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기 조지프 니덤의 세균전 국제과학조사단 참여동기와 주요 역할

Joseph Needham’s ‘Motivations for Participation’ and ‘Major Roles’ in the International Scientific Commission on Bacterial Warfare during the Korean War

Article information

Korean J Med Hist. 2023;32(3):1005-1041
Publication date (electronic) : 2024 December 31
doi : https://doi.org/10.13081/kjmh.2023.32.1005
*Associate Professor, Department of Korean Studies, Hankuk University of Foreign Studies
김태우*
*한국외국어대학교 한국학과 부교수. 한국현대사 전공 / 이메일: taewoo21@gmail.com
†이 연구는 2023년도 한국외국어대학교 교내 학술연구비의 지원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임. 영국 현지 문서 수집을 도와준 세인트앤드루스대학교의 김준형 박사님, 그리고 이 연구의 수행 과정에서 많은 지적 자극과 조언을 주신 서울대학교 김옥주 교수님과 게이오기주쿠대학교 마쓰무라 다카오(松村高夫) 교수님에게 감사의 말을 전합니다.
Received 2023 October 29; Revised 2023 November 4; Accepted 2023 December 15.

Abstract

This paper analyzes the motivations of the British biochemist Joseph Needham for participating in ‘the International Scientific Commission for the Investigation of the Facts Concerning Bacterial Warfare in Korea and China (ISC)’ and his major roles within it during the Korean War. Needham stayed in China for four years starting in 1942 as a scientific counselor and director of the British Scientific Mission in China, which enabled him to interact with many Chinese scientists and politicians. Surprisingly, during this period (1944), Needham conducted an investigation into the Japanese military’s use of bacterial warfare. Through his personal records, Needham repeatedly stated that his experience with bacterial warfare research in 1944 was one of the most important reasons for his participation in ISC activities. In addition, Needham secretly but very actively sought to recruit other investigators within Britain. Needham repeatedly tried to persuade fellow professors at Cambridge University, William Thorpe and Vincent Wigglesworth, to be included in the investigation team. Although Needham had doubts about his own expertise in investigative activities, he actively expressed his desire to become a member of the investigative team through various channels. Primary documents show that he actively and voluntarily led the investigation activities after joining the team in professional discussions, document analysis, and witness interrogations. Needham’s passion and sincerity demonstrated in internal meeting minutes dispel some misunderstandings that the investigation team’s activities were limited to passively approving Chinese data.

1. 머리말

1952년 2월 22일 북한 외무상 박헌영은 미군이 비행기를 사용해 “전염병균을 전파하는 다량의 각종 독충들”을 북한 지역에 조직적으로 살포하고 있다는 성명을 발표했다(조선중앙통신사, 1953: 113-114). 그리고 이틀 후인 2월 24일 중국 외무상 저우언라이(周恩來) 또한 미국의 세균전에 관한 박헌영의 발언을 적극 지지하는 성명을 공표했다.1) 사실 북한은 이미 1951년 초부터 미군의 세균전 수행 가능성에 대해 공공연히 주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중국까지 미군의 세균무기 사용 혐의를 제기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내 세계 여론은 한국에서의 세균전 논쟁으로 들끓기 시작했고, 그 논쟁의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공정하고 전문적인 세균전 조사위원회 구성의 필요성까지 제기되고 있었다.

이 논문은 위와 같은 배경 속에서 조직된 ‘조선과 중국에서의 세균전 사실에 대한 국제과학조사단(International Scientific Commission for the Investigation of the Facts Concerning Bacterial Warfare in Korea and China; 1952년 당시 사용된 한국어 번역 명칭 그대로 사용, 이하 ‘국제과학조사단’ 혹은 ‘조사단’)’의 핵심적 조사위원이었던 영국인 생화학자 조지프 니덤(Joseph Needham, 1900~1995)의 조사단 ‘참여동기’와 ‘주요 역할’에 대해 조명해 보고자 한다. 니덤은 1952년 당시 케임브리지대학교 교수이자 영국 왕립학회 회원으로서, 이미 자신의 전공인 생화학 분야에서 세계적인 명성을 쌓아 올린 저명한 중견학자였다. 그런데 왜 50대 초반의 왕립학회원이 어느 날 갑자기 세균학·전염병학·곤충학 분야 중심의 한국전쟁 현지조사 활동에 참여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특히 그 조사 과정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역할’을 수행했는지 생생하게 보여주는 논저는 지금까지 부재하다.

이제껏 기존 학계의 한국전쟁기 세균전 관련 논저는 대부분 미군의 세균전 수행의 진위(眞僞)를 규명하는 문제에 집중해 왔다. 관련 논저들 중에서 스티븐 앤디콧(Stephen Endicott)과 에드워드 해거먼(Edward Hagerman)의 저서는 세균전이 실제 수행되었을 가능성을 주장하는 대표적인 연구로 알려져 있다(Endicott and Hagerman, 1998). 앤디콧과 해거먼은 미국과 중국 아카이브로부터 무수히 많은 세균전 관련 1차 자료를 수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를 근거로 세균전 논쟁이 불거졌던 시기와 정확히 일치하는 시기(1951~1953)에 미군의 세균무기 활용 주장, 관련 예산, 실제 생산과 공격 능력 등이 현저하게 상승했고, 미군 내부적으로 매개 곤충 및 기타 다른 생물학전 수단 관련 실험들이 진행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해 내는 데 성공했다. 게다가 한국전쟁 당시 생산된 대량의 중국 측 1차 자료를 활용하여, 1952년 초에 중국의 공중위생 캠페인 또한 대대적으로 확대된 사실을 최초로 확인해 주었다. 그러나 두 연구자가 자신의 책에서 명백히 밝혀둔 것처럼, 현재까지 접근 가능한 미국의 문서보관소 공개 자료로는 “미국이 한국전쟁에서 생물학 무기로 실험을 했다는 명확하고 확인 가능한 ‘직접적인’ 증거”를 확보하는 것이 불가능했다(Endicott and Hagerman, 1998: 188). 나름의 커다란 연구성과에도 불구하고 그 한계 또한 분명했던 것이다.

반대로 우드로 윌슨 센터의 캐스린 웨더스비(Kathryn Weathersby)와 밀턴 라이텐버그(Milton Leitenberg)의 논문은 한국전쟁기 세균전의 허구성을 주장하는 대표적 연구로 간주되고 있다(Weathersby, 1999; Leitenberg, 1999). 두 사람의 연구는 러시아연방 대통령기록보관소에 소장되어 있던 12건의 문서에 근거한다. 이 문서들은 1953년 스탈린 사후 베리야(Lavrenti Beria)가 그의 정적 흐루쇼프(Nikita Khrushchev)의 지지자였던 이그나티예프(Semen Ignatiev)의 비행을 고발하기 위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그나티예프가 중국과 북한의 세균전 증거 조작 사실을 확인하고도 상부에 보고하지 않았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었다. 웨더스비는 이 문서들이 세균전론과 관련된 “오래된 혐의를 최종적으로 영면에 들게 했다”고 선언했다(Weathersby, 1999: 180).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이 이 문서 자체가 소련 비밀경찰(NKVD) 총수 출신으로서 온갖 고문에 의한 자백과 협잡을 일삼았던 베리야의 정권투쟁기 작성 문서였을 뿐만 아니라, 참조 문서 자체도 원본이 아닌 원본 일부의 수기(手記) 필사본에 근거한 논문이라는 점, 즉 원자료의 진위 여부를 확인시켜 주는 직인이나 서명 혹은 문서의 소장처 등의 표시가 부재한 필사 문서에 근거한 논문이라는 점에서 논쟁을 “영면에 들게” 하기에는 일정한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Weathersby, 1999: 176).

그런데 세균전 사건 당시 중국인민지원군 위생부장이었던 우즈리(吳之理)의 회고록이 그의 사후 15년 만인 2013년에 공개되면서 세균전 조작설은 다시 세간의 주목을 받을 수 있었다. 우즈리의 주장에 의하면, 중국과 북한 당국이 세균전 조사 결과를 규정된 사실에 부합하게 만들기 위해 위증을 교사하거나 증거를 위조하는 등 상당히 고심하면서 일을 진행했다고 한다(황영원, 2016: 221). 2016년 라이텐버그는 이 같은 우즈리의 주장을 반영하여 자신의 기존 주장을 강화하는 논문을 다시 발표하기도 했다(Leitenberg, 2016). 그러나 세균전 논쟁의 제기 과정을 분석한 전예목의 주장처럼, “세균전 증거의 조작을 입증하는 것만으로는 증거가 불충분하게 발견될 수 있는 소규모 실험적 세균전을 미국이 감행하였을 가능성과, 공산 측에서 증거를 과장하였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전예목, 2021: 30) 소규모 실험적 세균전의 가능성은 현지조사 완료 직후 니덤 또한 강하게 주장했던 가설들 중 하나였다.2)

본고는 위와 같이 세균전의 진위 여부를 규명하려는 기존의 주요 연구동향과는 달리, 오롯이 조지프 니덤이라는 영국 생화학자의 한국전쟁 세균전 현지조사 ‘참여동기’와 조사위원회 내에서의 그의 ‘주요 역할’을 규명하는 데 연구의 목적을 두고 있다. 즉, 이 논문은 기존의 세균전 논쟁에 본격적으로 참여하는 논문이라기보다는, 조지프 니덤 개인의 세균전 조사활동에 관한 일종의 ‘지성사(intellectual history)’적 접근을 시도한 연구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기본적 연구 목적에도 불구하고, 니덤이라는 연구자에 대한 지성사적 접근이 냉전의 의학사와 지성사 및 한국전쟁기 세균전 논쟁에도 다양하고 중요한 시사점을 제시할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이 글은 니덤의 세균전 조사활동과 관련된 편지, 메모, 개인적 보고서는 물론, 세균전 국제과학조사단 내부 회의자료 등을 핵심 연구자료로 활용한다. 그런데 이 다양한 자료들은 전쟁과 국제정치를 위한 과학의 동원이라는 냉전기의 현실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측면이 있다. 요컨대 이 글은 한국전쟁기 세균전이라는 논쟁적 주제에 연루된 여러 학자들의 고뇌와 갈등에 대한 고찰을 통해, 1950년대 초반 냉전 의학의 어두운 일면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점에도 주목해야 할 것이다.

