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 14세의 인삼: 17세기 말-18세기 초 프랑스의 본초학 지식 형성*

Louis XIV’s Ginseng: Shaping of Knowledge on an Herbal Medicine in the Late 17th and the Early 18th Century France

Article information

Korean J Med Hist. 2016;25(1):111-146
Publication date (electronic) : 2016 April 30
doi : https://doi.org/10.13081/kjmh.2016.25.111
Institute of Humanities, Yonsei University, Seoul, KOREA
이혜민
연세대학교 인문학연구원
**연세대학교 인문학연구원 이메일: leehm@yonsei.ac.kr
*이 논문은 2010년도 정부재원(교육과학기술부 학술연구조성사업비)으로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연구되었다(NRF-2010-361-A00018). 이 논문의 주제에 대한 아이디어를 주시면서 많은 조언을 해주시고 17-18세기 영국의 인삼론에 대해 다룬 미출간 논문(영국사학회 발표문)을 읽을 수 있도록 배려해주신 설혜심 선생님께 감사드리는 바이다.
Received 2016 January 30; Revised 2016 February 20; Accepted 2016 March 16.

Abstract

This article aims to investigate the shaping of knowledge and discourse on ginseng, especially among physicians and botanists, since its introduction to France from the 17th century until the early 18th century. In France, knowledge on herbal medicine, including that of ginseng, was shaped under the influence of the modern state’s policy and institution: mercantilism and the Académie royale des sciences. The knowledge of herbal medicine developed as an important part of the mercantilist policy supported systematically by the Académie.

The East Asian ginseng, renowned as a panacea, was first introduced into France in the 17th century, initially in a roundabout way through transportation and English and Dutch publications of travel tales from various foreign countries. The publication activity was mainly conducted by Thévenot company with the intention to meet the needs of French mercantilism promoted by Colbert. It also implied interests on medicine in order to bolster the people’s health. The Thévenot company’s activity thus offered vital information on plants and herbs abroad, one of which was ginseng. Furthermore, with Louis XIV’s dispatching of the Jesuit missionaries to East Asia, the Frenchmen were able to directly gather information on ginseng. These information became a basis for research of the Académie.

In the Académie, founded in 1666 by Colbert, the king’s physicians and botanists systematically and collectively studied on exotic plants and medical herbs including ginseng. They were also key figures of the Jardin du Roi. These institutions bore a striking contrast to the faculty of medicine at the University of Paris which has been a center of the traditional Galenic medicine. The research of the Académie on ginseng was greatly advanced, owing much to the reports and samples sent from China and Canada by Jartoux, Sarrazin, and Lapitau.

From the early 18th century, the conservative attitude of the University of Paris, which was a stronghold of conservative Galenic Medicine, began to change with its new interest on foreign medicine herbs, including Chinese medicine. In our opinion, this change is exemplified in a paper, that is to say in a thése de licence or thése quolibétique in French, submitted to the Faculty of Medicine in 1736 by Folliot de Saint-Vast under the direction of Jacques-François Vendermonde. During this period, the knowledge of Chinese Materia Medica was introduced, despite of textual adaptation and interpolation, through the “translation” of Chinese medicale books such as Bencao Gangmu. The Chinese medical books were presented to the French academic public by doctors and Jesuit missionaries active in China. The assessment of the ginseng was generally favorable yet, although physicians and doctors began to take more caution on considering it as a panacea.

I. 머리말

“과학혁명”의 시대인 17세기에 유럽에서는 인간과 자연에 대한 인식에 근본적인 지각변동이 일어났으며, 이와 동시에 의학 분야에서도 새로운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본초학 분야에서 17세기는 유럽 국가들의 팽창주의 및 중상주의 정책의 영향 하에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의 전통적인 텍스트에 기반한 학문 전통에서 벗어나 새로운 본초학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던 시기였다. 특히 인삼은 17세기에 유럽에 본격적으로 소개되기 시작한 새로운 약초였다는 점에서 17세기 본초학 지식의 구축과 확장 및 대륙 간 문화 교류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1,].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내외 학계에서 인삼은 다른 약용작물에 비해 비교적 최근에야 본격적으로 조명을 받기 시작하고 있다. 물론 20세기에도 인삼에 대해 다룬 연구들이 출판되기는 했지만, 오직 인삼만을 지구적인 범위에서 경제사 혹은 문화사적으로 접근한 연구는 아주 근자에 들어 출간되고 있다. 프랑스 학계의 경우 프랑스의 아메리카 인삼 수용을 세계 경제 및 무역체제 하에서 분석한 글이 최근 나온 바 있다(Pelletier, 2011; Motsch, 2014). 국내 학자 중에는 설혜심 교수가 근대 영국의 인삼론에 관한 연구를 선도해나가고 있다. 설혜심 교수는 17-18세기 영국의 다양한 분야에 걸친 문헌 200여개를 분석하면서 근대 초 영국과 미국의 인삼에 대한 인식 문제를 다루었다(설혜심, 2014). 또한 최신 논문에서는 19세기 영국의 신문기사 분석을 바탕으로 이 시기에 인삼이 동서양을 구분하는 상징, 다시 말해서 부패, 사치, 비합리성으로 대변되는 전근대적인 동양의 표상으로 작용하였다고 지적하면서 새로운 인삼의 문화사의 개척 가능성을 제시하였다(설혜심, 2015).

이 연구는 절대왕정기 프랑스의 인삼론 형성 과정, 특히 프랑스의 인삼 수용 및 지식 형성에 호모 리테라투스(homo litteratus)들이 기여한 역할을 살펴보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물론 이 시기 학자들과 지식인들의 해외 식물과 본초에 대한 관심은 당대의 정치, 경제, 문화적인 맥락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다. 특히 프랑스의 경우 학자들이 국가 정책에 부합해서 인삼을 비롯한 해외 식물의 상품화 가능성에 관심을 가지고 소개했을 뿐만 아니라, 국가기관에 의해 조직화되어 집단적으로 연구를 수행했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17세기 중엽 이후부터 계몽주의 시대 이전까지 프랑스의 인삼 지식 수용 및 확장 과정은 크게 네 국면으로 나누어볼 수 있다. 우선 첫 번째 국면은 인삼에 대한 간접적인 소개와 더불어 학술적인 연구를 위한 제도적인 기반이 마련되는 단계였다. 프랑스에서는 1640년대부터 1670년대까지는 주로 포르투갈, 이탈리아, 잉글랜드, 네덜란드의 선교사, 상인, 모험가들이 쓴 여행기나 저술의 번역 출판을 통해서 동양의 인삼이 소개되었다. 이 시기 해외의 본초학 텍스트 번역과 수용은 무엇보다도 재무장관 콜베르(Jean-Baptiste Colbert, 1619-1683)가 적극적으로 추진한 중상주의 정책에 발맞추어 이루어졌다. 당시 영국과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는 중국 외부 지역에서 인삼을 비롯한 여러 상품의 교역을 독점하면서 막대한 부를 축적하고 있었던 반면에, 세계 무역 경쟁에서 한 발 물러서 있던 프랑스는 영국인들과 네덜란드인들이 유럽으로 들여온 온 약재와 작물 및 기타 상품을 수입해서 써야 하는 처지였다. 이에 콜베르는 프랑스인들이 “청어 장사꾼(vendeurs de harengs)”이라 부르며 멸시하던 네덜란드인들의 경제 모델, 즉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를 모방하여 1664년에 프랑스 왕립 동인도회사(Compagnie royale des Indes)[2,]를 설립하였다(Jacq-Hergoualc’h, 1986: 77). 또한 콜베르는 경제 정책을 학문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하여 1666년에는 왕립과학원(Académie royale des sciences)과 국왕의 정원(Jardin du roi)을 창설함으로써 해외에서 들여오는 식물, 작물, 약초 등에 대해 국왕 측근의 학자들이 조직적, 체계적인 연구를 수행하도록 하였다.

두 번째 국면은, 콜베르의 사후 1680년대에 중반부터 1690년대 후반까지 루이 14세가 추진한 해외진출 정책을 통해서 프랑스인들이 시암[태국]과 중국에서 인삼의 실물을 직접 접하거나 복용해보면서 이에 대한 기록을 손수 남기기 시작한 시기에 해당된다. 시암을 교두보로 삼은 프랑스인들의 동남아 진출은 이미 1662년부터 본격화되었다(Lach & Van Kley, 1993: 1185-1196). 그런데, 아시아의 인삼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직접적인 증언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우리가 아는 한에 있어서는, 1680년대 이후부터이다. 이 시기에 루이 14세는 정치사절 겸 문화사절로 종교인 과학자들을 아시아에 대거 파견하였다. 이 과학사절단은 아시아의 문물과 산물에 대해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본국에 보고하였다. 사절단의 일원이었던 슈아지 신부(1644-1724)와 예수회 선교사 타샤르(1651-1712)는 시암에서 접한 인삼에 대해 기록을 남겼다(Choisy, 1687: 323-325; Tachard, 1686: 370-373)[3,]. 특히 슈아지 신부는 귀국 후 1687년에 왕립과학원의 회원이 되었다. 사절단의 청나라 입국 이후에는 예수회 선교사들로부터 인삼에 대한 보고가 더 많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이 시기의 가장 유명한 상징적인 에피소드는 1686-1687년에 프랑스를 방문한 시암 사절단이 프랑스 국왕 루이 14세에게 인삼을 진상했던 일이라 할 수 있다. 당시의 사료에 따르면, 시암 국왕의 수석자문관이었던 폴콘(Constantine Phaulkon, 1647-1688)[4,]이 루이 14세에게 “잔캄(Jancam)”, 즉 인삼을 선물하였다. 이와 더불어, 그의 선물 목록에는 “차를 우려내고 인삼을 익히기 위해 물을 데우는데 쓰이는(pour chauffer l’eau pour le Thé & cuire le Jancam)” 은주전자 하나와 중국의 다기 하나도 함께 들어 있었다(Smithies, 1986: 84-87). 시암 사절단이 가져온 인삼에 대해 프랑스의 지식인들은 상당히 인상적인 선물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 약 반세기 이상 지난 1740년에 약학자이자 왕립과학원의 회원인 조프루아(Claude Joseph Geoffroy, 1685-1752)는 시암 사절단의 인삼을 수집품으로 소장하고 있었다(Geoffroy, 1740: 97).

