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수(麋壽) 이갑수(李甲秀)의 생애와 사상: 우생 관련 사상과 활동을 중심으로†
Life and Ideas of LEE Kap-Soo: Focusing on the Ideas and Activities Related to Eugeni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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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Lee Kap-Soo (April 23, 1889-December 5, 1973) graduated from Gyeongseong Medical College in 1920, went to Germany to study, and returned to Korea after graduating from Berlin University in 1924. On September 14, 1933, he played a leading role in the founding of the Joseon Eugenics Society, and he contributed eugenic ideas through written publications and lectures. He was a leading eugenicist who continued his activities related to eugenics, such as re-establishing the Korean National Eugenics Society and making efforts to enact the Eugenics Act after Korea’s liberation from Japanese occupation. His ideas on eugenics were then a rapid acceptance of the world’s times and science, and his ideas were an expanded eugenics that emphasized the nation. He actively carried out the campaign for eugenics and maintained a consistent stance before and after liberation. His eugenic ideas and activities show that Korean society was not free from the influence of eugenics that was gaining popularity around the world. His eugenic ideas were related to enlightenment, but the basis of eugenics was the logic of discrimination and exclusion. In particular, his eugenic ideas and activities have caused pain to Hansen’s patients through forced isolation and discontinuation. In addition, his doctrine of eugenics still holds sway in Korean society. The history of Lee Kap-Soo’s life and eugenics-related activities shows the important points and characteristics of the history of eugenics in Korean society before and after the liberation from Japan, and furthermore provides an important clue in understanding and explaining the colonial vestige in Korean society, economic growth first ideology, enthusiasm for scientific development, and competitive social culture.
1. 머리말
이 단종을 실행하는 목적은 국민으로부터 열등 분자를 없애자는데 있습니다. 열등 분자는 우생학상으로 열등 분자를 말함이니 즉, 정신병, 화류병, 간질 기타 유전성의 악질을 가진 사람들은 단종시킴으로써 세상에서 자최[자취]를 질초도록하여 민족의 피를 깨끗이 하자는 것이 단종의 목적인데, 국민체위향상을 위하여 또는 국민보건을 위하여서는 절대로 필요한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히틀러의 『나의 투쟁』 중 한 대목을 생각나게 하는 이 발언은 1938년 『매일신보』에 실린 이갑수(李甲秀, 1889.4.23-1973.12.5)[1,]의 주장이다[2].
이갑수는 1920년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독일 유학을 떠나 1924년 베를린 대학교를 졸업했다. 그는 귀국 후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 교수와 부속병원 내과 과장을 역임하는 등 일제 식민지기 의학분야의 저명한 학자이자 교육자였다. 해방 후에도 그는 초대 보건부 차관(1949.6.11-1950.11.1)을 역임하고, 이후 대한 YMCA후원회 이사, 제2대 서울여자의과대학 학장 등을 역임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특히 그는 일제 식민지기 1933년 9월14일, 윤치호를 비롯하여 당시 주요 국내 인사 85명이 발기인으로 참여한 ‘조선우생협회’를 창립했으며, 이 협회의 기관지라고 할 수 있는 『우생』의 발간, 대중 강연 등 우생 관련 활동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갑수가 전 생애에 걸쳐 몰두했던 ‘우생학’이란 종의 개량을 통해 유전적 소질의 악화를 막고 더 나아가 개선하는데 목적을 둔 학문을 말한다[3,]. 우생학은 19세기 후반 유럽사회에 확산되기 시작했던 다윈의 진화론, 사회진화론, 유전학과 서로 긴밀한 관계를 맺으면서 발전하였다(신영전, 2006).
식민지 조선에서 우생학은 이미 1910년대 후반에 ‘민족개선학’ 또는 ‘인종개선학’이라는 이름으로 일본으로부터 수용되었다. 한편 독일을 통한 직수입의 경로도 존재했는데, 그 대표적인 사례가 독일 유학을 다녀 온 이갑수의 활동이다. 김예림은 일제 식민지기 대중매체에 ‘우생학’이라는 개념 자체가 등장한 것은 1920년대 초반이며, 1920년대 중반 이후 유전학과 함께 일반인들에게 보급되고 1930년대에 완숙기를 맞았다고 하였는데(김예림, 2005: 333), 그 완숙기의 중심에 이갑수가 있었다.
이갑수의 우생 관련 활동에서 주목할 점 중 하나는, 나치의 홀로코스트로 대변되는 우생사상이 야기한 세기적 비극 때문에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우생학(eugenics)’이란 표현이 전세계적으로 거의 자취를 감추었음에도 이갑수는 해방 후 ‘한국민족우생협회’를 재건하고 결혼상담소를 개설하는 등 적극적인 우생 운동을 재개하였다는 점이다. 또한 1949년부터 약 1년 반 동안 대한 민국 정부의 초대 보건부 차관을 역임하면서 한센병 정책 등에서 그의 생각을 지속적으로 관철했고, 퇴임 후에도 ‘국민우생법’을 제정하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했다. 결론적으로, 그는 일제 식민지기뿐만 아니라 해방 후까지 우생사상을 평생 간직하고 더 나아가 제도화하려 했던 한국의 대표적인 우생론자였다.
한국 우생사에서 이갑수가 가지는 이러한 상징적·실질적 위상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 그의 생애와 그의 우생 사상은 부분적으로만 소개되었다. 학계에 그의 활동을 본격적으로 소개한 것은 잡지 『우생』의 발간 경과와 게재 내용을 다룬 신영전(2006)의 논문이지만, 그의 생애와 사상을 본격적으로 다루지는 않았다. 정구충 등 일부 필자들이 그를 한국 의료사의 주요 인물로 소개하기도 하였으나, 이 역시 생애 전반에 걸친 단순 소개에 그치고 있다(정구충, 1985; 한국의학회, 2009).
또한 그간 한국 우생 관련 논문으로 한센병(김재형 & 오하나, 2016; 서기재, 2017; 이지형, 2017), 한일 문학 속에 나타나는 한센병(이지형, 2017), 정신질환자(이방현, 2013), 출산과 ‘불구자’(소현숙, 2000), 단종·낙태(신동일, 2018; 최규진, 2018), 문화 속의 우생학(이선옥, 2003) 등을 다룬 연구들이 있으나, 이 연구들도 이갑수의 생애와 사상에 대해 본격적으로 다루지는 않았다. 최근 이갑수와 그가 주도한 『우생』에 대한 내용이 소개되었으나(이정선, 2016), 이는 『우생』 잡지에 수록된 그의 글에 국한하여 제한적으로 소개를 하는 데에 그쳤다. 특히 해방 전후 시기 그가 공직에 머물며 추진했던 정책과 사상적 변화를 포함한 본격적인 연구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
이 연구에서는 일제 식민시기와 해방 이후에 이르기까지 가장 대표적인 우생론자였던 이갑수의 생애와 우생 관련 활동을 정리하고, 그의 우생 사상 습득 경로와 주요 특징이 무엇인지 살펴보고자 한다. 아울러, 그의 우생 관련 사상과 활동이 보건 의료사에서 가지는 함의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작업은 20세기 초 전 세계를 풍미했던 정치, 사회, 과학 담론이었던 우생학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식민지 조선과 해방 후 한국 사회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연구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그의 행적 및 관련 자료를 체계적으로 수집하고 정리하는 한편, 관련 인사와 인터뷰도 진행하였다. 특히 일제 식민지기부터 해방 후까지 『우생』지를 포함한 다양한 잡지와 신문에 기고한 글들을 체계적으로 수집하여 분석하였다.
2. 미수 이갑수의 생애: 우생 관련 활동을 중심으로
1) 출생, 성장 및 교육과정
이갑수는 1899년 4월 23일(양력) 황해도 김천군에서 부친 이택기(李宅基)와 경주 김씨 사이에 차남으로 출생하였다. 그를 소개한 『동아일보』 기사에서 그가 “13대를 [이어온] 1만석거리 대지주의 아들[로 자라난] 덕으로 남달리 순탄한 길을 밟”았다고 소개한 것으로 보아[4,], 꽤 유복한 환경에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어린 시절 자녀가 없었던 서울 일가 이승경(李承慶)에게 양자로 입양되었다. 이승경은 양녕대군의 16대손이었는데, 이갑수 집안도 같은 집안 사람이었다. 이갑수의 양부인 이승경은 이후 재혼하여 3명의 아들(인수, 광수, 춘수)을 두었고, 이갑수를 다시 자신의 셋째 남동생인 승모(承模)에게 입양시켰다(정구충, 1985: 199-120). 그는 매동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고[5,], 1916년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고 1920년에 졸업하였다. 이 시기 이갑수는 경남의 부호 자제였던 정씨와 결혼하여 아들 하나를 두었으나 이후 정식으로 이혼하였다[6].
1921년 이갑수는 독일 유학을 떠났다. 유학 길은 박주병[7,], 최두선[8,]과 동행하였다. 그는 요코하마에서 베를린까지의 여행기를 『매일신보』에 연재하였다[9,]. 그 글에 나타난 그의 여행 경로는 요코하마에서 후시미마루(伏見丸)를 타고 고베-모지-상해-홍콩-싱가포르-콜롬보-마르세유로 이동하고 육로를 이용하여 베를린으로 가는 매우 복잡하고도 긴 여정이었다. 이갑수는 1924년 베를린 의과대학을 졸업하였는데, 졸업 시 연구주제는 ‘다양한 탄류(석탄/목탄/숯)의 흡착 및 해독작용에 대하여(Ueber das Adsorptions und Entgiftungsvermögen verschiedener Kohlearten)’였다[10,]. 졸업 후 그는 바로 귀국하지 않고, 프라이부르크 대학교(Albert-Ludwigs-Universität Freiburg)[11,] 내과에서 1년 간 수련을 마친 후 대서양을 통해 미국을 방문한 뒤 귀국하였는데, 이승만의 호의로 미국에서 많은 곳을 돌아볼 수 있었다고 한다(정구충, 1985: 201).
미국에서 돌아온 이갑수는 1926년 서울 수송동에 진료소를 신축하여 ‘이갑수 내과의원’(이내과의원)을 개원하였다[12]. 개업의 활동을 하면서 1927년 6월부터 1928년 8월까지 『동아일보』 「가뎡고문」이라는 란에 위생과 육아 질병에 관한 독자의 질문에 답하는 Q&A 형식의 의학상담란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1933년 이갑수는 “학위가 필요하다”는 이유로[13,] 다시 일본으로 유학 길을 떠나 1936년 교토 제국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정구충, 1985: 201). 당시 그가 쓴 논문은 “신체 내 교양은[14,]의 역할(生体内に於ける膠樣銀の運命に就て)”외 5편이었다. 지도교수는 오규 기쿠오(荻生 規矩夫) 약리학 교실 교수로 그는 교토제국대학에서 1927년 “아드레날린의 미주신경(부교감신경) 작용에 대하여(「アドレナリン」の迷走神経(副交感神経)作用こ就て)”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그 역시 1930-32년 사이에 독일과 오스트리아 유학을 다녀온 인물이었다(泉孝英, 2012). 이갑수의 일본 박사 과정 시기는 ‘조선우생협회’ 창립과 대중 강연 등 그가 조선 내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던 기간과 겹친다. 이는 그가 박사과정 중에도 상당 시간을 조선에 머물렀음을 의미한다[15].
2) 일제 식민지기 우생활동
1933년 9월 14일 오후 3시, 황금정 ‘지요다(千代田) 그릴’에서 발기인 윤치호, 권동진 외 40여명의 인사가 참석하여 ‘조선우생협회’ 발회식을 개최했다. 이갑수는 총무이사로 협회의 창립 과정과 이후 강연회 개최 등 협회 운영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또한 ‘조선우생협회’가 발행한 협회지라고 할 수 있는 『우생』이라는 잡지의 제작 과정에서도 적극적으로 다양한 글을 싣는 등 열성적으로 활동하였다[16].
