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료냐 예방이냐? 결핵 퇴치 운동의 우선권 논의: 20세기 전환기 프랑스를 중심으로

Treatment or Prevention? the matter of Priority in the Anti-tuberculosis Movement at the Turn of the 20th Century France

Article information

Korean J Med Hist. 2022;31(3):691-720
Publication date (electronic) : 2022 December 31
doi : https://doi.org/10.13081/kjmh.2022.31.691
*Department of History, Kyung Hee University
민유기,*
*경희대학교 사학과 교수, 경희대 HK+통합의료인문학연구단 일반연구원, 프랑스사 전공
경희대학교 사학과 교수, 경희대 HK+통합의료인문학연구단 일반연구원, 프랑스사 전공 / 이메일: solidarite@khu.ac.kr
†이 논문은 2019년 대한민국 교육부와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임 (NRF2019S1A6A3A04058286).
Received 2022 July 6; Revised 2022 August 6; Accepted 2022 December 29.

Abstract

The purpose of this paper is to analyze discussions on the matter of priority in treatment and prevention that took place in the medical community, the government and social hygiene associations to tuberculosis referred to as one of the national calamity in France at the turn of the 20th century. In other words, it is to show that treatment and prevention have complementary properties in France’s anti-tuberculosis movement, considering the discussions on which institutions should preferably be expanded - between the Sanatorium that values medical treatment and the anti-tuberculosis dispensary that values social prevention.

Tuberculosis, which is known to have existed from the ancient times, spread to the era of industrialization and urbanization, resulting in a large loss of lives in the second half of the 19th century following cholera in the first half of the century. Starting in Germany in the middle of this century, Sanatorium established a treatment for tuberculosis patients with air therapy, proper exercise or rest, and diet. In France, a public Sanatorium was built for the lower class, not like a luxury resort style Sanatorium for the wealthy class, from the 1890s. The spread was slow, however, due to financial problems. In the 1900s, anti-tuberculosis dispensary as a health center were increasingly built in working class quarters. The debate over whether to support the sanatorium or the dispensary was ignited at first, but since the mid-to-late 1900s, the two institutions’ roles, namely, medical treatment and social prevention, have been recognized as complementary. The Anti-tuberculosis dispensary Act of 1916 and the Sanatorium Act of 1919 systematically supported the complementary relationship between treatment and prevention in fighting against tuberculosis.

1. 들어가며

2019년에 개봉한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은 그해 프랑스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이듬해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는 작품상과 감독상 등 4개 부분에서 수상하며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영화에서 부잣집에 기생하기로 작정한 가난한 한 가족은 가정부 자리를 차지하려 기존 가정부를 각혈하는 결핵 환자로 꾸며댄다. 부잣집 사모님은 요즘도 결핵이 있냐고 반문하지만, 음모를 꾸민 가족의 구성원은 경제개발협력기구(OECD) 국가들에서 한국이 결핵 발생률 1위라며 응답해 집주인이 겁을 먹고 기존의 가정부를 내쫓게 만든다.1) 세계보건기구(WHO) 자료에 의하면 2020년 지구적 차원에서 결핵은 전체 사망 원인 중 13번째, 감염병에 의한 사망으로는 코로나19(COVID-19)에 뒤이은 2번째 원인에 해당했다.2)

결핵(Tuberculosis)이란 명칭은 1830년대에 독일 의사 쇤라인(Johann Lukas Schönlein)이 식물 덩이줄기를 뜻하는 라틴어로 17세기부터 결절을 지칭하는 데 사용된 ‘투베르(Tuber)’를 활용해 처음 사용했다.3) 인수공통 감염병인 결핵의 원인균은 1억5천만 년 전 쥐라기부터 존재했던 것으로 알려졌고, 서양의 문헌 기록에서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 시기부터 등장한다(Hayman, 1984: 1015-1016; Daniel, 2006: 1862-1870). 폐 질환으로 체내 산소가 부족해 얼굴이 창백해지기에 근대에는 ‘백색 페스트’로 불리기도 했으며, 예술가 상당수가 폐결핵 환자로 알려지며 ‘예술가의 병’, ‘지식인의 병’이란 다소 낭만적인 별칭도 생겼다. 결핵에 관한 이런 인식은 19세기 후반에 변화했다. 결핵이 나쁜 위생 상태의 공장에서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고 열악한 주거 환경에서 거주하던 도시 노동자들에게 대거 발병해 ‘도시 하층민 병’, ‘빈곤의 병’이란 인식이 증가했기 때문이다. 프랑스는 19세기 말에 심각한 저출산 현상이 국가적 사회적 주요 관심사였다. 이에 당시 질병에 의한 사망 원인 1위였던 결핵을 저출산, 알코올 중독과 함께 ‘국가적 재앙’의 하나로 간주하며 의료계, 정치권, 시민사회가 협력하며 결핵 퇴치 운동을 전개했다.

역사적으로 결핵과 관련된 주요 전환점은 1882년 독일의 의사 로베르트 코흐(Robert Koch)에 의한 결핵균 추출이다. 원인균 파악 이후 의료적 예방 측면에서 전환점이 된 것은 1921년에 프랑스 파스퇴르연구소의 의사 겸 세균학자 알베르 칼메트(Albert Calmette)와 그의 동료였던 수의자 겸 세균학자 카미유 게랭(Camille Guérin)이 개발해 자신들의 이름을 붙인 BCG 예방 백신의 등장이다.4) 러시아 출신 미국인 미생물학자 셀맨 왁스먼(Selman Waksman)이 1943년에 개발한 항생제 스트렙토마이신(Streptomyces)이 치료 측면에서 결핵 퇴치에 이바지한 것 역시 하나의 전환점이다.5) 지구적 차원의 이들 전환점에 더해 프랑스 공중보건 역사에서는 결핵 퇴치와 관련해 1916년에 제정된 결핵보건소 설립법과 1919년에 제정된 결핵요양원(sanatorium)6) 설립법이 중요하게 언급된다. 두 법률은 20세기 전환기에 본격화된 프랑스의 결핵 퇴치 운동을 제도적으로 체계화하였고, 결핵 퇴치에 있어 치료 우선과 예방 우선 사이의 일시적인 대립을 해소시켰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중반까지 전개된 프랑스에서의 결핵 퇴치 운동 및 결핵보건소와 결핵요양원 관련 선행연구는 크게 네 개의 범주로 구분될 수 있다. 첫째, 고전적 의료사 연구로 20세기 중반에 주로 연구되었다. 19세기 결핵 관련 의과학계 성과들과 결핵 치료법, 결핵 퇴치를 위한 입법 흐름을 소개하고 분석하는 파리 의과대학 박사 논문들이 대표적이다(Jadot, 1944; Girond, 1948). 둘째, 의료에 관한 사회사 혹은 사회문화사 연구다. 사회경제사에 집중해오던 사회사 연구가 노동자의 일상생활과 건강, 위생과 공중보건, 사회정책과 사회운동 등으로 연구 대상을 확장하고 문화사적 분석을 추가한 20세기 말에 도출된 논저들이 주로 이 범주에 속한다. 결핵 환자에 대한 사회적 인식, 치료와 예방을 위한 의료계와 사회위생 단체의 활동을 고찰한 연구서가 주요 성과이며(Guillaume, 1986), 프랑스 제3공화국의 공중보건 정책 발전에 관한 방대한 연구서에서도 결핵 관련 내용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다(Murard & Zylberman, 1996). 영미권 학계의 성과로는 알코올 중독이나 위생 조건 등 사회적 환경과 결핵의 관련성을 중시하고 노동자 계급에 대한 부르주아의 두려움을 언급하며 결핵을 ‘사회적 질병’으로 분석한 연구서가 대표적이다(Barnes, 1995). 셋째, 도시사 연구로 리옹 명사들의 결핵요양원 건립을 포함한 결핵 퇴치 활동 분석(Dessertine & Faure, 1988), 파리의 공중보건 및 도시위생 강화 정책과 결핵 퇴치 운동의 관련성 분석(민유기, 2021; 2022) 등이 있다. 이들 사회사나 도시사 연구들에서도 부분적으로 다뤄지기도 하지만, 결핵보건소와 결핵요양원의 사회적 문화적 공중보건학적 역할에 관한 연구가 마지막 범주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주로 건축사적 측면에서 결핵요양원의 공간적 특성과 의료적 기능 연구가 많고(Cremnitzer, 2005; Grandvoinnet, 2014), 20세기 전반기 결핵보건소의 확산 과정을 고찰한 박사학위 논문(Poncelet, 2020), 양차 세계대전 사이 철도 노동자의 결핵 예방과 치료를 고찰한 연구도 있다(Lamoureux, 2008).

