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한기(崔漢綺)의 신기(神氣) 논의와 중서의학 비판: 화담학(花潭學)과의 관련성을 중심으로
Choe Han-gi's Discourse on Singi and His Criticism on Chinese Medicine and Western Medicine: Focusing on the Relationship with Seo Gyeong-deok’s Philosop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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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This study examines how Choe Han-gi (崔漢綺, 1803-1879) developed his medical discourse which integrated the concepts of traditional Chinese medicine with modern Western anatomy, based on the philosophy of Seo Gyeong-deok (徐敬德, 1489-1546), a scholar of the Neo-Confucianism of Joseon (1392-1910). Seo emphasized gi (氣, C. qi, vital, material force) rather than yi (理, C. li, the principle of things) as a way of understanding the world. Since Choe’s early academic interests pertained to Neo-Confucianism, it is reasonable to examine his philosophy in this context. Similar to Seo, Choe assumed that the most essential component of the world was the intrinsic and mysterious gi. Although Seo spoke of gi as a damil cheongheo ji gi (湛一淸虛之氣, the gi which is profound, uniform, clear, invisible, and empty), Choe preferred to use the word Singi (神氣, C. shenqi, the intrinsic, invisible, and mysterious gi). He believed that the earth, moon, and stars operated through the action of Singi and that all creatures could only exist by relying on it.
Singi was the most important premise in Choe’s medical discourse, a fact demonstrating that although he could be very critical of traditional Chinese medicine, his perspective was part of that tradition. He believed that Singi integrated and operated the entire human body and that it perceived external objects. He also emphasized the role of hyeongjil (形質, C. xingzhi, a visible object with a form and quality; here it means all human bodies). This was the medium through which Singi could appear in reality. Choe thought that Singi could not reveal itself in reality without hyeongjil, and that hyeongjil became a dead thing without Singi. His perception of the role of hyeongjil was expressed in his interest in modern Western anatomy, an interest that complemented his focus on Singi.
In light of his understanding of the Singi-hyeongjil relationship, Choe criticized both modern Western anatomy and traditional Chinese medicine. He thought that modern Western anatomy lacked awareness of Singi and that traditional Chinese medicine lacked accurate knowledge of human anatomy. Although he was not completely sympathetic toward any forms of medicine, he was open to ideas from both Western and Chinese medicine. Choe could not accept Western anatomy as fully as Japanese intellectuals did. The study of anatomy in Japan had developed in relation to the idea of Ancient Learning (古學, C. guxue), which denied such theories of systematic correspondence as Yin and Yang and the Five Elements (陰陽 五行, C. yinyang wuxing) and tended to focus on the action of hyeongjil itself. Because Choe accepted modern Western anatomy without accepting Ancient Learning, his perspective was unique in the history of East Asian anatomy.
From a medical history perspective, how does Choi Han-gi’s medical discourse distinguish itself from other medical discourses, and what are its characteristics? In addition to other explanations, focusing on the political imagination associated with medicine can help illuminate the differences between the medical discourse of Choe and those of others. Discussion of medicine and the human body was tied to political thought, manifesting the political imagination of the society in which that discussion took place. The development of Western and Japanese anatomy reflected a vertical and hierarchical political order, exemplified by the belief that the brain was the center of the body. However, Choe doubted that organs like the brain or heart dominated the body. In his view, the Singi ruled the body; it was not a specific organ, and it was equally inherent in all people. His political thought also emphasized the horizontal and equal order among people. His view of Singi simultaneously influenced both his perspective on medicine and his perspective on society. Choe Han-gi’s belief in this horizontal and equal political order was inherent in his Singi-centered medical discourse.
1. 머리말
최한기(崔漢綺, 1803-1877)는 19세기 중후반 유학사상가로서 조선후기 사상사의 전개에 있어서 독특한 위상을 가졌다. 그는 자신의 신기(神氣) 논의를 통하여 전세계 인류가 공동 발전하는 낙관적인 시대상을 제시하였다. 본 글에서 중점적으로 논의하고자 하는 그의 의학(醫學) 논의에 대한 기존연구도 대략적으로 볼 때, 이러한 최한기 이해 속에서 이루어졌다. 그의 의학 논의에 대한 연구는 대체로 중서절충 혹은 중서통합적인 관점에서 이루어졌다[1]. 최한기가 서양의 해부학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가지면서도 신기라는 전통적인 개념을 일관되게 강조하였던 것은 그의 이러한 면모를 잘 보여준다고 하겠다.
하지만 그의 의학 논의를 단순히 중서절충, 혹은 중서통합적이라는 관점에서 이해하는 것은 명확한 한계를 갖는 것도 사실이다. 왜냐하면 최한기가 중국의학과 서양의학을 어떠한 일관된 논리적 구조 속에서 결합시키고자 하였는지의 문제가 분명해져야 중서절충·중서통합이라는 문제가 현상적인 설명을 넘어 구체성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2]. 이와 더불어 그 통합의 사상이 갖는 역사성이 분명하게 밝혀져야 최한기가 의도하였던 의학 논의가 갖는 의미 또한 더욱 선명해질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일본과 중국에서의 사례는 최한기의 의학 논의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시사점을 줄 수 있다
명청대와 근세 도쿠가와 일본에서 일어났던 금원사대가(金元四大家)를 비판하는 새로운 의학의 모색은 송학(宋學)을 비판하고 복고주의를 표방한 명청대 고학(古學)과 긴밀한 관련성을 가졌던 것으로 생각된다(Unschuld, 2010: 194-197). 이에 비해서 최한기의 경우에는 고학과의 연관성을 직접적으로 찾을 수 없다. 최한기는 고학과의 영향관계보다는 서경덕(徐敬德, 1489-1546)의 학술, 즉 화담학(花潭學)과 긴밀한 관련성을 가졌다[3]. 이것은 동아시아 새로운 의학의 모색과 함께 등장한 서양 해부학 수용과 관련하여 흥미로운 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본 글은 최한기의 의학 논의가 어떠한 사상적 맥락 속에서 형성되었으며, 그것이 갖는 역사성은 어떠한 것인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위하여 본 글은 최한기의 신기 관념과 그가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되는 화담학의 문제의식을 연결시켜 이해하고자 한다[4]. 그 이유는 첫째 그의 학술배경이 다양한 측면에서 화담학과 긴밀한 관련성을 가졌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며, 둘째 이와 관련하여 그의 신기 관념과 화담학의 담일청허지기(湛一淸虛之氣)가 많은 유사성을 가졌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논의를 통하여 다음 두 가지의 점들을 기대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첫째, 최한기의 의학 논의를 화담학의 견지에서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화담학의 담일청허지기와 최한기 의학의 중요한 전제였던 신기가 갖는 공통점을 통하여 화담학과 최한기 의학의 긴밀한 관계성들을 추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이 논의를 통하여 최한기의 의학 논의가 갖는 논리적 구조와 그것이 어떠한 역사적 현실을 반영하고 있었는지를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점들을 통하여 본 글은 최한기가 새롭게 제시하였던 중서의학의 비판과 통합이라는 의학적 전망이 어떠한 맥락 속에서 이루어졌는지, 그리고 그것이 함의하는 의학사적 의의는 무엇이었는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신기 논의의 화담학적 성격
최한기가 유년시절 가장 처음으로 접한 사유가 성리학이었다는 점을 고려해 볼 때, 그가 과연 성리학적 사유에서 완전히 자유로웠는지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의 사유 속에서는 성리학과 공유하는 점들이 상당 부분 발견되기 때문이다(정진욱, 2003: 1; 9-21; 전용훈, 2007: 276; 백민정, 2009; 2018). 그와 성리학과의 관계성을 살펴보고자 할 때, 우선 그의 가학적·학문적 배경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의 가문은 학파와 정파로 볼 때 북인(北人)·남인(南人)과 깊은 관련성을 가졌으며(권오영, 1992: 150-151), 태어난 곳은 서경덕 학술의 영향이 강했던 경기도 개성 지역이었다. 인조(仁祖, 재위 1623-1649) 이후 서경덕의 문인들은 북인과 남인 계열에서 주로 활동하였으며, 주지하듯이 개성은 서경덕의 고향이었다. 이를 통하여 화담학과 최한기와의 관련성을 유추해 볼 수 있다.
그의 학적 전승과 깊이 관련되어 있는 개성 출신 유학자 한경리(韓敬履, 1766-1827)와 김헌기(金憲基, 1774-1842)는 노론(老論) 낙론(洛論) 학맥이었다(권오영, 1992: 142-145). 이 낙론 학맥은 상수학(象數學)·심학(心學)과 관련하여 그 내면에 서경덕 학풍과 긴밀한 관련성을 가졌다(조성산, 2007: 43-98, 176-184). 낙론 학풍에는 기(氣)의 본성을 담연(湛然)한 것으로 보는 ‘담연지기(湛然之氣)’ 관념이 마련되어 있었다[5,]. 이 기의 담연성 강조는 서경덕 학풍과 깊은 관련성을 갖는 것이었다(조성산, 2007: 88-98).
한경리와 김헌기의 스승인 개성 출신 조유선(趙有善, 1731-1809)은 서경덕의 문집인 『화담집(花潭集)』을 간행하는데 적극 참여하였고(정호훈, 2018: 69-72), 서경덕의 위패가 있는 화곡서원(花谷書院)의 중수기(重修記)를 남기기도 하였다[6,]. 김헌기에게서도 서경덕에 대한 강한 존경심이 보였다. 그는 서경덕을 개성지역의 대유(大儒)로 인식하였다[7,]. 또한 그의 신기 논의는 서경덕·최한기와 깊은 유사성을 보였다[8,]. 최한기를 둘러싼 이러한 서경덕 학풍의 상황들을 보면, 최한기에게 끼친 서경덕의 사상적 영향을 우선적으로 추론해 볼 수 있다[9]. 최한기와 서경덕의 사상적 관련성 문제를 구체적으로 규명하는 것은 최한기의 학술이 어떻게 기존 유학사상과 결합되어 있었는가를 해명하는 문제와 관련성이 있다. 서경덕과 최한기가 기를 사물의 본질로 이해하기 위하여 어떠한 공통의 노력들을 기울였는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최한기와 서경덕에게서는 기를 현실에서 증명하기 위한 노력들이 공통되게 보였다. 기에 대한 논의는 서경덕 학문의 주요 주제였으며, 최한기도 이 문제에 대해서 가장 심혈을 기울였다. 서경덕은 기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하여 부채와 바람을 들었다[10,]. 부채를 흔들면 바람이 이는 것은 이 대기가 빈 공간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최한기 또한 부채와 바람을 통하여 기가 형질을 갖춘 존재임을 증명하고자 하였다. 최한기는, 부채를 흔들면 먼지가 날리는 것은 대기 속이 빈공간이 아니라 기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11,]. 또한 최한기는 물에 엎어놓은 주발 속에 물이 들어가지 않는 것과, 방에서 급하게 동쪽 창을 닫으면 서쪽 창이 열리는 것은 기가 존재하는 증거라고 하였다[12].
둘째, 최한기와 서경덕은 기로부터 리(理)의 탐구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서경덕은 송대 장재(張載, 1020-1077)와 소옹(邵雍, 1011-1077)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문중양, 1999: 98-110). 그 가운데 기로부터 리를 탐구하는 것에 대해서는 주로 소옹의 영향이 컸다. 소옹은 실제의 사물들 속에서 리를 발견하고자 노력하였다[13,]. 이점은 서경덕에게서도 발견되었다. 서경덕은 소옹의 관물론(觀物論)을 수용하면서 실제적인 사물들 속에서 리를 발견하고자 노력하였다[14]. 이러한 사유는 최한기에게서도 발견되었다.
최한기의 이러한 논의는 그의 추측(推測) 논의와도 긴밀한 관련성을 갖는다. 그는 성리학의 궁리(窮理) 논의가 리를 고정된 관점에서 고찰하였기 때문에 한계를 가졌다면, 자신의 추측 논의는 기의 궤도를 좇아서 리를 찾는 것이기 때문에 리를 더 잘 파악할 수 있다고 하였다[17]. 즉 리를 파악하는 데 있어서 기의 역동성이 이용되는 것이다.
셋째, 서경덕과 최한기가 기로부터 리의 탐구를 주장할 때, 왜 그들은 리보다 기를 고찰의 대상으로 삼았는지에 대한 더욱 상세한 설명이 필요하다. 서경덕과 최한기는 모든 사물들의 근본을 이루는 본원적인 기, 즉 담일청허지기와 신기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 본원적인 기는 리를 파악하는 데 중요한 매개가 될 수 있었다. 리를 보기 위해서는 그 리의 구현체로서의 가장 본원적인 기를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리는 형체가 없어 오직 기를 통해서 그 구체적인 모습을 알 수 있다. 그러한 점에서 리의 궤적을 가장 정밀하게 보여주는 본원적인 기의 존재는 중요하였다. 이 본원적인 기는 형체가 있어서 추정 가능했으며, 이 기를 통해서 리의 궤적을 추측할 수 있었다. 이점은 사실 서경덕과 최한기 사유의 가장 중요한 공통점이라고 할 수 있다.
서경덕은 장재의 영향 속에서 우주만물은 태허(太虛)에서 유래하였으며, 그 태허의 담일청허지기가 사물들의 가장 중요한 본원이라고 사유하였다[18,]. 서경덕에게 이 본원적인 기는 모든 사물들의 가장 깊은 곳에 내재해 있으며, 증감이 없는 불생불멸의 기였다. 사물의 궁극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서경덕에게 이 담일청허지기는 흡사 태극 및 리의 위상을 갖는 존재이기도 하였다(최일범, 1990: 139-141; 황광욱, 2003: 104; 조성산, 2017: 391-393). 서경덕이 담일청허지기를 이렇게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바로 앞서 언급했듯이 이 기를 통하여 리를 파악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최한기에게도 이러한 문제의식이 포착되었다.
하늘은 지구를 둘러싸고 있어 만물은 이 범위 가운데를 벗어나지 않으며, 기가 운행하면 리가 따르므로 만사는 모두 (기가) 운행하는 기틀에서 말미암는다. 그러므로 먼저 대상(大象)을 추론하여 그것으로써 섬실(纖悉)한 법칙으로 삼고, 모름지기 일기(一氣)로부터 세세한 조리(條理)를 찾아야 한다[19].
진실로 대기(大氣) 상에서 단서와 조짐을 보아야 하니, 사물에서 미루어 탐구하고 사물에서 경험을 얻어 대기와 어긋남이 없게 되어서 이에 의거하여 여러 번 시험하고 공적을 쌓으면 거의 대기의 운화를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이것은 곧 현명하고 지혜로운 자들이 할 수 있는 것이다. 전체대용을 미루어 통달하여 대기가 활동운화하는 본성을 보고 얻을 수 있다면 통민운화(統民運化), 일신운화(一身運化)에 대해서도 점차 열리고 통하는 것이 있게 될 것이다[20].
최한기는 만물은 지구를 둘러싼 하늘을 벗어나지 않는다고 하였으며, 만사는 모두 이 기의 운행하는 기틀에서 생겨난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어서 그는 대기를 가장 본원적인 탐구의 대상으로 삼았다. 즉, 최한기는 모든 기의 원천으로서 대기에 관심을 가진 것이다. 최한기의 학술에서 이 대기는 가장 근본적이고 본원적인 고찰의 대상이었다. 이어 그는 그것이 어떻게 지구상의 모든 사물의 본원을 이루었는지에 대해서 설명하였다. 최한기에 의하면,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이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이 대기 때문이었다[21,]. 그러므로 지구상의 모든 존재는 이 대기에 승순해야 하는 것이다[22]. 최한기는 자신이 편집한 의학서였던 『신기천험(身機踐驗)』 총론의 첫 머리를 다음과 같이 시작하였다. 이 저작은 인간 몸을 다룬 의학서였지만, 최한기는 우주론으로부터 인간 몸의 논의를 시작하였다.
최한기는 해, 별, 지구, 달이 하나의 몸체를 이루어 신기운화를 행하는 것을 설명하고, 인간이 어떻게 신기라는 매개체를 통하여 이것과 연결되어 있는가를 설명하고자 하였다. 최한기에게서 우주의 대기에 담겨있는 신기는 인간을 포함한 모든 만물에 담겨있고, 그 내면의 가장 본원적인 기였다. 사람은 이 신기의 운화를 이어받아 몸이 생기고 이어서 지각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23]. 인간에 한정해서 말할 때 최한기는 다음과 같이 이러한 상황을 더욱 구체적으로 언급하였다.
대저 하늘은 곧 대기이다. 대기가 사람의 몸 가운데를 뚫고 피부 사이에 스며들어서 한서조습이 안과 밖에서 교감하여 생(生)을 이루니 비록 잠시 동안이라도 끊어지면 살지 못한다. 이것이 기로써 명(命)을 삼고 기로써 생을 삼는다는 것이다. 천기(天氣)와 인기(人氣)는 둘로 나눌 수 없는 것이다[24].
