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일본과의 의료 교류와 그 성격 - ‘동아시아의료’의 한 사례 -

The exchange of medicine with Japan during the Koryo Dynasty era and its characteristics -A case of ‘East Asian Medicine’-

Article information

Korean J Med Hist. 2023;32(1):241-277
Publication date (electronic) : 2023 April 30
doi : https://doi.org/10.13081/kjmh.2023.32.241
Associate Research Professor, Yonsei University, College of Medicine, Division of Medical History, Department of Medical Humanities and Social Sciences
이경록,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의사학과 및 의학사연구소 연구부교수, 의사학 전공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의사학과 및 의학사연구소 연구부교수, 의사학 전공 / 이메일: medhis@hanmail.net
Received 2023 February 23; Revised 2023 March 15; Accepted 2023 April 19.

Abstract

In this article, I reviewed the exchange of medicine between the Koryo Dynasty and Japan during the Koryo Dynasty. Compared to the exchange of medicine during the Three Kingdoms or the early Joseon Dynasty, medicine between Korea and Japan was loosely affected each other during the Koryo Dynasty. This characteristic of medical history with Japan during the Koryo Dynasty corresponded to the overall low density of exchanges between the two countries.

In this paper, the exchange of medicine during the entire Koryo period was divided into 4 periods, and medical records in Korea and Japan were discussed in terms of medical personnel, medical knowledge, and pharmaceutical materials. During the Koryo Dynasty, Korea was interested in Japan’s medical personnel and pharmaceutical materials, and Japan was interested in Korea’s medical knowledge and pharmaceutical materials.

When limited to the Koryo Dynasty, it is difficult to determine the superiority or inferiority of pharmaceutical materials, medical personnel, and medical knowledge between Korea and Japan. Without frequent contact to compare the level of medical care, each country only accepted the other country’s medical care within the necessary range. This means that the exchange of medicine between Koryo and Japan did not flow only in one direction.

In addition, I proposed to understand the pre-modern East Asian world, including Korea-Japan relations, by using the concept of political bodies instead of the concept of state. In other words, it is necessary to call the subject of action that independently judges and executes foreign relations while maintaining a high degree of autonomy in decision-making as ‘political bodies’, and utilizes this concept to interpret the pre-modern East Asian world complexly. The concept of political bodies is also useful for understanding the exchange of medicine among the three East Asian countries.

1. 머리말

흔히 동양의 전근대 의학을 ‘한의학(漢醫學)’ 또는 ‘중국의학’(중의학, Traditional Chinese Medicine, TCM)이라고 표현한다. 중국에서 연원한 의학이라는 뜻이자, 중국이 중심이 되어 주변국에 영향을 미친 의학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중국과 한국 사이의 외교가 항상 이어진 것은 아니었을뿐더러 양국 관계의 성격도 고정된 것은 아니었다. 더 나아가 중국으로부터의 영향이 일방적이지는 않았음은 의료 부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한의학’이나 ‘중국의학’이라는 표현으로는 전근대 의료를 제대로 설명할 수가 없으므로, 이 글에서는 ‘동아시아의료’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현재로서는 지역을 지칭하는 ‘동아시아’라는 단어가 객관적이고 공정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한국의 전근대 의료사에 접근할 때 지역사로서의 의미를 갖는 ‘동아시아 의료’는 실재하였는가? 혹은 한국ㆍ중국ㆍ일본의 전근대 의료가 하나의 네트워크였다고 해석하는 것은 타당한가?

동아시아의료의 실체적 전개에 대한 확인과 이론적인 개념화에 대해서는 심도 깊은 검토가 요구된다. 무엇보다도 이러한 검토에는 의료 네트워크에 대한 다양한 사례 연구의 축적이 필요하다. 이 글에서 고려와 일본 사이의 의료 교류를 다루는 이유이다.

그동안의 한일 의료 교류사에 대한 연구성과는 아주 미흡하다. 중국에서 활동하는 의료사 연구자에게는 한국과 일본 사이의 의료 교류가 관심의 영역이 아니었다. 한일관계사 연구자에게도 ‘의료’는 사소한 주제에 불과하였다.1) 그렇다면 한국과 일본의 의료사 연구자들은 어떠했는가?

일찍이 1904년에 『일본의학사(日本醫學史)』를 저술한 후지카와 유우(富士川游)도 전근대 한일 사이의 의료는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 후지카와는 나라(奈良)시대에 한국 의료인들이 일부 오기는 했으나, 헤이안(平安)ㆍ가마쿠라(鎌倉) ㆍ무로마치(室町)시대에는 일본 승려들이 중국에서 직접 의학을 전수받았다고 자세히 서술하였다. 그는 중국과 일본 사이의 의료 교류에는 집중하면서도 한국과 일본 사이의 의료 교류에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2)

반면 미키 사카에(三木榮)는 ‘일본의학을 분명히 알려고 한다면 선진 반도의 학을 알지 않으면 안 되고 그와 함께 선진의 대륙의학을 알 필요가 있다. 이 역(逆)의 것도 고구(考究)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입장이었다. 그는 한일 간의 의료에 주목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미키는 양국 사이의 영향이 시기에 따라 한 방향으로만 전개되었다고 인식하였다. 즉 전근대에는 중국의학의 세례를 받은 한국의 ‘반도의학’이 일본에 영향을 미쳤으며, 1894년 갑오개혁을 계기로 근대에는 일본의 ‘신의학’(서양의학)이 반대 방향으로 영향을 끼쳤다는 설명이었다. 그는 연구 시야를 넓혔으나 아무래도 도식적이었다는 한계를 지닌다. 고려시대 한일 간의 의료에 대해서 미키는, 고려와 일본의 국가 단위에서는 의학 교류가 거의 없었으며, 다만 고려 문종이 의원(醫員)을 일본에서 구한 기록이 남아있다고 하였다.3)

김두종의 한국 중세의학 특히 고려시대 의료 연구에서는 아라비아의학ㆍ인도의학의 유입을 강조하는 점이 눈길을 끈다. 고려시대 의료의 국제적인 성격을 드러낸다는 점이 특색이다. 중국의학의 과도한 영향력을 재검토하려는 노력이었다. 하지만 여러 나라 의학의 유입 기록만으로 그가 중시하는 고려시대 의료의 국제성ㆍ자주성이 증명되지는 않는다. 아울러 그의 한일 의료 교류사 서술을 살펴보면, 삼국시대의 한국의학이 바로 일본의학의 기원이었으며 한국은 일본에 커다란 자취를 남겼다는 민족주의적인 관점이 뚜렷하다.4)

손홍열 역시 한국이 전파자의 입장에서 일본의 고대의학을 이룩해주었다고 각별히 강조한다. 김두종과 일치하는 시각이다. 고려시대 의료에 대해서 손홍열은 중국 의료제도와 비교하면서 중국의학의 수입과 영향에 많은 지면을 할애하였다. 반면 거란, 여진, 일본, 남만 등과의 접촉은 ‘기타(其他) 제국(諸國)과의 교류(交流)’라는 항목에서 짧게 언급하였다. 특히 고려와 일본과의 교류로는 문종의 풍비병(風痹病) 치료 관련 기록이 일본에 남아있다는 서술에 그치고 있다.5)

그러나 고려시대에 한국 의료가 일방적으로 일본에 흘러갔다는 기존 연구는 사실(史實)이 아니다. 이 주장은 중국 의료가 일방적으로 한국에 흘러왔다는 주장만큼이나 위험하다. 한국과 일본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은 교섭 내용을 사실 그대로 파악하는 동시에 그 성격까지 검토할 필요가 있다.

이 글에서는 고려시대 대일 의료의 추이를 4개 시기로 나누어 추적하려고 한다. 흔히 한일관계사 연구자들은 1274년 여몽연합군의 일본 공격을 기점으로 고려시대를 양분한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의료 교류의 변동을 비롯하여 100년 가량씩의 시간별 간격, 권력 교체 및 무력 충돌과 같은 정치외교적 상황을 감안하여 대일 의료사를 4개 시기로 세분한다.

본문에서는 양국의 의료 기사를 최대한 수집한 후에 고려시대 전기간의 의료 교류를 의료인, 의학지식, 약물 분야로 나누어 논의하려고 한다. 이 과정에서 의료 교류 기록이 너무나 단편적이므로 그 가치를 음미하기 위해서 정치외교의 흐름까지 함께 살필 것이다. 고려시대의 논문이지만 본문 후반부에서는 조선초기의 의료 교류 상황까지도 검토할 예정이다. 고려시대 사료의 양적인 한계를 보완하는 동시에 통시적인 흐름을 파악하기 위해서이다.6) 특히 양국 간의 의료 교류를 정리하면서 앞서 언급한 전근대 동아시아의료체제의 구조를 염두에 두려고 한다. 이 과정에서 전근대 동아시아세계를 ‘정치체’ 간의 관계로 분석하는 것을 제안할 것이다.

2. 의료 교류의 단서와 축적

1) 918~1056년 : 단교와 치료술 전파의 흔적

9세기에 들어 통일신라에서는 권력이 급격히 이완되었다. 이미 780년 선덕왕 즉위로부터 하대(下代)에 접어들자 귀족들 사이에서는 왕권 쟁탈이 격화한 것이다. 지방에서는 호족(豪族)들이 할거하면서 9세기 전반에는 장보고와 같은 해상세력가도 등장하였다. 이 시기가 일본에서는 헤이안(平安)시대(794~1185년)에 해당한다. 일본에서도 지방세력이 점차 강성해지는 반면에 헤이안 정권의 지방 통제력은 약화되었다.

지방 통제력이 약화되자 일본 큐슈 연안에서는 9세기 말부터 이른바 신라해적(新羅海賊)이 횡행하였다.7) 신라해적은 신라의 지방 통제가 약화되면서 민간에 등장한 선단을 가리킨다. 신라의 민간 선단은 상황에 따라 해적이 되기도 하고 상인이 되기도 하였다.8) 이 무렵에는 신라와 헤이안 정권이 모두 불안정해지면서 양국 간의 공식 외교가 단절되었던 것이다.9)

918년 건국 이후 고려에서는 중앙집권체제의 추구에 맞춰 성종대~현종대에 지방제도가 정비되어갔다. 지방 통제의 강화를 기반으로 외국과의 공식적인 외교나 교역도 가능해졌다. 이미 고려에서는 후삼국 통일 이듬해인 937년(고려 태조 20년)부터 일본과 접촉을 시도하였고, 이어서 939년에도 일본에 첩문[牒]을 보내 외교관계를 모색하였다.10) 972년, 974년, 997년, 1019년에도 사신을 파견하였다.11)

이처럼 고려가 대일 교섭에 적극적인 데 반해 일본의 태도는 부정적이었다. 10세기 일본에서 헤이안시대가 중후기의 율령체제 해체기에 이르자 지방호족들이 큰 세력을 형성하였기 때문이다.12) 고려의 통교 제안에 대한 일본의 공식적인 거절 이유는 고려의 문사(文辭)에 일본을 모욕하는 문구가 들어있다거나 예의(禮儀)에 맞지 않아 거칠다는 것이었다.13) 표현이 무례하다는 식의 거절은 폐쇄적인 외교 자세를 견지하였던 고대ㆍ중세 일본의 상투적인 반응이었다.14) 일본에 대해 고려가 교린(交隣) 관계를 원했던 것을 감안하면, 일본측의 입장은 한국이 일본에 사대(事大)의 예를 취하지 않는다는 점에 불만을 표시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15)

하지만 일본측의 속내는 달랐다. 일본에서는 10세기에도 여전히 고려의 침입 풍문이 떠돌았다.16) 또한 1019년(고려 현종 10년) 일본의 『소기목록(小記目錄)』에 따르면 ‘신라는 원래 적국인지라 국호를 (고려로-인용자) 바꾸었다 하더라도 야심은 남아있을까 걱정됩니다’라고 할 정도로,17) 일본은 한국의 공격을 경계하였다. 1019년에 일본을 침입한 외적이 고려인인지 여진족인지조차 구분하지 못한 데서 단적으로 드러나듯이 일본은 국제 정세에 어둡기도 하였다.18)

