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민참여로 마을의 건강을: 1970-80년대 마을건강원 활동과 보건의료에서의 주민참여 논쟁
Community Health by People’s Involvement: the Characteristics and Dilemma of Community Participation in Community Health Projects of the 1970-80s,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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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This paper aims to historically re-evaluate the issues surrounding resident participation in health care and its legacy by examining the community participation in health care. In the 1970s and 1980s, community participation was one of crucial trends and a controversial topic in the international health as well as the international aid. Throughout the 1970s, local participation was regarded as one of essential elements for the access to basic healthcare and primary health care in developing countries. Community health projects which aimed to apply primary health care were implemented in rural areas and some urban areas in the 1970s and 1980s. Village Health Workers(VHWs) were a symbolic example of community participation in these projects. They consisted of local women and led health activities with simple skills in their villages. They served as a bridge between the project team and the residents. Health professionals expected them to be health leaders for “self-help” in health of their communities. In the mid-1980s, however, as the number of health facilities and professional health care workers increased, the activities of VHSs were decreased. The mixed understanding of the responsibilities and roles of VHSs among the health professionals affected the skeptical view on the achievement and effects of community participation in health care. In the mid-1980s, as the government officially organized the VHWs, the dilemma surrounding community participation intensified. When the community health projects were ended, most of the VHW organizations were also disbanded. After the projects, the spirit of community participation was only inherited by some healthcare movement organizations, such as medical cooperatives.
1. 머리말
1978년 알마아타에서 열린 세계보건기구(WHO)의 국제보건회의에서는 건강권을 인간의 기본권으로 강조하며 일차보건의료(primary health care)1)을 통해 “2000년까지 모든 사람에게 건강을(Health for All by the year 2000)” 달성할 것을 선언하였다. 알마아타 선언에 따르면 일차보건의료는 개인과 가정, 지역사회가 최초로 접하는 보건의료의 첫 단계로서 해당 국가와 지역사회의 경제적, 사회문화적 조건을 고려한 방법과 기술을 통해 필수적인 보건의료를 실시하는 것을 의미한다(WHO, 1978: 3). 또한 일차보건의료는 사회정의 정신에 입각한 개발의 일부로서 보건의료에 대한 보편적 접근성과 형평성을 높이기 위한 중요요소이다. 선언에서는 지역사회 구성원들의 “완전한 참여(full participation)”를 일차보건의료를 실현하기 위한 중요한 전략이자 철학으로 제시하였다(WHO, 1978: 3). 지역사회의 자원을 최대한 활용하면서 지역사회의 주요한 건강 문제들을 다루기 위해서는 지역주민의 주체적인 참여가 요구된다는 것이었다. 이처럼 알마아타 선언은 이전까지 지역별로 산발적으로 시도되고 있던 보건의료사업에서의 주민참여를 보건의료정책의 중요원칙으로 공식화했다.
이와 같은 알마아타 선언의 배경은 한국에서 나타나고 있었던 일련의 흐름과 무관하지 않았다. 1960년대 후반부터 한국에서는 보건의료사업에서 지역사회 중심의 사업, 지역주민들의 참여(community participation)에 기반한 사업을 강조한 지역사회보건사업(community health project)이 여러 지역에서 실시되었다. 이 사업들의 경과와 성과는 사업을 지원한 원조기관들을 통해 사업 시작단계에서부터 국제사회에서 공유되었다.2) 1970년대 의과대학·병원과 국책기관 등에서 실시한 사업의 내용들은 알마아타 선언 이후 정부 보건정책으로 반영되었다. 일례로 지역사회보건사업의 주민참여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인 마을건강원(Village Health Worker)3)은 1980년대 중반 보건정책으로 정식 반영되어 전국에 보건진료소가 설치된 지역에서 공식적으로 선발하고 활동하도록 규정하였다. 최근까지도 지역에 따라 마을건강원들이 정기적으로 지역사회 건강관리와 관련한 교육을 받고 활동하고 있다.
하지만 일부 보건전문가와 행정 종사자들을 제외하면 1970-80년대에 보건의료사업에서 주민참여 시도가 있었고, 오늘날까지 제도로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1980년대 후반 전국민 의료보험 제도가 실시되고 대다수 시범사업이 종료된 1990년대 초반 이후 오랫동안 지역사회보건사업은 사실상 ‘잊혀진’ 사업이 되어 거의 논의되지 않았다. 2000년대 중반 이후부터 지자체 단위에서 참여형 건강증진사업이 시행되고 일차의료 강화를 둘러싼 논의가 재부상하면서 1970-80년대 지역사회보건사업의 주민참여 경험을 다루기도 하지만, 현 보건사업의 기원을 설명하기 위한 전사(前史)로 언급되는 정도에 그치고 있다 (조병희, 2010: 2-4; 김새롬, 2019: 4-6).
지역사회보건사업과 보건의료에서의 주민참여 경험이 잊혀진 과거로 남은 이유는 대부분의 시범사업이 종료된 1990년대 이후 일차보건의료사업의 지속성이 약화되었고 지역사회보건사업에서 시도한 보건의료의 주민참여가 사실상 실패한 것으로 평가되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김대희, 1990; 김용익, 1992). 대표적으로 김용익은 1990년대 초 시범사업이 마무리되는 시점에 주민참여 개념이 자원동원적인 것과 주민소외현상을 극복하기 위한 개념이 혼재되어 있음을 지적하면서 한국에서 “보건의료 주민참여의 시도 중 살아서 기능하는 기전은 거의 없다”고 평가했다(김용익, 1992: 97). 그의 평가처럼 1980년대 후반 1990년대 초반에 걸쳐 기존에 결성되었던 보건의료 주민참여 조직은 대부분 해체되거나 형식적으로 남았다.
하지만 성패에 초점을 맞추면 사업이 지니는 역사성에 대해서 평가하기 어렵다. 1970-80년대에는 지역사회보건사업을 비롯해 다양한 지역사회 활동들이 전개되고 있었다. 대표적으로 새마을운동의 경우 그 성패에 대한 상반된 평가가 존재하는데, 실패로 평가한다고 할지라도 다양한 사례연구와 분석을 통해 그 의미를 다층적으로 논하는 연구들이 축적되고 있다.4) 중국 ‘맨발의 의사’(赤脚医生)에 대한 역사적 연구와 평가가 분과학문을 넘나들며 계속되고 있는 것처럼(Fang, 2012; Li, 2015; Gross, 2018) 한국의 경험에 대해서도 보건의료 전문가의 관점 외에 다양한 시각에서 분석하면서 논의를 확장할 필요가 있다.
전반적인 연구의 부재 속에서 1970-80년대 보건의료사업에서 주민참여가 지니는 다층적 성격에 대해서도 제대로 규명되지 못하고 있다. 1960-80년대 보건의료사업에는 권위주의적인 독재 정권의 성격을 반영한 상명하달식의 관제적인 정책이라는 이미지가 강하게 자리잡고 있다(신영전, 2010: 53-56). 하지만 이 시기 보건의료사업들이 모두 관제적 성격을 띠고 있었던 것은 아니며, 민주적·상향식 보건의료사업을 구상하며 실천하려는 시도도 있었다. 1970년대를 전후로 농촌에서는 새마을운동뿐만 아니라 협업농장, 협동조합운동 등이 함께 전개되고 있었고 그 중 일부는 진보적 농촌운동·농민운동으로 이어졌다. 지역사회보건사업에서의 주민참여활동 또한 새마을운동과 유사하게 하향식 조직과 활동이 이루어진 지역이 있는 반면, 상향식 주민조직 구성과 참여활동을 시도한 곳들도 있었다. 지역사회보건사업의 경험이 진보적 사회운동과 결합하여 의료협동운동으로 발전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차이는 사업의 주도세력과 원조기관, 지역사회의 특성에 따른 것이었고, 1970년대와 1980년대 시기별 지역사회의 보건의료 환경의 변화를 반영한 것이기도 했다. 이와 같은 지역별·시기별로 나타나는 보건의료 주민참여 양상의 차이와 그 의미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가족계획사업과 결핵관리사업, 기생충박멸사업 등에 대한 연구가 축적되면서 1960~1980년대에 진행된 주요한 공중보건사업들의 양상과 성격이 다층적으로 규명되고 있다(정준호·박영진·김옥주, 2016; 정준호·김옥주, 2018; 조은주, 2018; 권오영, 2019; 김지민, 2020; 박승만, 2021). 최근 연구들은 그동안 집중되어 있던 보건사업의 국가주도성에 대한 논의에 그치지 않고 민간단체와 전문가, 원조기구의 역할에 대해서도 비중있게 다루고 있다. 그러나 대다수의 연구에서 1960~70년대의 연속성에 초점을 두고 있어, 1970년대를 전후로 나타난 새로운 보건의료사업의 흐름을 파악하고 보건의료를 둘러싼 주민참여의 성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변화된 한국의 사회경제적 조건과 원조 환경, 그에 따른 보건사업의 방향 전환에 대한 추가적인 분석이 필요하다.5)
2010년대 초 지역보건 전문가들이 지역보건 60년의 역사를 정리하며 시범사업들의 역사를 정리하여 모으고 주요 종사자들의 회고를 기록한 출판물은 보건전문가들의 입장만을 반영하고 있다는 한계는 있으나 지역사회보건사업의 실시 배경과 사업의 전개 양상을 구체적으로 이해하는 데 중요한 참고가 된다(지역보건의료발전을위한모임, 2012). 최근 특정 지역 시범사업 양상을 분석하여 지역주민들의 참여양상과 시범사업팀과의 관계, 주민들의 반응 등을 검토한 연구도 생산되고 있다(정다혜, 2021). 하지만 다른 지역사회보건 시범사업들이나 여타 지역사회개발사업들과의 관계를 파악하지 못했다는 한계가 있다.
이에 본 연구에서는 1970년대를 전후로 보건의료에서 지역사회 참여가 강조되고 지역주민들이 보건의료 활동의 주체로 등장하는 과정을 지역사회보건사업을 중심으로 살펴보되, 그 중에서도 마을건강원의 활동에 주목하여 그 양상과 성격을 규명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먼저 1970년대 개발도상국에 대한 원조에서 주민참여가 강조되는 맥락을 살펴보고 이것이 의학계의 지역사회의학 논의가 부상하는 맥락과 연관되어 있음을 밝힐 것이다. 그리고 지역사회의학에 입각해 진행된 지역사회보건사업에서 마을건강원이 조직되고 활동하는 양상을 살펴볼 것이다. 이를 토대로 1980년대 시범사업이 안정화되고 확대되는 과정에서 나타난 보건의료 환경의 변화와 주민참여를 둘러싼 논쟁의 내용을 분석하고자 한다. 특히 마을건강원을 비롯한 주민들의 역할에 대한 서로 다른 이해와 실천이 어떤 딜레마를 초래하고 있었는지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마을건강원이 정부 정책으로 제도화되는 1980년대 중반 이후 기존 사업의 주민참여의 동력은 오히려 약화된 반면, 정부 정책과 기존 시범사업 외부에서 주민참여를 강조한 보건의료운동이 부상하였음을 설명할 것이다. 이를 통해 1970-80년대 부상한 주민참여 이슈가 보건의료 영역에서 어떤 역사적 의미를 지니는지 고찰해보고자 한다.
