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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J Med Hist > Volume 26(1); 2017 > Article
한국에서 국제적 연구자로 성장하기: 이호왕의 유행성출혈열 연구 활동을 중심으로*

Abstract

In the 1960-70s, South Korea was still in the position of a science latecomer. Although the scientific research environment in South Korea at that time was insufficient, there was a scientist who achieved outcomes that could be recognized internationally while acting in South Korea. He was Ho Wang Lee(1928~ ) who found Hantann Virus that causes epidemic hemorrhagic fever for the first time in the world. It became a clue to identify causative viruses of hemorrhagic diseases that were scattered here and there throughout the world. In addition, these outcomes put Ho Wang Lee on the global center of research into epidemic hemorrhagic fever.
This paper examines how a Korean scientist who was in the periphery of virology could go into the central area of virology. Also this article shows the process through which the virus found by Ho Wang Lee was registered with the international academia and he proceeded with follow-up research based on this progress to reach the level at which he generalized epidemic hemorrhagic fever related studies throughout the world. While he was conducting the studies, experimental methods that he had never experienced encountered him as new difficulties. He tried to solve the new difficulties faced in his changed status through devices of cooperation and connection.
Ho Wang Lee’s growth as a researcher can be seen as well as a view of a researcher that grew from a regional level to an international level and could advance from the area of non-mainstream into the mainstream. This analytic tool is meaningful in that it can be another method of examining the growth process of scientists in South Korea or developing countries.

1. 머리말

후발국에서 활동하는 연구자가 선진적 연구 무대에 자신의 성과를 올리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학계에서 이름을 알리려면 우수한 논문을 발표하면서 활동해야 하는데 후발국은 이러한 점에서 미흡하다. 예를 들면 연구 장비나 시설 등이 제대로 구비되지 못하고, 함께 연구할 인력도 충분한 훈련을 받지 못한 경우가 많아 연구를 수행하는 데 어려움이 많다. 또한 후발국이라는 여건은 외국의 여러 연구자들과 자유롭게 교류하기도 힘들다. 자신과 유사한 연구를 수행하는 많은 연구자들과 정보를 공유하고 새로운 방법을 배우면서 연구 활동의 폭을 확대해야 하지만 후발국의 연구자들이 이러한 기회를 얻기란 쉽지 않다. 이러한 까닭에 후발국에서의 연구 활동에는 어려움이 많으며, 이를 극복하고 연구자로 성장하여 국제 학계의 주목을 받는 성과를 거두는 사례는 흔치 않다.
1970년대의 한국 역시 후발국의 위치에 있었다. 당시 미흡했던 연구 환경 속에서도 한국에서 활동하면서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성과를 거둔 과학자가 있다. 바로 한국형출혈열(공식 명칭은 신증후군출혈열, Hemorrhagic Fever with Renal Syndrome)의 원인 바이러스인 한탄바이러스(Hantaan Virus)를 세계 최초로 발견한 이호왕(李鎬汪, 1928~ )이다. 한국형출혈열은 한국에서 발생했던 유행성 출혈열 질환이다. 이호왕은 한국에서의 출혈열 연구를 통해 원인 바이러스를 처음 발견했다. 이 성과는 세계 곳곳에 산재해 있었던 출혈성 질환의 원인 바이러스를 규명하는 단초가 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이호왕은 이들 질환을 유발하는 바이러스들을 종합 관리하고, 새로운 바이러스 속(genus)으로 제창하기에 이르렀다.
이호왕은 열악한 한국의 연구 환경 속에서 어떻게 이러한 성과를 거둘 수 있었는가? 이러한 결과가 있기까지 그에게서 어떠한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가? 이 논문은 이호왕의 연구 활동을 통해서 후발국의 연구자가 어떻게 국제적 연구 활동의 중심부에 도달할 수 있었는지 살피고자 한다. 이 논문을 통해 그가 후발국의 연구자로서 연구 자원이나 환경의 측면에서 부족한 것을 채우기 위해 어떠한 방법을 취했는지 보이고자 한다.
이호왕에 관해서는 김근배와 신미영의 연구논문을 통해 잘 알려져 있다. 김근배는 이호왕의 유행성출혈열 연구 전반을 살피며 그가 자신의 연구 네트워크를 효율적으로 활용함으로써 성공적인 연구로 이끌었다고 주장했다(김근배, 2005). 김근배의 논문은 이호왕이라는 연구자의 활동 가운데 네트워크의 중요성을 부각시켰다는 점에서 상당히 의미 있는 시도이다. 하지만 네트워크의 범주를 다른 연구자 및 연구 그룹에 한정하여 논의하고 있다. 신미영은 두 편의 연구 논문을 통해 이호왕을 조명했다. 하나는 그의 핵심적인 연구 성과인 한탄바이러스의 발견 과정을 미시적으로 추적한 것이고(신미영, 2007), 다른 하나는 이호왕이 처음 바이러스학에 발을 들일 때 수행했던 일본뇌염바이러스 연구를 다룬 것이다(신미영, 2012). 이들 논문은 이호왕의 유행성출혈열 연구와 한탄바이러스의 발견까지의 모습을 좀 더 풍성하게 바라볼 수 있게 해 준다. 그러나 이호왕이 한탄바이러스 발견 이후 어떠한 활동을 했고, 어떻게 국제적인 바이러스학 연구자로 성장해 갔는지는 조명해 주지 못한다.
이 글은 바이러스학자 이호왕의 사례를 통해 과학 후발국 한국에서 그가 어떻게 세계 각국의 과학자들과 연구 활동을 할 수 있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그의 대표적인 성과인 한탄바이러스 발견 이후의 행적을 따라가면서 후발국 출신의 연구자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연구 역량을 습득하는 것 외에 외국 연구자들과의 협력이 절실했음을 보일 것이다. 당시 한국은 바이러스학이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한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이호왕은 이들과 동등한 협력보다는 의존적 협력 관계를 이루었다. 그는 외국의 유행성출혈열 연구자들을 자신을 중심으로 엮어냈다. 이것은 과학 후발국이라는 연구 여건 속에서 그가 취할 수 있었던 활동이었다. 이호왕은 이러한 역할을 통해 전세계의 연구자들과 함께 연구할 수 있는 위치에 올라설 수 있었다. 이 연구는 이호왕의 바이러스 연구 활동을 통해 후발국 한국에서 연구하면서 국제적인 규모로 활동했던 연구자의 성장 맥락을 이해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 나아가 한국 현대의학 발전의 길목에 교육제도나 보건의료 정책 뿐 아니라 기초의학연구의 성취도 뒷받침되었음을 살필 수 있을 것이다.