그러나 완전한 격절은 아니어서 양국 간의 교류가 미약하게나마 이어졌다. 표류인(漂流人, 표풍인)의 송환처럼 반드시 처리해야 할 사안들이 발생했기 때문이다.19) 송환을 위해서는 양국 변경에서 근무하는 관리들 사이의 접촉이 필수적이므로 양국 사이의 연결이 철저히 차단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이 시기 양국 사이의 의학지식 전파의 흔적은 일본측의 『의심방(醫心方)』과 『의략초(醫略抄)』에 남아있다. 우선 일본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의서인 『의심방』은 984년(고려 성종 3년) 탄바노 야스요리(丹波康賴)가 완성하였다. 전부 30권으로 되어 있으며 주로 수(隋) 소원방(巢元方)의 『제병원후론(諸病源候論)』에 근거하여 이론을 확립하고, 수당(隋唐) 방서(方書)에 실린 100여 명의 이론을 참고하여 주료제방(主療諸方)에서 본초(本草)ㆍ약성(藥性)ㆍ명당(明堂)ㆍ공혈(孔穴)ㆍ양생(養生)ㆍ복석(服石)ㆍ방내(房內)ㆍ식이(食餌) 등으로 과(科)를 구분하였다.20)

『의심방』에는 5건의 한국 처방이 인용문 형식으로 수록되어 있다. 탄바노 야스요리가 이 5건은 한국으로부터 연원했거나 한국을 통해서 유입했던 치료술이라고 판단했다는 뜻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약을 복용할 때는 약사여래 등에게 기원하는 복약송(服藥頌)을 동쪽을 향해 먼저 외우라.21)

② 적취(積聚)에는 껍질을 벗긴 속수자(續隨子)를 술에 타서 복용하라.22)

③ 성기(性器)를 키우고 정력을 강화하려면 하얗게 태운 노봉방(露蜂房) 재를 술에 타서 마시거나 성기에 바르라.23)

④ 폐옹(肺癰)에는 황기(黃耆) 1냥을 달여서 2번에 나누어 복용하라.24)

⑤ 정종(丁腫) 독기가 심장에 들어가 죽게 된 경우에는 국화즙 3되를 짜서 단번에 복용하라.25)

의심방』에 따르면 처방 ①과 ②의 출전은 『신라법사방(新羅法師方)』이고, ③의 출전은 『신라법사유관비밀요술방(新羅法師流觀秘密要術方)』(『신라법사비밀방(新羅法師秘密方)』)이며, ④와 ⑤의 출전은 모두 『백제신집방(百濟新集方)』이다. 『신라법사방』과 『백제신집방』은 신라와 백제의 처방을 수록한 의서가 확실하므로 한일 간 치료술 교류의 증거이다. 그러나 처방 ①~⑤ 즉 『신라법사방』ㆍ『백제신집방』의 일본 전파가 고려 건국 이전인지, 건국 이후인지는 알 수가 없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일본에서의 치료술 전승이 분명한 처방 ⑤만을 다루겠다.

⑤-1 (『의심방』) : 정종(丁腫) 독기(毒氣)가 이미 심장에 들어가 곤란을 겪다가 죽게 된 사람을 치료하는 『백제신집방』의 처방. 국화의 잎과 줄기를 함께 빻아서 (국화-인용자)즙 3되를 짜서 단번에 복용한다.26)

⑤-2 (『의략초』) : 『백제신집방』에서는 ‘국화의 잎과 줄기를 함께 빻아서 (국화-인용자)즙 3되를 짜서 단번에 복용하라’라고 하였다.27)

1081년(고려 문종 35년)에 『의략초』를 저술한 탄바노 마사타다(丹波雅忠)는 『의심방』을 저술한 탄바노 야스요리의 증손이다. 『의략초』(⑤-2)에서는 『백제신집방』을 인용한다고 표기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치료법 문장을 비교해보면 『의심방』(⑤-1)을 그대로 재인용한 것으로 판단된다. 재인용 여부에 상관없이 『의심방』과 『의략초』를 통해서 10세기 후반~11세기 후반에 일본에서는 한국의 의학지식을 인지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한국 처방들을 지속적으로 활용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고려초기 일본과의 의료 교류의 흐름을 조망하기 위해서는 짧게나마 그 이전 시기의 의학 교류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고대에는 한일 간의 의료인 왕래가 적지 않았다. 일찍이 414년에 신라에서 일본으로 건너가 윤공천황(允恭天皇)의 족병을 치료한 김무(金武)를 비롯하여,28) 553년과 554년에는 백제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의박사(醫博士) 왕유릉타(王有㥄陀)와 채약사(採藥師) 반량풍(潘量豊)ㆍ정유타(丁有陀)가 보인다.29)

백제가 멸망한 후인 671년에는 약물 전문가[解藥]인 발일비자(㶱日比子), 찬파라(贊波羅), 금라금수(金羅金須), 귀실집신(鬼室集信), 덕정상(德頂上), 길대상(吉大尙) 등의 백제 의료인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관리로 등용되었다.30)

약물과 관련해서는 686년에 약물이 포함된 100여 종의 교류가 나타나며,31) 일본 귀족들이 구입하려고 한 신라 물품 목록인 「매신라물해(買新羅物解)」에는 약재 명칭이 들어 있다. 구체적으로 752년(신라 경덕왕 11년) 6월 17일의 「매신라물해」에는 정향(丁香), 필발(蓽撥), 목환자(木患子), 소방(蘇枋) 등이 있다. 며칠 뒤인 6월 23일의 「매신라물해」에는 사향(麝香), 주사(朱沙), 훈육(薰陸), 인삼(人蔘), 목환자(木患子) 등이 보인다.32) 현존하지 않는 「매신라물해」에도 또 다른 약재들이 수록되어 있었을 것은 분명하다.

또한 일본 동대사(東大寺) 정창원(正倉院)의 「종종약장(種種藥帳)」에는 대황(大黃)ㆍ감초(甘草)ㆍ인삼(人蔘)ㆍ계심(桂心)ㆍ아리륵(阿梨勒) 등이 보인다.33) 이 「종종약장」은 일본 황실ㆍ귀족ㆍ동대사의 승려들이 사용한 일종의 약재 대장이다.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물품들 가운데 756~860년에 실제로 사용한 약재들의 목록이 기입되어 있으므로, 당시 양국의 약물 교류 실상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따라서 시계열적으로 살피자면, 고대에는 한국-일본 간의 의료인ㆍ약물들의 교류가 다양하게 전개되다가 9세기 경부터 정치적인 이유로 침체되었다. 침체의 여파는 고려가 건국된 이후에도 여전하였지만 『의심방』ㆍ『의략초』 등을 통해서 한국 의학지식이 일본에 간헐적으로 영향을 미친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34)

2) 1056~1185년 : 비정기적인 교섭과 의료 교류의 고조

1056년(고려 문종 10년)에 드디어 고려와 일본 간의 사신 왕래가 이루어졌다. 일본국(日本國) 사신으로 조신(朝臣) 출신의 정상위(正上位) 권예(權隷)인 후지와라 요리타다(藤原賴忠) 등 30명이 고려의 금주(金州, 김해부)에 도착한 것이다.35) 30명 규모라면 아주 작은 사신단은 아닌데, 이들의 자세한 활동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일본에서도 고려와 수교할 필요를 느끼고 능동적으로 움직였다는 점에서 양국 관계는 새로운 단계로 진입했다고 판단할 수 있다. 이전에는 고려에서만 여러 차례 사신을 파견했을 뿐이었다. 문종대 이후의 지속적인 사신단 왕래 기록을 찾기는 어렵지만, 두 나라 사이에 교섭이 이어지면서 분위기가 약간 누그러진 것은 사실이다.36)

양국 정부 사이의 정례적인 교섭은 드물었으나, 민간 차원의 교류는 유지될 수밖에 없었다. 크게 두 가지 이유였다. 당시의 강력한 신앙이었던 불교에 대한 열망을 억누를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상업적인 목적의 교역 역시 엄금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우선 양국 사이에는 활발한 불교 교류가 이루어졌는데, 문종의 아들로서 당대 최고의 승려였던 대각국사 의천(義天)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의천은 대장경(大藏經)을 결집할 때 일본을 포함하여 중국과 거란에서 불경을 구하였다.37) 반대로 1095년(고려 숙종 즉위년)에 일본 흥복사(興福寺)의 승려는 대재부(大宰府)에서 송나라 상인 유유(柳裕)를 만나서 「극락요서(極樂要書)」ㆍ「미타행원상응경전장소(彌陀行願相應經典章疏)」 등을 의천으로부터 구해달라고 요청하였는데, 2년 뒤에 유유는 실제로 「극락요서」 등 13부 20권을 의천에게 얻어서 일본으로 가져왔다.38) 양국 승려들이 활발하게 접촉하고 있으며39) 승려들의 교류에 민간 상인들이 개입하고 있었다는 점도 주목된다.

민간 상인에 의한 교류는 문종대부터 아연 활기를 띠었는데,40) 문종 27년(1073)에 첫무역 기사가 보인다. 동남해도부서(東南海都部署)에서 ‘일본국(日本國) 왕칙정(王則貞)과 송영년(松永年) 등 42명이 와서 토산물을 진상하겠다고 청하였고, 일기도(壹歧島)의 구당관(句當官)도 33명을 보내어 토산물을 헌상하겠다고 청하였다’라고 보고하자, 문종이 바닷길로 개경에 이르도록 지시한 것이다.41) 고려측의 기록을 살펴보면 문종대와 선종대 등에는 일본인들과의 교역기사가 빈번해진다. 이 무렵 고려는 송나라 상인과 일본 상인들로 북적거렸는데, 무역을 통해 수익을 노리는 민간 상인을 억제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데 당시 교역의 특징은 고려 상인과 외국 상인 사이의 순연한 민간교역이 아니라, 고려정부와 외국 상인 간의 교역이었다는 점이다.42) 고려정부와 직접 접촉하고 있었기에 일본 상인들은 한일 양국의 외교 교섭까지 대행하였다. 이 비공식적인 외교 업무에는 의료인 요청도 포함되어 있었다. 문종 33년(1079) 11월의 「고려예빈성대일본첩(高麗禮賓省對日本牒)」은 고려 예빈성에서 일본의 외교 업무를 담당하던 대재부(大宰府)에 보낸 첩문[牒]이다. 문종의 ‘풍질(風疾)’ 치료를 위해서 일본 상인 왕칙정이 귀국하는 편에 의원을 요청한 내용이었다.

고려국 예빈성에서 대일본국 대재부에 첩함.

당성(고려 예빈성-인용자)은 엎드려 성지(聖旨, 문종의 지시-인용자)를 받았습니다. 듣건대 귀국(貴國)에 풍질을 잘 고치는 의인(醫人)이 있다고 하여, 이제 상객(商客) 왕칙정이 고향에 돌아가는 기회를 보아 그 편에 첩문을 보내면서 아울러 왕칙정에게 풍질의 연유를 말하였습니다. 청컨대 그쪽에서 뛰어난 의인을 선택하여 내년 이른 봄에 보내어 와서 풍질을 고치게 해주십시오. 만일에 효과가 있으면 반드시 그 대가가 가볍지 않을 것입니다…….43)

대재부에서는 이 첩문에 해장(解狀)을 첨부하여 태정관(太政官)에게 보고하고, 일본 공경(公卿)들과 관백(關白)은 이듬해 11월까지 만 1년에 걸쳐 진지하게 숙고하였다. 공경들은 고려에 의인(醫人)을 파견할 것인가 말 것인가, 보낸다면 누가 좋은가 등을 의논하였다. 그들은 탄바노 마사타다(丹波雅忠)의 자문을 받아 고레무네노 도시미치(惟宗俊通)를 파견하려 하였다.

하지만 관백 후지와라노 모로자네(藤原師實)는 자신의 꿈을 빌미로 거절하였다. 이에 고려첩장(高麗牒狀) 속의 6개 문제점을 지적하는 형식으로 거절하면서, 고려에서 보내온 방물(方物)도 되돌려 보내고 일본측의 답신은 사신을 통해 전달하기로 하였다. 일본의 대재부가 고려의 예빈성에 발송하는 공문 형식이었다.44) 고려의 외교적 결례를 핑계로 삼아 고려의 의료인 요청을 거절한 것이다. 하지만 거절을 위해 일본에서 사신을 파견했다는 점은 양국 간의 교섭이 존속하고 있음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문종대 이후에도 고려-송-일본 간에는 상인이 왕래하면서 교역이 급증하였다.45) 당연히 일본 상인들은 자신들이 필요한 물품과 약재를 고려에서 구입하였을 것이다. 앞 시기의 「매신라물해」에 정향, 필발, 목환자, 소방, 사향, 주사, 훈육, 인삼 등등이 기록되어 있다는 점은 이미 언급하였다. 고려말에는 인삼이 일본으로 전파된 기록도 남아있다.46) 따라서 문종~명종대의 이 시기에도 일본 상인들이 고려로부터 약재를 구입했으리라 추측하는 것은 합리적이다.

