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tractThis study examines the scope and underlying causes of South Korean physician migration to the United States between 1965 and 1980. During this period, substantial numbers of Korean physicians immigrated to the U.S., with most remaining permanently. While previous accounts have relied primarily on memory and anecdotal evidence, this paper provides a quantitative analysis of this migration phenomenon using data from the U.S. Immigration and Naturalization Service (INS) and diverse domestic and international sources. The primary institutional catalyst for this migration was the 1965 revision of U.S. immigration law, combined with increased demand for medical professionals in America. Persistent domestic push factors—including low income levels and inadequate residency training conditions in Korea—further intensified the outflow. The Korean government’s failure to implement effective countermeasures accelerated this trend. Physician migration, however, declined significantly in the mid-1970s due to tightened U.S. immigration requirements and structural transformations in Korean healthcare. These changes included the introduction of national health insurance and expanded medical infrastructure through foreign medical loans, which created new domestic opportunities for Korean physicians and substantially reduced emigration incentives. This study concludes by connecting this historical phenomenon to contemporary issues. While the transnational brain drain has largely ended, it has evolved into a regional imbalance characterized by physician concentration in metropolitan areas. The study’s findings suggest that strengthening regional healthcare infrastructure may provide a viable solution to this persistent disparity.
1. 들어가는 말: 기억되지만, 파악되지 않은 사태1960년대와 1970년대에 걸쳐, 한국의 많은 의사는 미국을 향했다. 그리고 그렇게 도미를 택한 의사 대부분은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졸업 동기 중에 미국에 간 사람이 17명인데, 돌아온 사람은 오로지 나뿐”이라거나(이영호, 2014: 37), “우리 1년 선배는요, 67명이 졸업했는데, 거의 50명 가까이 미국에 거주”하고 있다는 여러 의사의 증언은 도미 사태의 규모가 절대 작지 않았음을 짐작게 한다(이영호, 2014: 37; 김일순, 2011: 143). 미국으로 건너간 이가 얼마나 많았던지, 외려 한국에 남아있던 이들이 “낙오되는 것 같고 불안”을 느낄 정도였다(김홍복, 2013: 71).
사태의 규모 탓에, 의사 도미는 당대에도 심각한 사회 문제로 인식되었다. 먼저 도미는 오랜 의료인 부족 문제를 더욱 악화하는 원인으로 지목되었다. 인구 1,000명 당 의사 수가 일본의 1/3 수준인 데다, 전국 읍면의 35.8%가 무의촌이던 당대의 상황에서, 도미는 한국 의료를 위협하는 중대한 문제였다.1) 합동통신은 도미가 진행되던 1973년, 영문 연감 『Korea Annual』(한국 연감)을 통해 이렇게 지적했다. “한국은 오래도록 의사, 간호사 등 의료 인력의 부족에 마주하고 있다. 이는 최근 의료 인력 다수가 … 한국을 떠나면서 악화하고 있다. 의료 인력의 부족은 특히 농촌과 벽지의 의료 이용을 어렵게 한다”(Hapdong News Agency, 1973).
동시에 도미 사태는 이공계 ‘두뇌 유출’의 연장으로 이해되기도 했다.2) 의학 이외의 분야에서는 이미 미국으로의 인력 유출이 상당한 수준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1960년대 말까지 해외 유학 이후 귀국하지 않은 이가 전체 유학생의 80% 이상일 정도였다(문만용, 2006: 238). 이러한 상황에서 의사 도미는 두뇌 유출 문제가 학문 전 분야로 확장될 수 있음을, 그리하여 “사회의 근대화, 경제개발의 실천, 학문의 발전, 기술의 향상 등 … 과업을 수행할 인적 요소”가 상실될 수 있음을 의미했다.3) 요컨대 의사 도미는 의료 인력 부족이라는 한국의 현실과 ‘조국 근대화’라는 한국의 미래를 위협하는 사건이었다.
사태의 엄중함이 연이어 지적되면서, 1970년대 들어 보건사회부는 실태 파악을 위한 조사에 착수했다.4) 1971년 국회 국정감사 당시 보건사회부는 1969년부터 1971년까지 의사 816명이 해외로 이민하였고 이 가운데 85%가 미국을 향했다고 대답했으며, 1974년 보건사회부를 연두 순시한 대통령 박정희(朴正熙, 1917–1979)에게 장관 고재필(高在珌, 1913–2005)은 1973년까지 2,500여 명이 도미하였다고 보고하였다.5) 대한의학협회 역시 실태 파악에 나서, 1974년 말 3,726명에서 4,762명의 의사가 외국을 향했다고 보고했다(김일순, 서경, 1977).
문제는 보고의 정확성과 깊이였다. 보건사회부와 대한의학협회의 추정 모두 정확한 수치와 거리가 있었다. ‘2,500여 명’이라거나 ‘3,726명에서 4,762명’이라는 보고는 사실상 사태를 정밀하게 파악하지 못했다는 자인과 다르지 않았다. 1973년 기준 한지의사를 포함한 의사 수가 16,982명이었으니, 오차 범위만 6.1%에 달하는 셈이었다. 추세와 원인에 대한 파악 역시 이루어지지 않았다. 보건사회부와 대한의학협회 모두 특정 시점의 현황만을 추산했을 뿐, 시간의 흐름에 따른 증감이나 증감의 배경이 되는 원인은 짚지 못했다. 그리고 이후에도 도미 사태는 정확한 분석과 연구의 대상이 되지 못한 채, 기억 또는 회상의 대상으로만 남아있었다.
기억되지만 파악되지 않은 사태에 관하여, 이 논문은 다음의 두 가지 측면에 관한 규명을 시도한다. 의사 도미는 시간에 따라 정확히 얼마나 증가 또는 감소했으며,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먼저 첫 번째 질문과 관련하여, 미국 이민귀화국(Immigration and Naturalization Service, INS)의 자료를 참고한다. 1979년 이민귀화국은 1965년부터 1977년까지 미국에 이민한 의사의 수를 집계하여 통계로 제시하였다(Miller, 1979). 1978년 이후 의사 이민자 수를 따로 제시하지 않는다는 한계가 있으나, 큰 문제는 아니다. 후술하겠지만 1970년대 후반이 되면서, 도미가 이미 많이 감소하였기 때문이다.
도미 증감의 원인에 대한 두 번째 질문은 상술할 필요가 있다. 세계 각지에서 미국으로 두뇌 유출이 진행되던 당시 국제노동기구(International Labour Organization, ILO)의 와타나베 스스무(渡辺 進)는 한 편의 보고서를 작성하였다. 여기서 와타나베는 두뇌 유출을 이민자 본인, 출신국, 수용국의 세 차원에서 분석할 수 있으며, 여기에는 이민자 본인의 지적 동기, 직업 성공의 기회 탐색, 수용국의 인력 상황 및 이민 정책, 출신국의 생활 및 경제 수준, 이민 규제 대책 등이 포함된다고 제안하였다(Watanabe, 1969).
와타나베의 분석 틀은 유용하지만, 일부 재정리될 필요가 있다. 이민자 본인에 해당하는 지적 동기나 직업 성공의 기회 탐색 등을 출신국의 유출 요인(push factor)과 수용국의 유입 요인(pull factor)이 창출한 구조의 효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도미 증감의 원인에 대한 질문은 다음을 의미한다. 동기와 제도 차원에서, 도미 증감에 영향을 미친 수용국 미국의 유입 요인과 출신국 한국의 유출 요인은 무엇인가?
수용국 미국의 유입 요인에 대해서는 이미 광범한 연구가 진행된 바 있다. 미군정기부터 1950년대에 걸친 미국 유학과 이민을 다룬 장영민의 연작 연구는 미귀국자의 실태와 미귀국의 이유, 양국 정부의 대책 등을 종합적으로 고찰한다(장영민, 2016; 2021). 여기에 과학기술 분야의 두뇌 유출에 초점을 맞춘 문만용의 연구도 참고할 수 있다(문만용, 2006). 이에 더해 이민에 초점을 맞추지는 않으나, 의료인의 미국 유학을 다룬 박지영, 황교련의 연구, 미국 선망을 다룬 박승만의 연구, 당대에 활동했던 여러 의사의 인터뷰 등은 당대 한국 의사에게 미국이라는 국가 또는 미국 의학이 어떤 의미였는지 엿볼 수 있는 근거가 된다(박지영, 황교련, 2021; 박승만, 2022).
상기한 연구가 한국인 의사가 느꼈을 미국의 ‘매력’을 보여준다면, 미국 의료의 상황과 의료인 이민 정책에 초점을 맞춘 연구는 이민을 가능케 한 미국의 현실을 보여준다. 미국을 향한 이민이 본격화했을 때 출간된 의료사, 의료 행정 연구자의 저작(Margulies and Bloch, 1969; Stevens, 1971; Stevens, Goodman, and Mick, 1978)은 미국 의료의 상황을 일목요연하게 보여주며, 미국을 향한 중저소득국 출신자의 이민을 다룬 라이머스의 연구(Reimers, 1985: 92–122)와 한국인 이민에 초점을 맞춘 김일수(Kim, 1981: 147–178), 이창신의 연구(Lee, 2011)의 연구는 미국 정부의 이민 정책 변화와 미국 의료의 구조 변화가 의사 인력 유출에 미친 영향을 종합적으로 분석한다.
