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지타 쓰구아키라의 생애를 통해 본 식민지 조선의 의학/의료/위생

The Japanese Colonial Medicine as Seen Through the Life of Fujita Tsuguakira

Article information

Korean J Med Hist. 2016;25(1):41-76
Publication date (electronic) : 2016 April 30
doi : https://doi.org/10.13081/kjmh.2016.25.41
Inha University School of Medicine, Incheon, Korea
최규진
인하대학교 의과대학
*인하대학교 의과대학 이메일: qjchoi@gmail.com
Received 2016 February 5; Revised 2016 February 20; Accepted 2016 March 16.

Abstract

Fujita Tsuguakira (藤田嗣章) was a man who established Jahyeuiwon, a governmental medical facility, during the Residency-General Period and took over the presidency of a committee in the Japanese Government-General of Chosun after Chosun was annexed to Japanese. In addition, he is a man well qualified to be placed on the top of the list when discussing the Japanese colonial medicine in Chosun, considering his personal history of getting evolved in the colonial rule of Taiwan for seven years as an army surgeon.

He led the colonial medicine in Chosun for nine years before and after the Japanese annexation of Korea. He was engaged in almost all the areas related to the colonial medicine such as anti-cholera projects, Hansung Sanitation Union, Deahan Hospital, Chosun Chongdokbu Hospital, Jahyeuiwon, medical schools affiliated to the Japanese Government-General of Chosun. In all respects, his life was in sync with the expansionist strategies of Imperial Japan. Especially, his deeds in Chosun was an “active aid to the instructions” from Army Minister Terauchi Masatake (寺内正毅)” as Sato Kozo (佐藤剛藏) testifies. Fujita was chosen by the military, and so he faithfully served the role given from it. The rewards that he received form the military attest to this fact. He took the position of Surgeon General in Army Medical Service on September, 1912, the top place that an army surgeon could hold. The position was first given to the officer who worked outside Japan proper, and he was the only army surgeon with no doctorial degree to receive such title except for Ishiguro Tadanori (石黒忠悳) who was the first army surgeon in Japan.

To sum up, Fujita was not a “doctor” but a “military officer”. His walk of life mainly lay in the role of an aider adjusted to the ups and downs and the speeds of the plans of Imperial Japan to invade the continent. Therefore, the Japanese colonial medicine controlled by such man as Fujita in Chosun was inevitably studded with the military things. As a chief in the army medicine, what was important to him was the hospitals for managing the armed troops and projects for preventing infectious disease that could threaten the military sanitation. As a result, the medical service for those under the colonial rule was naturally put on the back burner.

This study was conducted mainly based on Fujita’s memoirs called Army Surgeon General Fujita Tsuguakira (陸軍軍醫中將 藤田嗣章, 1943), and accordingly it would be not without limitations. However, as he is a man who cannot be put aside when discussing the Japanese colonial medicine in Chosun, the records by this study of his life and past activities are expected to give no small amount of contribution to these discussions.

1. 서론

『醫史學』에 발표된 논문 중 인물사 연구는 단일 주제로는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다. 의학사 관련 연구의 약 절반 가량이 개항기부터 1945년까지 기간에 대한 것이고 대부분의 인물사에 관련된 연구도 이 기간에 활동한 사람들이다. 그런데 연구 대상 대부분은 한국인 또는 서양인 의사들이었다(박윤재, 2010). 상대적으로 일본인 의사들에 대한 단독 연구는 거의 없는 실정이다.

그나마 황상익이 최근 저서를 통해 사토 스스무(佐藤進), 고조 바이케이(古城梅溪) 등과 같은 식민통치에 관여한 일본인 의사들에 대한 연구를 진척시켰으며(황상익, 2013), 마쓰다 도시히코(松田利彦)가 시가 기요시(志賀潔)에 관한 논문을 통해 조선에 머물렀던 일본인 의사들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켰다(마쓰다 도시히코, 2014).

식민지 의학(colonial medicine)[1]의 시행 주체는 결국 사람이다. 식민지에 머물며 위생행정이나 의학교육에 관여한 주요 인물들을 통해 식민지 의학이 구현된다. 때문에 특정 인물이 선택된 시대적 배경, 그 선택된 인물의 성향과 그가 추진한 정책, 그가 남긴 말과 글 등을 통해 제도사(制度史)로는 파악할 수 없는 정보를 얻을 수 있다. 따라서 식민지 의학의 구체적인 양상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일본인 의사들에 관한 보다 많은 연구가 축적될 필요가 있다.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볼 때, 우선 주목할 만한 인물로 후지타 쓰구아키라(藤田嗣章)[2]를 들 수 있다. 후지타는 시기적으로도 통치 주체나 통치 성격의 전환이 이루어진 한일병합을 전후한 시점에서 식민지 의학을 주도했다. 그는 콜레라 방역사업에서부터 한성위생조합, 대한의원, 총독부의원, 자혜의원, 조선총독부 부속의학강습소, 조선의사회 등 식민지 의학과 관련된 방대한 분야에 개입했다. 아울러 군의(軍醫)로서 대만 식민 통치에도 7년간 관여했던 이력까지 고려한다면 일제 식민지 의학을 논하는 데 있어 가장 앞자리에 놓아도 부족함이 없는 인물이다.

그러나 현재까지 한국뿐 아니라 일본, 대만에서도 그에 관한 독립된 연구는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후지타를 다룬 연구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가 한국 의학사 연구에서 언급된 것은 다른 인물들보다 늦지 않았다. 일찍이 기창덕은 후지타에 대해 “침략의료의 영수(領袖) 역할을 하였다”고 평한 바 있다(기창덕, 1997: 43). 하지만 이러한 평가에 걸맞는 실증적인 연구는 진행되지 못했다. 이후 신동원(신동원, 1997)과 박윤재(박윤재, 2005)가 일제 위생행정을 전반적으로 분석하면서 콜레라 방역, 한성위생회, 자혜의원 건립 등과 관련해 후지타의 행적을 다룬 바 있고, 이충호가 조선총독부 부속의학강습소의 의학교육과 관련해서 다룬 적은 있지만(이충호, 2011), 아직 그의 생애와 식민지에서의 활동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연구는 없다.

후지타가 식민지 의학에서 갖는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관련 연구가 충분히 진행되지 못한 이유는 무엇보다 발굴된 자료가 적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대만, 한국, 일본에 남아 있는 사료들을 모을 경우 연구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특히 아직 선행연구에서 활용된 바 없는 후지타가 남긴 자서전 성격의 회고록 『陸軍軍醫中將 藤田嗣章』은 그에 관한 많은 정보를 제공해주고 있다. 이 자료는 1941년 후지타가 병에 걸려 임종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그의 생애와 업적을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 일본 육군 군의단(軍醫團)에서 후지타의 구술과 글들을 모아 제작한 것이다. 이 책은 사토 고조(佐藤剛藏)[3]를 비롯하여 대만과 조선에서 함께 협력했던 수십 명의 일제 관료와 의사들의 증언까지 담고 있어, 후지타에 관해서는 물론 일제 식민지 의학을 연구하는 데 있어 중요성이 크다.

그러나 이 자료는 육군 군의단에서 후지타의 업적을 기리기 위한 목적으로 제작한 것인 만큼 그 한계 또한 적지 않다. 주된 내용의 근거는 후지타의 구술에 의존하고 있으며, 관련 인물들의 글 역시 후지타의 업적을 치켜세우는 데 방점이 놓여있다[4,]. 때문에 후지타의 과실은 축소·은폐되었을 가능성이 크며, 공적은 과장되거나 위조되었을 수 있다[5,]. 이 연구는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주관성이 드러난 부분은 배제하였으며, 후지타 쓰구아키라의 구술인 경우 가급적 그가 회고록 이전에 남긴 기록이나 당시 대만과 조선의 신문기사, 잡지, 관보 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을 인용하였다[6,]. 관계자의 증언에 있어서도 보다 객관적인 다른 기록이 있을 경우 그것을 우선하였으며[7], 객관적으로 입증하기 어려운 행적의 경우에는 본 자료 속 관계자들의 증언을 통해 중복 확인되는 것들을 취하였다.

2. 성장과정과 대만 발령까지의 상황

후지타는 1854년 1월 27일 일본 에도(江戶) 아카사카(赤坂) 지역 미카와다이(三河台) 마을의 나카야시키(中屋敷)에서 태어났다[8,]. 후지타의 아버지 후지타 쓰구노리(藤田嗣服)는 원래 다케무라(竹村) 성씨였으나 후지타 가문의 데릴사위로 들어와 후지타 가문을 계승하게 되었다. 후지타의 원래 가문인 다케무라 가문은 서예로 유명한 귀족가문이었으며, 데릴사위로 옮긴 후지타 가문도 왕자의 양육을 맡았던 귀족 집안이었다(陸軍軍醫團, 1943: 1).

학습을 중요시하는 집안의 분위기 덕에 후지타는 8살 때 스루가(駿河) 다나카한(田中藩) 지역에 가서 번교(藩校)[9,]인 일지관(日知館)에 입학해 유학(儒學)과 무술 그리고 난학(蘭學)을 배웠다. 18세에는 이 일지관에서 조교(助敎)로 근무하며 학생들에게 난학을 가르쳤다. 후지타가 성인이 될 무렵은 메이지신정부가 들어서며 근대적 개혁조치들이 추진되는 상황이었다. 후지타가 18세가 되던 1871년에는 중앙집권체제 강화를 위해 메이지 유신의 최대 개혁이라 불리는 폐번치현(廢藩置縣) 조치가 단행됐다[10,]. 이는 후지타의 진로에 큰 영향을 주었다. 폐번치현 조치로 인해 각 번의 무사(武士)가 월급(常祿)을 받지 못하게 되면서 당연히 무사로서 살아가리라 생각하던 후지타는 다른 진로를 찾아야 했던 것이다(陸軍軍醫團, 1943: 2-3).

