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 홍콩의 열대의학 연구와 세균설: 말라리아와 페스트 방역을 중심으로†
Abstract
At the end of the nineteenth century, Hong Kong was in the midst of a malaria and plague epidemic which caused a fierce dispute within the medical community over disease theories and quarantine practices. However, the Hong Kong colonial authorities and medical community did not immediately accept the theory of etiology based on germ theory. Although germ theory was becoming scientifically established through research on plague and malaria in the 1890s, the Hong Kong colonial authorities and medical community did not immediately accept it. Patrick Manson (1844-1922) began studying tropical medicine based on germ theory by studying elephantiasis and malaria in Amoi and Hong Kong during the 1880s. However, he was unable to strongly advocate for a quarantine policy based on germ theory because the exact transmission routes of these diseases were not yet fully understood. Although the scientific community began to shift towards germ theory after the discovery of causative bacteria for diseases like malaria and plague in the 1880s and 1890s, many medical and colonial health officials in Hong Kong still held on to the quarantine policy based on miasma theory. However, a series of infectious diseases and destructive miasma theory-based quarantine measures were pushing Hong Kong society into chaos, and the existing quarantine measures was no longer sustainable. In the twentieth century, colonial authorities and medical community in Hong Kong adopted tropical medicine and quarantine measures based on germ theory as their prominent position. Despite the establishment of tropical disease theory based on germ theory, racial perceptions of disease did not change significantly. Instead, the theory of tropical medicine reinforced orientalist views of disease.
색인어: 홍콩, 열대의학, 말라리아, 페스트, 패트릭 맨슨, 미아즈마설, 세균설, 인종론
Keywords: Hong Kong, Tropical Medicine, Malaria, Plague, Patrick Manson, Miasma Theory, Germ Theory, Racism
1. 서론
열대의학은 15세기 이래로 열대지역에 진출한 유럽인들의 생명을 위협하는 열대성 질병들에 대한 병인론 연구와 치료제 개발을 위한 의학연구에서 시작되었다. 열대는 매혹적이지만 미아즈마로 가득찬 질병의 온상이었으며, 19세기 중반까지 열대의학은 기후와 환경으로부터 병인을 찾았다( Arnold, 1996: 9-10).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전반까지 영국제국에서는 신민을 보호하고 식민지를 유지·확대하기 위해서 새로운 열대의학이 재정립될 필요가 있었다. 패트릭 맨슨(Patrick Manson: 1844-1922)은 이러한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여 상피병(elephantiasis)과 말라리아(malaria) 등의 연구를 통해 열대 질병이 기후와 환경이 아니라 세균과 기생충에 기인한다고 밝혀 세균설에 입각한 과학적 연구로 전환시킨 장본인으로 평가된다( Eldridge, 1992: 215-219). 맨슨은 중국과 홍콩 등을 식민지 열대의학의 전초기지로 삼아 자신의 주요한 경력을 쌓았으며, 귀국 후에는 런던 열대의학대학(London School of Tropical Medicine)의 설립과 영국 식민성의 의학 자문을 맡았다. 그는 ‘근대 열대의학의 아버지’ 1)로 불리며 열대의학의 선구자가 되었다(KKY Lai etc., 2003: 145-147). 2)
의과대학 졸업 후 맨슨은 1860-70년대에 중국 해관의 의사로서 타이완과 아모이에서 활동했다. 특히 1878년 맨슨은 중국 남부 아모이에서 일명 ‘코끼리 피부병’으로 불리는 상피병(象皮病) 연구를 본격화했다. 그는 상피병 연구에서 혈액 속에 사는 기생충 중의 하나인 사상충(filaria)의 배아가 빨간집모기 체내에서 성장하는데, 모기가 열대 질병의 중간 숙주 역할을 한다는 것을 알아냈다. 곤충이 병원체의 숙주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을 그가 처음으로 밝힌 것이다. 그러나 이 시기의 맨슨은 모기가 사람을 물 때, 사상충이 사람에게 감염되는 것인지, 사람이 물을 마실 때 더러운 물에서 죽은 모기에서 빠져나온 사상충에 감염되는 것인지는 확신하지 못했다( Chernin, 1983: 148-166).
1880년, 프랑스의 샤를 라베랑(Charles Louis Alphonse Laveran: 1845-1922)이 말라리아 환자의 혈액 속에서 오실라리아 말라리아( Oscillaria malariae)라는 말라리아 열원충(훗날 Plasmodium으로 개칭됨)을 발견했다( Cox, 2010: 2). 그 역시 모기가 말라리아의 중간 숙주 역할을 한다는 것과 모기 체내에 기생하는 열원충의 존재를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말라리아가 어떤 방식으로 사람에게 감염되는지는 여전히 설명하지 못했다. 1880년대 홍콩에서 개업의이자 식민정부의 자문의로 활동했던 맨슨은 말라리아의 원인균과 감염경로를 밝히는 연구를 지속했다. 영국에 돌아온 맨슨은 런던에서 개업하기도 했으나 곧바로 런던선원병원(Seaman’s Hospital in London) 등에서 일하며 말라리아의 병원체 연구에 매진하면서 런던 열대의학대학의 설립을 준비하였다. 그러던 사이, 말라리아 열원충의 일상 주기를 과학적으로 증명해 낸 사람은 맨슨과 교류했던 스코틀랜드 출신 로널드 로스(Ronald Ross: 1857-1932)였다. 로스는 말라리아 연구에 뒤늦게 뛰어들었지만, 1897년 말라리아가 얼룩날개모기속( Genus Anopheles)에 속하는 모기의 침샘에 모여있던 열원충 감염에 의한 것임을 발견하였고, 사람이 아노펠레스 모기에 물려 말라리아에 감염된다는 사실을 증명하게 된다( Ross, 1898: 488-489). 맨슨과 로스의 등장 이전까지만 해도 열대의학은 열대 질병의 발병 요인을 높은 기온과 습도, 더러운 환경과 열대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는 유럽인의 체질로 설명하였다. 그러나 맨슨과 로스는 상피병과 말라리아에 동물 숙주인 모기가 중간 숙주일 뿐만 아니라 중간 숙주를 통한 병원체의 감염으로 열대 질병이 발생한다는 사실을 밝혀냄으로써 미아즈마설이 아닌 세균설(또는 미생물설)에 입각한 열대의학의 확립을 주도한 대표적 인물들이었다( 염운옥, 2017: 98-99).
