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력과 대립 : 근대 중국 서의계(西醫界)의 파벌문제
Abstract
After the defeat of the Opium War and the Sino-Japanese War, China’s intellectuals realized necessity of modernization (Westernization) to survive in the imperial order of the survival of the fittest. In particular, it was urgent to accept Western medicine and train the doctors who learned Western medicine to change the sick and weary Chinese to be robust. Thus, new occupations of the Western Medicine Group (xiyi, doctors who learned Western medicine) emerged in China. As with the first profession, the new Western Medicine Group tried to define standards of Western medicine and medical profession; however, it was difficult in the absence of the strong central government. In addition, they formed a faction by the country where they studied or the language they learned. The factions included the Britain - America faction(yingmeipai) consisting of the Britain - America studied doctors or graduates from Protestant missions based medical schools, and the Germany - Japan faction(deripai), graduates from medical schools by Japanese or German government and the Chinese government. In 1915, they founded the National Medical Association of China mainly consisting of the Britain - America faction and the National Medical and Pharmaceutical Association of China led by the Germany – Japan faction. Initially, exchanges were active so most of eminent doctors belonged the two associations at the same time. They had a consciousness of a common occupation group as a doctor who had learned Western medicine. Thus, they actively cooperated to keep their profits against Chinese medicine and enjoy their reputation. Their cooperation emitted light particularly in translation of medical terms and unified works. Thanks to cooperation, the two associations selected medical terminologies by properly using the cases of the West and Japan. Additionally, medical schools of the Britain - America faction and the Germany – Japan faction produced various levels of the Western Medicine Group doctors for China to timely respond to the rapidly increased demand. However, a conflict over the promotion of hygiene administration and the unification, organization of medical education did not end. This conflict was deepening as the Nanjing nationalist government promoted sanitary administration. It was the Britain - America faction who seized a chance of victory. It was because figures from the Britain - America faction held important positions in the hygiene department. Of course, some related to the National Medical and Pharmaceutical Association of China were also involved in the hygiene department; however, most took charge of simple technical tasks, not having a significant impact on hygiene administration. To solve the problem of factions of the Western Medicine Group, the Britain - America faction or the Germany - Japan faction had to arrange the education system with a strong power, or to organize a new association of two factions mixed, as in Chinese faction(zhonghuapai). But an effort of the Britain - America faction to unify the systems of medical schools did not reach the Germany - Japan faction’s medical schools. Additionally, from 1928, executives of the two Chinese medical associations discussed their merger; however they could not agree because of practitioners’interests involved. Substantially, a conflict between factions of the Western Medicine Group continued even until the mid-1930s. This implies that the then Chinese government had a lack of capacity of uniting and organizing the medical community.
색인어: 근대 중국, 서의, 서양의학, 박의회, 영미파, 중화의학회, 일독파(덕일파), 중화민국의약학회, 의학용어, 위생
Keywords: Medical Missionary, Western Medicine, The China Medical Missionary Association, Britain - America faction, yingmeipai, The National Medical Association of China, Germany - Japan faction, deripai, The National Medical and Pharmaceutical Association of China, Medical Terminology
1. 서론
아편전쟁과 청일전쟁에서의 연이은 패배 후, 중국의 지식인들은 자국이 우승열패의 제국질서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근대화(=서양화)가 필요하다는 점을 절실히 깨달았다. 특히 병들고 지친 중국인을 강건한 민족으로 바꾸기 위해 서양의학을 받아들이고 서양의학을 배운 의사를 양성하는 작업이 급선무였다. 이를 통해 서의(西醫)라고 하는 새로운 직업군이 등장한다. 처음 출현하는 직업이 그렇듯이 새로운 중국의 서의계도 서양의학 및 의업의 표준을 정하고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였으나, 강력한 중앙정부의 부재 속에서는 이를 이루기 어려웠다. 게다가 서의들은 자신들이 유학한 나라 혹은 교육 언어에 의해 분열되어 있었다. 영미 유학파 혹은 영미권이 우세한 프로테스탄트 미션계 의학교 졸업생이 모인 영미파(英美派)와 독일 혹은 일본 유학파 및 독일과 일본 정부가 세운 의학교, 중국 정부가 세운 의학교 출신자가 모인 일독파(日獨派) [ 1]라고 하는 파벌이 존재하였던 것이다. 이들은 각각 중화의학회(中華醫學會)와 중화민국의약학회(中華民國醫藥學會)라는 학회를 설립하여 활동하였다. 이들은 각자 유학지에서 배운 방식대로 의료위생제도를 이끌어가고자 하였기 때문에 대립이 불가피하였다. 이 두 파의 대립은 어느 쪽이 정치적인 권력이나 발언권을 획득할지의 문제와도 관련되며, 이에 따라 민국시기 의료위생제도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이 두 파벌에 대한 연구가 선행될 필요가 있다. 또한 이러한 연구는 근대 중국의 서양의학계의 양상을 파악하기 위해서도 중요하다.
중국 학계에서 근대 서양의학의 도입과 전파를 바라보는 낡은 틀은 제국주의의 문화침략이라는 인식이다. 일본에서 유학하였지만 영미파로 분류되는 진바오산(金寶善) [ 2]은 선교사의 병원 설립, 유학생 파견 등을 제국주의 열강의 문화침략으로 파악하였다( 金寶善, 2003). 샤위안위안(夏媛媛) 또한 서양의학의 제국주의적, 식민주의적 특성에 주목하여 서의 내부의 파벌 문제를 살펴보고 있다( 夏媛媛, 2014). 그는 의학교육이라는 측면에서 영미파와 일독파의 대립 및 각 의학교의 설립과 운영에 대해서도 비교적 자세히 다루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러한 문제의식은 서의 내부 보다는 오히려 서의와 중의(中醫)의 대립이라는 측면에 더 잘 맞아떨어진다. 그 외에 『중외의학문화교류사』와 같이 서의계 파벌다툼의 긍정적인 면을 강조하는 연구도 보인다( 馬伯英, 1997: 524-526).
한편으로는 서의를 하나의 직업군으로 파악하고 그 성격을 밝히는데 주력한 연구도 보인다. 신규환은 의사들이 스스로의 이권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에서 의학단체를 설립하였음을 밝히고, 민국시기 동안 중국사회에서 영어 사용과 외국 유학 여부는 의과대학과 의사사회의 사회적 지위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였음을 지적하였다( 신규환, 2011). 의사 집단에 대한 총체적, 사회사적, 집단사적 연구를 표방한 인쳰(尹倩)의 경우 사회사 혹은 집단사적 관점에서 새롭게 근대 중국의 의사 집단 문제를 다루었으나 실질적인 내용은 서의 내부의 문제보다는 중의와 서의의 관계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尹倩, 2013: 8). 크로이쳐 또한 민국시대 중서의논쟁에 대해 살펴보면서 중의가 살아남게 된 원인을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검토하였다( Croizier, 1968).
