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중국 『해관의보(Medical Reports)』의 간행과 의학사적 의의
The Publication and Historical Significance of Modern Chinese Medical Repor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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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Unlike Western medical journals such as The Lancet which focused on Western-centric medical cases, Medical Reports analyzed medical and sanitary issues in East Asia, including China, Korea, and Japan and sought solutions to these problems. Medical Reports, a medical project initiated by the Chinese Maritime Customs Service (CMCS) in 1871, aimed to compile reference materials on the health conditions and diseases in ports. It was launched by the British Inspector General Robert Hart, who appointed the British Shanghai Customs Surgeon R. Alexander Jameson as the editor. Beginning in the 1860s, the British-led CMCS began expanding its reach from major cities to border areas, western regions, Taiwan Island, and Hainan Island, as well as territories beyond Qing Dynasty, such as Seoul, Busan, Incheon, Hong Kong, and Macau. This expansion required multinational cooperation, leading to the participation of Customs Surgeons, medical missionaries, and military doctors from ten countries, including the UK, the United States, France, China, Germany, Canada, Portugal, Norway, the Netherlands, and Australia, in the Medical Reports project. The Medical Reports were directly tied to the medical and sanitary initiatives in that community. They were authored by Customs Surgeons from a country with substantial regional influence. An analysis of the authors’ nationalities, primary research focuses, and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customs regions they covered revealed a statistically significant correlation.
Even after Robert Koch discovered bacteria in the late nineteenth century, the miasma theory remained dominant, and most British doctors in India did not acknowledge the possibility that diseases could be caused by parasites. Despite this conservative historical context, the Medical Reports featured progressive research, including studies on leprosy based on germ theory and studies that actively embraced the emerging theory that parasites could be the cause of certain illnesses. In this process, the relatively unknown young physician named Patrick Manson, while working at the CMCS for 13 years, significantly advanced his medical knowledge by publishing numerous studies on filaria in the Medical Reports. His work led to the groundbreaking discovery that mosquitoes transmit infectious diseases. These research achievements pioneered the field of tropical medicine, a discipline that had not been established even in the extensive colonial holdings of France and Britain in tropical regions. Manson’s work for the Medical Reports significantly advanced human efforts to prevent and respond to infectious diseases.
1. 서론
오늘날 많은 국가의 행정기관은 주요 활동 성과를 공개하고 향후 계획을 전달하기 위해 연례보고서를 발행한다. 17세기 영국에서 시작된 근대 정부 보고서 제도는 19세기 말에 이르러 청(淸) 정부에 고용된 중국해관(Chinese Maritime Customs Service, CMCS)의 영국인 해관원들이 상하이(上海)의 강해관(Shanghai Customs, 江海關)에서 처음으로 보고서를 발행하면서 중국에 전파되었다. 1871년, 이러한 흐름 속에서 중국해관의 『해관의보(Medical Reports, 海關医報)』가 간행되었다.
『해관의보』란 청의 총리아문(總理衙門) 산하 총세무사서(Inspectorate General, 總稅務司署)에서 봄·여름 또는 가을·겨울 반년 동안 수도 베이징(北京)과 각 개항장에서 있었던 검역과 방역, 상수와 배수 문제, 대소변과 쓰레기 처리 문제, 도시 청결과 소독 문제 등 위생과 관련된 이슈와 거류민의 건강, 병원 운영, 질병의 발생과 치료, 감염병의 전파와 치료 등 의료와 관련된 이슈 및 해관의사(Customs Surgeon 또는 Customs Medical Officer)의 의료 활동을 종합하여 위생사업의 방향을 제시하고 의학계에 최신 연구 성과를 제공하기 위해 만들어진 항구보건보고서와 의학연구보고서를 포함하는 간행물이다.1) 중국해관의 해관의사 혹은 편집장이 의뢰한 각 분야에서 활동하는 다양한 국가의 의사 개개인이 직접 집필한 것과 편집장이 전재(轉載)를 위해 선정한 의학계의 최신 연구 성과를 취합하여 발간하는 형식으로, 대부분의 기간 동안 영국인 강해관의사 제이미슨(R. Alexander Jamieson)이 편집장이었고,2) 1871년부터 1911년까지 총 80호가 발행되었다. 특히 당대 직면한 질병의 기전을 밝히고 효과적인 치료법에 대한 심층적인 학술 연구를 담은 의학연구보고서들은 『해관의보』의 전문성과 학술적 가치를 강화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해관의보』는 당대 영국의학계의 큰 주목을 받았는데 『해관의보』의 내용이 『영국 의학 저널(British Medical Journal)』에 소개되고 의학계에 미치는 큰 공헌에 대한 찬사가 이어진가 하면, 당시 영국여왕의 명예의사(Honorary Physician to Her Majesty the Queen)가 『해관의보』의 내용을 극찬하고 주제별로 그 내용을 재편집하여 의학자료집으로 출판하는 등 당대 영국의학계에서도 참고하는 주요 의학 자료였다. 『해관의보』가 중국 내부에서뿐만 아니라 당대 해외 의학계의 주목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상하이의 영국조계(Shanghai British Settlement)에서3) 출발한 중국해관이 점차 외연을 확장해 나가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다국적 의사들의 『해관의보』의 집필진으로서의 흡수에서 기인하였다. 영국, 미국, 프랑스, 중국, 독일, 캐나다, 포르투갈, 노르웨이, 네덜란드, 호주 등 무려 10개 국가 출신의 의사들이 그들의 연구 성과를 『해관의보』에 발표하였다. 특히 『해관의보』는 훗날 ‘열대의학(Tropical Medicine)’의 창시자로 불려지는 영국인 하문관의사(Amoy Customs Surgeon, 廈門關醫員) 패트릭 맨슨(Patrick Manson)의 참여는 물론, 주중 프랑스 공사관 육군 일급 군의관(Médecin Aide-major de Lère Classe de l’Armée, Attaché à la Légation de la République Française en Chine) 마티뇽(J. J. Matignon), 일본 요코하마 외국인 보건위원회 위원장(Chairman of the Yokohama Foreign Board of Health) 미국인 시몬스(Duane B. Simmons), 조선 제중원(濟衆院) 의사 겸 조선해관의사 미국인 알렌(Horace N. Allen) 등 다양한 국가와 분야에서 의료사업에 종사하는 의사들의 참여까지 이끌어,4) 『해관의보』의 내용은 다양한 환경에서 발생하는 각종 질병과 의료 기술에 관한 정보와 사례를 아우르는 내용으로 확대되었다.
현재 『해관의보』는 19세기 상하이, 푸젠(福建), 후베이(湖北), 저장(浙江), 윈난(雲南) 등 지역의 위생 현안과 의료 문제에 관한 연구뿐만 아니라 현지의 인문 지리와 기후 변화에 관한 연구에까지도 폭넓게 활용되고 있다(單麗, 2012; 王少陽·楊祥銀, 2012; 楊祥銀·王少陽, 2012; 佳宏偉, 2013; 2015; 王鵬·楊祥銀, 2018; 趙成彬·劉雅仙, 2022; 진칭, 2022; 董強, 2023; 程露, 2024). 그리고 근대 서양 의학지식의 전파와 교류의 관점에서 『해관의보』는 이미 중요한 의학사 자료로 인식되어 왔고(詹慶華, 2012a; 2012b; 張志雲, 2022; 董強, 2023), 해관의사 패트릭 맨슨의 열대의학에 관한 연구에서 이 자료가 활용되면서 그 일부 내용에 대한 의학적 분석이 이루어졌다.5) 하지만 대부분의 연구는 『해관의보』를 활용한 지역사 연구에 치중되어 있던 관계로 『해관의보』의 개항장과 그 배후지의 질병, 의료, 위생에 관한 보고서로서의 측면만 강조되어 왔으며, 『해관의보』에 수록된 수십 편의 순수 질병의 병리와 치료에 관한 의학연구보고서는 극히 드물게 이용되어 왔다. 기존에 영인된 2종의 『해관의보』의 해제 역시 『해관의보』에 수록되어 있는 의학연구보고서들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안 되어 있다는 아쉬운 부분이 있다.6) 또한, 일부 연구들은 『해관의보』에서 중국 현지의 위생상황을 열악하다고 언급한 텍스트들을 발췌하여 이 같은 내용이 서양 우월주의와 식민주의의 시각이라고 판단하며 비판하였다(董強, 2023: 27-28; 佳宏偉, 2015: 125; 王鵬·楊祥銀, 2018: 123-124). 이러한 시각의 문제점은 당시 중국해관의 위생 사업이 영국정부 수석의료관(Chief Medical Officer) 사이먼(John Simon)의 보건위생 사상과 영국 이외 다양한 서양 국가들의 최신 의학 성과에 기반하고 있었고, 『해관의보』의 내용에서 드러난 위생의 좋고 나쁨의 판단 기준이 대부분 이것에 기반하였다는 사실을 간과하거나 이러한 사실을 알지 못한 상황에서 각자의 연구 지역이나 연구 인물에 국한하여 필요한 텍스트만 선택적으로 활용함으로써 발생했다.
동아시아에서 비공식 제국주의(informal imperialism)를 추진해온 영국은 방대한 군사력과 국가 예산을 투입하여 동아시아를 식민지화하려 했던 것이 아니라 최소한의 병력과 예산으로 상하이, 싱가포르, 홍콩 등 거점을 기반으로 동아시아 시장을 장악하고 경제적 이권을 얻고자 했다. 영국인 총세무사(Inspector General, 總稅務司) 로버트 하트(Robert Hart)는 강해관을 시작으로 연해와 장강(長江) 유역의 대도시를 거점으로 해관을 신설해 나가고 윈난, 광시(廣西) 등 변방지역, 충칭(重慶) 등 서부 내륙의 장강 상류지역과 타이완섬(臺灣島), 하이난섬(海南島) 등 도서지역, 그리고 마카오(澳門), 조선(朝鮮) 등 청조의 지배권역 밖까지 외연을 확장해나갔다. 다양한 국가와의 협력이 필요한 상황에서 중국해관은 예를 들어 윈난이나 광시와 같은 프랑스 식민지와 인접하여 프랑스 영향력이 큰 지역에는 프랑스인 해관원과 해관의사를 채용하여 인적 자원을 활용했고, 마카오와 같이 포르투갈의 식민통치를 받는 도시에 설립하는 해관의 경우에는 포르투갈인 해관원과 해관의사를 활용하였다. 이러한 배경에서 각 지역의 항구보건보고서는 이들 국가의 해관의사가 작성하였고 그렇기 때문에 그 내용에는 영국 이외 국가의 의학 교육체계에서 육성된 다양한 국적의 의사들이 지니고 있던 의학 지식이 반영되어 있으며, 그들 국가의 주요 관심 질병, 의학적 관점, 의료정책에 대한 입장 등이 반영되어 있다는 사실을 고려해야 한다.