이들 여러 선행연구는 20세기 전환기 프랑스의 결핵 퇴치 운동에 관한 상당한 지식과 역사상을 제공하지만, 연구가 진척되지 않은 영역도 있다. 결핵요양원이나 결핵보건소는 주요 의료 기관으로 여러 연구에서 언급되나 다음과 같은 궁금증을 해소해주는 연구는 찾아보기 어렵다. 결핵균이 추출된 1880년대 초부터 결핵요양원과 결핵보건소 건립이 법률로 규정된 1910년대 말까지 프랑스의 결핵 퇴치 운동은 어떤 방향성을 추구했을까? 결핵보건소와 결핵요양원은 어떤 사회적 논의를 거쳐 확산되었을까? 결핵 퇴치라는 공통의 목표 달성을 위해 예방과 치료 가운데 좀 더 우선시된 것은 무엇이었을까? 치료와 예방의 우선권 논의에서의 대립은 어떻게 해소되었을까?

이와 같은 문제의식 속에서 이 글은 결핵균이 추출된 1880년대 초부터 결핵 보건소와 결핵요양원 설립 법률이 제정된 1910년대 말까지 프랑스의 결핵 퇴치 운동을 고찰한다. 목표는 의료계와 정치권 및 개혁적 시민사회 내부의 치료 우선 대 예방 우선이라는 미묘한 입장의 차이를, 그리고 점차 치료와 예방이 상호보완적이라는 주장과 인식을 결핵 퇴치 운동 참여자들이 공유하는 과정을 분석하는 것이다. 활용하는 주요 사료는 연구 대상 시기에 생산된 의회 공문서, 위생과 공중보건 관련 단체의 정기간행물, 결핵 국제학술대회 자료, 결핵 퇴치 운동에 참여한 의사들의 논저 등이다.

2. 20세기 전환기 결핵 퇴치 운동의 대두

산업혁명 초기에 공장이나 노동자 집단 주거지의 위생 상태는 매우 열악했고, 여러 도시에서 폐질환 환자가 빠르게 늘어났다. 파리 네케르(Necker) 병원의 의사 르네 라에넥(René Laënnec)은 자신이 발명한 청진기를 심장 및 폐질환 환자 진찰에 사용했다. 그는 인체 내부의 소리를 분석하고 이를 해부학적 병변과 연결한 결과를 1819년에 책으로 출간해 폐결핵을 진단하고 증상을 이해하는 생리학적 기반을 제공했다(Laënnec, 1819). 결핵 치료법으로는 18세기 중반부터 엄격한 식단과 절제된 생활, 적당한 야외 운동이 제시되었으며, 19세기 초부터는 체력 회복을 위한 식단 관리와 기후 요양 치료를 병행해 폐결핵을 완치한 사례들이 보고되었다(Knoff, 1900: 5, 10). 기후요법은 나쁜 공기가 질병의 원인이라는 미아즈마(miasma) 혹은 장기(瘴氣) 이론이 여전히 통용되던 19세기에 폐결핵 치료책으로 널리 인정되었다. 의사 샤를 뒤자(Charles Dujat)의 1837년 파리의대 박사 논문은 결핵 치료를 위한 기후요법을 강조했다(Dujat, 1837). 그의 논문은 영국 의사 제임스 클라크(James Clark)가 1830년에 출간한 심장과 소화 기관의 만성 질환 예방과 치료를 위한 기후요법에 관한 책(Clark, 1830)의 영향을 받았다.

결핵 사망률은 19세기 내내 줄어드는 추세였다. 프랑스에 비교해 총인구가 빠르게 증가하던 독일에서는 1886년에서 1900년까지 결핵으로 인한 사망이 30퍼센트 이상 감소했다(Armaingaud, 1904: 8). 프랑스에서도 중장기적으로 완만하게 결핵 사망률이 줄어들고 있었으나 단기적으로는 연간 사망자가 증가하기도 했다. 내무부 통계를 인용한 당대 자료에 따르면 프랑스에서 결핵에 의한 사망자는 1906년 87,091명이었으나 1907년에는 91,048명으로 1년 사이에 약 4천 명이 늘었다(Girard-Mangin, 1913: 25-26). 19세기 말 파리에서의 결핵 사망률은 일부 연구에서 ‘감소하지 않았다’고 언급되는데(Wilson, 1990: 375), 이는 부분적으로만 사실이다. 중장기적인 추세를 살펴보면 결핵 사망률 감소가 분명 나타나는데, 단기적으로는 특정 연도를 기준으로 이전보다 사망률이 높아지는 연도들이 제법 존재했기 때문이다. 파리시 통계국장으로 활동한 인구통계학자인 자크 베르티옹(Jacques Bertillon)에 의하면 파리에서 결핵 사망자는 1886년에 인구 10만 명당 527명, 1890년에 519명, 1895년에 508명, 1900년에 482명, 1905년에 448명으로 중장기적으로 감소했다. 그러나 1888년과 1889년 그리고 1890년에는 그 수치가 479명, 496명, 519명으로 증가했고, 1899년에서 1900년에도 468명에서 482명으로 증가했다(Bertillon, 1906: 177).

단기적으로 결핵 사망률이 늘어나는 해가 존재했을 뿐 아니라 경제 활동과 인구 재생산이 활발한 청년 세대가 가장 큰 피해를 입고 있었다. 1910년 만 20세부터 40세까지 청년의 사망자 42퍼센트가 결핵에 의한 것이었다(Girard-Mangin, 1913: 25-26; Artaud, 1914: 88). 특히 프랑스의 결핵 사망자 규모는 유럽의 다른 나라에 비교해 상대적으로 컸다. 프랑스 정부에서 1899년에 조직한 결핵위원회의 첫 활동 결과로 1900년에 출간된 보고서는 유럽 15개 국가의 폐결핵 및 폐 염증성 질환 사망자 통계를 제시했다. 이 통계에 의하면 프랑스는 러시아, 오스트리아, 헝가리에 이어 네 번째로 관련 사망자가 많았고 이는 잉글랜드의 2배에 해당했다(Commission de la tuberculose, 1900: 28).

이렇듯 결핵에 의한 사망은 심각한 문제였으나 예방 백신이나 치료제 개발은 기대만큼 이루어지지 않았다. 예방 백신과 치료제 개발 노력은 코흐가 1882년에 결핵균을 추출한 이후 본격화되었다. 그런데 코흐가 1890년에 치료제로 발표한 결핵균의 글리세린 추출물인 투베르쿨린(tuberculin)은 치료제로써 효과가 없음이 빠르게 판명되었다.7) 예방 백신과 치료제 개발이 지지부진하면서 프랑스 의료계는 독일의 결핵요양원 치료법에 본격적인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1880년대 말에 프랑스어로 번역 출간된 독일 의사 헤르만 브레메르(Hermann Brehmer)와 페터 데트바일러(Peter Dettweiler)의8) 책들은 프랑스에 결핵요양원 치료법을 널리 알렸다(Brehmer, 1887; Dettweiler, 1888). 이후 프랑스 의료계에서는 공기 치료, 식이요법, 야외 활동이나 휴식, 위생교육을 환자 상태에 따른 적절하게 조합해 사용하는 것이 결핵의 유용한 치료법이라는 인식이 증가했다(Léon-Petit, 1895: 40).