이들 서의가 설립한 의학회에 대한 연구는 주로 정부의 위생사업과 관련하여 전개되었다. 특히 국민정부시기 위생부에서 활약한 인물들을 통해 영미파, 즉 중화의학회가 위생행정의 제도화에 있어서 비교적 우위를 점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飯島涉, 2010). 다만 중화의학회가 중국에서 가장 큰 의학회로 적게나마 연구가 진행된 반면( 劉遠明, 2007; 劉遠明, 2012; 秦國攀, 2010; 曺貞恩, 2014; 陶飛亞·王皓, 2014), 어느 시점에서 다른 학회에 편입되었을 것으로 짐작되는 중화민국의약학회에 대해서는 거의 연구된 바가 없다.
전체적으로 보면 선행연구의 관심은 영미파와 일독파라고 하는 서의 내부의 문제보다 서의와 중의의 대립에 있다. 또한 서의 자체에 대해 중점적으로 다루더라도 그 내용이 영미파 혹은 일본파에 치우쳐 있거나, 두 파의 대립이 비교적 잘 드러나는 의학 교육 혹은 위생권력 문제에 초점을 맞춘 경향이 강하다. 이에 따라 본고에서는 중화의학회와 중화민국의약학회의 협력과 대립을 중심으로 서의 파벌의 양상을 검토하고자 한다. 특히 중화의학회와 중화민국의약학회가 주요 의료위생정책의 실시에 있어 같은 입장을 표명하면서 도 위생행정의 주도권을 두고 경쟁하였다는 점에 주목하여 파벌다툼의 복잡한 성격을 밝히고자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당시 의학계 통합을 위한 노력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2. 서의계 파벌의 형성
1) 형성 배경
20세기 초 서양의학은 중국 각 지역에 설립된 의학교의 졸업생이 배출되고 구미와 일본에서 서양의학을 배운 유학생이 돌아오면서 빠르게 세력을 확장하였다[ 3]. 중국의 서의는 영미파와 일독파라는 파벌을 형성하였는데, 영미파는 영미계 의학교를 졸업한 의사 및 미국이나 영국 유학파를 뜻한다. 중국에 설립된 영미계 의학교의 대부분은 의료선교사가 세운 곳으로, 청말 중국 국내에서 서양의학을 배울 수 있는 곳은 미션계 의학교를 제외하면 매우 드물었다. 따라서 이들 영미파는 의료선교사와도 밀접한 관계에 있다. 또한 1908년 미국 국회에서 중국 정부에게 미국 배상금(庚子賠款) [ 4]의 반을 유학생 파견에 쓰도록 하면서 미국으로의 유학생이 급증하였는데 그 중에는 의학을 배우고자 한 이들도 적지 않았다. 중국 국내에서 미국식 교육의 총본산으로는 베이징협화의학원을 들 수 있다. 이 의학교의 졸업생 및 의학교의 지원을 통해 국내 및 미국에서 연수를 받은 의사들은 이후 위생기구의 주요 직책을 담당하며 영미파가 확대되는데 일조하였다.
일독파는 독일이나 일본계 의학교를 졸업한 의사 및 독일이나 일본 유학파를 뜻한다. 독일 유학파는 소수에 불과하고 대부분은 일본 유학파이다. 러일전쟁 이후 일본의 5개 관립학교가 1907년부터 1922년까지 중국인 유학생을 받기로 중국 정부와 특약을 맺으면서 일본으로의 유학생이 급증하였다( 見城悌治, 2010: 101). 경비는 중국측에서 부담하였다. 일본은 중국과 거리가 가까워 비용이 비교적 적게 들며 한자를 사용하는 등 문화적으로도 비슷하기 때문에 유학지로 인기가 높았다. 유학생들이 일본에서 배운 의학제도는 모두 독일을 본 딴 것이며, 수업 또한 대부분 독일어로 이루어졌다. 따라서 일본에서 유학한 의사들은 자연스럽게 독일계 의학교 출신자들과 가까워져 일독파를 형성하게 된다. 유학파 중 가장 많은 수를 점하는 것이 바로 일본파로, 중국에서 서의 세력이 늘어나기 시작한 것도 1905년부터 1915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일본에 유학했던 학생들이 돌아오고 중국의 의학교에서 졸업생이 배출되면서부터이다( Croizier, 1968: 49). 중국의 일독파 학교로는 독일이 세운 동덕의학교(同德醫學校)와 상하이덕문의학교(上海德文醫學校), 일본인이 세운 만주의과대학(滿洲醫科大學) 등이 있다. 한편 메이지 유신을 모방하고자 하였던 베이징정부는 베이핑육군군의학교(北平陸軍軍醫學校) 및 항저우(杭州), 쑤저우(蘇州), 우창(武昌), 바오딩(保定) 등 7곳의 의학전문학교에 일본인 혹은 일본유학파를 교원으로 채용하였다. 따라서 이들 정부 관련 의학교 또한 일독파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처럼 근대 중국 서의계는 영미파와 일독파의 두 갈래로 나뉘어 있었다[ 5]. 인쳰은 당시 각국의 의학이론과 기술에 큰 차이는 없었으나, 교육제도나 위생조직 등 여러 면에서 의견의 충돌이 있었기 때문에 대립하는 양상이 나타났다고 주장하였다( 尹倩, 2013: 80) [ 6]. 한편 크로이츠의 연구에 따르면 파벌 다툼의 원인은 기술 수준의 차이에서 비롯되었다. 실질적으로 일본에서 유학한 중국인들은 대부분 이류대학에서 공부하였고, 학교를 제대로 졸업한 사람도 소수에 불과하였다. 정부는 각 성(省)의 의학전문학교에 주로 일본유학파를 고용하였는데, 이들 대부분이 학교를 졸업한 후 1-2년 만에 교장 혹은 교수로 임용되었기 때문에 중요한 책임을 맡을 만한 소양이 부족하다는 평을 받았다(ドクトル·ライヒマン, 1930: 69-70). 이에 반해 영미파의 경우 일반적으로 일본의 이류 의학교에서 공부하거나 혹은 1911년 이후 설립된 지방의 이류 의과대학 출신 보다 더 높은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Croizier, 1968: 50) [ 7].