19세가 되던 1872년 후지타는 의학을 공부하기로 결심하고 도쿄로 상경했다. 그 무렵 도쿄의학교의 전신인 대학동교(大學東校)에는 정규입학생 외에 원외생(員外生) 제도가 있었다. 당시 일본에서 의학을 배우기 위해선 먼저 독일어를 학습해야 했기에 후지타는 원외생 등록에 앞서 사설 교육기관인 춘풍사(春風舍)에 들어가 독일어를 배웠다. 독일어를 습득한 후지타는 대학동교의 원외생으로서 뮬러(Benjamin Carl Leopold Müller)와 호프만(Theodor Eduard Hoffmann) 등의 강의를 들었다[11,]. 21세 때인 1874년에 동료들과 함께 유시마미쿠미쵸(湯島三組町)에 메이지의학사(明治醫學舍)를 설립하였다. 그곳에서 후지타는 강사로 근무하면서 의학공부를 계속해나갔다. 그리고 24세 때인 1877년 4월 도쿄대학부 부속의원의 외래진단소계(外來診斷所係)에 취직하면서 의사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陸軍軍醫團, 1943: 3)[12].

1877년 메이지 신정부에 대한 최대이자 최후의 반란인 세이난 전쟁(西南戰爭)의 발발은 그의 인생에 결정적인 기회를 제공했다. 부상자가 급증함에 따라 군의의 수요가 급격히 증가했던 것이다. 이에 후지타는 관군에 지원하여 군의보(軍醫補)로서 군의의 삶을 시작했다(陸軍軍醫團, 1943: 5). 1877년 6월 도쿄에 있는 육군본병원(陸軍本病院)에 배정되어[13,] 3년 3개월 동안 근무하고(陸軍軍醫團, 1943: 5), 1880년 9월 구마모토(熊本)로 전임해 4년간 근무하였다. 1882년 제물포조약 체결 당시 인천에 콜레라가 유행함에 따라 일본공사관 군인과 군부(軍夫)들을 관리하기 위해 조선에 파견되기도 했다(陸軍軍醫團, 1943: 10). 후지타는 1884년 1등 군의로 승진하였고, 다시 중앙인 도쿄 육군병원으로 발령받았다(陸軍軍醫團, 1943: 13).

대학동교 청강생 출신 의사인 그에게 전쟁은 가장 확실한 출세의 발판이었다. 청일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제6사단 야전병원장이 되었고 육군 1등 군의정(軍醫正, 중령급)으로 승진했다. 그는 더 적극적으로 전지 파견을 자원했지만 강화조약(講和條約)이 체결되어 군대가 요동지역에서 철수함에 따라 성사되진 못했다. 대신 청일전쟁의 승리로 할양 받은 대만 점령을 보조하는 업무가 그에게 맡겨졌다. 대만 점령 과정은 또 하나의 전쟁이었다. 최초 상륙한 1895년 6월부터 본토 점령이 달성된 10월까지 4,500명의 일본군이 목숨을 잃었다. 이는 청일전쟁에서 사망한 일본군 수의 세 배에 달하는 숫자였다. 여기에는 대만 민중들의 거센 저항 이외에도 대만의 열대성 기후와 열악한 위생조건으로 인한 병력 손실이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大江志乃夫, 1992: 3-11). 근위사단장이자 왕족인 기키시라 가와노미야(北白川宮)조차 전염병으로 사망한 상황이었다. 후지타는 급히 근위사단 병참감부부(兵站監部附) 자격으로 대만에 파견되었다(陸軍軍醫團, 1943: 39).

3. 대만에서의 행적과 한국 발령까지의 상황

1) 대만에서의 생활

후지타는 어용선(御用船)을 타고 1895년 8월 26일 대만 지롱(基隆)에 상륙했다. 당시 병참군의부장은 고토 다쿠지(伍堂卓爾) 군의정이었다. 그런데 고토 다쿠지가 1895년 10월 말라리아에 걸려 일본으로 후송됨에 따라 11월 12일부로 후지타가 병참군의부장직을 이어받았다. 이후 그의 업무는 제1여단군의부장 겸 대만병참군의부장으로 확대되었고, 1896년 4월 10일 대만총독부 군무국 육군부 제4과장으로 승진하며 대만 전체의 육군위생을 총괄하게 되었다(陸軍軍醫團, 1943: 40-41).

당시 대만은 ‘전염병(瘴癘)의 땅’으로 불리며 모두들 발령을 기피하는 곳이었다. 대부분 4개월간 근무한 후 곧장 교대신청을 해 본토로 돌아갔다(陸軍軍醫團, 1943: 42). 대만 육군에서 위생행정을 총괄한 전전임(前前任) 모리 오가이(森鷗外)와 전임(前任) 이시자카 이칸(石阪惟寬) 모두 오래 버티지 못했다[14]. 하지만 후지타는 달랐다. 그는 7년간 대만에 머물며 페스트 예방위원과 대만총독부의원 감독 및 총독부위생상임위원, 대만중앙위생위원, 대만도서관장, 대만협회 창립위원, 대만지부간사장 등을 역임했다(『臺灣日日新報』, 1902.3.21, 3.23).

그러나 후지타가 원하는 방향으로 대만 통치가 진행된 것은 아니었다. 초기 진압 이후의 군정(軍政)은 순조롭지 못했다. 3년 동안 가바야마 스케노리(樺山資紀), 가쓰라 다로(桂太郎),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 등 모두 일본 군부의 내로라하는 인물들이 총독을 맡았고, 일본정부도 첫 식민지였던 만큼 총독에게 행정권, 사법권, 육해군의 지휘권은 물론 특별입법권(六三法)까지 부여하며 적극적으로 지원했지만 대만을 장악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총독부의 신경제관리정책으로 기득권과 취업기회를 박탈당한 대만인들의 저항이 거셌다[15,]. 일본 측의 경제적 부담도 커져갔다. 저항세력 진압을 위해 일본정부가 특별예산으로 지출한 군사비가 대만총독부 세출 총액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으며 무력충돌에 따른 사회적 혼란은 세수(稅收) 부족을 초래해 심각한 재정 적자를 낳았다(문명기, 2009: 95). 일본 내 지식인들의 대만 통치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도 점차 거세졌다[16].

이러한 상황을 타계해야 할 부담을 안고 1898년 4대 총독인 고다마 겐타로(兒玉源太郞)가 부임했다. 고다마는 1898년부터 1906년까지 대만 총독이라는 관직을 가지고는 있었지만 1900년 제4차 이토(伊藤博文) 내각에서 육군상, 1903년 제1차 가쓰라(桂太郎) 내각에서는 내무상과 문부상을 겸했다. 또한 만주군 총사령관으로 러일전쟁을 이끌어야 했던 만큼 그가 대만 통치까지 신경 쓸 여력은 많지 않았다. 고다마는 일본 내무성 전 위생국장인 고토 신페이(後藤新平)[17,]를 대만총독부 민정국장으로 초청해 대만 통치를 일임했다[18].

고토 신페이는 대만총독부 민정국장으로 부임한 후 가장 먼저 군이 장악하고 있던 통치체계를 민정화(民政化)하는 작업에 전력했다. 우선 민정국을 민정부로 승격시켜 고토는 민정국장에서 민정장관이 됨에 따라 총독이하 최고의 권력자가 되었다. 그리고 군부의 민정에 대한 간섭을 배제시켜 문관통치를 위한 기본 틀을 잡았다(檜山幸夫, 2003: 199-200). 이러한 개편이 위생행정 분야에도 진행됐다. 원래 1895년 7월 2일 육군 군의감인 모리 오가이가 대리 위생사무총장에 임명되면서, 모든 위생행정이 육군국 군의부(軍醫部) 주관아래 이루어지고 있던 상황이었다(鈴木哲造, 2011: 142). 그리고 이를 후지타가 이어 받았던 것이다. 하지만 고토에 의해 민정부가 모든 사무를 장악함에 따라 위생사무 역시 온전히 민정부 산하 위생과에서 주관하게 되었다(『臺灣總督府報』 第317號 第4·6條, 1898.6.30).

또한 고토는 군부가 지방행정까지 관할하기 위한 목적으로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가 설치했던 기존의 판무서(辦務署)를 대폭 축소시키고 새롭게 판무서를 배치하면서 문관 출신 경찰인 경부장(警部長)에게 판무서장에 대한 지휘감독권을 주어 모든 통제가 군부 개입 없이 민정부 산하에서 이루어질 수 있도록 조정하였다. 이후 고토는 일본 내각을 설득해 문관경찰의 확장을 골자로 하는 총독부관제 개정을 추진해 민정부 아래 최고 기관으로 경찰본서를 설치하여, 민정부에서 지방까지 연결되는 일원화된 문관경찰조직을 갖추었다. 그리고 이러한 문관경찰에게 의사와 위생업무에 대한 감독권한을 부여함으로써 위생경찰체계까지 완비했다(손준식, 2010: 57).

이러한 개편과정에서 민정부와 군부 사이에는 적지 않은 충돌이 발생했다. 고토 민정장관과 마쓰무라 가네모토(松村務本) 육군소장 간에는 의견 충돌이 잦았고, 급기야 고토가 주최한 연회에서 마쓰무라가 고토에게 주먹질을 가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陸軍軍醫團, 1943: 55). 같은 의사 출신인 고토와 후지타의 관계 역시 순탄하지 않았다. 후지타는 민정장관 자리에 자신이 아닌 고토가 앉은 데 대해 상당한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후지타는 고토가 추진하는 위행행정에 계속 반대 입장을 표명했으며, 고토가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이를 고다마 총독에게 직접 얘기했다(山口四郞, 1919: 73-76).

그러나 이미 권력은 고토에게로 넘어가고 있었다. 고다마는 후지타가 직접 보고하더라도 민정장관에게 설명하도록 지시해 모든 일을 고토를 통해 집행했다(陸軍軍醫團, 1943: 49). 사실 고토는 일본에서 내무성 위생국장으로 있을 때 부터 대만의 위생고문 자격으로 대만 위생행정에 관여했다. 자신의 부하인 가토 마사요시(加藤尚志)를 위생과장으로, 그리고 오카다 요시유키(岡田義行)를 위생기사로 파견했으며, 야마구치 히데타카(山口秀高)를 통해 대북병원(臺北病院)과 대만토인의사양성소(臺灣土人醫師養成所)를 관장토록 했다[19,]. 또한 대만에 온 이후에는 일본인 민간의사들을 초청해 공의제도를 적극 추진함에 따라(鈴木哲造, 2007: 147-148) 군부의 위생행정 개입 여지를 남기지 않았다.

