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일본의‘병원’: 용어의 도입과 개념형성을 중심으로*
“Byoin” in Modern Japan: Focusing on the Terminological Introduction of “Hospital” and the Complex Formation of Its Conce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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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This paper aims to clarify when the term of Byoin (病院, hospital) was introduced and how its concept was developed in modern Japan. The word “Byoin” was introduced in Japan in 1787 for the first time, but it had not been in use until early 1860s. Instead, various medical institutions performing the functions of modern medical facilities, such as Yojosho (養生所, A place for preserving health), Shijuku (私塾, private school), called by traditional names as ever. Japanese intellectuals already adopted the word Byoin and the concept of western hospital in early 1860s when their national delegates were dispatched to Europe to revise the treaties forged with western powers. Japanese translations of hospital appeared in English-Japanese/Japanese-English dictionaries published in the 1860s. For instance, the word Byoin (hospital in Japanese) was first published in a dictionary published in 1867 and unclearly connected to the words, hospital, infirmary.
This paper will argue that the concept of Byoin was sophisticated through Meiji government's efforts to implement reforms distinguishing medical facilities based on their capacity of inpatients and quality. The first medical law (醫制, Isei) proclaimed by the Meiji government in 1874 articulated regulations for a hospital in eight different articles. The government established hospitals in various parts of the country, following its newly established modern medical care policies. However, in this process, Iin (醫院, hospital/clinic), another term for “hospital” appeared. Regional differences and financial issues made standardizing the concept of a hospital even more difficult. In response to the widely embedded confusion, the Japanese government made an effort to clarify the concept of a hospital, setting up provisions regarding the size of medical facilities. As a result, the word Byoin finally came to be used for a hospital with more than ten beds, while a clinic with beds below ten was called Shinryojo (診療所, clinic). On the other hand, Iin meant a medical facility less qualified than a hospital since 1933 when Japanese government made a harder restriction on the usage of Byoin.
1. 들어가는 말
현행 한국 의료법에서는 30병상 이상, 일본 의료법에서는 20병상 이상의 입원시설을 갖춘 의료기관을 병원이라고 일컫는다. 시설의 규모에 따라 병원, 의원, 진료소 등으로 구분하기도 하지만, 통상적으로 의료기관을 지칭할 때 병원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병원이 기능하기 위해서는 의술을 행하는 의사가 있어야 하고, 의사를 찾아오는 환자가 필요하다. 의사와 환자는 치료하는 자와 치료받는 자의 관계를 형성하지만, 동아시아에서는 의술을 행하는 의사의 역할이 중요하게 여겨진 만큼 의술이 행해지는 공간에 대해서는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따라서 병원이라는 의료공간에 대한 필요성을 인식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그러나 일본에서 병원의 연원을 따질 때에는 훨씬 시대를 거슬러 올라간다. 그 기준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일본에 서양인 의사와 서양의학기술이 처음 들어온 시기를 병원의 기점으로 삼는 경우이고, 또 하나는 근대병원의 큰 특징이기도 한 질병을 치료할 목적으로 환자를 수용하여 치료한 것을 병원의 기점으로 삼는 경우이다.
먼저 첫 번째의 경우에 해당하는 것은 1557년 규슈 오이타현(大分縣)에 세워진 알메이다 병원이다[1,]. 이는 예수회 선교사들의 포교활동의 일환으로 세워진 것으로, 포르투갈의 선교사면서 의사였던 루이스 데 알메이다(Luis de Almeida)가 세운 것이다. 이듬해인 1558년에 의학교가 병설되어 의사를 양성하기도 하였고, 1559년에는 내과병동 8실(16명 수용)을 증축하는 등 의료시설의 확충을 꾀하였다. 예수회의 포교활동의 일환으로 세워졌기 때문에, 음식물, 숙박, 의료를 무상으로 제공하는 시료(施療)의 형태로 운영되었다는 특징이 있다(福永肇, 2014: 40-42). 당시에 흔치 않았던 외과수술을 행하고, 식사요법 등의 생활지도 및 순회치료 등을 실시하여 규슈 바깥지역까지 명성을 떨쳤다고는 하나 에도(江戶) 막부의 금교정책으로 그 명맥은 끊어졌다.
두 번째의 경우에 해당하는 것은 1722년 에도에 세워진 고이시카와 양생소(小石川養生所)이다. 에도시대(1603-1867)의 의학은 한의학적 지식에 기초한 내과적 치료가 주류를 이뤘고, 환자는 자택에서 요양을 하고 의사가 왕진을 가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일반 서민은 약재를 이용하여 병을 치료하였고, 귀족, 사무라이 등 사회적 지위가 높은 자, 혹은 상업을 통해 부를 축적하여 경제적으로 윤택한 자들이 주로 의사를 요청했기 때문이다. 즉, 의사는 환자를 위한 의료공간을 설치할 필요도 의무도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시스템이 주류였던 에도사회에 의료비를 제공할 수 없는 빈민환자들을 수용하기 위한 공간이 탄생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고이시카와 양생소이다. 에도막부의 8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德川吉宗, 1684-1751, 재임기간 1716-1745)는 의료 행정의 일환으로 약초를 조사하게 하고, 주요도시에 약초원(藥草園)을 세웠는데, 양생소는 그 안에 설치되었다. 이곳은 의사가 상주하고, 환자를 일정한 공간에 수용하고 치료하는 공간[2,]이라는 의미에서 현재의 병원의 개념과 유사하다고 평가되며, 1722년부터 에도말기까지 꾸준히 시설을 유지하여 국가의 의료기관으로서 자리매김을 했다는 점도 일본 최초의 병원의 기원으로서 의미를 더해주는 부분이라고 하겠다[3].
그러나 이 두 의료공간은 모두 빈민 치료를 위한 시료(施療)를 행했다는 점에서 근대 병원의 개념과 차이를 보인다. 근대병원의 특징은 환자를 수용하는 시설을 갖춘 곳을 일컫는다. 아울러 특정계층이 아닌 대중 다수로 그 대상을 확대하여 치료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또한 일본의 경우 근대서양의학을 기초로 한 의료를 실시하는 곳이라는 의미도 포함된다. 일본에서 이러한 특징을 충족시키는 의료공간이 등장하기 시작하는 때는 에도시대 후기부터라고 볼 수 있다. 근대적인 형태의 의료시설에 가까운 것으로 평가되는 것 중의 하나는 1824년 나가사키 교외에 세워진 나루타키주쿠(鳴滝塾)이다. 지볼트(Philipp Franz Balthasar von Siebold, 1796-1866)는 사숙(私塾)과 진료소를 세워 난학(蘭學)에 기초한 의학(외과, 산과, 안과), 박물학, 민속학, 지리학 등을 가르치면서 진료소를 운영하였다(福永肇, 2014: 59). 임상교육의 일환으로 진료소를 운영하면서 환자를 치료했기 때문에 근대적인 의료시설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이와 더불어 1861년에 네덜란드 해군군의로 일본에 온 폼페(Johannes Lijdius Catharinus Pompe van Meerdervoort, 1829-1908)가 나가사키에 세운 나가사키 양생소(長崎養生所)가 이러한 개념을 설명해주는 좋은 예이다. 나가사키 양생소는 본격적인 의학교육과 함께 병실, 수술실, 격리환자실, 약품·기계실 등 근대서양식 병원의 공간구조를 갖추고, 기능을 수행하였다는 점에서 근대서양의학에 기초한 본격적인 의료시설로 볼 수 있다. 이곳은 근대서양의학을 기초로 한 공간으로서는 처음으로 환자를 수용하는 입원시설을 확보하고 있었는데, 치료와 입원은 당시 의학교육이나 빈민들을 위한 시설로 설립된 곳과는 달리 유료로 운영되었다(福永肇, 2014: 68).