게다가 유학생들은 유학한 나라에 따라 서로 다른 교육체제를 경험하였고, 귀국 후 각자 자신이 배운 제도에 따라 학교를 설립하였다. 학제, 커리큘럼, 입학기준, 교사의 수준, 사용 언어 등이 모두 달랐다. 가장 큰 차이를 보인 것은 언어로, 영미파 의학교 및 병원에서는 논문 발표, 학교 교과과정, 병원의 기록 등에 모두 영어를 사용하였으며 일독파는 독일어 혹은 일어를 사용하였다[ 8]. 이들이 설립, 운영한 학교의 졸업생이 배출되면서 파벌이 계승 확대되기에 이른다. 한편 1920년대 이후 민족주의의 영향으로 의학교육에 있어서 중국어를 사용하려는 움직임이 강해지면서 1930년대 이후부터는 중국어를 위주로 삼고 외국어를 병행하는 학교가 다수를 차지하였다( 조정은, 2015). 또한 선행연구에서는 공통적으로 중국정부가 통일된 의학교육제도 및 위생조직을 설립할 힘이 없었다는 점이 파벌 다툼의 가장 큰 원인이라고 지적하였다. 즉 이들 영미파 및 일독파는 국가 위생 정책의 설립과 실행을 좌우하는 권한을 차지함으로써 본인들의 이익을 더욱 굳건히 하고자 하였고, 이는 극심한 파벌 대립으로 이어졌다.
2) 영미파 중화의학회
중화의학회는 현재 중국에서 활동하는 의학 단체 중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단체이다. 이 단체의 설립은 191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15년 2월 5일 박의회(博醫會) [ 9] 대회에 참가한 중국인 의사 21명은 중국인을 중심으로 한 의학단체가 필요하다는데 뜻을 함께 하여 그날 밤 회의를 통해 중화의학회(The National Medical Association of China)의 설립을 정식으로 선포하였다[ 10]. 즉 중화의학회는 박의회 중국인 회원들의 모임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초대 회장은 옌푸칭(顔福慶) [ 11], 비서는 우롄더(伍連德)가 맡았다. 1915년 7월 3일에는 교육부로부터 정식으로 인가를 받았으며[ 12], 1915년 말에는 회원 수가 232명에 이르렀다. 1915년부터 『중화의학잡지(中華醫學雜誌, The National Medical Journal of China)』를 창간하고 중국어판과 영문판을 동시에 출판하였다. 처음에는 반년에 한 번 출간하였으나 1916년부터 1923년까지는 계간, 1924년부터는 격월로 출간하였다.
「중화의학회선언서」에서 학회의 목적으로 가장 먼저 제시된 것은 의사들의 친목 도모이다. 이는 수가 점차 늘어나고 있던 중국인 의사들이 서로의 지식과 경험을 공유할 필요성을 통감하였기 때문이다. 음력 정월에 연회를 개최하였는데, 이는 각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이 한 곳에 모여 서로의 의견을 공유하고 개인적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에 대해 상의하기 위해서였다[ 13]. 또한 의덕[醫德, 의사로서의 도덕성]과 의권[醫權, 의사로서의 권리]의 유지, 의학과 위생 관념의 보급, 중국과 서양의학계의 교류 등도 주요한 목적으로 제시되었다[ 14]. 즉, 중화의학회는 박의회와는 달리 종교색을 완전히 배제한 단체였다. 중화의학회 회원 중에는 옌푸칭이나 강청(康成, Ida Kahn), 스메이위(石美玉, Mary Stone)등 기독교 신자이면서 의료선교사로 활동한 인물도 있지만, 우롄더와 같이 선교와는 관련 없는 인물도 존재한다. 다만 이들 모두 서양의학을 배운 의사라고 하는 점에서 공통분모를 지닌다. 회원들은 서양에서 유학하거나 혹은 의료선교사가 설립한 의학교에서 서양의학을 배운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며, 박의회의 회원으로도 활동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회원이나 준회원이 될 수 있는 자격은 중국인에게만 주어졌다[ 15]. 정회원은 외국의 의과대학 졸업생이거나 혹은 국내의 의학교를 졸업하고 서양언어가 가능한자로 제한되었다. 중국의 의학교를 졸업하고 서양언어를 하지 못하는 경우에는 준회원으로 가입하였다. 준회원의 경우에는 정회원과 동등한 권리를 향유하나 학회의 임원이 될 수는 없었다. 국적과 상관없이 중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우수한 개인 혹은 회원은 명예회원이 될 수 있었다. 명예회원에는 학회와 관련이 깊은 정부 인사 및 박의회의 의료선교사 등이 속해 있었다( 秦國攀, 2010: 16-17). 이처럼 중화의학회는 중국인만이 정회원이나 준회원이 될 자격을 부여받았다는 점, 영문 명칭에 National, 중문 명칭에 중화(中華)라는 단어가 들어 있다는 점에서 중국인에 의한 중국전체를 대표하는 학회가 되고자 하였음을 알 수 있다. 민족주의의 영향력이 점차 강해지고 있던 시점에서 박의회를 외국인 단체로 규정하고, 박의회와는 다른 중국인 중심의 단체라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 것이다. 한편 중화의학회는 어디까지나 서양의학을 배운 의사들의 단체였기 때문에 회원 규약에 등장하는 “중국인”에 중의는 포함되지 않는다.
중국에서 활동하고 있던 의료선교사들의 입장에서 보면, 중화의학회의 설립은 서양의학의 중국 전파라고 하는 목적이 어느 정도 달성되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기도 하였다. 이에 따라 CMJ의 편집자는 “모든 의료선교사는 중국인이 자국민의 건강이나 복지의 문제를 해결하는 날이 올 것을 바라고 있었으므로, 중국인 의사들이 단체를 결성한 것에 대해 매우 만족한다.”라고 밝혔다[ 16]. 이후에도 두 학회의 밀접한 관계는 지속되었으며, 1932년 4월 15일 박의회가 중화의학회에 합병되면서 중화의학회는 명실상부 중국을 대표하는 의학단체로 거듭나게 되었다( 曺貞恩, 2014). 중국명은 종전과 같이 중화의학회, 영문명은 The Chinese Medical Association로 변경되었다. 또한 의료선교 업무를 담당하는 부서인 「교회의사위원회(敎會醫事委員會, Council on Medical Missions)」가 설치되었다. 합병으로 인해 회원 수는 1,500명 이상으로 늘어났다.
