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ㆍ청 외교와 조선의 의관들†
Diplomacy between Joseon and Qing China and the Role of Joseon Medical Officia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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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The medical practices of Joseon medical officials began in Shenyang, where the unique circumstances of Joseon people residing in Shenyang lasted for eight years and created opportunities for interaction with the Qing people. During this time, Joseon medical officials gained the trust of Qing society, and even the emperor entrusted them with medical care.
Following the Qing occupation of Beijing in 1644, the diplomatic arena shifted to Hanyang and Beijing. Joseon medical officials provided treatment to Qing envoys within Joseon, while Qing rulers summoned them to Beijing. Although the Qing domain expanded from Shenyang to Beijing, the trust placed in Joseon medical officials remained consistent. This trust became the foundation for medical officials to engage in diplomatic activities. Medical officials occasionally acquired important information and influenced the decisions of Qing rulers.
By the late 17th century, however, the adjustments to the Joseon-Qing relations that had continued since the Byeongja Horan (Manchu War of 1636) had stabilized. Qing envoys visited Joseon less frequently, and contentious diplomatic issues became rare. While the trust in Joseon medical officials that had been established in the seventeenth century continued into the early eighteenth century, the transfer of medical responsibilities for Qing envoys from Naeuiwon to Jeonuigame and Hyeminseo gradually curtailed opportunities for Joseon medical officials to play active diplomatic roles. By this point, Qing rulers no longer summoned them, and Joseon politicians did not make diplomatic use of them. This shift illustrates how the changing dynamics of Joseon-Qing relations in the eighteenth century were reflected in the evolving role of medical officers.
1. 들어가며
1637년 조선은 청과의 전쟁에서 패배하였다. 청은 명을 대신하여 조선의 새로운 종주국으로 군림하였을 뿐만 아니라 승전국으로서의 권리도 행사하였다. 그 결과 조선과 명 사이의 외교적 관례가 조ㆍ청 관계 내에 이식되었고, 질자(質子), 쇄환(刷還), 징병, 혼인, 세폐 문제 등이 새로운 외교적 화두로 떠오르게 되었다. 하지만 200여 년간 지속된 조ㆍ명 관계는 몇 가지 제도적 장치만으로 이식될 수 없었고, 새롭게 부과된 의무들은 적용 과정에서 많은 시행착오를 요구하게 되었다. 익숙함과 생소함 사이에서 양국은 관계를 조정해나갔고 중국 지배를 완수한 강희 치세의 중반 무렵부터 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이명제, 2021: 17-51).
조ㆍ청 관계가 아직 조정의 과정을 거치고 있을 때 조선을 가장 고통스럽게 만든 것은 징병과 세폐 문제였다. 청은 충성의 징표로 명과의 전쟁에 동참할 것을 강요했고, 이는 숭명반청의 슬로건을 내세우고 집권에 성공하였던 인조 정권의 존립 기반을 위협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조선은 징병 문제를 어떻게든 회피하고자 시도하였으나 홍타이지는 조선의 시도를 철저히 무력화시켰다.1)
세폐는 조선에 경제적 부담을 안겼다. 조선은 일종의 평화유지비에 해당하는 세폐를 매년 청에 전달해야 했고, 홍타이지가 요구한 세폐의 수량은 호조의 연간 조세 수입을 상회하는 것이었다(홍선이, 2011: 18-19). 세폐는 이후 10차례에 걸쳐 상당 부분 감면되기는 하였지만 대략 홍타이지가 처음 요구하였던 수량의 20% 정도는 19세기 후반까지 매년 청에 전달되었다(이명제, 2024: 55-56).
이처럼 병자호란 패배는 결코 상징적 사건에 머물러 있던 것이 아니다. 패전의 책임을 추궁하는 홍타이지의 칙유문은 다방면에서 조선 사회의 현실적인 부담으로 작동하였다. 따라서 병자호란 이후 조선의 핵심 과제 중 하나는 조선에 부과된 새로운 의무사항, 그 중에서도 징병과 세폐 같은 문제를 무력화시키는 것이었다. 조선이 선택할 수 있었던 현실적인 대안은 수용할 수 있는 여러 요구들을 최대한 수용하여 청인의 환심을 사고, 이를 바탕으로 수용할 수 없는 의무사항에 저항하는 것이었다.2)
이러한 외교적 기조로 인해 조선 조정은 수용 가능한 영역에서 청의 요구에 최대한 협조하는 모습을 유지하였다. 그 과정에서 조선의 의관(醫官) 역시 외교 현장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조선 의관들의 치료 대상은 대조선 외교 일선에서 활약하는 청의 통관이나 사신은 물론, 고위 관료, 황족 심지어 황제로까지 확대되었다. 조선은 이내 청에 제공하는 의료 지원이 정치적으로 활용 가능한 수단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 동안 조ㆍ청 외교에서 의관의 존재는 크게 부각되지 않았다. 몇몇 선행 연구에서는 비공식 교섭 경로를 모색하는 과정에서의 교섭인 역할에 주목하긴 하였지만 단편적인 사례만 다루거나 의관의 치료 행위는 상대적으로 소홀히 다루었다.3) 하지만 조선 의관들이 외교 현장에서 활동하기 위해서는 조선 의관에 대한 청 사회의 신뢰감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에 본고에서는 조ㆍ청 외교에서 확인되는 의관들의 의료 활동에 먼저 주목하고, 이를 바탕으로 의관들이 정치적 교섭의 한 축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계기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본문은 크게 세 시기로 나누었다. 첫 번째 시기는 1637~1644년까지로 조선 의관과 청의 관료들이 접촉하는 시기이다. 이 시기에 주로 활동하였던 조선 의관은 심양관에서 소현세자를 비롯한 질자를 배종하였던 의관들이다. 본고에서는 이들의 활동이 심양관의 조선인들을 넘어 청 황제 홍타이지까지 확대되는 양상을 살펴볼 것이다. 두 번째 시기는 입관 이후부터 17세기 후반까지로, 이 시기에 활약하였던 의관들은 주로 내의원 소속 의관들이 었다. 이들은 조선과 청의 사신 외교 과정에서 의료 행위를 통해 활동의 기반을 넓혀 나갔으며 점차 정치적 영역에서 존재감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세 번째 시기는 18세기 이후에 해당하는 시기로, 내의원(內醫院)을 대신하여 양의사(兩醫司)가 외교 현장에서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이러한 현상은 대체로 조ㆍ청 관계의 이완과 맞물려 발생하는데 그 원인에 대해 시론적이나마 분석을 진행해보고자 한다. 이상의 과정을 통해 의료 행위의 주체이자 외교적 교섭의 매개자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 의관을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2. 심양의 조선인 의관
인조가 항복을 결심하자 청 황제 홍타이지는 다양한 의무사항을 조선에 부과하였는데, 그 중 하나는 질자를 심양에 두는 것이었다.4) 이 조치에 따라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은 물론 삼정승과 육조판서의 자제들이 질자의 신분이 되었고, 세자시강원의 관원을 비롯해서 수백 명 단위의 인원이 질자와 함께 심양관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그 인원들 중에는 심양 주재 조선인 일행의 건강을 책임질 의관 역시 존재하였다.
<표 1>은 1637년부터 1644년 8월6)까지 심양관에서 배종7)하였던 의관의 명단이다. 총 23명이 의관이 확인되는데, 유의(儒醫) 현술선(玄述先)을 제외하면 모두 내의원 의관이었다. 내의원에 소속된 의관은 내의와 침의, 의약동참의로 구분해볼 수 있는데,8) 심양관에 배종하였던 인원을 단순 나열하면 내의 8명(정남수ㆍ신덕청ㆍ박군ㆍ이호검ㆍ윤홍임ㆍ남응침ㆍ송경일ㆍ이순원), 침의 13명(유달ㆍ유후성ㆍ정훤ㆍ박태원ㆍ이득길ㆍ신가귀ㆍ안례ㆍ채득기ㆍ전덕립ㆍ윤후익ㆍ최응원ㆍ정후계ㆍ최우량), 의약동참의 2명(김신성ㆍ정지문)이었다. 다만 내의와 의약동참의를 동일한 계통으로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침의 13명과 내과 계통의 내의와 의약동참의 10명으로 보아도 무방하다.9)
1637~1644년 심양 배종 의관 명단
Table 1. List of Medical Officers Who Accompanied the Resident Officials to Shenyang from 1637 to 1644
그렇다면 심양에 주재하였던 의관들은 조선인들만 치료하였을까? 불행히도 현재 남아있는 자료들로는 세자 부부 이외의 환자들에 대한 치료 과정을 상세하게 알 수 없고, 특히 청인들에 대한 치료 기록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병자호란 직후 소현세자를 심양으로 호송하던 도르곤이 의관을 요청하여 유달(柳達)을 파견한 사례가 남아있지만10) 심양 내에서 청인을 치료한 흔적을 찾기는 쉽지 않다.
단 하나의 예외 사례가 존재하는데 그것은 바로 1643년 황제 홍타이지에 대한 치료였다. 홍타이지는 1640년부터 중풍 증상으로 곤란을 겪고 있었는데, 이 과정에서 조선에 청죽(靑竹)과 생강 등의 약재를 반복적으로 요구하였다(이명제, 2024: 67). 약재에 한정되어 있던 홍타이지의 요구는 1643년 3월을 기점으로 조선 의관의 진료로 확대되었다. 처음에는 당시 심양관에 주재하였던 의관 채득기(蔡得沂)가 동원되었다.11) 그리고 이틀 뒤 약술을 잘 아는 의원 1인과 침의 유달을 심양으로 들여보내 한의(漢醫)와 함께 황제를 치료하도록 명하였다.12) 이에 조선 조정은 내의 박군(朴頵)과 침의 유달을 곧장 심양으로 들여보냈고, 박군과 유달은 채득기와 함께 황제 치료에 동원되었다(이명제, 2024: 72-73).