위에서 소개한 의료공간은 근대병원이라는 용어가 함축하고 있는 의료의 공간적 요소 및 기능적 요소를 일부 혹은 전부를 충족시키는 곳이었다. 그러나 그 시설의 명칭은 OO양생소, OO사숙 등 기존에 사용되던 용어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즉, 메이지 신정부가 수립된 이후 법조항에 등장하는 ‘병원’이라는 용어는 아직 사용되지 않았던 것이다. 서양근대의학이 일본에 도입되는 과정에서 근대의학에 기초하여 환자를 수용하는 의료시설이 만들어졌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지만, 위와 같은 예에서 볼 수 있듯이 근대적인 의료시설은 그보다 더 일찍부터 만들어졌으나 그것을 지칭하는 명칭이 병원이 아니었을 뿐이었다. 즉, 어느 시기를 기점으로 병원이라는 용어가 등장하면서 기존의 명칭을 대체한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은 의료시설을 지칭하는 통상적인 용어로 사용되는 ‘병원’이 일본에서 처음 등장한 것은 언제이며, 어떻게 정착해 나아갔던 것일까?
본 연구에서는 병원이 의료시설을 지칭하는 용어로 처음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언제인지, 그리고 이후 근대일본사회에서 ‘병원’이라는 용어가 어떻게 정착해 가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그 과정은 용어의 도입이라는 외형적인 문제를 다루는 것을 넘어서서, 근대일본사회에서 ‘병원’을 어떻게 규정하고 있는지를 살펴봄으로써 내용상의 변화를 조망해보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이를 밝히는 작업은 일본의 근대의학과 근대적 의료시설의 정비 및 정착과정을 알아보기 위한 중요한 기초작업이 될 것이다. 동시에 한국의 그것을 규명하는 데에도 필요한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초창기 한국 근대의학은 개항 이후 서양근대의료기관 및 의학교육의 도입으로 시작되어 식민지시기에 서양근대의학의 확대기를 거치며 형성되었다. 그 과정에서 일본식의 용어와 시스템이 다수 도입된 것이 현실이다. 따라서 본 연구는 근대일본에서 형성된 의료기관 및 시설에 관한 용어와 관련규정을 정리, 분석하여 그 개념을 파악하는 것으로 근대일본의 의학사 및 한국을 포함한 동아시아 근대의학사의 형성과 발전과정을 이해하기 위한 단초를 제공하는 연구라고 할 수 있다.
2. ‘병원’ 용어의 사용
근대일본에서 병원이라는 용어가 사용된 시기를 두고 의견이 분분하다. 그 중에 설득력을 얻고 있는 주장은 1868년부터 1869년에 일어난 보신전쟁(戊辰戰爭) 때에 사용했다는 설로, 보신전쟁 중에 전쟁에 참가한 군인들의 치료를 위해 각지에 설치된 의료시설에 병원이라는 깃발을 세워 환자를 수용하고 있는 시설임을 밝힌 데에 기인한다고 알려져 있다[4,]. 그 중에서 가장 큰 야전 병원이 도쿄의 이즈미바시(和泉橋)의 도도야시키(藤堂屋敷)의 자리에 설치되었고, 후에 의학소 ‘가(仮)’병원이 설치되었는데, 이것에 요코하마 군진병원의 기능이 이전되면서 대병원(大病院)으로 불리었다. 그러한 과정에서 ‘병원’이라는 용어가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5,]. 다른 일례로, 보신전쟁 때 도쿠시마번(德島藩) 아와노쿠니(阿波國)의 번의였던 세키 간사이(関寛斎, 1830-1912)는 현재 일본의 동북지방을 지칭하던 오우(奧羽)지방에 오우출장병원(奧羽出張病院)을 개설하고 그곳에서의 활동을 수기로 정리하여 기록하였는데, 이 일기에서 병원용어의 사용과 기능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6]. 이처럼 보신전쟁 때 각지의 전장에서 부상당한 병사를 수용하고 치료하는 의료시설을 지칭하는 용어로 ‘병원’을 사용했다는 사실에서 그 용어는 메이지시기 이전부터 존재하였고, 그 개념이 정립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일본 역사 속에서 처음 병원이라는 용어가 등장한 것은 1787년에 출판된 모리시마 주료(森嶋中良)의 저서인 『홍모잡화(紅毛雑話)』 1권(卷之一) 속의 ‘병원’이라는 항목에서이다. 이 책에서는 ‘명나라에는 가스토후이스(gasthuis, ガストホイス)라는 집이 있어, 명나라 사람들은 이를 병원이라고 번역한다’고 밝히는 과정에서 병원이라는 용어가 처음 등장하였다[7,]. 즉, ‘병원’은 중국에서 처음 번역어로 사용되었고, 이 시설을 일본에 소개하는 과정에서 그 용어가 유입된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용어 설명과 함께 시설면의 특징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는데, ‘외국에서 오는 사객(使客)과 나라 안의 병자는 귀천(貴賤) 없이 이곳에 머무르며, 의사, 간호인, 침구 등이 마련되어 있다’고 설명하고 있어, 의료시설로서의 요소를 갖춘 공간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森嶋中良, 1787: 15-16; 金久保好男, 1999: 225).
1787년에 발간된 『홍모잡화』에서 병원의 의미와 기능에 대한 설명이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1장에서 살펴본바와 같이 책이 출판된 이후에도 이와 같은 기능을 가진 의료시설을 지칭하여 ‘병원’이라고 부르지 않고, ‘양생(養生)’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의미와 기능을 전했다. 『홍모잡화』 이후 일본에서 병원이라는 용어가 의료시설을 지칭하는 의미로 보급되어 사용되었다면, 1860년대 초에 네덜란드 군의인 폼페가 세웠던 의료시설을 병원이라고 명명해도 충분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시설은 여전히 양생소(養生所)라는 이름으로 의료시설임을 알렸다. 이에 비추어 생각해보면 1861년 나가사키 양생소가 설립될 당시에는 ‘병원’이라는 용어는 존재하기는 했으나, 아직 일본 사회 내에서 의료시설을 지칭하는 용어로 정착하지는 못했던 것으로 추론해 볼 수 있다.
1) 분큐견구사절(文久遣歐使節)과 ‘병원’
그렇다면 일본에서 환자를 수용하는 시설을 갖추고 의료를 행하는 공간이라는 의미로서 ‘병원’이라는 용어와 개념이 형성되고 수용된 것은 언제라고 볼 수 있는가? 그 가능성 중의 하나로 분큐견구사절(文久遣歐使節)의 활동을 들 수 있다. 분큐견구사절은 제1회 견구사절(遣歐使節), 개시개항연기교섭사절(開市開港延期交涉使節)로도 불리며, 1862년에 유럽에 파견된 사절단을 지칭한다. 정사(正使) 다케우치 야스노리(竹內保德)를 비롯한 총인원 36명이 도쿄의 시나가와항(品川港)을 출발하여 나가사키, 홍콩, 싱가포르 등을 거쳐 말타, 프랑스, 영국, 네덜란드, 프로이센, 러시아 등에 체류하면서 개항, 개시를 연기하는 각서를 조인하는 것이 사절단의 주된 임무였다. 주로 20대로 구성되어 있던 단원들은 서구 문물에 대한 관찰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사절단의 단원 중에는 난학자이면서 교육가, 계몽사상가, 그리고 게이오기주쿠(慶應義塾)의 창설자로 잘 알려진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사쓰마(薩摩)번의 시의(侍醫)였고 후에 메이지정부의 외교관, 정치가로 활동한 마쓰키 고안(松木弘安)[8,], 난학자이면서 교육가인 미쓰쿠리 슈헤이(箕作秋坪)도 포함되어 있었다. 마쓰키는 이들과 함께 유럽의 의학 및 의료 등을 관찰하고 다수의 견문기를 남겼는데, 견문기에는 병원에 관한 기록도 포함되어 있다[9,]. 그리고 후쿠자와는 그의 자전에 유럽에서 환대를 받은 경험을 적으며 병원을 거론하기도 하였다. 병원에 가면 해부하는 것을 보여준다고 하고, 그가 유럽에 머무는 동안 작성했던 일기인 『서항기(西航記)』(1862)에서 어느 병원을 방문하였는 지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언급하는 등 그가 병원이라는 공간에 대한 이해와 함께 시설면에 크게 관심을 두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후쿠자와는 홍콩, 프랑스 파리, 영국 런던, 프로이센 베를린, 러시아 페테르부르그 등에서 방문한 병원을 언급하면서, 남녀의 구분 및 병실의 개수, 병실의 베드 수 등 병원시설에 대해 구체적으로 묘사하였다. 이와 함께 농아학교[養啞院], 맹아학교[養盲院]와 정신병원[養癲院]의 개념과 시설에 대해서도 설명하였다(靑柳精一, 2011: 50-51)[10].