2. 의존적 협력: 새로운 바이러스의 존재 공인

1) 새로운 병원체의 분리

이호왕은 1976년 유행성출혈열의 병원체를 최초로 발견했다(이호왕, 1976). 그가 유행성출혈열 연구에 뛰어든 지 7년 만에 거둔 성과인 것이다. 그는 그 동안 다른 연구자들이 실험 재료로 사용하지 않던 등줄쥐의 폐로부터 병원체를 발견할 수 있었다. 병원체 발견 소식이 알려지자 유행성출혈열을 연구하는 많은 연구자들은 이호왕의 성과가 진짜인지 의심을 품었고, 여러 가지 방법으로 확인을 시도했다. 이호왕은 외국에서 보내온 여러 혈청을 맹검(blind test)했고, 미국의 연구소에 직접 방문하여 재현 실험을 해 보임으로써 자신이 발견한 병원체가 참임을 인정받을 수 있었다.
이호왕은 출혈열 병원체의 발견과 분리에 대해 국제 학술지에 영어 논문으로 발표하여 출혈열 바이러스학계에 공식적으로 알리고자 했다. 출혈열 바이러스를 연구하는 주요 연구자들에게는 성과를 직접 재현해 보임으로써 발견 사실을 알렸지만 이를 공식화하기 위해서는 해당 분야의 유명 학술지에 발표하는 것이 필요했다.
그가 국제 학술지에 병원체의 발견과 분리에 관한 내용을 발표할 수 있었던 것은 출혈열 연구 초창기부터 도움을 주었던 존슨(Johnson, Karl M.)의 도움이 컸다. 존슨은 1965년 볼리비아 출혈열의 원인 바이러스를 최초로 분리한 연구자로 미육군 소속 연구자들과의 교류를 통해 이호왕의 대학원 시절 지도교수였던 쉬러(Scherer, William F.)와 학문적 관계를 형성했다. 이호왕은 유행성출혈열 연구 초기 파나마 중미의학단장으로 있던 존슨의 연구소를 방문하면서 그와 긴밀한 연구 관계를 구축할 수 있었다[1]. 존슨의 제안으로 이호왕은 국제 학술지 발표를 계획했다. 이는 그가 자신의 성과를 공식화하려는 목적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이 주제를 선점하여 연구를 이어나가기 위해서였다. 이호왕이 출혈열 병원체를 발견한 시점은 그가 미육군의학연구개발사령부로부터 받고 있었던 연구비가 거의 종료될 시점이었다. 따라서 그는 이 성과를 국제 학계에 하루 속히 발표함으로써 연구비의 중단을 막고, 나아가 추가적인 지원까지 받고자 했다.
하지만 오랫동안 누구도 성공하지 못했던 출혈열 병원체를 발견한 성과라 해도 이호왕 혼자 국제 학술지에 발표하는 것은 무리였다. 과학 후발국의 연구자로서 국제 학술지 발표의 문을 열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이호왕은 이전에 일본뇌염바이러스 연구 성과를 『미국면역학회지(Journal of Immunology)』에 발표해 본 적은 있었다[2]. 이는 그의 박사학위논문을 다듬어 지도교수인 쉬러와 공동으로 발표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번 출혈열 병원체 분리 연구는 그가 독자적으로 수행한 연구였기 때문에 내용이 충실히 갖추어졌는지, 영어 표현이 적절히 구사되었는지 등을 스스로 판단하기 어려웠다.
이호왕은 존슨으로부터 논문의 완성도를 높이는 데 필요한 점에 대해 많은 도움을 받았다. 존슨은 이호왕에게 편지를 보내 국제 학술지에 발표하기 위해서는 좋은 형광 사진이 필요하다고 하면서 최상의 사진을 얻기 위해 필요한 방법을 알려주었다. 이 편지를 받은 이호왕은 1976년 8월 5일 존슨에게 흑백 사진을 찍어본 적은 없지만 학술지 발표에 필요하다면 시도해 보겠다고 답장했다[3]. 이렇듯 이호왕은 국제 학술지에 논문을 발표하기 위한 창구로 존슨을 적극 이용했다. 이듬해 3월에는 실험에 필요한 현미경, 필터, 재료 등에 대해 도움을 구하는 내용을 보냈다.
  • …… 등줄쥐 폐장 조직 부분에 대한 에반스 블루 대조염색은 내가 기대했던 것보다 잘 되지 않았습니다. 바이러스와 한국형출혈열 회복기 혈청의 중화 시험은 진행 중에 있고 나는 당신에게 곧 냉동된 한국형출혈열 바이러스 조직을 안전하게 보낼 계획입니다.

  • 올림푸스는 epi-illumination 현미경을 일본에서만 생산합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이 라이츠 산보다 좋지도, 저렴하지도 않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나에게 가능한 한 빨리 당신의 라이츠 현미경의 카탈로그 번호와 가격을 알려주십시오.(이하 밑줄은 필자 강조)

  • 나는 당신이 1) 필터와 2) 영국에서 좋은 F-conjugated 면역글로불린을 만드는 회사의 이름과 주소, 3) 러시아의 인체 실험 사본을 보내주면 감사하겠습니다.

  • 나는 소련의 출혈성 신증 신염과 일본 오사카에서의 유행성출혈열이 한국형출혈열과 매우 관련 있다는 혈청학적 증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실험에 대한 정밀한 정보를 아는대로 곧 당신에게 알려드리겠습니다. ……

  • 1977. 3. 8.

  • 이호왕[4]

이호왕은 존슨에게 자신의 실험 내용에 대한 도움은 물론이고 준비한 논문 전반에 대해서도 조언을 구했다. 존슨에게 쓴 편지를 보면 자신에게 연락을 하려면 항공 메일로 편지를 하거나 급한 경우 전화를 해도 좋다고 하면서 서울 전화번호를 알려주었다[5]. 논문 출판에 대해 간절히 알고 싶으니 가능한 한 빨리 알려달라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이 편지에 대한 답장인 5월 16일 편지에서 존슨은 이호왕에게 몇 가지 수정할 내용과 당부 사항을 전했다[6]. 그는 또한 바이러스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말 것을 조언했다. 왜냐하면 이호왕이 발견한 병원체가 확실히 바이러스로 확인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정말 좋은 전자현미경으로 관찰하거나 이미 알려진 다른 바이러스와의 항원적 관계를 파악하기 전까지는 바이러스라고 표현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조언했다. 그 밖에 논문 내용에 있는 지명을 정확히 표기할 것, 양성반응이 가장 높은 야생쥐의 수집 지역인 송내리, 천수리, 가산리에 대한 월별 구성을 표로 어떻게 할 것인지와 사진의 크기에 대한 조언 등을 꼼꼼히 정리해 보냈다. 동시에 자신이 서론과 방법 부분을 빨리 써서 보내겠다고 했다. 이렇게 볼 때 존슨은 이 논문에서 일종의 교신 저자 역할을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 결과 이호왕은 존슨과 함께 1978년 『미국전염병학회지』에 출혈열 병원체의 분리에 대한 논문을 발표할 수 있었다(LEE, HW et al., 1978).