고토는 민정화 작업에 종지부를 찍듯, 1902년 이력이나 능력 면에서 당대 최고급 의사이자 위생행정가인 다카기 도모에(高木友枝)를 초청해 대만 위생 행정을 맡겼다. 다카기는 1902년 대만에 온 후 대만총독부 대북의원원장, 대만의학교장, 적십자대만지부장촉탁, 대만지방병 및 전염병조사회위원, 대북지롱시계획위원을 연이어 맡으며 위생행정을 진두지휘했다. 1903년에는 민정장관 고토의 지시를 받아 각 단위에 위생행정을 전달하는 경찰본서 위생 과장을 맡았다. 이밖에도 임시방역과장, 임시방역위원회간사, 대만지방병 및 전염병조사회간사, 대만중앙위생회간사를 맡아 고토가 추진한 위생행정과 관련된 거의 모든 일에서 실무책임자 역할을 했다[20]. 다카기가 맡은 대부분의 직책은 후지타가 맡고 있거나 직간접적으로 관여했던 일들이었다. 이처럼 전반적인 군 세력의 축소와 함께 문관 출신 의사들이 위생행정을 장악함에 따라 후지타의 입지는 좁아질 수밖에 없었다. 후지타는 1902년 그나마 유지하고 있던 대만적십자지부장 자리도 다카기 도모에에게 물려주며 대만을 떠났다(『臺灣日日新報』 第二版, 1902.4.24).

2) 대만을 떠나 한국에 오기까지

후지타는 1902년 3월 제5사단 군의부장에 임명되어 히로시마로 갔다. 그에게 맡겨진 임무는 히로시마 우시나(宇品) 정박장 사령부 및 히로시마시의 공중위생 감독이었다. 이전 근무에 비하면 한직이었다. 그러나 전쟁은 다시 그에게 좋은 발판을 제공했다.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함에 따라 그는 6월 새롭게 구성된 제4군의 군의부장에 임명되어 만주로 급파됐다.

민정(民政)에 대한 후지타의 예민함은 만주 근무에서도 나타났다. 일본군은 러일전쟁 당시 펑텐(奉天)을 점령한 후 전진하여 카이위안(開原)까지 진출하였는데 이때 군부 내에서 피난민을 통치하는데 있어 민정서(民政署)를 설치해 문관에게 행정을 맡기자는 주장이 대두되었다. 그러나 제4사단 우에하라(上原) 참모장이 제동을 걸었고 후지타의 경력을 추켜세우며 헌병들을 통해 관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후지타는 “바라던 일”이라며 “흔쾌히 받아들였고”, 민정서 대신 헌병근무소를 설치해 군정을 실시했다(陸軍軍醫團, 1943: 134).

후지타는 군인들의 사기진작을 위해 “사창(私娼)을 공인”하고 이를 군의가 매일 관리하도록 할 만큼 일본군의 승리를 위해 적극 협조했다(藤田嗣章, 1934: 275). 러일전쟁이 승리로 마무리된 후 후지타는 도쿄로 돌아왔다. 군의로서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데 기여한 명목으로 후지타는 1906년 공(功)3급 금치(金鵄) 훈장과 훈(勳)2등 욱일중광장(旭日重光章)을 하사 받았다(陸軍軍醫團, 1943: 164).

러일전쟁의 승리는 단지 후지타의 재기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이는 군부의 영향력을 극대화시켰다. 본래 청일전쟁의 승리로 정치적 입지가 커진 일본 군부는 궁극적 목표를 중국 대륙 진출로 설정하고, 독립적인 통수권과 군부대신 현역무관제(軍部大臣現役武官制)를 활용해 정부와는 독립적으로 이를 추진해 왔다[21,]. 승리의 결과물인 요동반도를 통해 직접 대륙 진출을 꾀하려 했으나 삼국간섭으로 요동지역을 반환하게 되자 대만을 통한 중국 침략을 구상했다. 대만을 기지로 삼아 중국 남부인 샤먼(厦門) 침략을 기획했지만 이 역시 서구 열강들의 견제로 실패로 끝났다(德富猪一郞, 2012: 707-712). 결국 군부는 대만을 통한 대륙진출 대신 한반도를 통한 대륙진출로 전략을 바꾸었다. 이 과정은 철저히 조슈번(長州藩) 출신의 군벌들이 주도했다. 이들이 바로 육군 내 최대 세력인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 가쓰라 다로(桂太郞),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로 이어지는 이른바 ‘야마가타 계열’이었다(전상숙, 2006: 122-123, 127-128).

러일전쟁의 승리로 제국 내 군부의 입지는 더욱 커졌으며, 일본 정치의 주도권은 사실상 야마가타 계열의 손에 넘어가게 된다. 이는 한반도를 통한 대륙진출 전략이 보다 가속화됨을 의미했다. 당시 한국의 경우 이토 히로부미로 대표되는 문관세력이 통감 통치를 하고 있었지만, 야마가타 계열의 적자로서 대륙정책을 주도했던 육군대신 데라우치 또한 영향력을 넓히고 있었다. 데라우치는 항일투쟁을 빌미로 심복인 아카시 모토지로(明石元二郞)를 한국주차군 헌병사령관으로 투입했다(도면회, 1999: 46-49). 이와 마찬가지로 데라우치는 위생행정 분야에도 군부의 정책을 이행할 인물을 물색했는데(陸軍軍醫團, 1943: 150), 그 적임자는 바로 후지타였다. 데라우치는 후지타를 불러 이토가 임명한 “사토(佐藤進)[22]는 의사(醫事)행정 방면에는 밝지 못한데 자네(君)는 대만의 경험도 있어 적임자라 할 만하니 사토를 표면에 내세우고 수고스럽겠지만 한국의 위생방면을 자네에게 맡겨 보고 싶다”며 한국 파견을 직접 제안했다(『朝鮮新聞』, 1936.5.19).

4. 일제 통감부 시기의 행적

1) 궁중의무(宮中醫務) 장악

후지타는 데라우치의 제안을 받아 1906년 8월 한국 주차군 군의부장으로 한국에 왔다[23,]. 사토 스스무와 거의 같은 시기 조선에 왔지만 이토에 의해 조선의 위생행정은 사토에게 맡겨졌다[24,]. 후지타는 우선 궁중의무(宮中醫務)에 개입하며 자신의 입지를 다져나갔다. 먼저 궁중에 “의사위생개량(醫事衛生改良)이 필요하다”며 언어의 천재로 불리던 일등군의 가미오카 카즈유키(神岡一亨)에게 한국어를 배우게 하여 궁중의무를 감독하게 했다(陸軍軍醫團, 1943: 143).

하지만 전통의사들이 시의(侍醫)로서 궁중에 포진해 있는 이상 궁중의무에 직접 개입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통감부 위생고문 자격으로 사토 스스무가 궁중을 찾아 고종의 안부를 아뢰어도 대답만 할 뿐 용체에는 접근할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을 포착한 후지타는 총리대신 이완용과 백작 송병준을 통해 방법을 찾았다. 후지타는 이들에게 진찰할 때 청진기 사용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설득할 것을 종용하여 직접 고종의 흉부를 진찰했다. 궁중의무에 직접 관여할 수 있는 물꼬를 튼 후지타는 더 적극적으로 개입해나갔다[25,]. 전통 의사들을 통제하기 위해 시의들을 모아 놓고 “시의가 약을 처방할 때에는 일단 나를 통해서 협의한 후에 투약하도록 규정을 개선하겠다”고 선포했다. 이에 시의들이 저항하자 자신의 지시를 따르지 않는 자는 “앞으로 단연코 궁중 출입을 금지 시키겠다”고 경고했다. 사토 스스무가 해내지 못한 일을 달성함에 따라 통감부 내에서도 자신의 입지를 넓힐 수 있었다. 또한 궁중의 의사업무를 장악함으로써 “궁중은 물론 국내 위생업무도 원만하고 유리하게 실행할 수” 있었다(陸軍軍醫團, 1943: 143)[26].

궁중의무를 장악한 후지타는 행보를 더욱 넓혀갔다. 그는 경성의 거리가 매우 혼잡하다며 당시 중심가이던 남대문의 양쪽 끝벽을 자르고자 주장했다. 후지타는 대만에 있을 당시 성벽을 절단하여 군부의 통치를 이롭게 한 경험이 있었다. 이러한 경험을 근거로 통감 이토에게 건의했으나 이토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지만 후지타는 하세가와(長谷川) 군사령관을 찾아가 이를 설득했다. 결국 통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후지타는 남대문의 양쪽 성벽을 허물었다(陸軍軍醫團, 1943: 150).

통감인 이토를 거슬러 군사령관을 통해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킬 만큼 후지타는 조선 부임 초기부터 군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강하게 표출했다. 역으로 이는 군부의 강력한 지원 없이는 불가능 한 것이었다. 하가 에이지로(芳賀榮次郞)[27,]의 증언처럼 후지타는 “조선에서 군의부장으로 근무할 당시 데라우치 육군대신으로부터 회의가 있을 때 마다 각 분야의 정황에 대한 질문을 받으며, 군의부장으로서의 본무 외에도 장래를 내다보면서” 데라우치의 조선장악을 보조하였다(陸軍軍醫團, 1943: 180)[28].

2) 콜레라 방역활동과 한성위생회 설립[29]

1907년 7월 고종을 강제 양위시킨 이토 히로부미는 영친왕을 일본으로 데려가려는 계획을 세웠다. 이에 대한 저항을 무마시키기 위해 이토는 먼저 “한국인에게 친근감을 보여주어야” 한다며 사전 작업으로 일본 요시히토(嘉仁) 친왕의 방한을 추진했다(久米正雄, 1931: 368). 메이지 천황은 한국의 혼란한 정국과 치안 불안을 이유로 난색을 표했지만 아리스가와노미야(有栖川宮威仁) 친왕과 동행할 것이며 철저한 경호를 준비하겠다는 이토의 약속에 결국 승인했다. 1907년 9월 공식적으로 10월 16일부터 20일까지의 5일간의 방한 계획이 발표됐다(도널드 킨, 2002: 419).

그런데 이 무렵 신의주, 경성, 부산 등지에서 콜레라가 발생했다. 일본 궁내성(宮內省)은 대한의원 원장을 통해 황태자의 한국방문을 연기하도록 종용했지만 이토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신 확실한 방역 태세를 보여주어야 했다. 이를 위해선 군부의 힘을 빌릴 수밖에 없었다. 이토는 이전 일본, 조선, 대만 모두에서 콜레라와 페스트 방역활동을 이끈 바 있는 후지타를 찾았다[30,]. 후지타는 “무한 권력과 무한 금력(金力)을 주면 반드시 콜레라를 박멸해내겠다”고 답했다. 이토는 자신의 정치적 생명이 달린 일인 만큼 이에 응했다(陸軍軍醫團, 1943: 151).

