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직의 젠더: 도쿄제국대학 부속병원으로 본 근대 일본 의사와 간호사의 위계

Gender of Profession: The Nurse and The Medical Practitioner at the Tokyo Imperial University Hospital

Article information

Korean J Med Hist. 2022;31(3):647-689
Publication date (electronic) : 2022 December 31
doi : https://doi.org/10.13081/kjmh.2022.31.647
*Assistant Professor of History, Sungkyunkwan University
최자명,*
*성균관대학교 사학과 조교수, 근대일본사 전공
성균관대학교 사학과 조교수, 근대일본사 전공 / 이메일: jamyungchoi@skku.edu
†이 논문은 성균관대학교의 2021학년도 삼성학술연구비에 의하여 연구되었음.
Received 2022 July 1; Revised 2022 July 21; Accepted 2022 December 19.

Abstract

This article explores the shaping of gender hierarchy between the nurse and the doctor in modern Japan, through the lens of the Tokyo Imperial University Hospital. I understand gender hierarchy of these two medical professions not just in terms of ranks in hospital bureaucracies, salaries, or educational credentials, but also the ways their work was defined, their skill levels were evaluated, as well as the probability of their united actions as members of a single profession to advocate their shared interests. Tokyo Imperial University is Japan’s oldest university, which is the birthplace of modern medical education. The hospital of this university was a symbolic locus for the making of gender hierarchy of the doctor and the nurse, which often transpired in other institutions and articulated in state regulations such as the Nurse Regulations prepared by Home Ministry officials in 1915. In this hospital, doctors who were male, while designing nursing education and labor practices, defined nursing primarily as women’s supplementary labor for doctors. While doctors had an exclusive professional territory, such as diagnosis, surgery, and medication, what nurses’ exclusive professional territory was undefined and how their skill levels could be evaluated remained unclear. In other words, probationary nurses often worked together with trained nurses, which allowed managers of the hospital to exploit their cheap labor, as well as attenuating the professional authority of the trained nurses.

But, this process did not go unchallenged. Leaders of nurses at this hospital, such as Suzuki Masa and Ōzeki Chika did not think that nurses should be subordinated to the doctor. As managers of the Tokyo Imperial University Hospital hired unmarried women to have them endure intense labor with low wages, Ōzeki publicly protested a doctor at Tokyo Imperial University to improve nurses’ working environment, and these two soon resigned.

After the resignation, Suzuki organized a visiting nurse service company called The Charity Visiting Nurse Corps (jizen kangofukai), and dispatched a group of its member nurses to the clients. Unlike when they worked in the Tokyo Imperial University Hospital, they became an independent service provider, deciding their work schedules, and the fees for their service for themselves. Compared to their wages in the Tokyo Imperial University Hospital, the service fees were two to three times higher in this new company. As nurses came to claim a high pay, visiting nurse service companies of this kind blossomed in Tokyo and other big cities,

However, they eventually failed to gain a clear legal definition of what nurses could exclusively do as professionals and how their skills were assessed, and private nurses lost their high demand during the Great Depression. By looking at this process, this article reconfirms the conventional wisdom that the gender hierarchy of doctors and nurses were not biologically given but socially constructed through the interplay of education, employment, state policies, and the market, and considers why nurses’ efforts alone could not challenge the entirety of this hierarchy, without institional supports from the state.

서론

일본에서 간호사(看護師)1)라는 직업은 19세기 말 이래 여성들이 압도적인 다수를 차지해왔다. 2010년대 중후반에도 의사 중 남성의 비율은 80% 정도인데, 간호사 중 여성의 비율은 90% 이상이었다(OECD, 2015; 厚生労働省, 2018). 그리고 대부분이 여성인 간호사는 다수가 남성인 의사에 비해 직위, 학력, 급여, 노동조건에서 열악한 위치에 놓였다. 이 때문에 일본 사회에서 간호사 구인난이 만성화했고, 1990년 언론인 교텐 요시오(行天良雄)는 심각한 구인난의 원인을 진단하며, 간호부가 “백의의 천사”로 불리지만, 직위상 의사에 종속되며, 업무의 성격도 환자와 접촉한다는 점에서 위험하고, 격무에 야근이 잦지만 급료가 낮으며, 사회적 평판도 높지 못함을 꼬집었다(行天, 1990: 15, 20-28).

어떻게 전문교육을 받은 자격증 소지자들이 종사하는 전문직인 의사와 간호사 사이에 이러한 위계가 형성되었을까? 어떻게 간호사는 여성의 직업으로 고안되고 의사라는 직업에 비해 위와 같은 불이익을 감수하게 되었을까? 이 연구는 1887년 창설된 (도쿄)제국대학 의과대학 부속병원 간병법강습과(看病法講習科)2)를 통해 이 질문에 답을 구한다. 도쿄제대 의과대학과 부속병원은 당시 일본에서 가장 크고 권위가 있는 병원이었으며, 그 전신기관인 요코하마 군진(軍陣)병원은 일본에서 여성을 간호인력으로 맞아들인 최초의 병원이었다. 이 병원에서 도쿠가와 시대 번의(潘医)들은 신학문을 받아들여 의사가 되었고, 신시대의 여성들이 자격증을 갖춘 간호부가 되었다. 그리고 남성인 의사와 여성인 간호부 사이에 성립한 성별분업은 직위, 급여, 학력, 근무환경의 결정권뿐만 아니라, 업무와 숙련도의 평가방법, 단일한 이해를 공유하는 노동자로서의 결집가능성, 국가정책에의 영향력 등 여러 가지 요소로 이루어진 위계로 전화했다. 이 과정은 갈등을 수반했다. 병원의 운영자들이 배우자가 없는 여성들을 간호부로 선발하여, 병원에 기숙하면서 강한 노동강도를 견디는 저임금 노동자로 활용한 데 대해, 간호사들은 파출간호부회(派出看護婦会)를 조직, 병원에서 나가 개인사업자로서 근무환경을 스스로 설정하고, 급여를 개선하며, 독자적인 양성기관도 설립했다. 그러나, 업무내용과 숙련도에 대한 공신력을 얻지 못함으로써, 근무환경의 결정권을 쟁취한 그들의 도전은 장기적으로 물거품이 되었다. 이 과정을 추적하며, 이 연구는 의사와 간호사의 위계가 교육과 고용관행, 국가정책과 시장의 상황과 맞물려 형성되었다는 평범한 사실을 확인하고, 왜 파출간호부회를 통한 간호부들의 노력이 업무와 숙련도의 규정방식, 교육과 고용, 근무환경의 결정권, 국가정책과 얽혀있는 위계의 전모에 영향을 끼치지 못했는지, 바꿔 말하면, 왜 제도적 뒷받침 없이 간호사라는 직업의 위상이 향상될 수 어려운지 성찰한다.

도쿄제대는 일본에서 가장 오래되고 졸업생들의 영향력이 강한 학교였지만, 도쿄제대 병원의 간병법강습과는 일본적십자사의 간호교육기관보다 사회적 위상이 높지 않았다. 적십자사병원은 20세기 초반 일본 전국에 지부를 두고 도합 간호사 3천명을 보유했다(亀山, 1984: 22-23, 125). 또한, 이 병원의 간호교육 기관은 전국에 간부간호사를 공급하고 전후 4년제대학으로 거듭났지만, 도쿄제대 간병법강습과는 1945년 이전 고등교육기관으로 올라서지 못했고, 전후에도 대학이 되지 못한 채 지원자가 줄어든 2002년 폐교되었다. 패전 이후인 1948년 도쿄제대 의학부에 여학생만을 받는 위생간호학과(衛生看護学科)가 설치되었고 보건학과로 개조된 1965년 이후에도 과 안에 간호학교실(看護学教室)이 있었지만, 졸업자들이 일선 간호사로 일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간호사 양성의 중심지가 아니었던 때문인지, 이 학교 및 그 졸업생을 통해 간호 역사를 생각하는 연구는 드물다. 기노시타 야스코(木下安子), 가메야마 미치코(亀山美知子), 야마시타 마이(山下麻衣) 등 많은 역사가들은 적십자사병원을 중심으로 서사를 구성한다(木下, 1969; 土曜会歴史部会, 1973; 亀山, 1984a; 雪永, 1970, 山下, 2016). 도쿄제대 병원을 다룬 연구들은 초창기 교육과정이나, 1세대 간호사의 개인적인 경험을 부각하고 있는 데 그친다(대표적으로 高橋, 1969a; 高橋, 1969b; 亀山, 1992; 宮田, 2011). 영어권 학계에서는 1945년 이전 일본 간호사에 대한 연구 자체가 드문 실정이다(Harari, 2019; Harari, 2020; 식민지 조선의 간호에 대해서는 Kim, 2019).

이 연구는 도쿄제대가 근대 일본 간호교육의 중심이 되지 못했다는 사실을 간호사가 의료전문직의 주변에 머물게 되는 역사적 맥락에서 이해한다. 당초 여성을 간호사로 받아들이는 데 소극적이었던 적십자사병원과 달리, 도쿄제대 병원의 운영자들은 일찍부터 영국인 간호사를 강사로 초빙하여 가사 의무가 없는 여성을 간호사로 훈련시켰다. 이 학교는 1898년 고등간병법강습과(高等看病法講習科)라는 일본 최초의 간부간호사 양성프로그램을 설립했다. 그런데, 이 병원의 운영자들은 간호사의 직업적 권위를 강화하기보다는 대부분의 간호사를 강한 노동강도를 견디는 저임금 인력으로 활용했고, 간호사들을 등급을 나누되 업무 내용은 구분하지 않고 함께 일하게 함으로써 무자격자를 저임금으로 고용하고 간호사의 직업적 권위를 위협하는 노동관행을 탄생시켰다. 그들은 고등간병법강습과를 단 1회만 운영한 뒤 폐지함으로써, 스스로 간호고등교육의 중심지가 되기를 포기했다. 곧, 도쿄제대가 간호교육의 주류가 되지 못했던 사실은 간호사가 전문직으로서 약점을 떠안는 과정과 맞물려 있었던 것이다.

의사와 간호사의 위계에 대한 선구적인 연구는 가메야마 미치코가 1984년 출판한 근대일본 간호역사 개설의 마지막 권인 『간호부와 의사』이다. 이 책의 짤막한 서문에서 가메야마는 “간호부와 의사는 (의료계를 지탱하는) 두 축이지만” 교육과 고용관계의 중심은 의사였고, “그 근저에 실은 성차별”이 있음을 지적한 뒤, “간호부와 의사가 걸어온 과정을 비교”하려는 포부를 밝혔다. 19세기 후반부터 패전까지 의사와 간호사의 경험을 개괄하며, 가메야마는 간호사가 의사의 보조역에 머물렀고, 의료계에 대한 영향력이 의사보다 적었으며, 의사만큼 배타적인 직업적 권위를 보호받지 못했고, 간호교육의 질적 하락이 통제되지 않았음을 지적했다(亀山, 1984b: 2, 337-338). 그러나, 그녀는 의사와 간호사 사이의 성차별이 정확히 무엇이었으며, 어떻게 구축되고 유지되는가에 대해 충분히 논의하지 않았다. 직업여성에 관한 연구 중에도, 특정 직종에서 성별위계가 어떻게 형성되는지를 해명하는 연구는 보이지 않는다(西, 1955; 村上, 1983; 濱, 2022; 일본 여성사의 연구 흐름은 이은경, 2021: 5-13).

일본의 병원들 중 병원 기록을 공개하는 경우는 드물지만, 도쿄제대 병원은 1930년대 직원명부 등 초기 사료들이 공개된 바 있고, 1990년대 들어 19세기말 이래 상당한 분량의 병원 기록을 공개한 간호부사(看護部史)가 편찬되면서(東京大学医学部附属病院看護部看護史委員会 {이하 東大委員会}, 1991), 이 병원의 간호인력에 대한 학문적 분석이 가능해졌다. 이 논문은 이 사료들과 함께 정부의 「간호부규칙」, 간호부들의 회고록, 파출간호부회에 관한 대중잡지 기사들 등을 취합하여, 의사와 간호사의 위계가 어떻게 성립하고 진화했는가를 탐구한다.