특히 후쿠자와는 『서양사정(西洋事情)』(1866)에서 프랑스의 병원과 프랑스, 러시아, 영국의 빈원(貧院)의 상황에 대하여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는데, 그 내용을 간략하게 소개하도록 하겠다[11].
병원
병원은 의약을 얻을 수 없는 빈민을 위해 설립한 곳이다. 정부가 만든 것이며, 사적으로 회사를 결성하여 만든 것도 있다. 영국 및 합중국에 이러한 것이 가장 많은데, 사적으로 만든 병원은 조직의 왕공귀족, 호상(豪商) 등을 설득하여 기부를 청하고, 병원이 만들어진 이후에도 매년 일정한 기부금을 모아 병원을 유지한다. 또한 병원에 입원하는 자는 극빈자는 전혀 비용을 내지 않지만, 어느 정도 재산이 있는 자는 빈부에 따라 의료비를 지불한다. 각국의 도시부에는 없는 곳이 없다. 병원의 법은 각국이 대동소이하므로, 다음의 프랑스 병원의 법을 제시한다.
파리에는 크고 작은 병원이 13곳이 있다. 병원마다 의사는 각각 8명에서 15명, 가장 큰 병원에는 30명이 있다. 간호원[介抱人]은 남녀의 간호원이 있는데, 각 성별에 따라 병자를 담당하며, 환자 50명에 간호원 10명이 따르는 것이 기준이다(중략).
13개 병원이 각지에 존재한다고는 하나, 왕궁의 근방에 관공서가 있어 관에서 관리를 두고, 모든 병원을 지배한다. 따라서 도시의 인민, 병원에 가고 싶은 자는 먼저 역소에 가서 관의 면허를 받은 후에 병원에 들어간다. 병원의 비용은 모두 정부에서 나오는 것은 아니다. 처음에 병원을 세울 때에는 도시에 명령하여 각 호(戶)에서 빈부에 따라 비용을 내고, 그 후에 병원을 수리하거나 병자에게 주는 약품, 의복값 및 일하는 사람(婢僕)의 급료 등의 비용은 다음의 법에 따라 비용을 모은다(후략).
병원과 같이 소개하고 있는 빈원은 별칭 및 용어, 수용대상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빈원은 노원(老院), 유원(幼院)이라는 별칭이 있고, 이를 총칭하여 빈원이라고 불렀고, 노인이나 어린이 중에 신체불구한 자, 허약한자, 빈곤하여 생계를 꾸리기 힘든 자들이 수용대상이었다는 점, 빈원을 건설하는 때에는 병원의 개원과 동일한 법령을 적용하도록 규정했다는 점 등이다(靑柳精一, 2011: 54-55).
이러한 유럽의 사례에 따르면 병원의 조건은 빈민을 위한 의료시설로, 정부가 개원하는 것이 일반적이며, 일부는 사적으로 개원한 병원도 포함하는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병원의 운영은 정부의 지배하에 두지만, 사적으로 만들어진 경우에는 회사조직의 지도층에게 기부금을 받아 이 기부금으로 운영하되, 최극빈층이 아닌 경우에는 의료비를 징수하는 것을 기본 방침으로 하고 있다. 1860년대 초에 일본에 설립된 의료시설을 보면, 정부 주도로 근대서양의학에 기초한 공간에 환자를 입원시켜 치료를 실시하고, 그 과정에서 유상 및 무상치료가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서구의 병원의 개념을 수용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2) 사전에 나타나는 ‘병원’의 번역어
1862년에 사절단의 일원으로 서양을 견문하고 온 사람들 중에는 난학을 배우고 영어를 습득한 자들이 다수를 차지했다. 따라서 서양에서 처음 접하는 공공기관을 일본어로 번역하고, 일본어에 대응시키는 작업도 같이 이루어졌다. 병원 역시도 그러한 예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일본에서 출판된 사전에서는 병원을 지칭하는 ‘hospital’을 어떤 의미와 대응시켜 번역하였을까? 이를 위해 먼저 1860년대를 전후한 시기에 일본에서 발간된 사전류에는 어떤 것이 있었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일본에서 발간된 첫 영일사전은 에도막부직할의 양학연구교육기관인 요가쿠시라베쇼(洋學調所)에서 발행한 『영화대역수진사서(英和對譯袖珍辭書)』(1862)[12,]이다. 초판은 1862년에, 개정증보판은 1869년에 발행되는데, 개정증보판은 두 종류가 확인되었다[13].
1860년대에는 일영사전도 다수 출간되었다. 일본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간행된 영일·일영 단어집으로 평가되는 『영어전(英語箋)』(1857)[14]은 총 2권으로, 약 1,600여 단어가 수록되어 있다. 그러나 원저의 저자인 메드허스트(W. H. Medhurst, 1796-1857)가 실제로 일본에 왔다는 기록은 없기 때문에, 그가 일본에 와 본 경험이 있는 네덜란드 사람 등으로부터 일본어 지식을 전해들은 것을 기초로 사전을 편찬한 것이라고 평가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어전』이 발행된 6년 뒤에 『영어전후편(英語箋後篇)』(1863, 전4권)이 발행될 정도로 당시 유효한 사전 중의 하나였다.
이 외에도 일본어의 로마자 표기의 근간을 마련한 사전으로 평가되는, 미국 장로회의 의료선교사이며 의사였던 헵번(J. C. Hepburn, 1815-1911)이 직접 편찬한 『화영어림집성(和英語林集成, A Japanese and English Dictionary: with an English and Japanese Index)』(초판 1867년)[15,]이 있다. 그리고 일본어를 영어로 번역한 것은 아니지만 일본학자면서 중국주재 프랑스공사관이었던 레옹 파제스(Léon Pagès, 1814-1886)가 일본어를 프랑스어에 대응한 ‘Dictionnaire Japonais-Français’(1868)[16] 등도 발행되었다.
일본에서 출판된 각각의 사전에서는 병원을 어떻게 번역하고, 대응시키고 있는지 위에 언급한 사전을 중심으로 시기순으로 살펴보도록 하겠다.
① 『영화대역수신사서(英和對譯袖珍辭書)』(1862) 및 『개정증보 영화대역수신사서(改正增補 英和對譯袖珍辭書)』(1869), 『和譯英辭書』(1869)
『영화대역수신사서』의 1862년 초판과 개정증보판에는 각각 hospital이라는 단어가 실려 있는데, 이에 대응하는 일본어 번역어는 병원과 빈원이었다. 이외에도 관련단어인 dispensary와 infirmary도 찾아보았는데, 초판과 개정증보판 모두에 실려 있고, dispensary는 고유명사가 아닌 ‘약제를 가난한 자[貧人]에게 베푸는[施] 곳’으로, infirmary는 ‘병원’에 대응되었다.
② 『영어전후편(英語箋後篇)』(1863, 전 4권)
1857년에 출판된 『英語箋』의 원본은 확인할 수 없으므로 1863년에 출판된 『영어전후편』을 기준으로 살펴보도록 한다. 각 권에서 의학과 약에 관련된 단어들이 다수 발견되었으나, 병원, 빈원 등의 일본어 단어는 수록되어 있지 않았다. 대신 hospital에는 객사(客舍)라는 일본어 단어가 대응되었다[17].
