선은 ‘식민지 아카데미즘’ 자장 안에 있으면서도 그 임계에 다가서는 활동을 펼친 셈이다. 제국 학제 속에서 최고의 교육을 받은 윤일선은 경성제대라는 식민지대학에서 ‘제국 아카데미즘’을 수행한다. 결국 피식민자라는 정체성을 어찌하지 못하고 경성제대를 떠나지만, 세브란스의전에서는 ‘제국 아카데미즘’을 이식하는 역할을 맡는다. 윤일선의 활동 궤적에서는 피식민 주체로서의 한계뿐만 아니라 제국의 주체(agent)로서의 능동성을 엿볼 수 있다. 아래에서는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를 몇 가지 생각해 보고자 한다.
첫째, 의학이라는 학문의 특성이다. 무엇보다 자연과학이라는 학문 특성상 정치나 사회 문제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울 수 있었다. 예컨대 조선어 사용이 전면적으로 금지된 상황에서도 연구를 지속할 수 있었다. 토끼 위에 암종(癌腫)을 만드는 데 성공한 윤일선은 1943년 일본 병리학회에서 연구 결과를 발표하였다[129]. 또한 1944년 5월에는 중국 난징(南京)에서 열린 ‘동아의학대회(東亞醫學大會)’에도 참가하는데[130], 이를 예컨대 비슷한 시기에 열린 ‘대동아문학자대회’ 등과 비교해 보면 이미 두 대회를 바라보는 우리의 태도가 사뭇 다름을 알아차릴 수 있다. 아울러 의사라는 전문가 집단의 일원이었기 때문에 총독부의 자의적인 탄압을 어느 정도 피할 수 있었던 면도 놓쳐서는 안될 것이다. 이는 의사와 마찬가지로 조선인만의 독자적인 단체를 구성해 활동할 수 있었던 변호사와 유사한 측면이 있다[131].
둘째, 세브란스의전이라는 환경이다. 경성제대에서는 강의는 일본어, 학술용어는 독일어를 사용하였지만, 세브란스의전에서는 강의는 한국어, 학술용어는 영어를 사용했기 때문에, 이적 직후에는 말이 익숙하지 않아 어려웠다는 회고도 있다. “그러나 나는 세브란스 의전으로 자리를 옮긴 후 마치 내 집에 돌아온 것 같이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경성제대에 있을 땐 무엇인가 남의 집에 있는 것 같은 기분에서 하루하루 생활”했다고 한다[132]. 세브란스의전은 조선인의 공간이었던 셈이다. 이러한 환경을 뒷받침한 것은 서구 특히 미국의 지원이었다. 예컨대 윤일선은 러들로(Alfred I. Ludlow) 교수를 통해 세브란스 씨로부터 3년간 도합 9,000달러의 연구비를 수령하여 첫 제자인 이영춘과 알레르기 연구를 수행할 수 있었다[133]. 보성전문학교와 같은 민족 사학(私學)과 더불어 식민지 치하 일종의 대항 아카데미즘으로 기능한 연희, 세브란스, 이화(梨花), 숭실(崇實) 등 미션스쿨의 존재는 ‘후식민지(postcolonial) 아카데미즘’의 양상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셋째, 윤일선의 개인적 특성이다. 윤일선은 성실함에 더해 탁월한 실력을 갖춘 학자였다. 일어, 영어, 불어, 독어를 자유롭게 구사하면서 세계 학계를 무대로 활동하였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윤일선의 탈정치적 성향이었다. 유학 시절 “독서회나 학생회에 일체 관계하지 않고 공부에 전념”한 것은 앞에서 살핀 대로이다. 식민지 말기 전문학교에 삭발령이 내려져 학생들의 반발이 예상되던 때 윤일선이 솔선하여 머리를 빡빡 깎고 학교에 나옴으로써 학생들도 별 말 없이 따르게 되었다는 일화에서는 그의 처세를 엿볼 수 있다[134]. 학문적 실력을 갖추고 정치에 거리를 둠으로써 식민지 말기의 엄혹한 상황에서도 윤일선은 학자로서 활동을 이어갈 수 있었던 셈이다.

