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국내파’ 여성의사 안수경(安壽敬), 김영흥(金英興), 김해지(金海志) 연구†
The study on the first women doctors in Korea, AHN Soo-kyung, KIM Young-heung, and KIM Hae-j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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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This study examined three women, AHN Soo-kyung, KIM Youngheung and KIM Hae-ji, who were officially licensed as doctors for the first time in Joseon. I wanted to find a new “starting point” of women’s medicine history by scrutinizing their home environment, medical classes, graduation and medical license, and life after becoming doctors. The parents of KIM Young-heung and KIM Hae-ji might have been enlightened and Christians. AHN Soo-kyung did not have a Christian family. Her father, AHN Wang-geo, who was both an educator and a poet, was aware of the need for women’s education or modern education. Female medical missionaries such as Rosetta S. Hall and Mary Cutler also worked hard to get them admitted to the medical class.
They went to school with a female guardian and a brother and adapted to school life safely. After graduating from Kyongsung Medical College they obtained doctors’ licenses and continued their medical activities at the hospital.
KIM Young-heung actively engaged in social activities as a female intellectual by giving public lectures. She worked as a doctor in Kyongsung, Pyongyang, and Incheon. KIM Hae-ji did medical work and got married in Pyongyang. However, she had a hard time due to her husband’s death and a medical accident. In the end, she seems to have left the medical field by returning her medical license.
AHN Soo-kyung had been working at Dongdaemun (East Gate) Women’s Hospital for more than 20 years and was willing to participate in what she could do as a woman, doctor and intellectual. Therefore, she established a free maternity clinic in the hospital. She defended Joseon’s students and hospitals in protest of the controversy of nursing school and the move to abolish Dongdaemun Women’s Hospital. She quietly participated in the Dong-Ah Women’s Association and 6.10 the Independence Movement by doing anything she could do to help. She had a shy personality, but she faithfully fulfilled her duty as a doctor with a strong professional sense that saving people was her calling.
1. 서론
여성사를 연구하는 방법은 역사 속에서 뛰어난 여성인물을 발굴해 내어 남성 중심의 기존 역사를 보충하는 ‘보완사(compensatory history)’, 역사의 발전 과정이나 사회운동 등에서 여성이 어떻게 역할, 기여했는가를 연구하는 ‘공헌사(contribution history)’, 생물학적 성이 아닌 사회적 성별 차이, 차별에 주목하는 관점에서 양성의 관계와 구조를 분석하는 ‘젠더사(gender history)’ 등을 꼽을 수 있다. 특히 2010년을 전후로 한국 근대여성사 연구는 여성의 자각과 관련된 신여성, 여성운동, 여성교육과 관련된 연구가 가장 많으며(홍양희, 2013) 최근에는 젠더사 연구를 통해 전통적 여성사의 범주를 넘어서는 역사학의 패러다임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고 한다(김정인, 2016). 그러나 이러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보완사나 공헌사적 관점에서조차 충분한 연구가 이루어지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과거 역사 속 여성 인물들에 대한 충분한 발굴과 조명도 아직 제대로 완수되었다고 보기 힘들다. 또한 남성중심적 시각에서 기술된 기존의 문헌자료를 비판하고 재해석하는 작업도 필요하다(정현백, 2012: 72).
의사라는 직업은 근대 초기 조선 여성들이 사회진출을 할 수 있었던 대표적인 전문 직종 중 하나이다(이배용, 1999). 여성이 근대교육을 통해 가질 수 있는 전문직은 의사, 교사, 언론인, 예술가 정도였다. 의사는 힘든 수련과정과 고난도의 학습을 요구하는 직업이었지만, 건강과 질병치료를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직업이기도 했다. 특히 여성의사는 내외법이 상존하던 조선 사회가 근대화되기 위해서는 매우 절실한 존재였다. 그래서 여성의료진의 필요성은 서양근대의학이 도입된 직후부터 대두되었다.1)
조선에 온 기독교 여성선교사들은 의료선교의 한 방법으로 조선 여성들과 접촉하면서 조선여성들 중에서 의료인을 양성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최초의 여성병원인 보구녀관을 설립하고 박에스터를 비롯해 여학생들을 미국, 일본으로 유학 보내 의학공부를 하게 도운 것, 간호사 양성을 위한 간호학교를 세운 것 등은 그러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특히 조선여성의사 양성에 큰 기여를 한 로제타 홀(Rosetta Sherwood Hall)은 조선총독부의원 부속 의학강습소(이하 의학강습소로 약칭)의 청강생으로 여학생들을 위탁 교육하는 일도 추진했는데(김성은, 2007) 그 결과 최초로 조선 내의 교육으로 의사가 된 조선여성이 안수경(安壽敬), 김영흥(金英興), 김해지(金海志)이다. 그러나 그동안 근대 초기 여성의료인을 발굴한 연구들의 다양한 성과에도 불구하고2) 역사학, 의학사의 주요 논자들에서 경성의전의 여자 청강생 문제는 여자의학강습소나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에 비해 주목되지 않았고, 다음과 같이 아예 누락되어 있는 경우도 많았다.
총독부는 여성의 의학교육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갖고 있지 않아 한국 여성은 일본 여자의학전문학교에 유학을 해야 하는 형편이었다. 이러한 시기(1928년)에 미국 북감리교 선교의사 홀(Dr. RS Hall)의 제창과 여의사 길정희와 의사 김택원 부부의 노력으로 경성여자의학강습소를 설립하고 의사시험 준비 과정의 의학교육을 시작하였다.3)
조선 내에서 여자의사 양성을 위한 근대의학교육이 시작된 것은 1890년 외국인 선교사인 ‘홀’부인이 이화학당 졸업생 5명에게 의학을 가르치면서부터이다. 한국 최초의 여의사는 1900년에 와서야 출현하였다. 그가 바로 박에스터이다. (…) (박에스터는-인용자주) 서울은 물론 지방을 두루 다니며 진료에 열중하다가 심한 과로로 폐결핵에 걸려 34세로 타계하였다. 홀 부인의 병원은 그 후 1928년 경성여자의학강습소로 발전되어 조선내에서도 여성을 위한 공식적인 의학교육 기관이 마련되었다. 그 이전에는 의사가 되고자 하는 여성들은 주로 일본에 유학하여 의학을 공부하였다.4)
위와 같이 대표적인 의학사, 여성사 연구에서도 여성의사의 계보를 “박에스터→일본여자의학전문학교 출신→경성여자의학강습소 졸업생” 순서로 잇고 있다. 2012년 대한의사협회 의료정책연구소에서 작성한 연구보고서 「우리나라 근현대여성사에서 여의사의 활동과 사회적 위상」(주양자 외, 2012)에서도 이러한 시각은 이어진다. 이 보고서에서는 “1900년 최초의 여성의사 박에스터 이후 현재까지 여성계와 의료계에서 간과 또는 축소되거나 누락된 여성의사들이 근대기 이후 한 시대의 지식인으로 어떻게 살았는지를 조망하고자 당시 신문, 잡지 등 언론매체와 관련자료 등을 토대로 살펴보고자”(주양자 외, 2012: 5) 하였으나 이들 세 사람에 대한 언급은 다음과 같이 소략하다.
1914년 조선총독부가 우리나라 여성의학교육의 선구자인 로제타 홀의 건의를 받아드려[sic 원문의 오탈자임-인용자 주] 조선총독부의원 부속의학강습소(1916년 경성의학전문학교로 승격됨)에서 조선여학생 안수경, 김해지, 김영흥 등 3명의 여학생을 청강생으로 받아들이기까지 남학생(1886년에 대해[sic] 의학교육을 실시)에 비해 28년이나 늦게, 청강생으로나마 여성에게 의학교육의 기회가 주어졌다. 그러나 그조차도 11년만인 1925년부터 청강생 입학이 금지되면서 국내 조선여의사 양성은 난관에 부딪혔다.(...)결국 1938년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가 설립되어 여성이 근대의학교육을 받을 수 있게 되기까지 조선의 여성이 현대의학을 공부하여 의사가 되는 방법은 순전히 개인의 의지와 노력으로 태평양을 건너거나 현해탄을 건너 남의 나라에서 의학교육을 받고 의사가 되거나 검정고시를 통과하여 의사가 되는 방법 밖에 없었다.5)
이 연구보고서의 위와 같은 서술은 김성은의 「로제타 홀의 조선여의사 양성」을 근거로 한 것으로 보인다. 김성은의 논문에서는 로제타 홀이 어떠한 노력으로 경성의학전문학교(이하 경성의전으로 약칭)에 여학생들을 청강생으로 참여할 수 있게 했는지를 비교적 상세히 다루고 있어 많은 참조가 된다. 그러나 이 논문에서는 로제타 홀을 중심으로 서술함으로써 그 청강생들의 이름조차 밝히지 않고 있다.
1918년 경성의학전문학교 과정을 수료한 3명의 조선여성들이 총독부의 의료면허증을 받았다.(...)이 세 명의 여의사는 경성의학전문학교의 의학과정을 마치고 의사면허를 취득함으로써 조선 국내에서 교육받은 최초의 여의사였다는 데 그 의의가 있다.6)
이와 같이 경성의전 수료생들은 ‘세 명’이라는 익명 속에 감춰져 있다. 심지어 어떤 글에서는 이들보다 후대인 1925년에 경성의전을 수료한 고수선을 ‘한국 최초의 여의사’라고 생각하기도 한다.7) 가장 최근에 나온 연구서 『한국의 과학기술과 여성』에서도 이들과 관련된 서술에는 오류가 있다.
박에스더는(...)35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두 번째로 의사가 된 여성은 1918년 도쿄여자의학교를 졸업하고 의사 시험에 합격한 허영숙이었다. 이후 해외에서 의학교를 졸업하고 의사가 된 여성이 차츰 증가하였다.(...)조선총독부 인가 의학교는 여성 입학을 허용하지 않았지만, ‘청강생’이라는 이름으로 교육을 하기도 하였다. 조선 여성에게 의학교육을 시킬 방법을 찾고 있던 선교 여의사 로제타 셔우드 홀의 노력으로 안수경, 김영흥, 김해지 등 3명의 여성이 경성의학전문학교에서 청강생 자격으로 공부하고 1918년 비공식적으로 ‘졸업’한 후 의사면허시험을 보아 의사가 되었다.8)
우선 조선에서 첫번째로 의사가 된 여성을 박에스더로, 두번째로 의사가 된 여성을 허영숙으로 서술한 부분이 틀렸다. 졸업은 허영숙과 안수경, 김영흥, 김해지 모두 1918년에 했으며, 의사면허를 받은 것은 허영숙은 1919년 11월인데, 안수경, 김영흥, 김해지는 1918년 5월로 1년 이상 앞서있기 때문이다. 또한 안수경 등 세 사람이 의사면허시험을 보아 의사가 된 것이라는 서술도 틀렸다. 이들은 당시 경성의전을 졸업한 남학생들과 마찬가지로 졸업 즉시 무시험으로 의사면허를 취득했다. 이 두 서술이 틀린 것은 이 책의 문제라기보단 이 책들이 해당 대목에서 인용한 논문들의 오류였던 듯 하지만, 그만큼 이들 세 사람에 대해서는 아직도 부정확하고 불충분하게 알려져 있는 것이다.