여기서 두 가지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선 한의의 존재이다. 만주에서 전통적으로 의학의 역할을 수행하였던 존재는 샤먼이었다. 하지만 여진이 후금에서 청으로 외연을 확대하는 과정에서 몽골과 중국의 의학적 지식을 수용하는 한편 한의들을 황실의 주치의로 고용하게 된다. 다만 청의 의료 체계는 여전히 미비한 상태였고, 한의들 역시 다른 관청에 소속되어 활동했던 것으로 보인다. 청에 의학 전문 행정 기관으로 태의원(太醫院)이 설립된 것은 입관 이후인 1644년 8월의 일이었다.13) 홍타이지는 조선 의관들로 하여금 이 한의들과 함께 자신을 치료하도록 지시한 것이다. 흥미롭게도 청의 한의가 조선인을 치료한 사례도 확인된다. 1638년 소현세자의 산증(疝症)이 악화되자 한 번은 심양관에서 한의를 초청하였고, 한 번은 청에서 병세를 확인하겠다며 한의를 파견한 것이다.14) 다시 말해 심양 내에는 중국 전통의학에 익숙한 의관이 존재하였고, 청인들 역시 한의에게 일차 진료를 받을 수 있었다.15)
다음으로 침의 유달을 지목했다는 사실이다. 당시 심양관에는 침의로 채득기와 전덕립(全德立)이 주재했었고, 채득기가 진단에 동원되기도 하였지만 청에서는 굳이 유달을 따로 지목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내의 송경일(宋擎日)과 이순원(李順元)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약술(藥術)에 능한 의관까지 따로 요구하였다. 이는 청에서 조선 의관의 실력을 파악하고 있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이와 관련해서 조선 출신 청의 통관(通官) 정명수(鄭命守)의 발언이 주목된다.
신들의 말이 “성상의 체후가 오래도록 미령하시어 신민이 걱정하고 있다”라는 데에 미치자, 정명수가 답하기를, “황제께서 행차에 임하여 말씀하기를, ‘국왕의 병은 바로 풍증(風症)이다. 남한산성에서 여러 달을 머물러 몸이 상한 데가 반드시 많을 것인데 이어 한질(寒疾)을 얻었으므로 이처럼 오래도록 낫지 않는 것이다. 본국의 의약으로 오래도록 효험을 보지 못하고 있으니 우리나라의 의원을 보내 증세를 보도록 하려 했는데, 폐단이 있을 듯하여 그만둔다.’라고 하셨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신들이 “황제의 은혜가 망극하지만 풍토가 각기 다르니, 다른 나라의 의원이 입시할 수 있는 바는 아니다”라고 하니, 정명수가 웃으면서 말하였다. “비록 온다고 하여도 유달 한 사람만 못할 것입니다. 말을 들었기에 감히 전하는 것일 뿐 입니다.”16)
위의 인용문은 1641년 조선을 방문하였던 정명수와 접반 관원 사이의 대화로 인조의 병세를 논하고 있는 장면이다. 정명수는 황제가 인조를 위해 청의 의관 파견을 계획하였다가 포기하였다는 정보를 전달하면서 설사 청의 의관이 파견되었다 한들 유달만 못할 것이라고 언급하였다. 정명수의 평가는 청에서 유달의 실력을 인정하고 있다는 사실과 동시에 1643년 유달이 지목된 이유를 보여준다.
그렇다면 청에서는 유달의 실력을 어떻게 파악하였던 것일까? 유달이 심양에서 청측 인사들을 치료한 기록은 확인되지 않지만 조선에서 청 사신을 치료한 경험이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1639년 청에서는 인조의 건강을 확인하기 위해 예부승정 만다르한[滿達爾漢]을 파견하였는데, 만다르한이 안질(眼疾)로 약재를 요구하였다. 이에 조선에서는 약재와 함께 유달의 진료를 제공하였다.17) 또 같은 해 11월 조선을 방문하였던 청의 예부참정 추하르[超哈爾]는 유달을 따로 불러 팔의 통증에 대한 진단을 의뢰하기도 하였다.18) 1640년에는 소현세자의 1차 귀국 당시 호행하였던 오목토[俄莫克圖]가 자신의 종인을 치료하기 위해 유달의 진료를 요청한 일도 있었다.19) 1641년에도 조선을 방문한 청의 원역이 유달의 진료를 요구하였다.20) 숭덕 연간 조선을 방문한 청측 인사들이 일관되게 유달을 지목한 사실은 유달의 의학적 능력이 청 내부에 공유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청측 인사들에 대한 유달의 진료는 그의 신망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유달에 대한 청인들의 지목 시기가 흥미롭다. 유달이 1639년 9월 15일 배종을 마치고 조선으로 귀국하자마자 유달에 대한 지목이 등장하는 것이다. 이는 심양 내에서도 청 인사에 대한 유달의 진료가 존재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이와 관련해서 한 가지 기록이 주목된다. 1639년 초 심양관에 주재하고 있었던 문학(文學) 정뇌경(鄭雷卿)이 정명수를 고발하는 사건이 발생한다.21) 고발 사건이 정치적으로 비화되자 심양관에서는 정보를 얻기 위해 동분서주하였는데 바로 이때 유달이 정보를 입수해 전달하는 장면이 확인된다. 유달은 “황제께서 외국인과 관련된 사건은 분명하게 조사해야 하기 때문에 형부상서에게 친문하도록 명했다”22)는 내용을 전달하였는데 실제로 며칠 후 형부 담당 버일러 지르갈랑이 주도하는 심문이 이루어졌다.23) 이상의 과정을 보면 유달은 자신만의 정보망을 통해 신뢰도가 높은 정보를 획득한 셈인데, 아마도 이 정보망은 유달의 진료 과정에서 구축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심양에서 조선 의관이 청측 인사를 진료했다는 보다 직접적인 증언도 있다. 1647년 3월 조선을 방문한 청의 정사와 부사는 체증(滯症)과 해수(咳嗽)로 조선 의관의 진료를 요구하였는데, 정명수는 ‘심양에서 배종하였던 이득길(李得吉)’을 지목하였다.24) 1646년 1월 청의 정사가 이득길을 지목하였다는 사실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25) 청의 정사는 키충거[祁充格]라는 인물로 1646년 이전에는 조선을 방문한 적이 없었다. 또한 청 사신단의 치료를 위해 이득길이 동원되었던 사례 역시 사료 상에서 확인되지 않는다. 따라서 키충거의 이득길 지목은 심양 배종 당시의 진료 행위에 기반하였을 가능성이 다분하다. 또한 잉굴다이는 1644년 6월 박군과 유달에게 진단을 의뢰한 바 있다. 이와 관련된 서계가 남아있지 않지만 잉굴다이 내지는 청 측 주요 인사에 대한 진료 행위가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26)
이렇듯 심양 배종 의관들은 세자 내외와 조선인 원역들에 대한 진료는 물론 심양 내 청인들에 대한 진료를 통해 존재감을 드러내었다. 심양에서의 기억은 조선을 방문하는 청 사신단에 의해서 재현되었고, 그 과정에서 조선 의관들에 대한 신뢰감은 고조되었을 것이다. 또한 청 황제 홍타이지의 치료 요구에 대한 적극적인 호응은 세폐 감면으로 보상되기도 하였다(이명제, 2024).
3. 사신 외교와 조선인 의관 : 치료에서 외교적 주선까지
1644년 명이 멸망하고 청은 북경을 점령한다. 9월 북경으로 천도한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도르곤은 소현세자의 영구 귀국을 허락하였으며, 이듬해 봉림대군의 영구 귀국도 허락하였다.27) 의관을 포함하여 청에 상주하였던 인원들 역시 모두 조선으로 귀국하게 되었다. 이제 양국의 상시적 접촉은 단절되었으며 사신 외교가 대화의 핵심 수단이 되었다. 따라서 조ㆍ청 외교 안에서 의관의 존재 역시 사신 외교의 과정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논문 말미에 첨부한 <부록>은 『승정원일기』에서 조선 의관이 청 사신을 치료한 기록을 추출한 것이다. 먼저 시기별로 나누어 살펴보면 17세기 기록이 92건으로 69.1%, 18세기 기록이 36건으로 27.1%, 19세기 기록이 5건으로 3.8% 정도 비율이다. 이러한 비대칭성은 기록의 누락에서 기인한 문제는 아닌 것으로 여겨지는데, 이에 대해서는 4장에서 다시 논하겠다.
다음으로 치료를 담당한 의관의 직임을 살펴보겠다. 내의원 소속일 경우 내의/침의/의약동참의로, 전의감과 혜민서 등 비(非)내의원 소속 의관은 외의로 분류하였다. 우선 직임이 확인되는 의관은 143명으로 침의 87, 내의 26, 의약동참의 5, 외의 25명이다. 침의가 61% 정도로 과반수 이상을 차지하였는데 지목 여부가 확인되는 68건만 놓고 보면 침의 지목이 59건(86.8%)으로 더욱 압도적이다. 이를 통해 청 사신들이 침의의 진료를 선호했던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외의의 경우 17세기에는 단 4명, 18세기~19세기에 21명으로 후대에 편중되게 등장한다는 특징을 보인다. 17세기 외의의 사례를 더 살펴보면 1건의 경우 내용이 결락되어 실제로 치료 여부를 알 수 없고 2명의 경우 내의가 아니라는 이유로 진료를 거부당했기 때문에(부록의 연번 61번, 이하 n번으로 표기) 실제 진료가 확인되는 사례(85번)는 단 1건에 불과하다. 다시 말해 17세기에는 내의원 의관이 청 사신의 진료를 전담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청 사신단에 의해 지목된 의관 중 확인되는 인물은 18인이다. 이 중 두 번 이상 지목된 인물은 김상성(金尙誠) 14회, 안례(安禮) 8회, 이응두(李應斗) 7회, 유달ㆍ이후담(李後聃) 5회, 이득길ㆍ박군ㆍ김만직(金萬直) 4회, 최유태(崔有泰)ㆍ변삼빈(卞三彬) 3회, 이시성(李時聖)ㆍ오지철(吳志哲) 2회의 순이다. 청 사신이 이들을 지목한 이유로는 청 경내에서의 접촉 경험을 꼽을 수 있다. 안례나 유달, 이득길, 박군 등은 이미 심양 배종 의관으로 활약한 경험이 있었다. 김상성의 경우 첫 번째 지목(20번) 이전인 1645년 조선으로 귀국하였던 봉림대군을 배종한 사실이 확인된다.28) 이응두(67번)와 이후담(66번)은 최초의 지목(67번) 이전에 북경 사행에 참여했었던 사실이 확인되며29)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김만직(62번) 역시 지목 이전에 북경을 방문하였다. 최유태(77번)은 1678년,30) 이시성(83번)은 1677년31) 북경을 다녀왔으며, 오지철의 경우 시기는 확인되지 않지만 최초의 지목(104번) 당시 차통관이 북경에서 오지철과의 대면을 이유로 제시하였다.32) 이처럼 변삼빈(93번)을 제외한 인물들은 지목 이전에 청의 경내를 방문한 경험이 확인된다. 즉 북경 내지는 심양이라는 공간에서의 의료적 접촉 여부가 조선 경내에서의 의관 지목에 중요한 동기가 되었음을 추론해볼 수 있다.