대기는 사람의 몸 가운데를 뚫고 피부 사이에 스며들어서 한서조습이 안과 밖으로 교감하여 생을 이루니, 대기가 없으면 생을 이어갈 수 없는 것이다. 이처럼 최한기는 인간에 대한 이해를 우주적 차원에서부터 이끌어오고 있다. 그가 생각하기에, 인간의 몸에는 이 대기의 운화, 즉 우주적 변화의 양상들이 내재되어 있었다. 이점은 서경덕이 우주의 담일청허지기가 모든 사물들 속에 내재되어 있다고 생각한 점과 논리구조상 흡사하였다. 서경덕에게 있어서 담일청허지기가 모든 사물 속에 내재되어 있는 가장 본원적인 기였다면, 최한기에게 있어서는 대기에서 말미암은 신기가 가장 본원적인 기였다[25]. 양자의 표현방식과 용어의 차이는 있지만 그 의미하는 바는 같았다고 생각된다.
최한기는 이 기의 성격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여 서경덕이 가졌던 일기장존(一氣長存)의 모습 또한 보여주었다. 이점 또한 서경덕과 최한기가 얼마나 서로 닮아있었는가를 보여주었다.
(1) 사생인귀(死生人鬼)는 단지 기의 취산(聚散)일 따름이다. 취산은 있되 유무(有無)는 없는 것이니 기의 본체가 그러한 것이다. 기의 담일청허한 것이 한없이 허공 속에 가득 차 있다. 그것이 모여 크게 된 것이 하늘과 땅이며 그것이 모여 작게 된 것이 만물이니 기가 모이고 흩어지는 형세에는 미약한 것, 뚜렷한 것, 오래 가는 것, 빠른 것이 있을 따름이다. 크고 작은 것이 태허에 모이고 흩어짐에 있어서, 크고 작은 것의 차이는 있지만 비록 한 포기의 풀이나 한 그루의 나무 같은 미미한 것일지라도 그 [담일청허한] 기는 끝내 흩어져 버리지 않는다[26].
(2) [기는] 한 하늘의 범위 안에서 모이고 흩어진다. 이른바 흩어진다는 것은 일기(一氣)의 형체 안에서이고 이른바 모인다는 것 또한 기의 형체 안에서이니 흩어지는 것은 영원히 흩어져 소멸하는 것이 아니며 모이는 것도 영원히 모여서 불변하는 것이 아니다[27].
(1)에서 서경덕이 기는 취산할 뿐이라고 한 것은 (2)에서 최한기가 기는 하늘의 범위 안에서 흩어짐과 모임을 반복하니 흩어지는 것은 영원히 흩어져 소멸하는 것이 아니요, 모이는 것도 영원히 모여 불변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 것과 흡사하였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첫째 기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한 노력, 둘째 기로부터 리를 찾고자 했던 시도, 셋째 모든 사물에 공통된 본원적인 기가 내재해있다는 주장은 서경덕과 최한기의 사유가 상호 많은 유사점을 가졌음을 보여준다[28].
마지막으로 덧붙여서 최한기의 신기와 서경덕의 담일청허지기와의 관련성을 좀 더 분명히 하기 위해서 양응수(楊應秀, 1700-1767)를 언급하고자 한다. 서경덕의 담일청허지기를 우주의 신기로서 이해한 양응수는 신기 관념에 있어서 최한기와 매우 흡사한 인식을 보여주었다(조성산, 2017: 390-398). 양응수는 18세기 초중반 노론 낙론(洛論) 학맥의 중심인물이었던 이재(李縡, 1680-1746)의 제자로서 노론계 지식인이었다. 하지만 그는 처음부터 노론계는 아니었으며, 그의 본래 가계와 학맥은 북인과 연결되어 있었다. 그는 북인계였던 첫 번째 스승 권집(權王集, 1665-1716)의 기통질국(氣通質局) 논의를 계승 발전시켰다(조성산, 2017: 384-390).
양응수의 기통질국 논의의 핵심은 기에는 크게 두 가지 범주가 있으며, 그것은 모든 사물에 공통되게 있는 (본원적인) 기와 사물의 개별적 차이를 만드는 (형질의) 질(質)로 나눌 수 있다는 것이었다(조성산, 2017: 385-409). 양응수는 이 본원적인 기를 신기로 규정하였으며, 이 신기를 서경덕의 담일청허지기와 같은 것으로 인식하였다(조성산, 2017: 395-396). 양응수의 이러한 신기에 대한 사유는 최한기의 신기 관념을 이해하는 데에도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이러한 점들을 보면, 양응수와 최한기에게서 보이는 신기에 대한 상상력은 화담학의 자장 안에서 성장할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이와 같이 최한기는 화담학의 자장 안에서 성장할 수 있었다고 생각되지만, 최한기는 화담학과는 구별되는 모습 또한 보였다. 그가 음양오행과 오운육기 논의를 분배의 설이라고 비판하고서 새로운 기학을 정립하고자 한 것은 이것을 보여준다. 화담학의 상수학(象數學)은 기수(氣數)를 강조하면서 최한기가 비판하였던 음양오행·오운육기의 설과 밀접한 관련성을 가졌다. 그러한 이유로 운명론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29]. 아마도 최한기는 음양오행과 오운육기 논의가 신기의 무한한 가능성을 일정한 틀에 가두는 부작용을 초래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던 듯하다. 최한기는 기의 역동성과 그 변화양상에 충실하고자 하였으며, 이것은 추측이라는 그의 독특한 사유로 나타났다. 이러한 점을 볼 때, 신기의 상상력은 화담학으로부터 영향을 받았지만, 그 외의 부분들은 최한기가 서학 등의 영향을 받으면서 새롭게 발전시켜 나간 것으로 볼 수 있다. 화담학과의 공통성과 이질성을 동시에 고려할 때 양자의 관계는 더욱 선명해질 수 있다.
요컨대, 기에 대한 입장에 있어서 최한기와 서경덕은 많은 유사성을 가졌다. 첫째 그들은 기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하여 노력하였고, 둘째 기로부터 리를 찾고자 노력하였다. 셋째 그들은 신기와 담일청허지기라는 것을 사물의 가장 본원적인 기로서 인식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점들은 그들이 서로 비슷한 기의 사상을 가졌음을 보여준다. 덧붙여 양응수의 사례 또한 서경덕과 최한기와의 사상적 유사성을 입증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 양응수는 자신의 신기는 서경덕의 담일청허지기라고 언급함으로써, ‘모든 사물에 내재하는 본원적인 기’라는 상상력이 화담학과 밀접히 관련되어있음을 보여주었다.
3. 신기와 형질의 관계성 규정에 나타난 화담학적 성격
앞서 살펴보았듯이 최한기는 이 세상에 본원적인 기가 있다는 측면에서 서경덕의 사유와 긴밀한 관련성을 가졌다. 최한기가 의학 논의로 주로 제시하였던 신기와 형질 및 그 관계성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도 화담학적 이해는 유용하다.
(1) 신기는 하늘과 땅과 사람이 모두 같지만 형질은 하늘과 땅과 사람이 각각 같지 않다[30].
(2) 기는 하나이지만 사람에게 품부되면 자연히 사람의 신기가 되고, 사물에 품부되면 자연히 사물의 신기가 된다. 사람과 사물의 신기가 같지 아니함은 질(質)에 있지, 기에 있지 않다[31].
(3) 기의 성격은 우주에서 모이고 흩어지면서 사물과 짝하면 사물의 기[物氣]가 되니 물에서는 물의 기가, 흙에서는 흙의 기가, 불에서는 불의 기가 된다. 사물에 짝하지 않는 것은 곧 운화기이다. 어찌 기를 물, 흙, 불에서 그 계한(界限)을 나눌 수 있겠는가? 그 근본을 들면 일기(一氣)이고, 분수(分殊)의 측면에서 보면 만유(萬有)이다[32].
최한기는 (1)에서 신기는 하늘과 땅과 사람이 모두 같지만 형질은 하늘과 땅이 다르지 않다고 하였다. 그는 (2)에서 본원적인 기는 하나이며 이것이 사람에게 부여되면 사람의 신기가 되고 물건에 품부되면 물건의 신기가 된다고 하면서, 사람과 물건이 같지 아니한 것은 질에 있지 기에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하였다. 다시 말해서 기는 같고 질은 같지 않다는 논의였다. 여기에서 기는 신기를 의미하며, 주자성리학의 통체태극(統體太極) 즉, 리와도 흡사한 위상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이어 나오는 사람의 신기와 물건의 신기라는 말은 주자성리학에서 리와 기의 결합으로서의 성(性)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3)에서 최한기는, 기는 그 근본을 들면 일기이지만 분수의 측면에서 보면 만유라고 하여 기일분수와 기통질국의 논리를 전개하였다[33].
이러한 기통질국의 관념은 최한기에 앞서 양응수에게서 이미 그 특성이 잘 보였다. 양응수는 앞서 언급했듯이 기통질국의 논의를 전개하면서 신기와 형질의 이원적이면서도 연속적인 관계에 대해서 지적하였다. 양응수는 명나라 의사 이천(李梴, ?-?)의 ‘인간에게는 혈육(血肉)의 심(心)과 신명(神明)의 심이 있다’는 내용을 근거로 심에는 두 가지 기, 즉 신기(神氣)와 혈기(血氣)가 있다고 주장하였다[34]. 다음은 양응수가 인용한 이천의 관련 언급이다.
심(心)은 일신의 주인이며 군주의 관직이다. [첫째] 혈육의 심이 있는데, 형체는 마치 피지 않은 연꽃과 같으며 폐의 아래와 간의 위에 자리한다. [둘째] 신명(神明)의 심이 있는데, 신(神)은 기혈(氣血)이 화생(化生)하는 근본으로 만물은 이것으로 말미암아 성장한다. 색과 형상이 분명하지 않아서 있다고 일러도 어디에 있는가 하며 없다고 일러도 다시 존재하니 만사만물을 주재하며 허령불매한 것이 이것이다. 그러나 형(形)과 신(神)은 역시 항상 서로 의지한다[35].
이천은 형체를 갖는 심과 형체를 갖지 않는 신명의 심을 구분하였다. 형체를 갖는 심은 폐의 아래와 간의 위에 위치하는 것이지만, 신명의 심은 기혈을 화생시키는 신(神)으로 있는 듯 없고 없는 듯 다시 있으며 만사만물을 주재하고 허령불매(虛靈不昧)하다고 하였다. 양응수는 이천이 언급한 신명지심을 신기로 이해하였고, 해부학적 심장인 혈육지심(血肉之心)은 혈기로 이해하였다[36]. 이것은 기통질국의 기와 질에 각각 대응되었다. 양응수는 이천의 말을 빌어 와서 형과 신이라는 두 가지 개념을 활용하여 기와 질을 이원적으로 인식하였다.
그렇다면 신기와 형질은 현실에서 어떻게 서로 연결되어 있는가. 그 연결의 단서를 주돈이(周敦頤, 1017-1073)의 “형(形)이 생긴 이후에 신(神)이 지각(知覺)을 발(發)한다”에서 찾아볼 수 있다[37,]. 신기와 형질은 지각을 통하여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그 지각의 주체는 신기였으며, 형질은 신기가 지각할 수 있게 하는 재료이자 바탕이었다. 최한기에 앞서 이러한 신기와 형질, 지각의 관계성을 가장 잘 보여준 이 또한 양응수였다. 양응수는 주돈이의 말을 가져와 신기는 혈기에 의지하여 지각을 발한다고 하였다[38]. 양응수는 주돈이가 형이 생긴 이후에 신이 지각을 발한다고 말한 것을 신기가 혈기에 의지하여 지각을 발한다고 해석한 것이다.
천지조화는 단지 음양이 변하고 합하여 오행만물을 낳는 것인 까닭에 사람에게 있어서 신기는 양이 되고 혈기는 음이 되며 신기는 주가 되며 혈은 (신)기의 짝이 되어 일신을 운용할 수 있고 또한 신기가 지각하는 것을 도울 수 있다. 이 때문에 의학서에서 이르기를 눈은 혈을 얻어야 볼 수 있고 귀는 혈을 얻어야 들을 수 있고 손은 혈을 얻어야 쥘 수 있고 발은 혈을 얻어야 걸을 수 있다고 한 것이다. … 사람에게 내재해 있는 천지본연의 신기가 혈기를 얻어서 지각할 수 있으니, 이것은 하나의 이치가 아니겠는가! [39]
양응수는 『황제내경소문(黃帝內經素問)』 「오장생성편(五藏生成篇)」의 “간, 귀, 손, 발은 혈(血)을 얻어야 비로소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쥘 수 있고 걸을 수 있다” [40]는 내용을 인용하였다. 위 글에서 양응수는 신기와 혈기가 합쳐져서 일신이 운용되는 것이며, 신기는 혈기를 통하여 지각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인용문 마지막 부분 “사람에게 내재해 있는 천지본연의 신기가 혈기를 얻어서 지각할 수 있으니”에서 신기가 지각의 주체임을 분명히 하였다.
최한기는 양응수와 같은 맥락에서 하늘의 신기가 혈액을 갖춘 존재에 품부되면 지각할 수 있는 물건이 된다고 하였으며[41,], 귀와 눈 등을 통하여 듣고 보는 주체는 신기임을 말하였다[42,]. 또한 최한기는 인간이 지혜로워지고 빼어난 행실을 갖게 되는 것은 감각기관 내지 장부가 아니라 신기라고 하여 지각의 주체가 신기임을 분명히 하였다[43,]. 이 과정에서 최한기는 신기를 감각기관과 분리하여 인식하는 태도를 보이기도 하였다[44].
이처럼 그는 신기가 지각의 주체임을 분명히 말하였다[45,]. 또한 이와 동시에 그는 신기와 감각기관을 분리하여 이해하였다. 최한기는 신기가 우리 몸의 어떠한 특정기관에 종속되지 않고 독립적이며 매우 역동적으로 작용하는 것으로 생각하였다(이현구, 2000: 88-89; 정진욱, 2003: 67-78). 최한기는 이러한 신기가 우리 몸에서 작동하는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신기의 동정을 좇아서 눈에 집중하면 일신(一身)의 기가 눈에 모여 지극해지고, 귀에 집중하면 일신의 기가 귀에 모여 지극해지고, 코에 집중하면 기가 코에 모여 지극해지니 혀와 모든 촉감이 모두 그러하다. 이것은 상황에 따라서 분별하여 대처하여서 차례로 응수(應酬)하는 것이다. 그 사무가 중첩하여 [하나하나] 접하여 대응할 겨를이 없을 때에는, 이목구비(耳目口鼻)와 여러 감각기관이 교대로 접하고 응하여 옮겨가면서 집중하게 된다. …… 이때에 어떻게 눈은 간에 응하고 귀는 신장에 응한다고 논할 틈이 있겠는가! [46]
최한기는 신기와 감각기관이 어떻게 외부에 반응하는지를 설명하면서, 신기가 감각기관들을 통하여 외부를 감각하고 인지하는 상황을 세밀히 묘사하였다. 신기는 어느 특정한 감각기관에만 정주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몸에서 유동하면서 작용하였다. 최한기는 이러한 신기는 모든 감각기관들을 주관하며 통합하기도 한다고 하였다. 각 감각기관의 신기는 다시 하나의 신기가 되기도 하면서 자유자재로 우리 몸 안을 유동한다고 하였다[47,]. 또한 최한기는 신기는 감각기관뿐만 아니라 우리 몸의 혈액, 맥박, 호흡, 장부, 뼈 등을 반응시키는 궁극의 작동자라고 설명하였다. 인간의 모든 신체행위는 신기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48]. 이처럼 최한기는 신기라는 것이 자유자재로 우리 몸을 조종하면서, 신체의 기능을 선도하고 통합할 수 있다고 보았다.
신기가 갖는 우리 몸에서의 위상은 『신기천험』의 전광증 사례에서 더욱 명확히 확인해 볼 수 있다. 다음은 최한기가 전광증에 대해서 언급한 부분이다.
광(狂)의 경우 처음에 발병했을 때 대략 지식(知識)은 있다. 전(癲)의 경우 처음에 발병했을 때 곧 대략 미몽(迷蒙)하다가 오래되면 완전히 지식(知識)이 없어진다. 그렇게 되는 이유는 모두 몸의 기틀을 이루고 있는 신기가 어지럽게 되어 뇌에 누를 끼치기 때문이다. 대개 뇌는 신기가 엉겨 모여 있는 곳인데, 뇌에 병이 있을 때에는 신기를 어지럽히는 데 이른다. 이것은 곧 신기가 먼저 어지럽게 되어 뇌가 그것 때문에 불안해지는 것이다. … 기틀을 이루는 신기가 결함이 없으면 만사가 승순(承順)하게 되고, 기틀을 이루는 신기가 어지럽게 되면 곧 전광증이 되는 것이다[49].
