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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J Med Hist > Volume 35(1); 2026 > Article
경성제국대학 신경정신과학교실에서의 정신분석학 연구의 전개: 일본 제국 정신의학의 맥락에서†

Abstract

This study examines the reception and eventual decline of psychoanalysis, which remained outside the psychiatric mainstream in prewar Japan, in the Department of Neuropsychiatry at Keijo Imperial University. It traces the scholarly formation of Kubo Kiyoji, who led the department, and the development of psychoanalytic research within the department. It focuses on the personal and intellectual networks of Japanese psychiatry and on Keijo Imperial University’s position within the academic hierarchy. Kubo encountered psychoanalysis through Eugen Bleuler, director of the Burghölzli psychiatric hospital, while studying in Zurich. This exposure provided him with an intellectual framework distinct from the German psychiatry tradition that was dominant in Japanese psychiatry. Consequently, the research output of the Department of Neuropsychiatry at Keijo Imperial University reflected Kubo’s interests. The department produced articles introducing psychoanalytic theory and clinical case reports through the early 1930s. At the same time, Kubo adopted psychoanalytic theory eclectically rather than embracing it in its entirety, similar to Bleuler, who had maintained a cautious distance from Freud since the mid-1910s. Furthermore, Japanese psychiatry was shaped by a hierarchical structure centered on Kure Shuzo, a professor at Tokyo Imperial University, within which psychoanalysis remained non-mainstream. Under these conditions, psychoanalytic research at Keijo Imperial University did not become a sustained departmental program and did not develop into sustained collaboration with Tohoku Imperial University, where psychoanalysis was actively pursued. Instead, the department’s research gradually shifted toward somatic therapies and other fields with more visible findings, a shift better suited to the department’s academic position. Consequently, the discontinuation of psychoanalytic research at Keijo Imperial University was not simply the result of a change in Kubo’s personal interests. Rather, it reflected the structural conditions under which Keijo, as a peripheral imperial university, had to concentrate its resources on research fields more favorable to securing academic prestige. By tracing this case, this study suggests that research in the medical faculty of Keijo Imperial University was affected not only by the personal and intellectual networks of medicine in the Japanese Empire, but also by Keijo’s position as a peripheral imperial university.

1. 머리말

전전(戰前) 일본 제국 정신의학계에서 정신분석학은 독일식 생물학 중심 정신의학이 지배적이었던 지적 환경 하에서 주변적 위치에 머물러 있었다. 정신분석학에 대한 임상 연구가 수행되었던 신경정신과학교실1)은 제국 전체에서 두 교실에 불과했다. 경성제국대학(이하 경성제대) 신경정신과학교실이 그 중 하나로서 1928년 개설 초기부터 정신분석학 연구를 수행했다는 점은 이례적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경성제대 신경정신과학교실의 연구 경향은 초대 주임교수 구보 기요지(久保喜代二, 1895–1977)의 학문적 배경과 관련지을 수 있다. 그는 유럽 유학 시기 취리히와 빈에서 정신분석학을 접했고, 귀국 이후 이를 임상 현장에 활용했다. 이는 주임교수 개인의 학문적 경험이 교실의 독자적 연구 방향 형성에 영향을 미쳤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1930년대 중반 이후 경성제대 신경정신과학교실은 점차 정신분석학과 거리를 두는 양상을 보였다. 정신분석학을 주제로 한 연구 성과는 더 이상 학술지에 게재되지 않았고, 1940년 정신분석학 관련 기고에서 구보는 과거 자신이 정신분석학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자신이 정신분석학자가 아님을 분명히 했다(久保喜代二, 1940: 2086). 이는 당시 도호쿠제대 신경정신과학교실에서 정신분석학 연구가 지속되고 있었던 상황과 대비된다.
선행연구들은 구보가 정신분석학에 관심을 가졌다는 점을 포착하고 교실에서 수행된 정신분석학 연구의 내용적 측면을 임상정신의학의 관점에서 살펴본 바 있다(鄭元龍, 1997; 민성길ㆍ이창호, 2016).2) 또한 정신분석학사 연구에서도 구보의 정신분석학 연구 이력이 몇 차례 검토되었다(西見奈子, 2019; 이정민, 2021).3) 하지만 그 연구가 가능했던, 그리고 지속되지 못했던 배경에 대한 분석은 지금까지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았다. 따라서 이 글은 경성제대 신경정신과학교실에서 정신분석학 연구가 어떠한 조건 속에서 전개되었으며, 왜 지속적인 연구 경향으로 자리 잡지 못했는지를 핵심 문제로 삼는다. 특히 이 문제를 고찰하기 위해 식민지에 위치한 제국대학이라는 경성제대의 공간적ㆍ제도적 조건에 주목하여, 제국 의학 지식 네트워크와 식민지 의료 현실이 교차하는 공간으로서 경성제대 의학부에서 이루어진 지식 생산의 특성을 분석의 중심에 두고자 한다.
경성제대 의학부에서의 지식 생산을 둘러싼 연구는 지속적으로 이루어져 왔다. 초기 연구들은 주로 일본 제국의 통치 전략과의 관계 속에서 의학자들의 학문 활동을 해석하는 경향이 강했으나(박순영, 2006; 김옥주, 2008), 비교적 최근의 연구들은 식민지에 위치한 제국대학이라는 공간적ㆍ제도적 조건과 제국적 지식 네트워크와의 상호 교류의 맥락에서 경성제대 연구자들이 지식 생산의 방향을 어떻게 형성해 갔는지에 대해 주목하고 있다. 예를 들어 정준영은 만주사변 이후 경성제대의 만몽(滿蒙) 연구 추진 과정을 분석하면서, 이를 식민지 내부에서 경성제대의 존재 의의를 재정립하려는 대학 차원의 시도와 대륙 연구를 둘러싼 제국적 학문 맥락 속에서 고찰했다(정준영, 2015). 그리고 박지영은 위생학ㆍ예방의학교실에서 수행된 인구통계학 연구를 분석하면서, 교실의 연구 방향이 주임교수 미즈시마의 미국 유학 경험과 일본 우생학 연구자들과의 학문적 교류라는 지적 맥락 속에서 형성ㆍ전개되었음을 보여주었다(박지영, 2020). 이러한 연구들의 성과는 경성제대 신경정신과학교실에서의 정신분석학 연구의 도입과 중단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식민지 제국대학이라는 공간의 특성과 제국 정신의학계 전체의 맥락을 동시에 고려할 필요가 있음을 시사한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본고는 주임교수 구보를 중심 행위자로 두고 그의 학문적 이력, 제국 정신의학계의 인적ㆍ지적 네트워크, 주변부 제국대학으로서 경성제대가 지닌 위치 등 그가 처해 있던 여러 조건에 주목한다. 이를 통해 경성제대 의학부에서의 지식 생산의 성격을 주임교수 개인의 학문적 관심이나 식민 통치와의 연관성으로 환원하기보다는, 다양한 조건 하에서 형성된 지식 생산의 구체적 맥락을 드러낸다. 이를 통해 경성제대 신경정신과학교실에서 연구 방향이 어떠한 구조 속에서 형성되고 변화되어 갔는지를 밝히고자 한다.
이에 본고는 먼저 구보의 학문적 이력과 연구 지향의 형성 과정을 추적함으로써 정신분석학 연구가 경성제대에 도입될 수 있었던 지적 기반을 제시한다. 다음으로 전전 일본 정신의학계의 인적ㆍ지적 구조를 검토하여 경성제대의 학계 내 상대적 위치와 상호 관계를 파악한다. 마지막으로 식민지 조선의 의료 환경을 비롯한 경성제대의 특수한 조건을 분석하여, 정신분석학 연구가 지속되기 어려웠던 배경을 구조적으로 규명한다. 이러한 고찰을 통해 본고는 경성제대 신경정신과학교실의 정신분석학 연구를 제국 지식 네트워크와 식민지 의료 환경이라는 중첩된 조건 하에서 식민지 제국대학의 연구자가 자신의 학문적 위치를 어떻게 조정해 나갔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로 제시하고자 한다.

