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계와 식민의학: 식민지 시기 조선인 결핵 실태를 둘러싼 논란을 중심으로
Statistics and Colonial Medicine: A Doubt and Controversy on Tuberculosis Statistics in Colonial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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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This paper focuses on the criticism of tuberculosis statistics published by the Japanese Government-general in colonial Korea and a research on the reality of tuberculosis prevalence by medical doctors from the Department of Hygiene and Preventive Medicine at Keijo Imperial University (DHPMK). Recent studies have shown that colonial statistics shape the image of colonial subjects and justify the control to them. Following this perspective, this paper explores the process of producing the statistical knowledge of tuberculosis by medical scientists from DHPMK. Their goal was to find out the resistance to tuberculosis as biological characteristics of Korean race/ethnicity. In order to do so, they demonstrated the existence of errors in tuberculosis statistics by the Korean colonial government and devised a statistical method to correct them based on the conviction that the Western modern medicine was superior than Korean traditional medicine as well as the racist bias against Korean. By analyzing how the statistical concepts reflected these prejudices, this paper argues that the statistical knowledge of tuberculosis created images that Japanese people was healthier and stronger than the Korean people and justified the colonial government’s control over Korean.
1. 머리말
1942년 조선의 행정 문제를 다룬 한 학술지에는 조선총독부 질병통계의 정확성에 의혹을 제기하는 논문이 실렸다. 그 의혹은 다음과 같았다.
조선에서는 전염병 통계를 모아도 기묘한 현상에 고민하게 된다.예를 들어 장티푸스, 적리(赤痢) 같은 소화기계 급성전염병은 생활, 위생이라는 면에서 생각하면 당연히 그 발생수가 적다고 생각되는 일본인에서 조선인보다 높은 발생률이 나타난다. 반대로 사망률을 보면 일본인에서 낮고 조선인에서 높다. 이런 점으로 보아 통계의 재료가 되는 신고에 문제가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중략) 결핵 같은 만성전염병이 과연 일본인에게서 많을지 조선인에서 많을지를 알기 위해서도 이런 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1].
이 문제제기는 두 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알려준다. 첫째는 식민통치기간 중 인구에 대한 통계적 조사가 가장 강력하게 추진된 전시체제 하에서조차 조선총독부의 질병통계가 전문가들의 신뢰를 얻지 못했다는 점이고, 둘째는 조선인보다 일본인이 더 질병에 취약하다는 통계 결과에도 불구하고,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조선총독부의 방역정책이 조선인에 대한 통제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는 점이다.
이 현상은 식민통치와 인구통계의 관계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으로는 잘 설명되지 않는다. 인구통계는 ‘객관적’이고 ‘가치중립적’이라는 믿음에 의해 지적 권위를 획득하고, 그 권위를 바탕으로 식민지에 대한 상상과 그 통치 방향을 결정하며 그것에 정당성을 부여한다(아파두라이, 2004; 201-240). 그러나 조선총독부의 통계는 신뢰성을 획득하지 못했고 그만큼 식민통치에 대한 정당화 역할도 수행하기 어려웠다. 식민지 조선에서 인구조사는 조선인들에게 식민화의 수단으로서 알려졌고 그로 인해 그들의 협조를 얻지 못했으며(박명규, 서호철, 2003), 조선인 하층계급의 상태를 파악하고 관리하는 데 실패했다(愼蒼健, 2010). 그렇다면 조선총독부의 조선인 질병통계는 구체적으로 어떤 이유로 전문가들, 즉 의학자들의 신뢰를 얻지 못했고, 그런 상황에서 의학자들은 조선의 질병 유행 상황을 어떻게 이해했을까? 그리고 그에 대한 이해는 어떻게 조선인에 대한 조선총독부의 위생통제를 뒷받침했을까?
식민지 시기 조선인에 관한 의학자들의 통계적 연구는 제국주의의 자장 안에서 형성되었다. 조선 내 일본인 및 조선인 의학자들은 조선인의 신체를 계측하고 통계적으로 분석한 뒤 일본인 및 다른 ‘민족’들과 비교함으로써 그 ‘민족적’ 특징을 도출했다. 이 측정과 비교의 과정에는 생물학적, 사회문화적 우열 관계를 포함한 인종주의적 해석이 동반되었으나, ‘수학적’ 연구 방법으로 인해 그 연구 결과는 ‘객관적’ 사실로서의 지위를 획득했다. 이 지식들은 조선인의 열등성과 후진성을 보여주는 ‘과학적’ 증거로서 기능하며 식민지배를 정당화하는 논리와 연결되었고, 반대로 그 논리가 조선인에 관한 통계적 연구에 반영되기도 했다(박순영, 2006; 김옥주, 2008; 정준영, 2012; 홍양희, 2013).
위 연구들의 시각을 공유하면서 이 논문은 조선총독부의 조선인 질병통계에 대한 불신과 조선의 질병 유행 상황에 대한 의학자들의 이해가 형성되는 과정을, 결핵통계를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조선인 결핵통계에 대한 불신은 그 집계가 시작된 직후부터 지속적으로 제기되었으며, 통계에 포함된 오류를 극복하고 조선인 결핵 유행의 ‘진상’을 밝히려는 의학자들의 시도가 체계적으로 이루어졌다. 따라서 결핵통계는 그 ‘진상 규명’의 과정을 추적하기 좋은 소재일 뿐 아니라, 조선인에 대한 의학자들의 관념이 어떠했는지, 그것이 어떻게 조선총독부의 통계를 대신하여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지식으로서의 권위를 얻게 되었는지를 드러내기에 좋은 소재이다.
결핵은 식민지 조선에서 소위 ‘망국병’으로 불리며 중시되었음이 널리 알려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의학사 분야의 연구는 그리 많지 않다. 지금까지 식민지 조선의 결핵에 대한 연구들은 주로 조선총독부와 기독교 선교사들의 결핵예방운동에 주목해왔다(박윤재, 2008; 최은경, 2013). 이 연구들은 꼼꼼하고 비판적인 분석을 통해 조선총독부의 결핵예방운동이 결핵에 대한 적극적 대응에 실패하고 결국 조선인의 개인위생만을 강조했다는 한계를 드러냈다. 그 과정에서 조선인의 개인위생 관리에 치중한 조선총독부의 방침은 결핵예방운동이 실패한 결과로만 그려졌을 뿐, 그것이 어떻게 정당성을 얻었는지는 다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조선인의 개인위생 통제 또한 나름의 지적 타당성을 입증해야 시행될 수 있었다. 이 논문은 의학자들의 조선인 결핵통계 연구를 통해, 조선인에 대한 위생통제의 지적 기반으로서 조선인의 의료행태와 생활양식이 결핵 만연의 핵심적 원인이라는 인식의 논리적 구조를 살펴보고, 그런 식민통치의 논리가 어떻게 통계 지식에 반영되었는지를 드러내고자 한다.
2. 결핵 만연에 대한 위기의식과 결핵통계를 향한 불신
1920년대 중반부터 조선에서는 결핵의 급격한 증가를 우려하는 위기의식이 조성되기 시작했다. 한 신문기사는 조선총독부 경무국 위생과가 발표한 통계를 인용하여, 1927년 2월 말까지 조선에서 폐결핵 환자가 5,706명으로, 그 전 해와 비교하여 약 2,000명이 증가했다고 보도했다[2,]. 다른 해에 발표된 기사 또한 조선총독부의 통계를 인용하여 1927년부터 1933년까지 연도별로 연말에 집계한 폐결핵 환자 수가 1927년에는 4,836명, 1928년에는 6,835명, 1929년에는 7,650명, 1930년에는 6,674명, 1931년에는 7,477명, 1932년에는 8,058명, 1933년에는 9,014명으로, 1930년을 제외하고는 “매년 500명 이상 1,000여 명씩 결핵 환자가 격증”하고 있다고 언급했다[3,]. 이런 상황에 대해 한 사설은 위생상태의 적절한 개선이 없다면 조선은 “불과 얼마 안 되어 병의 정복을 당할 것이요, 다시는 더 어쩔 수 없는 경우까지” 도달하여 결국 “폐결핵이 우리 사회를 망하게 할” 것이라고 경고했다[4].
하지만 이 위기의식은 조선의 결핵 유행 상황에 대한 ‘정확한’ 통계적 근거를 바탕으로 형성된 것은 아니었다. “조선의 결핵병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 분명한 통계를 오인(吾人)이 가지지 못하였으므로 연래(年來)의 증세(增勢)에 대하여 명시하지 못하는 것은 유감”이라고 하면서도 “최근 오인이 목도하고 문견(聞見)한 수치로만 추측할지라도 급격한 증가를 표시하는 줄 믿는다”라고 언급한 기사에서 드러나듯[5], 당시의 결핵 급증에 대한 위기의식은 오히려 ‘분명한 통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통계 수치들을 가지고 결핵 유행의 실제 상황을 ‘추측’한 결과 조성된 것이었다. 그렇다면 당시 결핵에 대한 논한 사람들은 왜 조선총독부의 결핵 통계 자료를 사용하면서도 그 신빙성을 의심했고, 그것을 통해 조선의 결핵 유행 상황을 어떻게 유추했을까?
이에 대해 본격적으로 살펴보기에 앞서, 먼저 조선의 결핵 상황에 대한 정부 차원의 조사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검토하고자 한다. 식민지 시기 조선 전 영토에 걸친 결핵 분포 상황을 파악하려는 시도는 1910년대 말에 시작되었다. 조선총독부는 1919년부터 결핵으로 인한 사망자 수를 집계하기 시작했다. 그때까지 조선총독부의 사망통계에서 결핵은 별도의 사망원인으로 구분되지 않았지만[6,], 1918년 조선총독부령 제4호로 ‘폐결핵 예방에 관한 건’이 반포된 것을 계기로 그 중요성이 부각되어 별도의 사인으로서 집계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7].
결핵사망통계가 작성되기 전까지 조선의 결핵 분포 상황을 알려주던 주된 자료는 조선총독부의원과 각 도에 설립된 자혜의원(慈惠醫院) [8,] 등 관립병원의 진료환자 통계였다. 관립병원이 매년 작성한 환자 통계는 해당 병원에서 진료를 받은 환자의 수를 진료과목별, 외래와 입원, 질병별, 민족별, 방문시기별로 나누어 집계했는데, 그중 결핵으로 진단받은 환자들의 정보가 포함되어 있었다[9]. 이 결핵 환자 통계는 조선 전체의 환자 수를 집계한 것이 아니라 단지 관립병원을 방문한 결핵 환자의 수를 파악한 것이었지만, 결핵 환자를 진단한 의사 또는 환자 자신을 대상으로 결핵 환자의 신고가 의무화되거나 다른 방법을 통해 조선의 결핵 환자에 대한 전수조사가 시행된 적이 없는 식민지 조선의 상황에서는 조선 전체의 결핵 유병률을 대신하는 자료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조선총독부의 결핵사망통계와 관립병원의 결핵 환자 통계는 좀처럼 그 신뢰성을 인정받지 못했다. 가령 1918년 『매일신보』의 한 기사는 조선총독부의 폐결핵 환자 통계에서 일본인은 남자가 4,545명이고 여자가 5,105명인 데 비해, 조선인은 남자가 3,811명이고 여자가 2,560명으로 남녀 모두 일본인보다 조선인이 적지만, “실상 환자 수를 또박또박이 조사하게 되면 이보다 몇 갑절이 될 놀라운 숫자를 보게 될” 것이며, “실상을 조사하면 비교적 조선인이 많을 것”이라고 보도했고[10,], 같은 해 조선총독부 경무총장 후루미이즈시오(古海嚴潮)는 의사의 진료를 받은 결핵 환자 수를 <표 1>과 같이 보고하면서, 조선인 결핵 환자가 일본인 결핵 환자보다 적은 현상에 대해 “민도(民度)가 낮은 조선에서는 이 외에 의료를 받지 않은 병자가 매우 많을 것으로 추측”한다고 말하며 조선인 결핵 환자 통계에 대해 의구심을 표출했다[11].