2. 1970년대 주민참여 담론의 부상과 의학계의 지역사회의학 논의
한국에서 지역사회와 주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강조하고 이를 기반으로 보건의료체계를 수립하려는 움직임이 시작된 것은 1970년 무렵부터였다. 물론 그 이전에 보건의료의 불균형 문제를 해결하고자 치료와 예방활동을 벌이고, 지역 특성을 고려한 의료활동과 연구를 수행한 사례가 부재했던 것은 아니다. 대표적으로 이영춘은 일제시기부터 1960년대 후반까지 전라북도 개정(옥구) 지역을 중심으로 농촌주민들의 보건의료 문제 해결을 위해 진료소와 간호학교를 세우고, 농촌위생 연구를 실시했다(박윤재, 2003; 2009; 최원규, 2021). 그러나 1960년대까지의 지역사회를 대상으로 한 보건의료 사업들은 사업주체들의 의료제공과 공중보건활동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고, 주민들을 사업의 주체로 삼는다는 개념은 부족했다. 한편 1968년부터 전국 규모로 지역마다 조직된 가족계획어머니회의 경우 보건사업에 지역 여성들을 적극 활용한 사례로서 주목할 만하다(배은경, 2012; 조은주, 2014). 그러나 가족계획어머니회는 경구용 피임제 보급을 비롯해 1960년대 초반부터 전국적으로 시행되고 있던 가족계획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하향식으로 조직된 것으로, 지역사회의 고유성이나 참여의 가치에 초점을 두지는 않았다.6)
그에 비해 1960년대 후반에서 1970년대 초반에 본격적으로 시작된 지역사회보건 시범사업에서는 지역사회의 사정을 고려한 사업내용과 그 지역의 자원을 최대로 활용하는 방안 마련을 강조했다. 보건의료 서비스를 일방적으로 제공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지역주민을 사업에 주체적으로 참여하도록 하고, 그들의 의견을 수용하여 주민들의 보건의료 요구에 맞는 사업을 실시하는 것을 중요한 목표로 삼았다. 이러한 시범사업들은 대부분 외국 원조자금을 바탕으로 실시되었다. 세계교회협의회(WCC: World Council of Churches) 산하의 기독교의료연구회(CMC: Christian Medical Commission)를 비롯한 기독교 선교·구호단체들, 세계보건기구(WHO), 독일개신교해외개발원조처(EZE: Evangelische Zentralstelle für Entwicklungshilfe E.V.), 독일기술협력청(GTZ: Deutsche Gesellschaft für Technische Zusammarbeit), 미국 국제개발처(USAID)와 같은 원조기구들은 의료선교사나 선교병원, 대학, 국책기관 등 다양한 주체들의 지역사회보건사업을 지원하면서 공통적으로 지역사회 참여를 강조하였다. 대표적으로 EZE는 지역사회보건사업 실시를 위해 지역주민들이 신용협동조합을 결성하고 운영하는 데 자금을 지원하였다. 이 때 EZE는 자금의 일정 비율 이상은 지역주민들의 자발적인 기여로 조성할 것을 조건으로 지원하였다(설대위, 1998: 193). USAID도 지역사회보건 시범사업을 포함해 보건체계 마련을 위한 차관을 제공하였는데, 사업을 실시할 때 지역사회의 참여와 주민들의 주도성을 이끌어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7)
지역사회보건사업은 정부의 여러 정책에도 불구하고 갈수록 심화되고 있던 한국의 의료격차와 의료자원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의료전문가들이 실천방안을 실험적으로 실시하면서 시작되었다. 여기에 1960년대 후반부터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들의 원조정책이 전환되기 시작하고, 국제보건 차원에서는 ‘지역사회의학’이 부상함에 따라 지역사회보건사업에 대한 여러 원조기관의 관심과 지원이 확대되는 조건이 마련되었다.
해방 후 1950년대 중반까지 한국에 대한 외국 원조가 탈식민 신생독립국가에 대한 지원과 전쟁의 피해 복구 및 재건에 초점을 맞춘 구호원조였다면, 1950년대 후반 이후부터 1960년대에 걸쳐 제공된 원조는 근대화 전략에 호응하는 경제 개발 원조가 주를 이루었다. 1960년대 원조자금은 개발원조가 경제성장을 견인한다는 가정하에 기간산업 및 수출산업 분야, 그리고 사회간접자본에 집중적으로 투입되었다. 적어도 1960년대 초반까지 국제적으로 근대화전략은 산업화와 경제성장을 통해 빈곤에서 탈피한다는 낙관론에 기대고 있었다(김상현, 2019: 288). 1960년대 제1차 및 제2차 경제개발계획을 거치며 높은 경제성장률을 보여준 한국의 사례는 이를 증명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의 경제성장은 빈부 격차와 도시와 농촌간의 격차를 심화시켰고 여러 사회문제들을 초래했다. 국제적으로는 경제원조에도 불구하고 남반구와 북반구의 격차는 오히려 심화되고 제3세계의 빈곤문제는 악화되었다. 1960년대 후반 라틴아메리카에서는 기존의 구조적 모순을 개혁하기를 요구하는 혁명적 분위기가 형성되었고, 베트남전쟁을 목도하며 유럽에서는 68혁명이, 미국에서는 인권운동이 일어났다.
이러한 움직임은 기존의 개발도상국에 대한 개발 노선과 세계질서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로 이어졌다. 미국을 비롯한 서구 ‘제1세계’ 국가들은 경제개발 일변도로 진행되어 온 개발원조의 실효성에 대한 의문, 베트남 전쟁개입에서 극명하게 드러난 냉전적 개입의 도덕적 정당성에 대한 비판에 대응해야 했다. 이러한 가운데 1970년대 개발원조는 ‘인간개발’(human development)과 ‘사회개발(social development)’, ‘인도주의 구호(humanitarian relief)’를 강조하는 것으로 변화한다. 그것은 1950년대부터 이어온 기술원조 및 기술협조(technical cooperation)의 노선과 1960년대부터 강조한 ‘개발’이라는 방향성은 유지하되 개발 방향에서 인도주의와 사회정의를 강조하는 것이었다. 특히 양적 경제성장을 통한 낙수효과를 기대하는 대신, 가난하고 소외된 집단들을 대상으로 인간의 ‘기본적 욕구(Basic Needs)’ 즉, 최소한의 식량, 주택, 보건의료, 교육 등을 충족시켜 절대적 빈곤을 해결함으로써 개발의 불균형을 해소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 과정에서 수원국의 의사를 반영한 원조를 실시하고, 기존에 개발에서 소외받고 배제되었던 사람들을 개발과정에서 적극적인 참여자로 포함시킬 것을 강조했다.
이러한 기조는 미국 정부, 국제연합(UN: United Nations)·세계은행을 비롯한 국제기구들, 여러 민간원조기구들의 원조정책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났다. 미국은 1966년과 1973년 두 차례에 걸쳐 대외원조법(Foreign Assistance Act)을 개정하였다. 이에 따라 미국 국제개발처(USAID: United States Agency for International Development)는 ⓵식량 및 영양, ⓶인구와 보건, 그리고 ⓷교육과 인적자원 세 분야의 개발에 집중해 원조를 제공하고 빈곤한 다수를 타겟으로 한 사업을 통해 선택된 소수가 아닌 모든 사람들에게 경제 성장의 수혜가 보장될 수 있도록 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의료 및 교육부문에 대한 원조 대상은 도심 지역보다는 낙후되고 가난한 지역으로 옮겨갔다(USAID, 1975a: 3).
기본적 욕구 충족을 지원하는 전략은 참여에 대한 지향과 결합되어 있었다. UN은 대중들의 참여가 자발적이고 민주적인 개입을 내포하고 있으며 경제개발 및 사회개발사업의 목표 수립과 정책 구상, 계획과 실행 등 의사결정에 사람들이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개발의 이익이 공정하게 분배되고, 참여자들은 본인들의 의사결정 역량을 자각하게 될 것으로 기대했다(United Nations, 1975; Midgley, 1986: 26). 국제노동기구(ILO: International Labour Organization)는 기존의 개발전략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1969년 세계고용프로그램(WEP: World Employment Programme)을 도입했다. WEP는 고용이 빈곤 및 불평등 문제와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고 보고, 개발계획에서 절대적 수준의 기본적인 욕구 충족을 우선할 것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의사결정 과정에 대중들의 참여가 중요하다는 점을 지적했다. 기본적인 욕구 충족과 참여의 관계는 1976년 WEP 총회에서 강조되었다. 교육과 건강과 같은 기본적인 욕구의 충족이 대중들의 참여를 증진시키고, 참여가 다시 이러한 개발 전략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었다(International Labour Office, 1976). 이후 의사결정에서의 대중참여 문제는 기구 내의 주요한 논의 주제로 부상하였다(Majeres, 1977).
물론 인도주의와 이상적인 참여 개념에 기반한 원조 논리가 냉전정치의 권력 관계의 전환을 의미한다거나 한국을 포함한 개발도상국의 현실을 우선적으로 고려한 것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원조기구들에서 인도주의적 개발과 민주적 참여를 강조했지만 이 또한 어디까지나 새로운 세계질서를 요구하는 제3세계의 압력에 대한 냉전적인 대응이자 원조 축소를 요구하는 1970년대 서구사회 내부의 경제적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과정에서 나온 논리였다. 원조당국은 사회주의적인 소득재분배를 경계하면서도 대중들의 경제·사회개발에 참여할 수 있는 공정한 기회를 보장하여 공정하고 균형있는 개발을 달성할 수 있는 체계를 구축할 것을 강조했다. 자본주의적인 방식으로 개발의 불균형을 해소하여 사회안정을 유지함으로써 개발도상국이 원조 축소를 감당하며 ‘자립(self-reliance)’하기를 바랐다. 참여 논리가 부각되는 사업들의 이면에는 언제나 대외원조의 감축이라는 국면에 대응하기 위한 ‘자조(self-help)’와 자립의 강조가 동반되었다.
이와 같이 1960년대 후반 이래 세계적으로 사회정의와 ‘인간적 개발(발전)’에 대한 논의가 확산되고 있던 국제적 상황에서 보건의료계에서도 개발도상국에 대한 의료공급과 의학교육의 새로운 대안을 마련하려는 시도가 진행되었다. 개발도상국을 대상으로 한 의료사업이 변화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은 1960년대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국제적으로 공유되기 시작했다. 공통적으로 보건의료 전문가들은 전통적인 의료가 과학기술적으로는 큰 발전을 이룩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따른 의료비 상승으로 인해 상당수의 세계 인구가 의료혜택을 받지 못한다고 지적였다. 그들은 개발도상국을 대상으로 한 의료는 산업화된 선진국과 다른 방식으로 제공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각 나라의 환경에 맞는 기술을 활용하고, 사회경제적 조건을 고려하여 통합적으로 접근하는 것, 그리고 의료인력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지역사회와 비전문가 보조인력들을 활용하는 것이 핵심적으로 제기된 대안들이었다(King ed., 1966; Bryant, 1969).
