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후기의 주요 약물과 그 존재양상 - 돝의 미나리(시호)·생강의 생산과 유통 -
Important Drugs and Its Patterns during the Late Goryeo Dynasty -Obtain and distribution of Bupleuri Radix (柴胡) and Ginger(生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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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This article deals with drugs obtain and distribution during the Goryeo Dynasty. In particular, I analyzed the case of ‘Bupleuri Radix(柴胡)’, which corresponds to ‘dot-ui minali’ as Idu(吏讀), an archaic Korean notation, and Ginger(生薑), which was intentionally introduced and cultivated in Goryeo.
Drugs of the Goryeo Dynasty can be classified into 5 types. Drugs that use the Chinese character name as the name of Goryeo were type A, drugs that correspond 1:1 with the archaic Korean notation to the Chinese character name were type B, and drugs that have the Chinese character name translated directly into the Korean name were type C. And although it were originally the foreign drugs, the drugs cultivated in Goryeo were Type D, and the drugs imported from foreign countries were Type E. Among these, types B and D are particularly interesting. Bupleuri Radix and Ginger discussed in this article were representative examples of type B and D respectively.
Looking overall, type B had the highest proportion, followed by type A. Type E was the next most common. On the other hand, type C and D were relatively small. However, regardless of the high or low proportion, these types coexisted and constituted the therapeutic drugs of the Goryeo Dynasty. In conclusion, during the Goryeo Dynasty, interest and use of local drugs, namely Hyangjae(鄕材), greatly expanded.
1. 머리말
고려시대에는 다양한 약물들이 존재하였다. 약물에 대한 가장 자세한 정보를 담고 있는 자료는 의서(醫書)이다. 하지만 현재 알려져 있는 고려시대 의서는 종합의서나 본초서(本草書)류가 아니라 방서(方書)류이다. 처방에 들어가는 약물들이 건조하게 나열되어 있으며, 채취와 가공 방법이 일부 덧붙여져 있을 뿐이다. 한편 사서(史書)와 문집(文集)에도 약물 자료들이 남아 있다. 고려 당대의 약물에 대한 구체적인 묘사라는 장점이 있으나, 기록된 약물의 숫자가 절대적으로 적은 데다 단편적이다.
자료의 부족으로 인하여 그동안의 고려시대 약물 연구는 약물 명칭[藥名]을 열거하거나, 인삼처럼 중요한 약물들의 공납이나 수출을 언급하는 데 그쳤다.1) 그러나 고려시대 약물의 범주와 활용양상은 각양각색이었으므로, 모든 약물이 일괄적으로 재배 혹은 채취 형식으로 생산된 후에, 특정된 공납(貢納) 절차를 거쳐 특정 집단에게만 공급되거나 수출되는 방식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따라서 의서 자료에서는, 약명(藥名)의 반복처럼 보이더라도 그러한 처방들을 기술한 고려의 의학자들이나 의서를 편찬한 고려 정부를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아울러 사서·문집 자료에서는, 약물의 수취나 유통 기록 너머에 있는 약물 생산자나 소비자에게 눈을 돌릴 필요가 있다. 요컨대 약물 연구는 약물을 둘러싼 고려의 사람들을 이해하는 데 주안을 두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고려시대의 약물 목록을 작성함으로써 약물들의 분포를 조망해보아야 한다. 또한 부족한 사료의 ‘양(量)’을 보완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약물 사례의 축적도 요구된다. 단편적인 기록일망정 개별 약물들의 이야기들로 서로를 지탱시킴으로써 고려의 약물 생산과 유통양상을 다시 재구성할 수 있어서이다. 이 글에서 다룰 내용이다.
본문에서는 우선 고려 사회에서 중시한 약물들을 정리하려고 한다. 고려시대의 『신집어의촬요방』과 『향약구급방』에서 공통적으로 활용하는 약물들을 비교하고, 이 과정에서 조선초의 『향약채취월령』까지 다룰 예정이다. 약물은 그 생산지에 따라서 크게 자국 약물과 외국 약물로 양분된다. 하지만 외국 약물이었더라도 국내로 유입되어 재배에 성공하는 도입약물도 있으므로, 자국 약물·외국 약물·도입약물이라는 3가지로 분류할 수도 있다. 그런데 수입된 탓에 유통의 흔적만을 보여주는 외국 약물보다는, 생산과 유통을 모두 살필 수 있는 자국 약물이 중요함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여기에서 자국 약물의 향명(鄕名, 고유어) 부여 방식에 착안하면 다시 3가지로 세분할 수가 있다. 따라서 자국 약물 3가지에 도입 약물·외국 약물을 더하면 5가지로 범주화할 수 있다.
이어서 5가지 유형 가운데 시호(柴胡, 돝의 미나리)와 생강(生薑)의 생산과 유통방식을 논의하려고 한다. 시호는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유형의 대표 사례이다. 그리고 도입약물의 토착화를 보여주는 생강은 고려 정부의 약물 확보에 대한 강한 의지를 상징하는 사례가 된다. 이들 약물의 사례 연구는 향약(鄕藥)의 개발 및 전개 과정에 대한 실증 작업으로서 고려시대의 의술 수준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이다. 또한 국가체제의 성격을 탐구하는 데 있어서도 약물의 생산과 유통방식은 유용한 단서가 된다.
이 글에서 약물 생산은 채취, 재배, 가공 등의 방식을 통해서 주변의 물질을 의료용 약물로 전환시키는 일련의 과정이다. 그리고 약물 유통이란 공납, 분급, 증여, 매매, 소비 등의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행위체 사이의 약물 이동이다. 여기에서 행위체란 중앙정부·지방관·약점사 등의 약물 관리자, 채취와 재배를 담당하는 일반 백성 등의 약물 생산자, 의료인과 환자를 아우르는 약물 소비자를 가리킨다.
2. 고려후기의 주요 약물과 그 유형
1) 고려후기-조선초기 의서의 공통 약물
현재는 고려시대의 처방전 실물이나 구체적인 치료 약물의 목록이 제대로 남아 있지 않다. 고려시대 약물들의 실체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고려의 의서들에 등장하는 처방 약물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고려의 의서 가운데 통계적으로 유의미하게 분석할 수 있는 것은 『신집어의촬요방(新集御醫撮要方)』이다. 이 의서는 고종 13년(1226)에 간행되었고 대체로 지배층이 주된 치료 대상이었다.2) 현재 『신집어의촬요방』의 135개 처방이 『의방유취』 등에 인용된 형식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향약구급방(鄕藥救急方)』은, 조선 태종 17년(1417)의 중간본(重刊本)이기는 하지만 유일하게 책자 형태로 남아 있는 고려시대의 의서이다. 고려 고종대 이후에 편찬된 『향약구급방』은 대체로 일반 백성들을 치료 대상으로 삼았다(이경록, 2010a: 286, 301).
『신집어의촬요방』의 135개 처방을 조사해보면 명칭만 남아 있는 처방이 17개이고, 약물이 기재된 처방이 118개이다.3) 118개 처방에서 등장하는 총 약물수는 1,022개이지만, 중복되는 약물들을 빼면 256종의 약물이 사용되었다. 그리고 『향약구급방』 본문에서는 약물이 기재된 526개의 처방을 찾을 수가 있는데, 앞과 마찬가지로 중복되는 약물들을 빼면 331종의 약물이 등장한다(이경록, 2010a: 367-371). 다음 약물들은 『신집어의촬요방』과 『향약구급방』에서 공통으로 처방된 약물들을 정리한 것이다. 따라서 아래 목록은 고려후기에 신분의 고하에 상관없이 환자들이 흔히 처방받던 약물들이다.
감초(甘草), 견우자(牽牛子), 결명자(決明子), 경미(粳米), 계란(雞卵), 고삼(苦蔘), 괄루(括蔞), 괴(槐), 길경(桔梗), 나미(糯米), 나복자(蘿蔔子), 난발(亂髮), 납밀(蠟蜜), 낭아(狼牙), 녹각(鹿角), 당귀(當歸), 대극(大戟), 도인(桃仁), 마인(麻仁), 맥문동(麥門冬), 면(麵), 모려(牡蠣), 밀(蜜), 박하(薄荷), 반하(半夏), 방풍(防風), 백렴(白斂), 백반(白礬), 백작약(白芍藥), 복령(茯苓), 부자(附子), 비상(砒霜), 사상자(蛇床子), 사향(麝香), 삼릉(三稜), 상근백피(桑根白皮), 상륙(商陸), 상산(常山), 생강(生薑), 서각(犀角), 석고(石膏), 석창포(石菖蒲), 세신(細辛), 송(松), 수(酥), 승마(升麻), 시호(柴胡), 아교(阿膠), 애(艾), 염(鹽), 오수유(吳茱萸), 왕과(王瓜), 우슬(牛膝), 욱리인(郁李仁), 위피(蝟皮), 유(油), 유지(柳枝), 자완(紫菀), 저지(猪脂), 정력자(葶藶子), 조협(皂莢), 지각(枳殼), 지유(地楡), 지황(地黃), 질려자(蒺藜子), 차전자(車前子), 천궁(川芎), 천남성(天南星), 초(醋), 총(葱), 출(朮), 치자(梔子), 택칠(澤漆), 토사자(兔絲子), 통초(通草), 파두(巴豆), 포황(蒲黃), 피마자(蓖麻子), 행인(杏仁), 현삼(玄蔘), 형개(荊芥), 호도(胡桃), 황금(黃芩), 황기(黃芪), 황단(黃丹), 황벽(黃蘗), 흑두(黑豆)
『신집어의촬요방』과 『향약구급방』 본문에서 공통되는 약물은 위와 같이 87종이다. 위 목록에서는 동일한 약물을 하나로 묶었다. 예를 들어 백출(白朮)과 창출(蒼朮)은 임상에서는 별개의 약물로 취급하지만, 원래는 동일한 식물이므로 여기에서는 ‘출(朮)’로 묶었다. 표제어 역시 가급적 요즘 사용하는 약명으로 통일하였다. 이 87종이 고려후기에 중시된 약물들이었다.
