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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J Med Hist > Volume 33(1); 2024 > Article
송대(宋代) 사람들의 옹저(癰疽)에 대한 인식과 대응: 홍매(洪邁)의 『이견지(夷堅志)』를 중심으로†

Abstract

During the Song period, abscesses(癰疽) were a disease that could affect anyone regardless of their class. This study examines how people at that time explained the cause of abscesses and their efforts to treat them, focusing on the experiences of those who suffered from abscesses and their families. Previous research on disease history during the Song period primarily focused on ailments like colds (傷寒) and infectious diseases (瘟疫), or plagues prevalent in the southern regions of China. On the other hand, examining abscesses as a common everyday illness that could affect anyone and considering them from the perspective of patients’ experiences has remained unexplored in previous studies.
To reconstruct the experiences of Song period patients, this study analyzes over sixty anecdotes related to abscesses found in Yi Jian Zhi (夷堅志) written by Hong Mai. These cases span across the mid to late 12th century, with a majority of the patients being from the literati (士人) class or connected to the literati.
These anecdotes exhibit two distinct trends. One focuses on narratives surrounding the onset of abscesses, attributing their cause primarily to the patients’ lifestyle. When the cause of the abscesses was unknown, people metaphorically attributed its onset to perceived blasphemy against God, an act of killing, negligence in duties, or other wrongdoings. This trend is evident among the literati class in particular, where abscesses were often linked to factors such as excessive legal executions or exploitation, and even acts of killing people. Except for those cases, in explaining the cause of abscesses in commoners, there were instances caused by a pediculus infestation, while in case of literati, Dansha (丹砂) poisoning was a common cause. It is interesting to note that the narrative tradition, prevalent in official history biographies, which attributes the onset of abscesses to worries and resentment, was not evident in written records such as Yi Jian Zhi. Furthermore, the detailed description of external similarities, portraying abscesses as traces of punishment from the underground realm (陰界), is a narrative characteristic that solidified such stereotypical perceptions. The literati's notion that they should alert people through these related anecdotes contributed to the spread of this perception.
Another trend in these anecdotes was centered around narratives of abscess treatment, where the focus shifted primarily to seeking “doctors,” unlike the metaphorical explanations of abscess onset causes and processes. When afflicted with abscesses, people generally sought out those renowned surgeons, known as Yang-yi (瘍醫), and those famous for treating abscesses. In local communities, individuals who had “received the divine secrets of abscesses,” those possessing their own mysterious abscesses cures, and those famous for generations for treating abscesses by using stone acupuncture were active. Such information about them was shared within the local societies. Their treatment predominantly consisted of surgical procedures to lance abscesses and drain pus, which often led patients to endure significant pain during the treatment process. In many cases, such patients sought treatment from well-known local surgeons and abscess specialists who surgically treated them. The literati, who are said to have influenced the development of pulse-centered medical and academic medicine in China, also sought out surgeons for abscess treatment.
Medical formularies compiled by the court as well as privately published ones rarely mentioned surgical methods utilizing tools. The fact that surgical techniques were utilized in local regions at that time indicates a disparity between the official medical practices documented in texts and the practical methods employed in local communities.
An analysis of approximately sixty anecdotes related to abscesses shows that abscesses were characterized by unknown causes and excruciating pain. Their onset was often attributed to the patient’s lifestyle and wrongdoings, and they were also perceived as punishment for one’s wrongdoings. However, as it was a disease where treatment effects could be relatively easily observed through surgical procedures, there was a proactive utilization of the locally formed treatment environment, preferring surgical interventions over relying on religious powers. Contrary to the medical trends and methods outlined in medical literature, surgical treatments were prevalent as the chosen method of treatment among the population in local communities. It appears that the realities experienced, reasoned, and shared by people in the Song period regarding the perception and response to abscesses did not necessarily align with those of mainstream medical practices. Moreover, despite attributing the onset of abscesses to one’s wrongdoing, there was a preference for seeking surgeons or Yang-yi (瘍醫) over religious methods in their treatment, reflecting a characteristic of the local medical culture surrounding abscesses during the Song period.

1. 머리말

‘옹저(癰疽)’1)는 중국 의료사에서 아주 오래전부터 주목받아 온 질병 중 하나로, 송대(宋代, 960~1279) 『외과정요(外科精要)』를 쓴 진자명(陳自明, 1190~1270)은 서론에서 “무릇 옹저의 병은 다른 병에 비해 매우 고통스러워 성인(聖人)들은 이를 잡병의 우두머리로 여겼다”고 언급하였다.2) 옹저는 ‘잡병의 우두머리’로서 사람들이 일상에서 자주 경험하는 질병이었다. 이 논문은 옹저에 대해 송대 일반 사람들이 어떻게 대처하였는지, 즉 발병 경위와 원인에 대해 어떻게 이해하고 또 이를 치료하기 위해 어떤 조치를 취하였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의료사에서 질병에 대한 연구를 할 때, 병인(病因)과 치료 원리 등 의학사적 고찰도 중요하고, 국가 또는 사회 공동체의 관리나 통제를 살펴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일반 사람들이 그 질병을 어떻게 경험하고 사유하며 어떤 조건 속에서 어떤 치료를 택했는지를 살펴보는 것도 중요해 보인다. 이와 관련하여 의료사회학이나 의료인류학은 질병에 대한 일반인의 시각과 경험을 중요한 주제로 다룰 뿐만 아니라 질병에 있어서 생물학 이상의 요인들, 건강 관련 신념과 믿음, 행동의 구성, 치유시스템과 사회적 위계 등에 포괄적으로 주의를 기울인다(데버러 럽턴, 2009: 131-173; 메릴 싱어, 2022: 14). 또, 질병이란 사회적 현실의 특별한 배치 속에서 구축된 구성물로, 특정 질병에 대해 사회적으로 구축된 ‘해석 모델’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언급한다(Kleinman, 1980: 104-105). 송대 옹저에 대한 일반 사람들의 사유와 믿음 그리고 그들에게 제공된 치료 환경과 그들의 선택을 살펴보는 것은 옹저를 둘러싸고 송대 사회가 구축한 대처 방식의 다채로운 면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옹저에 대한 송대 일반인의 경험을 관찰할 때 필요한 유용한 자료를 우리는 송대 필기 자료에서 찾을 수 있다. 특히 『이견지(夷堅志)』는 남송(南宋, 1127~1279) 시기 홍매(洪邁, 1123~1202)가 지방관으로 재직하며 여러 지역에서 보고 들은 이야기를 모아 수록한 것으로, 편찬 시기는 대략 12세기 말로 추정된다. 『이견지』는 다양한 계층의 일반 사람들의 일화를 담고 있어 그간 송대 사회사나 생활사 또는 여성사 연구에 많이 활용되었다. 서사 자료로서 정사(正史)나 전장(典章)류 또는 사대부의 문집에서 볼 수 없는 당시 사람들의 일상생활에 대한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3) 근래에는 법제사 연구자 역시 『이견지』의 사료적 가치를 강조하며 송대 법사학 연구에서 『이견지』의 일화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바 있다.4) 물론 의료사 연구에서도 『이견지』를 활용한 다양한 연구가 축적되어 있다. 주로 기층 사회의 의료 환경과 민중의 경험을 다룬 연구가 주를 이루었다.5) 본 논문에서는 『이견지』를 중심으로 송대 전문 의학계나 치자(治者)의 입장이 아닌 옹저에 대한 병자로서 일반 사람들의 경험을 살펴볼 것이며,6) 이외에 비슷한 시기 다양한 필기 자료, 의안 자료 및 정사의 유관 기록 등을 함께 보면서 『이견지』가 가질 수 있는 한계를 보완하고자 한다.
『이견지』의 질병 관련 일화 중 옹저가 차지하는 비중은 적지 않으며,7) 이를 통해 볼 때 옹저는 당시 사람들이 자주 경험하는 질병이었다. 이는 비슷한 시기 다른 사대부들의 필기 자료나 심지어 정사 자료를 보더라도 유독 옹저와 관련된 기록이 많은 데서 역시 확인된다. 『이견지』 내 옹저와 관련된 일화를 정리해 보면 총 60여 건으로 <부록 1>과 같다. 일정한 시기 특정 질병과 관련된 일반 민의 경험을 60여 건 수집할 수 있는 것은 매우 드문 사례이며, 이것이 본 연구에서 『이견지』를 중심으로 활용한 이유 중 하나이다. 이렇듯 집중된 사료를 통해 당시 옹저를 둘러싼 사람들의 사유와 선택 그리고 당시의 의료문화 등을 유추할 수 있다.
약 60여 건의 일화를 분석하여 보니 송대인의 옹저 경험과 관련한 일화에는 서로 다른 두 가지 서사 경향이 보인다. 하나는 발병 경위나 원인에 중점을 둔 서사이고, 다른 하나는 치료 과정을 부각한 서사이다. 이 두 경향은 언뜻 보기엔 상이한 내용으로 보이나 모두 옹저에 대한 송대인의 대처 방식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떼어 놓고 볼 수 없다. 아울러 원인에 대한 인식과 치료에 대한 선택이 반드시 합리적 사유의 흐름을 따르지 않을 수 있으며, 그 모순적이며 다층적 측면이 송대 사람들의 질병 경험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깊게 할 것이다.
먼저, 송대 사람들은 옹저의 발병 경위와 원인을 이해할 때 여러 상상과 해석을 가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은유’의 방식으로 질병에 부여되는 사회적 의미를 고찰한 수잔 손택의 연구를 참조할 수 있다(수잔 손택, 2010). 또, 옹저에 대한 대응에서는 의사, 특히 옹저 전문 의료인을 찾는 사례가 자주 목격되었다. 이는 사회가 제공하는 여러 치료 조건 속에 당시 사람들의 선택을 보여주기에 흥미롭다. 한 질병에 대해 발병에 대해서는 은유적 사유를, 대응에 있어서는 실질적 치료를 보여주기에 당시 사회에서 가지는 옹저라는 질병의 독특한 함의를 읽을 수 있다.
송대 의료사 연구에서 질병에 대한 주목은 주로 남방의 지리적 환경과 관련한 풍토병이나 온역과 같은 전염병 및 그 대책에 대한 연구가 주를 이루었다.8) 옹저는 언제 어디서나 누구나 걸릴 수 있는 일상의 질병으로, 송대 질병사 연구에서 옹저에 대한 주목은 의미가 있다. 물론 일상의 질병으로 ‘상한’에 대한 연구가 적지 않으나 옹저는 송대 흔한 질병이고 당시 사람들이 주목했던 질병임에도 상한에 비해 연구자들의 관심을 많이 받지 못했다. 게다가 상한과 관련한 연구를 보더라도 이론이나 문헌연구에 집중돼 있다(逯銘昕, 2017). 이런 맥락에서 일상의 질병에 대한 일반 사람들의 경험에 집중하는 본 논문의 시도는 학술사적으로 의의가 있다. 『이견지』를 활용하여 송대 의료사를 연구한 사례는 지금까지 적지 않지만 특정 질병에 대해 주목한 연구는 많지 않다.
이외에 옹저와 관련한 연구는 중국 전통 의학에서 옹저를 어떻게 이해하고 치료했는지 의학 지식에 관한 연구가 주를 이룬다.9) 다만, 옹저에 대해 근래 문화사적으로 접근한 연구가 있어 주목할 만한데, 중국 사학(史學) 전통 속에 등에 저(疽)가 발하여 죽었다는 뜻의 “저발배이사(疽發背而死)” 서사 현상을 분석한 연구이다(潘務正, 2016: 136-145). 이 연구는 역대 전기류 자료를 중심으로 사가(史家)의 태도에 주목하여 옹저에 대한 인식과 해석을 분석했다. 그러나 사가의 입장 외에 사인 계층을 포함한 민간 영역에서 나타난 옹저에 대한 다양한 인식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본 논문에서는 기존 연구를 바탕으로, 『이견지』의 일화 및 비슷한 시기 필기류 기록과 옹저 관련 의안 및 정사 등을 자료로 삼아 옹저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인식과 대응을 관찰하고자 한다. 먼저, 60여 건의 일화에 대한 설명을 시작으로 발생 시기와 지역 및 발병자의 신분과 발병 부위 등에 대한 이해를 한다. 그다음 발병 경위나 원인에 대한 서사를 분석하여 당시 사람들의 사유 속에 나타난 옹저에 대한 인식을 살펴볼 것이다. 마지막으로 당시 사람들이 옹저의 치료를 위해 어떠한 노력과 선택을 하였는지 그 대응 과정을 살펴본다. 이러한 고찰은 당시의 전문 의학계의 경향이나 관(官)의 정책이 아닌 송대 일반 사람들의 실제 경험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2. 옹저(癰疽): 사인(士人)의 병

『이견지』에는 옹저의 발병과 치료에 대한 약 60여 건의 일화가 수록되어 있다. 시기를 보면 대략 12세기를 전후로 발생한 것이다. 일화 중 시기를 명시한 28건을 기준으로 분석해 보면 모두 12세기에 발생한 일화임을 알 수 있다. 시기적으로 가장 이른 것은 대관(大觀) 2년(1108)의 일이고,10) 가장 늦은 것은 경원(慶元) 2년(1196)의 일이다.11) 대략 12세기 100여 년에 걸친 일화들이라 할 수 있겠다. 지역으로 보면 여러 지역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양절로(兩浙路)와 강남동로(江南東路)에서 일어난 일화가 비교적 많다(<부록 1>). 또한 60여 건의 옹저 발병 케이스는 불완전하지만 계통적인 분석을 할 수 있는 여지도 우리에게 준다.
그렇다면 주로 어떤 이들이 옹저를 앓았을까? 병자의 신분 구성은 매우 다양했다. <부록 1>을 근거로 하여 발병자의 신분 구성을 대략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데, 전체 일화 중 발병자가 미지칭 다수인 일화 1건,12) 발병자가 신이거나 귀신 또는 꿈에 나타난 사람인 경우 3건을 제외하고,13) 또 물고기 두창을 언급한 1건을 제외한14) 총 57건의 일화에서 2명의 발병자가 언급된 5건, 4명의 발병자가 언급된 1건의 일화를 고려하면, 총 65명의 발병자가 등장하며, 그들의 신분 구성을 살펴보면 아래 <표 1>과 같다.
발병자의 구성을 보면 사인(士人) 및 그 가족이 전체 발병자의 약 70%를 차지한다. 이러한 결과는 우리로 하여금 옹저가 사인 계층에서 더 많이 발생했던 질병이었는지 의문을 갖게 한다. 사인 계층의 발병자가 다수를 차지하는 것은 다양한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겠다. 저자 홍매가 사인 계층이기에 사인 계층의 일화를 더욱 많이 접했거나 또는 더 관심을 가지고 수집했을 가능성이 크며, 또 다른 우연한 계기로 사인 계층의 일화가 더욱 많이 남게 되고 수록됐을 수 있다. 상식적으로 보더라도 영양 상태나 위생 조건이 더 나쁜 하층 계층이 옹저에 더 취약했을 수 있다. 그러나 위 통계 결과가 분명히 말해주는 것은 당시 사인 계층이(도) 옹저를 많이 앓았다는 사실이다.
옹저는 확실히 사인 계층이 자주 걸리고 또 종종 죽음에 이르기도 했던 질병이었다. 많은 사인이 이름을 올린 『송사·열전』에 그들이 옹저를 앓았다는 기록이 적지 않게 발견되는 것은 이를 잘 반영한다.15) 또한 사대부 사찬 의방서 등에 옹저와 관련한 내용은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을 보면 옹저는 당시 사대부들이 주목했던 질병 중 하나임은 분명해 보인다. 무엇보다도, 『이견지』의 저자 홍매의 형이었던 홍괄과 홍준은 모두 옹저의 치료에 관심을 보인 바 있고(최해별, 2018), 홍매 역시 이에 영향을 받아서인지 『이견지』에 옹저 관련 일화를 적지 않게 수록하였다. 옹저는 분명 홍매가 주목했던 질병 중 하나였다.
그다음으로 위 65명의 옹저를 앓은 병자들의 상황을 잘 살펴보면, 그 발병 부위가 매우 다양했음을 알 수 있다. 65명 중 발병 부위가 언급되지 않는 경우 1건, 그리고 발병 부위가 두 군데 언급된 병자 2건을 고려하면 모두 66건 신체 부위가 언급되는데, 구체적인 상황은 아래 <표 2>를 참조할 수 있다.
『이견지』의 일화 속 옹저의 발병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언급되는 부위는 등(發背)이었다. 등에 발병하는 경우가 22건으로 거의 3분의 1의 비중을 차지한다. 나머지는 머리와 얼굴, 온몸, 손과 발 등이 많이 언급되었으며, 그 외 목과 인후, 다리, 가슴, 엉덩이 등 순으로 언급이 되었다. 무엇보다도 등에 발병한 22건 중 사인 또는 그 가족이 발병한 사례가 18건이나 되었고, ‘부자’로 명시된 자가 1건이었다. 발병자의 신분이 사인 계층의 비중이 크다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등의 경우 유독 사인 계층 또는 부자에게 더욱 집중되는 경향을 포착할 수 있다.
사인 계층과 옹저의 관련성은 당대 의자(醫者)의 시선에서도 확인된다. 12세기 말 13세기 활동했던, 송대 외과 의학의 발전에 기여한 바 있는 진자명은 옹저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외과정요』를 편찬하면서 그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한 바 있다.
옛날부터 비록 ‘양의(瘍醫)’라는 한 과가 있었고 또 『유연자귀유방(劉涓子鬼遺方)』 등 논저가 있었지만, 후대 사람들은 깊이 연구하지 못했고, 이에 이 방들은 잊혀 없어지고 왜곡되고 어그러졌으며 미혹되고 막혔다. 지금 향촌과 마을에는 대부분 비천한 사람들이 전문적으로 이 과를 다루고 있다. 그러나 이 병에 걸리는 사람은 또한 대부분 부귀한 자로 『내경』에서 이르길, “대저 옹창은 대부분 기름진 고기와 좋은 곡식을 먹는 사람들에게서 나타난다”고 하였다. 우리 집안은 대대로 대방맥을 전공하였는데 매번 이 병에 걸리는 사람들을 보면 열 명에 한두 명만이 살아남으니 대개 의자들 가운데 우수하고 훌륭하여 능히 방론을 연구할 수 있는 자가 적기 때문인 것이다.16)
진자명은 옹저 치료에 대한 당시 현실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외과정요』의 편찬 취지를 설명하고 있다. 옹저를 치료하는 자들은 주로 비천한 자들이고 옹저에 걸리는 병자들은 대체로 부귀한 자들이라 치료가 어려워 의자들이 옹저 치료에 대한 방론(方論)을 더욱 연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옹저에 걸리는 사람이 대부분 부귀한 계층이라고 한 지적은 『이견지』의 일화가 반영하는 현실과 어느 정도 일맥상통한다.
이처럼 진자명은 옹저의 원인에 대해 『내경』을 인용하며 기름진 음식을 언급했고, 또 향촌과 마을에서는 비천한 이들이 주로 옹저 치료를 담당하고 있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실제 현실에서 사인 계층을 포함한 당시 일반 사람들은 옹저의 발병을 어떻게 이해하고, 그 치료를 위해 어떤 대응을 선택했는지 궁금해진다.