4. 맺음말

여기서는 머리말에서 제시한 세 가지 과제에 대하여 해방 이후 윤일선의 행보를 시야에 넣어 음미하고자 한다.
첫째, 식민지 지식인 윤일선의 삶에 대한 전기적 서술이다. 명문가에서 태어난 윤일선은 일본과 조선을 오가면서 일어, 불어, 영어를 자연스럽게 접할 수 있는 환경에서 자랐다. 이러한 외국어 능력이 후일 학자로서 살아가는 데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일본 유학에 오른 윤일선은 구제 고등학교와 제국대학 의학부라는 당시 일본의 학제 속에서 최고의 교육을 받았고, 이윽고 스스로 제국대학 교수 자리에 올랐다. 배움의 과정에서 윤일선이 쌓은 학맥, 인맥의 범위는 일본 제국의 판도와 겹쳐졌다. 일본의 아시아 침략의 결과로서 형성된 공간을 윤일선은 제국의 지식인으로서 누비게 된다. 다만 이러한 화려함은 민족 차별로 인해 스스로 경성제대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는 그늘과 맞붙어 있었다. 새로운 직장인 세브란스의전은 윤일선으로서는 태어나서 처음 겪는 조선인 중심의 공간인 동시에 일상적으로 서양인들과 접하는 공간이었다. 윤일선은 세브란스의전에서 자기 집에 돌아온 것 같은 편안함을 느꼈고, 서양인 동료를 통해 미국의 독지가로부터 연구비를 수령하였다. 조선인이 처한 형편에 대한 자각 그리고 서구 아카데미즘과의 접속이라는 두 측면은 해방 이후 윤일선의 활약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해방 이후 윤일선은 중앙의사단체 결성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1945년 8월 17일 개업의 400여 명이 모여 이용설을 위원장으로 하여 ‘건국의사회’를 창립하였다. 한편 1945년 9월 19일에는 의학교 교수가 중심이 되어 윤일선을 위원장으로 하여 ‘조선의학연구회’를 창립하였다. 두 단체를 통합하려는 노력 끝에 1945년 12월 9일 윤일선을 회장으로 하여 ‘조선의사회’가 발족하였지만 혼란은 계속되었다. 결국 1947년 5월 10일 새로이 ‘조선의학협회’가 창립되어, 심호섭(沈浩燮)이 회장을 윤일선은 학술위원장을 맡았다. 조선의학협회는 1948년 1월 미군정으로부터 중앙의사단체로 공식 인가를 받았다. 1948년 5월 1일 열린 제2차 총회에서 윤일선은 회장에 선임되어, 1952년까지 제2대와 제3대 회장을 맡았다. 조선의학협회는 1948년 8월 정부 수립 후 ‘대한의학협회’로 이름을 바꿨다. 1949년 7월 회장 윤일선이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국제암학회에 참석하는 길에 미국에 들러 세계의학협회에 정식으로 가입하였다. 윤일선은 1955년 6월에서 1956년 5월까지 다시 한 번 제7대 대한의학협회 회장을 맡았다[135].
한편 1945년 9월 미군정으로부터 경성제대 의학부를 접수하라는 통지를 받은 윤일선은 의학부장을 맡아 대학 재건을 위해 노력하였다. 1946년 1월에는 의학부 전체 교수가 신탁통치에 반대하여 사표를 제출하는 사태가 벌어졌을 때, 윤일선은 한 사람 한 사람 설득하여 복귀시켰다고 한다. 1946년 여름 ‘국립서울대학교설립안’ 즉 국대안을 둘러싸고 대학이 어수선한 가운데서도 윤일선은 수업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1946년 10월 22일에는 정식으로 서울대 교수이자 초대 대학원장으로 임명되었다[136]. 1955년 4월 부총장을 맡은 데 이어, 처음으로 치러진 교수에 의한 총장 직선을 통하여 1956년 7월 제6대 총장에 취임하였다. 5·16 이후 총장 직선제가 없어진 탓에 윤일선은 한동안 ‘서울대 교수회의 동의를 얻어 임명된 유일한 총장’으로 불렸다[137].
대학과 의학계에서 여러 일을 맡았지만 1946년 조선병리학회(이후 대한병리학회)가 창립된 이래 1958년까지 12년간 초대에서 제16대까지 줄곧 회장을 맡은 것은 눈에 띈다. 대학을 그만둔 후에는 1963년 원자력원 원장[138], 1967년 한국과학기술후원회 이사장, 1980년 한국과학기술진흥재단 이사장 등을 역임하였다. 88세까지도 건강한 모습으로 대한병리학회나 암학회에 출석하여 후학들의 연구를 격려하였고, 1987년 6월 92세로 타계하였다. 식민지 조선 최고의 의학자였던 윤일선은 해방 이후에도 명실공히 한국 학술을 대표하는 인물로서 활약한 셈이다.