2) 한탄바이러스의 등록

이호왕은 병원체 분리 논문을 준비하는 동시에 그것의 바이러스로서의 특징을 규명하는 연구도 진행했다. 자신이 분리한 병원체가 출혈열을 일으키는 원인 바이러스임을 보이기 위해서는 그것의 물리화학적 특징을 파악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기본적으로 크기가 어떤지, 어떤 조건에서 활성화 또는 비활성화되는지, 그리고 기존의 다른 바이러스와의 관계는 어떻고, 차이점은 무엇인지 등을 밝혀야 했다. 이를 위해 이호왕은 크기 측정에 필요한 여과 실험, pH 및 열적 안정 범위 측정 실험, 다양한 종의 숙주 동물을 대상으로 출혈열 병원체 접종 실험 등을 계획했다.
하지만 이호왕 연구팀에서 이러한 실험들을 자체적으로 실시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의 연구팀에 속한 연구원들이 바이러스 연구에 능숙한 편도 아니었고, 연구소에 구비된 실험 장비들도 충분하지 못했다. 소속 연구원들은 야생쥐의 채집과 해부, 조직 배양 정도의 일을 담당했고, 그나마 고려대 생물학과 출신인 이평우가 이호왕을 도와 상대적으로 전문적이라 할 수 있는 형광항체법 적용, 현미경 관찰 등을 수행할 수 있었다. 병원체가 바이러스인지 여부를 따져야 하는 실험을 실시하기 위해서는 많은 것들이 필요했지만 이호왕의 실험실 내에서 소화할 수 있는 실험은 몇 가지로 한정되었다[7].
발견한 병원체의 바이러스로서의 특징을 밝히는 연구를 위해 미육군전염병연구소의 프렌치(French, George R.)가 합류했다. 프렌치는 1950-60년대 일본과 한국에서 출혈열에 대한 연구를 해 본 경험이 있었고, 이호왕이 출혈열 병원체 증명 사실을 발표했을 때부터 연락을 주고받으며 관계를 형성했던 사람이다. 그는 여과지에 병원체를 통과시키는 실험을 비롯한 각종 실험을 함께 하면서 이호왕을 도왔다. 이호왕과 프렌치는 다양한 크기의 필터를 이용한 여과 실험 내용을 서로 공유하면서 병원체의 크기를 파악했다[8].
한국에서 발생하는 출혈열로부터 분리된 병원체가 다른 바이러스와는 어떠한 반응을 보이는지에 대해서도 조사되었다. 이것은 바이러스가 기존의 다른 바이러스와 다르게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임을 보여주기 위해 필요한 실험이었다. 이호왕은 출혈열에 감염된 등줄쥐의 폐조직에서 분리한 균주 76-118을 총 10종의 바이러스와 대조시켜 형광항체법으로 검사하였다[9]. 이 실험에서 양성반응을 보이는 바이러스는 유행성출혈열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었다. 실험 결과 이 병원체는 마버그, 에볼라 바이러스 등 7종에 대한 혈청에는 모두 음성반응을, 한국에서 발생하는 출혈열, 일본의 유행성출혈열, 소련의 신증후군출혈열 환자의 각 혈청에는 모두 양성반응을 나타냄으로써 유행성출혈열에만 관련된 바이러스라는 것이 확인되었다. 동시에 한국과 일본, 소련에서 발생하는 출혈성 질환이 서로 유사하다는 것도 증명되었다.
이밖에 세포주를 찾기 위한 실험도 진행되었다. 세포주를 찾는 작업은 출혈열 바이러스 연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출혈열 바이러스를 실험실에서 대량으로 배양할 수 있으려면 그것을 가능하게 할 적절한 세포주를 찾는 것이 필요했다. 이 연구는 출혈열 병원체 증명을 공식화하기 전부터 필요성이 고려되었다. 1976년 4월 이호왕이 쉬러에게 병원체 증명 사실을 처음 알렸을 때, 쉬러는 병원체를 대량으로 배양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조언했다[10]. 이호왕은 이를 위해 일본 소재의 미육군 제406의학연구소에서 연구한 적이 있는 일본 연구자에게 연락을 취하기도 했다. 하지만 병원체 대량 생산이 가능한 세포주를 확립하는 데는 실패했다. 그나마 이호왕이 취할 수 있는 방법은 지리적으로 격리되어 있어 한국형출혈열이 유행한 적이 없는 제주도에서 등줄쥐를 최대한 잡아다가 실험에 사용하는 것뿐이었다. 제주도 등줄쥐는 출혈열 바이러스에 대한 항체가 없기 때문에 배양 실험은 가능했다. 하지만 제주도 등줄쥐를 사용하는 것은 대량 배양을 위해 필요한 세포주 확립의 방법이 되지 못했다.
출혈열 병원체의 바이러스로서의 특징을 밝히기 위한 연구에 공동으로 참여하고 있는 프렌치 역시 세포주를 찾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계속되는 실험 끝에 1978년 3월 A549세포[11]에서 출혈열 병원체가 배양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 …… 당신에게 들려줄 매우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우리는 한국형 출혈열을 복제하는 세포주를 발견했고, 그것이 형광항체에 의해 양성반응을 보임을 알아냈습니다. 그 세포는 인간 폐암 세포에서 유래한 폐포상피세포입니다. 세포는 잘 자라고 있고, 배지 교환을 자주 해 줘야 하지만 오랜 기간 동안 유지하기 쉽습니다. 항원은 11일째 흩뿌려진 점으로 처음 발견될 수 있었습니다. 나는 그것이 언제 최대치에 도달할지 모르지만 감염된 세포의 대부분은 최소 18일을 지나면서 증가하고 있습니다. 그 세포는 지금까지 5개의 출혈열 환자 혈청(모두 양성반응)과 5개의 정상 혈청(모두 음성반응)에 대해 시험되었습니다. 이 점에서 나는 그것이 진짜 한국형출혈열 바이러스를 복제하는 것이라고 매우 확신합니다. ……

  • 1978. 3. 23.

  • 프렌치[12]