다만 또 다른 축인 한국의 상황, 다시 말해 도미를 촉진한 한국의 환경과 이에 대한 한국 정부의 인식 및 조치에 관해서는 많은 연구를 찾아볼 수 없으나, 다행하게도 몇 편의 연구를 통해 일말의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 먼저 의료인 동원 제도의 변화와 수련의 파업을 다룬 신창훈과 정준호의 연구는 한국 정부의 대응을 돌아볼 기회를 제공한다(신창훈, 2023; 정준호, 2023). 상기한바 도미 문제는 무의촌 문제와 한데 엮여 있었고, 그러하기에 국가는 여러 방식으로 의사의 도미를 막아 무의촌 문제의 악화를 막으려 했기 때문이다. 또한 냉전 시기 한국의 ‘의료 외교’ 속에서 제3세계를 향한 한국 의사에 대한 정준호와 김진혁의 분석은 유출 요인의 부분을 제시한다(Jung, 2024; 김진혁, 2025). 그러나 이들 연구는 도미 자체에 초점을 맞추지 않으며, 따라서 여전히 도미를 촉진한 환경과 도미에 대한 대책 전반을 조명하기 위해서는 추가 연구가 필요하다.
이러한 연구 지형 속에서 의사 도미의 실태와 원인을 규명하기 위해, 아래에서는 먼저 이민귀화국의 자료를 바탕으로 시간에 따른 도미의 증감을 정확하게 제시한다. 그런 다음 전체 시기를 도미가 증가했던 1965년부터 1971년까지와 도미가 감소했던 1972년부터 1980년까지의 시기로 나누어, 각 시기에서 이민에 영향을 주었던 미국과 한국의 여러 요인을 포괄적으로 검토하고, 동기와 제도의 차원에서 이민 추세의 변화를 창출한 단기적 유출입 요인과 장기적 유출입 요인을 정리한다.
2. 이민의 유인과 도미의 증가, 1965–1971의사 도미는 시간에 따라 정확히 얼마나 증가하고 감소했는가? 이 값을 추산하는 한 가지 방법은 각 의과대학의 동창회 명부를 바탕으로, 미국 거주 인원의 총수와 비율을 정리하는 것이다. 다만 사람에 따라 도미의 시기가 다르고, ‘재미’에는 이민뿐 아니라 유학도 포함되기 때문에, 그런 방식으로는 정확한 값을 산출할 수 없다. 가장 정확한 수는 상기한 미국 이민귀화국의 보고서에 담겨 있다. 이에 따르면, 한국 의사에게 부여된 신규 영주권은 1965년 11명에서 1971년 965명으로 증가하였으며, 연평균 증가율은 해마다 두 배가 넘는 110.8%에 달했다(Miller, 1979)[표 1].
1) 생활 수준과 소득의 차이: 첫 번째 장기 지속형 동기급증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하나는 생활 수준과 소득의 차이였다. 1960년대와 1970년대, 한국 생활과 미국 생활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1960년 당시 한국과 미국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각각 79달러, 3,007달러로 미국이 한국의 38.1배에 달했고, 1970년에도 차이는 여전히 20.7배였다. 차이가 10배 밑으로 내려온 것은 1977년이 되어서였다[표 2].6) 적은 소득은 팍팍한 살림으로 이어졌다. 1965년 당시 말단공무원의 수입은 5,000원에서 6,000원 사이로, “점심한 그릇도 마음 놓고 못 사먹”는다는 한탄이 나올 정도였다.7) 미국을 향한 선망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봉급이 작기는 수련의도 마찬가지였다. 1960년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1963년부터 1967년까지 안과 레지던트 과정을 수련한 김홍복(金洪福, 1934–)은 당시 세브란스병원의 레지던트 월급이 1,000원이었다고 회고했다. 그의 말을 그대로 빌리면, 이는 “가장 싼 버스 왕복표 60장, 30일분” 또는 “제일 싼 담배 30갑 정도”였다(김홍복, 2013: 71). 물론 회고가 이따금 그러하듯, 약간의 과장이 없지는 않았다. 1964년의 한 보도에 따르면 수련의의 월급은 1,000원 또는 2,000원에서 시작해 해마다 조금씩 인상되었다.8) 그렇다고 해도 수련의의 수입이 높다고는 할 수 없었다.
한국 사회의 다른 이들처럼, 의사 역시 미국을 선망했다. 미국 의사는 수련의 시절부터 적지 않은 수입을 거두었다. 1967년 당시 미국에서 인턴과 레지던트의 월급은 각각 300달러와 550달러 수준이었다(Harmon, 1978: 506). 당시 원/달러 환율로 계산하면 한화로는 각각 148,775원에 해당하는 돈이었다.9) 같은 해 한국 대통령의 월급이 100,000원이었으니, 미국 수련의의 수입은 한국 최고위 공무원 수준이라고 할 수 있었다.10) 이러한 소식은 언론과 소문을 거쳐 한국에도 그대로 전해졌다.11)
이러한 차이는 미국행을 고민하는 강력한 동기가 되었다. 김홍복의 말을 계속해서 빌리면, 당시는 “다들 미국 가서 살고 싶어 했”던 시기였다(김홍복, 2011: 68). 처음에는 눌러앉을 생각 없이 유학을 간 이들조차도, 미국에서 여유 있는 삶을 경험하며 자연스레 이민을 결심하곤 했다. 1954년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한 유재덕(柳在德, 1930–2022)의 말처럼, “가서 보니까 거기 생활이 여기보다 윤택하니까 자연히 욕심이 생기고 그래서 주저앉는 것”이었다(유재덕, 2010: 157). 한국에 돌아온 이들도 미국의 윤택한 삶을 그리워하며 아쉬워하곤 했다.
2) 선진 의학과 수련 기회: 두 번째 장기 지속형 동기경제 수준의 차이뿐만이 아니었다. 선진 의학을 향한 갈망 역시 도미를 부추겼다. 한국에서 할 수 있는 일과 미국에서 할 수 있는 진료는 크게 달랐다. 외국 교과서나 논문을 통해 최신의 지식을 접한다고 해도, 인프라의 한계로 실제로 할 수 없는 경우가 허다했다. 이를테면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비뇨기과학의 주근원(朱槿源, 1918–2012)과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안과학교실의 최억(崔檍, 1923–2017)은 모두 장비의 부재 탓에 하고 싶은 수술을 할 수 없었다고 회고했다(이왕준, 2006: 93–94; 최억, 2012: 114). 임상뿐만이 아니었다. 대표적으로 고려대학교 의과대학 바이러스병연구소 이호왕(李鎬汪, 1928–) 또한 실험 장비의 부족으로 제대로 연구를 할 수 없었다(신미영, 2017).
폭넓은 수련 기회 역시 이민을 촉진했다. 한국에서는 대단한 선진 의학은커녕, 수련 기회 자체가 부족했다. 1971년 당시 전국 65개 수련 병원의 인턴과 레지던트 총원은 각각 544명과 1,717명으로,12) 같은 해 배출된 의사 1,185명 가운데 인턴이 될 수 있는 이는 전체의 45.9%뿐이었다(보건사회부, 1973: 136–137).13) 어렵게 인턴 자리를 구해도 끝이 아니었다. 레지던트 자리를 둘러싼 경쟁은 더더욱 치열했다. 김일순의 말처럼 “의과대학을 나와도 적당하게 취업할 곳이 별로 없”던 시기였다(김일순, 2011: 143). 더 나아가 성형외과처럼 애초에 한국에서는 제대로 수련할 수 없는 과도 있었다.14)
불평등한 젠더 질서는 수련의 문을 더욱 좁혔다. 여성은 인턴과 레지던트 지원 과정에서 지속적으로 차별을 받았다. 1960년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한 정을순(鄭乙順, 1936–)은 “여학생을 안 받는 과가 많았”고, “1등한 여학생보다 꼴지 한 남학생을 뽑겠다는 식”이었다고 회고했다. 수련 이후도 마찬가지였다. “스텝이 될 때에는 여학생이면 안 되는 거”였다. 이런 상황에서 “여학생들은 다 미국으로 갔”다(정을순, 2018: 203–208). 정을순의 진술은 실제 자료와 일치한다. 1974년 말 한국 의사 15,188명 가운데 여성은 2,016명으로 13.3%에 해당했다. 한편, 같은 시점 외국으로 이민하였다고 추산되는 4,762명 가운데 여성은 970명으로 20.4%였다(보건사회부, 1977: 6–7; 김일순, 서경, 1977: 129). 이러한 분율의 차이는 젠더 불평등이 이민의 유인으로 작동했음을 보여준다.
3) 정치적 안정성, 역사적 유대, 지식의 보편성: 그 밖의 장기 지속형 동기이민을 촉진한 다른 요인도 있다. 하나는 미국의 정치적 안정성이었다. 한국의 정치 상황은 계속해서 불안정했고, 이러한 불안정성은 박정희 군사정권이 들어서면서 더욱더 심화하였다. 일부 의사에게 이는 직접적 위협이었다. 마종기(馬鍾基, 1939–)가 대표적이었다. 마종기는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1963년 공군 중위로 임관하였다. 재경 문인 한일회담 반대 성명서에 이름을 올렸다는 이유로 1965년 공군 방첩대에 체포되어 구금되었고, 이후 제대 직후 도미를 강요받아 한국을 떠나게 되었다(마종기, 2018: 135–137). 물론 마종기와 같은 사례가 많지는 않았겠으나, 격변하는 정치적 상황은 도미를 부추긴 한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었다.
와타나베의 지적처럼 역사적 유대와 지식의 보편성 역시 영향을 미쳤다(Watanabe, 1969: 425–426). 해방 이후 긴밀해진 한미 관계는 여러 나라 가운데 미국을 택하는 계기가 되었다. 언어의 문제가 없지 않았겠으나, 그것은 어느 나라로 이주하건 공통적으로 마주할 문제였다. 지식의 보편성도 중요한 요소였다. 시공간의 맥락에 따라 중요한 질병이 다르고 대처하는 방법도 같지 않다는 점에서, 의학은 분명 지역성을 띤 학문이었다. 그러나 보편성도 못지않게 강했다. 한국에서 일정 수준으로 수련을 받은 이는 미국에서도 금방 적응할 수 있었다. 이를테면 어쩔 수 없이 도미를 택한 마종기는 한국에서 방사선 판독을 익힌 덕분에, “엑스레이 컨퍼런스 할 때는 나 혼자 설치”곤 했다고 회고했다(마종기, 2018: 137–138).
