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말 의학과 유학의 결합 양상: 단계 주진형을 중심으로
The Integration of Medicine and Confucianism in the Late Yuan Period: Focusing on Neo-Confucian Physician Zhu Zhenhe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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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Zhu Zhenheng, the last generation and sole representative from Southern China among the four masters of Jin-Yuan medicine, synthesized the evolution of Chinese medicine from the Song to the Yuan dynasties, profoundly impacting East Asian medical history. Zhu, identified as a Neo-Confucian scholar, appears in the Scholarly Records of the Song-Yuan Dynasties and in ‘the Biographies of Confucians’ rather than ‘the Biographies of Experts’ in the Official History of the Yuan Dynasty. His close association with the Jinhua school of Daoxue is noteworthy. Zhu’s career, as well as his medical theory and practice, exemplify the influence of Zhu Xi’s Neo-Confucianism, which was a significant intellectual resource among the literati during the late Yuan period, on medicine. Zhu Zhenheng’s model of a Confucian physician later became a paradigm in East Asia, as Neo-Confucianism gained mainstream acceptance among the literati. This paper offers a detailed exploration of the specific contexts of Zhu’s social and intellectual networks as well as an examination of the characteristics of his medical theories and practices. It explores how Zhu’s career and identity as a Neo-Confucian physician were shaped through the local and empire-wide networks of the Jinhua school of Neo-Confucianism within the broader context of the Mongol empire, a global power in the late Yuan period. The paper also examines in depth how Zhu’s medical practices were influenced by Neo-Confucianism, and it investigates the real nature and significance of the integration of medicine and Neo-Confucianism, two distinctly different realms of knowledge. Zhu Zhenheng’s medical theories were formed through concerns about jufang medicine and the active presentation of alternatives. A notable aspect of his integration of medicine and Confucianism was the adoption of Neo-Confucian terminologies, concepts, and philosophical and ethical theses, while ensuring that the unique and independent domain of medicine was not subordinated to abstract philosophical theories. This is especially evident through his active and effective use of medical cases. Unlike previous studies, this paper demonstrates that Zhu Zhenheng’s integration of medicine and Neo-Confucianism was mostly a metalevel process, involving methodology and knowledge reproduction patterns, and was driven by a belief in the possibility of harmonizing with Daoxue’s ultimate principle without undermining the autonomy of medical knowledge.
1. 서론
단계 주진형(丹溪 朱震亨, 1281~1358)은 동아시아 의학사의 획기적 변화를 가져온 금원시기를 대표하는 ‘금원사대가’ 중 가장 후대의 인물이자 유일한 강남 출신으로1) 송대 이후의 중국 의학사의 변화를 “집대성”하고(刘时觉, 2004; 吴以义, 2008; Simonis, 2015) 화북지역의 의학적 성취를 강남지역에서 흡수하여 발전시킨 인물이다(朱德明, 1999; 2007). 그는 도학(道學)이2) 엘리트층의 주류 사상이자 삶의 양식으로 자리를 잡은 시점에서, 주희(朱熹, 1130~1200)의 학의 적통(嫡統)을 자임하는 금화학파(金華學派)의 학맥으로 온전히 받아들여졌고, 송대 이후 나타난 식자층 의사, 특히 ‘유의(儒醫)’라고 불리는 새로운 유형의 의사의 전형으로 여겨지며 향후 동아시아 의사들의 사회적 존재 양상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陳元朋, 1997; 祝平一, 2006; 谷口綾, 2013; 김성수, 2015; 최해별, 2018a; 김영수, 2019). 그의 의학은 중국뿐 아니라 한국, 일본, 베트남 의학사에서도 중요한 위상을 차지한다(신동원, 2015; 真柳誠, 2020).
이 논문은 주진형의 유의로서의 사회적 존재 방식과 그의 의학의 특징을 분석해 봄으로써, 동아시아 의학사의 중요 분기점이자 유학사에서는 도학이 주류적 위상을 가지게 되는 시점에, 의학과 유학이 어떠한 양상으로 결합 되었는가를 분석해 보고, 그것이 동아시아 의학사·과학사·지식사에서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지 고찰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2장에서는 세계제국 몽골제국의 지식·엘리트 네트워크의 맥락 안에서 원대의 의사와 의학은 어떠한 성격을 띠고 또 어떻게 변화했는가를3) 살펴봄으로써 주진형과 그의 의학의 배경을 이해해보고, 주진형의 삶과 의학의 기반이 된 절강성 무주(婺州) 지역의 금화학파의 네트워크와 학풍의4) 분석을 통해 도학의 적통을 자임하는 금화학파라는 배경이 그의 삶과 의학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으며 사회에서 유의로서의 존재 방식을 어떻게 새롭게 변화시켰는가를 살펴볼 것이다. 3장에서는 유의 주진형의 의학의 특성을 이해하기 위해, 그가 맹렬히 비판하였던 국방의학(局方醫學)에 대한 문제의식과 대안을 살펴보고, 그가 어떻게 의학을 이론화, 학술화, 체계화했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나타나는 이론과 임상에서의 여러 충돌 지점을 어떻게 해결하려 했는지를 살펴보겠다. 이를 통해 주진형의 의학에 도학이 미친 영향의 내용과 성격을 명확히 하고, 그의 의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임상과 그 기록인 의안(醫案)의 의미를 분석함으로써, 기존의 연구에서 주진형의 의학과 도학의 관계에 대한 설명과는5) 다른 시각에서 중국의학사의 중요한 분기점에서 어떻게 의학과 유학이 결합을 하고 있는지를 셜명할 것이다.
더 나아가 이 논문의 주제를 다음과 같은 두 가지의 더 광범한 맥락에 위치시켜 이해하고자 할 것이다. 첫 번째로 금원시기를 넘어서 송에서 명초에 이르는 송원명 교체기 시기의(Smith, 2003) 중국의학사라는 맥락에 금원사대가와 주진형을 위치시켜 이해하려 한다. 금원시기는 북송시기부터 시작된 변화의 연장선에서 이해할 수 있는 부분과 금원시기부터 나타나는 확연한 변화를 보이는 부분이 공존하는 시기이다(Leung, 2003: 386-398). 송원명 교체기의 장기적 시각에 주진형의 의학을 위치시켜 파악할 때, 금원시기 의학이 어떻게 송대부터 시작된 변화의 흐름 속에서 연속성과 차별성을 나타내며 전개되는지를 더 잘 보여줄 수 있다고 본다.6)
두 번째로는 의학사를 더 폭넓은 과학사, 지식사의 맥락에 위치시켜 놓고(Daston, 2017; De Sio, 2019), 유학을 자신의 정체성과 지식의 기반으로 삼는 사대부 엘리트층이 전혀 다른 유형의 전문지식을 어떻게 수용해가는지, ‘유의’라는 새로운 유형의 의사가 어떻게 엘리트 네트워크에서 자리를 잡아가는지를 살펴보려 한다. 의학과 유학이라는 상이한 지식체계가 어떻게 상호 작용을 하며 의학이 지식 체계로 정립되어가는지에 대한 이 논문의 분석은 전근대 동아시아 사회에서 의학뿐 아니라 유학과는 전혀 다른 성격을 지닌 지식 체계, 특히 자연과학적 세계를 다루는 지식 체계가 유학과 만났을 때, 양자가 어떻게 결합, 충돌, 공존하였는가에 대한 연구에도 새로운 시각과 시사점을 제시할 수 있다고 본다.7)
2. 원말 지식·엘리트 네트워크와 유의 주진형
1) 몽골제국의 지식·엘리트 네트워크와 의학지식, 의사
세계제국 몽골제국의 일부였던 원은 역참제도와 여행자 등을 통한 팍스 몽골리카의 정보 고속도로를 이용해 다양한 지역과 문화권의 지식들을 교류하였다(김호동, 2013; Biran, 2020). 이 시기 원은 아시아의 여러 지역은 물론 이슬람을 비롯하여 유럽에서 들어온 지식과 문화에서도 영향을 받았고, 반대로 중국의 지식과 문화도 세계 각 지역으로 전파되었다. 천문학 (Yang, 2017; 2019; 이은희 외, 2018), 지리적 지식 (Park, 2012), 농학, 수학(Guo, 2019), 각종 기술 등 다양한 분야의 지식의 상호 교류가 이루어졌고, 의학도 예외는 아니었다. 원은 아랍, 이집트, 오스만제국 등으로부터 직접 약제를 수입하기도 하였고(Buell, 2007a: 280-283), 회회약물원(回回藥物院)의 수립, 아랍의 의서를 번역한 『회회약방(回回藥方)』 (Buell, 2021), 건강에서 음식의 중요성을 강조하게 된 풍토(Buell, 2007b; 조원, 2017)등에서 알 수 있듯이 특히 아랍 의학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Buell, 2007a; Schottenhammer, 2013).
원은 천문학, 점술, 의학 등 실용적 목적에 봉사하는 학문에 큰 관심을 기울여 지원하였고(Yang, 2019: 390-391), 이러한 학문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예외적인 신분 상승의 기회를 얻기도 하고 연구에 풍부한 지원을 받을 수도 있었다(Yang, 2017: 1241-1243). 또한 국가가 이들 분야를 진작시키기 위해 기구와 제도의 마련에 힘썼는데(Yang, 2017; 2019), 의료 분야는 원이 특히 중점을 두어 지원을 하였던 분야이다(Shinno, 2016; 范家偉, 2017; 2020).8) 그러나 원대의 다양한 분야의 지식의 발전이 국가의 제도와 지원에 의해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국가와 특별한 관계없이 재야에서 독립적으로 활동한 많은 이들과 사회 저변의 광범한 엘리트층의 네트워크는 어떤 면에서는 원의 다양한 지식을 떠받치고 있는 진정한 기반이었다. 원대 지식의 세계를 잇는 네트워크는 민족, 종교, 지위, 지역, 지식의 분야 등을 넘어서 광범하게 형성되어 있었다. 최근 원대사 연구는 전제국적으로 연결된 엘리트 간의 폭넓은 네트워크의 형성과 교류에 주목하고 있다(Chen, 2007; 申万里, 2012; Chu, 2018). 이들 연구는 몽골인, 색목인, 한인, 남인으로 분류하여 한족 지식층이 여러 제약에 의해 위축되어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과는 달리, 전제국적으로 여러 구분을 넘어 광범하게 형성된 엘리트 사이의 네트워크가 존재하였고 이들을 통해 활발한 교류가 있었음을 보여준다.9) 원의 지식세계는 유가적 교양에 바탕을 둔 한족 엘리트층과 제국운영을 위한 실용적 지식에만 관심을 가지고 중국문화와 동떨어진 한족 이외의 민족들로 분리되어 있지 않았다. 한족과 비한족들을 포함하여 제국의 엘리트층들은 인적으로 매우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고 다양한 지식과 문화의 상호 교류가 존재하였다. 지식의 내용 면에 있어서도 한족 사인들도 유가적 교양, 문학, 역사 등의 전통적 인문지식 뿐 아니라 자연과학이나 기술 등과 관련된 다양한 지식에도 광범하게 노출되어 있었고 개방적으로 다양한 분야의 새로운 지식을 수용하였다(Guo, 2019). 비한족 엘리트들도 전통적 중국 지식체계를 적극 수용하였고 중국의 전통적 사인 문화 활동에 매우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네트워크의 중심에 있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Chu, 2018: 284-298).10)
원대의 의사와 사인들 간의 활발한 교류와 네트워크 형성도 위에서 말한 광범한 원대의 엘리트 네트워크의 일환으로 이해될 수 있다(Shinno, 2016; 鞠芳凝, 2021). 전근대 중국의 전문 지식을 다루는 이들은 대부분 기본적으로 유학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이들은 공통 기반을 가지고 있었고 직접적 교류뿐 아니라 간접적 관계에 의해서도 연결되어 있었다. 북송 시기부터 나오게 된 ‘유의’라는 용어에서 알 수 있듯이 송대 이후로는 유학과 의학을 동시에 익히는 사인들이 늘어났으며 유의로 불릴 정도로 의학에 전문성을 키우지 않았을지라도 의학에 대한 관심과 존경심을 표하며 상당한 정도의 의학 지식을 가진 사인들도11) 존재했다(Hymes, 1987; 陳元朋, 1997). 송대까지는 사인층에서 직업적 선택지로 의료를 적극 고려하지는 않았지만, 하임즈의 강서 무주(抚州)의 연구에서 볼 수 있듯이 관리가 될 기회가 극도로 제한되기 시작한 원대(화북 지역에서는 금대)부터 실제로 의료를 직업으로 택하는 사인층이 늘어나기 시작하였다(Hymes, 1987: 18-26).
이러한 송대 이후의 흐름 속에서 원대에 이르러 사인층과 의사들이 더 활발한 교류를 하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원의 의료 중시, 사인의 직업 선택의 제한, 사인의 의사에 대한 존중감 증가와 더불어 원대부터는 활발한 학술적, 문화적 교류를 하는 사인들의 네트워크 자체에 의사들이 포함되는 사례가 증가하였기 때문이다. 사인 측에서는 의학 자체에 지적, 실용적 호기심을 가진 경우가 많았고 의사를 알고 있다는 것은 자신과 가족의 진료를 보장 받는데 큰 도움이 되었기에 의사와 관계를 맺기를 원하였다. 의사 측에서는 유명한 사인들을 통해서 명성을 제고하고 자신의 의료활동에 도움을 얻을 수 있고 추천을 통해 지배층에 접근하여 다양한 기회를 보장받을 수 있기에, 이들은 상호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 노력하였다(Shinno, 2016: 94-120; 鞠芳凝, 2021: 86-110).