I. 의사와 간호사의 직무위계와 간호사라는 직업의 여성화

1. 의사와 간호인력 사이 직무 위계의 형성과 여성노동력

1868년, 일본에서 여성들이 간호 업무에 종사하기 시작했다. 왕정복고를 천명한 1868년, 신정부는 막부 측과의 무력충돌로 발생한 부상병을 치료하기 위해 요코하마에 군진병원을 세웠는데, 그 병원에서 일하던 주일 영국공사관 의관 윌리엄 윌리스(William Willis)는 부상병의 가족들 중 과부와 노파들로 하여금 부상병을 간호하게 했다(「日本陸軍病院記録」, 1935: 11). 19세기 초반 영국에서 가난한 여성들이 병원의 값싼 노동력으로 고용되어 간호업무를 맡게 되면서 간호사가 여성의 직업이 되었던 바(Abel-Smith, 1960: 6), 윌리스가 영국 의료계의 성별분업을 이 병원에 도입했던 것이다. 이 성별분업이 영국에서 수입된 문화였다고만 보기는 어렵다. 1868년 도사(土佐) 번의(潘医) 히로타 지카아쓰(広田親厚)는 미부성(壬生城) 안에 부상병을 위한 야전병원을 세우고, 간호인력으로 여성 9명을 고용했는데, 이는 1868년 음력 4월24일로, 요코하마 군진병원에서 여성들을 동원한 윤4월17일보다 한 달 빠르다(中野, 2007: 41). 1880년대 제중원 등 한국의 병원에서 내외의 금기를 의식하고 여성의 진료를 위해 여성 간호인력을 구한 데 반해(이꽃메와 황상익, 1997: 3-5), 군진병원의 환자는 절대다수가 남성임에도 의사들은 부상병을 치료하는 긴박한 상황 속에서 여성의 일손을 빌렸던 것이다.

그런데, 간호교육이 시작한 시점은 여성들이 간호업무에 나선 1868년보다 훨씬 뒤였다. 신정부 설립 직후, 관료와 의사들은 국립, 공립 병원들을 설립하여 1883년 병원의 숫자는 625곳에 이르렀다. 도쿄제국대학 의과대학과 그 부속병원 또한 1858년 설립된 종두소(種痘所)와 1868년 전쟁 때 지어진 요코하마 군진병원이 진화한 끝에 탄생했다. 1868년 신정부는 종두소를 의학소(医学所)로, 요코하마 군진병원을 대병원(大病院)으로 개칭하고, 이 두 기관을 도쿄로 옮겨와 1869년에는 의학교겸병원(医学校兼病院)라 칭했다. 이후 신정부 관료들은 이 기관을 1869년 12월 대학동교(大学東校), 1874년 도쿄의학교(東京医学校), 1877년 도쿄대학 의학부(東京大学医学部), 그리고 1886년 도쿄제대 의과대학과 그 부속병원으로 탈바꿈시켰다. 이렇게 생겨난 병원에 서서히 교육받은 의사들이 배치되었다(Burns, 1997: 703-704). 그 과정에서 도쿠가와 시대 번의들이 병원과 학교를 운영하는 의사이자 교육자로 변신했지만, 1886년에도 도쿄제대 병원의 간호인력은 전문적인 간호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아니었다.

1869년 3월 병원의 「직원명부」는 이 과도적 시기에 병원에서 누가 의료와 간호를 담당하고 있었는지를 알려주는 귀중한 사료이다. 당시 대병원에서는 2명의 당직의(当直医), 4명의 부(副)당직의가 의사로 일하고 있었다(「職員名簿 (3)」, 1935: 43). 간호업무를 담당하는 사람들은 2명의 간병팀 책임자(看病方取締)와 4명의 간병팀 책임자보조(看病方取締助)였다. 간병팀 책임자는 “낮밤을 불문하고 병원에 머물며, 의사가 환자를 진찰할 때 반드시 옆에 있으며” “의사의 지시를 받아” 간병인들을 지휘하여 “병자의 간호, (...) 섭생, 병실의 청소를 관장”했다. 간병팀 책임자 보조는 매일 아침 7시반에 출근하여 간병 책임자의 지시를 받아 환자의 붕대 교체 등 병실의 제반업무를 담당했다(「病院規則初案」, 1935: 45-46). 관등과 급여도 이 사료에 나타난다. 당직의는 5등관으로 월 50냥의 급여를 받았고, 부당직의 4명은 6등관으로 월급은 30냥, 간병팀 책임자는 병원의 관등체계에서 8등관에 들지 못하는 등외리(等外吏)로 월급은 15냥이었다(「職員名簿 (1)」, 1935: 38; 「職員名簿 (3)」, 1935: 43).

이 시점에서 당직의와 간병팀 사이에 출신이나 커리어의 명확한 구별은 없었다. 당시 간병팀의 구성원들은 당직의처럼 도쿠가와 시대 의관의 아들들이었으며, 후에 의사가 되었다. 병원업무를 총괄하는 당직의 이케다 겐사이(池田謙斎)는 막부에 출사하던 의관의 아들이었고(「職員名簿 (1)」, 1935: 38), 당시의 간병팀 책임자 야노 료키츠(矢野良橘)와 오카 겐안(岡玄庵)은 모두 오타와라(大田原)번의 번의출신으로 요코하마 군진병원에 차출되어 의술을 익히던 견습의였다(栃木県医師会70年史編纂委員会, 2020: 3). 간병팀 책임자 보조였던 아리마 겐칸(有馬元函) 또한 기슈(紀州) 번의(潘医)였다(半藤, 2005: 3). 단, 간병팀은 밤낮을 불문하고 병원에 머물며 격무를 견뎠고, 병실 청소 등 치료와 직접적 관련이 없는 일까지 처리했고, 당직의에 비해 그 위상은 직위와 급여 면에서 의사보다 낮았다.

여성 노동자들은 이렇게 형성된 직무위계에서 간병팀으로 흡수되었다. 1868년 11월에 제정된 「병원규칙(病院規則)」에 의하면, 대병원에는 “40세 이상”으로 규정된 “간병부인(看病婦人)”이라는 여성 간호인력이 있었다(東大委員会, 1991: 4). 1869년 3월에 작성된 문서에 따르면, 병실에서 환자에게 약을 주거나 병자의 “거동(起臥), 의류, 음식, 청소 등 만사를 돕”는 간병인(看病人)이 있고 “세탁은 반드시 여성이 한”다는 조항이 있다(「大病院関係文書」, 1935: 27-28). 간병팀 책임자나 보조 등 번의 출신자가 간호인력의 일부가 되어 간병팀을 이끌지만, 흔히 여성이 담당하는 가사(家事)의 일부로 간주되어서인지 세탁일은 여성들에 맡겼던 것 같다. 그런데, 이들 여성들은 아직 병원에 정식으로 고용된 인력이 아니었다. 당시 병원에서 음식을 준비하는 업무를 외주인력에 의존하고 있었는데, 간병부(看病婦)들은 요리 외주인력(賄方請負)의 일부였다(東大委員会, 1991: 5-7). 도쿄대학 의학부장으로 근무하던 미야케 히이즈(三宅秀)에 의하면, 이 병원에서 한동안 간호 업무가 대부분 환자 친족의 손에 이루어졌는데, 친족이 없는 경우 1884년에서 1885년경까지도 “환자의 의뢰에 응해 (...) 간병인을 공급하는” 사람이 있었다(東京帝国大学医学部附属医院 {이하 東大医院}, 1929: 168-169).

곧 간호업무에 종사하는 여성들이 이 병원에 정식으로 고용되었다. 1876년 12월 도쿄의 혼고(本郷)에 자리를 잡은 도쿄의학교 부속병원에서 처음으로 당시 병원 운영자들은 간병 일을 하던 사람들 중 일이 “익숙(習熟)해진 사람을 발탁”해서 간병부(看病婦) 15명을 직접 고용했던 것이다(東大委員会, 1991: 7). 1876년 병원의 모든 간호 업무를 15명의 간병부가 감당한 것은 아니었다. 1880년대 초까지도 이 병원은 간병부가 부족하여 간호업무를 친족이나 외주인력에 상당부분 의지했다(東大医院, 1929: 168-169). 1877년 도쿄대학 병원은 내과, 외과, 부인과, 안과, 전염병의 다섯 개의 진료과를 갖추며 의사가 전문분야를 갖게 되었지만, 간병부는 전공별로 업무가 분화하지 않았다. 단, 이때부터 1887년 사이, 간병부는 77명까지 수가 늘어났고 의사의 치료를 보조하는 사람과 환자의 수발을 드는 사람으로 분화했던 것 같다. 1887년 도쿄제대 병원의 간병법강습과에 입학한 오제키 지카(大関和)에 의하면, 당시 도쿄제대 부속병원에 “간호부라고 부를 만한 사람”이 총 80명 정도 있었는데, 그 중 “주석(主席) 간호부”로서 치료를 돕던 사람이 40명, 그리고 “보조(附添い)” 간호부로서 노령으로 “환자 옆에서 용무를 돕는 정도”인 사람이 37명이었다(東大医院, 1929: 170).

여성 간호사를 병원의 직무체계에 받아들인 도쿄의학교의 조치는 군과 관계된 기관에서는 아직 찾아보기 어려웠다. 1877년 사쓰마(薩摩) 무사들의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사가(佐賀) 번의(潘医)의 양자 사노 쓰네타미(佐野常民)는 부상병 치료를 목표로 적십자사(赤十字社)의 전신기관 박애사(博愛社)를 설립, 곧바로 규슈(九州)의 전장에서 구호활동에 돌입했는데, 당시 간호인력은 전부 남성이었다. 박애사 운영자들이 여성 간호사를 고용한 것은 1886년 박애사 병원이 창립된 이후였는데, 이 해 도쿄제대 병원에서 일하던 간호부 10명을 스카웃해왔다(日本赤十字中央女子短期大学, 1980: 15-16; 東大委員会, 1991: 10). 해군 군의 다카기 가네히로(高木兼寛)가 1882년 창설한 유지공립도쿄병원(有志共立東京病院, 현 도쿄지케이카이{慈恵会}의과대학 부속병원)에는 설립 당초부터 여성 간호사가 있었으나, 이 역시 도쿄의학교보다 고용 시기가 늦다(東京慈恵会医科大学創立130記念誌編纂委員会, 2011: 41).

2. 간호교육의 도입과 간호 인력의 쇄신

병원의 운영자들이 여성들을 간호인력으로 고용하면서, 이들을 양성하는 교육기관들을 설립했다. 일본 최초로 간호부를 양성한 병원은 유지공립도쿄병원이었다. 설립자 다카기는 런던의 성토머스 병원(Saint Thomas Hospital) 의학교에 유학했는데, 성토머스 병원에는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이 1860년 세운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간호산파학교(Florence Nightingale School of Nursing and Midwifery)가 있었다(Seymer, 1956: 123). 다카기는 1885년 유지공립도쿄병원에 일본에 체류 중이던 미국인 선교사 메리 리드 (Mary Reade)를 영입, 간호사들을 상대로 일주일에 두 시간 강의를 시켰다(亀山, 1984a: 106-107). 이후, 1886년 교토간병부학교(京都看病婦学校), 1889년 일본적십자사 간호부양성소(박애사는 1887년 일본적십자사로 개명)가 생겨나며 간호교육기관이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간호는 사실상 여성의 일이 되었다. 1915년 일본 정부에 등록된 간호사 18,789명 중 남성은 단 35명이었고, 1935년 간호사가 10만 명이 넘은 상황에서도 남성은 222명에 불과했다(厚生省医務局, 1955: 814).

도쿄제대의 의사들도 간호교육기관을 세웠다. 미야케에 따르면 당시 간호인력 “다수가 노부(老婦)였기 때문에 환자의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거나(...) 뜻을 거스르는 사람이 있어” 환자들이 불평하곤 했는데, 이에 1886년 유럽에 파견되었을 때 미야케는 간호교육에 대해 조사하고 귀국 후 「간병부(看病婦) 견습규칙」을 작성, 1년짜리 교육과정인 간병법강습과를 설계했다(東大医院, 1929: 169). 1887년 10월, 병원 운영자들은 에딘버러 왕립 구빈원(The Royal Infirmary of Edinburgh)의 간호학교 제1회 졸업생인 아그네스 베치(Agnes Vetch)를 고용, 11월 수업을 시작했다(東大委員会, 1991: 12-13).

