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염왕국에서 문제 해결의 열쇠를 찾다: 1960-70년대 김정룡의 B형간염 백신 연구 활동†
Finding the key to solving problems in the hepatitis kingdom: A Study on the Development of Hepatitis B Vaccine by Kim Chung Young in the 1960-70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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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This paper analyzes the research process of Kim Chung Yong (henceforth referred to as KIM), who presented the hepatitis B vaccine in South Korea. In South Korea, which had been called the Hepatitis Kingdom, KIM developed a vaccine material for hepatitis B. Through his research achievements, South Korea, emerged from a country ignorant of hepatitis to a country with a hepatitis B vaccine. It is not easy to achieve remarkable results in developing countries where scientific development is lagging. This environment, however, helped KIM achieve his research. This article explains that the two circumstances affected his achievement in his research.
First, KIM got a chance to study in the U.S. when he was his starting as a researcher. In the 1960s, the scientific and medical education environment in Korea was still poor. KIM left for Harvard University with the support of CMB, where he was able to advance his studies. This experience was an opportunity to further enhance his research skills. Second, Korea’s poor health and hygiene environment in the 1970s worked in favor of verifying the effectiveness of vaccine materials he developed. South Korea, where hepatitis B was prevalent, became a good research site to secure enough test subjects. KIM also used blood sellers to find out the effects of the vaccine material he developed. Blood sellers are people who earn their living by selling their own blood and were commonly found in Korea at that time. The situation in Korea in the 1970s with prevailing hepatitis and the presence of blood sellers played an important role in KIM's research. His research on vaccine development for hepatitis B was hard to imagine in the scientific research environment of South Korea at the time. However, it was also this context and environment of South Korea at the time that enabled his achievement of developing a hepatitis B vaccine.
1. 머리말
1960-70년대 한국은 B형간염에 대한 관심이 거의 없었다. 당시는 콜레라나 장티푸스와 같은 급성 전염병의 관리가 훨씬 시급했고, 보건 당국은 이들 질병에 대한 관리 감독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질병관리본부가 발표한 『감염병감시연보』에 따르면 1960년대에는 이들 급성 전염병의 발생자와 사망자 수가 매년 조사, 관리되었지만 같은 시기 B형간염은 조사 대상에도 포함되지 못할 만큼 보건 당국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질병관리본부, 2019a). 간을 주로 연구하는 임상 연구자들도 간경변증이나 간암 등 사망으로 직결될 만한 질병에 관한 연구를 많이 시도했고, B형간염에 대한 연구는 거의 수행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1980년대 중반 이후 놀랍게 변화했다. 1983년 ㈜녹십자에서 B형간염 예방백신인 헤파박스-B(Hepavax-B)가 출시되고, 의사 집단을 중심으로 간염퇴치를 위한 캠페인이 벌어지는 등 B형간염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부쩍 커진 것이다. 국내에서 예방백신이 출시된 이후 1991년 대한소아과학회의 예방접종표에 B형간염 백신이 처음 포함되었고, 1995년에는 국가필수예방접종사업에 추가되었다(한지윤 외, 2011: 125). 예방접종이 본격 진행되면서 우리나라의 B형간염 발생률은 1970년대 약 7-8%에서 2018년 약 2.4% 수준으로 감소되었다(질병관리본부, 2019b: 26, 261-263). 이러한 변화의 출발점에는 한국의 과학자 김정룡(金丁龍, 1935-2016)이 있었다.
김정룡은 간 박사라는 별명으로도 유명한 한국의 간 연구자다. 그는 서울대 의대 대학원에 진학하면서 간 질환 연구를 시작했다. 당시 한국에서 간 질환 연구의 최고 권위자였던 한심석(韓沁錫, 1913-1984)을 지도교수로 택하고, 그의 연구를 도우면서 김정룡은 본격적으로 간 연구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서울대학교한국의학인물사편찬위원회, 2008). 그는 서울대 병원 내과에서 인턴과 레지던트 과정을 거치는 동안 간경변증, 간암, 간염, 간농양, 담낭염 등 간담도계 질환을 대상으로 혈청단백을 분석하는 연구를 수행했고, 이를 정리하여 1966년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이때만 해도 그는 간 질환 전반에 관심을 둔 임상의로서의 모습이 두드러지는 연구자였다. 그러나 박사학위를 받은 후 미국 연수를 거치면서 그는 새로운 연구 궤적을 그리게 되었다. 당시 한국에 만연해 있던 B형간염으로 연구 주제를 좁히고, 예방백신 개발 연구를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성과는 그의 연구자적 성장을 넘어 한국의 보건 환경 개선에 크게 기여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 김정룡의 연구는 B형간염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고 체계적인 관리가 이루어지지 못했던 한국의 상황을 전환시키는 데 일조했다. 그의 연구를 발판 삼아 국내에 B형간염에 대한 인식이 형성되고, 백신 접종이나 법정 전염병 지정과 같은 보건 당국의 관리가 시작될 수 있었다. 이 글에서는 김정룡의 연구 과정을 따라가면서 그의 연구가 자신의 연구자적 성장을 이끈 동시에 B형간염의 관리를 위한 초석을 마련했음을 보이고자 한다.
어떤 과학 연구 성과가 출현하기까지는 과학 연구를 수행할 수 있는 환경이 중요하게 작용한다. 예를 들어 최근의 블랙홀 관측이나 유전자 가위와 같은 연구 성과가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간 첨단의 과학 지식이 축적되고, 우수한 인력이나 자금, 실험 장비 등 연구에 필요한 자원이 적절히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주목할 만한 과학 연구 성과가 도출되기 위해서는 발전된 연구 인프라가 중요하게 작용한다.
하지만 과학 연구 성과가 발전된 곳에서만 나오는 것은 아니다. 보통은 과학 연구의 인프라가 잘 갖추어진 곳에서 훌륭한 성과가 많이 도출되지만 그렇지 않은 곳에서도 좋은 성과가 종종 나타나기도 한다. 열악한 여건은 오히려 연구의 필요성과 긴급성을 더해주며, 좋은 연구 환경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1960-70년대 B형간염 관리의 시급성을 잘 인식하지 못했던 한국이 바로 이러한 경우에 해당했다. 당시 한국은 간염 발생률이 높고, 심각한 상태로 진전되는 비율이 높아 간염왕국이라 불릴 정도였다. 그럼에도 이 질병에 대해 잘 알지 못했고, 관련 연구를 전문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연구자도 많지 않았다. 또한 자신의 피를 팔아 생계를 꾸려 가는 매혈자가 많았다. 매혈은 헌혈 문화가 자리 잡기 전 피를 수급할 수 있는 방법으로 유용하게 쓰였는데, 이 과정에서 감염이 많이 발생했다.
김정룡의 B형간염 연구는 이러한 배경 속에서 시작될 수 있었다. 그가 1970년대 후반 발표한 B형간염 백신 연구는 1983년 한국 최초의 B형간염 백신인 헤파박스-B로 가시화되었고, 이를 기반으로 그는 국내 B형간염 연구의 대가로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그가 연구를 진행했던 당시 한국의 연구 환경은 열악했고, B형간염의 위험성에 대해서도 잘 알려져 있지 않았지만, 그는 오히려 이러한 환경을 유리하게 이용하여 백신물질을 개발해 낼 수 있었다. 이 글에서는 김정룡의 연구 과정을 살펴보면서 B형간염에 취약했던 당시 한국의 보건 위생적 상황을 함께 고려해 보고자 한다.