세 번째 국면은 학자들을 주축으로 국내외에서 전개되었으며, 이 시기의 학술 활동은 첫 번째 및 두 번째 국면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 이 시기는 인삼에 대한 본격적인 학술적 탐구 및 인삼의 지리적인 확산으로 특징지어진다. 다시 말해서, 루이 14세 시대의 중상주의 정책을 학술적인 측면으로 확장시키면서 인삼을 비롯한 본초학의 지식 확대 및 정립을 추구한 단계라고 할 수 있다. 이 세 번째 국면은 1697년 왕립과학원에서 최초로 인삼에 대한 소고가 발표된 시점부터, 1718년에 『왕립과학원사(Histoire de l’Académie royale des sciences)』에서 당대의 인삼 지식 탐구를 종합한 시점까지로 볼 수 있다. 바로 이 시기에 프랑스의 인삼수용사에서 특별히 의미 깊은 성과들이 나왔다. 중국에 파견된 예수회 선교사 자르투 신부(le père Jartoux)가 만주 인삼에 대한 관찰 및 보고를 보내와서 유럽인들의 주목을 받았고, 또한 아메리카에서는 캐나다산 인삼이 발견되었다. 이후 인삼은 아메리카와 아시아 사이 대륙 간 교역에서 중요한 상품으로 부상하였고, 프랑스에서는 인삼에 대한 관심이 더욱 높아지게 되었다.

계몽사상 시대 이전 프랑스의 인삼 수용의 역사와 관련된 마지막 국면은, 1730년대 이후부터 『백과전서』의 출간(1751-1772년) 이전까지 인삼 지식의 확산 및 중국 의학의 수용 단계이다. 이 시기는 루이 14세의 치세 이후에 속하지만, 루이 14세 시대의 문화적 유산이 계속 영향을 미쳤던 시기로 볼 수 있다. 프랑스의 궁정과 사회에서는 1660년대 이후부터 시작된 오리엔탈리즘 열풍이 “쉬누아즈리(chinoiserie)”라는 형태로 지속되었고, 인삼도 그 대상 중 하나였다. 가장 보수적인 성향을 지녔던 파리 대학에서조차 1736년에 인삼이 강장제로서 효과가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진 논문이 제출되었다는 사실은 당시 프랑스 사회에서 인삼에 대한 관심이 얼마나 높았는가를 대변하는 동시에 인삼의 효능에 대한 회의와 의심도 나타나기 시작하고 있었다는 점을 알려준다. 또한 이 시기에 다시금 본초학 관련 해외 텍스트의 소개가 인삼에 관한 지식의 전달 통로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17세기 중엽에는 이탈리아어, 영어, 네덜란드어 혹은 라틴어 등으로 쓰인 해외의 식물과 약초에 관한 소개 글이 프랑스어로 번역되어 인삼에 관한 지식이 수입되었다면, 18세기부터는 중국의 의서가 부분적으로나마 소개되면서 지식의 수용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이때 프랑스에 중국 의학을 소개하는 데 활약한 이들은 루이 14세 시대에 동아시아 파견되었던 선교사들과 의사들이었다.

이 연구에서는 위에서 언급한 네 가지 국면을 하나씩 각각 다루기보다는, 주로 프랑스 지식인들의 인삼 연구, 특히 프랑스 왕립과학원과 파리 의과대학의 활동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18세기 이후 인삼의 국제교역(대륙 간 교역)에 대한 연구는 상당히 진척된 데에 반해서, 17세기부터 시작된 프랑스 인삼 수용의 역사를 지식 담론의 구축이라는 관점에서 살펴보는 연구는 아직 충분하지 못하다고 생각된다. 당시 프랑스 학계의 지식담론 형성과 본초학의 발전에는 국가의 중상주의 정책, 해외팽창 정책, 학문진흥 정책 및 대륙 간 생태적, 문화적인 교류가 큰 영향을 미쳤다. 우선 본론에 들어가기에 앞서 17세기 중엽 콜베르가 중상주의 정책을 막 시작했을 때 프랑스에서 인삼에 대한 경제적, 의학적인 관심이 출판물에서 나타난 양상 및 당대의 중상주의 정책과의 관계에 대해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2. 중상주의 정책과 인삼에 대한 관심의 부상

프랑스에서는 루이 14세 시대(재위 1643-1715년)부터 인삼이 본격적으로 소개되기 시작했으며, 처음에 그 매개가 된 것은 번역을 거쳐 수용된 영국, 네덜란드, 이탈리아 등의 본초학 텍스트들이었다. 이 텍스트들은 16세기까지는 유럽에는 알려지지 않았던 인삼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면서 사람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유럽인 중에서 인삼에 대해 가장 먼저 언급한 지식인 저술가는 포르투갈 출신의 예수회 선교사로 중국에 20년간 체류했던 세메도(Álvaro Semedo, 1585-1658)이다. 그는 1633년에 로마에서 이탈리아어로 『대중국지(Relatione della grande monarchia della Cina)』를 출간하면서 인삼을 비롯한 아시아의 각종 산물에 대해 소개하였다[5,]. 세메도의 저서는 1642년에 마드리드에서 에스파냐어판이 출간되었고[6,], 1645년에는 이탈리아어에서 프랑스어로 번역되어 당시 섭정이었던 마자랭(Mazarin) 추기경에게 헌정되었다[7,]. 더욱이 이 책의 재판본이 콜베르가 중상주의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던 시기인 1667년에 파리와 리옹에서 다시 출간되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8].

루이 14세의 조부 앙리 4세와 부친 루이 13세도 해외 교역을 위한 정책을 추진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지지부진한 상태에 머물렀으며, 당시 프랑스인들은 주로 영국과 네덜란드의 상인들이 유럽으로 가져온 해외의 교역품을 구입하였다(Jacq-Hergoualc’h, 1986: 77). 그렇지만 1661년 루이 14세의 친정 시작과 더불어 콜베르의 주도 하에 더 이상의 국부(國富) 유출을 막고 오히려 이를 증대시키고자 하는 중상주의 정책이 추진되었고, 1664년에 프랑스 왕립 동인도회사가 설립되었다. 바로 이러한 정치적, 역사적인 배경 속에서 17세기 중반부터 세메도의 책뿐만 아니라 아시아의 정보를 담은 다수의 저술이 프랑스어로 번역되어 출판 시장에서 유통되었다. 특히 이 시기부터 점진적으로 이루어진 식물학과 본초학 지식의 확대는 장기적으로 프랑스의 의학 발전에 기여하였다[9]. 동양 인삼에 대한 지식의 수용 역시 출판문화에 기반을 둔 본초학 지식 구축과 확장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프랑스의 중상주의 정책에 부응한 번역서 출판과 관련하여 특히 멜쉬제데크 테브노(Melchisédech Thévenot, 1620-1692)와 그 동료들, 일명 테브노 학술 동아리(la Compagnie de Thévenot)의 활동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들은 1660년대 초반부터 여행기를 중시하였으며, 1690년대 중반까지 외국의 모험가, 상인, 선교사의 저술을 대대적으로 프랑스어로 번역하였다. 이 여행기 모음집은 『기묘한 여행 이야기(Relation de divers voyages curieux)』라는 제목으로 불린다(이하 『테브노 여행기』로 약칭)[10,]. 여기에는 항해 방법부터 외국의 지리와 풍습, 동식물, 약초에 대한 정보 등에 이르기까지 콜베르가 추진하던 중상주의 정책을 뒷받침할 수 있는 방대한 정보가 수록되어 있었다. 특히 『테브노 여행기』의 출간 의도 및 목표는 당시 대아시아 교역의 주도권을 쥐고 있던 네덜란드에 프랑스가 대항할 수 있도록 하는 데에 있었다. 이 책의 제 2부는 1664년에 간행되었으며, 테브노가 국왕에 바치는 헌정사가 권두에 삽입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이 출판 기획이 국가의 정책, 관심사, 이해관계와 얼마나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는지를 명시적으로 보여준다. 한편, 테브노 학술 동아리에서 제안한 기획 중에는 먼 이국땅을 관찰하기 위해 특별히 잘 훈련된 과학자들을 파견한다는 계획안이 있었는데, 이는 이후 왕립과학원에 의해 실현되었다(Dew, 2009: 81-130).