1907년 10월 1일 10시를 기해 콜레라 방역본부가 설치되었다. 당시 경성위수사령관이었던 육군중장 오카자키 세이조(岡崎生三)가 방역총장을 맡고, 군의부장 후지타와 경무국장 마쓰이 시게루(松井茂)가 부총장을 맡았다. 경무국장 마쓰이는 법률관계 처리를 담당하였고, 서기관 고마쓰 미도리(小松綠)를 방역본부의 부원으로 들여 외국인 관련 업무를 맡겼다. 서기관 사와다 우시마로(澤田牛麿), 하기타 에쓰조(萩田悅造) 등이 사무를 보고, 고다마 히데오(兒玉秀雄)[31,]가 회계를 맡았다(陸軍軍醫團, 1943: 151).

최고 책임자는 위수사령관이었지만 방역이라는 업무의 특성상 후지타가 총괄 지휘를 맡았다. 후지타는 우선 방역에 필요한 경비로 일단 10만원을 지출해 줄 것을 이토에게 신청했다. 이토는 도쿄정부로부터 예비비 명목으로 이를 지급받아 후지타에게 전달했다. 이후 후지타는 한국정부로부터도 5천원을 받아내 총 10만 5천원의 자금을 가지고 방역사업을 시작했다. 제일 먼저 황금정(黃金町, 을지로) 뒤편 일대의 빈민 부락민 약 7천명에게 1인당 1일 쌀3홉씩을 배급키로 하고 동대문 밖 2-3리 떨어진 곳으로 전원 이주시켰다. 종로 및 저지대의 우물에 전부 석회(石灰)를 부어 사용을 금하고 물통 등을 모아 한강 중류의 물을 길러 소달구지로 운반해 취사용수로 사용케 했다. 동궁(東宮)의 용수는 통감부와 통감부 관저 사이에 있는 앵두골의 물을 사용케 했다. 요리점, 숙박업소, 음식점 등의 여종업원 대표와 요리사 등을 각 지역별로 모아 위생강연을 직접했으며, 경성시내의 위생상태 음식물 상황 등을 매일 오후 1시에 방역본부에 보고토록 했다. 시내 개업의들에게도 설사환자의 경우는 바로 신고하도록 하고, 시민들에게도 증상 발현시 속히 의사의 진단을 받도록 명령했다. 이를 통해 콜레라로 의심되면 수당을 주어 바로 시외로 전출시켰다(陸軍軍醫團, 1943: 152)[32].

이처럼 “계엄령을 선포한 것과 같은 분위기”에서 진행된(「韓國通信」, 『同仁』 19, 1907, p.10) 방역활동의 결과 2주 만인 1907년 10월 14일 콜레라 유행은 가라앉았다. 요시히토 친왕은 10월 16부터 10월 20일까지 통감 관저에 머물며 탈 없이 일본으로 돌아갔다. 무사히 방역임무를 마침에 따라 방역사업에 동원된 2,285명에게 10만 5천원 중 남은 돈 28,865원을 상여금으로 나누어 주고 10월 20일 바로 방역위원회를 해산했다(陸軍軍醫團, 1943: 153).

후지타가 주도한 콜레라 방역은 하나의 표본이 되어 이후에도 위생행정의 군사적 성격은 지속되었다. 특히 헌병경찰제가 자리 잡으면서 더욱 견고해졌다(박윤재, 2005: 202). 1900년대 말에 이르면 일본인 순사들이 검병적호구조사(檢病的戶口調查)를 구실로 여성들이 거처하는 내방까지 침입하는 상황까지 벌어졌다(金正明, 1964: 1284). 급기야 통감부 내 문관 관료들을 중심으로 군사적 위생행정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었다. 내무차관 오카시 시치로(岡喜七郞)는 전염병 방역을 위해서는 보다 근본적인 조치가 필요하다며, 상하수도의 개선, 피병원의 설립 등을 제안했다(『內閣往復文』 奎17755, 1909.9.28). 위생고문인 야마네 마사쓰구(山根正次) 역시 조선의 위생개선의 시급함을 강조하며 종두보급과 수도개선과 같은 체계적인 접근이 필요함을 강조했다(『每日申報』, 1910.12.11). 이런 문제 제기에 대해 후지타는 “담당 순사를 배치하고... 엄밀하게 명령하는 동시에 그 구내 인민으로 하여금 명령을 준봉(遵奉)하게 해야 한다”며 군사적인 방식의 방역을 고수했고(金正明, 1964: 1291), “조선의 민도로서는 ... 수도는 아직 시기상조”라며 근본적인 접근을 차단했다(佐藤剛藏, 1993: 155).

사실 이는 후지타가 본토에서 보여준 위생행정과는 적지 않은 차이를 보였다. 후지타는 히로시마에 근무할 당시 가장 공을 들인 것은 수도개선사업이었다. 군의부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도쿄에서 수도전문가를 불러 전체적인 수리를 진행했다. 이때 양수장치를 교환하기 위해 영국에 주문하여 교체하였다. 이를 위해 40만원을 정부에서 현으로 분배토록 내무차관을 설득하고 현청(縣廳)을 독려하여 사업을 완수했었다(陸軍軍醫團, 1943: 131).

물론 후지타가 한국에서 단지 긴급 방역조치에만 신경 쓴 것은 아니었다. 일본 본토에서처럼 지역 위생사업에도 신경을 썼다. 후지타는 1907년 콜레라 방역을 성공적으로 마친 후 경성을 “이전처럼 불결하게 만든다면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라며 이를 유지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했다. 후지타는 경시총감 마루야마(丸山)와 미우라(三浦) 이사관을 만나 협조를 부탁했다. 쓰레기와 오물은 성외로 갖다 버리는 것을 원칙으로 정하고 그 구체적인 방법을 연구하기 위해 경시청 서기관 아오키 가이조(靑木戒三)와 매일 출근 1시간 전에 파고다 공원의 육각당(六角堂)에서 만나 협의하였다(陸軍軍醫團, 1943: 154).

이러한 논의 끝에 만들어진 것이 바로 한성위생조합이었다[33]. 경비가 가장 큰 문제였는데 후지타는 “경성은 예부터 세금을 징수한 사례가 있기에 그에 따라 ‘위생조합경비’라 하여 조선인에게는 1개월에 10전 이상 30전까지 내지인(일본인)에게는 30전 이상 1원(100전)까지의 사업비용을 징수하도록” 하였고, 그 징수는 경관(警官)이 하도록 하였다. 이 돈으로 오물운반을 위한 마차 200대와 육군의 폐마를 사들여 이 전체를 관영토록 하였으며, 경찰관이 이것을 감시하고 인부를 지휘하여 시내의 쓰레기와 오물을 동대문 밖으로 반출토록 했다(『朝鮮新聞』, 1936.5.21).

후지타의 주도 아래 1907년 12월 27일 공식 발표된 이 조합의 정식명칙은 ‘한성위생회(漢城衛生會)’였다(統監府, 1911: 384). <한성위생회규칙>을 보면 “조합”이란 말 대신 “회”로 바꾼 이유를 엿볼 수 있다. 재원은 한국정부의 보조금과 한성거주자로부터 징수하겠다며 “자발성”을 강조하면서도, 회장은 내부차관, 최고 의결단위인 평의원은 경무국장, 한국주차군 군의부장, 경시총감, 경성이사청 이사관, 한성부윤, 경성거류민단장, 한성부민총대 등이었으며, 집행을 책임질 실행위원장은 경시총감이 맡았다(박윤재, 2005: 215). 이는 군부와 경찰이 지역에 개입하는 또 하나의 통로를 만든 것에 다름 아니었다(정혜경·김혜숙, 2005: 74).

통감부에서 밝힌 한성위생회의 설립목적은 “경성에서 일본 기사를 따라 청결히 해도 한인 시가가 불결하면 유해한 것이 자연히 한인 거리로부터 일본인 거리로 올 것”이기에 “전체적으로 합의하여 위생을 도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同仁會, 1910: 8). 이처럼 한성위생회의 설립 목적은 통치의 핵심 구역인 서울에 살고 있는 일본인들의 건강을 유지하는데 있었다(박윤재, 2005: 215). 한성위생조합은 병합 이후 경성부로 이관되어 계속 이행되었으며(陸軍軍醫團, 1943: 154), 이와 유사한 형태로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34].

3) 자혜의원 개설

자혜의원의 시작은 간도에서부터 기원했다. 후지타는 1907년 한국 통감부에 간도출장소를 청원했다. 이것이 받아들여져 1907년 8월 통감부 파출소를 개설함과 동시에 자혜의원을 설치했다. 후지타는 이곳에 1등 군의 무라이 시즈오(村井靜夫)를 원장으로 임명했다. 진료에 필요한 물품들은 러일전쟁이 끝나고 “통감부에 보관된 위생재료를 배부 받아” 공급하였다(陸軍軍醫團, 1943: 84). 설치 명분은 한국인에 대한 진료였다. 하지만 자혜의원의 첫 시작이 간도였다는 점, 그리고 그 재원이 모두 군부에서 나왔다는 점이 시사하는 바는 크다. 중국과의 경계를 의학적으로 관리하는 것은 그 자체로 군사적 성격을 갖는 것이기도 했다. 한국인들에 대한 진료 역시 후지타 스스로 언급했듯이 “민의(民意)의 안정”을 위한 것이었다(陸軍軍醫團, 1943: 85). 이러한 자혜의원의 성격은 이후 한반도 내 연이어 건립된 자혜의원까지 이어졌다.

후지타는 간도 자혜의원의 ‘성공’을 근거로 한반도 내에도 자혜의원을 증설할 것을 통감부에 건의했다. 후지타는 “우선 전주, 청주, 함흥에 자혜의원 설립”을 제안했다. 이 세 곳은 1907년 대한제국 군대 해산 이후 의병들의 반란이 일어난 지역이거나 같은 도내의 인근지역이었다[35,]. 그러나 대한의원 건립에 집중하고 있던 이토 통감은 “그와 같은 소규모로는 밀려오는 일을 감당할 수 없을 것”이라며 반대했다. 실제 후지타의 안은 한국인의 부용건물을 수리하여 “마치 육군야전병원식”으로 짓자는 것으로(陸軍軍醫團, 1943: 85), 각 지역의 장기적인 관리를 위한 조치라기 보단 임시 군사방편에 가까웠다. 이후 후지타는 자혜의원 관련 논의를 위해 한국정부 내부 위생국과 협의를 진행했는데, 위생국을 가더라도 위생고문인 야마네[36,]와는 논의하지 않고 위생국 기사 오쿠누키 교스케(奧貫恭助)를 외실로 불러 따로 논의를 진행했다(佐藤剛藏, 1993: 64)[37].

