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함흥의과대학 교수진의 구성, 1946-48:사상성과 전문성의 불안한 공존
The Construction of the Faculty of Hamheung Medical College in North Korea, 1946-48: An Unrest Coexistence of Political Ideology and Medical Experti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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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This paper aims to reveal how Hamheung Medical College in North Korea kept up its faculty with the trend of a new political system. The time period consists of three series of evaluations that occurred between the start of a reformation action in 1946 and the establishment of the regime in 1948. At the time, it was difficult to secure college faculty in the medical field, because of a serious shortage of medical personnel. Moreover, the problem in the recruitment of faculty at the medical college grew bigger since the members were required to have a high level of political consciousness. Then how did Hamheung Medical College accomplish this ideal securing of faculty that possessed political ideology and medical expertise?
For the first time, a faculty evaluation at the local level was carried out and got rid of a few pro-Japanese or reactionary factions but maintained most of the faculty. Although academic background and research career of the faculty were considered, securing of the manpower in terms of number was crucial for the reconstruction of a professional school level. At the second time, as the central education bureau’s intervention tightened the censorship, most of the faculty were evaluated as unqualified. Indeed, it was difficult to satisfy the standard of professionalism which emphasized a high level of academic career and political thought that included affiliation of Workers’ Party of North Korea. The Medical College could not find faculty that could replace those professors and therefore, most of them maintained their faculty positions. Since then, the faculty who received excellent evaluations led the school at the very front. At the third time, the Medical College itself led the evaluations and implemented more relaxed standards of political ideology and medical expertise. Faculty who were cooperative to the reformation actions that North Korea carried forward or had working experience at the hospital and health service received a high level of recognition. Accordingly, the Medical College expanded itself by securing many professors, but also embodied a large gap of academic and ideological levels between them.
Hence, the political ideology and medical expertise, which were set forth as the requirements for faculty, were constructed in the space of political ideal and social reality. Despite the high criteria the North Korean Government made, Hamheung Medical College’s faculty fell below the average in terms of ideological and academic standards. As a way to compensate this, professors who greatly satisfied the both virtues were placed as leaders and, for supporting them, professors who taught the general education curriculum were recruited largely. And also, it appointed a large number of medical doctors who accumulated experiences in the field as new professors. Nevertheless, the Medical College struggled to raise the quality of medical education and was unable to prevent a part of its faculty from leaving to South Korea in the time of the Korean War. Thus, the political and academic virtues of the faculty at that time were not just simply about the professor individuals but were interrelated with the medical education and health care system in North Korea.
1.서론
해방 직후 북한에는 정치를 포함한 모든 부문에서 거대한 변화의 소용돌이가 일어났다. 그 내부에는 식민지 잔재의 청산과 새로운 사회체제의 수립이라는 두 개의 중심축이 존재하고 있었다. 바꾸어 말하면, 사회주의 국가로 나아가기 위한 일련의 개혁 조치가 일제가 남긴 유산의 제거를 시작으로 광범위하게 전개되었던 것이다.
보건의료는 급진적 변화가 추구된 대표적인 분야의 하나였다. 무엇보다 사적 의료체계를 공적 의료체계로 바꾸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사회의 주력 계급으로 여긴 노동자와 농민들이 의료 혜택을 많이 받을 수 있도록 여러 조치를 취했다. 사회에 만연되어 있는 전염병 퇴치에 필요한 중앙집권적인 대응 체계도 갖추려고 했다. 이를 뒷받침할 의료인력을 대대적으로 양성하기 위해 의학교육의 확대에도 관심을 두었다.
이러한 조치가 효과를 거두려면 의사를 포함한 의료인들이 북한이 추진하는 사업에 적극 참여하거나 협력을 해야 했다. 의료인력이 많이 필요로 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전문성이 뒷받침되어야 했던 것이다. 그런데 당시 북한 상황은 우수한 의료인들을 확보하고 그들을 정치적으로 개조하는 것이 녹록치만은 않았다. 의료인력이 크게 부족한 상태에서 이들은 여전히 북한에서 개업의로 활동할 여지가 남아 있었고 나아가서는 남한으로 내려가는 선택을 할 수도 있었다. 결국 북한의 새로운 조치에 의료인들을 적극 동참하게 만들 대책이 요구되었다.
북한에 있던 의사들의 수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많게는 북한이 1947년 통계자료에서 밝힌 1천 7~8백명에서부터 적게는 최제창이 추산한 3백명까지로 그 편차가 매우 크다(북조선 인민위원회 기획국, 1947: 132; 허윤정·조영수, 2014: 239)[1,]. 그 이유는 의사들에 대한 정확한 통계자료가 부족한데다가 짧은 기간에 상당한 변동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이 기간에 적지 않은 의사들이 월남을 했고 한편으로 북한에서는 새로운 사람들이 의사 자격을 받았으므로 조사 시점에 따라 그 인원이 달라진다. 현재 연구자들은 당시 북한의 의사들을 약 1천명으로 추산하고 있으나(박윤재·신규환, 2012: 304; 황상익·김수연, 2007: 45) 실제로는 시기에 따라 그보다 적었을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김일성은 1947년 보고에서 의사의 수가 몇 백명에 지나지 않는다고 밝혔고(김일성, 1979a) 실제로 통계자료를 보면 1947년의 의사 수가 737명으로 집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북조선 인민위원회 기획국, 1948: 209)[2].
이 시기 북한에서 새로운 의료인력을 확보하기 위한 움직임은 크게 두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하나는 단기 방안으로 이전의 의료인력을 북한체제가 요구하는 방향으로 그들의 의식과 활동을 바꾸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장기 방안으로 새로운 의학교육을 통해 북한이 바라는 젊은 세대의 의료인력을 양성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의대의 교수인력은 후대의 의료인력 교육을 책임진 존재로서 그 누구보다 정치사상적으로 단련되고 학문적으로 우수한 모범적 의료인이어야 했다.
그동안 북한의 보건의료에 대한 연구는 비교적 활발히 이루어져 오고 있다. 해방 직후의 시기만 해도 다양한 주제에 대한 연구성과가 지속적으로 발표되고 있다. 그런데 초기 북한이 직면한 주요 딜레마였던 의료인력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연구가 미흡한 실정이다. 박윤재·박형우는 선구적으로 북한의 의학 교육기관을 소개해 그 개요를 보여주었고(박윤재·박형우, 1998), 최근에 허윤정·조영수는 해방 직후 북한의 의학교육에 실질적으로 영향을 미친 교육정책의 맥락에서 그 전개 과정을 다루었다(허윤정·조영수, 2014). 한편, 이 연구와 밀접히 관련된 연구성과로 박형우는 평양의학대학의 교수진을 추적해 시기별 변동 내역을 살폈고(박형우, 2002: 63-95), 김근배는 김일성종합대학과 이것에서 분리된 평양공업대학, 평양의학대학의 교수진 심사 및 충원을 개관하며 그 속에서 드러나는 주요 특징에 주목했다(김근배, 2003: 25-42).
이 연구는 북한에서 의대 교수진을 새로운 사회체제에 부응해 어떻게 구성해 갔는가를 함흥의과대학을 사례로 들어 구체적으로 밝히고자 한다. 함흥의대는 평양의학대학과 더불어 중심적인 고등의학 교육기관으로 북한 대학의 의학교육을 이해하는 데 유익한 주요 대상이다. 중앙정부의 보건의료 시책이 전방위적으로 펼쳐지고 있었으므로 함흥의대의 사례는 다른 의대의 이해에도 중요한 시사점을 줄 것이다. 그 시기는 북한이 새로운 보건의료체계와 더불어 의료인상을 만들어가고 있던 해방 직후의 1946년부터 정부 수립기인 1948년까지이다. 사회주의 보건체제로 나아가는 과도기로 예상치 못한 어려움을 만나고 그것은 보건의료 방향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는 역동성이 드러난다. 이는 의학사의 측면에서는 북한이 내세운 인민의 의사를, 전체 역사의 측면에서는 사회주의 인텔리를 시대적 맥락에서 어떻게 만들어갔는지 그 복잡한 양상을 세밀하게 보여주게 된다.
당시 북한은 의료인력이 크게 부족한 터라 질적으로는 물론 양적으로도 의학계 교수인력을 확보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게다가 이들은 높은 수준의 정치사상 의식까지 갖추어야 했기에 그 수급에서의 어려움은 더 커지게 되었다. 그렇다면 의료인력이 부족한 현실에서 사상성과 전문성을 겸비한 교수인력의 확보라는 이상을 어떻게 실현해 나갔을까? 특히 함흥의대 교수진에 대한 세 차례에 걸친 내외부의 심사 및 검열 과정을 들여다봄으로써 그 변화를 세밀하게 추적하게 될 것이다. 이 연구에서는 교수진 변동의 배경과 요인, 그로 인해 나타난 교수진 구성과 재편 등이 시기별로 다루어지게 된다. 첫 번째 시기는 1946년 중순까지로 함흥의학전문학교로 존재하고 있을 때 추진된 교수진 충원과 판정을 살핀다. 두 번째 시기는 1947년 중순까지로 함흥의과대학으로 승격된 후에 건국사상총동원운동과 함께 전개된 강도높은 교수진 검열과 개편을 검토한다. 세 번째 시기는 1948년 말엽까지로 정부 수립과 더불어 함흥의과대학에서 새롭게 진행된 교수진 확대와 공존을 다룬다. 이렇게 시기 별로 함흥의대 교수진의 심사와 충원 과정을 연구함으로써 의학계 교수진 창출이 구체적으로 어떤 방향으로 진행되었고 그것이 보건의료 변화에서 지니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밝히게 된다.
이 연구에 필요한 자료는 미국 메릴랜드 주에 위치한 국립문서보관소(NARA)를 직접 방문하여 얻었다. 이곳에는 전쟁 시기에 미군이 북한지역에서 노획한 함흥의대를 포함한 주요 대학들의 자료가 풍부하게 소장되어 있다. 물론 이 자료들은 특정 시각이 반영되어 있을 수 있으나 함흥의대 내부를 세세히 엿보기에는 아주 유용하다. 이러한 자료에 바탕하여 함흥의대의 교수진 심사와 구성에 대한 미시적, 동태적 연구가 가능하다. 무엇보다 당시 함흥의대의 공식 문서와 교원들의 개인 자료는 이 연구에 아주 중요하게 활용되었다[3].
