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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J Med Hist > Volume 31(1); 2022 > Article
중국 의학지식 전승의 또 하나의 전통: 송대(宋代) ‘지괴의안(志怪醫案)’의 특징과 의미†

Abstract

During the explanation of the origin of ‘prescription (醫方),’ an interesting phenomena in the accumulation and diffusion of medical knowledge in the Song Period is that many prescriptions contain narratives with bizarre elements, such as those given by God through dreams, received from ‘strange people (異人),’ or from animals appearing in these dreams. This study features an anecdote called ‘zhiguai (志怪) Medical Cases,’ which contains bizarre elements in the dissemination process of prescription, narrative of the treatment experience, and specific content of prescription, called a ‘zhiguai prescription.’ In previous research, such prescriptions were often called a ‘God-delivered prescription (神授方).’ However, a ‘zhiguai prescription’ appears adequate because it includes a number of factors beyond the ‘God-delivered prescription.’ This study examines the background of the intensive emergence of massive zhiguai medical cases in the Song Period, reviews the characteristics and significance of the zhiguai prescriptions in the context of postwar medical history, and finally investigates the influence of the bizarre narrative by tracing the dissemination of related prescriptions. This study found that the zhiguai prescription experiences were different from the so-called ‘academic’ that was formed in the Song Period, and it was ‘another’ method of medical knowledge dissemination based on their narratives.
The emergence of many zhiguai medical cases in the Song Period, especially in the Southern Song period, is related to the activities of the literati official (士大夫). The literati officials of the Song Period frequently witnessed strange or anomalous phenomena in their daily life. They relied on them to relieve the powerlessness of reality and left records. In addition, unlike the authors of the zhiguai genre of the previous era, they maintained an attitude faithful to the facts when recording them. The massive appearance of the zhiguai medical cases in the Song Period was the result of the combination of the intention of the literati official who valued medicine their medical knowledge to spread the awareness, their reliance on the strange or anomalous phenomena, and their attitude that emphasized a realistic narrative.
The significance of the zhiguai prescription of the Song Period can be found in the supplementation and diffusion of existing medical knowledge. In previous research, these were collectively described as ‘public experienced methods’; however, various characteristics were found by analyzing the nineteen cases of zhiguai medical cases in Yijianzhi (夷堅志) by comparing them with the related contents of the herbal medicine and prescription books of the time. In the use of herbal medicines for specific diseases, there are cases that are unusual or meaningful when compared with existing herbal medicine or prescription books, and thus, this became a decisive basis for the expansion of herbal knowledge in the later period. Moreover, new treatment methods that were not often seen in medical books at the time were introduced, and they have been continuously transmitted to the medical and herbal medicine books since then. Additionally, this study also found cases that were focused on promoting medical knowledge that was not well-known, and the knowledge that must be known, although they were recorded in the existing medical and herbal medicine books. The record of the zhiguai medical cases evidently had its meanings in supplementing and disseminating existing medical knowledge.
Prescriptions in the record of the zhiguai medical cases of the Song Period were subsequently recorded in various medical and herbal medicine books, and they handed down until the Ming and Qing period. Later, when a zhiguai prescription was described in a medical book, its bizarre narrative was not omitted, leaving a trace in the name of the prescription. It can be seen that this bizarre narrative served as a decisive opportunity for the prescription to be transmitted later, considering that existing medical books mentioned the related narratives in Yijianzhi (夷堅志) as the source for these subsequent transmissions.
When discussing the characteristics of the Song Period in Chinese medical history, many studies state that a strong academic medical trend was centered on the pulse and internal medicine, referring to the development of printing technology, the literati official’s interest in medicine, and the compilation of medical books. The contents and dissemination of the zhiguai medical cases of the Southern Song confirm ‘another’ tradition of medical knowledge transmission that relied on the bizarre phenomena and its narratives in Chinese medical history. Its transmission to the Ming and Qing period signifies the continuation of this tradition into later times. The fact that the zhiguai medical cases were later recorded in medical books in the Ming and Qing period clearly shows the dynamism of how knowledge of the ‘case’ affects the knowledge expansion of medicine, thereby revealing the power of ‘another’ tradition called the ‘zhiguai’ narratives.