둘째, 주변부 지식인에게 교양이 갖는 의미이다. 윤일선은 구제 고등학교와 제국대학에서 동시대의 일본 젊은이들과 함께 고뇌하면서, 일본 사회가 나름의 시각으로 정리한 서양의 지적 산물을 교양으로서 체득하게 된다. 윤일선의 교양에 대한 강조는 해방 후에도 지속되어, 어떤 수필에서는 한 쪽 반 정도의 짧은 분량 안에서 토인비, 베이컨, 칸트, 톨스토이, 공자, 키케로, 러스킨의 금언을 소개하기도 하였다[139]. ‘교양주의’의 극치라고 할 수 있겠다. 윤일선은 서울대 총장 시절 ‘상대성원리의 아인슈타인과 실천철학의 칸트의 말을 인용’하여 졸업식 훈사를 하였다고 한다. 대학 밖에서도 “웬만한 음악회에서 윤박사를 못 만나는 일이 별로 없으며” 겨울이면 “창경원 스케이트장에서 스케이트를” 즐겼다[140]. 교양이 ‘학력엘리트의 신분문화’[141]를 형성한다는 지적을 떠올리게 된다.
윤일선이 강조한 교양은 대부분 서구적인 것이었고, 때로는 근대주의적 편향을 드러내며 우리의 전통과 문화를 낮게 보는 태도로 이어지기도 했다. ‘온돌이란 불합리한 난방장치’ 탓에 ‘우리는 대체로 게으르다’든지, ‘유교적인 탁상공론인 논쟁과 사회계급의 차별’의 결과 ‘우리에게는 뭉치는 기질이 적다’는 언급 등이 그렇다[142]. 일본에서도 이른바 ‘구제 고등학교 교양주의’를 ‘이질적인 서양문화를 이상으로 하는 일종의 지적 식민주의’[143]라고 비판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다만 일본 사회는 동서양의 고전 특히 서구의 지적 산물을 받아들여 이를 일본적 전통과 조화시킴으로써 정전화된 교양을 만들어내고자 노력하였다. 그렇다면 다시 일본의 식민지였던 한국 지식인에게 교양이란 무엇인가. 적어도 윤일선에게 한국적 전통은 교양과는 인연이 옅었다. 서구와 일본의 이중의 주변부라고 할 수 있는 한국에서 나름의 교양을 체계화하는 일은 이후 세대의 과제로서 남겨진 셈이다.
1930년대 중반 일본에서는 ‘교양주의’를 비판하는 담론이 쏟아져 나왔다. ‘다이쇼(大正) 교양주의’의 탈정치적 측면을 비판하면서 지식인의 현실 참여를 강조하는 흐름이었다[144]. 윤일선은 젊은 시절의 독서와 사색 그리고 문화와 예술에 대한 섭렵을 통하여 튼튼한 인문적 소양을 갖출 수 있었지만, 정전화된 교양의 무비판적 수용에 대한 비판 의식 즉 ‘교양주의’ 비판이라는 문제의식은 없었다. 마르크스주의와 교토학파 철학을 결합하였다고 평가되는 미키 기요시(三木清)는 “결국 우리를 지배한 것은 도리어 ‘교양’이라는 사상이다. 그리고 그것은 정치라는 것을 경멸하고 문화를 중시한다는 반정치적이고 비정치적인 경향을 띠었다”고 지적한 바 있는데[145], 윤일선의 교양이야말로 금욕적이고 탈정치적인 그의 태도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
1949년의 인물평에서는 윤일선을 “술은 한 잔도 입에 대지 않고, 담배도 안 피우고, 농담 하나 하는 일 없다”고 묘사하였다. 또한 “행정적 수완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소개한 뒤, “행정적 수완이란 학자에게 있어서 사도(邪道)”라고 윤일선을 옹호하였다[146]. 10년 후인 1958년의 글에서도 “윤박사의 일과는 시계와 같이 정확하다. 규칙적이고 전형적인 그의 사생활은 스케줄 그대로 정리 진행되었지 예외도 탈선도 없고”, “관포지교(管鮑之交)라고 할 만한 절친한 친구가 없으며 미워하거나 싫어하는 한 사람의 적도 없다”고 그려졌다. 마찬가지로 “총장으로서 경륜이 부족하며 무능하니까 차라리 대학원장으로 오래 유임하였으면 좋을 뻔 했다”는 평가를 소개하였다[147]. 사회적인 활동보다 학문에 힘쓸 사람이라는 평가는 줄곧 따라다닌 셈이다. 식민지 말기 엄혹한 상황에서 학문에만 몰두한 윤일선의 태도에 대해서는 민족적 현실에 눈을 감았다는 비판이 가능할지 모른다. 다만 해방 후에도 변함없이 권력이나 정치와 거리를 두었다는 점에서 윤일선의 자세는 하나의 개성으로서 인정될 수 있고, 나아가 탈정치적 경향과 결합한 ‘교양주의’를 체현한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셋째, 식민지-주변부에서 학문의 양태이다. ‘식민지 아카데미즘’이라는 개념을 사용하는 이유는 그저 식민지의 역사를 어둡고 부정적으로 그리려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어려운 조건 속에서도 학문의 보편성을 향한 조선 지식인의 분투가 끊이지 않았음을 기억하는 동시에 그 과정에서 남겨진 상처를 직시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통하여 서구나 일본의 아카데미즘을 숭상하고 식민지-주변부에서 아카데미즘이 변변치 않았다고 한탄하는 것을 넘어, 근대 사회에서 아카데미즘이 지니는 불균등성, 비대칭성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다. 