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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J Med Hist > Volume 26(3); 2017 > Article
한센병을 둘러싼 제국의학의 근대사 -일본어 미디어를 통해 본 대중관리 전략-*

Abstract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understand the reality of imperial medicine by exploring the strategic attitude of the Japanese authority targeting the public who were not patients of Hansen’s disease. For this purpose, this study examines the mass media data related to Hansen’s disease published in Korea and Japan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rule.
Research on Hansen’s disease can be divided into medical, sociohistorical, social welfare, and human rights approach. There are medical studies and statistics on the dissemination of medical information about Hansen’s disease and management measures, the history of the management of the disease, guarantee of the rights of the patients and the welfare environment, and studies on the autobiographical, literary writings and oral statements on the life and psychological conflicts of the patients. Among existing research, the topics of the study on Hansen’s disease under the Japanese colonial rule include the history of the Sorokdo Island Sanatorium, investigation on the forced labor of the patients in the island, human rights violations against the patients, oral memoirs of the patients and doctors who practiced at that time. All of these studies are important achievements regarding the research on the patients.
An important study of Hansen’s disease in modern Japan is the work of Hujino Utaka, which introduces the isolation of and discrimination against the patients of Hansen’s disease. Hujino Utaka’s study examines the annihilation of people with infectious diseases in Japan and its colonies by the imperial government, which was the consequence of the imperial medical policies, and reports on the isolation of Hansen’s disease patients during the war.
Although these researches are important achievements in the study of Hansen’s disease in modernity, their focus has mainly been on the history of isolation and exploitation in the Sorokdo Island Sanatorium and discrimination against the patients within the sanatorium, which was controlled by the director of the sanatorium. Consequently, the research tends to perceive the problem within the frame of antagonism between the agent of imperialism and the victims of exploitation by the hands of imperialism. Hence, it has limitations in that it has not fully addressed the problem of the people who were not Hansen’s disease patients and as such, existed somewhere in between the two extremes in the process of administering medicine under the imperial rule.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identify the direction of imperial medicine in the history of Hansen‘s disease in Japan and to comprehend the characteristics of policy on Hansen’s disease developed by Mitsuda Kensuke, who was behind the policy of imperial medicine, and examine the process of imperial medicine reaching out to the people (of Japan and its colonies). To achieve the goal, this study explores how the agent of imperial medicine gain the favor the public, who are not Hansen’s disease patients, by means of the mass media. Specifically, this paper examines data in the Japanese language related to Korean patients of Hansen’s disease including the mass media data on Hansen’s disease in the source book titled The Collection of Data on Hansen’s Disease in Joseon under the Colonial Rule(8 volumes) compiled by Takio Eiji, which has not been studied until now. It also reviews the cultural and popular magazines published in Japan and Joseon at that time.

1. 머리말

이 연구는 일제강점기 한국과 일본에서 발행된 한센병 관련 미디어 자료를 통해, 일제의 ‘대중 포섭을 위한 전략적 태도’를 살펴봄으로써 일본 제국의학[1]의 실체를 파악하는 것이 목적이다.
기존 한센병 관련 연구는 의학적 연구, 역사 사회학적 연구, 사회 복지적 연구, 인권 중심적 연구로 나뉜다. 즉, 한센병에 대한 의학적 정보전달, 그리고 질병 관리 대책에 관한 의학적 연구라 통계, 한센병 관리의 역사, 한센인의 권리 보장과 복지환경, 한센인의 삶의 과정 및 심리적 갈등을 자전이나 문학으로 표출한 저작물 또는 구술 관련 연구가 있다. 이 중 일제강점기 관련 연구로는 김성리(2013), 김기주(2011), 김미정(2012), 이병례(2006), 정근식(1996, 1997a·b, 2002, 2005), 한순미(2010), 국가인권위원회(2005), 국립소록도병원(2005), 국사편찬위원회(2004, 2005), 대한나학회(2004), 마쓰다 도시히코(2014) 등의 논문이 있는데, 그 내용은 소록도자혜의원 설립의 역사, 소록도 한센인의 강제노역에 관한 조사 및 한센인 인권침해에 관한 연구, 한센인이 과거를 회상한 구술에 관한 연구, 식민지기 의사로 활동했던 인물연구 등이다. 일본에서의 식민지 관련 한센병 연구는, 후지노 유타카(藤野豊)가 『생명의 근대사』, 『전쟁과 한센병』에서 일본과 식민지의 감염병 환자 말살 행태(藤野豊, 2001: 1-685) 및 전쟁 중 한센인의 격리 문제 등을 다루고 있다(藤野豊, 2009: 1-197)[2].
이상의 연구는 한센병 관련 연구의 중요한 성과이지만, 그 연구 방향이 소록도갱생원 설립을 중심으로 한 격리 및 착취의 역사와 갱생원 내 한센인 차별 문제 등으로, 국가로 표상되는 제국의 주체와 제국에 착취를 당했던 피해자라는 양분된 구도 속에서 인식되는 경향이 강하다. 따라서 제국의학 실현 과정에서 양자 사이에 있는 ‘대중’의 문제가 구체적으로 논의되지 못했다는 한계가 있다.
본 연구는 ‘가해자/피해자 = 일본/조선’이라는 구도가 아니라, 가해자나 피해자가 상황에 따라 조선인도 일본인도 될 수 있다는 시각으로 접근하고 있다. 따라서 이 연구에서 말하는 제국의 주체는 제국의학을 담당한 일본인, 총독부에 근무하면서 식민지의학을 담당한 일본인, 그들의 하수인으로서 조선인을 가리킨다. 그리고 ‘대중’은 당시 제국의 주체가 ‘일본인’이라고 부르던 사람이다. 즉 식민지시기였기 때문에 당시 조선인도 ‘일본인’이 되어야 했다(실제, 일본인이라고 부추기면서 차별적 대우를 했더라도). 따라서 미디어에서 취급된 ‘대중’에는 당시 조선민족, 일본민족이 공존한다. 특히 이 논문에서는 1930년 전후부터 패전 이전까지 신문과 잡지를 구독했거나, 구독 가능성이 있으며, 혹은 구독하지 않았더라도 그 영향권 하에 있던 한국과 일본의 ‘대중’을 다루고 있다.
제국의학의 토대 구축은 일부 정치가와 의료관계자의 활동에 의해서 이루어지지만 이에 동조하고 가담하는 ‘다수의 사람들’에 의해서 완성된다. 한센병을 둘러싼 제국의학의 실현에도 마찬가지로 대중의 참여가 절실했다. 대중은 한센병 정책을 적극 추진할 수 있도록 연대해 가는 ‘운동성(運動性)’을 지니고 있다. 즉 이들은 대중매체의 영향을 받아 담론을 형성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수많은 무명의 존재’들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의 ‘다수성(多數性)’은 국가 예산이나 황실의 기부금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한센인 격리 공간 구축의 자금원이 될 수 있다는 가치를 지닌다.
이와 같이 실체가 있는 제국의학이 형성되기 위해 ‘대중’에 대한 전략이 매우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연구사에서 간과되어 왔다. 다만 김미정이 ‘보건의 위협자’, ‘잠재적 범죄자’라는 한센인에 대한 대중 인식(김미정, 2012: 434-441)을 언급했으나, 이는 한국 신문 일부(『동아일보』, 『조선일보』, 『매일신보』) 기사의 표면적 분석에 그치고 있고, 제국 주체의 대중에 대한 구조적 ·전략적 관점에서의 고찰에 이르지 못했다. 또한 일제가 발행한 한센병 관련 1차 자료에 대한 연구의 필요성이 정근식에 의해 언급되었으나(정근식, 2002: 11), 아직까지 전면적으로 소개되지 못했다는 한계도 있다.
이에 본 연구에서는, 제국의 소록도갱생원 설립과정과 착취의 역사 연구중심이었던 그간의 한계를 극복하여, 일본 한센병사 속에서 제국의학의 실천방향을 확인하고, ‘구라의 아버지(救癩の父)’로 불리던 미쓰다 겐스케(光田健輔)의 한센병 사업의 특성과 제국의학이 ‘국민’이라고 부르던 사람들(당시, 자신을 ‘일본 신민’이라고 여기던 조선과 일본의 다수)과 밀착해 가는 양상에 대해 살펴본다. 그리고 지금까지 연구 대상으로 다루어지지 않았던 다키오 에이지(滝尾英二)[3]의 『식민지하 조선의 한센병 자료 집성』[4]에 수록된 한센병 관련 미디어(『조선조일(朝鮮朝日)』, 『경성일보(京城日報)』, 『조선통신(朝鮮通信)』, 『일본 MTL(日本MTL)』, 『애생(愛生)』, 『문헌보국(文獻報國)』, 『경무휘보(警察彙報)』 등)및 소록도 방문 개인기록물, 그리고 당시 조선에서 간행된 문화 · 대중잡지(『조선(朝鮮)』, 『문화조선(文化朝鮮)』)를 통해 일제의 ‘대중’ 포섭의 양상에 대해 고찰한다.