대표적으로 1960년대 중반 독일 튀빙겐에서 모인 의료선교사들은 기존에 탈식민 독립국가, 개발도상국에서 그들이 진행되고 있는 보건의료사업을 비판적으로 평가했다. 그들은 교회와 연관된 보건 프로그램의 95%가 치료중심이며 그로 인해 취약집단의 20% 정도만이 근대적인 의료에 접근할 수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분석했다. 이것은 그들이 섬겨야 할 약자들의 건강 요구들을 충족시키는 데 실패했다는 평가로 이어졌다(Braley, 2014: 305). 1960년대 록펠러재단을 통해 개발도상국 건강문제를 연구한 브라이언트(John H. Bryant)도 많은 저개발국·개발도상국들이 미국·영국·프랑스와 같은 서구의 의료제도와 의학교육, 즉 첨단 의료기술에 의존한 치료의학 모델을 모방하였으나, 그것은 적합하지 않은 방식이었다고 지적했다(Bryant, 1969: 6). 인력과 재원이 부족하고 사회경제적으로 열악한 상황에서는 치료기술이 발달했다 할지라도 수많은 사람들이 간단하게 예방가능하고 치료가능한 병으로 죽어가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개발도상국이 처한 보건의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기존 모델이 아닌 그 지역의 문화와 사회경제적 특성에 부합하는 제도와 체계를 모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와 같은 문제의식은 의사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고 ‘지역사회의학’으로 의학교육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주장으로 이어졌다. 1968년 록펠러재단의 후원으로 이탈리아 벨라지오에서 열린 국제회의에서는 아프리카, 아시아, 남미, 유럽, 북미 등 9개국에서 22명의 보건의료 관련 관료 및 의과대학 교수들이 참석하여 여러 개발도상국의 의과대학에서 실시하고 있는 지역사회의학 프로그램에 대해 발표하고 토론하였다. 이 자리에서 록팰러재단의 라뎀(Willoughby Lathem)은 의과대학이 의사의 생산에만 관심을 쏟고 의료의 대상인 대중과 사회적 요구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지 않았다고 지적하면서, 의과대학의 사회에 대한 무관심은 의사들이 입원환자 개개인의 질병 치료에만 관심을 두었던 것과 연관되어 있다고 주장하였다(Lathem et al., 1970: 1-3). 그는 급변하는 시대에 사회적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서는 의사들이 사회적 책임감을 가져야 하며, 개인뿐 아니라 인구집단을 치료하는 능력과 기술을 갖추고 교육하여 의료제도를 개선해야 한다고 보았다. 의료를 필요로 하는 인구집단에게 충분하고 적절한 의료 혜택을 제공할 수 있는 의료분배제도를 연구하고 이를 위한 교육제도를 갖춰야 한다는 것이었다.
각 국가와 지역에 맞는 보건의료체계를 통해 현재의 의료불균형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지역사회의학의 전제는 한국의 보건의료 문제를 해결해야 하기 위한 근본적인 대책 마련을 고심하고 있던 한국의 보건의료 전문가들에게도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무의촌(無醫村)’은 의료인력과 의료자원의 부족 문제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해방 직후부터 해결해야 할 핵심적인 사회문제로 제기되고 있었다. 1950년대까지 만들어진 각종 정책들이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가운데, 5·16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부는 군정기부터 ‘의료균점(醫療均霑)’을 주요 국정목표로 내세우며 의료불균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여러 조치들을 시행한 바 있었다. 의료기관 개설허가제, 의사동원령 같은 강력한 규제를 시도하고, 한지의료업자들에 대한 승격 조치 등도 실시하였다(이주연, 2010). 하지만 강제적인 규제조치로 의료시설과 인력의 도시집중과 농어촌의 절대적인 공급 부족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한계가 있었다. 정부의 규제조치들이 시행될 때마다 여러 언론들은 공의들의 실태를 다룬 기사나 좌담, 의사들의 칼럼, 언론사 사설 등을 통해 정부의 동원정책의 문제를 지적하며 근본적인 대안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꾸준히 제기하였다.8)
결국 1969년 시점까지 전국 1,474개 읍·면 중에 의사가 없는 면은 약 44%인 641개였고, 치과의사나 한의사가 없는 ‘순무의면’도 약 37%인 359개면에 달하고 있었다(보건사회부, 1970: 158-159). 급속한 산업화·도시화에 따른 농촌 피폐화, 도시빈민 급증 등의 사회 문제들이 불거지고 있던 상황에서 의료시설과 의료인력 부족 문제는 단순한 자원 부족 문제에 그치지 않고 빈부격차, 농촌 소외 문제로 비화되었다. 보건의료 불균형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것은 비단 정부만의 고민은 아니었다. 의료계 내에서도 의료비 상승, 병원간 경쟁 심화, 병원의 상업화 경향에 대한 대중들의 비판에 대응할 필요가 있었고, 인권평등이나 의료의 기회균등에 대한 사회적 요구에 응답해야 한다는 책임의식이 일고 있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보건의료제도 개선을 고민하던 의과대학의 교수들과 의료 선교사들은 1960년대 후반 지역사회의학에 입각한 지역사회보건사업이 실시되는 것에 관심을 기울였다.
지역사회의학을 한국에 적용하는 실험은 의료선교사로 대구 동산병원에서 일하던 시블리(John R. Sibley)가 처음 시도하였다. 그는 1968년부터 사업을 실시하기 위한 준비작업을 시작했고, 지역주민들과의 협의를 거쳐 1969년부터 거제군 북부에 위치한 3개면(하청·연초·장목면)을 대상으로 지역사회보건사업을 실시하였다.9) 그는 의료가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이며, 누구나 용이하게 기초적인 의료혜택을 받을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보건의료사업이 실시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지역사회의 일차적인 의료사업이 기초가 되어야 기존의 의료공백을 메울 수 있다는 것이었다(거제지역사회개발보건원, 1974: 6-10). 또한 그는 간단한 예방과 보건지식이 있었더라면 염려가 없었을 환자들이 전체 환자중에서 큰 비율을 차지하고 있고, 비싼 의료비를 지불하고 전문의들의 고급 의료기술이 필요한 질병은 일부에 불과한 현실을 고려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에 지역사회의 필요에 맞는 포괄적인 의료사업을 진행하되, 부족한 의료자원은 지역사회의 가용자원을 최대한 활용하여 간단하고 최소한의 기술로도 주민들의 보건을 향상시킬 수 있는 의료체계를 만들고자 했다(Sibley, 1972).
특히 거제 사업은 지역주민들을 훈련시켜 간호보조원과 ‘마을건강지원자’로 활용하면서 주목을 받았다.10) 이중에서 마을건강지원자는 마을 사정을 잘 아는 중년 여성들로 구성되어, 각 마을의 세대들을 정기적으로 방문하여 건강상태를 체크하고 예방접종과 가족계획, 보건교육에 보조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거제 사업을 재정적·기술적으로 지원한 기독교의료위원회(CMC)의 바로우(R. Nita Barrow) 의장과 포브스(Colin Forbes) 박사는 1977년 내한하여 그간의 사업을 평가하였는데, 그들은 여러 사업 내용 중에서도 마을건강지원자들의 활동을 높이 평가했다. 지역주민들에 대한 훈련과 그들의 사업 참여가 국제적으로 지역사회의학과 일차보건의료 확산에 자극이 되는 좋은 사례라고 보았다. 의료선교 차원에서도 하나의 모범사례로서 국제적으로 널리 공유해야 한다고 평가했다(John R. ed, 1982: 106-107).
거제에서의 새로운 보건의료사업 시도는 다른 지역으로 지역사회보건사업이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한국의 몇몇 예방의학·보건학 전문가들은 시블리가 거제 사업을 구상하던 단계부터 교류하였고, 사업이 진행되는 동안 여러 형태로 사업에 참여하였다.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예방의학교실의 김명호와 김일순, 이화여대 의과대학 예방의학교실의 구연철, 서울대학교 보건대학원의 박형종이 대표적이었다. 그들은 농촌위생과 보건정책, 보건행정 전문가로서 반복되는 강제 인력동원의 문제와 정책 실패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한국 실정에 맞는 보건의료체계가 필요하다는 데 공감하며 시블리에게 한국에 맞는 사업방향을 자문고, 사업 추진을 위한 논의에 참여하였다. 또한 그들은 각 대학에서 지역사회의학교육과 지역사회보건사업을 시행하는 데 적극적으로 나섰다. 미국 존스홉킨스 대학에서 보건학을 전공하고 거제사업에 합류하기 위해 내한한 존슨(Kit G. Johnson)의 역할도 두드러졌다. 그는 연세대 의대 예방의학교실에서 조교수로 일하면서 시블리가 주도하는 지역사회보건사업 현장을 연구로 발전시켜 학계에 공유하였고, 한국 의과대학에 지역사회의학에 대한 국제적 논의를 소개하여 한국에서 지역사회의학 교육과 관련한 논의를 활성화하고 구체화하는 장을 마련하는 데 기여했다.11)
지역사회의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1972년 5월에는 전국 14개 의과대학이 함께 결성한 한국의학교육협회의 주관으로 지역사회의학을 주제로 의학 교육 세미나를 개최하였다. 존슨은 회의 개최를 적극적으로 주도하고, 회의에서 지역사회의학의 개념 정의에 관한 발제를 하였다(Johnson, 1972: 27-33). 그는 지역사회의학의 개념을 기존 의학지식과의 관계 속에서 규정했다. 그는 지역사회의학을 “전통적인 의료실천, 즉 치료행위의 장점과 공중보건과 예방의학의 기술, 그리고 사회의학적 태도를 결합한” 것으로서 “개별 환자에 대한 이해를 뛰어 넘어 지역사회에 대한 종합적이고 광범위한 식견 속에서 이루어지는 의학”이라고 설명했다(Johnson, 1972: 29). 방법적으로는 “지역사회주민 모두를 위하여 의사와 간호사·의료보조원 등의 다른 의료 제공자들, 지역주민들이 자발적인 상호작용을 통해 ‘포괄적·종합적 의료(comprehensive care)’를 개발하고 제공하는 것”으로 정의했다(Johnson, 1972: 30). 따라서 그는 지역사회의학을 하는 의사들이 이전까지 개별 전문가로서의 태도에서 탈피하여 다른 의료업 종사자들, 지역사회 주민들과 함께 구성된 의료팀의 일원으로서의 역할에 적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의사는 지역사회 주민을 가르치고 지도하는 것은 물론 지역사회 주민들의 목소리를 듣고 그들에게서 배우는 태도를 갖춰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궁극적으로 지역사회 주민들 스스로가 그들이 받고자하는 의료의 양과 질을 결정할 것이며 지역주민과 의사간의 공동노력으로 보건의료 시스템을 만들어가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사실 존슨이 제시한 지역사회의학의 정의는 광범위하고 그 자체로 목표를 담은 것이어서, 구체적이지는 않았다. 개인보다는 지역사회를 단위로 한 의료실천이 필요하다는 것, 그것은 지역사회 주민과의 긴밀한 관계 속에서 행해져야 한다는 것, 그리고 의사의 태도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과 같은 원칙들이 제시된 것이어서, 지역사회의학의 의미와 목표는 애초부터 모호함을 지니고 있었다. 지역사회의학 자체가 다양한 국가와 지역에서의 현장 경험에서 비롯된 지식과 결론들을 바탕으로 제기된 개념인만큼, 한국에서 지역사회의학의 상(像)과 그 의미 또한 지역사회보건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구체화되었다.
