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 조선·청 관계와 국왕의 건강 문제 -숙종 초반 교영례(郊迎禮)를 둘러싼 갈등을 중심으로-†
The Joseon-Qing Relations and the King's Health Problems in the Late Joseon Dynasty -Conflict surrounding ritual of greeting envoys (郊迎禮) in the early reign of King Sukj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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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The international situation immediately after the throning of King Sukjong was very complicated. In the Qing dynasty, a Revolt of the Three Feudatories (三藩之亂) occurred and a serious crisis struck, and Sukjong ascended to the throne in Joseon immediately afterward this incident. The Joseon Dynasty prepared for a war that might arise while pessimistically observing the Qing situation. The Qing was suspiciously watching the activities of Joseon. In this situation, the ritual of greeting envoys became a factor that amplified the conflict between the two countries.
When the Qing Envoy came to Joseon in the tribute system, the Joseon king had to go to the western towns to meet the emperor's documents and envoy. However, in the early reign of King Sukjong, the king's greeting envoy was frequently stopped. The first reason was that Sukjong's health had frequently deteriorated. The second reason was smallpox. Sukjong had not suffered from smallpox. Therefore, to reduce the likelihood of smallpox transmission, Joseon intended to stop the ritual of greeting envoys by traveling to the western towns.
The Qing dynasty became increasingly dissatisfied with Sukjong's refusal to welcome the Qing envoys. In 1686, a Joseon envoy requested to cancel the fine imposed on Sukjong. This act turned out to be a serious matter. The Qing criticized Sukjong's usual unfaithful ritual of greeting envoys as the cause of this incident.In the end, the reasons for the conflict over ritual of greeting envoys in 1686 were: first, the tense international situation due to the “ Revolt of the Three Feudatories,” and second, concerns about Sukjong's disease and smallpox infection. The combination of such uncertain elements influenced the international relations of Joseon and Qing Dynasties.
1. 머리말
교영은 중국의 사신을 교외에서 맞이하는 의례로서 종주국과 제후국의 위계를 현실에 구현한다는 점에서 조선·청 관계 속에서 가장 중요한 외교의례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17세기 후반 숙종 즉위 직후부터 약 10여 년 동안 조선은 청 사신에게 몇 차례나 교영례 중지를 요청하면서 상당 기간 갈등을 야기하였다. 언뜻 보면 제후국으로서 마땅히 행해야 할 의례와 관련해 논란이 벌어지는 것 자체가 의외일 수 있지만, 그 중심에는 숙종의 건강이 변수로 자리 잡고 있었다.
지금까지 이 사건은 거의 주목받지 못하다가 조선의 교영 중지 요청을 정치적 의도를 지닌 행위로 해석한 연구가 제출되었다(이화자, 2011). 이 연구에서는 숙종이 즉위한 이후 조선에서 교영을 지속적으로 중지하려고 했던 현상과 숙종 12년(1686) 청으로부터 강력한 경고를 받은 이후 충실하게 교영례를 시행했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으나, 숙종 즉위 직전 청에서 ‘삼번(三藩)의 난(1673-1681)’이라는 대규모의 반란이 일어나 청의 통치가 흔들리자 이 위기를 틈타 교영례를 거부했을 것이라는 점을 간접적으로 서술하였다. 또 다른 연구에서는 숙종 초반 조선이 청의 위기에 편승하여 성지(城地) 수축, 동철(銅鐵) 수입 등을 청에 요구했고 이러한 조선의 태도에 대해 청은 삼번의 난이 마무리된 직후, 조선에서 발송한 외교문서의 용어를 문제 삼아 연달아 벌금을 부과했다고 분석하였다(夫馬進, 2019).
삼번의 난은 청초에 국내에서 일어난 반란 중 최대 규모였으며 실제로 중국 남부의 상당한 지역을 반란군이 차지했다는 점에서 심각한 위기를 초래하였다(이재경, 2014). 더하여 당시 조선에서는 삼번과 제휴하여 청을 공격하자는 의견이 등장하거나(홍종필, 1977; 한우근, 1962: 114-117), 만일의 사태를 우려하여 군사적 대비를 실제로 추진하기도 하였다(김우진, 2019). 이러한 긴장된 상황 속에서 조선의 연속적인 교영례 중지 요청은 정치적 목적을 지닌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다만 조선에서 교영 중지를 요청한 직접적 이유는 숙종의 건강상태와 천연두(天然痘) 즉 두창(痘瘡)의 감염 가능성이었다[1]. 교영시행을 둘러싼 갈등 원인을 명확히 규명하기 위해서는 삼번의 난으로 촉발된 정치적 문제와 함께, 숙종의 건강상태, 두창 감염에 대한 우려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해야 해당 사건의 실상을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
숙종의 질병에 관해서는 『조선왕조실록』(이하 『실록』)의 기록을 중심으로 국왕들의 질병치료를 분석하는 과정에서 개략적으로 다루어졌고(김정선, 2005; 김훈, 2005; 이해웅·김훈, 2006), 그 중 특이한 병으로 황달, 두창, 산증(疝症)을 언급하였다(김훈, 2005). 이후 『실록』보다 왕의 일상에 대해 상세한 기록이 남아 있는 『승정원일기』를 중점적으로 검토한 연구들이 제출되었다. 숙종 9년(1683)에 발병한 두창의 병증을 정리한 후 각 시기별 처방과 치료법을 분석한 연구(고대원·김동율·김태우·차웅석, 2012)와 함께, 숙종 재위 기간 중 21년 동안 시행된 중완혈(中脘穴) 수구(受灸)에 관한 연구도 이루어졌다(김동율·고대원·김현경·차웅석·안상우, 2015).
숙종의 건강 문제 중 두창은 조선·청 관계에서 중요한 변수였다. 청에서는 두창을 심각한 질병으로 인식하여 두창이 유행할 때 이를 피하기 위한 다양한 조치를 시행했고, 고위 귀족들의 경우 두창의 발병 여부를 문서로 관리하기도 했다(杜家驥, 2004). 청 제국의 국내외 정치 영역에서 두창이 중요 변수로 작용했다는 분석도 이루어졌다(Chang, C. F., 2002). 최근에는 조선·청의 국제관계 속에서 두창 문제를 새롭게 주목하였는데, 해당 연구에서는 정묘·병자호란 과정에서 두창이 전쟁의 진행 및 강화 협상에 영향을 끼쳤다는 점을 분석하였다(구범진, 2016).
본고에서는 국왕의 건강상태가 조선·청의 국제관계에 어떠한 변수로 작용했는지 숙종 초반 교영례 사안을 통해 드러내고자 한다. 첫째, 숙종 즉위 직전 발발한 삼번의 난으로 인해 형성된 조선·청의 긴장된 관계와 주요 현안들을 소개한다. 이를 통해 양국 모두 반란의 추이를 의식하는 상황 속에서 교영례 문제가 촉발되었다는 점을 드러낼 것이다. 둘째, 숙종의 건강 악화와 교영중지의 상관성을 검토할 것이다. 숙종은 즉위 초부터 다양한 질병에 시달렸는데 실제 건강이 나빠진 시기와 교영례 시점이 중첩되는지, 그리고 교영 중지 요청을 청 사신이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를 파악하도록 한다. 셋째, 교영례와 관련된 또 다른 변수로서 숙종의 두창 문제를 검토할 것이다. 숙종은 두창을 앓기 전에 왕이 되었기 때문에 조선 왕실과 신료들은 두창의 감염에 대해 늘 주의를 기울였다. 이 문제가 교영례와 어떠한 방식으로 연결되는지 분석할 것이다.