테브노 학술 동아리는 동물학, 식물학, 지리학, 항해술 등 해외진출에 필요한 실용적, 경험적인 지식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와 더불어 선원과 병사의 건강 유지에 기여함으로써 중상주의 정책을 뒷받침할 수 있는 기반 학문인 의학(Mukerji, 2005: 25-26) 역시 이들의 주된 관심사 중 하나였다. 이러한 점은 테브노 학술 동아리의 정신적 지주라 할 수 있는 후이겐스가 1663년경에 받은 서신에도 드러난다(Christiaan Huygens, 1891)[11,]. “과학 및 기술 동아리 프로젝트(Project de la Compagnie des Sciences et des Arts)”라고 불리는 이 편지에는 테브노 학술 동아리의 이상 혹은 강령이 제시되어 있다. 여기에서는 천문학과 지리학 등의 중요성을 논함과 동시에, “삶에서 가장 귀중한 건강을 유지하고 회복하기 위해서는 특히 화학, 해부학, 의학을 통해 인간 육체의 구조와 움직임을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면서 의학 지식의 중요성이 강조되었다(Huygens, 1891).

『테브노의 여행기』는 1666년에 창설된 프랑스 왕립과학원의 해외 식물 및 본초 연구에 기본적인 정보와 방법론적인 기반을 제공하였다[12,]. 그 중에서 동양의 신비로운 약초인 인삼에 대한 소개는 『테브노 여행기』 제3부에 수록된 니우호프(Johan Nieuhof)의 네덜란드어 여행기[13,] 번역본과 마르티니(Martino Martini)의 라틴어 여행기[14,] 발췌 번역본에 등장한다(Nieuhof, 1665: 70; Martini, 1666; 45)[15,]. 특히 『테브노 여행기』의 인삼 소개는 영국 왕립학회의 관심을 끌 정도로 국제적인 영향력을 발휘하였다(Appleby, 1983: 122; Barnes, 2005: 104; 설혜심, 2014: 4). 요컨대, 17세기의 『테브노 여행기』를 통해 수용된 인삼 지식은 잉글랜드나 네덜란드처럼 인삼 교역을 통해 부를 축적하기를 희망했던 프랑스의 중상주의 정책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다. 또한 그 기저에는 경제적인 관심사와 더불어 의학적인 관심도 함께 내재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여행기에 담긴 정보는 대체로 간략하고 피상적인 편이었다. 인삼에 대한 전문적인 깊이 있는 연구는 왕립과학원의 학자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들은 중국에 파견된 선교사들이 보내온 구체적인 정보를 바탕으로 1690년대 말부터 인삼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를 수행하기 시작했다.

3. 프랑스 왕립과학원과 국왕의 정원

루이 14세 시대 과학진흥 정책의 핵심을 이루던 기관은 바로 1666년에 콜베르가 설립한 왕립과학원이었다. 국가가 추진하는 중상주의 정책을 학술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창설된 이 기관에는 테브노 학술 동아리의 회원 일부도 합류하였다(McClaughin, 1975: 235-242). 1666년 12월 22일 비비엔 거리(rue de Vivienne)에 위치한 국왕의 서재[16,]에서 열린 왕립과학원의 첫 번째 모임에는 수학자, 천문학자, 해부학자, 엔지니어 등과 더불어 의학박사와 의사 및 식물학자도 참석했다(Renaux, 2008: 8-9). 이러한 점은 왕립과학원 설립 초창기부터 의학과 본초학이 중요한 국책 연구 분야에 포함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왕립과학원이 수행한 여러 연구 중에는 당대에 알려진 식물과 약초에 대한 지식을 집대성하는 작업도 포함되어 있었으며, 식물학 연구 프로젝트를 주도한 이는 왕실 주치의 도다르(Denis Dodart, 1634-1717)였다. 그는 파리 대학의 약학 교수였으며, 국왕의 측근에서 외무장관직을 수행하기도 하였다. 그는 1673년에는 왕립과학원의 회원이 되었고, 1670년대부터 1690년대까지 왕립과학원의 자연사 연구, 특히 식물학 분야의 책임자로 활동하였다(Stroup, 1990: 19; Fontenelle, 1994: 179-180). 이 프로젝트에는 또한 도다르와 마찬가지로 어의(御醫)이자 식물학자인 동시에 화학자인 뒤클로(Samuel Cottereau du Clos, 1598-1685), 약학자겸 화학자이며 왕립과학원의 창립 멤버인 부르들랭(Claude Bourdelain, 1621-1699), 국왕의 정원 식물재배 총책임자이자 역시 왕립과학원 창립 멤버 마르샹(Nicolas Marchand, 1687년 사망) 등도 참여하였다.

이 인물들 중에서 특히 부르들랭은 프랑스에서 학술적인 인삼 연구를 처음 시작한 인물로 평가된다. 1718년에 간행된 『왕립과학원사』는 부르들랭이 1697년에 발표한 인삼에 대한 소고를 프랑스 인삼 연구의 출발점으로 보았다. 루이 14세 시대에는 전통적인 갈레노스 의학(médicine galénique)과 의화학(醫化學, médicine chimique)이 의학계를 양분하고 있었는데(Le Roi, 1862: xi-xiii), 부르들랭은 의화학의 지지자로서 갈레노스 의학에서 신봉하던 사혈요법을 전혀 사용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급성 질환과 늑막염, 폐렴, 인후염 같은 염증성 질환을 잘 치료해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는 사혈요법은 뇌졸중 같은 제한적인 증상에만 사용하였다. 약학자이자 화학자인 부르들랭은 모든 종류의 식물을 연구하고 분석하는 데에도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Fontenelle, 1994: 73-74). 새롭게 알려진 동양의 본초 인삼도 부르들랭의 관심사 중 하나였고, 1697년에 그는 왕립과학원의 동료들 앞에서 인삼에 대해 소개하는 글을 라틴어로 써서 발표하였다(Du Hamel, 1701: 451). 이에 대해서는 잠시 후에 좀 더 자세하게 이야기하겠다.

루이 14세 시대의 프랑스는 다른 대륙과 직접 접촉을 하면서 새로운 식물과 작물, 약초 등을 다양하게 들여오기 시작했다. 프랑스 왕립과학원 소속 의학자, 약학자, 화학자, 식물학자들은 해외에서 채집해 가져온 식물의 종자를 일종의 학술 식물원인 국왕의 정원에 심고 이를 열정적으로 연구하였다(Laissus, 1969: 193-236). 국왕의 정원의 기원은 1593년에 앙리 4세가 프랑스 남부 몽펠리에에 세우도록 명했던 식물원(Jardin des plantes de Montpellier)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탈리아의 식물원을 모방해서 만들었던 이 식물원은 의학 분야에서 명성을 얻고 있었던 몽펠리에 대학의 교수들과 학생들에게 현장학습의 기회를 제공해주었다. 그 뿐만 아니라, 지중해 지역의 상업교역을 통해 수입되는 많은 외래 작물을 프랑스에서 재배하도록 장려함으로써 농업을 진흥시키고자 하는 정책적인 목표도 지니고 있었다(Mukerji, 2005: 23-24). 국왕의 정원은 루이 13세 시대인 1633년에 식물학자 겸 의사 라브로스(Guy de la Brosse, 1586-1641)의 건의로 파리에 약재를 공급하는 기능을 지닌 식물원으로 기획되어 1635년 칙령에 의해 건립되었다(Legée: 1984, 189). 이 초창기 국왕의 정원은 지지부진한 상태로 방치되다가 이후 17세기 말에 콜베르와 왕실 주치의 겸 식물학자 파공(Guy-Crescent Fagon, 1638-1718)에 의해 새롭게 재건되었다. 국왕의 정원은 중상주의 정책을 뒷받침하기 위한 목적을 지니고 있었으며, 해외 식민지나 외국에서 가져온 약초를 전시함으로써 프랑스 국가와 해군의 위상을 드높이는 기능을 하였다. 동시에 파리 시민들에게 양질의 약재를 제공하는 역할도 담당하였다(Mukerji, 2005: 25-26). 국왕의 정원에서는 몽펠리에 대학 출신으로 왕립과학원의 회원이 된 식물학자들이 핵심인사로 활약하였다. 루이 14세와 루이 15세 시대에 국왕의 정원 식물학 교수직에 임명되었던 앙투안 드 쥐시외(Antoine de Jussieu, 1686-1758)와 그의 동생 베르나르 드 쥐시외(Bernard de Jussieu, 1699-1777) 같은 이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앙투안 드 쥐시에의 경우 인삼에 대한 짤막한 언급을 남겼는데, 이 기록은 파리 자연사박물관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한 필사본에 남아있다[17].

그림 1. 국왕의 정원 교수 투른느포르의 현장실습 장면. 1694년에 출간된 투른느포르의 저서 『식물학의 개념』에 수록된 판화 (도판 소장처: 파리 자연사 박물관 도서관)

Figure 1. A plant demonstration by Tourenfort, professor at the Jadin du roi. Engraving from his Éléments de botanique, published in 1694 (Photo credit: Bibliothèque du Muséum d’Histoire Naturelle).