한국의 B형간염에 대해서는 간염백신이 국가의 발전 전략으로 어떻게 활용되었는지를 살핀 연구(Holmberg et al. edit., 2017)와 1980년대 전반의 시대상 속에서 B형간염과 이를 둘러싼 행위자들의 활동을 생의학의 개념으로 분석한 연구(Park, 2019)가 있다. 또한 B형간염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1988년 서울올림픽 개최와 의료 전문가 집단의 계몽 활동, 유전공학 붐이라는 사회적, 과학적 맥락이 중첩되면서 형성되었음을 보이는 연구도 있다(신미영, 2019). 이들 연구에서는 백신 등장 이후 B형간염이 사회 속에서 어떻게 관리되고, 인식되었는지에 대해 다양하게 살피고 있지만 정작 이러한 일들을 가능하게 해 준 백신 개발 과정과 그 맥락에 대해서는 알기 어렵다.
이 논문은 보건의료적으로 미흡했던 여건이 B형간염 백신물질을 출현시킨 배경으로 작용했음을 나타내고자 한다. 구체적으로는 김정룡의 미국 유학 시절과 귀국 후 그가 B형간염 백신 개발 연구를 이어나가는 모습을 통해 살필 것이다. 미국에서 B형간염 연구를 처음 접한 이후 그 연구 경험이 국내 환경 속에서 어떻게 활용되었는지, 이러한 학문적 실천이 한국 보건의료에 어떻게 기여했는지 등을 살필 수 있을 것이다.
동시에 김정룡의 연구 활동은 한국이 과학기술적으로 성장의 발판을 다져나간 시기에 활동했던 연구자로서의 모습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사례가 될 수 있다. 한국전쟁 이후 열악했던 연구 환경은 외국 원조를 통해 학습과 연구 기회를 얻은 연구자들과 함께 점차 개선되었다. 특히 의학 분야는 미네소타프로젝트와 같은 원조 사업을 통해 미국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인물들의 활동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에 관한 전반적인 맥락은 이왕준의 학위 논문에 잘 나타나 있다(이왕준, 2006). 디모이아는 흉부외과의 이영균과 이찬범이 미국에서 배운 심장수술법을 국내에 적용하는 과정을 소개했고, 신미영은 미국 유학 경험을 가진 이호왕이 국제적인 활동을 하는 바이러스 연구자로 성장해 가는 모습을 보여주었다(J. P. DiMoia, 2007; 신미영, 2017). 김정룡에 관한 이 연구 역시 미국에서의 학습을 통해 귀국 후 활발한 연구 활동을 펼친 연구자로서의 모습을 나타낼 수 있다. 미국 유학 경험자들은 대부분 미국에서 새로운 연구 방법을 학습하고, 그것을 국내에 이식하는 과정을 거치며 학문적 발전의 기반을 마련했다. 김정룡은 미국에서 연구한 내용을 국내에서 이어갔고, 매혈 행위가 빈번했던 당시 한국의 사회적 환경을 활용하여 백신물질을 개발했다. 그의 연구는 의학 분야 자체의 발전 뿐 아니라 간염왕국이라는 오명을 벗을 수 있는 해결책을 마련하여 한국의 보건 환경 개선에도 기여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김정룡에 관해서는 그의 생애 전반을 담은 전기 형태의 글을 참고할 수 있다. 하지만 연구자로의 성장과 활동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그가 국내외에 발표한 연구 논문들을 분석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의 석사, 박사학위 논문을 비롯하여 미국 연수 당시 외국 저널에 발표했던 논문들, 귀국 후 국내외 저널에 발표한 여러 편의 논문들은 그의 연구 과정을 살피는 귀한 자료라 할 수 있다.
무엇보다 이 글에서는 김정룡이 미국 연수를 떠나기 전부터 미국에서 머물던 당시까지 그의 연구를 지원해 주었던 기관인 차이나메디컬보드(China Medical Board, 이하 CMB)1),의 자료도 중요하게 활용될 것이다. CMB의 자료는 국내에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실정이라 현재 자료를 보관하고 있는 록펠러 아카이브 센터를 통해 김정룡에 관한 자료를 확보할 수 있었다. 그 동안 CMB와 관련해서는 서울대 의대, 연세대 의대 등에 어느 정도의 규모로, 어떤 내용의 지원이 있었는지 등을 알 수 있었을 뿐 한 개인이 구체적으로 어떤 과정을 거쳐 지원을 받아 활동할 수 있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이왕준, 2006; 여인석, 2015). 이러한 점에서 이 연구는 CMB의 지원으로 성장의 토대를 마련한 개인 연구자의 모습을 조명하는 기회로도 작용할 것이다.
2. 선진적 과학 학습 기회 획득
1) 미국으로의 유학
김정룡은 1966년 박사학위를 받은 후 서울대 의대 내과학교실의 전임강사로 있다가 미국 연수의 기회를 얻게 되었다. CMB가 서울대 의대에 대한 지원 규모를 다시 확대하기 시작하면서 가능해진 일이었다. CMB가 서울대 의대에 펠로우십 지원 프로그램을 시작한 것은 1953년이지만 한 명에 불과했고, 10년 뒤인 1963년 이후부터서야 매년 여러 명의 교수인력을 외국에 보낼 만큼 지원 규모가 커졌다(서울대학교의과대학, 2008: 153-154).2) 김정룡은 1966년 이 프로그램에 지원함으로써 미국에서 연구 활동을 수행할 수 있었다.
김정룡이 CMB에 제출한 서류나 편지 등을 보면 그는 미국에서 연구할 기회를 얻기 위해 매우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펠로우십 프로그램 지원을 위해 작성한 인터뷰 서류에서 그는 근처에 사는 가족이나 친척이 있는지를 묻는 질문에 자신의 장인이 서울대학교 부속병원 원장인 한심석임을 기입했다. 이어 미국에서 누구와 함께 연구하고 싶은지를 묻는 질문에 찰스 데이빗슨(Charles S. Davidson) 교수를 기록하면서 자신의 장인인 한심석이 최근 데이빗슨을 만나 자신을 연구실에 받아들이기로 했음을 설명했다. 물론 김정룡은 스스로 미국 유학을 신청하기에 충분한 자질을 갖추고 있기도 했다. 인터뷰 서류에 기록된 바에 의하면 그는 미국의사자격시험에 통과했고, 영어도 충분히 잘한다고 언급했다. 당시 서울대 의대 학장이었던 이제구는 김정룡이 의대생 중 최고(top man)이며, 똑똑한 젊은 청년(a bright young man)이라며 펠로우십으로 고려될 만하다고 추천하기도 했다.3)
CMB의 펠로우십 지원 프로그램에서는 미네소타프로젝트와는 달리 지원자가 연수할 기관을 직접 선택할 수 있었다. 김정룡은 하버드 의대에 있는 데이빗슨의 실험실에 가고자 했다. 하버드 의대는 세계적인 의학 연구 공간으로, 이곳에서 연구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연구자로서의 자부심을 충분히 가질 만한 곳이었다. 특히 “시설 좋은 연구소, 세계적인 석학이 있는 병원”에서 연구하기를 꿈꿨던 김정룡에게 하버드 의대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연구 공간이었다(이호일, 2004: 194).
