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충에서 예방접종으로?: 해방 이후 한국의 일본뇌염 연구와 방역의 역사†
From Insecticide to Vaccination?: The History of Japanese Encephalitis Research and Control in South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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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This article examines the history of Japanese encephalitis (JE) research and disease control in South Korea from the post-liberation era through the 1990s, focusing on the gap between the accumulation of scientific knowledge and its translation into effective public health policy. Drawing on epidemiological reports, government documents, medical journals, and newspaper sources, this study analyzes three interconnected dimensions of Korea’s JE history. First, it traces how knowledge about JE was produced through transnational networks—including U.S. military medical laboratories, the World Health Organization’s malaria eradication program, and Korean scientists trained abroad. As such, this body of knowledge was externally structured, rather than through an independent domestic research infrastructure, and thus it failed to translate consistently into government prevention policy. Second, this study examines how DDT-centered vector control became the principal instrument of JE prevention, and how the repeated limitations of insecticide-based interventions helped produce a discourse that attributed outbreaks to rural backwardness. This narrative deflected attention from the structural deficiencies of the prevention system itself. Finally, this study shows that vaccination—long anticipated as the solution to JE—also faced its own institutional obstacles. The failure to secure adequate funding, the privatization of vaccine production, the shift to fee-based individual vaccination, and the absence of mandatory vaccination requirements collectively delayed stable preventive coverage until the mid-1980s, when rising vaccination rates finally produced a sustained decline in JE incidence. Taken together, this history demonstrates that the management of JE in modern Korea was shaped less by the availability of scientific knowledge or biomedical technology than by the presence or absence of the institutional foundations necessary to operationalize it.
1. 들어가며
20세기 중반 이후 국제보건의 역사는 새로운 백신과 살충제, 항생제 등 발전된 과학기술이 감염병의 통제에 획기적인 전환점을 마련해줄 것이라는 기대 위에서 전개되었다. 그러나 그 기대는 언제나 충분히 실현되지는 않았다. 강력한 살충제가 보급되어도 매개체를 지속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체계 없이는 유행이 반복되었고, 효과적인 백신이 개발되어도 접종이 보편화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과학기술의 도입이 곧 방역의 성공을 보장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이는 오늘날에도 유효한 질문을 제기한다. 어떠한 조건이 갖춰져야 새로운 지식과 기술이 실제로 작동하는 방역 역량으로 전환될 수 있는가?
해방 이후 한국에서 일본뇌염(Japanese Encephalitis)의 역사는 이를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사례이다. 일본뇌염은 작은빨간집모기(Culex tritaeniorhynchus)가 매개하는 플라비바이러스속(Orthoflavivirus) 일본뇌염 바이러스(Japanese encephalitis virus)에 의해 야기되고, 돼지 등의 가축이 바이러스의 증폭 숙주로 기능하는 인수공통감염병이다. 20세기 중반까지 일본뇌염은 주로 일본, 한국, 중국 등 동아시아 지역에서 유행하는 감염병으로 인식되었으나 1970년대 이후에는 동남아시아 대부분의 지역과 인도, 스리랑카 등지에서도 유행이 확산되었고, 현재는 오스트레일리아 북부를 포함한 태평양 연안 지역까지 발생 범위가 넓어졌다(Solomon et al., 2000). 일본뇌염은 감염 시 대부분 별다른 증상이 발현되지 않지만 감염자 중 0.4%에서는 고열, 두통, 구토, 마비 등의 증상이 나타난다. 입원 환자의 20-30%는 사망하고, 회복되더라도 45% 가량이 신경계 합병증 및 장애를 경험한다. 특히 일본뇌염에 대한 면역력을 갖추지 못한 소아의 경우 감염 위험이 높고 종종 심각한 후유증이 남을 수 있다는 점에서 특히 주의가 요구되었다(질병관리청, 2023). 한국에서는 비교적 일찍이 일본뇌염에 대한 지식을 축적해왔으며 DDT와 백신을 통한 대응도 시도되었으나 그 유행이 수십 년에 걸쳐 반복되어 왔다. 지식과 기술의 존재가 효과적인 방역으로 바로 이어지지는 못한 것이다.
그간 한국에서 일본뇌염과 관련해서는 주로 의과학계와 수의학계를 중심으로 일본뇌염 발생과 그 추이를 살피는 역학적 연구, 진단과 치료에 관한 연구, 예방접종 관련 연구 등이 축적되어 왔으며(홍창의, 1962; 전종휘 1963; 김경호ㆍ백승복, 1966; 이주원ㆍ오대규, 1987; Sohn, 2000; 양동군ㆍ권창희ㆍ김성희, 2007), 일본뇌염 대응을 위한 매개 모기의 생태학적 특징 및 백신 개발과 관련한 연구도 이루어졌다(주인호, 1961; 이호왕, 1975; 홍영진 외, 2010). 질병의 생태학적 특성과 임상적 치료, 과학적 예방책 등에 대한 연구는 꾸준히 축적되고 있으나, 일본뇌염에 대한 의료인문학적인 연구는 드물다. 일본뇌염을 연구한 전종휘, 주인호, 이호왕과 미군 제406의학종합연구소에 관한 연구에서 간접적으로 논한 정도이다(김택중, 2012; 신미영, 2012; 2015; 김태우, 2022; 박지영, 2023; 조희수, 2024). 그간 의료사 분야에서 두창, 장티푸스, 콜레라, 결핵 등에 대한 질병사 연구가 오랫동안 이루어졌으며 COVID-19 팬데믹을 계기로 감염병의 사회사에 대한 관심이 광범위하게 증가했지만, 일본뇌염의 역사는 본격적으로 다뤄지지 않았다.
일본뇌염에 대한 의료사적 무관심은 부분적으로 이 질병이 아시아 지역에서 주로 발생하는 풍토병으로 여겨져 국제보건에서는 중요한 질병으로 다뤄지지 못했다는 점에서 기인한다. 일본뇌염은 미국이 태평양전쟁에 참전하고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동아시아 지역에 주둔하면서 본격적으로 서구의 시야에 들어왔다. 한국에서 일본뇌염에 대한 지식이 축적되고 방역의 수단을 개발하는 과정에서도 1945년 이후 1970년대까지 미군을 매개로 한 의학 연구 네트워크와 말라리아 박멸사업과 같은 모기 매개 질병에 대한 국제보건의 자원이 중요하게 활용되었다. 그러나 제국주의 팽창과 식민지 개척에 광범위한 위협으로 인식되었던 황열병이나 말라리아와는 달리, 일본뇌염과 그 방역에 대한 국제보건의 관심은 국지적이고 단기적인 수준에 그쳤다. 그 결과 한국에서는 일본뇌염에 대한 지속적인 대응을 이어갈 안정적인 자원을 확보하지 못했다. 해방 이후 한국의 방역 정책이 외부 원조에 크게 의존했음을 감안할 때, 일본뇌염에 대한 한국 정부차원의 대응책은 안정적으로 발전하지 못했다.
일본뇌염 대응의 이러한 상황은 20세기 국제보건의 전개 방식과 맞닿아 있다. 랜들 패커드(Randal M. Packard)는 20세기 국제보건의 역사를 검토하면서 지금까지 전 세계적으로 국제보건에 대하여 막대한 자원이 투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저소득 국가의 건강 수준이 근본적으로 향상되지 못한 것은 주민의 건강을 위한 기본적인 보건 서비스와 공중보건 인프라에 대한 관심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하며, 단순히 과학기술을 적용하는 것만으로는 우리가 마주한 보건 위기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Packard, 2016). 수닐 암리스(Sunil Amrith) 역시 말라리아 박멸사업이나 BCG 접종사업이 각국 정부와 국제기구를 통해 국제보건의 핵심 사업으로 전개되었지만, 지역별 맥락을 고려하지 않은 보편적인 기술 중심의 개입이 지닌 한계는 분명했다고 지적한 바 있다(Amrith, 2006).
한국에서 일본뇌염 연구와 방역의 역사는 이러한 관점이 제기하는 문제를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확인할 수 있게 해준다. 일본뇌염의 역사에서 드러나는 연구와 실제 방역 정책의 전개 사이의 간극은 당시 외부에서 도입된 지식과 기술이 곧바로 자체적인 방역 역량으로 전환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보건의료 문제의 해결은 지식이나 기술의 도입만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이를 위한 제도와 사회적 환경 등이 갖춰져야 하는 것이다.
이 글에서는 해방 이후 한국에서 일본뇌염에 대한 연구와 방역이 전개된 과정을 세 가지 측면에서 추적한다. 먼저, 한국에서 일본뇌염에 관한 지식이 축적되는 과정을 살필 것이다. 해방 후 한국은 일본뇌염 발병지라는 지역적 특성과 미군정과 한국전쟁을 거치며 형성된 미국 주도의 군진의학 네트워크를 통해 일본 뇌염 지식의 형성에 참여하였다. 이를 고려하여 해방 후부터 1960년대까지 국제적으로 일본뇌염에 대한 이해와 지식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한국이 개입하게 되는 과정을 검토할 것이다. 다음으로는 일본뇌염에 대한 살충 중심 방역의 전개과정을 살펴볼 것이다. 일본뇌염에 대한 지식 축적이 방역의 실천으로 수렴되지는 않았고, DDT 중심의 방역정책이 전개되었음을 설명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방역정책의 한계를 둘러싼 대안이 근대화 담론과 연결되었음을 보일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백신이 새로운 방역 수단으로 도입된 이후에도 백신의 생산ㆍ분배 및 비용 부담 등 예방접종을 둘러싼 제도적 정비가 지속되었음을 살펴본다. 이를 통해 외부에서 도입된 과학기술 그 자체보다 그것을 실제로 작동시키기 위한 제도적 기반의 구축이 일본뇌염 방역의 성패를 좌우했음을 보이고자 한다. 인수공통감염병 대응이 다시금 중요해진 현재에도 이러한 역사적 교훈은 유효할 것이다.
2. 일본뇌염 연구의 초국가적 네트워크
해방 이후 한국에서 일본뇌염에 대한 지식은 한국의 독자적인 자원을 바탕으로 생산되고 축적된 것이 아니라, 한국에 주둔한 미군 및 국제보건 네트워크를 매개로 한 초국가적 네트워크 안에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이 지식들은 학술 네트워크를 통해 유통되었을 뿐 한국 정부의 방역 체계 안으로 곧바로 수렴되지 못했다. 이 절에서는 일본뇌염에 관한 지식이 어떤 경로로 생산되고 축적되었는지를 살피고 그 지식과 실제 현실 간의 간극을 드러내고자 한다.