2. 충원과 판정: 학력 고려
북한에 모든 지역을 관장하는 중앙정권이 세워진 것은 1946년 2월 9일 발족한 임시인민위원회부터였다. 이는 조선공산당을 비롯한 조선민주당, 조선신민당 등 각종 정파가 연합하여 만들어진 기구였다. 위원장 김일성이 이끌되 좌파 계열과 민족주의 계열이 다양하게 망라된 형태였다. 임시인민위원회 산하에 10개의 국과 3개의 부가 설치되었고 그 하나로 보건국이 포함돼 민주당 소속의 의사 윤기녕이 책임을 맡았다(기광서, 2011: 342-348)[4,]. 당시 보건국은 국장과 차장 아래에 치료부, 위생전염병부, 의료품조달부, 통계부, 일반부, 재정부, 인사부를 갖추고 있었고 직원은 49명이었다[5].
임시인민위원회의 정책 방향을 제시한 <20개조 정강>을 보면, 보건의료와 관련하여 “(15) 로동자와 사무원들의 생명보험을 실시하며 로동자와 기업소의 보험제를 실시할 것”과 “(20) 국가병원수를 확대하며 전염병을 근절하며 빈민들을 무료로 치료할 것”이 제시되었다(김일성, 1979f). 아직은 사회주의 보건의료체제를 전면적으로 내세우지 않고 그를 향한 정지작업을 추진할 것을 밝히고 있다. 실제로 윤기녕 국장은 의료기관을 국영으로 하는 것이 이상적이지만 여러 사정상 점진적으로 할 것이고, 개업의들의 생활을 위협하거나 불안을 주는 급격한 시책도 피하고 점차로 개혁할 것임을 피력했다(황상익·김수연, 2007: 43-48).
그런데 당시 의학 고등교육은 보건국이 아닌 교육국 관할 하에 있었다. 교수진 충원을 비롯한 학사운영, 교과목 구성 등 그 전반적 사항이 교육국 소관이었던 것이다(허윤정·조영수, 2014: 239-268)[6,]. 사실 의학 고등교육을 둘러싸고 보건국과 교육국 사이에는 갈등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논란에 대해 김일성은 의학이라 할지라도 학교교육은 일원화해서 교육국에서 책임지고 보건국은 치료사업과 의료일꾼 재교육을 맡는 것으로 정리했다(김일성, 1979e). 교육국 국장은 조선공산당 소속의 장종식이었다. 항일운동으로 투옥 경력이 있는 소학교 교원이자 신문사 기자를 역임한 인물이었다.
중앙차원에서 임시인민위원회가 조직되고 그 산하기구인 교육국이 강화됨에 따라 새로운 교육 조치가 본격적으로 취해졌다. 위원장 김일성은 1946년 3월 <교육 부문 앞에 나서는 몇 가지 과업에 대하여>라는 연설에서 중앙의 지도 하에 “온갖 불순한 사상요소들과 강하게 투쟁하는 한편 각급 학교 교원들을 다 료해검토하여 교육기관에 잠입한 반동분자들을 빨리 제거”할 것을 지시했다(김일성, 1979b). 새로운 후대와 민족간부를 키우는 데 교원들의 사상 의식이 중요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다른 교육기관의 사례에 따르면 이는 지역별로 주요 정당과 사회단체 대표들로 구성된 교육심사위원회의 주도로 이루어졌다. 이때의 중점은 일제의 고위직에 있었거나 적극 협력했던 친일파와 함께 북한정권의 주요 개혁 조치에 저항하는 반동세력들의 제거에 두어졌다(신효숙, 1999: 182-183). 당시는 대외적으로 모스크바삼상회의의 결정에 따라 소군정의 신탁통치가 시행되고 대내적으로는 지주들의 토지를 몰수해 소작농들에게 나눠주는 토지개혁이 실시되고 있을 때여서 그에 반대하는 세력을 몰아내려고 했던 것이다. 또한 사회주의적 교육체제로 방향을 잡아나가기 위한 새로운 교육개혁을 추진하고 있을 때라서 그것을 저해하는 방해 세력을 사전에 차단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많은 의사들은 대표적인 자산가 집단에 속했으므로 그 여파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당시 북한에서는 “… 개인개업에 열중하던 일부 불건전한 보건일꾼들과 극소수의 착취계급 출신의 반동적인 일꾼들은 인민보건사업에 협조하기를 거부하여 나섰으며 심지어 일부 불순분자들은 반동세력과 결탁하여 파괴암해책동을 감행하였다”고 한다(홍순원, 1989: 393). 다시 말해, 북한체제에 저항하는 반대세력에 동조적인 의사들이 있었던 것이다. 특히 조선민주당에서 우파민족주의 계열이 배제되고 그 지도자 조만식이 연금된 이후부터 이러한 반대활동은 더 거세졌다(김선호, 2006: 299-308).
일제강점기인 1944년에 세워진 함흥의학전문학교는 예전 그대로 존속되었다. 학제와 교과과정, 건물 등 대부분을 물려받았다. 크게 바뀐 것이 있다면, 교수와 학생들의 인적 구성이 완전히 달라졌다는 점이다. 이 학교를 주도한 일제가 물러난 터라 조선인들이 새로운 주도 세력으로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특히 교수인력의 근본적인 변화는 불가피했다. 그래서 모든 교수직을 조선인들로 채워야 하는 중요한 과제를 안게 되었다.
하지만 함흥의전의 인적 기반은 매우 취약했다. 갓 세워진 학교라 소수의 일본인 교수인력만이 존재했고 부속병원도 아직 갖추어져 있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즉, 이 학교에는 일제강점기의 다른 의학 교육기관과 달리 조선인 교수 및 전문인력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이는 해방 직후 함흥의전의 재건을 주도할 교수인력을 다른 곳으로부터 충원해 새로 구성해야 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의학분야의 교수인력을 확보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 의학교육기관의 확충 및 설립 움직임이 여러 지역에서 경쟁적으로 일어나 전문인력 유출을 꺼리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었던 탓이다. 평남 평양과 함남 함흥만이 아니라 새로이 평북 신의주와 함북 청진까지 이러한 움직임에 가세했다(허윤정·조영수, 2014: 241-247)[7,]. 이러한 경향은 이후에도 변하지 않아 “함북에서 몬로주의 정책으로 적재의 타지 전출을 엄금”하고 있다는 것이었다(함흥의대, 1947: 사무 타합 사항). 이로 인해 함흥의전은 의학 교수인력을 다른 지역으로부터 충원하는 것이 불가능하고 도내에서 자체적으로 확보해야 하는 어려운 사정에 놓이게 되었다. 결국 함흥의전은 함경남도 지역에서 활동중인 개업의들과 한편으로는 부속병원으로 바뀐 함흥도립의원 소속의 의사들을 중심으로 교수인력을 꾸릴 수밖에 없었다.
함흥의전이 직면한 가장 중요 과제는 자격을 갖춘 교수인력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발령 일자를 보면, 교수진 충원은 1945년 11월 30일에서 12월 1일 사이에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 교수 자격을 갖춘 사람들을 물색한 다음 한꺼번에 임용한 것이었다. 발령 기관도 중앙의 교육국이 일부를 임명했지만 함경남도 인민위원회가 서둘러 발령을 낸 경우가 더 많았다. 새로이 충원한 모든 교수인력은 실제로 함흥을 중심으로 함남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던 의사들이었다. 출신지역 역시 2명을 제외하고는 함남이었다(함흥의학전문학교, 1946). 인근지역에서 최대한 빨리 많은 사람들을 자체적으로 확보하기 위해 나섰던 결과였다.
함흥의전 교장으로는 최명학이 임명받았다. 그는 함남 함흥 태생으로 세브란스의전을 나온 후 교토제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다음 모교에서 오랫동안 교수를 역임한 해부학의 권위자였다. 세브란스의전 교수를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와 개업의로 활동하다가 해방 직후 조선민족함경남도집행위원회 부위원장 겸 보건국장을 역임하던 중 중책을 맡게 되었다(함흥의과대학, 1947: (최명학) 교원 리력서; 박형우·여인석, 1992: 88-91; 허윤정·조영수, 2014: 242-243). 최명학이 함흥의전 책임자를 맡게 된 이유는 그가 함남지역에서 활동중인 의학분야 최고의 명성있는 인물이라는 판단 때문이었을 것이다. 또한 그는 함경남도건국준비위원회의 주도적 인물로 1946년 4월에는 진보적인 조선신민당에 가입했고 이후 그것이 조선공산당과 합당함으로써 북조선로동당 소속이 되었던 점도 작용했을 것이다[8,]. 최명학은 1952년 과학원이 창립될 때 의학분야 유일의 원사이자 농학 및 의학부문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된 것에서 보듯(강호제, 2007: 110) 북한 의학계 최고의 인물로 인정받고 있었다. 이밖에 학감 최정헌, 부속병원 원장 리홍근이 임명되며 간부진을 구성했다.
1946년 4월 당시 함흥의전 교수진은 총 21(교양 2 포함)명이었다(함흥의학전문학교, 1946)[9,]. 무엇보다 의학분야 교원들에게서 보이는 공통점의 하나는 적게나마 연구경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라는 점이다. 이들 중 비록 박사 학위자는 4명(최명학, 리주걸, 김을성, 주민순)에 불과했지만 그 대부분은 학교 졸업 후 2년 이상의 연구경험을 쌓은 사람들이었다. 박사 학위자들 중 3명은 의학전문학교 교수경력도 가지고 있었다. 출신학교별로는 대학 6명, 전문학교 13명으로 의학계 전문학교 출신이 다수를 차지했다. 함경남도 지역에서 교수인력을 서둘러 충원하다 보니 그 수준은 높은 편이 아니었다[10].