다만 경제 수준과 수련 기회의 차이, 정치적 안정성과 역사적 유대, 지식의 보편성 등은 1960년대 이전부터 상수로 존재하던 요인이었다. 이는 이후로도 계속되었다. 의사 도미가 종결되던 무렵인 1975년에도 한국과 미국의 1인당 국내 총생산 차이는 여전히 12.6배에 달했고, 연구 및 진료 인프라의 문제, 정치적 불안정성 역시 해소되지 않았다. 따라서 지금까지 살펴본 여러 요인은 의사 이민을 추동한 장기적 요인으로 작동했을 수는 있어도, 이민의 급증과 급감을 설명해 주지는 않는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장기적으로 작동한 동기에 더해, 단기적 변화를 살펴야 한다.
4) 미국의 이민 문호 개방: 제도의 단기 변화주목해야 할 단기 국면의 한 가지 변화는 양국 정부의 이민 정책이다. 예상과 달리 한국 정부는 의사 이민이 본격화한 1965년부터 1970년까지 아무런 대책을 내어놓지 않았다. 오히려 의사 이민을 가능케 하는 제도의 창을 계속해서 열어 놓았다. 먼저 외국에서 전공의 수련을 받는 경우에는 여권이 자동으로 연장되었다. 선진의학의 도입을 위하여, 1955년 보건사회부와 국방부, 외무부가 합의하여, 1957년 정식으로 실행한 조치였다(보건사회부, 1957).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귀국을 전제로 해외 수련의 편의를 마련하기 위한 제도였지만, 현실 속에서는 아이러니하게도 이민의 첫걸음으로 작동했다.
이른바 ‘킴스플랜’ 역시 이민을 가능케 했다. 1958년 육군 의무차감 김수명(金洙明, 1925–)은 남성 의과대학 졸업생이 바로 군의관으로 징집됨에 따라 전문 과목 수련이 힘들어진다는 실정을 고려하여, 징집의 연기를 건의하였다. 이에 따라 1959년 국방부 장관 김정렬(金貞烈, 1917–1992)이 전문의 수련을 모두 마친 뒤 입대하는 방식으로 군 복무 제도를 전환하였고, 여기에는 김정렬의 이름을 딴 ‘킴스플랜’이라는 이름이 붙었다.15) 문제는 여권 자동 연장 제도와 마찬가지로, 이렇게 마련된 징집 연기 제도 덕분에, 입대를 미루고 도미한 다음 돌아오지 않는다는 선택지가 가능해졌다는 점이었다.
한국 정부가 사실상 의사 이민을 전면 허용한 상황에서, 이민의 추세는 미국 정부의 정책에 따라 결정되었다. 1965년까지 미국의 이민 제도는 매우 엄격하였다. 1921년의 「긴급 할당법」(Emergency Quota Act)과 1924년의 「존슨리드 법」(Johnson-Reed Act)은 국적별 이민자의 상한선과 서반구 이외 이민자의 총상한선을 설정, 이민의 문턱을 크게 높였다. 1952년의 「이민과 국적에 관한 법」(Immigration and Nationality Act of 1952), 이른바 「매카런-월터 법」(McCarran-Walter Act)에 의해 규제가 일부 완화되었으나, 여전히 이민은 힘들었다(민경희, 2008: 49–64).
의사도 마찬가지였다. 1956년 미국 정부는 J 비자를 활용한 교환 방문 프로그램으로 입국한 이는 미국을 2년간 떠나지 않으면 영주권자가 될 수 없다고 못 박았고, 1959년에는 여기에 더하여 수련받는 외국인 의사의 체류 기간을 최대 5년으로 제한하였다. 이는 외국인 의사의 수련을 어렵게 했다. 일반 외과를 포함한 일부 전문 과목의 경우에는 5년 안에 수련을 마칠 수 없었고, 설령 수련을 마친다고 하더라도 전문의가 되려면 추가로 1년에서 2년의 실무 경험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Stevens, 1971: 402).
이러한 상황은 1965년 「이민과 국적에 관한 법」이 개정되면서 변화하였다. 이미 여러 난민법, 임시 입국 허가, 특례법 등으로 「매카런-월터 법」의 할당제는 흔들리고 있었고, 여기에 1965년의 개정으로 국적별 할당제와 아시아-태평양 지역 할당제 역시 폐지되었다. 인본주의의 대두와 소수 민족 집단의 영향력 확대 등의 정치적 이유, 그리고 여기에 우주, 국방, 교육, 산업 분야의 성장에 따른 숙련 인력에 대한 수요 증가와 같은 경제적 이유가 맞물린 결과였다(민경희, 2008: 64–69; Lee, 2011: 318–328).
이민법 개정이 가져온 파장은 컸다. 먼저 아시아 출신 이민자가 급증하였다. 1965년 아시아계 이민자가 차지하는 비율은 전체 이민자의 5% 수준에 지나지 않았으나, 1972–1976년이 되면서 이 값은 32%로 증가했다. 특히 눈여겨볼 지점은 전문직 이민의 증가였다. 개정된 이민법에 따른 이민 신청자의 분류 체계 속에서, 전문직 종사자와 과학기술자는 높은 순위를 차지했다. 이들은 노동부 장관의 승인 없이도 이민할 수 있었고, 이에 따라 한국, 대만, 필리핀의 전문직이 대거 미국으로 이주하였다(민경희, 2008: 64–69; Lee, 2011: 328–333). 1965년부터 시작된 한국 의사의 도미 현상은 결정적으로 이민법의 개정에 따른 결과였다.
5) 미국 사회의 의사 수요 증가: 구조의 장기 변화물론 이민의 문호가 열린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곧 이민자의 증가를 의미하지는 않았다. 이민 이후의 일자리가 확보되지 않는다면, 이민은 그리 쉽게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1965년 이민법 개정을 앞두고, 미국 존슨 행정부(1963–1969)와 입법부는 이민자의 증가를 예상하지 않았다. 법무부 장관 로버트 케네디(Robert F. Kennedy, 1925–1968)의 발언이 대표적이었다. 1964년 하원에 출석한 로버트 케네디는 첫해에는 아시아 출신 이민자가 많을 수 있겠으나, 이후로는 큰 유입이 없으리라 예상한다고 진술했다. 이들에게 이민법 개정은 실제 이민을 유도하기보다는, 할당제의 차별성을 폐지하는 상징적 입법 활동이었다(Lee, 2011: 328–330).
이들이 놓친 것은 새롭게 열린 이민의 문을 활용하려는 여러 집단의 의지였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는 변화한 이민 제도를 활용하여, 전문직 노동력을 확보하려던 미국 병원 자본이 있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개원의 위주의 미국 의료는 대형 병원을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이민법의 개정과 함께 메디케어(Medicare)와 메디케이드(Medicaid)가 시행되면서 의료 수요가 급증했고, 이렇게 증가한 수요를 대형 병원이 그대로 흡수한 결과였다(스타, 2023: 444–467). 미국 이민귀화국의 리처드 밀러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요약했다. “미국 국회는 아시아-태평양 국가에 닫혀있었던 대규모 이민의 문을 열어젖히는 동시에, 의료 서비스를 향한 수요 증가를 유발했다”(Miller, 1979: 6).
문제는 병원의 성장세와 인력 충원 사이의 틈이었다. 미국의사협회는 압력을 통해 의과대학 입학 정원을 계속해서 동결했고, 그 결과 1950년과 1960년 사이 인구 대비 의사 비율은 오히려 감소했다. 미국 정부가 1963년부터 의과대학 추가 설치를 장려하고 재정 지원을 확대했지만, 인력 양성에 오랜 시간이 필요한 의료 분야의 특성상 의사 인력은 여전히 부족했다. 설상가상 베트남 전쟁으로 인해 다수의 의사 인력이 징집되면서, 의사 인력 부족 문제는 더욱더 심화하였다(Alam, 2018). 더 큰 문제는 어렵게 양성된 의사 인력마저도 일부 인기과와 개원가에 집중되었다는 점이었다. 공공 병원과 비인기과를 향한 외면은 의료 인력의 양적 부족 문제를 질적 차원에서 더욱 심화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외국인 의사는 대형 병원의 매력적인 선택지로 부상하였다. 상대적으로 인건비가 적게 들고, 공공 병원이나 기피 과에 대한 거부감도 적었기 때문이다(Stevens, 1971: 398–399). 이주하는 처지에서는 기피 과를 피할 수도 없었고, 설령 기피 과라고 하더라도 본국보다는 처우가 좋았기 때문에 피할 이유도 없었다. 또한 언어가 유창하지 않고 지역 기반도 없는 외국인 의사에게는 개원보다는 외려 시스템에 따라 작동하는 병원 환경이 나을 수 있었다. 실제로 당대의 보고와 일부 의과대학 동창회 명부를 바탕으로 한국인 의사의 전공 선택을 살펴보면, 절대적인 자리가 많았던 내과나 외과 이외에도, 당시 기피 과로 분류되던 마취과, 정신과, 산부인과, 병리과, 방사선과, 소아과 등을 선택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김일순, 서경, 1977; 가톨릭대학교 의과대학 동창회, 1991; 2002;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미주동창회, 1984)[표 3].
