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과 ‘혁명’ 사이의 보건: 보건사업평가조사사업과 한국 보건의 ‘자립’, 1960~1962†
Health between Revolution and Military Coup : The Public Health Evaluation & Planning Program and the Making of ‘Self-sufficient’ Korean Public Health, 1960—19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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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This article analyzes the formation of the development-oriented path of the South Korean healthcare system in the 1960s as a complex outcome of shifts in domestic politics and foreign aid. To this end, it focuses on the Public Health Evaluation & Planning Program (1960—1962), a program that coincided with the intersection of political upheavals—the April Revolution and the May 16 military coup—and a transition in U.S. aid policy to Korea.
The April Revolution led to the collapse of the Syngman Rhee regime, which had prioritized defense and development, allowing a welfare state discourse to emerge. Popular aspirations unleashed by the revolution created cracks in the ideological landscape of the 1950s, which had been dominated by the defense-and-development-first policy. From a perspective advocating the harmonization of welfare and the economy, Korean health experts and the USOM Health and Sanitation Division strongly argued for an expanded governmental role in healthcare after the revolution. This effort materialized as the Public Health Evaluation & Planning Program, a common preliminary step for long-term health planning in the international health field at the time.
The military junta, which seized power through the coup a year after the revolution, sealed the cracks created by the revolution. They adopted an explicit development-first policy and focused on economic development, grounded in the logic of subsuming welfare within the framework of economic growth. Concurrently, aiming to reduce the economic burden of aid, the U.S. government rapidly curtailed public health assistance—the material foundation of Korea’s healthcare system. Furthermore, amidst the reorganization of aid agencies, the USOM Health and Sanitation Division—which had emphasized the parallel pursuit of welfare and development—was dismantled. USOM began to promote the establishment of a development-oriented healthcare system in Korea. The Korean healthcare system rapidly achieved ‘self-sufficiency’ from the U.S. but without the intended expansion of the government’s role. This dual shock of the early 1960s—the military coup and the shift in U.S. aid policy—functioned as a critical juncture, locking the Korean healthcare system into the development-oriented path.
1. 머리말
1960년대 초반은 한국현대사 연구에서 분기점으로 여겨진다. 경제개발 중심의 ‘근대화’ 프로젝트가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는 점에서, 1960년대 초반은 일반적으로 시기 구분의 기점이 된다. 이러한 경향은 의료사 연구에서도 마찬가지다. 대표적인 의료사 통사인 『한국의학사』와 『한국현대의료사』는 각기 ‘경제개발과 의료환경의 변화’, ‘경제성장과 의료’라는 제하에서 1961년을 기준으로 시기를 나눈다. 여기서 보건 분야는 “산업화라는 시대의 구호에 보조를 맞추어야” 했으므로 가족계획, 기생충박멸, 결핵 퇴치 등 경제개발을 위한 일부 사업을 중심으로 재편되었다고 느슨하게 설명된다(여인석 외, 2018: 320; 박윤재, 2021). 이런 설명에서 산업화를 위한 보건의료체계의 등장은 마치 자연스러운 것처럼 제시되며, 제2공화국 시기는 배제되어 있다.
하지만 개발우선론적 보건 정책에 대해 “대중을 희생하여 이루어질 산업재건은 도대체 누구를 위한 것인가?”(양재모, 1956: 42)라며 비판하는 모습이 보여주듯, 개발을 위한 보건에 모두가 자연스럽게 동의한 것은 아니었다. 특히 4월 혁명 직후에는 복지국가 건설이 화두가 되며 보건에 대한 강조가 힘을 얻었고,1) 주한 미국원조사절단(United States Operations Mission in Korea, 이하 USOM) 보건위생국(Health and Sanitation Division) 역시 “경제적 건전성이란 것은 건강 문제를 포함한 복지 사회정책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며 한국 정부의 보건 역할 확대를 촉구했다(Shelamer, 1960). 이처럼 1960년대 초반은 개발우선론과 일종의 사회개발론인 복지ㆍ개발 병행론의 두 흐름이 경쟁하던 시기였다. 따라서 1960년대 개발 지향적 보건의료체계의 등장은 보다 복잡하고, 역사적인 과정으로 이해될 필요가 있다.
이 글의 목적은 1960년대 초반 한국 보건의료체계의 개발 지향적 경로가 설정되는 과정을 밀도 있게 이해하는 데 있다. 이를 위해서는 국내 정치와 경제, 그리고 원조의 변화를 의료와 연결시켜 1960년대 초반의 변화를 파악해야 한다. 즉 한국전쟁이 낳은 정치경제적 구조 위에서, 4월혁명부터 5.16군사쿠데타로 이어지는 정치적 격변, 그리고 미국의 대한원조 전환에 주목해야 한다. 전후 과도한 국방비가 한국 경제를 짓누르는 상황 속에서 이루어진 정치와 원조에서의 변화는 보건을 포함한 한국 ‘근대화’의 틀을 형성했기 때문이다. 정치적 변화는 한국의 복지 논의와 실천에 영향을 끼쳤고, 미국의 원조 정책 전환은 의료 물자 지원의 중단으로 이어져, 한국 정부가 원조에 의존하던 보건의료 구조를 탈피해야 하는 새로운 상황을 강요했다.
1960년을 전후한 시기 한국에서의 정치ㆍ경제, 원조, 의료의 관계는 그간 종합적으로 연구되기 보다, 정치-의료(신창훈, 2024), 혹은 원조-의료 관계(한봉석, 2017: 183-189)와 같이 개별적으로 연구되었다. 1960년대 후반~1970년대 한국의 사회개발 논의와 지역사회보건사업을 분석한 연구는 국내의 개발 논의와 국제원조를 의료와 연결시켜 분석했다는 점에서 많은 참고가 된다(정다혜, 2024: 64-93). 이 연구는 1960년대 후반 보건의료의 확대를 강조하는 보건의료계의 대안적 흐름이 경제성장을 우선시하는 한국의 주류 사회개발론에 균열을 만들었으며, 이것이 대안적 보건의료체계를 지향한 지역사회보건사업으로 이어졌음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이 연구는 사회개발론이라는 용어가 사용되고, 정책적으로 다루어지기 시작한 1960년대 후반 이후에 주목하다 보니, 경제 개발을 우선시하는 한국적 사회개발론이 어떻게 1960년대 후반에 등장하여 주류를 차지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못했다. 개발우선론적인 사회개발론의 등장은 1960년대 초반의 변화, 즉 4월혁명의 영향, 쿠데타 이후 박정희 정권의 국가발전 기획, 그리고 미국 대한원조의 변화와 얽혀있는 문제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이 글은 기술원조2)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보건사업평가조사사업(Public Health Evaluation and Planning Program, 이하 평가조사사업)’을 검토한다. 한국 보건사회부(이하 보사부), USOM, 세계보건기구(World Health Organization, 이하 WHO)가 합동으로 추진한 이 사업은, 정부 수립 이후부터 당시까지 한국 보건 사업 전반을 평가하고, 이를 바탕으로 장기적인 사회ㆍ경제 개발 계획에 포함되는 장기 보건 계획을 수립하기 위해 실시되었다.3) 재건에 초점을 맞추었던 1952년 WHO/UNKRA 한국 보건 계획 조사단의 활동과 달리, 경제개발과 보건 사업의 조응이 중시된, 규모나 범위 면에서 더욱 확장된 사업이었다.
평가조사사업은 장면 정권의 보건 사업 중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겨졌고,4) 쿠데타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또한 사업의 결과로 1963년부터 시작된 지방 보건 강화 사업은 1970년대까지 이어지며 장기적으로 한국 사회에 영향을 미쳤다. 이런 점에서 평가조사사업은 1960년대 초반 의료사 연구 공백을 메우고, 이 시기 한국의 정치적 격변과 보건의료체계의 관계를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소재이다. 또한 USOM은 원조 부담을 경감하려는 대한원조 정책 변화 속에서 평가조사사업을 구호 및 재건 원조 중단의 분기점으로 삼고자 했다. USOM은 이 사업을 계기로 한국 정부의 역할을 확대하고, 미국으로부터 한국 보건의 ‘자립(self-sufficiency)’을 이끌어내고자 했다. 요컨대 평가조사사업은 한국의 정치적 격변과 미국의 보건 원조 전환이라는 두 흐름이 교차하는 지점이었다. 나아가 이 사업은 당시 일반적인 국제보건 사업 중 하나로, 제2차세계대전 이후 개발원조와 탈식민 국가의 보건의료체계 형성이라는 보편적 맥락 위에 한국 의료사를 위치시킬 수 있는 통로가 될 수 있다.
이 글은 한국인 보건 전문가 집단과 주한 USOM 보건위생국에 주목하여 평가조사사업을 분석한다. 주로 대한공중보건협회(이하 공중보건협회)를 중심으로 한 보건 전문가들은, 복지ㆍ개발 병행론의 입장에서 국방ㆍ경제 우선론을 비판하고, 건강을 국민의 권리이자 민주주의의 토대로서 강조했다. 보건 전문가들은 이처럼 ‘보건의 민주화’라고 부를 수 있는 지향을 바탕으로 국제보건의 흐름과 공명하며 정부 역할 확대와 장기 계획 수립 등을 추구했다.
한편 USOM 보건위생국 담당자들은 보건 전문가인 동시에 원조 담당자로서의 정체성을 갖고 있었다. 이들은 한국인 보건 전문가들과 함께 개발우선론을 비판하며 복지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도, 한국인들의 복지에 중요한 역할을 하던 물자 지원을 중단하고 ‘자립’을 추진했다. 한편으로 보건위생국은 적극적인 보건 기술원조의 필요성을 주장하며, ‘저개발국’에서 낮은 수준의 근대화를 추진한 USOM의 전체적인 입장과도 일정 정도 거리를 두고 있었다. 선행연구는 원조 기관을 단일한 실체로 이해하며 보건위생국 역시 기술원조에서 소극성을 보였다고 설명했지만(한봉석, 2017: 188-189), USOM 역시 내부적으로 다양성을 갖고 있었다.
이 글은 한국 보건의료체계를 국내 정치와 경제, 그리고 원조 변화의 복합적 산물로 파악하면서, 보건 측면에서 4월혁명이 남긴 유산은 무엇이고, 그것이 5.16군사쿠데타, 미국의 원조 감축이라는 두 충격 속에서 어떻게 변화되었는지를 추적한다. 이를 통해, 이후 전개되는 공공 보건의료 영역의 취약성과 개발 우위의 구조를 이해하는 데 기여하고자 한다.