3. ‘옹저의 해(癰疽之害)를 입다’: 발병 원인에 대한 인식

『이견지』의 일화나 비슷한 시기 필기 자료를 보면 옹저의 발병 경위와 원인에 대한 일반 사람들의 다양한 사유를 엿볼 수 있다. 의료인류학에서는 한 사회가 병의 원인을 이해하는 방식을 ‘자연 원인론’과 ‘초자연적 원인론’으로 나누었다.17) 옹저의 발병에 대해 송대 기층 사회에 형성된 이해는 초자연적 원인론에서도 그 병을 ‘징벌’의 결과로 보는 경우가 많았다. 옹저를 징벌의 결과로 보는 것은 이미 진한(秦漢) 시기부터 있었다. 기존 연구를 보면, 사가(史家)의 ‘천도(天道)를 밝히는’ 역할을 배경으로 『사기(史記)』 이후 저(疽)의 발배(發背)가 하늘의 견책이라는 인식이 있었고, 이후 사가들 사이에서 이러한 전통이 이어왔다고 언급하였다. 아울러 명청 시기 이러한 관념은 민간으로 확대되어 보편화되었다고 지적하였는데(潘務正, 2016: 136-145), 이 절에서는 이미 송대부터 이러한 인식은 민간에서 매우 보편적이었음을 밝히며, 사서나 전기류의 기록을 넘어 다양한 필기 자료 속에 담긴 기층 사회의 인식을 복원하고자 한다.
옹저의 발병 원인을 응보로 이해하는 것은 당시 의학계의 설명과는 다소 층위의 차이가 보이는 것이었는데, 의서를 읽을 수 있고 의학지식에 어둡지 않았던 사인들도 이러한 인식을 공유했다는 것이 흥미롭다. 송대 사회는 어느 사회에서나 그럴 수 있듯 한 질병에 대해 서로 다른 층위의 이해가 공존했다. 전통 의서에서 언급하는 옹저의 발병 원인을 보면 다음과 같다. 『황제내경(黃帝內經)· 영추(靈樞)』를 보면, 옹저의 발병 원인을 정서적 문제(喜怒不測), 식생활의 문제(飮食不節), 음기와 양기의 불균형(陰氣不足, 陽氣有餘), 영기(營氣) 흐름의 문제 등으로 지적하였고,18) 『유연자귀유방(劉涓子鬼遺方)』에서는 역시 영위기혈(營衛氣血)의 불통으로 인해 열이 성하고 이로 인해 살이 썩는 것이라 하였다.19) 송대 진언(陳言, 1121~1190)은 『삼인극일병증방론(三因極一病證方論)』에서 옹저의 발생은 세 가지 측면, 우사희노(優思喜怒)로 인한 기의 막힘, 한열풍습(寒熱風濕)으로 인한 것, 단석 등 식생활과 방사(房事) 등을 꼽았다.20) 경원 연간(1195~1201) 편찬된 이신(李迅)의 『집험배저방(集驗背疽方)』에서는 천행(天行), 수약기체(瘦弱氣滯), 노기(怒氣), 신기(腎氣)의 허약, 단약(丹藥) 등 식생활 다섯 가지로 보았다.21) 대체로 당시까지의 주류 의학에서는 옹저의 원인으로 첫째, 걱정과 희노의 정서적 요인 등으로 인한 기혈의 불통과 응체, 둘째, 한열풍습 등 사기의 침투, 셋째, 단약 등 식습관을 꼽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견지』를 포함하여 당시 사인들이 남긴 필기류 기록을 보면 병자의 평소 잘못에서 발병의 이유를 찾은 경우가 많았다. 당사자의 과오로 ‘옹저의 해(癰疽之害)’22)를 입었다고 생각했으며, 옹저를 ‘화복보응(禍福報應)’23)의 결과로 인식했다. 옹저의 발병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독특한 사유는 수잔 손택이 지적한 은유로서 질병이 가지는 다양한 상징과 의미를 떠올리게 한다. 그는 원인이 불명확하거나 치료가 어려운 질병은 사람들을 두려움에 떨게 하고 사회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옳지 못하다고 느껴질 은유로 사용될 가능성이 많으며, 그 질병과 그 질병을 앓는 사람들에게 낙인을 찍는데(수잔 손택, 2010: 93, 142), 이렇듯 질병을 둘러싼 은유적 사유를 송대 사람들의 옹저 해석에서도 찾을 수 있다. 다만 송대의 경우 낙인찍기라는 설명보다는 당시 사람들이 공유했던 ‘정형화된 해석(stereotype)’이 존재했다고 설명하는 것이 더욱 적절해 보인다. 아래에서는 송대 옹저의 발병을 둘러싼 일련의 정형화된 해석의 구체적 내용과 사인 계층에서 나타난 특징 그리고 관련 일화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서사적 경향성, 이러한 인식이 확산된 동력 등을 분석하고자 한다.

1) ‘옹저의 해’를 입게 된 다양한 이유 – 신성 모독, 살생, 직분에서의 잘못, 슬(虱)

송대 일반 사람들의 사유 속에 ‘옹저의 해’를 불러일으킨 병자의 잘못은 다양했다. 먼저, 송대 사람들은 신상(神像)에 대한 훼손 등 신성 모독에 대한 응보로서 옹저의 발병을 이해했다. 요주(饒州) 쌍점(雙店)에 사는 왕환(汪渙)은 대대로 신을 잘 모셨는데, 어린 아들이 장난을 치다 신상의 가운데 손가락을 부러뜨렸고 그날부터 아이의 가운데 손가락에 창(瘡)이 생겨 몹시 아팠으며 손이 오그라들어 펴지 못했다.24) 또 온주(溫州)의 시장 사람 장팔(張八)은 한 객상으로부터 단향목(檀香木)으로 된 관음상을 샀는데 진짜 단향목인지 의심스러워 불상의 발바닥을 깎아보았다. 이때부터 왼쪽 발이 아프기 시작했고, 저독(疽毒)이 피부를 찌르는 것같이 아팠으며 발은 문드러졌다.25)
위의 사례들은 신상에 대한 훼손의 정도가 심하지 않았기에 대체로 죽음에까지 이르지는 않았는데 소흥 13년(1143) 건양현(建陽縣) 사람 왕무간(王撫幹)의 사례는 좀 달랐다. 그는 영천사(靈泉寺)에 머물면서 절 앞에 있던 십여 그루의 신성이 깃든 거목을 베어 땔감으로 쓰려고 했다. 현지 사람들은 이곳에서 귀신을 보았다는 자도 있어 매년 제사를 지내던 곳이었다. 그는 결국 땔감 3천 단을 얻었지만 한 달 후 등에 저가 발하여(疽發於背) 죽었다.26)
신성 모독과 관련하여 부적을 쓰는 도사나 제사를 주관하는 도인의 경건하지 못한 태도 역시 옹저로 벌을 받았다. 예를 들면, 도술에 능하게 된 한 사인이 부적을 쓸 때 실수로 잘 못 써서 그 벌로 옹저를 앓았다.27) 유사한 일화는 다른 필기 사료에서도 보인다. 다소 시기는 이르지만 오대 북송 초 손광헌(孫光憲, ?~968)이 편찬한 『북몽쇄언(北夢瑣言)』을 보면, 전촉(前蜀, 907~925) 시기 옥국관(玉局觀)의 도사 조가선(趙駕仙)과 상관도사(上官道士)는 단에 올라 법사를 행하는데 경건하게 임하지 않았다. 곧 두 도사는 발배로 인하여 죽었다.28) 이 일화는 남송시기 증조(曾慥, ?~1155)가 편찬한 『유설(類説)』에 수록되었으니 남송까지 계속 회자 된 것이다.29) 또 송대의 일화로 화산(華山) 운대관(雲䑓觀)의 한 도사는 물건을 팔아 이익을 취하고 술과 여자를 가까이하고 순검(廵檢)인 마씨(馬氏)도 그와 함께 어울려 다녔다. 결국 도사는 등에 창이, 마순검은 저가 발하여 죽었다.30)
살생에 대한 대가가 옹저의 발병으로 이어졌다는 사유도 매우 보편적이었다. 관직이 선찬사인(宣贊舍人)에 이른 양씨(楊氏)는 평생 닭고기를 좋아하였다. 말년에 귀밑머리 아래 부스럼이 일었고, 목구멍에 옹저가 발하였다.31) 양씨 외에 감묘관(監廟官)이었던 조씨(趙氏) 역시 평소의 살생으로 옹저를 앓게 되었다. 그는 병약하여 평소 녹혈(鹿血)을 먹었는데, 매일 한 마리씩 그 몸에 긴 철관을 꽂아 피가 모이면 마셨다. 만년에 그는 옹저를 앓다가 죽었다.32) 남송 시기 곽단(郭彖, 생졸년 미상)이 쓴 『규거지(睽車志)』를 보면 유사한 사례가 보인다. 상숙현(常熟縣) 호남촌(湖南村) 부자 왕익(王翊)은 집에서 거위 한 마리를 삶으려고 하여 이미 털을 깎고 도끼로 거위를 내리치려는데 갑자기 거위가 울었다. 집안 사람들은 이를 기이하게 여겨 달려와 왕익에게 아뢰었으나 왕익은 삶아서 먹었고, 며칠 후 저가 발하여 죽었다.33) 이 외에 물고기 요리를 팔아서 생계를 유지했던 서무(舒懋) 역시 결국은 살생의 응보로 온몸에 옹저가 퍼졌는데, 통증이 매우 심했으며 결국 죽었다.34)
신성 모독이나 살생 외에 병자의 평소 행실이나 맡은 직분에서 잘못을 범하는 경우도 종종 옹저의 발병으로 이어졌다. 예를 들면, 자신의 이익을 위해 거짓 진료를 한 의료인의 일화에서도 나타난다. 부조교(符助敎)는 옹저 치료를 잘하기로 이름이 났는데 재물을 탐하여 병자의 상처에 독이 없는데도 먼저 약으로 독을 발하게 하여 치료를 하였다. 결국 그 역시 옹저가 발하여 죽었다.35) 의사 왕돈인(王敦仁)의 사례도 거짓 진료의 죗값으로 옹저가 발하여 죽은 경우이다.36) 이외에 가난한 사람의 물건을 대신 팔아주던 중개인이 중간에 이익을 착복한 죄로 옹저가 발병하였다는 일화도 있고,37) 시부모님 봉양에 성실하지 않은 며느리가 그 죗값으로 옹저를 앓게 되었다는 일화도 흥미롭다.38)
응보적 사유 외에 외부적 요인이 옹저를 유발하였다고 이해한 일화도 없지는 않다. 슬(虱), 즉 이가 몸에 들어와 발병하는 경우인데, 이른바 슬류(虱瘤)이다. 무주 임천현의 어떤 사람은 뺨에 옹저가 생겼는데, 의사는 슬류라고 진단하였고 반드시 갈라서 이를 빼내야 한다고 하였다.39) 또 요주(饒州) 부량현(浮梁縣)의 이씨는 등에 무언가 나서 간지러워 참을 수 없었는데, 의자(醫者) 진덕립(秦德立)은 슬류라 진단하였고, 터뜨리자 이가 한 말이나 나왔다고 한다. 치료를 하였지만 이씨는 결국 죽고 말았다.40) 처주(處州) 송양현(松陽縣) 백성 왕육팔(王六八)은 그릇과 시루를 만드는 일을 하였는데, 어느 날 진운(縉雲)의 주씨(周氏) 집에서 일을 해주다 장난으로 시루에 구멍을 뚫어 이를 넣고 메웠다. 그 후 1년 뒤 다시 시루를 수리해 주기 위해 와서 메운 곳을 열어보니 이가 살아 있었고, 그는 손에 상처를 내 피를 빨아 먹게 하였다. 간지러워 긁으니 그 자리에 옹저가 났고 손등까지 퍼졌으며 치료를 하기 어려운 지경이 되어 마침내 죽었다.41) 그의 장난이 화를 불러온 것이다.
송대 일반 사람들은 옹저의 발병 경위를 이해하면서, 신성 모독이나 과도한 살생 또는 평소맡은 직분에서의 잘못 등에서 이유를 찾는 경향이 있었고, 슬에 의한 발병의 사례도 있었다. 이를 통해 당시 기층 사회에 작동했던 가치, 신에 대한 경외나 살생의 금지 또는 도인과 승려등 종교인, 의사나 중개인 등 특정 직종에서의 윤리 의식, 며느리로서의 도리 등에 대한 보편적 인식을 확인할 수 있으며, 옹저에 대한 정형화된 해석은 이러한 가치의 유지와 확산에 일조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사인의 병이라고 인식되는 옹저인 만큼 사인들의 경험과 이해는 어떠했는지 궁금하다.

2) 사인(士人)의 사례 – 가혹한 법의 집행, 과도한 징세, 살인, 단사(丹砂)