이상을 통해 숙종 초반 삼번의 난으로 인해 조선·청 관계의 긴장이 높아진 상황 속에서 숙종의 건강문제가 외교 갈등의 주요 요인이 되었다는 점을 밝힘으로써 국제관계와 질병의 관련성을 다양한 측면에서 드러내고자 한다.
2. 숙종 초반 조선·청 관계와 교영례
1) 숙종 초반 대외위기와 조선·청 관계
교영례를 둘러싸고 조선·청 양국이 갈등을 빚은 시기에, 청에서는 ‘삼번의 난’으로 불리는 대규모 반란이 일어났다. 삼번의 난은 현종 10년(1673)부터 약 10여 년 간 지속되었는데, 조선에서는 반란의 발발 직후부터 관련 정보를 지속적으로 수집하면서 전쟁의 추이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伍躍, 2007; 이재경, 2014). 조선의 입장에서는 오랑캐 청이 패전하기를 바랐지만 전장의 확대는 예기치 못한 사태를 초래하였다. 숙종 즉위년(1674) 청과 반목하던 대만의 해상세력인 정경(鄭經)이 조선을 공격하러 왔다는 소문에 도성에서 피난 행렬이 줄을 이었다[2,]. 정경의 조선 침략설은 1680년대 초까지 지속적으로 반복되며 조선의 위기감을 가중시켰다(김우진, 2019: 26-28). 또한 조선의 바람대로 청이 패배한다고 해도 문제가 되었다. 당시 조선에서는 청나라가 패배할 경우 중원을 버리고 본거지인 영고탑으로 돌아가는 과정에서 평안도 및 함경도를 경유하여 조선을 침략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이른바 ‘영고탑 회귀설’에 의한 위기의식이 본격적으로 제기되었다(배우성, 1998).
대외위기가 가중되는 상황 속에서 조선에서는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고자 하였다. 가장 먼저 산성(山城) 축조와 강화도 정비에 중점을 두었다. 청과 전쟁이 발생할 경우, 청군이 한양에 이르기 전에 차단하기 위해 개성 대흥산(大興山)에 축성을 단행하였다. 숙종 2년(1675) 3월에 공사를 시작하여 약 50일 만에 완공되었고, 이후 도체찰사부(都體察使府)에 소속시켰다(김우진, 2019:48-50). 동시에 강화도의 군사체계를 전반적으로 정비하였다. 강화도는 유사시 국왕 및 왕족의 피난 장소로서 ‘보장처(保障處)’로 평가되는 곳이었다. 숙종 1년(1675)에는 청군의 도하를 대비하여 강화도의 갑곶진에 제언을 쌓았고, 숙종 5년(1679) 3월부터는 강화도 전체 방어를 위해 돈대를 축조하고 관리체계를 정비하였다(김우진, 2019: 77-85).
한편 청에서도 조선을 의심의 눈초리로 보고 있었다. 당시 중국의 동북지역에서는 조선이 대만의 정경 군대를 인도하여 중국으로 쳐들어온다는 소문이 돌았다. 청은 조선에 정보가 유출되지 않도록 북경에 온 조선 사신의 출입을 더욱 엄격히 통제했다. 산해관에서는 물품 수색을 강화해 조선 사신단은 몰래 획득했던 청의 공문서 등을 불태워야 했다(김우진, 2019: 25). 또한 조선 사신의 이동로도 변경하였다. 이는 기존 이동로에 있던 우가장(牛家庄)에 군사시설을 설치하면서 조선 사신들로 하여금 우가장을 피해 조금 더 먼 곳으로 이동하도록 한 것이었다[3]. 청의 입장에서는 해안 방어를 강화하여 대만 세력 및 해적을 막겠다는 취지였으나, 조선 사신들에게 군사시설을 노출하지 않으려는 의도도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청 황제와 고위 관료들은 ‘삼번의 난’이 진행되는 동안 조선에서 요청한 여러 가지 사안에 대해서 매우 부정적으로 보고 있었다. 숙종 8년(1682) 조선사신을 전송하기 위해 시행된 연회에서 예부시랑(禮部侍郞) 어싱거(額星格, Esingge)는 그 동안 조선의 태도에 대해 ① 기만적 수단을 써서 청조를 염탐한 점, ② 적절한 때가 아닌데도 동전 생산에 필요한 동철(銅鐵) 무역을 신청한 점, ③ 일본에 침략당할 우려가 있다고 하면서 성과 해자를 수리하고 전차를 만든 것 등 조선의 잘못을 일일이 거론하면서 삼번과의 전쟁이 격렬했기 때문에 그 동안 참았다는 내용을 언급하였다(夫馬進, 2019: 110-112). 또한 숙종 11년(1685) 조선에서 우역(牛疫)으로 인해 청과의 무역에서 소 교역을 중지해달라고 요청하였다. 청 예부에서는 조선의 요청을 핑계로 일축하였고, 강희제는 ‘조선 사람은 천성이 교활하고 거짓말을 잘하므로 그들의 요청대로 해주어서는 안 된다’라고 말하였다(夫馬進, 2019: 113-114). 청 황제와 신료들은 삼번의 난 기간 동안 조선의 태도에 대해 의구심을 지녔으며,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조선의 빈번한 교영례 중지 요청은 결국 갈등을 촉발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우역 문제와 함께 숙종 11년 함경도 지역의 민간인과 토병(土兵)이 불법적으로 국경을 넘어가 인삼을 캐다가 우연히 청의 관병과 마주치자 이들에게 총을 쏴서 부상을 입힌 사건이 발생했다(이화자, 2008: 91-96). 조사를 마치고 관련자들에게 형벌을 부과했는데, 범인 이외에도 조선의 지방관도 처벌을 받았으며 조선국왕에게도 벌금으로 은 2만 냥이 부과되었다[4]. 숙종 12년 북경을 향하던 조선 사신은 이 소식을 듣고는 북경에 도착한 후 벌금의 부당함을 지적하며 취소를 요청하는 글을 예부에 제출했다. 청에서는 조선 사신의 요청에 대해 황제의 결정을 비판하는 것으로 받아들였고, 사신들에 대한 처벌까지 논의되었다. 황제의 명령으로 조선 사신들의 처벌은 면했지만, 예부에서는 곧이어 다음의 외교문서를 조선으로 보냈다.
돌아보건대 그 임금은 어둡고[昏懦] 그 신하는 방자하니, 놀기만 하고 게으른 짓이 버릇이 되어 습속을 이루었기 때문에 예의를 버리고 은혜를 잊는 일이 한 번이 아니었습니다. 저희들이 매번 듣건대, 사신이 그곳에 이르면 과거에 정한 의주(儀注)를 준수하지 않아, 국왕은 때로는 <청 사신을> 맞이하지만 접견은 하지 않고 때로는 거만하게도 맞이하지도 않으니, 황제를 가까이에 모시면서 조심해야 하는 의리는 도대체 무엇을 가리키는 것입니까[5]?