프렌치는 출혈열 환자의 혈청이 접종된 A549세포에 형광항체법을 적용했을 때 출혈열 병원체에 대해 양성 반응을 나타낸다는 것을 알아냈다. 출혈열의 병원체가 증식되는 세포주를 찾기 위해 이호왕도 각종 동물의 장기 조직을 검사했지만 발견하지 못했는데, 프렌치가 새로운 세포주를 발견함에 따라 동일한 조건에서 바이러스를 계대 배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프렌치로부터 이 소식을 접한 이호왕은 A549세포에 병원체 배양을 시도해 보았다. 실험 결과이 세포에서 출혈열의 병원체에 대한 반응 정도는 등줄쥐의 폐조직에서 나타나는 만큼 민감하지는 못했으나 양성으로 나타났다[13].
프렌치는 A549세포와 등줄쥐에서 분리한 바이러스를 가지고 한국의 출혈열과 유럽의 유행성 신염(Nephropathia epidemica)이 혈청학적으로 관련 있음을 증명했다. 프렌치는 이 세포주에 스웨덴의 유행성 신염 환자의 혈청을 반응시켜본 결과 매우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었다. 프렌치의 이 실험이 성공적으로 수행됨에 따라 독립적인 방법으로 두 질병이 밀접하게 연관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프렌치는 이호왕과 함께 이러한 내용을 1981년 『사이언스지(Science)』에 논문으로 발표했다(French, GR et al., 1981).
출혈열 병원체의 특성을 알아보기 위한 각종 실험 절차를 거치면서 이 병원체는 출혈열 환자의 혈청에만 반응하는 새로운 바이러스라는 것이 확인되었다. 그렇지만 이 바이러스가 국제 학계에서 통용되기 위해서는 공식적인 이름이 필요했다. 이호왕은 새로운 바이러스의 이름을 ‘한탄바이러스(Hantaan Virus)’라 하기로 했다. 보통 바이러스 이름에는 병원체가 분리된 곳의 위치나 지명이 활용된다. 이 이름은 강원도에서 경기도 북부로 흐르는 한탄강에서 따온 것이다. 그가 제출한 보고서에 따르면 새로운 바이러스의 이름을 한탄강에서 착안한 데에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이유가 있다. 가장 먼저 바이러스 발견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송내리 근처에 한탄강이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로 한탄강은 철의 삼각지역을 따라 흐르는데 이 지역은 한국형출혈열이 처음 발생했고, 한국전쟁 동안 미군에서 3천 명이 넘는 환자가 발생한 곳이기도 하다. 세 번째로 Hantaan은 한국어로 한탄, 애통(lamentation) 등을 의미하는데, 한탄강은 지리적으로 남한과 북한 사이를 흐르고 있어 1945년 이후 한국의 슬픈 역사를 보여주는 곳이기도 하다. 이산가족이기도 한 이호왕은 출혈열의 병원체를 한탄바이러스로 명명하면서 연구 내용과 직접 관련된 것 이상으로 많은 의미를 담아 표현했다[14].
한탄바이러스가 등록된 카탈로그에는 프렌치가 1저자, 이호왕이 2저자로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병원체를 최초로 발견한 이호왕이 1저자로 기록되어 있지 않은 데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이호왕이 1976년 등줄쥐에서 분리한 병원체는 공식적인 바이러스로 인정받기 전까지 항원에 불과한 상태였다. 이 병원체가 바이러스라는 사실을 규명하고 최종 등록하는 과정에 프렌치의 성과가 상대적으로 많이 반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프렌치는 A549세포라는 세포주를 발견하여 병원체의 계대 배양을 가능하게 하는 성과 외에 이호왕과 함께 한탄바이러스의 바이러스적 특성을 다각도로 밝히는 연구에 기여했다. 또한 한탄바이러스의 카탈로그 등록 양식을 교정해 주기도 하는 등 이호왕의 출혈열 병원체 분리 이후 연구 참여율이 높았다. 이러한 점들을 볼 때 프렌치가 왜 1저자로 기록되어 있는지 알 수 있다.
프렌치의 활동은 왜 그렇게 활발했던 것일까? 우선은 1970년대 한국의 연구 환경이 미흡했고, 국제 바이러스학계에서의 위상이 높지 못해서 외국 연구자의 도움이 그만큼 필요했기 때문이라 생각할 수 있다. 특히 한국전쟁 때 부터 출혈열 연구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프렌치는 이호왕의 연구에 합류하는 데 적격인 인물이었다.
또한 이호왕의 출혈열 연구를 지원해 주는 곳은 미육군이었고, 프렌치는 미육군 전염병의학연구소에 소속된 연구자였다. 즉 이호왕이 1976년 병원체 분리에 성공하자 미육군은 후속 연구에 대한 주도권을 잡기 위해 프렌치를 연구에 참여시킨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연구 초기부터 지속적으로 이호왕에게 지원을 해 온 미육군으로서는 출혈열 병원체 발견을 넘어 유사 질병 연구, 백신 개발과 같은 후속 연구의 가능성까지 내다보았던 것이다. 당시 이호왕 연구팀은 바이러스 분리 성공으로 후속 연구를 추진할 수 있는 기술력은 갖추었지만, 연구에 필요한 자금력과 인력이 부족했다. 반면 미육군에서는 자금력이나 인력은 충분히 갖추어진 상태이므로 기술력만 도입이 된다면 어렵지 않게 백신 개발에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미육군은 분리한 병원체가 공식적으로 인정을 받기까지 연구에 동참함으로써 표면적으로는 연구 지원 기관으로서의 역할을 했지만, 한편으로는 후속 연구에서 유리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목적이 있었다. 실제로 한탄바이러스 등록 후 이호왕 연구팀 외에 미육군에서도 출혈열 백신 개발 연구에 뛰어들었는데 이는 미육군의 의도를 보다 분명히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겠다[15].
이호왕은 출혈열의 병원체를 발견하고, 그것의 바이러스로서의 특징까지 밝혀내면서 당시 국내 연구자로서는 드물게 국제 학계에 이름을 알릴 수 있었다. 물론 그 과정에는 과학 후발국의 연구자로서 연구 내적, 외적으로 미흡한 점이 많았다. 연구팀 조직, 사용하는 연구 기법, 실험실 장비 등 실험에 필요한 기본적인 요소들이 충분치 못했고, 그에 따라 외국 연구자들과의 협력 연구가 절실했다. 협력이 상호 간에 필요한 것을 취하기 위한 활동이지만, 과학 후발국인 한국의 연구자 이호왕은 동등한 위치에서 협력하는 것은 아니었다. 연구 자원의 한계로 선진적 공간의 연구자들에게 의존하는 경향이 컸다. 이호왕이 외국 학술지에 논문을 발표할 수 있었던 것은 존슨의 도움이 있었고, 발견한 병원체가 바이러스임을 보여주기 위해 필요했던 실험 역시 프렌치가 도움을 주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출혈열 병원체의 발견이라는 근본적인 성과를 낸 것은 이호왕이었다. 그렇지만 그것이 한탄바이러스라는 이름으로 등록되어 국제 학계에 알려지는 데는 외국 연구자들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미육군의 필요와 더불어 이호왕도 그들의 손을 잡고 국제적인 활동에 닿을 수 있었던 것이다. 아직 바이러스학이 제대로 자리 잡히지 않은 한국보다는 외국 연구자들과의 교류를 우선시하는 것이 더욱 필요했고, 이를 통해 이호왕은 자신의 연구자로서의 위상을 더욱 높이고자 했던 것이다.

