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세기 조선의 임상 의학은 어떻게 이뤄졌을까 - 『역시만필』을 통해 살펴본 의관 이수기의 임상 의학-†
How Did Joseon’s Clinical Medicine Develop in the 17-8th Century : I Sugi’s medical thoughts depicted in the Stray notes with experienced tes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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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In this research, I analyzed Stray notes with experienced tests (歷試漫筆), a medical book written by I Sugi (李壽祺), a physician of Joseon (朝鮮) dynasty, to check the trend of clinical medicine and the reasoning prevalent among Joseon physicians in the seventeenth and eighteenth centuries. I Sugi’s medical science can be sorted into diagnosis and treatment. For accurate diagnosis, there had to be examinations and analysis on the nature of a disease. He made use of four kinds of examination methods including seeing, hearing, touching, and asking, and he favored pulse diagnosis. The nature of a disease was analyzed based on standards of eight principle, six meridian, five vicera, etc., but the analysis was not fixed on specific standards. Regarding the treatment of illness after diagnosis, he used a single drug, ready-made herbal formula, or adding or subtracting herbs to the formula according to the symptoms, etc. For medical reasons needed for diagnosis and treatment, previously published medical books were utilized. Treasured Mirror of Eastern Medicine (東醫寶鑑) was much depended upon, for it was even cited in full sentences.
I Sugi’s clinical medicine that embraces diagnosis and treatment can be concluded as ‘Pulse, Syndrome, Formula, and Herb (脈證方藥),’ which is a concept that includes pulse diagnosis, symptom analysis, composition of formula with herbs. This method emphasizes using pulse diagnosis as examination method and modification of formula as treatment tool. The period of ‘Pulse, Syndrome, Formula, and Herb’ lasted for quite a long time, but its usage stopped as in the modern times when Western medicine was introduced, along with new concept of illness, including the germ theory. Afterwards, ‘Syndrome Differentiation and Therapy Determination (辨證論治)’ appeared in China, which not only emphasized the difference between Chinese medicine and Western medicine but also prepared for the integration with Western medicine, and took the place of ‘Pulse, Syndrome, Formula, and Herb.’
Stray notes with experienced tests vividly shows how doctor I Sugi applies medical knowledge of East Asia organized through Treasured Mirror of Eastern Medicine to real clinical medical treatment. Furthermore, this book shows that in this context, physicians of Joseon in the seventeenth and eighteenth centuries referred to the ‘Pulse, Syndrome, Formula, and Herb’ to perform clinical medical treatment and to proceed with clinical reasoning.
“아! 깨치기 어려운 것이 병의 이치로다. 하류를 따라 내려가면 찾을 수 없고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야 그 병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으니 어찌 소홀히 하겠는가!”1)
1. 시작하는 글
헨릭 월프(Henrik R. Wulff) 등은 17-8세기 서구 의사들이 수행한 의료 행위를 검토한 뒤, 200년 전에 사용된 대부분의 치료법은 아무런 유익한 효과를 내지 못했으며 과거 의사들 역시 자신의 처방에 대해 의문을 가지지 않았고 자신의 사변적인 이론들을 경험적으로 검증하거나 반증하려고 노력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헨릭 월프・스티그 페데르센・라벤 로젠베르, 2007: 78). 이 주장이 동아시아 의학 전통에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을까? 한반도, 특히 조선 시대의 의사들은 어떻게 환자를 치료하고자 했으며 효과가 나지 않을 경우 어떤 대책을 강구했을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의사들이 남긴 의료 기록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동시에 해당 의료 기록의 작성자가 어떤 인물이었는지 그리고 그의 의료 활동은 어떻게 이뤄졌는지에 대한 확인 역시 필요하다.
동아시아 의학 전통에도 현대의 병원에서 작성되는 의무 기록(medical chart)과 유사한 문건이 존재한다. 의안(醫案)이라고 불리는 이것은 약물 활용과 관련된 치료 전략을 전달하기 위해 작성된 일종의 의학 저술 장르다(Charlotte Furth, 2007: 14). 16세기 중국에서 활발히 편찬되기 시작한 의안은 의가 자신이나 스승의 명성을 높이기 위해 또는 전문가로서의 경력을 확보하기 위해 출판되기도 했지만 그 중에 환자를 비롯한 독자를 설득하기 위한 구체적인 의료 지식을 포함하고 있는 만큼 한 의가의 치료 과정 전반을 살펴볼 수 있는 지침이 된다(Christopher, 2001: 319, Andrews, 2001: 325). 최근 국내에 의안 저작 『역시만필(歷試漫筆)』(1734년 편찬)이 소개됐다. 그중에는 영의정 홍치중(洪致中), 형조참판 이현록(李顯祿), 당대의 문인이었던 최대립(崔大立), 홍세태(洪世泰) 등 실존 인물들의 치병 사례 뿐 아니라 현전하는 조선 의서 중 가장 많은 151개 의안이 수록되어 있어 17-8세기 조선에서 벌어진 임상 의료의 생생한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중요 사료로 평가받고 있다.2) 이 책의 저자는 의관(醫官) 이수기(李壽祺, 1664-1743?)다. 그는 1664년 천안이씨(天安李氏)의 일원으로 태어나 1690년 의과(醫科)에 합격한 뒤 전의감 훈도(訓導), 교수(敎授)로 활동했으며 1730년에는 어의(御醫)로서 영조(英祖)의 질병 치료에 참여하기도 했던 인물이었다(이수귀, 2015: 606-12). 의과에 합격했을 뿐 아니라 국왕의 질병 치료 과정에 참여했다는 것은 조선 정부가 그를 뛰어난 의술을 지닌 의가로 공인했음을 의미한다(신동원, 2010: 94). 따라서 이수기가 직접 저술한 의안 저작 『역시만필』을 통해 당대 조선 최고 전문 의가가 수행하던 임상 의료의 구체적인 모습을 마주하게 되리라 기대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의안 연구는 의료 행위를 분석해 해당 의가의 임상 의학 관련 내용을 파악하는 내사(內史)적 연구와 의사와 환자, 환자 보호자, 동료 의사들 간의 관계를 중심으로 동아시아 의료에 대한 보다 정확한 그림을 그려내는 외사(外史)적 연구로 구분된다(Christopher Cullen, 2001: 298).3) 『역시만필』에 대해서는 맥진을 중심으로 저자 이수기의 의학 전반을 살펴보는 연구 외에 조선 의학이 『동의보감』에 의해 정리된 고방(古方)을 실천 지식으로 활용해가는 완숙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거나 상한(傷寒) 치료를 매개로 한국, 중국, 일본의 의학이 분기되는 양상이 담겨있다거나 조선 후기 독자적으로 발전한 외감병의 모습이 확인된다는 내사적 연구가 발표되어 있다(전종욱, 2017: 59-81; 이기복, 2012: 429-59; Chaekun OH, 2014: 1-24, 김상현, 2017: 133-43). 이 밖에 여성 진료 기록을 바탕으로 조선 후기 여성의 삶과 질병을 재구성하거나 의관 이수기가 스스로를 전문 지식인으로 차별화하려는 자의식을 보이고 있음을 살피는 외사적 연구도 발표되어 있다(이꽃메, 2011: 497-532; 이기복, 2013: 483-527).
위의 연구에도 불구하고 『역시만필』이 지닌 사료적 가치에 비해 저자 이수기의 임상 의학에 대한 연구는 여전히 부족한 실정이다. 기존에 진행된 연구 역시 상한을 비롯한 외감병, 맥진, 방제 등을 소재로 부분적으로만 진행됐을 뿐 그의 임상 의학 전반을 아우르지는 못했다. 이번 연구에서는 이수기의 임상 의료가 어떻게 이뤄졌는지 그리고 그것을 가능케 했던 의학적 근거가 무엇이었는지를 살펴 17-8세기에 활동한 조선 의가들이 지니고 있던 임상 의료의 경향과 사유를 확인해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역시만필』 수록 의안 전체를 분석 대상으로 삼은 것은 물론 주디스 파쿼(Judith Farquhar)가 중의사들의 진료[看病] 행위를 조사하며 제시한 ‘진단’과 ‘치료’의 구분 분석 방식을 활용해 이수기의 임상 의학을 살펴보고 그 의미를 파악하고자 했다(Judith Farquhar, 1994: 61-200).4) 이어 『동의보감』으로 대표되는 조선 후기 의학과 이수기의 임상 의학, 그리고 현대 중의학의 주요 특징으로 꼽히는 ‘변증론치(辨證論治)’ 사이에서 드러나는 연관 관계를 살펴 이수기의 임상 의학이 지닌 역사적 맥락을 설명해보고자 했다(邓铁涛, 2005: 1-4, 김두종, 1981: 319-25).
이수기 1인이 조선 의관 전체를 대표한다거나 그의 의안이 당대의 조선 의안 전체를 대표한다고는 볼 수 없다. 의관과 같은 엘리트 의사가 조선의 임상 의학 전부를 대표한다고 볼 수도 없다. 다만, 그가 과거 시험을 통과할 정도로 훈련된 의사였다는 점, 단순 의관이 아니라 전의감에서 의관을 교육하는 직책을 담당하고 있었다는 점, 임금의 병을 치료하는 어의로서 활동했었다는 점, 그리고 18명에 달하는 의과 합격자를 배출한 천안이씨의 일원으로5) 이른바 세의(世醫)였다는 점은 『역시만필』이 당대 조선 의관들이 수행했던 실제적인 의료 행위와 의학적 사유 양식 등을 드러내는 단면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2. 의관 이수기의 임상 의학, 진단과 치료
1) 이수기의 진단, 맥진과 증상 분석
진단의 기본 절차는 환자 몸에 드러나는 징후를 살피고 증상을 파악하기 위해 살펴보고, 들어보고, 물어보고, 만져보는 것이다. 망문문절(望聞問切)로 불리는 위의 행위는 동아시아 의학 경전 『황제내경(黃帝內經)』 중에 제시된 이래 조선 의서 『동의보감(東醫寶鑑)』에서도 그대로 수록되어 있었다.6) 의관 이수기 역시 위의 모든 방법을 활용해 환자의 병증을 파악하고자 했다. 그중 그가 가장 적극적으로 활용한 것은 맥진(脈診)이었다(전종욱, 2017: 61).