의학계 교원들의 이전 근무처를 보면 크게 두 부류로 구분된다. 첫 번째 그룹은 지역에서 개업의로 활동하던 사람들로 전체의 절반 가까운 8명이었다. 특히 경력이 풍부한 사람들은 모두가 개업의 중에서 충원되었다. 두 번째 그룹은 일제의 의료기관에서 근무하던 사람들로 앞서보다 약간 많은 9명이었다. 이곳의 거점 의료기관이라 할 함흥도립의원 종사자들이 7명으로 그 대다수를 차지했다. 이들은 대체로 근무경력이 짧은 젊은 의사들이었다. 이밖에 해방 후 고향으로 돌아온 사람이 2명 포함되었다.
이들의 직급은 교수, 조교수, 강사로 나뉘어 있었다. 교수 9명, 조교수 3명, 강사 7명이었다. 대체로 연구경력이나 실무경력이 긴 사람들이 교수로,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조교수나 강사로 발령받았다. 교수 직급을 받은 사람들은 당시 개업의로 활동중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연구경험을 가진 후 실무에 종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자료를 보면 직급 구분에서 엄격한 기준을 찾기는 다소 어렵다. 나이나 학력, 경력 등에서 일정한 평가 방식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발령처에 따라 직급이 일차적으로 부여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한 명을 제외하고는 중앙의 교육국에서 발령을 받은 사람들은 교수, 함경남도에서 발령을 받은 사람들은 조교수 혹은 강사였다.
전공별로는 기초와 임상분야가 각각 4명과 15명이었다. 전공을 고려했을 때 교수인력이 크게 미흡했음을 알 수 있다. 세부 내역을 보면 교수인력이 부족하거나 아예 없는 전공이 많았다. 임상분야인 이비인후과, 기초분야인 병리학, 의화학, 위생학은 전공자가 하나도 없었고 상당수의 분야는 1명의 교수인력으로 운영되었다. 임상의 핵심 분야라 할 내과와 외과도 교수인력이 크게 부족한 편이었다. 그렇다 보니 이 시기 함흥의전에서는 보조인력으로 5명의 시간강사와 6명의 연구생을 확보해 활용했다. 이밖에 교양으로 기초과학과 인문사회 과목을 담당할 교수인력이 전임 2명과 시간강사 3명 있었다.
눈에 띄는 인물로는 교장 최명학 외에 몇몇 사람들이 더 있다. 박사 학위자 리주걸(외과)과 김을성(피부비뇨기과)은 각각 경성여의전과 세브란스의전 교수경력을 가지고 있었다. 리명섭(세균학)은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를 마친 다음 다시 의학부에 들어가 졸업한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였다. 리유호(소아과)는 교원들 중에서 로동당에 가장 일찍 가입했고 소련 연수도 다녀온 것에서 보듯 사상성을 겸비한 인사였다. 윤함복(소아과)은 경성여의전을 졸업하고 함흥도립의원에서 근무하다가 함흥의전에 합류한 유일의 여성 교원이었다. 이밖에 김후선은 규슈제대 법문학부 출신으로 학생감을 맡고 있었고 강영환은 도호쿠제대에서 물리학을 전공한 시간강사로 기초과학을 담당했다.
한편, 함흥의전에서도 교원들을 심사해서 그 결과를 중앙의 교육국에 제출했다. 그 내용은 개인이 작성한 이력서와 위원회가 평가한 조사서로 이루어져 있었다. 특히 조사서는 “성분(출신가정)”, “가정상황”, “소속단체명”, “사상경향”, “기타참고사항”을 기재하도록 돼 있었다. 그런데 조사서는 모든 대상자들의 사상경향을 “진보적 민주주의에 협력”이라고 평가하고 있는 것에서 보듯 다분히 형식적으로 작성되었다[11]. 좌익 계열의 당이나 단체에 가입하고 있던 사람들도 공산당, 신민당, 민주청년동맹 소속 1명씩으로 아직까지는 소수에 불과했다. 다만, 이는 장차 대학 교원들에게 중앙의 당과 내각이 중요하게 요구하게 될 기준으로서의 의미를 지녔다고 볼 수 있다.
이때 시행된 교원 심사의 직간접적인 여파로 적어도 2-3명이 학교를 그만두게 되었다. 하나의 사례를 보면 함흥의전에서 교육국에 교수의 해직을 내신하는 공문으로 그 사유를 “사정에 의하여 해직”하여 주기를 요청했다(함흥의학전문학교, 1946: 직원 해직 내신에 관한 건). 이 중에는 박사 학위자 2명도 포함되었다. 의학분야의 교수인력이 부족한 상황이라 적은 인원에 대해서만 문제를 삼았다. 그렇지만 이는 고등교육 교수인력의 정치사상을 강화하는 기회이자 한편으로는 이들의 입지를 불안하게 만드는 사건이기도 했다.
이와 동시에 북한에서는 일부 교원을 선발해 소련으로 파견했다. 선진의학의 중심지로 여긴 소련에서 사상성과 전문성을 동시에 강화해 향후 의학교육의 주도적 인물로 육성하기 위해서였다. 함흥의전의 경우 젊은 세대 5명(리유호, 김기선, 김배준, 박치호, 박주상)이 선발되었다. 연수 기간은 1946년 9월부터 1947년 3월까지로 약 6개월이었다. 전공분야는 내과 3명, 외과 1명, 소아과 1명으로 의료인력 양성에서 핵심을 차지하는 분야들이었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일본에서 유학한 사람들로 그 중에는 최고의 명문대학인 도쿄제대, 교토제대, 규슈제대 의학부 출신들이 모두 포함되었다. 아울러 이들은 학교를 다니던 도중 저항활동에 참여했거나 북한에서 일찍이 좌익 계열의 당이나 단체에 가입하는 등 진보적 성향을 지녔던 사람들이다(함흥의학전문학교, 1946; 함흥의과대학, 1947).
3. 검열과 개편: 사상 강화
북한에서 모든 국가사업을 강력히 추진하게 된 것은 합법적인 최고 권력기관으로 북조선 인민위원회가 1947년 2월 등장하면서부터였다. 전국적인 선거로 지역의 인민위원회가 구성되고 이들이 참석한 가운데 김일성을 수반으로 하는 북조선 인민위원회가 공식 출범했다. 공산당과 신민당의 합당으로 탄생한 북조선로동당은 이때부터 최대의 주도 세력으로 떠올랐다. 인민위원회 산하에는 14개의 국과 4개의 부가 설치되었고 보건국은 민주당 소속의 의사 리동영[12,]이 맡았다. 일부의 국에서는 학력과 경험이 우수한 전문인력을 충원하고 소련 제도의 도입을 주도할 소련계 한인을 부국장으로 임명했다(기광서, 2011: 348-354). 보건국에도 차장으로 리 와씰리 표도로비치가 임명되었다. 당시 보건국은 위생감독부, 모자보건부, 요양소·휴양소감독부가 추가되고 직원은 66명으로 늘어났다(황상익·김수연, 2007: 48; 김진혁, 2014: 265).
보건의료에서도 새로운 조치가 잇달아 취해졌다. 국영 의료기관을 확대하고 개인 병원과 개업 의사들을 억제하며 의료인들에 대한 정치교양사업을 강화해 나갔다. 그럼에도 보건의료에서의 개혁 조치는 잘 진척되지 못했다. 1947년 5월 인민위원회 회의에서 김일성은 특별히 <인민보건사업을 강화할데 대하여>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는 “지금 보건사업이 잘 된다고 볼 수 없다”며 보건의료 일꾼들의 새로운 양성과 함께 사상교양사업의 강화 등을 제기했다. 모든 의사들이 진정으로 “국가와 인민을 위하여 복무하는 진보적 의료일꾼”이 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김일성, 1979e). 아울러 인민위원회는 1947년 8월 <보건일꾼의 의무와 권리에 관한 규정>을 제정하여 의사를 포함한 보건의료인들을 중앙에서 적극적으로 관리 통제할 법적 근거를 마련했다. 예로서 의사들이 지역을 옮기거나 근무처를 바꿀 때는 시도 인민위원회의 허가를 받도록 했다. 또한 새로이 의사가 되는 사람들은 국가연구원을 제외하고는 2년간 중앙에서 지정하는 지역의 의료기관에서 근무할 의무를 지니게 되었다(정경모·최달곤 책임편집, 1990: 415-422).
특히 1946년 11월 말에 추진된 건국사상총동원운동은 정치사상 의식을 강화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지역에서 인민위원회 선거가 이루어진 직후 김일성은 <인민위원회의 당면과업>의 하나로 인민정권이 추진하는 개혁 조치를 강력히 펼치기 위해 건국사상총동원의 전개와 그 일환으로 사상의식의 개조를 제시했다(김일성, 1979d). 이로 인해 북한의 정치사회적 개혁 조치를 저해하고 위협하는 관료주의자, 이색분자, 불순분자들을 색출해 몰아내거나 교화시키는 작업이 추진되었다. 이때부터 북한의 모든 지역과 부문들로 사상운동이 확대되며 본격적으로 펼쳐졌다(김재웅, 2005: 237-268).
이 운동은 보건의료에서 크게 몇 가지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하나는 의료인 대상의 정치교양 교육이 강화되었다. 수시로 개최된 강습회에서는 그 일부로 “마르크스-레닌주의 기본”을 필수 강좌로 열어 교육시켰다[13,]. 둘은 진보적인 당이나 단체에의 가입이 장려되었다. 1946년 4월에 창립된 북조선보건연맹(위원장: 최응석)은 그 중의 하나였다(홍순원, 1989: 394-395). 셋은 지도적 위치에 있는 의료인들을 대상으로 철저한 검열사업이 이루어졌다. 함흥의대는 중추적 의학교육기관으로서 그 주요 대상이 되었다.
이 학교는 북한의 고등교육 확장 시책에 따라 1946년 10월에 함흥의과대학으로 승격되었다[14,]. 고등학교에 해당하는 고급중학교 졸업 자격을 갖춘 신입생 160명을 받아들여 수업년한 5년제로 운영되는 북한의 대표적 대학으로 발돋움했다. 당시 평북과 함북에서 지역 자체적으로 추진하고 있던 의대 설립 움직임에 대해서는 제동을 걸고 평양과 함흥의 의대 설립에 집중할 것을 지시했다(정경모·최달곤 책임편집, 1990: 427). 이로써 함흥의대는 북한 전체적으로는 평양의 김일성종합대학 의학부와 거의 동시에 의학분야의 최고 고등교육기관으로, 함남 지역에서는 최초의 고등교육기관으로 세워졌다[15]. 당시 함흥은 산업시설들이 운집해있는 북한 최대의 공장지대로서 이곳에 세워진 의대는 주력 계급인 노동자들의 보건의료를 중시한다는 상징적 의미도 지녔다.
