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후반 전의감 의학생도의 유형별 진로 양상 분석 - 『전함생도안』과 『별천팔세안』의 인물을 중심으로

Analysis of the Career Trajectories of Students from the Jeonui-gam in the Late Nineteenth Century : Focusing on the Individuals in Jeonhamsaengdoan and Byeolcheonpalsean

Article information

Korean J Med Hist. 2024;33(3):599-640
Publication date (electronic) : 2024 December 31
doi : https://doi.org/10.13081/kjmh.2024.33.599
*Researcher, PhD student, History of education, Chungnam National University
**Associate Professor, Cheongam University
신은정*, 우현정**
*언양초등학교 교사. 교육사 전공
**청암대학교 조교수. 교육사 전공
교신저자: 청암대학교 조교수. 교육사 전공/ 이메일: mobflore@naver.com
†이 논문은 2021년 대한민국 교육부와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임(NRF-2021S1A5B5A16075763).
Received 2024 October 29; Revised 2024 November 11; Accepted 2024 December 17.

Abstract

This study analyzes the career trajectories of students from Jeonuigam in the late nineteenth centry Joseon dynasty, shedding light on its educational functions by focusing on individuals listed in the Jeonhamsaengdoan and Byeoncheonpalsean. The primary subject of this research, the Jeonhamsaengdoan, is a valuable resource for understanding the career paths of Jeonuigam students, containing enrollment information for 384 individuals. The Byeolcheonpalsean, introduced for the first time in this paper, provides information about an alternative method of enrollment known as ‘Byeolcheon’ for students entering Jeonuigam.

The analysis of these individuals’ career paths reveals that many Jeonuigam students had overlapping enrollments in other technical institutions, such as Saekwon and Gwangsangam. This suggests that medical education was not limited to specific disciplines but was part of a broader educational framework. Moreover, the Seogyeong system allowed younger siblings to enroll alongside older ones, while the Byeolcheon system, which facilitated recommendations from other institutions, provided educational opportunities for families. These findings highlight the diverse methods in which medical and vocational education were conducted in the late nineteenth century Joseon dynasty.

Approximately 66 percent of Jeonuigam students became medical officials, while others pursued careers in fields such as interpreting and various government roles, contributing to society in multiple ways. This study demonstrates that Jeonuigam was not solely focused on training medical personnel but was intricately linked to broader vocational education systems. Consequently, this study contributes to a historical understanding of medical education in the late Joseon period. Future studies should explore comparisons with Hyeminseo and Naeuiwon, changes in the social status of the middle class, and Jeonuigam’s role during the transition to modern medical systems.

1. 서론

1. 연구의 필요성

조선시대 중앙의 의료체제는 내의원, 전의감, 혜민서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이들 삼의사(三醫司, 내의원 · 전의감 · 혜민서) 중 내의원은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및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등 관찬 사료에 풍부한 자료가 전해지고 『약방일기(藥房日記)』를 통해 활동 모습을 추측하는 데 용이하다. 조선시대의 의료 체계는 각 관청별 구성과 기능이 달랐으며, 교관직이 따로 없던 내의원과 달리 혜민서나 전의감은 의학교수와 의학 훈도가 있어 교육의 기능이 컸던 것으로 추측되는 바 이들을 연구하는 것은 의학 관청의 교육적 기능을 이해하는 데 더욱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전의감은 명실공히 조선의 의료시스템을 총괄하는 관청으로서 의학 지식의 전수와 의료 인력의 양성에 있어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혜민서의 경우, 최근 들어 박인순의 『혜민서연구』(박인순, 2014: 1-255)와 우현정 · 신은정의 「18세기 혜민서의 의학교육 연구: 혜국지(惠局志)를 중심으로」(우현정 · 신은정, 2023: 53-73)를 통해 그 교육과 활동 모습에 어느 정도 다가갈 수 있게 되었다.

전의감의 경우 여전히 교육적 가치를 알 수 있는 연구가 부족한 가운데, 『전함생도안(前銜生徒案)』1)의 발굴은 전의감의 본 모습을 좀 더 구체적으로 그릴 수 있게 해주었다. 『전함생도안』은 의학관청의 유일한 생도안이며,2) 더욱이 지금까지 자료가 거의 없었던 전의감에 대한 자료이기 때문에 그 중요성이 상당하다고 할 수 있으나 본 안(案)을 최초로 학계에 소개한 논문(박훈평, 2013: 1-7) 이후 이 자료를 활용한 연구가 거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함생도안』은 조선시대의 의학 관청에서 관리했던 생도(生徒)3)와 전함(前銜)4)의 진로를 파악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기에 의학교육의 실제에 대한 소중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최근 『별천팔세안(別薦八世案, 이하 별천안)』이 확인되었다.5) 『별천안』은 1870년부터 1893년까지 총 8회에 걸쳐 전의감과 사역원, 주학청에서 각각 전의감에 생도로 입속한 이들을 별천(別薦)6)한 명단을 수록한 자료이다. 『전함생도안』과 비교하여 세부 양식은 차이가 있으나 생도의 개인정보와 가계 정보 등이 수록되어 어떤 인물들이 전의감에서 수학하였는지 일부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전함생도안』에 수록된 인물들과 일부 중복되어 교차 검증이 가능하고, 정확한 입속 시점을 확인할 수 있다는 특징이 있다. 『별천안』은 『전함생도안』에서 확인할 수 있는 자료에 추가적인 자료를 더욱 제공함으로써, 연구자들에게 전의감의 실제 활동 모습을 추측하게 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

따라서, 본 연구는 『전함생도안』과 『별천안』의 분석을 통해 전의감의 교육적 기능에 대해 설명을 시도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전의감 『전함생도안』에 수록된 384명의 생도 정보를 『별천안』과 『조선시대 의관 총목록』,7) 국사편찬위원회의 『승정원일기』및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과 비교하여 동일 인물로 추측되는 인원을 선별하여 분석할 것이다. 또한 동 시기 타 기술 관청인 관상감과 사역원의 생도안의 인물을 비교하여, 동일 인물로 생각되는 인원을 파악하고 이에 대한 해석을 시도하고자 한다.

본 연구는 전의감에서 교육받은 생도들의 양태와 진로에 초점을 맞추어, 그들이 어떠한 경로로 의학을 포함한 정부의 각처에서 활동하게 되었는지를 탐구한다. 이를 위해 전의감의 『전함생도안』에 기록된 생도들의 이후 활동사를 분석함으로써, 조선시대 의학교육 관청이 실제로 어떻게 의료 인력의 진로에 영향을 미쳤는지를 밝히고자 한다. 그 과정에서, 전의감 생도들의 다양한 진로 경로를 통해 당시 잡학 교육의 현실과 그 사회적 의미를 다각도에서 조명할 예정이다.

본 연구는 『전함생도안』에 수록된 생도들의 진로를 추적하고, 이들의 사회적 배치와 활동 분야를 분석하여, 조선시대 의학교육과 의료 인력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제시한다. 이를 통해, 전의감에서의 의학교육이 조선시대 의료 체계와 사회 내에서 어떠한 역할을 수행했는지, 그리고 이러한 교육이 생도들의 진로에 어떤 구체적인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한 심층적인 분석을 진행할 것이다. 이와 같은 연구는 조선시대 의학교육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 있어 크게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

2. 선행연구 분석

본 연구를 진행하기에 앞서, 기술직 관청의 선발 과정과 『전함생도안』을 포함한 타 관청의 생도에 대한 선행연구를 살펴보고자 한다. 현재까지 기술직 관청의 선발에 관한 연구는 문과 및 과거시험을 통한 선발에 비해 상대적으로 미비한 상황이다. 김현목의 연구인 「조선후기 역학생도 천거에 관한 연구」는 이 주제에 대한 최초의 시도이다. 그는 역과 시험 이전의 중요한 절차인 입속에 대해 설명하고, 이 과정을 통해 다양한 통계자료를 제공하여 후속 연구자들에게 많은 기초 자료를 남겼다. 해당 연구를 통해 생도의 합격률과 주요 가계의 변동 양상, 특히 조일수호조규 전후의 변화 등을 확인할 수 있다.

박권수의 연구(박권수, 2019: 289-321)는 그동안 소개되지 않았던 관상감의 완천(完薦)8)자료 『삼력청완천록(三曆廳完薦錄)』, 『본청완천안(本廳完薦案)』, 『삼력청완천안(三曆廳完薦案)』을 학계에 소개하고 이들 입속자에 대한 연구를 통해 기술직 중인의 활동 모습을 전체적으로 조망하였다. 그의 연구를 통해 관상감의 입속 방식에 대한 시대별 변화 양상을 확인할 수 있고, 그 과정에서도 고수되는 중요한 원칙들을 알 수 있다. 박권수의 연구(박권수, 2019: 292)를 통해 관상감 완천 자료에 포함되지 않은 음양과 합격자에 대한 의문이 제기된 바 있으며 본 연구에서 다루는 『별천안』이 이러한 의문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우현정의 최근 연구(우현정, 2023: 47-76)는 사역원 생도의 완천안과 진로를 분석함으로써, 사역원 생도의 전체적 경향을 살펴보고 사역원 역관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켰다. 해당 연구를 통해 사역원 생도들이 역과 외에도 잡학 분야에서 입격하는 사례를 확인할 수 있었으며, 이들이 역관을 통한 진로 이외에도 다양한 분야에서 진로를 모색하고 있음을 본인 및 가계의 조사로 확인하였다. 그러나 역과에서 사역원 생도의 점유율이 약 60%로 추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역원 출신이 아닌 역과 합격자에 대한 해석이 명확히 제시되지 않았다. 이에 대한 해답은 박권수의 연구와 마찬가지로 본 연구에서 살펴볼 『별천안』을 통해 살펴보고자 한다.