고려에 올 때 일본 상인은 교역을 위한 물품을 싣고 왔다. 그런데 고려에 가져온 교역 물품은 흔히 ‘토물(土物)’, ‘방물(方物)’이라고만 기록되어 있다.47) ‘일본의 토산물’이라는 의미에 불과하다. 기껏해야 해조(海藻), 수은(水銀), 감귤(柑橘), 유황(硫黃) 등이 보이는데 김두종은 이것들을 의약품으로 판단하고 있다.48) 고려에 들어온 약재들의 기록이 자세하지 않아서 아쉽다.

약재 기록이 부족한 상황에서 1123년(고려 인종 1년)에 저술된 『고려도경(高麗圖經)』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시기에 벌어진 한일 간의 교류 물품을 지목하고 있어서이다. 즉 ‘일본에서 (고려로-인용자) 온 것으로 능금[來禽]ㆍ푸른 추리[靑李]ㆍ참외[瓜]ㆍ복숭아[桃]ㆍ배[梨]ㆍ대추[棗]도 있다’라고 명시하였다.49) 이 기록에 등장하는 복숭아ㆍ배ㆍ대추는 『향약구급방(鄕藥救急方)』 등에서 약재로도 사용된다. 『고려도경』 기록은 과일ㆍ채소 외의 약재들도 일본으로부터 유입되었을 것이라는 추론의 또 다른 방증이다.

그런데 「고려예빈성대일본첩」에 보이는 의료인 요청과 『고려도경』 기록 등이 시사하는 약재 무역 가능성에 대한 논의에는 전제가 있다. 문종이 걸렸다는 ‘풍질’ 개념을 이해하는 것은 물론 실제로 문종을 치료할 수 있는 의료인이 일본에 존재한다는 점과 고려에서는 일본 의료인을 초빙하는 데 아주 적극적이었다는 점이다. 아울러 서로 교역된 고려와 일본의 약재가 무리없이 치료에 활용되도록 두 나라에서는 약물학(본초학) 지식이 공유되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두 나라 사이의 의학지식체계가 공통되어 있다는 점을 실제로 확인하게 된다.

그렇다면 당시의 주류 의학지식체계는 어느 정도로 일치하였는가? 고려 인종 14년(1136)에 의업식(醫業式)과 주금업식(呪噤業式)에서 규정한 의관들의 교과목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표 1>에 보이는 바와 같이 고려의 시험 과목은 일본의 시험 과목과 대체로 일치하며 중국 당(唐)의 그것을 본받았다. 고려와 일본에서는 의학이론과 약물학 지식을 통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Comparison of medical subjects in Tang, Koryo, and Japan

이상의 논의와 같이 문종 10년(1056) 일본 사신의 왕래 후에 승려 간의 접촉과 상인들의 활발한 무역으로 양국 간의 교류는 존속하였다. 많이 확인되지는 않으나 공식적인 외교 교섭도 이어지고 있었다. 특히 「고려예빈성대일본첩」에서는 일본에 의료인을 요청하였고, 당시의 무역 정황 및 『고려도경』을 통해서는 해조ㆍ수은ㆍ감귤ㆍ유황을 비롯한 약물들의 양국 교역을 짐작할 수 있다. 여기에 두 나라 의학 교과목의 유사성까지 감안한다면 고려와 일본은 의료 분야에서 공통분모도 공유하고 있었다.

3. 의료 교류의 지속과 중단

1) 1185~1274년 : 정기적인 통교와 약물지식의 유통

일본에서는 1185년에 가마쿠라(鎌倉)막부가 성립하였다. 1170년(고려 의종 24년) 고려에서 무신정권이 들어선 직후였다. 비정기적으로 교류하던 이전 시기와는 달리, 양국에서는 권력이 바뀌었을 뿐만 아니라 정례적으로 교섭하는 단계에 들어섰다. 이 시기의 양국 간 교섭 형식에 대한 고려측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두 나라가 내왕을 튼 이래 해마다 진봉(進奉) 1회에 선박은 2척을 넘지 않도록 하였으며, 만일 그 밖의 선박이 거짓으로 다른 일을 빙자하여 우리나라(고려-인용자)의 연해지방 마을을 소란스럽게 할 때에는 엄격하게 처벌하며 금지하기로 약정하였습니다.51)

위 기록에 따르면 고려에서는 일본과의 관계를 ‘진봉(進奉)’이라는 단어로 표현하였다. 약간 후대의 기록이지만, 1206년(고려 희종 2년)에는 대마도 사자[使介] 명뢰(明賴)를 비롯한 40명이 금주에 와서 원포(圓鮑) 2,000첩(帖) 등을 진봉하였다. 이때 금주방어사는 일본 첩문의 문장이 요잡(擾雜)하고 어투가 공손하지 않아서 ‘진봉의 예[進俸之禮]’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대마도에 첩문을 보내어 책망하기도 하였다.52) 1206년 기록에 고려-대마도의 진봉체제가 이미 안정화된 상황으로 묘사되어 있다면, 이 진봉체제는 그 이전에 형성되었다고 판단하는 것이 마땅하다.53)

그러나 ‘진봉체제’ 즉 고려와 일본이 사대관계(事大關係)라는 것은 고려정부의 인식이었을 뿐이다. 일본의 입장은 정확히 반대편이었다. 1206년 고려 금주 방어사의 첩문은 대마도까지만 전달되었으며, 첩문에 담긴 ‘진봉의 예[進俸之禮]’ 운운이라는 표현을 일본 조정에서 알게 되면서 논란이 커진 것은 1240년(고려 고종 27년)에 이르러서였다.54) 이에 앞서 1227년(고려 고종 14년)에 일본인들이 고려의 금주와 웅신현을 연달아 노략질하자55) 전라주도 안찰사가 승존(承存) 등을 일본 대재부에 보내 항의한 일이 있었다. 고려의 항의 첩문을 확인한 일본 조정에서는 오히려 고려의 첩문이 무례하다고 반발하였다.56) 또한 고려 문종의 치료 요청에 대한 거절 사유를 다시 살펴보면, 고려 첩문의 ‘성지(聖旨)’라는 표현은 ‘송조(宋朝)에서 칭하므로 번국(蕃國, 고려-인용자)에서는 사용할 수 없는 표현이다’라고 하였다.57) 일본정부에서는 시종일관 자신들이 고려보다 우월하다고 인식하였던 것이다.

양국 상호 간의 인식 차이에도 불구하고 12세기 후반에서 13세기 후반까지는 비교적 안정된 외교관계가 유지되었다. 당시의 외교 채널은 고려정부 → 경상도(慶尙道) → 금주(金州, 동남해도부서가 위치) → 대마도(對馬島) → 대재부(大宰府) → 일본정부로 이어지는 구조였으며, 금주의 방어사(防禦使)와 대마도의 도사(島司)가 직접 접촉을 담당하였다. 위 인용문에서도 나오듯이, 1년에 1회에 한하여 일본에서 이른바 ‘진봉선(進奉船)’ 혹은 ‘공선(貢船)’ 2~3척에 물품을 보내오면 고려에서는 넉넉히 회사품(回賜品)을 지급하는 형식이었다.

그런데 양국 관계에서 논란이 되는 부분은 대마도의 외교적 자율성이 어느 정도였느냐는 것이다. 근년의 연구에서는 대마도에서 자신들의 판단에 따라 주체적으로 고려에 진봉했다는 이해가 강해지고 있다.58) 대마도 도민들이 진봉선 무역의 주체였으며 일본의 중앙 귀족들은 고려와의 교섭에 무관심해서 진봉선의 존재조차 알지 못했던 것이다.59)

따라서 일본의 지방 단위인 동시에 독자적인 교역 활동의 주체였던 대마도의 이중적 성격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당시 일본정부에서는 대마도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였다. 1263년(고려 원종 4년) 왜구가 웅신현 물도에 침입하자 일본에 항의하러 파견되었던 홍저는 ‘해적을 추궁하니 대마도(對馬島)의 왜인(倭人)이었습니다’라고 보고하였다.60) 홍저가 해적의 출신 지역을 ‘일본국’이 아니라 ‘대마도’라고 구분하는 점이 흥미롭다.

또한 시간이 흘러 몽골이 강성해지자 고려에서는 대일관계의 성격을 몽골에 해명해야 했다. ‘평소에 일본(日本)과는 통호(通好)한 적이 없으며, 단지 대마도(對馬島) 사람들이 간혹 무역하러 금주(金州)를 왕래한 것’이라는 설명이었다.61) 외교적인 발언임을 감안하더라도, 고려에서는 일본과 대마도를 별도의 교역 주체로 인정하고 있었다.

고려말까지도 고려정부-일본국, 고려정부-대마도의 이중적인 교류는 병행되었다. 대표적으로 공민왕 17년(1368) 7월에는 4일 간격으로 일본국 사신과 대마도 사신이 각각 도착하였다. 이 해에는 고려와 일본 사이에서 사신이 빈번하게 왕래하였는데, 고려에서는 별도로 대마도에 사신을 파견하기도 하고 대마도 측의 사신을 통해 쌀 1,000석을 하사하기도 하였다.62) 대마도측은 자율적인 판단에 따라 고려와 대외 교섭을 벌이는 정치세력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정치세력들이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행동하는 양상은 한국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고려시대에 탐라(탁라)가 시종일관 고려의 행정 단위였던 것은 아니었다. 고려초기에 완전히 개별적인 ‘도(島)’였던 탁라(乇羅)는 현종 2년(1011)에야 군현 단위로 편제되었다. 숙종 10년(1105)에 정식으로 ‘탐라군’이라는 군현명을 부여받았지만, 중앙정부에서 직접 현령(縣令)을 파견했던 것은 의종대에 이르러서였다. 원간섭기에 들어서자 탐라가 일시적으로 원의 직할령이 되기도 했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63)

동아시아의 교역망에 적극 참여하였던 탐라에 대해서 일본측에서는 그냥 ‘탐라’라고 부르기도 하고, ‘고려국 탐라’라고도 기록하였다.64) ‘탁라산은 고려국의 별개 섬이다[託羅山是高麗國之別嶋也]’라는 일본측의 표현은65) 탐라가 고려정부의 영향력이 미치는 대상인 동시에 독자적인 교류 활동의 주체라는 이중적 성격을 드러낸다. 일본과 대마도의 경우처럼 고려와 탐라 역시 하나의 국가 개념으로 포괄하기는 어렵다.

조선초기로 시선을 넓히자면, 일본에서는 지역별로 독자성을 지닌 정치세력들이 부각되었다. 뒤에서 제시하는 <부록 1>은 일본의 지역 상황을 세종 5년(1423) 시점에서 잘 보여준다. 일본의 지방세력들은 조선과 외교관계를 맺고 약재를 교역하는 독자적인 정치 단위였다.66) 이들은 앞다투어 통교에 필요한 도서(圖書)를 조선정부로부터 부여받았다. 특히 14세기 후반부터 동아시아세계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유구국(流球國)이 주목된다.67)

유구국은 대마도보다 훨씬 자유롭게 조선과 접촉하였다. 일본의 무로마치막부도 유구국을 자기 나라와는 별개의 정치 단위로 인식하고 있었다.68) 당시 유구국은 명(明)의 책봉을 받으면서 국제적 위상이 급상승한 독립국이었기 때문이다. 현재 일본의 영토에 포함되지 않았던 유구국에 일본이라는 국가 범주를 그대로 적용해서는 당연히 안 된다. 조선초기에 유구국은 일본과 전투를 벌이면서 조선과의 관계를 두고 경쟁하였다.69) 물론 조선에서도 일본국, 유구국, 대마도를 별개의 정치 단위로 인식하고 있었다.70)

요컨대 현대의 ‘국가’ 개념을 전근대로 소급하여 동아시아세계를 이해하는 것은 무리가 따른다. 현재 국가의 영토와 일치하지 않을뿐더러 지역별 주체성이 근대국가보다는 강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고정된 ‘국가’보다는 탄력적인 개념으로 당시의 정치 단위들에 접근하는 것이 필요하다. 즉 지역 단위로 정치적 의사결정의 자율성이 높은 상태를 유지하면서 대외 교섭이나 교역 등에 관해 독자적으로 판단하고 실행하는 행위 주체를 ‘정치체(政治體)’라고 부르고, 이 정치체 개념을 활용하여 전근대 동아시아의 세계를 유연하게 해석할 필요가 있다.