이에 본 연구는 영국인 총세무사 로버트 하트가 중국해관 출판체계를 구축하고 『해관의보』를 간행하기 시작한 구체적인 경위에서부터 시작하여 영국인 편집장 제이미슨이 『해관의보』의 항구보건보고서와 의학연구보고서 체계를 구축해나가는 과정과 영국 이외 국가 연구자들의 의학 성과까지 수용해가는 과정을 분석하고자 한다. 이것은 『해관의보』가 당대 다양한 환경에서 발생하는 각종 질병의 사례와 이에 대한 치료법, 세계의 최신 의료 기술에 관한 정보가 모이는 장(場)이 될 수 있었던 과정에 대한 탐구이자 『해관의보』를 의학사적으로 더 깊이 있게 이해하는 데 필요한 기초를 제공할 것이다.
본 연구를 위하여 1차 사료인 중국해관의 『총세무사 통령(Inspector General’s Circular, 總稅務司通令)』과 『해관의보』를 핵심 사료로 활용하였다. 통령은 중국해관을 총괄하는 총세무사가 내리는 명령으로서 중국해관 최고의 행정명령에 해당하고, 이는 특정 지방 해관의 세무사(Commissioner, 稅務司)에게 하달되는 경우도 있고 전국의 세무사에게 일괄적으로 하달되는 경우도 있었다. 기존에 생산된 통령은 총세무사서에서 주기적으로 취합하여 정리 작업을 거친 후 해관 내부 자료로 간행되었다. 이에 통령 문서집은 고본(孤本)이 아니라 일종의 연속간행물에 해당하는데 2013년에 중국의 해관총서(海關總署)에서 영인한 바가 있다.7) 그리고 『해관의보』는 2016년에 중국의 국가도서관(國家圖書館)에서 영인한 바가 있는데,8) 이 영인된 자료집은 현재 경희대학교 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어 한국에서도 열람이 가능하고,9) 백여 년 전 상하이에서 출판된 초판 원본의 경우에도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고문서자료실에 한 권이 소장되어 있어 그 실제 모습도 한국에서 확인해볼 수 있다.10) 근대의 중국해관은 공무 집행 시 양력이 공식 기준이었기에 본 연구는 양력으로 날짜를 표기한다.
2. 중국해관 출판제도의 형성과정과 『해관의보』의 간행
1859년, 상하이에서 세무사제도를 기반으로 하는 새로운 중국해관이 탄생하였다(陳詩啓, 2002: 50). 영국인 강해관 세무감독 레이(H. N. Lay)가 중국해관 초대 총세무사로 임명되면서 영국, 미국, 프랑스의 상하이 주재 영사가 각각 추천한 세무감독(Inspector of Customs, 稅務監督)들에 의해 운영되던 세무감독위원회(稅務監督委員會)가 혁파되고(Wright, 1950: 106, 136), 강해관은 영국인이 주도하는 기관으로 변모한 것이다. 이후 총리아문대신(總理衙門大臣) 혁흔(奕訢)이 제2대 총세무사로 임명한 영국인 로버트 하트는 강해관을 모델로 중국 대부분의 개항장에 지방 해관을 창설하였고(戴一峰, 1993: 20-21), 총세무사로서 각 지방의 해관을 효율적으로 관리해야 하는 문제에 직면하였다.
로버트 하트는 보고서제도를 활용하여 각 지방 해관을 효과적으로 관리·감독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1864년 2월 전국의 세무사에게 그 전해의 연간무역통계보고서(Annual Returns of Trade)를 작성하여 강해관에 송부하라는 지시를 내렸고,11) 인쇄 업무는 강해관세무사가 책임지도록 하였다.12) 인쇄처로는 1865년 강해관에 인서방(Printing Office, 印書房)과 표보처(Returns Department, 表報處)가 신설되어 기존의 카르발류(A. H. De Carvalho) 출판사나 노스 차이나 헤럴드(North-China Herald) 신문사에 의뢰하여 해관자료를 출판하던 방식에서 벗어나 해관만의 독자적인 출판체계를 구축하기 시작하였다.13) 그리고 로버트 하트는 1865년에 연간무역보고서(Annual Report on the Trade) 제도를 추가로 도입하여 각 지방 세무사에게 해당 지역의 한 해 동안의 정황을 글로 써서 보고할 것을 요구하였다.14) 전국에서 판매되는 해관간행물의 판매수익은 전부 강해관세무사의 오리엔탈은행(Oriental Bank Corporation) 계좌로 입금되었는데,15) 이러한 선순환적인 운영방식은 강해관이 지속적으로 출판 사업에 투자할 수 있게 하여 이후 『해관의보』를 비롯한 더 다양한 해관보고서의 출현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연간무역통계보고서와 연간무역보고서 제도를 통해 전국 각지의 지방해관으로부터 보고서를 수집하는 시스템을 마련한 로버트 하트는 1870년에 이르러 개항장 주민들의 질병 정보를 파악하고 중국 내외 의료계 및 일반 대중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참고자료를 마련하고자 『해관의보』 창간을 결정하였다.16) 6개월 간격으로 수집된 보고서를 정리하여 발간하는 반년간(半年刊) 형식으로, 편집처로는 강해관 인서방이 선정되었으며 편집장으로는 영국인 강해관의사 제이미슨이 임명되었다.17) 제이미슨은 영국 아일랜드 출신으로 1868년에 로얄칼리지(Royal College) 의과대학에서 학위를 받은 후 이듬해에 강해관에 입사했는데, 그 이전에 노스 차이나 헤럴드에서 에디터로 근무했던 경험을 살려 강해관에서 의사로 일하면서 동시에 『해관의보』의 편집장까지 겸임하게 되었다(진칭, 2022: 147).18) 편집처의 경우 시간이 흐를수록 강해관 인서방의 출판업무가 과중해지자 1873년에 강해관의 인서방과 표보처가 강해관에서 분리되어 조책처(Statistical Department, I. G., 總稅務司署造冊處)라는 베이징 총세무사서 산하의 새로운 출판 전담 부서로 개편되었다(van de Ven, 2014: 90). 이 과정에서 기존에 강해관 인서방을 책임졌던 영국인 부세무사(Deputy Commissioner, 副稅務司) 테인터(E. C. Taintor)가 조책처 세무사(Statistical Secretary, 造冊處稅務司)로 승격되어 조책처 책임자가 되었고,19) 조책처 사무실도 상하이 와이탄(外灘)에 위치한 강해관청사 내에 마련되었으며, 여전히 강해관의사 제이미슨이 계속해서 『해관의보』의 편집장을 맡았다.20)
<표 1>과 <그림 1>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최초로 간행된 해관의보는 1871년에 인쇄된 해관계간보고서 『해관공보(Customs Gazette, 海關公報)』 제10호에 제6부(Part VI)가 추가되어 해관의보라는 제목으로 실린 형태였다. 그것이 실린 『해관공보』는 연간 4회씩 발행되던 중국해관의 계간(季刊) 간행물로, 반년간으로 간행하겠다는 계획에도 어긋난 채로 『해관공보』의 일부분으로 삽입되어 간행되었다. 제3호까지 『해관공보』의 제6부분에 삽입된 형태로 간행된 이 시기는 『해관의보』가 독자적인 간행물로 성장하기 이전에 다른 간행물에 종속된 형태로 간행되던 초기 단계에 해당한다. 이후 『해관의보』 제4호에서 제13호까지 여전히 『해관공보』의 제6부분에 삽입된 형태로 간행되었으나, 단행본의 형태를 갖추었고 표지에 ‘해관의사가 중국 조약항의 해관에 제출한(Forwarded by the Surgeons to the Customs at the Treaty Ports in China)’이라는 문구가 추가되었다. 『해관의보』는 이 시기에 독립된 간행물로서의 체계를 갖추기 시작하는 과도기로서 두 번째 단계를 시작하였다. 로버트 하트는 1875년에 전국 세무사에게 관할 항구 해관의사의 보고서 작성을 감독할 것을 의무화하고 해관의사의 보고서 제출 여부와 업무 성과를 연동시키는 등의 새로운 제도를 도입하였다.21) 이렇게 함으로써 『해관의보』 작성은 해관의사에 대한 업무평가에 있어 하나의 중요한 지표가 되었다.
『해관의보』 제14호부터는 독립된 형태의 해관간행물로 간행되었고 이때부터 『해관공보』에서 분리되어 중국해관 스페셜 시리즈(Special Series)로서 간행되었다. 중국해관은 조책처 출범 이후 간행물을 통계 시리즈(Statistical Series), 스페셜 시리즈, 미분류 시리즈(Miscellaneous Series), 서비스 시리즈 (Service Series), 오피스 시리즈(Office Series), 총세무사서 시리즈(Inspectorate Series) 등 6개의 시리즈로 확대했다.22) 스페셜 시리즈의 간행물은 해관 고유의 주요 업무인 관세와 직결된 부문들은 아니지만 총세무사 로버트 하트가 시기별로 관심을 가지고 해관업무를 확대해 나가는 과정에서 주목받았던 주제들로 이루어졌는데, 스페셜 시리즈의 제1호는 국산 아편에 관한 보고서였고, 『해관의보』는 스페셜 시리즈의 제2호 간행물로 간행되었다. 그리고 1880년대부터는 중국해관 스페셜 시리즈가 공식 판매 가능한 간행물로 지정되었으며, 23) 판매 가능한 해관간행물은 각 지방 해관에 3부씩 배부되고 해관원들에게 각자의 업무 성격에 따라 해당 분야의 간행물이 무료로 증정되었고,24) 중앙의 총세무사서에서 지방 해관 장서의 파손, 분실, 유출 등을 감독할 수 있는 관리체계를 구축해 나갔다.25) 이러한 노력을 통해 의료계에 보다 효율적으로 『해관의보』를 제공할 수 있는 제도가 마련될 수 있었으며, 더 나아가 『해관의보』는 상하이, 홍콩, 런던 등 중국해관과 네트워크가 형성되어 있는 대도시들에서 쉽게 구매하여 열람할 수 있는 자료가 되어 더 광범위하게 확산될 수 있었다.