*밑줄은 필자
여기서 말하는 국왕은 곧 숙종이다. 그리고 가장 문제가 된 지점은 청 사신에 대한 접견과 교영례였다[6]. 영접 절차상 교외에서 행하는 교영과 정전(正殿)에서 행하는 영칙(迎勅, 또는 迎詔)은 황제의 명령문을 받는 행위이기 때문에 조선국왕과 황제의 관계이다. 동시에 접견은 교영 및 영칙 의례를 마친 후 이루어지는 행위로, 주인과 손님 즉 빈주(賓主) 사이의 문제이다. 위 사료에 따른다면 조선 국왕은 황제 및 사신과의 관계에서 모두 물의를 일으킨 셈이다.
국왕을 이 정도의 강도로 비판한 문서는 조선 국왕으로부터 직접 항복을 받아 낸 청 태종 시기 이후 거의 처음이라고 할 수 있다[7,]. 청 태종 이후, 순치제 및 강희제 전반기까지 범월 사건, 척화신(斥和臣)의 등용, 왜정(倭情) 문제 등으로 청 황제가 조선 국왕을 질책한 사례는 확인되지만 실무를 담당한 신하들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책임을 물었을 뿐 국왕 자체를 비판한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 때문에 위의 예부 문서를 받은 조선 군신들은 병자호란 때보다 더욱 치욕적 사건이라고 인식했다[8]. 그렇다면 교영례에 어떠한 문제가 발생했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자.
2) 숙종 초반 교영 현황
숙종은 46년의 재위 기간에 37회 청 사신을 맞이했다. 연평균 약 0.85회에 해당하는 빈도로서 거의 해마다 청 사신이 방문했다고 할 수 있다. 병자호란 이후 청이 조선에 요구한 내용에 따라 황제의 명령문을 가지고 온 청 사신에 대해 서교(西郊, 지금의 독립문일대)와 궁궐의 정전(正殿)에서 조·칙을 받는 의례를 행해야 했지만 다양한 상황으로 인해 매번 시행된 것은 아니었다. 숙종의 교영례 불참을 비난한 예부의 자문이 도착한 숙종 12년(1686) 이전까지는 교영이 불규칙적으로 이루어졌다. 반면 기존의 연구에서 지적한대로 숙종 12년 이후부터는 한 차례의 예외 없이 국왕이 교영에 참여하였으며, 숙종 40년 이후에는 왕세자(이후 ‘경종’)가 교영을 대행하였다(이화자, 2011: 316-317). 숙종 즉위부터 숙종 11년까지 교영례 시행 현황은 아래의 표와 같다.
분석 대상은 숙종이 교영에 직접 나가지 않았거나 교영 대행을 요청한 사안이다. 숙종 즉위~숙종 11년까지 전체 18회의 청 사신 방문 중 이와 같은 조건에 해당하는 사안은 10회이다. 해당 기간 매우 높은 비율로 교영 중지를 요청했다고 볼 수 있는데, 삼번의 난으로 인해 조선의 태도를 예의주시하고 있던 청의 입장에서는 분명 문제를 삼을 수 있을 상황이었다.
위의 표1에 따르면 숙종의 교영 중지 사유는 크게 질병과 두창이었다. 질병을 이유로 청 사신에게 교영 중지를 요청한 사례는 4회(⑥ ⑦ ⑰ ⑱)였고, 모두 수용되었다. 다만 실록에 따르면 병을 무릅쓰고 교영에 참여한 사례도 있었다(⑭). 또 다른 이유는 두창이었다. 두창은 두질(痘疾), 두역(痘疫), 두환(痘患) 등으로 기록되었는데, 실제로는 또 다른 발진성 질병인 홍역(紅疫)과 발병초기에 구분이 안 되었을 가능성도 높다[9,]. 중요한 점은 조선 군신들이 이를 두창으로 인식하고 교영 중지 이유로 제시했다는 점이다. 조선에서는 6회(③ ④ ⑧ ⑨ ⑪ ⑫)에 걸쳐 두창 감염 우려를 이유로 교영 중지를 요청하였지만, 이 중 2회(④ ⑫)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그 과정에서 청 사신과 갈등이 불거졌다. 이외에 두창 유행을 이유로 국왕의 청 사신 전송을 중지해달라는 요청(⑤)과 교영 중지를 논의만 한 사례도 있다(⑭ ⑮). 한편 숙종 9년(1683) 10월 숙종은 두창이 발병하였고 약 보름 만에 회복되었다. 두창을 앓고 난 직후 교영에는 직접 참여했으며[10,], 그 이후의 두 번의 교영은 질병으로 중지하였다[11].
이상의 교영 현황에 근거하여 질병과 두창을 이유로 교영 중지를 요청했을 때 숙종의 건강 상태 및 도성 내외의 두창에 대한 보고를 검토하도록 한다.
3. 숙종의 질병과 교영례
숙종의 첫 번째 교영 사안은 책봉을 받기도 전에 발생하였다(①). 청 사신이 청 황후의 시호를 알리기 위해 조선에 오는 도중 현종이 사망했기 때문이다. 이 때 숙종은 교영에 참여하지 않았는데, 질병 때문은 아닌 것으로 보이며 국왕의 교영 중지가 어떠한 과정을 통해 받아들였는지 명확한 기록은 없다.
사례②(숙종1, 1675)에서 사업(司業) 윤휴(尹鑴)는 삼번의 난으로 청이 혼란스러운 시기에 청의 의심을 사더라도 금수와 같은 저들에게 고개를 숙여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며 교영 중지를 건의하였지만, 숙종은 자신의 책봉에 관한 일이라며 윤휴의 요청을 거절하였다[12]. 숙종 이전 효종과 현종 또한 국왕 책봉 사신이 조선에 왔을 때 모두 교영례를 행했기 때문에13) 숙종이 이를 중지하는 것은 상당한 부담을 지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윤휴는 교영 직전까지 교영 중지를 주장했지만 모든 중신들이 반대하자 이로 인해 사직을 요청하기도 하였다.14)
사례⑥(숙종4)과 사례⑦(숙종4)은 숙종 4년(1678)에 약 두 달의 시차를 두고 발생한 사안이다. 사례⑥에서 조선은 숙종의 질병을 이유로 교영과 접견의 취소를 요청했다. 최종적으로는 교영은 대신이 대행했고 접견은 그대로 시행되었다(3월22일)[15,]. 이와 관련된 숙종의 건강상태를 확인하면, 숙종은 같은 해 2월 1일부터 3월 하순까지 약 두 달간 질병으로 고생했으며, 윤3월에 한 차례 병세가 나타나 4월까지 치료가 이어졌다. 당시 숙종의 증상은 감모(感冒), 한축(寒縮), 번열(煩熱), 두통(頭疼), 인후통(咽喉痛) 등으로 기침을 동반한 심한 감기로 판단된다. 해당 기간에 무려 17차례 이상 약을 통한 치료가 시행되었는데, 2월 중순까지는 기침을 가라앉히기 위한 인삼패독산(人蔘敗毒散) 및 가미사물탕(加味四物湯) 등을 처방하였고, 2월 하순부터 3월 초에는 소변과 대변의 이상증세를 치료하기 위해 삼소작약탕(蔘蘇芍藥湯) 및 이공산(異功散)을, 3월 상순에는 식은땀 및 오한의 치료를 위해 가감생맥산(加減生脈散)과 소요산(逍遙散)을, 4월에는 보양을 위해 가미사군자탕(加味四君子湯)과 육미지황원(六味地黃元)을 처방하였다(고대원, 2015: 89-90). 이러한 상황 속에서 청 사신과의 접견은 정전이 아닌 편전(便殿)에서 이루어졌으며[16,], 사신 전송도 영의정이 대행하였다[17].