다시 고려시대의 3기로 돌아가자. 양국 사이의 정기 교역선[進奉船, 貢船]은 상당량의 물자 교역을 시사하는데, 고려정부와 대마도 사이의 관무역에 해당하였다. 앞서 의천의 「극락요서」 등이 일본으로 전해졌다고 언급하였지만, 고려포(高麗布)ㆍ조류(鳥類)ㆍ세자화엄경(細字華嚴經) 등도 일본으로 전해졌다.71) 1234년에는 고려 고종이 일본으로 가는 교역선을 통해 일본 승려에게 법어(法語)를 구하기도 하였다.72) 교역선의 왕래는 다양한 내용의 문물이 안정적으로 교류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당시에는 고려의 금주에서만 교역이 진행된 것이 아니었다. 일본의 대마도에서도 고려-송-일본의 물산이 활발히 교역되고 있었으므로 고려와 일본의 약재들은 대마도를 통해서도 교역되었을 것이다. 교역선 등을 통한 양국의 접촉에는 의학지식 교환도 수반되며, 물자 교역에는 약물도 당연히 포함된다. 우선, 의학지식 교류의 흔적이 1211년(고려 희종 7년)에 작성된 일본의 「복고량강법(服高良薑法)」에 다음과 같이 남아있다.

고량강(高良薑) 복용법.

이 약은 송나라 고량군(高良郡)에서 산출된다. 중국과 거란과 고려에서 모두 귀하게 여긴다. ‘말세묘약(末世妙藥)’이 바로 이것이다. 근래에 만병(萬病)을 치료했는데 반드시 효과가 있었다. 곧 (고량강-인용자) 가루 1돈을 술에 타서 복용한다…….73)

일본, 고려, 중국, 거란에서는 중국 고량강(高良薑)이 만병통치약으로 쓰였던 것이다. 고량강은 생강과의 식물인데, 중국 한대(漢代)의 『명의별록(名醫別錄)』에서 이미 ‘고량강’은 별도의 약물로 구분되었다. 동아시아 여러 지역에서 고량강 약효를 인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동아시아 약물학 지식이 공유되고 있을뿐더러, 고려의 약물학 지식을 일본에서도 인지하고 있었음을 확인하게 된다. 『의심방』ㆍ『의략초』에 이어 발견되는 일본으로의 의학지식 전파 사례가 고량강이다. 물론 이 기록은 고려의 고량강 지식이 일본보다 반드시 선진적이었다는 뜻이 아니다. 그저 양국 사이에 고량강 같은 약물 사용에 대한 정보가 알려지고 있었음을 드러낼 뿐이다.

실제로 고량강은 양국에서 약물로 실용되고 있었다. 이 무렵인 고려의 『신집어의촬요방(新集御醫撮要方)』(1226년)에서는 고량강이 배합되는 고량강이중환(高良薑理中丸)이나 호초이중환(胡椒理中丸)이 처방되었다.74) 고려의 또 다른 의서인 『비예백요방(備預百要方)』에서도 고량강이 등장한다.75) 한편 일본에서는 『의심방』(984년)에 이미 고량강의 일본식 표기[和名]가 나타났을 정도이며,76) 『만안방(萬安方)』(1315년)에도 고량강산(高良薑散) 처방이 있어서 고량강이 활발하게 실용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77)

이상에서 살핀 고량강은 중국의 의학지식과 약재가 고려ㆍ일본에서 통용된 경우였다. 이 시기에 고려와 일본 사이에서 유출입된 약물은 없을까? 굳이 그 흔적을 찾자면 ‘일본 밤[栗]’을 거론할 수 있다. 몽골사신인 조양필(趙良弼)이 원종 12년(1271) 9월과 이듬해 12월에 일본으로 파견되었다가 일본 밤을 고려로 가져왔던 것이다. 고려에서는 이것을 의안현(義安縣)에 심어서 충렬왕 2년(1276)에 열매를 맺는 데 성공하였다.78) 하지만 밤이 약용(藥用)이기는 해도 원래 용도는 식용(食用)이므로 완전한 의료 기사로 인정하기는 어렵다.

요컨대 고려에서는 새로 등장한 일본의 가마쿠라막부와 수교하여 외교적 안정을 구가하였다. 교역선을 통한 정례적인 물품 교역에는 약재들도 포함되었을 가능성이 아주 높으며, 1211년의 「복고량강법」 기록은 한일 간의 의학지식 공유를 보여준다. 한일관계를 세밀하게 들여다보면, 고려에서는 일본의 중앙정부에 해당하는 가마쿠라막부와는 별도로 대마도와 이른바 진봉체제를 유지하였다. 고려시대 탐라나 조선전기 유구국의 활동 양상까지 염두에 두었을 때 전근대 동아시아세계는 ‘정치체’ 간의 관계로 분석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2) 1274~1392년 : 충돌과 의료 교류의 욕구

1266년부터 몽골이 일본을 강하게 압박하자 고려와 일본의 관계도 급격히 뒤틀렸다.79) 세계 대제국을 건설하려는 몽골의 대외팽창정책이 영향을 미친 것이었다. 실제로 1274년과 1281년 여몽연합군이 일본을 공격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2차례의 충돌 이후에도 몽골에서는 수시로 일본 공격을 시도하였다. 여몽연합군의 공격이 일본에 큰 충격을 준 것은 ‘무쿠리(蒙古)ㆍ고쿠리(高麗)’라는 상징적 표현과 각종 기록으로도 확인된다. 일본에서는 각지에 군사적 방어를 강화하는 동시에 신불(神佛)에게 기도하는 방식으로 대응하였다.80)

여몽연합군의 공격 이후 단절된 고려와 일본 사이의 외교는 70여 년만인 공민왕 15년(1366)에 재개되었다.81) 한반도를 횡행한 왜구(倭寇)의 처리를 위하여 새로 들어선 무로마치막부에 사절을 보낸 것이었다. 이처럼 오랜 단교와 왜구의 극성으로 인하여 양국 사이의 의료 교류 역시 침체되었다. 우왕 4년(1378) 이자용(李子庸)이 일본에 인삼을 선물하였던 기록이 겨우 발견될 뿐이다.

판도판서 이자용과 전 사재령 한국주를 일본에 보내 해적을 단속해 달라고 청하면서, 구주절도사 원료준(源了浚)에게 금은ㆍ술그릇ㆍ인삼(人蔘)ㆍ화문석ㆍ범과 표범의 가죽 등을 선물로 주었다.82)

인삼이 외교사절편에 보내는 최고급 예물이자, 신라ㆍ조선과 마찬가지로 고려시대에도 대표적인 약물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시기에 인삼 이외의 약재는 등장하지 않는다. 현존하는 기록이 불완전하다기보다는, 어수선한 국제 정세 때문에 실제로 의료 교류가 드물어졌다고 이해해야 한다. 의료 역시 정치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다는 점은 분명하다.83)

따라서 현재로서는 조선 건국 직후의 기록을 재검토하여 고려말기 양국의 의료 정황을 유추할 수밖에 없다. 조선초의 대일 의료기록을 조사해보면, 단연 의료인들의 행적이 눈에 띈다. 대표적인 사례로는 일본인 평원해(平原海)와 숭태(崇泰)를 꼽을 수 있다.

태조 6년(1397)은 조선이 건국한 지 6년째이므로 고려와는 시간 거리가 멀지 않다. 이때 의술(醫術)에 정통하였던 일본인 평원해가 조선에 귀순하였다. 그는 전의감에 근무하면서 국왕과 관료들을 치료하였다. 치료 성과가 좋아서 태종의 각별한 총애를 받을 정도였다. 평원해의 아들인 평순(平順) 역시 의원으로 근무하였으며, 나중에 창원(昌原)을 본향으로 하사받았다. 대를 이어 후대를 받은 셈이다.84)

숭태 역시 일본 대마도 출신의 승려였다. 그가 대마도 종정성(宗貞盛)의 사신으로 조선에 왔을 때 세종은 그가 의술에 정통하다는 소문을 들었다. 세종은 숭태를 후대하면서 의원(醫員) 전순의(全循義)ㆍ김지(金智)ㆍ변한산(邊漢山)에게 배우도록 명하고, 아울러 숭태에게 환자를 치료하게 하였는데 효과가 꽤 있었다.85) 조선의 의관들을 가르칠 정도의 실력이었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조선이 건국하자마자 곧바로 평원해ㆍ숭태가 환대된 것은 고려말부터 이미 일본 의료인에 대한 호기심이 존재하였을뿐더러 일본인들의 임상 실력을 높이 평가했다는 의미이다.86)

보다 주목되는 것은 약재 교류의 증가였다. 평원해가 조선에 귀화한 태조 6년(1397) 말에 박돈지(朴惇之)는 회례사(回禮使)의 신분으로 일본에 파견되었다가 정종 1년(1399)에 귀국하였다.87) 일본측 기록에는 이때 일본이 요청한 구체적인 내용이 들어있다. 즉 무로마치막부의 3대쇼군(將軍) 아시카가 요시미쓰(足利義滿)는 대장경ㆍ동종과 함께 ‘좋은 약물들[藥物良者]’을 부탁하였다.88) 정치외교적으로는 이미 1392년 조선 개국 직후부터 무로마치막부에서 조선과의 교린[隣好] 의지를 적극적으로 피력한 상태였다.89) 이어서 세조 7년(1461)과 성종 12년(1481)에는 우황(牛黃)을 비롯한 약재 30종을 조선에서 구하였다.90) 이러한 분위기를 소급하면 고려말에 일본에서는 한국 약물들에 대한 수요가 크게 증가하였다고 추론할 수 있다.

조선 역시 국용(國用)과 일용(日用)에 관계되는 물화의 교역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91) 태종이 즉위하자마자 일본에서는 석고(石膏)와 백반(白礬)을 비롯한 약재(藥材)를 연이어 바쳤다.92) 일본 약재들이 빈번하게 유입되었던 이유는 조선에서 이 약재들이 필요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일본 약재에 대한 관심이 지대했음은 조선 사신단의 주요 임무가 일본 약재의 수입이라는 데서도 분명해진다. 일본으로 파견되는 사신단에게는 ‘우리나라에서 산출되지 않는 약재는 보고듣는대로 구입해오라’는 명령이 떨어졌다.93)

제도적인 측면에서 볼 때, 세종 12년(1430) 상정소(詳定所)에서 정한 왜학(倭學)의 취재서(取才書)로 『본초(本草)』가 포함된 것은94) 약재가 양국 간의 중요한 교역품임을 여실히 보여준다. 『경국대전』에서는 한일 간의 물품은 교환비율대로 교역한다고 규정되어 있었다.95) 양국 사이의 유통 사례들에서도 특정한 교환 비율이 실제로 확인된다.96) 조선초기에 급증한 한일 간의 교역 규모를 구체적으로 가늠하기 위해서 세종 5년(1423) 일본 각지에서 조선으로 유입된 기록을 정리하면 <부록 1>과 같다.

<부록 1>에서 알 수 있듯이 조선에서는 1년 동안 24회에 걸쳐서 일본정부 및 일본 각지의 지방세력과 교역 관계를 구축하였다. 이 해의 유입 약물은 소목, 서각, 곽향, 정향, 유황, 소향유, 감초, 기린혈, 진피, 파두, 당귀, 상산, 연교, 백단, 호초, 백지, 황금, 초과, 축사, 부자, 울금, 필발, 침향 등등으로 다양하였다.

의료 분야 가운데에서도 약물에 대한 관심은 이처럼 지속적이었고 유출입 현상이 도드라졌다. 약물이란 사용하고 나면 부족해지는 데다 고유한 특산지가 있기 마련이어서였다. 조선전기를 통관하면, 조선에서 일본으로 유출된 주요 약물은 인삼(人蔘), 송자(松子), 청밀(淸蜜), 우황(牛黃) 등이었다. 동시에 일본으로부터는 감초(甘草), 호초(胡椒), 소목(蘇木), 침향(沈香), 정향(丁香), 유황(硫黃), 양강(良薑), 소합유(蘇合油) 등이 주로 유입되었다. 이 약재들이 조선과 일본 사이에서 상호 유출입된다는 것은 그만큼의 약재 수요가 존재할뿐더러, 교역품으로서의 국제적인 경쟁력을 지니고 있다는 뜻이다.

결국 조선에서는 중국산 약재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일본 등 남방계열의 약재도 필요하였다. 약재에 있어서 중국에만 의존하지 않는다는 점은 동아시아의료의 구조와 관련하여 주목해야 할 지점이다. 개별 약재를 활용한 치료경험의 축적을 거치면서 지역별로 고유한 의학지식이 형성되기 때문이다.