환자의 경우 정사와 부사 등 사신이 100명, 통관이 41명, 종인이 8명으로 사신에게 치료가 집중되고 있다. 아마도 사신의 지위나 역할이 상대적으로 높았던 만큼 조선에서 청 사신의 건강 문제에 예민하게 접근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환자의 지위 때문에 의원의 격을 낮추거나 진료 자체를 거부한 사례는 확인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각 시기별로 구체적인 진료의 과정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1650년 이전까지는 유달과 윤후익(尹後益), 이득길, 박군과 같이 심양 배종 의관들이 치료를 담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청인들이 안면이 있다는 이유로 직접 지목하는 경우도 많았지만 조선에서 그들에게 익숙한 의관을 배정한 경우도 있었기 때문이다.33)
입관 이후에는 조선의 북경 사행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앞서도 청 사신단의 조선 의관 지목 이유로 북경에서의 접촉 경험을 예로 들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조선 의관의 북경 방문을 요구하는 사례도 있다. 청의 통관 출신으로 제독의 지위까지 올랐던 이일선(李一善)은 1663년 조선을 방문하였는데 침의 김상성의 진료에 효과를 보았다며 그를 다음 사행에 북경으로 보내달라고 요구하였다.34) 1685년 11월 조선을 방문한 청의 부사 역시 이후담에게 뜸과 침 치료를 받고 차도가 있었다며 그를 북경으로 보내달라고 요청하였다.35)
그렇다면 북경 사행에 동행한 의관들은 어떠한 방식으로 치료를 하였는가? 1662년 안례의 사례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본래 북경 사행에는 종실 인원이 아니면 어의를 보내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현종은 연로한 영상 정태화가 정사라는 이유로 특별히 어의 안례의 입송을 허락하였다.36) 정태화는 당시의 사행을 「음빙록(飮氷錄)」이라는 기록으로 남겨두었는데 안례의 행적도 담겨 있다.
9월 25일. 제1 보정대신 소닌[索尼]이 침의 김상성이 왔는지 여부를 물었다. 이일선이 김상성은 오지 않았지만 이번에 온 의관 역시 의술에 뛰어난 인물이라고 대답하였다. 소닌이 이일선에게 내일 아침 의관을 데리고 자신의 집에 오게 하였다.37)
9월 28일. 이일선이 안례를 얼거왕(乻巨王)의 집에 데리고 갔지만 왕이 태후의 병환으로 인해 궁궐에 가버렸다. 그러자 소닌의 집으로 향했는데 소닌 역시 태후의 병이 가볍지 않다고 말하며 자신 역시 어제 문안을 드리고 왔다고 하였다. 날이 저문 후 얼거왕이 사람을 보내 안례를 불러 침을 맞았는데 이일선 역시 따라갔다. 안례가 돌아와 말하길, “얼거왕의 말을 들어보니 태후의 두통과 번열(煩熱)은 한감(寒感)으로 인한 병인 듯합니다”라 하였다.38)
위의 인용문에 등장하는 소닌은 4명의 보정대신 중에서도 수위에 위치한 인물이다. 보정대신은 연소한 황제 강희제를 보좌하는 대신을 일컫는 것으로, 당시 소닌의 지위를 보여준다. 그런데 소닌이 침의 김상성을 찾았다는 것은 소닌이 이미 김상성의 치료를 받았던 경험이 있음을 의미한다. 청에서 최상의 의료서비스를 향유할 수 있었던 소닌이 조선 의관에게 진료를 의뢰하였다는 사실은 조선 의관에 대한 신뢰감이 청 사회에 여전히 유효했음을 의미한다.
이일선으로부터 안례를 소개받은 소닌은 9월 26일부터 계속해서 치료를 받게 된다. 그리고 다음날 얼거왕이라는 인물 역시 안례를 불러 치료를 의뢰한다. 얼거왕의 얼거는 얼허[elhe]라는 만주어 왕호를 음차한 것으로 욜로[岳樂]를 가리킨다. 욜로는 누르하치의 손자이자 아바타이의 아들이었으며 소닌의 사위이기도 하였다.39) 소닌에 대한 치료 행위가 새로운 고위층 인물과의 만남으로 확장된 것이다.
소닌과 욜로의 치료를 담당한 안례는 황태후의 병환과 관련한 정보를 획득한다. 물론 안례는 욜로의 증언을 통해 황태후의 병환을 감기 정도로 판단하였지만 황태후는 이듬해 2월 세상을 떠난다.40) 안례가 고위층 인사와의 만남을 통해 황실 인원의 안위와 관련된 민감한 정보를 얻어냈던 것이다.
한편 안례의 의료 행위는 소닌과 욜로를 상당히 만족시켰던 듯하다. 9월 30일 이일선은 사람을 통해 관소에 한 가지 사안을 전달하는데 강희제가 안례를 귀국시키지 말고 남겨두도록 결정했다는 것이었다. 이 일의 전모는 다음날 소닌의 증언을 통해 알 수 있다.
10월 1일. 아침에 이일선이 안례를 불러 함께 보정대신 소닌의 집으로 향했다. 소닌이 안례에게 말하였다. “세 명의 보정대신이 나의 병을 치료해주고자 조선의 태의를 남겨두는 일로 황제께 품정하였다고 한다. 너는 북경에 남는 것을 고되다 여기지 말고 차분히 나를 치료하라. 병에 차도가 있다면 너에게 있어 영광일 뿐만 아니라 너희나라 국왕이 그 일을 듣는다면 또한 기뻐하지 않겠는가?”41)
소닌의 증언에 따르면 네 명의 보정대신 중 소닌을 제외한 나머지 세 명의 보정대신이 직접 황제에게 건의를 올려 안례를 남겨두는 건을 통과시켰다. 소닌은 이 일이 안례 개인에게도 영광이 될 것이며 조선 국왕도 안례의 공로를 인정할 것이라며 격려하였다. 소닌의 발언처럼 이 일이 안례 개인에게 부와 명예를 가져다주었는지는 명확하게 알 수 없지만 조선 의관의 존재감을 청 사회에 각인시키기는 충분했을 것이다.
안례의 경우 김상성이 누리고 있었던 명성에 의지하여 소닌과 접촉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김상성에 대한 청인들의 신망은 어떠했을까? 1664년 우의정 홍명하의 『연행록』을 통해 확인해보자.
16일. 이부우시랑(吏部左侍郞)이 제독청에 당도하여 김상성을 불러 보았다. 그의 병세를 묻고 김의(金醫, 김상성)가 곧장 침을 놓자 한참 후에 돌아갔다. 이 시랑은 곧 청인(淸人, 旗人)으로 전날 칙사로 조선을 방문했던 적이 있다고 한다. 옥하관에 도착한 이후 통관과 한인(漢人), 청인들이 김의를 찾으며 앞 다투어 침과 뜸 시술을 받고자 하니 김의는 하루 종일 침만 쥐고 다른 일을 할 겨를도 없었다.42)
17일. 아침에 이부우시랑이 또 제독청에 당도하여 김상성을 불러 침을 맞고는 떠났다. 통관이 말을 전달하였다. “보정대신이 김상성을 보고자 하니 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내가 “사행단의 원역은 마음대로 출입할 수 없어서 결단코 보내기가 어렵다”라 답하였다. 통관 무리가 또 말을 전달하였다. “이는 사사로이 멋대로 출입하는 것과 차이가 있으며 전례도 있으니 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에 비로소 허락하였다. 김상성이 보정대신의 집에 찾아가니 보정대신의 병이 아니라 그 조카가 손에 병이 있어 침과 뜸을 맞고자 실례를 무릅쓰고 초청하였다 한다.43)
1664년 우의정 홍명하(洪命夏)는 조선의 사행원이 유황을 구매하였다가 적발된 사건으로 인해 진주사로 파견되었다. 홍명하의 기록에서 김상성의 활동이 처음 감지된 시기는 4월 16일로 이부우시랑이 직접 김상성을 지목하여 호출하였다. 이부우시랑은 기인 출신의 만결(滿缺)과 한족 출신의 한결(漢缺)이 존재하는데 청인(淸人)이라는 기록을 통해 만결임을 알 수 있다. 강희 3년 만결의 이부우시랑은 우다리[吳達禮]라는 인물로 인용문의 언급처럼 1659년 인평대군의 치제를 위해 부사로 조선을 방문하였던 적이 있다. 그리고 우다리는 조선 방문 당시에도 박군과 김상성을 지목하여 치료를 받았다(50번). 조선 경내에서의 의료적 접촉이 북경에서 이어진 상황이라 할 수 있다.
우다리에 대한 치료보다 더 중요한 것은 16일자 하단의 내용이다. 기록상에서 김상성의 진료가 등장한 것은 16일자였지만 실상은 북경 도착 직후부터 김상성에 대한 진료 요청이 끊이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조선 사행단이 북경에 도착한 일시는 4월 7일로, 이미 열흘 가까운 시간 동안 김상성은 조선 사신이 아닌 청인에 대한 진료로 여념이 없었던 것이다.
이튿날인 17일에는 이부우시랑 우다리에 이어 보정대신도 김상성에게 진료를 의뢰한다. 다만 4명의 보정대신 중 어떤 인물인지는 기록상으로 명확하지 않으며, 실제 진료를 의뢰한 인물도 보정대신의 조카였다. 김상성의 진료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제독 이일선의 처와 가족들,44) 예부시랑,45) 병부시랑46) 등도 그의 진료를 요구하였다. 김상성의 사례를 통해 보정대신과 같은 최고위층 관료들에서 일반 기인 및 한족까지 조선 의관에 대한 신뢰를 공유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1666년 11월 북경을 방문하였던 김만직의 사례에서 조선 의관을 향한 신뢰감을 다시 엿볼 수 있다. 김만직은 이미 같은 해 4월에도 북경을 방문하여 내대신(內大臣)을 치료한 바 있었다.47) 다시 북경을 방문한 김만직을 호출한 사람은 보정대신 오보이[鰲拜]였다. 오보이는 네 명의 보정대신 중 서열상 네 번째였지만 김만직이 북경을 방문한 1666년 단계에서는 다른 보정대신이나 황제를 압도할 정도로 막강한 권력을 구가하고 있었다(장자오청ㆍ왕르건, 2010: 30-41).