결핵 치료에 관한 의료계의 관심은 높았다. 파리 의과대학에서 1888년, 1891년, 1893년에 개최된 제1회, 제2회, 제3회 프랑스 결핵 학술대회에서는 예방과 치료 방안이 모두 논의되었으나 의료계는 치료 문제에 좀 더 관심을 보였다.9) 결핵 관련 연구 성과는 결핵 퇴치의 중심이 의료적 치료여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게 하였다. 파리 의과대학 소속 해부병리학자들은 1892년과 1895년 파리 공공병원의 시신 부검을 통해 기록상 폐결핵에 걸렸거나 치료를 받은 적이 없는 시신들 절반 정도에서 폐결핵이 치유된 흔적을 발견했다. 이런 사례는 이미 1850년대 의학계에 보고된 바 있었으나 결핵 퇴치 운동이 본격화된 시점에서 재확인되었고, 이를 근거로 결핵은 ‘만성 질환 중 가장 완치 가능한 질환’이라는 인식이 의료계에서 확산하였다(Baché, 1934: 31).

결핵에 관한 연구 성과들에는 결핵균의 감염과 확산을 막을 사회적 예방 활동의 중요성을 환기하는 것도 있었다. 파리 의과대학 학장 폴 브루아르델(Paul Brouardel)은 호흡기, 소화기, 피부 접촉 등 결핵균의 감염 경로를 연구한 결과 결핵이 주로 호흡기 감염을 통해 발병한다고 발표하며, 도시 빈곤층이 습관적으로 땅에 내뱉는 가래침이 결핵 확산의 실체적 매개라고 강조했다(Brouardel, 1901: 737, 733). 프랑스 의학학술원은 이미 1890년부터 건물의 안뜰이나 통로에 설치해서 주기적으로 소독하는 가래통 혹은 휴대 가능한 소형 가래통에 가래침 뱉기와 같은 결핵 예방을 위한 생활 지침을 발표하고 있었다(Knopf, 1900: 78).

다양한 의과학 연구 성과들과 더불어 민간 차원의 결핵 퇴치 운동 역시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공중보건을 중시한 의사들은 결핵 퇴치를 위한 민간 사회단체들을 여럿 조직하거나 전문가 혹은 후원자로 이들 단체에 참여하면서 자발적으로 결핵 퇴치 운동에 앞장섰다. 예를 들어 의사 세르시롱(G. Sersiron)과 아르맹고(A. Armaingaud)는 1892년에 보르도에서 ‘결핵 퇴치와 예방 동맹’이라는 사회단체 결성을 주도해, 결핵 예방을 위한 위생적 생활 지침의 대중적 확산을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결핵 퇴치 운동 내에서도 결핵 요양원을 중시하는 흐름과 사회적 차원의 예방을 중시하는 흐름이 달랐다. 일반적으로 명망가 의사들이나 개업 의사들은 지역 엘리트들과 함께 결핵요양원 건립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치료를 중시하는 태도를 보였다. 리옹, 마르세유, 릴, 루앙 등 주요 도시들의 저명 의사들은 도시별로 결핵요양원 건립 활동을 지원하였다(Letulle, 1901: 36-47). 반면 급진공화파의 사회개혁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관련 활동에 참여한 의사들이나 공공병원 의사들은 사회적 차원의 예방 활동을 더 중시하는 태도를 보였다. 사회 개혁적 급진공화파 정치인들과 이들을 지지하는 의료인들이 1904년에 결성한 사회단체 ‘사회위생동맹(Alliance d’hygiène sociale)’에는 결핵 퇴치만 아니라 알코올 중독 반대, 불량 주거 개선, 위생교육 확대, 상호부조 기금 확산 활동가들이 결집하였다(Murard & Zylberman, 1996: 443-474).

민간에서 시작된 결핵 퇴치 운동은 지자체와 정부의 공중보건 활동 강화로 이어졌다. 파리시는 1889년부터 감염병 환자가 발생한 장소에 무료 소독 공공서비스를 개시했다. 1890년대 중반 연간 3만5천~3만8천 건의 소독 활동 가운데 결핵과 관련된 소독이 가장 많이 이루어졌다. 파리 공공병원 총괄 사무국은 1896년에 결핵 환자가 병원에서 일반 환자를 감염시킬 위험성을 인지하고 병원 내 결핵 환자를 분리하고 전용 병실을 마련할 것을 결정했다. 파리시의회는 1900년부터 공공 도로에 가래침 뱉기 금지 캠페인을 대대적으로 펼쳤다(민유기, 2021: 45, 46, 51). 중앙정부는 1899년에 처음으로 결핵위원회를 조직했고, 이 위원회는 몇 차례 명칭을 바꾸면서도 계속 활동을 확대하며 의료계, 시민사회단체, 지자체들과 협력하였다.

3. 결핵요양원 대 결핵보건소: 건립 우선권 논의

결핵균 추출이 알려지고 이어진 의료계의 노력에도 예방 백신과 치료제 개발이 별다른 소득을 거두지 못하자 결핵요양원 건립 활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19세기 중반에 지중해나 대서양 해안가에 세워진 요양병원들과 유사하게,10) 1890년대에 지방 명사들과 의료인들의 협력으로 빈곤층의 결핵 치료를 위한 요양원들이 몇몇 지방 도시 인근에 세워졌다. 대표적인 사례로 프랑스 남동부의 주요 도시인 리옹에서는 의사 프레데릭 뒤마레스트(Frédéric Dumarest)가 지역 은행가들과 함께 1897년에 빈곤층 결핵 환자 구호 협회를 조직했다. 이 협회는 리옹에서 멀지 않은 알프스산맥 끝자락의 고원에 자리한 오트빌(Hauteville)에 1900년에 민중 결핵요양원을 건립했다.11) 파리권역에서는 한 종교적 자선단체가 센-생-드니(Seine-Saint-Denis)도 빌팽트(Villepinte)에서 1890년대 말부터 빈곤층을 위한 결핵요양원을 운영했다(Jankowski, 1994: 385-386).

민간 차원에서 시작된 결핵요양원 건립 활동은 지자체가 공중보건 강화를 위해 민중 결핵요양원을 직접 건립하도록 고무시켰다. 파리시 예산으로 운영하는 파리 공공병원(Assistance publique)을 총괄 사무국은 1890년에 파리의 가난한 결핵 환자를 돌보기 위한 시범적 민중 결핵요양원 건립을 결정하였다. 부지확보에 어려움을 겪다가 이 문제가 해결되자 바로 시의회가 배정한 공공병원 예산으로 건설에 착수하였고 1900년에 파리에서 약 70킬로미터 떨어진 앙지쿠르(Angicourt)에서 개원했다(Meesureur, 1905: 35-47). 민간의 결핵요양원 건립도 계속되었다. 1899년에 파리에서 조직된 한 결핵 환자 구호단체는 파리권역의 블리니(Bligny)에 1903년에 민중 결핵요양원을 개원했다(Guinard, 1925: 6).

중앙정부 차원에서는 1895년에 하원 공공위생위원회(commission d’hygiène publique)가 제출한 보고서를 통해 공공 결핵요양원 건립 문제가 처음으로 논의되었다. 환자를 한곳에 결집시키면 결핵균 확산의 온상이 될 거라는 건립 반대 의견이 제시되었으나, 건립을 찬성하는 측은 ‘통제되지 않는 결핵균’이 위험하지 ‘엄격한 관리를 받는 결핵 환자의 결집’은 위험하지 않고 결핵 퇴치에 크게 기여한다고 항변했다. 하원의 공공위생위원회는 1901년 하원에 제출한 결핵 확산 방지 방안 보고서에서 국가와 지자체가 결핵 치료를 위한 질병보험 제도를 촉진할 것, 공무원을 위한 국립 결핵요양원을 건립할 것 등을 건의했다(Amodru, 1900: 791-792). 1899년에 조직된 정부의 결핵위원회는 1896년에 마련된 파리 공공병원의 병원 내 결핵 환자 분리 치료 지침의 전국적 적용을 정부에 요구했고, 1904년 1월 15일 자 정부의 규칙 회람(circulaire)으로 해당 지침이 전국의 모든 병원에서 적용되도록 만들었다. 병원 내 결핵 환자 분리 치료와 입원, 지자체 관내 여러 공공병원이 존재할 경우 결핵 환자 전용 병원 지정 등이 요구되자 결핵 치료 병원의 기능을 할 결핵요양원 건립에 관한 관심이 더 확대되었다.