한편 양국 사이의 의료인ㆍ약재 교류 외에 의서(醫書)의 유통은 조선 건국에서 한참 지난 후에야 발견된다. 성종대에 일본의 요청에 따라 『세의득효방(世醫得效方)』을 보내주었던 것이다.97) 또한 중종대에는 일본에서 요청한 3종의 의서 중 하나를 보내주려고도 하였다.98)

이상에서 살핀 바와 같이 조선이 건국되자마자 양국 간 의료 교류는 폭발 양상이었다. 이는 고려말에 이미 상대국의 의료에 대해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지만, 실제 교류는 억눌린 상태였음을 암시한다. 그렇다면 자연스레 의문이 든다. 고려말에 양국에서는 어떤 방식으로 상대방의 의료를 파악하고 있었을까? 고려말에는 한반도에 건너온 왜구들이 많았는데, 전투 과정에서 다친 왜구들의 치료 상태나 생포된 왜구들을 통해서 일본인들의 의술 수준이 알려졌을 수도 있다.99)

그런데 일본에 납치되었다가 귀환한 고려 사람들도 꽤 많았다. 이첨(李詹, 1345~1405년)의 문집에는 정승우(鄭承雨)의 효행이 실려 있다. 왜구에게 사로잡힌 정승우는 일본 비전주(肥箭州)에서 팔려 일본 사람의 집안일에 부려졌다. 하지만 멀리 고국의 어머니를 근심하는 그의 효성이 일본인들을 감동시켜서 드디어 귀국하게 되었다. 이때 고려 백성 62명도 함께 돌아왔다는 것이다.100)

우왕과 창왕대의 기록을 조사해보면 일본에 억류되었던 230여 명(1379년), 112명(1383년), 92명(1384년), 150명(1386년), 250명(1388년), 100여 명(1389년)이 순차적으로 귀환하였다.101) 이 고려 사람들을 매개로 일본 내의 의료 실상에 대한 정보가 고려에 알려지고, 동시에 고려의 의학지식이 일본으로 전파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일본에 납치되었던 정승우는 원래 지식인이었다. 정보의 이러한 상호 유통이 조선초기 양국 간 의료 교류의 복선이 된 게 아닐까? 이렇게 본다면, 무력 충돌(전쟁)이 의료 발전을 자극한 또 하나의 사례가 되는 셈이다.

요컨대 조선 건국 직후에 조선에서는 일본인 평원해와 숭태를 환대하면서 일본 의료인을 높이 평가하였다. 반면 무로마치막부가 조선의 ‘좋은 약물들’을 적극 수입했던 것을 상기하면, 일본에서는 한국 약물에 대한 수요가 아주 컸다. 자세히 들여다보았을 때 조선초기에는 의학지식(의서) 전파보다는 약물 유출입이나 의료인 왕래가 상대적으로 활발하였다. 이러한 양국의 움직임은 고려말에 부각된 문제점들을 해소하는 과정이었다. 달리 표현하자면, 고려말에는 한일 간에 상대국의 약물과 의료인에 대한 수요가 크게 축적되고 있었다.

4. 맺음말

이 글에서는 고려시대에 일어난 한국과 일본 사이의 의료 교류를 4개 시기로 나누어 검토하였다. 삼국이나 조선초기 기록까지 살펴본 이유는 고려의 부족한 기록을 보완하려는 것이기도 하지만, 고려시대 전후의 맥락 속에서 의료 교류사의 전개를 이해하기 위해서였다.

고대에는 한국과 일본 사이의 교섭이 활발했던만큼, 의료 분야에서도 의료인과 약물 등의 교류가 상당히 두드러졌다. 하지만 양국의 정세로 인해 9세기 이래 한일 간의 교섭은 미약해졌다. 고려시대에 두 나라 사이의 의료는 느슨하게 연결된 채로 영향을 주고받는 정도였다. 고려시대 대일의료사의 이러한 성격은 양국 교류의 밀도가 전반적으로 낮았던 것과 부합한다. 이어서 조선이 건국되자마자 양국 교류는 역동적으로 전개되었다. 활발함과 느슨함과 격렬함으로 이어지는 고대 이래의 의료 교류사는 단속적(斷續的)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러한 ‘단속(斷續)’이 바로 동아시아의료사의 보편적인 전개 원리였다.

하지만 다른 시대보다 침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고려시대에 한일 간에 벌어진 의료 교류에 대한 정리는 필요하다. 상대적으로 느슨하게 보일 뿐 두 나라가 영향을 주고받았던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본문의 논의를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고려초기에는 양국의 공식적인 외교가 단절된 상태였으며, 의학지식 전파의 흔적을 일본측의 『의심방(醫心方)』(984년)과 『의략초(醫略抄)』(1081년)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의심방』에는 『신라법사방』ㆍ『신라법사유관비밀요술방』ㆍ『백제신집방』의 처방 5건이 인용되어 있다. 이 가운데 처방 1건은 『의략초』에서도 그대로 재인용하고 있었다. 10세기 후반~11세기 후반에 일본에서는 한국의 의학 지식을 지속적으로 활용하였다는 의미이다.

이어서 1056년 일본 사신이 고려에 도착하자 양국 사이의 교섭이 강화되었다. 이 시기에 양국 간의 교역이 증가하는 추세는 약재 교류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를테면 해조(海藻), 수은(水銀), 감귤(柑橘), 유황(硫黃) 등의 교역품이나 『고려도경(高麗圖經)』(1123년)에 보이는 일본산 복숭아[桃]ㆍ배[梨]ㆍ대추[棗] 등은 약용(藥用)되기도 한다. 특히 의료인과 관련해서는 문종 33년(1079)의 「고려예빈성대일본첩(高麗禮賓省對日本牒)」이 주목된다. 문종의 ‘풍질(風疾)’을 치료할 일본 의료인이 고려에 파견되지는 못하였으나, 일본 의료에 대해 고려는 수용할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당시 양국의 의학 교과목이 유사한 점까지 감안하면 고려와 일본에서는 의학이론과 본초학 지식을 공유하고 있었다.

1185년 일본 가마쿠라막부의 성립 이후 양국 관계는 교역선(交易船)이 매년 왕복할 정도로 개선되었다. 무역품에는 당연히 약재도 포함되었을 것인데, ‘일본 밤[栗]’과 같은 것만 기록에 남아있어서 아쉽다. 하지만 이 시기 양국 간의 의학지식 교환은 확인이 가능하다. 즉 일본의 「복고량강법(服高良薑法)」(1211년)에서는 ‘송나라 고량군(高良郡)에서 산출되는 고량강(高良薑)을 고려에서도 귀하게 여긴다’고 서술하였다. 고려와 일본에서 고량강을 치료에 실용하는 모습은 양국의 의서에서 찾아볼 수 있다.

마지막 시기는 여몽연합군이 일본을 공격한 1274년부터이다. 양국 간의 무력 충돌에 이은 왜구의 창궐로 정세가 어수선해지자 의료 교류는 가라앉을 수밖에 없었다. 기록상으로도 1378년에 이자용이 일본에 인삼을 선물했다는 것이 전부이다. 하지만 조선초기의 의료 교류를 토대로 고려말의 상황을 재구성할 수 있다. 조선에서는 일본인 평원해(平原海)의 귀순을 허용하는 한편, 조선 의관들은 숭태(崇泰)로부터 배웠다. 반면 일본 무로마치막부에서는 조선에 ‘좋은 약물들’을 요청하였고, 이어서 우황(牛黃) 등의 약재들을 구하였다. 이미 고려말에 양국 사이에서는 인삼을 비롯한 약물에 대한 큰 수요와 의료인에 대한 초빙 욕구가 축적되고 있었다는 뜻이다.

이와 같이 고려시대에 한국에서는 일본의 의료인과 약물에 관심이 있었고, 일본에서는 한국의 의학지식과 약물에 관심이 있었다. 고려와 일본 사이에서 약물ㆍ의료인ㆍ의학지식의 우열이나 선후를 따지기는 어렵다. 의료 수준을 비교할 정도로 빈번하게 접촉하지는 못한 채 각자 필요한 범위 내에서 상대국의 의료를 수용할 뿐이었다. 양국의 의료 교류가 한 방향으로만 흘렀던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이 글에서 다룬 10~14세기의 고려시대로 한정했을 때, 한국과 일본 사이의 교류는 다른 시기보다는 드물었고 침체되어 있었으며 중국 당나라의 의학을 공유하고 있었다.

아울러 한일관계를 포함한 전근대의 동아시아세계는 국가 개념 대신 정치체 개념을 활용하여 이해할 필요가 있다. 고려시대에 대마도는 일본의 지방 단위인 동시에 독자적인 교역 활동의 주체였다. 탐라 역시 고려정부의 영향력이 미치는 대상이자 독자적인 교류 활동의 주체라는 이중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고려시대의 탐라와 대마도는 지역별 주체성이 강한 정치 단위들이었다. 따라서 의사결정의 자율성이 높은 상태를 유지하면서 대외 관계를 독자적으로 판단 실행하는 행위 주체를 ‘정치체(政治體)’라고 부르고, 이 개념을 활용하여 전근대 동아시아 세계를 복합적으로 해석할 필요가 있다. 정치체 개념은 동아시아세계의 의료 교류를 입체적으로 이해하는 데도 유용할 것이다.

Notes

1)

한일관계사학회, 『韓日關係史硏究의 回顧와 展望』, 국학자료원, 2002; 한일관계사학회, 『한일관계사연구의 회고와 전망』, 景仁文化社, 2018; 민덕기, 「한국에서의 한일관계사 연구의 회고와 전망 -조선시대를 중심으로-」(北島万次ㆍ孫承喆ㆍ橋本雄ㆍ村井章介 엮음, 『한일 교류와 상극의 역사』, 景仁文化社, 2010); 이영, 「일본 중세 대외관계사 연구의 문제점과 영향」(고려대학교 일본사연구회 편, 『동아시아 속의 한일관계사』(上), 제이앤씨, 2010); 이강한, 「고려시대 대외교역사 연구의 현황과 과제」, 『이화사학연구』 47, 2013; 森平雅彦, 「10世紀~13世紀前半における日麗関係史の諸問題 -日本語による研究成果を中心に-」(日韓歴史共同研究委員会 篇, 『第2期日韓歴史共同研究報告書:第2分科会篇』, 2010); 村井章介, 「日本における日麗関係史研究:1992~2016年」(東京大学大学院人文社会系研究科韓国朝鮮文化研究室 編, 『韓国朝鮮文化研究 : 研究紀要』 17, 2018).

2)

富士川游, 박경ㆍ이상권 역, 『日本醫學史』, 법인문화사, 2006, 62쪽; 99쪽; 176쪽; 199쪽 등; 富士川游, 小川鼎三 校注, 『日本医学史綱要』 1, 平凡社, 1974, 18쪽; 25쪽; 62쪽 등. 요즘도 7세기 이전에는 일본 의료와 본초학의 기술ㆍ지식이 주로 백제에서 전파되었지만, 8세기 이후부터는 唐의 영향이 커진다고 이해하고 있다(日本学士院 編, 『明治前 日本医学史』 第1卷, 日本学術振興会, 1955, 7~18쪽; 酒井シヅ, 『日本の医療史』, 東京書籍, 1982, 32~47쪽; 傳田伊史, 「日本古代의 大黃의 貢進에 대하여」(고려대학교 일본사연구회 편, 앞의 글, 2010, 203~204쪽)).

3)

三木榮, 「日鮮中ㆍ医学交流史鳥瞰」, 『朝鮮学報』 21ㆍ22, 1961; 三木榮, 『朝鮮醫學史及疾病史』, 自家 出版, 1963, 38쪽; 107쪽 등.

4)

金斗鍾, 『韓國醫學史 全』, 探求堂, 1966, 56~58쪽 등; Kim, Doo Jong. “Transmission of Korean Medicine to Japan during the Age of the Three Kingdoms(37 B.C. ~ 680 A.D.)” Bulletin of the History of Medicine 32(3), 1958.

5)

孫弘烈, 『韓國中世의 醫療制度硏究』, 修書院, 1988.

6)

한일관계사 사료와 관련해서는 뛰어난 성과들이 존재한다. 먼저 한국의 『삼국사기』ㆍ『삼국유사』ㆍ『고려사』ㆍ『고려사절요』ㆍ『조선왕조실록』의 기록 약 2만건을 연대순으로 정리한 손승철과 『고려사』ㆍ『고려사절요』의 고려시대 기록을 집중적으로 정리한 김덕원의 작업이 있다(孫承喆, 『韓日關係史料集成』 32권, 景仁文化社, 2004; 金德原, 『韓國 中世 日本史料集成 -『高麗史』ㆍ『高麗史節要』를 中心으로-』, 景仁文化社, 2006). 일본측 사료들은 장동익의 작업과 김기섭 등의 작업이 있다(張東翼, 『日本古中世 高麗資料硏究』, 서울대학교출판부, 2004; 김기섭 외, 『일본 고중세 문헌 속의 한일관계사료집성』, 혜안, 2005). 위의 두 자료집을 서로 보완하면 일본측의 기록을 거의 누락 없이 살필 수 있다. 특히 장동익은 고려시대 동아시아 삼국 사이의 교류를 일목요연하게 연표 형식으로도 정리하였다(장동익, 『高麗時代 對外關係史 綜合年表』, 동북아 역사재단, 2009). 최근에는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일본측의 자료를 일자순으로 배치한 ‘고려 관련 일본 사료’(https://db.history.go.kr/KOREA/item/jpkrList.do)를 제공하기 시작하였다. 이 성과들은 아주 정밀하고 충실하므로 이 글 작성에 큰 도움이 되었다.