Ⅰ. 머리말

송대(宋代, 960~1279)는 중국 의학사상 의학 지식의 축적 및 확산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가 나타난 시기이며, 그중에서도 의방(醫方) 지식의 확대와 관련해 송 조정 주도의 대규모 관찬 의방서(醫方書) 및 여러 사대부나 의자(醫者)들의 사찬 의방서의 편찬은 대표적이다. 이러한 송대 의방 지식의 축적과 확산에서 또 하나 주목할 수 있는 특이한 현상 중 하나는 의방의 출처 또는 연원을 설명할 때 꿈을 통해 신(神)이 주었다거나, 이인(異人)에게서 받은 것이 라거나 또는 꿈에 나타난 동물이 전해준 것 혹은 병자가 선계(仙界)에서 우연히 얻게 된 것이라는 등 괴이(怪異)한 요소를 포함하는 서사를 가지고 있는 의방이 적지 않게 보인다는 것이다. 이 논문에서는 송대 출현한, 전수 과정에 괴이한 요소를 가지고 있는 의방을 찾아 정리하고 송대에 어떤 배경 속에서 이러한 전승 서사를 가진 의방이 다수 출현하게 되었는지, 주로 어떤 의방들이 이러한 서사를 가지게 되었는지 그리고 이러한 서사의 영향 등을 고찰해보고자 한다. 흔히 송대 의학사의 특징으로 신유학에 기반한 사대부의 의학에 대한 관심과 참여로 그 ‘학술적’ 경향의 확대가 지적되곤 하는데,1) 위와 같은 의방의 출현은 의학 지식의 생산, 축적 그리고 확산에 있어서 송대가 가진 더욱 다양한 측면을 보여줌과 동시에 중국 의학 지식 전승의 다양한 전통을 보여준다.
본 논문에서는 의방의 전수 과정에서 괴이한 요소를 포함하고 그 치료 경험에 대한 서사가 나타나며 의방의 구체적 내용을 상세히 담고 있는 일화를 ‘지괴의안(志怪醫案)’이라 칭하며 지괴의안 속 의방을 ‘지괴의방’이라 부르고자 한다. 기존 연구에서는 이런 의방을 흔히 ‘신수방(神授方)’이라 지칭한 바 있는데(周云逸, 2019: 269-275), 괴이한 것에는 ‘신이 전수한 것’ 외에도 다양한 요소를 포함하고 있기에 이를 다 포괄하는 ‘지괴의방’이 적절해 보인다.
주목할 점은 고대로부터 괴이한 요소가 포함된 의안은 사서나 의서 등을 통해 그 흔적들을 찾을 수 있지만 송대는 상당히 많은 수량의 지괴의안이 집중적으로 발견된다는 것이며, 이들 의안 중 다수는 이후 명청 시기까지 전승된다. 송대 지괴의안을 수집하고 정리한 결과 송대 여러 관찬 및 사찬 의서에서 산발적으로 보이나 주로 남송의 사대부 홍매(洪邁, 1123~1202)가 편찬한 『이견지(夷堅志)』와 남송의 의자 장고(張杲, 약1149~1227)가 편찬한 『의설(醫說)』에 대거 수록되어 있다([표 1], [표 2], [표 3] 참조).2) 이들 지괴의안이 의학 지식의 전승에서 송대 나타난 어떤 문화적 특징을 대변하는지 궁금해진다.
근래 중국 역사 속 각종 안(案, case)과 관련한 연구를 보면, ‘경전’과 ‘실제(실천)’의 중간다리로서 ‘안’의 의미를 읽으며 이 가운데 ‘의안(醫案)’의 역사를 다루면서 특히 의학 지식의 생산에서 의안이 가지는 의의를 조명한 바 있다(Furth, 2007: 125-151). 본 논문에서는 송대 생성된 지괴의안이 의학 지식의 생산과 축적 그리고 확산에서 가지는 함의를 고찰해 보고자 한다.
송대 서사 자료 속에 등장하는 의학 지식에 관한 연구는 적지 않게 축적되어 왔다. 『이견지』의 일화 속에 수록된 다양한 의방 지식에 관해서는 기존 연구에서 이미 다루어진 바 있으며(최해별, 2019: 103-156), 『이견지』에 포함된 지괴의안과 관련해서는 송대 도교 의료를 다룬 연구에서 신선의 치료 등 측면으로 접근한 연구를 주목할 수 있겠다(莊宏誼, 2005: 73-147). 무엇보다도 송대 지괴의안과 관련한 가장 직접적인 연구로는, 송대 ‘신수방(神授方)’에 관한 한 중국학자의 연구를 주목할 수 있다. 이 연구에서는, 신수방은 전통 시기 독특한 의방의 한 유형이라 볼 수 있으며, 송대 이르러 상세한 신수(神授) 과정과 의방 정보를 동시에 구비한 서사 형식이 새롭게 등장하였음을 강조하고, 이것이 남송 시기에는 의서로 흡수된다고 지적하였다. 아울러 『이견지』 수록 11건의 신수방을 사례로 이는 송대 의약학, 특히 민간의 험방(驗方)과 민간신앙의 호응의 결과임을 그리고 여기에는 홍매 등 서사자로서 의학지식을 구비했던 사인들의 역할이 중요함을 지적하였다. 또한 이들 신수방의 내용이 의학적으로 근거가 있음을 밝히며 그 가치를 높이 평가했다(周云逸, 2019: 269-275). 그러나 이 연구는 ‘신수방’에 국한시켜 관음(觀音), 장왕(張王), 관왕(關王) 등 신이 등장하는 의안에 주목하여 신이 드러나지는 않는 다양한 지괴의안을 간과하였고, 그 함의 역시 민간신앙의 전파라는 데에 국한하여 설명하였다. 또, 홍매 등 사대부의 역할을 이야기의 서술자나 의학지식의 제공자로 보는 데 제한하였으며, 이들 의안이 포함하는 의방에 대해서도 민간 험방의 확산이라는 다소 모호하고 개괄적인 설명에 그쳤다.
본 논문에서는 기존 연구를 바탕으로, 연구 대상을 ‘신수방’에 제한하지 않고 그 외 다양한 ‘괴이’한 요소를 포함하는 의안으로 확대하여 살펴보고자 하며, 이를 통해 지괴의안의 출현을 민간신앙의 영향 속에서만 볼 수 없는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본 논문은 먼저 사대부의 역할을 이해할 때 단순한 서술자 또는 의학 지식의 제공자를 넘어 송대 지괴의안의 대량 출현 배경으로서 사대부의 참여를 적극적으로 고찰한다. 다음으로 지괴의안에 등장하는 의방을 분석하여 민간의 경험방 등으로 간단히 설명할 수 없는 그 의학사적 특징과 의미를 고찰해 보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의안의 이후 전승 과정을 살펴보면서 지괴 서사가 해당 의방 지식의 이후 확산에 미친 영향을 살펴본다.
이러한 연구를 통해 의학 지식의 축적과 확산에서 송대 사대부의 영향을 다양한 각도에서 살펴볼 수 있을 것이며, 더 나아가 중국 의학 지식 전승의 ‘또 하나의’ 전통을 엿볼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Ⅱ. 송대 ‘지괴의안(志怪醫案)’의 다량 출현과 사대부의 역할