2. 장기 보건 계획의 대두와 미국의 대한원조
보건 원조는 제2차세계대전 종전 이후 전쟁 재발 방지와 서구의 안정적인 경제적 이익 확대 등의 목적으로 본격화되며, 전후 개발원조의 핵심 분야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Packard, 2016: 91-93). 그런데 전후 보건 원조를 주도한 WHO의 보건 전문가들은 ‘저개발국’에서의 보건 사업이 효과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대부분의 보건 사업이 당면한 문제 해결에 급급해 무계획적, 임시방편적으로 진행되고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WHO는 개별 프로젝트들을 포괄하는 종합적인 장기 보건 계획 수립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장기적인 계획은 국가의 가용자원을 바탕으로 효과적인 보건 사업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런 생각이 종합된 결과가 1960년 8월 WHO 산하 보건행정전문위원회(Expert Committee on Public Health Administration, 이하 위원회) 4차 회의 보고서 「보건 사업의 계획(Planning of Public Health Services)」이었다.5) 보고서의 목적은 “중앙정부가 보건 사업을 질서정연하고 효과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유연하고 장기적인 계획을 세우는 일반원칙을 공식화”하는 것이었다(WHO, 1961: 3-7).
위원회의 전제는 “국가 보건 계획이 국가 발전의 근본적인 한 부분”이라는 것이었다. 그 이유는 복지와 개발 두 측면에 있었다. “모든 경제개발계획의 궁극적 목표는 인구의 생활수준 향상에 있으므로, 건강 증진과 보호를 위한 투자는 필수적인 요소를 구성”하기 때문이었다. 또한 보건 사업은 직접적으로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노동력 향상과 생산시간의 연장 등 총생산 증가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므로 경제발전을 위해 반드시 필요했다. 건강이 복지와 개발 두 측면에서 중요하다는 위원회의 생각은 초기 국제보건계를 주도하던 사회 의학적 흐름의 유산이었다. WHO의 한 축을 담당한 사회의학의 옹호자들은 건강을 개인의 권리이자, 국가의 책임으로 위치시키는 동시에 경제발전에 있어서 국민 건강의 중요성을 강조했다(Packard, 2016: 93-96).
위원회는 장기적인 보건 계획 수립에 앞서 국가 보건 상황에 대한 철저하고 체계적인 조사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보건 조사와 평가가 국제 보건의 일반적인 접근 방법으로 자리 잡았다. 한국이 소속되어 있던 WHO 서태평양 지역사무소(WHO Western Pacific Regional Office, 이하 WPRO)는 이미 1950년대부터 국가 보건 사업의 종합적ㆍ장기적 계획 수립을 관할 지역의 가장 근본적인 목표로 간주했고(WPRO, 1958: 11), 조사 및 평가를 위한 기술원조를 실시했다(WPRO, 1952: 18).
이러한 흐름은 1961년 9월 케네디 미국 대통령이 UN에서 주도한 “UN 개발의 10년(United Nations Development Decade)” 선언을 전후한 시기 장기 계획에 대한 강조 속에서 더욱 활발해졌다. 사회경제적 개발계획과 조응하는 장기 보건 계획이 중요시되며, WPRO 관할 지역의 경우 말레이시아, 캄보디아, 라오스 등지에서 조사가 이루어졌다(WPRO, 1962: vii).
하지만 1950년대 WHO의 기술원조는 한국에서 활발하지 않았다. 한국 정부는 1949년 WHO에 가입했지만, 한국전쟁으로 인해 유엔군사령부를 통제하는 미국이 지속적으로 보건 원조를 주도하고 있었다. 따라서 한국은 일차적으로는 주한민사원조사령부(Korea Civil Assistance Command, KCAC), 이차적으로는 유엔한국재건단(UN Korea Reconstruction Agency, UNKRA)의 지원을 받고 있었고, WHO와 관련해서는 오직 펠로십 프로그램만 진행하고 있었다(WPRO, 1958: 13).
한국이 WHO가 주도하는 국제보건의 흐름 속에 편입되기 시작한 시기는 1950년대 후반이었다. 한국의 재건이 완료되었다는 판단하에 1958년부터 이루어진 미국의 원조감축, 그리고 1959년 6월로 예정된 UNKRA 활동 종료의 영향이었다. 1959년에는 말라리아, 1960년에는 국립보건원에 대한 WHO의 기술원조가 시작되었다. 그럼에도 한국에 WHO 연락사무소가 1962년 10월 설립된 사실에서 알 수 있듯, 여전히 미국이 보건 원조를 주도했다.
비록 WHO가 한국에서의 논의를 주도하지는 않았지만, USOM 보건 전문가들 역시 경제개발에서 건강이 갖는 중요성을 강조하는 한편, 장기 계획 수립에 관하여 유사한 문제의식을 공유했다. 게다가 장기 보건 계획 수립은 1950년대 후반부터 지속된 미국의 대한 보건 원조, 나아가 대한원조 전환과 얽혀 있었다.
1950년대 후반, 미국 정부는 그간 추진했던 대규모 군사ㆍ경제 원조의 효용성에 대한 비판에 직면했고, 원조 부담을 경감시키는 방향으로 국제기구의 원조 역할 확대, 피원조국의 자립 등을 추구했다. 미국은 1958년부터 한국에 대한 무상원조를 감축했고, 꾸준히 한국의 원조 의존도를 낮추려 했다. 정책 변화의 궁극적 목표는, 미국의 동아시아 안보를 위한 한국의 성공적인 군사 대비 태세를 유지하면서도 한국 정부의 역할을 확대하는 것이었다(이휘현, 2020).
이런 측면에서 당시 한국에서 진행되던 ICA(International Cooperation Administration, 국제협력처) 원조 프로그램의 목표는, 한국이 확대되는 역할을 감당할 수 있도록 역량을 개발하기 위해 자원과 기술원조를 제공하는 데 있었다. 이는 한국군 지원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ICA 프로그램에서는 “성공적인 군사 대비 태세의 전제조건인 정치적, 경제적 안정성 유지가 더욱 중요한 것”으로 여겨졌다. 이때 보건은 주거, 난민 동화, 실업, 농촌 빈곤과 함께 한국의 사회 정치적 안정성에 직결되는 주요 문제 중 하나였으므로, 재정적 비중은 크지 않았지만 ICA의 주요 프로그램 중 하나로 여겨졌다.6) 보건 분야에서 최종적인 목표는 원조에 의존하던 한국 정부가 국가 보건 사업을 홀로 책임질 수 있는 수준까지 성장하도록 만드는 것이었다.7) 실제로 미국 측은 1957년에 공중보건 구호(Public Health Relief) 사업을 종료했고,8) 1959년 하반기부터 물자 지원을 단계적으로 폐지하기 시작하는 등, 보건 원조의 중점을 구호와 재건에서 기술원조로 전환하며 한국 정부의 역할 확대를 추구했다.9)
하지만 기술원조로의 전환은 미국 측의 의도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전환의 전제인 보건 예산 증가부터 문제였다. 원조 감소에 따라 발생하는 공백을 한국 정부가 책임져야만 원조로부터의 자립이 가능했고, 보건 사업이 원활히 수행될 수 있었다. 하지만 1959년 정부의 전체 예산 중 보건 분야는 약 1% 정도에 불과했다(보건사업평가조사예비조사위원회, 1961: 7-31).
여기에는 한국전쟁이 만든 구조가 작용하고 있었다. 전쟁 이후 한국 정부는 경제력에 비해 과도한 군사력을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미국의 군사원조가 있었지만, 군인의 월급과 급식 등을 부담한 한국 정부의 몫이 전체 국방비의 절반에 가까웠고, 따라서 연 예산의 30~40%가 국방비에 투입되고 있었다. 이로 인해 1950년대에는 적자 재정이 이어졌고, 1959년 무렵이 되자 정부는 적자를 피하기 위해 조세 증수로 대응했다. 정부는 마른 수건을 쥐어 짜내고 있었다(이동원, 2019: 283-291). 경제개발을 위한 자원 배분마저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한국전쟁과 미국의 동아시아 안보 전략이 조형한 구조 속에서 보사부는 예산 확보에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장기 계획 수립은 USOM 측이 보기에 기술원조로의 전환에서 중요한 요소였다. 장기 계획은 한국 정부가 가용자원을 바탕으로 효과적인 보건사업을 운영할 수 있도록 만드는, 보건 분야 ‘자립’에 필수적인 단계였다. 또한 보사부가 예산 확보에 어려움을 겪는 상황에서 장기 계획의 수립과 발표는 정부에게 보건 사업의 중요성을 설득할 유용한 방법으로도 여겨졌다.10) 하지만 보사부는 종합적인 장기 계획을 추진할 여력이 없었고, 예산 부족으로 일상적인 업무만을 수행하고 있었다.11)
3. 4월혁명과 보건사업평가조사사업
1) 혁명의 열기와 보건의 민주화
4월혁명은 보건을 포함한 사회 전 분야의 개혁 요구로 이어졌고, 사회 변화의 원동력을 제공했다. USOM 보건위생국은 혁명 이후 한국의 보건 전문가들 사이에서 변화에 대한 신중한 낙관론이 만연해 있다고 평가했다. 보건위생국 역시 혁명에 기대감을 표하며 개혁을 위한 권고사항을 준비했다. 기존 내무부 관할이던 도 보건 행정의 보사부 통제, 경찰 위생업무의 환원, 부처 간 조정위원회 설립, 자문기구인 보건위원회 설립, USOM 보건위생국과 보사부의 합동 예산 책정, 보건 사업을 총괄할 보건청 혹은 보건 담당 제2차관직 신설 등 보사부의 보건 역량 강화를 목적으로 하는 내용이었다.12)
과도정부 보건사회부와 USOM 보건위생국 간담회(1960년)
Figure 1. Meeting between the Ministry of Health and Social Affairs of the Interim Government and the USOM Public Health & Sanitation Division(1960)
(「김성진보건사회부장관미국경제협조처보건위생국직원접견담화1」, 1960(CET0069733, 국가기록원 소장))
보건위생국의 관찰처럼, 한국인 보건 전문가들은 혁명 이후 보건 분야 개혁에 기대감을 나타냈다. 4월혁명은 복지국가론이 힘을 얻는 계기였고(최민석, 2021: 200-201), “국민의 복지는 보건 및 건강을 떠나서 생각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었다.13) 서울대 의대 교수 권이혁은 보건 분야에도 “혁명정신이 반영”되어야 하며, 혁명의 정신이 한국 사회를 변화시키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많은 보건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호기라고 강조했다.14) 보건 전문가들은 혁명 이후 이승만 정권의 보건정책에 대한 비판과 개혁 요구를 폭발적으로 표명했다.15)
이러한 개혁 요구의 기저에는 보건 문제를 민주주의와 연결시켜 사고하는 ‘보건의 민주화’ 지향이 있었다. 그 중심에는 주로 공직과 학계에 포진된, 1957년 설립된 공중보건협회의 보건 전문가들이 있었다.16) 공중보건협회 초대 이사 중 한 명인 김연주는 해방 직후부터 의료란 사회 유지의 근간이며, 민주국가 건설에서는 의료의 민주화가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에게 의료의 민주화는 모든 국민에게 의료가 균등하게 배분될 때 가능했고, 이를 위한 방법은 의료국영화를 포함한 정부 역할의 확대였다(김연주, 1948).17)
1950년대에는 의료균점 논의를 넘어, 건강이 권리의 차원에서 강조되기 시작했다. 공중보건협회 초대 총무부장 양재모는 민주주의 국가에서 모든 국민이 건강할 의무와 권리를 가진다며 민주주의와 국민의 건강을 결합시키는 한편, 보건의 민주화를 위한 보건계의 역할을 강조했다(양재모, 1956: 38-43). 나아가 양재모는 국민의 건강권을 민주주의와 더욱 적극적으로 연결시켰다.