조선의 결핵 통계에 대해 의혹이 제기된 핵심적인 이유는 그 통계 수치상 조선인이 일본인보다 결핵에 적게 걸린 것으로 표시되었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한 『매일신보』의 기사와 후루미의 글은 둘 다 조선인 결핵 환자 수가 일본인보다 적게 집계된 통계 결과를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그것이 실제와 다를 것이라고 언급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조선 내 의학자들 또한 조선인 결핵 환자가 일본인보다 적은 통계 현상에 대해 강한 불신을 표하면서 그것이 집계과정에서 조선인 환자가 누락된 결과라고 믿었다. 예를 들어 식민지 조선에서 가장 큰 의학 학술단체인 ‘조선의학회’는 1921년 결핵을 학회의 특별 연제로 선정하고 조선의 결핵 유행 현황에 대한 보고를 조선총독부의원 내과 과장오자와 마사루(大澤勝)와 동 병원 외과 과장 기리하라 신이치(桐原眞一)에게 의뢰했는데, 이들 또한 조선총독부의원의 결핵 환자 통계를 바탕으로 조선의 결핵 유행 상황을 설명하면서도 그중 조선인 통계는 현실과 다르다고 여겼다. 오자와는 조선총독부의원 내과의 외래환자 통계를 분석하여 전체 사망자 100명 중 폐결핵 사망자의 비율이 일본인은 3.3%이고, 조선인은 1.3%라는 계산 결과를 얻었다. 하지만 그는 이 결과에 대해, “이것이 조선의 폐결핵 만연의 실상을 말하는 것이라면 조선은 천혜의 낙토(樂土)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반드시 그렇다고 믿을 수가 없다. 후일 정확한 통계를 얻으면 그 수치는 내지(內地) 및 외국의 사람들을 경악하게 할 것이 틀림없다”라고 평가했다[12,]. 오자와와 함께 발표한 기리하라는 조선총독부의원 외과를 방문한 외래환자들 중 골관절 결핵 환자의 수를 집계하여 분석한 끝에, 일본인 여성보다 조선인 여성에서 골관절 결핵이 훨씬 더 적다는 결과를 얻었다. 하지만 그도 오자와와 마찬가지로 이 통계가 사실과 다르다고 지적하면서, 조선인이 실제로 일본인보다 결핵에 덜 걸리는 것이 아니라 “조선인 여자가 외출을 꺼리는 관습상, 외과적 결핵처럼 만성 경과를 거쳐도 고통이 비교적 경미한 질환으로는 의사를 방문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통계 현상이 나타났을 뿐이라고 언급했다[13].
이처럼 조선인이 일본인보다 결핵에 덜 걸릴 리 없다는 믿음은 식민지 시기 내내 조선 내 일본인 및 조선인 의학자들과 언론매체들 사이에서 널리 퍼져있었다. 이 믿음의 기반에는 서양의학의 발달 여부가 건강의 정도를 결정하는 지배적인 요소이며, 따라서 서양의학을 먼저 배우고 발전시킨 일본인이 조선인보다 건강하다는 관념이 놓여있었다. 가령 조선 내 의학자들이 통계 결과와 달리 조선인 사이에서 결핵이 만연하다고 생각한 대표적인 이유 중 하나는 조선인들 사이에서 서양의료가 별로 확산되지 않았다는 데 있었다. 일례로 오자와는 조선의학회의 발표에서 조선인 중 “우리 의학에 의지하는 사람이 적고 여전히 초근목피에 기대는 사람들”이 많다고 언급했고[14,], 1920년대 후반 이래 결핵 예방을 위한 계몽운동이 활발해짐에 따라 그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경성제국대학(이하 경성제대) 내과학교실의 조수 김동익(金東益) 또한, 결핵에 대한 대중강연에서 조선인이 결핵에 걸렸을 때 일차적으로 서양의학을 이용하지 않는 태도를 비판했다. 그는 “이 병에 쓰는 약으로는 한약, 상약, 매약, 양약 등 수백수천 가지”가 있다고 말하며, “가정에서 이 약도 쓰다가 저 약도 쓰고 하지 마시고 가장 신용할 만한 의사에게 전부 부탁할 것”을 당부했다[15]. 오자와와 김동익처럼 서양의학을 전공한 의학자들을 비롯하여 다른 의료수단들을 압도하는 서양의료의 우수성을 확신하는 사람들에게, 결핵 치료의 일차적인 수단으로 서양의료를 선택하지 않는 조선인들의 태도는 그들로 하여금 적절한 치료시기, 즉 완치가 가능하다고 간주되는 발병 초기를 놓치고 결국 결핵의 악화를 초래하는 요소로 비추어졌다. 물론 1940년대 후반 효과적인 항결핵제가 발명되기 전까지 결핵의 완치는 매우 어려운 일이었지만, 서양의학의 치료 효과를 믿던 이들이 보기에, 서양의학을 우선시하던 일본인들보다 그렇지 않던 조선인들에서 결핵이 적다는 것은 성립 불가능한 일로 여겨졌다.
나아가 의학자들이 보기에 서양의학의 발달이란 단순히 사람들이 의존하는 의료자원의 종류가 서양의학 위주로 재편되는 것뿐 아니라, 서양의학의 관념에 근거한 생활양식을 갖게 되는 것을 가리켰다. 결핵의 경우에 서양의학적인 생활양식이란, 결핵의 발생과 전파를 촉진할 만한 행동과 환경을 효과적으로 통제하는 것을 의미했다. 김동익의 강연에 따르면 조선인은 이 점에서 결핵균에 감염되기 쉬운 습관을 지니고 있었다. 익숙하지만 삼가야 할 대표적인 행동으로 그가 조선인들에게 제시한 것은 전차, 도로, 정원 등의 공공장소에서 가래를 뱉는 행위, 입을 가리지 않고 기침을 하는 행위, 결핵 환자와 침실 및 식기를 공유하는 행위 등이었다. 김동익은 이런 행동으로 인해 환자의 몸에 있던 결핵균이 외부로 배출되어 침을 통해 다른 사람에게 전염될 수 있다고 보았고, 이런 결핵의 감염과 전파 원리를 알고 실천함으로써 조선 사회의 결핵 확산을 저지할 수 있다고 예상했다[16].
이와 함께 일본인보다 조선인 사이에서 결핵이 더 만연함을 뒷받침하는 증거로 자주 거론되던 것은 조선의 전통적인 가옥 양식, 즉 온돌이었다. 오자와는 『동의보감』(東醫寶鑑)의 기록을 인용하여 조선에서 오래전부터 결핵이 유행해왔다고 하면서, 그 원인을 조선의 ‘특유한 가옥의 건축양식’, 즉 ‘온돌가옥’에서 찾았다. 그에 따르면 온돌가옥은 통풍이 잘 되지 않는 탓에 유독가스, 열, 습기 등을 외부로 배출하지 않고 결핵 감염에 유리한 환경을 조성했다[17,]. 그 원리에 대해서는 후일 경성제대 내과학교실 교수 이와이 세이시로가(岩井誠四郞) 더 구체적으로 제시한 설명이 있는데, 겨울철 보온을 위해 실내에서 열기가 빠져나가는 것을 막는 구조로 된 온돌가옥은 환기가 잘 이루어지지 않아서 세균 번식에 유리한 습기가 실내에 많고, 창문이 작아서 살균기능을 하는 자외선이 집안으로 잘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런 환경에서 많은 식구가 조밀하게 지낼 경우 실내공기를 통한 결핵균의 전파 가능성이 매우 높아진다는 추론이었다[18]. 즉 이들의 논의는 조선 특유의 온돌 문화로 인해 조선인들은 오래전부터 결핵 감염에 취약한 환경에 노출되어 왔다는 지적이었다.
요컨대 조선인 사이에서 결핵이 만연하다는 믿음은 주로 조선에서 서양의학의 발달과 보급이 미진하다는 논의에 의해 뒷받침되었다. 이런 설명 방식은 일본에서 결핵이 만연한 이유를 설명하는 방식과 다른 논리적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의학자들이 보기에 일본에서 결핵이 유행한 이유는 위생사상과 의학의 발달에도 불구하고, 급격하게 진행된 도시화와 산업화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한 까닭이었다. 결핵예방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한 세균학자 기타사토 시바사부로(北里柴三郎)가 1920년 10월 경성에서 한 강연에 따르면, “일본에서 의학은 장족의 진보를 하고 있지만”, 도시와 공업의 발달에 수반되는 여러 건강문제를 관리할 사회제도가 충분히 마련되지 않았고, 대중들은 알고 있는 의학 및 위생에 관한 지식을 실천하지 않기 때문에 결핵이 유행하고 있었다[19,]. 이는 바꾸어 말하면 일본인들은 이미 서양의학에 근거한 결핵 예방법에 대해 이미 잘 알고 있지만 그것을 실천으로 옮기려는 의지와 제도적 뒷받침이 부족한 상태이며, 그것만 보완된다면 결핵을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1932년 경성제대 위생학예방의학교실 조수 니노미야(二宮司) 또한 이런 관점에서 일본의 결핵 상황을 검토했다. 그에 따르면 일본에서는 결핵이 유행하고 있기는 하지만, “의학의 급격한 발달과 일반민의 위생적 관념의 각성이 서로 도와 이[결핵]에 충분히 반항하고 이것을 억제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었다[20]. 이처럼 의학자들의 눈에 일본의 결핵 유행은 결핵을 야기하는 문명의 진보와 그에 대항하는 서양의학의 발달 사이의 불균형에 의한 산물이었다.
조선의 결핵 유행 상황에 대한 논의에서, 어느 집단의 서양의학 지식의 체득 여부는 그 집단에서 결핵의 유행 상황을 파악하고 예측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비록 수년간의 통계자료가 일본인이 조선인보다 결핵에 취약한 상황을 보여주고 있을지라도, 그런 통계결과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할만큼 서양의학의 효과에 대한 의학자들과 언론의 믿음은 강력했다. 가령 조선총독부의학강습소 졸업생으로 조선총독부의원에서 일하던 방희창은 미국과 조선의 인구 대비 폐결핵 환자 수를 비교하며 “당국에서 엄중한 예방규칙을 실시하는 곳에서도 [결핵이] 매년 증가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런 규율도 아직 없고 위생학과 세균학의 지식이 유치한 우리 반도 동포야 어찌 한시라도 마음을 놓을 수 있으리오”라고 한탄했다[21,]. 나아가 스스로를 무족자(無足者)라고 칭한 한 논자는 “우리 조선에서는 소위 의원(醫員)이라 칭하는 자들도 폐결핵이 두려워 할 것인 줄을 알지 못할 뿐 아니라, 신경쇠약이나 보통 해수(咳嗽) 등과 혼동하여 통칭 부족증(不足症)이라 하며 그 예방법 같은 것은 하지도 않았다”고 말하며, 폐결핵 균에 대한 저항력을 기를 것을 강조했다[22,]. 이와 대조적으로, 비슷한 시기 적십자사를 중심으로 폐결핵 예방사업이 적극적으로 진행되던 일본의 성과는 조선의 언론을 통해 알려지면서, 조선의 열악한 실상을 부각시켰다[23,]. 이런 논의 지형에서 서양의학의 발달과 보급은 어느 국가 혹은 민족의 건강 향상과 직결되는 조건으로 그려졌다. 어느 집단 내 결핵 유행의 원인을 논할 때, 빈곤, 영양, 근로조건 등 그 집단이 처한 사회적, 경제적 환경이 결핵의 발생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는 설명이 제시되기도 했지만[24], 조선인과 일본인의 차이를 비교하는 데 있어서 상대적으로 핵심이 된 요소는 서양의학의 발달과 보급이었다.
서양의학의 발달과 보급 상태가 결핵 유행 정도를 결정한다는 관념 그 자체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었던 것은 아니다. 가령 1917년 조선총독부의원의 부원장이자 내과과장이던 모리야스 렌키치(森安連吉)는 “조선인에서 결핵 환자가 많다는 설을 주장하는 사람도 있지만, 이것은 폐결핵과 폐디스토마를 혼동했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단언할 수는 없”으며, 환기가 어렵고 열악한 거주환경과 낮은 위생사상 때문에 조선인은 결핵에 걸릴 위험이 높지만 “신체가 튼튼해서 병에 대항하는 저항력이 강하기 때문에 그에 비해서는 환자가 적다”고 주장했다[25]. 모리야스의 견해는 결핵과 흡사하게 객혈(喀血)을 주된 증상으로 하는 폐디스토마가 조선의 풍토병으로 널리 유행하는 상황에서, 서양의학을 전공한 의학자라고 할지라도 두 질병을 정확히 감별하여 진단하기 어려운 경우가 있다고 지적함으로써 결핵의 진단과 예방에 있어서 서양의학의 효과가 완벽하지 않음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모리야스는 조선인들이 비록 서양의학을 체득하지 못했더라도 오랜 기간 열악한 환경에 노출되면서 그에 적응하여 결핵에 대한 저항력을 갖게 되었을 가능성을 강조함으로써 서양의학의 미발달이라는 요소가 조선이 결핵 유행을 일방적으로 촉진하지만은 않았음을 지적했다. 하지만 1921년 조선의학회에서의 결핵 유행에 관한 발표 이래, 조선 내 의학자들과 언론의 입장은 대부분 결핵에 대한 서양의학의 영향력과 그 성취의 지연으로 인한 조선인 사이의 결핵 만연을 확신하는 방향으로 기울어졌다.