지금까지 수집된 지괴의안을 살펴보면 이전 시대에 비해 남송 중후기 비교적 많은 수의 지괴의안에 관한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 이들 의안의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기존 연구에서처럼 그 괴이한 요소가 ‘몽중신수(夢中神授)’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러기에 지괴의안의 다량 출현을 민간신앙과의 결합으로만 설명할 수 없는 요소가 분명히 존재한다.
송대 이르러 많은 수의 지괴의안의 출현은 분명 관련 기록이 전해지고 전승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던 송대 사대부의 활약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여기에는 우선적으로 송대 사대부들이 의학을 중시하였고, 또 의학 지식의 확산에 굳은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 가장 중요하게 언급되어야 할 것이다(陳元朋, 1997; Goldschmidt, 2009; 薛芳芸, 2012). 그러기에 기존 연구에서도 송대 지괴의안의 특징 중 하나로 구체적 의방 지식의 등장을 꼽았고, 사대부에 대해서도 ‘의학 지식의 제공자’로서의 역할을 강조했다.3) 그러나 송대 지괴의안의 대량 출현과 관련한 사대부의 역할은 ‘의학 지식의 제공자’에 머무르지 않는다. 사대부들의 역할을 좀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지괴류 기록을 남기게 된 배경을 좀 더 면밀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송대 사대부와 관련한 적지 않은 연구에서 그들의 사후세계관이나 예언과 귀신 그리고 술수에 대한 인식 등을 다루었다(Liao, 2002: 399-440; 2005: 347-395; 2007: 89-134; 廖咸惠, 2009; 김한신, 2014: 297-324; 2019, 58-80). 또한 과거 시험을 준비하는 압박 속에서 과거 합격을 바라는 마음의 표출로 징조, 예언 및 몽환에 의지했던 사례에 대한 검토도 이루어졌다(존 샤피, 2001: 303-312; 廖咸惠, 2004). 이들 연구는 송대 사대부의 사유세계의 한 저편에는 괴이 현상에 대한 믿음과 의지가 있었음을 말해준다. 그들은 일상생활에서 자주 괴이 현상과 마주해야 했고, 이에 대해 쉽게 지나치지 못했던 나름의 관심과 이해가 있었다.
이와 관련하여 송대 사인들은 다양한 지괴(志怪)류 기록을 남겼다. 송대 지괴류 소설에 대한 기존 연구에서는 중국 소설사의 전체적 맥락에서 송대 지괴류의 특징을 언급할 때 송대 문인들이 남긴 지괴 기록의 수량은 이전 시기의 것과 비교할 때 결코 적지 않으며 또 송대의 지괴소설은 당대에 비해 ‘사실성’과 ‘대중성’을 더욱 추구했다고 지적했다. 아울러 송대 지괴의 특징은 그 내용이 사(史)에 대한 보충이거나 유가적 명교(名敎)를 선전하는 것 두 가지 중 하나였다고 설명한다. 무엇보다도 “사실을 추구하는 경향 그리고 사가(史家)로서 정보를 전달하려는” 인식이 강하게 나타난다고 했는데, 이에 따라 송대 지괴 기록은 이전 시대의 것에 비해 상상력이 크게 발휘되지 못하다거나 또는 이야기의 괴이한 정도가 상대적으로 약하게 나타난다고 하였다. 또한 이러한 특징은 다시 대중성과 맞물려 이야기의 주제가 일반 민중의 정서나 민중 생활을 반영하는 경향으로 이어지며, 이런 경향은 남송 시기로 갈수록 더욱 강화된다고 지적하였다(李儉國, 2018: 1-11).
이런 맥락 속에서 이해해 보면 송대 지괴의안의 다량 출현은 송대 사대부의 괴이 현상에 대한 인식 및 그들의 글쓰기 문화와 연관돼 있어 보인다. 그들은 평소 의학에 관심이 많았기에 일상생활 속에서 경험한 혹은 보고 들은, 질병과 그 치료와 관련된 신비롭고 괴이한 이야기를 그냥 지나칠 수 없었을 것이고, 이를 사실 그대로 기록하고자 하는 서사 태도를 배경으로 지괴의안은 다량 출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전해들은 괴이한 이야기를 사실 그대로 기록하려고 했던 사대부 문화는 전국 각지의 수많은 기이한 일화를 모아 『이견지』를 편찬한 홍매의 사례에서 매우 전형적으로 보인다. 그는 『이견지』에 수록된 이야기들을 자신이 직접 보고 들은 것이라 강조했다. 그가 건도(乾道) 2년(1166) 『이견지·을지』를 펴내면서 쓴 서문을 보면 다음과 같다.
  • 나의 이 책은 오래된 일화일지라도 60년을 넘지 않으며, 직접 눈과 귀로 보고 들은 것으로서 모두 분명하게 근거가 있는 것들이다. 내가 믿을 수 없다고 생각된 것은 직접 가서 허구인지 살펴보았고 선생이 있으면 그것을 물어보았다.4)