조지프 니덤은 과학사와 중국학 분야에서 워낙 뛰어난 업적을 남긴 인물이기 때문에, 그의 삶을 조망하는 다양한 논저가 이미 다수 존재하고 있다(박성래, 1995; 송상용, 1995; Davies, 1997; Gurdon and Barbara, 2000; 사이먼 윈체스터, 2019; 이문규, 2017). 이 대부분의 논저들에 등장하는 니덤의 세균전 과학조사단 참여는 그의 과학적이고 엄중한 학자로서의 삶에서 잠시 스쳐 지나간 예외적 사건, 중국인들과의 우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얽혀든 사건, 그래서 한때 그를 꽤나 난처하게 만든 삶의 그림자 등으로 간주되곤 했다.

이 같은 논의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사실상 한국전쟁기에 작성된 니덤 개인 문서들까지 탐구한 역사학적 연구로는 영국의 역사학자 톰 뷰캐넌(Tom Buchanan)의 논문이 유일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뷰캐넌은 니덤의 조사단 활동에 대해서는 “갈릴레오의 용기”라고 높게 칭송하면서도, 애초 니덤의 조사단 활동에 대한 개입 의지나 그 참여 과정에 대해서는 “주저하면서 끌려들어간(drawn reluctantly)” 것에 불과하다고 평가하고 있다(Buchanan, 2001: 503). 반면에 본 논문은 니덤이 조사단 참여를 주저하기는커녕 오히려 매우 적극적이었다는 사실을 다양한 당대 문서를 통해 보여줄 것이다. 본문에서 자세히 후술하겠지만, 니덤은 생화학자로서의 자신의 전문성이 세균전 조사활동에 최적인가에 대해 의구심을 제기했을 뿐, 다양한 경로를 통해 조사단 활동에 직접 ‘기꺼이’ 관여하고 싶다는 견해를 적극적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심지어 그는 조사단원 선정 및 관련 전문가 설득 과정에도 자발적으로 개입하고 있었다.

본고는 위와 같은 조지프 니덤의 적극적 참여동기와 조사단 내의 역할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한국전쟁 당시에 생산된 다양한 1차 자료를 수집·활용했다. 그 핵심 자료들은 영국 제국전쟁박물관(Imperial War Museum) 문서고와 케임브리지대학교 니덤연구소(Needham Research Institute)에 소장되어 있는 니덤의 개인 편지들, 다양한 보고서, 회의록, 수기 메모, 팸플릿, 사진, 신문 스크랩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기존 어느 논저에서도 활용된 적 없는 과학조사단 전원회의록(프랑스어본)을 확보하여, 조사단 내부 논의의 역동성과 니덤의 구체적 역할 등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상의 자료들은 조지프 니덤에 대한 지성사적 이해를 깊게 해줄 뿐만 아니라, 한국전쟁기 세균전 논의에도 중요한 아이디어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2. 조지프 니덤의 국제과학조사단 참여동기와 개인적인 조사위원 모집 활동

1) 조지프 니덤의 경력과 국제과학조사단 참여동기

조지프 니덤은 30대 초반에 이미 생화학자(biochemist)로서 세계적 명성을 획득한 연구자였다. 그는 케임브리지대학교 곤빌앤키스 칼리지(Gonville and Caius College, 이하 ‘키스 칼리지’)에서 생화학 전공으로 학사(1921)부터 박사(1925)까지 받은 후, 바로 같은 대학에서 펠로우십을 획득했다. 니덤은 1931년 『화학적 발생학(Chemical Embryology)』이라는 세 권짜리 책을 단독으로 저술했는데, 이를 통해 이미 서른한 살의 나이에 해당 분야에서 세계적 명성을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책 덕분에 10년 후인 1941년 “과학 분야에서는 노벨상 다음 가는 명예”라고 칭송되기도 하는 영국 왕립학회 회원(FRS)으로 임명되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사이먼 윈체스터, 2019: 54-56).

그런데 니덤은 그의 나이 50대에 이르러 『중국의 과학과 문명(Science and Civilization in China)』이라는 과학사 저서 발간 프로젝트에 돌입하여, 그의 인생 전반부 업적 전체를 압도하는 놀라운 연구성과를 남기기도 했다. 소위 중국에 대한 외부인들의 부정적 인식을 “거의 하룻밤 사이에, 그리고 거의 혼자 힘으로” 바꾸어 버렸다는 중국과학사 저서 시리즈를 발간하기 시작한 것이다(사이먼 윈체스터, 2019: 250). 그는 이 같은 역사학 분야에서의 업적을 인정받아 1971년 인문학계 최고 영예인 영국 아카데미 회원(FBA)으로 선정되었고, 1992년에는 엘리자베스 여왕으로부터 영국 명예훈위(Order of the Companions of Honour)까지 받을 수 있었다. 이렇듯 니덤은 과학과 인문학 분야의 최고 영예를 동시에 획득하는 이례적 업적을 남기게 되었는데, 20세기에 위의 세 가지 타이틀(FRS, FBA, CH)을 동시에 지닌 사람은 그가 유일했다고 한다.3)

그렇다면 이렇듯 놀라운 연구업적을 남긴 조지프 니덤의 삶에서 1952년 세균전 현지조사 활동은 그저 냉전 초기의 혼란한 정치 상황 속에서 발생한 우발적이고 예외적인 이벤트에 불과했다고 평가해야 할까? 과학조사단 참여는 그의 삶에서 잠시 스쳐 간 감추고 싶은 해프닝에 불과했을까? 아마도 니덤 자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가 본 논문에서 사료로 활용된 다수의 편지와 메모들을 수십 년 동안 소중하게 보관하다가, 국가에서 관리하는 아카이브로 온전히 이전한 데에는 오랫동안 지속된 그만의 신념과도 같은 것이 작용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한국전쟁기 과학조사단 참여는 그에게 소중했던 연구활동만큼 이나 그의 삶에서 적잖이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일대 사건이었던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유독 한국전쟁기 세균전 관련 문서들만 그의 생전에 공공기관의 문서고에 따로 이전할 이유가 있었을까?

본고는 니덤의 주요한 삶의 경력과 실제 그가 남긴 기록에 근거하여, 크게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관점에서 그의 과학조사단 참여의 배경과 동기를 살펴보고자 한다. 첫 번째는 꽤나 광범하고 간접적인 배경인 듯하지만, 통상적으로 인생의 중요한 선택에서 결정적 영향을 미치곤 하는 개인적 신념, 사상, 가치관 등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이 부분에서는 주로 그의 타문화에 대한 포용성과 개방성,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사고방식, 사회주의적 신념의 형성 과정 등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우리의 일상적 선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관계와 인연의 문제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이와 관련해서는 주로 ‘중국’ 혹은 ‘중국 과학계’와 니덤의 깊은 인연에 대해 검토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로는 ‘세균전’이라는 세부적 연구 주제와 니덤 사이의 구체적 관련성에 대해 짚어보고자 한다. 이는 기존 연구에서 전혀 드러나지 않은 부분이지만, 니덤 개인적으로는 가장 중시했던 내용이었다

우선 첫 번째로, 어린 시절부터 자연스럽게 형성된 타문화에 대한 개방적이고 포용적인 자세, 그리고 그의 개인적 경험들을 통해 형성된 사회주의적 신념 등에 대해 살펴보자. 이를테면 어린 시절의 니덤은 이미 열 살 무렵부터 자유주의 신학자였던 반스(E. W. Barnes)의 독창적인 강의를 매주 열심히 경청했다고 하는데, 당시 반스는 과학적 발견에 의거해 기독교 교리를 재구성하려는 운동의 최전선에 서 있는 인물로 유명했다. 반스는 다윈을 무조건적으로 추종했고, 기적의 존재를 부정했으며, 성례전에 관한 근본적 믿음에 반대했다. 어린 시절의 니덤은 이 같은 반스의 강의를 매주 들으면서 과학적이고 이성적인 사고의 중요성과 이질적인 대상에 대한 개방적이고 포용적인 접근법을 익힐 수 있었다(이문규, 2017: 86; 사이먼 윈체스터, 2019: 32-33).

실제 그는 주변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저명한 생화학자에서 역사학자로 과감하게 변신한 사례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개인적·사회적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고 홀로 오랫동안 이성적으로 숙고한 후에 자기 자신만의 길을 과감히 선택하는 경우가 많았다. 1930년대 그 주변의 수많은 좌파적 지식인들이 무신론자로 변해갈 때, 유독 니덤만은 끝까지 그리스도교 신앙을 지켜낸 것도 비슷한 사례로 거론할 수 있다. 1936년 니덤은 칼 폴라니(Karl Polanyi) 등과 함께 『그리스도교와 사회혁명(Christianity and the Social Revolution)』이라는 책을 발간하여 그리스도교에 대한 자신의 신념을 구체적으로 드러내기까지 했다(Polanyi, et al., 1936). 그는 주변의 분위기에 동요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숙고하고 연구한 끝에 마르크스주의와 그리스도교의 양립 가능성을 확신했던 것이다(송상용, 1995: 185-186). 니덤만의 자유롭고 독립적인 사고와 집요한 삶의 선택 방식을 확인할 수 있다.

니덤이 평생토록 그리스도교 신자로서의 삶을 고수했다는 사실은 그를 단순한 마르크스주의자나 친소주의자로 평가하는 것의 부적절성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실제 니덤의 사회주의는 그의 성장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접할 수 있었던 개인적 환경과 사건들 속에서 성숙한 측면이 강했다. 예컨대 니덤은 십대 시절 철도원들과의 우정을 통해 노동계급의 삶에 눈뜰 수 있었고, 1926년의 영국 총파업, 경제대공황 시기의 경제파탄과 대량실업, 1933년 나치 집권기 등을 거치면서 자신만의 사회주의 사상을 구축해 갔다고 평가되곤 한다(사이먼 윈체스터, 2019: 37-38; 송상용, 1995: 185). 니덤은 교조주의적 사상과 신념의 노예였다기보다는, 자신의 경험과 자율적인 숙고를 통해 독립적인 선택을 지속하는 인간 유형이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대부분의 학자들이 꺼리던 위험한 세균전 현지조사 활동에 적극적·자발적으로 참가할 수 있었던 배경에도 위와 같은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사고와 삶의 태도가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니덤은 이 같은 자신을 ‘명예 도사(honorary taoist)’라고 부르기도 했다(송상용, 1995: 186).

다음으로는 개인의 가치관만큼이나 인간의 일상적 선택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사회적 관계와 인연의 문제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즉 보다 구체적으로는 조지프 니덤의 세균전 조사활동 참여 결정과 그의 ‘중국’ 혹은 ‘중국 과학계’와의 깊은 인연에 대해 간략히 검토해 보도록 하겠다.