그가 가고자 했던 실험실의 수장인 데이빗슨은 하버드 의대 보스턴시립병원 내 손다이크기념연구소(Thorndike Memorial Laboratory, 이하 손다이크)4),의 부소장으로 간 질환과 영양학 분야를 연구하는 의학자였다. 알콜중독자의 영양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손다이크에 간 질환 및 영양학부를 만들었다. 이곳은 미국에서 최초로 간 질환 연구에 전념한 임상연구단이기도 했다.5)
손다이크에 간 김정룡은 자신이 박사논문을 쓰면서 관심을 두었던 간 질환 환자의 혈청에서 단백질을 분리, 정제하는 연구를 계속하고자 했다(Kater et al., 1970: 913-918).6), 하지만 지도교수인 데이빗슨은 김정룡에게 B형간염 연구를 해 볼 것을 제안했다. 데이빗슨은 1955년 일본의 간염연구센터에서 근무하다가 미국에 복귀한 군 연구자들과 공동으로 간염 연구를 진행한 적이 있었는데, 이때 극동지역의 간염 실태에 대해 파악할 수 있었다(Chalmers et al., 1955: 1163-1235). 당시 B형간염은 아시아 지역에서 많이 관찰되고, 한국을 포함하여 중국, 일본 등에서도 높은 감염률을 나타내고 있었다. B형간염 발생의 지표라 할 수 있는 B형간염 표면항원(HBsAg, 이하 표면항원) 양성률이 세 국가 모두 10%대를 기록했다. 1970년대 한국의 경우 전체 국민 중 간염 항원을 보유하고 있는 사람의 비율이 약 12.3%였고, 비슷한 시기 일본도 12.4%, 중국도 9.8%에 달하는 등 상당히 높은 편이었다(N. Furusyo et al., 1998; Y. Yan et al., 2014). 당시는 일본을 제외하고는 표면항원에 대한 선별검사 체계가 마련되지 않아 간염 환자 관리가 어려웠다. 또한 한국과 마찬가지로 중국 역시 수혈이나 오염된 혈액을 사용하는 문제로 B형간염이 만연해 있었다. 이처럼 당시 극동지역은 B형간염의 감염 가능성이 매우 높았음에도 체계적으로 관리되지 못한 상태에 있었다. 동아시아의 이러한 환경을 파악한 데이빗슨은 한국에 간염으로 인한 문제가 크므로 관련 연구가 매우 시급하고,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김정룡에게 B형간염을 연구해 볼 것을 권했다.
당시 B형간염은 데이빗슨의 이야기대로 한국에서 만연해 있는 질병이지만 다양하게 연구되지 못하고 있었다. 몇몇 연구자들을 중심으로 간염에 대한 연구가 발표되기는 했지만 대체로 간염의 진단과 치료, 임상 사례 보고 등에 치중해 있었다. 이 연구를 잘 익힌다면 전문성을 갖춘 연구자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으므로 김정룡은 B형간염을 연구 주제로 선택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1960-70년대 한국은 산업화, 도시화를 겪으면서 생활환경이 바뀌었고, 이 가운데 질병 발생 양상이나 주요 사망 원인도 변화했다(권오영, 2019: 41-49). 1950-60년대만 해도 장티푸스와 콜레라로 인한 방역이 보건당국의 주된 관심사였는데, 1970년대를 지나면서 경제사회적인 발전과 도시의 위생 환경 구축이 진행됨에 따라 전염병 발생은 전에 비해 크게 감소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보건당국의 관심을 방역에서 만성질환 관리로 옮겨주었다. B형간염은 이 시기 보건당국이 중요하게 인식한 질병 중 하나였다(대한간학회, 2013: 44). 김정룡의 B형간염 연구는 이러한 맥락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라 볼 수 있다.
데이빗슨은 김정룡에게 오스트레일리아 항원을 연구해 보라고 권유했다. 오스트레일리아 항원은 블룸버그(Baruch S. Blumberg)가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 혈청에서 발견한 미지의 항원으로 이후 B형간염바이러스로 확인되었다. 블룸버그는 1967년 논문을 통해 그가 발견한 오스트레일리아 항원이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 혈청 외에 다운증후군, 백혈병, 간염 환자의 혈청에서도 발견되고 있음을 밝혔다(Blumberg et al., 1967: 924-931). 당시는 오스트레일리아 항원이 정확히 어떤 병원체인지 알려져 있지 않은 상황이었고, 이것이 간염 환자에서도 나타나고 있었으므로 데이빗슨이 보기에 이 재료는 김정룡에게 충분한 연구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는 블룸버그에게 연락하여 김정룡을 소개해 주었고, 김정룡은 블룸버그를 찾아가 시료를 얻어 연구에 활용했다.7)
김정룡은 오스트레일리아 항원과 바이러스성 간염과의 관계에 대해 1969년 미국의 『전염병학회지』에 발표했다(Kater, Kim and Davidson, 1969: 391-392). 손다이크의 연구자들과 공동으로 진행된 이 연구는 간염을 알콜성 간염과 바이러스성 간염으로 구분하고, 각각의 사례와 오스트레일리아 항원 간의 관계에 대해 확인하는 것을 주요 골자로 했다. 그 결과 이들은 알콜성 간염의 거의 모든 사례에서 오스트레일리아 항원혈증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함으로써 이 항원이 바이러스성 간염의 원인물질일 가능성을 높였다. 또한 급성 바이러스성 간염 환자의 대변과 소변으로부터 오스트레일리아 항원을 증명하기도 했다. 이처럼 김정룡 등은 실제 바이러스성 간염 환자의 샘플로부터 오스트레일리아 항원의 존재를 확인하는 연구를 통해 이 둘 간의 상관관계를 훨씬 높여주었다. 특히 이 연구는 김정룡이 미국에 연수 와서 처음 발표한 논문으로 이후 그의 연구의 방향성을 잡아준 것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
2) 연구역량의 축적
CMB 지원으로 미국에 간 김정룡은 1967년 7월 1일부터 일 년 간의 펠로우십 과정을 시작했다. 그런데 연구를 수행하면서 당초 1년으로 계획된 연수 기간은 몇 차례 연장을 거쳐 3년을 넘기게 되었다. 미국에서의 연구가 의미 있는 결과로 이어짐에 따라 원래 계획보다 오래 머무르며 연구하게 된 것이었다.
김정룡은 간염을 일으키는 원인체, 즉 간염 관련 항원의 특징을 규명하는 연구를 수행했다. 손다이크에서 활동한 여러 연구자들과의 협력을 통해 김정룡은 이 항원이 가지는 물리화학적 특징과 면역학적 반응을 조명하는 연구를 진행할 수 있었다. 그는 간염 관련 항원을 화학적으로 정제하는 과정을 통해 특징을 살피고자 했다. 그 동안 간염 바이러스는 수혈을 통해 전염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수혈 경험이 없는 환자에게서도 간염이 발생하는 경우가 있었으므로 다른 전염 경로를 고려해야 했다. 이에 대해 김정룡은 만약 입을 통해 간염이 전염된다면 위산이나 소화효소에 견딜 수 있어야 한다고 보았고, 이를 실험해 보기 위해 간염 관련 항원에 펩신 처리를 해서 접종물을 만들었다(Kim, Spano and Clark, 1971: 411-414). 그는 이 접종물을 토끼와 기니피그에 각각 접종했고, 그 결과 면역반응이 나타남을 확인했다. 이 실험은 간염 관련 항원의 특징을 밝히는 연구인 동시에 백신으로서의 가능성을 내다 볼 수 있는 연구이기도 했다.
미국 연수 전까지만 해도 간 질환 전반에 관심을 가졌던 김정룡은 손다이크에서의 활동을 통해 B형간염에 대한 다양한 접근을 시도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지도교수 데이빗슨은 그가 B형간염에 관한 연구에 주목할 수 있도록 유도해 주었다. 관련 연구를 수행하는 동안 김정룡은 동료 연구자들과의 협력을 통해 여러 연구 방법을 접목시킬 수 있었다. 김정룡과 공동으로 연구했던 빗셀(D. Montgomery Bissell), 스파노(Joseph Spano), 클라크(Geoffrey E. Clark) 등은 모두 보스턴 시립병원에서 인턴, 레지던트, 펠로우십 과정 가운데 있으면서 연구 활동에 참여한 사람들이었다. 특히 빗셀은 하버드 의대 세균학 및 면역학과 출신으로 간염 관련 항원의 바이러스적 특징을 확인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스파노는 위통(stomach pains), 궤양, 역류 등에 관심 있는 임상의로 김정룡이 간염 관련 항원을 소화 효소 처리하는 데 협력했을 것으로 보인다.8) 김정룡은 이들과의 연구를 통해 국제 학술지에 여러 차례 연구 성과를 발표하는 경험을 쌓기도 했다. 이와 같은 모습은 국내에서의 활동으로는 이루어내기 어려운 것들이었다. 미국이라는 새로운 연구 공간은 그가 연구자로 한 단계 더 나아갈 수 있는 새로운 경험들을 제공했다. 김정룡은 이곳에서의 연구 활동을 징검다리 삼아 학문적 활동 영역을 키워나갔다.