함흥의대에서도 모든 교원들을 대상으로 한 검열사업이 1947년 3월에 본격적으로 실시되었다. 교육국의 지시에 의해 교원심사위원회가 내부 인사들을 배제한 채 로동당 함남도당 문화부장, 함남도 교육부장, 중앙 교육국 간부로 짜여졌다(함흥의대, 1947: 함흥의과대학 교원심사 보고에 관한 건)[16,]. 사실 이들은 함흥의대 교원들을 잘 알지 못했기에 그에 대한 기본 정보를 확보해야 했다. 이를 위해 대학은 개인이 작성한 이력서와 책임자가 기술한 조사서를 교원심사위원회에 제공했다. 김일성종합대학의 사례를 보면, 이전과는 달리 이력서에 학력과 경력만이 아니라 가족사항, 출신성분, 소속정당, 추천인 등까지 상세히 적도록 했다. 조사서는 교원 개인들의 성분, 소속기관명, 가족상황, 사상경향, 성격, 기타참고사항을 담았다. 이에 바탕하여 대학의 인사 업무를 담당하는 간부부가 자체적으로 1차 심사를 해 보고서를 작성했다(김근배, 2003: 31).
이러한 자료를 토대로 교원심사위원회는 함흥의대의 교원들에 대한 최종 심사를 벌였다. 평가는 “사상경향”, “사업성적”, “발전성 여하”에 중점을 두었다. 구체적으로는 사상, 성품, 사업, 학력, 기술 등을 전반적으로 검토해서 따졌다. 그 내용은 아주 신랄하여 대부분의 교원들이 여러 측면에서 온갖 부정적 평가를 받았다. 먼저, 로동당 당원인 경우는 “진보적”이라는 평가를 받았지만 그렇지 않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비진보적”, “기회주의적”이라는 지적을 받았다. 당원 중에는 “좌경적 오류를 범할 우려”가 있거나 “적극성이 부족”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민주당이나 무소속일지라도 “진보적 노력”으로 분류된 사례가 있는 것으로 보아 로동당 소속 여부로만 판정을 내린 것은 아니었다. 다음으로 사업성적도 로동당 당원들이 “열성적”으로,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상당수는 “비열성적”, “근무태만”으로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로동당 당원이 아니고 사상이 비진보적인 경우라도 “열성적”이라는 호평을 받은 사람들이 있었다. 끝으로 발전성 여부는 사상경향과 사업성적에서 치명적 문제가 있다고 여겨진 상당수의 사람들은 모두가 “발전성이 없음”이라는 판정을 받았다. 그렇지만 사상경향과 사업성적이 우수하더라도 발전성이 없거나 의심된다는 평가를 받은 사람들도 있었다. 오히려 일부는 사상경향에서 문제점을 지적받았어도 “장래가 촉망”, “발전성 가망”의 호평을 받았다. 이는 발전성 여부를 출신학교와 연구경력 등 학력을 주되게 고려해 교수자격 유무를 따졌기 때문이다. 실례로 “학력상 대학교수 자격”이 부족하다거나 혹은 인정된다는 평가를 내리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처럼 함흥의대의 교원들에 대한 심사는 꽤나 복잡하게 이루어졌다. 사상경향, 사업성적, 발전성 여부가 전반적으로 고려되다 보니 그 내용이 간단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당시 심사에서 가장 주되게 고려한 점은 사상성과 전문성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대상 교원이 북한이 지향하는 정치사상에 부합하느냐, 아울러 대학 교원으로서의 전문적 역량을 가지고 있느냐가 핵심 사항이었다. 여기서 사상성은 로동당 당원 혹은 그에 동조적인 사람들, 전문성은 대학 졸업자들 혹은 풍부한 연구경력자들이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런데 실제로는 사상성과 전문성을 동시에 갖춘 대상자들이 적다보니 양자 사이에 현실적인 타협점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즉, 전문성이 떨어져도 사상성이 높으면, 사상성이 부족해도 전문성이 우수하면 발전성이 있다는 평가가 내려졌던 것이다.
교원심사위원회에서 내린 최종 평가는 심사 대상자 25(교양 7 포함)명[17,] 중에 “요단(要斷) 3, 부동 5(1), 보통 4(1), 진보적 9(3), 학문적으로도 유망 4(2)”명이었다. 가장 부정적인 판정을 받은 요단은 불온 단체 가입, 삐라 훼손 등으로 반동적 인물로 지목된 경우였다. 부동은 대지주 출신, 반동그룹에 동조적인 일명 성대파(城大派)[18,], 무능력자 등으로 평가를 받은 사람들이었다. 보통은 무소속으로 학력은 부족하나 발전성이 있다고 여겨진 인사들이었다. 진보적이라는 평가를 받은 사람들은 로동당 당원이거나 아니면 젊은 사람들이었다. 가장 우수한 평가를 받은 사람들은 로동당 당원일 뿐만 아니라 학력도 뛰어난 경우였다[19]. 이렇게 전체 함흥의대 교원 중에서 오직 4명만이 모든 자격을 갖추었고 그 절반에 가까운 최대 12명은 기준에 미달된다는 판정을 받았다.
이 심사 직후에 요단 판정을 받은 3명은 학교에서 곧바로 퇴출되었다. 하지만 보통은 물론 부동으로 평가를 받은 사람들도 교수직을 그대로 유지했다. 무엇보다 의학계 교수인력의 부족으로 이들을 대체할 새로운 적임자들을 충원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일을 계기로 함흥의대 교수진의 배치는 내부적으로 커다란 변화를 겪었다. 그 두드러진 점의 하나는 가장 우수한 평가를 받은 사람들에 의해 “학교가 강화”되어야 한다고 보았고(함흥의대, 1947: 함흥의과대학 교원심사 보고에 관한 건) 실제로 이들이 주요 직책을 맡았다는 것이다. 함흥의대를 주도할 새로운 세력이 교원 심사를 통해 전면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교원 심사가 끝난 직후 1947년 4월 함흥의대 의학분야 교수진은 총 19명이었다(함흥의과대학, 1947). 이전에 비해 새로운 사람들이 9명 충원되었으나(월북자 2명 포함) 그 사이에 심사에서 탈락한 사람들을 포함하여 동일한 인원이 그만두어 전체 인원은 같았다[20,]. 검열 직후 함흥의대에서 부족한 분야, 즉 생리학, 병리학, 약리학, 의화학, 세균학, 법의학, 이비인후과, 정신신경과 등의 교원을 요청했으나 그 대부분은 충원되지 못했다(함흥의대, 1947: 부족 교원 알선 의뢰에 관한 건)[21]. 크게 달라진 점은 의료분야의 핵심이라 할 내과와 외과가 보강되고 북한이 중요하게 여긴 위생학 교원이 확보된 것이었다. 또한 교양을 담당하는 기초과학과 정치사상 관련 교수인력이 대폭 늘어난 것을 들 수 있다.
새로이 마련된 함흥의대 직제를 보면 학장과 부학장을 주축으로 대학 운영을 주관할 대학평의회가 설치되고 대학 교육을 관장하는 교육장과 행정사무를 총괄하는 경리장을 두었다. 교육장 아래에는 강좌장, 교무부장, 교양부장, 부속병원장, 연구원장, 그리고 경리장 아래에는 서무과장, 회계과장, 경리과장 등이 편재되었다. 이들 중에 대학 운영과 직결된 핵심 자리는 학장, 부학장, 교육장, 병원장, 그리고 교무부장, 교양부장 등이었다(함흥의대, 1947: 함흥의과대학 직제 및 인사발령에 관한 건)[22].
이 시기에 두드러진 점은 주요 보직에 사상성과 전문성을 겸비한 인물들이 전면 배치되었다는 것이다. 학장을 비롯한 주요 간부들은 모두가 로동당 당원일 뿐만 아니라 대학 출신 혹은 박사학위자였다. 대내외적으로 함흥의대를 대표하는 인물들을 책임일꾼으로 내세웠던 것이다. 비록 상당수의 교원들은 당과 내각에서 요구하는 기준에 미달되나 새로운 체제에 걸맞은 인물들을 앞에 내세워 이들이 대학을 이끌도록 했다. 아울러 발전 가능성이 기대되는 다수의 젊은 세대 의사들을 교수진으로 충원하는 조치도 취했다. 애초에는 경력이 부족한 이들을 보조인력으로 삼으려 했으나 교수인력의 부족문제 해소와 동시에 대학 풍토의 쇄신을 위해 교수진으로 전격 합류시켰던 것이다[23].
또 다른 특이한 점은 부학장이 소련계 한인으로 교체된 것이었다. 북한의 주요 기관에 소련에서 파견된 사람들을 대거 부책임자로 등용하는 당시의 추세와 연관된 조치였다. 이는 북한에 선진 소련의 체제와 경험을 빠르게 도입하여 적용하려는 의도에서였다(신효숙, 1999: 175-180). 부학장 박덕환은 함북 청진 출신으로 소련의 대학에서 사범학을 전공하고 중등학교 교원으로 활동하던 사람이었다. 그는 북한으로 온 후 김일성대학과 중앙의 교육국에서 잠시 근무하다가 함흥의대로 파견되었다(함흥의과대학, 1947: (박덕환) 교원리력서). 그런데 의학 교육기관에서는 소련계 한인의 부학장 임명이 의도한 효과를 충분히 거두기는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임용된 지 얼마 안돼 의사 출신의 내국인 부학장을 적극 물색했던 것을 그 근거로 들 수 있다[24]. 아무리 소련에서 고등교육을 받고 오래 생활을 했더라도 의사 경력이 없기에 보건 의료 행정 및 의학교육에 도움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전공별 분포를 보면 기초와 임상분야가 각각 5명과 14명이었다. 여전히 전공 교수인력이 크게 부족한 상태였다. 기초나 임상에서 아직도 전임 교원을 채우지 못한 전공분야가 다수 있었다. 기초의 생리학, 병리학, 세균학, 의화학, 임상의 이비인후과는 교수인력이 한명도 없었다. 설령 교원을 확보한 분야라 해도 그 인원은 크게 부족한 실정이었다. 그렇다 보니 이 시기에 소련의 대학 제도를 도입해 시작된 강좌(까페뜨라)는 3개의 분야(해부학, 내과, 외과)에 불과했다. 강좌의 책임자로는 학력이 뛰어난 박사 학위자 혹은 그에 준하는 연구경력을 가진 사람들이 임명받았다. 당시 강좌장 내신을 위한 참고자료는 이들이 그간 발표한 연구논문이 주되게 제시되었다(함흥의대, 1947: 강좌장 내신에 관한 참고문서 송부의 건)[25]. 이 강좌제는 한 명의 권위적 교수를 책임자로 해서 동일한 전공자들이 다수 참여하는 학문집단을 구성하는 것이었다. 특정 전공분야에서 교육과 연구를 이끌 하나의 강좌를 구성하려면 최소한 교수-조교수-조수의 인적 체계를 갖추어야 했다.