7)

일본측 기록에는 9세기 신라해적에 관한 정보가 상세하다(김기섭 외, 앞의 글, 2005, 365쪽; 367쪽; 451쪽; 453쪽; 458쪽; 481쪽; 498쪽).

8)

張東翼, 앞의 글, 2004, 440쪽; 정순일, 「‘貞觀 11년(869년) 新羅海賊’의 來日航路에 관한 小考」(고려대학교 일본사연구회 편, 앞의 글, 2010).

9)

흔히 신라해적의 횡행은 일본 지배층들이 한국에 대해 적대적 태도를 지니면서 폐쇄적인 고립주의를 취하게 되는 계기로 지적된다(이병로, 「일본 지배층의 對新羅觀 정책 변화의 고찰 -주로 9세기를 중심으로-」, 『대구사학』 51, 1996; 張東翼, 앞의 글, 2004, 48쪽).

10)

『日本紀略』 後篇2, 937년 8월 5일; 939년 3월 11일; 『貞信公記抄』, 939년 2월 15일; 940년 6월 21일(김기섭 외, 앞의 글, 2005, 519~520쪽). 고려와 일본의 국가간 공식 접촉 경과는 이미 정리되어 있다(李在範, 「13世紀 以前의 麗日關係」(한일문화교류기금ㆍ동북아역사재단 편, 『몽골의 고려ㆍ일본 침공과 한일관계』, 경인문화사, 2009, 63~65쪽)).

11)

『日本紀略』 後篇6, 972년 9월 23일; 974년 윤10월 30일; 『小右記』, 997년 6월 13일; 1019년 9월 4일(김기섭 외, 앞의 글, 2005, 521~536쪽).

12)

張東翼, 앞의 글, 2004, 48쪽; 김현우, 「10세기 일본의 정치적 상황과 한일관계」(고려대학교 일본사연구회 편, 앞의 글, 2010, 261쪽).

13)

『小記目錄』, 長徳 3년(997) 6월 13일(張東翼, 앞의 글, 2004, 75쪽); 『細川護立氏所藏文書』 「後深草上皇書狀」, 正應 5년(1292) 12월 10일(김기섭 외, 앞의 글, 2005, 635~634쪽).

14)

張東翼, 앞의 글, 2004, 184쪽.

15)

고려와 일본 정부는 모두 자신들이 대국이며 상대국은 조공국(번국)이라는 관념을 지니고 있었다(南基鶴, 「고려와 일본의 상호인식」, 『日本歷史硏究』 11, 2000; 村井章介, 손승철ㆍ김강일 편역, 『동아시아속의 중세 한국과 일본』, 景仁文化社, 2008). 역대 일본의 공식적인 입장은 한국에 대해서 事大는 허용하고 交隣은 거부한다는 것이었다.

16)

『權記』 第1, 997년 10월 1일(김기섭 외, 앞의 글, 2005, 525~527쪽).

17)

『小記目錄』 16, 寬仁 3년(1019) 8월 3일(張東翼, 앞의 글, 2004, 87쪽). “新羅者元敵國也, 雖有國號之改, 猶嫌野心之殘.”

18)

『神皇正統錄』 中, 1019년 4월 24일; 『小右記』, 1019년 9월 4일; 9월 22일(김기섭 외, 앞의 글, 2005, 529쪽; 534~535쪽).

19)

고려초기부터 일본과의 표류민 처리 기사가 꽤 많다. 929년 후백제에서 일본과 교섭하게 된 명분도 표류민 송환에 대한 감사 표시였다(김기섭 외, 앞의 글, 2005, 516쪽; 522쪽; 523쪽; 528쪽).

20)

富士川游, 앞의 글, 2006, 105쪽.

21)

『醫心方』 卷2, 針灸服藥吉凶日 第7.

22)

『醫心方』 卷10, 治積聚方 第1.

23)

『醫心方』 卷28, 用藥石 第26.

24)

『醫心方』 卷15, 治肺癰方 第13.

25)

『醫心方』 卷16, 治丁創方 第1.

26)

『醫心方』 卷16, 治丁創方 第1. “百濟新集方, 治丁腫毒氣已入心欲困死方. 取菊葉合莖, 搗絞取汁三升, 頓服之.”

27)

『醫略抄』 治丁創方 2. “百濟新集方云, 取菊葉合莖, 搗絞取汁三升, 頓服之.”

28)

『日本書紀』 卷13, 允恭天皇 3년(414); 『古事記』 下卷, 允恭天皇.

29)

『日本書紀』 卷19, 欽明天皇 14년(553); 15년(554).

30)

『日本書紀』 卷27, 天智天皇 10년(671).

31)

『日本書紀』 卷29, 天武天皇 下, 朱鳥 1년(686).

32)

「매신라물해」에 대해서는 다음 자료와 글들이 참고된다(노명호 외, 『韓國古代中世古文書硏究』(上) 校勘譯註篇, 서울대학교출판부, 2000, 464~465쪽; 윤선태, 「752년 신라의 대일교역과 「바이시라기모쯔게(買新羅物解)」 -쇼소인(正倉院) 소장 「첩포기(貼布記)」의 해석을 중심으로-」, 『역사와 현실』 24, 1997; 박남수, 「752년 金泰廉의 對日交易과 「買新羅物解」의 香藥」, 『한국고대사연구』 55, 2009; 신카이 사키코, 「8세기 중반 신라의 대일 관계 동향과 「買新羅物解」」, 『韓日關係史硏究』 67, 2020; 三上喜孝, 「한일목간에서 본 고대 동아시아의 의약문화」, 『동서인문』 17, 경북대학교 인문학술원, 2021).

33)

「종종약장」에 대해서는 다음 자료와 글들이 참고된다(朝比奈泰彦, 『正倉院藥物』, 植物文獻刊行會, 1955; 宮內庁正倉院事務所 編, 柴田承二 監修, 『図説 正倉院藥物』, 中央公論新社, 2000; 崔在錫, 「日本 正倉院 소장 한약제를 통해 본 統一新羅와 日本과의 관계」, 『民族文化硏究』 26, 1993).

34)

한편 고려초기의 약물 전파와 관련해서는 952년(고려 광종 3년) ‘新羅 照明王의 大樋皇后가 일본 長谷寺에 33종의 보물을 기증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보물 가운데는 沈香, 蘇合, 麝香, 犀角 등의 약물들도 보인다(『長谷寺靈驗記』 上 第12, 952년 3월(김기섭 외, 앞의 글, 2005, 520~521쪽)). 하지만 기록의 신빙성에 문제가 있어서 이 이야기는 설화라고 간주되고 있으며, 사찰에 대한 일회적인 기증 기록이므로 교역이라고 판단하기도 어렵다.

35)

『高麗史』 卷7, 世家7, 문종 10년(1056) 10월. “日本國使正上位權隷滕原朝臣賴忠等三十人來, 館于金州.” 이보다 5년 앞서 고려 金州에서는 상선을 통해 일본에 첩문[牒]을 보냈다(『百鍊抄』 上 第12, 1051년 7월 10일(김기섭 외, 앞의 글, 2005, 540쪽)).

36)

1019년에 여진족이 일본을 침입하여 일본인들을 납치하였고, 고려정부에서는 이들을 구출하여 일본으로 귀국시켰다. 모리 카츠미(森克己) 이래로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이 조치가 일본의 대고려자세를 누그러뜨리는 계기가 되어 문종 10년(1056)에 일본 사신이 고려에 파견되고 일본 상인들의 고려 방문도 가능하게 되었다고 이해하고 있다(李在範, 앞의 글, 2009, 162쪽).

37)

『大覺國師文集』 卷14, 「寄日本國諸法師求集敎藏疏」; 「開城 靈通寺 大覺國師 碑文」(李智冠, 『校勘譯註 歷代高僧碑文』 高麗篇 3, 가산불교문화연구원출판부, 1996, 122쪽).

38)

窺基, 『阿彌陀經通贊疏』 下 刊記(張東翼, 앞의 글, 2004, 406쪽).

39)

張東翼, 「佛典의 流通을 통해 본 高麗時代의 韓ㆍ日關係」, 『石堂論叢』 58, 2014.

40)

1073년 고려 문종대부터 한일 간의 교역이 급증하는데 교역 기록은 주로 고려측에 남아있는 점이 특징이다(李在範, 앞의 글, 2009, 73~75쪽).

41)

『高麗史』 卷9, 世家9, 문종 27년(1073) 7월. “東南海都部署奏, 日本國人王則貞松永年等四十二人來, 請進螺鈿ㆍ鞍橋ㆍ刀ㆍ鏡匣ㆍ硯箱ㆍ櫛書案ㆍ畵屛ㆍ香爐ㆍ弓箭ㆍ水銀ㆍ螺甲等物. 壹歧島勾當官, 遣藤井安國等三十三人, 亦請獻方物東宮及諸令公府. 制, 許由海道, 至京.”

42)

고려정부와 직접 교역하는 것은 송나라 상인들도 마찬가지였다(『高麗圖經』 卷26, 宮殿2, 長齡殿. “賈人之至境, 遣官迎勞, 舎館定然後, 於長齡受其獻, 計所直以方物, 數倍償之”).

43)

「고려예빈성대일본첩(高麗禮賓省對日本牒)」(노명호 외, 앞의 글, 2000, 445~446쪽). “高麗國禮賓省牒, 大日本國大宰府. 當省, 伏奉聖旨. 訪聞貴國有能理療風疾醫人, 今因商客王則貞廻皈故鄕, 因便通牒, 及於王則貞處說示風疾緣由. 請彼處選擇上等醫人, 於來年早春, 發送到來, 理療風疾. 若見功効, 定不輕酬者…….”

44)

문종대의 의원 파견 요청을 일본에서 심사숙고하다가 거절한 경과는 일본측 기록에 충실히 남아있다(張東翼, 앞의 글, 2004; 김기섭 외, 앞의 글, 2005). 이와 관련해서는 다음 글들이 참고된다(奧村周司, 「医師要請事件に見る高麗文宗朝の對日姿勢」, 『朝鮮学報』 117, 1985; 李在範, 앞의 글, 2009).

45)

李鎭漢, 『高麗時代 宋商往來 硏究』, 景仁文化社, 2011; 박종기 외, 『한국해양사 Ⅲ(고려시대)』, 한국해양재단, 2013 참고.

46)

『高麗史』 卷133, 列傳46, 우왕 4년(1378) 10월.

47)

고려와의 무역에 종사했던 일본인들은 薩摩, 筑前, 大宰府, 對馬, 壹岐 등지의 상인과 관리들이었다. 九州를 중심으로 하는 일본인 상인들은 자기 지역의 공예품과 특산품을 고려와 교역하였다(佐伯弘次, 앞의 글, 2010, 162쪽).

48)

『高麗史』 卷9, 世家9, 문종 33년(1079) 11월; 『高麗史』 卷10, 世家10, 선종 1년(1084) 6월; 선종 2년(1085) 2월; 선종 10년(1093) 7월. 金斗鍾, 앞의 글, 1966, 131쪽.

49)

『高麗圖經』 卷23, 雜俗2, 土産. “土産…… 倭國者, 亦有來禽ㆍ青李ㆍ瓜ㆍ桃ㆍ梨ㆍ棗.”

50)

『唐六典』 卷14, 太醫署 太醫令; 醫博士; 鍼博士; 『高麗史』 卷73, 選擧1 科目1, 인종 14년(1136) 11월; 『令義解』, 「醫疾令第卄四」(淸原夏野, 이근우 역주, 『영의해 역주 (하)』, 세창출판사, 2014, 244쪽). *는 針生의 교과서를 가리킨다.

51)

『高麗史』 卷25, 世家25, 원종 4년(1263) 4월. “自兩國交通以來, 歲常進奉一度, 船不過二艘, 設有他船枉憑他事, 濫擾我沿海村里, 嚴加徵禁, 以爲定約.”

52)

『平戶記』 1, 泰和 6년(1206) 2월(김기섭 외, 앞의 글, 2005, 566쪽).

