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색 마약’과의 전쟁: 한국의 마약 정책과 반공주의, 1945-1960
Abstract
This paper investigates the discourses and policies on narcotics in Republic of Korea from 1945 to 1960. Since the Liberation the narcotic problem was regarded as the vestige of Japanese imperialism. which was expected to be cleaned up. The image of narcotic crimes as the legacy of the colonial past was turned into as the result of the Red Army’s tactics to attack on the liberalist camp around the Korean war. The government of ROK represented the source of the illegal drugs as the Red army and the spy from North Korea. The anticommunist discourse about narcotics described the spies, who introduced the enormous amount of poppies into ROK and brought about the addicts, as the social evil. Through this discourse on poppies from North Korea, the government of ROK emphasized the immorality of the communists reinforcing the anticommunist regime, which was inevitable for the government of ROK to legitimize the division of Korea and the establishment of the government alone. This paper examines how the discourses and policies on narcotics in ROK was shaped and transformed from 1945 to 1960 focusing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them and the political context such as anticommunism, Korean war, the division of Korea, and etc. This approach would be helpful to reveal the effect of the ROK’s own political situation to the public health system involving the management for drugs.
색인어: 마약, 아편, 간첩, 마약법, 마약의 취체, 반공주의, 한국전쟁, 아편의정서, 앵속의 재배와 아편의 생산, 국제무역
Keywords: Poppy, Narcotics, Reds, Anti-communism, Drug Policy, Republic of Korea, Korean war, Cold war, Harry J. Anslinger, Protocol for Limiting and Regulating the Cultivation of the Poppy Plant
1. 머리말
한국전쟁의 정전회담이 중단과 재개를 반복하던 1953년 한국의 한 언론은 유엔군 사이에 마약 중독자가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도했다. 그에 따르면 부산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 가운데 폭행, 살인 등의 범죄를 저지른 병사들은 주로 마약 중독자들이며, 이들에게 마약을 공급한 것은 한국인 마약 밀매단이었다. 이 정보를 탐지한 한국 정부는 경찰을 동원하여 부산의 마약 소굴을 수색한 결과, ‘급생의원’이라는 한의원을 운영하던 무면허 한의사를 불법 마약 유포의 중심인물로 체포했다. 이 한의사는 창부, 포주, 자동차 운전사, 구두닦이로 이루어진 마약 밀매단을 조직하여 “수천 명에 달하는 우방 미(美) 병사들의 아편중독자를 내게 한” 혐의와 함께, 북한군이 퇴각하면서 한국에 남겨 둔 간첩이라는 의심을 받았다[ 1].
북한군과 중공군이 마약을 유포하여 한국군과 유엔군을 약화시킨다는 지적은 이 기사 외에도 자주 거론되었다. 한국의 다른 일간지는 “북한 공산 괴뢰 및 중공 오랑캐들은 그들의 소위 공작대들로 하여금 마약류를 남한 각지에 휴대 유입시킴으로써 마약류를 판 돈을 그들의 공작비에 충당케 하는 한편, 이와 같이 마약을 퍼뜨림으로써 유엔군 장병을 중독케 하여 전력을 소모시키려는 악랄한 전법”으로 나오고 있다고 공산군을 비판하면서, 공산군이 서울을 비롯한 전선 일대에서 유통되는 마약의 출처라고 보도했다[ 2].
마약을 한국 사회를 침략, 전복하려는 공산주의자들의 도구로 보는 인식은 1950년대 한국에서 널리 퍼져있었다. 해방 이후 마약 중독자 증가가 중요한 사회 문제로 부상하는 가운데, 정부는 공작비를 마련할 용도로 아편을 소지하고 있던 간첩을 체포했다는 수사 결과를 공표했고, 이를 근거로 관련 부처의 고위 관료들은 북한으로부터 유입되는 아편을 철저히 차단하겠다는 담화를 발표했으며, 공산주의자들의 아편 전술을 비판하는 사설 또한 일간지의 지면에 자주 등장했다. 언론과 정부의 적극적인 선전은 마약이 공산주의자들의 침략 수단이라는 인식을 대중들에게 확산시켰고, 공산주의자들이 한국인을 마약 중독자로 만드는 부도덕한 행동을 하고 있다고 강조함으로써 그에 대한 적대감을 자극했다.
이와 같은 반공주의적 논의는 마약 문제로 인한 사회 혼란을 공산주의 세력, 즉 ‘중공’, ‘북한’, ‘좌익’의 탓으로 돌렸다. 그에 따르면 마약은 개인의 파멸을 초래하고 국가의 성장을 방해하며, 이런 마약을 유포하는 공산주의자들이야말로 개인과 국가의 몰락을 유발하는 ‘나쁜’ 집단으로서 마땅히 배척되어야 할 대상이었다. 이처럼 공산주의자의 부도덕성을 강조하는 담론을 통해 정부는 마약을 반공의 도구로 이용했다. 여러 정치 세력의 반대를 무릅쓰고 단독 정부를 수립한 이승만 정권에게, 이런 반공 담론은 단정 수립을 정당화하는 장치였다.
이 논문은 해방 이후부터 이승만 정부 시기까지 마약 문제에 대한 인식과 대책의 형성 및 변화 과정을 추적한다. 분단과 단정 수립이라는 배경에서 제시된 반공주의와의 관계 속에서 마약을 둘러싼 담론과 정책을 살펴보는 이 논문의 시각은, 1950년대 한국의 정치적 지형이 보건의료 문제에 어떻게 반영되었는지를 드러내는 데 유용하다. 지금까지 한국 현대 의학사의 연구들은 대체로 1950년대의 의료 상황을, 해방 이후의 국가 수립 과정에서 이루어진 제도적 기반 마련 및 미군정과 한국전쟁을 통한 구미 의료의 수용을 중심으로 서술해왔다( 신좌섭, 2000; DiMoia, 2013). 의약 분야에서 1950년대는 근대적인 의약품 관리 체계가 성립된 시기로 그려진다. 가령 조석연은 해방 이후 근대 국가 수립을 목표로 한 한국 정부가 국민에게 선거권을 부여하고 보호하는 대신 마약을 사용할 자유를 제한했으며, 이런 근대적 국민 만들기의 일환으로 1957년에 마약법이 제정되었다고 주장한다( 조석연, 2012; 2013). 약무 행정을 포괄적으로 살펴본 신규환은 1950년대에 한국 정부가 위생경찰 중심의 식민지적 보건의료체계를 폐기하고 근대적 약물 관리 및 전문가 양성을 위한 제도적 기반을 마련했다고 서술한다( 신규환, 2013).
하지만 식민지 보건의료체계로부터 미국적 또는 세계적 체계로의 전환을 보여준 이 연구들은 건국과 한국전쟁 못지않게 해방 이후 한국의 정치적 화두였던 분단과 단독정부 수립, 그리고 이를 둘러싼 정치 세력들의 이념적 대립에 대해서는 거의 고려하지 않는다[ 3]. 이승만 정부는 남북한의 경쟁 세력들에 대하여 단정 수립의 정당성과 권위를 확보하기 위해 반공주의를 국시로 내걸고 적극적으로 선전했다. 이를 통해 반공주의는 사회의 여러 영역에 깊이 파고들었고, 보건의료 분야도 예외는 아니었다. 마약 문제는 보건의료와 반공주의의 접점이었다. 정부는 마약 문제를 이용해서 간첩과 좌익의 부도덕성을 부각시켰고, 이런 정부의 반공 담론은 언론을 통해 유포되었다. 따라서 마약에 관한 정부와 언론의 인식과 대응이 지닌 반공주의적 성격을 살펴봄으로써, 이 논문은 1950년대 한국 정부를 둘러싼 정치적, 이념적 환경이 보건의료 문제에 어떻게 반영되었는지, 또 보건의료에 관한 담론이 한국 정부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는 데 어떻게 동원되었는지를 이해하는 실마리를 제공하고자 한다.