이들의 소속 정당은 로동당 10명(남로당 2명 포함), 민주당 1명, 무소속 8명으로 로동당 소속의 사람들이 크게 늘어 절반을 넘어섰다. 이 시기에 정치적 주도권을 쥔 로동당이 당원을 대대적으로 확장하는 조치를 취함에 따라(이주철, 2008: 59-63, 67-70) 많은 사람들이 새로이 로동당에 가입했다. 그렇다 보니 로동당 소속이더라도 교원 심사에서 비진보적이라는 판정을 받은 사람들이 일부 있었다. 한편, 출신학교는 대학 7명, 전문학교 12명이었고 그 가운데 박사학위자는 3명(최명학, 주민순, 박준)이었다. 교원들의 학력은 새로운 교체가 일어났음에도 이전과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학력이 비교적 우수한 일부의 사람들을 신임 교원으로 충원했으나 그와 비슷한 사람들이 도중에 물러났던 탓이다. 전반적으로 볼 때 의학분야 교원들의 사상성은 강화되었으나 전문성은 그다지 개선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 시기에 교수 부족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몇 가지 조치를 적극 취했던 것은 사실이다. 가장 기본적으로는 의사들을 정치사상적으로 교화시켜 북한체제에 협력하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학력 수준이 높고 사회 경험이 많은 의사들을 단기간에 바꾸는 것은 쉽지 않았다. 이 때문에 북한에서는 젊은 세대의 의사들을 정치사상적으로 교양하는 일에 더 치중했다. 이들이 기성 세대의 의사들보다는 수월하게 개조될 것이라 여겼던 까닭이다. 아울러 북한에서 의사들을 주요 국영 의료기관으로 끌어들이는 다른 방안의 하나는 상당 수준의 보수를 보장해주는 것이었다. 당시 함흥의대를 보면 교원의 봉급은 1,800원으로 사무직원의 약 2배에 달했다(함흥의대, 1947: 함흥의과대학 직제 및 봉급 규정의 건)[26].
이러한 조치에도 교수진 확보는 쉽지 않았다. 교원 부족으로 “현하 수업상 지장이 심대”할 정도였다(함흥의대, 1947: 사무 타합 사항). 무엇보다 당시 북한에 자격을 갖춘 의학분야의 교수인력이 많지 않았던 데다가 많은 의사들이 심하게 동요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산가 집단으로서 의사들은 토지개혁을 필두로 중요 산업 국유화, 반대세력 제거, 종교활동 제약 등의 조치로 신분의 위협과 생활의 불안을 느끼고 있었다. 더 직접적으로는 중요 산업 국유화에 편승하여 일어난 개인 병원의 인민병원으로의 전환 움직임은 많은 의사들의 존립을 위태롭게 했다. 이러한 사정으로 북한체제에 협력하는 것을 꺼리거나 거부하는 의사들이 적지 않았고 그 일부는 서둘러 월남하기도 했다(홍순원, 1989: 440-444: 393; 황상익·김수연, 2007: 59-60; 허윤정·조영수, 2014: 261)[27].
4. 확대와 공존: 실무 중시
남한에 대응해 북한에서도 독자적인 정부 수립을 위한 움직임이 일어났다.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를 필두로 헌법을 제정하고 내각을 결성함으로써 1948년 9월 북한 정부도 공식 출범했다. 김일성을 수반으로 하는 내각은 3개의 위원회, 20개의 성으로 구성되었다. 주요 요직에는 로동당 인사들이 주축을 이룬 가운데 남한 출신의 진보적 월북 인사들을 포함한 동조적인 여러 정파의 인사들이 등용되었다. 그 하나로 보건의료를 담당하는 보건성이 출범했고 책임자는 경성대학 의학부 교수를 역임한 월북 인사 리병남[28,]이 임용되었다(기광서, 2011: 354-361). 보건성은 의무국과 방역국, 의약품생산관리처와 의약품관처, 그리고 계획부, 자재부, 약무부, 수의부, 교육부 등으로 구성되었고 직원은 97명으로 늘어났다(김진혁, 2014: 267). 해방 전에 없던 위생시험소, 위생검열원, 산업의학연구소, 약품연구소, 전염병연구소, 전염병원, 결핵병원, 모성유아상담소, 구급소, 간이산원, 휴양소 등이 그 산하에 갖추어졌다(리병남, 1949: 8-15).
이 시기에는 이미 인민민주주의적 보건의료체제를 확립해가고 있었다. 세부적으로는 인민들 사이에 널리 퍼져있는 전염병을 줄이고 국영 의료기관을 확대하며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무상으로 치료하는 등에 중점을 두었다. 그 중에 의료기관은 사립 형태를 억제하고 일제 소유 혹은 사립 병원을 국영으로 전환하거나 모금을 통해 병원을 신설해 국가 소유의 인민병원을 대폭 늘리는 조치를 취했다. 아울러 이에 소요되는 의료인력을 확보하기 위해 장기적으로는 의학 고등교육을 확대하고 단기적으로는 의학강습소의 설치와 하급 의료 인력의 재교육을 추진했다.
이때부터는 보건성이 의학 고등교육사업을 교육성으로부터 이관받아 직접 담당하게 되었다(리병남, 1949: 12)[29,]. 그런데 보건성이 추진하는 보건의료사업은 여전히 호된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었다. 1948년 3월 김일성은 <보건위생사업을 개선 강화하기 위한 몇 가지 과업>을 제기하며 “지난 기간 보건국 사업에서는 일정한 성과가 있은 반면에 반드시 시정하지 않으면 안될 결함도 적지 않게 발로”되었다고 주장했다. 그 배경에는 보건의료 전문인력의 부족 문제가 중요하게 존재하고 있었다. “과거의 의사들이 뽐내는 것도 의사가 부족한 사정과 적지 않게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에 대한 대책으로 사상성과 전문성을 동시에 갖춘 진정한 “인민의 의사”를 대량 확보하는 것이 제시되었다(김일성, 1979c; 홍순원, 1989: 431).
북한은 정부 수립을 앞두고 1948년 7월에 <북조선 고등교육사업 개선에 관한 결정서>를 발표했다. 고등교육 지도 기관으로 교육국 내에 고등교육원을 설치하고 김일성종합대학의 분리를 포함한 고등교육에 관한 여러 개선 조치를 담았다. 함흥의대와 관련된 사항으로는 대학의 수업년한은 4년으로 하되 의학부는 5년으로 하며 신입생 정원은 150명으로 정해졌다. 산업부문 사업을 기술적으로 지원하고 교수들의 학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과학연구원을 설치하고 연구사업에 종사하는 교수들에게는 봉급의 50%를 가산하여 우대하는 조치를 취하기로 했다. 전공별로 학과 까페뜨라를 확대하고 교수인력과 연구 설비를 적극 확충하며 학위와 학직 제도도 새롭게 제정하여 운영하기로 했다. 학장을 포함한 대학 간부와 까페뜨라 소속 그리고 학위 보유 교수들의 봉급을 대폭 올려주는 조치도 담았다[30,]. 그 일환으로 함흥의대 학장 최명학이 김일성종합대학 의학부의 장기려와 함께 의학분야에서는 처음으로 의학박사 학위와 교수직을 받았다(북조선인민위원회, 1948).
이에 발맞추어 함흥의대에서도 새로운 교수인력을 대대적으로 충원하기 위해 힘썼다. 당시 의대 교수인력의 풀은 여전히 나아지지 못했다[31]. 의사들이 부족한 상황에서 우수한 교수인력의 상당수가 월남을 했고 남북 분단으로 남한 의사들의 월북은 어려워졌다. 더구나 의학분야의 우수한 교수인력이 김일성종합대학 의학부에 집중되는 상황에서 이웃에 위치한 함경북도에 청진의과대학이 1948년 9월 공식 출범함에 따라 유치 대상자들은 더 줄어들었다. 또한 의학전문학교가 곳곳에 세워져 6개로 늘어남으로써 교수인력 수급을 둘러싼 지역 간의 경쟁은 심화되었다. 결국 의학 고등교육기관에서 교수인력을 적절히 충원하기 위해서는 교원 자격을 바꾸어 그 대상 범위를 달리하거나 넓히는 수밖에 없었다.
교원 심사에서 보듯 그동안 의사들의 전문성은 주로 학력에 중점이 두어져 있었다. 대학 졸업 혹은 박사학위 취득을 대학 교원의 중요한 조건으로 삼았다. 함흥의대는 전문학교에서 대학으로 승격한 곳이므로 교원의 자격으로 전문학교가 아닌 대학 졸업 이상의 학력을 요구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던 중 북한에서는 새로운 정치체제를 갖춘 정부의 출범을 계기로 이전에 일본이나 다른 제국주의 국가에서 받은 학위를 전면 무효화하는 조치를 취했다. 그동안 의사들이 가지고 있던 학력의 가치가 떨어지고 그 차이가 무시되거나 줄어드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1948년 10월에 제정된 새로운 학위 및 학직에 따르면 학위는 박사와 학사[32,] 두 단계로 나누고 이는 원칙적으로 “학위논문 (심사)에 통과한 자”에게 수여되지만 학위논문이 없어도 “과학사업에 특히 공로가 많은 자”도 받을 수 있었다. 학직은 교수, 부교수, 조교수로 구분하며 각각 박사학위를 가진 자, 학사학위를 가진 자, 대학 졸업 후 대학이나 연구소에서 교육 또는 연구사업을 담당하고 있는 자에게 수여하는 것으로 정했다. 하지만 “특별한 경우에 한하여 학위가 없지만 대학을 졸업한 자로서 사업경험이 많고 고등 과학기술을 소유한 자”에게도 교수 또는 부교수 학직을 부여할 수 있게 했다(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각, 1948). 말하자면, 의학의 경우 보건의료 분야에서 공로가 많거나 의료경험과 기술이 우수한 사람들에게도 대학의 교수인력으로 선발될 기회가 열리게 되었던 것이다.