사례⑦(숙종4)에서도 숙종의 질병이 문제가 되었다. 『실록』에서는 “임금의 환후가 회복되지 않아서 교영을 중지하였다”라고 하였는데[18,], 아마도 앞서 언급한 숙종 4년 2월부터 3월까지의 질병으로 인해 건강을 완전히 되찾지 못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교영은 중지되었지만 같은 해 5월 20일 인정전에서 조서를 받고 접견을 시행했다. 다만 5월 22일에는 경연과 상참(常參)을 중지했고[19,] 5월 23일 더위로 인해 서병(暑病)이 발생하여 생맥산(生脈散) 가미방(加味方) 5첩을 치료에 사용하였다[20]. 아마도 5월 20일에 있었던 교영례의 여파로 추정된다.
사례⑭(숙종8)에서는 교영 중지 사유로 두창의 유행과 건강 상태가 모두 거론되었지만 주로 건강이 문제가 되었다. 숙종은 같은 해 3월 2일부터 교영이 예정된 3월 7일 이후까지 감기와 함께 위장 계열의 질병 증상을 보였다(고대원, 2015: 94). 교영 중지를 명확히 요청하지는 않았지만, 숙종은 병을 무릅쓰고 교영을 시행했으며[21,] 몸 상태가 좋지 않아 청 사신의 숙소에 가지는 못했다[22,]. 이로 인해 청 사신이 귀국할 때도 편전에서 접견하였다[23].
사례 ⑰(숙종10)의 교영례는 숙종 10년 12월 12일에 예정되어 있었는데, 같은 해 9월부터 12월까지 국왕에게 해수, 번갈, 구토, 오심(惡心) 등이 반복해서 나타났고, 소변이 붉어지는 증상까지 보였다. 이로 인해 18차례나 의약처방이 이루어졌다. 특히 12월 13일부터 12월 22일까지 무려 10차례나 중완혈(中脘穴)에 뜸을 떴다(고대원, 2015: 97). 결국 국왕의 교영 중지를 요청하여 청 사신으로부터 수용되었고, 청 사신의 접견도 편전인 태화당(泰和堂)에서 이루어졌으며[24,] 전송도 대행하였다[25].
사례 ⑱(숙종11)에서도 11월에 예정된 교영에 나아가지 못했다. 이때도 질병 때문으로 보이는데, 숙종 11년 9월부터 11월까지 작년과 유사한 감기 증상이 나타났고 11차례의 처방이 이루어졌다(고대원, 2015; 98-99). 치료를 반복하는 상황에서 교영일이 다가오자 교영 중지를 여러 차례 요청한 끝에 승인을 받았고[26,], 청 사신들의 접견도 편전에서 이루어졌다[27,]. 당시 청 사신은 조선 민인 및 토병이 청 관원에 총격을 가한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서 파견되어, 11월 22일부터 12월 1일까지 6차례의 조사를 실시하였다[28,]. 청 황제가 보낸 칙서에는 국왕과 함께 조사하라는 내용이 있었지만[29,], 숙종은 건강을 이유로 참여하지 않았고 마지막 심문 때만 남별궁(南別宮)으로 직접 이동하여 심문을 진행하였다. 숙종의 건강이 좋지 않았던 것은 분명하지만, 청 사신을 접견할 당시 이미 착용한 관대를 일부러 벗었다는 내용[30]을 고려하면 교영과 심문을 수행하지 못할 정도로 건강이 나빴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어쨌든 청 사신들은 마지막 심문을 제외하고는 참석하기 어렵다는 조선 측의 요청을 수용하였다.
숙종 초반 질병을 이유로 교영 중지를 요청한 사례는 18회의 청 사신 방문중 4회(⑥ ⑦ ⑰ ⑱)이며 이는 모두 수용되었다. 실제로 즉위초 숙종은 지속적으로 질병을 앓았고 때로는 심각한 상황에 이르기도 하였다. 동시에 청 사신들은 숙종의 질병을 실제적인 사안으로 인식했던 것으로 보이며, 이는 아마도 당시 청측 통역관들이 조선국왕과 관련된 정보를 비교적 정확히 파악했기 때문일 것이다. ⑱의 사례는 모호한 부분이 있지만, 청 사신들은 이를 문제 삼지 않았다. 조선과 청이 조공책봉관계를 맺은 이후 국왕의 질병으로 인한 교영례 중지는 대부분 수용되었다. 인조, 효종, 현종, 그리고 숙종 초반의 교영 현황은 다음과 같다.
우선 인조의 교영은 병자호란이 끝난 직후인 인조 15년(1637)에만 확인된다. 2건의 미확인 사례를 제외한다면, 인조는 인조 18년(1640) 이후 단 한 번도 교영에 참여하지 않았다. 당시 인조의 건강은 매우 좋지 않았는데, 창후(脹候), 번(煩), 한열(寒熱) 등의 만성질병을 앓았으며, 집권후반기에 들어서 병자호란을 비롯하여 인조 17년(1637) 저주사건, 인조 23년(1645) 소현세자 사망 등 각종 정치사건으로 인해 건강이 상당히 악화된 것으로 보인다(김혁구·김남일·강도현·차웅석, 2012). 청 사신들은 인조의 교영 중지 요청에 대해 그대로 수용하였으며 별다른 갈등은 나타나지 않았다. 심지어 인조는 교영례뿐만 아니라 정전(正殿)에서 황제의 명령문을 받는 의례 역시 거의 시행하지 않고 대부분 편전에서 청 사신을 맞이하였다. 예외적으로 인조 23년(1644) 소현세자가 귀국했을 영칙례를 실시하였는데, 이때도 교영은 중지하였다[31].
인조와 달리 효종은 거의 빠짐없이 교영에 참여하였다. 1건의 미확인 사례를 제외하면 효종 10년(1659) 1월 22일에 예정된 교영을 대행한 경우만 있을 뿐이다. 같은 해 1월 9일에 발가락에 침을 맞았다는 기록이 확인되는데[32], 아마도 거동이 매우 불편해서 교영에 참여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반면 현종은 질병으로 인해 상당한 빈도로 교영을 중지하였다. 현종은 재위기간 동안 약 절반정도의 교영만 시행하여 교영 비율이 52%에 불과하며, 이는 숙종 즉위~숙종 11년까지의 교영비율(50%)과 거의 비슷하다. 현종대 교영 비율이 현저하게 떨어지는 이유는 현종의 질병 때문이었다. 현종은 즉위 때부터 안질과 종기로 고생했고, 치료를 위해서 온양 온천에 5차례나 방문하였다. 20대 후반에는 천식과 담음증세도 나타났다(이해응·김훈: 230-234). 청 사신들은 현종의 교영 중지 요청을 모두 수용했으며, 인조대와 마찬가지로 특별한 갈등이 나타나지는 않았다.
인조시기부터 숙종 초반까지 질병으로 인한 교영 중지 요청은 대부분 수용되었다. 따라서 국왕의 건강 상태가 나쁠 경우 교영을 중지하는 일은 어느 정도 관행으로 자리 잡았다고도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숙종 8년(1682) 국왕의 질병을 언급했음에도 청 사신이 이를 거절하고 친행을 강요한 점, 그리고 숙종 12년(1686) 예부의 자문에서 숙종의 건강 상태에 대한 언급 없이 교영에 불성실했다는 것만 비판한 점을 고려할 때, 청과의 긴장된 관계 속에서 국왕의 잦은 교영 불참은 외교 문제로 비화될 가능성이 높았다.