2. 정신분석학 수용과 연구의 전개

2.1. 구보 기요지의 학문적 이력과 정신분석학 초기 연구

구보 기요지는 1895년 홋카이도 오타루(小樽)에서 출생했고, 1918년 도쿄제대 의학부를 졸업했다. 졸업 직후 기타사토연구소(北里硏究所) 및 게이오대학 의학부 세균학교실 조수로 재직하던 중(細菌學雜誌, 1919a: 158; 慶應義塾大學醫學部, 1921: 20, 22),4) 1920년 취리히대학으로 자비 유학을 떠났다. 일본 의학계에서 선호되던 독일ㆍ오스트리아가 아닌 스위스 취리히를 선택한 것은 제1차 세계대전 직후 일본과 독일ㆍ오스트리아 간의 외교 관계가 복원되지 않았던 당시 상황에 따른 차선책이었다(久保喜代二, 1921a: 476).
그는 신경의학자 모나코프(Constantin von Monakow)의 연구실에서 신경병리를 연구하는 한편, 취리히대학의 정규 학생 자격으로 여러 강의를 수강했다.5) 그 중에서도 취리히대학의 정신병원 부르크횔츨리(Burghölzli)의 원장 블로일러(Eugen Bleuler, 1857–1939)6)의 강의를 통해 정신분석학을 처음 접한 구보는 이에 강한 흥미를 갖게 되었다.7) 이에 더해 취리히대학에서는 정신분석학 외에도 다양한 심리학적 임상정신의학이 수행ㆍ교육되고 있었다. 예를 들어, 모나코프 교수는 임상에서 모든 환자에게 심리요법을 병행하고 있었으며, 구보는 강사진으로부터 정신분석요법을 비롯한 여러 심리요법의 실제를 교육받을 수 있었다(久保喜代二, 1921a: 476; 1921b: 504).
당초 신경병리 연구를 위해 취리히에 유학했던 구보는 부르크횔츨리에서의 경험을 계기로 자신의 진로를 정신의학으로 변경하게 되었다.8) 학부 졸업 후 불과 1년 반 만에 유학길에 올랐던 그는 “일본 학계의 정실(情實)에 대해 아는 바가 없으므로 더 진지하게 관찰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전했는데(久保喜代二, 1921a: 476), 이러한 언급에서 짐작되듯 취리히에서의 학문 경험은 추후 그의 연구 방향 형성에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20세기 초 부르크횔츨리는 주류 독일어권 정신의학 연구기관과 달리 심리학적 접근을 중시하는 학풍을 형성했으며, 특히 1900년대 초반부터 약 10년간 제도권 정신의학계에서 정신분석학 연구가 이루어질 수 있었던 거의 유일한 거점이었다(Falzeder, 2018: 115; Maetzener, 2018: 551). 블로일러는 정신분석학의 발전 초기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를 공개적으로 지지한 최초의 대학교수였고, 1908년 최초의 정신분석학 전문 학술지가 창간되었을 때 프로이트와 공동 발행인으로 참여하는 등, 그 확산에 적극적으로 관여했다(Falzeder, 2007: 344-347).9) 하지만 블로일러는 자신의 모든 이론을 전면적으로 수용하기를 바라는 프로이트의 교조적 태도에 점차 비판적 입장을 취했고, 이러한 상황 속에서 1910년대 중반 이후 정신분석학은 부르크횔츨리에서조차 점차 주변화되어 갔다(Falzeder, 2007: 363).10)
그러나 블로일러는 이후에도 정신분석학을 유용한 이론 중 하나로 평가하며, 임상과 강의에서 이를 지속적으로 다루었다. 1925년 프로이트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자신이 여전히 정신분석학을 강의하고 있으며, 정신분석요법이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환자는 관련 전문가에게 의뢰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양자 간의 이론적 차이는 본질적이지 않다고 덧붙였다(Maetzener, 2018: 565). 이러한 학문 환경 속에서 구보 역시 블로일러를 비롯한 교수진의 지도를 통해 정신분석학의 실제를 접할 수 있었다. 요컨대 일본 정신의학계에서 비주류로 간주되던 취리히 유학은 구보에게 주류와는 구분되는 연구 경향을 습득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던 것이다.11)
1년 간의 취리히 유학 생활을 마친 구보는 빈대학 신경학연구소로 자리를 옮겼고, 신경병리 연구를 계속하면서도 프로이트 학파의 강연에 참석하는 등 정신분석학에 대한 관심을 이어나갔다(久保喜代二, 1940: 2086). 빈대학 신경학연구소는 일본 정신의학계에서도 선호하는 유학지였는데,12) 이와 같은 유학지 변경이 구보와 일본 정신의학계와의 교감의 결과인지, 혹은 정신분석학파의 거점빈에 흥미를 느끼고 정신분석학에 대한 관심을 이어 나가기 위한 선택이었는지를 밝혀주는 자료는 확인되지 않는다.
구보는 빈에서의 2년간의 유학 생활을 마치고 1923년 8월 귀국길에 올랐다. 그리고 같은 해 12월 빈대학에서의 신경병리 연구성과를 제출하여 홋카이도제대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고, 동시에 동 대학 신경정신과학교실 조교수로 임명되었다.13) 그가 유학 중 처음 정신의학을 접했기에 일본 정신의학계와 인적 연계가 상대적으로 얕았음에도 곧바로 제국대학 교원에 임용된 배경에는, 당시 홋카이도제대 초대 의학부장으로 있던 그의 장인 하타 벤조(秦勉造, 1877–1943)14)의 영향력이 일정 부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교실의 정식 개설 이후 초대 주임교수를 맡을 예정이었고, 이를 기다리는 동안 도쿄제대 신경정신과학교실이 운영하는 도쿄부립 마쓰자와(松澤)병원에 파견되어 근무했다(神經學雜誌, 1924: 144).15)
마쓰자와병원에서 구보는 유학 당시 언어 장벽으로 인해 환자에 적용하지 못했던 정신분석요법을 비롯한 다양한 심리요법을 시도했다(久保喜代二, 1940: 2086). 1926년 『신경학잡지(神經學雜誌)』에 게재된 「구레박사(吳博士)가 과거 강술(講述)하신 강박관념증의 일례에 대한 이후 관찰」에서 그 시도의 일면을 확인할 수 있다. 이 논문은 1925년 초 그가 담당했던 23세 남성 강박관념증 환자에 대한 심리요법 증례 보고였다.16)
구보는 환자의 가족력 및 성장 과정을 상세히 청취했고, 특히 정신분석학 이론과 밀접한 성(性)과 관련된 과거 경험을 구체적으로 기록했다.17) 이어 그는 “환자의 정신과 긴밀한 접촉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정신분석요법을 여러 차례에 걸쳐 활용했다(久保喜代二, 1926a: 314). 환자 면담 때마다 꿈을 상세히 서술하게 한 뒤 그에 대한 환자의 감상을 청취했고, 그에 이어 자유연상을 유도하는 절차를 밟았다.
환자가 보고한 꿈 가운데 하나는 숙부의 집 지붕 꼭대기에 있는 좌석에 착석하자마자 지붕을 따라 미끄러져 내려가는 꿈이었다. 구보는 환자가 숙부의 딸에 연애 감정을 품었던 사실에 비추어 이를 “성적 상징으로 판단할 수 있다면 프로이트파 사람들에게는 꽤나 흥미로울 꿈”이라고 평하면서도(久保喜代二, 1926a: 319), 자신과 그러한 해석에 거리를 두는 태도를 보였다.
본 증례에 대한 총괄적 평가 과정에서도 구보는 정신분석학의 개념을 설명 언어로 사용하면서도 정신분석학적 해석에는 다음과 같이 유보적으로 기술했다.
본 환자가 앓고 있는 황당무계한 성적 공상은 융[Carl Jung]의 표현을 빌리자면 Symbolische Wiederholung der Koitusbelauschung[성교 목격의 상징적 반복]에 다름아니다. 즉, 부모의 동침을 엿보았던 경험을 반복하고 있는 것으로, 성적 공상은 그 상징적 표현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정신분석법의 관점에서 계속하자면 본 환자에게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거세 콤플렉스를 시작해 동성애적 요소 등을 여럿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이러한 사실이 가지는 의미와 강박관념증과의 관계를 프로이트 학파처럼 주장하는 것이 아직 전혀 가능하지 않다(久保喜代二, 1926a: 324-325).
동시에 구보는 환자의 치료 과정에서 정신분석요법에만 의존하지 않고 다른 심리요법을 병용했다. 정통 정신분석학이 과거의 외상(trauma)을 의식화하는 과정을 통해 치료 효과를 도모하며 환자의 삶에 직접적인 지침을 제공하지 않는 데 반해, 구보는 치료 과정에서 보다 적극적인 개입을 시도했다. 그는 환자에게 “강박관념과 악수하라”고 권고하며 강박관념을 있는 그대로 수용할 것을 교육했는데(久保喜代二, 1926a: 321), 이러한 접근은 모리타요법(森田療法)18)에서 착안한 것이었다. 아울러 환자의 결단력 저하를 아들러(Alfred Adler)19)의 열등감 개념으로 해석하여, 환자 스스로의 사회적 위치와 현실에 대한 재인식을 유도했다(久保喜代二, 1926a: 321-323).
이와 같이 다양한 심리요법을 절충적으로 활용하는 태도는 개별 임상 증례 보고에서만이 아니라 그의 이론적 저술에서도 일관되게 확인된다. 예를 들어, 1924년 히스테리 치료기전에 대한 글에서 그는 히스테리의 핵심 치료 기제를 프로이트가 제시한 ‘리비도의 전환(Wandlung der Libido)’20)에서 찾으면서도, 그 전환을 유도하는 데 있어 설득요법, 암시요법 등 여타 심리요법도 효과적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久保喜代二, 1924d: 246-247). 다시 말해, ‘리비도의 전환’을 촉진할 수 있다면 치료가 기반하는 이론적 체계는 부차적이라고 여겼다. 유사한 인식은 1926년의 「정신요법의 실제와 이론」에서도 반복되는데, 이 글에서 구보는 자신이 치료에 활용하는 “정신분석적 조작”이 “프로이트 학파가 주장하는 정신분석법을 그대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 환자의 심정과 사고방식을 점차 이해해 가는 동시에 그 결론을 환자가 이해하도록 명확히 설명해 주는 것”이라고 강조했다(久保喜代二, 1926b: 52).
지금까지 살펴본 임상 증례 보고와 저술을 종합하면 구보에게 정신분석학은 유용한 심리학적 이론이자 치료 방법론이었지만 그대로 준수해야 할 지침으로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즉, 정신분석학은 스스로의 임상 경험에 맞추어 유연하게 변용해 나가야 할 실천적 지식으로 받아들여졌다(久保喜代二, 1926b: 52).
구보가 정신분석학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는지는 프로이트와 그의 이론에 대한 평가에서 보다 분명하게 드러난다. 정신분석학 이론의 성립을 역사적으로 고찰한 「정신분석법의 창시자 프로이트에 대하여」(1924)에서 구보는 프로이트를 “지기 싫어하고 매우 자존심 높은, 명예욕 만만의 반항적 학자”로 묘사하는데 이어 그의 생애를 “일종의 결투사(決鬪史)”라고 표현하며, 이러한 성격적 특징이 프로이트 학설의 장점과 한계를 동시에 낳았다고 평가했다(久保喜代二, 1924c: 231). 다시 말해, 구보는 정신분석학 이론이 지니는 경직성과 배타성을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프로이트의 설에 조금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던가 결점이 있다고 해서 그의 관찰 전체를 부정해서는 안 된다”라고 하며 정신분석학의 학문적 의의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久保喜代二, 1924c: 237).

