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상 경험의 학문적 지위 높이기: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제1내과와 『임상내과학』
Raising the Academic Authority of Clinical Experience: The Department of Internal Medicine at Keijo Imperial University and Its Periodical Imsangnaegwaha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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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This paper examines the periodical Clinical Internal Medicine published by the Department of Internal Medicine at Keijo Imperial University in colonial Korea. Previous studies on medical research at Keijo Imperial University have primarily focused on preclinical departments such as anatomy, hygiene, pharmacology, and microbiology which produced knowledge that supported Japan’s imperialistic expansion. This approach has overlooked the research contributions of clinical departments, often viewing the roles of preclinical and clinical departments through a dichotomy between research versus clinician training. However, Clinical Internal Medicine demonstrates that the Department of Internal Medicine at Keijo Imperial University was actively engaged in research. By analyzing the purpose and content of Clinical Internal Medicine, this paper reveals that its publication was an effort by the Department of Internal Medicine to address the demand for practical knowledge among clinicians practicing outside the university. At the same time, it reflects a commitment to enhancing the academic value of clinical experience and critiques the blind pursuit of experimental medicine in the Japanese medical community in the 1920s and 1930s. The case of the Department of Internal Medicine at Keijo Imperial University illustrates the transformation of clinical experience into “worthy” academic knowledge in colonial Korea. Based on these findings, this paper provides insights into the role of clinical departments at Keijo Imperial University in research and post-graduation education.
1. 머리말
식민지 조선 최대의 의학 지식 생산 기관인 경성제국대학 의학부는 임상의학교실과 기초의학교실로 나뉜다. 임상과 기초를 가르는 기준은 진료 기능의 유무이다. 진료, 연구, 교육의 역할을 담당한 임상의학교실에는 ‘대진료과’(大診療科)로 불린 내과학교실, 외과학교실, 소아과학교실, 산부인과학교실과 그보다 작은 규모의 안과학교실, 이비인후과학교실, 정형외과학교실, 신경과학정신과학교실, 피부과학비뇨기과학교실, 방사선과학교실, 치과학교실 등 총 11개 교실이 있었다. 이에 비해 연구와 교육만을 수행한 기초의학교실은 해부학교실, 생리학교실, 의화학교실, 병리학교실, 약리학교실, 미생물학교실, 위생학교실, 법의학교실 등 총 8개 교실로 구성되었다(사토 고조, 1993: 163-165; 기창덕, 1995: 231-236).
바꾸어 말하면 임상의학교실과 기초의학교실은 경성제국대학 의학부를 이루는 양대 축이었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경성제국대학 의학부의 지식 생산 활동에 관한 연구들은 대부분 기초의학교실에만 주목해 왔다. 그 연구들은 식민통치와 지식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며 경성제국대학 의학부의 조선 관련 특수 연구, 만주 조사 사업, 체질인류학 연구, 인구통계 연구 등을 다루었다. 그에 의하면, 조선의 고유한 환경을 연구하기 위해 경성제국대학에 특별히 개설된 미생물학 제2강좌와 약리학 제2강좌가 각각 풍토병과 한약재를 연구했고(李賢一, 2009; 신창건, 2007), 만몽문화연구와 대륙문화연구처럼 일본의 만주 진출을 위한 조사 사업에는 해부학교실, 약리학교실, 위생학교실, 미생물학교실 등이 참여했다(정규영, 1999; 이한결, 2014; 정준영, 2015). 일본인과 조선인의 혈통 관계를 다룬 체질인류학 연구는 해부학교실과 법의학교실의 관심사였으며(전경수, 2002a; 전경수, 2002b; 박순영, 2006; 김옥주, 2008; 정준영, 2012; 사카노 토오루, 2013: 283-334), 조선, 만주, 일본의 인구문제에 관한 통계적 분석은 위생학교실의 연구 대상이었다(박지영, 2020).
선행 연구가 해부학, 미생물학, 약리학, 위생학을 비롯한 기초의학 위주로 진행된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유추된다. 첫째는 선행연구의 문제의식으로 인한 선택적 사료 검토이다. 의학 지식의 식민성을 밝히는 데 집중한 선행연구들은 국책 관련 연구에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자신들의 실제적 효용성을 강조했던 기초의학교실을 우선적으로 검토해 왔다. 반면, 임상의학교실은 환자 치료라는 고유 기능 덕택에 국책과의 연관성을 내세워 자신의 효용을 강조할 필요가 상대적으로 적었다. 그뿐 아니라 파편적인 증례보고가 큰 비중을 차지했던 임상의학 연구에서는 일관된 관점과 그에 반영된 식민성을 포착하기 어렵다는 현실적 어려움도 있다. 그런 사료의 성격으로 인해 임상의학교실은 연구자들의 우선순위에서 멀어진 것으로 보인다. 둘째는 임상의학교실을 앞지르는 기초의학교실의 연구 실적이다. 진료에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하는 임상의학교실에 비해 연구에만 매진하는 기초의학교실의 논문 발표가 더 왕성했던 것은 일견 당연한 일이다. 기초의학교실이 박사학위 수여권을 지닌 경성제국대학 의학부의 관행상 임상의학 전공자라도 박사학위 취득을 원한다면 기초의학교실에서 수년간 연구해야 했던 점도 기초의학교실의 연구를 활발히 하는 데 기여했다. 이런 양적 차이를 토대로 그간의 연구자들은 기초의학교실을 경성제국대학 의학부의 연구 활동을 대표하는 행위자로 간주해 온 듯하다. 한 예로, 경성제국대학 의학부의 기관 학술지인 『경성의학잡지』를 분석하여 그 연구 활동의 성격을 밝힌 이현일의 논문은 그런 시각을 잘 보여준다.1) 이 논문은 『경성의학잡지』에 수록된 임상의학교실의 연구가 기초의학교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적”음을 지적하며 “분과별로 보면 기초의학이 중심이 되어, 경성제대 의학부는 임상의사의 양성보다도 의학 연구를 주된 목적으로 했음을 알 수 있다”라고 언급한다. 그 기저에는 기초의학교실의 기능은 ‘연구’이고 임상의학교실의 기능은 ‘임상의사 양성’이라는 구획이 놓여 있다(李賢一, 2009: 116).