송대 사인들 역시 옹저의 발병 경위에 대해 다양한 사유를 하였으며, 평소 행실의 잘못에서 그 원인을 찾았고 위에서 열거한 정형화된 사유의 경향이 그대로 확인된다. 그런데 여러 과실 가운데서도 두 가지가 매우 두드러졌다. 하나는 관직에 있으면서 그 역할에서 잘못과 실수가 있어 옹저가 발병했다는 것과 단사와 같은 금석약의 복용으로 인한 것이 그것이다.
먼저, 인종(仁宗) 가우 2년(嘉祐, 1057) 진사이자 호부시랑(戶部侍郞)의 자리까지 올랐던 채거후(蔡居厚, ?~1125)의 사례가 전형적이다. 선화(宣和) 7년(1119)에 채거후가 호부시랑에서 파직되고 청주(青州) 지사로 임명되었는데 부임 가기 전 등에 옹저가 발병하여(疽發于背) 도사를 불러 제를 올리고 친하게 지내던 왕씨에게 청사(青詞)를 써달라고 하였지만 며칠 뒤 죽었다. 왕씨 역시 갑자기 죽었다가 사흘 후 다시 깨어나더니 말하길, 채거후는 음계에서 벌을 받고 있으며 이는 오직 운주(鄆州)에서 처리한 일 때문이라고 전했다. 채거후의 부인은 남편이 운주안무사로 있었을 때 양산박(梁山濼)의 도적 오백 명이 투항하였는데 그들을 모두 다 죽였던 일을 말해주었다. 결국 채거후의 옹저 발병은 그 때문이었던 것이다. 가족들은 도사 노시중(路時中)을 불러 황록초(黃籙醮)를 지내고 사죄하며 대신 용서를 구하였다.42) 『송사』의 채거후 열전에서는 청주로 부임 가기 전 병으로 죽었다고만 기록하고 있는데,43) 그의 죽음에는 기실 이런 곡절이 있었던 것이다.
엄주(嚴州)의 관찰판관(觀察判官) 왕진(王稹) 역시 부당한 처벌을 했다는 논란에 휩싸여 옹저를 앓고 음계(陰界)에 끌려갔다가 겨우 살아 돌아왔는데 억울함을 인정받아 목숨은 건졌지만 옹저의 흉터는 남게 되었다.44) 건염 연간(建炎, 1127~1130) 계양감(桂陽監) 지사직을 맡고 있던 오중궁(吳仲弓)은 도적들에 대해 엄한 법으로 다스렸고 감옥에 들어간 자들 모두 죽음을 면치 못했는데, 그 역시 결국 옹저로 죽었다.45) 이들 사례의 경우 가혹한 법의 집행도 있지만 결국 이로 인해 사람을 많이 죽게 한 죗값을 받은 것이다.
이외에 세금을 가혹하게 징수하여 백성들에게 해를 끼친 지방관 역시 등의 옹저로 고통을 받게 되었고 결국 죽음을 면치 못했다.
자중현(資中縣)의 마모(馬某)라는 자는 도조사간관(都漕司幹官)으로 있을 때 매번 세금 징수를 감독하면서 오직 많이 거둘 것만 생각하고, 세액이 적합한지 여부는 불문하고 오직 기한 내 징수에만 신경을 썼다. 그리고 이에 대해 큰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사천 지역 주민들은 그가 잔학스럽게 세금을 거두어가는 것을 보고 ‘마쇄(馬刷)’라고 별명을 지어 주었다. …… 얼마 후 마씨의 등 왼쪽에 옹저가 났다. …… 옹저로 악취가 온 방에 진동을 했다.46)
세금의 징수를 가혹하게 했던 지방관 마모는 그에 대한 응보로 옹저를 앓았다. 이외에도 정화 4년(1114) 조정의 궁궐 수축 과정에서 골회(骨灰)가 필요했는데, 옛 무덤을 파헤쳐 인골을 썼던 일에 연루된 조정의 한 관원이 역시 옹저로 죽었다.47)
이로써 보건대, 지방관의 경우 대체로 엄혹한 법의 집행과 가혹한 세금의 징수가 주요 잘못으로 거론되었다. 두 가지 죄를 모두 범한 한 지방관도 있었는데, 재상 진회(秦檜)의 처남이자 소흥(紹興, 1131~1162) 초 소주(蘇州) 지사를 맡고 있던 왕환(王㬇)은 옆구리에 저가 발배하여(疽發于脅) 죽었다. 관련 기록을 보면 그는 형을 집행하는 데도 엄혹했고 세금을 거두는 데도 엄준했다고 평하며 옹저의 발병은 이와 무관하지 않음을 내비쳤다.48)
그다음으로, 사인의 사례에서 눈에 띄는 것은 단사(丹砂) 등 금석약의 복용과 관련한 것이다. 양절로(兩浙路) 월주(越州) 통판(通判)을 지낸 소무(邵武) 사람 왕회(王櫰)는 천진교를 지나다 한 거지를 도와주었는데, 범상치 않던 거지를 미처 알아보지 못한 왕회는 그가 준 과일이 황금으로 변한 것을 보고서야 비로소 후회하였다. 거지는 왕회에게 당신이 신선이 될 기질이 없어서라고 말하며 20년 후 돌아오겠다고 하였고, 그 후 20년 왕회는 단사를 복용했고 등에 옹저가 발병하여 죽었다.49) 신선이 되고자 단사를 먹은 것이 화에 이른 것이다.
사인 집안의 가족들도 단사의 복용으로 옹저가 발병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북송 시기 왕안석을 도와 신법을 실시하고 참지정사(參知政事)와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 등을 지낸 장돈(章惇, 1035~1106)의 시첩은 70세의 나이에 등에 옹저가 발병했다. 현승(縣丞)인 손자 장씨는 수주(秀州)에서 옹저 치료로 이름이 알려진 장소낭자(張小娘子)를 불렀고, 장소낭자는 단약을 먹어 그 독이 일으킨 것으로 진단하였고 치료가 어렵다고 했다. 현승은 조모가 평생 한 번도 단약을 먹은 적이 없다고 말하자 조모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 자의] 말이 맞을 것이다. 젊을 적에 매번 공[章惇]께서 대단(大丹)을 드실 때 늘 우리 무리에게 반 알을 주셨는데 오랜 시간 먹었고 여러 차례 먹었다. 그러니 독이 쌓인 것인데 지금 후회한들 무슨 소용 있겠나?50)
그녀는 결국 죽었다. 당시 옹저 치료로 이름난 자라도 단약의 독으로 인해 발병한 옹저는 치료가 어려웠음을 알 수 있다.
제일 주목할 만한 사례는 남송 고종 시기 중서시랑(中書侍郎)까지 지낸 장각(張慤)의 경우다. 그의 사례는 당시 사대부의 옹저 발병율이 높을 수밖에 없었던 현실이 단사의 복용과도 무관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그는 젊은 시절 거의 매일 단사를 먹었다고 한다. 나이가 들어 복주(福州)로 돌아왔을 때 식욕이 왕성하여 엄청난 양의 음식을 먹어치웠다. 후에 갑자기 발제(髮際)에 부스럼(瘍)이 생기더니 목으로까지 번졌고 결국 죽었다.51)
이로써 보건대, 사인의 경우 옹저의 발병을 이해할 때 주로 관원으로서 직무를 수행할 때 저지른 과오가 거론이 되었고, 여기에는 투항한 도적의 생명을 경시한 것, 가혹한 법의 집행과 과도한 세금의 징수 등이 포함이 되었다. 또 욕망의 추구를 상징하는 금석약의 복용도 옹저의 발병을 설명하는 주요한 원인이 되었다.
송대는 의서가 전하는 기록과는 다른 층위로 기층 사회에서 사인 계층을 포함하여 많은 사람이 옹저의 발병을 병자의 과오에 대한 죄값으로 이해했다. 사인의 경우 의학지식에 어둡지 않았을 것인데도 평소 과실에서 옹저의 발병을 복합적으로 이해했다. 한 가지 주목할 점은, 필기 자료 속 일화에서는 정서적 원인이나 혈기의 응체 그리고 한열풍습의 침투 등과 관련한 이해는 찾아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특히, 『송사·열전』에서 옹저로 사망 원인을 기록하고 있는 사대부 중에는 근심과 울분이 병이 된 “우분성질(憂憤成疾)”의 사례가 종종 등장한다. 『송사·열전』 역시 응보의 결과 등 다른 원인을 언급하고 있기도 하지만 우분(憂憤) 또는 분에(憤恚)로 인한 옹저의 발병을 명확히 기록하고 있으며, 이는 앞서 의서에 나타난 원인 중에서도 걱정과 희노 등의 정서적 요인에 해당하는 것이다. 사인들의 울분이 옹저 발병으로 이어졌다는 서사에 대해서는 기존 연구에서 사학(史學) 전통과 관련하여 상세히 분석하였기에 이를 참조할 수 있다(潘務正, 2016: 136-145). 다만 여기에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송사·열전』에는 자주 보이는 ‘우분성질(憂憤成疾)’의 서사 경향이 『이견지』 일화나 다른 사인의 필기 자료에서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서사와 기록의 목적과 방식에 따라 서로 다른 인식의 양상이 나타나는 것도 흥미롭다.
옹저의 발병 경위와 관련하여 송대 일반 민중들이건 사인들이건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경향은 응보적 사유이다. 사인들에게 있어서는 관원으로서 행실이 더욱 중시되었고, 여기에는 엄혹한 법의 집행, 과도한 세금의 징수, 맡은 직의 수행과정에서의 살인, 그리고 과도한 욕망의 추구 등이 죄악시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관원에게 요구된 가치는 옹저의 발병을 둘러싼 정형화된 해석을 형성해왔을 터이며, 사인들도 이러한 해석을 공유하고 확산하였기에 이는 일반민의 요구를 반영한 것일 뿐만 아니라 그들 스스로 구축한 것이었다. 여러 일화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서사적 특징을 분석하면 이러한 인식이 얼마나 정교하게 구축되었는지 확인할 수 있다.

3) 옹저, 음계(陰界)의 처벌 흔적

송대 옹저의 발병 경위를 설명하는 일화를 보면 공통적으로 확인되는 하나의 서사적 특징을 발견할 수 있는데, 옹저가 병자의 잘못에 대한 ‘음계(陰界)’의 처벌임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피와 고름이 흐르기도, 살이 썩어 패이기도 하는 다소 혐오스러울 수도 있는 옹저의 모양은 음계의 징벌의 흔적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상술한 바 있는 엄주(嚴州)의 관찰판관(觀察判官) 왕진(王稹)의 사례는 ‘음계’를 다녀온 서사가 등장하여 매우 흥미롭다. 그는 음사(陰司)의 재판을 받고 돌아와 사람들에게 그가 겪은 일을 말한다. 그는 저가 등에 발하여 통증으로 정신이 혼미해진 끝에 음계에 끌려가게 되었는데 그가 예전에 참여했던 재판 건으로 불려간 것이며 함부로 한 사람을 처벌한 죄에 대해 심문을 받았다고 했다. 왕진은 그 판결은 상급자 주지사의 뜻이었고 자신은 어쩔 수 없었다고 항변하였으며, 음계의 관원들은 관련 문건을 확인 후 그의 억울함을 확인하고 결국 살려 보내주었다. 그가 깨어났을 때 “피비린내가 진동했고 창은 이미 터져 그날 바로 나았지만”, “등에 두 개의 흉터가 마주 보고 있었고 일찍이 도형을 받은 것 같았다”고 언급하고 있다.52) 다행히 목숨은 건졌지만 흉터는 남았던 것이다. 거짓 진료로 한 사람의 억울한 죽음을 바로 잡을 길이 없게 만든 왕돈인은 저가 등에 발하여 죽으면서 “지금 나는 반드시 지하(地下)에서 대질을 당할 것이다”라고 하였다.53) 왕진이나 왕돈인의 사례 모두 생전의 과오에 대해 음계의 수사와 재판을 상정하고 있고 옹저는 징벌의 결과임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옹저가 음계 처벌의 흔적임을 더욱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일화도 있다. 사인(士人) 호자문(胡子文)은 소주(蘇州) 상숙현(常熟縣) 복산(福山)에 있는 동악행궁(東嶽行宮)에서 실수를 저질렀다. 동악행궁에는 선악(善惡)의 두 판관(判官)이 마주 보고 있었는데, 호자문이 술에 취해 악을 다루는 판관의 붓을 장난으로 집어왔다. 갑자기 한 사자(使者)가 오더니 호자문을 동악행궁으로 끌고 갔고 호자문은 용서를 빌었지만 재판관은 그렇더라도 처벌은 받아야 한다며 들고 있던 붓으로 호자문의 등에 점을 찍었고 호자문은 곧 깨어났다. 붓으로 점을 찍은 곳에 저가 생겼고 통증이 참을 수 없었으나 백일 만에 나았다.54) 상술한 바 있는 옹저 치료를 잘하기로 소문난 부조교(符助敎)는 재물을 탐하여 거짓 진료를 일삼다가 결국 음계에서 온 황색 옷을 입은 포졸(黃衣卒)에게 잡혀가게 되었다. 포졸은 손에 들고 있던 방망이를 높이 들어 부조교의 등을 찍었고, 찍은 곳에는 사발만한 대저(大疽)가 발하였다.55)
경건하지 못한 태도로 제단에 올랐던 도사 조가선과 상관도사는 법사를 행하려고 하던 찰나 갑자기 한 노복이 엎어져 경기하며 말하길 “붉은 옷을 입은 네 사람이 하늘에서 내려와 두 도사를 끌고 단 앞으로 데려가 등을 20대씩 채찍질하였다”고 하였다. 곧 두 도사는 발배로 인하여 죽었다. 등에 가해졌던 채찍질이 발배로 나타난 것이다.56) 경건하지 못했던 운대관의 도사와 그와 어울린 순검 마씨도 어느 날 동시에 같은 꿈을 꾸었고, 꿈에 어디론가 잡혀가 장 70을 맞고는 깨어보니 도사는 등에 창이, 마순검은 저가 발하였다.57)
음계의 직접적인 처벌이 아니더라도 옹저의 발병 형상을 마치 처벌을 받은 모습처럼 묘사한 사례도 적지 않다. 세금을 가혹하게 거두었던 마쇄라는 별명을 가진 자중현의 마모도 그 죗값으로 옹저를 앓았는데, “마씨의 등 왼쪽에 옹저가 났다. 그런데 옹저가 좀 나아졌다 싶더니 다시 오른쪽에 옹저가 생겼다. 두 개의 옹저가 서로 마주 보고 있는 것이 척장을 당한 모습과 똑같았고, 옹저의 깊이도 몇 마디나 되어 살 사이로 폐가 다 보일 지경”이라고 하였다.58)
또한 장기가 훤히 들여다보인다는 묘사도 주목할 만하다. 숙천현(宿遷縣)의 수재(秀才) 주씨(周氏)와 곽씨(郭氏)는 같은 마을 대성(大姓)인 윤씨(尹氏) 집에서 정강지변 시기 조종어용(祖宗御容)과 궁위(宮闈)의 기물을 확보했다가 조정에 보내지 않았다고 무고를 하였고 이에 윤씨 집 사람들이 기시에 처해졌다. 후에 주씨는 그 공으로 본 현의 현령이 되고 곽씨는 현승이 되었다. 훗날 그들은 우연히 길에서 만난 다섯 명의 장졸이 쏜 화살에 가슴을 맞았는데, 두 사람은 쓰러졌고 다음날 등에 저가 생겨 앞뒤로 뚫어져 오장이 다 보였고, 결국 죽었다.59)
장기가 다 보인다는 묘사와 관련하여 가우(嘉祐, 1056~1063) 연간 진사로 북송 시기 군사적 방면에서 큰 공을 세우고 추밀부사(樞密副使)의 자리까지 올랐던 왕소(王韶, 1030~1081)의 경우도 주목할 만하다. 그는 왕안석 신법 시기 이루어진 개척 사업인 ‘희하개변(熙河開邊)’에 주도적 역할을 하였는데 이때 사람을 많이 죽였다. 그는 등에 저가 발하여 죽었는데, 『송사』의 저자들이 그의 열전을 쓸 때 덧붙이길, “이미 저를 앓고 있을 때 오장이 훤히 들여다보였는데, 대개 사람을 많이 죽인 증거다”라고 하였다.60)
또, 살생의 경우 병자의 옹저가 발한 모양과 살생을 당했던 대상의 죽을 때 모습의 유사성을 강조한 일화도 있다. 건염 연간(建炎, 1127~1130) 말 계양감(桂陽監) 지사직을 맡았던 오중궁(吳仲弓)의 사례는 전형적이다. 오중궁은 잡은 도적 떼를 모두 죽인 죗값으로 병에 걸려 목 주위에 큰 옹저가 났는데, “얼마 후에 곪은 데가 터져 인후의 목줄이 다 드러날 정도였다. 마치 참형을 받은 사람의 모습과 흡사하였다”고 했다.61)
관직이 선찬사인에 이른 양씨는 평생 닭고기를 좋아하여 결국 옹저에 걸렸는데, “옹저가 곪아 터진 뒤 고름이 흘러 목구멍 아래에 이르자 살을 파고들어 구멍이 생겼다. 그 위치가 정확하게 닭을 잡을 때 칼로 내려치는 곳과 같았다”고 하였다.62) 양씨 외에 감묘관(監廟官)이었던 조씨는 평소 녹혈(鹿血)을 먹었는데, 매일 한 마리씩 그 몸에 긴 철관을 꽂아 피가 모이면 마셨다. 만년에 그는 옹저를 앓았는데 피부를 갉아 먹어 구멍이 생겼고 간지러웠으며 대나무 관을 꽂아 끓는 물을 부어 넣어야 가려움이 멈추었다.63) 역시 사슴에 철관을 꽂아 피를 마신 형상과 유사한 형상으로 옹저의 발병과 고통을 묘사함으로써 옹저가 평소 살생의 응보임을 명확히 하였다. 이 외에 물고기 요리를 팔아서 생계를 유지했던 서무(舒懋) 역시 결국은 살생의 응보로서 온몸에 옹저가 퍼졌는데, “옹저의 도드라진 부분이 모두 미꾸라지나 드렁허리의 머리 모양이었고, 뾰족한 주둥이가 밖으로 튀어나와 있었다”라고 묘사했다.64)
평소 단사를 먹어 왕성한 식욕을 자랑하다 옹저의 발병으로 죽음을 맞이한 중서시랑까지 지낸 장각도 마지막 죽음에 이르렀을 때의 모습은 “36개의 창이 생겨 결국 죽었다. 게다가 창이 터질 때는 소리가 났고, 상처가 모두 밖을 향하고 있어 사람의 입과 뒤집힌 입술 모양 같았다”고 전하였다.65)
옹저의 발병은 신체 각 부위에 외형적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았고 게다가 피부가 썩고 고름과 피가 흐르는 경우가 많았다. 발병의 원인을 병자의 평소 잘못에 대한 응보로 사유하는 정형화된 인식은 혐오스러운 외형을 강조하여 그것이 곧 그 음계 처벌의 흔적이나 결과라는 서사를 통해 더욱 견고하게 전개되었다.

4) 이를 알려 세상 사람들이 경계 삼게 하다!(著之於此, 以爲世戒!)