2.2. 경성제대 신경정신과에서의 정신분석학 연구의 전개

마쓰자와병원에 파견되어 활동하던 구보는 홋카이도제대 신경정신과학교실의 개설이 여러 해 연기된다는 소식을 듣고 1924년 10월 조교수직을 사임했다(内村祐之, 1968: 33). 이후 그는 마쓰자와병원 근무를 계속하면서 도쿄제대 신경정신과학교실 강사직을 잠시 맡았다. 이윽고 1925년 4월, 그는 조선총독부의원 신경정신과 과장 및 경성의학전문학교 교수로 부임했다. 당시 경성제대의 설립이 이미 확정된 상황이었음을 고려하면, 구보의 임용은 향후 경성제대 교수직을 염두에 둔 인사였다고 할 수 있다.
구보의 조선 부임 경위를 직접적으로 설명하는 자료는 확인되지 않지만, 여러 정황을 종합하면 기타사토연구소와 게이오대학 의학부에서 일찍이 인연이 있었던 당시 조선총독부의원 원장 시가 기요시(志賀潔, 1871–1957)의 요청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21) 한때 타 제국대학의 주임교수에 내정될 정도의 학력과 유학 경력을 갖춘 학자가 조선 부임을 결정한 배경에는 거절하기 어려운 요청이 있었을 것이라 추측할 수 있다.22)
1928년 경성제대 신경정신과학교실이 설치되고 이어 구보가 1928년부터 1929년까지 1년간 해외 시찰을 다녀옴에 따라 교실에는 본격적인 연구 체제가 갖추어졌으며, 정신분석요법과 같은 심리요법 역시 임상 연구의 대상이 되었다. 교실 개설 이후 구보가 직접 정신분석요법 증례를 보고한 사례는 없었으나, 정신분석학 관련 기고는 몇 차례 진행되었다. 예를 들어 프로이트의 괴테상(Goethe-Preis) 수상을 계기로 『조선의학회잡지(朝鮮醫學會雜誌)』에 게재한 「정신분석학의 창시자 프로이트에 대하여」(1930)는 그의 1924년 기고를 일부 수정 및 재구성한 것으로, 그 내용을 고려한다면 구보가 이 시점까지도 정신분석학에 대해 호의적인 입장을 유지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久保喜代二, 1930).
한편, 특정 연구 경향이 단순한 개인적 흥미를 넘어 지속적인 연구 전통으로 발전한다는 것은, 해당 주제가 교실원들 사이에 공유되고 이를 토대로 새로운 연구가 전개되었음을 의미한다. 주임교수의 영향력이 절대적이었던 의국강좌제(醫局講座制)23) 체계 하에서 구보의 정신분석학에 대한 관심 역시 교실원들에게도 직접적으로 전수되었고, 교실원들은 이를 실제 임상 현장에 적용했다.
가장 이른 교실원의 연구 기록은 안종일(安鐘一, 1902(?)–1938)24)이 1929년 조선의학회 총회에서 발표한 「히스테리 정신분석례」이다. 비록 발표 요약만이 『조선의학회잡지』에 남아 구체적 내용은 파악되지 않으나, 그는 여러 명의 히스테리 환자에게 정신분석요법을 시행했고, “리비도의 발달이 원만하지 않음으로 인해 해당 증후군이 발생했음을 확인[하고] …… 이를 정상 궤도로 이끌어 냄으로써” 치료에 이르렀다고 기술했다(安鐘一, 1929: 1520). 정신분석요법이 언어적 소통을 핵심 매개로 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는 조선인 환자에게도 여러 차례 요법이 시도되었음을 시사한다.
그리고 교실원 히카루 노부유키(光信幸, 1903–?)25) 역시 정신분석학 관련 저작을 여럿 발표했다. 그의 1930년 논문 「성적불감증을 주소로 하는 히스테리의 일분석치험례(一分析治驗例)」는 『조선의학회잡지』를 비롯하여 『치료급처방(治療及處方)』 및 『최신치료(最新治療)』에도 중복 게재되어 일본 의학계 전반을 독자층으로 염두에 두었다(光信幸, 1930).26)
이 논문에서 히카루는 다른 심리요법을 병용하지 않고 정신분석요법을 단독적으로 적용했다. 그는 22세 기혼 여성의 히스테리 사례를 대상으로 약 6주에 걸쳐 20여 차례 치료를 시행하며, 자유연상과 꿈 해석을 통해 유년기 가족관계와 성적(性的) 갈등을 탐색했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비롯한 몇몇 정신분석학 이론이 문화적 차이로 인해 동양에 적용될 수 있는지에 의문을 제기하면서도, 환자의 꿈 이미지를 성적 상징체계 속 다양한 상징으로 해석하는 등 비교적 프로이트에 충실한 해석을 시도했다(光信幸, 1930: 1523-1526). 치료 과정에서 환자는 과거의 경험을 의식화할 수 있었고, 한편으로 환자에서 치료자로의 감정의 전이(Übertragung) 역시 관찰되었음이 보고되었다.27)
또한 경성제대 신경정신과학교실은 지속적으로 프로이트의 신규 문헌을 접하며 이론적 측면에서도 연구를 이어가고 있었다. 히카루는 1931년 「프로이트의 히스테리 학설」을 『최신치료』에 연재하면서 『쾌락원칙을 넘어서』(1920)와 『자아와 이드』(1923)를 중심으로 프로이트 후기 사상에서 리비도 개념의 확장적 변용, 그리고 이드(es), 자아(ich), 초자아(über-ich)의 개념에 대해 구체적으로 소개했다. 그리고 이와 같은 개념적 이해를 토대로 정신분석학의 관점에서 히스테리의 병인론을 설명하였다(光信幸, 1931a; 1931b). 이는 교실이 정신분석학을 임상 적용의 수준에 그치지 않고, 그 이론의 이해 또한 원전을 통해 충실히 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이와 같은 교실의 정신분석학 연구는 경성제대 의학부에서의 지식 생산이 도쿄제대를 위시로 한 일본 의학계의 연구 경향을 일방적으로 수용하는 지식 네트워크의 말단에 머무르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구보는 일본 주류 정신의학계와의 학문적 교류가 아니라 취리히와 빈에서의 유학 경험을 통해 독자적으로 정신분석학 이론과 요법을 습득했다. 그리고 그는 제국대학의 제도적ㆍ물적 자원을 기반으로 자신의 학문적 자산을 교실의 진료와 연구에 적극적으로 적용할 수 있었다.
더 나아가 구보를 비롯한 교실 구성원들은 선도적 입장에서 일본 정신의학계 전반에 정신분석학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자 시도하고 있었다. 구보는 히카루의 히스테리 증례 보고 말미에 부기(附記)를 덧붙이며 “정신분석학은 지금도 많은 정통 정신병학파에 의해 기피되고 있는 상황이다 …… 동법[정신분석요법]에 의해 현저한 치료 효과를 거둘 수 있는 것은 이제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이리하여 신경증을 치료하는 데 있어 단순한 암시요법에 만족하는 것은 이제 시세(時勢)에 지극히 늦은 것이다”라고 언급하며(光信幸, 1930: 1528), 그 임상적 유용성에도 불구하고 학계에서 정신분석학이 배척되는 현실을 드러내고 그 재평가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히카루 역시 프로이트의 후기 이론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프로이트 학설을 가리켜 무비판적으로 범(汎)성욕설이라고 하는 견해는 프로이트를 오해하는 바가 매우 크다”라고 지적하며(光信幸, 1931a: 16), 당대 일본 학계의 몰이해를 비판했다.
하지만 정신분석학이 일본 정신의학계에서 비주류 경향으로 남아 있는 상황에서, 이를 지속적으로 연구하면서도 학계 내 학문적 위신을 유지하고, 더 나아가서 ‘보편적’ 지식 체계의 일부로 자리매김하기 위해서는 정신분석학에 대한 인식 개선을 함께 도모할 수 있는 협력 세력의 확보가 중요했다. 당대 일본 정신의학계에서는 도호쿠제대 신경정신과학교실이 주임교수 마루이 기요야스(丸井清泰, 1886–1953)를 중심으로 정신분석학 연구를 적극적으로 수행하고 있었다. 히카루의 히스테리 환자 증례에서 마루이의 1928년 정신분석학 저작이 언급되었다는 사실은 경성제대 신경정신과학교실이 도호쿠제대의 정신분석학에 대한 관심을 명확히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1931년 마루이가 프로이트에게 보낸 서한28)은 마루이 역시 경성제대와 구보를 정신분석학의 학계 내 영향력 확대를 위한 잠재적인 협력 대상으로 주목하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그러나 적극적 협력 관계의 구축과 이를 매개로 한 정신분석학 연구의 잠재적 지속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정신분석학은 경성제대에서 지속적인 연구 경향으로 자리 잡지 못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정신분석학이 주류 정신의학계에서 주변적 위치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학계 전반의 인적ㆍ지적 계보를 통해 살펴보고, 식민지에 위치한 제국대학으로서 경성제대가 정신분석학 연구를 지속적으로 전개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는지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 아울러 제국 정신의학계에서 정신분석학을 연구했던 또 다른 교실인 도호쿠제대의 학계 내 위치를 파악함으로써, 경성제대와 도호쿠제대 사이에 구체적으로 어떠한 교류와 연계의 가능성이 존재했는지, 그리고 그러한 가능성이 실현되기 어려웠던 이유는 무엇이었는지 또한 살펴보고자 한다.

3. 일본 정신의학계의 인적ㆍ지적 구조와 정신분석학의 위치

3.1. 주류 정신의학계에서의 정신분석학의 위치

전전 일본 정신의학계는 대다수 의학교육기관의 신경정신과학교실 주임교수직을 도쿄제대 신경정신과학교실 3대 주임교수 구레 슈조(呉秀三, 1865–1932)29)의 제자가 담당했던 인적ㆍ지적 동질성이 강한 집단이었다(岡田靖雄, 1999: 89). 구레는 독일ㆍ오스트리아에 유학하여 신경병리학 및 임상정신의학을 연구했고, 당대 독일 주류 정신의학을 대표했던 에밀 크레펠린(Emil Kraepelin, 1856–1926)의 정신질환 분류체계를 익혔다(秋元波留夫, 1979: 1424-1425). 그의 제자들 역시 이러한 학문적 계보 속에서 독일 주류 정신의학을 수학했고 유학지로도 독일ㆍ오스트리아를 선호했다.
독일 주류 정신의학계는 정신분석학에 일관되게 비판적인 태도를 보였다. 크레펠린은 정신분석학을 형이상학적 사변에 불과한 것으로 간주하여 학문적 언급 자체를 꺼렸다고 전해지며(内村祐之, 1968: 61; Falzeder, 2018: 200-201), 이와 같은 부정적 태도는 당시 독일어권 대학의 정신의학자들 사이에서 광범위하게 공유되고 있었다(Falzeder, 2018: 188; Maetzener, 2018: 555). 그 일례로 1913년 독일정신의학회 연례총회에서 ‘정신분석학의 의의(Die Bedeutung der Psychoanalyse)’가 논의 주제로 다루어졌을 때, 정신분석학을 옹호하는 입장에섰던 취리히대학의 블로일러는 반대측 대표 연자를 비롯한 다수의 정신의학자들로부터 강도 높은 비판에 직면해야 했다(Schröter, 2023: 189-190).
따라서 독일 주류 정신의학을 받아들이고 유학지에서 독일ㆍ오스트리아 정신의학자를 사사했던 일본 정신의학계에서 정신분석학이 수용될 여지는 크지 않았다. 당시 사용되던 교과서 중 하나인 『최신정신병학(最新精神病學)』(1922)은 정신분석요법이 “지금까지 학자의 승낙을 충분히 얻지 못하고 있[으며] …… 주로 영미(英米)에서 널리 시행되고 있다”라고 언급했다(杉田直樹ㆍ下田光造, 1922: 201-202).
일본 정신의학계에서 상대적으로 정신분석학에 개방적이었던 인물들은 주로 제1차 세계대전의 여파로 미국을 유학지로 택한 학자들이었다. 당시 미국 정신의학계에서는 정신분석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었고, 이들 유학생 역시 그러한 흐름 속에서 정신분석학을 직간접적으로 접할 수 있었다.30)
미국 유학생 중 정신분석학에 가장 깊은 관심을 보이며 이후 관련 연구를 지속해 나간 인물은 마루이 기요야스였다. 그는 존스홉킨스대학 유학 중 주임교수 마이어(Adolf Meyer, 1866-1950)31)의 교실에서 프로이트 전집을 접하고 이를 통독한 이래 정신분석학에 큰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山村道雄, 1984: 1134). 그리고 1919년 도호쿠제대 신경정신과학교실 주임교수로 부임하면서 점차 교실 내 정신분석학 연구 경향을 주도해 나갔다.
마루이가 정신분석학 연구를 독자적으로 지속할 수 있었던 또 다른 배경으로는 정신의학계 외부에 형성된 후원 세력의 존재를 들 수 있다. 그는 1913년 도쿄제대를 졸업한 직후 동 대학 제3내과학교실에 입국했으며, 당시에는 정신의학과 별다른 접점이 없었다. 그러나 도호쿠제대에 신경정신과학교실이 신설되는 과정에서 일본 의학계 전반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제3내과학교실 주임교수 아오야마 다카미치(青山胤通)가 마루이를 도호쿠제대 신경정신과학교실 교수로 선점했다(山村道雄, 1984: 1133). 이는 일본 정신의학계를 주도하던 구레슈조의 의향과는 무관하게 이루어진 것이었다. 비록 1914년 교수직 내정 이래 1916년 미국 유학을 떠날 때까지 마루이는 도쿄제대 신경정신과학교실 및 도쿄 부립 스가모병원(마쓰자와병원의 전신)에서 1년 이상 수련을 받았으나, 구레와 대립 관계에 있던 아오야마의 제자 마루이는 주류 정신의학계의 입장에서 외부자로 인식되었다(大槻憲二, 1949: 216-217).
이러한 배경은 마루이가 독자적으로 연구를 진행해 나갈 수 있는 조건이 되었다. 즉, 그는 구레 슈조를 중심으로 한 주류 정신의학계와 접점이 옅었고, 동시에 독자적인 후원 기반을 확보하고 있었기에 주류와는 다른 연구 방향을 비교적 자유롭게 추구할 수 있었다. 특히 미국 유학을 통해 정신분석학을 접한 경험은 그가 주류와는 별도의 학문적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독자적 연구 경향을 구축해 나가는 중요한 계기로 작용했다.