2. 해방 직후 식민 지배의 유산으로서 마약 문제와 단속 중심의 정책 수립
해방 직후 한국에서는 마약 중독자 증가가 중요한 사회 문제로 부상했다. 1947년에 미군정 보건후생부는 마약 중독자 인원과 밀매 건수를 집계한 결과, 마약 범죄가 해방 직전에 비해 곱절로 증가했다고 발표했다. 그에 따르면 1945년 1월부터 7월까지 적발된 마약 밀매는 131건이었으나, 1947년 1월부터 7월까지는 418건으로 2배 이상 증가했다[ 4]. 아울러 해방 직전 17,000명이던 마약 중독자는 1947년 7월경에는 30만 명에 육박한다고 추정되었다[ 5]. 1949년 2월경 정부에 등록된 마약 중독자 수는 6,367명이었다. 하지만 당국은 등록되지 않은 환자를 포함하여 전국에 약 10만 명의 마약 중독자가 있다고 예상했다[ 6]. 이는 비록 1947년의 추정 값보다는 줄었지만 해방 전과 비교하면 5배 이상 높은 수치였다. 이와 같은 정부의 통계는 해방 후 사회 질서가 혼란한 틈을 타서 마약 중독과 밀매가 급증하고 있다는 언론의 경고와 함께 자주 보도되었다.
한국 언론은 해방 후 마약 문제의 주요 원인이, 일본이 철수하면서 한반도에 남긴 아편의 불법적인 유포와 만주 일대에 거주하던 마약 중독자들의 귀환에 있다고 진단했다. 당시 주요 일간지는 “해방 후 일본군이 항간에 퍼뜨리고 간 아편과 해외에서 돌아온 아편 중독자들의 무사려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아편 중독자가 나날이 격증”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7]. 이런 주장은 일본이 전개한 아편 정책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었다. 일본은 제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의료용 마약의 자급과 동아시아 마약 시장 장악을 위해, 자국의 세력권 가운데 아편 소비가 거의 없는 조선을 아편 및 그것을 가공한 마약의 대량 생산 기지로 선정했다. 비록 제1차 세계대전이 종결됨에 따라 해외로부터 마약 공급이 재개되어 조선산 마약에 대한 수요가 급감했지만, 만주사변 후 마약의 공급지로서 조선의 역할은 다시 강화되었다. 아편의 대량 소비지인 만주를 지배하게 된 일본은 재원 조달을 목적으로 만주에서 아편 전매를 실시했고, 높은 아편 수요를 조선산 아편과 마약으로 충당했다. 이를 위해 조선총독부는 강원도와 함경도 일대에 대규모 아편 재배 단지를 조성했고, 그곳에서 생산되는 수출용 아편의 유실을 막고자 「아편단속령」(阿片團束令, 1919)을 실시했으며, 1929년에는 잉여 아편의 불법 유통을 막기 위해 아편 수납, 마약 제조 및 판매를 모두 관영화했다( 박강, 1998; Jennings, 1995).
조선에서 생산된 수출용 아편과 마약은 조선총독부 전매국의 감독 아래 보관되었으나, 1945년 일본인 관리자들이 조선에서 철수함에 따라 적절한 관리를 받지 못한 상태로 방치되었다고 언론에 보도되었다. 언론에 따르면 이 마약들은 관리가 느슨해진 틈을 타서 한국인들 사이에 불법적으로 유포되었다. 일례로 『경향신문』은 마약 중독자의 급증이 “해방 후 일제의 발악으로 산포된 아편으로 발생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 8]. 『동아일보』 또한 “해방 직후 왜적들이 전매국 답십리 공장과 진해에서 뿌리고 간 막대한 생아편 1만1천4백여 키로와 모르핀 980여 키로(현 시가 이십억 이상)가 큰 해독을 끼치고 있다”고 보도했다[ 9]. 치료용 아편의 일일 최대 투여량과 모르핀의 치사량이 각각 500mg임을 감안하면, 당시 일본이 남긴 마약은 다수의 한국인을 중독에 빠뜨릴 수 있는 양이었다( 배성태, 2011: 38; 김대근 등, 1999, 56).
언론이 주목한 마약 문제의 다른 원인은 해방 이전 만주를 비롯한 중국 등지에서 거주하던 마약 중독자와 밀매상의 귀환이었다. 언론은 “중국으로부터 귀환한 전재동포들 중에 섞이었던 마약환자의 씨는 점차로 조국 전역에 뿌려져……가지가지의 사단을 일으키는 장본이 되고 있”다는 우려를 표출했으며[ 10], 그들에게 마약을 공급하는 밀매상들에 대해서도 “민족과 국가를 좀먹고 있”다고 비판했다[ 11]. 언론에 따르면 마약의 주된 수입 경로는 “일본에게서 다량으로 제조되어……비밀히 수입되는 것”과 “38 이북에서……월경 남하”되는 것으로, 특히 일본으로부터의 밀수는 “과거 일제가 계획적으로 중국본토나 만주지방에 마약을 수출하여 그 나라 국민의 정기를 빼앗고 민족단결과 배일의식을 분해시키는 경험에 비추어보아 결코 우연적이 아닌 놀라운 모략이 숨어있어 의식적으로 수출하는 것”이라는 의심을 받았다[ 12]. 뿐만 아니라 이를 중개하던 밀매상들은 일본의 침략 정책에 편승하여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이기적인 인물로 다음과 같이 묘사되었다.
이처럼 마약 밀매는 과거 식민지에 대한 일본의 아편 정책이 해방 후까지도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증거로 서술되었다.
미군정과 그 뒤에 수립된 한국 정부 또한 해방 후의 마약 문제를 식민 통치의 유산으로 간주했다. 마약 문제에 대한 그들의 대응은 식민 지배의 잔재 청산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미군정이 1946년에 발표한 미군정법령 제119호 「마약의 취체」는 식민지 시기의 마약법규들을 대체하기 위한 법안으로, “조선 총독부 재무부 전매국 마약통제과의 모든 기능, 기록, 직언, 재산을 한국 정부의 보건후생부 약무국에 이관”한다고 선포했다. 이에 따르면 마약의 용도는 ‘치료와 연구’로 제한되고, 정부의 허가를 받지 않은 마약의 취급은 모두 금지되며, 마약 취급자의 자격과 권한도 정부의 통제를 받게 되었다[ 14]. 그 후속 조치로서 미군정은 먼저 조선총독부가 수출 목적으로 관리하던 강원도와 경상도 일대의 아편 재배를 금지했다. 그에 따라 “매년 1만 5천여 명이 동원되여……생아편을 산출하든 조선의 양구비꽃 재배는 맥아더 사령부의 금령으로서 금년부터 중지하게 되였는데 이로 말미아마 38 이남에만 5백47만여 평이 잡곡농토로 전향”되었다[ 15]. 이 조치는 미군정 보건의료정책의 주된 목표 중 하나인 식민지 보건의료체계의 해체와 미국식 체계로의 재편에 부응하는 방침이었다(신좌섭, 2001: 81-85).
식민 잔재의 청산이라는 구호 아래 조선총독부의 아편 정책을 폐지한 미군정과 한국 정부는 그 결과로 여겨지던 마약 밀매를 검거하는 데 집중했다. 「마약의 취체」에 따라 서울 중앙경찰청은 출범 직후부터 마약밀매단 소탕을 실시했으며[ 16], 서울 검찰청과 협동 작전을 전개하여 충무로 등지에 있는 마약굴을 수색하고 마약 중독자 및 밀매상을 체포했다[ 17]. 나아가 미군정과 한국 정부는 각 도에 마약 취체관을 배치하여 경찰과 함께 마약 밀거래를 단속하도록 했으며, 각 시도에서는 마약 집중 단속 기간을 정하여 수사를 진행했다[ 18]. 이 같은 단속의 성과들은 언론을 통해 빈번하게 발표되었다. 언론의 보도에 따르면 1947년부터 1949년까지 경기도에서 검거된 마약 사건은 526건이었고, 체포된 마약 사범은 593명이었으며, 몰수된 마약의 양은 생아편 66kg, 헤로인 4.7kg, 모르핀 3,800병이었다[ 19].
마약 문제에 대한 한국 정부의 대책은 중독자 구제와 재활보다, 밀매 단속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정부는 마약범을 밀고하는 사람에게 포상금을 수여하고, 투서함을 설치하여 마약범들에 대한 신고를 촉구하는 등 새로운 정책들을 꾸준히 도입하여 마약 범죄의 검거율을 높이고자 했다[ 20]. 물론 정부가 마약 중독자에 대해 아무런 조치도 마련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보건후생부 마약과는 1948년 약 200만원을 투자하여 서울 왕십리에 마약 환자를 위한 수용소를 설립하고 중독 치료를 위한 시범 사업을 기획했으며, 시립 순화병원에 마약중독치료소를 설치하여 가난한 마약 중독자들이 무상으로 치료받을 수 있도록 했다[ 21]. 하지만 이런 시설은 마약 중독자 수에 비해 매우 부족했고 적절한 치료 또한 이루어지지 않아 언론의 비판을 받았다[ 22].