파리 공공병원 총괄 사무국 내 병원 설립위원회는 1903년에 결핵 환자 전용 병원 신설을 결정했는데 부지확보에 난항을 겪다가 파리권역에서 방치되던 브레반(Brévannes) 고성을 매입하고는 개보수를 거쳐 1900년대 중반부터 운영을 시작했다.12) 이 결핵 병원은 결핵 환자 호스피스(hospice)로 설립되었으나 당대인들이 일반적으로는 사나토리움(sanatorium), 즉 결핵요양원으로 지칭했고, 관련 각종 사료에도 두 용어가 혼용되어 등장한다. 오늘날의 시각에서 병원과 호스피스 그리고 요양원은 다른 체계의 의료 기관들이나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전반에 프랑스에서는 결핵요양원이 많은 이들에게 결핵 환자 치료를 위한 전문 병원 혹은 호스피스로 여겨졌다. 결핵요양원 확산을 적극적으로 옹호한 의료인들에게 이곳은 “위생적 방법으로 환자의 전반적 상태를 치료하는 특수 기관”으로 인식되었으며(Grillot, 1901: 8), 결핵 환자를 완치할 수 있는 ‘유일한 치료’ 시설로 평가되었다(Guinard, 1925: 10).

그러나 결핵요양원 건립과 확산이라는 결핵 퇴치 운동의 방향성에 회의적인 목소리도 존재했다. 비용 대비 치료 효과가 문제였다. 1893년에 열린 제3회 프랑스 결핵 학술대회에서 한 의사는 결핵요양원이나 호스피스의 확산에는 ‘과도한 비용’이 발생한다고 경고하였다(Drouineau, 1893: 787). 1901년 의학학술원의 논의에서는 30만 명에 이르는 결핵 환자를 수용할 결핵요양원 건립에 18억 프랑과 그 운영 유지에 연간 3억2천8백만 프랑이 소요된다는 주장이 개진되었다(Brunon, 1901: 448). 새 결핵요양원의 건립을 구상하거나 계획하는 이들은 유명세를 떨치던 기존 결핵요양원의 건축시설을 참고하면서 상당한 비용을 필요로 하는 고급스러운 건축 장식에 반감을 가지기도 했다. 프랑스 의료계 관계자들은 독일에서 결핵요양원 치료법을 확산시킨 브레메르가 건립해 운영한 결핵요양원을 방문 시찰한 후 의료적 측면과 건축적 측면에서 서로 다른 평가를 했다. 시찰단은 브레메르의 결핵요양원 내부의 공간적 격리 구조나 치료를 위한 시설에는 긍정적인 평가를 했으나 숲 한가운데 고딕 양식으로 중세 영주의 성처럼 지어진 결핵요양원의 조망탑, 포탑, 장식적 첨탑, 베란다, 파사드 등 건축 장식에 대해서는 “매혹적이나 다소 거만을 피우는 듯 하는 건축적 총체”가 치료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고 부유층 환자의 만족감을 위한 것이라며 비판적인 시각을 표출했다(Léon-Petit, 1895: 102; Knopf, 1900: 151).

건립 및 운영비 차원에서 결핵요양원의 결핵 퇴치에 관한 효용성을 문제시한 이들은 이 기관이 부유층만을 위한 곳이라며 비판적인 태도를 보였다. 도시 노동자와 빈민층이 결핵 환자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상황에서 고급 결핵요양원에 대한 노동자들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이에 사회개혁가들은 노동자 결핵 환자를 치료할 공공 혹은 민중 결핵요양원 건립을 늘려야 한다는 의견을 자주 개진했다. 기후나 자연 풍광이 좋은 곳에 고급 결핵요양원을 새로 짓지 말고 도시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버려진 고성이나 농장 등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자는 주장도 등장했다. 독일에서도 같은 논리로 1890년대부터 민중 결핵요양원 건립이 증가하고 있었는데, 관련 비용은 1883년 비스마르크(Otto von Bismarck) 수상이 도입한 의료보험의 지역 사무국이 마련했다.13) 1898년 12월 파리의 한 일간지는 부유층만 이용 가능했던 시설을 대중적으로 확산하여 ‘덜 특권적 계층들도 이용’ 가능하게 해야 한다며, 파리 공공병원 총괄 사무국에서 건설 중이던 앙지쿠르 민중 결핵요양원에 긍정적 평가를 하였다(Frollo, 1898: 1).

이처럼 1890년대까지 결핵 퇴치 운동의 주요 방향성은 민간 차원에서 부유층이나 중간층 결핵 환자용 결핵요양원을 건립하거나, 파리 공공병원 총괄 사무국처럼 도시 노동자나 빈민층 결핵 환자용 민중 결핵요양원을 건립해 치료에 우선권을 부여하는 것이었다. 문제는 민중 결핵요양원에서 빈곤층 결핵 환자를 수용해 무료로 치료를 한다고 하더라도 심각하지 않은 상태의 빈곤층 환자들이 생업을 포기하고 장기간에 걸쳐 치료를 받아야 하는 요양원에 입원하는 게 불가능했다는 점이다. 중증 환자의 경우 결핵요양원에서 치료를 받더라도 완치의 가능성이 크지 않았기에 죽음을 기다리는 격리 수용소라는 부정적 인식도 존재했다. 결핵 퇴치 운동과 같은 사회개혁 차원의 위생과 공중보건 강화 활동의 이면에는 부르주아 사회 지도층이 빈곤층의 삶의 방식을 통제하며 도덕화하려는 의도 역시 포함되어 있었고, 결핵요양원을 통해 빈민들을 격리시키는 것이 아닌지도 의문시되었다(Seignan, 2010).

민중 결핵요양원의 한계가 드러나는 상황에서 1900년대 들어 치료보다 예방의 중요성이 강조되기 시작했고, 민간과 공공 영역의 관심과 지원 역시 결핵요양원보다 결핵보건소 건립에 집중되었다. 정부와 사회위생 관련 시민사회 단체들도 비용과 기대효과 차원에서 치료보다 예방을 더 우선시하였다. 결핵요양원 건립을 지지하던 의사 중에서도 사회위생에 관심을 기울인 이들은 치료에서 치료 및 예방으로 관심사를 확장시켰다. 파리 의과대학 교수로 당대 저명 신경과 의사였던 루이 랑두지(Louis Landouzy)는 1901년 런던에서 열린 제2회 결핵 국제학술대회에서 많은 결핵 환자 수를 고려할 때 결핵요양원에서 환자의 완치 사례가 너무 적기에 결핵요양원은 결핵 퇴치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발언했다. 사회위생을 중시한 또 다른 의사는 1903년 의학학술원에서 결핵을 퇴치하기 위해서는 치료만이 아니라 결핵을 확산시키는 알코올 중독, 불량주택, 위생에 대한 경시나 무지와 맞서 싸워야 한다고 호소했다(Baché, 1934: 38).

사회위생 활동가들은 경제적 이유로 쉽게 건립하기 어려운 결핵요양원보다 일상적 예방 활동이 가능하고 도시 노동자 주거지역 내에 설립이 가능한 결핵보건소가 결핵 퇴치에 큰 역할을 할 수 있음을 반복적으로 강조했다. 보건소는 빈곤층 환자 구호 시설로 산업화와 도시화로 각종 사회문제가 발생한 19세기 중반부터 여러 도시에서 종교단체나 세속적 자선단체 등이 자선과 구호 활동의 일환으로 운영하기 시작했다. 프랑스어로 ‘보건소(dispensaire)’는 ‘나눠주다’라는 뜻의 라틴어 단어(dispensare)에서 유래한다. 1887년에 출간된 『상용 의학사전』에서 보건소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무료 의료 및 의약품을 제공하는 자선 시설” 또는 “의료인이 무료로 상담을 제공하고 빈곤층에 의약품을 제공하는 특별 진료소”로 설명되었다(Labarthe, 1887: 630). 프랑스 전역에 알려진 최초의 주요 보건소는 르아브르(Le Havre)에서 의사와 지역 명사들이 시의 지원을 받아 1875년에 문을 연 아동 환자용 보건소였다(Foville, 1886: 520-538). 1893년 7월 15일자로 빈곤층 무료 의약품 지원법이 제정되자(Faure, 1984: 593-608) 보건소 확산 움직임이 본격화되었다. 이런 움직임 속에서 결핵을 예방하고 진단하고 치료에 관련된 지원과 조언을 하는 전문적인 결핵보건소가 나타났다.