3.2. 마루이 기요야스의 도호쿠학파

일본 정신의학사 연구의 다수는 정신의학계 내 정신분석학 연구의 효시를 도호쿠제대 신경정신과학교실에서 찾고 있다(Blowers & Yang, 1997: 116; 西見奈子, 2019: 59; Okonogi, 2022: 4).32) 따라서 경성제대 신경정신과학교실의 정신분석학 연구가 일본 정신의학계 내에서 어떠한 위치를 점했는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대 정신분석학 연구의 또 다른 거점이었던 도호쿠학파와 그 주임교수 마루이의 위치를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다.
마루이는 1919년 도호쿠제대 부임 이후 정신분석학 연구를 체계적으로 추진해 나갔으며, 『(정신)신경학잡지』 등 일본 정신의학계의 주요 학술지에 정신분석학 관련 논문을 지속적으로 발표하고 일본(정신)신경학회33) 연례총회에서도 매년 연구 성과를 보고했다. 특히 1932년부터는 교실 차원에서 정신분석학 전문 학술지34)를 발행함으로써, 교실을 정신분석학 임상 연구의 거점으로 자리매김하고자 했다(西見奈子, 2019: 95-96).
그러나 구레 슈조를 중심으로 한 일본 정신의학계 구조 속에서 정신분석학 연구는 환영받기 어려웠다(Takemoto, 1990: 964-967). 이에 대한 동시대 학자들의 증언 역시 다수 존재하는데, 우치무라 유시(内村祐之)35)는 마루이가 정신분석학에 비판적인 당대 일본 정신의학계 속에서 “그야말로 고군분투했다”라고 회고했으며(内村祐之, 1968: 269), 정신분석학에 개인적 관심을 가졌던 스기타 나오키(杉田直樹) 또한 (정신)신경학회 총회에서 정신분석학 관련 발표가 있으면 “반드시 반대 토론이 속출하여 회장(會場)이 일시 혼란” 상태에 빠졌다고 기술했다(杉田直樹, 1935: 3021).
이와 같은 반대파의 한 축에는 심리요법으로서 모리타요법을 독자적으로 개발한 모리타 마사타케(森田正馬, 1874–1938)36)와 그의 지지자들이 있었다. 모리타는 구레의 오랜 제자로 일본 주류 정신의학계 인적 계보의 일부였고, 학계 내에서 상당한 지지 세력을 확보하고 있었다(内村祐之, 1968: 268). 모리타는 강박 관념을 비롯한 신경증 치료에 대해 “프로이트와 같이 기회적 원인이 되는 우연한 사건을 검색하려는 수고의 필요성을 인정하지 않는다”라며(森田正馬, 1928: 141), 증상을 신속한 제거의 대상으로 삼기보다 그것이 존재함을 인정하며 일상생활을 지속하도록 하는 치료 방법론을 구체화해 나갔다. 이는 증상의 원인을 무의식에서 찾아 그것을 의식화함으로써 해소하고자 했던 정신분석요법의 접근과는 본질적으로 상이한 방식이었다. 이러한 이론적 불일치로 인해 도호쿠제대 측과 모리타요법의 지지자들은 (정신)신경학회 연례총회에서 번번히 충돌했다(内村祐之, 1968: 268-270; 高良武久, 1979: 241; 山村道雄, 1984: 1136).
결과적으로, 전전 일본 정신의학계의 인적ㆍ지적 구조 하에서 정신분석학 연구의 공간은 제한되어 있었다. 다만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독일ㆍ오스트리아 이외의 지역으로 유학이 이루어지고, 마루이와 같이 도쿄제대 신경정신과학 교실의 영향권 바깥에 위치한 인물이 등장함에 따라, 정신분석학이 자리 잡을 공간이 한정적으로 마련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지점에서 경성제대의 구보와 도호쿠제대의 마루이가 가지는 유사점을 확인할 수 있다. 두 사람 모두 정신분석학이 배척되지 않았던 지적 환경(취리히, 미국)에서 정신의학을 본격적으로 접함으로써 이에 대한 흥미를 가지게 되었고, 학문적 경력과 임용 과정에서의 인적 계보 측면에서도 구레 슈조를 위시로 한 주류 정신의학계의 구심력에서 상대적으로 벗어나 있었다. 이와 같은 조건은 그들이 비교적 자율적으로 정신분석학을 연구할 수 있었던 배경으로 작용했다.
특히, 1931년 무렵, 구보와 마루이는 서로의 존재를 의식하고 있었다. 마루이가 1931년 프로이트에게 보낸 서한37)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이 언급된다.
도쿄제국대학을 졸업하고 구레 슈조 교수의 정신과 교실에서 공부한 후, 저는 일본 정부에 의해 학문의 견문을 넓히고자 해외로 파견되었습니다. 물론 저는 유럽으로 가고 싶었습니다만, 때는 마침 전쟁 중이었고 그럴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저는 1916년 미국으로 향했고, 2년 반 동안 볼티모어의 존스홉킨스대학의 아돌프 마이어(Adolf Meyer) 교수의 핍스(Phipps) 정신과 클리닉에서 연구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저는 영국, 프랑스, 스위스를 여행했고, 마이어 교수의 소개 편지를 가지고 블로일러(Eugen Bleuler) 교수를 만날 기회를 가졌습니다. 당시에는 아직 당신의 나라에 입국이 허락되지 않았고, 당신을 정말 만나 뵙고 싶었습니다만, 그럴 수 없었습니다. 1919년 8월 귀국하여 저는 여기 센다이의 도호쿠제국대학의 정신과 교실 교수가 되었고, 그 이래 지속적으로 정신분석학에 관심을 가지고 제자들과 함께 정신분석학적 방법을 통해 환자를 치료하고자 했으며, 일본인들, 특히 의사들에게 정신분석학 지식을 갖도록 권유했습니다. 1921년 이래 저와 제 학생들은 정신분석학적 탐구의 결과를 해마다 도쿄 또는 일본 내 대도시에서 열리는 일본신경학회 총회에 보고하고자 했고, 이들 중 몇 건은 이미 일본의 의학 학술지에 출판되었습니다. …… 제가 처음 미국에서 귀국했을 때 일본에서 정신분석학적 치료를 시행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일본인 중 정신분석학 문헌의 독자는 매우 드물었습니다. 아마 아실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거의 모든 일본의 정신의학자는 독일에서 정신의학을 공부했고, 그들이 당신의 생각을 듣지도, 신경 쓰지도 않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다만 말씀드리고 싶은 부분은 현 시점에서 유일한 예외가 있는데, 조선의 경성제국대학 신경정신과학교실의 구보 기요지 교수가 정신분석학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1931년 2월 2일 센다이에서)38)
이 서신에서 마루이는 일본 주류 정신의학계의 지적 계보와 그에 벗어나 있는 자신의 예외적 위치를 드러냄과 동시에, 협력 가능성이 있는 유일한 인물로 구보를 언급하고 있었다. 이는 그가 경성제대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정신분석학 연구 발표, 그리고 상대적으로 주변적인 구보의 정신의학계 내 위치로부터 상호 연계 가능성을 엿보았음을 시사한다.