한편, 1690년대부터 왕립과학원에서는 인삼을 과학적, 의학적인 연구와 토의의 대상으로 삼기 시작했다. 이때 왕립과학원에 중요한 정보를 제공한 이는 1687년 중국에 입국하여 강희제의 궁정에서 활동하고 있던 예수회 선교사들이었다. 1718년에 간행된 『왕립과학원사』의 「식물학(botanique)」 장에는 그때까지 알려지거나 연구된 인삼에 대한 지식을 정리하는 짧은 논고가 “인삼에 대하여(Sur le Gin-Seng)”라는 제목으로 실렸다(L’Académie royale des sciences, 1718: 41-45). 이에 따르면, “과거에 최초로 예수회 선교사들이 중국에서 높이 평가받고 있는 약초인 인삼에 대해 이야기하였고, 그들 덕분에 유럽에서 인삼에 대해 약간 알게 되었다.” 이후 선박 몇 척에 인삼을 소량 들여왔지만, 워낙 “귀하고 대단히 비싼 약초인지라 진기한 견본(표본) 정도만” 들여왔다고 한다.

중국에 파견된 예수회 선교사 중 일부는 과학자로서 왕립과학원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Hsia, 2009). 이들은 강희제의 궁정에서 천문학, 수학, 물리학, 지리학, 동물학, 식물학, 의학 등 다양한 학문을 연구하였으며, 특히 식물학 분야에서 큰 성과를 남겼다. 이들이 연구한 식물학은 순수 식물학뿐만 아니라 산업, 원예, 의학 등에 활용될 수 있는 응용 분야까지 넓은 범위에 걸쳐 있었다(Huard & Wong, 1966: 152-175). 예수회 선교사들은 중국의 인삼에 대해서도 식물학적, 의학적인 정보를 유럽에 보내왔다[18,]. 프랑스인 예수회 선교사이자 수학자 르콩트(Louis Daniel Le Comte, 1655-1728)는 1696년에 출간한 회고록에서 인삼을 중국의 훌륭한 강심제이자 만병통치약으로 소개하였다. 그는 인삼의 외형적 특징과 인삼 복용법을 소개하면서 이 약초에 대해 무척 긍정적인 어조로 이야기하였다(Le Comte, 1696: 377). 벨기에 출신의 예수회 신부로서 1685년부터 청나라 궁정에서 천문학자 겸 수학자로 활약한 앙투안 토마(Antoine Thomas, 1644-1709)는 인삼을 직접 복용해보기까지 하였다. 그는 1691년에 몸이 아플 때 강희제로부터 인삼을 하사받아 2회 복용했다는 기록을 남겼다(Huc, 1857: 409).

루이 14세가 파견한 과학사절단이 북경에 도착한 지 약 10년 후에 왕립과학원에서는 처음으로 인삼에 대학 학술적인 논의가 진행되었다. 그것은 앞서 언급했던 국왕 주치의 부르들랭의 인삼에 관한 소고 발표를 말한다. 1697년 11월 27일 왕립과학원에서 발표한 글에서 부르들랭은 중국에서 높이 평가받고 있는 “신-셈(Sin…sem)”에 대해 소개하였다. 그는 우선 이 이국 식물의 이름이 지닌 의미부터 이야기하면서, “신”은 인간(hominem)을, “셈”은 식물(plantam)을 의미하며[19,], 이는 곧 인간의 형상을 한 중국의 뿌리식물을 말한다고 설명하였다. 그는 주로 인삼의 식물학적인 특징에 관심을 두어 인삼의 외형 및 식생 방식을 묘사하는데 공을 들였고, 식생 지역은 주로 동부 타타르 지방인 요동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인삼이 중국에서 놀라운 효능을 지닌 것으로 찬양을 받고 있으며, 병으로 크게 쇠약해진 환자나 노인들에게 힘을 북돋아 준다고 언급하였다(Du Hamel, 1701: 451). 이는 왕립과학원에서 인삼의 식물학적 특징 및 의학적 효능에 대해 최초로 공식적으로 언급한 사례이다. 부르들랭이 언급한 병자나 노인을 위한 강장제로서의 인삼의 효능은 이후 1736년에 파리 의과대학에 제출된 논문의 토의 주제가 되기도 하였다.

여기에서 특히 주목할 점은 루이 14세의 어의들이 인삼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루이 14세가 실제로 인삼을 복용했는지 여부는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국가의 신체와 동일시되는 국왕의 신체의 건강 유지를 위해 노심초사하던 그의 어의들이(Le Roi, 1862) 1680년대 중반 이후 “중국 의사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약초로서 “피를 정화시키고 오랜 질병을 앓은 후 쇠약해진 기력을 회복시키는 특효약”(Tachard, 1686: 371)으로 알려진 중국 인삼에 대해서 큰 관심을 보였다는 점은 분명하다.

부르들랭이 왕립과학원에서 인삼에 대한 소고를 발표했을 때와 같은 해인 1697년에 왕립과학원의 통신회원이었던 사라쟁(Michel Sarrazin, 1659-1734)은 캐나다령 프랑스(퀘벡)의 어의로 파견되었다. 그는 곧 다수의 식물 표본을 보내왔고, 왕립과학원 회원 바이양(Sébastien Vaillant, 1669-1722)이 이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20,]. 바이양은 1700년에 사라쟁이 보내온 식물 중 73번 표본이 인삼과 비슷하다는 점에 주목했다. 바이양이 남긴 것으로 추정되는 1708년의 수기 기록에는 사라쟁이 8년 전에 보내온 이 표본에 “닌진 혹은 인삼 종(Ninzin seu singin species)”이라는 메모가 붙어 있었다(Boivin, 1977: 281; Motsch, 2014: 39).

사실상 아메리카 인삼을 최초로 발견했지만 주목을 받지 못했던 사라쟁의 경우와는 달리, 1711년도에 자르투 신부가 중국에서 보내온 편지는 프랑스인들이 인삼을 아시아가 아닌 다른 지역에서 적극적으로 찾게 되는 계기를 제공하였다. 이 편지에서 자르투는 타타르인들이 “약초 중 으뜸”으로 평가하는 인삼을 만병통치약으로 소개하면서 그 의학적 효과 및 자신의 복용 경험담을 이야기하였다. 이와 더불어, 그는 인삼이 북위 39도에서 47도, 동경 10도에서 20도 사이에 자라며 비슷한 기후와 환경을 지닌 캐나다에서도 발견될 가능성이 있다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그는 또한 중국인삼의 도판도 함께 보내왔다(Jartoux, 1711: 71-81; Hsia, 2009: 134; Johnson, 2012: 41-42). 자르투를 비롯한 예수회 선교사들이 중국에서 보내온 중국 식물 및 약초에 대한 관찰기와 도판 등 각종 정보는 왕립과학원의 학자들 사이에서 식물학 연구 열풍을 불러 일으켰다(Stroup, 1990: 111). 자르투의 편지는 예수회 선교사들의 다른 편지들과 더불어 1713년에 인쇄본으로 출판되어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의 지식인 독자들 사이에서 널리 읽혔다.

이후 1716년에 예수회 선교사이자 박물학자 라피토(Joseph François Lafitau, 1681-1746)가 프랑스령 캐나다에서 아메리카산 인삼을 발견하여 이를 보고해왔는데(Lafitau, 1718), 사라쟁의 경우와는 달리 그의 보고는 즉각적으로 주목을 받았다. 왕립과학원에서도 이에 대해 공식적으로 토의하였다. 과거에 사라쟁이 보냈던 “아랄리아(Aralia)” 표본도 라피토가 발견한 인삼과 비교 대조를 해본 후, 그것이 다름 아닌 캐나다산 인삼이었다는 사실이 알려지게 되었다. 이러한 반응의 차이가 나타난 이유는 자르투의 인삼에 대한 보고를 담은 서신 출판 이후 유럽에서 중국 인삼에 대한 관심이 크게 일어났다는 사실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자르투가 인삼이 중국 이외의 다른 지역, 특히 프랑스의 식민지인 캐나다에서 발견될 가능성을 이야기했었기에, 약 5년 후 알려진 라피토의 “발견”은 즉각적으로 세간의 이목을 끌었던 것이다.

당시 왕립과학원 학자들이 처음부터 자르투와 라피토의 발견에 열광하거나 찬사를 보냈던 것은 아니었다. 특히 식물학자들은 자르투와 라피토의 비체계적인 연구 방식과 논리 전개에 불만을 나타냈고, 심지어 자르투가 발견한 것이 진짜 동양의 인삼이 맞는지 의구심을 제기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바이양과 앙투안 드 쥐시외는 자르투와 라피토가 각각 보낸 인삼이 서로 동일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또한 그들은 이미 몇 해 전에 사라쟁이 보냈던 표본도 라피토의 인삼과 동일한 것이라고 결론지으면서, 사라쟁이 더 먼저 캐나다 인삼을 발견했음을 인정하였다. 또한, 1718년 2월 9일에 열린 왕립과학원 회합에서 인삼이 “아랄리아스트룸(Araliastrum)”이라는 새로운 식물 속(屬)에 포함된다고 선포되었다. 바이양은 이미 1717년 6월에 꽃의 구조에 따른 식물분류법을 제시하였으며(Vaillant, 1718a), 그 다음 해에 “아랄리아스트룸”, “셰르아르디아(Sherardia)”, “보에르아비아(Boerhaavia)”라는 세 가지 새로운 속을 제시하였다(Vaillant, 1718b). 이로써 린네우스(Carl Linnaeus, 1707-1778) 이전에 서구의 식물 분류 체계 속에 인삼이 들어오게 되었다.