이렇게 로버트 하트의 적극적인 지지 받으며 『해관의보』가 제도화되는 과정에서 중국해관이 연해와 장강유역의 대도시 거점에서 점차 윈난성, 광시성 등 변방지역, 충칭 등 서부 내륙과 타이완섬, 하이난섬 등 도서지역, 그리고 마카오, 조선 등 청조의 지배권역 밖에까지 해관을 신설하며 외연을 확장해 나가자 『해관의보』가 다루는 내용 역시 더욱 다양한 환경에서 발생하는 각종 질병과 이에 대한 치료법에 관한 정보와 사례로 확장되었다. 이에 따라 『해관의보』 간행에 참여하는 해관의사들 역시 점차 다양해져 『해관의보』는 후에 서양의학사에서 ‘열대의학의 아버지’라고 불리게 되는 영국인 하문관의사 패트릭 맨슨의 참여는 물론, 주중 프랑스 공사관 군의관 듀갓(M. E. Dugat), 일본 오사카(大阪)에서 의료선교사로 활동하던 미국인 타일러(Wallace Taylor), 마카오의 공북관(Lappa Customs, 拱北關) 해관의사 포르투갈인 실바(J. Gomes da Silva), 조선의 해관의사 영국인 알렌과 발독(E. H. Baldock) 등 다양한 지역과 분야에서 의료사업에 종사하는 총 10개국 국적의 의사들이 참여하여 최신 의학 지식을 공유하는 공간이 되었다.
또한, 『해관의보』가 1878년부터 독립된 형태의 간행물로 간행되고 수집하는 각종 질병 사례와 치료법, 최신 의료 기술 등에 대한 정보도 더욱 다양해지면서 영국의료계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1879년에 『영국 의학 저널』에는 『해관의보』에 영국인 편집장 제이미슨이 쓴 의료 키트에 관한 부분이 소개되었으며,26) 1880년에는 하문관의사 패트릭 맨슨이 『해관의보』에 게재한 일련의 상피병(Elephantiasis)과 필라리아(filaria)에 관한 연구 성과도 소개되었다.27) 1884년에는 영국여왕의 명예의사 고든(C. A. Gordon)이 그동안 『해관의보』에 실린 글들을 주제별로 편집해서 『1871-1882 중국해관 해관의사 보고서 집대성(An Epitome of the Reports of the Medical Officers to the Chinese Imperial Maritime Customs Service, from 1871 to 1882)』이라는 제목으로 영국에서 자료집을 출판하였다. 고든은 이 자료집에서 현재 해결하지 못한 수많은 과학 문제에 대한 중국해관의 의사들이 보인 탐구는 매우 중요하며 그들이 의학계에 큰 공헌을 해오고 있다고 평가하였고(Gordon, 1884: 14), 의학계는 그동안 편집장 제이미슨이 보인 노력과 그가 『해관의보』에 실은 많은 귀중한 연구 성과에 특별히 감사를 표해야 한다고 표현하기도 했다(Gordon, 1884: 15). 질병 연구에 있어서는 특히 패트릭 맨슨이 『해관의보』에 실은 간헐적 발열의 발생과 필라리아의 혈액 내 존재 사이의 명백한 연관성에 관한 연구와 필라리아의 생활사에 관한 그의 연구를 높이 평가하였다(Gordon, 1884: 15). 『영국 의학 저널』은 이 자료집에 대한 리뷰에서 의학서를 소장하는 모든 도서관과 의학 발전에 관심 있는 모든 사람이 반드시 갖추어야 할 자료집으로 소개하였다.28) 이렇게 『해관의보』가 의학 전문지로 자리매김하며 전성기를 누린 이 시기를 『해관의보』 발전의 세 번째 단계로 볼 수 있다.
하지만 『해관의보』 사업은 1880년대에 정점을 찍은 후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전성기에 각 호당 10편 이상의 보고서를 유지하던 데에서 1889년의 제37호에 이르면 4편으로 줄어들었고 결국 1890년 상반기에 간행 예정이었던 제38호는 간행마저 연기되었다.29) 로버트 하트는 1890년 12월에 개혁을 통해 『해관의보』 사업을 다시 정상 궤도에 올려놓으려고 노력하였다. 그는 『해관의보』가 의학계로부터 인정받는 사업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부록을 제작하여 해관의사들의 『해관의보』 사업에 대한 공헌도를 평가하였으며, 특히 1885년 이래 평가 하위 5개 지방 해관을 통고하였다.30) 그리고 구룡관(Kowloon Customs, 九龍關)과 공북관과 같이 홍콩과 마카오라는 특수한 지리적 원인으로 보고서를 반드시 제출해야 할 의무가 없는 해관에 대해서도 보고서 제출을 격려하였다. 하지만 <표 1>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1890년에 간행될 예정이었던 제38호가 무려 4년이 지나 1894년에 간행되는 등 로버트 하트의 이러한 노력은 큰 성공을 거두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해관의보』의 발간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게 된 데에는 여러 요인이 작용한 것으로 보이는데, 『해관의보』 발행 경비의 부족 측면을 우선 생각해볼 수 있다. 청불전쟁 이후부터 청국과 프랑스가 체결한 일련의 조약과 장정에 의거하여 청은 서남 지역에 개항장들을 신설하게 되면서(van de Ven, 2014: 119), 운영 경비보다 세입이 적어 예산이 부족한 해관의 수가 많아지게 되고 해관 전체의 예산이 분산된 것이 『해관의보』 발간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1880년대 말까지만 해도 해관의 주요 업무 분야는 관세와 항무, 밀수 단속, 위생 사업이었는데 1880년대 말부터 하트가 해관의 업무를 다양한 측면으로 확장하면서 기존의 의료·위생 사업에 대한 투자가 축소되었고 이것이 그 원인 중 하나로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는 해관에서 발간한 스페셜 시리즈의 주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데, 스페셜 시리즈는 시기적으로 총세무사가 관심을 가지고 추진한 사업에 관한 보고서로 1880년대 말까지 의료·위생 외에는 오랜 기간 관세와 무관한 새로운 보고서가 없다가 1880년대 말부터 해양경찰, 기상관측, 준설, 해양구조대, 호수·하천, 국제해양회의, 화폐, 동북·윈난·광시·장강 상류로의 해관업무 개척 등 다양한 사업을 주제로 한 보고서가 간행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31) 발행 경비의 부족 외에 『해관의보』의 발간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게 된 또다른 요인으로는 『해관의보』 발간 자체가 편집장 제이미슨의 개인적인 역량에 너무 기대고 있었던 것을 들 수 있다. 1890년대부터 제이미슨의 건강이 악화되면서 편집장으로서의 역량이 감소함에 따라 『해관의보』의 발간 역시 부진해지기 시작했다. 즉, 발행 경비 부족과 편집장 제이미슨의 부재라는 요인 등이 작용하여 『해관의보』의 간행 부진을 초래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하락세는 1893년 9월 『해관의보』의 대대적인 개혁으로 이어졌다. 로버트 하트는 제이미슨이 1871년부터 20여 년간 편집장을 맡으면서 거둔 성과와 그의 노고를 높이 평가한 후 그의 편집장 직무를 해임하였고, 앞으로 해관의사가 제출한 보고서는 편집 절차 없이 그대로 인쇄될 것이며, 만약 반년 동안 해당 항구에서 특별히 보고할만한 일이 없었을 때는 항구, 중국, 동양과 관련된 어떠한 의료·위생 분야의 내용이라도 글로 써서 보고할 것을 권장하였다.32) 곧이어 4년이나 미루어졌던 제38호, 제39호, 제40호가 1년 후 출간되었지만 이들 보고서의 내용에 깊이가 없고, 과학적 가치가 떨어지며, 발행이 정기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은 데에 대한 비판과 함께, 그간 『해관의보』의 항구보건보고서들이 중국의 질병에 대한 유일한 정보 원천으로 기능해왔고 전체 세계 인구의 약 1/4에 해당하는 지역을 다루면서 큰 역할을 해왔었는데 앞으로 이 보고서의 발행이 중단된다면 의학 발전에 엄청난 손실일 것이라고 강조하며 다시 한 번 더 중국해관의사들이 중국의 질병 연구 및 보고를 위해 노력하기를 촉구했다.33) 『영국 의학 저널』은 『해관의보』 제41호가 1894년 제40호에 이어 바로 간행된 사실에 가치를 실었고,34) 1895년부터 『해관의보』가 간행되면 종종 전체 내용에 대한 리뷰를 게재하는 등 『해관의보』 사업에 힘을 실어주었다.35)
이러한 노력에도 『해관의보』는 <표 2>에 나타난 것처럼 후반부로 갈수록 반년에 한 번씩 간행되지 못하고 종종 두 권씩 합집의 형태로 발간되었다. 또한, 편집장이 없는 체제로 간행되면서 이 시기의 『해관의보』는 이전과 비교해 전문성이 떨어지고 단어 오타 및 문단 간격, 문단 첫 단어 들여쓰기, 글자체 등을 포함한 상당히 많은 양식상의 오류가 발견된다. 이후 8개국 연합군의 베이징 침공과 신정(新政) 초기 행정부 개편과정을 겪으면서 『해관의보』 사업은 또다시 혼란에 빠지게 되었고 결국 1904년의 제66·67호 합집을 끝으로 장기적인 휴간 상태에 들어갔다. 『해관의보』가 개혁과 쇠퇴를 거치며 긴 휴간기에 접어든 이 시기를 해관의보 발전사에서 네 번째 단계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청 왕조가 붕괴된 1911년에 1904년 여름·가을호에 해당하는 제68호부터 1910년 여름·가을호에 해당하는 제80호까지 무려 13회를 합집으로 간행하고 『해관의보』는 그 발전사의 마지막 단계이자 다섯 번째 단계를 끝으로 폐간되었다.
3. 항구보건보고서의 위생 분석과 보건사업과의 연관성
『해관의보』에 수록된 글은 크게 항구보건보고서와 의학연구보고서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필자가 통계해본 결과 처음 간행된 1871년부터 마지막 호가 간행된 1911년까지 40년간 발행해온 『해관의보』에는 총 587편의 글이 수록되어 있고 그중 항구보건보고서가 525편, 의학연구보고서가 59편, 그리고 나머지 3편은 공문서이다. 자유롭게 작성할 수 있었던 의학연구보고서와 달리 항구보건보고서는 영국인 총세무사 로버트 하트가 제시한 가이드라인에 따라 작성해야 했다.