4. 정신분석학 연구의 중단

경성제대 신경정신과학교실에서의 정신분석학 연구는 1930년대 초반까지 단발적 시도를 넘어 지속 가능성을 지닌 연구 전통으로 전개될 가능성을 보였다. 이는 구보의 학문적 관심과 제자들의 증례 보고 및 이론 연구, 그리고 도호쿠제대와의 잠재적 연계 가능성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1932년 이래로 1941년 구보가 주임교수직을 사임할 때까지 교실 내에서 정신분석학 연구의 학계 보고는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고, 연구의 중심은 주류 정신의학계가 주목하던 생물학적 제제를 활용한 정신질환 치료 연구 등 다른 분야로 이동했다.39)
도호쿠제대와의 연계가 형성되어 정신분석학 연구가 이어지기 보다는 그 연구 경향이 중단된 데에는, 일본 정신의학계의 인적ㆍ지적 구조, 정신분석학의학계 내 입지, 주변부 제국대학이라는 경성제대의 위치, 그리고 식민지 조선의 의료 환경 등 복합적인 조건이 작용했다. 다시 말해, 정신분석학 연구가 중단된 것은 주어진 조건 하에서 교실이 학문적 영향력 확보를 위해 연구 방향을 재편해 나간 전략적 실천의 결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변화가 어떠한 조건들의 교차 속에서 형성되었는지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4.1. 정신분석학과 거리두기: 정신의학계 학문 지형 속 연구 방향의 재편

1932년 이후 경성제대 신경정신과학교실이 정신분석학 연구에서 멀어져 간 것은 주류 학계와의 긴장 관계 속에서 교조적 성격을 강화해 나간 도호쿠 학파의 위치를 인식함에 따라 구보가 취한 전략적 선택으로 이해할 수 있다. 여러 문헌들은 그가 점차 정신분석학 이론, 특히 마루이의 도호쿠학파가 보인 교조적 태도에 대해 일정한 거리를 두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1933년 심리학자 사토 고지(佐藤幸治)와 마루이 사이에 『심리학연구(心理學硏究)』 지면을 통한 논쟁이 벌어졌을 때 구보는 사토의 입장을 지지했다. 사토는 교토제대 신경정신과학교실 강의 촉탁을 맡고 일본(정신)신경학회 총회에도 지속적으로 참여하며 정신의학계와 교류해 온 인물이었다. 그의 핵심 비판은 마루이와 도호쿠학파가 정신분석학에 대해 “맹목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데 있었다(佐藤幸治, 1933b: 638). 이러한 두 사람 간의 논쟁 과정에서 구보는 사토에게 개인적 서신을 보내 “[정신분석학파의] 감상적 태도 또한 짐작컨대 종문(宗門)을 지키려고 하는 신자의 태도와 마찬가지일 것이다”라고 하면서, “정신요법으로서의 분석학 역시 그 독특한 해석이 없다고 해서 좋은 효과를 얻을 수 없는 것은 결코 아니다”라고 덧붙였다(佐藤幸治, 1933b: 639). 이를 통해 그는 도호쿠학파 비판에 동의하는 입장을 명확히 드러냈다.
이 사례는 구보가 취리히 유학 시절부터 유지해 온 정신분석학에 대한 ‘절충적’ 이해가, 도호쿠학파가 보인 ‘교조적’ 수용 방식과 명확한 대비를 이루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앞선 시기까지 구보는 정신분석학을 절대적 이론 체계로 받아들이지는 않았음에도 그 임상적 효용에 대해서는 일관되게 긍정적인 입장을 취했고, 그의 제자들에게 정신분석요법을 단독적으로 활용하여 환자 치료를 시도하게 하기도 했다.
그러나 1933년을 전후하여 구보는 정신분석학에 대한 절충적 인식을 정신분석학을 옹호하는 근거로 사용하기보다는, 오히려 마루이와 도호쿠학파가 보인 교조성을 비판하는 기준으로 재배치하기 시작했다. 다시 말해, 구보에게서 변화한 것은 정신분석학 이론에 대한 이해 그 자체가 아니라, 정신분석학파에 대한 태도였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정신분석학파와의 거리두기는 어떠한 맥락 속에서 이루어진 것일까? 그 단초는 일본 정신의학계 내부의 인적ㆍ지적 구조와 학계 내부의 위계, 그리고 그 안에서 마루이와 구보가 점한 위치를 비교함으로써 찾을 수 있다.
마루이는 구레와 지속적으로 대립해 왔던 도쿄제대 제3내과학교실 아오야마 교수의 영향력을 배경으로 도호쿠제대 신경정신과학교실 주임교수직에 올랐고, 당초 자신의 제자를 이 자리에 앉히고자 했던 구레는 이에 분개했다(岡田靖雄, 1994a: 273). 따라서 구레의 영향 하에 있던 주류 정신의학자들 역시 마루이에 대해 상당한 반감을 보이고 있었다(大槻憲二, 1949: 216-217). 마루이가 독자적으로 정신분석학 연구에 몰두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아오야마와 같은 독립적인 후원세력의 존재와 더불어, 애초에 주류 정신의학계와 밀착하기 어려웠다는 사정도 작용하고 있었다.
반면 구보는 주류 정신의학계와 강한 인적 연계를 지닌 인물은 아니었지만, 마쓰자와병원 근무 이래 이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는 정신분석학에 대해서도 절충적 태도를 취했으며, 주류 학계의 정신분석학에 대한 인식 변화의 필요성을 제기할 때에도 그 거부감을 의식하며 학문적 관심을 환기하는 수준에 머물렀다. 그는 주류와 구분되는 학문적 경력을 지니고 경성제대 부임 이래 비교적 독자적으로 학계 내 위신을 구축해 나갔으나, 그 시도가 주류 학계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방향으로 전개된 적은 없었다. 경성제대는 식민지에 위치한 주변부 제국대학으로서 학계 위계상 주류 정신의학계와의 관계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위치에 있었고, 그의 독자성은 어디까지나 주류 학계와의 ‘협력적 경쟁’ 속에서 선도적 위치를 확보하는 데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마루이와의 적극적 연계는 오히려 정신분석학에 대한, 더 나아가서는 구보 자신에 대한 주류 정신의학계의 거부감을 불러일으키는 요인으로 여겨졌을 가능성이 크다.
더욱이 구보가 마루이의 도호쿠학파와 긴밀한 협력 네트워크를 형성하더라도 그 내부에서 구보가 주도적 위치를 점하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마루이는 1919년 부임 이후 꾸준히 정신분석학 연구를 이어왔고, 국제정신분석학회(International Psychoanalytical Association) 센다이 지부의 설립을 주도할 정도로 일본 내 정신분석학계 전반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반면 구보는 조기에 유학을 마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경성제대에 부임했으며, 식민지 제국대학 교수라는 상대적으로 주변적 위치에 있었다. 따라서 독자적으로 일본 정신분석학계 전체를 선도해 나가기는 어려운 입장이었다. 특히 마루이는 비임상가 중심의 국제정신분석학회 도쿄 지부 설립을 견제하기 위해 프로이트에게 직접 서신을 보낼 만큼 학파 전체를 이끌고자 하는 의지가 강했으므로(이정민, 2021: 236-240), 구보가 마루이를 제치고 일본 정신분석학계에서 주도적 위치를 확보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즉, 구보의 거리두기는 당대 일본 정신의학계의 인적ㆍ지적 계보, 그리고 식민지 제국대학 소속이라는 학술기관의 제도적 위계 등 여러 조건 하에서 내린 전략적 선택의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다.
더 나아가서, 구보는 핵심 이론 측면에서 정신분석학과 상충되었던 모리타요법에 대해 점차 호의적인 입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구보는 유학 복귀 이래 초기부터 모리타요법을 접하고 이를 강박관념증 환자의 치료에 응용한 바 있었다(久保喜代二, 1926a: 321). 그러나 당시 그는 모리타요법의 효과가 “이론의 독창성에서 나온 것은 아니”라고 언급하며(久保喜代二, 1924d: 247), 이론 자체에 대해서는 정신분석학과 마찬가지로 유보적인 태도를 유지했다. 반면 1935년 신경학회 총회에서의 토론 과정에서 그는 모리타요법이 정신분석요법에 비해 임상에서 응용하기 쉽다는 개인적 소감을 공개적으로 전했다(佐藤幸治, 1935: 596).
이러한 구보의 발언은 단순한 이론적 선호를 넘어서는 의미를 지닌다. 즉, 그가 공개적으로 모리타요법을 호평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해당 요법이 인적ㆍ지적 계보상 일본 주류 정신의학계와 밀착되어 있었다는 점이 자리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 구보의 이러한 발언은 특정 이론의 내적 타당성에 대한 평가라기보다, 그것이 놓인 학문적 위계와 권력 구조 속에서 자신의 입지를 조정하려는 판단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구보는 도호쿠학파의 정신분석학 이해에 대해 명시적인 비판을 가하게 되었다. 인슐린 쇼크요법이 일본 정신신경학회 총회에서 큰 주목을 받던 1939년, 도호쿠제대의 야마무라 미치오(山村道雄)가 정신분석학적 관점에서 인슐린 쇼크요법의 치료 기전을 해석하는 논쟁적 발표를 했고, 구보는 “정신분석의 입장에서 설명을 교묘(巧妙)하게 잘 꾸몄지만, 저에게는 동의하기 어려운 기분이 듭니다”라는 냉소적인 짧은 코멘트만을 남겼다(山村道雄, 1939: 449).40) 이는 구보가 생물학적 제제를 활용한 치료의 기전을 정신분석학 이론으로 설명하려는 시도를 이론적 과잉으로 간주했음을 보여준다. 전후 회고에서 야마무라는 구보를 “일찍이 정신분석학을 배우려 노력한 바 있었던” 비판자로 회상했다(山村道雄, 1984: 1136).41)
이상의 사례들은 구보가 정신분석학의 임상적 유용성 자체는 일관되게 인정했음에도, 그 이론이 일본 주류 정신의학계의 위계 구조에서 주변적이고 논쟁적인 위치에 놓이게 되자 이에 일정한 거리를 두는 방향으로 태도를 조정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태도 변화는 구보 자신의 회고에서도 분명히 확인된다. 1940년 『일본의사신보(日本醫事新報)』의 요청에 따라 기고한 「정신분석학에 대하여」에서 그는 자신의 정신분석학에 대한 경험을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42)
나는 정신분석학도가 아니므로, 정신분석학을 소개하는 것은 내 임무가 아니다. 하지만 일찍이 나에게는 정신분석학에 심취한 시대가 있었으므로, 충분하지 않지만 다소 정신분석학을 운운할 자격은 있다고 생각한다. 大正9년[1920년] 취리히 대학에서 블로일러 교수의 정신분석학총론이라는 강의를 듣게 된 것이 시작으로, 당시의 빛나는 듯한 감격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이후 빈으로 이동하여 大正12년[1923년] 귀국할 때까지 당시 입수할 수 있는 문헌을 수집하고, 프로이트 학파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는 했다. 꽤나 공부했다고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독일어가 미숙한 탓에 환자에 실지연구(實地硏究)를 하는 데까지는 나아가지 못했다. 귀국 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신경증 환자를 상대로 정신분석학의 응용을 시험해봤지만, 실지에서 부딪혀 보니 종래 상상했던 것과는 많이 어긋난 느낌이 들어 점점 프로이트설(說)에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 프로이트의 무의식설(說)은 지나치게 편의적으로 구성되어 있고, 성욕설(說)은 인간의 본능 생활을 지나치게 단순히 고찰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 순간, 프로이트에 대한 나의 순진한 신앙을 잃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 하지만 조금이나마 정신분석학을 공부한 것은 결코 무익한 것이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정신과의(醫) 및 정신요법의(醫)에게 정신분석학 만큼 도움이 되는 심리학은 없을 것이라 생각할 정도로, 나는 깊이 그 은혜를 느끼고 있는 자이다. …… 정신요법의 선택에는 의사 및 환자의 취향, 성격과 큰 관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학문적 이유로 그것을 선호해서 정신분석학을 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이해(了解)할 수 없는 것을 용이하게 납득하려 하지 않는 자는 도저히 프로이트 학도가 될 수 없는(なり切れぬ) 것 아닌가라고 생각한다. 아마 나도 그러한 사람 중 하나이다(久保喜代二, 1940: 2086-2087).
이 회고는 구보가 정신분석학을 임상적으로 유용한 자원으로 평가하면서도 그것을 교실의 지속적 학문적 전통으로 전면적으로 받아들이는 데 이르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이와 같은 정신분석학에 대한 구보의 태도는 그가 유학 시절 사사하며 깊은 영향을 받았던 블로일러의 학문적 자세와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즉, 블로일러와 마찬가지로 구보는 정신분석을 유일한 진리로 여기고 그를 답습하기보다는 여러 이론 중 하나로 여겨 선택적으로 수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구보는 “블로일러는 정신병리의 연구에서 프로이트의 천재적 관찰을 칭찬(稱揚)하는 것을 꺼리지 않는 한편, 조용히 프로이트를 방관하고 있다. 블로일러는 언제까지나 자연과학자다”라고 그의 스승이 보이는 태도를 평가한 바 있었다(久保喜代二, 1924c: 238). 그리고 이후 경성제대에서의 그의 연구와 임상 활동은 그 역시 마찬가지로 ‘자연과학자’였음을 드러내었다. 특히 이러한 태도는 앞서 살펴본 일본 정신의학계 내에서의 그의 위치, 그리고 정신분석학에 대한 그의 입장 변화와 함께 읽힐 때 그 의미가 보다 분명히 드러난다.