원래 생화학자 니덤은 1937년까지만 해도 중국과는 어떤 인연도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1937년 케임브리지대학교에 유학 온 세 명의 중국인 학생들, 그 중에서도 훗날 그의 두 번째 부인이 되는 루궤이전(魯桂珍)을 만나면서 이전에는 전혀 알지 못했던 중국문명과 중국어에 대한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수년 후 니덤은 과학계의 권위 있는 왕립학회 회원이자 뛰어난 중국어 능력을 지닌 학자로서 영국 정부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이내 그는 1942년 일본의 침략으로 고통받고 있던 중국으로 가서 과학 분야의 재건을 돕는 일에 종사하라는 정부의 지시를 받게 되었다. 이후 니덤은 4년 동안이나 충칭 소재 영국대사관의 하부 조직이었던 중영과학합작관(中英科學合作館)의 대표라는 공적 외교관의 신분으로 중국에 머물면서 수많은 중국과학자들과 교류할 수 있었다. 당시 니덤은 훗날 세균전 조사단 활동에 직접 관연한 중국과학원의 궈모뤄(郭沫若) 같은 학자들뿐만 아니라, 저우언라이와 같은 정치인들과도 깊은 신뢰관계를 형성할 수 있었다(송상용, 1995: 184; 사이먼 윈체스터, 2019: 93-94, 154-157).

이 같은 상호신뢰 관계의 형성, 니덤의 중국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와 출중한 중국어 실력 등은 1952년 세균전 조사단 참여의 중요한 동기들 중 하나로 작용하게 되었다. 중국에서 조사단 활동이 시작되기 약 2개월 전인 1952년 4월 말, 니덤은 다음과 같은 메모를 개인적으로 작성해 두었다: “상당한 명성을 지닌 중국 과학자들의 이름이 최근 언론에 등장하고 있다. 예컨대 곤충학자 첸시샹(陳世驤, Ch’en Shih-Hsiang), 세균학자 웨이흐시(魏曦, Wei Hsi), 면역학자 추치밍(朱既明, Chu Chi-Ming), 병리학자 리페이린(Li Pei-Lin) 등이 그들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들 모두를 알고 있고, 나는 그들의 정직을 보장할 수 있다.”4) 결국 니덤의 세균전 조사활동 참여의 주요 동기들 중에는 유럽과 미국의 명문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이 중국인 과학자들과의 개인적 인연과 그들에 대한 신뢰가 중요하게 작용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세균전’이라는 세부적 연구 주제와 니덤 사이의 구체적 관련성에 대해 짚어보고자 한다. 놀랍게도 한국전쟁기 니덤의 세균전 현지조사 활동은 그의 삶에서 ‘두 번째 세균전 조사활동’이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실제 니덤 자신도 이 같은 과거 경력을 조사단 참가의 가장 중요한 동기로 강조하고 있었다. 니덤은 한국전쟁 조사단에 참가하기 두 달 전인 1952년 4월 22일 중국 외교관 출신인 존 프랫(John T. Pratt)에게 보내는 편지를 통해 과거 자신의 세균전 조사 경력에 대해 아래와 같이 상세히 서술했다.

지난 전쟁 기간의 한때(1944년), 후베이와 허난에서 일본인들의 세균전 활용에 대한 보고서를 준비하는 것이 내 임무의 일부분이었습니다. 나는 현장조사 기회는 없었지만, 중국 의무감실을 통해 접근할 수 있었던 보고서들에 기초해서 연구를 수행했습니다. 비록 나는 완벽한 회의감(complete scepticism)을 갖고 조사를 시작했지만, 결국에는 일본인들이 페스트에 감염된 벼룩을 살포하는 컨테이너를 실제로 투하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이것들은 페스트가 일반적으로 보고된 적 없는 지역에서 약간의 사망률을 동반한 상당수의 페스트 사례들을 유발했습니다. 당신도 알다시피 선페스트(bubonic plague)는 일반적으로 다소 명백히 제한된 지역(푸젠성과 윈난성)에서 발견되는 풍토병으로서, 이 지역을 벗어나 확산하지는 않습니다. 내 보고서는 아마도 여전히 정부 파일에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나는 그 복사본이나 어떤 엄밀한 노트들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5) (밑줄은 인용자)

니덤은 이 편지를 통해 자신이 직접 후베이성이나 허난성에서 현장조사를 실시하지는 않았지만, 중국 의무감실에 보관된 보고서들을 통해 일본인들의 인공적인 페스트 감염 시도에 대해 확신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후베이성과 허난성에서 발생한 사건은 현시점에는 여러 역사학자들에 의해 명백한 역사적 사실로 검증된 일본군의 악명 높은 세균전 야외실험을 지칭한다(Harris, 2002). 1944년 니덤은 중국 측 문서 검토만으로도 이를 확신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 같은 경험의 연장선상에서 니덤은 한국전쟁기 세균전 과학조사단의 필요성까지 강조하고 있었다. 그리고 훗날 한국전쟁 세균전 현지조사 직후의 기자회견에서 조사단 참가 수락 동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에 나는 일본에 의해 진행된 세균전을 경험했고, 이에 자연스럽게 그들의 수단이 어떻게 발달했는지 조사하고 싶은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또한 나는 당시 중국인 과학자들과 긴밀하게 어울릴 기회가 있었는데, 그들의 결론에 대해 그들과 토론하고 평가하는 과정에서, 그들이 매우 충분한 자격을 갖추었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6) (밑줄은 인용자)

니덤은 위와 같은 언급을 통해 앞서 본고에서 거론된 세 가지 선택의 동기들 중 두 가지, 즉 중국 과학자들과의 개인적 인연과 상호 간의 신뢰 형성, 그리고 2차대전기 세균전 현지조사 경험을 동시에 거론했다. 짧은 답변이지만 그의 결정적 참여동기를 농축한 표현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2) 조지프 니덤의 국제과학조사단 조사위원 모집 활동

미군의 세균전 수행 혐의에 관한 저우언라이의 박헌영 지지 성명이 나온 다음 날인 1952년 2월 25일, 중국인민세계평화보위위원회 궈모뤄 위원장은 세계평화회의(World Peace Council, WPC)에 해당 문제에 대한 호소문을 제출했다. 세계평화회의는 1940년대 후반 소련과 사회주의권 중심의 반전평화운동에 의지해 형성된 조직으로, 냉전 초기에는 사회주의권뿐만 아니라 서유럽의 많은 진보적 지식인과 문화인들까지 지지하고 있던 범세계적 평화단체였다. 이를테면 1950년 3월 세계평화회의의 반전·반핵을 위한 「스톡홀름 호소문(Stockholm Appeal)」 서명 운동이 진행될 때, 불과 3개월여 만에 전체 인류의 약 1/8이자 전체 성인 인구의 약 1/4에 해당하는 273,470,566명이 호소문에 서명하는 놀라운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프랑스 인구의 30%, 이탈리아 인구의 32%가 서명). 당대 반전평화운동과 세계평화회의의 영향력이 얼마나 막강했는지 짐작하게 해준다(김태우, 2015: 185). 요컨대 1952년 중국의 선택은 당대 적잖은 서구 지식인들까지 포용하고 있던 세계평화회의를 통해 세균전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찾고자 했던 것이다.

1952년 3월 29일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개최된 세계평화회의 집행위원회의에서 중국 대표 궈모뤄와 북한 대표 이기영이 세균전 문제에 관한 보고서를 제출하면서, 공정하고 독립적인 과학자들로 구성된 국제조사단 구성의 필요성이 최초로 제안되었다. 이에 집행위원회는 양국이 제기한 문제에 대해 토의한 후, “모든 사실과 증거를 수집하기 위한 국제위원회의 구성”을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더불어 “인류 전체에 대한 위협”이 될 수 있는 세균전의 가능성에 맞서 세계의 “모든 사람들을 보호”하는 것이 자신의 의무라는 「세계평화회의 호소문」 (Appeal of the World Peace Council)」도 발표되었다.7)

조사단 결성이 공식적으로 채택되자 세계평화회의와 중국 측 관계자들은 곧바로 예비적 초청장을 보내는 문제를 논의하기 시작했다. 조사위원 후보자 명단 작성의 책임은 궈모뤄와 함께 유럽에 동행한 중국의 첸싼창(钱三强) 중국과학원 현대물리학연구소장에게 맡겨졌다. 첸싼창은 베이징대학교와 칭화대학교를 졸업한 후, 프랑스의 소르본대학과 콜레주드프랑스에서 노벨상 수상자인 프레데리크 졸리오퀴리(Frédéric Joliot-Curie)와 이렌느 졸리오퀴리(Iréne Joliot-Curie) 문하에서 수학한 물리학자였다. 그는 1948년 귀국과 함께 칭화대학교 교수가 되었고, 1950년 현대물리학연구소를 창립했다.8) 이 같은 첸싼창 교수의 이력에서 중요한 사실은 그가 유럽인들의 신뢰를 받는 과학자였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당시 세계평화회의 의장이었던 프레데리크 졸리오퀴리와 강한 친분 관계가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서구학계에서 신망이 높던 졸리오퀴리와 함께 세균전 문제에 대해 허물없이 토론할 수 있는 중국 측 연구자였다.

