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대 중국의 파블로프 학설 수용과 의료 체계의 변화 -보호성(保護性) 의료 제도의 확립을 중심으로†
The Introduction of Pavlovian Theory and the Change of the Medical System in China in the 1950s: Focusing on the Construction of the Protective Medical Sys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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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In the 1930s, Stalin established Pavlovian theory as a socialist medical theory, criticized bourgeois science and ideology, and consolidated his dictatorship. Stalin used Pavlov's theory to emphasize the interaction between man and environment and the inheritance of acquired characteristics, trying to ensure the legitimacy of the socialist system reform in politics and society. Therefore, if the Soviet scientists and doctors did not conform to Pavlov's theory, their research would be strictly controlled, making free and creative research impossible. In the 1950s, China and North Korea, which accepted the socialist political model of the Soviet Union, also had this dogmatic tendency.
In 1950, China signed the “The Sino-Soviet Treaty of Friendship,” initiated the movement of learning from the Soviet Union in politics, economy, society, education, law, science, medical care, and other aspects, and established a socialist country based on the Soviet model. In Chinese medical circles, through the “Pavlov Learning Movement," they accepted the health care system and medical technology of the Soviet Union without any criticism, and carried out the ideological transformation of intellectuals to wipe out the influence of western capitalism. Moreover, Virchow's ‘Cellular Pathology’ and Mendel's ‘Genetics’ were denounced as reactionary bourgeoisie theory, and Pavlov's theory became a socialist medical theory based on dialectical materialism. As a result, the Communist Party of China reorganized the medical and scientific knowledge system based on Pavlov's theory, and took it as an important ideological tool to establish the socialist medical system.
In the 1950s, Chinese medical workers strengthened ideological education through the “Pavlov's learning movement,” applied this theory to clinical practice, and implemented new treatment methods such as “Sleep Therapy” and “PPM(Psychoprophylactic Painless childbirth Method).” In addition, hospitals implemented the “Protective Medical System” and established the socialist medical system. The goal of the protective medical system was to eliminate the negative stimulation which has adverse effects on the treatment of patients and to establish a patient-centered medical system. Therefore, the hospital launched a comprehensive effort to create a clean environment, eliminate all kinds of noise, cultivate a friendly working attitude, and improve nutrition. As a result, the hospital environment and the working attitude of medical staff improved and the treatment rate of diseases also improved, while the mortality rate of patients decreased.
At the same time, with the strengthening of political education for doctors, nurses and patients in hospitals, hospitals have become places to educate socialist laws and ideology. In addition, in order to prove the superiority of Pavlov's theory, medical workers carried out unscientific sleep therapy on patients, so people's body became an experimental space for of socialism. Moreover, in the implementation of PPM, women could not tell the pain of childbirth, but under medical control, they were in a contradictory situation of enduring labor pain. The Communist Party of China has established its national identity by promoting its image of “rescuer”, which liberates the patients from the pain of disease, and the “welfare” image of taking good care of the people's body. The Communist Party of China has reconstructed the metaphors of “sickness” and “labor pain”, making it an indispensable medium for the concepts of socialism, women's Liberation and medical welfare to be engraved on the people's body. Therefore, through the clinical practice of sleep therapy and PPM, we can understand how the Communist Party of China controlled the people's body, and such policies and systems demonstrate the “medical” governance mode of socialist control over the people.
Ⅰ. 서론
이반 페트로비치 파블로프(Ivan Petrovich Pavlov, 1849-1936)는 조건반사 이론을 확립한 러시아의 생리학자이다. 주지하듯이 그의 조건반사 이론은 개에게 종소리를 울린 다음에 음식을 주는 것을 여러 번 반복하면, 나중에는 개가 음식을 주지 않고 종소리만 들어도 침을 흘린다는 것이었다. 그는 개가 음식을 주면 침을 흘리는 것처럼 자극에 대해 선천적ㆍ무의식적으로 반응하는 반사를 ‘무조건반사(Unconditioned Reflex)’라 하였고, 반면 종소리와 같이 음식과 무관한 외부자극에 반응하는 것을 ‘조건반사(Conditioned Reflex)’로 구분하였다. 요컨대 조건반사는 자극과 반응 사이에 결정되는 관계로서 경험을 통해 형성되며, 조건 혹은 환경이 바뀌면 그 관계도 변하게 된다(다니엘 토드스, 2006: 106). 이와 같은 파블로프의 조건반사 이론은 인간이 어떻게 학습하고 환경에 적응하는지를 설명하는 단초를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인간의 행동과 사고를 과학적으로 조절하거나 통제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파블로프 조건반사 이론의 핵심은 ‘정신’(Psyche 또는 Mind)을 생리적 현상으로 환원하여 설명하는 것이었다(김옥주, 2000b: 244-245). 그는 인간의 학습ㆍ행동ㆍ심리ㆍ정신 활동과 같은 고등한 뇌의 기능을 조건반사라는 생리적 현상에 기초한 객관적인 방법을 통해 연구하였다. 이러한 파블로프의 생리학과 조건반사 이론은 1920년대 소련의 볼셰비키당의 지도자들에게 변증법적 유물론을 과학적으로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이용되었다. 파블로프의 이론과 변증법적 유물론은 주로 세 가지 측면에서 유사성이 강조되었다(김옥주, 2000b: 246-247). 첫째, 파블로프가 행동ㆍ학습ㆍ심리와 같은 인간의 정신 활동을 조건반사라는 생리적 메커니즘에 기초하여 객관적으로 연구한 것은 형이상학적 관념론을 배격하고 물질의 우선성을 원리로 삼는 변증법적 유물론에 합치되었다. 둘째, 파블로프의 장기적 실험(Chronic Experiment) 방법론은 실험동물이 환경 전체와 맺는 다양한 상호관계를 중시하였는데, 이는 모든 현상의 보편적 연관성과 상호 의존성을 중시하는 변증법적 유물론에 부합하였다. 셋째, 파블로프는 조건반사 활동은 곧 신호 활동이며, 유기체는 대뇌의 신호 활동을 통해 객관적 세계를 인식하고 반영한다고 하였다. 또한 그는 신호 활동은 1차 신호체계와 2차 신호체계로 구분되며, 인간은 우선 1차 신호체계를 통해 현실을 감지한 후, 2차 신호체계(단어ㆍ언어ㆍ과학적 사유)를 통해 현실 세계의 주인이 된다고 주장하였다. 즉 언어와 같은 2차 신호체계의 활동은 인류 특유의 반영 혹은 인식 활동의 생리적 기초이며, 인간의 추상적 사유를 조성하는 생리적 기초라는 것이다. 때문에 파블로프는 인간이 세계(혹은 환경)에 적응할 수 있으며, 세계를 개조할 수도 있다고 보았으며, 이것이 인간의 ‘능동성’의 물질적 근원이라고 하였다.1), 이와 같은 파블로프의 주장은 “인간의 의식은 객관 세계(혹은 존재)의 반영일 뿐만 아니라, 세계를 창조한다”는 레닌의 반영론적(反映論的) 유물론과 일맥상통한다.2) 결국 파블로프의 학설은 생물학적 존재 조건 혹은 물질적 조건에 의해 인간의 정신 활동이 결정된다고 가정함으로써, 물질결정론으로 사적유물론(史的唯物論)의 경제적 기초를 확립하려 했던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이념적 정당성을 뒷받침해 주었다.
파블로프는 변증법적 유물론과 조건반사 이론을 결부 짓는 것에 대해 동의하지 않았으나, 볼셰비키당의 지도자들은 그의 이론을 정치적으로 이용하였다. 레닌은 파블로프에게 연구와 생활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으며, 스탈린은 1929년 고등뇌기능 실험유전학연구소(Institute of Experimental Genetics of Higher Nervous Activity)를 세워 대규모 실험 연구 사업을 지원하였다. 특히 1950년대 스탈린은 파블로프의 이론을 사회주의 의학 이론으로 공식화하여, 부르주아 과학 및 이데올로기를 비판하고 스탈린 체제를 정당화하는 데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김옥주, 2000b: 239-240). 스탈린은 조건반사를 통해 인간의 행동을 조작할 수 있다는 파블로프 학설을 활용하여, 세뇌 교육과 선전을 통해서 스탈린 체제를 정당화하고 개인의 우상화를 이룩하였다. 이를 통해 인민들은 스탈린과 국가에 대한 맹목적 충성심과 애국심으로 무장한 ‘사회주의적 인간’으로 개조되었으며, 그가 구축한 독재적 지배체제에 순응하고 심지어 찬양하기까지 하였다. 이와 같은 스탈린 체제의 정치화 작업 속에서 파블로프 학설은 사회주의 이념의 정당성을 뒷받침해 주는 ‘과학’으로 숭배되었으며, 과학계를 비롯한 학문 전반을 통제하는 이데올로기로 자리매김하였다. 이후 소련의 과학자와 의료인은 파블로프 학설에 부합되지 않은 연구 활동에 대해서 엄격한 통제와 검열을 당했으며, 자유롭고 창의적인 연구를 진행하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이러한 교조주의적 경향은 소련식 사회주의 모델을 수용한 북한과 중국에서도 유사하게 나타났다.
특히 중국에서는 1950년 ‘중소우호동맹호조조약(中蘇友好同盟互助條約)’을 체결하고, 소련식 모델에 근간을 둔 사회주의 체제를 건설하기 위해 정치ㆍ경제ㆍ사회ㆍ교육ㆍ법률ㆍ과학ㆍ의료 전반에 걸친 ‘소련학습운동’을 전개하였다(儲著武, 2018; 劉琪, 2017; 石文文, 2009; 邢和明, 2004; 周紅, 2018; 周萍, 2007; 周權, 2019). 소련식 사회주의 모델은 생산수단의 국유화, 중공업 발전을 최우선으로 하는 사회주의 공업화 전략, 중앙 정부의 명령에 따라 생산ㆍ분배ㆍ소비가 통제되는 계획 경제 체제를 일컫는 것이었다(石文文, 2009: 13). 마오쩌둥[毛澤東]은 이와 같은 사회주의 모델의 구축을 위해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론뿐만 아니라 소련의 선진적 경험과 우수한 문화까지 모조리 학습해야 한다고 국민들에게 호소하였다.3), 또한 중국 공산당은 1950년 5월 「중국과학원의 기본 임무에 관한 지시(關於中國科學院基本任務的指示)」를 내려 “과학이 국가의 공업ㆍ농업ㆍ국방건설ㆍ보건과 인민의 문화생활에 진정으로 봉사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국제적으로 진보한 과학적 경험을 흡수” 4),해야 한다고 하였는데, 이는 다름 아닌 소련의 과학 기술과 경험을 학습하라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1953년 2월 28일부터 6월 17일까지 쳰싼창 [錢三强]을 단장으로 하는 중국과학원 대표단이 소련을 방문하였고,5), 1954년 10월에는 양국이 「중소과학기술합작협정(中蘇科技合作協定)」을 체결하여 과학 기술 연구 및 인적 교류도 활발하게 진행하였다(尹木蘭, 2011: 13-15). 이 시기 동안 과학과 의료계에서는 소련학습운동이 광범위하게 일어났으며, 소련식 모델에 근간을 둔 과학 이론과 실험 방법이 무비판적으로 수용되었다. 이를 통해서 피르호(Rudolf Ludwig Karl Virchow, 1821-1902)의 세포병리학설과 멘델(Gregor Johann Mendel, 1822-1884)과 모건(Thomas Hunt Morgan, 1866-1945)의 유전학이 유심주의적ㆍ부르주아적인 것으로 치부되어 배척당하고, 이를 대신하여 파블로프의 조건반사론이 변증법적 유물론에 토대를 둔 사회주의 과학 및 의학 이론으로 공식화되었다.6) 그 결과 파블로프의 학설은 1950년대 초반 중국의 생리학ㆍ심리학ㆍ병리학ㆍ의학ㆍ수의학 연구 전반에 거대한 영향을 미치며, 사회주의적 과학 지식 체계 및 의료 시스템을 재편하는데 중요한 사상적 도구로 이용되었다.
파블로프 학설이 사회주의 의학 이론 및 임상 실천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는 기존에 소련과 북한을 중심으로 약간의 연구가 진행되었다. 특히 한선희와 김옥주의 연구는 파블로프 학설이 스탈린 체제의 확립뿐만 아니라 북한의 한의학의 과학화와 부르주아 의학의 청산에 사상적 무기로 작용하였음을 역사적으로 밝힘으로써 의료와 정치의 관계를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귀중한 연구사적 시각을 제공하였다(김옥주, 2000b; 한선희ㆍ김옥주, 2013). 이외에도 북한 사회주의 체제 형성기(1955-1961)의 보건 의료에 대한 연구에서 소련의 북한에 대한 의료 지원과 파블로프 학설의 수용에 대한 연구가 간략하게 언급되었다(정준호ㆍ김민규ㆍ김옥주, 2018; 김진혁ㆍ문미라, 2019). 그러나 북한과 유사하게 소련식 사회주의 의료 체계를 구축하고자 했던 중국이 파블로프 학설을 어떻게 수용하고, 이를 토대로 어떻게 의료 권력과 제도를 개편 했는가에 대해서는 연구가 거의 없는 실정이다. 그러므로 본고는 1950년대 소련ㆍ중국ㆍ북한 등 사회주의 국가가 파블로프 학설을 중심으로 ‘어떻게 사회주의적 의료 체계를 구축했는가’라는 문제를 본격적으로 탐색해 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 정치와 의료의 관계를 탐색하고, 사회주의 의료 체계의 특수성을 검토해 보고자 한다. 무엇보다 ‘사회주의 체제가 의료를 통해 어떻게 인민들의 신체와 정신을 지배하고자 했는가’ 혹은 ‘사회주의 체제가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어떻게 인민의 몸까지 소비하고 통제했는가’라는 문제를 검토해 보고자 한다.
1950년대 중국의 파블로프 학설 수용과 과학계ㆍ의료계의 반응에 대해서는 주로 2010년 이후부터 개별적인 연구가 진행되었다. 예를 들어 리훙허[李洪河]와 비샤오리[畢小麗] 등은 유기체와 환경의 상호작용을 중시하는 파블로프 학설을 토대로 중의학의 이론 체계가 변화하고, 침요법의 신경자극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는 과정을 분석하였다(畢小麗ㆍ李劍, 2006; 霍蕊莉ㆍ朱玲ㆍ楊峰, 2015; 李洪河, 2011; Ka Wai FAN, 2015; Taylor Kim, 2005). 또한 슝웨이민[熊衛民]과 리옌리[李豔麗]는 파블로프 학설 수용 과정에서 과학계의 비판적 태도와 과학 용어 번역을 둘러싼 마찰에 대해 다루었으며(李豔麗ㆍ閻書昌, 2014; 熊衛民, 2014), 한후이리[韓惠黎]와 장청[張程]은 1953년 파블로프 학습운동의 전개 과정과 의료계의 반응에 대해서 간략하게 분석하였다(韓惠黎ㆍ張程, 2018; 張程, 2019; 韓惠黎, 2019). 이외에도 원펑[文豊]은 상하이 제 2의학원[上海弟二醫學院]이 1952년부터 1957년까지 소련의 의과대학을 모방하여 학제 개편을 단행하고, 교육과정에 파블로프 학설과 마르크스ㆍ레닌주의 사상 교육이 강화되는 과정을 설명하였다(文豊, 2011). 그러나 이들 연구는 파블로프 학설의 수용과 영향이라는 단선적인 맥락 속에서, 의료 혹은 의학적 변화를 개별적으로 나열하는 데 그치고 있다. 무엇보다 이들 연구는 철학적ㆍ의학적 맥락에서 연구를 진행하여, 역사적 관점에서 ‘공산당이 사회주의 체제 확립의 일환으로서 의료를 어떻게 활용하고 통제했는가’라는 문제에 대해서는 주목하지 않았다.
본 논문은 기존 연구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1950년대 초반 과학잡지와 의학잡지에 대한 텍스트 분석을 통해 다음과 같은 점을 조명해 보고자 한다. 첫째, 파블로프 학설이 의료계의 사상개조를 위한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작용하고 있었음을 명확히 하고자 한다. 무엇보다 파블로프 학설이 자본주의 체제를 비판하고 소련식 사회주의 체제를 정당화하기 위한 사상적 투쟁의 무기로 이용된 측면을 역사적으로 밝히고자 한다. 둘째, 파블로프의 의학 이론을 명확히 하고, 수면요법과 무통분만법을 통해서 파블로프 학설이 임상적으로 실천되는 과정을 탐색하고자 한다. 또한 1950년대 파블로프 학설을 임상에 적용하려는 다양한 실천을 통해서 중국 공산당이 ‘인민의 고통과 질병을 어떻게 해석하고, 인민의 신체를 어떠한 방식으로 관리했는가’라는 단면을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셋째, 파블로프 학설과 보호성 의료 제도의 연관성을 검토하고자 한다.7) 사실 1950년대 초반 확립된 보호성 의료 제도는 파블로프 학설에 기반하여 병원의 의료 환경과 서비스를 환자 중심으로 재편한 사회주의 의료 체제 개편의 핵심 내용이었다. 그러나 기존의 연구는 보호성 의료 제도가 무엇이며, 구체적 실천 사례와 문제점은 무엇인가에 대해서 거의 검토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본고에서는 파블로프 학설과 보호성 의료 제도의 연관성 및 각 병원에서의 실시 사례를 중심으로 사회주의적 의료 체제가 확립되어 가는 과정을 살피고자 한다.