그런데 맨슨의 영향력이 컸을 것으로 추정되는 1880년대부터 1890년대 전반까지 홍콩 식민당국과 의학계에서 세균설의 자장은 크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1880년대 이후 세균설이 전세계적으로 확산되던 시기에 왜 홍콩 식민당국과 의학계는 세균설에 미온적이었을까? 세균설에 입각한 열대의학 연구를 주도했던 맨슨은 홍콩에서 어떠한 역할을 수행했나? 기존 연구에서는 이러한 질문들에는 거의 답하지 않았다( Haynes, 2001; 李尙仁, 2012). 이 연구의 첫 번째 목표는 1880년대부터 1890년대 전반까지 홍콩에서 세균설이 왜 자리잡지 못했는지를 밝히는 것이다.
이 연구의 두 번째 목표는 홍콩 열대의학과 세균설의 발전에서 말라리아와 페스트가 어떤 역할을 수행했는지를 분석하는 것이다. 1894년 페스트균의 발견은 홍콩 열대의학과 세균설의 발전에서 중요한 전환점으로 간주되었다( Yip, 2009: 17-18; Sihn, 2017; 신규환, 2018). 그러나 페스트 유행 이후, 세균설에 입각한 방역정책이 곧바로 시행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홍콩 식민당국과 의료계 내부에서 미아즈마설과 세균설에 입각한 방역정책의 경쟁과 타협이 진행되었다. 반면 말라리아 연구는 홍콩의 열대의학 연구와 세균설의 발전에서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말라리아와 같은 기생충 질환은 인간에게 덜 치명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세균설과는 분리된 채 발전해 왔다고 보았기 때문이다(Farley, 1989: 60-61; Sinha, 2018: 64-67). 그러나 19세기 말의 말라리아는 맨슨뿐만 아니라 당대의 연구자들 사이에서 세균성 질환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Worboys, 1996: 181-183; 李尙仁, 2012: 218, 312). 홍콩의 열대의학과 세균설의 발전과정을 규명하기 위해서는 페스트뿐만 아니라 말라리아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마지막으로 식민지 홍콩에서 미아즈마설에서 세균설로의 인식 변화가 방역 정책에 어떠한 변화를 가져왔는지, 이러한 질병 인식이 열대의학과 방역을 둘러싼 식민당국과 의학계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아울러 세균설이 인종론과 결합하면서 식민지배에 활용되는 모습도 확인해 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이 연구는 홍콩대학 소장 영국 식민성(Great Britain Colonial Office, 이하 CO)의 각종 공문서와 온라인 정부 기록물(Hong Kong Government Records Online 제공 문서, 이하 HKGRO) 등을 중심적으로 분석함으로써 홍콩 정부기록과 각종 보고서 등에 나타난 열대의학 지식과 세균설의 관계를 확인해 보고자 한다.
2. 1880-90년대 홍콩의 질병 상황과 인식
1) 식민당국과 의학계의 말라리아 인식
1880년 이전까지 홍콩 식민당국은 정부공립의원(Government Civil Hospital)과 성병의원(Lock Hospital) 등을 개원하였으나 병원 안에 세균검사실 등을 갖추고 있지 못했다. 1880년 이후 정부공립의원의 약제사이자 분석가인 맥칼럼(Hugh McCallum: 1853-1898), 크로우(Edward Crow), 왓슨(Malcolm Watson) 등이 실험실 운영을 담당했다. 그러나 그들의 역할은 수질관리, 독극물검사, 식품검사 등을 실시한 것으로 감염관리를 위한 세균검사와는 거리가 멀었다( Crow, 1889).
이 시기 홍콩 식민지 위생행정의 총책임자는 식민지 의관(Colonial Surgeon)인 필립 아이리스(Philip Bernard Chenery Ayres, 1840-1899, 재임 1873-1897)였다. 그는 영국 옥스퍼드셔(Oxfordshire) 출신으로, 1865년 8월, 에딘버러 의과대학(University of Edinburgh Medical School)을 졸업하고 영국령 모리셔스(Mauritius)와 인도 등지에서 정부 의관으로 일했다. 1873년 11월, 그는 홍콩으로 전직하여 식민지 의관과 정부병원의 총책임자로 24년간 근무했다. 그는 경찰병원, 군병원, 정부공립의원, 동화의원(東華醫院), 빅토리아 교도소, 성병의원, 정신병원, 식민지 위생부 등 식민지 보건의료 전반에 관여하였다. 그가 의학도로서 공부하던 1860년대 영국은 에드윈 채드윅(Edwin Chadwick, 1800-1890)의 공중보건법과 미아즈마설이 확실히 자리매김하던 시기였고, 그는 채드윅 공중보건법의 충실한 사도로서 19세기 후반 식민지 홍콩의 보건의료정책을 주도했다고 말할 수 있다( Hong Kong Museum of Medical Sciences Society, 2006: 87).
1880년대 홍콩 식민지 보건행정의 실무책임자는 존 앳킨슨(John Mitford Atkinson: 1856-1917)이었다. 그는 캠브리지 브리턴(Briton) 출신으로, 1878년 잉글랜드 로열 칼리지 의과대학(Royal College of Surgeons of England)을 졸업하고, 1894년 캠브리지 대학에서 보건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887년 11월, 그는 홍콩 정부공립의원에 부임하게 되었다. 그는 1912년 현직에서 은퇴할 때까지 홍콩에서만 25년 동안 일했다. 앳킨슨은 홍콩 정부공립의원 감독관으로 홍콩 방역행정의 실질적인 책임자였다. 그는 세균학 실험실의 운영에도 관심을 갖고 있었다. 3) 1888년 앳킨슨이 정부공립의원의 책임자가 되면서, 1889년 이 병원에 실험실과 영안실이 건립되었다. 새병원은 기존 병원과는 달리, 실험실, 영안실 이외에도 수술실, 전염병실, 예방접종실 등이 부속되어 있었다. 4) 그러나 1890년대까지도 앳킨슨이 주도하던 정부공립병원 내에서 질병분류는 증상에 따른 분류였지 세균학적인 검사에 따른 분류가 아니었다.