미국에서 수행하던 연구는 귀국해서도 계속 이어졌다. 이 연구 결과는 1973년 미국 『임상연구저널(The Journal of Clinical Investigation)』에 발표되었다(Kim and Tilles, 1973: 1176-1186). 앞선 연구에서 펩신 처리를 통해 만든 접종물은 사실상 백신에 가까운 물질이었다. 접종물이 백신의 지위를 얻기 위해서는 실험에 사용된 항원이 가지는 특성을 밝힐 필요가 있었다. 이를 위해 김정룡은 항원의 물리적 성상을 확인하고자 했다.
오스트레일리아 항원의 물리적 특징을 밝히고자 한 연구는 이전에도 블룸버그 외의 여러 연구자들에 의해 발표된 적이 있으나, 이들 연구와 김정룡의 연구는 항원을 함유하고 있는 혈청의 처리 방법에서 차이가 있었다. 이론적으로 혈청 단백질로부터의 오염을 최대한 제거하여 정제된 항원일수록 더 높은 신뢰도를 갖는 생물물리학적 데이터를 얻을 수 있다. 1950년대부터 동물 바이러스를 정제하는 데 단백질 가수 분해 효소로 소화시키는 방법이 많이 사용되어왔다(Sharp, 1953: 277-313). 김정룡은 소화효소를 이용하여 혈청 오염 물질을 제거하고자 했고, 블룸버그 등 이전 연구자들이 실험에 사용하지 않은 펩신에 주목했다. 펩신을 사용함으로써 혈청 단백질 오염을 최대한 제거하여 순도 높은 항원으로 물리적 특징을 규명할 수 있었다. 동시에 김정룡은 이 연구에서 간염 B 항원이 불완전바이러스일 가능성을 확인했다.9) 불완전바이러스는 감염성은 없지만 바이러스로서의 형질을 유지하고 있는 것을 말한다. 간염 B 항원의 이러한 특징은 아직 확립된 상태가 아니어서 연구자마다 다르게 제시되고 있었지만, 김정룡의 이 연구 성과는 백신 물질로의 발전 가능성을 높여 주었다.
김정룡은 미국 유학을 통해 B형간염 연구에 접근할 수 있었고, 좋은 연구 환경에서 학습함으로써 빠른 시간 안에 연구 역량을 축적했다. 그의 이러한 모습은 비슷한 시기 미국 유학을 경험했던 여러 연구자들과 비교될 만하다. 미국 유학 경험이 있는 의료계의 많은 연구자들은 당시 한국이 처한 상황에 맞게 연구 주제를 선택하거나 한국에 필요한 치료 방법을 배우고 돌아와 교육과 진료 과정에 그대로 적용하며 발전의 기틀을 다졌다. 소아과의 홍창의나 흉부외과의 이영균, 이찬범 등은 미국에서 배워 온 수술법을 국내 환자에게 적용함으로써 치료법의 발전은 물론 후학들을 위한 교육 차원에서도 중요하게 활용했다(서울대학교의과대학소아과학교실동문회, 1988; DiMoia, 2007). 또한 미국에서의 연구 경험은 공통된 주제를 연구하는 여러 외국 연구자들과의 협력의 기회가 되었고, 학문적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미생물학의 이호왕은 자신의 연구를 수행하면서 외국 연구자와의 교분을 적극 활용하여 학문적으로 발전된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신미영, 2017). 김정룡 역시 미국 유학 경험을 통해 학문적 성장의 기반을 마련했다. 나아가 그는 미국에서의 연구를 국내에서도 이어가면서 당시 국내 B형간염 연구의 분위기를 새롭게 했다. 그간 국내에서 B형간염은 임상의사들의 사례 보고나 진단 및 치료에 관한 동향 소개, 간 질환과의 관련성 보고 등이 주류를 이루며 국내적인 상황에 치중한 연구가 많이 발표되었다. 하지만 김정룡의 활동을 통해 B형간염에 대한 면역학적 연구가 시도되기 시작했다. 이는 김정룡 개인의 연구자적 성장을 보여주는 모습인 동시에 연구자의 미국 유학 경험이 국내 연구의 범주를 확대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도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3. 열악한 보건 환경의 활용
1) 간염 왕국 한국
1970년대 한국은 간염 발생률이 높은 편이었다. 간염 감염률을 보여주는 지표인 혈청 내 B형간염 표면항원의 양성률은 1980년대 이후부터 집계되기 시작했다(안윤옥, 1982: 35-45).10) 따라서 1970년대의 한국의 간염 발생 정도를 짐작해 보기 위해서는 당시 B형간염 연구자들의 실험 데이터를 참고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당시 국내 연구자들이 발표한 논문을 살펴보고자 한다.
1974년 고려대학교 의과대학 미생물학교실의 이호왕을 비롯한 연구팀은 1973년과 1974년 우석병원의 공혈자 및 외래환자를 대상으로 표면항원 양성률을 조사했다(이호왕 외, 1974: 43-44). 외래환자 1,407명 중 5.3%인 75명에서 표면항원 양성률이 나타났고, 3개 병원의 공혈자를 대상으로 하는 조사에서는 서울대학교병원 1,282명 중 94명(7.3%), 적십자병원 100명 중 8명(8.0%), 우석병원 1,242명 중 79명(6.4%)으로 대략 6-8% 수준의 양성률을 보였다. 순천향병원의 강득용의 조사에서는 1972-73년 서울의 직업적공혈자 4,307명 중 7.4%인 321명에서 표면항원 양성률을 보였다(강득용, 1976). 1975년 순천향병원 건강관리과에서 신체검사한 뉴크라운피혁회사 직원 196명 중 15명(7.6%)에서, 1975-76년 중소기업은행 신입여자행원 65명 중 5명(7.7%), 태평양화학미용여사원 148명 중 5명(3.4%), 동아건설 남자직원 55명 중 3명(5.5%)에서 표면항원 양성 반응이 나타났다.
김정룡 역시 논문에서 표면항원 양성률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실험에는 서울대병원과 국내 혈액은행을 찾은 공혈자 3,103명, 서울시와 강원도의 일반인 2,335명의 혈청과 서울대병원 의사 171명, 간호원 226명, 검사실 직원 37명, 의학과 및 간호학과 3, 4학년 학생 220명 등 의료종사자의 혈청이 사용되었다. 공혈자 3,103명 중 271명에서 표면항원이 확인됨으로써 8.73%의 양성률을 나타냈다. 일반인 2,335명 중에서는 168명(7.19%)의 혈청에서 표면항원이 확인되었다. 일반인 가운데 서울시 거주자는 1,966명 중 135명(6.87%), 강원도 거주자는 369명 중 33명(8.94%)에서 표면항원이 확인되었다. 실험에 사용된 표본이 1970년대 한국을 대표한다고 보기 어렵지만, 당시 공혈자와 일반인의 표면항원 양성률은 약 8%로 외국의 양성률인 0.1%, 0.2%에 비하면 상당히 높은 비율임을 알 수 있다(Blumberg, Sutnick and London, 1968: 1566-1586). 또한 그는 일반인의 표면항원 양성률(7.19%)보다 공혈자의 양성률(8.73%)이 더 높게 나타난 점에도 주목했다. 당시 우리나라의 공혈자는 거의 매혈자였고, 헌혈문화나 혈액관리 체계가 잘 작동되지 못하고 있을 때라 양성률이 높은 공혈자의 혈액이 그대로 공급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한편 김정룡은 의료종사자의 표면항원 양성률에도 주목했다. 이들은 B형간염 환자와 직접 접촉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로서 환자로부터 직접 감염될 위험도 높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감염을 전달하는 2차 매개체로 작용할 수도 있어 관심을 둘 필요가 있었다. 김정룡은 서울대병원에 근무하는 의료종사자들을 대상으로 표면항원 양성률을 조사했다.