파리에서 결핵보건소는 1901년 파리의 가난한 구역 중 하나인 몽마르트르(Montmartre)에 의사 레옹 보네(Léon Bonnet) 주도로 설립되었다. 이후 1904년까지 파리의 20개 구 가운데 부유한 구인 6구, 7구, 16구를 제외한 모든 구에 결핵보건소가 설립되었다. 특히 1903년에 파리 20구에 문을 연 주에-루브-타니에스(Jouye-Rouve-Taniès) 보건소는 시민들의 기부금을 재원으로 파리시가 직접 설립했다(Vallin, 1901: 707-732; Dehau & Ledoux-Lebard, 1906: 106). 1901년에 북부 산업도시 릴(Lille)에서는 이 도시의 파스퇴르연구소 소장이던 칼메트가 연구소에 딸린 시유지에 시의 지원과 지역 명사들의 기부로 결핵보건소를 설립했다. 개소 당시 명칭은 파스퇴르의 최측근 동료였던 저명 의사 겸 세균학자 에밀 루(Emile Roux)의 이름을 딴 에밀-루 ‘예방원(préventorium)’이었다.14)

릴에 결핵보건소를 설립하고 관련 활동이 프랑스 전역으로 전파되도록 헌신한 칼메트는 본래 결핵요양원 활동을 지지한 의사였다. 그는 1890년대에 부유층만이 결핵요양원을 유용하게 이용 가능함을 파악하고는 상당한 건립비가 필요한 특별한 건축물 없이 기존 농가를 이용해 빈곤층 환자에게 결핵요양원식 치료법을 적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그는 위생교육을 받지 못한 이들의 일상을 엄격하게 관리하기 어렵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그는 결핵의 치료만이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적용 가능한 위생교육을 통한 사회적 예방 활동이 치료보다 우선적으로 필요하다고 판단했고, 결핵 퇴치 운동이 성과를 내기 위해서는 모든 산업도시에 결핵보건소를 설립해 ‘위생교육’과 ‘가난한 노동자 결핵 환자의 생활 지원’에 힘써야 한다고 주장했다(Calmette, 1901: 577). 칼메트는 정부의 결핵위원회 회의에서 노동자 결핵 환자가 의료 기관을 찾아오기 전에 의료인이 먼저 그들을 찾아가야 한다며 다음과 같이 웅변했다.

결핵에 걸린 노동자가 의사 진료를 받으러 가서 [확진 판정을 받고] 강제로 실업 상태가 될 때까지 기다릴 것이 아니라, 그가 중상을 입은 것을 눈치 채기 전에 그를 찾아가 도움을 주어야 한다는 원칙을 수립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감염 초기에 그에게서 결핵을 발견할 수 있기를 바라며, 우리가 그의 가족과 그의 [생활] 환경을 보호하면서 그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조언과 보살핌을 제공하기 위해 즉각적으로 노력하기를 바랍니다(Commission de la tuberculose, 1900: 337).

결핵보건소의 일차적 업무는 진단검사를 통해 결핵이 의심되는 지역민의 감염 여부와 지역사회의 감염 확산 정도를 파악하는 것이었다. 칼메트의 결핵보건소에서는 운영 첫 3년 동안 검진을 받은 직물업 남성 노동자 185명 중 95명 그리고 동일 직종의 여성 노동자 242명 중 138명이 결핵 판정을 받았다(Calmette, Verhaeghe, Woehrel, 1905: 54). 이곳은 산업도시 릴의 노동자들이 쉽게 방문하도록 평일 밤늦게 그리고 주말에도 문을 열었고, 결핵 감염 판정을 받은 이들에게 병증 단계에 따라 적당량의 고기, 달걀, 우유를 제공하기도 했다. 기본적 업무인 검진뿐 아니라 결핵보건소에는 관할 구역에서 거주하는 모든 결핵 환자의 등록 관리 및 주기적인 가정방문, 환자의 능력과 건강 상태에 상응하는 일자리 소개, 유용하다고 판단되는 매 순간의 주거지 소독, 위생적인 소형 휴대용 가래통 배부, 가래 제거 방법 안내 교육, 의복 살균 등의 활동이 요구되었다. 결핵보건소는 “가정에서 가능한 최상의 조건에서 결핵 환자의 위생을 보장하고 환자와 떨어져 지낼 수 없는 주변 사람들을 감염으로부터 보호하는 데 필요한 모든 지침을 제공”하는 예방 활동 기관으로 사회개혁 세력에게 크게 환영받았다(Amodru, 1900: 793).

칼메트의 결핵보건소는 결핵 환자의 가정을 방문해 생활환경을 조사했다. 일상적 사생활에 대한 간섭이나 개입 혹은 훈육 느낌을 줄 수 있는 방문을 반기지 않는 이들을 안심시키려 방문 간호사를 돕는 사회조사 요원으로는 지역사회에서 신망이 큰 은퇴 노동자를 활용했다. 가정방문 조사에서는 결핵 환자와 그 가족의 영양 섭취와 주거 위생 상태, 일상생활 습관 등을 파악하고 환자의 상태가 악화하지 않고 가족 구성원을 감염시키지 않도록 해줄 위생지침을 안내하고 교육했다. 1907년 사회위생동맹 전국대회에 참가한 이들은 ‘칼메트식 혹은 프랑스식 보건소’가 결핵을 진단하고 위생을 전파하며 환자 가정에서 예방 교육을 하는 3가지 목표를 추구하는 이상적 결핵 ‘예방 도구’라고 강조했다(Alliance d’hygiène sociale, 1907: 366). 칼메트의 결핵보건소는 유럽 각국에 ‘프랑스식’ 결핵보건소로 알려졌다.

결핵보건소는 결핵요양원에 비교해 건설비가 적게 들었으며, 도시 노동자 밀집 거주 지역에서 결핵 감염 여부를 진단하고 환자가 주변에 결핵균을 전파하지 않도록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위생교육을 할 수 있어서 기대되는 예방 효과가 컸다. 따라서 20세기 전환기에 사회적 연대를 내세우며 중도적 사회개혁을 추구한 급진공화파의 열띤 지지와 호응을 얻었다. 급진공화파의 상징적 정치인 레옹 부르주아(Léon Bourgeois)는 수상과 하원의장을 지내며 결핵 퇴치 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주도했다.15) 그러나 결핵보건소 건립을 결핵요양원의 대안처럼 인식하는 정치권이나 사회단체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시각도 상당했다. 결핵요양원의 공기 치료와 식이요법, 야외 활동 혹은 휴식이 유일한 효과적 치료법이라 확신한 의료인들은 결핵보건소의 예방적 역할은 제한적이며, 결핵보건소는 결핵요양원이 대거 건립되어 환자를 수용하기 전까지 결핵 퇴치에 임시적인 효과만을 제공할 수 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Congrès international de la tuberculose, 1905: 503-518).