그러므로 정부가 만약에 국민의 건강을 향유하고 안녕과 복리를 도모함을 게을리 하거나, 비록 도모할지라도 건강한 국민을 원하는 궁극 목적이 국민을 오직 정권수호의 도구로 이용함에 있다면, 그러한 정부는 민주국민이 바라는바 아니메 마땅히 타도되어야 한다. 국민들의 지상 염원은 보다 나은 국가를 이룩함에 있는 것이다(양재모, 1957: 38-39).
건강권을 저항권과 연결시키는, 마치 4월혁명을 예견하는 듯한 강한 비판이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건강이 국민의 권리이고, 국가의 책임이라면, 국민의 건강을 보호하는 데 실패한 정부는 타도되어야 했다. 양재모는 국가와 개인의 관계를 의료적 차원에서 연결하려 시도했다. 이러한 설명은 당시 WHO를 비롯한 국제보건계와 마찬가지로 개인의 건강을 권리이자 국가의 의무로 위치시키려던 흐름과 공명하고 있었다.
이런 맥락에서 양재모는 국방과 경제 문제가 시급하므로 보건이나 복지 문제는 나중에 해결해야 한다는 당시의 국방ㆍ경제 우선론을 주객전도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민주주의와 복지에 대한 논의 없이 국방과 경제를 위해 보건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논리조차 비판받아야 할 대상이었다. 양재모에게 경제개발과 복지는 선후관계가 아니라 조화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양재모와 같은 주장은 당시 소수에 불과했다.
개발우선론이 주도하던 흐름에 균열을 낸 계기는 4월혁명이었다. 혁명 이후 보건의 민주화가 민주개혁의 과제 중 하나로 부상한 결과였다. 그 근간에는 대중적인 열망이 있었다. 혁명 직후인 1960년 5월 21일, 자택에서 요양 중이던 한 결핵 환자는 혁명 이후 “민주보건”을 위한 마음에 기고문을 작성했다.18) 그는 기고문을 통해 “제반 민주개혁에 있어서 국민의 기본권리를 경시하거나 인간 생명의 존엄성을 침해하려는 모든 요소를 철저히 제거”해야 한다며 “보건의 민주화”를 강조했다. 해방 이래로 정부는 분단과 전쟁 등 비상 상황이라는 명목으로 국민 보건을 경시해 왔는데, 이제는 적극적인 보건정책에 나서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적극적 보건정책에 대한 요청은 “의료보장”과 “의료국공영화”에 대한 목소리로도 이어졌다.19) 또한 혁명의 주역이던 학생들 역시 무의촌 문제 해결을 위한 보사부의 적극적 행동을 주문했고, 장면 정권의 과업으로 의료보험을 포함한 실질적인 사회보장제도의 실시를 꼽기도 하였다.20) 이처럼 보건의 민주화는 혁명 이후 민주개혁의 과제 중 하나로 부상했다.
그 연장선상에서, 보건 전문가들은 건강 문제를 4월혁명의 원인 중 하나로 위치시켰다. 공중보건협회 이사이자 USOM 보건 고문으로 활동하던 방숙에게 민주주의 국가란 모든 국민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이념을 가진 공동체이며, 특권층만 욕구를 충족하여 불평등이 심해질 경우 국민이 봉기하는 것은 섭리와도 같았다.21) 이승만 정권의 정치인과 지식인들은 “대중의 생활의욕이 나날이 감퇴 되어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경제부흥계획 운운”하며 대중의 생명 유지에 필수적인 보건 사업을 너무나 경시했기 때문에 실패한 것이었다. 방숙이 볼 때, 혁명은 지나친 개발우선론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나아가 방숙은 보건의 민주화를 민주개혁의 주요 과제 중 하나로 공고히 위치시키고자 했다. 현재 민주개혁의 목표가 국민의 인간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생활수준 향상에 있다면, 교육을 통해 지식과 기술을 습득하여 생산능력을 가짐으로써 이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데, “생산능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으려면 그 생산업에 종사하는 역군들의 『건강한 활동력』이 있어야”했다. 이는 곧 식량 특히 단백질을 필요로 하는 것이고, 농민과 어민의 노력이 필요한 일이었다. 따라서 농ㆍ어민의 건강을 최대한 보존할 필요가 있었다. 즉 방숙에게 “교육-산업-건강(보건)-농어업은 서로서로 연쇄작용을 하는 것이며 어떠한 분야도 국민의 생활수준 향상의 방도에 있어서나 국방력의 강화에 있어서도 각각 불가결의 가치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의 결론은 보건의 민주화도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민주개혁에서 지성인들이 부르짖는 교육의 민주화, 경제의 민주화, 정치문화의 민주화를 논할 때에 그들이 당면한 생활안정 또는 권리옹호만을 요구할 것이 아니라, 또 하나의 기본적인 인간의 생명보호유지에 필요한 제 권리도 찾을 수 있도록 『보건의 민주화』도 같이 부르짖어야 하는 것은, 진정한 민주주의를 이해하는 민중의 지도자의 당면한 임무라고 생각된다.22)
요컨대 보건의 민주화에 담긴 지향은, 국민 건강의 확보가 개인의 권리이자 국가의 의무이며 민주주의의 근간이라는 믿음이었다. 따라서 정부는 모든 국민의 건강을 증진하기 위해 적극적인 역할을 담당해야 하고, 국방ㆍ개발 일변도의 시각을 극복해야 했다. 국방ㆍ개발과 복지는 병행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이처럼 보건의 민주화는 건강의 문제를 혁명의 원인이자 과제로, 즉 중요한 정치적 의제로 위치시키며 4월혁명 이후 복지국가 논의의 한 축을 담당했다.
한편 건강에 대한 시각에서 유추할 수 있듯, 보건 전문가들의 지향은 전반적으로 WHO와 USOM의 전문가들과 공명했다. 공중보건협회 초기 임원진인 송형래, 이병학, 양재모, 권이혁, 백행인, 심상황 등의 보건 전문가들은 유학을 통해 보건학을 공부하여 국제적인 흐름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유학 이외에도 보사부 고위 공무원은 WHO 총회나 관련 행사에 참여하고, USOM 보건위생국과 교류하며 복지와 개발 양 측면에서 보건을 강조하는 국제적인 흐름에 동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일부의 경험과 생각은 ‘WHO 참석담’과 같은 공중보건협회의 학술집담회 등의 형태로 보건 전문가들 사이에서 공유되었다(대한공중보건협회 40년사 편찬위원회, 1997: 134). 위원회의 4차 보고서 역시 국립보건원의 번역을 통해 공유되었다.23) 이외에도 한국인 보건 전문가들은 국가의 자원을 고려한 경제적 보건정책을 강조했다는 점에서,24) 그리고 장기적인 계획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점에서 국제보건과 공명하고 있었다(Yang, 1960: 71).
이처럼 한국의 보건 전문가와 USOM 보건위생국은 복지ㆍ개발 병행론의 입장에서 혁명 이후 변화에 기대감을 표했다. 하지만 보사부가 경찰로부터 위생 사무를 돌려받은 것을 제외한다면,25) 이들의 개혁 및 장기 계획 수립 요구는 좀처럼 관철되지 못했다. 보건위생국이 볼 때, 보사부는 혁명 이후 연이은 정부 교체 속에서의 혼란과 민주당 신구파의 갈등, 인사 공백 등으로 제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고 있었다. 보사부와 보건위생국의 소통도 원활하지 못했다. 미국의 물자 지원이 종료됨에도 1961년 예산에 큰 변동은 없었고, 이대로라면 국공립병원과 보건소가 진료 수입만으로 운영되어야 했다.26) 또한 1961년부터 약 8억 환에 달하던 미국의 방역 약품 원조가 중단되는데, 오직 1억 환의 예산만 확보된 상황이었다.27)
보건위생국은 보사부를 압박했다. 1960년 10월 대한의학협회 연례총회에 참석한 셰라머 의무과장(Arthur M. Shelamer, Medical Affair Branch)은 축사를 통해 정부가 국민 건강을 책임질 의무가 있고, 경제적 발전과 복지가 병행되지 않는다면 사회적 불안정으로 이어질 것이라며 정부를 우회적으로 비판했다(Shelamer, 1960). 또한 USOM은 보건 원조 종료까지도 검토하는 강경한 입장을 세우며 정부 역할 확대와 소통 강화를 압박했다.28)
보건 전문가들도 압박에 나섰다. 1960년 10월, 공중보건협회는 ‘보건행정혁신안’을 공개 제안했다. 협회는 혁명으로 수립된 새 정부가 복지국가 수립이라는 목표 달성을 위해 보건정책을 수립해야 하며, 임시방편적 정책을 벗어나 국제적인 기준에 맞는 장기적인 계획을 수립함으로써 “일반 국민 생활의 수준 향상에 기여”하고, “국가건설에 공헌할 수 있는 건강국민을 육성”해야한다고 주장했다. 협회는 복지와 개발 양 측면을 강조하는 동시에 USOM의 개혁안과 유사한 7개의 혁신안을 제시했다. 즉, 보건 행정 계통ㆍ감독의 일원화 및 강화, 부처 간 업무조정, 보건소법 구체화, 보건 기술직 대우 향상, 보건 예산 3% 이상 보장, 결핵ㆍ나병ㆍ성병ㆍ기생충병 대책 수립, 중앙 및 지방에 상설 보건위원회 구성 등이었다.29) 협회 차원의 단체행동은 12월에도 이어지는 등, 보건 전문가들은 4월혁명의 공간 속에서 보건의 민주화를 실현시키기 위한 실천에 나섰다.30)
정부도 호응했다. 10월과 11월, 이병학과 방숙이 각각 차관과 방역국장에 임명되며 공석이던 보사부 주요 보직이 모두 채워졌다. 전 국립보건원장 이병학의 임명으로 그간 장차관급에 의사, 특히 보건 전문가가 없던 상황이 해소되었다는 점에서 보건위생국은 이번 인사를 혁명 이후 “가장 중요한 진전”이라고 평가했다.31) 11월 15일에는 USOM과 보사부의 회담이 진행되며 소통이 재개되었고, 곧이어 보건위원회가 개최되었다.32) 이외에도 나용균 장관이 보건부 독립을 언급하며 보건 분야 개혁에 대한 기대감을 키웠다.33)
이러한 변화의 흐름 속에서, 보사부는 장기 계획 수립 준비에 착수했다. 그리고 1960년 12월 15일, 보사부는 보건위생국과의 정례 회의에서 장기 계획 수립을 위한 평가조사사업의 원조를 요청했다.34) WHO가 주도한 국제보건의 흐름과 미국 대한원조의 전환, 그리고 보건의 민주화 지향이 4월혁명을 계기로 교차하고 확대되며 한국의 보건 구조 개혁과 장기 보건 계획 수립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2) 사업 추진과 난항
보사부와 USOM 보건위생국의 회의는 USOM 측의 긍정적 화답 속에서 무난히 마무리되었다. 1961년 2월에는 사업 진행이 공식화되었다.35) 그럼에도 초기 진행은 순탄하지 않았는데, 보건 원조에 대한 양측의 이견 때문이었다.