홍첨지(洪僉知)의 며느리가 시집에서 서로 다투며 격분했던 일이 있은 뒤 수일 동안 음식을 먹지 않았었다. 이후 돌연 가슴 속이 뭉치고 갑갑한 증상이 생기며 혼미하여 인사불성했다. 옷깃을 더듬으며 허공에 헛손질하고 때때로 딸꾹질을 하며 왕왕 손으로 가슴을 두드렸다. 까닭을 물어도 대답을 하지 않아 그 연고를 알 수 없었다. 맥을 살펴보니 양쪽 촌맥(寸脈)에서 모두 빠르게 뛰는 삭맥(數脈)이 확인됐다. 위장이 허약하고 흉격에 열이 있는 것으로 진단해 치료했다. 귤피죽여탕을 세 첩 쓰고 겸하여 단중에 뜸을 스물한 장 뜨니 딸꾹질과 옷깃을 더듬는 증상이 조금 줄어들었다.7)
인용문에서 환자는 아무 말 없이 손목만 내놓은 채 내 병을 맞춰보라고 요구한다. 이수기 역시 별다른 질문 없이 맥을 짚었다. 불문진단(不問診斷)의 현장이다. 진맥 결과 양쪽 촌맥이 빠르게 뛰는 것을 확인하고 위장이 허약하고 흉격에 열이 있어 딸꾹질을 하는 것이라고 진단한 뒤 귤피죽여탕을 처방했다. “열이 나고 입이 쓰며, 가슴이 그득하고 맥이 빠르게 뛸 때는 귤피죽여탕을 쓴다”, “귤피죽여탕은 위장 기운이 허약해져 흉격 부분에서 열이 나고 딸꾹질을 하는 경우를 치료한다”는 『동의보감』의 문장에 입각한 결정이었다.8) 손목에서 촉진되는 촌구맥(寸口脈)은 환자 병증에 대한 여러 가지 정보를 제공해주지만 그것만으로 모든 것을 파악할 수는 없다. 무엇보다 환자가 앓고 있는 증상과 그 병리 기전에 대한 해석이 필요하다(皮国立, 2008: 258-9). 이수기가 귤피죽여탕을 처방한 근저에도 양쪽 촌맥에서 확인한 삭맥과 흉격 부위에서 느껴지는 열감을 연결시킨 병리 기전에 대한 해석이 존재했다.
맥과 병증 해석에는 맥진을 실시한 의가의 주관적인 견해가 개입될 수 밖에 없으므로 의가마다 다른 결과를 도출해낼 수 있다. 이수기 역시 『역시만필』 전체 의안 151개 중 30개 사례에서 한 환자의 치료 방향을 두고 다른 의사 또는 환자 보호자와 논란을 벌였다. 30개 사례 중 이수기가 직접 치료해 호전된 경우가 6회, 다른 의사가 치료했다가 실패한 뒤 다시 이수기가 치료하여 호전된 경우가 19회, 다른 의사가 치료하여 환자가 사망에 이른 경우는 5회였다. 이수기와 다른 의사 또는 보호자 사이의 충돌은 어떻게 환자의 병증을 파악하고 치료 방향을 설정할 것인가에 기인했다. 24개 사례에서 이수기는 환자의 병증을 허증(虛證)이라고 판단해 인삼 등을 포함한 보약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다른 의사들은 실증(實證)이라고 판단해 야인건, 월경수 등과 같은 성질이 세차고 차가운 약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음양표리한열허실(陰陽表裏寒熱虛實), 8개 판단 기준 중 허실에 대한 판별이 가장 까다롭다. 허실 자체가 체내 정기(精氣)와 사기(邪氣)의 상대적인 존재 정도를 판단하는 개념인데다가 맥진이나 설진 등과 같은 주관적인 진찰 과정을 통해 기혈(氣血)의 허실 여부를 파악하기 때문이다(朱文锋, 1999: 458, 521, 558). 허증과 실증에 대한 분석 그리고 보법과 사법의 적용 여부를 둘러싸고 벌어진 논란에서 이수기가 제시한 판단 기준은 맥진이었다.9) 맥진은 이수기가 임상 의사로서 ‘전문가적 독자성’을 확보하기 위한 수단이었을 뿐 아니라(이기복, 2013: 518-20) 발병 과정을 설명하지 않는 환자를 살피고 자신의 치료 방법에 의심을 품은 환자를 설득시키며 자신과 다른 주장을 펼치는 다른 의사들을 제압하기 위한 방편이기도 했다. 실제 그의 맥진 실력은 영조의 진찰을 위해 별도로 불려갈 정도로 정평이 나 있었다.10)
한편 이수기는 육음(六淫), 장부, 경락 등의 기준 외에 ‘음양표리한열허실’로 알려진 이른바 팔강(八綱)에 입각해 병증을 구분 분석하는 방식을 가장 많이 활용했다.11) ‘월경전(越經傳)’이라는 용어가 기재되어 있어 상한에 적용되는 육경을 활용한 병증 분석 역시 진행됐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단 한 차례에 불과했다(Chaekun OH, 2014: 8-9).
박첨지(朴僉知)의 후실이 병이 들었다. 소요산, 자음지보탕을 복용해도 좋아지지 않았다. 나를 찾아와서 물었다. “대변에 설사기가 있고 소변이 매끄럽지 않다고 합니다. 창자 부근이 아프고 생식기가 아픈 것도 가볍지 않다고 합니다. 소변이 시원하게 나가지 않으며 쌀뜨물처럼 뿌옇습니다라고 합니다.” 내가 말했다. “간장의 경맥은 생식기를 돌아 아랫배까지 도달합니다. 이 병의 뿌리는 간장 경맥에 있습니다.” 평간유기음을 5첩 쓰자 생식기 부위 통증은 조금 그쳤지만 설사는 그치지 않았다. 조습탕 5-6첩을 겸하여 썼다. 다시 찾아와서 소변이 여전히 시원하게 나가지 않고 대변이 자주 나오며 기운 역시 없다고 했다. 다시 춘택탕에 육계, 목향 5푼을 더한 방제를 적어주었다. 연달아 4-5첩을 복용해 치료의 발판으로 삼았다.12)
위 사례에서 환자의 증상을 전해 들은 이수기는 먼저 병증의 뿌리가 간장 경맥[肝經]에 있다고 판단해 평간유기음을 처방했다. 발병 부위인 생식기와 그곳을 흐르는 간장 경맥을 연관시킨 병증 분석이었다. 이어 습사(濕邪)가 문제가 되어 설사가 발생했다고 보고 조습탕을 처방한 뒤, 방광의 기화(氣化) 작용에 문제가 있어 배뇨 장애가 발생했다고 보고 춘택탕을 처방했다. 병인, 병리 기전, 그리고 관련된 장부를 활용한 증상의 변별[辨證]과 그에 근거한 전형적인 방제의 선택 과정이었다. 노중의 천차오쭈(陈潮祖)는 증상 변별의 관건은 병리 기전 파악에 있다고 했다(陈潮祖, 2015: 83). 이수기 역시 “병은 처방을 내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오로지 병증을 판별하는 것이 어렵다. 오래된 병이라도 마땅한 약방을 얻으면 효과가 빠르게 메아리칠 것이라며”13) 병증에 대한 이해를 무엇보다 강조했다. 그러나 체표에 드러나는 증상을 분석해 체내에서 발생하는 병리 기전을 추론하는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내가 다시 여섯 맥을 살펴보니 모두 위로 떠오른 채 미끌거리면서도 빨랐다. 외감에 담(痰)이 끼어 있는 증후였다. 배를 눌러보니 왼쪽은 곳곳에 딱딱한 것이 두드러져 있었고 오른쪽은 텅빈 채 부드러웠다. 문득 이 증상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기름에 튀긴 음식을 많이 먹어 습담(濕痰)이 조장되었는데 풍한(風寒)을 맞닥뜨려 엉기고 뭉치는 바람에 흉통이 유발된 것이다. 앞서 복용한 탕제들로는 다 풀어지지 않아 담이 경락에 엉겨 붙고 혈맥이 통하지 않는 바람에 부창(浮脹)이 발생한 것이었다. 시호조중탕 다섯 첩을 쓰자 [증상이] 확실하게 줄어들었고, 연이어 십여 첩을 쓰자 부창이 완전히 사라졌다. 한 달 넘게 조리하고 쾌차했다. 부창 증상은 습열(濕熱)에 속하지만 때로는 비장[脾]이 무너져 생기기도 한다. 마땅히 임기응변해야지 한 가지 치료법에 고착되어서는 안 된다.14)
인용문에서 이수기는 최재령(崔載寧)이 앓고 있던 온몸이 붓고 팽창되는 부창증을 치료하기 위해 시경반하탕, 시령탕을 투여했다. 그러나 모두 실패했다. 세 번째 진료에 이르러서야 환자가 앓고 있는 부창증의 발생 기전이 일반적인 경우가 다르다는 것을 깨닫고 시호조중탕이라는 새로운 방제를 선택해 증상을 호전시켰다. 두 차례에 걸친 치료의 실패 그리고 세 번째 진찰 과정 중에 진행된 맥진, 복진 등은 모두 정확한 발병 원인과 병리 기전을 확보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의안 말미에서 이수기는 ‘임기응변’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한다. 눈앞에 있는 환자의 몸에 나타나는 병증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의서에 축적된 정보 뿐 아니라 의료 실천 경험에 기반한 기민함 역시 필요하다는 임상 의가로서의 절실한 고백이었다.
요컨대 이수기는 망문문절 네 가지 진찰 방법을 활용했다. 그 중 맥진은 그가 가장 자신 있는 진찰 방법 중 하나였으며 병증을 분석하는 실마리였다. 그리고 팔강, 육경, 오장 등의 기준에 의거해 병증 분석을 시도했다. 다만 임상 의가였던 만큼 특정 기준에 고착되지 않았다. 환자의 상황에 맞게 임기응변해가며 병증을 분석해나갔다.