대표적으로 연세대 의과대학에서 강화지역 지역사회보건사업을 주도한 김일순은 시범사업을 시행하면서 지역사회의학의 ‘포괄적 의료’ 개념을 지역주민의 의료 인식이라는 관점에서 설명하였다. 그는 기존과 같이 진료와 예방(또는 공중보건)이 독립적으로, 때로는 적대적으로 사업을 진행해왔던 것이 문제라고 지적하였다. 지역주민 입장에서 볼 때 보건은 하나이며 진료와 예방으로 따로 구분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지역주민들에게 필요한 의료형태는 진료와 예방을 통합한 의료이며, 이것이 ‘포괄적 의료’라고 설명하였다(한국보건개발연구원, 1977: Ⅳ-12). 지역사회보건사업을 추진한 이들은 단순히 특정 지역을 범위로 의료행위를 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지역사회의 요구를 파악하고, 그것에 맞는 의료모델과 의료체계를 수립하는 것을 중요한 사업 목표로 삼았다. 문제는 어떤 방식으로 지역주민들과 상호작용하고 주민들이 참여하는 보건의료 사업을 만들어나갈 것인가에 있었다.
3. 마을건강원 조직과 활동: 최일선 보건요원에서 건강지도자까지
이화여자대학교, 연세대학교, 가톨릭대, 서울대학교 등 여러 의과대학들과 선교병원인 예수병원은 1970년대 초부터 예방의학교실과 보건대학원을 중심으로 지역사회보건사업을 시범사업 형태로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의료 환경이 열악하다고 판단되는 지역을 선정했고, 면 혹은 동 단위로 사업을 전개했다. 1970년대 지역사회보건사업은 주로 농어촌 무의지역을 중심으로 실시되었다. 일부 도시 영세지역에서 진행된 사업들도 있었으나, 많은 경우 한국의 농촌 실정에 맞는 보건의료 체계를 수립하는 것에 우선적인 관심을 가졌다. 그동안의 의학교육과 의료실천이 도시 병원을 중심으로 행해지면서 농촌 의료에 무관심했던 것을 극복한다는 실험적 의미가 컸다. 보건의료 인력의 도시집중 문제에 대응하여 새로운 형태의 보건의료 인력을 개발하고, 부족한 보건의료 인프라를 감안하여 지역사회의 자원을 최대한 활용하여 사업을 시행하는 것이 지역사회보건사업의 중요한 목표였다.
이화여대가 실시한 남양주군 수동면 사업과 같이 기존에 보건사업을 실시하고 있던 지역이 있는 경우 지역사회보건사업에 맞게 재편하기도 하였다. 각 대학에서는 이전부터 무의촌 의료봉사나 가족계획 연구사업 같은 방식으로 지역사회를 대상으로 보건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는 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이러한 ‘지역 타겟’ 사업들은 지역사회보건사업의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 하지만 기존 지역 타겟 사업은 사업의 물리적 범위를 설정한다는 것에 초점이 있을 뿐, 사업의 시행 방식에서 다른 사업들과의 차별성이 있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무의촌 의료봉사의 경우 단기간 해당 지역에서 병원과 같은 방식의 의료진의 진료와 처방이 이루어지고 약간의 보건활동이 가미되는 방식이었다. 반면에 지역사회보건사업에서는 새로운 보건의료모델을 개발하는 것을 목표로 하면서 의사나 간호사를 비롯해 사회과학자까지 다양한 수준과 역할을 지닌 사람들이 팀을 꾸렸고, 지역주민을 주체로 포함하여 지역 내 보건의료 자원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자 했다. 지역사회를 대상으로 하되, 일방적이고 일률적인 의료공급을 탈피해 지역사회의 현실에 맞는 새로운 조직과 인력을 구성하고자 했다. 이 사업들은 주로 사업 취지에 공감한 외국원조기관들의 재정 지원을 받아 실시되었다.
일반적으로 지역사회보건사업은 진료와 보건활동을 수행할 거점 진료소나 마을보건소를 두었고, 지역사회 주민들의 요구를 반영하고 지역사회 참여를 이끌어내기 위한 여러 형태의 주민 조직을 결성하고자 시도하였다. 사업팀과 긴밀한 관계를 맺는 주민들을 조직하는 것은 전체 지역주민들이 사업을 이해하고 협력하도록 하기 위한 중요한 과정이었다. 사업팀은 주민들이 사업을 함께 추진해나갈 수 있는 방법으로서 사업조직체계의 일부를 구성하는 몇 가지 유형의 주민참여 조직을 결성하였다.
첫째는 사업 추진을 위한 운영위원회를 구성하여 지역주민이 참여하도록 하는 것이다. 보건위원회, 보건개발회 등으로도 불린 운영위원회 조직은 지역사회보건사업의 사업의 기본 방향을 설정하고 운영계획을 심의하면서 사업에 관한 행정적, 재정적 사안들을 논의하였다. 주로 사업을 총괄하는 사업팀의 의사와 지역의 면장이 참여하고 학교 교장 등 지역사회에서 영향력이 있다고 판단되는 사람들이 참여하였다. 연세대에서 추진한 강화 지역사회보건사업의 경우 부면장, 우체국장, 통일주체대의원, 초등학교장, 교회 목사, 이장, 예비군 중대장 및 기타 유지 등이 보건협의회를 구성하였다(김일순 외, 1979: 26).
둘째는 의료비 부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의료보험조합을 조직하거나 신용협동조합, 의료비공제조합을 결성하는 것이었다. 이는 주민들의 의료비 부담을 줄이면서 보건사업의 재정적 기반을 마련하여 시범사업 이후까지 자립적으로 지역보건사업을 지속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방안이었다. 지역사회보건사업에서 진행한 의료보험사업들은 1977년 정부의 의료보험제도가 본격적으로 시행되기 이전에 실시된 것이었고, 청십자의료보험과 같은 지역의료보험이라는 점에서 이후 국가 차원의 지역의료보험제도를 설계하는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12) 지역사회 참여의 관점에서는 주민들이 정기적으로 보험료를 납부함으로써 진료소 이용을 포함한 지역사회보건사업에 대한 참여도를 높이고, 책임과 권한의식을 강화하며 주민들의 보건의식을 향상시키는 데 기여했다고 평가된다(이화여자대학교 예방의학교실, 2000: 71).
마지막으로 주민참여의 전략으로 가장 활발하게 활용된 것은 마을건강원(健康員)이다. 마을건강원은 마을 주민들의 건강을 살피고 이들의 건강증진을 위한 활동에 앞장서는 역할을 맡은 사람으로, 대부분 자연부락(대개는 리 단위)당 1~3명씩 지역 주민 중 마을(부락) 사정을 잘 이해하고 있는 기혼 여성들로 구성되었다. 지역에 따라서 마을건강원은 마을건강지원자(시블리 거제군) 마을보건임원(이화여대 양주군 수동면), 가정건강요원(연세대 강화군), 마을건강요원(예수병원 완주군) 등으로 불렸다.
초창기 마을건강원은 의료팀이 처한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목적에서 조직되었다. 지역사회보건사업팀은 대부분 지역 외부에서 들어온 의료인과 학자, 학생들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주민들의 질병 상태나 가족관계, 성향을 단기간에 파악하기 어려웠다. 사업팀이 주민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으면서 주민들의 일상을 이해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따라서 의료팀과 주민들 사이에서 일상적인 교량 역할을 할 수 있는 이들이 필요했다. 마을건강원은 주민들에게 익숙한 언어로 사업의 취지와 내용을 설명하고, 주민들이 사업에 협조하고 참여하도록 독려하는 역할을 했다. 또한 마을건강원은 거점 진료소 또는 보건소를 효과적으로 운영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의료진들은 마을에서 치료가 필요한 환자들이 제때에 치료를 받도록 하고 필요한 경우 추후관리를 할 수 있어야 했는데, 소수의 의료진들이 진료를 하면서 이를 병행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에 비해 마을건강원은 집집마다의 사정을 의료진보다 잘 파악하고 있고 정기적으로 세대방문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주민들이 적절한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권하고, 필요한 경우 환자들이 다시 내원하고 약을 복용하도록 안내할 수 있었다. 아래 구술에는 거제 지역사회보건사업에서 마을건강원을 조직하게 되는 배경이 잘 드러나고 있다.
“마을건강 하러 왔는데. 그런데, 환자들이 안 돌아와요. 특별히 결핵 같은 거 계속 팔로우업(follow up) 치료해야 되는데, 고혈압이라든지…. 그니까 안 돌아오는 환자를 [시블리 선생이] 나보고 [마을로] 나가서 보라니까 … (중략) … 그렇게 마을을 보내주시고, 나가면서 알기 시작했죠. 마을 상황을 점점점. 이건… 아이구, 온 가족이 그냥 다 죽어가는 거예요. 무슨 일로? 기생충 때문에요. 빈혈이 얼마나 심하고. 근데 그게 한 사람, 한 사람도 어세스(access), 진단이 안 된 상태로 그냥 방치인 거예요. 그러다가 … (중략) … [시블리 선생이 말하기를] 마을의 사람들 훈련을 좀 시켜갖고 교육을 할 수 있도록 하면 어떤가 였었어요. 그래서 내가 뭐 “좋습니다. 그거 해야 됩니다.” 그래서, 거기 [하청교회 다니시는] 집사님. 권사님인가 할머니 한 분이 계셨어요. … (중략) … 그래서 우리는 마을 잘 모르니까 마을 이장님이나 또 예수 믿는 사람들 통해가지고, 자원봉사 할 수 있는 분들 있느냐?[라고 그 할머니에게 물어봤어요.] 그래서 인제 그걸 내가 맡게 된 것이죠. 그분들을 교육하기 시작했죠.”13)
이처럼 마을건강원은 지역주민이면서 지역사회보건사업의 최일선 요원으로 활동하는 사람이었다. 기독교 의료선교와 관련이 깊었던 거제와 완주 지역의 경우 사업 초기에 지역교회가 사업에 긴밀하게 협조하며 사업 정착을 도왔는데, 그런 경우 마을건강원 조직을 시작할 때 여성 교인들이 중심이 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이웃을 위한 봉사를 실천한다는 기독교 정신을 활동의 계기로 삼았다.14) 교회와의 연관이 적은 지역의 경우에는 이장의 추천으로 선발되는 경우가 상당했다. 보통은 이장이 독자적으로 판단하기보다 부녀회의 자문을 받는 경우가 많았다. 일부 주민조직이 활성화되어 있는 마을에서는 추천된 사람을 마을 총회에서 최종적으로 결정하였다(예수병원기독의학연구원, 1987: 185). 반면 정부 시범사업의 경우 주민들이 마을총회에서 일차적으로 뽑아서 면장에게 추천하면 면장이 면보건요원의 의견을 참작하여 최종 선정하는 절차로 진행되었다. 최종결정권자가 면장이 되는 하향식 선발방식이었다(한국보건개발연구원, 1980: 89).