의료종사자의 표면항원 양성률은 공혈자나 일반인에 비해 높은 편이었다.11), 표 1에서 보는 것처럼 의료종사자들 중 의학과 학생의 표면항원 양성률은 6.94%였고, 검사실 기사가 10.81%로 가장 높게 나타났다. 검사실 기사는 전염원으로의 위험이 대단히 큰 환자의 가검물을 직접적으로 접촉하는 사람들로 표면항원 양성률이 가장 높았다(김정룡, 1975: 708-709). 즉 표면항원 양성률의 차이는 환자와 얼마나 많이 접촉하는가에 따라 달랐다. 의사보다 간호원, 의학과 학생보다 간호학과 학생의 표면항원 양성률이 높은 것은 간호원과 간호학과 학생들이 환자에게 직접 주사시술을 하는 일을 담당하는 데서 비롯된 결과였다. 김정룡은 의료종사자의 건강과 2차 매개체로서의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서라도 이들을 대상으로 능동적인 면역법이 실시되어야 함을 강력히 주장했다(김정룡, 1975: 709). 그가 말한 능동적인 면역법이란 곧 백신 접종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김정룡은 1979년 『대한의학협회지』에 “B형 간염 백신에 관한 연구: 정제 간염 B 표면항원을 이용한 B형 간염의 예방”이라는 논문을 발표했다(김정룡, 1979: 1013-1025). 이 논문은 앞서 미국 유학 시절 연구한 성과를 실제 적용 가능한 백신 물질로 개발하는 과정을 담고 있다. 그가 펩신 처리를 통해 정제한 항원을 이용하여 만든 접종물이 백신으로 사용될 수 있는지, 어떤 조건에서 효능이 높은지 등을 탐구한 것이다.
B형간염 백신에 대한 연구는 전부터 외국의 많은 연구자들에 의해 진행되고 있었다. 이들의 연구로부터 정제된 표면항원이 B형간염 백신 물질로 유력하다는 것도 알려졌다. 하지만 대체로 실험에 사용한 샘플 규모가 크지 않거나 관찰 기간이 짧아 안전성이나 효능 등의 측면에서 만족스럽지는 못한 상태에 있었다. 백신 물질로의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더 많은 샘플을 대상으로 실험을 함으로써 안전성을 확보해야 하고, 얼마만큼을 접종해야 효과가 좋은지 충분히 확인할 수 있어야 하는데 기존 연구에서는 이러한 점들이 잘 정립되지 못했다. 김정룡은 이 점을 문제로 지적하면서 자신이 연구한 정제된 B형간염 표면 항원을 이용한 접종물의 효과를 밝히고, 접종량과 접종방법, 재접종 효과 등을 제시했다.
김정룡의 연구가 기존 B형간염 백신 연구자들의 논문과 다른 점은 정제된 항원을 사용했다는 점 외에 매혈자에게 직접 접종하는 방식을 취했다는 점이다. 기존 연구자들의 논문에서 사람에게 접종을 한 예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백신 효과를 확인하기 위해 대부분은 침팬지와 같은 동물을 이용했다. 이들에 비해 김정룡이 실험에 중심적으로 사용한 접종대상은 다름 아닌 사람이었으므로 접종물의 효능 면에서는 상당히 직접적인 결과를 확인할 수 있었다.
매혈자는 1970년대 한국에서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당시는 헌혈 문화가 자리 잡히지 않았을 때라 수술 환자들에게 필요한 충분한 양의 피가 혈액은행에 보관되어 있지 못했다. 따라서 수술에 사용할 피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가난한 매혈자들로부터 피를 사들여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은 1970년대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1970년대 한국의 혈액 관리 수준은 제도와 현실의 차이가 아직은 큰 상태에 있었다. 1954년 개원한 국립혈액원이 4년 뒤 대한적십자사혈액원으로 개칭했고, 본격적인 혈액사업을 시작하고자 했다. 실질적인 사업 수행이 가능하려면 관련 법 제도가 성립할 필요가 있었는데, 관련법인 혈액관리법은 1970년 8월에 제정 공포되었다.12) 혈액관리법은 그동안 매혈에 의지했던 혈액 수급을 헌혈을 통해 관리할 수 있도록 하고, 공혈자 혈액의 건강진단을 통해 공혈자와 수혈자의 건강을 보호하여 국민 보건 향상에 기여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법은 마련되었지만 체계적인 관리가 이루어지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1974년의 신문 보도에 의하면 적십자중앙혈액원이 헌혈운동을 하고 있음에도 국고지원 부족으로 헌혈운동의 전국적 확대에 어려움을 겪었다(동아일보, 1974). 당시 혈액수요량은 42만 병(1병=400cc)이었다. 이중 녹십자의 혈액제제용 12만 병을 제외하면 30만 병이 남았는데, 혈액원은 30만 병 중 8만 병을 모두 헌혈로 충당할 계획을 세웠다. 서울 4만 병, 지방 4만 병의 채혈 목표를 갖고 시작했지만 예산 부족으로 지방의 목표치를 3만 병으로 줄였다. 나머지 22만 병은 여전히 매혈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검사과장의 설명에 의하면 병원에서는 적십자에서 헌혈로 모은 피를 수혈하기를 원하지만, 채혈량이 적고 보관시설이 부족하여 매혈의존도를 낮추기는 어려웠다. 이러한 상황에 비추어 보면 국가 차원에서는 혈액을 관리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질적 운영의 측면에서는 여전히 매혈의 비중이 높았다. 김정룡이 매혈자의 혈액에 주목한 것은 이러한 현실적인 맥락 속에서 비롯된 것이었고, 또한 그의 연구주제의 특성상 간염 항원 보유 가능성이 높은 혈액이 필요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한편 김정룡은 매혈자들에게 자신의 연구 내용을 설명하고, 이에 동의하는 사람에게 일정한 비용을 지불하고 혈액을 제공받았다. 보통 매혈자는 생계에 어려움이 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혈액에 대한 대가로 돈을 지불받는다. 김정룡은 비용을 지불하고 자신의 실험에 이들의 참여를 유도했다. 이들은 자신의 혈액을 제공하고, 비용과 함께 백신물질을 접종받았다(이호일, 2004: 228-229). 생계를 위해 자신의 피를 사고 파는 행위가 김정룡에게는 실험에 필요한 재료를 획득하는 방법이 되었다. 당시 한국의 매혈 문화는 김정룡의 실험을 수행하는 데 유리하게 작용했고, 이러한 맥락에서 매혈자들은 김정룡의 B형간염 백신 연구의 실험대상자로 활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
김정룡은 이 실험대상자들에게 정제된 표면항원으로 만든 킴 백신(KIM vaccine)의 접종을 실시했다. 1973년 9월과 1974년 2월, 1975년 2월에 걸쳐 접종이 이루어졌고, 접종을 시작한 이후부터 약 3년 6개월 동안 관찰했다. 접종 방법으로는 피하 주사와 경구 투여의 두 가지가 사용되었다. 피하 주사는 상박 외측부에, 경구 투여는 일정량을 20cc의 증류수에 희석하여 복용시키는 것으로 진행되었다. 매혈자들 중 1개월 간 매주 간 수치 검사를 통해 정상 범주에 포함된 사람들이 실험 대상에 포함되었고, 대조군은 정제된 표면항원을 접종하지 않은 채 관찰되었다. 김정룡은 총 1,105명에게 접종을 실시했고, 이 중 1년 이상 추적 관찰이 가능한 497례의 실험 결과를 모아 1979년 『대한의학협회지』에 발표했다.