윤일선의 사례에 초점을 맞춰 검토한 결과, 검열과 탄압, 언어의 위계, 학문 재생산의 부재, ‘미디어 아카데미아’, 중앙학술단체 창설 시도와 좌절 등 ‘식민지 아카데미즘’의 특징은 의학 연구에도 기본적으로 관철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다만 자연과학이라는 학문의 특성상 경제학이나 역사학과 비교할 때 학문의 제도적 안정성이 높고 학자가 운신할 수 있는 폭도 넓었다.
그렇다면 ‘후식민지(post-colonial) 아카데미즘’은 어떤 전개를 보였을까. “우리는 과학적 사유의 단련을 하여야 할 것이며 만은 가설을 생각하여 내이고 우리의 과학적 전통을 세워야 할 것이다.”[148] “우리는 우리의 과학을 세우고, 발전시켜, 남에게서 배우며, 또 남에게 미치는 바 있어야 하겠다.”[149] 해방 직후 ‘우리의 과학’ 즉 한국적 아카데미즘을 건설해야 한다는 사명감 속에 윤일선이 남긴 말이다. 서울대 총장 재직 중에는 “한 나라의 독특한 문화와 전통과 학문을 뒷받침하고 그 나라 그 민족에 의해서 학문의 자유가 보장되어 생긴 대학”만이 ‘학문을 위한 대학’이라면서, 따라서 “순수한 의미에 있어 우리나라의 대학은 해방 후에 생겼다”는 자부심과 사명감 어린 발언도 남겼다[150]. 자신을 내친 경성제국대학을 염두에 둔 언급임에 틀림 없다.
윤일선에게는 일본 제국의 영향 아래 영위되어 온 식민지 조선의 학술을 새롭게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세계 학계에 접속시켜야 하는 과제가 주어졌다. 해방 이후 한국의 과학 교육 및 연구를 이야기할 때 빠트릴 수 없는 것이 ‘미네소타 프로젝트’이다. 미네소타 대학은 미국 정부의 예산 지원을 받아 1954년 9월부터 1961년 6월까지 약 7년간 서울대에 교환교수 프로그램, 시설복구 및 장비지원을 제공하였다. 이 프로젝트를 통하여 농대, 공대, 의대를 중심으로 한 서울대 교수 요원 226명이 장단기 미국 연수를 다녀왔는데, 의학분야에서는 모두 77명이 연수를 받았다. 미네소타 프로젝트의 결과로 서울대 의학교육은 과거 일본식의 이론중심에서 미국식의 임상중심으로 바뀌었다고 평가된다[151].
미네소타 프로젝트 기간은 윤일선의 서울대 부총장, 총장 재임기간과 거의 일치한다. 일본 학계에서 배운 지식을 식민지 조선에 전했던 윤일선은, 해방된 한국에서 다시 후배 학자를 미국 학계로 보내는 역할을 떠맡게 된 셈이다. 1953년 2월 서울대 의대를 졸업한 이들 가운데 이상국(李尙國), 백승룡(白承龍), 이인성(李寅誠)은 서울대 개교 후 입학한 학생으로는 처음으로 병리학교실에 입국하여 한국전쟁의 어려운 여건 속에서 교실의 명맥을 이었다. 특히 이상국은 회장 윤일선을 도와 오랫동안 병리학회 총무를 맡았는데, 1955년 8월 다름 아닌 미네소타 프로젝트에 의해 미네소타 대학으로 연수를 떠났다. 백승룡도 뉴욕의 빙햄튼 병원으로 유학을 떠났다[152]. 병리학교실에서도 일본식 교육과 미국식 교육이 교차되기에 이른 것이다.
윤일선은 해방 이후 미국식 과학 교육, 의학 교육이 주목받는 상황에서 이를 기존의 일본식 교육과 조화시키고자 애썼다. 윤일선은 ‘일본계통, 독일계통에서 받은 과거의 교육’을 ‘이론’ 중시, 그리고 ‘미국의 교육방법, 혹은 영국계통의 교육’을 ‘실제’ 중시라고 분석한 뒤, “이론만 하고 실제를 모르는 것도 대단히 어려운 일이고, 또한 실제만 치중해서 이론을 안보는 것도 안 될 것”[153]이라고 주장하였다. 의학에 대해서도 ‘임상의학적 방면’만이 아니라 ‘기초의학적 방면’에도 힘을 기울일 것을 주문하였고[154], 나아가 의학 연구의 진보를 위해서는 ‘다른 관계 자연과학의 발전’이 중요하다고 강조하였다[155]. 해방 이후 한국 의학이 “일본식 대학원 의학과와 미국식 전문의 과정을 병행하는 특이한 의학교육 및 연구 체제”[156]를 갖추게 된 데는, 과학 혹은 의학 교육의 방향성을 둘러싼 윤일선과 같은 이들의 고민과 판단이 배경으로 작용하였을 것이다. 식민지-주변부적 혼종성(hybridity)이 아카데미즘에서도 드러난 셈이다.