다만 모든 의사의 이민이 허가되지는 않았다. J 비자를 활용한 교환 방문 프로그램으로 많은 외국인 의사가 들어오면서, 미국의사협회 의학교육위원회와 미국의과대학연합(Association of American Medical Colleges)은 학력을 인정할 수 있는 외국 의과대학의 목록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에는 한계가 있었고, 이에 따라 1957년 외국인 의사의 능력을 검정하기 위한 ‘외국 의과대학 졸업생 교육위원회’(Educational Council for Foreign Medical Graduates, 이하 ECFMG)가 운영되기 시작했다.16)
1958년 시작된 ECFMG 시험은 미국 이민의 걸림돌로 작동하였다. 합격률은 높지 않았다. 1975년 기준 전체의 36.4%만이 시험을 통과했다(Miller 1979: 8). 오전과 오후에 걸쳐 내과학 140문항, 외과학 80문항, 소아과학, 산부인과학, 기초의학 각각 60문항, 총 400개의 문항에 답해야 했고, 이 가운데 적어도 300개 문항을 맞춰야 합격할 수 있었던 탓이었다(Stevens, 1971: 400, fn 19.). 그러나 한국 의사의 합격률은 낮지 않았다. 모 대학의 경우 많을 때는 한 학번의 60%가 미국으로 건너갔는데, 이는 한국 의사의 합격률이 평균을 웃돌았음을 시사한다. 실제로 김일순은 “우리나라 의사들의 합격률이 대단히 높았”다고 회고했다(김일순, 2011: 143).
ECFMG 시험을 통해 외국인 의사의 수준이 검증되고, 이민법 개정으로 의료 인력의 이민이 손쉬워지면서, 여러 병원은 적극적으로 외국인 의사 유치에 나섰다. 한국인 의사를 데려가기 위해 “한국에 와서 호텔에 방을 얻고 상주”할 정도였다(조범구, 2016: 126). 어떤 이들은 환심을 사기 위해 ECFMG 수험료를 대납하거나, 가운과 신발을 챙겨주기도 했다. 한국인 의사는 오히려 병원을 골라잡을 수 있었다. 정을순은 “응답이 몇 군데서 오면 그중에서 맘에 드는 병원을 골라 가지고 갔”다고 회고했다(정을순, 2018: 205).
이렇듯 높은 생활 수준과 소득, 넓은 수련 기회와 같은 장기적 동기와 이민법의 개정, 의사 인력을 향한 수요 증가와 같은 단기 국면의 변화가 맞물리면서, 한국의 여러 의사는 미국을 향했다. “전국 의과대학 졸업생들은 학생시절은 물론 졸업 후에도 이 [ECFMG] 시험 준비를 모두 열심히 하였”고, 운이 좋게 인턴이 된 이들은 “바쁜 인턴 생활을 하면서도 시험 준비”를, 인턴 대신 “군에 간 사람들은 군에서 ECFMG 시험 준비”를 하던 시기였다(김일순, 2011: 143; 김홍복, 2013: 71). 심지어 이미 종합병원에 자리를 잡은 이들도, 더 나은 조건을 찾아 미국을 향했다(조범구, 2016: 129–130). 그러나 급증하던 이민은 1971년이 되면서 갑자기 감소세로 전환했다. 무슨 이유 때문이었을까. 이제 감소 이면의 요인을 검토할 차례이다.
3. 의료 구조와 정책의 변화와 도미의 감소, 1971–1980급증하던 의사 도미는 1971년을 기점으로 감소하기 시작했다. 마찬가지로 미국 이민귀화국의 자료에 따르면, 1965년부터 1971년까지 110.8%이던 연평균 증가율은 1971년에서 1977년 사이 -27.8%로 전환되었다. 1971년 전후의 수치 변화는 더 극적이다. 1970년과 1971년 사이의 증가세는 323.2%에 달했으나, 1971년과 1972년 사이의 증가세는 -20.4%였다. 그렇다면 다시 질문을 던질 수 있다. 도미는 왜 감소했는가? 다시 말해 동기와 제도의 차원에서 장단기적으로 어떤 변화가 있었기에, 도미가 감소하였는가?
1) 한국의 의과대학 정원 확대: 근본적이나 간접적인 장기 대책도미 현상에 대응하기 위해, 한국 정부는 크게 두 가지 대책을 내어놓았다. 하나는 의과대학을 증설하여 공급을 늘리는 것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여행과 이민을 어렵게 함으로써 의사 유출 자체를 단속하는 것이었다. 각각에는 나름의 장단이 있었다. 후자는 직접적인 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 대책이었으나 강제성 탓에 반발을 마주할 수 있었고, 전자는 도미에 대한 직접적인 대책도, 단기간에 효과를 볼 수 있는 대책도 아니었으나, 장기적으로 보면 도미에 따른 유출을 상쇄할 수 있는 근본적인 대책에 해당했다.
당시 정부 내에는 의사 인력에 관한 두 가지 계획안이 존재했다. 하나는 과학기술처 안으로, 1967년 8월 과학기술처 내에 설치된 인력개발연구소에서 작성한 것이었다. 박정희 군사정권은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부터 인력 계획을 수립하였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5년 기한의 단기 계획에 지나지 않았다. 장기 계획의 필요성이 계속해서 제기됨에 따라, 1966년 5월 경제기획원 내에 인력개발위원회를 설치하였고, 이듬해 4월에는 과학기술처를, 그리고 같은 해 8월에는 과학기술처 내 인력개발연구소를 설치하여 인력개발위원회의 실무를 담당하게 했다.17)
과학기술처는 1968년 12월, 의사 인력을 포함한 종합 인력 계획을 제시하였다. 과학기술처의 전망에 따르면, “인구의 자연증가와 국민소득 수준의 향상에 따른 국민의 의료기관 이용률의 상승으로 의사 수요는 점차 증대”될 것이었다. 문제는 공급이었다. 현행대로라면 의사 인력에 대한 수요가 공급을 웃돌아, 1986년 기준 13,800명의 의사가 부족할 전망이었다[표 4]. 이에 따라 과학기술처는 “추계 기간 초부터 의과대학의 학생 정원을 증원”하고, “의대 및 의료기관을 분산”시켜 “의사의 도시 집중 성향으로 인한 지역적 불균형을 시정”할 것을 건의하였다(과학기술처, 1968: 97–99).
과학기술처와 별개로, 보건복지부 역시 ‘의사 수급 장기 계획’을 수립하였다. 자료의 부재로 원본은 확인되지 않으나, 당대의 보도를 통해 윤곽을 파악할 수 있다. 장기 계획은 몇 단계로 나누어 발표되었다. 먼저 과학기술처의 전망이 제시되기 몇 달 전인 1968년 5월, 보건사회부는 “무의면을 해소하고 의료균점 시책을 보강”하기 위한 장기 계획의 1단계를 발표하였다. 한의사와 한지한의사, 귀순의료업자 등을 대상으로 한지의사 국가시험 응시 자격을 임시로 부여하여, 부족한 의사 인력을 보충한다는 계획이었다.18)
장기 계획의 2단계는 의과대학 정원 확대였다. 과학기술처의 발표 이후인 1969년 4월, 보건사회부는 의과대학의 신설과 증설을 통한 의사 인력 공급 대책을 발표하였다. 먼저 전국 13개 의과대학 가운데 10개 의과대학의 정원을 각각 30명씩 증원하고, 1976년도에는 100명 정원의 의과대학 3개를 신설하는 동시에 기존 2개 의과대학의 정원을 각각 50명씩 증원한다는 계획이었다.19) 다만 다른 수치를 보도한 자료도 있어, 정확한 면모는 파악하기 힘들다. 대한의학협회의 기관지 『의협신보』는 1970년 60명, 1972년 50명, 1973년부터 1975년까지 각 80명 모두 350명을 증원하고, 1977년 80명 규모의 의과대학을 신설할 계획이 수립되었다고 보도하였다.20)
보건사회부와 과학기술처의 계획은 증원의 필요성을 지적한다는 점에서 방향을 같이 했다. 세부 사항의 차이가 없지는 않았다. 당시 대한의학협회에서도 이러한 차이를 지적하며, 부처 간 혼선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21) 물론 대한의학협회의 목적은 증원 자체를 백지화하는 데 있었다. 의대 증설 없이도 해외 유출만 막는다면, 의사 공급에 문제가 없다는 주장이었다.22) 이러한 반발에도 정부는 의과대학 정원 확대를 계속 추진해 나갔다. 계획이 발표된 이듬해인 1970년부터 1980년까지 9개 의과대학이 차례로 설치되었고, 신입생 수 역시 1,000명 대 초반에서 2,000명 대 초반으로 증가하였다.23) 이는 보건사회부의 원래 계획이었던 430명 또는 700명을 크게 웃도는 숫자였다.
2) 한국의 이민 규제: 실패한 단기 대책의사 공급을 늘려서 유출로 인한 부족 문제를 상쇄한다는 대책은 근본적인 해결책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없지 않았다. 증원된 인력 가운데 일부가 도미를 택한다고 가정하더라도 공급 자체가 2배가량 증가했기 때문에, 상황은 분명 개선될 것이었다. 문제는 의과대학 증원과 의사 인력 공급의 시차였다. 신규 인력이 배출되려면 적어도 6년의 세월이 필요했고, 여기에 수련 기간을 합산하면 10년 이상이 지나야 했다. 장기 대책에 더하여 단기 대책이 요청된 까닭이었다.
