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과학화, 식생활의 합리화: 1910-20년대 일본 근대 영양학의 탄생
Scientizing Everyday Life, Rationalizing Eating Habits: The Rise of Nutrition Science in 1910s-1920s Jap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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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Historians of science have noted that modern nation-states and capitalism necessitated the systematic creation and implementation of a wide array of knowledge and technologies to produce a more productive and robust population. Commonly labeled as biopolitical practices in Foucauldian sense, such endeavors have often been discussed in the realms of public hygiene, housing, birth control, and child mortality, among others. This article is an attempt to extend the scope of the discussion by exploring a relatively understudied domain of nutrition science as a critical case of social engineering and intervention, specifically during and after World War I in the case of Japan.
Research and dissemination of knowledge on food and health in Japan, like other industrializing nation-states, centered on new public hygiene initiatives since the late nineteenth-century. However, in the aftermath of WWI, or more precisely, after the Rice Riots of 1918, a new trend began to dominate the discourse of nutrition and health. In the face of wartime inflation and the resultant nation-wide riots, physicians and social scientists alike began to view the food choice and budget issue as a solution to the middle class crisis. This new perception drew on the conceptual framework to understand food, metabolism, and cost in the language of quantifiable nutrition vis-à-vis monetary values. By analyzing how specific nutritional knowledge was translated into the tenets for public campaigns to reform everyday life, this paper ultimately sheds light on the institutionalization of a new area of research, nutrition (eiyō) in Japan.
1. 머리말
과학사가들의 연구에 의하면 근대적 학문분과로서의 영양학의 부흥은 근대 국민국가의 형성 자체와 시기적으로 그 궤를 함께 해왔다고 한다. 19세기 중반 무렵, 독일 등 일부 서유럽 국가의 화학 및 동물생리학 분야에서는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영양학적 이슈라고 할 만한 테마가 중심적인 연구영역을 차지했다(Kamminga and Cunningham, 1995: 1). 1840년대에는 소위 3대 영양소라 일컬어지는 탄수화물, 지방, 단백질 성분이 각각 입증 및 명명되었고, 독일 화학자 유스투스 폰 리비히(Justus von Liebig)의 저서 『동물화학(Animal chemistry; or, Organic Chemistry in It’s Application to Physiology and Pathology)』(1842)은 동물 및 인간의 신진대사에 대한 양적분석의 방법론적 기초를 제공하였다. 생화학 혹은 유기화학의 창시자로도 여겨지는 리비히의 주된 관심은 투입(input)으로서의 음식 섭취와 산출(output)로서의 일 혹은 열의 상관관계를 밝히는 작업에 있었다. 이러한 신체적 효율성에 관한 연구는 19세기 생리화학분야에서 줄곧 중심적인 학문적 위치를 차지해왔으며, 이 현상은 때마침 강력한 군대와 생산적인 노동력 양산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근대 국민국가의 이해를 뒷받침하는 것이기도 했다는 것이다(Kamminga and Cunningham, 1995: 4-5).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인간의 신체적 효율성 및 통제를 극대화하고자 한 공장과 군대가 실험실에서 얻은 영양학 지식이 가장 먼저 활용된 실천의 장이었다는 점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이렇게 특정 인구집단의 일상적 식단에 대한 관리 및 통제가 중요한 학문적, 제도적 의제로 자리잡아간 사실은 푸코(Michel Foucault)가 제기한 근대 생체권력(bio-power)의 메커니즘을 연상시킨다. 주지하다시피 푸코는 유럽에서 17세기 무렵을 기점으로 한 집단의 생물학적 존재가 정치적으로 의미를 갖기 시작했다고 주장한다. 이전 시기에 지배적이었던 부, 상품, 노동력, 그리고 신체를 “취하는” 방식(deduction)에서, 생명을 관리, 최적화, 증식시키는 방식으로 권력의 작동양태가 바뀌었다는 것이다(Foucault, 1990: 136-137)[1,]. 구체적인 실천양상으로서는 좀 더 생산적이고 건실한 집단을 양산해내기 위한 일련의 지식과 테크놀로지가 출현하여 공공보건, 산업보건, 주택개량, 산아제한, 영아사망률 조사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용되기 시작하였다. 한편, 인간의 식생활과 건강의 상관관계에 관한 과학적 연구가 19세기 이후 정치적 중요성을 획득해 나간 점 역시 같은 맥락에서 분석할 필요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식생활 조사나 영양 연구의 역사를 생체권력의 측면에서 논의한 경우는 매우 드물다. 예외적인 사례로는 브라이언 터너(Bryan Turner)가 신체규율의 역사사회학적 맥락에서 17-18세기 유럽에서 유행한 의학적 식사관리법(dietetic management)을 분석한 연구를 들 수 있다(Turner, 1992). 또한 최근의 식문화사 및 건강・신체문화사 분야의 진전과 함께, 독일과 덴마크의 사례를 통해 합리적 영양과 생명(생체)정치적 실천을 접목한 연구성과가 등장하고 있다(Treitel, 2008; Overgaard, 2011). 독일사가인 코리나 트라이텔은 영양학과 관련 정책을 독일 생명정치(biopolitics)의 주요한 장으로서 연구하는 작업은 인종위생(racial hygiene)과 우생학에 초점을 두어 온 기존의 생명정치 연구영역을 확장하는 일이 될 것이라 지적한 바 있다(Treitel, 2008: 2).
영양학의 기초적 연구성과는 19세기 전반에 걸쳐 발표되었지만, 국민국가 단위에서 이러한 연구성과를 본격적으로 활용한 것은 제1차 세계대전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참전국가들은 역사상 최초로 총력전으로 전개된 이 전쟁을 계기로 식량 및 인적자원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긴박하고 현실적인 과제에 직면했다. 또한 총력전의 특성상 국내전선(home front)의 이슈가 곧바로 전선에서의 성과로 이어지는 상황 속에서 부엌의 효율성조차도 전쟁수행에 기여할 것이라 여겨지기도 했다. 가령, 생리학자 막스 루브너(Max Rubner)는 독일의 식량부족 사태를 해결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고, 미국 식품청(Food Administration)은 전시 식량절약 프로그램을 위한 대대적인 영양조사를 실시했다(Weindling, 1989: 288-289; Levenstein, 1988: 137-146).
다른 산업화된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메이지 유신 이후의 일본은 공공위생정책의 관점에서 식품과 영양에 관한 지식을 축적하고 유포하기 시작했다. 개별 식품의 성분분석 및 주요 영양소의 흡수율 조사는 지속적으로 이루어졌고, 각기병 및 군대식 연구는 군의학 분야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했다(山下政三, 2008; Bay 2012).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더 정확하게는 쌀 소동(1918) 이후부터는 식생활, 식품과 건강의 관계에 관한 담론에서 새로운 풍조가 지배적이 되었다. 이 새로운 풍조의 중심에는 일본이 소위 “식량문제(食糧問題)”에 봉착했으며, 이는 전후 중산층이 몰락해가는 징후에 다름아니라는 위기의식이 있었다. 이 위기에 대처하기 위한 논의 중에서, 특히 식생활의 소비 합리화라는 맥락에서 개입하고자 했던 것이 바로 생리의학적 전문지식을 지닌 기초의학 연구자들 및 임상의들었다. 이들은 일반인들의 일상적인 식습관을 “합리화”시키기 위한 특정한 영양지식을 제도화하고 전파하는 작업의 중요성을 새삼 강조하기 시작했고, 이 중 일부의 흐름은 일본의학계 내의 독립된 연구분과로서의 “영양학”의 수립과 제도화를 추진해나갔다. 새로운 분과학문으로서의 영양학은 제2차 대전 후에는1947년의 일본 영양・식량학회의 설립이 상징하듯, 의학계 일반과는 결별하여 점차 독자적인 영역으로 확대되었지만, 전전의 초기 태동기에는 어디까지나 생화학등 기초의학 및 내과학에 종사하는 의학전문가들이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일본 영양학 일반에 대한 선행연구는 영양학 관련 종사자 출신들이 집필한 통사적인 연구 (萩原弘道, 1960; 高木和男, 1985), 혹은 방대한 식문화 관련 연구 중에서도 특히 식품영양학사적 관점에서 다룬 연구(昭和女子大學食物學研究室, 1971) 등을 참고할 수 있다. 또한 비교적 최근에는 젠더나 제국사적 관점에서 영양학적 지식의 이데올로기적 측면에 주목한 연구도 등장하고 있다(村田泰子, 2000; 2001; 眞嶋亜有, 2002). 본고는 이러한 선행연구를 참조하면서도, 의학전문가들이 일반대중의 식생활에 특별히 주목하고 개입하고자 한 배경과 그 의미를 당시 일본의 정치사회적 맥락 속에서 분석하고자 한다. 특히 이 과정에서 점차 특정 영양소의 수량적 가치 및 비용의 경제성에 중심을 두는 인식틀이 권위를 획득해가는 사례분석을 통해, 오늘날까지도 대중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식’과 ‘건강’의 관계를 바라보는 영양소 환원주의적 인식론(영양주의, nutritionism)의 기원에 대한 이해의 단초를 제공하고자 한다.
2. 쌀 소동의 충격과 위기의 징후로서의 “식량문제(食糧問題)”
1972년에 열린 일본영양학사를 주제로 하는 한 좌담회에서 한 원로 영양학자 하라 미노루(原實)는 쌀 소동을 일본 영양학의 기점으로 꼽았다. 그는 본인이 도쿄제국대학 농화학과를 졸업한 1920년 당시에는 체계적인 한 학문분야로서의 영양학이란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회고한다. 그러나 1918년 여름의 쌀 소동 이후에 본격적으로 인구증가와 식량 공급문제가 관료와 학자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내무성에서도 ‘국립영양 연구소’를 설립했다(櫻井芳人 外, 1972: 29). 즉, 하라의 회고에 의하면, 식량안보의 문제, 더욱 구체적으로는 쌀 부족이야말로 분과학문 및 제도로서의 영양학을 촉발시켰다는 것이다.