특히 이갑수는 해방 전후에 걸쳐 의학, 위생, 우생과 관련한 많은 글들을 신문이나 잡지 등에 기고하였다. 그 중에서도 우생학적 성격이 강한 글은 “우생학적 운동이란 무엇인가”(『중앙』, 1932), “우생학적 산아제한론”(『신여성』, 1933), “단종법(『매일신보』, 1938) 등이었다(표 1). 이갑수는 이 시기 기고 활동 이외에도 우생운동과 관련하여 결혼 문제에 집중해 결혼상의소를 설치, 운영하기도 하였다.
이갑수는 일본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후 우생협회의 활동과 함께 김탁원, 길정희 부부가 운영하던 동대문 부인병원과 의학강습소를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부속병원(1940년 설립)으로 전환하는 작업에 참여하였고 내과 과장겸 교수가 되었다. 또한 이 시기 이갑수는 『민족우생학』이란 책을 저술하기도 하였다[17].
3) 해방 후 우생활동
해방이라는 크나큰 시대적 변화에 따라 그의 우생사상은 변화했을까? 변화했다면 어떻게 변화했을까? 이를 확인하기 위해 해방 직후 우생과 관련한 이갑수의 활동을 크게 세 시기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첫 번째는 ‘한국민족우생협회’를 재발족하고 결혼상의소 설치, 신문기고 등의 활동과 함께 민족청년단활동에 협조했던 시기이다. 두 번째는 정부수립 후 초대 보건부 차관으로 활동하던 시기이다. 세 번째는 차관을 그만 둔 이후이다. 각 시기별 우생과 관련한 주요 활동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해방직후 이갑수는 일제강점기에 자신이 주도해서 만든 「우생협회」를 재발족시켰다. 이와 관련하여 『대동신문』은 1946년 10월 20일자 지면에 다음과 같은 기사를 실었다.
조선우생협회(朝鮮優生協會)는 지금으로부터 13년전에 창립되어 민족우생운동(民族優生運動)에 힘을 써오다가 왜정(倭政)의 탄압으로 일시 휴식 상태에 빠졌던 바 이번에 이것을 재발족(再發足)시키기로 되어 10월15일 오후 3시에 이사회(理事會)를 열고 유억겸(兪億兼)씨의 개회사와 이갑수(李甲秀)씨의 경과보고가 있었고, 특히 이사회 석상에 임석한 이승만(李承晩)박사와 이범석(李範奭) 장군은 민족우생운동에 대한 열렬한 토의가 있었다 한다. 그리고 동회에서는 종래 불러오던 조선우생협회라는 명칭을 변경하여 한국민족우생협회(韓國民族優生協會)라고 부르기로 목하 모든 것을 준비 중이라 한다[18]
이날 모임은 “최종적으로 ‘한국민족우생협회’로 이름을 개칭하고, 민족우생에 관한 법령을 급속 제정하도록 관계당국에 건의하기로 결정하고 폐회하였다”[19,]. 이후 1947년 6월 6일자 『민중일보』는 보다 구체적인 내용을 보도하고 있는데, 이 협회의 목적을 “조선민족의 건강과 우생학적 결혼을 연구 실천코저”라고 기재했으며 ‘국민우생결혼상담소’도 화신(和信) 백화점 내에 설치할 예정이라고 보도했다. 조직구성은 회장에 유억겸, 총무에 이갑수, 이사에 구자옥(具滋玉), 김성수(金性洙) 등이었다[20].
이상의 기사에서 주목할 부분은 이갑수가 해방 후에도 우생협회 창립과 운영에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고, 이 협회가 식민지기에 존재했던 ‘조선우생협회’를 계승한 조직이라는 점을 공식적으로 표방하고 있다는 점이다[21,]. 또한 이 행사에 당시 유력한 정치가인 이승만과 이범석이 참석하였는데, 이 자리에서 이승만은 “민족우생에 관한 정치적 견해”라는 제목으로, 이범석은 “민족우생과 청년운동”이란 제목으로 강연을 진행하였다고 하나 그 구체적인 내용은 전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이 우생협회 발족식에 참석하여 연설까지 했다는 것은 당시 유력 정치인들도 ‘민족우생’에 관심을 가졌고 그 관심이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다지는 데에 불리할 것이 없었다는 점을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이후 ‘한국우생협회’는 임시의정원과 1946년 2월 조직된 비상국민회의의 직능을 계승한 ‘대의기구’였던 국민의회에 가입하기도 하였다[22].
일제 식민지기에 그랬듯이 ‘우생운동’ 중 하나는 계몽과 여론 형성을 목적으로 우생 관련 글을 기고하고 강연회를 개최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승만, 이범석 등 당시 거물급 정치인이 참석한 재발족 선언에도 불구하고 ‘한국민족우생협회’의 활동은 식민지기에 비해 그리 활발하지 않았으며, 직접적으로 ‘우생’이란 단어를 포함한 기고문도 많지 않았다. 그나마 우생학을 적극적으로 표방하는 기고문은 협회 재발족 직후인 1946년 8월에 이갑수가 『현대과학』에 쓴 “조국재건과 민족우생운동”과 박순천이 창간한 「부인신보」에 실린 “시평: 우생결혼”(1947년 6월 11일자), “새말: 우생학”(1947년 6월 21일자) 정도이다[23].
그나마 해방 후 드러나는 가장 적극적인 활동은 화신(和信) 백화점 내에 ‘국민우생결혼상의소’를 설치한 것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한성일보』는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부인신보』는 ‘시평(時評)’을 통해 이 「국민우생상의소(國民優生相議所)」의 설치 목적이 “건강상으로 보아 적합한 결혼에 대한 상의와 유아자모들의 보건 문제에 관한 의론이며, 또 실비치료까지 겸하여 담당하여 우리 민족 장래를 위하여 적절한 기초(基礎)공작의 하나”라고 소개하고 있다[27]. 이 상의소는 일제 식민지기에도 운영했던 결혼상의소의 재개원이라고 볼 수 있다. 그 이름에 ‘우생’을 공식적으로 표방했기에 우생을 강조하는 성향이 더 강해졌다고 볼 수 있다.
이 시기 이갑수는 같은 독일유학생이면서 개인적으로도 특별한 인연이 있었던 안호상(安浩相)이 주도한 조선민족청년단의 설립과 운영에 협력하였다. 이에 대해 정구충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이 서술은 조선민족청년단에 협력한 맥락을 간접적으로나마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안호상은 해방 후에 철기 이범석과 같이 독일 ‘히틀러 유겐트’를 모방하여 ‘민족청년단’을 양성하였는데 그 조직이 매우 우수하였으므로 이범석이 국무총리일 때 안호상은 문교부장관에 발탁되었다. 이 단체에는 미수(이갑수)와 박주병도 많은 협조를 하였다(정구충, 1985: 205).
이갑수는 서울여자의과대학[28,] 내 분규의 책임을 지고 학교를 떠난 후, 윤일선, 정구충 등과 사회부에서 보건부를 독립시키는 활동을 했으며, 1949년 6월 11일부터 1950년 11월 1일까지 초대 보건부 차관으로 활동했다. 차관 재임 당시 주요 보건분야 현안은 감염병 대처, 의료인 면허제도, 의료보험제도, 청소년 흡연문제 등이었는데, 이와 함께 언론에 가장 많이 언급되었던 것이 한센병에 대한 정책이었다. 차관에서 물러난 후 그의 회고나 대담을 살펴봐도 한센병을 가장 많이 언급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29].
차관이 된 직후 그는 나환자[30,] 분포 조사 등 실태조사를 실시하고, 실태 파악과 조사 독려를 위해 경상남북도, 대전 등을 직접 방문하기도 하였다[31,]. 또한 ‘나(한센병)예방협회’[32,]의 활동과 격리치료 비용을 마련하기 위한 구나권(救癩券)[33] 모집 운동을 독려하기도 하였다. 그가 제안하는 한센병 정책의 핵심은 기본적으로 수용시설을 만들어 한센병환자와 미감염아동들을 ‘일반인’으로부터 가급적 “멀리” 격리하여 “완전히 없애는” 것이었다.
보건부로서 강력한 대책을 강구하고 있으며 금번 경남북 양도의 라환자 수용소를 시찰하였는데, 충남에는 라환자가 극소하니만큼 충남의 라환자를 경남북에 이송하거나 그것이 여의치 않으면 충남의 현재 수용된 라환자는 물론 부랑라환자를 전폭적으로 수용할만한 기관을 설치하여 충남의 라환자를 완전히 없애려 한다(1949년 8월28일자 『충청일보』, 이갑수 발언 중, 강조는 저자).
그 밖에도 이 시기 이갑수는 우생운동 법제화를 시도하였다. 1951년 9월 25일 제정된 「국민의료법」 초안 제1조 안은 “제1조 본법은 ‘민족의 우생적 발전’(필자 강조)을 도모하기 위하야 국민의 보건 향상과 국민의료의 적정을 기함을 목적으로 한다”였다. ‘우생’이란 단어는 이 법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1944년 제정된 「조선의료령」과 이 법의 기초가 된 1942년 일본 「국민의료법」에는 등장하지 않는 단어이다. 결국 최종 법안에서 ‘우생’이란 단어는 빠졌지만, 1951년 7월 국회 법령 독회(讀會)에서 사용된 「국민의료법」 초안은 1950년 10월까지 보건부 차관으로 있었던 이갑수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1957년 『동아일보』와 진행한 인터뷰에서 그는 “지금도 차관 당시 『우생법령』을 제정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고 있다”고 말했다[34].
3. 이갑수의 우생사상
1) 우생사상 습득 및 형성 과정
그렇다면 이갑수의 우생사상은 어떻게 형성된 것일까? 구체적으로 그의 우생사상의 습득 경로는 무엇이었고, 누구에게서 영향을 받았을까? 또한 우생론자로서 그의 성품은 어떠했을까?
그의 청년시절은 밖으로는 제1차 세계대전, 러시아혁명, 윌슨의 평화원칙 발표(1918), 국내로는 일제의 침략과 3.1만세운동 등 식민주의와 제국주의가 맹위를 떨치던 혼란기였다. 피식민지의 지식인 청년으로 나라 안팎의 상황을 접하면서 그는 여러가지를 고민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또한 그 시기는 유전학 등 현대 과학의 급속한 발전에 따라 사회, 경제적 문제를 과학을 통해 타개하려는 19세기에 시작된 과학중심주의의 영향 하에 놓여있던 시대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과학의 중심에 유전학과 우생학이 있었다.
우생학은 19세기말 영국의 생물통계학자 골턴이 명명한 후 스펜서(Herbert Spencer)를 거쳐 당시 자유주의의 위기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사회개혁을 갈망했던 다양한 세력들에게 수용 및 변용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대서양을 거쳐 미국에서 왕성하게 꽃피웠다. 1922년 미국우생위원회(후에 미국우생학회가 됨)가 설립되었고, 미국 이민법의 제정과 시행에도 강력한 영향을 미쳤다. 우생학의 열풍은 영국, 미국 뿐만 아니라 독일, 프랑스, 네덜란드를 비롯한 유럽, 더 나아가 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에 몰아친 전 세계적 현상이었다[35,]. 우생사상은 가장 선진적인 서구 과학 담론이기도 하였으며 20세기에 들어서는 위생, 성병 치료 및 예방, 배우자 선택, 태교법과 단종법에 대한 논리적 근거를 제공하는 역할을 넘어 인종주의, 식민주의, 제국주의의 이데올로기적 근거로 기능하고 있었다(김예림, 2005).
이갑수가 우생사상으로 무장했던 과정에는 독일 유학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갑수는 경성의전을 졸업하고 총독부의원에서 일했는데 그 당시에도 신문에 글을 기고했다. 글의 주제는 주로 광견병 등 전염병, 금연(단연, 斷煙)에 관한 것이었다[36,]. 비록 ‘우생’이란 단어를 사용하지는 않았으나 “아무리 허약한 여성도 체육을 충분히 하면 남자보다 강건하치 못할 까닭이 없다”는 등의 논리를 펼치기도 했고[37,], 독일 유학 길 도중 후시미마루 배 위에서 쓴 여행기에는 식민지배의 정치구조, 화폐, 경제발전, 신문물 등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소개하는 글을 썼다. 약육강식의 국제 정치 실태를 목격하면서도 상하이 같은 대도시의 발전을 두고 “(여러 나라들이) 서로 경쟁하여 집합한 결과 금일과 같은 번영한 대처(大處)가 되었다”[38]며 ‘경쟁’을 번영의 원인으로 지목하기도 했다.