만약 병이 깊어지면 완전히 회복되기는 기대하기 어려워지고, 고질병은 더욱 심해져 마침내는 지각운용이 상도를 벗어나는 데에 이르러 이에 전광증이 있게 된다. 이것은 신기운화가 조화를 얻지 못하여 이와 같이 지각운용이 상도를 반하는 데에 이른 것이다[50].
최한기의 전광증 해석은 그가 구상한 우리 몸과 신기의 관계를 잘 보여주었다. 전광증 부분은 최한기가 ‘영성(靈性)’을 신기로 바꾼 것 이외에는 홉슨(Benjamin Hobson, 合信, 1816-1873)의 『내과신설(內科新說)』을 거의 그대로 옮겨놓은 것이었다(金哲央, 1984: 95-99; 김성준, 1999: 26). 최한기가 영성을 신기로 대체한 사실은 신기가 인체에서 어떠한 위상을 가졌는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주목해야 한다. 왜냐하면 최한기는 영성을 신기로 대체해도 무리 없이 자신의 논리가 구성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전광증 해석에 있어서 홉슨이 영성에서 병의 원인을 찾으려고 했다면, 최한기는 신기로부터 병의 원인을 찾고자 하였다. 영성은 형질과 질적으로 다른 존재로서 형질에 의지하지 않고도 지각할 수 있었지만, 신기는 형질과 같은 기였으며 반드시 형질을 통해서만 지각할 수 있었다[51,]. 이것은 양자의 중요한 차이였다. 이처럼 영성과 신기는 엄연히 그 의미의 맥락이 달랐지만, 최한기는 양자를 교체해도 문맥상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 듯하다[52,]. 최한기는 신기가 마치 영성처럼 신체기관으로부터 독립적이면서 신체의 조정자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 홉슨의 영육론(靈肉論)과 최한기의 신기형질론(神氣形質論)은 본질적으로 상이한 이론이었지만, 영성을 신기에 육체를 형질에 대응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논리구조상 유사성을 가졌다고 생각된다[53].
최한기의 눈병에 대한 해석도 신기와 신체기관의 분리를 잘 보여주었다. 그는 기존 의서들이 눈병에서 논하는 것은 풍담(風痰)과 한열(寒熱)에 관한 것뿐이라고 하면서, 사실 얼굴의 눈 이면에 신기가 눈병의 원인이 됨을 언급하였다[54]. 최한기는 단순히 눈이라는 형질의 질병만을 언급할 것이 아니라, 그 형질의 병을 야기한 신기를 우선 인지해야 함을 말하였다. 이것은 전광증의 사례에서도 볼 수 있듯이 형질 병의 원인으로 그 배후의 신기를 든 것이었다.
그는 신기가 우리 몸의 진정한 통섭조종자라고 생각했으므로 뇌와 심장과 같은 어느 특정한 신체기관이 우리 몸을 주관한다는 논의에 대해서 반대하였다[55,]. 뇌와 심장이든 신체기관은 본질적으로 신기가 아니라 형질이었기 때문이다. 최한기는 뇌의 병을 사지(四肢)의 병보다 중시하였으며[56,] 생령지각(生靈知覺)의 생겨남과 기역(記繹)의 능력은 뇌에서 징험할 수 있다고 하여서 마치 뇌를 몸의 중심으로 하는 설을 주장한 것처럼 보인다[57]. 하지만 최한기가 주장한 신기-형질 논의에서 보면, 뇌가 중요한 신체기관임에는 분명하지만 신기 그 자체는 아니었다. 따라서 그가 뇌주설(腦主說)을 주장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심의 문제 또한 마찬가지였다. 최한기는 심이 지각운용을 주관한다는 것은 장부의 심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신기의 심을 의미한다고 하였다[58,]. 그렇다면 여기에서 말한 신기의 심은 일반적인 마음을 말하는 것인가? 이에 대해서 최한기는 “옛날에 사람들을 등용함에 심에 대해서 논한 것이 많지만 심이란 신기의 영향(影響)이니, 어찌 신기를 들어서 운화와 인도를 분명히 꿰뚫고 형질을 잡고서 곧장 본원에 통하며 내외를 합쳐 체용에 틈이 없게 하는 것만 하겠는가!” [59]라고 하였다. 최한기는 장부와 마음 이면의 더 깊은 곳에 내재되어 있는 신기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뇌주설, 심주설(心主說) 모두를 비판하였던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였다. 이것은 그에게 얼마나 화담학으로부터 유래한 신기에 대한 인식이 강하였는가를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요컨대, 최한기의 신기와 형질 논의는 화담학의 기통질국 논의를 통하여 이해할 수 있다. 신기는 형질을 통하여 지각을 일으키며 그 발현된 지각을 통하여 신기와 형질은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 구별 또한 명확하였다. 최한기는 지각의 주체자로서 신기를 형질 앞에 두었고, 양자의 관계를 분절적이고 독립적으로 보았다. 그러한 점에서 비록 그 개념과 맥락에 있어서는 명확한 차이를 보였지만, 최한기는 홉슨의 영성을 신기로 대체할 수 있었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사유를 통하여 최한기는 지각을 뇌가 주도한다는 뇌주설과 심장이 주관한다는 심주설 모두를 비판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이 신기와 형질을 구분하는 사유는 앞서 양응수에게서도 볼 수 있었던 특징이었으며, 화담학의 기통질국의 관점에서 그 논리의 구조를 이해해 볼 수 있다.
4. 서양 해부학 수용의 화담학적 성격
16세기 유럽의 르네상스 시대 해부학이 발전하는 데 신플라톤주의는 중요한 영향을 끼쳤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신플라톤주의에 기초한 신학은 모든 자연과 인간에 깃든 신의 섭리를 밝히고자 하였고, 이것은 인간의 정밀한 이해를 통하여 가능할 수 있다고 설명하였다. 이 신플라톤주의는 수학과 기하학을 그 정밀한 이해의 방법으로 제시하였다(크로스비, 2005: 224-226). 이러한 사유는 수량화라는 사물 이해의 새로운 기준점을 서양에 전파하였고, 이어 이 수량화된 것들을 다시 시각화하려는 노력들이 뒤따랐다(크로스비, 2005: 277-281). 베살리우스(Andreas Vesalius, 1514-1564)를 중심으로 한 해부학 연구 또한 16세기 유럽에서 일어난 이러한 새로운 사상경향의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조성일, 2008: 15; 18-21; 송창호, 2015: 166-167). 그는 인간의 몸을 위대한 창조자의 지혜가 드러난 것으로 보면서(구리야마, 2013: 126), 『인체 구조에 대하여(De Humani Corporis Fabrica)』를 통하여 인체 내부를 측량 관찰하고 수치화하고 이미지화하고자 하였다.
최한기는 유럽에서 해부학의 발달을 촉진했던 수량화의 문제의식을 일부 공유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그는 경기도 개성 출신이었다. 개성은 일찍부터 상업이 발전했던 곳으로 수량화 문제와 긴밀하게 연관된 공간이었다. 특히 이 지역에서 발흥한 화담학은 우주와 세계를 기수(氣數)를 통하여 인식하고자 하였으며, 이 기수를 측정함으로써 리는 추론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18세기 후반 조선의 대표적인 천문역법 전문가였던 서명응(徐命膺, 1716-1787) 가문이 개성 출신이었던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조창록, 2004). 서명응은 리를 밝히는 데 있어서 기수의 중요성을 역설하였다[60]. 이것은 기하학을 통하여 신의 섭리를 알고자 했던 노력과 논리구조상 흡사한 점이 있었다.
최한기 또한 사물을 정확히 파악하고 궁극적인 진리에 도달하는 데 기수가 갖는 중요성을 역설하였다. 그는 『신기통(神氣通)』의 「기수지학(氣數之學)」, 「수학생어기(數學生於氣)」에서 이 문제를 적극 논하였다. 그는 수가 아니면 그 기를 운용할 수 없고, 기가 아니면 만물을 궁격할 수 없다고 하였으며[61,], 그러한 차원에서 산수지학(算數之學)의 중요성을 역설하였다[62,]. 이에 덧붙여 최한기는 시각을 중시하여 『신기통』 저술에 있어서 「체통」 다음에 「목통」을 두었으며, 다른 감각보다 눈이 갖는 역할을 중시하였다[63,]. 특히 최한기는 새로운 문물을 만드는 데 있어서 눈이 갖는 역할을 강조하였다[64,]. 그러한 점에서 최한기는 16세기 유럽 해부학 발전에 중요한 기반이었던 수량화·시각화의 문제의식과 깊은 공유점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65].
이와 같이 최한기는 수량화·시각화의 관점에서 해부학에 대한 서양의 문제의식을 공유하였다. 하지만 이것은 최한기가 가졌던 신기와 형질의 사유 가운데에서 주로 형질과 관련된 문제의식 속에서 이루어진 측면이 강하였다[66]. 이 문제를 좀 더 상세히 알아보기 위하여 그의 중국의학과 서양의학 비판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먼저 다음은 중국의학에 대한 그의 대략적인 입장이다.
중국[華夏]의 의서는 이미 기화(氣化)의 맥락에 어두워서 오직 방술(方術)로 억지로 가져다 맞춘 것에 의지하였다. 천문의 방술로 억지로 가져다 맞춘 것을 반드시 의술에서 참고하여 증험삼고, 지리의 방술로 억지로 가져다 맞춘 것을 반드시 의술에 끌어다 부합시키며, 학문의 억지로 가져다 맞춘 방술 또한 의술에 가져와 인용하니 곧 방술의 의서가 이루어져서 자연히 인체의 부위맥락과는 점점 차이가 나고 멀어졌다. 병을 진단하고 약을 쓰는 것 모두 방술을 좇았다. 약의 오미(五味)를 오행에 부속시켰고 또한 장부를 오행에 배속시켰다. 이에 상생과 상극의 설이 있게 되었다. 마침내는 득효(得效)의 여부 또한 방술로써 자신하였다. 이것이 [중국에서] 의술이 천한 기예가 된 이유이다[67].
최한기는 중국[華夏]의 의서는 기화의 맥락에 어두워서 오직 방술로 억지로 꿰어 맞춘 것이 대부분이라고 하였다[68,].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인체의 부위 맥락을 정확히 규명하지 못하게 되어서 방술에 더욱 의지하게 되는 악순환을 거듭하게 되었다고 지적하였다. 이것을 정리하면, 그는 중국의학이 첫째 기화의 맥락에 무지하였고, 둘째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인체의 부위맥락과 같은 형질을 정확히 규명하지 못하였다고 지적하였다. 이러한 지적에는 중국의학이 서양의학의 장점, 즉 형질을 정확히 파악하는 점을 결여하고 있다는 인식이 내포되어 있었다[69].
이와 같다면 최한기는 서양의학에 전적으로 우호적인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최한기는 서양의학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었다. 최한기는 서양 해부학이 갖는 본질적인 한계점을 지적하였다. 최한기는 서양해부학에 대해서 많은 부분 그 공로를 인정하였음에도 불구하고[70,], 죽은 사람을 통하여 얻게 되는 해부학 지식에 대해서 기본적으로 비판적이었다(정진욱, 2003: 78). 그는 죽은 사람의 내장기관을 살펴보는 것은 명확한 한계를 갖는다고 생각한 것이다. 왜냐하면 시체에는 살아있는 사람의 생기(生氣)가 부재하기 때문이었다[71].
최한기는 인간의 몸은 단순한 기계가 아니며[72,], 신체에서 발현되는 신기운화를 중시하였다[73,]. 다른 부분에서 비록 그는 인간 몸의 형태는 기계라고 하기도 하였지만, 그 내부에 신기를 담고 있다고 하여서 사람의 몸을 단순한 기계로서 바라보지 않았다[74,]. 따라서 최한기에게 서양 해부학은 명확한 한계를 갖는 학문이었다[75]. 최한기에게 형질은 신기와 함께 작동할 때에만 의학적으로 의미가 있었던 것이다. 서양적 관점에서의 수량화·시각화가 작동하기 어려운 신기라는 지점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러한 최한기의 신기 인식은 일본 도쿠가와 시기 서양 해부학을 비판하면서 후세방파라는 전통의학론, 즉 금원사대가 의학을 전개했던 사노 야스사다(佐野安貞, ?-?)의 『비장지(非藏志)』(1760) 논의와 공명하는 점이 있었다[76].
무릇 장(臟)이 장인 것은 형상을 이르는 것이 아니라 신기를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이 사라져 기가 흩어지면 장은 단지 허기(虛器)일 뿐, 무엇으로써 시청언동이 그 [상응하는] 장부를 따름을 알겠는가! 또 무엇으로써 영위(榮衛)와 삼초(三焦)의 통기(統紀)를 볼 수 있겠는가! [77]
사노는 기가 사라진 장기는 허기일 뿐이니, 이것을 해부하여 본다고 해서 무슨 얻는 것이 있겠는가하고서 해부학의 유용성을 부인하였다[78,]. 사노와 최한기 사이에 놓여있었던 공통된 인식을 짐작케 해준다. 그것은 우리 몸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신기가 갖는 중요성이었다[79,]. 사실 고대 중국의학에서 중요한 고찰의 대상은 장기나 소화관, 골격이 아니라 그 속을 흐르는 기였으며(이시다 히데미, 1996: 25), 신체를 치료한다는 것은 신체 내의 유동하는 기를 치료한다는 것을 의미하였다(이시다 히데미, 1996: 30). 그러한 점에서 보면, 최한기가 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던지 간에 그는 본질적으로 기를 중시하는 고대 중국의학의 정신 안에 있었다[80].
최한기는 서양의 과학기술이 기를 정밀히 측정하고 수량화하는 것에 관심을 표명하였고, 또한 이것을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81,]. 그는 “기수(氣數)가 밝혀져서 신운화(身運化)의 강약과 진퇴가 실제 근거를 갖게 되고, 해부의 증험이 많아져서 몸 전체부위의 이루어진 기틀과 운동에 다른 논의가 없게 되었다” [82,]고 하여 서양과학의 성과들을 적극 인정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궁극적으로는 신기조차 수량화하고 측정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연결될 수도 있다. 하지만 신기에 대한 최한기의 사유는 서양과학과 의학으로는 종국적으로 온전히 설명되기 어려운 지점이 존재하였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몸을 어떠한 기계적인 존재로 보는 입장으로는 이 신기의 문제를 정확히 파악하기 어려운 지점이 있게 되는 것이다[83]. 다음은 그의 신기에 대한 사유가 오히려 천인감응의 고대 중국의학과 그 맥이 닿아있음을 보여주었다.
(1) 의학은 단지 일신(一身)의 병이 있는지 병이 있지 않은지의 여부만을 따져서는 안 되고, 마땅히 운화기(運化氣)의 처음과 끝을 자세히 이해하여 사람이 자신의 생각대로 끌어와 부합시킬 수 없는 것임을 정확하게 보아서 오직 맥락을 따라서 기화(氣化)를 승순(承順)하는 것에 있다. 그 근원에서 해, 별, 땅, 달이 밀고 당기며 전환(轉圜)시키는 기의 대략을 깨달아 얻으면 만사를 순히 따를 수 있어 (의학의) 방향을 거의 얻게 될 것이다. 이것은 우주를 통찰(統察)하여 경험을 쌓아 허(虛)를 없애고 실(實)로 나아가 기화를 규명하는 것에서 말미암는다[84].
(2) 보제(補劑)나 단방(單方)의 효과 여부는 사람에 따라서 다르다. 이 사람에게는 적합한 효과가 혹 저 사람에게는 적합하지 않는다. 비록 한 사람으로써 말한다고 하더라도 작년에 이 약을 사용해서 효과를 얻은 자가 지금에는 이 약을 사용하여 효과를 보지 못하거나 혹 이 때에는 효과를 얻은 약이 다른 때에는 효과를 보지 못한다. 이것은 삼등운화(三等運化)가 고르지 못하여 기혈과 장부에 이 약이 때때로 적합해지거나 때때로 적합해지지 않기 때문이다[85].
최한기는 (1)에서 우주자연의 기와 인간의 몸에서 작동하는 기의 존재와 그 상호작용성에 대해서 언급하였다. 또한 그는 (2)에서 사람과 때에 따라서 약의 효과가 달라질 수 있음을 언급하였다. 그 이유는 하늘과 인간, 땅의 운화가 고르지 못한 이유 때문이라고 하면서 자연과 인간 몸의 상호연관성에 대해서 말하였다. 이러한 점에 주목한다면, 최한기의 신기 관념은 우주자연과 인간 몸에서 발현되는 기의 상호작용을 중시한 전통적인 중국의학과 단절된 것으로 보기 어렵다[86,]. 인간 몸을 자연으로부터 유래한 것으로 보고, 이를 연관시켜 이해하고자 한 것은 오히려 음양오행론의 자연과 인간을 아우르는 사고방식과 유사성을 가졌다[87]. 이러한 점은 최한기가 고대 중국의학의 전통을 한편에서 충실히 계승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다시 기존 중국의학과 구별되는 것은 최한기는 첫째, 이 신기의 성격을 도식화하거나 고정적인 것으로 보지 않았다는 점이다. 해부학을 포함해서 최한기의 음양오행, 오운육기, 사원소설 비판에는 어떠한 공통된 의도가 담겨 있었다. 최한기가 보기에, 이것들은 도식적이고 고정된 논의여서 기의 의미를 온전히 담아내지 못한다는 것이었다[88]. 둘째, 이 문제와 관련해서 앞서 언급하였듯이 최한기의 신기는 고대 중국의학의 그것보다 상대적으로 형질과의 관계에 있어서 독립적인 성격을 가졌다. 신기를 특정 신체기관들과 긴밀히 결부시켜 이해하고자 했던 『황제내경』의 시도들과 비교해 보면, 최한기가 주장한 신기 관념의 의미가 좀 더 선명히 드러난다.