루이 14세 시대에 인삼에 관해 축적된 지식과 정보 및 제도적, 인적인 인프라는 국왕의 사후 18세기 초반에도 전 시대의 지적 자산이자 유산으로 이어졌다. 이에 더해서 18세기에는 다시 외국의 본초학 텍스트가 프랑스의 인삼 지식 형성에 일익을 담당하게 되었다. 동아시아로 파견된 의사들과 예수회 선교사들이 중국의 의서를 프랑스어로 소개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4. 파리 의과대학의 인삼 논문

프랑스에서는 중상주의 정책의 추진 결과 17세기 후반부터 해외의 새로운 작물들과 약재들이 대거 소개, 도입되고 새로운 본초학이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그 기반이자 거점이 바로 앞에서 언급한 프랑스 왕립아카데미의 주도 하에 추진된 국왕의 정원 프로젝트였다. 반면에 스콜라적인 전통에 깊이 침잠해 있었던 파리 대학은, 국왕과 콜베르의 측근이었던 도다르 같은 일부 인사를 제외하고는, 대체로 본초학이나 식물학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고 평가된다. 특히 파리 의과대학은 국왕의 정원에 대해 못마땅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는데, 그 이유는 이 프로젝트의 핵심 인물들이 주로 몽펠리에 의과대학 출신의 학자들이었기 때문이었다[21,]. 전통적으로 경험을 중시하고 개방적인 태도를 보였던 몽펠리에 대학과는 달리, “갈레노스 의학의 아성”이었던 파리 대학은 17세기에 등장한 새로운 의학 지식들에 대해 보수적이고 완고한 태도를 고수하였다. 파리 의과대학은 17세기에 하비(William Harvey, 1578-1657)의 혈액순환론에 관한 논쟁에서 패배한 후 세간의 웃음거리가 되었고 프랑스 혁명기 이전까지 당대의 의학 발전을 선도하지 못하고 죽은 듯 지냈다고 평가되기도 한다(Pecker, 1984: 44). 요컨대 18세기에 파리 대학은 의학사에서 아무런 중요한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18세기 초에 파리 대학에서 제출된 논문 한 편은 이 시기에 ‘보수의 아성’에서도 새로운 변화의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된다.

1736년 2월 9일 파리 의과대학에서는 프랑스 최초로 인삼을 주제로 제출된 논문에 대한 심사가 오전 6시부터 정오까지 진행되었다. 「인삼, 병자들에게 강장제 역할을 하는가? (An infirmis à morbo viribus reparandis Gin Seng?)」라는 제목의 이 논문을 제출한 이는 폴리오 드 생바(Lucas Augustin Folliot de Saint-Vast)라는 의학도였다. 그는 프랑스 북부 노르망디 지방 출신으로 중국학 연구자도 아니었고, 평생 중국이나 아시아에는 가본 적도 없었다. 반면에, 이 논문의 심사위원장이었던 파리 의과대학 교수 자크 프랑수아 방데르몽드(Jacques-François Vendermonde, 1746년 사망)는 아시아와 깊은 인연을 가진 인물이었다(Folliot de Saint-Vast et Vandermonde, 1736)[22,]. 인삼이라는 주제가 선택된 데에는 방데르몽드의 영향력이 작용했을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 방데르몽드는 1692년에 프랑스 노르(Nord) 지방에서 태어났으며 마카오에서 10년 이상 체류하면서 포르투갈 국적을 취득하였다. 그는 1720년 랭스(Reims)에서 첫 의학 학위를 취득하였고, 이후 마카오에서 활동하다가 프랑스로 돌아와서 1734년 12월에 파리 대학에서 의학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Bayle, 1841: 522).

파리 대학의 전통적인 쿠오리베트 논문(thèse quodlibétaire)[23,] 형식으로 작성된 인삼 논문의 내용은 다섯 부분으로 나뉘어 전개된다. 첫 번째로는 인삼의 효능이 요구되는 의학적인 배경으로서, 건강이 손상되는 이유와 병의 징후를 당시의 의학이론으로 설명하고 있다. 병의 징후는 신체의 쇠약함으로 나타난다[24,]. 병은 다혈증(Plethora) 혹은 체액변성(Cacochymia) 등 다양한 원인에 의해 야기되며, 이는 기력 손상을 일으킨다. 다혈증과 체액변성에 의한 수축(opressio)과 이완(dissolutio) 작용에 의해 힘의 온전함(integritas virium)이 줄어들며, 인간의 몸에서 단단한 부분인 고체(solida)와 그 속을 흐르는 액체(fluida) 사이의 균형이 무너지면서 건강을 해치게 된다. 이러한 설명은 혈액순환론의 발견 및 뉴턴(Newton, 1642-1726/27)의 혁명 이후 유럽의학계에 일어난 근본적인 세계관의 변화와 그 영향을 보여주고 있다. 이 시기의 의학자들은 인간의 몸을 내부에 액체가 흐르는 일종의 기계로 파악하였다. 따라서 인간의 몸을 이루는 단단한 부분(고체)과 그 속을 채우고 순환하는 혈액, 림프절, 임파액 등과 같은 액체 사이의 균형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였다(French, 2003: 215-216). 폴리오 드 생바는 몸 속의 고체와 액체의 관계가 분비(secretiones)와 배설(excretiones)을 관장하는데, 예컨대 만약 분비가 너무 과하거나 부족하면 모든 종류의 병을 일으키게 된다고 설명한다.

논문의 두 번째 부분에서는 기력이 쇠하는 이유와 치료 방법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기력의 감소(Virium jactura)는 음식섭취 부족, 유용한 체액의 급감, 소화불량 혹은 혈류 과다에서 기인하며, 기력을 회복시키기 위해서는 지나치게 과잉된 몸 속 액체를 제거해야 한다는 것이다. 소화불량을 일으키는 원인은 다양한데, 힘줄(fibrae)과 림프절(glandulae)이 느슨해지면 타액(saliva)이 과다하게 희석되어 넘치게 되고 혹은 지나치게 수축되면 타액이 뻑뻑해져서 음식물을 소화시키는 데 문제를 일으키게 된다. 또한 정신적인 쇠약(spirituum depauperatio)도 소화불량의 원인이 되며, 그것은 음식을 오래 먹지 못하거나 육체를 지나치게 혹사시키거나 오랫동안 슬픔에 잠기거나 유용한 체액이 지나치게 소진되는 데에서 기인한다.

마침내 논문의 세 번째 부분에서 ‘진생(Gin Seng)’혹은 ‘페치(Pe Tsi)’, 즉 인간의 형상을 닮은 본초인 인삼에 대한 소개와 묘사가 등장한다[25,]. 인삼은 바로 위에서 설명한 소화불량 같은 병을 치료하고 기력을 회복시키는 치료제(remedium)로서 제시된다. 논문의 라틴어 텍스트 원문에는 ‘진생’이라는 단어에 별표가 붙어 있고 그 바로 옆 왼쪽 여백에 다시 별표를 표시하고 人生이라는 커다란 한자가 삽입되어 있다. 이는 일종의 난외주(欄外註)로서 人蔘을 잘못 쓴 것이다[26,].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이야기하도록 하겠다. 폴리오드 생바는 당시까지 알려진 자르투 등의 연구를 바탕으로 북위 39도에서 49도 사이 중국과 타타르 지방에서 서식하는 인삼의 식생환경, 외형적인 특징, 향과 맛, 수확 시기, 건조 방식, 보관 방식, 음용 방법 등을 소개한다. 이어서 중국 인삼과 같은 특징을 지닌 캐나다 인삼(Aurelianam Canadensem)에 대해 언급한다. 그는 캐나다인들이 중국의 인삼과 같은 시기에 수확하고 같은 방법으로 건조 및 보관하는 이 약초가 “외형, 맛, 효능에 있어서 중국 인삼과 다르지 않다[27,]”고 말한다. 그 증거로 중국인들이 캐나다산 수입 인삼을 진짜 인삼으로 받아들이고 있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인삼만큼 효과적인 치료제는 없으며, 그것은 “소화를 돕고 원래의 상태로 되돌리며, 발한을 완전히 복구시키고, 쇠약해진 기력을 회복시키는[28]” 효능을 지니고 있다고 말한다.