그는 『이견지』의 일화들이 모두 분명하게 근거가 있는 것이며 그가 직접 보고 들은 것이라 강조하였고 지어낸 것이 아님을 명시했다. 또 『이견지·지경(支庚)』 서문을 쓸 때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 매번 객(客)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그 자리에서 바로 그것을 기록했다. 혹시 술자리에 있어서 쓸 시간이 없을 때는 다음 날 아침 그것을 써서 즉시 그 사람에게 보여주어 그 시말에 차이가 있거나 빠진 것이 없게 하였다.5)

홍매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이를 바로 기록해두었고, 부득이 다음 날 기록을 했을 때는 시말에 착오가 없도록 노력했다. 그의 서사자로서의 태도가 돋보이는 대목이다.
홍매는 ‘눈과 귀로 직접 보고 들은 것’을 그 자리에서 기록했다고 강조하였는데, 이와 관련하여 그가 『이견지』에 수록한 지괴의안 중 우윤문(虞允文, 1110-1174)의 일화는 전형적이다([표 1]의 2번). 고종(高宗) 소흥(紹興) 24년(1154) 진사가 되어 관계에 진출한 후 건도 5년(1169) 재상의 자리까지 올랐던 우윤문은 직접 겪은 기이한 치료 경험을 홍매에게 이야기했고, 홍매는 이를 그대로 『이견지』에 실었다. 일화의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 우윤문은 소흥 28년(1158)에 거주(渠州) 지주로 있다가 임안부로 돌아가던 중 성의 북문 밖 접대원에 머물게 되었다. 우윤문은 도중에 더위를 먹는 바람에 병이 나서 한 달 넘게 설사를 하였다. 9월 9일 중양절 꿈에 어느 낯선 곳에 도착하였는데, 신선이 사는 곳 같았다. 선계(仙界)의 관원같이 옷을 차려입은 한 사람이 오더니 그에게 앉으라고 권하였다. 벽을 보니 운율에 맞춰 쓰인 약방이 한 장 있어 여러 번 읽어보니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서독(暑毒)이 비장에 침입하면 습기가 다리까지 미친다. 만약 이것이 빠져나가지 못하면 설사를 하고, 설사를 못하면 학질이 된다. 오직 웅황을 조리하여, 밀가루와 쪄 약을 만든다. 감초로 탕을 만들어, 그것을 복용하면 편안하고 좋아진다. 따로 치료를 행한다면, 그것은 의가들의 큰 잘못이다.” 꿈에서 깨어난 뒤 여전히 그 내용을 기억할 수가 있어 즉시 그것을 기록하였다. 대체로 더위로 인해 설사가 나는 것을 치료하는 처방이었다. 처방대로 복용하니 곧 병이 나았다.6)