실제로 쌀 소동은 메이지 유신 이후 최초의 전국적인 대규모 소요사태로 손꼽힌다. 제1차 세계대전 동안 일시적인 경기붐이 지나간 후, 극심한 인플레이션으로 생활물가는 치솟았다. 쌀 가격은 1916년 가을 기준으로 1고쿠(약 180ℓ)당 12엔에서 2년 후인 1918년에는 45엔으로 뛰었다. 7월 23일, 도야마 만의 어촌마을에서 쌀의 반출을 막기위한 주민들의 항의로 시작된 움직임은 삽시간에 전국적으로 동시다발적으로 퍼졌다. 정부는 9월 중순까지 지속된 소동을 제압하기 위해 소요가 일어난 300개 지역 중 70여 곳에 군대를 투입했다(昭和女子大學食物學研究室, 1971: 467-8, 475-6). 미가의 폭등이 소요의 직접적인 원인이라 파악한 당국은 쌀 증산 및 미가 통제를 위한 장단기적 대책 마련에 고심했다[2]. 대대적인 토지개간사업, 논개량사업 및 곡물저장시스템의 근대화 등을 비롯하여, 식민지 조선에서 1920년대 이후 산미증식계획을 수립하는 등 소위 ‘제국 내 자급자족’을 달성하기 위한 장기적 증산계획이 수립되었다.
영양학의 기원에 대한 하라의 회고로 다시 돌아가보자. 그가 말한 쌀 소동의 결정적 계기라는 것은 식량에 관한 이슈가 하나의 사회적 문제가 되어버린 이러한 사태, 즉 쌀 소동이라는 공전의 전국적 소요사태를 계기로 그것이 단순한 미가의 문제를 넘어서 궁극적으로 체제를 위협할만한 포괄적인 “식량문제”로 대두하게 되었음을 의미했다고 볼 수 있다. 그가 언급했듯이 당시의 학자-관료들은 식량문제를 거의 대부분 인구문제와 함께 거론했다. 이러한 “인구 및 식량 문제”라는 조합은 인구압의 해결책으로 인식되었던 일본인의 해외이주가 식민지를 제외한 지역에서 정책적으로 가로막히게 된 1920년대 후반이 되면 더욱 빈번하게 거론되었다. 농림성은 1925년 현재 일본인구 59,159,000명이 30년 후에는 85,030,000명으로 증가할 것으로 추산하였고, 이는 식량증산 속도를 크게 웃도는 인구폭발 현상이라는 우려를 불러일으켰다[3,]. 이에 정부는 1927년 3월 인구식량문제의 근본적 해결을 위한 자문 및 조사기관으로서, 내각부 내 총리대신 직속의 인구식량문제조사회 설치를 공표했다[4].
이렇게 1920년대 전반에 걸쳐서 “식량문제”가 인구문제와 결합하여, 맬서스 인구론적인 위기의식이 고양되어갔음은 분명한데, 이것이 영양학 탄생의 직접적인 계기라는 하라의 인식에는 사실 하나의 중요한 고리가 빠져있다. 그것은 쌀 소동 자체가 단순한 쌀 부족이나 기근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소동의 참가자들은 무료로 쌀을 나누어달라고 요구했던 것이 아니라, 소비자로서의 공정하고 합리적인 가격으로 쌀을 구매할 권리를 주장했다. 즉, 쌀 소동이 일어난 1918년 시점에는 이미 도시 거주민은 물론, 농어촌의 주민들조차 상당수는 쌀을 상품으로서 구매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광범위한 쌀의 상품화는 특히 러일전쟁 이후의 일본의 산업화 및 도시화로 인한 생활수준의 변화를 반영하는 것이기도 했다. 쌀은 다수가 선호하는 주식 아이템일뿐 아니라, 만족할만한 생활수준의 가장 기본적인 상징물이기도 했다. 경제사가 페넬로페 프랭크스(Penelope Francks)는 쌀 소동을 역사상의 다른 식량폭동의 사례와 마찬가지로 식문화 패턴과 산업화 및 도시화로 인한 생활양식의 변화의 관계를 읽어낼 수 있는 지표로 바라볼 것을 주문한다. 가령 프랑스 혁명시기 노동자들이 빵이 있음에도 설탕과 커피 값 폭등에 분노한 사례처럼, 생존을 위한 다른 식량의 존재여부와는 별도로 전반적인 생활수준 향상의 반영이라는 측면에서 쌀이 갖는 의미를 해석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Francks, 2007: 158). 이런 맥락에서, 쌀 소동 이후 봇물처럼 쏟아져나온 대책안들이 인구압과 식량부족이라는 대의명분을 내세우면서도, 그 이면으로는 이미 상품으로서의 쌀, 그리고 소비자로서의 쌀 수요자라는 관점을 전제로 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 점은 전문가와 관계자들의 논의 중 상당수가 소비자들의 수요를 줄이는 방법, 혹은 쌀 대체품을 고안해내는 방식에 골몰했다는 사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관계 당국의 입장에서는 무엇을 근거로 쌀 대용식을 권장할 것인가? 가령 일본산 쌀을 선호한다고 알려진 소비자들에게 수입 쌀의 소비를 권장하고 정당화할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가장 경제적이면서도 영양가 있는 식단은 누가 어떻게 결정할까? 이러한 질문에 대해 생리학적 전문지식을 가진 의학 연구자들이 누구보다도 적극적으로 응답했다. 쌀 소동 발발 직후에 나온 『중앙공론(中央公論)』의 추계 부록에서는 “폭동사건의 비판”이라는 제목 하에 전문가들의 견해가 소개되고, 이어서 쌀 대용식 연구에 관한 글이 실렸다. 그 다음호에는 나가이 히소무(永井潜, 1876-1957)가 “음식물의 생물적 진가를 설명하며 영양학적 근거 없는 식량 절감을 배격한다”는 다소 격정적인 어조의 제목의 에세이를 실었다. 도쿄제국대학 의학부 생리학 교수인 나가이는 생명철학에 관한 저서뿐 아니라 일본에 우생학을 도입하고 민족위생학회를 창립한 인물로도 유명하다. 이 글에서 그는 식량문제의 해결을 위해 경제, 식산, 교통, 교육 등 모든 방면의 노력을 경주해야 하는데, 이 모든 노력이 철저한 효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우선 영양에 관한 정당한 지식이 사회계층을 넘어선 모든 이들에게 도달함으로써만 가능하다고 역설했다(永井潜, 1918: 61).
바로 이러한 영양생리학적 지식을 각 가정의 일반 독자에게 전달하여 위기상황을 타파하고자 했던 한 사례로 내과의사 누카다 유타카(額田豊, 1878-1972)의 저술 활동을 들 수 있다. 의학박사 출신의 누카다는 여성의 의약학 및 과학 교육을 중시하여 1925년 데이코쿠여자의학전문학교(帝國女子醫學專門學校, 현 도호대학(東邦大學))를 설립한 것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누카다병원, 결핵요양소 및 데이코쿠여자의학전문학교를 설립한 것 외에도, 생리화학, 결핵, 당뇨, 신장염 등에 관한 전문의학서적 및 식품과 생리화학, 식이요법에 관한 글을 다수 남겼다. 그 중에서도 일반 독자를 대상으로 쓴 『알뜰생활법(安價生活法)』(1915)은 1920년에 나온 개정판이 33쇄를 찍었고, 비슷한 내용을 서명과 출판사를 바꾸면서 1939년까지 여섯 차례에 걸쳐 출간된 스테디셀러였다(額田豊, 1915; 1919; 1920; 1926a; 1931; 額田豊, 藤原秋光, 1939)[5,]. 이 책은 1910년대 후반부터 1920년대 초반에 집중적으로 출간된 비슷한 종류의 일상생활 절약 안내서 중 가장 이른 시기에 등장한 사례로 볼 수 있고, 특히 열량 및 영양가를 정확한 수치로 제시하는 기존의 영양생리 관련 지침에서는 볼 수 없었던 식품의 가격변수를 도입했다는 점에서 특기할 만한 사례였다. 가령 ‘임시각기병조사위원회’에서 활약하기도 했던 당뇨병 연구자 스토 겐조(須藤憲三, 1972-1934)가 문부성의 의뢰로 1912년에 여자사범학교 및 고등여학교 가사 과목의 교원들을 대상으로 행한 강연에서도 인체의 화학적 성분, 식품의 화학적 분석과 소화흡수 등 생리화학 및 식품과학에 관한 내용이 중심일 뿐, 식품의 영양가(養價)의 금전적 가격변수에 대한 고려는 전혀 등장하지 않았다(須藤憲三, 1913).
누카다는 책의 서두에서 영국작가 F. J. 크로스(Cross)가 소개한 하루에 3펜스로 살아가는 법을 인상깊게 읽었고, 그 구체적인 원칙들은 본인이 평소에 생각하던 것들과 매우 비슷하다고 밝혔다. 전시 인플레이션이 대두하기 시작한 1915년 시점에 일본의 실정에 맞는 가계생활 지침을 제시해주고자 한 것이 초판을 집필하게 된 계기였고, 그 후 5년 뒤 새로운 영양학적 지식과 치솟은 물가를 반영한 개정판을 펴냈다고 한다(額田豊, 1920: 6-7)[6,]. 즉, 가계경제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인 식료품의 예산과 소비의 합리화를 꾀하기 위한 지침서라는 것이다. 이 책은 생활난의 전반적인 의미, 영양생리학적 기초사항, 주요 식품의 영양가 및 단가 계산의 크게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특기할 만한 점은 누카다가 서론격인 첫 번째 장에서 중간계급이 현재 겪고 있는 생활난의 의미를 당시의 사회적 위기의 핵심적 원인라며 열정적인 논조로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크로스의 책을 참고했듯이, 그는 이러한 중산층의 생활난이 일본에만 국한된 현상은 아니며 전세계적인 현상이라고 말한다. 즉, 인구증가, 높아진 생활수준, 대중교육의 도입과 그에 따라 함께 높아진 노동자들의 목소리, 부의 불평등한 분배 등 근대사회의 근본적인 변혁이 초래한 현상이라는 것이다(額田豊, 1920: 1). 특히 일본의 경우 세계대전 후의 국제정세가 정부로 하여금 군비에 더 많은 예산을 쓰드록 만들었고, 이는 국민들의 어깨 위에 더 무거운 경제적 부담을 지우는 것으로 귀결되었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는 생활난이 앞으로 더욱 심화되고 일반 국민들의 불안정한 삶의 요소가 증대될 것이라고 전망하면서도, 궁극적으로는 “비생산적인 군사부문”의 팽창을 민족 생존권 확보를 위한 필수불가결한 행보로 간주하여 이를 지지한다.