도쿄제대 병원에 간호교육이 뿌리내리는 과정은 19세기 초반까지 빈곤층 출신의 저임금 여성노동자였던 간호사가 교육받은 전문인력으로 거듭나던 세계사적 전환의 일부였다. 19세기 초반까지 유럽에서 간호사란 병원에 기숙하던 저임금 여성노동자였지만(Abel-Smith, 1960: 6),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이라는 엘리트 여성이 간호사 양성기관을 설립하고 그 졸업생들이 전세계에 간호교육을 전파하면서 간호사라는 직업을 자격증을 갖춘 전문직으로 탈바꿈시켰다. 간호교육은 베치에게도 기회를 주었다. 1873년 나이팅게일 간호산파학교 졸업생들이 에딘버러 왕립 구빈원 병원에서 간호학교를 개교하자(Seymer, 1956: 128, 130), 베치는 그 학교를 졸업하고, 1887년 9월 일본에서 기독교계 여성 중등학교인 사쿠라이 여학교(桜井女学校)의 간호 교육기관에서 가르치다가, 이듬해 도쿄제대 병원에서 일했던 것이다(平尾, 1990: 16).

도쿄제대 병원에서 일하는 간호부의 프로필은 일변했다. 간병법강습과의 입학지원자는 수업료로 한 달에 50전을 낼 수 있어야 했고, 연령이 20세에서 35세 사이로 젊었으며, 수업을 따라갈 독해력을 갖춰야했다(東大委員会, 1991: 15). 1887년 오제키의 눈에 비친 도쿄제대 병원 간호인력의 절반이 노령이었지만, 간병법강습과에는 노령의 여성이 입학할 수 없었다. 또한, 배우자를 뒷바라지하며 간호업무에 종사하기는 버겁다고 생각했는지, 간병법강습과의 설계자들은 입학생의 자격을 가사(家事) 의무가 없는 사람으로 한정했다. 간병부강습과 입학 지원자들은 미혼, 기혼, 과부인지의 여부를 답해야했는데, 과부의 경우 어린 아이가 있다면 보육은 어떻게 할 요량인지를 대답해야했다. 학생들은 통학을 원칙으로 했으나, 야간근무를 실습하는 경우 병원에서 숙박하며 간호부 제복을 착용하고 일해야 했다. 1891년 개정된 간병부강습규칙에서는 이 프로그램의 입학 자격을 “23세 이상 35세 이하의 여성으로 지아비가 없는 사람”으로 명문화했다(東大委員会, 1991: 15, 25). 가사의무가 없는 여성을 간호사로 채용하는 관행은 1889년 개교한 적십자사 간호부양성소에도 보이는데, 이 학교의 지원자격은 “20세 이상 30세 이하 독신으로 건강한” 여성이었다(亀山, 1984: 31-32). 간호 개혁을 선도하던 영국에서도 간호업무가 젊은 독신여성의 일이 되어가고 있었고(Vicinus, 1995: 제3장; Hawkins, 2010: 21, 28-29), 나이팅게일, 베치, 오제키 모두 간호사로 활약할 당시 배우자가 없었다.

간병법강습과 첫 학생들 몇몇은 도쿄제대 병원 간호의 쇄신을 상징하는 인물들이었다. 1회 생도 28명 중 미야케가 “부인 유지”라고 부르던 6명은 사쿠라이 여학교에서 베치에게 배우던 학생들이었는데, 이들은 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하던 나머지 22명의 학생들과는 차이가 있었다. 오제키에 따르면 다른 학생들은 “우선 문자를 가르쳐”야했고, 베치의 영어강의를 번역하는 일도 사쿠라이 여학교에서 배우던 스즈키 마사(鈴木雅)의 몫이었다(東大医院, 1929: 169-170). 오제키는 도쿠가와 시대 구로바네번(黒羽藩) 가로(家老)의 딸로 태어나 남편과 헤어진 뒤 도쿄로 상경하여 기독교로 개종한 뒤 목사의 권유를 받아 간호업에 투신했고, 스즈키는 역시 사족과 결혼했다가 사별한 이후 사쿠라이 여학교에서 간호학을 익혔다. 도쿄제대 병원에서 1년 과정의 간병부강습과에서 실습 과정을 마치고, 1888년 10월 오제키와 스즈키는 도쿄제대 병원의 간병부 책임자(看病婦取締)가 되었다(亀山, 1992: 7-40; 土曜会歴史部会, 1973: 77; 東大委員会, 1991: 17-18). 이렇게 해서 1869년 3월 대병원의 견습의사 간병팀 책임자는 19년 후 간호교육을 받은 여성 간병부 책임자로 대체되었다. 1889년 이전에는 간호사들을 병실 단위로 배속하는 제도가 없었는데, 오제키와 스즈키의 지휘 아래 간호사들은 이제 병실 단위로 5명이 한 조(組)로 배속되어 병실을 관리하고 입원 환자를 간호했다(東大委員会, 1991: 32).

출신가문으로 직업과 직위가 어느 정도 정해지던 신분제 사회를 전복한 신정부의 지도자들은 통치에 긴요한 새로운 엘리트 직업군을 전통적 가문의 상속자가 아니라 자격시험을 통과한 개인들에 개방했다. 최고엘리트와는 거리가 멀었던 번의와 그 아들들은 도쿄제대 병원을 운영하는 고위 관료로 비약했고, 출생에 관계없이 의사가 되고 싶은 명민한 젊은이들을 훈련시켰다. 출생과 직업의 분리는 남성에게만 한정된 현상이 아니었다. 오제키는 신분제 사회에서 주어진 삶을 거부하고 선교사와 도쿄제대 병원이 제공한 기회를 잡은 여성이었다.

그런데, 직업 선택에서 출생이 무의미해진 것은 결코 아니었다. 도쿄제대 의사들 중 도쿠가와 시대 번의나 그 아들들은 흔했다. 1920-30년대에도 도쿄제대 의학부 학생들 중 의사의 아들들이 20-30%였는데, 당시 도쿄제대 전체 학생들 중 의사 자제들은 5-6%에 불과했으니, 출생이 도쿄제대 의학부 입학에 끼친 영향은 과소평가할 수 없다(東京帝国大学学友会共済部, 1925: 14; 東京帝国大学学生課, 1935: 18-19; 東京帝国大学学生課, 1939: 16-17).

어떠한 성별로 태어나느냐 또한 직업 선택에 영향을 끼쳤다. 오기노 긴(萩野吟)이나 요시오카 야요이(吉岡弥生) 등 일본의 1세대 여성의사들은 도쿄제대에서 의학고등교육을 받을 기회를 얻지 못해, 사립의학교에서 남학생들 틈에 끼어 의사 수업을 한 뒤 19세기말 의술개업시험을 통과하며 의사면허를 받았다(日本女医史編纂委員会, 1962: 93). 요시오카가 1900년 도쿄여의학교(東京女医学校)를 설립하고, 이 학교가 1912년 도쿄여자의학전문학교라는 고등교육기관으로 승격되지만(東京女子医科大学, 1980: 7-17), 1940년까지 이 학교가 일본의 유일한 여성을 위한 의학고등교육기관이었고, 그 교격은 대학이 아닌 고등전문학교였다.3) 곧, 여성들에게 의학 고등교육기회가 폭넓게 개방되는 데 시일이 소요되었고, 여성들은 남성보다 의사가 되기 어려웠다. 여성들은 간호사가 될 수 있었지만, 간호사의 자격과 근무환경을 정한 것은 간호사들이 아니라 절대다수가 남성인 의사들이었으며, 간호사들이 병원의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창구는 전무했다. 결국 간호사라는 직업은 여성에게 새로운 교육과 직업의 기회를 열어주는 동시에, 의사의 보조역에 머무르게 한 셈이다.

그러나, 교육받은 여성 간호사들은 스스로 누군가에 종속된 보조자라고만 생각하지는 않았다. 19세기 영국의 엘리트 간호사들은 간호를 하층 여성들의 육체노동이라기보다는 도덕성과 모성을 발휘하며 빈자를 돕는 기독교 엘리트 여성들의 사회 봉사활동으로 생각했고, 타락한 사람들을 교화하는 간호사의 인품과 도덕성을 사회개혁의 수단이라고 믿었으며, 병원에서 의사와는 별도의 간호사 관료제를 구축했다(Hawkins, 2010: 21-23, 25). 오제키는 기독교 여성 엘리트들의 사회개혁단체인 대일본기독교부인교풍회(大日本基督教婦人矯風会)에서 활동하며, 간호사들의 기강을 바로잡고 사회적 평판을 높이기 위해 대일본 간호부인교풍회(大日本看護婦人矯風会)를 조직했다(亀山, 1992: 81-118). 스즈키 또한 의사 오기노와 함께 대일본부인위생회(大日本婦人衛生会)를 조직하고, 여성들에게 의학 지식을 전달했다(東大委員会, 1991: 17). 이들은 간호사의 위상을 높이려는 의지가 있었고, 간호사의 노동환경을 둘러싼 이들의 도전과 국가관료와 병원 운영자들의 대응을 통해 의사와 간호사의 위계가 조정되었다.

II. 의사와 간호사의 위계와 그 동요

1. 오제키 지카의 문제제기

오제키가 간병부 책임자가 된 1888년 10월, 여전히 대다수 간호사는 저임금에 시달리고 있었다. 1889년도 급여기록에 의하면, 이 병원에는 월급을 받는 사람과 일급을 받는 사람이 있었다. 월급을 받는 사람들은 도쿄제대 의과대학 졸업생들과 재학생, 서무직원, 약국 책임자(薬局取締)였고, 일급을 받는 사람들은 간호사들과 약국 조제원, 병원 사환(小使), 현관 경비(玄関番), 안마사였다. 월급과 일급 수령자의 구분 기준에 대한 기록은 없으나, 월급 노동자가 일급 노동자보다 급여가 많았고, 월급 노동은 고학력 정신노동과, 일급노동은 저학력 육체노동과 연결된다. 1880-90년대는 일본에서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고용계약이 학력을 매개로 분화, 제도화되는 시기였는데(Choi, 2020), 이 병원에서도 이 고용관행이 제도화된 것이다. 의학사는 월급이 20엔에서 40엔 사이, 의과대학 재학생은 15엔, 서무직원도 15엔, 약국 책임자가 40엔으로, 이들의 월급은 모두 15엔 이상이었다. 반면, 간호부, 사환, 현관 경비, 안마사는 모두 일급 35전 이하, 월 10엔 이하였다(東大委員会, 1991: 35).

1889년도 급여와 1887년도 「간병부 견습규칙」은 의사와 간호사의 위계가 어떠한 형태를 취하고 있는지 가늠하는 데 유용한 사료이다. 의사와 간호사 사이에는 교육기회의 차이에 따른 학력의 차이, 그와 연결된 급여정산방식의 차이와 액수의 격차가 있었다. 의사는 도쿄제대 의과대학 혹은 그 전신교(前身校) 시절 이래의 교원 혹은 그 졸업생들이었지만, 「간병부 견습규칙」에는 여성이 어떠한 학력을 갖춰야 간병법강습과에 지원할 수 있는지 언급이 없다. 당시 간호사라는 직업에 학력 진입장벽이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의사는 치료에 직결된 업무만 봤고 출퇴근하고 결혼할 자유가 있었지만, 간호사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세탁처럼 치료와 직결되지 않는 환자 수발의 임무를 부여받았고, 가사를 포기하고 병원에 기거하며 일했다. 요컨대, 의사와 간호사의 위계는 직위,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의 급여 정산방식과 액수, 업무의 범위가 전문분야와 일치하는지의 여부, 그리고 출퇴근, 결혼의 자유라는 다양한 요소로 표현되었다.