2. 일본의 한센병 인식과 정책

근대 이전, 일본에서 한센병은 ‘유전병’으로 취급되어 환자의 가족 및 친척 등과 결혼을 기피하는 정도였다. 근대 시기에 접어들어서는 콜레라 등의 ‘급성감염증’ 정책에 중심을 두고 있어서 한센병은 적극적 관리 대상이 아니었다. 그러나 1899년 막부시기 시행되던 ‘거류지제도(居留地制度)’가 폐지되고 ‘내지잡거(內地雑居)’[5]가 실현되어 서양인이 일본 내에서 자유롭게 거주·이동할 수 있게 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이 시기 일본을 방문한 서양선교사들은 일본에 한센인이 많은 것에 놀라 1880-90년대에 한센인 병원 등을 세웠다(藤野豊, 2006:2). 이에 따라 일본정부도 ‘일본에 의한 한센인 정책’ 마련을 시급한 과제로 삼았다. 한센인 정책의 출발은, 당시 제정된 「북해도구토인보호법(北海島舊土人保護法)」(1899), 「정신병자감호법(精神病者監護法)」(1900), 「창기단속규칙(娼妓取締規則)」(1900)과 같이 서양인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문명국’의 수치를 가리는 방편으로 마련되었던 것이다(藤野豊, 2008: 155).
1899년 제 13회 제국의회(帝國議會)에서 네모토 쇼(根本正) 등 3인의 의원이 「나환자 및 거지 단속에 관한 질문」을 제출했다. 여기에서 한센인은 ‘일본제국의 위광(威光)을 훼손하는 중대한 문제’로 제기되었다(藤野豊, 2010: 9). 1902년 16회 제국의회에서 사이토 히사오(斎藤壽雄)는 「나환자 단속에 관한 건의안」에서 외국인이 일본에 와서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거리의 한센인이라고 보고했다. 그리고 1906년 22회 제국의회에서 야마네 마사쓰구(山根正次)는 의회입법안으로 「나예방법」을 제출하고, 1907년 23회 제국의회에서 「나예방에 관한 건」이 성립되었다(藤野豊, 2010: 10-11)[6].
일본의 한센인 사업은 피차별부락(被差別部落) 조사에서 출발한다(藤野豊, 2008: 160). 1912년 9월부터 젠쇼병원(全生病院)에서 한센인에게 종교적 교리를 전하던 혼다 에코(本多慧孝)라는 승려가 1913년 3-5월 병원장과 함께 전국 한센병요양소와 한센인 다발지역을 시찰하고 그 중 피차별부락이 한센병 발생의 근원지라고 지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생사상에 근거한 ‘민족정화’라는 국가적 목표 하에 「근본적나예방요항(根本的癩豫防要項)」(1920)이 발표되면서 기존의 방랑하던 한센인 격리에서 모든 환자를 격리하는 정책으로 전환되었다. 1930년 12월에는 일본 내무성 위생국에서 『나병근절책(癩の根絶策)』을 발간하는데, 이후 이에 근거하여 일본과 식민지의 한센병 정책이 시행된다. 1931년 일본에서 ‘나예방협회’가 설립된 것에 이어, 1932년 12월에는 이마이다 기요노리(今井田清徳), 이케다 기요시(池田清), 니시키 산케이(西亀三圭), 나가바야시 시게키(長林茂樹)가 설립위원 대표로서 재단법인 설립 허가를 총독부에 출원하여 ‘조선나예방협회(朝鮮癩予防協會)’가 설립되었다.
일본의 한센인에 대한 정책은 ‘문명국가 건설’의 과잉으로 드러난다. 일본은 1897년 1차 ‘국제나회의(國際癩會議, 베를린)’ 참가 이후[7] 국제적 지위확보를 위한 문명국으로서의 위상 수립이라는 취지를 내세워 한센인 단속과 격리의 제도화를 추진했다. 그러나 실상 베르겐의 2차 회의에서는 ‘환자의 승낙에 의한 격리’가 제기되었고, 1923년 3회 스트라스부르 회의에서는 ‘집 근처에서 인도적으로 격리’, 카이로에서 열린 제 4회 회의 때는 ‘합리적 퇴소의 보증’의 논의가 있었다(柳橋演男 등, 1957: 79, 193).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에서는 이 부분이 무시되고 절대격리가 실시되었다.
일본이 국제적 조류에서 일탈하여 절대격리를 고수했던 이유는, ‘국제나회의’(제3회)에서 일본(식민지 포함) 한센인이 10만 명이 넘는다고 보고되었기 때문이다[8]. 이 회의에 참가했던 미쓰다 겐스케는 ‘야만적이고 미개한 원주민에게 만연한 나병’이 ‘순결한 혈통인 일본인’에게 많다고 보고된 사실은 다른 서양국가에 대해 ‘굴욕적 사실’이라고 개탄하며 한센인 절대격리를 주장했다(光田健輔, 1926: 41-42)[9].
이 미쓰다라는 인물은 일본에서 ‘구라의 아버지’로까지 칭송되던 일본 한센병 정책의 핵심적 존재이다. 그는 군의가 되고 싶었으나 시력 문제로 꿈이 좌절되면서 병리학자의 길을 지망하게 되었다. 그의 한센병과의 인연은 동경대학 의학부에 기부되는 한센인 시신 해부에 적극적으로 참가함으로써 시작되었다(武田徹, 1997: 33). 1915년 젠쇼병원 원장으로 취임한 미쓰다는 일본의 피차별 부락의 소재지를 파악하고 철저한 조사를 실시한다. 그리고 같은 해 한센인 단종수술을 처음 실시한다. 단종수술을 일본에서는 와제쿠토미(ワゼクトミ-) 혹은 우생수술이라고 명명했다(滝尾英二, 2001: 176). 미쓰다는 이 수술을, 1924년 일본 피부과학회에서의 「간단한 유정관절제술(単なる輸精管切除術)」이라는 보고에서, “유정관 하부 절제, 즉 국소마취 후 음낭 후면 피부를 겨우 1cm 정도 열어서 유정관을 노출시켜 그 일부를 절제하는...나 근절의 백미(白眉)”라고 언급한다(光田健輔, 1950: 12). 그 외에도 한센인은 같은 병을 가진 아이를 낳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 한센병에 걸린 모체가 임신, 분만을 하면 한센병에 대한 저항력을 잃게 된다는 점, 남자 아이의 고환은 한센병 병균이 번식하기 쉬운 온상이라는 점을 주장하며 한센병 근절에 대해 강조했다. 그리고 미쓰다는 한센인 ‘징계권’에 대한 필요성도 주장했는데, 그의 의견에 따라 「나예방에 관한 건」 개정안에 수용소장의 「징계검속권(懲戒檢束權)」(1916)이 명기되었다.
미쓰다는 1930년 오카야마(岡山)현에 처음으로 개설된 국립격리시설 나가시마애생원(長島愛生園)의 초대 원장이 되었다. 한센병 관리의 ‘국가대표’가 된 그는 ‘국가의 체면’을 지키기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국민 스스로가 한센병에 대처해 가기를 바랐고 이를 위해 식민지를 포함한 전 국민 동원을 모색했다[10]. 그가 주력을 기울였던 것은, 일반 대중의 공간에서 환자를 퇴출하는 것과 환자들만의 공간을 구성하는 것을 통해, 한센병 사업이 환자와 비환자 모두를 위한 ‘공공의 선(善)’이라고 전시(display)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미쓰다는 두 가지 측면에서 활동하였는데, 그 한 가지가 한센병을 ‘감염병’으로 대중에게 각인시키는 언론활동 즉 ‘공포의 선전’이었고(武田徹, 1997: 34), 나머지는 갱생원에 견학자를 적극적으로 초청하는 것이었다[11]
미쓰다를 주축으로 한 한센병 사업의 결과, 1933년부터 일본 황태후 생일인 6월 25일이 ‘나예방 데이’로 정해졌다. 그리고 ‘국민 계몽’이라는 명목으로 각지에서 강연회나 영화상영 등의 행사가 늘어났다(武田徹, 1997: 42). 또한 ‘무나현운동(無癩県運動)’을 실시하여, 일본 전국에서 경쟁적 형태로 자택에서 요양하는 환자를 찾아내어 격리시설로 보냈다(藤野豊, 2006: 8-9). 그래서 1940년에는 당초 목표였던 1만 명 격리가 달성되었고, 1941년에는 일본의 공립 격리시설이 모두 국립으로 이관되어 국민들을 동원하는 형태로 한센인 관리 정책이 시행되었던 것이다. 미쓰다는 1941년 나가시마애생원 잡지 『애생』에서 “천황의 명령을 받들어 생명을 바치는 군인과 같은 마음으로 후방의 국민들도 자신들의 공간에서 한센인을 퇴출(光田健輔, 1942: 1-2)”해야 한다며, 한센인 관련 질병정책이 황국신민의 자부심을 가지고 목숨을 걸 정도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러한 제국의학에 대한 자부심은 일제를 지탱하는 버팀목 중 하나였다. 그리고 패전으로 제국주의 시대의 종언을 맞이했음에도 불구하고 제국의학의 자부심은 ‘일본제일(닛뽄이치, 日本一)’라는 개념으로 변형되어 ‘자랑스러운 일본인’ 대중을 구축하는 것으로 여전히 그 맥을 이어간다.
패전 후 1949년 3월 6일, 나가시마애생원에서의 「나병관리강습회」 보고(光田健輔, 1950: 102)에서, 미쓰다는 과거 일제강점기의 한센병 격리수용소 운영[12]에 대한 의견을 제출한다. 여기에서 미쓰다는 당시 소록도갱생원 사업을 ‘조선통치의 본질을 표상하는 선정(善政)’, ‘조선통치에서 자랑할 만한 업적’으로 소개한다. 또한 미쓰다는 패전 후 한센인을 매개로 일본국민의 한국에 대한 민족차별 감정을 선동하기도 했다. 그는 한국전쟁으로 인해 일본이 완벽하게 만들어 놓은 소록도갱생원에 혼란이 일어났고 그 결과 한국 한센인이 일본으로 밀입국한다는 정보를 선전했다(藤野豊, 2008: 165). 이와 같은 소록도갱생원을 매개로한 식민지통치 합리화는 1967년 편찬된 하기와라 히코조(萩原彥三)의 『조선의 구라사업과 소록도갱생원』[13] 등 다양한 자료에서 마찬가지로 드러난다.

3. 미디어가 발신하는 ‘공포의 선전’과 ‘행복한 이상향’

미쓰다의 제국의학 실현을 위한 방법, 즉 단종과 절대격리를 위한 ‘언론 활동’과 ‘견학자 초청’과 같은 대중포섭은, 식민지의학을 담당하던 인물들에 의해 조선에서도 비슷한 형태로 드러났다. 조선에서 한센병 대책에 관여한 초기 인물은 야마네 마사쓰구이다. 야마네는 일제강점기 조선 한센인 격리를 위한 시책추진과 시설마련을 도모했다. 이리하여 1916년 2월 24일 소록도자혜의원(후에 소록도갱생원)이 창설되고 초대 원장으로 아리카와 도오루(蟻川享)가 임명된 후 조선 각 도의 한센인 수용이 시작되었다[14]. 하가 에이지로(芳賀 栄次郎, 1864-1953)는 1935년의 「조선시책 25주년 감회」에서 갱생원 설립 초기를 회상하며, “원래 조선에서 나환자 수용시설은 서양인의 손에 의해 두 세곳 설치되어 있었는데...매우 유감스러운 점이 많아서 총독부에서는 소규모라도 완전한 요양소를 설치하고 싶었다”고 언급한다(滝尾英二, 2001: 48). 이러한 의식 하에 소록도갱생원은 서양에 의한 갱생원에 비해 일본 식민지의학의 우수함을 자랑하고 싶은 도구로 마련되었다. 청일·러일전쟁의 승리 후 대만, 사할린 남부, 조선, 만주를 그 세력권에 편입하여 아시아 유일의 ‘제국’의 길을 걸으며 세계열강의 일각을 차지해가고 있던 상황에서, 근대의학 분야에서 일본이 상당히 뒤쳐진다는 의식이 있었다. 따라서 한센인 정책에 있어서도, 쉽게 도달하기 어려운 의학적 성과 보다는 한센인 관리시스템과 대중의 호응에 기대어 결과물을 완성해가려고 했다. 이를 위해 미디어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근대 이전부터 존재하던 대중의 한센인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은 언론기사를 통해 객관화, 구체화되어 갔다. 한센인은 ‘불온’한 존재로, ‘부랑’하며, ‘부민의 곤란’을 유발하므로 정부 당국의 조처가 필요한 대상으로 소개되었다[15]. 다음은 당시 신문에 게재된 한센인 관련 기사 제목의 일부이다(滝尾英二, 2002a: 3, 4, 45, 70, 88, 136, 150).16)
  • <일본어 신문>

  • 「나 병에 걸린 자기 아이에게 인육이 약이라고 듣고-거지 소년을 죽인 엄마 마침내 사형」, 『조선조일』 (1925.10.22.)