앳킨슨은 1888년 정부공립의원의 감독관이 되었고, 1890년 식민지 의관 아이리스의 지시에 따라 1889년 한 해 동안 정부공립의원에서 사망자 1,793건을 다음과 같이 분석하였다( Ayres, 1890: 311-316). 주요 사망원인은 일반 질환, 국소 질환, 독극물, 외상, 외과 수술 등으로 분류된다. 일반 질환은 병독 의존 질환, 외인 의존 질환, 발육병, 미분류 등으로 다시 분류된다. 병독 의존 질환과 외인 의존 질환은 각각 5가지 하위 그룹으로 다시 분류된다. 이 중 페스트는 첫 번째 하위 그룹을 형성하고, 말라리아는 두 번째 하위 그룹을 형성한다. 말라리아는 다시 간헐열/이장열/말라리아성 악액질 등으로 나뉜다. 영미식 질병 분류는 감염성 여부, 환경적 요인, 신체 계통 등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1870년대 이후 질병 분류 방식이 조금씩 변화되었지만, 감염, 발열, 신체 계통을 중심으로 한 분류는 지속되었다. 사망원인 분류 역시 감염병, 신체 부위, 계통 질환을 중심으로 분류되었으며, 주로 증상에 따른 분류였다( 신규환, 2014: 390-391; 신규환, 2015: 243-255). 1880년대까지 홍콩 식민지의 공식보고서는 증상에 따른 기존의 질병 분류 방식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세균학적인 질병 분류가 사용되지 않았던 1880년대까지 홍콩 최고의 사망원인은 무엇이었을까? 식민지 의관의 정기보고서에 따르면, 최고의 사망원인은 열병(fevers)이었다. 열병에는 감염성 질환뿐만 아니라 내분비 질환이나 자가면역 질환 등 비감염성 질환이 포함된다. 당시에는 세균검사나 현미경검사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각각의 열병을 정확히 구분해 낼 수 없었다. 홍콩에서 열병은 대부분 말라리아로 인한 것이어서 말라리아를 홍콩열병(Hong Kong fever)이라고도 불렀다( Yip, 2009: 12-29). 1880년대 말부터 1890년대까지 말라리아 발병률은 인구 10만명 당 400명이었고, 말라리아 치사율은 인구 10만명 당 200명으로 50%에 이를 정도였다( Chan-Yeung, 2018: 208). 식민당국은 말라리아의 발병 원인을 미아즈마설로 설명하고자 했다. 식민지 의관 아이리스는 늪지와 같은 불결한 환경이 말라리아 환자를 양산한다고 생각했다( Ayres, 1885: 173).
1886년 홍콩 식민지 의학계는 미지의 환경과 ‘동양의 질병’을 탐구하기 위해 홍콩의사회를 조직했고, 초대 회장을 맡은 패트릭 맨슨은 동양의 질병 중 말라리아가 가장 중요한 질병이라고 주장했다. 그 당시 대부분의 의사들은 말라리아의 발생 원인을 비위생적 환경 요인으로 돌리고 있었다. 그러나 맨슨과 프레스턴(T. J. Preston) 등 다른 부류의 의사들은 말라리아가 박테리아나 균체와 같은 해로운 생물에 의해 발생하고 있다고 추정하고 있었다( Ham, 2012: 139). 1880년대 맨슨은 모기가 말라리아의 중간 숙주 역할을 한다고 생각했으나, 모기에 물릴 때 말라리아 병원충인 열원충이 혈액 속에 침투한다는 것까지는 몰랐다. 맨슨은 세균설에 입각한 말라리아 감염이론을 주장하고 있었지만, 말라리아의 감염경로를 정확히 몰랐기 때문에 홍콩의 동료 의사들과 마찬가지로 환경적인 요인으로 말라리아가 발병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었다. 실제로 말라리아 환자의 대부분은 열악한 환경에서 거주하는 중국인들 사이에서 발생하고 있었다.
1886∼1887년 홍콩섬 서구(西區)에서 말라리아 감염자가 각각 772명, 441명 등으로 최고조에 이르렀다( Ayres, 1888). 이에 윌리엄 데복스(Sir George William Des Voeux: 1834-1909, 제10대 총독 재임 1887-1891) 총독은 이 질병의 조사를 위해 1888년 열병 위원회(The Fever Commission)를 조직했다. 이 위원회는 패트릭 맨슨과 홍콩의사회 회원들이 주도하였다. 열병 위원회는 토지절삭 금지, 유칼립투스 식물을 활용한 정수, 하수처리 시설의 향상 등 환경 시설의 개선을 통해 말라리아를 예방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Hong Kong Government, 1888a: 21). 이들의 말라리아 방역대책은 미아즈마설에 입각한 것이었다( Hong Kong Government, 1888b: 1-3).