본고는 위에 제시한 세 가지 문제의식에 착안하여, Ⅱ장에서는 1950년대 파블로프 학설의 이데올로기화 과정을 전반적으로 살피고자 한다. Ⅲ장에서는 파블로프의 의학 이론의 기본 전제인 유기체의 통일성ㆍ자연과 인간의 상호작용ㆍ신경론을 중심으로 ‘신경병리학설’이 정립되는 과정을 살펴보고자한다. 마지막으로 Ⅳ장에서는 보호성 의료 제도의 보급을 중심으로 파블로프 학설의 의료적 실천 양상 및 제도화 과정을 살펴볼 것이다. 본 연구는 의료와 사회주의 체제의 연관성 더 나아가 의료와 정치 권력의 관계를 탐구함으로써, 중국식 사회주의가 만들어져 가는 과정 및 그 특수성을 역사적으로 탐색하는 초석을 놓고자 한다. 이를 통해서 의료 제도와 치료 기술이 정치적 권력 관계 속에서 어떻게 변화하며, 개인의 질병과 고통이 어떻게 정치적으로 해석되고 치료되는가의 문제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성찰할 수 있는 토론의 장이 마련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Ⅱ. 파블로프 학설과 사상개조
1949년 9월 29일 중국 공산당은 임시 헌법의 의의가 있는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공동강령(中國人民政治協商會議共同綱領)」을 발표하여, 제5장 제43조에 “자연과학을 발전시켜서 공업ㆍ농업과 국방의 건설에 이바지하며, 과학의 발명과 발견을 장려하고 과학지식을 보급한다” 8),고 천명하였다. 이는 중국 공산당이 과학기술 정책의 주안점을 경제건설과 실용주의에 두었음을 의미하였다. 한편으로 중국 공산당은 1950년 2월 14일 ‘중소우호동맹호조조약’을 체결하여, 소련식 사회주의 모델을 바탕으로 정치ㆍ경제ㆍ사회ㆍ문화 전반에 걸친 개혁을 단행하였다(劉琪, 2017; 石文文, 2009). 무엇보다 지식인과 관료 계급에 대한 대대적인 사상투쟁을 통해서 미국과 서유럽에 뿌리를 둔 학문과 사상은 ‘관념론적’ㆍ‘유심주의적’ㆍ‘부르주아적’인 것으로 낙인찍히고, 이를 대신하여 변증법적 유물론에 토대를 둔 소련의 학문과 사상을 중심으로 사회주의적 지식체계의 재편이 이루어졌다((趙亮, 2012; 張才良, 2008). 이 과정에서 자연과학과 농업 분야에서는 환경 변화에 의한 획득형질의 유전을 강조하는 미추린(Michurin)-리센코주의(Lysenkoism)9)가 유행하였으며, 의료 분야에서는 파블로프 학설이 수용되었다.
특히 파블로프의 학설은 1949년 파블로프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본격적으로 중국에 소개되기 시작하였다.10), 중국 정부는 3명의 자연과학자를 소련의 파블로프 탄생 100주년 기념식에 파견하는 한편,11), 파블로프 관련 학술강연회 및 기념회를 개최하고,12), ‘위대한 생리학자 파블로프’를 주제로 한 자연과학 강좌 프로그램을 신화(新華) TV에서 방영하였다.13), 또한 파블로프의 조건반사 및 고등신경활동에 관한 다양한 서적들이 번역되고, 파블로프 관련 선집과 전집이 적지 않게 출판되었다.14), 아울러 중국 정부는 소련의 과학자들을 초빙하여 고등신경활동과 관련된 연구를 지도하게 하였다. 이들은 파블로프의 고등신경활동과 관련된 과학 연구 실험소의 건립 및 청년 생물학자의 육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15)
1953년 2월 7일 마오쩌둥은 전국 정치협상회의 1기 4차 회의[全國政協一屆四次會議]에서 위대한 국가 건설을 위해서는 “마르크스ㆍ레닌주의 이론뿐만 아니라 소련의 선진 과학기술도 학습해야 한다”16),고 발언하였다. 마오쩌둥의 발언은 공산당 간부를 비롯하여 사회 각 계층과 분야에 있어서 소련 학습 열풍을 불러일으켰으며, 이는 과학계도 예외가 아니었다. 1953년 8월 21일 위생부는 중국과학원 및 중화전국자연과학전문학회연합회(中華全國自然科學專門學會聯合會)의 협조하에 베이징에서 ‘파블로프 학설 학습회(이하 학습회로 생략)’를 개최하였다.17), 이 학습회에는 생리학자ㆍ심리학자ㆍ임상의학자를 비롯한 각계 연구자 100여 명이 참가하였다. 참가자들은 40일 동안 『대뇌양반구의 기능에 관한 강의(大腦兩半球機能講義)』(戈紹龍 譯, 上海: 文通書局, 1953)ㆍ『동물의 고등신경계 활동에 관한 25년 동안의 객관적 연구(動物高級神經活動(行爲)的25年客觀硏究)』 18),ㆍ『대뇌피질과 내장(大腦皮層與內臟)』(К.М. 贝柯夫 著, 北京: 人民卫生出版社, 1953)ㆍ『고등신경활동 병리 생리학 개론(高級神經活動病理生理學槪論』(伊万诺夫ㆍ斯莫棱斯基 著, 北京: 人民卫生出版社, 1952) 등 4권의 책을 집중적으로 학습하고 토론하였다. 이 학습회는 중국의 과학자들이 “파블로프의 과학사상을 자신의 주도 사상으로 삼아, 파블로프의 방향을 따라 전진하겠다”19) 일종의 정치적 선언과 다름 없었다. 당시 북경의학원(北京醫學院) 생리학과 교수였던 왕즈쥔[王志均]은 학습회에 참여한 후, 자신이 느꼈던 감정과 교훈을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현재 우리들 앞에는 한 갈래의 광명대로(光明大路)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지속적으로 열심히 파블로프 학설을 학습하며, 더 많이 사색하고, 더 많이 체험하며,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파블로프의 관점ㆍ방법ㆍ태도를 우리들의 교학 연구와 의료 업무에 관철시키는 것이다. 이렇게 해야 비로소 중국의 의학ㆍ과학의 발전에 이로울 것이며, 질적으로 더욱 향상된 간부를 양성하여 조국의 건설에 부응할 수 있을 것이다.20)
이처럼 중국의 과학자들은 이 학습회를 통해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파블로프의 관점ㆍ방법ㆍ태도”를 교육ㆍ연구ㆍ의료 실천에 적용하려는 맹목적 태도를 형성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 학습회는 어떤 면에서 중국의 과학자들에게 파블로프 학설을 교조적으로 신봉하게 하는 학술적 분위기를 창출하는데 중요한 계기를 제공했다고 할 수 있다. 그 결과 중국의 과학계는 단순히 소련의 학설과 실험을 모방하고 답습하는 수준에 머물렀으며, 기타 서구 세계와의 학문 교류가 철저히 단절된 상태에서 고립적인 길을 갈 수밖에 없었다(尹木蘭, 2011: 13-15).
또한 이 학습회를 계기로 ‘파블로프 학설 학습’의 대중적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21), 이러한 대중운동을 통해 파블로프의 학설은 주관주의와 유심주의 자연과학에 반대한 선진적 유물주의 과학으로 추앙받았다.22), 주관주의적 유심주의 자연과학은 인간의 객관적 존재를 부정하고, 의지와 욕망을 긍정하는 미(美) 제국주의를 우두머리로 한 자산계급의 이익을 대변한다는 비판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반면 유물주의 자연과학은 인류와 동물의 행위에 대한 객관적 연구를 통하여 자연 현상과 사회생활의 규율을 밝혀냄으로써 인민의 평등과 행복을 추구하는 사회주의 체제의 근간이 되는 과학으로 옹호되었다. 그 결과 파블로프의 학설은 중국의 과학자들 가운데 자산계급 과학사상을 가진 자에 대한 사상적 탄압과 더불어, 사회주의 체제를 정당화하기 위한 정치적 도구로 활용되었다. 왜냐하면 파블로프 학설을 중심으로 한 소련의 선진과학 사상에 대한 학습은 1950년대 초반에 진행되었던 항미원조(抗美援朝) 및 지식인에 대한 사상개조 등의 일련의 정치운동과 더불어 미제국주의에 대한 적대감을 극대화하고 소련과의 형제애를 강화시켰기 때문이다. 이 뿐만 아니라 파블로프 학습 운동은 지식인들에게 “공산당과 신중국 인민정부의 지도하에 우리들이 끊임없이 발전과 학습의 기회를 얻게 되었다” 23)는 정권에 대한 긍정적인 승인 효과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중국의 파블로프 학설 수용은 변증법적 유물론에 토대를 둔 사회주의적 지식체계를 확립하기 위한 사상적ㆍ정치적 차원의 각성에만 머물렀던 것이 아니었다. 1953년 9월 26일 파블로프 탄생 104주년 기념대회24)에서 중국과학원 원장이었던 궈모뤄[郭沫若]는 다음과 같은 기념사를 발표하였다.
파블로프 학설을 학습하는 것은 단순히 이해 수준에 머물러서는안 된다. 우리들은 파블로프 학설을 학습하고 또한 반드시 그의 학설을 발전시키고, 그의 학설을 실천하고 응용하고 널리 보급해야 한다. … 파블로프 학설을 각종 의식형태 속에 응용하고 확대해야 할 더 큰 필요성이 있다. 특히 생리학ㆍ심리학ㆍ의학ㆍ교육학ㆍ언어학ㆍ체육학ㆍ목축학 분야에서, 파블로프 학설은 우리들의 유심론의 독소를 제거하고 연구 방식을 개선하는데 매우 도움이 된다. … 열심히 파블로프 학설을 학습하고 그의 학설을 발전시켜 파블로프를 기념하자! 진실한 애국주의와 노력으로 조국을 위해 헌신하는 정신으로 파블로프를 기념하자! … 우리의 위대한 조국은 마오쩌둥 주석과 중국 공산당의 지도하에 3-4년 동안 역사상 유례가 없는 변혁을 겪었다. 우리는 제국주의ㆍ봉건주의ㆍ관료자본주의의 통치를 전복시키고 토지개혁을 완성하였으며, 각종 규모가 큰 사회개조 운동과 사상학습 운동을 성공적으로 추진하고, 신속하게 국가의 경제 건설과 기타 각 부분의 업무를 회복시켜 발전의 길로 접어들게 하였으며, 이미 계획건설의 단계로 진입하였다. … 오늘날 우리들은 더욱 위대한 동맹국 소련의 전면적이고 무조건적인 도움 아래 대규모의 중공업 건설을 추진하고 있다. 50개의 기업이 건설과 재건 중이며, 91개의 새로운 기업의 건설과 재건이 적극적으로 준비 중이다. 몇 년 후 우리의 조국은 자신의 비교적 강대한 공업 기초를 갖게 될 것이다. 우리들의 위대한 조국은 바야흐로 점차 국가 공업화와 농업ㆍ수공업ㆍ사영(私營) 공상업의 사회주의 개조를 실현해 가고 있다. 찬란한 사회주의 사회의 청사진이 이미 우리들의 눈앞에 펼쳐졌다. 우리들은 이러한 시대에 살고 있으니, 18년 전의 파블로프와 마찬가지로 항상 먼저 우리들의 조국을 위해 헌신해야 하지 않겠는가?25)
이처럼 궈모뤄는 과학ㆍ의료계의 종사자들에게 파블로프 학설을 단편적 지식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의 학설을 토대로 사회주의 체제에 걸맞은 사상과 관념을 함양하고, 이를 사회주의 개조와 경제 건설에 적극적으로 응용할 것을 요구하였다. 또한 그는 파블로프 학설과 연구 태도를 본받아 과학계 인사들이 애국주의적 열정을 발휘하여 사회주의 국가건설에 헌신할 것을 호소하였다. 무엇보다도 위의 사료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처럼 1950년대 초반은 중국이 농업ㆍ공업ㆍ상업 전 분야에 걸친 사회주의 개혁을 단행하고, 중공업을 육성하여 경제적 성장을 도모하려 했던 시기였다. 이를 위해서 중국 공산당은 응용과학 및 공학 분야를 중점적으로 육성하고, 보건의료 및 위생 시스템을 개편하여 사회주의 경제건설에 필요한 노동자들의 건강을 보호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므로 어떤 측면에서 중국 공산당은 파블로프 학설을 보급함으로써 과학계 인사들의 애국주의적 헌신과 열정을 결집시키고, 이를 토대로 중공업 육성에 필요한 노동자의 신체를 관리하고자 했던 것이다. 즉 파블로프 학설은 과학연구에서 공산주의적 실용주의(Communist Utilitarianism)를 강제하는 데 학문적 도구로 사용되었으며, 이는 과학 연구가 정치와 분리되어 발전할 수 없는 국면을 초래하였다.
이처럼 1950년대 중국에 수용된 파블로프 학설은 사회주의적 지식체계의 재편, 변증법적 유물론에 토대를 둔 세계관의 형성, 자본주의적 관념과 관행의 청산, 사회주의적 경제 체제의 확립 전반에 영향을 미친 하나의 이데올로기로서 기능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예를 들어 1953년 가을 중국 생리학회상하이분회(中國生理學會上海分會)ㆍ화동위생위원회위생국(華東衛生委員會衛生局)ㆍ상하이시위생국(上海市衛生局) 등 세 단체가 연합하여 상하이 파블로프 학설 학습회[上海巴甫洛夫學說學習會]를 조직하였다. 이 학습회는 소규모 조별 모임을 통해서 1954년 1월부터 6월까지 파블로프 이론을 학습하고 토론하였는데, 상하이와 쑤저우[蘇州]ㆍ난퉁[南通]ㆍ전장[鎭江] 등지의 의료인ㆍ위생행정가ㆍ생물학자가 584명(정식 참가자 511명, 청강자 73명)이나 참가하였다. 그러나 상하이 제1의학원[第一醫學院]과 제2의학원[第二醫學院]의 생물화학분과 학생과 의사들이 90% 이상 학습회에 참여하였는데, 일부는 “학습의 목표가 명확하지 않고, 일도 바쁜데 학습에까지 참여해야 한다” 26),는 불만을 토로했던 것으로 보아 정치적 동원과 강제적 압박이 작용했음도 배제할 수는 없다. 무엇보다 학습회는 학습운동의 목적을 “파블로프 고급신경활동 학설의 기본 내용과 원칙을 체계적이고 정확하게 인식시키는 것” 이라고 규정하였지만, 이 학습을 통해서 “유물주의 학습에 대해 새로운 요구가 발생했다” 27)고 평가함으로써, 이것이 의료인의 사회주의적 사상개조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음을 암시하였다.
이외에도 중국 공산당 중앙 군사위원회 총후방 근무부 위생부[軍委總後勤部衛生部]에서는 1953년 3월부터 파블로프 학습운동을 추진하였다. 이들은 먼저 군의대학(軍醫大學)ㆍ군의중학(軍醫中學)ㆍ갑종육군의원(甲種陸軍醫院) 등 단위에 재직하는 의료 간부에게 한 차례 학습운동을 실시한 후, 그 경험을 바탕으로 전군대의 의무종사자에게 학습을 확대시켰다.28) 군사위원회 위생부에서는 학습운동을 전개할 때 다음과 같은 점에 유의해야 한다고 명시하였다.