4. 우선권 갈등의 해소: 결핵 퇴치를 위한 치료와 예방의 상보성

겉으로 보기에 결핵요양원과 결핵보건소는 치료냐 예방이냐 우선권 논쟁의 대표적 주자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는 치료냐 예방이냐는 논쟁의 표면과 달리 결핵요양원과 결핵보건소는 대립적 갈등적 관계가 아니었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프랑스에서 결핵요양원과 결핵보건소는 결핵 퇴치라는 하나의 목적에 도달하기 위한 상보적 의료 기관이었다. 각각의 기관을 지지하는 세력 간의 입장 차이와 대립은 어느 한쪽의 기능과 역할을 무시하거나 폄하를 하는 것이 아니라, 한정적 자원을 어디에 먼저 사용할 것인지 우선권의 요구를 둘러싸고 펼쳐졌다. 시기적으로는 1890년대에 치료 중심의 결핵요양원 건립이, 뒤이어 1900년대 초부터는 예방 중심의 결핵보건소 건립이 결핵 퇴치 운동의 우선적 방향성으로 더 많은 주목을 받았다.

당대 의료계 인사들은 우선권 방향성 관련 논의에 관심을 가지면서도 결핵요양원이 치료와 예방의 기능을 같이 수행한다는 인식을 공유하였다. 1898년에 파리 의과대학에서 개최된 제4회 프랑스 결핵 학술대회의 전체 여덟 세션 중 첫 번째 세션 주제가 ‘결핵 예방과 치료 수단으로써 결핵요양원’이었다. 1899년 베를린에서 열린 제1회 결핵 국제학술대회에 참가한 브루아르델 등 프랑스 의료계의 주요 인사들은 도시와 주변 교외에 민중 결핵요양원을 세워 노동자와 빈곤층 환자를 치료하면서 예방도 병행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Brouardel & Grancher, 1899: 739). 이 국제학술대회에서는 결핵 발병률과 결핵 환자 면역 문제, 결핵 예방을 위한 주거위생 문제, 결핵요양원의 치료법과 확산 방안을 함께 논의하였다.16)

1890년대 결핵요양원 관련 논의들이 왕성하게 전개될 때에도 프랑스 의료계는 치료가 지닌 예방 효과를 가벼이 여기지 않았다. 파리권역에서 1899년에 결성되고 1903년에 블리니 민중 결핵요양원을 세운 구호단체는 결핵 초기의 노동자, 소상인과 장인의 치료에 필요한 제반 요소들을 결합하는 “노동자를 위한 치료 기관이자 그의 가족을 위한 예방 기관” 건립과 운영을 단체의 목적으로 내세웠다(Démier & Barillé, 2007: 260). 파리 의과대학에서 결핵 관련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파리와 뉴욕에서 결핵 퇴치 운동에 헌신한 독일계 미국인 크노프(S. A. Knopf)는 결핵요양원이 환자를 치료하는 동시에 환자에게 타인을 감염시키지 않도록 위생지침을 제공하는 예방 교육 기관이라고 자주 언급했다(Amodru, 1901: 791). 프랑스 의사 모니(E. Mosny)는 결핵요양원이 ‘치료 기관이자 예방 학교’라며 치료와 예방이 분리되지 않는 상호 보완적 기능이라고 천명했다(Mosny, 1901: 921). 결핵요양원이 환자를 치료하는 기관이지만 환자가 엄격한 위생 규율을 체화하는 곳이기에, 병증이 완화되거나 상태가 호전하여 퇴소하는 이들이 일상에서 예방적 위생 실천을 확산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9세기 후반 독일 사례를 통해 확립된 결핵요양원의 치료법과 효능은 프랑스를 포함한 유럽 각국에 널리 알려졌다. 그러나 독일의 결핵요양원을 그대로 수용하기에는 프랑스의 재원이 충분하지 않았다. 독일에서 결핵요양원의 확산은 1883년 세계 최초로 제도화된 질병보험 체제에서 조성된 재원이 크게 기여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프랑스의 상황은 이와 달랐다. 칼메트는 독일의 질병보험 기금과 비교할만한 재원이 마련되어야만 프랑스가 독일식 결핵요양원 모델을 수용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Calmette, 1901: 577). 그는 충분한 재원이 마련되어 결핵요양원을 건설할 수 있게 되기 전에 우선적으로 사회적 예방 활동이 가능한 결핵보건소의 빠른 건립과 확산의 필요성을 호소했다.

프랑스의 사회적 정치적 상황 역시 결핵 퇴치 운동의 방향성이 1890년대의 치료 우선에서 1900년대 초의 예방 우선으로 변화하는 데 일정한 영향을 끼쳤다. 프랑스 정부 최초의 결핵위원회 구성은 1899년 11월로 같은 해 6월에 탄생한 발덱-루소(P. Waldeck-Rousseau) 수상의 ‘공화국 수호 정부’에서였다. 드레퓌스 사건이 야기한 국론분열과 사회갈등을 완화하고 공화국 체제를 뿌리내리려는 정부의 목표 속에서 감염병에 대한 대응은 공화국의 시민에 대한 공적 책임을 다하는 것이었다. 최초의 결핵위원회 위원장을 기업인 출신 정치인으로 르아브르 시장 재임 당시 보건소 건립과 운영을 지원했고 이 지역에서 하원의원에 선출된 후에는 노동자를 위한 사회주택 관련 입법을 주도한 쥘 시그프리드(Jules Siegfried)가 맡은 것도 이런 맥락에서였다. 파리 의과대학 학장 브루아르델은 의료계를 대표해 이 위원회의 부위원장을 맡았다. 공화국 수호라는 정치적 흐름 속에서 상당한 비용과 기간이 필요했던 결핵요양원보다 결핵보건소가 결핵 퇴치를 위한 우선적 공적 지원 대상으로 비교 선택되기 쉬웠다. 따라서 중앙정부의 결핵위원회 논의에서는 치료보다 예방이 우선권을 갖게 되었다. 1900년 2월에 열린 결핵위원회 첫 회의에서 시그프리드 위원장은 사회적 예방 활동을 위한 보건소 설립 필요성을 역설했다(Waldeck-Rousseau, 1903: 86). 위원회는 결핵 감염을 줄이기 위한 예방 활동 목적의 보건소 설립 필요성을 강조하며 첫 활동을 마쳤다.

위원회에서 우선 중시된 결핵보건소 설립은 치료를 중시하며 결핵요양원 확산을 우선시한 1890년대의 흐름을 보완하는 것이었다. 위원회에서 활동한 기술공학자 폴 디슬레르(Paul Dislère)는 결핵보건소 설립을 목표로 내세운 파리의 한 자선단체 총회에서, “결핵은 치료 가능한 질병이기에” 치료가 중요하지만 동시에 “결핵은 피할 수 있는 질병이기에” 예방 조처가 치료를 위한 조처들 곁에서 함께 작동해야 한다며, “치료와 예방의 두 원칙을 자주 상기해야” 한다고 연설했다(Dislère, 1903: 6).

결핵 퇴치 운동에서 치료와 예방의 두 방향성이 지닌 상보성에 대한 인식은 1900년대 중후반부터 치료와 예방을 둘러싼 우선권 요구들을 잠재우기 시작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칼메트는 1890년대 농촌에서 결핵요양원 활동을 하다 1900년대 초부터 결핵보건소 활동 중시로 선회하였으나, 1907년에 두 기관이 동시에 필요하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그는 1907년 베를린에서 열린 국제 위생 대회에서 결핵을 퇴치하기 위한 투쟁은 첫째, 예방 조처로 건강한 이들을 보호하고, 둘째, 결핵보건소, 결핵요양원, 병원의 보살핌으로 환자를 치유하는 노력을 동시에 경주하는 조건에서만 효과적일 수 있다고 선언했다. 마찬가지로 결핵요양원의 치료 효과에 비판적 입장을 피력해오던 의사 랑두지는 1912년 로마에서 열린 한 학술회의에서 결핵 퇴치 운동의 이중적 방향성이 첫째, 질병에 대한 사회적 예방, 둘째, 질병에 대한 의료적 치료라고 웅변했다. 이런 인식은 1913년 파리에서 열린 사회위생동맹 전국대회에서 논의되고 재확인되는바, 대회 참가자들은 의료적 치료를 우선시한 입장과 사회적 예방을 우선시한 입장의 옹호자들 사이 반목 대신 감염의 근원을 고갈시킨다는 유일한 실천적 목표를 위한 결핵 퇴치 운동 세력의 단결을 호소했다(Alliance d’hygiène sociale, 1913: 149).