실제 첸싼창은 유럽의 진보적 과학자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조사단 후보자 목록을 작성할 수 있었다. 니덤의 개인 서한들에는 첸 박사를 도와준 것으로 추정되는 유럽 현지인들이 등장한다. 세계보건기구(WHO) 사무차장 사히브 싱 소키(Sahib Singh Sokhey),9) 유엔 산하 기구인 유니세프(UNICEF, 국제연합 아동기금)의 설립자로 유명한 세균학자 루드빅 라이흐만(Ludwik Rajchman),10) 졸리오퀴리의 수석보좌관이자 저명한 물리학자였던 피에르 비카르(Pierre Biquard)11) 등이 그들이다. 즉, 유니세프와 세계보건기구의 중요 인물들까지도 세균전 조사활동의 중요성에 공감하면서, 그 조사단원 모집 활동에 직접적으로 개입했던 것이다. 물론 이들과 여러 통의 서한을 주고받은 니덤 또한 조사단의 일원이 되고 싶다는 소망을 직접적으로 피력했을 뿐만 아니라, 최고의 전문가를 조사단원으로 모집하기 위한 활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해 나가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1952년 4월 22일, 니덤은 소키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만약 제가 초청된다면 기꺼이 참가 문제에 대해 고려할 것입니다(gladly consider the question of participation). …… 이렇게 말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당신과 함께 일할 수 있다면 매우 기쁠 것입니다.”12) 니덤은 매우 적극적으로 조사단 참가 의지를 피력하고 있었다. 이에 소키 또한 니덤의 편지를 받자마자 바로 응답했다. “저는 오늘 파리로 가서 당신의 이름을 책임 있는 사람들 명단에 올리겠습니다.”13) 뱀과 지팡이로 상징되는 세계보건기구의 마크가 선명하게 찍혀 있는 세계보건기구 사무차장의 편지였다. 공정하고 전문적인 조사를 원했을 소키의 입장에서는 영국 왕립학회원의 조사단 참여 의지를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니덤이 첸싼창 교수로부터 조사단 초청과 관련된 공식 서한을 최초로 받은 시점은 1952년 5월 24일이었다. 첸 박사의 초청장은 졸리오퀴리의 보좌관이었던 피에르 비카르의 편지봉투 내부에 동봉된 형태로 니덤에게 전달되었다. 아마도 보안상의 이유였을 것이다. 첸싼창 박사는 니덤을 공식적으로 초청하면서, 자신이 유럽에 남아 궈모뤄의 개인적 지시를 받고 있으며, 조사단원들의 첫 회동은 프라하에서 갖게 될 것이라고 언급했다. 더불어 여행 및 숙박 관련 모든 비용은 중국 당국이 부담할 것이며, “조사위원회 출발 예정 날짜가 6월 초이기 때문에, 나는 가능한 빨리 당신의 수락 확인을 받고 싶다”고 종용했다. 니덤의 대답은 명료했다. “저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저는 확실한 초청을 받은 것에 대해 매우 큰 영광으로 생각하며(I feel greatly honoured), 이 점에 대해 귀하도 잘 알고 있으리라 확신합니다.”14)

그런데 니덤은 위와 같이 조사단 참여에 대한 확답을 보내는 편지에서 소프(Thorpe), 위글스워스(Wiggleworth), 반 헤이닝언(Van Heyningen) 등의 인명을 제시하면서, 소프에게는 초청장을 보내도 괜찮을 것 같지만, 자신과 긴 얘기를 나눈 위글스워스나 편지를 보낸 반 헤이닝언으로부터는 아직 답변을 듣지 못했다고 말하고 있었다. 편지에 거론된 소프와 위글스워스는 니덤의 케임브리지대학교 동료교수인 윌리엄 소프(William H. Thorpe)와 빈센트 위글스워스(Vincent B. Wigglesworth)를 지칭하고, 반 헤이닝언은 키츠(Kits)라는 예명으로 불린 옥스퍼드대학교의 생화학자 윌리엄 반 헤이닝언(W. E. Van Heyningen)을 지칭한다. 그리고 여기서 언급된 상호 간의 대화와 편지의 주제는 당연히 과학조사단 참가 문제였다. 당시 니덤은 세균전 관련 분야의 동료교수들에게 편지나 대화로 끊임없이 조사단 참여를 설득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굉장히 망설이거나 부정적인 입장을 제시했다. 동물생태학자였던 윌리엄 소프는 곤충에 관한 책을 저술한 적이 있긴 했지만, 자신이 위생곤충학자(medical entomologist)가 아니라는 측면에서 조사단 참여에 소극적으로 임했다.15) 원래 니덤 또한 전문적 세균학자나 위생곤충학자만이 조사단원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던 적이 있었다.16) 그러나 6월 28일 베이징에서 세균전 조사활동이 본격화된 이후에도 조사단에 필수적이라고 생각했던 곤충학자가 한명도 참여하지 못하게 되자, 니덤은 재차 소프에게 조사단 참여를 종용하는 편지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니덤은 “당신의 전문적 능력이 현재 절실하게 필요한 상황”이라고 간청했다. “미래 인류의 안녕을 위해 이보다 가치 있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최후까지 설득했다. 조사활동에 대한 니덤의 진정성을 읽을 수 있다.17)

니덤이나 소프와 마찬가지로 케임브리지대학교 교수이자 왕립학회원이었던 곤충생리학자 위글스워스는 차분하면서도 냉소적인 어조로 미국의 권모술수 가능성을 제기하면서 조사단 참여를 거부했다. 그는 “실질적으로 유용한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확신이 들 때에만 관심을 갖게 될 것”이라고 말하면서, 설령 조사단이 세균전과 관련된 그 무언가를 확실히 입증해 낸다고 할지라도, 미국은 “약간의 희생양”만을 만든 후 사건과의 관계를 끊어버릴 것이라고 강조했다. 심지어 대부분의 서구 사람들은 양심의 가책조차 느끼지 못할 것이라고 차갑게 답변했다.18) 그러나 니덤은 위글스워스도 포기할 수 없었다. 소프에게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베이징에서 위글스워스에게 편지를 보냈다. “나는 당신의 결정에 커다란 아쉬움을 느낍니다. 설령 미국 측의 ‘희생양’ 효과만을 남긴 채 끝난다고 할지라도, 이 한국에서의 실험보다 훨씬 끔찍한 무차별적 파괴무기를 통제하는 사람들의 무책임함에 대한 더 깊은 깨달음을 제공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19)

소프와 위글스워스는 끝내 조사단에 참가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는 소프와 위글스워스만의 사례가 아니었다. 니덤은 조사단 활동을 마친 후 런던으로 돌아왔을 때, 기자들로부터 조사단 참여 초청장을 받은 또 다른 영국인 학자들이 있는지, 그리고 만약 있다면 그들의 이름을 밝힐 수 있는지 공개적 질의를 받았다. 기자들은 중국의 주장을 일방적으로 수용해 줄 수 있는 특정 학자만이 초청장을 받은 것은 아닌지 의심했던 것이다. 이에 니덤은 실제 초청장을 받았던 학자들에게 그들의 이름을 밝혀도 괜찮은지 일일이 물어보았고, 한명을 제외한 모든 학자들로부터 자신의 이름을 공개해도 좋다는 답변을 받아낼 수 있었다. 그 이름은 다음과 같다: 밀른(A. Milne, 곤충학자), 미치슨(D. A. Mitchison, 세균학자), 힌튼(D. A. Hinton, 곤충학자), 잭슨(F. Jackson, 세균학자), 소프(W. H. Thorpe, 곤충학자). 여기에 더해 니덤은 자신의 이름 공개를 허락한 ‘비공식적’ 초청 의뢰서를 받은 7명의 이름도 추가적으로 공개했다. 이 명단에는 앞서 등장한 위글스워스와 헤이닝언도 포함되어 있었다.20)

영국 내 최고의 곤충학과 세균학 전문가들로 구성된 위의 명단은 분명 정치적 선별과는 무관한 것이었다. 니덤이 여러 차례 편지를 보냈던 윌리엄 소프 또한 독실한 기독교 평화주의자로 잘 알려진 인물이었다. 니덤은 “중국이 이 나라[영국]로부터 저명하고 독립적인 과학자 대표들을 조사단원으로 선발하기 위해 엄청나게 노력했다”고 주장했다.21) 최소한 니덤이 소프와 위글스워스 등에게 보냈던 여러 통의 간절한 편지들을 두고 보면, 그 같은 주장이 과장된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3. 조지프 니덤의 국제과학조사단 내의 주요 역할

1) 과학조사단 운영 및 전문적 토론 과정의 주도

1952년 6월 21일, 세균전 국제과학조사단의 첫 번째 그룹이 베이징에 도착했다. 궈모뤄 중국과학원장이 세계평화회의에 세균전 관련 호소문을 제출한 후 4개월 정도가 지난 시점이었다. 서구 국가들이 이 조사단에 대한 거부감을 가지면서, 중국에서의 모임은 조금씩 지연된 측면이 있었다. 몇몇 과학자들은 합류 의사에도 불구하고 정부 측의 방해로 결국 참가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22)

6월 21일 1차로 도착한 5명의 조사위원들은 모두 유럽 출신의 과학자들이었다. 이들은 영국의 조지프 니덤을 비롯해, 스웨덴의 안드레아 안드린(Andréa Andreen, 스톡홀름시 중앙 생화학연구소장), 소련의 주코프 베레치니코프(N. N. Jokov-Verechnikov, 소련 의학 아카데미 부원장, 前 하바롭스크 일본 세균 전범자 재판 수석 의학 전문가), 프랑스의 장 말테르(Jean Malterre, 국립 그리뇽농업대학 동물생리학연구소장), 이탈리아의 올리비에로 올리보(Oliviero Olivo, 볼로냐대학교 의학부 해부학 교수, 前 투린대학교 일반생물학 강사) 등이었다.23) 일주일 후인 6월 28일, 브라질 출신의 사무엘 페소아(Samuel B. Pessoa, 상파울루대학교 기생충학 교수, 전 상파울루주 보건부장)까지 합류하면서 조사단은 6명의 완전한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24) 8월 6일 매우 뒤늦게 조사단에 합류한 이탈리아 로마대학교 미생물학 연구소의 프랑코 그라찌오시(Franco Graziosi) 박사는 정식 조사위원이 아닌 ‘옵저버’로 임명되었다.