그런데 중간본 『향약구급방』에는 「방중향약목초부(方中鄕藥目草部)」라는 자료가 부록으로 들어있다. 여말선초에 편찬된 「방중향약목초부」에서는 『향약구급방』의 처방에 들어 있는 ‘토산 약물 목록’을 정리하였다. 고려에서 향재(鄕材)라고 판단하고 있던 약물들의 목록인 셈이다.4) 이 「방중향약목초부」에서는 약물 180종을 표제어로 삼아서 그 향명(鄕名)을 비롯하여 채취 시기나 약물의 특성 등을 서술하였다. 특히 180종의 대부분에는 고려의 고유어가 이두(吏讀)로 표기되어 있어서 중요하다. 따라서 위의 87종 가운데 「방중향약목초부」에서도 공통적으로 기재된 약물들이 궁금해진다. 이 공통된 약물들은 60종인데, 바로 위의 목록에서 밑줄을 그어 표시한 것들이다.
여말선초에서 더 내려가면 조선 세종 13년(1431)에 간행된 『향약채취월령(鄕藥採取月令)』을 만나게 된다.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향약채취월령』은 토산 약물들의 향명과 채취 시기 등을 간결하게 정리한 일종의 약물학 사전이었다. 현존본 『향약채취월령』에는 위유(萎蕤)를 비롯한 154종이 수록되어 있다.5) 앞의 약물 87종 가운데 『향약채취월령』에서도 다시 공통으로 수록한 것을 조사해보면 다음과 같이 약물 35종의 목록이 만들어진다.
결명자, 고삼, 괄루, 괴, 길경, 당귀, 대극, 맥문동, 모려, 박하, 반하, 백렴, 사상자, 삼릉, 상륙, 석창포, 세신, 승마, 왕과, 욱리인, 위피, 정력자, 지유, 질려자, 천궁, 천남성, 치자, 택칠, 토사자, 통초, 피마자, 현삼, 호도, 황금, 황기
이 35종이 고려 고종 13년(1226) 이래로 조선 세종 13년(1431)까지 흔하게 처방되었던 약물들, 다시 말하면 환자들과 의료인들이 필수적이라고 간주하였던 약물들 목록이다. 그리고 위에서 다룬 4종의 자료들(『신집어의촬요방』, 『향약구급방』 본문, 『향약구급방』 「방중향약목초부」, 『향약채취월령』)에 등장하는 약물들을 표로 정리하면 <부록 1>과 같다.
물론 위의 약물 87종 혹은 35종이 당시의 중요한 약물을 모두 망라했다고 볼 수는 없고, 토산 약물을 완전히 포괄했다고 단언할 수도 없다. 예컨대 87종 약물에서 빠져있는 인삼은 고대 이래 한반도에서 자생한 토산 약물이자 중요하게 취급된 약물이었다. 하지만 인삼은 『신집어의촬요방』과 『향약구급방』 「방중향약목초부」에만 수록되어 있고, 『향약구급방』 본문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향약구급방』 본문에서 수록하지 않은 이유는 인삼이 고려의 일반 백성들이 복용하기에는 고가약물이어서였다.
반면 인삼에 못지 않게 동아시아의학을 대표하는 감초는 87종 약물 목록에는 들어있으나 35종 약물 목록에서는 빠져있다. 즉 감초는 『신집어의촬요방』과 『향약구급방』 본문에 수록되어 있고, 『향약구급방』 「방중향약목초부」와 『향약채취월령』에는 누락되어 있다. 위의 ‘향약’ 목록에 감초가 빠져있는 이유는 분명하다. 조선초까지도 감초는 한반도에서 재배할 수 없었던 외국 식물이었기 때문이다. 감초의 토산화가 성공한 것은 조선 성종대에 접어들어서였다.6)
이처럼 인삼은 약물에 대한 접근성의 문제로, 감초는 외국 식물이어서 위의 목록에서 누락되었다. 이러한 부분들을 감안하면 위의 목록은 당시에 중시되던 약물들 가운데 최소한의 범위라고 판단할 수 있다. 아울러 약물들은 각자 자신들의 역사를 지니고 있으므로, 목록 작성을 넘어서 이 약물들을 그 특성에 따라 범주화할 필요가 제기된다. 이제 고려시대 약물들의 유형에 대해서 살펴보자.
2) 고려후기 약물들의 5가지 유형
앞서 제시한 87종의 약물 목록을 읽다 보면 고려에서도 당명(唐名)을 그대로 사용하는 약물들이 꽤 많이 눈에 띈다. 중국식 명칭을 그대로 수용한 경우이다. 견우자(牽牛子), 계란(雞卵), 난발(亂髮), 납밀(蠟蜜) 등등은 지금도 그 명칭을 읽으면 곧바로 이해되는 것들로서, 고려에서도 고유어 표기인 이두(吏讀)를 별도로 병기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약물들이었다.
특히 여기에는 식재료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경미(粳米), 계란(雞卵), 납밀(蠟蜜), 도인(桃仁), 밀(蜜), 애(艾), 염(鹽), 유(油), 초(醋), 총(葱), 행인(杏仁) 등이다. 일상에서 친숙한 명칭들이므로 약물로 사용할 때도 그 명칭을 그대로 쓰면 되었던 것이다. 원래부터 치료용으로 쓰이던 약물들의 경우에도 오랫동안 사용하여 친숙해졌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였다. 위의 목록에는 빠져있으나, 인삼(人蔘)도 향명과 당명이 일치된 이 유형에 포함된다.
하지만 <부록 1>에서 확인되듯이 87종의 약물 목록 가운데 거의 절반에 해당하는 유형은 고려와 조선의 향명을 이두로 표기한 것들이다.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유형이다. 구체적으로 87종 가운데 앞부분에 위치한 약물들의 당명과 향명 표기법을 『향약구급방』 「방중향약목초부」에서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결명자를 살펴보자면, 『신집어의촬요방』과 『향약구급방』에서는 각각 허로(虛勞)로 눈이 어두워진 증후와 여러 해 동안 실명한 청맹(青盲)을 치료하기 위해 당명으로 표기된 ‘결명자’를 처방하였다.12) 이에 대해 「방중향약목초부」에서는 ‘민간에서는 되팥[狄小豆]이라고 부른다’라고 향명을 덧붙였다. 고려의 일반인들이 ‘되팥’이라고 부르는 식물이 바로 ‘결명자’라는 설명이었다.
또한 길경(桔梗)-도라지의 사례는 지금까지도 병용하여 쓰이는 표현이다. 향명인 ‘도라지’가 당명인 ‘길경’에 해당한다는 설명에 따라, 『향약구급방』에서는 ‘갑작스런 객오(客忤)로 인하여 죽은 사람처럼 말을 못하는 경우’와 ‘후폐(喉閉)와 독기(毒氣) 치료’에 도라지(길경)를 사용했던 것이다.13) 뒤에서 본격적으로 다루게 될 시호(柴胡)의 경우에는 향명으로 ‘돝의 미나리[猪矣水乃立, 믈나리]’ 혹은 ‘묏미나리[山叱水乃立, 묏믈나리]’라고 표기하였다.
한편 약물 87종에서 향명이 기입되어 있는 것들을 읽어가다보면 약간 특이한 경우들이 눈에 띈다. 당명을 그대로 직역(直譯)한 향명들이었다. 「방중향약목초부」의 표기법을 기준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낭아(狼牙)는 ‘이리의 이빨’로, 우슬(牛膝)은 ‘쇠무릎풀’로, 위피(猬皮)는 ‘고슴도치의 가죽’으로 향명을 부여받았다. 원래 고려에 ‘이리의 이빨’이라고 부르고 있던 식물이 있었을 리는 없다. ‘낭아’라는 약물과 동일한 자생식물을 고려 사람들이 찾아서 ‘이리의 이빨’이라고 명명(命名)하였을 것이다. ‘쇠무릎풀’이라는 식물과 ‘고슴도치의 가죽’이라는 동물도 약용(藥用)하기 위해서 일부러 약물 명칭[藥名]을 붙인 것이었다. 이 또한 별개의 유형으로 간주할 만하다.
이상과 같이 고려의 토산 약물들은 향명 표기법을 기준으로 삼아 3가지 유형으로 범주화할 수 있다. 이 글에서는 당명(唐名)을 그대로 향명(鄕名)으로 습용(襲用)한 견우자(牽牛子) 같은 약물들을 A유형이라고 부르겠다. 그리고 이두(吏讀)로 표기한 향명을 당명과 1:1로 대응시키는 결명자(決明子, 되팥) 같은 약물들을 B유형이라고 부르고, 당명을 그대로 향명으로 번역한 낭아(狼牙, 이리의 이빨) 같은 약물들을 C유형이라고 부르겠다. 이것들이 고려시대의 토산 약물인 향재(鄕材)의 유형들인데, 당시의 향재들을 수합한 자료가 앞서 다룬 『향약구급방』 「방중향약목초부」이다.
따라서 『향약구급방』 「방중향약목초부」의 약물 180종 전체에 대해서도 다시 3가지 유형으로 분류해볼 수 있다. 다음 <표 1>이 그 결과이다.
180종은 A유형 62종(34.4%), B유형 108종(60.0%), C유형 10종(5.6%)으로 구성된다.17) 이것이 바로 고려시대 토산 약물들의 유형별 분포와 비중이었다. 그리고 B유형의 비중이 가장 높다는 점은 <표 1>에서 쉽게 확인이 된다.
한편 앞서 제시한 87종 약물 가운데 맨 앞에 있는 것이 감초(甘草)이다. 그런데 고려시대까지만 하더라도 감초는 완전히 수입해야 하는 약물이었고, 조선초에야 토산화에 뛰어든다.18) 감초에 앞서 토산화에 착수했던 고려시대의 사례로는 생강(生薑)을 거론할 수 있다. 둘 다 동아시아의학에서 빈용(頻用)되고 필수적인 약물이기도 하다. 재배 약물의 종류를 늘리려는 적극적인 움직임이어서 주목할 수밖에 없는 유형이다. 조선전기에 토산화를 적극적으로 시도하다가 끝내 실패한 호초(胡椒)도 동일한 유형에 해당한다. 이 글에서는 생강처럼 토산화를 시도하는 도입약물들을 편의상 D유형으로 분류하겠다.