심장이라는 것은 군주의 관직이니 신명(神明)이 여기에서 나오고, 폐라는 것은 재상과 사부의 관직이니 치절(治節)이 여기에서 나온다. 간이라는 것은 장군의 관직이니 모려(謀慮)가 여기에서 나오고, 담이라는 것은 중정(中正)의 관직이니 결단이 여기에서 나온다. 전중(膻中)이라는 것은 신사(臣使)의 관직이니 희락(喜樂)이 여기에서 나온다. …… 무릇 이 열 두 기관은 어느 것 하나 없어서는 아니 된다. 그러므로 군주가 밝다면 아래가 평안해진다. 이것으로써 양생하면 장수하게 되니 죽을 때까지 위태롭지 않다. 그것으로써 천하를 다스리면 크게 번창하게 된다. 군주가 밝지 못하면 열두 기관이 위태롭게 되어 길이 막히게 되고 통하지 않게 되어버리니 몸이 이에 크게 상하게 된다. 이것으로써 양생하면 위태롭게 된다. 그것으로써 천하를 다스릴 경우 근본이 크게 위태롭게 되니 경계하고 경계한다[89].
위와 같이 『황제내경』의 의학은 특정 신체기관과 특정한 정신적 요소를 일대일 대응시켜 이해함으로써 ‘고정적인’ 측면을 가졌다(가노우 요시미츠, 1999: 272: 294-295; 김희정, 2008: 240-247). 또한 그럼으로써 『황제내경』은 신체기관이 어떠한 위계질서를 형성하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김희정, 2008: 243).
최한기는 『황제내경』의 이러한 관점을 신기를 고정적이고 도식화하는 분배의 설이라고 하면서 비판하였다(이현구, 2000: 90). 앞서 언급했듯이 최한기에게 신기는 우리 몸에서 어느 특정 신체기관에 귀속되거나 머무는 것이 아닌, 그 자체로 독립적이고 유동적인 것이었다. 최한기는 신기를 각 장부에 기계적으로 대응시키지 않았기에, 즉 의미상 신기를 형질 밖에 두었기 때문에 오히려 장부에 대한 독립적이고 체계적인 인식이 가능할 수 있었다. 만약 각 장부에 특정한 정신적인 요소나 음양오행을 선험적으로 귀속시킨다면 장부 본래의 구조와 기능을 헤아리는 데 어려움이 있게 된다고 최한기는 보았다[90].
최한기는 우선 신체기관의 구조와 기능을 정확히 파악함으로써, 신기를 파악할 수 있다는 입장을 가졌다. 그는 만약 신기만을 알고 형질에 대해서 무지하다면 발전이 없을 것이라고 하였고, 형질을 온전히 알지 못한 자는 신기를 헤아릴 수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서양의 해부학이 인체의 전체부위와 기혈맥락을 손으로 직접 만져서 살펴보고 눈으로 확인을 거쳐서 이루었음에 대해서 최한기가 그 의학적 공로를 인정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93,]. 그는 해부도를 통하여 살아있는 사람의 장부를 이해하고 이를 통하여 신기의 발용을 이해하고 신기의 발용을 통하여 신기의 전체를 이해하고 신기의 전체를 통하여 우주 전체의 신기를 이해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졌다[94,]. 이것과 같은 맥락에서 그는 신경과 혈관을 정확히 이해하면 천기(天機)가 눈에 훤하게 드러날 것이니 천기에 밝게 되면 의학의 절반은 완성된 것이라고 하였다[95,]. 이것은 최한기가 보기에, 기존 음양오행과 오운육기에 의한 인간 몸의 이해와는 그 방향을 달리하는 귀납적이고 합리적인 것이었다[96]. 이것은 최한기가 신기에 어떠한 선험적인 성격을 부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서양의 해부학을 통하여 신기를 발견하고자 하였던 최한기 의학 논의의 사유기반을 좀 더 상세히 이해하기 위해서 일본의 해부학 발전에 기여한 고방파(古方派) 고토 곤잔(後藤艮山, 1659- 1733)과 그의 제자 야마와키 도요(山脇東洋, 1705-1762)와의 비교가 필요하다. 이들의 의학이론은 당시 일본에서 주자성리학을 비판하면서 일어난 고학(古學)과 깊은 관련성을 가졌다. 고학은 주자성리학이 관심을 가졌던 실제 세계의 배후에 있는 형이상학적인 원리나 음양오행 논의의 체계적 상관성에 대해서 주목하지 않았다(마루야마 마사오, 1995: 195-196).
이것을 해부학과 관련해서 말한다면, 장기의 실제적인 구조와 기능을 사물의 모습 그대로 인지하면 되는 것이지 음양오행과 오운육기를 통한 형이상학적인 설명은 불필요하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들은 사물 이면의 체계적 상관성을 부정하고 ‘즉물적(卽物的)’인 태도를 취하고자 했던 것이다. 본 글에서 ‘즉물적’이라는 말은 감각할 수 있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인식하고자 하는 태도를 의미한다. 이것은 구체적으로는 음양오행과 오운육기 논의 및 눈에 보이지 않거나 감각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을 말한다. 야마와키 도요가 고학의 대표적인 학자였던 이토 진사이(伊藤仁齋, 1627-1705)에 비유되기도 하였다(富士川游, 2006: 447)는 점은 해부학과 고학의 긴밀한 관계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고토 곤잔은 음양오행과 오운육기 논의를 비판하고서 음양오행의 구분 없이 모든 기를 일기(一氣)로써 통합하였다(富士川游, 2006: 387). 고토 곤잔은 음양분배의 설을 비판하면서 기가 장부(臟腑)에 유체됨으로써 질병이 발생한다는 일기유체설(一氣留滯說)을 주장하였다[97,]. 이것은 사실 최한기의 신기 논의와 흡사한 점이 있었다. 최한기 또한 음양오행과 오운육기의 설을 배격하고 모든 기를 신기로 일원화하였으며, 모든 질병의 발생과 원인을 신기에 두었다. 그는 질병이 발생하고 사라지는 것은 신기가 운화하는 것으로 인하여 옮겨 다닌다고 하였다[98]. 그러한 점에서 일기와 신기 관념은 상호 흡사한 점이 있었다. 하지만 이후 고토 곤잔의 문제의식은 제자들에 의하여 기의 문제보다는 장부와 형질에 대한 관심으로 이동하였다. 이것은 즉물적인 사실성과 구체성을 지향하였던 고학의 문제의식에서 볼 때, 어느 정도 예측 가능했던 방향이라고 할 수 있다. 야마와키 도요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리(理)는 혹 전도될 수 있지만 물(物)은 어찌 속일 수 있겠는가! 리를 먼저하고 물을 뒤에 하면 아주 지혜로운 사람이라도 실수가 없을 수 없지만, 물을 시험하고서 그것에 대하여 의견을 피력하면 용렬한 사람도 근거할 곳이 있게 된다. …… 소나무는 소나무이며 잣나무는 잣나무이며 나는 것은 날고 달리는 것은 달린다. 이것은 천고에 변하지 않는 것이며 지역이 달라도 오류가 없는 것이니 어찌 명백하고 분명한 것이 아니겠는가? …… 복고(復古)의 학으로써 생각해보고, 경험의 실제로써 징험하니 이 얼마나 다행인가? [99]
야마와키 도요는 사물 이면에 존재하는 리와 같은 추상적인 것보다는 눈에 보이는 사물 그 자체를 강조하였다[100,]. 야마와키 도요는 직접 시체를 해부하여 『장지(蔵志)』를 저술하였으며 인체에 대한 기존의 이해가 잘못되었음을 지적하였다. 그는 자신의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는 대상, 즉 형질의 문제에 집중한 것이다. 야마와키 도요의 둘째 아들 야마와키 토우몬(山脇東門, 1736-1782)은 외과술인 자락술(刺絡術)을 발전시켰다. 그는 일기가 유체되어 생긴 병(어혈)을 약이 아닌 수술로써 제거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富士川游, 2006: 461-461, 481-482). 이것은 화(和)보다는 한(汗)·토(吐)·하(下)를 중시했던 고의방의 문제의식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富士川游, 2006: 454). 수술과 한·토·하를 중시하는 것은 형질의 문제와 깊은 관련성을 가졌다. 화가 눈과 같은 감각으로 확인하기 어려운 형질 내면의 현상이었던 데 비해서, 한·토·하는 감각 기관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는 형질의 문제였던 것이다. 또한 그는 해부도인 『옥쇄장도(玉碎臟圖)』를 저술하기도 하면서 해부학 발전에도 많은 기여를 하였다(김성수·신규환, 2017: 147-148).
이러한 형질 중심의 문제의식은 이후 『해체신서』에 이르러서 절정에 다다랐다. 스기타 겐파구(杉田玄白, 1733-1817)는 “대체로 장부와 골절의 위치에 하나라도 차이가 있다면 사람이 어떻게 서 있을 수 있으며, 치료는 무엇에 근거하여 시행할 것인가!”라고 하였다[101,]. 이를 통하여 고의방과 난학의 결합은 더욱 심화되어 갔다(富士川游, 2006: 483). 이처럼 일기유체설의 문제의식은 결국 해부와 수술이라는 외과학으로 전이되어갔다. 이것을 최한기의 의학 논의 속에서 설명한다면, 질병의 원인을 신기가 아닌 형질에서 파악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이유로 신기를 질병의 원인으로 인지하고자 했던 최한기와는 명확히 구별되는 방식이었다. 이것은 신기를 의학논의의 중심에 두느냐 아니면 형질을 의학의 중심에 두느냐의 논의였다. 그들 모두 음양오행론에 부정적이었다고 하더라도 양자 사이에는 이러한 차이가 존재하였다. 그 차이는 전통적인 사유와의 연속과 단절이라는 문제와 깊은 관련성을 가졌으며 궁극에는 서양 해부학 수용과정에서도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즉 서양 해부학을 전면적으로 수용할 것인가, 아니면 전통중국의학적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수용할 것인가의 문제와 관련성을 가졌다.
중국에서도 고학·고증학과 같은 새로운 학문의 성립과 새로운 의학은 서로 짝하였다. 고학·고증학의 기존 학문체계, 즉 주자성리학과 같은 학문에 대한 비판은 해부학을 통하여 새로운 의학을 구축하고자 했던 청나라 왕청임(王淸任, 1768-1831)의 의도와 부합하는 바가 많았다[102,]. 왕청임은 질병치료에 있어서 해부학이 중요하다고 하면서[103,] 전통적인 내경의학이 주장한 심장이 군주지관으로서 신명(神明)을 내어 우리 몸을 통솔한다는 심주설에 대해서 의심하였고, 그 연장선상에서 각 장부가 특정한 신정(神情)을 포함하고 있다는 설에 대해서도 회의하였다[104,]. 그러면서 그는 심장이 아닌 뇌가 정신과 사유 활동을 담당하는 기관이라고 하였다[105,]. 그는 『황제내경』의 논의들을 부정하였던 것이다. 대신에 그는 원기(元氣)를 생명의 근원이라고 하면서 이원기를 통하여 인체의 유력(有力), 무력(無力), 죽음을 설명하고자 하였다[106].
왕청임이 원기 개념을 설정하고 장부에 신정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본 것이나 원기를 통하여 인체의 운용체계를 논하려고 한 점은 최한기의 신기, 고토곤잔의 일기 논의와도 흡사한 부분이 있었다. 음양오행, 오운육기와 같은 선험적으로 제시된 체계적 상관론을 부정하는 데 신기, 일기, 원기와 같은 포괄적인 기론이 표명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왕청임이 원기가 기관(氣管)의 안에 있다고 한 점은 최한기와 달랐다. 최한기의 신기는 어떠한 특정한 신체기관에 편중되어 있다고 말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이점은 최한기와 왕청임의 중요한 차이였다.
요컨대, 최한기의 해부학 수용에는 독특한 사상의 지점들이 있었다. 최한기는 서양에서 해부학이 발달할 수 있었던 수량화·시각화의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것으로만 최한기의 해부학 수용문제를 논하기는 어렵다. 최한기는 해부학 수용자들이 일반적으로 가졌던 즉물적인 입장에 전적으로 기울지 않았다. 이것은 그가 가졌던 신기-형질의 관계성에 대한 독특한 시각과 관련되어 있다. 최한기는 신기와 형질의 사유를 통하여 서양의학과 중국의학을 동시에 비판하였다. 그것은 서양의학은 신기에 대한 인식을 결여하였다는 점, 중국의학은 형질을 잘 알지 못한다는 점으로 요약될 수 있다. 엄격히 말해서 최한기는 그 어느 의학에 기울지 않고 신기와 형질의 균형적인 문제의식을 유지하였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는 일본에서 이루어진 방식의 서양 해부학 수용으로 나아가지 않을 수 있었다. 일본에서의 해부학 발전은 형질을 중시하는 고학의 논의를 기반으로 이루어졌지만, 최한기는 신기와 형질을 동시에 중시하는 화담학을 통해서 서양의 해부학을 수용하였다. 고학을 매개하지 않는 서양 해부학 수용이라는 점에서 최한기는 동아시아의 서양 해부학 수용 역사에서 독특한 위상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5. 최한기 의학 논의의 정치사상
인간의 몸은 정치제도를 상징하는 오래된 메타포였으며(터너, 2002: 329), 역사적으로 의학 논의는 정치사상과 밀접한 관련성을 가졌다(Unschuld, 2010: 12). 그 시대의 몸과 의학 논의는 그 시대의 사회와 정치에 대한 상상력을 반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최한기의 의학 논의 또한 그의 정치사상을 반영하였음을 추론해 볼 수 있다. 『신기천험』의 의학 논의는 최한기의 생애 후반기에 주로 이루어졌다. 그의 정치사상이 거의 완성된 이후에 그의 의학 논의가 형성되었다. 그러한 점에서 그의 의학 논의 속에는 자연스럽게 그가 가졌던 정치사상이 습합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 부분에서는 그의 의학 논의를 정치학적 관점에서 해석함으로써, 그가 전개했던 의학 논의와 정치사상의 상호관련성을 다루고자 한다.
장부에 대한 『황제내경소문』의 주장은 장부의 기능을 관직에 유비한 것이었지만, 내면적으로는 사회의 고정적인 위계질서를 반영하고 있었다(김희정, 2008: 243). 즉, 사회적 관계와 권력에 대한 인식이 장부에 대한 인식 또한 규정하고 있었던 것이다[107,]. 특히 심장의 강조에서 군주의 권한을 강화시키고자 하는 관념을 읽어볼 수 있다. 인간 몸의 장부가 각각 위계를 갖고 특수한 신정(神情)을 전유한다는 것은 집권적 봉건제의 정치체제와 닮아있었다[108,]. 『황제내경소문』의 논의는 서양에서 혈액과 심장을 강조하였던 영국인 하비(William Harvey, 1578-1657)의 문제의식과 흡사하였다. 하비는 순환하는 혈액과 몸의 중심기관으로서 심장의 중요성을 강조한 바 있었다. 이것은 당시 영국의 군주권 강화와 중앙집권성을 반영하였던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스크리치, 2008: 297-306; 운슐트, 2010: 319-325).
서양과 일본에서 해부학의 발전은 몸과 사회에 대한 다양한 상상력을 반영하였으며, 혹은 자극하였다. 서양에서는 르네상스 운동과 함께 인간 신체에 대한 관심이 증대하였으며, 그 관심은 인체의 근육과 균형에 대한 것이 주를 차지하였다. 인체의 균형과 미를 추구하였던 회화가 해부학에 많은 영감을 준 것은 이러한 상황을 잘 보여주었다(그레고리, 2001: 54-61; 야마모토 요시타카, 2010: 216-231). 이러한 경향은 의학의 관심을 장기에서 뼈와 근육으로 이동시켰다. 베살리우스는 기존 몬디노(Mondino dei Luzzi, 1270-1326)의 복부와 장기 중심의 해부학을 골격, 근육과 신경의 영역으로 확대시켰다(조성일, 2008: 30; 55; 68). 베살리우스는 뼈와 관절, 근육을 그의 『인체 구조에 대하여』의 앞부분에 배치하였다[109].