2) 최적의 연구 여건에서 성과 도출
킴 백신의 효과를 파악하기 위해 대조군과 샘 백신 접종 사례가 함께 검토되었다.13) 대조군은 킴 백신이나 샘 백신을 접종하지 않은 채 관찰되었다. 대조군의 경우 시험 기간 동안 B형간염이 임상적 증상으로 나타난 사례는 75명 중 12명이고, 증상을 나타내지는 않았지만 표면항원이 발견된 사례는 3명이었다. 즉 백신을 접종하지 않은 집단에서는 약 20%의 B형간염 감염률을 보였다.
이에 비해 킴 백신을 피하 주사한 115명 중 B형간염 발생자는 단 1명(0.87%)으로 나타났다. 킴 백신 접종군은 대조군에 비해 B형간염 발생이 현저히 감소된 결과를 보였던 것이다. 또한 킴 백신을 경구 투여한 경우는 87명 중 6명에게서 B형간염이 발생했다. 비율 상 약 7%에 해당하는 수치로 킴 백신의 경구 투여는 효과 있다고 보기 어려웠다. 샘 백신의 경우 피하 주사를 실시한 123명 중 5명(4%)에서, 경구 투여를 한 97명 중에서는 12명(12%)에서 B형간염이 발생했다. 이 또한 대조군과 비교했을 때 그다지 의미 있는 성적이 되지 못했다. 이 실험에서 김정룡은 킴 백신을 피하 주사로 접종하는 것이 B형간염의 감염을 거의 확실히 예방할 수 있는 방법임을 확인했다.
킴 백신을 이용하여 B형간염의 예방을 높이기 위한 접종량과 횟수를 파악하기 위한 실험도 이루어졌다. 표 2에서 보는 것처럼 0.1 ml의 킴 백신을 주사했을 때 임상 발현이 1례, 불현성 감염이 4례로 13%의 표면항원 양성률을 보였는데, 이에 비해 0.5 ml를 주사했을 때는 표면항원이 전혀 검출되지 않았다. 이로써 얼마나 접종해야 효과가 높은지 알 수 있었다. 또한 1회 접종보다 재접종이 B형간염을 예방하는 데 더 효과적임을 확인하기도 했다. 0.1 ml를 1회 접종했을 때 임상 발현과 불현성 감염을 합한 항원 검출 비율이 13%였으나, 두 달 간격으로 2회 접종했을 때는 7%로 감소함을 발견했다. 이에 비해 샘 백신은 경구 투여보다 주사로 접종하는 것이 좀 더 효과가 좋았지만, 킴 백신과 비교했을 때의 효과는 전반적으로 좋지 못했다. 이로써 김정룡은 자신이 개발한 킴 백신이 B형간염을 예방하는 데 아주 효과적인 물질이며, 피하 주사를 통해 일정량을 재접종하는 것이 더 높은 효과를 거둘 수 있음을 밝혔다. 그리고 이 실험을 부분정제 및 열처리 백신인 샘 백신과 비교함으로써 기존 백신보다 자신의 백신이 훨씬 탁월하고 안전성이 높음을 나타냈다.
1979년 『대한의학협회지』에 발표한 이 논문은 B형간염이 만연한 한국에서 효과 높은 백신을 개발했다는 점에서 상당한 의미가 있었다. 당시 한국에서 B형간염은 심각한 질병으로 인식되지 못하고 있었고, 관리가 잘 되지 못한 탓에 발생률은 떨어질 줄 몰랐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개발된 킴 백신은 간염 왕국 한국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고, 개발 자체로 매우 가치 있는 연구였다.
하지만 김정룡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자신의 연구를 대내외에 알리고자 했다. 사실 B형간염 백신 연구는 외국의 연구자들을 통해서도 많이 진행되고 있었다. 블룸버그는 1969년 바이러스를 열처리하는 방법으로 B형간염 백신 특허를 획득했다.14), 최초의 B형간염 백신 HBVAX를 생산한 머크(Merck & Co., Inc.) 사의 연구원인 힐레만(Maurice Hilleman)은 1970년대 후반 펩신, 요소, 포름알데하이드로 혈청을 처리하는 방법을 통해 백신 물질을 찾아냈다. 일본 녹십자에서도 열처리를 통한 고순도 B형간염백신 제조에 성공하여 1976년에 특허를 획득했다.15), 이처럼 외국의 간염 연구자들은 열처리를 통해 불활성화하거나 화학적 방법으로 혈청을 정제함으로써 백신물질을 개발하고 있었다. 김정룡의 백신 역시 펩신을 이용한 화학적 방법으로 정제하는 과정을 거쳐 얻은 것이었다. 그는 이 성과를 외국의 학술지에 발표함으로써 자신도 간염 연구의 세계적인 흐름에 합류하고자 했다. 그는 1979년 미국 『소화기병학회지』에 킴 백신의 실험 결과를 초록으로 게재했다(Kim, Lim and Funakoshi, 1979: 1287).
김정룡은 자신이 개발한 킴 백신이 가치 있는 B형간염 백신 물질임을 보이고자 했다. 그는 킴 백신이 이들 백신에 뒤지지 않는 효과를 지닌 것임을 강조했다. 김정룡은 논문에서 외국의 주요 간염 연구자들이 개발한 백신물질을 간략히 소개하면서도 “소수례를 대상으로 짧은 기간 동안 관찰했거나 또는 대조군이 결여된 연구업적이 있을 뿐”이라고 표현함으로써 자신의 백신물질이 상대적으로 우수한 효과를 가지는 것임을 보이고자 했다(김정룡, 1979: 1013).