결핵요양원이나 결핵보건소는 조금씩 증가했고, 전반적인 사회위생 강화 활동과 공중보건 개선 등으로 결핵 환자 발병과 사망은 제1차 세계대전이 발생할 때까지 완만하게나마 줄어들었다. 하지만 전쟁이 발발한 후 다시 환자 수가 크게 늘어나기 시작했다. 최초의 총력전답게 여성들도 동원되어 후방의 군수공장에서 일했는데, 공장들의 비위생적 노동조건과 환경 탓에 결핵 감염자가 증가했다. 전선에서는 장기간의 참호전이 병사들의 결핵 감염을 확산시켰다. 1914~1918년 4년의 전쟁 기간 결핵으로 제대한 군인은 10만9천458명에 달했다(Blum, 1919: 376-385; Viet, 2015: 534). 군 복무 중 감염이 확인된 경우는 제대 후에 치료를 위한 지원을 받았으나 입대 전 잠복 결핵 상태에서 신체검사에서 이를 식별하지 못해 군복무를 하다가 뒤늦게 발병한 경우는 치료를 위한 공적 지원을 받지 못했다.

전쟁 기간 전방과 후방에서 확산하는 결핵에 대응하기 위해 중앙정부는 서둘러 결핵 퇴치 운동의 법률적 제도적 기반을 확립하고자 했다. 먼저 급진공화파 정치인 레옹 부르주아의 주도로 ‘사회위생과 결핵 퇴치 목적의 예방 보건소 설립법’이 제정되어 1916년 4월 18일자 관보에 공포되었다. 관련 법안은 이미 1910년에 사회위생 및 결핵 예방 보건소 설립 법안으로 하원에 제안되었으나 의회에서 구체적으로 논의되지 못했고 그 이후에 제안된 유사 법안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전쟁 발발 이후 군수공장 여성 노동자들의 결핵 감염 여부를 진단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병사를 대상으로 하는 위생교육의 필요성이 커지면서 오랜 입법 시도가 성과를 거두었다. 해당 법률은 ‘사회위생 및 결핵 퇴치 공공보건소’를 결핵 퇴치 교육, 예방과 위생 조언, 요양병원과 결핵요양원 혹은 치료소로 보내질 환자의 보호와 격려, 환자로 인해 오염될 수 있는 의복, 물품, 장소, 주택 소독 등의 특수한 임무를 담당한다고 규정하였다. 아울러 결핵보건소는 환자에게 지자체의 위생 및 구호 관련 재원으로 무료 진료와 무료 약품을 제공하며, 법 제정 5년 내 프랑스 전국의 평균 사망률을 초과하는 지자체는 ‘사회위생 및 결핵 퇴치 공공보건소’를 의무적으로 설립해야 한다고 규정하였다.17)

또한 1917년 3월에는 결핵요양원 설립 법안이 하원에 제출되어 1919년 9월에 통과되었다. 이 법은 1919년 9월 9일자 관보에 ‘결핵 환자 치료를 위한 특별 요양원 설립 및 해당 기관의 환자 관리 조건과 규정법’으로 공포되었다. 이 법은 결핵요양원을 국가, 도, 기초 자치체인 코뮌, 공공기관에 의해 운영이 보장되는 결핵 환자 ‘치료에 특화된 곳’으로 정의했고, 국가가 이들 기관 운영비를 지원한다고 규정했다. 국가는 결핵요양원이 1916년 법으로 건립되는 여러 보건소와 연계되는 조건 속에서만 설립, 정비, 확대, 수리에 필요한 비용을 지자체에 배부하는데, 국가의 지원금이 관련 총비용의 절반을 넘을 수는 없었다. 해당 법은 국가, 도, 코뮌이 1893년 빈곤층 의료지원법의 적용을 받는 이들에게 결핵요양원 입원비를 지원한다고 규정했다. 또한 빈곤층 무료 의료지원 대상인 결핵 환자가 입원할 결핵요양원이 존재하지 않는 도는 5년 이내에 공공 결핵요양원을 건립하거나 민간 결핵요양원 건립을 지원해야 하고, 민간 결핵요양원의 빈곤층 무료 입원비는 국가가 분담한다고 규정했다. 자치체나 사회단체의 지원으로 건립된 민간 결핵요양원은 자유롭게 운영하되 그 현황을 도지사에게 보고해야만 했다.18)

결핵보건소 건립법은 결핵요양원 등 치료 기관에 입원하기 전까지 보건소의 결핵 환자에 대한 보호 관리를 명시했고, 결핵요양원 건립법은 해당 기관을 결핵보건소와 연계한다는 조건에서 공적 지원을 한다며 요양원과 보건소의 상보적 관계를 명시했다. 두 법은 모두 5년 이내 일정한 조건 내에 지자체의 결핵보건소와 결핵요양원 설립을 의무화하였기에 양차 세계대전 사이에 프랑스 전역에서 해당 기관들이 크게 늘었다. 1917년에 결핵보건소는 파리에 30곳, 지방에 22곳, 총 52곳이 존재했는데 1923년 1월 1일에는 79개의 도에 421곳, 같은 해 말에는 498곳이 존재하게 되었다. 1917년에 민중 결핵요양원은 12곳으로 총 1,162개의 침상을 보유했으나, 1923년 1월 1일에는 결핵요양원 전체 침상이 약 2만 개에 이르렀다(Guillaume, 1986: 195-196). 양차 세계대전 사이 시기에 BCG 백신이 보급되고 결핵보건소와 결핵요양원의 상보적 활동이 증가하면서 프랑스의 결핵 퇴치 운동은 크게 확대되었다.

5. 나오며

결핵은 19세기 산업화와 도시화 흐름과 함께 도시 노동자와 빈민에게 널리 퍼졌고 많은 인명 손실을 초래했다. 세기말에 다른 국가들과 달리 심각한 저출산 현상으로 국가적 사회적 위기의식이 강했던 프랑스에서는 질병으로 인한 사망 원인 1위였던 결핵을 국가적 재앙의 하나로 인식하였다. 이에 따라 20세기 전환기에 의료계, 시민사회단체, 정치권 등 사회적 행위자들의 협력 네트워크에 의한 결핵 퇴치 운동이 활발하게 펼쳐졌다. 1890년대에는 치료를 위한 결핵요양원 건립이 결핵 퇴치 운동의 주요 방향성이었다, 처음에는 기후 좋은 해안가나 산악 고원 지대에 부유층을 위한 고급 요양 치료 기관이 건립되었으나 점차 대도시 인근에 도시 빈곤층 환자를 위한 민중 결핵요양원 건립 움직임도 등장했다. 하지만 결핵요양원 건립은 재정적 문제로 빠르게 확산하기 어려웠고, 1900년대 들어와서는 파리와 주요 산업도시의 노동자 주거 구역에 결핵 검진이라는 의료 기능 외에 사회적 예방과 위생교육을 주요 목적으로 하는 결핵보건소 건립이 더 주목받았다. 칼메트가 산업도시 릴에 세운 결핵보건소는 결핵 진단뿐 아니라 결핵 환자의 가정방문을 통한 사회조사나 일상생활에서의 위생교육 측면에서 돋보였고 프랑스 전역에서 결핵보건소 활동을 촉진하였다.

결핵요양원과 결핵보건소의 우선적 건립과 확산을 놓고 각 기관을 옹호하는 세력 사이에는 지원의 우선권 논의가 펼쳐졌다. 의료인들은 의료적 치료와 예방을 중시하는 결핵요양원 건립과 확산을 선호했고, 사회개혁에 몰두하며 사회위생을 중시한 정치권과 사회단체들은 의료적 예방뿐 아니라 식생활 개선과 주거 환경 개선 활동 등 사회적 예방을 가능하게 해주는 결핵보건소 건립과 확산을 선호했다. 치료와 예방의 우선권 논쟁은 한정적 재원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사용할 것인가의 문제였지 어느 한 측면을 부차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게 아니었다. 1900년대 중후반부터는 의료적 치료와 사회적 예방이 상보적이라는 인식이 강화되었다. 1916년과 1919년에 각각 제정된 결핵보건소와 결핵요양원 건립법은 치료와 예방의 상보성을 제도적으로 뒷받침하였다.