③ 『A Japanese and English Dictionary: with an English and Japanese Index (和英語林集成)』(1867)
상술하였듯이 이 사전은 일본어 로마자 표기의 근간을 이루는 사전이다[18]. 이 사전에서 일본어 단어로서는 처음으로 병원이 수록되었는데, ‘BIYO-IN ビヤウ井ン, 病院, n. A hospital, infirmary’로 표기하였다. 그리고 hospital, infirmary는 각각 병원의 로마자 표기인 ‘Biyo-in’으로 일본어 의미를 표기하였다. 다른 사전에서 hospital의 일본어 번역어로 대응되던 빈원, 당시 의료시설을 지칭하던 양생소(養生所), 그리고 메이지 시대에 의료시설을 지칭하는 용어로 병원과 함께 사용되던 의원 역시 수록되어 있지 않았다. 대신 양생(養生)은 ‘Fostering, or preserving health, the care of one’s health‘로 설명하고 있다.
④ Dictionnaire Japonais-Français (1868)
이 사전은 편찬하는 과정에서 배열방법[19]이 변경되어 알파벳순서로 배열되어 있지 않고, 발음표기도 다른 사전과는 다르다. 이 사전에는 병원이라는 일본어 단어는 수록되어 있지 않다. 대신 병가(病家)라는 단어가 hôspital의 의미로 풀이되었다.
에도 말기부터 메이지 초기에는 위에 언급한 사전류 이외의 다른 사전도 존재한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1860년대에 출판된 사전류를 중심으로 일본어를 영어나 프랑스어로, 또는 영어를 일본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hospital’과 ‘병원’, 그리고 관련어휘가 각각 어떠한 의미와 연결되는지를 살펴보았다. 이 과정에서 나타나는 것은 위의 표에서 확인되는 것과 같이 ‘hospital’은 대부분 ‘병원, 빈원’에 대응되고, ‘infirmary’는 ‘병원’에 대응되었다는 점이다[20]. 그리고 메이지 유신 직전인 1867년에 편찬된 햅번의 일영사전에서 처음으로 ‘병원’이라는 일본어 어휘가 등재되었으며, 이를 ‘hospital’과 ‘infirmary’와 대응시키면서 ‘병원’이라는 일본어 단어에 대한 명확한 규정이 처음으로 형성되었다. 즉, 환자의 치료뿐만 아니라 구빈원의 의미로도 대응되었던 병원이 1867년에는 환자를 치료하는 의료시설로서의 의미가 강조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개념 정리는 ‘병원’이라는 일본어 단어를 영어로 설명하는 경우에만 성립한다. 1880년대 후반에 간행된 영일사전에서는 ‘hospital’의 의미를 ‘병원, 빈원, 시제원(施濟院)’으로 표현하여 1860년대 출판된 사전의 그것과 큰 차이를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을 근거로 생각해보면, 영어의 ‘hospital’은 병원뿐만 아니라 빈원, 시제원 등 경제적으로 어려운 환자들을 무상으로 치료하는 곳, 사회적 약자를 수용하여 돌보는 곳이라는 의미까지 포함하는 단어[21]로 해석되었지만, 일본어의 ‘병원’은 경제적으로 빈궁한 환자라는 의미보다는 ‘환자를 치료하는 곳’이라는 의미가 강조되며 이전의 의미보다 한정적인 의미로 정착되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1862년에 출판된 『영화대역수진사서』에 infirmary에 대응되는 일본어로 ‘병원’을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보면, 『홍모잡화』를 통해 처음 병원이라는 명칭이 일본에 들어온 이래로 1860년대 초반까지 병원이라는 단어가 지속적으로 존재하였고, 의료시설을 지칭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분큐견구사절이 서구의 공공기관을 관찰하고 병원과 빈원을 나누어 설명하면서, 서구의 의료시설에 대응되는 개념을 ‘병원’이라고 지칭하면서 새롭게 의미가 부여된 것이었다.
분큐견구사절이 병원, 빈원 등의 공공시설을 관찰하고 적은 기록과, 일본에서 출판된 영일, 일영사전의 예에서 병원이라는 용어의 사용과 의미를 파악해 볼 수 있었다. 그 과정을 살펴보면, 1787년의 서적에서 번역된 병원과 19세기 중반에 일본에서 번역된 병원은 공통점도 있지만, 그 내용상, 개념상에 있어서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고 할 수 있겠다.
그보다 먼저 원(院)에 대한 의미를 정리한다면 병원의 의미가 좀 더 명확해 질 것으로 생각한다. 사절단의 기록에 나타나는 병원, 양맹원, 양아원, 양전원, 빈원 등의 예에서 살펴볼 수 있는 것처럼, 경제, 의료, 교육 등의 측면에서 국가나 단체의 보호가 필요한 사람들을 수용하여 국가의 보호아래 그들의 생활을 유지시켜주는 공간에 대하여 공통적으로 원(院)이라는 번역어를 사용했다는 점이다.
그러한 법칙에 따라 병원을 설명하는 구절과 병원이라는 용어를 살펴본다면, 영어와 프랑스어를 번역하는 과정에서 병자(病者)를 수용하는 곳[院]이라는 의미를 표현하기 위해 ‘공공의 의료기관’이라는 의미를 담아, 일본사회에 존재하기는 하였으나 공식적으로 의미를 부여받지 못했던 병원(病院)이라는 명칭을 사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1860년대 초반에 병원이라는 용어는 학자들 사이에서는 사용되고 있었지만, 아직 사회에 완전히 정착되지는 않은 상태였다. 그러나 점차 메이지 정부가 추구하려던 의료위생정책을 반영하고, 수행하는 의료기관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막부 말기부터 사용되기 시작한 병원은 점차 공식적인 용어로 자리잡아 갔던 것이다[22].
3. 법률제정과 ‘병원’의 개념 형성
1) ‘병원’ 관련 규칙의 제정
1868년 메이지 유신으로 신정부가 수립되면서 정치적인 변화뿐만 아니라 의료위생행정도 전환기를 맞이하였다. 그러나 그 변화가 유신 직후부터 순조롭게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신정부는 수립되었지만, 사쓰마번와 조슈번 등 유력 웅번들의 세력 규합체가 이루어낸 메이지 유신에 반대하는 번주들도 많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막부와 이들 세력, 특히 동북지방의 번들과 신정부의 싸움은 1년 넘게 지속되었다. 이때 신정부군이 승리하기는 했지만, 각지의 번을 없애고, 새로운 행정구역인 현을 제정한 폐번치현은 1871년에야 이루어졌다.
1870년대 초반은 조세제도, 교육제도, 징병제도 등 사회 각 분야에 새로운 체제를 도입하는 시기였다. 따라서 메이지 정부수립 초기의 수년간은 의료위생행정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한 시기였다. 당시 의료기관은 보신전쟁시기에 병사들을 치료할 목적으로 세워진 병원, 각 번을 중심으로 한 의학교 겸 번립병원, 각 지방 유지들의 각출금에 의한 병원 등 다양한 설립주체에 의해 운영되고 있었다(스가야 아키라, 1989:43-45). 본격적인 의료위생행정의 정비는 1874년에 신정부가 의제(醫制)를 반포하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의제는 문부성총괄하의 위생행정기구를 확립하고, 1872년에 반포된 학제와 관련하여 서양의학에 기초한 의학교육을 확립하여, 이를 근거로 의사개업 면허제도를 수립하는 것과 근대적 약포제도를 수립하여 의약분업제도를 확립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그것은 총체적으로 위생행정의 확실한 기초를 만드는 작업이었다(厚生省醫務局編, 1955: 6). 그러나 1874년에 반포된 의제는 총 76개조 중에 일부 조항만이 먼저 실시되었다. 그것은 제6, 7, 37, 42, 45, 71-74조의 조항에 해당하는 것으로, 6-7조는 지방의 의무(醫務)담당자 설치와 그 보고에 관한 규정, 37, 42, 45조는 의사의 자격과 처방 및 치료에 관한 규정에 해당한다. 그리고 71-74조는 매약 및 매약업자의 단속, 매약의 검사 및 판매에 관한 일련의 조항이다. 그 나머지 규정은 후에 순차적으로 적용되었다(스가야 아키라, 1989: 38). 따라서 1870년대 초반은 아직 의제에서 구상했던 규정들이 모두 적용되지는 않았던 시기였다. 의제에서 우선적으로 실시된 항목은 의사의 자격과 역할에 관한 조항으로, 그 대부분은 의사의 자격을 서양의학교육을 받은 자로 규정하기 위한 조항이었다. 이는 1872년의 학제의 반포와 함께 새로운 교육체계를 도입하는 과정과 서양의학교육을 추진하려는 움직임이 맞물린 결과였다.