3. 자료 소개

가. 『전함생도안』

박훈평에 의해 처음 학계에 소개된 『전함생도안』은 생도 및 전함의 명단을 정리한 책이다. 수록 인원은 총 384명으로9),10) 생도와 전함의 명단을 필사하여 적은 2차 자료이며, 원자료는 현존하지 않지만 전의감의 『완천안』과 『별천안』일 것으로 추정된다. 『완천안』을 원자료로 추정하는 이유는 일반적인 『완천안』에서 확인할 수 있는 본관, 부친의 이름, 입속 날짜와 함께 서경(署經)11)의 입속으로 추정되는 인물집단군이 있기 때문이다.12) 그러나 일반적인 『완천안』에 수록되어 있는 생년이나 입속 방법, 보거인(保擧人), 사조(四祖)의 정보가 없어 해당 인물을 특징짓거나 문서의 성격을 파악하는 데 제한점을 가진다. 다만 『완천안』의 경우 완천 대상자와 함께 허입(許入) 유무가 기록되는데, 『전함생도안』의 인물들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 『전함생도안』 속 인물들은 이미 입속의 허가를 받은 생도로 간주할 수 있다.

『전함생도안』의 내용상 특이점은 책의 서명이 전함과 생도의 명단을 뜻하는 ‘전함생도안’인 것인데 반해 전함과 생도를 따로 나누어 제시하고 있지는 않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이 명단의 작성 목적을 수행함에 있어서, 전함과 생도를 따로 구분할 필요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향후 전의감의 업무를 맡게 될 예비 관원인 전의감 생도 56명과 전함은 사실 전의감을 구성하는 의원집단 전체라고 할 수 있다. 앞서 전함(前銜)을 ‘이전 혹은 현재 의원의 직임을 맡은 자’로 정의한 바 있다. 따라서 전의감의 경우 관청 관련 인물은 기본적으로 생도나 전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생도안』이라고 하지 않고 『전함생도안』이라고 한 이유는 한번이라도 정(正), 부정(副正), 주부(主簿), 참봉(參奉) 등 품계를 가진 의관과 일반 의학 생도를 동시에 같이 칭하는 것이 조선의 유교적 예법과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위의 논의를 통해 이 책의 목적을 추정해 볼 수 있다. 그 목적은 이들의 현재직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고, 과거 이들이 전의감의 생도를 거쳤는지만 확인이 필요한 어떠한 절차를 위해 제작되었다는 것이다. 필자는 이 절차가 전의감의 취재나 과거 시험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전함생도안』은 시험의 응시생이 과거 혹은 현재에 해당 관청의 생도였는지 증명하기 위한 정보를 일목요연하게 한 권에 보여준다. 또한 입속년도를 기준으로 인물을 분류하고 있기에, 응시생이 자신의 입속년도를 기억한다면 본인을 찾고 증명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즉, 『전함생도안』은 잡과 과거시험 중 의과의 응시생의 명단을 확인하기 위한 부거도목(赴擧都目)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13)

나. 『별천안』

『별천안』은 본 고에서 처음 소개하는 자료로서 각 잡학 관청에서 전의감으로 생도를 추천한 명단을 수록하고 있는 자료이다. 『별천안』은 전의감 외에도 사역원, 관상감에서도 확인되고, 잡학 관청에서 다른 잡학 관청으로 생도를 추천할 때 사용하였으리라 추정된다. 앞서 밝힌 대로 『별천안』은 1870년부터 1893년까지 총 8회에 걸쳐 전의감과 사역원, 주학청에서 각각 추천받아 전의감에 생도로 입속한 이들에 대한 정보를 담고 있다. 기술직 중인에서 의학, 역학, 주학은 서로 긴밀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특히 『의역주팔세보(醫譯籌八世譜)』와 같은 일종의 화이트리스트를 공유하며 자신들의 세력을 공고히 해 나갔음이 확인되고 있다(권기석, 2020: 187).14) 『별천안』 역시 그러한 용도로 제작되었으리라 추측되며, 각기 인물에 대해 8대까지 걸쳐 담고 있다. 수록 인원은 총 272명으로 『전함생도안』 수록 인원과 44명이 중복된다.

『별천안』 속 인원은 본래 관청에서 타 잡학 과거 응시를 원하는 생도를 대상으로 해당 관청으로 특별히 추천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앞서 제기한 문제에서 처럼 해당 관청 생도가 아닌 자들 중에서 과거에 합격하는 경우 중 일부를 설명할 수 있으리라 기대된다.

그림 1.

『전함생도안』(좌)과 『별천안(별천팔세안)』(우)의 표지와 속지

Figure 1. Covers and Contents of Jeonhamsaengdoan(Left) and Byeolcheonan(Byeolcheonpalsean)(Right)

(연세대학교 학술문화처 도서관 소장(고서(귀) 100, 101))

Ⅱ. 『전함생도안』과 『별천안』 수록 의학 생도의 진로 유형

1. 수록 인원의 주요 특성

가. 『전함생도안』 수록 인원의 입속 연령과 입속 방법

앞 장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전함생도안』에 수록된 인원은 총 384명이다. 『전함생도안』 수록 인원 중 다른 관청의 완천안, 과거 합격 방목, 족보를 통해 나이를 확인할 수 있는 인물은 266명이며15) 이들은 전체 384명 중 69%에 해당한다. 이들의 평균 입속 연령은 15.9세이며 종전 박훈평의 연구가 160명을 대상으로 하여 평균 15세의 나이를 나타낸 것과 비교하면 인물은 106명을 더 조사한 것이며 평균 입속 연령은 1세 가량 늘어난 것이다(박훈평, 2013: 1-7).

또한 관상감 입속 생도 중 1825년부터 1860년까지 입속한 『본청완천안』 수록 인원의 평균 연령 16.5세, 1872년부터 1893년까지 입속한 『삼력청완천안』 수록 인원의 평균 연령 13.9세와 비교하여 그 사이의 기간에 해당하는 1865년부터 1884년까지에 입속한 『전함생도안』 수록 인원의 평균 연령이 15.9세로 확인된 것은 19세기에도 후반으로 갈수록 점차 입속 연령이 낮아지고 있다는 박권수(박권수, 2019: 300)의 추정을 보충하는 자료가 된다. 이들의 나이 분포를 표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표1].

『전함생도안』 수록 인원의 입속연령

Table 1. Ages of Individuals Recorded in Jeonhamsaengdoan

위의 <표 1>과 <그림 2>를 보면 평균나이는 약 16세이지만, 가장 많은 인원이 분포하는 최빈치는 11세∼15세 구간으로 전체 나이를 알 수 있는 인원 가운데 34%에 해당한다. 이 중 특이한 사례로서 최연소자 2인과 최고령자 2인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림 2.

『전함생도안』 수록 인원의 입속연령 그래프

Figure 2. Graph of the Ages of Individuals Recorded in Jeonhamsaengdoan

(『전함생도안』)

입속시 가장 연소한 인물은 #145 김균위로 1878년 3월 당시 만 4세였다. 김균위가 이토록 빨리 입속하게 된 이유는 당시 ‘서경(署經)’이라는 제도로 설명할 수 있다. 서경은 사역원 생도 입속이나 관상감 생도 입속에서도 확인되는 입속 방법으로 같은 형이 완천을 거쳐 입속 한 경우, 완천의 심사 과정을 훗날 동생에게도 적용하는 제도이다(박권수, 2019: 300). #145 김균위 역시 어린 나이지만 형인 #144 김균복이 입속할 때 한 번에 같이 입속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경향은 이미 사역원의 『완천록(完薦錄)』과 『완천기(完薦記)』에서 다수 확인할 수 있다(우현정, 2023: 50). 서경을 통하면 형의 입속 이후, 어린 동생들을 한꺼번에 미리 입속시킴으로써, 나중에 따로 완천하는 과정을 생략할 수 있었다.16)

Ⅰ장에 설명한 바와 같이 전의감의 『전함생도안』은 입속 방법에 대한 정보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특정한 인물의 배치를 통해 서경의 입속 방식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아래는 1878년 3월 입속자를 수록 순서대로 #137∼#148까지 나열한 것이다[표2].17)

『전함생도안』으로 추정한 서경 입속의 예

Table 2. Examples of the Seogyeong Entrance presumed from Jeonhamsaengdoan

<표 2>의 입속자 군(群)을 보면 해당 번호 대는 형(兄)이 있는 인물들이 집중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동복제(同腹弟)들이 동시에 입속 하는 모습 또한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은 사역원의 완천 기록인 『완천기』나 관상감의 완천 기록인 『삼력청완천록』, 『본청완천안』, 『삼력청완천안』에서도 서경 입속 인원을 따로 적기한 사실 및 입속 방법이 일치한다. 이를 통해 전의감도 사역원이나 관상감과 마찬가지로 추천 시, 한번 인증된 가문의 경우 동복제의 입속을 완천 없이 허락하였음을 알 수 있다. <표 2>에서 서경의 단서가 되는 형을 유일하게 밝히지 못한 #142 김상일과 #143 김상진 형제의 경우 현재 두 명이 동복형제라는 사실은 확인되므로, 이들 또한 누군가의 동생 자격으로 전의감에 입속 하였음을 추측할 수 있다.

입속 당시 최고령자인 #44 정지수는 59세에 입속 하였다. 그는 1870년 혜민서 주부18)를 지냈으나 1872년 3월, 59세의 나이로 다시 전의감에 입속하였다. 이후 그는 1880년 내의까지 오르게 되었다. #44 정지수는 혜민서와 전의감에 동시에 입속 하였거나 혹은 혜민서에서 전의감으로 소속을 옮겼다고 추정된다. 정지수의 경우를 통해 혜민서와 전의감은 서로 간의 인적교류에 있어서는 배타적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즉, 당시 혜민서 소속은 전의감 소속과는 별개로 여겼음을 이해할 수 있다.

두 번째 고령자는 1872년 입속한 #58 이용관이며, 당시 48세로 전의감에 입속하였다. 그는 의약동참이었는 데 입속 4년 후인 52세에 사망하여19) 그의 마지막 기록은 ‘의학생도’로서 확인된다.20),21) 의약동참이 비록 어의라고는 하나 전의감의 의원이 아니라도 추천을 통해 오를 수 있는 자리이다. 따라서 그는 과거시험을 치기 위해서 늦깍이 생도가 됐을 가능성이 있다. 또 다른 가설로는, 자신을 통하여 자손들을 전의감 생도완천에 도움이 되기 위해서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최고령자 정지수의 손자인 #284 정재학, #285 정재형이 『전함생도안』에 등장하는 조손 관계이며, 두 번째인 이용관 또한 아들 #382번 이창균이 『전함생도안』에 올라있어 이러한 추측에 신빙성을 더해준다. 혜민서의 경우 입속 시에 본인 및 처의 사조(四祖)를 모두 살펴서 완천의 과정을 거쳤으며, 전의감도 이와 같거나 비슷했을 것이기 때문이다.22)

『전함생도안』 수록 인물 중 44명은 『별천안』에 수록되어 이들의 경우, 천거나 서경, 직입(直入)이 아닌 별천(別薦)의 방법으로 전의감에 생도로 입속 하였음을 추정할 수 있다. 그들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표 3].

