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7년 한국의 콜레라 유행과 식민지 방역 체계의 형성
The Cholera Epidemic of 1907 and the Formation of Colonial Epidemic Control Systems in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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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It was in 1907 when Korea was annexed by Japan in the field of health care systems as the Gwangje Hospital, Uihakgyo the National Medical School and the Korean Red Cross Hospital were merged into the colonial Daehan Hospital, and massive cholera epidemic controls by the Japanese Army were enforced.
However, despite their importance, the cholera epidemic of 1907 in Korea and preventive measures taken at that time have not yet been studied extensively as a single research subject. The purpose of this paper is to contribute to a more concrete and broader understanding of the Korea-Japan annexation of health care systems under the rule of the Japanese Resident-General of Korea by revealing new facts and correcting existing errors.
In 1907, cholera was transmitted to Korea from China and Japan and spread across the Korean Peninsula, resulting in a major public health crisis, perhaps one of the most serious cholera outbreaks in the twentieth century Korea. Although Busan and Pyeongyang were the cities most infected with cholera, the targets for the most intensive interventions were Gyeongseong (Seoul) and Incheon, where the Japanese Crown Prince were supposed to make a visit. The Japanese police commissioner took several anti-cholera preventive measures in Gyeongseong, including searching out patients, disinfecting and blocking infected areas, and isolating the confirmed or suspected. Nevertheless, cholera was about to be rampant especially among Japanese residents.
In this situation, Itō Hirobumi, the first Resident-General of Korea, organized the temporary cholera control headquarters to push ahead the visit of the Japanese Crown Prince for his political purposes to colonize Korea. To dispel Emperor Meiji’s concerns, Itō had to appoint Satō Susumu, the famous Japanese Army Surgeon General, as an advisor, since he had much credit at Court. In addition, as the Japanese-led Korean police lacked epidemic control ability and experience, the headquarters became an improvised organization commanded by the Japanese Army in Korea and wielded great influence on the formation of the colonial disease control systems. Its activities were forced, violent, and negligent, and many Korean people were quite uncooperative in some anti-cholera measures.
As a result, the Japanese Army in Korea took the initiative away from the Korean police in epidemic controls, serving the heavy-handed military policy of early colonial period. In short, the cholera epidemic and its control in 1907 were important events that shaped the direction of Japan’s colonial rule.
1. 머리말
1907년, 대한제국은 국가의 존립에 결정적인 타격을 입었다. 헤이그 밀사사건으로 고종이 강제로 퇴위하고, 정미7조약 체결과 대한제국 군대 해산으로 명실상부 일본의 반식민지로 전락한 것이다. 일제는 메이지(明治) 유신(1868) 이전부터 이른바 ‘정한론’(征韓論)을 제창하며 한국 침탈의 야욕을 보이다가 조일수호조규(강화도조약, 1876)를 발판으로 본격적으로 한반도에 진출하였고, 러일전쟁을 계기로 한일의정서(1904)와 을사늑약(1905)을 차례로 체결하며 한반도 식민지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1907년의 비극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과정에서 무엇보다 신속하게 추진된 것은 보건 의료 분야의 장악이었다. 위생이 문명의 잣대로 여겨지고 제국주의적 침략의 선봉에 세워진 만큼 그것은 한반도 침탈과 일본인의 한반도 이주에 필수 불가결한 작업이었기 때문이다.1)
대한제국의 무능을 지적하며 소위 ‘식민지 근대화론’을 내세우는 논자도 있지만, 오히려 조선 말기와 대한제국 시기의 정부는 대내외적으로 위태로운 여건 속에서도 보건 의료의 근대화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제중원(濟衆院, 1885), 광제원(廣濟院, 1899), 대한적십자병원(1905)2)을 비롯한 근대식 병원을 설립하였고, 의학 교육 기관인 ‘의학교’(1899)를 세워 근대 서양식 면허 의사를 배출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1885년에 국책 사업으로서 종두(種痘)와 해관(海關)을 통한 해항 검역을 실시하였고, 1894년에는 내무아문(內務衙門)에 위생국(衛生局)을 설치하였으며, 그 이듬해에는 『검역규칙』, 『호열랄병예방규칙』, 『호열랄병소독규칙』, 『종두규칙』, 『종두의양성소규정』 등의 근대적 위생 제도를 마련함으로써 전염병 방역을 위한 폭넓은 조치를 취하였다. 하지만 한반도 침탈을 노리는 일제로서는 이와 같은 위생 개혁을 통하여 근대 국가로 나아가려는 한국의 행보를 차단할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1907년에 광제원, 의학교, 대한적십자병원을 대한의원(大韓醫院)으로 축소·통폐합하여 의료 및 의사(醫事) 행정의 효율적인 장악을 기하였고, 때마침 같은 해에 콜레라가 유행하자 일본 황태자의 한국 행계(行啓)를 빌미로 강압적으로 진압함으로써 식민지 방역 체계의 기틀을 닦은 것이었다.
이처럼 1907년은 대한의원이 설립되고 대대적인 콜레라 방역이 실시됨으로써 사실상 보건 의료의 한일 병탄이 이루어진 해였다. 이 가운데 광제원, 의학교, 대한적십자병원의 폐지와 대한의원의 설립 과정에 관해서는 비교적 많은 연구가 축적되었지만(신동원, 1997: 332-345; 박윤재, 2005: 175-197; 황상익, 2013: 697-727; 이규원·최은경, 2018), 1907년 콜레라 방역에 관해서는 단일 주제로서 본격적으로 다루어진 바가 없다.3) 신동원은 통감부 주도의 무단적 방역사업을 평가하는 과정에서 1907년 콜레라 방역을 다루었으나 윤곽을 짧게 그려내는 데 그쳤고(신동원, 1997: 405-407), 박윤재는 1909년의 콜레라 방역과 함께 군사적인 방역 활동으로서의 특징과 그 영향에 방점을 두고 비중 있게 고찰하였으나 1907년 콜레라 유행 및 방역 그 자체와 그것을 둘러싼 제반 상황까지 깊이 다루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박윤재, 2005: 198-212). 1907년 콜레라 방역을 언급한 기존의 연구에는 대체로 당시 콜레라 유행의 규모가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는 인식이 드러나는데(신동원, 1997: 407; 대한감염학회, 2009: 363; 서울역사편찬원, 2018: 27), 이러한 유행 규모의 과소평가는 강압적이고 대대적인 콜레라 방역의 부당성을 강조하는 논거로서는 유효하겠지만, 실상을 정확히 반영한다고 볼 수는 없다. 심지어는 사실과 전혀 다른 내용이 근거도 없이 기술되는 경우도 있었다(李炯植, 2013: 31).4)
이상의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본고에서는 먼저 1907년 한국의 콜레라 유행과 방역 상황 전반에 관하여 구체적이고 폭넓은 논의를 전개할 것이다. 이어서 콜레라 유행 자체에 초점을 맞추어 그것이 기존의 인식과는 달리 보건상의 큰 위기였음을 해명할 것이다. 나아가 콜레라 방역 체계의 형성 과정을 고찰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제기되는 세 가지 물음, 즉 육군 군의총감 사토 스스무(佐藤進)가 방역 사무에 기용된 배경,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일본 황태자의 한국 행계를 강행한 동기, 그리고 육군이 주도하는 임시방역본부가 설치된 이유를 파악하려고 한다. 이 과정에서 지금까지 논의되거나 밝혀지지 않았던 새로운 관점과 사실이 부상할 것이다. 이처럼 한국 의학사의 중요한 이정표인 1907년 콜레라 유행과 방역의 전모를 입체적으로 드러냄으로써 통감부 시기 보건 의료의 한일 병탄 과정을 보다 깊이 이해하는 데 기여하려고 한다.