4. 숙종의 두창 우려와 교영례
숙종은 조선 국왕 중 유일하게 재위 기간에 두창을 앓았다. 전근대 두창의 치사율이 40%에 이르는 상황 속에서[33,] 국왕이 두창으로 사망할 우려가 높다는 것은 안정적인 왕조의 유지라는 측면에서 매우 불안한 요소였다. 훗날 영조(英祖)가 자신의 혈통을 강조하기 위해 효종, 현종, 숙종을 잇는다는 의미로 ‘삼종혈맥(三宗血脈)’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는데, 숙종 또한 이에 비견될 정도의 희소한 혈통을 지니고 있었다. 숙종의 부친인 현종은 단 한 명의 장성한 형제도 없었고 숙종 또한 마찬가지였다. 더구나 14세의 나이로 즉위한 숙종에게는 아직 계승자가 없었기 때문에 숙종이 사망한다면 다음 후계자의 정통성에는 자연히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 왕실과 신료 모두 숙종의 건강상태, 특히 두창 발병에 매우 민감하게 대응하였다. 더구나 숙종의 모친(명성왕후)은 첫째 딸인 명선공주(明善公主)를 두창으로 잃었던 경험도 가지고 있었다[34].
숙종 1년(1675) 청 사신이 한양을 떠나기 직전 국왕의 신릉(新陵: 崇陵) 행차를 논의할 때 민간에 두창이 성행한다는 이유로 중지했지만[35,], 능이 도성 동편에 위치한 점을 고려할 때 두창 발병지가 도성 내 전체인지, 도성의 동쪽 지역인지 불분명하다. 또한 윤휴가 교영 중지를 건의할 때 두창을 전혀 언급하지 않은 점으로 보아 발병 시기나 지역이 숙종의 교영 이동로와 직접적으로 관련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다만 숙종 1년 5월 궁인(宮人) 중에 두창을 앓는 사람이 있어 국왕의 거처를 창덕궁에서 경덕궁(慶德宮: 지금의 경희궁)으로 옮기도록 조치했다[36,]. 또한 같은 해 10월 하순 숙종에게 손이 싸늘해지고 얼굴에는 붉은 열과 반점, 두통과 번열(煩熱) 등의 증상이 나타났다[37,]. 이로 인해 대신 등은 두창으로 의심하여 주사(朱砂)를 복용하도록 하였는데[38], 두창에 대한 긴장감을 잘 보여준다.
표1의 ③(숙종2)과 ④(숙종2)는 불과 한 달 사이에 두 번의 청 사신이 방문한 경우이다. 두 사례 모두 두창으로 인해 교영 중지를 요청했다. ③의 경우, 두창이 유행하는 동시에 아직 현종의 삼년상에 해당하는 시기였다. 숙종 2년 2월 2일부터 대신들은 두창이 번지고 있으므로 교영뿐 아니라 사신의 관소로 찾아가는 일도 모두 중단할 것을 건의하였다[39,]. 숙종도 이와 같은 의견을 받아들였고, 청 사신의 접대를 담당한 원접사(遠接使)를 통해 청 사신과 협의하도록 했다[40,]. 또 다른 한편으로 조선에서는 상을 치르는 기간 동안 교영과 함께 영접에 수반되는 제반 의례를 모두 중지하고자 했다[41,]. 최종적으로는 교영과 나례(儺禮)를 시행하지 않았다[42].
④(숙종2)의 경우, 경연 자리에서 영의정은 민간의 두창이 아직 말끔하게 없어지지 않았기에 교영이 걱정이 된다고 전달했지만 숙종은 불과 한 달 전의 교영도 중지했기 때문에 이번에는 시행하도록 했다. 이와는 별개로 일단 청 사신에게 교영 중지를 요청했는데 청 사신으로부터, “우리의 곤란함을 이용해 가벼이 여겨서 모욕하는 것인가”라는 극단적인 발언만 끌어냈다[43,]. 당시 삼번의 난으로 인해 조선·청 관계가 긴장된 상황 속에서 숙종의 질병이 확인되지 않은 한 조선의 교영 중지 요청은 청의 위기를 틈타는 것으로 인식될 수 있었던 상황을 잘 보여준다. 두창의 우려가 없지는 않았으나, 같은 해 2월 21일에 “작년에는 두창이 심해 경연을 중지했지만 이제 재개[44,]”하는 상황과 “여염이 근래 자못 깨끗해졌다[45,].”는 발언을 고려해볼 때, 2월 중순 이후에는 두창이 상당히 잦아들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같은 해 3월 15일 숙종은 교영례를 시행하였다[46].
⑧(숙종5), ⑨(숙종5), ⑪(숙종6), ⑫(숙종7), ⑭(숙종7), ⑮(숙종8)는 모두 두창의 유행을 이유로 교영 중지를 요청한 사례이다. ⑧은 교영일(숙종5년 2월14일) 3주 전부터 두창이 문제가 되었다. 전년도(숙종4) 12월에 신료들은 민가에 두창이 유행하니 선농제(先農祭) 친행을 중지할 것을 건의하였고[47,], 숙종 5년 1월에도 두창으로 인해 선농제와 교영 모두를 중지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48,]. 같은 해 2월 청 사신에게 교영 중지를 요청하였고 비교적 쉽게 받아들여졌다[49,]. 당시 청 사신 일행은 숙종이 힘들게 교영을 하면 병환이 생길 수 있다며 오히려 걱정하는 모습을 보였고 숙종의 건강을 염려해 국왕이 주관하는 연회를 취소하기도 했다[50,]. ⑨에서도 자세한 내용은 확인되지 않지만 두창의 유행을 이유로 교영이 취소되었다[51].
⑪(숙종6)부터는 교영 중지 요청으로 인해 청 사신과의 갈등이 심각해졌던 사례들이다. 숙종 6년 9월 조선 신료들은 민간에서 두창이 유행한다는 이유로 청 사신에게 교영 중지를 건의했지만 강한 거부 의사만 확인했다. 당시 조선의 원접사는 청측 통역관으로부터 황제가 조선 국왕의 병을 의심하고 있으며 이번 청 사신을 통해 국왕의 병세를 자세히 살피고 오라는 말을 듣기까지 하였다[52,]. 청측 통역관이 중간에 전달한 내용이기 때문에 사실을 어느 정도 반영하는지는 명확히 판단하기 어려우나, 이후 청 사신이 보인 태도를 보면 상당부분 실상에 가까웠던 것으로 생각된다. 조선에서는 청 사신이 압록강을 넘어 온 이후부터 연속하여 교영 중지를 요청했지만 청 사신이 완강히 거부하였기에[53] 결국 숙종은 교영례의 시행을 결정하였다.