요컨대 그동안 의학사 연구에서는 초창기 근대식 여성의사의 중심을 미국에서 의학박사를 받은 박에스터나, 도쿄여자의학전문학교 출신인 허영숙, 길정희, 현덕신, 유영준 등의 해외파에 두었고, 국내파의 계보는 1928년 경성여자의학강습소, 1938년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가 설립된 이후부터로 보았다. 1910년대에 이미 경성의전에도 여자 ‘졸업생’이 있었고, 그들이 의사가 되었다는 사실은, 성명과 숫자로 간단하게나 부정확하게 언급되는 정도였던 것이다.
이러한 기존 연구들은 여성의학의 제도교육이 남성에 비해 많이 늦어졌고, 초기에는 특별한 혜택을 받은 극소수 여성에게만 의학교육이 가능했던, 당시 여성이 받은 교육적, 사회적 차별에 대한 문제제기로서는 의미가 있다. 그러나 여성의 억압과 차별의 역사 속에서도 새로운 길을 개척해 나갔던 선각자 여성들의 성취와 의의를 충분히 발굴해내지 않을 이유는 없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는 최초로 경성의전을 졸업한 3인의 여학생에 대하여 보완사와 공헌사적 시각에서 이들의 성장배경과 교육, 활동 등을 추적해보려 한다. 어떤 여성들이 어떻게 하여 의학공부를 할 결심을 했으며, 그들이 남학생들과 수업을 함께 받고 졸업을 하여 의사면허를 취득하기까지의 과정은 어떠했는지, 의사가 된 후 어떤 삶을 살았는지 등을 상세히 규명함으로써 의학사 속에서 이들의 정당한 자리를 마련해주고자 한다. 즉, 이들의 생애와 활동에 대한 실증적인 탐구를 통해 그동안 간과되어 왔던 여성의학사의 새로운 ‘기점’을 찾아볼 것이다.
2. 경성의학전문학교의 세 명의 여학생들-김영흥, 김해지, 안수경
1) 출신 및 가정환경
이들이 남학생들만 가득한 경성의전에 들어가고, 의사라는 힘들고 생소한 직업을 선택할 수 있게 한 가족들이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그리고 이러한 가정환경에서 세 여성은 어떤 계기로 의사의 꿈을 품게 되었을까. 우선 이들 세 사람 모두 유복한 가정에서 자란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김해지와 김영흥의 부모는 기독교신자들로서 로제타 홀과 인연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에 처음 되는 여의 세 명이 금년에 새로이 경셩의학전문학교로부터 나온 일은 본보에 이미 보한 바와 같거니와 이제 세 여의의 경력과 장래의 취직에 대하야 들은 즉 김영흥「金英興」(二八) 김해지「金海志 前報 海老라함은 誤」(二六) 안수경「安壽敬」(二二)의 세 여의 중에 김영흥과 김해지의 두 규수는 모두 평양출생으로 중등정도의 학교를 마쳤으며 상당한 자산과 지위가 있는 집 처자로 김영흥의 부친은 김진기「金眞基」씨라 하며 김해지의 부친은 김창규 「金彰奎」씨라 하는데 모두 동대문안 예수교 부인병원원장 미국부인 홀여사가 등전군의 총감의 총독부의원장으로 있을 때에9), 특별히 소개하야 청강생으로 입학케 한 후 졸업하기까지 학비를 대었으며 안수경은 시가 안왕거씨의 영양으로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후 당시 그 학교의 교장이던 상원씨의 소개로 역시 청강생으로 통학하게 되었는데 그 학비는 남작 이재극씨가 담당하야 금일의 성취를 얻었더라.10)
위 기사들에 따르면 김영흥, 김해지의 부친들인 김진기, 김창규는 평양의 자산가이며, 안수경의 부친은 시가(詩家) 안왕거라고 한다. 김영흥과 김해지는 미국 선교의사였던 로제타 셔우드 홀의 주선으로 청강이 허가된 것으로 보아 감리교회 및 선교사들과의 연관성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로제타 홀은 주위의 목회자, 전도부인 등의 자녀들에게 의학공부를 할 것을 적극적으로 권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개신교 신자로서 김진기라는 이름은 조선 최초의 개신교 신자로 알려진 김진기(金鎭基, 1863~1944)가 있고, 김창규 역시 제임스 홀, 로제타 셔우드 홀 부부의 전도를 돕는 조사(助事)일을 했던(옥성득, 2016: 289) 김창식(金昌植, 1857~1929)의 (사촌)형제이자 목사였던 김창규가 아닐까 하는 추정을 해볼 수 있지만,11), 위 기사의 이름 한자표기와 다르고 김영흥, 김해지와의 관계를 유추할 만한 다른 단서는 아직 발견된 바 없어서 단정하기 어렵다.12), 다만 김해지의 경우 결혼 기사에서 평양에 있는 일신당약방의 주인인 김정상의 매씨라고 나온 신문기사를 근거로 약제상이었던 김정상13)과의 남매 관계 정도만 확인된다. 이러한 기록들이 단편적이고 현재까지로는 충분한 사료로 입증되어있지 않아 확언하기 어려우나, 김영흥과 김해지가 로제타 홀의 추천을 받아 최초의 여성의사가 되기로 한 데에 기독교적 가정환경이 영향을 끼쳤을 가능성은 분명해 보인다. 김영흥과 김해지의 가족들에 대한 사실관계는 아직 불분명한 부분이 많은 만큼 자료 보강을 통한 차후의 과제로 남기고자 한다.
그런데 안수경은 아버지가 교육가이자 1910년대 漢詩 평론, 『신해음사(辛亥唫社)』 잡지 발간 등으로 왕성한 활동을 했던 안왕거이고,14) 같은 경성의전을 1년 뒤 졸업한 남동생이 사회주의 운동가 안광천(안효구)이기 때문에 김영흥, 김해지에 비해 보다 많은 자료, 기록들을 추적할 수 있다.
안수경의 아버지 안왕거의 본명은 안택중(安宅重, 초명 安瑀重. 1858~1929)으로, 往居 외에도 긍래(肯來), 지정(之亭), 중거(中擧) 등의 필명을 사용했다. 본관은 광주(廣州)이고 대대로 김해지방에서 정착해오다가 1880년에 증광(增廣) 진사시에 합격하여 법관 양성소 교관, 한성사범학교 교관 및 교장, 수학원 교관 등을 역임했다.(김보성, 2017: 406)15), 수학원 교관을 할 때에는 동궁이었던 영친왕의 스승이기도 했다.16), 그는 1909년 이후 교관직을 사임한 뒤 다시 고향 김해에서 지내다가, 『신해음사』 시집을 간행하기 위해 다시 상경해 한시를 발굴, 활성화하고 한시 비평의 명맥을 이어가는 데 앞장섰다. 신해음사는 신해년(1911) 봄에 친일파 귀족인 이기용 자작이 출자하고, 이재극 남작, 그리고 『매일신보』의 기자들이었던 정운복, 선우일, 이해조, 이철주 등과 함께 안왕거가 발기인으로 참여해 “현시 각가의 시집을 수취 간행하여 민몰(泯沒)의 탄(歎)이 무(無)하기로 주지를 입(立)함”을 목적으로 설립된 단체이다.17), 신해음사는 사실상 안왕거가 창립한 것이며 편집, 교정, 서무, 회계 등 전반적 운영을 도맡아 했다고 한다.18)
신해음사에서는 『신해음사 ○○집(○○에는 간행된 해의 干支를 적음)』이라는 이름으로 전국 각지에서 우편으로 투고한 한시를 수집, 간행하였는데, 한문학의 쇠퇴기에 상실감을 느낀 한문 식자층, 한문 수요층들에게 위안과 정신적 유대감을 주어 한시의 부흥을 이끌었다(신상필, 2010: 116). 신해음사는 투고인의 자격이 개방적이어서 기생, 여학생, 양반가 부인, 외국 여성 등 다양한 계층, 직군의 여성들이 참여할 수 있었다(성민경, 2012: 314). 안왕거는 특히 여성작가의 한시를 선별하고 평정하는 데에 관심을 가졌다. 그가 『매일신보』에 연재한 『동시총화(東詩叢話)』, 『중외일보』에 연재한 『열상규조(洌上閨藻)』 등은 여성작가들의 시를 비평한 것이었다. 또한 신해음사를 통해 『허난설헌집』을 교감(校勘)하고, 허난설헌의 시에 감화받았다는 허소설헌(허경란)의 차운시를 붙여 간행하였으며, 중국으로 이주한 고부의 일상을 담은 『고부기담(姑婦奇談)』을 간행하는 등 다양한 여성작가를 발굴, 재조명해왔다(박영민, 2008: 563-564).
안왕거의 여성문인에 대한 이러한 관심은 딸인 안수경이 고등교육을 받을 수 있었던 중요한 가정환경이 되었으리라 추측된다. 여성의 글을 존중하고 여성들을 작가로 인정했다는 것은 여성에 대한 차별적 편견이 적었던 것이고, 여성의 창작의식, 지적 능력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런 아버지였기에 안수경도 자신이 여성이라는 점에 구애받지 않고 남학생만 입학하던 의학강습소에 들어갈 용기를 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더 흥미로운 것은 이 『신해음사』에 안수경의 글도 여러 차례 실려있다는 점이다. 당시 여학생이었던 안수경은 『신해음사』 제1호인 신해집에서부터 참여를 해 왔으며, 그녀의 시로는 <조매(造梅)>(제1호), <방적(紡績)>(제2호), <동제(同題)>(제4호), <영월(咏月)>(제7호) 등이 있다(임보연, 2014: 301). 당시 15세의 여학생이었던 안수경의 시는 인물이나 사물에 빗대어 자신의 감정을 우회적으로 표현하고 시적 화자로서 스스로에 대해 겸손과 반성을 하는 태도를 취하는 경향이 있었다(임보연, 2014: 302). 특히 다음과 같은 작품에서 안수경은 주로 공부하는 학생으로서 학문, 공부에 정진하고 분발할 것을 다짐하는 성실한 자세를 표현하고 있다.
또한 안수경과 남매지간인 안효구(安孝駒)의 시도 『신해음사』 제1호에서부터 함께 보인다. 안효구는 안광천(安光泉)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인물로, 역시 경성의전을 졸업하였고 자혜의원 등에 근무한 적도 있지만 훗날에는 주로 조선 사회주의운동 단체들(정우회, 일월회, 조선공산당, ML파 등)의 대표적 이론가로 활동한다.21) 안왕거는 『신해음사』에 투고되는 한시 창작자, 회원의 다양성, 저변 확대를 위해 본인의 자녀들에게 시를 지어 게재하게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안수경과 안왕거, 그리고 안효구 모두 한국 근대초기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들임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전기적 사실에 대해 그동안 단편적으로만 알려져 왔고, 이들의 가족관계를 총체적으로 파악해 낸 연구는 없었다. 안수경은, 미국 여선교사들이 주도한 ‘조선인 여성의사 만들기 프로젝트’의 한 ‘성과물’로서만 언급이 되었을 뿐 그녀가 어떠한 집안의 자제이며, 어떻게 경성의전에 들어가게 되었는지 등에 대해서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다. 그리고 안왕거는 1910년대의 한시 잡지를 이끈 문인으로서는 충분히 알려진 인물이었고, 그의 딸과 아들이 그가 간행한 『신해음사』에 시를 실었다는 것도 지적된 연구가 적지 않다.(박영민, 2008; 임보연, 2014; 장유승, 2020) 그러나 그 딸과 아들이 훗날 어떤 인물들이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추적하지 않았다. 더불어 연구에 따라 딸의 이름이 안수경인지, 안숙경인지를 혼동하는 경우도 있었다.22), 또한 안효구가 안광천이며, 안광천의 아버지가 안왕거라는 점 역시 여러 연구에서 밝혀져 왔으나, 안왕거의 직업이 ‘구한국 시의(侍醫)’로 잘못 알려져있기도 했다.23) 그러나 안왕거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교육가이며 문인으로 보는 것이 합당하며, ‘시의’를 지냈다는 주장의 근거가 불분명하다. 한때 동궁의 스승까지 되었던 교육가가 은퇴 후 한시집을 간행했고, 한시의 부흥을 위해 자신의 자녀들에게 한시를 써볼 것을 권했던 것이다. 또한 교육가로서 근대교육의 가치와 필요성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기에 자녀들이 고등교육(의학교육)을 받는 데에도 적극적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아버지의 뜻에 부응하던 총명한 두 자녀는 나란히 경성의전을 졸업하고 의사면허를 땄으며, 식민지 조선에서 제각기 자기 몫의 사회적 역할을 다 했던 것이다. 그래서 안수경과 안광천은 10대 시절에 『신해음사』에 여러 편의 한시를 실어본 특이한 이력을 갖고 있는 의사와 사회주의 이론가인 셈이다.