이상과 같은 기초의학교실 중심적인 접근은 경성제국대학 의학부의 연구 활동에 얽힌 정치적·사회적 맥락을 드러내는 데 크게 기여해 왔다. 그러나 그것은 임상의학교실의 연구 활동을 거의 고려하지 않는 점에서 지식 생산 기관으로서 경성제국대학 의학부가 수행한 역할의 전모를 파악하기에는 다소 부족함이 있다. 비록 기초의학교실에 비해 국책 조사 참여와 학술 성과가 적기는 했지만 경성제국대학의 임상의학교실은 나름의 연구 활동을 전개했다. 그중 가장 두드러진 예로는 교실 자체의 학술지 발간을 들 수 있다. 경성제국대학에서는 내과학교실 제1강좌를 필두로 하여, 외과학교실 제1강좌와 소아과학교실 등에서 1930년대 초부터 각각 『임상내과학(臨床内科学)』, 『임상외과(臨床外科)』, 『성대소아과잡지(城大小兒科雜誌)』를 발행하기 시작했다. 이 잡지들은 각 교실에서 이루어진 강의, 임상시험, 증례보고 등 각종 학술 활동의 내용을 수록했으며 1940년대 초 전쟁의 심화와 물자 부족으로 인해 잡지 발간이 어려워지기 전까지 정기적으로 간행되었다.2)
교실 차원의 학술지 발행은 일반적인 일이 아니었다. 조선에서 간행되던 의학 전문 학술지에는 조선 지역을 대표하는 의학 학술 단체인 ‘조선의학회’의 기관지 『조선의학회잡지』와 조선 및 만주 의사들 간의 상호 교류를 도모하는 학술 단체인 ‘만선연합의학회’의 기관지 『만선지의계』가 있었고, 의학교육기관들의 학술지로 『경성의학전문학교기요』, 『경성의학잡지』, 『대구의학전문학교잡지』,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기요』 등이 있었으며, 그 외에 조선인 의사들의 연합 학술 조직인 ‘조선의사협회’의 기관지 『조선의보』가 있었다. 어느 한 교실이 독립적으로 학술지를 발간하는 일은 조선을 통틀어 『임상내과학』, 『임상외과』, 『성대소아과잡지』의 경우가 유일했다(유형식, 2011: 93-168). 교실 차원의 학술지가 드물었던 이유는 그 출판에 드는 인력과 자금, 꾸준한 투고의 원천이 되는 지속적인 연구, 일정 규모 이상의 안정적인 독자층 같은 현실적 요건을 충족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일 것이다. 경성제국대학 의학부의 교실들 중에서도 제1내과, 제1외과, 소아과처럼 규모가 큰 세 임상의학교실만이 학술지를 간행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학술지 간행이라는 이례적인 일을 했다고 해서 이 세 교실의 활동이 경성제국대학의 다른 임상의학교실들과 질적으로 달랐다고 보기는 어렵다. 연구를 중시하는 경성제국대학의 성격에 걸맞게 다른 임상의학교실도 세 교실과 마찬가지로 연구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3) 그런 사실은 임상의학교실 출신 의사들의 연구 경험에 대한 회고에서 잘 드러난다. 그에 의하면 이들은 교수로부터 엄격한 연구 지도를 받으며 진료 일과 이후의 시간을 연구에 쏟았다. 각 교실은 저마다 나름의 연구 방향을 가지고 있었다. 예를 들어, 안과학교실은 각종 안질환에 관한 실험연구와 임상연구를 병행하여 일본 안과학계에 활발히 발표했으며, 산부인과학교실은 교실 전체가 조선인의 골반에 관한 계측학적 연구와 임신 조기 진단을 위한 동물실험에 몰두했다. 이비인후과학교실은 일본 이비인후과학회의 조선지방회를 창설하고 매년 3, 4회의 학술회의를 개최했다. 피부비뇨기과는 알레르기와 펠라그라를 연구했으며, 치과학교실은 치아우식증, 카신벡병, 치아 발육에 관해 연구했다(京城帝國大學創立五十周年記念誌編集委員會, 1974: 261-318). 이로 미루어 볼 때, 경성제국대학 임상의학교실은 적극적으로 연구 기능을 실행하고 있었으며, 자체적인 학술지 창간을 통해 연구 발표와 학술 교류를 촉진하려 한 제1내과, 제1외과, 소아과의 활동은 그런 연구 기능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따라, 본 논문은 경성제국대학 임상의학교실의 학술지를 분석함으로써 그 연구 활동을 살펴보고자 한다. 세 잡지 중 본 논문이 초점을 맞춘 것은 제1내과의 학술지인 『임상내과학』이다. 1933년에 7월에 창간된 『임상내과학』은 셋 중 가장 먼저 출범했으며, 현재 1943년까지의 간행분이 남아 있어서 나머지 두 잡지보다 오랜 기간의 정보를 제공한다. 나아가 제1내과에 관해서는 동창회보인 『행목(杏木)』과 더불어 교실 연구 업적집, 그 주임교수인 이와이 세이시로(岩井誠四郞)의 개강 10주년을 기념하는 『이와이 교수 논문집』(岩井敎授論文集, 1939)과 『이와이 선생 고희 기념록』(岩井先生古稀記念錄, 1956) 등 관련 자료가 풍부하다. 이 자료들을 활용하여 본 논문은 『임상내과학』의 창간 목적, 구성 및 내용, 조선과 일본 의학계에서의 위치를 검토하고, 그럼으로써 제1내과의 연구 활동이 지닌 특징과 의도를 드러내려 한다. 이는 경성제국대학 임상의학교실이 담당한 연구 기능의 일단을 보여줄 것이다.
2. 이와이 내과와 『임상내과학』의 창간
경성제국대학 제1내과의 정식 명칭은 내과학교실 제1강좌이다. 내과학교실은 세 개의 강좌로 구성되어 있었다. 각 강좌의 주임교수는 이와이 세이시로, 이토 마사요시(伊藤正義), 시노자키 텟시로(篠崎哲四郞)였다. 강좌들은 그 주임교수의 이름을 딴 별칭으로 불렸다. 제1강좌는 이와이 내과, 제2강좌는 이토 내과, 제3강좌는 시노자키 내과였다. 이와이 내과는 그중 가장 규모가 컸다. 이와이 내과 출신 의사들의 회고에 따르면, 이 교실의 구성원은 40-60명으로 회진 때에는 이와이의 뒤를 따라 긴 행렬을 이루었으며(京城帝國大學創立五十周年記念誌編集委員會, 1974: 261; 長谷川進, 1990, 68; 전종휘, 1994: 35), “의국원(醫局員)이 많기로는 대학 제일”이었다고 한다(松崎七美, 1956: 91).
『임상내과학』은 이와이 내과의 학술지이다. 『임상내과학』의 발행처는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이와이 내과교실 내 임상내과학 편집부”였고 이와이 내과의 구성원이 편집 실무를 담당했다(岩井誠四郎, 1939: 1).4) 잡지 말미에 ‘이와이 내과 동창명부’와 동문들의 동향을 수록한 점 또한 『임상내과학』의 발행 주체가 이와이 내과임을 보여준다.5)
그런데 『임상내과학』에서 ‘이와이 내과’는 경성제국대학 내과학교실 제1강좌와 동의어가 아니었다. 이는 “당 내과가 건설된 지 벌써 13년 반이 지났습니다” 라는 ‘발간의 사’의 한 구절을 통해 드러난다(岩井誠四郎, 1933a: 1). 『임상내과학』이 창간된 1933년에서 13년을 거슬러 올라가면 1920년이다. 이는 경성제국대학 내과학교실 제1강좌가 설립된 시점보다 8년 이르다. 경성제국대학은 1924년부터 예과 입학생을 받기 시작했고 그들이 본과에 진학한 1926년에 의학부가 출범했다. 의학부 개교 당시에는 기초의학교실뿐이었고 이듬해인 1927년부터 임상의학교실도 문을 열었다. 그리고 다시 1년 후 내과학교실이 산하 강좌들로 분화했다(기창덕, 1995: 229-235). 요컨대 경성제국대학 내과학교실 제1강좌는 1928년에 성립했다. 그렇다면 왜 ‘발간의 사’는 이와이 내과의 창립 시점을 1920년이라고 한 것일까?
1920년은 이와이가 조선에 부임한 해이다. 이와이는 1912년 규슈제국대학 의학부를 졸업하고 모교에서 내과를 전공했다. 그 뒤 도쿄제국대학에서 혈청학을 연구하다가 1918년 기타사토 연구소에 들어갔으며 1920년 4월 게이오기주쿠대학 의학부에 조교수로 취임했다. 그러나 그는 취임한 지 7개월 만인 1920년 11월에 조선총독부의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기타사토 연구소 시절의 선임이자 게이오기주쿠대학의 동료 교수였던 시가 기요시(志賀潔)가 조선총독부의원의 원장으로 발탁되면서 이와이에게 자신을 도와 함께 부임해 줄 것을 청했기 때문이다. 조선총독부의원에서 이와이는 제1내과의 과장직을 맡았고 경성의학전문학교의 내과학 교수를 겸임했다. 그러다가 경성제국대학 의학부가 창설되자 그곳으로 이직하여 내과학교실 제1강좌의 주임교수가 됐다(石田純郞, 2013: 12). ‘발간의 사’는 이런 이와이의 경력을 따라 이와이 내과가 “1928년 대학[경성제국대학, 역자주]에 이관”되었다고 서술했다(岩井誠四郎, 1933a: 1). 그런 언급의 기저에는 이와이 내과가 그 소속 기관의 변동을 초월하여 존속해 온 집단이라는 인식이 놓여 있었다. 물론 이 인식적 공동체의 제도적 실체는 경성의학전문학교 제1내과의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이식에 근간을 두었다. 이로 보아, 『임상내과학』은 조선총독부의원 시절부터 경성제국대학 시절에 이르기까지 이와이가 이끌어 온 의국과 그를 통해 배출된 일군의 의사들을 통틀어 ‘이와이 내과’로 여기고 있었다.