홍콩 식민당국 역시 미아즈마설에 입각한 말라리아 이론을 선호했다. 대표적으로 앳킨슨은 세균의 존재를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말라리아의 원인이 열원충에 의한 감염이라고 주장하는 라베랑의 가설에 반대하면서 강수량, 기온, 토양 등이 말라리아를 양산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Atkinson, 1894: 1054-1060). 앳킨슨은 아이리스의 『1891년 식민지의관 보고서』의 부속 문서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앳킨슨은 1891년 여름의 런던 회의에서도 라베랑의 연구를 무시하고 있었다. 1894년 로마 회의에서도 앳킨슨은 홍콩의 말라리아는 토지 개간 등과 같은 환경적인 요인으로 발생한다고 주장하였다. 1894년 홍콩의 말라리아에 관한 보고서에서도 앳킨슨은 말라리아의 발생 원인을 기온, 습도, 토양 등 환경적인 요인으로 설명하고자 했다(Atkinson, 1894: 1055). 1896년 앳킨슨은 말라리아 환자의 혈액 샘플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Atkinson, 1896: 301). 그러나 1890년대까지 앳킨슨은 말라리아의 월간 그래프를 작성하면서 온도와 강우량을 중요한 기준으로 작성했다. 그가 기후와 환경을 말라리아 감염 확산의 주요한 요인으로 간주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는 여전히 미아즈마설에 입각한 말라리아 이론을 추종했던 것이다( Atkinson, 1900: 517).
1890년대 후반 로스와 맨슨 등은 모기에 물려 말라리아에 감염된다는 사실을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었다. 맨슨은 이후에도 말라리아에 대한 연구를 지속했는데, 홍콩을 이미 떠났지만, 열대의학의 대부이자 영국 식민성의 자문의(medical adviser to the colonial office, 재임 1897-1912)로서 영국정부 및 홍콩 식민당국과 의학계 전반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李尙仁, 2012: 10). 홍콩 식민당국도 미아즈마설에 입각한 말라리아 이론을 계속해서 고집할 수는 없었다. 1890년대 홍콩에서 세균설에 입각한 말라리아 방역대책이 본격화되지는 않았지만 미아즈마설에 입각한 말라리아 방역은 이미 임계점에 이르고 있었다. 말라리아 유행 지역에 대한 모기박멸책은 많은 비용이 들었고, 1900년 말라리아 감염자도 674명에 이르고 있었다( Bell, 1901: 689). 새로운 말라리아 이론이 정립됨에 따라 홍콩에서도 말라리아 방역대책을 수립하고 전담해 줄 전문가가 필요했다.
2) 식민당국과 의학계의 페스트 인식
1894년 5월, 홍콩에서 페스트 유행은 홍콩 사회에 심대한 충격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페스트의 원인과 감염경로를 둘러싸고 적지 않은 논란을 일으키고 있었다. 홍콩의 보건관료들은 페스트 조사를 위해 홍콩을 방문했던 기타사토 시바사부로(北里柴三郎: 1853-1931)와 같은 세계적인 세균학자의 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면서도, 페스트 방역에 대해서는 여전히 미아즈마설에 입각한 방역정책을 고수하는 이중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페스트가 발발하자, 홍콩 식민당국은 청결국 특별회의를 소집하여 프란시스(John Joseph Francis) 법률자문관을 위원장으로 하는 상설위원회가 페스트 방역의 전권을 행사하게 했다. 그러나 실제 방역업무는 식민지 의관인 아이리스가 책임지고 있었고, 정부공립의원의 감독관인 앳킨슨과 부감독관 로손(James Alfred Lowson: 1866-1935)이 실무를 담당하고 있었다. 당시 앳킨슨은 자신의 학위논문 때문에 일시 귀국한 상태여서 실질적으로 로손이 페스트 방역 실무를 담당하였다. 로손의 보고에 따르면, 1894년 5월부터 7월까지 세 달 동안 2,679명이 페스트에 감염되고, 2,485명이 사망하여 치명률은 93.4%에 이를 정도로 홍콩사회는 죽음의 공포에 휩싸였다( Lowson, 1895: 29). 로손은 페스트가 발병하자, 감염 환자를 격리 병원선인 히게이아호로 강제 격리하였고, 호구 검역과 소독 등 강력한 방역조치를 요청했다. 호카이(何啓: 1859-1914) 등 중국인 의사들은 강제 격리와 호구 검역 등 로손의 강력한 방역조치가 중국인의 반감을 불러일으킬 것이라면서 반대했지만, 상설위원회의 지원하에 로손은 병력을 동원한 강력한 방역조치를 실시하였다( 신규환, 2020: 38-39).
로손은 1866년 스코틀랜드 포파(Forfar) 출신으로, 1888년 에딘버러 대학에서 의학사를 받았다. 그는 1889년 11월부터 홍콩에서 정부공립의원의 의사로 일하기 시작했으며, 1894년 홍콩 페스트 유행시기 페스트 방역행정 실무자로 활약하였다. 그는 아이리스, 앳킨슨과 마찬가지로 미아즈마설에 입각한 강력한 방역조치를 주장했다. 1880년대 프랑스와 독일에서는 세균설이 확대되고 있었지만, 같은 시기 영국 의학계는 채드윅의 공중보건법과 미아즈마설의 지속적인 영향을 받고 있었다. 홍콩 식민지의 보건관료들이 영국의 영향하에서 미아즈마설에 입각한 방역행정을 전개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신규환, 2020: 46-50). 미아즈마설은 오염된 환경을 질병 전파의 근본 원인으로 간주하고, 감염병이 발생하면 환자를 강제 격리하고 감염원을 소독, 소각, 폐쇄시키는 대대적인 방역조치를 수반했던 반면, 세균설은 세균에 감염된 국소 부위에 대한 방역조치만으로도 방역의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었다. 미아즈마설과 세균설 중 어느 이론에 입각하여 방역을 실행하느냐에 따라 비용과 효과에 큰 차이가 있었다.