『해관의보』의 항구보건보고서 집필은 대부분 해당 지방 항구의 해관의사가 맡았던 것으로 확인된다. 해관의사는 원칙적으로 해당 지역의 의료·위생 관련 정보의 수집과 정리, 항구 검역을 비롯한 해관 관할 구역의 위생 관리와 감독, 해관원에 대한 의료 서비스 제공 등에 관한 직무를 수행하는 의료 계열 공무원이었다.36) 필자가 『해관의보』에 수록된 항구보건보고서 전체 525편의 집필 의사를 분석해본 결과, 해관의사가 494편을 작성하였고 나머지 31편은 의료선교사, 외국의 주중공사관 군의관, 청국 북양함대에 초빙된 외국인 군의관 등 다양한 직업 현장에서 일하는 의사들이 작성한 것이었다. 이러한 방식은 중국해관이 인재를 발굴하고 인재 영입을 하는 데에도 도움이 되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영국인 마이어스(William W. Myers)와 레니(Alexander Rennie)가 그 사례이다. 이들은 중국에서 의료선교사로 활동하면서 『해관의보』에 항구보건보고서를 기고하다가 중국해관과 인연을 맺고 공식적으로 채용되어 해관의사로 일하면서 의학연구보고서 작성에도 참여하였다.37) 세무사에 의해 집필자로 선정된 의사들은 곧 총세무사 로버트 하트가 제정한 가이드라인에 따라 항구보건보고서의 초안을 작성하였고, 세무사가 그 초안을 상하이에 송부하면 상하이에서 편집장 제이미슨의 편집을 거쳐 『해관의보』로 간행되었다.
총세무사 로버트 하트는 1870년에 제이미슨을 편집장으로 임명할 때 『해관의보』의 항구보건보고서 작성에 관한 가이드라인도 함께 제시하였다.38) 이 가이드라인을 정리한 것이 <그림 2>이다. <그림 2>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항구보건보고서의 내용은 크게 보건위생, 일반질병, 감염병 세 가지 분야를 중점적으로 다루며 a부터 f까지 총 6가지 항목으로 구성되었다. ‘보건위생’에는 세 가지 세부 영역이 포함되었는데, 보고 기간 동안 해당 지역 주민들의 전반적인 건강 상황과 외국인의 사망률, 그리고 사망한 외국인들의 사망 원인에 대한 조사를 보고하도록 했다. b부터 d까지는 ‘일반 질병’에 해당하는 내용으로, b는 현지에서 만연하는 질병에 대한 포괄적인 상황, c는 그 질병들의 유형·특성·합병증, 그리고 어떤 특별한 조치가 필요한지에 관한 내용이며, d는 배수 등 지역의 인프라 변화 및 기후의 변화와 질병과의 관련성을 분석하게 했다. e부터 f까지는 ‘감염병’과 관련된 주제로 e는 현지에서 돌고 있는 특수 질병, 그중에서도 특히 나병(leprosy)에 대해 보고하도록 했는데, 이 당시 해관에서 지칭하는 이른바 ‘특수 질병’이란 대체로 오늘날의 만성 감염병에 해당한다. f는 해당 지역의 감염병 유행 여부, 유행하는 감염병의 발생원인, 발병과 치료법, 그리고 그 사망자 수에 관한 것이었다. 이 가이드라인에 따라 작성된 항구보건보고서 초안은 세무사들에 의해 상하이에 송부된 후 편집장 제이미슨의 검열과 편집을 거쳐 간행되었는데, 제이미슨의 역할은 『해관의보』의 편집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전체 보고서의 약 10%에 해당하는 42편의 항구보건보고서를 직접 작성하여 해관의 보건위생 사업 방향 설정과 의료 활동에 적극적으로 기여했다.
최종 편집된 항구보건보고서는 크게 보건위생, 의료 활동 등 의학 관련 내용과 개항장 및 그 배후지의 자연지리, 인문지리, 기상관측, 사회 문제 등 의학 외의 내용으로 구성되었다. 의학 관련 내용을 살펴보면 그중 보건위생에 관해서는 검역, 상수, 배수, 도로 청결 등 사회의 위생 향상을 위한 대규모 사업 추진 방향이나 거시적인 논의가 제시되는 경우가 많았고, 의료 활동과 관련해서는 집필자인 해관의사와 의료선교사들이 직접 경험한 진료 사례가 대부분을 차지했다. 전반적으로 한 해관이 설립되면 초기에는 위생에 대한 논의가 주를 이루지만, 상수도 건설, 검역체계 구축과 같은 핵심적인 위생 사업들이 완성되면 의료 활동에 대한 논의의 비중이 두드러지게 증가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는 내과 진단이나 만성 질환 치료 등에 관한 내용보다는 말라리아(malaria), 콜레라(cholera), 페스트(plague), 두창(small-pox), 장티푸스(typhoid fever), 이질(dysentery) 등에 관한 내용이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당시 중국해관은 영국의 1825년 검역법(Quarantine Act 1825)과 1872년 공중위생법(Public Health Act 1872)을 참고하여 이들 질병을 감염병으로 분류하였고(진칭, 2022: 134-136), 이들은 당대 가장 높은 유병률과 치사율을 기록하던 질병들이었기에 그에 관한 내용이 높은 비중을 차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출판된 『해관의보』의 항구보건보고서 집필 의사의 국가별 구성과 주요 연구 경향, 보고서 집필 의사의 국적과 연구 대상인 해관 지역 간의 상관관계를 분석하면 다음과 같다. 필자가 분석해본 결과 『해관의보』 항구보건보고서의 525편 중 대부분인 440편이 제이미슨과 같은 영국의학 교육체계 내에서 육성된 영국인 해관의사와 의료선교사가 작성한 보고서로 영국인이 항구보건보고서 집필에서 절대 다수를 차지했다. 그리고 그들 중 상당수가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의대 출신인 것으로 집계되었다.
영국인 해관의사들은 주로 중국의 연해 지역 개항장이나 장강 중류 및 하류지역의 개항장에 배치되었는데, 이들 지역은 도시의 규모가 크고 대규모 외국인 거류민 사회를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작성한 항구보건보고서는 주로 도시 위생 문제에 초점을 맞춘 내용이었다. 예를 들어 중국 최대 도시인 상하이에서는 식수 문제가 항상 중요한 쟁점이었고 『해관의보』 창간 이래 강해관의 항구보건보고서는 계속해서 공공조계 공부국(Municipal Council, 工部局)의 수질 관리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였다. 제이미슨은 그의 동료인 강해관의사 조지바튼(George Barton)과 협력하여 주기적으로 황푸강(黃浦江)과 수저우하(蘇州河)의 강물 샘플을 채취하여 그 성분을 연구하면서 식수 공급 현장을 조사하였고,39) 영국 왕립화학대학(Royal College of Chemistry) 프랭클랜드(Edward Frankland) 교수가 공부국이 채취한 황푸강의 샘플을 분석하여 비생물적 부유물과 비교적 큰 부유미생물을 제거한 여과된 물은 안전하다고 발표한 내용을 반박했다.40) 제이미슨은 프랭클랜드가 ‘런던의 하수’를 표준 기준치로 설정하여 상하이에 적용했다는 사실과 이에 기준한 하수 또는 동물 오염의 포화도를 측정하는 과정에서 활용한 질소 함량의 계산방식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였고, 의사의 시각에서 식수와 콜레라, 설사, 이질, 장티푸스 등 질병의 전파 간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사이먼을 비롯한 파크스(E. A. Parkes), 버든 샌더슨(J. S. Burdon-Sanderson), 바스티안(H. C. Bastian) 등 당대의 저명한 영국 의학자들의 이론을 근거로 깨끗한 식수와 상수도의 건설 필요성을 『해관의보』에 지속적으로 발표했다.41) 그 결과 상하이는 1883년에 홍콩에 이어 동양에서 두 번째로 상수도를 공급한 도시가 되었다(福士由紀, 2010: 199). 이를 통해 『해관의보』의 보고서 내용이 해당 지역의 의료·위생 사업의 방향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것을 확인할 수 있으며, 이러한 사례는 상하이의 강해관에서 시행한 ‘검역’에서도 발견된다. 상하이의 강해관이 영국이 역사상 최초로 단순한 격리가 아닌 의학 검사(Medical Inspection)에 기반한 의학 검역 체계를 구축한 바로 그 해인 1872년에 ‘해관 의학 검역’ 체계를 구축하게 된 것도(진칭, 2022: 140, 155, 171), 여러 차례 강해관의 항구보건보고서에 보고된 1차 방역저지선으로서의 항구 검역에 관한 내용이 이론적 근거를 마련해주면서 가능했다.
영국인 해관의사들이 주로 배치되었던 후베이성 이창(宜昌)의 경우도 항구보건보고서를 작성한 이래 역대 해관의사 모두 도시의 배수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고, 조계지의 쓰레기 처리와 배수 시설 청결에 각별히 주의를 기울일 것을 촉구했다(王鵬·楊祥銀, 2018: 123-124). 한커우(漢口)의 항구보건보고서는 시민들이 하수를 한강(漢江)으로 배출하고 다시 그것을 마시게 되는데 이것이 이질이 유행하는 근본원인이라고 지적하였다(程露, 2024: 110). 또한, 19세기 말에 샤먼은 동남아와 중국 연해를 이어주는 역할을 하게 되면서(村上衛, 2013: 448), 구랑위(鼓浪嶼)라는 작은 섬에서 거류민사회를 형성하고 중국인들은 샤먼섬(廈門島)이라는 상대적으로 큰 섬에서 거주하는 상당히 특이한 도시구조를 형성하고 있었는데, 샤먼의 항구보건보고서는 두 섬에서 보이는 선명한 도시 위생의 차이를 통해 쓰레기, 배설물, 오수, 개인위생 등이 말라리아, 콜레라 등 감염병 유행의 요인으로 지목했다(佳宏偉, 2013: 115-117).