우리들은 파블로프 학설을 학습하는 것에 대해서, 이는 일반적인 의학 기술 업무 학습이 아니라 동시에 의무종사자의 사상개조 운동이며, 자산계급 의학 관점과 무산계급 의학 관점의 사상투쟁이라는 것을 반드시 인식해야 한다. 우리 의무종사자는 대다수 구(舊)사회 출신으로 구사회가 우리에게 오염시킨 해독, 즉 유심론적, 성심성의껏 노동 인민을 위해 봉사하지 않는 사상 및 태도를 가지고 있다. 일부 의료종사자는 더욱 오랫동안 영미 자산계급 의학 관점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농후하고 확고한 유심론 혹은 기계론적 유물론의 구(舊)의학 사상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사람과 질병을 각각 고립적으로 연구하고, 질병과 환경의 관계를 분리하여, 의학 기술을 자신의 돈벌이 도구로 삼았다. 파블로프 학설은 … 필연적ㆍ논리적으로 의학은 인민을 위해 봉사해야 한다는 관점, 의사는 반드시 환자를 치료해야 하며 질병만을 치료하는 것은 아니라는 과학적 이론을 도출하였다. … 우리들은 단호하게 무산계급의 입장에서 변증법적 유물론의 철학 관점을 지도사상으로 삼아, 파블로프 학설의 기초 위에서 실제와 연계하여 모든 지산계급 의학 관점 및 업무 방식에 대해 냉혹한 비판과 투쟁을 가해야 한다. 이를 통해 우리들의 사상을 개조하고 우리들의 의료 방식을 변화시키고, 우리들의 의료 업무 제도를 개선해야 한다.29)
이처럼 파블로프 학습운동에는 변증법적 유물론과 유심주의의 사상투쟁, 자산계급과 무산계급의 계급투쟁이라는 정치적 요소가 내포되어 있었다. 즉 군사위원회 위생부에서는 이 학습운동을 단순히 일반적인 의료 기술 업무에 대한 학습으로 간주하지 않고 정치적인 사상개조 운동으로 간주했던 것이다. 그 결과 영미(英美) 자산계급 의학 관점을 가지고 있는 의료인은 ‘구사회 출신’ㆍ‘인민을 위해 봉사하지 않으며’, ‘환자보다는 질병의 치료에만 집중하며’, ‘의료를 돈벌이 수단으로 삼는’ 냉혹하고ㆍ비인간적인 의사라는 정치적 낙인을 받게 되었다. 반면 소련의 무산계급 의학 관점은 파블로프의 학설을 이론적 무기로 삼은 ‘과학적’이고 ‘선진적’인 의학이자, ‘인민을 위해 봉사하고’, ‘환자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인간적인 의학의 상징으로 추앙받았다. 이러한 측면에서 파블로프 학설은 의료계 사상투쟁의 무기로써, 의료인에게 변증법과 유물주의를 학습시키고, 의료 권력 질서를 소련 중심으로 재편하는 데 정치적으로 활용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950년대 소련학습운동 전반에서 “자본주의ㆍ부르주아ㆍ영미제국주의ㆍ유심주의를 타도하자”는 구호는 매우 일반적이었고, 이는 과학계를 비롯한 의료계 전반에서도 보편적으로 나타났다(勾文增, 2006; 王海迪, 2015). 이와 같은 상황에서 파블로프 학설을 비판한다는 것은 정치적ㆍ사회적 낙인과 배제를 감수해야 했다. 예를 들어 중국과학원 생리화학연구소의 연구원이었던 류위민[劉育民]30),은 중앙위생부가 1953년 조직한 학습회에 참여한 후, 「파블로프 학설을 학습한 이후(學習巴甫洛夫學說以後)」라는 글을 써서 비판적인 의견을 제기하였다. 이에 대해 학습회 조직위원회는 “류는 학습 과정에서 일관적으로 소극적인 자세를 취하였고, 학습 태도도 항상 단정하지 않았으며, 학습 감상을 쓸 때에도 잘못된 시각을 고집하였다. 중국과학원 생리화학연구소는 전국의 생리화학계에 대해서 사상 지도의 책임이 있다. … 과학원에서 류위민에게 교육을 실시할 것을 건의하며, 아울러 토론을 실시하라”고 통보하였다(熊衛民, 2014). 학습회의 이와 같은 조치에 대해서 생리화학연구소의 소장이었던 펑더페이[馮德培]는 연구자의 학술적인 인식과 태도를 정치문제로 비화하는 것에 대해 우려를 제기하며, 보고회를 개최하여 류위민이 쓴 글에 대해 변론할 기회를 제공하였다. 일련의 토론을 통해 류위민은 ‘반(反) 파블로프 주의자’와 ‘반(反) 소련주의자’라는 정치적 오명을 벗을 수 있었으나, 그의 스승이었던 펑더페이는 자신의 제자를 정치적 풍파 속에서 구제하고자 1954년 스웨덴으로 유학 보냈다(熊衛民, 2014). 이처럼 파블로프 학습운동이 진행되면서 그의 학설의 과학적 순수성을 의심하는 것은 모두 불순한 태도와 인식으로 매도당했다. 또한, 파블로프 학설에 대한 비판을 제기하는 사람은 사상검증과 자아비판을 통해서, 자신이 원래 가지고 있었던 이념이나 신념을 부정해야만 했다. 이를 통해 중국의 과학자와 의료인은 이념이 개인보다 높은 위치에 있음을 인정해야만 생존이 허락되었으며, 사상개조를 통해 사회주의자로 거듭나야만 했다.
파블로프 학설의 교조주의적 도그마는 대학교육에도 영향을 미쳤다. 1937년 중국에는 33개의 의학 단과대학과 대학교[醫學院校]가 있었는데, 이 가운데 외국인이 설립한 미션계 의대는 17개교가 있었으며, 국립과 성립(省立) 의대는 16개교였다(朱潮, 1988: 104). 1947년에는 45개의 의약학 단과대학과 대학교가 있었으나,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의과대학은 50% 이하였으며, 전공도 의학ㆍ약학ㆍ치과학만 존재했다. 또한 의학교육은 영국ㆍ미국ㆍ독일ㆍ일본ㆍ프랑스의 영향을 받아 교육내용이 하나로 통일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학제도 6년에서 8년으로 다양하게 운영되었다(朱潮ㆍ張慰豐, 1990: 2-10). 그런데 1952년 소련식 교육체제를 수용하면서 44개의 의대에 대한 학제개편을 단행하여, 의대를 종합대학에서 분리하여 독립적 의과대학으로 개편하였다. 아울러 전공을 의료ㆍ위생ㆍ소아ㆍ구강ㆍ약학 5개 학과로 구분하였으며, 약학은 4년제로 나머지 전공은 5년제로 학제개편을 단행하고, 2년제 전수과(專修科)를 증설하였다(蔡景峰ㆍ李慶華ㆍ張冰浣, 2000: 85). 의과대학이 소련식 학제로 개편됨에 따라, 전공언어도 ‘영어’ 사용을 금지하고, 러시아어를 필수 교과과정으로 선정하였으며, 의대 교재도 소련의 교재를 번역하여 일률적으로 배포하였다(朱潮ㆍ張慰豐, 1990: 351).
심지어 1954년에는 제1회전국고등의학교육회의(第一屆全國高等醫學教育會議)를 개최하여 전국에 통일적인 교학계획과 교학대강를 제정하라고 명령하였다. 새롭게 제정된 교학계획은 소련을 모방하여 ① 기술 배양과 정치사상 교육의 결합, ② 이론과 실제의 결합, ③ 기초지식과 전공지식 양성의 결합, ④ 교사의 지도와 학생의 자율 학습의 결합이라는 4가지 원칙을 수립하였다(黃永秋ㆍ李劍, 2007: 26). 그 결과 마크크스-레닌주의 사상교육이 강화되었으며, 전공과목의 비중이 증가하고, 실습 시간이 총수업 시간의 50% 이상을 차지하게 되었다. 또한 통일적 교학대강을 사용하면서 소련의 미추린 학설과 파블로프 학설에 기반한 의학교재가 채택되었으며, 영미의 과학사상과 의학 이론이 포함된 교재는 철저하게 배제되었다. 예를 들어 상하이 제2의학원은 1952년 상하이 성요한대학(St. John's University)ㆍ진단대학의학원(震旦大學醫學院)ㆍ동덕의학원(同德醫學院)이 합병하여 설립되었다. 그런데 소련식 교과목 개편에 따라 1953년부터 중국혁명사ㆍ마르크스-레닌주의 기초ㆍ정치경제학ㆍ변증유물주의 등 정치과목이 개설되었다. 또한 러시아어 속성반을 개설하여 러시아어 교육을 강화하였다(文豐, 2011: 18-28). 이외에도 상하이 제2의학원은 파블로프 학설 학습회를 조직하여, 전교 학생과 교수 및 병원의 의료 인력이 참가하도록 강제하였다. 이후, 학습회의 성과에 대해 일부 교수와 학생들은 “영국과 미국의 의학 서적에 대한 비판력이 강화되었다” 혹은 “영미 등 자본주의 국가의 왜곡되고 잘못된 학설에 대해 주체적으로 비판하게 되었다”31)라고 고백하였다. 이처럼 의과대학에서의 정치교육이 강화되고, 소련식 교학대강과 교재가 채택됨에 따라 의료 권력과 지식 체계가 영미파 중심에서 소련파 중심으로 대체되는 현상이 발생했다. 이는 결국 의료인의 사상개조와 결부되어 사회주의 체제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의료인을 정치적으로 동원하는데 중요한 촉진 작용을 하였다.
그러나 1953년 스탈린이 사망하고, 1956년 소련 공산당 제20차 전당 대회에서 ‘스탈린 격하 운동’이 일어나면서 파블로프 학설의 권위도 점차 하락하였다. 이 전당 대회에서 흐루쇼프(Nikita Khrushchyov, 1894-1971)는 스탈린의 권위에 전면적으로 도전하며, 소련의 경직된 사회주의 체제에 대한 개혁 의지를 피력하였다. 이후 마오쩌둥은 ‘각각의 상황에 맞는 사회주의를 건설하자’는 흐루쇼프의 제안을 받아들여 1956년 4월 25일 「10대 관계를 논함(論十代關係)」을 발표하였다. 마오쩌둥은 이 발표문에서 소련식 모델을 벗어나 중국의 실질적 상황에 부합하는 사회주의 건설의 길을 탐색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胡锦玉, 2005: 6). 마오쩌둥은 ‘중국의 길’을 탐색하기 위해 ‘백화제방ㆍ백가쟁명(百花齊放ㆍ百家爭鳴)’ 32) 방침을 천명하며, 지식인의 자유로운 토론을 보장하고, 다양한 학파의 존재와 새로운 학파의 창립을 허용하였다.
쌍백운동으로 자유로운 발언의 기회가 주어지자 중국의 과학계와 의료계 인사들도 파블로프 학설에 대한 교조주의적인 신봉을 비판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중국 공산당의 선전 부장이자 문교위원회의 부주임이었던 루딩이[陸定一]는 과학사상과 정치문제를 철저하게 분리할 것을 요구하며, 의학을 포함한 자연과학은 계급성이 없다고 천명하였다. 그는 “중의(中醫)는 봉건 의사이고,서의(西醫)는 자본주의 의사이며, 파블로프와 미추린의 학설은 사회주의적이고, 멘델-모건의 유전학은 자본주의적이다” 33),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잘 못되었다고 지적하며, 종파주의와 함께 맹목적으로 소련을 추종하는 좌경 교조주의를 경계하였다. 즉 루딩이는 자연과학 자체의 발전 규율을 존중하며, 일부 지식인이 학문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것을 비판하였다. 하지만 자유로운 사상비판이 공산당과 마오쩌둥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으로 이어지자 1957년 6월 이후 중국 공산당은 갑작스럽게 정치적 투쟁의 방향을 전환하였다. 이른바 ‘반우파 투쟁’이라 불리는 정치적 탄압 속에서, 중국 공산당은 자신들에게 비판적인 지식인을 반동파(혹은 우파)나 제국주의 첩자로 몰아 ‘노동개조소’로 보냈다. 반우파투쟁으로 과학과 정치가 다시 결합하면서, 파블로프 학설을 비판했던 의료인과 과학자는 ‘우파’로 지목되어 정치적 박해를 받았다. 이에 따라 파블로프 학설도 다시 부활하여 의료계와 과학계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34), 이와 같은 1950년대 중국의 복잡한 정치적 상황 속에서 파블로프 학설은 부침을 거듭하다가, 1960년 중소 관계의 대립이 표면화된 이후에는 그 학문적ㆍ사상적 권위가 약화되었다(韓惠黎, 2019: 29-33). 이러한 측면에서 1950년대 중국에서 파블로프 학설의 부침은 과학의 이데올로기화가 과학 자체의 자유로운 발전을 어떻게 왜곡시키고, 학문적 자율성을 침해하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Ⅲ. 사회주의적 의학 이론의 정립과 실천
파블로프는 유기체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탐구하는데 일생을 바친 사람이었다. 그는 혈관계ㆍ소화계ㆍ뇌가 생리적으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탐구하여, 혈액순환ㆍ소화생리ㆍ고등정신기능의 원리를 도출해 냄으로써 인간의 신체에 대한 의학적 이해를 심화시켰다. 그는 개를 이용하여 소화생리에 대해 연구하던 도중 외부자극에 의존하는 조건반사를 발견하고, 이를 고등뇌기능 연구로 확대해 정신병리이론과 신경계의 유형이론(Typology)을 도출해 냈다(김옥주, 1992a: 19-30). 파블로프의 이와 같은 생리학연구에 기초한 의학적 성과는 장기실험법(Chronic Experiment)을 통해 얻어낸 것이었다. 그는 실험동물에 대한 외과적 수술을 진행한 후 동물이 완전히 회복될 때까지 기다려 실험을 진행하는 ‘장기적 실험’을 통해 실험동물이 환경 전체와 맺는 상호관계를 연구하였다. 이는 기존의 급성실험(Acute Experiment)이 수술 직후의 동물을 대상으로 국부적이고 단일한 현상만을 연구했던 것과 상반되게, 신체의 기능과 작동 방식에 대해 유기적이고 전체적인 접근을 가능하게 했다. 이처럼 파블로프는 유기체에 대한 장기적ㆍ총체적 시각을 바탕으로 조건반사의 원리를 도출해냈기 때문에 인간의 신체에 대한 독자적인 의학 이론을 형성할 수 있었다.
파블로프 학설에 입각한 의학 이론은 유기체에 대한 인식, 병인론 및 치료법이 19세기 중ㆍ후반 유행했던 피르호의 세포병리학이나 코흐(Robert Koch, 1843-1910)의 세균설에 입각한 국부적 치료 방식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우선 파블로프의 의학 이론의 첫 번째 핵심 원리는 유기체를 ‘하나의 통일된 전체’로 보는 관점이었다. 파블로프는 인체는 신경ㆍ근육ㆍ혈액순환ㆍ영양ㆍ배설 등 각 계통으로 분리되어 있지만, 각각의 계통이 서로 고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긴밀하게 통일적으로 연계되어 있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그는 신체 기관과 계통의 활동은 중추신경계통의 작용에 따라 질서 정연하게 규칙적으로 조절되고 통제된다고 강조하였다.35) 요컨대 파블로프는 유기체는 각 조직ㆍ계통이 중추신경계통의 주도 작용아래 끊임없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통일체이며, 유기체의 어떤 부분이라도 생명 활동에서 분리될 수 없다고 간주하였다. 이는 유기체를 각종 개별 단위의 총화, 즉 조직과 장기의 세포는 일정 정도에서 독립된 생활을 하지만 기계의 각 부분과 같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기계론적 시각과는 일정한 차이가 있었다.
예를 들어 파블로프는 소화활동에 대해서, 그 과정은 신체의 각 기관과 계통의 유기적 연결에 의해서 통일적으로 일어난다고 보았다. 요컨대 외부환경의 자극이나 음식물에 대하여 대뇌피질의 조건반사에 의해 소화액이 분비되고, 대뇌피질이 내장근(Visceral Muscle)의 내장운동을 조절함으로써 소화가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그러나 세포병리학을 주장한 피르호는 신경계통과 내장기관은 각각 독립적으로 분리되어, 소화활동은 고등신경계와 무관하게 내장근의 불수의운동(Involuntary Movement)에 의해 무의식적으로 일어난다고 보았다.36), 때문에 파블로프는 세포론이 내장기관을 비롯한 신체기관의 자주성과 독립성을 강조하여, 유기체의 전체 활동이 서로 분리되고, 신체 기관과 계통 사이의 연계성이나 통일성이 약화되었다고 비판하였다. 그 결과 세포병리학은 모든 질병의 원인을 세포의 국부적 변화에서 찾고, 신체의 국부적 치료만을 강조하여 의학의 통일적 혹은 연계적 발전을 저해하였다는 것이다.37), 이처럼 파블로프는 코흐ㆍ피르호로 대표되는 독일의 실험실의학이 질병을 세포ㆍ세균과 같이 작은 단위로 연구하며 국부적인 치료를 강조하는 것(윌리엄 바이넘, 2017: 182)에 반대하였다. 그는 유기체가 대뇌피질의 조절과 통제 작용 하에 각 기관이 분리되지 않고, 전체적ㆍ통일적으로 연계된다고 간주하였다. 그러므로 질병의 치료에서도 유기체의 통일성을 강조하며, 인체의 장기-조직-세포-체액을 연결하고 통제하는 신경계의 기능을 회복시키는 치료에 집중하였다.
둘째, 파블로프는 유기체와 환경의 상호작용을 중시하였다. 파블로프는 유기체의 생명 유지는 단순하게 내부 환경의 항상성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하는 외부환경에 대한 신속한 적응력에 달려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유기체가 생존하기 위해서는 환경과 끊임없는 상호작용을 통해 균형을 유지해야 하며, 이는 고등동물의 신경계통의 반사작용으로 완성된다고 하였다. 또한 파블로프는 조건반사는 무조건반사의 기초위에 대뇌피질의 활동 과정을 거쳐 완성된다고 지적하였다. 이는 일종의 단기성 연결로 만약 환경의 변화에 따라 이러한 단기성 연계가 불필요하다는 것이 입증되면 이 연계도 소거된다(이반 파블로프 저, 1999: 49-68). 그래서 대뇌피질의 활동은 가변적이며 대뇌피질의 흥분과 억제과정, 즉 조건반사의 끊임없는 형성과 소실을 통해 비로소 유기체는 그가 처한 외부환경에 대해 더욱 정확한 적응력을 발휘하게 된다고 설명하였다. 유기체와 환경의 통일성 문제는 환경이 인간의 신체와 건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파블로프는 인간의 활동과 건강에 유리한 방향으로 환경을 개조해야 할 필요성을 제기하였으며, 질병의 예방을 위한 환경의 개선과 관련된 보건의료 및 예방의학의 필요성을 제기하였다.