『별천안』 등재자 중 『전함생도안』 중복 등재자

Table 3. Individuals Listed in Byeolcheonan Who Are Also Duplicately Listed in Jeonhamsaengdoan

『별천안』 등재자 중 『전함생도안』 중복 등재자는 총 44명이며, 이들의 『별천안』 수록 당시 평균나이는 14.9세로 『전함생도안』 평균 나이인 15.9세보다 1세 가량 적다. 이외에도 『전함생도안』과는 달리 이름과 부친, 본적 외에도 나이와 직역 및 신분과 추천을 받은 기관까지 명시하고 있어 더 다양한 정보를 제공해 준다. 44명 중 주학청으로부터 추천받은 이는 34명(77%), 전의감으로부터 추천 받은 이는 8명(18%), 사역원으로부터 추천받은 이는 2명(5%)이다. 주학청으로부터 추천을 받은 자가 다수인 것은 잡과 입격자 중 주학 취재에 중복하여 입격하는 인물이 다수 있는 것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 『전함생도안』과 『별천안』의 등재자 분석을 통해 입속 연령의 범위는 물론, 이미 알려진 완천의 방법 외에도 서경과 별천의 입속 방법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나. 『전함생도안』 수록 인원 안의 가족관계

『전함생도안』을 통해 친족관계를 빈번히 확인할 수 있으며 가장 쉽게 찾을 수 있는 친족관계는 형제이며 생부가 같은 사람을 형제로 보았을 때, 49개의 사례가 발견된다. 이 가운데, 2명 형제인 경우는 35개 사례, 3명 형제인 경우는 13개 사례, 4명 형제인 경우는 1개 사례가 발견된다. 4형제는 #62 현종운, #146 현령운, #147 현횡운, #148 현량운 형제이다. #62번 현종운이 1872년 먼저 입속 한 이후, 서경을 통해 #146∼#148번이 동시 입속 하였다.

본인이 생도로 입속한 이후 아들이 다시 생도로 입속한 경우는 4개의 사례가 확인되며, 손자가 다시 생도로 입속한 경우는 1개 사례가 확인된다. 본인 및 자식이나 손자가 다시 생도로 입속 하는 경우가 많이 확인되지 않는 이유는 『전함생도안』이 비교적 짧은 15년간의 입속 생도에 대해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수의 친족관계가 확인되는 현상은 이미 선행연구에서 지적된 바와 같이 잡학 관청을 담당 중인들의 혈연적 폐쇄성의 예로 볼 수 있다(박권수, 2019: 302). 그러나 부친의 입속이 자식의 입속을 무조건 보장하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그러한 세전이 어떠한 과정과 방식을 거쳐 자식에게 이루어지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본 고에서는 Ⅲ장 진로 유형에 따른 대표 인물 별 사례 분석을 통해 이를 고찰해 볼 것이다.

다. 『전함생도안』 수록 인원의 입격

『전함생도안』의 인물 중 1번이라도 입격한 인물은 총 176명이다. 이것은 전체 인원인 384명의 43%에 해당하는 수치이다. 이 중 가장 많이 합격한 의과 출신 인물은 93명으로 전체 인원 대비 24%이며 등과자 중에서는 53%에 해당하는 수치다. 주학 취재에 입격한 이는 48명으로 이는 전체 명단의 13%, 전체 등과자 중에서는 27%에 해당한다. 역과 입격자는 42명으로 전체의 11%, 전체 등과자 중 24%였다. 음양과 입격자는 6명으로 전체의 1.5%, 등과자 중 3%였다. 또한 문과 등과자 4명 중 대과가 1명, 소과 등과자가 3명이며 소과는 진사 2명, 생원 1명이 확인된다.

『전함생도안』 수록 인원의 중복 등과자는 모두 주학과 다른 과에 동시에 입격하였으며, 주학 취재에 먼저 합격한 이후 타과에 합격하는 순서도 동일하였다. 주학과 의과에 합격한 인물은 10명, 주학과 역과에 동시 합격한 인물은 2명, 문과 과거에 합격한 4명 모두 주학에 이미 등과한 자들이었다.23) 그러나 의과와 역과, 의과와 소과, 역과와 소과를 동시에 합격한 이는 없는 것으로 보아 주학은 입격 이후로 관련 분야에 진출할 수도 있지만, 입격 이후 다른 과를 준비하고 진출하는 경우가 많았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현상과 관련해서 선행연구에서 제시한 바와 같이 취재로 등용되는 주학의 진입 장벽이 의학이나 역학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기 때문이라는 의견(권기석, 2021: 241)에 동의한다. 덧붙이자면 의학의 경우 약재의 양을 계산할 때 주학의 학문 내용이 도움되는 바, 주학 취재에 합격하였다는 증서 혹은 수학적 능력 자체가 당시 의관의 취재나 과거시험, 혹은 이후 의료 관직을 가질 때 유리한 점이 있었으리라 생각해 볼 수 있다.

『전함생도안』 인원 중 중복등과자

Table 4. Individuals Listed in Jeonhamsaengdoan Who are double-passed national examinations.

『전함생도안』에 수록된 1869년 3월부터 1884년 10월까지 실시된 의과에서 식년시 6회, 증광시 4회 등, 총 10회 181명의 의과 입격자가 배출되었다. 이 중 전의감의 『전함생도안』 출신 인물은 총 79명이다. 이는 전체 의과 등과자 181명의 43.6%이며, 『전함생도안』 수록 인원 384명의 21%에 해당하는 수치다. 전체 의과 등과자 181명 중 43.6%가 『전함생도안』에서 나온 이유는 다음과 같이 추정할 수 있다. 첫째, 1869년 이전의 전의감 『전함생도안』 출신 인물은 포함되지 않은 기록이기 때문이고, 둘째, 혜민서 생도의 자격을 통해서도 의과를 응시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의과방목』을 통해 전의감은 물론 혜민서 출신으로 보이는 인물들 또한 상당수 확인할 수 있는 바24), 전의감뿐만 아니라 혜민서에서도 의과 합격자가 배출되었고, 이는 전의감과 같이 혜민서도 자체의 전함생도안을 작성하고, 관리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입속 후 등과까지 걸리는 시간은 박훈평의 연구(박훈평, 2013: 4)에서 이미 밝힌 바와 같이 식년시 의과가 실시된 주기에 비롯하여 보통 1년, 4년, 7년이다.

보통 이들은 과거가 실시되기 1년 전에 입속하는 경향이 강했다. 그 이유는 보통 과거가 있는 년도의 전해 9월에 의과를 비롯한 잡과 초시가 설행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잡과 초시에 합격한 뒤에라야 다음 해 열리는 복시에 응시할 수 있다. 기록상으로 입속과 같은 해에 의과에 합격한다는 것은 실제로 그 전년 초시에 합격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시험 특성상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78 정종하와 #276 정석규의 경우 같은 년도에 입속하고, 과거에 합격하였다.

어린 나이에 입속하는 생도의 상당한 수가 과거 합격까지 10년 이상이 걸렸다. 이를 통해 의과 과거에 대한 준비를 갖추지 않은 동몽들이 미리 『전함생도안』에 이름을 올리는 것이 일종의 추세와 같았다고 설명할 수 있다.25) 이것은 사역원과 관상감의 서경 입속 및 본 고에서 추정한 전의감의 서경 입속과도 연관 된다.

라. 『전함생도안』수록 인원의 타 관청 중복 입속

전의감의 『전함생도안』 생도 중에는 타 관청의 생도로 입속한 이들이 많이 존재한다. 사역원의 『완천기』의 경우 1861년부터 1893년까지 1,303명이 수록되었고,26) 관상감의 완천안인 『삼력청완천안』도 1872년부터 1893년까지 347명의 인원이 확인이 되는 바, 이들 중 전의감의 『전함생도안』 수록 인원과의 중복 여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그림3].

그림 3.

『전함생도안』 수록 인물의 중복 입속 현황

Figure 3. Status of Duplicate Age Records of Individuals Recorded in Jeonhamsaengdoan

(『삼력청완천안』, 『완천기』, 『전함생도안』)

위의 <그림3>과 같이 『전함생도안』과 『완천기』의 명단에 이름이 동시에 존재하는 인물은 141명이며,27) 『전함생도안』과 『삼력청완천안』 명단에 동시에 존재하는 인물은 33명이다.28) 전의감과 사역원, 관상감 모두에 입속했던 사례도 19명에 달한다.29) 전의감을 포함하여 2곳 이상의 관청에 모두 입속하여 생도의 신분을 가졌었던 인물은 163명으로 입속 시기가 동일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전체 『전함생도안』 생도 중 42.4%에 해당한다. 그리고 주학청의 추천을 받은 『별천안』 등재자가 34명이라는 점은 최소 10%에 해당하는 생도가 주학청에도 속했으리라 추정되지만, 확인은 불가하다. 지금까지의 확인된 자료를 근거로 각 관청의 중복 입속 현황을 벤다이어그램으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동시에 여러 관청에 입속한 생도가 많은 현상은 다음과 같은 사항을 추측하게 해준다. 첫째, 당시의 잡학 생도들은 여러 과(科)에 진로의 가능성을 열어두고 많은 양의 학습을 했다는 점이다. 둘째, 한 관청의 생도가 되었다라는 사실은 곧 다른 관청의 생도가 됨을 배척하는 의미가 아니라는 것이다. 셋째, 상당한 수의 잡학 생도는 부친과 같은 과의 직업을 세습하여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잡학기관 내 몇 개의 학문의 범주 중에서 선택했다는 점이다.