지역마다 선발된 마을건강원들은 다양한 배경을 가지고 있었지만, 공통적으로 마을 내에서 상당기간 거주하면서 마을 사람들을 잘 알고 주민들의 신임을 얻고 있는 여성들이었다. 특히 부녀회장이나 가족계획어머니회 출신 중에 마을건강원으로 활동하는 사례들이 많았다. 대표적으로 강화지역의 경우 초기에 선발된 가정건강요원 20명 중 14명이 가족계획어머니회 회장이었다(한국보건개발연구원, 1977: Ⅳ-17).15) 가족계획 관리와 모자보건과 관련된 활동이 마을건강원의 주요 업무였기 때문에 가족계획어머니회 출신들이 마을건강원 역할을 맡을 가능성이 높았다. 1977년 전국적으로 새마을부녀회가 조직된 이후에는 새마을부녀회장이 마을건강원을 겸직하는 경우도 다수 나타났다. 하지만 부녀회장이 바뀔 때마다 마을건강원도 교체되는 것은 아니었다. 대부분 정기적으로 보건 교육을 받고 이를 활용해야 하는 마을건강원 업무의 특성 때문에 부녀회장의 임기가 끝나더라도 마을건강원 활동은 계속 유지하는 경우가 많았다.16)
마을건강원들은 본격적인 활동 전에 지역사회보건사업팀으로부터 일정 기간 동안 교육을 받았고, 활동하는 동안 정기적으로 재교육을 통해 보건지식을 습득했다. 교육 과정에서 마을건강원들 간에 활동 경험을 공유하며 개선점을 찾거나, 다른 사업지역을 견학하기도 했다. 예수병원 완주군 사업의 경우 마을건강원들은 초기 교육 후 한 달에 한 번씩 월례세미나를 통해 추가 교육을 받고, 1-2주에 한 번꼴로 보건간호사를 만나 지도를 받았다. 여름과 겨울에는 정기적으로 ‘마을건강요원 여름교실(겨울교실)’과 같은 집중 교육 프로그램에 참여하였다. 이 지역 마을건강원들은 구급약, 혈압계가 든 가방을 메고 다녔는데, 가방에는 예수병원에서 제작한 마을건강원 활동지침서가 들어있어 필요한 경우 참고할 수 있도록 했다(조선대학교 의학전문대학원 예방의학교실, 2010: 61-62).
초기 마을건강원들은 위생적인 가정분만을 위한 분만키트 지원, 결핵·고혈압 환자의 추후관리 등 비교적 간단한 역할을 맡았다. 그러다가 활동이 안정화되고 활성화되는 지역에서는 이들의 역할이 점차 확대되었다.17) 마을건강원 활동이 안정화된 지역에서 마을건강원들이 담당하는 기본 업무는 각자가 담당하는 50~100가구를 대상으로 정기적인 가정 방문을 하면서 주민들의 질병상황을 비롯한 보건정보를 수집하는 것이었다. 세대마다 돌면서 가정건강기록부를 기록하였고, 가족계획 상황을 체크하면서 피임약을 배부하거나 임신부에게 산전·산후 관리에 관한 내용을 안내했다. 또한 영유아들의 예방접종 현황을 관리하며 예방접종을 제때 할 수 있도록 주민들에게 안내하였고, 결핵환자들의 추후관리를 맡기도 했다. 마을 여성들을 한데 모아 사업팀에서 보건교육을 시행할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하는 것도 주요한 업무였다.
이러한 마을건강원의 역할은 본래 가족계획요원, 모자보건요원, 결핵관리요원과 같은 면보건소의 보건요원들에게 부여된 일이었는데, 현실적으로 보건요원이 면 전체를 소화하기 어려웠고, 보건업무를 통합적으로 수행하는 경우도 드물었다. 이에 비해 마을건강원들은 기존의 지역사회 네트워크를 토대로 자연부락(리) 단위를 맡아 활동하면서 수시로 사업팀과 소통할 수 있었기 때문에 면보건요원보다 효과적이었다. 시범사업이 진행되는 지역의 경우 면보건요원보다 마을건강원들에 대한 교육이 더 체계적으로 이루어지기도 했다. 그래서 마을건강원 업무가 숙련된 곳에서는 마을건강원이 간단한 응급처치를 하거나 상비약을 관리하고, 필요한 경우 주민들한테 약을 제공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사실상 간호조무사(간호보조원)이나 간호사 역할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던 것이다.
마을건강원이 수행한 또 하나의 중요한 역할은 환자를 사업팀이나 병원으로 안내하는 의뢰 활동이었다. 여러 지역사회보건사업들에서 의료전달체계를 구축할 때 마을건강원도 체계에 포함시켰다. 주민 → 마을건강원 → 마을건강간호사(보건간호사 또는 보건진료원) → 의사(진료소 또는 보건지소) → 보건소 혹은 2,3차 병원으로 이어지는 형태의 의뢰체계에서 마을건강원은 주민과 의료진을 연결하는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마을건강원이 주민들과 직접 접촉하며 건강관리 활동을 벌이다보니 마을 사람들은 건강에 관한 문제가 있을 때 마을건강원을 먼저 찾아 상담하기도 했다(한국보건개발연구원, 1979a: 103). 마을건강원들은 마을의 환자들을 의료진에게 안내해 적절한 치료를 받도록 했고, 그로 인해 환자들이 건강해질 때 큰 보람을 느꼈다. 아래는 그러한 의뢰 활동의 사례이다.
“저는 얼마전에 우리 마을에서 아침밥을 먹은 후에 샘에 물 길르러 가다가 갑자기 쓰러진 금자네를 안내해서 신협[보건사업팀 진료소가 있는 곳]으로 데리고 왔어요. …(중략)… 연락을 받고 급히 쫓아가봤더니 아주 심한 상태여서 보건개발회 최간호원과 함께 예수병원으로 안내하여 응급조치 한 후에 무사히 출산시켰어요. 그 때 신협에서 긴급대부를 해줘서 빨리 됐지요!”18)
초기 마을건강원들을 조직한 것은 사업수행을 위한 현실적인 필요에서 시작된 것이었지만 마을건강원 활동은 지역사회보건사업의 핵심적인 요소가 되었다. 마을건강원들은 지역에 따라 원조받은 사업비로 약간의 인센티브나 교통비를 제공받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무보수로 활동하였다. 그들에게 주어진 임무가 적지 않았으나, 건강관리에 대한 보람과 자부심을 느끼며 활동을 이어나갔다. 마을건강원의 역할이 확대되면서 지역사회보건사업 주체들은 마을 건강원을 주민참여의 중요한 토대로 삼고 육성하고자 했다. 마을건강원 조직과 훈련은 “주민 스스로가 자발적으로 자신들의 건강문제를 발견하고 해결하는 데 관심을 가지고 직접 참여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 되었고, 훈련된 마을건강원이 지역사회의 건강관리를 책임지는 “건강지도자”가 되는 것을 기대하기도 했다(예수병원기독의학연구원, 1987: 185; 방숙, 1989: 330-331).
마을건강원들의 활동이 활발한 지역은 보건의료 주민참여의 핵심 사례가 되어 외국 원조기관들과 일차보건의료 및 주민조직에 관심을 가진 종교그룹, 농민 단체의 많은 관심을 받았다. 한국의 경험은 원조기관에 제출한 보고서와 원조기관의 사업평가를 통해 해외에 공유되었고, 1978년 알마아타 선언을 전후로 일차 보건의료가 부상하면서 일차보건의료와 농촌개발의 사례로 소개되었다(WHO Regional Office for the Western Pacific, 1979; Esman, 1980; Dunlop at et al., 1982). YMCA, 천주교 인성회, 가톨릭농민회. 신용협동조합연합회 등 기독교 사회운동과 협동운동 조직들에서도 관심을 갖고 시범사업 지역을 견학하였다. 이들은 지역사회보건사업을 새로운 협동운동, 농촌운동의 사례로 접근하여 활동 지역에 적용하였다. 일례로 가톨릭농촌여성회(현 가톨릭여성농민회, 이하 가여농)의 경우 조직 차원에서 지역사회보건사업과 유사한 보건사업을 실시하였다. 1981년 9월부터 1984년 2월까지 2년 6개월간 진료와 보건활동을 하였는데, 이때 주민 중에서 마을건강원에 해당하는 ‘마을건강지도자’를 선발하고 이들을 가여농 차원에서 교육하여 활동하도록 했다. 마을건강지도자들은 정기적으로 교육을 받아 보건지식을 습득하였고, 가정상비약을 관리하는 역할을 맡았다.19)
이와 같이 마을건강원은 비전문가 주민의 보건의료활동이라는 점에서 새로운 시도로 주목받았다. 마을건강원들의 활동은 지역사회 건강관리의 효율성 강화라는 보건의료적 측면과 주민이 참여하고 개입하는 보건의료활동이라는 주민운동 혹은 지역사회개발 측면이 결합되어 있었다. 그러한 점에서 마을건강원은 말단 보건의료요원으로서의 정체성과 주민의 정체성, 즉 마을의 ‘건강지도자’로서 주민들의 보건의료 요구를 파악하고 대변하는 사람이라는 이중의 정체성 사이에 위치해 있었다. 그것이 이들의 활동을 빛나게 하는 요소이기도 했다. 때문에 사업 초반에는 마을건강원의 이중적인 정체성을 충돌하지 않는 방식으로 적극 활용하면서 사업을 활성화하였다. 그러나 사업이 전개되고 전반적인 보건의료 환경이 변화됨에 따라 마을건강원 스스로의 기대역할과 지역사회보건사업을 추진한 의료팀, 정부의 기대역할간의 차이가 점차적으로 드러나게 된다. 그리고 보건의료 주민참여의 핵심으로 여겨졌던 마을건강원은 그 유효성을 둘러싼 논쟁의 중심에 서게 된다.
4. 1980년대 보건의료 접근성 확대와 보건의료 주민참여의 딜레마
민간의 대학과 병원에서 먼저 시작한 지역사회보건사업은 1970년대 중반 이후 정부의 보건의료 정책 수립에 영향을 미쳤고, 전반적인 보건의료 환경 변화에 기여했다 1975년 한국개발연구원 주최로 개최된 국민보건계획수립을 위한 세미나에서 남덕우 부총리는 향후 국민보건정책의 기본방향을 제시했다. 그것은 ①의료서비스의 균점체제를 확립하기 위해 농어촌을 대상으로 한 ‘저렴(low-cost)의료체제’ 시범사업을 추진할 것 ②비용이 저렴한 예방사업 및 보건교육 사업을 강화할 것 ③의료시설의 낭비를 제거할 것 ④ 결핵, 정신질환, 공해방지에 대해 정부가 투자할 것 ⑤의료인력의 교육제도를 개선할 것이었다.20) 이 계획의 상당수는 이미 여러 지역사회보건사업에서 시도하고 있는 내용들이었다.
사실 정부는 농어촌 대상의 의료체계 수립보다는 군립병원 증설에 우선적인 관심이 있었다. 1970년대 초 정부는 제3차 경제개발계획에서 전국 14개 군에 군립병원을 설립하는 것을 주요 의료정책으로 내세우고 있었고 이 소요자금을 외국 차관으로 확보할 것이라고 목표를 밝혔다.21) 하지만 차관을 지원한 USAID는 군립병원 설립 대신 저소득층을 겨냥한 저비용의 통합형 보건의료전달체계를 구축하는 데 기술과 차관을 제공하기로 하였다. 한국의 보건의료 현황을 조사한 USAID는 지금까지 미국의 의료기술과 민간 의사 중심의 시스템을 이전하는 방식으로 의료원조가 진행되었던 것이 문제였다고 지적했다. 현재 한국이 고비용 보건의료시스템으로 인해 여러 문제가 발생하게 된 데에는 미국도 부분적으로 책임이 있다는 것이었다.22) 이에 USAID는 지역사회보건사업에서 시도하고 있는 대안적인 보건의료 시스템의 요소들을 국가 차원으로 확장할 수 있도록 지원하기로 한다. 그것은 농어촌과 저소득계층까지 보건의료 서비스를 확대하는 것을 목표로 한 ‘경비절약형 보건의료체제’를 확립하는 데 기술과 차관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1975년 USAID는 이 사업에 5백만 불을 지원하기로 한국 정부와 합의하였다. 한국 정부의 보건정책 방향은 이러한 원조 논의 과정에서 제시된 것이었다.