사회적 위기에 대한 그의 진단이 비록 정치적, 정책적 비판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중류사회의 위기”라고 부른 현상은 각별히 주의를 끄는 현상이었음에는 분명하다. 특히 어느 정도의 교육받은 “샐러리맨” 계층이 생활난을 겪는 일은 새로운 현상이라고 지적한다[7,]. 실제로 당시의 언론에서도 이 계층은 “양복세민(洋服細民)”이라고 불렸는데, 1910년대 후반에는 교사, 경찰, 공공사업 고용자, 우편부 등 고정된 임금을 받는 노동자들이 생활난을 호소하며 파업에 나서는 사례가 적지 않았다(Lewis, 1990: 2-3). 누카다는 메이지 유신 이래 사십여년 간의 역사를 봉권적 무권(武權)이 근대적 금권(金權)으로 점차 대체되어 간 시기라고 지적하며, 이러한 금권의 시대에는 중산층이 점차 설 자리를 잃어가며, 극소수만이 상층부로 진입하고 나머지 대다수는 하층부로 내려가게 된다고 했다. 심지어 이런 경향이 계속된다면 종국에는 중산층이 완전히 궤멸되어 “자본과와 임노동자”만이 남게될 것이라는 우려까지 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는 현대자본주의의 양극화 현상을 꽤 날카롭게 포착하고 있었다. 이러한 우려는 중산층이 한 사회에서 가장 기본적이고 건실한 토대를 이루어야 한다는 인식에서 도출된 것으로, 누카다는 이들의 붕괴가 전체 사회의 위기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절박한 심경을 토로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중산층의 위기야말로 전쟁보다더 더욱 위중한 국가적 위기로 진단하여, 지체없이 “치료”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중차대한 문제에 대해 그는 의사로서 전문적인 견지에서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생리적 요구인 식생활과 관련하여 해법을 제시할 책임감을 느낀다고 밝혔다(額田豊, 1920: 35-36).
누카다가 고안한 해결책이란 다름아닌 개인 차원의 생활습관 개선을 통한 생활난의 개선이었다. 그는 세금감면, 부의 재분배 혹은 구호책 등은 임시방편에 지나지 않으므로, 가장 근본적인 해결책은 개개인에게 과학적 지식에 근거하여 생활비를 절감하는 방법을 학습시키는 것이라 주장했다. 그는 총가계수입 대비 식료품 지출 비율 산출에 관한 미국 가정학자 엘렌 리처즈(Ellen Richards)의 연구를 참조하면서, 일본 도시중산층의 경우 식비가 가계수입의 40퍼센트에 달한다는 수치를 제시했다(額田豊, 1920: 38-43). 가계경제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이 수치는 정확한 영양지식에 근거할 때만 개선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특히 그는 한 가정의 먹거리를 책임지는 주부 혹은 교육 수준이 높은 여성들도 과학적 식품에 관해서는 무지한 경우가 많다고 탄식했다. 즉 건강 및 가정경제의 근저에 있다고 할 수 있는 식품영양과 요리에 관한 지식이 앞으로 여학교나 일반 가정에서 더욱 널리 보급되어야 한다는 서두의 강조점을 통해서, 이어지는 장절에서 소개될 영양 및 생리학적 지식의 일차적인 습득 주체를 주부 혹은 여성으로 상정하고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누카다가 소개하는 영양학의 기초지식 및 각 필수영양소의 계산방법 등은, 원론적으로는 다음 절에서 소개할 내무성 위생국 문서와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3대 주요 영양소 중에서도 단백질을 중요한 기준점으로 삼는다는 점, 그리고 주요 식품의 단백질, 칼로리, 가격 분석을 통해 최소비용으로 최대치의 영양소를 섭취하는 데 주안점을 둔다는 점도 비슷하다. 그런데 그는 구체적인 식단의 내용에 있어서는 메이지 시기 이래로 통속적으로 간주되어 온 소위 자양물, 즉 육식이나 유제품는 가격에 비해 전혀 효율적인 식품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또한 영양소나 칼로리 법칙에 대해서도, 그것을 곧바로 기계적으로 적용하기보다는, 이미 습관으로 굳어진 전통적 식생활을 과학적으로 재조명하는 도구로 접근하는 태도를 보였다. 즉, 인간의 몸이 어떤 물질로 구성되었는지, 또 신체기능을 유지하기 위한 열량이 얼마나 필요한지 알게되었음에도, 이 두 가지 요소만으로는 인간이 섭취해야할 먹거리를 결정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생리적 작용은 극히 복잡할 뿐 아니라, 다양한 음식물의 결합 및 그 양은 다양한 다른 조건에 따라 결정된다. 따라서 전통과 습관은 수백 년간 축적된 임상의 보고와도 같으므로 주의깊게 살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額田豊, 1920: 90). 예를 들어, 나무꾼이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 2-3개월을 보내기 위해 통상 가져가는 식품은 된장과 쌀 혹은 보리였다. 나무꾼은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이들 음식을 통해 생존에 필요한 적정량의 단백질과 탄수화물을 섭취하게 되며, 그렇기 때문에 이는 오랜 경험을 통해 관습으로 굳어졌다는 것이었다. 더 최근의 발견인 비타민의 경우 역시 비슷하게 사실상 일본인의 전통식 속에 풍부하게 포함되어 있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부지부식 중에 섭취해왔다고 했다.
누카다가 단백질 섭취의 중요성을 인정하면서도 당시 중산층 및 지식인들 사이에 보급되고 있던 육류 및 유제품 소비에 회의적인 태도를 보인 것은 반드시 비용 절감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는 인간이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먹거리가 풍토나 기후 등 자연환경과 맺는 관계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경고했다. 즉, 한 지역에 자연적으로 풍부한 재료가 기본적으로는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에게 최적화된 영양공급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외래식품을 들여오는 일은 때때로 필요하지만, 양상추(lettuce)나 양배추(cabbage)와 같은 외래종에 열광하기보다는 기존에 재배되고 있던 지사(萵苣)나 스이젠지나(水前寺菜)와 같은 채소를 먹는 편이 낫다고 단언했다[8,]. 또한 굳이 육고기나 유제품을 비싼 돈을 들여 섭취하지 않더라도,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소박하고 값싼 식품을 먹는 편이 합리적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누카다에게 영양소와 칼로리 등의 수치와 실험데이터는 일본 열도에서 나는 천혜의 산물이 갖는 장점을 가장 효과적으로 극대화시키고, 된장, 콩, 두부, 구와이(慈姑) 등 전통식품이 영양가 면에서 서양 재료에 뒤지지 않는다는 점을 과학적으로 증명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그에게 있어 당시 도시 중산층 사이에 유행하던 소위 “하이칼라” 기호품이었던 유제품 및 육류 소비 열풍은 궁극적으로 중산층의 생활난을 자초하도록 만드는 비합리적, 비과학적 행태에 지나지 않았다. 따라서 누카다가 제시했던 모델 메뉴는 빵식/서양식 메뉴보다는, 쌀 혹은 보리 등 곡식을 주식으로 한, 주로 식물성 식품 혹은 생선(혹은 말고기같이 저렴한 육고기)을 부식물로 삼은 식단이었다(그림 1)[9].
결국 누카다는 인간이 살아가는 자연환경, 풍토, 그리고 개인의 체질에 따라 바람직한 먹거리가 달라질 수밖에 없는 점을 고려할 때, 당시 널리 통용되던 독일의 생리화학적 연구 성과에 기반한 육식 위주의 서구 식단은 경제면뿐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건강상으로도 바람직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물론 이렇게 “수입” 영양생리학과 일정한 거리를 두면서 “일본인”의 신체와 환경에 맞는 실천법을 강조한 것은 당시에 전혀 새로운 의견은 아니었다. 육식 반대 및 현미식 보급을 주창한 메이지 후기의 ‘식양회(食養會)’를 이끈 육해군 군의관 및 의료종사자들 역시 유사한 주장을 전개했다(Hong, 2018). 오사카에서 위장병원(胃腸病院)을 운영하고 있던 임상의 유카와 겐요(湯川玄洋) 역시 “일본인의 신체에 적합한” 위장병리 처방과 지침서가 중요하다고 강조하면서, 1년 12달의 기후와 절기에 따른 풍속에 입각한 식사법 지침서를 개정, 증보를 거듭해서 출간하고 있었다(湯川玄洋, 1925). 한편, 규슈제국대학 위생학 제1강좌를 이끌던 기생충학자 미야이리 게이노스케(宮入慶之助, 1865-1946)는 이 무렵부터 전시기에 걸쳐 식생활 문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발언한 의학자로서, 주 연구 분야인 혈관 내 기생충(住血吸虫)의 감염 경로에 대한 연구 이외에도 일반 독자를 위한 위생학 및 식생활 지도서를 다수 남겼다. 그는 특히 영양과다 문제와 전통적 절식, 단식 및 현미식의 긍정적 효과를 강조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심지어 리비히나 포이트 등의 고전적인 연구성과를 19세기식 “낡은 신화”에 지나지 않는다고까지 단언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주로 미국의 치텐든(Russell H. Chittenden, 1856-1943)이나 덴마크의 힌드헤데(Mikkel Hindhede, 1862-1945) 등과 같이 단백질 최소요구량을 훨씬 낮게 제시한 학자들의 새로운 연구경향을 적극적으로 일본에 소개했다(宮入慶之助, 1923; 1924).