2. 주요 특성에 따른 진로 유형 구분

『전함생도안』의 인물들을 조사했을 때, 과거 합격 혹은 기록상 파악되는 진로를 확인할 수 있는 인물은 189명이었다. 본 고에서 이들의 유형을 크게 4가지 유형으로 구분하고자 하며 이를 다음과 같이 구분하고자 한다.30),31)

가. 1유형 : 전의감생도-의학관료

1유형에 속하는 이들은 전의감 생도 이외에 다른 타 잡학 기술 관청의 생도에 속하지 않으면서 의학 관료가 된 인물들이다. 이들은 전의감의 의관이 되거나 혹은 의과 과거에 합격한 뒤, 내의원 의관으로 진출하는 등 처음부터 의학 관료를 진로의 목표로 하여 생도가 된 이들로 보인다. 이들은 진로를 파악할 수 있는 『전함생도안』에서 진로가 파악되는 189명의 인물 중, 가장 많은 67명에 해당하며 약 35%에 해당한다. 이 수치는 전의감의 생도 중 가장 많은 비율이 의학 관료만을 목표로 했다는 것을 반증하기도 한다. 즉, 비록 다른 잡학 관청의 생도에 중복으로 소속돼있는 이들이 많다 하더라도, 가장 중심된 흐름은 전의감만의 생도를 거쳐 의학 관료가 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다만 이들 중에서 혜민서의 의학 관료가 된 이가 있다는 점은 의학 관료가 되기 위해 전의감과 혜민서에 중복하여 입속하는 생도의 존재도 추측하게 해준다.32)

나. 2유형 : 전의감생도-타잡학생도-의학관료/타잡학생도-전의감생도-의학관료

2유형은 전의감 생도 이전이나 이후에 타 잡학기관에 생도로 입속하였다가 이후에는 의학 관료의 진로를 택한 부류이다. 이들은 189명 중 58명이 확인되며, 31%를 구성한다. 이들은 어떤 이유로든 다른 기술직 잡학 생도의 완천자 명단에 이름을 올려놓았으며 진로를 위한 구상의 결과 혹은 적성을 찾으려는 노력의 결과 의학 관료가 되는 길을 택했다. 이는 1유형의 결과와 합산 시에 총 189명의 전의감 생도 인원 중 약 2/3에 해당하는 66%의 인원이 의학 관료가 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다. 3유형 : 전의감생도-타잡학생도-타학관료/타잡학생도-전의감생도-타잡학관료

3유형은 전의감 생도 이전 혹은 이후에 타 잡학교육기관의 생도에 완천되었다가 결국 타 잡학 관청과 관련된 진로를 택한 이들이다. 이들은 역과나 음양과에 입격하거나 혹은 해당 관청의 전함 등으로 실직을 맡은 인물들이다. 이 유형에 해당하는 인물들은 전의감과 타 관청 사이에서 자신의 진로를 의관이 아닌 다른 길을 택했으며 총 60명(32%)에 해당한다. 이 수치는 전의감의 생도 중에서 상당한 수가 다른 잡학 계열의 관료를 염두에 두면서 입속했음을 뜻한다.

라. 4유형 : 전의감생도-문과(소과 · 대과)합격-문관

4유형에 해당하는 인물은 384명의 전의감 생도 인원 중 4명으로 #19 이용림, #74 이건호, #112 이제선, #315 이중환이다. 이 중 문과 대과 합격자는 1명, 문과 소과 합격자는 3명이며, 소과 합격자 중 진사시 합격자는 2명, 생원시 합격자는 1명이다. 이들은 소수이긴 하지만 조선시대의 중인계층에서 양반층으로의 진입이 불가능 하지 않았음을 뜻한다.

Ⅲ. 진로 유형에 따른 대표 인물 별 사례 분석

본 장에서는 4가지 유형에 따른 대표 인물 별로 그들의 진로를 분석해 보고자 한다. 각 유형에 해당하는 여러 명의 인물 중 가장 전형성을 지니고 있고, 자료의 수집이 용이한 2∼4명을 분석 인물로 선정하였다.

1. 1유형 : 전의감생도-의학관료

가. #3 현동헌

현동헌(玄東憲, 1856-1913)은 『전함생도안』 수록 인물로 1869년 이전에 전의감에 입속하였다. 그는 이후 1874년에 의과에 입격하였고, 1881년 내의를 거쳐 1887년 어의가 되었다. 갑오개혁 이후 재편된 제도 속에서는 태의(太醫)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현동헌 본인 및 가계의 관력

Table 5. Relationship of Hyeondongheon’s Personal and Family Background

현동헌은 전의감에서의 교육을 통해 의관으로 양성되었고, 그 능력을 인정 받아 고위직 의관에 이른 대표적인 인물이다. 현동헌의 이력은 『전함생도안』과 『별천안』에 수록된 많은 인물들의 이력을 대표한다. 현동헌의 가계를 살펴보면 부친과 조부 모두 의과에 입격하여 내의를 역임하였고 동생인 현동기(玄東驥, 1868∼?)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의과에 입격한 이후 내침의를 거쳐 태의에 이른 것으로 확인된다. 모계의 경우, 외조부 역시 의과를 거쳐 내의로 활동하였다. 처부인 김연의 경우 사역원 판관을 역임하였다.

현동헌의 사례는 그의 가계와 개인의 이력을 통해 대체로 의학 교육기관을 통해 양성된 인물에게 기대되는 전형적인 진로를 보여준다.

나. #100 최영석

최영석(崔永奭, 1862∼?)은 1875년 5월 『전함생도안』에 입속된 것으로 확인되는 인물로 #3번 현동헌과 마찬가지로 의학 교육기관의 전형적 진로를 보여주는 예이다. 1875년 전의감에 입속하여 4년 뒤인 1879년 의과에 합격하였다. 5년 이후인 1884년에는 전의감 정에 오른 것으로 확인된다. 이후 갑오개혁 이후 의료를 담당했던 내부에서 활동하기도 하였다.

최영석 본인 및 가계의 관력

Table 6. Relationship of Choi Young-seok’s Personal and Family Background

최영석의 경우는 전의감의 주요 업무인 조선의 의료 시스템을 총괄하는 업무를 갑오개혁기 까지 담당하다가 개편된 제도하에서도 같은 업무를 유지했다. 좀전의 사례에서 보았던 현동헌의 예에서처럼 내의를 통해 어의로 오르는 ‘전문의료인’으로서 의원의 업무보다는 국가의 의료서비스를 책임지는 ‘의료행정인’으로서의 의원의 업무가 강조된 진로를 보여준다.

최영석의 가계를 살펴보면 부친과 증조부가 각각 전의감 직장과 전의감 정을 지낸 것으로 확인된다. 특히 최영석의 숙부인 최도성(崔道成, 1850∼?)은 의과에 합격한 인물로, 최영석의 『전함생도안』에 별도 표시가 되어 있으며 최영석의 동생이 그의 양자로 들어가는 등 돈독한 관계로 보여지는 바, 최영석이 전의감에 입속에 도움을 주었을 인물로 추측된다. 이 밖에도 최영석의 모계와 처가에 걸쳐 율과, 역과, 음양과 등 다양한 잡과 계통이 확인된다.

최영석의 예를 통해 의학기관을 통해 양성되는 인물의 다양한 배경을 확인할 수 있고, 입속하는 데 영향을 주는 인물이 직계 존속뿐 아니라, 방계로도 늘어날 수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다양한 학문 출신의 방계와 직계 혹은 모계, 처계 중에서도 주된 학문의 계통을 확인할 수 있다.

2. 2유형 : 전의감생도-타잡학생도-의학관료/타잡학생도-전의감생도-의학관료

가. #81 정병기

정병기(鄭秉岐, 1863∼?)는 『별천안』 수록 인물로 1874년 전의감에 입속하였고, 1880년 의과에 입격하였다. 정병기는 『완천기(完薦記)』와 『삼력청완천안(三曆廳完薦案)』에도 수록되어 1872년과 1878년에 사역원과 관상감에 입속하였음이 확인된다. 의과 과거 합격 이후에는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주사로 임명되었다.

정병기 본인 및 가계의 관력

Table 7. Relationship of Jeong Byeong-gi’s Personal and Family Background

정병기의 가계를 살펴보면 먼저 부계에서 부친과 조부가 전의감 관료로 활동한 기록이 확인된다. 훗날 전보국 주사가 된 동생 정병한(鄭秉漢, 1866∼?)은 1878년에 전의감에 입속한 기록이 확인되지만 1880년 역과에 입격하여 정병기와 마찬가지로 2개 이상의 기관에서 잡학을 학습한 것을 알 수 있다. 처부와 처조부는 주학 모두 주학 관련 인물이지만 정병기의 이력에서 주학 관련 전력은 확인되지 않는다.

정병기의 경우, 해당 가계에서 의학과 주학, 역학을 학습한 인물들을 확인할 수 있고, 스스로도 역학과 의학, 음양학을 모두 익혀 의관으로 진출한 사례로 당시 의학생도 중에서 동일 계열의 여러 학문을 익히는 경우가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나. #383 이호선

이호선(李好善, 1869∼?)은 1884년 『전함생도안』에 수록되기 전에 『완천기』와 『삼력청완천안』에도 수록되어 있는 인물이다. 1878년 사역원에 입속 할 때는 이순선(李舜善, ?∼?)의 동복제로 서경 입속하였다. 1884년 전의감에 입속한 다음 해에 의과에 합격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호선 본인 및 가계의 관력

Table 8. Relationship of Lee Ho-seon’s Personal and Family Background

이호선의 가계를 살펴보면 먼저 생부인 이기태(李基泰, 1838∼?)는 1875년 역과에 입격하여 사역원 전함을 지냈던 것으로 확인된다. 따라서 이호선의 형과 이호선이 사역원에 입속할 때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이호선의 생외조부는 음양과에 입격한 전력이 있다. 따라서 이호선이 관상감 생도로 입속 하였을 때, 도움을 받았을 것이다. 이호선의 장인도 혜민서 주부를 지낸 인물로 이호선이 전의감 생도가 되고, 이후에 의과에 합격하는 데 영향을 주었으리라 추측된다.