USAID와의 합의에 근거하여 1976년에는 보건계획수립 및 연구를 위한 국책기관으로 한국보건개발연구원이 설립되었다. 한국보건개발연구원은 군 단위 지역사회보건사업인 ‘마을건강시범사업’을 실시하였다(Dunlop et al., 1982: 8). 마을건강시범사업은 1976년부터 준비하여 1980년까지 강원 홍천, 경북 군위, 전북 옥구 지역에서 시행되었다. 마을건강시범사업은 농촌 주민에게 기본적인 예방과 치료서비스를 제공하고 새로운 보건의료인력으로 보건진료원과 마을건강원을 개발하고 훈련하는 것, 그리고 지역사회 참여를 발전·강화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이 사업은 거제·춘성·남양주 등 1976년 당시 이미 진행되고 있던 지역사회보건사업들을 참고하면서 설계·실시된 것이었다.
한국보건개발원의 마을시범사업을 수행하면서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초에 걸쳐 정부는 일련의 보건의료 정책들을 추진하였다. 1976년 의료보험법 개정을 통해 1977년부터 의료보호 및 의료보험 제도를 본격적으로 실시하였고, 1978년에는 「국민보건의료를 위한 특별조치법안」을 제정하여 공중보건의사를 보건지소에 파견하도록 했다. 그리고 1980년 12월에는 공중보건의사와 관련한 1978년 법에 보건진료소와 보건진료원 제도23)를 신설한 「농어촌 보건의료를 위한 특별조치법」(농특법)을 제정하였다. 농특법은 일차보건의료사업을 국가 정책적으로 제도화한 것으로, 농어촌과 도서벽지까지 보건의료시설과 인력을 확충하고 그들이 지역사회의 자원을 활용해 일차보건의료사업을 실시하도록 법으로 규정한 것이었다. 이처럼 1970년대 중반부터 이어진 각종 보건의료정책들은 심화되고 있던 사회불균형 해소에 대한 정부의 적극적 태도를 보여주었다. 정부의 적극적인 사회정책은 1970년대 유신체제 말기에서 1980년대 초 군부쿠데타로 이어지는 정치적 위기 국면을 극복하고자 하는 타개책의 일환이었다.
정부가 지역사회보건사업을 우호적으로 인식하고 보건정책으로 받아들이고자 한 또 다른 이유는 그것이 정부의 지역사회 정책과 일치한다고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부는 지역사회의학과 그에 입각한 지역사회보건사업이 정부에서 실시하고 있는 새마을운동과 유사하며 새마을운동의 일부로 포함될 수 있다고 여겼다. 1970년대 초 예방의학계를 중심으로 지역사회의학에 대한 논의가 활성화되면서 1973년 12월에 대한예방의학회 주최로 지역사회의학 및 의학교육 세미나가 열렸는데, 이 회의에 참석한 보건사회부 의정국장의 축사에서 이러한 인식을 살펴볼 수 있다. 의정국장 민창동은 지역사회의학에 대하여 “주민참여가 지역사회의학의 선행조건”이며, 이것이 “거국적으로 전개되고 있는 새마을 운동으로서 의료의 새마을화를 성취하는 것”이라고 말했다(한국의학교육협회, 1972: 5). 그는 “자조와 자립으로 질병없는 마을을 만드는” 사업의 기조가 정부의 새마을운동 정신과 직결된다고 주장하면서, 지역사회보건사업이 새마을 정신을 온 국민에게 뿌리박게 하는 데 기여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국책기관인 한국보건개발연구원의 마을건강사업이나 지자체가 주도한 지역사회보건사업에서는 새마을운동과의 결합 시도가 더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이 경우 상향식의 주민참여보다는 ‘자조’와 ‘자립’의 정신, 이를 통한 효율적인 개발가능성에 초점을 맞춰졌다.
우리나라에서는 새마을사업을 창조했고 새마을운동을 성공시켜 국가와 지역사회의 비약적인 발전을 실현시킨 바 있다. 새마을사업의 선도국인 우리나라가 만약 새마을운동에 보건의료를 포함시켜 사업을 전개한다면 전국민이 참여하는 보건의료망이 형성되고 포괄적인 사업이 전개되어 여기에서도 세계의 선도국이 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중략)… 이 [알마아타]선언이, 우리나라에서 적용가능성은 지대하다. 그 근거는 우리에게는 자조하고 협동하는 새마을정신이 있다는 것이다.24)
물론 지역사회보건사업이 정부의 예상처럼 새마을운동으로 쉽게 통합되지는 않았다. 주민들의 요구로 시범사업을 진행하고 초기부터 사업 운영을 위한 주민 조직과 체계가 새마을운동과 별도로 운영되었던 지역에서는 더욱 그러했다. 예수병원이 주도한 완주군 용진면 사업의 경우 의료문제 해결의 방법으로 주민들이 보건개발 신용협동조합(이하 신협)을 결성하였고, 신협을 매개로 출자금을 조성하고 운영하는 방식으로 보건의료사업을 전개했다.25) 용진면 주민들에게 새마을운동은 주택개량이나 도로확장 사업에 한정된 사업이었다.26) 그렇기 때문에 주민들은 조직과 활동방식, 내용 면에서 새마을운동과 지역사회보건사업을 별개로 인식하였다. 이처럼 민간 주도성이 강한 시범사업 지역에서는 재원과 조직운영 측면에서 관주도의 새마을운동과 지역사회보건사업을 구별하였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두 사업을 대조적이거나 차별화되는 것으로 인식하거나 새마을운동의 문제를 극복하는 대안으로서 지역사회보건사업을 인식하는 시각은 많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대부분의 지역사회보건사업 추진 과정에서 하향식 동원을 경계한 상향식 참여방식을 적극적으로 고민하거나, 엘리트·지배계층의 의사결정과 대비되는 ‘소외되고 배제된 사람들’의 의사결정 참여를 뚜렷하게 강조하지는 않았다. USAID에서 지원한 한국보건개발연구원의 마을건강사업이나 WHO에서 지원한 전남대의 곡성군 지역사회보건사업에서는 새마을운동도 일종의 지역사회개발과 주민참여의 방법으로 간주하고, 이들 사업을 보건의료사업과 통합하는 활동을 지원했다. 적어도 정부와 매개된 원조기관들에서는 권위주의 정부의 중앙집권적인 특성이나 지역사회별 민주적 참여의 토대 유무에 대한 구체적이고 비판적인 관심보다는 보건사업의 주민참여 형식과 체계 구축에 더 큰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한편 농특법이 시행됨에 따라 1980년대 초부터 점차적으로 지리적으로 의료시설 접근성이 떨어지고 무의촌 지역에 속했던 지역들에 보건지소와 보건진료소가 설치되었고 공중보건의사와 일차건강관리를 전담하는 보건진료원이 파견되었다. 제도의 효용성을 둘러싼 논란은 제도 시행 이후에 계속적으로 제기되었으나27) 지역에 의사‧간호사 인력이 충원되었다는 것은 주민들에게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또한 의료보험 실시 이후 의료수요가 증가하면서 정부는 의료공급의 확대를 위해 해외 차관을 중개하거나 세제지원을 하는 방식으로 민간 의료시설 설립을 유도하는 정책을 폈다(박윤재, 2021: 138-142). 이와 같은 정책들로 정부는 무의촌이 완전해소 되고 있음을 선전하였고, 농어촌의 보건의료 접근성은 이전시기에 비해 개선되었다.
하지만 이와 같은 보건의료 접근성의 개선은 지역사회보건사업 추진에 양날의 검으로 작용했다. 농특법의 실시는 일차보건의료의 제도화에 해당하는 것으로 지역사회보건사업을 추진하던 주체들에게는 환영할만한 조치였다. 그들은 공중보건의와 보건진료원들이 사업에 참여하거나 협조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방식을 고민해 사업 내용을 재편하거나 새로운 사업을 계획했다. 특히 보건진료원은 일시적으로 머무는 공중보건의와 달리 한 곳에 오랫동안 머물면서 일하는 일차보건의료의 핵심인력으로 개발된 인력인만큼 이들을 훈련하고 지역사회보건 시범사업에 결합하는 데 관심을 기울였다. 민간 시범사업팀이 정부 보건행정 체계를 통해 배치‧운영되는 보건지소‧보건진료소를 통제하거나 조직체계를 통합하기에는 무리가 있었으나 보건체계 정비가 지역사회보건사업이 지향하는 의료전달체계 확립과 사업의 안정화에 기여하는 것은 분명했다.
역으로 지역사회 참여 측면에서 보건의료 인력과 의료시설이 증가하는 것은 지역사회보건사업에 대한 주민참여 동력을 약화시키는 방향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마을건강원들은 공중보건의사와 보건진료원이 상주하고, 아플 때 찾아갈 수 있는 병의원들이 늘어가는 상황에서 기존에 행하던 역할들 상당수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고 느끼게 되었다. 주민들은 굳이 사업팀의 진료소를 찾지 않아도 되었고 마을건강원을 통해 건강 상담을 할 필요성도 점차 줄어들면서 마을건강원들의 활동이 소극적으로 변하는 지역들이 생겼다.
이러한 변화는 지역사회보건사업팀이 기대한 것과 반대되는 결과였다. 지역사회사업을 주도했던 전문가들은 마을건강원들이 사업을 통해 리더십을 갖추어 건강지도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여서 시범사업 이후 보건사업이 지역사회 주도사업으로 자립할 때 사업을 리드할 주체가 되어줄 것을 기대했다. 그들은 마을건강원들이 보건업무에 그치지 않고 건강지도자로서 지역사회의 보건문제를 스스로 발견하고 해결하는 능력을 갖추는 수준까지 성장하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대다수 마을건강원들은 시범사업이 종료되면 자신들의 활동도 마무리된다고 여기고 있었고, 지역의 보건의료 환경이 개선된 상황에서 활동을 지속할 필요성을 크게 느끼지 못했다.
이와 같은 주민참여의 딜레마는 주민참여의 목적과 주민들의 기대역할을 둘러싼 인식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사실 마을건강원의 위치는 애매했다. 마을건강원들은 일차적으로 지역사회보건사업을 통해 지역의 보건의료 환경이 개선되고 주민들이 혜택을 받는 것에 대한 보답의 의미로, 지역사회 봉사 차원으로 활동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은 대부분 스스로 주도적 역할보다는 보조적 역할을 자처하였다. 부족한 자원 활용의 측면에서 본다면 그들은 말단의 보건의료 제공자로서 보건의료 보조인력으로 일한 것이었다. 이런 관점에서는 보건의료 환경이 개선될수록 마을건강원의 ‘최일선 보건요원’으로서의 활동과 영향력이 줄어드는 것은 자연스러웠다.