남송, 금, 원 모두 사인층과 의사의 교류는 활발하였고, 사인층은 의사와의 교류를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많은 문헌을 남겼다.12) 신노의 이들 문헌에 대한 연구는 원말이란 시기에 강남지역에서 금화학파라는 도학 네트워크와 긴밀한 연관 속에서 전개된 주진형의 의학과 의사로서의 존재 양식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맥락을 제공한다. 신노는 문헌의 내용을 상세히 분석하여 의사를 묘사하는 사인들의 태도에서 화북과 강남의 지역적 차이와 시대적 변화, 특히 도학의 전파에 따라 의사에 대한 기대와 평가에 변화가 생겨남을 잘 설명하고 있다(Shinno, 2016: 94-120). 금말과 원초의 화북 지역 사인들은 의사를 유학자로 묘사하는데 그다지 관심을 보이지 않고 엘리트의 일원으로서의 의사가 얼마나 사인들의 전통적인 “문(文)”에 적극 참여했는가에 중점을 두고 글을 쓴 반면, 남송의 대다수 도학의 추종자였던 강남 사인들은 의사의 자질로도 도학의 가치와 도학자로서의 올바른 행동을 중시하여 유학의 정신을 지키며 유학을 계속 공부해나가는 의사를 찾았다(Shinno, 2016: 95-100).13) 예를 들어, 엘리트 의사들에 대한 평가에서, 소식(蘇軾, 1037~1101)의 학문이 주류를 이루던 시기에 문장으로 이름을 날렸던 금의 엘리트인 원호문(元好問, 1190~1257)은 의사들도 전통적인 문화 영역, 특히 문장의 영역에서 공유할 것이 있고 이에 참여하는 일원이라는 점을 가장 중시하고 있었지만, 주희의 증손자이며 도학의 계보에 위치한 남송의 연견(硯堅, 1212~1289)은 엘리트 의사의 묘사에서 이상적인 유학자의 측면을 강조하고 그들의 가치가 도학의 가치와 얼마나 일치하는가에 주목한다(Shinno, 2016: 95-100). 금이 무너진 후 원 치하의 화북에서도 도학에 입문한 새로운 세대의 학자-관료층이 나타났는데 한림학사를 지냈던 왕운(王惲, 1228~1304)이 그러한 예이다. 왕운은 장인과 의부가 의사인 배경을 지녔을 뿐 아니라 자신의 잦은 질환으로 인하여 의사와의 교분이 두터워서 의사들과의 교류에 대한 많은 글을 남겼는데(Shinno, 2016: 100-103), 전 세대 화북의 사인인 원호문과 달리 그는 도학의 기준으로 엘리트 의사를 평가하였다.
강남 지역의 사인으로 최소 51개의 의사에 관한 글을 남긴 남송 말 강서성 무주에서 태어난 도학자인 오징(吳澄, 1249~1333)은 젊은 시절부터 의서를 공부하였고 이를 가족을 돌보는데 응용하기도 한다(Shinno, 2016: 103-109). 오징의 삶과 철학에서 의료는 상당한 비중을 지니고 있다(성호준, 2005). 그는 이 시기 의학의 새로운 발전은 화북에서 이루어졌다고 보았고, 강남의 의사들에 대해서는 박한 평가를 하였다(Shinno, 2016: 108-109). 오징은 의지도(醫之道)와 유지도(儒之道)는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기에 모든 유학자는 의학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했다.14) 오징도 도학의 가르침을 기준으로 엘리트 의사를 평가하였고 더 나아가 단순히 의학의 원칙과 문헌을 공부하는 것뿐 아니라 성(誠)이라는 도학의 가치를 실현할 수 있어야만 좋은 의사가 될 수 있음을 강조했다(Shinno, 2016: 105). 또한 양의(良醫)의 조건으로 도덕적 자질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으며 도덕적 자질이 의술의 수준과도 연결되어 있다고도 보았다(Shinno, 2016: 108-109). 오징은 의(醫)의 실(實)을 유학자들의 실행 없는 허언과 종종 대비하였고, 심지어 과거 시험을 준비하는 것보다 의사가 되는 것이 유학이 말하는 진정한 성인(聖人)의 도를 실현하는 삶과 더 가까워질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Shinno, 2016: 105-106).15) 훌륭한 의사를 국의(國醫)라고 칭하며 국가에 의하여 지원되는 의사들을 상정했던 화북의 원호문, 왕운과 달리 원대 강남에 살았던 오징은 “국의”라는 표현을 1번 외에 쓴 적이 없으며(Shinno, 2016: 109), 오히려 훌륭한 의사는 한 지역의 문화적 전통의 산물로 보았다.16) 이는 송 이래 강남 도학자들의 주된 기류이기도 하였다. 훌륭한 도학자가 국가의 지원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듯 훌륭한 의사도 국가가 아닌 사회, 특히 그들이 기반을 두고 있는 지역사회의 문화적, 지적 전통의 산물이라고 본 것이다. 남송 이래 강남에서는 국가의 지원보다 지역의 문화적, 지적 전통이라는 배경이 훌륭한 엘리트 의사를 키워내는 주된 요소로 강조되고 있지만, 이렇게 길러진 엘리트 의사들은 물론 원대에 의료에 관련된 관직에 진출하게 되고 이들은 엘리트층으로 자연스럽게 섞이기 시작한다.17)
원 중기 이후 강남에 거주하던 유학자 가문에서 태어나 무주 사인의 정체성의 핵심인 주희의 학맥에 속한 도학자가 된 주진형은 위에서 말한 원 중기 이후 강남 도학을 받아들인 사인들이 높게 평가하는 유의의 유형과 그 존재 양상을 잘 보여주는 예이다. 그는 사인이 의사의 길을 직업 선택지로 받아들이게 된 예를 보여주며, 그의 삶은 과거 시험에 소진되는 것보다 의사의 길을 가는 것이 오히려 도학의 이상인 성인의 도를 실현하는 삶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본인 뿐 아니라 주변의 주자의 적통을 자임하는 저명한 유학자들도 모두 공인해주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의 집안을 보면 의학을 업으로 하는 사람들이 기존의 사인층들과 친족 관계나 인맥으로 자연스럽게 섞여 있는 좋은 예이기도 하다(刘时觉, 2004: 1-8; 马雪芹, 2006: 1-16). 다음 절에서는 주진형에게 가장 중요한 네트워크였던 절강성 무주의 사인 사회와 금화학파와의 관계의 맥락에서 유의 주진형을 살펴보겠다.
2) 무주의 사인들, 금화학파와 주진형의 관계
주진형은 『원사(元史)』에서 의사와 같은 전문기술직종을 기재한 「방기전(方技傳)」이 아닌 유학자들을 기재한 「유학전」에 올라 있으며 주자(朱子)의 적통이라 주장하며 명의 건국 시기에 도학을 주원장(朱元璋, 1328~1398)에게 이념적 기반으로 제공하며 큰 영향력을 행사한 절강성 무주 지역을 중심으로 한 금화(金華)학파와 긴밀한 관련성을 지니고 있다. 그는 당시 도학자의 주요 인맥과 가까웠고, 주희의 4전 제자인 허겸(許謙, 1270-1337)의 학맥으로 『송원학안(宋元學案)』에 실려 있기도 하다. 주진형의 유학자로서의 정체성, 유학자 집단과의 관계와 그의 의학과 의사로서의 존재 양상을 서로 분리하기는 어렵다(Furth, 2006; 張學謙 2012; 2015). 주진형에 대한 가장 중요한 전기자료를 쓴 이 또한 명의 건국 과정에 참여하여 주원장이 도학을 국가의 기본 이데올로기로 채택하는데 큰 영향력을 행사하였고(Langlois, 2009) 중국을 뛰어넘는 국제적 명성을 지녔던 금화학파가 배출한 가장 저명한 인물인 송렴(宋濂, 1310~1381)18)이었다. 송렴의 묘비명 「고단계선생주공석표사(故丹溪先生朱公石表辭)」(『丹溪心法』 附, 이하 「석표사」)의 주진형에 대한 기록은 그와 절강성 무주 지역의 사인들과 금화학파와의 관계를 보여줄 뿐 아니라, 주진형 사후 송렴에 의한 이러한 기록과 찬양이 주진형의 영향력이 전제국적, 국제적으로 전파되는데 크게 기여했다.
주진형은 원 세조 22년에 절강성 무주 의오현(義烏縣)에서 대대로 유학을 익힌 가계인 적안(赤岸) 주씨 집안에서 태어났다.19) 부친 주원(朱元, 1263~1295)은 일찍 사망했으나 모계와 처가인 척(戚)씨도 학술 전통을 지닌 집안이었다.20) 젊은 시절에는 협기를 숭상하는 풍모를 지녔지만 36세에 금화 사선생의 가장 후대 인물로 주희의 4전 제자인 허겸의 가르침을 듣고 “도를 듣는데 힘쓰기로” 결심하여 허겸의 제자가 되어 “천명인심(天命人心)”과 “내성외왕(內聖外王)”의 공부를 하였다.21) 과거에 실패한 후 스승 허겸의 충고에 따라 “궁하여 아래에 있으니 은혜를 멀리 보낼 수 없으므로 멀리 보내려면 의학이 아니고서 어떻게 추구하겠는가”라고 하며 모친과 친지, 스승의 질병으로 관심을 가지게 되었던 의학에 투신한다. 그는 배종원(裵宗元), 진사문(陳師文) 류의 국방의학이 성행하는 것에 불만을 가지고 “고방(古方)이 신증(新症)에 합당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여러 지역을 찾아다니며 스승을 구하다 유완소(劉完素, 1110~1200)의 제자이자 장종정(張從正, 1156~1228), 이고 (李杲, 1180~1251)의 학설에 정통한 나지제(羅知悌, ca.1243~1327)를 항주에서 만나 새로운 의학을 공부한다. 나지제에게 배운 후 처음 고향에 돌아왔을 때는 여러 의사가 그를 비웃고 배척하였으나 마침내는 모두 탄복하며 제자가 되기를 원하였다.
주진형은 이미 고향에서 의학으로 이름을 알리고 있었음에도 40이 넘는 나이에 새로운 의학을 배우고자 스승을 찾아 무주를 떠났던 길지 않은 기간(1325~1327)을 제외하고 관직도 거부하고 대부분을 무주에서 생활하였다. 그에 대한 상세한 자료를 남긴 송렴과 「단계옹전(丹溪翁傳)」을 쓴 대량(戴良, 1317~1378), 그가 의례 자문을 해주었던 정씨의문(鄭氏義門), 일생 스승으로 받든 허겸, 이후 그의 다수의 제자 모두 무주의 사람이었음에서 알 수 있듯이 그의 중요한 인간관계는 무주를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었다. 특히 금화사선생인 허겸의 제자가 되어 주자의 5전 제자로 인정되어 금화 도학 네트워크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졌다는 것은 그의 삶과 사후의 그에 대한 기록과 영향력 확산에 주요한 작용을 하였다. 송렴이 쓴 주진형의 일생을 보면 무주는 그에게 단순한 고향이나 주거지 이상이었다. 그는 무주 지역과 관련된 지역민의 문제, 공공적 일에 자발적으로 적극 참여, 지도하였고 그의 명성 또한 명의로서뿐 아니라 지역에서의 지도적 인사로서의 면모가 매우 강하다. 그의 의학과 의사로서의 삶은 강한 지역 정체성을 지닌 무주의 금화학파라는 사인 집단과의 결속을 떠나서는 설명하기 힘들다(Furth, 2006: 434-441; 马雪芹, 2006: 83-138).
절강성 교통의 연결 중심지에 위치한 무주는 원대에 강남의 다른 지역들과 비슷하게 국가의 피라미드적 체제에 의해 분배된 권위로부터 독립하여 사인층 스스로 형성한 네트워크를 통해 자신들이 문화적, 준(準) 정치적 권위를 지니고 있음을 주장하였다(Bol, 2022: 19-24). 때로는 협력관계에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국가권력으로부터 독립된 권위를 추구하는 사인층의 네트워크를 형성, 유지하고, 그 안에서 특정한 사람들이 영향력을 얻게 되는 방식은 다른 강남 지역의 경우와 비슷하였다.22) 다른 어떤 지역보다 원대의 문집이 많이 남아 있고 지방지 출판도 빈번하였던 무주 지역은23) 송대에는 도학 운동의 비판자들의 고향이기도 하였으나 12세기 중엽 도학의 중심지가 된다. 무주는 12세기에서 16세기에 걸쳐 학문으로 전국적으로 때로는 국제적으로도 명성을 얻은 지역민이 늘 존재하였고 12세기 중엽에 이곳 현시(縣試)는 200대 1의 합격률로 전국에서 가장 경쟁이 치열했다. 12세기 말부터 매번 과거 시험마다 대략 10명의 진사를 배출하기 시작하여 꾸준히 많은 진사를 배출한다(Bol, 2022: 33-35).24) 과거에서 성공적이었던 무주 지역의 사인들은 과거에 의한 사환이 제한되었던 원대에는 국가에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정체성과 특권, 그리고 문화와 학술적 전통을 유지하기 위해 강력한 지역 사인들의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지역 정체성을 강화하는 전략을 취한다(Chen, 2007; Bol, 2022). 본격적으로 무주의 학풍이 조성된 것은 12세기에 여조겸(呂祖謙, 1137~1181)이 도학을 도입하고 사인 공동체를 만들기 시작하면서부터이다(Bol, 2022: 59). 여조겸이 진작시킨 무주의 사풍은 남송말부터 변화하여, “금화사선생”으로 명명되어진 주희의 학의 열렬한 수호자인 하기(何基, 1188~1268), 왕백(王柏, 1197~1274), 김이상(金履祥, 1232~1303), 허겸(許謙, 1270~1337)에 의해 원대에는 도학의 중심지로 자리매김하고,25) 주희의 사위인 황간(黃榦, 1152~1221)이 주희의 도통을 북산(北山)의 하기에게 전수한 이래로 이들은 자신들이야말로 주희의 적통이라 주장한다. 무주지역의 사인들의 네트워크에서 독특한 점은 주희의 도통을 잇는 진정한 계승자라는 도학의 학파로서의 정체성이 지역적 정체성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이 때 도통의 계승자로 주희의 학을 따라 사는 삶은 단순한 학문 수양을 넘어서 지역 사회에서 공공선을 위해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하는 것에 의하여 완성될 수 있으며, 그 구현의 장은 바로 자신의 지역 사회, 이들에게는 무주였던 것이다.
주진형의 삶은 도학이 제시한 지역사회에서의 공공선을 이루는 삶의 방식으로 의사로서의 활동이 적극적으로 인정을 받게 되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특히 도학의 주류라고 볼 수 있는 금화학파에서 주진형에게 의업을 할 것을 스승인 허겸이 권하면서도 그를 완전한 자신들의 학맥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과 송렴의 주진형 전기에서 볼 수 있듯이 그의 의사로서의 삶은 결국은 도학의 이념을 실천하는 삶으로 이해되었고, 그의 의사로서의 활동이 지역사회에서 올바른 도학이 추구하는 이상적 삶의 양식으로 서술되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Bol, 2022: 167). 결국 의술을 베푸는 것은 도학을 실현하는 하나의 방식으로 이해되었고 주진형은 의사로서뿐 아니라 지역의 사인으로서의 활동을 바탕으로 유의로서 정통적인 도학의 학맥의 완전한 일원으로 수용되고 있다. 도학자로서의 윤리적 자질과 사회적 실천을 하고 있다는 것이 송렴의 주진형에 대한 높은 평가의 핵심이며, 그러한 자질과 실천이 의사로서의 삶으로서도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Furth, 2006: 439-441).