이렇듯 누카다를 비롯한 이들 의학자 및 임상의들의 주장은 쌀 소동 이후의 경제적 식량문제 해결을 위해 갑자기 등장한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이전부터 가지고 있던 생리영양학적 견해의 연장선상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누카다의 경우는 특히 칼로리와 영양소 수치뿐 아니라 식재료의 금전적 가격이라는 새로운 변수를 추가한 계산방법을 궁리했다는 점에서는 이례적인 것이었다. 누카다의 초보적인 가격별 영양소량 계산법은 1920년대 이후 더욱 체계화된 실험과 통계조사에 입각한 본격적인 영양학 연구의 출현을 예고했다. 아울러 쌀 소동 이후부터 기초의학이나 소화기 내과의들이 영양생리학적 이슈에 대하여 점차 생리학적 측면뿐만 아니라, 사회경제적 및 이데올로기의 측면도 동시에 고려하면서 발언해나간 점 역시 주목할 만한 변화였다. 이러한 식습관 메뉴얼 혹은 식생활 관련 대중적 의학도서 장르는 독자 개개인의 생활습관의 변화를 통해 건강과 가정경제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는 시도였다.
3. 합리적·과학적 식생활을 위하여: 영양학의 제도화
쌀 소동 직후인 1919년 내무성 위생국이 발간한 두 책자는 정부 당국이 영양학 연구 및 보급이라는 현안에 대응한 방향성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하나는 “각 국에서의 식량문제”라는 자료 번역집 형태의 책자로 제1차 세계대전 당시의 구미 각국에서 영양 및 식량 대책에 도움이 될 논문의 번역모음이다(内務省 衛生局保健衛生調査室, 1919). 선별된 논문의 내용은 독일에서의 식량난과 그 대응, 미국 식품국(Food Administration)의 식량 절약 사례 및 건강에 미친 영향, 영국의 전시기 공공식당(national kitchen)과 전시 빵, 연합국식량위원회 등 다양한 주제에 걸쳐있었다. 이 문건은 당시 일본의 과학자들과 관료들이 얼마 전에 종결된 제1차 세계대전의 참전국들이 겪었던 비슷한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려고 했는지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즉, 비슷한 시기 구미 각 국에서 전시 식량난이 정책적 차원의 식품 및 영양 연구를 촉발한 것과 비슷하게, 쌀 소동 이후의 “식량문제”는 일본 내에서 식량자원과 영양 연구의 체계적 제도화에 대한 전문가의 관심을 이끌어냈던 것이다.
또 다른 책자는 『영양과 식량경제(榮養と食糧経済)』라는 제목의 55쪽 가량의 간략한 매뉴얼로서, 기본적인 영양학 지식과 일상적 식품을 준비하는 데 필요한 실용적 지침들로 구성되었다(内務省衛生局, 1919). 위생국은 우선 국민 각자에게 영양과 식량경제에 관한 지식을 보급하여, 스스로 철저한 자각에 의해 식량을 절약하는 일이 가장 필요하다고 인식하여 이 메뉴얼 작성을 의뢰했다고 밝힌다. 그리고 관헌, 지방 장관, 독지가, 일간지 및 잡지 등 각 방면의 원조를 통해 이 책자의 내용이 널리 보급되기를 바란다고 당부하기도 했다(内務省衛生局, 1919: 범례 두 번째 및 세 번째 항목). 일례로 후쿠시마현 내무부는 같은 해 비슷한 취지의 책자 『우리는 무엇을 먹어야할까(吾人は何を食ふべきか)』를 발행했는데, 현 사정에 맞게 농업생산성 향상과 대체곡물재배법에 관한 내용이 주를 이루면서도, “영양과 식량경제”라는 한 장은 위의 내무성 매뉴얼을 거의 통채로 인용하고 있다(福島県内務部, 1919).
위생국이 집필을 의뢰한 두 명의 의학자는 앞 절에서 소개한 나가이 히소무와 사이키 다다스(佐伯矩, 1876-1959)였다. 나가이는 앞의 두 장, “음식이 중요한 이유는?”, “음식은 얼마나 먹는 것이 좋은가?”에서 주로 독일 생화학 연구 성과에 의존하여 단백질과 칼로리 이론을 독자들에게 소개했다. 그는 우선 “석탄을 태우면 증기기관에 열과 힘이 발생하는 것처럼, 단백질, 지방, 탄수화물은 인간의 몸에서 원기를 만드는 근원이 되는 물질이다” 라고 단언하며, 인간의 신체를 증기기관에 비유하면서 각 영양소(養素)의 의미와 중요성을 설명했다(福島県内務部, 1919: 2). 또 어떤 식품에 3대 영양소가 풍부한지에 대해 제시한 나가이는 그 중에서도 단백질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단백질은 인간의 몸에 가장 중요하고 풍부한 물질임에도 지방이나 탄수화물에서 변화되거나 합성되지 않으므로 여러가지 음식을 통해 반드시 섭취해야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단백질 위주의 영양소 해설은 19세기 중반 이래 리비히 등 독일 생리학자들이 공식화한 고전적인 영양원칙에 충실히 입각한 내용이었다. 리비히가 『동물화학』(1842)에서 질소계 물질, 즉 단백질이 근육조직의 기본성분이므로 단백질이 근육의 성장을 돕는다고 주장한 이래, 그 제자인 칼 포이트(Carl Voit)는 평균 남성노동자 기준 하루 최소 118g의 단백질 섭취가 필요하다는 “포이트 표준”을 제시했다(Finlay, 1995: 50). 19세기 말 무렵에는 리비히-포이트의 단백질설, 특히 동물성 단백질을 강조한 이론이 산업화된 구미 각 국에서는 정설로 받아들여졌다.
아울러 인간의 몸을 증기기관에 비유한 항목 역시 당시 비교적 새로운 이론이었던 열량측정 방식을 참조한 것이었다. 1880년대 독일 생리학자 막스 루브너(Max Rubner)는 3대 영양소가 체내에서 칼로리로 상호 변환된다는 것을 실험적으로 밝혀냈다. 얼마 후 이러한 열역학 등가법칙에 근거한 소위 칼로리이론은 국제적인 표준으로 굳어졌고, 노동효율, 식습관 및 빈곤의 관계를 기술하는 사회과학적 분석의 기초개념으로 통용되기에 이르렀다(Treitel, 2008: 12). 일본에서도 칼로리 개념은 비슷한 시기에 도입되어 각종 위생조사에도 쓰이고 있었는데, 나가이는 이제 독자들에게도 자신이 먹는 음식의 칼로리를 직접 계산할 수 있는 방법을 상세히 알려주었다(内務省衛生局, 1919: 14)[11].
전술한 기본적 영양 지식을 바탕으로 나가이는 다음과 같은 논리로 보건식(保健食) 개념을 소개했다. 인간의 신체는 섭취량에 구애받지 않고 최대한 안정적인 양의 영양소를 흡수하려 한다. 따라서 소고기나 계란 같은 자양분이 풍부한 음식을 아무리 많이 섭취하더라도 신체는 필요량 이상의 부분은 배설물로 내보낼 뿐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과도한 영양은 인체기관에 과중한 부담을 안길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잘못된 영양”은 일 개인과 가정의 경제에 해가될 뿐 아니라, 국가적 차원에서도 막대한 손실을 발생시킨다. 따라서 보건식이란 건강에 해를 끼치지 않는 한 최대한도의 절약을 꾀하는 식단을 뜻했다. 일본인을 위한 보건식의 이해를 돕기 위해, 나가이는 다음과 같은 수치를 제시했다: 평균 체중(49-52kg)의 남성이 보통 정도의 작업을 할 경우, 90g의 단백질, 20g의 지방, 450g의 탄수화물로 총 2,400kcal가 필요하다[12,]. 여성, 청소년, 아이들에게는 더 적은 양이 필요한데, 14-17세 남성과 성인 여성은 남성표준의 80퍼센트로 충분하고(14-17세 여성은 70퍼센트), 10-13세의 아동에게는 60퍼센트, 6-9세에게는 50퍼센트, 2-5세에게는 40퍼센트가 각각 요구된다(内務省衛生局, 1919: 13). 이와 같이 나가이는 위계적인 가족모델을 상정하여, 가장 많은 양의 섭취가 필요하다고 간주되는 남성 가장을 중심에 두고 나머지 가족구성원의 필요량을 나이와 성별에 따라 내림차순으로 제시하는 방식을 택했다. 또한 기존 영양조사 및 연구의 대상이 학교, 공장, 군대와 같은 단체에 머물렀다면, 이 책자는 대중 일반을 타겟으로 한 지침서의 형태를 취한만큼, 사회구성원 개개인, 특히 각 가정을 영양 섭취의 주체로 설정했다는 차이가 있다.
한편, 나가이는 국제적으로 통용되던 포이트 혹은 애트워터 표준치를 일본인의 체형에 맞게 활용하면서도, 글의 말미에서는 더욱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부득이한 상황 하에서 총 단백질 섭취는 절반, 칼로리는 1,850kcal로까지 낮출 수 있다는 모호한 결론을 제시했다. 나가이의 의도가 영양학적 기초지식과 보건식 개념을 평이한 언어로 풀어 설명함으로써 일반인들이 식자원을 절약하도록 설득하기 위한 것이었음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표준 보건식에 대한 그의 다소 유보적이고 불명확한 논조는 당시 전문가들조차 가장 기본적인 수치라 할 수 있는 일본인의 보건식 표준치에 대한 명확한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는 사실을 예증하고 있다. 아울러, 앞에서 간단히 소개한 미야이리와 같은 학자들이 주장한 저단백질, 저칼로리 최소요구량설이 등장하게 되는 배경이기도 했다.