2) 이수기의 치료, 방제와 약물
본격적인 치료를 위해서는 ‘정기를 보충하고 사기를 제거한다[扶正祛邪]’, ‘채워져 있는 것은 덜어내고 부족한 것은 보충한다[瀉其有餘, 補其不足]’ 등의 치료 원칙이나 해표(解表), 사하(瀉下), 화해(和解) 등과 같은 구체적인 치료 방법을 확정하는 것이 유리하다.15)
적괴의 경우 비장이 손상을 받아 기운이 허약해져 있다. 적괴가 독을 퍼뜨리면 그것이 변해 한열을 일으킨다. 나는 아직 적괴를 치료할 수 있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노약자의 적괴를 공격하는 것은 국력이 약한 나라가 군사 일으키는 것을 좋아하는 것과 같다. 도리어 자국 백성을 피폐시키지 않을 수 없으니 적국에게 패배하게 된다. 이 병을 만나면 차라리 치료하지 않고서 나을 수 있도록 해야한다. 나는 나이 들어 쇠약해진 사람 중에 적괴를 가진 사람을 여러 번 보았다. 탈이 날 때마다 그저 오적산 몇 첩을 복용시키기만 하면 급한 증세가 완화되어 편안해졌다. 이것 또한 하나의 징험이다. 젊고 건장한 사람이라면 적괴를 공격하는 방법으로 효과를 볼 수 있다. 이것은 주나라 무왕(武王)이 한 번 분노하여 천하를 편안케 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병에 허증과 실증이 있듯이 치료에도 완치(緩治)와 급치(急治)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16)
위의 사례에서 이수기는 적괴를 나이 들어 쇠약한 사람과 젊고 건장한 사람이 앓고 있는 것으로 구분한 뒤, 급히 효과를 내도록 하는 급치와 천천히 효과를 내도록 하는 완치의 치료 방법을 전쟁에 빗대 설명하고 있다. 어떻게 치료할 것인지가 확정돼야 구체적인 치료 수단을 동원할 수 있다. 약물을 논의하기 전에 치료 방법을 결정하는 것은 동한 시대 의서 『상한론』 이래 동아시아 의학 전통에서 공유하던 통념이었다(裵永淸, 2021: 13). 치료 원칙이나 방법은 성별, 연령, 신분 등의 일반 조건 뿐 아니라 개별 질병의 상황까지도 아우를 수 있도록 구체적이어야 했다. 예를 들어 두통과 함께 어지럼을 호소하고 있는 환자의 경우 부족한 것은 채우고 담음은 삭이며 기운을 조화롭게 만들겠다는[補虛消痰調氣]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옥액탕에 인삼이 추가하는 방제를 치료 수단으로 활용했으며, 오랜 설사를 앓고 있는 환자의 경우 기혈을 모두 보충하겠다는[雙補氣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귀작이공산을 처방했다.17) 이수기의 저작, 『역시만필』은 ‘만필(漫筆)’이라고 불려질 정도로 자유로운 글쓰기 방식을 취하고 있는 만큼 그 중에 수록된 의안 모두가 치료 원칙이나 방향, 방법 등의 격식을 갖추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개별 사례에 기재된 방제의 종류, 병증 경과 및 환자 예후 등에 의해 이수기가 어떻게 병증을 이해하고 있었는지 또 어떻게 치료하려 했는지가 재표명 되고 있다.
임상 의가 이수기의 진면목은 그가 활용한 방제와 약물을 통해 발현된다. 『역시만필』 중에는 100여 개가 넘는 방제가 자유자재로 사용되고 있다.18) 그의 방제 활용 패턴은 특정 병증에 두루 활용할 수 있는 통치방(通治方)을 활용해 환자의 병증에 우선 대응한 뒤 이후 반응을 살펴가며 다음 방제를 선택하는 ‘선 통치방, 후 개별 처방’이었다. 머리가 아픈 환자에게 두통을 치료하는 통치방인 가감견통탕을 투여한 뒤 이후 경과를 기반으로 신출산, 강활승습탕을 차례로 처방했으며, 오한과 한열이 번갈아 나며 배뇨 장애를 호소하는 환자에게는 시령탕을 우선 처방한 뒤 배뇨 양상에 따라 인삼맥문동탕, 가미생맥산, 삼기계부탕으로 처방을 바꿔갔다.19) 그렇지만 방제의 핵심은 적절한 방제를 고르는 것이 아닌 방제를 구성하고 있는 개별 약물을 어떻게 운용할 것인지에 있었다.20)
홍진(紅疹)은 기해년[1719] 겨울부터 경자년[1720] 여름, 겨울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대표 증후가 일치하지 않았다. 그중 가장 안좋은 것은 반진이 아니라 목구멍이 부어 폐색되는 경우였다. 위중하면 며칠 지나지 않아 죽기도 했다. 혹은 뺨에 옹종[頰癰]이 생기거나 턱에 종기[頷腫]가 생겼다가 농이 터지기도 했다. 위독한 증상에 통상의 방법에 따라 형방패독산, 양격산, 구인즙, 월경수, 야인건 등을 사용하면 무익할 뿐 아니라 해를 입혀 위급함을 구해내기 어렵게 했다. 나는 「대두온문」 금련소독음에서 인경하는 약물인 우방자를 볶은 뒤 갈아 두 돈을 넣어 군약(君藥)으로 삼고, 술에 적신 현삼을 더하고 원래 방제 중의 길경 용량을 두 배로 올려 각각 한 돈 반으로 구성했다. 나머지는 본래 방제의 구성을 따랐다. 하루 두 번 또는 세 번 복용시켜 대여섯 첩을 쓰자 병세가 안정되지 않은 적이 없었고 이것으로 완전히 나은 경우가 매우 많았다.21)
이수기는 1719년에서 1720년 사이에 유행하던 홍진을 치료하기 위해 『동의보감』에 수록된 금련소독음을 활용했다. 금련소독음 구성 약물 대부분의 용량은 7푼이었으나 우방자 만은 정확한 용량을 가늠할 수 없는 한 움큼[一撮]으로 기재되어 있었다.22) 이수기는 우방자의 용량을 두 돈으로 명기하며 군약으로 삼았다. 현삼과 길경 역시 다른 약물의 두 배 용량으로 끌어올렸다. 『동의보감』에 기재된 방제를 선택하면서도 개별 약물의 용량을 조정하며 약물의 군신좌사 관계를 재설정한 것이었다. 같은 전염병이 유행하고 있더라도 발현 증상이 달라지면 그에 따라 구성 약물과 용량에 변화가 도모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이외에도 박주부(朴主簿)의 두통을 치료하기 위해 『동의보감』에 수록된 가미사물탕을 선택한 뒤 적작약, 시호, 목단피 등과 같은 새로운 약물을 추가했다. 그리고 발열사물탕(發熱四物湯)에 풍증을 치료하는 약물을 추가했다는 설명을 덧붙였다.23) 의도된 변형이었다. 기존 의서에 따라 방제를 선택하면서도 구성 약물 간 군신좌사 관계, 약물의 종류, 용량 등은 모두 환자의 병증 상황에 따라 임의로 변경했던 것이었다.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병이란 한 가지 방법을 가지고 획일적으로 치료할 수 없는 것이라며 상황에 맞는 방제 운용을 강조했다.24)
이수기가 가장 의존했던 약물은 인삼이었다. 그는 인삼에 대해 기사회생시키는 신묘한 약재, 죽어가는 사람도 되살리는 약재라며 높은 평가를 보냈다.25) 그러면서도 부유한 사람들이 인삼으로 자신의 수명을 단축시키는 것도 많이 보았다며 신중하게 활용할 것을 강조했다.26) 인삼 외에도 부인의 경의(經衣)를 물에 담가 그 즙을 취한 월수(月水) 뿐 아니라 사람의 분변인 야인건, 어린아이와 검은 개, 고양이, 돼지의 분변인 무가산과 같은 오물(汚物), 값이 나가지 않는 환자 자신의 소변, 땅강아지, 뽕나무 가지, 심지어 독약이라고 홀시되던 자리공 등까지도 병증에 맞게 적극적으로 응용했다.27)
파쿼의 분석에 따르면 중의학에서 활용되는 치료의 층위는 개별 약물로 개별 징후에 대응하는 1단계, 고정된 방제로 증상들에 대응하는 2단계, 진단 결과를 논리적이고 상황에 충실한 이론에 입각해 방제 원리, 약물 지위와 연결시킨 3단계로 구분된다(Judith Farquhar, 1994: 211-4). 이수기의 치료는 특정 병증에 효과적인 단일 약물을 활용하거나, 통치방을 활용하거나, 증상을 분석한 뒤 그에 적합하도록 기존 방제를 가감해 활용하는 등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환자가 앓고 있는 병증의 정도에 따라 약물이 지닌 효능에 따라 그리고 환자의 경제적 필요에 따라 자유롭게 층위를 오가는 노숙한 임상 의사의 모습을 드러낸다.
3. 의관 이수기가 수행한 임상 의학의 근거
1) 진단의 근거와 임기응변
갓 장가든 18살 남성의 상한(傷寒) 병증을 두고 의관 이수기와 평소 의서를 즐겨보던 대갓집 아들이 논쟁을 벌였다. 둘 간의 논쟁은 ‘프로페셔널’과 ‘아마추어’ 의사의 차이가 무엇인지 잘 보여준다. 대갓집 아들은 장가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상한을 얻었으니 방로로 인해 발생한 열증 상한[犯熱傷寒]이라고 진단했다. 그러나 이수기는 상한의 경우 겉으로 드러난 증상이 아닌 맥에 의거해 판단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대갓집 아들의 의견을 일축했다. 의서 『동의보감』에 근거한 판단이었다.28) 어설픈 의학 지식을 지니고 있는 대갓집 아들과 전문 의가 이수기의 차이는 환자의 병증을 상한과 잡병으로 구분한 뒤 맥진으로 토대로 병증을 분석할 수 있는 ‘임상 의사의 시선’29)을 지니고 있는지 그리고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분명한 의학적 근거를 지니고 있는지 여부에 있었다.