주희의 학의 정통성을 계승하는 것을 자신들의 정체성으로 삼은 금화학파는 어떤 지적 풍토와 경향성을 가지고 있기에 주진형에게 의학을 권하고 그를 다른 도학의 철학적 논의와 저작에 대한 기여 없이도 의학에 대한 기여와 지역 사인으로서의 공헌만으로 자신들의 학맥에 온전한 일원으로 수용할 수 있었던 것일까? 그에게 의학을 적극 권한 허겸을 살펴보더라도 그에 대한 평가는 “주자학 맥을 계승하여 ‘금화사선생’, ‘북산사선생’으로 일컬어졌으며 북방의 허형(許衡, 1209~1281)과 함께 ‘남북이허(南北二許)’로 불리었다. 천문, 지리, 전장, 제도, 자학, 음운 등에도 두루 통하였다”(『송원학안』)고 하여 그가 주자의 적통임을 강조함과 동시에 실용지식을 포함한 다양한 지식체계에 두루 능통한 박학(博學)의 전통을 잇고 있음도 이야기하고 있다. 송렴 또한 이러한 박학의 기풍과 자연과학 지식, 실용지식을 비롯하여 다양한 지식에 대하여 매우 수용적인 자세를 보여주었던 대표적 인물이다. 이러한 지적 풍토에서 의학은 박학의 일종으로 받아들여졌다. 무주의 박학의 전통은 오래된 것이고26) 송말 이후 주희의 학의 진정한 계승자를 표방하면서도 무주의 사인들은 동시에 박학을 추구하였지만, 이것이 박학과 도학의 공존이 전혀 모순되지 않아서 공존을 위한 논리가 필요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주희 자신도 박학다식한 학자였으나 주희는 박학을 “지리(支離)”의 위험이 있다고 늘 경계하였다.27) 또한 도학 사상가들은 “덕성지지(德性之知)”의 원천으로서의 사물의 리에 대한 탐구에 비해 현상 세계의 지식, “견문지지(見聞之知)”를 쌓아가는 것을 부차적인 것으로 여겼다. 박학의 일종이자 기본적으로 “견문지지”를 중시하는 학문으로 볼 수 있는 의학이 도학과 공존하기 위한 논리는 필요하였고, 주진형 스스로도 그리고 그가 속해 있던 금화학파의 학자들도 나름대로 이러한 논리를 제공하여야 했다. 이 공존의 논리를 어떻게 제시했는가는 다음 장에서 다루어질 것이다.
주진형은 「방기전」이 아닌 「유학전」에 수록되고, 이후 『송원학안』에 실릴 만큼 금화학파의 일원으로 완전하게 인정받았지만, 소수의 남아 있지 않은 저작을 제외하고28) 그의 저작과 학술적 업적은 모두 의학에 관한 것이다.29) 그가 도학의 철학적 의논에 깊게 관여하였다는 기록도 없고 이에 대한 공헌을 남기지도 않았다.30) 그의 대표저작이 도학의 색채를 강하게 띄는 “의학도 격물치지(格物致知)”31)의 공부라고 주장하는 『격치여론(格致餘論)』이라는 제목의 저서이지만, 그의 저작에서 특별히 도학에 대한 철학적 논의를 발견할 수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화학파라는 주희의 적통을 잇는 무주의 도학 네트워크에서 완벽하게 자신들의 일원으로 승인을 받고 있다는 것은 의학과 의사로서의 삶만으로서도 충분히 사인층의 핵심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라고 보인다. 주진형의 유의로서의 사회적 존재 양상은 이전과 다른 새로운 측면을 보여주는데, 주진형은 기본적으로 유학을 공부하였던 사인으로 시작하였지만 이후의 그의 삶은 의사로서의 행보가 주를 이루고 학문적 업적과 저작, 사람들과의 학술적 교류 또한 의학을 통한 것이 거의 전부를 이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도학의 계보의 완전한 일원으로도 받아들여졌다는 것이다. 이는 의학 방면에서뿐만 아니라 유학 방면에서도 큰 성과를 보인 유학자를 그들의 유학 방면에서의 업적 때문에 유학의 계보에서 중요하게 보는 것과는 다르다. 또한 명백히 “유의”로는 여겨졌던 금원사대가인 유완소, 장종정, 이고와 같은 경우는 유학의 계보에 주진형처럼 적극적으로 포함되어지지는 않는다. 주진형이 의학에서의 업적과 의사로서의 삶만으로서도 유학자로 온전히 받아들여졌다는 것은, 물론 일정한 가족, 교육 등의 배경을 전제로 하고는 있지만, 의학이 일종의 학술적 체계를 띄게 됨에 따라 유학을 중심으로 한 학(學: 학술, 지식)의 장으로 의학이 훨씬 깊숙이 수용되었고, 일정한 배경을 지닌 유의들은 의사로서의 삶을 그들 삶의 중심으로 삼을지라도 사인층에서 유학자이자 엘리트로 “학인(學人)”으로 온전히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지막으로 주진형의 의학의 광범한 전파의 바탕이 될 수 있었던 보편성의 측면 또한 도학을 기반으로 한 금화학파의 지적 경향과 지역적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한 전략의 방향과 일맥상통하다는 것을 지적하고자 한다. 무주의 사들이 주희의 도통의 계승자라는 정체성에 입각한 지역적 네트워크를 통하여 궁극적으로 원했던 것은 “일향지사(一鄕之士)”가 아닌 “천하지사(天下之士)”로서의 존재였다(Bol, 2022: 18). 도학이 추구하는 보편성은 이들의 정체성이 단순히 지역적이지만은 않다는 그들의 주장에 가장 좋은 기반이 될 수 있었다. 시작점은 무주였으나 이들이 궁극적으로 나아가고자 했던 것은 전제국적, 아니 더 나아가 보편적인 이(理)가 통하는 영역 전체였다. 실제 무주를 기반으로 한 강력한 지역 엘리트들의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전제국적 더 나아가 국제적 명성을 얻음으로 이를 실현한 대표적 인물이 주진형과 송렴이다.32) 주진형의 의학은 인간의 질병과 체질에 환경이 미치는 영향을 점차 중시하면서 지역적 특색을 강조하는 경향을 보였던 원대의 의학 담론과는(Hanson, 2006; 2011) 달리 보편성을 보다 강조함으로써 그의 의학은 광범하게 전파되었다(Simonis, 2015). 이후 그의 의학이 중국 전역과 동아시아에까지 전파될 수 있었던 기반은 그가 궁극적으로 보편적 영향력을 추구했기 때문으로도 보이며 이는 무주의 사인 네트워크와 금화학파의 도학의 지향점과 일맥상통한다.
3. 유의 주진형 의학의 특성
1) 국방의학에 대한 비판과 대안
주진형에 대하여 가장 직접적으로 알 수 있는 그 자신이 쓴 저서,33) 그리고 송렴과 대량이 쓴 전기에 의하면 그가 새로운 의학을 공부하는데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국방의학에 대한 회의와 비판이다.
송대는 국가 주도로 역대 효험이 있는 처방을 수집하여 관방의료기구의 표준 처방집 형식의 서적, 즉 국방 서적을 편찬해 배포하는데 주력하였다. 992년 칙명을 받아 왕회은(王懷隱) 등이 편찬한 『태평성혜방(太平聖惠方)』, 1078년 태의국(太醫局)에서 편찬된 『태의국방(太醫局方)』을 여러 차례 수정, 보완을 거쳐 1107년 송 휘종 대관 연간(1107~1110)에 배종원, 진사문이 개정하여 『태평혜민화제국방(太平惠民和劑局方)』(이하 『화제국방』)을 출간하였고 이는 1151년에 개간되고, 1208~1252년에 확장되어 출간(增註太平惠民和劑局方)된다(Goldschmidt, 2009: 212). 또한 휘종 정화 연간(1111~1118)에 출간한 『성제총록(聖濟總錄)』 등도 송 정부가 배포한 대표적 국방 서적이다.
이러한 국방서적의 출간과 배포는 국가의 권위와 국가기관의 운영체계를 기반으로 하여 당시 복잡화하고 있는 처방을 단순화하여 적용하려는 실용화 경향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국가에 의해 1076년 매약소(買藥所)가 세워지고 1103년 5개의 매약소가 추가로 세워져서 화제국에 의해 만들어진 약들을 판매하였다. 이들은 국방서적의 처방에 따라 미리 제조해 놓은 약들을 시장의 3분의 2 가격으로 팔았다. 이러한 제도는 남송에서도 이어져서 1148년 여러 도시에 혜민약국(惠民藥局)이 세워졌고(Leung, 2006: 376) 이는 원대에까지 이어졌다.
국방의학은 송 정부의 적극적 지원과 국가기관의 영향력에 의해 널리 퍼졌지만, 시장에서도 상당한 상업적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자료도 발견되었다. 2009년 섬서성 한성(韓城), 반락(盤樂)에서 발굴된 11세기 송대 무덤(M218)의 북벽의 벽화는 문헌사료에서는 볼 수 없는 당시 국방의학의 유행과 실상의 단면을 보여준다(康保成, 孙秉君, 2009: 79-88). 벽화 그림에는 주사환(朱沙丸)이라고 쓰인 약상자를 들고 있는 사람, 『태평성혜방』 서적을 들고 있는 사람, 백출(白術), 대황(大黃) 약재를 들고 있는 사람, 이렇게 3인이 약을 조제하고 있는 장면이 있다(Hong, 2015: 240, Fig. 7). 무덤의 주인은 약방 등 사업으로 화려한 무덤과 성대한 장례 의식을 감당할 만큼 큰 부와 사회적 성공을 이룬 상인이고 사인층에는 속하지는 않은 사람으로 학자들은 추정하고 있다(Hong, 2015: 243-251). 이 상인이 약방을 경영하여 큰 부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은 『태평성혜방』과 같은 국방서적을 따라 즉석에서 판매할 수 있는 약들을 상업적으로 대량 생산하여 판매한 덕분으로 보인다. 이는 11세기 화북 지역의 상황이지만 상업화가 더욱 진행된 강남지역에서는 이러한 현상이 널리 퍼져있었으리라 보이며, 주진형이 “증상에 근거하여 방문을 검사할 수 있어 곧 처방하여 약을 쓰며 의사를 찾을 필요가 없고 수치(修治)할 필요도 없으며 이미 만들어진 환(丸), 산(散)을 찾아서 구입하면 병, 통이 나을 수 있다”고 서술한 실태를 그대로 보여준다.34) 주진형이 서술한 바대로 “송부터 지금까지 남북을 나누지 않고 답습하여 풍속이”35) 되어서 “송대부터 지금까지 관청에서 법으로 지켜왔고, 의학계에서는 업으로 지켜왔으며, 병자는 생명을 살리는 것으로 믿어왔고, 세상 사람들은 풍속으로 배워왔다”36)고 할 만큼 국방의학은 송대 이후 화북에서도 강남에서도 모두 큰 영향력을 지니고 당시 의료에 중심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37)
국방의학의 유행 하에서 주진형도 처음에는 『화제국방』으로 의학을 공부하였고 “백성에게 은혜를 베푸는 뜻이 지극하다”38)며 효용을 부분적으로 인정하였지만 국방의학에 대하여 회의를 품게 된 계기가 있었고, 그 후 이를 극복할 새로운 의학을 추구하게 되었음을 서술한다. 그는 30세에 모친이 비위병에 걸렸을 때 이전의 『화제국방』 등에 의거한 치료법이 아니라, 자신이 스스로 고대 의학 경전인 『소문(素問)』을 5년간 공부하여 모친의 치료에 성공한 후, 이전 가까운 친족의 죽음이 의사들이 국방의학의 서적에만 의지하여 약을 잘못 써서 발생한 것이라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39) 이후 그는 다시 『소문』을 4년간 독학하다가 새로운 치료법을 공부하기 위하여 스승을 찾아 나선다. 결국 항주에서 유완소의 재전제자이자 장종정, 이고의 학설도 잘 알던 나지제를 만나 스승으로 모시고 화북의 의학을 배우고 이를 자신이 새롭게 발전시켜 나간 것이다.