일본에서는 1871년부터 여름과 가을철에 노인과 아동을 중심으로 높은 치사율을 보이는 뇌염 유행에 관해 기록해왔다. 약 10년 간격으로 대규모 유행이 발생하던 중 1924년 여름, 단 몇 주만에 6,000명 이상의 환자가 보고되고 그 중 60%가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이 급성 뇌염은 국가적인 보건 의제로 부상하였다. 1924년 대유행에 대해 학자들은 주로 제1차 세계대전기에 유행한 기면성 뇌염인 폰 에코노모(Von Economo) 뇌염과의 관계를 두고 다양한 가설을 제기하였다. 그러나 이 뇌염은 여름철에 발생하고 고열과 급성 뇌 증상을 보인다는 점에서 겨울철에 발생하고 기면 증상을 동반하는 폰 에코노모 뇌염과 차이가 있었다. 이에 도쿄제대 전염병연구소의 다카기 이츠마(高木逸麿)는 폰 에코노모 뇌염을 ‘A형 뇌염’으로, 일본의 여름철 급성 뇌염을 ‘일본 B형 뇌염(Japanese B encephalitis)’으로 구분하여 명명할 것을 제안하였다(Halstead & Jacobson, 2003; Kuno, 2022).1)
이후 1933년 하야시 미치토모(林道倫) 등이 원숭이의 뇌를 이용해 처음으로 바이러스를 분리하는 데 성공하였고, 1935년 대유행 때에는 도쿄대, 기타사토 연구소 등 여러 기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다수의 일본뇌염 균주(나카야마, 칼리니나 등)를 성공적으로 분리하였다. 이 중 카사하라 시로(笠原四郎) 등이 뇌염으로 사망한 소년 나카야마로부터 분리한 ‘나카야마 주(Nakayama strain)’가 미국 내 여러 연구실로 공유되면서 이후 수십년 간 일본뇌염 백신 제조와 항체 검사의 표준주로서 기능하였다(Kuno, 2022). 1938년에는 미타무라 토쿠시로(三田村 篤志郎) 등이 작은빨간집모기에서 일본뇌염 바이러스를 분리하면서 모기 매개 전파가 증명되었다.
이처럼 일본뇌염이 하나의 독립적인 질병으로 명명되고 그 병원체와 전파 경로에 대한 지식이 축적되는 동안 식민지 조선에서도 유사한 질병이 발생하였다. 1924년 일본 대유행 당시 조선에서도 약 5,000명의 환자가 발생하였고 약 50%가 사망했다고 보고되었는데, 이는 ‘기면성 뇌염’으로 기록되었다. 1930년대에도 경성부립 순화병원의 전종휘가 순화병원장 시이바 요시야(椎葉芳彌)와 함께 유행성 뇌염 증례를 일본 의학계에 보고하였다. 1935년에 조선에서 발생한 유행성 뇌염이 1924년의 일본의 B형 뇌염일 것으로 추정한 것이었다.2) 해방 이전 주로 일본학계에 보고되었던 한국의 ‘하계 뇌염’이 일본뇌염이었을 것이라는 추정은 1950년대 들어서야 이루어졌다(Hullinghorst et al., 1951).
한국의 여름철 뇌염이 ‘일본뇌염’으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은 해방 직후 미군이 주둔하면서부터였다. 이 전환의 결정적 계기는 미군이 실시한 혈청학적 조사였다. 아시아 지역에 주둔한 미군에게는 일본뇌염이 치료제가 없고 심각한 뇌손상이나 사망을 초래할 수 있는 감염병이었기에 주둔지의 감염 실태를 파악하는 것은 군사적 필요와 직결되었다(김태우, 2022; 정준호, 2022). 미군은 이미 태평양전쟁기인 1942년 3월부터 소아마비 백신 개발자로도 유명한 육군 의학부의 앨버트 세이빈(Albert B. Sabin)을 통해 나카야마 주를 이용한 일본뇌염 백신 개발 프로젝트에 착수한 바 있었고, 오키나와 침공 시 군인들 사이에서 일본뇌염으로 인한 중증 뇌염과 사망이 발생하면서 종전 이후에도 이 질병에 대한 조사를 이어갔다(Kitchener, 2003). 한국에서는 1946년 군산 부근 미군 주둔지에서 3명의 중증 뇌염 환자가 발생했고, 인천지역 미군에서도 1명의 환자가 발생하면서 혈청학적 조사가 진행되었고, 사망한 미군 병사의 뇌와 척수에서 바이러스를 분리해 이것이 일본뇌염 바이러스임을 확인하였다(Sabin et al., 1947).3) 1946년 주한미군에게서 발병한 뇌염과 그에 대한 혈청학적 조사는 이전까지 한국에서 ‘유행성 뇌염’ 또는 ‘하기뇌염(夏期腦炎)’ 등으로 불분명하게 지칭되던 질병들이 당시에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질병 분류 체계 안에 자리잡는 계기가 되었다.
미군의 일본뇌염 조사는 뇌염 발병에 대한 단발적인 확인에 그치지 않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동아시아 주둔 미군의 의학연구 체계를 통해 연구로 진전되었다. 태평양전쟁 때 말라리아 조사연구를 수행한 제207 말라리아 조사파견대(207th Malaria Survey Detachment)는 1946년 3월부터 약 4년간 일본과 한국에서식하는 모기를 조사했다(207th Malaria Survey Detachment APO 301, 1950). 그들은 모기가 매개하는 말라리아, 뎅기열, 필라리아증, 일본뇌염 등의 질병 중에 일본뇌염에 특히 관심을 가졌다. 일본뇌염에 관해서는 다른 질병에 비해 사전 지식이 없어 매개모기의 종류와 번식처, 계절적 특성, 흡혈 습관 등을 파악해야 했기 때문이다. 한국의 모기에 대한 조사는 1946년 가을과 1947년 가을에 이루어졌다. 이 조사를 통해 한국에 서식하는 일본뇌염 매개 모기로는 빨간집모기(Culex pipens), 작은빨간집모기(Culex tritaeniorhynchus), 토고숲모기(Aedes togoi)가 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LaCasse & Yamaguti, 1948). 모기 매개 질병에 대한 군진의학적 관심이 말라리아 조사 인프라를 일본뇌염 연구에도 활용하게 한 셈이었다.
보다 본격적인 일본뇌염에 대한 역학적 조사는 동아시아 지역에서 미군의 의학연구소 역할을 수행한 제406 의학종합실험실(406th Medical General Laboratory)을 거점으로 이루어졌다. 1947년 세이빈은 이 실험실의 연구자들과 함께 서울, 인천, 군산 및 오키나와의 거주민과 가축을 대상으로 일본뇌염 바이러스에 대한 항체 보유 여부를 검사하였다(Sabin et al., 1947). 그 결과 5-9세 이상의 거주민 상당수와 돼지 등의 가축이 일본뇌염에 대한 항체를 보유하고 있다는 것이 드러났다. 연구자들은 한국에서 질병 통계나 임상적 감시 체계의 부재로 인해 일본뇌염의 존재가 이전까지 두드러지지 않았을 뿐 이미 일본뇌염 병원체가 만연한 상황이라며, 특히 아직 감염 이력이 없어 항체를 갖추지 못한 아동이 일본뇌염에 감염될 시 증상이 심각할 수 있다고 경고하였다(Deuel et al., 1950). 이러한 연구의 설계와 실행, 결과의 해석은 모두 미국의 군진의학 네트워크를 통해 이루어졌고, 그 성과 또한 영어로 발표되어 국제 학술장에 유통되었다. 한국의 일본뇌염에 대한 초기 지식 대부분은 한국의 보건당국이 아니라 미군의 군진의학적 필요에 의해 축적되었다.
1949년의 대유행은 일본뇌염에 대한 한국 사회의 관심을 높이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8월 말부터 개성에서 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뇌염은 9월 초 서울ㆍ경기 및 남부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뇌염 환자가 주로 15세 이하의 소아 청소년에게 발생하며 돌발적으로 고열과 두통이 생기고 말을 하지 못하고 4-6일 내에 사망한다”는 보도가 이뤄지고, 뇌염에 대한 공포감은 사회 전반에 확산되었다.4) 보건부는 임시 유행성 하기뇌염 방역본부를 설치하고 뇌염을 법정전염병으로 규정하였으며 뇌염 환자를 격리 수용했다.5)
한국 정부는 이 ‘하기 유행 뇌염’의 정체와 성격을 밝히기 위해 자체적으로 조사에 나섰다. 보건부는 약 2억원의 긴급기금을 투입했고, 주인호가 이끄는 서울여자의과대학 조사팀은 서울 시내 환자 557명을 대상으로 뇌염 환자의 특징을 규명하는 작업을 수행했다. 조사 결과 환자 중 61%가 4-15세의 아동이며, 남한 뿐 아니라 북한의 개성 등지에서도 감염이 보고되고 있음이 확인되었다(Chu, 1951: 90).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의 전종휘도 전염병동에서 하루 100명이 넘는 환자를 진료하면서 사망한 환자를 부검하여 뇌염 바이러스를 분리하는 데 성공하였다(김택중, 2012: 158-159).6) 전종휘가 서울대병원 등에서 관찰한 결과는 1949년 가을에 학술대회에서 구두발표 되었으나, 논문은 1952년 피난지인 부산에서 『경남의사회지』를 통해 발표되었다(전종휘ㆍ오인혁ㆍ신동훈, 1959).