이수기의 맥진은 장위안쑤(張元素) 등의 견해를 수록한 『찬도방론맥결집성(纂圖方論脈訣集成)』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는 4차례 정도 『맥결』을 언급하며 그 내용을 바탕으로 진맥 결과와 병증의 병리 기전을 연관시켰다.30) 『찬도방론맥결집성』은 조선 성종(成宗) 이래 줄곧 의학 및 침구의 취재를 위해 사용되던 진단 교재였을 뿐 아니라 『동의보감』 등장 이후에도 그 지위를 잃지 않고 있었던 만큼 이수기가 맥진을 위해 이 책을 활용한 것은 매우 자연스럽다(김두종, 1981: 421, 장용우・백상룡・정창현, 2003: 49).
내가 진찰해보니 좌측 맥은 홍삭(洪數)했지만 우측 맥은 허미(虛微)하고 힘이 없었다. 진찰을 마친 뒤 말했다. “[입이 삐뚤어지고 눈이 감기지 않는 구안와사] 병증에 대해 옛 의서에서는 대부분 위토(胃土)에 속하는데 목(木)이 쇠약해지면 금(金)의 기운이 그 위에 올라타게 되고 토(土)는 두려움을 덜 느끼게 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만약 이런 경우라면 우측 맥의 기세가 왕성해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도리어 좌측의 기세가 왕성하고 우측은 미약하니 분명 비토(脾土)의 기운이 부족해지는 바람에 간목(肝木)이 이기는 것을 넘어 업신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풍(風)을 다스리는 약물로 비토의 기운을 손상시켜서는 안되며 비장을 보충하는 약물을 사용해야 합니다. 비장 기운을 북돋워 간장 기운을 진정시킬 수 있게 되면 풍은 절로 사라질 것입니다.31)
인용문에서 이수기는 구안와사를 앓고 있는 노인 환자의 맥을 살피고 있다. 좌측 맥, 우측 맥의 구분은 『찬도방론맥결집성』, 『동의보감』 등에 공통적으로 기재되어 있는 촌관척(寸關尺) 세 부위와 장부(臟腑)와의 상관 관계에 따른 것이다. 좌측 맥은 간장 그리고 우측 맥은 폐장과 관련된다[그림 1]. 『동의보감』에 따르면 구안와사는 힘줄에 해당하는 목의 기운이 약해져 발생한다. 약해진 목의 기운 위에 금의 기운이 올라타면 힘줄이 단축되어 주변부를 잡아당기게 되면서 눈과 입이 돌아간다. 또 목의 기운이 약해지면 토가 목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어 그에 해당하는 얼굴살이 늘어지게 된다.32) 이수기는 간장에 해당하는 목의 기운이 약해지면 구안와사가 발생한다는 『동의보감』 문장에 근거해 간장 기운이 반영되는 좌측맥이 약하게 나타날 것이라 예상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실제 환자에게서는 좌측 맥이 우측 맥보다 강하게 박동하는 것으로 촉진됐다. 의서와 실제 진찰 결과가 서로 괴리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확정되어 있던 지식과 눈앞의 현실이 차이를 보일 때 무엇을 선택해야 할까? 이수기는 『동의보감』이 아닌 자신의 진맥 결과를 판단 기준으로 삼았다. 그리고 그에 따라 토에 해당하는 비장 기운을 북돋워 목에 해당하는 간장 기운을 억제하는 새로운 치료 방법을 제시했다. 잡병을 치료할 때는 증상이 우선이고 맥은 그 다음이라는 『동의보감』 문장에 도전하는 과감한 판단이었다.33)
이수기가 맥진을 수행하고 병증을 분석하기 위해 『찬도방론맥결집성』, 『동의보감』과 같은 의서를 읽었던 것만큼은 분명하다. 다만 의서를 읽고 의학 지식을 축적했다고 해서 모두 임상 의사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에릭 카셀(Eric J. Cassell)이 이야기했던 것처럼 특정 질병을 앓는 여러 환자를 돌보아 왔던 경험을 통해 추상적 지식과 구체적 환자가 연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에릭 카셀, 2002: 294-8). 이수기 역시 “『서경(書經)』을 곧이곧대로 믿으면 『서경』이 없느니만 못하다”,34) “의서 중에 실려 있는 설명에 구애받지 말고 경맥 증상에 따라 치료해야 한다”35)고 이야기하며 ‘문서 정보’의 한계를 넘어 임상 의료 현장에서 확보한 ‘실제 지식’을 근거로 판단할 것을 여러 차례 강조했다.
2) 방제와 약물 활용의 근거와 임기응변
이수기가 활동하던 시기, 중국에서는 장제빈(張介賓), 쑨이쿠이(孫一奎) 등 명문학파(命門學派) 의가들이 제시한 온보(溫補) 의학이 유행하고 있었다(傅芳・鄭金生・廖育郡, 2003: 683-705). 1722년 쑨이쿠이의 의서 『적수현주(赤水玄珠)』가 조선에 이미 유입되어 있었지만36) 『역시만필』 중에는 명문(命門)을 일신의 주인[一身之主]으로 간주한다거나 화의 근원을 더해주고[益火之源] 수의 주인이 튼실해지도록[壯水之主] 하기 위해 온보 효능을 지닌 방제를 복용해야 한다는 등의 명문학파 의가들의 주장이 수록되어 있지 않다. “병은 획일적으로 치료할 수 없다. 허를 보하고 실을 사하는 것은 의가의 대법이다”,37) “방금 전에 약을 달였다 할지라도 증상이 변하면 마땅히 그 증상에 따라 약을 고쳐써야 한다”38)와 같은 원론적인 치료 원칙만 반복되고 있을 뿐이다. 다만 외감 상한으로 발열이 동반되고 있는 경우 허증이라는 진단을 자주 내리고 인삼 등과 같은 따뜻한 성질의 약물을 빈번하게 투여하고 있어 치료의 전반적인 방향이 온보 쪽으로 경도되어 있음을 짐작해볼 수 있다(Chaekun OH, 2014: 6-9).
『역시만필』 중에는 『동의보감』, 『맥결』, 『의학입문』, 『만병회춘』 등이 인용 의서로 활용되고 있다. 그중 의존도가 가장 높은 의서는 『동의보감』이었다. 직간접 인용 빈도가 32회(63%)에 달하며 다른 의서들의 인용 빈도를 압도한다[표 1]. 실제 이수기는 『역시만필』 본문 중에서 「상한」문의 맥문동탕, 「적취」문의 궤견탕, 「신」문의 감수산과 주사안신환 등과 같이 『동의보감』 세부 항목과 그 중의 방제를 출처로 밝히며 병증과 방약 간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다.39)
그 후 소갈증을 얻어 의원의 치료를 여러 번 받았으나 효과를 보지 못했다. 내가 진찰해보니 촌부의 맥이 빠른 정도가 심했다. 내가 말했다. “노심초사로 인해 심장의 화가 위로 치솟고 신장의 물이 이를 잡아주지 못하기 때문에 목구멍이 타들어가 번갈증이 생기고 기혈이 소모되어 살이 빠지는 것입니다. 진액과 혈을 보충하는 약을 써야 합니다.” 강심탕 10첩을 쓰자 금방 나았다. 『역시만필』40)
강심탕. 심장의 화가 위로 치솟고 신장의 물이 이를 잡아주지 못해 번갈로 물을 마시고 기혈이 날로 소모되는 증상을 치료한다. 『동의보감』 「세 가지 소갈」41)
위의 『역시만필』 인용문 중에는 강심탕의 출처가 기재되어 있지 않다. 그렇지만 병증 설명 와중에 드러나는 병증-방약의 연결 관계가 『동의보감』 「세 가지 소갈」 중에 수록된 강심탕의 그것과 동일하다. 『동의보감』과 같은 고방(古方) 중에 실려 있는 문서 정보를 임상 의료 현장에서 실제 지식으로 전용하며 증험(證驗)하고 있는 것이다(이기복, 2012: 437-9). 『동의보감』 강심탕의 문장, 심장의 화가 치솟는 원인을 ‘노심초사’, 번갈로 물을 마신다는 구체적인 정황을 ‘목구멍이 타들어간다’, 기혈이 소모되는 결과를 ‘살이 빠진다’로 설명하고 있는 부분은 마치 허준이 이수기의 입을 빌어 환자에게 설명하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착각마저 들게 한다. 『역시만필』의 경우 환자를 치료하고 난 이후 저자의 기억에 의해 기술된 추억식 의안에 해당하므로 위의 인용문 역시 치료 이후 『동의보감』의 문장에 따라 그 내용을 각색했다고 볼 수도 있다.42) 그렇다 하더라도 『역시만필』 전반에 흐르고 있는 『동의보감』과의 친연성만큼은 부정할 수 없다.
이수기는 병증을 분석하고 방제를 선택하는 병증-방약 관계에서 『동의보감』을 다수 인용하며 그 중에 수록된 방제의 효과를 신뢰했다[표 2]. 특히 추풍거담환, 청심온담탕, 통심음, 사령산, 보중행습탕에 대해서는 “이 증상은 이와 같은 방법으로 치유됐다”43), “나는 이 몇 개 약물을 병증에 따라 응용하였는데, 효과를 본 경우가 심히 많았다”고44) 밝히며 치료 효과의 재현을 자신했다. 한편 고방을 변형시킨 새로운 방제를 제안하기도 했다. 순차적으로 제시되어 있는 최판관(崔判官)의 부인, 이생원[李生]의 부인, 그리고 어느 노인의 손녀가 앓고 있던 위벽(痿躄) 치험 사례는 이수기가 어떻게 기존 방제를 변형시켜갔는지 보여준다. 최판관의 부인에게 처음 투여됐던 『동의보감』 수록 방제, 청열사습탕은 이생원의 부인과 어느 노인의 손녀를 거쳐가며 청열사습탕합 사물탕, 자혈사습탕으로 변형되어갔다. 급기야 자혈사습탕에 대해서는 경험한 것 중에 가장 뛰어나다는 평가와 함께 위벽 치료 전문 방제로 인정하기에 이르렀다.45) 기존 의학 정보에 이수기 개인의 치료 경험이 결합되어 만들어진 새로운 성과물이었다.