보건위생국은 이번 사업을 계기로 기술원조로의 전환을 명확히 하고자 했다. 그 전제는 한국 정부의 예산 증액을 통한 역할 확대였다. 셰라머 국장 대행은 2월 14일 이병학 차관에게 보낸 장문의 서한에서 세 가지 질문에 답변을 요구했다. 첫째, USOM 측과 긴밀히 협업하여 기술원조를 적극 수용하고, 이를 위해 보건 분야에 대충자금을 적극 활용할 것인지, 둘째, 앞으로 USOM과 합동으로 파견훈련 프로그램을 관리하고, 복귀한 수료생을 충분히 활용할 것인지, 셋째, 기술원조로의 전환을 받아들일 것인지였다. USOM은 특히 세 번째 질문에서 강경한 태도를 보였는데, 보사부가 물자 지원에만 관심을 가진다면 USOM의 공중보건 프로그램이 모두 중단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36)
이병학 차관은 답신에서 셰라머의 지적에 동의하면서도 세 번째 질문, 즉 물자 지원의 종료에 대해서만은 다른 입장을 드러냈다.37) 이병학은 기술원조와 함께 물자를 지원받는 것이 한국 정부에게 중대한 필요성을 가지며, 따라서 보사부가 제안한 조사 사업은 “얼마나 많은 물자와 기술적 조언이 필요한지 찾기 위해 수행”되는 것이라며 양자의 병행을 강조했다. 나아가 그는 평가조사사업 종료까지 원조 감축의 유보를 요청했다.
저는 아직 한국 공중보건 프로그램이 충분한 수준까지 재건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정부는 이제 생산적인 주요 산업들의 재건과 팽창을 통하여 경제적 수준을 안정ㆍ향상시키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이러한 국가적 노력에 부응하여 보건 사업은 산업위생, 환경위생, 그리고 더 나은 의료에 높은 중요도를 두는 방향으로 조정되어야 합니다. ……
하지만 현재 저희는 충분히 재건된 수준도 아니고, 심지어 질병 통제 사업을 수행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닙니다. …… 또한 양측 모두 매우 잘 알고 있듯, 이러한 필수적인 물품의 극심한 부족으로 질병의 확산이 저희의 통제를 벗어날 것이며, 결국 노동자 및 산업의 생산성을 저해할 것입니다.
ICA 공중보건 원조는 1958 회계연도 이래로 줄어드는 추세입니다. 이처럼 중요한 기본 정책의 급격한 변경은 보건 사업 전반에 대한 신중한 조사, 그리고 전체 보건사업에 대한 간접적인 영향 파악에 기반해야 한다는 것이 저희의 생각입니다. 돌이켜보면, 현재의 원조 감축은 그러한 절차 없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보건 조사가 마무리될 때까지는 주요 보건 사업에 대해 어떠한 결정도 유보되어야 합니다.38)
이병학은 현재 한국의 개발이 본격화되는 시점이므로 건강 증진을 위한 보건사업이 절실하지만, 한국의 현실상 미국의 물자 지원이 없다면 복지는 물론 개발까지 모두 타격을 입을 것이라고 주장했다.39) 전쟁을 겪은, 경제적으로 곤란한 한국의 현실을 고려할 때, 개발과 복지 두 측면 모두에서 물자 지원이 지속될 필요가 있다는 입장이었다. 이병학에게 평가조사사업의 목적은 한국 보건의 개혁과 강화에 있었지, 급속한 자립에 있지 않았다. 기술원조로의 전환과 대충자금 활용 확대를 수용한 것에서 알 수 있듯, 보사부가 한국 정부의 역할 확대를 거부한 것은 아니었지만, 물자 지원으로부터 천천히 벗어나며 장기적인 토대를 마련한다는 구상이었다.
반면 USOM은 한국의 재건이 완료되었고, 원조를 통해 보건소, 병원 등 기반 시설도 건설된 만큼, 이런 시설들을 기반으로 한국 정부가 필수 의료 물자를 책임지며 자립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미국의 역할은 이제 기반 시설을 운영할 수 있도록 기술적으로 지원하는 것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셰라머는 원조로 설치된 모든 시설의 상태 보고서, 인력 배치를 포함한 활용 계획, 예산지원 계획 등의 제출을 평가조사사업의 선결 조건으로 제시했다.40)
하지만 보사부가 보기에 그간 ICA 원조로 건설된 시설들은 한국의 역량에 비해 지나치게 비대했다. 보사부는 물자 지원 종료 이후 시설 운영자금을 확보하는 데 어려움을 겪으며 신설된 시설의 대여까지 고려하는 상황이었다.41) 당시 미국의 일반적인 ‘저개발국’ 보건 원조와 마찬가지로, 주한 USOM이 진행한 건설 위주의 지원에는 한국의 상황과 실질적인 보건 분야 자립에 대한 고민의 깊이가 충분하지 않았다(Packard, 2016: 232-233). 의료 시설 재건을 마친 원조 당국에게 중요한 것은 온전한 ‘자립’보다 부담이 낮은 ‘효율적인 자립’에 가까웠다. 복지ㆍ개발 병행론이라는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양측은 원조-피원조 관계에 내재된 근본적 인식 차이를 갖고 있었다.
셰라머는 USOM 내부 보고서를 통해, 비록 보사부가 물자 지원에 대한 인식 차를 드러냈지만 그 외의 요구사항을 모두 받아들였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여전히 “물자 지원은 [한국] 국고와 대충자금을 통해 이루어져야”했고, 보건 원조가 완전히 중단될 때의 공백을 막기 위해 한국 정부에 충분한 예산 배정을 권고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42)
1961년 3월 30일 2차 회의에서는 실무적인 문제들이 논의되며 평가조사사업이 본격적으로 준비되었다. 양측은 WHO의 참여를 논의하는 한편, 합동 예비조사를 실시하기로 합의했다.43) 추진계획도 수립되었다. 먼저 4~5월에 조사 분야와 분야별 일정 계획을 완료하고, 예비조사위원회(fact-finding and coordinating committee, 이하 예비위)를 구성한다. 예비조사 단계인 6~8월에는 USOM 보건위생국과 예비위가 각 분야별 정보를 수집ㆍ편집하여 예비조사 보고서를 작성한 뒤, 외부인으로 구성된 WHOㆍICA 합동 자문위원단에게 전달하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9~10월은 본조사 단계로, 자문위원단을 중심으로 평가 및 권고사항, 장기 계획이 준비되는 일정이었다.44)
계획에 따라 4월에는 사업을 개시하고, 예비조사 분야를 확정 지었다.45) 1961년 중으로 평가조사 및 장기 계획 수립을 마치려는 방향이었다. 이러한 추진 일정은 당시 장면 정권의 역점 사업인 경제개발5개년계획 일정과 조응하고 있었다. 1961년은 장면 정권이 설정한 경제개발계획의 개시년도였다(김기승, 1997: 463-469). 보사부는 1961년 중으로 장기 보건 계획을 실시하여 전체 사회경제 개발의 일부로서 보건 분야를 위치시키고자 했다. 하지만 1961년 5월 장면 정권이 발표한 장기 계획의 강조점은 경제에 치우쳐 있었다. ‘국민생활개선의 방향’ 중 하나로 제시된 보건 분야는 계획안 마지막 페이지의 한 문단뿐이었다(건설부, 1961: 9, 103). 복지정책이 “민주당 공약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던 나용균 장관의 언급이 무색했다.46)
정권을 운영하는 민주당은 아직 명확한 노선을 채택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정권 일각에서는 ‘경제제일주의’를 외치며 개발을 통해 복지국가에 도달하겠다면서도, 다른 한편에서는 재정 확대가 뒤따르는 진보적인 복지정책과 사회보장을 공약했다. 공존하기 어려운 두 정책을 공약하는 민주당이 모순적이라는 비판도 제기되었다.47) 이처럼 사회보장제도와 의료국영화 등 혁명의 다양한 요구는 개발우선론이 주도하던 사상적 지형에 균열을 일으키고 있었다.
하지만 한국을 둘러싼 현실은 녹록하지 않았다. 혁명 이후에도 한국의 경제 상황을 짓누르던 국방비의 압박이나 미국과의 관계가 해소된 것은 아니었다. 장면 정권은 감군을 추진하는 한편 경제개발의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미국에 원조 증액을 요청했지만, 미국 정부는 한국의 자립을 추진하기 위해 공공요금, 금리, 환율의 급격한 인상을 선결조건으로 요구했다. 장면 정권은 국민의 지지에 기반해 미국과 입장을 조율하며 정책을 추진하기보다는, 빠른 경제성장을 위해 미국 정부의 요구를 일방적으로 수용했다. 경제적 여러움 속에서의 선택이었다. 이는 물가 상승과 경제적 혼란, 지지율 하락으로 이어졌다(정진아, 2017). 정권 차원에서는 더더욱 경제적 성과가 필요해졌고, 보건의 민주화는 후순위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경제개발계획 수립을 담당한 부흥부는 모든 역량을 경제개발에 쏟고자 했다. 게다가 보건위생국을 제외하면, USOM 역시 유사한 입장이었다. 보건위생국은 부흥부와 USOM의 계획 수립 방향에 대해 언급하면서, 복지 문제에 대한 경시가 곧 USOM의 목표인 한국의 ‘자립’ 달성을 불가능하게 할 것이라고 지적했지만, 계획을 주도하는 부흥부와 USOM 측 모두 개발우선론적 입장을 고수했다.48)
실제 계획안의 내용은 1959년 이승만 정권에서 발표된 『경제개발3개년계획안』과 사실상 동일했다(부흥부 산업개발위원회, 1959: 580). 몇몇 수치나 미사 여구를 제외하면, “복지의 향상을 도모”한다는 목표, 그리고 의료 공급과 질병 통제, 상하수도 정비, 국민건강보험제도 실시 등이 동일한 구성으로 제시되었다. 비록 3개년계획안에도 복지국가적 이상이 담겨 있었지만, 혁명으로 수립된 장면 정권의 장기 계획이 복지의 실현을 생산력 증대 이후의 문제로 설정했던 이승만 정권의 계획과 동일한 내용을 담았다는 것은 실망스러운 결과였다.49) 4월혁명이 만든 균열 속에서도 여전히 개발우선론은 우위에 서 있었다.
4. 이중의 충격: 쿠데타와 원조 감축
1) 쿠데타 이후 예비조사의 실시
평가조사사업이 채 시작되기 전에 발생한 쿠데타는 개발우선론의 영향력을 확대시켰다. 혁명의 요구 속에서 노선을 조율 중이던 장면 정권과 달리, 군사 정권의 노선은 선명한 개발우선론으로 기울었다. 물론 군사 정권 역시 4월혁명의 계승을 천명한 만큼, 복지와 건강에 대한 대중적 열망을 외면할 수 없었다. 의사 동원을 통한 무의촌 문제 대응, 의료보험법 제정 등은 군사 정권이 혁명의 요구를 일정 정도 수용한 결과였다. 하지만 의료 문제 대응은 경제개발에 대한 영향을 최소화하는 방식인 민간 동원을 통해 전개되었다.