논문의 네 번째 부분은 의화학적인 논의로 시작된다. 폴리오 드 생바는 “약의 효능은 처음에는 경험으로 입증되고, 화학적인 분석으로 증명된 원칙에 의해 확인된다[29,]”는 명제로 문장을 시작하지만, 곧이어 “경험은 종종 길을 잃을 위험에 처한다[30,]”는 단서를 단다. 예를 들어, “화학적인 불(ignis chymicus)”은 독초에서 해롭지 않은 성분을 추출할 수 있으며, 천연 약초의 여러 성분을 혼합할 때 원래의 효과와는 다른 효과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 자연적인 본래 특징과 유사한 혼합물 만들어낸다면, 기대에 부응하여 건강에 유익한 효과를 얻을 수 있다[31,]. 폴리오 드 생바는 바로 신대륙 아메리카에서 들여온 “페루의 나무껍질(Cortex Peruvianus)”, 즉 “키니네(quinquina)” 및 “시마루바(Sima-rouba)”, “이페카쿠아나(Ipecacuanha)” 같은 천연 본초(本草)가 이러한 효능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특히 이 약초들이 어떻게 발열, 설사, 이질 등을 치료하고, 앞서 논문의 두 번째 부분에서 설명했던 소화불량의 원인 중 하나인 이완되거나 경직된 위장의 힘줄을 복구시키는지에 대해 길게 설명한다. 그는 중국 인삼이 바로 신대륙의 약초와 동일한 효력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한다. 여기에서 특히 주목할 점은 폴리오 드 생바가 인삼의 효능에 대한 근거로 중국의 의서(textu Sinensi)를 인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이시진(李時珍, 1518-1593)의 『본초강목(本草綱目)』을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삼은 설사, 이질, 기력약화, 위와 창자의 통증, 실신, 졸도, 마비증세, 무기력증, 경련을 치료하는데 유용하다. 그것은 성행위로 인해 지나치게 고갈된 기력을 놀라운 방식으로 회복시켜 준다. 급성 혹은 만성의 병을 앓은 이들에게는 인삼과 비견할 말한 약이 없다[32].” 이 문장 앞에도 별표가 붙어 있으며, 이 별표는 난외 여백에 크게 한자로 쓰여 있는 『본초강목』의 제목과 저자를 가리키고 있다. 그리고 이어지는 문장은 인삼의 기력 회복 효능은 대단해서 병자의 “죽음을 늦추고(ut retardata morte)”그 사이에 다른 약재를 사용함으로써 병자의 건강을 회복시킬 수 있게 한다고 말한다.

논문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인삼이 그토록 칭송받고 있는 것처럼 진정한 만병통치약인지에 대한 질문을 제기하고, 인삼의 효능에 관해서 당시 제기되고 있던 의혹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폴리오 드 생바는 대단한 강장 효과를 지닌 인삼을 잘못 사용한 사람들이 인삼을 폄하한다고 비판하면서, 다시 『본초강목』을 인용하며 인삼을 복용해서는 안 되는 경우에 대해 언급한다. 식도락가와 주정뱅이는 인삼을 복용해도 큰 효과가 없으며, 악성 혹은 전염성 열이 오르내리는 경우에는 주의를 해서 복용을 해야 한다. 염증성 발열 등이 있거나 개나 뱀에게 물렸을 경우에도 인삼 복용을 금해야 하며, 출혈이 있는 경우 그 원인을 알기 전까지는 신중하게 복용해야 한다. 갑산성종, 괴혈병, 성병의 경우 복용해도 효과는 없지만 위험하지는 않다. 『본초강목』의 인용은 인삼 복용법을 설명하는 것으로 끝맺음된다. 또한 폴리오 드 생바는 단순한 성질을 지닌 자연산 인삼이 큰 효능을 갖고 있다는 점은 놀랍기 그지없으며, 약재를 적절하게 혼합함으로써 그 효과는 더욱 커진다고 덧붙인다. 마지막으로 인삼이 약초로서의 성격보다는 눈에 띄지 않게 건강을 점진적으로 증진시키는 식품으로서의 특징을 더 많이 가지고 있다는 의견도 함께 제시된다. 결론적으로, 그는 인삼이 질병에 의해 약화된 기력을 회복시키기에 “인삼은 강장제로 적합한가?”라는 질문에는 최종적으로 긍정적인 답변을 제시하고 있다.

이 논문의 전반적인 어조는 인삼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지만, 이와 더불어 인삼이 모든 경우에 복용할 수 있는 만병통치약이라는 주장에 대해서는 유의해야한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이 글은 1730년대 프랑스 의학도의 인삼 수용 관점에 더해서 몇 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보여준다. 우선, 중국의 인삼 외에도 아메리카의 본초에 대해 적극적인 관심이 보이며 양자를 비교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태도는 17세기의 파리 의과대학이 대체로 본초학에 관심을 크게 두지 않았던 것과는 많이 달라진 점이라 할 수 있다. 18세기에 프랑스인들이 해외 식민 활동 혹은 국제 교역을 통해 해외의 약초를 직접 복용하거나 경제적인 이익을 얻게 되면서 궁극적으로 의학계에도 이국의 본초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일어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 논문이 보여주는 또 다른 특이사항은 18세기 초에 『본초강목』이 중국의 의학지식(Materia Medica)으로서 일부 소개되었다는 사실에 있다. 폴리오 드 생바의 논문에서는 『본초강목』이 인용되고 있는데, 인용문 부분은 프랑스식 따옴표(《)가 문단 왼편에 표시되어 텍스트를 시각적으로 구분하고 있다. 이와 동시에, 여백에 한자를 일종의 난외주로 따로 인쇄하여 넣음으로써 논문의 핵심 키워드 및 근거 자료를 시각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인삼에 대한 이야기가 처음 나오는 곳의 왼쪽 여백은 물론이거니와 『본초강목』이 인용된 부분의 오른쪽 여백에도 원어명이 별표와 더불어 한자로 쓰여 있다. 『본초강목』을 인용하고 논문 여백에 한자를 삽입한 데에는 분명 심사위원장 방데르몽드의 영향이 개입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그는 프랑스에 귀국하면서 중국의 약재 샘플을 가져와서 왕립과학원 회원이자 왕의 정원 교수인 베르나르 드 쥐시외에게 제공하였는데, 이때 각각의 약재에 대한 요약 및 『본초강목』의 해당 부분의 한자를 베낀 자료를 함께 가져왔었기 때문이다(Huard & Wong, 1966: 165). 그런데, 논문의 여백에 삽입된 한자는 인삼(人蔘)을 인생(人生)으로 잘못 썼으며, ‘본(本)’자는 거꾸로 누워있고, ‘초’자는 정식 약자도 아니고 『강희자전(康熙字典)』에도 등장하지 않은 문자로 쓰여 있다[33]. 따라서 중국 의서에 대해서 논하던 18세기 프랑스 의학도의 지식이 심지어 교수조차도 그리 신통한 편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 의학을 진지하게 받아들인 이러한 시도가 특히 파리 대학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이 논문은 큰 의미를 지닌다.

마지막으로, 폴리오 드 생바의 논문에서 『본초강목』의 구절을 따옴표 안에 인용한 부분이 원문의 정확한 완역이 아니며 다른 텍스트와 뒤섞여 있다는 점에 주목할 수 있다. 이시진의 『본초강목』 원문에서는 인삼의 효능에 대해 남자와 부인의 일체의 허증, 발열, 자한, 현운, 두통, 반위, 토식이나 토혈, 하혈, 혈림, 혈붕, 산후의 제병 등을 치료하며, 원기를 보하고 폐기를 왕성하게 한다고 설명하고 있는데[34,], 이러한 구절은 폴리오 드 생바의 이른바 ‘번역’ 혹은 ‘인용’과는 상당히 차이점이 있다. 특히 인삼이 “성행위로 인해 지나치게 고갈된 기력을 놀라운 방식으로 회복시켜 준다(mirum in modum refocilliat nimià venere exhaustos)”는 구절은 『본초강목』을 인용한 것이 아니라, 마르티니의 『신중국 지도(Novus Atlas Sinensis)』 중 인삼의 효능에 대해 설명한 문장이 크게 변형된 것으로 보인다. 마르티니는 베이징 동쪽 융핑(Iungping)이라는 곳에서 난다고 알려진 인삼에 대해 설명하면서, 이 약초의 효능이 “지나치게 정신적으로 과잉상태이거나 허약함, 피곤, 슬픔이나 기타 이유로 기력이 쇠했을 때 기적적으로 효과가 있다[35,]”고 말하였다(Martini, 1655: 35). 폴리오 드 생바의 논문 중 “mirum in modum refocilliat nimià venere exhaustos”라는 구절은 마르티니의 “nimium auctis exundantibusque spiritibus … exhaustis ad miraculum prodest”라는 문장에서 먼 연원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마르티니의 문장이 텍스트 전파 과정에서 여러 유럽 언어로 여러 단계를 거쳐 번역되거나 중역되거나 재인용되면서 그리고 다른 텍스트가 개입되면서 변형된 것은 아니었을까? 마르티니의 텍스트가 유럽의 본초학 텍스트에 큰 영향력을 미쳤으며, 유럽의 여러 언어로 널리 소개되고 계속 재인용되었다는 점에서 가능성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눈에 띄는 흥미로운 점은 마르티니가 정신적인 활동의 과잉 때문이라 말한 것이 폴리오 드 생바의 텍스트에서는 육체적인(성적인) 활동의 과잉이 원인이라는 설명이 제시되었다는 점이다.