그런데 조사단 구성 초기 니덤은 위와 같은 6명의 조사위원 구성에 대해 개인적 편지와 메모를 통해 적잖은 불안감을 드러내곤 했다. 불안감의 원인은 조사단의 전문성과 관련된 우려였다. 애초 니덤은 세균학자, 전염병학자, 위생곤충학자가 조사단의 중심 구성이 되어야 한다고 믿었는데,25) (최소한 전염병학자인 페소아 교수가 2차로 합류하기 전까지는) 해당 분야 관련 전문가가 조사단 내에 절대적으로 부족하다고 느끼고 있었다. 앞의 장에도 살펴보았듯이, 베이징에 도착한 이후에도 케임브리지 동료교수들인 곤충학자 위글즈워스와 소프의 조사단 참여를 간절하게 독촉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니덤은 아직 페소아 교수가 합류하기 이전 시점인 6월의 어느 날에 자신의 아내에게 편지를 쓰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명 연구자 그룹을 구성하겠다는 애초의 계획은 실현되지 못했습니다. 이에 나는 소장파 그룹이 구성된 것 같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실제 구성을 보니 (몇몇 예외를 제외하곤) 탁월하지도 젊지도 않은 그룹입니다.”26) 조사단 구성에 대한 그의 실망과 불안감을 읽을 수 있다. 훗날 그는 최종보고서의 ‘초안’을 작성하는 과정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조사단 구성의 불완전성을 토로했다. 물론 니덤은 이 문장들 위에 삭제를 뜻하는 빗금을 사정없이 긋고 최종보고서에 수록하지는 않았다: “조사단은 시작 단계부터 조사단원들의 자격 요건과 관련해 불안함을 느꼈다. (비록 조사활동이 끝나기 전에 그라찌오시 박사가 보강되기는 했지만) 조사단원들 중 두 명만이 세균학과 위생곤충학 분야에서 저명한 인물이었고, 단원 중 두 명은 전문적 의학 자격 요건도 부족했다.”27)

니덤이 지목한 “전문적 의학 자격 요건도 부족”한 두 명의 인물들 중에 니덤 자신도 포함되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조사단에 합류하기 이전 시점부터, 니덤은 스스로 조사단원이 되기에는 전문성이 부족하다는 생각을 공공연히 표출하고 있었다. 그는 매우 높은 수준의 전문적인 세균학자와 곤충학자들로 조사단이 구성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 자신의 기준으로 볼 때, 왕립학회원인 니덤 자신도 조사단의 일원이 되기에는 자격이 부족한 측면이 있었다. 때문에 니덤은 조사단의 일원이 되기를 적극적으로 소망하고 정식 초청장의 수령에 진심으로 기뻐하긴 했지만, 자신의 위상은 ‘연락관(liaison)’ 신분에 머무르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생각을 종종 피력하곤 했다.28) 그는 자신의 중국어 능력과 중국 과학자 및 정치인들과의 친분관계가 과학조사단 활동에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리고 이렇듯 조사단 합류 이전 시기 피력된 ‘연락관’ 신분에 대한 강조는, 니덤이 조사단 참여를 꺼렸다는 기존 연구의 오해를 만들어 낸 측면이 있다(Buchanan, 2001: 503). 그러나 그의 연락관 신분의 강조는 자신의 ‘전문성에 대한 우려’를 반영한 주장일 뿐이었고, 실제 니덤은 앞서 살펴 본 여러 사례를 통해 알 수 있듯이 다양한 경로를 통해 매우 적극적으로 조사단 합류를 소망하고 있었다.

과학조사단은 1952년 8월 31일 최종보고서에 서명할 때까지 약 2개월의 긴 시간 동안 베이징, 선양, 평양 등을 거점으로 조사활동을 수행했다. 조사단은 6월 23일 예비위원회의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해, 7월 9일까지는 베이징에 체류하면서 주로 조사위원들 사이의 전문적 토론 및 관련 문서 검토 작업을 수행했다. 이후 선양으로 이동하여 7월 25일까지 중국 동북지역 사건 관련 현장 조사를 수행했고, 7월 28일부터 31일까지는 평양에서, 8월 3~4일에는 전쟁포로수용소에서 증인 심문을 실시했다. 마지막으로 조사단은 8월 9일부터 12일까지 베이징에서 체류하면서 최종보고서 편집을 위한 회의를 진행했고, 8월 13일부터 30일까지 보고서 작성 및 부록에 수록할 문서 정리 작업을 수행했다(ISC, 1952: 63-67).

이렇듯 기나긴 조사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조사방법 중 하나는 관련 자료 검토 및 전문가들 사이의 전문적인 토론이었다. 전문가 토론은 수십 차례의 상이한 회의체를 통해 진행되었는데, 가장 중요한 회의는 조사위원 전원이 참여하는 조사위원 전원회의(Plenary Meeting)였다. 그 중에서도 브라질의 페소아 교수가 합류하기 전까지의 전원회의를 예비위원회의(Preparatory Commission Meeting)로 호칭했는데, 사실상 이 시기에 조사위원회의 운영방식과 조사위원 역할 분담 등이 상당 정도 진행되었다.

과학조사단 예비위원회의와 전원회의 내부회의록을 검토해 보면, 니덤은 그 많은 회의의 실질적인 리더 역할을 수행하는 경우가 빈번했다. 형식적으로는 매번의 회의마다 의장이 교체되는 순환적 리더 제도를 채택했지만, 핵심 논의 주제 선정과 조사위원 업무 분담 등에서 니덤이 회의의 주도적 역할을 수행하는 경우가 많았다. 사실 조사위원들 중에 세균전 문제에서 가장 전문적 지식을 갖춘 사람은 주코프였다고 볼 수 있다. 그는 권위 있는 세균학자였을 뿐만 아니라, 하바롭스크 재판에서 세균전 문제를 직접 다뤄본 경험이 있는 연구자였다. 때문에 실제 주코프 또한 여러 회의체에서 니덤 못지않게 빈번히 주도적 역할을 수행하곤 했다. 그러나 조사단 합류 전에 ‘연락관’ 역할을 강조했던 니덤이 정작 중국과 북한 현지에서 보여주는 너무나 적극적인 조사활동은 어쩌면 다소 의외의 행보처럼 비춰질 수도 있었다.

이를테면 니덤은 6월 23일 첫 회의에서부터 조사단의 과업에 따라 조사위원들을 ‘전문화된 그룹’으로 나누어야 한다고 적극적으로 제안했다. 조사단 전원 회의 산하에 2~3명으로 구성된 몇 개의 ‘분과위원회’를 두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더불어 니덤은 자신이 공식적인 곤충학자는 아니지만, 생화학이라는 자신의 연구분야가 곤충학에 가장 가깝게 느껴지기 때문에 스스로 곤충 관련 연구를 주도해 보겠다고 제안했다. 여기에 더해 니덤은 말테르 박사가 동물생리학자이긴 하지만 항공학 기술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세균전 비행체 인식, 세균 살포 수단, 컨테이너(세균폭탄) 연구 등을 주도해 줄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말테르는 니덤에게 “자신의 길을 열어준 것”에 감사하다고 말하면서, 곤충 문제를 다루는 니덤의 소위 ‘동물학위원회(Zoological Commission)’에 자신도 합류하고 싶다는 의견을 피력했다.29)

니덤은 이틀 후인 6월 25일 2차 회의에서부터 벼룩, 파리, 설치류 등의 생태와 인간의 질병을 증식시키는 그들의 습성에 대한 발표를 하기 시작했다.30) 그리고 이후 베이징에서 이어진 열 차례의 전원회의에서 곤충과 관련된 구체적인 논의를 실질적으로 이끌어 갔다. 니덤은 소프나 위글즈워스와 같은 곤충학자가 부재한 상황 속에서, 곤충학 관련 논문 강독이나 중국 측 곤충학자들과의 토론 등을 통해 조사단의 결핍 요소를 직접 보완하고자 했던 것이다. 6월 25일 전원회의는 니덤이 곤충학적 문제 해명의 책임을 질 것을 만장일치로 결정했다. 더불어 6월 27일 3차 회의에서는 주코프 교수가 주도하는 미생물학 조사위원회의 구성이 제안되었고, 이 또한 만장일치로 통과되었다.31) 이렇듯 니덤의 제안 하에 조사위원회 내부의 여러 전문 분과위원회 체제가 모습을 갖추어 나갔다.

니덤은 곤충 연구뿐만 아니라, 미군의 세균전 혐의와 ‘일본과의 관련성’ 연구 또한 주도적으로 이끌어 갔다. 그는 6월 23일의 첫 회의에서부터 해당 주제와 관련해 1952년 4월 27일 자신이 직접 작성한 보고서가 있다고 언급했다. 이 보고서는 영국 내에서 자신의 지인들과 개인적으로 회람하기 위해 집필해 둔 것이었다. 전원회의는 다음 회의에서 니덤이 직접 일본군의 세균전 공격에 관하여 구체적인 발표를 해줄 것을 제안했고, 주코프에게도 하바롭스크에서 본 사실들을 추가적으로 보고해 달라고 요청했다.32)

실제 1952년 4월 27일에 작성된 니덤의 보고서는 1944년 자신의 일본군 세균전 조사 결과에 대한 요약과 함께, “[미군] 점령 당국이 광범한 일본 측 연구의 지속을 부추기지 않을 논리적 이유는 없는 것 같다”고 주장했다. 그는 “살아있는 곤충의 활용이 조잡하거나 기괴하다고 간주”되고 있지만, “이것은 일본인들에 의해 가장 많이 사용된 방식이라는 것이 검증된 사실”이라고 강조했다. 여기에 더해 니덤은 “현재의 사건에서 괴로움을 느끼게 하는 것은, (만약 현재의 주장이 사실로 확인된다면) 아시아 사람들을 실험동물처럼 냉혹하게 사용한 사실”이라고 말하면서, “백인들이 아시아 사람들을 자신과 동등한 사람이나 형제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했음을 뜻하는 것으로 간주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니덤은 세균전 문제를 인종주의 문제로까지 확장해서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있었던 것이다.33)

일본과 미국의 협력에 의한 세균전 수행 가능성에 대한 니덤의 지속적인 의구심은 과학조사단 최종보고서 곳곳에 그 흔적을 남겼고, 결국 미군 부대의 세균전 수행방식은 “제2차 세계대전 시기 일본 군대가 사용한 것과 같은 방법을 발전시킨 것 같다”는 결론의 한 문장으로 이어지게 했다(ISC, 1952: 60). 니덤은 영국으로 귀국한 후의 기자회견 과정에서, 한국전장에서의 세균전이 “워싱턴의 인지 없이 극동군사령부에 의해 수행”되었을 가능성을 강하게 시사했다. 즉 일본을 점령한 미 점령군 사령부가 본국 정부의 허가 없이 비밀리에 세균전을 실험적으로 수행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34)

1952년 당시 니덤의 문서 더미에는 일본 소재 미군 제406의학종합연구소의 한국 진드기와 질병의 상관성에 관한 보고서도 포함되어 있었다.35) 406연구소는 1946년 도쿄에 신설된 미군 의학연구소로서, 그 구성원의 절반 정도가 일본 국적의 연구자들로 구성된 극동지역의 미군 중핵 의학연구소였다(김태우, 2022). 406연구소는 일본 국립공중위생원, 기타사토연구소, 도쿄대학교 등 연구소 바깥의 일본 의학 연구단체들과도 적극적인 협력관계를 구축했던 미·일 의학협력의 상징과도 같은 곳이었다. 니덤은 이미 이 시기에 한반도 곤충과 인간 질병에 관한 연구가 미·일 연구자들의 협력관계를 통해 진행되고 있었다는 사실까지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같은 사실들에 관한 파악은 미군과 일본의 세균전 협력 관계에 대한 니덤의 심증을 더 확실하게 만들어 주었을 것이다.