53)

한국 학계에서 進奉船은 進獻下賜의 양국 관계를 가장 잘 표현해주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李鉉淙, 「高麗와 日本과의 關係」, 『東洋學』 7, 1977). 나종우는 11세기 후반에서 13세기까지 고려 우위의 정치적인 위계질서가 분명한 進奉體制가 운영되었다고 평가하였다. 진봉체제의 운영 기간에 대해서 이영은 1169~1266년으로, 장동익은 1190년대~1260년대로 제시하였다(羅鐘宇, 「高麗前期의 韓ㆍ日關係」, 『韓國中世 對日交涉史 硏究』, 圓光大學校 出版局, 1996; 이영, 『왜구와 고려ㆍ일본 관계사』, 혜안, 2011; 張東翼, 앞의 글, 2014). 일본 학계의 進奉體制(進奉貿易)에 대한 연구는 이미 1950년대부터 시작하여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森平雅彦, 앞의 글, 2010, 214~216쪽).

54)

『平戶記』 1, 1240년 4월(김기섭 외, 앞의 글, 2005, 581~583쪽).

55)

『高麗史節要』 卷15, 고종 14년(1227) 4월; 5월.

56)

『百鍊抄』 第13, 1227년 7월 21일(김기섭 외, 앞의 글, 2005, 576쪽).

57)

『水左記』, 承曆 4년(1080) 9월 4일(張東翼, 앞의 글, 2004, 105쪽).

58)

李在範, 앞의 글, 2009, 91쪽.

59)

佐伯弘次, 앞의 글, 2010, 165쪽. 더 나아가 고은미는 大宰府의 현지 책임자인 武藤氏는 범죄자에 대한 재판권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 재판권을 이용하여 고려와 교섭했으므로 대외교섭에서 발언권이 있었다고 지적하였다(고은미, 「11~13세기의 大宰府의 權限」(고려대학교 일본사연구회 편, 앞의 글, 2010)).

60)

『高麗史節要』 卷18, 원종 4년(1263) 8월. “洪泞等還自日本曰, 窮推海賊, 乃對馬島倭也.”

61)

『高麗史』 卷26, 世家26, 원종 8년(1267) 1월. “且日本素與小邦, 未嘗通好, 但對馬島人, 時因貿易, 往來金州耳.”

62)

『高麗史』 卷41, 世家41, 공민왕 17년(1368) 1월 무자; 7월 을해; 기묘; 윤7월; 11월 병오.

63)

『元史』에는 ‘고려’와 ‘탐라’가 별도 항목으로 편제되어 있다. 원에서는 고려와 탐라를 별개의 정치체로 인식했다는 의미이다(『元史』 卷208, 列傳95 外夷1). 金日宇, 『高麗時代 耽羅史 硏究』, 신서원, 2000 참고.

64)

『小記目錄』, 長元 4년(1031) 2월 19일(張東翼, 앞의 글, 2004, 91쪽); 『參天台五臺山記』, 延久 4년(1072) 3월 20일(張東翼, 앞의 글, 2004, 188쪽).

65)

『渡宋記』, 永保 2년(1082) 9월 16일(張東翼, 앞의 글, 2004, 190쪽).

66)

흔히 조선초기 조선과 일본의 관계망 특징으로 비대칭적인 放射狀을 꼽고 있다. 일본에서는 國王에서부터 商人과 中小 武士에 이르는 다양한 계층이 조선과 개별적인 관계를 맺었다는 것이다. 즉 조선-일본 쇼군 사이의 交隣關係(대등관계)와 조선-일본 기타지역 사이의 羈縻關係(상하관계)라는 이중적 구조이다(村井章介, 앞의 글, 2008; 佐伯弘次, 앞의 글, 2010). 이러한 이중구조론은 통설로 자리잡고 있다(孫承喆, 「朝鮮時代 交隣體制의 분석과 그 문제점」, 『韓日關係史硏究』 1, 1993; 민덕기, 「조선전기 ‘교린’으로 보는 대외관계」, 『前近代 동아시아 세계의 韓ㆍ日관계』, 景仁文化社, 2007).

67)

孫承喆 外, 『朝鮮ㆍ琉球關係史料集成』, 國史編纂委員會, 1998; 하우봉ㆍ손승철ㆍ이훈ㆍ민덕기ㆍ정성일, 『朝鮮과 琉球』, 아르케, 1999; 池田榮史, 「고려ㆍ조선과 류큐(琉球)의 물질문화교류」, 『대구사학』 91, 2008.

68)

『策彦和尙初渡集』 上, 1539년 5월 21일(김기섭 외, 앞의 글, 2005, 907쪽).

69)

『成宗實錄』 卷279, 성종 24년(1493) 6월 6일(무진).

70)

『成宗實錄』 卷288, 성종 25년(1494) 3월 20일(기유).

71)

張東翼, 앞의 글, 2004, 380쪽.

72)

『元亨釋書』 第7-淨禪2, 1234년(김기섭 외, 앞의 글, 2005, 580쪽).

73)

明庵榮西, 『喫茶養生記』 下(국사편찬위원회, https://db.history.go.kr/KOREA/item/jpkrList.do). “一. 服高良薑法. 此藥出於大宋國高良郡. 唐土契丹高麗同貴重之. 末世妙藥, 只是計也. 治近頃萬病必有効, 卽細末一錢, 投酒服之…….” 묘안 에이사이(明庵榮西, 1141~1251년)가 지은 『喫茶養生記』 2권은 일본 최초의 茶書로서 1211년(고려 희종 7년)에 저술되었고 3년 후에 다시 보완되었다. 『끽다양생기』에 대해서는 핫토리 도시로우(服部敏良)가 상세하게 연구하였다(服部敏良, 『鎌倉時代医学史の硏究』, 吉川弘文館, 1964, 335~388쪽; 張東翼, 앞의 글, 2004, 358~359쪽).

74)

『醫方類聚』 卷108, 霍亂門2 御醫撮要 高良薑理中丸; 『醫方類聚』 卷115, 咳嗽門2 聖惠方1 咳嗽治咳嗽短氣諸方 胡椒理中丸.

75)

『醫方類聚』 卷94, 心腹痛門3 食醫心鑑 高良薑粥方.

76)

『醫心方』 卷1, 諸藥和名 第10, 第9卷 草中之下三十九種.

77)

『萬安方』 卷48, 小兒雜病, 高良薑散(『萬安方 (全)』, 科學書院, 1986, 1245쪽).

78)

『高麗史』 卷27, 世家27, 원종 12년(1271) 1월; 원종 13년(1272) 1월; 원종 13년(1272) 12월; 『高麗史』 卷28, 世家28, 충렬왕 2년(1276) 10월.

79)

『高麗史節要』 卷18, 원종 7년(1266) 11월; 원종 8년(1267) 8월.

80)

여몽연합군의 일본 공격에 대한 일본측의 防禦 準備, 神佛 祈願, 論功行賞 기록은 장동익의 연표에서도 대표적인 사례만 수록할 정도로 많다. 그만큼 일본이 받은 충격이 컸다는 의미이다(장동익, 앞의 글, 2009, 6쪽).

81)

『高麗史』 卷41, 世家3, 공민왕 15년(1366) 11월.

82)

『高麗史』 卷133, 列傳46, 우왕 4년(1378) 10월. “遣版圖判書李子庸, 前司宰令韓國柱如日本, 請禁賊, 遺九州節度使源了浚金銀ㆍ酒器ㆍ人參ㆍ席子ㆍ虎豹皮等物.”

83)

더구나 일본이 원나라와의 교역에 집중하자 고려와 일본 사이의 교역은 더욱 위축되었다. 일본은 몽골과는 적대적 긴장 속에서도 13세기말부터 적극적인 對元貿易에 나서는 상반된 모습을 보였다(南基鶴, 「蒙古의 日本 侵略과 日本의 對應」(한일문화교류기금ㆍ동북아역사재단편, 앞의 글, 2009, 233쪽)).

84)

『太祖實錄』 卷12, 태조 6년(1397) 8월 25일(갑진); 『太宗實錄』 卷1, 태종 1년(1401) 3월 1일(경신); 『太宗實錄』 卷15, 태종 8년(1408) 1월 30일(기묘); 『世祖實錄』 卷28, 세조 8년(1462) 4월 24일(기축).

85)

『世宗實錄』 卷116, 세종 29년(1447) 5월 6일(병신).

86)

이 외에도 의술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은 일본인들이 조선측의 기록에 나온다. 단종 즉위 직후에는 일본의 사신인 喜益이 鍼灸와 醫方에 정통하다고 하자 內醫 金吉浩ㆍ鄭次良ㆍ金智에게 배우도록 하였다(『端宗實錄』 卷7, 단종 1년(1453) 7월 15일(경오)). 성종대에 조선정부에서는 대마도의 十石이 의술에 정통하며, 특히 嚴藏司가 診脈과 針灸에 능하다는 것을 파악하고 있었다(『成宗實錄』 卷142, 성종 13년(1482) 6월 10일(정미)).

87)

『太祖實錄』 卷12, 태조 6년(1397) 12월 25일(계묘); 『定宗實錄』 卷1, 정종 1년(1399) 5월 16일 (을유).

88)

『善隣國寶記』 應永 5년(1398) 8월(張東翼, 앞의 글, 2004, 507쪽).

89)

『善隣國寶記』 明德 3년(1392) 12월 27일(張東翼, 앞의 글, 2004, 506쪽).

90)

張東翼, 앞의 글, 2004, 547쪽; 김기섭 외, 앞의 글, 2005, 735쪽.

91)

『世祖實錄』 卷2, 세조 1년(1455) 12월 8일(기유).

92)

『太宗實錄』 卷1, 태종 1년(1401) 6월 18일(을해); 『太宗實錄』 卷2, 태종 1년(1401) 9월 29일(을묘); 『太宗實錄』 卷9, 태종 5년(1405) 6월 3일(정묘).

93)

『成宗實錄』 卷102, 성종 10년(1479) 3월 25일(신사). “禮曹啓日本國通信使齎去事目… 一. 我國不産藥材, 隨所聞見貿來.”

94)

『世宗實錄』 卷47, 세종 12년(1430) 3월 18일(무오).

95)

『經國大典』 卷3, 禮典 待使客.

96)

『世宗實錄』 卷78, 세종 19년(1437) 7월 19일(정미); 『世祖實錄』 卷2, 세조 1년(1455) 9월 6일(무인); 『世祖實錄』 卷8, 세조 3년(1457) 6월 10일(임인).

97)

『成宗實錄』 卷231, 성종 20년(1489) 8월 26일(신해).

98)

『中宗實錄』 卷62, 중종 23년(1528) 8월 17일(병진).

99)

예를 들어 羅公彦은 도망하는 왜구들을 추격하여 죽이고 13명을 사로잡았다(『高麗史』 卷134, 列傳47, 우왕 7년(1381) 4월).

100)

『雙梅堂先生箧藏文集』 卷22, 雜著 鄭承雨孝行狀.

101)

『高麗史』 卷134, 列傳47, 우왕 5년(1379) 7월; 『高麗史』 卷135, 列傳48, 우왕 9년(1383) 9월; 『高麗史』 卷135, 列傳48, 우왕 10년(1384) 8월; 『高麗史』 卷136, 列傳49, 우왕 12년(1386) 7월; 『高麗史』 卷137, 列傳50, 창왕 즉위년(1388) 7월; 『高麗史』 卷116, 列傳29, 諸臣 朴葳.

102)

<부록 1>은 『세종실록』 권19~22에 수록된 세종 5년(1423)의 교역 기사를 정리한 것이다. 일본의 다른 지역에서 왔더라도 도착 날짜가 동일한 경우에는 지면 관계상 하나의 날짜로 묶었다. 따라서 실제 지역별 교역 건수는 <부록 1>보다 많다.