주진형은 국방의학의 어떤 면이 그렇게 커다란 문제점을 지녔다고 보아서 비판하였는가? 우선 주진형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우려하고 있었던 국방의학의 문제점은 이것이 이미 나와 있는 기존 처방의 모음집일 뿐이어서, 계속 변화하는 다양한 질병을 이들 제한된 기존 처방으로 치료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점이었다. “천지의 기화(氣化)는 무궁하고 인신의 병도 무궁하기” 때문에,40) “이전 사람들에게 효험이 있었던 방문을 모아서 지금 사람의 무한한 병에 응하는” 것은 “각주구검, 안도색기(刻舟求劍, 按圖索驥)”와 같고 “우연히 적중하기를 바라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보았다.41) 그는 “옛사람이 처방을 지은 것은 당시 병이 있는 사람을 위해 지은 것”42)일 뿐이기에 기존에 나와 있는 처방을 기계적으로 적용하기만 해서는 제대로 된 치료는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국방서적은 또한 병의 원인에 대하여 논하지 않고, 각 처방에 간단하게 증후를 서술하는 정도에 그치고 있기 때문에 다양한 원인에 의하여 발생한 비슷한 증후들을 같은 방식으로 처방하게 되고 이는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는 문제점 또한 제기한다. 병의 근본적 원인을 논의하지 않고 한 처방으로 여러 병을 두루 다스리는 식의 오류를 범하는 예를 들기 위하여, 그는 『국방발휘』에서 풍병(風病)에 대해 자세히 논하였다. 국방의학은 풍을 다스리는 약으로 여러 가지 위증(痿證, 사지가 무력한 병증)을 치료하고 있으며, 이에 기인하여 풍병과 여러 위증을 모두 동일하게 논치(論治)하는데 이것이 얼마나 큰 오류이며 심각한 문제를 불러오는지를 상당히 자세히 논한다. 주진형은 병에도 편목이 있어 원류가 다르면 치법도 달라야 한다고 주장하고43) 미세한 작은 차이도 다시 구별하고 자세히 분석해서 병의 원인을 파악하고 이에 따라 다른 치료법과 처방을 해야 하는데 국방의학은 이를 전혀 충족시켜주지 못한다고 비판한다.44)
주진형은 국방의학은 환자를 직접 살펴보아 병의 정황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이에 따라 처방을 조정하고 치료법을 결정하고 변화시켜 나가는 과정이 없기에 오류를 범하게 된다고도 비판한다. 그는 의사가 병을 보고 환자에게 증을 물어 병의 정황을 얻고 난 후에도 환자의 특성과 질병의 양상을 자세히 살펴야 한다고 주장한다. “혈기의 심천, 신체 부위의 상하, 장부(臟腑)의 내외, 시기의 오래됨과 가까움, 형지(形志)의 고락(苦樂), 피부의 후박, 그리고 중독의 가부, 표본의 선후, 나아가 연령의 노약” 등을 파악해야 하고 “치료에는 오방(五方)이 있고, 계절에는 사시(四時)가 있고, 어느 약으로 어느 병을 치료하고 어느 경에 어느 약을 쓰며 어느 것이 정치(正治, 일반적인 치료법), 반치(反治, 일반적인 방법과 상반되는 치료법)이고, 어느 것이 군, 신, 좌, 사(君臣佐使)인지 이들을 합하여 아주 미세함을 따지고 방문을 의논하며 치료할 때” 비로소 그 병에 적중하는 처방과 치료를 행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나아가 그는 환자의 환경적 요소까지 살필 것도 강조한다.45)
그렇다면 주진형이 이러한 국방의학의 문제점을 시정하고 올바른 대안을 제시하기 위해 가장 강조한 것은 무엇인가? 그는 올바른 의사의 자질과 역할의 확립과 그 권위의 인정을 국방의학의 폐단을 고치고 새로운 의학으로 나아가기 위한 가장 중요한 요소로 보고 있다. 주진형은 고인(古人)들이 의를 신성공교(神聖工巧)로 이야기하고 “의(醫)는 의(意)다”라고 말하는 것의 의미는, 의사는 임상에서 복잡한 변화에 대처할 때는 “마치 큰 적을 직면한 사령관이나 배를 조정하여 거칠고 사나운 파도를 항해하는 키잡이와” 같기에, “군자처럼 때에 맞게 처리하는 묘용을 취할” 자질을 갖추어야만 의(醫)에 부끄럽지 않은 진정한 의사라 할 수 있다는 것이라고 설명한다.46) 주진형이 생각하는 의사는 국가가 내려준 표준 처방을 따르거나 시장에서 약을 팔아 상업적 이익을 취하는 사람이47) 아닌, 성현이 직면한 상황을 파악하여 때에 맞게 올바르게 대응하는 것처럼 각각 상황의 환자와 질병을 보고서 그에 정확히 맞는 대응을 할 수 있는 지적, 전문적, 더 나아가 윤리적 능력을 가진 사람이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는 의사의 전문가적 식견과 역할, 더 나아가 윤리적 자질을 매우 중요하게 여긴 것으로, 이의 결여가 그가 국방의학을 비판한 핵심이다. 주진형은 당시 국방의학이 유행하면서 환자와 질병을 판단하는 주체로서의 의사의 역할은 사라지고 의사들 또한 이를 받아들이기도 한다고 보았고 이는 절대 용인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국방의학이 의사들의 전문성과 역할을 축소시키고, 권위를 떨어뜨린다고 생각하여 비판적인 태도를 지녔던 것은 사실 주진형만의 생각은 아니었고 이러한 태도는 일찍이 송대부터 나타나고 있다. 국가에 의하여 국방의학과 약방이 널리 보급되었던 송대의 의사들도 주진형과 비슷한 우려를 하여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국방의학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것을 거부하는 태도를 보여주고 있음을 골드스미드의 연구는 잘 보여준다. 그는 『중화의전(中華醫典)』(1999, 2001)이 수록한 700여개 의서의 데이터베이스에서 송, 금, 원 시기의 문헌 중, 국가가 운영하는 약방과 국방서적의 처방에 대한 언급을 찾은 결과 분석을 통해서, 의약과 관련 없는 문헌 중에서는 오히려 국가기관인 약방에 대한 풍부한 언급을 찾아볼 수 있는 반면, 의학 관련 문헌에서는 의외로 국가의 약방에 대해 언급한 텍스트는 매우 드물었음을 보여준다(Goldschmidt, 2009: 212-213). 또한 이들 의학 관련 문헌에서 국방서적의 처방을 인용한 사례도 극히 드물었다는 상당히 의외의 결과를 제시하기도 하였다. 심지어 송대, 국가의 의료 관리로 일하였던 구종석(寇宗爽, ca. 12세기 초)마저도 자신이 저술한 『본초연의(本草衍義)』에서 단지 3차례만 『화제국방』을 아주 사소한 문제를 언급하기 위해서만 인용하고 있는데서 알 수 있듯이(Goldschmidt, 2009: 213-214), 이들은 국가의 권위에 도전하는 강한 비판을 직접적으로 남기지는 않았지만, 원대의 주진형과 비슷한 이유에서 국방의학과 국방서적에 대해 비판적이었고, 당시 국가 주도의 국방의학에 의한 의료환경의 변화가 자신들에게 유리하다기 보다는 위협적인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다고 보인다(Goldschmidt, 2009: 215). 송대 의사들도 돌팔이와 심지어 별로 교육을 많이 받지도 않은 환자들조차 국방의학에 의하여 스스로 약을 처방하게 된 의료환경에서 제대로 교육받은 의사의 전문성과 역할이 크게 도전 받고 있다고 느꼈다는 것이다. 1~2세기 이후 주진형이 제기한 국방의학에 대한 비판, 그리고 의사의 자질, 역할, 권위를 강조하는 대안은 사실상 송대 이후의 교육받은 유의들의 태도의 연속선상에서 파악할 수 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주진형은 국방의학의 문제점과 대안을 송대 이후의 변화들을 종합하면서 새로운 시각으로 한층 선명하게 제시하였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주진형이 국방의학의 대안의 핵심으로 제시했던 이상적 의사의 상은 도학이 제시하는 이상적 사인의 상인 자율적 주체로서 자신의 심이 아닌 어떠한 외부에도 자신의 판단을 의지하지 않고 그 판단이 옳을 수 있도록 끊임없이 학을 통해 수양하는 존재와 합치한다는 것이다. 도학에서의 국가와 사인의 관계 설정 또한 국가주도의 국방의학을 강력히 비판하고 의사를 중심에 놓고 의사가 주체가 되어야 함을 강조하는 주진형의 새로운 의학과 정확히 일치한다(민병희, 2008a; 2008b).
2) 의술의 학술화, 이론과 임상의 충돌과 해결 방식
주진형은 단순한 처방전과 치료법의 나열을 의학이라고 보지 않았고 정해진 처방에 따라 약을 제조하고 치료행위를 행하는 이를 진정한 의사라고 보지 않았다. 그가 국방의학의 폐단을 넘어서기 위해 가장 강조하고 있는 의사의 자질, 역할, 권위를 보증할 수 있는 의학은 병의 원인을 논할 수 있고, 의사가 환자를 자세히 살피고 진단하여 정확한 판단을 하는데 기반을 제공할 수 있는 의학이었다.48) 단순한 정보, 지식의 나열과 기술로서의 의술을 넘어서서, 인간의 신체와 생리, 병리를 체계적으로 설명하고 이해할 수 있는 일종의 ‘이론’적 기반을 제공하여야 하며, 이는 기술로서의 의술이 아니라 일종의 지식체계, 학술체계로서의 ‘의학’이어야 한다는 것이다.49)
주진형의 의학은 처방전과 치료법을 나열하는 방식을 넘어서서 체계화를 시도하고 원리를 제공하는 방식으로 의학을 지식체계로, 특히 문헌을 바탕으로 하는 지식체계로 체계화하고 학술화하는데 공헌을 하였다. 체계화되고 학술화된 양식의 지식체계로서 의술을 의학으로 승격시키기 위해서는 개별적 정보와 지식의 집적이 아닌 체계를 갖추어 설명을 제시하는 논리를 보여줄 수 있는 ‘이론’이 필요하다.50) 전근대 시기 중국 의학에서 ‘이론’이라는 것은 철학적 이론과 의학적 이론이 혼재 되어 있는 양상으로 근대에서의 의학 이론처럼 해부학 등의 자연과학적 방법론을 바탕으로 한 관찰과 실험 등을 통하여 생리와 병리를 설명하고 있다기보다는(김대기, 2018), 철학적 이론―대체로 유학과 도교의 이론―에 의존하여 인간의 신체와 우주, 그리고 병의 기전 등을 설명하는 형태를 띠고 있다. 즉 자연과학이나 의학의 방법론을 통한 이론화가 아니라, 인간의 신체와 질병의 양상에 철학적 이론을 끌어들여 추상적 설명을 제공하는 방식으로 이론화가 이루어진 것이 대부분이다. 유학의 부흥 시기인 송대 이후로는 유학의 이론을 끌어들여 의학 이론을 정립하려는 유의들의 시도가 활발하였고, 금원사대가 특히 주진형은 도학의 이론을 의학과 결합시켰다고 이야기되고 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다른 방법론과 목적을 가진 철학적 이론과 의학적 이론을 합쳐 놓았기에, 당연히 실제 인간의 생리와 병리를 다루고 임상에 임하였을 때 모순이 생겨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충돌 지점들이 발생하였을 때, 이를 어떻게 해소하려 노력하였는지가 사실상 의학과 유학이 공존할 수 있었는지 아니면 유학에 의하여 의학의 고유한 특성이 심각하게 왜곡될 수밖에 없었는지를 평가하는데 중요하다.
주진형뿐 아니라 송대 이후에 유의들이 유학을 의학과 결합시키려 할 때, 유학의 윤리를 의사의 덕목 또는 의사의 직업윤리로 강조하는 것과 함께, 의술을 체계화, 학술화하여 의학으로 승격시키는 작업에서 유학의 지식체계와 학술체계로서의 양상과 지식 생산, 재생산의 기제를 의학에도 적용하려 하였고, 이론의 면에서도 유학의 철학적 이론을 끌어와 의학 이론을 체계화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따라서 주진형의 의술의 학술화, 체계화의 노력은 송대 이후의 유의들의 지속적인 노력의 맥락에서 살펴보아야 한다.
송대 이후로 엘리트 의사들 특히 유의라고 불리는 의사들이 중심이 되어 발달시킨 학술적 전통의 의학은 문헌을 중심으로 하는 학습을 중시하며 상당히 공고화되어가는 반면, 민간 전통의 침술,51) 안과학, 외과술 등 기술적이고 육체를 사용하는 의술과 미신적인 의료행위 등은 점차로 주변화되기 시작한다(Leung, 2003: 386-398).52) 이러한 학술적 전통의 의학에서 특히 주의를 기울인 것은 『황제내경(黃帝內經)』과 같은 고대의 의학 경전들이었다. 북송 이후 국가의 의료 교육에서는 고대의 의학 경전을 다시 공부하도록 하였고, 이들 의학 경전들을 재출간하는 작업이 이루어졌기에 고전 의학 경전에 대한 접근성이 매우 커지게 되었다. 문헌에 의한 의학 공부를 중시하는 학술적 전통의 의학에서는 이러한 고대의 의학 고전들에 나타난 이론을 중시하게 된다. 이와 더불어 송대 전염병의 창궐로 인하여 다시 주목을 받게 된 『상한론(傷寒論)』에 대한 연구 또한 송대 이후의 학술적 전통의 의학의 중요한 핵심으로 자리 잡았다(Goldschmidt, 2009: 225-274; Boyanton, 2015). 이에 더하여 송대 이후 새로운 치료법과 처방들의 발전으로 이에 대한 지식 또한 학술적 전통의 의학에서 중요하게 된다.
송대 이후의 엘리트 의사들에게는 고대의 의학 경전과 현재의 처방과 치료법, 또는 상한에 입각한 이론과 현재의 처방과 치료법 사이에서 나타나게 되는 괴리가 상당한 문제로 부각된다. 이들 사이의 괴리를 어떻게 좁힐 수 있는가가 큰 과제로 떠오르게 되지만, 의학 고전의 이론들과 현재의 새로운 처방은 서로 병존하기 힘들었고, 상한의 이론과 현재의 새로운 처방 또한 쉽게 결합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보다 야심찬 기획은 이 세 가지를 모두 관통할 수 있는 새로운 이론적 기반을 바탕으로 모든 것을 통합하여 새로운 체계를 만드는 것이었고 이는 더욱 어려운 과제였다. 그러나 송대 이후로는 새로운 이론 체계를 만들어 서로 모순되고 상충하는 의학의 이론과 임상을 결합하려는 시도가 계속 시도되었다(Goldschmidt, 2009: 276-319).
이러한 종합적 이론을 만들려는 시도에서 가장 성공적이고 영향력이 컸던 것은 11세기 말에서 12세기 초에 만들어진 “오운육기론(五運六氣論)”이다.53) 오운육기론은 우주만물이 어떻게 상호 연결되어 있고 영향을 미치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중국의 전통적 우주론과 상수 체계의 핵심이 되는 3개의 체계인 간지, 음양, 오행을 결합하여 만들었다. 오운육기론은 계절적 변화와 그 특징이 적절한 시기에 나타나면 인간의 신체도 이에 상응하는 변화가 나타나지만, 기후의 변화가 계절에 상응하지 않게 나타나게 되면 이는 질병을 발생시킨다고 주장한다(Goldschmidt, 2009: 293). 오운육기론은 송뿐 아니라 금원의 의학에도 크게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오운육기론에 입각한 의학 이론은 인간의 생리와 병리를 너무나 자의적으로 간지, 음양, 오행으로 만든 임의적 체계에 맞추는데 치중하였고 실제로 이러한 추상적 체계와 인간의 질병을 직접적으로 연관시켜 설명하는 데는 무리가 따를 수밖에 없었다. 이 이론은 모든 것이 이를 통해 설명 가능한 것처럼 제시하지만, 어떠한 실제적 관찰과 실험 등을 통한 자연과학적 방법론을 통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기에 이 체계에 모든 생리와 병리를 꿰어 맞추는 것은 오히려 실제로 일어나는 현상을 왜곡할 위험만 증대시킨다.
주진형을 비롯하여 금원사대가들도 오운육기론을 받아들였지만, 이들의 의학 이론은 송대에 의학 고전이나 상한론과 현재의 처방을 통합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시도하였던 이론화나(Boyanton, 2015) 오운육기론과 같은 류의 이론화에 의해서 만들어진 이론과는 성격을 상당히 달리하고 있다. 금원사대가를 각기 일정한 학파로 분류하는 것은 후세에 붙여진 것이지만,54) 이들을 각각 하나의 학파로 분류하게 만든 대표적 이론들을 보더라도 이들이 이론을 필요로 하고 만든 목적은 송대의 오운육기론과는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의 이론은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는 추상적 체계를 제시하는 것보다는 치료방식이나 병리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내용을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자신의 의학에 체계를 갖추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주진형의 의학 이론으로 일반적으로 가장 강조되는 것은 다음 두 가지이다. 첫 번째는 양은 남고 음은 부족하기에(“양유여음부족(陽有餘陰不足)”55)) 음을 보충하여 주어야 한다는 자음(滋陰)의 이론이고, 두 번째는 화(火)를 군화(君火)와 상화(相火)로 구분하여 생리와 병리를 논한 상화론이다(원종실, 2005; 성호준, 2015).56) 그는 『격치여론』 서(序)에서 습열, 상화는 왕빙의 주석서부터 파묻혔으나, 장중경(張仲景, 150~219)과 이고에 의해 분명히 나타나게 되었고, 사람의 몸은 음이 부족하고 양이 유여하다고 『소문』에서 진지하게 밝혔으나 장중경과 이고가 표창하지 못한 까닭에 국방의학이 성행하는 것이므로 자신이 국방의 미비를 증명하고 자신의 뜻을 덧붙이고자 한다고 밝히며 자신의 의학이 상화의 문제와 음부족의 문제를 표창하려 한다고 말한다.57) 그러나 주진형의 이론은 신체와 질병이 우주의 불변의 원리에 의하여 구조되어 있다고 주장하거나 모든 것을 일관되게 설명할 수 있는 추상적 체계를 제시하고 연역적으로 그 체계로부터 생리와 병리의 여러 현상을 설명해내는 형태의 이론이라기보다는, 환자와 질병을 마주했을 때 병의 원인과 처방, 예방, 치료 방식 등을 판단하기 위한 방향성을 주는 일관된 논리와 설명에 가깝다.