조선총독부와 관립병원의 결핵 통계가 발표되기 시작한 이래, 조선인 결핵통계가 잘못되었고 실제로는 일본인보다 조선인이 결핵에 더 취약하다는 믿음은 조선 내 의학자들과 언론 사이에서 널리 확산되었다. 그러나 조선인의 정확한 결핵 감염 실태를 조사하려는 시도는 1930년대 전반에 이르기까지 이루어지지 않았다. 조선에서 결핵이 급증한다는 걱정이 표출되기 시작한 1920년대 중반에도 그에 대한 기사들은 조선인의 결핵 감염 실태를 밝히려 하기보다는 결핵 환자가 조선인보다 일본인에서 더 많다는 ‘통계상의 오류’를 상기시키지 않으면서 조선내 결핵 환자의 증가를 부각시키려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일례로 동아일보의 한 기사는 1924년에 집계된 결핵 환자가 조선인 8238명, 일본인 3633명, 외국인 53명이고, 그중 사망자는 조선인 3102명, 일본인 893명, 외국인 27명으로, 결핵 환자의 사망률이 조선인에서 약 40%, 일본인에서 24%, 외국인에서 50%였다고 보고하면서 “사망률도 조선인이 수위(首位)”라고 강조했다[26,]. 조선인이 가장 높게 표시된 이 사망률 수치는 결핵 환자들 중 사망자의 비율을 계산한 값으로, 일반적으로 조선총독부의 통계에 수록되는 사망률, 즉 인구 1만 명당 사망자 수와 다른 지표였으며, 당해 조선총독부 방역통계에 수록된 인구 1만 명당 사망자 수는 일본인 22.15, 조선인 1.77, 외국인 7.70으로 일본인이 가장 높은 수치를 보였다[27].
하지만 1930년대에 접어들어 결핵이 급격히 증가하고 있다는 위기감이 점점 더 고조되면서, 의학자들 사이에서는 조선의 실제 결핵 유행 상황을 조사하려는 새로운 시도가 부상하기 시작했다. 이 의학자들의 목표는 결핵 진단기법 중 하나인 투베르쿨린 피부반응 검사(Tuberculin Skin Reaction Test)를 이용한 집단검진을 실시하고 그를 통해 특정 집단의 결핵 감염 정도를 파악하는 것이었다[28]. 투베르쿨린은 1890년 독일 세균학자인 로베르트 코흐(Robert Koch)가 결핵균에서 추출한 물질로, 결핵균에 감염된 경험이 있는 사람은 투베르쿨린에 대해 면역반응을 일으키게 된다. 이런 원리를 이용하여 투베르쿨린을 피부에 소량 주입한 뒤 일어나는 반응에 따라 결핵 감염 여부를 판단하는 것이 투베르쿨린 피부반응 검사이다. 결핵균에 감염되어도 결핵이 발병하지 않는 경우가 상당히 많기 때문에 어느 인구의 결핵균 감염률을 결핵병의 만연 정도와 동일시 할 수는 없지만, 결핵 이환율을 정확히 파악하기 어려운 환경에서 투베르쿨린 피부반응 검사의 성적은 결핵 유행 정도를 알려주는 지표로 널리 사용되었다.
1930년대 전반 조선에서 이 연구에 가장 적극적으로 나선 사람들은 경성제대 위생학예방의학교실과 소아과학교실의 의학자들이었다. 경성제대 위생학예방의학교실에서는 1933년부터 아동의 건강에 영향을 미치는 주된 요인으로서 조선 내 아동 집단의 결핵 감염률을 조사하기 시작했고[29,], 경성제대 소아과학교실에서는 결핵의 대표적인 진단기술 중 하나로서 투베르쿨린 피부반응 검사의 효과를 검토하기 위해 1934년부터 아동들을 대상으로 결핵 집단검진을 실시했다[30,]. 연구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두 교실의 의학자들은 서로의 성과들을 공유했고[31,], 아동의 결핵 감염률과 그에 영향을 미치는 사회적 요소들을 탐구한다는 목표 하에 공동연구를 진행하기도 했다[32].
이 두 집단 중에서도 특히 경성제대 위생학예방의학교실의 의학자들은 조선의 결핵 유행 실태를 규명하는 데 관심을 갖고 아동을 대상으로 한 결핵 집단검진을 왕성하게 실시했으며, 그 연구들을 발판으로 삼아 1930년대 후반에는 조선 전체의 민족별 결핵 감염 양상을 도출했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조선총독부와 관립병원들에 의해 작성된 조선인 결핵 통계의 ‘오류’를 극복하고, 조선 전체의 결핵 유행 상황에 대한 ‘진상’을 제시하고자 했다. 그들은 어떻게 조선인 결핵 통계의 ‘오류’를 해소했으며, 궁극적으로 그들이 진짜라고 이해한 조선의 결핵 유행 상황은 어떤 것이었을까?
3. 결핵집단검진을 통한 결핵 감염의 민족적 특징 구하기
조선의 결핵 실태에 관한 경성제대 위생학예방의학교실의 집중적인 연구는 1930년대 중반부터 시작되었다. 이 연구는 크게 두 방향으로 진행되었는데, 하나는 투베르쿨린 피부반응 검사를 이용한 결핵집단검진을 통해 조선의 결핵 감염률을 파악하려는 시도였고, 다른 하나는 그때까지 부정확하다고 비판을 받아 온 조선총독부의 조선인 결핵사망통계를 재검토하여, 조선인 결핵 사망의 진상을 밝히려는 연구였다. 이 연구들을 주도한 인물은 스가와 유타카(須川豊)였다. 그는 1936년에 경성제대 의학부를 졸업한 뒤 위생학예방의학교실에서 수련을 받고 후일 강사로 승진했다가 경기도 위생과장을 역임한 인물이다[33,]. 그는 1930년대 후반부터 결핵 연구에 몰두하여 조선의 결핵 사망률과 감염률에 대한 다수의 논문을 발표했다[34,]. 이 과정에서 스가와는 위생학 예방의학교실의 동료 혹은 후배 연구자들과 적극적으로 의견을 교환하면서 공동 연구를 수행했고, 공동 연구가 아닌 경우에도 후배들의 결핵 연구에 관심을 갖고 연구 방법과 노하우를 알려주었다[35]. 스가와를 구심점으로 한 지적교류를 통해, 경성제대 위생학예방의학교실의 결핵 연구들은 비슷한 문제의식과 방법론을 공유하는 일련의 학맥(學脈)을 형성하게 되었다.
조선에서 투베르쿨린 피부반응을 이용한 결핵집단검진 연구가 부상한 데는 조선의 결핵 만연에 대한 사회적 우려의 증가와 그에 수반한 의학자들의 관심 향상이 일차적인 원인이 되었지만, 그 외에도 결핵 유행의 심각성이 강조되면서 그 상황에 대한 실태조사가 활발히 추진되던 일본의 분위기가 배경에 놓여 있었다. 일본에서는 정부가 1904년에 ‘폐결핵 예방에 관한 건’, 1919년에 ‘결핵예방법’을 공포했으며, 1910년대부터 민간 차원에서 다수의 결핵예방단체들이 조직되는 등 일찍부터 결핵 예방을 위한 여러 노력들이 시행되었음에도, 1930년대에 이르기까지 결핵의 확산이 계속되었다(靑木純一, 2004; 福田眞人, 1995). 이런 상황에서 일본의 의학자들은 결핵의 유행 실태를 파악하기 위한 집단검진에 나섰다. ‘일본결핵예방협회’(日本結核豫防協會)의 학술지 『결핵』(結核)에는 1920년대 후반 이래 투베르쿨린 피부반응 검사를 활용하여 아동, 여공, 의료 종사자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결핵집단검진에 관한 논문들이 빠르게 증가했다[36].
결핵집단검진 연구는 1930년대 일본 정부가 본국과 식민지의 관계자들이 모인 ‘전국위생관료회의’에서 결핵 박멸을 강력히 촉구하는 등 일본 제국 전역으로 결핵예방운동이 확산에 따라[37,], 그 식민지에서도 점차 증가하기 시작했다. 조선과 만주 의학자들의 연합학술대회인 ‘선만연합의학회’(鮮滿聯合醫學會) [38,]와 연합학술지인 『만선지의계』에서는 만주 의학자들이 조선 의학자들보다 한발 앞서 결핵집단검진 연구를 활발하게 발표했다. 선만연합의학회에서는 1934년부터 1938년까지 지린(吉林), 다롄(大連), 펑톈(奉天) 등지에서 시행된 투베르쿨린 피부반응 집단검진 결과가 4건 발표되었고, 그 검진대상의 규모는 총 7,000여 명에 육박했다[39,]. 같은 기간 『만선지의계』에는 만주의 아동에 대한 투베르쿨린 피부반응 집단검진 연구가 4편 수록되었다[40,]. 이에 비해 조선 의학자들의 연구는 선만연합의학회에서 1편[41,], 『만선지의계』에서 1편이 발표되었을 뿐이었다[42,]. 이런 상황은 조선 의학자들을 자극했고[43,], 스가와 또한 조선의 결핵 유행 상황에 대한 연구가 많지 않은 상황에 대해 “조선 최대의 치욕이며 위생관계자는 물론 일반 의가(醫家)들이 크게 반성”해야 할 점이라고 말했다[44].
조선에서 결핵집단검진은 1936년 조선총독부가 조선결핵예방협회를 창립하고 전국적인 결핵예방운동을 전개하면서 본격적으로 시행되었다. 조선총독부는 각 도에 조선결핵예방협회의 지부를 설치하고 계몽운동, 무료검진, 결핵 유행 실태조사 등을 적극적으로 수행할 것을 촉구했다(대한결핵협회, 1998: 256-262). 그에 따라 강원도, 경성부, 경상북도, 황해도, 충청남도, 평안남도 등지의 지방 위생과에서 투베르쿨린 피내반응을 이용한 결핵집단검진이 실시되었다[45].
지역 위생과들의 결핵 집단검진은 조선총독부의 장려에 의해 시행되기는 했지만, 실제로 조선총독부의 지침과 감독은 거의 없었다. 조선총독부는 전국적인 결핵예방협회 지부의 창설 이후 그 실무를 지방행정기구에 맡긴 채 그에 대한 지원과 관리를 거의 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창설 당시 결핵예방협회는 결핵 환자의 격리 치료를 위한 결핵요양소 설립과 결핵 조기 진단을 위한 건강상담소 증설을 구체적인 활동 목표로 내세웠지만[46,], 조선총독부는 재정 부족을 이유로 결핵요양소를 독립적인 기관으로서 설립하는 대신 각 지역 도립의원에 부속기관의 형태로 설치할 것을 제시했으며, 그마저도 도립의원경비로 해결할 것을 요구한 상태였다[47,]. 건강상담소의 설치 또한 새로운 기관을 설립하는 것이 아니라, 각 지역 도립의원과 공의 진료소에 결핵상담 업무를 추가한 것에 불과했다[48]. 이처럼 결핵예방협회의 활동은 거의 지방행정기구의 역량에만 의존하고 있었고, 이 상황에서 지역별 결핵실태조사는 오로지 지방 위생관료들의 몫이었다.
중앙으로부터의 지침과 감독이 없는 상황에서, 지역 위생관료들의 결핵실태조사는 산발적으로 시행되었다. 지역마다 달랐던 조사방법과 검사범위는 그 사실을 잘 보여준다. 가령 경기도와 경상북도의 경우에는 나머지 지역들처럼 투베르쿨린 피부반응 검사를 이용한 집단검진을 실시하지 않았다. 경기도 위생과는 주로 체신국 종업원, 간호사, 접객업자 같은 결핵 감염의 고위험군을 대상으로 객담검사(喀痰檢査)와 건강진단을 실시함으로써 결핵 유행 상황을 파악하고자 했고[49,], 경상북도 위생과는 주로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한 건강상담에 의지했다[50]. 이 두 지역의 조사방법은 투베르쿨린 피부반응 검사를 사용한 결핵집단검진을 적극적으로 추진한 다른 위생과의 경우와 분명히 구별되었다.
하지만 투베르쿨린 피부반응 검사를 시행한 지역들 사이에서도 구체적인 검사방법은 서로 달랐다. 투베르쿨린 피부반응 검사는 투베르쿨린에 대한 과민성 면역반응을 활용한 결핵 진단법들의 총칭으로서, 투베르쿨린 용액의 농도, 접종 방식, 접종 부위 등 세부 내용이 다른 여러 검사법을 포함하고 있었다. 가령 일본에 소개된 투베르쿨린 피부반응 검사는 총 11 종류였는데, 여러 검사법들이 경합을 벌인 결과 1930년대에 가장 널리 사용된 방식은 피르케법(Pirquet’s Skin Reaction)과 망투법(Mantoux Test)이었다. 피르케법은 피부 위에 투베르쿨린 용액을 한 방울 떨어뜨린 후 그 부위에 바늘로 상처를 내어서 상처를 통해 시약이 흡수되도록 하는 방법인 데 비해, 망투법은 일정량의 투베르쿨린 용액을 주사기로 피부 내에 직접 주입하는 방법이었다(그림 1) [51,]. 두 방법은 시술 후 피부에 생기는 구진(丘疹)의 크기를 측정하여 양성 혹은 음성을 판정했으나, 같은 방법이라도 검사자에 따라 투베르쿨린 용액의 농도와 결과 판정 기준에 차이가 있었다. 조선의 지역 위생과들의 보고를 살펴보면, 경성부와 평안남도 위생과는 망투법으로 접종하면서 투베르쿨린 용액은 1,000배 희석액을 사용했다. 판정방법은 구진의 크기가 1.0cm 이상일 때를 양성으로 간주했는데, 평안남도 위생과가 1.0cm 미만을 모두 음성이라고 한 데 비해, 경성부 위생과는 0.4cm 이하를 음성, 0.5cm부터 0.9cm 사이를 의양성으로 판정했다. 충청남도와 전라남도 위생과는 망투법으로 접종하면서도 투베르쿨린 용액의 농도는 경성부와 평안남도 위생과의 것의 절반인 2,000배 희석액을 사용했다. 두 곳 모두 구진이 0.5cm 이상일 때를 양성이라고 했지만, 전라남도 위생과의 경우 0.5cm 이상인 경우에도 등급을 두어서 1.0cm까지를 양성, 1.1cm부터 2.0cm까지를 강양성, 2.1cm 이상을 강강양성으로 판정했다. 전라북도 위생과의 경우는 망투법이 아닌 피르케법을 사용했고, 구진이 0.5m 이상일 때를 양성으로 판정했다[52]. 이처럼 각 지역 위생과들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투베르쿨린 피부반응 검사를 시행했다.