또한, 도쿄제대의 의사와 간호사들 중 전문교육을 받은 인력의 비중은 차이가 컸다. 1889년도 도쿄제대 병원의 간호사들은 간병부 책임자, 간병부, 부첨부(付添婦)라는 세 등급으로 나뉘었다. 1889년도 스즈키와 오제키 둘뿐이던 간병부 책임자의 일당은 33전으로, 30일 내내 일한다 해도 월급은 10엔 정도였다. 두번째 랭크인 간병부(看病婦)로는 19명이 고용되어 있었는데, 이들의 일급은 17-8전, 한 달을 쉬지 않고 일하면 월급은 5엔 남짓이다. 부첨부(付添婦)는 77명인데, 이들의 일당은 5-8전, 아무리 많이 받아도 2엔 40전이었다. 전년도 1회 간병법강습과 과정을 마친 사람들 중 17명이 간병부로 일한 반면, 간병법강습과를 이수하지 못한 77명은 부첨부로 일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바꿔 말하면, 80%가 넘는 간호인력이 교육받지 못한 노동자였다. 간병부의 일급은 25-35전을 받는 현관 경비는 물론이고 18전-25전 받는 병원의 사환보다 낮았다. 또한 간호인력의 절대다수인 부첨부들은 병원에서 급여가 가장 낮았다(東大委員会, 1991: 35).

당시 간호사들의 노동조건을 말해주는 직접적인 사료는 없지만, 이에 대한 오제키의 증언이 남아있다. 1890년 9월, 오제키는 당시 도쿄제대 병원에서 외과 주임 사토 산키치(佐藤三吉)에 건의서를 제출했고, 이 건의서를 일본기독교 부인교풍회(日本キリスト教婦人矯風会)의 기관지 『부인교풍잡지(婦人矯風雑誌)』에 실었다(大関, 1890: 6-7). 이 건의서에서 오제키는 간호사들이 숫자가 부족해 “업무를 견디다 못해 (...) 병욕(病褥)에 신음”하니, 그 “숫자를 늘려 주야(昼夜)교대를 시켜 잠을 푹 자도록 하”자고 주장했다. 당시 간호사 업무에는 교대가 없었던 것 같다. 오제키는 노동환경의 개선을 역설하며, “간병법 강습”만으로 “선량한 간호부를 얻”기는 어려우니, 간호사들을 “부인교풍회나 부인위생회”와 같은 엘리트 여성단체에 가입시켜 “사회의 순량한 공기를 호흡”하게 하자고 제안했다(大関, 1890: 6-7).

이후 도쿄제대 병원에서 간호사의 업무범위가 조정되며 노동강도가 줄어들었다. 1890년 11월 경 작성된 「간병부 배치법(看病婦配置方)」이라는 문서에 의하면, “간병부로 하여금 오로지 간호에만 종사하게끔 하기 위해” “부첨간병부를 폐지”하고, 각 병실마다 배속한 간병부를 5명에서 6명으로 증원하며, 간병부가 하던 “청소 및 기타의 잡일”을 대신해줄 여성노동자(部屋附雇女)를 병실마다 한 명씩 고용했다(「看病婦配置方」, 東大委員会, 1991: 21). 교대근무도 실현되었다. 1895년부터 2년간 간병법강습과를 다닌 한 학생의 증언에 의하면, 도쿄제대 병원에서 간호사는 이틀에 하루 당직을 섰다. 당시 간호사들은 “이틀 중 하루는 밤에 기숙사에 돌아와 쉬지만, 하루는 병실에서 쭉 환자와 함께 보냈”고, 밤에는 “병실의 빈 침대나, 간호부 대기실(控室)의 침대”에서 잠깐씩 잤다(土曜会歴史部会, 1973: 110). 그러나, 의사들은 공개적으로 근무환경의 개선을 요구한 오제키에 우호적이지는 않았다. 간병법강습과에서 오제키를 지도했던 세오 겐지(瀬尾原始)가 니가타(新潟)현 다카타(高田, 현재는 조에츠{上越}시)에 창립한 지메이도(知命堂)병원의 초대 병원장으로 부임했는데, 오제키는 사토에게서 세오를 따라 지메이도병원으로 전근하지 않겠냐고 권유받았다고 한다(森川, 1982: 5, 42-43; 相馬, 1944: 267). 1891년 2월 실제로 오제키는 도쿄제대 병원을 그만두고 지메이도병원으로 전근했다(森川, 1987: 32; 亀山, 1992: 57). 1909년 오제키는 이 사직을 되돌아보며, “우리들의 정신이 당시의 의국(医局)에 받아들여지지 못했”다고 회고했다(大関, 1909: 18). 1891년 봄 스즈키도 내과 간병부 책임자 자리를 사직했다(土曜会歴史部会, 1973: 94; 大関, 1909: 18).

이 둘이 그만둔 뒤 간병법강습과 학생을 노동력으로 활용하는 관행이 생겼다. 1891년 11월에 작성된 「간병법강습규칙」에서, 간병법강습과의 운영자들은 강습생의 나이를 23세에서 35세 사이로 한정한 뒤, 다시 그들을 제1종과 제2종 두 부류로 나누었다. 제1종 학생들은 수업료를 면제받고 음식과 제복을 제공받았지만, 원내에서 숙박하며 실습을 할 때 환자를 수발할 의무가 있었다. 이들은 실습을 통해 급여도 받았는데, 실습날 일급은 4전이었다. 또한, 병원 운영자들은 간병법강습과를 졸업한 학생이 의무적으로 도쿄제대 병원에 2년간 복무할 의무를 규정, 아직 희소하던 훈련받은 간호인력을 확보했다. 1887년 간병법강습과 학생들은 수업료로 매월50전을 냈고 병원의 제복도 사비로 샀지만, 이제 병원 운영자들은 수업료를 면제해주고 학생들을 일급 4전에 병원의 노동자로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의무를 지지 않고 통학할 자유를 누리는 제2종 학생들은 1887년의 학생들처럼 매월 50전이라는 적지 않은 돈을 수업료로 내고, 그 외 제복 등 모든 부대비용을 사비로 해결했다. 1876년 216개였던 병상의 숫자가 1889년 447개까지 늘어났지만 1890년 간병부는 단 50명이었던 도쿄제대 병원의 사정상, 이 조치는 어떻게든 간호인력의 숫자를 늘려야했던 병원운영자의 고육책으로 이해할 수 있다(「看病法講習規則」, 東大委員会, 1991: 25-26, 63, 66).

나아가 1913년 병원의 운영자들은 제1종과 제2종의 구별을 없애고 모든 학생들이 기숙사에 머물며 실습하도록 강습규칙을 개정했는데, 이 역시 1910년 병상 숫자가 660개가 되었음에도 간호사가 98명인 상황에 대한 대응인 것 같다(東大委員会, 1991: 78, 63, 67). 이듬해인 1914년부터 3년간 간호법강습과의 입학생은 150명 이상이었는데, 이는 1912년의 입학생 50명에서 크게 늘어난 것이었다(東大委員会, 1991: 69). 또한, 1914년 11월 「간호부 및 간호법강습생 기숙사 내규」를 마련, 간호부와 학생의 기숙사 생활을 통제하는 간호부장(看護婦長)4)을 배치하고, 출퇴근 관리, 임시 외출과 방문자 면회의 허가 등 업무를 맡겼다. 병원 운영자들은 이러한 노동관행을 여성의 덕성과 연관지었다. 이 내규의 저자는 기숙사를 “정신 수양의 가정”으로 규정하고, 간호사들에게 이곳에서 “규칙과 명령을 받들어 (...) 부덕(婦徳)을 발양”하라고 주문했다(東大委員会, 1991: 84-86). 이렇게 해서, 1928년 도쿄제대 병원의 운영자들은 많은 간호사들의 퇴직에도 불구하고 250-260명 정도의 간호인력을 유지했고, 여기에 150여명이 넘는 강습생들을 실무에 참여시켜 병원을 유지했다(「看護法講習生心得」, 東大委員会, 1991: 92, 97).5) 학생을 노동력으로 활용하는 병원 운영자의 결정은 오제키가 주장했던 간호부 증원조치였지만, 그 과정에서 간호사들은 견습생들과 함께 일하며 다수가 몇 년 만에 퇴직하는 임시적인 노동자가 되었다. 1915년 당시 자격증을 보유한 간호사는 전국적으로 18,045명이었는데, 2,693곳의 병원에 있는 입원병상 수는 38,814개였으므로, 1947년 이후처럼 외래를 돌보며 3교대로 병상을 지키기에는 간호인력이 턱없이 부족했다(厚生省医務局, 1955: 818).

또한, 간호사들은 숙련도에 대한 명확한 규정을 얻지 못하고 잡무에 시달리게 되었다. 1896년의 「간병부 주의사항」에 의하면, 도쿄제대 병원의 간호사들은 “의원의 지휘를 따라 근무하”도록 요구받았고 이제 1등간병부, 2등간병부, 3등 간병부로 나뉘었다. 1등간병부는 간호업무에 종사하며, 2등 이하 간병부를 이끌고 물품의 청구, 사용, 관리, 세탁물의 취급, 환자 사유품 관리, 병실 야근의 배분 등의 업무를 수행했고, 2등간병부는 간호업무에 종사하며 1등간병부의 유사시 그 근무를 대행했다. 3등간병부는 2등간병부를 도와 근무를 하되, “병실내 잡용(雑用), 즉 약품 배부, 환자 운반 및 환자가 부탁하는 잡사(雑事)”를 처리했다. 1932년 수업을 마치고 2년간 근무한 한 간호사에 의하면, 의무근무 1년차는 7시40분에 점호를 마치고 일과표를 받아, 외래진찰실을 청소하고, 환자가 입원, 퇴원할 때 병상을 정리하고, 손소독액을 교환하고, 타올, 거즈, 붕대류를 세탁했다. 환자 배식, 필요한 물품의 주문, 약국에 다녀오는 심부름도 이들의 일이었다. 2년차에 접어들면 2-3명의 환자를 담당했다(東大委員会, 1991: 226).

물론, 간호사는 전문기술을 습득했다. 간병법강습과의 교육자들은 1891년 「간병법강습규칙」을 개정, 구급요법, 마취, 소독, 환자운반, 주사, 관장 등 학생들이 배우는 기술을 구체화했다(東大委員会, 1991: 25). 오제키의 건의 이후 병실마다 배치되어 잡일을 도와주던 노동자도 여전히 있었다. 1896년의 규정에 의하면, 잡사부(雑使婦)는 병실의 청소, 중환자를 간호하는 간병부의 보조, 간병부실 청소 등을 했고, 이들은 병원에 숙박하며 오전6시부터 오후8시까지 일했다(「雑使婦心得書」, 東大委員会, 1991: 28). 곧, 간호업무의 전문화가 진행되고 잡사부 덕분에 간병부가 모든 잡무에 투입되지는 않았지만, 간병부의 업무에는 여전히 잡무가 섞여있었다. 한 졸업생이 일갈했듯 “당시의 생도는 노동력”이었고(東大委員会, 1991: 227), 학생이거나 졸업 후 의무복무를 하는 3등간병부들은 병실의 잡무를 떠안게 되었던 것이다. 그들은 병실 변기의 소독, 회진 시 환자 상태의 설명, 의원의 처방을 거부하는 환자의 설득 등 업무 외에, “병원의 사무원 혹은 의사에게 받은 명령”을 수행했다. 직위가 다른 간호사들의 업무는 잘 구분되지 않았는데, “각등 간호부의 복무할 개요를 (...) 정했지만, 서로 도와 무리 없도록 복무할 것”이라는 조항이 주목된다(「看病婦心得書」, 東大委員会, 1991: 26-28).

2. 파출간호부회의 등장

스즈키가 일을 그만두기는 했지만, 직업적 기회는 병원 바깥에서도 충분했다. 입원이 일반적이지 않았던 19세기말 일본에서 상류층 환자가 간호사를 사적으로 고용하는 일은 흔했다. 그 최초의 사례는 1887년 봄 교토간병부학교(京都看病婦学校)에서 간호사를 양성하던 미국의 훈련받은 간호사 1세대인 린다리처즈(Linda J. Richards)가 “사회적, 정치적 지위가 높은 일본인”이 “간호사의 파견을 요청”해 학생을 파견한 사례였다(Richards, 1911: 79-80). 이 수요에 응해, 스즈키는 1891년 11월 도쿄에서 일본 최초의 파출간호부회인 자선간호부회(慈善看護婦会)를 조직했다. 1892년 “빈자는 무료로 간호”할 수도 있다는 이 단체의 광고문구로 보아, 자선간호부회라는 이름은 스즈키의 이 포부를 드러낸 것으로 보인다(무서명기사, 「慈善看護婦会」, 1892: 46-47). 스즈키를 따라 도쿄제대 병원에 근무하던 간호사 10명이 자선간호부회에 가입했는데, 회사 운영이 어렵자 스즈키는 1895년 자선간호를 중단하고 단체명을 도쿄간호부회로 바꾸었다고 한다(看護史研究会, 1983: 31).