보건사회부는 1970년 7월, 해외 수련 제한 대책을 발표하였다. 인턴 수련은 전면 금지되었고, 레지던트 수련 역시도 해외 수련의 필요성과 귀국을 보증하는 기관장 날인이 없이는 불가능했다. 해외여행 자체도 까다로워졌다. 8월 11일 공포된 보건사회부 예규 제263호 「해외여행심사규정」 개정안에 따르면, 만 45세 이상이거나, 만 45세 미만인 경우 시도립의원, 기타 국공립 보건의료 기관에서 2년 이상 근무한 자 또는 보건소, 보건지소 또는 무의지역에서 1년 이상 근무한 자에 한하여 보건사회부 장관의 추천을 받을 경우에만 해외여행 허가를 받을 수 있었다.24)
이와 더불어 「해외여행심사규정」이 공포된 같은 날, 보건사회부는 예규 제266호로 「의료요원해외이주허가기준」을 발표하였다. 여행에 더하여 해외 이주 자체를 어렵게 하는 방안이었다. 이에 따르면 만 45세 이상이거나, 만 45세 미만인 경우 보건소 또는 보건지소에서 1년 이상 근무한 자, 시읍 또는 군청 소재지 이외의 지역에서 1년 이상 개업한 자, 보건소와 보건지소를 제외한 국공립 보건기관과 의료기관에서 2년 이상 근무한 자만이 해외 이주 허가를 받을 수 있었다.25) 다만 국공립 기관만을 인정해 주는 것이 부당하다는 지적에 따라, 2주가 채 지나지 않은 8월 24일, 해외여행과 해외 이주 기준에 사립 의대 부속병원과 적십자병원에서 2년 이상 근무한 자를 포함하고, 인턴, 레지던트 수련 기간도 근무 기간으로 인정하기로 결정하였다.26)
이는 오랜 전략에 기반을 둔 정책이었다. 이전부터 한국 정부는 무의촌 문제 해결을 위해서 계속해서 의료인을 동원하는 정책을 모색했다. 먼저 1950년대에는 군의관을 무의촌 순회 진료에 투입하고, 더 나아가 무의촌에 정규 배치하는 방안을 검토하였다. 하지만 국방부의 반대로 후자는 실현되지 못했다. 이후 1960년대 초반에는 「국민의료법」 제17조와 「의료법」 제21조에 근거하여 지정업무종사명령을 발동, 의사를 무의촌에 배치하였다. 다만 이러한 조치 역시도 국방부와 보건사회부의 의견 충돌로 종결되었으며, 1965년 3월 「의료법」 개정과 함께 지정업무종사명령이 사라지면서 법적 근거를 상실하였다.27)
이후 공의 보수를 인상하거나, 한지의사, 북한 출신 조의사 등을 배치하는 방법을 추가로 모색했으나, 결과적으로 효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공의 보수는 턱없이 부족했고, 한지의사나 북한 출신 조의사 등의 자원은 무의촌 문제를 해결하기에 충분치 않았다. 1971년 당시 보건사회부는 북한 출신 조의사에게 한지 의사 면허를 부여하는 방식으로 신규 공의 정원 300명 가운데 110명을 충원하려 했으나, 한지의사 시험에 합격한 이는 응시자 139명 가운데 6명뿐이었다.28) 결국 방법은 동원뿐이었다. 「해외여행심사규정」과 「의료요원해외이주허가기준」은 이러한 흐름 속에서 공포된 대책이었다.
문제는 의사 집단의 반발이었다. 물론 보건사회부 정책을 빠르게 수용한 이들이 없지는 않았다. 제도 공포 당일, 35명의 의사가 해외 수련을 위해 발 빠르게 보건소장 자리에 지원했고, 여기에 7명이 추가로 원서를 낼 예정이었다.29) 그러나 이들은 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1971년의 ‘수련의 파동’은 정부 정책에 대한 저항이 가장 극적으로 표출된 사건이었다. 6월 16일 국립의료원을 시작으로, 주요 국립대와 사립대 병원의 수련의 집단이 파업을 단행했다. 주요 요구 사항은 급여 인상과 신분 보장, 그리고 해외여행 및 이주의 제한 철폐였다.30)
정부의 태도는 강경했다. 정부를 대표한 보건사회부 장관 이경호(李坰鎬, 1917–1987)는 처우 개선은 가능하지만, 해외여행 및 이주 제한은 폐기할 수 없다고 강경 대응하였다.31) 이후 국공립의료기관에서 2년 이상 근무한 이에게 여행과 이주를 허가하겠다며 유화책을 내어놓았지만, 여전히 제한 자체를 철폐하지는 않았다. 정부의 강경한 태도는 9월 초순까지 지속하였다.32) 의사 인력 유출이 사회 문제로 불거진 상황에서, 보건사회부 역시 쉽게 타협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정부의 태도는 1971년 9월 중순 무렵 변화하였다.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교수 심상황(沈相煌, 1909–1972)을 비롯한 의료계 중진이 제한 철폐를 요구하는 등 의료계의 저항이 심화하였고,33) 신민당 역시 정부의 책임을 묻기 시작했기 때문이다(신창훈, 2023: 1062). 이에 따라 9월 14일 국무총리 김종필(金鍾泌, 1926–2018)이 규정의 완화를 지시하였으며, 9월 18일 보건사회부 제2차 수련의 제도 심의위원회에서 제한 규정을 철폐하기로 결정하였다.34) 이후 1972년 4월, 제한 규정은 최종 폐지되었다.35)
이민 제한을 위한 대책이 결과적으로 실패하면서, 보건사회부는 다른 대안을 도입하였다. 1972년 4월에는 무의촌에 수련의 4년 차를 6개월간 배치하는 ‘수련의 파견 근무제’를 시행하였고, 1973년 2월에는 「의료법」을 전부 개정하여 동원의 근거를 부활하였다.36) 여기에 1976년에는 의사 국가시험 불합격생을 대상으로 무의촌 2년 근무 후 면허증을 주는 조건부 의사제를 시행하는 한편,37) 1977년에는 공중보건장학생 제도를, 그리고 1978년에는 「국민보건의료를위한특별조치법」을 바탕으로 공중보건의사 제도를 도입하였다(신창훈, 2023: 1063–1067)
이러한 일련의 사태는 박정희 군사정권이 인력 유출 자체를 중대한 문제로 바라보기보다는, 어디까지나 무의촌 문제 해결을 가로막는 여러 장해물의 하나로 인식하였음을 보여준다. 만약 인력 유출 그 자체를 문제로 보았다면, 강경한 태도를 계속해서 유지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실제로 정부는 수련의 파견 근무제와 같은 다른 대책이 나오자마자, 다시 인력 유출을 용인하고 방치하였다. 외려 정부가 인력 유출 억제를 사실상 포기함에 따라, 도미는 다시 증가하였다. 언제 다시 이민 규제가 재도입될지 모른다는 공포가 도미를 자극한 결과였다. 표 1을 보면, 1975년을 기점으로 형성된 두 번째 정점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다시 질문을 던질 수 있다. 다시 시작된 도미의 증가세는 어떤 이유에서 지속하지 못하였는가?
3) 미국의 이민 요건 강화: 제도의 단기 변화실마리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미국 정부의 이민 요건 강화였다. 미국 정부는 1970년대 중반이 되면서 이민 정책의 변화를 모색했다. 한 가지 이유는 외국인 의사의 수가 예상을 크게 웃돌았기 때문이었다. 이민법 개정 전인 1964년부터 이민법이 개정된 1965년까지 미국에 입국한 외국인 의사는 8,153명이었다. 그러나 9년이 지난 1973년부터 1974년까지, 이 값은 14,908명으로 증가했다. 182.9%의 급증세였다. 1970년부터 1977년까지 미국에 입국한 외국인 의사가 같은 시기 미국 의과대학에서 배출된 신규 의사 수보다 많을 정도였다. 미국 보건교육복지부는 추세가 계속된다면 1990년 이민자 의사가 전체 의사의 1/3 수준이 될 것이라 추산했다(이하 Miller, 1979: 6–11).
여기에 의료인 유출에 따른 출신국의 의료 붕괴 문제를 지적하는 이들도 있었다. 1972년 기준 전체 이민자 의사의 70%는 인도와 필리핀, 한국 출신이었고, 한국의 사례에서도 잘 알 수 있듯 이는 출신국의 의료인 부족 문제를 심화할 수 있었다. 실제로 한국의 의사 1인당 인구는 1960년 이후 지속해서 감소 추세였으나, 의사 이민이 본격화한 직후인 1967년과 1971년의 정점 이후인 1973, 1974년에 일시적인 증가 추세를 보였다[표 5].38)
이민 정책의 변화가 모색된 마지막 이유는 이민자 의사의 수준 문제였다. 1975년 당시 미국 하원 주간외국통상위원회(House Committee on Interstate and Foreign Commerce)에서는 이민자 의사의 언어 문제와 의학 교육 문제가 지적되었다. “의사 진료는 심리 상태에 관한 미묘한 해석이 필요”하기에 “미국 문화의 미묘한 뉘앙스는 차치하더라도, 영어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이의 진료 수준은 의심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었다.
의학 교육의 수준도 도마 위에 올랐다. 1969년 기준 외국인 의사에게 요구되는 ECFMG 시험에서 80점 이상을 득점한 이는 전체의 12.3%로, 미국 의과대학 졸업생의 성적과 비교하면 크게 떨어졌다. 미국 의과대학 졸업생의 경우, 같은 시험에서 79.6%가 80점 이상으로 예상되었다. 1975년 1월 기준 ECFMG 합격률이 전체의 36.4%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은 외국인 의사의 실력 문제가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음을 의미했다.
이러한 일련의 이유에 따라 1976년 10월, 미국 의회는 「의료인교육지원법」(Health Professions Educational Assistance Act)을 통과시켜, 외국인 의사에게 요구되는 조건을 강화했다. 먼저 ECFMG 영어 시험 또는 토플 시험을 통해 영어 능력을 증명해야 했고, 이를 통과한 다음에는 기존의 ECFMG 시험을 대체하는 비자 증명 시험(Visa Qualifying Examination, 이하 VQE)에 합격해야 했다. 새로운 시험은 기존의 시험에 비해 어려웠기 때문에, 그 자체로 이민의 문턱을 크게 높였다. 송명근에 의하면, 1980년 당시 한국인 “500명이 도전해 단 한 명만 합격할 정도로 어려운 시험”이었다(송명근, 2010: 48).