국립방역연구소는 1949년 일본뇌염 대유행을 계기로 서울의대 및 세브란스 의대 등과 함께 ‘뇌염학술조사연구위원회’를 꾸려 뇌염에 대한 연구 조사를 진행했다. 국립방역연구소는 해방 이후 한국에서 사람의 감염병에 관한 역학적 조사 연구는 물론 감염병 예방 백신의 연구 및 생산을 담당한 기관으로, 조사를 통해 국내에 유행한 뇌염이 일본뇌염이라는 것을 밝혀냈다.7) 이들은 바이러스 주를 확보해 백신 개발까지도 시도했다(이삼열ㆍ김응용, 1953: 13-82). 당시 국립방역연구소장 이병학은 한 기사에서 앞으로는 한국에서도 일본뇌염 백신을 제조할 수 있을 것이라며 “보건부에서 이미 여기에 대한 예산도 청구하였으니 이후로 사전예방주사만 하면 문제없”을 것이라는 자신감을 드러내기도 했다.8)
1949년 유행의 보다 구체적인 전모는 1951년 제406 의학종합실험실의 연구에서 종합적으로 정리되었다. 이 연구는 실장 헐링호스트(Robert L. Hullinghorst)와 바이러스ㆍ리케차질병과장 번스(Kenneth F. Burns), 그리고 세균학 연구자로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미생물학 교수와 미군정 및 대한민국 정부에서 초대 방역국장을 지낸 최영태가 함께 참여하였다. 이 연구에 따르면 1949년 유행은 8월 말부터 10월 초까지 총 5,548명의 감염과 2,492명의 사망(치사율 약 45%)을 기록하였다. 병원 입원 환자 567명 중 63%가 3-13세 아동이었으며, 고열ㆍ두통ㆍ경부 강직 증상을 보였고 사망하지 않은 경우에도 정신 지체나 경련 등의 신경학적 후유증이 남았다. 수액 수입이 부족해 체액 균형 유지가 어렵고 환자 가족에게 의존할 수 밖에 없었던 열악한 간호환경, 발병 전에 영양상태가 좋지 않았던 점이 유독 높은 사망률의 원인이라고 지적되었다(Hullinghorst et al., 1951).
1952년에 다시 일본뇌염 대유행이 발생하여 1,221명의 감염자와 526명의 사망자를 기록했다. 일본뇌염은 그 해 가장 많은 사망을 초래한 감염병이었다. 하지만 전년도 장티푸스(14,051명 사망), 두창(11,530명 사망), 발진티푸스(6,154명 사망)에 비하면 일본뇌염으로 인한 사망자는 상대적으로 적은 편에 속했고, 방역 당국의 관심은 다른 급성 감염병에 집중되어 있었다.9) 다만 전종휘 등은 1949년 대유행 때의 임상적 관찰과 연구 내용을 바탕으로 1952년의 유행을 임상적으로 비교하며 연구할 수 있었다(전종휘ㆍ오인혁ㆍ신동훈, 1959).
한국전쟁으로 여러 기반이 파괴된 상황에서 1950년대 일본뇌염에 관한 본격적인 연구를 국내의 연구 자원으로 수행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러나 역으로 전쟁은 연구 장비와 실험 자원, 자본이 부족했던 한국인 연구자들에게 일본뇌염 연구에 참여할 수 있는 미군 의학연구소와 국제보건 네트워크를 마련해주었다. 이 과정에서 한국 연구자들은 일본뇌염의 생태적 특성과 방역의 방향성에 관한 중요한 지식을 축적하였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주인호이다. 1949년 일본뇌염 조사 이후 한국전쟁 중에 미군 출혈열 연구소(Hemorrhagic Fever Center)에서 연구 기회를 얻은 주인호는 의용곤충학 연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하였고, 1959년에는 대만 미해군의학 연구소(NAMRU-2)에서 모기 바이러스 분리 실험을 통해 본격적인 뇌염 연구에 착수했다(박지영, 2023). 그는 오키나와, 말레이지아, 인도네시아, 사이판 군도에서 채집한 모기를 대상으로 뎅기열, 황열, 뇌염 바이러스를 분리하는 작업에 참여하였다(주인호, 1989: 20). NAMRU-2에서 주인호는 동면하는 양서류와 파충류를 통해 뇌염 바이러스가 보존된다는 가설을 검증하는 실험을 맡았는데, 이 실험은 비록 실패했지만 일본뇌염 바이러스의 생태적 순환에 대한 이해를 심화하는 경험이 되었다(주인호, 1989: 21-22).
주인호가 초국가적 네트워크에서의 연구 경험을 통해 얻은 중요한 통찰은 일본뇌염 방역이 단순한 살충이나 사후 대응을 넘어 생태적 감시 체계로 전환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대만 및 오키나와 주둔 미군 내 뇌염 감염의 혈청학적 연구를 통해 감염자 중 상당수가 증상이 없거나 가벼운 불현성 감염이라는 점이 밝혀졌고, 주인호는 한국의 전주 지역 일본뇌염 발병 양상이 이와 유사하다고 지적하면서 방역 정책 수립 시 불현성 환자의 존재를 고려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또한 대만에서의 20여 종 동물 대상 뇌염 항체 조사를 토대로, 일본뇌염 방역에서 가축, 특히 돼지에 대한 감시가 필수적이라고 주장했다(주인호, 1961: 26-27). 이러한 제안들은 당시 한국에서 일반적이었던 DDT 살포 중심의 방역과는 다른 방식의 접근이었다. 그러나 주인호의 이러한 주장은 학술 논문을 통한 의견 제시를 넘어 정부의 방역 정책에 직접 반영되는데까지는 도달하지 못했다.
일본뇌염 연구에서 초국가적 네트워크의 역할을 보여주는 또 다른 중요한 사례는 이호왕이다. 그는 한국에 연구자원이 부족했던 상황에서 자신이 획득한 초국가적 네트워크를 활용해 연구 역량을 쌓아가는 과정을 잘 보여준다. 미네소타 프로젝트를 통해 미국 유학을 떠난 이호왕은 석사 과정 지도교수 제롬 시버튼(Jerome T. Syverton)으로부터 당시 한국에서 큰 문제가 되고 있던 일본뇌염 바이러스에 관한 연구를 할 것을 제안받았다. 석사 과정에서 헬라 세포, 원숭이 신장 세포(Vero Cell), 섬유아 세포 등 다양한 세포에서 일본뇌염 바이러스를 증식하는 실험을 수행하며 조직배양법을 익힌 이호왕은 박사 과정에서 새로운 지도교수 윌리엄 쉬러(William F. Scherer)를 만나게 되었다. 쉬러는 제406 의학종합실험실에서 2년간 근무하며 일본뇌염 바이러스를 연구한 경험이 있었고, 이호왕에게 돼지가 일본뇌염 연구에서 중요하게 활용될 수 있다는 점을 알려주어 이호왕이 돼지 신장 세포(Porcine Kidney Cells)를 활용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쉬러는 자신이 제406 실험실에서 교류했던 일본뇌염 연구자 조르디 카잘스(Jordi Casals), 에드워드 부셔(Edward L. Buescher) 등을 이호왕에게 소개해주며 그가 연구 네트워크를 넓히는 데도 도움을 주었다. 귀국 후 이호왕은 쉬러의 도움으로 미국 국립보건원(National Institutes of Health)의 연구비를 확보하고 쉬러와 부셔가 제406 실험실에서 연구하던 ‘일본뇌염 바이러스의 월동 기전 연구’를 한국에서 시작했다(신미영, 2012; 2015). 이호왕은 한국에서의 일본 뇌염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실용적 목표 아래 백신 개발에도 관심을 기울였고, 실제로 백신을 개발하는 데도 성공했다. 다만 이는 대량 생산되어 널리 접종되지는 못했다(조희수, 2024).
개별 연구자들의 네트워크 외에 국제기구의 자원이 일본뇌염 연구에 전용된 것은 당시 한국의 연구 환경을 보여주는 또 다른 단면이다. WHO는 1950년대 국제보건의 핵심 의제였던 말라리아 퇴치 사업을 한국에서 실시하기 위해 1959년부터 1969년까지 보건사회부에 말라리아 퇴치 사업(National Malaria Eradication Service) 담당 부서를 설치하고 운영하였다. 이 사업의 목적은 말라리아 퇴치였지만, 한국에서는 이 기금과 인적 자원이 일본뇌염 연구에도 상당부분 활용되었다.
국립방역연구소의 김경호와 백승복이 1964년 전라북도에서 수행한 일본뇌염 매개 모기 조사는 WHO 말라리아 퇴치 사업의 자원이 일본뇌염 연구에 활용된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들은 약 1,340건의 모기를 채집하여 혈청 시험과 혈구 응집억제반응 시험을 시행하였는데, 모기 채집 자원과 시험에 필요한 나카야마주 일본뇌염 표준 혈청은 WHO 말라리아반으로부터 제공받았으며, WHO 말라리아반 고문관 판 덴 훅턴(Albert C. van den Gugten) 박사의 도움을 받아 연구를 수행하였다(김경호ㆍ백승복, 1966). 1967년부터 1년간 보건사회부 말라리아 퇴치 사업 곤충반이 수행한 일본뇌염 매개종의 생태학적 조사 역시 과학기술처와 주한미국경제협조처(USOM)가 공동 주관하는 신탁기금의 지원 아래 이루어졌고, 연구 수행 과정에서 WHO 서태평양지구의 수석 곤충학자 저우친셴(Ching-Yen Chow, 周欽賢) 등의 조언을 받았다(이성우 외, 1968). 이러한 연구들은 일본뇌염의 역학적 실태와 매개 모기의 생태에 관한 기초 자료를 축적하는 데 기여하였다. 다만 이 연구들이 말라리아 퇴치라는 다른 목적의 사업에 기대어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역설적으로 한국에서 일본뇌염을 위한 독립적인 연구 기반이 얼마나 취약했는지 보여준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해방 이후 한국에서 일본뇌염에 관한 지식은 미군의 의학연구 네트워크, WHO 말라리아 퇴치 사업, 미네소타 프로젝트 등의 초국가적 경로를 통해 축적되었다. 이 과정에서 일본뇌염의 역학적 윤곽이 그려졌고, 주인호의 생태적 감시 체계 제안처럼 국내 일본뇌염 방역의 방향을 제시할 수 있는 지적 토대가 마련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지식들이 국내 방역 정책에 반영되어 방역 현실을 변화시키는데 까지는 여러 단계의 간극이 존재했다. 연구의 기반 자체가 대부분 외부 자원에 의존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연구의 성과가 정책으로 전환되기 위해 필요한 행정 역량과 예산, 보건 인프라가 갖추어져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1950년대 후반까지 일본뇌염 관련 통계조차 제대로 집계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이 간극을 단적으로 보여준다.10) 이어지는 절에서는 이 간극이 실제 방역 현장에서 어떠한 양상으로 나타났는지, 그리고 그것이 일본뇌염을 둘러싼 담론과 정책의 전개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 살펴볼 것이다.