지역 위생과들의 비일관적인 조사는 1940년 결핵예방회 조선지방본부가 중앙통제적인 조사사업을 시작하기 전까지 계속되었다. 재단법인 결핵예방회는 1939년 4월 일본 황실이 출자하여 창립한 기관으로, 1939년 11월에는 조선과 대만에 지부를 설치했고 조선총독부 및 지방관청의 행정적 지원과 일본 황실의 재정적 지원에 힘입어 적극적이고 전국적인 결핵예방사업을 전개했다[53,]. 결핵예방회 조선지방본부의 주력 사업 중 하나는 조선의 전국적인 결핵실태조사였다. 결핵예방회 조선지방본부는 1940년부터 각 도에 체위향상 모범지구를 설정하고 구내에 거주하는 11세부터 20세까지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결핵집단검진을 실시했으며[54,], 그 검사 성적은 중앙으로 수렴되었다. 그 보고에 따르면 전국 29,949명의 피검자 중 44.9%가 양성이었다[55]. 이에 비해 1940년 이전에 시행된 조선의 결핵실태조사는 제각각이었고, 그 조사방법은 지역 위생관료들의 자율적인 선택에 달려있었다.
1940년 이전의 산발적인 연구들을 모아 종합하는 역할은 경성제대 위생학 예방의학교실의 의학자들이 담당하고 있었다. 그들의 주요 연구 목표는 결핵 유행 양상의 민족별 특징을 구하는 것이었다. 이는 가급적 많은 데이터를 생산 및 수집하여 정책 수립과 평가에 필요한 표준수치를 구하는 데 중점을 둔 결핵예방회의 문제의식과는 달랐다. 경성제대 위생학예방의학교실의 의학자들은 직접 결핵집단검진을 실시하여 데이터를 수집하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기존 데이터를 통계적으로 보정하여 민족별로 연령에 따른 결핵 감염률 변화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파악하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이는 스가와가 데이터 수집을 위한 현지조사에 나서기보다, 각지 위생과들에게 부탁하여 기존 데이터들을 확보하고 그것을 분석하는 일에 집중했던 데에서 드러난다. 그는 자신의 연구부터 조선내 다른 의학자들에 의해 수행된 검사 결과까지 총 26개의 연구를 분석하여 결핵 유행 과정에서 나타나는 조선인과 일본인의 민족적 특징을 도출했다[56].
이처럼 결핵 감염 패턴의 민족적 특징을 중시하는 스가와의 태도는 결핵예방회가 집단검진 결과를 보고하면서, 그 민족 구성에 대해 ‘대체로 조선인’이라고 언급한 것 외에 별다른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것과는 대조적이었다[57,]. 스가와는 연령 변화에 따른 민족별 결핵 감염 패턴을 도출하기 위해 총 28개 연구들을 해체하고 그 데이터만을 추출해서 총 42,733명의 투베르쿨린 피부반응 검사 성적을 민족별, 연령별로 재구성했다. 이런 데이터의 통합은 정확도면에서 논란의 여지가 매우 높은 작업이었는데, 그 이유는 스가와가 참조한 연구들의 검사방법과 결과판정법이 각기 달랐고, 그중 일부 연구들은 민족 구분 없이 데이터를 수집했기 때문이었다. 스가와 자신도 “이와 같은 비교는 엄밀한 의미에서는 오류가 많음이 분명”하다고 인정하면서도 “조선의 결핵 감염도의 현상을 추찰(推察)하는데 참고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하면서 데이터 통합을 고집했다[58].
이와 같이 서로 다른 연구에 포함된 데이터를 통합하려면 방법론적인 오류가 불가피함에도 불구하고, 스가와는 조선인과 일본인을 대상으로 연령에 따른 결핵 감염의 민족적 패턴을 도출하는 데 몰두했다. 그 이유는 스가와가 이 패턴을 조선의 결핵 유행 실태의 ‘진상’을 드러내는 자료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이런 관점은 경성제대 위생학예방의학교실의 연구 분위기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이 교실의 주임교수인 미즈시마 하루오(水島治夫)는 미국 존스홉킨스대학(Johns Hopkins University)에서 공중보건학을 전공한 인물로, 1920년대 미국 공중보건학계에서 부상한 통계학적 방법론을 도입하여 인구의 건강과 질병에 관한 여러 현상들을 연구했다[59,]. 그의 지휘 하에 경성제대 위생학예방의학교실에서는 세균학적 관점에서 전염병의 전파 경로와 예방법을 강구해 온 일본 위생학계의 전통적인 연구 주제들보다는, 통계학을 이용하여 접근 가능한 주제들, 즉 인구의 증감과 이동, 체격과 성장, 질병의 분포 양상에 대한 연구가 수행되었다[60].
이 연구들을 관통하는 목표는 민족의 ‘생명력’(生命力, vitality)을 계산하는 것이었다[61,]. 경성제대 위생학예방의학교실의 의학자들은 민족 혹은 국가를 하나의 생물학적 집합으로 간주하고 여러 통계학적 지표들을 사용하여 그 번성 및 생존 능력의 총체 즉, 생명력을 파악하려 했으며, 그 과정에서 연령에 따른 통계 지표들의 변동 패턴은 민족이 지닌 생명력의 고유한 특징으로 여겨졌다[62,]. 예를 들면 경성제대 위생학예방의학교실의 의학자로 아동의 성장 문제를 다룬 이인규는 체격에 큰 변화가 일어나는 연령을 중심으로 연령 증가에 따른 조선인과 일본인의 성장 추이를 분석함으로써 그 민족별 패턴을 도출했다. 그에 따르면 6세에서 13세까지 조선인은 연령별 발육량이 일본인보다 적고, 따라서 7년간의 총 발육량 또한 일본인보다 적었다. 조선인의 발육량이 일본인의 것보다 적은 가장 큰 이유는 발육이 최고로 활발해지는 시점이 늦기 때문이었다. 즉 일본인은 11세부터 성장이 급증하는 데 비해 조선인은 12.6세가 되어야 비로소 성장이 급증하기 시작했다[63,]. 성장 급등기의 지연은 빈곤한 집단에서 주로 나타나는 특징이므로, 이런 연령 패턴은 조선인 아동이 주로 경제적 이유로 인해 일본인 아동보다 발육이 저하되는 상황을 가리켰다[64]. 이처럼 경성제대 위생학예방의학교실에서 보건통계지표의 연령패턴은 어느 민족의 건강 정도, 즉 그 민족이 가진 생명력의 상태를 보여주는 중요한 단서였다.
스가와의 결핵 연구는 보건통계의 연령별 패턴을 민족 건강의 주된 특징으로 본 경성제대 위생학예방의학교실의 관점을 반영하고 있었다. 그런 관점하에 스가와는 그때까지 조선에서 수행된 결핵집단검진 결과들을 모아 민족별, 연령별로 재조합하고 그 패턴을 탐구했다. 이 분석을 통해 그는 “도시에 거주하는 아동에서 약 반수가 [결핵에] 감염되는 연령”이 조선인에서는 8세인데 비해 일본인에서는 14세이며, 이처럼 이른 나이부터 급속하게 진행된 결핵감염으로 인해 조선인 아동이 일본인 아동보다 2배 정도 결핵 감염률이 높다고 주장했다. 이 연구 결과를 후일의 결핵 사망률 연구와 비교함으로써 스가와는 일본인이 조선인에 비해 학동기의 결핵 감염률은 낮은 반면 청년기 결핵사망률이 높다고 언급하며, 이것이 결핵에 걸릴 경우 조선인이 일본인보다 생존기간이 길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했다[65]. 이 주장은 조선인이 일본인보다 결핵에 걸렸을 때 더 많이 살아남는다는 뜻이 아니라, 일본인의 결핵의 발병 및 진행 속도가 조선인보다 더 급격함을 가리켰다. 전체 연령의 추이로 보면, 일본인의 결핵 사망률은 청년기에 가장 높고 그 이후에는 점차 줄어들지만, 조선인의 결핵 사망률은 비록 청년기에는 일본인만큼 높지 않더라도, 그 뒤로 꾸준히 증가하여 결국 일본인보다 더 많은 사망자가 발생한다는 것이 이연구의 결론이었다. 이 같은 연구는 단지 조선에서 어느 민족이 결핵에 얼마나 더 많이 걸렸는지를 보여주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각 민족이 결핵을 연령에 따라 어떻게 경험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려는 시도였다.
나아가 스가와는 결핵 감염의 연령 패턴을 바탕으로 결핵에 대한 조선인과 일본인의 저항력을 구하고자 했다. 그에게 결핵집단검진 연구는 “민족의 결핵에 대한 저항력의 차이를 논하는 한 근거”였다. 그는 “감염, 이환, 사망의 세 방면으로부터” 접근하여 민족의 결핵 저항력을 파악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66]. 투베르쿨린 피부반응 검사를 이용한 결핵집단검진은 결핵 감염률이 어느 연령에서 높은지, 다시 말해 어느 민족이 어느 시기에 결핵에 취약해지는지를 알려주는 통로였다. 민족에 침투한 결핵균이 어떻게 결핵병으로 발전하는지, 그리고 결과적으로 민족의 건강과 생존에 얼마나 영향을 미치는지는 결핵 유병률과 사망률을 통해 파악 가능했다 스가와에게 이 통계적 지표들은 결핵이 어느 민족에게 미치는 악영향과 그 과정을 보여주는 동시에, 그 민족이 결핵에 대항하여 건강을 유지하고 살아남는 능력을 보여주는 수단이었다.
4. 조선인 결핵 사망의 ‘진상’과 민족간 생명력의 위계질서
경성제대 위생학예방의학교실에서 결핵에 대한 민족의 저항력을 구하려는 시도의 다른 한 축은 결핵 사망률 연구였다. 이 연구는 결핵집단검진 연구보다 약간 늦게 시작되었지만 그와 나란히 진행되며 결핵집단검진 연구의 결과를 뒷받침하고 또 반대로 그것을 근거로 사용하기도 하면서 조선인의 결핵저항력이 일본인의 것보다 낮다는 관념을 강화했다. 1939년부터 1942년까지 연달아 발표된 경성제대 위생학예방의학교실의 결핵 사망률 연구들은 모두 ‘조선인 결핵 사망의 진상’ 규명을 목표로 했다[67,]. 1938년 조선총독부의 조사결과에 따르면 인구 1만 명당 조선인의 결핵 사망률은 4.9로, 일본 본토에 거주하는 일본인의 결핵 사망률 20.3과 비교하여 약 4분의 1이었고,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의 결핵 사망률 25.2의 약 5분의 1에 불과했다. 경성제대 위생학예방의학교실의 연구자들은 이 조사 결과를 믿지 않았다. 그들은 “조선인의 결핵 사망률이 내지보다 매우 낮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다”고 하면서, 조선총독부의 통계를 보정하여 ‘조선인 결핵 사망의 진상’을 밝히고자 했다[68].
경성제대 위생학예방의학교실의 의학자들은 조선의 다른 의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조선총독부의 조선인 결핵사망통계가 실제와 크게 다르다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이 교실에서 재조 일본인의 사망통계를 연령별, 사인별로 분석한 오치아이(落合時典)는 “조선인의 사망통계는 (특히 그 사인에 있어서) 매우 불만족스럽고 도저히 엄밀한 취급이 불가능하여 본의는 아니지만 도외시하는 것 외에 방법이 없다”고 언급했고[69,], 결핵이 일본인의 평균수명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한 다니구치(谷口芳德) 또한 “조선인의 병류별(病類別) 통계는 완전히 신뢰하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말했다[70,]. 이런 이유로 1940년까지 조선인 결핵사망통계는 경성제대 위생학예방의학교실의 연구 대상에서 배제되어 왔다. 조선인의 결핵 사망률을 연구하기 시작한 스가와와 하라후지(原藤周衛)조차 조선인의 “병류별 통계는 자료로서의 가치가 매우 낮고 따라서 신뢰할 만한 조선인 결핵사망통계는 구하려 해도 얻을 수가 없었다”고 연구의 고충을 토로했다[71].