여기에 더해 미국 입국 과정 자체가 까다로워졌다. VQE에 통과하여 비자를 받을 수 있는 자격을 갖췄다고 하더라도, 단기 취업 비자(H1)를 공공기관 또는 사립 비영리 기관에서의 교육과 연구에 한정하여 발급하였고, 교환 방문 비자(J1) 역시 수련 기관의 동의와 수련자의 귀국 서약, 귀국 이후 취업에 대한 출신국 정부의 보증을 모두 갖춘 경우로 제한하였다. 여기에 출신국 정부의 요청 없이는 2년 이상의 교육과 수련을 금지하기도 했다. 이에 더해 이민법 역시 불리하게 개정되었다. 1976년 통과된 새로운 이민법은 의료인에게 고용 예정에 대한 증명을 요구하였다(민경희, 2008: 70).
이후 이것이 지나치게 엄격한 조건이라는 지적에 따라, 1977년 예외 조항이 추가되었다. 저명한 의료인은 자격을 증명할 필요가 없었고, 미국과 캐나다 의과대학을 졸업한 이는 VQE를 면제하며, 1977년 1월 9일 당시 진료 중이던 이 역시 자격 증명을 면제받았다. 여기에 출신국 정부가 귀국 이후의 취업을 구체적으로 보증할 필요는 없으며, 1977년 1월 10일로 예정된 발효 역시 1년 연기되었다.39) 그러나 이러한 완화에도, 여전히 과거보다는 훨씬 엄격한 조건이었다.
미국 정부의 이민 정책 변화는 한국에도 실시간으로 전해졌다. 한국 언론은 1970년대 초부터 미국 정부의 이민 정책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고, 실제로 외국인 의사를 향한 미국 사회의 여론 악화를 재빨리 보도하기도 했다.40) 하원에서의 논의 역시 마찬가지였다. 한국 언론은 1976년 9월, 미국 포드 대통령의 서명이 이루어지기도 전에, 「의료인교육지원법」이 하원에서 가결되었으며, 이에 따라 의사 이민의 문턱이 높아졌다고 보도했다.41) 후속 보도 역시 계속되어, 일부 기사는 1면을 장식하기도 했다.42) 보건사회부 의정국은 “의사의 이민 길이 막힌 것은 무의촌 해소, 국민 의료 시혜 확대 등 보사부의 당면 시책을 효율적으로 추진할 계기가 될 것”이라 반색을 표했다.43)
의사 집단 역시 추세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의료계의 여러 중진 의사는 미국 학회 등을 통해 접한 현지 분위기를 한국에 전했다. 이를테면 1972년 연세대학교 의무부총장 민광식(閔珖植, 1912–1979)은 언론 인터뷰를 통해 미국 정부의 정책 변화를 예측하는 미국 사회의 여론을 전달했다. 중진 의사뿐만이 아니었다. 도미의 주축을 맡은 젊은 의사들 역시도 나름의 통로를 통해 미국 사회의 소식을 접했다.44) 도미의 꿈을 품던 이들에게 변화한 미국의 상황은 비보와 다름없었다.
이후 상황은 다시 한번 반전되었다. 1980년대 초반, 미국 정부는 다시 한번 이민의 창을 열어젖혔다. 의사가 부족하지 않다는 미국의사협회의 주장과 달리, 「의료인교육지원법」 이후 여러 병원이 인력 부족으로 운영에 어려움을 겪은 탓이었다. 이에 따라 1981년 이민법이 다시 개정되어, 외국인 의사에 대한 규제를 1983년 12월 31일로 재차 연기하였다. 외국인 의사를 향한 담론도 변화하였다. 외국인 의사를 향한 문제 제기는 이제 근거가 없는 것으로 격하되었다. 불과 몇 년 만에 분위기는 180도 바뀌었다(Politzer, 1983).
주목할 점은 이러한 변화에도 대규모 도미가 재개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가톨릭대학교의 경우, 1979년 졸업생 기준 5% 미만으로 내려간 도미 비율은 계속 감소하여 1985년 졸업생 기준 0.9% 수준이 되었다. 1967년만 하더라도 졸업생 가운데 63.8%가 도미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대규모 도미는 이제 종결되었다고 할 수 있었다(가톨릭대학교 의과대학 동창회, 1991; 2002). 이민의 창이 다시 열렸음에도, 도미가 재개되지 않은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실마리는 한국의 상황에 있었다.
4) 한국의 의료보험 시행과 의료 시설 확충: 구조와 동기의 장기 변화1970년대 중후반 당시, 한국 의료는 달라지고 있었다. 먼저 의료보험 제도가 활발하게 논의되기 시작했다. 당시 한국은 의료 공급이 의료서비스 구매로 드러난 유효 수요를 초과하던 상황이었다. 외래 환자 연인원과 입원 환자 연인원은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두 값은 각각 365일 매일의 재원 환자와 외래 진료 환자 수를 합한 값이다. 1960년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두 값은 정체에 가까운 완만한 증가세를 보였다[표 6].45) 이유는 분명했다. 소득에 비해 의료비가 비쌌기 때문이었다.46)
정부와 의료계는 의료보험이 잠재적인 의료 수요를 대폭 증가시킬 것이라 기대했다. 보건사회부 내의 정책 연구소였던 사회보장심의위원회는 1969년 펴낸 『사회개발장기전망』을 통해 “의료비에 대한 동시적 부담 의식이 없으므로 의사 방문일과 의사 치료일 수[가] 급격히 증가”하리라 예상하였다(보건사회부, 1969: 122). 정부뿐만이 아니었다.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의 김일순은 1976년 대한병원협회가 주최한 토론회에서 환자가 두 배로 증가할 것으로 예측하기도 했다(김일순, 1976: 47). 이러한 예측은 의료계가 의료보험의 실시에 적극적으로 협력했던 이유이기도 했다. 의료계는 1970년대 초반부터 의료보험 도입을 검토하고, 정부에 이른 시행을 요구하였다(황병주, 2011: 448–449).
예상대로 의료보험 시행 후 의료 수요는 폭증하였다. 표 5에서 보듯, 외래 환자 연인원과 입원 환자 연인원은 1977년 500인 이상 근로자가 있는 사업장에 대한 직장의료보험이 시작되고, 1979년 공무원과 사립학교 교직원에 대한 공교의료보험이 시작되면서 빠른 증가세를 보였다. 직장의료보험이 시행된 다음 해인 1978년, 서울대학교 보건대학원의 허정(許程, 1932–)은 “의료보험이 갖는 병원 의료 수요의 창출 효과”로 인하여 “적정선 이하로 맴돌던 종합병원 병상 이용률이 갑자기 환자를 수용할 수 없을 정도로 종합병원 러쉬”가 발생하였다는 평을 내어놓았다(허정, 1978: 22). 이러한 증가세는 1988년 지역의료보험이 시행되고, 1989년 지역의료보험이 도시 자영업자를 포괄하면서 계속해서 유지되었다.
이에 더해 정부의 차관 도입은 의료기관의 성장을 가속해, 늘어난 수요를 흡수할 수 있게 했다. 1970년대 후반 사회개발이 본격화하면서, 정부는 최소한의 재정으로 의료 공급을 확대하기 위해 사립병원에 차관을 알선하는 방식을 선택했다. 1990년대 초반까지 지속된 의료 차관은 1970년대 후반부터 병상, 외래 환자 연인원, 입원 환자 연인원이 급증하는 배경이 되었다. 의료기관 유형별 병상 수 통계가 제공되기 시작한 1977년부터 마지막 차관 집행이 완료된 이듬해인 1995년까지 종합병원의 병상수는 603.9%, 병원의 병상수는 305.5% 증가했다(홍창희, 박승만, 2023)
차관은 장비의 현대화에도 일조하였다. 의료 차관과 함께 도입된 교육 차관은 여러 의료기관이 임상병리, 영상의학, 특수 검사 및 수술 장비 등 다종 다량의 의료 장비를 갖추는 기반이 되었다. 이로써 이전에는 경제적 부담으로 불가능했던 연구와 진료 인프라가 대폭 확충되었다. 특히 국립대학교 의과대학 부속 병원의 경우, 1992년 당시 교육 차관으로 구매한 장비가 수량 기준 26.0%, 비용 기준 54.0%에 달했다. 이는 고가 장비의 구매에 차관이 크게 활용되었음을 보여준다(홍창희, 박승만, 2023).
의료보험의 시행과 의료 시설의 확충, 장비의 현대화는 도미의 유인을 감소했다. 억눌려있던 수요가 현실화하면서, 의료기관을 운영하거나 의료기관에 고용된 의사들은 수입의 증가와 일자리 창출을 마주하게 되었다. 또한 대거 확충된 인프라는 새로운 연구와 진료를 가능케 했다. 이는 1960년대의 의사들이 마주했던 상황과는 다른 것이었다. 물론 1970년대 중반 당시에는 여전히 의료보험의 시행이 논의되던, 그리고 차관 도입이 아직 계획되던 중이었다. 그러나 기대감은 이민을 묶어 놓기에 충분했다. 김일순은 “우리나라도 경제성장을 하고 의료보험이 생기고 병원의 수가 늘어나면서 취업 기회도 많아져 미국에 가지 않은 사람들은 한국에 남”게 되었다고 회고했다(김일순, 2011: 144).