셋째, 파블로프는 신경병리학설을 제시하였다. 파블로프의 신경병리학설은 세 가지 내용을 포괄하고 있었다. 첫 번째는 유기체 내의 조직과 기관은 서로 긴밀하게 연계되어 있는데, 신경계통의 활동을 통해 기능상의 연계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대뇌피질이 고등한 조절과 통제 작용을 담당하며, 세 번째는 신경활동의 기본형식은 반사작용이라는 것이다.38) 그는 신경의 기능과 작용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동물 유기체의 신경계통이 완벽할수록 이 계통은 더욱 중추화되고, 이 가장 고등한 부분이 유기체의 모든 활동을 통제한다. 설사 이것이 분명하게 관찰되지는 않더라도 명확하게 출현한다. 고등동물의 수많은 기능은 확실히 대뇌 양반구의 영향을 받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이 가장 고등한 부분이 신체에서 발생하는 모든 현상을 통제하고 있다.39)
이처럼 파블로프는 유기체가 전체적 통일성을 유지하고 주변 환경과 끊임없는 균형을 유지하는 이유는 중추신경계통이 각 기관과 계통을 연계하고 조절하는 작용을 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즉 유기체의 모든 기능과 활동은 대뇌피질의 조절과 통제를 받으며, 어떠한 한 기관의 생리기능도 대뇌피질의 영향에서 벗어나 독립적으로 작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 결과 유기체는 내적인 통일성을 유지하고, 주변 환경과의 끊임없는 반사작용을 통해 환경에 적응하고 더 나아가 환경을 개조하는 존재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신경계의 조건반사를 통해 파블로프는 “신경계통이 모든 병리 작용의 기원ㆍ발전ㆍ결과에 있어서 주도적인 통제 작용을 하며, 신경계의 통제 작용의 기본 구조는 반사이며, 질병의 발생 또한 반사작용이다” 40),라는 신경병리학설을 제기하였다. 그러므로 파블로프의 주장에 따르면 질병은 외부 유해인자의 자극으로 신경계통의 기능이 손상되었기 때문에 발생한다. 예를들어 염증은 생물적ㆍ물리적ㆍ화학적 자극이 특정 부분의 신경 세포에 작용하여 신경 기능에 변화가 발생하고, 이로 인해 조직에 염증 반응이 나타난 결과 발생한다는 것이다. 때문에 파블로프는 병리 과정을 단순하고 국부적인 세포의 반응 과정이 아니라, 신경 기능의 변이 과정으로 간주하였다. 즉 신경 기능이 변화하지 않으면 병리 현상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파블로프는 위궤양의 발생 원인에 대해 위의 국부적인 손상 때문이 아니라 외부 환경의 변화와 관련이 있으며, 이로 인한 신경계통의 손상이 몸 전체 기관과 계통의 기능 변화에 영향을 미치고, 그 가운데 일부의 증상이 위궤양으로 발현되었다고 주장하였다. 파블로프는 질병의 발생과 발병의 기전에서 신경계통의 작용을 중시하였기 때문에 치료에서도 ‘자극’이 중추 신경계에 진입하는 것을 방지하거나, 이상(異常) 자극을 받은 대뇌피질을 정상적 상태로 회복시키는 방법을 중시하였다. 그러므로 신경병리학을 추종했던 의사들은 위궤양의 치료에 있어서 질산은(硝酸銀) 용액을 사용하여 질병의 발생 부위를 부식시키는 국부적인 방법을 사용하기보다는 장시간의 수면요법을 통해 신경계통을 안정시키거나 식이요법을 통한 환경과 신체의 조화라는 전체적인 치료법에 주목했다.41)
이처럼 파블로프는 조건반사에 대한 연구를 통해서 대뇌피질의 생리적 기능을 과학적으로 분석함으로써 새로운 의학 이론을 정립하였다. 그는 인간의 행동은 측정할 수 있고 통제될 수 있다고 보았으며, 질병도 신경계의 자극 반응을 통해서 치료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파블로프는 인간의 말초적ㆍ중추적ㆍ의식적ㆍ무의식적ㆍ생리적ㆍ심리적 모든 유형의 행동을 ‘반사’로 간주하였기 때문에 ‘글쓰기’와 ‘눈 깜박거림’이라는 두 가지 상반된 신체적 행동 사이에 존재하는 복잡한 질서와 차이를 밝혀내지는 못했다(제프리 그레이, 2000: 175). 또한 그는 동물연구에서 유래된 조건반사의 원칙을 인간에게 동등하게 적용함으로써 인간의 존엄성을 해쳤다는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제프리 그레이, 2000: 172). 특히 버나드 쇼(Bernard Shaw, 1856-1950)는 파블로프의 연구가 신의 권위와 존재는 물론 삶의 형이상학적 요소를 부인하고, 인간의 자유의지ㆍ양심ㆍ의식까지 부정했다고 비판하였다(버나드 쇼, 2012: 360). 이외에도 파블로프는 신경증에 대한 치료 방법으로 약물요법을 광범위하게 채택하였는데(제프리 그레이, 2000: 146-159), 이는 신경증 환자들에게 적지 않은 폐해를 남겼다. 예를 들어 1950년대 초반 중국에서는 이른바 파블로프용액[巴甫洛夫溶液]이라는 신경기능조정제(神經機能調整劑)가 병원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는데, 이 용액은 카페인(Coffein, 흥분제)과 브롬화물(Brom化物, 진정제ㆍ수면유도제)의 혼합물이었다.42), 그런데 병원과 약국에서는 흥분과 억제 작용을 하는 이 약물을 만병통치약으로 처방함으로써, 오히려 일부 환자는 극도의 심리 불안과 신경쇠약증을 호소하기도 하였다.43), 이와 같은 모순과 한계 때문에 파블로프 학설은 현재 신경생리학과 임상분야에서는 거의 영향력이 사라졌지만, 1920년대 이후 미국에서 행동주의 심리학의 발전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며 학습모델과 행동치료법 개발에 널리 활용되었다(Joseph Wolpe, 1982; Schultz Duane, 2003).
그렇다면 중국의 의료인은 이와 같은 파블로프의 의학 사상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우선 중국의 의료인은 유심주의적인 자본주의 의학 이론을 비판하고, 파블로프의 의학 이론을 변증법적 유물주의에 근거한 사회주의 의학 이론으로 칭송하였다. 딩짠[丁瓚]은 「전투적인 파블로프 학설을 학습하자(學習戰鬥的巴甫洛夫學說)」라는 글에서, 중국 의료계의 문제점을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피르호의 세포병원학은 인류의 질병을 조각으로 잘게 나누어 국부적이고 고립적으로 연구하였다. 그러므로 세포병원학은 질병의 본질에 대해 정확한 인식을 할 수 없다. 이것이 오늘날 자본주의 국가의 의학 이론과 실천 방면에서 극도의 결함 현상을 초래했다. … 이로 인해 일부 영미 의학자는 어쩔 수 없이 더욱 비현실적인 유심론인 이른바 “신심의학(身心醫學)”에 의존하게 되었다. 파블로프는 결연하게 그의 고등신경활동 학설을 제기하였다. 이는 분명히 피르호의 세포병원설이 오늘날 의학 연구에서 날로 쓸모없다는 것을 폭로하였을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변증 유물주의 원칙에 입각해서 근대 과학적 병원(病源) 관념의 공고한 기초를 확립하였다. … 중국의 과학자들이 파블로프 학설에 대해 이처럼 냉담한 태도를 보이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는 역사적으로 형성된 약간의 잘못된 사상 때문이다. 우선 중국의 다수 과학자는 오랫동안 영미 자산계급 학술사상에 빠져서 그들이 비교적 익숙한 영미 과학 교과서 혹은 실험실 가운데 일부 과학 이론과 방법을 제외하고 세상에 더 이상 어떠한 과학적 연구도 없다고 잘못 인식하고 있다. … 소련의 회의44), 이후 그의 연구는 새로운 수확을 얻었는데, 의과학적 측면에서 생리학ㆍ해부학ㆍ조직학ㆍ병원학ㆍ약리학ㆍ면역학ㆍ보건학ㆍ임상 치료 분야는 모두 파블로프가 제시한 원칙 가운데 적지 않은 새로운 성취를 얻었다. 이러한 새로운 수확은 과학 자체의 발전에도 도움이 되지만, 과학을 더욱 인민의 수요에 부합하도록 하여, 인민의 행복한 생활을 위해 이바지 할 수 있도록 하였다. … 우리들은 우선 반드시 오랫동안 영미 자산계급 과학 사상으로부터 받은 잘못된 영향을 비판하고, 특별히 잘못된 객관주의적 태도를 극복하고, 변증법적 유물주의 원칙을 자연과학 연구의 지도 사상으로 확립해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소련 과학의 선진 경험을 열심히 배워서 우리들의 연구 수준을 향상시킬 수 있다. 이처럼 전투적 파블로프 학설을 배워야만, 비로소 중국의 생리학ㆍ심리학과 의학의 과학 연구를 진일보 발전시킬 수 있을 것이다.45)
위의 글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중국의 의료인은 피르호의 세포병리학이 인류의 질병을 조각으로 잘게 나누어 국부적으로 연구하였으며, 이 때문에 영미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질병을 전체적ㆍ통일적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국부적 치료에만 치중한다고 비판하였다. 이외에도 바이스만-멘델-모건으로 이어지는 유전학은 반(反) 과학적인 자산계급 학설로서, 반동적 바이스만의 이론은 독일의 파시스트들이 비(非) 아리안종을 대량 학살하는 ‘과학적 구실’로 작용하였다고 주장하였다.46) 그 결과 영미의 자본주의 국가에서 의학을 공부한 사람들은 자산계급 의학 사상에 물든 반동파로 낙인찍혔고, 세포병리학과 유전학은 부르주아 의학의 잔재로서 청산의 대상이 되었다.
의료계의 반동적 잔재를 청산하기 위한 파블로프 학습운동은 종합병원ㆍ의과대학ㆍ정부와 군대의 의료기관을 중심으로 광범위하게 추진되었다. 예를 들어 1954년 장시성[江西省] 난창시[南昌市]에서는 도시 전체의 의료종사자를 대상으로 파블로프 학설 학습회를 개최하였다.47) 이 학습회에는 성위생청ㆍ난창시위생국ㆍ장시의학원[江西醫學院]ㆍ성시의료예방기구(省市醫療豫防機構)ㆍ학교 등 단위의 의사ㆍ중의사(中醫師)ㆍ간호사ㆍ조산사ㆍ교수ㆍ강사ㆍ조교 등 1,000여 명이 참가하였다. 학습은 1954년 10월에서 1955년 11월까지 약 1년간 진행되었으며, 고급반과 중급반으로 분류하여 파블로프 학설의 기본 이론과 임상 실천 방법 등을 강의하였다. 또한, 학습은 매주 3시간씩 진행하되, 2주에 한 번 중심 발언을 거행하고, 나머지 2주는 집단 자습과 소모임 토론을 실시하였다. 그런데 본격적인 파블로프 학설 학습에 앞서 장시성 성위원회 공산당 간부학교[江西省委黨校]의 교육부장이 「변증유물론」ㆍ「실천론」ㆍ「모순론」을 강의하였으며, 난창시 위생국장이 마르크스ㆍ레닌주의 관점에서 의료계에 존재하는 문제점에 대해서 신랄한 비판을 가하였다. 이처럼 파블로프 학설보다 사회주의 이론 학습이 우선시 되었던 것은 이 학습운동이 의료인에 대한 정치학습으로 변질되었음을 의미한다. 즉 파블로프 학습운동은 유심주의와 부르주아 사상을 공격하기 위한 ‘공론의 장’이었으며, 학습을 통해 강압적이고 억압적인 방식으로 사회주의 체제와 공산당 권력의 합법성을 의료인들에게 주입하였다. 이를 통해 병원은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를 훈육하는 정치적 장으로 전환되었으며, 의료인들은 국가와 인민의 매개자이자 공산당을 대신해서 인민을 보살피는 ‘봉사자’라는 사회적 역할을 부여받았다.
한편 파블로프 학습운동은 일종의 의료 기풍의 쇄신운동으로서, 의료종사자의 환자에 대한 서비스 태도를 개선하는 데도 주안점을 두었다. 예를 들어 상하이 시립 제2노동병원[上海市立第二勞工醫院] 간호부는 1955년 6월 하순부터 파블로프 학습운동을 전개하였다. 학습운동은 대략 2달 반 동안 진행되었는데, 학습에 참석한 사람이 912명이나 될 정도로 많았다.48) 학습은 매주 한 차례씩 열렸으며, 강의가 한 시간 반, 토론이 한 시간 정도 진행되었다. 강의는 총 8차례 개최되었는데 주로 파블로프 학설의 내용을 소개하였으며, 강의가 끝난 후에는 10개의 소그룹으로 나누어 토론을 진행하였다. 특히 소그룹의 토론에는 학습보조원이 참여하여 학습에 도움을 주었으며, 소그룹의 조장은 토론의 결과를 종합하여 총결산 보고서를 작성하여 제출해야 했다. 또한, 학습에 참여한 간호사들은 개인별로 중간 결산 보고서를 작성하고, 시험을 치르고 학습 정도를 평가받았다. 이처럼 학습에는 어느 정도의 강제성이 동원되었지만, 간호사들은 학습을 통해서 새로운 업무 태도를 형성하게 되었다. 이 학습운동에 참여했던 웡퉁뤼[翁同蕤]는 자신과 기타 동지들의 반응을 다음과 같이 술회하였다.