이것은 근육과 신경의 최종 운용자가 뇌라는 점에서, 결국 그의 해부학은 뇌의 역할과 의지를 강조하는 것으로 귀착될 수 있었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해부를 통하여 인간 몸에서 근육을 발견하는 것이 자아의 등장과 긴밀한 관련성을 갖는다는 지적은 주목할 만하다(구리야마, 2013: 146-154). 자신이 직접적으로 통제하기 어려운 소화와 맥박 작용보다 자신이 스스로 움직일 수 있는 근육에 더 주목한다는 것은 자아를 발견하는 문제와 밀접한 상호 관련성을 갖는다는 설명이다. 그렇게 발견된 자아가 뇌에 깃들어 있다고 믿는다면, 근육과 신경을 발견하고자 하는 해부학은 결국 뇌주설과 상호 긴밀한 관련성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110].
해부학과 뇌주설을 사회적인 차원으로 전환하여 설명해보면, 해부학에 호의적인 이들은 뇌주설을 지지함으로써 뇌가 명령하고 신체가 따른다는 방식의 수직적 위계질서를 강조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기 쉬었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 해부학의 발전과 절대주의 국가와의 관련성 또한 논해졌다(조성일, 2008: 4). 해부학에는 인체를 장악하고자 했던 군주 중심의 절대권력이 자리 잡고 있었다는 것이다. 또한 해부학을 통하여 마련되기 시작한 인간 몸을 기계로서 바라보는 사유는 인간 몸의 수동성을 증가시킬 수 있었고, 그 기계를 작동시키는 절대권력을 상상하도록 만들 수 있었다[111,]. 해부학을 발전시켰던 베살리우스는 대대로 궁정과 긴밀한 관계를 맺던 의사 가문 출신이었고, 그의 저서『인체 구조에 대하여』는 신성로마제국 카를 5세(1500-1558) 황제에게 헌정되었다. 또한 베살리우스는 카를 5세의 주치의로서도 오랫동안 활동하였다[112]. 이것은 그가 가졌던 친왕적이고 친국가적인 성향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일본에서의 해부학 발달 또한 권위적인 정치사상과 긴밀한 관련성을 가졌다. 일본의 해부학은 고학에 많은 영향을 받고 있었다. 고학의 정치사상을 단순히 요약하면 성인의 절대화라고 할 수 있다. 성인이라는 신체화 된 진리가 존재하며, 이 성인이 구체적으로 제시한 법과 제도를 사람들은 그대로 따르면 되는 것이었다. 고학은 성인의 길을 이해함에 있어서 성인이 정한 예악형정의 실천을 중시하였다(마루야마, 1995: 200-201). 그러한 점에서 사람들은 성인의 법과 제도만 배우면 되지, 음양오행과 오운육기처럼 사물 그 자체의 원리나 질서에 대해서는 궁구할 필요가 없었다. 이것은 성인과 일반인들 사이에 놓여있는 연속성이 단절되고 성인의 권위가 한층 절대화하는 과정으로 해석된다(마루야마, 1995: 192; 213-214). 즉 권위적인 질서의 심화인 것이다.
만약 성인을 막부정권으로 상정한다면, 고학은 막부정권의 정당성은 이미 자명한 것이며 그것에 추호도 의심할 필요가 없다는 사유를 마련해 줄 수 있었다. 그러한 점에서 고학은 막부 및 사무라이 집권층의 이해를 대변한다고 할 수 있다(마루야마, 1995: 253-259). 그러한 고학과 관련성을 갖는 해부학 또한 막부정권의 자명성과 절대성을 재현하는 중요한 수단이 될 수 있었다. 실제 일본에서 해부학의 발전은 막부정권과 긴밀한 관계성 속에서 이루어졌다(스크리치 2008: 175-184). 그리고 고학과 해부학이 비판해마지 않았던 음양오행과 오운육기의 사유는 비록 한편에는 위계질서를 함의하기도 하였지만[113,], 본질적으로는 상생과 상극이라는 사물 이면의 형이상학적인 역동성을 의미하였으며[114] 그러한 이유 때문에 막부권력이 추구하였던 안정성·영원성과는 일정한 거리가 있었다.
해부학은 음양오행과 오운육기의 형이상학을 비판하였으며, 점차 장부의 형질적인 구조만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이동하였다. 그럼으로써 해부학은 고학의 정치적 상징들과 더욱 잘 결합할 수 있는 결과물을 만들어내었다. 그것은 기존 의학의 해부도가 잘못되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인체구조의 즉물적인 자명성을 선포하는 것에 더하여, 뇌가 우리 몸을 주관하고 외부 반응을 통제한다는 뇌주설의 형태로 나타났다. 이 뇌주설은 특정한 신체기관이 우리 몸을 주관한다는 측면에서 수직적이고 권위주의적 질서와 관련성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이 뇌이든 심장이든 어떠한 것에 의하여 신체가 주도적으로 운행된다는 사유는 국가적 관계에 유비될 때 통치자에 의한 지배와 종속의 성격을 내포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생각된다(구리야마, 2013: 161-163; 김태진, 2016: 225).
앞서 살펴본 최한기의 중서의학 비판에서 중서의학이 함의한 이러한 위계적 정치성에 대한 그의 비판의식을 읽어볼 수 있다. 최한기는 기존 중서의학이 신기에 대해서 잘 살피지 못했기 때문에 심주설·뇌주설과 같은 어느 특정한 형질의 신체기관을 주로 하는 논의에 빠졌다고 지적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는 신기를 의학 논의의 주요 주제로서 견지하였다. 최한기에게 신기의 역할은 매우 포괄적이며 절대적이었다. 신기는 장부에 포섭되지 않았고 독립적이었으며, 장부에 명령을 내리는 존재였다. 이 신기는 우주로부터 왔으며, 세계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내재되어 있는 것이었다. 신기는 어떠한 특정한 관계에 포섭된 국지적인 존재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보편적이고 무중심의 존재였다.
이러한 신기에 대한 인식은 최한기가 구상했던 세계관 및 사회관과도 연결되어 있었다. 신기가 어느 곳에서나 균등하게 편재되어 있다는 것은 뇌와 심장 등 개별적인 신체기관들 사이에 어떠한 선험적인 위계를 설정하지 않았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일기를 통하여 최한기의 신기와 흡사한 논의를 전개했던 고토 곤잔의 다음과 같은 견해는 최한기의 신기 논의가 의학을 넘어 어떻게 사회의 영역에서 이해될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요(堯)가 임금으로서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은 순(舜) 이하 백관과 사농공상이 모두 그 임금을 서로 도왔기 때문이니 순의 임금됨 또한 그러하였다. 이것은 모두 균등한 사람들인데 일이 있어 직분이 있게 된 것이다. 대개 천지 사이에는 일기(一氣)가 있을 따름이 니 일기에는 풍한조습(風寒燥濕)이 있다. 군상이화(君相二火) 또한 오히려 이와 같으니 풍에는 저절로 풍의 일이 있게 되고 한은 저절로 한의 일이 있게 된다. 조습은 저절로 조습의 일이 있게 된다. 임금이 되면 명령을 내리고 재상이 되면 임금의 명령을 따라서 행한다. 비록 그 나뉨은 있지만, 마치 스스로 주관하는 바는 없는 것과 같다[115].
고토 곤잔은 음양오행을 일기로 통합하여 기에 특정한 위계들을 부여하지 않았다. 기는 상황에 따라서 어떠한 것으로 전환되고 변화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도식적인 음양오행 논의에 비판적이었다[116]. 이것을 위 인용문에서 고토 곤잔은 “이것은 모두 균등한 사람들인데 일이 있어 직분이 있게 된 것이다”고 표현하였다. 또한 그 나뉨과 직분은 영원불변한 것이 아니라, 변용가능한 것이라고 말하였다.
이와 같은 일기를 통한 사회와 인간 몸에 대한 이해는 최한기의 신기 논의와도 부합하는 점이 많았다. 최한기가 해부학에 관심을 가졌던 것은 몸의 위계화 문제와 관련성이 없었다. 그것은 신기를 정확히 파악하기 위하여 형질인 몸의 부분 부분들을 균등하고 정확히 살피고자 하는 의도에서 나왔다. 뇌주설과 심주설의 부정은 이점을 보여준다. 그는 중국과 서양, 혹은 사회계층간의 균등성을 강하게 염두에 두고 있었으며(노혜정, 2005; 신해순, 1989; 김병규, 1996; 황경숙, 1993: 72-79), 민을 실질적인 정치주체로 바라보았다(김봉진, 2006: 46). 다음의 글은 신기가 어떻게 정치주체들의 균등성을 강조하는 그의 정치론에 반영되어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훌륭한 선거지관(選擧之官)을 선거하기 위해서는 백성이 원하는 것을 따라야 한다. 백성이 비록 지극히 어리석다고 하더라도 수많은 이목(耳目)에는 저절로 전달되는 신기(神氣)가 있으니 공론(公論)이 그 가운데로부터 일어나고 추천(推薦)이 그 말로부터 정해진다. 경(卿)·재(宰) 수십 인들이 내외에서 공적을 쌓고 이미 충성스럽고 공정한 재식(才識)을 가지고 있어서 백성의 바람에 부합하는 자로 무리에서 뛰어난 두세 명을 지점(指點)하여 백성의 바람에 따라 선거를 맡긴다면 이는 선거 가운데 훌륭한 선거인 것이다[117].
최한기는 백성들이 비록 지극히 어리석다고 하더라도 그 수많은 백성들의 이목에는 저절로 전달되는 신기가 있어서 공적인 논의가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처럼 최한기에게 신기는 수평적인 관계와 질서를 보장해줄 수 있는 중요한 근거였다. 신기를 일반 민인들의 공통된 심성으로 본다면, 최한기가 구상하였던 정치질서를 유추해 볼 수 있다. 최한기의 신기 논의에는 기존의 위계화 된 사회질서를 극복하고 새로운 균등의 질서를 마련하고자 하는 의도가 반영되어 있었다. 기존의 중국의학과 서양의학이 모두 수직적이고 위계화 된 사회질서와 관련 있었다면, 최한기는 위계화 되지 않는 무중심의 의학과 정치질서를 신기와 형질의 새로운 관계를 통하여 구상하였다. 다음 중국의학과 서양의학의 경계를 허물고자 했던 그의 신기 논의는 그러한 점에서 혁신성을 갖는 것이었다.
이에 저절로 중국은 서양에서 취하는 것이 있고 서양은 중국에서 취하는 것이 있었다. 또한 중국에서 취하지 않고 서양에서 취하지 않는 것도 있었다. 천지인(天地人)의 신기운화(神氣運化)를 분명히 밝혀 그것을 약치(藥治)에 행하여서 집과 국가와 우주를 치료하는 것으로 미루어 확장함에 어찌 중과 서로써 제한을 두겠는가? [118]
이것은 그가 지향하였던 대동사회의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의 의학과 대동사회의 정치사상은 이렇게 조우하고 있었다. 그가 사유했던 의학 논의가 갖는 역사성과 정치성은 이러한 점에서 추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인간의 몸과 의학은 정치사상과 긴밀한 관련성을 가졌다. 몸과 의학 논의에는 그 사회의 정치적 상상력이 내포되어 있었던 것이다. 기존 『황제내경』의 의학과 하비의 심장 논의에는 위계적이고 중앙집권적인 정치체제에 대한 상상이 함의되어 있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서양과 일본의 해부학의 발전에는 수직적이고 위계적인 정치질서가 내재되어 있었다고 생각되며, 이것은 뇌주설과 같은 논의로 표면화되어 나타났다. 하지만 최한기는 심주설·뇌주설 모두에 부정적이었다. 그의 의학 논의의 주요 개념이었던 신기는 유동적이며 보편적인 것으로 균등하며 차별적이지 않았다. 이 신기를 기반으로 그는 수평적인 질서를 중시하는 정치사상을 전개하였다. 최한기의 의학 논의에는 이러한 수평적 정치질서에 대한 지향성이 내재되어 있었다. 이것은 그의 의학 논의가 갖는 역사성이자 정치성이었다.
6. 맺음말
이상으로 최한기의 의학 논의가 갖는 화담학적 성격과 정치사상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화담학을 통해서 최한기의 의학 논의를 독해함으로써 신기와 형질의 이원성이 어디에서부터 유래하였으며, 그것이 어떻게 서양의학의 해부학을 수용하면서도 서양의학과는 구별되는 새로운 의학을 전망할 수 있었는가를 살펴보고자 하였다. 그럼으로써 본 글은 일본에서의 서양 해부학 수용과는 다른 최한기의 의학 논의가 갖는 독특성을 드러내고자 하였고, 그것이 어떠한 정치적 상상력을 반영하고 있었는지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우선 본 글은 최한기와 서경덕이 기 인식에 있어서 매우 많은 유사점을 가졌음을 증명하고자 하였다. 첫째 그들은 기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하여 노력하였고, 둘째 기로부터 리를 찾고자 노력하였다. 셋째 그들은 신기와 담일청허지기라는 것을 사물의 가장 본원적인 기로 인식하고자 하였다. 이 사유는 기통질국 관념과 깊은 관련성을 가졌다. 덧붙여 양응수의 사례 또한 서경덕과 최한기와의 사상적 유사성을 입증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 양응수는 자신의 신기는 서경덕의 담일청허지기라고 언급함으로써, 모든 사물에 공통으로 내재하는 ‘본원적인 기’라는 상상력이 화담학과 밀접히 관련되어있음을 보여주었다.
이어서 본 글은 최한기 의학 논의의 중요한 이론 축이었던 신기-형질 논의를 화담학의 기통질국 논의를 통하여 이해하고자 하였다. 최한기에게 있어서, 신기는 형질을 통하여 지각을 일으키며 그 발현된 지각을 통하여 신기와 형질은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 구별 또한 명확하였다. 최한기는 지각의 주체자로서 신기를 형질 앞에 두었고, 양자의 관계를 분절적이고 독립적으로 보았다. 그러한 점에서 비록 그 개념과 맥락에 있어서는 명확한 차이를 보였지만, 최한기는 홉슨의 영성을 신기로 대체할 수 있었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사유를 통하여 최한기는 지각을 특정 신체기관인 뇌가 주도한다는 뇌주설과 심장이 주관한다는 심주설 모두를 비판하였다. 이와 같이 신기와 형질을 구분하는 사유는 화담학의 기통질국의 관점에서 그 논리의 구조를 이해해 볼 수 있다.
이렇게 신기와 형질의 위상을 분명히 정립함으로써 최한기는 서양 해부학 수용의 과정에서 독창적인 위상을 가질 수 있었다. 최한기는 기수를 통하여 진리를 인식할 수 있다는 화담학의 입장을 통하여 서양에서 해부학이 발달할 수 있었던 중요한 지적 배경인 수량화·시각화의 문제의식을 어느 정도 공유하였다. 하지만 이것으로만 최한기의 서양 해부학 수용문제를 논하기는 어렵다. 최한기는 서양 해부학 수용자들이 일반적으로 가졌던 형질 중심의 즉물적인 태도에 전적으로 경도되지 않았다. 이것은 그가 가졌던 신기-형질의 관계성에 대한 관점과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다. 최한기는 신기와 형질의 사유를 통하여 서양의학과 중국의학을 동시에 비판하였다. 그것은 서양의학은 신기를 결여하였다는 점, 그리고 중국의학은 형질을 잘 알지 못한다는 점으로 요약될 수 있다. 최한기는 그 어느 의학에 기울지 않고 신기와 형질의 균형성을 유지하였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는 일본에서 이루어진 방식의 해부학 수용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일본에서의 해부학 발전은 주로 형질을 중시하는 고학의 즉물적인 사고 속에서 이루어졌지만, 최한기는 신기와 형질을 동시에 중시하는 화담학의 논의를 통해서 서양 해부학을 수용하였다. 고학을 매개하지 않는 해부학 수용이라는 점에서 최한기는 동아시아 해부학 수용의 역사에서 중요한 위상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렇게 형성된 최한기의 의학 논의는 어떻게 다른 의학 논의들과 구별되며, 그 특징은 무엇인가. 이론적인 설명 이외에 의학이 담고 있었던 정치적 상상력을 통하여 그 의학들 사이의 차이점을 드러낼 수 있다. 의학 논의에는 그것을 만들어낸 사회의 정치적 상상력이 내포되어 있었다. 가령, 『황제내경』의 장부에 대한 설명과 하비의 심장 논의에는 위계적이고 중앙집권적인 정치체제에 대한 상상이 함의되어 있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서양과 일본의 해부학의 발전에는 수직적이고 위계적인 정치질서가 내재되어 있었으며, 이것은 뇌주설과 같은 논의로 나타났다. 하지만 최한기는 심주설·뇌주설 등 특정 신체기관이 지각을 주관한다는 설에 부정적이었다. 그의 의학 논의의 주요 개념이었던 신기는 유동적이며 보편적인 것으로 균등하며 차별적이지 않았다. 이 신기를 기반으로 그는 수평적인 질서를 중시하는 정치사상을 전개하였다. 최한기의 의학 논의에는 이러한 수평적 정치질서에 대한 지향이 내재되어 있었다. 이것은 그의 의학 논의가 갖는 정치성이자 역사성이었다.