나가이의 이론적 영양 법칙 개요 다음에 이어지는 후반부는 일종의 절약 지침인 “무엇이 경제적이면서도 맛있고 영양가있는 음식인가”와 “음식의 경제는 왜 중요한가”의 두 장으로, 당시 영양관련 연구에 남다른 열성을 보이던 사이키가 집필했다. 교토제국대학에서 의화학을 전공한 사이키는 1907년 예일대 생리화학박사학위를 받았다. 귀국 후 1914년 무렵부터 사립 영양 연구소를 설립하여 쌀 도정도, 동물성 단백질, 및 조리법에 따른 쌀 흡수율 등에 관한 실험적 연구를 수행하고 있었다. 체계적인 실험에 기반하여 의학과 생리학 내에서도 독립된 연구 분과로서의 영양학의 수립에 노력을 기울이던 사이키는 대중의 전반적인 건강 향상을 위한 공공영양학에도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萩原弘道, 1960: 35-7). 당시의 다른 지식인들과 마찬가지로 사이키는 식량 안보가 가장 중요한 국가적 관심이 된 당시의 상황을 강조하며, 연간 70만 명씩 증가하는 인구를 증산으로만은 따라잡을 수 없다고 우려했다. 수입 쌀 장려를 일시적인 대책으로 인정하면서도, 그는 더욱 근본적인 해결은 점차적으로 사람들의 입맛을 쌀 선호에서 대체식량으로 바꾸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사이키는 당국에 의한 강제적 식사 개량 조치에 대해서는 반대하는 입장에 서서, 장기적으로 국민들 개개인이 자발적인 노력으로 식량을 절약하는 방침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럼으로써 궁극적으로는 주요 식량에 대한 국가적 차원의 자급자족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었다(内務省衛生局, 1919: 17-20).
사이키가 요청하는 국민들의 자발적인 노력은 다음과 같이 조리법은 물론 식사 방법과 같은 세세한 사항에까지 미쳤다: (1) 재료의 선택에 유의할 것; (2) 입에 맞는 음식을 만들기 위해 조리방법을 개선할 것; (3) 보통 먹지 않고 버리는 생선 머리나 야채 껍질 등에 영양가가 풍부하다는 점을 명심하여, 재료의 낭비를 막도록 주의할 것; (4) 소화를 돕기 위해 잘 씹을 것; (5) 다양한 음식물을 먹을 것; (6) 공공시장이나 소비자조합과 같이 경제적인 방법으로 구매할 방법을 고안할 것; (7) 햇빛에 말리거나, 통조림, 소금절임 등 다양한 식품 보존법을 활용할 것; (8) 겉보기에만 그럴듯한 식품만 고르려 하지말고, 수입쌀 구입도 고려할 것; (9) 조식(粗食)도 미식(美食)도 바람직하지 않다는 점을 명심할 것; (10) 포식하지 않아도 좋다는 점을 알아야 했다.
여기서 사이키가 집필한 안내서의 핵심은 바로 첫 번째 항목인 ‘올바른 재료의 선택 방법’을 각 영양가의 양과 가격의 상관관계로 꼼꼼하게 보여준 점에 있다. 그 방법은 93.7g의 소고기 안심에서 얻을 수 있는 것과 동량의 단백질 및 칼로리를 얻기 위해 각기 다른 식품들의 경우 얼마만큼의 양을 얼마의 가격에 살 수 있는가를 목록으로 제시한 것이다(표 1). 사이키는 이러한 가격 및 영양가의 매트릭스를 통해 육식의 경우 소고기보다는 닭, 돼지, 말고기 순으로 더욱 경제적이며, 쌀보다는 잡곡이, 특히 같은 영양 가치를 지니면서도 가격은 훨씬 저렴한 수입쌀을 권장했다. 사실 메뉴얼에서 압축적으로 제시한 핵심 내용은 사이키가 이미 “경제영양법”이라는 이름 하에 쌀 소동 당시에 강연을 통해 일반 청중에게 전파하고 있던 내용이었다. 강연에서는 단순한 식재료의 영양 및 금전가치의 계산치뿐 아니라 이런 원칙을 바탕으로 실제 어떤 식단을 구성해야 하는지 예시를 들어 보였다. 가령, 하나는 비싸지만 영양가치는 덜한 식품으로 구성된 식단, 다른 또 하나는 덜 비싸지만 더 많은 단백질과 칼로리를 제공하는 식단을 나란히 제시하면서, 후자의 소박한 밥상도 영양적으로 더 우수하고 만족스러운 식사가 될 수 있다고 설득하는 방식이었다(萩原弘道, 1960: 41-2).
이상의 위생국 책자가 배포된 시점을 기점으로 하여 국가적 차원의 영양학의 제도화 및 민간 연구기관 설립이 앞다투어 전개되었다. 1920년 9월 제국의회는 사이키의 국립영양연구소 설립 청원을 승인하기로 결정했다. 국립화된 영양 연구소는 이듬해 말 신축된 연구소로 옮겨 기초연구부, 응용연구부, 조사부의 세 개 분과에 총 30명의 연구원을 두었다. 연구소장으로 부임한 사이키는 영양학 연구가 “사회정책”으로서 의미를 갖는다고 선언하고, 그것이 노동정책, 가계경제, 사상문제, 결핵과 같은 국가적 질병의 문제 등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그 필요성을 강조했다(萩原弘道, 1960: 46-7, 60-1). 이렇게 하여 내무성 위생국 산하의 국립영양 연구소는 연구 및 교육에 본격적으로 착수할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13].
한편 국립영양 연구소의 뒤를 이어 1925년에는 육군 보급창에 해당하는 양말창(糧秣廠)이 주로 군대식의 합리화의 교육, 선전을 목적으로 ‘양우회(糧友會)’를 제국육군 산하기관으로 설치하고 잡지 『양우(糧友)』발간, 식량전람회, 식량학교 설립 등의 활동을 전개했다. 또한 다음 해인 1926년 미쓰이 재벌 및 몇몇 다른 기업가들의 기부금에 의해 게이오대학 의학부에 영양 관련 연구, 교육기관인 식양연구소(食養研究所)가 설립되는가 하면, 도쿄와 오사카의 위생시험소 내에도 각각 1928년, 1929년에 영양연구조사과가 설치되었다. 양우회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영양소화 관련 연구를 내놓고 있던 도쿄대학 내과학교실 출신 부부 의사 가가와 아야(香川綾)와 가가와 쇼죠(香川昇三)는 1933년 가정식양연구회(家庭食養研究)를 설립하여, 국립영양 연구소의 영양학교 및 양우회의 식량학교와 더불어 영양사 양성을 위한 민간기관으로 기능했다(高木和男, 1985: 418-426)[14].
이렇게 쌀 소동 이후의 제도적 기반을 마련한 이 시기의 생리화학 및 영양학은 국가 경제와 국민 건강이라는 두 가지 목표를 결합하는 연결고리로서의 의미를 특히 강조했다. 즉, 이 “식량문제”를 식생활의 주체 혹은 소비자 선택의 합리화를 통해 해결할 수 있다는 인식 하에, 이를 위한 과학적인 지식체계를 생산하고 전파해야한다는 과제를 설정한 것이다. 이는 한편으로 실험 및 통계조사를 기반으로하는 과학적 영양 연구의 제도화 과정을 통해 식품과 소화를 특정한 영양분이나 에너지량 차원에서 파악하는 인식틀을 더욱 강화시켰다. 식사 지도나 식생활에 대한 조언은 단백질, 지방, 탄수화물, 비타민, 탄수화물 등 영양소의 문제로 치환되거나, 혹은 이 모든 것을 계량화시킬 수 있는 칼로리의 용어로 표현하게 되었음을 의미했다. 나가이와 사이키의 매뉴얼이 보여주듯이, 경제적이면서도 영양적으로 우수한 음식의 선택은 영양소의 최소요구량과 그 가격의 수량적 계산을 통해서만 도출된다는 인식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이러한 1920년대 영양학의 제도화 과정은 영양(榮養, eiyō)이라는 용어가 식양(食養, shokuyō)이나 자양(滋養, jiyō)과 같이 비슷한 의미로 쓰이던 용어들을 대신하여 이론적 권위를 획득해간 시기와도 중첩된다고도 볼 수 있다[15,]. 이 세 가지 용어는 넓게 보아 특정한 음식, 혹은 그 음식을 섭취함으로써 건강을 증진시킨다는 의미로 메이지 시기 이래로 상호 호환되어 쓰였던 용어들이다. 사이키의 영양 연구소는 그 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영양’이라는 용어를 의식적으로 권장하며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자 했다. 사이키는 1926년에 출간한 『영양』이라는 저서에서 그 동안 협의의 의미로 단편적으로 다루어졌던 영양 연구가 새로운 체계를 갖추어야한다고 주장했다. 즉, 음식물의 소비법에 있어서 생리상의 요구, 경제상의 생산, 사회적 의리라는 세 가지 요소를 다함께 고려하여 합리화하는 데 그 의의가 있다는 것이다. 이 세 가지 측면에서 접근하는 소비는 “건강의 원천, 경제의 근본, 도덕의 기초”며, 이 셋을 통합하여 합리화하는 것이야말로 영양 연구의 목적이라고 주장했다(佐伯矩, 1926: 15-16). 이러한 노력에 힘입어 1920년대 중후반 이후부터 “영양”이라는 용어가 일반화되었고,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다른 용어들은 전문적, 일상적 용어로서는 거의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한편, 이러한 “영양” 명칭의 확립 과정은 특히 “식양”이라는 용어의 변천 과정을 통해서도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위에서 언급한 게이오대학 식양연구소나 가가와 부부의 가정식양연구회(1940년에 여자영양학원으로 개칭)와 같은 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식양”은 전전까지는 여전히 꽤 빈번히 쓰이는 용어였다. 국립영양 연구소와 쌍벽을 이루는 민간기구라 일컬어졌던 게이오대학의 식양연구소는 설립 당시 소장인 오모리 겐타(大森憲太, 1889-1973)가 연구소의 명칭에 대해 밝힌 바가 있다. 즉, 영양 연구소가 식품의 영양분석에 초점을 두는 반면, 대학병원에 부설된 식양연구소의 경우는 그 설립목적이 식이치료에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한 것이다[16,]. 오모리는 기존의 식이치료 방식은 엄밀한 과학적 연구보다는 부분적인 임상 경험에 근거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고 비판적으로 평가하면서, “식양요법”이란 일종의 응용 영양학이라고 말했다. 또, 약물치료의 근본 목적은 치료에 있지만, 식양요법은 치료의학과 예방의학을 모두 아우르는 것으로 간주하고, 특히 후자의 중요성이 점차 증대해가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식양요법”을 독일어 “Diätlehre”와 나란히 놓으면서, 이 새로운 분야는 영양학적 원칙뿐 아니라 병리학적 징후에 근거한 학문이라고 설명했다(慶応醫學部食養研究所, 1931: 1-2)[17]. 이러한 발언과 연구회의 설립 이후의 활동을 고려할 때, 식양연구회는 병원 부속기관으로서 환자식 및 식이요법에 주안점을 둔다는 면에서 영양 연구소와는 차별화된 전략을 세웠지만, 넓은 의미에서는 개별 영양소 및 칼로리 중심의 양적 분석법을 골자로 하는 점에 있어서는 영양학의 하위부문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 이러한 용법은 “식양”이라는 개념이 특히 1930년대 이후부터는 영양학적이 담론이 모두 담아낼 수 없었던, 체질, 풍토, 환경, 풍습 및 양생론적 전통을 차용하는 방식으로 식양도(道) 혹은 식양술(術)과 같은 용어로 대중적으로 쓰이며 변용되어간 맥락과는 전혀 다른 의미라고 할 수 있다. 즉, 게이오대학 식양연구회의 “식양”은 내용적으로는 “영양”에 근접한 것이었다.