이런 경성제대 위생학예방의학교실 의학자들의 견해는 당대 조선총독부의 결핵사망통계에 대한 조선 의학자들의 불신과 맞닿아 있었다. 이전 의학자들이 언급한 바와 같이 경성제대 위생학예방의학교실의 의학자들도 서양의학 지식이 반영되지 않은 조선인들의 ‘비위생적’ 생활양식을 근거로 들며 조선인 결핵사망통계의 부정확성을 비판했다. 이 교실의 의학자들은 “조선인 결핵사망률이 내지에 비해 현저히 낮다는 결과는 조선인의 생활환경을 실제로 목격, 체험”하면 “도저히 진상으로서 그대로 수용할 수 없다”고 언급했다. 그들이 목격한 조선인의 생활환경이란 “처마가 낮고 창이 작으며 두꺼운 벽과 낮은 지붕으로 둘러싸인 반도 재래의 가옥에서 가래를 뱉으며 많은 가족들과 모여 사는 실정”을 의미했다[72,]. 이 언급 중 “처마가 낮고 창이 작으며 두꺼운 벽과 낮은 지붕으로 둘러싸인 반도 재래의 가옥”은 이전부터 조선 의학자들 사이에서 결핵 만연의 원인으로 자주 지적된 ‘환기가 불량한 온돌가옥’의 구조적 특징과 일치했다[73]. 그뿐 아니라 “객담을 뱉으며 많은 가족들과 모여 사는 실정” 또한 이전 의학자들이 언급한 “결핵균의 전파에 주의하지 않는 비위생적인 습관”과 일치했다. 어떤 특별한 인용도 없이 이런 견해를 당연한 듯 언급한 경성제대 위생학예방의학교실의 연구자들의 태도는 1920년대부터 조선의학계에서 논의되어 온 조선인 결핵통계의 부정확성과 결핵 만연의 원인에 대한 인식이 그들에게 체화되어 있었음을 보여준다.
경성제대 위생학예방의학교실의 의학자들이 보기에 조선인 결핵사망통계에 오류를 야기한 직접적인 원인 또한 조선에서 서양의학의 미진함과 관계가 있었다. 그들은 조선인이 의료 이용시 주로 의존하는 한방의(韓方醫), 즉 의생(醫生)을 통계 오류의 유발자로 지목하면서, 조선인의 사망원인에 대한 의생들의 오기(誤記)와 오진(誤診)이 통계 오류를 야기한다고 주장했다. 스가와와 하라후지는 의생이 사인을 얼마나 부정확한 용어들로 표현하는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조선의 사망병명 중에는 기발한 것이 많다. 전차추락병(電車墜落病), 어골재인불하증(魚骨在咽不下症), 나아가서는 수심3척폭6척 수중수면병(水深三尺幅六尺水中睡眠病) 등의 걸작도 있지만, 그 중에는 감모성폐렴성순환쇠약(感冒性肺炎性循環衰弱), 폐위협착(肺胃狹窄), 폐열증(肺裂症), 전율기급(戰慄氣急), 태기불화역상심뇌(胎氣不和逆上心惱), 학슬증(鶴膝症) 등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적지 않다 …… 결핵으로 분류된 사망병명 중에도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혈성객담(血性喀痰), 폐허(肺虛), 천행수(天行嗽), 노수(勞嗽), 노증(勞症), 노손(勞損), 노양(勞瘍), 여로복(女勞復), 허로(虛勞), 방로(房勞), 귀흉(龜胸), 기허증(氣虛症), 부족증(不足症), 원기부족증(元氣不足症), 뇌리병(腦裏病), 심질(心疾), 심폐경염(心肺經炎). 이상과 같은 상태이기 때문에 이번 동태통계에서도 조선인 결핵사망통계는 조선 전체의 통계를 그대로 믿고 사용할 수 없다[74].
그들에 따르면, 의생은 한의학의 방식에 따라 질병을 진단하고 그것을 한의학의 용어로 사망진단서에 기입했다. 이런 병명들은 서양의학의 질병분류체계에 바탕을 둔 조선총독부의 사인통계에서 모두 ‘원인불명’으로 취급되었고, 1938년 조선인구동태통계의 편찬을 위해 국세조사과가 나서서 한의학 병명들에 대한 현지조사를 시행하기 전까지, 한의학의 용어로 진단을 받은 많은 사례들이 ‘결핵’ 항목에서 누락되었다. 심지어 한의학적 병명으로 진단된 여러 사례들이 ‘결핵’ 항목에 추가된 1938년의 조선인구동태통계에서조차 조선인의 결핵 사망률은 인구 1만당 4.9로, 비슷한 시기 일본 열도에 거주하는 일본인의 결핵 사망률 20.3의 약 4분의 1에 불과했다[75].
의생이 조선총독부의 위생통계에 오류를 야기하는 주요 원인이라는 인식은 경성제대 위생학예방의학교실의 의학자들이 지적하기 전부터 조선 내 의학자들 사이에서 널리 알려져 있었다. 일례로 조선총독부의원장, 경성제대 의학부장, 총장을 역임한 시가 기요시(志賀潔)는 대다수의 조선인들이 서양의학 교육을 받은 의사가 아닌 의생에게 의존하는 현실이 전염병 예방과 위생행정에 지장을 초래한다고 비판하며, 조선의 질병 및 사인통계가 정확하게 집계되지 않는 원인이 의생에게 있다고 주장했다. 의생들은 의사들과 마찬가지로, 사망진단서를 발급하고 전염병 발생을 신고할 의무가 있었다. 하지만 시가가 보기에 의생들은 서양의학에서 사용되는 사인의 의미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진단하고 기술해야 할지에 대해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다.
의생 사이에서 금일 우리가 사용하는 병명이 사용되지 않는 것은 전염병 예방 및 기타 위생행정상에도 대단히 불편하다. 따라서 조선의 의사통계도 대체로 신뢰성이 결여되었다는 아쉬움이 있다. 사망진단서 특히 사인 기재 등에도 왕왕 우스꽝스러운 것을 볼 수 있다. 사인에 습진, 이명(耳鳴), 개선(疥癬), 현훈(眩暈), 구토 등이 있고, 또 누누이 듣는 사인으로 기발한 것은 ‘복상사(腹上死)’라는 병명이다[76].
시가가 의생들이 기재한 사인을 우스꽝스럽다고 한 이유는, 그것들이 서양의학에서 논의되는 사인의 정의에 조금도 부합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사인이란,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한 원인으로서의 질병 혹은 의학적 상태를 나타낸다. 하지만 습진, 이명, 개선, 현훈, 구토 등은 증상을 나타내는 용어일 뿐 질병이 아니고, 그 증상 자체도 죽음에 이를 만큼 위험한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이런 사망진단은 그것을 기재한 의생이 사인을 서양의학의 방식대로는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 자신들의 지식을 정부의 요구에 엉망으로 끼워 맞추었음을 드러내는 증거였다.
이런 관념을 공유한 경성제대 위생학예방의학교실의 의학자들은 의생이 조선인 결핵사망통계의 오류를 야기한다는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의사와 의생의 결핵 진단율을 비교했다. 결핵 진단율이란, 의사와 의생이 각각 진단한 총 사망자 중 결핵 사망자가 차지하는 비율이었다. 다시 말해 결핵 진단율은 의사와 의생이 진료하는 동안 결핵을 발견하는 빈도를 의미했다. 하지만 경성제대 위생학예방의학교실의 의학자들은 결핵 진단율을 단순한 빈도로서가 아니라, 의사와 의생의 결핵 진단 능력으로 이해했다. 예를 들어 그들은 1939년 ‘조선인구동태통계’에 수록된 조선인 결핵 사망자 총 12,355명을 의사에게 진단을 받은 사람 6,181명과 의생에게 진단을 받은 사람 6,174명으로 구분하고 각 집단의 인원을 총 사망진단 건수로 나눈 결과, 의사의 결핵 진단율이 총사망진단 100건 당 7.97건인데 비해, 의생의 것은 2.48건이라는 결과를 얻었다. 그들은 이 계산결과에 대해, “의생은 의사에 비해 약 3분의 1밖에 결핵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해석했다. 그들에 따르면 “의사에게 가는 계급과 의생에게 가는 계급의 결핵 사망률에 차이가 있”을 수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의사에게 가는 계급이 의생에게 가는 계급보다 더 부유하고 좋은 환경에서 살기 때문에, “조선의 실정으로 보아 의생에게 가는 계급에서 결핵이 적다고는 생각하기 어렵고, 의생은 그 진단 기술로는 이 정도 밖에 결핵을 발견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77].
이처럼 의생의 결핵 ‘진단 기술’ 혹은 진단 능력이 의사의 것보다 열등하다는 견해는 서양의학이 한의학보다 과학적이라는 강한 믿음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 스가와와 오가미는 한의학의 많은 부분이 과학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그들에 따르면 한의학은 “과학적 검토를 받을 필요가 있”는데, 만일 그럴 경우 그 치료법인 한약은 그에 대한 과학적 분석이 진행되어 점점 더 성장할 예정이지만, 한의학의 나머지 부분인 진단법과 의학사상 등은 ‘비과학적’이기 때문에 이에 입각하여 진료하는 의생은 “오히려 도태될 운명”이었다[78,]. 이처럼 한의학에 대해 회의적인 견해는 경성제대 위생학예방의학교실만의 것은 아니었다. 앞서 보았듯이 시가는 한의학이 “단순히 치료만을 주로 하고 적극적으로 병을 예방하는 데에는 어떤 생각도 하지 않”기 때문에 위생의 발달을 방해한다고 보았다[79].
의생의 결핵 진단 능력이 의사의 것보다 열등하다는 관점은 서양의학을 전공한 의사들에게는 당연하게 여겨졌지만, 그것이 모든 이에게 받아들여진 것은 아니었다. 한의학 부흥론자인 조헌영은 “조선의 폐결핵 사망률이 세계 최저”라는 통계를 보고 “조사가 불완전하다는 것으로 간단히 처리”하면서 “조선의 사망통계의 자료가 되는 사망진단서의 대다수를 한방 의생이 작성하는데 그들이 병명을 옳게 적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태도를 “피상적 관찰에 지나지 못”한 것이라고 비판하면서, “조선인의 폐결핵 사망률이 적은 것은 결코 통계의 불완전이 아니오, 실제로 그런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가 든 근거는 총 다섯 가지였다. 첫째로, 사망시의 폐결핵은 증상이 매우 뚜렷하여 잘못 진단할 가능성이 매우 낮고, 둘째로, 대체로 의생에 의해 진단된 조선인의 폐결핵 사망률과 의사에 의해 진단된 재조 일본인의 폐결핵 사망률의 연도별 차이가 거의 비슷하며, 셋째로, 도별 폐결핵 사망률의 차이가 조선인과 일본인 사이에서 비슷하다는 점이었다. 조헌영은 이렇게 지역과 연도에 따른 결핵 사망률 변화가 조선인과 일본인 양쪽에서 동일한 경향을 보이는 현상에 대해, 의사의 결핵 진단 능력이 연도별, 지역별로 다른 것이 아니라면, 의생의 결핵 진단 능력 또한 그러하다고 해석했다. 넷째로, 조헌영은 영양상태가 불량할수록 폐결핵 사망률이 높다는 통념을 비판함으로써, 조선인이 일반적으로 일본인보다 영양상태가 나쁘기 때문에 틀림없이 폐결핵 사망률이 높을 것이라는 의학자들의 추측에 반박하고자 했다. 그에 따르면 조선의 현실상 여자가 남자보다 식사를 잘 할 리가 없음에도, 30세 이후 여자의 폐결핵 사망률이 남자의 절반 이하에 불과하며, 영양상태가 좋은 사람들이 경상북도보다 평안남도에 많음에도 불구하고, 폐결핵 사망률은 평안남도가 경상남도의 5배 가까이 높은 점은, 결핵과 영양상태의 관계에 대한 의학자들의 통념이 틀렸다는 증거였다. 다섯째로, 조헌영은 서양의학이 발달할수록 결핵 사망자가 줄어든다는 통념이 잘못되었음을 입증함으로써, 서양의학을 많이 사용하는 일본인보다 그것을 덜 사용하는 조선인 사이에서 결핵 사망자가 많을 것이라는 의학자들의 추측을 반박하고자 했다. 이런 의도에서 그는 “구미제국에서 근래에 점차 폐결핵 사망률이 저하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는데 이것을 그 원인이 위생사상의 보급과 의료시설의 완비에 있다고 보는 모양”이지만, “그렇다면 왜 불란서의 폐결핵 사망률이 영국이나 이태리의 2배나 될까. 현대의학이 발달된 점에 있어서 독일과 같이 최고 지위에 있는 일본에서 그렇게 고율의 폐병 사망자를 내는 까닭은 무엇일까”라고 문제를 제기했다[80]. 그러나 조헌영의 문제제기는 대중언론에 수록되었을 뿐 의학자들 사이에서 학술적으로 진지하게 검토되지는 않았다.