2) 주요 문서 분석과 증인 심문

니덤은 세균전 조사활동에서 필수적이었던 주요 ‘문서 분석’이나 ‘증인 심문’ 과정에서도 핵심적 역할을 수행했다. 예컨대 조사활동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문서군으로 분류된 ‘프라하 문서군’(Prague Documents)의 경우, 거의 니덤 개인 단독으로 정리·분석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프라하 문서군’이란, 1952년 초 중국과 북한 정부에 의해 순차적으로 공개된 후, 프라하의 세계평화회의 사무국과 중국의 해외 통신사들을 통해 유럽 지역에 배포된 세균전 관련 문서들을 통칭한다(ISC, 1952: 9). 이 문서들은 1952년 1~2월 북한 지역의 페스트 발병에 관한 보고서, 1952년 3월 중국 동북 지역과 북한 지역을 자체 조사한 ‘미국의 세균범죄 조사를 위한 중국 조사단’ 보고서, 국제민주법률가협회의 북한 현지조사 보고서, 사건 목격자들의 증언 녹취록, 스파이 증언 녹취록, 전쟁포로가 된 미국인 비행사들의 증언 녹취록 등을 포함한다.36)

니덤은 조사단 활동 초기부터 이 문서군의 중요성을 자각하면서, 자신이 자발적으로 이에 대한 분석을 시도함과 동시에, 그를 논리적으로 참조할 수 있는 일종의 ‘가이드’를 작성하고자 했다.37) 그는 프라하 문서군이 다소 혼란스러운 배열과 제목들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조사활동 과정에서 신속하고 정확하게 활용할 수 있도록 문서 안내자료를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38)

실제 니덤은 7월 3일 프라하 문서군의 활용에 관한 가이드 수정본을 전원회의에 제출했다. 이 가이드는 프라하 문서군을 ‘SIA’라는 약자로 표시하면서, 문서들을 ‘SIA/1’, ‘SIA/2’, ‘SIA/3’ 등으로 재배치한 후, 이를 다시 소주제별로 재분류 했다. 예컨대 ‘미국의 세균범죄 조사를 위한 중국 조사단’ 보고서는 “NCNA/8539)에 전체 내용이 나와 있고, SIA/13에 요약”되어 있는데, “나[니덤]는 전체 보고서의 사본을 가지고 있으며, 조사단의 다른 구성원이 언제든지 참조할 수 있다”고 안내했다. 반면에 니덤은 SIA/11로 분류된 캐나다 목사 앤디콧(James Endicott)40)의 개인적 경험에 관한 보고서는 과학적으로 의구심이 드는 자료라고 비판적으로 서술했다.41)

니덤은 프라하 문서 가이드를 완성한 이후에도 이 문헌들에 대한 개인적 분석을 지속한 듯하다. 니덤은 위의 문서 가이드와 비슷한 성격을 지닌 ‘프라하 문서군 사진 자료 가이드’까지 개별적으로 제작했다.42) 그리고 7월 12일 니덤은 중국 동북 지역의 도시 선양에서 개최된 제11차 전원회의에서 “프라하 문서를 계속 검토”하고 싶다는 개인적 의견을 제시했다. 니덤은 프라하 문서의 원문서에 해당하는 중국 측 원자료들을 직접 검토하고 싶다고 말했다. 중국어를 읽고 쓸 줄 알았던 니덤은 번역문(프라하 문서)의 원문서까지 분석하길 원했던 것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동료들은 중국어 자료까지 검토하겠다는 니덤의 열정을 말리기 시작했다. 이미 니덤이 베이징에서 프라하 문서에 너무 많은 시간을 투여했다거나, 니덤이 너무 소중한 존재이기 때문에 “증인 심문을 위해 에너지를 비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한 니덤의 답변은 간명했다. 자신은 여전히 에너지가 부족하지 않고, 두 종류의 작업을 동시에 수행할 수 있으며, 결정적으로 “중국어로 작성된 문서를 독파하는 것에서 커다란 즐거움과 편안함을 느낀다”고 대답했다. 위와 같은 요구와 대답은 대외비문서인 조사단 전원회의록에 등장하는 내용이다.43) 이 에피소드 또한 조사활동에 임하는 니덤의 진실성과 성실성을 잘 보여준다.

약 20일 동안 베이징에 체류했던 조사단은 중국 동북 지역과 북한 지역으로 이동한 이후에는 주로 사건 현장 ‘목격자 증언 청취’와 사건 관련 ‘수집 물질(증거물) 분석’ 활동에 임하게 되었다. 베이징에서는 주로 문서 분석과 전문가 토론 과정을 통해 세균전 수행 여부를 검증했다면, 중국 동북 지역과 북한에서는 목격자 증언 청취와 증거물(세균 용기, 쥐나 곤충과 같은 매개체, 세균 감염 물질 등)에 대한 세균학적 실험 등을 통해 검증을 실시했다. 실험실 분석은 주로 세균학자인 주코프나 전염병학자인 페소아 등에 의해 주도되었고, 니덤은 일부 실험에 대한 보조나 참관 업무를 수행할 뿐이었다.44) 자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세균전 사건 현장에서의 니덤의 역할은 주로 증인 심문이나 그 이후의 심문 결과 내부 토론 과정에서 두드러지곤 했다.

니덤은 사건 현장에서의 검증 과정에서 일종의 ‘완벽하고 결정적인 사례’를 찾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었다. 이는 어쩌면 케임브리지 동료교수 위글스워스와의 대화에 의해 영향받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위글스워스는 만약 조사를 통해 확인한 증거들이 모호하고 정황적인 것이라면, 결국 조사 결과는 부정적 보고서로 귀결되고 말겠지만, 만약 증거가 “어느 세부 사례에서라도 결정적이면(질병 확산 시도가 진행되었음을 입증한다면), 우리는 조사를 계속할 필요도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단 하나의 사례일지라도 정말 확실한 증거를 확보할 수 있다면, 그 외의 사례들은 검증할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45)

아마도 니덤은 위와 같은 위글스워스 교수의 조언에 절대적으로 공감했던 것 같다. 왜냐하면 그는 앞서 베이징에서 프라하 문건을 분석할 때부터 그 결정적이고 완벽한 사례를 찾기 위해 나름의 엄밀한 기준을 세우고 그에 준해 조사활동을 전개해 나갔기 때문이다. 여타 동료들 또한 이견 없이 니덤의 준거를 추종했다. 니덤이 만들어낸 ‘완벽한 사례’의 다섯 가지 판단 기준은 다음과 같다: ① 비행기가 보고되었다. ② 목격자들이 무엇인가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③ 목격자들이 최소한 용기(세균폭탄)의 파편을 발견했다. ④ 목격자들이 곤충을 발견했다. ⑤ 감염이 관찰되었다.46) 조사위원들은 베이징에서부터 이상과 같은 기준에 준하여 결정적 사례를 찾아내기 위해 애썼고, 당연히 중국 동북 지역과 북한에서의 목격자 심문 과정에서도 위와 같은 기준에 준해 세부적 문제들을 질의하곤 했다.

조사위원들은 최종적으로 북한의 강서군과 회양군의 벼룩을 이용한 페스트 전파 시도 사건, 중국 헤이룽장성 간난현의 들쥐를 이용한 페스트 전파 시도 사건, 중국 콴티엔현의 꽃파리와 거미 등을 이용한 탄저병 전파 시도 사건, 중국 요동과 요서 지역의 다양한 곤충과 물건들을 이용한 폐형 탄저병 전파 시도 사건, 북한 대동군의 조개를 이용한 콜레라 전파 시도 사건 등을 중요 사례로 선정하여 최종보고서에 수록했다. 조사단은 최종보고서의 ‘결론’을 통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조사단은 많은 사실들을 접하였으며, 그 사실들 중 몇몇은 상호 연관성을 지닐 가능성이 매우 높은 것으로 판단했다. 따라서 조사단은 바로 이 사실들에 노력을 집중했다.”(ISC, 1952: 60) 요컨대 조사단은 다수의 사건들 중에서도 비행기나 공중 투하물이 확인되고, 목격자들이 세균폭탄이나 곤충을 발견했으며, 질병 감염까지 관찰된 사례들, 그리고 이 조건들이 긴밀한 상호연관성을 보여주는 사례를 찾기 위해 애썼던 것이다.

런던의 기자회견장에서 니덤은 위와 같은 기준에 의거하여 최종 판단을 내리는 과정에서 결국 조사단의 심문 과정에 참여한 수백 명의 사람들에 대한 신뢰에 어느 정도 자연스럽게 의존했다고 말했다.47) 여기서 언급된 심문 대상자들은 평범한 소작농이나 철도 종업원으로부터 중국 보건부의 고위 직원이나 미국 명문대학교 출신의 과학자들까지 매우 다양했다. 이들은 사건 현장 인터뷰나 조사단 전원회의에서 자신의 목격담이나 실험실에서의 전문적 분석 결과를 구체적으로 증언하곤 했다.