한편, 이처럼 수량적 분석 및 실험방법론이 영양 연구에 도입되고, 칼로리, 단백질, 혹은 비타민 등 영양소 위주의 담론이 점차 주류를 차지하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영양학의 제도화가 이상적인 식단 혹은 표준식의 내용 자체를 결정한 것은 아니었다. 다시 말해, ‘합리화’라는 명제 하에서 내용적으로는 전혀 다른 주장이 다른 한편으로는 전개되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의학계 내에서, 당국의 안팎에서 발언한 이러한 의학자들의 외침은 1920년대 쌀소동 이후의 전반적인 사회 담론 속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했을까? 다음 절에서는 의학자 그룹과는 다른 경로를 통해 ‘식의 합리화’를 주장했던 사례를 살펴보겠다.
4. 의학계를 넘어서 생활개선운동으로: 의학과 경제학의 접점
1920년대는 “생활”과 “개조”라는 두 키워드가 정책 및 사회사상에서 범람했던 시기였다[18,]. 이 둘을 조합한 대표적인 사례는 정부 주도로 학자-관료들이 광범위하게 관여했던 ‘생활개선운동’이다. 1919년 여름, 문부성은 사회 교육을 위한 부서를 내부적으로 설치하고, 쌀 대용식, 근면, 근검절약 등을 장려하기 위한 일련의 조례를 공포했다(中嶌邦, 1974: 61-62). 이 캠페인은 의식주각 부문의 일상적 관행을 합리화, 효율화시키기 위한 방법을 널리 알리는 데 초점을 두고, 주로 교육계 종사자들을 대상으로 한 전람회 및 강좌 개최, 출판물 간행 등의 방법을 통해 전개되었다. 이에 호응하여 1920년 1월 가정학, 의학, 여성교육, 건축, 박물관학 등 각 분야의 전문가들은 ‘생활개선동맹회’를 문부성 산하기관으로 조직했다. 이 운동의 특징은 주로 도시의 중산층을 대상으로 했다는 점에 있었는데, 이는 주도자들이 당시의 사회적 혼란을 개인이 삶의 방식을 합리화하고 전반적인 삶의 질을 높임으로써 해결할 수 있으리라 전망했기 때문이다.
생활개선운동의 대표적인 표어는 “문화생활”이라 할 수 있는데, 이 용어는 당시 폭발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한 대중매체가 칭송하고 있던 이미지이기도 했다. 문화생활이란 간소하고, 합리적이며 효율적인 라이프스타일, 즉 대부분의 경우 서구화된 생활 양식과 문화로 풀이되었다(南博, 社會心理研究所, 1987: 247-248)[19,]. 생활개선운동의 소비경제학적인 이론을 제공했던 모리모토 고키치(森本厚吉, 1877-1950)는 “효율적 생활 표준(efficient standard of living)”이라는 개념을 도입했다. 그는 인간의 욕구를 의식주와 같이 생존에 필요한 가장 기본적인 욕구, 지위와 체면을 유지하려는 욕구, 편의를 추구하려는 욕구, 마지막으로 사치하려는 욕구 등 네 가지 층위로 나눴다. 모리모토의 효율적 생활표준이란 이 중에서 앞의 세 가지 항목을 포함하고 마지막 ‘사치’ 욕구를 철저히 배제한 것으로 설정됐다(Morimoto, 1918: 17-18)[20,]. 그는 사치의 욕구에 대하여 “불필요하고, 부적절하며, 종종 경제생활에 해를 끼치는 욕구”라며 비판했다. 이러한 판단은 흡사 막스 베버가 공식화한 금욕적 프로테스탄트 윤리를 연상시키는 면이 있는데, 모리모토는 베버와는 달리 그러한 근검절약 정신에 기반한 ‘합리화’ 과정에 대한 낙관적 태도를 숨기지 않았다. 그는 사치의 측면을 철저히 배제한 “효율적 생활표준”을 통해 독자들로 하여금 궁극적으로는 국가의 생산능력 향상에 기여하도록 설득하고 있다[21].
모리모토의 효율적 생활표준이 가장 첫번째로 고려한 항목은 역시 식생활과 관련된 소비부문이었다. 그는 일본인들이 사치스러운 옷에는 돈을 아끼지 않으면서, 자양분이 풍부한 음식을 소비하는 일에 드는 돈은 아까워한다고 한탄했다. 앞의 문부성 및 의학자들의 대체적인 의견과는 다르게, 모리모토는 식비절감은 궁극적으로 일본인의 건강을 해치게 될 것이라 생각하여 이에 반대했다. 그는 오히려 식생활의 합리화에 가장 큰 장애물은 일본인들이 채소와 생선 중심의 전통적인 조식(粗食)에 집착한다는 점을 꼽았다. 그리고 영양 최소요구량에 대한 기존 연구를 이용하면서도, 특히 동물성 단백질의 중요성을 주장한 연구에 강조점을 두었다. 그리하여 비록 식비를 절감하지는 못하더라도 일본인의 식생활에서 결여되어있다고 여겨진 육식과 유제품을 더 많이 섭취하는 것이 합리적인 소비라는 주장을 펼쳤다(森本厚吉, 1922: 435-441).
모리모토의 식생활 “개선”에 관한 기본입장을 다소 과장된 표현이기는하지만 가장 집약적으로 표현한 말이 “다쿠앙즈케 망국론(澤庵漬亡國論)”이다. 무를 식초나 쌀겨에 절인 식품인 다쿠앙즈케는 당시에도 가장 널리 애용되고 있던 식품 중 하나였다. 그는 다쿠앙즈케가 영양가가 거의 없음에도 불구하고 소화를 촉진시키는 면이 있다고 지적하면서, 그 짭짤하고 밥과 잘 어울리는 특징 때문에, 다쿠앙즈케 몇 조각과 차 한잔만 있으면 밥을 몇 그릇이나 비울 수 있다고 말했다(森本厚吉, 1921: 188-189)[22]. 따라서 다쿠앙즈케는 식량자원이 부족했던 과거 봉건시대에는 훌륭한 아이템이었지만, 현대사회에는 어울리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건강에 해를 끼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과도한 다쿠앙즈케 섭취가 보통 과식으로 이어진다는 점을 우려하며, 그는 쌀밥 중심의 식생활이 위 확장 및 영양실조의 원인 중 하나이며, 이는 결국 현대사회의 효율성과 생산성을 저해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모리모토의 영양합리화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는 유제품 및 육식 소비를 늘리는 데 있었다. 그는 비타민 연구로 잘 알려진 미국의 생화학자 맥컬럼(Elmer McCollum, 1879-1967)의 글에 동조하면서, 부적절한 식생활이 어떻게 한 민족의 건강, 문화, 그리고 심지어 정치체제에까지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설명했다. 그가 길게 직접 인용한 맥컬럼의 관찰에 의하면:
잎채소만을 보호식품(protective food)으로 삼는 민족들은 작은 신장, 상대적으로 짧은 수명, 높은 영야사망률, 그리고 조상들에게 전수받은 단순한 기계적 발명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다. 반면에, 우유를 풍부하게 사용하는 민족들은 큰 신장, 긴 수명을 누리며 어린 세대를 더 잘 키운다. 그들은 우유를 사용하지 않는 민족에 비해서 더 공격적이며, 문학, 과학, 예술에서 더 훌륭한 성과를 이루어냈다. 또한 그들은 더 수준 높은 교육, 정치체제를 갖추고 있어, 이는 개인들의 능력을 신장시키는 최고의 기회를 제공한다. 이런 성과들은 생리학적 기초를 가지며, 이는 영양과 근본적으로 관련되어 있다는 점을 부정할 길이 없다(McCollum, 1918: 150-151).
모리모토가 직접 일본어로 번역한 인용문에서 그는 두 문구를 바꾸어 결과적으로 본인의 육식, 유제품 장려를 뒷받침하도록 했다. “잎채소만을 보호식품으로 삼는 민족들”을 “(일본인처럼) 결핍된 식품에 의존하는 민족은”으로 교체했고, “우유를 풍부하게 사용하는 민족들”은 “충분한 우유와 육류를 섭취하는 민족들”로 바꾸어 번역했다(森本厚吉, 1921: 184-185). 여기서 “보호식품”이란 맥컬럼이 그의 책 전체에서 쓰고 있는 핵심용어로 비타민의 다른 표현이며, 위의 인용문은 비타민이 풍부한 우유의 중요성과 그것이 인간의 생리와 문화에 끼치는 긍정적인 영향을 주장한 것이다. 사실 맥컬럼은 락토 베지테리어니즘(유제품을 포함하는 채식주의)을 가장 이상적인 식단으로 꼽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리모토는 원문에는 등장하지도 않는 “육식”을 유제품 옆에 끼워넣어 번역했다(McCollum, 1918: 52)[23].