마약 밀매에 대한 정부의 단속은 식민지 유산의 청산을 위한 활동으로 선전되었다. 1949년 말까지도 언론은 “왜정 40년간에 마약으로 인한 해독이 뿌리 깊이 부식”된 점, 밀수입, 만주로부터의 마약 중독자 귀환 등을 마약 문제의 핵심 원인으로 지적했으며[ 23], 보건부 장관 구영숙(具永淑)은 1949년에 보건부의 시정 방침을 발표하면서, 마약 문제에 대해 “국력을 배양하는 데 큰 장애”이자 “모든 범죄의 근원”을 이루므로 “철저히 근멸”할 것이라고 언급하면서 “특히 외국으로부터 침입하여 오는 마약과 마약 환자에 대한 취체를 엄중히 할 생각”이라고 공표했다[ 24]. 이처럼 마약 문제가 식민지 유산이라는 인식 아래, 마약 정책은 국가의 발전을 가로막는 오랜 장애물을 제거하는 작업으로서 단속 중심의 성격을 갖게 되었다.
3. 한국전쟁 시기 간첩-마약 담론의 확산과 반공 선전
마약 문제의 원인을 둘러싼 논의의 지형은 한국전쟁을 분수령으로 재편되었다[ 25]. 마약이 식민 지배의 잔재라는 인식이 논의의 주변부로 밀려나면서, 마약 문제가 한국 사회를 전복하려는 좌익과 간첩, 그리고 그 배후에 있는 북한의 공산주의자들의 계략이라는 견해가 형성되어 논의의 중심을 차지했다. 이 같은 변화는 단정 수립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남북한의 경쟁 세력에 대해 정권을 강화하려는 이승만 정부의 반공 체제 구축, 그리고 한국을 국제적 냉전의 최전선으로 만들고 국내의 반공 체제를 고착화한 한국전쟁과 긴밀한 연관을 맺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한국전쟁은 중공군과 북한군의 마약 전술에 대한 보도를 통해, 한국 사회에 간첩과 좌익이 마약을 유포하고 있다는 시각을 강화했다. 이 시각은 한국에 마약을 퍼뜨리는 공산주의자들의 부도덕성을 부각시킴으로써 반공 체제의 성립을 뒷받침했으며, 1950년대 내내 마약 문제의 원인을 설명하는 주된 견해였다.
마약 문제에 대한 한국 정부와 언론의 논의는 1949년 무렵부터 바뀌기 시작했다. 논의의 초점이 마약과 공산주의자의 관계에 맞추어지면서, 좌익과 간첩이 공작비를 마련하기 위해 북한으로부터 아편을 받아 한국 사회에 유포한다는 간첩-마약 담론이 등장했다. 이 담론은 여순 사건을 계기로 부상했다. 이승만 정부는 여순 사건의 주모자인 남로당원 이중업이 국가의 정보를 월북한 박헌영에게 전달하는 한편, “대한민국을 전복시키려고 산하에 특수부대를 조직하고……여수, 순천 지방에서 폭동을 일으키게”했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이중업이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북한괴뢰정부로부터 1천만 원 이상의 공작비를 화폐로 받아오는 반면 매월 아편 10키로 이상을 주문진과 포항으로 밀수입”했다고 언급하며, 이에 대해 “동족을 아편으로 말살할 것도 기도”했다고 비판했다[ 26]. 이 담론에서 아편은 북한에서 유입되어 ‘동족의 말살’을 초래하는 원인이었고, 이를 유포한 좌익 정치인들은 동포를 위험에 빠뜨린 부도덕한 세력으로 묘사되었다.
간첩-마약 담론은 1950년대 전반에 걸쳐 나타났으며 한국전쟁 시기와 그 직후에 가장 활발하게 논의되었다. 『경향신문』과 『동아일보』의 기사를 중심으로 살펴보면, 1949년에 처음 등장한 간첩-마약 담론은 마약에 관한 기사 49건 가운데 5건으로 약 10%에서 나타났다. 그 이래로 간첩-마약 담론은 전쟁 중이던 1952년과 1953년에 두 해 모두 마약 관련 기사 28건 중 4건으로 약 14%로 증가했으며, 전쟁 직후인 1954년에는 36건의 기사 중 12건인 약 33%에서 거론되며 가장 높은 빈도를 나타냈다. 그 뒤로 감소하기 시작한 간첩-마약 담론은 1955년에는 79건 중 14건인 약 18%의 기사에서 나타났으며, 1958년에는 163건의 마약 관련 기사 중 34건인 약 21%, 1959년에는 87건 중 11건인 약 13%의 기사에서 논의되었다. 이 같은 감소 추세가 계속되다가 1962년에는 마약 관련 기사 67건 중 1건에서 간첩이 거론되었고, 이후 거의 언급되지 않았다[ 27].
이 같은 담론의 부침 가운데 한국전쟁은 간첩-마약 담론의 강화에 결정적인 계기였다. 중공군과 북한군이 유엔군의 사기 약화 및 군자금 마련을 위해 전선 후방에서 아편을 유포한다는 전황 보도는 간첩-마약 담론의 핵심 요소가 되었다. 『경향신문』은 “북한 공산괴뢰 및 중공 오랑캐들은 그들의 소위 공작대들로 하여금 마약류를 남한 각지에 휴대 유입시킴으로써 마약류를 판 돈을 그들의 공작비에 충당케 하는 한편, 이와 같이 마약을 퍼침으로써 유엔군 장병을 중독케 하여 전력을 소모시키려는 악랄한 전법”을 사용한다고 주장했다[ 28]. 『동아일보』 또한 “괴뢰 및 중공 오랑캐들은……아편을 대량 밀수하여 이를 각종 공작의 군자금으로 충당하는 한편 이를 직접 주사약으로 제조하여 후방에 주입 사용케 함으로써 총후(銃後)를 문란케” 하는 작전을 펼친다고 보도했다[ 29]. 마찬가지로 『조선일보』도 공산군이 아편을 이용하여 “유엔군 병사의 사기를 저하시키는 동시에 군사기밀을 탐지하려고 책동 중”이라는 기사를 게재했다[ 30].
정부와 언론은 공산군이 아편을 이용해서 조성한 자금이 좌익과 남파 간첩의 공작비로 쓰이며, 유포된 아편은 한국 사회에서 불법적으로 유통된다고 강조했다. 일례로 내무장관 진헌식(陳憲植)은 1953년 6월 공보처를 통해 “북한 괴뢰집단은 가공하게도 최근 우리 대한민국 영역 내에 대량의 마약을 전파시켜 유엔군은 물론 각 중요 기관 및 일반에게까지 침투케 하여 전투력을 약화시킴은 물론 그들의 대남 공작 및 오열 분자의 활동을 용이하게 하는 자금 조달을 하고 있다”라고 하며, 북한군의 사주를 받은 밀매범들을 체포했다고 발표했다. 진헌식은 북한군이 유포한 마약을 불법으로 유통시킨 인물들을 거명하며 그들이 “마약 반제품 ‘찌루’ 190그람을 입수 남하하여 ‘모루히네[모르핀의 일본식 발음, 인용자 주]’로 정제 판매코자 27일 부산시 모처에서 인쇄업을 경영하는 김진성 외 2명과 공모……밀조 중 당국에 체포”되었다고 알렸다. 그에 따르면 아편과 그것을 원료로 한 마약은 대개 북한 괴뢰로부터 “해상 루트를 통해 서울로 집결”되고 “그 대부분은 기차 또는 항공편으로 전선 및 부산 방면으로 반출”되어 한국 사회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31].