이갑수가 유학을 떠난 1921년, 독일에서는 본격적인 우생학 열풍이 불기 시작했다. 독일에서 우생학의 다른 표현이라 할 수 있는 인종위생학(Rassenhygiene) 운동은 19세기 말 쉘마이어(Schallmayer)와 프로에츠(Ploetz)가 인종우생학을 제기하면서 시작되었다(Weiss, 1986: 33-46). 1895년 안락사를 옹호하고 정부가 개인의 죽음을 통제해야 한다는 조스트(Jost)의 책(Jost, 2017)과, 1920년에는 불치병 환자, 정신질환자, 박약아, 선천성 불구를 가진 아동 등과 같이 ‘살 가치가 없는 생명에 대한 살생의 허용’을 주장하는 칼 빈딩(Karl Binding)과 알프레드 호체(Alfred Hoche)의 책이 출간되기도 했다(Binding & Hoche, 2006).
이갑수가 독일 베를린대학을 졸업하던 1924년은 히틀러(Hitler)가 비어홀 폭동에서 실패한 뒤 투옥되어 『나의 투쟁(Mein Kampf)』 제1권을 집필했던 시기이다. 이 책에서 히틀러는 우생학적 광기를 구체적으로 표방하고 있다[39,]. 1933년 히틀러의 나치정권 집권 이후 이러한 인종위생(racial hygiene) 운동은 흑인, 유태인, 동부 유럽인들을 인종적으로 구분하고 열등한 존재로 규정하는 정치운동으로 급속히 변질되었다(Garver & Garver, 1991: 1109).
이갑수는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유학생활을 마치고 독일에서 돌아와 「우생협회」를 설립하고 그 협회의 기관지라고 할 수 있는 『우생』 창간호에 독일 「유전병방지법」을 번역하여 소개했다. 그 법은 독일에서 12년간 수백만 명의 생명을 앗아간 대중 우생운동의 첫 걸음이자 법적 근거를 제공한 법령이었다(Rifkin, 1999). 또한 그는 독일의 우생정책도 반복하여 상세히 소개하였다. 1931년 1월1일 세계 학풍(學風)을 다룬 『동아일보』의 특집 인터뷰에서 그는 독일 학생들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였다.
이들(학생들)은 방과(放課)만 되면 제 각기 소속단체의 정복(正服)을 입고 교외 격검장(擊劍場)으로 대를 지어 검술을 경합하는데 독일 대학생들의 좋아하는 이 검술은 서반아(西班牙)의 투우(鬪牛) 그것에 떨어지지 않는 국기(國伎)라 하겠습니다.
본래 독일국민의 국민성 인내성 많기로는 유명한 것이지만은 그 중에도 특히 대학생들은 그 같은 단체의 훈련과 아울러 검술을 일삼아 건전한 체육을 만드는 동시에 비겁한 성정을 단련시키고 담을 크게 하야 조국을 위하여서는 자기의 생명이라도 아끼지 않는다는 정신(저자 강조)을 기르는 것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대학생치고 왼편 뺨에 검술 경기의 칼자국 없는 것이 한 수치로 알만치 그들의 기상은 씩씩하고 쾌활한 것입니다. 더구나 구라파 대전 후로 그들은 극히 질소하고 검소하야 그야말로 악의악식을 하야 가면서도 조금도 초췌하야 비관하는 빛이 없이 그대로 산 기운이 씨근거리는 것입니다[40].
이 인터뷰에 그가 독일을 이해하는 방식이 잘 드러난다. 특히 이러한 사고방식은 앞서 살펴본 것처럼 후에 독일 유겐트를 모방한 안호상의 학도호국단 조직 지원으로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정구충, 1985: 205). 이갑수는 안호상과 특별한 인연을 맺었는데, 정구충은 “해방직후 초대 문교부장관을 했던 안호상과 독일 유학 동기였던 이갑수는 당시 보건전문학교 교수로 있던 안호상을 일제 요시찰로부터 보호하기도 하였으며, 해방 후 이범석과 같이 ‘민족청년단’을 양성하는 데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고 하였다(정구충, 1985: 205).
안호상은 독일 유학생으로 해방 후 히틀러의 유겐트를 모방한 ‘조선민족청년단(족청)’과 ‘학도호국단’의 설립에 주도적 역할을 했으며, 특히 ‘학도호국단의’ 경우, 초대 단장직을 맡기도 했다. 그는 초대 문교부 장관으로 “우리는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로 시작되는 <국민교육헌장> 제정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또한 단군조선, 기자조선의 영토가 베이징까지 미쳤다고 주장하는 등 한국배달문화연구원 원장으로 ‘한백성주의’를 설파하였고 열혈 반공주의자로 활동하는 등 해방 후 한국 사회 파시즘의 핵심적 이데올로그였다. 이갑수가 이러한 안호상과 깊은 친분을 맺었기에 그의 우생사상에도 깊은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갑수에게 독일만이 유일한 모델은 아니었다. 그의 여러 글에서는 독일뿐만 아니라 영국, 프랑스, 노르웨이, 네덜란드, 벨기에, 일본 등 당시 선진국의 상황을 자기 주장의 근거로 함께 제시하였다[41]. 그럼에도 당시 사회는 그를 대표적인 독일 유학생 중 하나로 여겼고, 그 역시도 독일을 가장 비중 있게 소개하였다.
이갑수는 독일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면서 이승만의 도움으로 미국의 여러 지역을 돌아볼 수 있었다(이갑수, 1955). 그 와중에 이순용(李淳鎔)과 임병직(林炳稷)을 만나 당시 세계정세가 패전국에 귀속되는 민족에게만 민족자결주의가 적용되고 연합군(영, 미, 불, 일본 등)에 예속되는 영토의 민족에게는 적용되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는 역시 약육강식(저자 강조)이라는 당시 세계정세”를 “조용할 때 침착한 어조로” 이야기했다고 한다(정구충 1985: 201). 이갑수가 방미했던 시기 미국은 대부분의 주들이 강제불임법을 입법하고 연방정부가 이민제한법(1924년)을 통과시키는 등 우생운동이 절정에 도달해 있었다(김호연, 2008: 250-255).
이갑수가 본격적으로 조선에서 우생협회를 만들고 운영한 시기는 일본 교토 박사 유학시절과 겹친다. 이 시기는 일본의 우생학을 본격적으로 접할 수 있는 시기였다. 일본에 우생학이 본격적으로 도입된 것은 러일전쟁 이후이다. 1916년 나가이 히소무(永井潜)가 보건위생조사회에서 우생학의 정책화를 제창하고, 1917년에는 대일본우생회가 결성되었으며, 1920년대에는 관련 단체가 잡지를 발간하기도 했다. 1930년대에는 일본민족위생학회(1935년부터 ‘협회’로 명칭 변경)가 만들어졌다. 이 단체는 ‘단종법’ 제정을 목표로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으며 마침내 1940년 「국민우생법」이 제정되기에 이르렀다(横山尊, 2015: 1-11). 이갑수가 「국민우생법」을 제정하고자 한 것도 일본의 법 제정에서 가장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갑수의 주도 하에 우생협회가 일제 식민지기와 해방 후 우생운동의 일환으로 개설하여 운영했던 결혼상담소는 미국의 대표적인 우생학자이며 결혼상담소의 아버지라 불리는 폴 포페네(Paul Popenoe)의 주요 우생 활동이었다. 또한 일본 우생학의 아버지이자 이갑수의 롤 모델이었던 나가이 히소무의 활동을 따라 한 것이기도 했다. 이갑수는 결혼상담소뿐만 아니라 나가이 히소무의 동향을 『우생』 등을 통해 지속적으로 소개했다[42].
이갑수의 가정사와 출신에 관련한 그의 태도도 우생사상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전술한 바와 같이 그는 전주 이씨로 양부 이승경은 태종대왕의 장자 양녕대군의 16대손이었다. 또한 그가 평생의 자랑이자 롤 모델로 삼았던 이승만도 같은 16대손이었다. 그가 양녕대군의 자손이라는 것과 이승만과 인척관계라는 사실은 평생 그의 삶과 생각을 지배하는 중요한 요인이었다. 이갑수는 직접 『人偉 李承晩博士傳記』라는 전기를 써서 출간하기도 했는데, 거기에서도 자신이 이승만과 같은 양녕대군의 자손임을 강조하고 있다(李甲秀, 1955).
아버님은 내가 어렸을 때 세상을 떠나신 때문에 백부[43]님 슬하에서 자라왔다⋯⋯백부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너는 공부 잘해서 승만(承晩) 아저씨처럼 돼야 한다”고 격려해 주시던 기억이 지금도 머리에 생생하다.
당시 전주 이씨 양녕대군의 후손이라는 사실과 이승만의 인척이라는 사실이 그 자체로 대단한 권력이 되는 시기였다. 이승만 대통령의 정치적 미화 작업에는 그가 양녕대군의 후손이며 아버지가 경선공이라는 것이 활용되기도 했기 때문이다(다케시, 2008: 23). 이갑수는 이승만 대통령 시절 정기적으로 그의 친척들이 경무대에 함께 모여 행사를 할 때 참석하는 등 직접적인 교류를 지속하였다[44]. 그러므로 그가 첫 번째 보건부 차관이라는 자리에 앉을 수 있었던 데에도 이러한 배경이 유리하게 작용했을 것이다. 소위 ‘왕족(王族)’이라는 선민 의식에 젖기 쉬운 조건에 있었다고 볼 수 있는데, 이러한 선민의식은 우생적 사고의 중요한 토양이자 특징이기도 하다.
미션 스쿨을 다녀 평생 감리교 신자로 살았던 이갑수는 이미 어릴 적부터 “강의(剛毅)한 성품과 명철한 두뇌”라는 평을 들었다[45,]. 평생 그를 지켜본 동료인 정구충도 “청년 때 독일서 같이 있던 친구들이 그의 강직한 고집을 ‘철학박사’로 표현하기도 했다”고 적고 있다. 성인 시절 그의 성품에 대해서도 주변인들은 “성격이 철저하여 남을 도와줄 때에는 정성을 다했다”, “강직하고 부정을 싫어하는 미수는 자기소신대로 일생을 관철하였다”(정구충, 1985: 203-205)고 묘사하고 있다. 그의 아들 역시 아버지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기억하고 있다.
제 생각에는 아버님의 심기증(hypochondria) 심리 상태도 관련이 있지 않나 하는 생각입니다. 제가 어릴 때를 기억하면 한번은 바늘에 조금 찔리셨는데 손을 물에 닦으신 후 소독을 2-3번 하신 후 붕대 감으시고 움직이시지도 않았던 기억이 나는데, 그때 어머니가 저한테 아버지 성격이 매우 깨끗한 반면 동시에 본인 건강에 지나치게 걱정하시는 습관이 있으시다고 하셨던 기억이 나요. 저도 하도 난리를 치셔서 이상하다 생각해서 그런지 아버님이 찔린 손가락을 잡으시고 분주하게 왔다 갔다 하시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46].
1957년(58세)에 진행한 인터뷰에서도 그를 “얌전 고지식”, “제 털 뽑아 제 구멍에 넣을 분”, “처세에 있어 조심조심하고 살림에도 수완을 부릴 줄 모르는 이” 등이라고 소개하고 있다[47,]. 앞서 소개한 바와 같이 그의 묘비에 “명성 높은 명의보다 양심적인 양의 되라”가 새겨져 있는 것처럼 그는 높은 도덕을 강조했다. 이상과 같은 그의 성품에 관한 기술들을 요약하면 그는 “원칙을 매우 중요시하고 완벽함을 고집하는 성격”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렇게 완벽을 고집한 그의 성품은 ‘완벽함’을 주장하는 우생론과 닮아 있다[48].