15일. 김만직이 연일 보정대신의 집을 왕래하자 오보이가 매우 환대하였다. 오보이가 사신의 안부를 묻자 김만직은 사신의 일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잠자고 쉬는 것도 모두 폐할 정도라는 뜻으로 말을 꺼내니 이일선이 갑자기 말문을 막았다고 한다. 들어보니 높은 관직에 있는 보정대신 오보이의 3번째 아들 역시 김만직을 후하게 대접하고, 전(田)씨 성의 환관이 자못 문자를 잘 이해하여서 보정대신 부자의 총애를 받는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김만직으로 하여금 환관에게 몰래 글을 전달하여 이일선이 볼 수 없는 곳에서 만나자고 요청하였다. 문자가 통했지만 환관에게 일이 생겨 승낙하고도 오지 못했으니 답답할 노릇이다.48)
당시 조선 사신단은 유황 불법 구매와 주회인(走回人) 안추원(安秋元) 사건 등으로 인해 상당한 곤란을 겪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김만직이 최고 실권자 오보이를 치료하는 상황을 이용하기로 마음먹었다(김창수, 2019: 84; 이재경, 2019: 410). 하지만 청의 통관 이일선은 김만직이 오보이에게 주선을 요청하는 시도를 번번이 저지하였다. 상황이 여의치 않자 오보이 부자의 총애를 받는 환관을 통해 오보이 부자와 직접 접촉하는 방식으로 선회하였다. 이러한 시도도 무산되었지만 이 모든 과정이 김만직을 통해 진행되었음은 주목할 만한 요소이다. 그런데 며칠 뒤 다시 한 번 상황이 전환된다.
19일. 김만직이 보정대신의 집을 왕래할 때마다 이일선이 따라다니며 매번 만직에게 함부로 말하지 말 것을 경계시켰다. 만직이 간혹 오보이의 아들에게 편지로 사정을 전달하려 하면 일선이 반드시 편지에 담긴 뜻이 무엇인지 묻고 매우 심하게 방해하였다. 김만직이 말하였다. “이곳에 도착한 지 이미 오래인데 모든 소식이 끊겨서 사신들도 일이 돌아가는 모양을 모르니 우울하기만 합니다. 어찌하여 이 곳에서 탐문하지 못하게 하는 겁니까?” 이일선이 대답하였다. “이 곳이 얼마나 존엄한 곳인데 망령되이 말을 꺼냅니까? 그 일이 점차 순조롭게 풀리고 있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 여겨야지, 어찌 조금도 처벌받지 않으려 하는 겁니까?”
(이에) 김만직이 오보이의 앞에서 전씨 성의 환관에게 눈짓하여 은밀한 곳으로 데려 갔다. 환관이 말하길, “이미 셋째 어르신께 상황을 말씀드렸습니다”라 하였다. 셋째 어르신은 보정의 아들이다.
(잠시 후) 오보이가 말하였다. “일찍이 사신이 병이 났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어떠한가?” 김만직이 대답하였다. “국사에 마음을 쓰다 보니 밤에도 잠을 못자서 날마다 위중해지고 있습니다.” 오보이가 말하였다. “너희 사신에게 나를 봐서라도 편안히 잠자리에 들어도 좋다고 전하라.”49)
김만직은 전씨 성의 환관을 통해 조선 사신의 사정을 오보이의 아들에게 전달하는데 성공하였고, 오보이는 사신들이 편안히 쉬어도 좋다는 긍정적인 답변을 내놓았다. 물론 이 과정에서도 이일선의 방해는 계속되었지만 오보이와 직접 소통하려는 본래의 계획을 달성한 것이다.50) 이후에도 김만직의 오보이 치료는 계속되었고 그때마다 오보이 측 인사들은 긍정적인 메시지를 전달하였다.51) 또한 시간이 지나면서 김만직은 오보이뿐만 아니라 도통(都統) 바하나[巴哈納]와 소닌의 치료도 담당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소닌까지 포섭하려 시도하였다.52) 소닌의 섭외는 이일선의 방해로 인해 실패하였지만 이미 오보이에게 확언을 받았기 때문에 사신들은 어느 정도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53) 오보이가 김만직의 치료에 사례하며 보낸 백금(白金)과 비단도 조선 사신단에게 긍정적인 메시지로 읽혔을 것이다.54)
결과적으로 강희제는 현종에게 벌은(罰銀) 5천 냥을 부과하였다. 이는 당초 청 예부에서 영의정 정태화 등을 삭탈관직하고 현종에게는 벌은 1만 냥을 부과한 것에서 상당 부분 경감된 조치였지만 상황을 낙관하고 있었던 조선 사신 입장에서는 당혹스러운 결과였다. 당시 정사직을 수행하였던 허적(許積)은 귀국 후 스스로 삭탈관직을 요청하였으며 삼사는 그의 실책을 통렬하게 비판하였다.55) 결국 허적은 1년 여 간 정계를 떠나있어야 했을 정도로 정치적 타격을 입고 말았다.
하지만 안례와 김상성, 김만직 등이 보정대신과 같은 최고위 지배층의 치료를 담당하였다는 사실은 청 사회 내부에서 조선 의관에 대한 수요가 높았음을 의미한다. 청이 심양에서 북경으로 영역을 확장하고, 그 과정에서 태의원의 설립과 같은 제도적 정비를 단행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 의관에 대한 신뢰는 여전히 유효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신뢰는 조선 사신단이 외교적 교섭을 행하는 과정에서 의관에게 역할을 부여할 수 있는 근거로 작동하기 시작하였다.
4. 여전한 신뢰와 축소되는 역할 : 내의원에서 양의사로
18세기에 접어들면 청 사신단을 향한 조선 의관의 치료 기록이 현저하게 감소한다. 또한 특정 의관에게 치료를 의뢰하는 빈도도 줄어든다. 그렇다면 이러한 현상은 조선 의관을 향한 청 사회의 시선에 변화가 발생했기 때문일까?
이 문제는 조선과 청의 접촉 빈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앞선 선행 연구에 따르면 1691년을 기점으로 청의 대조선 사행 빈도에는 급격한 변화가 발생한다. 즉 1637~1691년 사이 조선에 파견된 사행은 총 91건으로 연평균 1.65회가 된다. 그런데 이후 1692~1881년 사이에 파견된 사행은 총 75건으로 연평균 0.38회에 불과하다(이명제, 2021: 25-30). 수치상으로 4배 이상의 차이이다. 따라서 청 사신에 대한 조선 의관의 치료 기록이 17세기에 집중되어 나타나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청 사신이 조선 경내에 머무르고 있는 시간도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접칙고(接勅攷)』에는 청 사신이 한양에 머무는 유관(留館) 일수가 기록되어 있는데 지속적으로 감소되고 있다. 이에 따라 숭덕~순치 연간에 10일 이상 한양에 머물렀던 것에 비해 강희 연간 이후에는 평균 10일 이내, 건륭 연간 이후로는 5일 이내로 감소한다. 즉 동일한 한 번의 사행에서도 환자가 발생할 확률이 감소한 것이다.56)
시기별 청 사신의 사행 빈도 및 유관 일수
Table 2. Periodical Frequency of Qing Envoy Missions and Duration of Stay at Diplomatic Quarters
청의 대조선 사행 빈도와 유관 일수는 의관 관련 기록의 감소를 해명하는 동시에 청의 관료층과 의관이 접촉할 수 있는 기회가 줄어들었음을 알려준다. 그에 반해 조선의 대청 사행 빈도는 18세기를 전후로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57) 따라서 한양이 아닌 북경에서 조선 의관들의 활동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1714년 동지사에 동행하였던 변삼빈의 사례부터 살펴보도록 하겠다.
각로(閣老) 송주(松柱)가 침을 맞고자 관소 밖 여염집에 도착하여 의관 변삼빈과 역관 김홍지(金弘祉)가 나갔다. 침을 맞은 후 각로가 김홍지에게 말하였다. “이전에 목극등(穆克登)이 위연으로 갔을 때 백두산을 보지 못하고 돌아왔다. 그리하여 황지를 받들고 조선을 위협하여 백두산으로 가보고자 하였다. 내가 목극등의 생각이 조선에 불편하다 여겨 목극등에게 말하였다. ‘만약 그렇게 하면 조선에서 길을 안내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조선은 나라가 작고 백성들이 빈한하니 너가 이 사실을 소상히 깨닫고 황상에게 잘 상주하여 조선에 은혜를 베푼 이후에 출사한다면 걱정없이 도모한 바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그러자 목극등이 크게 깨달아 세폐를 감면하고 사행로 각 참의 찰원(察院)을 수리하여 사행에 편리하게 해주도록 황상께 상주하였다.58)
위의 인용문은 사행 이후 작성된 사신별단의 일부분으로, 각로 송주는 문화전대학사겸예부상서(文華殿大學士兼禮部尙書) 숭축(嵩祝)을 가리킨다. 대학사나 예부상서가 1품직인데다가 대조선 외교 업무를 담당하는 예부상서의 직임을 고려했을 때 숭축은 조선 입장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숭축이 변삼빈을 호출하는 장면은 정사로 사행에 참여하였던 이택(李澤)의 연행 기록에도 묘사되어 있다.
6일. 우각로 송주가 병이 나서 대상인 정세태(鄭世泰)의 집으로 찾아와 어의의 간병을 요청하니 수역 김홍지가 함께 갔다.59)
『연행일기』에 따르면 변삼빈과 숭축이 만난 시기는 1715년 1월 6일로, 사신별단에서 묘사된 여염집은 북경의 대상인 정세태의 집이었다. 정세태는 많은 연행 기록에 등장하는 인물로 조선과 청의 무역을 주도하였는데,60) 이 기록을 통해서 조선 의관과 청 관료의 만남을 중개하기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사신별단에 누락되어 있지만 변삼빈은 이후 숭축의 며느리를 진료하고 숭축의 부인과 대면하기도 하였다.61) 이후에도 숭축은 변삼빈에게 과병(果餠)을 보내며 친밀감을 표현하였다.62)
사신별단에 따르면 숭축은 변삼빈의 치료가 끝난 후 1711년 강희제의 유시63)와 관련한 전후사정을 전달하였다. 이 유시는 1710년 발생한 조선인 이만지(李萬枝)의 범월(犯越) 사건과 관련 있는데 당시 청에서는 이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목극등을 사관(査官)으로 파견하였다. 강희제는 목극등에게 범월 사건 조사와 함께 조선 측과 경계 문제를 확정짓고 오라는 지시를 내린다. 정계(定界) 문제는 조선의 경계와 산천이 노출될 뿐만 아니라 청의 의지에 따라서는 조선의 강역이 침탈당할 수도 있는 문제였기 때문에 조선에서는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인용문에도 나와있는 것처럼 목극등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채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64) 얼마 지나지 않아 강희제는 조선이 청에 납부해야 하는 세폐의 일정량을 감면해주고 조선 사신이 이용하는 사행로에 위치한 숙소를 수리한다는 유시를 내리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1711년의 유시이다.