Notes

1) 윤일선 개인에 초점을 맞춘 연구로는 안홍준, 「윤일선과 한국 병리학」, 서울대학교 의학석사 학위논문, 1996이 있다.

2) 아마노 이쿠오 지음, 박광현·정종현 옮김, 『제국대학 -근대 일본의 엘리트 육성 장치-』 (산처럼, 2017) 참조.

3) 이향철, 「근대일본에 있어서의 「교양」의 존재형태에 관한 고찰 -교양주의의 성립·전개·해체를 중심으로-」, 『일본역사연구』 13 (2001.4), 81, 100쪽.

4) 홍종욱, 「‘식민지 아카데미즘’의 그늘, 지식인의 전향」, 『사이』 11 (2011.11), 93-134쪽.

5) 「나의 學問遍歷 <15> 尹日善 박사 <前 서울대 總長> ①」, 『每日經濟新聞』, 1987.2.23.

6) 「나의 學問遍歷 <16> 尹日善 박사 <前 서울대 總長> ②」, 『每日經濟新聞』, 1987.2.24.

7) 위의 글.

8) 「元老科學技術者의 證言 <1> 尹日善 博士 篇 <上>」, 『과학과 기술』 12-1 (1979), 55-7쪽.

9) 「電還尹氏」, 『皇城新聞』, 1902.7.22; 「尹氏歸國」, 『皇城新聞』, 1906.8.2.

10) 「夫人在院」, 『大韓每日申報』, 1906.8.25.

11) 「나의 學問遍歷 <16> 尹日善 박사 <前 서울대 總長> ②」, 『每日經濟新聞』, 1987.2.24.

12) 「尹氏月繩」, 『皇城新聞』, 1908.1.16.

13) 「나의 學問遍歷 <16> 尹日善 박사 <前 서울대 總長> ②」, 『每日經濟新聞』, 1987.2.24.

14) 「尹高麗氏의 逝去」, 『每日申報』, 1913.12.2.

15) 「元老科學技術者의 證言 <1> 尹日善 博士 篇 <上>」, 55쪽.

16) 「官立學校卒業生 京城中學校」, 『朝鮮總督府官報』 805, 1915.4.13.

17) 「具鎔書」, 『財界回顧 9』 (韓國日報社, 1981), 22쪽.

18) 「나의 學問遍歷 <17> 尹日善 박사 <前 서울대 總長> ③」, 『每日經濟新聞』, 1987.3.2.

19) 「元老科學技術者의 證言 <1> 尹日善 博士 篇 <上>」, 56쪽.

20) 「나의 二十歲靑年時代 (一) 遠大한 抱負 안고 玄海灘 건너 尹日善 博士의 스물 때」, 『東亞日報』, 1940.4.2.

21) 강명숙, 「일제시대 학교제도의 체계화 -제2차 조선교육령 개정을 중심으로-」, 『한국교육사학』 32-1 (2010.4), 3-7쪽.

22) 『第六高等學校一覧 自大正五年至大正六年』, 1916.12.5.

23) 「現代醫學의 뿌리 심어 東湖 尹日善」, 『내가 겪은 二十世紀 -白髮의 證言 元老와의 對話-』 (京鄕新聞社, 1974), 136쪽.

24) 「元老科學技術者의 證言 <1> 尹日善 博士 篇 <上>」, 55쪽.

25) 『第六高等學校一覧 自大正五年至大正六年』, 1916.12.5.

26) 「元老科學技術者의 證言 <1> 尹日善 博士 篇 <上>」, 57쪽.

27) 「現代醫學의 뿌리 심어 東湖 尹日善」, 136쪽.

28) 「나의 學問遍歷 <17> 尹日善 박사 <前 서울대 總長> ③」, 『每日經濟新聞』, 1987.3.2.

29) 서울대학교 한국의학인물사 편찬위원회, 『한국의학인물사』 (태학사, 2008), 112쪽.

30) 이향철, 「근대일본에 있어서의 「교양」의 존재형태에 관한 고찰」, 100쪽.

31) 아마노 이쿠오 지음, 박광현·정종현 옮김, 『제국대학』, 88-91쪽.

32) 「나의 學問遍歷 <17> 尹日善 박사 <前 서울대 總長> ③」, 『每日經濟新聞』, 1987.3.2.

33) 京城醫專尹日善, 「(新春隨想) 新年の想ひ出一つ二つ」, 『關西醫事』 9-1 (1937.1).

34) 『京都帝國大學一覽 自大正八年至大正九年』 (1920.3), 305쪽.

35) (大正一二醫卒)伊東日善, 「大正八, 九, 十年頃の京大基督敎靑年會寄宿舍生活を顧みて」, 『京都帝國大學基督敎靑年會四十周年記念誌』 (京都帝國大學基督敎靑年會, 1941), 57-8쪽.

36) 『京都帝國大學 基督敎靑年會 寄宿舍日誌』는 현재도 교토대학 YMCA 기숙사에 보관되어 있다. 일지를 포함한 기숙사 관련 자료는 교토대학 미즈노 나오키(水野直樹) 님의 도움으로 열람할 수 있었다.

37) 일지 날짜를 괄호에 넣었다. 이하 같음.

38) (大正一三醫卒)宮崎松記, 「想ひ出」, 『京都帝國大學基督敎靑年會四十周年記念誌』, 59-61쪽; (大正一二醫卒)金關丈夫, 「想ひ出いろいろ」, 『京都帝國大學基督敎靑年會四十周年記念誌』, 43-56쪽.

39) (大正一二醫卒)伊東日善, 「大正八, 九, 十年頃の京大基督敎靑年會寄宿舍生活を顧みて」, 57-8쪽.

40) 京城醫專尹日善, 「(新春隨想) 新年の想ひ出一つ二つ」, 『關西醫事』 9-1 (1937.1).

41) 「나의 學問遍歷 <17> 尹日善 박사 <前 서울대 總長> ③」, 『每日經濟新聞』, 1987.3.2.