니덤은 평범한 사람들의 증언에서는 “무언가를 지어내거나, 다른 사람들의 증언과 연관시키려 하지 않는” 명료하고 독립적인 태도에 가장 큰 인상을 받았고, 중국 과학자들로부터는 높은 수준의 전문성과 그를 바탕으로 한 일치된 견해에 영향 받지 않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중국 과학자들은 “옥스퍼드대학교, 하버드대학교, 예일대학교, 케임브리지대학교에서 학업을 이수한 사람들이고, 그들 중 어느 누구도 무언가에 대한 의구심을 품고 있다는 인상을 우리들 중 누구에게도 준 적이 없었”다. 게다가 이들은 열차의 객차나 자동차 내부와 같은 분리된 공간에서 조사위원들과 장시간 개인적으로 대화할 수 있는 시간이 있었지만, 어느 누구도 조금의 망설임을 보여주거나 “액면 그대로 믿으면 안 된다”고 속삭이지도 않았다.48) 니덤은 “약 200명의 과학자들이 자신의 부분을 연기해야만 하고, 약 400명의 평범한 증언자들 또한 자신의 부분을 연기해야만 했다”는 것이 믿기 힘든 사실이었다고 말했다.49)

그런데 니덤 개인적으로는 그 어떤 증인 심문보다도, 미군의 세균전을 폭로한 ‘미공군 비행사’들에 대한 심문을 가장 중시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니덤은 미군 비행사 심문 자료를 모아 둔 개인 기록철의 제일 앞부분에 케임브리지평화전선(Cambridge Peace Front)의 총무 그린(S. W. Green)으로부터 수령한 한통의 편지를 첨부해 두었기 때문이다. 그린은 평화전선 내부 회의 결과를 통지하면서, 세균전 문제에 대한 의견이 상반된 둘로 갈라지긴 했지만, 모든 회원들은 미군 포로에 대한 자유로운 분위기의 심문이야말로 하나의 중요한 진전으로 간주될 수 있다는 점에 대해 동의했다고 말했다.50) 케임브리지평화전선은 버트랜드 러셀 등이 관여한 케임브리지대학교의 평화운동단체로 추정된다(Feinberg, 1967: 234). 아마도 니덤 또한 평화전선의 일원이었을 것으로 짐작되며, 따라서 평화전선 회원들의 논의 결과를 심사숙고하면서 현지 조사단원들과 공유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왜냐하면 실제 케임브리지 평화전선 회원들이 강조했던 심문의 전제조건과 매우 유사하게, 비행사 심문 과정 자체가 최소한 겉으로 보기에는 꽤나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진행된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조사단 심문 과정에 참여한 비행사들은 케네스 이노크(Kenneth L. Enoch), 존 퀸(John Quinn), 플로이드 오닐(Floyd B. O’Neal), 폴 니스(Paul Kniss)라는 이름의 4명의 미공군 중위들이었다. 이노크와 퀸은 1952년 5월 5일 이미 자신의 세균전 참여에 대해 폭로함으로써 세계여론의 주목을 받았던 인물들이었고, 오닐과 니스는 이번 과학조사단 심문 과정에서 처음으로 세균전을 폭로하게 된 미군포로들이었다.

조사단 최종보고서에는 4명의 비행사들과 조사위원들이 “자유로운 담화의 조건 하에서(under conditions of free discourse)” 대화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는 간략한 기록만 등장하지만(ISC, 1952: 48), 니덤의 영국 기자회견문에서는 비교적 상세한 당일의 회담 분위기가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 있다: “그것은 매우 격식에 얽매이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이런 방[역주: 기자회견장]에 앉아 있었습니다. 가운데에는 커다란 테이블이 놓여 있었습니다. 중국인들은 절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전혀 움직이지도 않았으며, 내내 비행사들과 조사단원들이 다 함께 이야기를 주고 받았습니다.”51) “한번에 3~4시간 동안 조사단과 비행사들 사이의 자유토론이 이어졌을 겁니다. 비행사들은 자신의 맥주를 마시면서 담배를 피우곤 했고, 극도로 정상적으로 행동했습니다.”52)

훗날 영국 케임브리지대학교 니덤연구소 아카이브를 통해 공개된 <그림 1>과 <그림 2>의 사진들은, 최소한 니덤이 존재하지도 않았던 상황을 허구로 날조해 내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그림 1>은 이 날의 기자회견에서 공식적인 의장 역할을 담당한 조지프 니덤이 존 퀸 중위와 웃으면서 악수를 하고 있는 장면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림 2>는 존 퀸 중위가 실제 맥주병들이 놓여 있는 긴 테이블에 앉아서 준비된 프롬프트를 읽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정면을 바라보며 이야기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당시 서구사회에는 미군 비행사들에 대한 육체적 고문이나 약물 사용에 대한 의구심이 퍼져 있었다. 이에 대해 니덤은 “그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이제는 절대적으로 확신한다”고 말했다.53) 지금의 우리는 위의 사진들만으로는 당시 미군 비행사들의 정신상태를 추측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러나 비행사들과 장시간 자유 대화를 나눈 니덤의 시선에서 그들은 최소한 정신적으로 비정상적인 사람들은 아니었다.

그림 1.

웃으면서 악수를 나누는 조지프 니덤과 존 퀸 중위

Figure 1. Joseph Needham and Lt. John Quinn smiling and shaking hands

그림 2.

긴 테이블 위에 맥주병들이 놓여 있는 존 퀸 중위 심층 면담 장면

Figure 2. In-depth interview with Lt. John Quinn, with beer bottles placed on a long table

그러나 1953년 한국전쟁 정전협상이 체결된 후 본국으로 돌아간 세균전 폭로 비행사들은 자신이 극심한 육체적 고문, 협박, 부당한 대우, 신체적 권리 박탈, 정신적 학대 등으로 인해 세균전에 관한 거짓 자백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번복 진술서를 제출했다. 전후 미국은 추가적인 국가 위신의 손상을 막기 위해 매우 적극적으로 세균전 문제에 대응하고 있었다. 그러나 훗날 이 같은 대응 또한 모든 폭로자들이 귀국 후 철저한 감시 하에 놓여 있었다거나, 자백을 철회하지 않으면 중형이나 극형(반역죄에 의한 사형)에 처해질 수 있다는 정부 측의 강한 압력을 받았다는 또 다른 고발로 이어지기도 했다. 모든 송환자들은 “나 자신의 자유 의지”로 작성한다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세균전 자백 번복 진술서를 작성했지만, 당시 미 국무부조차 공공연한 압력 아래에서 행해진 철회가 대중으로부터 신뢰를 받을 수 있을지 우려를 표시하기도 했다(Endicott and Hagerman, 1998: 166-167). 한국전쟁은 정전을 맞았지만, 세균전 논쟁은 여전히 끝나지 않고 있었다.

4. 맺음말

1952년 8월 31일 조지프 니덤을 포함한 6명의 조사위원들이 최종보고서에 서명하면서 두 달 이상의 국제과학조사단 세균전 현지조사 활동은 공식적으로 종료되었다. 보고서는 60쪽의 본문과 605쪽의 부록으로 구성된 총 665면의 두꺼운 책의 형태를 지니고 있었다. 두 달이라는 긴 조사 기간과 600쪽을 넘는 전체 보고서의 양은 기존에 북한 현지조사를 실시했던 국제민주여성연맹이나 국제민주변호사협회의 보고서와도 확실한 차별성을 보여주고 있었다.

여기에 더해 국제과학조사단의 보고서 원문을 꼼꼼히 읽어 보면,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는 달리 그 서술과 주장이 매우 조심스럽게 작성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조사위원들이 직접 작성한 보고서 본문에는 ‘미제국주의자’(American imperialist)나 ‘전쟁범죄자’(war criminals)와 같은 선동적이고 정치적인 어휘가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그리고 보고서의 ‘결론’ 부분에서도 한국전쟁기 세균전과 일본과의 연관성에 대해 ‘추측형’ 문장만을 사용하고 있을 뿐이다. 여기에 더해 조사위원들은 전 세계인들의 비난을 무릅쓴 미국의 비인간적 방식의 세균전 실행에 대해 쉽게 믿을 수 없었다고 말하면서, “reluctantly”(‘주저하면서’ 혹은 ‘꺼리는 맘을 갖고’) 논리적 단계를 하나하나 거쳐 가면서 결론에 다다를 수 있었다고 고백했다(ISC, 1952: 60).

니덤이 조사활동을 마치고 귀국한 직후에는 아직 665쪽의 전체 보고서가 영국에 전달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런던에서는 조사단의 공식 업무용 언어였던 프랑스어로 작성된 60쪽짜리 보고서 본문만 소량 유통되고 있었다. 보고서에 대한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검증을 위해서는 오히려 ‘부록’의 자료들을 면밀히 살펴보는 것이 중요했는데, 실상 당시까지는 보고서에 대한 과학적 검증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미 영국 신문들은 구체적 검증 과정 없이 과학조사단을 노골적으로 비난하고 있었다. 북런던의 저명한 신문은 조사단을 “공산주의 과학자들의 위원회(a Committee of Communists Scientists)”라고 호칭했는데, 니덤은 그런 명칭이 자신들에게 적용될 수 없다고 강하게 저항했다.54)

지금까지 이 논문은 한국전쟁기 조지프 니덤의 세균전 국제과학조사단 참여 동기와 주요 역할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동안 학계에서는 조지프 니덤의 과학조사단 참여를 중국과의 인연으로 인해 발생한 불행한 사건, 그의 위대한 학술적 여정에서의 돌발적 에피소드 정도로 취급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이 글은 한국전쟁 당시 니덤과 그의 지인들이 주고받은 다수의 편지들, 조사 과정에서 니덤이 직접 작성한 메모와 보고서들, 조사단 회의록, 기자회견문 등을 종합적으로 수집·분석하여 그의 참여동기와 수행 역할에 대한 구체적 분석을 시도했다.

우선 니덤의 조사단 참여동기와 관련하여, 본고는 니덤의 타문화에 대한 포용성과 개방성,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사고방식, 사회주의적 신념 등의 형성 과정 등을 살펴보았고, 두 번째로 ‘중국’ 혹은 ‘중국과학계’와 니덤의 개인적 인연을, 그리고 세 번째로 2차대전기 니덤의 일본군 세균전 현지조사 경험의 중요성에 대해 거론하였다. 니덤은 아주 어린 시절부터 자유주의 신학론을 깊게 공부한 과학적 관점의 독실한 그리스도교 신자로서, 단순한 마르크스주의자로 평가될 수 없는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사상을 지닌 과학자였다. 게다가 1942년부터 전시 하의 중국(장제스 통치 하의 중화민국)에서 영국대사관의 공적 외교관 신분으로 다수의 저명한 중국인들과 친분관계를 형성한 대표적 친중 인사이기도 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니덤은 이 시기(1944년)에 일본군의 세균전 활용에 대한 현지조사 임무를 수행하기도 했다. 니덤은 지인들과의 여러 편지나 기자회견 등을 통해 1944년 세균전 조사 경험이 한국전쟁 세균전 조사활동 참가의 가장 중요한 원인이었다고 반복적으로 말하곤 했다. 여기에 더해 중국과의 인연으로 형성된 아시아 사람들에 대한 개인적 애정, 전쟁에 대한 혐오 등이 복합적으로 조사단 참가 결정에 영향을 준 것으로 추정된다.