의서 속에서 약물 운용과 관련된 모든 정보를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방제 운용의 핵심으로 언급되는 약물 용량은 더욱 그러하다(仝小林, 2010: 3-10). 이수기는 이장수(李長水) 부인의 두통을 치료하기 위해 보중익기탕에 인삼을 더해 처방했다. 처음에는 인삼을 한 돈 정도 투여했지만, 곧이어 두 돈, 세 돈, 급기야 다섯 돈까지 증량했다. 그리고 이에 대해 기운을 보충하는 것은 빈 구덩이를 메우는 것과 같다며 채워질 때까지 인삼을 증량해야 한다고 자신했다. 다만 어느 정도의 용량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았다.46) 보중익기탕 활용의 근거가 된 『동의보감』 역시 상한 병증에 내상이 끼어 있는 경우 약물을 가감해서 사용한다고 언급하고 있을 뿐47) 용량에 대한 구체적인 지침은 제공하고 있지 않다. 수레바퀴와 굴대의 결합 정도는 손짐작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다는 기술자 룬폔(輪扁)의 말처럼 방제를 구성하고 있는 개별 약물의 용량 역시 의서가 아닌 임상 의가 자신의 경험과 판단에 의거해 임의 조정됐다.48)
요컨대 이수기의 가장 주된 방제 활용 근거는 조선 의서 『동의보감』이었다. 그는 『동의보감』 문장에 입각해 병증을 분석하고 그중에 수록된 방제를 활용하며 고방으로서의 권위를 존중했다. 그렇지만 의서 중에 수록된 고방을 그대로를 사용하지는 않았으며 증상에 맞춰 기존 방제를 변형해 투여하거나 새로운 방제를 만들어내거나 구성 약물의 용량을 조정하는 등 임상 의가로서 유연한 방제 및 약물의 활용을 보여주었다.
4. 『동의보감』, 맥증방약 그리고 변증론치
광해군 5년(1613) 『동의보감』이 간행됐다. 조선 최고 의관으로 손꼽히던 허준(許浚, 1539-1615)이 편찬한 저작이자 정부에서 간행한 관찬 의서였다. 『동의보감』은 등장 이후 의관들의 탐독 대상이 됐을 뿐 아니라 조선의 지식인이라면 꼭 지니고 있어야 할 저작으로 평가받았다(신동원, 2015: 322-7).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수기의 의학 지식은 『동의보감』, 『의학입문』, 『만병회춘』 등과 같은 조선 및 중국 명대 의서에서 유래했을 뿐 아니라 『동의보감』에 높은 의존도를 보이고 있었다. 이수기는 『역시만필』 중에서 황별제(黃別提)로부터 의학을 배웠음을 밝힌 바 있다.49) 황별제의 정체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별제라는 관직명으로 미뤄볼 때 활인서(活人署)에서 근무하던 의관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황별제를 통해 당대의 관찬 의서 『동의보감』의 내용이 이수기에게 전달됐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
신동원은 『동의보감』의 성취를 신형장부의학의 창안으로 정리하며 그 내용을 「내경」, 「외형」, 「잡병」 등의 대항목 분류에 따라 체계적으로 정리된 105문 2,781개의 세목과 각각의 병증 항목마다 수록된 총 4,700여 개의 통치방과 증상별 가감 방제로 꼽았다(신동원, 2015: 249-72). 허준이 이룩한 병증 정리의 일목요연함과 개별 병증과 방제 사이의 유기적인 연결은 『동의보감』을 대증 치료의 전범(典範)으로 이해하도록 유도한다. 실제 일부에서는 『동의보감』에 기반해 이뤄지는 임상 의료의 추론 방식(clinical reasoning)을 ‘조건에 따라 가장 적합한 탕약을 골라내는 것’으로 정리해두기도 했다(Tae-Hun Kim, et al., 2021: 7).
그러나 허준은 『동의보감』 「잡병편」 앞머리에 병증의 진단과 치료에 대한 대원칙을 제시해두었다. 「천지운기(天地運氣)」, 「심병(審病)」, 「변증(辨證)」, 「진맥(診脈)」, 「용약(用藥)」, 「토(吐)」, 「한(汗)」, 「하(下)」 등을 편성하며 질병이 발생하는 이유와 진단 및 치료 방법에 대해 분명히 기술해두었던 것이다. 정확한 진단을 위해서는 「변증」과 「진맥」을 통한 병증 분석이 필수적이다. 「변증」 중에는 음양(陰陽), 허실(虛實), 정신(精神), 표본(標本) 등의 증상 분석 기준이 제시되어 있으며 이들은 두창이나 당독역과 같은 전염병의 병리 기전 분석을 위해 실제 활용되기도 했다(오재근, 2021: 46-54). 「진맥」에서는 촌관척 맥진을 비롯해 맥에 대한 전반적인 내용이 소개된다. 병증 별로 확인되는 특징적인 맥상과 병증 간 연계는 「풍(風)」, 「한(寒)」, 「내상(內傷)」, 「허로(虛勞)」 등 개별 병증 항목 중에 포함된 ‘맥법(脈法)’을 통해 제시된다. 효과적인 치료를 위해서는 치료 원칙과 방향, 치료 대상에 따른 약물 활용 방법 등이 선결돼야 한다. 허준은 해당 내용을 「용약」 중에서 소개한 뒤 이어지는 「토」, 「한」, 「하」 에서는 개별 치료 방법의 운용과 적용 병증에 대해 제시하고 있다. 다만 안타깝게도 『동의보감』에는 저자 허준의 직접적인 의료 경험이 구체적으로 기술되어 있지 않으며 그 중에 수록되어 있는 의안 중에도 개별 병증의 병리 기전이나 치료 기전 등이 충분히 설명되어 있지 않다(오재근, 2015: 585). 따라서 『동의보감』에 대한 학습만으로는 그중에 실려 있는 의학 지식이 임상 의료 현장에서 어떻게 적용될지 가늠하기 쉽지 않다.
내가 요즘 의술을 업으로 삼는 의원들을 살펴보니 분명하고 적확한 견해나 정밀하고 깊은 기술이 없으며 표피적이고 두루뭉술하며 거칠고 얕은 수준을 면치 못하고 있다. 경험 방서를 잠깐 암기하고 약물 이름이나 대충 외운 뒤 곧장 의술은 이 정도면 족하다고 말할 정도이다. 급기야 실제 임상에 들어서서 치료가 쉬운 것은 요행히도 간혹 적중하지만 조금이라도 치료하기 어려운 것은 멀뚱히 바라본 채 아무 방안도 내지 못한다. 허실을 분변하는 것이나 합방과 변방을 내는 일에 이르러서는 까마득히 아무것도 할 줄 모르면서 왕왕 함부로 사람을 해하는 경우도 있다. 아! 세상에 의술이 없어진 지 오래됐도다!50)
위의 인용문, 『역시만필』 서문을 작성한 도승지 이성룡(李聖龍, 1672-1748)은 당대의 의가들이 허실을 분변하는 진단 그리고 치료 방제를 구성하는 치료의 영역에서 문제를 보이고 있음을 꼬집고 있다. 상투적인 문제 제기일 수도 있으나 의학을 진단과 치료로 구분해서 바라보고 있는 점 만큼은 눈길을 잡아끈다. 보다 후대에 활동한 의관 홍현보(洪顯普, 1815-1896)는 이수기의 의학을 “맥증(脈證)을 서술하고 방약(方藥)을 논했다. 새롭고 기이한 것에는 힘쓰지 않고 오로지 평이하고 간편한 것만을 좇았으니 하나같이 만전을 기하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었다”라고 평가했다.51) 맥증의 맥은 맥을 살핀다는 의미의 심맥(審脈), 증은 증후를 변별한다는 의미의 변증(辨證)으로 설명되며 ‘진단’을 대표한다.52) 그리고 방약은 동아시아 의학 전통의 주요 치료 수단인 방제(方劑)와 약물을 뜻하는 단어로 ‘치료’를 대표한다.
허준 보다 먼저 활동한 명대 의가 위퇀(虞摶)의 경우 병증을 설명하는 론(論), 맥진을 다루는 맥법(脈法), 치료 방제를 소개하는 방법(方法)의 항목에 따라 개별 병증을 설명했고 궁팅셴(龔廷賢) 역시 개별 항목의 서술 순서로 맥결(脈訣), 병론(病論), 치법(治法), 방약(方藥)을 제시했다.53) 허준 이후에 활동한 명대 의가 우쿤(吳昆) 역시 의안을 구성하는 7개 항목을 소개하며 나이, 체형, 목소리, 피부색과 병증에 대한 진찰 내용과 합치될 수 있도록 맥상을 기재할 것, 의서 중에 기재된 내용에 근거해 진단을 마무리한 뒤 치료 대상, 순서, 수위 등의 방법을 확정하고 처방을 구성할 것 등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54) 의술의 내용을 맥진과 병증 분석을 포함한 진단 그리고 치료 방법 및 방제를 포함한 치료로 구분하는 것은 당대에 통용되던 서술 방식이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흐름에 입각해 이수기의 의학을 살펴보면, 이수기는 『찬도방론맥결집성』, 『동의보감』 등의 의서에 기재된 병증 관련 정보 및 분류 기준에 입각해 병증을 분석한 뒤 자신이 직접 수행한 맥진 결과를 반영해 발병 원인과 병리 기전을 확정하고 최종 진단을 내렸다. 이어 확정된 진단 결과에 따라 적절한 치료 원칙을 수립하고 『동의보감』을 비롯한 기존 의서에서 제시한 고방을 참고하면서 환자의 병증에 적용할 수 있는 방제를 구성한 뒤 자유롭게 약물을 가감해가며 방제를 운용했다. 맥증방약(脈證方藥)이야말로 『동의보감』 등장 이후 이수기를 비롯한 조선 의관들이 수행했던 임상 의료의 전형적인 구조이자 추론 방식이었던 것이다.