2) 이갑수 우생론의 내용과 특징
그렇다면 해방 전후 대표적인 우생론자였던 이갑수 우생론의 주요 내용과 특징은 무엇이었을까? 이갑수가 우생운동의 적극적인 수용을 목적으로 동원했던 주요 논리는 두 가지인데, 첫째는 세계 주요 국가들이 그것을 행하고 있다는 것이며, 둘째는 의학, 특히 유전학으로 대변되는 당시 첨단 과학이 우생학을 뒷받침하고 있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이갑수는 당시 매우 드문 독일 유학자라는 경력을 최대한 활용했다. 그는 독일과 일본유학, 미국여행 등을 통해 다른 사람들에 비해 매우 빨리 서양문물을 접했는데, “당시 선진국들에서 이미 우생 관련 조치들을 시행하고 있다”는 것을 우생학 수용의 주요 논거로 삼았다[49,]. 또한 독일뿐만 아니라, 일본, 미국, 네덜란드 등 당시 선진국의 우생정책 시행을 발빠르게 소개하였다[50].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그는 1933년 히틀러가 발표한 「유전병방지법」을 1934년 『우생』에 번역해 실었는데, 외국 개별 법령의 입법 소식을 듣기가 쉽지 않았던 당시 상황을 고려할 때 이는 매우 신속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전술한 바와 같이, 이갑수가 우생협회를 만들고 활발한 활동을 시작했던 시기는 진화론과 유전과학의 발전과 함께 우생학이 첨단 학문으로 여겨지고 이에 근거한 다양한 사회정책들이 전 세계적에 걸쳐 적극적으로 시행되던 시기였다. 이갑수는 우생론의 정당성을 설득하는 데에 당시 최고의 과학이라고 할 수 있는 유전학적 근거들을 다수 활용하였다[51].
당시 과학, 특히 유전학이 가지는 영향력은 막강하였다. 더욱이 전문적인 과학 지식은 일반인들이 비판하기에는 너무 어려운 내용이어서 그 주장에 반박하기가 어려웠다. 이것은 당시 우생학이 전세계적으로 크게 퍼져나간 중요한 이유이기도 했다(横山尊, 2015). 첨단 과학에 대한 경외감과 선진국의 발전상에 압도되어 있던 조선인들에게 이갑수의 이런 주장은 설득력이 클 수 밖에 없었다.
이갑수의 우생운동 성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를 위한 적절한 분석의 틀이 필요하다. 우생운동은 개입의 적극성에 따라 적극적인 개입(예: 단종, 유전자 변형)과 상대적으로 소극적인 개입(예: 교육, 홍보)으로 나누어 각각 ‘경성’, ‘연성’이라 명명하고, 내용면에서는 대상인구집단의 인구 수의 증가를 목적으로 하는 개입을 ‘진흥’, 줄이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을 ‘억제’로 분류하여 이를 2X2방식으로 배치시키면 4종류의 성격으로 나눌 수 있다(신영전, 2006). ‘경성진흥우생론’은 우생론자들이 주장하는 ‘좋은’ 유전자의 양산을 ‘강제적인’ 방식을 통해 진행하는 것을 말하며, ‘경성억제우생론’의 대표적인 예는 ‘나쁜’ 유전자를 없애기 위해 시행하는 강제적 ‘단종법’이다. ‘연성우생론’은 진흥우생이든 억제우생이든 그 방법 면에서 교육, 홍보, 권장 등을 수단으로 사용하되 강제하지는 않는 방법을 말한다[52].
일제 식민지기 우생학 논의는 주로 연성우생론의 성격을 보였다(신영전, 2006). 특히 강제적인 단종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의견을 피력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단종과 거세를 이야기할 때에도 조심스러운 표현을 사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만큼 아무리 우생에 신념을 내비친다 하더라도 경성우생론을 주장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던 것이다.
이갑수 역시 식민지기와 해방 이후 모두 극단적인 방법을 통한 우생운동은 진정한 우생학 정신이라고 볼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우량한 국민을 얻기 위하여 인위적으로 열등의 분자를 도태(淘汰)시키는 (것은) 극단적인 수단이요 진정한 우생학적 정신이라고는 볼 수 없다. 만일 저 뉴턴, 하이네, 볼테르, 스펜서 같은 위인도 일찍이 스파르타 국민으로 태어났더라면 다 허약한 아이라고 산간에 버림을 받았을 것이요. 절대로 우리 인류에게 위대한 공헌이 없었을 것이라 하겠다⋯⋯우생학의 근본적 정신은⋯⋯스파르타민족의 사상도, 플라톤과 니체의 주창한 바 극단적 인위 도태를 반대하는 동시에 미래 인종을 개량해서 우량한 분자를 증가시키며 장래 사회에 해독을 끼칠 저열한 분자를 될 수 있는 대로 감소케 하자는 데 있다[55].
그러나 동시대의 우생론자들과 약간의 차이를 보이기도 했는데, 유억겸, 윤성순 등이 독일처럼 결혼 등 개인의 일을 법률로 제한하는 것에 대해 분명히 반대의사를 표명하고 있는 반면, 이갑수는 결혼의 결과가 “그 민족에게 큰 영향을 주므로” 국가가 제제하는 것에 찬성하였다[56]. 그뿐 아니라 이갑수는 스파르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강경한 우생학적 사고를 반대한다고 이야기하면서도 우생의 필요성을 주장할 때에는 언제나 이들의 주장을 먼저 인용하였다. 무엇보다 그가 주장한 ‘소극적’ 접근이란 장애인, 한센병 환자, 저지능아 등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단종을 시행하자는 것이었다. 1938년 들어 일본 의회에서 『단종법』 제정움직임이 있자, 이갑수는 『매일신보』에 다음과 같은 글을 실었다.
이 단종을 실행하는 목적은 국민으로부터 열등 분자를 없애자는데 있습니다. 열등 분자는 우생학상으로 열등 분자를 말함이니 즉, 정신병, 화류병, 간질 기타 유전성의 악질을 가진 사람들을 단종시킴으로써(저자 강조) 세상에서 자취를 질초도록하여 민족의 피를 깨끗이 하자는 것이 단종의 목적인데, 국민체위향상을 위하여 또는 국민보건을 위하여서는 절대로 필요한 일이라고 하겠습니다[57].
이처럼 독실한 감리교 신자였던 이갑수는 생명에 제재를 가하는 경성우생론을 노골적으로 주장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그것에 완전히 반대하지도 않았다[58,]. 해방 후에도 이갑수는 여전히 “이와 같은 인위적 도태는 인류도덕상으로나 또는 종교 상으로 보아 절대적으로 허용할 수 없”다고 밝히고 있다(이갑수, 1953: 1). 하지만 그가 “우리 대한민족(大韓民族)의 보건 및 우생 상 일대 귀감이 될 것으로 믿어 마지 아니”한다고 극찬하며 추천서를 썼던 하두철의 『국민의학』은 제1편을 우생학에 할애하였고, 단종에 대해서도 아래와 같이 매우 강경한 입장을 담고 있다.
이 단종이라 함은 전체민족질을 좀먹어 민족멸망의 두려운 결과를 가져오는 즉 상술(上述)한 악질 유전병을 가진 자를 생식단절을 시킨다든가 또는 격리 등 여러 가지 적당한 방법으로써 그 악질 유전질을 그 병자에게 국한시키고 또 다시 후손에게는 유전되지 않도록 하는 방법인데, 즉 단종인 바 이 단종을 실시함에는 그 개인 의지에 맡긴다든가 또는 개인의 자제력과 교양에 기대함과 같은 것은 도저히 기약한 바 목적을 달성치 못하는 것이다. 결국은 국법과 국가적 시책으로서만 가능한 것이라(하두철, 1953: 53-54).
일반적으로 협의의 의미에서 우생학이란 “인류를 유전학적으로 개량할 것을 목적으로 하여 여러 가지 조건과 인자 등을 연구하는 학문”을 말한다. 그러나 이갑수는 ‘우생’의 의미를 매우 폭넓게 사용하였다. 이는 독일의 영향일 수도 있다. 독일에서 사용하는 용어인 ‘인종위생(Rassenhygiene)’은 영어인 ‘Eugenics’보다 훨씬 광범위한 영역을 포함하는 용어로, 한 집단(a population)의 유전적 질을 개선하기 위한 모든 시도들 뿐만 아니라 인구(population)의 절대적인 증가를 꾀하려는 모든 조치 또는 수단들을 포괄하는 상대적으로 넓은 개념이다(김호연, 2009: 195). 일례로 이갑수의 확장된 우생관은 성적 취향까지도 문제를 삼아, 동성애, 변성애, 색욕전도증도 유전적 요인과 상관이 있으며 악하거나 유해한 것으로 규정하였다.
만일 유전적 성욕의 성질이 악(惡)한 때에는 여러 가지의 이형(異型)이 생기어 개인으로부터 사회(社會)에까지 해독을 끼치는 것이니 즉 동성애(同性愛) 변성애(變性愛) 또는 색욕전도증(色慾轉倒症) 등이 일어나는 것입니다[59].
특히 이갑수는 단종과 같은 경성 억제우생론을 펼치면서 그 대상을 정신질환과 전염병인 화류병, 한센병까지 확장 적용했다. 당시 과학적 수준이 낮아 정신질환을 유전성이 있는 것으로 잘못 판단했을 수 있으나, 당시에도 전염성이 명확했던 화류병과 한센병까지도 단종의 대상으로 본 것은 그의 ‘확장된 우생관’의 한 형태, 신념이 지식을 압도하는 형태를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한센(Hansen)이 1880년경에 박테리아를 발견한 후 노르웨이에서는 이미나병(leprosy)이 전염병이라고 판단하여 정책을 만들었고, 1897년 베를린에서 열린 제1차 국제 나회의(1st international leprosy conference) 이후에는 전염설이 정설로 확정되었다(Edmond, 2006). 이갑수가 주도하여 펴낸 『우생』 제3집에 실린 정구충의 “우생학상으로 본 화류병”에서 그는 화류병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태내 감염이 항상 유전과 근사하여서 종래에는 우생학 연구 즉 유전 연구에 매독이 중요한 관계가 있는 줄 알았으나 ‘스피로헤타 팔리다(매독균, 역자주)’의 전염이 태내에 됨을 증명한 후로는 매독의 치료로 의하여 그 병태후증 (病胎後症)은 절멸 시킬 수 있음을 안다[60].
이갑수의 ‘확장된 우생사상’을 분석할 때, 한센병에 대한 그의 주장을 추가적으로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다른 것들이 그저 단순한 주장이거나 결혼상담처럼 상대적으로 소극적이었던 것에 비하여, 환자 본인 의사와 상관 없이 한센병 환자의 단종을 행하고, 부모가 한센병 환자라는 이유로 부모와 격리시킨 일들은 당사자들에게 직접적으로 큰 고통을 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한센병 환자를 단종시켜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해방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그는 보건부 차관일 당시 보건부 예산의 6할 가량이 ‘나병환자의 수용소’를 위해서 소비되었다는 점을 지적하며 “이러한 현상은 오로지 ‘우생정책’으로서만이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61]. 시급히 한센병 환자를 없애야 보건부 예산을 다른 곳에 쓸 수 있다는 의미였는데, 그에겐 “우생정책”, 즉 단종법이야말로 한센병을 근절시킬 수 있는 좋은 방안이었을 것이다. 물론 이갑수만이 한센병에 우생학적 관점으로 접근한 것은 아니었다. 1954년 국회에서 한민당 국회의원인 윤택중(尹宅重, 1913-2002)은 다음과 같이 발언한 바 있다.
우리의 민족 우생상으로 지극히 우려되는 소위 나병 환자에 대해서 근자에 문명국가로서 지극히 수치스러운 것은 더 말할 필요도 없거니와 우리의 민족 우생상으로 보아서 또한 한심스럽기 짝이 없는 현상인 것은 누구나 부인하기 어려운 것입니다[62].