보건 분야에 투입되던 자원조차 개발에 집중될 필요가 있었다.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박정희는 대규모의 국방비를 유지하는 구조 위에서 경제개발을 추진하기 위해 가능한 재정 확대를 억제하려 했다. 그는 1962년 예산 관련 담화에서 “극히 취약한 경제적 지반 위에 의욕적인 경제개발을 착수하기 위한 이와 같은 미증유의 예산 규모를 성립시키는 데 있어, 고려하여야 할 점은 적자의 최대한 억제”라고 강조했다.50) 복지 예산은 그 타겟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무턱대고 혁명 과제 중 하나였던 복지의 실현을 폐기할 수는 없었다. 군사 정권은 혁명의 과업과 개발 노선을 나름대로 조화시켜야 했다. 따라서 복지는 논리적인 차원에서 개발과 성장의 울타리 안에 포함될 필요가 있었다. 박정희 의장은 복지란 “국민의 기본인권과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고 경제생활에서 국민이 그들의 욕구를 추구할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며 복지를 경제적 차원에 위치시켰다.51) 따라서 복지국가의 구현은 경제성장과 연결되는 것이었다. “국민의 복지를 증진하기 위한 과감하고도 구체적인 경제정책”이라거나, 공업 발전과 자원개발을 통한 복지국가 건설이라는 언급 등은 이러한 논리에서 출발한 것이었다.52) 선명한 개발 노선이었다. 일부 지식인들의 복지국가론 역시 점차 복지를 경제적 총량의 성장으로 이해하며 복지와 자유, 민주주의를 조화시키기 위해 경제성장이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최민석, 2021: 202-203). USOM 보건위생국은 쿠데타 이후 첫 분기보고서를 통해, 군사 정권은 “사회적 혹은 인적 자원 개발에 대한 인식이 거의 없거나 아예 없”으며, “모든 사회개발 활동을 희생시키며 ‘경제개발’에 강조점을 두었다”고 비판했다.53)
군사 정권은 감원계획에 따라 보사부 사무관급 이상 고급 공무원 86명을 해임했다.54) 쿠데타 이후 보사부 내에 의사 출신인 의무관은 4명만 남았고, 대학 졸업 간호사는 전무했다.55) 인력 감소로 USOM과의 협조도 제대로 진행될 수 없었다. 게다가 6월 25일 이병학 차관이, 7월 20일 방숙 방역국장이 해임되며 평가 조사를 주도하던 고위급 관료들이 퇴진했다.56) 미국의 물자 지원 감소를 대체하기 위해 보건 분야에 배정한 정부 예산과 대충자금은 군사 정권에 의해 경제개 발을 위한 분야로 재배정되었다.57) 보건 측면에서 볼 때 쿠데타는 혁명이라기보다는, 복지를 개발우선론 안에 포섭시킴으로써 4월혁명이 만든 균열을 봉합한, ‘혁명의 억제’에 가까웠다.
보건위생국은 쿠데타의 영향을 보건 측면에서 평가하며, 강력하고 효과적인 법 채택, 인사시스템 발전, 도 단위 보건 기관의 재조직과 지역민의 환경위생 활동 참여 증대 등 긍정적인 영향과 함께, 공중보건 분야 인력의 50% 감축, 숙련된 전문 인력의 교체 및 해고, 위생 프로그램에 대한 극단적인 경시와 이에 따른 재정 지원 감소를 언급했다.58) 보건 사업의 기반인 인력과 재원에 대한 타격이 두드러지는 평가였다.
그 기반이 축소되는 와중에도 보사부와 보건위생국은 사업 재개를 위해 움직였다. 1961년 6월 20일 열린 3차 회의에서는 예비위 위원을 선정하고, 예산, 자문위원 선정 등을 협의했다.59) 회의 직후인 25일 이병학 차관이 해임되었지만 사업이 중단되지는 않았다. 경제적이고 효과적인 보건 사업은 군정 역시 동의하는 바였고, 이 사업은 원조의 주도권을 쥔 USOM의 관심 사업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26일에는 외무부가 WPRO 측에 공식적으로 사업 참여를 요청하며 사업이 다시 본 궤도에 들어섰다.60)
7월 1일에는 한국 보건 전문가 150여 명이 참여한 예비위가 구성되었다[표 1]. 예비위의 임무는 선정된 24개 조사 분야를 중심으로 외부 자문위원단이 참고할 자료를 수집하고 정리하는 것으로 설정되었다.61)
7월 5일 열린 예비위 첫 회의부터 위원들은 조사 방식에 문제를 제기했다. 한국인 보건 전문가들이 그저 자료를 수집, 정리하여 외국인 자문위원단에게 정보를 전달하는, 소극적 역할에 대한 문제 제기였다. 일부 위원들은 “한국실정은 한국인들이 더 잘 알 것”인데 외국의 사례와 경험만 가진 자문위원단에게 사업을 전적으로 맡겨서는 안된다고 지적했다. 그간 원조에 대한 불만이 담긴, 한국의 현실에 대한 고려가 필요하다는 비판이었다. 이어진 논의 끝에 예비위가 실태조사만을 담당하는 기존 역할을 확대하여, 추후 의견과 건의 사항도 보고하는 것으로 결론이 지어졌다.62)
보건 전문가들은 문헌, 현장, 서면조사로 구성된 예비조사를 통해 남한 전역에 관한 정보를 수집할 수 있었다. 비록 보고서 준비 과정이 “자료의 불비와 신뢰성의 희박”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지만(보건사업평가조사예비조사위원회, 1961), 보건 전문가들과 보사부는 한국인의 질병 상황, 보건 사업, 인력, 행정 등 다양한 정보를 수집, 정리, 종합하는 과정을 통해 한국 보건의 현실과 특수성에 대한 인식을 심화시킬 수 있었다. 예비조사는 해방 이후 전국적인 차원에서 실시한 첫 보건 조사라는 점에서 일종의 보건학적 한국 지도 제작 과정과도 같았고, “앞으로 보건 행정의 지침서가 될 것”으로 기대되었다.63) 실제 보고서는 보사부뿐 아니라, 의사 및 보건 전문가 집단 내에서 엄청난 관심을 불러일으켰고,64) 권이혁은 평가조사와 보고서를 바탕으로 한국의 특수성을 담은 『공중보건학』을 집필할 수 있었다.65) 이런 면에서 보건 조사는 보건위생국에게도 한국 보건의 ‘자립’을 위한 필수적인 단계였다. 보건위생국은 평가조사사업이 “본질적으로 한국인의 프로그램이 될 것이며,” 이는 “한국인들의 훈련에 필수적”이라고 그 중요성을 강조했다.66)
1961년 12월 31일에 발행된 『보건사업평가조사예비조사보고서』67)는 약 980 페이지의 방대한 분량이었다.68) 보고서의 목차는 국민보건의 배경, 인구동태, 예방의학, 환경위생, 산업보건, 학교보건, 모자보건, 정신보건, 보건간호, 보건교육 및 훈련, 보건검사, 보건소활동 및 공의, 의료사업, 약무행정, 민간단체 및 학회, 의료요원 교육 등 총 16부로 구성되었다.
특징으로는 첫째, 질병의 한국적 특징이 종합되었다. 질병을 다룬 3부 예방의학은 보고서에서 가장 많은 분량(26.7%)을 차지하는데, 여기서는 질병을 40여 개로 분류하여 역사, 발생 현황, 지역, 계절, 성별, 연령대별 특징, 치명률 등 한국의 역학적 특징을 분석했다. 이는 당시 한국의 보건 전문가들이 외국의 공중보건을 번역하고 모방하는 단계를 넘어, 한국의 현실을 토대로 “우리의 사회와 민족에게 알맞은 보건을” 구축하려던 흐름과도 연결되는 것이었다(권이혁, 1960).
둘째, 재정에 관한 내용이 전체의 21.9%를 차지한다. 목차상 재정 부분은 절에 해당되는데, 질병을 다룬 3부 예방의학 다음으로 높은 비중을 차지하며 구성의 균형을 무너뜨린다. 내용으로는 정부 및 원조 예산, 보건비의 비중과 내용, 변화 등을 다루고 있다. 정부 역할 확대를 주장한 USOM, 보건 예산을 정부 총 예산의 3% 이상 확보해야 한다는 공중보건협회의 주장과 마찬가지로, 예산 문제가 양측에서 높은 관심을 받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비록 예비조사보고서가 발행되었지만, 전체 일정 지연으로 1961년 연중 사업 완료라는 목표 달성은 불가능했다. 쿠데타로 인한 사업 중단에 더해, 예산 배정 지연과 조사 분야 확대로 인해 3개월로 계획된 예비조사가 6개월 동안 진행되었다.69) 게다가 예비조사 보고서가 발행된 시점에도 외부 자문위원단 인선이 완료되지 못했다. USOM과 보사부는 자문위원단 인선을 9월 1일까지 마무리할 계획이었지만, 7월 말 WPRO 측이 사업 연기를 요청했다.70) 한 달 내에 자문위원을 구하기도 어렵고, 계획된 사업이 아니므로 사용할 예산이 없다는 이유였다. WPRO는 예산과 채용 문제 해결을 위해 7월에 시작한 예비조사를 일시 중단하고, 1962년 봄에 재개하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보사부는 1961년 중으로 사업을 완료하려 했다. 1962년에 시작될 군사 정권의 경제개발5개년계획 때문이었다. 경제기획원은 모든 부처에 5개년 계획을 요청했고, 보사부는 계획에 보건 분야를 포함하기 위해 사업을 최대한 진행하려 했다. 보사부는 WPRO의 제안에 대해, 경제기획원의 장기 계획 요청에 따라 예비조사는 지속되어야 한다며, WHO 자문위원의 방한만 별도로 1962년 봄에 진행하는 방안을 제시했다.71) ICA 측 자문위원만이라도 11월까지 방한하여, 12월에 사업을 일정 정도 마무리 지으려는 판단이었다.72)
보사부는 일정을 앞당기려 노력하는 한편, 자체적으로 종합적인 장기 보건 계획을 수립했다. 1961년 8월, 정희섭 장관은 기자회견을 통해 장기 계획을 수립 중이라고 밝혔다. 보사부의 5개년 계획안은 공중보건행정, 의료, 예방의학, 환경위생 등을 포함하는 통합적 보건 서비스 구축을 목표로 했다.73) 또한 계획은 가족계획사업, 한센병 치료 5개년 계획, 결핵 치료 30개년 계획 등을 포괄하는 종합적이고 장기적인 구상을 담고 있었다. 계획 실행에는 총 308억 환이 소요될 예정이었다.74) 1961년 중앙 및 지방정부 보건비 총액이 약 104억 환인 점을 감안하면(보건사업평가조사예비조사위원회, 1961: 37), 보건 예산 확대가 계획의 전제였음을 알 수 있다.