42) (大正一二醫卒)伊東日善, 「大正八, 九, 十年頃の京大基督敎靑年會寄宿舍生活を顧みて」, 57-8쪽.

43) 「나의 學問遍歷 <18> 尹日善 박사 <前 서울대 總長> ④」, 『每日經濟新聞』, 1987.3.3.

44) 「現代醫學의 뿌리 심어 東湖 尹日善」, 136쪽.

45) 金斗鍾, 「日本 京都에서 奉天까지」, 『나의 交友錄』 (中央日報, 1977).

46) 「元老科學技術者의 證言 <1> 尹日善 博士 篇 <上>」, 56쪽.

47) 「나의 學問遍歷 <18> 尹日善 박사 <前 서울대 總長> ④」, 『每日經濟新聞』, 1987.3.3.

48) (大正一一經卒)伊藤祐之, 「その頃を顧みて」, 『京都帝國大學基督敎靑年會四十周年記念誌』, 41쪽.

49) (大正一一經卒)伊藤祐之, 「その頃を顧みて」, 『京都帝國大學基督敎靑年會四十周年記念誌』, 41쪽.

50) 伊藤祐之,『マルクスよりイエスへの歩み』 (向山堂書房, 1933) 참조.

51) 李寬求, 「意氣와 風流의 濟濟多士」, 『나의 交友錄』 (中央日報, 1977), 129쪽.

52) 다카다 리에코 지음, 김경원 옮김, 『문학가라는 병 -도쿄제국대학 문학부 엘리트들의 체제 순응과 남성 동맹-』 (이마, 2017), 98쪽.

53) 筒井清忠, 『日本型教養の運命-歴史社会学的考察-』 (岩波書店, 1995), 97-9쪽.

54) 筒井清忠, 『日本型教養の運命-歴史社会学的考察-』 (岩波書店, 1995), 97-9쪽.

55) 「元老科學技術者의 證言 <1> 尹日善 博士 篇 <上>」, 56쪽.

56) 「나의 學問遍歷 <18> 尹日善 박사 <前 서울대 總長> ④」, 『每日經濟新聞』, 1987.3.3.

57) 위의 글.

58) 「給費生成績報告ノ件」, 渡部学·阿部洋編, 『日本植民地教育政策史料集成(朝鮮篇)第51巻 (下)』 (龍渓書舎, 1989).

59) 尹日善, 「夜深人靜獨座觀心」, 홍병철 저, 『學海』 (學海社, 1937), 220쪽.

60) 「現代醫學의 뿌리 심어 東湖 尹日善」, 136쪽.

61) 「元老科學技術者의 證言 <1> 尹日善 博士 篇 <上>」, 56쪽.

62) 「나의 學問遍歷 <17> 尹日善 박사 <前 서울대 總長> ③」, 『每日經濟新聞』, 1987.3.2.

63) 위의 글.

64) 「나의 學問遍歷 <18> 尹日善 박사 <前 서울대 總長> ④」, 『每日經濟新聞』, 1987.3.3.

65) 醫學博士 病理學者 京城聖セブランス醫學專門學校敎頭尹日善, 「藤浪先生と私」, 『藤浪先生追悼錄』 (人文書院, 1935).

66) (大正一二醫卒)金關丈夫, 「想ひ出いろいろ」, 43-56쪽.\

67) 「나의 學問遍歷 <18> 尹日善 박사 <前 서울대 總長> ④」, 『每日經濟新聞』, 1987.3.3.

68) 『京都帝國大學一覽 自大正十二年至大正十三年』, 1924.3.28.

69) 「나의 學問遍歷 <19> 尹日善 박사 <前 서울대 總長> ⑤」, 『每日經濟新聞』, 1987.3.9.

70) 『京都帝國大學一覽 自大正十三年至大正十四年』, 1925.2.10; 『京都帝國大學一覽 自大正十四年至大正十五年』, 1926.3.31.

71) 「나의 學問遍歷 <19> 尹日善 박사 <前 서울대 總長> ⑤」, 『每日經濟新聞』, 1987.3.9.

72) 「現代醫學의 뿌리 심어 東湖 尹日善」, 137쪽.

73) 「나의 學問遍歷 <19> 尹日善 박사 <前 서울대 總長> ⑤」, 『每日經濟新聞』, 1987.3.9.

74) 醫學博士 病理學者 京城聖セブランス醫學專門學校敎頭尹日善, 「藤浪先生と私」.

75) (大正一二醫卒)伊東日善, 「大正八, 九, 十年頃の京大基督敎靑年會寄宿舍生活を顧みて」, 57-8쪽. 윤일선이 언급한 이름은 『地塩洛水: 京都大学YMCA百年史』 (京都大学キリスト教青年会百周年記念事業委員会記念誌部会編, 2003)에 실린 당시의 회원명부에서 모두 확인할 수 있었다.

76) 京都大学医学部病理学教室百年史刊行会, 『京都大学病理学教室百年史―病院病理部の新しい動きを含む― 明治33年(1900)-平成20年(2008)』 (京都: 京都大学医学部, 2008), 19쪽.