그는 한센병 문제를 우생학적 관점으로 바라보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나병환자가 많은 것을 문명국가로서 ‘수치스럽고’ ‘한심스러운 것’으로 바라보며 정부의 강경한 태도를 촉구했다. 그는 이후 문교부 정무차관(1960)을 거쳐 장면내각 때 문교부장관(1961)을 역임하여 교육계 수장 역할을 한 사람이었다. 그의 강한 우생학적 주장과 그것을 거침없이 발언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이갑수를 중심으로 한 우생론자의 역할이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갑수는 왜 전염병인 한센병 환자들에 대한 단종을 고집했을까? 제한된 자료를 가지고 이에 대해 명확한 답변을 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그의 발언과 활동을 중심으로 추론해 볼 수 있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번째, 그가 잘못된 지식을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이다. 그가 차관이었을 당시 그는 한센병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병은 환자와의 접촉 전염인 동시에 유전병이다(저자 강조). 그러므로 미감염상태에 있는 유아라 할지라도 이는 모두 일반인과 격리시켜서 한 40년만 지난다면 현재 환자수 이상의 이병(罹病)은 방지할 수 있을 것이며 그로서 오래지 않아 일반가정과 사회의 나병환자를 근절시킬 수 있게 된다. 나병환자에게는 미안한 일이나 그들을 일반인에서 격리시키는 외에 나병근절책은 없는 것이다[63].
하지만 과연 그가 한센병에 무지하여 유전병이라고 단언했을까? 설령 그가 잘못 알고 있었더라도 오랜 기간 동안 그의 주변 사람들이 이를 지적할 기회는 많이 있었을 것이다. 더욱이 나병 정책은 당시 중요한 사회적 사안이었다.
다른 가능성은 그가 한센병이 유전병이 아닌 것을 알았지만, 한센병 환자의 출산 시 자녀가 감염되거나 출생 후 같이 생활하면 감염될 확률이 있기 때문에 이를 주장했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설령 한센병이 유전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환자의 자녀들이 빈곤하게 살아갈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을지도 모른다. 단종이나 ‘미감아’[64] 격리 등 강력한 한센병 대책의 시행을 위해서 “한센병이 유전병이다”는 강력한 주장이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마지막으로, 이갑수의 한센병 환자에 대한 우생학적 대응은 일본의 영향이 컸을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일본 후생성이 1937년 작성한 ‘민족우생제도안’에서는, 출산 시 한센병에 감염될 가능성을 들어 “우수한 민족의 영광을 기대하는 이 법률의 영원한 목적을 위해” 나병환자의 단종을 “허용”하자고 주장하였으나 나병환자의 단종은 ‘나병예방법’의 개정을 통해 대처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하지만 1948년 제정된 「우생보호법」에서는 결국 “본인 또는 배우자가 나(癩)에 걸렸거나, 또한 후손들에게 이를 전염시킬 우려가 있는” 경우 단종을 허용하는 안이 제정되었다.
하지만 이유가 어떻든지 “나병은 환자와의 접촉 전염인 동시에 유전병이다”는 그의 발언은 당시의 지식수준을 기준으로 삼아도 잘못된 것이었다. 일본이 당시 한센병 환자에 대한 단종을 시행한 것은 그것이 유전병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출생 시 감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었다(横山尊, 2015). 또한 시대적 상황을 고려하더라도 그의 생각과 결정으로 한센병 환자와 그 자녀들에게 가했던 고통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65]. 더욱이 그가 당시 최고의 전문가이자 최초의 보건부 차관으로 보건의료분야에 만든 이러한 정책기조는 그의 임기 중에만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니라 이후 보건부 정책 전반에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 그의 사상과 행동은 단순한 개인의 범주를 넘어선다. 실제로 이갑수의 후임인 정준모 보건부차관(재직기간; 1952. 2. 7-1954. 3. 14)은 1954년 국회에서 다음과 같이 답변하였다.
따라서 잘 아시다시피 이 나병 환자를 근절하고 또 새로운 환자가 발생되지 않도록 하는데 있어서는 제일 좋은 방법은 환자를 모두 일정한 장소에 격리 수용해 가지고 여기에 대한 철저한 치료를 가할 것이며, 다음에 예방책으로서 나환자의 가족에서 나오는 어린애들은 그 부모로부터 떼 가지고 따로 보육소를 만들고 환자인 부모와 접촉을 피하게 하는 그런 방법, 또는 한편으로 나환자는 될 수 있으면 결혼을 하지 않고 생산을 하지 않도록 조치하는 방법 이러한 것이 나환자를 근멸시키는 방법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정준모 보건부차관, 1953년 1월 8일자 국회발언)[66].
이를 요약하면 한센병 환자에 대한 ‘가장 좋은 방법’이 (1) 격리수용 후 치료, (2) 환자 자녀를 부모로부터 격리, (3) 환자에 대한 결혼 금지 및 단종이라고 밝히고 있는데, 이는 유전병 언급을 제외하고 과거 이갑수가 차관시절 견지했던 입장과 전적으로 동일한 것이다.
이갑수의 ‘확장된 우생관’은 화류병이나 한센병 등 전염성 질환에 대한 적용을 넘어 건강한 몸, 체질, 체위 더 나아가 ‘정신’까지 포함한 ‘민족의 질’을 ‘향상’시키는 것을 ‘우생’의 이름으로 주장하는 데에 이른다. 다시 말해 질병을 없애 민족의 피를 깨끗하게 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민족과 국가의 발전에 필요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현하 국내 정세로나 민족적 위기에 처하며 국민의 양적 또는 질적 자원이 부족한 우리 대한민국이야말로 강건한 국민이 요청”되며, 우생학 내용을 포함하고 있는 하두철의 책 『국민의학』[69,]이 “우리 대한민족(大韓民族)의 보건 및 우생 상 일대 귀감이 될 것”이라고 평하면서 통상적인 표현과 다른 ‘대한민족(大韓民族)’이란 단어를 사용하였다(河斗澈, 1953). 그러나 일제 식민지기 이갑수가 ‘민족우생과 체질향상’을 강조했던 여러 기고문의 ‘민족’과 ‘국민’이 조선을 의미하는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실제로 그는 식민지기 경성 여자의학전문학교 보직자로 있으면서 총독부가 요구하는 국민총력조선연맹활동에도 참여하기도 했다[70].
동양인 피식민자로서 이갑수의 우생론은 일종의 자가당착에 빠져 있었다. 그는 독일 유학시절 인종차별을 당했고[71], 일본인에게도 민족적 차별을 당했을 뿐만 아니라 가정사에서도 적자(嫡子)에서 밀려나 재입양을 당하는 일을 경험하기도 했다. 서양인을 더욱 강하고 바람직한 신체로 여기던 오리엔탈리즘적 인종주의가 자동적으로 일본인의 열등함을 인정하게 되는 까닭에, 일본에서 인종주의적 체질인류학은 별다른 환영을 받지 못했다. 그 대신 체력 강화를 통해 강인한 노동자와 군인을 양성하는 방향으로 전환했는데, 이갑수의 우생론도 이런 일본 우생론의 경로를 따라갔다고 볼 수 있다.
우생운동에서 이갑수가 가지는 높은 위상은 그의 개인적 배경, 해외유학, 보건부 차관이라는 직책 등에 연유한 바 크지만, 무엇보다 그의 실천적 활동과 관련이 있다. 당시 우생학에 관심을 가진 이들은 많았으나 이갑수만큼 적극적인 실천을 보여준 사람은 드물다. 그는 1934년 우생협회 창설과 해방 직후 재창설을 실질적으로 주도했으며, 우생 관련 활발한 강연과 기고 활동을 전개했다. 또한 결혼상의소를 열어 우생학에 근거한 상담을 실행에 옮겼다. 그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안호상, 이범석 등이 주도한 조선민족청년단(족청)[72,] 활동에도 협조하였다. 족청은 초기 이승만, 이범석, 안호상 등의 정치조직으로서의 성격을 가졌다[73,]. 이갑수는 1946년 한민당의 관선의원, 중앙집위원으로 활동하였고[74], 이러한 정치활동은 그가 초대 보건부 차관에 임명되어 우생학적 정책을 추진할 수 있는 바탕이 되었다. 족청의 이념은 우생학과 친화성을 가지는데, 족청의 강령인 ‘단지삼칙(團旨三則)’을 살펴보면 “우리는 민족정신을 환기하여 민족지상·국가지상의 이념 하에 청년의 사명을 다할 것을 기한다”고 밝히고 있다.
이갑수의 우생사상의 또 다른 특징은 해방 전 후 일관성을 보인다는 것이다. 이는 해방 전후 글의 내용과 논조에서 확인되는데, 1932년 『중앙』에 게재한 “우생운동이란 무엇인가”라는 글과 1946년 8월 『현대과학』에 게재한 “조국 재건과 민족우생운동”이란 글의 내용이 대부분 같은 것은 많은 예 중 하나이다.
아울러, 1946년 재발족된 ‘한국민족우생협회’는 이름을 ‘조선우생협회’에서 ‘한국민족우생협회’로 ‘개칭’하기로 결정하였다고 밝히면서 스스로 ‘재건(再建)’이라 표현하고 있다. 이 모임에 참여한 핵심인물인 이갑수, 유억겸, 구자옥, 김성수 모두 일제 식민지기 우생협회의 발기인이었으며, 협회의 활동 목표도 대동소이하고 결혼상의소 개설 운영 역시 별차이가 없었다. 이갑수는 퇴임 후에도 여전히 자신의 임기 중에 ‘국민우생법’을 관철시키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했고 여생을 우생학에 대한 계몽을 하며 살겠다며 우생에 대한 신념을 일관되게 유지하였다[75].
물론 해방 직후에도 우생론을 펼친 이는 이갑수만이 아니었다. 1945년 12월 학무국에서 신교육제도의 기본이념을 확립하고자 만든 신교육방침안에도 “(5) 우생과 체육에 관한 지식과 이상을 학득(學得)케 하기 위하여 국민체육 본위의 향상을 도(圖)하며 견인불발(堅忍不拔)의 기백을 함양함”이라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76,]. 또한 해방 후 우생 관련 책자들도 소개되었는데, 1956년 김남호는 일본 우생학의 아버지 나가이 히소무와 이갑수가 롤 모델로 삼았던 폴 포페노이(Paul Popenoe)와 로스웰 힐 존슨(Roswell Hill Johnson)의 『응용 우생학(applied eugenics)』를 번역해 출간하였다(로스웰 힐 존슨, 1956). 1959년 김사달[77,]도 위정자 및 입법자들과 “우리 국민일반의 후진성” 때문에 「우생보건법」의 제정이 안 되고 있다고 하면서, “우수한 천품을 유감없이 발휘할 수 있도록” 산아제한을 하는 「우생보건법」의 제정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아울러 그는 “가족계획의 원칙이 부유층보다는 빈곤층에서 실시되어야 할 것이다”고 주장하고 결론적으로 「우생보건법」 제정을 통해 “민족의 실(實)을 기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고 주장하였다[78,]. 1964년에도 「우생법」 제정의 움직임이 있었다[79]. 그밖에 비록 ‘우생’이란 단어는 사용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결국 내용면에서 기존 우생운동의 주장과 다를 바 없는 여러 주장들은 ‘위생’, ‘보건’, ‘유전학’, ‘의학’의 영역 속에서 명맥을 유지했다. 이 영역들은 이갑수 같은 우생론자들에게 우생사상을 설파할 수 있는 최적의 공간이었다. 이렇게 여러 영역에서 다양한 이들이 우생론을 주장했으나, 이갑수가 일제 식민지기와 해방 후 우생론적 주장과 활동을 일관되게 수행한 대표적 인물이자 이후 우생담론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친 인물임은 분명하다.