4.2. 심리요법 연구의 구조적 한계

1932년 이후 경성제대 신경정신과학교실에서는 정신분석학뿐 아니라 구보가 호의적으로 평가했던 모리타요법 등 심리요법 전반에 대한 연구 역시 더 이상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구보의 학생 강의 기록 및 여러 기고문(久保喜代二, 1924a; 1924b; 1933a; 1933b), 그리고 동시대 학자들의 기록은 구보가 정신분석학을 비롯한 심리학과 심리요법 이해의 필요성을 일관되게 강조해 왔음을 보여주며(大槻憲二, 1949: 215), 교실 내에서도 정신분석학에 대한 교육은 지속되어 왔다.43) 따라서 심리요법 연구의 중단은 앞서 살펴본 정신의학계 내 교실의 위치와 그에 따른 전략적 선택의 문제와 더불어, 심리요법 연구 자체가 지닌 한계 또한 그 지속을 제약했음을 짐작케 한다. 이 점은 심리요법 연구가 지닌 특수성을 함께 검토할 필요가 있음을 보여준다.
심리요법 연구는 일반적으로 개별 증례 보고(case report)의 형식을 띠는데, 이는 학문적 성과를 드러내는 데에는 불리한 논문 형식이었다. 이는 생물학적 제제를 활용한 치료 연구 논문과의 비교를 통해서 더욱 분명히 드러나는데, 치료 연구의 경우 도입의 신속성, 증례의 규모, 그리고 그 치료 결과의 통계적 분석을 통해 성과를 ‘객관적’으로 가시화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교실의 인슐린 쇼크 요법 논문은 타 대학에서 추가 실험이 가능하도록 상세한 치료 프로토콜을 제시함에 더해, 시행 환자 수와 이환 기간에 따른 증상 관해율 등을 바탕으로 치료 효과를 정량적으로 보고함으로써, 서구의 선행 연구에 필적하는 치료 성과와 신속한 투고에 따른 선도성을 부각시킬 수 있었다(久保喜代二ㆍ服部六郎ㆍ明柱完, 1936a; 1936b). 반면 정신분석요법을 비롯한 심리요법은 그 효과를 정량화하기 어렵고 치료 결과 제시 또한 개별 사례에 대한 주관적 서술에 의존하는 경향이 강했다. 따라서 주변부 제국대학으로써 학문적 존재감 확보를 당면 과제로 삼았던 경성제대의 상황에서는, 즉각적이고 수치화 가능한 성과를 제시하기 어려운 심리요법 연구보다는 생물학적 치료 연구 등에 역량을 집중하는 것이 전략적으로 유리한 선택지로 작동했다.
심리요법 연구의 또 다른 제약은 장기간의 증례 관찰과 이에 따른 인력 및 시간의 과도한 소모였다. 1926년 구보가 보고한 강박관념증 환자의 경우, 약 한 달간의 입원 치료과정에서 매일 같이 정신분석요법이 적용되었고, 이후 약 6개월에 걸쳐 서신을 통한 간헐적 상담이 지속되었다(久保喜代二,1926a: 316). 히카루의 히스테리 환자 증례에서도 한 달 반 동안 20회 이상의 꿈 해석과 자유연상이 이루어졌으며, 이마저도 환자의 개인 사정으로 치료가 중단되면서 예정보다 단축된 것이었다(光信幸, 1930: 1523). 이러한 사례들은 당시 소수 인력으로 운용되던 경성제대 신경정신과학교실에서 정신분석요법을 비롯한 심리요법 연구가 성과 산출의 효율성 면에서 불리했음을 보여준다.
또한 장기간의 치료는 진료비 상승을 초래했고, 이에 따라 치료비를 감당할 수 있는 환자를 확보하는 것 역시 쉽지 않았다. 구보는 1930년 “정신치료에 의한 의사 측의 정신적 노력과 필요로 하는 시간에 대한 물질적 보수를 지불하는 관념이 부족한 한, 본 요법[정신분석요법]은 언제까지나 실지의가(實地醫家)와는 연이 먼 것으로 여겨지지 않을 수 없다”라고 지적했고(光信幸, 1930: 1528),44) 비슷한 문제의식은 본토의 타 정신의학자 역시 제기한 바 있었다(杉田直樹, 1935: 3021). 식민지 조선의 경제 여건을 고려한다면, 장기간의 심리요법에 시간과 비용을 투자할 수 있는 환자를 확보하기란 일본 본토보다 한층 더 어려웠을 것이다.45)
종합하면, 경성제대 신경정신과학교실에서 정신분석학 연구가 지속되지 못한 이유는 구보 개인의 학문적 성향 변화나 이론 해석의 전환 때문만이 아니라, 학계 내 인적ㆍ지적 위계 속에서 학문적 위신을 확보하기 위한 전략적 판단과 식민지 의료 환경이 지닌 구조적 제약이 상호 작용한 결과였다고 할 수 있다. 주변부 제국대학의 교수였던 구보의 입장에서는, 비정량적이고 시간 소모가 크며 주류 학계의 연구 전통에서 벗어나 있던 정신분석학보다는 명확한 효과를 수치로 제시할 수 있는 생물학적 치료 연구 등에 교실 역량을 배분하는 편이 보다 현실적인 선택이었다. 이와 같은 정신분석학 연구의 사례는 경성제대에서의 지식 생산을 이해함에 있어 식민지라는 제도적 조건과 경성제대라는 기관의 특수성, 그리고 일본 본토 학계의 인적ㆍ지적 구조가 미친 영향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할 필요가 있음을 보여준다.

5. 맺음말

경성제대는 제국대학이라는 제도적 지위를 기반으로 다양한 학문적 배경을 지닌 연구자들이 활동할 수 있었던 공간이었다. 주임교수 구보 기요지는 취리히 유학을 통해 당시 일본 주류 정신의학계의 경향과는 구분되는 심리학 중심의 정신의학을 직접 습득함으로써, 경성제대에 정신분석학을 비롯한 독자적 연구 경향이 유입될 토대를 마련했다. 이러한 인적 기반에서 비롯된 서구 지식의 유입은 경성제대가 단순히 제국 본토의 지식을 수동적으로 수용하는 공간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신경정신과학교실 설치 이후 이루어진 일련의 정신분석학 연구는 경성제대에서의 지식 생산이 가졌던 일정 수준의 자율성, 그리고 선도적 위치에서 제국 학계의 연구 경향을 변화시키고자 했던 시도의 일면을 보여준다.
그러나 경성제대 신경정신과학교실의 지식 생산은 일본 정신의학계의 인적ㆍ지적 구조 속에서 이루어졌으며, 주변부 대학에서 학문적 위신을 확보해 나가야 했던 구보는 본토 학계 내부의 위계 구조를 지속적으로 의식해야 했다. 당시 일본 정신의학계는 구레 슈조를 중심으로 인적ㆍ지적으로 높은 단일성을 갖춘 집단이었고, 정신분석학은 그 안에서 주변적 연구 경향에 머물러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구보는 마루이와 연계를 통해 정신분석학 연구를 지속하기보다는, 주류 정신의학의 반감을 사던 마루이와 도호쿠학파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두는 방향으로 자신의 태도를 점진적으로 조정해 나갔다. 이는 단순히 이론에 대한 입장의 변화라기보다는 주류 정신의학계에 인적ㆍ지적 권위가 집중된 제국학계의 구조 속에서 경성제대 신경정신과학교실의 학문적 위상을 제고하기 위한 전략적 선택으로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정신분석학 연구의 중단은 경성제대 신경정신과학교실이 처한 제도적ㆍ환경적 제약 속에서 학문적 성과를 보다 효율적으로 가시화하고자 했던 연구 방향의 재편으로 해석될 수 있다. 학문적 위신 확보가 당면 과제였던 교실의 입장에서, 제한된 인력과 자원을 바탕으로 연구 성과를 제시하기 위해서는 장기간의 시간과 노력을 요구하면서도 그 효과를 명확히 드러내기 어려운 심리요법보다는, 생물학적 치료 연구와 같이 가시적 성과를 ‘객관적’ 지표로 제시할 수 있는 연구가 더 유리했다. 더군다나 식민지 조선의 의료 환경은 신경증 환자를 대상으로 하는 심리요법을 장기간 지속하는 것을 구조적으로 어렵게 만들었으며, 이러한 조건은 교실의 연구 방향이 점차 생물학적 치료 연구 등으로 기울어지도록 작용했다.
이상의 논의는 경성제대에서의 정신분석학 연구의 단절을 구보 개인의 이론 이해 변화로 환원하기보다는, 일본 정신의학계의 인적ㆍ지적 구조와 식민지 제국대학이라는 제도적 조건 하에서 형성된 전략적 조정의 결과로 재구성했다. 이를 통해 경성제대를 단순히 중심부 지식을 수용하는 공간이 아니라, 주어진 제약을 인식하면서 학문적 영향력 확보를 위해 연구 방향을 선택하고 조정해 나간 행위자적 실천의 장으로 위치 지을 수 있었다. 이러한 분석은 식민지 제국대학에서의 지식 생산을 이해함에 있어 지식의 내용뿐 아니라 연구 주제의 선택과 연구 방향의 전환을 가능하게 한 학문적ㆍ제도적 조건을 함께 분석할 필요성을 보여준다.