결국 후지타의 자혜의원 증설 계획은 2대 통감인 소네 아라스케(曾彌荒助)에 의해 채택되었고, 데라우치 육군대신이 통감을 겸하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추진됐다(陸軍軍醫團, 1943: 87). 재원은 간도자혜의원과 마찬가지로 일본 육군이 러일전쟁 후 통감부에 이관한 것을 활용하였다(三木榮, 1963: 291). 이 재원은 러일전쟁당시 러시아 함대의 습격으로 인해 해상교통이 차단될 경우를 대비해 일본군이 대량 비축해둔 의료기구와 의약품이었다. 러일전쟁이 예상보다 빨리 끝남에 따라 이를 처리하기 곤란한 상황에서 후지타가 데라우치에게 통감부로 이관해 조선 통치를 위해 사용토록 제안한 것이었다(陸軍軍醫團, 1943: 156).

합병 전까지 13개의 자혜의원이 설치된 지역은 각 관찰도 및 기타 일본 수비대가 주둔하고 있는 곳을 지표로 하여 선택된 것이었으며(신동원, 1997: 368), 임명된 의사 역시 전원 일본인 군의들이었다(『朝鮮總督府官報』 號外, 1910.10.1). 일본 중의원에서조차 조선 각도에 설치된 자혜의원 원장이 모두 군의라는 점을 지적하면서 일방적인 군의 위주의 인사정책을 비판할 정도였다(日本帝國議會, 1991: 313). 또한 자혜의원 증설 과정에서 후지타는 대만 경험을 의식한 듯[38,], 일제 식민 통치를 보조했던 동인회 의사들마저 철저히 배제했다(박윤재, 2005: 261). 이미 평양과 대구에서 기반을 잡아가고 있던 동인의원(同仁醫院)도 자혜의원으로 이관시켰으며(『皇城新聞』, 1910.8.11), 동인회가 위탁 받아 각 지역에 배치했던 경찰의(警察醫) 역시 자혜의원 건립을 이유로 축소시켰다(『大韓帝國官報』, 1910.6.30).

물론 자혜의원은 조선인에 대한 무료진료와 순회진료 등의 사업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한일병합으로 빚어지는 일제에 대한 반감을 무마시키고 조선인의 호의를 획득하고자 하는 수단으로서의 목적 또한 컸다(박윤재, 2005: 248-249). 하지만 실제 자혜의원을 이용한 환자 구성을 분석해보면 내실은 일본인 관리를 위한 병원이었고[39], 어디까지나 근본적 목적은 군 자원의 활용과 의료를 통한 군사적 통치의 강화에 놓여있었다.

5. 한일병합 이후의 행적

1) 조선총독부의원장 부임과 개편

‘야마가타 계열’의 군인이자 당시 수상이었던 가쓰라는 1910년 3월 20일 야마가타, 데라우치와 회담하여 소네 아라스케를 통감에서 해임시키고 한국에 대한 강제점령을 최종 결정했다(海野福壽, 2004: 199). 총독으로는 결국 데라우치가 임명됐다. 야마가타 그룹의 대륙정책 책임자였던 육군대신 데라우치가 조선의 총독으로 임명된다는 것은 대륙침략을 위한 병참기지로서의 이행이 본격화됨을 의미했다(海野福壽, 2004: 202). 이에 따라 조선의 총독정치는 표면적으로 대만의 선례를 따라 틀을 갖추었지만 질적인 면에서 크게 달랐다. 문관 출신 관료들이 권력을 잡고 민정부를 중심으로 문관경찰제를 통해 통치를 해나가던 대만과 달리 조선은 “육군대신과 총독의 지휘를 받는 헌병사령관이 경찰권을 독점하여 민정도 헌병이 행하는 육군 직할령”과 같았다(전상숙, 2006: 119).

데라우치는 이러한 토대를 만들기 위해 총독 부임 전 통감시기부터 이미 헌병경찰제를 다지기 시작했다. 이원화되어 있던 한국의 경찰권을 통감부로 가져와 통일하고 헌병사령관이 경시총감을 겸임하도록 하여 헌병과 경찰을 일원화시켰다(釋尾東邦, 1926: 539). 1910년 6월 24일 경찰권이 공식적으로 일제에 넘어갔다. 이어 일제는 1910년 6월 30일 한국경찰관 관제를 폐지하고 칙령으로 통감부경찰관 관제 개정과 한국주차헌병조례를 개정하여 경시청과 경무국을 합쳐 새롭게 경무총감부를 설치했다. 그리고 그 수장자리에 헌병사령관 아카시를 임명했다. 이후 한국의 경찰사무는 통감부 직할로 이관되었고 지방헌병대장이 지방경찰부장을 겸하여 지역의 말단 경찰까지 헌병에 의해 통제되는 조직형태가 구축되었다(전상숙, 2006: 140).

위생행정 분야는 후지타를 중심으로 개편이 이루어졌다. 강점과 함께 대한의원이 조선총독부의원으로 개칭되며 데라우치의 절대적 신임을 받아온 후지타가 원장으로 임명됐다. 하지만 후지타는 이에 만족하지 않았다. 후지타는 데라우치에게 직접 “자신은 자혜의원을 만든 사람이지만”, 총독부 관제상 “자혜의원과는 관계가 없게 되었다”고 호소하여 내무부 위생고문격으로 자혜의원 사무촉탁까지 맡았다[40,]. 이로써 총독부 의원장이 각 도 자혜의원의 인사 및 경영까지 관할하는 총책이 될 수 있었다[41,]. 반면 병합과 함께 한국 내부 위생국의 사무가 총독부 경무총감부의 일개 과인 위생과로 축소 이전되면서 내무부 위생국 고문이었던 야마네의 역할은 경무총감부 위생과 고문으로 축소되었다[42].

후지타는 조선총독부의원 원장이 된 후 조직개편을 단행했다. 내과, 소아과, 안과, 산부인과 외 나머지 의관들을 모두 교체하였다. 이어 피부과, 이비인후과, 외과를 신설하고 각 부장 및 약국장에는 현역 군의와 약제관을 임명했다. 이런 개편을 통해 조선총독부 의료진들의 절반가량이 군의들로 채워졌다. 이는 자혜의원의 모든 원장을 비롯한 소속 의사들이 군의들로 채워진 것과 같이 “군의를 활용하는 동시에 조선의 군사적 지배를 의학적 측면에서 관철시키는 일환”이었다(박윤재, 2005: 241). 무리하게 군의들을 투입함에 따라 군부와 비군부 출신 의사 사이에 갈등이 일었고, 이는 총독부의원의 고질적인 문제로 고착되어 급기야 1920년 하가 에이지로 원장 교체의 중요한 원인이 되기도 했다(『每日申報』, 1920.9.28).

2) 조선총독부의원 부속의학강습소 개편

대한의원은 사토 스스무가 원장을 맡아오다 1909년 7월에 육군군의총감 기쿠치 쓰네사부로(菊池常三郞)로 교체되었다. 기쿠치 원장은 한국에 의과대학 설치를 구상했는데, 그 계획은 상당히 구체적이었다. 대한의원 부속의학교를 승격시켜 의과대학을 창설하고 해부학에 구보 다케시(久保武)를, 세균학에 사이토 겐지(齊藤謙次)를, 내과에 모리야스 렌키치(森安連吉)를 임용하겠다는 구상이었다. 그런데 소네 통감이 중병에 걸림에 따라 그와 인척이며 시의(侍醫) 역할을 자임했던 기쿠치는 소네 통감을 돌보는데 전력을 다했다. 결국 소네가 일본으로 요양을 감에 따라 기쿠치 역시 이에 동행하면서 대한의원 원장직을 사임하였다. 결국 후지타가 대행 업무를 맡게 되었고 기쿠치의 의과대학 계획은 실현되지 못했다(陸軍軍醫團, 1943: 97).

사실 기쿠치가 남아있었다 하더라도 당시 정황상 대한의원 부속의학교의 대학 승격은 어려웠다. 데라우치는 철저히 실업교육에 방점을 두고 있었다. 당시 ‘조선에 대학을 설립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여러 곳의 주문이 있었지만 데라우치는 “우선 피폐하고 곤궁한 인민들을 부유하게 만드는 것이 선결문제”라는 구실로 이를 거부했다. 데라우치의 지시를 받는 후지타가 조선총독부의원장이 되면서 대한의원 부속의학교의 위상은 더욱 후퇴했다. 후지타는 조선의 민도(民度)에 적당하지 않다는 이유로 대한의원 부속의학교를 조선총독부의원 부속의학강습소로 강등시켰다(佐藤剛藏, 1993: 80).

강등과 함께 제모 또한 각모에서 환모로 바뀌었다. 이는 데라우치의 명령에 의한 것이었다. 우연히 각모를 쓴 학생을 본 데라우치는 “거만한 단계”라며 “속히 환모로 바꾸도록” 지시했다. 이는 조선인 학생들의 자존심을 자극하여 “학과를 쉬게 하는 대소동”이 일어나 종로 경찰서장이 중재에 나서야 하는 상황까지 벌어졌다(佐藤剛藏, 1993: 87). 또한 의학교육의 중요한 한 축이 었던 약학과도 폐지되었다[43,]. 의학교육이 퇴행을 거듭하면서 학생들의 불만은 이어졌다. ‘강습소’라는 이름 자체에 대한 반발이 커서 조선총독부는 궁여지책으로 졸업증서에 ‘의원의육과(醫院醫育課)’라는 이름을 새겨 학생들을 달래야할 정도였다(佐藤剛藏, 1993: 49-50). 이러한 “의육(醫育)의 축소적 개혁”에 대해 당시 의학계에서도 비판의 목소리가 거셌다. 그럼에도 데라우치는 조선의 현 시점에서는 이정도가 최선이라며 후지타를 통해 강행해 나갔다(陸軍軍醫團, 1943: 246).