북한정권에서 내세우고 있던 의사의 전형은 ‘국가와 인민을 위해 복무하는 진보적 의사’였다. 이미 1947년 5월 김일성의 연설에서부터 이러한 표현이 등장을 했다. 그렇지만 대학에서 교수인력을 충원할 때 이 의사상을 당장 중요하게 고려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교원 심사에서 이 점을 주목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이후의 신임교원 채용에서도 중요 사항으로 고려하지 않았다. 그런데 학위 및 학직 제도가 제정되면서 북한에서 정립해가고 있던 의사상이 교수인력 임용에서도 중요하게 반영되기 시작했다. 학력이나 연구경력이 부족하더라도 국가와 인민의 보건의료에 기여할 기술과 경험이 있다면 그 자체로도 충분한 가치를 인정받게 되었다[33].
함흥의대에서도 새로 제정된 규정에 따라 1948년 11월에 교원들을 대상으로 학직 사정작업이 벌어졌다(함흥의과대학, 1948: 함흥의과대학 관계 학직 수여 내신 서류 전달에 관하여). 이는 대학의 행정과 교육연구를 주도하는 대학평의회에서 주관했다. 회의에는 학장을 비롯한 주요 간부진, 대학 당조직, 사회단체 등이 참여했는데 참석자 10명 가운데 8명이 대학 소속이고 다른 2명은 외부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학직 사정에 요구되는 주요 참고자료로는 대상자들의 이력서, 자서전, 평정서가 이용되었다. 물론 최종 결정은 내각의 보건성을 거쳐 국가학위수여위원회에서 내렸다.
대학 교원의 학직은 강좌장 교수, 강좌장 부교수, 부교수, 조교수로 구분되었다[34]. 이때 강사 제도는 공식 직급에서 사라졌다. 세부적으로는 강좌장 교수 10(교양 2 포함)명, 강좌장 부교수 7(1)명, 부교수 3(2)명, 조교수 15(4)명으로 내신안을 만들었다. 이렇게 학직을 부여한 이유에 대해 학직별로 다소 차이는 있으나 중요하게는 “과학연구에 공로”, “민주학원 건설에 공로”가 있다는 점을 들었다. 전반적으로 보면 강좌장에 교수만이 아니라 부교수들까지 임용하여 그 인원이 17(3)명으로 전체의 절반에 이르렀다. 또한 새로운 세대의 교수인력을 확보하기 위해 젊은 사람들을 조교수로 대거 임용한 것도 또 다른 특징의 하나였다.
1948년 12월 당시 함흥의대의 교수진은 총 36(9)명으로 이전에 비해 크게 늘어났다. 그 사이에 교원 심사에서 부동으로 판정을 받은 일부를 포함한 8(2)명이 그만두었지만 그보다 훨씬 많은 17(3)명을 새로이 충원한 결과였다. 특히 의학분야의 교수인력이 8명이나 더 늘어났다[35,]. 나이든 사람들보다는 젊은 세대 위주로 교원 충원이 이루어졌다. 함흥의대의 간부진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진보적 로동당 당원이자 학력이 우수한 사람들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기술과 정치 겸비의 간부”, “앞날이 촉망되는 민족간부”로 여겨졌다(함흥의과대학, 1948a; 1948b; 1948c). 보직 교원들은 간판급 인물로, 일반 교원들은 보통의 인물로 구성하는 이전의 전략이 그대로 이어졌다. 이로써 함흥의대는 대학으로서의 교수진을 어느 정도 갖추게 되었다.
부학장은 소련계 한인이 물러나고[36,] 량철환이 임명되었다. 그는 함남 리원 태생으로 경성제국대학을 졸업하고 같은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해방 후 고향에서 개업을 하다가 도립 인민병원 원장으로 활동하던 중 함흥의대로 초빙되었다. 일찍이 조선신민당에 가입하여 이후 로동당 당원이 되었고 군 인민위원회에도 참여하는 등 정치적 활동에도 열성적이었다. 그를 평가한 평정서를 보면 “자연과학자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정치에 대한 무관심성을 철저히 타파하고, 사회과학에 대한 비교적 앙양된 리론을 가지고” 있었다(함흥의과대학, 1948a: (량철환) 리력서, 자서전, 평정서). 이렇게 그는 사상적으로나 학문적으로 우수성을 인정받아 함흥의대 부학장의 중책을 맡게 되었다.
의학계 교원들의 전공 분포를 보면 기초와 임상분야가 각각 8명과 19명이었다. 교원의 증원으로 대부분의 전공분야에서 교수인력을 추가로 확보할 수 있었다. 물론 생리학과 피부비뇨기과는 여전히 교원을 충원하지 못한 상태였다. 전공별 인원은 기초의 경우 분야당 한두 명의 교원이 있었지만 특히 내과, 외과, 이비인후과와 같은 임상의 경우는 다수의 교원을 확보했다. 전공별로 교수인력을 빠지지 않고 충원하고자 했고 수요가 많은 몇몇 임상분야는 비교적 많은 교수인력을 갖추려고 했다.
이 시기부터는 강좌(까페뜨라)를 많이 개설하고 그 책임자를 대거 임명했다. 거의 모든 분야에 강좌를 개설하고 임상의 경우에는 그 개수를 최대한 늘리려고 했다. 교원이 충원된 12개의 전체 의학계 분야 중 9개에서 강좌가 개설되었고 임상의 경우는 내과 3개, 이비인후과 3개, 외과 2개의 강좌가 만들어졌다. 전체적으로 강좌장은 15명에 달했다. 의대의 교육연구체계를 서둘러 갖추기 위해서였다. 그렇다 보니 강좌장에는 이전과 달리 학력과 경력이 떨어지는 인물들이 다수 발탁되었다. 이들 가운데 다년의 연구경력[37]을 갖춘 대학 출신 혹은 박사 학위자는 6명 뿐이었다. 전문학교 출신까지 포함해도 그 수는 9명을 넘지 않았다. 대신에 나머지 사람들은 상당 기간 병원에서 근무한 경험을 가진 실무 경력자들이라는 특징을 지녔다.
의학분야 교원들의 출신학교를 보면 대학 8명과 전문학교 19명으로 오히려 전문학교 출신들이 크게 증가했다. 특히 신임 교원들 가운데 전문학교 학력자들이 대폭 늘어난 결과였다. 이들의 경우는 14명 중에 11명이 전문학교 출신들이었다. 출신학교별로는 북한의 다른 의대들과는 달리 학장의 모교인 세브란스의전 출신이 7명으로 가장 많았다[38]. 박사 학위자는 4명(최명학, 량철환, 조계성, 주민순)이었다. 출신학교의 지역 분포는 국내 21명, 일본 6명으로 국내 의학교 출신들이 주류를 형성했다.
학직 내신에서 보듯 기존 교원들은 함흥의대에서의 활동 공로를 크게 인정받았다. 즉, 전문학교 출신이더라도 그동안 의대에서 근무한 경력이 중요하게 고려된 것이었다. 그 대신에 신임 교원들은 대학에서 활동한 경력이 없다보니 다른 경력을 필요로 했다. 그 가운데는 특히 새로운 형태로 떠오른 국가 소유의 병원에서 활동한 내역이 주목을 끌었다.
신임 교원들의 이력을 구체적으로 보면 대부분이 지역의 국영병원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사람들이었다. 신임 교원 14명의 직전 근무처는 인민병원 7명, 산업부속병원 4명, 사립병원 3명이었다. 인민병원이나 산업부속병원의 경우 이들의 직급은 원장 8명으로 상당수가 책임자의 위치에 있던 인물들이었다. 이들 중에는 다른 도에서 차출되어 함흥의대로 옮겨온 사람들도 3명 있었다. 중앙의 소환 조치로 가까이는 함경북도, 멀리는 평안북도, 황해도에서 함흥의대로 왔다. 이들이 그동안 쌓아온 실무 경력은 국가와 인민을 위해 복무한 활동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으며 정당화되었다. 평양의학대학의 사례에서 보듯 교원들 중에는 다수의 사람들이 보건의료 활동에 열성적이었다는 이유로 표창도 받았다(평양의학대학, 1948)[39].
이들 가운데는 연구성과를 거두어 학술대회에서 발표하는 기회를 갖기도 했다. 예로서 외과 강좌장 주민순은 1947년 12월 개최된 북조선 종합의학회에서 “폐결핵의 외과적 요법”을 보고했다(함흥의과대학, 1948a: (주민순) 자서전). 1948년 5월부터 12월까지 전개된 치료기관 경쟁운동에서 우수 성과를 거두어 함흥의대 종합진료소는 모범직장으로, 주민순 외과 과장은 모범일꾼으로 선정되었다(보건성, 1949: 75).
정당 소속은 이전에 비해 로동당의 비율이 줄고 오히려 무소속의 비율이 약간 더 늘어났다. 로동당 13명(남로당 2명 포함), 민주당 2명, 무소속 12명이었다. 정부 수립으로 사회체제가 안정됨에 따라 로동당 가입 여부가 교원 임용에서 덜 중요하게 고려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평정서를 보면 정치적 입장이 애매하다거나 소부르조아적 근성을 지니고 있다거나 사상 무장이 희박하다는 등의 부정적 평가를 받은 사람들이 여럿 있었다. 심지어는 형제 중에 토지를 몰수당하고 월남한 경우도 있었다. 반면에 로동당 소속으로 노동자나 농민, 학생들과 사업을 같이 하는 등 정치적 활동에 열성적인 사람들도 있었다. 이들은 함흥의대에서 정치사상사업을 이끌 교직원세포위원장, 병원세포위원장, 직맹위원장의 중책을 맡았다. 이처럼 함흥의대의 교수진은 정부의 노선과 시책에 동조적인 태도를 지녔지만 정치사상적으로 균질적이지는 않았다[40].