보사부의 구상은 어느 하나 계획대로 진행되지 못했다. 국제개발처(U.S. Agency for International Development, 이하 USAID)75) 측 자문위원 선정 지연으로 1962년 5월에야 평가 및 계획 단계에 들어갔다.76) 그 사이인 1962년 1월에 경제개발5개년계획안이 발표되었고, 보사부 자체 5개년계획안은 포함되지 않았다. ‘기술진흥5개년계획’이 경제개발계획을 보완하는 장기 계획으로 발표된 것과는 차이가 있었다.77)
군사 정권의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은 더욱 선명해진 개발우선론적 시각을 명확히 보여주었다. 이전 계획까지 국민생활개선을 위한 한 분야이던 보건 분야는 경제개발을 보조하는 “기타 써비스업” 중 하나로 격하되었다. 보건 사업의 목표에서는 3개년계획안부터 명시되던 ‘복지 향상’이 삭제되었다(대한민국 정부, 1962: 297-298). 복지국가적 이상과의 명시적인 연결마저 끊어지며, 4월혁명이 창출했던 복지의 공간이 협소해지고 있었다.
군사 정권의 경제개발계획안을 확인한 보건위생국은 “경제 개발에 치중한 나머지, 보건 사업에 대한 고려는 거의, 또는 전무하다”고 비판했다. 평가조사사업 이후의 전망도 밝지 않았다. 1962년 예산도 임금 인상분을 제외하면 증액이 없었다.78) ‘보건의 민주화’라는 표현도 쿠데타 이후 자취를 감추었다.
2) 본조사와 원조 감축
1962년 5월, WHO와 USAID 소속 4명으로 구성된 자문위원단이 한국에 도착했다. USAID는 네팔, 인도, 레바논 등 아시아에 주재하던 보건 행정, 간호, 위생공학 고문을, WPRO는 역학 및 생물통계 전문가를 파견하며 다른 ‘저개발국’에서의 경험을 활용하고자 했다. USAID 측은 1개월, WHO 측은 3개월 동안 한국에 체류하는 일정이었다. 자문위원단은 짧은 기간을 보완하기 위해 내한 1개월 전부터 예비조사보고서는 물론, 한국, 미국, WHO에서 작성한 한국 관련 기존 보고서들을 검토했다.79) 내한 후에는 통계 및 기타 사실관계를 검토하고, USOMㆍ예비위ㆍ보사부ㆍ도 등의 보건 관계자들과 인터뷰를 진행하는 한편 현장조사를 실시했다.80)
평가 및 장기 계획 수립이 온전히 외부 자문위원단에 의해서만 진행되지는 않았다. 앞서 예비위의 문제제기에 따라 한국인 보건 전문가들의 참여가 확대된 결과였다. 이에 따라 예비위를 이끌었던 윤유선을 위원장으로 실무위원회(Evaluation and Planning Committee)가 구성되었다[표 2]. 실무위원회는 자문위원단의 평가 및 장기 계획 수립에 참여하며 평가보고서에 의견을 반영했다.81)
5월 29일, 평가보고서 「한국 보건 사업에 관한 보고서」가 제출되었다. 저자들은 국민 건강을 개선하기 위해 필수적ㆍ실용적이며, 정부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의 권고사항을 담으려 노력했다고 밝혔다. 전체 구성은 예산, 행정, 교육, 연구, 지방 보건, 질병 통제, 각종 보건 사업 등에 관한 20개 주제의 문제점과 권고사항을 다룬 평가보고서, 그리고 환경위생과 간호 분야 보충 보고서로 이루어졌다.82)
보고서의 서두를 장식한 문제는 역시 예산이었다. 자문위원단과 실무위원회는 복지ㆍ개발 병행론의 입장에서 제1차 경제개발계획의 보건 분야 경시를 비판했다. 개발을 수행할 국민의 건강이 경시된다면, 국민총생산에 기여할 수 있는 인력이 낭비되고, 경제성장이 정체된다는 지적이었다. 현재 수준의 예산에서는 국가의 기본적 역할인 국민의 건강 보호와 향상조차 불가능했다. 심지어 보건 예산이 차지하는 비중은 국방비를 제외하고 1960년 2.26%에서 1961년 1.54%로 감소했다. 한국인 대다수의 경제력과 심각한 무의촌 문제를 고려했을 때, 이 정도의 예산으로는 국민의 건강을 보호하고, 개선할 수 없었다
이들은 예산 비중이 점진적으로 개선되어 2~3년 안에 국방비를 제외한 국가 총 예산 중 3%가 보건 분야에 배정되어야 하며, 5개년계획의 마지막 해인 1966년에는 4~5% 수준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현재 존재하는 문제들은 대규모 예산 인상 없이 해결될 수 없”기 때문이었다.83) 이러한 비판은 세계 각국과 비교해도 유례가 없을 정도로 낮은 정부의 역할에 대한 한국 보건 전문가들,84) 한국 보건의 ‘자립’을 추구한 USOM 보건위생국 그리고 WHO 측의 공통된 인식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당시 한국을 제외한 모든 WHO 서태평양지역 회원국이 4% 이상의 예산을 보건에 투입하고 있던 점을 고려할 때,85) 국방비 제외 5% 수준의 보건비는 이들에게 충분히 현실적인 목표였다. 이외에도 자문위원단은 전체 보건 업무를 총괄할 보건청, 그리고 모자보건ㆍ간호ㆍ보건 통계ㆍ보건교육ㆍ보건 평가를 전담할 부서 설립, 지방 보건의 확대 및 강화 등을 권고했다.
뒤이어 7월 24일에는 WHO 자문위원 위안(I. C. Yuan)이 주도한 장기 계획 「한국 국가 보건 사업의 기초로서 지방 보건 서비스의 재조직과 강화」가 제출되었다.86) 충청남도를 시범지역으로 삼아 보건지소, 보건소, 도립병원, 도 보건당국, 도립위생시험소 등을 중심으로 지방 보건 조직을 강화함으로써 “보건사업 장기계획의 기초를 확고”하게 하기 위한 성격의 시범사업(충청남도 모범보건도 조성사업, K-0025)이었다.87)
8월 8일, 정희섭 장관은 평가 및 권고사항과 장기 계획을 박정희 의장에게 보고했다. 박정희 의장은 경제개발5개년계획과 조응하는 국가 보건 계획을 확립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5개년계획에 따를 수 있는 건강한 국민이 필요하다”고 언급했다.88) 실제로 1963년 예산에는 충청남도 모범보건도 사업을 위해 별도로 6,500만 원(6억 5천만 환)이 추가되며 1962년 대비 보건 예산이 약 10% 증액되었다. 평가조사사업의 영향이었다.89)
하지만 군사 정권의 움직임은 그 사이 일어난 물자 지원의 중단이라는 구조적 변화에 대응하기에 불충분한 수준이었다. 미국 원조 당국은 평가조사사업을 계기로 급속하게 원조 규모를 줄여나가고 있었다. 1960년 약 316만 달러에 달하던 보건 원조 규모는 1961년 약 60만 달러, 1962년 0달러로 축소되었다.90) 평가조사사업이 종료되며 1960년까지 실질적으로 중앙정부 보건비 대비 55~75% 정도의 규모였던 미국의 보건 원조가 사라진 것이었다.91) 따라서 예산 확대를 전제로 한 보사부의 장기 계획안은 현실화될 수 없었다.
게다가 USOM은 물자 지원을 넘어 보건 분야 기술원조마저 축소하며 한국 보건의 ‘자립’을 급속도로 추진했다. 보건위생국은 평가 및 장기 계획에 따라 한국에 필요한 분야를 중심으로 조직을 재편한다는 방침에서 공석을 채우지 않고 있었다.92) 그런데 1961년 9월 킬렌(James S. Killen) 신임 USOM 단장 부임과 11월 본부 체계가 ICA에서 USAID로 변화하면서 이루어진 기구 개편 속에서 보건위생국은 보건위생과(Branch)로 격하되었다.93) 한국 보건이 낮은 수준의 근대화에 도달했다는 판단 때문이었고, 이는 장기 계획 수립 이후 본격적인 기술원조를 통해 한국 보건을 ‘자립’시키려던 보건위생국의 입장과 다른 흐름이었다. 게다가 경제개발5개년계획에 나타난 보건 분야에 대한 경시는 USOM이 보건 분야를 더욱 축소하는 명분이 되었다. 결국 USOM은 공중보건 고문 1명을 제외하고 모든 보건 관련 직책을 폐지했다. 또한 USOM은 진행 중이던 모든 보건 프로그램을 1962년 6월 30일부로 중단하기로 결정했고,94) 남겨진 1명의 보건 고문은 공공사업국(Public Services Division) 산하에 편입되며 1960년 말까지만 해도 16명 규모였던 보건위생국이 해체되었다.95)
1962년 6월 30일 한국을 떠난 한 보건 고문은 한국 정부의 보건 역량이 어느 정도 성장했지만, 자립의 단계와는 거리가 멀다며 물자 지원에 이어 기술원조의 급속한 철수가 한국의 자립을 어렵게 만들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가 USOM에 남긴 마지막 권고사항은 첫째, 평가사업의 권고사항 이행을 위한 한국 정부와 USOM의 공동 노력, 둘째 폐지된 보건교육, 위생, 간호 고문 직책의 부활, 셋째 USOM이 주저하고 있는 충청남도 모범보건도 조성사업에 대한 지원이었다.96)
하지만 1963년 하반기에 이르자 보건 분야 원조의 목표는 “최소한의 기술원조”를 제공하는 것으로 축소되었다.97) USOM 내에서 개발과 복지의 병행을 강조하던 보건위생국의 소수 입장은 희미해졌다. 이제 보건 고문은 최대한의 경제적 효과를 만드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한국 정부가 경제개발에 최대한의 효과를 만드는 보건 사업에 집중하고, 생산에 적은 영향만 주는 보건 관련 지출은 감소시키도록 지도하는 것이 보건 분야 기술원조의 목표였다. 이러한 변화는 당시 미국 대한원조가 본격적으로 경제개발을 지원하기 시작하는 상황과 조응하고 있었다(박태균, 2007: 270-273). 전반적인 보건 원조는 이제 미국을 대신하여 WHO가 주도할 것이었다.
선명한 개발 노선에 입각한 국가 발전 기획에 더하여 이루어진 원조 감축은 개발 지향적 노선을 확고하게 구축하는 결정적 계기였다. 게다가 보건의 민주화를 주장하던 보건 전문가들 역시 혁명 이후에도 해결되지 않는 경제난을 마주하며 변화하고 있었다. 보건 전문가들이 보기에 한국의 보건 사업은 이상적인 서구 보건학이 아니라 한국적 특수성에 기반해야 했다(권이혁, 1960). 그 핵심은 식민과 전쟁을 겪은 한국의 경제적 낙후였고, “이런 근본적 현실에서 파생된 공중보건과 직접적으로 관련 있는 특수성을 구체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했다(한달선, 1964).