맥증방약의 기본틀은 후대 임상 의서 편찬에 그대로 적용됐다. 이수기 이후에 활동한 조선 의가 강명길(康命吉), 황도연(黃度淵) 등은 자신이 편찬한 의서의 내용 구성을 맥증방약의 형태로 구현했다. 먼저 정조(正祖) 시대를 대표하는 의관 강명길은 자신이 책임 저술한 관찬 의서 『제중신편(濟衆新編)』의 전체 구성을 맥(脈), 증(證), 치(治)의 형태로 일관하며 증상과 맥을 각각 구분 기재한 뒤 그에 따라 방제를 선택할 수 있도록 편성했다고 밝혔다. 철종(哲宗) 및 고종(高宗) 년간을 대표하는 의관 황도연 역시 자신의 의서 『의종손익(醫宗損益)』 중에서 위의 구성을 다시 한번 반복했다.55) 나아가 황도연의 또 다른 의서이자 의료계의 베스트셀러였던 『방약합편(方藥合編)』은 출간 이후, 증맥과 방약을 합쳐펴낸다는 의미를 지닌 『증맥방약합편(證脈方藥合編)』으로 제목을 바꾼 채 수차례 간행되며 한반도 의사들에게 맥증에 기반한 진단 그리고 방약을 활용한 치료 방법을 소개했다.56) 맥증방약의 전성 시대였다.
맥증과 방약에 관해서는 다양한 논의가 존재한다. 맥진과 관련하여 이수기는 맥진의 지위를 부정하지 않았으며 상한의 경우 맥진을 강조하고 잡병의 경우 증상 판별을 강조하는 『동의보감』의 논의를 따랐다.57) 그러나 이후에 등장한 정약용(丁若鏞)은 『동의보감』 또는 『찬도방론맥결집성』에 기재된 맥진의 주요 이론, 촌관척과 개별 장부 간 연계를 부정했으며, 이제마(李濟馬) 역시 제한된 맥상의 정보만을 인정했다.58) 심지어 이규준(李圭晙)은 촌구 부위에서 깊이에 따라 오장을 배속하는 새로운 맥진 이론을 제창하기도 했다.59) 방제 운용 역시 일관된 방향으로 전개되지 않았다. 선행 연구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수기는 따뜻한 성질을 지닌 약물로 온보(溫補)의 효과를 내는 방제를 자주 운용했다(Chaekun OH, 2014: 9). 이수기 이후에 활동한 조선 의관 주명신(周命新), 강명길, 황도연 역시 장제빈의 온보 방제 운용의 성과를 적극 수용했으나(하기태・김준기・최달영, 1999: 15-6) 이러한 방제 운용은 주전헝(朱震亨)과 그 제자 그룹의 영향을 받아 차가운 성질의 약물로 자음강화(滋陰降火)하는 치료 방제를 수록한 『동의보감』과 분명한 차이를 보였다(신동원, 2015: 216, 265). 이와 같은 차이는 이수기가 활동할 무렵 중국에서 유행하던 온보학파 의학이 조선에 유입된 결과로 분석되기도 하지만(김정선・황상익, 2007: 151-9) 근본적으로는 의료 현장을 중시하는 임상 의가들의 유연성에 기인한다. 이수기만 하더라도 『동의보감』 등 기존 의서의 권위를 인정하되 환자의 병증 상황에 따라 기존 방제를 변형해 투여하거나 새로운 방제를 만들어내거나 구성 약물의 용량을 임의로 조정하는 등 기존 의학 지식을 권변(權變)하며 임기응변해 갔다.
그렇지만 맥증방약의 시대는 지속되지 못했다. 서양 의학 도입 이후 한의학 연구 방법에 대한 회의와 논란이 증폭됐으며 그 중 맥진은 주요 비판 대상으로 손꼽혔다.60) 한반도의 전통 의학 전공자들은 일제 강점기, 한국 전쟁의 혼란기를 겪어내며 한의학을 둘러싼 논란에 대응했지만 새로운 설명 방식을 제시해내지는 못했다. 한편 중국의 전통 의학 전공자들은 당대 서양 의학의 질병 개념과 세균 이론까지도 적극적으로 포섭하며 ‘변증론치’라는 기존과 다른 이론 체계를 준비했다(레이샹린, 2021: 169-92). 그리고 신중국을 건립한 중국 정부는 자신들의 전통 의학을 ‘중의학(Traditional Chinese Medicine)’이라 지칭하며 팔강 변증, 경락 변증, 육음 변증, 장부 변증 등과 같은 보다 구체적인 변증론치 체계를 구성해냈다. 변증론치는 중의학과 서양 의학 간의 차이를 강조하고, 필요한 경우 서양 의학과의 통합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기 위해 고안된 새로운 방법론이었다(Volker Scheid, 2002: 209-37).
망문문절, 네 가지 진단 방법을 통해 증상을 진찰하고 병리 기전을 파악한 뒤 그에 기반을 둔 병증 분석에 입각해 치료에 임한다는 점에서 이수기의 맥증방약과 변증론치 사이에 근원적인 차이는 존재하지 않았다. 심지어 이수기는 질병 중에는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원인이 같더라도 겉에 드러나는 증상이 다른 경우가 있고 속이 다르더라도 겉은 같은 경우가 있다고 설명하며 맥증방약 체계 속에서 변증론치의 중요 특징인 동병이치(同病異治), 이병동치(異病同治)의 논의까지도 포괄했다(焦树德, 2006: 115-6).61) 단 세균 이론을 수용하고 질병(disease)과 증상(symptom)의 범주를 포함한 병증(病證, syndrome)을 분석 대상을 삼는 등 기존 동아시아 의학 전통의 의학적 논의 구조를 조정하면서도 임상과 치료법의 실용적 가치에 초점을 두며 서양 의학과의 공존을 꾀한 변증론치 체계가 등장한 이상(레이샹린, 2021: 170-92) 맥증방약의 위상은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일제 강점기부터 임상 효과가 부각되어 있던 한약과 달리, 맥진은 맥진과 신체 장부 간 연관 관계, 맥상의 효용성 등에 대한 비판에 효과적인 답변을 제시하지 못한 채 진찰 결과를 검증하는 수단 정도로 간주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박윤재, 2008: 78-81, 조헌영, 1980: 335). 결국 『동의보감』 편찬 이후 이수기를 비롯해 한반도에서 활동하던 의가들의 임상 의료 도구이자 임상 추론 도구였던 맥증방약은 새롭게 등장한 변증론치에 자신의 지위를 일정 정도 양보할 수 밖에 없었다.62)
5. 맺음말
예나 지금이나 의사들은 불완전한 정보를 가지고 있더라도 완벽한 판단을 내리기 요구받고 있다(싯다르타 무케르지, 2015: 18). 과거의 의사들이 충분한 의학 지식을 갖추지 못했다거나 의학 지식을 효과적으로 운용하지 못했다고 평가할 수 있으나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별다른 근거 없이 임상 의료를 실천했다거나 보다 나은 치료 효과를 도출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았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중국 한대(漢代)의 의사였던 춘위이(淳于意, B.C. 215?-?) 역시 치료를 제대로 해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환자들에게 고발당했다. 막내딸 티잉(緹縈)의 탄원으로 사면될 수 있었지만 한문제(漢文帝)가 내린 자신이 지닌 의술의 특징과 진료 실적을 묻는 조서를 마주해야만 했다. 황제는 춘위이에게 “진찰을 하고 치료한 병증 중 많은 경우 병명이 같지만 진단은 다르다. 어떤 경우에는 죽고 어떤 경우에는 사는 것은 왜 그런 것인가?”, “제나라 문왕(文王)이 병을 얻은 뒤 일어나지 못한 까닭을 알고 있는가?” 등의 질문을 던졌다.63) 목숨이 경각에 달린 춘위이는 자신의 의학을 검증하는 황제의 질문에 답변하지 않을 수 없었다.64) 『역시만필』의 저자 이수기 역시 여러 차례 실패했다. 자신이 치료하던 환자가 여러 달이 지나도 여전히 가슴 답답해하고 열이 나는 증상을 보일 때는 자신의 진단과 치료 방법에 의문을 가지며 고심했다.65) 할 수 있는 것을 다 했음에도 아무 반응이 없을 때 의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수기는 모든 병에는 반드시 그 병이 생겨난 그 연유가 있다고 확신하며 다시 한번 그 원인을 찾아보고자 노력했다.66) 그가 시도한 방법은 간단했다. 다름 아닌 환자가 앓고 있는 증상을 자세히 묻고 조사한 뒤 적절하게 처치하는 것이었다.67)
이수기의 의학은 서한(西漢) 시대의 명장 청부스(程不識)의 신중함과 리광(李廣)의 기묘함을 모두 갖춘 것으로 평가된다(이수귀, 2015: 24). 그의 병리 기전 파악이나 방제 운용이 원칙과 주도면밀함을 중시하던 불패장군(不敗將軍) 청부스처럼 의학적 근거에 입각해 분명하고 정확하게 이뤄졌기 때문이었고, 매 순간 현장의 필요에 따라 내려지는 그의 의학적 판단이 변칙과 의외성에 출중해 비장군(飛將軍)으로 불리던 리광처럼 신기하게 적중되며 기묘한 효험을 얻었기 때문이었다.68) 『역시만필』에 담긴 의안의 내용과 그의 의학에 대한 평가에 근거해 볼 때 이수기의 임상 의학은 맥증방약으로 정리된다. 이수기 이전에도 맥진 등을 근거로 정기(精氣)가 허약해서 발생한 병증인지 사기(邪氣)가 충실해져서 발생한 병증인지를 갈랐으며 병증에 따라 치료 원칙을 수립한 뒤 그에 적합한 방제를 구성하기 위해 약물을 더하고 빼는 일을 반복했다. 17-8세기에 활동한 이수기와 이전 의가들간의 차이는 맥증방약의 내용을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에 있었다. 이수기의 맥증방약 근저에는 동아시아 의학의 전통을 정리한 조선 의관 허준의 『동의보감』의 성과가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추세는 서양 의학 전입과 신중국 건립 이후 변증론치가 대두될 때까지 계속됐다. 오래된 임상 의학이었다.
Notes
Case 50. “噫! 難曉者, 病理也. 若求諸流而不得, 當遡其源而庶得其病情, 其可忽歟!”
기존 연구에서는 저자 이수기의 단락 구분에 따라 의안 개수를 130개로 파악했으나 한 단락 내에 2개 또는 3개의 사례가 연이어 등장하기도 한다. 각각을 구분 계상하면 154개다. 중복 등장하는 사례 2개와 치료 내용이 아닌 사례 1개를 제외하면 『역시만필』은 총 151개 의안으로 구성되어 있다.