그런데 위의 87종 목록에는 빠져있는 약물들도 고려시대 의료를 구성하였다. 즉 『신집어의촬요방』의 약물 256종과 『향약구급방』의 약물 331종에 포함되어 있는 침향(沈香), 정향(丁香), 유향(乳香), 빈랑(檳榔), 육계(肉桂) 등등이다. 기후가 맞지 않아서 한반도에서는 재배가 불가능하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것들은 수입하는 약물들이므로 고려에서는 생산의 흔적이 전혀 없다. 약물 유통만이 존재하는 경우이지만, 실제로 처방되었으므로 고려시대의 실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빠뜨릴 수 없는 유형들이다. 이러한 수입 약물들은 E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다.
3. 돝의 미나리(시호)와 생강의 사례
앞 절에서는 고려시대의 약물들을 5개 유형으로 범주화하였다. B유형이 가장 많고, A유형이 그 뒤를 이으며, E유형도 제법 많다. 반면 C유형이나 D유형은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다.
이제 유형별로 개별 사례를 통해 고려시대 약물들의 존재양상과 그 특징을 재구성해볼 차례이다. 머리말에서 예고했듯이 B유형의 대표격인 돝의 미나리(시호)와 D유형의 전형인 생강에 집중하여 고려시대 약물의 생산과 유통방식을 분석하려고 한다. 시호와 생강은 의서(醫書) 외에도 사서(史書)와 지리지(地理志)에 걸쳐 몇 건의 기록이 존재하는데, 다른 약물들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자료 상황이 나은 편이라는 점도 감안하였다.
1) 시호(柴胡)라 불리게 된 돝의 미나리[猪矣水乃立]
시호는 산형과에 속하는 여러해살이풀이다. 시호는 당명(唐名)을 이두(吏讀) 형식의 향명(鄕名)으로 표기한 B유형에 해당한다. 『향약구급방』 본문을 살펴보면 시호로 학질(瘧疾)을 치료한다는 기록이 나온다. 뿐만 아니라 『향약구급방』 「방중향약목초부」에도 시호에 관한 언급이 있다.
위 인용문에서는 중국산 시호에 상응하는 고려의 식물 명칭들이 제시되었다. 이 가운데 청옥채(靑玉菜)나 초채(椒菜)는 한자식으로 표현한 식물 명칭이고(이은규, 2022: 514), 실제로 고려의 민간에서는 이 시호를 ‘돝의 미나리’나 ‘묏미나리’라는 고유어로 불렀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이전의 시호 기록을 찾아볼 필요가 있다. 가장 오래된 시호 기록은 고려 문종 33년(1079)에 나온다. 송에서 보내온 약물 104종의 명칭 가운데 ‘은주시호(銀州柴胡)’가 보인다.21) 중국 대륙의 은주지방에서 산출되는 시호를 고려에 보내왔던 것이다. 이 시호는 문종의 풍비(風痺)를 치료하기 위한 약물이었지만, 고려의 의관들로서는 중국산 시호 실물을 관찰하는 계기이기도 하였다. 반면 문종때까지 ‘돝의 미나리’가 고유 약물로 사용된 기록은 없다.
당연히 고려의 의학자들로서는 궁금증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중국산 시호와 동일한 식물이 고려에도 존재하는가?, 혹은 존재하지 않는가?라는 의문이다. 인용문에도 나와있지만 시호는 주로 뿌리를 햇볕에 건조시켜서 약용한다. 송에서도 시호 뿌리 부분만을 고려에 보내왔을 것이다. 약용하는 시호의 모습은 <그림 1>과 같다. 그런데 이 시호 뿌리만 보고서 어떤 식물인지를 판단하기는 쉽지 않다. 송의 ‘시호’가 곧 고려의 ‘돝의 미나리’라고 일반 백성들이 알아채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이 작업은 고려의 의학자들이 담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고려의 의학자들은 여러 토산 식물 가운데에서 시호에 상응하는 것을 어떻게 식별해낼 수 있었을까?
다행스럽게도 시호의 전체 모습을 그려놓은 본초서가 있었다. 송(宋)의 당신미(唐愼微)가 편찬한 『증류본초(證類本草)』이다. 『증류본초』의 시호 항목에는 중국 각지에서 산출되는 시호 그림과 함께 시호의 주치(主治, 치료하는 증후)까지 설명되어 있었다(<그림 2>). 시호라는 약물을 이해하는 데는 금상첨화였다. 『증류본초』를 검토한 고려의 의학자들은 시호가 고려의 ‘돝의 미나리’·‘묏미나리’와 같다고 판단하였다. 중국 의학의 본초학과 고려의 자생식물들에 모두 밝았던 중앙정부에서 재직하던 의관들의 노력이었을 것이다.
시호 지식과 관련해서는 의종대에 흥미로운 기록이 남아 있다. 의종 11년(1157)에 김유립은 왕명으로 울릉도를 조사하였다. 그는 울릉도의 자연환경에 대한 설명에 이어서 시호(柴胡), 고본(藁本)[蒿本], 석남초(石南草) 등이 산출된다고 보고하였다.
국왕이 울릉의 땅이 넓고 토지가 비옥하여 옛날에 주현(州縣)이 있었고 백성이 거주할만하다고 들어 명주도감창(溟州道監倉) 김유립(金柔立)을 보내어 가서 살피도록 하였다. 김유립은 보고하기를, “…… 시호·고본·석남초가 많이 자라지만 바위가 많아 백성들이 살기에는 좋지 않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따라 그 논의가 이어지지 않았다.22)
시호·고본·석남초는 모두 약물이다. 이 기록은 고려의 토산 약물과 관련된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제대로 주목하지 않았다.
당시 상황을 재현하자면, 이미 인종 19년(1141)에 명주도감창사가 울릉도에 사람을 보내서 특이한 과실 씨와 나뭇잎을 채취하여 가져오도록 한 적이 있었다.23) 이로부터 16년이 지났다. 의종은 선구보(善救寶)를 설치하여 약물을 모아둘 정도로 의료에 관심이 많은 국왕이었는데,24) 약물의 확보에 신경을 쓰고 있어서 김유립에게 다시 확인하도록 지시했을 것이다. 김유립은 약물학 지식을 갖춘 사람이었다. 울릉도에서 조사하던 그는 항간에서 부르는 ‘돝의 미나리’를 보자 ‘시호’를 발견했다고 중앙정부에 보고한 것이었다.
이처럼 의종대 무렵, 다시 말하면 늦어도 12세기까지는 시호=돝의 미나리라는 점을 이미 알고 있었다. 고려 의학자들은 시호만이 아니라 고본·석남초 등의 형태를 위시하여 그 채취 및 가공 방법을 숙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의관 신분이 아닌 감창사(監倉使) 김유립이 약물들을 판별할 수 있었다면, 울릉도 외의 다른 지역에서도 이미 중국산 시호·고본·석남초에 상응하는 고려산 토산 약물들이 생산되고 있었다고 이해해야 한다.
시호는 고려에서 계속 사용되었다. 『신집어의촬요방』에서는 시호가 3개 처방에서 등장한다. 모든 풍병을 치료하는 우황청심원(牛黃淸心圓),25) 장부가 차가운 숙질(宿疾)을 비롯하여 학질과 돌림병[時氣] 등을 치료하는 온백환(溫白丸),26) 풍기가 몰린 데와 오랜 소화불량 등을 치료하는 칠선환(七宣丸)이었다.27)
이어서 시호의 주치(主治)로 『향약구급방』 본문에서 학질을 언급하였고, 「방중향약목초부」에서 상한병을 언급하였다는 것은 앞서 살핀대로이다. 여말선초의 또 다른 의서인 『향약간이방(鄕藥簡易方)』에서는 어린이 비위(脾胃)의 기가 고르지 못하여 음식을 먹기 싫어하는 증상에 시호를 사용하였다.28)
조선에 들어서도 마찬가지였다. 현존하는 『향약제생집성방(鄕藥濟生集成方)』 (정종 1년, 1399)에서는 적취심복창만(積聚心腹脹滿), 상천중만(上喘中滿), 오장풍열안(五藏風熱眼) 등에 시호가 4회 처방되었다.29) 이어서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세종 15년, 1433)에서는 상한(傷寒)으로 인한 유행병에 시호승마탕(柴胡升麻湯)을 처방하는 등30) 다방면으로 시호를 사용하였는데, 향약본초개론(鄕藥本草槪論)과 향약본초각론(鄕藥本草各論)에서도 시호는 토산 약물로서 설명이 되고 있었다.31)
그러나 외래약물인 ‘시호’가 정말로 한반도에서 자생하는 ‘돝의 미나리’에 해당하는가에 대한 확인 과정이 필요하였다. ‘돝의 미나리’는 ‘시호’와의 형태 유사성을 넘어서 그 약성(藥性)까지 인정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활약한 이가 노중례(盧仲禮)이다. 세종 5년(1423)에 중국으로 파견된 노중례는 향재 62종을 가져가서 명(明)의 의학자들과 토론을 벌였다.32) 이때 시호를 비롯하여 누로·목통·위령선·백렴·고본 등 6종은 당재(唐材)와 동일하다는 것을 인정받았으며, 단삼을 비롯한 8종은 당재와 불일치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노중례가 수행한 업무를 정리하면 다음의 <표 2>와 같다. 노중례는 ‘돝의 미나리’라는 토산 약물을 가져가서 중국의 의학자들과 토론하여 ‘시호’라고 인정을 받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한반도 내에서 ‘돝의 미나리’의 산출지가 궁금해진다. 고려시대에는 울릉도 이외의 생산지 기록이 남아 있지 않지만, 후대인 조선초기의 『세종실록』 지리지에서 ‘시호’를 찾아보면 전국 8도에서 모두 산출된다.33) 조선초기에 돝의 미나리는 한반도 전역에서 자생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게다가 돝의 미나리는 조선 정부에서 재배를 권장할 정도로 중시하던 빈용약물(頻用藥物)이거나 고가약물도 아니었다. 따라서 시간을 소급하면 고려시대에도 돝의 미나리는 이미 주변에서 널리 발견되는 식물이었다고 추론할 수 있다.