그가 자신의 연구논문에서 제시한 바에 의하면, 킴 백신은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는 킴 백신을 사람에 접종함으로써 그것의 직접적인 효과를 확인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김정룡은 매혈자를 대상으로 정제된 표면항원을 직접 접종했고, 접종량과 접종 횟수 등을 여러 가지로 실험하면서 킴 백신의 백신물질로의 가치를 직접 확인했다. 동시에 백신 접종으로 인한 부작용도 나타나지 않았음을 보고했다. 둘째는 한국에서 한국인 실험 대상자로 얻은 우수한 결과라는 것이다. 당시까지만 해도 B형간염바이러스가 실험실 내에서 배양되지 못했기 때문에 이를 구하려면 간염 환자의 혈청으로부터 얻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한국은 간염 환자가 많은 곳으로 그만큼 환자 혈청을 구하기 쉬웠고, 매혈자라는 집단이 존재함으로써 외국과는 다른 실험 환경을 꾸릴 수 있었다. 매혈자의 존재는 김정룡의 연구 진행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백신물질의 최종적 접종 대상은 인간인데, 김정룡은 실험 과정에서 이들을 대상으로 효과를 직접 확인해 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실험 결과를 외국의 유명 학술지에 게재하고자 했다. 가장 먼저 영국의 유명한 의학 잡지인 『랜싯(Lancet)』에 투고했으나 27개의 질문이 돌아왔고, 일일이 그에 대한 답변을 보냈음에도 원초적인 실험이라는 이유로 결국 게재되지 못했다. 이어 『미국감염학회지』에도 접수했으나 거절당했다(이호일, 2004: 227-228). 이처럼 그는 자신의 연구 성과를 국제적으로 알리고자 시도했으나 원고 접수 또는 심사 과정에서 탈락되었다. 김정룡은 이에 대해 자신이 국력이 약한 나라의 연구자여서 무시당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16),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보면, 그의 연구는 아직 안전성과 효과가 확인되지 않은 백신 물질을 임상실험이라는 명목 하에 일반인에게 투여한 결과였다. 외국의 연구 환경에서 매혈자를 실험에 활용한 김정룡의 연구는 수용되기 어려웠다. 물론 외국의 연구자들도 실험 과정에 백신 물질을 인체에 적용해 보는 사례가 아주 없지는 않았지만, 김정룡의 경우에 비하면 규모가 작았다.17), 반면 김정룡은 당시 한국 사회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었던 매혈자를 활용하여 실험을 실시했고, 이러한 모습은 1970년대 한국 사회에서는 크게 문제되지 않았다.18) 간염 발생률이 높고, 매혈 행위가 비일비재했던 당시 한국의 상황이 김정룡에게는 ‘유리한’ 연구 여건으로 작용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효과가 높은 백신 물질을 찾아낼 수 있었다.
4. 맺음말
B형간염은 197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 사회에서 크게 주목받지 못하는 질병이었다. 그러다 1980년대 이후 의사집단, 정부, 대중 등 여러 집단의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이 배경에는 서울올림픽 유치 성공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대규모 국제 스포츠 행사 개최를 준비하기 위해서는 많은 것들을 갖추거나 고쳐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 중 중요한 부분으로 보건위생 환경의 개선이 거론되었다. 의사집단은 간염퇴치를 위한 캠페인을 전개하면서 백신 예방접종으로 B형간염의 감염률을 낮추어 올림픽 기간 동안 외국인이 안심하고 한국에 방문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1983년 녹십자에서 출시된 헤파박스-B는 국내 연구자의 손에서 탄생한 국내 최초의 예방백신이라는 점이 크게 강조되면서 온 국민의 관심을 주목시켰다. 이 백신은 그 동안 한국에서 접종되던 수입백신 가격의 1/3 수준으로 저렴했기 때문에 더욱 인기를 끌었다. 이처럼 1980년대 한국 사회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면서 B형간염은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게 되었고, 그 배경에는 김정룡의 연구가 있었다.
보통 주목할 만한 과학 연구 성과가 도출되었다고 할 때, 그 연구는 발전된 또는 양질의 연구 환경이 갖추어진 곳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실험장비나 인력, 자금 등 연구에 필요한 자원이 풍부한 곳에서 뛰어난 연구 성과가 많이 나타나기 마련이다. 일례로 다수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곳을 떠올려 보면 인프라가 잘 갖춰진 연구 기관들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반드시 연구 자원이 풍부하고, 발전된 곳에서만 좋은 연구 성과가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미흡한 연구 여건이더라도 주목할 만한 성과는 등장할 수 있다. 이 글에서 살펴본 김정룡의 B형간염 백신 개발 연구는 이러한 맥락을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김정룡은 1960-70년대 한국에서 만연해 있던 B형간염 예방백신 개발에 크게 기여한 과학자이다. B형간염은 간경변이나 간암 등으로 진전될 가능성이 매우 높은 질환임에도 위험성이 더 높은 질병들에 가려 잘 관리되지 못하고 있었다. 아직 한국이 과학 후발국의 위치에 있었던 1970년대에 김정룡은 국내에서의 연구를 통해 B형간염을 예방할 수 있는 백신물질을 개발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의 B형간염 백신물질 개발 연구는 B형간염을 매개로 그의 개인적, 사회적 맥락이 적절히 결합된 결과라 볼 수 있다.
먼저, 그는 개인 연구자로서의 출발 시점에 미국 유학을 통해 새로운 학문을 학습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연구자로의 성장을 위해서는 기반이 될 지식을 습득할 필요가 있었는데, 그는 발전된 학습 공간으로 이동을 통해 첨단 지식을 학습했다. 대학원 졸업 후 CMB의 지원으로 미국 연수의 기회를 얻은 김정룡은 이곳에서 만난 지도교수의 제안으로 B형간염바이러스를 연구주제로 선택하게 되었다. 그는 과학 발달의 최전선이었던 미국 하버드 의대에서 공부하면서 B형간염이라는 새로운 연구 주제를 만났고, 여러 연구자들과 함께 최신의 기법을 익히며 연구할 수 있었다. 이러한 학문적 경험은 김정룡 개인의 연구 역량을 한층 끌어올려주는 기회로 작용했다.
다음으로, 당시 한국의 열악한 보건위생 환경은 김정룡이 개발한 백신물질의 효과를 확인하는 데 유리하게 작용했다. 김정룡의 B형간염 백신 개발 연구는 과학 후발국에서 거두기 쉽지 않은 획기적인 성과였다. B형간염바이러스는 실험실에서 배양되기 어려워 환자 혈청으로부터 항원을 분리해서 사용해야 했다. 1970년대 한국은 B형간염이 만연했으므로 환자 혈청을 구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이 점은 한국의 열악한 보건 환경이 연구에 도움이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김정룡은 자신이 개발한 백신물질의 효과를 알아보기 위해 당시 한국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었던 매혈자를 활용했다. 김정룡은 그들에게 백신 접종 실험의 필요성을 설득했고, 이들의 동의를 거쳐 한국의 B형간염 문제 해결에 다가갈 수 있었다. 일반적인 과학 연구 공간에서 이러한 일은 윤리적으로 문제될 수 있지만, 간염이 만연해 있던 1970년대 한국의 상황과 당장의 생계를 위해 피를 팔아야 했던 매혈자들의 존재는 김정룡의 연구가 진행되는 데 굵직한 역할을 담당했다.
김정룡은 외국 원조를 통해 첨단의 과학 연구 공간에 진출했고, 그곳에서의 학습을 통해 연구 역량을 축적할 수 있었다. 당시 한국에 만연했지만 전문적으로 연구되지 못했던 B형간염을 연구 주제로 선택했고, 이를 발전시켜 백신물질을 얻어내는 연구에 이르면서 그는 B형간염 분야에서 전문성을 가진 연구자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그가 백신물질을 찾아낼 수 있기까지는 1960-70년대의 열악했던 보건의료 환경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매혈자의 존재, B형간염이 제대로 관리되지 못했던 당시 보건의료 환경 등은 김정룡의 B형간염 백신 연구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김정룡의 B형간염 백신 연구는 1960-70년대 한국 의학 분야의 연구 범주를 확대했다는 점과 함께 이후 예방접종 실시를 통해 질병 관리의 틀을 마련하고, 보건환경을 개선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Notes
차이나메디컬보드는 1914년 록펠러재단(Rockefeller Foundation)에서 중국의 의학교육과 연구 발전에 필요한 대학을 지원하기 위해 만들어진 단체이다. 1928년 독립 재단이 된 이후에도 CMB는 중국의 북경협화의과대학(Peking Union Medical College)을 현대 의학의 요람으로 만들기 위해 막대한 운영비를 제공하고, 세계적인 석학을 초빙했다. 하지만 1950년 이후 중국과 미국의 정치경제적 관계가 악화됨에 따라 CMB는 더 이상 북경협화의과대학을 지원하기 어려워졌다. CMB는 그간 중국을 지원하던 자금으로 한국, 일본, 홍콩, 필리핀, 태국,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대만 등 극동과 동남아시아 지역의 의학, 간호학, 보건학 연구와 교육 강화에 힘썼다. 차이나메디컬보드 홈페이지 https://chinamedicalboard.org/centennial (2020. 5. 30. 접속).