송대 사회는 옹저의 발병을 두고 서로 다른 층위의 인식이 공존했지만, 특히 기층 사회의 일반 사람들의 사유 속에서는 병자의 평소 과오에 대한 죗값이라는 정형화된 인식이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정형화된 인식은 관련 일화가 사람들 사이에 전해지면서 더욱 확산하였을 텐데 여기에는 사인들이 이런 일화를 기록하여 세상 사람들이 경계 삼게 하였던 것이 한몫했다.
이와 관련하여 왕안석 신법 시기 ‘희하개변(熙河開邊)’에 주도적 역할을 하며 많은 사람을 죽였던 왕소(王韶, 1030~1081)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기억과 서사를 주목할 만하다. 우리는 이미 『송사·열전』에서 그가 “저를 앓고 있을 때 오장이 훤히 들여다보였는데, 대개 사람을 많이 죽인 증거다”라고 언급한 것을 확인했다.66) 이렇듯 그의 옹저의 발병이 사람을 많이 죽인 것과 무관하지 않다는 인식은 기실 북송 시기부터 이미 팽배해 있었다. 북송 시기 주욱(朱彧)은 아버지 주복(朱服)이 요(遼)에 사신으로 갔을 때 또는 광주 지방관으로 있을 때 보고 들은 내용 등을 수집하여 선화 연간(宣和, 1119~1125) 책으로 편찬하였는데, 관제나 전장 제도 및 토속과 민간풍습까지 광범위한 내용을 담았다. 흥미로운 점은 그가 왕소와 관련하여 다른 정사 자료에는 보이지 않는 다음과 같은 일화를 싣고 있다는 것이다.
왕소는 희하에서 사람을 많이 죽였으며, 말년에 홍주(洪州)지사를 맡으면서 불교를 공부하였다. 하루는 장로 스님 조심(祖心)에게 묻길, “예전에 도를 알지 못했을 때 지은 죄가 실로 많습니다. 지금 도를 알게 되었으니 죄가 사라지는 것입니까?” 심이 답하길: “옛날에 어떤 사람이 가난하여 빚을 졌는데 부귀해진 후 돈을 빌려준 주인을 만나면 갚아야 합니까? 말아야 합니까?” 왕소가 말하길, “반드시 갚아야지요.” 심이 답하길, “그런즉 도를 알게 되었다며 돈을 빌려준 자가 어찌 빚을 면해주지 않는가라고 하면 어찌하겠습니까?” 얼마 후 왕소는 저가 뇌에 발하여 죽었다.67)
이 일화는 한 스님과 왕소의 대화를 통해 불교에 귀의를 하더라도 죗값은 치러야 함을, 그리하여 왕소는 말년에 불교를 공부하고 죄를 뉘우쳤지만 옹저의 발병을 피할 수 없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당시 왕안석을 좇았던 신당(新黨)에 대해 우호적이었던 주욱의 태도를 생각한다면 왕소의 과오와 그의 죽음을 바라보는 당시 사회의 냉혹한 인식이 더욱 느껴진다. 대화체의 형식이나 스님의 비유를 통한 설명이나 분명 읽는 이로 하여금 교훈을 얻게 하려는 의도가 다분히 보인다. 왕소의 사례는 당시 사람들 사이에 회자 되었고, 남송 시기 이도(李燾, 1115-1184)는 『속자치통감장편(續資治通鑑長編)』을 편찬하면서 “저가 발배하여 오장이 다 보였는데 이는 [과오에 대한] 응보”라고 기록했다.68) 그리고 이러한 인식은 원대 사인들이 『송사』를 편찬하면서 그의 열전을 쓸 때에도 그대로 전해졌던 것이다.
관련 일화를 기록하고 소개하는 데는 이를 세상 사람들이 경계 삼게 하고자 하는 의도가 분명히 있었다. 상술한 바 있는 세금을 가혹하게 거두어 ‘마쇄’라는 별명까지 얻었던 자중현의 마모는 마지막에 옹저가 발하여 죽음을 앞두고 있었을 때 문병을 하러 온 이들에게 “당연히 저를 귀감으로 삼아야 합니다. 저는 그저 후회막급일 뿐입니다”라고 탄식하였다.69)
단사 등 금석약을 복용하여 옹저에 걸리는 일도 경계를 삼아야 할 일이었다. 방작(方勺, 1066~1142)의 『박택편(泊宅編)』의 기록을 보면 당시 사인들의 금석약(金石藥) 복용 문제를 거론하며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금석약을 복용하는 자들은 약의 힘을 빌려 그 욕망을 채우려 하는 것이기에 대부분 숨기며 말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어느 날 병이 발하면 비록 숨기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다. 오흥(吳興) 사람 형부시랑 오경연(吳景淵)은 유황(硫黄)을 먹었는데 이를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20년 후 아들 탁(槖)이 화정(華亭)의 시역관(市易官)이 되었을 때 발배(發背)로 죽었으니 비로소 유황독이 그 독기를 전하여 아들에게까지 미친 것임을 알았다. 어찌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70)
방작은 금석약의 복용을 경계하면서 당시 금석약을 복용하면서도 숨기는 자들에게까지 경계의 글을 남긴다. 형부시랑 오경연은 평소 유황을 몰래 복용하였는데 결국 그 화가 20년 후 그의 아들에게까지 미쳤다는 것을 알리며 “어찌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며 경고하였다.
상술한 남송 고종 시기 중서시랑까지 지낸 장각의 사례는 그의 처참한 죽음이 후대까지 전해지며 경계를 삼으라고 경고하는 이들에게 널리 인용되는 사례가 되었다. 『송사』의 장각 열전을 보면 그의 사망 경위에 대해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다.71) 그러나 그가 단사를 복용해서 소위 ‘빈저(鬢疽)’로 죽었다는 이야기는 송대 그리고 그 이후 널리 알려졌다. 장고(張杲)는 『의설(醫說)』에서 사대부들에게 “금석약에 대한 경계(金石藥之戒)”의 일화들을 소개하며 “복단지과(服丹之過)”의 제목을 달아 장각의 사례를 소개하였다.72) 장각의 일화는 이후 명대 이시진의 『본초강목』 “단사”조에 수록된다.73)
홍매와 비슷한 시기를 살았고 사대부 가문 출신의 주밀(周密, 1232~1298) 역시 옹저가 ‘보응’의 결과이며 이를 널리 알려 경계 삼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사람 중에 하나이다. 그는 가혹하고 과도한 처벌로 결국 음계의 처벌을 받아 옹저를 앓다 죽은 한 지방관을 소개하면서 서두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화복보응(禍福報應)의 이야기는 대부분 이치에 맞지 않게 끌어다 붙이거나 사실과 다르게 전해지는 경우가 있어 다 믿을 만한 것이 못 된다. [그러나] 지금 마을에서 직접 목격하여 확실한 일이 한 가지 있기에 여기에 적어 세상 사람들이 경계삼도록 하려 한다.
주밀이 본 일은 당시 가화현(嘉禾縣) 통판이면서 지현을 대신해 그 지역을 다스리고 있던 진조(陳造, 자는 周士)의 일화다. 통판 진조는 자신을 모욕했다고 여긴 노비를 과도한 처벌로 죽음에 이르게 하였는데 다음과 같다.
[진조는] 그에 관해 여러 가지 일을 조사하여 편지로 써서 [그의 주인인] 조덕연에게 전달하였는데, 과장 되게 재물을 숨긴 죄 등 그 논하는 것이 지나쳤다. 당시 조덕연은 소주 장관으로 있었는데 당일 바로 사람을 보내 그를 잡아 오게 하였고, 척장을 한 후 유배 보내 압송하여 가화현에 이르러 무리가 다 볼 수 있게 하였다. 당시는 한창 더울 때였는데, 진조는 곧 그의 옷을 벗겨 뜨거운 햇빛 아래 비추게 하니 상처의 피가 곪고 냄새났다. 그는 수일 만에 죽었다. 죽기 전에 주씨는 탄식하며 이르길: “진 통판이 무고하게 나를 때려죽였으니 마땅히 음부(陰府)에 가 고소를 할 것이다.” 당시가 보우(寶祐) 년 병진(丙辰) 해 6월이었다. 이해 12월 진조는 저가 발배하여 죽었다. 아, 무서운 일이다!74)
그 노비는 죽으면서 음계의 관아에 고소하겠다고 탄식했다. 결과 같은 해 진조는 저의 발배로 죽음에 이른 것이다. 불과 6개월 만의 일이었다. 주밀은 “무서운 일이다”라고 탄식하며 진조의 잘못에 대한 응보가 저의 발배로 인한 죽음으로 나타난 것으로 믿으며, 이를 기록으로 남겨 사람들에게 경계 삼으라고 한 것이다.
병자의 평소 잘못으로 인한 응보로 옹저에 걸려 죽음에 이른 일화는 사람들 사이에 회자되었다. 동시에 일화에 반영된 사회가 요구하는 일련의 가치들도 확산되었을 것이다. 물론 정사류 사료에서는 관련 기록이 잘 보이지 않는다. 왕소나 상술한 채거후, 장각 등의 옹저와 얽힌 자세한 일화는 그들의 「열전」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일화가 알려지게 된 데는 물론 이를 세상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 경계 삼도록 했던 사인들의 활약이 한몫했다. 주욱, 방작, 홍매나 주밀 등 여러 사인들은 목격담과 경험담을 기록으로 남겼고 때론 경고했다. 관련 일화는 사람들 사이에 전해져 사회가 요구하는 여러 가치와 관련한 기층 사회의 정형화된 인식을 형성하고 확산하는 데 기여했다.

4. 의(醫)·외과의(外科醫)·양의(瘍醫)를 찾는 경향: 외과적 치료와 내과적 치료

옹저의 발병을 알게 되었을 때 송대 사람들은 주로 어떤 대응을 하였을까? 의료인류학에서는 사람들이 아플 경우 복합적이거나 상호 경합적인 치유의 전통 중에 선택을 하며 어떤 선택을 하는지 주목한다(메릴 싱어, 2022: 57). 지역 사회에서 치료를 위한 일반인의 선택이 어떤지는 송대 지역 의료문화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요소일 것이다. 발병 원인을 병자의 평소 과실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으니 그에 따라 치료를 위한 노력에서도 제사를 올려 속죄하거나 개과천선의 다짐 또는 살생의 중지나 신과의 협상이 우선되었을 것으로 보이지만 그들의 대응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의(醫)나 외과의(外科醫) 또는 양의(瘍醫) 등 의료인을 찾아 치료를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치료 방식은 외과적 치료와 내과적 치료가 모두 보인다.
『이견지』의 일화 중 <부록 1>을 기준으로 했을 때 치료 과정 또는 치료를 위한 모색이 명시된 병자는 총 37명이다. 그들은 외과 또는 내과적 치료를 받기도 또는 직접 시료하기도 했고, 종교적 실천을 통해 병의 호전을 기도하기도 했으며, 또 치료 불가의 진단을 받기도 했다. 이중 외과 또는 내과적 치료를 택한 경우가 27건으로 약 70%를 차지한다(<표 3>).
『이견지』의 일화를 통해 보면 그들은 확실히 종교적 실천보다 의료적 치료를 우선적으로 시도했다. 그리고 외과적 치료를 시행한 경우가 많았다. 그들이 어떤 이들을 찾아가 어떤 치료를 받았는지 궁금해진다.

1) 의(醫)·외과의(外科醫)·양의(瘍醫)를 찾는 경향

송대 옹저를 앓았던 이들이 치료를 받기 위해 주로 찾았던 이들은 의사였다. 그 외 도인에게서 치료를 받기도 했으며, 지방관 또는 서리 중 의학에 관심이 있는 이들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 때론 노비에게서 치료를 받은 사례도 있다. 그리고 경우에 따라 자가 치료를 하기도 했다. <표 3>을 기준으로 외과 또는 내과 치료 및 치료 불가의 진단을 내려준 이들의 신분 구성을 살펴보니 ‘의(醫)’로 표기된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았다(<표 4>).
<표 4>에서 치료나 진단의 주체가 명확히 제시되지 않은 5건을 제외한 29건 중에서 그 주체가 의사로 명시된 경우는 19건으로 60% 이상이었다. 이를 통해 보건대 송대 옹저를 앓고 있던 사람들은 대체로 ‘의사’의 도움을 받아 치료를 받은 경우가 주를 이루었다. 당시 각 지역에는 의자(醫者), 의, 명의(名醫), 촌의(村醫) 등이 있었고, 이들 중에는 특히 외의(外醫), 외과의, 양의라 불리었던 사람들도 있었으며, 이들은 대체로 옹저 치료를 전문으로 하는 의사들이었다. 의사가 치료나 진단을 해준 19건의 사례에서 의사를 표기한 용어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아래 <표 5>와 같다.
외의나 외과의 또는 양의를 찾는 경향은 사인 계층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자가 안공(安恭)인 안숙(安肅)의 처 형씨(邢氏)는 턱에 옹저가 나 ‘외의’를 찾았고,75) 자가 백고(伯固)인 사인 나공(羅鞏)은 무원의 이름난 ‘양의’를 모셔왔다. 강동제점형옥의 자리에 있던 한 지방관 및 야주사였던 조종선은 모두 의사에게 치료를 받았는데 홍매는 이들을 ‘양의’로 표기했다. 금위막사(禁衛幕士) 성고(盛皐)는 ‘외과의’인 유경낙(劉經絡)을 모셔왔다. 강령부 율수현의 부자 강순명은 집안 대대로 옹절 치료를 잘했던 태평주 당도현의 ‘외과의’ 서루대를 찾았다.76) 상술한 장돈의 시첩이자 수주(秀州) 현승 장씨의 조모가 등의 옹저로 고생하자 수주(秀州) ‘외과(外科)’ 장생(張生)의 처 장소낭자(張小娘子)를 불렀는데, 이 인물은 특이하다. 그녀는 어느 날 피장대왕(皮場大王)이라는 신인(神人)을 만났고 『옹저이방(癰疽異方)』 한 책을 전해 받고 의술을 깨쳐 마침내 의술로 이름을 날리고 그 남편에게도 의술을 전해주었다.77)
『이견지』 외의 기록에서도 위와 같은 경향은 쉽게 확인된다. 예를 들면, 북송 시기 신법을 주도하고 천하를 호령했던 왕안석 역시 아들 왕방(王雱)이 옹저로 고통받고 있을 때 양의를 찾아 치료하였다. 다음은 조정에서 조회가 끝난 후 신종(神宗, 1067~1085 재위)과 왕안석이 나눈 대화이다.
황제께서는 왕안석을 보며 말하길, “듣자 하니 경의 아들 방(雱)이 오랜 병을 앓고 있다 하였는데 조금 나아졌소? 어떻소?” 안석이 답하길, “방은 족양(足瘍)을 앓아 경사(京師)의 의사들을 두루 찾았지만 효과가 없었습니다. 근래 태주(泰州) 양의 서신(徐新)이라는 자를 불러 치료를 하였는데 조금 나아졌습니다.”78)
왕안석 역시 아들의 족양을 치료하는 데 양의 서신을 찾아 치료를 받았고 치료 효과를 보았던 것이다. 이와 같이 당시 사대부들 중 양의를 찾아 치료를 받은 기록은 적지 않다. 물론 의사의 치료를 받은 사례는 사인 계층에 국한되지 않으며, 그 외 일반 민들의 경우도 외과의나 의자를 찾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79)
당시에는 옹저를 전문으로 하는 의사들 외에 하급 지방관이나 서리 신분으로 의술에 뛰어난 이들 중 유독 옹저 치료를 전문으로 하는 이도 있었다. 상술한 바 있는 부조교(符助敎)는 옹저 치료를 잘하기로 소문난 이였고,80) 도성의 한 도수감영사(都水監令史)는 신묘한 악창약(惡瘡藥)을 보유하고 있기도 했다.81) 또한 집안의 허드렛일을 하는 노복에게 치료를 받은 사례도 있다. 남송 초 재상의 자리까지 올랐던 주승비(朱勝非, 1082~1144)의 사례이다.
주승비는 등에 저가 발하여 두루 의공(醫工)을 불렀지만 치료를 할 수 없었는데, 막주(莫儔) 집의 급사(給使)가 말해주는 바가 있었고, 승비가 그것을 따르니 하루만에 나았다. 승비는 바야흐로 그 노고에 갚을 방법이 없음을 걱정하고 있었는데, 막주의 집에서 그에게 금을 주어 그[주승비]에게 청을 넣어달라고 하여 마침내 [복귀의] 명이 있게 되었다.82)
재상의 자리까지 올랐던 주승비가 등의 옹저를 치료하기 위해 의공(醫工)을 두루 찾았다는 것도 주목할 만하며, 마지막에 그를 치료해 준 이가 막주(莫儔) 집의 급사였다는 것도 흥미롭다. 당시 막주는 곡강(曲江)에 폄적되어 있었고, 그의 노복이 우연히 주승비의 옹저를 고쳐주었기에 다시 관직에 복귀할 수 있었다.
당시 사람들은 옹저를 치료하기 위해 주로 의사를 찾았는데 그중에서도 옹저를 전문으로 하는 외의나 외과의 또는 양의를 찾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 그리고 하층의 서리나 노복들도 치료를 행하고 있었다. 대체로 진자명이 “대부분 비천한 사람들이 전문적으로 이 과를 다루고 있다”고 했던 지적이 어떤 배경에서 나온 것인지 알 만하다.