이 글은 니덤이 유럽에서의 과학조사단 구성 과정에서도 직·간접적 영향을 준 사실을 구체적으로 보여주었다. 특히 니덤은 영국 내에서 단순한 조사단 피초청자가 아닌, 적극적인 조사위원 모집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그는 왕립학회 회원이자 케임브리지대학교 교수로서 케임브리지와 옥스퍼드의 권위 있는 세균학자와 곤충학자들에게 개인적으로 연락하여 조사단 활동에 참여할 것을 적극적으로 설득하곤 했다. 니덤은 개별 연구자들의 정치적 성향에는 신경쓰지 않은 채, 세균전 관련 분야의 최고 전문가를 조사단에 포함시키고자 최선을 다했다. 심지어 이 같은 시도는 베이징에서의 조사단 활동 개시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또한 이 글은 조사단 내부 회의록 분석을 통해 니덤이 전문적 토론 과정이나 문서 분석, 증인 심문 등에서도 그 누구보다 적극적·자발적으로 조사 활동을 주도해 나간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를테면 니덤은 소위 ‘프라하 문서군’ 분석 과정에서 해당 문서군의 원문에 해당하는 중국어 문헌까지 분석하여 사소한 번역상의 오류까지 수정해 내기도 했는데, 이에 동료 조사위원들은 니덤의 엄청난 업무량을 지켜보면서 그의 건강을 진심으로 염려하기도 했었다. 내부 회의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이 같은 니덤의 열정과 성실성은 최소한 조사단 활동이 중국 자료를 간단히 승인해 주는 선에서 그쳤을 것이라는 일부의 오해를 불식시켜 주는 측면이 있다.

니덤은 1952년 9월 말의 기자회견장에서 부록까지 포함하는 600쪽 이상의 전체 보고서를 주의 깊게 연구해 달라고 부탁했다.55) 그러나 놀랍게도 이제껏 세균학자나 곤충학자와 같은 전문가들에 의해 보고서의 부록을 포함하는 전체 보고서에 대한 ‘과학적 분석’이 제대로 진행된 적이 없는 듯하다. 최소한 이 논문의 당대 자료들을 통해 “가장 위대한 학자들 중 한 명”56)이라고 칭송받곤 하는 조지프 니덤이 열악한 조건 하에서도 최선을 다해 조사활동에 임했다는 사실이 일부 규명된 측면이 있는 만큼, 향후에는 니덤의 소망처럼 부록을 포함한 전체 보고서에 대한 과학적 연구가 본격적으로 진행될 수 있길 기대해 본다.

Notes

1)

「我中央人民政府外交部部长周恩来 支持朝鲜朴宪永外务相抗议美国政府进行细菌战的声明」, 『人民日報』, 1952년 2월 25일.

2)

니덤은 영국 기자회견 과정에서 미극동군사령부에 의한 일종의 실험적인 “드레스 리허설(full-dress rehearsal)”의 가능성을 주장했다. “Press Conference in London: Statement by Joseph Needham, F.R.S.,” 26 September 1952, p. 13. [Joseph Needham Papers, Imperial War Museum, File 55(이하 ‘File 55’와 같이 파일 번호만 기재)]

3)

“Joseph Needham,” Wikipedia, https://en.wikipedia.org/wiki/Joseph_Needham. Accessed 20 June 2023.

4)

Joseph Needham, “Notes on Alleged Bacterial Warfare in Korea,” 27 April 1952. (File 4)

5)

Jospeph Needham, “Letter from Joseph Needham to John Pratt,” 22 April 1952. (File 10)

6)

“Press Conference in London: Statement by Joseph Needham, F.R.S.,” 26 September 1952. (File 55)

7)

Britain-China Friendship Association, “Appeal of the World Peace Council,” America is using germ warfare against Korean and Chinese people, 25 April 1952. (File 1)

8)

“Qian Sanqiang,” Wikipedia, https://en.wikipedia.org/wiki/Qian_Sanqiang. Accessed 24 October 2023.

9)

Joseph Needham, “Letter from Joseph Needham to Sahib Sokhey,” 22 April 1952. (File 10)

10)

Jeseph Needham, “Letter from Joseph Needham to W. E. Van Heyningen (Kits),” 23 May 1952. (File 10)

11)

Pierre Biquard, “Letter from Pierre Biquard to Jeseph Needham,” 24 May 1952. (File 10)

12)

Joseph Needham, “Letter from Joseph Needham to Sahib Sokhey,” 22 April 1952. (File 10)

13)

Sahib Sokhey, “Letter from Sahib Sokhey to Joseph Needham,” 25 April 1952. (File 10)

14)

Joseph Needham, “Letter from Joseph Needham to Pierre Biquard,” 27 May 1952. (File 10)

15)

Ibid

16)

Joseph Needham, “Letter from Joseph Needham to Sahib Sokhey,” 22 April 1952. (File 10)

17)

Joseph Needham, “Letter from Joseph Needham to William Thorpe,” 26 June 1952. (File 10)

18)

Joseph Needham, “Letter from Joseph Needham to Pierre Biquard,” 28 May 1952. (File 10)

19)

Joseph Needham, “Letter from Joseph Needham to Vincent Wigglesworth,” 16 June 1952. (File 10)

20)

Joseph Needham, “Letter from Joseph Needham to the Press Association,” 31 October 1952. (File 55)

21)

Ibid.

22)

니덤은 영국에서의 기자회견 과정에서, 인도 출신의 저명한 페스트 전문가가 인도 정부로부터 승인을 받지 못해 조사단에 합류하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니덤은, “개인적으로 그 혹은 한두 명의 인도 연구자들이 가지 못한 것에 매우 큰 유감을 느꼈다”고 말했다. “Press Conference in London: Statement by Joseph Needham, F.R.S.,” 26 September 1952, p. 8. (File 55)

23)

“Actes de la Commission Scientifique Internationale chargée d’examiner les faits concernant la guerre biologique en Corée et en Chine: Préambule (Proceedings of the International Scientific Commission for the Investigation of the Facts Concerning Bacterial Warfare in Korea and China, 이하 ‘Actes de la Commission Scientifique Internationale’),” date unknown, p. 2. (File 17)

24)

“Actes de la Commission Scientifique Internationale: Cinquième Séance,” 30 June 1952, p. 1. (File 17)

25)

Joseph Needham, “Notes on Alleged Bacterial Warfare in Korea,” 27 April 1952. (File 4)

26)

Joseph Needham, “Letter from Joseph Needham to Dorothy Needham,” June 1952. (File 12)

27)

“Replacement of pages x and xi of the Draft ‘Formation and Work of the Commission’.” (File 12)

28)

Joseph Needham, “Letter from Needham to Pierre Biquard,” 27 May 1952. (File 10)

29)

“Actes de la Commission Scientifique Internationale: Premiére Séance (préparatorie),” 23 June 1952, p. 3. (File 17)

30)

“Actes de la Commission Scientifique Internationale: Seconde Séance (préparatorie),” 25 June 1952, p. 2. (File 17)

31)

“Actes de la Commission Scientifique Internationale: Troisième Séance (préparatorie),” 27 June 1952, p. 1. (File 17)

32)

“Actes de la Commission Scientifique Internationale: Premiére Séance (préparatorie),” 23 June 1952, p. 3. (File 17)

33)

Joseph Needham, “Notes on alleged Bacterial Warfare in Korea,” 27 April 1952. (File 4)

34)

“Press Conference in London: Statement by Joseph Needham, F.R.S.,” 26 September 1952, p. 17. (File 55)

35)

Barnett, H.C. and S. Toshioka, “The Bloodsucking Insects, Mites and Ticks of Korea and their Relation to Disease Transmission,” 1951, 406th Med. Gen. Lab. (File 20)

36)

프라하 문서군의 원문서들과 이에 대한 니덤의 개인적 메모들은 영국 제국전쟁박물관의 니덤파일 20~23번에 체계적으로 분류·보관되어 있다.

37)

“Actes de la Commission Scientifique Internationale: Troisième Séance (préparatorie),” 27th June 1952, p. 1. (File 17)

38)

Joseph Needham, “Notes on the Prague Documentation (Amended Version),” date unknown. (File 20)

39)

NCNA는 ‘New China News Agency’를 지칭한다(ISC, 1952: 9).

40)

제임스 앤디콧은 앞서 등장한 세균전 연구자 스티븐 앤디콧의 부친이다.

41)

Joseph Needham, “Notes on the Prague Documentation (Amended Version),” date unknown. (File 20)

42)

Joseph Needham, “Abstract of Photo Series,” date unknown. (File 20)

43)

“Actes de la Commission Scientifique Internationale: Onzième Séance,” 12 July 1952, p. 2. (File 18)

44)

“Actes de la Commission Scientifique Internationale: 16th Séance,” 18 July, 1952, p. 1. (File 18)

45)

Joseph Needham, “Letter from Needham to Pierre Biquard,” 28 May 1952. (File 10)

46)

“Actes de la Commission Scientifique Internationale: Septième Séance,” 3 July, 1952, p. 2. (File 17)

47)

Joseph Needham, “Letter from Needham to Pierre Biquard,” 28 May 1952. (File 10)

48)

“Second Transcript of the Press Conference in London: Statement by Joseph Needham, F.R.S.,” 26 September 1952, p. 3. (File 55)

49)

Ibid., p. 5.

50)

S. W. Green, “Letter from S. W. Green to Joseph Needham,” date unknown. (File 55)

51)

“Second Transcript of the Press Conference in London: Statement by Joseph Needham, F.R.S.,” 26 September 1952, p. 7. (File 55)

52)

Ibid., p. 6.

53)

“Press Conference in London: Statement by Joseph Needham, F.R.S.,” 26 September 1952, p. 6. (File 55)

54)

“Second Transcript of the Press Conference in London: Statement by Joseph Needham, F.R.S.,” 26 September 1952, p. 1. (File 55)

55)

“Second Transcript of the Press Conference in London: Statement by Joseph Needham, F.R.S.,” 26 September 1952, p. 11. (File 55)

56)

1995년 3월 24일 조지프 니덤이 사망했을 때 영국 일간지 『인디펜던트(The Independent)』는 그를 “이 세기 혹은 그 어떤 세기에서도, 그리고 이 나라 혹은 그 어떤 나라에서도 가장 위대한 학자들 중 한 명”이라고 평가했고, 『가디언(The Guardian)』은 그를 “이 세기의 가장 위대한 영국인 중 한 명”이라고 회고했다. The Independent, 26 March 1995; The Guardian, 27 March 1995.

Refer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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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athersby Kathryn. Deceiving the Deceivers: Moscow, Beijing, Pyongyang and the Allegations of Bacteriological Weapons Use in Korea. Cold War International History Project Bulletin 111998;:176–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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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웃으면서 악수를 나누는 조지프 니덤과 존 퀸 중위

Figure 1. Joseph Needham and Lt. John Quinn smiling and shaking hands

그림 2.

긴 테이블 위에 맥주병들이 놓여 있는 존 퀸 중위 심층 면담 장면

Figure 2. In-depth interview with Lt. John Quinn, with beer bottles placed on a long tab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