  • 「어린 아이를 죽여 생간을 꺼낸 한센병 환자」, 『조선통신』 (1927.3.18.)

  • 「살아있는 사람에게 떨어지는 피를 빨아 먹는 흉폭무자비한 살인귀」, 『조선조일」(1928.3.30.)

  • 「생간을 빼내는 나환자 일당」, 『경성일보』 (1928.6.10.)

  • 「소녀살인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레프라 환자 2명을 각지에 지명수배 조사 중」, 『조선조일』 (1932.5.11.)

  • 「지극히 괴기한 나환자의 범행-소녀 살인사건」 『조선조일』 (1932.5.15.)

  • (滝尾英二, 2002a: 31, 45, 66, 73, 204, 205)

  • <한국어 신문>

  • 「癩病者의 橫行 어린아해를 잡고 무슨 욕을 뵈이어」, 『동아일보』 (1920.8.6.)

  • 「迷信은 亡國의 禍源: 문둥이는 음경을 먹어도 결단코 병은 낫지 안는다-타파하라 속히 미신을!」, 『동아일보』 (1920.8.13.)

  • 「十二歲小兒를 割腹後摘肝」, 『동아일보』 (1927.3.15.)

  • 「靑春少婦食人鬼 七歲女兒를壓殺烹食 惡鬼도戰慄할 迷信慘劇」,

  • 『동아일보』 (1928.5.15.)

  • 「癩病患者가 殺兒未遂 병 고친다는 미신을 밋고」, 『동아일보』 (1929.5.27)

  • 「무덤을 파헷치고 어린애 송장을 먹어」, 『조선일보』 (1930.9.7.)

  • 「문둥병자가 五歲兒를 죽여 경주에서 일어난 대소동-可驚할 迷信의 弊害」, 『조선일보』 (1931.9.1.)

이러한 기사는 한센인의 미신적 광기를 비난하며 결국 범죄를 낳는다는 내용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미신적 치료법을 맹신한 범죄뿐 아니라 생계형 범죄나 성범죄도 저지른다는 기사도 확인할 수 있다.17) 이처럼 한센인이 비환자인 대중의 공간에 존재함으로써 일어나는 폐해에 대해 알리며 그렇기 때문에 격리가 필수적이라는 분위기를 이끌어낸다. 신문기사 중 주제적으로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한센인의 미신적 행동은 비환자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엽기적이라는 것이 강조되어 있다[18]. 잡지 『조선』에서는 각 관내에서 행해지는 한센인의 풍습과 미신요법에 대해 다음과 같은 내용을 소개한다[19].
결국 이런 행동을 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치료가 어렵다는 것을 강조하고 전염의 위험성이 높다는 분위기를 조장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미디어를 통한 한센인 혐오 담론 유포는 비환자인 대중이 자신들의 생활권에서 한센인을 추방해주기를 바람과 함께, 이들의 격리를 적극적으로 총독부에 요청하는 분위기를 형성한다[20]
  • 근래 남조선 일대를 중심으로 나병환자가 횡행하는 날이 많아지고, 지방주민의 위생상 경제상의 위협이 적지 않다....과반수의 부산부의 상인 측 대표가 상업회의소를 방문하여 그 정리 정책의 수립을 요구하고, 나아가 그 문제를 부산만 단독으로 해결하고 실시해서는 철저하게 정리할 수 없으니, 경남, 경북, 전라 3도가 연합회의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당국에 요청했다고 한다[21].

이상은 조선 대중의 한센인 격리에 대한 절실한 요구와 그에 대한 대책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기사이다. 이러한 흐름은 우생학에 대한 긍정과도 맞물려 있다. 1932년 12월 10일자 『경성일보』의 「인구문제와 우생학」에서는 인구의 질적인 문제에 대해 강조하며 “적극적 방침을 세워 이 중요한 현안을 만족스럽게 해결하기 위해 관(官)과 민(民) 할 것 없이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언급한다(滝尾英二, 2002a: 256). 이는 ‘열등한 인간 소탕’에 민간의 참여가 절실함을 호소하는 내용이다[22].
이처럼 한센인들에 대한 이미지는 일본어와 한국어 신문 등을 통해 다양한 측면에서 열등한 존재로 고착되어 갔다. 그러나 비슷한 내용을 실으면서도, 한국어 신문 기사의 요점이 꾸준히 한센인에 대한 ‘조사’, ‘색출(문제제기를 통한)’, ‘격리’였다면,[23] 일본어 신문은 이에 더하여 식민지의학의 위엄(진보해가는 의료시설, 갱생원의 체계적인 시스템, 조선인들의 황국 신민으로서의 행복감, 나예방협회의 활동과 성과)에 대한 기사를 많이 실어가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우선 소록도갱생원의 설립 이후 환자의 증가 양상과 그에 따른 긍정적인 효과가 꾸준히 언급된다. 다음은 그에 관한 기사들의 목록이다(滝尾英二, 2002a: 26, 56, 69, 72, 82, 93, 132; 2002b: 160).
  • 「나병 요양소의 확장과 증설」, 『조선조일』 (1925.4.24.)

  • 「소록도 의원 병사 증축」, 『조선조일』 (1927.6.4.)

  • 「천형병원을 확장하여 500명 더 수용」, 『경성일보』 (1928.5.13.)

  • 「나 환자 수집(狩集) 소록도에 보내다」, 『조선조일』 (1928.6.3.)

  • 「소록도의 나병원 수용력이 증가하여 4개 도의 환자를 이동」, 『조선조일』 (1928.9.3.)

  • 「중증 나환자 요양소에 보내다」, 『조선조일』 (1929.10.25.)

  • 「나 환자 수용소 확장」, 『조선조일』 (1930.6.20.)

  • 「넓어져 가는 소록도 갱생원 대 번창」, 『경성일보』 (1935.4.10)

‘확장’ ‘증설’ ‘증가’ ‘대 번창’ 등의 제목이 인용한 기사의 특징을 말해준다. 신문기사는 소록도갱생원이 얼마나 많은 사람을 수용하고 있는지, 수용해가고 있는지, 앞으로도 수용할 수 있는지 꾸준히 보도해 갔다. 그리고 확장의 개념에는 단순한 시설 확장에서 그치지 않고 의학적인 진보에 관해서도 제시한다. 연구를 위해 한센인 시신을 대학에 기증하기도 하고, 치료법에 대한 새로운 발견을 선전하기도 한다[24].
그리고 소록도갱생원 한센인의 생활에 대한 기사에는 그들의 ‘감정’이 다루어진다는 특징이 있다. 앞서 다양한 기사에서도 확인했듯이 한센인은 비인간적 존재로 취급되었다. 이들의 색출 및 격리 과정에서 사용되는 ‘수집(狩集)’, ‘수립(狩立)’, 즉 ‘사냥하여 모은다(혹은 내쫓는다)’는 표현은 한센인에 대한 태도(비인격적 혹은 동물적 존재)를 단적으로 드러낸다[25].
그러나 갱생원 내 한센인은 감정을 표현하는 ‘인간’으로 소개된다. 예를 들어 1938년 9월 15일자 『경성일보』의 「감격하는 환자, 미나미 총독 소록도를 시찰」이라는 제목의 기사는,
  • 총독은 원장의 안내로 5,000 명의 환자를 수용하는 동양 제일의 나수양소와 형무소 시설을 자세하게 시찰하셨다. 특히 중앙운동장에 모여 있던 남녀 3,770 명의 환자를 향해, 총독은 자애로운 아버지와 같은 모습으로 훈화를 들려 주셨다. 일동은 훈화를 들으며 일본 국민으로서의 영광에 감격의 눈물을 흘리고,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황국신민서사를 제창했다(滝尾英二, 2002b: 282).

라고 소개하여 한센인의 눈물, 진심 등을 언급한다. 그리고 소록도갱생원에는 오락기관, 악단, 극장 등의 문화공간이 설치되어 있어 환자가 ‘유희적 감정’을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을 알리기도 한다[26]. 이러한 삶의 보장으로, 환자들이 “감사하는 마음으로 매우 명랑하게 갱생생활을 영위해 가고 있는 현재 상황”이라는 한센인의 심정이 다루어진다[27]. 그리고,
  • 새로운 환자를 환영하는 한편 그들은 천형병(天刑病)을 극복하고자 노력하고 있고, 건강한 사람은 전답에서 혹은 토목건축을 도우며 얼마 안 되지만 임금 받는 것을 좋아하여 열심히 일을 하고, 2,000 명의 대가족이 어떤 불만도 표하지 않으며 낙원의 실현에 힘쓰고 아무런 사고도 없이 지내고 있다[28]

는 내용처럼 환자의 ‘노력’, ‘좋아함’, ‘불만 없음’ 등, 감정을 가진 인간으로 취급한 표현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한센인도 생산 활동을 통해 자신의 삶의 터전을 가꾸며 만족하며 지낸다는[29] 등의 기사는 갱생원 내 한센인이 평범한 사람들과 다를 바 없다는 식이다. 즉 갱생원 안과 밖의 한센인에 대한 취급이 다르다는 것이다. 한센인이 갱생원 내에서 인간답게 살고 있다는 묘사는, 한 때 자신의 가족 혹은 이웃이기도 했던 존재들을 비인간 취급하여 자신의 공간에서 무자비하게 몰아낸 대중에게 윤리적 합리화와 안도감을 제공하고, 일본제국 건설이 궁극적으로 ‘천황의 자애’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으로 전시된다.
한센인 이미지 형성의 대중전략은 이러한 미디어를 통해 이루어졌다. 이를 위해 미디어는 갱생원 밖 한센인들에 대한 극단적인 표현, 즉 미개, 잔인, 위협, 각종 범죄, 부랑 등의 수식어를 붙여 비인간적 존재로 취급했다. 이러한 기사는 대중들에게 호응을 얻어 한센인을 자신들의 공간에서 추방해달라는 요청을 자발적으로 끌어낸다. 그 이유도 당당하게 자신들의 안전, 위생, 이상적인 종족보전, 범죄예방 등 이상적인 사회실현을 위해서 이다. 그리고 ‘천황의 은혜’를 입은 한센인은 격리공간에서 ‘인간다운 존재’로 새롭게 다시 태어나는 형태로 재포장되었다. 이런 이유에서 소록도갱생원을 소개하는 신문기사제목에는 ‘별천지’ ‘천국’ ‘낙원’ ‘천혜’라는 단어가 종종 보인다[30]. 사람의 감성을 자극하여 결과적으로 ‘천황의 은혜’를 끌어내는 기술은 당시 일본의 대중 미디어에서 종종 확인할 수 있다[31]. 근대 일본의 대중 미디어는 황국신민으로서의 자부와 천황에 대한 감사, 궁극적으로는 국가에 이로운 방향으로 자신을 희생하는 존재가 ‘진정한 일본인’이라는 ‘공통감각(public sympathy)’을 형성하는 매개였다.