이번 학습을 통해 대다수의 간호사 동지들은 파블로프 학설의 주요 내용에 대해 가장 초보적인 인식을 할 수 있었고, 비록 피상적이기는 했지만 비교적 정확한 윤곽을 이해할 수 있었다. 수많은 간호 동지들은 과거에 비록 ‘대뇌피질’ㆍ‘조건반사’, ‘흥분억제’ 등의 명사를 들어보기는 했으나, 매우 모호했으며 혹은 근본적으로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학습 후에는 비교적 명확해졌다. … 많은 동지가 학습 후 실제와 연계하여 업무를 개선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소아과의 한 동지는 “과거에는 어린이가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하여, 치료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을 때 항상 거짓말을 하거나 겁을 주어도 상관없다고 여겼다”라고 말하였다. 이번 학습을 통해서 그녀는 어린이에게 “아줌마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주사 놓을 거야”라거나 “약을 먹지 않으면 너 수술실에 보낼 거야” 등등의 말을 다시는 하지 않는다. … 병실 업무를 살피는 동지들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일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즉 환자들의 충분한 수면을 보장하고, 환자와 이야기를 나눌 때 불량한 자극을 주지 않도록 회피하고, 요강과 피 묻은 붕대를 제때 갈아주는 것도 불량한 자극을 감소시키는 하나의 방법이라고 말하였다. 수술실의 동지는 환자를 맞이하고 보낼 때 반드시 부드럽고 친절하게 대하며, 두려움에 떨고 있는 환자들에게 다방면으로 위로와 설명을 해주고, 수술실의 불필요한 소리를 최대한 감소시켜야 한다고 말하였다. … 이번 학습은 우리 간호부 동지들의 열정을 진작시키는 데 매우 큰 작용을 하였다.49)
위의 사료를 통해 알 수 있듯이, 파블로프 학습운동을 통해 간호사들은 환자에 대한 보살핌과 배려를 최우선으로 하는 업무 태도를 양성하였다. 이와 같이 파블로프 학습운동을 통해 업무 기풍을 개선한 사례는 비일비재하게 많이 등장하였다. 예컨대 상하이공안의원[上海公安醫院]의 경우에는 1953년에 10여 차례, 1955년에는 6차례에 걸쳐 파블로프 학습운동을 전개하였다.50), 두 차례에 걸친 학습운동을 통해 상하이공안의원의 약제실에 근무하는 약사들은 “후약실(候藥室)의 환경을 개선하고, 약의 조제 시간을 단축하고 약을 배부할 때의 언어 및 조제약의 색ㆍ향ㆍ맛에도 주의를 기울여” 51), 환자들의 치료에 도움을 주려고 최대한 노력하였다. 이처럼 파블로프 학습운동을 통해서 의료종사자에게는 친절한 태도ㆍ인내심ㆍ희생과 배려 등의 새로운 덕목이 요구되었다. 의료종사자에게는 환자의 신뢰를 획득하여 그들과 협력 관계를 이룩함으로써 치료를 원활하게 하는 중재자와 조력자로서의 역할이 중시되었다. 아울러 파블로프 학습운동이 업무 기풍의 쇄신이라는 차원에서 진행되면서, 학습에 참여하는 의료종사자와 그렇지 않은 사람 간에는 대조적인 이미지가 형성되었다. 즉 학습에 참여한 의료종사자는 ‘적극적’ㆍ‘열정적’ㆍ ‘주체적’ㆍ‘희생적’이라는 이미지를 얻게 되었지만, 참여하지 않은 의료종사자는 평상시 업무태도가 ‘무책임’하거나 ‘불성실’한 사람으로 공공의 비난과 질타를 면치 못하게 되었다.52)
이외에도 일부 병원에서는 파블로프 학습운동을 임상 연구와 결합하여 의료적 실천을 주도하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 제63육군의원(第六十三陸軍醫院)은 1952년 5월부터 파블로프 학습운동을 조직하여 이에 대한 체계적인 학습을 진행함과 동시에 임상시험을 병행하였다.53), 임상시험은 ‘수면요법(睡眠療法)’과 ‘정신예방성 무통분만법’의 두 가지 방면에서 추진되었다. 수면요법은 파블로프의 보호성 억제54),의 원리에 의거하여, 1943년 안드레예프(Andreev)가 고안해 낸 것이었다. 소련에서는 일부 십이지장궤양ㆍ위신경관능증ㆍ기관지천식ㆍ신경쇠약과 신경질환 환자들에게 포수 클로랄(Chloral Hydrate)과 아미탈 소디움(Amytal Sodium) 등의 수면제를 처방하여, 장기간(수일에서 수 주 동안) 수면상태로 침대에 누워있게 하였다.55), 제63육군의원에서는 1952년 8월부터 수면요법을 실시하였는데, 임상시험에 앞서 간호사들에게 그 원리와 주의사항을 숙지하도록 하였다. 또한 병원의 파블로프 학설 연구위원회가 간호수칙과 의료수칙을 제정하여, 그 원칙에 따라 수면요법을 실시하도록 하였다. 임상시험은 총 7명의 환자를 대상으로 진행되었는데, 그 가운데 3명은 치료 과정 중에 있었기 때문에 결과를 알 수 없었고, 4명은 1주에서 5주간의 치료 과정을 마친 환자들이었다. 4명 중 2명은 위궤양과 십이지장궤양, 2명은 신경쇠약증 환자였다. 이 가운데 신경쇠약증을 앓고 있었던 1명의 환자는 병력이 2년 정도로, 입원 시 수면불안ㆍ두통ㆍ기억력 감퇴ㆍ주의력 결핍ㆍ변비 등의 증상을 앓고 있었다. 그러나 1주간의 수면요법을 실시한 후, 정신충동성 흥분 상태가 발생하여 처지를 중단하였다. 반면 2명의 십이지장궤양 환자는 치료 효과가 매우 좋아서, 수면요법이 일부 질환에 특별한 효과가 있다는 것을 입증하였다.56)
1950년대 중국에서 수면요법은 위궤양과 십이지장궤양과 같은 만성궤양성 질환자 이외에도, 조기치매와 같은 정신질환 환자에게도 광범위하게 활용되었다.57), 그러나 환자에게 수면제를 먹여, 하루 15-20시간을 잠들게 한다는 것은 적지 않은 부작용을 유발하였다. 우선 기본적으로 장기간 수면제를 투여받은 환자는 약물중독에 빠질 위험성이 높았으며, 환자가 장기간 근육을 사용하지 않고 누워만 있었기 때문에 근력이 약화되어 보행장애와 균형감각 상실을 호소하는 경우도 있었다. 또한 환자가 오랫동안 숙면을 취하도록 하기 위해서 수면제 투여 전에 반드시 설사약을 먹이거나 관장을 실시했기 때문에 장기능이 저하되어 만성변비에 시달리는 경우도 있었다.58), 이외에도 수면요법은 신진대사ㆍ위액분비 및 혈액성분에도 영향을 미쳐 다양한 합병증을 야기하였다.59), 이와 같은 다양한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의료인은 파블로프 학설의 우월성을 실험하고 사회주의 체제의 합법성을 입증하기 위해서 인민의 신체를 끊임없이 불확실한 치료의 대상으로 활용하였다. 요컨대 인민의 신체는 사회주의 의료 복지의 선진성과 과학성을 입증하기 위한 실험 수단으로 전락하여, 그 행동의 자율성과 주체성을 상실해 버렸다. 예를 들어 일부 환자가 장기간의 수면제 복용으로 정서불안과 정신이상 증세를 호소하며 수면제를 거부하거나 병원에서 도망가려고 하면, 의사와 간호사는 진정제나 마취제를 투여하여 환자를 굴복시켰다.60) 그 결과 환자는 고통을 호소하거나 아픔을 신체적으로 표현하지도 못한 채, 다시 깊은 수면 속으로 빠져들어야 했다. 이는 중국 공산당이 노동하지 않고 아픔을 호소하는 신체에 대해서 인위적으로 잠들게 함으로써 행동성을 상실시키고, 의료 복지가 실현된 고통 없는 국가라는 이상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 환자의 고통을 철저하게 은폐했음을 알려준다. 그러므로 수면요법의 임상적 실천은 1950년대 중국 공산당이 인민의 신체를 어떻게 사유하고 통제했는지를 보여주며, 사회주의 체제가 인민을 다스리는 통치 방식의 단면을 보여준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정신예방성 무통분만법은 파블로프의 ‘언어적’ 조건반사에 입각하여, 1950년대 벨보브스키(I. Z. Vel'vovskii, 1899-1981)가 고안해낸 것이었다. 그는 출산=산통을 연상시키는 언어적 조건반사를 개선하여, 출산=무통이라는 새로운 언어체계를 만들어 냄으로써 출산의 고통을 정신적으로 제거하고자 하였다(유연실, 2019). 1952년 6월 17일 중앙인민정부 위생부에서 무통분만법의 보급에 관한 통지문을 공포한 이후, 제63육군의원에서도 7월 중순부터 이에 관한 준비 작업을 실시하였다. 우선 2주에 걸쳐 학습을 실시하였는데, 첫번째 주는 의사와 간호 인력을 조직하여, 의료인이 무통분만법을 숙지하도록 하였다. 2번째 주에는 산모를 대상으로 무통분만법의 원리ㆍ분만의 과정ㆍ조산동작 등을 교육하였다. 이후 제63육군의원에서는 1952년 8월 1일부터 10월 31일까지 4개월 동안 161명의 산모에게 무통분만법을 실시하였다. 그 임상 결과는 아래의 표와 같다(표 1).
위의 표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무통분만법은 161건 가운데 156건, 즉 96.1%에 달하는 놀라운 성공률을 달성하였다. 사실 신음소리를 내고 어느 정도 불편함을 느낀 경우도 성공률에 포함시킨 것을 보면, 이 통계 자체가 상당히 왜곡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산모가 분만 후에 아픔을 느끼지 않았다고 말하면 이를 성공률에 포함시킨 것을 통해서도 산모의 주관적인 느낌이 성공률을 가늠하는 기준으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때문에 어떤 면에서는 산모가 ‘아프지 않았다’는 답변을 기대하는 의료인의 압박 속에서 고통을 감추거나, 자신의 느낌을 솔직하게 말하지 못했을 경우도 상정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반면 실패율은 3.1%에 불과했는데, 병원에서는 실패 원인을 산모가 무통분만법에 대해서 신뢰가 부족하고, ‘분만 시에는 반드시 아프기 마련이다’는 구관념에 마음이 완전히 정복되어 있었기 때문으로 돌렸다. 동시에 “의료인이 산모에게 무통분만 교육을 실시할 때 깊고 상세하게 가르치지” 않았고, 의료인이 “임무를 추진할 때 인내심이 부족했던” 62), 것도 또 다른 실패의 원인으로 지적되었다. 이처럼 무통분만의 실패는 의료 기술 자체의 문제이기 보다는 ‘구관념’에 빠져있고, ‘신기술’을 신뢰하지 않는 산모의 탓이나, 의료인의 업무 태도의 문제로 귀결되었다. 하지만 무통분만법은 “과거에 가능성이 없다고 여겼던 수많은 일이 오늘날에는 기적처럼 하나하나 실현되는” 63), 것을 확인시켜준 모범적인 사례로 언급되었다. 요컨대 무통분만법은 파블로프 학설을 임상에 적용한 대표적인 사례로서, 국가가 여성을 생리적 고통으로부터 해방시킨 사회주의 여성 해방의 상징으로 간주되었다(유연실, 2019: 170). 그 결과 무통분만법은 파블로프로 대표되는 소련 의학 기술의 보급에 대한 정당성과 명분을 제공해 주었다.
그러나 천진시립총의원(天津市立總醫院)에서 무통분만법을 주도했던 위아이펑[兪靄峯]은 무통분만법의 실시가 공산당의 정치적 압박 속에서 의료인들에게 상당한 부담을 주었음을 암시적으로 서술하였다. 위아이펑은 무통분반법을 과학적으로 비판하거나, 그 효과를 의심하는 의료인은 구관념에 빠져 있다거나 자산계급 유심주의 사상에 빠져있다는 정치적 질타를 받았다고 병원 내의 긴장된 분위기를 토로하였다.64), 또한 위아이펑은 신속한 성과를 요구하는 위생부의 압박 때문에 의료인이 파블로프 학설에 대한 학습과 기술적 이해가 부족한 상황에서 서둘러 무통분만을 실시할 수밖에 없었다고 회고하였다. 무엇보다 무통분만법의 실패는 사회주의 의료의 우월성을 부정하고, 이 것이 공산당의 부정적 이미지 생산으로 연결될 수 있었기 때문에 의료인은 그 성공률에 집착하거나 결과를 과장되게 조작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1952년 공산당 기관지인 『인민일보』에서는 “베이징ㆍ톈진ㆍ상하이 등 13개 대도시와 허베이[河北]ㆍ산시[陜西]ㆍ장쑤[江蘇] 등 22개 성에서 소련의 선진 경험인 무통분만법을 실시했는데, 실험에 참여한 48,000여 명 가운데 거의 90%의 산모가 분만 시 고통을 느끼지 못했다”65),고 보도하였다. 하지만, 이 성공률의 이면에는 여러 가지 현실이 은폐되어 있었다. 예를 들어 무통분만법을 실시하는 병원에서는 의사와 간호사에게 ‘산통’과 ‘진통’ 등 고통을 연상시키는 단어의 사용을 완전히 금지했으며, 출산일은 ‘좋은 날(好日子)’로, 분만실(産房)은 ‘휴양실’로 명칭을 변경하였다.66), 그러므로 어떤 면에서 무통분만은 아픔이라는 감각적 통증을 근본적으로 사라지게 한 것이 아니라, ‘아픔’과 관련된 단어를 분만실에서 사용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가능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또한, 의료인은 고통과 산통을 호소하는 산모를 구관념에 빠져있고, 국가와 의료인을 신뢰하지 않은 무지하고 고집스러운 여성으로 비난하였다.67),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산모가 무통분만이라는 국가의 혜택과 복지 속에서 산통에서 해방되었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역설적으로 ‘하나도 아프지 않다’고 미소를 지어야만 했던 것이다.68) 그러므로 무통분만은 사회주의 의료 복지와 사회주의 체제의 우월성이라는 정치적 합법성을 창출하기 위해서, 여성이 출산의 고통도 철저하게 침묵해야만 했던 정치적 통제와 억압의 현실을 방증해 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Ⅳ. 보호성 의료 제도의 시행
파블로프의 학설에 입각한 보호성 의료 제도는 환자 중심의 의료 체계를 구축하는 것이 핵심이었다. 그 원리는 앞에서 말한 파블로프의 의학 이론에 기초한 것이었다. 우선 파블로프는 인체는 하나의 통일된 전체로서, 국부적으로 발생한 질병이 몸 전체에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에 병을 치료하기보다는 ‘사람’을 치료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그는 인체의 내외 환경이 연계되어 있어서 외부의 불량한 요소가 질병을 일으킬 수 있으며, 유리한 요소는 질병의 치료와 회복을 촉진한다고 설명하였다. 아울러 파블로프는 ‘언어’와 같은 제2 신호체계가 질병의 치료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최대한 부적절한 언어의 사용을 금하고, 긍정적인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69), 이와 같은 이론에 근거하여 소련의 마카로브스키(Makarovski) 지역 병원에서 보호성 의료 제도를 창안하여, 환자의 치료율이 현격히 상승하고 치료 기간도 단축되는 효과가 발생하였다.70) 중국에서는 파블로프 학설의 수용과 더불어 1953년부터 본격적으로 보호성 의료 제도를 도입하기 시작했다.
제1군의대학 임상학원(第一軍醫大學臨床學院) 내과 의사였던 우전겅[吳振庚]은 보호성 의료 제도의 도입을 통한 의료 기구 개혁의 필요성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역설하였다.
의료 기구는 환자의 외부 환경으로 환자에게 좋은 영향을 생성시키기도 하지만 나쁜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자본주의 사회의 병원 제도와 의료 태도 속에서 적지 않은 환자가 이를 악물고 고통을 참으며 질병을 치유하였다. 그 결과 병을 치료하기보다는 병을 얻었으며, 극도로 비인도적인 참사가 빚어지기도 하였다. 의료 기구 가운데 반드시 환자 자체에 영향을 미치는 각종 유익한 조건을 창조하여 보호성 억제를 강화하고, 해로운 자극을 방지하고 제거해야 하며, 각 방면에서 질병이 신속하게 호전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 우리는 반드시 의료 기구의 통일적 관념을 확립하고, 약물과 수술의 치료 가치에 편중해서는 안 된다. 모든 치료와 관련된 업무를 중시하고, 환자 주위의 모든 치료 임무 달성에 도움을 주는 요소를 이용하여, 모든 유리한 업무와 종합하여 의료 역량을 강화해야 한다.71)
우전겅은 자본주의 혹은 영미식 의료제도를 ‘비인도적’이라고 규정하고, 이와 같은 환경 속에서 환자가 질병을 치유하기보다는 오히려 질병에 더 걸리는 사태가 발생했다고 비판하였다. 때문에 그는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에서는 영미식 병원 제도와 의료 태도를 개선하여 종합적이고 통일적인 의료 제도를 확립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를 위해서는 각 의료 분과의 유기적 연계와 의료부-간호부-수술실-약제실 등 각 치료 업무의 협업 체계를 구축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했다. 무엇보다도 통일적 협업 체계 위에서 ‘청결한 환경’, ‘조용한 분위기’, ‘친절한 태도’와 같이 외부 환경 자극을 긍정적으로 개선하는 것이 보호성 의료 제도의 핵심 내용이었다.
우전겅이 주장한 보호성 의료 제도 확립의 주된 방향은 크게 7가지 정도였다. 첫째, 병원의 ‘가정화(家庭化)’였다. 이를 위해서 병원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이 혈육처럼 환자를 대하고, 친가족처럼 환자에 대한 헌신과 사랑의 정신을 양성해야 했다. 또한, 환자와 의료인의 친밀한 관계 형성을 위해서 기존에 병명(病名)으로 환자를 호칭하던 방식을 폐기하고, 친절하게 ‘모모(某某)’ 동지라는 방식으로 환자를 불러야 했다. 이외에도 병원의 실내장식과 분위기를 집처럼 편안하게 꾸며서 환자가 정서적 안정감을 느끼며 병원에서 편안하게 생활 할 수 있도록 해야 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관건은 환자와 의료인의 신뢰에 바탕을 둔 상호존중과 협력관계의 구축이었다.
둘째, 언어를 ‘치료’의 요소로 여기고, 환자에게 불량한 영향을 미치는 ‘자극적’ 언어의 사용을 금지하는 것이었다. 파블로프와 그의 제자들은 언어ㆍ문자와 같은 제2차 신호체계가 조건반사를 형성하여 질병의 치료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72) 그러므로 의사는 환자와 짧은 대화를 나누더라도, 환자에게 자신의 질병이 치유될 수 있다는 믿음을 남겨주어야 하며, 그들이 유쾌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자신의 질병을 이겨낼 수 있도록 긍정적ㆍ낙관적 언어를 사용해야 했다. 또한, 의료인이 임상에서 증세ㆍ진단ㆍ치료에 관해 이야기를 나눌 때 ‘영어’ 혹은 ‘외국어’를 사용하는 것도 자제하도록 하였다. 이는 전문적이고 생소한 용어가 환자의 질병에 대한 걱정과 우려를 증폭시킬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를 통해 의학 용어는 점차 ‘중국어’와 환자가 이해하기 쉬운 ‘일상적’ 언어로 대체되었다.
셋째, 치료의 ‘무통화(無痛化)’였다. 의료종사자는 환자를 다룰 때, 환자가 모든 정신적 혹은 육체적 고통 느끼지 않고 편안하게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최선의 서비스를 제공해야 했다. 무엇보다 환자에게 처지의 필요성 및 치료의 내용과 시기를 상세하게 설명하여, 환자가 의료인의 처치에 적극적으로 협조할 수 있도록 해야 했다. 또한, 각종 검사와 소(小)수술을 실시할 때 별도로 검사실과 처치실을 설치하고, 그 안에 적절한 음악을 틀어서 환자가 조화로운 리듬 속에서 정신적 긴장을 해소할 수 있도록 해야 했다. 아울러 환자에게 고통을 주는 불필요한 검사를 최소화하고, 수술 전후에 적절한 마취제와 진통제를 사용하여 환자의 고통을 경감시키는 방식도 장려되었다.
넷째, 병원에서 소음을 최소화하고 청결한 환경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병실의 환경을 조용하게 유지하면 의무종사자가 바빠서 허둥지둥거리는 현상도 자연스럽게 사라지고, 신중하게 업무를 처리할 수 있어서 치료 중 발생하는 실수와 분쟁이 사라지는 장점이 있었다. 또한, 정숙한 분위기는 환자의 휴식과 안정에도 도움을 주었다. 때문에 조용한 분위기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의료종사자가 ‘창문 열기’, ‘의료 도구와 기기의 전달’, ‘책걸상의 이동’을 숙련되고 정교하게 처리해야 했으며, 업무상 필요한 대화도 최대한 작은 목소리로 나누어야 했다. 이외에 쾌적한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서 병실의 침대를 조밀하게 배치하지 않고 적절한 간격을 유지하고, 실내에 빨래를 함부로 널지 못하게 했으며, 음식물도 함부로 반입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무엇보다 간호사들은 환자의 옷과 침구에 혈흔이나 오염물이 묻지 않도록, 이를 자주 교환하고 갈아주어야 했다. 또한 환자도 개인위생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했는데, 함부로 가래를 뱉고 작은 쓰레기를 버리는 행동이 철저하게 금지되었다. 의료종사자도 청결과 위생의 상징인 ‘흰색 가운’을 입고, 목욕ㆍ두발ㆍ손톱 관리에 각별한 주의를 가해야 했다. 주치의와 간호 부장은 매일 아침 조회 시간에 의료종사자의 복장과 손톱 등을 검사하였다. 이와 같이 환자의 치료에 불량한 자극을 주는 ‘오염’과 ‘소음’을 최소화하는 것이 보호성 의료 제도가 지향하는 하나의 목표였다.