시호 사례는 ‘돝의 미나리’라는 향명이 채택되어 순조롭게 뿌리를 내린 경우이다. 앞 절에서 서술하였듯이 ‘돝의 미나리’(시호)처럼 이두로 표기된 B유형이 가장 많아서 이와 유사한 사례들은 흔한 편이다. 서너가지만 들어보면 고려의 말슨아배[勿叱隱阿背, ]는 독주근(獨走根, 마두령)과 동일한 약물이 되었으며,34) 가위톱풀[犬角刀叱草, 가히돗플]은 백렴(白蘞)으로,35) 하눌타리[天原乙, ]는 괄루(栝樓)로,36) 말오줌나무[馬尿木, ]는 삭조(蒴藋)로37) 간주되는 과정을 밟았다. B유형 약물들은 중국을 내왕하는 고려·조선 의학자들의 노력에 의해서, 또는 고려·조선 의학자들의 자체적인 판단에 의해서 당재와 약효가 동일하다고 인정받았다.
요컨대 ‘돝의 미나리’는 고려시대에 이미 한반도 전역에서 자생하고 있던 식물이었다. 그러다가 시호가 약용될 수 있다는 지식을 고려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순간 ‘돝의 미나리’는 고려에서 약물로 활용되었다. 본초학 지식의 확대가 약물의 증가를 가져온 경우였다. 고려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는 일상적인 고유어(이두)를 당명에 대응시키는 B유형의 특성상 고려 사회에서 약물 증가는 더욱 가속화되었다.
2) 생강소(生薑所)에서 재배하게 된 생강(生薑)
생강은 인도·말레이시아 등이 원산지로 추정되고 있으며, 동인도를 중심으로 온난지대에 널리 분포되어 있다(농촌진흥청, 2005: 20). 고려시대에도 생강에 대해 몰랐던 것은 아니었다. 공자(孔子)의 언행을 기록한 『논어(論語)』를 읽은 사람이라면, 공자가 ‘생강 먹는 것을 거르지 않았다’라는 인상 깊은 문장을 잊을 수는 없었다.38) 하지만 고려에서는 생강을 식재료나 향신료로 사용한 문헌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고려와 조선에서 생강은 의료용 약물로서의 중요성이 컸다.
이미 언급했듯이 생강은 아예 외래식물을 들여와서 재배한 사례였다. 당연히 생강에 대한 한반도 고유어는 발견되지 않는다. 조선 세종대까지 생강은 현재의 전라남도에서만 재배되었다.39) 고려시대에도 현재의 전라남도 진도군에서 재배되었다. 동일한 위도와 비슷한 자연환경임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경상남도 지역에서는 생강이 재배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전라남도 지역이 중국과의 무역로에 자리잡고 있어서 생강의 수입경로였던 때문으로 짐작된다. 1300여 년 전에 신만석(申萬石)이 중국에 사신으로 갔다오면서 현재의 완주에서 생강 재배가 시작되었다는 구전(口傳)은 이러한 맥락에서 나왔을 것이다(완주군청, 1982: 239). 생강 재배에는 국제교역이라는 경제적 요인과 재배에 적합한 환경이라는 지리적 요인이 모두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고 이해할 수 있다.
고려시대 생강 재배에 대해서는 『세종실록』 지리지의 나주목(羅州牧) 해진군(海珍郡) 항목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그리고 이것을 보완하는 기록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고려의 생강소[薑所]에 대한 설명도 있다.
(해진군에는-인용자) 소(所)가 네 군데 있으니, 생강소(生薑所)·구향소(仇向所)·다염소(茶鹽所)·전포보소(田浦保所)이다.40)
고려 때에 또 소(所)라고 칭하는 것이 있었는데, 금소(金所)·은소(銀所)·동소(銅所)·철소(鐵所)·사소(絲所)·주소(紬所)·지소(紙所)·와소(瓦所)·탄소(炭所)·염소(鹽所)·묵소(墨所)·곽소(藿所)·자기소(瓷器所)·어량소(魚梁所)·강소(薑所)의 구별이 있어 각각 그 물건을 공급하였다. 또 처(處)로 칭하는 것이 있었고, 또 장(莊)으로 칭하는 것도 있어, 각 궁전(宮殿)·사원(寺院) 및 내장택(內莊宅)에 분속되어 그 세를 바쳤다. 위 여러 소(所)에는 다 토성(土姓)의 아전과 일반 백성들이 있었다.41)
이 두 가지 기록으로 해진군 즉 고려시대의 진도현(珍島縣)이 생강을 생산하는 특수재배지역이었다는 점이 확인된다.42) 소(所)는 본래 특정한 물품을 세금으로 내는 군현 안의 촌락이었다(윤경진, 2002; 김난옥, 2011). 여기에 생강은 외래식물이어서 집중적으로 재배되어야 한다는 점까지 감안해야 한다. 따라서 진도현 전체가 아니라, 진도현 내의 특정한 촌락이 생강소(生薑所)로 지정되고, 이곳에 거주하는 일반 백성들[編戶]이 생강 재배를 전담하는 방식을 취하였을 것이다.43) 생강의 생산 구조는 또 다른 외래식물인 감초의 사례에서 추론할 수 있다.
감초의 경우에는 조선에서 재배에 성공하였다. 이때 감초는 무안현의 철소리(鐵所里),44) 평양부 서쪽의 감초리(甘草里)45) 등에서 집중적으로 재배하였다. 그리고 영산현과 창녕현에도 각각 감초를 재배하는 밭[甘草田]이 설정되어 있었다.46) 생강 역시 감초와 유사한 방식으로 재배되었을 것이다.
이처럼 특정한 지역에 생강 재배지가 설정되었다는 것은 여러가지를 시사한다. 소(所)를 통해 생산한다는 것은 생강을 이 지역의 공납물로 수취하겠다는 뜻이다. 고려 정부의 강력한 토산화 의지의 지향점은 개경으로의 공납이었고, 소(所)를 통한 국가적 분업체계의 구축이었다(이정신, 2013).
수취를 위해서는 1년 단위로 생강의 공납 분량과 시기를 규정한 공적(貢籍)이 작성되어야 했다. 문종 17년(1063)에 익령현(翼嶺縣)과 성주(成州)에서 황금(黃金)이 산출되자 삼사(三司)에서는 공적에 붙이자고 아뢴 일이 전형적인 예이다.47) 진도에서는 생강 재배에 착수하면서 공적을 작성하여 생강 공납의 근거로 삼았을 것이다.
원래 고려에서는 약물을 삼사(三司)의 총괄 아래 각 도별로 할당하고, 다시 군현 단위로 부과하였다(이경록, 2010a: 224-225). 생강 공납의 부과 구조에 대해서는 또 다른 소(所)인 은소(銀所)가 참고된다. 고종대 기록에서는 “서해도(西海道)의 주군(州郡)은 병난을 입었으므로 요공(徭貢)을 7년간 감면해주고 또 곡주(谷州)·수덕(樹德) 두 지역의 은공(銀貢)을 5년간 줄여라.”라고 하였다.48) 당시에 은(銀)을 곡주·수덕에 거주하는 모든 사람들이 가가호호에서 생산할 수는 없었다. 은은 집중적인 채취와 전문적인 정련이 필요해서이다. 이 때문에 은을 집중적으로 생산하는 곳이 바로 앞의 인용문에 나온 은소(銀所)였다.49) 그런데 고종대 기록에서 보이듯이 은공(銀貢)의 부과 단위는 은소가 아니라 곡주·수덕이었다. 따라서 생강 역시 생강소 단위가 아니라, 진도현 단위로 부과되었다고 판단된다. 진도현의 관리들이 생강 공납에 관여해야 하는 구조였다는 뜻이다.
생강소의 재배민들은 다른 부역을 면제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충렬왕대에 남경의 민(民) 8명을 ‘착달호(捉獺戶, 수달 잡는 호)’로 삼았는데, 부역을 피하려는 민들이 여기에 많이 붙었다. 이들은 매년 수달 가죽을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의 궁에 납부하고 절반은 조인규(趙仁規)의 집에 들여보냈다.50) 소민(所民)들은 특정 물품을 생산하는 대신 잡역을 면제받는 것이 원칙이었는데(윤경진, 2002: 60), 새로 생강 공납 의무를 지게 된 진도현 생강소의 농민들에게도 다른 잡역은 경감시켰다고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이러한 원칙에도 불구하고 생강소 재배민들에게 부과된 생강 납부 의무는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고려에서는 소(所)에 대한 징렴(徵斂)이 과중하여 소민(所民)들이 도피할 정도였다.51) 이에 더해서 추가적인 징수도 드물지 않았다. 국왕을 치료하는 백자인(栢子仁)이 부족해지자 경주에서 다시 징납하려 하거나 양광도에서 웅장(熊掌)과 표태(豹胎)를 공물(貢物)로 독촉하였듯이,52) 부족하기 마련인 생강에 대해서도 토색이 진행되었을 것이다.
요컨대 생강은 도입약물이자 재배약물이었다. 생강은 진도현의 생강소(生薑所)에서 집중적으로 재배되었으며, 공적(貢籍)에 근거하여 수취하였다고 이해된다. 생강 토산화는 고려 정부의 약물 확보에 대한 강한 의지를 보여주는 D유형의 사례였다.
3) 약물의 수취구조와 민간유통
시호나 생강 같은 약물의 품질 관리와 공납의 진행을 위해서는 지방의 의료행정 조직이 동원되어야 했다. 방어진(防禦鎭)이라면 의학(醫學)이,53) 일반 군현이라면 중앙에서 목(牧)·도호부(都護府) 등에 배치한 의사(醫師)와54) 향리 출신인 약점사(藥店史)가55) 약물 공납량의 배정과 수취에 깊이 관여했을 것이다.
먼저 시호나 생강 토색을 당하는 일반 백성들은 생산뿐만 아니라 가공과 운반까지 직접 담당하는 사람들이었다. 시호를 약물로 사용하는 과정은 채취 행위만으로 끝나는 게 아니었다. 약물은 뿌리[根], 줄기[莖], 가지[枝], 잎[葉], 껍질[皮], 심[骨], 꽃[花], 열매[實]별로 치료 증후가 다르다. 앞서 인용했듯이, 시호는 7-8월에 채취하여 줄기를 제거하고 뿌리를 햇볕에 말리는 과정을 거쳐야 했다. 이처럼 시호를 확보하여 가공하는 사람은 채취를 담당하는 일반 백성들이었다.