3) 일독파 중화민국의약학회
중화민국의약학회는 1915년 5월[ 17] 일독파 의약(醫藥) 전문가들이 베이징에서 모여 결성한 협회이다( 中華民國內政部年鑑編纂委員會編, 1936: (G)217). 중요인물인 탕얼허(湯爾和)와 허우위원(侯毓汶) 또한 일본에서 유학한 인물들이다. 탕얼허는 저장성(浙江省) 항저우 출신으로 일본 가나자와의학전문학교(金澤醫學專門學校)에서 의학을 배웠다. 중화민국의약학회의 설립자 중 한 명으로 초대회장을 지내기도 하였다. 1922년 이후 교육총장, 내무총장, 재정총장 등을 역임하고 중국 의학계의 중요인물로 활약하기에 이른다. 다만 일본 점령기 친일적 행각 때문에 좋은 평을 받지는 못하였다( 姚毅, 2011: 142). 설립자 중 한 명인 허우위원 또한 일본 치바의학전문학교에서 의학을 공부하였다. 1908년 대학 졸업 후 귀국하여 펑톈고등의학당(奉天高等醫學堂) 교무장, 단징육군의원(單京陸軍醫院) 원장, 톈진시(天津市) 위생국 및 베이핑시(北平市) 위생국 국장 등을 역임하였다. 1941년에는 치바의과대학으로부터 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화인민공화국 설립 후에도 핑위안성(平原省) 위생국 고문, 핑위안성 의과학교 부교장, 바오딩의학전과학교(保定醫學專科學校) 부교장 등을 맡았다( 見城悌治, 2010: 72).
중화민국의약학회에는 이사부(理事部), 의학부, 약학부 등이 설립되었으며, 매년 상회(常會)를 개최하였다( 鄭鐵濤·程之范編, 2000: 527). 1915년 8월 첫 번째 상회에서 탕얼허가 초대회장으로 선출되었고, 다음해 10월부터 『중화민국의약학회회보』를 출판하였다. 입회자격이 중화의학회에 비해 까다롭지 않아 초기에는 회원 수가 더 많았다( 郝先中, 2015: 70) [ 18]. 1931년에는 재정상의 이유로 상하이로 거점을 옮기고, 『신의약(新醫藥)』이라는 월간지를 편찬하였다. 상하이 외에 베이징, 난징(南京), 쑤저우, 난창(南昌), 한커우(漢口), 항저우, 원저우(溫州), 타이싱(泰興), 차오저우(潮州) 등에서도 분회를 운영하였다( 陳邦賢, 1937: 338). 『신의약』은 1934년 『동남의보(東南醫報)』 및 『사회의보(社會醫報)』 등과 합병, 『신의약잡지(新醫藥雜誌)』가 된다. 주요 활동 목적은 의약학 연구 및 이를 통한 학술의 독립, 해외 동지와의 교류, 의학교육의 육성, 정부에게 위생행정 법안에 대해 건의하고 위생행정의 진행을 재촉하는 일 등이었다. 이 밖에 의학 용어의 통일, 기생충병의 조사, 중의 및 중약 연구 등 여러 분야에서 적극 활동하였다( 鄭鐵濤·程之范編, 2000: 527). ‘의약학회’라는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의학전문가와 약학전문가가 함께 활동함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일본에서 유학한 중국인 중에 약학 전공자가 적지 않았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약학 전공자수를 비교해보면 영미 유학생보다 일본 유학생이 많다( 中國藥學會, 2008: 6). 한편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이 학회는 1937년 활동을 중단하였는데, 그 원인으로는 학회가 정치적 혼란이 계속되던 북양정부시기에 설립되었다는 점, 주로 일독파들이 활동하였다는 점, 경비의 부족으로 제대로 사업을 전개하지 못했다는 점, 중의에 대한 편견과 장기간에 걸친 중서의 분쟁이 학회의 발전에 악영향을 끼쳤다는 점 등을 들고 있다( 範鐵權, 2015: 95-97).
한편 저명 의사 중 많은 수는 중화의학회의 회원이면서 중화민국의약학회의 회원이기도 하였다( 尹倩, 2013: 71). 따라서 두 협회는 서로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 1917년 중화의학회 제2차 대표대회에서는 탕얼허를 중화의학회 부회장으로 선출하였고 1920년 제3차 대회에는 당시 중화민국의약학회 회장이었던 허우위원이 참여하였다( 劉遠明, 2007: 165). 같은 목적을 위해 협력하는 모습도 보인다. 1926년 2월 제6차 중화의학회 대회 이후, 당시 중화의학회 회장 류뤠이헝은 중화민국의약학회와 함께 “분발영국경관판이공공위생촉성회(分撥英國庚款辦理公共衛生促成會)”를 조직한다. 위원은 중화의학회 5인, 중화민국의약학회 5인 총 10인으로 구성되었다. 영국은 위원회의 건의를 받아들여 의화단 배상금에서 매년 17%, 즉 50만위안(元) 이상을 중국의 공공위생 및 의학교육 사업의 경비로 사용할 것을 허락하였다( 中華醫學會, 2010: 32). 다만 북양정부시기 중화민국의약학회가 점하고 있던 위생행정에 대한 영향력이 난징정부시기부터 중화의학회로 넘어가고 의학 교육 및 위생행정의 통일과 체계화를 둘러싼 이권다툼이 격렬해지면서 두 학회의 우호관계에도 균열이 생기게 된다( 尹倩, 2008: 24).
3. 의학 현안을 둘러싼 협력과 대립
1) 의학용어의 번역
서양인 의료선교사에 의해 주로 이루어지던 의학 용어 번역은 1915년 2월 12일 박의회의 출판·용어위원회(The Publication and Terminology Committee) [ 19]와 장쑤성교육회(江蘇省敎育會)의 회담을 통해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였다. 회담에는 장쑤성 교육회 부회장 황옌페이(黃炎培), 박의회의 코스란(Philip Brunelleschi Cousland) [ 20]과 닐(James Boyd Neal) 등 총 27명이 참석하였다. 박의회가 담화회를 개최한 목적은 장쑤성교육회 및 각 의학단체와의 협력을 통해 더 완벽한 용어를 선정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기 때문이다[ 21]. 이 회의에서 결정된 사항은 다음과 같다.
1. 각지의 동지들은 각 소재지에서 의학연구회를 조직할 것을 주장해야 한다. …… 설립 후에는 본회에 통지하고 용어회의 대표인 코스란에게도 보고한다.
2. 각지 의사들의 의학용어에 대한 저작이나 의견서를 모아 본회에 송부하고, 코스란에게도 전송한다.