77) 「元老科學技術者의 證言 <1> 尹日善 博士 篇 <上>」, 56쪽; 「나의 學問遍歷 <20> 尹日善 박사 <前 서울대 總長> ⑥」, 『每日經濟新聞』, 1987.3.10.

78) 「履歴書」, 『學位授與關係書類昭和四年』 (교토대학 문서관 소장).

79) 「나의 學問遍歷 <20> 尹日善 박사 <前 서울대 總長> ⑥」, 『每日經濟新聞』, 1987.3.10.

80) 『京城帝國大學一覽 自大正十五年至昭和二年』, 1927.4.10.

81) 「敍任及辭令」, 『朝鮮總督府官報』 377, 1928.4.5.

82) 『京城帝國大學一覽 自昭和二年至昭和三年』, 1928.4.10.

83) 『京城帝國大學一覽 昭和四年』, 1929.6.10.

84) 「尹日善氏, 京大敎授新任, 조선인으론 처음」, 『東亞日報』, 1928.2.22.

85) 윤일선 외에 오사카(大阪)제대 의학부 출신 고영순(高永珣)이 1928년 12월 24일부터 26일까지 이틀간 조교수로 임용된 기록이 있기는 하다. 奇昌德, 『韓國近代醫學敎育史』 (아카데미아, 1995), 240쪽; 『京城帝國大學一覽(昭和十七年)』 (京城帝國大學, 1943.3), 225쪽; 정근식 외, 『식민권력과 근대지식: 경성제국대학 연구』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1) 참조.

86) 「나의 學問遍歷 <20> 尹日善 박사 <前 서울대 總長> ⑥」, 『每日經濟新聞』, 1987.3.10.

87) 「나의 學問遍歷 <21> 尹日善 박사 <前 서울대 總長> ⑧」, 『每日經濟新聞』, 1987.3.17.

88) 「나의 學問遍歷 <20> 尹日善 박사 <前 서울대 總長> ⑦」, 『每日經濟新聞』, 1987.3.10.

89) 위의 글.

90) 「城大尹日善氏 博士論文通過 의학박사가 되얏다」, 『每日申報』, 1929.1.10.

91) 「나의 學問遍歷 <20> 尹日善 박사 <前 서울대 總長> ⑦」, 『每日經濟新聞』, 1987.3.10.

92) 「나의 學問遍歷 <21> 尹日善 박사 <前 서울대 總長> ⑧」, 『每日經濟新聞』, 1987.3.17.

93) 「나의 學問遍歷 <22> 尹日善 박사 <前 서울대 總長> ⑨」, 『每日經濟新聞』, 1987.3.23.

94) 위의 글.

95) 지제근, 「윤일선」, 서울대학교 한국의학인물사 편찬위원회 편, 『한국의학인물사』 (태학사, 2008), 175쪽.

96) 「現代醫學의 뿌리 심어 東湖 尹日善」, 136쪽.

97) 「元老科學技術者의 證言 <1> 尹日善 博士 篇 <上>」, 55-7쪽.

98) 여인석, 「세브란스의전 연구부의 의학연구 활동」, 『의사학』 13-2 (2004.12), 249쪽.

99) 「나의 學問遍歷 <22> 尹日善 박사 <前 서울대 總長> ⑨」, 『每日經濟新聞』, 1987.3.23.

100) 「나의 學問遍歷 <23> 尹日善 박사 <前 서울대 總長> ⑩」, 『每日經濟新聞』, 1987.3.24.

101)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의학백년편찬위원회, 『의학백년』, 연세대학교 출판부, 1986, 98쪽.

102) 「나의 學問遍歷 <25> 尹日善 박사 <前 서울대 總長> ⑫」, 『每日經濟新聞』, 1987.3.31. 해당 내용이 담긴 문부성 고시 제152호 (1934.4.12)는 『官報』 제2181호 (1934.4.12)에 실려 있다.

103) 「元老科學技術者의 證言<1> 尹日善 博士 篇 <上>」, 55-7쪽.

104) 「基礎醫學重鎭 尹日善 博士洋行 毆米의 醫學界를 視察코저 私學派遣의 嚆矢」, 『每日申報』, 1937.3.23.

105) 「나의 學問遍歷 <26> 尹日善 박사 <前 서울대 總長>⑬」, 『每日經濟新聞』, 1987.4.6∼「나의 學問遍歷 <34> 尹日善 박사 <前 서울대 總長> 」, 『每日經濟新聞』, 1987.5.11.

106) 「現代醫學의 뿌리 심어 東湖 尹日善」, 136쪽.

107) 홍종욱, 「보성전문학교에서 김일성종합대학으로 -식민지 지식인 김광진의 생애와 경제사 연구-」, 『歷史學報』 232 (2016.12), 283-325쪽.

108) 「徹頭徹尾 우리 힘으로 길러낸 最初의 博士, 尹日善博士의 指導下에 硏究, 文化朝鮮에 새 光明! 堂堂한 論文에 京大에서도 놀라, 病理學會席에서 세 번 講演, 感激에 넘치는 師弟」, 『東亞日報』, 1935.6.19.