2) 치료 방법의 경향성

위의 <표 3>을 보면 『이견지』에 수록된 치료 사례 중에는 외과적 치료의 사례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총 18건이며, 이는 내과적 치료 사례의 배에 가까운 수치이다. 『이견지』의 사례와 그 통계만을 가지고 이것이 당시 현실을 그대로 반영한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경이로운 치료 효과나 흥미를 유발할 수 있는 소재의 일화가 『이견지』에 더 많이 수록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다수의 외과적 치료 사례는 당시 옹저 치료에서 외과 수술적 치료 경향이 전혀 없지는 않았던 현실을 반영한다. 이 부분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 ‘동아시아는 기(氣), 서양은 해부’라는 이분법적 틀에 이의를 제기하고 “물리적 대상으로서의 인체에 개입하기 위한 동아시아 의학의 노력과 실행”을 주목한 근래의 연구 경향을 언급할 필요가 있다. 관련 연구는 논증 과정에서 동아시아에서 실행된 외과적 치료의 경향성을 강조하면서 정골(整骨), 상과(傷科), 치종(治腫)의 사례를 제시하였다(이기복, 2022: 37-94). 『이견지』의 일화에서 다수 나타난 외과적 치료의 양상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보지 않을 수 없으며, 『이견지』의 사례는 그동안은 간과된 외과학 사례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료이다.
구체적인 치료 방법을 살펴보면, 턱의 이식 수술 1건, 약을 붙이거나 바르기 2건, 뜸 2건, 침이나 칼 또는 실을 활용하여 찌르거나 짜서 고름을 빼내거나 돌출 부위를 잘라내는 시술이 13건이었다. 즉 도구를 활용한 시술의 방법이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단순 통계이기는 하지만 이러한 수치는 당시 사람들이 의자(醫者)를 찾아 치료를 받았을 때의 상황을 부분적으로 반영한다. 동아시아의 치종에서 외과적 시술의 경향을 강조한 상술한 논문 역시 ‘침습적 치료’, ‘약물보다는 침도로 절개해서 악혈을 뽑아내는 치료’에 주목했던 동아시아 외과 전통을 언급하며, 외과적 처치는 동아시아 의학 풍경에서 일상적이었음에도 그동안 지워져 있었음을 지적했다(이기복, 2022: 74-76). 『이견지』 일화를 통해 부분적이지만 당시의 외과 시술적 치료 현장을 관찰할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견지』 일화에서 보이는 외과적 치료, 그중에서도 시술의 비중이 크다는 경향성은 당시의 의서가 제시하는 치료 방법과는 다소 차이가 난다는 점이다. 즉 송대 관방 편찬 의방서는 물론이고 사인들의 사찬 의방서 및 당시 유통된 송대 이전의 옹저 관련 전문서에 제시된 의방을 보면 내복약의 의방, 붙이고 바르는 외용의 산방 및 고방 또는 침구의 방법 정도였다. 『태평성혜방』의 경우 내복약의 산방(散方) 및 탕방(湯方), 붙이는 형태의 외용 산방 및 고방(膏方)이 주를 이룬다.83) 이러한 상황은 『태평혜민화제국방』도 다르지 않다.84) 당시 사인들의 사찬 의방서 역시 내복약, 붙이거나 바르는 형태의 외용약 또는 뜸의 활용 등이 대부분이었다.85) 송대 사인들이 편찬한 옹저 전문 의서 역시도 그러하다.86) 옹저 전문 고전으로 인식되는 『유연자귀유방』의 경우 부분적으로 농혈을 터뜨리는 외과 시술적 방법이 제시되어 있지만 대체로 내과적 치료와 외용의 방제가 중심을 이룬다.87)
이렇게 볼 때, 칼이나 침 또는 실을 활용하여 상처 부위를 찢어 고름을 빼내는 방법은 소위 관방 의학이나 관·사찬 의서에서 주로 제시하는 방법은 아니며 그러나 당시 일반 사람들이 실제 생활에서 받았던 치료는 이런 시술적 방법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시술의 방법은 의서에서는 중심으로 다루지 않은 치료 방법이지만 지역의 옹저 치료로 이름난 의자들은 여전히 이 방법을 사용하였던 것이다. 또한 앞서 진자명이 『외과정요』의 서문에서 “향촌과 마을에는 대부분 비천한 사람들이 전문적으로 이과를 다루고 있고 그러나 이병에 걸리는 사람은 대부분 부귀한 자”여서 치료가 어렵다고 한 것도, 그래서 이 분야의 방론(方論) 연구가 필요하다는 그의 지적도 어떤 맥락에서 나온 것인지 더욱 이해가 된다. 그가 말한 향촌과 마을의 비천한 이들은 바로 옹저 전문 의사로 주로 외과 시술적 치료를 시도했던 이들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진자명의 걱정과는 달리 아래 사례를 보면 부귀한 이들도 옹저로 이름난 의자들을 따로 모시어 시료를 받았던 것을 알 수 있다.

3) 외과 시술의 현장

12세기 옹저를 앓는 사람들이 외과의, 양의 등을 찾으면 이들이 주로 행했던 치료는 외과적으로 고름을 밖으로 짜내는 것이 주를 이루었다. 상처 부위를 찢고 고름을 짜내는 것, 그 과정에서 돌침이나 칼로 상처를 찌르거나 ‘화침(火針)’을 사용하는 것, 실로 묶어 끝을 잘라내는 것 등의 방법이 동원되었다. 구체적인 치료 현장을 살펴보자.
소흥 8년(1138), 강녕부(江寧府) 율수현(溧水縣) 납산(蠟山)에 사는 부자 강순명(江舜明)은 등의 옹저로, 집안 대대로 ‘악창(옹절)’ 치료를 잘하기로 소문난 태평주(太平州) 당도현(當塗縣)의 외과의 서루대를 불러왔다. 이 일화는 서루대가 치료 과정에서 많은 사례비를 요구했고 그리하여 강순명의 가족들과 다툼이 생겼으며 결국 서루대는 강순명도 살리지 못하였고 욕심을 부린 것에 응보를 받아 역시 1년이 못 돼 죽었고 의업을 이어왔던 대도 끊어졌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대대로 옹저 치료로 소문이 난 서루대가 강순명의 옹저를 치료할 때 썼던 방법은 상처 부위를 침으로 찌르는 방법이었다. 그는 “마땅히 곪은 곳이 터져야 하고, 고름이 모두 나오면 즉시 완쾌하실 것입니다”라고 말하며 다음과 같이 시료를 하였다.
여러 손님이 둘러앉아 보고 있는 가운데 서루대가 침으로 그 창(瘡)을 찔렀다. 그리고 종이를 비비 꼬아서 길이는 약 5촌 정도, 굵기는 동전을 꿰는 줄 정도로 가늘지 않은 줄을 만들고 약을 묻혀 틈으로 찔러 넣으니 강순명이 연거푸 소리를 질렀다.88)
약을 묻힌 종이를 빼내자 피와 고름이 흘러나왔지만 결국 강순명은 치료 과정에서 죽고 말았다. 침으로 상처 부위를 터뜨리고 약을 주입하는 방법은 당시 옹저 전문 의사들이 주로 쓰는 치료 방법이었던 것 같다. 무엇보다도 병자의 고통은 매우 극심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듯 고통이 수반되는 것이니 병자의 입장에서는 침이나 도구로 찌르는 치료 방법을 매우 두려워했다. 아래의 일화는 이러한 경향을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소흥(1131~1162) 초, 강동제점형옥(江東提點刑獄)의 자리에 있던 한 지방관의 치료 경험이다.
사람들은 저양(疽瘍)을 앓거나 상절(傷折)한 경우 대부분 의사가 침구(鍼灸)의 방법을 사용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소흥 초 강동제형은 왼쪽 다리에 옹저가 생겼다. 매일 다리가 부어올라 그 높이가 한 척에 달했다. 매번 의사가 약을 바르려고 하였지만 의사도 가까이 오지 못하게 했다. 한 의사가 말하길, “이것은 찢어서 터뜨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라고 했다. 옆의 부하가 이를 듣고 제형에게 아뢰니 제형이 그[의사]로 하여금 옷을 벗고 맨발로 들어오게 하였다. 다만 속옷을 허리춤에 묶는 것은 허락하였고, 머리카락을 나누어 네 개의 작은 상투로 묶게 하고 두건으로 싸지 않게 했다. 의사가 옆에 서서 두 손을 모으고 말하길, “부어오른 것이 이미 익어 저녁이면 스스로 터질 것입니다. 침이나 돌칼의 힘을 빌리지 않아도 됩니다.” 제형이 기뻐하며 마침 고개를 돌려 옆에 있던 시첩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큰 소리를 내며 잡고 부르짖으니, 옹저가 터졌는데 농혈이 한 두(斗)나 나왔다. 통증이 곧 멈추었고 능히 일어설 수 있었다. 대개 의사가 깨진 동전을 갈아서 반으로 만든 다음 그것을 입에 물고 있다가 틈을 기다려 사용한 것이니 즉시 효과가 나타났다.89)
이 일화는 첫머리에 당시 사람들이 침구(鍼灸)를 쓰는 것을 두려워한다고 서술하면서 이런 경향 때문에 당시 의사들은 환자 몰래 침이나 칼을 쓰기도 했던 상황을 말해준다. 강동제형은 의사의 시료를 받을 때 그에게 옷도 벗고 맨발로 들어오게 하고 두건도 쓰지 못하게 했다. 의사는 갈아서 날카롭게 만든 동전을 입에 물고 있다가 병자가 방심하는 틈을 타 옹저를 터뜨리고 고름을 빼냈던 것이며 그 효과는 아주 좋았다.
유사한 사례는 종종 있었는데, 순희(1174~1189) 말, 야주사(冶鑄使)였던 조종선(趙從善) 역시 옹저로 아파하고 있었다. 의사 황상(黃裳)이 2촌 정도 되는 작은 칼을 자리 아래 감추고 있었고 웃으며 담소를 나누고 있던 사이 몰래 그것을 꺼내 고름을 짜내어 마침내 낫게 해주었다는 것이다.9) 홍매는 두 일화를 ‘양의수법(瘍醫手法)’이라는 제목 아래 같이 싣고 있는데 두 의사 모두 두터운 사례를 받았다는 사실도 빼놓지 않았다.
침이나 칼을 쓸 때 이를 불에 달구어 쓰는 것도 한 방법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자는 효공(孝恭)이며 길주(吉州) 지사, 강남서로 제점형옥사, 기주로(夔州路) 전운사 등을 지낸 섭행기(葉行己)의 동생 섭극기(葉克己)는 열 살 때 약을 먹다 중독되어 오장이 다 상했고 생식기와 엉덩이 사이에 커다란 옹저가 나더니 7개의 구멍이 뚫렸고, 똥오줌이 그 사이로 나왔다. 10년이 흘렀을 무렵 섭극기는 형 섭행기를 따라 무주(撫州) 난계현(蘭溪縣)에 잠시 살고 있었는데, 한 도인이 지나다 그를 보고 치료를 할 수 있다고 하였다. 도인의 치료는 다음과 같았다.
불에 달구어 붉게 된 젓가락을 꼬리뼈에 6∼7촌 정도 꽂아 넣었는데, 섭극기는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듯 편안한 모양이었다. 곧이어 차가운 젓가락에 약을 묻혀 그곳을 바르기를 여러 차례 되풀이했다. 또 뜨거운 철침으로 저(疽) 위를 지지니 피부가 모두 그을려 떨어졌다. 그런 뒤에 여섯 개의 구멍에 약을 발라서 다 메워 넣고 한 개만 남겼다. 그가 말하길, “이것을 막으면 안 된다. 막으면 죽는다.”고 하였다. 형은 옆에서 차마 볼 수가 없어 소매로 가리며 일어났다. 겨우 이틀 밤이 지나자 창가(瘡痂)가 모두 떨어져 나갔고, 지진 곳의 피부는 이미 평평해졌으며 여섯 개의 구멍도 모두 메워졌고, 배 안에는 따로 작은창자가 생겨났다. 이때부터 보통 사람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91)
도인은 불에 달군 젓가락과 뜨겁게 달군 철침을 써서 옹저를 지지고 약을 넣었다. 이 일화는 도인이 치료한 사례에 속한다. 병자인 섭극기는 통증도 느끼지 못한 듯하였지만 가족들은 옆에서 차마 볼 수가 없을 정도였다는 서사가 눈에 띈다.
옹저에 대해 불에 달구어진 소위 화침(火針)으로 치료를 하는 방식은 여러 곳에서 보인다. 그때마다 병자와 그 가족들은 그와 같은 방식에 상당한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전형적인 사례로 건도(乾道) 원년(1165) 외과의 유경낙(劉經絡)의 치료 사례를 빼놓을 수 없다. 이 일화는 폐옹(肺癰)을 앓고 있었던 금위(禁衛)의 막사(幕士)인 성고(盛皐)의 폐옹 투병 경험과 완치 사례이다. 성고는 가슴의 통증으로 음식도 먹을 수가 없는 상태로 병을 앓은 지 반년이 넘도록 병명도 알지 못했는데, 전전사(殿前司)의 외과의(外科醫) 유경낙의 진료를 받고는 이것이 폐옹임을 알았다. 그리고 그는 뜸이나 탕제로는 치료할 수 없으니 마땅히 화침으로 공략해야 한다고 하였다. 유경낙이 한 척 정도 되는 화침을 불에 데우고 있는데 가족들이 말렸지만 성고의 의지는 확고했다. 유경낙은 화침을 시술하였고, “옆에서 보고 있던 자들은 머리를 숙이고는 차마 볼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라고 홍매는 기록했다.92) 당시 옹저 치료에서 특히 폐옹의 치료에서 화침이 최선의 치료 방법인데, 병자들은 이를 매우 두려워하여 치료를 받지 못하다 죽음에 이른 경우가 많았음을 알 수 있다.93)
이 외에 옹저 부위를 실로 묶어 고름을 짜내거나 덩어리가 잘려나가게 했던 방법도 당시 옹저 전문 의사들이 종종 쓰던 방법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자가 백고(伯固)인 나공(羅鞏)이 사인이었을 때 머리 뒤쪽에 류(瘤)가 생겼는데 크기가 매우 컸다. 무원(婺源)에 의술이 뛰어난 양의가 있다고 하여 그를 모셔 와 치료하게 하였다.
의사는 약을 바른 실로 류의 가장자리를 여러 차례 두른 후 그 끝을 매듭지어 자르고 밖으로 나가 밖에서 쉬고 있었다. 두 시가 지나자 묶은 곳이 매우 아파서 덜덜 떨었고 참을 수가 없었다.94)
그러다 나공은 깊은 잠에 빠졌고, 깨어보니 배게 옆이 다 젖어 있었으며 주머니 같은 것이 한 개가 놓여 있었다. 머리 뒤쪽을 만져보니 류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아들들이 등불을 가져와 비춰 보니 머리에는 아무런 흔적도 남지 않았다.95)
또 누하경(婁夏卿)의 첩이 목에 부스럼(瘡)이 나 마을의 촌의가 쑥뜸을 떴다. 잠시 후 피부가 불룩 튀어나오더니 돌돌 말린 모습이었다. 그 모양이 꽃의 꽃받침 같았다. 어쩌다 잘못해서 물건에 부딪히면 통증이 심장과 등골뼈에까지 미쳤다. 당시 ‘장소낭자’로 이름난 의사를 불렀지만 ‘번화뇌치(翻花腦痔)’로 진단만 해주었을 뿐 치료하지 못했다. 촌의는 다시 약을 바른 실로 묶고 뽑아내려 했는데 반나절 지나 둘둘 말라진 것이 실선을 따라 떨어졌고 여러 차례 묶기를 너 다섯 번 했는데 끝내 낫지 못하고 수십 일이 지나 죽었다.96) 돌출된 옹저 부위를 실로 묶어 잘려나가게 했던 방식은 당시 양의나 촌의가 옹저를 치료할 때 자주 썼던 방법이었던 것 같다. 물론 이 과정에서 병자는 몸을 ‘덜덜 떨며 참을 수 없는’ 정도의 통증을, 또 심장과 등골뼈까지 미치는 통증을 참아내야 했다.
이러한 외과 수술적 치료 사례는 송대 다른 문헌 기록에는 많이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명대(明代) 강관(江瓘, 1503~1565)이 편집하고 그의 아들이 증보하여 1552년에 간행된, 송, 원 명 시기의 의안을 수록한 『명의유안(名醫類安)』의 옹저 부분을 보면 외과 시술적, 침술적 치료 사례가 적지 않게 등장한다. 침이나 칼 등으로 살을 찢어 썩은 고름과 피가 나오게 하는 방식이다. 그중에서도 류(瘤)와 관계된 의안을 보면, 총 네 건의 의안 중 세 건이 송대의 사례이며, 그중 두 건이 『이견지』에서도 언급된 것이다.97) 세 건 모두 외과적 시술 즉, 실로 묶어 돌침으로 찔러 찢어서 내부의 곪은 것을 빼내는 방식이다. 이외 『명의유안』의 정창(疔瘡), 배옹저창(背癰疽瘡), 유옹(乳癰), 복옹(腹癰) 등 편의 의안에는 외과적 시술이 등장하는 사례가 적지 않다.98) 명대에 이르면 더욱 옹저 치료에 외과적 시술을 진행한 사례가 사찬 의안서 등에 수록될 정도로 더 보편화되었거나 혹은 주류 의학계의 수용으로 이루어지는 추세가 나타난 것으로 볼 수 있다.