3. DDT 중심의 살충 방역과 근대화 담론
초국가적 네트워크를 통해 일본뇌염의 역학적 윤곽이 그려지고 방역의 방향을 제시할 수 있는 지적 토대가 마련되었음에도 그것이 한국의 방역 현실을 변화시키기까지는 긴 시간이 걸렸다. 예방접종이 보편화되기 전까지 일본뇌염에 대한 사실상 유일한 방역 수단은 DDT 살포를 통한 살충이었고, 이 역시 체계적인 계획 아래 실시되었다기보다는 보여주기식으로 시행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방역의 실패를 해결하기 위해 구조적 문제를 짚기보다는 그 책임을 ‘후진성’ 문제로 돌렸다. 이 절에서는 살충 중심의 일본뇌염 방역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살펴보고, 이때 등장한 근대화 담론을 살펴보고자 한다.
해방 후 남한에 주둔한 미군은 미군 내 감염병 확산 방지를 최우선으로 하면서 귀환 인구와 주요 도시 지역, 미군 주둔 지역을 중심으로 대량의 DDT를 살포했는데, 이는 주로 발진티푸스와 말라리아 등을 겨냥한 것이었다. 일본뇌염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동아시아에 주둔한 미군에게 새로운 위협으로 주목받은 것은 사실이었지만, 콜레라나 두창, 발진티푸스, 유행성출혈열 등에 비해 미군에게 치명적인 감염병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DDT가 모기 살충제로도 기능한다는 점에서 이러한 살포는 일본뇌염 방역에도 간접적인 효과를 발휘했다.
1949년 일본뇌염 대유행 당시 우선적인 방역책으로 모색된 것 역시 DDT의 확보였다. 한국의 보건당국은 유례없는 뇌염 유행에 대응하며 뇌염의 성격을 파악하기 위한 여러 자원을 동원하면서 동시에 DDT 확보에 주력하였다. DDT는 일본뇌염 유행이 남부 지역까지 확산되었다고 보고된 9월 초ㆍ중순이 되어서야 미군을 통해 확보할 수 있었다. 보건당국은 확보된 DDT를 뚝섬의 살충제 제조소에서 5% 살충액으로 희석 제조해 서울시와 각 도에 분배했고, 비행기를 통한 공중살포도 시행하였다.11)
한국전쟁 중이었던 1952년에 한국에서 발생한 감염병 중 일본뇌염의 규모가 가장 컸지만, 장티푸스나 두창, 발진티푸스와 같은 다른 감염병에 비해 감염자와 사망자 수가 적었기에 큰 관심을 받지는 못했다. 보건부가 방역요강을 발표하고 방역기구 조직, 검역반 배치, 환자 격리, 집단발생지역 휴교 또는 영업정지, 사체 화장, 구충 소독, 모기장 사용 등을 지시하였으나, 이러한 지침이 현장에서는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12) 보건부의 조치는 “전재(戰災)와 한재(旱災)를 받고 있는 우리가 다시 병재(病災)까지” 겪어서는 안된다는 전쟁기의 위기 의식을 보여주는 것이자 1949년 대유행때처럼 전국적인 큰 피해를 막아야 한다는 인식이 반영된 것이었다.13) 그러나 임시수도 부산에서조차 방역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고, 환자발생 보고 또한 소홀히 이루어졌다.14)
전쟁 후 1950년대에 반복된 네 차례의 유행에서도 각 의과대학이나 주요 병원에서는 진료반을 꾸려 치료활동을 지원하고 구충 작업과 무기 휴학, 환경위생 정리 등을 실시했다. 하지만 대부분은 사후약방문 격이었다. 1958년에는 6,856명의 환자 중 2,166명이 사망하는 대규모 유행이 다시 반복되었는데, 이때에도 당국이 대중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의 당부는 “모기가 많이 모이는 수채구멍을 깨끗이 하고, 가능한 한 영양제를 많이 섭취하고, 몸에 이상이 있을 때 초기에 치료를 받으라”는 것이었다.15)
모기 퇴치가 유일한 방역이라 할 수 있는 상황에서 대중적으로는 미군 협조로 이루어지는 DDT 공중살포가 일본뇌염 방역에 가장 효과적이라는 인식이 자리잡았다.16) 한국전쟁을 거치며 DDT는 대중의 일상에 더욱 깊숙히 침투하였다. 발진티푸스 등의 감염병 방역을 위해 DDT 사용을 확대하고 DDT 사용법에 대한 대중 교육도 병행했기 때문이다. 한국산 몸니의 DDT 저항성으로 인해 사용되기 시작한 린덴 또한 살충 약제로 권장되었으나, 주류는 DDT였다(정준호, 2022). 도심 지역 DDT 공중살포의 효과가 낮다는 평가가 나오기도 했으나, 공중살포가 주민들에게 안정감을 준다며 지속적으로 요구되었다(정준호, 2022: 76).
그러나 농촌지역에서 DDT의 살충 효과는 제한적이었다. DDT는 기본적으로 모기와 같은 감염병 매개 곤충의 살충에 높은 효과를 발휘하지만, 논에서 벼를 주로 재배하는 한국의 농촌 환경에서는 논물에 직접 살포할 경우 벼를 함께 죽일 수 있어 논에 직접적으로 살포하는 일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Yeo, 2015: 58-59). 일본뇌염의 주요 매개 모기인 작은빨간집모기가 논ㆍ습지ㆍ관개수로 등 광범위한 수계 환경에서 번식하는 종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논물을 제외하고 살충제를 살포하는 것만으로는 개체군을 효과적으로 억제하기 어려웠다. 물론 방역의 우선순위에서 농촌 지역이 도시에 비해 후순위에 놓여 있다는 점도 농촌의 방역이 효과적이지 못했던 이유 중 하나였다.
저조한 방역 때문인지 매개 모기의 생태 때문인지를 확증할 수는 없으나, 일본뇌염 역학조사에서 한국의 남부지역, 특히 농촌의 일본뇌염 발생률이 높다는 결과가 발표되기도 했다. 국립방역연구소에서 1955년부터 1966년까지 12년간의 일본뇌염 발생의 지역적 분포상태를 조사한 바에 따르면 전라북도가 인구 10만명 당 18.5로 평균 이환율이 가장 높았고, 1958년에는 85.5에 달했다. 이 연구에서는 대체적으로 전라남도와 경상남도, 부산과 같은 남부지방에서 일본뇌염 발생이 높게 나타나는 것으로 볼 때 남부지방에 일본뇌염이 집중되며 여기에서 뇌염이 북쪽 지방으로 이동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하였다(김경호ㆍ백승복ㆍ장영식, 1967). 이러한 결과는 농촌의 생태와 일본뇌염 발병을 연결하려는 인식과도 맞닿아 있었다. 논물은 모기가 번식하는 대표적인 장소이기 때문에 통상적으로도 논농사가 주로 이루어지는 호남과 영남 지방이 일본뇌염의 주요 발병지라고 알려져 있었다. 농촌 지역에서 뇌염모기의 숙주 역할을 하는 돼지의 사육이 많이 이뤄진다는 점 역시 이러한 인식에 기여했다.
이러한 가운데 1960년대부터는 일본뇌염의 발생 원인을 농촌의 후진성에서 찾는 시각이 전문가와 언론을 중심으로 강화되었다. 한 신문 사설에서는 농촌에서 “100년 전 그대로 불결한 외양간과 개울들에서 모기가 발생하고 있다”며 “문화국가”의 이름이 부끄러운 “교아국가(蛟蛾國家)”라고 비판했다.17) ‘뇌염박사’로 불린 전종휘 또한 “해마다 번창하는 뇌염은 우리나라의 후진성과 빈곤성을 보여주는 척도”라고 주장하며, 뇌염은 농촌의 비위생적 환경에서 비롯되는 ‘농촌의 병’이라고 보았다.18) 본질적으로는 일본뇌염의 체계적인 방역을 위한 역학 연구와 인프라가 제대로 구축되지 않은 상황에서 그러한 공백이 DDT 살포와 사후 대응으로 채워질 수밖에 없다는 데 문제가 있었으나, 농촌의 후진성을 비판하는 시각에서 뇌염 문제는 축산의 과학화ㆍ기업화와 같은 농촌의 ‘근대화’에 의해 “저절로 해결되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비교적 정기적으로 DDT 살포와 같은 방역 사업이 이루어지는 대도시와 그렇지 않은 농촌의 실정을 놓고 볼 때 농촌이라는 자연적 특성에만 원인을 돌리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DDT 살포는 주로 도심 지역에서 이루어져서, “돼지우리가 없고 DDT 살포차량이 빈번히 다니는 중심가 주민들”이 오히려 농촌 지역보다 더 많은 모기 박멸의 혜택을 받고 있다는 지적도 나왔다.19) 특히 1960년 대 후반부터는 도시 변두리 지역의 일본 뇌염 문제가 농촌보다 오히려 심각하다는 기사가 자주 등장하였다. 오수ㆍ하수 처리가 제대로 되지 않은 청계천 하류와 같은 하천 주변 역시 “곤충의 번식장”이라 불렸고, 상하수도 시설이 갖추어지지 않은 도시 빈민 밀집 지역은 감염병의 온상으로 여겨졌다. 이는 일본뇌염 발생의 원인이 농촌의 자연적 특성이 아니라 방역 인프라의 불균등한 배분에 있었음을 의미한다.