이처럼 북한군에 의해 유포된 아편이 한국 사회로 흘러들어와 만연함을 부각시킨 담론은 공산주의자들의 부도덕성을 강조했다. 진헌식은 위의 발표에서 북한군의 활동을 “전율할 적의 흉계”라고 비판했으며, 다른 기사는 북한군에 의해 아편이 “사회 안전과 국민 보건을 문란시킬 목적으로 남한에 투입”되고 있다고 언급하면서 북한군의 아편 공세가 한국 사회에서 초래할 악영향을 우려했다[ 32]. 이 같은 언급은 북한의 공산주의자들의 공격이 한국의 군대와 정치 세력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한국인과 한국 사회 전체를 겨냥하고 있음을 지적했다. 나아가 마약 중독자들은 “공산괴뢰들이 계획하는 미끼를 따먹고 있는” 어리석은 사람들이자, “사회악을 조장하고 나아가서는 망국케하는 전율할 존재”로 그려졌다[ 33]. 이런 담론에서 공산주의자들은 군사적, 정치적 목적을 이루기 위해 ‘동포를 배반’하고 한국 사회 전체를 위험에 빠뜨리는 집단으로 묘사되었다.
간첩-마약 담론을 통해 ‘나쁜’ 공산주의자의 이미지를 부각시킴으로써 정부는 대중들에게 반공주의를 확산시키고자 했다. 공보처는 “공산주의자들이 일선 지역에 있는 국군의 사기를 저해하고 파괴활동에 대한 자금을 공급하기 위하여 대량의 마약을 대한민국으로 보내고 있다는 사실”을 체포된 간첩이 자백했다는 수사 결과를 자주 발표했으며[ 34], 이를 대중들이 시각적으로 확인할 수 있도록 아편을 비롯한 간첩들의 소지품을 모아 전시회를 열었다[ 35]. 뿐만 아니라 정부가 전국적으로 전개한 반공 운동은 대중들에게 공산주의자들이 마약 문제의 주범이라는 인식을 확산시켰다. 일례로 정부는 1954년 10월 25일부터 30일까지를 ‘방첩강조주간’으로 선포하고, “전국적으로 방첩사상을 앙양하는 한편 적의 스파이전에 대비하는 국민운동”을 전개하면서 고위 관료들의 담화를 통해 “기밀탐지 심지어는 마약 공세 등도 행하여지고 있다는 사실은 휴전 이후 군경 각 기관에 의하여 적발된 수많은 사건으로써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니 일반 공무원은 물론이거니와 국민 전체가 적의 모략을 분쇄”해야함을 대중들에게 촉구했다[ 36]. 정부의 적극적인 간첩-마약 담론의 선전은 대중들 사이에서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적대감을 유발했다. 『동아일보』의 사설은 공산주의자들을 “동족멸망의 야만행위”를 자행한 비인도적인 세력으로 묘사했다[ 37]. 이런 담론은 한국전쟁을 겪으며 공산군에 대한 공포와 적의를 품게 된 대중들 사이에서 반공주의적인 시각을 확산시켰다( 김동춘, 1992: 135-181). 특히 공산주의자들의 아편 공세에 대한 불만은, 『경향신문』에 실린 한 사설이 보여주듯 “썩어빠진 적색 마약에 시드른 놈들을 우리는 하로 바삐 이 땅에서 스러지게 하고싶다”라는 강한 적개심으로 표출되었다[ 38].
나아가 간첩-마약 담론은 정부의 정치적 경쟁 세력에 대한 견제를 정당화하는 장치 중 하나였다. 간첩과 좌익이 공작비를 마련하기 위해 아편을 유포한다는 담론은 야당 정치인에 대한 정부의 감시가 필요하다는 제안으로 이어졌다. “선량한 국민으로 하여금 중독자를 배출시키자는 간계”를 간첩이 전개하고 있다고 비판한 『동아일보』의 사설은, “신출 간첩들을 색출하는 것도 긴요하겠으나 남한에 있는 재래종”에 대한 감시를 철저히 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말하며 국내 정치 세력에 대한 정부의 감시를 촉구했다[ 39]. 뿐만 아니라 간첩-마약 담론의 영향력이 확대됨에 따라, 정치인의 아편 소지가 단지 마약 법규의 위반이 아니라 간첩 활동의 증거인지 의심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다. 가령 정부가 조봉암을 비롯한 진보당 간부들을 국가 보안법 위반 혐의로 고발 및 처형한 진보당 사건에서, 진보당 간부 “허[허봉희, 인용자 주]가 가지고 온 시가 1,800만환에 해당하는 4키로그람의 아편이 동 당 확대 공작에 사용된 혐의”는 “동 당 간부들이 북한에서 파견된 간첩들과 접선”되었다는 강한 의혹을 불러일으키는 자료로 간주되었다[ 40]. 이처럼 간첩-마약 담론의 구도에서 아편은 정치인들에게 좌익과 간첩의 혐의를 제기함으로써, 그들에 대한 정부의 감시를 정부의 개입을 타당하게 하고, 그로 인한 활동의 제약을 불가피하게 만드는 정치적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이와 같이 간첩-마약 담론은 정부의 반공 체제 구축에 이용되었다. 정부는 간첩-마약 담론을통해 공산주의자들의 부도덕성을 강조함으로써 대중들 사이에서 반공주의를 확산시키는 한편, 정치적 경쟁 세력들에 대한 감시를 강화하고 그들에 대한 견제를 정당화할 수 있었다. 간첩-마약 담론의 형성과 확산은, 공산주의자를 민족의 배신자, 반인륜적 집단, 독재 체제의 옹호자로 묘사하며 그에 대한 ‘나쁜’ 이미지를 만드는 정부의 반공주의 선전과 일맥상통하는 작업이었다. ( 김영희, 2010; 이하나, 2012). 이 같은 선전은 국가보안법 등의 제도와 함께 정부의 반공 체제 수립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요소였다. 반공체제를 구축함으로써 이승만 정부는 단정 수립의 정당성과 남북한의 경쟁 세력들에 대한 권위를 확보하고자 했다.
간첩-마약 담론은 반공체제 수립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며, 1950년대 마약 문제의 원인에 관한 논의의 중심을 차지했다. 하지만 이와 같은 담론 지형의 변화 속에서도 실제적인 마약 통제는 단속 위주의 정책에서 거의 달라진 바가 없었다. 경찰이 상부 기관으로부터 간첩과 관련된 제보를 받고 수사에 나선 사례가 종종 있었지만, 대부분의 활동은 마약굴 소탕이나 중독자 및 밀매자 적발이었다. 간첩-마약 담론의 부상에 의해 단속의 정도가 철저해졌다고 보기에도 어려움이 있다[ 41]. 일례로 『동아일보』의 한 사설은 보건부의 마약 취체에 대해 “이 정도로서는 도저히 근절키 어려울 것”이라고 평가하면서, “예산 부족으로 취체 활동할 수 없고 각종 단체에서 간섭하는 사례가 없지 않어 취체에 지장을 초래하고 있다”고 말하며 마약 정책을 개선할 의지를 보이지 않는 보건부의 태도를 비판하며, “마약 취체원에 대한 강력한 사법권 부여”를 비롯한 강력한 대책 마련을 요구했다[ 42]. 이런 경향으로 볼 때 간첩-마약 담론과 마약 통제는 거의 관련성을 갖지 않고 전개되었다.
4. 아편의정서 채택과 국제적 마약통제체제로의 편입
간첩-마약 담론이 확대되는 가운데, 1953년 무렵부터 마약 밀수의 국제 정세를 거론하는 기사들이 증가하기 시작했다. 이 기사들은 미국 정부와 언론의 발표를 인용하여 중공의 아편 유포의 배후에 소련이 있다고 주장하면서, 마약 문제를 냉전의 양 진영간 대립으로 서술했다. 『경향신문』의 한 기사는 뉴욕타임즈에 게재된 기사의 일부를 전달하며 “북경의 공산 정권은 세계의 아편 수요량을 훨씬 넘는 아편을 생산하고 있으며 소련은 세계의 안전 보장에 위협을 주는 이런 무제한 생산을 후원”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43]. 『동아일보』의 기사 또한 “유엔 주최 아편회의를 소집 개최하였는데……소련을 필두로 한 철의 장막 위성국가는 단 한 나라도 참석조차 아니하였으니, 이 행동은 공산도배들은 국제적 조절에 상관 않고 자기네 멋대로 얼마든지 생산하여 얼마든지 팔아먹겠다고 결속한 증좌”로써, “전 자유세계 각국은 이 수법에 대한 대책을 어서 속히 세워가지고 적극 투쟁을 전개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국제적인 마약 밀수가 자유주의 국가들에 대한 공산주의 국가들의 공격이라는 의혹을 강력하게 제기했다[ 44].