4) 내과적 치료와 의방(醫方)의 활용

『이견지』의 일화를 보면 외과적 치료를 받는 경우에도 탕약의 복용 등 내과적 치료가 병행되는 경우가 많았고, 또 외과적 시술 없이 내과적 치료로 치료를 받는 경우도 많았다. 구체적으로는 약을 먹는 것, 선하죽(鮮蝦粥)이나 생강이나 배 등을 활용한 것 그리고 ‘화독배농내보산(化毒排膿內補散)’이나 또는 ‘공안약방(公安藥方)’ 등 각종 경험방의 활용이 그것이다.
먼저, 당시 의사들 역시 내복약을 통한 치료를 주로 행하였다. 예를 들면, 정화 4년(1114) 장안 태극궁(太極宮) 수축에서 인골 석회를 사용한 것에 연루가 되어 그 응보로 엉덩이에 옹저가 났던 조정의 한 사대부는 옹저 길이가 1촌 정도 되었는데 중간에 뼈가 있어 앉을 수도 누울 수도 없었다. 그는 의사를 불렀고 의사는 그에게 약을 주어 씹어 먹게 하였다. 종기가 떨어져 나갔는데, 며칠 후 또 종기가 났고 다시 치료하였지만 결국 죽었다.99)
외과의로 이름난 자도 때에 따라 약을 먹는 것으로 처방을 하기도 했다. 경진(景陳)의 동생 장자공(長子拱)은 7살이었는데 겨드랑이 사이에 옹저가 나 피부 아래 자라 모양으로 생긴 형상이 보이기 시작했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통증이 심했다. 돌침으로 옹저를 치료하기로 소문난 덕흥(德興) 고성촌(古城村)의 외과의 홍두부(洪豆腐)는 그것을 보더니 새우를 사서 죽을 끓여 먹이라고 하였고, 주위 사람들은 모두 새우 죽이 창독이 싫어하는 맛이라 처방한 것으로 생각했다. 의사가 마침내 그것을 먹였더니 얼마 되지 않아 통증이 멈추었다. 그러자 의사는, “이는 별징입니다. 나는 별징이 좋아하는 것을 구해 먹여보았을 뿐입니다”라고 하더니 이후 약을 주었는데, 비위(脾胃)를 치료하는 약과 같았다. 부자 두 돈을 갈아서 여러 차례 먹으니 나았다. 이듬해 병이 다시 도졌지만 같은 방법으로 치료를 하니 나았다.100)
상술한 바 있는 의술에 능한 양주의 의자 양길로 역시 후옹(喉癰)을 앓고 있는 병자 양립지에게 병의 원인이 자고(鷓鴣)새를 많이 먹어 반하독에 중독된 결과라 판단하고 생강편을 입에 물고 있으라는 치료법을 제시하였다.101)
명의 양길로보다 더 의술이 뛰어난 이는 모산관(茅山觀)의 도인이었다. 어느 사인이 병이 들었는데 양길로는 그에게 “열증이 이미 끝을 달리고 있고, 기혈이 소진하여 3년 후 배저(背疽)로 죽을 것이며, 치료할 수 없다”고 진단했다. 사인은 낙심하지 않고 의술이 신통하다는 모산관의 한 도사를 찾아갔더니 도사는 매일 좋은 배를 사서 먹으라고만 하였다. 사인이 돌아가 시키는 대로 해보니 한 해가 지나 몸이 회복되었고, 양길로도 그를 보고 놀라워했다는 일화이다.102) 이와 유사한 일화가 『기구속문(耆舊續聞)』에도 전한다. 호남(湖南)의 한 사인이 사주(泗州)를 지나는데, 태소맥(太素脉)을 잘 아는 자가 옹저에 걸릴 것이라고 진단하였다. 이후 사인은 과거급제 후 진맥을 받았는데 의사가 배를 많이 먹으라고 권유하기에 배를 많이 먹었다. 이후 온몸에 창이 났지만 약을 먹고 나았다. 대개 배가 옹저의 기(癰疽之氣)를 분산시켜 창 정도로 병을 치르고 지나갔다는 것이다.103)
이외 『이견지』에는 옹저 치료에 효험이 있는 의방을 소개하는 일화가 몇 차례 등장한다. 모두 의방을 확보하는 과정에서 사인들의 역할이 돋보이며, 개중에는 사인의 투병 경험 그리고 그 치료 과정에서 의방의 효험까지 확인한 내용도 보인다. 흡현승 호권이 도성의 한 이인(異人)으로부터 받은 ‘화독배농내보산’,104) 공안현 현령이 꿈에서 관왕으로부터 받은 ‘공안약방’과 광덕군 지사 시강조가 꿈에 장왕에게서 받은 생강과 향부를 활용한 처방105) 등이 그것이다. 당시 사인들은 옹저 치료에 유용한 의학지식과 의방을 공유하고 확산시키는 데 주력하였고, 이와 유사한 기록은 『이견지』 외에 사인들의 문집과 필기 자료 속에 자주 보인다.106)
송대 사인을 포함한 일반 사람들은 옹저의 치료를 위해 다양한 선택지 중에서 주로 의사나 의술을 행하는 전문인을 찾았다. 또 사인들의 경우 효험이 있는 경험방의 지식을 공유하기도 했다. 이는 옹저를 둘러싸고 구축된 당시의 지역 의료문화를 보여준다. 지역 사회에서는 옹저 치료로 이름난 의, 외과의, 양의 등이 활동하고 있었고 때로는 도인, 서리, 심지어는 노복도 치료 주체로 등장했다. 지역 사회에서는 이들에 대한 정보가 유통되고 있었고 사인들도 이들을 찾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옹저 치료에서는 종교적 방법보다는 의사를 찾아야 한다는 인식이 공유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들은 내, 외과의 치료 방법을 모두 활용했는데, 특히 현실에서는 외과 시술을 마다하지 않는 의료인과 이를 두려워하면서도 종종 선택지로 삼았던 사례가 적지 않았다. 전문 의료인을 찾는 경향, 외과적 시술의 치료 등 이는 송대 옹저를 둘러싸고 기층 사회에 형성되었던 지역 의료의 수준과 특징을 반영한다.

5. 맺음말

송대 옹저는 일상에서 누구나 자주 걸렸던 질병이었다. 『이견지』의 옹저 관련 60여 건의 일화 및 비슷한 시기 필기 자료 속 옹저 관련 기록을 분석하여 보니 전문 의학계나 관의 입장이 아닌 옹저를 경험한 당사자의 인식과 대응을 살펴볼 수 있었다. 이들 일화는 사인 계층의 사례가 많았으며, 실로 옹저는 ‘사인의 병’이라 해도 될 만큼 사인들이(도) 자주 걸렸고 주목했던 질병이었다.
먼저, 사인을 포함한 일반 사람들은 옹저의 발병 경위나 원인에 대해 당시까지의 축적된 의학지식과는 다른 층위로 다양한 상상과 해석을 가했다. 그들은 옹저의 발병을 주로 병자의 평소 과실에 대한 죗값으로 이해하는 정형화된 경향을 보였다. 신성 모독이나 과도한 살생 및 맡은 직분에서의 잘못에 대한 결과로 옹저의 발병을 이해했다. 특히 사인의 경우 과도한 법의 집행이나 수탈 및 살생이 거론되었다. 의학지식을 접하고 있었던 사인 계층 역시 이러한 정형화된 인식을 공유하며 확산했다. 이외에 일반 민의 경우 슬로 인한, 사인의 경우 단사나 유황 등 금석약의 중독으로 인한 사례가 많았다. 또한 송대 정사(正史)의 열전(列傳) 또는 묘지명(墓誌銘) 등에서 자주 보이는, 옹저의 발병을 ‘걱정과 울분’ 때문으로 보는 서사 전통은 『이견지』 등 필기 자료에서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이로써 보건대 송대는 옹저의 발병 원인에 대해 서로 다른 층위의 인식이 공존했고, 계층에 상관없이 기층 사회에서 공유된 정형화된 인식 중 하나는 ‘죗값을 치르는 것’이었다. 또한 외형상의 유사성을 묘사하여, 옹저를 음계(陰界)의 처벌 흔적으로 묘사하는 서사적 특징은 이러한 정형화된 인식을 더욱 견고하게 하였고, 관련 일화를 알려 세상 사람들이 경계 삼게 해야 한다는 사인들의 의식은 이러한 인식을 형성하고 확산하는 데 기여했다.
옹저의 발병을 은유적으로 사유했던 것과는 다르게 치료에 있어서 그들은 죗값을 씻는 종교적 방식보다는 주로 의사나 의술을 행하는 전문인을 찾았다. 이는 옹저를 둘러싼 지역 의료문화를 반영하기에 흥미롭다. 당시 지역 사회에서는 옹저 치료로 이름난 의, 외과의, 양의 등이 활동하고 있었고, 지역 사회에서는 이들에 대한 정보가 유통되고 있었다.
옹저의 종류나 증상에 따라 달랐지만 그 치료는 외과적 치료와 내과적 치료가 모두 이루어졌다. 주목할 점은 여러 일화 중에서도 외과적 치료를 하는 사례가 많았고, 외과적 치료에서도 칼이나 침 또는 실을 활용하여 상처 부위를 찢어 고름을 빼내는 수술적 치료를 행한 경우가 많았다. 이는 물론 특이한 시술이나 예상을 넘는 치료 결과 등으로 유독 그러한 일화가 『이견지』에 더 많이 남게 되어 나타난 결과일 수 있다. 그러나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당시 기층 사회에서는 외과적 시술을 행하는 사례가 종종 있었다는 것이며, 이러한 치료 사례가 인구에 회자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당시 관방의 의방서, 사인들의 사찬 의방서, 송대 유통된 옹저 전문 의서에서는 도구를 활용한 시술적 방법은 거의 언급되지 않았다. 당시 지역에서 외과적 시술 방법이 활용되었던 사실은 문헌에서 보이는 관방 의학계와 기층 사회의 치료 현장 사이에 다소 격차가 있을 수 있음을 시사한다.
중국 의학사에서 송대는 진맥 중심의, 내과적이며 학술사적 경향의 의학이 발전했고 여기에는 사대부의 역할이 컸다고 하는데(梁其姿, 2012: 4-12, 28), 이들 사대부 역시 옹저 치료에 있어서만큼은 외과의나 양의를 찾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은 송대 의학에 대한 우리의 단조로운 이해를 경계하게 한다. 동시에 외과적 치료의 경향성은 동아시아 의학 역시 서양의학 못지않게 물리적 몸에 대한 이해가 있었고, 외과적 처치 역시 동아시아 의학 풍경에서 일상적이었다는 최근 연구 경향에 부합한다(이기복, 2022: 76).
결론적으로, 『이견지』의 일화나 당시 사인들이 남긴 필기 자료 및 부분적으로 정사 자료나후대 의안 자료가 보여주는 옹저에 대한 송대인의 인식과 대응은 매우 다채로웠다. 그들은 당시 의서가 전하는 의학 지식과는 다른 층위로 다양한 해석과 은유적 사유를 보여주는데 무엇보다도 기층 사회에서는 병자의 평소 과오에 대한 죗값의 결과라는 이해가 형성돼 있었다. 옹저에 대한 그들의 실제 대응은 지역에 이름난 옹저 전문 의사를 찾는 것이었는데, 지역 사회에서 인구에 회자된 치료로는 당시 의학계의 경향이나 의서가 제시하는 방법과 달리 외과 시술적 치료도 있었다. 옹저 인식과 대응에 있어서 송대인들이 실제 사유하고 경험하며 공유했던 현실이 주류 의학계의 그것과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 것 같다. 또한 발병 원인에 대해서는 잘못에 대한 죗값이라는 인식을 하면서도 그 치료에서는 종교적 방법보다는 외과의나 양의를 찾는 것을 선호했던 것은 옹저를 둘러싼 송대의 지역 의료문화의 특징을 반영한다.

Notes

1) ‘옹저(癰疽)’는 소위 종기나 부스럼 등과 같이 신체의 특정 부분에 염증이 생겨 세포가 죽고 고름이 몰려 있는 ‘농양’부터 넓게는 살덩어리(암)까지 포괄하는 넓은 의미로 쓰이며, 발병 부위 역시 피부뿐만 아니라 각종 장기를 포함한다. 한의학에서는 기혈이 독사(毒邪)에 의해 막혀 창종(瘡腫)이 발생하는 것으로 보며 크기나 발병 부위 또는 성질에 따라 癰, 疽, 發背, 瘤, 瘍, 癤, 疔 등 다양하게 표기하지만 여기에서는 ‘옹저’라 통칭한다.

2) 陳自明, 『外科精要』 序, 人民衛生出版社, 1982, 1쪽, “凡癰疽之疾, 比他病最酷, 聖人推爲雜病之先.”

3) P. B. 이브리는 여성사 및 사회사 연구에서 서사 자료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이견지』 일화의 사료적 가치를 강조한 바 있다(이브리, 2009: 14-18).

4) 대만의 류입언(柳立言)은 송대 판례집인 『청명집(清明集)』과 『이견지』를 비교 분석하여 문학 자료 및 지괴 자료의 법사학 연구에의 활용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타진했다(柳立言, 2020).

5) 송대 의료사 연구자들은 일찍부터 『이견지』를 활용하여 연구를 진행하였다. 먼저, 『이견지』를 활용하여 송대 도교 의료에 대해 고찰한 연구가 적지 않다(莊宏誼, 2005; 張園園, 2016: 106-112). 또, 『이견지』를 활용하여 민간의 의료 행위자나 기층 사회의 의료에 대해 연구한 사례가 적지 않다(姚海英, 2011: 47-51; 趙正韜, 2015). 이외에 고독(蠱毒) 등 당시 민간의 독물 활용과 관련한 연구도 진행된 바 있고(劉黎明, 2003; 陳秀芬, 2016), 송대 의학지식의 전수와 관련한 연구도 있다(최해별, 2020). 이외에 송대 의료사 관련 다양한 연구에서 『이견지』의 일화는 중요한 사료로 활용되었다.

6) 의료인류학의 연구방법에서 일반인의 질병 서사(illness narratives)는 매우 중요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는데(메릴 싱어, 2022: 119), 『이견지』는 송대 다양한 질병 서사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기에 그 가치가 크다.

7) 최해별의 연구에 따르면, 『이견지』의 일화 중 ‘의방(醫方)’ 지식을 포함하는 일화를 분석한 결과 자주 언급되는 병증이 순서대로 중독, 옹저, 기생충 질환, 설사 순이다(최해별, 2019: 103-156).

8) 대표적으로, 미야시타 사부로는 송원시기 의학 지식의 변혁을 더욱 광범위한 사회 배경 속에 읽어 당시 복잡한 사회 의료의 수요에 대한 회응으로 보았고, 여기에는 도시의 번영, 질병의 유행, 남방인구의 증가와 풍토병의 침습 등을 포함시켰다(宮下三郞, 1967: 123-169). 또 남방의 ‘장(瘴)’에 대한 연구가 적지 않다(Ellen, 2011: 191-225; Chen Yun-ju, 2016: 205-254). 이외에 송대 의료사 연구자들은 대체로 전염병에 주목하였다(Asaf, 2009; 韓毅, 2015; 김한신, 2022).

9) 옹저에 관하여 중국 전통 의학계의 인식이나 의학지식의 변천에 관한 연구는 적지 않으며(謝欣妮 외, 2020; 劉寧, 2021 등), 특히 송대 『외과정요』와 관련한 연구, 뜸과 옹저 치료 및 옹저 관련 문헌 연구 등이 있다. 여기에서 관련 연구를 일일이 나열하는 것은 생략한다. 또한 송대 사대부의 의학지식 축적과 교류 및 전승을 다룬 연구에서 부분적으로 옹저를 언급하거나 옹저 치료 의방을 다룬 바 있다(최해별, 2016; 2018). 송대 사대부는 옹저에 관심이 많았기에 옹저 관련 전문 의서나 의방서의 편찬 또는 옹저 관련 의학 지식 기록을 많이 남겼다. 최근 송대 사대부의 옹저 관련 의학지식 축적과 확산 활동 전반을 다룬 연구를 참고할 수 있다(최해별, 2024).

10) 『夷堅支甲』 卷4 「雙頭蓮」, 中華書局, 2006, 738-739쪽.

11) 『夷堅支戊』 卷10 「蕪湖王氏癡女」, 1131쪽.

12) 『夷堅丁志』 卷3 「洛中怪獸」, 558쪽.

13) 『夷堅甲志』 卷19 「誤入陰府」, 170-171쪽; 『夷堅丙志』 卷9 「應夢石人」, 440-441쪽; 『夷堅支乙』 卷5 「顧六耆」, 829-830쪽.

14) 『夷堅丁志』 卷5 「魚病頭瘡」, 579쪽.

15) 『송사·열전』에서 사망 원인이 옹저로 기록된 사례는 30여 건을 훌쩍 넘는다. 다른 질병으로 사망한 사례도 있었겠지만 「열전」의 서사에서 사망 원인을 명기한 경우는 많지 않으며, 이런 측면에서 옹저로 인한 사망의 경우 사인을 명확히 지적한 부분이 흥미롭다. 이와 관련하여 반무정(潘務正)은 역대 전기 자료 속 ‘저발배이사’ 서사를 분석하여, 이는 주인공 인물의 심리 상태(주로 울분)를 반영하기도, 사가들의 포폄과 권선징악의 저술 태도를 반영하기도 하며, 애국지정 등 비극의 서사 효과를 가진다고 지적했다(潘務正, 2016: 136-145). 이 외에 『송사·열전』의 관련 사례를 분석하여 당시 사대부의 옹저 경험에 대한 면밀한 분석과 연구가 필요해 보인다.

16) 陳自明, 『外科精要』 序, 1쪽, “自古雖有瘍醫一科, 及鬼遺等論, 後人不能深究, 於是此方淪沒, 轉乖迷塗. 今鄉井多是下甲人, 專攻此科. 然沾此疾, 又多富貴者. 『內經』云: 大凡癰瘡, 多失於膏粱之人. 僕家世大方脈, 每見沾此疾者十存一二, 蓋醫者少有精妙能究方論者.”

17) 자연 원인론으로 감염, 스트레스, 장기 부전, 사고, 공공연한 침략 등이 있고, 초자연적 원인론으로 운명, 불길한 느낌, 접촉에 의한 전염, 초자연적 징벌, 영혼 상실, 마술, 주술 등이 있다(메릴 싱어, 2022: 98).

18) 『黃帝內經·靈樞』 卷9 人民衛生出版社, 2005, 118쪽, “病之生時, 有喜怒不測, 飮食不節, 陰氣不足, 陽氣有餘, 營氣不行, 乃發爲癰疽.”

19) 『劉涓子鬼遺方』 卷1 人民衛生出版社, 1986, 19쪽.

20) 『三因極一病證方論』 卷14 「癰疽敍論」, 人民衛生出版社, 1983, 198쪽.

21) 『集驗背疽方』 「背疽其源有五」, 人民衛生出版社, 1989, 71쪽.

22) 『夷堅丙志』 卷13 「路當可得法」, 479쪽, “仍有癰疽之害.” 상수현(商水縣) 知縣의 아들 路時中은 법록(法籙)으로 유명했는데 부적을 잘못 써서 견책을 받아 ‘옹저의 해’를 입었다고 했다.

23) 『齊東野語』 卷9 「陳周士」, 上海古籍出版社編, 『宋元筆記小說大觀』 第5冊, 上海古籍出版社, 2007, 5544쪽. 저자 周密은 자신은 평소 ‘화복보응지설(禍福報應之說)’을 잘 믿지 않았었는데, 通判 陳造가 생전 잘못으로 저가 발하여(疽發背) 죽었다는 사실을 소개하며 경계 삼으라 충고하였다.