의제는 병원에 관한 조항도 포함하고 있다. 이는 1873년 의제제정준비의 일환으로 지방의 병원설립상황을 파악한 것을 토대로 작성된 것이다(厚生省醫務局編, 1955: 104). 의제의 병원규정은 바로 실시되지는 않았지만, 서양의학교육을 규정한 항목에 이어서 제1의 제19조부터 제26조에 개략하고 있다. 관련조항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제19조 관비의 병원은 의학교에 속하는 것에 한한다.
제20조 의학교부속 병원은 원장 또는 부원장, 당직의사, 약국장 이하를 둬야한다. 단, 그 수는 원장, 교장에게 협의하고, 위생국 지방관의 협의에 따라 문부성이 결정한다.
제21조 원장은 공사(公私)병원 상관없이 의술개업면장(제37호)을 소지한 자가 아니면 그 직을 맡을 수 없다.
제22조 의학교부속병원의 원장은 전임 혹은 교장, 부학장을 겸하기도 한다.
제23조 원장은 공사병원 상관없이 반년마다 치료한 환자[病客]수, 치유, 사망, 병명 등의 명세표를 작성하여, 매년 두 번 2월과 7월중에 위생국 및 지방청에 제출해야 한다.
제24조 의학교에 속하는 병원비용은 지방에서 그 일부를 지급한다. 단, 입원료, 약종료는 원장, 교장, 지방관 및 위생국과 협의하고 문부성에 신청하여 이를 정한다.
당분간 입원 환자를 나누어 3등 혹은 5등으로 하여 지방의 편의에 따라 매년 상응하는 입원료를 수납한다. 아주 빈궁한 것을 증명할 수 있는 자는 비용을 지불하지 않는다. 단 이 병원은 진찰료를 받지 않는다.
제25조 하나의 부현(府縣) 또는 유지(有志)가 인민협동하여 병원을 건설하고자 할 때에는 먼저 발기인사 중에 의사, 교원의 소속, 씨명, 이력 및 회사(会社)의 방법, 자금의 연유, 유지[保続]의 목적을 적고, 학문의 과정, 병실, 약국 규칙을 첨부하여 지방관에게 제출하고, 지방관은 이것을 위생국에 협의하여 문부성에 전달하여 허가를 받을 수 있다.(중략)
제26조 매독원(梅毒院), 전광원(癲狂院) 등 각종 병원 설립 방법은 모두 앞의 조항에 기준한다[23].
즉각적으로 위의 기준에 맞는 병원이 설립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정부가 서양의학교육을 받은 의사의 개업을 촉진하는 정책을 실시하면서 각 부현(府縣)에는 의학교 부속병원, 공립병원 이외에도 사립병원이 속속 개원하게 되었다(김영수, 2015: 368-370). 내무성 『위생국연보』의 보고 중에 가장 오래된 1875년도의 병원 통계에 따르면, 병원의 총수는 전염병원과 특수병원을 포함하여 63개였고, 그 중 일반병원은 관공립과 사립을 합쳐 59개였다(猪飼周平, 2013: 58).
이들 병원은 의제에서 규정한 것처럼 허가제로 설립되었고, 그 취지는 1876년 내무성에서 각 부현에 포달한 「공립사립병원설립신청서식[公立私立病院設立伺及願書式]」(1876년 3월 31일, 內達乙43)에 의해 구체화되었다. 공립병원의 설립에 대해서는 신청요청서[伺]를 정하여 내무성의 허가를 받게 하였고, 사립병원의 경우에는 설립신청서[願]의 서식을 정하여 부현의 허가를 얻고, 그때마다 지방행정구역인 부현에서 내무성에 보고하도록 하였다. 이에 근거하여 도쿄부에서는 같은 해에 「사립병원설립원서식(私立病院設立願書式)」(1876년 6월 10일, 府達甲45)을 정하여 사립병원설립수속의 세칙을 규정하였다. 이후 지방의 위생행정사무가 정비되면서 병원설립에 관해서도 일정한 방식이 정해졌는데, 공립병원의 설립운영에 관한 비용지출은 부현회(府縣會) 또는 정촌회(町村會)의 결의를 필요로 하였기 때문에 지방자치제도의 확립과 더불어 병원의 설립에 관한 감독은 지방행정구역인 부현에서 일임하게 되었다. 이와 함께 기존의 병원설립서식은 1887년에 폐지되었다(厚生省醫務局編, 1976: 105). 즉, 1874년 의제 제정 이래 중앙정부기관이 병원 설립을 허가해주던 것에서 1887년부터는 각 지역행정단위를 중심으로 병원의 설립이 인가되는 방식으로 변경된 것이다. 이는 이후 의사의 신분, 업무에 관해 규정한 의사법의 제정(1906)과 맞물려 병원설립의 가속화를 촉진하는 요인이 되었다.
2) 병원과 의원, 그리고 진료소
지방행정구역을 중심으로 일본 전국에는 의료시설이 설립되어 가는데, 이를 지칭하는 용어로 병원, 그리고 또 다른 용어인 의원(醫院)이 등장하였다. 법규정은 ‘병원’으로 작성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의원도 꽤 높은 빈도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의원이라는 단어가 일영사전에 등재되고, 병원과 같은 의미인 hospital, infirmary로 번역되기 시작한 것은 1890년대 초이다[24]. 즉, 그 이전까지는 의료시설을 지칭하는 공식 용어는 병원뿐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시 작성된 문서나 의료시설의 명칭으로 병원뿐만 아니라 의원도 사용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1869년에 작성된 한 문서에는 병원과 의원이 동시에 등장한다. 이 문서는 야마구치번(山口藩)에서 군무관에게 작성한 문서로, 야마구치번의 상비병이 상경하는 데에 따른 조치를 적은 문서이다[25,]. 이 문서에 병원을 설명하는 항목이 들어있는데, 큰 제목은 병원에 관한 항목[病院之事]이라고 적고 있는 반면, 이를 설명하는 내용에는 ‘부대에 의원(醫院)을 설치하여 의생(醫生)을 데려오는 데에 필요한 비용을 지불하라’고 하며 의원(醫院)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또 다른 예는 1874년의 나가사키 가병원규칙(長崎仮病院規則)을 선정하는 것에 대한 문서로, ‘의원 및 육해군병원’이라고 두 용어를 동시에 사용하는 경우이다[26]. 병원과 의원 둘 다 의료시설을 지칭하는 용어지만 구별하여 사용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예는 위와 같은 단편적인 사례 이외에도 도쿄대학의학부의 예에서도 드러난다. 1877년 도쿄카이세이학교(東京開成學校)와 도쿄의학교(東京醫學校)를 합병하여 도쿄대학이 설립되면서 기존의 병원은 도쿄대학의학부 부속병원으로 개칭되었다. 그 이듬해인 1878년에 도쿄 간다구(神田區) 이즈미초(和泉町) 1번지에 부속병원이 설립되는데, 이때 이 부속병원의 정식 명칭은 ‘부속의원’이었다(東京大學醫學部創立百年紀念會·東京大學醫學部百年史編纂委員會編, 1967: 469). 이후 다시 명칭을 개칭하는 과정에서 혼고(本郷)에 있던 것을 제1의원으로, 간다(神田)에 있던 것을 제2의원으로 하는 등 이후에 의학부부속의료기관의 명칭은 수차례 변경되었다[27].