생강 역시 시호처럼 뿌리 부분만 약용하므로 생강의 줄기 부분은 제거해야 했다.56) 게다가 건강(乾薑)이라면 적당한 기간 동안 말려야 했다. 종이를 공납으로 바치기 위해서 닥나무를 힘들게 가공하는 과정이 필요한 것과 똑같았다.57) 공납물의 운반에서는 고려시대에 차(茶)의 생산지였던 화계(花溪)의 사례가 참고된다. 차를 공납(貢納)하기 위해 관청에서는 노약자(老弱者)까지 징발하였는데, 험준한 산중에서 따 모은 차는 머나먼 개경까지 등짐으로 날라야 했다.58)
그런데 약성(藥性) 유지를 위해서는 적절한 방식으로 재배하고, 수확한 후에는 말리거나 자르거나 가공하는 등의 이른바 포제(炮製) 과정에 대한 전반적인 지식이 필요하였다. 즉 생강 재배에는 배수가 잘 되는 사질양토가 적합했다. 생강은 습기가 많은 환경을 좋아하므로 수분이 부족하면 덩이줄기의 비대가 미흡하여 다수확을 기대하기가 어려웠다. 반면 배수가 불량하면 산소부족으로 덩이줄기는 성장하지 않거나 심지어 뿌리가 썩기 일쑤였다. 재배 과정에서는 적절한 습도 조절이 필수적이었다(농촌진흥청, 2005: 32-33).
또한 『증류본초(證類本草)』에 따르면 생강은 9월에 채취해야 했다.59) 현대식으로 표현하면 발아단계에서는 최저 온도가 18℃ 이상이어야 하고 생육단계의 지온(地溫)은 25℃를 유지해야 했다. 15℃ 이하에서는 생육이 정지되고 10℃ 이하에서는 동해(凍害)를 입으므로 첫서리가 오기 전에 생강 수확이 완료되어야 했다(농촌진흥청, 2005: 30-31). 도입약물인 생강에 대한 이러한 지식들은 생강소 재배민들이 스스로 오롯하게 터득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다시 말하면, 본 초학 지식의 습득이 전제되어야 생강의 재배, 수확, 가공, 보관, 활용이 가능하다는 뜻이다. 고려의 의료 실정을 감안하면 생강 종자의 수입을 비롯해서 재배지 선정, 재배 기술의 전파 등은 중앙정부의 의관들이 직접 개입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한편 진도현에 직접 생강소를 설치하고 생강 공적(貢籍)의 작성이나 품질 관리를 담당했던 실무자는 누구였을까? 물론 공물(貢物) 납입의 공식적인 책임은 수령(守令)과 안렴사(按廉使)가 담당하였지만60) 다양한 약물들의 공납에는 의학 지식과 지방의 행정 실무에 두루 밝은 사람이 필요했다. 약물별로 채취 시기와 포제 완료 시점이 제각각인데다, 약성은 포제 완료 직후에 가장 좋으므로 모든 약물들을 지방에서 오래도록 한데 모아서 보관할 수도 없었다. 곡물 조운과 달리 적절한 시기에 개경으로 운반하는 것이 요구되었다.
따라서 약물 수취에는 행정력이 필수적이었다. 영주(永州) 이지은소(利旨銀所)를 현(縣)으로 승격시킨 기록을 보면 현사(縣司)와 장리(長吏)를 모두 예전과 같이 두었다고 하였는데, 이 기록에 따르면 소(所)에는 별도로 관아(官衙)나 향리를 배치하지 않았다고 이해될 수도 있다.61) 그러나 앞에서 인용한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소(所)에 ‘토성(土姓)의 아전’이 존재한다고 서술하였다. 생강소의 경우에는 생강소에 거주하는 ‘토성(土姓)의 아전’ 혹은 진도현의 약점사(藥店史)가 관련될 텐데, 이들은 중앙정부의 명을 받아서 진도현에 생강소를 설치하고 재배를 독려하면서 최전선에서 수취를 담당하였을 것이다.62)
향리 출신인 이들 약점사는 지방 거점인 계수관(界首官)에 파견된 의사(醫師)의 지시를 받았다.63) 즉 속현(屬縣)이었던 진도현의 약점사라면, 중앙의 의관으로서 나주목에 배치된 의사의 지시를 받아야 했다. 조선에서는 고려의 ‘의사’를 조선의 ‘심약(審藥)’에 비견하였다.64) 심약의 업무를 감안하면, 고려의 나주목에 파견된 의사들은 약물의 공납 과정에 관여하고 있었다. 동시에 나주목에 파견된 의사는, 중앙정부의 의관으로부터 전달받은 생강에 대한 약학 지식을 나주목의 약점사나 진도현의 약점사에게 전수하였을 것이다.
이상에서 살핀 것처럼 생강의 재배와 유통 과정에서는 여러 이해당사자가 결부될 수밖에 없었다. 공적을 작성하여 생강을 수취하는 중앙정부를 비롯하여 생강 재배민, 생강소의 토성(土姓)이나 군현(郡縣)의 약점사, 목(牧)·도호부(都護府) 등 계수관 단위의 의사·약점사, 중앙의 의관 등이 모두 이해당사자였다.
시호나 생강은 다른 약물들처럼 개경으로 납부되었다.65) 고려에서 공납 약물들은 태의감(太醫監)의 약고(藥庫) 등에서 보관하였기 때문이다. 고려의 의료관서 편제를 살펴보면 동서대비원(東西大悲院), 태의감, 혜민국(惠民局)에는 간수군(看守軍)을 배치하였다. 동서대비원, 즉 동대비원(東大悲院)과 서대비원(西大悲院)에서는 산직장상(散職將相) 각각 2명, 태의감에서는 잡직장교(雜職將校) 2명, 혜민국에서도 잡직장교 2명이 근무하고 있었다.66) 간수군은 왕궁의 내탕(內帑)을 비롯하여 주요 관서의 창고에 배치되어 감시 임무를 맡던 부대로서, 장상(將相)-장교(將校)-군인(軍人)으로 편제되었다(김용선, 2007: 198). 이 간수군의 정확한 배치 시기는 알 수 없지만, 간수군의 임무는 이들 의료관서를 지키는 것이었다. 간수군의 임무에는 창고에 보관된 시호와 생강을 지키는 일도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문종은 동서대비원에서 환자를 모아 구휼(救恤)하도록 지시하였고, 인종은 치료를 위해 동서대비원에서는 풍족하게 축적하라고 지시하였다.67) 당연하게도 동서대비원 같은 대민의료기구에서는 치료용 약물을 보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어서 고종 40년(1253)의 화재 기사로부터 태의감에는 약고가 설치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68) 그리고 예종 7년(1112)에 판관(判官) 4명을 배치한 혜민국은 고려 말에 혜민전약국(惠民典藥局)으로 개칭되었다.69) 관서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혜민전약국은 약을 판매하는 곳이었는데, 이색은 병든 노비를 위해 이곳에서 약을 구하기도 하였다.70)
따라서 의료 기능을 담당하는 동서대비원, 태의감, 혜민국에는 각각 약물을 보관하는 약고(藥庫)가 있었고, 간수군이 이를 지키고 있었다. 전국에서 공납한 약물들이 이들 창고로 운반되었을 것이지만, 가장 대표적인 수납처는 아무래도 핵심적인 중앙의료기구인 태의감이었다고 판단된다. 그런데 백자인(栢子仁) 사례를 보면, 중앙의 의관들은 지역별로 백자인의 품질 차이를 인식하고 있었다.71) 당연히 시호과 생강의 경우에도 태의감 약고 등에 수납하는 과정에서는 이들 약물의 종류, 분량, 품질 등을 태의감 의관이 직접 검수했을 것이 분명하다. 이 과정에 맞춰서 채취민을 감독하여 개경에 납부하는 업무는 약점사가 맡았다고 이해해야 한다.
그런데 고려에서 생강은 재배지역이 한정되어 있었으므로 그 가격이 비쌌다.72) 생강에 대한 욕심은 명종대 대장군(大將軍) 박제검(朴齊儉)의 아들인 박보광(朴葆光)과 이소응(李紹膺) 집안의 싸움이 잘 보여준다. 생강 때문에 살인이 벌어질 뻔한 사건이었다.
그의 아들 박보광은 어리고 경박한 자로, 처음 권무(權務)에 보임되자 기세가 교만해졌다. 길에서 우연히 이소응의 아내를 만났는데, 그 여종이 생강(生薑)을 가진 것을 보고 달라고 했으나 주지 않자 박보광이 때리며 욕을 했다. 이소응의 아내가 크게 노하여 종[僮僕]들에게 칼과 몽둥이를 들려서 박제검의 집으로 이끌고가 큰 소리를 지르며 박보광을 죽이려고 하니, 박보광과 집안사람들이 모두 도망쳐 숨었다.73)
이 기록을 통해서 무신집권기 무렵에 이미 생강에 대한 지식이 보편화되었다는 사실과 함께 민간유통의 단서가 드러난다. 즉 모든 생강이 중앙정부의 수취분급체계를 통해서만 유통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생강이 국가체제에 의해 생강 소비자에게 완전하게 공급될 수 없다면, 생강 수요는 민간유통으로 보완될 수 밖에 없었다. 앞서 착달호(捉獺戶)들이 잡은 수달 가죽의 절반이 조인규의 집으로 들어간 것을 살펴보았는데, 고위 관원으로 대표되는 지배층에 대한 산출물의 증여는 선물인 동시에 뇌물이었다. 각 도의 안렴사와 별감들은 상공(上供)을 빙자하여 명주[紬]·모시[苧]·가죽[皮]·종이[紙]·포(脯)·과일[果] 등의 물품을 거두어 권귀(權貴)들에게 뇌물로 바쳤다.74) 그리고 조정에 있는 양반(兩班)들은 차(茶), 약(藥), 종이, 먹 등을 개인적인 선물로 제공받았다.75)
이러한 증여방식 외에 매매방식 역시 생강 유통의 큰 축이었을 것이다. 환자가 필요할 때마다 생강을 국왕으로부터 하사받거나 지방관들로부터 선물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어서이다. 소금의 사례를 참고하자면, 고려전기에 염호(鹽戶)는 국가에 대한 염세(鹽稅)를 바치고 남은 소금을 소비자나 상인들에게 판매하였다(권영국, 2009: 128). 생강소가 자리잡은 진도현의 경우에는 속현에서 주현으로의 읍격(邑格) 변화에도 불구하고76) 계수관이던 나주목의 영향력이 유지되었다. 나주목은 중앙에서 파견되는 지방관들이 왕래하는 대읍(大邑)으로서 교통의 거점이자 지방경제의 중심지였다(박종진, 2024: 117-120). 소금과 마찬가지로 생강 역시 공납 물량 이외의 여유분은 진도현에서 나주목으로 일단 집결된 후에 전국으로 유통되었을 것이다.77)
그러나 전국적인 유통이 가능했음에도 불구하고 생강의 유통반경은 경제력과 밀접한 연관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것은 생강이 고가약물이기 때문이었다. 이 가능성은 앞서 소개한 『신집어의촬요방』과 『향약구급방』을 비교함으로써 확인이 가능하다.