가장 근본적인 개념인 음양에 대한 주진형의 생각만 보더라도, 음양 자체도 매우 상대적인 것으로 직접 임상을 통하여 판단해야 하는 것이지 미리 결정되어 있는 것이 아님을 다음과 같이 보여준다.
음양 두 글자는 원래 상대적으로 말하는 것으로 가리키는 것이 정해져 있지 않아 한열(寒熱)을 말하기도 하고 혈기를 말하기도 하고, 장부(臟腑)를 말하기도 하고, 표리를 말하기도 하고, 동정을 말하기도 하고, 허실을 말하기도 하고 음양을 말하기도 하고 기우(奇偶)를 말하기도 하고 상하를 말하기도 하고 정사(正邪)를 말하기도 하고 생살을 말하기도 하고 좌우를 말하기도 한다.58)
따라서 주진형이 음상부족을 논하며 음을 보충해야 한다고 하더라도 여기에서 음과 양 자체도 어떤 신체기관이나 질병의 양상을 말하는지 정확하게 고정하여 논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59)
상화와 군화를 논할 때에도 “폐장을 주관하는 것은 신(腎)이요 소설(疎泄)를 맡은 것은 간(肝)이다. 두 장은 모두 상화를 가지고 있으며 그 계통은 위로 심(心)에 속한다. 심은 군화이니 사물에 느끼는 바가 있으면 쉽게 동하게 되고 심이 동하게 되면 상화도 또한 동하게 되며, (상화가) 동하게 되면 정(靜)은 스스로 달아난게 된다”60)고 하여 간장과 신장이 상화이고 심장이 군화라고 고정되게 설명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그는 또한 “오장(五臟)에는 각각 화가 있으니 오지(五志)가 그것을 격동시키면 그 화가 따라서 일어난다”고도 하여61) 상화의 망동(妄動)이란 것이 특정하게 간장과 신장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고 오장에 각기 갖추어진 화는 “상화지상(相火之常)”의 정상적인 화이고 오지가 격동을 시킨 후에 따라서 일어나는 화가 “상화지변(相火之變)”으로 병리적 양상을 지닌 망동하는 상화라고 보고 있기에 이는 특정한 신체 기관이나 질병을 논한다기보다는 동과정이라는 개념을 사용하여 인간이 어떻게 질병을 갖게 되는가를 설명하는 논리에 가깝다(원종실, 2005: 190).
그는 상화의 문제는 쉽게 망동하는데 있고 혈의 음기는 난성이휴(難成易虧) 하는 것과 상화의 망동에 손상되기 쉬운 속성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기에, 음기의 손상과 상화의 망동을 막아서 음기를 보전하는 방식의 임상적 실천을 위한 설명을 제공하는 이론이라고 볼 수 있다. “하늘이 낳으신 혈과 기는 본래 스스로 화평한 것인데 승(勝)이라도 말하고 허(虛)라고도 말한다. 그나마 이렇게 어그러지고 망령되게라도 말하지 않으면 어찌 알 수가 있겠는가?”62)라고 그가 이야기하고 있듯이 주진형의 자음론이나 상화론에서의 구분들은 사람들의 이해를 돕거나 가르치기 위한(heuristic) 목적으로 사용한 것이지 음양과 혈기가 실제로 어떠한 상태인지를 논한 것이 아니고 화와 관련하여 오장과 같은 신체기관이 고정된 역할만을 담당한다고 규정한 것도 아님을 알 수 있다. 이는 임상적 실천에서 상화의 망동을 막고 음기를 보존하기 위해서는 구체적으로 여러 가지 방법을 적용할 수 있도록 큰 틀에서의 생리와 병리의 기제를 추상적을 제시한 것으로, 그 추상적 체계 자체가 구체적인 생리와 병리와 실제로 연결되어 설명되는 이론은 아니다.
실제로 주진형이 음허(陰虛)로 변증한 질병에 대해 기록한 의안을 분석한 결과, 의안에서 가장 많이 응용한 처방은 사물탕(四物湯)과 이진탕(二陳湯)이고 가장 자주 응용한 약물은 백출, 감초, 인삼, 진피, 당귀, 천궁, 백약 등이었는데 백출, 인삼, 당귀, 천궁은 온한 성격의 약물이고 사물탕 또한 온한 성격의 약재를 같이 사용한 처방이 많았다. 국방의학을 비판하며 신온조열(辛溫助熱)한 약물 위주의 처방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주진형의 주장에 따라 한량한 약물을 위주로 처방을 했을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그의 실제 처방은 오히려 양혈보기(養血補氣), 보양익기(補陽益氣)를 위하여 온한 성격의 약물을 빈번히 사용했다. 또한 기가 허할 시에는 보비위(補脾胃)를 위해서 인삼, 황저, 백출 등을 가미한 약물 위주의 처방을 내렸음을(양광열, 2007: 157-158) 볼 때, 추상적 이론에 의한 분류에 의해서가 아니라 실제 임상에서의 필요에 따라 처방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주진형의 의학 이론은 도학, 특히 주돈이(周敦頤, 1017~1073)의 우주론과 주희의 학에 영향을 받았고 도학을 의학 이론과 결합시켰다. “태극의 이치와 『역』, 『예기』, 『통서(通書)』, 『정몽(正蒙)』 등 책을 참조하고 『내경』의 이론을 전부 철저히 참조하고 그 중의 중지를 탐구하였다”는 데서 볼 수 있듯이63) 그는 도학에서 중시하는 유가 문헌과 도학의 이론의 영향을 받았고, 도학에서 용어, 개념, 논리 등을 빈번히 차용하고 자신의 의학의 이론을 설명하는데 적극적으로 이용하고 있다. 그의 의학 이론의 기저에는 주돈이의 우주론이 자리 잡고 있고 이로써 『내경』을 해석하려고 하였지만, 태극을 넘어서는 “무극(無極)”에 대해서 언급하지는 않고 있다. 또한 그는 우주의 시작점에서 태극이 인간에게 부여한 “원기(元氣)”를 넘어서는 형이상학적 실재가 있다거나 리에 대해서 이야기한 적도 없다. 이러한 점에서 그는 도학의 형이상학을 기반으로 삼고 있었지만 순수한 철학적 이론과 형이상학적 추상으로 인간의 신체와 질병이라는 “견문지지”의 세계를 규정하거나 해석하고자 한 적은 없다.
그의 상화와 군화의 논의에서도 주희의 『중용』의 해석은 큰 영향을 미쳐서 인심(人心)은 도심(道心)의 명을 받들어 모든 것이 중절(中節)에 맞도록 해야 한다는 인심도심론의 틀로써 상화망동을 다스리고 주정(主靜)에 힘써야 함을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도 그는 도학의 이론을 생리와 병리를 설명하기 위하여 그대로 적용하지는 않는다. 도학에서 심을 인간의 주재자(主宰者)로 설정하여 모든 것을 심을 중심으로 설명하는 방식을 인간의 생리를 설명하는데 적용하기보다는 그는 신과 간의 역할을 중시하고 오장의 각각의 역할에도 주목하며 심을 이를 모두 통괄하는 보다 추상적인 개념으로만 사용한다. 즉 실제로 인간의 신체와 생리구조에 도학의 추상적 이론이 너무 강하게 반영되어 현상을 왜곡시키는 방식으로 도학의 이론을 적용한 것이 하지는 않고 있다.64)
주진형의 의학 이론에서 도학 이론의 추상적인 측면이 인간의 생리와 병리를 설명하는 틀로 사용되는 것은 매우 제한적이었고, 그의 이론에 도학의 이론이 미친 가장 큰 영향은 인간의 감정과 욕망을 다스리는 방식을 생리와 병리와 연결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주진형은 인간의 감정이 외부의 물(物)에 감응하여 욕망이 생겨난다고 보았다.65) 군화가 동하기 쉬운 것은 인간의 정욕 때문이라고 보고, “음식남녀”를 인간의 욕망의 근원으로 보았다. 그의 이러한 생각은 「음식색욕잠서(飮食色欲箴序)」를 『격치여론』의 첫머리로 한 것에서도 잘 나타난다. 그는 상화의 망동을 막기 위해서는 주정에 힘써야 하며, 수심(收心), 양심(養心)을 해야 한다고 하여 도학의 수양론을 의학에 접목시켰다.66) 그는 건강의 유지와 질병 치료에 양생, 섭생이라고 할 수 있는 생활 습관의 변화와 윤리적인 삶과 감정적 안정을 중시하였다.67)
주진형의 유명한 이론을 중심으로 그의 의학에 대하여 논하였지만, 그의 저술과 제자들이 편찬한 책과 전기자료를 볼 때, 그의 의학의 주요한 내용은 모두 임상을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분석한 내용이다. 심지어 그의 본초학마저 임상 본초학이라고 볼 수 있다(오재근, 2011). 그의 저술에는 “논(論)”이라고 하여 자신의 주요한 이론을 소개한 내용들도 있지만, 대부분의 내용은 임상을 통해서 얻은 경험을 적은 것으로 특히 ‘의안’의 형식으로 자신의 임상 경험을 자세히 서술한 내용이 상당한 분량을 차지한다(刘时觉, 2004: 193-200). 그와 그를 직접 목격한 제자와 지인들이 기록한 서적이나 문헌에서 의안이 차지하고 있는 분량을 보면, 『격치여론』 24안, 『국방발휘』 10안, 『금궤구현(金櫃鉤玄)』 25안, 그의 전기인 「석표사」에서 3안, 「단계옹전」에서 14안의 의안을 찾아볼 수 있다.68) 이후 의안이 본격적으로 출판된 명대에 나온 『명의류안(名醫類案)』69)과 이를 이어 청대에 작성된 『속명의류안(續名醫類案)』70) 2권에 단계의안으로 분류되어 실린 의안은 총 344안이 된다(刘时觉, 2004: 193-194).71)
아래의 『격치여론』에 기록된 의안 형태의 임상기록을 살펴보면 주진형이 실제 어떻게 환자를 진단하고 치료했는지 그 과정을 잘 이해할 수 있다.
어느 하녀가 얼굴색이 자색이고 좀 살졌으며 성격이 가라앉고 많이 우울했으며 나이는 40세에 가까웠고 월경이 3개월 없었으며 아랫배에 혹이 하나 있었는데 처음에는 밤톨과 같았고 점차 증병처럼 되었다. 내가 맥을 보니 두 손이 모두 막혀있고 중하게 짚으면 오히려 (맥이) 있으며 그 덩어리를 만지려 하면 몹시 고통스러워 했고 누르면 반 치 높아져서 천금초석환(千金硝石丸)을 주었다. 4-5번 먹더니 그녀가 갑자기 말했다. “유두가 검고 즙이 있으니 아마 임신한 것 같다.” 내가 깨달아 말했다. “약이 너무 준엄하다.” 앞의 약을 정지시키고 사물탕에 백출을 배로 넣고 진피로 보좌하여 30첩을 주니 맥이 완전하게 되어 다시 초석환을 주었다. 4-5번 먹으니 돌연 덩어리가 한 무리 없어졌다고 스스로 말하여 곧 복용을 정지시켰다. 또 보름이 지나서 월경통이 심하더니 검은 피가 반 되 내리고 안에 초핵 같은 것이 몇십 알 있어 덩어리가 절반가량 없어지니 또 와서 약을 취하여 나머지 덩어리를 없애려 하였다. 내가 이를 알고 말했다. “성급해 하지 말아야 한다. 덩어리가 이미 열렸으니 다시 쳐서는 안되며 다음 월경이 오면 전부 없어질 것이다.” 다음 월경이 와서 검은 핏덩어리가 좀 내리고 또 한 무리 없어지니 또 와서 약을 물었다. 내가 말했다. “오직 금기를 지키면 다음 달에 꼭 완전히 없어질 것이다.” 그 후 그대로 되었다.72)
위에서 주진형이 환자를 진단하고 치료하는 과정을 보면, 그는 질병의 증상 뿐 아니라 환자의 안색, 체형, 성격, 나이도 살피고, 하녀라는 신분에서 오는 생활 습관, 환경 요소도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환자에게서 증상의 진술을 듣고 직접 살피고 나서 맥을 짚고 직접 혹의 부위를 만져 진단을 한다. 이를 통해 처방을 내린 후, 환자의 경과를 보아가면서 환자의 변화에 따라 다시 약을 조정하고 있다. 그는 질병의 경과를 계속 살피면서 자신의 처방의 문제점을 찾아내고 처방을 계속 바꾸어 적용한다. 그는 환자와 질병의 환경적, 감정적, 기질적 요소를 매우 중시하며,73) 정서 안정과 생활 습관에서는 금욕을 중시하여 금기를 지킬 것을 요구하기도 하는 등 상당히 복합적인 방식으로 진단과 처방, 진료 과정을 거쳐서 병을 치료하고 이를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그가 남긴 문헌 내용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이러한 의안 형태의 임상 경험의 기록은 매우 구체적이다. 그는 환자의 특성, 환자를 둘러싼 환경 등을 관찰하고 질병의 원인과 전개를 살피고 이에 알맞은 처방을 내리고 환자의 질병의 추이를 다시 관찰해가면서 이를 조절해 나가는데 그가 내리는 처방과 치료방식에는 약물의 방제(方劑) 뿐 아니라 환자가 스스로 주의해야 할 생활상, 감정상의 주의사항도 자세히 포함되어 있다. 질병의 기전에 대해서도 그 질병이 발생한 환경과 환자를 구체적으로 관찰하여서 이를 서술하고 있는 경우가 특정한 질병의 일반적인 기전을 설명하고 있는 예보다 훨씬 빈번하다.