Notes

1) 도쿄제대를 비롯한 일본 내 대부분의 제국대학 의학부 및 의학교육기관에서 경성제대 신경정신과학교실(정식 명칭은 신경과학ㆍ정신과학 교실)에 상응하는 교실의 명칭은 ‘정신병학교실’이었다. 본고에서는 서술의 일관성을 위해 이와 같은 교실들을 일괄적으로 ‘신경정신과학교실’로 지칭한다.

2) 鄭元龍은 교실원 히카루 노부유키(光信幸)의 정신분석요법을 활용한 히스테리 증례 보고에 주목하여, 그 내용의 상당부분을 한국어로 번역하여 수록했다(鄭元龍, 1997: 107-114). 그리고 민성길ㆍ이창호는 경성제대 신경정신과학교실의 연구 활동 전반을 검토했고, 그 과정에서 정신분석학이 교실의 연구 주제 중 하나로 다루어졌음을 확인하여 그 내용을 비교적 상세히 서술했다(민성길ㆍ이창호, 2016: 149-151).

3) 니시 미나코(西見奈子)는 도호쿠제대 신경정신과학교실 주임교수 마루이 기요야스를 중심으로 전전 일본 정신의학자들의 정신분석학 연구를 살펴보는 과정에서 구보에 대해서도 간략히 언급했다(西見奈子, 2019: 82-84). 또한 이정민은 경성제대 신경정신과학교실 조수로 근무했던 명주완의 학문 이력을 검토하는 과정에서, 구보가 정신분석학에 관심을 보였던 사실을 소개했다(이정민, 2021: 235).

4) 이 시기 구보의 연구 이력은 1919년 10월 25일 기타사토연구회례회(北里研究會例會)에서 「發疹チフス和猿に於ける血小板數の變化」(발진티푸스 일본원숭이의 혈소판수 변화)라는 제목으로 발표한 기록만이 확인된다(細菌學雜誌, 1919b: 768).

5) 당시 구보의 기고 내용에 따르면, 의학부 졸업 후 해외로 유학한 일본인 유학생이 현지에서 정규학생으로 등록하는 경우는 드물었던 것으로 보인다(久保喜代二, 1921a : 476). 구보가 취리히 대학의 정규학생으로 등록된 기록은 다음 웹페이지에서 열람할 수 있다. Matrikeledition-Kubo Kiyoji, Universität Zürich, https://www.matrikel.uzh.ch/active/static/12387.htm. Accessed 13 March 2026.

6) 블로일러는 1911년 당대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던 에밀 크레펠린의 ‘조발성치매(dementia praecox)’ 개념을 재구성하여 ‘정신분열병(schizophrenia)’ 개념을 제시하는 등 당대 독일어권 정신의학의 핵심 인물로 활동하였다.

7) 久保喜代二, 「東八の窓より, あはれむベき精神病者のために【三】」, 『京城日報』, 1926년 6월 6일.

8) 久保喜代二, 같은 기사.

9) 블로일러는 프로이트의 초기 저작인 『히스테리 연구(Studien über Hysterie)』(1895, 공저)에 대해 호의적인 서평을 남겼고(Maetzener, 2018: 551), 『꿈의 해석』(1900)을 읽은 뒤 큰 흥미를 느껴 당시 부르크횔츨리에 재직하던 카를 융(Carl Jung, 1875–1961)에게 관련 발표를 요청했다. 융이 정신분석학을 접하게 된 계기 또한 블로일러의 소개였다(Falzeder, 2007: 345).

10) 정신분석학계의 교조주의적 태도에 대한 블로일러의 불만은 그가 1910년대 초반 프로이트에게 보낸 편지에서 잘 드러난다. 두 사람이 주고받은 주요 서신의 내용 및 그에 대한 해설은 Maetzener, C., “The Freud-Bleuler Correspondence: German Edition,” Journal of the American Psychoanalytic Association 66-3 (2018), pp. 549–568을 참조.

11) 현재까지 확인된 일본 정신의학자의 취리히 유학 사례는 구보 기요지와 기타바야시 사다미치(北林貞道, 1872–1948) (1917-1920년 유학)의 두 사례에 불과하다. 기타바야시는 도쿄제대 신경정신의학교실에서 다년 간의 수련을 거친 이래 아이치현립의전(나고야의대의 전신) 주임교수로서 일본 및 독일 주류 정신의학에 장기간 노출된 이후 취리히로 유학하게 되었다.

12) 도쿄제대 신경정신과학교실 3대 주임 구레 슈조(呉秀三), 4대 주임 미야케 고이치(三宅鑛一), 그리고 그 밖에 해당 교실 출신으로 타 대학 주임교수직에 있었던 다수 정신의학자가 빈대학 신경학연구소를 거쳐갔다(氏家信, 1942: 52–53). 구보가 유학하던 시기 그는 구레 슈조의 문하생으로 나가사키 의전의 교수직에 있던 사이토 모키치(齋藤茂吉), 다카세 기요시(高瀬清) 등과 함께 연구실 생활을 했다(加藤淑子, 1978: 42-44).

13) 「郵船便最近歸朝者」, 『日英新誌』 8(통권 93호) (1923), 11-14쪽; 「北海醫大學位授與決定者」, 『醫海時報』, 1535, (1923), 2169쪽.

14) 구보 기요지의 장인이었던(山崎佐, 1941: 3; 人事興信所, 1941: ク10) 하타 벤조는 도쿄제대 제1외과학교실 출신으로 1904년 이래 홋카이도에서 활동해 왔다. 그는 1921년부터 1925년까지 홋카이도제대 의학부 초대 의학부장으로 재임했다(泉孝英, 2012: 487).

15) 도쿄부립 마쓰자와병원은 당시 700병상으로 규모와 시설 면에서 일본 정신의학계를 대표하는 정신병원으로, 도쿄대학 신경정신과학교실의 임상 수행과 연구의 대부분이 이루어지던 공간이었다(菅修, 1937: 805).

16) 해당 환자의 증상에 대해 구레 슈조가 강연하고, 그를 구보가 기록한 내용이 본 증례에 앞서 『신경학잡지』에 게재된 바 있다(呉秀三, 1925). 구레는 이 환자의 치료를 구보에게 일임했고, 이에 따라 구보는 1925년 2월부터 환자를 담당하여 한 달 간 환자를 직접 치료했다. 그해 4월 조선총독부의원으로 자리를 옮긴 이후에도 서신을 주고받으며 총 6개월 간 치료를 이어갔다(久保喜代二, 1926a: 320-322).

17) 환자는 당시 대학 휴학생으로, 중학교 시절부터 지속된 우울감과 반복적 확인행동, 그리고 성(性) 관련 강박증상을 호소했다. 또한 성장 과정과 관련하여 어린 시기 부모의 동침 목격, 유년기 성적 접촉 경험, 청소년기 동성간 성폭력 피해 등을 보고했다(久保喜代二, 1926a: 314-317).

18) 모리타요법은 당대 일본의 정신의학자 모리타 마사타케(森田正馬)가 제시한 신경증에 대한 심리요법으로, 신경증 증상을 제거하려 하기보다 그 존재를 인정한 채 현실 생활을 지속해 나감으로써 증상의 완화를 도모하는 접근을 취했다. 일본 정신의학계에서 모리타요법이 차지한 위치에 대해서는 본고 3.2절 참조.

19) 아들러는 초기 프로이트 학파의 일원으로 활동했으나, 1911년 무렵 결별한 뒤 ‘열등감과 그에 대한 심리적 기제’를 정신병리 이해의 핵심으로 삼는 독자적 이론을 전개했다.

20) 구보는 환자가 의사에게 보이는 정동적 애착이 치료 과정에서 부모-연인-친구 관계와 유사한 형태로 이동하는 양상을 설명하는 데 ‘리비도의 전환’ 개념을 사용했다. 이는 환자의 의사에 대한 비대칭적 의존이 점차 완화되고, 의사를 친구이자 상담자로 대하는 보다 안정된 관계로 재편되는 과정을 의미했다(久保喜代二, 1924d: 246-247).

21) 마쓰다 도시히코(松田利彦)는 경성제대 설립 당시 제국대학 교수직에 걸맞은 경력을 가진 연구자들이 부임을 선호하지 않았던 탓에, 초대 의학부장 시가 기요시를 비롯한 교수 초빙 담당자들이 인맥을 통해 제자를 추천받거나 직접 제자를 기용하는 방식으로 인사를 충원했음을 보였다(松田利彦, 2014: 121-123, 130-131). 시가 기요시는 저명한 세균학자로, 기타사토연구소, 게이오대학 의학부 세균학교실 교수로 재임하던 중 1920년 조선으로 건너와 조선총독부의원장 겸 경성의학전문학교 교장을 지냈다. 그는 경성제대의 설립 과정에 적극적으로 관여했으며, 1926년 의학부 개설과 함께 초대 의학부장에 취임했고, 이후 제3대 경성제대 총장(재직 기간: 1929-1931)을 역임했다. 시가 기요시의 조선에서의 활동에 대해서는 마쓰다 도시히코, 「시가 기요시(志賀潔)와 식민지 조선」, 『한림일본학』 25 (2014), 33-58쪽을 참조.

22) 그가 조선 부임 직후 조선총독부의원 정신병동의 시설과 전반적 연구 환경에 강한 실망을 표했다는 점(久保喜代二, 「東八の窓より, あはれむベき精神病者のために(一)」, 『京城日報』, 1926년 6월 4일.), 명시적 주체는 드러나지 않지만 초빙을 받아 조선에 왔다는 기록이 확인되는 점(「新京城の觸感(八), 東部篇(H), 連建ㆍ東崇ㆍ苑南洞の卷(三)」, 『京城日報』, 1932년 11월 25일.), 그리고 그의 추후 연구 경력 전반에서 조선 및 조선인을 주된 연구 과제로 삼으려는 적극적 시도가 보이지 않았다는 점이 이러한 해석을 뒷받침한다.

23) 전전 일본의 의학부 임상의학교실은 부속의원의 의국과 대학의 강좌가 동일한 인적 구성을 이루는 ‘의국강좌제(醫局講座制)’ 체제로 운영되었다. 이 체제에서 주임교수는 교실의 진료ㆍ연구ㆍ인사 전반을 통괄하는 권한을 지니며 교실 운영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通堂あゆみ, 2014: 150).