3. 국제적 제휴: 출혈열 연구의 중심지 형성

1) 전세계의 문제로 확대

한탄바이러스를 학계에 등록하기 위해 필요한 실험을 수행하면서 이호왕은 일본의 유행성출혈열에도 관심을 가졌다. 그는 출혈열 연구를 시작할 당시 참고했던 기존 연구 자료를 통해 1960년대 일본에서도 출혈열 의심 질환이 발생한 적이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당시 오사카에서 발생했던 유행성출혈열 환자의 혈청에 대해 문의하기 위해 오사카 대학 미생물병연구소와 접촉했다[16]. 오사카 대학 미생물병연구소는 이호왕이 서울대 의대 미생물학 교실에서 근무하던 시절 학생 교육 훈련을 위한 교환 프로그램을 통해 교류하던 곳이었다[17]. 그는 이 연구소의 오쿠노(Okuno, Yoshiomi)에게 연락하여 일본의 유행성출혈열 환자 혈청을 구할 수 있는지 알아보았다. 오쿠노는 이호왕에게 약 10년 전 타무라(Tamura, Masata)라는 의사가 오사카에서 유행성출혈열 환자를 확인, 보고한 적이 있었고, 그에게서 환자 혈청 표본을 받았지만 분실했다고 알렸다[18]. 하지만 타무라에게 요청하여 이호왕에게 혈청 표본을 보낼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이호왕이 혈청을 부탁한 것은 일본에서 수집한 혈청을 한국형출혈열과 같은 방식으로 실험했을 때 나타나는 반응을 보고 두 질병이 얼마나 유사한지를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그는 항체 반응 검사를 통해 일본의 유행성출혈열과 한국의 출혈열이 상당히 유사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호왕은 이 내용을 1977년 10월 오사카에서 열린 제25차 일본 바이러스학회에서 발표했다(이호왕, 2003: 241). 이 발표로 일본에서도 유행성출혈열이 존재한다는 것이 분명히 확인되었다.
1978년 9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제4차 국제바이러스학회에 참가한 이호왕은 도호쿠 대학 의학부 세균학과의 이시다(Ishida, Nakao) 교수를 만나 그로부터 유행성출혈열 환자의 혈청 검사를 의뢰받았다. 학회에서 돌아온 이호왕은 바로 실험에 착수했고, 그 결과를 이시다에게 알렸다. 그리고 10월에 열릴 미-일 의학교류학술회의(US-Japan meeting)에서 발표할 것을 제안했다[19].
이호왕은 왜 이시다가 보낸 혈청의 검사 결과를 서둘러 전했고, 그것을 학술회의에서까지 발표하려고 했던 것일까? 이시다가 보낸 혈청 검사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출혈열 발병 환자가 공통적으로 동물실험실 근무자라는 점이었다. 다시 말해 한국형출혈열 실험을 수행한 적이 없는 동물실험실인데도 출혈열 환자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그 동안 출혈열은 야생 등줄쥐의 배설물 등이 공기 중에 노출되었을 때 사람이 호흡하면서 감염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출혈열이 발생한 도호쿠 대학병원 동물실험실은 한국형출혈열 바이러스를 이용한 실험이 진행되는 곳이 아니었고, 등줄쥐를 이용하여 실험하는 곳이 아니었는데도 환자가 발생했다는 점에서 특이했다. 게다가 이러한 형태의 출혈열은 도호쿠 대학병원에서 뿐 아니라 니가타 의대, 고베 의대, 와카야마 의대 등 동물실험실에서 일하는 일본 연구자와 테크니션들 사이에서 연이어 나타났다[20].
이호왕은 일본에서 발생한 출혈열의 숙주로 실험용 쥐를 의심했다. 왜냐하면 쥐를 독점적으로 사용하는 건물의 동물실험실에서 일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만 출혈열이 발생했고, 거의 대부분의 환자가 매일 쥐와 밀접한 관계 속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특징을 나타내는 환자가 도호쿠대학병원을 비롯하여 일본 곳곳의 동물실험실에서 나타나자 이호왕은 서둘러 발표할 필요성을 인식했다. 이시다 역시 이호왕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미-일 의학교류학술회의에서 발표하는 것이 좋겠다고 대답했다[21].
이 연구는 이호왕에게 도시에 서식하는 쥐에 관심을 갖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일본은 등줄쥐가 서식하지 않는 곳인데도 동물실험실에서 쥐를 다루는, 나아가 출혈열 바이러스 연구를 하지 않는 연구자에게서도 출혈열이 발병했다. 이 사실은 이호왕이 국내 유사 사례에도 관심을 가지게 만들었다.
고려대 바이러스병연구소는 출혈열 연구에 중점을 두고 있었으므로 출혈열 의심 환자의 혈청이 많이 수집되었다. 1976년 처음 출혈열의 병원체를 증명했을 때도 여러 곳에서 출혈열 의심 환자 혈청이 도착했는데 그 중에는 야외에 나간 적이 없는 서울시 거주자의 혈청도 있었다. 이호왕은 일본 사례를 통해 도심에 거주하는 사람에게서도 출혈열이 발생할 수 있음을 알게 됨에 따라 과거 수집했던 혈청을 분석했다. 그 결과는 1980년 『대한바이러스학회지』에 발표되었는데 이 논문에 의하면 1976년에 3명, 1979년에 2명의 출혈열 환자가 서울에서 발생했다(이호왕 외, 1980). 이들 환자에게는 집쥐와 직접적인 접촉이 있었거나 거주지 주변에 집쥐가 많이 서식한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이러한 것들을 볼 때 서울시내에서 발생한 출혈열은 집쥐와 관련이 있음이 확인되었다.
거의 전세계에 분포해 있는 집쥐에서 출혈열의 병원체가 확인됨에 따라 출혈열은 더 이상 한국, 유럽, 일본 등 몇몇 국가의 문제가 아닌 전세계의 문제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이호왕은 일본에서의 연구를 통해 출혈열이 동물실험실에서 발생할 수 있고, 서울의 사례로부터 도심에서도 나타난다는 것을 발표했다. 그런데 실험용 쥐와 집쥐는 특정 지역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실험용 쥐는 몇몇 회사에서 사육되어 각지의 연구소 및 실험실에 보내지고, 집쥐는 종의 특성상 거의 전세계에 분포되어 있다. 따라서 실험용 쥐와 집쥐를 통해 출혈열이 발생한다는 이호왕의 논문은 전세계 출혈열 연구자의 시선을 받게 되었다[22]. 이호왕과 그의 바이러스병 연구소에 이목이 집중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2) WHO 연구 협력센터 지정

이호왕이 일본에서의 출혈열 연구를 활발히 수행하면서 연구 범위를 점차 확대해 가고 있을 무렵 대학원 시절 지도교수였던 쉬러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그 편지는 쉬러가 세계보건기구(World Health Organization, WHO) 바이러스병부의 브레스(Bres, Paul)에게 보내는 편지로 이호왕, 에디(Eddy, Gerald, 미육군전염병연구소 바이러스부), 오야(Oya, Akira, 일본 국립보건원 바이러스 및 리켓치아학부), 쇼프(Shope, Robert E., 예일대 아보바이러스연구소), 앨런(Allen, W. P., NIH 미-일 프로그램) 등이 참조할 수 있도록 한 것이었다. 쉬러는 WHO의 브레스에게 출혈열 연구의 중요성을 알리면서 이호왕이 일본의 오야, 미육군전염병연구소의 에디 등과 함께 출혈열 연구를 협력해서 수행할 수 있다고 소개했다. 쉬러는 브레스에게 출혈열이 세계적으로 퍼져나갈 것에 대비하여 실험실 연구에 필요한 표본 슬라이드를 제공하고, 관련 인력을 교육시킬 사람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이러한 역할을 할 핵심 인물로 서울의 이호왕을 지목했다.
  • …… 나는 협력 센터의 수를 제한하려는 WHO의 정책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지난 11월의 내 편지에서 간략히 설명 목적이 어떻게든 성취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거기 있는 것을 반복하면

  • 1) KHF의 고정된 슬라이드(감염된 등줄쥐나 미육군전염병연구소에서 사용한 배양주에서 얻은 인간의 세포)를 준비, KHF 사례를 확인하기 위해 면역형광항체법을 사용할 지역의 진단 실험실과 현재 지도에 나타나지 않은 세계 곳곳 특히 불현성 감염이 있는 곳에 이 슬라이드들을 공급(감염된 폐조직이나 배양된 인간 폐 세포의 고정된 슬라이드는 비전염성을 지니는 것으로 추정된다.)

  • 2) 지역의 진단실험실로부터 KHF에 대한 진단적 면역형광항체법을 수행하기 위한 인력의 훈련

  • 서울의 이호왕이 도쿄에 있는 오야의 센터, 미육군전염병연구소의 에디, 미국 예일 센터와 협력하여 그러한 프로그램을 수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들 그룹은 서로 잘 알며 훌륭하게 협력할 것을 확신합니다. 이렇게 하여 그 목적이 새로운 센터 구축 없이 성취될 수 있습니다. ……

  • 1979. 3. 13.