3. 수정한 의학용어표를 본회에 보내줄 것을 코스란에게 요청한다. 또한 표를 각지 의학교나 학회에 보내 공동으로 연구하여 의견을 발표한다.
4. 각종 의견을 모은 후 중의나 서의, 과학자를 초빙하여 오늘처럼 회의를 열고 의논한다. 그 후 정부에 요청하여 사람을 파견하고 공동으로 용어를 심사·결정한다[22].
한편 회의에서는 일본식 용어에 대한 의견도 교환하였다. 코스란은 적절한 일본식 용어는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다만 용어를 직역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 음역의 경우 일본어 발음이 중국어와 매우 다르다는 점은 일본어 용어 채택에 걸림돌로 작용하였다[ 23].
계속하여 제2차 담화회가 1916년 1월 16일, 제3차 담화회가 1916년 2월 12일에 개최되었다. 제3차 담화회부터는 중화의학회[ 24], 중화민국의약학회, 장쑤성의학전문학교(江蘇省醫學專門學校), 저장성의약전문학교(浙江省醫藥專門學校), 푸저우육군의원(福州陸軍醫院), 항저우의약학회(杭州醫藥學會)의 대표들이 참석하면서 더욱 폭넓은 의견 교환이 가능해졌다[ 25]. 즉 제3차 담화회부터는 영미파 서의와 일독파 서의 그리고 의학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들 등 여러 배경을 지닌 이들이 함께 활동하기 시작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의학용어의 통일성을 확보하고 새로운 용어를 선전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나아가 제3차 담화회에서는 박의회, 중화의학회, 중화민국의약학회, 장쑤성교육회 네 단체가 모여 의학용어심사회(Union Committee on Medical Terminology)를 결성하기에 이른다[ 26]. 의학용어심사회는 1916년 8월 7일부터 14일까지 제1차 대회를 개최하였다[ 27]. 교육부에서는 탕얼허를 파견하였다. 박의회에서는 닐, 맥올(P. L. McAll), 코맥(J. G. Cormack), 실즈(R. T. Shields), 중화의학회에서는 수펑빈 외 4인, 장쑤성교육회로부터는 우르장(余日章), 선언푸(沈恩孚), 우쟈쉬(吳家煦)가 참석하였다. 중화민국의약학회는 총 9명을 파견하였으나, 매일 회의에 참가할 수 있는 인원이 5명으로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4명은 참석하지 못하였다. 그 외에 영문 서기(劉瑞恒)와 중문 서기(王立才)가 있었다. 대회 전날(8월 6일)에 결정된 사항은 다음과 같다. ①표결에 의해 대표 중 3분의 2가 동의한 용어를 통일 용어로 확정한다. ②3분의 2의 동의를 얻지 못한 용어는 득표수가 많은 용어 둘을 선정하여 다시 투표한다. 그래도 3분의 2가 되지 못하는 경우에는 두 용어를 병기하고 그 중 많은 표를 얻은 용어를 앞에 적는다. ③재표결시 다시 검토할 것을 주장하는 사람이 있는 경우에는 다음날 다시 결정하기로 한다( 溫昌斌, 2011: 17-18). 대회 첫째 날(7일)에는 해부학이라는 세 글자에 대해 한 시간 반 동안 토론하였는데, 이는 해부학이라는 용어가 무엇보다 중요했기 때문이다(第一日討論解剖學三字, 約費一時間有半, 因此事最重要也). 이어서 골학, 뇌학, 신경학, 무기화학에 관한 용어에 대해 토론하였다. 박의회의 대표가 중국어 자의(字義)에 대해 잘 모를 경우에는 선언푸가 설명해주었다. 그는 비록 의학지식은 없으나 한자·한문에 통달한 인물이었다.
한편 영미파와 일독파 사이에 의견이 엇갈리는 경우도 종종 발생하였다. 일본에서 교육받은 사람들은 라틴어 직역을 선호하였는데, 직역하는 편이 의학생이 외국책을 읽을 때 도움이 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양인 의료선교사는 기본적으로 되도록 서양의 영향이 보이지 않는 용어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결국 장쑤성교육회의 중재에 따라 절반 이상의 용어에 대해서는 합의를 보았는데, 의학용어 중 5분의 3은 일독파의 의견에 따르고 5분의 2는 의료선교사가 정한 용어를 그대로 사용하기로 하였다.
제2차 대회는 1917년 1월 11일부터 17일까지 개최되었는데, 제1차 대회에 참가한 네 단체 외에 이과교수연구회(理科敎授硏究會)도 참가하였다[ 28]. 계속하여 같은 해 8월 제3차 대회를 열고 해부학용어조와 화학용어조로 나누어 각각 해부학 용어와 화학용어에 대해 의논하였다[ 29]. 8월 27일 의학용어심사회가 교육부의 인증을 받으면서 심사회에서 정해진 용어는 공식 번역용어로 자리 잡게 된다[ 30]. 1918년 7월에 열린 제4차 대회에서는 해부학용어조, 화학용 어조, 세균학용어조로 나뉘어 용어에 대해 의논하였다( 溫昌斌, 2011: 37). 이상 총 4번의 대회를 거쳐 대부분의 용어가 정해졌으며, 특히 해부학 용어에 대해서는 심사가 끝이 났다. 제4차 대회에서 의학용어심사회는 「과학용어심사회(科學用語審査會)」로 개칭하고, 의학용어뿐만 아니라 다른 과학 분야의 용어에 대해서도 번역작업을 진행하게 된다[ 31]. 과학용어심사회에는 처음부터 참가하고 있었던 네 개의 단체 외에 중국과학사(中國科學社), 중화농학회(中華農學會), 이과연구회(理科硏究會), 중화박물학회(中華博物學會), 베이징협화의학교, 화동교육회(華東敎育會)가 참가하였다[ 32].