본 글은 최한기의 의학 논의를 화담학을 통하여 조명함으로써 최한기의 의학 논의뿐만 아니라 그의 사상이 어떠한 사상적 연원과 배경을 가지고 전개되었는가를 살펴보고자 하였다. 그가 왜 신기를 고집스럽게 사물의 근원으로 제시하고자 하였는지는 화담학을 통해서 이해해볼 수 있다. 그의 서양 해부학 수용과 일본의 서양 해부학 수용이 달라지는 이유는 여기에 있었다. 최한기에게 신기 논의는 개체 사이의 공유점과 균등성을 담보하는 중요한 개념장치였으며, 이러한 이유 때문에 최한기는 이 신기를 포기할 수 없었다고 생각된다. 신기를 통하여 발전시킨 그의 의학 논의 또한 그러한 정치이념들을 담고 있었다. 의학 논의가 정치적 상상력과 긴밀한 관련성을 갖는다는 점을 최한기의 의학 논의 또한 잘 보여주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최한기의 의학 논의는 의사학적인 관점에서 볼 때, 중서의학이 어떻게 통합될 수 있었는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중요한 위상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비록 최한기는 임상의가 아니었고, 사상가에 가까웠으므로 그의 의학 논의는 실제 의학 행위에 있어서 그 만큼의 한계를 갖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의학과 사상의 긴밀한 관계성은 의학과 사상의 구분을 어렵게 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한 점에서 그의 신기를 중심으로 한 의학 논의가 갖는 의미는 적지 않다. 신기 관념은 최한기가 서양의학으로 경도되는 것을 막게 하였다. 그 신기는 균등성의 의미를 내포하는 것이어서 수직적인 질서와 거리가 있었다. 이것은 중서의학의 한계와 장점을 동시에 극복하고 수용하고자 하는 의학적 노력의 일환이었다.
Notes
최한기의 의학논의에 대해서는 다음 논문들을 참조할 수 있다(여인석, 노재훈, 1993; 신동원, 1997; 권오영, 1999: 333-343; 여인석, 1999; 김성준, 1999; 임태형, 2000; 이현구, 2000: 81-94; 김용헌, 2000: 229-234; 이규성, 2007; 안상우, 권오민, 이준규, 2009; 김문용, 2009; 정진욱, 2003; 김철앙, 2004; 정진욱, 2004; Shin, 2009).
중국의학이라는 용어는 1950년대 이후 나온 표현으로(이충열, 2004: 45-46) 최한기 의학을 설명하는 데 적절하지 않을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중서통합, 중서절충이라는 표현 또한 정확한 것으로 볼 수 없다. 하지만 최한기가 중국의 의서를 화하의서(華夏醫書)라고 지칭하였고(崔漢綺, 『明南樓全集 一』 『身機踐驗』 凡例, p. 320, “華夏醫書 旣昧氣化脈絡 惟恃方術傅會.”), 중서의학은 참작통용해야 한다(崔漢綺, 『明南樓全集 一』 『身機踐驗』 凡例, p. 322, “中西醫術 參酌通用.”)고 말한 것을 보면, 중국의학이라는 용어는 전혀 부적절한다고만 볼 수 없는 점이 있다. 더욱이 중서통합, 중서절충의 대안으로 사용할 수 있는 동서통합, 동서절충이라는 말은 동이 가지는 광범위함 때문에 부정확하다고 할 수 있다. 동서통합, 동서절충이라는 용어보다는 중서통합, 중서절충이 현재로서는 최한기 의학의 성격을 규정하는 가장 구체적인 용어가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므로 본 글은 중서통합, 중서절충이라는 용어가 갖는 불완전함을 인지하면서도 불가피하게 중서통합, 중서절충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화담은 서경덕의 호이며, 이를 통하여 본 글은 서경덕의 학술을 화담학으로 부르고자 한다.
최한기와 관련한 대부분의 연구는 최한기의 반주자학적 성격을 조명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최한기의 사상이 신유학과 밀접한 관련성을 가진 점을 제시한 연구(전용훈, 2007: 269, 276), 그리고 이러한 문제의식을 더욱 발전시켜서 최근 최한기와 주자학과의 관련성을 상세히 다룬 연구가 발표되었다(백민정, 2009; 2018). 하지만 본 글은 주자학 안에서 더욱 범위를 좁혀서 화담학과 최한기를 비교 검토함으로써 그 사상적 유사성을 드러내고자 한다.
낙론은 氣의 湛一性과 그에 기반한 心氣의 보편적 純善性을 주장하였다(李縡, 『陶庵集』 卷10 「答尹瑞膺心說辨問」, “氣之爲物 雖有淸濁粹駁之不同 其本則湛一而已矣 心又氣之精爽而又合理言之 則不可專著一氣字 故其本體 湛然則聖人衆人一也.”; 金元行, 『渼湖全集』 渼上經義, 大學 「答松巖李公(載亨)」, “朱子固已謂心者氣之精爽 則所謂精爽者 斷非謂粗底氣稟之氣而然 又必着氣之二字於精爽之上 則其精爽者之本由於此氣者 亦可知矣 有此氣然後卽有此精爽 無此氣則便無此精爽.”).
趙有善은 57세 되던 1787년(정조 11) 『花潭集』을 重刊했다고 한다(趙有善, 『蘿山集』 卷4 「與絅溫 丁未」, “花潭集重刊之役 幸已始手 而所在木字不甚勝 舊本附錄 亦未及釐正 不免急遞草卛 爲可恨也 其門人錄在東儒師友錄中 往請注谷 借得謄送爲好.”; 趙有善, 『蘿山集』 卷11 附錄 「年譜」, “丁未 先生五十七歲 二月重刊花潭集 本集年久散漫 先生手自校讐 正其訛誤 續成其年譜 又採取遺事之雜出諸集者 以爲附錄 而鳩財刊行.”) 또한 그는 화곡서원 중수기를 남기기도하였다(『蘿山集』 卷7 「花谷書院重修記」)
金憲基, 『初庵全集』 卷2 「贈徐繼祖」, “嘉君志業在承先 先則花潭百代賢 讀易辛勤追舊緖 建祠悽愴揭深虔 孤貧崛起猶能爾 佑啓由來致有然 莫歎仳離多失學 桑楡收拾尙餘年.”; 『初庵全集』卷5 「爲士林請 褒蘿山先生書 續稿」, “伏以昔花潭徐先生 奮起草萊 闡明斯道 爲世儒宗 及其沒也 當朝諸先生 尊尙其道 仰達 宸聦 右相之 贈 文康之謚 備極崇奬 而俎豆妥侑 爲百世士林之矜式 此實 聖世崇文敦敎之盛典也.”; 『初庵全集』 卷5 「爲士林呈繡衣 請褒梨湖金公書 癸巳」, “在昔花潭徐先生倡是學於是邦 其淵源所漸 普及朝野 而况於其鄕里乎 敎育成就 儒風丕作 先生之功 於是爲大 而右相之 贈文康之謚 其於崇報 可謂備至已矣.”
金憲基, 『初庵全集』 卷3 「問金止庵」, “蓋神者主乎氣 而其運用精采處 所謂不離於氣 而不囿於氣者也 如陰陽未便是神 而陰陽之不測處乃神也 闔闢未便是神 而其一闔一闢之妙者是神也 … 且如人身之滿體流行者 皆氣也 而主乎此者則是心 心卽是神也 今卽此祖考之神氣而言之 求祖考於上下四方 其肅然來者則氣也 而神便在此 然神則又却無肅然之可言者也 如此則固未嘗兼言乎理 而亦不害爲差別於氣也.”
氣數와 實用을 중심으로 한 조선시대 개성지역의 학풍에 대해서는 조창록(2004)의 논문을 참조할 수 있으며, 이 지역의 氣數學的 전통이 최한기와 관련성을 가졌다고 본 연구도 있다(박성순, 2010: 8-9). 서경덕, 서명응, 최한기의 학문적 사승관계가 명확히 잘 드러나지 않는 것은 이 지역의 학풍이 自得을 강조한 것과 관련이 있다는 의견 또한 제시되었다(조창록, 2004: 202; 박성순, 2010: 9).
徐敬德, 『花潭集』 卷1 「謝金相國 名安國 字國卿 號慕齋 惠扇 二首」, “問 扇揮則風生 風從何出 若道出於扇 扇裏何嘗有風在 若道不出於扇 畢竟風從何出 謂出於扇 旣道不得 謂不出於扇 且道不得 若道出於虛 却離那扇 且虛安得自生風 愚以爲不消如此說 扇所以能鼓風 而非扇能生風也 當風息太虛靜泠泠地 不見野馬塵埃之起 然扇纔揮風便鼓 風者氣也 氣之撲塞兩間 如水彌漫谿谷 無有空闕 到那風靜澹然之頃 特未見其聚散之形爾 氣何嘗離空得 老子所謂虛而不屈 動而愈出者此也 纔被他扇之揮動 驅軋將去 則氣便盪湧爲風 故詩曰 形軋氣來能鼓吹.”
崔漢綺, 『明南樓全集 一』 『推測錄』 卷2 推氣測理 「人物潛於氣」, p. 109, “空房中張一大扇 驅塵而去 未接於壁 其游塵皆從左右流散 如以手括水而浪從兩傍而流 故曰氣者陸地之水也.”
崔漢綺, 『明南樓全集 二』 『人政』 卷10 敎人門 三 「氣之形質」, p. 179, “見得充滿氣之形質 然後可以見運化之道 以鉢覆於盆水之中 而水不入鉢中 以其鉢中氣滿而水不入 是氣有形質之一證也 一室有東西牕 而急閉東牕 則西牕自開 以其氣滿室中 而橐鑰衝動.”
邵雍, 『皇極經世書』 「觀物內篇」, “人皆知天地之爲天地 而不知天地之所以爲天地 不欲知天地之所以爲天地則已 如其必欲知天地之所以爲天地 則舍動靜 將奚之焉.” 또한 소옹의 아들 邵伯溫(1057-1134)은 이러한 사유의 과정을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정리하였다. 邵康節 저, 윤상철 역, 『皇極經世』 3 (서울: 대유학당, 2011), 446쪽. “以道明道 道非可明 以物明道 道斯見矣 物者道之形體也 故善觀道者 必以物 善觀物者 必以道 謂得道而忘物則可矣必欲遠物而求道 不亦妄乎.”
徐敬德, 『花潭集』 卷1 「讀易吟」, “坎離藏用有形先 到得流行道始傳 羲畫略摹眞底象 周經且說影中天 硏從物上能知化 搜自源頭可破玄.”
崔漢綺, 『明南樓全集 一』 『氣學』 卷2, p. 248, “談理者 或捨氣究理 無所取準 徒啓後人之紛鬨.”
崔漢綺, 『明南樓全集 一』 『推測錄』 卷2 「測氣測理」, p. 101, “推此測理 乃得誠實有據 無捉空摹虛之弊.”
崔漢綺, 『明南樓全集 一』 『氣學』 卷2, p. 248, “就一物而窮理 或有兩可 又有三可之說 以其無形之理談猝難究意也 若夫一氣運化 自有軌轍 縱有初頭究索二三之端 依氣之準的 驗氣之經歷 庶有歸一之方.”; 崔漢綺, 『明南樓全集 一』 『推測錄』 卷6 推物測事 「窮理不如推測」, p. 172, “惟言窮理 則理無分於推測流行 窮無際於湊泊比擬 發明推測 則推有分於推測流行 測有驗于勸懲可否 窮理之學 有一定之本元 而究吾知之未盡 推測之學 有條理之可尋而驗取捨之活法.”
徐敬德, 『花潭集』 卷2 「鬼神死生論」, “氣之湛一淸虛 原於太虛之動而生陽 靜而生陰之始 聚之有漸 以至博厚爲天地 爲吾人 人之散也 形魄散耳 聚之湛一淸虛者 終亦不散 散於太虛湛一之中 同一氣也 其知覺之聚散 只有久速耳 雖散之最速 有日月期者 乃物之微者爾 其氣終亦不散.”
崔漢綺, 『明南樓全集 一』 『推測錄』 卷2 推氣測理 「大象一氣」, p. 101, “天包地球 萬物不外範圍之中 氣運理隨 萬事皆由周旋之機 故先推大象 以爲纖悉之效則 須因一氣 以探條理之委曲.”
崔漢綺, 『明南樓全集 一』 『氣學』 卷2, p. 244, “苟於大氣上 見端倪 而推尋乎事物 事物上得經驗而無違於大氣 依此累試積功 庶可見大氣之運化 是則稍有明慧者所能也 推達於全體大用 見得大氣活動運化之性 至於統民運化一身運化 漸次開豁.”
崔漢綺, 『明南樓全集 一』 『明南樓隨錄』, p. 313, “夫大氣充滿宇內 陶均萬物 有形質之運化神氣 爲生人物之平常資賴 天下無外此氣之事物 …… 天地之大氣 勢不可以人之思想言論有所違戾 固當承順而已.”
崔漢綺, 『明南樓全集 一』 『明南樓隨錄』, p. 304, “我身神氣 元來稟受於大氣運化 則固當隨遇承順運化而已 別無充養之可言.”
崔漢綺, 『明南樓全集 一』 『身機踐驗』 序, p. 319, “日星地月 統合而成機成體 以行神氣運化 萬事萬物生生無窮 … 地因充滿神氣 自行其運化之能 月因推挽神氣 自成其運化之能 日以載轉神氣 健行其運化之能 五緯經星 各因大氣運化 行其所能 … 人承神氣運化 百骸九竅 臟腑四肢 鉅細筋管 成機成體 知覺運動生焉 始終本末藉賴氣化 通萬物 攝萬事 是由於稟氣同 通氣同也.”
崔漢綺, 『明南樓全集 一』 『氣學』 卷2, p. 247, “夫天卽大氣也 大氣透澈人身之中 漬洽皮膚之間 寒暑燥濕 內外交感 以爲生 雖須曳間隔絶 不得生 是乃以氣爲命 以氣爲生 天氣人氣不可分二.”
신기는 전통적으로 기의 정령처, 즉 기 가운데에서 가장 신묘한 부분을 지칭하는 것으로 사용되었다. 그와 같은 이유로 리와 구분없이 사용되기도 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朱熹(1130-1200)와 楊應秀의 다음 언급을 참조할 수 있다. 『朱子語類』 卷1, 51항목, “氣之精英者爲神.”; 楊應秀, 『白水集』 卷6 「神說」, “盖神者, 乃是精英之氣, 包括萬理, 而主萬化妙萬物者也. 渾然一體, 流行古今, 而語其大則無外, 語其小則無內, 推之於前而不見其始, 反之於後而不見其終, 語其明則無所不照, 語其剛則無所不入, 語其才則無所不能, 就其中, 指其條理文路子而言之曰理. 指其爲造化極至之妙而言之曰太極. 以其無聲臭之可聞而言之曰無極. 指其本體之渾然而言之則謂之太一. 指其爲萬物之本原而言之則謂之太始. 指其生生不竆而謂之易. 指其統體流行而謂之道. 天以是賦之人物則曰命. 人物得之, 以爲所以仁義禮智信之理則曰性. 是神得血氣而能知覺則曰心. 是心之本體虛靈洞徹, 萬理咸備者, 名之以明德. 生理藹然純粹至善者, 名之以仁. 是心之動, 循其性之本然而自然感發者, 謂之情. 緣是情而商量計較者, 謂之意. 知覺從本然而發者之謂道心. 知覺不從本然而從血氣發者之謂人心. 是故道理之名目, 有許多般數, 而實則由乎此一神, 而隨其地頭, 分出許多名目矣.” 최한기의 논의를 보면 그에게서도 신기가 갖는 이러한 전통적인 성격은 공통되게 보인다고 할 수 있다.
徐敬德, 『花潭集』 卷2 「鬼神死生論」, “死生人鬼 只是氣之聚散而已 有聚散而無有無 氣之本體然矣 氣之湛一淸虛者 瀰漫無外之虛 聚之大者爲天地 聚之小者爲萬物 聚散之勢 有微著久速耳 大小之聚散於太虛 以大小有殊 雖一草一木之微者 其氣終亦不散.”
崔漢綺, 『明南樓全集 一』 『運化測驗』 卷1 「氣之形」, p. 261, “從其一天範圍之內 而聚之散之 所謂散之 在一氣形之內 所謂聚之 亦在氣形之內 則散非永散而消滅 聚非永聚而不變.”