4. 식민지의학의 ‘정화(精華)’, 소록도갱생원으로의 초대

앞 절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소록갱생원은 한센인에게 새로운 인간적 삶을 보장하는 이상적인 공간으로 전시되었다. 1932년 ‘조선나예방협회’ 설립 후 각종 미디어에는 소록도갱생원 소개를 더 적극적으로 하고 있다. ‘나협회’ 소개, 설립위원 소개, 기부자, 기부요청에 관한 기사가 압도적으로 많아진다. 그리고 일본 각계 인사들의 소록도갱생원 방문이 늘어났다. 다음 <표 2>는 일본의 정치 의료계 인사들과 기자들의 소록도갱생원 방문기이다[32].
이상의 소록도 방문기는 일본의 조선 한센병 정책 현황과 한센인 수용의 추이, 소록도 내의 시설시찰에 대한 감상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여행기인 만큼 소록도까지 가는 경로가 자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예를 들면, 다지리 오사무(田尻敢)는,
  • 전라남도 벌교역에서 남쪽으로 약 10리 정도 떨어진 지역에 녹동이라는 어촌이 있다. 여기에서 발동기선으로 10분 정도 가면 소록도에 도착한다....수년 전 조선의 나(癩)는 외국인 선교사에 의해 관리되었고 정부가 운영하는 소록도요양소는 거의 유명무실 그 자체였지만, 조선 관민(官民)의 나에 대한 이해를 통해 조선나예방협회가 창립되었다. 동시에 120만 엔의 헌금이 생겼고, 이 금액의 대부분을 소록도갱생원의 설비를 갖추는 데에 사용하여, 크리온 섬[33]에 이은 세계 두 번째 수용력을 지닌 4천명 환자 수용계획을 세우고...이처럼 조선의 계획에 자극을 받아 일본이 나병으로부터 하루빨리 구원받기를 바라는 마음이 강하게 들었다(田尻敢, 1935: 2-3).

며, 관민 협력에 의한 조선에서의 한센병 정책 성공이 일본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고 있다. 그리고 시라토 하치로(白戸八郎)는 이전부터 소문으로만 듣던 갱생원을 꼭 방문해보고 싶었다는 감상을 전하며, 일본에서 부산 그리고 조선 내에서 소록도로 가는 경로를 자세히 소개한다. 그는,
  • 갱생원은 조선총독부 직할의 요양소이다. 이 시설은 조선에서뿐 아니라 세계에서도 보기 드문 대규모 시설이어서 언젠가는 꼭 방문해 보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었다....부산에서 경성으로 가는 기차를 타고, 삼랑진(三浪津)이라는 곳에서 갈아 타 경상남도 진주라는 곳까지 갔다. 거기에서 버스를 타고 조선의 산간을 돌아 순천에 이르는데, 여기에는 약 4시간 정도 소요된다. 순천에서 다시 기차를 타고 벌교역에 내려서 자동차로 한 시간 정도 더 가면 반도의 남단 녹동이라는 마을에 이른다. 거기에서 병원의 작은 증기선을 타면 소록도에 도착한다....이 섬은 이상적인 건강지(健康地)로, 땅이 비옥하고 해산물이 풍부하여 부식물의 자급이 가능하다는 것은 실로 이 섬이 가진 큰 특권이라고 할 수 있다(白戸八郎, 1939: 7).

고 하며 갱생원 내의 시설을 구체적으로 소개한다. 그리고 가와조메 요시노부(川染義信)의 방문기에서는, 소록도를 일본인에게 친숙한 곳으로 소개하기 위해 “최승희가 태어난 곳이자 손선수를 낳은 고향으로 친숙한 조선!!”이라는 표현을 글머리에 사용하여 세계적 명성을 떨친 인물들이 태어난 고장으로 ‘조선’을 환기시킨다(川染義信, 1936: 3). 실제 최승희와 손기정은 소록도와 전혀 관련 없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을 균일한 하나의 덩어리로 취급하고, 일본인들의 관심을 소록도에 모으기 위해 ‘유명한 조선인’을 언급했다. 또한 조선나예방협회 설립 직후부터 소록도를 방문했던 미쓰다 겐스케도 1940년 소록도갱생원 시찰 후 다음과 같은 감상을 전한다.
  • 풍년춤(豊年踴) 대열이 뿌우뿌우하는 소리를 내고, 북을 두드리며 200명 정도 입장했다. 빨강·초록·노란색 천조각으로 장식한 의상을 입고 깃털로 만든 모자를 쓴 머리를 빙글빙글 돌리면서 손을 흔들고, 발로는 춤을 추며 흥겨운 몸짓으로 대열을 만들면서 돈다. 일본의 본오도리와 비슷하다....그러는 중 세찬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대열은 아랑곳하지 않고 춤을 췄다. 내가 감동했던 것은 운동장 트랙에 백의를 입고 무릎을 꿇고 않아있던 수천 명의 군집의 모습이었다. 춤이 끝날 때 까지 하얀 벽처럼 트랙에 조용히 않은 채 아무도 일어서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은 숨을 죽이고 관람하고있었다. 비는 점점 더 세차게 내렸다. 행사 중지 명령이 내려졌다. 군집은 그제야 가지고 있던 우산을 꺼내어 쓰고 각 부락으로 흩어졌다. 일본에서는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光田健輔, 1940: 5-6).

조선인들의 태도에 미쓰다는 ‘일본에서는 볼 수 없는 광경’이라고 감탄한다. 이와 같이 일본인 방문자들은 ‘조선인의 협력적 태도’에 대해 상당히 주목하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는데, 다른 방문기록에서도 소록도 방문 후 특히 강조하는 것은 조선의 한센병 정책이 ‘관과 민이 협력’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들의 글에는 ‘관민일체(官民一體)’라는 단어를 빈번하게 확인할 수 있다. 국가의 한센인 정책에 대한 조선인의 적극적 ‘참여’에 기술의 초점을 두어, 아직 참여하지 않은 조선 대중을 고무시키고, 이를 모델로 삼아 일본 대중의 참여를 이끌어내고자 했던 것이다.
당시 일본 ‘나예방협회’에서는 자금출원 문제를 가장 고심하고 있었는데, 그 자금은 민간에서 충당하고자하는 계획이 있었다. 『일본MTL』에는, 한센병 근절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자금이 가장 문제인데, 관민이 서로 협력하고 나예방협회가 전국적인 조직을 정비하여 열심을 내면 어려울 것도 없다”는 내용이 있다[34]. 즉 민간의 협조를 통한 자금조달로 이상적인 한센인 정책을 실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각계의 일본인들은 ‘관민일체’의 이상적인 사례를 제공한 소록도갱생원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카노 로쿠로(高野六郎)는,
  • 현재 조선 소록도의 시설은 일본의 나가시마(長島) 보다 몇 배는 더 낫다. …… 조선나예방협회가 조직되어 관민이 협력하여 약 150만 엔의 자금을 모아 소록도 전부를 매수하여 환자 4천명 수용 계획을 수립했다....기부금이 예상 외로 많이 모여서, 당초 계획이 확대되어 올 가을에 이미 4천 명 수용의 나도(癩島)가 완성되고, 11월 21일에 낙성식을 거행하게 되었다....소록도 부근의 부락을 대상으로 학교나 병원을 제공하기도 하는데, 이것도 일본에서 볼 수 없는 광경으로 역시 감탄을 자아낸다(高野六郎, 1936: 16).

소록도갱생원이 ‘관민일체’로 자금조달 문제를 극복해갈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주변 마을과 병원 및 학교 시설을 공유할 정도로 영향력을 확대해 가고 있다는 점에서 일본의 귀감이 된다는 것이다. 시모무라 가이난(下村海南)도 한센인 정책에 대한 조선 대중의 높은 참여율을 칭찬하며 이에 반해 일본 대중의 한센인에 대한 관심이 매우 부족함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 일본과 조선의 나병에 관한 큰 차이점을 들자면 나에 대한 관심 부분이다....일본의 나예방협회는 200만 엔을 모으려 했으나 절반도 모아지지 못했다. 이에 반해 조선에서는 50만 엔 정도 모으려고 했는데 210여만 엔이 모였다....기부금을 내는 사람은 조선인이 더 많다. 더구라 조선의 인구는 일본의 삼분의 일 수준이고 부유함의 정도도 일본보다 한참 낮다. 이처럼 일본에서는 나문제가 너무 간과되고 있다(下村海南, 1937: 2).