1930년대 후반 경성제대 위생학예방의학교실의 의학자들은 조선인 결핵사망통계의 오류가 의생으로 인해 비롯되었다는 믿음을 가지고 조선인 결핵사망의 진상을 규명하고자 했다. 그들은 조선인 결핵 사망 데이터의 추가적인 수집이 아닌, 기존 자료에 대한 통계적 보정을 통해 민족 전체의 일반적 특징을 구하는 것이 조선인 결핵 사망의 진상에 접근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이 도입한 보정방법은 조선인 결핵사망통계에 오류를 일으켰다고 간주된 원인, 즉 ‘의생의 진단’을 통계에서 배제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조선총독부가 발표한 조선인 사망통계 대신, 자신들이 직접 인천의 사망진단서를 검토하여, 의사가 작성한 것과 의생이 작성한 것으로 나누고, 각각의 총 사망자 수중 결핵 사망자의 비율을 계산하여 비교했다. 의생의 진단서에서 폐위(肺痿), 폐옹(肺癰), 기부족증, 상혈(上血), 객혈, 토혈, 해수 등 결핵의 증상으로 추측되는 사례들도 결핵으로 간주하여 원래의 결핵사망자 수와 합산했다. 그 결과 경성제대 위생학예방의학교실 의학자들은 총 사망 100건당 결핵 사망, 즉 결핵 진단율이 의사에서 11.35이고 의생에서 1.64임을 도출했다. 그들은 이 중 의사의 결핵 진단율이 실제 총 사망 건수에 대한 결핵 사망 건수의 비율이라고 간주하고, 조선 전체의 총 사망 건수에 인천의 의사 결핵 진단율을 곱하여 1938년에는 49,355명, 1939년에는 53,413명의 결핵 사망자가 발생했다고 추산했다. 이는 조선인구동태통계에 보고된 1939년의 총 결핵 사망자 12,355의 약 4배에 육박하는 수치였다[81].
경성제대 위생학예방의학교실의 연구자들은 자신들의 보정 결과가 ‘조선의 결핵 사망의 진상’에 가깝다고 확신했지만, 그들의 보정법은 연구를 통해 검증된 적 없는 자신들의 임의적인 전제를 포함하고 있었다. 그들은 의생의 결핵 진단 능력이 의사의 것보다 낮다는 조선의학계의 통념을 바탕으로, 의생의 결핵 통계를 보정과정에서 완전히 배제했고, 나아가 의생이 많은 시골보다 의사가 많은 도시의 결핵 통계가 더 정확하다고 생각하면서, 시골의 결핵 통계 또한 결핵 사망률 계산에서 제외했다. 의사의 통계와 도시의 통계만을 이용하여 조선 전체의 결핵 사망률을 일반화하는 것은, 의생의 진단 능력에 대한 조선 사회 일각의 옹호, 그리고 결핵이 시골보다 도시에서 더 많이 발생한다는 의학적 통설을 무시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성제대 위생학예방의학교실의 의학자들은 자신들의 보정결과가 ‘조선의 결핵 사망의 진상’을 보여준다고 확신했다.
자신들의 보정결과가 ‘진상’에 가깝다는 경성제대 위생학예방의학교실 연구자들의 판단은 일본인보다 조선인이 결핵에 취약할 것이라는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스가와와 오가미가 보정 후의 조선인 결핵 사망률을 ‘진상’이라고 여긴 기본적인 이유는 그 수치가 일본열도에 거주하는 일본인의 결핵 사망률보다 낮거나, 적어도 그와 비슷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조선총독부의 조선인 결핵 사망률을 대체할 값으로 인천에서 의사의 진단을 받은 조선인의 결핵 사망률을 선택한 이유는, 그것이 “전체 내지의 결핵사망비와 가깝고, 부부(府部)만의 의사에 의한 수치와 대략 가깝”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인천과 같은 도시 지역, 즉 “부부(府部)의 율을 전선(全鮮)에 적용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결국 “내지 전체의 비율과 큰 차이가 없”다는 점을 우선시 하여 자신들의 보정결과를 ‘진상’으로 내세웠다[82].
조선인의 결핵 사망률이 일본인의 것보다 낮을 리 없다는 경성제대 위생학 예방의학교실 의학자들의 확신은 민족들 사이에 생명력의 위계질서가 있다는 관념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그들은 ‘생명력’을 둘러싼 민족간 우열 관계가 인구의 증감, 체격과 성장, 질병의 유행과 그에 대한 저항 등 생명력을 나타내는 여러 지표들에서 일관되게 나타난다고 생각했다. 이 지표들 중 경성제대 위생학예방의학교실에서 민족의 생명력을 평가하는 데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지표는 평균수명이었다. 1936년 이래 경성제대 위생학예방의학교실에서는 미즈시마의 주도로 교실의 연구원들이 모두 참여하여 일본 본토의 각 지역과 그 식민지를 포함하여 일본 제국 전체를 아우르는 지역별 생명표(生命表)를 작성했고, 그것을 이용해서 각지 주민의 민족별 평균수명을 구했다[83,]. 이 교실의 강사로 생명표 연구에 가장 적극적으로 참여한 최희영에 따르면, 평균수명은 ‘민족의 생명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일괄적으로 표현하는 지표로서, “개인의 수명이 각기 다른 것과 같이 한 국가, 한 민족, 한 지방 주민 전체의 수명도 각기 다른” 상황에서 “그 지방 주민의 건강도를 일목요연하게 반영”했다. 다시 말해 국가간, 민족간, 지역간 건강도의 위계는 평균수명의 비교를 통해 도출되었다. 예를 들어 독일인의 평균수명은 남자 59.8세, 여자 62.6세이고, 미국인의 평균수명은 남자 55.3세, 여자 57.5세이며, 일본인의 평균수명은 남자 44.8세, 여자 46.5세인 데 비해, 조선인의 평균수명은 남자 36.4세, 여자 38.5세로, 이 수치들을 통해 “얼마나 조선주민의 생명력의 약하냐, 즉 보건정도가 좋지 못한지”를 알 수 있었다. 즉, 평균수명은 민족의 생명력 중 일부 특징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그 생명력의 상태를 총괄적으로 드러내는 지표이고, 따라서 평균수명 사이의 위계는 생명력의 다른 지표들, 즉 “보건정도”를 나타내는 여러 지표들을 통해서도 동일하게 표출된다고 간주되었다[84].
경성제대 위생학예방의학교실 의학자들이 보정한 조선인의 결핵 사망률은 보정 이전과 달리 생명력의 위계질서에 부합했다. 일본인의 평균수명이 조선인보다 우수한 것과 같이 일본인의 결핵 사망률도 조선인보다 낮았기 때문이었다. 경성제대 위생학예방의학교실의 의학자들은 이처럼 평균수명의 민족간 위계질서와 일치하는 통계수치를 ‘진상’으로 여겼고, 그와 반대로 민족간 생명력의 위계에 맞지 않는 통계수치를 발견했을 때에는 그것을 통계적 오류, 즉 ‘허상’이라고 간주했다. 물론 예외도 있었다. 실제 인구의 자연증가율 같은 경우 일본이 서구의 다른 나라들보다 앞서 있었다[85,]. 하지만, 이와 같은 위계상의 예외는 평균수명과 관계 깊은 질병 사망률이나, 일본과 그 식민지 사이의 관계에서는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86].
조선인 결핵 사망의 진상 규명을 목표로 한 경성제대 위생학예방의학교실의 연구는 조선인의 결핵 사망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제공하는 작업이 아니라, 그때까지 조선인의 결핵에 대해 조선 내 의학자들이 만들어 온 관념을 통계적인 방법론을 동원하여 추인한 것이었다. 경성제대 위생학예방의학교실의 조선인 결핵 사망률 보정법에는 조선인 의학자들의 조선인과 의생에 대한 통념이 반영되어 있었고, 그 보정 결과는 의학자들의 통념을 뒷받침하는 ‘과학적’, ‘수학적’, ‘통계적’ 근거로서의 역할을 했다. 이 과정에서 보정법과 통념은 영향을 주고받으며 서로를 강화시키는 관계에 있었다.
5. 맺음말
이 논문은 경성제대 위생학예방의학교실 의학자들의 연구를 중심으로 조선총독부의 결핵통계에 대한 비판과 조선인 결핵 유행 상황의 ‘진상규명’이 이루어진 과정을 살펴보았다. 일본인이 조선인보다 결핵에 더 취약함을 나타낸 조선총독부의 결핵통계는 조선 사회 대부분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특히 조선 내 의학자들의 거부는 서양의학의 우수성에 대한 그들의 확신에서 비롯되었다. 그들은 서양의학 지식을 체득하지 못하여 ‘비위생적인’ 환경과 생활양식에 노출된 조선인이 서양의학을 선취한 일본인보다 ‘열등한’ 건강상태를 지닌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고, 그에 입각하여 조선총독부의 결핵통계를 믿을 수 없다고 비판했다.
조선 의학계의 다른 의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조선총독부의 통계에 비판적 인식을 가지고 있던 경성제대 위생학예방의학교실의 의학자들은 조선인 결핵 유행의 실제에 접근하기 위해 그에 대한 통계적 연구에 착수했다. 그들의 연구 목표는 결핵에 대한 조선인의 ‘민족적 저항력’을 계산하는 것이었고, 그것이 조선의 결핵 유행 상황의 ‘진상’을 보여준다고 생각했다. 그들에게 있어서 ‘진상’이란 어느 민족에서 나타나는 결핵 감염률, 유병률, 사망률 등의 연령별 패턴을 통해 도출되는 것으로, 단순히 데이터의 양을 늘림으로써 어느 집단의 평균에 가까운 값을 산출하는 것과는 달랐다. 이런 시각에서 조선의 건강 상태를 향상시키는 방법은 조선인 결핵 유행의 연령별 패턴을 관리하는 작업과 같았고, 이는 단순히 결핵 환자의 전체 수를 줄이려 한 기존 조선총독부의 방침과는 다르다는 점에서, 새로운 결핵 관리 방법이었다.
조선인 결핵 유행의 실제를 구하기 위해 경성제대 위생학예방의학교실의 의학자들은 조선총독부 결핵통계를 보정하는 방법을 제시했다. 이 보정법은 조선총독부의 결핵통계를 비판할 때 조선 내 의학자들이 공유한 여러 관념을 반영하고 있었다. 이 방법은 서양의학 전공자에 비해 결핵 진단 능력이 ‘열등한’ 의생들의 자료와 그 의생들이 의료 서비스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지방의 자료를 통계로부터 배제했다. 의사와 도시의 자료만을 ‘진상’으로 인정한 이 보정법을 적용한 결과는 조선 내 의학자들이 상상한 조선인과 일본인의 우열관계에 부합했다.
경성제대 위생학예방의학교실에서 결핵 통계의 보정 결과는 ‘민족간 생명력의 위계’와 일치했기 때문에 참으로 인식되었다. 여기에서 생명력의 위계는 민족간 평균수명의 크기에 의해 결정되었으며, 건강과 관련된 모든 방면에서 일관되게 나타난다고 여겨졌다. 경성제대 위생학예방의학교실의 의학자들에게 생명력의 크기를 좌우하는 가장 결정적인 요소는 서양의학의 발달이었다. 이런 관점에서 서양의학을 선취한 일본인은 조선인보다 우수한 생명력을 지니고 있었고, 이런 관계는 결핵통계 같은 다른 보건지표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되었다.
이와 같은 결핵통계의 ‘진상’ 판단 기준은 조선총독부의 질병통계가 단지 숫자가 표방한 ‘가치중립성’과 ‘객관성’만으로 지적 권위를 획득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사회의 일반적인 인식에 부합하는지가 신뢰성의 평가에 중요했음을 드러낸다. 특히 식민지 조선에서의 평가 기준은 의학자들이 지닌 서양의학에 대한 신념을 강하게 반영하고 있었다. 경성제대 위생학예방의학교실의 결핵통계는 이런 믿음을 바탕으로 형성되었고, 그 연구결과는 다시 이 믿음을 뒷받침하는 과학적 근거로 사용되었다.
결국 경성제대 위생학예방의학교실의 의학자들이 제시한 ‘진상규명’의 체계는 서양의학의 권위만을 배타적으로 인정하는 방식이었다. 이 체계는 서양의학 중심적인 시각과 그로부터 기인한 조선인에 대한 고정관념을 ‘과학적’, ‘합리적’으로 뒷받침하며 강화했다. 이와 같은 서술은 조선총독부의 조선인 결핵통계에 문제가 없었다거나 조선인의 보건 상태를 파악하는 서양의학의 관점이 진실과 완전히 어긋났다는 뜻이 아니다. 이 논문의 강조점은 서양의학의 우수성을 믿는 사람들이 그 지적 권위에 기대어 조선인의 건강 문제를 특정하고 고정적인 방식으로 이해하려 했으며, 경성제대 위생학예방의학교실의 보정 작업이 이런 통념을 ‘과학’이라는 수단으로 뒷받침했다는 데 있다.
경성제대 위생학예방의학교실 의학자들의 시각에 따르면 결핵 만연을 야기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은 조선인의 서양의료 이용 미진과 ‘후진적인’ 생활양식이었다. 이런 인식 하에서 조선인의 결핵 만연을 극복할 방책은 조선인 스스로 서양의료를 적극적으로 이용하고 서양의학 지식에 입각한 생활습관을 체득하는 것이었다. 물론 조선인의 서양의료 이용을 증진하기 위해서는 정부 차원의 의료자원 확대가 필요했지만, 이에 대한 문제는 거의 거론되지 않았고 결핵 만연은 우선적으로 조선인 개인의 문제로 취급되었다. 이와 같은 경성제대 위생학예방의학교실의 연구는 조선인의 개인위생에 대한 통제에만 매달린 조선총독부의 결핵예방 정책에 타당성을 제공했다.