이처럼 소위 ‘번역’ 혹은 ‘인용’이 부정확하게 이루어지기는 했지만 1736년 파리 대학의 인삼 논문은 프랑스 의학계에 동양의 의서를 소개했다는 의의를 지니고 있다. 물론 이 논문의 심사위원장인 방데르몽드가 『본초강목』을 비롯한 중국의 의서를 최초로 소개한 인물은 아니었다. 이미 18세기 초에 당트르콜 신부(le père François-Xavier Dentrecolles)는 중국 의학서적을 참조하여 인삼 등 여러 약초에 대한 내용을 번역하여 소개하였다[36,]. 당트르콜 같은 선교사들이 중국의 의서를 번역한 내용은 비록 출판되지는 않았지만, 뒤알드(Jean-Baptiste Du Halde, 1674-1743)가 『중국제국지지(中國帝國地誌)』[37], 일명 『중국통사(中國通史)』를 저술할 때 중요한 참고자료가 되었다. 폴리오 드 생바의 논문 제출 한 해 전인 1735년에 출판된 뒤알드의 『중국제국지지』에는 여러 중국 의서가 인용되었는데, 『본초강목』의 발췌문도 함께 인용되었다. 1736년 파리 의과대학의 인삼 논문이 방데르몽드의 직접적인 영향 외에 뒤알드의 『중국제국지지』와 어떤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지, 둘 사이에는 어떤 공통점 혹은 차이점이 있는지 여부도 검토해볼 만한 흥미로운 주제로 보인다. 그렇지만, 이는 주로 인삼에 대한 의사와 식물학자들의 논의를 다루는 이 연구의 주제에서는 벗어난 것이기에 미래의 탐구 주제로 남겨놓고자 한다.

1648년에 리슐리외(Richelieu) 추기경의 대자(代子)가 파리 대학에서 중국 의학에 관한 논문을 제출했을 때 그는 큰 비판을 받았다(Huard et al., 1973: 371). 이와는 대조적으로 18세기 초에는 가장 보수적이었던 파리 대학에서도 당대의 새로운 의학 지식을 수용하고, 심지어 중국의 의학까지도 그 존재를 인정하며 적극적으로 검토하는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 때 중국 의서에 담긴 인삼 지식을 수용하는 데 매개자 혹은 통로 역할을 담당한 이들은 루이 14세 시대부터 아시아에 파견되었던 선교사들과 의사들이었다. 이들은 비록 서툴게나마 중국의 텍스트를 번역 혹은 요약 정리하면서, 그리고 때때로 중국과 유럽의 본초학 텍스트를 섞어가면서 중국의 의서를 프랑스 학계에 소개하였다. 폴리오 드 생바의 인삼 논문은 이러한 18세기 초 프랑스 의학계의 학문 풍토의 변화를 엿볼 수 있게 하는 사례 중 하나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5. 맺음말

이 연구에서 우리는 동아시아의 인삼이 17세기에 프랑스에 처음 소개된 이후, 18세기 전반기까지 국가의 정책적, 제도적인 뒷받침 하에 인삼에 대한 지식과 담론이 형성되어 나가는 모습을 특히 식물학자들과 의학자들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인삼에 관해서 프랑스가 얻어낸 정보와 결과물은 유럽 대륙 뿐만 아니라 범지구적인 차원에서도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인삼의 문화사에 관한 연구에서 프랑스는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더욱이 프랑스에서는 인삼에 대한 연구가 국가 기관의 주도 하에 의사와 식물학자들에 의해 조직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의학사 및 과학사적인 관점에서도 관심을 둘만한 주제라고 생각된다.

1718년에 『왕립과학원사』는 1697년 부르들랭의 인삼에 관한 라틴어 소고발표부터 1718년 라피토와 바이양의 아메리카 인삼 발견에 이르기까지 프랑스의 인삼에 대한 논의를 정리한 일종의 프랑스의 인삼 수용의 역사를 서술하였다. 그렇지만 프랑스의 인삼 연구 및 수용의 역사가 이 시기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그 전사(前史)로 17세기 초부터 진행된 테브노 학술 동아리의 번역 출판 활동은 해외의 식물학과 본초학에 대한 관심을 고취시켰다. 이때 그 기저에는 콜베르의 중상주의 정책에 부응하고자 하는 경제적인 관심사와 더불어, 의학적인 관심도 함께 존재하였다. 이후 루이 14세가 해외에 파견한 선교사들과 의사들이 중국과 캐나다에서 인삼에 대한 정보를 직접 수집하고 샘플을 채취함으로써, 학술적인 연구 기반을 제공하였다.

프랑스에서는 중상주의 정책의 중요한 한 부분으로서 본초학이 17세기부터 발전하였는데, 이때 학술활동의 조직적인 구심점이 되었던 것은 왕립과학원이었다. 왕립과학원은 당대의 과학자들과 의학자, 식물학자들을 대거 규합하여 인삼에 대한 정보수집 및 연구 활동을 체계적으로 진행하였다. 특히 18세기 초에 자르투, 사라쟁, 라피토에 의해 중국과 캐나다의 인삼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가 들어오면서, 왕립과학원의 인삼 연구는 큰 진전을 보였다.

왕립과학원이 본초학 연구 및 인삼의 수용에 가장 먼저 발 벗고 나섰던 반면에, 17세기까지 갈레노스 의학의 아성이었던 파리 의과대학에서는 국왕의 정원 같은 새로운 본초학 프로젝트에 대해 못마땅해 하는 반응을 보였다. 그렇지만, 18세기 초에는 파리 대학에서도 기존의 보수적인 태도와는 달라진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우리는 그러한 일면을 보여주는 역사적인 증거가 바로 1736년에 파리 의과대학에 제출된 인삼 논문이라고 보고 있다. 이 논문은 파리 대학의 본초학 수용과 더불어 중국 의학의 수용도 함께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때 중국의 의학에 관한 지식 수용은 동아시아에 파견된 의사들과 예수회 선교사들이 중국의 주요 의서를 발췌, 번역 혹은 번안함으로써 이루어졌다. 한편 이 시대에는, 파리 의과대학에 제출된 논문에서 드러나듯이, 『본초강목』 같은 중국의 의서를 인용하며 (혹은 인용하기를 원하면서) 인삼에 대한 호의적인 평가를 내리면서도, 동시에 인삼을 만병통치약으로 보는 관점에 대해서는 거리를 두는 태도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Notes

1)

최근 세계적인 학계의 연구 추세는 경제 정책과 의학, 식물학 등의 관계, 교역의 세계화와 그 결과 나타난 범지구적 차원에서의 식물의 지형도 변화 및 영향, 의학과 제국주의의 관계 등의 주제에 대해서 활발한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2)

프랑스 왕립 동인도회사는 영어권에서는 FREIC(the French Royal East India Company)이라는 약자로 표기되기도 한다.

3)

슈아지 신부는 인삼에 대해 중국의 운람수슈안(Hounlam-sout-chouan) 지방과 쿨리(Couli) 지방에서 자라는 뿌리식물이며, 이 지역들 이외에는 그 어떤 곳에서도 나지 않는다고 하였다(Choisy, 1687: 323). “운람수슈안”의 경우 프랑스식으로 표기된 발음으로 볼 때 윈난(Yúnnán)과 스촨(Sìchuān)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중국남부의 운남성, 사천성, 광서성에서 재배되는 삼을 삼칠삼(Panax notoginseng)이라 하는데, 이는 고려인삼(Panax ginseng)과는 별개의 종으로 중국 남부뿐만 아니라 인도와 베트남에도 분포해 있다. 한편, “쿨리”의 인삼은 유명한 고려인삼을 지칭하는 것으로 짐작된다. 고려는 외국에서 Caule, Cauli, Caoli, Corai, Cory, Core 등으로 표기되거나 발음되었고, 조선시대에도 여전히 옛 명칭으로 불리곤 하였다.

4)

폴콘은 그리스인 모험가로서 시암의 아유타야(Ayutthaya) 왕국에서 귀족 작위를 받고 출세하여 나라이(Narai, 1632-1688) 국왕 측근의 정치가로 활동했던 인물이다. 프랑스에서는 무슈 콩스탕스(Monsieur Constance)라고 불렸다.

5)

Alvaro Semedo, Relatione della grande monarchia della Cina… (Romae: sumptibus H. Scheus, 1633).

6)

Alvaro Semedo, Imperio de la China i Cultura evangelica en el, por los religios de la Comp. de Jesus… (Madrid: Sanchez, 1642).

7)

Alvaro Semedo, Histoire universelle du grand royaume de la Chine, composée en Italien par le P. Alvarez Semedo Portugais, de la Compagnie de Jésus, et traduite en notre langue par Louis Coulon P. … (Paris: Sébastien Cramoisy et Gabriel Cramoily 1645).

8)

Alvaro Semedo, Histoire vniverselle de la Chine, rééd. (Paris: Mabre-Cramoisy; Lyon: Prost 1667).

9)

조프루아는 “식물학 연구는 우리에게 식물에 대한 지식을 알려주며, 반복적인 경험은 기술(les Arts)의 특징과 약의 효능에 대해서 알게 해준다”고 말하였다(Geoffroy, 1740: 96).

10)

Melchisédech Thévenot, Relation de divers voyages curieux…, 4 vols. (Paris: [plusieurs éd.], 1663-1696).

11)

이 편지의 발신자가 누구인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12)

예를 들어, 폴란드의 과학자 겸 모험가 겸 예수회 선교사였던 보임(Michal Boym, c.1612-1659)이 1656년에 비엔나에서 라틴어로 발표한 『중국의 식물(Flora sinensis)』 같은 저술이 대표적이다. 이 책의 번역본은 1664년에 출간된 『테브노 여행기』 제2부 말미에 수록되었다.

13)

니우호프의 네덜란드어 여행기는 1665년에 암스테르담에서 출판되었다.