의학용어심사회 및 과학용어심사회의 용어 통일 작업은 먼저 초안을 작성하고 선정된 초안에 대해 대회에서 의논을 거쳐 용어를 결정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예를 들면 제1차, 제2차 대회에서는 중화민국의약학회의 초안이 채택되었으며, 제3차 대회에서는 해부학과 화학 용어에 대해서는 중화민국의약학회의 초안이, 세균학용어에 대해서는 중화의학회의 초안이 선정되었다. 심사회 초기 중화민국의약학회가 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교육부와 관계가 깊었다는 점이 작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33]. 이 때문에 1917년 박의회의 출판·용어위원회의 회장을 맡고 있던 맥올은 의학용어심사회 1-2차 대회에서 결정된 용어 중에는 의료선교사의 생각과는 다른 용어가 많다고 지적하였다. 그러나 중국인 단체와의 협력을 통해 이익을 얻었음은 분명하다며 만족감을 표하였다[ 34]. 박의회는 심사회에 속한 학회 중 유일한 서양인 중심의 단체로 서양의 의학언어를 중국어로 번역하는데 주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또한 의학용어위원회의 설립을 주도한 인물이 코스란이었다는 점에서 박의회 산하 의학용어위원회의 작업이 심사회에도 큰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과학용어위원회에서 박의회가 초안을 담당한 분야는 병리, 약물, 산과, 부인과, 소아과, 내과, 외과, 수술 등 다양하였다[ 35]. 과학용어심사회는 1927년 해산할 때까지 총 12번의 회의를 개최하였으며 중국과학용어의 번역과 선정에 크게 기여하였다( 張大慶, 1996: 48-52). 1922년 중화의학회 대회에서 수펑빈은 과학용어심사회가 7년간 활동을 지속하면서 만개가 넘는 용어를 다루었다고 발표하였다( K. Chimin Wong(王吉民) and Wu Lien-teh(伍連德), 1932: 574). 과학용어심사회의 의학용어조는 1929년 박의회대회에서 개최된 회의를 마지막으로 활동을 마쳤다[ 36].
의학용어심사회나 과학용어심사회의 용어통일작업은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었지만 여러 문제점도 지니고 있었다. 선행연구에서는 심사회의 성과로 정부와 협력하여 일을 추진하였다는 점, 번역용어의 표준을 제시하였다는 점, 심사회의 활동을 통해 인재양성에 기여하였다는 점, 의학용어 심사의 순서를 정했다는 점 등을 들고 있다. 문제점으로는 자금 상황이 불안정하고 전문가가 부족했다는 점, 참가 단체가 많지 않아 대표성이 약하다는 점을 들었다( 溫昌斌, 2011: 52-63). 실제로 교육부가 매달 보내오던 보조금이 1923년 12월을 마지막으로 끊기면서 심사회의 운영은 각 단체의 보조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37]. 또한 과학용어위원회가 본래 의학용어심사회로부터 출발하였기 때문에, 의학용어 이외의 용어 번역에 있어서는 전문성이나 대표성이 약했다. 그러나 의학용어의 경우에는 전국 규모의 의학단체(박의회, 중화의학회, 중화민국의약학회)가 참가하고 있었으므로, 과학용어심사회가 담당한 다른 분야에 비해 전문성이 높았다고 평가할 수 있다. 또한 서의계가 영미파와 일독파로 나뉘어 각자 용어 번역을 추진하고 있던 상황에서 심사회의 존재는 두 파가 서로의 의견을 교류하고 합의를 이끌어내는데 주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예를 들면 의료선교사는 심사회의 논의를 통해 일본식 용어를 받아들이고자 하는 태도를 보인다. 또한 의료선교사가 만든 용어의 가장 큰 문제점이라고 할 수 있는 새롭게 만들어낸 한자 및 조어는 중국인들과의 의논을 통해 삭제, 보완되면서 더 나은 방향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의학단체의 중국인 이외에도 제2차 담화회 및 의학용어심사회 제1차 대회의 회장, 제2차 대회의 해부학 용어조 회장을 역임한 우르장은 비록 의학지식은 부족하였지만 한자·한문에 통달한 인물로 적절한 중국어 용어를 결정할 때 어느 정도 긍정적인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38]. 박의회는 심사회의 작업이 끝나면 박의회의 번역사업도 더욱 간단해질 것이라 기대하였다[ 39]. 따라서 심사회에 적극적으로 참가하는 한편, 심사회에서 결정된 용어를 보급하는 일에도 힘썼다. 번역서에는 심사회의 용어를 사용하고, 이미 출판된 저서의 경우에는 심사회의 용어를 적용한 개정판을 출간하였다[ 40].
과학용어위원회의 뒤를 이은 것은 난징국민정부가 1928년 설립한 대학원역어통일위원회(大學院譯語統一委員會)이다. 그 후 1932년에는 국립편역관(國立編譯館)이 설립되어 과학용어의 편집 및 번역을 담당하였다. 이처럼 근대 중국에서의 과학 용어 번역작업은 의료선교사나 의학단체 등의 민간 주도에서 국가 주도로 변화하였다. 과학용어심사회가 기본적으로 민간 단체였기 때문에 용어 사용을 강제할만한 힘이 없었던데 반해, 국가기관인 대학원역어통일위원회 및 국립편역관의 경우에는 좀 더 효과적인 용어 통일 작업이 가능하였다( 溫昌斌, 2011).
2) 위생행정
중국의 근대적 위생운동은 1912년 만주의 폐페스트 창궐과 방역운동에서 시작되었다(ドクトル·ライヒマン, 1930: 22). 위생운동을 주도한 것은 외국에서 의학 혹은 보건위생학을 전공하고 중국에 돌아온 의사들로, 대표적으로는 우롄더를 들 수 있다. 또한 1912년 이후 베이징협화의학원에서는 위생학 강좌를 운영하였으며, 중앙방역처에서도 위생 관련 강연회를 지속적으로 개최하였다. 박의회나 중화의학회와 같은 민간학술단체에서도 위생 문제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위원회를 조직하고 강연회 및 사진전을 열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북양정부시기에는 전국적인 공공위생정책도 마련되지 못하였고 의사업에 대한 관리 또한 거의 진행되지 않았다( 徐小群, 2007: 140). 정부 차원의 본격적인 위생행정이 시도된 것은 1927년 내정부 위생사(內政部 衛生司)를 설치하면서부터이다. 난징국민정부는 1928년 7월 베이징을 점령하자 곧바로 10월에 내정부 위생사를 위생부(衛生部)로 승격시키고 중앙방역처(中央防疫處)를 흡수하여 조직의 강화를 도모하였다. 