그러나 자발적인 주민참여와 주민주도형 보건사업의 가능성을 기준으로 평가한다면 마을건강원들의 활동력 저하와 전반적인 주민참여 동력의 감소는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1986년 8월 순천향대에서 열린 지역사회보건사업에 대한 세미나에서 참석자들은 짧게는 5년, 길게는 10년 이상 지역사회보건사업을 진행해온 경험을 공유했다. 이 자리에서 사업을 주도한 전문가들은 주민참여의 성과에 대한 솔직한 평가를 드러냈다. 그들은 전반적으로 지역주민들이 사업에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기보다는 피동적으로 대응한다고 평가했다. 보건의료 서비스를 이용하기는 하지만 사업에 자발적이고 주도적으로 사업을 운영해나가는 예가 드물고 시범사업 이후 주민주도적으로 사업을 지속할 의지가 약하다는 것이었다. 강화지역 사업을 주도한 김일순은 재정을 지원하는 원조기관에서는 주민들의 자발적 참여를 중시하고 이를 사업에 적용할 것을 요구하지만, 한국의 현실을 비추어 볼 때 대상으로 하는 ‘힘없고 자원 없는’ 지역사회는 이론처럼 되지 않는다고 비판하기도 했다(순천향대학 인구 및 지역사회의학연구소, 1986: 105).
사업을 주도했던 의료인들은 지역사회의 자원과 창의성을 활용하여 주민 스스로 건강에 관한 문제를 인식하고 이를 해결해나가도록 하는 것, 그래서 시범 사업 이후에도 주민들 주도로 자생능력을 갖추고 보건사업을 이어갈 수 있는 체계를 갖추는 것을 지역사회 참여의 목표이자 성공태로 파악하고 있었다. 서울대 보건대학원 교수로 보건진료원 개발과 훈련에 참여한 이선자는 지역사회 참여가 논의되기 위해서는 지역사회 주민과 보건사업을 하는 측이 대등한 입장에서 만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런 맥락에서 마을건강원 또한 보건요원을 잘 도와주는 하급 인력이 아니라, 마을에서 영향력 있고 지도력 있는 사람으로 선정하여 보건지도자가 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순천향대학 인구 및 지역사회의학연구소, 1986: 186).
하지만 이러한 지역사회 참여에 대한 입장은 다분히 이론적이고 선언적이었다. 실제 사업의 주민조직들과 주민참여의 매개들이 주민의 주도성과 창발성을 키우고 주민들의 자발적 참여를 도모하기 위한 활동이었는가, 그리고 이러한 목표를 주민들과 어느 정도까지 공유하고 있었는가를 따져볼 필요가 있었다. 많은 지역에서 시범사업이 무르익고 마무리되는 시점까지 보건교육 외에 마을건강원의 역량 강화나 리더십 배양을 목적으로 한 프로그램을 적극적으로 운영하는 사례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시범사업 대부분에서 마을건강원들에게 보건요원 이상의 역할을 부여하고 독려하는 데까지는 나아가지 못했다.
물론 보건의료 환경 변화에 대응하여 마을건강원들이 스스로 새로운 역할을 수행하는 방식으로 변화를 꾀한 사례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마을건강원들은 집집마다 방문해서 보건정보를 파악하는 업무보다는 치료나 진단으로 스스로 가시적인 성과를 낼 수 있는 활동을 통해 주민들의 신뢰를 얻고 인정을 받고 싶어했다.28) 1980년대 후반에 실시된 고려대 여주 점동면 사업의 경우 마을건강원들이 기존의 보건활동에 그치지 않고 보건사업팀에 적극적으로 사업을 제안하고 이를 반영해줄 것을 요구하였다(차철환 외, 1992: 207). 그들은 지역주민들에게 서비스를 제공하거나 매개할 수 있을 때, 그 자원을 매개로 리더십을 확보할 수 있다고 보았다. 마을건강원들이 요구한 ‘서비스’는 병원 치료와 진단과 같은 의료서비스였다. 사업팀은 마을건강원들의 요구를 수용해 지역을 대상으로 자궁암 진단검진사업을 실시하였다. 사실 이러한 방식은 지역사회보건사업이 애초에 지향했던 일차보건의료에 기반한 보건의료체계 수립, 지역사회 참여를 통한 ‘자립적인’ 보건사업 모색이라는 목표와는 거리가 있었다. 하지만 마을건강원들이 보건의료사업의 매개자로서 주민들의 의견을 대표하면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기 위한 방법을 자발적으로 모색한 사례라는 점에서는 의미있는 시도로 평가할 수 있다.
마을건강원의 역할과 보건의료 주민참여의 향방을 둘러싼 딜레마는 1985년부터 마을건강원을 정부 정책으로 제도화하면서 더욱 극명하게 드러났다. 1984년 보건사회부는 “국민보건위생과 영양관리의 선진화를 위해” 보건진료소가 설치된 전국 1500개 의료취약지역에 4명씩 총 6천명의 마을건강원을 배치할 것이라는 계획을 발표했다. 보건사회부는 마을건강원들을 인구보건연구원에서 교육받게 한 뒤 그들에게 ①전염병 예방의 계몽 및 전염병이 발생했을 때 신속한 보고체제를 갖추도록 하는 역할, ②건강관리가 필요한 대상자를 발견하여 보건진료소에 치료를 의뢰하는 역할, ③여전히 후진적인 지역의 보건위생의식을 제고시키고 ④가족계획사업과 피임기구 보급 업무를 맡기고자 계획했다29). 이같은 조치는 보건진료원들이 지역에서 일차건강관리사업을 하기에 원활한 조건을 제도적으로 보조하는 것으로서 의미있는 것이었다.
마을건강원들은 보건사업을 보조하는 역할, 주로 보건진료원의 방역사업을 돕거나 가족계획대상자 정보를 전달하는 간단한 활동들을 간헐적으로 수행하였다. 그러나 그 이상의 주도적이고 주체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한계가 있었다. “보수를 받지 않고 농사일과 가사일에 바쁜 농촌부인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많은 일들을, 그리고 전문적이어서 골치가 아픈 보건관계 업무를 기꺼이 오랫동안 계속해서 할 수 있겠는가?”라는 보건전문가들의 지적은 타당한 측면이 있었다(김용익 외, 1990: 178). 또한 제도적으로 마을건강원을 배치하기로 하였지만, 실질적으로 이들을 조직하고 관리하는 것은 보건진료원의 일로 맡겨져 있었다. 의욕이 있는 보건진료원들은 마을건강원 조직과 교육을 위해 힘을 쏟고 이들을 매개로 주민대상 보건교육을 실시하였지만 그러한 보건진료원들마저 마을건강원을 지속적으로 교육하고 관리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예수병원기독의학연구원, 1991: 24-28). 결국 마을건강원들의 활동은 일부를 제외하면 보건지도자가 아닌 보조 보건요원의 역할에 머무는 형태가 되었고, 지역사회보건 시범사업이 실시된 지역들에서도 사업이 종료되는 시점에 마을건강원 조직도 대부분 해체되었다.
하지만 지역사회의학이 도입되고 지역사회보건사업이 실시될 때 이론적 수준에서나마 강조되었던 ‘소외되고 배제된’ 주민들의 ‘상향식’ 참여라는 화두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이미 1970년대부터 기독교 사회운동그룹들을 중심으로 지역사회의학과 일차보건의료의 가치에 공감하며 주민들이 주도하는 보건의료사업을 실시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1970년대 수도권도시선교회에서 활동한 권호경·이해학 목사는 광주대단지 사건 이후 성남지역에서 주민조직운동을 벌이며 1972년 200명의 조합원으로 구성된 의료협동조합 ‘주민의료협동회’를 결성하였다. 김일순·시블리를 비롯한 지역사회보건사업을 벌이고 있던 보건 의료전문가들이 지역사회의학에 기반한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자문하고 지원하였고, 양요환을 비롯한 서울대 사회의학연구회의 의대생들이 정기적으로 진료를 했다(이명애, 2017: 113-121). 이들은 지역사회보건사업의 경험을 공유하며 대학의 시범사업 장 밖에서 보건의료를 기반으로 한 주민운동을 지원했다.
이와 유사하게 난곡(신림7동) 지역에서는 가톨릭 사회운동의 일환으로 동일하게 수도권도시선교회 활동을 하던 김혜경을 중심으로 1976년 ‘난곡희망협동회’(이하 난협)가 조직되었다. 난곡지역에서는 서울대 의대 가톨릭동아리 학생들이 주말진료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진료 수혜에 그치지 않고 주민들이 함께할 수 있는 활동을 해보자는 취지에서 난협을 조직하였다. 난협은 의료활동을 중심으로 35개 통을 세대별로 나누어 10반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마을건강원에 해당하는 반 대표들이 매월 정기모임을 하며 의료활동 계획과 지역 문제들을 함께 논의했다(김혜경, 1990: 18-23). 보건교육도 주민들이 관심있는 주제를 먼저 요청하면 진료팀이 준비해서 진행하는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이들은 의료활동을 중심으로 모였지만 공부방을 만들거나 장학사업을 하는 식으로 협동의 내용들을 늘려가며 조직을 장기적으로 운영해나갈 수 있었다. 그 결과 난협은 설립 10년이 되는 때에 주민들의 모금활동으로 자금을 마련하여 1988년 ‘요셉의원’을 설립하였고, 빈민들을 위한 의료지원에 앞장섰다.
이들 의료협동회는 지역사회보건 시범사업들이 대부분 관민협조적인 성격을 띠었던 것과 달리 주민자치운동 성격을 강하게 띠고 주민운동의 맥락에서 보건 의료 사업을 진행하였다. 공통적으로 주민조직 운동에 전념하는 활동가를 중심으로 보건의료조직이 결성되었다는 점에서 주민참여의 취지를 실천할 수 있는 토대를 갖추고 있었다.
한편 1980년대 중후반은 지역사회보건 시범사업의 열기가 식고 있었던 시기였지만, 반면 진보적인 보건의료운동은 본격화되기 시작한 때였다. 학생운동을 경험한 보건의료인들을 중심으로 보건의료운동 차원에서 농촌과 도시공단지역, 빈민지역에서 의료활동을 하는 이들이 이전보다 두드러졌다. 이는 민중운동 혹은 상향식 주민참여활동에 기반하여 보건의료활동을 할 수 있는 새로운 토대가 되었다. 일부 민간 개발원조기관은 사회운동적 성격의 보건의료활동을 지원하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거제, 강화, 완주 보건의료 사업을 오랫동안 지원한 EZE는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 1970년대보다 분명하게 주민들이 직접 참여하고 가난하고 소외된 민중들의 힘을 강화시키는 사회운동을 적극 지원하기로 하였다(이만열, 1997: 45-47). 이는 한국의 민중운동 흐름에 부응하는 것이었으며, 보건사업 지원방향에도 반영되었다.
EZE는 1985년에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에 보낸 서신에서 앞으로 한국의 보건분야를 지원할 때 농촌과 도시에서 적극적인 주민참여에 대한 지향을 포함하여 지역사회보건 프로그램을 실시하는 곳에 우선적으로 지원할 것이라는 의사를 밝혔다.30) 국가 차원의 보건체계가 개선되고 민간병원이 증가하고 있으나 이것이 민중들에게까지 도달하지는 못하고 있으므로 민중들을 위한 보건사업이 강화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주민참여형 보건사업을 위해서 보건사업을 끌고 나갈 자격있는 인력을 양성하는 데 필요한 훈련 프로그램도 지원하기로 하였다.