의안이라는 형식은 거슬러 올라가면 사마천의 『사기』의 순우의(淳于意)의 의술에 대한 기록에서부터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있지만, 본격적으로 의안의 형태가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은 11세기, 12세기 송대로 볼 수 있다(Furth, 2007: 126-131).74) 의안은 송대에 국가의 의학 시험에 의안 형식의 문제가 출제되고, 짧게 시행되는데 그쳤지만 국가에서 의료 종사자들에게 자신의 의료 기록을 제출하도록 하는 제도에 의해서도 발달되었다.75) 그러나 실제 의안이 하나의 중요한 장르로 발달하게 된 것은 유의들이 만들어간 학술적 전통의 의학과 이를 통해 사인층과 의사들이 밀접하게 교류하게 되면서 임상 치료의 기록이 이들 사이에서 널리 회람되기 시작하면서부터이다. 부유한 사인층은 의사들이 자신의 가문의 의료 기록을 제공해주기를 바랐고, 이러한 반(半) 공적, 반 사적인 기록은 자신의 가족을 이어서 치료할 다른 의사들에게 제공되었고 또한 의학에 관심이 있는 사인층 사이에서 비공식적으로 유통되기도 하였다. 의안은 외부인이 의사의 치료를 기록하는 것에서 의사가 자신의 의학의 이론에 대한 예시를 보여주는 기록으로 변화하였고 점차 의사 일인의 의안들을 모아서 하나의 독립된 책으로 편찬하는 것으로 진화하여갔다. 12세기에서 15세기 사이에 의안은 삼인칭에서 일인칭 기록으로, 사적인 기록에서 공적인 기록으로, 그리고 주변적인 기록에서 의학 저술의 주요한 핵심으로 변화해간다(Furth, 2007: 131). 의안이라는 명칭이 쓰인 것은 명대부터이지만 명대의 저자들이 의안을 출판할 때 참고한 것은 금원사대가가 남긴 의안들이었다. 이들은 의안집을 남기지 않았지만, 이들의 저술에는 풍부한 분량의 의안이 있었다(Furth, 2007: 131-133). 상황에 따라 발생한 특수한 각각의 임상 사례를 기록한 의안은 고대의 의학 경전과 금원사대가들의 이론 사이의 충돌, 그리고 이론과 임상 사이의 충돌을 중재하고 매개하는 역할을 하였다. 한자 안(案)이 사례라는 뜻 외에 주석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듯이 의안은 자신이 주장하는 이론에 대한 주석과 같은 역할을 하기도 하면서 이론에 포용되지 않는 다양한 임상에서의 사례를 제시하였다(Furth, 2007: 132). 철학적 개념과 논리를 중심으로 설명하는 이론의 추상성에 구체성을 띠게 하고 실제 사례와 현상을 추상적 이론에 꿰어 맞추지 않으면서도 어느 정도 체계 안에서 어우러져 전체적인 체계를 유지하게 만들어 주는 역할도 한 것이다.
이와 같은 의안의 형식을 적극 활용하여 주진형이 이론과 임상을 결합하는 방식을 살펴볼 때, 그가 의학에 유학의 개념과 이론을 끌어들여 이론을 만들고 체계화, 학술화하는 과정에서 유학과 전혀 다른 지식체계인 의학의 독립적인 특성을 인정하고 이를 훼손시키지 않고 보존하면서 양자의 결합을 시도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음양이나 오행 등의 개념을 중심으로 생리와 병리를 설명하고 체계화를 시도하는 것은 중국 의학이 형성되기 시작한 초기부터 발달하기 시작한 경향이지 딱히 유학의 영향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이러한 개념과 카테고리를 적극 이용하여 상당히 완전한 체계를 제시한 오운육기론과 같은 이론에 비하여, 주진형이 음양 등의 전통적인 개념과 이론, 그리고 도학의 개념, 용어, 이론 등을 끌어와 자신의 의학을 이론화한 방식을 보면, 주진형의 경우는 자연 세계와 인체와 같이 철학적 추상을 가지고 정확히 설명하고 체계화할 수 없는 현상들, 즉 그가 임상에서 마주치는 실제 환자와 질병을 억지로 도학의 철학적 이론에 끌어다 맞추려고 하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오히려 그는 다양한 임상의 사례를 자세히 제시하고 이를 분석하고 설명함으로써, 다양한 환경에서 다변하는 인간의 신체와 질병을 있는 그대로 정확하고 섬세하게 관찰하고 판단하는데 간단한 도식이나 이론, 너무 완전하게 갖추어져 있는 추상적 체계에 의존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것을 오히려 강조하여 제시하고 있다. 주진형은 의학이 다루는 영역과 대상의 독특한 성격을 잘 이해하고 있었고, 억지로 그의 주요한 정체성을 형성하 는 도학의 이론에 의학을 끼어 맞추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
주진형의 의학에 도학이 미친 영향은 오히려 메타한 수준의 것들이라고 볼 수 있다. 그가 자신의 저작의 제목을 『격치여론』이라 붙이며 의학도 “격물치지”로 볼 수 있다고 주장한 것과 같이 의학이 도학과 같은 리를 추구하는 학으로서 치학의 자세를 공유하고자 하였고, 도학이 추구하는 심을 수양하여 성인과 같은 삶을 살고자 하는 윤리적 삶의 자세를 그의 의학 이론에 도입하고 의사 또한 이러한 윤리적 삶을 실천하는 방식으로 여기었다는 점에서 어떤 개념이나 이론을 기계적으로 유비하여 맞추는 방식이 아니라, 높은 수준에서 도학과 의학이 공유하는 리가 같고 그것을 추구하는 방식 또한 공유할 수 있으며, 실제 삶에서도 진정한 의사로서의 삶을 살면 그것이 진정한 도학자의 삶이기도 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인정받은 것이 그가 의학과 유학을 결합하는 방식이었다고 볼 수 있다.
4. 나가는 말: 의학과 유학의 결합, 상이한 지식체계의 공존
세계제국 몽골제국의 일환이었던 원에서는 전 세계의 다양한 지식과 정보가 모이고 교환되었고 원 정부는 실용적 지식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으며 특히 의학에는 풍부한 지원을 하였다. 그러나 당시 진정한 지식 발전의 기반이 되었던 것은 단순히 국가의 지원만이 아니었고 원대 특유의 여러 제약을 극복하기 위해 엘리트들에 의해 적극적으로 형성되고 유지되었던 다양한 문화적, 지적 네트워크였다. 의학도 이러한 거대한 몽골제국 원의 지식·엘리트 네트워크의 맥락에서 발전해나갔다. 주진형은 광범한 몽골제국 원의 지식·엘리트 네트워크 속에서 송대 이후 나타난 ‘유의’라는 새로운 유형의 엘리트 의사가 기존의 의사와는 다른 양상으로 사회에서 받아들여지고 존재하게 되었음을 보여준다. 주진형은 의사로서의 삶과 의학에의 공헌으로 지역의 사대부로서 그 책임을 다하고 성인의 도를 지향하는 도학자로서 올바른 삶을 살아가는 사인으로 평가되어 주자의 적통을 자임하는 금화학파의 학맥의 온전한 일원으로 받아들여졌다. 주진형은 동아시아 의학사에서 의학이 학술적 권위를 가지게 되고, 의사로서의 삶이 유학자로서의 지향으로 인정되고, 의학이 유학이 기본 틀인 전근대 시대의 광범한 ‘학’의 체제 내로 받아들여지고, 유의가 유학자의 정체성을 바탕으로 한 사인층이 형성하고 있는 넓은 ‘학인’의 네트워크에 포용되기 시작하는 변화를 보여준다.76)
의학의 측면에서 주진형이 의학을 도학과 어떻게 결합하였는가를 살펴보면, 메타한 수준에서 그는 도학의 ‘학(넓은 의미의 학술체계, 지식체계)’의 방법론과 지향, 그리고 지식 생산, 재생산의 방식을77) 의학에 적용하였다. 그는 도학의 기본 지향과 테제와 의학이 일치한다는 믿음에서 의학을 이해하되, 무리하게 매우 성격이 다른 두 지식체계를 결합하려는 시도는 거의 없이 오히려 의학은 철학적 이론 체계로 다룰 수 없는 독자적 영역을 지니고 있고 인간의 신체와 질병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추상적 사상을 무리하게 개입시키면 안 된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가 제시하는 이상적 의사가 지녀야 하는 자질과 능력, 권위, 삶의 양식은 정확히 도학에서 이상적 사인이 지녀야 하는 자질과, 능력, 권위, 그리고 삶의 양식과 일치하고 있다. 그의 의학의 출발점인 송대 이후 유행하였던 국가 주도의 국방의학에 대한 강한 비판의식은, 국방의학이 의사를 국가가 내려주는 처방전을 따라 약을 지어 팔거나 치료를 제공하는, 판단의 주체로서의 능력과 권위를 인정받지 못하는 수동적 존재로 만든다는 데 기인하였다. 그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의사는 주체적이고 자율적으로 판단을 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고 자신의 판단력을 바탕으로 의술을 베푸는 존재이며, “군자처럼 때에 맞게 처리하는 묘용을 취할” 수 있는 자질과 권위를 가진 존재였다. 이는 도학에서 수양을 통해, 학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궁극적인 이상적 사인의 지향과 삶의 방식과 정확히 일치한다. 주진형이 제시하고 있는 의사의 사회적 존재 방식, 국가권력과의 관계 또한 도학이 이상적으로 상정한 사인과 일치된 지향을 보여준다. 그는 이러한 의사가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단순한 기술로서의 의술이 아닌 이론화, 체계화, 학술화된 의“학”이라고 생각하여, 국방의학의 대안으로 그의 새로운 의학을 제시하였다. 주진형의 의학은 주돈이, 주희의 도학 개념과 이론에 큰 영향을 받았음은 분명하지만, 그의 의학의 가장 핵심에는 임상에서의 관찰과 일종의 실험 같은 실제 임상에서의 경험의 축적과 기록이 있다. 그의 저작과 제자들이 전하고 있는 문헌의 상당수가 “의안”의 형태를 띠고 있는데, 이는 의안이라는 장르가 지니는 특성에 의해 일정한 이론적 체계를 제시하면서도 임상에서 마주치는 추상적 이론이나 체계에서 벗어나는 다양한 현상을 그대로 기록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단순한 처방과 치료법의 나열이 아니라 자신의 의학에서 전체적 체계를 유지하며 이후 의사의 판단을 위한 학습의 방향성을 가질 수 있게 하는 방식으로 의안을 적극 사용하였고, 의안을 통해 이론과 임상, 고전 의학 경전과 자신의 새로운 의학의 충돌을 매개해나가면서 자신의 의학에 일정한 체계성을 유지한 것으로 보인다.
주진형은 고대의 의학 경전의 직접적 계승을 주장하고 송대의 의학적 전통을 배제하는 의학의 도통의 계보 안에 자신의 의학을 위치시키지만, 실제 그의 의학은 송대 이후의 유의들이 주도한 학술적 전통의 의학의 맥락에서 볼 때 송대의 의학과 연결성이 강하다.78) 물론 금원사대가는 송대의 유의들의 전통과 중요한 차이점을 지니고 있다. 그들이 제시하는 이론은 송대의 오운육기론과 같은 이론과 달리 훨씬 구체척이고 목적성이 강한 학설들이었고 이러한 차이점은 이후 이들을 각각의 학파로 구분하게 만든다. 송대에서 명초까지 이어지는 장기간의 맥락에서 금원사대가와 주진형을 넣고 이해하자면, 그들 스스로 표방하는 것보다는 훨씬 실제로는 송대 이후의 의학의 전개 양상에서 연속성이 강하지만, 그들을 송대의 유의들과 구분하게 해주는 차별점 또한 명확히 존재한다. 송대 이후 금원시기를 거치는 맥락에서 주진형은 고대의 의학 경전의 전통, 송대 이후 발달한 학술적 전통의 의학, 화북 지역 금에서 발달한 새로운 의학, 그리고 그 스스로 발전시킨 새로운 의학을 절충, 종합하여 집대성함과 동시에, 자신의 독창적 이론을 제시하고 자신의 의학을 체계화, 학술화하는데도 성공하였다고 보인다.79)
끝으로 금화학파의 거두이자 후세의 주진형에 대한 인식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기록을 남긴 송렴의 일화(Guo, 2019: 242-244)를80) 통하여 주진형의 의학과 유학의 결합과 공존의 방식을 의학사뿐 아니라 보다 폭넓은 과학사, 지식사의 맥락에서 생각해보며 논문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송렴은 전진교 도사 조우흠(趙友欽, b.1271)이 홀로 지방에서 천문학을 연구하여 저술한 천문학 입문서인 『혁상신서(革象新書』에 서(序)를 써주었다. 조우흠은 알려지지 않은 일개 지방의 도사였고, 송렴은 비록 천문학의 전문적 지식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혁상신서』의 가치를 알아보고 보급에 도움을 주고자 서를 써준 것이다.81) 송렴은이 서에서 당시 세계 최고의 관측소로 알려진 말라가 천문대 출신으로 1250년대에 원으로 와서 천문학 연구를 이끌었던 페르시아 출신 자말 알 딘(扎馬魯丁, Jamāl al-Dīn, d.1289)이 만년력(萬年曆)이라는 일종의 회회력을 만들어 바쳤던 1267년의 일을 논하면서 “인간의 심은 모두 같고 리는 하나”라는 도학의 최상위 테제를 언급한다.82)
서역은 만리 밖 멀리 있다고 들었다. 원이 그 나라를 취하였을 때, 자말 알 딘이 만년력을 바쳤다. 그 측정과 검증의 방법은 오직 십이궁(十二宮)의 방식을 사용하여 360도로 나눈다. 이십팔수(二十八宿)의 움직임과 머묾에 대한 설에 대해서는 자말 알 딘은 전혀 들어본 적이 없는 듯하였다. 그러나 일식과 월식을 계산하는데 이르러서는 대개 중국과 일치하였으니, 리는 같기 때문이다(理之同故也). 아! 사해 안팎의 무릇 머리뼈가 둥글고 발가락이 네모난 백성들은 그 심은 모두 같고 그 리는 모두 다르지 않다. 어찌 특별히 하늘을 헤아리는 일만이 그러할까?83)
이 일화는 도학이 유학의 주류가 되어가기 시작한 원말 시기 도학을 자기 정체성으로 삼고 있는 사대부의 지식 세계의 범위와 다양한 지식에 대한 태도를 잘 보여주며, 또한 도학과 전혀 다른 지식체계를 도학과의 모순과 충돌을 해결하면서 공존할 수 있게 하기 위해 어떠한 논리를 제시하고 있는지에 대해 중요한 단서를 준다. 이는 송렴이 속해 있는 금화학파의 도학을 자기 정체성으로 삼고 있는 주진형의 경우를 이해하는데도 도움이 될 뿐 아니라, 더 나아가 동아시아 전근대시기의 유학이 전혀 다른 유형의 지식체계, 특히 자연과학적 세계를 다루거나 다른 문명권에서 오거나 실용적 목적을 지닌 지식체계와 조우하였을 때 어떠한 논리로 양자의 결합과 공존을 도모할 수 있었을까에 대한 이해에도 큰 시사점을 준다.