이 밖에도 최한기는 인식론에서 서경덕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던 소옹과 유사성을 보여주었다. 최한기는 觀物에는 다섯 가지 방법이 있다고 하면서 反觀, 無我, 窮理, 證驗, 未發을 들었다(崔漢綺, 『推測錄』 卷6 推物測事 「觀物有五」, p. 179, “以我觀我反觀也 以物觀物無我也 以我觀物窮理也 以物觀我證驗也 有我無物未發也 五者備而推測成矣.”). 觀物이라는 말은 소옹의 觀物 논의에서 나온 것으로 보이며, 反觀과 無我는 소옹이 사물을 인식할 때 강조한 방법이었다(邵雍, 『皇極經世書』 「觀物內篇 12」, “所以謂之反觀者 不以我觀物也 不以我觀物也 以物觀物之謂也 旣能以物觀物 又安有我於其間哉.”). 이러한 점들은 최한기와 소옹 사이의 유사성을 보여주며, 나아가 소옹을 상당 부분 수용한 서경덕과의 유사성 또한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서경덕 또한 觀物을 매우 강조하였다(徐敬德, 『花潭集』 卷1 「觀易 偶得首尾吟 以示學易輩諸賢」, “花巖不愛邵吟詩 吟到堯夫極論時 一未開來無混有 二能交處坎生離 神於水面天心得 易向柳風梧月知 秋洛春潭景何遠 花巖不愛邵吟詩.”; 徐敬德, 『花潭集』 卷1 「又一絶」, “觀物工夫到十分 日星高揭霽披氛 自從浩氣胸中養天放林泉解外紛 藏乙巳閏正元夜 獨起依枕無寐 因記前日所見吟罷 鷄旣鳴矣.”).
王廷相, 『雅述』 上篇, “易雖有數 聖人不論數而論理 要諸盡人事耳 故曰得其義 則象數在其中自邵子以數論天地人物之變 棄人爲而尙定命 以故後學論數紛紜 廢置人事 別爲異端 害道甚矣.” 이에 대해서는 (조성산, 2007: 62) 참조.
崔漢綺, 『明南樓全集 一』 『神氣通』 卷1 體通 「四一神氣」, p. 21, “神氣則天地人皆同 形質則天地人各不同.”
崔漢綺, 『明南樓全集 一』 『神氣通』 卷1 體通 「氣質各異」, p. 10, “氣是一也 而賦於人 則自然爲人之神氣 賦於物 則自然爲物之神氣 人物之神氣不同 在質而不在氣.”
崔漢綺, 『明南樓全集 一』 『運化測驗』 卷2 「五行四行」, p. 286, “氣之爲物 聚散宇內 偶之物則爲物氣 在水則爲水氣 在土則爲土氣 在火則爲火氣 不偶之于物 則是運化氣也 豈可以氣分界限於水土火也 擧其本則一氣 於分殊則萬有也.”
최한기의 신기와 형질의 이원적 구조에 대해서는 (신원봉, 69-102; 손병욱, 1998: 59-64; 정진욱, 2003: 33-47; 65-84; 정진욱, 2004: 223-235)을 참조할 수 있다. 손병욱은 최한기의 기 논의를 기일분수, 기통질국의 관점에서 논의한 바 있다(손병욱, 2004: 367).
楊應秀, 『白水集』 卷2 「答兪大齋」, “醫學入門所謂血肉之心 神明之心 足可爲心有二氣之證前此未得見之 今承錄示 感幸何極.”
李梴, 『醫學入門』 卷1 「臟腑」 臟腑條分, “心者 一身之主 君主之官 有血肉之心 形如未開蓮花 居肺下肝上是也 有神明之心 神者氣血所化 生之本也 萬物由之盛長 不著色象 謂有何有謂無復存 主宰萬事萬物 虛靈不昧者是也 然形神亦恒相因.”
여기에서 혈기는 최한기의 형질과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周敦頤, 『周濂溪集 一』(上海: 商務印書館,民國, 1930) 卷1 「周子太極圖說」, p. 2, “形既生矣神發知矣.”; 형(形), 신(神), 지(知)에 대한 이러한 주돈이의 언급과 최한기의 사유와의 관계성은 (정진욱, 2003: 12) 참조.
楊應秀, 『白水集』 卷5 「答林啓濬」, “盖神氣者 天地本有之氣也 血氣者 氣聚成形以後所生者也 神氣資血氣而發知覺 血氣助神氣而爲知覺 故血氣實則神氣守而知覺分明 血氣虛則神氣不守而知覺不明.”
楊應秀, 『白水集』 卷10 「漫筆」, “天地造化 只是陰陽變合 而生五行萬物 故在人則神氣爲陽 血氣爲陰 神氣爲主 而血爲氣配 能運用一身 又能助神知覺 是以醫書云 目得血而能視耳得血而能聽 掌得血而能握 足得血而能步 … 天地本然神氣之在人者 得血氣而生知覺 此非一理乎.”
이와 관련된 『黃帝內經素問』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黃帝內經素問』 「五藏生成 第十」, “肝受血而能視 足受血而能步 掌受血而能握 指受血而能攝.”
崔漢綺, 『明南樓全集 一』 『神氣通』 卷1 體通 「氣質各異」, p. 10, “天之神氣 襯近於地 與地之蒸噓 相染相渾 因成天地之神氣 賦於土石 爲堅重之頑物 賦於草木 爲枝葉花實傳種之物賦於蠢動飛潛血液之類 爲視聽知覺之物.”
崔漢綺, 『明南樓全集 一』 『神氣通』 卷1 體通 「諸竅互通 神氣益明」, p. 15, “夫聽之在耳 而所聽者 神氣也 視之在目 而所視者 神氣也 聽視雖異路 神氣則一也.”; 崔漢綺, 『明南樓全集一』 『神氣通』 卷1 體通 「經驗乃知覺」, p. 27, “神氣者 知覺之根基也 知覺者 神氣之經驗也不可以神氣謂知覺也 又不可以知覺謂神氣也.”
崔漢綺, 『明南樓全集 一』 『神氣通』 卷1 體通 「神氣由臟腑而有異」, p. 20, “蓋神氣根於臟腑成器 而能視聽言動 及其貯聚生力 硏熟生習 離象之見 出類之行 乃神氣之所得 非臟腑之素具也.”
崔漢綺, 『明南樓全集 一』 『神氣通』 卷1 「神氣通序」, p. 5, “雖有此諸竅諸觸 若無神氣之記繹經驗 平生屢聞數見之事物 皆是每每初聞見之事物也.”
신기를 지각의 주체로 본 견해로는 (이현구, 1990: 86-90; 김성준, 1999: 30-33; 정진욱, 2003: 74-75; 101-103; 정진욱, 2004: 224-225; 244-245; 가와하라 히데키, 2004, 185-186; 이규성, 2007: 59-60; 야규 마코토, 2008: 227)가 있다.
崔漢綺, 『明南樓全集 一』 『神氣通』 卷1 體通 「神氣由臟腑而有異」, p. 20, “從神氣之動靜 而注於目 則一身之氣 會極於目 注於耳 則一身之氣 會極於耳 注力於鼻 而會氣於鼻 舌與諸觸皆然 是乃隨遇區處 次第酬應也 其於事務重疊 接濟無暇 耳目口鼻諸觸 遞次接應 轉移注力 … 方是時 何暇論目應肝耳應腎哉.”
崔漢綺, 『明南樓全集 一』 『神氣通』 卷3 「人我神氣變通」, p. 63, “形體之諸竅諸觸 各有定所不可移易 神氣之諸竅諸觸 縱緣各體而得通 能湊合於一 動靜聚散 皆有操縱 可以變通其神氣 互代其用也 耳聽之神氣 可通於目視之神氣 而視聽合爲一 口味之神氣 可通於鼻香之神氣 而味香合爲一 又可以視聽香味之神氣 合爲一 以至諸竅諸觸之神氣 統合爲一 多少變通從一神氣 而通於諸竅諸觸.”
崔漢綺, 『明南樓全集 一』 『神氣通』 卷1 體通 「氣質相應相援」, pp. 12-13, “臟腑百骸 各具其質 自相聯絡而周遍流注者 血液脈息也 統攝操縱者 神氣也 自其從外入者言之 諸竅之神氣先動 而血液次應之 臟腑百骸 從而應之 自其收藏歸趣涵育思商者言之 神氣默識於內 而血液次爲之潛着 臟腑次爲之助援 自其自內應外者言之 神氣發於形色言動 血液次應之注力臟腑從爲之助援 莫非神氣先唱 而血液臟腑次序應之 爲後援也 是以神氣爲一身之統攝.”
崔漢綺, 『明南樓全集 一』 『身機踐驗』 卷3 「癲狂論」, p. 376, “狂者初起 略有知識 癲者初起卽略迷蒙 久而全無知識 其故同在於成機之神氣 亂而累及於腦 蓋腦爲神氣之凝聚 而有時腦病 致亂神氣 此則神氣先亂而腦爲之不安也 … 成機神氣無欠而萬事承順 成機神氣有亂而卽成癲狂也.”
崔漢綺, 『明南樓全集 一』 『身機踐驗』 凡例, p. 323, “若病到深遠 蘇完難期 痼患轉劇 竟致知覺運用反常 爰有顚狂之症 是乃神氣運化不得調和 致此知覺運用之反常.”
이점과 관련하여 영성을 몸과 구별되는 무형의 존재로 신기를 몸과 구별되지 않는 유형의 존재로 그 개념을 나누어 정리한 글도 있다(김성준, 1999: 26-27; 정진욱, 2003: 2).
그러한 점에서 신기는 서양의 영혼과 흡사한 맥락과 의미를 갖는다고 본 연구들이 있었다(가와하라 히데키, 2004: 186; 정진욱, 2003: 5). 하지만 개념상 영혼과 신기는 엄연히 다른 것이었다.
홉슨은 기독교적 관점에서 영성을 전광증의 원인으로 보았다고 생각되지만(김성준, 1999: 21), 일반적으로 서양의학은 전광증을 신체적 원인에서 찾았다(더핀, 2006: 406). 현대 서양의학 또한 전광증을 뇌의 전두엽과 측두엽의 문제로 파악하여 특정한 신체기관과 결부하여 이해하고자 한다. 서양의학에서 질병과 신체기관을 결부시키는 사고방식은 전광증에서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었으며, 19세기를 거치면서 대부분의 질병개념은 점차 해부학적으로 변해갔다(더핀, 2006: 412; 월프, 2007: 78, 130). 정신병을 특정 신체의 문제로부터 바라보는 것은 이러한 추세와 깊은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다.
崔漢綺, 『明南樓全集 一』 『神氣通』 卷2 目通 「相人醫人之神眼」, p. 38, “相書之論眼 陷於吉凶禍福 醫書之論眼 在於風痰寒熱 述作之人 傳習之人 皆以在面之眼爲眼 不識身體之內 自有神氣之眼 吉凶禍福 肇作於神氣之眼 而發見於在面之眼 風痰寒熱 先侵於神氣之眼 而施及于在面之眼 則眼相眼病之根源 俱在於神氣 若能知人之神氣 進就之如何 不克進就之如何 觀人之術 療人之病 庶得離形貌而施藥 相人者 雖不知現相者之神氣 其論禍福吉凶 億則屢中 以其相人者之神氣 或有所通也 治人之病 亦將神氣施藥 庶得其效.”
앞의 각주 45) 논문들 참조. 구체적인 자료로는 다음을 들 수 있다. 崔漢綺, 『明南樓全集一』 『身機踐驗』 凡例, p. 323, “推反常之知覺運用 究明和適之知覺運用 何必偏執主腦主心.”; 崔漢綺, 『明南樓全集 一』 『身機踐驗』 序, p. 319, “人物形體 腦筋骨髓 血脈氣管 成機成體 自能知覺運動 推測古今 大小事務 可盡人道之行 何必專恃腦主知覺 拚棄心主知覺 又何必沈沒心主知覺 而不悟腦氣筋之貫綴全體諸竅諸觸 動輒感應哉.”
崔漢綺, 『明南樓全集 一』 『身機踐驗』 卷1 「腦爲一身之主」, p. 327, “非獨醫學 多少諸學 皆由腦質稟受而知覺記繹有優劣虛實 惟此病與不病 其所關繫 尤大於臟腑肢節之病 先明此病然後 醫書之取捨可定 至於醫家醫國之道 亦可推擴.”
崔漢綺, 『明南樓全集 一』 『身機踐驗』 卷1 「腦爲一身之主」 p. 327, “生靈知覺之生 記繹之能 可驗于腦 夫腦者 人身神氣凝聚而成形質 散佈腦氣筋於耳目口鼻諸觸 收入在外神氣之聲色臭味諸觸 至再至三 知覺生 喜怒哀樂感動深切者 腦筋之吸引亦深 漬染腦中 終身不諼以其腦之精輭 感通之氣易入 聲色臭味諸觸 隨所入淺深精麤 各從九對中所司之筋而感透腦中 記繹生焉.”
崔漢綺, 『明南樓全集 一』 『身機踐驗』 凡例, p. 323, “心主知覺運用 實有可闡之端 心非臟腑之心 乃神氣之心.”
崔漢綺, 『明南樓全集 二』 『人政』 卷20 用人門 一 「身氣用人」, p. 399, “古之用人 多論其心心是神氣之影響 豈若擧神氣而通澈運化人道 操形質而直透本源 合內外而軆用無間.”
徐命膺, 『保晩齋集』 卷16 「蠡測篇」, “天地萬物 不越乎理氣數三者 太極 理也 陰陽五行 氣也 一三五七九二四六八十 數也 樞紐主宰而理以之名 動靜闔闢而氣以之形 分限節度而數以之立 數出於氣 氣命於理 故君子明理而已 氣數之學 有不學焉 然理有未明 不得不假氣數而明之也.”
崔漢綺, 『明南樓全集 一』 『神氣通』 卷1 體通 「氣數之學」, p. 15, “數由氣而作 物由氣而生非數無以用其氣 非氣無以窮格萬物 雖精於氣數者 尙不能盡物理之蘊奧 不識氣數者 所謂窮格可知也.”
崔漢綺, 『明南樓全集 一』 『神氣通』 卷1 體通 「數學生於氣」, p. 31, “夫欲通達於氣之理者 不通於算數之學 其類無相之肓乎 氣必有理 理必有象 象必有數 從數而通象 從象而通理 從理而通氣 有交發互將之益.”
崔漢綺, 『明南樓全集 一』 『神氣通』 卷2 目通 「窮格器用」, p. 39, “人身形體 是一器械也 內盛神氣 外接酬用 耳目口鼻手足頭體 又各有所接用之器物 耳有管筒 口有匙箸飮食 鼻有臭物手有執持之器 足有履納之物 頭有冠巾 體有衣服 惟目之所用器物 奚特統察一身所用之器物 至於所用器物之器械物料 又於所用器物之器械物料 所由之器械物料 皆爲眼見之器物.”
崔漢綺, 『明南樓全集 一』 『神氣通』 卷2 目通 「窮格器用」, p. 39, “凡天下窮格物理者 當以器用爲準的 以及於器用之器用 而辨別優劣利鈍 則參涉于眼力神氣之通 然後格致得宜 庶免差謬也 若不以器用爲準的 所謂格致 無攸用其能 亦難得其模着 又不以目力神氣參商 則優劣利鈍 將何以辨別 義與不義 將何以質正 是知天下之物 莫非器用 而有物 則必有所制之器 人間事務 皆有器用 而有事務 則必有其器 從其有而變通 從其無而創制 皆出於目力神氣之通有器而不用 成器而毀棄 由於目力神氣之不通.”
최한기의 사유와 수량화의 관련성 문제는 (신동원, 1997: 202-203; 여인석, 1999: 156) 참조.
최한기가 가졌던 신기와 형질의 문제의식을 고려하면, 그의 의학 논의를 서양의 수량화·시각화라는 논의 속에서만 파악하기 힘든 점이 있다. 정진욱은 최한기의 신기와 형질의 이중구조가 신기의 측면에서 전통 한의학, 형질의 측면에서 서양 의학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는 이론이 되었다고 설명하였다(정진욱, 2003: 111). 본 글 또한 이점에 동의하면서도, 이 이중구조가 갖는 화담학적 연원, 최한기가 기존의 한의학 이론과 구별되는 점, 또한 그것이 갖는 동아시아 해부학 수용의 역사에서 갖는 위상과 의의를 조명하고자 하였다.
崔漢綺, 『明南樓全集 一』 『身機踐驗』 凡例, p. 320, “華夏醫書 旣昧氣化脈絡 惟恃方術傅會天文之方術傅會 必參證于醫術 地理之方術傅會 必牽合于醫術 學問之傅會方術 亦援引于醫術 便成方術之醫書 自與人身部位脈絡 漸致隔遠 執證施藥 皆從方術 以藥五味 附于五行又以臟腑 配之五行 於是有相生相克之說 畢竟得效與否 亦以方術自信 此所以醫術爲賤技.”