홍매와 우윤문은 동시대를 살았던 인물로, 『이견지』에는 우윤문 및 그의 집안과 관련된 일화 또는 우윤문에게 직접 전해 들었다고 하는 이야기가 적지 않다. 『이견지·갑지』 권17에 수록된 여덟 개의 일화는 모두 홍매가 우윤문에게서 직접 들은 이야기이며, 위의 일화 역시 여기에 속한다.7) 이 외에 우윤문의 아버지가 사후 부처가 되었다는 이야기, 우윤문이 올린 상소 등과 관련된 다양한 일화들이 실려 있다.8) 이들 일화는 모두 사후 세계를 다루거나 점복과 관련된 이야기 등 그들의 신비로운 경험과 관련이 있다.
우윤문이 한 달 넘게 치료를 하지 못했던 설사병의 치료가 의사나 의서를 통했던 것이 아니라 꿈에서 본 약방을 통해서였다는 것은 매우 흥미로우며, 우윤문은 “꿈에서 깨어난 뒤 여전히 [의방의] 내용을 기억할 수 있어 즉시 그것을 기록하였고”, 이 이야기를 우윤문으로부터 직접 들은 홍매는 이를 놓치지 않고 기록으로 남겨 『이견지』에 수록하였다. 우윤문의 일화 외에도 꿈을 통해 얻게 된 의방에 대해 꿈에서 깬 후 이를 ‘기록’하였다는 사례는 적지 않다.9)
우윤문이 꿈속에서 얻은 의방에 대한 기록과 구술 그리고 홍매의 우윤문 일화에 대한 기록 및 『이견지』에의 수록 등 당시 사대부의 경험과 경험의 공유 그리고 글쓰기 활동은 지괴의안의 다량 출현과 전승에 결정적 배경이 된다.
우윤문의 일화가 말해주는 또 다른 흥미로운 내용은 지괴의안 속에 사대부는 단순한 ‘서사자’로서 의학 지식의 ‘제공자’의 역할에 머무르지 않고, 괴이한 치료 경험의 주인공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괴이한 치료 경험을 직접 겪는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사대부는 중앙 조정의 재상에서부터 지방관 및 지역의 사인들까지 다양한 층위에서 나타난다. 〈표 1〉의 19건의 일화 중 질병을 앓고 기이한 치료 과정을 경험하는 주체가 사대부 또는 사인인 사례가 7건이다.10) 이외 괴이한 방식으로 의방을 확보하는 주체가 사인으로 명시된 사례가 1건이다.11) 지괴의안에서 사대부는 서사자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직접 괴이한 치료 경험을 하고 이를 통해 의방을 확보하는 주체로서 자주 등장하고 있다.
결국, 당시 사대부의 ‘괴이’ 현상에 대한 믿음과 의지 그리고 이를 사실 그대로 기록하려는 서사 태도 더 나아가 괴이한 경험을 서로 공유하고 기록으로 남기려 했던 활동 등을 배경으로 송대 지괴의안은 다량으로 출현하게 되었다. 괴이한 치료 경험에 인물, 시간, 장소 등에 대한 객관적 정보나 경험자로부터 직접 전해 들었다는 등의 사실성이 강조되다 보니 - 그리고 어떤 일화는 재상 우윤문이 직접 경험하고 겪었다고 하니 - 이들 일화는 더욱 사람들에게 회자될 수 있었을 것이다.
송대 지괴의안의 다량 출현은 분명 송대 사대부가 구성한 독특한 문화 속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들은 평소 의학을 중시하고 의학 지식을 확산시키고자 했던 뜻이 있었기에 일상생활 속에서 경험한 혹은 보고 들은, 질병과 그 치료와 관련된 신비롭고 괴이한 이야기를 그냥 지나칠 수 없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괴이 현상에 대한 그들의 관심과 사실적 서사로서 ‘지괴(志怪)’에 대한 그들의 태도 등이 지괴의안의 다량 출현을 가능하게 했을 것이다. 구체적인 의방 지식에 덧붙여진 괴이한 치료 경험에 대한 사실적 서사는 해당 의방에 귄위를 부여해주었을 것이고 이로써 이 의방은 더욱 널리 전승될 수 있었을 것이다.