이처럼 다양한 이력과 혈연관계로 얽혀 있는 안왕거, 안수경, 안광천을 연관지어 살펴보려는 시도가 그동안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이유는, 안수경과 안광천이 사회인이 된 후에는 직접적으로 아버지를 언급한 일이 없었고, 세 사람이 함께 어떤 자리에 나타난 일도 없었기 때문인 듯 하다. 또한 세 사람의 가는 길이 많이 달랐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안왕거는 친일 인사들과 가깝게 지내며 문인활동을 이어갔던 인물이고, 안수경은 기독교 신자가 되어 기독교 단체에서 운영한 병원에 재직하였으며, 안광천은 사회주의자들과 함께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던 것이다. 그들이 서로를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대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확인할 수 있는 자료가 발견되지 않았다. 함께 의학을 공부한 남매가 서로 다른 길을 갈 때 서로를 격려하고 응원했을지, 서로를 이해하기 어려웠을지 알 수 없다. 더구나 친일 인사들과 가까운 아버지의 입장에서 아들이 수차례 경찰에 체포되고 일제의 요주의 인물이 되는 과정을 보며 어떤 심경이었을지도 짐작하기 어렵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안왕거는 안광천이 1928년 3차 조선공산당 사건에 연루되어 검거되던 과정에서 아들의 동료를 자신의 집에 머물게 했던 기록이 남아있다.24) 또한 사회주의운동, 독립운동에 투신했던 안광천의 친인척은 이현경, 노백용, 노남교, 안삼환 등 적지 않다. 이러한 점들로 볼 때 안수경 가문의 일대기는 차후 흥미로운 연구주제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2) 의학강습소 청강생 입학과 경성의전 졸업
이 세 명의 여학생이 경성의전에 청강생으로 입학할 수 있었던 경위에 대해서는 김성은(2007)의 연구에서 상세히 밝혀진 바와 같이, 여성의사선교사들이 조선여성들에게 선교와 의료사업을 진행하는 데 있어 인력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었던 데에서부터 출발한다. 로제타 홀과 메리 커틀러는 북감리교회 소속 의사선교사로서 1890년대 초부터 조선에 부임하였는데, 두 사람은 조선여성을 직접 의사로 양성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특히 1911년 이후 선교본부로부터 여성의사선교사의 조선 파견이 중단되면서 여성의사 부족문제가 심각해졌기 때문에(김성은, 2007: 8-11) 로제타 홀과 메리 커틀러는 1913년에 평양의 광혜여원 부속 여성의학반을 운영하기 시작했고, 조선총독부의원장 후지타(藤田嗣章)에게 요청하여 남학생만이 입학 가능했던 조선총독부의원 부속 의학강습소에 1914년에는 여학생들도 청강생 신분으로나마 입학할 수 있게 만들었다(사토 고조, 1993: 90-92).
사실, 이들이 의학강습소에 입학하게 된 것은 1914년이지만 의학강습소가 여학생도 받아들이기로 한 것은 1912년(개정 1912년, 시행 1913년)부터였다(이충호, 2011:151). 1911년 2월 제정된 「조선총독부의원부속의학강습소규칙」에서는 제2장 10조에 “의과 생도는 조선인인 남자, 조산부과 및 간호부과 생도는 조선인인 여자로 하고 의과·조산부과 제1학년 또는 간호부과 제1학기에 입학을 허가할 수 있는 자는 다음 각호에 해당하고 입학시험에 합격한 자이어야 한다.”로 되어 있었다.25), 그러나 1912년 12월에 개정된 「조선총독부의원 부속 의학강습소 규칙」에서는 “의과 생도는 조선인, 조산부과 및 간호부과 생도는 내지인 또는 조선인으로 하고, 제1학년 또는 제1학기에 입학을 허가할 수 있는 자는 다음 각호에 해당하고 입학시험에 합격한 자이어야 한다.” 라고 개정되어 있다.26) 즉 처음 제정될 때에는 의과생도를 ‘조선인인 남자’로 명시적 제한을 해 두었지만, 1년 뒤 개정 규칙에서는 ‘조선인’으로 포괄함으로써 여성들에게도 의과생도의 자격을 허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1900~1910년대 전후의 조선의 의학교육체제는 나라의 격변기였던 만큼 그 제도나 기관, 규정 등이 자주 변경되었다. 1899년 설립된 의학교가 1907년 대한의원 교육부로 변경되었고, 1909년에는 대한의원 부속 의학교로 개편된 뒤, 1910년 병합으로 대한의원이 조선총독부의원으로 바뀌면서 의학교가 조선총독부의원 부속 의학강습소로 지위가 격하되었다(조은진, 2015: 9). 그러다가 1914년 12월부터 다른 전문교육기관이었던 전수학교, 공업전습소와 함께 의학전문학교로의 승격 문제가 논의되어 1915년 4월에 의학전문학교로 승격하기로 결정되었다가, 예산문제로 1년 미뤄지면서 최종 1916년 4월에 경성의전이 설립되었다(박윤재, 2004). 안수경, 김영흥, 김해지가 청강생으로 입학한 것은 1914년이므로, 그들은 입학은 의학강습소로 하였고, 졸업은 경성의전의 이름으로 하게 되었던 것이다.
로제타 홀의 추천으로 의학강습소에 처음 입학했던 여학생은 김영흥, 김해지와 함께 또 한 명의 여학생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한 명의 여학생은 학교 생활에 적응을 못했는지 중도에 그만뒀고, 안수경은 홀의 추천이 아닌 다른 경로(경성여고보 교장 추천)로 입학했다.27), 감리교여선교회 연간보고서에 따르면 수업료는 남학생들처럼 면제였고 기숙사도 제공받기로 했다고 한다. 의학강습소의 조산부, 간호부에 재학한 여학생들은 총독부의원 내의 조선식의 건물을 기숙사로 하여 수용하고 있었기 때문에(사토 고조, 1993: 85) 김영흥과 김해지도 이곳에서 머무른 것이 아닐까 추정된다.28), 의학강습소 1학년의 학과목은 수신, 국어(일본어), 물리학, 화학, 해부학 및 해부실습, 조직학 및 생태학, 수학, 체조 등이었고(이충호, 2011: 146), 의학강습소에서의 수업을 수월하게 받기 위해 일본어 공부에 좀 더 힘써야 했다. 또한 광혜여원의 전도부인인 황유니스가 ‘샤프롱(chaperons)’으로서 이들의 보호자가 되어주었다(김성은, 2007: 26).
한국 젊은 남성들을 위한 총독부 의학교의 관계자들은 친절하고 자애롭게 이들 여성들을 남성들과 함께, 그러나 남성들과 떨어져 앉게 하여 가르쳐 주겠다고 했다. 수업료는 남학생들과 마찬가지로 무료이고, 그들의 성적이 보증된다면, 그들에게 남학생들과 같이 정부 의료면허를 줄 것이며, 그러나, 많은 남학생들에게 제공되는 장학금 대신에, 그들은 여학생들에게는 적당한 감독하에 자비로 자취생활을 할 수 있는 기숙사를 제공하기로 했다. 그들은 또한 교실 및 다른 곳을 갈 때 항상 우리가 직접 선정한 샤프롱(여성 보호자)과 동행하게 될 것이다.29)
한편 안수경의 남동생인 안효구의 존재도 이들이 경성의전에서 청강생으로 수학하기에 유리한 여건을 조성했을 것으로 보인다.30) 이들이 의지할 수 있었던 여성보호자, 동기(同氣) 덕분에 이들은 수업을 받을 때에도 큰 불편 없이 열성적일 수 있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학과시간이 끝난 뒤에도 남학생들과 함께 교실에 모여 해부실에서 교수에게 배운 것을 복습하고 필기하는 여학생들의 모습은 이들을 참관하러 온 기자에게 매우 색다르게 보였던 모양이었다.
기자는 다시 그 학생들의 수업하는 교실에 참관하기를 정한즉 교수는 흔연히 허락하고 앞서 안내하는데 해는 이미 오후 두 점이 지나서 학과는 파하고 삼학년생 일동은 교실 후면 해부실「解剖室」에서 학리실지연습「學理實知練習」을 하는데 문을 열고 들어간즉 남학생 있는 한편 머리에 세 사람이 다 같이 옥색모시치마에 양목적 삼을 입고 혹은 서며 혹은 걸터앉아 칠판에 교수의 그리어놓은 학리를 그대로 옮기어 베끼노라고 연필을 들고 민속히 손을 놀리며 간혹 서로 귀의 말로 물어가며 골몰하는 것은 과연 한낮 다른 광채를 내이더라31)
이들은 졸업과 동시에 다른 남학생들과 동일하게 의사면허를 받을 수 있었다(사토 고조, 1993: 90). 『총독부관보』 1918년 4월 1일자에 실린 경성의전 47인의 졸업자 명단에 안수경, 김해지, 김영흥의 이름이 실려 있다. 그리고 『총독부관보』 1918년 5월 18일자에는 이들 경성의전 졸업생들을 중심으로 의사면허 취득자 명단이 실려있다. 의사면허 번호는 안수경이 244번, 김영흥이 248번, 김해지가 251번이다. 조선에서 최초로 공식 의사면허를 발급받은 여성들로서,32), 졸업 후 김해지는 커틀러를 보조하기 위해 평양으로 가고, 김영흥과 안수경은 동대문 부인병원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33), 아래의 글은 커틀러가 1918년에 작성한 연간보고서의 한 대목이다.