이와이 내과는 어떤 집단이었을까. 『임상내과학』 창간호에 실린 ‘이와이 내과 동창 명부’는 구(舊) 직원 59명의 정보를 기재했다. 그들 중 가장 높은 연배의 인사는 조선총독부의원 제1내과에서 이와이의 지휘 아래 근무했던 히라오카(平岡辰二), 요시무라(吉村藏), 나카오(中尾進), 다무라(田村寶眞), 시다(志田信男), 다케다(武田三郞), 지성주, 임명재 등이었다. 특히 히라오카는 이와이의 경성제국대학 이직 후 그의 뒤를 이어 경성의학전문학교 내과학 교수가 됐다(京城醫學專門學校, 1925: 77-78; 1926: 85; 1927: 86; 朝鮮總督府醫院, 1928: 35). 그들 다음으로 입국한 김동익, 박종선, 김전식 등은 경성의학전문학교에서 근무하다가 이와이와 함께 경성제국대학으로 이직했다(김동익, 1979: 62). 그들에 더하여 25명의 의사들이 『임상내과학』의 창립 시점에 이와이 내과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그중에는 규슈제국대학 출신인 조교수 후로나카 후지오(風呂中不二夫)를 비롯하여, 김용필, 유석균, 김병선, 김왕석, 히라이(平井一郞), 다카하시(高橋正雄) 등 경성의학전문학교 졸업생이 6명, 권호옥, 김사일 등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 졸업생이 2명, 계인교, 김근배, 오현관, 장치순, 나카무라(中村亥一), 이노우에(井上秀人), 쓰시마(津島啓太郞), 야나기하라(柳原大助), 에모토(榎本光男), 이노우에(井上國久), 야마자키(山崎義之), 야마시타(山下雅義), 시모나카(下中龍一) 등 경성제국대학 졸업생이 13명 있었고, 그 외 출신 학교가 확인되지 않는 구성원이 3명 있었다(京城醫學專門學校, 1933: 225-231; 1940: 173-200).
이와이 내과 동문들은 출신 학교가 달랐음에도 자신들이 동일한 지적 전통을 공유한다고 생각했다. 이와이 내과에서 근무했던 한 인물은 “이와이 내과 동창회에는 독특한 훈향(薰香)이 있습니다. 이 향의 근원은 이와이 선생에서 발하고 있지만 여기에 여러 사람이 동화되고 혼화되어 독특함을 발휘하고 있습니다”라고 했고(ZSU生, 1939: 6), ‘발간의 사’는 이와이 내과 출신자들 사이에 ‘무형의 류(流)’가 존재한다고 언급했다(岩井誠四郎, 1933a: 1). 여기에서 무형의 류가 무엇을 뜻하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임상내과학』 제1권 제2호에 ‘의잠(醫箴)’을 수록하여 의사가 가져야 할 덕목으로 자비, 성실, 청렴, 겸손, 신중 등을 제시했던 점이나,6) 이와이가 매년 신입 의국원에게 “좋은 사람이 아니면 좋은 의사가 될 수 없다”라고 강조했다는 점 등으로 보아 ‘무형의 류’라는 것이 단순히 진료에 관한 지식과 요령을 넘어 의사로서의 가치관까지 포함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松崎七美, 1956: 91).7)
이렇듯 이와이 내과에서 수련을 마친 의사들은 이와이를 주축으로 한 유대를 형성했다. 그런 심리적 관계는 이와이 내과에서 운영하는 제도적 장치들에 의해 유지·강화됐다. 가장 핵심적인 장치는 ‘의국-강좌제’와 수직적 수련 체계였다. 먼저, 의국-강좌제는 진료 기능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대학의 강좌를 그 부속병원의 의국과 연동시키는 제도였다. 이를테면 경성제국대학 내과학교실 제1강좌는 그 부속병원 제1내과에 해당했다. 내과학교실 제1강좌의 주임교수인 이와이가 제1내과 과장을 겸했고 강좌의 교원들은 제1내과를 구성하는 의국원이기도 했다. 의국-강좌는 한 명의 주임교수를 정점으로 하는 피라미드형 위계조직에 의해 운영되었다. 각 강좌에는 교수 아래에 조교수, 강사, 조수, 부수 등의 직급이 있었고, 교수의 지시에 의해 진료, 연구, 교육의 방침이 결정되었다. 나아가 교수는 의국원의 진로에도 관여했다. 수련을 마친 의사들은 교수의 판단과 알선에 따라 학교에서 계속 근무하거나 지역병원에 취직해서 경력을 쌓을 수 있었다. 이런 방식으로 의국-강좌제는 의국원에 대한 교수의 권위와 영향력을 극대화하는 효과를 발휘했다(通堂あゆみ, 2014).
아울러, 이와이 내과의 수련 체계는 교수의 감독 하에 선배 의국원이 후배 의국원을 지도하는 수직적인 시스템이었다. 1930년대 후반 이와이 내과의 의국원이었던 전종휘의 말에 따르면 그 실제 운영은 다음과 같았다.
2-3년차 젊은 부수가 교실에서 5-6년 지낸 팀 선배의 지시에 따라 입원 환자의 주치의로 책임지며, 서너 명이 한 팀이 되었다. 그해 새로 들어온 의국원이 미국의 인턴 식으로 일선에서 일하고, 그 위 선배의 순으로 2-3년차 의국원이 주치의처럼되어 새 의국원 1년차 생을 지도하였다. 또 학위논문이 끝났거나 거의 끝나가고 있는 노(老) 선배의 흥미있는 증례가 있으면 가끔 1년차 의국원이나 주치의를 데리고 부정기적으로 회진하며, 관심을 끄는 학술 예는 2-3년차 중간 의국원들에게 지시하여 증례를 보고토록 하고 공동 명의로 발표하는데, 의국의 오랜 선배가 늘 제1의 저자가 되는 것이 상례였다(전종휘, 1994: 35-36).
윗연차와 아랫연차 사이의 유기적 관계는 그들 사이에 공통의 진료 및 연구 경험을 만들어 냈다. 그들이 공유한 경험은 매년 주기적으로 개최되는 의국 차원의 야유회, 야구대회, 송년회 등에 의해 더욱 풍부해졌다.8) 수련을 마친 의국원들에게 그런 과거의 경험은 그들을 이어주는 추억이 되었고 매년 개최되는 동창회를 통해 현재로 소환되며 그들 사이의 결속을 지속했다.
『임상내과학』의 발간은 이와이 내과 구성원 간의 유대를 강화하려는 의도에서 출발했다. 이와이 내과 동문을 연결하는 잡지를 발간하자는 것이 당초의 구상이었다. 이때의 ‘잡지’란 동창회지에 가까웠다. 이와이의 회고에 의하면, 그런 구상은 1932년 말 이와이 내과 송년회 자리에서 제시되었다(岩井誠四郎, 1939: 1). 제안자들은 수련 기간에 동고동락하며 가깝게 지냈던 사이라도 수련을 마치고 의국을 떠나면 각자의 생활에 치여 근황을 알기 어려우므로 서로의 소식을 교환할 수단이 필요하다고 호소했으며, 의국의 새로운 소식이 과거 수련 시절의 추억을 상기시켜서 서로 간의 우정과 친교를 돈독히 할 수 있다고 역설했다(岩井誠四郎, 1933a: 1).
하지만 친목 도모만이 잡지 발간의 유일한 목적은 아니었다. 이와이 내과 동문들은 학술 교류를 위한 공간 또한 원했다. 이와이 내과에서 친목 중심의 동창회지가 아니라 『임상내과학』이라는 학술지를 발간한 이유는 그 때문이었다. 그들에 의하면, 수련을 마치고 진료 현장에 나간 의사들은 낯설고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는 경우가 많았다. 설상가상으로 지방에서 개원한 의사들의 형편은 자료와 설비의 부족으로 “공부가 불가능, 실험이 불가능”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럴 때 서로의 경험, 지식, 교훈을 공유하는 것은 주변 사람들에게 지침이 되어 정확한 진단과 치료를 촉진하고 “내과학의 향상”에 기여한다고 여겨졌다(岩井誠四郎, 1933a: 1).9)
학술 교류와 친목 도모는 『임상내과학』의 양대 목표가 되었다. 그러나 처음에는 조화롭게 병존하는 듯 보였던 두 목표는 이내 서로 충돌하기 시작했다. 『임상내과학』의 독자가 점점 더 늘어나 이와이 내과 동문의 범주를 넘어서게 되자 “한 의국의 동창회지라는 감이 옅어지고 하나의 전문 잡지로서”의 성격이 강해져서 동문 간의 개인적인 소식을 거론하기 어려운 상황이 된 것이었다. 그로 인해 이와이 내과는 1940년 동창회지인 『행목』을 별도로 발행하기로 했다. 환언하면, 이는 이와이 내과가 친목 도모의 기능을 『임상내과학』으로부터 분리할 만큼 학술적 측면을 중시했음을 가리킨다(岩井誠四郎, 1939: 1).