스즈키의 목표가 높은 급여만은 아니었겠지만, 파출간호부회에서 간호사들은 자신들의 급여를 정했고 병원 근무와 비교하여 비약적인 노동생산성의 상승을 체험했다. 당시 스즈키가 어떠한 기준으로 간호부들의 등급을 정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1892년 스즈키는 자선간호부회 간호부들을 4등급로 구분했고, 파출된 1등간호부의 일당은 70전, 2등간호부는 50전, 3등간호부는 30전, 4등간호부는 20전이었다. 전염병 환자는 추가요금을 받았는데, 이 경우 1등간호부 일당은 1엔, 2등간호부는 75전, 3등간호부는 50전이었다. 간호업무 외 “다른 잡일에 사역되는 것을 거절”하며, 2일 이상 연달아 근무할 경우 하루에 최소 6시간을 쉬도록 보장한다는 조항도 규칙에 포함시켰다(무서명기사, 「慈善看護婦会」, 1892: 46-47). 도쿄제대 병원 간병부책임자의 일급이 33전, 간호부가 17-18전이었는데, 이들의 일당은 파출간호부회에서 최소 2-3배로 뛴 것이다. 물론 이들이 의료전문가로서 의사의 권위에 도전한 것은 아니었다. 오제키는 1899년 출판한 『파출간호부의 마음가짐』에서 의사의 “명을 잘 따라 투약 시간을 지키고”, “투약치료에 대해서 토를 달지 말라”고 당부했다(大関, 1899: 3). 도쿄간호부회에도 가사 의무가 없는 사람만 입회할 수 있다는 조항은 있다(무서명기사, 「東京看護婦会」, 1899: 41).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호사가 개인사업자로 독립하며, 병원 조직 속에 유지되던 의사와 간호사의 위계에 부분적으로 균열이 난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스즈키는 1896년 도쿄간호부회 자체로 간호사를 양성하는 도쿄간호부강습소(東京看護婦講習所)를 설치했다. 이 교육시설은 수업기간이 3년이었고, 읽기, 쓰기, 산수가 가능한 20세에서 40세 사이의 가사 의무가 없는 여성들을 받아, 1년간은 의학, 간호지식을 가르치고6), 2년간은 병원 실습, 파출간호 업무를 수행시키며 간호부로 키웠다. 오제키는 그 해 도쿄간호부강습소의 강사로 취임했다(看護史研究会, 1983: 45-46). 이 프로그램의 수업기간인 3년은 1896년 당시 도쿄제대 병원 간병법강습과 수업 기간인 1년보다도 길다. 당시 적십자사병원 간호부양성소의 교육기간도 1년 반이었고, 의무복무가 2년이었다(吉川, 2013: 393).

도쿄제대 간병법강습과의 교육과정이 3년으로 늘어난 것은 1908년으로, 이 때 실습에 관한 상세한 규정이 생겼다. 간병법강습과의 교육자들은 실습을 각 과의 병실에 소속해서 일을 배우는 유형과 환자 한 명을 집중해서 간호하는 유형으로 나누고, 학생들을 두 그룹으로 나누어 이 두 유형의 실습을 교대로 담당하게 했다. 1908년도부터 강습생들은 첫 1년 반은 수신, 의학과 간호 지식을 배우며 틈틈이 실습을 하고, 나머지 1년 반은 오로지 간병부의 근무와 똑같은 실습에 임했으니, 학생들은 전체 교과과정의 절반 이상 전임 간호인력으로 일했다(「看病法講習規則」, 東大委員会, 1991: 46). 간호교육의 충실을 도모하는 오제키와 스즈키의 긴 양성기간은 실습기간을 늘려 간호노동력을 확보하려는 병원 운영자들에 의해 도쿄제대 병원에 도입되었다. 간병법강습과 모집학생을 세 배로 늘린 지 몇 년 뒤인 1917년 「간호법강습규칙」이 개정되며, 이 프로그램의 수업은 2년으로 줄었는데, 여전히 그 중 1년은 실습만을, 나머지 1년은 수업과 실습을 병행했다(「看護法講習科規則」, 東大委員会, 1991: 94).

1890년대 이후 도쿄제대와 여타 의료교육기관 졸업생들의 개업으로 병원이 늘어나고, 그 병원들에 고용된 간호사들의 숫자가 꾸준히 늘어남에 따라, 파출간호부들의 숫자 또한 빠르게 늘어났다. 1899년 파출간호부회의 숫자는 도쿄시에만 50개를 헤아렸고, 908명의 간호사가 파출간호부회에 소속되어 있었다. 1922년에는 일본 전국적으로 910개의 파출간호부회가 영업을 하고 있었다(看護史研究会, 1983: 54; 鬼塚, 1922). 1908년의 직업소개 팸플릿에서, 교토의 한 파출간호부회 관계자는 간호부가 “(제대) 학사가 버는 30엔 정도”를 “쉽게 버는 직업”이라고 자랑했다(西, 1908: 38). 1925년 중앙직업소개소의 사회조사에 따르면, 파출간호부들은 일당의 20-25%정도를 회장에 소개수수료로 지불했지만 급여가 높아, 많은 간호사들이 병원에서 2-3년 일한 뒤 파출간호부회로 이직했다(中央職業紹介事務局, 1927: 12-13).

파출간호부들의 활약은 도쿄제대 병원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미 1896년도 규정에도 파출간호부의 고용관행이 언급되어 있는데, 입원환자는 규정에서 “부첨부”로 지칭하는 사설간호사를 “특별히 고용”할 수 있었다(「在院患者心得書」, 東大委員会, 1991: 30). 1928년도에 도쿄제대 병원의 환자에 고용된 파출간호부들의 숫자를 확인할 수 있는데, 병원에 직접 고용된 간호사가 283명, 파출간호부가 241명이었다. 환자의 80%가 파출간호부를 고용한 진료과도 있었다. 파출간호부의 고용은 진료의의 소속 부서 간호부장을 통해 이루어졌으며, “이들의 요금은 (...) 환자가 직접 파출간호부회에 지불했”는데, 요금은 “간호요금 외 식비, 침구료 및 교통비”를 포함, 하루에 3엔 정도였다(東大医院, 1929: 187-188). 이렇게 풍부한 파출간호부 인력 덕분에, 이 병원의 간호사들은 학생이라는 견습노동력을 제외하고도 500명이 넘었고, 병상을 조금 더 수월하게 관리할 수 있었다. 게다가 병원의 간호사들은 사직하고 파출간호부회로 진출하는 사람도 있었을 터이니, 이들이 파출간호부들을 적대할 이유는 없었던 것 같다. 때로 도쿄제대 병원의 의사들은 파출간호부의 활약에 못마땅함을 표하기도 했다. 1933년 각과 주임협의회 의사록에 “부첨간호부에 들어가는 비용이 너무 많아, (...) 환자의 부담이 크니 이를 완화할 방법이 없는지” 토론한 기록이 있다(東大委員会, 1991: 100). 그러나, 의사들이 꼭 파출간호부들을 적대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도쿄간호부강습소에서 오제키는 도쿄제대 의사들을 초빙해서 교원으로 활용했다(看護史研究会, 1983: 46). 병원 운영자들이나 지역 의사회가 파출간호부회를 조직하기도 했는데, 1922년 일본적십자사 아이치(愛知)현 지부는 파출에 응하는 외근부(外勤部)를 두었고, 나가사키(長崎)시 의사회는 부속간호부회를 두어 왕진을 돕는 파출간호부를 확보했다(鬼塚, 1922: 55, 89).

파출간호는 병원이 아직 상류층의 의료수요를 충족하지 못하던 19세기말 이래 영국과 미국에서도 볼 수 있는 관행이었다. 미국의 병원 운영자들은 병원에 간호학교를 부설함으로써 간호학교의 학생들을 저렴한 간호인력으로 활용했고, 간호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은 사설간호사들의 단체에 등록하여 높은 급여를 받고 아직 병원을 이용하지 않던 상류층 환자들의 집에서 간호서비스를 제공했다. 상류층 환자들이 1910-20년대 병원에서 입원치료를 받기 시작하자, 도쿄제대 병원에 일하던 파출간호부들처럼 이들도 병원의 병실에서 사설 간호사로 일했다(Reverby, 1987: 95-105). 영국에서도 1880년대와 1890년대 병원의 간호교육기관에서 훈련받은 사람들의 30%에서 40% 정도가 사설 간호사로 일하며, 상류층 고객을 돌보고 더 나은 급여를 받으며 스스로 스케줄을 관리하며 일했다(Hawkins, 2010: 166-167).

III. 정책적 방치와 파출간호부의 운명

1. 직업적 권위의 불안과 시장의 불확실성

오제키와 스즈키는 병원 운영자들의 구속에서 벗어나 교육자로서 그리고 개인사업자로서 일했고, 간호사의 높은 시장가치 덕에 파출간호부회 회원들의 소득도 향상시켰다. 이로써 그들은 급여와 근무환경을 결정하는 권리를 얻으며 의사와 간호사의 위계에 부분적인 균열을 냈다. 그런데, 이 도전은 의사와 간호사의 위계 자체를 무너뜨리기에는 부족했다. 도쿄제대 병원에서 1등간호부와 2등, 3등간호부의 업무가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았다는 점을 확인했는데, 스즈키 또한 도쿄간호부회의 간호부 등급이 어떻게 다른지 명시한 기록은 남기지 않았다. 국가관료, 교육자들, 그리고 간호사 자신들도 간호사의 기술이 정확히 무엇이며, 그 수준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지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창출하지 못했다. 간호사들은 그 전문성이 무엇인지 애매하다는 전문직 노동자로서는 치명적인 약점을 안고 있었고, 병원과 간호학교가 늘어나며 간호사 숫자가 늘어나자 그들의 경제적 위상과 병원으로부터 독립된 근무환경도 사라졌다.

1909년 오제키는 『부인신보(婦人新報)』의 지면에 「간호부계의 곤란」이라는 글을 실어, 좀처럼 공신력을 확보하지 못하는 간호업계의 현실을 개탄했다. 오제키에 따르면, 1894년 경 콜레라 등 “전염병이 크게 유행해 간호부보다 수요자 수가 많아”졌을 때 “미숙한 간병부”뿐만 아니라, “소양 없는 자”가 “간병부의 이름”을 걸고 활동하면서, “자선의 대명사”였던 간호사의 평판이 “이들 소양없는 간병부”에 의해 실추되어, “가끔씩 무능한 간호부나 부정한 사람이 나올 때는 덮어놓고 (...) 추업(醜業)으로 몰리”게 되었던 것이다(大関, 1909: 18-19).

오제키의 진술은 정확한 업무내용과 숙련도를 판단하기 어렵다는 간호사라는 직업의 본질적인 불안을 가리킨다. 도쿄제대 병원 3등간호부들의 업무에서 그러했듯, 간호라는 업무는 때로 잡무와의 경계선이 불명확했고, 파출간호부회 1등간호부와 그보다 낮은 등위의 간호사들의 업무와 숙련도도 명확하게 규정된 바가 없었다. 간호부 양성기관에 대한 통제는 없었고, 병원과 파출간호부회 간호교육기관마다 수업기간, 수업의 질이 달랐다. 오제키가 운영하던 도쿄간호부 강습소는 수업과 실습기간이 합쳐 3년이었고, 강사도 도쿄제대 의과대학 교수와 오제키 자신을 포함한 검증된 사람들이었다. 이 강습소는 도쿄제대 간병법 강습과보다도 앞서 수업기간 3년짜리 프로그램을 정비했으며, 25명을 장학생(給費生)으로 선발, 이들의 수업료, 기숙사비와 음식대를 면제해주었고, 매월 급여로 1엔을 지급했다(看護史研究会, 1983: 46). 반면, 1895년 4월 『부인신보』에 광고를 게재한 중앙간호부회(中央看護婦会)의 양성소는 양성기간이 6개월이었고, 수업료는 한 달에 3엔, 기숙사비는 한 달에 2엔 50전이었다. 장학생제도는 없었다(中央看護婦会, 1895: 22-23). 가뜩이나 이 직업에서 업무와 숙련도가 명료하게 구분되지 않는 상황에서, 파출간호부회에서 행해지는 간호교육의 질도 제각각이었던 것이다. 파출간호라는 업종은 3등간호부이나 무자격자를 1등간호부라고 속여 파견하는 식의 부정행위에 취약했고, 실제 어느 정도 부정행위가 있었는지 통계는 없지만 간호사의 실추되는 평판은 현실의 문제였다.