비영국인 집필자들이 작성한 나머지 85편의 『해관의보』 항구보건보고서에서는 프랑스인 의사와 미국인 의사가 각각 22편과 48편의 항구보건보고서를 작성하여 두 국가는 비영국인 집필자들 중에서 가장 높은 참여 비중을 보였다. 프랑스인 의사가 작성한 항구보건보고서는 모두 프랑스인 해관의사가 작성한 것이었고, 1894년에 처음 제출되어 중국해관이 영어를 공식 언어로 사용함에도 단한 편을 제외하고 모두 프랑스어로 작성되었다. 비록 중국해관에서 프랑스어를 공식 언어로 사용한다는 규정을 제정한 적은 없었지만, 「1861년 진해관장정(Tientsin Custom House Regulations, 1861)」의 통관과정을 보면 제출된 한문 서류는 반드시 영어나 프랑스어로 작성된 번역문을 동시에 제출해야 한다고 규정되어 있는 등 특정 업무 분야에서 제한적으로 프랑스어의 사용을 허용한 전례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42) 그리고 『해관의보』의 영어권 출신 해관의사가 작성한 항구보건보고서에서 프랑스어 문구를 본문에 그대로 인용한 사례와 프랑스어 문헌을 인용한 각주는 곳곳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으며, ‘râle(수포음)’, ‘écraseur(교단기)’, ‘fémur(대퇴골)’, ‘médecine(의학)’ 등 의학 고유명사를 프랑스어 원어 그대로 사용하거나, 중세 프랑스어에서 어원을 찾을 수 있는 œ와 같은 문자도 ‘diarrhœa(설사)’를 비롯하여 많이 사용되는 등 프랑스어로 작성된 보고서는 별문제 없이 영어권 해관의사들에게 활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프랑스인 해관의사들이 주로 배치된 해관들은 지리적으로는 모두 프랑스령 인도차이나(Indochine Française)의 통킹 보호령(Protectorat du Tonkin)과 인접해 있는 베이하이(北海)의 북해관(Pakhoi Customs, 北海關), 룽저우(龍州)의 용주관(Lungchow Customs, 龙州關) 등 광시성과 멍쯔(蒙自)의 몽자관(Mengtsz Customs, 蒙自關), 쓰마오(思茅)의 사모관(Szemao Customs, 思茅關) 등 윈난성에 집중되어 있었다. 윈난 지역에 프랑스인이 주도하는 해관이 설치된 것은 중국에서의 이권을 둘러싼 구미 열강들의 경쟁과 타협의 결과로 해석할 수 있다. 1870년대부터 1880년대까지 중국에서 영국과 프랑스의 협력 관계는 중국 남부의 이권을 둘러싸고 점점 경쟁적으로 변해갔고, 북방에서는 영국이 러시아와 대립하는 가운데 독일이 산둥 반도를 장악하며 영국의 장강 유역 특권에 도전하면서 국제 경쟁이 심화되자 영국은 각국의 중국에서의 영향력을 상호 인정하고 침해하지 않는 질서를 구축하려는 노력을 시작했다(Wright, 1950: 718-719). 이러한 배경 속에서 영국과 프랑스는 중국 서남 지역의 이권을 둘러싸고 청과 일련의 조약과 장정을 체결하고 개항장을 건설하기 시작하였고 윈난 지역의 해관들 역시 이 과정에서 설치된 것이다(陳詩啓, 2002: 320-321).
프랑스인 해관의사들은 인도차이나정부와의 긴밀한 협조를 통해 해당 지방에서 의료 활동을 펼쳤는데, 예를 들어 몽자관의사 미슈(J. L. Michoud)는 1894년 멍즈에서 의료 활동을 시작할 때 사이공 세균학연구소(Bacteriological Institute at Saigon)로부터 백신 튜브(Vaccine tube)를 지원받았고,43) 1903년에는 멍즈에 인도차이나정부에서 건설한 프랑스계 멍즈병원(L’Hôpital de Mongtze)이 설립되어 환자 치료를 시작했다.44) 또한, 사모관의사 오르톨란(T. Ortholan)은 쓰마오에서 두창이 유행할 때 수십 명의 어린이들에게 당시 사이공 파스퇴르연구소(L’Institut Pasteur de Saigon)로부터 공급받은 백신을 접종함으로써 감염병 유행에 대응하였다.45) 이뿐만 아니라 그들은 프랑스와 영국의 동남아시아에서의 의료 활동 경험을 적극 활용하였는데, 북해관의 항구보건보고서를 보면 북해관의사 푸티온 라비엘(J. L. Poothion-Lavielle)이 프랑스계 병원의 동료들과 함께 연간 700회 이상 페스트 예방접종을 하는 과정에서 “하프킨 림프 세럼(Lymphe Serum de Haffkine)을 접종하는 방법은 영국령 인도 제국(諸國)에서 이미 페스트 예방에 보편적으로 사용되고 있다”고 설명하였다.46) 그리고 본인들의 이러한 의료 활동을 기재한 프랑스계 병원의 연례보고서를 인도차이나 총독부(Gouvernement Général d’Indo Chine)에 제출하였다.47) 이렇듯 프랑스인 해관의사들이 작성한 항구보건보고서에는 프랑스와 영국이 동남아시아에서 축적한 의료 활동 경험이 반영되어 있으며, 그들은 인도차이나정부에서 백신과 같은 의료 자원을 공수 받아 각 지역에서 의료 활동을 펼치면서 관련 기록을 인도차이나 총독부에 연례보고서로 제출하는 등 인도차이나정부와의 긴밀한 협력을 통해 중국 내에서 의료 활동을 수행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미국인 의사가 작성한 48편의 『해관의보』 항구보건보고서는 <표 3>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지역적으로 외진 지역부터 발달한 지역까지 중국 전역에 걸쳐 배치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구체적으로는 주요 핵심 해관이 있던 광저우(廣州), 톈진(天津), 닝보(寧波), 장강 중하류와 연해 등 발달한 지역인 수저우(蘇州), 우후(蕪湖), 원저우(溫州), 전장(鎭江), 비교적 외진 서부지역과 도서지역인 충칭과 하이커우, 그리고 외국에 해당하는 조선에서 작성한 것도 확인된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한 지방해관의 질병의 발병과 치료 사례 등을 상부에 보고하는 성격의 항구보건보고서에서부터 본인 근무처의 문제점을 직접 거론하는 보고서까지 다양한 내용을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진강관(Chinkiang Customs, 鎭江關) 의사 플랫(A. R. Platt)은 1878년 전장의 항구보건보고서에 약 20명의 두창 치료 사례에서 간헐적으로 완하제나 밤에 진정제를 투여하는 것 외에는 내복약 투약을 중단하고 오직 소독약을 통해 살균하고, 신선한 공기를 쐴 수 있도록 창문을 열어 환기에 모든 노력을 집중했더니 오히려 예상치 못한 치료 효과를 얻었다는 사실을 공유했다.48) 우해관(Wenchow Customs, 甌海關) 의사 맥고완(D. J. Macgowan)은 1882년에 간행된 원저우의 항구보건보고서에서 콜레라는 사람 간에 전파되는 장내 독소(enteric poison communicable from person to person)가 아니라 공기 중 세균(air-borne germs)을 통해 전파되는 것이므로 검역은 무의미한 것이라는 주장을 내놓았는데,49) 이는 코흐(Robert Koch)가 세균을 발견한 전후에도 여전히 의학계에서 의학 검역에 대해 회의적이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예시이다. 또한, 맥고완이 작성한 4편의 원저우 항구보건보고서는 질병이나 치료법을 언급할 때 진한(秦漢)부터 근대에 이르는 중국의 의학사를 보고서의 절반 이상에 달할 정도로 상세히 다루었다. 그 외에도 무호관(Wuhu Customs, 蕪湖關) 의사 에제튼 하트(Edgerton H. Hart)는 1898년에 우후의 항구보건보고서에서 해관청사와 기숙사에 존재하는 위생 문제를 과감하게 지적하고 그 근본원인이 서양인의 감독을 받는 조계지가 부재하기 때문이라고 강조하였다.50) 이처럼 미국인 의사가 작성한 항구보건보고서들은 해당 지역의 질병 발생 상황과 치료 사례 등 업무 수행에 관한 결과뿐만 아니라 해당 해관의 업무 수행 과정에서 겪는 문제점과 개선을 위한 제안 사항 등도 포함되어 있었다.
『해관의보』에는 이들 국가 출신의 의사 외에도 중국인 해관의사가 6편, 포르투갈 해관의사가 4편, 캐나다 의료선교사가 2편, 독일인 해관의사가 1편, 노르웨이인 해관의사가 1편, 호주인 해관의사가 1편 등 총 15편의 기타 국가 출신의 의사가 작성한 항구보건보고서도 수록되어 있다. 구체적으로는, 중국인 해관의사 황콴(黄宽)이 그의 고향인 광저우의 월해관(Canton Customs, 粵海關)에서 근무하면서 6편을 기록했고, 캐나다 의료선교사 윌리엄 맥클린(William E. Macklin)이 난징(南京)의 금령관(Nanking Customs, 金陵關)에서 2편을 작성했고, 노르웨이인 해관의사 오토 굴로센(Otto K. R. Gulowsen)이 산둥성(山東省) 동해관(Chefoo Customs, 東海關)에서 1편을 작성했고, 호주인 해관의사 우바넥(M. Urbanak)이 전장의 진강관에서 1편을 작성했다. 이들의 공통점은 대부분 영국에서 유학했거나 영국과 협력적 관계인 국가의 출신이었고, 그들이 쓴 항구보건보고서는 대부분 대만이나 산둥과 같이 영국의 영향력이 약한 지역이나 난징과 같이 전통적 무역항이 아닌 도시였다. 그리고 마카오에 설립된 공북관에서 포르투갈인 해관의사 실바는 1편은 영어로, 3편은 프랑스어로 항구 보건보고서를 작성하였고, 독일인이 작성한 항구보건보고서는 대만의 담수관(Tamsui Customs, 淡水關) 해관의사 요한슨(C. H. Johansen)이 작성한 1편 외에는 찾아볼 수 없으며, 러시아인은 집필진 중에서 찾아볼 수 없었다.
『해관의보』 항구보건보고서의 집필 의사의 국적과 연구 대상인 해관 지역 간에 상관관계를 분석해본 결과 프랑스 식민지와 인접해 있는 프랑스 영향권에 있는 해관에서 작성한 항구보건보고서는 모두 프랑스인 해관의사가 작성하였고, 영국 식민지와 인접해 있는 영국 영향권에 있는 해관에서 작성한 항구보건보고서는 모두 영국인 해관의사가 작성한 것을 확인하였다. 예를 들어, 광시성과 윈난성에 있던 해관 중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통킹 보호령과 인접해 있던 베이하이의 북해관, 룽저우의 용주관, 멍쯔의 몽자관, 쓰마오의 사모관은 모두 프랑스인 해관의사가가 항구보건보고서를 작성하였다. 그리고 당시 영국령 인도제국(British Raj)의 버마 샨(Burma Shan)과 인접해 있던 텅충(騰衝) 등월관(Tengyueh Customs, 騰越關)의 경우 같은 윈난성에 위치해 있으면서도 전부 영국인 해관의사가 항구보건보고서를 작성하였다. 그 외에도 필자가 통계해본 결과 ‘중국해관의 심장’이라고 불리는 상하이 강해관의 경우 미국인, 프랑스인 등 여러 국가 해관의사가 재직한 적이 있었음에도 강해관의 항구보건보고서는 예외 없이 전부 영국인이 작성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그리고 포르투갈의 식민통치를 받던 마카오에 있는 공북관에서 작성한 항구보건보고서 역시 모두 포르투갈인 해관의사가 작성한 것을 확인하였다. 이처럼 집필 의사의 국적과 연구 지역 간에 유의미한 연관성이 발견되는데, 전화가 활용되기 전인 19세기에서 20세기의 경우 제국주의 국가들은 의사와 외교관을 포함한 현지 전문가의 판단에 의존하여 대응할 필요가 높았다는 상황을 고려했을 때, 이러한 연관성은 제국주의 국가들이 현지 전문가를 통해 정보를 공유하고 협력했음을 시사하는 사례로 볼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해외 국가의 영향력이 강한 지역에서는 그 국가의 해관의사가 작성한 『해관의보』 항구보건보고서가 지역사회의 의료· 위생 사업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이는 해외 국가의 해관의사가 작성한 보고서의 내용이 단순히 의료·위생적인 정보를 담고 있는 것을 넘어, 해당 지역에 대한 해당 국가의 정치적 영향력을 반영하고 있음을 의미하며, 해당 지역에 대한 한 국가의 정치적 영향력을 반영하는 지표로도 간주될 수 있음을 나타낸다.