다만 당시 숙종은 감기로 인해 약을 처방받았고[54,] 조선 군신은 두창의 유행을 실제로 심각하다고 인식하였다. 청 사신이 방문하기 세 달 전인 숙종 6년 6월 문과시험 때문에 춘당대(春塘臺)로 국왕이 행차할 때, 수행할 무사 중에 ‘역질범염인(疫疾犯染人)’ 즉 두창으로 사망한 사람과 접촉한 인원들은 제외하기로 했다[55,]. 이는 초상집 등에서 병균을 옮길 가능성을 고려한 조치였다. 또한 같은 해 8월 경덕궁으로 거처를 옮기기 전 궁궐을 수리할 때에는 두창을 검사하는 관원을 파견하였다[56,]. 청 사신의 도착 약 2주 전인 9월 9일 예정된 정시(庭試)에 대해서도 원래는 국왕이 머물고 있던 경덕궁 숭정전(崇政殿)에서 실시하려고 했지만, 민가에 두창이 퍼져있기 때문에 응시자들이 혹시라도 병을 옮길까 시험장소를 창덕궁 인정전(仁政殿)으로 장소를 옮겼다. 국왕의 거처에서 시행할 시험을 다른 곳에서 치르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이 때문인지 실록에서는 시험장소의 변경 이유에 대해 “국왕께서 두창을 앓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라고 언급하였다[57,]. 두창에 대한 우려가 상당했음에도 청 사신의 압박으로 어쩔 수 없이 교영을 행하게 되자, 숙종은 교영 이동로에 해당하는 돈의문(敦義門)일대에 두창 감염자가 있는지 확인하도록 하였다[58].
그런데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영의정과 호조판서의 장계(狀啓)를 받고 교영을 중지하기로 하였다[59,]. 아마도 청 사신의 접대를 맡은 조선 신료들이 끈질긴 요청 끝에 중지 허가를 끌어낸 것으로 보인다. 교영 중지에 대해 청 사신은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시하였다. 교영 당일(9월24일)에는 곧바로 돌아가겠다는 으름장을 놓았고, 청 사신과 조선 신료들 사이에 으레 행하던 현관례(見官禮)를 비롯하여 여행의 노고를 위로하는 연회[下馬宴]까지 모두 취소하였다[60,]. 또한 26일과 27일의 연회 요청도 모두 거절하였다[61].
⑫(숙종7)에서도 교영을 둘러싸고 다시금 갈등이 불거졌다. 숙종 7년 3월 조선에서는 두창 유행을 언급하며 교영 중지를 요청했지만 청 사신은 거부했다[62,]. 그러자 문무백관 300명이 교영 중지를 다시금 요청했고, 원접사는 백성들의 이동을 통제하기 어렸다는 점을 언급하며 궐문 앞에서 행사를 치를 것을 제안했지만 청 사신은 강경한 태도로 국왕의 출성을 요구했다[63,]. 결국 숙종은 같은 해 4월 2일 교영을 시행했다[64,]. 다만 사신의 전송은 국왕이 나가지않고 대행하였다[65,]. ⑫의 경우 조선에서 두창에 대한 긴장은 분명 존재했다. 숙종 6년 10월에 왕비 인경왕후(仁敬王后)에게 두창 증상이 나타나 숙종은 긴급히 창경궁으로 거처를 옮겼고[66,], 곧이어 인경왕후가 사망했다[67,]. 인경왕후가 두창을 앓고 있던 와중에 숙종에게 기침과 구토 증세가 나타나 숙종의 진료를 맡은 약방(藥房)은 극도로 긴장했으며, 두창으로 의심하여 관련 약을 시험하기도 하였다[68,]. 이후 두창 감염을 우려해 상당 기간 아예 신료들을 접하지 않아 사무가 적체될 지경에 이르렀다[69]. 이와 같은 상황에서 국왕의 교영 중지를 위해 문무백관 수 백인이 동원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전과 달리 청 사신은 이를 수용하지 않았고, 두창 문제는 양국 갈등을 폭발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⑭(숙종8)와 ⑮(숙종8)에서는 교영례 실시를 둘러싼 조선 내 논의 과정에서 두창이 어느 정도 유행한다는 점을 인식하면서도, 청 사신에게 교영 중지를 요청하지는 않았다는 것이 특징적이다. ⑭에서 조선 군신들은 교영은 어쩔 수 없이 해야 하고, 사신 관소 방문을 중지시키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자 하였다. 실제로 교영 이후 숙종은 청 사신의 접견 요청을 병을 이유로 거부했고 전송도 편전에서 접견하는 것으로 대체하였다. ⑮에서도 두창이 간혹 발생한다는 것을 이유로 대신이 숙종에게 교영 중지를 건의했지만[70,] 교영은 그대로 시행되었다[71]. 그리고 이듬해(숙종9) 10월 숙종은 두창에 감염되었다.
두창의 위험성은 조선뿐 아니라 청에서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앞서 언급했듯이 청은 이른 시기부터 두창이 발생할 경우, 격리를 위한 피두소(避痘所)를 마련했을 뿐 아니라 두창을 앓은 이들을 숙신(熟身, urehe), 그렇지 않은 이들을 생신(生身, eshun)으로 구분하여 관리할 정도였다(구범진, 2016: 15; 杜家驥, 2004: 135). 따라서 두창의 발병여부는 숙종 이전부터 외교관계에서 중요한 고려 대상이었다. 인조연간에 인평대군이 청 사신을 만나려고 할 때 통역관 정명수는 자신의 일행에 두창에 걸린 사람이 있기 때문에 만나지 못하게 하였다[72,]. 당시 인평대군은 두창을 앓지 않았기 때문이었다[73,]. 효종연간 세자(이후 ‘현종’) 책봉을 위해 청 사신이 조선에 왔을 때, 국왕과 세자가 함께 교영을 해야 했지만 당시 세자가 두창을 앓지 않았다는 이유로 교영에서 제외하였다[74,]. 현종 2년(1661)에는 도성 내 두역이 크게 유행한다는 것과 양상(痒瘡)을 이유로 교영 중지를 요청하였고 그대로 수용되었다[75].
숙종이 두창을 앓지 않았다는 사실과 조선·청 양국의 외교관계 속에서 두창의 위험성을 공유해 온 관행을 고려한다면 두창은 교영을 중지할 만한 이유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청의 입장에서 보면, 국내에서 대규모 반란이 진행되는 와중에 조선의 무리한 요청, 조선인의 불법 월경 및 금지물품 수입 등으로 조선에 대한 불만이 점차 커져 가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때에 질병으로 인해 국왕의 교영 참여가 줄어들었고, 여기에 더하여 두창 감염 우려를 내세워 지속적으로 교영 중지를 요청하자 그 동안 쌓인 청의 불만이 폭발하게 되었다.
조선에서는 두창이 조금이라도 유행할 경우 교영 중지를 요청하였다. 여기에 대한 청 사신의 대응은 통일되지는 않았다. ④(숙종2)에서 청 사신은 조선의 요청을 거절하였지만, ⑧(숙종5), ⑨(숙종6), ⑪(숙종6)에서는 교영 중지를 수용하였고, ⑫(숙종7)에서는 다시 거부하였다. 따라서 두창과 관련해서 청 사신의 입장은 개별적인 성격을 띤다. 다만 ⑪(숙종6)부터 청 사신이 연이어 조선의 요청을 거부하려는 태도를 보이고, ⑫(숙종7)에서는 완강히 거부했다. 또한 ⑭(숙종8)와 ⑮(숙종8)에서는 국왕의 건강이 다소 나쁘고 두창 감염의 우려가 있었음에도 교영 중지 요청을 강하게 하지 않았다는 흐름이 나타난다.