References

1. 『高麗史』, 『高麗史節要』, 『太祖實錄』, 『定宗實錄』, 『太宗實錄』, 『世宗實錄』, 『端宗實錄』, 『世祖實錄』, 『成宗實錄』, 『中宗實錄』, 『經國大典』, 『唐六典』, 『元史』, 『日本書紀』, 『令義解』.
2. 『大覺國師文集』, 『雙梅堂先生箧藏文集』, 『高麗圖經』, 『日本紀略』, 『貞信公記抄』, 『小右記』, 『小記目錄』, 『細川護立氏所藏文書』, 『權記』, 『神皇正統錄』, 『長谷寺靈驗記』, 『百鍊抄』, 『阿彌陀經通贊疏』, 『平戶記』, 『水左記』, 『參天台五臺山記』, 『渡宋記』, 『策彦和尙初渡集』, 『元亨釋書』, 『喫茶養生記』, 『善隣國寶記』.
3. 『醫方類聚』, 『醫心方』, 『醫略抄』, 『萬安方』.
4. 김기섭ㆍ김동철ㆍ백승충ㆍ채상식ㆍ연민수ㆍ이종봉ㆍ차철욱, 『일본 고중세 문헌 속의 한일관계사료집성』 (서울: 혜안, 2005).
5. 金德原, 『韓國 中世 日本史料集成 -『高麗史』ㆍ『高麗史節要』를 中心으로-』 (파주: 景仁文化社, 2006).
6. 노명호ㆍ박영제ㆍ박재우ㆍ오영선ㆍ윤경진ㆍ윤선태ㆍ최연식ㆍ이종서, 『韓國古代中世古文書硏究』(上) (서울: 서울대학교출판부, 2000).
7. 孫承喆 外, 『朝鮮ㆍ琉球關係史料集成』 (과천: 國史編纂委員會, 1998).
8. 孫承喆, 『韓日關係史料集成』 32권 (파주: 景仁文化社, 2004).
9. 李智冠, 『校勘譯註 歷代高僧碑文』 高麗篇 (서울: 가산불교문화연구원출판부, 1996).
10. 장동익, 『日本古中世 高麗資料硏究』 (서울: 서울대학교출판부, 2004).
11. , 『高麗時代 對外關係史 綜合年表』 (서울: 동북아역사재단, 2009).
12. 국사편찬위원회 ‘고려 관련 일본 사료’(https://db.history.go.kr/KOREA/item/jpkrList.do).
13. 고려대학교 일본사연구회 편, 『동아시아 속의 한일관계사』(上) (서울: 제이앤씨, 2010).
14. 기타지마 만지(北島万次)ㆍ손승철(孫承喆)ㆍ하시모토 유(橋本雄)ㆍ무라이 쇼스케(村井章介) 엮음, 『한일 교류와 상극의 역사』 (파주: 景仁文化社, 2010).
15. 金斗鍾, 『韓國醫學史 全』 (서울: 探求堂, 1966).
16. 金日宇, 『高麗時代 耽羅史 硏究』 (서울: 신서원, 2000).
17. 羅鐘宇, 『韓國中世 對日交涉史 硏究』 (익산: 圓光大學校 出版局, 1996).
18. 南基鶴, 「고려와 일본의 상호인식」, 『日本歷史硏究』 11 (2000), 65-92쪽.
19. 무라이 쇼스케(村井章介), 손승철ㆍ김강일 편역, 『동아시아속의 중세 한국과 일본』 (파주: 景仁文化社, 2008).
20. 미카미 요시타카(三上喜孝), 「한일목간에서 본 고대 동아시아의 의약문화」, 『동서인문』 17 (2021), 177-195쪽.
21. 민덕기, 『前近代 동아시아 세계의 韓ㆍ日관계』 (파주: 景仁文化社, 2007).
22. 박남수, 「752년 金泰廉의 對日交易과 「買新羅物解」의 香藥」, 『한국고대사연구』 55 (2009), 341-391쪽.
23. 박종기 외, 『한국해양사 Ⅲ(고려시대)』 (서울: 한국해양재단, 2013).
24. 사에키 코지(佐伯弘次), 손승철ㆍ김강일 편역, 『조선 전기 한일관계와 博多ㆍ對馬』 (파주: 景仁文化社, 2010).
25. 孫承喆, 「朝鮮時代 交隣體制의 분석과 그 문제점」, 『韓日關係史硏究』 1 (1993), 188-200쪽.
26. 孫弘烈, 『韓國中世의 醫療制度硏究』 (서울: 修書院, 1988).
27. 신카이 사키코(新飼早樹子), 「8세기 중반 신라의 대일 관계 동향과 「買新羅物解」」, 『韓日關係史硏究』 67 (2020), 97-138쪽.
28. 윤선태, 「752년 신라의 대일교역과 「바이시라기모쯔게(買新羅物解)」 -쇼소인(正倉院) 소장 「첩포기(貼布記)」의 해석을 중심으로-」, 『역사와 현실』 24 (1997), 40-66쪽.
29. 이강한, 「고려시대 대외교역사 연구의 현황과 과제」, 『이화사학연구』 47 (2013), 37-81쪽.
30. 이병로, 「일본 지배층의 對新羅觀 정책 변화의 고찰 -주로 9세기를 중심으로-」, 『대구사학』 51 (1996), 149-172쪽.
31. 이영, 『왜구와 고려ㆍ일본 관계사』 (서울: 혜안, 2011).
32. 李鎭漢, 『高麗時代 宋商往來 硏究』 (파주: 景仁文化社, 2011).
33. 이케다 요시후미(池田榮史), 「고려ㆍ조선과 류큐(琉球)의 물질문화교류」, 『대구사학』 91 (2008), 47-58쪽.
34. 李鉉淙, 「高麗와 日本과의 關係」, 『東洋學』 7 (1977), 243-256쪽.
35. 張東翼, 「佛典의 流通을 통해 본 高麗時代의 韓ㆍ日關係」, 『石堂論叢』 58 (2014), 123-194 쪽.
36. 하우봉ㆍ손승철ㆍ이훈ㆍ민덕기ㆍ정성일, 『朝鮮과 琉球』 (서울: 아르케, 1999).
37. 한일관계사학회, 『韓日關係史硏究의 回顧와 展望』 (서울: 국학자료원, 2002).
38. , 『한일관계사연구의 회고와 전망』 (파주: 景仁文化社, 2018).
39. 한일문화교류기금ㆍ동북아역사재단 편, 『몽골의 고려ㆍ일본 침공과 한일관계』 (파주: 경인문화사, 2009).
40. 宮內庁正倉院事務所 編, 柴田承二 監修, 『図説 正倉院藥物』 (中央公論新社, 2000).
41. 森平雅彦, 「10世紀~13世紀前半における日麗関係史の諸問題 -日本語による研究成果を中心に-」, 日韓歴史共同研究委員会 篇, 『第2期日韓歴史共同研究報告書:第2分科会篇』 (2010).
42. 村井章介, 「日本における日麗関係史研究:1992~2016年」, 東京大学大学院人文社会系研究科韓国朝鮮文化研究室 編, 『韓国朝鮮文化研究 : 研究紀要』 17 (2018).
43. 三木榮, 「日鮮中ㆍ医学交流史鳥瞰」, 『朝鮮学報』 21ㆍ22 (1961).
44. 三木榮, 『朝鮮醫學史及疾病史』 (自家 出版, 1963).
45. 酒井シヅ, 『日本の医療史』 (東京書籍, 1982).
46. 朝比奈泰彦, 『正倉院藥物』 (植物文獻刊行會, 1955).
47. 奧村周司, 「医師要請事件に見る高麗文宗朝の對日姿勢」, 『朝鮮学報』 117 (1985).
48. 日本学士院 編, 『明治前 日本医学史』 第1卷 (日本学術振興会, 1955).
49. 服部敏良, 『鎌倉時代医学史の硏究』 (吉川弘文館, 1964).
50. 富士川游, 『日本醫學史』, 裳華房, 1904(박경ㆍ이상권 역, 『日本醫學史』, 법인문화사, 2006).
51. 富士川游, 小川鼎三 校注, 『日本医学史綱要』 1 (平凡社, 1974).
52. Kim, Doo Jong. “Transmission of Korean Medicine to Japan during the Age of the Three Kingdoms(37 B. C. ~ 680 A. D.)” Bulletin of the History of Medicine 32-3 (1958).

Appendices

Appendix 1. Records of the inflow of goods from various regions of Japan in the 5th year of King Sejong(1423)

Article information Continued

Table 1.

Comparison of medical subjects in Tang, Koryo, and Japan

국가 분과 의학 교과목
의생(醫生) 본초(本草) 갑을(甲乙) 소문(素問) 황제침경(黃帝鍼經) 맥경(脉經) 명당(明堂) 맥결(脉訣)
침생(鍼生) 본초(本草)* 갑을(甲乙)* 소문(素問)* 황제침경(黃帝鍼經)* 맥경(脉經)* 명당(明堂)* 맥결(脉訣)* 유주도(流注圖)와 언측도(偃側圖) 등* 적오신침경(赤烏神針經) 등*
고려 의업(醫業) 본초경(本草經) 갑을경(甲乙經)* 소문경(素問經) 침경(針經)* 맥경(脈經) 명당경(明堂經)* 난경(難經)* 구경(灸經)*
주금업 (呪噤業) 칠권본초경(七卷本草經) 침경 (針經)* 맥경 (脈經) 명당경 (明堂經)* 유연자방 (劉涓子方) 창저론 (瘡疽論)
일본 본초 (本草) 갑을 (甲乙) 소문 (素問)* 황제침경 (黃帝針經)* 맥경 (脈經) 명당 (明堂)* 맥결 (脉訣)* 유주도 (流注圖)* 적오신침경(赤烏神針經)* 소품방 (小品方) 집험방 (集驗方)
언측도 (偃側圖)*
번호 날짜 지역과 주체 유입 물품
1 1월 1일 구주총관(九州摠管) 원의준(源義俊) 소목(蘇木) 1,000근(斤) 등
2 1월 12일 일향(日向)ㆍ대우(大隅)ㆍ살마(薩摩) 3주(州)의 태수(太守) 조신(朝臣) 원구풍(源久豐), 축주관사(筑州管 事) 평만경(平滿景) 유황(琉黃) 3,000근 등
3 1월 28일 전(前) 구주총관(九州摠管) 원도진(源道鎭), 준주태수(駿州太守) 원성(源省), 비주태수(肥州太守) 원창청(源 昌淸) 유황 5,000근
4 2월 5일 좌위문대랑(左衛門大郞) 수우각(水牛角) 8본(本) 등
5 2월 26일 하송포(下松浦) 지좌(志佐), 일기주태수(一岐州太守) 원중(源重) 소목 800근 등
6 5월 19일 관서도(關西道) 구주부(九州府) 석성(石城) 식부소보(式部小輔) 원준신(源俊臣) 유황 1,500근 등
7 5월 25일 구주도원수(九州都元帥) 원의준(源義俊), 축주부(筑州府) 석성관사(石城管事) 평만경(平滿景), 작주(作州) 전(前) 자사(刺史) 평상가(平常嘉), 구주(九州) 전(前) 총관(摠管) 원도진(源道鎭) 유황 1,000근 등
8 6월 3일 왜인(倭人) 등차랑(藤次郞)의 모친, 삼미삼보라(三味三寶羅) 단목(丹木) 300근 등
9 6월 15일 좌위문대랑(左衛門大郞) 유황 2,300근 등
10 6월 21일 평만경(平滿景), 원도진(源道鎭), 원의준(源義俊), 원준신(源俊信), 상가(常嘉) 단목 1,000근 등
11 6월 26일 대마주(對馬州) 대관(代官) 야마다로중구(野馬多老重久) 단목 1,200근 등
12 7월 11일 원의준(源義俊), 평만경(平滿景) 유황 5,000근 등
13 9월 18일 구주(九州) 전 총관(摠管) 원도진(源道鎭), 축주부(筑州府) 석성관사(石城管事) 평만경(平滿景) 부채[扇子] 150자루[把] 등
14 9월 24일 축전주태수(筑前州太守) 등원만정(藤源滿貞), 비주자사(備州刺史) 지상대장씨종(砥上大臧氏種), 좌위문대 랑(左衛門大郞) 유황 2,500근 등
15 10월 4일 대마주(對馬州) 태수(太守) 종정성(宗貞盛) 빈랑(檳榔) 126근 등
16 10월 15일 구주(九州) 다다량덕웅(多多良德雄), 축전주관사(筑前州管事) 평만경(平滿景) 홍직금단자(紅織金段子) 1필 등
17 10월 18일 구주(九州)의 원의준(源義俊)ㆍ평상가(平常嘉)ㆍ원창청(源昌淸) 유황 5,000근 등
18 10월 25일 일본국 원의준(源義俊)ㆍ평만경(平滿景)ㆍ원성(源省)ㆍ좌위문대랑(左衛門大郞) 서각(犀角) 4본 등
19 10월 27일 일향(日向)ㆍ대우(大隅)ㆍ살마주(薩摩州) 태수(太守) 수리대부장작(修理大夫匠作)인 원구풍(源久豐)ㆍ원귀 구(源貴久) 유황 8,000근 등
20 11월 17일 일본국 원의준(源義俊) 유황 5,000근 등
21 11월 24일 일본국 원도진(源道鎭), 평만경(平滿景) 유황 5,000근 등
22 12월 25일 일본국왕의 사신 규주(圭籌)ㆍ범령(梵齡)과 도선주(都船主) 구준(久俊) 등, 대마주(對馬州) 좌위문대랑(左衛 門大郞) 침향(沈香) 30근 등
23 12월 27일 일본 사신인 규주(圭籌)ㆍ범령(梵齡) 기린혈(麒麟血) 1근 등
24 12월 28일 구주(九州)의 전 도원수(都元帥) 원도진(源道鎭) 유황 13,000근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