이때 보건 전문가들의 관심을 끈 것이 인구 문제였다. 인구 문제는 경제발전과 보건 양 측면에서 중요한 문제로 부상하고 있었다. 보건의 민주화의 가장 강력한 옹호자이자 사회보장제도 도입을 주장하던 양재모는 1960~1961년을 거치며 인구 문제가 선결되지 않으면 “아무리 경제발전을 이루고 국민보건향상을 위한 사업을 해도 아무 효과가 없”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양재모, 2001: 296). 방숙 역시 방역국장 사임 이후 연세대에서 양재모와 함께 가족계획사업에 천착했다. 인구 문제는 경제발전의 저해 요인으로 이해되고 있었기에 개발우선론과도 조화될 수 있는 지점이었다. 1961년 11월 국가재건최고회의는 ‘가족계획추진에 관한 건’을 통과시키며 인구정책을 본격적으로 추진했고, 미국 인구협회와 같은 해외 민간 기관들도 한국의 인구 문제를 지원하기 시작했다. 가족계획사업은 빠르게 한국 보건 사업의 핵심을 차지했다.
1963년 2월, 공중보건협회장 이종학은 보건의 민주화를 구현하기 위해 국가 역할의 대폭 확대를 전제로 한 장기 보건 계획을 제시했다. 그는 보건세 창설을 통해 연 평균 66.4억 원(664억 환)으로 전국에 182개 보건소와 182개 군립병원, 1,951개 보건진료소 설치를 중심으로 보건의료의 국가관리를 강조하는 5개년 계획을 주장했다. 1961년 보건예산의 6배 이상을 활용하려는 계획이었다(이종학, 1963: 437-448). 하지만 복지를 경제적 총량 성장 속에 포괄시킨 군사 정권의 국가 발전 기획과 개발 중심의 보건의료체계를 지도하는 미국 원조 당국 사이에서, 복지국가적 이상을 반영한 이종학의 주장은 현실화되기 어려웠다. 같은 해, 이종학은 충청남도 모범보건도 조성 사업에 현지 책임자로 참여했다. 이중의 충격이 낳은 구조적 제약 속에서도 4월혁명의 유산은 이어지고 있었다.
5. 맺음말
이 글은 1960년대 초반 한국 보건의료체계의 개발 지향적 경로가 설정되는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 혁명과 쿠데타, 그리고 미국의 대한원조 전환이 교차했던 보건사업평가조사사업을 검토했다. 이 글에서 보여주듯, 개발 지향적인 보건의료체계의 정착은 일방적이거나 자연스러운 과정이 아니었다. 비록 4월혁명이 낳은 제2공화국 시기에도 한국전쟁의 여파로 인한 경제난 속에서 개발우선론이 여전히 우세를 점했지만, 동시에 복지에 대한 사회적 열망을 발판 삼은 ‘보건의 민주화’가 민주개혁의 과제로 부상하며 기존 구도에 균열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이처럼 경합적이고 유동적인 4월혁명의 공간에서, 보건 전문가들은 건강을 개인의 권리이자 민주주의의 토대로 적극 연결시키며 개발우선론을 비판했고, 때로는 개인으로, 때로는 공중보건협회를 통해 국가 보건정책에 개입하려 시도했다.
국제적인 흐름도 우호적이었다. WHO의 보건 전문가들이 개발과 복지의 병행을 강조하고 있었고, USOM 보건위생국 역시 같은 입장에서 한국 정부의 보건 역할 확대를 압박했다. 이처럼 국제보건의 흐름과 보건의 민주화 지향이 4월혁명을 계기로 교차하고 확대되며 장기계획 수립을 위한 평가조사사업이 시작될 수 있었다. 비록 한국의 보건 전문가들과 USOM 보건위생국이 한국 보건의 ‘자립’ 속도와 방식을 둘러싸고 인식 차를 보이기도 했지만, 복지와 개발의 병행이라는 공통의 토대 위에서 함께 사업을 추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쿠데타와 USOM 보건 원조의 전환은 개발우선론의 명백한 우위로 이어졌다. 군사 정권은 혁명의 유산을 일정 정도 수용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장면 정권보다 선명하게 개발에 집중했다. 복지가 경제적 총량 성장으로 규정되며 개발의 울타리 안으로 포섭되었고, 재정 적자로 이어질 수 있는 보건 분야가 축소되는 등 혁명이 만든 균열이 봉합되었다. 한국인 보건 전문가와 USOM 보건위생국은 평가조사사업을 통해 정부 역할 확대의 방향에서 권고사항과 장기 계획을 제출했지만, 경제개발을 최우선시 하는 군사 정권의 국가 발전 기획 아래에서 그 전망은 밝지 않았다.
게다가 한국전쟁 이후 한국 보건의료체계의 물적 토대였던 미국 보건 원조의 급격한 축소는 또 다른 충격이었다. 그나마 복지와 개발의 병행을 강조하며 복지국가론의 한 축을 담당하던 USOM 보건위생국마저 원조기구 개편 속에서 해체되었고, 이후 USOM 기술원조의 목표는 개발 지향적인 한국 보건의료체계 구축으로 협소해졌다. 이에 더해 보건의 민주화를 강조하던 일부 보건 전문가들 마저 인구 문제 해결로 관심을 돌렸다. 미국 원조 전환의 결과는 한국 정부의 역할 확대가 동반되지 않은 급속한 ‘자립’이었고, 이는 개발우선론 우위의 고착화를 의미했다. 이처럼 군사 정권과 USOM의 개발우선론은 개발 지향적 보건의료체계의 경로를 구축했다.
한국인의 빈곤과 의료 자원의 부족은 식민과 전쟁의 상흔이 남긴, 당시 대다수의 개인이 해결할 수 없는 건강의 구조적 요인이었다. 보건의료의 국가관리를 요청하는 목소리가 해방 직후, 그리고 4월혁명 시기에 등장했던 이유는 여기에 있었다. 하지만 정책 결정자들의 선택은 더욱 빠른 개발로의 집중이었다. ‘한강의 기적’을 향해 전진하는 길의 출발점에서 볼 때, 사람들의 건강을 위한 사회적 보호망의 확대는 너무 무거운 짐이었다. 빠른 길이 선택되었지만, 그 과정에서 감내해야 하는 것 대부분은 선택에 참여하지 못한 이들의 몫이었다.
Notes
1960년 전후 복지국가론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고(최민석, 2021: 198-205).
제2차세계대전 종전 이후 미국의 대외원조는 ① 구호 ② 군사 ③ 경제 ④ 기술원조로 나눌 수 있다(이동원, 2019: 15-36). 그중 기술원조는 1949년 시작된 미국의 저개발국 원조사업인 포인트 포(Point Ⅳ)에서 유래한 개념이다. 기술원조의 목적은 저개발국 개발에 필요한 지식과 경험, 기술을 전수하는 것이었는데, 연수생 훈련, 전문가 파견 및 지도 등 저비용의 방식을 통해 진행되었다. 기술원조는 주로 천연자원, 농업, 교육, 보건 분야에서 낮은 수준의 근대화를 목표로 이루어졌고, 낮은 재정적 비중에 비해 높은 사회문화적 파급력을 특징으로 한다. 기술원조의 맥락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고(한봉석, 2017: 3-10, 30-44; 이동원, 2019: 34).
보건사회부 장관, 「보건사업평가조사」, 『국무회의록』, 1962년 4월 30일, 8쪽.
Iong Gwyn Ra, “[A Letter from Ra to Moyer],” 1961. 1. 9., Health, Jan. 1961(2of2), Box 11, Entry P 582, RG 286. 이하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 자료는 일반적으로 ‘저자-문서 제목-생산일자-Folder 제목-Box 번호-Entry 번호-Record Group 번호’ 순으로 작성한다. 동일한 Folder에서 나온 문서의 경우 Box 번호 이하는 생략했다.
1차 보고서는 보건행정의 일반적인 원칙을 다룬 Expert Committee on Public-Health Administration (1951), 2차 보고서는 Methodology of Planning an Integrated Health Programme for Rural Areas (1954), 3차 보고서는 Local Health Service (1960)이다.
“Country Program Book, Republic of Korea, Budget Proposal FY 1961,” 1959. 8. 25., Bureau for East Asia, Burma, Korea and Indonesia Program Subject Files, 1960-68, RG 286, pp. 27-28, 50; “Country Program Book, Republic of Korea, Budget Proposal FY 1962,” 1960. 8. 26., p. 47.
“Country Program Book, Republic of Korea, Budget Proposal FY 1961,” 1959. 12. 15., p. 18.
Alfred S. lazarus, “Term End Report,” 1959. 6. 10., KOREA-HEALTH, Box 110, Entry 422, RG 469, pp. 12-13.
Shelamer, “PSD-HS Program Resume,” 1961. 9. 22., Health, Jan. 1961(1of2), Box 11, Entry P 582, RG 286, p. 1. 구호와 의료 시설 재건, 낮은 수준의 근대화를 목표로 한 기술원조 등 1950년대 미국의 대한 보건 원조의 성격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고(한봉석, 2017: 183-189).
Shelamer, “[A Letter from Shelamer to Lee],” 1961. 3. 30., Health, Jan. 1961(2of2).
Lazarus, “Special Consultant in Public Health,” 1959. 11. 20., KOREA-HEALTH.
Lazarus, “Korea, Quaterly Activities, April-June 1960,” 1960. 6., Health - Reports (1960), Box 146, Entry UD 1276, RG 469; Lazarus, “Items for Discussion with Minister and Vice Ministers of Health and Social Affairs,” 1960. 9. 1., Health (Aug. - Dec. 1960), Box 146, Entry UD 1276, RG 469.
민광식, 「의정당국에의 건의」, 『의사시보』, 1961년 2월 6일.
권이혁, 「보건위원회설치하라 산아제한은 재고할문제」, 『의사시보』, 1960년 9월 19일.
대표적으로 1960년 5~6월 『의사시보』 에 연재된 특집 <보건행정에 제언한다>가 있다.
김명호의 회고에 따르면 공중보건협회 창설의 주축은 보건학 유학생과 1953년 설립된 공중보건원 수강생들이었다. 공중보건원 수강생 100여 명은 보건 분야 공직자 중 선발되었다(대한공중보건협회 40년사 편찬위원회, 1997: 729-730).
자료를 공유해 주신 고려대 여성의학사연구소 김진혁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결핵 근본대책을 세우라」, 『조선일보』, 1960년 5월 21일(조간).
김영언, 「새 공화국에의 제언」, 『조선일보』, 1960년 8월 16일.
「농촌은 이렇다. 무의촌을 없이하라」, 『동아일보』, 1960년 8월 9일(조간); 「장면 내각의 과업」, 『연세춘추』, 1960년 8월 29일. 하지만 일각에서는 사회보장제도가 성급하며 생산이 우선이라는 시각 역시 존재했다. 학생들 사이에서도 개발우선론과 복지ㆍ개발 병행론은 경합하고 있었다. 「사회보장제도에의 관심」, 『연세춘추』, 1960년 6월 13일.