『신집어의촬요방』에서는 생강이 엄청나게 많이 처방되었다. 소속명탕(小續命湯)을 비롯하여 42군데에서 생강이 등장하므로, 『신집어의촬요방』 전체 처방의 1/3에 해당할 정도이다. 생강은 생강 자연즙(自然汁)을 그대로 사용하거나, 껍질 벗긴 생강을 볶아서 사용하는 등으로 다양하게 활용하였다. 심지어 생강탕(生薑湯)이라는 처방명도 발견된다.78) 그런데 생강이 지배층에게는 빈용약물이었지만, 『향약구급방』을 주로 활용하는 피지배층에게는 희용약물(希用藥物)이었다.
『향약구급방』에서는 생강이 6군데에서 등장한다. 생선회 중독, 냉리, 혈뇨, 생리불순, 겨드랑이냄새 등의 치료였다. 예컨대 “생선회를 먹고 소화가 되지 않은 경우에는 생강을 빻아 즙을 낸 후에, 생강즙 소량을 물에 타서 복용한다.”라는 식이다.79) 그러나 『향약구급방』에 사용되는 모든 약물들을 조사해서 빈용약물 순위를 매겨보면, 생강은 25위에 불과하다(이경록, 2010a: 367-371). 많이 사용되지는 않은 편이다. 이것은 생강이 고려의 일반 백성들에게는 희소한데다 귀한 약물이었음을 의미한다. 생강을 마음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일반 백성들로서는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결국 고려에서는 환자의 신분계층에 따라 생강 사용에서 차이가 존재하였다고 판단할 수 있다.
반면에 시호(돝의 미나리)는 한반도 전역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자생약물이었다. 시호 역시 공납물로서 중앙정부에 납입되었을 것이지만, 일반 백성들도 치료를 위해서는 쉽게 시호를 채취하거나 매입할 수 있었을 것이다. 고려의 시호 가격은 알려지지 않았으나 인삼·생강보다는 저렴했을 것이 분명하다. 일상 약물이자 저가약물인 시호의 유통방식이 희소약물이자 고가약물인 생강과는 동일할 수가 없었다.
더 나아가 고려의 의서를 살펴보면 계란(鷄卵)이나 동자소변(童子小便, 어린이의 오줌) 등도 약물로 처방되는데, 이것들까지 국가 단위에서 ‘약물’로서 수취되거나 관리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반면 고려 정부의 입장에서 보자면 수입 약물일수록, 도입약물일수록, 재배약물일수록, 고가약물일수록, 빈용약물일수록 더 적극적으로 약물의 생산과 유통에 개입하였다. 머리말에서 적었듯이 고려의 모든 약물이 동일한 방식으로 생산, 공납, 분급, 매매, 소비되지는 않았던 것이다.
요컨대 생강은 중앙정부의 의관 - 계수관의 의사·약점사 - 진도현의 약점사·토성의 아전 - 재배민으로 이어지는 의료행정 조직을 통해 재배되었다. 고려 정부에서는 군현의 약점사와 계수관의 의사를 동원하여 채취민들을 관리하고 개경의 의료관서로 생강 같은 약물들을 운반시켰다. 하지만 시호나 생강은 민간에서도 유통되고 있었으므로 신분의 고하에 상관없이 활용이 가능하였다. 다만 시호가 저가약물이었던 데 반해 생강은 고가약물이었다. 생강이 환자의 경제력이나 사회적 지위에 상응하여 빈용약물이기도 하고 희용약물이기도 하였던 이유였다.80)
4. 맺음말
고려시대에는 새로운 약물들의 명칭이 넘쳐났다. 본문에서는 『신집어의촬요방』과 『향약구급방』을 비교하고 『향약채취월령』을 참고하여 고려후기의 약물을 A유형에서 E유형까지 5가지로 분류하였다. 중국식 한자어인 당명(唐名)을 고려의 향명(鄕名)에서 그대로 습용(襲用)한 약물들이 A유형, 이두(吏讀)로 표기한 향명을 당명과 1:1로 대응시키는 약물들이 B유형, 당명을 그대로 향명으로 직역(直譯)한 약물들이 C유형, 원래는 외래약물이었으나 토산화에 착수하는 도입약물들이 D유형, 수입 약물들이 E유형이었다.
약물 자료로서 주목되는 「방중향약목초부(方中鄕藥目草部)」에서는 180종의 자국 약물을 정리하였다. 이 토산 약물 180종을 범주화하면 A유형 62종(34.4%), B유형 108종(60.0%), C유형 10종(5.6%)이었다. 이것이 고려후기 토산 약물들의 최소한의 목록이자 유형별 비중이었다. 이 가운데 본문에서는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B유형과 고려에서 의도적으로 도입한 외래약물인 D유형에 초점을 맞추었다. 시호(柴胡)와 생강(生薑) 사례의 분석이었다.
B유형의 대표격인 시호는 ‘돝의 미나리[猪矣水乃立]’라는 고려의 고유어로 등치시킨 경우이다. 원래 돝의 미나리는 전국적으로 분포한 자생식물이었다. 고려에서는 문종대의 치료시에 유입된 시호 뿌리 실물과 『증류본초』의 시호 그림 등을 통해서, 이 시호가 돝의 미나리와 동일하다고 인식하였다. 이에 시호는 『신집어의촬요방』·『향약구급방』은 물론이고 조선초의 『향약제생집성방』과 『향약집성방』에서도 통용되었다.
하지만 이 돝의 미나리가 정말 시호와 일치하는가라는 의문이 남아 있었다. 이에 조선 세종대의 노중례는 명(明)을 방문하여 돝의 미나리=시호임을 밝혔다. 시호 사례에서 보이듯이 향명 부여는 이용 가능한 약물의 확대를 가져오며, 외래의학 지식의 확산은 고려시대의 약물 개발로 이어지는 효과를 가져왔다.
한편 생강은 D유형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원래 생강은 한반도에서 자생하지 않았던 외래식물이었다. 고려시대에는 진도현에 생강소(生薑所)를 설치하고 인위적으로 재배를 시작하였다. 생강의 토산화에는 공적(貢籍)을 새로 작성하여 생강을 수취하는 중앙정부를 비롯하여 생강 재배민, 진도현의 약점사, 계수관인 나주목의 의사·약점사, 중앙의 의관 등이 모두 참여하였다. 생강 사례는 고려 정부의 강력한 약물 확보 의지를 잘 드러낸다.
시호나 생강은 간수군이 배치된 중앙의 태의감 등에 공납되었다. 공납되는 약물에 대해서 태의감 의관들은 검수를, 지방의 약점사는 운반 관리를, 채취민들은 가공과 운반까지를 담당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모든 시호나 생강이 국가의 공납-분급체계를 통해서만 유통되는 것은 아니었다. 우선 시호는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자생약물이어서 반드시 중앙정부의 분급을 거쳐야 하는 것이 아니었다. 공납 물량 이외의 생강 역시 민간에서 증여 혹은 매매되었다고 이해하는 것이 마땅하다. 다만 생강은 누구나 매입할 수는 있으나 쉽게 사용할 수는 없었다. 고가약물이어서였다. 생강은 환자의 경제력이나 사회적 지위에 따라서 빈용약물이기도 하고 희용약물이기도 하였다. 즉 개별 약물별로 약물의 생산과 유통방식은 다양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고려시대의 약물을 전반적으로 살펴보면 B유형이 가장 비중이 높았고, A유형이 그 다음으로 많았다. E유형도 제법 많은 편이다. 반면 C유형과 D유형은 상대적으로 적었다. 비중의 높고 낮음을 떠나서 5가지 유형들이 병존하면서 고려시대의 치료 약물을 구성하였다. 이 가운데 시호 같은 B유형과 생강 같은 D유형에서는 고려 사회의 약물 생산 및 유통 의지가 도드라졌다. 결국 고려시대 약물 유형들의 분포를 조망해보면 토산 약물, 즉 향재(鄕材)에 대한 관심과 활용이 크게 확대되었다.
Notes
미키 사카에는 「고려시대의 본초」에서 『고려사』와 『향약구급방』 등에서 추출한 약물들을 정리하였다(三木榮, 1963: 86-97). 김두종 역시 「중세의 의학 - 고려의학」에서 고려시대의 의료를 다루면서, 고유약물의 존재나 약물의 국제 교류와 관련한 사료를 뽑아서 나열하였고, 아라비아·일본·원나라 등과의 약물 교류 기록을 서술하였다(金斗鍾, 1966: 119-124, 129-132, 143-145). 한편 손홍열은 「의·약의 교류와 의서의 간행」에서 고려시대 약물들의 수출입과 교류에 대해 서술하였으나 대체로 미키 사카에와 김두종의 견해를 요약한 것이었다(孫弘烈, 1988: 146-148). 세 연구자 모두 고려의 약물에 대한 관심은 있었으나 약물학 지식의 전승 측면, 약물과 수취구조와의 관계 측면, 약물의 생산·유통과 사회와의 연관성 측면 등에 대해서는 그리 주목하지 않았다. 최근의 고려시대 약물 연구사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서 다루었다. 이경록, 「약명 유형에 나타난 고려시대 약물들의 구조 -『향약구급방』 「방중향약목초부」를 중심으로-」, 『史林』 89 (2024).