오제키는 국가가 간호사의 자격을 관리하고, 무자격자를 시장에서 배제해주기를 원했다. 오제키의 회고담에 의하면, 그녀는 각 파출간호부회 지도자들과 함께 중의원 의원들과 내무성 위생국장 고토 신페이(後藤新平)에 간호사에 대한 규칙을 발포해달라고 호소했고, 고토도 이에 동의했다(大関, 1909: 19). 이후 1900년 도쿄부의 「도쿄부(東京府) 간호부규칙(看護婦規則)」을 시작으로 각 지방정부가 「간호부규칙」을 제정했고, 1915년에 내무성령으로 전국적인 「간호부규칙」이 마련되며 무자격자에 대한 규제가 생겨났다.

그런데, 국가관료들의 주안점은 간호사의 업무와 숙련도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파출간호부회의 불법행위를 규제하는 것이었다. 도쿄부 내무관료 사토 유즈루(佐藤襄)는 「도쿄부 간호부규칙」을 발포하는 이유를 설명하며, “국립(官立) 및 공사립의 병원에서 양성되는 사람들”에 비해 “소위 간호부회 혹은 간호부양성소”는 “일반적으로 속성(速成)”이기 때문에 “대부분은 (...) 간호부의 가짜이름을 빌린” 것과 같다는 냉정한 평가를 내렸다. 그는 이 법령으로 “도쿄시 간호부의 약 8할을 차지”하는 “속성 가짜 간호부”들이 업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다거나, “부당한 사례금을 탐”한다거나, “매음부처럼 풍기를 무너뜨리”거나, “주치의의 지시를 받지 않고 제멋대로 의술을 시전”하는 물의가 바로잡히기 바랐다. 이 규칙에 따르면, 파출간호부회의 설립을 경시청에서 허가를 받아야 했고, 파출간호부의 자격은 “만 20세 이상의 여성으로, 경시청의 간호사 시험에 급제한 사람”이었다. 이 규칙을 어겨 벌금형에 처해졌거나 업무상의 부정행위를 저지른 사람이 파출간호부회에 가입하는 것을 금지하거나 2년간 휴업하도록 하는 처벌규정도 있었다. 도쿄부 관료들은 이 규칙의 규제대상을 파출간호부회의 간호사들로 한정하고, 병원의 간호사들은 병원 측에 그 규제를 위임했다(「理由」, 看護史研究会, 1983: 54-57, 58-61. 인용구는 54-55).

이 규칙의 작성자는 간호사의 직업적 권위를 법적으로 규정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무자격자가 면허가 있는 간호사와 같이 일할 여지를 남겨두었다. 이 규칙을 통틀어, 간호사의 업무가 무엇인지 명확한 언급이 없다. 반면 제7조에서 간호사가 침범할 수 없는 의사의 배타적 업무영역으로 진료, 수술 및 투약이 명시되어 있다. 그리고 제8조에서 “간호사는 무면허인 사람으로 하여금 대신 간호를 시킬 수 없”으나, “일부 보조를 하는 것”은 허락했는데, 간호사와 보조자의 업무가 정확히 어떻게 분절되는지에 대한 설명은 없다. 요컨대, 이 규칙에는 간호사가 할 수 없는 일에 대한 규정만 있고, 특정 등급의 간호부만이 할 수 있는 일에 대한 규정은 없었다(「東京府看護婦規則」, 看護史研究会, 1983: 58-59).

1915년 제정된 내무성의 「간호부규칙」에서도 면허를 가진 간호부의 업무영역에 대한 규정은 불명확하다(무서명기사, 「看護婦規則」, 1915: 721-722). 그 제1조는 간호부가 “공중의 수요에 응해 부상자와 병자 혹은 임산부의 간호의 업무를 행하는 여성”임을 적시했지만, 전문가로서의 간호사가 관장하는 업무 내용이 무엇인지는 동어반복 이상의 규정이 없다. 그리고 역시 무자격자의 업무참여도 가능했는데, “무자격자에 대해 (...) 이력을 심사하여 간호 업무를 볼 수 있게하고 준간호부(準看護婦)의 면장(免狀)을 줄 수 있다”는 규정이 있다. 사실상 이 준간호부 자격증은 병원이나 파출간호부회에서 개설한 교육프로그램에서 수학 중인 견습간호부들에 부여되는 자격증이었는데(看護史研究会, 1983: 106), 결국 국가관료들도 병원에서처럼 파출간호부회에서도 학생을 저임금 노동력으로 활용하는 관행을 승인했고, 무자격자와 사실상 업무가 같은 간호사의 권위를 갉아먹었다. 내무성의 간호부규칙에서는 지방장관이 지정한 간호부강습소의 졸업자에게 면허를 무시험으로 발급하는 규정을 마련, 몇몇 파출간호부회 간호부강습소의 권위를 인정했지만, 이 규정은 간호사의 권위를 확립하는 데는 역부족이었다. 1935년 대중지 『현대(現代)』에 한 파출간호부는 부잣집에서 많은 간호사를 파출한 뒤 현관에서 학력, 출신지, 취미 등을 물어 마음에 드는 사람을 고르고 나머지는 하루 일당을 주고 돌려보냈다거나, 기껏 파출해서 집안일만 시켰다는 일화를 소개했는데(무서명기사, 「派出婦と派出看護婦の座談会」, 1935: 346, 350), 파출간호부의 숙련도에 대한 사회적 평가가 뿌리내리기는 힘들었던 것 같다. 파출간호부들의 불안정한 직업적 권위는 더 저렴하게 가사노동을 해결해주는 파출부(派出婦)가 등장하며 더욱 도전받게 된다.

또한, 간호사 교육기관의 숫자는 병원과 파출간호부의 증가와 함께 늘어났고, 이는 궁극적으로 파출간호부의 급증으로 이어졌다. 오제키가 졸업했을 때 희소한 인력이었던 자격증을 보유한 간호사는 1915년에는 18,045명, 1925년에는 44,105명, 1935년에는 102,968명, 1940년에는 130,425명으로 급증했다(厚生省医務局, 1955: 814). 도쿄의 증가폭은 더 심한데, 면허가 있는 간호사는 1916년도 2,658명에서 1940년 24,748명으로 불어났다(警視庁, 1920: 92면; 警視総監官房文書課統計係, 1940: 156). 반면, 의사의 숫자는 매우 완만하게 늘어났다. 1885년 약 4만명이던 의사의 숫자는 1910년까지 유지되다가, 이후 완만한 속도로 늘어 1941년 67,612명에 달했다. 1885년에는 대학과 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의사가 580명뿐이었는데, 이후 고등교육받지 못한 의사들이 은퇴하고 대학과 전문학교 졸업생들로 대체되며 의사숫자가 정체상태를 보이다가 1910년 이후 완만한 증가세에 접어들었던 것이다(厚生省医務局, 1955: 806-809). 요컨대, 1915년에서 1940년 사이, 의사 수가 고등교육졸업자의 비율이 높아지는 방향으로 50% 증가한 반면, 간호사 수는 간이교육시설의 급증을 통해 7배가 되었다.

간호사의 희소가치도 떨어졌지만, 입원시설을 갖춘 병원이 늘어나고 입원 병상이 늘어나며 가정에서 간호사를 부르는 환자들도 줄어들었다. 스즈키 마사가 자선간호부회를 조직한 1891년 일본에서 병원은 579개였지만, 1915년에는 병원은 2,693곳, 입원병상이 38,814개였고, 1940년에는 병원이 4,732곳, 병상은 188,655개가 되었다(厚生省医務局, 1955: 818-819). 전체 간호사에서 병원에서 일하는 간호사의 비중은 빠르게 높아진 것 같다. 통계가 남아있는 도쿄의 경우, 간호부규칙이 마련되던 1899년 당시 파출간호부는 도쿄시 전체간호부의 80%였지만, 1925년 도쿄에서 병원에서 일하는 간호사는 11,130명, 파출간호부회의 간호사는 13,051명이었다(中央職業紹介事務局, 1927: 5, 21). 병원이 확대되고 치료의 공간이 가정에서 병원으로 이동하면서, 파출간호부들은 병원에서 일을 찾아야했다. 오제키가 파출간호에 나설 때 파출처는 대체로 사회지도층의 자택이었지만, 1951년도의 조사에서 파출간호사를 호출한 567곳 중 87%인 471곳이 병원, 13%인 51곳이 일반가정이었다(労働省婦人少年局, 1952: 8). 이러한 상황 아래, 파출간호부들은 시장 가치를 잃고 고객 확보를 위해 분투했던 것 같다. 1930년대 어느 파출간호부회의 회장은 개업의들에게 “달력이나 온도계를 가지고 인사드리러” 다녔고, 때로는 거칠게 면박당했다고 회고했다. 어느 파출간호부회의 회장은 1930년대 대부분의 간호사들이 모교 부속병원에 취직하고 파출간호부회에 입회하려하지 않아 신입회원을 구하는 데 애를 먹었다고 회고했다(看護史研究会, 1983: 192-193, 205, 208). 당시 일본 전국의 병원을 무리없이 운영하는 데 어느 정도의 간호인력이 필요했는지를 추산하기는 어렵지만, 1915년에 비해 1940년 간호사 한 명이 담당할 병상 개수가 줄어든 것은 사실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병원에서 일하는 간호사에 대한 파출간호부의 급여상 우위는 유지되기 어려웠다. 1910-20년대 도쿄제대 병원의 급여기록에 의하면, 간호부장들은 기숙사 사감(舎監)과 함께 이제 일급이 아니라 월급을 받았고 1920년 베테랑 간호부장들의 월급은 64엔, 경력이 오래지 않은 간호부장들도 모두 50엔 이상이었다. 1926년 도쿄제대 병원 1등간호부가 된 간호사는 일당으로 1엔 84전을 받았는데, 1926년 도쿄부의 1등간호부의 파출 일당이 2엔이었으니, 이미 이 시점에서 도쿄제대 병원과 파출간호부회의 급여차이는 꽤 축소된 것 같다(東大委員会, 1991: 70-71, 82-82; 婦人職業研究会, 1926: 157). 이후 도쿄제대 병원의 급여는 알 수 없지만, 1930년대 직업소개 책자에서 소개된 파출간호부회의 수입은 병원의 간호사보다 확실히 낫다고 보기 어렵다(婦人職業指導会, 1933: 45-55).

2. 노동자로서의 결집력

간호사들이 전국적인 단체를 만들어 직업적 이해를 도모하는 것도 난망했다. 의사들은 번의 출신자들이 한동안 문부성 의무국장과 내무성 위생국장으로 활약하며 의제를 제정(1874), 질병의 예방과 치료를 의사의 배타적 업무로 규정하고, 의학교육기관과 면허제도를 설계했다. 또한, 의사들은 직능단체를 조직하고 법률 초안들을 작성한 끝에, 1906년에는 의사법(医師法)과 의사회규칙(医師会規則)의 발포, 그리고 내무성과 직결된 전국적인 직능단체인 의사회(医師会)의 설립이라는 결실을 거두었다. 이 법안에 따르면 의사회는 “의료문제에 관해 관청의 자문에 응하거나 건의를 할 수 있는” 공인된 이익단체였다(厚生省医務局, 1976 記述編: 99-100; 厚生省医務局, 1976 資料編: 68). 반면, 1929년 각 병원 간호부장들이 주도하여 설립한 일본간호부협회는(日本看護協会, 1967: 2) 간호부들의 노동운동을 조직한다거나, 의사회처럼 국가권력에 영향력을 발휘하는 이익집단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지 못했다.