의학강습소규칙은 조선총독부의원 관제가 공포되고 약 5개월 후인 1911년 2월 20일에 공포됐다. 규칙 자체는 대한의원 부속의학교의 것과 별반 다를 바 없었다(기창덕, 1995: 65). 그러나 교육방식과 교육자는 크게 손을 보았다. 후지타는 부속의학교 때 사용하던 번역된 조선어등사본 교재는 일체 소각하고(佐藤剛藏, 1993: 79), “장래를 고려해” 일본어로 교육하도록 바꾸었다(陸軍軍醫團, 1943: 246). 후지타는 대한의원 부속의학교 교수 7명 전원을 폐관시켜 조선인 교수는 한 명도 남기지 않았다. 이러한 개편은 상당한 반감을 사 방화사건이 여러 차례 발생했다(佐藤剛藏, 1993: 73).

후지타는 사토 고조를 의육과장에 임명하고, 교원 겸 서기에 사카이(酒井謙治郞)를 임명하여 교육사무를 맡겼다. 해부학과 세균학은 대한의원 부속의학교 시절과 동일하게 구보(久保武)와 사토 고조가 맡았으나 병리학과 기타 기초의학과목은 새로 채용된 현역 군의관인 임상의관에게 맡겼으며, 각 임상과목도 역시 신임 현역 군의관들이 분담 교육하도록 했다. 그리고 수신과목을 신설하여 매주 1회 학생들의 생활에 후지타가 직접 개입했다(佐藤剛藏, 1993: 80-81). 이처럼 의학교육마저 군의들이 주도했다. 사토 고조가 병합 후 거의 모든 것이 “군의만으로 이루어지던 중에 나와 같이 군계통에 속하지 않은” 자에게도 교육이 맡겨졌다며 의아해 할 정도였다(佐藤剛藏, 1993: 52). 후지타는 교육기간도 2년 반이나 3년으로 줄이려 했으나 사토 고조가 설득하여 간신히 4년이라는 기간은 유지할 수 있었다(佐藤剛藏, 1993: 80).

조선총독부의원 부속의학강습소가 대한의원 부속의학교보다 진일보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여성 교육에 관한 측면이었다. 미국인의사 홀(Rosetta Sherwood Hall)의 의뢰에 의해 조선총독부 부속의학강습소에서 조선인 여성을 청강생으로 받아 여의사를 양성했다. 단, 이것은 1회에 3명 정도로 제한하였다. 또한 각 의원과 적십자 지부를 통해 조선인 산파와 간호부도 양성하였다(陸軍軍醫團, 1943: 277).

후지타에 의해 제동이 걸렸던 의학 관련 고등교육기관의 창설은 결국 그가 총독부의원장을 퇴임하고 나서야 다시 추진되었다. 1914년 7월 하가 에이지로가 2대 총독부의원장으로 취임해 ‘경성의전설립위원’을 구성하면서 기쿠치의 계획이 다시 가동되었다. 그러나 1914년 제국의회가 해산되는 바람에 또다시 보류되었다. 결국 1916년 4월에 가서야 경성의학전문학교로 결실을 맺을 수 있었다(陸軍軍醫團, 1943: 99).

3) 조선의학회 창립과 의사 관리

후지타는 조선 총독부의원장 취임을 기회로 경성에 살고 있는 주요 의사들을 초청하여 ‘취임피로연’을 가졌다. 그 자리에서 후지타는 ‘조선의학회 창립의 건’을 제안하였고 후지타를 비롯하여 9명이 창립위원으로 추천되었다(朝鮮醫學會編, 1911). 이후 1911년 4월 29일 조선의학회 발회식을 갖고 후지타가 초대회장에 추대됐다. 당시 약 400여명의 의사를 회원으로 두었는데 조선인 의사 9명도 포함됐다(陸軍軍醫團, 1943: 276).

후지타는 군의를 중시했지만, 군부가 중심이 된 식민 통치를 위해서라도 민간 의사들의 협조가 필요하다는 점을 결코 모르지 않았다. 실질적으로도 민간인 의사들의 협조는 중요했다. 원래 후지타는 무라카미(村上) 한성병원장과 고조 간도우(古城管堂), 구도 다케조(工藤武城) 등과 합심해 의사단체를 구성한 적이 있었다[44,]. 이 무렵 한일병합으로 한국군대해산령이 내려지면서 한국군과 일본군과 시가전이 벌어져 부상자가 속출했는데 이때 의사단체가 신속하게 출동해 큰 도움을 얻은 바 있었다(陸軍軍醫團, 1943: 247-248).

후지타가 의사회를 만든 것은 조선이 처음이 아니었다. 그는 구마모토에서도 “육군 위생부와 지방 관헌 그리고 군의와 지방의와의 연계에 진력”했다. 후지타는 조선에서와 마찬가지로 규슈 의사회를 조직하여 자신이 초대 회장을 맡았다. 구마모토와 히로시마, 그리고 조선에서 후지타와 함께 근무했던 하가 에이지로가 증언하듯이 “후지타의 지론은 재직군의가 각각 그의 본무에 진력하는 이외에 지방과의 연락을 긴밀히 하여 지방위생을 향상시킴으로써 군대위생의 성과를 올려야 한다는 것”이었다(陸軍軍醫團, 1943: 179).

다시 말해, 후지타는 위생행정이 어디까지나 군의들에 의해 진행되는 방식을 고수했고, 민간 의사들은 긴급 방역이나 전시를 대비해 적절한 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있는 군의 보조 인력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6. 결론을 대신하여

후지타는 1914년 7월 환갑의 나이로 조선총독부의원장직을 사임하며 군의 신분을 제외한 모든 관직에서 손을 뗐다(陸軍軍醫團, 1943: 101). 병렬적으로만 나열한다면 후지타 만큼 식민지 의학에 많은 족적을 남긴 사람은 없을 것이다[45,]. 특히 여성 의료 인력을 양성하고, 노인들을 위한 요양원이나 맹아원을 건립한 것은 높이살만 하다[46,]. 그러나 몇 개의 행적과 표면적인 성과만으로 그를 평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총체적으로 보았을 때, 후지타의 삶은 그가 근무한 지역들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일제의 팽창주의 전략과 궤를 함께 했다. 특히 조선에서의 행적은 사토 고조가 증언하듯이 데라우치 “육군대신의 훈시에 적극적으로 원조”한 삶이었다(陸軍軍醫團, 1943: 273)[47].

후지타는 군부에 의해 선택된 사람이었고, 그 역시 군부가 부여한 역할에 충실했다. 이는 그가 군부로부터 받은 보상을 통해 입증된다. 그는 1912년 9월 28일 군의로서 최고의 위치라고 할 수 있는 육군군의총감 자리에 올랐다(陸軍軍醫團, 1943: 165)[48,]. 이는 일본 본토를 벗어난 지역의 근무자에게 준 최초의 사례였으며, 박사급이 아닌 인물로는 일본 군의의 효시로 불리는 이시구로 타다노리(石黒忠悳)를 제외하고는 유일했다[49,]. 후지타 직전 군의총감에 오른 인물이 도쿄대 출신에 독일 유학까지 다녀온 모리 오가이였던 것을 보더라도 그의 군의총감 임명은 분명 파격적인 것이었다. 당시 군사(軍事) 잡지에 “하늘에 두 개의 태양이 없는데, 군의총감에 두 사람이 있다”는 논평이 실릴 정도였다(佐藤剛藏, 1993: 64-65)[50].

후지타가 일본 제국 내 근무한 지역은 다양했지만, ‘군인’으로서 일관된 삶을 살았다. 주되게 그의 행보는 일제의 대륙침략 계획의 부침과 속도에 맞춘 보조자로서의 역할에 놓여 있었다. 때문에 후지타가 장악한 조선의 일제 식민지 의학은 군사적으로 점철될 수밖에 없었다. 즉, 군의의 수장으로서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군대를 관리하기 위한 병원이었고, 군 위생을 위협할 수 있는 전염병에 대한 방역조치였다. 그 이상의 피식민지인들을 위한 의료는 후순위일 수밖에 없었다. 또한 같은 의사일지라도 이러한 방향과 속도에 결을 달리할 경우 각을 세워야만 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러일전쟁이나 황태자 방한을 대비한 콜레라 방역 때에는 사후 자원이 남아돌 만큼 철저함을 기했던 반면, 일반 민중들을 위한 위생사업의 경우 세금을 부과시키고 경찰을 통한 단속으로 일관한 것은 그에게 합당한 것이었다. 수도 보급 대신 격리식 방역을 고수하고, 민간의사들을 배제한 채 군의만을 기용했으며, 의과대학으로의 승격 대신 의학강습소로 격하시킨 것 또한 같은 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점들을 종합해 볼 때, 후지타 쓰구아키라는 일제 통치 초기 군부를 중심으로 한 일제의 식민 정책의 방향에 맞추어, 대륙침략을 위한 발판으로서 조선이 관리될 수 있도록 식민지 의학의 기틀을 다진 인물이라고 평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그는 의학사적으로 조선이 일제 통감 통치에서 총독 통치로 변하는 과정에서 식민지 의학의 양상이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 인물이며, 아울러 조선에서 일제 식민지 의학이 제도적인 면에 있어 대만의 그것을 유사하게 따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질적인 차이를 갖게 되는 과정과 그 이유를 보여주는 인물이기도 하다[51].

사실 이 연구에서 정리한 것은 후지타의 행적 중 객관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것들만 추린 것이다. 그의 삶과 그를 통해 구현된 일제 식민지 의학을 더 면밀하게 평가하기 위해선 보다 많은 후속 연구가 필요하다. 또한 이 연구가 선행연구들과 다양한 사료들로 검토하고 보완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후지타의 회고에 바탕을 둔 근본적 한계를 완벽히 극복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후지타는 일제 식민지 의학을 논하는 데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인 만큼 그에 관한 기초적인 연구를 진행한 것만으로도 적지 않은 의미를 가지리라 본다.

Notes

1)

이 논문에서 사용한 ‘식민지 의학’이란 이지마 와타루(飯島涉)가 정의한 개념을 차용하여 “식민당국이 식민 통치를 위해 식민지에 적용시킨 근대식 서양의학에 기반한 위생 개념, 의료 제도 및 기술”로 정의하고자 한다(飯島涉, 2005: 8). 후지타의 경우 단순히 위생행정가라고 규정할 수 없을 만큼 관여한 영역이 광범위하여 이러한 광의의 개념을 적용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특히 제목에 명시한 것과 같이 후지타가 주되게 개입했던 조선총독부 부속의학강습소 등 교육과 관련된 의학 분야, 궁중의무, 조선총독부의원과 자혜의원 그리고 조선 의사회를 중심으로 한 의료 분야, 콜레라 방역과 한성위생회를 중심으로 한 위생 분야를 포괄하는 개념으로 사용하였다.