소련으로 연수를 다녀온 사람들은 중요 자리에 배치되었다. 박치호는 젊은 나이에 부속병원 원장으로 전격 발탁되었고 리유호는 함흥의대 종합진료소 소장[41,]이자 로동당 함흥시당 리론간부의 직책을 맡았다. 박주상은 함흥의대 부속병원 구급소 소장으로 활동했다. 하지만 그 사이에 2명, 곧이어 추가로 1명이 다른 곳으로 이직을 했다. 특히 김배준은 도쿄제대 의학부 출신의 초기 로동당 당원으로서 그 우수성을 인정받아 내각 보건성 교육부장으로 자리를 옮겼다[42]. 그만큼 우수한 진보적 의료인력을 필요로 하는 곳이 많았다. 따라서 애초 의도와는 다르게 함흥의대에서 소련 연수 출신의 교원들이 차지하는 위상과 역할은 크게 줄어들었다.
이 시기의 다른 특징 하나는 교양 중에 인문사회의 교수인력이 늘어난 점이었다. 과목은 사회과학, 정치경제학, 철학, 로어, 체육 등으로 구성되었다. 특히 교양분야에서는 당성이 투철한 사람, 로어 실력이 우수한 사람 등이 신임 교원으로 보강되었다. 대학에서 로동당의 주도권 유지와 로어 교육의 강화와 같은 시대 변화에 따른 조치였다. 예를 들어, 황규준은 일본 와세다대학 전문부를 나온 젊은 세대로서 로동당중앙당학교를 수료한 진보적 신진 인사였다. 말하자면 당원 간부로서 체계적인 교육을 받고 함흥의대 교원으로 배치된 것이었다. 또한 리봉호는 소련의 교원대학을 갓 졸업한 사람으로서 필수 외국어로 자리잡은 로어를 담당했다. 나이가 어리고 경력이 없었음에도 특별 대우를 받아 강좌장의 직위를 얻었다. 로어가 독립적인 강좌로 개설될 정도로 강화된 점은 당시 대학이 변화하는 방향의 일면을 보여준다.
5. 결론
1946년부터 1948년 말까지는 북한의 정치사회가 급변한 가운데 보건의료체제가 확장되며 사회주의적 형태로 변모해 가던 시기였다. 이때 북한이 직면한 의료분야의 주요 과제 중 하나는 사상성과 전문성을 겸비한 의사들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특히 새로운 후대의 의사들을 양성할 의학 고등교육기관의 확대로 이러한 의사들에 대한 필요는 더 늘어났다.
그런데 당시 북한은 의료인력 자체가 크게 부족했다. 내부적으로 의사들에 대한 수요가 크게 증가했을 뿐만 아니라 상당수의 의사들이 북한의 개혁 조치에 불만을 품고 남한으로 내려갔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에 자리잡은 개업의 위주의 의료활동을 위협하는 국영병원 확대와 의료수가 제한, 한편으로는 의사들의 물질적 기반을 와해시키는 토지개혁과 중요 산업국유화 등이 취해진 결과였다. 이로써 1946년 북한 전체 의사 1천3백명 중에 그 절반에 가까운 약 6백명이 1948년 정부 수립 이전에 월남을 했다. 북한으로서는 예상치 못한 아주 심각한 사태였다.
이 때문에 북한은 의사들을 양성할 의학교육을 조기에 더 확대하고자 했다. 1948년까지 의과대학 3개와 의학전문학교 6개 등을 설치한 것은 이러한 조치에 따른 결과였다. 전문학교에서 대학으로 1946년 10월에 승격한 함흥의과대학은 그 중의 하나였다. 그런데 의학 고등교육기관의 확대는 서로 간에 인력유치 경쟁을 유발해 교수인력의 부족을 더 악화시켰다. 더구나 대학 교수는 새로운 의사 양성을 책임진 지도급 인사로서 전문성과 더불어 사상성까지 요구됨에 따라 이 자격조건을 갖춘 대상은 크게 줄어들었다.
그렇다면, 함흥의대는 의사들이 크게 부족한 상황에서 교수인력을 어떻게 확보해 갔을까? 어찌 보면 심사 과정을 거쳐 자격을 갖춘 교수인력을 확보했다기보다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시기별로 어떻게 다르게 교수인력으로 만들어 갔을까? 교수인력의 심사는 1946년 4월, 1947년 4월, 1948년 12월 세 번에 걸쳐 이루어졌다. 교수인력으로서의 자격은 정치사상적 의식 수준과 의학기술적 전문능력에 중점이 두어졌다.
첫 번째 시기는 북한에서 다양한 부문에서 개혁적 조치가 시작된 때로 여전히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지역의 정당과 사회단체의 대표들로 구성된 교육심사위원회가 주도했다. 이때는 북한에서 전개한 식민지 잔재 청산의 표적이 된 친일파나 주요 개혁 조치에 저항하는 반동세력을 색출해 제거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졌다. 그리고 교수인력의 전문성은 학력과 연구경력이 중요하게 고려되었다. 물론 학교의 재건에 집중한 전문학교 시기이다 보니 교수인력의 전문적 수준 못지않게 양적인 확보도 중요했다. 이로써 함흥의전은 조기에 교수인력을 많이 확보하되 북한체제에 위협이 되는 소수의 인사들에 한해서는 몰아내는 조치를 취했다. 학교는 여전히 연공서열에 따라 중진 교원들이 이끄는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두 번째 시기는 국가차원에서 정치사상 의식을 강화하는 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됨에 따라 중앙의 주도로 대학 교원들에 대한 검열사업이 실시되었다. 로동당 함남도당, 함남도 교육부, 중앙 교육국의 간부로 구성된 교원심사위원회에 의해 함흥의대 교원들의 정치사상, 사업성적, 발전성을 전반적으로 심사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부적격 판정을 받았고 소수의 사람들만이 검열을 통과했다. 대학 교원으로서 로동당 가입여부를 포함한 사상성과 함께 출신학교와 연구경력 등 학력에 중점을 둔 전문성까지 엄격하게 심사한 결과였다. 그렇지만 현실적으로 이들을 대체할 우수한 교수인력을 확보할 수 없었기에 그 상당수는 구제를 받았다. 함흥의대 교수진은 여전히 이전의 규모를 벗어나지 못한 채 크게 부족한 상태였다. 대신에 이때부터는 나이와 경력에 관계없이 전문성과 더불어 사상성을 갖춘 교원들이 전면에 나서서 대학을 이끌게 되었다.
세 번째 시기는 북한 정부가 수립되어 사회체제가 안정화되어 가던 때로 대학 자체적으로 교원 심사가 이루어졌다. 학장을 비롯한 보직자들이 중심이 된 대학평의회가 교원 평가를 맡았다. 이때는 북한의 개혁 조치가 일단락된 시기로 다소 포용적인 방식으로 추진되었다. 마침 당시는 사업활동 경험과 보유 기술의 가치를 인정해주는 학위 및 학직 제도가 마련되고 이는 국가와 인민을 위해 복무하는 새로운 의사상과 잘 부합했다. 그러므로 사상성이 부족해도 북한체제에 협력적이면, 전문성이 떨어져도 활동 경력이 있으면 교수 자격을 갖춘 것으로 인정받았다. 이에 힘입어 함흥의대는 국영병원에서 실무 경험을 쌓은 의사들을 교수인력으로 대거 충원함으로써 자리를 잡게 되었으나 이들의 학문적, 사상적 수준은 균질적이지 않았다. 그 결과 함흥의대는 의학교육의 수준 향상에 여전히 어려움을 겪었고 그 교수진 일부가 체제가 이완된 전쟁 시기에 이탈하는 것을 막기 어려웠다.
이렇게 함흥의대 교수인력의 조건으로 내세운 사상성과 전문성은 정치적 이상과 사회적 현실 속에서 요동치며 만들어져 갔다. 그 전반적인 경향은 시기별로 학력->사상->실무를 상대적으로 중시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는 북한이 지향하는 새로운 의사상의 정립과 조응했다. 이렇게 해방 직후 북한의 의과대학 교수진은 함흥의대 사례에서 보듯 의료인력, 교육정책, 정치체제 등이 상호 연계되며 구성되어 나갔던 것이다.
Notes
통계자료에 따르면 보건국장 윤기녕이 1946년에 북한의 의사 수가 1천 7~8백명이라고 밝힌 것은(황상익·김수연, 2007: 45) 의사 1,305명과 한지의사 534명을 합친 것으로 보인다.
북한에서 발간한 통계자료는 출간 연도에 따라 의사 수(치과의사 미포함)를 다르게 기록하고 있다. 1946년 통계자료는 1946년 1,305명, 1947년 통계자료는 1946년 1,701명, 1947년 1,793명, 1948년 통계자료는 1947년 737명, 1948년 1,089명으로 집계했다. 그런데 1947년 통계자료는 한지의사를, 1948년 통계자료는 1948년의 경우 한지의사 중에서 자격시험을 거쳐 의사가 된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으므로 1946년 1,305명과 1947년 737명이 비교적 정확한 수치라고 말할 수 있다. 이로부터 월남한 의사를 추산해 보면 이전 시기를 포함하지 않더라도 1946년과 1947년 사이에 6백명 가까이 이르렀던 것으로 보인다.
함흥의대와 관련된 자료는 크게 두 부류로 구분된다. 하나는 학교 측의 교원 내신 발령철이고, 다른 하나는 개인 교원들의 자료철이다. 이들 자료와 북한 대학, 『인민보건』, 『내각공보』, 『법령공보』는 필자가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에서, 그밖의 북한 자료는 통일부 북한자료센터, 국사편찬위원회 『북한관계사료집』 등에서 얻은 것임을 미리 밝힌다.