이처럼 국제적인 마약 밀수가 공산주의 국가들의 주도 아래 이루어지고 있다고 간주한 언론과 정부는, 마약 밀수에 관여한 공산 국가들 또는 자유주의 국가에서 비밀리에 활동하는 공산주의자들 사이에 긴밀한 연계가 있다고 보았다. 가령 『경향신문』은 “일본 공산주의자와 북한 괴뢰 및 중공계 분자들이 태업과 파괴 행동 계획을 전개하기 위하여 한국에 대량의 아편, 마약, 무기 및 폭약을 밀수출하고 있다”고 보도하면서, 한국의 마약 문제에 중국, 일본, 북한의 공산주의자들이 관여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45]. 그 중에서 일본은 중공으로부터 한국뿐 아니라 미국, 동남아시아 등지로 밀수되는 마약의 중간 경유지로 지목되었다. 『동아일보』의 한 기사는 미국 연방마약국장 해리 앤슬링거(Harry J. Anslinger, 1892-1975)의 발표를 인용하여 “일본의 공산 주졸들이 이런 종류의 교역에 종사”해왔으며 “그와 같은 불법 행위는 기금 조달 이외에도 한국 및 일본에 주둔한 미군을 포함한 군대 및 민간인을 부패시키려는 데 그 동기가 있다”고 언급했다[ 46]. 이런 마약 밀수 경로에서 북한은 중공에서 수출된 마약을 한국으로 침투시키는 직접적인 관문으로 간주되었다. 한국군 특무대는 북한에서 “완전히 설비를 갖춘 아편 공장이 설치되어……중공으로부터 수시로 막대한 양의 생아편을 지급받아 정제하고 있으며” 여기에 “중공의 기술지도원까지 수 명 파견”된 상태이고[ 47], 북한 지도부가 중공으로부터 “지급 받은 막대한 아편의 수량을 대한민국에 충분히 유출치 못하였다는 중공 당국의 신랄한 책임 추궁”을 받고 있다고 발표했다[ 48].
이런 논의에서 한국의 마약 문제는 한국전쟁 또는 간첩으로 인한 국내 문제만이 아니라, 세계적인 마약 밀수 문제와 관련된 것으로 그려졌다. 즉 한국에서 일어난 마약 밀수는 중공을 필두로 한 공산주의 국가들이 자유주의 진영에 대해 전개하는 전략의 일부로 인식되었다. “중공이 오열을 통하여 아편을 전 자유세계 각국에 밀수출”하고 있다고 본 『동아일보』의 기사는 “이 아편 판매금으로 중공이 한국전비 충당에 사용하고 있다”고 말하며, 한국이 자유주의 국가들에 대한 공산주의 진영의 마약 정책으로부터 직접적인 영향을 받고 있음을 강조했다[ 49]. 중공의 마약 밀수 정책에 관한 비판적인 논의들은, 그 정책이 군자금 마련뿐 아니라 자유주의 국가들에 다수의 마약 중독자들을 양산함으로써 군사력을 약화시킬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이로 인해 자유주의 국가들이 겪는 문제가 한국에서도 동일하게 일어나고 있다고 파악했다. 예를 들어 엄격한 마약 통제법의 수립을 주장한 국회의원은 한 미국 잡지의 말을 인용하면서, 중국이 “뉴욕의 소년에 대해 마약을 전파시켜서 자유진영의 청소년에 전투능력을 갖다가 마멸시켜버리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고 “그런 수법이라고 하는 것이 미국에서 뿐만 아니라 어느 나라든지……별 차이가 없을 것”이며 “더군다나 지금 북에다가 중공군을 놓아 두어 가지고 전쟁을 한다는 나라”인 한국은 부지불식간에 미국과 같은 문제를 겪고 있음을 강조했다[ 50].
중공을 위시한 공산주의 진영의 마약 전략에 관한 논의들은 공산주의자들의 부도덕성을 부각시켰다, 하지만 이 논의는 ‘동포에 대한 배신’을 강조한 간첩-마약 담론과 달리, 공산주의자들이 자유주의 국가 주민들의 신체적, 정신적 건강이라는 보편적인 가치를 침해한다는 데 비판의 초점을 맞추었다. 『경향신문』의 한 사설은 중공의 마약 밀수에 대해 “자유 세계에 독균 뿌리는 전율할 마약 정책”이라고 언급했으며, 『경향신문』의 다른 기사는 “공산주의자들은 그러한 비밀 무기로서 자유세계의 건전한 분위기를 파괴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세균 무기의 효과에 몇 십배 되는 독소를 세계에 유포시키었다”고 비판했다[ 51]. 나아가 『동아일보』의 기사는 “아편은 악용되어 인류를 멸망시키는 마약화할 수 있”음에도 “중공이 오열을 통하여 아편을 전 자유세계 각국에 밀수”하는 것은 “아무리 장사꾼의 행동이라 하여도 너무나 비양심적”이라고 지적했다[ 52].
국제적 냉전 대립을 강조하는 마약 담론은 대체로 미 연방마약국장 앤슬링거의 공식 발표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53]. 그는 연방마약국의 초대 국장으로, 마약 정책에 대한 연방마약국의 발언력을 키우고자, 국제적인 마약 문제가 미국의 국익에 끼치는 악영향을 강조하면서 연방마약국이 제시한 대책이 미국 무부의 안보 정책에 부합한다고 내세웠다( Kinder and Walker, 1986). 그의 전략에 따라 연방마약국의 활동은 당시 미 국무부의 최우선 구호이던 반공에 초점이 맞추어졌으며, 마약 관리를 넘어서 공산주의 세력에 대한 첩보 활동과 반공 선전까지 포함하게 되었다[ 54]. 앤슬링거는 연방마약국의 첩보망을 이용하여 수집한 자료를 토대로 중공이 한국전쟁에 파견된 미군과 미국 본토에 마약을 유포함으로써 그를 붕괴시키고자 했다는 보고서를 유엔 마약위원회에 제출하면서, 공산주의 국가들의 마약 밀수출을 봉쇄하기 위해 국제기구가 국가간 마약 유통에 개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Anslinger, 1961).
하지만 앤슬링거 및 미 연방마약국의 견해와 달리, 이 보고서의 내용이 실제와는 거리가 있다는 지적도 있다. 미국 역사학자 윌리엄 워커(William Walker)는 앤슬링거가 첩보를 통해 수집한 자료들을 교묘하게 곡해하여 중공을 마약 밀수의 온상으로 보이게끔 함으로써, 공산당에 대한 미국 대중들의 불안을 자극했다고 주장한다( Walker, 1988; 1991). 중국 역사학자 주용밍(Zhou Yongming) 또한 중공이 마약을 밀수출했다는 미 연방마약국의 주장이 당시 중국의 상황과 달랐다고 지적하며, 미 연방마약국의 보고서가 결정적이지 않은 근거들에 의존했다고 분석한다( Zhou Yongming, 2000).
앤슬링거와 미 연방마약국의 입장을 중심으로 한 미국의 마약 담론이 전달된 통로는 주로 외신과 주한 미공보원이었다. 주한 미공보원은 한반도에서 발생한 마약 문제를 다룬 미국 정부와 언론의 논의를 한국의 언론사에 제공했다. 한국인들에게 미국 문화를 소개하고 한국의 여론 주도층인 정치가, 언론인, 지식인들에게 미국의 대한 정책과 미국 중심의 냉전 질서에 순응적인 태도를 함양한다는 목적으로 설치된 주한 미공보원은 한국전쟁 시기에 라디오 프로그램인 ‘미국의 소리’(Voice of America)를 통해 북한과 중국이 소련의 명령에 따라 전쟁을 일으켰다고 비난하며 미국의 참전을 정당화했으며, 이와 관련된 정보를 한국 언론에 전달했다( 장영민, 2014; 허은, 2003). 한국의 신문사들은 주한 미공보원로부터 받은 정보를 게재함으로써 마약 문제에 대한 미국의 담론을 대중들에게 알렸다.