2)

‘藤田嗣章’의 한글 표기인 ‘후지타 쓰구아키라’는 국립국어원 외래어 표기법 용례에 근거한 것이다. ‘嗣章’의 경우 ‘아키’혹은 ‘아키라’로 발음이 가능한데 일본인명대사전에 의하면 ‘藤田嗣章’의 경우 ‘아키라’로 불렸다.

3)

사토 고조(佐藤剛藏)는 1906년 교토제국대학 의과대학을 졸업한 의사이다. 1907년 6월 한국에 와서 1945년 12월 일본으로 돌아갈 때까지 총독부의원 의육과장, 경성의학전문학교 교장,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교수,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 교장 등을 지냈다(황상익, 2013: 642).

4)

대표적으로 사토 고조의 글을 보면, 후지타와 관련된 동일한 사건에 대해서 『朝鮮醫育史』에서는 비교적 객관적으로 기술하고 있는 반면 『陸軍軍醫中將 藤田嗣章』에서는 상당히 긍정적인 논조로 기술하고 있다.

5)

대표적으로 일제가 대만을 통해 중국 침략을 꾀했던 1900년 샤먼(厦門) 출병에 대해 정황상 후지타가 관여를 했을 것으로 추정되나 실패한 작전이어서 인지 이에 대해 언급을 피하고 있으며, 자신의 이력에 “샤먼(厦門) 방면에 출장 감”정도로 기술하고 있다(陸軍軍醫團, 1943: 164). 또한 이 논문의 본문에서 다양한 자료들을 통해 확인되고 있듯이 후지타는 문관·무관 사이 대립의 중심에 놓여있었다. 그러나 『陸軍軍醫中將 藤田嗣章』에서는 오히려 자신이 두 세력 사이에서 중재자 역할을 한 것처럼 기술하고 있다. 심지어 그와 가장 큰 대립을 보였던 고토 신페이, 야마네 마사쓰구(山根正次)와의 관계에 대해서도 문제가 없었다고 언급하고 있다.

6)

대표적으로 조선 부임 과정과 한성위생회와 관련된 부분에서는 조선신문에 기고한 후지타의 글과 비교해 인용하였다. 1936년도 『朝鮮新聞』의 ‘朝野名士の朝鮮觀’란에는 5월 19일, 20일, 21일, 22일, 26일 총 5회에 걸쳐 조선 부임 과정과 한생위생회에 대한 후지타의 글이 실렸다.

7)

대표적으로 사토 고조의 증언은 『朝鮮醫育史』와 겹치는 경우가 많은데, 이럴 경우 가급적 『朝鮮醫育史』의 기록을 취하였다.

8)

현재 도쿄 미나토쿠(港区) 록본기(六本木) 지역에 해당한다.

9)

에도시대 번사(藩士)의 자제를 교육하기 위해 설립한 학교로 학생들은 대부분 7-8세에 입학한다(山下武, 1969 참조).

10)

폐번치현은 헤이안 시대 후반부터 이어온 봉건적 토지지배 방식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것으로, 메이지 유신의 최대 개혁이라 말할 수 있다(박삼헌, 2012: 107-10).

11)

뮬러와 호프만은 독일의 군의로서 대학동교에 근무하며 근대 일본의학교육을 정비하였다(Heinz Vianden, 1984: 165-168).

12)

후지타는 본인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대학동교의 청강생이었고 “정규 대학과정을 마치지 못했다”. 당시(1875년부터)에는 1년 반 이상 의학을 수학했다는 것만 증명할 수 있으면 의술개업시험을 볼 수 있었다(橋本鉱市, 『専門職養成の政策課程』, 学術出版会, 2008 참조). 스스로 밝힌 의사면허 취득 과정은 다음과 같다. “그 무렵에는 의업에 관한 법령이 완비되지 않아 나는 그 후 메이지17년(1884년) 5월 15일에 의술개업면장(지금의 의사면허증)을 받게 되었다. 소위 ‘이력면장(履歷免狀)’으로 ‘의술로서 봉직한 이력에 근거하여 이 면장을 수여함’이라고 쓰여 있고, 내무경(內務卿)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씨와 위생국장 나가요 센사이(長與專齋)씨의 명의가 적혀 있었으며, 제4052호로 의적에 등록되었다.”(陸軍軍醫團, 1943: 4)

13)

당시는 육군성(陸軍省)에 의무국이 없었고 육군 전체 위생사무를 본병원(本病院)에서 취급했다(陸軍軍醫團, 1943: 5).

14)

1895년부터 1896년까지 주둔한 2만 5천 명의 군인 중 90% 이상이 질병에 시달렸으며 2,014명이 질병으로 사망했다. 대만 통치 초기 군부 위생책임자는 “일본 근대문학의 창시자”로 잘 알려져 있는 모리 오가이(森鷗外)였다. 독일 유학까지 다녀와 명성이 자자한 그였지만 대만의 위생상황은 너무 열악해서 근대 의료를 적용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며 관리 실패를 인정하고 떠났다(Michael Shiyung Liu, 2009: 47).

15)

일제의 신경제관리정책과 이에 대한 무장투쟁에 대해서는 翁佳音의 『臺灣漢人武裝抗日硏究史(1895-1902)』(國立臺灣大學出版委員會, 1986: 135-163)를 참조할 것.

16)

일본 내 지식인들과 국민들로부터 제국으로서의 역량에 대한 의구심을 불러일으켰다. 급기야 대만 영유는 일본에게 ”사치에 불과”하니 1억 엔에 서구 제국이나 중국에 팔아야 한다는 주장까지 제기됐다(矢內原忠雄, 1988: 8).

17)

고토 신페이는 스카가와 의학교를 졸업하고 독일 유학까지 다녀온 의사로서 1892년부터 1894년까지 일본 내무성 제2대 위생국장을 역임했다. 이후 정치적 위기를 맞았으나 고다마 겐타로가 청일전쟁에서 돌아오는 배와 병사들에 대한 검역을 그에게 맡겼고 이를 성공적으로 완수하면서 재기할 수 있었다. 이러한 인연을 바탕으로 고다마가 대만 총독으로 부임할 때 민정국장으로 초청됐다. 일제의 대만 장악은 고토 신페이에 의해 달성되었다고 평가될 만큼 일제의 초기 대만 통치에 있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며, 후지타와 함께 일제의 초기 식민지 의학을 연구하는데 있어서도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Michael Shiyung Liu, 2009 참조)

18)

고다마와 고토의 인연은 만주까지 이어져, 러일전쟁 이후 고다마는 남만주철도주식회사 총재직을 고토에게 제의했다. 처음에는 거절했으나 고다마가 병사함에 따라 1906년 말 결국 총재직을 맡게 된다(고바야시 히데오, 2004: 45-49).

19)

야마구치 히데타카(山口秀高)는 1889년 도쿄제국대학 의과를 졸업한 의사로서 고토 신페이의 추천으로 1896년 대북병원 원장으로 부임했다. 1897년 대북의원에 대만토인의사양성소를 개설하여 대만에서 최초로 근대식 의학교육을 실시했다. 이후 대만총독부의학교 교장과 대만총독부의원 원장을 역임하는 등 고토 신페이를 도와 식민지 대만의 의학 관련 분야를 총괄했다.(『臺灣歷史人物小傳』, 2003: 17-18)

20)

1902년 고토의 초청으로 대만에 온 다카기 도모에는 최고위 무사가문이었으며, 1885년 도쿄제대의 전신인 도쿄의학교를 졸업하였고, 기타사토 연구소에서 4년간 근무한 뒤 독일로 건너가 2년간 코흐연구소에서 공부한 최고의 엘리트였다. 독일 유학 후 일본에 돌아온 그는 위생국방역과장과 임시검역국사무관 등을 맡아 일본의 예방정책을 체계화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Michael Shiyung Liu, 2009: 48, 53-54).

21)

군부대신의 임용 자격을 현역 대장(또는 중장)만이 맡을 수 있도록 법적으로 제한한 제도로 군부는 이 제도를 이용하여 내각의 존립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井上淸, 1975: 49-53).

22)

사토 스스무(佐藤進)는 1869년 메이지 유신 정부가 제1호로 발급한 공식 여권으로 독일 유학을 떠나 베를린대학 의학부를 졸업했으며, 1874년 동양인으로는 최초로 의학 박사가 되었다. 도쿄의 준텐도(順天堂)병원과 도쿄제국대학 병원장을 거쳐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때는 군의총감(軍醫總監)을 역임했다. 조선과 중국의 의학 분야를 장악하기 위해 설립된 동인회(同仁會)의 부회장 재임 시 이토 히로부미의 요청으로 한국에 와 대한의원 창설준비위원장으로서 의료계 병탄의 주춧돌을 놓았다(황상익, 2013: 720-721).

23)

후지타의 한국으로 오기까지의 결정은 쉽지 않은 것이었다. “오랫동안 대만에 있었는데 이제 또 조선인가”라며 동정해 주던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陸軍軍醫團, 1943: 99).

24)

사토 스스무 역시 군의 출신이었으나 사토가 이토를 도와 대한의원 창립을 주도한 것은 군의 차원보다는 동인회 부회장으로서 역할 한 것이다(同仁會, 1943: 68).

25)

실록에 후지타의 궁중의무 개입이 구체적으로 명시되어 있지는 않으나 『고종실록』 48권, 1907년 2월 19일 기록을 보면 고종이 후지타에게 “특별히 훈(勳) 1등에 서훈(敍勳)”을 하사한 기록이 있어 이 무렵 궁중의무에 개입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후지타의 궁중의무 개입에 대해서는 당시 직접 왕궁에 출입했던 일본인 여의사 도가와 기누코(戶川錦子) 역시 다음과 같은 증언을 보태고 있다. “일한병합전의 한국궁정의 의료는 전부 한방의가 담당하였기에 일본 신의학의 혜택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의계의 태두인 사토 스스무 남작이 대한의원장으로 부임한 후에도 역시 그러했으므로 당시 군의부장이었던 후지타 각하는 한국의 대관들을 설득시키고 자기 자신이 직접 왕궁진찰의 시범을 보였다. 그 후부터 궁정 내 의료가 현대식으로 이루어졌다.”(陸軍軍醫團, 1943: 186)

26)

후지타는 조선에 머무는 동안 궁중과 관련된 일에 상당한 공을 들였다. 실록을 통해 그가 직접 진료한 기록을 다수 확인할 수 있으며, 유명한 화가였던 자신의 아들 후지타 쓰구하루(藤田嗣治)를 조선으로 불러 어진(御眞)을 그리도록 주선하기도 했다(『순종실록』 부록 4권 3장, 1913년 5월 23일). 그의 장남 후지타 쓰구오(藤田嗣雄)도 오랫동안 조선총독부에서 근무했다(角田廣司, 1917: 377).