2. 1907년 한국의 콜레라 유행과 방역 상황
1907년 여름철에 콜레라가 청(淸) 남부 지역에 발생하여 상해(上海), 천진(天津)을 거쳐 안동현(安東縣) 방면으로 유행이 번지고 있었다(韓國統監府, 1908: 3; 三木栄, 1991: 68). 7월 24일 상해를 떠나 나가사키(長崎), 모지(門司), 고베(神戶)를 거쳐 요코하마(橫濱)를 향하던 일본유선회사 기선 야마시로마루(山城丸)에 콜레라 증상을 보이는 환자가 발생하여 7월 31일, 임시방역사무관 시가 기요시(志賀潔)와 전염병연구소 조수 사토 데쓰지로(佐藤鐵次郞)가 나가하마소독소(長濱消毒所)에 출장하여 조사한 결과, 상해에서 콜레라균이 유입되어 약 10명의 환자가 발생한 사실이 밝혀졌다(細菌學雜誌社, 1907: 627-628).5) 7월 26일 후쿠오카현(福岡縣) 모지시에서 의사(疑似) 콜레라 환자가 발생한 이래 시 내외에 콜레라가 확산되었고, 나가사키에도 상해발 기선을 통해 콜레라가 꾸준히 유입되었다(山本俊一, 1982: 119-121). 콜레라는 간사이(關西) 지방을 거쳐 9월 말 도쿄(東京)에까지 전파되며 5년 만에 전국적인 큰 유행을 보였다.6)
이러한 상황에서 콜레라의 한국 유입은 시간 문제였다. 이미 7월 24일에 경상북도 김산군(金山郡) 김천에 콜레라 환자가 발생하였다는 보도가 있었지만7), 진성 콜레라 환자가 아니었거나 적어도 유행으로 번지지는 않았다. 재한 일본인 거류민은 본국의 상황을 전해들으며 위생상의 주의를 촉구하였고,8) 한국인 또한 일본과 중국의 콜레라 발생 소식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9) 특히 유행이 대규모로 번진 모지 지역은 해상 교통으로 한국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모지에서 입항하는 선박에 대하여 부산 및 원산 세관에서는 8월 24일부터, 인천 세관에서는 8월 27일부터 검역을 실시하였고,10) 8월 30일에 통감부가 내부에 조회하여 각 해항에 모지의 콜레라가 유입되지 않도록 당부하였다.11) 하지만 9월 들어 상황이 급박해지기 시작하였다. 안동현에 콜레라가 크게 유행하면서 9월 2일경 신의주 관내 위화도(威化島)에 의사 콜레라12) 환자가 발생한 것이다(韓國統監府, 1908: 44). 경시총감 마루야마 시게토시(丸山重俊)는 콜레라의 육지 방역을 위하여 경무고문의장(警務顧問醫長) 사사키 요모시(佐佐木四方志)를 현지에 파견하였고,13) 인천 세관에서는 검역 대상에 안동현 방면에서 출항한 선박을 추가하였으며,14) 평양에서는 기차 검역을 개시하였다.15) 하지만 신의주, 의주, 용암포 등지에 콜레라 환자가 속출하게 되었다.16)
한편 도쿄에 체류 중인 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9월 18일, 통감 대리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에게 일본 황태자17)가 곧 도한(渡韓)할 수 있다며 경성과 인천에 “전염병이 없을 것으로 믿지만” 상황을 시급히 조사하여 보고하라고 지시하였다.18) 그러나 경성에서는 이미 9월 16일과 17일에 모지를 거쳐 경성에 온 일본인 두 명이 각각 토사병과 의사 콜레라로 사망한 이래 콜레라가 퍼지고 있는 상황이었다(韓國統監府, 1908: 3).19) 이처럼 일본 황태자의 방한을 앞두고 경성에 콜레라가 유행할 징조를 보이자 한국주차군(韓國駐箚軍) 군의부장 육군 군의감 후지타 쓰구아키라(藤田嗣章)는 9월 25일 이후 통감 대리 하세가와에게 콜레라 박멸 건의서를 제출하였고, 이에 관하여 내부대신으로부터 일임된 경시총감 마루야마는 한국 정부로부터 2만 원을 지출시켜 당해 경성의 첫 콜레라 환자가 나온 죽동(竹洞, 현 을지로2가∼3가 일대) 부근을 중심으로 임시 방역 활동을 지시하였다(韓國統監府, 1908: 4-6).20) 경성에서는 순사가 동원되어 발병 여부 조사가 이루어졌고,21) 환자가 나오면 소독 및 격리22)와 더불어 그 부근에 교통 차단 조치가 단행되었다.23) 내부에서는 경시 총감의 요청으로 창의문 밖 전 피병원(避病院)에 임시검역위원부 설치가 추진되었고,24) 경시청 내에 검역소가 설치되어 검역 방법이 강습되었으며,25) 군부에서는 일반 관리의 위생 검사가 일본인 의사에 의하여 실시되었다.26) 결국 죽동 부근의 유행은 잠잠해졌지만, 일본인 시가지는 “만연 및 창궐의 기세가 오르고” 있었고, 9월 28일에는 인천에서도 환자가 발생하였다(韓國統監府, 1908: 47).27) 이에 경성 일본인 거류민단은 아사히마치(旭町, 현 회현동 일대)에 예방사무소를 설치하여 자체적인 방역을 꾀하였고,28) 인천의 일본인 거류민단도 이사청령에 기초한 “청결법”의 실시를 결의함에 따라 의사 8명을 동원하여 대청소와 거류민 전원의 건강 진단을 개시하였다.29) 부산에도 유행의 조짐이 보이자 9월 29일에는 방역 계획의 수립을 위하여 후지타가 부산에 급파되기도 하였다(韓國統監府, 1908: 6).30)
10월 3일에 경성에 도착한 이토에게 이러한 상황은 그야말로 악몽이었다. 그는 그날 밤 통감부 무관 육군 소장 무라타 아쓰시(村田惇)의 진언으로 후지타에게 대책을 문의하여 “무제한의 비용과 독재권을 허락해주시기만 하면 2주일을 기하여 박멸할 수 있다”는 답변을 듣고 군사령관 하세가와를 통하여 즉각적인 실행을 명하였다(陸軍軍醫團, 1943: 147). 10월 4일, 제13사단장 육군 중장(中將) 오카자키 세이조(岡崎生三)를 총장, 육군 군의총감 사토 스스무를 고문, 군의감 후지타31)와 경무국장 마쓰이 시게루(松井茂)32)를 부총장으로 하는 임시방역본부가 설치되고 방역방침, 임시방역규정,33) 감시원규정이 마련됨으로써 10월 5일부터 본격적인 방역 활동이 개시되었다(韓國統監府, 1908: 7-12). 위의 규정에는 명시되어 있지 않지만, 이는 일본 황태자의 방한 전에 콜레라를 종식시키기 위하여 처음부터 “무력으로써 강제할” 방침의 ‘군대식’ 방역이었고,34) 기존의 방역 책임자였던 경시총감이 경성 한국인 구역의 일개 방역위원장으로 격하된 것이 상징적으로 드러내듯이 철저하게 군 통제 하의 체계였다(韓國統監府, 1908: 31). 이토는 10월 6일 일본 내각 총리대신 사이온지 긴모치(西園寺公望)에게 보낸 전보에서 임시방역본부 구성의 배경과 목적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밝히며 일본 정부에 10만 엔(圓)을 요청하였다.
황태자 전하의 한국 시찰에 관해서는 귀임 이래 각기 봉영 준비에 착수하였지만, 불행히도 귀임 전에 발생한 콜레라가 아직 전혀 박멸되지 않았음. 경성에서는 일본인 부락을 중심으로 유행하게 되었고, 한국인 부락에도 여기저기 발생하였으나 엄중한 소독 및 예방 조치를 실행하였기 때문에 그 병독을 근절할 수 있었음. 그러나 일본인 부락은 예방이 느슨하여 환자는 소수이나 아직 전멸에 이르지 못하였으므로 본관이 귀임한 이튿날 아침부터 주차군에 명하여 위수 사령관을 방역총장으로 삼고 문무관 십 수 명을 방역위원으로 부속시켜 경성 전체에 엄중한 소독 및 예방 실행에 착수시켰음. 인천은 환자가 극히 소수이지만 전하의 상륙지이므로 경성과 마찬가지로 엄중한 방역법을 실행시키고 있음. 부산은 인천에 비하여 병세가 격렬할 뿐만 아니라 모지 및 시모노세키(下關)와 특별히 연결되어 있으므로 각종 수단에 호소하여 병독의 침입과 만연을 예방하고 있음. 말할 것도 없이 전하의 한국 방문은 우리의 대한(對韓) 정책에 중대한 관계를 가지는 공전의 거사이므로 있는 힘껏 병독의 전멸을 기하여 본관이 책임을 지고 앞서 기술한 비상한 방역 수단의 단행을 즉시 명하였음(……).35)
일본과 한국 정부로부터 각각 10만 엔과 5천 엔의 예산을 확보한 임시방역본부는 총장, 고문, 부총장과 위원 11명(육군 소속 6명, 통감부 소속 5명)으로 구성되었고,36), 일본 황태자의 이동 경로에 해당하는 경성, 용산, 인천에는 조수 포함 36명의 방역감시원을 따로 두었으며,37) 주요 도시(경성, 용산, 영등포, 인천, 부산, 평양)의 방역위원부와 경성 내 관청 및 육군부대의 방역위원이 실질적인 방역 임무를 맡았다(韓國統監府, 1908: 28-43). 하지만 총인원 2,154명에 달하는 거대한 조직이 하루아침에 급조되어 제대로 작동할 리가 없었다. 이를테면 방역 업무의 핵심 중 하나인 석회의 살포 목적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자가 적지 않았”고,38) 비용을 부당하게 청구하는 경우가 “다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았으며, 평양에서는 방역본부의 전보를 잘못 이해한 평양 여단장 육군 소장 오노데라 미노루(小野寺實)가 갑자기 계엄령을 내려 시내의 과반이 봉쇄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하였다(韓國統監府, 1908: 14-18; 佐藤剛蔵, 1956: 21).39)