이와 같은 민중운동의 배경에서 주민들과의 협력을 통해 의료·건강문제를 해결하고자 실험한 보건의료조직 중 일부는 1990년대 의료생활협동조합으로 전환하여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1970-80년대 지역사회보건사업의 이념과 주민참여의 경험은 명목상으로만 남는듯 했으나 인적·조직적·내용적으로 연속과 단절을 보이면서 새로운 보건의료운동으로 1990년대까지 이어졌다.
5. 맺음말
지역사회보건사업은 1960년대 이래 세계적인 보건의료체계를 둘러싼 새로운 대안 모색 시도와 ‘인도주의적 구호’와 ‘사회개발’로의 개발원조 노선의 변화, 그리고 의학계의 사회적 책임성에 대한 요구가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196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까지 전국의 여러 지역에서 시범사업 형태로 실시되었다. 이 사업은 이전까지의 공중보건사업과 달리 예방과 치료를 모두 포함하는 포괄적 의료를 지향하고 있었고, 사업 주관 기관의 일방적 사업이 아니라 주민참여에 기반하여 주민의 의사가 반영되고 주민들의 활동이 결부된 사업운영을 시도했다. 이를 통해 궁극적으로는 자립적이고 주민주도적인 보건사업 모델을 수립하고자 했다.
지역사회보건사업에서의 주민참여는 지역사회보건사업을 둘러싼 각 주체들의 서로 다른 목표가 표출되는 장이었다. 지역사회보건사업을 주도한 의과대학 및 연구기관에서는 지역사회의학을 적용하고 실습하면서 한국 현실에 맞는 보건의료체계를 모색한다는 목표를 갖고 있었고 지역사회 보건 연구의 장으로 삼고자 했다. 이 과정에서 마을건강원으로 대표되는 주민조직들은 현실적으로 부족한 보건의료자원을 보완하는 역할을 하면서 점차 역할을 확대해나갔다. 원조 기관은 주민참여를 통해 자발적인 주민자치를 강화하고 일차보건의료를 실현할 토대를 구축할 것을 기대했다. 풀뿌리민주주의에 기반한 주민 주도성과 자립 지향은 지역사회보건사업의 목표 전반에 전제되어 있었다. 그러나 실제 사업이 진행될 때 어떻게 민주적으로 다양한 배경의 주민들을 참여시키고 그들의 요구를 반영할 것인가의 문제는 쉽게 간과되었다. 주민들은 보건의료수혜에 대한 보답의 의미에서 사업에 협조하며 봉사를 하고, 더 많은 의료서비스를 받고자 하는 의지가 대체로 강했다. 반면 주민이 주도하는 자립적인 보건사업에 대한 구상이나 지향은 약했다. 이것에 대해 사업기관들은 주민들의 자발성 한계를 원인으로 지적했으나, 보건의료의 책임과 역할에 대한 사업기관과 지역주민들의 인식 차이, 지역사회보건사업의 궁극적인 목표에 대한 서로다른 기대가 결과로 보는 것이 적절해보인다.
1970년대부터 시작된 보건의료에서의 주민참여 활동은 1980년대 보건의료환경의 변화 속에서 소극적으로 변하였다. 이에 대해 지역사회보건사업을 주도했던 전문가들은 주민참여 시도를 사실상 실패한 것으로 평가하고 회의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하였다. 마을건강원 제도화가 보여준 주민참여의 형식화는 이러한 평가를 강화하는 요소였다. 그러나 지역사회보건사업에서 강조한 주민참여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과 주민참여의 경험은 시범사업 외부에서 주민운동의 형태로 시도되고 발전되어 갔다. 보건의료운동의 맥락에서 진행된 주민참여 활동과 의료협동조합의 결성은 인적·물적 차원에서 지역사회보건사업과 일정한 연속성과 단절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1970년대 기독교 사회운동에 기반한 주민운동과 1980년대 민중운동, 1990년대 시민운동으로의 전환이라는 사회운동 흐름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이와 같은 의료협동운동의 역사와 성격에 대한 논의는 추후의 과제로 남긴다.
Notes
일차보건의료는 ‘primary health care’의 번역어로 1970년대 중반 전문가들이 용어 번역에 관해 잠정적으로 합의한 이후 현재까지 사용되고 있다(한국보건개발연구원, 1977: 8). 하지만 이용어가 논의될 당시부터 간호계에서는 건강의 의미를 강조한 ‘일차건강관리’로 번역어를 대체하여 사용하기도 하였다. 최근에는 ‘care’를 ‘돌봄’으로 번역한 ‘일차건강돌봄’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하는데(김새롬, 2019 등), 이 글에서는 편의상 주요 연구에서 사용되고 있는 ‘일차보건의료’를 사용하였다.
Johnson, Kit G., “The Koje Do Community Health and Development Project,” cmcm/69/10, World Council of Churches Archives, 1969; “Koje Do Public Health Activities March-June 1970,” HLS Health & Sanitation, Container 45, RG 286, The U.S. 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 1970.
마을건강원(Village Health Worker 또는 Community Health Worker)은 1977년부터 1980년까지 한국보건개발연구원에서 실시한 마을건강 시범사업에서 사용된 용어로 이후 공식 보건행정에서 사용되었다. 마을건강원은 사업지역에 따라 마을건강지원자, 마을건강요원, 마을보건 임원, 가정건강요원 등의 용어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새마을운동과 관련한 최근 20년간의 연구사는 김영미(2022: 490-495) 참고.
1970년대 보건사업의 변화와 관련하여 1970년대 기생충 관리사업과 가족계획 사업이 통합사업으로 실시되는 과정을 다룬 연구는 당시 아시아 기술협력 네트워크뿐만 아니라 변화된 1970년대 한국 공중보건사업의 환경 및 원조 방식의 변화를 함께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정준호·김옥주, 2018).
다만 가족계획어머니회는 관주도·하향식으로 조직되었지만 이후 지역사회보건사업에서 마을건강원 조직에도 주요하게 활용되고 있어 지역 조직의 변용이라는 관점에서 연속성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USAID, “Project paper for a Korea health demonstration loan,” 1975b, p. 4.
「의사동원에 일언」, 「동아일보」, 1962. 06. 01; 「무의촌」 일소책에는 근본대책이 필요하다, 「경향신문」, 1962. 07. 30; 「인술은 산술... 얼굴만 한번보이고 더러는 「조수개업」도」, 「경향신문」 1962. 07. 31; 「무의촌 와들와들」, 「조선일보」, 1964. 06. 16; 「무의촌해소대책과 병역 의무대충의 문제점」, 「조선일보」 1965. 04. 03
거제 지역사회보건사업의 배경과 전개과정에 대해서는 정다혜(2021) 참고.
거제 사업에서 지역주민들을 간호보조원, 마을건강지원자로 활용한 것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정다혜(2021: 120-132)를 참고할 것.
존슨은 앞서 언급한 1968년 이탈리아 벨라지오에서의 지역사회의학에 관한 회의 내용을 기록한 책을 한국에서 번역할 수 있도록 주선하여 1971년에 연세대학교의과대학에서 「지역사회의학: 교육·연구 및 의료」로 출판하였다(Lathem et al., 1970/1972). 또한 1972년에는 의과대학간의 협의회인 의학교육협회에서 지역사회의학교육을 주제로 국제세미나를 개최할 때 독일 선교단체로부터 재정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주선하였다(한국의학교육협회, 1972). 이처럼 그는 1970년대 초반 한국의 여러 의과대학에서 지역사회의학 논의를 활성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정부는 1981년 홍천·옥구·군위 지역을 지역의료보험 시범사업 지역으로 지정했다. 이 지역들은 한국보건개발연구원에서 1978년부터 1980년까지 지역사회보건사업으로서 ‘마을건강사업’을 실시한 곳이었다. 1982년에는 보은, 목포지역과 함께 이전부터 지역사회보건사업의 일환으로 의료보험사업을 전개해왔던 강화군을 시범사업지역으로 선정했다(손명세, 2012: 122).
채영애(前 거제 지역사회건강사업 마을건강사업 담당 간호사) 구술, 2021. 05. 26.
채영애(1982: 226); 박정배(前 완주 용진면 마을건강요원) 구술, 2021. 08. 27.
가족계획어머니회는 1968년부터 전국적으로 하향식으로 조직되었던 리·동 단위 가임여성들의 조직이다. 가족계획어머니회는 마을단위의 대표적인 부녀조직 중 하나로 1977년 새마을부녀회 조직으로 마을 부녀조직이 통합되기 이전까지 존재하면서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며 활발하게 운영되었다고 평가받는다(신현옥, 1999; 황정미, 2001; 조은주, 2014).
고려대에서 실시했던 여주군 점동면 마을건강사업의 경우 1983년부터 29명의 마을건강원이 조직되었는데, 시범사업이 종료되는 1990년까지 약 3분의 1에 해당하는 10명의 마을건강원이 바뀌지 않고 활동을 지속했다. 마을건강원 활동을 중도에 그만둔 이유도 부녀회 임원 교체와 상관없이 대부분 취직이나 다른 일로 인한 시간부족으로 인한 것이었다(차철환 외, 1992: 172).
이하의 마을건강원의 역할과 업무와 관련한 보다 구체적인 내용은 각 지역사회보건사업의 보고서와 이명숙·한명화·이금련(1993)을 참고하였음.
신용협동조합전라남도지부(1984: 67).
「보건사업을 마치고」, 「농촌부녀」 32, 1984. 4. 17;
「저렴의 의료체제 시범사업 추진」, 「경향신문」, 1975. 12. 13.
「14개사업 14억불 요청」, 「경향신문」, 1972. 12. 07.
USAID, “Project paper for a Korea health demonstration loan,” 1975b, p. 14.
보건진료원제도의 역사와 성격에 관련해서는 이꽃메(2009), 정다혜(2022) 참고.
한국보건개발연구원(1979b: 5).
용진면에서는 신용협동조합 방식을 채택한 이유로 주민의 자발적인 참여와 협동적 방법으로 자신들의 문제를 경제적 측면에서부터 점진적으로 개선을 시도한다는 점을 들었다. 신용협동 조합은 금융협동뿐만 아니라 주민의 집단적 문제해결을 위한 민주훈련과 각종 사회교육을 실시할 수 있다는 점, 합법적으로 지역사회발전을 위한 개발사업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보건개발사업을 위한 적절한 조직형태로 여겨졌다(신용협동조합연합회전라남도지부, 1984: 89).
소병선(前 용진 보건개발신용협동조합 이사) 구술, 2021. 08. 27.
「마구잡이 공중보건의 배치 “실적행정”에 의료인력 낭비」, 조선일보」 1983. 10. 25; 유의촌(有醫村) 마을의(醫) 구실하게 구급체제로」, 경향신문」 1983. 11. 29.
이화여대 수동면 사업에서 마을건강원들이 분만세트와 같은 의료기구나 상비약을 관리하고 활용한 것이 주민들의 마을건강원에 대한 신뢰를 높이는 효과가 있었고, 그것이 마을건강원 활동에 긍지와 보람을 느끼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평가가 있었다(이화여자대학교 예방의학교실, 2000: 77). 이는 마을건강원들의 선호와 요구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이다.
「전국 읍면동에 건강원 배치」, 「경향신문」 1984. 10. 23.
EZE, “Funding priorities of health programmes in Korea,” August 2nd, 19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