『전함생도안』에 있는 인물 중 많은 수가 부계나 모계, 혹은 처가의 영향을 받아 해당 분야의 잡학 생도가 되었으리라 추측할 수 있다. 그중에서도 이호선은 사역원, 관상감, 의학기관의 영향력을 가장 뚜렷하게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다. #75 한승현

한승현(韓升鉉, 1858∼?)은 1871년 주학에 입격한 후, 1872년 『완천기』에 수록되었으며, 이후 『별천안』에도 수록된 인물이다. 『별천안』을 통해 1873년 전의감으로 추천되었으며 이것은 『전함생도안』에 같은년도에 입속 한 것으로 기록되어 다시 한번 추천이 확인된다. 이후 1885년 의과에도 합격하여 주학과 의학 두 분야에 모두 합격하게 되었다. 같은해 전의감 참봉에 재수되어 의학 관련 진로를 가지다가 1903년 탁지부 주사가 되어 근대적 관제에서 본인의 다양한 이력과 관계되는 진로를 가진 것으로 보인다.

한승현 본인 및 가계의 관력

Table 9. Relationship of Han Seung-hyun’s Personal and Family Background

한승현의 경우 부친이 의과에 입격하여 내의원 정을 지낸 인물이고, 외조부 또한 의과에 입격하여 내의원 정을 지냈다. 내의원 정은 모두 의과 계열의 최상급 관료로, 한승현이 전의감 생도가 되고 이후 의과에 입격하는 데 많은 영향을 끼쳤으리라 추측된다.

한승현의 진로에서의 특징은 『별천안』 추천기관이 전의감으로 기록되어 있다는 점이다. 즉 전의감에 별천을 하되, 그 추천기관이 전의감이라는 것이다. 그의 부친이나 외조부의 영향력으로 한승현이 전의감 생도가 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으리라 추측되지만 별천으로 따로 추천된 사실이 의문으로 남는다. 추측컨대, 완의를 통해 전의감에 입속 하는 것보다 별천을 통하면 유리한 절차가 있었으리라 생각해 볼 수 있다.

라. #18 김홍규

김홍규(金弘圭, 1856∼?)는 1869년 이전 전의감에 입속 한 것으로 확인되는 인물이다. 그는 전의감에 입속된 상태인 1871년 주학 취재에 입격하였으며 2년 뒤인 1873년 의과에도 입격하여 2개의 분야에 모두 합격하였다. 이후 그의 진로는 주학 분야인 계사로 기록된다.

김홍규 본인 및 가계의 관력

Table 10. Relationship of Kim Hong-kyu’s Personal and Family Background

그의 부친과 조부는 모두 주학에 입격한 인물들이다. 특히 그의 부친은 1869년 김홍규가 전의감에 입속 할 당시 계사로 기록된 것으로 보아, 주학 관련 관직에 진출했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외조부는 혜민서 참봉을 지낸 인물로 김홍규가 모계를 통해 의학과 연결되었음을 알 수 있다. 부계와 모계를 통해 김홍규 및 그의 동복제 3명이 모두 전의감과 주학청에 입속 했음을 쉽게 이해된다.

김홍규를 통해 알 수 있는 진로의 특징은 주학과 의학에 모두 입격한다 하더라도, 자신의 가계에서 우세한 분야를 선택해 진로를 나아갔다는 점이다. 많은 경우 주학과 의학 과거에 모두 입격했던 경우에, 대체로 의학 관련 진로를 택했다. 김홍규의 동생들도 다수의 경우와 일치한다. 그러나 김홍규의 경우는 부친과 조부의 영향력이 컸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결과적으로 의과 과거에 합격한 이후 주학 관련 분야의 진로를 가진 인물유형으로 파악된다.

3. 3유형 : 전의감생도–타잡학생도–타학관료/타잡학생도-전의감생도-타잡학관료

가. #346 한장윤

한장윤(韓章潤, 1860∼?)은 『전함생도안』과 『별천안』에 모두 수록된 인물로 1870년에 전의감에 별천으로 입속하여 1882년 이후에도 해당 기관에서 수학한 것을 알 수 있다. 한장윤은 『완천기』에도 수록되어 전의감에 별천된 연도인 1870년에 사역원에도 입속한 것으로 확인된다. 그는 1873년 주학 취재에 입격하였고, 1882년 전의감 입속, 1891년에는 역과에 입격하여 계사와 역관으로 모두 활동한 것으로 보인다.

한장윤 본인 및 가계의 관력

Table 11. Relationship of Han Jang-yoon’s Personal and Family Background

한장윤의 가계를 살펴보면 먼저 부계에서 부친인 한계진(韓啓鎭, 1823∼?)의 경우, 1844년 주학 취재에 입격하였다. 동복형인 한흥윤의 경우, 사역원 생도로 학습한 이력과 주학 취재 입격 이력이 확인되고, 동복제인 한광윤 역시 주학 취재 입격이 확인된다. 특이한 점은 『별천안』에 의해 전의감으로 추천된 1870년 이후 12년이나 지난 뒤에 1882년 전의감 입속으로 확인된다는 점이다. 이는 한장윤이 1870년부터 1882년까지 전의감에 속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별천안』을 통해 입속 여부가 분명하게 확인되지만 다시 한 번 『전함생도안』에 수록되었다는 것은 『전함생도안』이 특정 시점에 과거 시험과 관련되어 작성된 안(案)이라는 추측을 더욱 신빙성 있게 한다.

한장윤의 경우, 해당 가계에서 주학, 역학을 학습한 인물들을 확인할 수 있고, 본인의 경우, 역학, 의학, 주학을 학습한 사례로 의학 생도 출신이지만 역관으로 활동한 경우에 해당한다.

나. #26 김영길

김영길(金永吉, 1853∼?)은 『완천기』와 『전함생도안』에 수록된 인물로 1864년 사역원에 입속한 후, 1869년 전의감에 입속한 인물이다. 그는 1874년 역과에 입격한 이후, 1891년 이전 사역원 주부를 지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즉, 기존에 사역원 생도인 동안 전의감에 입속하였으나 역과의 진로를 계속해서 밟아나간 인물이다.

김영길 본인 및 가계의 관력

Table 12. Relationship of Kim Young-gil’s Personal and Family Background

김영길의 가계를 살펴보면 역학보다 주학 관련 관직이 강조된다. 그의 부친과 조부, 외조부는 모두 주학에 입격한 인물들이다. 처부는 혜민서 직장을 지낸 인물로 그의 전의감 입속을 위한 인적자원이 되었을 수 있다. 그의 영향인지, 혹은 처부의 영향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김영길의 아들 두 명 모두 전의감 및 의학 생도가 되었으며 차남 김석홍은 의과 과거에 합격하였다.

김영길은 사역원과 전의감 중 자신이 원하는 계열로 진로를 선택하는 당시 기술직 중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만약 본인의 전의감 입속이 자신의 진로와 큰 상관이 없다 하더라도 후대 자손이 의학 관청에 진출하고자 할 때 도움이 되기 위해 전략적인 입속을 선택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다. #180 이주혁

이주혁(李周爀, 1863∼?)은 『전함생도안』과 『삼력청완천안』에 수록 인물로 1878년 이전 전의감에 입속하였다. 1880년에는 관상감에 완의를 거처 입속하였으며 같은 해 음양과에 입격하였다. 그의 부친과 조부는 사역원 관련 인물들이다. 모계의 외조부가 혜민서 주부를 지낸 인물이므로 이주혁과 그의 동복제들이 전의감에 입속하는 데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관상감과 관련하여 연관된 친인척이 없는 바, 그의 입속 경위는 현재로선 알 수 없다. 다만 관상감 입속시 보거인(保擧人)과 연관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 볼 수 있다.

이주혁 본인 및 가계의 관력

Table 13. Relationship of Lee Joo-hyuk’s Personal and Family Background

이주혁은 가계의 직접적인 영향력을 받아 기술관 내에서 다양한 진로를 선택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일반적으로 기술관 계열에 속한 이들은 여러 전공 및 진로를 선택할 수 있도록 가능성이 열려 있었다고 짐작해 볼 수 있는 사례에 해당한다. 19세기 말 전의감 생도 중에서 갑오개혁 이후 새로운 직업 또는 전공으로 나가는 경우가 많이 확인되는 것은 이들 자체가 기술관이어서 관련된 전공을 가졌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다양한 진로를 선택하려는 노력 그 자체의 결과로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라. #187 최해진

최해진(崔海鎭, 1869∼?)은 『전함생도안』은 물론 『완천기』와 『삼력청완천안』에도 수록된 인물이다. 그는 1878년 전의감에 입속하였으며 같은 해 사역원에도 입속하려 하였으나 완천을 통과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4년 후인 1882년 관상감의 완의를 통과하여 1885년 음양과에 입격, 1886년 명과학 액외수선관을 지냈다.

최해진 본인 및 가계의 관력

Table 14. Relationship of Choi Hae-jin’s Personal and Family Background

최해진의 가계를 보면, 부친은 혜민서 참봉을 지낸 의과와 관련된 인물이다. 외조부는 역과에 입격한 인물로 사역원 입속을 위한 천거에 영향을 주었으리라 생각할 수 있다. 관상감과 관련된 인물이 그의 가계에는 확인되지 않는다.

최해진의 예 역시 이주혁의 예에서처럼 가계에 특정 전공에 해당하는 사람이 없더라도 기술관 내에서 다양한 전공을 선택한 예에 해당하거나 혹은 밝혀지지 않은 관상감 관련 가계의 존재를 추측케한다.

4. 4유형 : 전의감생도-문과(소과 · 대과)합격-문관

가. #74 이건호

이건호(李建鎬, 1854∼?)는 『별천안』과 『전함생도안』 명단에 수록되어 있으면서 과거 소과에 합격한 인물이다. 그는 12살 되던 해인 1867년에 이미 주학에 입격하였으며 1870년 『별천안』에서 주학청에 의해 전의감으로 추천되었다. 1873년에 『전함생도안』 명단에 수록되었으며 바로 다음 연도인 1874년 문과에 합격하였다.