이와 같은 변화상은 조선·청 관계, 나아가 동아시아 정세와 연동된다고 할 수 있다. 교영 시행을 둘러싼 갈등이 불거진 ⑫(숙종7)의 경우 우선 인경왕후의 제문(祭文)을 전달하는 사신이었기 때문에 청의 입장에서 조선에 내리는 특혜에 국왕이 교영에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수도 있다. 다만 청의 정세와 연관 지으면 당시 삼번의 반란에서 핵심 축이었던 오삼계(吳三桂)가 1678년 사망하고 그의 손자 오세번(吳世璠)이 뒤를 이었지만 반란은 점차 진압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더구나 ⑬(숙종8)의 청 사신은 오세번을 완전히 정벌했다는 강희제의 조서 전달하였다. 앞서 2장에서 언급했던 대로 ‘삼번의 난’이 진행되는 중에는 조선의 태도에 불만을 가지면서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면, 이제부터는 인내해야할 이유가 사점차 사라졌다고 추정할 수 있다[76].
5. 맺음말
숙종 즉위 직후의 국제정세는 매우 복잡했다. 청에서는 ‘삼번의 난’이 발생하여 심각한 위기에 휩싸였고 조선에서는 곧 현종이 사망하여 숙종이 왕위에 올랐다. 조선은 청의 상황을 부정적으로 관망하면서 혹시라도 발생할지 모르는 전쟁을 대비하였다. 청에서도 조선의 활동을 의심스럽게 주시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교영례는 양국의 갈등을 증폭시키는 요소가 되었다.
조공·책봉관계 속에서 청 사신이 조선에 오면 국왕은 전통적 관례에 따라 서교(西郊)로 나가 황제의 문서와 사신을 맞이해야 했다. 그런데 숙종 초반 국왕의 교영은 빈번히 중지되었다. 첫 번째 이유는 숙종의 건강 때문이었다. 숙종은 14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한 이후 줄곧 다양한 질병에 시달렸으며, 특정 시기에는 건강 상태가 매우 악화되어 약방에서 숙직하는 경우도 여러 차례 있었다. 이렇게 건강이 악화되거나 회복하는 단계에서는 청 사신이 방문할 경우 교영 중지를 요청하였고 대체로 수용되었다. 두 번째 이유는 두창이었다. 숙종은 재위 기간에 두창을 앓았다. 전근대 시기 두창의 치사율이 매우 높았던 상황 속에서 조선 왕실과 신료들은 두창이 도성 내외에 유행하는 시기에는 가급적 교영을 중지하려고 하였다. 그렇지만 두창의 유행은 국왕의 현재 건강상태와는 직접적 관련이 없었고, 질병으로 인한 교영 중지와 결합하면서 청 사신과의 갈등 요소가 되었다. 일부 사신은 조선의 요구를 수용하기도 했지만 다른 일부 사신들은 일말의 여지도 없이 거부하였고 심지어 조선에서 청 내부의 반란을 틈타 교영을 회피하는 행동으로 보인다며 노골적으로 비난하기도 하였다.
교영 시행을 둘러싼 갈등은 조선인의 불법 월경 사건의 처리와 결합하면서 공식적으로 폭발하였다. 숙종 11년 청에서는 숙종에게 월경 사건에 대한 책임을 물어 벌금을 부과했는데, 당시 북경을 향하던 조선 사신은 이 소식을 듣고 예부에 벌금 취소를 요청했다. 이 행위는 심각한 사안으로 불거져서 결국 청 예부에서는 숙종이 그간 교영례에 불성실했다는 점을 노골적으로 지적한 외교문서를 조선으로 보냈다. 결국 숙종 12년 교영례에 관한 갈등은 ‘삼번의 난’으로 인한 청 제국질서의 균열 및 긴장된 국제정세의 조성, 숙종의 질병과 두창이라는 전혀 예상할 수 없는 요소의 결합으로 인해 나타난 결과였다.
숙종 9년(1684) 숙종에게 두창이 발병했다. 약 2주간의 치료 끝에 고비를 넘기고 건강을 회복할 수 있었다. 이에 따라 이후 두창을 이유로 하는 교영 중지 요청은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더하여 기존 연구들에서 분석한대로 말년의 세 차례를 제외하고는 모든 교영을 빠짐없이 수행하면서 숙종의 건강은 더 이상 교영의 변수가 되지 않았다.
이상의 논문은 국제관계에서 국왕과 관련된 의학적 요소가 일정한 변수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점을 논증했다. 한편 숙종대 시행된 왕실 관련 사적 정비 및 추숭 작업, 국왕의 행차, 숙종 40년대 세자와 관련된 다양한 정치 현안에서 숙종의 건강은 주요한 매개가 되었다(윤정, 2012; 최형보, 2014). 다만 필자의 역량 부족으로 이와 같은 중요한 주제는 추후의 과제로 남겨 두고자 한다.
Notes
전근대 시기 천연두를 가리키는 용어로는 마마, 두역(痘疫), 두진(痘疹), 두창(痘瘡) 등이 사용되었다. 천연두라는 용어는 근대시기에 등장하였다. 인두(人痘) 또는 우두(牛痘)를 이식해서 면역력을 높이는 인공적인 종두(種痘) 방식이 보급되면서 상대적으로 이러한 치료가 보편화되지 않았던 시기의 병증을 천연두로 명명한 것으로 보인다(신동원, 2013: 176-177). 본고에서는 조선시대 천연두를 가리키는 용어로서 보편적으로 쓰인 두창을 사용하도록 한다.
『숙종실록』 숙종 즉위년(1674) 9월 4일(을축)
『通文館志』 事大 上 「中原進貢路程」
이재경은 당시 조선국왕에게 부과된 벌금을 분석하여 청의 친왕급에게 집행된 형벌과 유사하다는 것을 밝혀내고 청 내부의 형률이 외국의 국왕에게 적용되었다는 점을 강조했다(이재경, 2019).
『同文彙考』 原編 권51, 犯越, 「禮部知會呈文陪臣免嚴拿發與該國治罪咨【互飭諭】」, 25b-29a, “顧乃其君昏懦 其臣恣肆 玩惕驕惰 習以成風 棄禮忘恩 非惟一事 臣等每聞使臣至彼 不遵先年 所定儀注 其國王或迎而不見 或偃蹇不迎 天威咫尺之義 謂之何哉”
교영례는 궁궐 밖에서 중국 사신을 맞이하는 의례이다. 관련 연구에 따르면 중국 사신을 어떻게 맞이해야 할지에 대해서는 명대(明代) 이전까지 규정된 바가 없었다. 명나라는 특이하게도 중국 사신이 외국을 방문했을 때 외국에서 시행해야 할 의례를 만들고 이를 반포하였다(김성규, 2003). 명에서 이러한 의례를 창출한 역사적 배경에는 원간섭기 고려와 원의 관계가 자리 잡고 있다. 원에서는 국내의 지방 관원이 중앙 사신을 맞이하는 의례를 고려에 적용하였다. 이에 따라 고려 국왕은 성 밖에서 원 사신을 영접하였고, 시간이 지나면서 의례면에서 고려에 설치된 정동행성(征東行省)의 지위에 근거하여 지방행정단위로 인식하였다. 원의 뒤를 이은 명도 국내 지방에서 행하는 의례를 고려에 적용하였고 고려는 이를 수용하였다(정동훈, 2015). 이렇게 형성된 교영의례는 조선 전 시기에 걸쳐 준용되었다.
청 황제가 조선 국왕을 비판한 칙서는 대부분 『同文彙考』의 「勅諭」, 「犯禁」 조항에 수록되어 있다. 이와 관련해서 배우성 외, 『국역 『同文彙考』 勅諭·犯禁·刷還 史料』 (서울: 동북아역사재단, 2013) 참조.