페스트 유행 초기, 로손은 페스트 유행이 페스트균의 감염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페스트가 바이러스 감염에 의한 것이 아니라 비위생적 환경이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여겼다. 페스트 유행을 막기 위해서는 페스트가 유행할 수 있는 열악한 환경을 개선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5) 실제로 로손은 비위생적 환경과 감염지를 일소하는 정책을 주도하였다. 아울러 그는 동화의원 등 중의병원을 감염의 온상으로 지목하고 동화의원의 폐쇄를 주장하기도 했다. 미아즈마설에 입각한 로손의 강력한 방역정책은 찬사와 동시에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흥미롭게도 미아즈마설의 강력한 주창자였던 로손은 세계적인 세균학자인 기타사토가 홍콩을 방문하자, 기타사토를 극진히 대접하는 한편 그의 연구를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로손의 보고에 따르면, 기타사토는 1894년 6월 14일과 23일 페스트균 발견에 성공했다. 미아즈마설의 강력한 지지자였던 로손도 더 이상 세균설을 부정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는 페스트가 페스트균 감염으로 발생한다고 인정했다. 그러나 기타사토의 페스트균 발견은 오류로 판명되었고, 오히려 홍콩 식민당국의 지원을 받지 못한 알렉상드르 예르생(Alexandre Yersin: 1863-1943)이 페스트균 분리에 성공하였다. 예르생의 페스트균 발견에도 불구하고 페스트의 감염 경로는 여전히 오리무중인 상태였다. 감염원을 차단하기 위해 미아즈마설의 해법은 여전히 유효하였다. 로손은 세균설을 부정하지 않았지만, 페스트의 근본 원인이 과밀과 배수 결핍에 의한 더러움, 환기 및 조명 불량, 영양 부족 등 환경적 요인에 있다고 주장했다. 그에게 세균설과 미아즈마설에 입각한 방역조치는 양립 가능한 것이었다( 신규환, 2020: 36-46).
식민당국의 미아즈마설에 입각한 방역정책은 강제 격리, 소독, 소각 등 가혹할 정도로 강력한 것이었다. 특히 식민당국은 경보병대를 동원하여 환자를 강제 격리시키고 중국인 거주지를 철거 및 소각하였기 때문에 중국인들의 강력한 저항에 직면했다. 로손 등 식민당국의 보건관료들은 페스트의 온상지로 동화의원을 지목하고 동화의원의 폐지를 강력하게 요구했고, 중국인들은 이에 반발하였다. 윌리엄 로빈슨(William Robinson: 1836-1912, 제11대 총독 재임 1891-1898년) 총독은 동화의원에 대한 실태조사를 위해 동화의원 조사위원회를 조직하고 대책을 마련하고자 하였다. 동화의원 조사위원회는 로크, 톰슨, 호카이, 채터, 화이트헤드 등 5명으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소수 의견으로 동화의원 폐지안을, 다수 의견으로 서양의학을 수용하는 조건으로 동화의원을 유지하는 방안을 제안했다. 로빈슨 총독은 동화의원을 개혁하는 다수 의견을 수용하면서 서양의사인 종징위(鍾景裕)를 동화의원에 근무하게 하였고, 의료선교사인 존 톰슨(John C. Thompson: 1863-?)을 순회감독관으로 임명했다( 신규환, 2020: 46-50).
3. 1890년대 말 세균설 정립 이후의 감염병 인식과 한계
1) 홍콩 의학계의 말라리아와 페스트 인식 변화
1897년 로날드 로스에 의해, 말라리아가 아노펠레스 모기에 의해 감염된다는 사실과 감염 경로가 확인되자, 1898년 12월, 영국 식민성의 체임벌린(Joseph Chamberlain: 1836-1914) 장관은 로빈슨 총독에게 홍콩의 모기 샘플을 채집하여 영국 자연사 박물관에 보내도록 지시했다. 6) 홍콩에서 아노펠레스 모기에 의한 감염이 어느 정도인지 확인해 보고자 한 것이었다. 1899년 홍콩 식민당국은 어떤 종류의 모기가 홍콩에 서식하고 그 중에서 말라리아 감염을 일으키는 종은 얼마나 차지하고 있는지에 주목하였다. 그 임무는 홍콩 산림부(the Botanical and Afforestation Department)의 책임자인 찰스 포드(Charles Ford)가 담당하였다. 찰스 포드는 원예 전문가로 모기 전문가는 아니었다. 찰스 포드는 수집한 185개의 표본을 영국에 보냈는데, 그 중에서 아노펠레스 모기는 발견되지 않았다. 표본 중에서 말라리아와 상관없는 9종의 집모기( Culex mosquitoes)가 확인되었다. 7)
이러한 조사 결과는 미아즈마설에 입각한 말라리아 이론을 선호했던 앳킨슨과 같은 식민지 보건관료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호재였다. 홍콩에서 말라리아는 특정 모기가 관여하는 것이 아니라 더럽고 비위생적인 포괄적인 환경이 근본 문제라고 계속해서 주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오래갈 수는 없었다. 영국 식민성은 홍콩에서 말라리아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1900년부터 아노펠레스 모기에 의한 감염 확산을 막기 위한 방역조치를 강구할 것을 홍콩 식민당국에 계속해서 타전했다.
최근의 연구들은 적어도 대다수의 경우, 아마도 모든 경우겠지만, 일반적으로 아노펠레스라고 알려진 모기종 또는 그 밖의 모기종들이 물 때 유기물(열원충)이 혈액에 들어오면서 질병에 감염된다. 아노펠레스는 혈액 속에 열원충을 가진 사람을 물게 되고, 혈액과 함께 열원충을 흡입하게 된다. 이 열원충이 아노펠레스의 성체 속에서 증식되고 세균을 증식시키고, 거기에서 곤충의 침샘과 주둥이에 침투하는 세균을 만들어낸다. 따라서 모기가 사람을 물 때, 사람의 혈액을 통해 열원충이 들어오고 질병이 발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라리아는 대다수의 경우, 아마 모든 경우에 감염된 아노펠레스에 물리는 것을 막는 것으로 예방이 가능할 것이다(The Hong Kong Government Gazette, 12 January 1901: 21).
이러한 말라리아 인식에 기초하여 식민당국의 방역 조치도 이전과는 달라져야 했다. 이전처럼 광범위한 지역에서 관개수로 사업이나 하수처리 사업을 실시하는 것만으로는 말라리아 방역의 성과를 얻을 수 없었다. 사람이 모기에게 물릴 수 있는 조건을 차단하는 것과 아노펠레스 모기를 퇴치하는 방안을 모색해야했다. 이에 따라 기존 페스트와 말라리아 방역에서 미아즈마설에 입각하여 방역 행정을 주도하던 앳킨슨과 로손의 역할이 지속되기는 어려웠다.