한편, 『해관의보』의 항구보건보고서에서 주목할 만한 또 다른 특징은 외국에 해당하는 조선의 항구보건보고서가 수록되어 있다는 점인데, 이는 같은 시기 조선해관 무역통계보고서를 상하이 강해관에서 발행하기 시작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51) 1885년부터 1895년까지 약 10년 동안 4명의 해관의사가 작성한 총 6편의 항구보건보고서가 있고, 총세무사서의 미국인 알렌,52) 영국인 와일스(J. Wiles),53) 영국인 발독(E. H. Baldock),54) 인천해관(Jenchuan Customs, 仁川海關)의 미국인 랜디스(E. B. Landis)가 집필에 참가하였다.55) 알렌의 첫 항구보건보고서는 중국해관의 가이드라인에 따라 각 항목별로 구체적으로 작성하였고 조선의 ‘온돌’과 ‘일꾼’을 지칭하면서 중국식 표현인 ‘kang(캉, 炕)’과 ‘coolie(쿨리, 苦力)’를 사용하였지만, 두 번째 항구보건보고서부터는 이러한 흔적을 찾기 어려우며 이러한 현상은 중국에서 활동한 경험이 없는 와일스, 랜디스, 발독 등의 보고서에서 더욱 뚜렷하게 나타났다. 따라서 알렌의 첫 보고서 외에는 사실상 상하이에서 간행만 되었을 뿐 중국과 전혀 무관하게 오직 조선의 시각과 역사적 맥락 속에서 작성된 것으로 해석된다.
4. 의학연구보고서의 질병 연구와 의학사적 기여
『해관의보』는 항구보건보고서 외에 다양한 국가의 의사가 당대 최신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작성한 심층적인 학술 연구를 게재함으로써 전문성을 높이고 국제적인 의학 지식 공유의 공간으로 기능했다. 『해관의보』의 총 587편의 기고문 중 59편이 바로 이러한 의학 분야의 심층적인 연구인 의학연구보고서로, 이들 연구는 당대 세계 각국의 의사들이 직면했던 의학적 과제들과 질병의 치료 등 분야에서 이루어진 발전의 과정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기록이다. 의학연구보고서의 국가별 저자 구성을 살펴보면 영국인 33편, 미국인 9편, 프랑스인 8편, 독일인 3편, 중국인 1편, 포르투갈인 1편, 네덜란드인 1편, 그리고 나머지 3편은 편집장 제이미슨이 작성한 최신 의학 연구의 소개와 리뷰로 항구보건보고서와 마찬가지로 의학연구보고서 역시 영국인 의사가 작성한 비중이 매우 높았다.
편집장 제이미슨은 두 가지 방식을 활용해서 의학연구보고서의 원고를 모집하였다. 우선 중국해관에 속해 있던 해관의사 혹은 각국에서 활동하는 의료선교사나 군의관이 질병에 대한 새로운 연구나 조사 결과 보고서를 『해관의보』에 직접 투고하여 게재하는 방식이 있었고 59편의 의학연구보고서 중 46편이 이 방식으로 모집된 원고였다. 의학연구보고서는 항구보건보고서와 달리 명확한 가이드라인에 따라 작성해야 하는 규정이 없었고, 중국해관의 해관의사가 아니라도 의사라면 누구나 『해관의보』에 본인의 연구를 투고할 수 있도록 열려있었다.
이렇게 집필자의 직접 투고 방식 외에 편집장 제이미슨이 ‘특별기획(Special Articles)’으로 원고를 의뢰하거나, 당시 의학계에서 이슈가 되었던 의학 연구 성과를 『해관의보』에 전재하는 방식도 있었는데 나머지 13편의 의학연구보고서가 이 방식으로 게재된 것이다. 제이미슨이 의학자에게 원고를 의뢰해서 ‘특별기획’으로 간행된 원고 중에는 1881년에 영국인 하문관의사 패트릭 맨슨에게 의뢰한 필라리아의 순환계로의 이동 주기성에 관한 연구가 있다. 또한, 강해관의사 프랑스인 피숑(L. Pichon)이 자국의 주중 공사관 의관 듀갓에게 원고를 의뢰하여 듀갓이 『해관의보』에 발표한 이질 치료에 있어서의 아일란투스 뿌리 껍질(root bark of Ailanthus)의 약효에 관한 연구가 있다. 이것은 편집장이자 강해관의사였던 제이미슨이 『해관의보』의 내용을 전문화·다양화하기 위해 강해관의 글로벌한 인적자원을 활용하여 영국 이외 국가의 의학자들에게 원고를 의뢰한 사례이다.
편집장 제이미슨이 『해관의보』에 전재한 연구들도 다양한데, 우선 독일 베를린(Berlin)의 의사 블라슈코(A. Blaschko)가 1883년 『비르초우 아카이브(Virchow’s Archiv)』에 발표한 장벽의 교감 신경총(Sympathetic Plexuses of the Intestinal Wall)에 관한 연구를 영문으로 번역하여 전재한 것이 있고, 1880년 네덜란드령 동인도 의학발전협회(Vareeniging tot Bevordering der Genesskundige Wetenschappen in Nederlandsch-Indie)로부터 학술상을 받고 그 협회가 출판한 네덜란드 의사 반 데르 부르크(C. L. van der Burg)의 열대 지역에서 흔히 발견되는 소장에 염증이 생겨 발생하는 흡수 장애 질환인 열대성 스프루(Sprue)에 관한 연구서를 요약 편집한 후 영문으로 번역하여 전재한 것도 있어 영어나 프랑스어로 된 연구가 아닐지라도 당대 중요한 연구를 영어로 번역하여 전재한 사례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1881년 국제의학회의(International Medical Congress of 1881)에서 발표된 논문들의 요약문도 『해관의보』에 게재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1893년에 제이미슨이 편집장의 위치에서 물러난 이후 이러한 작업은 거의 중단되었고, 그 이후 약 20년 동안 주중 프랑스 공사관 군의관 마티뇽이 1897년에 중국 북방지역에서 두창 백신의 면역 지속시간에 관해 프랑스 의학 아카데미(L’Académie de Médecine de Paris)에서 발표한 연구가 『해관의보』에 전재된 것 외에는 더 이상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56) 이렇듯 제이미슨은 『해관의보』에 당대 의사들이 직면했던 질병의 발병 기전을 규명하고 효과적인 치료법을 개발하는 데 도움이 되는 연구들을 지속적으로 소개하고 공유하는 데 노력을 기울였다. 이는 『해관의보』가 단순히 각 지방 항구의 보건 상황을 보고하는 보고서의 성격을 넘어 질병의 연구라는 의사들의 직업 소명을 발휘하여 『해관의보』의 전문성과 학술적 가치를 강화하는 데 일조했다.
질병 연구는 『해관의보』에 게재된 59편의 의학연구보고서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핵심내용이다. 특히 그 당시 특수 질병으로 인식된 감염병에 관한 연구가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한다. 중국해관은 당시 영국 의학계가 상피병, 나병 등 질병을 특수 질병으로 인식한 것을 따라 의학계에서 아직 병리를 정확히 밝히지 못한 감염성이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이들 질병들을 특수 질병으로 인식하였다. 59편의 의학연구보고서에서 가장 많이 다루어진 질병은 상피병으로 패트릭 맨슨이 이 질병 및 필리리아에 관해 12편의 연구를 발표했으며, 나병은 1870년에 제이미슨이 『해관의보』의 항구보건보고서에 관한 작성 가이드를 제시할 때 질병 중 유일하게 별도의 항목으로 지정되어 특별 관리되고 그에 대한 보고가 의무화 되었던 질병으로, 항구보건보고서에서 자주 언급되는 질병일 뿐만 아니라 그에 관한 전문적인 연구들이 『해관의보』의 의학연구보고서에 발표되었다.
상피병은 필라리아증의 일종으로 필라리아 기생충에 감염된 남성 환자는 다리와 음낭 부위가 부어오르고 여성 환자는 다리와 음순 부위가 부어올라 피부가 거칠고 주름져 코끼리 피부(象皮)와 같다고 하여 붙여진 병명으로, 이 질병은 열대지역의 장기(瘴氣)로 인해 나타나는 질병으로 오랜 시간 인식되어 왔고, 1850년대부터 주로 인도에서 활동하던 영국인 의사들이 주축이 되어 연구가 진행되어 오던 질병이었다. 1862년에 인도에서 활동하던 영국인 의사 카터(H. Vandyke Carter)가 상피병과 유미뇨(Chyluria)는 모두 음낭 림프관 정맥류(varicose condition of the scrotal lymphatics)를 동반한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하고(Carter, 1862: 186-193), 1873년 『랜싯(The Lancet)』에 헤마토조아(Hæmatozoa)에 대한 소개가 이루어졌다(Parkes, 1873: 323). 이어 인도 주재 영국인 군의관 루이스(Timothy R. Lewis)가 1875년에 이러한 질병은 모두 선충류 헤마토조아(Nematode Hæmatozoa)에 의해 발병한다는 사실을 밝혀내고,57) 같은 해 『네이처(Nature)』에 루이스의 최신 연구 저서에 대한 리뷰가 게재되었다(Cobbold, 1875: 363). 이러한 시대적 맥락 속에서 패트릭 맨슨은 1871년부터 샤먼의 하문관에서 근무하면서,58) 1875년 『해관의보』에 림프 음낭(Lymph Scrotum)과 상피병은 같은 질병이 서로 다른 형태로 발병한 것이거나 같은 질병이 다른 발병 단계에 보이는 서로 다른 증상에 해당하고, 상피병과 유미뇨도 동속성을 가지며, 림프음낭과 상피병, 유미뇨 모두 필라리아 감염에 의해 일어나는 질병이라는 연구 결론을 내렸다.59) 필라리아가 림프관(lymphatics)에 대량의 국지적인 손상을 주면서 종양이 생기게 되고, 이러한 종양이 림프관을 막히게 하여 림프관의 얇은 부분이 부풀어나면서 파열될 수 있는데 이것이 음낭에서 발생하면 림프음낭 증상으로 나타나고 방광에서 발생하면 유미뇨 증상으로 나타나며 많은 림프물질이 축적되어 쌓이게 되면 이것이 일정 정도의 조직화가 일어나 두텁고 단단한 조직을 형성하여 상피병이 된다는 것이었다.60)
당시 영국 본토와 인도 의학계는 이에 대해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여전히 미아즈마설이 주류를 이루고 있던 의학계에서는 상피병의 원인이 필라리아 기생충 감염이라는 이론에 대해 부정적인 여론이 더 컸고, 필라리아의 감염 경로 등 이 이론을 둘러싼 여러 쟁점들에 답할 수 있는 루이스의 유의미한 후속 연구가 더 이상 진행되지 못했다(李尚仁, 2012: 119-124). 이 시기 프랑스 군의관 라브랑(C. L. Alphonse Laveran)이 말라리아원충(Plasmodium)을 발견하고 이것을 말라리아의 병인으로 지목했을 때에도 당시 인도의 영국인 의사들은 여전히 기후, 토양, 공기 등 환경적인 요인을 말라리아 발병 원인으로 보고 기생충이 질병을 유발한다는 이론에 회의적이었으며, 루이스마저 미아즈마설을 주장하는 독일의 저명한 위생학자 페텐코퍼(Max Joseph von Pettenkofer) 등의 이론을 지지하였다(李尚仁, 2012: 125).