『숙종실록』 숙종 12년(1686) 윤4월 29일(임오), “其詬責絶悖之言 實丙子以後所未有之辱也”
두창은 조선 전기에는 다양한 발진성 질병을 포함하였지만 조선후기에 들어서 두창(천연두)과 마진(홍역)으로 구분되었다(여연석·이현숙·김성수·신규환·김영수, 2018: 165).
『숙종실록』 숙종 10년(1684) 7월 4일(무진)
『숙종실록』 숙종 10년(1684) 10월 28일(경진); 『숙종실록』 숙종 11년(1685) 11월 21일(정축)
『숙종실록』 숙종 1년(1675) 1월 28일(계유)
『효종실록』 효종 1년(1650) 3월 7일(경신); 『현종실록』 현종즉위(1659) 11월 8일(을축)
『숙종실록』 숙종 1년(1675) 2월 30일(무오)
『숙종실록』 숙종 4년(1678) 3월 22일(계사)
『숙종실록』 숙종 4년(1678) 3월 22일(계사
『숙종실록』 숙종 4년(1678) 3월 27일(무술)
『숙종실록』 숙종 4년(1678) 5월 20일(기미)
『승정원일기』 숙종 4년(1678) 5월 22일(신유)
『승정원일기』 숙종 4년(1678) 5월 23일(임술)
『숙종실록』 숙종 8년(1682) 3월 7일(을묘)
『숙종실록』 숙종 8년(1682) 3월 10일(무오)
『숙종실록』 숙종 8년(1682) 3월 15일(계해)
『숙종실록』 숙종 11년(1685) 10월 28일(을묘)
『승정원일기』 숙종 11년(1685) 12월 19일(을사)
『숙종실록』 숙종 11년(1685) 11월 18일(갑술); 『숙종실록』 숙종 11년(1684) 11월 20일(병자)
『숙종실록』 숙종 11년(1685) 11월 21일(정축)
『숙종실록』 숙종 11년(1685) 11월 22일(무인) ;『숙종실록』 숙종 11년(1685) 11월 23일(기묘); 『숙종실록』 숙종 11년(1685) 11월 25일(신사); 『숙종실록』 숙종 11년(1685) 11월 27일(계미); 『숙종실록』 숙종 11년(1685) 11월 29일(을유); 『숙종실록』 숙종 11년(1685) 12월 1일(정해)
『숙종실록』 숙종 11년(1685) 11월 13일(기사)
『숙종실록』 숙종 11년(1685) 11월 21일(정축)
『인조실록』 인조 23년(1645) 2월 18일(신미)
『효종실록』 효종 10년(1659) 1월 9일(신축)
조선에서 유행한 대두창(大痘瘡, Variola major)의 치사율은 15~40%에 이르렀다(김옥주, 1993: 40).
명선공주는 두창이 발병한 지 10일 만에 사망하였다. 『현종실록』 현종 14년(1673) 7월 23일(경인); 『현종실록』 현종 14년(1673) 8월 2일(기해)
『숙종실록』 숙종 1년(1675) 3월 15일(계유)
『숙종실록』 숙종 1년(1675) 5월 9일(정묘)
『숙종실록』 숙종 1년(1675) 10월 22일(병자); 『숙종실록』 숙종 1년 10월 23일(정축)
『숙종실록』 숙종 1년(1675) 10월 24일(무인)
『승정원일기』 숙종 2년(1676) 2월 2일(갑인); 『숙종실록』 숙종 2년(1676) 2월 8일(경신);『숙종실록』 숙종 2년(1676) 2월 10일(임술)
『숙종실록』 숙종 2년(1676) 2월 13일(을축)
조선시대 왕조의 주요의례를 정리한 전례서(典禮書)에서는 조·칙을 맞이하는 의례를 가례(嘉禮) 항목에 수록하였다. 교영 관련 의례는 가례의 「영조서의(迎詔書儀)」 및 「영칙서의(迎勅書儀)」에 포함되어 있다.
『숙종실록』 숙종 2년(1676) 2월 14일(병인)
『승정원일기』 숙종 2년(1676) 3월 11일(계사), “今乃因我困弊 而輕侮之乎”
『숙종실록』 숙종 2년(1676) 2월 21일(계유)
『숙종실록』 숙종 2년(1676) 2월 21일(계유)
『숙종실록』 숙종 2년(1676) 3월 15일(정유)
『숙종실록』 숙종 4년(1678) 12월 23일(기축)
『승정원일기』 숙종 5년(1679) 1월 21일(정사)
『승정원일기』 숙종 5년(1679) 2월 13일(무인)
『승정원일기』 숙종 5년(1679) 2월 14일(기묘)
『승정원일기』 숙종 6년(1680) 2월 22일(임오)
『승정원일기』 숙종 6년(1680) 9월 13일(무진)
『숙종실록』 숙종 6년(1680) 9월 21일(병자)
당시 숙종의 증상은 감기로 인한 해수(咳嗽), 대변활삭(大便滑數) 등으로 나타났으며 창름산(倉廩散)과 청화화담탕(淸火化痰湯)을 복용하였다. 『승정원일기』 숙종 6년(1680) 9월 18일(계유); 『승정원일기』 숙종 6년(1680) 9월 20일(을해)
『승정원일기』 숙종 6년(1680) 6월 6일(계해)
『승정원일기』 숙종 6년(1680) 8월 4일(경신)
『숙종실록』 숙종 6년(1680) 9월 8일(계해)
『승정원일기』 숙종 6년(1680) 9월 23일(무인)
『승정원일기』 숙종 6년(1680) 9월 23일(무인)
『승정원일기』 숙종 6년(1680) 9월 24일(기묘)
『승정원일기』 숙종 6년(1680) 9월 26일(신사); 『승정원일기』 숙종 6년(1680) 9월 27일(임오)
『숙종실록』 숙종 7년(1681) 3월 29일(임오)
『숙종실록』 숙종 7년(1681) 4월 1일(갑신)
『숙종실록』 숙종 7년(1681) 4월 2일(을유)
『숙종실록』 숙종 7년(1681) 4월 9일(임진)
『숙종실록』 숙종 6년(1680) 10월 18일(계묘)
『숙종실록』 숙종 6년(1680) 10월 26일(신해)
『숙종실록』 숙종 6년(1680) 10월 26일; 『승정원일기』 숙종 6년(1680) 10월 22일(정미); 『승정원일기』 숙종 6년(1680) 10월 24일(기유)
『숙종실록』 숙종 6년(1680) 12월 25일(경인); 『숙종실록』 숙종 7년(1681) 1월 10일(갑자)
『승정원일기』 숙종 8년(1682) 6월 23(기해)
『숙종실록』 숙종 8년(1682) 7월 6일(신해)
『승정원일기』 인조 25년(1647) 3월 10일(신해)
『효종실록』 효종 8년(1657) 8월 16일(병술)
『승정원일기』 효종 6년(1655) 1월 9일(갑오)
『승정원일기』 현종 2년(1661) 1월 29일(기묘)
청·조선의 외교 문제와 관련해서도 청이 연속적으로 벌금[罰銀]을 부과하는 현상은 삼번의 난이 마무리되는 1677년부터 집중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이재경, 2019: 415-416). 이러한 상황을 종합적으로 본다면, 교영례를 둘러싼 갈등과 연이은 문서위식 사건 등은 삼번의 난으로 인해 촉발된 대외위기와 별개로 청의 전반적인 예제 정비작업과 연관될 가능성도 존재한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별고를 통해 논증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