다섯째, 환자의 수면시간을 연장하는 것이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파블로프는 수면이 일종의 보호성 억제로서 질병의 치료에 특별한 효과가 있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보호성 의료 제도를 시행하는 병원에서는 환자에게 10시간 이상의 수면을 보장하고자 하였다. 우전겅은 보호성 의료 제도의 선두주자인 마카로브스키(Makarovski) 지역 병원에서 시행했던 환자의 생활수칙 시간표를 예시로 제공하였다(표 2).
위의 표에서 볼 수 있듯이 병원은 환자의 수면시간을 연장하기 위해서 새롭게 업무 시간을 조정하였다. 우선 아침 청소 작업을 야간의 휴식과 산책 시간으로 옮겼으며, 아침에는 간단한 정리 작업만을 실시하였다. 또한, 오후에는 환자의 낮잠 시간을 보장하고, 나머지 시간에 기타 활동을 안배하며, 체온도 아침과 저녁에 환자가 깨어있을 때 측정하였다. 이외에도 밤 10시에는 일괄적으로 소등하였으며, 환자가 취침한 후에는 함부로 병실에 들어가 환자의 수면을 방해하지 않도록 하였다. 이러한 환자의 생활수칙 시간표를 중심으로 의료종사자의 업무와 휴식 시간도 엄격히 규정되었으며, 환자도 시간표에 따라 자신의 활동을 조절하고 통제해야 했다.
여섯째, 환자의 영양을 향상시키고 식욕을 촉진시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서 병원의 음식은 영양사를 지정하여, 영양과 위생을 체계적으로 관리하였다. 또한, 습관ㆍ기호ㆍ소화 기능은 환자마다 다르므로 음식은 비타민과 영양소가 다량으로 함유되어 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색ㆍ향ㆍ맛ㆍ온도도 신경을 써야 했다. 병원의 식당은 청결하고 밝아야 했으며, 식사는 정해진 시간에 규칙적으로 하고, 매끼 정해진 양을 적절히 섭취해야 했다. 아울러 밥을 먹을 때의 환경이 환자의 식욕에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에 식사 시간에 환자를 검사하고, 증세를 묻거나 각종 처치를 실시하는 행위는 모두 금지되었다. 식사 후에는 적절한 산책과 휴식을 취하여, 환자의 소화를 촉진하고 기분도 전환하도록 하였다.
일곱째, 환자의 적극적 정서를 양성하고, 질병에 대한 주의력을 전환하는 것이었다. 병마와의 싸움은 환자를 소극적이고 우울하게 만들기 때문에 환자의 적극적 정서를 양성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였다. 환자의 기분을 전환하기 위해서 주로 음악이 동원되었는데, 이를 위해 각 병원에서는 소형 방송실을 설치하였다. 음악은 기상ㆍ체조ㆍ식사ㆍ취침 시간에 맞게 적절하게 골라 방송하되, 음악이 환자에 따라 불량한 자극을 일으킬 수 있어서 환자의 음악에 대한 반응과 의견을 적극적으로 청취하도록 하였다. 또한, 체육활동도 의료 처지의 한 방법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환자는 매일 아침 규정된 시간에 체조를 해야 했다. 마지막으로 환자에게 적당한 소일거리를 제공하여 환자의 질병 자체에 대한 주의력을 전환하였다. 이를 위해서 병원 내에 작은 클럽이나 휴게실을 설치하여 환자가 오락과 여흥을 즐길 수 있도록 하였다. 무엇보다 여유 시간이 있을 때 환자를 조직하여 정치ㆍ시사ㆍ문화와 위생 교육을 실시하여, 치료 중 끊임없이 환자의 정치 수준과 문화 수준을 향상키고, 환자가 자각적으로 예방의학을 실천할 수 있도록 위생 상식을 주입하였다. 이를 통해 병원은 치료의 공간이면서도, 환자를 사회주의적 국민으로 양성하는 정치적 훈육의 장소로 변모하게 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1953년 제3군의대학(第三軍醫大學)과 부속 병원에서는 보호성 의료 제도를 실시하였다. 이를 주도했던 쉬쉬안허[徐選和]와 리둥[李冬]은 보호성 의료 제도를 파블로프 의학 사상을 병원 관리에 구체적으로 응용한 것이자, 임상관리의 ‘혁명’이라고 까지 찬양하였다.73), 제3군의대학에서는 2주간 파블로프 학설을 학습한 후, 2주간의 점진적 실행 단계를 거쳐 의료성 보호 제도를 확립하였다. 점진적 실행 단계에서는 업무 태도 개선조ㆍ영양 개선조ㆍ환경 미화조ㆍ정숙조로 나누어 실행에 필요한 계획을 수립하도록 하였다. 3단계 보편적 실행 단계에서는 보호성 의료 제도를 전(全) 부서와 병원으로 확대하였다. 특히 3단계에서는 참여자의 열정을 고무시키기 위해서 “사람마다 상냥한 태도를 양성하자, 곳곳을 조용하게 만들자, 환경을 미화하자, 영양을 강화하자” 74)라는 행동 구호를 외치게 하였다. 이는 보호성 의료 제도가 지향하는 친절ㆍ정숙ㆍ위생ㆍ영양이라는 핵심 요소를 그대로 반영한 것 이었다. 4단계는 보호성 의료 제도를 공고히 하는 것이 목적이었는데, 이를 위해 당정(黨政)ㆍ의료ㆍ행정의 검사조를 조직하여, 그 실시 정도를 평가하고 감시하였다.
쉬쉬안허와 리둥은 제3군의대학에서 보호성 의료 제도를 시행한 성과를 7가지로 정리하였다. 첫째, “모든 것을 휴양원(休養員)을 위하여”라는 구호 아래, 전체 병원의 근로자가 실제 행동에 참여했다. 여기서 유의하여야 할 점은 ‘환자’를 ‘휴양원’으로 부르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질병을 앓고 있는 것을 의미하는 환자라는 용어가 불량한 자극을 야기할 수도 있기 때문에, 이를 ‘휴식’과 ‘요양’을 취하고 있는 사람을 의미하는 ‘휴양원’으로 대체하였던 것이다. 즉 보호성 의료 제도의 시행으로 환자는 더 이상 질병을 앓는 사람이 아닌 휴식을 취하는 사람으로 그 의미가 전환되었다. 둘째, 의료종사자가 제2 신호체계(언어)의 환자에 대한 영향에 유념하여 업무 태도를 개선했다. 이를 위해 제3군의대학 병원에서는 진료를 대부분 예약제로 전환하였으며, 병구(病區)ㆍ병실(病室)과 같이 ‘병(病)’자가 들어가는 글자를 모두 없애고, ‘환자’라는 호칭도 철저히 사용을 금지하였다. 이처럼 보호성 의료 제도의 실시로 ‘질병’과 ‘환자’라는 단어는 금기어로 전락하였으며, 언어적으로 ‘질병’이란 용어가 사라지는 독특한 문화현상이 발생했다. 또한 의사의 회진이나 의대생의 실습 때에 실시했던 환자의 증상에 대한 보고와 토론은 회진 이전에 실시하거나 혹은 병실 밖에서 작은 소리로 실시하였다. 셋째, 환자의 식욕을 촉진시키는 음식을 제공하였다. 특히 2병동에서는 음식 예약제를 실시하여 음식의 종류를 다양화하고 맛과 질까지 개선하였다. 넷째, 병원의 무미건조한 환경을 개선하였다. 병원의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서 정원에 꽃과 나무를 심고, 곳곳에 벤치를 설치하여 환자가 쉬고 즐길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병실의 복도ㆍ식당ㆍ예진실에 화분을 두거나 자수ㆍ그림 등을 걸었으며, 식당이나 예진실에는 책을 배치하여 환자가 독서를 할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다섯째, 병실이 조용하고 아늑한 공간으로 바뀌어, 환자들이 편안하게 쉴 수 있게 되었다. 여섯째, 환자의 활동과 휴식 시간을 개선하여, 환자의 수면시간이 10-11시간으로 연장되었다. 일곱째, 의료 사고의 발생이 사라졌다. 1952년의 의료 사고는 90건에 달했는데, 1953년의 의료 사고는 2건으로 현격히 줄어들었다. 또한 보호성 의료 제도를 실시한 후에 환자의 사망률도 크게 감소하였다. 이처럼 제3군의대학에서는 보호성 의료 제도를 시행한 이후 임상 관리ㆍ병원 환경ㆍ업무 태도가 전반적으로 개선되었고 환자의 치료율도 향상되었다.
1954년 중국 의과대학 제1병원(中國醫科大學第一醫院, 이하 제1병원으로 약칭)의 간호부에서도 보호성 의료 제도를 실시하여 간호 업무를 개선하였다. 제1병원의 간호부는 3급 간호와 계획적 간호 제도를 창안하였다.75) 3급 간호는 환자를 병세의 경중에 따라 3급으로 나누어, 즉 중증환자ㆍ병세가 위중한 만성병 환자ㆍ병세가 가벼운 환자로 나누어 차등적인 돌봄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계획적 간호는 중증환자와 특수한 상황의 환자에 대해 중점적 간호 항목, 필요한 처치, 예상 가능한 합병증 등을 고려하여 체계적인 간호를 실시하는 것이었다. 제1병원 간호부는 보호성 의료 제도를 실시하기 이전과 이후의 모습이 명확히 대조적으로 구분될 정도로 상당한 성과를 이룩하였다.
A-1 실시 이전: 중국 의과대학 제1병원은 치료 중심 병원으로, 각 병실에 60-70개의 침대가 놓여있다. 다수의 환자는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중증환자로 환자의 대소변ㆍ음식ㆍ누워 있는 자세의 변동 등 모두 간호사의 도움이 필요했다. 이전에는 중점과 계획성 없이 일했다. 간호사는 모두 어디에서 부르면 그곳으로 가는 주먹구구식 방법으로 일을 처리했다. 때문에 업무가 매우 분주하고 두서가 없었으며, 호출 소리가 하루 종일 끊이지 않았다. 간호사가 조금이라도 늦게 도착하면 환자가 침대를 두드리거나 가래통을 두드려대서 사방에 소음이 끊이질 않았다. 간호사가 약을 주고, 체온을 측정하고 혹은 기타 처치를 할 때 몇 차례나 호출에 응하느라 이를 중단해야 했다. 간호사는 업무가 힘겨워서 얼굴이 땀투성이가 되었고, 병실을 나가자마자 또 호출 소리를 듣고 다시 가는 일이 발생했다. 대부분 돌아다니는 데 시간을 허비했고, 퇴근 시간이 되어도 퇴근을 하지 못했다. 일을 잘 처리하지 못하면 환자도 불만족스러워했다.
A-2 실시 이후: 보호성 의료 제도를 학습한 후, 이러한 소음과 분주함이 환자의 휴식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3급 간호를 고안하였다. 즉 중점적으로 명확히 처리하고 수동적 업무 태도를 주체적으로 개선하여, 조용하고 편안한 휴식 환경을 확립하였다. 간호사가 먼저 명확하게 업무를 분담하고, 동시에 환자를 병세의 경중에 따라 3급으로 분류하였다. 간호사와 위생원은 정해진 시간에 따라 병실을 순회하며, 주체적으로 환자의 요구를 발견하고 병세의 변화를 관찰하였다. 동시에 환자의 등을 닦아주거나, 구강을 청결하게 해주거나, 침구를 정리해 준다. 환자는 간호사가 언제 오는지 알기 때문에 해결해야 할 문제를 집중해 두었다가 간호사가 왔을 때 한꺼번에 해결했다. 3급 간호를 실시한 이후부터 호출 소리가 줄어들었으며, 다시는 침대나 밥그릇을 두드리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일하는 사람들도 계획에 따라 안심하고 일을 처리하였다. 그 결과 두서없이 바쁜 현상이 해결되었으며, 업무의 효율성도 현저하게 높아졌다. 환자들도 모두 “간호사가 너무 친절하다. 항상 누군가 와서 우리를 보살피며, 세심하게 간호해 준다”라고 말하였다. 그리하여 간호사의 업무와 휴식 시간도 크게 개선되었다.76)
이처럼 보호성 의료 제도의 시행 이후 ‘소음’ㆍ‘혼란’ㆍ‘불만’으로 가득 찼던 병원의 분위기는 ‘정숙’ㆍ‘질서’ㆍ‘안정’ㆍ‘친절’ㆍ‘만족’으로 대체되었다. 그러므로 제1병원의 간호사였던 왕쑤허[王素合]는 보호성 의료 제도가 ① 간호사의 책임감과 성취욕을 강화하여 간호 업무 수준을 향상시키고, ② 중증환자에 대한 간호가 강화되어 치료율도 향상되었으며, ③ 의사와 간호사의 연계를 강화시켜 의료 사고의 발생을 방지하는 데 긍정적인 효과를 발휘하였다고 평가하였다.
보호성 의료 제도의 시행 이후 약제실과 약사의 업무 태도가 개선된 경우도 적지 않았다. 예를 들어 제1군의대학 임상학원과 정저우시 철도의원[鄭州市鐵路醫院]의 약제실에서는 파블로프 학습운동과 보호성 의료 제도를 병행하여 시행하였다.77) 우선 제1군의대학 임상학원 약국은 파블로프 복합제(複合劑)의 처방전을 새롭게 만들었으며, 조제제(調製劑)의 형태를 개선하여 환자가 쉽게 복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철도의원의 약제실은 환자에 대한 서비스 태도를 개선하고, 환자에게 불량한 영향을 미치는 각종 자극을 최대한 제거하였다. 이외에도 환자가 복용하기 쉽도록 약물의 형태ㆍ색ㆍ향ㆍ맛을 개선하였다.
그런데 보호성 의료 제도를 시행하는 데는 지역과 병원의 규모에 따라 일정한 편차가 존재했다. 예컨대 장시성[江西省] 상고현(上古縣) 위생원(衛生院)에 근무했던 류사오화[劉紹和]는 『약학통보(藥學通報)』에 실린 「약제실 업무에서 어떻게 보호성 의료 제도를 관철할 것인가(在藥房工作中怎樣貫澈保護性醫療制度)」 78),라는 글을 읽고 위생원을 개혁하였다. 그는 우선 각종 소음을 방지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환자를 대했으며, 약품의 질량을 제고하고, 그릇과 용기의 청결에도 주의를 기울였다. 그러나 그는 위생원에 근무하는 동지들 가운데 “의료 보호제는 단지 큰 병원에서만 실시하고, 소규모 병원은 조건과 환경이 열악하기 때문에 실시하지 않아도 큰 문제가 없다” 79)고 잘못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고 비판하였다. 즉 대도시의 대형병원이나 대학병원 등에서는 보호성 의료 제도를 적극적으로 시행하였지만, 현급(縣級) 이하의 중소 도시에서는 병원의 규모도 작고 의료인의 자질도 부족하여 확산되지 못했던 현실적 한계가 존재했다. 또한 류사오화는 일부 공장에서 생산된 약이 보호성 의료 제도에 부합하지 않는 문제점도 지적했다. 그는 당귀침고편(當歸浸膏片)은 냄새가 너무 역겹고 용량이 크며, 청어간유(靑魚肝油)는 붉은색으로 혼탁하게 변해서 일부 환자들은 복용을 거부한다고 지적하였다. 특히나 현급(縣級) 위생원의 약제사는 기술 수준이 낮아 이러한 문제에 적절하게 대응하기 어렵기 때문에 이후 보호성 의료 제도를 전면적으로 확대할 때는 병원ㆍ제약회사ㆍ제조공장 등 의료와 관련된 기관들이 긴밀하게 협조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요컨대 그는 보호성 의료 제도를 시행하기 위해서는 병원뿐만 아니라 환자를 비롯한 여러 사회ㆍ경제적 자원들이 함께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것을 지적하였다.