이러한 의미에서 도쿄제대 병원에서 간부간호사가 간병법강습과 졸업생들의 내부승진으로 발탁되는 일은 매우 드물었다는 점은 눈여겨볼 만하다. 병원의 운영자들은 1898년 2년과정의 고등간병법강습과(高等看病法講習科)라는 간병부장(看病婦長) 양성 프로그램을 한 기수만 운영하고 폐지했다. 이 프로그램의 지원자는 독서, 작문, 지리, 역사, 동물, 식물, 물리, 화학, 산수 등 중등학교 졸업자가 통과할 법한 입학시험을 치렀고, 나이는 23세와 30세 사이로 가사 의무가 없어야 했다. 졸업자는 도쿄제대 병원 간병부장으로 4년간 일할 의무가 있었는데, 실제로 졸업자 17명 중 16명은 간병부장이 되었다(「高等看病法講習規則」, 東大委員会, 1991: 38, 39-40, 42). 이 프로그램이 1회로 폐지되고 간병부장 자리가 채워지자, 도쿄제대 병원의 간호사가 간부간호사로 승진할 가능성은 사라졌다. 다른 병원도 사정은 비슷했던 것 같은데, 20여년 일한 한 간호사는 회고담에서 간호부장이 일반적으로 “특별히 병원에서 초빙받”는데, “적십자사병원 출신자”가 많다고 증언했다(長瀬, 1912: 238).

병원 운영자들이 애초부터 한 기수만 운영하고 폐지할 생각이었을 수도 있으나, 입학경쟁률이 세 배가 넘었다는(土曜会歴史部会, 1973: 117) 프로그램의 폐지는 일본 교육사에서 이례적인 일이었다. 이 조치로 이후 간호사들이 교육기관의 승격을 요구한다면 모델이 될 수 있는 권위 있는 국립 고등교육기관이 없어졌다. 또한, 간호사에 대해 유리한 정책의 시행을 요구할 국립 고등교육기관의 교육자와 사회각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졸업생들이 없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이후 간부간호사 교육은 사립학교인 적십자사병원과 성누가병원에 뿌리를 내려 이 두 학교는 전후 4년제 간호대학으로 발전했지만(日本赤十字中央女子短期大学, 1980; 聖路加国際大学大学史編纂・資料室, 2010), 이들 학교의 졸업생들이 간호사의 노동강도와 노동자로서의 결집력에 의미 있는 영향을 끼치지는 못한 것 같다.

결혼생활과 일을 병행하기 어려운 직업의 특성도 간호사들이 숙련노동자로 성장해서 직능집단으로 결집하는 데 방해물이 되었다. 가사 의무가 없는 사람만을 입학시킨다는 조항은 도쿄제대의 간호교육기관이 1950년 도쿄대학 간호학교로 개칭된 뒤에도 남아있었다(東大委員会, 1991: 46-47, 79, 124, 130). 도쿄제대 병원뿐만 아니라, 실제로 1945년 이전 간호사로 일하는 여성 절대 다수는 미혼이거나 남편과 헤어진 여성들이었던 것 같다. 1950년 2월 행해진 노동성 부인소년국(婦人少年局)의 조사에서, 간토와 도호쿠 지역의 병원이나 진료소에서 일하는 간호사들 중 응답자의 94%정도인 2,504명이 미혼이었고, 3%정도인 81명이 이혼했거나 사별했으며, 배우자가 있는 사람은 3%정도인 85명이었다. “야근이 필요한” 간호사는 병원 기숙사에 살아야했으니, “가족을 갖는 사람이 적은 것은 필연”이었던 것이다(労働省婦人少年局, 1951: 7, 31). 1951년 5월 노동성 부인소년국에서 시행한 조사에 따르면, 설문에 응한 566명의 파출간호부 중 41%인 232명이 남편과 사별했거나 이혼했고, 50%정도인 282명은 미혼이었다(労働省婦人少年局, 1952: 7, 25).

이 때문에, 간부급 간호사와 파출간호부회 회장과 같은 간호사의 지도자들과 젊은 간호사들 사이에 출신계급, 학력, 결혼 계획의 차원에서 차이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고등간병법강습과를 졸업한 도쿄제대 부속병원의 간병부장들은 1916년 간병법강습과의 동창회인 도쿄제국대학 부속의원 간호법강습회 동창회(후일의 芙蓉会)를 조직했지만, 이 단체의 지도자들과 회원들은 만주출정 병사에 대한 위문품 전달, 기근 및 화재 의연금 기부, 그리고 회원들의 친목회와 간호기술을 연마하는 강습회를 추진했을 뿐, 1945년 이전 급여와 노동환경을 향상시키거나 모교의 교격을 높이려고 단체로서 운동을 한 적은 없다(東大委員会, 1991: 277-280).

오제키와 스즈키는 파출간호부회를 조직하며 학력, 급여, 직위, 근무환경의 결정권과 맞물려 있는 의사와 간호사의 위계에 부분적으로 균열을 냈지만, 업무 내용과 숙련도를 판별하기 어려운 간호사의 직업적 약점을 극복하지는 못했다. 위생관료들도 간호사의 업무와 숙련도를 명시하지 않는 도쿄제대 병원에서의 노동관행을 답습했으며, 교육과 직업의 배타적 특권을 관리하는 관료들의 방치 속에 파출간호부의 존립기반은 취약했다. 또한, 간호사는 학력, 인생계획, 출신계급의 면에서 균질적이지 않았고, 하나의 직능집단으로 결집하기 어려웠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병원에서 의사에 종속된 지위로부터 벗어났던 파출간호부들의 도전은 시장 상황이 변화하며 물거품이 되었다. 1930년대에 파출간호부들의 수입과 사회적 위상은 지속적으로 하락했고, 1947년 직업안정법(職業安定法)이 시행되며 파출간호부회는 영업이 금지되었다.

결론

패전 이후, 미국 점령사령부의 위생행정가들은 일본 정부에 권고하는 형태로 간호의 전문화, 병원 간호업무의 확대를 골자로 하는 개혁을 단행했다. 이들은 도쿄제대에 위생간호학과를 설치하여 일본 최초로 간호학을 전공하는 4년제 대학 프로그램을 만들었고, 적십자여자전문학교 등 간호 고등교육기관들을 정비했다. 전후 후생여학부로 개편된 도쿄제대의 간호교육기관도 교육기간이 2년에서 3년으로 늘어났다. 또한 그들은 간호사와 의사의 관료제를 완전 분리, 간호사의 수장인 총간호부장이라는 직위를 만들어, 종래 각과의 주임의사의 명령을 받는 지위에 있던 간호부장들을 통솔하게 했다. 도쿄대학 병원에서는 1950년 내과 간호부장이었던 하시모토 마사(橋本マサ)가 초대 총간호부장의 지위에 올랐다(東大委員会, 1991: 131). 나아가 1950년 점령사령부의 위생행정가들은 하루 8시간의 3교대제를 표준으로 하는 노동기준법의 제정을 주도함으로써, 2교대나 당직제로 일하던 간호사의 노동강도를 줄여주려 했다(中島, 1990: 15). 간호인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에서, 도쿄대학 병원에서 3교대가 모든 진료과에서 현실화된 것은 1964년의 일이지만(東大委員会, 1991: 255), 이 개혁을 통해 간호사들의 위상과 노동환경이 개선되었음은 부정할 수 없다.

간호사들도 가혹한 노동조건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며 처우 개선에 어느 정도 성공했다. 패전의 혼란 속에서 후생여학부 학생들은 기숙사 사감에게 주말이 아닌 평일의 외출, 주말의 외박, 편지 검열 중단, 그리고 졸업 후 의무복무의 철폐를 요구했고, 실제로 1949년 이 학교의 학생들은 졸업 후 이 병원에서 2년간 의무적으로 일하지 않아도 되게 되었다(東大委員会, 1991: 120). 1955년 간호학교 동창회 후요카이(芙蓉会)의 회의록에는 간호사들이 결혼을 허락받고, 여성노동자에게 주어진 산후휴가를 행사할 수 있도록 병원 운영자들에 어떻게 요구할지를 토론하는 기사가 보인다. 1957년에는 병원기숙사에 기거하는 것이 아닌 자택 통근을 허락해달라는 요구가 나왔고, 실제로 통근하는 사람이 나타난 것은 1960년 전국적인 병원노동자 파업 이후인 1962년 경부터였다고 한다. 1976년에는 통근자 비율이 전체 간호사의 64%까지 높아졌다(東大委員会, 1991: 134, 256). 1971년 가사 의무가 없어야 한다는 입학규정이 학칙에서 사라졌다(東京大学医学部附属看護学校45周年記念誌出版委員会, 1995: 194). 병원파업에 가담한 한 간호사가 일갈했듯, 이전까지 “천사라는 이름으로 박애와 희생을 강요”당하던 간호사에게 결혼과 출산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森, 1967: 212), 그들은 패전 이후 노동자의 권리를 주장했으며, 결혼의 자유를 쟁취했던 것이다.7)

그러나 간호사는 여전히 업무의 내용과 숙련도에 대한 명확한 규정을 얻지 못했고, 직업적 권위는 위태롭다. 간호사의 노동강도를 줄이고 업무를 확대하기 위해서 점령사령부의 위생행정가들은 간호사의 수를 늘려야했는데, 당시 고등교육기관만으로는 간호인력의 수요를 충족할 수 없었다. 때문에, 이들은 1948년 간호부의 자격을 고등교육을 받았는지 여부에 따라 갑종과 을종 간호부로, 1951년에는 간호부와 준(准)간호부로 나누었다. 준간호부 자격을 취득하려면 중등간호교육기관을 졸업하고 현청에서 주관하는 시험을 통과해야했다. 준간호부는 간호학 고등교육기관(단기대학, 4년제 대학, 혹은 간호학 전공과)를 졸업하고 간호부 국가시험을 합격하면 간호부 자격증을 취득할 수 있었다. 간호학 고등교육기관의 졸업자는 준간호부 시험을 면제받고 바로 간호부 국가시험에 도전할 수 있었다. 1945년 이전 준간호부는 견습생 같은 무자격자에게 주는 면장이었지만, 전후에는 학교교육과 시험을 통해 얻는 자격증이 되었다(富岡, 1966: 64-71). 그런데, 준간호부와 간호부 업무의 차이는 명확히 규정되지 않았다. 1999년 인터뷰에 응한 어느 간부간호사는 “간호부와 준간호부라는 구별은 있지만, 실제로 하고 있는 일은 같고, 자격과 급여만 차이가 날 뿐”이며, 자신이 일하는 병원에서 “의사들이 싸게 쓸 수 있는 간호부”로 준간호부를 선호하기 때문에 간호부 숫자를 늘리려고 하지 않는다고 증언했다(別冊宝島編集部, 1999: 299).

간호사의 노동강도는 개선되기는 했지만 여전히 종사자가 힘들어하는 수준이었다. 1958년 도쿄대학 병원에는 891개의 병상이 있었는데, 1960년 통계에 의하면 도쿄대학 병원 간호사의 숫자는 간호부장 17명을 포함해서 총 318명이었다. 이들 중 각 진료과에서 외래 업무를 돌보는 간호사를 제외하고, 간호부 15명이 조를 이뤄 한 명이 4대에서 5대의 병상을 책임지는 비율로 병동을 지켰다(東大委員会, 1991: 65; 133). 그러나, 간호부가 부족했다. 도쿄대학 병원의 운영자들은 오전7시에서 오후3시까지 일하는 간호사(일근)의 숫자를 늘리고, 업무가 적은 오후3시부터 11시까지 일하는 간호사(준야근)과 오후11시부터 다음날 오전7시까지 일하는 간호사(심야근)의 숫자를 줄이는 방향으로 이 상황에 대응했지만, 심야근 간호사는 격무에 시달렸다. 1957년부터 8년간 도쿄대학 병원에서 일한 한 간호사의 회고에 의하면, 연차가 낮은 간호사에게 심야근을 맡겼던 탓인지 그녀는 일주일 연속으로 간호사 두 명이 70대의 병상을 관리하는 심야근에 임했는데, 아침에 피로로 빈혈 증세를 느꼈다(東大委員会, 1991: 234). 1964년 도쿄대학 병원에서 연속 야근을 이틀로 제한하는 내규가 생겼지만, 1980년대에도 간호사들은 적으면 8일, 많으면 19일 정도 야근에 임했다(東大委員会, 1991: 255, 155). 준간호부들은 더 자주 야근에 동원된 것 같다. 도쿄대학 병원의 통계는 아니지만, 1969년 10월부터 1970년 3월까지 300여명의 준간호부들을 상대로 한 전국 실태조사에 의하면, 준간호부들이 일하는 병원의 84%에서 야근에는 준간호부만 투입되었다. 응답한 준간호부의 68.5%가 (정)간호부와 실력차를 느끼지 못했지만, 그들의 94.7%는 간호사 일을 오래할 생각이 없다고 답했는데, 이유로는 승진할 가능성이 없고, 노동조건이 나쁘며, 결혼도 생각하고 있음을 꼽았다. (全国准看護婦の集い, 1970: 20-22) 1999년의 인터뷰에서 어느 준간호부는 “큰 병원의 경우 기혼자의 근무는 거의 불가능”한데, “육아휴가와 같은 제도도 부실하고, 사람으로서의 생활이 가능한 시간대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의견을 피력했다. (別冊宝島編集部編, 1999: 311-318)