뜻밖에도 조선에 우호적인 조치가 내려졌기 때문에 조선 측에서도 내막을 탐문한 바 있는데, 목극등이 주선한 결과로 결론지었다.65) 그런데 숭축은 목극등의 주선이 자신의 조언으로 인한 결과였다는 정보를 새롭게 제공하였다. 숭축의 언급은 자신의 공로를 과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대로 수용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런데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숭축 역시 이 사건의 당사자 중 하나였다는 점이다.
1711년 목극등을 파견하기 전 청에서는 조선에 자문을 먼저 발송하였는데 이를 동지겸사은사 정재륜(鄭載崙)이 수령해온다. 이 자문에는 이만지 사건에 대한 조사를 위해 사관을 파견한다는 내용만 있을 뿐 정계 문제는 언급하지 않고 있다. 다만 정재륜 일행은 이 일이 정계 문제로 발전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장계로 보고하였다.66) 그런데 정재륜 일행은 귀국 도중 심양에서 다시 장계를 발송하는데, 성경장군(盛京將軍)이 역관 김지남(金指南)과 의관 이시필(李時弼)을 불러 강희제가 사관에게 범월 사건 처리 이후에 백두산을 시찰토록 지시했다는 정보를 제공하였다는 내용이었다.67) 이 장계로 인해 조선은 반신반의하던 정보의 실체에 조금 더 다가설 수 있었으며 미리 대응할 수 있는 시간도 확보하게 되었다.68) 그런데 여기서 조선에 정보를 제공한 성경장군이 바로 앞서 등장하였던 숭축이었다.69)
눈 여겨 볼 사실은 숭축이 1711년과 1714년 모두 의관을 통해 조선에 정보를 제공했다는 점이다. 그런데 1714년 변삼빈의 치료는 숭축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연행일기』에는 변삼빈이 치료를 담당한 다양한 인물이 등장한다.
4일. 황제의 일곱 번째 아들 순군왕(淳郡王)이 다리에 병이 났다. 시위를 통관청(通官廳)으로 보내어 어의를 청하여 병세를 물었다.70)
5일. 순군왕의 병 때문에 교거를 보내 의관 변삼빈을 창춘원(暢春苑)으로 부르니 수역 김홍지(金弘祉)가 함께 갔다.71)
14일. 황제의 뜻으로 어의를 불러 중서성의 문부(文簿)를 담당하는 자의 병을 살피게 하였다. 수역 김홍지가 대통관과 함께 왕래하였다. 중서성 관리의 이름은 소침(蘇沉)이다.72)”
기록에 따르면 변삼빈은 순군왕과 소침이라는 인물 역시 치료하였다. 순군왕은 강희제의 7황자 윤우(允祐)를 가리킨다. 소침의 경우 중서성이 청대에 존재하지 않았던 관직인데다가 동일한 인명이 확인되지 않아 누구인지 특정할 수 없다. 다만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조선 의관을 호출한 존재이다. 강희제는 순군왕과 소침을 치료하기 위해 시위나 교거를 보내거나 황제의 지의(旨意)를 활용하였다. 이를 통해 청 황제가 여전히 조선 의관을 시야에 두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조선 의관은 청의 경내에서 의료 행위를 기반으로 일정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조선 의관이 조ㆍ청 외교의 현장에서 가장 극적으로 활약한 장면은 1728년 오지철의 사례에서 확인할 수 있다.
8일. 13왕이 침의와 중국말을 잘하는 역관을 만나보길 원한다고 관소에 알려왔다. 사신이 김시유(金時裕)로 하여금 오지철을 이끌고 가보게 하였다. 13왕의 아들은 여러 해 창종(瘡腫)을 앓아 의관을 불러다 약을 문의하고자 한 것이다. (중략) 13왕은 침상 위에서 비단 자리를 깔고 앉아 있었으며, 곁에는 또 다른 비단 자리를 두 개 마련하여 두 사람을 오르게 하였다. (중략) 오지철이 병을 치료하는 방도에 대해 간략히 말하자, 왕이 크게 기뻐하며 내일 다시 와 달라고 청하였다.73)
인용문은 동지사의 군관으로 사행에 참여한 강호부(姜浩溥)의 사행 기록이다. 인용문에 등장하는 13왕은 이친왕(怡親王) 윤상(胤祥)으로 옹정 연간의 최고 권력자 중 일인이었다.74) 이친왕은 조선 사행단에 침의를 요청하며 아들의 진료를 의뢰하였고, 오지철은 이친왕의 기대에 부응하는 모습을 연출하였다. 이후 오지철은 수시로 이친왕가를 방문하며 치료에 매진하게 된다.
9일. 김시유가 오지철과 함께 13왕의 집에 가서 그 아들의 병을 살피고 약의 제조를 명하였다. 13왕이 환자(宦者)를 통해 “사가에서 빈번히 불러오니 매우 미안하지만 부자지간은 지극한 정리로 맺어진 관계니 부득이 요청한다. 그리고 내가 조선을 다른 나라와는 달리 보고 있으니 그대들은 왕래를 꺼리지 말라. 또한 귀공자라고 약 쓰기를 난처해하지 말도록 하라” 하고는 매일 간병해줄 것을 요청하였다.75)
20일. 김상명(金常明)이 황제를 따라 원명원(圓明園)에 가서 머무르고 있었는데 금일 원명원에서 잠시 수세소(收稅所)로 돌아왔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김시유를 보내 사책(史冊)의 일을 물었다. 상명이 말하였다. “내가 주선의 계획을 가지고 있으니 그대는 나의 뜻을 어지럽히지 말라.” 김시유가 어떻게 주선할 것인지 물었지만 끝내 대답하지 않고, 단지 “지금 천하의 일은 모두 13왕의 손에 달려 있다. 내가 오지철과 그대를 추천하여 13왕의 아들을 진료하게 한 것인데 어찌 방법이 없다고 한단 말인가?”라 하였다.76)
이친왕은 오지철과 김시유에게 연일 진료를 부탁하며 조선을 특별히 신경 쓰고 있으니 양해를 부탁한다는 의사를 표현해 왔다. 여기서 조선을 특별히 신경쓴다는 언급은 사행의 목적을 충족시켜주겠다는 의미로도 받아들일 수 있다. 그렇다면 당시 조ㆍ청 관계에서 가장 큰 외교 사안은 무엇이었을까? 이에 대한 해답은 20일자 기사에 있다. 조선 사신단은 김상명이 원명원에서 돌아오자 역관 김시유를 보내 사책 문제의 해결을 도모한 것이다. 여기서 사책이란 『명사(明史)』 조선열전(朝鮮列傳)을 가리키는 것으로 인조반정과 관련된 변무 문제였다.77)
20일자 기사에 등장하는 김상명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김상명은 정묘호란 당시 피로인의 후손으로 강희ㆍ옹정ㆍ건륭 연간 정1품직인 영시위내대신(領侍衛內大臣)을 비롯하여 요직을 두루 역임하였다(우경섭, 2009: 198-201). 김상명이 조선 출신이었기 때문에 조선에서는 그를 외교적 교섭 대상으로 적극 공략하였는데, 1728년 유사한 상황이 재현된 것이다. 그런데 김상명은 모든 일은 이친왕의 의지에 달려있기 때문에 이친왕 아들의 주치의로 오지철을 추천한 것이라고 밝혔다.
그로부터 다소간의 시간이 흐른 후인 2월 4일 조선의 세폐 일부를 경감한다는 조치가 내려졌다. 조선 사신단은 이 일이 이친왕의 결단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판단하며 기뻐하였다.78) 조선열전의 간본을 미리 확보하려는 시도는 옹정제가 아직 열람하지 못하였다는 이유로 못하였다는 이유로 좌절되었지만79) 세폐경감만으로도 충분히 유의미한 성과였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이친왕은 한 가지 요구사항을 전달한다. 그것은 아들의 병에 차도가 있어서 옹정제에게 오지철의 잔류를 건의하여 윤허를 받았으니 치료에 전념하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조치는 심지어 자문으로 작성되어 조선에 발송되었고, 그 결과 오지철은 9월까지 북경에 머물게 되었다.80)
오지철의 사례는 조ㆍ청 양국에서 조선 의관을 정치적으로 활용하여 세폐 경감이라는 실질적인 결실로 귀결되었다는 점에서 의미 있다. 즉 김상명은 권력의 핵심에 위치한 이친왕을 공략하기 위해 조선 의관을 선택했고, 오지철은 탁월한 실력을 통해 이친왕의 환심을 사는데 성공하였다.
오지철의 사례가 여전히 조선 의관의 존재가 청에서 유효하였음을 증명하였다면, 1721년 임대재(林大材)의 사례는 정치적 활동의 가능성과 의료적 활동의 제한을 동시에 보여준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1721년 2월 조선을 방문하였던 청 사신 중 부사 나첨(羅瞻)은 진맥과 침술에 능한 의관의 진료를 요청한다. 이에 조선에서는 전의감 의관 진후관(秦後觀)과 임대재를 보내 부칙의 병을 살피게 하였는데 나첨은 임대재의 침술에 상당히 만족하여 술상을 제공하고 의주까지 동행을 요청하였다.81)
그런데 같은 해 10월 연잉군(延礽君)의 왕세제 책봉을 주청하는 사행이 출발하게 되면서 조선 측의 고민이 깊어졌다. 조선은 1696년 이균(李昀, 후의 경종)의 왕세자 책봉이 거부되는 경험을 겪으면서 책봉 주청에 민감하게 반응하였다. 다행히 1697년 재주청을 통해 왕세자 책봉을 얻어내었지만 1721년의 왕세제 책봉은 막 즉위한 젊은 군주의 동생을 왕위계승자로 승인받아야 한다는 점에서 청의 동의를 구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주청사의 정사로 선발된 이건명(李健命)은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몇 가지 준비에 착수하였다. 그 중 하나는 의관 임대재를 사행에 동참시키는 것이었는데, 봄에 조선을 다녀간 나첨이 대조선 업무를 담당하는 예부시랑(禮部侍郞)이었고, 임대재가 그의 환대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사행단이 북경에 도착하자 나첨은 조선에 우호적인 입장을 피력하며 적극적으로 접촉해왔다. 그리고 임대재는 사행단과 나첨의 사이에서 연락책의 역할을 담당하였다(김일환, 2014: 194-196; 손성욱, 2019: 196-209).