방역 활동은 오물과 쓰레기 처리, 환가(患家) 부근의 소독, 교통 차단, 우물 폐쇄와 급수, 강제 이주, 음식물 단속, 검병적(檢病的) 호구 조사, 선박 및 기차 검역 등으로 이루어졌다(韓國統監府, 1908: 68-87).40) 이러한 내용은 1895년에 반포된 『호열랄병예방규칙』에도 대체로 나타나 있었지만, 몇 차례의 콜레라 유행을 겪으면서도 여러 현실적인 난관에 부딪혀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다가 1906년에 위생 관련 업무가 경무국으로 이관됨에 따라 방역 활동이 위생경찰의 소관이 된 이후 처음으로 대대적으로 실시된 것이었다.41) 다만 집에 들이닥친 순사에게 양쪽 뺨을 맞은 부인42)과 소독이라는 명분으로 하룻밤에 목욕을 다섯 차례나 강요당한 자43)가 있을 정도로 강압적이고 폭력적으로 집행되었고,44) 일본인 거류민조차 방역원의 인권 침해적인 행태에 불만을 가졌다.45) 일반인의 행동을 통제하는 각 지역의 이사청령에는 “구류 또는 과료”의 처벌 조항이 명문화된 반면,46) 식수의 입수 곤란이나 영업 중지로 인한 경제적 손실 등 일반인의 피해에 대한 구제는 요원하였다.47) 뿐만 아니라 대책 없는 규제로 집집마다 오물이 넘쳐 오히려 위생적으로 열악해지는 상황이 연출되기도 하였다.48)
콜레라 환자가 발생하면 신고의 의무가 있었으나 잘 지켜지지 않았기 때문에 한국인 환자의 파악은 검병적 호구 조사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었다(韓國統監府, 1908: 87). 그러나 해당 조사를 통하여 “환자나 시체가 발견되는 일이 많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경성의 경우 일본인 구역인 갑구에서만 5,546호(戶) 18,807명49)에 대하여 실시되었을 뿐, 한국인 구역인 을구의 상황은 수치조차 제시되지 않았다(韓國統監府, 1908: 83, 87). 경성과 인천 지역에서는 10월 5일 이후 공식적으로 환자가 발생하지 않았다. 경성에서 환자의 검진은 경성위수병원 소속 군의(軍醫) 3명이 담당하였고, 병원균의 검출은 위수병원(30건)과 대한의원 세균부(17건)에서 실시되었는데, 각각 9월 30일, 10월 5일 이후로 양성 반응이 나오지 않은 것이다(韓國統監府, 1908: 95-104). 이로써 당국은 “유행 초기에는 진성 콜레라가 섞여 있고 후기에는 완전히 비전염성 질환이었다”는 결론을 내렸다(韓國統監府, 1908: 105). 그렇다면 임시방역본부는 경성과 인천의 ‘진성’ 콜레라 유행이 끝난 시점에 꾸려진 것이기 때문에 유행의 종식은 임시방역본부의 활동과 관련이 없는 것이었다.50) 경인 지역의 콜레라 “절멸” 소식을 전한 10월 12일자 요미우리신문(讀賣新聞)은 여전히 “야만병”이 유행하는 일본은 “문명”이 의심될 것이라며 위생과 방역에 대한 국민의 “몰의무(沒義務), 배도덕(排道德)”과 “난폭한 행동”을 작심하고 비판하였다.51) 10월 16일, 일본 황태자는 예정대로 인천에 상륙하여 경성에 머문 뒤 10월 20일에 한국을 떠났다. 방역의 ‘목적’이 달성되자 그 다음날인 10월 21일에 평양과 부산 지역을 제외한 방역 사무는 크게 축소되었고, 10월 23일에는 모든 사무가 육군 군의부로 이관되었다(韓國統監府, 1908: 25-26). 1907년의 콜레라 유행은 평양 지역의 유행을 끝으로 11월 21일에 종식되었다(韓國統監府, 1908: 47-48, 68). 11월 30일에 경성과 인천의 주요 방역 관계자 150명이 통감 관저에 초청받아 연회가 열렸고(그림 1), 12월 말에는 고용인을 포함한 2,285명에게 위로금 명목으로 총 22,865엔이 지급되었다(韓國統監府, 1908: 115).52)
3. 1907년 한국의 콜레라 유행 재고
콜레라 발생이 확인된 9월 초부터 11월 말까지 한국주차군 측에서 공식적으로 집계한 지역별·민족별 콜레라 환자 및 사망자는 표 1과 같다.
집계된 환자는 총 376명으로, 한국인 198명, 일본인 163명, 청국인 15명이며, 이러한 수치는 1907년 콜레라 유행의 한국인 피해 상황을 보여주는 유일한 기록이다. 하지만 단순히 총 376명의 환자가 발생하였다는 정보로부터 대단한 유행이 아니었다는 결론은 도출될 수 없다. 그 이유는 첫째, 유행의 규모를 정확히 파악하려면 분모 즉 인구 데이터가 필요하고, 둘째, 한국인에 대한 집계 수치는 신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인권을 심하게 침해하는 강압적인 방역 조치가 단행된 탓에 수많은 한국인이 발병하여도 숨거나 숨겨주는 데 급급하였고, 임시방역본부 또한 한국인에 대한 검병적 호구 조사를 적극적으로 실시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한국인은 환자 집계에서 크게 누락되었을 가능성이 크며, 이러한 경향은 일제강점기 내내 이어졌다.54) 따라서 유행 자체의 규모를 파악하려면 비교적 신뢰할 만한 일본인 집계 수치를 이용할 수밖에 없다. 위의 두 가지 사항을 고려하여 1907년 당시 콜레라 유행의 규모를 지역별로 다시 살펴보면 그림 2와 같다. 더 정확한 파악을 위하여 『통감부 통계 연보』의 통계 자료를 기초로 작성하였고, 상대적 평가를 위하여 일본(전국 및 발생률 상위 3개 부현)의 1907년 콜레라 유행 관련 수치를 함께 비교하였다.
이로부터 1907년 한국의 콜레라 발생률(인구 10만 명당 콜레라 환자 수)은 일본의 약 24배에 이를 정도로 높았으며, 경성의 발생률과 사망률은 일본 내에서 발생률과 사망률이 가장 높았던 후쿠오카현보다 더 높았다. 사망률(인구 10만 명당 콜레라 사망자 수) 또한 비슷한 패턴을 보였다.
그림 3은 1906년부터 1942년까지 재한(재조) 일본인의 콜레라 발생률과 사망률을 시계열적으로 분석한 것으로, 통감부 설치 이후 발생한 콜레라 유행 가운데 1907년의 유행이 가장 심각하였음을 보여준다. 방역을 실질적으로 지휘한 군의감 후지타도 당시의 상황을 “주민 수로 말하자면 한인과는 비교가 안 되는 소수의 일본인 중에 이 수의 환자가 나온 것은 경계해야 할 사실”이라고 평가하였다(陸軍軍醫團, 1943 : 91). 이것이 군대를 동원한 강압적인 방역의 결과임을 감안하면 그 심각성은 더욱 커지며, 일본인 위주의 방역 대책이었음을 고려하면 한국인의 피해는 더 컸을 것이라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1907년의 한반도 콜레라 유행은 보건위생상의 큰 위기이자 한국 콜레라사의 중요한 사건이었던 것이다.55)
4. 1907년 한국의 콜레라 방역을 둘러싼 고찰
본 장에서는 1907년 한국의 콜레라 방역을 둘러싸고 1장에서 제기한 세 가지 물음에 관하여 고찰함으로써 식민지 방역 체계의 초기 형성 과정을 보다 심층적이고 입체적으로 파악하려고 한다.
1) 사토 스스무의 기용에 관하여
일본 근대 외과학의 개척자이자 일본인 최초로 서양에 유학하여 의사가 된 사토 스스무는 대한의원 창설위원회 위원장과 대한의원 원장을 역임함으로써 의학 분야의 한일 병탄을 주도한 인물이다(황상익, 2013: 375, 783).56) 그는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때 군의총감으로 활약하고 이홍장(李鴻章)의 부상을 치료한 외과의사로서 대중적으로도 유명하였지만, 전염병 방역에 관한 경험은 일천하였다. 따라서 1907년 콜레라 방역의 성격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그가 임시방역본부의 고문을 맡게 된 이유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토는 동인회(同仁會) 부회장으로서 한국과 중국의 위생 분야 장악에 관여하고 있었지만, 애초에 이토 통감 주도의 대한의원 설립에는 관심이 없었다(谷紀三郞, 1914: 272-274). 1906년 6월 3일, 사토는 통감부 내에 자신을 따르는 자가 없을 것이라며 이토의 도한 요청을 고사하고 군의감 오치아이 다이조(落合泰蔵)를 추천한 것으로 여겨지지만, 이토는 통감부 기사 고야마 젠(小山善)의 의견을 내세워 다시 생각할 것을 종용하였다(山內英之助, 1915: 84-85). 러일전쟁 이후 한국인의 민심을 달래면서 의료 분야를 침탈하는 데 사토만한 인물이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토를 직접 만나면 설득당할 것을 우려한 사토는 친교가 깊은 약학자 단바 게이조(丹波敬三)에게 거절의 뜻을 대신 전해달라고 부탁하였지만, 단바는 오히려 천황을 움직이면 사토가 응할 것이라는 아이디어를 제공하였고, 이토는 즉시 메이지 천황의 하명을 이끌었다(谷紀三郞, 1914: 275-276). 그리하여 사토는 6월 6일에 궁내성어용괘(宮內省御用掛)를 배명받고 6월 30일에 한국으로 떠나 대한의원 창설위원장을 맡게 된 것이다.