24) 『夷堅丙志』 卷6 「汪子毁神指」, 418쪽.

25) 『夷堅丙志』 卷6 「張八削香像」, 417쪽.

26) 『夷堅丁志』 卷5 「靈泉鬼魋」, 578-579쪽.

27) 『夷堅丙志』 卷13 「路當可得法」, 479쪽.

28) 『北夢瑣言』 卷11 「崔玄亮降雲鶴」, 中華書局, 2002, 242쪽.

29) 『類説』 卷43 「道士行法事不䖍」, 上海古籍出版社, 1993, 748쪽, “玉局觀二道士上壇行法事, 其僕忽見四人着緋自天而下, 拽二道士壇前, 鞭背二十相次, 患發背而死.”

30) 孔平仲, 『孔氏談苑』 卷1, 上海古籍出版社編, 『宋元筆記小說大觀』 第2冊, 2239쪽. 행실이 바르지 못한 승려의 발병 사례도 있다. 『夷堅支甲』 卷1 「普光寺僧」, 713-714쪽; 『夷堅丙志』 卷12 「奉闍梨」, 469쪽.

31) 『夷堅丙志』 卷14 「楊宣贊」, 485쪽.

32) 『夷堅丁志』 卷8 「趙監廟」, 603쪽.

33) 郭彖, 『睽車志』 卷2, 上海古籍出版社編, 『宋元筆記小說大觀』 第4冊, 4094쪽.

34) 『夷堅丁志』 卷9 「舒懋育鰍鱓」, 611쪽.

35) 『夷堅丁志』 卷10 「符助敎」, 619쪽.

36) 『夷堅乙志』 卷9 「王敦仁」, 261-262쪽.

37) 『夷堅支乙』 卷7 「王牙儈」, 851-852쪽.

38) 『夷堅乙志』 卷2 「張十妻」, 198쪽.

39) 『夷堅丁志』 卷8 「頰瘤巨虱」, 602-603쪽.

40) 『夷堅丙志』 卷11 「李生虱瘤」, 462쪽.

41) 『夷堅支丁』 卷8 「王甑工虱異」, 1031쪽.

42) 『夷堅乙志』 卷6 「蔡侍郞」, 232쪽.

43) 『宋史』 卷356 「蔡居厚」, 11210쪽, “又以知靑州, 病不能赴, 未幾卒.”

44) 『夷堅丁志』 卷17 「王稹不飮」, 680-681쪽.

45) 『夷堅甲志』 卷14 「吳仲弓」, 120쪽.

46) 『夷堅甲志』 卷17 「人死爲牛」, 147쪽.

47) 『夷堅乙志』 卷7 「西內骨灰獄」, 239-240쪽.

48) 陸友仁, 『吳中舊事』, 上海古籍出版社, 1993, 452쪽.

49) 『夷堅甲志』 卷18 「天津丐者」, 162-163쪽.

50) 『夷堅支乙』 卷5 「張小娘子」, 828쪽.

51) 『夷堅志補』 卷18 「張中書」, 1717-1718쪽.

52) 『夷堅丁志』 卷17 「王稹不飮」, 680-681쪽.

53) 『夷堅乙志』 卷9 「王敦仁」, 261-262쪽.

54) 『夷堅甲志』 卷6 「胡子文」, 47쪽.

55) 『夷堅丁志』 卷10 「符助敎」, 619쪽.

56) 『北夢瑣言』 卷11 「崔玄亮降雲鶴」, 中華書局, 2002, 242쪽.

57) 『孔氏談苑』 卷1, 上海古籍出版社編, 『宋元筆記小說大觀』 第2冊, 2239쪽.

58) 『夷堅甲志』 卷17 「人死爲牛」, 147쪽.

59) 『夷堅支甲』 卷2 「宿遷諸尹」, 722-723쪽.

60) 『宋史』 卷328 「王韶」, 10582쪽, “病疽卒, 年五十二. …… 旣病疽, 洞見五臟, 蓋亦多殺徵云.”

61) 『夷堅甲志』 卷14 「吳仲弓」, 120쪽.

62) 『夷堅丙志』 卷14 「楊宣贊」, 485쪽.

63) 『夷堅丁志』 卷8 「趙監廟」, 603쪽.

64) 『夷堅丁志』 卷9 「舒懋育鰍鱓」, 611쪽.

65) 『夷堅志補』 卷18 「張中書」, 1717-1718쪽.

66) 『宋史』 卷328 「王韶」, 10582쪽, “病疽卒, 年五十二. …… 旣病疽, 洞見五臟, 蓋亦多殺徵云.”

67) 『萍洲可談』 卷3 「王韶多殺伐之報」, 上海古籍出版社編, 『宋元筆記小說大觀』 第2冊, 2345쪽.

68) 『續資治通鑑長編』 卷313, 中華書局, 2004, 7592쪽, “至病疽發背, 洞見五臟, 亦其報也.”

69) 『夷堅甲志』 卷17 「人死爲牛」, 147쪽.

70) 『泊宅編』 卷下, 中華書局, 1997, 97쪽.

71) 『宋史』 卷363 「張慤傳」, 11347쪽.

72) 『醫說』 卷9 「金石藥之戒」, 326-327쪽.

73) 『本草綱目』 卷9 「金石部三 · 丹砂」, 人民衛生出版社, 2005, 521쪽, “時珍曰: …… 張杲《醫說》載: 張愨服食丹砂, 病中消數年, 發鬢疽而死, 皆可爲服丹之戒.”

74) 『齊東野語』 卷9 「陳周士」, 5544쪽.

75) 『夷堅甲志』 卷19 「邢氏補頤」, 169-170쪽.

76) 『夷堅丁志』 卷10 「徐樓臺」, 618쪽.

77) 『夷堅支乙』 卷5 「張小娘子」, 828쪽.

78) 『續資治通鑑長編』 卷247, 6012쪽.

79) 『夷堅丁志』 卷8 「頰瘤巨虱」, 602-603쪽; 『夷堅丙志』 卷11 「李生虱瘤」, 462쪽.

80) 『夷堅丁志』 卷10 「符助敎」, 619쪽.

81) 『夷堅丁志』 卷9 「張顔承節」, 612쪽.

82) 『建炎以來繫年要録』 卷79, 中華書局, 2013, 1492쪽. 같은 기록은 『宋史』에도 보이는데, 『宋史』 卷362 「朱勝非」, 11318쪽, “莫儔謫曲江, 其家蒼頭奴為勝非治疽而愈, 奴為儔請, 得復官.”

83) 『太平聖惠方』 卷61-65, 人民衛生出版社, 2020, 1305-1401쪽.

84) 『太平惠民和劑局方』 卷8 「治瘡腫傷折」, 人民衛生出版社, 2007, 209-223쪽.

85) 대표적으로 許叔微, 『普濟本事方』 卷6 「金瘡癰疽打撲諸瘡破傷風」, 中國中醫藥出版社, 2020, 96-103쪽. 洪遵, 『洪氏集驗方』 卷2 「癰疽」, 人民衛生出版社, 1986, 125-135쪽.

86) 未詳, 『衛濟寶書』, 人民衛生出版社, 1989; 李迅, 『集驗背疽方』, 人民衛生出版社, 1989.

87) 현전 『劉涓子鬼遺方』을 보면 부분적으로 상처를 찢어서 고름을 빼내는 방식을 소개하고 있지만(『劉涓子鬼遺方』 卷4 「相癰疽知有膿可破法」, 41-42쪽) 내복 또는 외용의 방제가 주된 내용을 이룬다.

88) 『夷堅丁志』 卷10 「徐樓臺」, 618쪽.

89) 『夷堅三志己』 卷7 「瘍醫手法」, 1354-1355쪽.

90) 『夷堅三志己』 卷7 「瘍醫手法」, 1354-1355쪽.

91) 『夷堅丁志』 卷13 「葉克己」, 650-651쪽.

92) 『夷堅三志壬』 卷9 「劉經絡神針」, 1535-1536쪽.

93) 화침에 대한 사람들의 두려움은 홍매의 이어진 서술에서 드러난다. 홍매는 『聖惠方』의 ‘폐옹’을 인용하며, “화침을 쓰면 차도가 있는데 실제로 이를 쓰자고 하면 병자는 의심하다 죽는다. 이것은 반드시 죽는 병이다. 혹자는 이병을 몰래 숨기기도 하고 혹자는 통증이 무서워 침을 놓지 않는다”라며 세간의 분위기를 전했다. 그리고 이 일화를 상세히 기록하는 것은 화침의 유용함을 후인에게 전하기 위함이라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夷堅三志壬』 卷9 「劉經絡神針」, 1535-1536쪽.

94) 『夷堅支乙』 卷6 「羅伯固腦瘤」, 836-837쪽.

95) 『夷堅支乙』 卷6 「羅伯固腦瘤」, 836-837쪽.

96) 『夷堅支乙』 卷5 「張小娘子」, 828쪽.

97) 『名醫類安』 卷9 「瘤」, 人民衛生出版社, 2005, 378-379쪽.

98) 『名醫類安』 卷9 「疔瘡」, 388쪽; 卷10 「背癰疽瘡」, 393, 396, 403쪽; 卷10 「癰疽」, 406쪽; 卷10 「乳癰」, 424쪽; 卷10 「腹癰」, 425쪽 등.

99) 『夷堅乙志』 卷7 「西內骨灰獄」, 239쪽.

100) 『夷堅支戊』 卷5 「鼈癥」, 1093쪽.

101) 『夷堅三志己』 卷8 「楊立之喉癰」, 1361쪽.

102) 『夷堅支景』 卷8 「茅山道士」, 940쪽.

103) 陳鵠, 『西塘集耆舊續聞』 卷7 「泗州醫」, 中華書局, 2002, 359-360쪽.

104) 『夷堅丙志』 卷16 「異人癰疽方」. 이 의방의 전수와 확산 과정을 고찰하고 이 과정에서 사대부의 역할을 조명한 연구가 있다(최해별, 2018: 89-129).

105) 『夷堅支景』 卷10 「公安藥方」, 963-964쪽; 『夷堅志再補』 「薑附治癰」, 1795쪽. 이들 일화에 등장하는 의방의 전수는 송대 志怪醫案을 고찰한 연구를 참조할 수 있다(최해별, 2022: 35-92).

106) 송대 사인들은 옹저 관련 의학 지식을 축적하고 확산하는 데 적극적이었는데, 관련 의서를 편찬하거나 편찬을 돕는 것 외에 옹저와 관련된 단편적 의학 지식을 문집이나 필기 자료 속에 남겨 공유하고 확산시켰다(최해별, 2024).

Table 1.
The Patient’s Social Status
신분 사인(士人) 및 그 가족 부자 민(民) 의사 승려 거지 시인(市人) 어부 거간꾼
명수 44 1 11 2 2 1 1 2 1 65
Table 2.
The affected area of Abscesses(癰疽)
환부 머리, 얼굴 손, 발 온몸 목, 인후 다리 가슴 엉덩이 겨드랑이
횟수 22 9 7 6 4 3 3 3 1
환부 배꼽 음구(陰尻) 허리 합계
횟수 1 1 1 1 1 1 1 1 66
Table 3.
Types of Chosen Resolutions for Treating Abscesses(癰疽)
대응방법 외과적 치료 내과적 치료 종교적 실천 치료 불가 명시 기타*
건수 18 9 6 5 3 41

※ 한 개의 일화 속에 여러 명의 병자가 등장하는 경우 개별적으로 파악함(62건 일화 중 37명의 병자). 한 병자의 치료 방법이 여러 가지일 경우 치료 방법을 기준으로 개별적으로 파악함(37명 병자 중 제시된 치료 방법 41건).

* 기타 3건은 내과적인지 외과적인지 불분명한 경우와 병자가 치료를 거부한 경우임.

Table 4.
Medical Practitioner’s Social Status
의료행위자 의(醫) 도인 등 병자 스스로 지방관/서리 기타*
건수 19 4 2 4 5 34

※ 외과 18건, 내과 9건, 내・외과 불명확 2건, 치료 불가 진단 5건으로 총 34건을 분석함.

* 기타는 치료 주체를 명시하지 않은 경우임.

Table 5.
Designations for Doctors
치료자 醫者/醫/名醫 外醫/外科醫 瘍醫 張小娘子(外科 張生 妻) 村醫 醫巫
건수 7 4 4 2 1 1 19

참고문헌 REFER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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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ENDICES

Appendix 1.

The Anecdotes about Abscesses(癰疽) in Yijianzhi (夷堅志)