학술 교류에 대한 이와이 내과의 관심을 부추긴 요인으로는 크게 두 가지를들 수 있다. 첫째는 연구를 중시하는 이와이 내과의 지적 경향이었다. 『이와이 교수 논문집』에 의하면 1921년 이래 1936년까지 이와이가 발표한 논문은 총 54편이었다. 이 수치는 그가 진료와 교육을 하면서도 연간 평균 3.6편씩 15년간 꾸준히 논문을 발표할 정도로 연구에 매진했음을 뜻한다. 같은 기간 그의 제자들이 발표한 연구는 총 202편이었다. 매년 13.5편의 연구를 발표한 셈이다(京城帝國大學醫學部 岩井內科敎室, 1939). 그들은 조선과 일본 양쪽 의학계에서 모두 활발히 활동했는데, 『조선의학회잡지』와 『만선지의계』에 다수의 논문을 게재했고 1927년에는 일본의학회의 ‘숙제 보고’를 맡아 교실 차원에서 간성혼수에 관한 연구를 진행한 적도 있었다(井上秀人, 1974: 261-262). 『임상내과학』의 발간은 이와이 내과가 전개한 이 같은 학술 활동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둘째는 진료 현장에서 활용 가능한 임상 지식의 축적과 확산에 대한 개원가의 요구였다. 이와이 내과 출신 의사들은 동료들과 모여서 진료에 대한 경험을 활발히 공유했던 수련 시절과 달리 개업 후에는 환자에 관한 고민이 생겨도 상의할 곳이 마땅치 않고 그 해결을 위해 사용할 수 있는 자료 또한 부족하다고 토로했다. 수련을 마치고 대학이라는 대규모 지식 생산 기관의 울타리를 벗어난 의사들을 위한 보수교육 체계, 학술 교환 제도, 자체적인 심화 학습에 필요한 자료가 전반적으로 빈약했던 조선 개원가의 현실을 반영한 호소였다(木內勝男, 1933: 86). 그와 같은 동문회원들의 지적 수요는 이와이 내과가 개원가의 임상 지식 교류에 주목하게끔 만들었다. 그들의 지향은 『임상내과학』의 명칭을 정하는 과정에서도 드러났다. 이와이 내과는 창간할 잡지의 이름을 정하기 위해 의국원들로부터 여러 후보를 모집했다. 이때 제시된 안들은 임상내과학, 내과의보(內科醫報), 내과임상 등으로 모두 실제 진료와 임상을 부각시킨 것들이었다. 이는 당시 이와이 내과 동문들 사이에서 잡지의 방향을 ‘임상’에 맞춘다는 합의가 존재했음을 의미한다.10)
정리하면, 『임상내과학』의 발간 목적은 개원가에서 활동하는 의사들에게 필요한 임상 지식을 제공하는 데 있었다. 최신 정보와 고급 자료에 대한 접근성이 높은 대학과 그렇지 못한 개원가를 연결하고 개원가에서 축적된 임상 경험을 교환하도록 하는 것이 그 구체적인 목표였다. 그에 대한 실천을 추동한 것은 이와이 내과 동문의 유대였다. 그로 인해 처음에는 『임상내과학』이 생산한 지식의 도달 범위가 이와이 내과 동문에 한정되었으나, 나중에는 그 밖의 의사들로까지 확대되었다. 이는 “동창 이외의 분들이라도 본지의 취지에 찬동하여 입회를 원하시는 분”을 모집하는 1933년 8월의 공지와 『임상내과학』이 “이와이내과 의국원만의 잡지가 아니라 회원 전체를 위한 잡지”라는 1933년 10월의 편집후기를 통해 드러난다.11) 그 과정에서 『임상내과학』은 친목 잡지의 성격을 벗어나 임상 전문 학술지로서의 성격을 갖게 되었으며, 『임상내과학』의 발행을 통해 이와이 내과는 개원의를 위한 일종의 보수교육 자료를 제공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그런 『임상내과학』의 지향점은 실제 잡지의 내용에 어떻게 반영되었을까?
3. 『임상내과학』의 구성과 내용
『임상내과학』 은 내과 진료와 관련된 경험적·실제적 지식을 광범하게 취급했다. 그 투고 규정에 의하면 『임상내과학』에 수록된 글의 범주는 “일반 내과 임상에 관한 논설, 경험, 감상, 질의, 기타 소식, 통신 등”이었다.12) 이는 『임상내과학』이 고도로 정제된 학술적인 연구만을 게재한 것이 아니라, 진료를 통해 얻은 경험적 지식과 감상까지도 중시했음을 의미했다. 『임상내과학』이 수집한 폭넓은 지식은 독특한 체제에 의해 분류되었다. 『조선의학회잡지』 같은 일반적인 의학 학술지의 본문이 ‘원저’와 ‘종설’로만 구분되었던 데 비해, 『임상내과학』의 본문은 총 6개의 섹션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강좌, 강연, 임상, 처방, 임상쇄담(臨床瑣談), 임상의 거울 등이 그것이었다. 이런 다변화된 본문 체제는 『임상내과학』이 일반 학술지보다 다양한 종류의 지식을 포괄했음을 드러냄과 동시에, 그것이 무엇을 ‘알 가치가 있는 지식’으로 간주했는지를 보여준다. 그렇다면 『임상내과학』의 각 섹션은 무슨 내용을 다루었을까?
먼저, ‘강좌’에서는 이와이가 환자의 주된 증상을 토대로 신속하고 정확하게 병을 진단하는 요령을 제시했다. 예를 들어, 호흡곤란을 겪는 환자가 병원에 왔을 때 의사는 가장 먼저 무엇을 떠올려야 하는지, 그리고 어떤 순서로 대처해야 하는지에 관한 지침이 여기에 해당한다(岩井誠四郎, 1933b: 3). 이와이는 『임상내과학』 창간호의 강좌란에 서문을 써서 그 목적과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실지의가(實地醫家)로서 가장 필요하고 또 시급한 것은 어떤 주관적인 주소(主訴) 내지 주관적인 증후에 직면한 경우, 이를 가장 정확하게 판단하고 그에 의해 어떤 원인을 빨리 발견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노련한 의사라도 쉽지 않다. 모든 질병은 정형적인 범주를 벗어나기 때문이다. (중략) 사소한 증후가 중요한 진단상의 지침이 됨을 잊어서는 안 된다. 발열 혹은 발열과 황달이 있다고 가정하자. 이 때 결막 충혈의 유무를 살펴보는 것은 그 진단을 근저에서부터 잘못되지 않도록 한다. (중략) 이런 의미에서 증후를 중심으로 한 사고방식, 소위 증후 진단학 같은 것을 써보자고 생각했다(岩井誠四郎, 1933b: 2).
그에 따르면 ‘강좌’는 의사들이 실제 진료에 직접 적용할 수 있는 진단 방법과 놓치지 말아야 할 주의사항을 포함한 일종의 ‘진단학’이었다.
‘강연’은 질병의 진단에 대한 이와이의 강의록이었다. 호당 한 개의 질병을 다루며 이와이가 구두로 설명한 내용을 의국원 중 한 명이 받아 적었다. 진단 방식을 다루는 점에서 ‘강좌’와 비슷하지만, ‘강좌’가 표준적인 지침이라면 ‘강연’은 실제로 이와이가 진료한 환자의 사례를 들어 최종 진단명을 도출하기까지의 과정을 제시했다. 일종의 ‘증례보고’인 셈이다. 한 예로, 『임상내과학』 1권 2호의 ‘강연’은 ‘장결핵’을 다루었다. 그에 의하면 환자는 40세 남성으로 설사, 호흡곤란, 전신쇠약감, 발열이 있어서 병원에 왔다. 환자와의 면담에서 이와이는 그가 약 1년 전부터 특별한 원인 없이 하루에 7-10회의 설사를 했으며 입원 약 3개월 전부터는 전신 부종, 수면 중 호흡곤란, 식욕감소, 발열 등을 겪게 되었음을 알았다. 그리고 진찰을 통해 환자의 가슴안에 물이 차 있음을 발견한 뒤 가슴 천자, X-ray 촬영, 소변검사, 대변검사 등을 실시하여 환자에게 장결핵이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여기까지의 과정을 열거함으로써 ‘강좌’는 면담-진찰-검사-결과 종합 및 최종 진단으로 이어지는 진료의 절차에서 ‘장결핵’으로 의심되는 환자를 만났을 때 유의할 점과 ‘장결핵’을 시사하는 증상, 병력, 진찰 소견, 검사 결과 등을 보여주었다. 이는 교과서적인 설명보다 훨씬 더 현실에 가까운 지식이었다(岩井誠四郎, 1933c, 36-39).