4. 맺음말
해방 전후 이갑수는 대표적인 우생론자의 삶을 살았다. 이런 그의 생애와 우생사상이 한국 보건의료사에서 가지는 함의는 무엇일까? 일제 식민지기 이갑수를 중심으로 한 우생운동의 전개는 비록 조선이 일제의 식민지였지만 전세계적인 우생 열풍과 무관한 예외 지역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우생론은 제국의 침략을 정당화하는 역할을 했는데, 그럼에도 우생학은 조선에서도 사회지도층들에 의해 환영 받았으며 더욱이 해방직후에도 그 흐름은 계속되었다. 일제 식민지기 우생협회의 창설 때에는 당시 사회 지도층 다수가 참여했고, 『우생』지에는 내로라하는 석학들이 글을 실었다. 해방직후 협회의 재발족 행사에는 이승만과 이범석과 같은 당시 거물급 정치 인사도 참석하였다.
이갑수가 해방 이전과 이후에도 여전히 우생운동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는 것은 몇 가지 역사적 시사점을 제공한다. 첫째, 이갑수가 해방 후에도 우생협회를 재건하고 또한 우생학의 발전을 도모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해방 후에도 그의 사회적 지위와 역할에 거의 변화가 없었기 때문이다. 식민지기 총력연맹 활동에도 참여했던 그가 해방 후 초대 보건부 차관이라는 국가 고위직까지 오를 수 있었다는 것은, 해방 후에도 한국 사회의 역사가 그 이전 시기와 단절 없이 여전히 연속된 지점이 있음을 보여준다.
그에 못지 않게 일본 군국주의와 이갑수가 주장했던 ‘체력은 국력’, ‘국가를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는 건강하고 튼튼한 국민’이라는 우생론적 지향에 대한 지배집단의 요구가 해방 후에도 변하지 않았던 것도 눈 여겨 봐야할 부분이다. 식민시대를 청산해야 할 당면의 과제가 있었음에도, 곧이어 닥친 냉전의 분위기 속에서 군국주의 시대의 산물을 일종의 유산으로 이어받은 부분이 있다는 것을 해방 전후 우생론을 통해 재차 확인할 수 있다. 이런 것들이 가능했던 배경에는 과학으로 무장한 우생론의 비윤리적 요소들을 비판하기에 식민지기나 해방 후 한국 시민사회의 역량이 턱없이 부족했던 것도 그 이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도 우생론의 더 큰 기반이었던 것은, 개인을 국가의 수단과 부품 정도로 바라보는 국가주의와 엘리트주의, 그리고 ‘과학’과 ‘발전’ 앞에서는 다른 이견을 낼 수 없었던 사회 전체에 팽배한 진보 지상주의였다. 이갑수는 이러한 시대적 배경의 산물이기도 하고, 우생론의 주장과 관련활동에서 다른 이들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독보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외에도 다른 이들의 우생론과 우생활동도 존재했다. 이들의 우생론과 이갑수의 우생론과의 차이와 함의를 보다 분명히 하기 위해서는 해방 전후 한반도의 우생론에 대한 전반적인 걸친 추가 연구가 필요하다.
전술한 바와 같이 일제 식민지기와 해방직후 ‘우생’이란 이름 하에 이루어졌던 주장은 당시 전 세계적으로 첨단 과학이자 학문이었고 나름 긍정적으로 볼 수 있는 계몽적 성격도 띠고 있었다. 19세기말부터 해방 이후까지도 지속적으로 한국 사회를 지배하고 있던 사상 중 하나는 이른바 ‘실력양성론’이었다. 이는 1880년대 사회진화론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망국적 상황 하에서 몸과 마음을 튼튼히 하고 실력을 기르자는 공감대 속에서 나타났다. 더욱이 1910년 국권 상실을 전후하여 민족주의, 대동사상, 사회개조, 아나키즘 등 반제국주의 사상이 대두되었고, 반제국주의 운동가들 역시 초기에는 사회진화론을 일정 부분 수용하는 양상을 보였다. 사회주의에 영향을 받은 이들 역시 “최후의 승리를 손꼽는 현명한 장령은 평일에 있어서 병마를 살찌워 둠을 양책으로 한다”고 주장했고[80,], 사회주의적 입장에 섰던 오평숙조차 ‘우수한 용사’를 기르기 위해 우생학적 산아제한론이 필요하다고 ‘무산자식 산아제한법’을 주장하였다(오평숙, 1933: 51-57).
이러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이갑수의 우생사상도 실력양성론의 연장선상에 있었을 것이다. 『우생』에서 이갑수는 “우생(優生)한 분자(分子)로 하여금… 아모쪼록 생식을 증진케 하자”고 주장하였는데[81,], 이 주장은 1922년 이광수가 『민족개조론』에서 ‘조선 민족 성격의 결함에 대한 개선책’으로 제시한 ‘우수한 선인 사이의 결혼’[82,]과 그들에 의한 중추(지도) 계급 형성, 그 지도 계급에 의한 각종 계몽의 대중화 등[83,]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다(신영전, 2006). 실제로 해방 후 이갑수의 집에 가정교사로 있던 정재룡이 그에게 “우생운동은 왜 하냐”고 질문했더니,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고 한다.
독립운동도 몸과 정신이 건강해야 잘 할 수 있고 더 나아가 독립 후에도 몸과 정신이 건강해야 나라를 이끌 수 있어서 관심을 둔다[84].
그러나 식민지기 실력양성론자는 일본의 도움을 받아서라도 실력을 양성하여 근대화를 이룩하자는 이들과 자력에 의한 실력양성을 주장하는 사람들로 나뉘었는데, 이갑수의 독일, 일본 유학과 인적교류, 일제 하 총력연맹 사업 참여 등을 살펴보면 그가 전자의 입장에 더 가까웠다는 주장에 힘을 실어준다[85,]. 이갑수가 조혼을 반대하고 ‘바람직한 결혼연령’을 강조한 이유는 (1) “一夫一婦인 자연적 법칙인 부부생활을 원만히 실현”할 수 있으며, (2) 임신률이 높고, (3) 어린 초산부나 나이 많은 초산부에게 발생하는 문제를 줄일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조혼을 하면 “그 후계자인 자손이 강건치 못하며 체질이 연약하야 제반 악병이 다수히 발생하는 것이니 이는 인류우생(優生)에 대한 적이 될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86].
이처럼 우생론이 가지는 일부 계몽적 성격에도 불구하고 우생사상은 당시나 지금이나 기본적으로 인종주의, 약자에 대한 배제와 차별을 그 핵심으로 하는 사상이다. 무엇보다 이러한 사상은 대규모 학살, 인체실험 등 비롯한 수많은 윤리적 문제들을 야기해왔다. 이갑수가 차관 당시 심혈을 기울였던 한센인에 대한 인권차별은 집단학살, 강제노역, 강제격리와 강제송환, 단종 및 낙태수술 및 양육권 문제, 교육권, 한센 시설에서의 폭력 문제, 언론에 의한 인권침해 등 거의 모든 영역에서 자행되었다(국가인권위원회, 2005: 29-158). 2011년 10월 17일, 한센인 539명이 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고, 2017년 2월 15일 법원은 국가 책임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87,]. 이는 한센인에 대한 단종·낙태 수술은 법적 근거가 없이 이루어졌으며, 동의에 의해서 이루어졌다고 하더라도 한센인을 둘러싼 적대적인 사회라는 상황 속에서 그 동의는 “자발적”인 것이 아니라 “강제적”인 것이라고 본 것이다. 또 당시 국가와 사회의 잘못된 인식으로 한센인들이 피해를 받았으며, 그 책임은 한센병 관리 정책의 주체였던 국가에게 있음을 인정한 것이다(김재형·오하나, 2016). 일본에서도 나병예방법이 위헌 국가배상소송을 통해 2001년 위헌 판결을 받았고, 고이즈미 내각은 항소를 포기했다(横山尊, 2015).
우생론은 인종주의, 식민주의, 제국주의의 이데올로기로 약소국에 대한 침략과 특정 인종에 대한 ‘인종청소’를 정당화했다. 김예림(2005)은 당시 우생학이 가졌던 역사적 의미를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우생학은 역사적으로 제국주의 혹은 국가주의 이데올로기와 아주 깊숙하게 내통하면서 그것의 현실화에 필수불가결한 지식 기반과 이를 바탕으로 한 실질적 제도화의 길을 공급해왔다. 우생학은 제국, 식민지, 인종, 민족, 국가라는 집단적 정체성을 상상하는 하나의 중요한 통로로서, 신체라는 물리적이고 유기적인 장소를 관통하면서 운행되는 ‘과학적’ 노선을 제공해 온 것이다(김예림, 2005).
식민지 지식인으로서 이갑수의 우생론 역시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당시 이러한 일본의 식민·제국주의를 정당화했다. 해방 후 보건부 차관으로서 가지고 있었던 우생사상에 대한 확신은 개인적인 견해를 넘어 한센병 환자들이 수많은 고통을 받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리고 ‘미감아’는 부모로부터 강제 격리를 당하고 사회로부터 심한 차별 속에서 살아야 했으며, 이들 중 상당수는 외국으로 강제 입양을 가야했다[88].
그러나 이갑수의 우생사상과 활동이 가지는 더욱 중요한 역사적 함의는, 그것이 아직 끝나지 않은 역사라는 점이다. 무엇보다 1973년에 제정된 「모자보건법」의 인공임신중절 허용 항목에 포함되었던 ‘우생’이란 단어는 여전히 현행법령으로 존재하고 있다[89]. 또한 장애인, 난민 더 나아가 여성에 대한 혐오는 이제 한국 사회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 문제가 되고 있다. ‘우승열패의 신화’로 요약될 수 있는 한국 사회의 치열한 경쟁주의 문화는 우생론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우생론에 대한 고집은 전문가들도 예외가 아니다. 인구보건학 분야의 권위자로 알려져 있는 한 인사는 자신의 삶을 회고하며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 바 있다.
그뿐 아니라 최근 유전자 검사와 치료 등에 대한 정부의 적극적인 장려정책과 과학계의 경쟁적 연구는 여전히 우생의 시대가 끝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진정한 의미의 우생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물론 과거의 우생학(이하 구우생학)과 현재의 우생학(이하 신우생학[91,])을 구별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는데, 신우생학은 목적, 대상, 수단에 있어 과거의 우생학과 현격한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米本昌平, 2011; 박희주, 2000). 이는 일견 타당하다. 하지만 설령 그러한 구분을 인정한다고 해도 현재 한국 사회를 비롯하여 전 세계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소수자와 약자에 대한 차별과 편견이 신우생학과 무관한 것인지, 또한 대자본의 거대한 자장 속에서 신우생학이 진정 자유로운 개인의 선택이라고 할 수 있는지[92], 신우생학이 구우생학으로 전화(轉化) 또는 발화(發火)할 가능성은 없는지 등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란의 여지가 많다.
이 연구는 해방기 전후를 살았던 한 우생론자의 삶과 활동의 궤적을 추적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이갑수의 생각과 활동이 당시 우생운동을 전적으로 대표한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며, 당시 우생학적 주장과 정책이 만든 폐해를 두고 그에게만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 수많은 이들이 우생론에 적극 동조했고, 그러한 양상은 현재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그러나 이갑수는 해방 전후 가장 적극적이고 일관된 우생학적 관점을 그의 정치, 사회, 학문적 영향력을 통해 한국사회에 확산시킨 대표적인 우생론자였기에 우생론이 가진 논리적 오류와 피해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이다. 이갑수의 생애와 우생 관련 활동 등의 역사는 해방 전후 우생 관련 역사의 중요한 지점들을 보여주고 있으며, 더 나아가 한국사회내 식민 잔재, 경제성장 제일주의, 과학적 발전에 대한 열광, 경쟁적 사회문화 등을 이해하고 설명하는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할 것이다.
Notes
같은 시대를 살았던 생리학 전공 의학자로 이갑수(李甲洙)가 있다. 이 두 사람은 종종 혼돈되곤 하는데, 이는 과거 기사 등 여러 기록에서도 마찬가지이므로 주의가 필요하다.
이갑수, 「斷種法」, 『매일신보』, 1938년 2월 16일.