본 글은 원 자료의 華夏醫書를 중국의서로 번역하였다. 최한기가 여기에서 화하의서라고 한 것은 그가 비판했던 음양오행, 오운육기 등의 내용들을 상당 부분 담고 있었던 중국의서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최한기가 생각한 기화는 기존 속류 중국의학이 가졌던 고정적이고 도식적인 것에서 벗어나 객관적인 원리를 추구하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최한기가 보기에, 당시의 중국의학은 객관적인 원리를 궁구하지 않은 채 정해져 있는 도식에 의하여 기를 설명하는 논의에 빠져있다고 판단한 것으로 생각된다.
崔漢綺, 『明南樓全集 一』 『身機踐驗』 凡例, p. 322, “況西醫之全體部位 氣血脈絡 出於手探目證 卽是水火機之運化生成也 此說不顯於世則已矣 旣列布於上海醫局 固是人之所欲明而無路驗明者也 非獨華東之信從 抑後世之所不諼.”; 崔漢綺, 『明南樓全集 一』 『身機踐驗』 序, p. 319, “西醫以剖割詳稽之致 明察全體經絡部位 部位不明 病源不明 治法亦不明 部位旣明 病源可推 病源的覩 治法庶得其方.”
崔漢綺, 『明南樓全集 一』 『運化測驗』 卷1 「形質中運化」, p. 258, “假使剖分其體而詳覩其內乃是分散皮膚骨節之死氣也 非榮衛溱理完全之運化生氣也.”; 崔漢綺, 『明南樓全集 一』 『神氣通』 卷1 體通 「神氣由臟腑而有異」, p. 20, “醫書云 肺應鼻 心應舌 脾應口 胃應牙齦 肝應目 腎應喉耳 自靈樞以後 皆尙此說 至漢令太醫院醫 驗視刑戮之人 身體脈絡 無不詳察 斤重大小 雖有詳傳 是皆驗視死人之臟腑經絡而已 非得見生人之臟腑 飮食則飢飽有異 喜怒則某臟動 某腑靜 疾病則虛實寒熱 各有低仰矣.”
이와 관련하여 최한기의 인체관을 기계론으로 보는 견해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었다(야규마코토, 2008: 220). 본 글도 이러한 비판과 궤를 같이 하고 있으며, 기존 연구가 주목하지 못하였던 최한기가 신체기관을 중시하면서도 동시에 신기를 중시한 입장을 화담학의 기통질국의 입장으로 설명하고자 하였다.
崔漢綺, 『明南樓全集 一』, 『身機踐驗』 卷2, 「身機總論」, p. 357, “資賴天地神氣運化 承順父母神氣運化 有此身之成機 驗時儀之輪齒 詎可諭其活動 水火機之管舌 何足及此生氣運化之方.”
崔漢綺, 『神氣通』 卷2 目通 「窮格器用」, p. 39, “人身形體 是一器械也 內盛神氣 外接酬用.”
이것은 앞서 살핀 신기와 형질에 대한 문제인식과 연결된다. 형질은 신기의 발현으로서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佐野安貞의 『非藏志』에 대해서는 (김성수, 2012: 125; Trambaiolo, 2015: 93-94) 참조
佐野安貞, 『非藏志』 序, “夫藏之爲藏 非形象之謂 以藏神氣也 神去氣散 藏只虛器 何以知視聽言動隋其所 又何以見榮衛三焦之統紀.” 이 자료에 대해서는 (스크리치, 2008: 176; 김성수, 2012: 125) 참조.
이것은 유럽에서도 마찬가지로 제기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더핀, 2006: 51) 참조.
사노는 “신이 사라져 기가 흩어지면”이라고 하여 신기를 신과 기로 구분하고 있지만, 최한기는 신기를 신과 기로 명확히 나누고 있지 않다. 이점은 전통중국의학의 논의와 차이를 보이는 부분이라고 생각된다. 정·신·기로 그 구분을 세밀히 할 수 있지만, 최한기는 신과 기로 나누기보다는 신기로 하여서 단순화하였다고 생각된다.
최한기의 신기 관념과 한의학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정진욱, 2003: 25-26; 77-78)에서도 언급되었다.
崔漢綺, 『明南樓全集 一』 『身機踐驗』 卷8 「萬物運化皆攝醫學」, pp. 519-520, “宇宙睿知賢俊 所悅樂者 氣化究明 萬事萬物 皆循氣化而得其脈絡 撤去蒙蔽之千載妨碍 啓發顯著之充滿形質 因器械而見氣明 遠鏡及顯微鏡是也 因器械而驗氣遲速 鍾錶及時辰儀是也 因器械而見氣形質 氣砲力拒 氣碗水避 是也 因器械而驗血氣之陞降 玉衡恒升是也 地氣之養氣 淡氣 炭氣 輕氣 電氣 皆可用法較辨之 水節風鎗 呑吐諸氣 磺强 硝强 和融諸藥.”
崔漢綺, 『明南樓全集 一』 『身機踐驗』 卷8 「萬物運化皆攝醫學」, pp. 520, “氣數明而身運化之强弱進退有實據 剖驗多而全體部位之成機運動無貳論.”
근대 서양의 기계로서의 몸 관념에 대해서는 (브르통, 2003: 75-97) 참조.
崔漢綺, 『明南樓全集 一』 『身機踐驗』 卷8 「萬物運化皆攝醫學」, p. 519, “醫學 不可但以一身之病不病論 當融會於運化氣之源委 的覩人意思之不可牽合 惟有循脈絡而承順氣化 於其源 則日星地月 推挽轉圜之氣 見得大略 萬事承順 庶得方向 是由於統察宇宙 積累經驗 祛虛就實 究明氣化.”
崔漢綺, 『明南樓全集 一』 『身機踐驗』 凡例, p. 322, “以補劑單方得效與否 隨人而異 宜於此人之效 或不宜於彼人矣 雖以一人言之 去年用此藥而得效者 今用此藥而不得效 或此時得效之藥 在他時而不見效 是由於三等運化 參差不齊 氣血臟腑 有是藥之時或適宜 時或不適宜.”
근대 서양의 해부학이 몸을 외부로부터 독립된 우주로 보았다면(브르통, 2003: 40) 최한기는 신기 관념을 통하여 몸을 외부와 소통하는 장(場)으로 보았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최한기의 사유방식은 운기론(運氣論)의 문제의식과 일면 흡사하였다. 운기론은 대기의 기후변화와 인간 몸과의 연관성을 매우 강조하였다(이형주, 최승훈, 안규석, 문준전, 1992; 윤창렬, 1997). 운기의학에 의하면, 그 때의 운기에 따라 병의 성격과 사람의 체질이 달라지고 이에 따라 처방 또한 달라질 수 있었다. 이와 관련하여 최한기의 의학 논의가 동양적 세계관과 한의학의 정체론(整體論)이 투영되어 있다고 본 견해도 있다(이규성, 2007: 38). 이 의견은 앞서 최한기의 신기 관념과 한의학과의 관련성을 논한 정진욱의 견해(정진욱, 2003: 25-26; 77-78)와 함께 최한기의 의학 논의와 전통중국의학과의 관련성을 말해주었다.
이와 관련하여 다음의 논의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최한기는 오행설과 사원소설 모두에 대해서 비판적이었다. 崔漢綺, 『明南樓全集 一』 『運化測驗』 卷2 「五行四行」, p. 286, “日用常行 何獨五行 萬物運化 豈分四行 中國五行說之害 到今爲難醫之疾 西國四行說之傳 縱爲氣之發端 猶有所未盡.”
『黃帝內經素問』 「靈蘭秘典論 十二內臟論」, “心者君主之官也 神明出焉 肺者相傅之官 治節出焉 肝者將軍之官 謀慮出焉 膽者中正之官 決斷出焉 膻中者臣使之官 喜樂出焉 … 凡此十二官者 不得相失也 故主明則下安 以此養生則壽 歿世不殆 以為天下則大昌 主不明則十二官危 使道閉塞而不通 形乃大傷 以此養生則殃 以為天下者 其宗大危 戒之戒之.”
崔漢綺, 『明南樓全集 一』 『神氣通』 卷2 目通 「相人醫人之神眼」, p. 38, “醫書之臟腑脈絡 藥性氣味 俱屬于五行 以施補洩 此乃人身形質之外 添附假虛之法 眩惑視聽 反晦可知之形質何暇論神氣哉.”
崔漢綺, 『明南樓全集 一』 『明南樓隨錄』, p. 307, “若只知有神氣 而不知有形質 未達一間之害 至使措處多罔昧.”
崔漢綺, 『明南樓全集 一』 『推測錄』 卷2 推氣測理 「推形質測神道」, p. 118, “夫形質之外 無他可求之神 故洞悉其形質者 可以測其神 若未能洞悉其形質者 不可以測其神.”
앞의 각주 70) 참조.
崔漢綺, 『明南樓全集 一』 『神氣通』 卷1 體通 「神氣由臟腑而有異」, p. 20, “神氣之管涉 自有不可模着者 從醫論之臟腑 而測生人之臟腑 從生人之臟腑 而測神氣之發用 從神氣之發用而測神氣之全體 從神氣之全體 而通天地萬物之神氣 是乃可循之條理.”
崔漢綺, 『明南樓全集 一』 『身機踐驗』 凡例, p. 321, “腦氣筋 分佈於耳目口鼻 以爲視聽臭味內而臟腑 外而肢末 腦筋密敷 如木葉之佈筋紋 無處不達 動輒感應 觸必有覺 又有總血管 廻血管 導飮食消化之氣血 週流上下 灌漑膚肉 籍養精液 是則身運化固有天機 自賅功用 苟能貫澈乎腦筋血管 瞭然於目 驗時儀之輪車丑斡旋 不足諭其運化成機 水火機之管舌呑吸 何能及乎廻血自上 醫學至此 斯過半矣 西醫之費精勞神至有鉸連骨格 紙塑人形 擧示後世 遠近諸國 雖未忍剖割考驗 可感前人敎後之惠.”
최한기 사유의 이러한 성격에 대해서는 (신동원, 1997: 202; 여인석, 노재훈, 1993: 72; 여인석, 1999: 152-153: 이현구, 2000: 86) 참조.
後藤艮山, 『近世漢方醫學書集成 13: 後藤艮山 山脇東洋』(大塚敬節 失數道明 編, 1979, 東京: 名著出版) 『艮山後藤先生往復書簡』 「答舟菴熊膽篇」, p. 245, “不惑宋明諸家之陰陽旺相府藏分配區區之辨 識百病生於一氣留滯則思過半矣.”
崔漢綺, 『明南樓全集 一』 『身機踐驗』 序, p. 319, “至於神氣運化 因種脈而成形質 疾病作息亦因神氣運化而轉移 是則中西醫書 俱未能特擧發明.”
山脇東洋, 『近世漢方醫學書集成 13: 後藤艮山 山脇東洋』(大塚敬節 失數道明 編, 1979, 東京: 名著出版)『藏志』, 乾之卷, 「藏志」, pp. 461-462, “理或可顚倒 物焉可誣 先理後物 則上智不能無失也 試物載言其上 則庸人有所立也 …… 松自松 栢自栢 飛者飛 走者走 亘千古而不變 通殊域而不謬 此豈非明且著邪 …… 稽焉以復古之學 徵焉以經驗之實 是何幸也.”이 자료에 대해서는 (김성수, 2102: 115-116) 참조.
야마와키 도요의 제자였던 나가토미 도쿠쇼안(永富独嘯庵, 1732-1766) 문하의 카메이난메이(龜井南冥,1743-1814) 또한 이와 비슷한 주장을 펼쳤다. 그는 사물에서 직접 구할 것을 제시하였다. 龜井南冥, 『近世漢方醫學書集成 14: 永富独嘯庵, 山脇東門, 龜井南冥』(大塚敬節 失數道明 編, 1979, 東京: 名著出版) 『南冥問答』 「南冥問答附言」, pp. 377-378, “古之致知者 必先格物 未聞以夫書也 譬諸武弁講兵 治世之士群居終日 繙書尋繹兵理 理之茅塞 不可通也 橫議紛糾 聚訟不止 要之未得之于物 如之何其能致知.”
西村書店 編輯部 編, 『解體新書』(東京: 西村書店, 2016) 凡例, p. 35, “夫臟府骨節 其位置有一所差焉 則人以何乎立 治因何乎施.”
기존 의학의 체계적 상관성을 비판하던 이 시기 새로운 의학의 모색은 왕청임의 문제의식과 짝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Unschuld, 2010: 212) 참조.
王淸任, 『醫林改錯』 上卷 「醫林改錯臟腑記敍」, “治病不明臟腑 何異於盲子夜行.”
王淸任, 『醫林改錯』 上卷 「醫林改錯臟腑記敍」, “其論心 爲君主之官 神明出焉 意藏於心 意是心之機 意之所傳曰志 志之動變曰思 以思謀遠曰慮 用慮處物曰智 五者皆藏於心 旣藏於心 何得又云脾藏意智 腎主伎巧 肝主謀慮 膽主決斷 據所論 處處皆有靈機 究竟未說明生靈機者何物 藏靈機者何所 若用靈機 外有何神情 其論心如此含混.”
王淸任, 『醫林改錯』 上卷 「腦髓說」, “氣之出入 由心所過 心乃出入氣之道路 何能生靈機 貯記性 靈機記性在腦者 因飮食生氣血 長肌肉 精汁之淸者 化而爲髓 由脊骨上行入腦 名曰腦髓 盛腦髓者 名曰髓海 其上之骨 名曰天靈蓋.”
王淸任, 『醫林改錯』 下卷 「半身不遂本源」, “夫元氣藏於氣管之內 分布周身 左右各得其半人行坐動轉 全仗元氣 若元氣足則有力 元氣衰則無力 元氣絶則死矣.”
그러한 장부가 설정한 권력관계가 사회에서도 무리 없이 적용될 가능성이 있었다. 이에 대해서는 (여인석, 2017: 33-34) 참조.
『황제내경』에서 심장을 중심으로 하여 각각의 장부가 특수한 신정을 가지고 있다는 사유는 당시의 사회적 위계 질서를 반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논의는 근대 서양의 뇌주설이 뇌만이 신정을 가지며, 다른 신체기관은 그러한 신정을 갖지 않는다는 사유와 비교해 볼 때(合信, 『全體新論』 「膽論」, “素問以膽爲中正之官 決斷出焉 實未知膽之爲用也.”) 함께 사회적 위계를 반영했다고 해도 각각 그 사회적 위계가 갖는 성격의 의미는 달랐다고 할 수 있다. 『황제내경』은 지방분권적인 봉건제적 요소를 상당 부분 가지고 있는 중앙집권 즉 집권적 봉건제 사회를 반영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며, 근대 서양의 뇌주설은 더욱 군주 중심의 중앙집권체제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구리야마 시게히사는 중국의 신체관이 그리스 의학에 비해서 권력의 다양성과 동등성을 보여주고 있음을 지적하였다(구리야마, 2013: 163).
베살리우스의 『인체 구조에 대하여』는 1권 뼈와 관절, 2권 근육, 3권 맥관계통, 4권 신경계통, 5권 배안내장, 6권 심장과 허파, 7권 뇌로 구성되어 있었다.
해부학과 뇌주설의 관련성 문제에 대해서는 김성수·신규환의 글을 참조할 수 있다(김성수·신규환, 2017: 63-74).
이에 대해서는 (브르통, 2003: 91-97) 참조.
이와 관련하여 그는 『인체 구조에 대하여』의 서문에서 카를 5세를 극찬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조성일, 2008: 52) 참조.
이것은 앞서 살펴보았듯이 오장육부가 각각의 위계적 질서를 함의하고 있었던 것을 말한다.
이에 대한 것은 (김태진, 2016: 254-260)을 참조할 수 있다.
後藤艮山, 『近世漢方醫學書集成 13: 後藤艮山 山脇東洋』(大塚敬節 失數道明 編, 1979, 東京: 名著出版) 「艮山後藤先生往復書簡: 燥火」, p. 287, “堯之爲君 舜以下百官士農工商 皆相而輔其君 舜爲君則亦然 此均是人 而有事則有分 蓋天地間一氣而已 一氣之有風寒燥濕君相二火 亦猶如此 而爲風自有風之事 寒自有寒之事 燥濕自有燥濕之事 爲君則行其令 爲相則從而遊行 雖有其分 如無所自主者也.”
앞의 각주 97) 참조.
崔漢綺, 『明南樓全集 二』 『人政』 卷17 選人門 四 「從民願擇選官」, p. 328, “選擧善選擧之官 從民願也 民雖至愚 衆多耳目 自有傳達之神 公論從其中而起 推薦從其言而定 卿宰數十人 外內著績 已有忠公才識 協於民望者 指點二三人之出類 從民願而任選擧 則是乃選擧之善選擧也.”
崔漢綺, 『明南樓全集 一』 『身機踐驗』 凡例, p. 322, “於是自有中取於西 西取于中者 又有不取於中 不取於西 而闡明天地人之神氣運化 施於藥治 推擴醫家醫國醫宇內之術 何可以中西爲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