이러한 여러 요인이 중첩되면서, 의사 도미는 결국 1975년 두 번째 정점을 보인 이후 계속해서 감소하였다. 한국 정부의 역할은 크지 않았다. 수련의 파동 이후, 한국 정부는 이민 단속을 완전히 포기하였다. 하지만 미국의 의료인 이민 정책이 변화하며, 대규모 이민의 가능성은 줄어들었다. 여기에 의료보험의 실행과 의료차관의 도입은 의도치 않게 의사를 한국에 붙들어놓는 강력한 유인으로 작동하였다. 이렇게 대규모 이민의 가능성은 사실상 0이 되었다. 한 번의 큰 정점과 또 한 번의 작은 정점으로 구성된 의료인 도미 열풍은 이렇게 국외의 정책 변화와 국내의 의료 상황 변화에 따라 종결되었다.
4. 나가는 말: 오늘날의 ‘두뇌 유출’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자. 의사 도미는 시간에 따라 정확히 얼마나 증가 또는 감소했는가? 그리고 동기와 제도 차원에서, 도미 증감에 영향을 미친 수용국 미국의 장단기 유입 요인과 출신국 한국의 장단기 유출 요인은 무엇인가? 먼저 1965년에 본격화한 대규모 도미 현상은 1971년을 기점으로 정점을 이루었으며, 이후 1975년 소규모 상승세를 보인 다음 1970년대 말 사실상 종결되었다. 가히 급증과 급감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증가세의 변화였다.
여기에는 다양한 요인이 관여하였다. 먼저 한국의 낮은 소득과 생활 수준, 부족한 수련 기회와 의료 인프라, 불안한 정치 상황은 도미의 강력한 유출 동기로 작동하였다. 다만 이들 요인은 도미 이전부터 지속하던 장기적인 요인으로, 단기간에 일어난 급증과 급감을 설명해 주지는 않는다. 한국 정부의 정책 역시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의과대학 증원은 인력 유출 자체를 감소하는 정책이 아니었고, 해외여행과 이주에 대한 규제는 저항에 부딪혀 곧 폐지되었다. 규제 설정과 폐지는 오히려 이주를 향한 동기를 자극하여, 두 번째 정점으로 귀결되기도 했다.
도미 현상을 결정지은 핵심 요인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제도적 차원에서 일어난 이민 정책의 변화였다. 미국 정부는 이민의 동기가 상수로 존재하던 상황에서 이민법을 개정하여 문호를 개방하였고, 이는 곧바로 이민의 급증으로 이어졌다. 반대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민법이 또다시 개정되며 이민의 창이 좁혀지자, 이민은 곧 감소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도미의 증감은 ‘종이 장막’(paper curtain)의 개폐에 따른 결과였다. 마리오 다니엘스의 주장처럼, 국제화 시기에도 지식과 물질, 인간은 자유롭게 순환하지 않으며, 여권과 비자 등을 활용한 국가의 통제력은 여전하다(Daniels, 2019).
다만 미국의 통제만이 유일한 요인은 아니었다. 한국 정부가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한국 의료의 변화 역시 도미를 감소시킨 결정적인 요소로 작동하였다. 의료보험의 시행은 의료 서비스를 향한 수요를 확장하여 의사의 소득을 증대하였고, 때마침 도입된 의료차관은 의료기관의 성장을 자극하여 확장된 수요를 수용할 수 있게 했다. 더 나아가 의료차관과 교육차관으로 진료 및 연구 인프라가 확충되면서, 이른바 선진의학을 향한 열망 역시 대폭 감소하였다. 1980년대 이민의 창이 다시 열렸음에도, 대규모 도미가 재개되지 않은 까닭이었다.
의사 도미에 관한 분석은 오늘날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국가 간 경계를 넘은 도미는 종결되었으나, 시도 간 경계를 넘은 지방의 두뇌 유출이 여전히 지속 중인 탓이다. 여러 해에 걸쳐 많은 대책이 시행되었지만, 의사의 수도권 편중은 계속해서 심화하고 있다. 지역 의료기관의 잇따른 폐업, 지역 근무가 미담으로 소개될 정도로 심각한 지역의 의사 구인난은 의사 인력의 수도권 쏠림을 드러내는 단적인 사례이다.47)
과거의 사례에 비추어, 크게 두 가지 해결책을 모색해 볼 수 있다. 하나는 시도 간 ‘종이 장막’의 시행이다. 이민법이 개정된 1965년을 기점으로 대규모 도미가 시행되었다는 사실, 그리고 이민 조건이 까다로워진 1970년대 후반 도미가 사실상 종결되었다는 사실은 이동을 규제하는 정책의 힘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을 국내에도 그대로 시행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다. 의사 인력의 일부를 지역에 묶어두는 공중보건의사 제도는 정책의 무게감과 지속성을 점차 상실하고 있다. 지역 의사제를 하나의 유력한 대안으로 생각할 수 있겠지만, 이제 논의의 첫걸음을 떼었을 뿐이다.
또 다른 해결책은 지역 의료의 강화이다. 결국 도미를 종결시킨 것은 의료보험과 의료차관 도입에 따른 한국 의료의 구조적 변화였다. 만약 지역 의료기관 및 의과대학의 시설과 장비 개선, 그리고 이를 통한 신뢰 회복과 수요 확보 등이 이루어진다면, 수도권을 향한 인력 유출을 일부 억제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병상수 확대와 같은 단순한 양적 확대는 의사의 근무 조건을 더욱 열악하게 만들어 유출을 촉진할 수 있기 때문에, 질적 개선 위주의 투자가 우선시되어야 한다. 그렇게 된다면 종이 장막 없이도 두뇌 유출을 막을 수 있다.
다만 현재 상황은 녹록지 않아 보인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의 자료에 따르면, 2024년 1분기 기준 수도권의 병상 비율은 전체 병상의 38.3%에 달한다. 더 나아가 종합병원과 상급종합병원으로 한정하면, 이 값은 다시 44.9%와 54.8%로 상승한다. 수도권에 집중된 인구를 고려한다면 많다고 할 수는 없겠으나, 문제는 고난도 의료행위가 가능한 의료기관이 특정 지역에 편재되어 있으며, 더 나아가 이러한 인프라의 편재가 수도권 쏠림을 다시금 강화한다는 점이다. 설상가상 아주대학교병원, 서울아산병원, 한양대학교의료원, 인하대병원, 서울대학교병원, 연세의료원, 고려대학교의료원 등 유수의 병원이 수도권에 분원을 설치할 계획이다. 지역 의료의 강화와는 모두 거리가 먼 움직임이다. 새로운 상상력과 강한 의지가 요청되는 시점이다.
Notes1) 1964년 당시 한국의 인구 1,000명 당 의사 수는 0.37명으로, 같은 해 일본의 1.03명에 비해 한참 적은 수였다(보건사회부, 1965: 39–47; 1967: 12–13). 일본의 수치는 다음을 참고하였다. OECD, “Doctors per 1,000 inhabitants”, OECD Data Explorer, https://www.oecd.org/en/data/indicators/doctors.html, 검색일 : 2025.5.28. 2) 두뇌 유출이라는 말은 원래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에서 미국으로의 인력, 특히 정부 자원이 대거 투입되는 의료, 고등 분야의 인력 유출을 가리키는 용어였다. 그러나 1960년대가 되면 국적과 분야에 무관하게 사용되기 시작했다. 미국으로의 인력 유출이 전 세계로 확대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를테면 존슨(Johnson, 1965), 마이어스(Myers, 1966), 와타나베(Watanabe, 1969) 등은 모두 두뇌 유출이라는 표현의 원래 용례를 언급하면서도, 이를 확장하여 사용하고 있다. 3) 이를테면 두뇌 유출 문제를 보도한 다음의 연재 기사에서 의사 도미는 과학자 도미와 같은 문제로 다루어졌다. 「두뇌유출 (1) 문제점」, 『동아일보』, 1966년 8월 23일, 5면; 「두뇌유출 (2) 그 원인」, 『동아일보』, 1966년 8월 25일, 5면. 비슷한 논조는 다른 여러 기사에서도 그대로 반복되었다. 「유출 못 막는 만방의 고민: 두뇌의 낙원 미국」, 『동아일보』, 1967년 6월 22일, 4면; 「인력 확보에 대한 재인식」, 『조선일보』, 1970년 2월 20일, 2면. 4) 이공계 두뇌 유출을 파악할 때는 대개 문교부가 발행한 유학생 실태 조사 보고를 활용한다. 문교부가 발행한 『해외유학생 실태조사 중간보고서』(1967)와 『해외유학생 실태조사 중간보고서: 증보판』(1968, 1969, 1972),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펴낸 『해외유학생 실태조사』(1971, 1973)가 전체 유학생의 전공과 귀국률, 귀국 후 취업 상황 등을 비교적 정확히 보여주는 덕분이다. 그러나 의료계의 경우는 다르다. 학위 취득을 목적으로 한 도미가 아니었기 때문에, 이들 보고서는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5) 「해외에 뺏기는 의료 인력」, 『조선일보』, 1971년 11월 18일, 7면; 「어려워진 의사 도미취업」, 『중앙일보』, 1974년 2월 21일, 4면. 고재필의 보고는 다음 문건에 근거한 것으로 추정된다. 보건사회부 기획관리실, 『해외거주 의료인 명부』(서울: 보건사회부, 1975.12.1). 이 문건은 1974년 말 2,607명이 도미한 것으로 파악한다. 다만 현재 실물이 확인되지는 않는다. 문건의 존재는 (김일순, 서경, 1977)에서 확인할 수 있다. 6) 국가통계포털, 「1인당 국내총생산(당해년가격)」, https://kosis.kr/. 검색일: 2025.5.28. 9) 1967년의 원/달러 환율은 달러당 270.5원이었다. 