14)

마르티니의 『신중국 지도(Novus Atlas Sinensis)』는 지도제작가 욘 블라우(Joan Blaeu, 1596-1673)의 『대지도(Atlas Maior)』 제10권에 수록되어 1655년에 암스테르담에서 라틴어로 처음 출판되었다.

15)

『테브노 여행기』 제3부 1665년판은 레이던에서, 1666년판은 파리에서 출간되었다.

16)

오늘날의 프랑스 국립도서관의 구관(舊館)인 리슐리외 도서관의 전신이다.

17)

Bibliothèque du Muséum d’Histoire Naturelle à Paris, Mss 1151, 4 pages (“인삼의 역사와 그 품질”).

18)

이와 더불어 중국의 차에 대해서도 식물학적인 특성뿐만 아니라 그 의학적인 효능에 대해서도 함께 보고하였다.

19)

인삼에 대해 유럽의 여러 언어로 쓰거나 번역한 텍스트를 보면, ‘삼(蔘)’이라는 단어를 설명하는 데 느꼈던 어려움을 엿볼 수 있다. 라틴어의 planta는 영어의 plant에 해당되는 단어로서 일반적인 식물을 의미한다.

20)

바이양은 1708년에 국왕의 정원 식물학 부교수로 임명되었다(Boivin, 1977: 224).

21)

물론 파리 대학과 몽펠리에 대학이라는 양 진영이 항상 명확하게 갈리는 것은 아니었다. 왕립과학원 회원이자 “왕의 정원”교수인 식물학자 투른느포르(Joseph Pitton de Tournefort, 1656-1708) 같은 이는 몽펠리에 대학에서 의학을 먼저 공부한 후에, 1696년에 파리 의과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투른느포르는 프랑스의 인삼 연구에 크게 기여한 바이양의 스승이기도 했다.

22)

폴리오 드 생바의 논문은 오랜 시간 동안 잊혀 있다가, 약 230여년 후인 1973년에 피에르 위아르(Pierre Huard) 등 프랑스인 학자 3명과 중국계 학자 1명의 공동 논문을 통해서 다시 빛을 보게 되었다(Huard et al., 1973: 359-374). 이 글에는 원래 4쪽 분량이었던 라틴어 인삼 논문 전문과 더불어 프랑스어 번역이 함께 소개되어 있다. (폴리오 드 생바의 라틴어 논문 전문은 구글북스에서도 열람할 수 있다). 그렇지만, 위아르 등의 글은 사료 발굴 정도의 성격을 지니고 있으며, 텍스트의 분석보다는 원문 번역과 당대의 역사적 맥락 혹은 관련 인물에 대한 단순 소개에 그치고 있다. 또한 논문 제목에 Jacques-François Vandermonde의 이름이 Jean-François로 잘못 표기되어 있다. 반면에, 본문에서는 자크 프랑수아 방데르몽드라고 제대로 표기하고 있다. 장 프랑수아 방데르몽드는 자크 프랑수아의 부친으로 약사였다.

23)

쿠오리베트 논문은 스콜라 철학의 전통에 기인하는 것으로서 오늘날의 학위 논문과는 완전히 다른 형태와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논문제출자는 특정 주제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이를 논증하는 짧은 글(논문)을 제시하였다. 이에 대한 심사는 심사위원들과 구두로 논쟁을 벌이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심사에서는 창의적인 연구보다는 삼단논법을 사용한 논리적인 토론 전개가 중요한 평가 대상이 되었다. 당시 의학도들이 박사 학위(doctorat)의 전 단계인 리상스(licence) 학위를 받기 위해서는 2년간 여러 편의 리상스 논문, 즉 쿠오리베트 논문을 제출해서 심사를 통과해야 했다(Huard et al., 1973: 360-361).

24)

“Imbecilitas, morbi symptoma.”

25)

“GIN SENG* seu Pe Tsi primum à similitudine supposità cum effigie hominis…”

26)

위아르 등은 광동어 발음을 따서 jen(人) cheng(生)이라 표기했다고 주장했지만(Huard et al., 1973: Planche XXVII), 우리는 한자를 잘못 (받아) 쓴 것이라 생각한다.

27)

“nec aspectu, nec gustu, nec etiam virtute erin Sinensi absimilis.”

28)

“haec coctionem juvat restituitque, Diaphoresim resarcit integram viresque imbecill[it]-as recreat.”

29)

“MEDICATORUM vires experientia imprimis confirmat, quas à certis principiis dimanantes ex analysi Chymicà judicaveris.”

30)

“sæpiùs errori obnoxias experimentis patebit.”

31)

위아르 등의 논문에 인용된 페이지에서는 이 문장의 바로 오른쪽 옆 여백에 독자가 “왜(Quare?)”라는 자필 노트를 붙여놓았다. 그리고 그 바로 밑에 Kina(키니네), Sima-rouba, Ipecacuanha라는 단어를 써놓았다(그림 2). 바로 각 본초가 언급되면서 약효를 설명하는 구절 바로 옆에 약초의 이름을 필기해놓은 것이다(Huard et al., 1973: Planche XXVII). 자필 노트의 주인공은 파리 대학의 학생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처럼 논문의 독자 역시 중국의 인삼과 더불어 신대륙의 본초들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 이와 같은 자필 노트를 통해 드러난다. 현재 열람 가능한 구글북스 스캔본에는 자필 노트가 남아 있지 않다.

그림 2. 1736년 파리 의과대학에 제출된 폴리오 드 생바의 인삼에 관한 쿠오리베트 논문

Figure 2. Thèse quodlibétaire submitted to the Faculty of Medicine in 1736 by Folliot de Saint-Vast

32)

*“In diarrhoeis, dysenteriis, ventriculi & intestinorum debilidate aut depravatione, sicuti in syncope, lipothumià, paralysi, stuporibus & convulsionibus prodest : mirum in modum refocilliat nimià venere exhaustos : hominibus à morbis vel acutioribus vel chronicis enervatis, nullum huic aequiparandum medicamentum”(밑줄을 필자가 덧붙임).

33)

‘草’자 대신 쓰인 글자는 당시 사용되던 이체자(異體字)가 아니며 한자에서 존재하지 않는 글자라는 사실을 『강희자전(康熙字典)』을 직접 확인하여 알려주신 연세대학교 인문학연구원의 고인덕 선생님께 감사를 드리는 바이다.

34)

李時珍, 『新註解 本草綱目』 第四卷 (서울: 여일, 2007), pp. 50-51.

35)

nimium auctis exundantibusque spiritibus, debilibus, fatigatis, vel morbo diunturnior, aliave de causa exhaustis ad miraculum prodest aliave de causa exhaustis ad miraculum prodest”(밑줄은 필자가 덧붙임).

36)

프랑스 국립도서관 소장 필사본에 당트르콜이 번역한 중국의서의 내용이 전하고 있다. Paris, BnF, Fr. 17238 (중국 서적의 발췌 번역), fol. 75-112v (“중국 치료법에서 최고의 약초인 인삼에 대해서” 등); Paris, BnF, Fr. 19538 (중국의 의학과 약초에 관한 여러 저서의 발췌 번역). 당트르콜에 대해 연구한 토마 드 보시에르에 따르면, 당트르콜은 『본초강목』이 아닌 다른 중국 서적을 참조했다고 한다. 그는 당트르콜이 중국의 유명한 의사 “계채영”이 쓴 “리무”를 바탕으로 인삼에 대해 자세히 묘사했다고 언급하였는데, 필자는 아직 “계채영”과 “리무”에 대해서는 알아내지 못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동양의학에 조예가 깊은 동료학자들께서 서양학자가 밝히지 못한 공백을 채워주실 수 있으리라 기대하는 바이다. 토마 드 보시에르의 원문은 다음과 같다. “Un fameux médecin nommé Gué Tché Yong a composé un livre appelé Li-Mou, où il décrit en grand détail toutes les particularités du Gin Seng; il a presque certainement été l’inspirateur du P. Dentrecolles. (계채영이라 불리는 유명한 의사는 『리무』라는 제목의 책을 저술하였다. 그는 이 책에서 인삼의 특징에 대해 아주 자세히 묘사하였다. 그는 거의 분명히 당트르콜 신부에게 영감을 주었던 인물이었을 것이다)”(Thomas de Bossierre, 1982: 127-129).

37)

프랑스어 제목은 『중화제국과 중국령 타타르 지방의 지리, 역사, 연대기, 정치, 자연에 관한 논고(Description geographique historique, chronologique, politique, et physique de l’Empire de la Chine et de la Tartarie chinoise)』이다.

Refer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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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국왕의 정원 교수 투른느포르의 현장실습 장면. 1694년에 출간된 투른느포르의 저서 『식물학의 개념』에 수록된 판화 (도판 소장처: 파리 자연사 박물관 도서관)

Figure 1. A plant demonstration by Tourenfort, professor at the Jadin du roi. Engraving from his Éléments de botanique, published in 1694 (Photo credit: Bibliothèque du Muséum d’Histoire Naturelle).

그림 2. 1736년 파리 의과대학에 제출된 폴리오 드 생바의 인삼에 관한 쿠오리베트 논문

Figure 2. Thèse quodlibétaire submitted to the Faculty of Medicine in 1736 by Folliot de Saint-Va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