위생부에는 총무, 의정, 보건, 방역, 통계의 5사(司)가 설치되었고 각 사에는 사장이 존재하였다. 그리고 각 사는 2-4과(科)로 이루어졌다. 위생부는 각 성에 위생처, 각 시에 위생국을 설치하여 행정기구를 정비하고 위생실험처와 위생실험구를 설치하는 한편, 고문기관인 중앙위생위원회(中央衛生委員會)를 통해 위생의 제도화를 추진하였다. 중앙위생위원회는 위생부장이 임명한 13-17명의 위원으로 이루어졌으며 총 관리는 위생부장이 맡았다(ドクトル·ライヒマン, 1930: 26). 위생부장에는 쉐두비(薛篤弼)가 취임하였다. 쉐두비는 의사가 아니었기 때문에 이 시기 일독파와 영미파 사이에 위생권력을 차지하기 위한 경쟁이 심화된다. 국민정부에서는 각 파벌의 인물들 및 파벌에 속해있지 않은 인물을 고루 채용함으로써 이러한 파벌다툼을 약화시키려고 하였다. 예를 들면 영미파 류뤠이헝(劉瑞恒) [ 41]을 상무차장(常務次長)으로 임명하여 위생행정의 지휘를 맡김과 동시에 의정사(醫政司) 사장(司長)에는 일본 유학파 의사 옌즈종(嚴智鐘)을 임명하였다( 傅惠·鄧宗禹, 1996: 851-852). 류뤠이헝은 1929년 11월부터 위생부장 대리로 활약하다가 1930년 4월 정식으로 부장에 취임하였다. 그는 서의를 중심으로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하였으며 협화의 학원을 통해 록펠러 재단의 자금 원조를 이끌어냈다( 姚毅, 2011: 168). 1931년 위생부는 내정부 위생서(衛生署)로 바뀌고 5사 체제는 총무, 의정, 보건의 3사 체제로 축소된다. 이에 따라 일독파 대부분이 사퇴하였다( 金寶善, 2003: 110). 그러나 서장과 부서장의 경우에는 영미파인 류뤠이헝과 진바오산이 계속해서 맡았다. 선행연구에서는 영미파가 부장이나 서장과 같은 요직을 주로 담당한 반면 일독파는 대부분 단순한 기술직을 담당하고 있어 위행행정에는 큰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였다고 지적하였다( 尹倩, 2008: 24). 이는 록펠러재단(Rockefeller Foundation)의 지원으로 위생행정에 관해 연수를 받을 기회가 비교적 많았던 영미파와 달리 일독파는 대부분 일반적인 의학교육만 받아 위생업무에 대한 실질적인 경험이 부족하였기 때문이다( 金寶善, 2003: 109). 중화의학회는 이전 회장인 옌푸칭이나 류뤠이헝 등이 위생부의 부장을 역임하고 중화의학회의 회원이 위생부 요직을 담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중국에서의 의료 위생 행정에서 주도적인 지위를 차지할 수 있었다[ 42]. 이후로도 국민정부는 위생서를 위생부로 승격시키지 않았으며 위생행정기구는 중일전쟁 등을 겪으며 계속해서 조직의 변화를 겪었다( 飯島涉, 2000: 302).
진바오산에 따르면 위생행정을 둘러싼 영미파와 일독파의 권력다툼은 당시 난징국민정부내의 권력 다툼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장제스 정권의 실력자였던 쿵상시(孔祥熙), 쑹즈원(宋子文), 천궈푸(陳果夫)·천리푸(陳立夫)형제 중 친미파의 배후는 주로 쿵상시, 쑹즈원이고 일독파는 천씨 형제 편에 속하였다. 실질적으로 중앙위생행정과 관련된 실권을 장악한 것은 친미파로, 록펠러재단 및 존 그랜트의 협력에 힘입어 위생행정과 관련된 기구들을 정비해 나갔다. 장개석 정권 초기의 난징시 위생국장 후딩안(胡定安), 중일전쟁 승리 후 상하이시 위생국장이 된 위송준(兪松筠) 등의 일독파는 대부분 직책을 맡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교체되고 만다. 이러한 영미파(특히 친미파)의 우세는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설립까지 이어졌다( 金寶善, 2003: 110).
4. 통합을 위한 노력
1927년 난징국민정부의 수립은 중국 의학계를 주도하는 세력이 서양인 선교사에서 중국 정부로 바뀌었음을 의미한다( Croizier, 1968: 53). 정부는 1928년 10월 중앙 위생 행정 기구인 위생부를 설치하고 의료 위생의 제도화를 추진하였는데, 이를 위해서는 분열되어 있는 의학계의 통일이 급선무였다[ 43]. 이러한 정부의 정책 하에 여러 의학단체 사이에서 통합의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는데, 특히 정부와 긴밀한 관계에 있던 중화의학회에서 주도적으로 제안하고 나섰다. 우롄더는 1928년 『중화의학잡지』에서 합병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이를 통해 중앙정부가 이미 구국을 위한 중요한 수단으로써 최신의 의료사업과 위생사업을 엄중히 실시·채택하였다는 점이 충분히 증명되고, 이로써 부국강민(富國强民)이라고 하는 목적이 달성될 수 있으리라 기대된다. 의료 위생 사업을 정리하기 위해서는 우선 전국의 의학단체를 모아 일치 단결시켜야만 성과를 얻을 수 있다. 이로 인해 의권〔醫權: 의사로서의 권리〕의 통일을 결의하였다[ 44].” 뒤이어 그는 중화의학회와 중화민국의약학회, 박의회의 합병을 통해 영국의 “영국의학회”, 미국의 “미국의학회”와 같이 중국을 대표하는 “중국의학회”가 성립된다면 중국의 의료를 굳건한 기반에 올려놓을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외국인이 설립한 의학단체는 중국에서의 의료문제를 해결하기에는 역량이 부족하다고 비판하였다. 외국인이 설립한 의학단체란 박의회를 뜻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45].
또한 그는 「본회의 장래」라는 기사에서 “국민정부 위생부는 이전부터 각종 의학단체가 자주 함께 연락하여 정부가 단순화된 조직에 대처하여 통일된 성과를 얻을 수 있도록 되기를 절실히 희망해왔다”라고 밝히고, 중화의학회의 회원이 위생부 차장 또는 부장을 담당하고 있으므로 중화의학회야말로 전국 의학계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46]. 즉 중화의학회의 회원들은 스스로의 권한을 확대하고자 하는 목적에서 정부의 의학단체통제에 적극 관여하였던 것이다[ 47]. 1930년에는 서의조례(西醫條例)의 제정으로 의사등록제도가 실시되면서 의료사업에 대한 정부의 개입이 본격화된다( 飯島涉, 2000: 17). 서의들은 기본적으로 정부의 규범과 관리를 지지하여 자신들의 직업 특권을 얻어내고자 하였으며, 적절한 소양을 갖추지 못한 의사를 통제할 것을 정부에 요구하였다.