미국의 반공주의적인 마약 담론이 한국에 본격적으로 유입되기 시작한 계기는 한국의 유엔 아편회의 참여였다. 한국 정부는 유엔 사무총장의 초청으로 1953년 5월 11일부터 6월 18일까지 뉴욕에서 개최된 유엔 아편회의에 주미영사 남궁염(南宮炎)을 파견했다. 이 회의는 유엔 경제사회이사회의 산하 기구인 마약위원회(Commission in Narcotic Drugs)가 주관한 모임으로, 마약에 관한 국제기구와 33개 국가의 대표들이 참석했다. 이 회의에서 마약위원회는 「앵속의 재배와 아편의 생산, 국제무역, 도매, 사용을 제한 및 규제하는 의정서」(Protocol for Limiting and Regulating the Cultivation of the Poppy Plant, the Production of, International and Wholesale Trade in and Use of Opium, 이후 「아편의정서」)를 채택했다. 이 자리에서 한국 정부는 「아편의정서」의 채택에 동의했고, 이후 그에 가입함으로써 정부 수립 이후 처음으로 마약과 관련된 국제 협정을 체결했다. 한국 정부에게 이는 국제적 마약통제체제에 편입하는 첫 관문이었다.
한국의 유엔 아편회의 참석을 유도한 것은 미국이었다. 미국은 「아편의정서」 채택을 의제로 한 유엔 아편회의에 리비아, 스페인, 네팔, 한국 대표를 초청할 것을 유엔 경제사회이사회에 건의했다. 『동아일보』가 주한 미공보부의 정보를 토대로 보도한 당시의 상황은 다음과 같다.
유엔 경제사회이사회에서는 지난 2일 오는 5월 11일에 개최되는 유엔마약회의에 리비아, 스페인, 네팔, 및 한국 대표를 초청하자는 미국의 제안을 승인하였다. 그런데 리비아와 네팔 양국의 초청은 만장일치로 가결되었고, 스페인의 초청은 13대 4, 한국 초청은 14 대 2(소련, 우크라이나 반대)로 각각 가결되었다[55].
『동아일보』의 기사는 유엔이 한국을 아편회의에 초청하는 과정에서 미국과 소련 사이에 신경전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유엔이 초청한 4개국은 미국을 비롯한 자유 진영 국가들로부터 경제적 또는 군사적 지원을 받고 있었다[ 56]. 이 중 스페인과 한국만이 유엔의 초청을 받아들여 회의에 참석하고 「아편의정서」에 가입했다( United Nations, 1963: 3).
「아편의정서」는 20세기 초반부터 체결되어 온 마약 관련 국제협약들 가운데 가장 엄격한 무역 통제를 요구하는 조약이었다. 마약에 관한 최초의 국제 협정은 1912년 「헤이그 협약」으로 아편, 모르핀, 코카인 등 마약의 원료 생산, 제조, 매매를 제한하고 그 사용을 의료 및 기타 합리적인 용도로 국한할 것을 추구했으며, 이를 감독하기 위해 관련 통계 자료를 국가간에 공개하도록 했다. 이후 새로운 마약 및 유사약물의 등장에 따라 체결된 여러 국제협약들은 이 같은 ‘헤이그 협약’의 기본 방침에 따랐으며, 이 협약들을 관장하는 임무를 20세기 후반에는 유엔 마약위원회가 맡았다. 유엔 마약위원회는 1948년에 기존 규제 대상을 비롯하여 제2차 세계대전 동안 급증한 합성마약들까지 통제하는 「파리 의정서」를 체결하면서, 마약에 관한 국제적 규제를 확대하고 체계화했다. 이런 통제 경향을 더욱 강화한 「아편의정서」는 각국의 마약 사용량과 잉여량을 축소하여 불법으로 유통되는 마약의 양을 전반적으로 줄이고, 유엔마약위원회가 승인한 7개국에게만 아편 생산과 마약 제조를 허가함으로써 마약의 과잉 생산과 불법 유통을 원천적으로 봉쇄한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신의기, 1994; Pietschmann, et al. 2009: 7-11).
「아편의정서」는 미국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아 입안 및 체결된 조약이었다. 미국은 중공을 비롯한 공산주의 국가들이 세계적인 마약 밀수의 본거지라고 주장하면서, 그에 대한 강력한 통제를 실시해야 한다고 촉구했고, 그를 위한 제도적 장치로 「아편의정서」 체결을 제시했다. 유엔 아편위원회의 미국 대표인 앤슬링거는 1952년에 열린 유엔 아편회의에서 마약이 중국으로부터 출발하여 홍콩을 거쳐 일본에 도착한다는 보고서를 제출하며 중공의 마약 밀수출을 제한하는 제도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Zhou Yongming, 2000; Bewley-Taylor, 1999: 92-100). 이런 통제 체제는 경제적, 도의적 목적만이 아니라, 마약 무역에서 소련을 위시한 공산 국가들을 견제하고 주도권을 확보하려는 미국의 정치적, 이념적 의도를 반영하고 있었다( Bewley-Taylor, 1999: 102-136).
이 같은 미국의 주장은 소련의 강력한 반발을 야기했다. 소련은 공산주의 국가들이 마약 밀수의 근원이라는 주장에 반대하며, 오히려 자본주의 국가에서 마약 중독자들이 많이 발생하는 반면, 공산주의 사회에는 그 수가 훨씬 적다고 주장했다. 소련은 1930년대 이후 축적된 통계 자료들을 근거로 마약 중독자가 독일, 미국 등 자본주의 국가들보다 소련에서 4배 이상 적다고 발표했으며, 이런 현상이 공산주의 체제의 우수성 덕택이라고 선전했다( Conroy, 1990). 소련이 보기에 「아편의정서」는 미국의 공산주의 진영 침략을 위한 교두보였다. 소련이 「아편의정서」에서 특히 반대한 부분은 조약 위반이 의심되는 국가에 국제 감시단을 파견하여 진상을 규명하고 마약 무역을 금지시킨다는 조항이었다. 소련은 이런 강제적인 조항을 통해 미국이 공산주의 국가들의 내정에 개입함으로써 주권을 침해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하며 그 체결을 거부했다( McAllister, 1999: 161-162).
미국은 소련의 반대를 무마하고 「아편의정서」를 체결하기 위해 자유주의 국가들을 규합했다. 「아편의정서」가 효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아편 생산 허가를 받은 7개국 중 최소 3개국과, 마약 제조 승인을 받은 9개국 중 최소 3개국을 포함한 25개국 이상으로부터 비준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편의정서」로 말미암아 마약 무역을 통해 얻는 수입이 줄어들 것이라고 우려한 국가들은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 중에서도 특히 영국은 「아편의정서」의 요구가 지나치게 엄격해서 실현되기 어렵다고 비판하며, 그보다 완화된 조약을 채택할 것을 제안했다. 나머지 국가들은 미국으로부터 받는 원조의 중단을 우려해서 「아편의정서」에 전면적으로 반대하지는 않았으나, 대체로 영국의 주장을 지지하면서 「아편의정서」의 비준을 미루었다( McAllister, 1999: 202-203). 이처럼 주요 마약 무역국들이 「아편의정서」에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는 상황에서, 미국은 자신이 원조하는 국가들을 동원하여 「아편의정서」를 체결하고자 했다. 미국이 유엔으로 하여금 「아편의정서」를 채택하는 회의에 리비아, 네팔, 한국, 스페인을 초청하도록 건의한 것은 이 같은 노력의 일환이었다.
한국 정부는 미국의 요청에 부응하여 전후 복구가 어느 정도 진행된 1955년부터 「아편의정서」 가입을 위한 준비에 착수했다. 「아편의정서」는 가입국들에게 연간 마약 수요량과 유통량을 비롯한 상세한 통계 보고서를 요구했다( 한국 외무부 정무국, 1957). 따라서 「아편의정서」 가입 이전에 한국 정부는 그에 맞는 정보 수집 능력을 갖추어야 했고 이를 위해 제도를 마련했다. 마약 사무를 주관한 보건사회부는 “우리나라는 마약 관계 제반 국제조약 및 협정 등에 가입 수속을 취하고 있는 단계”로 “국제마약기구의 요청에 의한 제 자료의 제출 등 각종 협약의 규정을 준수”하기 위해 “국내 마약 행정의 전반적인 실태를 파악”할 제도 정비에 나섰다[ 57]. 그 첫 단계는 통계 수집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보고 체계를 일원화하고 집계 방식을 표준화하는 것이었다. 보건사회부는 내무부, 재무부, 법무부, 국방부와 공동 명의로 「마약사범 취급상황 통보에 관한 건」을 발표하여, 각 부서에서 수집 및 보관해 온 정보를 보건사회부 장관을 정점으로 하는 보고 체계를 통해 수합하도록 하고, 각 부서에 표준적인 정보 기입 양식을 제시했다. 보건사회부가 제시한 통계 양식은 마약범의 인적 사항, 사건 일시 및 장소, 사건 개요, 압수한 마약의 품명, 수량, 보관 상태, 처분 방식 등을 포함하고 있었다. 이어서 보건사회부는 「마약사범 취급 상황에 관한 자료수집에 관한 건」을 발표하여 기존 통계 자료를 보완할 항목들을 추가했는데, 그에 따르면 이 추가 항목들은 국제적 마약조약들이 요구하는 기본적인 통계 수준을 만족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58].