특정 질병이 불러일으킬 수 있는 공중보건 위기와 관련해 한정적 의료자원이나 사회적 지원을 의료적 치료나 사회적 예방 중 어느 한 측면에 우선 투여해야 하는지 선택해야 하는 상황은 언제든 등장할 수 있다. 치료와 예방의 의료적 사회적 기대효과에 대한 다양한 사회집단의 서로 다른 가치부여는 사회적 긴장이나 갈등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이 글에서 고찰한 20세기 전환기 프랑스 결핵 퇴치 운동에서의 치료와 예방 우선권 논의는, 의료계와 시민사회 그리고 정치권이 서로 다른 가치를 부여하고 이로 인해 일시적으로 대립적인 비판들이 표출되었음에도 궁극적으로는 치료와 예방이 상호 보완적이라는 인식을 공유하게 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런 역사적 사례는 다양한 공중보건 활동에서 치료와 예방의 우선권과 상보성 관련 논의들에 성찰적 숙고의 기회를 제공해 준다.

Notes

1)

2019년 OECD 36개 회원국에서 한국은 결핵 발생률이 인구 10만 명당 59명으로 1위, 결핵 사망률은 인구 10만 명당 4명으로 2위였다. 2019년 세계보건기구(WHO) 통계에서는 215개 국가 중 한국이 결핵 발생률 87위, 결핵 사망률 102위였다(손은정ㆍ전두수, 2021: 317).

2)

WHO의 해당 자료는 2020년 지구 전체의 결핵 환자를 약 1천만 명, 이로 인한 사망자를 약 150만 명으로 추산한다. World Health Organization, Tuberculosis, 14 October 2021, https://www.who.int/news-room/fact-sheets/detail/tuberculosis. 검색일: 2022.06.22.

3)

프랑스에서는 결핵이란 명칭이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전까지 고대 히포크라테스 이래 고사(枯死)를 의미하는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피티지(Phthisie)’, 근대부터 사용되기 시작한 소진병을 뜻하는 ‘콩쉼쉬옹(Consumption)’이란 명칭이 함께 사용되었다(Berche, 2007: 67-70).

4)

칼메트와 게랭의 BCG 백신 최초 접종자에 관한 의학적 보고는 1924년 프랑스 『의학학술원 회보』에 게재되었다(Calmette, Guerin, Weill-Halle, 1924: 787-796).

5)

스트렙토마이신의 항결핵 효과는 내성의 빠른 발달로 제한적이었으나, 이후 내성을 완화하는 이소니아지드(isoniazid), 피라진아미드(pyrazinamide), 1960년대에 에탐부톨(ethambutol), 1970년대에 리팜피신(rifampicin)의 항결핵 효과가 규명되면서 결핵 치료제로 활용되고 있다(Murray, Schraufnagel, Hopewell, 2015: 1749-1759).

6)

결핵요양원은 ‘사나토리움(Sanatorium)’을 옮긴 것이다. ‘치유하다’라는 의미의 라틴어 동사 ‘사나레(sanare)’에서 유래하며 19세기 중반부터 주요 서양 언어들(영어, 독일어, 프랑스어)에서 사용되기 시작했다.

7)

치료제로써 효과는 없었으나 대신 투베르쿨린은 잠복 결핵의 진단에 활용되어 잠복 결핵이 활동성 결핵으로 진행하는 과정에 선제적으로 대응하게 하는 역할을 했다(Burke, 1993: 795-804).

8)

베를린 의과대학에서 결핵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브레메르는 1854년에 고향인 슐레지아 지역 해발 5~6백미터 고원인 괴르베르스도르프(Görbersdorf)에 결핵요양원을 건립해 공기 치료를 위한 호흡 훈련, 위생 관리를 통한 적절한 육체 활동, 신선한 음식 위주의 식이요법 병행을 결핵 치료법으로 체계화했다(Baché, 1934: 15). 브레메르의 결핵요양원에서 치료를 받으며 환자를 돌본 의사 페터 데트바일러(Peter Dettweiler)는 1876년에 프랑크푸르트 외곽의 팔켄스타인(Falkenstein) 마을에 결핵요양원을 건립했다. 그는 ‘야외 휴식 치료(Luftruhekur)’를 강조했다. 그가 활용한 공기 치료, 휴식, 식이요법은 결핵요양원 치료의 일종의 ‘헌장’으로 널리 수용되었고, 팔켄스타인은 당대인들에게 ‘결핵 치료의 메카’로 인식되기도 했다(Baché, 1934: 15; Knopf, 1900: 133).

9)

이들 결핵 학술대회에서의 논의 주제는 다음을 참고하라(Revue d’hygiène et de police sanitaire, 1888: 722-726; 1891: 491-492; 1893: 774-791).

10)

1850년대 지중해의 소도시 인근 세트(Sète)와 그로뒤루아(Grau-du-Roi)에 해양 요양병원이, 1860년대에 대서양의 소도시 베르크(Berck)에 파리 공공병원과 연계된 아동 연주창(Scrofula) 환자를 위한 요양병원이 문을 열었다(Toulier & Cremintzer, 2008: 25-34).

11)

데세르텐과 포르는 프랑스 남서부 론알프(Rhône-Alpes) 지방의 결핵 퇴치 운동에 관한 연구서에서 결핵 퇴치를 위한 지역 지도층의 빈곤 근절 노력 등 사회봉사 흐름과 해당 지역에서의 결핵 요양원 설립 과정 등을 세밀히 규명했다(Dessertine & Faure, 1988).

12)

1905년 파리에서 열린 제3회 결핵 국제학술대회에 제출한 파리 공공병원의 결핵 퇴치 활동 보고서에서 관련 내용이 확인된다(Administration générale de l’Assistance publique à Paris, 1905).

13)

1895년에 프랑크푸르트 외곽에 세워져 가난한 결핵 환자를 치료한 루퍼트샤인(Ruppertshain) 민중 결핵요양원이 대표적 기관이었다(Knopf, 1900: 133).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까지 독일 전역에서 부유층 환자용 결핵요양원 12곳, 중간 계층 환자용 결핵요양원 19곳, 민중 결핵요양원 104곳이 운영되었다(Artaud, 1914: 92).

14)

칼메트와 그의 동료들은 1905년에 이 결핵보건소의 1901~1903년 활동을 소개하는 책을 출간했다(Calmette, Verhaeghe, Woehrel, 1905). 칼메트의 생애와 의과학 업적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고하라(Simonet, 2019: 43-54).

15)

레옹 부르주아는 1895~1896년 수상, 1902~1904년 하원의장 등을 지냈고 연대주의 사상의 기반이 되는 소책자 『연대론(Solidarité)』를 1896년에 출간했다. 그의 결핵 퇴치 활동을 기리기 위해 1913년 파리에 새로 문을 연 대규모 결핵보건소는 레옹-부르주아 보건소라는 공식 명칭을 갖게 되었다(Bernard, 1913: 1476-1479).

16)

이 국제학술대회의 발표 세션들은 의과학적 차원에서 결핵의 현황과 병인론을 먼저 살펴본 후, 결핵에 대한 다각도의 사회적 예방 조처들을 검토하고 마지막으로 결핵요양원 치료 문제를 논의하도록 구성되었다(Masson, 1899: 288). 흥미로운 것은 결핵요양원을 ‘예방과 치료’ 수단으로 논의하는 세션과 별도로 주거 환경 논의가 펼쳐진 ‘예방’ 세션 및 결핵요양원 치료법을 논의한 ‘치료’ 세션이 존재했다는 점이다. 즉 국제학술대회 논의에서 의료적 예방 및 치료와 사회적 예방은 서로 구분되었다. 사회적 예방은 주로 광범위한 생활환경 개선과 연관되었다.

17)

Journal officiel de la République française, 18 avril 1916, pp. 3279-3281.

18)

Journal officiel de la République française, 9 septembre 1919, pp. 9729-9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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