1953년에 연수를 떠난 사람은 1948년 졸업하고 내과 레지던트를 마친 장석철이었다. 한편, 경우에 따라 다르지만 1963년 이후 펠로우십 프로그램에 참여한 교수들은 대략 3년 안팎의 연수 기간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Letter #54” (April 5, 1966), China Medical Board records, Accession 2014:022, SG 1(FA1292) Series 2: Fellowships and Grants (Box 54, Folder 730). 이 편지는 서울대 의대측에서 CMB에 보내는 추천서 목록 중 하나로 여겨진다. 문서 내에 보내는 사람과 받는 사람에 대한 표시는 따로 없으나 내용의 맥락으로 비추어 보면 서울대 의대에서 CMB 측에 보내는 서신임을 알 수 있다. CMB 자료는 별도의 언급이 없으면 이 문서파일에 속해있는 것임을 밝힌다. CMB에 관련된 자료는 국내에 거의 남아있지 않는 실정이다. 그나마 이왕준이 뉴욕의 CMB 사무실과의 연락을 통해 얻은 자료를 참고하여 일부 정리한 바 있다. 다만 그 자료는 CMB의 서울대 의대에 대한 전반적인 지원 현황에 대한 것이며, 개인에 대한 지원 내용은 알 수 없다. 필자는 현재 CMB 자료가 보관되어 있는 록펠러 아카이브 센터와의 연락을 통해 김정룡에 관한 자료를 모두 확보했고, 이 자료를 논문에 활용했다.
손다이크기념연구소는 1923년 보스턴시립병원에 설립된 연구소로 미국 시립병원 최초로 임상의학을 연구한 곳이다. 초대 연구소장이었던 피바디(Francis Weld Peabody)는 이 연구소에서 교육과 연구를 위한 충분한 시설을 제공함으로써 전문적 연구 분위기를 조성하고자 했다. Jeffrey M. Elrod and Anand B. Karnad, “Boston City Hospital and the Thorndike Memorial Laboratory: The Birth of Modern Haematology”, British Journal of Haematology 121(2003), p. 383.
연구단에서는 간경변 환자의 염분 저류(salt retention) 증명, 베르니케 뇌증에서 티아민 결핍의 역할 증명, 간부전 특히 간성뇌증(hepatic encephalopathy)의 메커니즘과 치료 규명 등을 연구했다. 데이빗슨의 손다이크에서의 활동에 대해서는 하버드 의대 홈페이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하버드 의대 홈페이지 https://news.harvard.edu/gazette/story/2002/10/faculty-of-medicine-memorial-minute-2/(2020. 01. 03. 검색).
미국에서 주로 B형간염바이러스 연구를 하기는 했지만 간 질환 환자 혈청과 단백질 간 관계에 대한 연구도 진행했다. 김정룡은 이 연구를 1970년 『미국 임상영양학회지』에 발표했다. 김정룡의 이 연구 이후 데이빗슨은 CMB에 연락하여 김정룡의 미국 연수 기한을 연장해 줄 것을 수차례 부탁했다.
김정룡은 블룸버그를 만나기 위해 그가 근무하고 있었던 필라델피아의 폭스 체이스 암센터에 찾아가 오스트레일리아 항원과 항체를 얻어 가지고 돌아왔다(이호일, 2004: 198).
USNEWS 홈페이지 https://health.usnews.com/doctors/joseph-spano-975160(2020. 5. 30. 검색).
김정룡은 이때부터 간염 관련 항원이라는 표기 대신 ‘간염 B 항원’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간염 관련 항원이 양성인 혈액제제를 투여했을 때 접종받은 사람에게서 바이러스성 간염을 전염시킬 수 있고, 이 항원을 비활성화시킨 물질로 적극적 면역이 가능함이 증명되면서 이것이 곧 간염 바이러스일 것임이 확실해지고 있었다. 이에 따라 간염 연구자들은 간염 B 항원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기 시작했고, 김정룡 역시 이러한 흐름에 합류했다.
혈청에서 B형간염의 표면항원이 검출된다는 것은 B형간염을 일으키는 병원균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혈청 내 표면항원 양성률이 높을수록 B형간염 발생률이 높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김정룡은 의료종사자의 연령별, 성별 표면항원 양성률도 조사했는데, 연령이나 성별에 따른 차이는 유의미하게 나타나지 않았다.
법제처 국가법령정보센터 홈페이지 혈액관리법(법률 제2229호, 1970. 8. 7. 제정) http://www.law.go.kr/lsInfoP.do?lsiSeq=7976&ancYd=19700807&ancNo=02229&efYd=19701108&nwJoYnInfo=N&efGubun=Y&chrClsCd=010202&ancYnChk=0#0000
샘 백신(SAM vaccine)은 일본 녹십자로부터 얻은 것으로 부분정제 및 열처리한 백신이다.
“Vaccine against viral hepatitis and process”, 미국 특허 출원번호 03636191, 출원인 Cancer Research Institute, 발명자 Baruch S. Blumberg & Irving Millman, 출원일 1969. 10. 8. 특허정보넷 키프리스 검색 http://abpat.kipris.or.kr/abpat/biblioa.do?method=biblioFrame (2020. 5. 29. 검색).
“B形肝炎ワクチンの製造方法”, 일본 특허 출원번호 51112733, 출원인 ミドリ十字, 발명자 船越哲,上村八尋,福島恒和,田中俊彦, 출원일 1976. 9. 20. 특허정보넷 키프리스 검색 http://abpat.kipris.or.kr/abpat/biblioa.do?method=biblioFrame (2020. 5. 29. 검색).
당시 국내에는 약물의 효과를 테스트하기 위해 사람을 실험대상에 이용하는 연구를 수행하는 사례가 많지 않았다. 특히 김정룡의 B형간염 백신의 경우 국내에서 개발된 최초의 백신이었으므로 매혈자와 같은 일반인이 임상실험에 동원된 사례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한편 이러한 성과를 국제학술공간에 소개하는 것 역시 쉽지 않은 문제였다. 즉 한국에서 활동하는 한국인 연구자의 실험 결과가 국제 학계에 발표될 때 의심이나 무시받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세계 최초로 유행성출혈열의 병원체인 한탄바이러스를 발견한 이호왕의 경우 그 성과를 처음 국제 학계에 보고했을 때, 연구를 지원해 준 미육군의학연구개발사령부를 비롯한 많은 연구자들이 혈청 맹검을 여러 차례 요청했고, 결국 이호왕이 직접 미국에 가서 실험을 재현해 보이기까지 했다. 이호왕이 자신의 발견 성과를 처음 알렸을 때, 어떤 연구자는 그가 연구과제를 연장하기 위해 쇼를 벌이는 것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이호왕의 경우 보편적인 연구방법을 이용해 거둔 성과였음에도 국제 사회에서 의심을 샀는데, 이처럼 과학 후발국의 연구자는 자신의 성과에 대해 공정하게 평가받지 못하는 경험을 하기도 했다(신미영, 2017: 98).
1971년 크루그만 등은 간염 유행지역의 어린이 39명을 대상으로, 1976년 모파스 등은 혈액 투석실 환자와 종사자 약 100명을 대상으로 접종 실험을 수행했다(Krugman et al., 1971; Maupas et al., 1976).
김정룡은 실험에 앞서 매혈자들에게 간염 바이러스의 감염 위험이 높으니 예방 가능성이 있는 백신 실험이 중요하다는 것을 주지시킨 후, 이에 동의하는 매혈자들을 대상으로 실험을 실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