이건호 본인 및 가계의 관력

Table 15. Relationship of Lee Geon-ho’s Personal and Family Background

이건호의 가계를 살펴보면 부친, 조부, 외조부, 처부, 처외조부까지 모두 주학에 합격한 인물들로 주학과 연관이 깊다. 그러나 전의감이나 문과에 관련된 직임을 한 사람이 없음에도 전의감 생도가 되고 문과에 합격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이건호의 경우 다양한 교육의 기회를 이용하는 한편, 문과 생원시까지 합격한 경우에 해당한다.

나. #112 이제선

이제선(李濟宣, 1862∼?)은 과거에서 뽑는 인원이 소과보다 더 적은 대과에 합격한 인물이다. 이제선은 『별천안』과 『전함생도안』 수록 인물이기도 한데, 1870년 주학청으로 부터 전의감에 별천된 것으로 보아 이전에 이미 주학청 생도였음을 알 수 있다. 이후 1875년 전의감 생도가 된 뒤인 1879년 주학 취재에 입격하였다. 12년 뒤에는 문과 정시에 20명 중 9등으로 입격하였으며 동년 가주서, 1893년에는 권지의 자격으로 승문원 부정자(從9品)의 자리에 오르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제선 본인 및 가계의 관력

Table 16. Relationship of Lee Je-seon’s Personal and Family Background

이제선은 『전함생도안』 중 유일한 문과 대과 합격자로 그의 부계나 모계, 처가 중 문과 관련 직임을 한자가 아무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문과 과거에 합격하였다. 그의 가문은 주학 취재에 입격한 자가 많은데, 그로 인해 자신의 생애 초반에 주학청에 입속하고 취재를 통과하는 진로를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문과 대과에 합격한 이후에는 그와 관련하여 승문원 부정자를 제수받는 등 일반 문과 합격자의 진로를 가졌다.

그의 기록에서 알 수 있는 흥미로운 점은 그의 주학입격안에 본인의 신분을 ‘계사’, 부친의 신분을 ‘주학별제’라고 기입한 것에 반해 문과 합격 시에는 본인과 부친의 신분은 ‘유학(幼學)’이라고 표현했던 점이다. 여기에서 잡과 과거와는 다른 문과 과거의 체계를 확인 할 수 있다. 잡학 과거에서 자신의 부친이 해당 관청이 아니라더라도 기술직 중인층에 해당하는 다양한 관직을 적었지만, 문과 시험을 응시할 때는 비록 잡학 관청의 실직을 했다 하더라도 그 정보가 특별한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는 점을 뜻한다. 이것은 잡과 시험에 응시하는 경우 부친의 관직이 잡과 관련 인물인가 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문과 시험을 칠 때는 부친의 잡과 관련 관직이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해석해야 할 것이다.

이제선의 경우를 통해 기술직 중인으로서 문과 과거에 도전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으며 이는 조선조를 관통하여 강조되었던 시험을 통한 계층이동, 즉, ‘출세의 사다리’의 존재를 보여준다.

Ⅳ. 결론

이 연구는 조선시대 의학교육의 핵심 관청 중 하나였던 전의감 소속 생도 명단에 대한 분석을 통해 당시 의학교육의 실제 모습을 밝히고, 생도들의 진로 경로를 드러내는 데 목적을 두었다. 특히 『전함생도안』과 『별천안』이라는 두 자료를 통해 전의감 생도들의 입속 과정과 이후 진로를 세부적으로 살펴보고자 하였다.

먼저 1869년부터 1884년까지 전의감 생도로 입속한 384명의 명단을 분석한 결과, 생도들의 입속 연령은 평균 15.9세로 나타났고, 입속 시점에 따라 서경이나 별천과 같은 제도를 통해 입속 된 사례를 다수 확인했다. 다음으로 전의감에 입속 된 384명의 생도 중 약 46%가 과거시험에 합격했고, 이들 중 53%가 의과에 합격하였다. 나아가 전의감 생도 중 많은 이들이 다른 잡학교육기관에도 중복 입속 하며 다양한 진로를 모색하였다. 이를 토대로 하여 전의감 생도들의 진로를 4가지 정도로 유형화할 수 있다. 1번 유형은 전의감 생도로서 의학 관료가 된 경우이고, 2번 유형은 다른 잡학 관청의 생도로 입속 한 뒤 의학 관료가 된 경우, 3번 유형은 전의감 생도였으나 다른 잡학 관료로 진로를 바꾼 경우, 4번 유형은 의과가 아닌 문과나 소과에 합격해 문관이 된 경우이다.

이상의 내용을 요약하면 전의감이 19세기 후반에도 여전히 의학교육과 의료 인력 양성의 중심 역할을 했으며, 해당 생도들이 의학뿐만 아니라 다른 잡과(산학, 역학 등)에도 참여했다는 점에서 의학교육이 단순히 의료 인력 양성에 그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더불어 『전함생도안』과 『별천안』의 분석을 통해 추정할 수 있는 19세기 의학교육과 잡학 교육의 특성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 번째, 많은 전의감 생도들이 타 기술 관청에도 중복으로 입속하였다는 사실을 통해 당시 의학교육을 학습했던 이들은 특정 학문에 국한되지 않고 여러 학문을 익힐 수 있는 환경에 속해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두 번째, 동복 형제들이 입속 할 때 나이가 어린 형제도 함께 입속 하는 서경 제도가 있었으며, 타 기관에서 특정 기관으로 생도를 추천하는 별천 제도가 함께 존재하였다. 이는 가족 단위로 교육 기회를 제공하기도 하지만 잡학 교육 기관 간의 연계를 통해 새로운 생도를 추천하는 다양한 방식으로 의학교육이나 잡학 교육이 이루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게 한다. 세 번째, 전의감 생도 중 약 66%가 의학 관료로 진출했지만, 상당수는 역관(譯官), 운관(雲官) 등 다른 분야로 진출해 다양한 경로를 통해 사회에 진출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필자는 본 연구를 통하여 기술직 중인층의 세전성에 관해 새로운 시각을 더하고자 한다. 종전의 연구물들은 중인 가문이 대대로 가문의 기술을 전수해 주거나 이들이 전략적 결혼을 통해 계층을 유지해 왔다는 전제하에 그 세전성을 확인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어 왔다. 그러나 본 연구를 통해 확인한 조선 후기 기술직 중인의 모습은 기존의 통론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필자는 조선시대 기술직 중인들 부모 대(代)와 그리고 생도 본인 대의 엄청난 학구열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는 오늘날 고위층 부모가 자신의 자녀를 위해 강남의 팔학군으로 이사를 하고, 그 자녀들이 대치동 학원가에서 공부하여 우수한 대학에 합격하는 모습을 보는 듯하다. 우리는 앞의 예시처럼 부모 대의 훌륭한 직업을 자녀가 본받아 성취했다고 해서 오늘날에도 ‘부모의 직업이 자녀에게 세전되었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일반 학생과 강남 팔학군 지역 학생의 입장이 다를지라도, 이들 또한 일반 학생의 못지않은 노력과 시간을 투자하여 수능이라는 공정한 시험을 통과했기 때문이다. 이와 연장선상에서, 우리는 기술직 중인층이 많은 노력을 통해 학업을 했다는 사실과 잡학 관청의 인재 등용 시험이 매우 공정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한다. 즉, 조선시대에도 부모 대와 본인 대의 교육열이 뒷받침 되지 않는 한 결코 잡학 과거에 합격하여 그들의 계층을 유지해 나갈 수 없었다.

가문이라는 요소가 잡학 생도의 입속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점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러나 종전의 관점에서처럼 ‘중인계층은 세전된다’는 전제를 쉬이 모든 기술직 중인들 개개인에 적용하는 것은 옳지 않다. 이것은 개인의 부단한 노력과 합격자를 선발하는 각 잡학 관청을 포함한 조선조 과거제도의 공정성을 과소평가한 말이기 때문이다.35)

이 연구는 조선 후기 의학교육 및 의료 체계의 이해에 기여하는 중요한 연구로서, 앞으로 더 넓은 범위에서 의학교육 및 의료 인력 양성의 역사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기초 자료로 활용될 수 있다. 또한 이는 의학교육뿐만 아니라 당시 잡학 교육의 전반적인 특성을 드러내는 데도 참고가 될 것이다. 그러나 추후 연구에서는 몇 가지 보완점이 필요하다. 우선, 혜민서나 내의원과 같은 다른 의학 관청과 전의감의 차별성을 비교 분석함으로써, 각 관청이 담당한 교육과 의료 인력 양성의 차이를 좀 더 구체적으로 밝힐 필요가 있다. 다음으로 전의감 생도들이 주로 속한 중인 계층의 사회적 지위 변화와 연계해 그들의 진로 선택이 신분 상승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추가적인 연구가 요구된다. 마지막으로 연구에서 다루지 못한 19세기 후반 전의감의 변화나 근대 의료 시스템 도입 과정에서 전의감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에 대한 연구도 이어져야 할 것이다.

Notes

1)

연세대학교 학술문화처 도서관 소장(고서(귀) 100).

2)

현재 확인되는 조선 후기 의학 관련 관청의 생도안은 전의감의 『전함생도안』이 유일하고, 혜민서의 경우, 아직까지 생도안이 확인되지 않는다. 내의원의 경우, 생도 양성이나 교육을 담당하지 않았다. 추후 혜민서의 생도안이 확보된다면 조선후기 의학생도 양성에 대한 전체적인 이해가 가능할 것이다.

3)

조선시대에는 성균관과 사학뿐만 아니라 여러 관청에 생도를 두어 향후 해당 관청의 업무를 맡게 될 전문가를 양성하였다. 전의감 생도는 의학 생도로 구분되고, 『大典會通』禮典 生徒조항을 살펴보면 전의감과 혜민서에 각각 56명과 62명의 의학 생도가 배정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4)

전의감의 전함(前銜)이라는 용어를 보는 두 가지 시각이 있다. 첫째는 전함이라는 직함에 해당하는 역할이 따로 있다고 보는 시각으로 전함을 ‘직(職)’으로 여기는 것이 이에 해당한다. 박훈평의 연구에서는 ‘참봉 이상의 직임이 아닌 전의감 관원과 치종청 침의 등’을 전함으로 여긴다.(2023f:119) 두 번째는 전함을 그 한자 의미를 그대로 해석하여 ‘이전에 직함을 가졌던 자’로 보는 시각이다. 특히, 일반적으로 의학 관청에서 가지는 직은 체아직(遞兒職)인 경우가 많아 대부분의 전의감 소속 의원들은 6개월∼1년 뒤에는 전함 명칭의 뜻인 ‘이전에 직함을 가졌던 자’의 신분으로 돌아오게 된다. 본 고에서는 첫 번째와 두 번째 시각을 모두 채택하여 전함을 ‘이전 혹은 현재 의원의 직임을 맡은 자’로 해석하고자 한다.