1970년대 들어서는 일본뇌염이 농촌 지역보다 서울이나 부산 등 대도시에서 더 유행하고 있다는 조사가 여럿 발표되면서 신문지상에도 보도되었다. 예를 들어 1972년의 한 조사에서는 일본뇌염 환자 127명 중 88.2%가 서울과 부산이었으며, 농촌지역 뇌염은 오히려 감소했다고 보고되었다. 대도시에서는 도시개발 과정에서 웅덩이, 늪, 하수천 등이 많이 생겨 뇌염모기가 더욱 많이 발생하는 반면, 농촌에서는 농약 사용이 증가하면서 매개 모기 유충이 사라졌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왔다.20) 이러한 분석이 맞다면, 농약이 농작물의 병충해뿐만 아니라 인간질병의 매개 곤충도 없애고 있는 것이었다. 이를 두고 연세의대에서 공해를 연구하는 권숙표는 “수질오염이 바람직한 결과를 가져온 것이라고 단정할 수 있을 것인가?”라며 농약의 딜레마를 지적하기도 했다. 의도하지 않은 농약 살포가 방역 효과를 대신하게 된 이 상황은 역설적으로 체계적인 일본뇌염의 매개체 통제 인프라가 끝내 구축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일본뇌염을 둘러싼 논의의 초점은 ‘근대화’에 있었다. 일본뇌염 퇴치에 대한 여러 글들은 농촌에서 ‘낙후’하고 ‘후진적’인 환경을 벗어나 ‘과학적’이고 ‘근대적’인 농업과 축산 환경을 갖춰야 한다고 주장했다. 도시의 일본뇌염 창궐 문제 또한 도시 개발의 이면인 ‘변두리 지역’, 즉 빈민 주거지역의 위생 환경을 개선하여 '근대적'인 도시 환경을 갖추면 일본뇌염 문제가 해결될 것으로 보았다. 물론 이러한 시각이 정부의 공식 방역 정책에 곧바로 채택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체계적 방역이 부재한 상황에서 일본뇌염 발생을 환경의 ‘낙후’와 ‘후진성’에서 찾는 프레이밍은 살충 인프라와 감시 체계의 구축이라는, 보다 직접적인 과제를 부차적인 것으로 만드는 효과를 지녔다. 뇌염의 원인이 ‘근대화의 미비’에 있다면, 그 해결 역시 장기적이고 전반적인 개발의 문제와 연동될 수 밖에 없으며 당장의 방역 인프라 구축 수준에서는 해결될 수 없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근대화 담론은 일본뇌염 방역의 현실적 대안이라기보다는 체계적 방역의 부재가 지속되는 상황을 설명하고, 때로는 정당화하는 담론으로 기능했다.
1970년대 뇌염 예방 포스터
Figure 1. An encephalitis prevention poster in the 1970s
1970년대 보건사회부에서 발행한 뇌염 예방 포스터로, 모기향 피우기, 아이들이 자는 곳에 모기장 설치하기, 볕이 뜨거운 낮에 활동 자제하기 등의 예방수칙이 삽화로 그려져있다(대한민국역사박물관 소장).
체계적 방역의 부재는 방역의 책임을 국가가 아닌 가정으로 전가하는 방식으로 나타났다. 해방 후 공중보건사업과 감염병 관리에서 위생과 건강 유지는 줄곧 강조되었는데, 그것은 여성의 역할로 젠더화되어 선전과 교육이 이루어졌다(이임하, 2020: 279-286). 일본뇌염의 경우 아동이 주요 이환 대상이라는 역학적 현실이 이 젠더화를 특히 강하게 작동시켰다. 앞 절에서 살펴본 것처럼 입원 환자의 60% 이상이 3-15세 아동이었고(Hullinghorst et al., 1951; Chu, 1951), 아동 감염의 경우 경련, 마비, 사망 등 성인보다 예후가 심각했다(홍창의, 1962). 이러한 역학적 현실은 일본뇌염을 ‘어린이의 질병’으로 인식하게 했고, 방역의 일차적 책임을 아이를 돌보는 어머니에게 귀속시키는 논리로 이어졌다. 어머니에게는 집안의 고인 물 관리, 살충제 살포, 모기장 사용, 아이의 청결과 영양 관리에 이르기까지 포괄적인 책임이 부여되었다.21) DDT 살포로 대표되는 중앙 방역 정책이 실질적 효과를 거두지 못하는 상황에서 감염병 예방의 부담은 가정으로, 그리고 가정 내에서는 어머니에게 집중되었다.
이처럼 살충 중심의 방역은 외부 자원에의 의존, 농촌 환경에서의 구조적 한계, 그리고 체계적 인프라의 부재 속에서 반복적으로 한계를 드러냈다. 이러한 가운데 예방접종은 살충 방역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방역 수단으로 부상하였다. 이어지는 절에서는 백신의 도입과 예방접종의 확대가 살충 중심 방역의 한계를 어떻게 극복하고자 했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어떤 새로운 제도적 문제들이 드러났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4. 예방접종에 대한 기대와 과제
일본뇌염에 대한 지식이 축적되는 초기 단계부터 예방접종을 통한 면역력 획득의 중요성이 강조되었고, 살충 중심의 방역이 반복적으로 한계를 드러내면서 예방접종에 대한 기대는 한층 높아졌다. 그러나 살충과 예방접종이라는 두 방역 수단은 공통된 문제에 직면했다. 살충이 DDT 살포라는 기술적 수단만으로는 해결되지 않고 매개체 감시 체계와 방역 인프라의 구축을 요구했던 것처럼, 예방접종 역시 백신의 존재만으로 실현되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예방접종을 지속가능한 방역 수단으로 작동시키기 위해서는 백신의 안정적 생산과 분배, 접종 비용의 부담 방식, 품질 관리와 부작용 보상 체계에 이르기는 제도적 기반이 함께 갖추어져야 했다. 이 절에서는 일본뇌염 예방접종이 도입되고 확대되는 과정에서 이러한 제도적 기반이 어떻게 구축되어 갔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어떤 문제들이 반복적으로 드러났는지를 살펴본다.
한국에서 예방접종 시행의 초기 과정에서 가장 중심적인 역할을 한 것은 국립 방역연구소이다. 이 기관이 국내 백신 생산의 거점이 된 데에는 백신이라는 제제의 특성이 중요하게 작용했다. 백신은 화학적으로 합성되는 여타 약품과는 달리 보관이나 운송 과정에서 변질이 쉬운 생물학적 제제이기 때문에, 당국은 국외에서 생산된 백신의 수입에만 전량 의존하기보다 국내에 백신 생산 거점을 마련할 필요가 있었다. 생산된 백신의 저장과 운송에도 냉장 보관 시설이 필수적이었으므로, 생산에서 접종에 이르는 전 과정을 관리할 공적 기관의 역할이 요구되었다. 백신 생산에 필요한 경비 역시 당국의 몫이었다. 1954년 제정된 「전염병예방법」에서는 백신 생산에 필요한 경비를 국고에서 부담하기로 하였는데, 이는 곧 국립방역연구소에서 생산되는 백신이 당국의 예산에 의존하는 구조를 만들었다.22) 다만 이는 만약 당국이 백신 생산에 예산을 제대로 투여하지 않을 경우 백신 공급에 차질이 생기고, 예방접종이 제대로 시행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에서 앞으로의 난관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일본뇌염 예방접종은 국립방역연구소의 주도로 꽤 이른 시기부터 시도되었으나 쉽사리 지속되지는 못했다. 1949년의 일본뇌염 대유행 국면에서부터 국립방역연구소는 이를 일본뇌염으로 진단하고 장차 국내에서의 백신 생산 가능성을 내비쳤으며, 실제로 1950년 여름의 한 기사에서는 국립방역연구소에서 생산한 일본뇌염 백신을 보건소 및 공의를 통해 학령기 아동에게 접종하였다고 보도한다.23) 당시 미군에서 군사적 목적으로 일본뇌염 백신 개발을 시도하였으며 국립방역 연구소가 미국 측에 백신을 요청하기도 했다는 점을 고려할 때, 국립방역연구소의 백신 생산 역시 그러한 기술적 흐름 안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이삼열ㆍ김응용, 1953: 13-82; Halstead et al., 2018: 524-525). 그러나 예방접종은 1950년 이후 한동안 중단되었고, 일본뇌염 방역은 모기 방제 목적의 DDT 및 소독제 살포에 의존하게 되었다.
한국전쟁 이후에도 일본뇌염 예방접종이 다시 시작되었으나 이는 당국의 예산 부족 문제로 전국 단위로 확대되지 못했다. 1957-59년의 기사와 연구 문헌에서는 국립방역연구소가 미국 육군군의학교에서 분양 받은 바이러스주로 일본뇌염 백신을 제조하여 전라도 지역의 아동에 대하여 대규모 시범 접종을 실시하고, 백신의 효능을 관찰한 흔적이 드러난다(이병학ㆍ김경호, 1959: 34-38).24) 한 기사에서는 이 시범 접종의 결과가 “세계 어느 나라에도 유례 없는 좋은 성과”로, 세계보건기구에서도 관심을 가질 정도였다고 보도했다.25) 그러나 당국은 오히려 일본뇌염에 대한 1960년도 특별 예방접종 예산 7,000만환을 삭감하고, 다른 감염병 예산에서 일부를 유용하여 사용하게 했다.26)
이렇게 1950년대 내내 당국의 일본뇌염 예방접종이 지속적이지 않았던 이유로는 몇 가지 요인을 들 수 있다. 먼저, 1950년대 초반에는 일본뇌염 백신이 기술적으로 충분하지 못했다. 일본뇌염 백신은 1930년대 이래 여러 나라에서 개발이 시도되었으나 1950년대 초까지도 효능과 면역원성이 충분히 입증되지 못했고, 미군이 개발한 백신 역시 1952년에 활용이 중단되었다(Halstead et al., 2018: 524-525). 1950년대 후반에 이르러 시범 접종에서 일정한 효능이 확인 되었으나, 여전히 이를 전국적으로 확대할 예산과 생산 역량은 뒷받침 되지 못했다. 한국전쟁의 발발과 전후 재건의 상황 속에서 보건 당국의 예산과 행정 역량은 다른 급성 감염병의 대응에 보다 집중되었고, 일본뇌염 예방접종은 당국의 우선순위에서 밀려나 있었다.