갱생원을 방문한 이들은 식민지의학의 성과를 자랑하며 이것이 일본의 한센병 정책에도 반영되어야 한다는 의지를 보였다. 전시 상황으로 발전해가며 자금난에 허덕이는 속에서 민간의 기부는 한센병 정책을 추진하기위한 핵심적인 요소였다. 따라서 당시 소록도갱생원 확장을 위한 주요 자금원이 된 기부에 대해서 강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와 같이 민간의 의식적 참여와 경제적 보조를 끊임없이 필요로 했기에 당시 신문과 잡지 기사는 기부금에 대한 ‘미담(美談)’[35]이 상당히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우선 황실이 모범을 보이고 있다는 점을 알리기 위해 「우량사회단체에 천황 하사금」이라는 제목의 기사는 꾸준히 게재된다[36]. 그리고 민간의 기부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선전했다[37]. 기부에 관한 기사는, ‘○○엔 돌파!’처럼 목표치를 정해 놓고 얼마까지 모금되었다는 식의 경쟁적인 글들이 소개되거나,[38] 기부한 사람의 따뜻한 마음씨를 강조한 글[39] 등으로 이어진다. 이미 국가에서는 모범을 보이고 있으니 일반인들도 기부를 통해 주변에 한센인 부랑자가 생기지 않도록 독려했던 것이다. 즉 수용시설이 부족하면 결국 피해를 보는 것은 ‘일반인 = 국민(조선과 일본의 비한센인)’ 자신이라는 것을 인식하게 하여 스스로 참여하게 했다. <표 3>을 보면 당시 민간에서의 기부금액을 알 수 있다[40].
이상의 표를 통해 조선에서 기부 신청과 수납이 원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제시된다. 잡지 『조선』의 「나예방 하사금과 기부상황」에서는 “나예방에 대한 조선 전체 관민의 관심은 매우 높다. 당초 27만 엔(관사 제외)의 기부를 예상했으나 이미 81만 엔을 돌파하여 3배에 달하는 성황을 이루어 일본에서도 경이로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며, 다수의 조선인 참여가 놀랍다는 듯이 소개한다(朝鮮總督府, 1933: 156).
이러한 식민지의학의 성과는 일본제국의 자랑으로 반도 내 ‘일본인’의 자부심을 불러일으키는 것과 동시에 열도일본인을 ‘충량한 신민’으로 완성해가는 도구로도 사용되었다.
그리고 이와 같이 ‘관민일체’로 이룩한 소록도갱생원은 단순히 정치나 의료계 관련자뿐만 아니라 일반인 방문을 위한 전시의 장으로도 활용되었다. <그림 2>에서 보이는 『문화조선』은 당시 조선에서 발행된 관광잡지이다.[41]. 이 잡지는 발간 취지에서 ‘조선이 가진 잠재력을 개발’하는 데에 있어 ‘일반국민이 조선을 아는 것’이라고 밝힌다(日本旅行協會朝鮮支部, 1939: 2). 이런 이유에서 이 잡지는 대중의 흥미를 자극하는 조선의 문화를 소개하고 있으며, 기자들과 일본에서 방문하는 각계 인사들의 조선여행기를 실어 실시간으로 조선의 상황을 전달하고 있다. 이 1942년 5월에 출간된 『문화조선』 4권 3호는 「소록도 특집」으로 구성된다. 이 「소록도 특집」에는 소록도에 대한 다양한 측면에서의 소개뿐 아니라 소록도 지도와 교통편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표2>, <그림 3> 참조).
소록도 방문에 대한 구체적 정보는 이미 1930년대 초반부터 제공되기 시작했다. <그림 4>의 오른편에 있는 두 개의 표는 소록도 방문자를 위한 경로 안내와 시간표이다. 그 내용을 보면, 녹동(鹿洞)과 소록도 사이의 왕복 배편은 9월부터 3월 사이에는 하루에 6편, 4-6월은 하루 8편, 여름철인 7-8월은 하루 10편 배정되어 있다. 소록도로 가는 구체적인 교통편도 소개하는데, 일본에서 직접 방문하는 경로와 경성을 거쳐서 방문할 수 있는 경로로 나누어져 있다. 그리고 출발지에 따라 이용할 수 있는 교통편과 경유지 등을 자세하게 기술하고 있다(<표 4> 참조).
이는 소록도갱생원을 조선의 주요한 관광지로서 자리매김하려는 노력이 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실제 「소록도 특집」이 발간되는 1940년 전후는 일제 말 전시 체제의 상황이라 대중의 관광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42]. 1939년 7월부터 ‘자동차용 가솔린 배급제화’, ‘배급량 30% 축소’ 계획이 발표되고, 1940년대 이후 전쟁 상황의 확대로 여행금지조치가 실시된 것이다. 즉 『문화조선』이라는 잡지가 일본(및 조선) 대중이 손쉽게 접할 수 있는 곳에 비치되어 갱생원을 선전하기는 했지만,[43] 실제로 관광객 방문을 기대하기 보다는 식민지의료의 전시장으로 대중에게 소개하고 유포하는 데에 중점을 두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갱생원의 모습은 더 미화될 수 있었다.
1940년 제14회 ‘나학회 총회’가 소록도갱생원에서 열렸고, 이는 식민지의 학의 위대한 결실로 여겨졌다. 제 3회 ‘국제나회의’에서 ‘문명국’으로서 수치심을 느꼈던 니시카와는 ‘나학회 총회’가 소록도갱생원에서 열리는 것에 대한 감격을 이야기하며 일본 제국의 발전상을 언급한다. 그러면서, “소록도갱생원을 통한 조선의 구라사업이 관민일체 하에 힘을 합하여 아름다운 성과를 내고 있다는 점에 경의를 표한다”고 하며, 소록도 한센인의 생활이 능률적, 경제적, 이상적인 것과 이를 이룩하기 위한 민간의 협조에 대해 극찬한다(西川義方, 1940: 8, 26). 그러나 이렇게 ‘관민일체’로 이룩하여 일본에까지 모범이 된다고 선전했던 갱생원 내에서는, 기존연구 성과나 패전 후 수용자의 증언을 통해 알 수 있듯이,[44] 배고픔, 혹독한 처벌, 강제노역, 단종, 생체실험 도구등 극단적 차별이 자행되고 있었다.

5. 맺음말

일본의 청일·러일전쟁 전승국으로 세계열강 대열에 참여했다는 과잉된 자부심은 서양과 비슷한 수준의 의학적 성과를 내야한다는 초조함을 낳았다. 그래서 미개국에 만연하다고 여겨졌던 일본(및 식민지)의 한센병 취급과 처리 과정에서 과학적인 성과의 적용 보다는 대중의 ‘공통감각(public sympathy)’이라는 측면에 관심을 기울였던 것이다. 일본의 구라사업의 핵심적인 인물인 미쓰다 겐스케는 한센병을 대중에게 알리기 위해 언론활동과 갱생원 초청을 부단히 시도했다. 이러한 방식은 식민지 조선에서도 비슷한 형태로 적용되었다.
식민지의학 담당 주체는 미디어를 통해 한센인이 ‘병원균을 가지고 있다는 차이’ 때문에 ‘공감할 수 없는 비인간적 존재’라는 이미지를 근대적, 과학적, 위생적, 객관적이라는 수식어로 포장하여 유포했다. 따라서 이러한 공해적 존재는 ‘폭력’(물리적 폭력뿐 아니라 혐오 담론 유포, 범죄자 취급, 비자발적인 격리)을 사용해서라도 격리할 수밖에 없다는 분위기로 이끌었다. 더 나아가 ‘폭력’이라는 비윤리적 태도의 ‘꺼림칙함’까지 떨쳐 버릴 수 있도록 갱생원 내의 한센인들의 인간다운 삶을 강조했다.
아름답게 포장된 소록도갱생원은 대중에게 조선의 관광명소로 소개되었다. 전시체제로 돌입하여 더 깊은 충성이 일본 열도나 반도의 대중에게 요구되었기에, 비인간으로 여겨지던 존재들이 ‘천황의 은혜’를 입어 인간답게 살아가는 전시장으로서 소록도갱생원의 이미지 관리는 중요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이미지 유포는 소록도갱생원이 일본 제국의 발전을 세계(서양)에 자랑하기에 적합한 장소라는 일본인의 ‘공통감각’을 형성하는 데에 기여했다.패전 후, 식민지 조선의 구라사업이 ‘선정(善政)’이었다는 미쓰다의 주장은 이 지점과 맞물려 있다. 소록도갱생원이 다른 나라에 비해 훌륭한 시스템을 갖추고 있어서 한센인에게 인간다움을 회복시킨 감사와 행복의 장이었을 것이라고 ‘여기는’ 다수의 ‘공통감각’이 패전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존재할 것이라는 인식이 전제된 발언인 것이다.
일본 「나예방법」(1907년)이 제정된 후 89년 만에 「나예방법 폐지에 관한 법률」(1996)에 이르렀으나 ‘한센인 숙박거부’ 등 민간 차원에서의 문제제기가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은, 서양과 대등한 제국수립과 식민지 경영을 위해 한센인을 차별했던 국가와 대중의 반성 없는 사고가 여전히 존재하고 더욱 다양해 진 미디어를 통해 이에 동조하는 대중을 만들어낸 결과이다[45]. 이는 일본 사회 내의 차별 문제뿐 아니라 오늘날 한국과 일본 사이의 전쟁책임 문제와도맞물려 있다. 여기에 제국의학의 근대사를 되돌아보는 의의가 있는 것이다.

Notes

1) 이 글에서 사용하는 제국의학(Imperial Medicine)이라는 용어는, 오쿠노 가쓰미(奧野克已), 미이치 마사도시(見市雅俊), 이케다 미쓰호(池田光穂)의 연구를 참고로 하였다. 즉 제국의학은 ① 일제가 식민지 경영을 유지하기 위해 사용한 통치기술로서, 종주국이 식민지에서 질병에 대한 치료와 의료 행정을 전개하고, 조사 연구를 실시하며, 그 정보와 지식을 본국으로 회수·집적하여 제국확장에 환원하는 과정에서 성립된 계획적인 것(奧野克已, 2006: 26), 그리고 ② 근대 식민지주의의 전개 속에서 종주국이 식민지에 대해서 행하는 공적인 의료(見市雅俊, 2001: 26), 마지막으로 ③ 정상적인 교과서나 교육내용, 근대적 시스템에 의해 이루어지는 근대의료에 반하여, 일정한 통치 공간 속에서 자리 잡은 특수한 의료(池田光穂, 2003: 119-122)라는 개념으로 사용한다. 일제강점기 식민지의학에 관해서는 최규진(2016), 김영수(2014), 신규환(2012, 2009)의 연구를 통해, 일제의 식민지 의료 행정 양상과 관련 인물 등의 사항을 참고하였다.

2) 그 외 일본에서의 한센병 관련 연구로는 아자미 쇼조는 『전쟁과 의료-의사들의 15년 전쟁』에서 부국강병 정책을 추진하기 위한 국가의 체력관리, 독일 나치의사회를 모방한 행태, 전시하의 국민 건강관리에 대한 폐해, 전쟁의 장기화에 따른 일본의료의 붕괴에 대한 연구(莇昭三, 2000)가 있고, 후지노 유타카의 『일본파시즘과 우생사상』, 『강제된 건강』 등에서(藤野豊, 1998; 藤野豊, 2000) 일본 국가 권력의 국민 건강관리의 실체 폭로 관점에서의 연구도 있다.