“여성들의 의학수업의 기획자”로서 나는, 3월 26일 경성의 총독부 의학학교에서 남자들과 대등한 발걸음을 내딛으며 졸업하게 된 세 명의 최초의 소녀들에 대해 보고하게 되어 기쁘다. 그들에게는 실제 의료행위를 할 수 있도록 하는 면허가 허가되었으며, 무엇보다도, 우리의 두 병원에서 의사들이 된 이래로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고 있다.34)
여성의사선교사들로서는 조선 여성들에게 보다 쉽게 다가갈 수 있고, 자신들의 의료활동에도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 이들 의사의 탄생이 뿌듯하고도 반가운 일이었다. 이들 덕분에 동대문 부인병원은 보다 체계적인 의료 및 선교사업을 추진해 갈 수 있었다. 커틀러와 홀은 이들을 “우리 소녀들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한 생생한 증거이자 “작은 도토리에서 큰 참나무가 자라난다”는 것을 매우 분명히 보여준다며 자랑스러워 했다.36), 조선 최초의 ‘국내파’ 여성의사의 탄생은 조선 사회로서도 물론 기쁘고 자랑스러운 일이었다. 여러 차례에 걸쳐 이들의 출신, 동정, 졸업, 진로 등에 대해 소개했던 『매일신보』뿐 아니라 미국 교민들이 낸 신문 『신한민보』에서도 이들의 졸업을 ‘한국 여자로 의사의 자격을 얻기는 이번이 처음’이라며 보도하였다.37)
이들의 졸업 사실은 조선총독부 관보 1918년 4월 1일자에 실려 있다. 여기에는 경성의전 졸업자를 총 47명으로 열거하고 있는데, 안수경은 31번째, 김해지는 34번째, 김영흥은 46번째에 실려있다.
3. 최초의 ‘국내파’ 여성의사들의 활동
1) 김영흥과 김해지의 졸업 후 활동
이렇게 하여 탄생한 최초의 ‘국내파’ 여성의사들은 그 후 어떠한 삶을 살았을까? 먼저 김영흥과 김해지의 의료 및 사회활동에 대하여 살펴보자. 김영흥은 안수경과 함께 동대문 부인병원에서 의료활동을 시작했지만 평양, 인천 등으로 근무지를 옮겨다녔다.38), 세 사람 중 사회운동이나 대중강연, 야학 등에 참여하는 적극적인 활동을 한 인물은 김영흥이었다. 김영흥은 1919년 당시 만세운동에 참여한 것으로 보이는데, 「대정8년 내지 同10년 朝鮮騷擾事件關係書類」공7책 기6, 문서번호 高警 제16191호에 따르면, “비밀결사 모험단원 검거 속보”란 제목으로 비밀결사에 참여한 사람들 중 한 명으로 “金英興(女醫)”이 포함되어 있다.39), 또한 1919~1920년 당시 조선에서 콜레라가 창궐하자 김영흥은 기성의사회에서 1920년 여름 평양에서 개최한 위생강연대회에 참여하여 「하기위생방법」이라는 연제로 강연에 나섰다.40), 그리고 여자청년회에서도 자녀양육에 관한 강연을 하기도 했다.41)
1921년에 김영흥은 인천에 새로 개원한 부인의원으로 옮겼는데, 이곳 역시 로제타 홀이 설립한 곳이었다. 이 병원의 설립을 소개하는 한 신문기사에서는 “이미 총독부의학교를 졸업하고 오랫동안 평양시에서 자유로 개원하야 우리 부인사회에 다대한 편의를 보급하던 김영흥 여의사를 청빙”하였다고 적고 있다.42), 즉 김영흥은 1918년인 졸업 직후에는 동대문 부인병원에서 재직하다가, 다시 고향인 평양으로 돌아가 개업을 했고, 다시 1921년 7월에 로제타 홀이 인천에 부인병원을 세우면서 초빙하자 인천으로 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1922년에는 동양의사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북경을 방문하였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의사로서의 재교육 및 의학자로서의 학회활동 등에도 관심이 많았던 것 같다.43), 김영흥은 1920년대 후반에는 다시 평양으로 돌아가 개업을 했다는 소식이 남아있다.44)
김해지 역시 평양기홀병원 등에서 근무함으로써 로제타 홀, 메리 커틀러와의 인연을 이어갔다. 김해지는 1920년 여성의 힘으로 만든 한국 최초의 여성지 『신여자』에 「여자의 정조」라는 글을 기고한 적이 있다. 이 글의 내용은 ‘신여자’들에게 정조를 자신의 자존, 생명으로 여겨야 한다는 보수적인 시각의 논설이다. 스스로도 “나는 如斯히 말하면 보수적 주의라고 할는지 不知이나”라며 자신의 보수성을 인정하면서도 “우리 여자계에서 흔히 걸핏하면 의미도 不覺하는 「하이가라」를 찾고 또는 발꿈치 높은 양화에 히사시가미로 머리를 단장하니 차를 물질문명이라고 할까. 문명의 초보라고 할는지?”라며 허영과 사치로 비판의 대상이 되어가고 있었던 신여성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글임을 밝히고 있다.45) 이 글에서는 유창한 한문 실력으로 공자, 맹자의 격언 등을 여러 구절 인용하며 정조, 여성의 정숙성을 강조하는데, 이는 신식 고등교육을 마친 ‘신여자’의 한 사람인 김해지가 사회와 여성의 변화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소극성, 조심스러움을 드러내고 있다.
김해지는 1921년 6월 안창덕과 결혼했다.46), 남편 안창덕도 1916년에 의학강습소를 졸업하고 평북 안주에서 병원을 개업하고 있었던 의사였다. 의사 부부의 탄생에 대해 당시 신문에서도 다루며 이들의 앞날을 축복해 주었다. 그런데 5년 뒤 김해지에게는 불운이 연이어 찾아온다. 1926년 3월에는 남편 안창덕이 감염병 환자를 치료하다가 감염되어 사망하였고,47), 9월에는 김해지 자신이 평양 기홀병원에서 임산부를 암으로 오진하여 개복을 하는 실수를 저지른 것이다. 이로 인해 김해지는 환자의 가족들로부터 항의와 고발을 당하는 수난을 겪었다.48) 김해지는 결혼 5년 만에 남편과 사별하고, 의료사고까지 내어 큰 상심과 실의에 빠졌었을 것이라 추측된다.
그 때문인지 그 뒤 김해지는 인천으로 옮겨 간 듯 하다. 로제타 홀은 1928년 감리교 여성선교회 연간보고서에서 김해지가 평양에서 커틀러와 함께 근무하다가 닥터 안과 결혼했고, 이후 남편과 안주에서 진료하다가 남편이 전염병 유행 때 사망했다는 사실을 언급한다. 그리고 1927년 현재에는 제물포로 아들과 함께 와서 의료복지사업을 돕고 있으며 이것에 김해지가 만족하고 있다고 적었다.49), 또한 1929년에 그녀가 근우회 인천지회의 검사위원으로 참여했다는 신문기사가 보인다.50), 김해지는 안수경과 함께 감리교 연간보고서에서 컨퍼런스 구성원으로서 1930년까지도 이름이 올라있는 것이 확인된다. 지금까지 찾아낸 그녀의 의사로서의 마지막 기록은 그녀가 1938년 12월 10일에 의사면허증을 반납했다는 사실이 남아있는 『조선총독부관보』이다.51) 그녀가 왜 의사면허증을 반납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밝혀진 바가 없어서 추후 연구에서 조사가 더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2) 안수경의 졸업 후 활동
김영흥, 김해지의 활동에 대해서는 많은 정보가 남아있지는 않지만, 안수경의 경우에는 동대문부인병원에서 오랜 기간 재직하였고, 그에 따라 병원의 이사직, 원장직 등을 맡는 등 병원의 주축으로서 활발한 활동을 했기 때문에 비교적 기록이 많이 남아있다.52), 안수경은 김영흥이나 동생 안효구53)처럼 자신이 직접 나서서 행동을 한다거나 남들 앞에 서서 연설을 하는 등의 적극적 성격은 아니었던 듯 하다. 그와 인터뷰한 기사들에서는 일관되게 그녀가 차분하고 조용한 성격임을 지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러한 성정과는 달리 그녀는 사회활동이나 사업에 다양하게 참여했다는 점이 특이하다. 안수경은 1920년에는 동아부인상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동아부인상회는 1920년 4월에 여성들만을 조합원으로 하여 소비자조합운동과 주식회사의 성격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던 상사(商社)였다. 이상회는 여성들의 일용품이나 가정의 필수품, 문구류 등을 판매하고 재봉업도 겸업하였다.56) 그녀가 나서서 어떤 업무를 맡거나 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으나 그녀는 이처럼 자신의 도움이 필요한 일이라면 어디든 선뜻 이름을 올리고 묵묵히 힘을 보탰다. 아래와 같이 동대문부인병원 안에 무료환자해산실을 만들어 집 없고 먹을 것 없는 여성들이 안전하게 출산과 산후조리를 할 수 있도록 지원했던 것도 그의 그러한 성품을 잘 보여준다.
조선여자의학계(醫學界)에 가장 역사가 오래고 경험이 많은 안수경(安壽敬)양의 사업을 들어보자.(...)특별히 그는 돈 없어 고생하는 무료환자(無料患者)들에게 가장 정답고 친절하게 위안을 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집도 없고 먹을 것도 없는 가련한 여자들이 길가에서 방황하며 추운 일기에 해산을 하다가 산모와 어린 아이가 원망의 피눈물을 머금고 노상에서 일생을 그대로 마치는 일이 비일비재할뿐더러 설사 그들이 무사히 해산을 하고 두 몸이 다 살아난다 할지라도 또한 종신토록 병신을 면치 못하는 이를 위하여 비록 그다지는 크지 못하나 현재 동대문부인병원 안에 설시하여 놓은 무료환자해산실이 비이지나 않도록 산모들이 와준다면 그는 참혹한 그들을 위하야 성력껏 보아주고 한마디의 위로라도 들려 줄까 하는데 그 뜻을 알지 못하고 지금 도로상에서 그대로 헤매는 그들을 향하여 얼마나 유감인지 모른다고 말한다.57)
또한 안수경은 1925년 미감리교 경영당국에서 재정긴축을 위해 동대문부인병원을 세브란스병원과 합병하기로 하자 이에 맞서 싸우기도 한다. 이것은 명목상으로는 합병이었지만 동대문부인병원을 없애고, 특히 경영권을 남성 측에 이전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병원 소속 의사들의 반발을 샀다.58), 이에 소속 의사들은 여성전용병원의 폐지는 현재 조선의 여성의료 여건에 비춰볼 때 여성들에게 큰 손실이며 여성기독교 사업 측면에서도 유리할 것이 없다는 결의문을 발표하며 설득했다. 이 ‘폐지반대연맹’에는 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 조선여자청년회, 동대문 의약간(醫藥看)청년회, 간호부회, 산파회, 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연합회 등 병원 내외 여성단체들도 대거 참여하였으며, 안수경도 병원 소속 여성의사들인 유영준, 정자영, 윤보명, 현덕신 등과 함께 참여하였다.59), 다행히 동대문 부인병원 측에서도 이들의 반발에 폐지를 보류하였고, 이로써 문제는 일단 봉합되었다.60)
그러나 1926년에는 로저스(Rogers, Mayme M) 간호원양성소장이 간호원양성소 학생에게 가혹행위를 하여 학생이 자살하는 사건이 일어나 동대문부인병원은 또 한 번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었다. 홍선희라는 학생이 로저스에게 질책을 받아 독약을 마시고 자살을 했는데, 간호양성소 재학생들은 ‘민족적 모욕’이라며 3일간의 동맹휴업으로 로저스에 대한 사임을 촉구했다.61), 이 일로 로저스는 무기휴직 징계를 받았지만,62) 며칠 만에 이사회에서 휴직해제를 결의해 복귀하는 일이 벌어졌다. 또한 당시 동맹휴업에 참여한 학생들에게 보복 차원에서 수업일수, 즉 의무근무일수를 6주간이나 추가하여 간호양성소 학생들과 운영자 측 사이의 갈등이 더욱 심화되었다. 이때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기 위해 『조선일보』에서 이사회의 일원이었던 안수경 등에게 인터뷰를 한 기록이 남아있다. 당시 로제타 홀은 이런 조치를 이사회의 결정이라며 회피하는 태도를 취하였는데, 이사 중 한 명이었던 안수경은 학생들 편에 서주었다. 그러나 이사회에서는 그녀와 소수의 인물을 제외하곤 로저스의 편에 서는 바람에 학생들 징계 절차는 막지 못했다.