5)

연세대학교 학술문화처 도서관 소장(고서(귀) 101).

6)

별천은 인재를 추천하는 천거 방식의 일부로 보인다. 별천의 용례를 확인해 보면 『典錄通考』 등에 특정 지위에 특정한 인물을 추천하는 제도로 추측된다. 『별천팔세안』과 『사역원별천안(司譯院別薦案)』의 서문을 확인하면 공통적으로 사역원과 전의감, 주학청에서 각각 해당 자료에 수록된 기관에 입속할 생도를 일정 인원씩 추천하고 있어 기존의 전의감 입속 방식 외에 추가로 생도로 입속하길 원하는 인원을 추천하는 방식으로 추정된다(『別薦八世案』, 庚午式年 本監薦貳員 司譯院薦參拾員 籌學廳薦陸拾貳員 癸酉式年 本監薦伍員 司譯院薦伍員 籌學廳薦拾員 丙子式年 本監薦伍員 司譯院薦玖員 籌學廳薦拾員).

7)

박훈평, 『조선시대 의관총목록』, (대전: 한국한의학연구원, 2018).

8)

완천은 천거 즉, 입속 심사가 완료되었다는 의미이다. 『서운관지』에 따르면 천거는 관상감에 입속하기를 원하는 자들이 사조단자와 보거 단자를 제출하고 일정한 심사 과정을 거쳐 관상감에 생도로 입속하는 절차를 말한다. 이 과정에서 심사가 완료되어 천거가 끝난 경우, 완천이라고 하였다.

9)

실제 적힌 인물은 387명이지만 이 중 같은 인물이 중복으로 추정되는 인물이 3명이다. 본 고의 통계수치는 384명을 기준으로 작성하였다. 『전함생도안』 상의 중복 인물은 진학렬(#86, #311), 이제필(#135, #270), 김동석b(#248, #258), 김균희(#99, #145)로 4명이지만, 『사역원완천기』의 1878년 6월 서경 기록에 비추어 추정한 결과 #145번 김균희(金均禧)가 김균위(金均褘)의 오자임이 확인되므로, 향후 #145번은 #99번 김균희와 다른 인물으로 상정한다. 따라서 통계에는 3명만 중복인으로 활용할 것이다.

10)

이하에서 나오는 인물에 대한 번호는 『전함생도안』에 수록된 순서를 의미한다.

11)

『大典會通』 吏典 署經에 따르면 서경은 각종 직에 제수되는 인물들에 대한 일종의 신원 확인 절차로 볼 수 있다. 대표적으로 도사나 수령, 삼사 등에 최초로 제수되는 경우에는 사조단자를 제출하여 신원 검사를 하도로고 하고 있다. 다만, 잡학교육기관의 생도안에 수록된 서경의 절차는 동복형의 신원을 통해 동복제의 신원을 보장하는 제도로 신원 확인이라는 큰 틀에서는 유사한 목적으로 보이지만 실제 활용 방식에는 큰 차이가 있다.

12)

서경으로 입속하였다는 기록은 없지만 이를 충분히 유추할 수 있는 수록 순서가 있다. 이는 Ⅱ장에서 자세히 다루고자 한다.

13)

부거도목은 문과 과거시험의 응시생 명단으로 보통 과거 시험전에 작성되었을 것으로 예상되는 문서이다. 잡과 과거시험의 부거도목에 대해 연구된 바는 없으나 문과와 비슷하거나 좀 더 소략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자세한 내용은 다음의 연구를 참고하기 바란다.(박현순, 2023: 371-407)

14)

이 주제와 관련하여서는 다음의 논문을 살펴보기 바란다. (이남희, 2021: 1-468; 권기석, 2021: 221-275)

15)

이 중 중복 인원은 진학렬(#86, #311), 이제필(#135, #270)이다. 진학렬과 이제필의 입속연령은 두 번째 입속 시기를 기준으로 하였다.

16)

사역원의 완천안인 『완천기』나 관상감의 완천안인 『삼력청완천록』를 통해 이러한 경향을 확인할 수 있다. 『완천기』의 경우 한 번에 3명의 형제를 동시에 서경으로 입속하는 경우도 다수 발견되고 있다. 제일 어린 입속자는 사역원은 2세, 관상감은 1세이다. (『완천기』권 貞, 홍의균(洪宜均) 기록, 『삼력청완천록』 안기상(安基祥) 기록 참조)

17)

서경으로 추정되는 입속자 군(群)은 1878년 3월 입속자 집단, 1881년 6월 입속자 집단이 있다.

18)

『의학팔세보』 안병의(安秉宜)의 기록.

19)

『선속(璿續)』 이용관의 기록. 1876.閏5.19 卒.

20)

『양청완천기』 이용관의 기록.

21)

#382 이창균의 1885 의과 합격기록.

22)

『혜국지』 고과조 입속.

23)

『전함생도안』 중복 등과자(15명)는 다음과 같다.

24)

『의과방목(醫科榜目)』 (국립중앙도서관)

25)

입속으로부터 과거 합격까지 10년 이상 걸린 14명 중 86%인 12명이 10세 이하에 입속한 인원들이다.

26)

이 중 입속이 허가된 자는 1,224명이다.

27)

동일 인물이지만 완천되지 못한 자 10명을 제외한 수치이다.

28)

동일 인물이지만 완천되지 못한자 1명을 제외한 수치이다.

29)

동일 인물로서 사역원에 완천되지 못하였으나 관삼감에 입속한 3명을 제외한 수치이다.

30)

주학 입격자의 경우 중복하여 입속하는 경우가 매우 많아 해당 유형의 통계를 작성할 때는 제외하였다.

31)

이하에서 개별 인물에 대한 진로는 주로 전의감 등에서 발행한 완천안과 『승정원일기』, 『조선왕조실록』, 『대한제국관원이력서』, 개별 가계의 족보, 선행연구 수록 자료 등을 참조하여 개별적인 출처는 따로 표시하지 않았다.

32)

#146 현령운(玄寧運)으로 1878년 3월 전의감 생도로 입속하였으나 『양청완천기』 기록에 의하면 1884년 9월 혜민서 참봉으로 기록되고 있다. 혜민서 생도 안이 없어 확인은 어려우나 전의감 생도 이후 혜민서 생도가 되었으리라 추측할 수 있다.

33)

#3 현동헌의 가계 분석표 및 이하 가계 분석표에서 의학계열, 역학계열, 주학계열, 관상학계열의 인물과 관련전력을 알아보기 쉽도록 분석하는 인물의 진로와 관계된 때만, 각각 의 무늬를 넣어 표시하였다.

34)

기록상 2명의 외조부가 존재하며 이유는 부친의 재혼으로 추정된다.

35)

미야지마 히로시는 조선의 직역(職役)이 일본과는 다르게 특정 집단에게 부여된 것이 아니라 개인에게 부과되어 같은 가족이더라도 직역이 각각 다른 경우가 확인된다고 말한다. 이를 근거로 그는 조선 사회가 일본과는 차별성을 가지며 중국의 형태와 유사하게 개인주의적인 성격이 강했다고 설명한다. 또한 문과 합격자에 대한 분석을 토대로 어떠한 명문 집안이더라도 명문 집안이라는 이유만으로 과거 급제가 자동으로 보장되지 않았다는 점도 지적한다(미야지마 히로시, 2003: 298-300).

References

1. 『국조방목』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2. 『별천안』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3. 『별천팔세안』 (연세대학교 학술문화처 도서관 소장).
4. 『사역원별천안』 (연세대학교 학술문화처 도서관 소장).
5. 『삼력청완천안』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6. 『서운관지』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7. 『역과방목』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8. 『운과방목』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9. 『완천기』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10. 『의과방목』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11. 『전함생도안』 (연세대학교 학술문화처 도서관 소장).
12. 『주학입격안』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
13. 권기석, 「조선후기 족보 入錄의 정치 · 사회적 의미 - 족보가 갖는 ‘화이트리스트’ 또는 ‘블랙리스트’의 兩面性을 중심으로-」, 『조선시대사학보』 92 (2020), 185-222쪽.
14. 권기석, 「조선후기 의관(醫官) 가문의 인원 구성과 계보적 연계 - 『의역주팔세보(醫譯籌八世譜)』수록 인원 분석을 중심으로-」, 『의사학』 30-2 (2021), 221-275쪽.
15. 김현목, 「朝鮮後期 譯學生徒 薦擧에 관한 연구 : 19세기 후반 「完薦記」를 중심으로」, 인하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4.
16. 미야지마 히로시, 「조선시대의 신분, 신분제 개념에 대하여」, 『대동문화연구』 42 (2003), 289-308쪽.
17. 박권수, 「조선 후기 관상감(觀象監) 입속자(入屬者) 연구」, 『한국사연구』 187(2019), 289-324쪽.
18. 박인순, 『혜민서연구』 (서울: 교육아카데미, 2014).
19. 박현순, 「조선시대 과거 응시 자격과 赴擧都目」, 『민족문화연구』 100 (2023), 371-407쪽.
20. 박훈평, 『조선시대의관총목록』 (대전: 한국한의학연구원, 2018).
21. 박훈평, 「19세기 후반 典醫監 醫學生徒에 대한 고찰」, 『한국의사학회지』 26-1 (2013), 1-7쪽.
22. 박훈평, 「19세기 典醫監의 구성과 운영 양상 -『官案』및 『事例』를 중심으로-」, 『서울과 역사』 115 (2023), 111-143쪽.
23. 이남희, 『조선후기 의역주팔세보 연구 : 중인의 족보 편찬과 신분 변동』 (파주: 아카넷, 2021).
24. 우현정 · 신은정, 「18세기 혜민서의 의학교육 연구: 혜국지(惠局志)를 중심으로」, 『한국교육사학』 45-1 (2023), 53-73쪽.
25. 우현정, 「조선 후기 사역원 생도의 진로: 『완천록(完薦錄)』과 『완천기(完薦記)』를 중심으로」, 『한국교육사학』 45-2 (2023), 47-76쪽.