3) 다키오는 식민지 조선 한센병 관련 연구를 1998년 5-9월, 11월, 그리고 1999년 2-3월에 걸쳐 잡지 『미래(未來)』에 게재하며, 소록도를 중심으로 한 한센인의 증언과 수오 마사스에(周防正季) 원장의 사살사건, 병원 내의 단종, 조선나병협회 설립 등에 관한 연구 성과를 『조선한센병사』라는 단행본으로 간행했다(滝尾英二, 2001).

4) 『식민지하 조선의 한센병 자료 집성(植民地下朝鮮におけるハンセン病資料集成)』은 전체 8권이며, 2001년에 1-3권, 2002년에 4-6권, 2003년에 7-8권이 후지출판(不二出版)에서 출간되었다.

5) ‘내지개방(內地開放)’이라고도 부른다. 외국인에 대한 거주·여행·외출의 제한을 폐지하고 일본 국내에서 자유롭게 여행·거주·영업을 허가하는 제도이다.

6) 이 법률에 근거하여 일본에서는 5개의 구역(東京府, 青森県, 大阪府, 香川県, 熊本県)으로 나누어 각각 한센인 격리수용소가 설치되었고, 1909년부터 격리가 개시되었다(藤野豊, 2010: 12).

7) 베를린에서 열린 한센병에 관한 제 1회 국제회의(1897)에서 이 병이 감염증이라고 보고되어 예방에는 환자 격리가 유효하다는 내용이 이후 한센인 관련 법률에 크게 영향을 끼쳤다(藤野豊, 2006: 2).

8) 이 보고는 니시카와 요시카타(西川義方)가 1940년 초가을 조선을 여행하면서 조선의 위생, 의식주, 역사, 조선 각지의 경관을 감상한 내용을 ‘조선여행의 비망기(朝鮮行の備忘記)’로 작성한 것이다. 이것을 다시 니시카와가 9월 「조선소록도갱생원을 통해 본 조선구라사업(朝鮮小鹿島更生園を通して観たる朝鮮救癩事業)」이라는 제목으로 개인 출판하였다. 인용은 이 개인출판 자료에서 하였다. 이 자료에서는 니시가와가 참가한 ‘제 3회 국제나회의’에서 각국의 한센인 통계를, 지나(1,000,000명), 일본(102,586명), 인도(102,513명), 브라질(15,000명), 인도지나(15,000명) 프랑스령기니아(8,687명), 이집트(6,513명), 콜롬비아(6,568명) 마다가스카르(6,372명) 라는 표를 제시하고 있다(西川義方, 1940: 1).

9) 그 외 하야시 후미오(林文雄)도 절대격리를 주장한 인물인데, 그는 국제연맹의 의뢰를 받아 세계한센병정책시찰(1933.1-1934.1)을 마친 후 시찰보고를 통해 필리핀요양소의 완치 한센인 퇴소와 미국요양소의 골프, 댄스, 음주 등을 강하게 비판하며 단종과 강제 노동의 정당성을 주장하기도 했다(藤野豊, 2004: 137, 144, 168).

10) 경성, 인천에 한센인이 돌아다니는 것에 대해, “국제도시인 경성 인천과 같은 도시는 한센병 환자 수용에 어려움이 매우 많다. 특히 경성부와 같이 조선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로 일본이나 해외에서의 왕래가 빈번한 도시는 조선의 다른 도시와는 달리, 경성부내에 있는 나환자의 배회는 단순히 건강상의 문제뿐만 아니라 조선 통치의 체면에도 관계되는 것이므로 앞으로 이러한 특수 사정을 고려하여 총독부에서 해마다 4, 50명 정도 할당 수용을 할 수 있도록 조치한다”며 ‘제국의 체면’을 손상시키는 중요한 문제로 여겼다(滝尾英二, 2002b: 307).

11) 우치다(內田)는, “미쓰다는 손님을 유치하는 데에 열심이었고, 그 덕에 직원들은 매주 일요일도 출근해야만 했다”며 미쓰다의 계속된 일반인의 갱생원 초대에 직원들이 힘들어했던 일화를 소개한다(內田守, 1971: 110).

12) 1916년 소록도자혜의원(1934년부터 소록도갱생원), 타이완에서는 1930년 낙생원(樂生園), 위탁통치령이었던 ‘남양군도(南洋群島)’에 소규모의 한센병 요양소, 괴뢰국가인 만주국에도 1939년 국립한센병요양소 동강원(同康園)을 개원했다.

13) 이 책은 일제강점기 소록도 갱생원의 설비 및 운영에 직접 관여했던 3인이 집필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이들은 당시 전라남도 위생과장이었던 요시오카 테이조(吉岡貞蔵)와 전라남도 재무부장이었던 사이토 이와조(齋藤巖蔵), 그리고 갱생원 서무과장이었던 요시자키 다쓰미(吉崎達美)이다(萩原彥三, 1967: 1-50). 이 외 조선 한센병사에 대한 관련 자료는 일본의 재단 법인 우방협회(友邦協會)에 의해, 1950년 경 조선 통치의 자료 조사, 수집, 보전의 목적으로 수집이 시작되었다. 이 협회의 자료는 현재 5,700 점에 이른다(學習院大學東洋文化研究所, 1985).

14) 1921년 6월 23일, 소록도자혜의원에 제 2대 원장으로 하나이 젠키치(花井善吉)가 부임했다. 이 시기는 3·1운동 이후 제국의 문화통치가 이루어지던 시기로, 하나이는 병원 확장을 위한 적극적인 활동을 펼쳤다. 그 결과 하나이 부임 당시 100명 안팎이던 수용자의 수는 그가 요양원에서 사망한 1929년의 시점에는 6배나 증가하여 750명에 이르렀다(厚生省, 1999: 107). 1929년 12월에는 3대 원장으로 야자와 슌이치로(矢澤俊一郎)가 부임했다(矢澤俊一郎, 1932: 1). 이 시기 섬 내의 환자뿐만 아니라 외래진료도 병행했으며(朝鮮総督府, 1932: 12), 국제적으로는 뉴욕 주식상장이 대폭락하고 세계대공황이 시작한 심각한 시기로, 섬 내의 환자 수는 크게 늘지 않았고 부랑하는 환자들이 많았다. 1932년 ‘조선나예방협회(朝鮮癩予防協會)’가 설립되었다. ‘조선나예방협회’는 소록도 전체를 매수하여 1933년 6월을 기점으로 환자가 아닌 900여명의 주민 전원을 다른 지역으로 이전시키고,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의 한센인 격리섬을 만들어, 조선 전국의 한센인을 강제 수용했다(滝尾英二, 2001: 63). 1933년에는 수오 마사스에(周防正季)가 소록도자혜의원 4대 원장으로 취임했다. 수용환자의 급증에 따라 소록도 확장공사가 실시되고, 원내 규칙을 강화하여 관리 통제가 심해졌다.

15) 「나 환자가 물품을 강요-부민이 곤란해 하다」, 『조선조일』 (1928.6.12.); 「행려병사자의 증가」, 『조선통신』 (1928.8.28.); 「방치된 나환자가 불온의 형세」, 『조선조일』 (1928.10.18.); (滝尾英二, 2002a: 73, 83, 85)

16) 이는 다키오 에이지의 『식민지하 조선의 한센병 자료집성』의 제4권과 5권에 나와 있는 890건의 신문기사(한글, 일본어)를 확인한 것 중 일부를 제시한 것이다.

17) 「나 환자가 늘어나서 부녀자를 희롱한다-감염병 환자 단속만으로는 철저하지 못함(『朝鮮朝日』1927.10.11)」, 「감자 도둑으로 천형병자 소란(『京城日報』1928.4.18)」, 「나 환자 30명이 범선을 덮침-감자를 뺏으려고 승선원과 격투를 벌이다(『朝鮮朝日』1928.4.18)」(滝尾英二, 2002a: 63, 67, 67).

18) 「미신으로 생간을 꺼내다-위험을 무릅쓴 조선 소녀(『朝鮮朝日』1924.10.9)」, 「생간을 얻기 위해 소녀 유괴-나 병을 치료한다는 미신에서(『朝鮮朝日』1925.8.9)」, 「시신을 발굴하여 인육으로 술을 담그다-천형병자의 미신(『京城日報』1928.4.17)」(滝尾英二, 2002a: 26, 30, 66), 「레프라 환자 죽은 사람의 고기를 먹는 미신(『京城日報』1935.3.5)」(滝尾英二, 2002b: 156).

19) 이 표는 잡지 『朝鮮』의 1929년 7월호(114쪽), 8월호(119-120쪽), 9월호(121쪽)에 수록된 각도 경찰부 위생과의 조사 내용을 바탕으로 필자가 작성함.

20) 「나병환자의 단속 진정」, 『조선조일』 (1927.8.31); 「환자 일소(一掃)를 지사에게 진정」, 『조선조일』 (1927.8.31.); 「천형병의 전멸을 꾀하라」, 『조선통신』 (1929.6.29.); (滝尾英二, 2002a: 61, 61, 90)에서 보이는 것 같은 ‘단속’, ‘일소’, ‘전멸’이라는 단어는 이들의 존재 자체가 해로운 곤충과 같이 여겨졌다는 것을 시사한다.

21) 「나 환자 정리의 필요」,『조선통신』 (1930.7.30.); 滝尾英二, 2002a: 135)

22) 이러한 분위기는 당시 우생사상의 대중 확산 분위기와도 맞물려 있다. 조선에서는 1933년 ‘조선우생협회’가 결성되고 잡지 『우생』이 발행된다. 잡지 『우생』에 관하여는 신영전의 「『우생(優生)』에 나타난 1930년대 우리나라 우생운동의 특징」(신영전, 2006: 133-155)에 자세하다.

23) <조사> 「不遇의 癩病患者 全南에 三千五百餘 도위생과에서 조사한 결과 昨年보다 五百名激增」, 『동아일보』(1923.2.18); 「救濟策이 全然업는 二萬餘名의 癩病患者」, 『동아일보』 (1927.6.25.); 「全朝鮮의 모히患者二萬 점점 증가하는 중이다 全南黃海가 首位」, 『조선일보』 (1930.2.18.); 「버림을 바든 朝鮮의 癩病患者 모던京城 에도」, 『조선일보』 (1931.10.26.); 「鹹南의 癩病患者 今年들어서急增」, 『중앙일보』 (1931.8.2.); (滝尾英二, 2002a: 14, 58, 104, 172, 148); 「不遇의癩病患者 全南에 三千五百餘 도위생과에서 조사한 결과」, 『동아일보』(1933 2.18); (滝尾英二, 2002b: 9).