이에 대하야 동 이사는 한 사람으로 그날 이사회에 참석하였던 동병원 의사 안수경 여사의 말을 듣건대 「나는 무엇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사로 이사회에 참례하였건마는 그 결의를 어겨놓지 못하였으니까요. 그러나 반대하는 편은 나와 이목사 임고씨뿐이었었고 같은 의사로 있는 선교사회 실행위원인 서양인들도 그에는 반대하지 않고 서양인 간호원 세 명은 어디까지 주장을 하니까 어찌하는 수 없이 그대로 결의가 되고 말은 것이지요. 하여간 어찌 되어서 그와 같이 처벌을 하는지는 이때껏 알 수 없습니다.(...)」
- 이하 홀 부인의 입장: 회피. 자기 권한이 아니라 이사회의 결정이다. 간호원장이 무리한 행동이 있었어도 원장이 어떻게 할 수가 없다.
- 학생들: 억울하기는 하나 어찌해야할지도 모르는 중. (졸업예정자인 박희옥 양)63)
그러나 이러한 “기만적 수단과 비의적 행위에 간호원과 의사 및 학생 일동이 분개”하였고, 안수경, 김순복, 현덕신, 유영준이 또 앞장서서 학생들 보호에 나섰다. 그들은 다음과 같은 질의서를 제출하여 병원 이사회 및 간호양성소 측에 해명과 시정을 촉구하였다.
문제중인 라저서(라저서는 ‘Rogers’의 음차 표기-인용자 주)사건에 대하야 좌의 사항을 귀회에 질의함
일, 휴직중에 있는 라저서를 이사의 일인으로 이사회에 참가케 한 이유
일, 라저서를 단연히 퇴직케하지 않는 이유
일, 만국간호부회에 참가치 아니 한 동대문부인병원간호원에서 그 규정을 채용한 이유
추고 팔일 오후 팔시까지 차에 대한 해답이 무할 시는 여등은 상당한 책전을 시하기로 동맹결의함 병인삼월육일 안수경 김순복 현덕신 유영준64)
그러나 이사회 측은 여전히 회피와 로저스에 대한 두둔의 태도를 보였다. 이후 이사회는 아무 회답이 없었고, 이사장인 노블(William Arthur Noble)목사의 부인만 안수경 외 3인과 면담을 했는데, 그 답변 내용이 로저스도 이사의 한 명이므로 이사회에 참석한 것이고, 로저스의 휴직이 간호원들의 요구 때문이 아니라 신경쇠약 때문이었는데 회복되었으니 복직한 것이며, 간호원 수업일수 규정은 그동안은 따르지 않았더라도 앞으로는 만국간호부회 규정을 따름으로써 그 협회에 참가하려고 그런 것이라는 변명들이었다.65), 이 말에 “조선 의사측은 더욱 분개”66),하여 “조선인을 끝없이 모욕하며 멸시하는 서양인 선교사들의 태도에 대하야 최후까지 그 반성을 일으키기로 결의”하고 선교사의 비도덕적 행위를 전조선 교인들에게 폭로하겠다고 선포했다. 이 일로 언론이 대대적으로 보도하고 엡웟청년회(懿法靑年會)에서 진상조사단이 꾸려지는 등67), 사회적 파장이 커져감에 따라 로저스는 돌연 자취를 감추었고 결국에는 사직을 하는 것으로 종결되었다.68), 여성선교사회에서는 로저스와 같은 경험 많은 간호원감독관을 잃게 되는 것이 아쉬웠던 듯 하지만 이 일로 간호원양성소의 입지가 흔들리는 것이 더 큰 손실이라 생각하고 사태를 일단락지었던 것으로 보인다.69)
이처럼, 기자들 앞에서는 부끄러워하고 수줍어하던 안수경이지만, 조선인으로서 동대문 부인병원의 이사 중 한 명이 될 정도의 위치에 올라섰지만, 그녀는 민족, 여성, 약자들을 위해서는 몸소 나서 싸우는 태도를 견지한 것이다. 그녀의 이런 면모는 1926년 6·10 만세운동 때에도 발현되었다. 그해 4월 사망한 순종의 인산일에 맞추어 독립만세와 가두시위를 계획하고 있을 때 안수경은 시위참가자 여성들의 안위를 위해 위생반으로 출장을 나갔다.
...다수한 부인이 여러시간 기다리는 동안에 혹 뜻밖에 불행하신 일이 있을까 염려하야 위생반을 조직하고 좌기와 같이 여러 의사와 간호원이 출장경계하게 되었습니다.
동대문 부인병원진찰소 의사 류영준, 정자영, 안수경(劉英俊, 鄭子英, 安壽慶) 삼씨와 약제사 김순복(金順福))씨가 출장할 터이며...70)
또한 동대문 부인병원에서는 본보 독자부인봉도단을 위하야 정문 안에 있는 넓은 터전을 제공하고 병원관계자 이외에는 타인을 금지하여 주기로 하였으며 앞에가린 우거진 나뭇가지까지 모조리 쳐내었습니다. 그리고 동병원 진찰소 안에는 위생반을 조직하고 여의 류영준 정자영, 안수경 삼씨와 약제사 김순복씨 및 영제병원, 동대문병원전치의원, 진성당의원, 김용채병원, 태화진찰소 여섯 병원의 간호부 십여 인이 출동하야 만일을 경계하는 여러가지를 준비하였사오니 당일 본 봉도 단원중에 조금이라도 불편한 점이 있거든 가까이 서있는 안내인에게 말씀하여 주시기 바라오며...71)
또한 안수경은 여자의학강습소를 여자의학전문학교(이하 여자의전으로 약칭)로 승격하기 위한 운동에도 이름을 올렸다.72), 그녀는 길정희, 김탁원, 유영준, 황애덕, 김미리사, 박인덕, 김활란, 홍에스터, 한소제, 황신덕, 김노다, 이종린, 윤치호, 이광수, 여운형 등 총 72명의 여자의전 준비위원 중 한 사람으로 여자의전 기성운동, 여자의전 발기취지서 발표73)에 참여하였다.
안수경은 최초로 조선 내의 제도교육으로 의사가 된 여성일 뿐 아니라 동대문부인병원의 저명한 의사, 조선인 이사, 그리고 원장에 오른 상징성 때문에 신문, 잡지의 기고나 인터뷰, 대담 등에도 종종 등장했다. 1927년 1월 1일 조선일보사에서 주최한 「본사주최 여류명사 가정문제 합평회」 같은 행사에서 서른 명 남짓 되는 여성 명사들과 함께 신년의 가정관련 의제들에 대한 대담에 참석하기도 하고, 1931년에는 매일신보에서 요청한 새해 계획에 대한 짧은 글을 기고하기도 하고,74), 여성들의 건강과 위생에 관한 전문가 칼럼을 싣기도 했다.75) 그녀는 글을 통해 대중에게 의학, 위생과 관련한 지식을 설파할 기회는 마다하지 않았던 듯 하다. 그녀는 자신의 전문분야인 산부인과나 성병과 관련된 상식을 알리려고 노력했다. 아래와 같이 여성의 건강을 위해서는 젊은 여성들뿐 아니라 어머니 세대, 그리고 남편들의 각성도 중요함을 강조했다.
의사가 된 저로서 제일 유감으로 생각하는 것은 아직까지 일반 가정에서 병원에 대한 신망이 두텁지 못한 결과 병원에만 데리고 오면 가히 살아날 수도 있는 병자까지 참혹한 주검이 되게 하는 줄 알고 나중에는 반드시 “팔자를 하는 수 있느냐”하는 한마디 한탄으로 끝을 막아버리는 일이올시다.
속담에도 “설마”가 사람을 죽인다는 셈으로 우리의 가정에서는 너무 믿지 못할 것을 억지로 믿는 폐단이 고래로부터 있는 모양이올시다.(...)특히 저는 젊은 며느리를 두신 모든 시어머님께 먼저 미신을 깨치어 병원의 긴요함을 아시며 사람의 목숨을 염려하시어 며느님 중에 태기가 있는 눈치가 있거든 지체말고 산파나 의사를 청하야다가 뜻밖의 불행을 면하시도록 하야 주시기를 바라는 바이올시다.76)
「근래에 부인병자가 많이 들어가는 것은 무슨 병입니까」
「그전에는 병원에 오기를 부끄러워하였음인지는 모르겠으나 지금은 병자가 열이면 칠팔은 화류병입니다. 그만큼 우리 인류사회가 점점 부패하여지는 것을 알겠지요. 어떤 이는 가엾은 이가 많지오. 남편이 얻어다 옮겨주는 병에 걸려 애기를 못 낳으면 왜 애기 못 낳느냐고 구박이 심할 뿐 아니라 이로 인하야 가정파란 일어나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니까요. 임신을 하되 낳지 못하고 실패하는 일이나 낳기는 하되 기르지 못하고 몇이든지 죽게 되는 것은 대개가 남편의 잘못으로 되는 것인데 학대는 부인만 받으니까 억울한 노릇이지오」77)
차사백과 같은 신여성이 자신의 출산 때 안수경이 진료하던 일을 회고하는 장면을 보면 안수경은 친절하고 차분하게 환자를 대하는 산부인과 의사였다.78), 안수경의 진료 성과는 1925년 감리교 여성선교회 연간보고서에도 실릴 만큼 좋은 업적도 냈던 듯 하다.79) 이 보고서에서는 안수경이 900리나 떨어진 곳에 있던 위급한 여성환자를 왕진 치료해 응급상황에서 구했던 일을 소개한다. 그 여성환자는 남자의사에게 치료받느니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환자였기에 먼 곳에 있는 안수경에게 굳이 왕진을 의뢰한 것이었다. 안수경의 성공적 치료는 크게 찬사를 받았으며 환자 측으로부터 치료비 및 병원 기금도 넉넉히 받았다. 그리고 보고서에는 이 일이 여성들에게 여성의사의 필요성을 깨닫게 하는 사건이었다고 서술되어 있다. 보고서에서는 이 안수경의 사례를 소개함으로써 실제 수요를 충족시킬 여성 외과의가 더 많이 필요함을 강조했다.
안수경은 1930년대까지는 적어도 결혼을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신문, 잡지에 실린 기사들에서 모두 그녀가 결혼을 하지 않았음을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80), 안왕거가 1927년에 쓴 안수경에 대한 시평(詩評)에서 다른 이름으로 收瓊이며 순천인인 김상규와 부부라고 언급한 구절이 있긴 하지만,81), 이를 사실로 보는 것에는 신중할 필요가 있다. 우선, 『열상규조』라는 시화(詩話)의 성격을 이해해야 하는데, 『열상규조』는 그동안 안왕거가 출판했던 글들과 미출판 저작인 『창해지』, 『살수지』 등을 매일신보에 연재한 것으로, 여기에 실린 대부분의 인물들이 허구일 가능성이 높다고 알려져 있다(장유승, 2020: 151).