하지만 패트릭 맨슨은 주류 의학계가 미아즈마설을 여전히 고수하고 있고 기생충 감염이 질병을 유발한다는 이론이 받아들여지지 않던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도 상피병의 병리를 파악한 후 필라리아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를 시작하여 1878년 『해관의보』에 필라리아에 관한 연구를 발표하였는데, 이것은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모기가 감염병을 전파한다는 사실을 밝힌 연구였다. 모기가 감염병 전파의 매개체임을 규명하여 새로운 질병 감염 경로를 밝혀낸 이 연구는 패트릭 맨슨 본인에게는 이후 열대의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을 형성할 수 있는 초석을 마련한 계기가 되었다. 이후 패트릭 맨슨은 꾸준히 『해관의보』에 후속 연구를 발표하여 본인의 기존 연구에서의 오류를 보완하고 발전해 나가, 1880년에는 필라리아 유충이 림프관에서 발육한다는 사실을 발견했고,61) 1881년부터 디스토마 링게리(Distoma Ringeri) 등에 관한 일련의 연구를 통해 기생충에 대한 이해를 넓혔으며,62) 1882년에는 필라리아의 혈액 순환에서의 생리학적 주기성을 밝혀냈다.63) 또한, 같은 해 『랜싯』에 필라리아의 주기성은 발열에 의해 혼란이 일어나면 저녁에 관찰되지 않을 수 있는데, 이는 필라리아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일시적으로 활동을 멈춘 상태일 뿐 열이 내려가면 다시 활동을 재개한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함으로써 최신 연구 결과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하고 새로운 해석을 제시하였다(Manson, 1882: 289-290).
한편, 나병은 중국해관에서 특수 질병으로 인식하여 해관의사들이 주요 연구 조사 대상으로 삼은 질병 중 하나였다. 이 당시가 되면 한센(Gerhard A. Hansen)이 나균(Mycobacterium leprae)을 밝혀냈음에도 그 감염 경로에 대해 유전과 전염이라는 두 가지 상반된 주장이 공존하는 상황으로,64) 나병은 여전히 원인과 확산 경로가 명확하게 규명되지 않은 특수한 질병이었다. 영국의 경우 검역법이 1710년에 처음으로 제정된 후 1825년 최종 확정되기까지 나병은 감염병으로 인정된 적이 없으며(진칭, 2022: 134-136), 1883년에 제정된 질병 예방(메트로폴리스)법[Diseases Prevention (Metropolis) Act 1883]과 1889년에 제정된 감염병(신고)법[Infectious Disease (Notification) Act 1889]에도 나병은 포함되지 않았다.65) 영국 의회에서도 감염병 관련 법안에 대한 논의에서 나병은 언급조차 되지 않았고 주로 사회적 해악이나 공공의 적, 정치적인 부패나 도덕적인 타락을 상징하는 비유적인 의미로만 언급될 뿐이었다.66) 하지만 1870년대에 영국정부 수석의료관을 지낸 사이먼은 중세 유럽의 격리를 통한 질병 대응방식을 논하면서 나병 환자들을 비인간적인 추방으로 내몬 종교 의식 만큼 애처로운 기록은 거의 없다고 표현하며 나병에 대한 비의학적인 시각의 문제점을 지적했는데(Simon, 1890: 36), 이 시기 영국 각계의 나병에 대한 이러한 인식 흐름에 따라 영국인 총세무사 하트 역시 나병을 일반 질병이나 콜레라, 페스트, 두창 등 법정 감염병과는 다르게 인식하고 특수 질병으로 분류하여 별도의 의학 보고를 요구한 것으로 보인다.
1860년대에 영국 에든버러대학(University of Edinburgh)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광저우의 월해관 의사 황콴은 1874년 『해관의보』에 미국과 상하이의 나병 사례를 분석한 연구 결과를 발표하여 나병과 이질 사이에는 아무런 직접적인 연관이 없음을 논증하였고, 나병은 발열을 동반한다는 기존의 일반적인 인식을 부정하였다.67) 또한, 건강한 사람이 나병 환자와 동거한 이후 발병하기까지에 대한 다양한 사례를 관찰하여 나병은 환자와의 밀접한 접촉 이후 시간적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 증상이 나타나며 동거를 건강한 사람이 나병에 감염되는 거의 유일한 경로로 지목했다.68) 그 연구 내용 중 나병을 유전적 질환으로 오인한 부분은 있지만, 그가 『해관의보』에 발표한 나병에 관한 연구는 나병에 관한 당시의 인식을 개선하는 데 기여하였다.
나병 연구는 하문관의사 패트릭 맨슨 역시 관심을 가진 분야로, 그는 1881년 『해관의보』에 필라리아와 피부 질환에 관한 연구를 발표하면서 당시 노르웨이 의사 한센이 밝힌 나균에 대해 주의를 덧붙였다. 그는 『미시과학저널(Quarterly Journal of Microscopical Science)』에 등재된 한센의 나병 환자의 결절(leper tubercles)에서 일종의 세균을 발견했다는 연구를 언급하며 본인도 3년 전 나병 환자의 결절에서 한센이 논문에서 언급한 세균과 유사한 세균을 대량으로 배양하는 데 성공하였지만, 연구해 본 결과 이러한 세균을 나병의 발병 원인과 연관있다고 단정 짓기에는 아직 증거가 부족하다고 지적했다.69) 세균은 모든 질병에서 확인되는데 나병 환자의 결절에서 세균이 발견되었다 하여 그것을 나균이라고 명명하기에는 아직 섣부른 결정이며, 여전히 의학 연구의 축적을 통해 다양한 가설들을 입증해나갈 필요가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70) 이 연구 외에도 패트릭 맨슨은 『해관의보』를 통해 나병을 기생충에 의한 감염 질병이라는 가설을 세운 후, 부모의 생리적 특징은 유전될 수 있으나 기생충은 유전되지 않으므로 나병은 유전병이 아닐 것이라는 주장을 제기하였다.71)
이후 중국해관은 프랑스계 병원과 협력하여 나병 연구를 진행하였고, 관련 연구가 『해관의보』에 게재되었다. 이는 1890년부터 중국해관에 프랑스인 해관의사의 비중이 급격하게 늘어난 것과 관련이 있어 보이는데, 1905년에 몽자관의사 바르베지외(Georges Barbézieux)는 윈난의 프랑스계 병원에서 수용한 나병 환자에 대한 조사를 통해 진행된 나병에 관한 연구를 『해관의보』에 발표하였다. 나병의 감염 경로를 두고 유전을 유일한 요인으로 보는 학파와 나병을 전염성 질환으로 보는 학파로 나뉘던 당시 상황에서 바르베지외는 프랑스계 병원에서 치료한 100건에 가까운 샘플 조사를 통해 “나병은 대부분 후천적으로 발생한다(la lèpre est presque toujours acquise)”고 주장하였고 유전, 생리적 결함, 빈곤 등은 나병의 발병에 유리한 환경을 조성할 뿐 감염의 직접적인 원인은 아니라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72) 또한, 그는 프랑스계 병원에 수용된 대부분의 환자가 논농사를 하는 농민이라는 사실에 주목하여 연구한 결과 나병의 직접 원인이 되는 한센이 발견한 나균은 논과 그 일대의 공기 중에 존재할 수도 있다는 가설을 제기하여 당시 의학계의 관심을 받기도 하였다.73) 이렇듯 『해관의보』에 발표된 나병 연구는 영국을 포함한 다양한 국가 출신의 해관의사들이 모여 나병의 발병 원인과 전파 경로 등을 규명하기 위한 다양한 연구를 발표하고 새로운 가설을 제시함으로써 나병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데 일조하였다.