우생학의 창시자인 골턴은 “우생학이란 육성을 통해서 인류를 개선하는 학문”이라고 정의하였다. 또한, “종족을 더 좋게 개량하는 일은 짝을 잘 짓는 것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더 우수한 혈통의 종자가 그렇지 못한 종자를 순식간에 도태시키게 될 가능성을 높게 해주는 모든 요소들을 깨닫는 일이 더 중요하며 인간의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고 주장하였다(Galton, 1883).
「같은 길을 가는 夫婦」, 『동아일보』, 1957년 4월 8일.
그의 동기로는 이정재, 장희태, 장용대, 박주병, 곽한용 등이 있다(정구충, 1985: 199).
이갑수는 첫 부인과 불화로 정식으로 이혼한 뒤, 김흥(홍)순과 재혼하여 병숙(여, 1937), 병애(여, 1939), 병연(여, 1942), 병석(남, 1944), 병남(여, 1947) 5남매를 두었다. 김씨와는 사별하고(1951년 피난 중 부산에서 폐렴으로 사망), 유성순(1919년생)과 재혼하여 병호(남, 1957), 병인(여, 1958) 남매를 두었다. 박정희 집권 이후 둘째, 셋째 부인 사이에 태어난 7명의 자녀를 모두 미국으로 입양 보냈다(이병호 면담 녹취록, 한양대학교 건강과 사회연구소 소장).
박주병(朴柱秉, 1902-1985)은 경성의전을 졸업하고 베를린대학에서 병리학을, 프라이브르그 대학에서 약리학을 전공했다. 미군정에서 보건후생부 보건국장을 역임하고, 1947년 조선약리학회를 조직, 초대회장이 되었다. 전쟁 중에는 해군의무감으로 활동했고, 그후 국립의료원장, 보사부장관, 의협회장, 결핵협회장 등을 역임했다(정구충, 1987; 336-342).
최두선(崔斗善, 1894-1974)은 휘문의숙과 와세다 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중앙학교 학교장직을 맡아보다 독일 마부르크대학교, 예나대학교, 베를린대학교 등에서 수학했다. 해방 후 동아일보 사장(1947), 5.10총선거 중앙선거위원회 위원, 제8대 국무총리, 대한적십자사 총재 등을 역임했다. 최남선의 동생이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 참조).
이갑수, 「獨逸 가는 길」, 『매일신보』, 1921년 6월 11일; 「歐洲行(1)」, 『매일신보』, 1922년 7월 25일; 「歐洲行(2)」, 『매일신보』, 1922년 7월 26일; 「歐洲行(3)」, 『매일신보』, 1922년 7월 27일; 「歐洲行(4)」, 『매일신보』, 1922년 7월 28일; 「歐洲行(5)」, 『매일신보』, 1922년 7월 30일.
그가 베를린대학에서 받은 것은 ‘doctor of physician’인데 일종의 의학사(medical doctor)에 해당한다. ‘Medical Doctor(MD)’라는 표현이 ‘의학박사’로 오역됨으로써 이후 많은 자료에서 그를 독일의학박사로 소개하고 있다. 그의 졸업논문 독일어 초록 번역은 서강대 정희윤 선생님의 도움을 받았다.
정구충에 따르면 이 곳에서 유일준(미생물학), 이석신(생화학), 이성용, 정석태, 박주병, 박장용(이상 의학), 최두선, 김준연, 박승철, 이운용, 황유일 등이 공부했다고 한다(정구충, 1985: 200).
이정선은 이갑수가 “신경병과를 진료과목으로 기재하는 등 단종 수술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정신질환자의 치료에도 관여했다”고 그의 진료과에 대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이정선: 2016: 327-328).
당시 교수가 되기 위해서는 박사학위가 필요했는데, 이갑수가 독일 유학을 통해 받은 것은 박사가 아니었기 때문에 박사학위가 필요했다.
당시 결핵치료제 등으로 사용하였다.
당시 일본 대학교 의학부로 유학했던 조선 의대생의 학위과정이 충실하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해방 직후 북한의 의과대학 교원을 분석한 김근배의 연구에 따르면, 박사학위 취득 소요기간은 6.5년 정도, 평균 나이는 35.5세 정도였다. 특히 일본에서 학위를 받은 12명 중 11명이 전문학교 출신이었다. 일본에서 대학을 마치고 모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경우는 단 1명이었다. 소요기간이 3년 밖에 걸리지 않은 사례도 있으나 그것은 일제 패전 직전에 필요한 최소 연구기간을 채운 경우이며, 대부분 취업이나 개업 중 연구에 참여하거나 도중에 쉬는 경우도 많았다(김근배, 2014: 455-456). 심호섭, 백인제, 최일문 등 일본 유학파 박사들 또한 박사 학위를 받을 때 당시 신문 기사들을 살펴보면, 총독부의원, 도립병원에서 근무 중이거나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1934년 ‘조선우생협회’의 창립과 활동에서 대해서는 신영전의 연구(신영전, 2006: 133-155)를 참고할 것.
정구충은 이갑수가 일제 말에 『우생학』이 아니라 『위생학』이란 책을 발간하였다고 서술했다(정구충, 1985: 205). 그러나 1962년 발간된 『한국박사록』에는 이갑수의 저서명으로 『우생학』, 『연애와 결혼』(1956)을 언급했으며, 『연애와 결혼』 등의 저자 소개란에는 『민족우생학』을 저서로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그 원본은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다.
「韓國優生協會」, 『대동신문』, 1946년 10월 20일.
「韓國優生協會發足」, 『한성일보』, 1946년 10월 20일.
「民族優生協會誕生 結婚相談所도 設置」, 『민중일보』, 1947년 10월 20일.
앞서 언급한 1946년 10월 20일자 『한성일보』 기사는 “조선우생협회가 1933년에 창립되었다가 외적의 탄압으로 등 1937년 여름부터 부득이 휴회상태를 계속하고 있는 바”라고 적고 있는데, 이는 조선우생협회가 적어도 1937년 여름까지 활동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인 셈이다.
「國民會議 新加入團體」, 『현대일보』, 1947년 3월 25일.
『부인신보』에 실린 글은 저자가 누구인지 명시되지 않았으나, 당시 발행인 박순천과 이갑수의 관계, 그리고 글의 내용 상 이갑수의 글일 가능성이 크다.
1920년 치바의대(千葉)졸업, 1929년 한성의사회 부회장, 조선생명보험㈜ 의무과장(1937, 1939) 등을 역임했다(중앙교우회, 2009).
세브란스 의전 출신, 1954년 관비 유학(미국) 결핵전문가 연세의대 내과 교수로 정년 퇴임하였다(1986). 대한체육회 체력관리위원, 강화위원, 1980년 대한체육회 스포츠과학위원회 위원을 역임했다.
「民族優生結婚相議所 發足」, 『한성일보』, 1947년 6월 5일.
「우생(優生) 결혼」, 『부인신보』, 1947년 6월 11일.
서울여자의과대학은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가 1948년 5월 22일 승격 인가를 받은 것이다.
조선총독부는 1916년 소록도에 자혜의원을 설립, 한센병환자를 강제수용했으며, 1932년에는 조선나예방협회가 설립되었다(전종숙, 2018). 이는 당시 일본에서도 시행되던 정책들이었다(藤野豊, 2001: 115). 식민지기 일본 본토는 물론이고 식민지 조선에서도 한센병 환자의 이미지는 열등한 존재이자 격리해야 할 존재로 자리를 잡아갔다. 그들을 수용한 ‘갱생원’은 식민지의료의 전시장이 되었고, 그 이면에서는 “배고픔, 혹독한 처벌, 강제노역, 단종, 생체실험 도구 등 극단적 차별이 자행되고 있었다.”(서기재, 2017: 445-446) 해방 이후 한센병에 각별한 관심을 보였던 이갑수의 태도도 이런 사회 분위기의 영향 속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한센병 환자’라고 칭하는 것이 맞지만, 과거 기록을 원용하기 위해 한센병, 나병 등의 표현을 혼용하였다.
「癩患者 分布 等 實態照査키로」, 『영남일보』, 1948년 8월 13일; 「救癩事業 積極性을 喪失」, 『영남일보』, 1949년 8월 26일; 「癩患者 隔離對策」, 『충청매일』, 1949년 8월 27일.
해방 후 1948년 9월 3일 대한나예방협회가 창립되었다.
1949년 한센병환자들의 수용을 위한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발행한 것으로 ‘구나사업회원권’이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같은 길을 가는 夫婦」, 『동아일보』, 1957년 4월 8일. 이갑수는 차관을 그만둔 후에 부산 피난 중에 제약회사를 경영하기도 했으나, 서울여자의과대학의 재건 위촉을 받아 다시 학장으로 돌아갔다. 이후 개칭된 수도의과대학에서도 학장으로 취임하여 1961년 9월까지 약 10년간 재직하고 정년퇴임을 하였다(정구충 1985: 206). 이후 1970년까지 수도의과대학의 후신인 우석대학 학교법인이사를 역임하였고 대한적십자사 조직위원(1947. 3-1959. 10), 대한여자기독교 청년회 후원이사(1949. 7-1963. 2) 등으로 활동했다. 또한 이갑수는 “청년들의 신체건강 증진을 위하여” 연식야구협회 회장과 고문을 지냈고(1954-1960 회장, 1965년 이후 고문), 국무원 사무국 고등전형위원(1955), 서울 컨츄리클럽 회원, 로타리클럽 회원, 한독협회 이사, 한미협회회원, 대한유년단본부 고문을 역임했다. 1958년 4월7일 세계보건의 날에는 그간 보건분야 공로를 인정받아 표창장을 받기도 하였다. 그는 1973년 12월 5일 하오(74세) 숙환으로 서울 종로구 누상동 20 자택에서 별세하여, 경기도 파주군 탄현면 기독교 상조회 묘지에 아내 유성순과 함께 묻혔다가 2016년 5월 10일 그의 아들 이병호의 주도로 화장하여 정동교회 수양관(천마산) 추모공원에 봉안되었다. 이 과정에서 묘지에 있던 묘비도 함께 없어졌는데, 묘비에는 십자가 표시와 함께 “의학박사 전주 이갑수, 권사 기계 유성순의 묘”, “명성 높은 명의보다 양심적인 양의 되라”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이병호씨는 분쇄 전 묘비 사진을 한양대 건강과사회연구소에 제공하였다(사진 및 녹취록 소재, 한양대학교 건강과사회연구소).
영국의 우생학운동은 염운옥의 논문(염운옥, 2004)을, 일본의 우생학에 대해서는 강태웅의 논문(강태웅, 2013)을 참고할 것.
이갑수, 「하계 유행 전염병을 주의하라」, 『매일신보』, 1921년 8월 3-5일; 「吾人의 衛生과 斷烟問題(1)-(4)」, 『매일신보』, 1921년 12월 1-4일; 「流生性感冒와 冬季衛生」, 『매일신보』, 1921년 12월 15일; 「狂犬咬傷 治療法(上), 광견에 물리면 속히 주사」, 『매일신보』, 1922년 3월 3일.
이갑수, 「여자와 체육」, 『중명』 3 (1922), 150-151쪽.
이갑수, 「歐洲行(1) 후시미마루(伏見丸)에서」, 『매일신보』, 1922년 7월 25일.
“고등 인종과 하등인종이 서로 섞이는 것은 자연의 섭리에 명백히 반한다. 이 경우 고등 인종인 아리안족의 소멸을 초래한다. 아리안 족이 다른 하등 인종의 피와 섞이게 되면 문화를 계승할 후손이 단절되는 결과를 초래한다.”(아돌프 히틀러, 2014: 417).
이갑수 외, 「世界各國의 學窓」, 『동아일보』, 1931년 1월 1일.