그런데 보호성 의료 제도의 확립은 병원의 환경과 의료인의 서비스 태도를 개선하는 것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보호성 의료 제도는 환자에게 의료 규율을 훈육하여 의료인의 업무에 잘 협조하도록 만들고, 환자가 스스로 질병을 극복하도록 하는 것이 최종적인 목표였다. 예를 들어 제1군의대학 임상학원 내과 의사였던 우전겅은 「환자의 보호성 의료 제도에 대한 인식(病人封於保護性醫療制度的認識)」이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보호성 의료 제도를 시행하는 대상은 환자이다. 만약 환자가 잘 받아들이지 않고 긴밀히 협조하지 않는다면 이 제도를 시행하기가 힘들다. 병원에서 일하는 사람은 환자에게 막무가내로 제도를 강요해서는 안 된다. 만약 제도 자체의 환자에 대한 장점을 반복해서 설명하지 않는다면 환자는 제도에 대해 압박과 혐오감을 느낄 것이다. 수많은 유형(有形)과 무형(無形)의 치료에 대한 장애는 환자들 사이에서 발생한다. 환자들 사이의 불만은 치료에 대한 믿음에도 영향을 미친다. (환자가) 의료 기관을 이해하지 못하고, 사소한 문제를 따지고 들어 큰 문제로 만들어 병원에 소문이 널리 퍼지면, 의료 기관의 위신이 손상되고, 병원의 업무에도 수많은 장애와 혼란을 초래한다. 이는 실질적으로 환자 자신에게 영향을 미친다. 단지 반복해서 적절하고 상세하게 제도의 원리ㆍ목적ㆍ실시 방법ㆍ주의 사항을 설명하고, 이 제도가 환자 자신에게 유익하다는 것을 친절하고 명확하게 증명하여, 제도를 준수하는 것이 바로 자신을 보호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야 한다.80)
이처럼 보호성 의료 제도를 관철시키기 위해서는 환자가 ‘구속’과 ‘혐오감’을 느끼지 않고, 병원의 규칙과 제도를 잘 따르도록 훈육하는 것이 필요했다. 이를 위해서 우전겅은 환자에게 9가지 내용을 교육시킬 것을 강조하였다. 첫째, 환자에게 왜 보호성 의료 제도를 시행해야 하는가를 가르친다. 둘째, 환자에게 보호성 의료 제도가 어떠한 제도인지를 설명한다. 셋째, 이 제도를 실시하는 데 환자의 협조가 필요한 이유를 명확히 제시한다. 넷째, 환자에게 낙관적 태도를 가지고, 치료를 신뢰하라고 지도한다. 다섯째, 환자가 의료 생활시간을 준수하도록 한다. 여섯째, 환자가 수면의 방해 요소를 제거하고, 수면시간을 연장하도록 한다. 일곱째, 환자가 자신을 통제하고, 구성원 전체를 고려하도록 가르친다. 여덟째, 환자가 자신의 질병과 상황에 대한 모든 것을 의료인들에게 토로하고, 치료에 전념하도록 한다. 아홉째, 환자와 의료인이 함께 노력해야만 환자의 삶이 건강해지고 즐거워진다는 것을 인식시킨다. 그는 9가지의 교육 내용을 환자들에게 훈육해야만, “치료 과정의 모든 장애물을 제거하고 질병을 신속하게 치료할 수 있으며, 병원을 환자의 낙원으로 바꿀 수 있다” 81)고 강조하였다. 그러나 어떤 측면에서 보호성 의료 제도의 시행은 파블로프의 조건반사를 인민의 신체에 작동시키려는 하나의 실험과 다름없었다. 의사들은 공산당의 매개자이자 보조자의 역할을 자처하며, 보호성 의료제도를 사회주의 체제를 건설하기 위한 일종의 조건 형성 기제로 만들었다. 즉 병원은 사회주의적 이데올로기와 변증법적 유물론을 인민의 신체에 각인 시키기 위한 학습과 훈육의 장이었으며, 인민은 병원을 통해 파블로르 학설의 위대성, 소련 사회주의 의학의 선진성, 사회주의의 복지와 인민에 대한 보살핌을 ‘반사’적으로 습득하였다. 이를 통해 인민은 사회주의의 합법성을 승인하고, 더 나아가 공산당의 정책을 옹호하며 국가의 동원체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반사작용’인 ‘행동’을 하게 되었다. 이런 측면에서 병원은 사회주의 체제를 실현하기 위한 정치적 장이었으며, 인민은 ‘조건반사’를 통해 사회주의에 순응하는 신체로 길들여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Ⅴ. 맺음말
1950년대 중국에 수용된 파블로프 학설은 사회주의적 지식체계의 재편, 변증법적 유물론에 토대를 둔 세계관의 형성, 자본주의적 관념과 관행의 청산 등등 정치ㆍ사회 전반에 영향을 미친 하나의 이데올로기로서 기능하였다. 의료계는 파블로프 학설 학습운동을 통해 사상투쟁을 전개하는 한편, 의료 제도 전반에 걸친 개혁을 단행하였다. 그 결과 피르호의 세포병리학이나 멘델의 유전학은 유심주의와 자산계급을 옹호하는 반동 학설로 치부되어 몰락의 길을 걸었고, 파블로프의 학설은 무산계급과 변증법적 유물론을 대변하는 사회주의 체제의 의학으로 공인되었다. 또한 의과대학도 영미식 학제에서 소련식 학제로 개편되었고, 교육내용과 언어도 모두 소련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그 결과 영미파 교육을 받은 의료인들이 장악하고 있던 의료 권력도 점차 소련파 중심으로 전환되었다.
파블로프는 유기체의 통일성, 유기체와 환경의 상호작용, 신경론에 토대를 둔 의학 이론을 정립하였다. 그의 의학 이론은 신경병리학설로 집약된다. 이 학설의 기본 전제는 신체의 각 부분이 신경계를 통해 서로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으며, 신경활동의 기본 형식은 반사작용이며, 이 활동에서 대뇌피질이 조절과 통제 작용을 담당한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유기체가 대뇌피질의 조절과 통제 작용 하에 각 기관이 분리되지 않고, 전체적ㆍ통일적으로 연계된다고 간주하였다. 동시에 유기체의 활동은 그것이 처한 환경과 항상 서로 영향을 주고받기 때문에 인간과 환경의 조화를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파블로프는 질병 발생의 원인을 환경의 자극에 의한 신경계통의 병변(病變) 현상에서 찾고, 신경계통의 자극을 차단하거나 기능 회복을 통한 전체적ㆍ통일적 치료 방법을 마련하고자 하였다.
1950년대 중국의 의료인들은 파블로프 학습운동을 통해 사상 교육을 강화하고, 그의 학설을 임상에 적용하여 수면요법ㆍ무통분만법과 같은 새로운 치료법을 적용하였다. 무엇보다 보호성 의료 제도를 시행하여 사회주의적 의료 체제를 확립하고자 하였다. 보호성 의료 제도는 환자의 치료에 부정적 자극을 미치는 요소를 제거하고, 환자 중심의 의료 체제를 구축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이를 위해 병원에서는 위생적 환경의 조성, 각종 소음의 제거, 친절한 업무 태도의 양성, 음식 영양의 개선 등 여러 방면에서 구체적인 노력을 전개하였다. 그 결과 병원의 환경과 의료인의 업무 태도가 개선되었고, 질병의 치료율도 향상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병원 내에서 의사ㆍ간호사ㆍ환자에 대한 사상교육이 강화되면서, 병원은 사회주의적 규율과 이데올로기를 훈육하는 장소로 변모하였다. 요컨대 병원이 사회주의적 국민을 양성하는 정치적 장소로 변질되어 가는 경향이 존재했다.
중국의 파블로프 학습운동과 보호성 의료 제도의 시행은 1950년대 후반 소련과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그 열기가 점차 약화되었다. 소련에서 파블로프 학설은 스탈린 독재 체제의 구축을 위해 정치적으로 이용되었는데, 이런 이유에서 스탈린 체제가 붕괴하자 파블로프 학설에 대한 교조주의적 신봉과 맹목적 추종도 급격하게 사라졌다(John D. Bell, 1981: 15). 중국의 경우도 공산당 권력의 정당성 확보와 사회주의 체제의 우월성을 선전하는 일종의 정치적 도구로서 철저하게 파블로프 학설을 이용하였다. 그러므로 파블로프 학설에 입각한 보호성 의료 제도의 확립에는 ‘국가 복지’의 이미지를 인민들에게 각인시키고, 이를 통해 인민의 신체를 통제하고자 했던 중국 공산당의 정치적 목표가 담겨 있었다고 볼 수 있다.
1956년 4월 25일 마오쩌둥이 「10대 관계를 논함」을 통해 ‘소련 배우기’를 중단하고 ‘자주적’ 사회주의 건설의 길을 모색하기 시작하면서 파블로프는 중국에서 그 정치적 힘을 상실하였다. 루딩이는 “파블로프 학설은 사회주의적”이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일종의 종파주의라고 비판하였다. 한편 그는 정치적으로 반(反) 소련의 정서 속에서 “소련의 과학적 성취까지 부인하는” 82), 것 또한 잘못된 관점이라고 지적하며, 과학을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말고 순수한 과학 그 자체로서 연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소련학습운동이 끝나고, 중국이 독자적인 길을 모색할 때에도 과연 과학과 의료가 정치와 권력으로부터 독립되어 순수성과 객관성을 보장받았는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부정적인 시각이 많다. 1950년대 후반 대약진 시기와 문화대혁명 시기(1965-1975)에도 중국의 지도자와 공산당은 과학과 의료를 정권의 합법성 창출을 위한 도구로 활용하였다(Miriam Gross, 2016; Liping Bu, 2017). 이런 측면에서 지식과 기술은 정치ㆍ사회적 조건 속에서 규정되기도 하지만, 정권과 권력의 유지와 강화에도 기여한다는 점은 명백하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1950년대 파블로프 학설의 수용과 보호성 의료 제도의 확립을 통해서 두 가지 측면을 도출해 낼 수 있을 것이다. 첫째, 파블로프의 학설에 기반한 의료 체제의 변화를 통해서 본 1950년대 초반 중국 사회주의의 특징은 과연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다.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은 그 시작부터 반(反) 자본주의와 반(反) 제국주의를 표방하는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를 핵심 내용으로 하였지만, 그 실체는 소련의 원조하에 소련식 이념과 제도를 이식하고 답습하는 것에 불과하였다. 이는 중국이 1950-56년까지 소련학습운동을 전개하며 정치ㆍ경제ㆍ사회 전반에 소련식 모델을 채택했으나, 1956년 흐루쇼프의 등장으로 중소 관계가 악화되면서 독자적인 길을 모색해 가는 정치적 흐름과 일맥상통한다. 이러한 정치적 흐름 속에서 공산당은 의과대학ㆍ사립병원에 대한 개혁을 단행하여, 종합대학으로부터 의과대학을 분리하고, 영미식 미션계 병원을 폐쇄하고, 사립병원을 국ㆍ공립 병원으로 전환하였다. 결국 ‘자본주의ㆍ자산계급ㆍ유심주의를 타도하자’는 정치 구호가 난무했던 의료계 개혁의 목적은 영미파 미션계의 의료 권력을 빼앗아 공산당이 의료 전반에 대한 통제권을 강화하고, 그 재산을 국유화하는 것이었다. 요컨대 1950년대 초반 중국에서 사회주의 체제의 확립은 ‘소련화’를 의미했으며, 보건의료 체제의 사회주의화는 ‘국유화’를 의미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1950년대 중국의 의료와 국가 권력의 관계를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우선 의료 개혁 전반에서 의료인의 자율성과 주체성이 담보되지 못하고, 국가의 정치적 압박에 속에서 ‘순응적’ㆍ‘타율적’으로 개혁이 이루어졌다. 의료인은 생존을 압박받는 사상개조의 광풍 속에서 ‘반(反) 사회주의자’와 ‘반(反) 소련파’라는 정치적 낙인을 피하기 위해서 파블로프 학습운동에 참여하여, 체제에 대한 충성을 서약하며 인민의 ‘봉사자’로 거듭나야만 했다. 그러나 인민의 봉사자는 인민의 입장과 시각에서 그들을 대변하기보다는 국가의 정책과 이념을 인민에게 전달하고 주입하는 ‘훈육자’이자 국가의 복지를 인민의 신체에 각인시키는 ‘대리자’에 불과했다. 또한, 병원에서의 의료 개혁과 임상에서의 치료 기술의 선택에서도 획일적인 모델과 치료술이 강요되었다. 이는 환자에게도 획일적인 의료 서비스의 강요로 이어졌으며, 환자의 권리와 의료의 다양성이라는 가치가 훼손되었다. 환자는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한 채 수면제를 먹고 침대에 누워만 있어야 했으며, 여성은 정신예방성 무통분만이라는 미명 하에 출산의 고통도 마음껏 호소하지 못하였다. 이처럼 의료가 정치에 포섭되는 형국 속에서, 인민의 신체는 사회주의 체제의 실험의 장으로 전락하였으며, 인민의 신체적 자율성도 크게 억압당했다. 결국 의료는 사회주의적 규율을 인민의 신체에 각인시키며, 인민의 노동력과 건강을 관리하는 통치 기제로 작동하였다. 그러므로 중국 사회주의 체제 내부에서의 의료인의 역할과 신체규율의 형성 문제를 ‘국가권력에 의한 신체의 강제적 동원원리’라는 틀 속에서 비판적으로 성찰해야만, 그에 대한 해체도 가능할 것이다.
Notes
朱智賢, 「巴甫洛夫學說是馬克思列寧主義反映論的自然科學基礎」, 『讀書月報』 1955년 2월 8일, 17쪽.
郭沫若, 「巴甫洛夫104週年誕辰紀念詞」, 『科學通報』 1953년 11월호, 3쪽.
毛澤東, 「在全國政協第一屆四次會議閉幕會上的講話(1953년 2월 7일)」 (中共中央文獻研究室, 1996: 263).
郭沫若, 「中央人民政府政務院文化教育委員會郭沫若主任關於中國科學院基本任務的指示」 (中央人民政府政務院 文化教育委員會 編, 1950: 147-148).
「中國科學院訪蘇代表團在北京擧行報告會後: 科學工作者深刻認識了蘇聯科學的先進性」, 『人民日報』 1953년 7월 20일 3면.
金汝煌, 「蘇聯醫學的唯物主義科學思想基礎」, 『人民軍醫』 1953년 8월 15일, 611-615쪽.
중국의 『人民軍醫』 잡지에서는 소련에서 “파블로프 학설에 의거하여 새로운 의료 제도를 건설했는데, 이것이 바로 보호성 의료 제도이다”라고 하였다. 또한, 편집장은 소련의 보호성 의료 제도에 입각하여 중국의 의료 제도와 의료 서비스를 개선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認眞學習蘇聯的先進經驗, 改進我們的醫療制度」, 『人民軍醫』 1953년 2월 15일, 108쪽).
「中國人民政治協商會議共同綱領」(全國人大常委會辦公廳ㆍ中共中央文獻研究室 編, 2015: 83).
미추린-리센코주의는 라마르크(Jean Baptiste Lamarck, 1744-1829)의 용불용설에 입각하여 유기체가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획득된 형태학적ㆍ기능적 특징이 유전될 수 있으며, 획득형질의 유전에 의해 유기체가 진화하고 새로운 종이 탄생한다고 주장하였다. 1948년 레닌 농학아카데미(Lenin Academy of Agricultural Sciences)에서 미추린-리센코주의가 스탈린으로부터 공인을 얻으면서, 이 학설이 멘델과 모건의 유전학에 대항하여 독점적 지위를 형성하게 되었다. 중국은 러톈위[樂天宇]가 중심이 되어 미추린-리센코주의를 수용하고, 1949년 2월에는 미추린학회[米丘林學會]를 창립하였다(王海迪, 2015; 張淑華, 2012). 파블로프 학설은 획득형질의 유전을 옹호했다는 점에서 미추린-리센코 학설과 일맥상통하는 측면이 있었다. 즉 파블로프는 유기체가 환경 변화를 통해 조건반사를 획득하면, 그 학습된 조건반사는 다음 세대로 유전되어 무조건반사가 된다고 생각하였다. 물론 파블로프는 획득된 조건반사의 유전을 증명하는 데는 실패하였으나, 이는 미추린-리센코주의가 소련의 과학계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는 데 일조하였다. 이후 소련과 중국의 과학계와 의학계는 미추린-리센코주의와 파블로프 학설이 공식적으로 연결되어, 환경의 변화에 불변하는 유전자가 전제된 멘델의 유전학을 지지하는 학자들이 설 자리를 잃게 되었다.
1946년 9월 26일 파블로프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중국의 주요 신문 매체에서는 그의 학설이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 관영 신문인 『人民日報』에서는 嚴希純의 「蘇聯偉大科學家巴夫洛夫的誕生百周年紀念」을 비롯하여 「巴夫洛夫與心理學」, 「巴夫洛夫對於教育學的影響」, 「巴夫洛夫心理實驗的簡單介紹」 등의 글을 게재하였다. 또한 『中蘇文化雜志』(20권 제 9기, 1949년 9월 20일)에서는 「巴甫洛夫的生活和事蹟」, 「巴甫洛夫回憶錄」, 「偉大的生理學家: 巴甫洛夫」 등의 글이 소개되었다. 1949년 9월 上海時代出版社에서도 戈紹龍이 編著한 『巴夫洛夫百年誕辰』(1949년 9월) 특집을 출판하였다.
「中國人民政治協商會議第一屆全體會議: 各單位代表主要發言」, 『人民日報』 1949년 9월 24일 2면.
1949년 9월 26일 中蘇友好協會 전국 총회 준비위원회와 中華全國自然科學工作者代表大會(이하 “科大會”로 약칭) 준비위원회는 정치계와 과학계의 106명의 인사가 참여한 가운데 協和醫學院 강당에서 성대한 파블로프 기념회를 개최하였다. 회의의 주석이었던 郭沫若은 “파블로프의 과학적 성취는 과학이 형이상학을 이기고, 유물론이 유심론을 이겼음을 상징한다”고 연설하며, 파블로프의 실험정신과 애국정신을 본받을 것을 호소하였다(丁瓚, 「前言」, 『人民日報』 1949년 9월 26일 7면).
「北平新華廣播電臺今晚廣播人民政協朱總司令等發言錄音: 二十五日起一星期自然科學節目預告」, 『人民日報』 1949년 9월 25일 1면.
劉民英, 『巴甫洛夫高級神經活動學說』, 北京: 中華書局, 1952; 中國科學院心理研究所 著, 『巴甫洛夫關於兩種信號系統的學說』, 北京: 中國科學院, 1952; 巴甫洛夫 著, 戈紹龍 譯, 『大腦兩半球機能講義』, 上海: 文通書局, 1953; 中國科學院心理學硏究室 譯, 『條件反射演講集』, 北京: 人民衛生出版社, 1594; 衛生部巴甫洛夫學說學習會 著, 『巴甫洛夫學說學習文集』, 北京: 人民衛生出版社, 1954; 人民衛生出版社 著, 『巴甫洛夫高級神經活動雜志譯叢』, 北京: 人民衛生出版社, 1955-1957.