1900년 10월부터는 최고 의료책임자 권한대행(Acting Principal Medical Officer) 존 벨(John Bell)과 의료조사관(Inspecting Medical Officer) 존 톰슨 등이 말라리아 방역을 주도했다. 톰슨은 1888년 에딘버러 대학에서 의학사, 1892년 캠브리지 대학에서 의학박사를 각각 받았다. 그는 런던선교회(The London Missionary Society)의 선교사로 홍콩에 파견되어 앨리스기념병원(Alice Memorial Hospital)에서 일하였다. 그는 홍콩 페스트 유행 이후 동화의원의 순회감독관으로 일하면서 동화의원에 서양의학을 도입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1897년 1월 이후, 톰슨은 홍콩 식민당국의 의료조사관으로 일하기 시작했고, 영국으로 돌아가 맨슨의 말라리아 이론과 말라리아 방역대책 등을 공부하였다. 1900년 홍콩으로 돌아온 톰슨은 말라리아 방역을 위한 본격적인 업무에 착수했다( Wong and Chan-Yeung, 2023: 278-280).
톰슨은 1900년 10월부터 홍콩섬, 카오룽 반도, 신계 지역 36개 경찰서의 도움을 받아 매주 12마리씩 1년 이상 수집한 결과 31,350마리를 포획할 수 있었다. 그 결과 아노펠레스 모기가 전체의 3.7%를 차지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가 확인한 얼룩날개모기속( Genus Anopheles)에 속하는 모기는 3종이었다. 아노펠레스 시넨시스( Anopheles sinensis), 아노펠레스 마쿨라투스( Anopheles maculatus), 아노펠레스 파티간스( Anopheles fatigans) 등이었다( Given, 1928: 10). 이들 3종은 빅토리아 시티, 카오룽, 신계 지역 등지에서 서식하고 있었다. 톰슨은 이 조사 결과에 근거하여 1900년부터 1903년까지 이들 지역을 중심으로 덤불 제거, 웅덩이 소각 등 모기 번식지를 절멸시키기 위한 모기 박멸사업과 치료제인 퀴닌 배포사업을 전개했다( Thompson, 1903). 1901년에는 로널드 로스가 홍콩을 직접 방문하여 말라리아 감염 여부를 판별할 수 있는 혈액검사법을 전수해 주었다( Bell and Stewart, 1901: 1294). 1902년에는 임시 세균연구소가 개소되는 등 실험의학은 더욱 탄력을 받을 수 있었다. 그 결과 1902년 이후 홍콩에서 말라리아 환자 발생 수는 절반 이하로 줄어들었다( Ham, 2012: 149). 무엇보다 아노펠레스 서식지를 찾아서 원충을 제거하는 방식으로 모기를 박멸하는 것은 효과를 검증하기 어려운 점이 있었지만, 말라리아 환자를 발본색원하여 퀴닌 치료를 시행한 것은 상대적으로 큰 효과를 보였다( Bell, 1901: 500).
홍콩에서 페스트 인식 역시 1900년대 이후 중요한 변화가 확인된다. 1894년 페스트 유행 이래로 홍콩에서 페스트는 유행과 소강 상태를 반복하고 있었다. 1900년 이후 페스트로 인한 반복적인 대대적인 방역 활동 때문에 홍콩 경제가 침체 일로를 걷게 되자, 1901년 10월, 헨리 블레이크(Henry Arthur Blake: 1840-1918, 제12대 총독 재임 1898-1903) 총독은 정확한 원인규명과 근본적인 대책 마련을 위해 본국에 세균학자의 파견을 정식으로 요청했다. 8) 그는 세균설에 입각한 핀셋 방역으로 방역의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이에 영국 정부는 1901년 11월 세균학자인 윌리엄 헌터(William Hunter: 1875-1909)를 홍콩에 정식 파견했다. 그는 영국 정부가 파견한 최초의 세균학자였다. 헌터는 1875년 스코틀랜드 밴프셔(Banffshire) 출생으로, 1897년 스코틀랜드 애버딘대학 의과대학을 최우등으로 졸업하였다. 졸업 후 그는 베를린대학과 애버딘대학(Aberdeen University)에서 병리학을 공부했으며, 런던병원의과대학(London Hospital Medical College) 등지에서 병리 검사와 세균 연구를 담당하였다. 당시 홍콩에는 세균실험실이나 장비가 없었기 때문에, 헌터는 실험장비 없이는 홍콩에 갈 수 없다고 파견을 거부하기도 했다. 홍콩 식민당국으로부터 세균연구에 필요한 실험실과 현미경 등 실험장비를 충분히 공급할 것이라는 약속을 확인받고서야 헌터는 홍콩으로 떠나는 배에 올랐다. 1902년 2월 말, 홍콩에 도착한 헌터는 케네디타운 감염병원(Kennedy Town Infectious Disease Hospital)에 임시 실험실을 설치하였다. 실험장비가 제대로 조달되지 않아 4개월이 지나서야 완비된 실험실을 구축하였다( Hong Kong Museum of Medical Sciences Society, 2006: 147-151).