이갑수, 「男女結婚年齡, 男女 몃살때의 結婚이 適合한가」, 『별건곤』 19 (1929), 61-62쪽; 「세계적 우생운동」, 『우생』 1 (1934); 아시아권에서 일본뿐만 아니라 중국에서도 청나라 말기부터 우생사상이 수용되었고, 1931년에는 판광단(潘光旦)이 『우생월간』을 간행하였으며 1936년 홍콩우생학회가 설립되는 등의 움직임이 있었으나(유연실, 2018) 상대적으로 이갑수는 중국 우생운동에 대해 비중 있게 소개하지는 않았다.
이갑수, 「우생결혼상담소」, 『우생』 1 (1934), 30쪽; 「나가이(永井교수)의 단종에 대한 강연」, 『우생』 2 (1935), 35쪽; 「생학적 견지에 잇어서 유리한 법률」, 『우생』 3 (1936), 20쪽.
양녕대군 16대손 이승경(李承慶)을 말한다.
대통령 집무실로 보이는 곳에서 이승만과 이갑수, 다른 가족 등과 함께 사진을 찍은 사진이 여러 장 남아있다.
「獨逸 遊學간 李甲秀 君을 생각하고」, 『매일신보』, 1921년 7월 2일.
2017년 필자와 인터뷰 내용 중.
「같은 길을 가는 夫婦」, 『동아일보』, 1957년 4월 8일.
그러나 이런 주장을 하기 위해서는 근거가 되는 별도의 연구가 필요하다.
이갑수, 「醫學上 結婚觀」, 『조선일보』 1930년 11월 26일.
이갑수, 「男女結婚年齡, 男女 몃살때의 結婚이 適合한가」, 『별건곤』 19 (1929); 「세계적 우생운동」, 『우생』 1 (1934).
이갑수가 창간과 운영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우생』지에서 우생학의 과학적 근거로 활용한 연구결과들을 보려면, 신영전(2006: 144)을 참고할 것.
이 외에 당시 소개된 우생운동의 방법론으로는 환경을 통제하여 인종을 개량하는 ‘우경학(優景學; euthenics)’이 있었다(최윤호, 「인종개량론」, 『신동아』 5월호 (1935), 94-95쪽).
이명혁, 「생물학상으로 본 우생학」, 『우생』 1 (1934), 4쪽.
이갑수, 「세계적 우생운동」, 『우생』 1 (1934), 8쪽.
이갑수, 「세계적 우생운동」, 『우생』 1 (1934), 7쪽.
「배우자선택에 대하야 제1회 우생좌담회」, 『우생』 1 (1934), 20-26쪽.
이갑수, 「斷種法」, 『매일신보』, 1938년 2월 26일.
기독교 사회였던 20세기 초중반의 미국에서도 경성우생론이 모순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오히려 “가정 내에서의 가족 건강과 도덕성 함양 그리고 행복한 삶은 국가효율이나 사회진보와 동일한 맥락에서 접근해야만 할 사항”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가졌다. 미국에서 첫 번째 합법적인 단종법은 1907년 인디애나에서 제정된 바 있다(김호연, 2018: 138-144). 그만큼이나 “우생학은 개념적으로나 실천적으로 매우 중층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고, 극단적 보수주의자로부터 사회주의자에 이르기까지 매우 넓은 이념적 스펙트럼과 연관을 맺고 있었다.”(김호연, 2014: 657) 미국에서 1937년 설립 이후 우생학자와 이민 제한 정책을 지원했던 민간단체 ‘파이오니어 재단(Pioneer Fund, NPO)의 창립자 중 하나인 드레이퍼(Wicliffe Draper) 또한 기독교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공동체 속에서 성장한 인물이다(김호연, 2016: 208).
이갑수, 「조선여성의 성교육에 대하야」, 『별건곤』 36 (1931), 51-52쪽.
정구충, 「우생학상으로 본 화류병」, 『우생』 3 (1935), 12쪽.
「같은 길을 가는 夫婦」, 『동아일보』, 1957년 4월 8일.
1954년1월8일 국회정기회의속기록, 국회사무처.
이갑수, 「국민보건을 위한 제정책」, 『새한민보』, 1949년 8월 1일.
인권활동가들은 ‘미감아(未感兒)’라는 단어 자체가 차별을 야기하는 부적절한 단어라고 주장한다. 저자도 여기에 동의하지만 당시 역사적 기술의 인용을 위해 제한적으로 사용했다.
이 논문의 목적은 그의 행위의 윤리적 문제를 판단하는 것이 주가 아니므로 추가적 논의는 최소화한다.
1954년 1월 8일 국회정기회의속기록, 국회사무처. 그는 보건부 예산의 40%를 이미 나병에 사용하고 있으며, 한센병환자가 이동할 때에는 정부의 허가를 받아야하는 조항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갑수, 「斷種法」, 『매일신보』, 1938년 2월 16일.
이갑수, 「조국재건과 민족우생운동」, 『현대과학』 8월호, (1946).
『국민의학』이라는 하두철의 책 이름에서도 이 책의 성격이 잘 드러난다.
그의 일제 말 활동에 대해서 정구충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대동아전쟁을 위하여 총력연맹이라는 총독부의 방계관제단체를 만들어 관에서 힘이 미치지 못하는 사업을 대행하였다. 그래서 지방무의촌에 순회진료를 하게 되었는데, 경성제대의과대학, 욱(旭)의전, 경의전, 여의전을 각각 2개반으로 편성하여 제1차로 가을에 여의전은 경기도와 충청북도를 책임지게 되었으므로 미수는 경기반을 필자(정구충)은 충북반을 맡게 되어 귀환보고 때 매일신보에 보도하여 농촌 위생 개선을 부르짖었다”(정구충, 1985:201). 이와 관련한 활동내용은 그의 관련 활동은 1944년 10월 31일자 『매일신보』에도 실려있다.
이갑수의 독일 유학기에는 그가 동양인이라는 이유로 하숙을 거절당한 이야기가 나온다(「그리운 젊은 날의 추억」, 『野談』 4-6 (1938), 150쪽).
조선민족청년단(朝鮮民族靑年團)은 1946년 10월 9일 ‘국가지상, 민족지상’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창설한 반공주의적 우파 단체이다.
이승만은 집권 후 1953년 9월 소위 ‘족청파’의 청산을 발표하지만, 1946년 ‘족청’ 설립 초기에는 이승만의 핵심 정치 조직 중 하나였다.
「韓民黨의 機構改革」, 『경향신문』, 1946년 10월 15일.
「같은 길을 가는 夫婦」, 『동아일보』, 1957년 4월 8일.
「신교육의 이념」, 『동아일보』, 1945년 12월 15일.
의사, 문필가, 수도의대·고대의대 교수, 서울시 의사회이사, 국민체육심의위원, 국회 문공위 전문위원, 씨름협회회장, 문협 이사, 수필가협회 부회장, 국회의사당미화 자문위원 등을 역임했다.
김사달, 「산아제한에 대한 시비: 「우생보건법」의 실시를 바라며」, 『동아일보』, 1959년 12월 6일.
1964년 당시 진행되려는 「국민우생법안」의 철회를 요구하는 전국 천주교 교구장들의 연명 성명서가 일간지와 잡지에 실리기도 하였다(「「국민우생법안」에 대한 우리의 견해」, 『경향』 6월호(1964).
양봉근의 글로 추정되는 『보건운동』 창간사 (1932).
이갑수, 「세계적 우생운동」, 『우생』 1 (1934), 9쪽.
이광수는 『민족개조론』에서 “근본적(根本的) 성격(性格)이 좋지 못한 민족이라고 그 민족의 각 개인이 다 좋지 못한 사람일 리(理)는 만무(萬無)하니, 그 중에도 소수나마 몇 개의 선인(善人)이 있을 것입니다. 마치 부패(腐敗)한 유태인(猶太人) 중에서 예수 같으신 이가 나시고 그의 사도(使徒)들 같은 이들이 난 모양으로. 이 소수의 선인(善人)이야말로 그 민족부활의 맹아(萌芽)”라고 하면서, 우수한 소년 남녀를 뽑아 동맹(同盟)에 가입케 하여 그 수를 증가시킬 것을 주장하였다(이광수, 「민족개조론」, 『개벽』 5월호 (1922).
이광수, 위의 글.
2018. 9. 26. 아들 이병호 씨 이메일 중.
일제 말기 그의 ‘총력연맹’ 참여와 활동은 당시 그가 의과대학의 보직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총독부의 지시를 거절하기 힘들었다고도 볼 수 있다. 또한 그는 일하던 총독부의원이 제시한 관비유학을 거절하기도 했다(『매일신보』 1922년 7월 2일). 그와 함께 총력동맹 활동에 참여한 정구충은 자신과 함께 이갑수가 창씨개명 독촉에 강경히 반대하였고 일본어 상용에 대한 요구에도 순응하지 않고 오히려 일본인 (의학부) 학생들에게 한국인 환자를 볼 때는 한국어를 알아야 한다고 강조하였다고 강변했다(정구충, 1985: 207). 그러나 민족문제연구소는 임전보국단 활동과 징병 독려 등을 이유로 『친일인명사전』에 정구충의 이름을 올려놓고 있다. 또한 해방 후 우생협회의 재건에 참여한 핵심인물로 언급되고 있는 구자옥, 유억겸, 김성수 모두가 친일 인사로 분류되어 있다.
이갑수, 「男女結婚年齡, 男女 몃살때의 結婚이 適合한가」, 『별건곤』 19 (1929). 그는 이 글에서 직접 만든 ‘결혼연령배합표’를 제시하기도 했다.
「대법, 한센인 단종, 낙태 위자료 바로잡았다」, 『한겨레』, 2017년 3월 30일.
정부는 ‘미감아’를 고아, 불구아, 허약아, 정신박약아, 불량아 등 17개 분류 중 하나로 공식 설정하고 고아원(아동복리시설)에 수용하였으며, 정부차원에서 해외입양 사업을 관리대책 중 하나로 추진했다(「變則성장에서 合理운영으로 고아원 整備」, 『경향신문』, 1970년 7월 18일). 더욱이 ‘미감아’의 입양이 미국에서 논란이 되자 보사부는 ‘미감아’에 대한 입양을 계속 추진하겠다고 발표했다(「韓國 未感兒 入養 美서 贊反兩論」, 『동아일보』, 1974년 4월 13일).
2019년 1월 15일 일부 개정된 「모자보건법」 제 14조는 “본인이나 배우자가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우생학적(優生學的)(저자강조) 또는 유전학적 정신장애나 신체질환이 있는 경우” 인공임신중절수술을 허용하고 있다.
그는 추가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국수주의가 팽배했던 시대, 부국강병을 국시로 하는 나라에서는 다산장려와 우생정책이 국가의 기본 정책이었다. 지금도 그들에게 이 근본이념에는 변화가 없다. 단지 본래의 의도를 의식적으로 은폐하고 다른 명목 하에서 정책을 펴고 있을 뿐이다. …… 과거의 역사적 경험에서 보면 우수한 문화를 지녔던 민족이 인구감퇴나 퇴화로 민족, 국가의 쇠망을 결과 지은 일이 허다했다. 우리도 깊이 유념해야 할 일이다. …… 퇴임 전 우생학회의 조직을 구상했었다. 주변에 동조해주는 학자들이 없어 결코 실현시키지 못했다. 우생학은 생명과학도뿐만 아니라 사회과학 분야 인사들도 참여하면 보다 알찬 성과를 기대할 수 있다. 멀지 않은 장래에 뜻을 같이 하는 학자가 한국의 보건대학원에서도 나왔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다.”
‘신우생학’이란 산전 진단과 장애를 가진 태아의 인공임신중절, 유전자 진단의 남용, 1990년대 이후의 인간 게놈 프로젝트를 통한 인간의 유전 정보 저장과 관리, 유전자 기술과 생식 기술을 사용한 임신, 인간을 유전자 중심적으로 바라보는 것 등을 가리킨다(横山尊, 2015).
박희주는 “정부의 개입이 사라지고 개인의 자율적 선택이 이를 온전히 대체했다고 믿는 것은 환상이다”고 하면서 “개인의 선택을 규제할 시장의 기능에 주목해야 한다”고 하였다(박희주, 2000: 14-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