24) 안종일은 1927년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졸업했고, 졸업 후 조선총독부의원 및 경성제대 신경정신과학교실에서 활동했다. 1933년 교실을 떠난 이후 전주 마약중독자치료소에서 수년간 근무했고, 1938년 「마약중독 동물에서 중추신경계통의 조직병리학적 비교연구」로 교실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폐결핵으로 사망했다. 「安鍾一氏 博士論文通過」, 『매일신보』, 1938년 1월 22일, 3면; 「人事」, 『매일신보』, 1938년 5월 13일, 1면.

25) 히카루 노부유키는 1929년 게이오대학 의학부를 졸업했으며, 경성제대 신경정신과학교실에서 1930년부터 조수로 근무하여 33년 12월 박사학위를 받았고, 35년까지 교실에서 근무한 이후 만주에서 개업한 것으로 확인된다(帝國秘密探偵社, 1942: 241). 「臨床學的に最初の論文城大の光氏」, 『京城日報』, 1933년 10월 5일, 7면.

26) 동일한 제목으로 『치료급처방』지 11권 11호 (1930년 12월 발간)에 전문(全文) 게재되었으며, 『최신치료』지 7권 1,2,3호 (1931년 1,2,3월 발간)에도 순차적으로 연재되었다.

27) 히카루는 이 환자의 증상이 프로이트가 말한 전환성 히스테리에 해당한다고 판단했으며, 정신분석요법을 통해 성장과정에서의 무의식적 갈등, 특히 오빠와의 관계에서의 여러 무의식적 원망(願望)과 열등감정이 의식화됨에 따라 치료가 가능했다고 분석했다(光信幸, 1930: 1527-1528).

28) 3.2.절에서 후술

29) 구레는 1901년부터 1925년까지 도쿄제대 신경정신과학교실 제3대 주임교수를 역임했다. 그는 재임 기간 동안 다수의 후학을 양성하는 한편, 1902년 도쿄제대 제1내과에서 신경계 질환을 담당하던 미우라 긴노스케(三浦謹之助)와 함께 일본신경학회를 창립함과 동시에 학회지 『신경학잡지』를 창간하여 학계 내 지식 교류의 활성화를 도모했다. 또한 일본 제국 내 관립정신병원 설립을 촉진하고 정신의학자의 활동 영역을 제도적으로 확장하는 「정신병원법」(1919) 제정 과정에도 적극 관여했다(岡田靖雄, 2002: 163–164, 173).

30) 예를 들어, 뮌헨에서 연구하던 중 1차대전 발발로 인해 필라델피아로 연구 거점을 옮겨야 했던 스기타 나오키는 유학 당시 『신경학잡지』에 기고한 글에서 “아시는 바와 같이 미국 정신병학계의 경향은 크게 정신분석에 향해 있어 화학 또는 병리해부학 방면으로 연구하는 학자는 극히 적고, 종래 독일에서 해왔던 것과 같은 일을 하는 것은 상당히 곤란하다”라고 언급했다(杉田直樹, 1915: 754-755). 당시 미국으로 유학한 일본인 정신의학자 중 마루이 기요야스 외 사이토 다마오(齋藤玉男), 스기타 나오키(杉田直樹), 고미네 시게유키(小峯茂之) 등이 정신분석학에 대해 어느 정도 관심을 보였음이 확인된다. 사이토의 경우 그가 재직한 니혼의대(日本醫大) 강의록에서 정신분석 이론이 비교적 구체적인 형태로 소개되었으며(松下正明, 1985: 747), 스기타의 경우 정신분석 관련 기고를 상당수 남기기도 했다. 다만 이들은 자신들의 소속 교실에서 정신분석학을 교육하고 임상에서 연구하는 단계에 이르지는 못했다. 한편, 독일ㆍ오스트리아와의 국교 회복 이후, 일본 정신의학자의 선호 유학지는 다시 독일어 권으로 회귀했는데, 1920년대 중반 이후 전전 일본에서 미국으로 유학한 정신의학자는 단 한 명에 지나지 않았다(岡田靖雄, 1994b: 422).

31) 마이어는 제1차 세계대전 무렵까지는 정신분석에 상당한 관심을 보였다(Lamb, 2014: 244; 松下正明, 1983: 747). 이후 그는 정신분석학에 상대적으로 비판적인 위치에 서게 되었지만(Lamb, 2014: 230-231), 그럼에도 그가 제시한 정신생물학(psychobiology)은 심리학 중심 정신의학을 지향함으로써, 미국 내에서 정신분석학이 수용 및 확산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했다고 할 수 있다(Hale, 1995: 167).

32) 마루이에 앞서 규슈제대 신경정신과학교실 소속 연구자들이 관련 저작을 남기기는 했으나, 이들은 임상적 적용보다는 비(非)임상가들과 유사한 이론 중심 접근 방식을 취하고 있었다(Takemoto, 1990: 955-958). 마루이 기요야스와 도호쿠제대 신경정신과학교실의 정신분석학 연구에 관한 상세한 설명은 니시 미나코(西見奈子)의 『いかにして日本の精神分析は始まったか―草創期の5人の男と患者たち』 (東京: みすず書房, 2019) 제2장. 「精神醫學における精神分析-丸井清泰」을 참조.

33) 1902년 일본신경학회로 창립되었으나, 1935년 일본정신신경학회로 명칭을 변경했다. 이에 따라 학회지의 제호 역시 『신경학잡지』에서 『정신신경학잡지』로 변경되었다.

34) 1943년까지 총 9권에 걸쳐 발행된 『도호쿠제대의학부정신병학교실업보(東北帝大醫學部精神病學敎室業報)』 (부제: 정신분석학논총(精神分析學論叢)였다.

35) 1928년부터 홋카이도제대, 그리고 1936년부터 도쿄제대 신경정신과학교실 주임교수(5대)를 역임했다.

36) 모리타 마사타케(森田正馬, 1874–1938)는 1902년 도쿄제대를 졸업하고 1903년 동 대학 신경정신과학교실 조수가 되었다. 1906년부터 지케이카이(慈惠會)의학전문학교 교수를 지냈으며, 1910년대 중엽부터 강박관념 등 여러 신경증 증상에 대한 ‘모리타요법’을 체계화해 나갔다(高良武久, 1979: 239).

37) 양자 간의 교신은 1927년, 도호쿠제대 측의 프로이트 저작의 일본어 번역 허가 요청에서 시작되었고, 1931년 무렵 마루이는 비(非)임상가를 중심으로 도쿄에서 국제정신분석학회(International Psychoanalytic Association) 일본 지부를 설립하는 데 대응하여, 정신의학자 중심의 센다이(仙臺) 지부의 별도 설립 허가를 요청하고 있었다(이정민, 2021: 236-240).

38) Image 17-21, Sigmund Freud, “Sigmund Freud Papers: General Correspondence, -1996; Marui, Kiyoyasu, 1927 to 1931, with letter from him to K. R. Eissler, 1952,” The Library of Congress. https://www.loc.gov/item/mss3999000980/. Accessed 13 March 2026.

39) 구보의 조선총독부의원 및 경성제대 신경정신과학교실 재임기간(1925-1941)에 확인되는 정신분석학 관련 학술지 투고는 발표문을 제외한 총 94편의 논저 가운데 7편이었으며, 그 중 실제 치료 증례를 다룬 것은 안종일의 발표문을 포함하더라도 3편에 지나지 않는다.

40) 마루이는 이러한 구보의 발언을 무례하다고 지적하며 제자를 대신하여 응수했다(山村道雄, 1939: 449-450).

41) 한편, 구보는 자신이 이해하고 있는 정신분석학이 마루이의 해석보다 오히려 정통에 가깝다고 인식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교토제대의 사토 고지는 논문을 통해 구보가 일본신경학회에서 마루이의 정신분석학 해석은 정통이 아닌 미국 전래(傳來)라며 야유(彌次)했다는 일화를 전했다(佐藤幸治, 1933a: 294). (시기상 1931년 혹은 1932년 총회에서의 사건으로 추정된다) 구보는 자신이 취리히와 빈이라는, 프로이트 학파의 본거지에서 직접 수학했다는 점에서 자부심을 지니며, 미국을 통해 정신분석학을 접했던 마루이의 전문성에 의구심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42) 1940년 『일본의사신보』는 「특별과제–정신분석에 대하여」라는 제목의 특집을 구성하여 정신분석학에 대한 전문가의 의견을 수록했다. 해당 특집에는 마루이, 구보를 포함한 네 명이 각각 의견을 개진했다. 여기서 마루이는 「어찌하여 우리나라 의학계는 정신분석에 대해 이리 둔감한 것인가」라는 직설적인 제목을 내걸었다(丸井清泰, 1940).

43) 정신분석학 연구가 더 이상 등장하지 않았던 1930년대 중반 입국한 의국원들 역시 정신분석학에 대해 상당한 지식을 갖추고 있었다. 예를 들어, 1934년 입국한 이토 고마오(伊東高麗夫)는 조교수로 임명된 1942년 이래로 학생 강의에서 정신분석학을 다루었으며(兪碩鎮, 1974: 140), 1935년 입국한 명주완 역시 정신분석학 관련 언론 기고를 여러 차례 발표했다(明柱完, 1941; 조두영, 2011: 63–65). 명주완은 프로이트 사망 직후 『조선일보』에 정신분석을 소개하는 글을 기고하기도 했다. 明柱完, 「[學藝]精神分析學의輪廓―創始者프로이트博士의訃告를듣고」, 『조선일보』, 1939년 9월 30일, 3면; 明柱完, 「[學藝]꿈의判斷과리비도―設―精神分析學의輪廓」, 『조선일보』, 1939년 10월 3일, 3면.

44) 히카루의 글에 부기(附記) 형식으로 구보가 덧붙인 내용이다.

45) 그 밖에 경성제대 신경정신과학교실에 특이적이었던 언어적ㆍ문화적 조건 역시 고려될 수 있다. 통역을 거쳐 진술하는 과정에서 조선인 신경증 환자들이 상대적으로 수동적인 태도를 보였다는 언급이 확인되며(杉原滿次郎, 1930: 494), 일본 문화 특유의 종교 관념이 등장하는 환자 사례도 보고된 바 있다(久保喜代二, 1926a: 315). 이러한 언어적ㆍ문화적 장벽은 조선인 환자 증례의 확보를 어렵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다만 조선인 교실원이 조선인 환자에게 정신분석적 접근을 시도한 사례 역시 확인되므로, 이러한 요소를 심리요법 연구 중단의 주요 원인으로 간주하기는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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