도쿄대학의학부 부속병원과 부속의원은 각각의 규칙이 마련되어 있었다. 의원규칙 및 병원규칙의 통칙(通則)에는 다음과 같은 설명이 있어 각각의 공간이 어떠한 목적을 가진 공간인지 확인할 수 있다. 통칙에는 ‘본원은 도쿄대학 의학부의 소속으로 의술강습에 도움이 되는 환자를 입원시켜 학생 및 생도에게 임상강의를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따라서 이와 같은 환자가 빈곤하여 약값을 스스로 내지 못하면 도와준다. 그러나 재산이 있는 환자는 모두 자비(自費)로 한다’고 밝히고 있다. 의원과 병원 규칙 내용이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어, 이 경우 명칭은 다르나 내용면에서는 동일한 기능을 수행하였다고 볼 수 있다[28].
그 외에 일반 공사립의료시설의 경우에도 병원과 의원은 혼재된 형태로 나타난다. 메이지 시기 전국 의료시설 리스트를 담아놓은 요람류를 찾아보면, 대부분의 의료시설은 병원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나 의원의 사용빈도수도 꽤 높게 나타난다. 관공립의 경우는 거의 병원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으나, 사립의 경우 병원과 의원이 혼용되어 나타나기 때문에 그 예를 통해 일정한 규칙성을 발견하기는 힘들다[29].
각 지방에서 펴낸 지방지의 예에서는 병원과 의원을 구분하지 않고 병기하는 사례도 나타난다. 위에 언급한 전국 의료시설요람에서는 의료시설을 지칭하는 항목명이 ‘병원’으로 설정되었던 데에 반해, 지방지의 사례에서는 항목명이 ‘병원의원’으로 되어 있다[30]. 병원과 의원의 소개글을 분석해 봐도 양자간의 차이는 크지 않다. 의원이 유명해진 이유를 병원에 비해 자세히 서술하는 정도이다. 따라서 이 역시도 병원과 의원을 명확히 구분 짓는 잣대는 아니다.
위와 같은 예에서 알 수 있듯이 메이지시기 초기에는 공적 문서에 병원과 의원이라는 용어가 구분되어 나타났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병원과 의원이 구별 없이 혼재되어 나타나는 양상을 보인다. 이와 같이 의료시설을 지칭하는 법적 용어인 병원과 법적용어가 아닌 의원이 혼재되어 나타나게 된 것은 의료시설의 지역적 편차와 특성으로 인해 이를 단속하고 감독하는 규칙을 일찍 제정할 수 없었던 점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1884년 당시 일본의 의학교의 수는 최고점을 찍었다(川上武, 1973: 166). 그러나 1880년대 전반을 기준으로 공립일반병원과 사립일반병원의 비율은 지역마다 차이를 보였다. 예를 들어, 하코다테, 니가타, 이와테, 구마모토, 아오모리, 네무로 등의 현은 공립병원수가 사립병원수보다 월등히 높게 나타났고, 그에 비해 도쿄, 치바, 오사카 등은 사립병원의 비율이 월등히 높았다(猪飼周平, 2013: 66-67). 이처럼 공립의학교겸병원, 공립병원, 사립병원의 규모는 의료시설마다, 지역마다 큰 편차가 있었다. 내무성 『위생국연보(衛生局年報)』의 제8차보고 중 1882년 7월에서 1883년 6월의 통계자료에 따르면, 공립의학교겸병원을 포함한 공립일반병원의 경우, 연간 진료인원수는 적게는 100명 정도부터 많게는 13,675명에 달했다. 또한 병원의 재산규모도 적게는 100엔 미만부터 많게는 106,769엔에 이르는 등 편차가 심했다(猪飼周平, 2013: 68). 따라서 이 시기는 지역마다 필요한 형태의 관공립 및 사립병원이 양산되는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다가 마쓰카타(松方) 내각의 재정긴축정책으로 정부가 부현(府縣)에서 운영하는 의학교의 비용을 지방세에서 사용할 수 없도록 규정하면서, 각 지역의 중심적인 의료시설로써 역할을 맡고 있던 공립병원들이 다수 폐원하게 되었다(厚生省醫務局編, 1976a: 166). 그 과정에서 병원의 명칭을 사용하던 관공립 의료시설은 크게 감소하고, 병원과 의원을 혼용하여 사용하던 사립 의료시설은 대도시를 중심으로 증가하는 추세를 보였다. 1887년 소득세법 및 1898년의 영업세법 제정 등 개업의에게 유리한 법령이 제정되어 가면서 사립 의료시설[31,]은 증가하였고, 병원과 의원이 혼용되는 현상은 더욱 가속화되었다[32].
개업의를 중심으로 하는 사립의료시설의 증가와 함께 이를 규제하는 방안이 검토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의료시설의 명칭을 확립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졌다. 1880-90년대를 거치면서 사립 의료시설이 총 의료시설의 과반수이상을 차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설립주체 및 규모를 확인하고 규제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마련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이에 대한 규칙을 마련할 필요가 생겼던 것이다. 이에 1891년에 처음으로 의료시설을 규모로 분류하는 기준이 마련되었다. 그것은 도쿄부가 마련한 「사립병원 및 산원 설립규칙(私立病院竝産院設立規則)」으로, ‘병원은 환자 10명 이상 입원하는 시설을 의미하며, 이에 해당하지 않는 것은 진료소’라고 규정한 것으로 ‘병원’이라는 용어의 개념이 확립되었다(厚生勞動統計協會, 2016: 51). 그러나 병원과 함께 사립의료시설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회에서 통용되고 있던 의원에 대한 규정은 이 규칙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
사립병원에 관한 법 규정이 제정된 이후인 1901년에 출판된 도쿄의 의료시설 요람에는 병원과 의원을 구분하여 수록하고 있다. 병원 항목에는 OO병원, OO의원과 같이 용어가 혼재되어 나타나는 반면, 의원 항목에는 병원이라는 명칭은 사용되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즉, 1891년도의 규칙에 근거하여 1900년대 초에는 병원에 대한 규정은 마련되어 용어의 구분이 이루어졌으나, 그 이외의 사립의료시설을 포괄적으로 지칭하는 진료소에 대한 규정은 아직 확립되지 않았던 것이다. 따라서 의원은 환자 10명이상을 수용하는 병원에도, 이 이외의 사립 의료시설을 지칭하는 진료소에도 여전히 사용되었다[33].
그러한 의미에서 병원과 의원은 동일 범주에 속하기도 하면서 상하관계를 형성하기도 하였다. 그 과정에서 병원과 의원은 서로 다른 특색으로 경쟁적인 관계를 형성하기도 하였다. 병원 운영을 위한 책자에서 의원은 의료시설과 환자의 접근성면에서 병원과 비교되는 곳으로 파악되었다. 『의원병원경영의 비결(醫院病院經營の秘訣)』(1926)에서는 의원은 지방의 상황, 인기도 등에 따라 건물의 모양을 달리해야 하며, 너무 크게 지어서도 안 된다고 조언하고 있다. 또한 의원은 원장 및 의사들의 신용도와 크게 관련이 있기 때문에 재진환자를 받기 위하여 진료실, 약국, 대기실, 화장실 등의 배치를 효율적으로 할 것을 강조하였다. 이에 비해 병원은 본관건축에 신경을 써야 하고, 각 등급의 입원실을 적절히 배치하여 이윤을 추구해야한다는 환자 입원을 통한 영리 추구가 강조되었다(水野嘉藏, 1926: 51-57).