우선 위의 일화는 원말이라는 시기에 주희의 적통을 잇고 있다고 평가받는 저명한 유학자가 얼마나 다채로운 범위와 출처의 지식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지 또한 얼마나 다양한 지식의 전문가들과 활발한 교류를 했는지를 잘 보여준다는 면에서 주진형과 그의 의학이 위치한 당시의 지식·엘리트 네트워크의 성격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준다. 천문학 입문서를 출판하려는 지방의 전진교 도사에게 원 조정이 이슬람 역법을 받아들였을 때의 일을 언급하는 내용의 서를 써주며 격려하는 금화학파의 도학자의 모습은 세계의 다양한 지역과 문화권에서 각종 지식이 모여들어 다양한 층위에서 교류가 이루지고 있던 원대의 지식 세계를 보여주며, 이러한 지식 세계의 맥락 안에서 유학자들도 중국의 전통적 인문 지식뿐 아니라 천문학을 비롯한 다양한 지식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수용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금화학파의 일원으로 공통된 지적 맥락에 위치하고 있던 송렴과 주진형의 예는, 유학자들이 실질적으로 가졌던 지식의 내용과 관심 범위 그리고 수용 태도에 대해서, 의학사, 과학사, 지식사 연구에서 선입견을 넘어서는 적극적인 접근이 필요함을 시사한다.
다음으로 송렴이 위에서 보여준 페르시아 출신 학자의 천문학과 자신의 정체성의 기반인 도학을 연결시켜 이 둘을 모순 없이 공존시키는 논리가 “리는 하나다(理一也)”라는 도학의 가장 상위테제의 적용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송렴은 멀리 서역에서 온 자말 알 딘의 천문 관측, 계산법이 전통적 중국의 방법과 차이가 있으나 일식과 월식을 계산한 결과는 결국 동일하였음을 말하며 이를 통하여 천하의 모든 사람들의 심은 동일하고 리는 하나라고 하는 도학의 가장 상위의 테제를 사용하여 심지어 페르시아의 천문학도 그것이 올바른 방식이라면 구체적 사항에서의 차이를 넘어서 리는 하나라는 테제로 수렴되면서 도학과 공존할 수 있음을 말한다. 송렴은 모든 지식체계는 결국은 자신의 정체성의 바탕인 도학의 체계와 합치되어야 한다고 믿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를 위해 천문학의 세부적 사항을 유학에 맞추어 설명하거나 유학의 개념과 이론을 천문학에 도입하지는 않고, 전혀 성격이 다른 지식체계의 공존의 근거를 도학의 “리는 하나다”라는 가장 포괄적이고 상위에 있는 테제에서 찾음으로써 해결하고 있다. 주진형이 유학과 의학을 결합시키고 공존시키려 할 때의 논리도 이와 매우 유사함을 앞의 분석에서 살펴볼 수 있었다. 그는 의학의 독립적 영역에 유학의 개념이나 이론을 무리하게 투영하려 시도하지 않고, 충돌되는 여러 지점을 해결하는 방식에서도 의학의 고유한 특성을 최대한 인정하여 왜곡시키지 않으려 하였지만, 의학도 “격물치지”의 학으로 볼 수 있으며, 의학의 지향을 도학의 윤리적, 사회적 지향과 일치시킴으로써 의학과 유학을 결합하고 공존시켰다. 이러한 최상위의 추상적 테제의 차원에서의 일치와 공존에 대한 믿음은, 의학과 같은 상이한 지식체계를 가지는 영역이 도학과 공존하면서도 구체적인 차원에서는 독자적 특성을 인정받아 독립된 영역을 침해받지 않는데 도움을 주었다고 보인다.
Notes
『四庫全書總目提要』 子部 醫家類에서 “유가의 분파는 송대에 갈라졌고, 의가의 분파는 금, 원대에 갈라졌다(儒之門戶分於宋,醫之門戶分於金元)”고 언급하고 있듯이 동아시아의학사에서 금원시기는 중요한 분기점으로 여겨진다. 현재 금원사대가로 불리고 있는 4인 중 원의 주진형을 제외하고는 모두 화북지역인 금의 영역에서 활동하였다(Yiyi Wu, 1993; 吴以义, 2008).
이 논문에서는 신유학(Neo-Confucianism), 성리학, 주자학, 理學, 정주학 등으로 불리는 계열의 유학 학파를 당시 자신들이 스스로를 칭했던 역사적 용어인 ‘도학’으로 통일하여 지칭하도록 하겠다.
몽골제국의 지식, 정보 네트워크의 발달 양상이 어떠했는가(티모시 메이, 2020; Biran, 2020), 그리고 원이라는 특수한 상황 하에서 어떻게 엘리트층들이 국가가 아닌 사회적, 문화적, 학술적 네트워크를 통하여 자신들의 정체성과 특권을 유지하려 노력했는가(Chen, 2007; 申万里, 2012; Chu, 2018; Bol, 2022)에 대해서 근래에 새로운 연구가 다수 나오고 있으며, 원대의 의사들의 네트워크에 대해서는 Shinno, 2016과 鞠芳凝, 2021에서 연구되었다.
무주 지역과 금화학파에 대해서는 Bol, 2022를 참고.
기존의 연구에서 주진형의 의학이 어떻게 도학의 영향을 받았는가에 대한 설명은 대체로 개괄적 수준에서 설명되어졌고(马雪芹, 2003; 刘时觉, 2004), 이를 전적으로 다룬 연구로는 Furth, 2006이 있다.
송대 이후의 흐름을 “집대성”한 주진형의 의학이 어떻게 명대 이후 상당 기간 동아시아 의학의 주류를 형성하게 되는지도 송에서 원, 명초에 걸치는 장기적 흐름 속에서 더욱 분명하게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Leung, 2003; Goldschmidt, 2009). 더 나아가 주진형의 영향력은 張介賓(1563-1640)이 주진형에 대해 비판을 하며 중국의학사에서 주진형을 대체하는 새로운 변화가 일어난 이후에도 지속된다고 할 수 있다. Struve, 2020의 장개빈에 대한 연구를 보면, 장이 주를 비판하고 있지만, 장의 기본적인 유의로서의 삶의 자세와 의학에 대한 자세 등은 주가 정립한 유의 상이나 학문방법론과 궤를 같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서학이나 자연과학과 같은 유학과 상이한 지식체계와 유학의 조우에 대한 연구뿐 아니라, “실학”에 대한 논의 등에서 나타나는 유학과의 관계 설정에 대한 논의에서, 기존의 탈 유학의 여부와 같은 단순한 논의를 벗어나, 유학과의 조우의 실제적인 성격과 양상에 대해 새롭게 접근하며 바라보는 데에도 시사점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원대의 의료 제도에 대해서는 많은 연구들이 축적되어 있어 의료 행정, 관직, 교육(Leung, 2003; 梁其姿, 2012; Shinno, 2016), 의호(醫戶)제도와 의학 과거제(김대기, 2017), 의료 구휼 제도(김대기, 2015), 법률(조원, 2021), 지방의 의료 제도, 삼황묘(Shinno, 2007; 范家偉, 2016; 2018; 2021) 등을 자세히 살핀 연구는 국가가 어떻게 의료를 운영하고 지원하였는지를 잘 보여준다.
최근 대표적인 이 시기 엘리트층의 네트워크 연구가 밝힌 네트워크의 특징들을 간단히 언급하자면, 금원교체기의 화북 지역의 지식층 간의 서간을 통해 네트워크를 분석한 Chu, 2018의 연구는 지역과 지적 지향이나 학파가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도 관계를 형성하면서 한족 사인들은 문화적 정체성을 형성해 갔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네트워크의 연결에서 중요한 연결고리 역할을 한 것은 몽골 지배층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몇 명의 주요한 인물들이었는데 이들은 비한족인 경우도 있었다. 원대 강남사회의 지식층의 네트워크를 연구한 申万里, 2012의 연구는 강남 사인들이 상도(上都)와 대도(大都)에 가서 네트워크를 형성하여 관직을 구하기도 하고 자신들의 신념을 주장하기도 하고 다시 강남으로 돌아와 보고 들은 지식을 전파함으로써 강남 사회의 문화를 변화시키고 있음을 보여준다. Chen, 2007은 원대 금화지역의 사인 네트워크를 연구하여 화북 지역의 사인 네트워크와의 차이를 논하고 강남의 사인 네트워크는 강력한 지역 정체성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이러한 지역 정체성을 기반으로 전국적 명성을 얻고 관계를 확장시키고 이민족 치하에서 자신들의 문화적 정체성을 보편적인 가치로 지켜내는데 성공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원에서 이렇듯 엘리트의 다양한 네트워크가 고도로 발달하게 된 이유로는, 과거를 거쳐 관직을 얻는 기회가 극도로 제한되자 현실적으로 인적 관계에 의한 추천 등이 관직 진출에서 더욱 중요해진 점, 그리고 한족 사인층들이 국가에 의지하지 않고도 자신들의 정체성과 문화를 유지해나가려는 생존전략으로 자신들의 거대한 문화 공동체를 형성하고 유지하기 위한 엘리트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이용하려 노력했던 점을 들 수 있다(Chen, 2007).
주진형의 일생에 대해, 송렴(宋濂, 1310~1381)이 쓴 주진형의 묘비명과 더불어 가장 많은 정보를 제공하는 「단계옹전(丹溪翁傳)」을 저술한 대량(戴良, 1317~1378)이 주진형의 일생에 관하여 쓴 글을 보더라도 일반적으로 문인이자 끝까지 원에 충심을 유지한 것으로 유명한 유학자인 그가 주진형의 의학과 임상경험을 의학적 용어, 개념, 이론을 정확히 사용하여 상세히 설명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陳元朋의 연구에 의하면 금에서 명초에 이르기까지 66인의 사인이 의사에게 바친 대략 400여 편의 글이 남아 있다. 장르도 시, 서문, 묘지명, 전(傳), 설(說) 등 다양하다(陳元朋, 1997: 240-248). 송대에 비해 이러한 글이 금대, 특히 원대에 더 증가한 것은, 출판량 자체의 증가, 그리고 문장을 주고받는 것으로 네트워크를 형성하는데 매우 적극적이었던 원대의 기풍에도 기인하지만, 원대부터는 상당히 높은 지위를 누리는 지식층 의사가 늘어난 것에서도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그들은 그러나 여전히 의술이란 일반적인 유학자들이 지니고 있지 않은 특별한 기술이 필요하다는 점도 잘 인지하고 있었다(Shinno, 2016: 95).
『吳文正集』 권15. “유가의 도는 인일 뿐이다. 애라는 것은 인의 용이니 애의 앞선 것에서 애친, 애신이 가장 크다. 부모는 자신의 뿌리니 애친을 알지 못하면 그 뿌리를 잊은 것이요, 자신이라는 것은 부모의 가지이니 애신을 알지 못하면 그 가지를 상하게 하는 것이다. 애친, 애신하여 장수하게 하고 건강하게 하는 것은 의가 아니면 누가 능히 하리요? 그러므로 유자는 의를 몰라서는 안된다(儒之道 仁而已 愛者 仁之用 而愛之所先 愛親愛身最大 親者身之本也 不知愛親 則忘其本 身者親之伎也 不知愛身 則傷其枝 愛親愛身而使之壽且康 非醫其孰能 故儒者不可以不知醫也).”
오징의 예는 북송이래 의사를 사인으로 인정해주고 유의라는 개념의 엘리트 의사층들이 출현했지만, 사인이 의사를 직업적 선택지로 본 것은 금원대에 이르러서야 일어난 변화라는 하임즈의 주장을 잘 보여준다.
이러한 지역주의적 경향이 의사가 자신의 지역만에 국한하여 활동하거나 명성을 얻는 것으로 만족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징은 오히려 향리가 아닌 전국적이고 보편적인 기준으로 의사는 평가받아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Shinno, 2016: 109).
원대의 유명한 문인인 우집(虞集, 1272-1348)의 인적 관계를 보면, 14세기 초가 되면서 원의 의료 관직, 의사직은 친척관계와 다양한 인맥을 통하여 엘리트층의 일부로 자연스럽게 섞이기 시작하는 양상이 잘 나타나고 있다(Shinno, 2016: 115).
송렴에 관해서는 『明史』 권128, 송렴의 열전을 참조.
주단계의 생애에 대한 서술은 송렴의 「석표사」와 대량의 「丹溪翁傳」(『丹溪心法』 附)을 참조하여 구성하였다.
주진형의 모친인 척씨(1260-1346)를 위해서도 송렴은 「元故朱夫人戚氏墓銘」을 지었다. 주진형의 모친, 처 모두 척씨이다.
「석표사」(『丹溪心法』 附), 402쪽
지역의 복리와 공공적 사업(교육기관 건립, 지역 사인 교육, 건물, 교각 건설에 기부, 구휼, 관과 지역민들 간의 중재, 지나친 조세 등 국가의 부당한 강요에 항의, 지역 치안, 방위에 기여 등)을 국가에 의지하지 않고 자발적으로 사인들이 추진하고 조직하고 권장하며 지역에서의 지도적 역할을 함으로써 권위와 영향력을 얻는다. 지역 사인들 간의 결혼을 통해 인맥을 구성하고, 대규모로 종족집단을 결집시키고 의례와 선행을 통해 정씨의문처럼 종족의 위상을 높이는 방식도 사인층의 네트워크 형성과 유지에 기여하였다. 사승관계와 문집이나 학술적 업적 등의 출판, 서간이나 서, 발 등의 글을 주고받는 행위 등도 이러한 네트워크 형성과 유지를 위한 주된 방식이었다.
여러 차례 중수된 『金華叢書』에 이 지역에서 출간된 많은 문헌이 보존되어 있다.
무주의 인구는 1290년에 216,000호, 1373년에는 256,000호였다.
사선생은 모두 중요한 관직을 거친 적이 없고, 오로지 학술과 교육, 덕행, 그리고 저작으로 명성을 얻었다(Bol, 2022: 123).
무주의 학풍을 시작한 여조겸은 박학굉사과(博學宏詞科) 출신이었고, 무주에서는 반자목(潘自牧)의 『기찬연해(記纂淵海)』, 왕상지(王象之)의 『여지기승(輿地紀勝)』, 장여우(章如愚)의 『군서고색(群書考索)』(반자목, 왕상지, 장여우의 생졸 연대는 불명확하나 모두 12세기 중반에 활동) 등 대표적인 유서(類書)가 나왔다.
『중용』의 “博學審問愼思明辨篤行”을 주희가 강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희가 항시 박학에 대한 우려를 표시하였고 이에 여조겸도 동의를 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Bol, 2022: 88-89를, 이에 대한 사료에 대해서는 Bol, 2022: 89의 주 10을 참조.
송렴에 의하면 주진형은 의학 서적 외에 『송론(宋論)』 1권, 『풍수문답』 약간권을 저술했다.
주진형의 저작에 대하여는 刘时觉, 2004: 82-107을 참조. 이러한 주진형의 예는 장개빈과 같은 경우에도 적용될 수 있는데, 장개빈이 도학에 관련한 철학적 논의를 하더라도 그의 저술의 중점은 항상 의학에 관한 것이었고 그의 저작 또한 의학에 관한 것으로만 이루어져 있다(Struve, 2020).