1960년대 말에는 국립방역연구소가 꽤 안정적인 일본뇌염 백신 제조 기술을 확보하고 그 시행의 여러 측면에 관하여 연구를 수행하였다. 1966년 9월에는 일본에서 개발된 백신이 대만 등지에서 그 효과가 인정되었는데, 이 소식이 한국으로 전해지면서 1967년에 국립방역연구소가 이를 들여왔다.27) 국립방역연구소는 이를 활용해 전라도 지역의 아동 8만 명을 대상으로 시범 접종을 시행했고, 그 효능을 인정 받았다(김경호ㆍ백승복ㆍ장경식, 1967: 68).28) 국립방역연구소는 1968년부터 1970년까지 3년간 이 기술로 국내에서 자체 생산한 일본뇌염 백신의 대량 생산을 시도하고, 저장 시 백신의 효력 변화를 시험하며 저장 방식을 고안하였고, 직접 생산한 백신을 5,000여 명의 어린이를 대상으로 접종한 후 그 효과와 부작용을 측정하기도 했다(김경호ㆍ백승복, 1968: 55-72; 백승복ㆍ신영오, 1969: 131-136; 백승복ㆍ신진철ㆍ정의범, 1970: 135-138). 해당 백신을 활용해 전국적인 예방접종을 시행할 수 있다면 일본뇌염을 효과적으로 잠재울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해볼만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1970년부터 당국이 일본뇌염 백신 생산의 일부를 민간에 넘기고 일본뇌염 예방접종에 필요한 비용을 접종자가 부담하게 하면서 일본뇌염 예방접종은 오히려 새로운 난관에 봉착했다. 당국은 생산 시설과 예산 부족으로 각종 백신을 적기에 생산하는 데 어려움을 겪어온 끝에 백신 생산의 일부를 민간 제약 회사로 이관하기로 했는데, 그중 하나가 일본뇌염이었던 것이다.29) 실제로 극동제약(현 녹십자), 동신제약 등의 민간 제약회사에서 생산한 일본뇌염 백신이 시장에 등장한 반면, 국립방역연구소의 백신 생산량은 이전보다 훨씬 낮은 수준으로 유지되었다(녹십자, 1997: 27-29).30) 이러한 변화는 곧 국립방역연구소에서 생산한 백신을 활용해 학교나 보건소 등을 통해 무료로 이뤄지던 일본뇌염 예방접종이 민간 제약회사가 생산한 백신을 활용해 일선 병ㆍ의원에서 유료로 시행됨을 의미했다. 물론 이 시기에도 몇몇 일본뇌염 유행 위험 지역 일부에 대해서는 당국이 무료로 예방접종을 시행하였지만 그 규모는 크지 않았고, 대부분의 일본뇌염 백신접종은 개인에게 맡겨졌다.31)
이러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일본뇌염 백신의 공급은 쉽사리 안정되지 못했으며, 당국은 백신의 역가와 부작용 우려를 통제하는 데에도 어려움을 겪었다. 1977년의 한 기사에서는 당시 뇌염 백신을 생산하던 동신제약ㆍ녹십자ㆍ동아제약 등의 업체가 전년보다 생산량을 20% 늘려 백신 공급 물량을 확보해 두었으나, 접종료가 높아 일본뇌염 예방접종이 현격하게 줄어들면서 백신의 소비가 줄어들어 재고가 남아돌고 있다고 보도했다.32) 그런가하면 1980년에는 오히려 일본뇌염 백신의 재고가 부족해 일본에서 백신을 수입하기도 했는데, 이는 생산량이 늘었음에도 접종 수요가 그 이상으로 증가한 결과였다. 이렇게 불과 수 년 사이에 재고 과잉과 부족이 번갈아 나타난 것은 당시 민간 기업의 백신 생산이 실제 접종 수요와 체계적으로 연동되지 못한 채 시장 상황에 따라 불안정하게 움직였음을 보여준다. 1978년에는 국립방역연구소에서 당시 여러 업체에서 생산하고 있던 일본뇌염 백신을 감정한 결과 역가 미달로 예방 효과가 현저하게 낮고 부작용 우려가 있다고 판단하여 전량 수거 및 사용 금지 명령을 내리기도 했는데, 이는 다시 당해년도의 백신 공급에 차질을 야기했다.33) 당국이 백신 생산은 민간에 이관하더라도 품질 관리와 검정 체계는 정비해야 했으나, 그러한 체계가 충분히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민간 생산이 확대된 결과였다.
접종 비용의 개인 부담 역시 일본뇌염 예방접종의 접근성을 떨어뜨렸다. 당국이 예방접종에 필요한 비용을 접종자가 부담하게 하면서, 예방접종을 위해서는 개인이 일선 병ㆍ의원에 방문해 백신 구매 비용은 물론 별도의 접종료를 지불해야 했다. 1970년 당시 당국은 뇌염 예방접종료를 220원으로 지정했으나, 일선 병원에서는 수수료를 받는다는 명목으로 정부 지정가의 거의 네 배에 달하는 800원에 접종하였다.34) 학교에서의 예방접종 역시 당국이 백신을 공급한 몇 몇 경우를 제외하고는 학교에서 개별 가정이 별도의 비용을 내게 하고 학교가 자체적으로 백신을 구매하고 교의(校醫)나 양호교사가 예방접종을 하게 했다.35) 전문가들은 정부가 각 시도 보건소를 통해 실비로 전국 아동에게 접종하게 하지 않는다면 이익을 취하려는 의사들을 막을 수는 없으며, 특히 뇌염 주요 발생 지역으로 꼽히는 농촌에서 예방접종률을 높이기란 불가할 것이라며 우려를 표했다.36) 언론에서도 농어촌이나 도시의 가난한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뇌염 접종을 시키지 못해 “감염의 공포 속에서 나날을 보”내고 있다는 우려를 제기했다.37)
접종 방식과 제도적 기반의 문제도 있었다. 이전에는 보건소나 학교를 통한 집단 접종이 주가 되었으나, 1970년대에 개인이 직접 병원을 방문하여 예방접종을 받는 개인 접종 방식이 점차 증가하면서 예방접종 시기의 파악, 병원의 선택과 방문, 비용 마련 등의 많은 요소가 개별 가정의 몫으로 남겨졌다. 더욱이 이 시기까지 일본뇌염 예방접종은 법적 의무가 아니었는데, 일본뇌염 예방접종이 의무화된 것은 천여 명이 넘는 감염자가 발생하고 백여 명의 사망자가 나온 1982년의 대유행 이후의 일이었다.38) 생산의 불안정, 비용 부담의 전가, 개인 접종으로의 변화, 그리고 의무접종의 부재가 겹치면서 보건소의 일본뇌염 예방접종 실적은 해마다 크게 변동했고, 예방접종을 통한 일본뇌염 방역이라는 목표는 안정적으로 실현되지 못했다. 그 결과 국내 일본뇌염 백신 접종은 1980년대 초까지도 목표치에 턱없이 모자라는 수준을 기록했다. <표 1>39)에 따르면 1970년대 내내 당국이 시행한 일본뇌염 예방접종은 전체의 5%를 넘지 못했고, 1980년이 되어서야 겨우 5.1%를 기록했다.40)
1966-95년 연도별 일본뇌염 환자 보고예와 치사율 및 예방접종률
Table 1. Annual Reported Cases, Case Fatality Rate, and Vaccination Coverage of Japanese Encephalitis in South Korea, 1966-1995
일본뇌염 예방접종이 폭 넓게 시행되지 못하는 상황에서 당국은 여전히 모기 퇴치의 중요성을 강조할 수밖에 없었다. DDT 등의 살충제를 살포하거나 모기가 서식하며 알을 낳을 수 있는 물 웅덩이를 메우고 모기장을 치고 자야 한다는 권고가 1970년대에도 여전히 등장한 것이다.41) 1950년대에는 미군 등의 원조로 DDT를 다량 확보할 수 있었던 것과 달리, 이 시기에는 그러한 원조 물품마저도 줄어들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전보다 상황이 개선되었다고 할 수도 없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해충구제사업은 허울”뿐이고 “예방접종을 통한 방역사업마저도 소극성을 면치 못하고 있”는 가운데 정부의 일본뇌염 대책이 예방보다는 긴급 대응에 급급하다는 비판이 계속해서 제기되었다.42) 보건당국에 대한 신뢰도 땅에 떨어졌다. 몇몇 기사에서는 “뇌염 의심 환자의 혈청 검사를 통해 일본뇌염 진단 및 공표를 맡고 있는 국립방역연구소가 고의적으로 일본뇌염 통보를 늦췄다”거나 “환자 수를 줄여 발표했다”는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43)
이렇게 1970년대까지도 당국이 일본뇌염 예방접종에 적극적이지 않았던 데에는 일본뇌염이 갖는 방역상의 특수성이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뇌염은 감염 시 어린이에게 심각한 신경학적 후유증을 남길 수 있다는 점에서 사회적 관심은 높았으나, 당국의 입장에서는 대응이 쉽지 않은 감염병이었다. 모기 매개 감염병인 동시에 돼지가 증폭숙주로 기능하는 인수공통감염병이라는 특성상 예방접종과 매개체 통제를 병행해야 했고, 어느 한쪽만으로는 뚜렷한 성과를 기대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결핵이나 말라리아처럼 WHO 등 국제기구로부터 지속적인 자원 지원이 이루어진 감염병과 달리, 일본뇌염에 대한 외부 지원은 일회성이거나 간접적인 수준에 그쳤다. 또한 장티푸스나 콜레라 등의 급성 감염병이 여전히 방역의 우선순위를 차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상대적으로 치사율이 낮은 일본뇌염에 한정된 예산을 투입하는 것은 당국에게 우선적인 과제로 여겨지지 않았던 것이다.
일본뇌염 예방접종에 대한 당국의 기조가 바뀐 것은 1982년, 일본뇌염 대유행이 다시 찾아온 이후의 일이었다. <표 1>에 따르면 1982년에는 무려 1,197명의 환자가 발생하고 그 중 40명이 사망하는 대유행이 발생했다. 이는 1968년의 1,226명 이래 처음으로 천백 여명의 환자 수를 기록한 것이었고, 사망자 역시 1973년 이후 가장 많은 수치였다. 당시 여러 기사에서는 당국의 일본뇌염 방역 수준이 15년 전 수준으로 후퇴한 것이라며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고, 국가 차원의 예방접종 확대 사업에 대한 목소리가 높아졌다. 당국은 뒤늦게 일본뇌염 예방접종을 의료보험에 포함시키고 취약 지역 영세민 자녀에 대한 무료 접종을 확대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44)
당국의 정책적 변화와 함께 민간에서도 일본뇌염 예방접종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면서 예방접종률은 크게 상승했는데, 1982년에는 45.7%, 1983년에는 절반을 넘긴 59.3%를 기록했으며 1980년대 중반부터는 90% 후반대를 기록하기도 했다. 접종률이 상승하자 1980년대 중반부터 일본뇌염 감염자 수는 한 자리 수를 기록했다. 그 영향을 정확히 측정하기는 어렵지만, 큰 폭의 접종률 상승은 일본뇌염 감염의 급격한 감소를 동반했다. 1984년에는 단 한 건의 일본뇌염도 발생하지 않는 “뇌염 없는 해”를 기록했다.45) 1985년부터는 일본뇌염 예방접종의 주요 대상이라 할 수 있는 3-15세 전체 인구에 대하여 예방접종을 실시하게 되었는데, 이 역시 예방접종률 상승에 기여했다(이종구, 2000: 165).