임대재의 사례는 사행단과 청 관원 사이의 연락책을 담당하였다는 점에서 앞선 사례들과 유사하다. 하지만 몇 가지 차이점도 존재한다. 우선 앞선 사례의 경우 청 관원의 의료적 지원 요청으로부터 의관의 역할이 자연스럽게 확대되었던 반면, 임대재의 경우 북경 출발 이전부터 정치적 안배가 이루어졌다. 다음으로 안례, 김만직, 이시필, 변삼빈, 오지철 등이 내의원 의관이었던 것과 달리 임대재가 전의감 의관이었던 점도 지적되어야 한다. 애초에 임대재는 의학적 능력과 별개로 오로지 나첨이라는 인물을 겨냥한 맞춤 인선이었던 것이다.
여기에 더해서 1721년 봄 전의감 의원이었던 임대재가 나첨의 진료를 담당하였다는 사실도 중요하게 지적되어야 한다. 3장에서 살펴보았듯이 17세기 내내 조선은 청 사신의 진료 요청에 내의원 의관들을 파견했다. 특히 1665년 부사의 요청에 외의를 보냈다가 거부당한 후 사신에게 외의를 보냈던 기록은 확인되지 않는다. 이러한 기조는 1721년 이전까지 유지되었는데 나첨의 요청에 외의가 파견되었던 것이다. 이는 1721년을 기점으로 모종의 변화가 생겨났음을 의미한다.
실제로 1721년 이후 외의를 파견한 사례들이 연달아 등장하기 시작한다. 1722년 12월에는 정사가 진맥을 요청하여 전의감 의관 현만규(玄萬規)를 들여보내 진맥을 보게 하였다. 하지만 정사는 현만규의 진맥이 잘못되었다는 이유로 다른 의관을 재차 요청하였고, 영접도감에서는 양의사(兩醫司) 중에 현만규보다 나은 인물이 별로 없다는 이유로 그제야 내의원 침의 채광하(蔡光夏)를 들여보내게 된다.82)
이듬해 1월에는 부사와 정사가 태의를 직접 요청하였기 때문에 처음부터 의약동참 김한령(金漢齡)과 침의 채광하를 들여보냈다.83) 하지만 4월 차통관 김세륜(金世倫)이 진맥을 잘 보는 의관을 요청하자 다시 양의사에서 의관을 파견하였고, 김세륜이 의관의 교체를 요구하고 나서야 침의 채광하를 보내주었다.84) 11월의 사례는 더욱 주목할 만하다. 11월 8일 차통관 강광덕(姜廣德)과 유능액(劉能額)이 북경에서의 안면을 이유로 오지철을 지목하자 어의임에도 불구하고 선뜻 오지철을 보내주었다.85) 하지만 이튿날 대통관 문봉선(文奉先)이 다리 통증을 이유로 의관의 진료를 요청하자 혜민서 의관 이익형(李益馨)을 파견하였고, 문봉선이 오지철로 교체를 요청하자 수락하였다.86) 이렇듯 조선에서는 청 사신측에서 특정 인물을 지목하지 않는 한 양의사에서 의관을 보내는 것으로 방침을 변경하였고, 청에서도 이러한 분위기를 감지하여 의관 교체를 요구하는 일이 반복되었다.
의관의 지위를 둘러싼 실랑이는 영조대 들어서 정리된다. 1725년 3월 청의 정사가 한양으로 오던 중 병세가 위독해지자 조정에서는 회의 끝에 전례가 있다는 이유로 내의 진후관(秦後觀)을 파견한다.87) 정사는 한양 도착 이후에도 계속해서 진후관의 치료를 요청하였고, 끝내는 의주까지 진후관을 대동시켰다. 그런데 정사는 한양에서 진후관 이외에도 의관 한 명을 추가로 요청하였는데, 이번에는 전의감 교수 이수기(李壽祺)를 파견하게 된다. 그런데 정사는 이수기 역시 의술이 정밀하니 의주까지 대동하고 싶다는 뜻을 전달한다.88)
이후 조선에서는 청 사신의 지위가 특별히 높거나(112번) 청 측에서 특정 의관을 지목하지 않는 한 외의를 파견하고 청에서도 외의 파견을 문제 삼지 않았다. 상황은 시간이 흐르면서 더욱 이완되었다. 1760년 4월에는 부사가 눈병을 이유로 의관을 요청하자 따로 의관을 파견하지 않고 원접사가 대동한 의원에게 진찰을 보게 하였다. 다만 중로에서 사신이 질병에 걸리는 경우의 전례에 따라 문위사를 파견하였을 뿐이다.89)
이러한 이완 현상은 19세기 들어 가속화된다. 1805년 6월 부사가 평양에서 의관을 요청하자 원접사는 심약(審藥) 오명화(吳命華)가 왕진하는 것으로 조치를 마쳤고, 조정에서도 병세가 미약하다는 이유로 문위관 파견을 미루었다.90) 1821년 8월에는 대통관의 병세가 위독해졌지만 원접사는 중화(中和)에 머무르며 해당 지방 의관의 처방을 받는 것으로 조치를 마무리하였다.91)
1720년 이후부터 확인되는 양의사로의 업무 이관과 관련해서 1719년 처음 편찬된 뒤 1778년 중수된 『혜국지(惠局志)』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혜국지』 식례(式例), 공사(供仕)조에는 칙사문질관(勅使問疾官), 반송사구료관(伴送使救療官), 접대소구료관(接待所救療官), 칙사두목구료관(勅使頭目救療官) 등과 같이 청 사신 접대와 관련한 내용이 정리되어 있다.92) 이는 1836년 경 처음 기록되고 1880년까지 보완이 이루어진 전의감 『사례(事例)』에서도 유사하게 반복된다.93) 그에 비해 1810년을 전후로 저술된 『내의원식례(內醫院式例)』의 경우 봉사(奉使)조에서 북경 사행에 어의가 파견되는 경우를 해설하였지만 조선을 방문한 청 사신 접대와 관련해서는 어떠한 조항도 남기지 않았다.94)
이렇듯 1719년 이후 집필된 삼의사(三醫司)의 규정집에서 청 사신 접대 업무는 사실상 양의사 업무의 소관으로 분류되고 있다. 하지만 1719년 청 사신 접대 규정에 변화가 생겼다고 단언하기는 쉽지 않다. 1721년부터 관례적으로 등장하는 ‘양의사에게 분부[分付兩醫司]’하여 의관을 입송시킨다는 기록이 단 한 건이기는 하지만 1665년에 이미 존재하기 때문이다.95) 즉 양의사에서 청 사신을 접대한다는 원칙이 이미 세워져 있었지만 모종의 이유로 17세기에는 무력화되었다가 1720년을 전후로 다시금 원칙이 재확립되었을 가능성도 존재하는 것이다.
여하간 1720년을 기점으로 청 사신의 의관 요청에 대한 조선 조정의 대응 방침이 양의사를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이는 내의원 의관을 제공하였던 이전 시기에 비해 분명히 손색이 있는 조치였다. 여전히 북경 사행이나 청 사신 접대에 내의원 의관들이 등장하기는 하였지만 이전과 달리 왕명이나 청 사신단의 요청이 선행되어야만 했다. 1728년 이친왕 아들에 대한 치료 의뢰 사례를 마지막으로 북경에서 청인에 대한 조선 의관의 치료 기사가 확인되지 않는다는 점도 이러한 기류를 반증한다. 그리고 이는 의관이 외교 일선에서 활약할 여지가 사라졌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5. 나가며
이상의 연구를 통해 조ㆍ청 외교 안에서 의관들의 활동 양상을 살피고자 하였다. 특히 조선의 의관들이 의료 행위를 통해 청 사회에서 신뢰를 얻어내며 스스로 외교 일선에서 활약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는 점에 주목하고자 하였다.
내의원 의관들의 진료 행위는 심양이라는 공간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심양에 조선인이 상주하는 특수한 상황이 8년 간 지속되었고, 그 상황은 조선의 의관과 청인이 접촉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그리고 조선 의관은 청 사회에서 신뢰를 획득하였고, 황제는 그들에게 진료를 의뢰하였다.
1644년 청의 북경 점령 이후 외교의 공간은 한양과 북경으로 이동하였다. 청 사신들은 조선 경내에서 조선 의관의 진료를 받았으며, 청의 권력자들은 북경에서 조선 의관을 호출하였다. 심양에서 북경으로 청의 영역이 확장되었지만 조선 의관에 대한 신뢰는 여전하였다. 그리고 그 신뢰는 의관이 외교 일선에서 활동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의관은 때로 중요한 정보를 획득하고, 청 권력자의 마음을 돌릴 수 있는 외교가로 활동하였다.
한편 17세기 후반에 이르면 병자호란 이후 지속되었던 관계의 조정이 마무리된다. 더 이상 청의 사신들은 빈번하게 조선을 방문하지 않았으며 양국 관계를 긴장시킬 만한 외교적 사안도 자주 발생하지 않았다. 17세기에 형성되었던 조선 의관에 대한 신뢰가 18세기 초반까지 작동하였지만 조선 내부에서 청 사신에 대한 의료적 지원을 내의원에서 양의사로 이관시키자 외교 현장에서 조선 의관이 활약할 여지는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청의 권력자들은 조선의 의관을 호출하지 않았으며 조선의 정치가들도 의관을 외교적으로 활용하지 않았다. 18세기 이후 관행적으로 변해가는 조ㆍ청 관계의 단면이 의관이라는 존재 안에서도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Notes
『仁祖實錄』 권34, 인조 15년 3월 20일 기미.
『仁祖實錄』 권34, 인조 15년 1월 28일 무진, “爾以長子及再一子爲質, 諸大臣有子者以子, 無子者以弟爲質. 萬一爾有不虞, 朕立質子嗣位.”
박훈평의 경우 1637년 12월 14일 김신성이 심양을 나갔다가 1638년 4월 26일 다시 돌아온 것으로 이해하였다(박훈평, 2018: 85). 이는 『심양장계』의 기록에 의거한 것으로 보이는데, 12월 14일 나간 것은 김신성이 아니라 김신성과 함께 들어왔던 인마이다. 김종일의 기록에 의거하더라도 1638년 2월 소현세자가 김신성이 처방한 약을 복용한 사실이 확인된다(『魯庵集』 권3, 瀋陽日乘, 崇禎十一年戊寅).