李奎報, 『東國李相國全集』 卷21, 說序 新集御醫撮要方序.
『신집어의촬요방』의 135개 처방은 안상우·최환수, 『어의촬요연구 -실전의서 복원총서 I-』 (한국한의학연구원, 2000)에서 정리한 132개 처방에 『향약제생집성방』의 3개 처방을 더한 것이다. 135개 처방은 이경록, 『고려시대 의료의 형성과 발전』 (혜안, 2010a), 358-366쪽에 정리되어 있다.
이경록, 「약명 유형에 나타난 고려시대 약물들의 구조 -『향약구급방』 「방중향약목초부」를 중심으로-」, 『史林』 89 (2024) 참고.
『鄕藥採取月令』(金信根 主編, 『韓國醫學大系』 41, 여강출판사 영인, 1992); 이경록, 「조선 세종대 향약 개발의 두 방향」, 『泰東古典硏究』 26 (2010b) 참고.
『世宗實錄』 卷119, 세종 30년(1448) 2월 1일(정사); 『成宗實錄』 卷178, 성종 16년(1485) 윤4월 29일(기유).
『鄕藥救急方』, 方中鄕藥目草部, 決明子. “決明子[俗云狄小豆.]”
『鄕藥救急方』, 方中鄕藥目草部, 苦蔘. “苦蔘[俗云板麻.]”
『鄕藥救急方』, 方中鄕藥目草部, 栝樓. “栝樓[俗云天乙根.]”
『鄕藥救急方』, 方中鄕藥目草部, 槐. “槐[俗云廻之木.]”
『鄕藥救急方』, 方中鄕藥目草部, 吉梗. “吉梗[俗云刀亽次.]”
『醫方類聚』 卷147, 諸虛門5 聖惠方3 治虛勞目暗諸方, 兔肝丸方; 『鄕藥救急方』 中卷, 眼, 神効決明散.
『鄕藥救急方』 上卷, 卒死. “理卒客忤停尸不言. 燒桔梗[道羅次]二兩, 爲末, 酒或米飮下.”; 『鄕藥救急方』 上卷, 喉痺. “理喉閉幷毒氣, 桔梗[鄕名道羅次]一兩·甘草一兩, 爲麁末, 用水三升, 煮取一升, 頓服.”
『鄕藥救急方』, 方中鄕藥目草部, 狼牙. “狼牙[俗云狼矣牙.]”
『鄕藥救急方』, 方中鄕藥目草部, 牛膝. “牛膝[俗云牛膝草.]”
『鄕藥救急方』, 方中鄕藥目草部, 蝟皮. “蝟皮[俗云苦蔘猪矣皮.]”
『향약구급방』 「방중향약목초부」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서 자세히 다루었다. 이경록, 「약명 유형에 나타난 고려시대 약물들의 구조 -『향약구급방』 「방중향약목초부」를 중심으로-」, 『史林』 89 (2024).
조선전기의 감초 토산화에 대해서는 다음 글이 참고된다. 이경록, 「조선전기 감초의 토산화와 그 의미」, 『醫史學』 24-2 (2015).
『鄕藥救急方』 下卷, 瘧疾. “單煮柴胡[鄕名靑玉菜, 或云猪矣水乃立]根不論多小, 隨意飮之.”
『鄕藥救急方』, 方中鄕藥目草部, 柴胡. “柴胡[俗云山叱水乃立, 又椒菜. 味苦微寒无毒. 七·八月採根, 日乾. 療傷寒.]”
『高麗史』 卷9, 世家9, 문종 33년(1079) 7월.
『高麗史』 卷58, 地理3, 東界 蔚珍縣, 의종 11년(1157). “王聞, 鬱陵地廣土肥, 舊有州縣, 可以居民, 遣溟州道監倉金柔立, 往視. 柔立回奏云…… 多生柴胡·蒿本·石南草, 然多岩石, 民不可居. 遂寢其議.” 원문의 ‘호본(蒿本)’은 ‘고본(藁本)’이 맞다. 유사한 발음이나 글자체로 인해 약물 명칭이 혼용되는 사례로는 ‘피마자(
『高麗史』 卷17, 世家17, 인종 19년(1141) 7월. “溟州道監倉使李陽實遣人, 入蔚陵島, 取菓核木葉異常者, 以獻.”
『高麗史』 卷18, 世家18, 의종 10년(1156) 10월.
『醫方類聚』 卷19, 諸風門7 和劑局方 治諸風, 牛黃淸心圓.
『醫方類聚』 卷197, 雜病門3 御醫撮要, 溫白丸.
『醫方類聚』 卷197, 雜病門3 御醫撮要, 七宣丸.
『鄕藥集成方』 卷69, 小兒門 小兒脾胃氣不和不能飮食. “[鄕藥易簡方] 治小兒脾胃氣不調不嗜食飮. 白茯苓一錢, 生乾地黃焙, 大黃剉炒令香, 當歸炙乾, 柴胡去苗, 杏仁湯浸去皮尖雙仁麩炒黃, 各半兩. ○右擣爲末, 煉蜜爲圓, 如麻子大, 每服五丸, 生薑湯呑下, 日三. 量兒加減, 不拘時.”
『鄕藥濟生集成方』 卷4, 積聚心腹脹滿; 上喘中滿; 『鄕藥濟生集成方』 卷5, 五藏風熱眼.
『鄕藥集成方』 卷5, 傷寒門 傷寒時氣. “[柴胡升麻湯]. 治時行溫疫壯熱惡風頭痛體疼鼻塞乾咽心胷煩滿寒熱往來痰盛咳嗽涕唾稠粘. 柴胡去芦·前胡去芦·乾葛·石膏煅·赤芍藥各十兩…….”
『鄕藥集成方』 卷76, 諸品藥石炮製法度, 草部, 柴胡; 『鄕藥集成方』 卷78, 本草草部上品之上, 柴胡.
『世宗實錄』 卷19, 세종 5년(1423) 3월 22일(계묘). “大護軍金乙玄·司宰副正盧仲禮·前敎授官朴堧等入朝, 質疑本國所産藥材六十二種內, 與中國所産不同丹蔘·漏蘆·柴胡·防己·木通·紫莞·葳靈仙·白斂·厚朴·芎藭·通草·藁本·獨活·京三陵等十四種, 以唐藥比較, 新得眞者六種. 命與中國所産不同鄕藥丹蔘·防己·厚朴·紫莞·芎藭·通草·獨活·京三陵, 今後勿用.”
『世宗實錄』 卷148, 地理誌, 京畿道; 卷149, 地理誌, 忠淸道; 卷150, 地理誌, 慶尙道; 卷151, 地理誌, 全羅道; 卷152, 地理誌, 黃海道; 卷153, 地理誌, 江原道; 卷154, 地理誌, 平安道; 卷155, 地理誌, 咸吉道.
『鄕藥救急方』 中卷, 丁瘡. “獨走根[…… 鄕名勿叱隱阿背也, 又云勿叱隱提阿.]”
『鄕藥救急方』 中卷, 發背·癰疽·癤·乳癰. “白斂[…… 鄕名犬角刀叱草.]”
『鄕藥救急方』 下卷, 中風. “括蔞鄕名天原乙.”
『鄕藥救急方』 下卷, 雜方. “蒴藋[鄕名馬尿木].”
『論語』 鄕黨篇. “不撤薑食.”
조선전기의 생강 토산화에 대해서는 다음 글이 참고된다. 이경록, 「조선 세종대 향약 개발의 두 방향」, 『泰東古典硏究』 26 (2010b).
『世宗實錄』 卷151, 地理志 全羅道 羅州牧 海珍郡. “所四, 生薑·仇向·茶塩·田浦保.”
『新增東國輿地勝覽』 卷7, 驪州牧 古跡 登神莊. “高麗時又有稱所者, 有金所·銀所·銅所·鐵所·絲所·紬所·紙所·瓦所·炭所·塩所·墨所·藿所·甆器所·魚梁所·薑所之別而各供其物. 又有稱處者, 又有稱莊者, 分隷于各官殿寺院及內莊宅, 以輸其稅. 右諸所皆有土姓吏民焉.”
고려시대 진도현과 나주목에 대해서는 다음 글이 참고된다. 박종진, 「고려시기 진도현의 위상과 변화」, 『도서문화』 38 (2011); 박종진, 「고려시기 ‘나주목영역’의 구조와 나주목의 위상」, 『한국중세사연구』 77 (2024); 최연식, 「三別抄 以前 珍島 관련 역사자료의 재검토」, 『지방사와 지방문화』 14-1 (2011); 윤경진, 『高麗史 地理志의 分析과 補正』 (여유당, 2012), 442-445쪽.
고려시대의 所는 285개로 추정되고 있다. 또한 하나의 물품을 1개의 소에서만 독점 생산한 것은 아니어서 종이를 생산하는 紙所는 6곳이 존재하였다(박종기, 2011). 생강 역시 진도현의 생강소 이외 지역에서도 재배되었을 것이다. 고려시대의 생강 생산 지역은 전라도의 몇 군데로 점차 확대되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新增東國輿地勝覽』 卷36, 全羅道4, 務安縣. “土産…… 鐵[出縣東鐵所里]. 茶, 石榴, 甘草[種鐵所里].”
『象村先生集』 卷23, 記, 平壤西倉記(솔 영인, 1994, 82쪽).
『新增東國輿地勝覽』 卷27, 慶尙道7, 靈山縣. “新增. 甘草[有田].”; 昌寧縣. “新增. 甘草[有田].”
『高麗史』 卷8, 世家8, 문종 17년(1063) 1월. “三司奏, 翼嶺縣及西北面成州篲田場地, 産黃金, 請附貢籍.”
『高麗史』 卷80, 食貨3 賑恤 災免之制, 고종 33년(1246) 5월. “制, 以西海道州郡被兵, 蠲徭貢七年. 又減谷州樹德兩所銀貢五年.”