Ⅲ. 지괴의안 속 의방(醫方)의 특징: 의학지식의 보완과 확산

송대 지괴의안의 특징 중 하나는 치료 과정에 대한 서사 속에 상세한 의방 지식을 담고 있다는 점이다. ‘괴이한’ 치료 경험이 담긴 일화 속에 제시된 의방의 특징이 어떠한지 궁금해진다. 질문을 달리하면, 과연 어떤 의방이 전승 과정에서 이런 지괴 서사를 가지게 되었을까?
기존 연구에서는 신수방의 11건에 대해 이를 ‘민간 경험방’이라 지칭하고 모두 의약학적 근거가 있음을 강조하며 각 의방이 이후 본초서나 의서에 수록되었음을 보여주었다(周云逸, 2019: 271-274). 그러나 지괴의방을 자세히 분석해 보면 민간의 경험방으로 뭉뚱그려 설명하기엔 부족한 측면이 있다. 또 의약학적 근거가 있음을 지적하는 것을 넘어 전후의 의학 지식의 맥락에서 어떤 특징이나 의미를 가지는 것인지 구체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런 후에야 비로소 지식의 전승에서 지괴의안이 지니는 의미를 정확히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지괴의안의 서사를 살펴보면 대체로 당시의 기존 의료 환경에 대해 그 한계를 짚은 부분을 다수 찾을 수 있다. 예를 들면, 당시 주위에 있던 의사들이 치료하지 못했다고 명시하거나,12) 또 의사가 내린 처방의 한계를 지적하는 사례도 있다.13) “여러 의사들이 고방(古方)과 초택(草澤)의 단방(單方)을 사용했지만 낫지 않았다”거나,14) 소개하는 의방은 “다른 방서(方書)에는 적혀 있지 않는 것”이라 명시하기도 했다.15) 분명 지괴의안에 소개되는 의방 및 의학 지식은 당시의 한계를 보완하는 것 또는 당시 잘 알려지지 않은 것으로 제시된 것이 많았다. 그렇다면 지괴의안 속 의방이 당시 의료 환경, 즉 의사의 수준이나 의학 지식을 보완하는 데 실제로 의미가 있었는지 혹은 잘 알려지지 않은 어떤 지식을 널리 알리려고 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지괴의안 속 의방의 특징을 살펴보기 위해 본고에서는 먼저 부록의 〈표 1〉에 실린 『이견지』 수록 지괴의안 19건의 의방을 분석하고자 한다. 『이견지』를 중심으로 살펴보는 이유는 의서가 아니면서도 송대 지괴의안이 가장 집중적으로 수록된 사대부가 편찬한 필기류 저서이자 이후 지괴의안의 전승 과정에서 가장 빈번하게 인용되어 그 영향력이 상당했기 때문이다.
이들 19건의 의방이 당시의 의학 지식의 맥락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보기 위해, 해당 의방과 남송 시기 당시 유통된 본초서 및 의방서의 유관 내용을 비교 검토해보고자 한다. 본초서의 경우 고대로부터 전해지고 북송 시기까지 축적된 본초학 지식을 집대성한 당신미(唐愼微, 1056-1136)의 『증류본초(證類本草)』16)를 중심으로 살펴보되 이후 명대 이시진(李時珍, 1518-1593)의 『본초강목(本草綱目)』과 함께 살펴봄으로써 북송에서 명대까지의 본초 지식의 축적 과정에서 남송 『이견지』에 수록된 지괴의방의 의의를 고찰한다. 의방서의 경우 당시 통행되던 대표적인 당송 시기 의방서를 살펴보는데, 당대의 경우 송 초 조정에서 교감을 진행하여 반포된 바 있는 당 영휘(永徽) 3년(652) 손사막(孫思邈, 581-682)이 편찬한 『천금요방(千金要方)』과 천보(天寶) 11년(752) 왕도(王燾, 670-755)가 편찬한 『외대비요(外台祕要)』 등을, 송대의 경우 송 조정 주도로 당시까지의 의방을 정리 편찬한 거질의 의방서들, 예를 들면 순화(淳化) 3년(992) 완성된 『태평성혜방(太平聖惠方)』, 정화(政和) 연간(1111-1117) 편찬된 『정화성제총록(政和聖濟總錄)』, 원풍(元豐) 연간(1078-1005) 초판 된 후 남송 말까지 지속적으로 증보와 수정을 거쳐 출간된 『태평혜민화제국방(太平惠民和劑局方)』의 관련 내용을 검토하여 당시 의방 지식의 맥락에서 지괴 의안 속 의방의 특징과 의의를 고찰한다.
위의 방식으로 19건의 의방을 분석해 본 결과 몇 가지로 나누어 그 의미를 찾을 수 있었다. 첫째, 특정 본초에 대한 활용이 돋보이는 의방이 있는가 하면, 둘째, 기존 본초 지식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잘 쓰이지 않던 약재를 활용하거나 그 배합 및 용법에서 기존 문헌에서는 잘 확인되지 않는 방제를 소개하기도 했다. 셋째, 본초나 방제 자체는 기존 의서에서도 확인되지만 이와 관련된 의학 지식을 적극적으로 알리고 그 활용을 독려한 데 의의가 있는 의방 등이다. 이러한 분류는 설명의 편의를 위한 것이며, 각각의 의방은 여러 특징이 중첩되어 나타난다. 이 중 세 번째로 분류된 의방은 확실히 이전 의서에서도 관련 지식이 명확히 확인되는 내용이다. 여기에서는 지면의 한계 상 각각의 대표적인 사례를 선별하여 설명하며 그 외의 것은 부록 〈표 4〉의 설명을 참조할 수 있다.