관료들의 통계 수집의 효율성을 증진하려는 시도와 함께, 보건사회부는 마약 취급자들에게 업무와 관련된 정보의 보고를 의무로 규정하는 새로운 제도, 「마약법」을 수립했다. 보건사회부가 발표한 「마약법」의 입법 취지는 그것이 「아편의정서」 가입을 위한 발판임을 나타내고 있다. 그에 따르면 「마약법」은 “1953년 6월 23일 뉴욕에서 ‘앵속의 재배, 아편의 생산, 교역, 도매와 사용에 대한 조절 제한에 관한 의정서가 작성되어 현재는 국제연합의 가입국, 비가입국 제 국가가 상술한 제 조약 협정 등에서 가입, 비준을 기탁하고 제 제도를 국내에 적용하고 있는 현황”에 부응하기 위한 것으로, “그 국제협약의 규정을 근거로 한 국내법의 입법 조치가 긴요한 바 있으므로 현행 중인 미군정 법령 제119호 「마약의 취체」를 대체”하기 위한 제도였다[ 59].
이처럼 「아편의정서」의 가입과 비준을 목적으로 제정된 「마약법」의 특징은 마약의 유통에 관한 상세한 관리 및 보고 체계에 있었다. 불법 마약에 대한 금지와 처분에 관한 원칙, 그리고 마약 취급자의 자격을 규정하는 데 중점을 둔 「마약의 취체」와 달리, 「마약법」은 마약의 유통 과정을 수입, 제조, 도매, 소분, 처방, 조제로 단계화하고, 각 단계별로 담당자의 업무와 자격을 명시하며, 각 업무와 관련된 보고 체계를 제시하는 것이 주된 목표였다. 1957년에 제정된 「마약법」은 총 8장 77조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 중 2, 3, 4장은 마약의 조제, 판매, 처방을 담당한 사람들, 즉 마약 취급자들의 자격과 의무를 다루고, 6장은 이들을 감시 및 규제하는 방식, 7장은 몰수한 마약의 처분법, 8장은 규정을 어긴 사람들에 대한 처벌 원칙을 제시했다. 그 중에서도 4장은 각 취급자에게 소지 및 처리한 마약의 품명, 수량, 입수처, 수수 상대자를 매달 세 번씩 관청에 보고할 의무를 명시한 부분으로, 「아편의정서」에서 요구하는 통계 자료를 수집하기 위한 핵심 장치였다.
이 같은 상세한 관리 및 보고 체계는 이전의 마약 제도에 비해 많은 인력과 비용을 필요로 했다. 국회의 마약법안 제1독회에 참석한 보건사회부 차관 신효선(申孝善)은 「마약법」을 실시하는 데 드는 부담 때문에 국회의원들의 반대에 부딪칠 것을 우려하여, 질의응답이 시작되기 전에 미리 이에 대해 변론했다. 그에 따르면, 「마약법」의 내용은 “국제마약관계 제 협약에 근거를 둔 각국의 국내법규에 대동소이”하며, “국제협약을 무시……한 일제의 ‘마약취체령’” 이 “만주 일대에 마약 중독을 만연하게 만들었던 것으로 보아, 자국만의 목적과 기준을 따르는 것보다는 번거롭더라도 국제적인 기준에 맞추는 편이 마약 규제에 효과적”이었다[ 60]. 이 같은 언급의 요지는 일국적인 기존 방침을 고수한다면 결국 마약 통제의 실패를 초래할 것이므로, 이를 방지하기 위해 국제적인 통제 체계를 도입해서 철저히 마약을 관리해야 하며, 그를 위한 어느 정도의 부담은 감수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정부가 부담을 감수하고 복잡한 법제를 만들면서 「아편의정서」 가입을 통해 국제적 마약 통제체제에 편입하려던 이유는, 국제 사회로부터 단정 수립의 정당성을 인정받고 북한과의 체제 경쟁에서 우위에 서기 위함이었다. 국내의 정치적 기반이 취약한 이승만 정부는 외교적인 방법을 통해 이 약점을 보완하고자 했다. 그 대표적인 방법이 유엔 외교였다. 단정 수립 이래 유엔으로부터 한반도 유일의 합법 정부라고 인준 받은 점을 정당성의 근거로 내세워 온 한국 정부에게 유엔 가입은 외교의 최우선 목표였다. 그러나 소련의 반대로 유엔 가입이 좌절되자, 한국 정부는 다른 국제기구들의 활동에 적극적으로 가입함으로써 독립국가로서 지위를 확보하는 전략을 차선책으로 선택했다( 고휘주, 1995: 309-338).
이 같은 상황에서 「아편의정서」 가입은 한국 정부가 “국제연합 정식회원국과 실질적으로 동등한 권리를 행사”하는 독립 국가임을 입증하는 수단으로 인식되었다. 한국 정부는 「아편의정서」와 유엔의 연관성을 강조하면서, 그에 대한 가입을 “국제연합의 회원국과 동등한 자격으로” 수행하는 활동으로 선전했다. 이것은 세계보건기구, 국제연합 식량농업기구 등 국제연합 전문 기구 가입과 더불어 “소련이 거부권을 행사할 수 없는 국제연합의 슬하 기관 또는 전문기구의 대부분에는 정식회원국으로 이미 가입”하여 국제연합의 활동에 실질적으로 참여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증거로 사용되었다( 한국 외무부, 1958: 274-316, 324-325, 346, 369).
「마약법」의 성립은 국제기구의 활동에 활발하게 참여함으로써 북한과의 체제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려는 이승만 정부의 외교적 전략과, 「아편의정서」를 통해 마약을 둘러싼 국제 정세에서 소련을 견제하고 주도권을 장악하려는 미국의 의도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이런 미국 정부의 의도는 그 마약 담론에 반영되었고, 한국 정부와 언론은 이것을 받아들이면서 마약 통제에 대한 미국의 냉전 논리에 익숙해졌다. 이는 북한과의 외교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려는 한국 정부의 의도와 결합하여 「아편의정서」 가입을 추진하는 강력한 동력을 만들어냈다. 「마약법」은 이 동력에 의해 수립된 것으로, 「아편의정서」가입 및 비준을 위한 제도적 도구로서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마약법」이 단속 중심의 마약 정책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분명히 파악하기란 어렵다. 「마약법」 수립과 함께 나타난 마약 정책의 단기적인 변화는 단속이 더욱 철저해지고 처벌이 엄격해졌다는 것이다. 정부는 통계 자료 수집에서와 마찬가지로 단속 작업에서도 정부 부처간 협력을 강조하며, “내무부, 법무부, 보건사회부, 국방부, 농림부, 재무부, 대법원에서 합동으로 마약 단속을 전국적으로 강력하게 실시”하겠다고 선포했다. 정부 부처들이 실무자 회의를 통해 결정한 대책은 중독자들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에 따르면 마약 중독자 가운데 초범은 마약 환자 치료소에 수용되었지만, 재범은 검찰에 송치하여 체형을 받게 되었다[ 61]. 마약 중독자는 치료소에 수감되더라도 한 달 후 퇴원과 함께 곧장 검찰에 송치되었다. 이는 퇴원한 환자를 방면하던 이전 정책에 처벌을 더한 것이었다[ 62].