‘임상’은 치료와 관련된 각종 연구를 수록했다. ‘강연’과 ‘강좌’가 이와이의 글만을 실었다면, ‘임상’은 다른 회원들이 참여하는 공간이었다. 다수의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만큼 『임상내과학』 내에서도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다. 평균적으로 한 호당 약 6편의 연구가 ‘임상’에 배치됐다. 임상란에는 주제에 따라 여러 종류의 연구가 등장했다. 조선에 많은 질병의 치료 지침, 희귀성 또는 난치성 질병의 실제 치료 사례, 최신 치료법 소개 등이 자주 실렸으며, 그 외에도 질병의 발생 및 치료 현황, 질병의 진단과 병리 기전, 증상이 유사한 질병들의 감별 진단법 등에 관한 연구가 있었다. 그 예로 1933년 7월에서 12월 사이에 간행된 『임상내과학』 1권 1호부터 1권 4호까지 임상란의 논문들을 주제별로 분류하면 아래와 같다(<표 1>).
‘처방’은 질병 및 증상에 따른 약물 치료법을 다루었다. 주로 한 호에 하나의 질병 또는 증상을 다루었는데, 1933년에는 고혈압, 야간 발한, 결핵열, 설사의 약물요법을 실었고, 1934년에는 출혈, 구토, 두통, 변비, 기침에 대한 약물요법을 소개했다.13) 약물요법은 약물의 종류와 기전, 투약 시기와 빈도, 투여 경로와 용량, 복용 기간, 부작용, 처방례를 비롯한 상세한 내용을 담았다. 예를 들어 『임상내과학』 1권 1호에 실린 ‘고혈압의 약물요법’은 발생 원인에 따라 고혈압의 종류를 나누고 각각에 대해 다른 약물을 처방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작용 기전이 다른 7종류의 약물을 이용한 51개의 처방례를 제시했다. 그 처방례는 당시 상용되던 약품들을 조합한 것으로 약물의 상품명, 1회 투여량, 분복 횟수, 투여 시기 등을 기재했다. 이처럼 처방란은 진료 현장에 곧장 적용할 수 있는 현실적인 정보를 제공했다(金東益, 1933: 73-78).
‘임상쇄담’은 임상에 관한 자질구레한 이야기라는 뜻으로, 진료 중에 겪은 짧은 경험담을 실었다. 매호 3-4개 정도의 원고가 실렸는데, 분량이 적고 형식이 간단해서 이와이 내과 의국원뿐 아니라 지역에서 개원한 회원들의 참여도 활발했다. 그들의 경험담은 희귀한 환자를 만난 사례, 오진을 했거나 치료에 실패한 경험, 환자를 진료하며 당혹스러웠거나 유쾌했던 경험 등 다양한 에피소드를 포괄했다. 이를테면, 평안북도 도립의주의원에서 근무하던 시다 노부오(志田信雄)는 거대한 난소 종양을 임신으로 착각한 환자의 말을 믿었다가 결국 환자 치료에 실패한 경험을 고백했고(志田信雄, 1934: 56), 평안북도 도립신의주의원의 나카오 스스무(中尾進)는 온천욕을 하다가 벼락을 맞은 환자를 진료한 경험을 서술했다(中尾進, 1934: 326). 이와이 내과에서 근무하던 마쓰자키 나나미(松崎七美)는 왼쪽 어깨의 통증으로 병원에 왔으나 X-ray 검사 결과 식도궤양이었던 환자의 사례를 보고했으며(松崎七美, 1934: 102), 그와 함께 이와이 내과에서 근무하던 야마시타 마사요시(山下雅義)는 심장이 오른쪽에 위치한 환자를 모르고 진찰했다가 왼쪽 손목에서 맥박이 만져지지 않아 당황했던 경험을 소개했다(山下雅義, 1934: 155). 이런 경험담들은 학술 논문이 되기는 어려워도 환자 진료에 유용한 교훈들을 담고 있었다.
‘임상의 거울’은 내과에서는 진단하기 어려웠지만 수술 또는 부검으로 병명이 명확히 밝혀진 환자들의 증례를 실었다. 한 예를 들면, 위암의 가족력이 있는 환자가 복통 때문에 내과에 왔으나 진찰 및 검사 소견이 모호해서 확진을 받지 못하다가 결국 수술을 통해 위암으로 판정받은 사례가 이에 해당했다. 임상의 거울란은 이 환자의 진료 기록과 수술 기록을 함께 수록하고 둘을 비교함으로써 내과의 진료 결과가 애매하게 나온 이유를 분석했다(宮田寬, 1938: 422-425). 『임상내과학』이 이런 작업을 시도한 의도는 다음과 같았다.
종이 한 장 두께이고 피부 한 장 두께이다. 이 피부 한 장 두께를 위해 우리는 얼마나 진단에 노력을 기울이는가. (중략) 실로 수술 소견, 부검 소견은 내과의의 심판소이며 임상의 거울이기도 하다. 이런 견지에서 교실의 입원 환자로 수술 또는 부검에 붙여진 증례는 요점을 약기(略記)하여 본 호부터 게재하기로 했다. 칭하건대 그 란(欄)을 ‘임상의 거울’이라고 한다. 타산지석이나마 되기를 바란다.14)
요컨대 임상의 거울란은 수술 및 부검 결과와 비교하여 내과적 진단의 정확성을 높이려는 목적을 갖고 있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임상내과학』의 본문은 임상 활동을 위한 지식들로 구성되었다. ‘강좌’는 신속하고 정확한 진단을 위한 지침을 제공했고, ‘강연’은 실제 환자의 증례를 바탕으로 진단에 이르기까지의 과정과 진찰 및 검사 소견을 알려주었다. ‘임상’은 질병의 치료와 관련된 종합적 지식과 최신 지견을 전달했고, ‘처방’은 현실적인 약물요법의 예시들을 보여주었다. ‘임상쇄담’은 의사들이 환자를 진료하며 겪은 다양한 경험담을 수록했으며 ‘임상의 거울’은 내과 진료 내용과 수술 및 부검 소견을 비교 분석했다. 이런 본문의 내용은 『임상내과학』이 일반 의학 학술지에서 ‘학문적 성과’로 인정받지 못했던 종류의 지식들을 ‘알 가치가 있는 지식’으로 간주했음을 의미한다. 여기에는 신체와 질병에 관한 과학적 원리를 밝히는 실험적·이론적 연구가 아니라, 실제 진료에 유용한 경험적이고 관찰적이며 때로는 임기응변적인 지식이 포함되어 있었다. 『임상내과학』은 그런 지식들에게 정식적인 논의의 공간과 형식을 제공했다.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임상내과학』이 경험적·관찰적 연구를 다루었다는 사실이 이와이 내과가 그런 연구만을 했다는 뜻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와이 내과는 개설 이래 다수의 실험적·이론적 연구를 발표했다. 『이와이 교수 논문집』의 말미에는 “이와이 교수의 지도 아래 이루어진 주요 업적”이라는 제목의 연구 목록이 부록으로 수록되어 있는데, 그에 의하면 『임상내과학』의 창간 1년 전인 1932년까지 106편의 논문이 발표됐고 그 중 86개, 즉 전체의 81.1퍼센트가 『조선의학회잡지』에 게재됐다. 대표적인 연구 주제로는 6회에 걸쳐 발표된 ‘콜레스테롤 대사’와 4회에 걸쳐 발표된 ‘자가혈구응집소 생성 기전’이 있었다. 『임상내과학』을 창간한 뒤로도 이와이 내과는 실험연구를 꾸준히 전개했다. 7회에 걸쳐 발표된 ‘간 질환에서의 신진대사’와 16회에 걸쳐 발표된 ‘비장의 조혈 및 내분비 기능’이 가장 대표적인 연구 주제였다. 이는 기초의학교실이 실험적·이론적 연구를 담당하고 임상의학교실은 경험적·실용적 연구만을 수행한다는 이분법적 시각으로는 이와이 내과의 연구 활동을 설명할 수 없음을 드러낸다. 실험은 이와이 내과의 연구 활동에서 항상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 그런 맥락에서 『임상내과학』 창간의 의미는 실험에 치우쳐져 있던 연구의 무게추를 임상적 관찰과 경험 쪽으로 옮기면서 그 학문적 가치를 적극적으로 조명하기 시작했다는 데 있다.15)
진료를 위한 경험적·실용적 지식을 중시하는 경향은 이와이 내과와 『임상내과학』만의 특색은 아니었다. 경성제국대학 제1외과의 『임상외과』와 동 대학 소아과의 『성대소아과잡지』 또한 『임상내과학』과 비슷한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임상외과』의 본문은 종설, 임상지견, 문헌소개, 임상쇄담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그중 임상지견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다. 『임상외과』 창간호에 수록된 글이 종설 10편, 임상지견 21편, 문헌소개 3편, 임상쇄담 8편이었던 점은 이를 잘 보여준다. 『성대소아과잡지』의 본문은 종설, 임상실험, 임상강연, 임상좌담으로 이루어졌다. 종설을 제외한 모든 부문에 ‘임상’이라는 단어가 들어 있다는 사실은 이 잡지가 실험적·이론적 지식보다도 진료 현장에서 활용 가능한 지식에 주목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로 볼 때, 임상에 실용적인 지식을 생산·전파하는 『임상내과학』과 이와이 내과의 성격은 당대 다른 임상의학교실의 학술지 발간 활동과 공명하고 있었다.