산업통계 분석시스템, 「주요국 통화의 환율 통계 자료」, https://istans.or.kr/. 검색일: 2025.5.20. 10) 「기다리는 사람들: (9) 봉급 생활자」, 『매일경제』, 1967년 6월 12일, 3면. 1961년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인턴과 군의관을 마친 뒤, 1967년 미국에서 다시 인턴을 시작했던 김일순(金馹舜, 1937–)은 미국 병원의 “인턴 급여가 … 군에서 군의관으로 받던 봉급의 10배가 넘었고, 세브란스에서 인턴을 할 때의 봉급에 비하면 거의 30배나 되었”다고 회고했다(김일순, 2011: 143–144). 11) 다음 기사가 대표적이다. 미국 수련의의 월급이 500달러에 달하며, 한국 의사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라는 보도였다. 「돈, 어떻게 벌어 어떻게 쓰나?: 의사」, 『매일경제』, 1968년 7월 15일, 3면. 14) 1958년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외과학을 수련하고, 미국에서 다시 성형외과학을 수련한 이영호(李英浩, 1932–)는 당시를 “한국에 제대로 된 성형외과라고 부를 만한 것이 없었던 시절”이라 회고했다(이영호, 2014: 36). 15) 킴스플랜의 기원은 1955년 김수명이 군의관의 수준 제고를 위해, 미국에 위치한 미국 병원에 군의관의 연수를 위탁한 것에서 비롯한다. 휴전 협정 이후 군의관 복무가 3년으로 줄면서 미국 연수가 사실상 불가능해졌고, 이에 따라 국군 병원 자체로 인턴, 레지던트 제도를 시행하기로 결정하였다. 한편, 1958년 군 복무에 따라 전문 과목 수련이 힘들어지는 현실을 고려, 보건사회부와 문교부가 국방부에 의과대학 졸업생의 징집을 요청하였고, 이에 따라 김수명은 1955년부터 국군 병원에서 시행하던 인턴, 레지던트 제도를 의과대학 부속병원으로 확대할 것을 제안하였다. 각 병원은 진료 인력 확보와 수련의 용이를 이유로 김수명의 제안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였고, 1959년 본격적으로 킴스플랜이 가동되었다. 이상은 한양대학교 의과대학 흉부외과학교실의 김근호(金近鎬, 1924–)가 김수명 등을 면담한 결과를 바탕으로 서술한 것이다(대한의학회, 1988: 420–428). 김일수는 이를 1964년에 시작된 것이라 서술하는데, 틀린 내용이다(김일수, 1990: 162). 17) 대통령령 제2658호, 「인력개발위원회규정」, 1966년 7월 15일 제정, 1966년 7월 20일 시행; 대통령령 제2996호, 「과학기술처직제」, 1967년 4월 12일 제정, 1967년 3월 30일 시행. 인력 개발 정책의 형성과 시행에 대해서는 (정부용, 2020)을 참고하라. 22) 「의대 신설 부당: 의협 문교부 방문코 강력히 주장」, 『의협신보』, 1969년 12월 1일, 1면; 「의대 증설의 필요성 없다」, 『의협신보』, 1969년 3월 6일, 1면; 「알맹이 없는 의대 남발」, 『경향신문』, 1971년 1월 15일, 5면. 23) 새로 설치된 의과대학은 다음과 같다. 전북대학교(1970), 중앙대학교(1971), 연세대학교 원주분교(1977), 순천향대학교(1978), 계명대학교(1979), 영남대학교(1979), 인제대학교(1979), 고신대학교(1980), 경상국립대학교(1980). 입학생 수는 자료의 부재로 정확히 계산할 수 없으며, 따라서 의예과 인가 정원 수로 추정할 수밖에 없다. 1970년 의예과 인가 정원은 2,360명이며, 1980년 의예과 인가 정원은 4,490명이다. 의예과가 모두 두 학년으로 구성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1970년은 평균 1,180명, 1980년은 평균 2,245명에 해당한다(문교부, 1971: 724–725; 1981: 614–615). 24) 「의료인 해외유출 억제: 수급 지장 막기 위해」, 『의협신보』, 1970년 7월 16일, 1면; 「의료인 해외여행에 보사부 해외여행심사규정 공포」, 『의협신보』, 1970년 8월 17일, 3면; 「허술한 해외유출억제책」, 『의협신보』, 1970년 8월 24일, 7면. 26) 「해외여행 억제책 완화: 사립병원 근무도 인정키로」, 『의협신보』, 1970년 8월 24일, 2면. 이는 각각 보건사회부 예규 제297호 「의료요원해외이주허가기준」, 예규 제300호 「해외여행심사규정」으로 공포되었다. 「의사들의 해외여행, 이주 제한: 위헌적인 예규」, 『조선일보』, 1971년 9월 10일, 7면. 27) 무의촌 문제에 대한 한국 정부의 정책 변화에 대해서는 신창훈(2023)을 참고할 수 있다. 지정업무종사명령 제도는 다음 법을 통해 도입되었다. 「국민의료법」, 법률 제221호, 1951년 9월 25일 제정, 1951년 12월 25일 시행. 이는 이후 「국민의료법」이 「의료법」으로 전부개정되는 과정에서도 존속하였다가, 1965년 3월 「의료법」이 개정되며 삭제되었다. 「의료법」, 법률 제1690호, 1965년 3월 23일 일부개정, 1965년 5월 24일 시행. 제21조 지정업무종사명령 삭제. 29) 「해외유학 지망 의사 35명 보건소장 임명」, 『동아일보』, 1970년 8월 11일, 7면. 당시 대한병원협회가 전국 의사 1,000명을 대상으로 한 표본 조사를 보면, 해외여행 억제를 무조건 철폐해야 한다는 이가 73.7%로 다수였으며, 24.8%는 단기 봉사라도 해야 한다고 응답하였다. 「수련의 파업 불가피: 책임에 맞는 대우를」, 『조선일보』, 1971년 9월 14일, 7면. 30) 수련의 파동의 원인과 전개에 대해서는 정준호(2023)를 참고하라. 다만 해외여행과 이주 제한을 둘러싼 세부적인 정책 입안 과정에 관해서는 본 연구와 일부 다른 서술이 있다. 32) 「의료요원 해외여행 완화」, 『의협신보』, 1971년 7월 23일, 1면; 「보사부 강경한 태도: 해외여행 억제규정 철폐요구에」, 『의협신보』, 1971년 9월 13일, 1면. 문교부 장관 민관식(閔寬植, 1918–2006) 역시 대한의사협회 회장 한격부(韓格富, 1913–2005), 서울대병원 원장 김홍기(金弘基, 1919–2002)와의 면담에서 다른 요구 사항은 긍정적으로 검토할 수 있으나, 여행 문제는 문교부 소관이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해외여행 제한 싸고 진통」, 『동아일보』, 1971년 9월 10일, 7면. 34) 「수련의 파업 사후대책 마련: 김종필 총리 해외여행 억제규정 완화 등 지시」, 『의협신보』, 1971년 9월 16일, 1면; 「해외여행 억제철폐: 수련의제도 심의위 건의 따라」, 『의협신보』, 1971년 9월 20일, 1면. 수련의제도 심의위원회는 수련의 파동을 계기로 수련의 제도를 근본적으로 개선하기 위해 조직되었다. 보건사회부 차관 홍종관(洪鍾寬, 1925–1997)을 위원장으로 하고, 대한의학협회 사무총장 김용완(金容完, 1927–2008), 적십자병원 원장 송호성(宋浩星), 가톨릭중앙의료원 의무원장 조규상(曺圭常, 1925-2013), 우석대학교 의과대학 교수 김세경(⾦世景, 1920–),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교수 김진복(金鎭福, 1933–2005), 성심병원 원장 윤덕선(尹德善, 1921–1996), 세브란스병원 원장 임의선(林宜善, 1919–1997), 서울대학교 부속병원 원장 김홍기(金弘基, 1919–2002), 국립의료원 원장 안병훈(安秉勳, 1923–2003), 국방부 의무국장 정호용(鄭浩鎔, 1932–)을 위원으로 두었다. 「수련의심의위 첫 회의」, 『조선일보』, 1971년 9월 16일, 7면. 35) 「해외여행 억제 반발 의료인들 철폐 주장」, 『매일경제』, 1972년 4월 25일, 7면; 「의사 해외 이주 억제 폐지: 보사부 무의지(無醫地) 일소 따라」, 『동아일보』, 1972년 4월 27일, 7면; 「의사, 간호원 등 해외여행 자유화」, 『매일경제』, 1972년 4월 27일, 7면. 36) 「의료법」, 법률 제2533호, 1973년 2월 16일 전부개정, 1973년 8월 17일 시행. 제11조 제1항. “보건사회부장관은 보건의료시책상 필요하다고 인정될 때에는 제5조 내지 제7조의 규정에 의한 면허에 있어서 2년이내의 기간을 정하여 특정지역 또는 특정업무에 종사할 것을 면허의 조건으로 붙일 수 있다.” 42) 「미국 이민 길이 좁아졌다」, 『조선일보』, 1976년 10월 10일, 1면; 「의사, 간호원 미국 이민 길 막혀」, 『조선일보』, 1976년 11월 21일, 7면; 「어려워진 미 이민 길: 미 새 이민법의 내용」, 『동아일보』, 1976년 11월 26일, 3면. 46) 일반인의 의료비 부담에 대해서는 (박승만, 2018)을 참고하라. 표 1.미국으로 이민한 한국 의사의 수, 1965–1977
Table 1. Number of Korean Physicians Emigrated to the United States, 1965–1977
표 3.미국 거주 한국인 의사의 전공
Table 3. Medical Specialties of Korean Physicians in the United States
표 4.과학기술처, 의사 인력 수요 공급 예측, 1967–1986
Table 4. Physician Supply and Demand Projections, Ministry of Science and Technology, 1967–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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