그런데 모리모토의 의도된 오역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일본인의 “열등한” 식생활에 대한 모리모토의 우려와 불안이 행간에서 읽힌다는 점이다. 맥컬럼은 우유섭취 대 비섭취 집단을 뛰어난 구미 대 열등한 아시아라는 식의 인종주의적 인식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는데, 모리모토는 이를 큰 거부감없이 받아들이는 듯하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동시에, 식생활을 개선함으로써 일본인이 낮은 단계의 그룹에서 벗어나 구미 국가들의 일원으로 가입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고 있었다. 모리모토는 매걸럼 교수와 개인적으로 나눈 대화를 소개하면서, “만약 일본 농민들이 우유와 육식을 더 많이 섭취하도록 식생활을 바꾼다면, 그들은 아마도 평균수명을 십오년은 더 연장할 수 있을 것이다”라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森本厚吉, 1921: 196-197). 모리모토에게 있어서 모든 인간은 그 개성, 지방성, 국적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대체로 비슷한 입맛을 가지고 있으므로, 한 민족의 식생활을 바꾸는 일은 그저 습관의 문제일 뿐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쌀밥중심의 “비효율적인” 식생활의 상징인 타쿠앙즈케는 과거의 음식, 혹은 “미개한” 음식으로, 반면에 육식, 유제품과 빵은 영양가와 효율성 높은 음식으로 간주하여, 전자에서 후자로 나아가는 방향이야말로 식의 합리화라는 것이 모리모토 주장의 핵심이었다.
사실 맥컬럼의 주장과는 별로 상관없는 모리모토의 육식 옹호론은 전혀 새로운 주장은 아니었다. 육식해금이 실시된 메이지 초기부터 육식옹호론자들은 동물성 식품섭취의 증가가 “열등한” 일본인의 신체적 조건을 향상시킬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하지만 일본이 이미 불평등 조약의 개정을 넘어서, 일차대전의 승전국으로서 워싱턴 회의에 참가하고 있던 1920년대 시점에 글을 쓴 모리모토는 메이지 지식인들과 비슷한 정도의 위기감과 열등감을 직접 표현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제국열강의 일원이 되었다는 객관적 지표에도 불구하고 맥컬럼이 분류한 낮은 문화적, 생리적 특징을 보이는 인종그룹에 일본인이 포함되었다는 데 일종의 불편함과 우려감을 떨칠 수 없었지 않았을까. 물론 그는 맥컬럼처럼 서구를 중심에 두는 위계화된 문명 논리 그 자체를 거부하지는 않았다. 메이지 시기와의 차이는 이제 그 문명의 사다리에서 일본이 조금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는 점에 있었다. 따라서 그는 영양섭취 및 식습관 차이에서 기인한다고 여겨진 신체적, 문화적 후진성이 철저히 모든 일본인들에게 해당되는 사항은 아니라는 인식을 내비쳤다. 이는 모리모토가 “일본인의 식생활”을 이야기하면서도 그 계몽과 개혁의 대상으로는 “미개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낮은 생활수준을 유지하고 있는 아이누 민족, 또는 주로 채식에 의존하는 농민들을 상정했다는 점에서도 읽어낼 수 있다(Morimoto, 1918: 18, 32). 결국 모리모토의 육식장려론은 메이지 지식인들의 주장과의 표면적인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전반적으로 인종적 열등감이나 열패감보다는 과학적으로 증명되었다고 여겨진 “효율적”인 생활방식의 지표이자 향상된 생활수준에 주안점을 두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하여 결론적으로 모리모토의 식생활 개선의 방향은 노동자, 농민 계급을 포함한 더 많은 일본인이 소비할 수 있도록 육고기와 유제품의 가격을 낮춰야한다는 쪽으로 귀결되었다. 즉, 소비자로서의 개인의 합리적 선택을 중요시했다는 점에서는 사이키의 영양 개념과도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었지만, 그 구체적인 방안에 있어서는 값비싼 동물성 단백질을 대체할 저렴한 대용물을 권장한 영양 연구소와는 달리, 생활의 효율성을 제고하기 위해 오히려 동물성 식품섭취를 늘릴 것을 주문했던 것이다. 이는 인체에 무해한 범위 내에서 최대한의 비용절감을 꾀하기 위해 식물성 식품의 효능을 재조명하고 쌀대용품 개발에 골몰하던 의학계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고려할 때 일견 돌출적인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메이지 초기 이래 소위 “문명개화”의 상징이었던 육식과 유제품 등에 드리워진 긍정적인 문화적, 과학적 의미는 꽤 뿌리 깊은 것이었다. 여성운동가이자 작가인 요사노 아키코(與謝野晶子)는 물가상승이 고조되어가고 있던 1910년대 중반에 쓴 한 에세이에서 일본인은 의복과 주거에 드는 비용을 줄이면서라도 식비를 늘려서 현대적 생활을 영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與謝野晶子, 1926: 25-27). 그리고 실제로도 그 이후에 전개된 상황은 의학전문가들이 제시했던 절미, 대체식 장려 등의 가이드라인과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나아갔다. 즉, 이 시기의 바로 직후인 1920-30년대에 걸쳐 식품산업과 도시 식문화 양 측면에서 쌀과 육고기, 유제품의 소비는 급격히 늘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물론 이는 “식량문제”의 대두 이후에 일본정부와 조선총독부가 식민지 조선에서 적극적으로 추진한 산미증식 및 축산업장려정책을 기반으로 대규모로 이입된 식민지 농축산물이라는 풍부한 “공급”을 통하여 가능해진 변화였다(眞嶋亜有, 2002: 225-6). 주식개량 및 절미, 대체식에 대한 논의가 다시 표면에 떠오르게 되는 것은 전시 물자부족사태가 첨예해진 1939년 이후의 일이었다.
5. 맺음말
1920년대 전반에 걸쳐 시작된 영양 및 식품과학 연구의 융성과 제도화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익숙한 영양학적 용어들, 칼로리, 단백질, 탄수화물, 무기질, 비타민 등이 식생활과 건강의 관계를 기술하는 가장 일반적인 인식틀로 자리잡도록 한 과정이기도 했다. 제1차 세계대전기의 인플레이션과 그 귀결로 발생한 쌀 소동을 통해 당시의 지식인-관료들은 먹거리 소비의 경제적 효율성 측면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새로운 학문적, 사회정책적 분야로서의 영양학은 처음부터 가장 낮은 가격으로 가장 높은 영양학적 효율을 추구하는 과제를 짊어안고 출발했다고 볼 수 있다. 1920년대의 “식량문제”로 표현할 수 있는 이런 상황은 또한 소비자(특히 가정 내에서는 여성) 개개인의 선택에 의한 식생활의 합리화를 꾀했다는 측면에서, 영양 지식의 보급과 교육이 특히 강조되었다. 애초에 식생활과 가계예산의 문제해결에 주목한 것은 생리영양학적 전문지식을 가진 의료계 학자들이었는데, 1920년대 식생활의 합리화 캠페인은 다른 분야의 전문가들도 합류하는 양상을 띠었다. 소비경제 측면에서 의식주 각 방면의 합리화를 주창한 생활개선운동은 그 대표적인 예로서, 이 캠페인의 주체들 역시 사회정책으로서의 새로운 영양학 개념에 기대고 있는 바가 컸다. 이들은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일상생활의 개선을 통해, 전반적인 삶의 질을 높이고 사회적 불안요소들을 사전에 예방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일련의 집중된 1920년대의 영양학적 노력은 어떠한 성과를 이루었을까? 1920-30년대는 특히 도시를 중심으로 상품화, 상업화된 식문화가 발달하고, 육식 소비도 이전 시기에 비해 현저히 늘어났다. 또한 1910년대 후반부터 가열차게 추진된 쌀대용식 보급운동은, 빵식 등 식문화의 다양화에는 기여했을지 몰라도 애초의 목표였던 쌀 소비 감소에는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오히려 쌀 소비는 지속적으로 증가했지만, 식민지 조선/대만에서의 쌀 조달 시스템이 정착되면서 오히려 제국내 ‘자급’을 이루기에 이르렀다. 다시 말해, 각 가정단위의 소비합리화 문제는 소위 “식량문제”의 사실상의 해결을 통해 일단은 그 사안의 시급성이 얼마간 희석되었다고 볼 수 있다. 또 한편으로, ‘식의 합리화’라는 모토는 공유하더라도, 실상 그 합리화의 내용이 결코 단일한 것은 아니었다. 가장 기본적인 영양소 최소요구량에 대한 합의도 부재한 상태에서,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통일된 식단이라는 개념 자체는 성립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의 영양학의 발달과 제도화는 그 내용 자체보다는 사회공학적이고 계량적인 인식틀과 연구방법론을 식품 및 식생활 논의에 도입하여 정착시켰다는 데 그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개개인 혹은 각 가정의 식탁의 합리화의 문제가, 국민 전체의 신체적 건강과 자원의 효율적 이용, 더 나아가 사회불안과 소요를 미연에 예방하는 이데올로기적 측면으로까지 확장되었던 최초의 계기가 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누카다와 모리모토의 사례가 단적으로 드러내듯, 이들이 제시한 “합리적 식생활”의 내용은 상반된 내용을 담고 있기도 했다. 하지만, 구체적 방안의 내용적 차이보다 중요한 지점은, 이들 주장이 당시 “식량문제”로 명명되고 중산층의 생활난으로 감지되었던 사회현상을, 각 가정이 자발적인 합리적 식품소비를 통해 극복해나갈 것을 요청한다는 공통된 목표를 지향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누카다가 강조한 사회양극화 경향 및 중산층 위기의 극복이라는 과제는 모리모토가 국민전체의 “표준계급”으로서의 중류계급이 중심이 되어 생활 안정을 꾀해야한다고 역설한 것과 그 궤를 함께 했다(森本厚吉, 1921: 8). 그리고 이들은 이러한 국가적 위기상황을 중류층 일상생활의 안정과 안전을 추구함으로써 극복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 해결책은 사회경제적 지식과 의학지식을 절묘하게 결합시켜 매일의 식생활을 합리화하는 것, 구체적으로는 단백질, 칼로리 및 단위가격의 3요소를 최적의 비율로 조화시킬 수 있는 합리적 소비주체를 길러내는 데 있었다. 그리고 그 객관적 계량치 및 표준수치의 산출 및 전파는 1920년대에 획기적으로 제도화, 체계화되기 시작한 영양학적 지식을 필요로 했음은 물론이다. 이러한 경험과 제도적 정비를 기반으로 “전시국가총동원법”(1938)하에 사회공학적 식생활의 “합리화” 방안이 전사회적으로 확장된 사례는 차후의 연구과제로 남겨두고자 한다.