그리고 『광주안씨대동보』 상의 안왕거(안택중)의 가계 기록을 참고해도 김상규라는 인물은 보이지 않는다. 아래 그림이 족보상 안택중의 가계를 보여주는 부분인데 안택중의 아들은 효일(孝馹), 효원(孝騵), 효구(孝駒), 세 명이었고, 사위는 노백용, 이치형, 허각석 세 명으로 보인다. 노백용의 딸 노남교가 안수경과 열세 살 정도밖에 차이가 나지 않기 때문에82) 노백용은 안수경의 남편일 리 없고, 허각석의 자녀가 셋 이상이라는 족보 내용으로 볼 때 허각석도 역시 안수경의 배우자이기는 어렵다. 안수경이 이치형이라는 이와 결혼했을 가능성이나 안수경이 김상규와 이혼을 했을 가능성은 남아 있지만, 일단 사위 중에는 김상규의 이름이 족보에 없는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1927년에 언급한 ‘순천인 김상규’는 허구의 인물일 가능성이 높다. 또한 안왕거의 『열상규조』에서 안수경이 언급된 1927년에는 앞선 여러 사건 사고들에서 보았듯 이미 안수경은 언론이나 감리교 여성선교회 단체 내에서 주목받고 있는 인물이었기 때문에 결혼 사실이 감춰졌을 가능성도 높지 않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신문, 잡지 등에서 직접 안수경을 인터뷰한 기사의, 그녀가 결혼을 하지 않았다는 서술이 사실일 가능성이 더 높아 보인다.
안수경은 실로 헌신적이고 성실한 의사였던 듯 하다. 산부인과 진료의 특성상 응급 환자가 많기 때문에 야근을 하거나 병원 숙소에서 지내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녀는 이런 생활을 마다하지 않았다.
나는 항상 바쁘게 지내니까 별 생각을 할 여지가 없이 그만 신년을 맞고 말았습니다. 이 안에서 기거하고 여기서 일을 보며 항상 똑같은 생활을 계속 하는 동안에 그럭저럭 열번의 새해를 이 안에서 맞게 되었습니다. 금년도 역시 변함없는 나의 생활이매 생각인들 무엇이 새롭겠습니까. 항상 내가 생각하고 있는 생각 즉 「오직 나의 직업에 충실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도 금년 새해도 평범하게 맞았습니다.83)
“댁이 낙원동에 있는 줄 알았는데 댁에는 몇시쯤에나 가십니까”
“나는 집에는 못 갑니다. 일요일 오후에 손님처럼 잠깐 다녀오고 그 외에는 이 병원에 유숙하고 있으며 밤중에도 일어나고 새벽에도 일어납니다”
“그럼 세상은 아주 모르시겠구먼요. 선생을 통해서 보고 들은 세태 인정을 들으러 왔는데요”
“나는 세상일은 도무지 모릅니다. 오직 나의 최선을 다하야 죽어가는 여러 사람들을 하나라도 더 살리려는 것이 나의 직무이니 세상은 그저 알아서 무엇하겠습니까”84)
그녀는 그만큼 자신의 직업에 대한 사명감이 투철하였다. 진료하느라 바빠서 ‘세상일에 대해선 잘 모른다’는 말을 하기도 하지만, 사실 그녀는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사회에 대해 무관심한 사람은 아니었다. 민족, 여성, 약자 등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어떤 형태로든 참여했고, 특히 그 일에 의사로서 동참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기꺼이 헌신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위와 같이 ‘여러 사람들을 하나라도 더 살리려는 것이 나의 직무이니 세상은 그저 알아서 무엇하겠습니까’라고 말하는 것은 그가 가진 자기 직업에 대한 투철한 소명의식을 보여주는 반증인 것이다. 덕분에 보통 서양의사가 원장이었던 동대문 부인병원에서 안수경은 18년간 꾸준하게 산부인과 의사로서 봉직한 성실성과 헌신을 인정받아 원장직에 오르게 된다.
병자들을 상대로 십팔년간 꾸준하게 사람을 살리는 천직을 가지신 부인의사가 계십니다. 개인으로 개업해서 내 병원을 가졌으면 일평생을 간대도 신기할 것 없지마는 외국사람이 경영하는 병원에서 십팔 년을 하루같이 지내었다는 것은 보통 사람으로 못할 것입니다. 현재 동대문부인병원장으로 계신 안수경 의사를 찾았습니다. 남자 병자는 절대로 자격 없고 전혀 부인병자만 상대하는 병원은 아마 경성에 이 동대문 병원일까 합니다. 역사가 깊고 선교사측에서 경영한만큼 서양의사가 재래로 원장이던 것이 안의사는 꾸준한 노력과 훌륭한 자격으로 지금은 이 큰 병원에 원장으로 계시다는 것은 다시금 축하할 노릇이요 기쁜 일입니다.85)
안수경은 1942년경에 동대문부인병원을 퇴직하고 개업을 했다. 『매일신보』 1942년 7월 24일자 기사에 따르면 관훈정 197-9번지에 ‘안산부인과’를 개업했고, 경영주는 이건춘(李建春)이라고 되어 있다.86), 그 후 그의 행적은 1947년 해방 후 결성된 서울보건부인회의 창립에서 마지막으로 발견된다. 서울보건부인회는 “첫째 우리는 건강하여야 할 것이요 둘째로 모든 건설의 단위와 출발을 가정에 두어야 한다는 것”에서 출발하여 가정의 보건으로부터 국가를 재건하려고 모인 여성단체였다. 안수경은 이 단체의 발기인으로 유각경, 길정희, 홍애시덕, 장봉순, 방덕흥, 김순복, 박은성, 손정규, 김용희, 최은희, 이애규, 황애시덕, 정자영, 정양자, 김귀인, 박승호, 장문경, 최연하, 박은혜, 황기성, 양한나, 박순천, 차사백 등과 함께 이름을 올렸다.87)
4. 결론
원래 아한(我韓)의 의학은 지나(支那)로부터 수입한 자라. 연구가 완전치 못한 중, 역시 남자에만 한하여 학습하며 또한 차에 모순하야 남녀의 내외법이 엄연 획정됨으로 여자가 일조, 병상에 위와(委臥)하야 의사를 초빙할 시에는 기 진찰의 법이 유출유괴(愈出愈怪)하야 병인의 혼체(渾體)는 금욕(衾褥)으로 매몰하고 다못 좌수(左手)의 일부만 돌출케 하야 의사가 집맥(執脈)한 후에는 거개, 감기, 시기(時氣), 몸살 등으로 진단하야 약방문 일제에 형방패독산(荊防敗毒散)이 아니면 불환금(不換金) 정기산(正氣散)을 의례로 투제하나니 희(噫)라. 차(此)이 단순한 방법으로써 어찌 교착복잡한 장부를 세밀히 진찰할까?(...) 여자의 체부(體膚)는 남자의 진찰에 노공(露供)키 불가라 하여 천수만루(千愁萬淚)로 일신을 매과(埋過)하다가 병세가 유독하면 최후의 결과는 부과시(不過是), 천부의 방년(芳年)을 일조로 단송(斷送)하여 전가(全家)의 비애통탄을 야기하여...88)
위의 독립운동가 이상설이 1909년 『대한흥학보』에 기고한 글에서는 내외법으로 인해 여성의학이 발달하지도 못했고, 여성들이 제대로 된 진료를 받지 못하는 비극에 대해 서술하면서, 이에 대한 대책으로 여학생들이 의학공부를 할 것을 권하고 있다. 위와 같은 생각이 선각자들에 의해 제기된 지 근 십 년만에 국내에서도 의학을 공부한 여학생이 세 명 탄생하게 된 것이다. 이들은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총독부 관보에도 경성의전의 졸업생으로 이름이 올라 있었으며, 이에 따라 의사면허도 자동취득되었다. 이들은 의학사적 측면에서 뿐 아니라 조선 여성들의 삶과 건강의 측면에서도 매우 중요한 성취이며 첫걸음이었다. 감리교 여선교회에서는 이들을 로제타 홀, 메리 커틀러 등과 동등한 ‘의사(Dr.)’로 인정했고, 특히 안수경은 감리교 여선교회의 연간보고서에도 매년 Dr. Ahn (Su Kyung)으로 꾸준히 올라 있었다.
그런데 1924년에 발간된 『경성의학전문학교일람』에서는 이들 세 명의 명단이 누락되어 있으며 총 졸업생도 총독부관보의 47인과 달리 44인으로 기재되어 있다. 총독부에서는 공식적으로 이들을 ‘졸업자’로 인정했지만, 경성의전에서는 이들을 정식 졸업자로 인정하지 않으려 한 듯 하다. 이러한 기조의 변화와 연관된 것인지 경성의전은 1925년경부터 더이상 여자청강생을 받지 않았다. 그로 인해 이후의 여성의사 육성은 별도의 교육기관 설립을 통해 추진되었다.90)
A 총독부의 학교출신으로는 누구누구인가?
X 아마도 거기는 지금 동대문 부인병원에 계신 안수경씨, 평양기 홀 병원에 계신 김해지씨, 또 한분인 인천부인병원에 여러해 계시다가 지금은 평양가서 개인개업 했다는 말이 있는 김영흥씨! 이 세 분이 다 원로(元老) 이시겠지. 그리고 그 다음에는 지금 성진 제동병원에 가 계 김영실씨가 역시 그곳 출신이고 개성야소교병원에 계신 고수선씨와 얼마전에 대구 신명학교 교원 겸 교의로 계시다가 지금은 경상북도 영덕이라는 고을에 가서 부부개업을 하야 남편은 공의로, 아내는 여의사로 게신 윤범영(윤보명의 오기-인용자 주)씨가 재작년에 졸업하고 나왔고 작년에도 이삼인 졸업한 이가 있다는 데 얼른 기억이 아니 나네.
A 그런데 총독부의 학교에서는 진기하게도 남녀 공학제를 써서 몇몇의 여자의사를 내여 보내더니 재작년부터는 그나마도 여자의 청강을 허락지 아니하야 그 제도가 없어졌다지? 대체 무슨 까닭일고? X 글쎄, 그런 말이 있데. 자세히는 알수 없지마는 아마 경험해 보니까 효과가 그렇게 좋지 못하던 것이지. 우선 남녀공학이라는 것이 어울리지를 아니했던지 몰라? 고수선씨와 윤범영씨 두 분이 통학할 때에도 한 분이 결석하면 한 분은 갔다가도 여러 남자틈에 가혼자 앉아서 공부하기가 열적으니까 책보를 끼고 도로 돌아온 일까지 있었다는 이야깃거리 까지 있었더니 그로 보면 남녀공학도 전도가 창창해봐야...91)
즉 ‘남녀공학’을 통한 여성의사 양성의 꿈은 오히려 1920년대 중반 들어 주춤하게 되었던 것이다. 위의 글에서 보이듯 남녀가 함께 공부하는 것이 효과적이지 않고, 조선에는 여전히 내외하는 인습이 남아 있다는 점 등에 의해 여학생들은 경성의전에서 배제되어갔다. 이 배제의 과정이, 그동안 의학사 연구에서 안수경, 김영흥, 김해지가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던 이유와도 연관되어 있다. 그 당시에 ‘벌써’ 조선의 여성이 남성들과 동등한 제도교육 속에서 양성되었을 리 없다는 우리들의 선입견이 그들의 존재에 제대로 주목하지 못하게 했던 것이다. 그들을 그저 ‘청강생’이었을 뿐이라고 여겼고 의사면허를 받는 데에도 차별이 있었을 것이라 단정했다. 그래서 아무도 그들이 총독부관보 상에 인증된 ‘졸업자’라는 점이나 졸업 후 자동적으로 공식 의사면허 취득의 수혜를 받았을 것이라는 점을 사료 속에서 직접 확인하려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렇듯 여전히 남녀가 유별하고 여성교육의 범위와 방식이 제한적이었던 사회 속에서 어렵게 탄생한 안수경, 김영흥, 김해지라는 최초의 ‘국내파’ 여성 의사들의 존재는 그래서 더 값지다. 로제타 홀, 메리 커틀러와 같은 여성선교 의사의 노력, 사회적인 여성의사의 필요성 대두, 의학교육 시스템의 정비 과정 중의 유연성, 안수경, 김영흥, 김해지의 진취적 도전 등이 함께 만들어낸 기적같은 결과였다. 그들이 있었기에 여성들이 아플 때 병원에 갈 용기를 낼 수 있었고, 미신 대신 과학과 의학을 신뢰할 수 있었으며, 여성교육의 필요성과 가치에 대해 체감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개인 차는 있었지만 그들이 자신들의 선구자적 위치에 걸맞게 여성 지식인으로서, 여성들의 삶과 건강을 책임지는 수호자로서 나름의 역할을 하려 했던 점 역시 한국여성사적으로 의미를 되새길 필요가 있다.