또한 중의라고 하는 경쟁자의 존재는 서의들이 서로 협력하는 계기가 되었는데, 1925년 상하이의사공회(上海醫師公會)의 성립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중의에 비해 서의의 수가 매우 적고 일반사람들이 서의와 중의의 차이를 잘 모르는 상황에서 중의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서의가 서로 힘을 모아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었던 것이다[ 48]. 박의회, 중화의학회, 중화민국의약학회의 기간지에는 주로 학술적인 내용이 실린 반면, 상하이의사공회에서 발간한 잡지에는 중의를 공격하는 내용의 글이 자주 등장한다( 趙洪鈞, 1989: 108-109). 이 협회에는 중화의학회와 중화민국의약학회의 회원들이 대거 참여하였다.
리타오(李濤)는 최근 중국의학계의 가장 큰 문제는 영미파와 일독파로 분열되어 있다는 점이라고 지적하고, 중화민국이 완전한 독립국으로써 학술방면에서도 독립하고자 한다면 영미파나 일독파가 아닌 중화파(中華派)를 창립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49]. 이러한 주장을 바탕으로 1929년 중화의학회와 중화민국의약학회 등의 찬성을 얻어 전국의사연합회(全國醫師聯合會)가 성립되었는데, 이 협회의 설립 목적은 파벌 다툼을 피하고 의학계를 통합하는데 있었다. 그러나 책임자들 중 일독파가 많아 일독파 의사 조직으로 여겨져 실질적인 통합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50]. 반면 1932년 시행된 박의회와 중화의학회의 합병은 의학계 통합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진 예라고 할 수 있다. 「의학회 합병」에서는 “수년 이래 의학계의 선각자들은 국내의 의학단체가 연합하여 정식으로 전국의 의학계를 대표하는 기관을 설립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하였다. 이에 따라 중화의학회와 중국 박의회의 합병에 관한 의논이 마침내 시작되었다”라고 밝히고 있다[ 51]. 다만 이 두 학회의 통합은 영미파 내부의 통합에 불과하여, 의학계의 진정한 통합이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이후에도 영미파와 일독파의 통합 문제는 계속 제기되었다. 1932년 대회에서 중화의학회 회장 뉴훼이성(牛惠生)은 “중국의 의학 관련 단체 중에는 쓸모없는 기관이 많고 의학계 전체가 사분오열되어 대내적으로도 대외적으로도 어려움이 있다. 심하게는 한사람의 회원이 두 의학회에 속하고 그 두 의학회의 주장이 첨예하게 대립되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 유식자는 일찍부터 매우 우려하였다”라고 하였다[ 52]. 여기에서 두 의학회란 중화의학회와 중화민국의약학회를 뜻한다. 실제로 이미 1928년 중화의학회 7차대회 때 두 학회의 합병문제가 논의된 적이 있으나[ 53], 개업의의 이해문제로 인해 합의를 보지 못하였다(ドクトル·ライヒマン, 1930: 69). 결국 두 학회의 대립은 1932년 박의회와 중화의학회가 합병된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54]. 1934년에는 중화의학회와 중화민국의약학회, 전국의사연합회를 합병시켜 “이상적인 의학단체”를 만들자는 주장도 제기되었으나 이 또한 합의에 이르지 못하였다[ 55]. 뉴훼이성은 이에 대해 중화의학회와 중화민국의약학회의 경우에는 의업과 약업의 성질과 입장이 달랐고, 중화의학회가 학술단체이고 전국의사연합회는 직업단체라 하지만 이러한 성격이 확연히 구분되지는 않아 서로의 주장에 다른 점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중화의학회는 학술단체의 성격이 강하기는 하나 직업단체이기도 하였고, 전국의사연합회는 의사들의 권익단체를 표방하였지만 학술적인 면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尹倩, 2013: 85). 한편 이러한 논의에 대해 의학회를 굳이 통일시킬 필요는 없다는 반박이 제기되는 등[ 56], 1930년대 중반까지도 여전히 이 문제가 중국 서의계의 중요 논쟁거리 중 하나였다.
5. 결론
근대 중국 서의계는 영미파와 일독파로 나뉘어 있었다. 영미파는 영국과 미국 유학 출신자 혹은 영미권이 우세한 프로테스탄트 미션계 의학교 졸업생들을 뜻하며, 일독파는 독일 혹은 일본 유학자 및 독일과 일본 정부가 세운 의학교, 중국 정부가 세운 의학교 출신자들이다. 즉, 이들은 본인이 어디에서 의학교육을 받았는지에 따라 파벌을 형성하게 된 것이다. 이들이 세운 학교의 경우 파벌에 따라 학제, 입학기준, 교사수준, 사용언어 등이 모두 달랐다. 이에 따라 박의회에서는 의학교육위원회를 설립하여 의학교육제도를 통일하고자 노력하였으나, 일독파의 동의를 얻지 못하였기 때문에 영미파 의학교의 제도를 정리하는 수준에 그쳤다. 영미파에서는 영미식으로 중국의 의학교를 모두 재편하고자 하였고, 일독파에서는 당연히 독일식으로 제도를 구축하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결국 영미파 혹은 일독파 둘 중 하나가 강력한 권한을 지니고 교육제도를 강제적으로 정리하던가, 혹은 “중화파”와 같이 새로운 협회를 조직할 필요가 있었지만, 1930년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이 문제는 해결되지 못하였다. 이는 결국 서양의학의 필요성이 높아지는데 반해 중국 정부가 스스로 서의 교육제도를 통일하고 체계화 시킬만한 역량이 부족하였음을 반영한다.
영미파와 일독파를 대표하는 중화의학회와 중화민국의약학회는 위생행정의 주도권을 두고 경쟁하였다. 이러한 대립은 중국의 서양의학 체계화에 있어서 큰 장애로 작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서양의학을 배운 의사라고 하는 공통된 직업군으로써의 의식을 가지고 자신들의 이익과 명성을 높이는 방안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협력하기도 하였다. 이는 서의의 이권단체인 상하이의사공회에 두 협회의 중심인물이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 또한 이들에게는 중의라고 하는 공통의 적이 존재하였다. 중의는 서의보다 수도 훨씬 많았을 뿐만 아니라, 중국인들 대부분의 신임을 받았다. 중의에 대항하기 위해서 서의들은 서로의 출신과 상관없이 협력하는 모습을 보인다.
한편으로 이러한 파벌의 존재가 중국의 의학발전에 장애만 되었던 것은 아니다. 영미파와 일독파의 협력은 시너지 효과를 발휘하기도 하였는데, 이는 의학용어 통일 작업에 잘 나타난다. 중국어에 더 어울리는 의학용어를 선정하는데 있어서 서구와 일본의 사례를 적절히 이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영미파와 일독파 의학교의 수준이 서로 달랐기 때문에 다양한 계층의 서의가 배출될 수 있었고, 덕분에 중국의 서의 수요에 적절히 대응할 수 있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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