1. 본초의 활용

송대 지괴의안에 등장하는 의방 중에는 당시의 의학지식 맥락에서 볼 때 특정 본초의 활용이 돋보이는 사례가 찾아진다. 〈표 1〉의 2번, 10번, 11번, 15번, 16번, 19번 등이 그렇다.
가장 흥미로운 사례는 11번 의안이며, 담천(痰喘) 치료에 ‘호도’를 활용한 의방이다. 평소 관음을 잘 모시던 홍집(洪輯)은 세 살 아들이 담천으로 죽음을 앞두고 있었다. 홍집의 아내가 꿈을 꾸었는데 관음이 나타나 ‘인삼호도탕’을 먹이라 하였고, 홍집이 그 말대로 “신라 인삼 한 촌, 호도 과육 한 개를 가져와 껍질을 정리할 틈도 없이 탕으로 끓여 조금 먹이니 가래가 멈추었고,” 곧 나았다. 이를 『이견지』에 수록한 홍매는 “이 약은 방서에 적혀 있지 않은 것으로, 대개 인삼은 가래를 멎게 하고, 껍질이 있는 호도는 폐를 안정시켜 준다”고 덧붙였다.17)
이 의방에 대해 홍매는 다른 방서에는 적혀 있지 않다고 하였는데 실제 그런 것인지 궁금해진다. 적어도 당시 통행된 여러 대표적인 의방서를 살펴보니 실제로 담천 또는 기침 등 관련 치료에 호도를 활용한 사례를 찾기 어려웠다. 당대 『외대비요』에서 해수(欬嗽)나 폐와 관련한 여러 병증에 대한 의방을 보면 호도를 활용한 사례는 찾기 어려웠다.18) 『태평성혜방』에서도 해수(咳嗽)와 천급(喘急) 관련 의방을 확인한 결과 호도를 사용한 예는 찾기 어려웠다.19) 『정화성제총록』의 관련 의방에서 역시 호도의 사용례는 찾기 어려웠다.20) 아울러 『태평혜민화제국방』이 수록한 관련 의방에서도 호도를 사용한 사례는 없었다.21) 송대 관방이 교감 및 편찬하여 간행한 당시의 대표적인 의방서를 살펴볼 때 홍매의 말이 허언은 아닌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호도와 관련된 당시 본초학의 지식은 어떠했을까? 손사막의 『천금요방』은 「식치(食治)」 중 ‘호도’를 설명하는 부분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 호도는 맛이 달고, 차가우며, 부드럽고(매끄럽고) 독이 없다. 많이 먹어서는 안 되며, 담음(痰飮)을 동하게 하여 속이 울렁거리게 하고 물을 토하고 음식을 토하게 한다.22)