이 연구는 이들 세 사람의 가정환경부터 삶의 궤적에 대해 본격적으로 추적해 본 첫 연구이니 만큼 아직도 충분히 밝혀지지 않은 사실들이 남아 있다. 그러나 이 연구를 바탕으로 후속 연구들을 통해 좀더 여성의학사의 인물과 사건이 구체적이고 상세하게 조명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길 바란다.
Notes
Annual Report of the Woman’s Foreign Missionary Society of 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 1885. pp.47-48.
대표적으로 임선영 외(2018), 신동원(2012), 최은경(2016), 한국여자의사회(2005), 김성은(2007), 이꽃메(2019) 등과 같은 연구들이 있다.
기창덕, 「의학교육의 현대화 과정」, 『의사학』 3-1 (1994), 66쪽.
이배용, 「일제하 여성의 전문직 진출과 사회적 지위」, 『국사관논총』 83 (1999). 181쪽.
주양자 외, , 「우리나라 근현대여성사에서 여의사의 활동과 사회적 위상」, 대한의사협회 의료정책연구소 연구보고서 (2012), 17쪽.
김성은, 「로제타 홀의 조선여의사 양성」, 『한국기독교와 역사』 27 (2007), 28쪽.
「최초의 부인청강생, 묘령의 여학생 3명이 처음으로 청강생이 되었다」, 『동아일보』, 1921년 4월6일; 「한국인 여의사 1호이자 항일독립운동가 고수선 지사」, 『오마이뉴스』, 2016년 11월 21일.
김영희 외, 『한국의 과학기술과 여성』 (서울: 들녘, 2019), 436-437쪽.
‘등전군의 총감’이란 당시 조선총독부의원장으로 있던 후지타 쓰구아키라(藤田嗣章)군의를 지칭한다. 후지타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최규진(2016) 참조.
「新女醫 三閨秀는 남자와 똑같이, 두 명은 평양출신이오, 한 명은 시가의 딸이다」, 『매일신보』, 1918년 4월 3일.
유관지 목사(북한교회연구원 원장)-박에스터 대담, 「진지리(眞池里)교회(평남 용강군)」; http://jubileeuni.com/index.php?mid=menu85&document_srl=11780&order_type=desc: 2021년 1월 10일 검색.
김창식의 딸 김로다는 이화학당을 졸업한 뒤 로제타 홀의 주선으로 상해에서 의학을 공부한 후 귀국해 서울 동대문여성병원에서 근무했고(김성은, 앞의 글, 18면) 아들 김영진도 훗날 의사가 되어 1921년 당시 해주병원에서 근무하였다고 서술된 2차 문헌이 있는 것(옥성득, 앞의 책, 291면.)도 김창규의 딸이 의학교육을 받았을 가능성을 높여주는 단서이기도 하다.
「각계투사-약업계의 원조 일신당약방주 김정상씨」, 『조선중앙일보』, 1933년 7월 27일.
박영민(2008)은 이를 「之亭公遺事」(廣州安氏大同譜, 1983)를 바탕으로 정리했다.
안왕거는 1909년 관직을 사임하고 고향에 돌아갔는데 이때 동궁이 그에게 손수 “疏歸亭”이란 글씨를 써서 내렸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또한 이병연의 『朝鮮寰輿勝覽』 김해군편에도 문원(文苑)의 한 사람으로 꼽히며 그의 이력도 기록되어 있다.
安往居, 「明新齋殿下」, 『매일신보』, 1918년 1월 26일.
『辛亥唫社 辛亥集』, 辛亥唫社, 1911. 규칙, 1면.
「辛亥唫社와 安之亭」, 『매일신보』, 1915년 1월 19일.
「造梅」, 『신해음사 신해집』 제1호, 1911. 인용된 두 시의 번역은 조연숙(2011: 356-357) 참조.
「紡績」, 『신해음사 임자집』 제2호, 1912.
『신해음사』에서 두 사람은 학생으로 표기되어 있고 나이가 밝혀져 있는데, 1911년 출간된 신해집에는 두 사람 모두 15세로, 1912년 출간된 壬子集에는 모두 16세로 표기되어 있다. 두 사람의 시가 연달아 게재된 곳에서도 이렇게 표기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두 사람은 동갑이었던 것 같고, 쌍둥이일 가능성도 있으나 그에 대한 더 확실한 기록은 아직까지는 찾을 수 없다.
장유승(2020: 152)은 “선행연구에서 안수경을 안왕거의 딸이라고 한 것은 잘못이다. 안왕 거의 딸 이름은 안숙경이다. 『매일신보』 1916년 9월 23일”이라고 적어두었지만, 이것이 오히려 잘못된 추정이다. 장유승이 근거로 든 『매일신보』 1916년 9월 23일자의 「해부실의 이채, 의학교에 세 명의 여자 청강생, 한 명은 안왕거씨 영양 안숙경」이란 기사에 안왕거의 딸 이름을 ‘안숙경’이라고 적은 것이 잘못 표기된 것이기 때문이다. 조선총독부 관보에서 1918년에 경성의전을 졸업한 명단에 있는 이름은 안수경이다. 또 1918년 경성의전을 졸업한 세명의 최초의 여의를 소개하는 기사(「新女醫 三閨秀는 남자와 똑같이, 두 명은 평양출신이오, 한 명은 시가의 딸이다」, 『매일신보』, 1918.4.3.)에서도 안수경으로 표기되어 있다. 즉, 안왕거의 딸을 안숙경이라고 쓴 기사가 오히려 잘못 표기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신문에서 최초의 세 여의사의 이름을 잘못 표기한 일은 「의학교를 졸업한 세 여사」(『매일신보』, 1918.3.27.)에도 있다. 이 기사에서는 金海志의 이름을 金海老로 적고 있다. 따라서 아직 잘 알려지지 않은 여학생들에 대해 신문에서 성명을 잘못 표기하는 일은 쉽게 일어날 수 있지만, 다른 기사들, 관보 등의 공식기록 등을 통해 종합적으로 추론해 볼 때 안왕거의 딸 이름은 안수경이 맞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34527: 2021년 1월 8일 검색.; 김기승(2004: 156)
「某事件關係 權泰錫公判」, 『동아일보』, 1929년 3월 15일. 안광천의 권유로 권태석이 조선 공산당에 가입했다는 이야기는 「開廷된지 四分에 禁止」, 『조선일보』, 1929년 3월 16일에도 비슷하게 보도되고 있다.
「조선총독부의원부속의학강습소규칙」, [조선총독부법령 제19호, 1911. 2. 20., 제정]; 국가법령정보센터, https://www.law.go.kr/법령/조선총독부의원부속의학강습소규칙/(00019,19110220): 2021년 1월 26일 검색.
「조선총독부의원부속의학강습소규칙」, [조선총독부법령 제37호, 1912. 12. 5 일부개정]; 국가법령정보센터, https://www.law.go.kr/법령/조선총독부의원부속의학강습소규칙/(00037,19121205): 2021년 1월 26일 검색.
「해부실의 이채, 의학교에 세 명의 여자 청강생, 한 명은 안왕거씨 영양 안숙경」, 『매일신보』, 1916년 9월 23일.
“안수경은 시가 안왕거씨의 영양으로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후 당시 그 학교의 교장이던 상원씨의 소개로 역시 청강생으로 통학하게 되었는데”라는 기사(「新女醫 三閨秀는 남자와 똑같이, 두 명은 평양출신이오, 한 명은 시가의 딸이다」, 『매일신보』, 1918년 4월 3일)로 보아 평양 출신인 김영흥, 김해지는 기숙사가 필요했지만, 안수경은 집에서 통학을 했던 것 같다. 안왕거의 주소지는 숭이동(崇二洞)이었고 숭이동은 총독부의원이 있던 자리인 현재의 혜화동 근처이다.
“Those in charge of the Government General’s Medical School for Korean young men, Seoul, have kindly and generously offered to teach these women, with the men but sitting apart from them; tuition free, the same as the men; if their grades warrant it, to give them government license to practice the same as the men; but, instead of the scholarships furnished to many of the male students, they will furnish a dormitory under suitable supervision ‘where ,the girls may live and cook for themseives, at their own expense. They shall also be always accompanied to class-rooms and elsewhere by chaperons of our own choosing.”; Rosetta S. Hall & Mary M.Cutler, Koang Hyoe Nyo Won (Woman’s Hospital Of Extended Grace), Fifteenth Annual Report Of The Korea Woman’s Conference Of 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 Seoul, 1913.6.6-11, pp.99-100.
안효구는 경성의전을 1919년 3월 31일 졸업하고 의사면허는 1921년에 받아 444번이었다. (『조선총독부관보』, 1921년 9월 8일.)
「해부실의 이채, 의학교에 세 명의 여자 청강생, 한 명은 안왕거씨 영양 안숙경」, 『매일신보』, 1916년 9월 23일.
참고로 그동안 최초의 의사면허 취득 여성으로 잘못 알려져 온 허영숙의 의사면허 번호는 348번이다.; 『조선총독부 관보』, 1919년 11월 28일.
Editorial Notes, The Korea Mission Field a monthly Journal of Christian Progress, 1918.6.; 「新女醫 三閨秀는 남자와 똑같이, 두 명은 평양출신이오, 한 명은 시가의 딸이다」, 『매일신보』, 1918.4.3.; 「兩 女醫 취직, 동대문안 부인병원에」, 『매일신보』, 1918년 4월 30일.
“As “Director of the Women’s medical Class”, I am happy to report the graduation of the first three girls, on equal footin with the men, at the Government General Medical College in Seoul on March 26, the granting of licenses to them to practice medicine, and, best of all, their excellent capabilities since becoming doctors in our hospitals.”; Mary M. Cutler, Woman’s Hospital of Extended Grace and Medical Education for Korean Women, Twentieth Annual Report of Korea Woman’s Conference of 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 Seoul, 1918.6.18-25, pp.128-129.