Article information Continued

그림 1.

『전함생도안』(좌)과 『별천안(별천팔세안)』(우)의 표지와 속지

Figure 1. Covers and Contents of Jeonhamsaengdoan(Left) and Byeolcheonan(Byeolcheonpalsean)(Right)

(연세대학교 학술문화처 도서관 소장(고서(귀) 100, 101))

그림 2.

『전함생도안』 수록 인원의 입속연령 그래프

Figure 2. Graph of the Ages of Individuals Recorded in Jeonhamsaengdoan

(『전함생도안』)

그림 3.

『전함생도안』 수록 인물의 중복 입속 현황

Figure 3. Status of Duplicate Age Records of Individuals Recorded in Jeonhamsaengdoan

(『삼력청완천안』, 『완천기』, 『전함생도안』)

표 1.

『전함생도안』 수록 인원의 입속연령

Table 1. Ages of Individuals Recorded in Jeonhamsaengdoan

순서 분포구간(만 나이) 인원수(명)
1 ∼5세 2
2 6세∼10세 57
3 11세∼15세 91
4 16세∼20세 63
5 21세∼25세 31
6 26세∼30세 13
7 31세∼35세 6
8 36세 이상 3
총 266명(전체의 69%), 평균나이:15.9세

(『전함생도안』)

표 2.

『전함생도안』으로 추정한 서경 입속의 예

Table 2. Examples of the Seogyeong Entrance presumed from Jeonhamsaengdoan

전함생도안 정보
분석 내용
수록 번호 입속 년월 이름 입속 나이 형제관계 비고
137 1878.3 전쾌길 7 #49 전학룡의 동생 본명: 전영옥(田榮鋈) 개명 : 전홍진(田弘鎭)
138 1878.3 정광신 20 醫科 정광석의 동생 형인 정광석이 먼저 전의감에 입속하고, 그의 동생자격으로 서경 입속하였으리라 추정
139 1878.3 정병한 12 #81번 정병기의 동생 -
140 1878.3 변규영 15 #28번 변두영의 동생 -
141 1878.3 변익영 8 #28번 변두영의 동생 -
142 1878.3 김상일 17 △의 동생(추정) #142 김상일과 #143김상진은 동복형제로, 1869.3월 이전에 이들의 형이 먼저 입속하였으리라 추정.
143 1878.3 김상진 13 △의 동생(추정)
144 1878.3 김균복 7 #99번 김균희의 동생 -
145 1878.3 김균위 4 #99번 김균희의 동생 -
146 1878.3 현영운 ? #62번 현종운의 동생 -
147 1878.3 현횡운 16 #62번 현종운의 동생 -
148 1878.3 현량운 8 #62번 현종운의 동생 -

(『전함생도안』)

표 3.

『별천안』 등재자 중 『전함생도안』 중복 등재자

Table 3. Individuals Listed in Byeolcheonan Who Are Also Duplicately Listed in Jeonhamsaengdoan

순서 입속연도 이름 한자 직역/신분 등재시 나이 추천기관 비고(이명, 아명, 개명)
1 1870 이회선 李晦善 동몽 10 전의감 -
2 1870 이명륜 李命倫 동몽 15 전의감 -
3 1870 변봉익 卞鳳益 동몽 11 사역원 卞大植, 卞猷益
4 1870 이해덕 李海德 계사 24 주학청 -
5 1870 이건호 李健鎬 계사 17 주학청 -
6 1870 이옥 李鈺 계사 30 주학청 -
7 1870 이정호 李正鎬 동몽 16 주학청 李定鎬
8 1870 이명상 李命相 유학 15 주학청 -
9 1870 김봉규 金鳳圭 유학 16 주학청 -
10 1870 김용규 金龍圭 동몽 15 주학청 -
11 1870 이제선 李濟宣 동몽 15 주학청 -
12 1870 최석호 崔錫浩 주입격 30 주학청 -
13 1870 최영찬 崔永讚 유학 25 주학청 -
14 1870 이지선 李智善 주입격 25 주학청 -
15 1870 이현상 李顯相 동몽 9 주학청 李賢相
16 1870 이인상 李寅相 동몽 15 주학청 -
17 1870 김윤석 金允錫 동몽 15 주학청 -
18 1870 홍태현 洪泰顯 유학 14 주학청 -
19 1870 이택상 李宅相 동몽 15 주학청 李能相
20 1870 이현호 李賢鎬 동몽 15 주학청 李經鎬
21 1870 한갑손 韓甲孫 동몽 11 주학청 韓章潤
22 1870 이용무 李容懋 동몽 15 주학청 -
23 1870 최흥원 崔興源 동몽 15 주학청 -
24 1873 김선일 金善日 동몽 11 전의감 金善百
25 1873 김선창 金善昌 동몽 9 전의감 -
26 1873 한승현 韓升鉉 동몽 16 전의감 -
27 1873 변규 邊圭 동몽 18 사역원 -
28 1873 김현규 金玄圭 유학 19 주학청 -
29 1873 이용태 李容台 유학 25 주학청 -
30 1873 홍의명 洪宜明 동몽 9 주학청 -
31 1873 이인두 李寅斗 동몽 15 주학청 -
32 1876 이준일 李準鎰 동몽 7 전의감 李準鎬
33 1876 이동현 李東炫 유학 17 전의감 -
34 1876 변동식 卞東植 동몽 9 전의감 -
35 1876 이지상 李止相 동몽 15 주학청 -
36 1876 이교상 李敎相 동몽 15 주학청 -
37 1876 이덕균 李德均 동몽 9 주학청 -
38 1876 최상각 崔相珏 동몽 9 주학청 -
39 1876 이제필 李濟弼 동몽 15 주학청 -
40 1876 윤영택 尹榮宅 동몽 11 주학청 -
41 1879 이완상 李完相 동몽 10 주학청 -
42 1879 이명호 李明鎬 유학 23 주학청 -
43 1879 최명원 崔命源 유학 30 주학청 -
44 1879 최영원 崔永源 유학 23 주학청 -

(『별천안』, 『전함생도안』)

표 4.

『전함생도안』 인원 중 중복등과자

Table 4. Individuals Listed in Jeonhamsaengdoan Who are double-passed national examinations.

수록번호 성명 등과 과목 초명/아명/개명 수록번호 성명 등과 과목 초명/아명/개명 수록번호 성명 등과 과목 초명/아명/개명
18 김홍규 1871 주학 - 74 이건호 1867 주학 - 112 이제선 1879 주학 -
1873 의과 1874 소과 1891 대과
(생원)
19 이용림 1868 주학 - 75 한승현 1871 주학 - 120 김선창 1879 주학 -
1878 소과 1885 의과 1885 의과
(진사)
63 이명륜 1871 주학 아명:李象吉 76 이용태 1873 주학 - 278 윤영택 1884 주학 -
1879 의과 1882 역과 1885 역과
64 이회선 1873 주학 - 98 경필영 1882 주학 - 315 이중환 1879 주학 -
1882 의과 1885 의과 1894 소과
(진사)
71 남영진 1876 주학 - 109 변대식 1871 주학 아명:卞鳳益 334 이지상 1879 주학 -
1880 의과 1876 의과 초명:卞猷益 1882 의과

(『전함생도안』, 『의과방목』, 『역과방목』, 『사마방목』, 『주학입격안』)

표 5.

현동헌 본인 및 가계의 관력

Table 5. Relationship of Hyeondongheon’s Personal and Family Background

(『전함생도안』, 『의과방목』, 『승정원일기』)

표 6.

최영석 본인 및 가계의 관력

Table 6. Relationship of Choi Young-seok’s Personal and Family Background

(『전함생도안』, 『의과방목』, 『승정원일기』, 『본청완천기』)

표 7.

정병기 본인 및 가계의 관력

Table 7. Relationship of Jeong Byeong-gi’s Personal and Family Background

(『전함생도안』, 『의과방목』, 『승정원일기』, 『완천기』)

표 8.

이호선 본인 및 가계의 관력

Table 8. Relationship of Lee Ho-seon’s Personal and Family Background

(『전함생도안』, 『의과방목』, 『승정원일기』, 『삼력청완천안』)

표 9.

한승현 본인 및 가계의 관력

Table 9. Relationship of Han Seung-hyun’s Personal and Family Background

(『주학입격안』, 『전함생도안』, 『의과방목』, 『승정원일기』, 『대한제국관원이력서』)

표 10.

김홍규 본인 및 가계의 관력

Table 10. Relationship of Kim Hong-kyu’s Personal and Family Background

(『완천기』, 『전함생도안』, 『의과방목』, 『주학입격안』)

표 11.

한장윤 본인 및 가계의 관력

Table 11. Relationship of Han Jang-yoon’s Personal and Family Background

(『완천기』, 『주학입격안』, 『전함생도안』, 『역과방목』)

표 12.

김영길 본인 및 가계의 관력

Table 12. Relationship of Kim Young-gil’s Personal and Family Background

(『완천기』, 『전함생도안』, 『역과방목』, 『의과방목』)

표 13.

이주혁 본인 및 가계의 관력

Table 13. Relationship of Lee Joo-hyuk’s Personal and Family Background

(『완천기』, 『전함생도안』, 『역과방목』, 『의과방목』)

표 14.

최해진 본인 및 가계의 관력

Table 14. Relationship of Choi Hae-jin’s Personal and Family Background

(『완천기』, 『전함생도안』, 『삼력청완천안』, 『운과방목』)

표 15.

이건호 본인 및 가계의 관력

Table 15. Relationship of Lee Geon-ho’s Personal and Family Background

(『주학입격안』, 『별천안』, 『전함생도안』, 『사마방목』)

표 16.

이제선 본인 및 가계의 관력

Table 16. Relationship of Lee Je-seon’s Personal and Family Background

(『주학입격안』, 『별천안』, 『전함생도안』, 『국조방목』, 『승정원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