이렇게 1920년대 중반까지 의원은 명확한 법적 근거 없이 병원과 그 이외의 사립 의료시설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그러다가 1933년 내무성령 「진료소취체규칙(診療所取締規則)」[34,]이 제정되어 의료시설의 용어사용을 규제하는 과정에서 각각의 용어는 정착되어 갔다. 이 규칙에서는 사립의료시설을 병원과 진료소로 나누고 있는데, 이 구분은 1891년에 만들어진 병원의 개념이 그대로 적용된 결과였다. 이 규칙에서도 의원은 법적인 용어로 지정되지는 않았지만, 10명이상의 환자를 수용할 수 있는 시설인 병원을 제외한 ‘공중(公衆) 또는 특정다수인을 위해 의업을 행하는 장소인 진료소를 일반적으로 일컫는 말’로 해석되었다(土屋忠良, 1938: 9-10). 이로써 병원뿐만 아니라 의원 및 진료소의 개념이 명확해졌다고 할 수 있다.
4. 맺음말
본고에서는 근대일본이 의료기관을 정비해 나아가는 과정에서 병원이라는 용어가 언제부터 사용되었으며, 그 용어가 어떻게 정착되어 가는지에 대하여 고찰하였다. 근대적인 의미의 의료시설은 에도 말기에도 존재하였으나, 이때는 그 시설에 병원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않았다. 1862년 사절단이 서구의 공공기관을 관찰하는 과정에서 병원이라는 용어는 사용되었고, 그 시기를 전후하여 사전에도 병원이라는 단어가 수록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여기에 메이지 신정부의 의료위생정책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병원이라는 용어는 의료시설을 지칭하는 공식적인 용어가 되었다.
이후 1874년 의제가 반포되면서 병원에 관한 조항이 마련되고, 메이지 정부의 의료위생정책을 근간으로 하여 각지에는 병원이 설립되었다. 그 과정에서 의료시설을 지칭하는 용어는 혼재되어 나타나는데, 이를 규제하고 단속하는 것은 각 지방정부 차원에서 이루어졌고, 전국적인 규제가 이루어지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는 지역별 공사립 의료시설의 편차, 개업의의 증가 및 설립주체의 다양화, 그리고 1890년대부터 1920년대까지 의사 및 의료기관에 대한 규칙이 제정 및 개정되면서 의료시설이 지속적인 증가추세에 있었기 때문에 관리 감독이 쉽지 않았던 사실에 기인한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병원은 의료시설의 규모를 규정하는 법률에 의해 개념규정이 이루어졌지만, 병원과 함께 쓰이던 의원은 개념이 명확하지 않은 채로 병원과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거나 진료소와 더불어 병원의 하위개념으로 사용되었다. 1933년에 의료기관의 규모에 따라 병원, 의원, 진료소 명칭의 사용제한이 전국적으로 적용되면서 비로소 각 용어의 개념이 자리잡아가게 되었다. 근대일본이 근대서양의학을 받아들이며 의료위생행정을 국가의 통치원리로 삼았던 것에 비해, 의료시설을 지칭하는 용어사용과 구분, 그리고 각 용어의 개념형성에는 꽤 오랜 시간이 걸린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본 연구를 통해 향후 동아시아의 맥락에서 의학용어와 제도, 그리고 의료정책의 비교 분석이 가능할 것으로 생각한다. 한 예로, 일본의 병원의 개념규정으로는 병원이 의원보다 상위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식민지 조선에서는 조선총독부의원, 자혜의원 등 조선총독부가 설립한 공적 의료시설에 의원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일반 개업의가 설립한 의료기관에는 병원, 의원이라는 용어가 사용된 사실을 들 수 있다. 일본에서 이루어진 병원과 의원 용어의 도입과 개념정립 과정에 비추어 한국에서 사용된 동일 용어를 분석해 보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이러한 연구는 의료정책의 비교와 더불어 의학용어와 제도에 있어서 한국과 일본이 공유하고 있는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을 구별해주는 단서를 마련해 줄 것이며, 각자의 독자성과 보편성을 규명하는 데에 기여할 것이다.
Notes
일본 최초의 서양식 병원인 알메이다 병원을 지칭할 때 통상적으로 ‘병원’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으나, 16세기 당시 ‘병원’이라는 명칭이 사용되었다는 기록은 확인되지 않는다(Harold J. Cook, 2007:341).
혼도(本道)라 불리던 내과의 7명이 상주하며 치료를 담당하였고, 양생소의 수용인원은 약 40명 정도였다. 1726년 양생소에 수용한 환자들의 합계는 250명으로, 1787년에 303명으로 가장 많았다가, 1859년에는 48명까지 감소하였는데, 환자수가 급감한 이유는 에도막부 말기가 되면 난학의(蘭學醫)를 중심으로 하는 의학소 등이 등장하면서 한방의를 중심으로 하던 양생소의 질이 저하된 데에 기인한다. 막부 말기에 메이지 유신으로 폐원이 되기 직전에는 입소를 희망하는 자가 정원에 못 미쳤고, 의사 및 관리의 도덕성이나 근무태도에도 문제가 생겨, 금전적 보상이 가능하지 않은 경우에는 입소조차 불가능한 경우도 발생하여 본래적인 기능은 상실, 변질되어 갔다(福永肇, 2014: 57).
각 연도별 환자수를 살펴보면 몇 십 명부터 200-300명에 이르렀을 정도로 편차는 심했으나, 환자수의 총수는 32,282명에 이르렀다(安藤優一郞, 2005: 149-156, 215-216).
보신전쟁 때 아이즈(會津)를 공격한 관군의 야전병원에 걸려있던 ‘병원’이라는 깃발은 현재 일본 준텐도의원(順天堂醫院)에 보관되어 있다. 흰색과 빨간색의 깃발에 관군의 국화꽃 문양과 병원(病院)이라는 글자를 새겨 넣었다.
대병원은 의학교육기관의 변천과 맞물려 수차례의 변동이 있은 후에 1875년에 도쿄 혼고(本郷)로 이전하였고, 1877년에 도쿄대학의학부가 설립되면서 1878년에 간다 이즈미초(神田和泉町)에 부속의원을 설립하였다(東京大學醫學部創立百年紀念會·東京大學醫學部百年史編纂委員會編, 1967: 469).
関寛斎, 『奥羽出張病院日記』(1868).
森嶋中良, 『紅毛雑話』, 卷之一(1787), p. 15.
후에 데라시마 무네노리(寺島宗則)로 개명하였다.
마쓰키는 본인의 자서전에서 “나와 미쓰쿠리는 병원, 학교 등에 치료 교육 및 조직의 방법에 대하여 탐구할 것이다”라고 밝히고 있다(「寺島宗則自敍傳」 , 『傳記』제3권 제4호; 靑柳精一, 2011: 49).
1862년에 작성한 서항기(西航記)는 후쿠자와 전집에 실려 있다. 福澤諭吉, 『續福澤全集』19(岩波書店, 1971).
후쿠자와가 출간한 『서양사정』의 목차에는 병원, 빈원, 아원(啞院), 맹원(盲院), 뢰원(癩院), 치아원(痴兒院) 등의 시설이 열거되어 있으며, 그 각각의 항목 아래 시설에 대한 간단한 설명이 붙어있다. 福澤諭吉, 『西洋事情』, 卷之一(林芳兵衛等, 1868).
원본은 H. Picard의 ‘A New Pocket Dictionary of the English-Dutch and Dutch-English Languages’(1857)라는 영란사전(英蘭辭典)의 네덜란드어 부분을 호리 다쓰노스케(堀達之助)가 일본어로 번역한 것이다. 제목에 사용된 수진(袖珍)은 포켓의 일본어 표현이다. 堀達之助編, 『英和對譯袖珍辭書』(1862).