Notes
須川豊, 大神盛正, “朝鮮に於ける醫師と醫生”, 『朝鮮行政』 21(2) (1942.4), 19쪽.
“작년 1년간 3천 명 사망. 매년 3천 명씩 늘어간다, 전율할 결핵병 통계”, 『조선일보』 1927.4.20.
“보건상 절대 위험. 결핵병자 강제 수용 총독부서 결핵예방령 입안 중. 산재한 환자 9천 여명”, 『조선일보』 1934.6.28.
“肺結核과 吾人의 生活程度”, 『매일신보』 1926.9.19.
“질병의 증가와 위생문제”, 『동아일보』 1925.10.6.
古海嚴潮, “肺結核豫防規則の制定”, 『朝鮮彙報』 (1918.3), 4-9쪽. 당시 조선총독부 경무총장이던 후루미 이즈시오는 이 글에서 당시 폐결핵이 별도의 사인으로서 집계되지 않았고 그로 인한 사망자는 모두 ‘호흡기병’ 사망자로 분류되었다고 언급했다.
“肺結核豫防に関する件”, 『朝鮮總督府官報』 1918.1.15; 1919년도 결핵사망통계는 다음을 참조하라. 朝鮮總督府, 『朝鮮衛生事情要覽』 (1922), 112-3쪽.
1925년 4월 “조선도립의원관제”의 반포와 함께 자혜의원들은 각 도의 지방비로 운영되는 도립의원(道立醫院)으로 전환되었다.
朝鮮總督府醫院, 『朝鮮總督府醫院年報』 1-13 (京城: 朝鮮總督府醫院, 1911-1926); 朝鮮總督府, 『統計年報』 (京城: 朝鮮總督府, 1914-1939); 朝鮮總督府警務局衛生課, 『朝鮮道立醫院要覽』 1-5 (京城: 朝鮮總督府警務局衛生課, 1937-1941).
“폐결핵, 조선 사람 환자가 더 많다고 조사됨”, 『매일신보』 1918.11.9.
古海嚴潮, “肺結核豫防規則の制定”, 4-5쪽.
大澤勝, “朝鮮に於ける結核(內科的方面)”, 『朝鮮醫學會雜誌』 37 (1922), 1-34쪽.
桐原眞一, “朝鮮に於ける結核(外科的方面)”, 『朝鮮醫學會雜誌』 35 (1921), 26-41쪽.
大澤勝, “朝鮮に於ける結核(內科的方面)”, 『朝鮮醫學會雜誌』 37 (1922), 1-34쪽.
“보건강좌-폐결핵의 예방법과 치료법. 성대암정내과 金東益씨 강연”, 『조선일보』 1932.3.15.
같은 글.
大澤勝, “朝鮮に於ける結核(內科的方面)”, 1-34쪽.
岩井誠四郞, “結核の豫防”, 『臨床內科學』 4 (1936) 326쪽. 이 기사는 1936년 5월 26일 결핵예방일 특집으로 경성방송국에서 방송한 경성제대 제1내과학교실 교수 이와이 세이시로의 라디오 강연을 필사한 것이다.
北里柴三郎, “戰慄すべき肺結核”, 『朝鮮及滿洲』 161 (1920.11), 42-4쪽.
二宮司, “統計的に見た肺結核死亡の諸相”, 『朝鮮及滿洲』 279 (1931.2), 50-54쪽.
방희창, “폐결핵의 예방책”, 『신문계』 23 (1915.2), 43-46쪽.
“無足言”, 『매일신보』 1918.3.12.
“폐결핵의 주의(1)”, 『매일신보』 1913.8.16; “결핵예방의 규정”, 『매일신보』 1914.6.16; “平安北道, 結核防滅事業”, 『매일신보』 1916.3.18.
“질병의 증가와 위생문제”, 『동아일보』 1925.10.6.
森安連吉, “可恐肺結核の話”, 『朝鮮及滿洲』 16(125) (1917.11), 72-3쪽. 모리야스의 주장은 폐디스토마가 객혈을 주된 증상으로 하는 점에서 임상 증상만으로는 폐결핵과 구별되기 어렵다는 그의 임상 경험과, 그런 폐디스토마가 조선인들에게 많다는 조선총독부의원 지방병 및 전염병 연구과의 연구 결과에 근거를 두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地方病及傳染病硏究科業績”, 『朝鮮總督府醫院年報 1918』 5 (1920), 288-293쪽.
“全朝鮮에 結核患者, 昨年中 萬千九百餘, 其中 死亡者는 四千二十二名”, 『동아일보』 1925.10.5.
朝鮮總督府, 『朝鮮防疫統計』 (京城: 朝鮮總督府, 1934), 120-1쪽.
투베르쿨린 피부반응 검사를 이용한 결핵 집단검진법을 조선에 도입한 인물은 경성부 학무과의의 학교의(學校醫) 정면석(鄭冕錫)이었다. 정면석은 1929년 경성의 조선인 보통학교학생 약 600명을 대상으로 투베르쿨린 피부반응 검사를 시행했다. 鄭冕錫, “鮮人學童ノ「ツベルクリン」皮內反應成績”, 『滿鮮之醫界』 95 (1929), 17-20쪽. 정면석의 연구는 이런 일본 의학계의 최신 성과를 조선에 처음으로 적용한 것이었으나, 발표 당시에는 조선의 다른 의학자들로부터 별 주목을 받지 못했다가 1930년대 전반 조선의 결핵 유행 상황에 관심을 갖게 된 경성제대 위생학예방의학교실 연구자들과의 협동 연구를 계기로 재조명되었다. 井上束, “小學兒童ノ結核調査及「ツベルクリン」皮内反應ニ就テ”, 『結核』 4(4) (1926), 262쪽; 李仁圭, 鄭冕錫, “朝鮮兒童ノ體格ト「ツベルクーリン」皮內反應トノ關係ニ就テ”, 『朝鮮医学会雜誌』 24(8) (1934), 22-36쪽.
경성제대 위생학예방의학교실에서 시행된 첫 번째 결핵집단검진 연구는 李仁圭, 鄭冕錫, “朝鮮兒童ノ體格ト「ツベルクーリン」皮內反應トノ關係ニ就テ”, 22-36쪽을 참조하라.
경성제대 소아과학교실에서 시행된 첫 결핵집단검진 연구는 高井俊夫他三氏, “夏期聚落に於ける小兒の體溫、ツベルクリン反應竝に胸部レ線像に就て”, 『城大小兒科雜誌』 4 (1934), 19-31쪽을 참조하라. 경성제대 소아과학교실에서는 주임교수인 도바시 미쓰타로(土橋光太郞)의 주도로 결핵 진단을 위한 실험적 기법들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졌고, 그 성과는 1936년 일본소아과학회에서 발표된 뒤, 동 교실의 학술지인 『성대소아과잡지』의 1937년 10호(결핵특집호)에 수록되었다. 그중 결핵집단검진 결과로 다음과 같은 연구가 포함되어 있다. 西野知格他三氏, “興南小學校兒童のTuberculin反應實施成績 (第一報)”, 『城大小兒科雜誌』 7 (1936), 20-24쪽; 西野知格他二氏, “興南に於ける學童の Tuberculin反應實施成績(續報)”, 『城大小兒科雜誌』 10 (1937), 172-189쪽; 原隆一他十六氏, “京城師範付屬小學校兒童に施行せるTuberculin反應實施成績”, 『城大小兒科雜誌』 10 (1937), 153-165쪽; 原隆一他十七氏, “京城師範學校生徒に施行せるTuberculin反應實施成績”, 『城大小兒科雜誌』 10 (1937), 166-171쪽.
이인규는 조선의학회의 연례학술대회에서 경성제대 소아과학교실의 연구자 하라 류이치(原隆一)가 경성부의 아동 약 70명을 대상으로 시행한 투베르쿨린 피부반응 검사 및 기타 결핵 진단검사의 성적에 관한 발표를 듣고, 그것을 자신의 연구와 비교하면서 투베르쿨린 피부반응 양성자들의 신체적 특징에 관하여 하라와 의견을 교환했다. 그들의 구체적인 토론 내용은 다음을 참조하라. 原隆一, 上田千年, “(講演抄錄)夏期聚落に於ける小兒の體溫「ツベルクリン」反應竝びに胸部「レ」線像に就て(第2報)”, 『朝鮮醫學會雜誌』 25(11) (1935), 85쪽.
渡邊龍三, 須川豊, “小學校新入兒童の「ツベルクリン」皮內反應の推移”, 『滿鮮之醫界』 216 (1939), 43쪽.
安西定, “須川豊先生を悼む-公衆衛生の総合化と実践に貢献”, 『日本公衆衛生雑誌』 42(5) (1995.5), 299-300쪽; 須川豊, “初期の衛生学敎室”, 京城帝國大學創立五十周年記念誌編輯委員會 編, 『京城帝國大學創立五十周年記念誌: 紺碧遥かに』 (京城: 京城帝國大學同窓會, 1974), 228-239쪽.
결핵사망통계에 관한 스가와의 연구는 다음과 같다. 須川豊, 原藤周衛, “朝鮮ニ於ケル結核死亡ニ就て”, 『滿鮮之醫界』 232 (1940.7), 1-8쪽; 須川豊, 大神盛正, “朝鮮ニ於ケル醫師ト醫生”, 19-27쪽; 결핵 집단검진인 투베르쿨린반응검사 결과에 대한 스가와의 통계적 분석은 다음과 같다. 渡邊龍三, 須川豊, “小學校新入兒童の「ツベルクリン」皮內反應の推移”, 『滿鮮之醫界』 216 (1939), 1-30쪽; 黑田聖吉, 須川豊, “小學校新入兒童の「ツベルクリン」皮內反應の推移 (第二囘報告)”, 『滿鮮之醫界』 226 (1940), 1-14쪽; 津村初男, 武藤実夫, 須川豊, “黄海道内諸地方に於ける「ツベルクリン」反応陽性率”, 『滿鮮之醫界』 235 (1940.10), 1-6쪽; 須川豊, 原藤周衛, “朝鮮人ニ於ケルツべルクリン陽性律”, 『日本医学及健康保險』 3199 (1940), 8-12쪽; 須川豊, “結核と年齡”, 『朝鮮医学会雜誌 臨床篇』 1(2) (1941-1943), 125-134쪽.
스가와가 저자로 직접 참여하지 않았지만 1930년대 말부터 1940년대 초까지 경성제대 위생학예방의학교실에서 발표된 결핵 연구에는 모두 스가와의 지도와 조언에 대한 감사의 문구가 쓰여있다. 大神盛正, “仁川在住學童のマントー氏反應成績と社會的諸因子との關係”, 『滿鮮之醫界』 240 (1942), 14-29쪽; 松島信雄, “平安南道に於ける朝鮮兒童のツベルクリン皮內反應檢査成績”, 『朝鮮醫學會雜誌 臨床篇』 1(5) (1941-1943), 47-60쪽; 그 외에 경성제대 위생학예방의학교실에서 수행된 것은 아니지만 스가와의 영향을 받은 결핵 연구로는 다음을 들 수 있다. 京城帝國大學衛生調査部 編, “ツベルクリン結核反應(マンツー氏反應)”, 『土幕民の生活·衛生』 (東京: 岩波書店, 1942), 264-272쪽. 그에 대한 스가와의 기여에 대해서는 같은 책의 315쪽에 수록된 경성제대 위생조사부의 대표 학생인 다나카 마사시(田中正四)의 후기를 참조하라.
그중 대표적인 연구로는 다음을 들 수 있다. 井上束, “小學兒童ノ結核調査及「ツベルクリン」 皮内反應ニ就テ”, 257-281쪽; 有馬英二, 菊池清一, 松田操, “學齡兒童ノ結核ニ就テ”, 『結核』 8 (1930), 229-243쪽; 寺島正一, “看護婦ニ於ケル「ツベルクリン」反應ノ推移ト結核性疾患ニ就テノ臨牀的「レントゲン」學的觀察”, 『結核』 11 (1933), 123-150쪽; 山田光繼, “岐阜市内一毛絲紡績工場女工ノ赤血球沈降速度ト「ツベルクリン」皮内反應ニ就テ”, 『結核』 13 (1935), 462-478쪽.
“結核預防 對策協議會 專門家들을 網羅하야 內相官邸에서 開催”, 『매일신보』 1931.8.5; “폐결핵 중 환자로 신고 않으면 엄중 처벌 폐결핵 예방법안을 개정중 불원한 장래에 실시”, 『조선일보』 1931.7.14.
선만연합의학회는 만주사변을 계기로 조선의학회의 만주에 대한 관심이 높아짐에 따라 1934년부터 격년으로 만주의학회와 조선의학회가 연합하여 개최한 학술대회로, 1940년까지 조선과 만주에서 번갈아가며 2일씩 총 4회가 열렸다. 선만연합의학회에서는 대체로 조선과 만주 지역의 의학적 문제들이 주로 논의되었다. 선만연합의학회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다음을 참조하라. “第2會鮮滿聯合醫學會槪況”, 『朝鮮醫學會雜誌』 26(11) (1936), 142-7쪽.