Notes
생명과 신체의 생존과 번영에 몰두하는 이러한 새로운 근대권력은 동시에 그 생명을 “죽일권한”(right of death), 즉 죽음정치(thanatopolitics)를 배제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은 특히 강조될 필요가 있다. 푸코 자신도 경고했듯이, 권력에 있어 생명을 관리하는 능력이 결정적이 된 만큼, 다른 생명을 파괴하는 행위, 즉 전쟁은 전례없이 잔혹해졌고 “대량학살은 필수적이 되었다”.
쌀 소동에 관한 대표적인 연구로는 교토대 인문과학연구소 쌀 소동 연구반이 1959년부터 1962년에 걸쳐 출간한 井上清, 渡部徹 編, 『米騒動の研究』 (東京: 有斐閣, 1959-1962) 전 5권이 있다. 영어권 연구로는 Michael Lewis(1990)를 참조.
「人は殖えるも食料足らず」, 『大阪朝日新聞』, 1926.5.7.
「人口食糧問題調査會官制」, 『国民新聞』, 1927.3.31.
1939년에 출간된 판본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비슷한 내용과 구조를 갖고 있다. 본문에서는 1920년의 개정판을 주 분석대상으로 삼았다. 또한 이와는 별도로 누카다는 1926년에는 체신성의 의뢰를 받아, 내무성 위생국 지침서와 비슷한 50쪽 가량의 짧은 지침서를 출간했다(額田豊, 1926b).
누카다는 정확한 출전을 밝히지 않았지만, 다음의 서적을 참고했으리라 추정된다. Cross, F. J., How I Lived on Threepence a Day and What I Learned from It: With Chapters on the A.B.C. of Cheap and Good Foods, Their Cost and Comparative Value (London: Richard J. James, 1912). 크로스는 책 서두에서 “건강과 효율성에 있어 지장이 없도록 하면서 하루 3펜스로 살아갈 수 있을까?”라는 질문은 던진 후, 자신의 경험을 통해 제철음식을 다량으로 구입하는 방법으로 “최소한의 비용으로 최고의 영양가치”를 추구함으로써 그것이 가능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가령 렌틸콩, 감자, 대추 등을 풍부히 사용한 샘플메뉴를 제시한다. 누카다는 크로스의 샘플 메뉴를 1915년 초판에 부록으로 번역하여 실었다가, 1920년의 개정판에서는 일본인에게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해서 삭제했다고 밝혔다(額田豊, 1920: 서문).
직업군별로 생활난의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가장 고통을 겪고있는 계층은 대략 월 150엔 이하의 임금을 받는 사람들이라고 주장한다(額田豊, 1920: 8-19).
누카다는 치사와 스이젠지나를 서양 야채인 양상추나 양배추와 필적하는 일본 재래종으로 언급했다. 하지만 이들 야채은 사실 유럽과 열대아시아 지역이 원산지로, 후자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오랜 기간 동안 열도에서 재배되었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므로 엄밀한 의미에서의 일본 재래종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누카다는 당시 서양식 식습관을 추종하는 세태에 대한 반발심을 감추지 않았고, 따라서 메이지 시기 이전의 식재료나 습관을 본래 “일본의 것”으로 간주한 것으로 보인다.
누카다가 이용한 영양소섭취량의 기준은 단백질 30-100g, 지방 10-20g, 탄수화물 450-500g이다. 단백질 기준의 최소치를 30g으로까지 낮춘 것이 특이하다(額田豊, 1920: 101).
각 식재료 그림의 크기는 그것의 가격의 반영한다고 한다. 즉, 크게 그려진 생선이나 소는 그만큼 같은 영양소를 얻기 위해서 더 높은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가이가 제시한 계산방법은 오늘날 상식적으로 알려진 방식과 유사하다. 단백질, 탄수화물, 지방 각각의 섭취량을 4.1, 4.1, 9.3으로 곱하면 칼로리 수치를 도출할 수 있다. 그는 이렇게 얻은 총칼로리량에서 불소화물을 감안하여 10퍼센트를 제하면 정확한 칼로리량을 얻을 수 있다고 덧붙였다.
나가이는 정확한 출처는 밝히지 않고 “신뢰할 만한 서양학자”의 연구에서 도출한 수치라고 말한다. 그 당시 가장 광범위하게 이용된 기준은 포이트의 독일 버전과 애트워터(Wilbur Olin Atwater)의 미국버전이었는데, 나가이는 구미남성 평균 체중 70kg을 일본남성 평균 체중 49-52kg에 맞추어 조정한 수치를 이용했다. 단백질 및 칼로리는 애트워터 표준(125g, 3,500kcal)을 기준으로 삼았고, 탄수화물은 포이트 표준(500g)을 기준으로 삼았다. 그러나 지방 최소 요구량은 이 두 표준 모두에 비해 훨씬 낮은 수치를 제시했다.
1940년에 공중위생원, 체육연구소와 합류하여 후생과학연구소로 재편되었다.
그 후 가가와 가정식양연구회는1937년에 여자영양학원으로 개칭하고, 전후에는 가가와영양학원으로 재편되었다. 지금의 여자영양대학의 전신이다 (www.eiyo.ac.jp).
막말의 난학(蘭學) 혹은 전통의학 서적에서는 영양을 표현하는 데 두 가지 한자의 조합, ‘榮養’과 ‘營養’이 함께 쓰였고 메이지 시기에는 후자의 쪽이 더 빈번히 쓰였다고 한다. 그러나 1920년대 국립영양 연구소 설립 이후부터는 의학서적이나 일반출판물 모두에서 전자가 우세를 점하기 시작했다. 『日本国語大辞典』, 표제어 “榮養”; 한편, 한국어에서는 전자로, 중국어에서는 후자로 한자 표기방식이 정착되었다.
「いよいよ開設される我國最初の食養研究所:官立榮養研究所に対立して食糧問題の解決に」, 『東京朝日新聞』, 1926.11.25.
1920년대 독일에서는 “Diät”라는 말이 붐을 일으켰는데, 특히 “의사의 지도에 따른 식이요법”이라는 의미로 쓰였다고 한다. 독일 농업사연구자 후지와라 아츠시는 이에 대해 건강증진에 대한 소비자들의 욕구와 건강한 인구를 창출하려는 복지국가의 관심이 수렴된 결과물로 설명한다(民衆史研究委員會, 2014: 62).
역사학자 나리타 류이치는 쌀 소동 이후의 1920년대에 등장한 “사회개조”의 흐름을 크게 네 가지로 구분했다.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 사회주의운동의 새로운 진전, 내셔널리스트 그룹의 조직,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러한 모든 사회개조의 요구에 대응하기 위하여 중앙 혹은 지방정부 차원에서 내놓은 사회정책이 그것이다(成田龍一, 2007: 104-105).
문화 생활의 가장 대표적인 상징은 소위 문화주택이었다. 핵가족이 편리하고 간편한 집에서 생활한다는 이미지를 상정하고 있는 이러한 문화주택은, 특히 관동대진재 이후 화이트칼라 도시 중상층에게 이상적인 주택모델로 여겨졌다고 한다(南博, 社會心理研究所, 1987: 250-252).
두 번째 및 세 번째 욕구, 즉 지위/체면 및 편의상의 욕구는 의식주 생존에 관한 욕구 바로 다음에 오는 항목들, 가령 “조명과 난방, 교육, 사회, 자선, 건강, 여가, 저축(보험)” 등을 포함한다.
“사치”의 욕구와 “지위/체면 및 편의상의 욕구” 사이의 구분은 그리 명확해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모리모토는 사치의 부정적인 효과를 특히 강조함으로써 그것을 “효율성”의 개념적 대극점에 두었다. “사치가 개인에게 미치는 효과는 성실과 청렴의 정신을 저해하고, 가계경제의 낭비를 초래하여 건강을 손상시키는 데 있다. 사치가 사회에 끼치는 영향은 다음과 같다: 국부 창출 능력의 저하, 상품가격 인상, 수입품의 증가, 사회적 안정에 부정적 영향. 이들은 분명 경제적 안녕에 해를 끼친다”(Morimoto, 1918: 17-18).
모리모토의 조사에 따르면 일본인들이 두 번째로 많이 소비하는 야채가 무며, 가구당 연간 평균 소비량은 238개, 하루당 0.8개라고 한다. 그는 생활수준이 높을 수록 다쿠앙즈케 소비량이 적어진다는 점을 관찰했다(森本厚吉, 1921: 186-187).
맥컬럼은 식품성 식품 혹은 동물성 식품만으로는 최적의 영양을 공급할 수 없다고 강조한다. “우유를 제외한 다른 동물성 식품은 식물성 식품의 영양적 결핍을 완전히 보충할 수 없다.” (McCollum, 1918: 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