趙以炳, 「十年來巴甫洛夫學說在我國的成就」, 『生物學通報』 1959년 10월호, 469쪽
毛澤東, 「在全國政協第一屆四次會議閉幕會上的講話(1953년 2월 7일)」(中共中央文獻研究室, 1996: 263).
『中央衛生部舉辦巴甫洛夫學說學習會』, 『科學通報』 1953년 5월 31일, 96-97쪽.
『動物高級神經活動(行爲)的25年客觀硏究』는 1954년 출판된 『條件反射演講集』(中國科學院心理學硏究室 譯, 北京: 人民衛生出版社, 1594)에 정식으로 포함되었다. 그러나 『條件反射演講集』은 1950년부터 中國科學院編譯局에서 이 책의 영문판을 저본으로 번역이 진행되었다. 1951년 이 책의 번역 작업이 中國科學院心理學硏究室로 이관되면서 검열과 수정 작업이 지연되었다. 1952년 10월 위생부가 ‘파블로프 학설 학습회’를 기획하면서 관련 문헌의 번역을 독촉하였고, 1953년 8월 21일 정식으로 ‘학습회’를 개최할 때에는 『條件反射演講集』의 미(未)출판 번역 원고를 인쇄하여 학습회의 참여자들에게 제공하였다. 때문에 1953년 진행된 각종 ‘파블로프 학설 학습회’에는 『條件反射演講集』의 비(非)공식 발행본이 배부되었고, 이 학습회의 연구자들에게 다양한 의견을 구하여 1954년 6월 『條件反射演講集』을 정식으로 발행하였다(李艷麗ㆍ閻書昌, 2014: 336-340).
趙以炳, 「十年來巴甫洛夫學說在我國的成就」, 『生物學通報』 1959년 10월호, 468쪽.
王志均, 「將巴甫洛夫學說運用到實際工作中去」, 『科學通報』 1953년 11월호, 8쪽.
1953년 이후 中國科學院은 ‘파플로프 학설 연구 위원회’를 조직하여 ‘파블로프 학설학습회’를 전국적 범위로 확대하였다. 그리하여 전국 20여 개의 대ㆍ중 도시에서 과학자들이 각 지역과 單位의 공산당 조직과 행정 조직의 지원을 받아 파블로프 학설에 대한 학습을 주도해 나갔다. 또한, 中華全國科學技術普及協會의 각 지방 조직이 中華醫學會ㆍ生理科學會ㆍ心理學會의 지방 조직과 협력하여 ‘파블로프 학설의 기본 지식 통속 강좌’를 개최하여 대중적인 선전을 주도하였다(丁瓚, 「巴甫洛夫學說在中國的傳播」, 『科學大衆』 1954년 10월호, 369쪽).
尤ㆍ日丹諾夫, 「反對自然科學中的主觀主義歪曲」, 『人民日報』 1953년 2월 3일 3면.
巴甫洛夫學說學習會, 「巴甫洛夫學說學習會工作總結」, 『科學通報』 1953년 11월호, 18쪽.
파블로프 탄생 104주년 기념대회는 中國科學院ㆍ中華全國自然科學專門學會聯合會ㆍ中央衛生硏究院이 연합하여 개최하였다. 이 기념대회는 1953년 8월 21일부터 40일간 진행된 ‘파블로프 학설 학습회’ 도중에 개최되었기 때문에 학습회의 참가자들도 기념회에 모두 참석해야 했다. 1953년 9월 26일과 27일에 걸쳐 진행된 기념식에는 학습회의 참가자를 비롯하여 800여 명의 인사가 참가하여, 파블로프 학설의 인기를 실감하게 했다. 이 기념식에는 中國科學院 원장이었던 郭沫若의 기념사를 비롯하여, 소련 과학자 알렉산드로프(Alexandrov)가 「巴甫洛夫生平及其貢獻」이란 제목의 연설문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또한 27일에는 ‘파블로프 학설 보고회’와 6강으로 구성된 ‘파블로프 학설 체계적 강좌’가 열렸는데, 매 차례 강좌에 참석한 사람이 1,000여 명 이상이었다(「中國科學院等單位聯合記念巴甫洛夫誕生104週年」, 『科學通報』 1953년 11월호, 5쪽).
郭沫若, 「巴甫洛夫104週年誕辰紀念詞」, 『科學通報』 1953년 11월호, 4쪽.
上海檔案館館藏號 B34-2-180-128, 「上海巴甫洛夫學說學習會總結報告(1954)」.
同上註.
「社論: 堅決貫徹學習蘇聯醫學的方向, 認眞開展學習巴甫洛夫學說運動」, 『人民軍醫』 1953년 3월 15일.
同上註.
류위민[劉育民]은 1945년 上海醫學院 醫療系를 졸업하고, 충칭[重慶]에 자신의 스승인 펑더페이[馮德培]가 건설한 中央研究院醫學研究所籌備處(生理研究所의 전신)의 助理研究員으로 일하였다. 1949년 중국과학원이 설립된 후, 펑더페이가 그 휘하의 생리화학연구소의 소장으로 임명되면서, 류위민도 연구원으로 합류하였다. 1953년 파블로프 학설에 대한 비판으로 풍파를 겪은 후, 스웨덴으로 유학을 떠나 그라니트(Granit, 1967년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의 실험실에서 연구하였다. 1960년대 초 귀국한 후 시각신경계통에 대한 연구를 주도하며, 시각 및 청각 생리실험실을 건설하였다. 1985년부터는 『생리학보(生理學報)』의 편집장으로 활동하였으며, 시각계통의 공간 분별 심리생물학 연구로 중국의 시각생리학 연구에 선구적인 역할을 하였다(楊振玉ㆍ範世藩, 2005; 楊雄裏, 2005).
上海交通大學附屬醫學院檔案館館藏號 8c7-8-14, 「上海巴甫洛夫學說學習總結報告(1953년)」, 24-25쪽.
백화제방ㆍ백가쟁명은 “온갖 꽃이 같이 피고, 많은 사람이 각기 주장을 펼친다”라는 것으로 1956-1957년까지 마오쩌둥이 펼친 사상개방 운동이었다. 이른바 ‘쌍백운동(雙百運動)’ 이라고도 불린다. 쌍백운동은 흐루쇼프의 등장 이후 헝가리와 폴란드 등 동구 사회주의 국가가 동요하자, 마오쩌둥이 이러한 동요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 ‘인민 내부의 모순’을 해소하는 방안으로 제시한 것이었다. 따라서 중국 공산당은 민주적인 당파나 지식인에게 자유로운 발언을 허용하고, 공산당에 대한 비판도 자유롭게 제기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오랫동안 사상과 언론탄압에 억눌렸던 지식인들이 입을 열기 시작하면서, 공산당의 독재와 마오쩌둥의 개인숭배에 대한 비판이 봇물 터지듯 쏟아졌다. 그러자 중국 공산당은 태도를 전환하여, 1957년 6월 8일 비판적 지식인들을 탄압하는 ‘반우파투쟁’을 벌였다(오쿠무라사토시 지음, 2001: 166-168).
陸定一, 「百花齊放, 百家爭鳴: 一九五六年五月二十六日在懷仁堂的講話」, 『天津大學學報』 1956년 4월, 7쪽.
劉瑞林, 「粉碎資產階級右派簒奪科學與教育的領導權的陰謀」, 『科學與教學』 1957년 8월 8일, 1-5쪽.
閻德潤, 「新醫學思想」, 『良師益友』 1951년 8월 10일, 575쪽.
朱顔, 「巴甫洛夫學說介紹」, 『中醫雜志』 제3권 제5기, 1954년 3월 2일, 6쪽.
파블로프와 그의 추종자들은 피르호가 세포에 대한 국부적인 치료만을 강조했다고 비판하였으나, 이와 같은 견해에는 일정한 오류가 존재한다. 피르호는 “모든 세포는 세포로부터(Omnis Cellula a Cellula)”라는 유명한 경구를 통해서, 생명의 기초 단위가 세포라는 것을 밝히고, 세포들 사이의 투쟁이 곧 질병이라는 생포병리학을 창설하였다(奇昌德, 1994: 430-434). 그러나 피르호는 모든 질병의 원인을 세포에 돌리지도 않았고, 질병을 세포의 수준에서만 파악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도 않았다(강신익, 2005). 오히려 피르호는 국부적인 존재로서의 세포보다는 세포들 사이의 관계에 주목함으로써, 인간과 사회의 조화를 추구하고자 하였다. 요컨대 피르호는 병의 치료에는 특정 부위의 병태생리학적 과정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인식하면서도, 병의 예방에는 인간 전체에 대한 사회보장이 더욱 중요시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이와 같은 지향성 때문에 피르호는 질병을 확산하는 정치ㆍ경제적 구조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공중보건 서비스의 창설을 주도하였다(하워드 웨이츠킨, 2019: 43-47). 피르호는 질병을 예방하고, 시민의 기초적인 물질적 안정을 보장할 것을 국가에 요구했다는 점에서 사회의학의 선구자라 할 수 있다.
孫振陸, 「巴甫洛夫學說的若幹基本原理」, 『護理雜志』 1955년 1월 31일, 9쪽.
閻德潤, 「新醫學思想」, 『良師益友』 1951년 8월 10일, 575쪽.
金汝煌, 「蘇聯醫學的唯物主義科學思想基礎」, 『人民軍醫』 1953년 8월 15일, 614쪽.
АㆍЛㆍ密斯尼可夫 著, 吳鈞燮 譯, 「巴甫洛夫學說與醫學」, 『科學通報』 1952년 3월 16일, 299쪽.
遊代祥, 「北京蘇聯紅十字醫院協定處方的一般介紹」, 『中國藥學雜志』 1954년 12월 8일, 534쪽.
陸定一, 「百花齊放ㆍ百家爭鳴的歷史回顧」, 『理論月刊』 1986년 6월 30일, 2쪽.
소련의 회의는 1950년에 개최된 “파블로프의 생리학적 가르침에 대한 소련과학 학술원과 소련의학 학술원의 과학 분과학회”를 의미한다. 이 학회에서 파블로프 학설이 생리학ㆍ의학ㆍ심리학 제반 분야에서 유일한 이론과 사상으로 공식화되었으며, 미추린과 파블로프 이론의 연관성이 공인되었다(김옥주, 2000b: 253).
丁瓚, 「學習戰鬪的巴甫洛夫學說」, 『科學通報』 1952년 3월 16일, 284-286쪽.
金汝煌, 「蘇聯醫學的唯物主義科學思想基礎」, 『人民軍醫』 1953년 8월 15일, 612쪽.
王吉華, 「南昌市醫義務人員積極開展巴甫洛夫學說學習」, 『江西中醫藥』 1954년 10월 28일, 4쪽.
翁同蕤, 「我們是怎樣學習巴甫洛夫學說的: 上海市立第二勞工醫院護理部有系統學習巴甫洛夫學說的經驗介紹」, 『護理雜志』 1955년 1월 31일, 11쪽.
위의 글, 12쪽.
사실 상하이 공안의원(公安醫院)에서 진행한 두 차례 파블로프 학습운동의 결과에는 일정한 편차가 존재하였다. 1953년에 실시한 10여 차례의 학습운동에는 약제실의 동지들이 처음에는 많이 참여했으나 끝날 때는 겨우 몇 명만 남아있었다. 그 이유는 학습 내용이 난해했던 측면도 있었지만, 학습의 조직방식(소그룹 토론과 시험을 치르지 않고 단순하게 강의만 하였음)과 학습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소극적인 반응을 보였기 때문이었다. 이후 1955년 상하이 공안의원에서는 두 번째 학습운동을 진행하였는데, 참여자들의 학습 의욕을 진작시키기 위해서 악제실의 공산당 당원을 동원하여 사상적ㆍ정치적 선전 작업을 진행하였다. 또한 학습 방식을 개선하여 강의보다는 학습보조원을 투입하여 소그룹 토론 활동을 강화하고, 시험을 시행하여 학습에 대한 강제성을 높였다. 이처럼 파블로프 학습운동은 학습자의 자율적 참여보다는 강제적 동원과 정치적 선동이 주류를 이루었다(倪ㆍ沈ㆍ陶, 「上海公安醫院藥濟室是怎樣組織學習巴甫洛夫學說的」, 『中國藥學雜志』 1955년 10월 8일, 466-467쪽).
同上註.
翁同蕤, 「我們是怎樣學習巴甫洛夫學說的: 上海市立第二勞工醫院護理部有系統學習巴甫洛夫學說的經驗介紹」, 『護理雜志』 1955년 1월 31일, 12쪽.
劉明鐸ㆍ高柏良, 「第六十三陸軍醫院在研究巴甫洛夫學說中的幾點體會」, 『人民軍醫』 1953년 5월 15일, 400-409쪽.
파블로프는 신경세포가 기능을 발휘하는 수준이 무한정 높아지면 결국에는 신경세포가 손상을 입게 된다고 보았다. 따라서 위험 수준에 도달하면 흥분과정은 억제과정으로 대체되고, 신경세포는 보호를 받게 된다고 주장하였다. 이것이 바로 초경계(超境界) 혹은 보호성 억제이다(제프리 그레이, 2000: 144). 또한 파블로프는 억제와 수면은 하나의 동일한 과정이라고 보았는데, 억제의 과정이 흥분지역에 의해 견제되지 않은 채 뇌 전체에 퍼지게 되면, 뇌 전체기능이 떨어지게 되고 이것이 행동상으로는 수면으로 나타난다고 주장하였다(제프리 그레이, 2000: 149). 이를 통해 파블로프는 병원성 물질에 대항하는 정상적인 생리학적 수단은 최면 혹은 수면이라는 수면치료의 이론적 근거를 제시하게 되었고, 파블로프의 추천에 힘입어 수면요법이 소련에서 커다란 인기를 누렸다(제프리 그레이, 2000: 159).
А. А. Вищневский 저, 關慶潤 역, 「睡眠療法對外科臨床之意義」, 『良師益友』 1951년 3월 1일, 69-72쪽.
劉明鐸ㆍ高柏良, 「第六十三陸軍醫院在研究巴甫洛夫學說中的幾點體會」, 『人民軍醫』 1953년 5월 15일, 404-405쪽.
王明輝, 「睡眠療法及護理」, 『護理雜志』 1955년 5월 1일, 172쪽.
위의 글, 173쪽.
Aㆍ沃羅豪夫 著, 王鋼 譯, 「睡眠療法的現實問題」, 『人民軍醫』 1955년 7월 15일, 411-414쪽.
王明輝, 「睡眠療法及護理」, 『護理雜志』 1955년 5월 1일, 174쪽.
劉明鐸ㆍ高柏良, 「第六十三陸軍醫院在研究巴甫洛夫學說中的幾點體會」, 『人民軍醫』 1953년 5월 15일, 406쪽.
同上註.
同上註.
兪靄峯, 「無痛分娩法在天津市立總醫院推行的經過」, 『新中國婦女』 1952년 9월, 10-11쪽.
「我國婦女兒童福利事業有很大發展」, 『人民日報』 1953년 4월 18일 3면.
莫平, 「讀者來信: 北京中國協和醫學院附屬醫院推行無痛分娩法」, 『人民日報』 1952년 9월 7일 2면.
「新中國無痛分娩法的綜合報告」, 『婦嬰衛生』 제9권 제8기, 1952년 9월, 15-16쪽.
「我體驗了無痛分娩法」, 『新中國婦女』 1952년 8월, 5-7쪽.
朱鏞連, 「應該恢復保護性醫療制度」, 『健康報』 1981년 2월 8일.
「認眞學習蘇聯的先進經驗, 改進我們的醫療」, 『人民軍醫』 1953년 2월 15일, 108쪽.
吳振庚, 「保護性醫療制度」, 『人民軍醫』 1953년 6월 15일, 431쪽.
A.C. Cтелченко 著, 於潛 譯, 「言語是治療因素」, 『中級醫刊』 1952년 12월 1일, 1101-1104쪽.
徐選和ㆍ李冬, 「第三軍醫大學施行保護性醫療制度的初步收獲」, 『人民軍醫』 1954년 2월 15일, 81쪽.
위의 글, 82쪽.
王素合ㆍ馬劍鳴, 「中國醫科大學第一醫院學習蘇聯先進制度改善了護理工作」, 『護理雜志』 1954년 4월 1일, 11-13쪽.
王素合ㆍ馬劍鳴, 「中國醫科大學第一醫院學習蘇聯先進制度改善了護理工作」, 『護理雜志』 1954년 4월 1일, 11쪽.
「通訊ㆍ報道: 藥房工作人員學習巴甫洛夫學說後工作有了改進」, 『中國藥學雜志』 1954년 10월 8일, 464쪽.
「在藥房工作中怎樣貫澈保護性醫療制度(讀者意見綜合)」, 『醫藥通報』 2권 10기, 1954년 10월 8일, 419-420쪽.
劉紹華, 「讀了 “在藥房工作中怎樣貫徹保護性醫療制度” 以後的感想」, 『醫學通報』 1955년 3월 8일, 152쪽.
吳振庚, 「病人對於保護性醫療制度的認識」, 『人民軍醫』 1954년 2월 15일, 85쪽.
위의 글, 86쪽.
陸定一, 「百花齊放, 百家爭鳴: 一九五六年五月二十六日在懷仁堂的講話」, 『天津大學學報』 1956년 4월, 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