물론 1980년대 중반 이후 일본뇌염이 급감한 것을 예방접종만으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이는 인간에 대한 예방접종률 상승은 물론 돼지 예방접종의 확대, 매개 모기 서식 환경의 변화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일본뇌염과 같은 인수공통감염병의 방역은 인간에 대한 단일한 기술적 개입만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임신한 돼지가 일본뇌염에 감염될 경우 유산이나 사산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아 농가에서는 돼지용 일본뇌염 백신에 대한 관심이 높았는데, 1970년대에 일본뇌염 백신이 개발되면서 돼지에 대한 일본뇌염 예방접종이 크게 확산되었다(탁동섭, 1996).46) 농수산부와 각 시도에서도 돼지 사산 방지를 위해 접종을 독려했으며, 농민들 역시 일본뇌염으로 인한 경제적 손실을 막기 위해 이에 적극적으로 동참했다. 농촌에서의 농약 사용이 증가하면서 매개 모기 유충의 서식지가 줄어든 것도 일본뇌염 감소의 또 다른 요인으로 지적되었다.47)
한편, 인간에 대한 일본뇌염 예방접종률의 상승은 또 다른 문제를 가져왔다. 이는 예방접종과 그에 사용되는 백신이 “안정적인 지위를 획득하고 있는 기술이 아닌, 첨예한 논쟁 속에서 형성되어가고 있는 기술”임을 보여주는 대목이다(정준호, 2023: 120). 일본뇌염 예방접종자의 수가 증가하면서 백신 부작용 문제가 제기된 것이다. 비슷한 시기에 DPT 백신과 장티푸스 백신 등에 대한 부작용 우려가 사회적으로 높아지면서 예방접종의 안전성에 대한 대중의 경각심이 커져있던 가운데, 1990년 여름 한 개인병원에서 일본뇌염 예방접종을 받은 3세 아동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한 것이다(정준호, 2023).48) 이 사고에 대해서는 ‘예방 접종에 사용된 백신에는 전혀 이상이 없으며 접종자의 특이 체질에 의한 사망’이라는 결론이 내려졌으나, 사망한 아동의 가족들은 해당 아동이 이전에도 같은 병원에서 일본뇌염 예방접종을 받았으나 별다른 이상이 없었다며 반발했다.49) 몇년 간 일본뇌염 감염자 수가 최대 세 명을 넘지 않았고 사망자 수 역시 1984년 이후로는 0명을 기록하고 있는 상황에서, 오히려 예방접종 부작용으로 의심되는 사망자가 발생하는 모순적인 상황이었다.
1994년 5월 23일, 서울의 한 개인병원에서 예방접종을 받은 아동 두 명이 며칠 간격으로 사망하면서 일본뇌염 백신 부작용에 대한 불안감은 일파만파로 퍼져나갔다. 이번에는 한 병원에서 같은 날 예방접종을 받은 아동이 두 명 연이어 사망한 사고였기 때문에 1990년과 달리 피접종자의 체질을 문제 삼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50) 이 사고 이후 3주 간 전국 곳곳에서 일본뇌염 부작용으로 의심되는 사례가 보고되기도 했는데, 당국은 5월 23일의 사고에 대해서는 백신 자체의 부작용임을 인정 하였으나 이후 3주간 보고된 다른 의심 사례들에 대해서는 예방접종 부작용을 부인했다.51) 그러나 일본뇌염 예방접종에 대한 대중들의 불안은 쉽사리 잠재워지지 않았고, 한동안 예방접종을 기피하는 현상이 나타나기도 했다. 1980년대 후반 90% 후반대까지 올랐던 접종률은1994년에 79.3%, 1995년에는 84.7%을 기록했다[표 1].
당국으로서는 부작용 사고로 인해 예방접종 자체에 대한 불신 증가와 접종률 감소를 막기 위한 대책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당국은 이 사고의 원인을 밝히기 위해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수사를 의뢰하였고, 국회 보건사회위원회에서는 예방접종 부작용에 대한 피해 보상을 제도화할 것을 요구하였다(정준호, 2023: 138-140). 그 결과 1994년의 일본뇌염 부작용 사고는 「전염병예방법」의 개정을 이끌어내는 계기가 되었다. 1995년 1월 1일부터 시행된 「전염병예방법」 54조의 2(예방접종으로 인한 피해에 대한 국가 보상)에서는 “예방접종을 받은 자가 그 예방접종으로 인하여 질병에 걸리거나 장애인이 된 때나 사망한 때”에 보상을 할 것을 규정하고, 이를 예방접종심의위원회가 판단하도록 하였다.52)
해방 이후 한국에서 예방접종은 일본뇌염을 해결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기대되어 왔으나, 백신의 생산과 분배, 비용 부담, 품질 관리, 부작용 보상의 체계가 함께 구축되어 가는 과정 속에서 비로소 방역의 수단으로 기능할 수 있었다. 이는 살충 중심의 방역이 외부 원조와 매개체 통제 인프라에 의존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예방접종이라는 기술적 수단 역시 그것을 실제로 작동시키기 위한 제도적 기반 없이는 방역의 성과로 이어질 수 없었음을 의미한다. 특히 한국의 방역 인프라가 어느 정도 갖춰진 198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에 일어난 일본뇌염 예방접종률의 상승, 발생률의 급감, 부작용 논란은 한 질병에 대한 방역이 특정 기술의 도입만으로 손쉽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며, 이는 앞으로도 그러하리라는 교훈을 준다. 결국 해방 이후 한국의 일본뇌염 방역사는 외부에서 도입된 지식과 기술 그 자체보다, 그것을 뒷받침하는 제도적 기반의 구축과 그 비용의 분배가 방역의 성패를 좌우했음을 보여주는 역사이다.
5. 나가며
이 글은 해방 이후 1980년대까지 한국의 일본뇌염 연구와 방역의 역사를 세 축으로 살펴보았다. 첫째, 일본뇌염에 관한 지식의 생산과 방역 수단의 개발은 처음부터 초국가적 네트워크에 의존하여 이루어졌다. 미군을 매개로 한 의학연구 네트워크, WHO 말라리아 퇴치 사업의 인적ㆍ물적 자원, 미네소타 프로젝트를 통한 한국인 연구자의 유학 경험 등이 한국 내 일본뇌염 연구의 토대를 형성했으며, 일본뇌염 방역을 위해 도입된 DDT나 백신 역시 국내에서 독자적으로 개발된 것이 아니라 외부로부터 도입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네트워크는 본질적으로 미군의 군사적 필요와 국제보건의 의제에 의해 구조화된 것이었으며, 한국의 보건의료 인프라를 내실 있게 강화하는 방향으로는 작동하지 않았다. 둘째, 살충 중심의 방역이 반복적으로 한계를 드러내는 가운데 일본뇌염 발생을 농촌의 ‘후진성’과 결부시키는 담론이 형성되었고, 이는 보건 인프라의 구조적 결함에서 시선을 돌리는 효과를 낳았다. 셋째, 예방접종이 살충을 대체할 방역 수단으로 기대를 모았으나, 백신 생산의 민간 이관, 접종 비용의 개인 부담 전환, 집단 접종에서 개인 접종으로의 변화, 의무 접종의 부재가 겹치면서 예방접종 체계의 안정화에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1980년대 중반 이후 예방접종률의 상승과 함께 유행이 급감했지만, 백신 부작용이라는 새로운 문제가 부상하면서 예방접종 피해 보상제도의 도입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이러한 역사는 일본뇌염의 ‘극복’이 특정 기술의 등장에 의한 선형적 사건이 아니라 초국가적 연구 네트워크, 공공 보건 인프라의 형성과 한계가 교차하는 복합적 과정이었음을 보여준다.
이 글에서는 해방 이후부터 50년 가까운 시간 동안 일본뇌염의 역사적 변화를 다루었지만, 이는 완결된 역사가 아니다. 최근 당국의 발표에 따르면 2000년대까지 한 자리수를 유지해오던 일본뇌염 감염자 수가 2010년에 26명으로 껑충 뛰었고, 2015년에는 40명, 2019년에는 34명을 기록하였다.53) 주로 아동과 청소년의 감염이 문제가 되었던 과거과 달리, 최근에는 어린 시절 예방접종을 받지 않았거나 접종 후 시간이 경과하면서 면역이 약해진 중장년층에서 환자가 집중적으로 발생하고 있다(질병관리청, 2023: 338-359). 최근의 기후변화 역시 일본뇌염의 유행 양상을 변화시키는 또 다른 요인이다. 지구 온난화로 고온 다습한 기후 환경이 확대되면서 일본뇌염 매개 모기의 번식 및 성장이 왕성해짐에 따라 일본뇌염이 재유행할 수 있다는 우려가 높아지고 있다(이화영ㆍ박영준ㆍ박옥, 2015; 양동군, 2022). 이는 일본뇌염이 한국 사회에서 ‘과거의 질병’이 아니라 여전히 변화하는 생태적ㆍ사회적 조건 속에서 새로운 방역의 과제를 제기하는 현재의 문제임을 시사한다. 그 과제에 대한 응답은 이 글이 살펴본 역사적 교훈, 즉 기술만이 아니라 그 기술을 작동시키는 체계 전반을 함께 사유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할 것이다.
Notes
1962년 도쿄에서 열린 WHO 일본뇌염 세미나에서 ‘일본 B형 뇌염 바이러스’에서 ‘B형’을 삭제한 ‘일본뇌염(Japanese Encephlitis)’으로 칭하기로 결정하였다.
전종휘는 훗날 회고에서 1935년에 유행성뇌막염으로 임상 진단되어 입원한 환자들을 관찰하면서 ‘당시 일본에서 B형 일본뇌염이 유행한다는 소식을 듣고 이에 유의하고 있었고, 조선의 다른 지역에서도 같은 병증이 발생했다는 풍문도 들은 바 있어 일본전염병학회지에 “일본뇌염이라고 고려되는 증례”로 발표하였다’고 밝혔다(대한감염학회, 2011: 186). 전종휘가 실제로 발표한 논문은 『滿鮮之醫界』에 1936년에 발표된 昨夏京城に發生ぜる流行性贈炎, 所謂夏季腦炎に就て」로, 그는 이 논문에서 자신이 관찰한 증례를 ‘1924년 일본에서 유행했던 뇌염B형과 동일한 질환으로 판단했다’고 서술하였다.
이 연구를 진행한 세이빈 등의 학자들은 군산에서 발병하여 사망한 19세 미군병사의 뇌와 척수 조직에서 분리해낸 바이러스가 기존의 일본뇌염 바이러스와 동일하다고 확인하면서 이를 ‘한국 바이러스(Korea virus)’로 명명하였다(Sabin et al., 1947: 362).