방숙, 「민주개혁과 보건」, 『조선일보』, 1960년 5월 10일(석간).
방숙, 「민주개혁과 보건」, 『조선일보』, 1960년 5월 10일(석간).
국립보건원 역, 「보건사업의 게획 – WHO 보건행정전문가위원회 제4차보고서」, 『의사시보』, 1961년 11월 27일~1962년 4월 30일.
심상황, 「경제적인 보건정책」, 『조선일보』, 1960년 6월 7일.
「위생사무 보사부서 관할」, 『경향신문』, 1960년 9월 8일(석간).
Lazarus, “Korea, Quaterly Activities, July-September 1960,” 1960. 9., Health - Reports (1960).
민의원 사무처, 「제37회 국회 보건사회위원회 회의록 제7호」, 『국회회의록』, 1961년 11월 3일, 9쪽.
Hugh D. Farley, “Public Health Program,” 1960. 11. 7., Health (Aug. - Dec. 1960).
대한공중보건협회, 「보건행정혁신안」, 『의사시보』, 1960년 10월 31일.
대한공중보건협회, 「나보사부장관에게」, 『의사시보』, 1960년 12월 5일.
Lazarus, “New Developments during Absence of Director,” 1960. 11. 9., Health (Aug. - Dec. 1960).
「보건위원회의 사명과 우리들의 기대」, 『의사시보』, 1960년 11월 28일; 「새규정안심의완료 보건위원회 첫 회의」, 『의사시보』, 1960년 11월 28일.
김성진, 「보건정책사견」, 『의사시보』, 1960년 9월 26일.
Shelamer, “Conference with Ministry of Health and Social Affairs officials,” 1960. 12. 15., Health, Jan. 1961(2of2).
Raymond T. Moyer, “[A Letter from Moyer to Kim],” 1961. 2. 10., Health, Jan. 1961(2of2).
Shelamer, “[A Letter from Shelamer to Lee],” 1961. 2. 14., Health, Jan. 1961(2of2).
Pyong Hak Lee, “[A Letter from Lee to Shelamer],” 1961. 2. 24., Health, Jan. 1961(2of2).
Pyong Hak Lee, “[A Letter from Lee to Shelamer],” 1961. 2. 24.
기술원조를 중시한 WHO와 서구 산업국가, 물자 및 자금 원조를 요구한 탈식민 국가 간 갈등은 당시 국제보건의 일반적인 문제 중 하나였다(Lee, 1997: 25-27).
Shelamer, “[A Letter from Shelamer to Lee],” 1961. 2. 14.
민의원 사무처, 「제37회 국회 보건사회위원회 회의록 제6호」, 『국회회의록』, 1961년 11월 2일, 25쪽.
Shelamer, “Re: Evaluation of Health Program,” 1961. 3. 14., Health, Jan. 1961(2of2).
보건사회부 장관, 「보건사업평가조사」, 3-4쪽.
Shelamer, “[A Letter from Shelamer to Fang],” 1961. 7. 5., Health, Jan. 1961(1of2).
「보건사업평가조사 예비조사 중간보고 (상)」, 『의사시보』, 1961년 8월 14일.
「보사부장관 나용균씨」, 『동아일보』, 1960년 9월 14일(석간).
「민주당 양파는 경제정책을 명시하라」, 『조선일보』, 1960년 8월 5일(석간).
Lazarus, “Meeting with Vice Minister of Health and Social Affairs - Aug. 5, 1960,” 1960. 8. 8., Health (Aug. - Dec. 1960).
경제개발3개년계획안의 성격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고(정진아, 2022: 341-352).
박정희, 「예산통과에 즈음한 담화」, 1961년 12월 31일, 대통령비서실, 『박정희연설문집 1 최고회의편』, 1973, 152쪽.
「8.15 전에 정권 이양문제 공표할 터」, 『경향신문』, 1961년 7월 19일(석간).
박정희, 「당면한 긴급 경제시책에 대한 담화」, 1961년 7월 16일, 대통령비서실, 『박정희연설문집 1 최고회의편』, 1973, 11쪽; 박정희, 「국민에게 보내는 연두사」, 1962년 1월 1일, 같은 책, 158쪽.
Shelamer, “Quarterly Activities, April—June 1961,” 1961. 8. 22., Health-Reports, Jan. 1961, Box 12, Entry P 582, RG 286.
「보사부 직원 대폭 정리」, 『의사시보』, 1961년 7월 24일.
Shelamer, “Quarterly Activities, April—June 1961,” 1961. 8. 22., Health-Reports, Jan. 1961.
「사령」, 『관보』 2892호, 1961년 6월 26일; 「사령」, 『관보』 2916호, 1961년 7월 25일.
Shelamer, “Term End Report of Arthur M. Shelamer - Acting Chief,” 1962. 7. 12., Health-Reports, Jan. 1962, Box 38, Entry P 582, RG 286.
Jo Bailey Howard, “Term End Report of Jo Bailey Howard - Sanitarian,” 1962. 5. 24., Health-Reports, Jan. 1962.
Shelamer, “Conference with Ministry of Health and Social Affairs re Evaluation and Planning Program,” 1961. 7. 5., Health, Jan. 1961(1of2).
Shelamer, “[A Letter from Shelamer to Fang],” 1961. 7. 5., Health, Jan. 1961(1of2).
「보건사업평가조사 예비조사 중간보고 (상)」, 『의사시보』, 1961년 8월 14일.
「보건사업평가조사 예비조사 중간보고 (하)」, 『의사시보』, 1961년 8월 21일.
「실무위원회, 현지시찰코 조사」, 『의사시보』, 1962년 5월 14일.
USAID and WHO Consultants, “Report on Korean Health Program,” Report on Korean Health Program, May 1962, p. 24, Health-Reports, Jan. 1962.
권이혁은 서문을 통해 이 책에 한국의 특수성을 반영하려 노력했다고 밝혔다. 권이혁은 이 책의 23개 장 중 14개 장에서 예비조사보고서를 주요 전거로 활용했다(권이혁, 1963).
Shelamer, “[A Letter from Shelamer to Fang],” 1961. 7. 5., Health, Jan. 1961(1of2); Shelamer, “Public Health Evaluation and Planning Program,” 1961. 7. 12., Health, Jan. 1961(1of2).
현재 원본 보고서 소장처는 확인되지 않는다. 이 글에서 활용한 146페이지 분량의 요약본은 외부 자문위원단에게 영문 번역본을 제공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자료를 제공해 주신 연세의대 동은의학박물관 정용서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Shelamer, “Korea, Quarterly Activities, January-March, 1962,” 1962. 4. 10., Health-Reports, Jan. 1962.
「예산영달늦어 보건사업예비조사부진」, 『의사시보』, 1961년 12월 4일.
I. C. Fang, “[A Letter from Fang to Shelamer],” 1961. 7. 24., Health, Jan. 1961(1of2).
Shelamer, “[A Letter from Shelamer to Fang],” 1961. 8. 14., Health, Jan. 1961(1of2).
Shelamer, “[A Letter from Shelamer to Pease],” 1961. 8. 23., Health, Jan. 1961(1of2).
보사부의 계획안은 현재 확인되지 않는다. 하지만 USOM 측에 해당 계획안이 제출된 바 있으며(Shelamer, “Quarterly Activities, July—September 1961,” 1961. 10. 26., Health-Reports, Jan. 1961), 외부 자문위원단의 보고서 참고문헌 목록에도 다음과 같이 등장한다. ‘First Five-Year Plan, Long-term Measures Concerning Public Health, Ministry of Health and Social Affairs, 1961, pp. 416.’ (Juliette Julien, “Nursing Report,” Report on Korean Health Program, May 1962, p. 14.)
Shelamer, “Quarterly Activities, July—September 1961,” 1961. 10. 26., Health-Reports, Jan. 1961; 「산아제한도 포함」, 『의사시보』, 1961년 8월 8일.
ICA의 후신으로, 1961년 11월 설립되었다. 본부 체계의 변화와 달리 현지 집행 기관인 주한 USOM은 뒤늦은 1968년에 주한 USAID로 변화했다.
Shelamer, “[A letter from Shelamer to Fang],” 1962. 4. 18., Health, Jan. 1962(1of2), Box 37, Entry P 582, RG 286.
「기술진흥 5개년계획 수립」, 『경향신문』, 1962년 2월 5일(석간).
Shelamer, “Korea, Quarterly Activities, October-December, 1961,” 1962. 1. 10., Health-Reports, Jan. 1962.
Shelamer, “[A letter from Shelamer to Lewis, Julien and Yuan],” 1962. 4. 10., Health, Jan. 1962(2of2).
Shelamer, “[A letter from Shelamer to Lewis],” 1962. 4. 20., Health, Jan. 1962(1of2).
Shelamer, “USAID and WHO Consultants Conference with Minister of Health and Social Affairs, Tuesday, May 29, 1962,” 1962. 6. 4., Health, Jan. 1962(2of2).
USAID and WHO Consultants, Report on Korean Health Program.
USAID and WHO Consultants, “Report on Korean Health Program,” Report on Korean Health Program, p. 2.
윤유선, 「각국의 보건의료 예산은 얼마나 되나」, 『의사시보』, 1962년 1월 22일.
“Consolidated Country Reports on Rural Health Services in the Western Pacific Region(WPR/RH/6),” p. 8, WPRO, Report on the First Regional Seminar on Rural Health Services (Manila, Philippines: WPRO, 1963).
I. C. Yuan, “Re-organization and Strengthening of Local Health Services as the Foundation of the Korean National Health Program,” July 24, 1962, Health-Reports, Jan. 1962.
보건사회부장관, 「모범보건도설정」, 『국무회의록』, 1962. 12., 1쪽.
「국가보건 계획 확립토록. 박의장, 상황조사보고 받고 지시」, 『부산일보』, 1962년 8월 8일.
Paul Hartman, “End-of-tour Report,” 1963. 1. 10., HLS 3(Health Education), Box 105, Korea Subject Files, FY 61-63 Entry 599, RG 286.
한국은행 조사부, 『경제통계연보』, 1963, 242~243쪽.
1960년 2월 이후 협정 환율은 1달러=650환이었지만, 시장 환율은 이미 1,300환을 넘어가고 있었음을 고려한 범위다.
Shelamer, “PSD-HS Program Resume,” 1961. 9. 22., Health, Jan. 1961(1of2).
Shelamer, “Quarterly Activities, July-September 1961,” 1961. 10. 26., Health-Reports, Jan. 1961.
Shelamer, “Korea, Quarterly Activities, October-December, 1961,” 1962. 1. 10., Health-Reports, Jan. 1962.
Office of Public Health, ICA, “Roster of Health Personnel, ICA/W and Overseas” 1960. 12., Health (Aug. - Dec. 1960), pp. 6-7.
Paul Hartman, “End-of-tour Report.”
USAID, “Country Assistance Program, Korea FY 1965 Part Ⅱ,” 1963. 9. 10., Box 2-1, Bureau for East Asia, Burma, Korea and Indonesia Program Subject Files, 1960-68, Entry UD 29, RG 286, pp. Ⅲ-43-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