한국 진출에 발을 들여놓은 이상, 사토는 1907년 일본 황태자의 방한에도 관여하지 않을 수 없었다. 행계에 앞서57) 메이지 천황의 시종장(侍從長) 도쿠다이지 사네노리(德大寺實則)가 전화로 한국의 위생 상황이 어떤지 묻자, 사토는 대체로는 알고 있지만 책임이 중한 만큼 조사한 후에 보고하겠다고 답하였다(佐藤進, 1914: 473). 하지만 얼마 후 경성의 위생 상태에 관해서는 통감 쪽에서 조사하여 궁내성에 보고할 테니 조사를 보류하라는 이토의 전언이 있었고, 그로부터 며칠 후 통감부는 이토에게 현 위생 상태가 일본 황태자의 도한에 전혀 지장이 없다고 통지하였다(佐藤進, 1914: 473-474).58) 그런데 그 다음날 사토는 지난 번 시종장의 부탁이 천황의 분부였음을 알게 되었고, 곧이어 이토는 사토를 급히 불러 “지금 참내하여 한국의 위생 상태에 관하여 주상하였는데, 폐하께서는 무어라 말씀을 올려도 들어주시지 않”으며 “사토를 선발로 보내 직접 조사시킨 후에 보고하라는” 칙명이 있었다고 알렸다(佐藤進, 1914: 474-475). 사토는 9월 20일에 일본 황태자 도한에 동행할 것을 배명받고,59) 9월 21일에 남작 작위를 수여받았다.
9월 26일에 한국으로 출발한 사토는 도착 후 콜레라 환자가 30여 명에 이르며 일본 황태자 숙소 근처에도 환자가 발생하였음을 파악하고 이토에게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의 선택지를 제시하였다(森田美比, 1981: 191). 첫째, 일본 황태자의 도한을 중지할 것, 둘째, 중지하지 않는다면 시코쿠(四國)와 규슈(九州) 지방을 먼저 방문할 것,60) 셋째, 유행이 종식된 뒤 이듬해에 도한할 것(佐藤進, 1914: 476). 그러나 이토는 사토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고 황태자의 행계를 강행하였다. 사토는 이처럼 “위생 따위 그다지 염두에 두지 않고 단지 하루라도 빨리 황태자의 도한을 청하고 싶은” 이토를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佐藤進, 1914: 477). 반대로 이토는 자신의 행보에 걸림돌이 될 수 있는 사토의 이러한 태도를 경계하여 애초에 한국의 위생 상황을 조사하지 못하도록 시도하였을 것이다.61) 하지만 황태자의 도한이 불안하였던 메이지 천황이 위생에 관한 한 이토보다 사토를 더 신뢰하였기 때문에62) 이토는 천황의 근심을 덜고 행계를 원활하게 진행하기 위하여 사토를 임시방역본부의 고문으로 내세운 것이다.
2) 일본 황태자 한국 행계의 강행에 관하여
위에서 언급하였듯이 이토는 한국의 콜레라 유행에도 아랑곳없이 일본 황태자의 도한을 추진하였으며, 만일 유행이 잦아들지 않으면 인천에 상륙하지 않고 황태자를 군함 내에 머물게 하여서라도 실현시킬 생각이었다(佐藤進, 1914: 477).63) 일본 궁내성이 콜레라 유행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고64) 황태자의 야마구치현(山口縣) 행계가 중지된 상황에서65) 이미 예정되어 있던 주고쿠(中國), 규슈, 시코쿠 지역 6현의 방문 일정을 뒤로 미루면서까지 ‘미개한’ 콜레라 유행지로 최초의 외국 행계를 단행하는 것은 상당한 무리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原武史, 2011: 169, 180). 메이지 천황도 의병 운동으로 인한 치안의 악화를 이유로 황태자의 한국 방문에 난색을 표명한 바 있다(原武史, 2011: 168). 그런데도 이토는 천황을 설득하여 아리스가와노미야 다케히토(有栖川宮威仁) 친왕의 동행을 조건으로 승낙을 받아내었고, 사토의 권고를 무시한 채 임시방역본부를 급조하여 황태자의 경성 방문까지 성사시켰다(春畝公追頌會, 1940: 772).
1907년 7월 헤이그 특사 사건을 빌미로 자신에게 유순한 순종(純宗)을 즉위시키고 대한제국의 군대를 해산시킨 이토는 일본을 모델로 하는 한국 황실의 변혁과 한국 황태자 영친왕(英親王)의 일본 유학66)을 통하여 자신의 식민통치 구상을 구현할 적기를 맞이하고 있었다(原武史, 2011: 168). 그러한 목적의 명분을 쌓고 자신과 통감부에 대한 악화된 여론67)을 잠재우는 데 일본 황태자의 한국 행계는 꼭 필요한 것이었다.68) 이토는 10월 7일, 일본 궁내대신 다나카 미쓰아키(田中光顕)에게 전보를 통하여 다음과 같이 주지시키며 내각 및 황태자 행계에 동행하는 주요 인사에게도 보여줄 것을 요청하였다.
(……) 전하가 도착하시는 당일은 한국 황제가 황태자와 함께 인천까지 출영하시기로 결정하고, 오늘 아침 궁내부 대신이 본관을 내방하여 정식으로 그 뜻을 언명하였음. 인천 봉영 예정은, 황제는 신체가 허약하여 경성 밖으로 나가시는 것이 이번이 처음인 모양이므로 정거장에서 전하의 도착을 기다리시기로 하고, 황태자만 날씨가 평온하다면 군함까지 출영하시기로 하였음. 다만 황태자도 머지않아 일본 유학을 하실 터이니 풍파가 거친 날에 처음 해상에 나와 바다를 두려워하게 되면 장래를 위하여 바람직하지 않으므로 군함까지 가실지 말지는 당일의 날씨에 따라 임기 결정할 것임. (……)69)
이처럼 행계 일정은 세세한 것까지 한국 황태자의 방일을 염두에 두고 계획되었다.
일본 황태자의 도착을 앞두고 방역총장 오카자키가 경성을 순시하며 방역 상황을 한창 검사하던 10월 12일, 순종은 이토의 지시에 따라 대한제국 황제로서 7년 반 만의 행행(行幸)에 나서 교외 청량리에 위치한 홍릉(洪陵)과 유릉(裕陵)을 참배하였다. 직소(直訴)와 집회로 어수선하였던 기존의 행행과 달리 기병대와 경찰의 경계 하에 복장을 갖춘 학도와 군중이 질서 있게 정렬한 모습이 연출되었는데,70) 이는 일본 황태자를 맞이하기 위한 ‘일본식’ 봉영의 예행연습이자 일본 근대 천황제의 ‘시각적 지배’를 도입한 것이었다(原武史, 2011: 171). 한국 황실의 장악과 일본식 통치 스타일의 확립을 위한 이토의 이러한 치밀한 구상에서 일본 황태자의 한국 행계는 포기할 수 없는 사안이었던 것이다.
3) 육군 주도 임시방역본부의 설치에 관하여
2장에서 살펴본 것처럼 이토 통감이 경성에 도착한 10월 3일 이전의 방역 활동은 경시총감의 지휘 하에 이루어졌지만, 임시방역본부가 꾸려지면서 육군 주도의 방역으로 급속히 전환되었다.71) 일본 황태자의 방한을 앞둔 급박한 상황이라 군대의 지휘 체계와 인력이 필요하였으리라 짐작할 수 있지만, 그 배경에 관하여 조금 더 깊이 고찰할 필요가 있다.
이토는 통감에 취임함으로써 통감부 및 이사청 관제 제4조72)에 따라 한국주차군의 지휘권을 획득하였고,73) 주차군의 조직 구성과 지휘 전달에까지 관여하며 군의 통제를 꾀하였다(瀧井一博, 2010: 331-332).74) 따라서 인사권이 “통감으로부터 명을 받거나 촉탁”되는 형태로 행사된 임시방역본부의 활동이 통감에 의하여 “군사령관 하세가와에게 일임”된 것인 이상, 그것은 적어도 이토의 한국 통치 구상과 어긋나는 것은 아니었다(韓國統監府, 108: 7). 또한 임시방역본부의 위원 및 감시원에 다키 겐지로(瀧元治郞) 대위를 비롯한 헌병이 포함된 것은 1906년 칙령 제18호75)와 1907년 칙령 제323호76)를 통하여 한국주차헌병대의 군사경찰 이외의 업무가 통감에게 예속된 것과 관련이 있다(韓國統監府, 1908: 28-43; 朝鮮憲兵隊司令部, 2000: 174). 그렇지만 이러한 사실은 필요조건에 불과하다.