심양관에 조선 질자 및 원역들이 체류하였던 시기는 1637년부터 1645년 초까지이다. 이 시기 심양관의 상황을 파악하기에 용이한 자료로는 세자시강원에서 작성한 『심양일기』와 『심양장계』가 있는데, 『심양일기』는 1644년 8월 18일까지 『심양장계』는 1643년까지 기록이 남아있다. 기록이 남아있어도 미비한 경우들이 있는데, 소현세자가 조선을 왕복하는 경우나 사냥이나 전쟁에 동원되어 심양관을 비우는 경우이다. 소현세자가 심양관을 비우면 세자를 배종한 원역과 심양관에 잔류한 원역이 각각 일기를 작성하는데, 시강원 기록의 특성상 세자를 배종한 쪽의 기록이 상세하다. 따라서 소현세자가 1차 귀국하였던 1640년 2월에서 5월, 2차 귀국하였던 1643년 12월에서 1644년 3월, 청의 군사 작전에 동참하였던 1644년 4월에서 6월까지 등의 시기는 심양관 배종 의관의 출입을 파악하기 난감한 측면이 있다. 세자의 출입이 잦고 『심양장계』가 남아있지 않은 1644년의 경우 특히 기록이 부실하다. 예를 들어 박군의 경우 1643년 12월까지 심양관 주재가 확인된다(『瀋陽日記』 1643년 12월 13일; 14일). 이후 심양에서 나간 기록이 확인되지 않는데 1644년 5월 인조를 치료한 기록(『承政院日記』 88책, 인조 22년 5월 6일 계사; 8일 을미)이 존재한다. 또 정남수, 최응원 등이 소현세자의 대리 인질인 원손을 배종하여 심양에 들어온 것은 확인되는데 원손이 귀국할 때 대동한 의관은 명확하지 않다. 다만 『심양일기』 1644년 7월 28일 치료 기사에 이호검과 정후계, 최우량만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정남수와 전덕립, 최응원 등이 7월 16일 원손 귀국 당시 동행했을 것으로 여겨지지만 추론의 영역이다. 1644년 8월 19일부터 1645년 2월까지는 기록이 없어서 알 수 없다.
배종 의관의 기준은 조금 더 확대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소현세자 1, 2차 귀국 당시 대리 질자로 심양에 머물렀던 인평대군이나 원손의 수행 의관도 존재하였으며, 명과의 전쟁을 수행하였던 조선 징병군 역시 의관을 대동하였다. 또한 조선 사신단에 포함되어 심양을 방문하여 단기간 체류하였던 의관들도 존재한다. 다만 이들의 명단을 사료 상에서 모두 확인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본 논문에서는 심양관에 질자 일행들과 장기적으로 체류하며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배종하였던 의관만을 대상으로 한다.
내의는 『經國大典』에서 12원으로 규정되었다. 침의청과 의약동참청의 경우 각각 효종과 현종조에 설립되었고, 정원과 관련한 규정은 각각 현종과 숙종조에 수립되었다. 하지만 침의와 의약동참의의 직임 자체는 16세기 후반 선조조에 이미 존재하였다(박훈평, 2022: 46-47). 현술선은 내의원 소속 침의는 아니지만 침술 때문에 심양에 들어가게 되었으므로 편의상 침의로 분류하였다(『瀋陽狀啓』 1638년 6월 21일).
예를 들어 의약동참의 정지문은 내의 박군의 후임으로 심양에 들어가게 되었다(『承政院日記』 78책, 인조 19년 4월 19일 갑자).
『瀋陽日記』 1637년 3월 10일.
『瀋陽日記』 1643년 3월 26일.
『瀋陽日記』 1643년 3월 28일, “仍辟人言曰 仍帝病今已向差 而欲爲對質於在此漢醫處 極擇善解藥術一等之醫一名及鍼醫柳達 罔晝夜入送事 再三嚴飭”
『瀋陽日記』 1638년 4월 24일; 5월 12일. 4월의 경우 예부(禮部) 의관 뇌명덕(雷鳴德)으로 존재가 확인되지만 5월은 정확한 신분이나 인명이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동일인물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숭덕 연간 인명이 확인되는 청의 한의로는 뇌명덕과 더불어 무진항(武振恒)이 있는데, 두 사람의 출신이나 청으로의 귀순 과정은 알려지지 않았다. 뇌명덕은 입관 이후 태의원 의관으로 활동하는 모습이 확인된다(『淸世祖實錄』 권76, 순치 10년 6월 27일 신유).
예를 들어 1638년 무진항이 청의 제왕 중 지르갈랑[濟爾哈朗]과 도도[多鐸]의 눈병을 치료한 기록이 남아 있다(『淸太宗實錄』 권43, 숭덕 3년 9월 1일 경신).
『承政院日記』 80책, 인조 19년 11월 9일 신사, “臣等言及 聖候久在違豫之中 臣民爲憂 則答曰皇帝臨行言之曰 國王之病 乃是風症 山城數朔 受傷必多 仍得寒疾 彌留至此 本國醫藥 久無見效 欲送我國之醫 試看症勢 而亦似有弊 止之云云 臣等以帝恩罔極而風土各異 非他國之醫 所可入侍云 則渠笑曰 雖來 不如一柳達 聞言故敢傳之云”
『承政院日記』 71책, 인조 17년 9월 26일 경진; 27일 신사; 28일 임오 등.
『承政院日記』 72책, 인조 17년 11월 27일 경진.
『承政院日記』 74책, 인조 18년 3월 19일 경자.
『承政院日記』 80책, 인조 19년 11월 6일 무인.
이명제는 정뇌경 사건을 청 예부와 호부의 갈등 관점에서 고찰한 바 있다(이명제, 2021: 98-101).
『魯庵集』 권3, 瀋陽日乘, “後數日醫官柳達出外還曰 聞皇帝云外國人事 不可不明査 其令尙書親問”
『瀋陽日記』 1639년 1월 26일.
『承政院日記』 96책, 인조 25년 3월 1일 임인, “迎接都監啓曰 勅使使差備譯官來言 上使則以膈間食滯之故 方服二陳湯 副勅使則以咳嗽之故 方服橘皮半夏湯 而鄭使言 今番行中 多有患病之人 前日瀋陽入送醫員李得吉 須卽入送”
『承政院日記』 93책, 인조 24년 1월 7일 을묘; 9일 정사.
『瀋陽狀啓』 1643년 6월 9일. 잉굴다이가 박군과 유달을 불러 진단을 의뢰하였는데 잉굴다이 본인의 증세인지 여부는 확실치 않다. 홍타이지의 병세를 진단할 때도 잉굴다이가 대리 처방받았기 때문이다.
『仁祖實錄』 권45, 인조 22년 12월 4일 무오; 권46, 인조 23년 1월 26일 경술.
『承政院日記』 91책, 인조 23년 윤6월 2일 임오. 『심양일기』에는 김상성이 확인되지 않는다. 따라서 1644년 9월 이후 북경에서 배종하다가 소현세자와 함께 귀국하지 않고 남아서 봉림대군을 배종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응두의 경우는 『歸巖集』 권12, 歸巖李元禎燕行錄, 1670년 7월 13일에서 확인되며, 이후담은 『顯宗實錄』 권5, 현종 3년 3월 8일 신사조에서 확인된다.
『燕行日記』(金海一) 12월 26일.
『承政院日記』 261책, 숙종 3년 9월 22일 병신.
『承政院日記』 560책, 경종 3년 11월 8일 갑신.
예를 들어 1658년 3월의 경우 의약에 정밀한 의관을 요청하였는데 저들이 이름을 알만한 의관을 보내는 것이 좋겠다는 이유로 박군을 선정하였다(『承政院日記』 149책, 효종 9년 3월 14일 신해).
『承政院日記』 181책, 현종 4년 12월 10일 계묘.
『承政院日記』 312책, 숙종 11년 12월 10일 병신.
『承政院日記』 175책, 현종 3년 7월 4일 을해.
『陽坡遺稿』 권14, 飮氷錄, “首輔政孫伊者 問鍼醫金尙誠來否 李一善對以金尙誠則不來 而今番來者亦是精明術業之人 孫輔政令一善明朝率來于其家”
『陽坡遺稿』 권14, 飮氷錄, “李一善率安禮往乻巨王家 王則以太后病患詣闕 仍往孫大臣家 孫也亦言太后之病非輕 俺於昨日問安而退云云 日晩後 乻巨王送人邀安禮施鍼 李一善亦隨去 安禮回來言 聞乻巨王之言 太后頭痛煩熱 似是感寒之病云云”
『陽坡遺稿』 권14, 飮氷錄, “乻巨王卽孫大臣之女壻也”
『淸聖祖實錄』 권8, 강희 2년 2월 11일 경술.
『陽坡遺稿』 권14, 飮氷錄, “十月初一日 朝李一善邀安禮往孫輔政家 輔政乃言于安禮曰 三大臣欲治俺病 姑留朝鮮太醫事 稟定于皇帝云 你勿以落留爲苦 從容治俺 所患得見其效 則非但於你有光 你國王聞之 亦豈不喜乎云云”
『燕行錄』(洪命夏), 1664년 4월 16일 무신, “吏部左侍郞到提督廳 招見金尙誠 問其病 金醫卽施鍼 良久乃歸 此侍郞乃淸人 而前日以勅使出來我國者云 自到舘之後 通官及漢淸人等 見金醫爭先針灸 金醫終日把鍼 不遑他事”
『燕行錄』(洪命夏), 1664년 4월 17일 기유, “朝吏部左侍郞又到提督廳 招金尙誠 施鍼卽去 通官送言曰 輔政求見金尙誠 不可不往云 余答以行中役員 不可任意出入 决難送之 通官輩又送言曰 此與私自出入有異 且有前例 不可不往云 於是始許之 金尙誠卽往其家 非輔政之病 其姪有手病欲針灸忌請云”
『燕行錄』(洪命夏), 1664년 4월 17일 기유.
『燕行錄』(洪命夏), 1664년 4월 18일 경술.
『燕行錄』(洪命夏), 1664년 5월 2일 계해.