『해관의보』는 중국해관에서 특수 질병이라는 카테고리에 넣었던 감염병 외에도 다양한 감염병의 병리와 치료에 관한 연구를 게재하였다. 1888년에 간행된 『해관의보』 제34호부터 네 개 호에 걸쳐 연속적으로 연재한 제이미슨의 연구가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74) 이는 그가 중국해관에서 약 20년간 해관의사로 일하면서 축적해온 수많은 진찰기록과 의료경험을 바탕으로 두창, 수두(varicella), 성홍열(scarlet fever), 홍역(measles), 발진티푸스(typhus fever) 등 다양한 감염병에 대해 연구한 성과들을 종합하여 집대성한 것이다. 이 연구들을 통해 제이미슨은 중국 개항장의 거류민사회에서 두창의 발병률이 극히 낮은 이유가 백신의 접종과 재접종을 중요시했기 때문이고, 경증 홍역의 발병률은 유럽과 비슷하나 중증 홍역은 유럽과 선명한 차이점을 보여준다는 등 다양한 연구 조사 결과를 발표하였고 이러한 연구 성과는 당시 『인도 메디컬 가젯(The Indian Medical Gazette)』에 소개되었다.75) 발진티푸스에 관해서는 주중 프랑스공사관 군의관 마티뇽이 1897년 『해관의보』에 발표한 연구가 의학계의 관심을 받았는데,76) 해당 연구는 유럽에서 유행하는 발진티푸스의 잠복기가 10일 이상인 것에 비해 베이징에서는 24시간도 채 안 되는 경우도 있어 잠복기가 매우 짧다는 사실, 그리고 유럽에서는 환자의 상태를 육안으로 판단할 수 있을 정도로 외견상 명백한 증상을 보인 반면 베이징의 환자들은 겉으로는 뚜렷한 증상이 드러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는 등 일련의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77) 그 외에도 영국인 강해관의사콕스(Robert H. Cox)는 1898년 『해관의보』에 그가 개발한 지속적인 정맥 주사(continuous intravenous injection)를 통한 콜레라 치료법을 자세하게 소개하였는데,78) 감염 초기 사용시 사망률을 50%에서 15%까지 낮출 수 있다는 그의 연구 결과는 당시 의학계의 관심을 이끌었다.79)
『해관의보』에는 감염병 외에도 다양한 질병에 관한 연구가 게재되었다. 1876년 영국인 하문관의사 뮐러(August Müller)가 다수의 비임 상태의 여성들이 고아를 입양한 후 정신적 의지와 식단 조절을 통해 모유 수유에 성공했다는 사례들을 접한 후 비정상적인 모유 분비(unusual milk secretion)에 관한 연구 결과를 『해관의보』에 원고를 보내자 편집장 제이미슨이 뮐러가 쓴 본문의 거의 2배에 가까운 분량으로 본인의 심리학적 분석을 더하여 발표한 연구가 있다.80) 음식 및 식수와 관련된 질병 역시 당시 중국인들을 위협하던 주요 질병이었는데 미국인 월해관의사 캐로우(Flemming Carrow)가 1880년 『해관의보』에 발표한 결석 및 그 치료법에 관한 연구와 주중 프랑스공사관 군의관 마티뇽이 1898년 『해관의보』에 발표한 식중독에 관한 연구가 대표적이다.81) 이렇듯 『해관의보』는 다양한 국적의 외국인 의사들이 참여하여 감염병 뿐만 아니라 당시 중국에서 발생한 여러 질병에 관한 심도 깊은 연구를 게재했다.
5. 결론
19세기, 영국, 프랑스, 미국 등 다양한 국가의 의사들이 중국해관에 모여 당시 세계 인구의 1/4를 차지하던 청국의 개항장과 그 배후지의 인구가 직면했던 각종 질병에 대한 연구를 기록으로 남겼다. 그들의 기록인 『해관의보』는 무명이었던 청년 의학자 패트릭 맨슨을 비롯해 유럽과 미국 등지의 수많은 청년 의사들이 중국 각지의 해관에서 의료 활동을 하며 확인한 각종 질병의 사례와 각국의 선진 치료법을 담고 있고, 서구 열강의 영향력 아래 있었던 일부 동아시아에서 서양 의학이 적용된 구체적인 사례들까지 담고 있어 19세기 후반 동아시아 지역의 의료·위생 문제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를 제공한다는 측면에서 의학사적 가치가 상당하다.
『랜싯』을 비롯한 서구 의학 저널이 서양 중심적 의학 사례들에 초점을 맞추던 것과 달리, 『해관의보』는 동아시아의 지역적 차원에서 발생하는 의료·위생 문제를 심층적으로 분석하고 이에 대한 해결책을 모색했다는 특수한 위치를 지니고 있었다. 『해관의보』는 서구 열강 국가들이 동아시아 원동 지역 거류민과 토착민의 질병을 비롯한 건강 상태를 파악하고 개항장의 의료·위생 인프라에 대한 정보를 얻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해관의보』에 제시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상수도 시설 확충, 예방접종 실시, 영국 의학 검역의 실시 등 서양 의학을 기반으로 한 다양한 위생 사업들이 추진되어 『해관의보』의 보고서 내용이 해당 지역의 의료·위생 사업의 방향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상당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자료이다. 또한 『해관의보』의 일부 연구에서 드러난 의학적 판단은 당시의 시대적 인식을 뛰어넘는 선진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당시 코흐가 세균을 발견한 이후에도 여전히 미아즈마설이 지배적이었고, 인도의 영국인 의사들은 기생충에 의한 질병 발생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고 있던 보수적인 시대적 배경 속에서도 『해관의보』에는 세균설에 입각한 나병 연구와 기생충이 일부 질병의 병인이 될 수 있다는 새로운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진행한 진보적인 연구들이 게재되었다. 이러한 연구 성과들은 프랑스의 동남아와 아프리카 식민지나 영국의 동남아와 인도 식민지 등 열대지역에서도 이루지 못한 열대의학과 같은 새로운 학문의 개척으로 이어짐으로써 인류의 감염병 예방과 대응에 크게 기여했다는 측면에서 『해관의보』의 연구들은 매우 의미 있는 역사적 기록이다.
본 연구는 중국해관이 상하이에서 출발해서 점차 전국으로 외연을 확장해나가는 과정에서 흡수한 다양한 국적의 의사들이 작성한 『해관의보』의 항구보건 보고서의 집필 의사들의 국적과 주요 연구 경향, 그들이 연구한 해관 지역 간의 상관관계를 분석한 결과 유의미한 연관성이 있음을 밝혀내었다. 『해관의보』의 항구보건보고서는 그 지역사회의 의료·위생 사업 방향과 직결된 것으로 그 지역에서 영향력이 강한 국가의 해관의사가 항구보건보고서를 작성했으며, 그 결과 각 지방의 항구보건보고서의 내용에는 영국 이외 미국, 프랑스, 포르투갈 등서로 다른 국적의 의사들이 본국에서 받은 의학 교육체계 속에서 확립한 본인들의 의학적 관점과 본국의 의료정책에 대한 입장 등이 반영되어 있다는 사실을 밝힘으로써 『해관의보』의 역사적 맥락에 대한 이해를 더했다는 점에서 연구사적 가치가 있다.
또한, 본 연구는 『해관의보』에 수록되어 있는 항구보건보고서 외에도 당대 세계 각국의 의사들이 직면했던 의학적 과제를 해결하고 치료법을 발전시켜간 과정을 확인할 수 있는 심층적인 학술 연구인 의학연구보고서들에 주목하여 『해관의보』가 영국 이외 국가 연구자들의 의학 성과까지 수용해가는 과정을 분석하였다. 그 과정에서 패트릭 맨슨이 13년간 중국해관에서 일하면서 『해관의보』에 필라리아에 관한 많은 연구의 게재를 통해 본인의 의학 지식을 발전시켜 감으로써 인류가 역사상 처음으로 모기가 감염병을 전파한다는 사실을 밝혀내고 이것이 이후 열대의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을 형성할 수 있는 초석이 되기도 한 사실을 비롯한 기타 많은 의학연구보고서들에 집중하였다. 이를 통해 『해관의보』가 당시 의학계에서 이슈가 되었던 의학 연구 성과를 지속적으로 소개하고 공유하는 장으로 기능하며 단순히 각 지방 항구의 보건 상황을 보고하는 보고서의 성격을 넘어, 전문성과 학술적 가치를 지닌 중요한 간행물로서 당대 의학계의 지식 교류와 발전에 기여한 면모를 발견함으로써 『해관의보』의 사료적 가치를 확대했다는 점에서 본 연구는 학술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본 연구는 『해관의보』 사업이 당시 세계적인 의학 성과로 인정받은 의학자 패트릭 맨슨이 중국해관에서 퇴직하고, 편집장 제이미슨이 건강 악화로 편집 업무를 계속해서 감당할 수 없는 상황, 그리고 총세무사 로버트 하트의 지속적인 해관업무 분야의 확대로 인한 의료·위생 사업 비중의 감소 등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1890년대에 들어서 가파르게 하락하기 시작하여 『해관의보』 사업이 1911년에 제80호를 끝으로 종료된 것을 기점으로 연구도 마무리하였다. 하지만 해관의사들의 의학 탐구에 대한 열정과 환경과 위생 상태의 개선을 위한 노력은 멈추지 않았으며 그들은 1911년부터 또 다시 『박의회보(博醫會報)』라는 새로운 장을 찾아 1931년까지 지속해갔다. 이에 필자는 본 연구의 한계를 극복하고 본 연구를 더욱 발전시키기 위하여 이에 대한 후속연구를 향후 과제로 삼고자 한다.
Notes
‘Customs Surgeon’은 중국해관과 공식 계약을 맺고 근무하는 의사 자격을 갖춘 공무원의 공식 직함을 이르는 고유명사이고, 공식적인 한문 번역은 ‘海關醫員(해관의원)’이다. 그리고 해관의 ‘Customs Medical Officer’란 Customs Surgeon을 포함한 해관의 의료·위생 담당자를 뜻하는 일반명사이다. 본고는 이러한 구분을 두지 않고 해관에서 의사로 일하는 근무자를 모두 ‘해관의사’로 번역한다.
이하 서양인 인명의 한글번역은 모두 성만 적는다. 다만 본고에 같은 성의 인물이 2인 이상 등장할 경우 이름과 성을 함께 적는다.
상하이의 영국조계는 1863년에 미국조계(Shanghai American Settlement)와 합병되어 공공조계(Shanghai International Settlement)의 일부가 되고, 강해관도 공공조계에 위치하게 된다.
Customs Gazette, Nos. 10~33; Medical Reports, Nos. 4~80 참조.
대만학자 리상런(李尚仁)이 2012년에 출판한 해당 연구서는 1999년 그가 임페리얼 칼리지 런던(Imperial College London)에서 발표한 박사논문(British Imperial Medicine in Late Nineteenth-century China and the Early Career of Patrick Manson)의 번역서가 아니라 그 이후 축적된 연구 성과를 보완하여 발전시킨 버전이다(Li, 1999; 2012).
『美國哈佛大學圖書館藏未刊中國舊海關史料』 제200권, 4-5쪽; 『海關醫報』 제1권,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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國家圖書館 編, 『海關醫報』 (北京: 國家圖書館出版社, 2016).
경희대학교 중앙도서관 중앙자료실, 등록번호: K10606258~K10606267, 청구기호: 362.10952J32ㅎ vols. 1~10.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고문헌자료실, 구장본 서양서, 바코드: 11000080192, 청구기호: Q450 98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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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b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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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5년 10월에 총세무사 로버트 하트의 직속 부하 미국인 메릴(Henry F. Merrill)이 상하이 강해관 현직 해관원의 신분으로 조선에 파견되어 조선해관 제2대 총세무사를 겸직하게 되면서 강해관과 조선해관은 처음으로 직접적인 관계를 맺게 되는 데(진칭, 2020: 1035), 이 직후 조선해관도 항구보건보고서를 작성하기 시작했고 모두 『해관의보』에 수록된 형태로 상하이에서 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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