하지만 이와 같은 단속 및 처벌의 강화로 인해 마약범의 검거율이 높아진 것은 1957년과 1958년뿐이었고, 그 후에는 마약법 제정 이전 시기와 큰 차이가 없었다. 김영석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마약법이 제정되어 적극적으로 추진된 1957년과 1958년에 보건 당국에 새로 등록된 마약 중독자들은 각각 1,459명과 1,677명이었다. 이 수치는 「마약법」이 제정되기 이전인 1956년의 1,018명에 비하면 약 500-600명 정도 많은 값이었다. 하지만 1959년이 되면 신규 등록한 마약 중독자 수는 1,018명으로, 1956년과 동일한 수준으로 되돌아갔다. 마약 범죄 통계 역시 이와 비슷한 경향을 보였다. 1956년에 마약 사건 수는 919건이고 관련자 수는 1,692명이었으나, 마약법이 제정된 1957년과 그 이듬해인 1958년에는 거의 두 배로 증가했다. 1957년에는 1,603건을 통해 2,231명이 적발되었고, 1958년에는 2,346건을 통해 3,334명이 검거되었다. 하지만 1959년에는 2,049건에서 2,839명의 사람들이 체포되었고 1960년에는 1,979건에서 1,988명이 체포되는 등 원래대로 줄어드는 경향을 보였다. 이런 추이로 볼 때 「마약법」의 제정이 마약 대책에 장기적으로 괄목할만한 변화를 가져왔다고 평가하기는 어렵다( 김영석, 1961: 3, 29).
마약법 수립 및 마약 통계 체계 재편 같은 정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아편의정서」는 제한적이고 단기적인 효력 밖에 발휘하지 못했다. 엄격한 무역 통제를 꺼린 주요 마약 무역국들이 그 비준을 미루는 바람에 1961년에야 비로소 「아편의정서」의 발효 조건이 충족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때는 이미 「아편의정서」보다 완화된 조건으로 기존 국제 마약조약들을 모두 대체하는 「마약에 관한 단일협약(Single convention on narcotic drugs, 이하 단일협약)」이 채택된 뒤 이를 운영할 ‘국제 마약통제위원회(International narcotics control board)’까지 창설된 상태였다[ 63]. 즉 「아편의정서」는 「단일협약」에 의해 폐지되는 조약들 중 하나였다. 영국을 비롯하여 스위스, 서독, 네덜란드, 이탈리아, 일본 등 마약 생산에 대한 엄격한 통제를 두려워하던 자유주의 진영의 국가들 뿐 아니라, 국제기구의 내정 간섭에 반대하던 소련 등 공산주의 진영의 국가들까지도 「단일협약」에 가입했으며, 1992년까지 189개국이 이에 가입했다[ 64]. 한국 또한 1972년부터 「단일협약」에 의거하여 마약의 유통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5. 맺음말
마약 문제에 대한 인식과 대응은 보건의료상의 필요에 의해서보다는, 국내 외의 정치적 지형에 의해 좌우되었다. 해방 직후 식민 지배의 잔재 청산과 근대 국가의 수립을 최우선 과제로 내세운 한국 정부는 마약 문제를 식민 통치의 유산으로 보았다. 정부와 언론은 마약 중독자 증가의 원인이 일본인 통치자들이 한국에 방치해 두고 간 아편과 해외에 거주하던 마약 중독자들의 귀환, 궁극적으로는 식민지에 대한 일본의 아편 정책에 있다고 지목했다. 이런 인식 하에 정부는 식민지 시기의 마약 법규인 「아편단속령」을 폐지하고 미군정령 「마약의 취체」로 대체했으며, 조선총독부가 관리하던 강원도 일대의 대규모 아편 재배 단지를 미곡 재배지로 바꾸는 작업에 착수했다. 뿐만 아니라 식민 통치의 잔재를 청산한다는 목표 아래 밀매 단속에 중점을 둔 마약 대책을 수립했다.
마약 문제가 식민 지배의 유산이라는 인식은 1950년대에 들어 급격히 바뀌었다. 한국전쟁을 계기로 마약 문제의 원인을 간첩과 좌익의 불법적인 아편 유포로 간주하는 간첩-마약 담론이 급부상했다. 공산주의자가 공작비 마련을 위해 북한으로부터 온 아편을 한국 사회에 몰래 퍼뜨린다는 인식이 본디 여순 사건 무렵에 등장했다가, 한국전쟁에서 중공군과 북한군이 군자금 마련 및 유엔군 약화를 위해 아편을 전선 일대에 유통시킨다는 전황 보도에 힘입어 강화되었다. 정부는 간첩-마약 담론을 이용해서 공산주의자들의 부도덕함을 부각시켰고, 이를 바탕으로 반공주의를 대중화하고 정치적 경쟁 세력에 대한 견제와 감시를 정당화했다. 즉 간첩-마약 담론은 정부의 반공 체제 수립에 동원되었다.
한국전쟁이 끝날 무렵 마약 문제의 원인을 자유주의 진영에 대한 공산주의 국가들, 특히 중공의 마약 밀수출로 보던 미 연방마약국과 그 국장 앤슬링거의 시각이 한국에 유입되었다. 이 담론은 간첩-마약 담론과 함께 강력한 반공주의적 논조를 띠고 있었으며, 한국에 대한 마약 밀수를 목표로 한 북한, 일본, 중공의 연계를 강조하는 논의의 등장을 자극했다. 미국의 반공주의적인 담론이 한국에 본격적으로 도입된 계기는 한국의 유엔 아편회의 참석이었으며, 이는 「아편의정서」 체결에 동조해 줄 국가들을 모으던 미국의 초청에 의한 것이었다. 미국은 마약 밀수의 주범이 공산주의 국가들이라고 주장하면서, 국제기구가 국가간 마약 무역에 개입하여 엄중 관리하는 「아편의정서」의 체결을 추진했으나, 이를 내정 간섭이라고 여긴 소련과 영국 등의 반대에 부딪쳐 난관을 겪고 있었다. 미국의 대외원조에 국가 재정의 상당 부분을 의존하던 한국 정부는 미국의 요청을 받아들여 「아편의정서」에 가입했다. 물론 이는 단순히 미국의 요구에 대한 반응만은 아니었으며, 단독 정부 수립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북한과 체제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려는 한국 정부의 외교적 전략의 일환이기도 했다. 이와 같은 정치적 목적 아래 「아편의정서」의 비준을 위한 「마약법」이 1957년에 제정되었다.
이처럼 보건의료의 상황보다는 한국 정부를 둘러싼 정치적 상황과 밀접한 관계에 있던 마약 담론 및 제도와 달리, 마약 정책은 정치적 상황에 민감하게 반응하거나 담론과 직접적으로 영향을 교환하지는 않았다. 이는 마약 담론 및 제도의 변천과 정책의 변화 과정이 그다지 일치하지 않는 점에서 잘 드러난다. 마약 문제에 정부의 대책은 해방 직후 단속 중심의 대응법이 정부에 의해 채택된 이래, 1950년대 내내 거의 같은 경향을 유지했다. 「마약법」의 수립에 힘입어 1957년과 58년에 잠깐 단속 성과가 높아지기는 했지만, 이것은 단기적인 변화였을 뿐 이후에는 「마약법」 제정 이전과 큰 차이가 없었다.
이와 같이 마약 문제에 대한 한국의 담론과 제도는 정부가 추구한 반공주의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앞서 보았듯 마약 문제를 둘러싼 담론과 제도, 그리고 정책을 결정한 요소가 마약 중독자 및 국민의 보건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한국에서 마약 문제와 관련된 논의와 제도에 깊은 영향을 미친 것은 정부가 추구한 반공 정책이었다. 반공주의와 깊이 연관된 마약 문제는 남북 분단과 단정 수립, 북한과의 체제 경쟁 같은 한국 정부의 정치적 상황이 1950년대 보건의료의 논의와 제도 형성에 결정적인 요소였음을 보여준다. 마약 문제에서, 해방 이후에 진행된 미국적인 보건의료체계의 도입은 단지 한국이 미국으로부터 원조를 받았거나 미국의 의학 지식 및 의료 기술이 뛰어나서라는 이유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식민지 유산의 청산과 단정 수립에 대한 정당성 확보, 체제 경쟁이라는 한국의 정치적 상황, 특히 외교적 성과를 바탕으로 체제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려고 한 한국 정부의 방침과, 미소 냉전 구도 하에서 세력을 확장하려던 미국의 대외 전략이 얽혀서 추진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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