27)

하가 에이지로(芳賀榮次郞)는 도쿄제국대학을 졸업한 의사로서 1907년 육군군의학교장에 임명되었으며 1914년 후지타의 뒤를 이어 조선총독부의원 원장에 임명되었다. 1916년에는 육군군의총감자리에 올랐다(일본인명사전). 하가 에이지로는 1890년 구마모토를 시작으로 히로시마와 조선에서도 후지타와 함께 근무했다(陸軍軍醫團, 1943: 179).

28)

하가는 후지타가 데라우치를 도와 “군의부장으로서의 본무 외에도 장래를 내다보면서 일을 착안해”나갔는데, “이후 데라우치는 조선 통감에 이어 총독부 총독이 되었고 후지타 역시 총독부의원장이 되었다”고 서술하면서 “내가 후지타의 후임으로 조선에 부임하여 모든 사무를 인계받을 적에 상세히 알게 되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문맥상 데라우치의 조선 통감 부임에서부터 한일병합과 총독부임까지 후지타가 적극 보조했음을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29)

1907년 콜레라 방역에서부터 한성위생회 설립까지의 상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박윤재의 『한국근대의학의 기원』(혜안, 2005: 198-225)과 「韓末ㆍ日帝 初 漢城衛生會의 活動과 植民 支配」(『서울학연구』 제22호, 2004: 67-89)를 참조할 것.

30)

후지타는 1882년 콜레라 방역을 위해 조선에 출장을 온 적이 있었으며, 1888년 구마모토에서도 콜레라 방역활동을 이끈 바 있고, 대만에서 수년 동안 페스트 예방위원을 역임하였다(陸軍軍醫團, 1943: 162-163). 대만이 “전염병의 땅에서 건강한 낙원(樂土)으로 바뀐 것은 관·민(官·民)의 노력과 시설의 힘도 있었지만, 군의부장 겸 대만총독부 촉탁인 후지타의 공 때문”이라는 평가가 있을 정도로 방역에 상당한 능력을 발휘했던 것으로 보인다(陸軍軍醫團, 1943: 263). 그의 이러한 대만에서의 경험이 1907년 조선에서 콜레라 방역을 하는데 반영되었을 것이다.

31)

고다마 히데오는 대만총독이었던 고다마 겐타로의 아들이자 데라우치의 사위이다(일본인명사전).

32)

후지타는 한국주차군 군의부장으로 역임할 당시 경성에는 일본인 측의 한성병원과 몇 개의 사립병원에 전염병실이 있었을 뿐, 한인 측에는 전염병실이 전혀 없다며 급히 양국의 유력자에게 건의하여 청파피병원(靑坡避病院)을 설립하였다. 그후 광희문밖 삼거리(三巨理)에도 피병원이 세워졌다. 1907년 10월 요시히토 친왕의 방문시 이 피병원이 큰 역할을 했다고 한다(陸軍軍醫團, 1943: 246).

33)

정식 명칭은 ‘한성위생회’이나 이를 기안한 후지타는 계속해서 ‘한성위생조합’으로 언급하고 있다. 회고의 내용을 보더라도 그는 처음부터 한성위생회를 조합으로 기획했음을 알 수 있다.

34)

일제는 조선에서 일찍부터 위생조합을 통한 제예사업(際穢事業)을 추진하였는데, 전염병 예방령 및 전염병 예방시행규칙과 연계되는 1915년 무렵에는 전국에 이미 986개가 있었다(정혜경·김혜숙, 2005: 74).

36)

야마네 마사쓰구(山根正次)는 1882년 도쿄대학의과대학을 졸업한 의사로서 영국에 유학하여 위생행정과 법의학을 공부했다. 귀국 후 경찰의장(警察醫長), 경찰의무국장, 경시청검역위원장 등을 역임했으며, 일본 경찰의무행정의 초석을 다진 인물로 평가된다(일본인명사전). 이처럼 경찰조직 내에서의 야마네의 경력과 업무 범위는 군부에서의 후지타의 그것과 유사했기에 대립할 경우 마찰은 클 수밖에 없었다.

37)

선행연구들에서는 야마네와 후지타의 갈등만을 언급하고 있지만, 이는 자혜의원의 성격이 동인회 이사였던 야마네가 동의하기 어려운 것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38)

고토 신페이가 군부 세력을 견제하며 대만의 식민지 의학을 위해 고용한 야마구치와 다카기 모두 동인회 회원이었다(丁蕾, 1999).

39)

1919년의 경우 인구대비 일본인의 21%, 조선인은 1.1%가 자혜의원을 이용했다(박윤재, 2005: 256).

40)

본래 내무부 위생국이 담당한 위생행정은 총독부의 내무부 지방국 위생과가 맡게 되었고 위생행정 가운데 경찰에 관한 사무는 경무총감부에서 관할했다. 구체적으로는 지방국 위생과가 주로 총독부의원과 자혜의원의 구료제도사무(救療制度事務) 및 그 밖의 위생행정을 관장했고 경무총감부는 일반위생 및 그와 관련된 단속을 맡게 되었다(이형식, 2012: 7).

41)

이러한 체계는 하가 에이지로 2대 총독부의원장시절과 3대 시가 기요시(志賀潔) 원장까지 이어졌다(陸軍軍醫團, 1943: .88)

42)

위생업무가 군이 장악한 경찰의 업무로 변질된 것을 고려한다면 사실상 그가 개입할 수 있는 여지는 거의 남지 않았을 것이다. 본 자료에서는 이처럼 위생업무가 이원화되는 데 야마네와 후지타의 갈등이 상당부분 작용한 것으로 기술되어 있으나(陸軍軍醫團, 1943: 88), 과연 둘 사이의 대립으로 그 정도의 변화가 생겼는지에 대해선 보다 면밀한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43)

사토 고조는 대한의원 부속의학교 시절에도 약학과는 학생수가 적었다며, 이름뿐이었다고 덧붙이고 있으나(佐藤剛藏, 1993: 50), 단 한 명이라 하더라도 조선인 약학도가 배출되는 구조가 있고 없는 것의 차이는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44)

이는 육군소장 우지이에(氏家參顯)의 증언으로, 그는 이 단체를 “경성의학회(京城醫學會)”라고 언급하고 있으나 당시 존재했던 단체 중 이와 같은 이름을 가진 단체는 확인되지 않는다. 대신 ‘한국의학회’와 ‘경성의사회’가 존재했는데 두 단체 중 한 단체를 지칭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45)

조선에서 후지타를 보좌했던 육군소장 우지이에(氏家參顯)는 후지타의 업적을 다음 14가지로 정리했다. 1) 콜레라 대방역과 그 후의 제예(除穢) 2) 자혜의원의 창설 및 전시 잔존 위생재료 활용과 순회진료 3) 자혜의원 창립 당시의 조선 진료기관 정비 4) 간호부와 산파의 양성(각 의원과 적십자사 지부에서) 5) 조선총독부의원의 개혁 6) 나(癩)요양소 설립 준비 7) 경성에 피병원 설립 8) 요양원과 맹아원의 설립 9) 한성위생회의 설립 10) 군의(軍醫)와 지방의(地方醫)와의 연계 및 의학회 설립 11) 이왕가(李 王家) 의무(醫務) 개혁 12) 일본 적십자사 지부사업의 협력 13) 외인(外人)의 선사(善事)를 도움 14) 조선인을 사랑함(陸軍軍醫團, 1943: 245)

46)

후지타는 조선총독부내무장관인 우사미 카쓰오(宇佐美勝夫)와 교섭해 양육원과 맹아원을 설립토록 함으로써 조선 노인의 요양과 맹아자의 교육 및 취업에 힘썼다. 당시 마사지 교육을 받은 젊은 맹인을 각 의원에 취직시켰다(陸軍軍醫團, 1943: 247).

47)

후지타는 회고록에서도 데라우치를 “오로지 무단정치를 하였다고 비난하는 것은 당시의 실태를 잘 알지 못하고 피상적인 견해로 판단한 것”이라며 방어하려 애를 쓰고 있다(p.158).

48)

후지타의 승진에는 인맥 또한 상당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의 가족관계를 살펴보면, 첫 번째 부인 “마사(政)의 언니 쥰(淳)과 동생 요코(鎔子) 모두 육군 고위 관직에 있는 군의(軍醫高官)들과 혼인”하였고, 장남인 쓰구오(嗣雄)는 “육군대장 고다마 겐타로의 세 번째 딸과 결혼”하였으며, 장녀 기쿠(喜久)는 군의대좌(軍醫大佐) 아이하라 노부유키(蘆原信之)와, 차녀 고코(康子)는 육군중장 나카무라 로쿠야(中村錄野)와, 삼녀 히로(ひろ)는 군의중좌(軍醫中佐)와 각각 결혼하였다(陸軍軍醫團, 1943: 119). 아울러 데라우치와 고다마 겐타로 그리고 후지타는 자녀들의 혼례를 통해 이어진 친인척 관계였다.

49)

후지타는 이시구로와 학력뿐 아니라 성향도 비슷해 ‘小石黒’라고 불렸다고 한다(陸軍軍醫團, 1943: 276).

50)

관행적으로 육군 현역 군의총감은 의무국장직에 있는 한 사람으로 한정되어 있었는데, 후지타가 군의총감으로 승진한 것을 빗댄 말이다.

51)

대표적으로 대만은 문관경찰이 주도하는 위생행정이었고, 조선은 군부 소속의 헌병경찰이 주도하는 위생행정이었다. 또한 대만은 지역 의료에서 공의(公醫)가 막중한 역할을 담당한 반면(문명기, 2014: 164-168), 조선에서는 공의의 역할과 성격이 달랐고(박윤재, 2005: 273-274), 군의를 통한 자혜의원 중심의 전시(展示)적 의료체계였다. 이에 대한 충분한 논의는 후속 연구를 통해 보완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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