번호/출처 제목 병자 정보 발병 부위 및 증상 발병 경위 및 원인에 대한 서사 치료자 정보 치료 및 대응 경과 및 예후 시기와 지역
1/甲志6 胡子文 士人 背, 疽 동악행궁 신에 대한 모독행위 - 『금강경』 암송 백일 후 나음 매일 경전 암송 蘇州 常熟縣
2/갑지14 吳仲弓 桂陽監 지사 項, 癰疽 瘡潰,喉管皆見 엄혹한 법 집행 - - 사망 건염연간(1127-1130) 말
繩以重法,入獄者多死 桂陽監
3/갑지15 賈思誠馬夢 夔州 按撫使 등, 背疽發 말을 가까이한 것 - - 13일 만에 사망 소흥 17년(1147)
生於庚午, 近馬禍 夔州
4/갑지17 人死爲牛 - 세금을 가혹하게 거둠 - - 사망 소흥 5년(1135) 이후 몇 년 蜀, 사천지역
疽發於背之左右. 兩 疽相對, 宛如杖瘡, 其深數寸, 隔膜洞見 肺腑, 臭滿一室.
5/갑지18 天津丐者 관인 王櫰 兩浙路越州통판(會稽倅) 단사를 먹음 - - 사망 -
疽發背死 以餌丹砂
6/갑지19 邢氏補頤 晏肅의 처 형씨 (晏肅, 字安恭) - 外醫 턱 교체, 봉합 20여년 더 살고 죽음 개봉부
生疽於頤 得一生人頤與此等者, 合之則可 後避亂寓會稽
7/갑지19 誤入陰府 음계의 小鬼 (李昭玘 경험, 음계 에서 양계로 길을 안내하는 小鬼) 머리 - - - - 李昭玘(?~1126)
瘡瘍滿頭, 膿血腥穢
8/갑지20 太山府君 泉州晉江縣현령 孫點 孫固의 손자 - - - 얼마 후 사망 건염 4년(1130)
疽發于背 泉州 晉江縣
9/乙志1 小郗先生 丐者(李季와 小郗先生이 만난 거지) 다리 - 소희선생 종이에 침을 뱉어 상처에 붙이게 함 索紙一幅,吐津塗 其上, 令貼于股 新肉已滿, 瘢痕悉平 완치 江南東路建康府
滿股瘡穢
10/을지2 張十妻 吳江縣民 아내 다리 살생, 시부모께 공손하지 않음 - - 일년후 사망 소흥 29년(1159)
兩股皆生惡瘡,蛆盈其中,齧骨及髓 嗜殺生, 又事舅姑亡狀 蘇州 吳江縣
11/을지6 蔡侍郞 戶部侍郞 蔡居厚 청주지사로 임용 운주 안무사 시절 양산박의 투항한 도적떼 오백명 모두 죽임 도사 命道士設醮 王生作青詞 사망 선화 7년(1119) 金陵(江南東路 江寧府)
疽發于背 사후 제사로 용서구함,黃籙醮
12/을지7 西內骨灰獄 조정의 사대부 朝士 엉덩이 궁전수축 중 골회 부족, 전사 자 무덤 해골 태워 대체, 이 작업에 참여. 명계의 처벌 以藥齕之 久而墜地,拳曲如 小豬尾.復以前法治之. 정화4년(1114)/선화연간 (1119~1125)
疽生於臀,長寸許, 中有骨焉, 不可坐臥 씹어 먹는 약 1년 넘게 치료하다 결국 사망 鄧州
13/을지9 王敦仁 醫者, 王敦仁 옥중 수감자(胡待制)에 대한 거짓 진료, 위증, 억울한 죽음 방치 - - 사망 소흥 13년(1143)
疽發背死 그 후 3년 광남서로
14/丙志1 九聖奇鬼 左司郎中薛徽言의 아들 薛季宣, 그 아 들 薛沄 손가락 설운은 도깨비의 장난에 대항하다 수중의 약을 땅에 던졌고 설계선의 손가락 사이로 약이 떨어졌고 종기가 남 - - - 융흥 2년(1163)
指間 瘡卽隱起
15/병지1 南嶽判官 태주교수 李摭 전생에서 지은 죄(天界 관원일 때 지은 죄로 속세로 내려옴. 在生隱惡, 受譴 至重 - - 사망 건염연간(1127- 1130) 초
疽生于腦 侵淫見骨 사후 제사로 呼道士, 設醮 兩浙路 台州
16/병지4 廬州詩 廬州의 지방관 張侯와 아내 (2명) 온몸 酈瓊의난 때 죽은 자들이 귀물이 되어 나타나 역대 안무사가 연이어 아프거나 죽음 - - 통증이 심함 소흥 7년(1137) 회서병변 이후
遍體生瘡痍. 爬搔疼 徹骨, 脫衣痛粘皮.
17/병지12 奉闍梨 승려 목소리가 안 나와 닭즙(雞汁) 을 마심 醫者 傅藥割去之 纔旬日復然, 則 又施前術, 凡至五六. 사망. -
舌左右歧出, 與元舌 爲三
18/병지14 張五姑 홍매의 外舅女弟 張宗淑 왼쪽 뺨 죽은 남편이 꿈에 나타난 후 발병 - - 臥病踰月, 昏昏不能知人 정강 1년(1126) 전후
丹瘤生左頰
19/병지6 張八削香像 溫州 市人 張八 발 左足 관음상 발끝 훼손 - 藥不能施 ‘至今’ 홍매 기록 당시
발은 썩음
疽毒攻其內者 지팡이 사용
足遂爛, 至今扶杖乃能行
20/병지6 汪子毁神指 雙店民汪渙아들 5세 中指間 神像에 대한 훼손 - 신상의 수리 나았지만 손가락이 말림 饒州
瘡, 絶痛 遂拳縮不可展
21/병지8 胡秀才 太學의 胡秀才 손가락 人神이 손가락에 머무는 날 이라며 다른 날 뜸을 뜨라는 권고를 듣지 않음 - 뜸을 뜸 7일 후 創發, 人神의 얼굴이 보임, 고약(膏)을 발랐지만 효과 없음. 40일 후 創이 더 욱 커짐, 심한 통증. -
贅疣 灼艾去之 竟不起
22/병지9 應夢石人 성도부로 안무사 席 大光의 꿈에 나타난 두 사람 온몸 꿈에 나타난 사람이 부모의 묘자리를 알려줌, 땅을 파보니 훼손된 석상 발굴 - 흙에 묻힌 훼손된 석상을 수리하고 사당 건립 成都府路 兩浙路 溫州
遍體瘡痍
23/병지11 李生虱瘤 浮梁사람 李生 등, 得背癢疾 - 醫者 秦德立 약을 바름 사망 요주 부량현
虱瘤 取藥傅其上,又塗 一綿帶繞其圍,經夕瘤破, 出虱斗許 但一小竅如箸端不合,時時虱涌出, 不勝計,竟死
가려움
24/병지13 路當可得法 상수현 지현의 아들 도인을 만나 도술 배운 후 法籙으로 유명해짐, 부적을 쓸 때 잘못 써서 견책받음 書一符錯誤 - - 49일 후 회복 정화연간(1111~1118)
癰疽之害
疽發於背 京西北路 陳州
痛楚備極 商水縣
25/병지14 楊宣贊 宣贊舍人 양씨 처음:瘡發鬢間 평생 닭고기를 좋아함, 종기 가 생김. 그 후 밤중 기르던 닭이 울어 홧김에 죽이자 瘡 毒이 다시 오름 - - 목에 구멍이 나 핏방울이 뚝뚝 떨 어지더니 사망 唐州 方城縣 廣陽鎭
이후:瘡毒大作,瘇滿 一面.
26/병지16 異人廱疽方 京師人 - 衆醫, 歙縣丞 胡權 화독배농내보산 1개월 후 완치 江南東路 徽州歙縣
苦背瘍七十餘頭
一老人 가슴 - 화독배농내보산 다음 날 나음
瘇發於胸
一翁 뇌, 發腦 - 믿지 않음 사망
其子 - 화독배농내보산 하루 지나 나음
27/丁志3 洛中怪獸 미지칭 다수 瘡痏 西洛市에 나타난 黑獸, 민간의 訛言은 이것이 사람의 피부를 만질 경우 瘡痏가 생긴다고 함, 잡고 보니 어린 여자 아이. - - - 선화 7년(1125) 낙양
이듬해 이 지역 금에 함락
28/정지3 胡大夫 신주지주 호대부 신주 관아의 괴이한 현상 - - 3일 만에 사망 江南東路 信州
疽發于背
29/정지4 戴世榮 武翼郞 대세영 부자 집안에 각종 변괴가 생김, (家忽生變怪) - - 수일 만에 종기가 터져 사망 소흥 32년(1162)
足患小疽, 遭怪尤甚 말머리 모양의 한 장이나 되는 괴이한 異物 나타났다 사라짐 疽潰而死, 家遂衰 替. 江南東路 南康軍 建昌縣
30/정지5 靈泉鬼魋 왕전공 절앞 숲의 나무를 함부로 베 어 뗄 감을 얻음, 祟物을 봄 - - 사망 소흥 13년(1143)
자가 田功인 王撫 幹, 建陽人 疽發於背 사망 후에도 祟物의 영향 지속 나무를 다시 심어 해결 建陽縣 靈泉寺
31/정지5 魚病頭瘡 溧水尉黃德琬의 관찰, 黃顙魚 黃顙魚에 疫이 돌아 豆瘡이 보임, - - - 한 달 후 좋아짐, 사람들은 독이 있을까 먹지 못함 建康府 溧水縣
증상은 사람하고 같음
遍身, 頭尾口眼間
32/정지6 僧化犬賦 秀才 陳茂 建陽縣人 온몸 개복사 지장원의 승려 德輔를 비방하는 賦를 지음,승려가 화가나 하늘에 고해 응징. 口業招譴 - - 사망 不復能聚徒,困悴 以死 開福寺 地藏院
瘡穢遍體
33/정지8 頰瘤巨虱 臨川人 瘤生頰間 痒不復可忍 虱瘤 병자 스스로 每以火烘炙 - -
醫者 虱瘤也,當剖而出 之. 油紙를 목에 두르고 돌침을 찌름, (瘤才破,小虱 湧出無數) 의자의 치료(施砭)로 완치 다만 그 부분이 하얗게 변함
34/정지8 趙監廟 監廟官 조씨 온몸 羸疾로 鹿血복용 병자 스스로 竹管을 瘡에 꽂아 끓는 물을 흘러 넣어야 가려움이 멈춤 두 달 후 사망 -
遍體生異瘡, 陷肉成竅 사슴에 철관을 꽂아 녹혈을 빨아먹음, 사슴의 응보
가려움
35/정지9 舒懋育鰍鱓 臨安浙江人 舒懋 賣魚飯爲業 온몸 遍身生瘡, 每瘡輒有鰍鱓頭喙 突出 미꾸라지 등 민물고기 어획, 살생 - - 1개월 후 사망 건도 5년(1169)
통증 극심 역병이 돌아 온가족 죽음, 舒 懋는 온몸에 종기
36/정지9 張顏承節 승절랑 張顔, 江西 米綱을 지휘할 때 머리 부리던 노복의 작은 잘못에 홧김에 도끼를 던졌고 노복 의 머리에 맞아 破傷風으로 죽게 됨, 그 아내와 아들 결국 물에 빠져 자살 의자 呼醫傅藥 일 년 넘게 아프다 사망 頭縮入項間而死 선화연간 (1119~1125)
머리를 다리 난간에 찧음, 頭顱腫潰如盎 瘡成痂, 매우 가려워 긁으면 고름 터짐 (腫潰), 계속 반복, 뼈가 드러남 都水監令 史 두씨, 신묘한 惡 瘡藥을 보유(夜直冥司,職典寃 獄) 두씨는 無用藥爲 라 말함 京師 天漢橋
죽음으로 죄 값 치름
37/정지10 徐樓臺 溧水縣 蠟山의 富人 江舜明 - 當塗 外科醫 서루대(累世能治 癕癤) 침으로 창을 찌른 후 종이를 꼬아 약을 찍어 구멍으로 찔러 넣고, 일경 후 빼자 피가 흘러나옴 사망 소흥 8년(1138)
背疽發 사망 후에도 고름 이 계속 흐름 江南東路 江寧府 溧水縣
38/정지10 符助敎 宣城符裏鎭사람 符助敎 (善治癕疽) 치료 과정에서의 속임수, 재물탐함 (病者瘡不毒,亦先以藥發之, 前後隱惡不勝言) - - 7일 밤낮 앓다가 사망 江南東路 宣州
大疽如盌 음계의 징벌, (黃衣)擧所執藤 棒點其背)
39/정지13 葉克己 兩浙路 嚴州 壽昌縣 사람 葉克己, 그의 아버 지는 大夫 陰尻間 服藥茹毒, 元藏已壞 그 치료 과정에서 大疽發於陰尻 승려: 혈리 치료 大疽 치료: 불에 달군 젓가락으로 종기 끝을 지져 끼우고, 차가운 젓가락으로 약을 바름, 다시 철침으로 대저를 지져 피부가 떨어져 나감, 약으로 여섯 개의 구멍을 막음 大疽 치료: 이틀 후 瘡痂盡脫, 완치 淮南東路 揚州
服藥茹毒으로 오장이 썩음, 赤目, 血利의 치료 중에, 大疽發於陰尻間,穿 七竅,糞溺自其中出 도인: 大疽 치료 兩浙路 婺州 蘭溪縣
臍下年過五十, 疽復發於 臍下 - - - 疽復發於臍下, 洞腹乃死 -
40/정지17 閻羅城 襄陽 南漳人 張腆 (世工醫)의 처 鄭氏 허리아래 부부가 음계로 끌려감, 장씨는 풀려나고, 처 정씨는 決杖 20대, 정씨는 환생후 발병 - - 凡十日膿始潰, 又十日方瘉 소흥 18년(1148)
腰下 忽微瘇, 繼生巨瘡, 痛不堪忍 완치 襄陽南漳縣
張腆慨然棄家
41/정지17 王稹不飮 嚴州 觀察判官 王稹 모주 막직으로 있을 때의 잘못된 옥사와 관련해 죄인을 함부로 처벌했다고 음계의 오해를 받고 불려감 - 음계에서 변론함, 상사의 지시였음 을 밝힘. 환생 후 瘡已潰, 卽日遂瘉, 완치. 兩浙路 嚴州
疽發於背 回世間 ‘切勿飮酒’ 음계 서리의 당부
42/支甲1 普光寺僧 승려 엉덩이 嗜酒不檢 瘍醫 孔彦璋 - 十年方死 -
腰脊之下尾骨, 短驢尾自皮膚間崛出 狎游
43/支甲2 宿遷諸尹 周·郭 두 秀才 숙천현 윤씨 집안은 난이 일어나자 거병, 조종의 어용 궁중 기물 획득, 난중에 조정에 보내지 못함. 주와 곽은 그가 사사로이 가졌다고 무고. 윤씨들 기시 처해짐. 청자색 옷을 입은 장졸이 시장에서 주와 곽을 화살로 쏨. 가슴에 맞고 다음 날 疽 발병 - - 한 달 후 사망 京東東路淮陽軍 宿遷縣
疽生于背
周, 縣令 前後洞徹 정강의 난 무렵
郭, 縣丞 至膈膜,見五藏
44/支甲4 雙頭蓮 賈安宅 온몸 - - - (나음) 대관 2년(1108)
대관3년 状元 瘡瘍遍體 吳興
45/支甲10 王仲共 王仲共 지주로 차견 갈 때 그 아들이 아버지가 좌천되는 꿈을 꿈, 그후 계속 꿈에 부합. 疑仕宦 止此,絶惡之,還南城,未幾疽 發背. - - 사망 순희연간 (1174~1189)
以朝奉郎知武岡軍 疽發背 형호남로武岡軍 衡陽
46/支乙4 小紅琴 王卿月 거문고를 좋아했고, 기예에 뛰어난 첩을 얻어 총애, 금국 사신으로 파견 명을 받고 가는 중 양주도착 전 疽發背間 - - 사망 淳熙 庚子年 紹熙 壬子 濾南에서 출발, 姑蘇에서 발병, 揚州 도착 전 사망
起居舎人 疽發背間
出牧淮西
47/支乙5 張小娘子 章縣丞祖母이자 단사 秀州外科張生의 처 張小娘子(皮場大王에게 『癰疽異方』을 받고 유명해짐) 고름을 터뜨린 후 단사가 원인인 것을 알고 치료가 어렵다고 진단 사망 兩浙路 秀州 (兩浙西路 嘉興 府)
章子厚侍妾 疽發於背 此服丹藥毒發所致
婁夏卿之妾 - 村醫 村醫: 灼艾, 약을 바름, 실로 묶어 잘라냄 수십일 후 사망 -
項生一瘡甚惡 張:翻花腦痔,世人患者絶少,吾方書不載治法.
48/支乙5 顧六耆 顧六耆家의 方隅禁 神 舉身 顧六耆가 집을 넓히고 우물을 파서 금신을 괴롭힘 (大聖寺 등불 기름을 관리하는 행자가 겪은 일) (膏油를 발라야 통증이 사라짐) 나아짐 秀州
(金神七殺) 成瘡痏
49/支乙6 羅伯固腦瘤 何次翁 - 道人 침으로 찔러 구멍 뚫어 약을 넣음 완치 襄陽
生瘤于鼻
羅伯固 士人 머리 - 瘍醫 약 바르고 실로 묶은 후 끝을 잘 라냄 완치 ‘吾鄕’, 婺源
腦後生一瘤 흉터도 남지 않음
50/支乙7 王牙儈 牙儈 王三 臀(볼기) 가난한 鄭小五가 온 가족이 疫癘에 걸려 담요와 갓을 팔아 약을 사려는 데 중간에 왕삼이 물건값의 반을 가져감, 음계의 관아(瘟部)로 끌려가 곤장을 맞고 깨어나니 엉덩이에 발병 - - 수개월 후 회복 건도 7년(1171)
生赤丁瘡約滿百 鄱陽
51/支景8 茅山道士 某郡一士人 熱證已極, 氣血消爍且盡,當以 背疽死 - 揚州名醫楊吉老 진맥 후 치료가 어렵다고 함 - 某郡
揚州
茅山觀道士 買好梨一顆,如生梨已盡,則取乾者泡湯飲之,仍食其滓. 완치 茅山觀
1년 만에 호전
52/支景10 公安藥方 向友正 가슴 치료를 한 지 반년이 되도록 나아지지 않음 비몽사몽 偉丈夫(관 왕),약방을 전해줌 末藥, 瓜蔞, 乳香으로 술로 끓임 도원현 지현 허진의 처방에 과루를 더한 것 완치 순희 8년(1181)
江陵長使 겸 공안현 縣令 癰發於胸臆間 公安縣
53/支丁3 虞一殺螺 漁人 虞一 손등 살생이 원인 - 追悔前業 誓不復更為 한참 후에 완치, 처자를 버리고 절 의 노복이 됨 明州 奉化縣
右手背生惡瘡 以取呀螺為生
손가락과 피부가 탈락되고 통증이 심하며 움직일 수 없음
54/支丁8 王甑工虱異 處州 松陽 백성 王六八 箍縛盤甑爲業 줄을 묶어 그릇과 시루를 만드는 일 손바닥 腰間甚癢 - 치료할 수 있는 약이 없음 사망 處州 縉雲縣
손바닥 捫得一虱
장난으로 시루에 구멍을 뚫 어 거기에 메움, 1년 후 다시 보니 살아 있기에 손바닥에 피를 내어 피를 빨게 함, 간지러워 긁으니 癰이 됨
抓之成癰
55/支戊5 任道元 任道元, 故太常少卿文薦之 長子, 受官出仕 도를 배움, 천심법 등, 출사 후 향 피우는 일 소홀.黄籙大 醮를 지내는 중 두 여종에게 음란한 말. - 신의 책망 사죄 그러나 종기는 더욱 커짐 순희 13년(1186)
左耳後痒 瘡益大, 頭脹如栲栳 福州
瘡如粟粒 不謹香火, 貪淫兼行 사망
56/支戊5 鼈癥 景陳弟 長子拱 겨드랑이 피부 아래 자라 형상이 보임 德興古城 村 外科醫 洪豆腐 (砭攻癰疽 如神) 鮮蝦로 죽을 만들어 먹임, 별징을 확인. 완치, 이듬해 재발, 다시 같은 방법으로 치료한 후 완치 德興 古城村
脅間忽生瘇毒 약을 주었는데 마 치 脾胃를 치료하는 것 같은 것.附 子末二錢投之,數服而消.
57/支戊10 蕪湖王氏癡 女 劉知縣의 아들 호절 집안 왕씨 癡女의 췌서로 들어감 부인 왕씨 집의 재산 탕진, 아내를 비녀로 팔아버림, 왕씨 사후 새로 재가. 재가 후 발병, 헛소리 醫巫 莫知為何等祟孽 한 달이 지나도 차도 없음, 일어나지 못함. 경원 2년(1196) 蕪湖
生疽於背 사망
58/三志己7 瘍醫手法 江東提刑 左股 - 非刺破不可 완치 소흥 초
發癰 癰已穿決, 出膿血
趙從善 冶鑄使 - - 醫 黃裳 환자 몰래 도구 사용 완치 순희 말
59/三志己8 楊立之喉癰 楊立之 인후 종기가 터져 농혈이 멈추지 않음. 의사 楊吉老 생강 편 한 근 입 에 물고 있으라고 함. 완치 楚州
廣府通判 喉間生癰 남방에 임직할 때 鷓鴣를 많 이 먹어 그런 것, 이 새는 半夏를 좋아해 독이 있음. 반하 독 중독. 생강으로 반하독 을 해독
60/三志壬9 劉經絡神針 盛皐 肺癰 - 외과의 劉經絡 艾炷湯劑,力所不 及 완치 건도 원년(1165)
禁衛幕士 火針으로 치료
61/補18 張中書 中書侍郞 머리 젊을 때 丹砂복용 폭식, 허기 유발 - - 瘡番而外向,如人 口反. 福州
張慤 髮際生瘍 浸淫及頂 36개 瘡 사망
62/再補 薑附治癰 時康祖 가슴 - 張王이 꿈 에서 처방 일러줌. 『본초』 의사 생강즙, 香附. 향부의 털을 제거 하여 생강즙에 담근 후 가루 내어 두 돈을 미음과 마심 창농 나오고 딱딱 한 종기도 사라 짐. 광덕군
廣德 지사 左乳生癰 胸臆間結核. 大如拳,堅如石
溫州 지사 牽掣臂腋,徹於肩, 痛楚特甚 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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