  • 쉬러[23]

편지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쉬러는 WHO의 브레스에게 출혈열 연구의 협력 체계를 강조했고, 이호왕이 일본 NIH, 미육군전염병연구소, 예일대 아보바이러스연구소 등과 출혈열 연구를 함께 수행할 수 있음을 알렸다. 쉬러가 보낸 이 편지는 사실상 이호왕의 바이러스병연구소를 WHO 협력 센터로 지정할 것을 의도하고 보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쉬러의 편지에 대한 답장으로 브레스는 같은 해 12월 이호왕에게 편지를 보내 다른 국가의 출혈열 연구자들에게 항원과 시약을 보내줄 것을 요청했다. 이것은 WHO 연구 협력센터로서의 공식적인 역할까지는 아니더라도 이호왕의 연구소와 WHO 사이에 계약이 체결되어 수행된 최초의 활동이었다.
  • 아시다시피 우리는 한국형출혈열 원인체의 특성을 밝히는 당신의 연구 과정에 많은 관심을 기울여 왔습니다. 당신의 연구 결과는 그 질병이 이미 퍼져 있는 극동 지역과 마찬가지로 북유럽 및 동유럽의 대부분의 국가에서 상당히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것은 중국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 나는 몇 달 전 이 문제에 대해서 오야 박사와 논의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는 극동 지역에서 이 문제의 연구에 대해 기꺼이 협력하겠다고 했고, 당신과 연락하겠다고 이야기했습니다.

  • 그 첫 번째 단계는 역학적 연구를 위해 필요한 항원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당신이 연구비 내에서 오야 박사에게 시약을 공급하면 기술서비스동의서와 1,000달러를 제공하겠습니다. 서명된 사본이 우리에게 도착하는대로 지불이 진행될 것입니다.

  • 나는 WHO가 이 문제 해결을 중요하게 인식하고 있음을 당신이 고려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당신은 세계의 다른 부분에 대해 그것의 적용을 확장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 1979. 12. 17.

  • 브레스[24]

이렇게 이호왕과 WHO 간의 관계가 형성될 수 있었다. 지도교수였던 쉬러가 WHO의 브레스에게 편지를 보내 이호왕과 오야, 에디 등이 협력 연구를 할 수 있도록 요청했고, 이호왕 역시 국내의 출혈열 바이러스 연구에 그치지 않고 일본, 핀란드, 소련 등 다양한 지역의 출혈열 환자 혈청 검사를 통해 자신의 연구 역량을 드러냈다. 이러한 것들이 복합적으로 고려되면서 WHO는 이호왕의 출혈열 연구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제공받은 연구비의 규모가 크지는 않았지만 이호왕은 WHO로부터 요청받은 항원 및 시약 공급에 성실히 임했다. WHO로서는 적은 비용으로도 출혈열을 관리할 수 있었으므로 과학 후발국 한국의 연구자인 이호왕에게 지원해 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1980년 11월 12일 브레스는 이호왕에게 편지를 보내 그 동안 시약을 잘 공급해 줘서 감사하다고 하면서 다른 국가로 혈청학적 조사를 확대하는 데 관심이 있으면 교류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겠다고 했다[25]. 이어 기술서비스동의계약을 1년 더 연장하자는 공문도 보내왔다(이호왕, 1999: 160-161). 이로써 이호왕은 WHO의 지원 프로그램 하에 출혈열 항원과 시약을 세계의 여러 과학자들에게 계속해서 공급했다. 이것이 발판이 되어 1981년 1월 그의 연구소는 WHO 협력센터(WHO Collaborating Centre)로 활동할 수 있었다[26].
이듬해인 1982년 2월 도쿄에서 WHO 신증후군출혈열 전문가 회의가 개최되었다. 이 회의의 안건 중에는 출혈열 표준 연구 협력센터 지정 문제도 포함되어 있었다. 미육군전염병연구소의 다림플(Darlymple, J. M.)은 이호왕의 바이러스병연구소를 추천했고, 참석자들의 동의를 얻어 통과되었다. 이로써 이호왕은 출혈열 전문가 집단으로부터 자신의 연구가 지니는 가치를 공식적으로 인정받았고, 그의 연구소 역시 세계적 위상을 갖게 되었다. 그 결과 이호왕의 고려대 바이러스병연구소는 WHO의 신증후군출혈열 바이러스 표준 연구 협력센터(WHO Collaborating Centre for Virus Reference and Research(Hemorrhagic Fever with Renal Syndrome))로 1982년 8월 공식 지정되었다[27].
WHO 협력센터와 WHO 바이러스 표준 연구 협력센터는 차이가 있다. WHO 협력센터는 유행성출혈열에 관해 WHO에서 요청하는 것을 제공하는 역할을 한다면, WHO 바이러스 표준 연구 협력센터는 WHO의 지원 하에 있는 각 지역의 협력센터를 총괄하는 중심 연구센터로 훨씬 다양한 임무를 수행한다. 즉 표준 연구 협력센터는 각지의 협력센터를 관리하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한국에서 WHO의 표준 연구 협력센터로 지정된 것은 이호왕의 바이러스병연구소가 처음이었다[28].
이호왕의 바이러스병연구소는 WHO 표준 연구 협력센터로 지정됨에 따라 총 8가지의 임무를 부여받았다[29]. 이로써 이호왕은 전보다 훨씬 다양한 연구를 수행하게 되었다. WHO 표준 연구 협력센터 지정 전까지만 해도 이호왕은 출혈열 유행 지역에서 바이러스를 연구하는 한 연구자로서의 모습만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WHO의 협력 기관으로 인정된 이후부터는 그 동안 해 오던 연구 패턴 뿐 아니라 출혈열 연구의 선도적 역할을 담당했다. 지정받은 8가지의 임무들 중에서도 출혈열 항원과 혈청학적 진단법을 보급하는 일과 외국으로부터 전달받은 출혈열 혈청 검사 등을 활발하게 수행했다. 또한 각국의 많은 연구자들은 이호왕의 연구소에 찾아와 출혈열 연구 방법에 대한 정보를 얻거나 훈련을 받았다[30].
WHO의 출혈열 연구 협력센터로 지정되면서 달라진 것은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활동 폭이 확장되었다는 점 외에도 이호왕이 다루는 출혈열 연구의 지역이 거의 전세계로 확대되었다는 것이다. 사실 그 동안 이호왕이 실험 재료를 자유롭게 구할 수 있었던 곳은 한국, 일본 정도였고, 과거 출혈열이 발생했던 것으로 알려졌던 소련이나 핀란드는 관심이 있었어도 여러 가지 문제로 재료를 얻는 것이 어려웠다. 따라서 실험 재료를 얻기 위해서는 개인적 친분이 있는 연구자를 통하거나 직접 방문을 하는 방법을 이용했다. 하지만 WHO의 연구 협력기관으로 활동하게 되면서 그러한 사적인 관계가 없더라도 해당 연구자나 기관에 공식적인 문서로 샘플을 요청할 수 있었다. 이로써 그 동안 출혈열 발생 지역으로 알려지지 않았던 곳의 출혈열 연구를 수행할 수 있게 되었고, 아프리카나 동남아시아의 출혈열 연구도 가능해졌다.
또 하나는 이호왕의 연구소를 중심으로 전세계 출혈열 바이러스 연구자들을 모을 수 있었고, 이를 이용해 조직적 연구가 가능해졌다는 점이다. 출혈열 연구 협력센터는 표준 시약 및 연구 방법을 세계 각지의 출혈열 연구자들에게 제공할 의무가 있었고, 출혈열 의심 환자의 혈청을 진단해 주기도 했다. 따라서 출혈열 관련 연구 내용은 거의 모두 이호왕의 연구소에 결집된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 보니 이호왕은 바이러스 연구에 있어 각 분야별 전문가들을 모두 만날 수 있고, 때로는 그들을 활용한 연구도 수행할 수 있었다. 이로써 이호왕의 실험실 독자적으로 수행할 수 없었던 연구도 협력을 통해 진행할 수 있게 되었다.
이호왕은 자신의 연구소가 출혈열 연구의 중심적인 연구센터로 인정됨에 따라 전세계 출혈열 연구를 총괄하고 관리하는 역할을 부여받았다. 무엇보다 WHO의 연구 협력센터로서의 활동은 조직적인 출혈열 연구를 가능하게 해주었고, 이전보다 훨씬 확장된 규모의 연구 성과를 도출할 수 있었다.