<색출(문제제기를 통한)> 「大田에 癩病者 민간의 대소동」, 『동아일보』 (1922.8.10.); 「癩病者와 모혀 中毒者에 對하야 無誠意한 當局의 態度」, 『동아일보』 (1923.7.26.); 「문둥이 五百名이 촌락을 습격하려다가 경찰과 츙돌되여 소동 住民의 病者忌避가 原因」, 『동아일보』 (1923.6.11.); 「癩病患者跋扈로 馬山府民의 恐慌」, 『동아일보』 (1927.6.14.); 「癩病者橫行으로 麗水市民不安」, 『동아일보』 (1931.4.21.); 「馬山府內에 癩病患者急增 시민보건상 중대 문제」, 『동아일보』 (1931.5.14.); (滝尾英二, 2002a: 10, 15, 25, 57, 145, 146); 「今年에는 解決해야될 우리地方重 大懸案 癩病者의 메카 大邱의 苦憫」, 『조선일보』 (1933.1.5.); 「癩患者의威脅」, 『조선일보』 (1934.9.2); 「癩病患者가 作隊해求乞, 민심은 극도로 불안중」, 『동아일보』 (1933.3.31.); 「統營各地에 癩病者橫行 주민보건상 중대문제 當局의 處斷을 懇望」, 『동아일보』 (1933.9.8.); 「一時根絶의 癩患者 又復大邱로 集中 부민의 생활에 막대한 위협」, 『동아일보』 (1936.6.13.); 「衛生朝鮮의 大癌腫 肺結核, 癩病의 威脅」, 『동아일보』 (1937.9.8.); 「麗水에도 문둥이! 떼를 지어서 시내횡행」, 『동아일보』(1937.10.27.); 「府民保健의 癌腫인 癩病院 移轉要望」, 『동아일보』 (1939.3.24.); 「百餘名 癩病者 順天市街에 橫行! 一般住民은 恐怖中」, 『동아일보』 (1938.5.2.); 「馬山에 癩病者橫行 民衆保健에 赤信號」, 『동아일보』 (1938.5.28.); 「癩病患者出沒 떼를 지어다니며 구걸을 한다 獒樹住民은 恐怖中」, 『동아일보』 (1938.8.11.); 「癩病患者가 橫行 關係當局에 根本退 治策要望 市民保健에一大威脅」, 『동아일보』 (1939.3.31.); 「문둥이 너무만하 慶州市民 極度로 不安」, 『동아일보』 (1939.6.16.); (滝尾英二, 2002b: 1, 108, 11, 62, 202, 227, 232, 263, 272, 273, 279, 298, 304).

<격리> 「금후의 소록도는 나병환자의 낙원」, 『조선일보』 (1933.9.1.); 「慶南癩患者의 第二次輸送」, 『조선일보』 (1934.9.6.); 「나병자 잇든 巢窟을 燒卻, 60명을 소록도로 보내고」, 『동아일보』 (1933.10.6.); 「街上彷徨의 癩患者 千六百名 또收容, 今年十月에 또 새로 실어가 新天地의 小鹿島로」, 『동아일보』 (1934.10.6.); 「小鹿島의 別天地로 千餘癩患者 輸送」, 『동아일보』 (1934.8.18.); 「小鹿島更生園擴張 街頭癩患者一掃」, 『동아일보』 (1935.2.26.); 「市民은 安心하라 市中橫行의癩病者 不日小鹿島로 輸送」, 『동아일보』 (1936.6.13); (滝尾英二, 2002b: 58, 110, 80, 89, 104, 155, 207).

24) 「나병 환자의 연구재료로 시신을 제공」, 『조선조일』 (1926.10.14.); (滝尾英二, 2002a: 41); 「시가성대총장 레프라 근절 계획」, 『조선조일』 (1931.3.19.); (滝尾英二, 2002a: 141) 「신물질의 발견 레프라는 고쳐진다」, 『경성일보』 (1933.7.20); 「레프라를 근본적으로 연구하다-경성 의전이 각 부문으로 나뉘어 각계 획기적인 시도」, 『경성일보』 (1935.3.15.); (滝尾英二, 2002b: 53, 160)

25) 「나 환자 수집 소록도에 보내다」, 『조선조일』 (1928.6.3.); (滝尾英二, 2002b: 72), 「대구 나환자 일제 내몰다」, 『조선조일』 (1928.6.19.); (滝尾英二, 2002b: 77)

26) 「전남 소록도 나요양소에 오락기관 설치」, 『조선조일』 (1927.8.27.); 「나요양소 연극장 보조 신청」, 『조선조일』 (1930.5.29); (滝尾英二, 2002a: 60, 132); 「소록도 소식: 환자는 음악을 좋아해, 활기차게 갱생에 노력하다」, 『경성일보』 (1934.12.4); 「소록도는 이상원(理想園) 모두 자급자족, 음악대도 생겼어요」, 『경성일보』 (1935.3.3.); (滝尾英二, 2002b: 131, 157)

27) 그들은 소록도를 자신들을 위해서 전부 개방해 준 것에 감사하여 매우 명랑한 기분으로 갱생생활을 영위하고 있고, 현재 당국에서는 여러 가지 위안 방면으로 계획도 세우고 있다. 「천형자에게 천혜의 소록도, 당국에 감사하여 명랑하게 빛의 길로」, 『경성일보』 (1933.10.8.); (滝尾英二, 2002b: 81)

28) 「소록도 소식, 환자는 음악을 좋아해, 활기차게 갱생에 노력하다」, 『경성일보』 (1934.12.4.); 滝尾英二, 2002b: 131).

29) 「김과 벽돌을 소록도에서 생산」, 『조선조일』 (1935.2.26.); 「소록도 낙원에서 옷감도 짠다」, 『조선조일』 (1935.2.26.); (滝尾英二, 2002b: 147, 157)에서 보이는 것처럼 소록도에서는 자급자족을 목표로 전답을 가꾸며, 직물도 생산하고, 김과 벽돌도 만들고 있다고 소개한다.

30) 「천형자에게는 천혜의 소록도」, 『경성일보』 (1933.10.8.); 「김과 벽돌을 소록도에서 생산-4천여 명 대세대의 낙원에 경제탄력을 가져 오다」, 『조선조일』 (1935.2.26.); 「소록도 낙원에서 옷감도 짠다」, 『조선조일』 (1935.3.6.); 「소록도는 낙원 환자의 천국」, 『조선매일』(1940.4.13); (滝尾英二, 2002b: 81, 147, 157, 324) 이는 조선 내 기독교(서양의 상징으로서) 관련 갱생원을 의식한 단어라고도 볼 수 있다. 기독교의 이상향으로서의 ‘천국’의 이미지를 소록도갱생원이라는 공간에 투사하여 그 성격을 표현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31) 일본 대중 미디어와 독자 형성에 관해서는 나가미네 시게토시(永嶺重敏)의 『잡지와 독자의 근대(雜誌と讀者の近代)』에 자세하다. 메이지 시기 미디어 독자의 대부분은 중산층이었으나, 다이쇼기(1912-), 쇼와기(1926-)에 접어들면서 노동자 농민 여성 등 독자층의 외연이 확대되어 광범위한 대중독자가 형성되어 갔다(永嶺重敏, 1997: 21). 대중독자가 환영하는 내용은 재미있고 유익한 내용이었다. 그 상징적 잡지가 『킹』이고(永嶺重敏, 1997: 203), 그 외 『모던일본』, 『부인클럽』 『소년클럽』 『소녀클럽』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32) <표 2>는 『식민지하 조선 한센병 자료 집성』 6권(滝尾英二, 2002c)의 내용을 확인하고 필자가 작성하였다.

33) 쿨리온(Culion)은 필리핀의 팔라완주 북부에 위치한, 마닐라에서 남서쪽으로 320km 떨어진 섬으로, 1906년 미국 통치하에 한센병 환자 격리 요양을 목적으로 한 시설이 설치되었다.

34) 『일본MTL』 60호 (1936.2), 1쪽을 참고하였다. 『일본MTL』은 가가와 도요히코(賀川豊彥)를 중심으로 1925년 6월에 발간된 「NIPPON MISSION TO LEPERS」의 기관지(월간)이다. ‘무나현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조선 한센인의 소록도갱생원 수용을 찬미하는 글 등을 다수 실었다. 1942년 회의 명칭을 「단풍나무 십자회(楓十字會)」로, 기관지도 『단풍나무 그늘(楓の蔭)』로 개칭했다(滝尾英二, 2002c: 5).

35) 이 ‘미담(美談)’이라는 단어는 기부와 관련하여 종종 등장한다. 일제는 청일 러일전쟁을 거치면서 전쟁에 자신을 희생하여 일본 천황의 덕을 드러낸 이야기를 ‘○○미담’이라는 제목으로 다양한 미디어에서 노출했다. 즉 미담의 주인공은 ‘국가를 위해 헌신하는 일본인’이라는 이미지가 담겨있다.

36) 「사회사업장려 천황 하사금전달」이라는 제목으로 잡지 『조선』의 1929년 11월, 1934년 2월, 1935년 3월과 11월, 1936년 3월, 1938년 3월과 11월에 연재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37) 「나 병원 확장, 뜻을 모은 기부로」, 『조선조일』 (1926.12.2.); 「소록도에 쏟아지는 同情」, 『경성일보』 (1927.12.16); (滝尾英二, 2002a: 42, 45, 64) 「사회사업에 거금 기부, 조선을 떠나는 후쿠이 씨」, 『조선조일』 (1934.9,19); (滝尾英二, 2002b: 126)

38) 「나예방협회의 기부 10만 돌파」, 『경성일보』 (1933.3.3.); 「경남의협회 기부 24만 엔 돌파」, 『조선조일』 (1933.3.3.); (滝尾英二, 2002b: 11)

39) 「불쌍한 나구제에 소녀가 정의 결정 3,200 매의 걸레 값 기부-부산고녀교의 훌륭한 행동」, 『경성일보』 (1933. 3.17); (滝尾英二, 2002b: 18)

40) <표 3>은 朝鮮癩豫防協會의 『朝鮮癩豫防協會要覽』 (1933.4) 59-60쪽을 참고하여 필자가 작성.