개정증보판은 『改正增補 英和對譯袖珍辭書』(蔵田屋清右衛門, 1869)와 『和譯英辭書』(Shanghai: American Presbyterian Mission Press, 1869)가 있다. 첫 번째 사전은 제목에 개정증보판이라고 표기되어 있고, 1867년에 번역은 완료되었으나 관허를 받아 출판된 것은 1869년이다. 두 번째 사전은 일본어 서문에 1866년 호리 다쓰노스케가 개정증보한 『英和對譯袖珍辭書』을 개정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영국인 선교사로 후에 상해 영사로 부임한 메드허스트가 1830년 당시 네덜란드령 바타비아에서 간행한 ‘An English and Japanese and Japanese and English VOCABULARY’(1830)가 원저이고, 무라카미 히데토시(村上英俊, 1811-1890)가 일본어로 복각하여 간행한 것이다. 무라카미는 막부 말기부터 메이지 초기에 활약한 의학, 한학, 난학에 능통한 프랑스어 학자로, 일본의 프랑스어 연구의 선구자적인 인물로 알려져 있다.
초판은 영어제목으로 출판되었고, 1872년도에 『화영어림집성』이라는 일본어 제목과 햅번을 平文으로 표기한 사전이 출판되었다. 영어제목도 병기되어 있다.
레옹 파제스가 편찬한 일불사전은 1603년 나가사키에서 인쇄된 일본어-포르투갈어사전(Dictionnaire Japonais-Portugais)에 기초하여 포르투갈어에서 프랑스어로 번역한 것이다. 부족한 부분은 1630년 도미니크회가 스페인어로 번역하여 간행한 일본어-포르투갈어 사전으로 보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전에는 客舍 カクシヤ kakf’s’ya a hospital의 순으로 표기되어 있다. 이 사전은 앞서 언급했던 것과 같이 원저자인 메드허스트가 직접 일본에 왔다는 기록이 없기 때문에 이 표현이 실제 사용된 것인지는 알 수 없고, 사용되었다고 하더라도 이 책이 번역되어 출판된 1860년대에 사용되었으리라는 것을 보장할 수는 없다. 오히려 객사라는 표현은 병원의 의미가 아닌, 호텔(hotel)의 의미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원저가 1830년에 출판되었다는 점을 감안해 본다면, 19세기 초반에는 ‘객사’라는 표현이 존재하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일영사전의 부(部)는 일본어 단어의 발음을 알파벳 A부터 Z의 순으로 배열하고, 각 단어의 일본어 발음표기와 의미, 이에 대응하는 영어 단어를 적고 있다. 영일사전의 부 역시 알파벳순으로 영어단어를 나열하고 있는데, 특이한 점은 각 영어 단어에 해당하는 일본어 단어를 한문이 아닌 로마자 단독표기로 적고 있다는 점이다.
처음에는 포르투갈어식 배열방법으로 표기하였는데, 파제스는 이것을 다시 프랑스어식으로 개정하였다. 이 과정을 거치면서 일반적인 사전의 배열과는 전혀 다른 배열순서를 보인다.
객사(客舍)와 병가(病家)는 에도 말기에 사용된 기록도 찾아볼 수 없고, 메이지 정부의 공식문서에도 등장하지 않기 때문에 병원의 번역어 분석에서는 제외하도록 한다.
豊田千速譯, 『ダイヤモンド英和辭典』(武田福蔵, 1888).
가네쿠보는 그의 논문에서 병원은 메이지 정부가 1870년 2월에 독일의학을 채용할 것을 결정하면서 병원이라는 의료시설이 등장하였고, 그 용어는 ‘hospital’이 아니라 ‘krankenhaus’에 대응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병원은 이미 막부 말기의 학자들이 서구를 관찰하는 과정에서 사용되었고, 개념도 도입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으므로 독일의학과의 상관성에 의해 병원이 등장하였다는 그의 가설보다 더 이른 시기부터 사용된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金久保好男, 1999: 225).
厚生省醫務局編, 『醫制八十年史』(印刷局朝陽會, 1955), pp. 479-480.
현재 검색가능 한 일영사전 중 1880년대 후반에 나온 사전에는 병원만 실려있다. 반면, 1893년의 사전에서는 병원과 함께 의원이 수록되어 있다. 箸尾寅之助編, 『新譯和英辭書』(嵩山堂, 1887); 林曽登吉編, 『新譯和英辭書』(細川書房, 1893).
「山口藩常備兵上京ニ関シ処置方ヲ候ス」, 1869년 12월 12일, 日本國立公文書館(太00108100).
「長崎仮病院規則撰定ノ儀」, 1874년 12월 28일, 內閣-單行書-處蕃書類, 日本國立公文書館(単00663100).
이후 1945년까지 의원에서 병원, 그리고 다시 의원으로 변경되는 과정이 있었다(東京大學醫學部創立百年紀念會·東京大學醫學部百年史編纂委員會編, 1967: 469-471).
제17장 ‘의원규칙’ 및 제18장 ‘병원규칙’ 참조. 東京大學醫學部編, 『東京大學醫學部一覽從明治14年至明治15年』(1881-1884), p. 131, p. 141.
사립 의료기관의 명칭은 지명(地名) 혹은 원장의 이름에 병원이나 의원을 붙이거나, 원장 이름의 앞 혹은 뒤에 치과, 내과, 산부인과 등의 전공명을 삽입하고 병원, 의원을 붙이는 식이었다. 山口力之助編, 『帝國醫籍寶鑑』(東京: 南江堂, 1898); 日本杏林社編, 『日本杏林要覽』(東京: 日本杏林社,1909); 工藤鐵男編, 『日本東京醫事通覽』(東京: 日本東京醫事通覽發行所, 1901)
柴田博陽, 『栃木繁昌記』(宮川庸三郎, 1899), pp. 27-32; 槙鉄男, 『最近旭川案内』(上条虎之助, 1905), pp. 20-23.
안마, 침술, 유사의료행위 등을 포함한다면 사립 의료시설의 범주는 꽤 확대될 수 있으나, 본고에서는 질병을 치료할 목적으로 환자를 수용하여 근대서양의학에 기초한 의료를 행하는 사립 의료시설로 한정하도록 한다.
1877년 당시 전국 각지의 병원 수는 159개소로, 국립이 11개소, 공립이 112개소, 사립이 35개소에 불과하였으나, 1878년 이후 사립병원의 수가 증가하게 되면서 10년 후인 1888년에는 국공립 병원 수는 225개소, 사립은 339개소로 급증하였다. 관공립병원의 수가 감소하는 것에 대해서는 마쓰카타 내각의 긴축재정정책으로 각지의 의학교가 폐교하면서 부속 의학교 역시 폐교의 수순을 따랐다는 주장이 있는 반면에, 기본적으로 메이지 정부가 ‘병원정책’에 대한 명확한 목표가 없었다는 지적도 있다(스가야 아키라, 1989: 53; 猪飼周平, 2013: 80-85).
工藤鐵男編, 『日本東京醫事通覽』(東京: 日本東京醫事通覽發行所, 1901).
1891년의 도쿄부의 규칙은 사립병원 및 사립산원의 개설에 대한 감독만을 규정했던 것으로, 1927년에 「병원산원취체규칙(病院産院取締規則)」이 제정되어 모든 병원 및 산원의 개설, 관리, 구조설비에 관한 감독규정으로 확대되었다. 그 후 의료기관의 설립주체가 다양화되고 증가하는 추세에 발맞추어 의료시설에 대한 전국적이고 통일적인 관리와 단속을 실시할 필요성에 의해 1933년에 「진료소취체규칙」이 제정되었다. 이때 병원 개원은 명령(개정의사법, 진료소취체규칙)에 의해 지방장관(도쿄는 경시총감)의 허가를 받아야 가능하게 되었다(厚生省醫務局編, 1976: 213-215; 土屋忠良, 1938: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