동아시아 의학사 연구의 내사(內史), 외사(外史) 구분에 대해서는 정진성(郑金生), 두정성(杜正勝)의 연구 참조(鄭金生, 2000: 191; 杜正勝, 2005: 54-5).
조선 시대 의서에 기재된 의료 행위 연구에 20세기에 도입된 인류학 연구 방법을 적용하는 것에 대해서는 비판이 있을 수 있다. 다만 파쿼의 현지 조사가 1980년대 중국에서 서양의학과 대자적인 형태로 존재하던 중의학 임상 의료 행위를 대상으로 이뤄진 점, 조사 대상에 전통 시대 의료 행위를 고수하고 있던 노중의(老中醫)와 그들의 의학을 계승하고 있는 의가들이 포괄되어 있던 점, 서양 의학이 본격 도입되기 이전 중국 청과 조선 시대 의가들의 의학이 근본적인 차이를 지니지 않고 있던 점, 변증론치 외에 현재까지 동아시아에서 지속되어온 임상 의료 행위를 조명할 수 있는 적절한 연구의 틀이 없다는 점에서 이수기의 임상 의학 분석에 파쿼의 접근 방식을 적용하는 것은 충분한 학술적 가치를 지닐 것으로 판단된다. 이번 논문에서는 이수기의 임상 의학을 분석하기 위해 중의학 임상 의료 행위를 진단과 치료로 구분해 분석하고자 했던 파쿼의 분석 틀을 채택했을 뿐 현대 중의학이 일궈낸 변증론치 체계의 논리로 이수기의 임상 의학을 섣불리 재단하려 들지 않았다. 참고로 주디스 파쿼는 1980년도 초중반 진행한 현지 조사를 통해 중의사들의 진료 행위를 분석했다. 그의 분석은 진단에 해당하는 ‘변증(辨證)’과 치료에 해당하는 ‘논치(論治)’로 구분한 뒤 각각을 위계에 따라 차등 배열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구체적으로 ‘변증’의 경우 환자가 지닌 징후(徵, sign)를 사진(四診)에 입각한 의사의 진단에 따라 증상(症, symptom)으로 파악한 뒤 변증론치 축(syndrome-therapy pivot)의 단계에서 팔강, 육음, 장부, 위기영혈, 육경 등의 이론적 틀에 입각해 증후(證, syndrome)로 변별한다. 한편 변증론치 축 단계에서 전체적인 치료 원칙과 치료 방법이 결정된다. ‘논치’로 불려지는 치료 과정의 경우 앞서 결정한 치료 원칙과 방법, 방제학(formulary) 분류 기준에 의거해 방제(fromulae)를 결정한다. 이후 방제를 구성하고 있는 각각의 약물들이(drugs) 군신좌사의 위계와 각각의 효능에 따라 조정된다(Judith Farquhar, 1994: 61-200).
천안이씨 가문의 의과 합격자 배출 정황은 한국 역대 인물 종합정보시스템, 열린마당, 인물 통계자료 참조(http://people.aks.ac.kr/, 검색일 2022년 1월 19일).
『東醫寶鑑』 雜病篇 卷1, 審病. 이하 『東醫寶鑑』은 순조 14년 중간본을 영인한 김신근 편, 『한국과학기술사자료대계 의약학편』 (서울: 여강출판사, 1988) 수록본을 활용했다.
Case 4. “洪僉知子婦, 在舅家有相詰激憤之事, 廢洪僉知子婦, 在舅家, 有相詰激憤之事, 廢食數日. 而其後忽得膈間欝悶之症, 昏迷不省人事, 循衣撮空, 時時發咳逆聲, 往往以手叩胷, 問之不答, 莫知其所苦. 余診其脉, 兩寸俱數, 以胃虛膈熱治之, 用橘皮竹茹湯三貼, 兼灸膻中三七壯, 則咳逆循衣之症少歇.”
『東醫寶鑑』 雜病篇 卷5, 咳嗽, 咳逆治法. “咳逆陽證, 發熱口苦, 胸滿脉數, 宜小柴胡湯... 或橘皮竹茹湯.” 『東醫寶鑑』 雜病篇 卷5, 咳嗽, 咳逆易治難治證. “橘皮竹茹湯. 治胃虛, 膈熱而咳逆.”
Case 65의 경우에서처럼 이수기는 상한(傷寒)을 앓고 있는 환자에게 자주 허열(虛熱)이라는 진단을 내렸고 치료 방제로 인삼맥문동탕을 빈번히 처방했다. 열이 나는 환자에게 발열을 가중시킬 수 있는 인삼을 투여한 배경에도 육맥이 모두 미약하다는 맥진 결과가 자리하고 있었다.
『承政院日記』 589책 영조 1년 3월 20일(1725). 『承政院日記』는 국사편찬위원회 승정원일기 홈페이지 제공 원문을 활용했다(http://sjw.history.go.kr/, 검색일 2022년 1월 19일).
음양표리한열허실을 팔강으로 명명한 것은 중국 근현대 시기에 활동한 의가 주웨이쥐(祝味菊)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 이전 의가들 역시 팔강의 8개 기준에 의거해 병증을 분석해왔다. 예를 들어 청대 의가 청궈펑(程國彭)의 경우 『의학심오(醫學心悟)』 「한열허실표리음양변(寒熱虛實表裏陰陽辨)」 중에서 음양표리한열허실의 8개 기준에 의거해 병증 정황을 ‘변증’할 것을 권고했으며 허준 역시 『동의보감』 「치병팔요(治病八要)」 중에서 유사한 내용을 소개했다. 8개 기준에 의거해 병증을 분석했다는 점에서 이수기의 ‘변증’ 역시 현대 중의학의 ‘팔강변증’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다만 기존 의서에서는 ‘팔강’을 병증을 분석하기 위한 기준의 하나로 소개했던 반면 현대 중의학 중에서는 ‘팔강변증’을 변증론치 체계를 구성하고 있는 가장 기본적인 변증 방법이자 주된 강령(綱領)으로서 위치 지우고 있다(朱文锋, 1999: 508-11).
Case 19. “朴僉知後室有病, 服逍遙散, 滋陰至寶湯之屬而不愈. 來問余曰, 大便有泄候, 小便不利, 而有腸痛, 且前陰痛不輕, 小便不利, 如米泔云. 余曰, 肝經之脈, 環陰器抵小腹, 則此病之根蒂在肝經也. 遂用平肝流氣飮五貼, 則前陰痛稍止, 大便泄不止, 兼用燥濕湯五六貼矣. 復來問小便不利, 大便頻數, 氣亦憊虛云. 更題春澤湯加肉桂木香各五分, 連用四五貼, 以爲調治之地.”
Case 23. “凡病不難乎處方, 惟難乎識症. 雖久病, 若得當劑, 效捷應響.”
Case 34. “余更診六脈, 皆浮滑而數, 此外感挾痰之候也. 卽按摩腹部, 則左腹顯有片片浮硬, 而右腹虛軟. 余忽覺此症, 祟於過食油烙之物助濕痰, 而適當風寒, 遂爲凝結而作胸痛, 前用湯劑, 未盡和解, 而痰凝經絡, 血脈不通而生浮脹. 遂用柴胡調中湯五貼, 則顯有減歇, 繼用十餘貼後, 浮脹盡消, 調理至月餘, 而後快復. 盖浮脹之症, 雖屬濕熱, 或脾敗而成. 當臨機應變, 不可膠守例治也.”
현대 중의학에서 정리한 치료 원칙 및 치료 방법에 대해서는 천차오쭈의 연구 참조(陈潮祖, 2015: 87-118).
Case 37. “凡塊症脾敗氣弱, 塊能肆毒, 變生寒熱者, 吾未見其能瘳者也. 夫老虛人之伐塊, 正猶弱國好動兵, 未有不反疲我民, 爲賊所敗. 如遇此疾, 寧不如不治之爲愈也. 余累見老衰人, 常有積塊者, 每作孽時, 只用五積散數貼, 則能救急而安. 此亦一驗也. 如少壯之人, 伐塊而得效者, 其與武王一怒而安天下之理者. 盖病有虛實, 治有緩急之不同耳.”
Case 9; Case 24.
이수기가 활용한 방제의 구체적인 내용은 『역시만필』 개별 의안에 대한 분석 참조(이수귀, 2015: 717-25).
Case 45; Case 18.
노중의이자 방제 전문가인 덩중자(邓中甲)는 방제 조합의 관건은 구성 약물의 군신좌사(君臣佐使) 규율을 확보하는 것 그리고 약물 관계, 용량, 포제 등과 같은 약물 조합 기술을 장악하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鄧中甲, 2019: 52).
Case 121. “盖此紅疹之症, 自己亥冬間, 至庚子夏秋, 而大熾症候不一. 而其中最惡者, 不在發斑與否, 喉腫閉塞者, 重則不數日而斃, 或有頰癰・頷腫膿潰, 危篤者. 並依常法, 用荊防敗毒散・凉膈散・蚯蚓汁・月經水・野人乾之屬, 則非徒無益, 反有害之, 最難救急矣. 余遂於大頭瘟門, 芩連消毒飮, 以引子牛蒡子炒硏二錢爲君, 更加玄蔘酒洗, 倍元方桔梗, 各一錢半, 餘材並依本方. 日再服三服, 用至五六貼, 則無有不安, 以此獲痊者甚多.”
『東醫寶鑑』 雜病篇 卷7, 瘟疫, 大頭瘟治法.
Case 112; 『東醫寶鑑』 外形篇 卷1, 頭, 氣厥頭痛, 『역시만필』 본문에는 발열사물탕(發熱四物湯)으로 기재되어 있다. 기존 번역에서는 이를 발열에 활용하는 사물탕으로 풀이했다(이수귀, 2015: 522). 그러나 가미사물탕 외에 청혈사물탕, 양혈사물탕 등 다양한 종류의 사물탕이 존재하고, 해당 사물탕 구성 약물에 가미사물탕에 없는 시호, 목단피 등의 약물이 추가된 것을 감안해 기존과 달리 발열사물탕으로 번역했다
Case 34; Case 118.