「무서운 하기 뇌염 유행」, 『조선일보』, 1949년 9월 4일, 2면.
「뇌염 기내에 만연」, 『동아일보』, 1949년 9월 7일, 2면.
전종휘는 일본뇌염으로 사망한 환자를 부검해 국내 최초로 일본뇌염 바이러스를 분리하는 데 성공했으며, 1949년 대한의학협회 추계학술대회에서 「이번 유행한 전염성뇌염의 임상역학적 연구」라는 제목으로 특별 강연을 진행하였다고 회고한다. 전종휘가 이후에도 일본뇌염 연구를 이어가 ‘뇌염박사’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전종휘, 1994).
국립방역연구소는 현 질병관리청의 전신으로 1912년에 조선총독부 경찰국 위생과 세균실로 시작해 1945년 8월 15일 해방 직후 조선방역연구소로 개칭하였다가, 1946년 2월부터 국립방역연구소가 된다. 1949년 12월 7일부터는 중앙방역연구소로 이름을 바꾸었다가, 1959년 12월 다시 국립방역연구소로 개칭한다. 1963년에 국립화학연구소, 국립생약시험소와 통합해 국립보건원이 되며, 1967년 국립보건연구원으로 개칭했다가 1981년에 다시 국립보건원으로 개칭하였다. 이 글에서는 편의상 국립방역연구소로 통칭한다. 국립방역연구소 명칭의 변천에 관해서는 이준상·김옥진(2000)을 참고.
「개가 드높은 우리 방역진 뇌염 병원균을 수발견」, 『조선일보』, 1949년 9월 16일, 2면.
World Helath Organization, Report of the WHO/UNKRA Health Planning Mission in Korea (Geneva: World Helath Organization, 1952), p. 38; 보건사회부, 「하기 방역대책에 관하여」, 국무회의 상정 안건철, 1959. 6. 16, 12-13쪽.
「뇌염과 방역과 우리의 태도, 당로자들은 무엇을 어떻게 해왔는가」, 『평화신문』, 1958년 9월 4일, 1면; 「이래서 예방책도 못 세운다, 내동댕이 친 뇌염 통계, 일억 여환 들인 방역비가 무색할 지경」, 『평화신문』, 1958년 11월 6일, 3면.
「D.D.T 도착」, 『조선일보』, 1949년 9월 8일, 2면; 「막자, 무서운 뇌염 치료 잘하면 겁낼 것 없다」, 『경향신문』, 1949년 9월 12일, 2면.
「전율! 각지 뇌염 진성으로 판명」, 『동아일보』, 1949년 9월 12일, 2면.
「뇌염 유행과 예방」, 『조선일보』, 1952년 9월 6일, 1면.
「부산 뇌염 방역에 이상」, 『경향신문』, 1952년 9월 13일, 2면.
「금년 것은 독성일본뇌염」, 『경향신문』, 1958년 8월 23일, 4면.
「[뇌염대책] 환절기에 처한 위생좌담회(2): 모기를 박멸하자 DDT 공중살포가 제일 효과」, 『마산신문』, 1955년 8월 31일, 1면.
「시급한 뇌염 박멸대책」, 『경향신문』, 1969년 6월 27일, 2면.
「뇌염 어떻게 막나」, 『동아일보』, 1968년 7월 16일, 6면.
「여름의 불청객… 뇌염」, 『조선일보』, 1968년 7월 14일, 7면.
「농약과 뇌염」, 『조선일보』, 1973년 6월 14일, 5면.
「충분한 영양 공급을… 여름철 어린이 보건을 위한 어머니 노트」, 『매일경제』, 1968년 7월 16일, 3면.
「전염병예방법」(법률 제308호), 1954.2.2. 제정, 1957.2.28. 시행.
「개가 드높은 우리 방역진 뇌염 병원균을 수발견」, 『조선일보』, 1949년 9월 16일, 2면; 「뇌염 예방주사 7월부터 일제 실시」, 『경향신문』, 1950년 6월 15일, 2면.
「뇌염 예방약 처음으로 접종」, 『경향신문』, 1957년 9월 7일, 3면; 「뇌염 효과 본 예방접종」, 『동아일보』, 1959년 11월 12일, 3면; 「하기 방역 대책 수립」, 『조선일보』, 1957년 4월 16일, 2면.
「뇌염 예방 왁찐 접종 좋은 성과」, 『조선일보』, 1959년 11월 17일, 3면.
「뇌염 대책 올해도 빈탕 예산 마련 전혀 없어」, 『동아일보』, 1961년 3월 8일, 3면.
「주목되는 뇌염 백신의 예방 효력」, 『조선일보』, 1966년 9월 6일, 3면.
「뇌염 예방약을 기증 대판의대서 8만 cc」, 『동아일보』, 1967년 3월 20일, 3면; 「전남북에 시범 접종 비교 분석」, 『경향신문』, 1970년 3월 2일, 7면.
「제약회사에서 예방백신 제조」, 『경향신문』, 1967년 3월 2일, 7면.
「GOOD WILL: 내일의 건강을 창조하는 기업 동신제약은 예방의약품 전문메이커입니다.」, 『조선일보』, 1975년 7월 29일, 7면.
「만오천 국교생 대상 뇌염 예방접종 실시」, 『동아일보』, 1971년 6월 10일, 8면; 「어린이 뇌염 방역에 허점」, 『동아일보』, 1973년 7월 17일, 7면.
「뇌염백신 재고 쌓여 메이커들 울상」, 『매일경제』, 1977년 8월 27일, 7면.
「보건원 감정 뇌염 백신도 역가 미달」, 『동아일보』, 1978년 7월 29일, 7면.
「서민 울리는 폭리 뇌염 백신」, 『경향신문』, 1970년 7월 1일, 7면.
「어린이 뇌염 접종 말썽 시 교위」, 『동아일보』, 1971년 7월 8일, 8면.
「서민 울리는 폭리 뇌염 백신」, 『경향신문』, 1970년 7월 1일, 7면.
「맹점 드러낸 방역 대책」, 『동아일보』, 1974년 7월 15일, 3면.
「뇌염 비상... 전국 천 명 넘어」, 『경향신문』, 1982년 9월 10일, 11면.
이 표에서 ‘-’로 표시한 곳은 통계 자료가 없는 것을 의미하며, “접종 목표 도즈”는 3~15세 연령층에 예방접종 시 필요한 백신의 양(도즈)를 의미한다. 처음에는 1차 접종 시 2회 접종하고 매년 1회 추가 접종하도록 하였으나, 1995년부터는 2년에 한 번씩 추가 접종하게 하였다.
물론 이 수치는 대한소아과학회가 1997년에 「보건복지부 급성전염병 통계연보」 및 「보건복지부 백서」를 바탕으로 연도별 일본뇌염 환자 보고예와 치사율 및 예방접종률을 정리한 것이므로, 민간 병의원에서 개인 비용으로 이루어진 예방접종까지 포함하면 실제 예방접종률은 이보다 높았을 것이다. 그러나 민간 예방접종에 대한 체계적인 집계 자체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은 당국이 예방접종의 실시를 민간에 맡기면서도 그 현황을 파악하고 관리할 체계를 갖추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민간 병원에서 실시되는 일본뇌염 예방접종까지 전수조사가 시작된 것은 전국예방접종률 조사가 시작된 2015년부터의 일이다.
「가능한 일은 다하자 -점증하는 뇌염 방지책을 촉구한다-」, 『조선일보』, 1974년 9월 15일, 2면; 「뇌염 대책에서 보는 보건행정 부재」, 『조선일보』, 1971년 9월 2일, 2면; 「뇌염 모기 박멸 작전」, 『동아일보』, 1977년 8월 27일, 7면; 「무방비… 뇌염 방역」, 『매일경제』, 1971년 8월 5일, 7면.
「맹점 드러낸 방역 대책」, 『동아일보』, 1974년 7월 15일, 2면; 「방역행정에 허점」, 『동아일보』, 1972년 7월 19일, 7면; 「여름철 건강 (4) 허술한 방역」, 『동아일보』, 1974년 7월 18일, 4면.
「국립보건원 「뇌염」 통보 늑장 진성 밝히고 팔일 째 쉬쉬」, 『동아일보』, 1972년 10월 9일, 7면; 「뇌염 대책에서 보는 보건행정 부재」, 『조선일보』, 1971년 9월 2일, 2면; 「뇌염 발생 통보 받고도 발표 우물쭈물」, 『조선일보』, 1976년 9월 12일, 7면.
「뇌염 비상… 전국 천 명 넘어」, 『경향신문』, 1982년 9월 10일, 11면.
「올해 뇌염 발생 한 건도 없어」, 『조선일보』, 1984년 9월 14일, 11면.
「각고의 7년.. 인내의 결실 – 돼지 생독 백신 개발한 농진청 가축위생연 티임」, 『동아일보』, 1976년 5월 12일, 6면; 「뇌염 예방 「생독 백신」 개발」, 『조선일보』, 1976년 5월 12일, 7면; 「돼지의 일본뇌염 예방 생독 백신을 개발」, 『조선일보』, 1972년 11월 30일, 7면.
「뇌염이 줄었다」, 『조선일보』, 1976년 10월 17일, 7면; 「뇌염 이호왕 교수에 듣는다」, 『동아일보』, 1972년 9월 5일, 5면.
DPT백신은 디프테리아ㆍ파상풍ㆍ백일해 혼합백신을 의미한다. 1960-90년대 한국에서 DPT 백신, 장티푸스 백신, 일본뇌염 백신 부작용에대한 논쟁과 예방접종 피해 보상제도의 형성 과정에 대해서는 정준호(2023)를 참고.
「뇌염 예방주사 맞고 세 살 어린이 숨져」, 『한겨례』, 1990년 5월 31일, 11면.
박노승ㆍ이재국ㆍ차준철, 「”뇌염접종 공포” 또 2명 중태」, 『경향신문』, 1994년 6월 1일, 23면; 최재영, 「뇌염 접종 어린이 중태」, 『경향신문』, 1994년 5월 24일, 23면.
안종주, 「처방전 못 찾는 일본뇌염 백신 파문」, 『한겨례』, 1994년 6월 10일, 9면.
「전염병예방법」(법률 제4777호), 1994.8.3. 일부개정, 1995.1.1. 시행.
질병관리청,「2021 감염병 감시 연보」 (질병관리청, 20022), 12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