4. 『임상내과학』의 성격과 의미
임상적 경험을 강조한 교실 차원의 학술지 발간은 당대 조선과 일본의 의학계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었을까. 일본 제국의 의학계에서 『임상내과학』과 같은 잡지의 간행이 경성제국대학 혹은 조선만의 특수한 사례였을까, 아니면 그것을 추동한 좀 더 보편적인 흐름이 존재했을까. 조선 의학계에서 유통되는 의학 전문 학술지가 대부분 학회와 학교 차원의 기관지였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임상내과학』의 발간은 조선에서 특수한 사건으로 보인다. 하지만 일본 의학계의 현상과 비교하면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았다. 이 절에서는 ‘일본의과대학부속도서관협회’가 1941년에 발행한 『일본의학잡지일람』(日本醫學雜誌一覽)을 분석하여 당시 일본 제국 의학계의 학술지 간행 상황을 밝히고, 그 지형 안에서 『임상내과학』이 어떤 위치와 의미를 차지했는지 검토하고자 한다.
일본 의학계에서 교실 단위의 학술지 간행은 1920년와 1930년대에 걸쳐 급격히 증가했다.16) 1890년대에 3개뿐이던 교실 학술지는 1900년대에 9개, 1910년대 19개로 늘어났다. 그리고 1920년대에는 24개, 1930년대에는 26개의 교실학술지가 새로 등장했다. 각 10년마다 1890년부터 1910년까지의 30년간 간행되어 온 것보다 더 많은 교실 학술지가 출판된 셈이었다. 이런 시기별 추이는 제국대학들의 설립 시점과 관련이 깊을 것으로 보인다. 간행 학교별로 살펴보면 1890년대에 교실 학술지를 발간한 곳은 모두 도쿄제국대학이었다. 1893년 이비인후과학교실에서 『대일본이비인후과회회보』를, 1897년 안과학교실에서 『일본안과학회잡지』를, 1899년 외과학교실에서 『일본외과학회지』를 창간했다(日本醫科大學付屬圖書館協會, 1941: 140). 1900년대에도 교토제국대학 이비인후과학교실에서 발간한 『이비인후과임상』을 제외한 나머지 8개 잡지는 모두 도쿄제국대학에서 간행되었다. 다른 대학들의 참여는 1910년대부터 시작되었다. 그때 창간된 10개의 교실 학술지 중 3개가 규슈제국대학에서 출판되었으며, 교토제국대학, 도호쿠제국대학, 도쿄제국대학에서 각각 2개씩 창간되었다. 나머지 하나는 게이오기주쿠대학의 것이었다(日本醫科大學付屬圖書館協會, 1941).
1920-30년대에는 경성제국대학을 비롯하여 나고야제국대학, 훗카이도제국대학, 오사카제국대학, 가나자와의과대학, 나가사키의과대학, 니가타의과대학, 구마모토의과대학 등이 교실 학술지 창간에 합류했다. 1920년대에 창간된 24개의 교실 학술지 중 9개는 도쿄제국대학에서 발행되었고, 그다음으로 교토제국대학에서 8개, 게이오기주쿠대학에서 3개, 나고야제국대학, 훗카이도제국대학, 가나자와의과대학, 나가사키의과대학에서 각각 1개의 잡지가 출간되기 시작했다. 1930년대에는 새로 출현한 26개의 교실 학술지 중 5개가 도쿄제국대학에서 창간되었으며, 경성제국대학, 나고야제국대학, 훗카이도제국대학이 각각 3개씩, 교토제국대학, 규슈제국대학, 오사카제국대학, 가나자와의과대학이 각각 2개씩, 도호쿠제국대학, 게이오기주쿠대학, 니가타의과대학, 구마모토의과대학이 각각 1개씩 창간했다. 경성제국대학과 마찬가지로 식민지 제국대학이던 대북제국대학은 1940년대에 접어들어서야 교실 학술지를 간행하기 시작했다(日本醫科大學付屬圖書館協會, 1941).
189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 교실 학술지의 발간 상황을 학교별로 정리하면, 도쿄제국대학이 24개, 교토제국대학이 13개, 게이오기주쿠대학이 5개, 규슈제국대학이 5개, 나고야제국대학과 훗카이도제국대학이 각 4개, 경성제국대학, 도호쿠제국대학, 가나자와의과대학이 각 3개, 오사카제국대학이 2개, 나가사키의과대학, 니가타의과대학, 구마모토의과대학이 각 1개의 교실 학술지를 보유하고 있었다. 순위를 매기면 9개 제국대학 중 경성제국대학은 6위를 차지했다. 이같은 일본 의학계의 맥락에서 살펴보면, 경성제국대학은 1920년대부터 활발해진 교실 학술지 간행의 흐름을 뒤쫓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日本醫科大學付屬圖書館協會, 1941).
일본 의학계의 교실 학술지 증가 추세에서 한 가지 더 주목할 점은 그 현상이 특히 임상의학 분야에서 두드러졌다는 사실이다. 189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 발간된 69개의 교실 학술지 중 임상의학 분야에 해당하는 것은 45개로 전체의 65.2퍼센트를 차지한다. 특히 1930년대에는 임상의학 부문에서 20개가 창간되어 이 시기에 새로 출현한 교실 학술지 전체의 76.9퍼센트를 차지했다(日本醫科大學付屬圖書館協會, 1941). 그런 추세는 세 개의 교실 학술지가 모두 임상 분야에서 만들어진 경성제국대학의 경우와도 맞닿아 있다. 왜 기초의학 분야보다 임상의학 분야에서 교실 학술지 창간이 더 많았을까? 전반적인 의학 학술지 종류의 증가는 연구 능력의 향상과 지식의 축적, 그리고 그에 의한 전공의 세분화와 연구 주제의 다변화에서 비롯된 결과로 보인다. 그러나 그런 변화가 임상의학 분야에서 더 두드러졌다는 근거는 찾기 어렵다. 다만, 이전까지의 학술지가 점점 더 늘어가는 임상의사들의 새로운 지적 수요를 충족시키지 못했다는 점은 유추할 수 있다.
내과 방면에 초점을 맞추어 살펴보면, 교실 학술지가 전통적인 학회 학술지와 차별성을 추구했음이 보다 분명하게 드러난다. 일본 내과학계에서는 『임상내과학』을 제외하고 1920-30년대에 6개의 교실 학술지가 등장했다. 1922년에 교토제국대학 마쓰오(松尾) 내과의 『실험소화기병학』, 1925년에 교토제국대학 쓰지(辻) 내과의 『내분비학잡지』, 1932년에 나고야제국대학 가쓰누마(勝沼) 내과의 『임상병리혈액학잡지』, 1935년에 도쿄제국대학 마나베(眞鍋) 물리요법내과(物療內科)의 『일본온천기후학회잡지』,17) 1936년에 나고야제국대학 오카다(岡田) 내과의 『소화기병학』, 그리고 같은 해에 교토제국대학 마시타(眞下) 내과의 『일본순환기병학』이 창간되었다(日本醫科大學付屬圖書館協會, 1941: 67, 76-77, 84, 115, 142).