4. 맺음말

이호왕은 과학 후발국 한국의 연구자로서 드물게 국제적인 연구 활동을 하며 인정받은 과학자이다. 물론 후발국 출신의 연구자들 중 과학적으로 뛰어난 성과를 거두는 경우가 종종 있기는 하지만 첨단 과학 활동이 이루어지는 공간이 아닌 곳에서 이러한 성과를 내기는 쉽지 않다. 이호왕은 과학 후발국의 위치에 있었던 1960-70년대 한국에서 활동하면서 유행성출혈열의 병원체를 세계 최초로 발견, 분리하는 데 성공했고, 이를 토대로 세계의 유행성출혈열 연구를 총괄하며 이끄는 자리에 오른 인물이다.
유행성출혈열 병원체의 최초 발견과 분리 성과를 거둔 이후 이호왕은 국내 뿐 아니라 전 세계의 출혈열 연구에 관여하게 되었다. 그 동안 출혈열과 유사한 특징을 보이는 것으로 알려졌던 몇몇 유사 질병을 자신의 연구 방법으로 증명함으로써 출혈열이 세계 각지에 분포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고, 이로써 이호왕의 연구 주제나 활동 범위도 확대되었다. 출혈열 연구 범위가 전세계로 확대되면서 이호왕은 자연스럽게 세계의 출혈열 연구자들과 연결 고리를 만들어 갔다. 이러한 성과들이 축적되고, 이호왕의 연구소가 WHO 연구 협력 센터로 지정되면서 그는 유행성출혈열 연구의 선도적 위치에 서게 되었다.
이호왕은 열악한 국내의 연구 환경 속에서 어떻게 세계 여러 국가의 연구자들과 활동하며 유행성출혈열 연구의 중심에 올라설 수 있었던 것일까? 변변치 못한 연구 환경 속에서 전세계 출혈열 연구의 구심점 역할을 할 수 있었던 데에는 그가 외국의 연구자들과 끊임없이 관계하며 협력을 추진했기 때문이다. 그는 외국 연구자들과의 교류를 통해 자신의 연구 범주 확대와 함께 연구자로서의 위상을 높이고자 했다. 그는 자신의 연구자로서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바이러스학이 아직 자리잡히지 않은 국내 연구계보다는 외국 연구계와의 교류를 우선시하는 것이 더욱 필요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에 따라 이호왕은 한국에서의 출혈열 병원체 발견 성과에 만족하지 않고 유사한 연구를 하는 전세계의 과학자들과 교류하고 정보를 공유했다. 이호왕은 그들이 원하는 자료가 있으면 지체 없이 제공해 주었고, 연구와 관련해서 미흡한 부분은 그들의 의견을 적극 수용했다. 자신의 연구를 돕는 외국 연구자들과의 협력은 과학 후발국에서 활동하는 이호왕으로서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협력은 상호 간에 주고받는 관계가 성립한다. 그런데 이호왕의 연구 과정에서 나타나는 협력의 모습은 일대일로 주고받는 것이라기보다는 의존적인 경향이 컸다. 연구를 하는 데 필요한 각종 자원이 충분치 않은 후발국의 연구자로서 불가피한 것이었다. 특히 자신의 연구를 지원해 주는 미육군과의 연구에서 이러한 모습은 더욱 두드러졌다. 존슨과 함께 『미국전염병학회지』에 발표할 논문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이호왕은 거의 전적으로 그의 조언을 수용했다. 프렌치와 함께 바이러스 카탈로그에 한탄바이러스를 등록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처럼 한탄바이러스 발견 이후 연구 주제와 활동 영역이 확장되면서 이호왕이 다루어야 하는 내용은 훨씬 다양해졌다. 하지만 연구 범위가 확대되었다고 해서 이호왕을 비롯한 그의 실험실의 역량도 비례하는 것은 아니었다. 자체적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연구 주제도 많았고, 무엇보다 처음 해 보는 것들이 많아 제대로 준비하기 어려웠다. 그는 관련 활동을 해 본 연구자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난관을 헤쳐 나갔다. 즉 표면적으로는 공동 연구를 수행한 것으로 볼 수 있지만 현실적으로는 많은 부분에서 조언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호왕의 연구 과정은 의존적인 협력의 모습이 드러난다고 볼 수 있다.
과학 후발국의 연구자는 선진 연구 공간의 과학자와 출발점부터가 다르고, 활동하는 동안 맞닥뜨리는 어려움의 내용도 다르다. 따라서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하는 방법을 어떻게 세우느냐에 따라 연구의 방향과 진전에 차이가 나타난다. 이호왕은 자신을 도울 수 있는 사람들에게 적극적으로 조언을 구하고 협조했다. 그 결과 그는 과학 후발국 한국에서 활동하면서 한탄바이러스 발견이라는 연구 성과와 그 연구 방법을 전세계 유행성출혈열 연구에 적용할 수 있었다. 나아가 자신의 연구소가 WHO 연구 협력센터로 지정되면서 이호왕은 전세계 유행성출혈열 연구의 구심점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Notes

1) Johnson, Karl M., “A Letter to Lee, Ho Wang” (24 February 1971), Lee, H. W. ed., Correspondence on the Discovery and Original Investigation on Hemorrhagic Fever with Renal Syndrome and Hantaviruses, 1970-1999 Vol.Ⅲ (2000), p. 2028. 이후 편지는 특별히 표시하지 않을 경우 이 책에 수록되어 있는 것들을 참고한 것임을 밝힌다.

2) Lee, Ho Wang and Scherer, William F., “The Anamnestic Antibody Response to Japanese Encephalitis Virus in Monkeys and its Implication Concerning Naturally Acquired Immunity in Man”, J. Immunol. Vol. 86, No. 2(1961), pp. 151-164.

3) Lee, Ho Wang, “A Letter to Johnson, Karl M.” (5 August 1976), pp. 2040-2041.

4) Lee, Ho Wang, “A Letter to Johnson, Karl M.” (8 March 1977), p. 2045.

5) Lee, Ho Wang, “A Letter to Johnson, Karl M.” (7 May 1977), p. 2048.

6) Johnson, Karl M., “A Letter to Lee, Ho Wang” (16 May 1977), p. 2049.

7) 당시 이호왕의 실험실에서 자체적으로 수행할 수 있었던 것 중 하나가 여과 실험이었다. 여과 실험은 병원체를 일정 크기의 필터에 통과시킴으로써 병원체가 세균인지 바이러스인지를 알아보는 것이다. 이 실험은 다양한 크기의 필터를 갖추면 어렵지 않게 수행할 수 있다.