헌병대와 경찰은 각기 조직을 확장하며 “마치 2개의 경찰 기관을 설치한 것처럼” 보일 정도로 대민(對民) 업무 영역이 겹쳐졌고,77) 통감이 “협력 일치”의 훈령을 따로 내려야 할 만큼 충돌을 빚었다(松井茂, 1910: 182; 朝鮮憲兵隊司令部, 2000: 121-122; 이승희, 2010: 62). 애초에는 고문경찰(顧問警察)을 경찰 기관의 중심에 두려는 이토의 구상대로 일상적인 경찰 사무는 경찰이 담당하였고, 경찰 또한 “유역(流疫)의 예방 및 구치(救治)의 방법을 보급하여 인생을 보호”하는 것이 급무임을 인지하고 “충분한 위생 단속”으로 “전염을 방지하는 처치를 취함”으로써 콜레라 유행을 억제한 영국의 이집트 식민 통치 사례를 조사하기도 하였다(松田利彦, 2009: 47-49; 松井茂, 1907: 15; 大石善喜, 1909: 64).78) 그러나 임시방역본부 설치 직후 이토가 경시총감 마루야마를 초치하여 경성 내에 “콜레라가 점차 만연함은 경찰이 확장치 못함이니 이렇게 등한시할 경우면 이현(泥峴, 현 충무로2가 일대) 구역은 병정으로 경찰하게 하겠다고” 질책할 정도로 경찰 주도의 콜레라 방역으로는 유행을 종식시키기에 역부족이었다.79) 실제로 내부 경무국은 1908년 경찰의 위생 사무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전염병의 예방 및 소독 방법의 시행에 관하여 해당 행무자(行務者)의 비숙련 때문에 유감스러운 바 적지 않아 경시청, 인천, 부산, 마산, 목포, 군산, 원산, 대구, 평양, 진남포, 신의주의 각 경찰서에서 일본인 경부 4명 및 일본인 순사 15명을 소집하여 9월 11일부터 15일 간 경성 두묘소(痘苗所) 구내 임시 강당에서 위생 사무 실지 강습회를 열었고, 주차군 군의부장 후지타와 내부 기사 오쿠누키(奧貫)가 주로 강사로서 학리(學理) 응용의 실지 강습을 실시하고 수업증서를 수여하였다. 이 강습에서 성적이 우수한 자를 강사로 뽑고 각 도에서 적임 순사를 선발하여 위생 사무를 실습시켰다(內部警務局, 1908: 71-72).
이와 같이 1908년의 시점에도 경찰 주도의 방역은 요원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임시방역본부는 육군 본위의 기관이 되었고, 1909년에 다시 콜레라가 유행하였을 때도 방역 활동은 주차군과 헌병대에 크게 의존하는 형태를 띠었다. 1909년 9월에 설치된 임시방역본부80)는 1907년에 비하여 육군 인사의 비중이 감소하였지만, 여전히 실질적인 지휘는 군의부장 후지타가 맡았으며, 헌병대장이 평의원으로 참여하고 헌병이 용산 철도 선로 이남의 방역을 담당하는 등 헌병대의 역할은 오히려 증대되었다(金正明, 1965: 1293). 육군이 주도한 1907년 임시방역본부의 군사적 성격은 1909년의 방역 체계로 이어져 헌병경찰 체제81)의 수립과 궤를 같이 한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1907년에 방한한 일본 황태자의 위생비 명목 하사금 3만 엔을 기초로 “한성 및 한성 부근 지역 위생 상태의 개선”을 위하여 같은 해 12월에 한성위생회82)가 발족하였는데, 이 역시 내부 경무국장과 더불어 한국주차군 군의부장과 한국주차헌병대 사령관 등이 평의원으로 참여하며 군사적 색채를 짙게 드리웠다(漢城衛生會, 1914: 1-2, 6, 148-151). 이처럼 통감부 시기 대한제국에서는 콜레라 방역 활동에 집중적으로 돌입하는 ‘전시’ 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위생 업무를 수행하는 ‘평시’에도 일본 육군의 개입이 일상화되었으며, 1907년 콜레라 방역의 경험이 그 원형을 이루었다고 볼 수 있다.
5. 맺음말
1907년은 광제원, 의학교, 대한적십자병원이 대한의원으로 통폐합되고 콜레라 유행에 대한 식민지 방역 체계의 기틀이 형성됨으로써 사실상 보건 위생 분야의 한일 병탄이 이루어진 해였다. 일본 메이지 정부는 막부 말기에 열강과 맺은 불평등조약의 개정을 최우선 외교 과제로 삼으며 ‘문명국’의 조건으로서 보건 위생의 중요성을 체감하였고, 이를 역이용하여 대한제국 침탈의 첨병으로 활용하였다. 따라서 통감부와 조선총독부를 통하여 약 39년 6개월간 자행된 불법적인 통치의 성격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1907년에 이루어진 위의 두 가지 사건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본고는 이 가운데 심도 있는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았던 1907년의 콜레라 유행과 식민지 방역 체계의 형성 과정을 다각적으로 드러내려고 하였다. 그 논점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1907년의 콜레라 유행은 동아시아 전역을 끌어들인 세계사적인 사건이었다. 청과 일본을 통하여 대한제국에 유입된 콜레라는 부산과 평양 지역을 중심으로 맹위를 떨치고 경성과 인천 지역에서도 비교적 크게 유행하며 기존의 인식과는 달리 보건상의 큰 위기를 초래하였다. 위압적인 방역에 대한 한국인의 비협조와 임시방역본부의 소극적 조사로 인하여 대다수의 한국인 환자가 집계에서 누락되었다고 판단되며, 이러한 경향은 일제강점기 내내 이어졌다. 조선총독부의 폭압적인 위생 단속과 터무니없는 전염병 통계의 원형이 통감부 시기에 나타난 것이다.
둘째, 1907년의 콜레라 방역은 일제에 의하여 여제 등의 전근대적인 요소가 배제되고 경찰과 군대가 대거 투입된 점에서 이전의 방역과 달랐다. 임시 방역본부가 설치되기 이전부터 콜레라 방역 및 검역이 경찰 인력을 통하여 이루어지고 있었지만, 일본 황태자의 방한 일정이 코앞에 다가온 상황에서도 그 효과가 나타나지 않자 육군 주도의 거대한 방역 조직이 하루아침에 편성되었다. 임시방역본부의 활동은 강압적이고 폭력적인 데 그치지 않고 방만하기까지 하였다. 방역 과정에서 발생한 일반인의 피해는 대체로 보상받지 못하였고, 대책 없는 규제로 위생 상태가 악화되는 일도 있었다. 게다가 당국의 상황 판단에 따르면, 일본 황태자의 한국 행계를 성사시키려는 방역의 목적상 가장 중요한 경성과 인천 지역은 콜레라의 유행이 종식된 이후에 대대적인 방역 활동이 펼쳐진 것이었다. 일본 황태자가 귀국하자마자 임시방역본부의 기능은 축소 및 폐지되었다.
셋째, 임시방역본부의 조직을 지시한 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군의총감 사토 스스무와 다소 착종된 관계를 맺으며 정치적 필요에 따라 그를 이용하였다. 1906년, 이토는 대한의원 설립을 통한 한국의 의료 장악을 무난하게 추진하기 위하여 사토의 네임 밸류를 필요로 하였고, 극구 고사하는 그를 메이지 천황의 권위를 빌려 창립위원장에 앉혔다. 그러나 1907년, 일본 황태자의 방한을 앞두고는 자신의 정치적 행보에 해가 될 것을 염려하여 천황의 명을 받고 한국의 위생 상황을 파악하려는 사토의 임무 수행을 막고자 하였다. 결국 경성에 파견된 사토가 행계의 중지를 권고하였지만, 이를 무시하면서도 임시방역본부의 고문을 맡기는 이중적인 행보를 보였다.