식민당국이 헌터에게 의뢰한 첫 번째 임무는 사망원인 분석이었다. 이에 헌터는 1902년 3월부터 세균학적 특징에 따라 사망원인을 분석하였다. 헌터는 1902년 한 해 동안 2,816명의 사망원인을 조사하였다. 주요 사망원인은 일반질환 27종, 국소질환 43종, 외상 5종 등으로 분류하였다. 27종의 일반질환은 주요 전염병과 기타 질환을 포함하는데, 두창, 페스트, 장티푸스, 콜레라, 이질, 각기병, 말라리아, 말라리아성 악액질, 패혈증, 파상풍, 한센병, 후천성 매독, 선청성 매독, 결핵, 알콜중독, 빈혈, 신경쇠약, 기아, 화상, 조산, 호지킨병, 아편중독, 사산, 익사, 의사(縊死), 질식, 소모증 등 1,636명이다. 이 중에서 최대 사망원인은 페스트(473명), 콜레라(379명), 결핵(151명), 각기병(149명), 말라리아(80명) 순이었다. 국소질환은 신경계질환, 순환계질환, 호흡계질환, 소화계질환, 림프계질환, 비뇨계질환, 생식계질환 등으로 나뉜다. 국소질환은 총 1,099명으로 기관지 폐렴(141명), 원인미상 설사(102명), 결핵성 기관지 폐렴(100명) 순이었다. 그 밖에 외상은 81명이었다. 이러한 질병 분류는 1890년대까지 사용된 증상에 따른 분류와 큰 차이가 없어 보이지만, 증상에 따른 육안 검사에서 벗어나 세균검사가 제도화되었다는 점에서 이전과는 큰 차이가 있었다. 주요한 세균검사는 현미경 검사를 통해 이루어졌다( Hunter, 1903: 213-221).
그런데 헌터가 말라리아에 대해 세균검사를 시행했는지는 불분명하다. 그의 질병 분류 목록에 말라리아는 항상 포함되어 있었지만, 말라리아를 중점적으로 분석한 보고서는 제출하지 않았다. 말라리아 방역은 톰슨이 주도하였기 때문에, 헌터는 말라리아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세균성 나선상균에 의해 발생하는 재귀열의 경우, 헌터는 모기에 의한 감염으로 판단하여 세균검사를 실시하였는데, 필요한 경우 말라리아에 대해서도 세균검사를 실시했을 것이다( Hunter, 1905: 961). 헌터는 말라리아보다는 당시 최대 사망 원인을 제공했던 페스트 방역에 주력했으며, 사체 부검, 현미경을 통한 세균검사, 백신제작 등을 통합 운영할 수 있는 세균연구소를 설립·운영하여 감염지에 대한 핀셋 방역으로 방역의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었다( 신규환, 2020: 60).
2) 열대의학과 인종론
19세기 중반 이후 반세기 동안 홍콩은 미아즈마설에 입각한 병인론이 지배하던 시기였고, 미아즈마설은 모든 질병이 더러운 환경에서 기인한다고 보았다. 식민지에서 식민주민들은 더럽고 조밀한 비위생적인 환경에 노출되어 있었고, 식민자들은 그들의 거주지와 일상 환경을 질병의 온상으로 간주하고 있었다. 식민당국자들은 질병 예방을 위해서는 식민주민들의 더러운 환경은 필요에 따라 언제든지 일소될 수 있는 대상으로 간주했다. 그러다 보니 미아즈마설은 인종론의 시각에서 식민주민을 차별하고, 식민지배를 정당화하는 이론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미아즈마설에 입각한 식민당국의 방역정책은 식민주민들과 충돌이 불가피했다.
19세기 말 새롭게 등장한 열대의학은 열대 식민지에서의 병인 연구를 환경적 요인을 중시하는 기존 연구에서 벗어나 세균설에 입각한 과학적 이론을 정립해 나가고 있었다. 세균설은 미아즈마설과 달리 질병이 발생하는 특별한 환경을 감염원으로 지목할 필요가 없었다. 또한 세균설에 입각한 방역조치는 소독과 예방을 위해 감염지역을 초토화시키는 대대적인 방역활동에 나설 필요가 없었으며, 감염병이 발생하면 감염원에 대한 핀셋 방역만으로 방역의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열대의학이 식민지 개척과 식민지배에 필요한 이론의 확립을 목표로 하는 한, 세균설만 식민지배와 인종차별 등과 동떨어져 있을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세균설을 지지하는 열대의학자들은 열대 질병의 병인에는 세균학적 원인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식민지인들의 신체, 생활습관, 거주지 등이 감염병의 온상이 될 수 있다는 점을 부인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들은 열대 질병의 감염을 막기 위해서는 가급적 식민주민들과의 교류를 피하고, 그들의 가옥에서 멀리 떨어져야 한다고 권고했다( Barron, 2008: 89-91).
1894년 홍콩에서 페스트가 유행한 후, 세계적인 세균학자들이 홍콩에 모여들었다. 페스트균이 발견되자, 세균설은 더 이상 논란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세균설에 비판적인 태도를 보였던 식민당국의 보건관료들도 점차 세균설을 수용하는 방향으로 태세를 전환했다. 그러나 식민당국이 세균설을 긍정했다고 해서 곧바로 방역정책이 완전히 달라진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식민당국은 더럽고 비위생적인 중국인들의 주거환경을 세균의 온상으로 지목했다( Robinson, 1896: 676).
식민당국은 식민주민들의 거주지, 식민주민이 자주 방문하는 병원, 사원, 시장 등을 주요한 감염병의 온상으로 간주하였다. 식민당국이 세균설에 입각한 방역정책으로 변경했을 때에도, 보건관료들은 식민주민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바꾸려 하지 않았다. 대표적으로 홍콩에서 페스트 유행 시기, 페스트 방역을 주도했던 로손과 앳킨슨과 같은 보건관료들은 세균설에는 온건한 태도를 보였던 반면 식민주민과 그들의 활동 반경을 감염병의 온상으로 지목하는 등 인종주의적 태도를 나타냈다. 1900년 전후 식민당국이 세균설의 수용을 공식화한 이후에도, 그들은 여전히 인종주의적 인식을 버리지 않았다( Atkinson, 1901: 231-234).