8) 여과 실험은 프렌치의 조언을 받아 더욱 정밀한 결과를 도출할 수 있었다. 이호왕은 자신의 실험 내용과 성적을 프렌치에게 알렸지만, 프렌치가 확인 실험을 해 본 결과 같은 값을 얻지 못했다. 프렌치는 자신이 사용한 필터를 이호왕에게 알려주면서 다시 실험해 볼 것을 요청했다. 어떤 필터를 사용하느냐에 따라 필터링 기법이 다르고, 그에 따라 다른 결과가 나올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호왕은 프렌치가 알려준 필터로 실험해 본 결과 자신이 처음 얻었던 값을 얻지 못했다. 결국 여과 실험은 6개월 간의 반복 끝에 병원체가 0.1μ의 필터에서는 통과하지만 0.05μ에서는 통과하지 못함을 알게 되었다. French, G. R., “A Letter to Lee, Ho Wang” (21 July 1977; 22 September 1977), pp. 2144-2146; Lee, Ho Wang, “A Letter to French, G. R.” (5 October 1977; 11 April 1978), pp. 2148-2155.

9) 실험에 사용된 10종의 바이러스는 다음과 같다. Pichinde, Tacaribe, Machupo, Lassa, LCM(Lymphocytic choriomeningitis), Ebola, Marburg와 Korean Hemorrhagic Fever(한국), Hemorrhagic fever with renal syndrome(소련), Epidemic hemorrhagic fever(일본). Lee, Ho Wang ed., Hemorrhagic Fever with Renal Syndrome Letters and Annual Research Report, 1959-1993 Vol.Ⅰ(1994), p. 496.

10)   Scherer, William F., “A Letter to Lee, Ho Wang” (7 April 1976), pp. 1991-1992.

11)   A549세포는 인간의 폐암세포에서 유래한 폐포 상피세포이다.

12)   French, G. R., “A Letter to Lee, Ho Wang” (23 March 1978), p. 2154.

14) 이호왕은 한탄바이러스 명명 배경에 대해 보고서 뿐 아니라 프렌치에게 보내는 편지에서도 자세히 설명했다. Lee, Ho Wang, “A Letter to French, George R.” (15 November 1979), p. 2184, Lee, Ho Wang ed., Hemorrhagic Fever with Renal Syndrome Letters and Annual Research Report, 1959-1993 Vol.Ⅰ(1994), p. 580.

15) 김근배, 「네트워크에 걸려든 바이러스: 이호왕의 유행성출혈열 연구」, 19쪽에는 이호왕의 출혈열 병원체 발견 이후 세계 주요 출혈열 연구그룹이 어떤 주제로 경쟁을 벌였는지 나타나 있다.

16) Lee, Ho Wang, “A Letter to Okuno, Yoshiomi” (30 November 1976), p. 857.

17) 국내에 일본뇌염 백신이 공급될 때도 오사카 대학 미생물병연구소의 역할이 컸다. 「일제수의계약요청…뇌염백신 수입 위해」, 『매일경제』 1969년 3월 18일.

18) Okuno, Yoshiomi, “A Letter to Lee, Ho Wang” (16 December 1976), p. 858.

19) Lee, Ho Wang, “A Letter to Ishida, Nakao” (18 September 1978), pp. 985-986.

20) 이호왕은 이시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자신이 실험한 결과 와카야마, 니가타 등으로부터 얻은 혈청에서 한국형출혈열 바이러스에 매우 강력한 양성반응을 보임을 확인했다고 언급했다. Lee, Ho Wang, “A Letter to Ishida, Nakao” (18 November 1978), p. 989.

21) Ishida, Nakao, “A Telegraph to Lee, Ho Wang”, (25 September 1978), p. 987.

22) Umenai, T., Lee, H. W., Lee, P. W., Saito, T., Toyoda, T., Hongo, M., Yoshinaga, K., Nobunaga, T., Horiuchi, T., Ishida, N., “Korean hemorrhagic fever in staff in an animal laboratory”, Lancet Vol. 313, No. 8130(1979), pp. 1314-1316.

23) Scherer, William F., “A Letter to Bres, Paul” (13 March 1979), p. 1998.

24) Bres, Paul, “A Letter to Lee, Ho Wang” (17 December 1979), p. 2688.

25) Bres, Paul, “A Letter to Lee, Ho Wang” (12 November 1980), p. 2690.

26) 「WHO 표준 연구 협력센터 글로벌 데이터베이스」, WHO 홈페이지 http://apps.who.int/whocc/Detail.aspx?cc_ref=KOR-1&cc_code=kor 검색일: 2016.9.28.

27) 고려대 바이러스병 연구소의 WHO 신증후군출혈열 바이러스 표준 연구 협력센터로의 지정에 대해서는 국내 주요 일간지 등에서도 앞다투어 소개했다. 「고대바이러스병연구소 WHO 협력센터로」, 『동아일보』, 1982년 8월 10일; 「고대 부설 바이러스병연구소 WHO 출혈열 연구센터 지정」, 『동아일보』, 1982년 8월 27일; 「유행성출혈열 연구센터 WHO 지원 고대에 개설-4만 7천불 기금도」, 『경향신문』, 1982년 8월 27일; 「WHO 지정 출혈열 중심 연구센터 설치」, 『보건신보』, 1982년 8월 30일.

28) 두 번째로 지정된 WHO의 표준 연구 협력센터는 WHO 서태평양 사무총장을 맡고 있는 신영수의 서울대 병원서비스연구소(Institute of Hospital Services Seoul National University)로 이곳에서는 병원행정에 관한 협력연구를 수행했다.

29) WHO 협력연구센터로 지정되면서 수행해야 할 8가지 임무는 다음과 같다. ① 신증후군출혈열의 병원체인 한탄바이러스의 특성 규명과 실험 방법 표준화 ② 표준 시약의 저장 유지 ③ 표준 시약의 생산과 보관 ④ 참고자료 서비스 제공 ⑤ 통제 대책에 대한 협력 연구의 적극적 참여 ⑥ 과학자 훈련 및 훈련 매뉴얼 생산 ⑦ 국립 연구소에 대한 자문 제공 및 실험 동물에서의 한탄바이러스 감염에 대한 감시 ⑧ WHO에 신증후군출혈열에 대한 역학적 정보 보고

30) 일본 20명, 미국 6명, 중국 4명, 러시아 3명, 스리랑카 2명, 홍콩,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그리스, 핀란드, 스웨덴, 인도네시아, 쿠웨이트, 베트남 각각 1명씩 다양한 국가에서 이호왕의 연구소에 와서 출혈열 연구 방법을 배워갔다(이호왕, 1999: 159).

<그림 1> WHO 출혈열 표준 연구 협력센터 지정
Figure 1. Designation as a WHO Collaborating Centre for Virus Reference and Research(Hemorrhagic Fever with Renal Syndrome) by W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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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erences

「고대바이러스병연구소 WHO 협력센터로」 (『동아일보』. 1982년 8월 10일.

「고대 부설 바이러스병연구소 WHO 출혈열 연구센터 지정」 (『동아일보』. 1982년 8월 27일.

「유행성출혈열 연구센터 WHO 지원 고대에 개설-4만 7천불 기금도」 (『경향신문』. 1982년 8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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