넷째, 애초에 임시방역본부가 설립된 이유는 이토 히로부미가 자신의 식민 통치 구상을 실현하기 위하여 한국과 일본에서의 콜레라 유행, 메이지 천황의 우려 표명, 사토의 중지 권고 등 여러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일본 황태자의 한국 행계를 강행하였기 때문이다. 한국 황실의 장악과 일본식 통치 방식의 이식이라는 목적을 달성하려면 한국 행계를 실현시켜 한국 황태자의 일본 유학을 위한 명분을 쌓고 자신과 통감부에 대하여 악화된 여론을 잠재울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이토는 이러한 주도면밀한 계산에 따라 한일 양 황실과 정부를 자신의 정치적 도구로 이용하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다섯째, 임시방역본부가 육군 주도의 조직이 된 것은 한국경찰의 방역 수준과 역량이 낮은 데서 비롯되었다. 임시방역본부 편성 이전에 방역 활동을 지휘하였던 경시총감 마루야마는 이토에게 질책을 받고 경성 한국인 구역의 일개 방역위원장으로 격하되었다. 경무국장 마쓰이를 비롯한 한국경찰은 영국의 이집트 콜레라 방역 사례 등을 조사하며 조직의 확장을 위하여 노력하였으나 헌병의 지휘 하에 편입되며 헌병경찰 제도의 수립으로 이어졌다. 임시방역본부의 군사적 성격은 이후 한성위생회와 1909년의 콜레라 방역으로 계승되어 무단적인 위생 단속과 방역 체계를 고착화하였다.
1907년 임시방역본부의 고문과 부총장을 맡은 군의총감 사토 스스무, 군의감 후지타 쓰구아키라, 경무국장 마쓰이 시게루가 당시의 상황을 훗날 각각 “일한 양국 장래의 국교 상 참으로 경하할 만한 일”, “완전히 전장(戰場)의 광경”, “재임 중 가장 영광으로 여기는 사건”으로 회고하였듯이, 1907년의 콜레라 유행과 방역은 통감부 체제에서 조선총독부 체제로 이행하는 과도기의 식민지 방역 체계 형성에 변곡점으로 작용하며 한국 의학사 및 질병사에서도 ‘기억되어야 할 사건’으로 남았다(谷紀三郞, 1914: 287; 陸軍軍醫團, 1943: 148; 松井茂, 1952: 248-249).
Notes
막부 말기부터 서양 열강들과 불평등조약을 체결한 일본은 이러한 조약을 개정하기 위하여 ‘문명국’의 지위를 얻어야 하였고, ‘문명’에의 지름길인 위생 개혁에 매진함으로써 이를 달성할 수 있었다. 위생이 곧 문명이라는 인식 하에서 보건 의료는 ‘미개한’ 식민지에 ‘문명’을 전수하기 위하여 반드시 장악해야 하는 것이었다.
대한적십자병원은 외교적으로 중립을 지키려는 대한제국의 의지의 산물이자 명목상 황실 소속이었지만, 실제로는 설립 계획 단계부터 실제 운영에 이르기까지 모두 일본인에 의하여 이루어졌기 때문에 이미 일제의 의도가 반영된 것이라 볼 수 있다(이규원·최은경, 2018).
단일 콜레라 유행을 다룬 역사 연구가 많이 이루어지는 상황에서도 1907년의 상황이 좀처럼 다루어지지 않은 데에는 유행 규모에 대한 과소평가도 한몫하였을 것이다.
해당 부분을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 8월부터 한성과 평양에 콜레라가 유행하였기 때문에 한때 궁내성이 후지타 쓰구아키라 대한의원장에게 황태자 도한의 연기를 요청하는 사태까지 발생하였다.”
「山城丸內の類似虎列剌」, 『讀賣新聞』, 1907년 8월 1일; 「山城丸の患者は眞症虎列剌」, 『讀賣新聞』, 1907년 8월 3일; 「長濱避病院虎列剌に就て」, 『讀賣新聞』, 1907년 8월 6일.
1907년 총 환자 3,632명(인구 10만 명당 발생률 7.7), 사망자 2,526명(인구 10만 명당 사망률 5.3, 치명률 69.6%)으로, 1896년 이후 1915년까지 1902년을 제외하면 최악의 유행을 보였다(內務省衛生局, 1924: 24-29).
「虎列剌患者發生」, 『朝鮮新報』, 1907년 7월 25일; 「虎列剌發生」, 『讀賣新聞』, 1907년 7월 26일.
「傳染病の流行」, 『朝鮮新報』, 1907년 8월 21일. “멀리 한국에 와 있으면서 전염병에 쓰러져 더럽게 죽는 것만큼 유감스러운 일은 없다. 우리는 하기 전염병의 유행을 들을 때마다 일본인의 위생상 주의를 촉구함과 동시에 어떻게 한인 부락의 불결함을 면할지의 문제를 생각해야 한다.”
「虎列拉猖獗」, 『大韓每日新報』, 1907년 8월 22일; 「虎列拉蔓延」, 『大韓每日新報』, 1907년 8월 24일; 「虎列大熾」, 『大韓每日新報』, 1907년 8월 24일; 「虎列刺의 猖獗」, 『皇城新聞』, 1907년 8월 27일; 「虎烈流行」, 『大韓每日新報』, 1907년 8월 30일.
「釜山元山の檢疫」, 『朝鮮新報』, 1907년 8월 24일; 「檢疫施行」, 『朝鮮新報』, 1907년 8월 29일.
「虎烈流行」, 『大韓每日新報』, 1907년 8월 30일; 「統照內部」, 『皇城新聞』, 1907년 8월 31일.
의사 콜레라는 임상적으로 진단된 것으로 콜레라균의 검출이 확인되지 않았을 뿐 진성 콜레라일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コレラ」, 『朝鮮新報』, 1907년 10월 2일).
「虎列流行」, 『大韓每日新報』, 1907년 9월 10일; 「コレラ猖獗」, 『朝鮮新報』, 1907년 9월 11일.
「船舶檢疫」, 『大韓每日新報』, 1907년 9월 12일; 「仁川稅關の檢疫」, 『朝鮮新報』, 1907년 9월 12일.
「平壤檢疫」, 『大韓每日新報』, 1907년 9월 14일.
「惡疾流行」, 『大韓每日新報』, 1907년 9월 13일; 「虎列剌の蔓延」, 『朝鮮新報』, 1907년 9월 14일; 「疹氣不絶」, 『大韓每日新報』, 1907년 9월 18일.
훗날 다이쇼(大正) 천황이 되는 요시히토(嘉仁) 친왕을 가리키며, 이후에도 ‘일본 황태자’로 표기할 것이다.
「皇太子殿下 韓國視察 件」, 『統監府文書』 電來 第44號, 1907년 9월 18일.
「京城の虎列剌」, 『朝鮮新報』, 1907년 9월 19일; 「又々京城の虎列剌」, 『朝鮮新報』, 1907년 9월 20일.
「虎列致屍調査」, 『皇城新聞』, 1907년 10월 3일.
「疾病調査」, 『大韓每日新報』, 1907년 9월 27일; 「査病有無」, 『皇城新聞』, 1907년 9월 29일.
「虎列剌續出」, 『朝鮮新報』, 1907년 9월 27일.
「居留地附近の虎疫」, 『讀賣新聞』, 1907년 9월 29일. 이로 인해 농부(農部) 서기관 이문하(李文夏)가 출근을 못하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하였다(「椒洞設網」, 『皇城新聞』, 1907년 10월 1일).
「檢疫設置」, 『大韓每日新報』, 1907년 9월 29일; 「檢疫部設寘」, 『皇城新聞』, 1907년 9월 29일.
「講習檢疫」, 『皇城新聞』, 1907년 10월 1일.
「日醫衛生」, 『大韓每日新報』, 1907년 10월 1일.
「仁川の虎列剌」, 『朝鮮新報』, 1907년 10월 1일.
「豫防事務所設置」, 『朝鮮新報』, 1907년 10월 1일.
「大淸潔と健康診斷」, 『朝鮮新報』, 1907년 10월 2일. 특히 인천이사청 이사관 시노부 준페이(信夫淳平)는 “불결한” 청국인 거리에 콜레라가 발생한 것을 계기로 청국 영사를 방문하여 “충분히 협력하여 콜레라의 박멸에 종사할 것을 제의”할 정도로 방역에 적극적이었고, 인천부윤 김윤정(金潤晶)은 방역 활동에 “여느 때처럼 한국적 소홀함이 없도록” 촉구하였다(「餘錄」, 『朝鮮新報』, 1907년 10월 3일). 전 시민 대상의 건강진단은 반대하는 거류민이 있을 정도로 강제적인 것이었지만, 속행하기로 결정되었다(「健康診斷尙續く」, 『朝鮮新報』, 1907년 10월 4일).
「船中の虎列剌」, 『朝鮮新報』, 1907년 10월 1일.
임시방역본부를 실질적으로 지휘하고 제반 계획과 지도를 맡은 인물은 부총장인 후지타였다(韓國統監府, 1908: 50; 최규진, 2016: 56).
경무국장 마쓰이의 부총장 직함은 “오로지 법률적인 역할”에 그치는 형식적인 것이었다(陸軍軍醫團, 1943: 147).
본 규정에서는 경성 지역을 갑구(甲區, 일본 관청·관사 및 일본인 거리)와 을구(乙區, 한국 관청·관사 및 한국인 거리)로 나누어 차별적이고 비대칭적인 방역을 명문화하였다.
「コレラ撲滅計畫」, 『朝日新聞』, 1907년 10월 6일.