전병무는 은소의 인적 구성으로, 所民의 감독과 공납 임무를 맡은 銀所吏(吏屬層), 銀戶로 편적되어 은광석 채취나 柴木 마련을 담당하는 銀所民, 工匠案에 등록된 채 은광석을 제련하는 工匠을 거론한다(田炳武, 1992).
『高麗史節要』 卷19, 충렬왕 3년(1277) 12월.
『高麗史』 卷78, 食貨1 田制 貢賦, 예종 3년(1108) 2월. “判…… 銅·鐵·瓷器·紙·墨雜所別貢物色, 徵求過極, 匠人艱苦, 而逃避. 仰所司, 以其各所別常貢物多少, 酌定, 奏裁.”
『高麗史節要』 卷13, 명종 15년(1185) 4월; 『高麗史節要』 卷25, 충숙왕 후5년(1336) 1월.
『高麗史』 卷77, 百官2 外職. “防禦鎭. 文宗定, 使一人五品以上, 副使一人六品以上, 判官一人七品, 法曹一人八品以上. 或加置文學一人, 以任講學, 醫學一人, 以任療病.”
『高麗史』 卷68, 禮10 嘉禮 牧都護知州員同坐儀. “牧·都護判官以上, 知州防禦副使·判官以上, 同廳坐, 牧·都護掌書記·法曹·知州防禦法曹, 別廳坐. 奉命使臣處, 問聖禮, 及有名日行禮, 則法曹以下, 醫·文師, 後行敘立.”
『高麗史』 卷75, 選擧3 銓注 鄕職, 현종 9년(1018). “定, 凡州府郡縣, 千丁以上, 戶長八人, 副戶長四人, 兵正·副兵正各二人, 倉正·副倉正各二人, 史二十人, 兵·倉史各十人, 公須·食祿史各六人, 客舍·藥店·司獄史各四人…….” 약점사에 대해서는 다음 글이 참고된다. 이경록, 『고려시대 의료의 형성과 발전』 (혜안, 2010a), 114-141쪽.
조선전기 기록이기는 하지만, 세종은 각 고을에서 생산되는 약물을 꽃, 잎, 줄기, 뿌리를 상하지 않게 캐어 보내도록 각 도에 지시한 적이 있었다(『世宗實錄』 卷37, 세종 9년(1427) 7월 7일(계사). “傳旨, 各道各官所産藥材, 令敎諭, 毋傷花葉莖根採送.”) 산출 약물을 원래 상태대로 조사하려던 이 기록은 역설적으로 약물이 부위별로 가공되어 공납되었음을 드러낸다.
『高麗史節要』 卷20, 충렬왕 6년(1280) 3월. “王謂承旨鄭可臣曰, 楮生於地, 何弊於民. 可臣曰, 臣嘗管記全州, 目見其民造紙之苦, 今蒙採擢, 至此, 用紙亦多, 不能無愧, 王只許除紙貢.”
李奎報, 『東國李相國全集』 卷13, 古律詩, 孫翰長復和次韻寄之. “官督家丁無老稚, 瘴嶺千重眩手收, 玉京萬里赬肩致.”
『證類本草』(四庫全書本) 卷8, 草部中品之上 總六十二種, 生薑.
『高麗史』 卷78, 食貨1 田制 貢賦, 공민왕 1년(1352) 2월.
『拙藁千百』 卷2, 文, 永州利旨銀所陞爲縣碑[代權一齋作]. “明年, 那壽奉使東歸, 爲鄕里榮, 以故處庳狹, 相地徙居州之西. 距故所若干步, 置縣司長吏咸若初.” 이 기록을 근거로 所에는 邑司와 長吏가 없었다고 설명하기도 하지만(윤경진, 2002: 47), 소에는 관리[吏]가 배치되었다는 해석도 병존한다(田炳武, 1992: 74; 이정신, 2013: 318).
김난옥은 12세기 말을 기준으로 前期 所와 後期 所를 구분하면서, 후기 소의 특징으로 所吏의 배치를 꼽고 있다. 김난옥, 「고려시대 所의 편제방식과 所民의 사회적 지위」, 『歷史敎育』 120 (2011) 참고.
계수관과 군현체제에 대해서는 다음 글이 참고된다. 박종진, 『고려시기 지방제도 연구』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7); 윤경진, 『고려 지방제도 성립사』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22).
『睿宗實錄』 卷6, 예종 1년(1469) 6월 29일(신사). “依前朝醫師例, 稱某官審藥, 特蠲其家徭役, 使以鄕藥, 救一邑人民. 其有成効者, 加其資, 仍令監司褒貶, 三年而遆.”
특히 생강 지식의 전파 경로는 생강의 공납 경로이기도 하였다. 기존의 所에 대한 연구에 따르면 소에서 생산하는 공물은 특정 기관에 바로 납부되었을 가능성이 크다(윤경진, 2002: 66; 김난옥, 2011: 191).
『高麗史』 卷83, 兵3 看守軍. “東·西大悲院散職將相各二. 園丘散職將相二. 籍田散職將相二. 守宮署雜職將校二. 太醫監雜職將校二. 大官署雜職將校二. 惠民局雜職將校二…….”
『高麗史節要』 卷4, 문종 3년(1049) 6월. “命集疾病飢餓者於東西大悲院, 救恤.”; 『高麗史節要』 卷9, 인종 5년(1127) 3월. “詔曰…… 十一曰, 濟危鋪·大悲院, 厚畜積, 以救疾病.”
『高麗史』 卷53, 五行1 火 火災, 고종 40년(1253) 2월. “太醫監藥庫, 灾.”
『高麗史』 卷77, 百官2 諸司都監各色. “惠民局. 睿宗七年置判官四人, 以本業及散職互差, 乙科權務. 忠宣王爲司醫署所轄. 恭讓王三年改惠民典藥局.”
李穡, 『牧隱詩藁』 卷30, 詩 從惠民局衆官索藥爲奴病也.
『高麗史節要』 卷13, 명종 15년(1185) 4월. “王患虛羸, 嘗餌栢子仁酒. 醫奏云, 栢子仁産雞林者最良. 請遣中使求之, 不許.”
생강은 조선에서도 고가약물이었다. 『於于野譚』의 「兀孔金八字」에 따르면 “생강은 남쪽 지방에서 나는 귀한 물건으로 관서 지방에서는 생산되지 않아 값이 매우 비쌌다. 한 배 가득 실린 값비싼 재화는 베 천 필, 곡식 천 석에 해당되었다.”라고 한다(유몽인, 2006: 572).
『高麗史』 卷100, 列傳13 諸臣, 朴齊儉. “其子葆光, 年少輕薄, 初補權務氣驕. 道遇李紹膺妻, 見從婢有持薑者, 求之不與, 葆光歐辱之. 紹膺妻大怒, 率僮僕, 持刀杖, 至齊儉家呼噪, 欲殺葆光, 葆光及家人皆逃匿.”
『高麗史節要』 卷20, 충렬왕 6년(1280) 3월. “又諸道按廉使別監, 今皆憑籍上供, 斂民紬苧皮紙脯果等物, 賂遺權貴, 請皆理罪.”
『高麗史』 卷84, 刑法1 職制, 충선왕 즉위년(1298) 1월. “下敎曰…… 一. 凡侍朝兩班不得受人賄賂, 至於茶·藥·紙·墨, 亦不可受. 違者罪之.” 이 기사는 사적인 증여의 일상화를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고려시기의 선물경제에 대해서는 다음 글이 참고된다. 한정수·서민수·이준, 「고려시대 선물(膳物)의 분석과 그 정치문화사적 함의」, 『역사와 실학』 75 (2021); 정용범, 「고려 무신 집권기 유통경제의 성격」, 『한국중세사연구』 70 (2022).
진도의 邑格 변화와 관련해서는, 이미 현종 9년(1018)에 현령관이 설치되면서 주현이 되었다는 견해(윤경진, 2012: 442-445)와 현종 9년에는 나주목의 屬縣이었으나 인종 21년(1143)에 이르러 현령이 파견되면서 主縣이 되었다는 견해(박종진, 2011: 130-138)가 있다.
생강 재배에 착수했다고 해서 고려에서 생강을 완전히 자급자족했던 것은 아니다. 생강의 일종인 高良薑과 良薑은 여전히 수입되었다. 이경록, 「고려시대 일본과의 의료 교류와 그 성격 -‘동아시아의료’의 한 사례-」, 『醫史學』 32-1 (2023) 참고.
『醫方類聚』 卷165, 酒病門2 御醫撮要, 生薑湯.
『鄕藥救急方』 上卷, 肉毒. “食鱠不消, 擣生薑, 取汁, 小与水和服.”
본문에서 다루지 않은 생강과 관련된 두 가지 기록이 있다. 먼저 현재의 전라남도 보성군 지역이 백제의 豆肹縣이었는데 신라 경덕왕(742-765년 재위) 때 薑原縣으로 개칭되었다가 고려에 와서 荳原縣이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高麗史』 卷57, 地理2, 全羅道 寶城郡 荳原縣). 이 강원현(두원현)은 생강과 관련된 지명이라고 설명하기도 한다(이정신, 2013: 215-216). 하지만 신라 경덕왕대에 이미 생강이 재배 작물이 되었을까는 의심스럽다. 다음에 등장하는 생강 기록과의 시간 간격이 너무 멀다. 다른 하나는 고려 현종이 전사한 군인가족에게 ‘차·생강·옷감을 차등 있게 하사하라[賜茶薑布物, 有差]’라고 지시한 기록이다(『高麗史』 卷81, 兵1, 兵制, 현종 9년(1018) 8월). 유사한 하사 기사들에서 관례적으로 ‘茶藥’이나 ‘茶布’를 하사하는 것을 감안하면, 이 ‘茶薑’은 ‘茶藥’의 오식으로 보인다. 아마도 行草로 쓴 ‘薑’과 ‘藥’이 비슷한 데서 발생한 史草의 오독인 듯하다. 이 글에서는 두 기록을 모두 받아들이지 않는다.
References
Appendices
[부록 1]
고려후기-조선초기의 중요 처방 약물 목록
[Appendix 1] List of important prescription drugs from the late Goryeo Dynasty to the early Joseon Dynasty
kjmh-33-2-259-app1.pd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