간호사는 높은 교육수준과 비슷한 수준의 현장경험을 공유하는 균질한 직업 집단이 되기에는 갈 길이 멀었다. 1979년의 조사에서 2년제나 4년제 대학을 나온 간호사는 전체의 4.6%에 지나지 않았다(島村, 1984: 15). 패전 이후 교육개혁을 통해 간호대학이 생겨났지만, 전체 간호사들 중 대졸 간호사의 비중은 여전히 현격히 낮은 상태로 유지되었다. 1945년 직후 상대적으로 소수였던 준간호부의 비중은 점차 늘어, 1970년대가 되면 전체 간호사의 절반 정도를 점하게 되었다(中島, 1990: 26). 그러나, 1945년 이전보다 준간호부가 간호부로 승진하기가 어려워졌다. 1945년 이전 준간호부란 사실상 간호교육기관에서 실습 중인 견습간호사였고, 그들은 실습이 끝나거나 시험에 응시, 합격하면 간호부 자격증을 얻을 수 있었지만, 전후에는 일을 쉬며 새로 간호학 고등교육을 받아야만 국가시험을 치를 자격이 주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도쿄대학 위생간호학과 등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도 일선 간호사가 되기를 꺼렸던 것 같다. 1964년까지 도쿄대학 위생간호학과를 졸업한 232명 중 임상간호에 종사한 사람은 단 8명이었다. 위생간호학과 교육자들은 1965년 이 과를 보건학과로 개칭하고, 여학생만을 받는 학칙을 폐지하며 학과의 강의실을 도쿄대학 병원에서 의학부 3호관으로 옮겨, 간호인력의 양성을 사실상 중단했다(東京大学医学部百年史編集委員会, 1967: 571, 584). 한 간부간호사는 인터뷰에서 위생간호학과가 생겨도 고등교육 졸업자들이 “손을 더럽히며 간호의 실천의 장”에 들어오기 보다는 “간호학교의 선생이 되”거나 “야근을 안 해도 되는 시설에 가”버린다고 지적했다(別冊宝島編集部, 1999: 288). 도쿄대학 간호학교는 지원자가 줄어들자 폐교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는 명문대학의 간호학과가 그 나라 간호계에서 지도적인 위치를 점하는 미국이나 한국과도 대조를 보이는 일본의 독특한 경험이라고 하겠다.

도쿄제대 병원은 여성을 간호사로 고용한 일본 최초의 병원이었고, 성별에 입각한 의사와 간호사의 위계가 형성되는 상징적인 공간이었다. 그곳에서 의사들은 간호사를 의사의 부하직원으로 위치시켰고 이후 여성들을 간호사로 훈련시켜, 의사보다 학력, 급여, 직위가 낮고, 가사와 병행하기 어려운 격무를 떠안지만 근무환경의 결정권이 없는 노동자로 맞아들였다. 또한 이 과정에서 의사들은 진단과 치료 등 배타적인 업무영역을 확보했지만, 간호부들은 업무 내용과 숙련도를 판별하기 어렵다는 전문직으로서는 치명적인 약점을 안고 견습생들과 함께 일하게 되었다. 도쿄제대와 도쿄간호부강습소처럼 건실한 병원과 파출간호부회의 교육기관을 통해 간호사가 전문 기술을 훈련했다. 그러나 이들의 업무는 잡무와 완전히 분리되지 못했다. 늘어나는 병상을 커버하기 위해 간호인력을 확대하면서, 병원 운영자들은 학생의 기숙사 거주를 의무화했으며, 학생이나 3등간호부를 병실 잡무까지 돌보며 강한 노동강도를 견디는 저임금 노동력으로 활용했고, 경험 많은 간호사는 이들과 업무가 같아 직업적 권위가 불안해졌다.

직위와 대우, 근무환경과 그 결정권, 국가정책의 영향력, 노동자로서의 결집력 등 다양한 요소에 관계된 의사와 간호사의 위계는 끊임없이 조정되었다. 간병부 책임자 오제키는 간호사의 근무환경에 대해 공개적으로 도쿄제대 병원의 의사에게 문제를 제기했고, 백여 년에 걸쳐 간호사의 근무여건은 서서히 나아졌다. 근대 간호교육과 서비스 자체가 구미의 박래품(舶来品)이었고, 오제키와 스즈키는 의사들에게 없던 간호학의 권위를 영국인 아그네스 베치에게서 확보했다. 1890년대 초반 도쿄제대 병원에서 스즈키와 오제키는 자신의 상급자인 의사들에 순종만 하는 직원이 아니었던 것이다. 오제키의 건의로 도쿄제대 병원에서 병실마다 배속되는 간호부의 숫자가 늘었고, 교대근무가 시행되었으며, 간호부가 담당해온 잡무를 담당해줄 노동자도 병실에 두어졌다. 전후 도쿄대학에 4년제 간호교육 프로그램이 자리를 잡고, 후생여학부 졸업생들은 도쿄대학 병원에서 졸업 후 의무적으로 2년간 근무하지 않아도 되게 되었으며, 1960년대 간호사들은 드디어 결혼과 통근의 자유를 얻었다. 또한, 간호사들은 의사에 대한 직무상의 종속 관계에서 벗어나기도 했다. 오제키와 스즈키는 병원에서 사직했지만, 이들은 파출간호부회를 조직하며 개인사업자로 변신, 자신들의 근무환경과 급여를 스스로 정했다. 전후의 노동개혁을 통해 점령당국의 위생행정가들은 총 간호부장이라는 직위를 만들어 간호사와 의사의 관료제를 완전 분리함으로써, 의사와 간호사의 오랜 직무 위계를 형식상으로는 해체했다. 나아가, 여성들도 의사가 되고, 여성들을 위한 의학고등교육기관을 세우면서, 더 이상 의사와 간호사의 위계를 남성과 여성의 위계로 규정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 모든 변화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간호사의 절대 다수는 여성이며, 총간호부장이라는 직책이 생겼어도 병원의 운영에 임하고 고용하는 간호인력의 수를 정하는 것은 의사들이다. 3교대제가 도입되었지만, 병동에서 일하는 간호사는 밤에 병실을 지키며 아침과 낮에만 일하는 다른 사람들과 생활리듬을 맞추지 못하는 많은 날들을 견뎌야한다. 간호사들은 업무 내용과 숙련도를 판별하기 어렵다는 직업적 약점을 극복하지 못했다. 오제키와 스즈키는 간호서비스 시장의 활황을 바탕으로 개인사업자로 독립했지만, 도쿄제대 병원에서처럼 지방정부와 내무성의 「간호부 규칙」에서도 간호사의 업무영역과 숙련도의 구분은 명확하게 규정되지 않았고, 이러한 상황에서 파출간호부의 직업적 위상은 유지될 수 없었다. 전후 준간호부들은 고등교육기관의 학위가 없는 상태에서 기술을 갖춰도 승진할 희망을 품지 못했고, 간호부들은 준간호부들의 존재로 인해 직업적 권위가 끊임없이 도전받았다. 이 때문에, 병원 운영자들은 간호사 인력난에 시달린다. 업무영역과 숙련도의 규정, 노동강도와 급여, 교육기관의 교격, 국가 정책에 대한 영향력, 비슷한 환경과 이해관계를 공유하는 결집력 등 간호사의 직업적 불안을 규정하는 많은 요소들이 간호사들만의 노력으로는 극복하기 어렵다는 점은 분명하다. 과연 일본사회는 150년이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는 이 해묵은 문제를 해결하고, 간호사 부족으로 위기에 봉착한 의료체계를 되살릴 수 있을까? 21세기 초반의 일본인들 앞에 이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고 간호노동의 가치를 복권하는 쉽지 않은 과제가 놓여있다.

Notes

1)

이 글에서 간호에 종사하는 직업과 그 종사자를 간호사로 부르되, 직책명을 언급할 때는 당시의 용어를 그대로 사용하겠다. 19세기 말엽 이래, 간호와 간병이라는 낱말이 혼용되다가, 1910년대가 되면 간병보다 간호라는 낱말이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다. 이 논문에서 다루는 도쿄제국대학 부속병원에서도 1901년부터 『의국일지(医局日誌)』에 간병부와 함께 간호부라는 단어의 용례가 보이며, 1908년부터 기록에서 병원의 공식기록이나 프로그램명에서 간병부라는 말이 간호부라는 말로 대체되었는데, 1910년 이전까지의 간병부 업무에 대한 규정이 1910년에 전혀 변화가 없는 것으로 보아, 이 용어의 대체가 특별한 의미를 내포하는 것 같지는 않다. 19세기 말엽 이래 일본에서 남성 간호사는 간병(호)인, 여성 간호사는 간병(호)부로 부르는 것이 보편적이었으나, 2002년 「보건사조산사간호사법」이 통과되며, 간호부와 간호인이라는 법률적 공식명칭이 간호사(看護師)로 바뀌었다.

2)

이 학교는 1886년 설립되었을 당시 이름은 제국대학이었으나, 1897년 교토에 제국대학이 하나 더 들어서자 도쿄제국대학으로 개칭되었다. 이 글에서는 편의상 1886년부터 1897년까지 이름이 제국대학이었을 때에도 도쿄제국대학, 도쿄제대로 지칭하기로 하겠다. 이 병원의 명칭은 1886년 (도쿄)제국대학 의과대학 부속의원에서 1919년 도쿄제국대학 의학부 부속의원으로, 1947년에 도쿄대학 의학부 부속의원, 1949년에는 도쿄대학 의학부 부속병원으로 개칭되었다. 이 논문에서는 1886년부터 1947년까지 이 병원을 도쿄제대 병원으로, 1947년 이후에는 도쿄대학 병원으로 약칭하겠다. 부속 간호학교의 이름은 1908년 간호법강습과, 1945년 후생여학부, 1950년 도쿄대학 간호학교로 개칭되었다.

3)

이에 반해 1940년도 남성을 위한 의과대학은 일본 본토에만 제국대학 의학부 7곳과 의과대학 11곳이있었고, 전문학교는 40곳이 넘었다.

4)

간병부 책임자라는 직명은 1898년 간병부장으로, 1910년 간호부장으로 바뀌었다.

5)

1915년도 간호부들의 총 숫자는 148명인데, 1928년도 간호부 총 숫자는 283명으로 12년 사이 135명이 늘어났다. 1916년도부터 1928년까지 간병(호)법 강습과를 졸업한 학생들의 총 숫자는 906명으로, 이 12년간 도쿄제대 병원의 간호사 771명이 사직하는 가운데에도 병원 운영자들은 간호부의 숫자를 1915년도보다 두 배로 늘리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東大委員会, 1991: 73, 69)

6)

과목은 해부학, 생리학, 간병학, 붕대학, 수신, 구급요법, 외과기계, 전기, 방부 및 소독, 안마법이다.

7)

1984년 시마무라 다다요시(島村忠義)라는 연구자가 주도한 전국 조사는 간호사들이 결혼하고 계속 일할 권리를 얻어냈음을 보여준다. 20만 명이 넘는 간호사들을 모집단으로 만여 명의 샘플을 정한 뒤 진행한 이 조사에서, 현직 간호사 중 결혼하여 가정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은 47.8%였다. (島村, 1984: 15) 간호사의 연령도 다양해졌다. 여전히 20대가 53.7%로 가장 많지만, 30대도 23.6%. 40대도 11.6%, 50대 이상도 7.9%였다. 근속연수는 1-4년만 일한 사람이 44.1%, 5-9년도 23.4%, 10-15년이 12.6%, 16년 이상이 12.2%였다. (島村, 1984: 17-18)

Refer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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