龍頭正男, “吉林省ニ於テ實施セルツベルクリン反應成績”, 『朝鮮醫學會雜誌』 24(8) (1934), 75쪽; 廣木彦吉, 坪崎治男, 岩田茂, 孫本正, 新井宗隆, 增谷榮, “滿人兒童生徒實施皮內反應調査報告”, 『朝鮮醫學會雜誌』 26(11) (1936), 128-9쪽; 遠藤繁淸, 小松雄吉, 山田弘, “大連市初等學校入學兒童結核調査”, 『朝鮮醫學會雜誌』 28(11) (1938), 116쪽; 小林盈藏他十一人, “大連市ニ於ケル日滿學校兒童生徒‘マ’氏 反應陽性者ノ‘レ’線學的竝ニ諸種理學的檢査成績”, 『朝鮮醫學會雜誌』 28(11) (1938), 118-9쪽.
龍頭正男, “吉林省ニ於テ實施セルツベルクリン反應成績(其ノ二)”, 『滿鮮之醫界』 175 (1935), 1-9쪽; 같은 저자, “吉林省ニ於テ實施セルツベルクリン反應成績(其ノ三)”, 『滿鮮之醫界』 182 (1936), 33-39쪽; 같은 저자, “吉林省ニ於テ實施セルツベルクリン反應成績(其ノ四)”, 『滿鮮之醫界』 183 (1936), 47-55쪽; 龍頭正男, 山中現三, “ハルビン省在住白系露人小學兒童ニ於けるツベルクリン反應成績”, 『滿鮮之醫界』 194 (1937), 1-6쪽.
李仁圭, 鄭冕錫, 崔羲楹, “(講演抄錄)朝鮮兒童ノ體格ト「マントウ」氏皮內反應トノ關係ニ就テ”, 『朝鮮醫學會雜誌』 24(8) (1934), 75쪽.
張喆/灬, “鐵嶺農村附近ノ鮮滿人小學生ニ於ケル皮內反應成績ニ就イテ”, 『滿鮮之醫界』 190 (1937), 1-6쪽.
西野知格他二氏, “咸興小學校兒童のTuberculin反應實施成績”, 190쪽.
須川豊, 原藤周衛, “朝鮮人ニ於ケルツべルクリン陽性律”, 8쪽.
蔡秉善, “江原道小學校兒童に於けるツベルリン皮內反應成績(1)”, 『滿鮮之醫界』 223 (1939), 1-9쪽; 慶尙北道 衛生課, 『慶北衛生の槪要』 (大邱: 慶尙北道 警察部 衛生課, 1940), 7쪽; 黃海道 衛生課, 『衛生槪要』 (海州: 黃海道 警察部 衛生課, 1937), 30-33쪽. 그 외 지역 위생과의 결핵 집단검진 결과는 다음에서 확인할 수 있다. 須川豊, 原藤周衛, “朝鮮人ニ於ケルツべルクリン陽性律”, 8-12쪽.
“朝鮮結核豫防協會 發會式”, 『朝鮮』 5 (1936), 140쪽.
“결핵 환자는 격증컨만 시료의 기관은 전무”, 『동아일보』 1934.12.2.
“결핵 환자 40만, 사망자도 연 4만 여 명”, 『동아일보』 1938.3.6.
京畿道 衛生課, 『衛生槪要』 (京城: 京畿道 警察部 衛生課, 1937), 62-84쪽.
慶尙北道 衛生課, 『慶北衛生の槪要』 (大邱: 慶尙北道 警察部 衛生課, 1940), 7쪽.
笠原道夫 編, 『小児結核症及其療法』 (東京: 南江堂, 1909), 62-63쪽.
須川豊, 原藤周衛, “朝鮮人ニ於ケルツべルクリン陽性律”, 8-12쪽.
井上八重二, “財團法人結核豫防會-朝鮮地方本部の機構と其の使命”, 『警務彙報』 413 (1940.9), 56-7쪽.
“朝鮮人에게도 結核性 京畿道調査로 戰慄할 數字判明”, 『매일신보』 1941.3.12; “體力管理의 基本材料로 靑少年들 保健調査-新設될 厚生局 結核豫防에 萬全”, 『매일신보』 1941.7.31.
小川功, “(講演抄錄)朝鮮のツベルクリン皮內反應陽性率に就て”, 『朝鮮醫學會雜誌 臨床篇』 1(6) (1941-1943), 89-90쪽.
須川豊, 原藤周衛, “朝鮮人ニ於ケルツべルクリン陽性律”, 8-12쪽.
小川功, “(講演抄錄)朝鮮のツベルクリン皮內反應陽性率に就て”, 89-90쪽.
須川豊, 原藤周衛, “朝鮮人ニ於ケルツべルクリン陽性律”, 8-12쪽.
미즈시마의 미국 유학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고하라. 重松埈夫, “水島治夫先生の思い出”, 『臨床と硏究』 66(5) (1989), 11-4쪽; 公衆衛生 編集部, “名誉会員を訪ねて(8) 水島治夫先生にきく”, 『公衆衛生』 27(7) (1963.7), 390-6쪽; 마쓰다 도시히코, “시가 기요시와 식민지 조선”, 『한림일본학』 25 (2014), 33-58쪽; 松田利彦, “志賀潔とロックフェラー財団―京城帝国大学医学部長時代の植民地朝鮮の医療衛生改革構想を中心に―”, 松田利彦 編, 『植民地帝国日本における知と権力』 (京都: 思文閣出版, 2019), 523-66쪽. 미즈시마의 인구통계 연구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하라. 愼蒼健, “植民地衛生学に包摂されない朝鮮人―一九三〇年代朝鮮社会の『謎』から”, 坂野徹, 愼蒼健 編, 『帝国の視角/死角』 (東京: 青弓社, 2010), 17-52쪽; 横山尊, “九州帝大医学部における民族衛生学·植民衛生学講座: 戦前·戦後の水島治夫の学問から(特集 帝国大学の〈内〉と〈外〉)”, 『九州史学』 167 (2014), 58-90쪽.
그중 가장 대표적인 연구로는 다음을 들 수 있다. 水島治夫, 『朝鮮住民の生命表』 (京城: 近澤書店, 1938).
원래 생명력은 생명 활동의 정도를 나타내는 양적인 개념으로, 에너지 변화율, 대사율, 증식율 등을 포괄한다. 그러나 경성제대 위생학예방의학교실의 연구에서 생명력은 다른 어떤 종류의 생명 활동보다도 인구 집단의 증식, 생존, 평균수명을 가리키는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1920-30년대에 사용되던 생명력의 정의는 다음을 참조하라. Raymond Pearl, “On the Distribution of Differences in Vitality among Individuals,” The American Naturalist 61(673) (1927), pp. 113-131.
水島治夫, “人口の自然増加率”, 『民族衛生』 2(2) (1932), 141-160쪽.
李仁圭, “朝鮮兒童の身長, 體重及び胸圍に就て”, 『朝鮮醫學會雜誌』 23(8), (1933), 61-82쪽.
같은 저자, “아동의 발육형상-조선아동의 특이성(3)-”, 『동아일보』 1937.11.7.
須川豊, “結核と年齡”, 247-256쪽.
같은 논문, 247쪽.
谷口芳德, “本邦ニ於ケル結核死亡ニ因ル平均壽命短縮ノ地理的分布”, 『朝鮮醫學會雜誌』 29(11) (1939), 41-58쪽; 須川豊, 原藤周衛, “朝鮮ニ於ケル結核死亡ニ就て”, 1-8쪽; 須川豊, 大神盛正, “朝鮮ニ於ケル醫師ト醫生”, 19-26쪽; 須川豊, “結核と年齡”, 247-256쪽.
須川豊, 原藤周衛, “朝鮮ニ於ケル結核死亡ニ就て”, 1-8쪽.
落合時典, “在鮮內地人ノ死亡統計ニ關スル硏究”, 『朝鮮醫學會雜誌』 30(7-8) (1940), 348쪽.
谷口芳德, “本邦ニ於ケル結核死亡ニ因ル平均壽命短縮ノ地理的分布”, 41-58쪽.
須川豊, 原藤周衛, “朝鮮ニ於ケル結核死亡ニ就て”, 1-8쪽.
같은 논문, 6쪽.
온돌의 건축학적 구조와 그 위생학적 효과를 둘러싼 조선 의학자들의 논의에 대한 자세한연구는 이연경, “1920년대 근대 건축에서의 위생 담론의 소개와 적용-朝鮮と建築”, 『도시연구: 역사·사회·문화』 18 (2017), 31-62쪽. 특히 43쪽을 참조.
須川豊, 原藤周衛, “朝鮮ニ於ケル結核死亡ニ就て”, 2쪽.
같은 논문, 5쪽.
志賀潔, “朝鮮の醫生に就て”, 『中外醫事新報』 1185 (1932), 291-7, 특히 293쪽.
須川豊, 大神盛正, “朝鮮に於ける醫師と醫生”, 19-26쪽, 특히 23쪽.
같은 논문, 19쪽.
志賀潔, “朝鮮人の衛生思想”, 『朝鮮及滿洲』 186 (1923.5), 37쪽.
조헌영, “사망통계를 통해서 본 폐결핵 환자(上)-과연 돈이 많아야만 고치는 법인가”, 『동아일보』 1938.7.2; 조헌영, “사망통계를 통해서 본 폐결핵 환자(中)-조선 사람 사망률은 왜 적은가”, 『동아일보』 1938.7.4; 조헌영, “사망통계를 통해서 본 폐결핵 환자(下)-병이 나도 초조해 하지 맙시다”, 『동아일보』 1938.7.5. 조헌영의 의학사상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하라. 신창건, “조헌영의 정치적 의학사상-식민지기, 해방후, 납북 후를 통하여-”, 국사편찬위원회 편, 『한국 근현대 과학기술사의 전개』 (과천: 국사편찬위원회, 2005), 115-164쪽; 박윤재, “1930-1940년대 조헌영의 한의학 인식과 동서절충적 의학론”, 『한국근현대사연구』 40 (2007), 118-139쪽.
須川豊, 大神盛正, “朝鮮に於ける醫師と醫生”, 19-26쪽.
같은 논문, 36쪽.
水島治夫, 『朝鮮住民ノ生命表』 (京城: 近澤書店, 1938); 崔羲楹, “朝鮮住民の生命表-第一回生命表(昭和元-五年)の補充及び第二回生命表(昭和六-十年)精細生命表”, 『朝鮮醫學會雜誌』 29(11) (1939.11), 68-108쪽; 水島治夫, 小山雄吉, 鶴崎敏胤, 谷口芳德, “府縣別生命表-第一回”, 『朝鮮醫學會雜誌』 28(8) (1938), 92-132쪽; 水島治夫, 細上恒雄, 原藤周衛, “府縣別生命表-第二回”, 『朝鮮醫學會雜誌』 29(9) (1939), 124-159쪽; 水島治夫, 原藤周衛, 細上恒雄, 小山雄吉, “生存比ニ觀スル健康度ノ地理的分布”, 『朝鮮醫學會雜誌』 29(11) (1939), 26-44쪽; 水島治夫, 谷口芳德, “六大都市(東京, 大阪, 京都, 名古屋, 横濱, 神戸)住民の生命表-第一囘 (昭和元年一五年)”, 『民族衛生』 8(1) (1940), 1-98쪽; 水島治夫, 谷口芳德, “六大都市(東京, 大阪, 京都, 名古屋, 横濱, 神戸)住民の生命表-第二囘(昭和六年―十年)”, 『民族衛生』 8(3) (1940), 175-211쪽; 水島治夫, 細上恒雄, “在滿(關東局管内)住民の生命表-第一囘(昭和六年―十年)”, 『朝鮮醫學會雜誌』 29(11) (1939), 45-63쪽; 水島治夫, 崔羲楹, “在滿(關東局管内)朝鮮人の生命表”, 『民族衛生』 9(2) (1941), 119-130쪽.
崔羲楹, “朝鮮住民의 生命表”, 『三千里』 12(9) (1940.10), 102-105쪽.
水島治夫, “眞の人口自然增加率”, 『優生學』 9(2) (1932), 1-7쪽.
水島治夫, “京城府住民の生命表”, 京城府 編, 『朝鮮都市の衛生事情に關する若干研究』 (京城: 京城府, 1938), 29-30쪽. 경성제대 위생학예방의학교실의 의학자들이 오랫동안 고민해 온 조선인의 유아사망률 문제 또한 그것이 생명력의 위계와 맞지 않는 수치를 보였던 점이 문제제기의 시작이었다. 미즈시마는 생명표 연구에 착수했을 때부터 조선인의 유아사망률에 대해 의혹을 제기하며, “구미국가들에서는 0세 사망률이 0세 인구 천 명 당 100 이상, 일본에서는 여자 124, 남자 140”인데, 그들의 것보다 낮은 조선인 유아사망률은 “의심할 것도 없이 유아사망이 전부 신고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언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