1880년대 홍콩에서 성공한 개업의였던 맨슨에게 최대의 난적은 말라리아였다. 그가 생각하기에 말라리아를 예방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안은 말라리아의 중간 숙주인 모기를 박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모기 박멸은 천문학적인 비용이 드는 일이었다. 맨슨 자신은 말라리아를 연구할수록 열원충에 의한 감염과 세균 증식을 확신했지만, 말라리아 방역을 위해서는 미아즈마설에 입각한 방역정책과 타협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미아즈마설의 지지자들은 모기가 서식하는 더러운 환경을 일소하고, 중국인 거주지와 거리를 두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1890년대 말기 말라리아 감염 경로를 검증한 논문 발표 이후에도 맨슨은 말라리아 감염을 피하기 위해서는 식민지 주민의 가옥에서 멀리 떨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Manson, 1900: 951). 당시 중국인들의 말라리아는 평균적인 치사율보다 훨씬 심각한 양상을 나타냈다. 서양인들의 치사율이 18.2%였던 것과 달리 중국인들의 치사율은 93.4%에 이를 정도였다( Yip, 2018: 111). 서양인들은 말라리아 방역을 위해서는 아노펠레스 모기에 물리지 말아야 하는 것 이외에도 감염상황이 심각한 중국인들의 거주지에서 멀리 떨어지는 것을 당연한 일로 여겼다.
1900년 이후, 홍콩 식민당국은 세균설에 입각하여 말라리아 방역을 본격화했다. 홍콩의 말라리아 방역을 주도했던 것은 존 톰슨이었다. 톰슨은 영국에서 맨슨의 말라리아 이론을 공부했고, 맨슨은 영국 식민성의 자문관으로 홍콩 식민당국에도 영향을 미쳤다( Thompson, 1900: 1701-1702). 존슨을 비롯한 보건관료들은 아노펠레스 모기에 의한 말라리아 감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저수조와 수로 등에 서식하는 모기들의 박멸시키는 방안, 혈액검사를 통해 아노펠레스 모기 감염을 확인 후 퀴닌 복용 방안, 말라리아 방역을 강화하기 위해 식민주민과의 인종 분리 방안 등을 제안하고 있었다. 9)
이러한 말라리아 인식과 방역대책은 기본적으로 맨슨의 말라리아 연구와 방역대책에서 기원한 것이었다. 말라리아 방역을 위한 맨슨의 제안은 홍콩뿐만 아니라 아시아 전역에서 활동하는 열대의학자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싱가포르의 해군 검역관인 기븐 역시 홍콩의 말라리아 방역을 위해 식민주민에 대한 인종 분리 방안을 제안하였다( Given, 1928: 28). 이처럼 열대의학자 사이에서 서양인 중심의 인종론은 상당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다. 20세기 전반, 홍콩에서 세균설에 입각한 열대의학의 확립은 홍콩의 방역행정이 효율적이고 과학적인 방역이라는 새로운 단계로 진입했음을 알렸지만, 다른 한편 서양인 중심의 인종론과 오리엔탈리즘을 강화하는 또 다른 계기로 작용하고 있었다.
4. 맺음말
맨슨은 아모이, 타이완, 홍콩 등지에서 세균설에 입각한 열대의학 연구를 본격화하고 있었다. 1880년대 홍콩 최대의 사망원인은 말라리아로 그 시기까지만 해도 홍콩 식민당국과 의학계는 미아즈마설에 입각한 말라리아 병인론을 지지하고 있었다. 맨슨은 상피병과 말라리아 등의 연구를 통해 곤충이 병원체의 숙주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밝혀 세균설에 의한 감염 이론을 제시했지만, 감염 경로를 정확히 제시할 수 없어 홍콩 식민당국과 의학계가 지지하고 있던 미아즈마설을 넘어서기엔 역부족이었다. 더불어 그가 제안한 말라리아 방역대책도 모기가 서식할 수 있는 더러운 환경의 일소, 퀴닌 복용, 중국인과의 분리거주 등 미아즈마설의 입장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맨슨의 말라리아 방역대책은 기본적으로 모기박멸에 맞춰져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는 말라리아 방역의 효과를 높이기 어려웠다. 말라리아 방역을 위해서는 모기박멸과 더불어 다양한 대책이 병용되어야 했다. 맨슨의 말라리아 방역대책에 나타난 인종주의적 시각은 1880년대 홍콩 활동 시기에 이미 배태되어 있었다.
1880년 라베랑의 말라리아 원충의 발견과 1894년 예르생의 페스트균 발견은 열대의학과 세균설의 발전에서 중요한 계기였다. 그러나 원인균이 발견되었다 해도 감염경로가 규명되지 않으면 기존의 방역정책을 변경할 수 없었다. 그런 점에서 1897년 로스의 아노펠레스 모기 말라리아설(mosquito-malaria theory)과, 1899년 폴-루이 시몽(Paul-Louis Simond: 1858-1947)의 쥐벼룩설(rat-flea theory) 확립은 세균설에 입각한 방역정책을 전환하는데 중요한 근거를 제공했다.
19세기 말 홍콩은 말라리아와 페스트 유행의 한복판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열대 병인론과 실제 방역을 둘러싼 의학계의 각축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홍콩 식민당국과 의학계는 세균설에 의한 병인론을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았다. 1890년대 세균설이 과학적 지위를 확고히 하자, 식민당국의 보건관료들은 세균설에 점진적이며 양립적인 태도를 보였다. 1890년대 말 말라리아와 페스트의 감염경로 등이 확인되면서 홍콩 식민당국도 세균설에 입각한 방역정책을 더 이상 미룰 수 없었다. 영국 식민성 장관과 홍콩 총독의 지시와 요청으로 방역정책의 대대적인 변경이 이루어졌다. 식민지 홍콩에서는 1900년대 이후 세균설에 입각한 방역정책이 본격화되었다. 그러나 세균설에 의한 열대 병인론이 확립되고, 방역정책이 수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식민주민에 대한 인종론적 인식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열대의학자들은 열대 질병에는 세균학적 원인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여전히 식민지인들의 신체, 생활습관, 거주지 등이 감염병의 온상이 될 수 있다고 여기고 있었다. 세균설에 입각한 열대의학 이론은 식민지배를 위한 논리를 제공했으며, 인종론을 결합시켜 오리엔탈리즘적인 질병 인식을 강화해 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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