이 잡지들은 1903년에 창간된 일본내과학회의 기관지 『일본내과학잡지』와 두 가지 차이를 보였다. 첫째, 『일본내과학잡지』가 내과 전분야를 포괄했던 것과 달리, 교실 학술지들은 내과의 세부 주제를 다루었다. 제목에서 드러나듯 『실험소화기병학』은 소화기학, 『내분비학잡지』는 내분비학, 『임상병리혈액학잡지』는 혈액학, 『일본온천기후학회잡지』는 온천 및 기후가 건강에 미치는 영향, 『소화기병학』은 소화기학, 신진대사병학, 영양학에 방점을 두었다.18) 둘째, 이 잡지들 중 절반은 ‘임상’을 강조하는 본문 체제를 갖추고 있었다. 『일본내과학잡지』가 본문에 특별한 구분을 두지 않고 주로 실험연구를 게재했던 것과 달리, 『실험소화기병학』의 본문은 강좌, 실험, 임상, 강연이라는 섹션들로 나뉘었고, 『일본순환기병학』은 임상강의, 논술, 원저, 강좌로 구성되었으며, 『소화기병학』은 종설, 원저, 임상강의, 임상이라는 네 섹션으로 이루어져 있었다.19) 이런 본문 조직은 이와이 내과의 『임상내과학』과 유사한 형태를 띠었다.
이처럼 1920-30년대 일본 내과학계의 교실 학술지들은 전공의 세분화와 임상 지식에 대한 강조라는 두 경향을 표출했다. 『임상내과학』은 임상 지식을 중시하는 점에서 그들과 비슷한 면모를 보이지만, 특정한 전문 분과에만 초점을 맞추지 않고 내과 전반의 지식을 종합적으로 다룬다는 점에서는 그들과 달랐다. 다시 말해, 『임상내과학』은 일본 제국의 내과학교실 학술지들 가운데 유일하게 분과화하지 않은 잡지였다. 그렇다면 『임상내과학』이 내과 임상의 전반적이고 포괄적인 지식에 무게를 두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 배경에는 일반적인 임상 지식조차 축적 및 교류할 수단이 빈약했던 조선 의학계의 상황이 있었다. 『임상내과학』이 창간된 1933년 무렵 일본에는 임상에 관한 경험적·실제적 지식을 집중적으로 다루는 잡지들이 앞다투어 나타났다. 1890년에 등장한 『실지의보』를 시발점으로 하여 1900년대에 7개의 잡지가 추가로 출현했고 1910년대에는 10개, 1920년대에는 25개, 1930년대에는 21개의 잡지가 등장했다(日本醫科大學付屬圖書館協會, 1941). 이 잡지들은 출판 시장에서의 생존을 위해 적극적으로 개편과 합병에 나섰다. 두 가지 예를 들면, 1905년에 창간된 『치료약보』는 1926년에 『최신치료』, 『의인』과 합병하여 『치료의학』으로 재편됐고, 1910년에 창간된 『임상월보』는 1938년 『금월의 임상』으로 개편한 뒤 1941년에 『진료의 실제』, 『제일시보』와 함께 『임상문화』로 통폐합되었다(日本醫科大學付屬圖書館協會, 1941). 이런 잡지들은 진료를 위한 실용적 지식과 최신 정보를 제공했다. 그러나 조선의 의학 출판 시장은 그와 같지 않았다. 조선에는 학술 논문 및 실험연구 중심의 전통적인 의학 학술지와 『가정위생』, 『의약공론』 같은 대중계몽잡지는 있었지만, 현장에서 진료하는 의사들을 위한 임상 전문 잡지는 거의 없었다.20) 『임상내과학』이 특수하고 세분화된 지식보다 포괄적이고 보편적인 내용을 우선시한 데에는 이런 환경이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조선에서 임상의사를 위한 경험적·실용적 지식에 대한 수요가 높았음은 『조선의학회잡지』의 개편에서도 잘 드러난다. 『조선의학회잡지』는 1941년부터 ‘임상편’을 별도로 발행하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기존 잡지는 ‘연구편’으로 개칭됐다. 임상편이 분리 발간된 이유는 그때까지 『조선의학회잡지』에서 소홀히 다루어지던 임상 관련 지식을 더욱 충실히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조선의학회 회장이던 사토 다케오(佐藤武雄)는 임상편의 발간 의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조선의학회잡지는 30년의 긴 역사를 지니고 있다. 그간 잡지의 내용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최근에는 기초의학 영역의 원저가 주가 됐고, 임상과의 관련성은 감퇴해 왔다. 따라서 임상에 종사하는 다수의 회원에게는 충실하지 못한 점이 많았(중략)기 때문에 이런 개편을 단행하여 임상편과 연구편을 나누어 발간하기에 이르렀다. 임상편은 그 이름이 나타내듯 일반 임상의가에게 가장 긴밀하고 유익한 내용, 특히 조선과 대륙의 질병에 관한 증례 보고 내지는 그에 관한 치료, 종설, 병리 및 반도[조선, 역자주]에서의 의사법규 등을 게재하며, 나아가 회원 상호 간의 소식 전달과 친목 등에도 뜻을 두고 반도의가의 목소리를 듣는다(佐藤武雄, 1941: 1).
요컨대, 그때까지 『조선의학회잡지』가 기초의학 연구를 게재하는 데에 지나치게 치중해 있어서 실제 진료 활동을 돕는 역할을 충분히 수행하지 못했으므로 그 기능을 담당할 용도로 임상편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조선의학회 부회장인 쿠도 다케키(工藤武城)는 “연구업적이 귀중한 까닭은 두말할 나위가 없으나 그것을 읽고 흥미를 느끼는 사람은 그 방면의 연구에 종사하는 사람 혹은 관련 전문 연구자에 한한다”라고 언급하며 『조선의학회잡지』가 그간 임상의사들의 관심에서 멀어졌음을 비판했고(工藤武城, 1941: 5), 경성제국대학 안과 교수인 아사노 류조(早野龍三)는 “3천여 의사를 가진 조선에서 본지 같은 순(純) 임상잡지가 없었다는 것은 오히려 신기한 일”로 임상편의 발간이 “오래전부터 회원 일동이 희망하던 바”였다고 말했다(早野龍三, 1942: 1).
이런 맥락에서 『임상내과학』의 간행은 이처럼 오랜 기간 기초의학에 관한 실험적 연구만을 가치 있는 연구로 인정하고 임상의학에 관한 경험적·실제적 지식을 학문적 논의의 대상에서 배제해 온 조선 의학계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시도였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의학계의 기초의학 및 실험연구 중심적 풍토와 그에 대한 임상의학계의 반격이 조선만의 특수한 현상은 아니었다. 일본에서도 의학계가 실험연구에 치우쳐 임상의학의 육성을 등한시하고 있다는 비판이 1920-30년대에 걸쳐 부상했다(天野郁夫, 2012: 149-185). 그리고 그에 대응하여 의학 출판 시장에서는 “종래 잡지가 매우 고답적이어서 실제로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비난을 시정”하고 “안이하게 연구의학에만 몰두”하지 않으며 임상의학에 공헌하겠다는 목표를 내세워 여러 임상 관련 잡지들이 창간되었다.21) 반면, 조선에는 그럴 만한 의학 출판 시장이 존재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으로 인해 임상의학 지식을 생산하고 전파하는 역할은 그나마 학술지를 간행할 여력이 있던 경성제국대학 임상의학교실의 몫이 되었다. 조선의 특수성은 여기에 있었다.
5. 맺음말
이 논문은 경성제국대학 이와이 내과의 교실 학술지 『임상내과학』의 간행 목적, 내용, 성격을 살펴본다. 『임상내과학』은 이와이 내과 동문회의 유대를 증진하고 임상 지식의 교류를 촉진하기 위한 목적으로 창간되었다. 하지만 『임상내과학』의 독자층이 이와이 내과 동문을 넘어 두터워짐에 따라 친목의 성격은 차차 탈각되고 학술지로서의 성격이 강해졌다. 『임상내과학』의 관심사는 조선 의학계의 기존 학술지들이 흔히 다루어 온 실험적·이론적 연구보다는, 이와이 내과 동문을 비롯한 개원의사들에게 실제적으로 필요한 지식, 즉 진료와 관련된 현실적이고 경험적인 지식이었다.