뒷줄 왼쪽 끝이 로제타 홀, 오른쪽 끝이 메리 커틀러이며, 메리 커틀러 옆의 남성이 사토고조이고, 로제타 홀 옆의 남성은 Mr. K. Okado라고 적혀있는데 학교 또는 총독부 인사일 것으로 추정되나 정확한 신원은 확인이 되지 않는다.
They are living proof of what our girls are doing and well illustrate that “tall oaks from little acorns grow.”; The Work Of Methodist Women In Korea Twenty First Annual Conference. 1919, p.11.
「한국 여의사의 졸업」, 『신한민보』, 1918년 5월 9일.
「海內 海外에 헛허저 잇는 朝鮮女醫師 評判記」, 『별건곤』, 1927년 3월.
「秘密結社 冒險團員 檢擧 續報」, 『大正8年乃至同10年朝鮮騷擾事件關係書類共7冊其6』, 1920년 6월 17일.
「衛生講演開催」, 『동아일보』, 1920년 8월 2일.
「女子靑年會講話會」, 『동아일보』, 1921년 7월 13일.
「仁川에 婦人醫院」, 『동아일보』, 1921년 10월 30일.
「金女醫北京行」, 『동아일보』, 1922년 9월 5일.
「海內 海外에 헛허저 잇는 朝鮮女醫師 評判記」, 『별건곤』, 1927년 3월.
김해지, 「여자의 정조」, 『신여자』 5, 1920년 6월.
“평북안주군창덕병원장 안창덕(34)씨와 평양 서문0일신당대약방 주임 김정상씨의 매씨로 지금까지 평양 광혜 여병원의 여의로 시무하던 김해지(30)양과 지난 이십일일 오전 십시에 남산현 예배당내에서 문약한 목사의 주례하에 성대히 결혼식을 거행하였다더라.”: 「신랑신부」, 『조선일보』, 1921년 6월 26일.
“...염병이 전염되어 자택 창덕병원 안에서 아내 여의사의 치료를 받던 중 지난 십구일 오후 세시에 드디어 본병으로 사망하였는데 일반은 그의 죽음을 매우 애석히 여긴다더라”; 「安州公醫殉職」, 『조선일보』, 1926년 3월 21일.
「癌으로 誤診코 孕婦를 開腹」, 『동아일보』, 1926년 10월 2일.
Thirtieth Annual Report of Korea Woman’s Conference of 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 Seoul, 1928, 56쪽.
「근우인천지회, 설치대회 성황」, 『중외일보』, 1929년 7월 8일; 「槿友仁川支會 創立大會盛况」, 『동아일보』, 1929년 7월 8일; 「근우인천지회 창립대회개최 지난 오일에」, 『조선일보』, 1929년 7월 8일.
『조선총독부관보』, 1938년 12월 10일.
안수경은 1930년대까지 계속 동대문부인병원 산부인과에 재직하여 동대문 부인병원장의 위치까지 올랐다.(김자혜, 「경성이 낳은 새 여성-부인병원 여의 안수경씨」, 『신가정』, 1933년 2월; 「한職業 十五年에 보고들은」, 『동아일보』, 1935년 4월 6일.)
「天道靑年會新事業」, 『동아일보』, 1921년 9월 19일; 「金海靑年會講演會」, 『동아일보』, 1922년 4월 25일; 「金海敎育會總會」, 『동아일보』, 1922년 5월 10일 ; 「金海女靑年講演會」, 『동아일보』, 1922년 5월 14일; 「金海女子한빗總會」, 『동아일보』, 1922년 6월 17일; 「運動萬歲도獨立萬歲?」, 『조선일보』, 1923년 11월 10일; 「衡平主催의 講演會」, 『조선일보』, 1924년 1월 17일 등 1921년부터 1924년 가을 일본으로 가서 사회주의운동을 하기 전까지 안효구는 매우 자주 대중강연이나 청년회 집회, 야학 등에 참여했다.
「첫길에압장선이들(六)-수녀같이 숨어있어 병자를 구원하는 동대문부인병원 의사 안수경양」, 『조선일보』, 1924년 11월 28일.
「감격에 싸여 생명영접 이만오천 차, 성직의 기쁨을 말하는 동대문 부인병원 안수경 여사담」, 『조선일보』, 1939년 1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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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길에압장선이들(六)-수녀같이 숨어있어 병자를 구원하는 동대문부인병원 의사 안수경양」, 『조선일보』, 1924년 11월 28일.
「合同은 形式으로 廢止되는 婦人病院」, 『조선일보』, 1925년 5월 20일.
「東大門婦人病院 廢止反對聯盟會, 남자 측이 경영함은 시대착오라고」, 『조선일보』, 1925년 5월 22일.
「責任者도 廢止反對」, 『동아일보』, 1925년 5월 23일.
「民族的侮辱이라고 看護員女生畢竟盟休」, 『조선일보』, 1926년 1월 30일.
「女學生들은一塲慟哭」, 『조선일보』, 1926년 1월 31일.
「問題의 看護員養成所長 理事會決議로 突然復職」, 『동아일보』, 1926년 3월 5일.
「理事會當局에 質疑書를 提出」, 『조선일보』, 1926년 3월 8일.
「看護員 意思를 無視하고 徹底히 羅姐西擁護」, 『조선일보』, 1926년 3월 9일.
「宣敎師의 非道德的行爲를 摘發해 敎人에 配付」, 『조선일보』, 1926년 3월 10일; 「 洋人宣敎師의 狡猾手段을 公開」, 『시대일보』, 1926년 3월 10일.
「懿法靑年憤起」, 『조선일보』, 1926년 3월 8일; 엡웟청년회는 미국 감리교의 청년단체 이름으로, 한국에서는 1897년 감리교 정동교회에서 처음 조직되었다. 엡윗은 요한 웨슬리의 고향 (Epworth League)에서 따왔다고 한다(「이주일의 역사-엡웟청년회 조직」, 『기독신문』, 2008년 4월 26일). 문헌, 기록에 따라 ‘엡웟’이라고도 하고 ‘엡윗’이라고도 하며, 음차표기로 ‘의법’이라고도 하는데 원어의 발음에 가장 가까운 것은 ‘엡윗’으로 보인다.
「停刊中의 社會相 (一)-羅姐西孃 辭職」, 『동아일보』, 1926년 4월 21일.
“Because of the tragedy that occurred early in 1926 some thought it better not to admit a new class before Conference which together without an experienced Superintendent Nurse, will probably cause the next report to be less promising; but this oldest N. T. S. in Korea-even older than in China-organized by Mrs. Edmunds-Harrison R. N. and Mary Cutler, M. D. is too firmly established to be permanently crippled.”; Annual Report of Korea Woman’s Conference of 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 Seoul 1926, 66쪽.
「조선일보독자부인봉도단」, 『조선일보』, 1926년 6월 8일.
「부인봉도단주의사항」, 『조선일보』, 1926년 6월 10일.
「女子醫學講習 昇格토록 運動 각방면원조엇기위하야 社會有志들이 奔走」, 『조선일보』, 1934년 4월 6일.
「女子醫專校 期成運動」, 『동아일보』, 1934년 4월 22일.; 「女子醫學專門 趣旨書發表」, 『조선일보』, 1934년 4월 22일.
「새해와 그들!그들과 새해 어떠한 결심과 어떠한 희망으로써 그들은 새해를 맞이하나? (三)-안수경, 職務에 忠實」, 『매일신보』, 1931년 1월 5일.
「產母衛生 民族保健 큰關係」, 『조선일보』, 1928.1.2.; 「이것만은 그만 두어주엇스면【三】- 전염병에 등한한 것과 화류병의 증가를 어찌할까」, 『중외일보』, 1930년 1월 17일.
「新進女流의 氣焰(十二) 迷信과 衛生思想; 병자에게 약은 아니스고 푸닥거리만 함을 금하라(女醫, 安壽敬女史談)(肖)」, 『동아일보』, 1921년 3월 5일.
「職業 十五年에 보고 들은 世態人情 ; (下)」, 『동아일보』, 1935년 4월 7일.
“...女子로서의 特典이라면 너무도 억울하다고 하면서 그래도 기쁨의 所致를 가지고 기다리고있었다. 安壽敬 先生의 온갖 親切을 다 받으면서 기막히는 苦痛을 참으면서 아무쪼록 喜消息이 있기를 기다리었다. 그때이다. 安壽敬 先生은 受苦하셨소 大門간에 고추달게 되었소 하였다...”; 차사백, 「여인일기(6)-회상」, 『조선일보』, 1933년 3월 4일.
Annual Report of Korea Woman’s Conference of 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 Seoul, 1925, 54쪽.
“아직 미쓰로 전반생을 전부 부인과, 산과의 연구에 바쳐 부인환자에게 큰 신임을 받고있는데 현재 동대문부인병원에 근무중이다.”; 김자혜, 「경성이 낳은 새 여성-부인병원 여의 안수경씨」, 『신가정』, 1933.2.; “이선생은 오늘까지 시집갈 것도 이저버리고 마흔 세살의 전반생을 이 거룩한 일에 바처온것이다”; 「感激에 싸여 生命迎接二萬五千次, 聖職의 기쁨을 말하는 東大門婦人病院 安壽敬女史 談」, 『조선일보』, 1939년 1월 1일.
“安壽敬 一名收瓊. 孝子孝婦. 順天人 金尙珪夫妻也”; 안왕거, 「評定 洌上閨藻 (67)」, 1927년 4월 6일.
「鬪士의 딸로 地下運動 全協올그로 活躍」, 『조선일보』, 1933년 2월 4일에 안광천의 생질이자 노백용의 딸로 소개된 노남교의 나이가 24세로 적혀있다. 안수경이 신해음사에 1911년 15세의 나이로 시를 게재한 나이에서 역산하면 노남교와 안수경의 나이 차이는 13세이기 때문에 안수경이 노남교를 낳았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즉 안수경과 노백용이 부부였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새해와 그들!그들과 새해 어떠한 결심과 어떠한 희망으로써 그들은 새해를 맞이하나? (三)-안수경, 職務에 忠實」, 『매일신보』, 1931년 1월 5일.
「한職業十五年에 보고들은 세태인정(상)」, 『동아일보』, 1935년 4월 6일.
「한職業十五年에 보고들은 세태인정(상)」, 『동아일보』, 1935년 4월 6일.
「人事-安壽敬女史」, 『매일신보』, 1942년 7월 24일. 이 이건춘이 친일파로 일제 강점기 중추원 참의를 지낸 이건춘은 아닌 듯 보인다. 그는 1936년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안수경이 함께 병원을 운영했던 이건춘이 누군가에 대해서는 후속 연구가 필요하다.
「서울保健婦人會 오는 三十日結成大會」, 『부인신보』, 1947년 5월 24일.
이상설, 「여학생에게 의학연구를 권고함」, 『대한흥학보』, 1909년 10월 20일.
안수경(Dr. Ahn)과 김해지(Dr. Hattie Kim)는 의료 및 사회사업 위원으로 보인다. 간호사들의 경우 Miss, Mrs.라고 쓴 것과 달리 의사들에게만 Dr.라고 적었음을 알 수 있다.
1928년 조선여자의학강습소가 생겨났고, 이후 경성여자의학강습소(1933),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1938) 등을 통해 여성의학교육의 토착화가 차츰 진전되었다(김상덕,1993).
「海內 海外에 헛허저 잇는 朝鮮女醫師 評判記」, 『별건곤』, 1927년 3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