주진형에 대한 전기적 기록에도 “글을 지을 때는 이(理)를 근본으로 하였고 강상치화(綱常治化)와 유관한 것이 아니면 경솔하게 논하지 않았다”(「석표사」)고 하여 그가 논의에 신중함을 보였다는 것이 강조되며, 그의 제자인 조양인(趙良仁)이 태극의 뜻에 대해서 물었을 때, 그는 “나는 여러 학생들과 이에 대하여 일찍이 논한 적이 없었다. 지금 그대가 물으니 우연히 이를 언급하게 된 것이다”(「단계옹전」)라고 하여서 철학적 주제에 대하여 논의를 하는 일이 매우 드물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주진형, 『격치여론(格致餘論)』, 11쪽
무주의 지역사와 지성사 연구들은 이들의 지적활동이 어떻게 특정한 지역적 특성과 결합하면서도 동시에 전제국적 지식세계와 연결되는지, 어떻게 지역적 특성을 발판으로 전제국적 영향력을 얻어 가는지를 보여준다(Dardess, 1982; Chen, 2007; Bol, 2022).
주진형이 남긴 저작 중 그의 제자들이 편찬한 것이 아닌 그 자신이 직접 썼다고 하는 책은 『격치여론』, 『국방발휘』, 『本草衍義補遺』 3권이다.
주진형, 『국방발휘』, 47쪽.
주진형, 『격치여론』, 11쪽.
주진형, 『국방발휘』, 47쪽.
이 논문에서 주진형에 대한 사료에 대한 번역은 필자가 한 것이나, 장일무, 지제근가 번역한 『단계의집』 (2000)의 번역을 참조했음을 밝혀둔다.
주진형, 『국방발휘』, 47쪽.
주진형, 『격치여론』, 11쪽.
주진형, 『국방발휘』, 53쪽.
주진형, 『국방발휘』, 47쪽.
주진형, 『국방발휘』, 54쪽.
주진형, 『국방발휘』, 49쪽. “국방은 원래 외감을 위해 처방을 세운 것이므로 내상 열증을 전부 같이 다스린다면 해가 클 것”이라고 외감을 치료하는 처방을 내상에 쓰는 것에 대해 경고하고 있다.
주진형, 『국방발휘』, 47쪽. “지금 국방을 보면 병의 원인에 대한 의논이 별로 없고, 각 방문의 조목에 증후를 서술함에 그쳤으며, 한 처방으로 여러 병을 두루 다스리니, 입법이 간편한 듯 하나 들판에 넓게 그물을 쳐 놓고 토끼가 걸릴 것을 바라는 것과 같은 것이니, 허학사(허숙미, 許叔微, 1079~1154)의 비웃음을 면할 수 있겠는가?”
주진형, 『국방발휘』, 47쪽.
주진형, 『국방발휘』, 47쪽.
주진형, 『국방발휘』, 53쪽. “좋은 의사를 만나지 못하면 틀린 약을 또 쓰게 된다.”
「단계옹전」에 의하면 주진형은 기존에 나와 있는 처방을 기계적으로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치료를 할 때에는 “도량, 규구, 권형과 같은 법규와 표준을 건립”할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 옳은 처방을 하기 위해서는 그 처방을 위한 원리, 기준을 세울 필요가 있고, 이를 위해서는 반드시 의학 경전이라고 할 수 있는 문헌에 의지하여 가르침을 받고, 경전의 이론을 철저히 이해하여 경전이 설명하는 이론의 근본적 원리를 이해해야만 올바른 처방과 치료를 행할 수 있다고 여겼다.
주진형, 『국방발휘』, 53쪽. “중경의 책은 도리를 기술한 것이나 좋은 의사가 예를 들고 같은 부류를 추측한다면 무궁한 응용이라 할 수 있지만, 약을 가감하고 다듬고 합하는 것에서 그치면 끝내 법칙을 벗어나기 어렵다”고 하여 무궁한 응용을 할 수 있는 근본적인 원리를 알아야하고 단지 약물을 조정하는 정도의 간단한 규칙을 아는 것으로는 부족함을 말하고 있다.
송대에 들어 의학 이론을 다시 논하기 전, 수나라 巢元方 『諸病源候論』 이후의 중국 의학사는 이론적 발전보다는 처방전 위주의 의학이 발달했는데 『수서』 「경적지」에 의서로 분류된 256부 4510권 중 의방이 차지하고 있는 비중이 3714권이며 『당서』 「예문지」에서도 비슷한 상황인 것에서도 이를 유추할 수 있다.
북송시기 교정의서국에서는(范家偉, 2014) 침술에 대한 고전 의서들을 모아서 출판하고 송의 인종은 침술을 위해서 청동 모델을 만들고 이에 동반하는 편람도 만들었지만 점차 침술은 본초학과 처방전, 상한에 치중한 학술적 전통에 가려지게 된다(Goldschmidt, 2009: 383).
12세기 이당(李唐)이 그린 「촌의도(村醫圖)」의 뜸을 뜨고 있는 초라한 행색의 마을을 순회하며 다니는 의사는 이러한 민간 전통의 의료인을 표현한 예라고 보인다. 이는 그러나 유럽의 의학사에 있어서도 비슷하게 전개된 양상이다. 1180년대 볼로냐 대학, 1200년 파리대학, 옥스퍼드대학, 1218년 살라망카대학 대학에서 의학교육이 시작되면서 대학을 중심으로 한 의학교육은 고전 및 이슬람의 의서를 바탕으로 이루어지게 되고 경험이나 실습보다는 학문적인 논쟁을 중심으로 대학교육을 받는 의사들이 등장한다. 신사의 지위를 획득한 의사들은 손을 쓰는 일은 신사가 아닌 계서의 아래 놓인 외과의와 약재상이 맡도록 하며, 대학교육을 받은 의사는 라틴어, 갈레노스와 이븐 시나를 논하고, 외과의와 약재상은 도제를 통해 배우게 되는 양상은 19세기까지 지속되어 의료인 사이에서 분화가 일어난다(윌리엄 바이넘, 2017:37-70). 따라서 유학이 의학과 결합하면서 의학의 민간전통에서 중시되던 육체를 쓰는 침술이나 외과가 경시된 것은 유학의 사상적 내용의 영향이기 보다는 유학을 공부하는 사인층이 유럽의 신사층과 같이 육체를 쓰는 행위 대신 이론과 문헌, 학설을 중심으로 한 교육을 중시한 것과 유사한 현상이라고 하겠다.
중국에서 오운육기론의 전개를 간략히 살피면, 漢代에 처음 나타났고 唐代에 유행했다. 당대에 왕빙(王氷)은 『황제내경소문』의 주석에서 이 이론을 지지하고 있다. 왕빙은 7장이나 할애하여 오운육기론을 논하였지만 이 장들은 후세에 위조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11세기 말에 와서 오운육기론은 가장 성행했고 대표적으로 심괄(沈适. 1031~1095)은 이 이론으로 자연의 변화를 예측할 수 있다고 하였다. 1099년 송의 의료관리였던 유온사(劉溫舒)는 황제에게 운기설을 의료에 적용한 『소문입식운기론오(素問入式運氣論奧)』라는 책을 바쳤다. 의학에 깊은 관심을 보였던 휘종은 오운육기론을 의료에 적극 도입하고 이의 적용을 권장하고 국가의 의료 교육 커리큘럼과 의학 시험에 오운육기를 포함시키도록 하였다(Goldschmidt, 2009: 296).
유완소는 오운육기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고 寒涼派로, 이고는 脾胃論을 강조하여 補土派로, 장종정은 汗吐下의 三法을 강조하여 攻下派(또는 攻邪派)로, 주진형은 “양유여음부족”을 강조하여 자음파로 분류된다.
주진형, 『격치여론』, 13-14쪽.
주진형, 『격치여론』, 38-39쪽.
주진형, 『격치여론』, 11쪽. 실제로 병리를 논할 때는 “양유여음부족”의 상태에서 양의 기운인 상화가 망동하는 것을 제어하고 음을 보충하여야 인간의 질병을 예방, 치료할 수 있다고 제시하고 있기에, 사실상 이 두 이론은 자음강화의 이론으로 상호 연결되어 있다.
주진형, 『국방발휘』, 52쪽.
그는 “양유여음부족”이 “기상유여혈상부족(氣常有餘血常不足)”이라고 하여 양은 기를 음은혈이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그의 양과 음의 개념은 확정적이라기보다 복잡하고 추상적이고 상대적인 개념이다. 주진형, 『격치여론』, 13쪽 참조.
주진형, 『격치여론』, 13쪽.
주진형, 『국방발휘』, 51쪽. 상화의 개념은 운기학적 개념에서 주진형에 의하여 장부 위주의 개념으로 발전되었으나 이 또한 특정한 장부의 기능을 논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윤영흠, 윤창열, 2014).
주진형, 『국방발휘』, 61쪽.
대량, 「단계옹전」, 406쪽.
Furth, 2006의 연구는 주진형이 기의 세계를 벗어난, 이 세계의 실재를 넘어선 추상적 개념의 리나 무극과 같은 존재를 의학에 적용한 적이 없음을 잘 보여준다. 이러한 측면에서 刘时觉이 주진형을 도학 운동에서 유물주의적 경향을 지닌 흐름으로 평가한 것에 Furth는 동의하고 있다.
주진형, 『단계심법』 권1, 258쪽. “周子가 말하기를, 神이 志를 발생시킨다고 하였다. 五性이 감동하니 만사가 나오고 오자의 성이 物에 의해 감수되면 움직이지 않을 수 없다.”
주진형, 『격치여론』, 13쪽.
이는 현대 의학에서도 심리적, 정신적 측면을 고려하고 질병 발생에 있어서 생활습관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학적 측면만으로도 충분히 제시할 수 있었던 원칙이라고도 할 수 있으나, 이러한 원칙에 도학적 윤리관과 지향성이 강하게 반영되었다.
총 98안이고 중복을 빼면 총 87안이며 無藥方 18안, 有藥方 69안이다.
명대인 1549년에 江瓘(1503~1565)이 초고를 작성하고 그의 두 아들에 의해 이후 보완되었다. 전 12권이다.
청대에 魏之琇가 1770년에 간행했으며 전 36권이다.
이중 앞의 책과 문헌의 의안과 중복되는 것은 73안이 있다.
주진형, 『격치여론』, 20-21쪽.
대량의 「단계옹전」의 주진형의 치료에 대한 기록에는 “분노해서 억지로 술을 마신” 여성의 예와 “남편이 광동에 들어간 지 5년이 지나도 오지 않는 상황” 자체가 질병의 원인이라고 진단하여 남편이 돌아오자 질병이 나은 예 등이 있는데, 이는 주진형이 인간의 감정적 요소가 질병에 미치는 영향을 중시하며 치료를 하였음을 보여준다.
대표적으로 소아과에 대한 의안을 실은 錢乙의 저작과 상한에 의한 질병에 대한 의안을 실은 허숙미의 저작을 들 수 있다(Furth, 2007: 129-130).
송대의 의방, 의안에 대해서는 최해별, 2016; 2018b 참조.
물론 의사가 근대 이후의 양상과 같이 독립적인 전문가로서의 권위를 부여받게 되는 수준에는 이르지 못했지만 주진형 이전의 의사의 존재 양상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는 것은 인정될 수 있다고 본다.
주진형과 그의 제자들이 방대한 문헌을 남기고, 이를 통해서 전제국적으로 그리고 국제적으로 그를 간접적으로나마 사승관계로 받아들이며 그의 권위를 받아들이는 학파가 형성된 것 또한 도학의 지식 생산, 재생산 방식과 유비하여 생각해 볼 수 있다.
주진형의 저작을 보면 고대의 의학경전과 금의 대가들 외에 송대의 의학자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받은 것을 볼 수 있다. 대표적으로 허숙미의 상한론을 해석하고 연구하는 방식과 『상한구십론』의 의안 형식에 영향을 깊이 받은 것으로 보이며, 송대의 진무택(陳無擇, 1121~1190)에 대해서는 비판적으로 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삼인극일병증방론(三因極一病證方論)』의 병인에 대한 논의와 화에 대한 논의에서 큰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주진형 사후의 단계학파의 전개와 성격은 본고의 범위를 넘어서는 주제이지만, 주진형의 의학이 그의 사후 명대 이후 상당 기간 동안 동아시아 의학의 전범을 제공하며 널리 수용되었던 것은 그의 대표적인 설인 자음강화론이나 상화론 등으로 뚜렷이 구별되는 하나의 학설을 강조하는 학파로서가 아니라, 절충적이고 종합적인 성격을 띠는 형태였다(Simonis, 2015). 또한 그는 환경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지역적 차이를 강조하는 당시의 의학적 풍토에서 환경을 중시하면서도, 환경에 의한 차이보다는 보편적인 생리와 병리에 더 집중하는 방식으로 보편성을 더 강조하였는데 이러한 면모도 그의 의학의 광범한 전파와 수용의 요인으로 작용하였다고 생각한다.
12-14세기 중국의 수학사, 천문학사에 관한 Guo의 2019년 프린스턴대학 박사학위논문에서 이 일화를 발견하여 도움을 얻었음을 밝혀둔다.
조우흠은 천문에 관련된 관직을 가지고 있거나 명성이 높은 학자가 아닌 지방의 전진교 도사였다. 원이 건축한 거대한 천문 관측소인 등봉(登封) 관성대(觀星臺)로부터 멀리 떨어진 강남동로 파양(江南東路 鄱陽, 현 강서성)에 살기에 국가가 소장한 방대한 서적과 자료도 이용할 수 없었던 그가 천문에 관한 기본 지식의 입문서로 쓴 책은 고도의 전문성이나 독창성을 지닌 책은 아니다. 이러한 책에 서를 써주게 된 것은 인간관계에 의한 것일 수 있으나, 송렴은 단순히 아는 사람의 부탁 때문만이 아닌 이 책의 내용에 대하여 자신이 가진 지식과 기준에 의거하여 평가를 하고, 그 가치를 인정하여 서를 쓴다. 송렴은 천문학이란 “몇 명의 대유(大儒)들이 정신을 집중하여, 보고 들은 것을 모두 전해 받고, 천문관측기구를 완벽히 갖추어야만 정미한 결과를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의 의견을 인용하며 조우흠의 『혁상신서』와 같은 책이 이러한 견해를 반박할 수 있는 예라고 보았다. 송렴은 조우흠이 그러한 훌륭한 장비를 비롯한 국가의 지원이 없이도 중앙의 천문관들이 내놓은 결과와 비슷한 결과를 도출해 내었음에 감탄하였고 그것이 이 서를 쓰게 된 이유라 밝힌다.
자말 알 딘과 그의 원에서의 활동에 대하여는 Yang, 2017; 2019 참조.
송렴, 『革象新書』 序, 『송렴전집』 권32, 688-68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