「韓國現地의 虎列刺防疫現況 및 日皇太子迎接 件」, 『統監府文書』 往電 第9號, 1907년 10월 6일.
그 면면은 다음과 같다. 방역총장 육군 중장 오카자키 세이조, 고문 육군 군의총감 사토스스무, 방역부총장 육군 군의감 후지타 쓰구아키라 및 내부 경무국장 마쓰이 시게루, 방역본부위원 통감부 서기관 고마쓰 미도리(小松綠), 육군 이등군의정 시바오카 분타로(柴岡文太郞), 통감부 서기관 사와다 우시마로(澤田牛麿), 오기타 에쓰조(荻田悅造), 고다마히데오(兒玉秀雄), 육군 삼등군의정 무라카미 기요시(村上潔), 통감부 기사 고야마 젠(小山善), 육군 보병대위 마쓰에 도요히사(松江豊壽), 히로세 스에히코(廣瀬季彦), 육군 일등 주계 우에무라 마쓰노스케(植村松之助), 육군 일등군의 데라카와 겐(寺川源).
방역감시원의 구역과 담당 인원수는 경성 및 용산 총 감시 5명, 경성 갑구 내 동구 4명, 경성 갑구 내 중구 3명, 경성 갑구 내 서구 3명(이상 경성 갑구 10명), 경성 을구 4명, 용산구 3명, 인천구 3명으로, 어디까지나 경성 내 일본인을 위한 방역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방역감시원은 전원 육군 소속이었다.
「防疫本部の諭達」, 『朝鮮新報』, 1907년 10월 8일.
「虎病大檢疫」, 『朝鮮新報』, 1907년 10월 12일.
음식물 단속과 검역을 제외하면 대부분 상대적 인구가 압도적으로 적은 일본인 위주로 이루어졌다. 이를테면 경성, 인천, 부산 지역에서 이루어진 방역 조치를 인구 대비로 환산하였을 때, 교통 차단 연인원(延人員)은 일본인이 한국인의 약 397.2배, 준설 우물 수는 약 7.7배, 폐쇄 우물 수는 약 5.6배, 관비 급수 연인원은 약 18.6배, 식량 지급 연인원은 약 4.2배에 달하였다(韓國統監府, 1908: 72-76, 統監府, 1909: 26-27).
경무국 보안과장 이와이 게이타로(岩井敬太郞)는 한국경찰의 전신인 고문경찰(顧問警察) 시대(1895∼1907)의 연혁을 편찬하며 당시 한국에 다수의 전염병 예방 관련 규칙이 있었으나 “실제로는 처음부터 공문(空文)에 불과하고” “대부분 일본의 규정을 직역한 것이라 한국의 현상(現狀)에 적합하지 않”았다고 평가하였다(韓國內部警務局, 1910: 223). 1902년 콜레라 유행 때 조선 정부와 한성부에서 해항 검역, 오물 및 쓰레기 처리, 개천 소독 등의 조치를 취하였으나 미미한 것이었고, 계속되는 유행에 결국 여제(厲祭)에 기대고 말았다(신동원, 1997: 241-245). 따라서 일제에 의한 1907년의 콜레라 방역은 무단성과 더불어 일종의 단절성을 띠는 것이기도 하다.
「日打韓婦」, 『大韓每日新報』, 1907년 10월 12일.
「沐浴消毒」, 『大韓每日新報』, 1907년 10월 6일.
1910년대에 경기도 수원군 화수리(花樹里) 주재소 순사 가와바타 도요타로(川端豊太郞)가 “엄격한 ‘청결 검사’에서 먼지가 남았다든가 변소가 더럽다는 이유로 닥치는 대로 조선인들의 뺨을 때”렸다는 증언이 있듯이, 1907년 콜레라 방역의 폭력성은 조선총독부의 위생 단속에서도 이어져 나타났다(마쓰다 도시히코, 2019: 103-104).
「編輯日誌」, 『朝鮮新報』, 1907년 10월 4일; 「讀者俱樂部」, 『朝鮮新報』, 1907년 10월 11일. 미키 사카에(三木栄)는 “인권을 침해하지 않는 범위에서 계엄령적으로 이를 실행하고 만연을 방지할 수 있어서 16일 전하를 맞아 20일 무사히 환송할 수 있었다”고 평가하였지만, 이는 통감부와 방역본부의 입장을 대변한 것에 불과하다(三木栄, 1991: 286-287).
이러한 처벌 조항은 경성이사청령 제3호, 제4호, 제5호, 한국청령 제1호, 인천이사청령 제7호, 제8호, 평양이사청령 제3호 등에 나타난다(韓國統監府, 1908: 52, 54, 58-60, 66). 신동원은 위생 사범에 대한 구류 등의 실형이 통감부 설치 이후 1905년에 처음 명문화되었으며, 이는 일본에서도 볼 수 없는 무단적인 것이었다고 지적한다(신동원, 1989: 84).
「食水困難」, 『皇城新聞』, 1907년 10월 8일; 「讀者俱樂部」, 『朝鮮新報』, 1907년 10월 10일; 「食水困難」, 『大韓每日新報』, 1907년 10월 12일.
「미위해지」, 『大韓每日新報』, 1907년 10월 17일; 「漢城民情」, 『皇城新聞』, 1907년 10월 17일.
경성이사청 관할 구역에 등록된 일본인 인구 22,059명의 85.2%에 달하는 인원이기 때문에 사실상 갑구 내 일본인 전원을 검사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결과론적인 해석이지만, 경성과 인천 지역에 한정하여 말하자면, 일본 황태자의 방한을 성사시키기 위하여 정무적 판단에 따라 임시방역본부를 급조한 것이 ‘무익한 소란’이었다는 비난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어 보인다. 하지만 제한적으로 이루어졌을 세균학적 검사 결과가 모든 상황을 반영하는 것은 아니므로 임시방역본부의 활동이 ‘진성’ 콜레라의 방역에 무익하였다고 단정하기도 어렵다.
「編輯室より」, 『讀賣新聞』, 1907년 10월 12일. 당시 일본에서도 전방위적인 콜레라 방역이 펼쳐지고 있었지만, 끊임없는 만연으로 유행의 종식은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국가에 의하여 근대적인 방역과 역학적 추적 등이 이루어지는 한편으로, 환자의 발생을 은폐하거나 미신에 기대는 국민이 많았고, 심지어는 도쿄에서 200여 명의 마을 주민이 콜레라 격리병원으로 지정된 히로오병원(廣尾病院)을 불태우려는 소동까지 벌어졌다(「廣尾病院を燒打にせんとす」, 『讀賣新聞』, 1907년 11월 4일; 「廣尾病院問題」, 『讀賣新聞』, 1907년 11월 5일). 마찬가지로 도쿄의 오쿠보병원(大久保病院)도 1907년에 촌장이 철거 요청을 한 데 이어 이듬해 2월에 방화 소동이 벌어지는 등 당국의 방역과 격리 조치에 대한 주민의 반발은 돌발적인 것이 아니었다(磯貝元, 2011: 86).
「檢疫巡檢賞金」, 『皇城新聞』, 1907년 12월 29일.
“의주 부근”에는 압록강 연안의 각 지역이 포함되어 있다(韓國統監府, 1908: 91).
이와 관련하여 미키 사키에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전염병 발생 통계 수는 자발적 신고의 것도 있겠지만, 전부라고 하여도 될 만큼 검병적 호구 검사의 결과로서 발견하여 얻은 것으로, 즉 표면에 나타난 발생 수에 불과하다. 이는 어느 국가에서도 사회가 혼돈한 시대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러한 통계적 성적은 점차 개선되어 왔지만, 총독부 정치의 후기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다분히 이 상태는 지속되었다. 조선의 전염병을 조사할 때 주의해야 하는 것이다.” (三木栄, 1991: 287)
최소한 콜레라 환자와 사망자의 집계가 시작된 이래로는 1907년의 유행이 일본인 인구 대비 최대 규모의 유행이었다. 다만 1919∼1920년의 조선인 콜레라 발생률과 사망률이 일제강점기 최고 수준을 기록한 바 있으나 해당 연도 외에는 신뢰할 만한 집계가 이루어졌다고 보기 힘들기 때문에 상대적 평가에 어려움이 있다. 일례로 1916년 유행 때 일본인의 피해는 매우 컸지만, 조선인의 피해는 미미한 것으로 집계되었다.
이토 히로부미가 사토를 가리켜 청일전쟁 때 이홍장을 치료한 공적으로 남작, 러일전쟁에서 군의총감으로 활약한 것으로 자작, 한일합병의 공적으로 백작의 가치가 있지만, 자신을 내세우거나 아첨하지 않아 남작에 머물렀다는 우스갯소리를 남겼다고 한다(森田美比, 1981: 184-185). 이처럼 사토는 이토 본인이 인정하는 의학 분야의 ‘이토 히로부미’였다(황상익, 2013: 721).