보건국은 윤기녕을 국장으로 해서 1945년 11월 행정10국의 하나로 설치된 기구였으나(기광서, 2011: 339-341) 이때는 활동을 활발히 하지 못했다. 윤기녕은 서울 태생으로 경성약학전문학교와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후 경성제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의사로 민주당 소속이었다. 이후 평양의학대학 교원으로 재직하다가 나중에 월남했다(평양의학대학, 1948: (윤기녕) 리력서).
「북조선 주재 소련민정청 사업 결산보고서(1945년 8월-1948년 11월. No. 129-130」를 황상익·김수연의 논문(2007)과 김진혁의 논문(2014)에서 재인용. 보건국에 대해서는 이 자료를 참조했다.
하지만 허윤정·손영수의 논문(2014)은 1948년 북한정부 수립 직후에 의학 고등교육사업이 교육성에서 보건성으로 이관된 사실은 주목하지 않고 있다.
신의주는 관서의학원, 청진은 관북대학 의학원 설립을 추진했으나 중앙의 반대로 각각 신의주의학전문학교와 청진의학전문학교로 만들어졌다.
최명학의 이력서에는 로동당 소속으로 적혀있으나 이보다 이른 1946년 4월 그의 조사서에는 조선신민당 소속으로 나와 있다(함흥의학전문학교, 1946: (최명학) 조사서). 이는 조선신민당이 조선공산당과 합쳐져 북조선로동당으로 바뀌면서 소급 적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 함흥의전 교원들에 대해서는 이들의 이력서가 들어있는 이 자료철을 이용해 기술한 것임을 밝힌다.
함흥의대의 교수진은 당시 김일성종합대학 의학부에 비해 학력 및 경력이 전반적으로 떨어지는 편이었다.
진보적 민주주의란 당시 북한에서 공식적으로 내걸고 있던 사상이념을 지칭하는 것으로 실제로는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개혁의 의미를 담고 있었다(신효숙, 1999: 170-171).
리동영은 평남 평양 태생으로 일본 메이지대학 중퇴와 경성의학전문학교 졸업 학력을 가진 개업의로 북조선적십자사 위원장과 민주당 중앙위원 및 부당수였다. 그는 1946년 초 민주당 개편 과정에서 조만식 그룹의 고립에 앞장섬으로써 중요 인물로 떠올랐다(황상익·김수연, 2007: 48; 기광서, 2011: 352-353; 김선호, 2006: 296).
다른 학교들의 교원 강습회를 보면 마르크스-레닌주의 기본 외에 정치경제학, 변증법적 유물론 등의 강좌가 열렸다(신효숙, 1999: 186-188).
함흥의전이 함흥의대로 승격된 시기는 연구논문마다 다르게 말하고 있으나 여기서는 북한에서 공식 발간한 자료에서 밝힌 1946년 10월 15일이 맞을 것으로 판단했다(김창호, 1990: 200).
이 지역에는 이듬해인 1947년 9월에 북한 최초의 공대인 흥남공업대학이 함흥의대에 이어 두 번째 대학으로 세워졌다.
1947년 함흥의과대학 교원 심사에 대해서는 그에 관한 다양한 서류가 들어있는 이 자료철을 이용해 서술한 것임을 밝힌다.
함흥의대의 전체 교원은 27명이나 학장과 부학장은 심사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성대파는 요단으로 분류된 인물의 출신 학교인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동문들을 일컫는 말이다.
10만평을 몰수당한 대지주 출신이라도(함흥의과대학, 1948a: (주수영) 자서전) 진보적 사상과 우수한 학력을 가진 교원은 심사에서 가장 좋은 평가를 받기도 했다.
함흥의대 의학분야 교수진 중 그만둔 사람들로는 생리학 최정헌, 세균학 리명섭, 내과 리홍근, 박치호(소련연수), 김배준(소련연수), 외과 리주걸, 소아과 윤함복, 피부비뇨기과 김을성, 리면필 등이, 새로이 임명된 사람들로는 해부학 양황섭, 위생학 김경집, 마흑룡, 내과 주수영, 원귀룡, 주창준, 손영수, 외과 리혜영, 피부비뇨기과 박준 등이 있었다.
교수인력의 부족을 계속해서 겪은 분야의 하나인 세균학 전공자를 확보하려고 중앙의 교육국이 신의주인민병원 의사의 소환을 요청했으나(북조인위 교육국, 1947: 보건기술자 소환 의뢰의 건) 실현되지 못했다.
1949년 12월에 제정된 &대학에 관한 규정>에 따르면 학장은 “대학의 학업조직과 학자양성을 위한 정치교양 및 과학연구사업을 지도”하는 것으로 그 역할이 규정되었다(정경모·최달곤 책임편집, 1990: 89-94).
교원 심사 직후의 임용안을 보면 의료경력이 짧고 나이가 젊은 사람들의 경우 조수(助手) 직급이 부여되었지만(함흥의대, 1947: 교직원 임용 내신에 관한 건) 실제로는 의학분야 5명 모두를 전임 교원으로 임용했다.
박덕환을 대체할 인물로 세브란스의전 출신의 의학박사로 청진의학전문학교에 재직중인 리상룡을 영입하려 했으나 그가 김일성종합대학 의학부 부학부장으로 발탁됨에 따라 이 시도는 무산되었다(함흥의대, 1947: 함흥의과대학 교원 심사보고에 관한 건; 평양의학대학, 1948: (리상룡) 리력서).
이들 외에 박준(피부비뇨기과)과 리일교(안과)도 강좌장 후보로 추천되었으나 이들은 임명받지 못했다.
이외에 함흥의대의 직급별 봉급은 학장 2,800원, 부학장 2,700원, 강좌장 2,600원, 연구원장 2,500원, 부장 2,300원으로 일반 교원에 비해 월등히 많았다.
평양의학대학을 연구한 박형우의 논문(2002)을 조사해보면 그동안 이곳에 재직한 적이 있는 의료분야의 전체 교원 123명(조수 및 연구원 포함) 중에 전쟁 시기까지 적어도 52명이 월남을 했고, 그에 비해 1948년 말까지 월북한 인사들은 10명이었다. 함흥의대의 경우 아직 제대로 밝혀져 있지 않지만 일부 교원들이 월남한 것은 확인할 수 있다. 한편, 중앙의 내무국에서는 남한으로 도주한 교원 명부를 제출하라는 공문을 교육국을 통해 내려보내기도 했다(북조인위 교육국, 1947: 남조선 도주 교원 명부 제출의 건).
리병남은 충남 천안 태생으로 경성제국대학 의학부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해방직후 경성대학 의학부 교수로 재직하면서 과학자동맹, 민주주의민족전선 등 좌익 계열의 사회단체에서 적극 활동하다가 1948년 4월 남북제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북한으로 올라갔다. 초기 북한에서는 김일성종합대학 의학부 교수로 근무했고 정부 수립과 동시에 보건성 책임자로 발탁되었다(박형우, 2002: 65; 황상익, 2004: 333-334).
의학전문학교는 1948년 3월, 의과대학은 1948년 10월까지 내각 지시로 그에 관한 업무가 교육성에서 보건성으로 이관되었다.
규정에 따르면 직위별 봉급은 총장 7,000원, 학장 6,000원, 부학장 5,000원, 까페뜨라장 박사교수 7,000원, 까페뜨라장 교수 5,000원, 까페뜨라 박사교수 6,000원, 까페뜨라 교수 4,500원, 까페뜨라장 학사부교수 4,000원, 까페뜨라장 부교수 3,500원, 까페뜨라 학사부 교수 3,500원, 까페뜨라 부교수 2,800원, 까페뜨라 학사조교수 2,500원, 까페뜨라 조교수 2,000원이었다. 대학 과학연구 및 교수사업에 3년 이상 종사했을 때는 기본봉급에 10%를 더 지불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1948년까지 북한에서는 자격시험을 치러 적어도 의사 109명, 펠셀 336명(助醫師) 등을 배출했으나(리병남, 1949: 12) 이들은 의대 교수인력과는 거리가 멀었다.
북한의 학사 학위는 박사 바로 아래의 단계로서 서방 국가의 학사가 아닌 석사 학위와 유사하다.
실제로 당시 교원들에 대한 평정서를 보면 “인민보건사업에 공헌”, “풍부한 경험과 기술 보유” 등을 내세워 그 우수성을 제시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강좌장이 되려면 교수 혹은 부교수의 학직을 가지고 있어야 했고 그 지위와 대우는 일반 교원에 비해 훨씬 좋았다.
함흥의대 의학분야 교수진 중 그만둔 사람들로는 위생학 마흑룡, 내과 손영수, 김기선, 소아과 김종하, 피부비뇨기과 박준, 치과 김익성 등이, 새로이 임명된 사람들로는 병리학 조계성, 세균학 리영구, 의화학 량철환, 내과 박치호, 한형재, 박재갑, 최상덕, 외과 함항연, 리계영, 소아과 공수범, 이비인후과 리명훈, 계훈홍, 리택선, 서봉섭 등이 있었다.
박덕환은 의학분야가 아닌 자신의 전공과 맞는 김일성종합대학 물리수학부 수학강좌로 자리를 옮겼다(북조선인민위원회, 1948).
다년간의 연구경력이란 1945년 경성제국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수여할 때 연구경력 3년 이상을 기준으로 삼은 것을 참조했다.
세브란스의전 다음으로 경성제대 의학부 5명, 평양의전 4명, 경성의전 3명의 순서로 출신 학교 분포를 보였다.
함흥의대 교원들의 이력서에는 표창 항목이 없어 그 사실을 알 수 없으나 평양의학대학의 경우는 잘 드러나 있다. 그 내역을 보면 다수의 교원들이 중앙이나 지역, 단체, 그리고 대학 등으로부터 표창장, 감사장, 상금 등을 받았다.
이러한 이유로 전쟁 시기에 이들 가운데 월남을 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평양의학대학의 경우 1948년 12월 당시 교원 91명(조수 및 연구원 포함) 중 이후에 월남한 사람들은 30명에 달했다(박형우, 2002: 80-87).
1950년 1월 제정된 <대학병원에 관한 규정>에 따르면 종합진료소는 의대의 교육 및 학술연구사업을 위해 설치된 기구였다(정경모·최달곤 책임편집, 1990: 388-389).
다른 2명인 김기선은 흥남중앙병원 원장으로, 박주상은 평양의학대학 연구원으로 소환되어 자리를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