Case 26; Case 100, 113.
Case 113.
Case 31; Case 123; Case 125. 『역시만필』에서 월경혈은 열을 내리기 위한 용도로 5차례 정도 사용됐다. 해열을 위해 월경혈을 사용하는 근거는 명확하지 않다. 『동의보감』에서는 성관계 이후 상한이 재발한 여로복(女勞復)이나 음열(陰熱)을 치료한다고 간단히 언급하고 있으며, 이익(李瀷) 역시 월수(月水)가 열을 다스린다는 것은 동쪽의 풍속에서 있어서의 중요한 처방이지만 의서에 나타나지 않는다고 의문을 제기한 바 있다(『東醫寶鑑』 湯液編 卷3, 婦人月水, 『星湖僿說』 卷17, 人事門, 本草). 『星湖僿說』은 한국고전종합DB 제공 원문을 활용했다(https://db.itkc.or.kr/, 검색일 2022년 1월 19일).
『東醫寶鑑』 雜病篇 卷2, 寒上, 脈法; Case 63. 이수기는 Case 15에서도 상한은 잡병과 달라서 마땅히 맥에 근거해야지 방로(房勞)가 원인이라고 하여 열증만 귀책해서는 안된다고 이야기한다.
임상 의사의 시선으로 환자를 진찰했음을 강조하기 위해 구리야마시게히사가 자신의 저작 중에서 해부학 지식에 입각해 몸을 살펴본다는 의미로 활용했던 ‘해부학적 시선’이라는 표현을 변용했다(구리야마시게히사, 2013: 119-36).
Case 4, 5, 43, 122.
Case 109. “余診左脉洪數; 右脉虛微無力. 余診罷以謂, 此症, 古方云, 多屬胃土, 木衰金乘, 土寡于畏. 若然則宜右脉盛. 今反左盛右弱者, 必脾土不足, 肝木來侮所不勝而然. 不宜用治風之劑以損其脾土, 當用補脾之藥, 自可扶脾抑肝, 則風自祛矣.”
『東醫寶鑑』 雜病篇 卷2, 風, 口眼喎斜.
『東醫寶鑑』 雜病篇 卷2, 寒上, 脈法.
Case 59. “盡信書不如無書.”
Case 58. “不可拘於方書之瘥後昏沉, 當以隨經治之.”
『承政院日記』 546책 경종 2년 10월 11일(1722). 또 다른 온보학파 의가 장제빈의 의서 『경악전서』는 1780년 무렵 조선에 유입됐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박훈평, 2020: 156).
Case 118. “故病不可一槩而治之. 補虛瀉實, 醫家大法.”
Case 53. “雖方煎藥, 若或症變, 則當隨症改藥.”
Case 1, 63; Case 38; Case 41, 51.
Case 47. “其後得消渴症, 多用醫治而不見效, 余診, 寸脈數甚, 余曰, 勞心焦思, 心火上炎, 腎水不濟, 咽路焦而煩渴生, 氣血耗而肌肉消, 當用滋補之劑, 遂用降心湯, 十貼而頓愈.”
『東醫寶鑑』 雜病篇 卷6, 消渴, 消渴有三. “降心湯. 治心火上炎, 腎水不濟, 煩渴引飮, 氣血日消.”
의안은 작성 방식에 따라 實錄式, 追憶式, 病歷式 의안으로 구분된다(黄煌, 2001: 13-23).
Case 41. “此症用此法得愈.”
Case 122. “余以此數藥隨症用之, 而得效者, 甚多矣.”
Case 78, 79, 80. Case 21, 22에 수록된 저유작약탕 역시 작약감초탕에 저근백피, 지유, 오수유, 황련이 추가되며 자혈사습탕과 유사한 발전 양상을 보인다. 이수기는 저유작약탕에 대해 복통을 동반한 출혈 설사 환자 십여 명이 곧장 효과를 보았다며 그 효과를 자신했다.
Case 111.
『東醫寶鑑』 雜病篇 卷4, 內傷, 勞倦傷治法; 『東醫寶鑑』 雜病篇 卷3, 寒下, 外感挾內傷證.
『莊子』「天道」. 『莊子』는 中國哲學書電子化計劃 홈페이지 제공 원문을 활용했다(https://ctext.org/, 검색일 2022년 1월 19일). 이와 유사한 내용은 청대 의가 왕칭런(王淸任)의 『의림개착(醫林改錯)』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왕칭런은 반신불수 치료 방제 보양환오탕을 제안하며 황기의 용량을 다른 약물보다 40배나 많은 4냥으로 기재했다. 그러나 환자가 황기의 다량 복용을 두려워할 경우 소량에서부터 시작해 차차 그 용량을 늘려가면 된다며 약물 용량 결정에 환자의 수용 여부까지도 감안할 것을 언급했다(왕청임, 2016: 91).
Case 128.
『歷試漫筆』 序. “余觀世之業於醫者, 無明的之見精深之工, 多不免膚率而粗淺. 霎記經驗之書, 略誦藥餌之名, 輒謂術自如是足矣. 及其擧而試之也, 其易治者, 則幸而或中, 而其少難治者, 則瞠然莫爲計. 至若虛實之辨闔變之方, 昧昧乎一未能焉, 往往有妄害人者. 吁, 今之世, 無醫久矣!”
『歷試漫筆』 序. “先叙脉證, 次論方藥, 不騖新奇, 惟從平簡, 一出於萬全之意.”
『證脈方藥合編』, 新增證脈方藥合編, 序. 新增證脈方藥合編 서문은 渼隱生의 저술이다. 『證脈方藥合編』은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청구기호: 古7671-65)을 활용했다.
『醫學正傳』 卷之一, 中風; 『萬病回春』, 凡例. 『醫學正傳』은 虞抟, 『医学正传』, 张丽君・丁侃 校注 (北京: 中国医药技出版社, 2011), 『萬病回春』은 龚廷贤, 『万病回春』, 周耀庭 点校 (北京: 人民卫生出版社, 1984)를 활용했다.
『脈語』 卷下, 脈按格式. 『脈語』는 郭君双 主编, 『吴昆医学全书』 (北京: 中国中医药出版社, 1999) 수록본을 활용했다.
『濟衆新編』, 凡例; 『醫宗損益』, 凡例. 『濟衆新編』과 『醫宗損益』은 김신근 편, 『한국과학기술사자료대계 의약학편』 (서울: 여강출판사, 1988) 수록본을 활용했다.
『방약합편』의 발간과 서지 정보에 대해서는 오재근, 박훈평의 연구 참조(오재근, 2017: 28-30; 박훈평, 2018: 170-83).
『東醫寶鑑』 雜病篇 卷2, 寒上, 脈法.
『與猶堂全書』 第一集, 詩文集, 第十一卷, 論, 脈論一; 『東醫壽世保元』 卷之二, 醫源論. 『與猶堂全書』는 한국고전종합DB 홈페이지 제공 원문을 활용했다(https://db.itkc.or.kr/dir/, 검색일 2022년 1월 19일). 『東醫壽世保元』은 김신근 편, 『한국과학기술사자료대계 의약학편』 (서울: 여강출판사, 1988) 수록본을 활용했다.
『黃帝內經素問大要』 素問附說, 脈解. 『黃帝內經素問大要』는 김신근 편, 『한국과학기술사자료대계 의약학편』 (서울: 여강출판사, 1988) 수록본을 활용했다. 맥진에 대한 도전은 청대 중국에서도 진행되고 있었다. 청대 의가 徐靈胎, 陳修園 등은 맥진을 중요 참고 사항 정도로 간주하며 그 지위를 격하시켰다(다음 카페, MD[DKM] 중 daydreamer가 작성한 ‘진단 중에서는 望診과 問診이 가장 중요하다’에서 인용했다. https://cafe.daum.net/poordoctor, 검색일 2022년 1월 19일).
1930년대 한반도에 서양 의학이 본격 도입된 뒤 벌어진 서양 의학과 한의학간 논쟁에 대해서는 조헌영 외의 저술 참조(조헌영 외, 1997: 25-255).
Case 30, 112. 증상을 변별한다는 의미를 지닌 ‘변증(辨證)’은 변증론치 체계가 본격 등장하기 이전 동아시아 의학 전통 내에서 통용되던 의학 용어다. 1613년에 편찬된 『동의보감』이나 1894년에 편찬된 『동의수세보원갑오구본』 중에도 ‘변증’ 또는 ‘사상인변증론’이라는 단어가 등장하고 있다. 따라서 변증론치 이론 체계가 도입되기 이전 중국 및 한반도의 의사들이 임상 의료 수행 과정에서 변증 행위를 수행하지 않았다고 볼 수는 없다. 다만 독자들의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 이수기의 임상 의학을 분석하는 과정에서는 ‘변증’이라는 단어를 의도적으로 사용하지 않았다.
『동의보감』 이후 통용되던 ‘맥증방약’의 체계가 ‘변증론치’ 체계에 실제적인 지위를 내줬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을 수 있다. 임상 진료는 현장성을 중시하는 만큼 국내 한의학계 임상 진료 역시 ‘맥증방약’이나 ‘변증론치’ 등 다양한 방식으로 이뤄지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현재 한의과대학에서 사용하고 있는 교재 중에 변증론치와 관련된 내용이 다수 포함되어 있는 점, 한국한의학연구원, 한국한의약진흥원 등 국가연구기관에서 개발해 한의사들에게 제공하고 있는 임상진료지침 상당수에 ‘변증론치’와 관련된 내용이 포함되어 있음에 근거해 위와 같이 기술했다(김미경・한창호, 2020: 98-124, 한방재활의학회, 2021: 7, 40, 80).
『史記列傳』 扁鵲倉公列傳. 『史記列傳』은 中國哲學書電子化計劃 홈페이지 제공 원문을 활용했다(https://ctext.org/, 검색일 2022년 1월 19일).
춘위이의 임상 의학에 대해서는 야마다게이지의 연구 참조(야마다게이지, 2007: 77-88).
Case 3.
Case 2, 3, 6, 50.
Case 53.
『史記列傳』 李將軍列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