이토가 천황에게 황태자 행계를 주청한 1907년 9월 16일 즈음의 일로 여겨진다.
1907년 9월 18일 즈음의 일로, 이미 경성에 첫 의사 콜레라 환자가 나왔지만 파악되지 않은 시점이라 여겨진다.
시의국(侍醫局) 소속이 아닌 자가 황태자를 수행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森田美比, 1981: 191).
당시 규슈 지역은 콜레라 사망자가 9월에만 326명이 나올 정도로 콜레라 유행의 정점에 있었고 시코쿠 지역도 점차 만연하고 있었다(內閣統計局, 1910: 10-57). 따라서 사토의 판단은 적어도 역학적 사실에 기초한 것이 아니었다.
사토는 같은 육군 소속으로 이후 초대 조선총독이 되는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内正毅)에게도 그리 달가운 인물은 아니었다. 후지타가 통감부 위생 고문으로 부임한 것도 데라우치 육군대신으로부터 “사토는 의사 행정 방면에 밝지 않지만 너는 대만의 경험도 있고 참으로 적재이니 사토를 표면에 내세우고 수고스럽겠지만 한국의 위생 방면의 일을 다시 한 번 해주길 바란다”는 청이 있었기 때문이다(陸軍軍醫團, 1943: 150; 최규진, 2016: 52).
일본 황태자의 도한과 관련된 상황만으로 메이지 천황이 평소에 이토보다 사토를 더 신뢰하였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자신의 정치적 목적에 따라 일본 황태자 도한을 강행하려는 이토를 견제하기 위하여 일본 의학계의 권위자인 사토를 내세운 것으로 해석될 수는 있다.
「姑無確信」, 『大韓每日新報』, 1907년 10월 6일; 「仁川の大光榮」, 『朝鮮新報』, 1907년 10월 6일.
「宮中の虎疫豫防」, 『讀賣新聞』, 1907년 9월 5일; 「虎列剌病豫防の通牒」, 『讀賣新聞』, 1907년 9월 13일.
「山口縣行啓御中止」, 『讀賣新聞』, 1907년 9월 25일. 시모노세키항이 있는 야마구치현은 환자 229명, 사망자 145명을 내며 일본에서 후쿠오카현, 효고현(兵庫縣), 오사카부에 이어 네 번째로 유행이 심각하였던 지역이다(內閣統計局, 1908: 648-649).
유학은 명분일 뿐, 인질로서 궁정의 반일 태세를 차단시키고 한국 황실을 일본에 동화시키기 위한 사실상 납치에 가까운 것이었다(한상일, 2015: 347).
재한 일본인 사회에서도 통감부의 방침이 거류민의 이익을 도외시한다는 이유로 “일본인의 통감부가 아니라 한국의 통감부”라는 비난을 받았고, 비난의 강도는 헤이그 특사 사건 이후 더 높아졌다(「京城たより」, 『朝鮮新報』, 1907년 5월 1일; 「當局の對韓態度」, 『朝鮮新報』, 1907년 7월 25일).
이토는 통감뿐만 아니라 제실제도조사국(帝室制度調査局) 총재로서 일본의 통치 개혁에도 종사하며 한국과 일본의 많은 정적과 대립하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무리하게 추진하여 확정된 행계가 중지될 경우 자칫하면 정치생명까지 위협받을 수 있었다(瀧井一博, 2010: 288).
「日皇太子 來韓時 韓皇帝, 皇太子 仁川港口迎接 件」, 『統監府文書』 往電 第14號, 1907년 10월 7일.
「皇上陛下 兩陵展拜」, 『皇城新聞』, 1907년 10월 12일; 「陵行儀節」, 『皇城新聞』, 1907년 10월 13일.
경찰 주도의 방역 활동도 충분히 무단적이지만, 본 절에서는 식민지 방역 체계의 형성 과정에 일본 육군이 개입하게 된 계기와 그 영향에 초점을 맞추어 논의할 것이다.
“통감은 한국의 안녕 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필요하다고 인정될 때는 한국수비군의 사령관에 대하여 병력의 사용을 명할 수 있다”(「勅令第二百六十七號」, 『官報』 第六七四四號號外, 1905년 12월 21일).
통감은 메이지 헌법 하에서 문관이 군대의 지휘권을 행사할 수 있는 유일한 관직이었다(瀧井一博, 2010: 297).
물론 한국주차군 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치의 반발을 샀다. 비록 육군의 저항으로 실패로 돌아갔지만 이토는 일본의 헌법개혁을 통하여 내각에 의한 군부 억제를 시도한 적이 있는 바, 한국에서의 군 통제는 그 실현을 위한 선례이자 실천의 장으로서 위치지어질 수 있다(瀧井一博, 2010: 323, 330).
「韓国ニ駐箚スル憲兵行政警察及司法警察ニ関スル件」(1906년 2월 8일, 国立公文書館 御 06521100). “한국에 주차하는 헌병은 군사경찰 외에 행정경찰 및 사법경찰을 관장한다. 단, 행정경찰 및 사법경찰에 관하여서는 통감의 지휘를 받는다.”
「韓国ニ駐箚スル憲兵ニ関スル件」(1907년 10월 7일, 国立公文書館 御07233100). “제1조 한국에 주차하는 헌병은 주로 치안 유지에 관한 경찰을 관장하고 그 직무의 집행에 관하여서는 통감에게 예속되며, 또한 한국주차군 사령관의 지휘를 받아 군사경찰을 관장한다. 제2조 헌병대 본부의 위치 및 분대의 배치 및 그 관할 구역은 통감이 정한다. 제3조 통감은 필요할 때 일시적으로 헌병대 일부를 그 관할 구역 밖으로 파견할 수 있다. 제4조 헌병의 복무에 관한 규정은 통감이 정한다. 단, 군사경찰에 관한 것은 한국주차군 사령관이 정한다. 제5조 앞 조항의 규정 외에 한국에 주차하는 헌병에 관하여서는 헌병조례에 의거한다. 부칙 본령은 공포일부터 시행한다.”
경무국장 마쓰이가 1910년에 “특히 경성에서는 경시청의 적지 않은 진력에 의거하여 근래 도로의 청결이 크게 볼 만하”다고 자평하였듯이, 일반적인 위생 사무는 한국경찰이 담당하였다(松井茂, 1910: 273).
당시 일본의 위정자뿐만 아니라 일반인까지 일본과 한국의 관계를 영국과 이집트의 관계에 빗대며 이집트 총영사로서 사실상 ‘이집트 총독’의 역할을 수행한 에벌린 베링(Evelyn Baring, 통칭 크로머 경) 식의 식민 통치를 촉구하였다(井上雅二, 1906; 「伊藤侯の對韓策(續)」, 『朝鮮新報』, 1907년 2월 8일; 「京城たより」, 『朝鮮新報』, 1907년 5월 1일; 「對韓時論」, 『朝鮮新報』, 1907년 5월 7일; 「覺悟如何に在り」, 『朝鮮新報』, 1907년 7월 31일).
「統監命令」, 『大韓每日新報』, 1907년 10월 6일.
1909년 9월 24일에 임시방역본부규정이 고시되어 내부 차관 오카 기시치로(岡喜七郞)가 본부장에, 군의부장 후지타 쓰구아키라, 경성이사관 미우라 야고로(三浦彌五郞), 경무국장 마쓰이 시게루가 부장(副長)에, 대한의원장 기쿠치 쓰네사부로(菊池常三郞), 지방국장 사와다 우시마로, 헌병대장 사카키바라 쇼조(榊原昇造), 일등군의정 기타무라 시즈모(北村徐雲), 토목국장 겸 위생국장 유맹(劉猛), 한성부윤 장헌식(張憲植), 사세국장 스즈키 시즈카(鈴木穆), 경성거류민단장 구마가이 라이타로(熊谷賴太郞), 용산 거류민단장 오쿠보(大久保), 경시부감 구연수(具然壽), 삼등약제정 데라다(寺田)가 평의원에, 경시총감 와카바야시 라이조(若林賚蔵)가 집행위원장에 임명되었고, 그 외에 감시위원 8명, 간사 4명, 서기 13명이 추가되었다(內部警務局, 1909: 135-137).
이토는 경무국장 마쓰이에게 “경찰을 헌병의 지휘 하에 통일시키면 어떨지” 자주 의중을 드러낼 정도로 경찰력에 의한 치안 유지에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松井茂, 1952: 265). 주로 의병 투쟁이 격화되는 상황을 염두에 둔 것이지만, 여기에 경찰의 ‘무능한’ 콜레라 방역에 대한 실망감도 더해졌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결국 강제 병합 직전인 1910년 6월에 한국경찰이 헌병대에 통합됨으로써 식민지 초기의 무단정치를 상징하는 헌병경찰 제도의 성립으로 이어졌다.
한성위생회는 통감부가 조직한 최초의 위생 활동 단체로서 병합 이후에도 식민지 위생 체계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였다(박윤재, 2004: 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