109) 「醫學朝鮮의 大氣焰 尹日善博士의 指導로 第二의 博士를 내엇다 朝鮮醫學界의 尊貴한 存在! 金聖湜新醫博 京大에서 論文 通過」, 『東亞日報』, 1939.5.17.

110) 「純朝鮮醫博의 母胎 尹日善博士指導로 三次醫博 이번엔 趙東秀氏 醫博, 至誠硏究로 尹日善博士談」, 『東亞日報』, 1939.5.24.

111) 「世醫專崔在裕氏 醫博學位通過 昨日京都帝大敎授會에서」, 『每日申報』, 1937.6.2.

112) 「나의 學問遍歷 <28> 尹日善 박사 <前 서울대 總長>⑮」, 『每日經濟新聞』, 1987.4.14.

113) 「나의 學問遍歷 <24> 尹日善 박사 <前 서울대 總長>⑪」, 『每日經濟新聞』, 1987.3.30.

114) 「前途가 多幸할 朝鮮刀圭界 처음으로 통일을 보아 醫師 協會를 創設」, 『每日申報』, 1930.2.23.

115) 「朝鮮醫師協會 部署決定」, 『東亞日報』, 1930.3.9.

116) 「奬學賞制를 實施, 朝鮮 醫師協會 定總의 決議」, 『東亞日報』, 1935.10.3.

117) 「朝鮮醫師協會 各部署를 更新」, 『每日申報』, 1936.10.3.

118) 「朝鮮醫師協會 第二回 學術演說會 卄四日 世醫專에서」, 『每日申報』, 1935.9.25.

119) 지제근, 「한국의 병리학, 그 도입과 정착」, 『의사학』 2-2 (1993.12), 162쪽.

120) 홍종욱, 「‘식민지 아카데미즘’의 그늘, 지식인의 전향」, 103쪽.

121) 金晟鎭, 「韓國의 碩學② 尹日善 博士論」, 『思潮』 1-2, 1958.7.

122) 「나의 學問遍歷 <35> 尹日善 박사 <前 서울대 總長> 」, 『每日經濟新聞』, 1987.5.12.

123) 「나의 學問遍歷 <23> 尹日善 박사 <前 서울대 總長>⑩」, 『每日經濟新聞』, 1987.3.24.

124) 홍종욱, 「보성전문학교에서 김일성종합대학으로」, 283-325쪽.

125) 「本社主催·民間六大專門學校聯合, “夏期巡廻講座” 迫頭」, 『東亞日報』 1935.7.27.

126) 「本社主催巡廻講座」, 『東亞日報』 1935.8.3.

127) 「나의 學問遍歷 <24> 尹日善 박사 <前 서울대 總長>⑪」, 『每日經濟新聞』, 1987.3.30.

128) 대한의학협회70년사편찬위원회, 『대한의학협회70년사』 (서울: 대한의학협회, 1979) 57-58쪽.

129) 「元老科學技術者의 證言 <1> 尹日善 博士 篇 <下>」, 『과학과 기술』 12-2 (1979), 55-7쪽.

130) 「共榮圈仁術交流 大東亞醫學必勝의 陣 -醫學大會 갔던 李鶴松博士談-」, 『每日新報』, 1944.5.21.

131) 한인섭, 『식민지 법정에서 독립을 변론하다 -허헌·김병로·이인과 항일 재판투쟁-』 (경인문화사, 2012) 참조.

132) 「나의 學問遍歷 <22> 尹日善 박사 <前 서울대 總長>⑨」, 『每日經濟新聞』, 1987.3.23.

133) 「나의 學問遍歷 <23> 尹日善 박사 <前 서울대 總長> ⑩」, 『每日經濟新聞』, 1987.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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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 대한의학협회70년사편찬위원회, 『대한의학협회70년사』 (서울: 대한의학협회, 1979); 대한의학회, 『한국현대의학사』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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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 金勇一, 「尹日善 會員」, 『앞서 가신 회원의 발자취』 (대한민국학술원,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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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 金晟鎭, 「韓國의 碩學② 尹日善 博士論」, 『思潮』 1-2 (1958).

141) 이향철, 「근대일본에 있어서의 「교양」의 존재형태에 관한 고찰」, 79-110쪽.

142) 윤일선(서울대학총장), 「역사상으로 본 우리 민족성」, 『지방행정』 7-62, 1958.

143) 이향철, 「근대일본에 있어서의 「교양」의 존재형태에 관한 고찰」, 79-110쪽.

144) 다카다 리에코 지음, 김경원 옮김, 『문학가라는 병』, 98쪽.

145) 三木清, 「読書遍歴」, 『三木清全集 第一巻』, 岩波書店, 1966(초출 1941), 389쪽.

146) R生, 「學者群像② 尹日善博士」, 『學風』 (乙酉文化社, 1949).

147) 金晟鎭, 「韓國의 碩學② 尹日善 博士論」, 『思潮』 1-2 (1958).

148) 尹日善(大學院長), 「科學과 科學精神」, 『現代科學』 4 (194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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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 윤일선(서울대학교 총장), 「대학교육과 해외유학」, 『새교육』 11-8 (195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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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 지제근,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병리학교실 50년사」, 『의사학』 5-1 (1996), 33-5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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