이런 관점에서 『임상내과학』의 간행은 일견 이와이 내과와 그 동문회 차원의 활동으로 보일 수 있지만, 그 저변에는 일본 제국 의학계를 관통하는 보다 큰 조류가 깔려 있었다. 임상 지식의 학문적 위상을 높이려는 움직임이었다. 1920-30년대 일본에서는 실험연구의 중요성을 지나치게 강조해 온 기존 의학계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었다. 그런 과거의 풍토가 진료에 필수적인 경험적·실용적 지식의 학문적 가치와 권위를 침식했고, 나아가 임상의학의 발달을 저해했다는 지적이었다. 그로 인한 실험과 경험, 기초와 임상 사이의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해 일본 의학계에서는 임상적 경험을 학술지에 실으려는 시도가 이루어졌다. 현장의 경험을 ‘알 가치가 있는 지식’으로 만들려는 노력이었다. 진료 현장의 경험과 교훈을 중시한 『임상내과학』은 그런 흐름과 연동되어 있었다.
조금 더 적극적으로 해석하면, ‘임상 경험의 학문적 위상 높이기’는 그때까지 기초의학의 권위에 눌려 온 임상의학이 스스로의 학문적 입지를 역전시키려 한 시도의 일환이었을 수 있다. 기초의학은 박사학위 수여권을 독점하고 그들의 주력 분야인 실험연구에 가장 높은 과학적 혹은 인식론적 가치를 부여함으로써 헤게모니를 유지했다. 그러나 이런 식민지 시기의 상황은 의과대학에서 임상의학교실이 기초의학교실에 대해 우위를 점하고 학장보다 병원장이 더 높은 지위를 갖는 오늘날의 모습과 반대이다. 현재로 이어지는 기초의학과 임상의학의 입지 전환 과정에는 물론 거대 제약 자본의 성장과 임상시험의 발달 같은 훨씬 더 직접적이고 중요한 요소들이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변화의 한 출발점이 식민지 시기 임상 지식의 위상 향상 시도에 있었을 가능성도 고려해 볼 법하다. 그에 대한 정밀한 탐색은 추후의 과제로 남긴다.
다른 한편으로, 『임상내과학』을 통해 임상 경험을 학술적 교류가 가능한 형태로 가공, 수집, 유통한 이와이 내과의 사례는 그간 한국 근대 의학사 서술에서 미묘하게 배제되어 있던 경성제국대학 임상의학교실의 연구 기능과 성격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연구 중심 교육기관인 경성제국대학의 특성을 따라, 이와이 내과의 주된 임무는 연구 능력을 갖춘 임상의사의 배출이었다. 그러나 조선 개원가의 열악한 현실은 그 의사들의 수련 후 활동을 뒷받침하지 못했다. 대학을 떠난 임상의사들은 실험연구는커녕 진료 능력 향상에 필요한 최신 의학 정보와 심화 지식에 접근하기도 어려운 형편이었다. 이와이 내과는 『임상내과학』을 통해 그런 의사들을 위한 보수교육 자료를 제공한 셈이었다. 하지만 그 교육은 조선 전체의 수요를 충족시키기에는 턱없이 부족했으며 세부 전공 영역의 전문성 강화에 기여한 일본 제국대학들의 경우와 달리 기초적 차원에 머물러 있었다. 이런 이와이 내과의 활동은 경성제국대학 임상의학교실이 수행한 임상연구와 졸업 후 보수교육의 일단을 보여준다.
Notes
경성제국대학이 발행한 기관 학술지의 명칭은 여러 번에 걸쳐 바뀌었다. 창간 시점인 1928년 3월부터 1929년 12월까지는 『경성의학기요』(영문명 Acta Medicinalia in Keijo)였다가 1930년 2월부터는 『경성의학잡지』(영문명 The Keijo Journal of Medicine)로 교체되었으며 1939년 4월부터는 영문명의 Keijo가 Keizyo로 표기되었다(李賢一, 2009: 114). 이 논문에서는 일관성을 위해 『경성의학잡지』로 통칭한다.
『임상내과학』, 『임상외과』, 『성대소아과잡지』의 간행 정보는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홈페이지, 국립중앙도서관 홈페이지, 일본국회도서관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경성제국대학은 연구 중심의 교육기관이라는 점에서 기술 및 응용 교육 중심의 전문학교와 구분되었다(馬越徹, 2001: 148).
「編輯後記」, 『臨床內科學』 1-1 (1933.7), 90쪽.
「岩井內科同窓名簿」, 『臨床內科學』 1-1 (1933.7), 88-89쪽.
「醫箴」, 『臨床內科學』 1-2 (1933.8), 1-2쪽.
이와이 내과 출신 의사들이 위의 덕목들을 완벽히 체화하여 식민성을 극복한 진료를 했다고 단언하기는 어렵다. 이와이의 경우만 보더라도 조선인에 대해 복합적인 태도를 취했다. 그의 제자들에 의하면, 이와이는 서툰 한국어로 조선인을 세심하게 진료하는 자상한 의사였다(전종휘, 1994: 73; 中尾進, 1956: 88).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는 고종의 사망 진단을 내린 후 사인 조작의 의심을 샀던 경험에 대해 “미개한 토지에서는 있을 법한 일”이라며 조선인을 비하하기도 했다(岩井誠四郎, 1956: 37-39). 이런 점을 감안할 때, 이와이 내과가 내세운 덕목들은 그들이 지닌 특성이라기보다는 ‘이상’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야구대회에 대해서는 中尾進, 「朝鮮での岩井先生の思い出二,三」, 岩井誠四郎先生古稀祝賀會編, 『岩井先生古稀記念錄』 (出版者不明, 1956), 88-90쪽; 송년회에 대해서는 「編輯後記」, 『臨床內科學』 3-6 (1935.12), 408쪽; 야유회에 대해서는 田村實眞, 「思い出」, 岩井誠四郎先生古稀祝賀會 編, 『岩井先生古稀記念錄』 (出版者不明, 1956), 102-104쪽을 참고.
「編輯後記」, 『臨床內科學』 3-5 (1935.10), 353쪽.
「編輯後記」, 『臨床內科學』 1-1 (1933.7), 91쪽.
「本誌の會員組織に就て」, 『臨床內科學』 1-2 (1933.8), 58쪽; 「編輯後記」, 『臨床內科學』 1-4 (1933.10), 70쪽.
「原稿募集」, 『臨床內科學』 1-2 (1933.8), 58쪽.
「總目次」, 『臨床內科學』 1 (1933), 3쪽; 「總目次」, 『臨床內科學』 2 (1934), 3쪽.
「編輯後記」, 『臨床內科學』 6-6 (1938.12), 435쪽.
京城帝國大學醫學部 岩井內科敎室 編, 「岩井敎授指導下ニ成レル主要業績」, 『岩井敎授論文集』 (京城: 岩井內科敎室, 1939), 1-20쪽.
이하의 내용은 『일본의학잡지일람』에서 발행처가 의과대학 소속 교실인 정규 학술지만을 추출하여 분석한 결과이다.
물리요법이란, 광선 요법, 전기 요법, 온천 요법, 기후 요법, 온열 요법, 마사지 요법 등 물리적인 힘을 빌려 질병을 치료하는 방법을 뜻한다(東京帝國大學 編, 1942: 167-179).
『소화기병학』 창간호에는 ‘소화기병학’이라고 적힌 제목 바로 아랫줄에 신진대사병학과 영양학이 병기되어 있다(岡田清三郎, 1936: 1).
『임상병리학혈액학잡지』를 제외한 나머지 잡지들은 모두 J-stage에서 원문을 확인할 수 있다. 「日本內科學會雜誌」, J-stage, https://www.jstage.jst.go.jp/browse/naika/-char/ja. 검색일: 2024.6.15 ; 「實驗消化器病學」, J-stage, https://www.jstage.jst.go.jp/browse/nisshoshi1926/-char/ja. 검색일: 2024.6.15; 「內分泌學雜誌」, J-stage, https://www.jstage.jst.go.jp/browse/endocrine1925/-char/ja. 검색일: 2024.6.15; 「日本循環器病學」, J-stage, https://www.jstage.jst.go.jp/browse/circdj/-char/ja. 검색일: 2024.6.15; 「日本溫泉氣候學會雜誌」, J-stage, https://www.jstage.jst.go.jp/browse/onki1935/-char/ja. 검색일: 2024.6.15; 「第一卷目次」, 『臨床病理學血液學雜誌』 (1932), 쪽수 없음.
「가뎡위생」, 현담문고, http://adanmungo.org/view.php?idx=5260. 검색일: 2024.6.15; 「의약 공론 발행」, 『동아일보』, 1931.4.4.
「編輯後記」, 『診療と經驗』 1-1 (1933), 134쪽; 「編輯後記」, 『臨床の日本』 1-1 (1933), 14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