41) 『문화조선』은 원래 동아여행사조선지부(전신, 일본여행협회조선지부, 경성)에서 1939년 6월 발간된 한국 최초 관광잡지 『관광조선(觀光朝鮮)』이 그 이름을 1941년 1월 바꾼 것으로, 당시 조선의 관광에 관련된 다양한 내용(여행지 안내, 교통편, 수필, 소설, 기생, 만화, 영화, 가요 등)을 수록하고 있다. 이 잡지는 각 호마다 「경성특집」, 「평양특집」, 「제주도특집」, 「낙랑특집」 등 특집을 싣고 있는데, 『문화조선』 4권 3호(1942.5)는 「소록도 특집」으로, 표지에는 소록도 간호사 사진이 게재되어 있다(<그림 2>, <그림 3> 참고). 이 특집의 소록도 외의 기사는 국영광주버스와 송광사, 여행상담, 경성주변 낚시터, 조지아백화점 안내소 방문기, 소설, 수필, 기행문, 색깔이 있는 페이지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42)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원래대로라면 1940년 제 12회 동경올림픽과 더불어 초대 진무천황 즉위 2600년을 맞이하여 국가적 세계 대회개최를 계획하고 있었으나 무산되었다(공익재단법인 일본 올림픽 조사위원회 공식 웹페이지 http://www.joc.or.jp/「올림픽 역사」부분 참고. 조사일 2017.11.20).

43) 이 잡지는 조선의 각 지역 백화점(미나카이(三中井), 미쓰코시(三越), 와신(和信), 조지야(丁子屋)) 내부에 설치된 일본여행협회 조선지부에 비치되었다. 한편 일본에서는 백화점 뿐만 아니라 좀 더 많은 대중이 접할 수 있는 역사나 서점, 사람의 왕래가 많은 거리 등에 설치된 안내소에 비치되었다(서기재, 2013: 415).

44) 소록도갱생원 수용자의 증언 일부를 옮기면 다음과 같다(1997년 12월 9일 증언, 증언자는 당시 79세). 단종은 여러 가지 이유로 당했어. 부부가 동거하는 경우 남자는 수술. 그리고 나쁜 짓을 한 범죄자는 수술. 형무소에서 나와 여기에 입원한 사람은 무조건 모두 수술. 연료를 귀중히 생각하던 때여서 제멋대로 나뭇가지나 잎을 모아서 태운 사람도 단종. 배급된 장작이 부족했지...오사카에서 의사라는 사람이 왔어. 일본의 군인 그 있잖아 군대에서 의사하는 사람. 그래 군의. 그 군의가 단종수술도 했고, 의학 연구를 다양하게 하고 있어서. 2시간 안에 몸이 굳어버리는 주사. 모두 「히키쓰루 주사」라고 불렀지. 얼굴이 이렇게 굳어져 버리는 거야. 주사를 맞으면 2시간 안에 죽어. 이것으로 사람이 엄청 많이 죽었지. 사토원장 때 사람들에게 엄청 노동을 많이 시켰는데 말이야. 이 의사의 손에 죽은 사람의 수도 엄청나(滝尾英二, 2001: 298-300).

45) 열등하다고 여겨지는 존재들에 대한 ‘낙인’은 패전 후에도 일본에서는 「국민우생법」,「우생보호법」(1948), 「화류병예방법」 「성병예방법」(1948), 「나예방법」(1953) 등으로 정부차원에서 유지되었다(藤野豊, 2003: 16).

그림 1.
미쓰다 겐스케 (1956)
<Figure 1> Mitsuda Kensuke (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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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문화조선』의 소록도 특집호 표지
<Figure 2> Cover of the Special Issue of Sorokdo Island of Culture Jos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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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
『문화조선』의 소록도 특집호 목차
<Figure 3> Contents of the Special Issue of Sorokdo Island of Culture Jos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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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4.
소록도갱생원 조감도
<Figure 4> A bird’s-eye view of Sorokdo Island Sanatori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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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 1.
<표 1>위생에 관한 풍습 및 미신요법
Hygienic customs and superstition therapy
전라남도 • 맑은 물을 산신에게 바치고 기도를 드린 후 병자에게 마시게 하면 완치된다.
• 누에의 요충을 술에 넣어 복용하면 효과가 있다.
• 인육을 먹으면 낫는다.
• 매미의 번데기가 서식하는 집의 부근의 흙을 파서 이것을 물에 끓여 먹으면 완치된다.
• 많은 사람들이 음료수로 마시는 물에 몰래 목욕을 하면 완치된다.

경상남도 • 인육을 먹으면 완치된다.
• 아이의 간을 먹으면 완치된다.
• 우역(牛疫)으로 죽은 소의 고기와 간을 먹으면 완치된다.
• 「今朝登山 淫東海 有一王 三頭六尾 九目九首 朝食惡鬼三千 暮食惡鬼三萬 其の食尚不足故今餐沙速去千裏」라고 적힌 부적을 환자 방 문기둥에 붙인다.
• 복숭아나무 가지로 때리면 완치된다.
• 고양이 내장을 먹으면 완치된다.
• 오동나무의 새순을 먹으면 완치된다.
• 유아의 음경을 먹으면 완치된다.
• 썩은 뱀을 먹으면 완치된다.
• 뱀을 설탕에 재워 그 즙을 마시면 완치된다.
• 나환자의 시체를 화장하여 그 뼈 분말을 뭉쳐 구슬형태로 만들어 새나 짐승에게 먹이면 자손에게 유전되지 않는다.

강원도 • 고양이의 태반 혹은 남자의 음경을 먹으면 완치된다.
• 뱀이 개구리를 먹으려고 할 때 이 두 동물을 잡아 술을 담아 마시면 완치된다.
• 아이의 생간을 먹으면 완치된다.
• 인육을 먹으면 완치된다.
Table 2.
<표 2> 잡지 및 개인 기록물을 통해 본 일본인의 소록도 방문기
Travelogue of Japanese Sorokdo Island through magazines and personal records
게재일시 제목 게재지 저자
1933.5 소록도에서 『일본MTL』 MY生

1933.7 미쓰다원장 조선여행일정 사적기록물 宮川量

1933.7 조선의 나견문기 사적기록물 宮川量

1934.8 소록도의 확장 『일본MTL』 斎藤安雄

1934.10 조선소록도 자혜의원 『일본MTL』 三井輝一

1934.11 소록도갱생원 소식 『일본MTL』 저자표기 없음

1935.7 완성되어가는 소록도갱생원을 보다 『일본MTL』 저자표기 없음

1935.9 소록도갱생원 현황 사적기록물 三井輝一(談)宮川量(記錄)

1935.10 내선신흥 제2국립요양소의 개원을 축하하다 『애생』 光田健輔

1935.11 조선 소록도갱생원 낙성 『일본MTL』 今井田政徳

1935.11 조선 소록도갱생원 낙성식을 참관한 기록 『애생』 田尻敢

1935.12 조선 소록도갱생원 낙성식 『경찰휘보』 저자표기 없음

1935.12 조선 나요양소 인상 『일본MTL』 田尻敢

1936.1 소록도 견문기 『애생』 高野六郎

1936.3 나요양소현황과 확장 『일본MTL』 霜崎清

1936.7 소록도갱생원 방문기록 사적기록물 宮川量

1936.10 조선 나요양소 소록도갱생원 방문기록 『일본MTL』 川染義信

1937.10-11 조선의 나를 통해 일본을 돌아보다-소록도이야기(1)-(2) 『일본MTL』 下村海南

1938.3 감격적인 등대건설 『일본MTL』 저자표기 없음

1939.8 소록도갱생원을 방문하다 『일본MTL』 白戸八郎

1940. 5-6 나요양소 소록도(1)-(2) 『문헌보국』 フツパ(山本春喜 번역)

1940.8 소록도갱생원장 수오원장의 동상이 서다! 『日本MTL』 저자표기 없음

1940.9 조선 소록도갱생원을 통해 본 조선의 구라사업 사적기록물 西川義方

1940.10 견디기 어려운 통한사(痛恨史) 『애생』 光田健輔

1940.10 소록도갱생원 참관 『애생』 光田健輔

1940.12 조선을 여행하고 『일본MTL』 遊佐敏彥

1942.1 후생성(厚生省)의 탄생을 계기로 『조선』 石田千太郎

1942.1 내지에 나절대격리의 모범을 보여야 『애생』 光田健輔

1942.5 특집 소록도갱생원(서문) 『문화조선』 저자표기 없음

1942.5 수오 마사스에 원장에 대해 이야기하다 『문화조선』 梶一

1942.5 갱생원 진료기 『문화조선』 小鹿島更生園

1942.5 갱생원의 생태 『문화조선』 中川浩三

1942.5 소록도갱생원 방문기 『문화조선』 相馬美知

1942.5 갱생원 현지 좌담회-갱생원클럽에 대하여 『문화조선』 橫川基외 6인

1943.4 소록도갱생원 근황 『애생』 西亀三圭
Table 3.
<표 3> 나예방협회 기부금신청 및 수납 상황표, 조선나예방협회 설립부터 1933년 3월 31일 까지 (단위: 圓)
Leprosy Prevention Association Donation Application and Payment List, since the establishment of the JLPA to March 31, 1933
경기도 충청북도 충청남도 전라북도 전라남도 경상북도 경상남도
도비보조액 12,000 4,000 8,000 10,000 31,000 44,000 37,000

기부신청액 167,712 7,501 21,109 150,061 220,257 98,355 248,415

기수납액 107,537 5,560 21,109 83,526 81,178 98,355 117,880

황해도 평안남도 평안북도 강원도 함경남도 함경북도

도비보조액 6,000 4,000 4,000 4,000 4,000 2,000 170,000

기부신청액 10,829 12,976 26,860 15,052 42,241 9,304 1,117,779

기수납액 10,829 12,439 14,266 7,000 37,417 8,483 691,149

기부신청액과 기수납액의 총계는 나예방협회의 직접 기부와 관공사(官公史) 기부가 포함된 금액이다.

Table 4.
<표 4> 일본, 부산 및 경성에서 소록도로 가는 경로 (1940)
Routes from Japan, Busan and Kyungsung to Sorokdo Island, 1940
방면 노별 (路別) 출발지 선명 경유지 도착지 소요시간 비고
일본 방면 에서 해로 시모노세키 (下関) 관부연락선 (關釜連絡船) · 부산 약 7시간30분 부산에서 조선기선으로 갈아탐

해로 부산 조선기선 (朝鮮汽船) 통영 여수 소록도 약 16시간 여수에서 경전서부선 및 자동차 육로도 있음

해로 시모노세키 관려연락선 (關麗連絡船) · 여수 약 17시간 시모노세키 여수 간 직행

육로 여수 경전서부선 (慶全西部線) 벌교 고흥 소록도 · 여수에서 벌교까지 기차, 벌교에서 자동차

경성 방면 에서 육로 경성 경부선, 호남선 및 경전서부선 대전 송정리 벌교 소록도 약 18시간 경성·대전 간 경부선, 대전·송정리 간 호남선, 송정리·벌교 간 경전서부선, 벌교에서 자동차

육해로 경성 경부선, 호남선 및 조선기선 대전 송정리 목포 소록도 약 28시간 목포까지 기차, 목포에서 기선(목포에서 약 7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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