『曾祖考燕行錄』, 11월 11일, “內大臣突只 曾有重病 春間淸平尉之行 金萬直仍爲往來於突只家 治病有效矣”
『曾祖考燕行錄』 11월 15일, “金萬直連日往來於輔政家 輔政極其致欵 至問使臣安否 萬直以使事未完 寢息俱廢之意言爲發端 則一善輒止之云 聞輔政之第三子爲達官者 亦待萬直甚厚 其寵宦田姓人 頗解文字 甚見親愛於輔政父子云 故使萬直潛結作書 邀致言於一善不見處 以文字通情 而其人有故 旣諾不來 亦可泄鬱”
『曾祖考燕行錄』 11월 19일, “金萬直之往來輔政家也 李一善動輒相隨 每戒萬直不可妄言 萬直或與輔政之子 以書通情 則一善必問所書之意如何 防之甚密 萬直曰 到此已久 凡奇從然 不知使臣 亦用憂鬱 何不探之於此處以喩之也 一善曰 此何等尊嚴之地而發口妄論乎 其事漸向順境實爲幸甚 而然豈至於全釋乎 萬直於輔政之前 目田小竪往密處 其人曰 已白于三爺前 卽輔政之子也 輔政曰 曾聞使臣有病 今如何耶 萬直曰 國事關心 夜不能寐 日益危重矣 輔政曰 語汝使臣 爲我安枕可也云云”
이일선이 집요하게 방해한 이유는 뇌물 때문이었다. 이일선은 대통관으로 조선과 청 관계를 주선하면서 뇌물을 얻어내곤 하였다. 하지만 조선이 오보이라는 실력자와 직접 소통하게 될 경우 주선의 대가를 요구할 수 없다. 『曾祖考燕行錄』 11월 19일; 20일 참조.
『曾祖考燕行錄』 11월 20일, “金萬直往輔政家 以小札陳情於輔政之子 則以書答之曰 逃人事 大老爺知道 勿令佟知云云”; 11월 21일, “萬直往四輔政家 則田姓人畫地書示曰 其事大老爺已爲善處 須勿爲慮云”; 11월 22일, “金萬直往四輔政家 則田靈書示小札曰 你的國王與大臣不怕云云”
『曾祖考燕行錄』 11월 18일; 11월 21일; 11월 22일. 한편 바하나와 소닌은 모두 이듬해 병환으로 사망한다. 이로 미루어보건대 바하나와 소닌은 순수하게 의학적 도움을 구했던 것으로 보인다.
『顯宗實錄』 권13, 현종 8년 1월 12일 정해.
『曾祖考燕行錄』 11월 29일.
『顯宗實錄』 권14, 현종 8년 1월 13일 무자; 29일 갑진 등.
유관 일수의 감소는 반복적으로 이루어진 청 황제의 시혜적 조치와도 밀접한 연관이 있다. 예를 들어 순치제는 치세 말기에 청 사신을 2명으로 제한하고 팔기 무역을 전면 금지시켰다(『淸世祖實錄』 권121, 순치 15년 11월 15일 무신). 또한 청 황제는 청 사신에 대한 접대 문제를 반복적으로 단속하였다(『正祖實錄』 권22, 정조 10년 윤7월 18일 기축).
선행 연구에 따르면 숭덕~순치 연간 조선의 대청 사행 빈도는 연평균 3회를 상회하지만 강희 연간 이후로는 19세기 후반까지 연평균 2회 내외에서 형성되고 있다(이명제, 2021: 18~19).
『同文彙考』 補編 권3, 使臣別單3, 冬至行正使李澤副使權別單, “閣老松柱以受鍼事 來到館門外閭家 醫官卞三彬與金弘祉進去 則受鍼後 閣老謂金弘祉曰 前者 穆克登之往渭原也 不得見白山而還 欲請奉旨威脅朝鮮 而往見白山 余料其不便於爾國 敎穆曰 若然則朝鮮不肯指路矣 朝鮮國小民貧 爾所詳知也 善奏皇上 施恩於朝鮮 然後出去 則可圖無憂 穆乃大悟 因奏皇上減貢又於沿路各站修葺察院以便使行”
『燕行日記』(李澤), 乙未(1715) 1월 6일, “右閣老松柱有病 來大賈鄭世泰家 請御醫看病 首譯金弘祉偕往”
『陶谷集』 권30, 庚子燕行雜識 下, “鄭世泰卽北京大賈也 其富罕儷 我國所買錦段 皆出其家 至於世所稱難得之貨 求之此家 無不得者 下至花果竹石名香寶器 亦皆種種具備 家在玉河橋大路之南 制作甚宏傑 擬於宮闕 爲我國買賣之主 故譯輩凡有大小買賣 奔走其家 晝夜如市”
『燕行日記』(李澤), 乙未(1715) 1월 7일, “歸路入見松閣老 閣老又見其子婦 後軍將軍之妻 使之診脉 閣老夫人亦見之 動止端正 容貌亦雅麗 侍婢數百 饌品極佳云”
『燕行日記』(李澤), 乙未(1715) 1월 20일.
유시의 내용은 『동문휘고』 原編 권24, 節使 7, 禮部知會免白金紅豹及修葺沿途館舍咨 참조.
백두산정계비 수립 과정에 대해서는 다음의 연구를 참조하였다(이화자, 2008: 140-166; 김우진, 2020: 113-118).
『肅宗實錄』 권51, 숙종 38년 4월 4일 병진; 7월 26일 정미.
『肅宗實錄』 권50, 숙종 37년 3월 5일 갑오.
『肅宗實錄』 권50, 숙종 37년 3월 16일 을사.
『肅宗實錄』 권50, 숙종 37년 4월 17일 을해.
『承政院日記』 462책, 숙종 37년 8월 29일 병술; 467책, 숙종 38년 4월 4일 병진.
『燕行日記』(李澤), 乙未(1715) 1월 4일, “皇帝之第七子淳郡王有脚病 送蝦出來通官廳 請御醫問病”.
『燕行日記』(李澤), 乙未(1715) 1월 5일, “以淳郡王病 送轎車 邀卞醫於暢春苑 首譯金弘祉偕往”
『燕行日記』(李澤), 乙未(1715) 1월 14일, “以皇帝旨意招御醫 看中書省掌文簿者病 首譯金弘祉偕大通官往來 中書官姓名蘇沉云”
『桑蓬錄』 권8, 1월 8일, “十三王通於館所 要見針醫及善華語之譯官云 使臣使金時裕 率吳持喆往見 蓋十三王之子 有積年瘡腫 欲邀醫問藥也 (中略) 王於床上 藉錦茵而坐 又置二錦茵於側命兩人升坐 (中略) 吳持喆略言療疾之方 王甚悅 請明日復來云”
옹정 연간 이친왕 윤상의 권력에 대해서는 조선에서도 이미 인지하고 있었다(『承政院日記』 602책, 영조 1년 10월 5일 기사).
『桑蓬錄』 권8, 1월 9일, “金時裕與吳持喆 同往十三王家 見其子之疾而命藥焉 王令宦者諭之曰私室之頻頻請見 極知未安 而至情所在 不得已焉 且吾視東國 與他國異焉 君輩毋以往來爲嫌亦勿以貴公子難於用藥也 仍請逐日看病云”
『桑蓬錄』 권8, 1월 20일, “金常明從胡皇 往在圓明園矣 今日自圓明園暫還收稅所云 故送金時裕問史冊事 常明曰 吾自有周旋之事 君毋亂吾意也 時裕問何以周旋 則終不言 但云今日天下事皆在十三王之手 吾薦吳持喆及君 使療其子之疾 安知無所以乎云”
인조반정을 찬탈로 규정한 『양조종신록(兩朝從信錄)』 등을 수정하고, 수정된 내용을 『명사』 조선열전에 반영시키는 것이 최종 목적이었다. 이미 1726년의 주청으로 조선의 요구는 수용되었지만 조선에서는 조선열전의 간본을 속히 확보하고자 지속적으로 노력하였다(한명기, 2002).
『桑蓬錄』 권9, 2월 4일, “皇旨曰 朝鮮年貢之法 歲貢米百石也 朕念該國道遠 輸送未易 白米三十石粘米三十石除減 每年使貢 粘米四十石而足以供祭祀之用 以此永爲定法 行文知委於該國王云 關西一道 精擇遠輸之久弊 自此大除 國家之幸 不可勝道 而但胡皇之遺惠也太無端 曩日十三王問我國用道之不足于金時裕之意 今始覺其有妙理也 今日燕中大小事權盡在於十三王者又可知矣”; 2월 10일, “今番貢米蠲減 大抵十三王居間周旋之力也”
『桑蓬錄』 권9, 2월 9일.
『同文彙考』 原編 권79, 「禮部知會留醫官在京咨」; 「禮部知會出送留京醫官咨」.
『承政院日記』 529책 경종 1년 2월 12일 계묘; 13일 갑진; 14일 을사; 16일 정미.
『承政院日記』 548책, 경종 2년 12월 18일 기사; 19일 경오.
『承政院日記』 549책, 경종 3년 1월 21일 신축; 25일 을사.
『承政院日記』 553책, 경종 3년 4월 28일 정축; 29일 무인.
『承政院日記』 560책, 경종 3년 11월 8일 갑신.
『承政院日記』 560책, 경종 3년 11월 9일 을유.
진후관은 1721년 羅瞻을 치료할 때 임대재와 함께 전의감 의관으로 파견된다. 이후 1722년 의과에 합격한 후 1724년 내의원 장무관을 역임한다.
『承政院日記』 588책, 영조 1년 3월 3일 신축; 589책, 영조 1년 3월 19일 정사; 30일 무오.
『承政院日記』 1180책, 영조 36년 4월 29일 계묘. 청 사신의 병환을 이유로 문안사를 파견하는 전례가 정확히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기록상 확인되는 첫 사례는 1639년 12월 마푸타[馬福塔]의 경우이다(『承政院日記』 72책, 인조 17년 12월 12일 갑오).
『承政院日記』 1894책, 순조 5년 6월 28일 경진.
『承政院日記』 2144책, 순조 21년 8월 30일 정미.
『혜국지』의 간행 시기 및 주요 내용은 다음의 연구에 정리되어 있다(박훈평ㆍ안상우, 2014).
『사례』에서는 반송사(伴送使), 전다관(煎茶官), 가유생(假儒生), 두목인(頭目人) 등으로 칙사 접대의 업무를 전하고 있다. 『사례』의 저술 시기 및 주요 내용은 다음의 연구에 정리되어 있다(박훈평, 2023).
『內醫院式例』 奉使, 赴燕. 『내의원식례』의 저술 시기 및 주요 내용은 다음의 연구에 정리되어 있다(박훈평, 2015).
『承政院日記』 191책, 현종 6년 11월 26일 무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