호도는 차가운 성질이며 ‘담음을 동하게 한다’고 한 설명은 언뜻 호도가 담천 치료에 적절하지 않은 듯 보인다. 이후 당 개원(開元) 연간(713-742) 맹선(孟詵)이 편찬한 『식료본초(食療本草)』 역시 손사막의 이해를 바탕으로 하였다.23) 송대 『증류본초』 역시 당대의 인식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우석(禹錫) 등은 맹선의 기록을 인용하면서 “담음을 동하게 한다”고 언급하였고, 많이 먹으면 안 되므로 조금씩 먹는 복용법까지 옮겨 놓았다.24) 당송 시기 기존 의방서에서 ‘천급(喘急)’, ‘해수(咳嗽)’ 등의 치료에 호도의 용례가 보이지 않았던 것도 호도에 대한 이러한 이해와 무관하지 않을 것 같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명대 이시진이 『본초강목』에서 호도를 설명할 때 이른바 “근세(近世)” 호도에 대한 이해와 쓰임이 조금은 달라진 경향을 설명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손사막이 『천금요방』에서 언급한 것을 그대로 인용한 이후 “발명(發明)”에 자신의 의견을 더하였다.
  • 胡桃의 알맹이 부분은 맛이 달고 기운이 따뜻하며, 껍질은 떫고 살은 윤기가 흐른다. 孫眞人이 그것은 차갑고 매끄럽다고 하였는데, 잘못된 것이다. 근세 의방에서는 痰氣, 喘嗽, 醋心, 癘風 등 질병 치료에 쓰이며 酒家는 자주 취한 후 그것을 먹는다. 그러니 그것을 많이 먹으면 물을 토하고 음식을 토하며 눈썹이 탈락한다거나 술과 함께 먹으면 각혈한다는 설 역시 반드시 모두 그런 것은 아니다. 다만 호도는 성질이 따뜻하여 능히 腎肺에 들어가니 오로지 虛寒者에게 좋다는 것이다. 痰火로 열이 쌓인 자에게는 많이 먹는 것이 좋지 않다는 것일 뿐이다.25)

요점은 호도가 차갑다는 손사막의 설명은 잘못된 것이며, 호도는 따뜻한 성질을 가지고 있고 근세 의방에서는 담기(痰氣)와 천수(喘嗽) 등 치료에 자주 쓰인다고 하였다. 다만 허한자(虛寒者)에 좋다는 것이고, 담화로 열이 쌓인 자에게는 좋지 않으며, 그리하여 그는 “주치(主治)” 부분에서 “치허한천수(治虛寒喘嗽)”를 강조했다.
그런데 이시진의 호두에 대한 이해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그는 유호두(油胡桃)를 설명하는 부분에서 다시 다음과 같은 설명을 한다.
  • 三焦라는 것은 元氣의 別使이다. 命門이라는 것은 삼초의 本原이다. … [호도는] 명문을 통하게 하고 삼초를 이롭게 하여 기를 돕고 혈에 영양을 주니 … 명문이 이미 통한 즉 삼초가 이롭다. 그러므로 위로는 폐로 통하여 虛寒喘嗽者가 그것을 먹어야 하며 … 洪氏 『夷堅志』에서 호도가 痰嗽를 치료하는 것은 능히 폐를 안정시키기 때문이라고 하였는데 대개 그는 호도가 명문삼초에 좋은 약이라 그런 것을 몰랐던 것이다.26)

호도는 따뜻한 성질일 뿐만 아니라 ‘명문을 통하게 하고 삼초에 이로운’ 좋은 약재라 위로는 폐에 이로우며 그러기에 ‘허한천수자’에게도 좋다는 것이다. 아울러 호도가 천수 치료에 좋은 이유를 ‘호도는 폐를 안정시켜준다’고만 했던 홍매의 무지를 지적하며, 이시진은 호도가 명문삼초에 이롭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을 강조했다. 연이어 그는 『이견지』를 인용하며 홍집의 사례와 홍매의 치료 경험을 소개했다.
이렇게 볼 때, 당시 관방 의방서의 상황과 본초학의 이해를 고려하면 남송 시기 홍매가 전한 홍집의 ‘인삼호도방’은 당시 담천 치료에서 호도를 활용한 상당히 이른 사례라 추정할 수 있다. 그러기에 이시진도 관련 설명을 하면서이 의안을 인용한 것이다. 대략 북송까지의 본초학에서는 호도의 성질을 차갑고 또 ‘담음을 동하게 하는’ 것으로 인식하였고, 대표적 의방서에도 호도를 담천 또는 해수 치료에 쓴 사례를 찾기 어려웠다. 이시진이 말한 호도의 쓰임이 달라진 ‘근세’가 구체적으로 어느 시기를 가리키는지 알 수 없지만, 홍집의 의안은 남송 시기 담천 치료에 호도를 사용한 사례를 보여주며, 이때는 홍매 역시 호도가 폐를 안정시키는 데 유용하다고만 알았을 뿐 ‘명문삼초’에 좋다는 지식을 몰랐을 때였다. 즉, 『이견지』에서는 호도의 약물학적 효능에 주목하면서 담수에 효과가 있다는 서술에 그쳤다. 이후 명대 『본초강목』에서는 『이견지』의 의안을 토대로 호도가 ‘명문을 통하게 하고 삼초를 이롭게 한다’는 논의까지 진행시켰다. 『증류본초』의 호도에 대한 이해의 한계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이견지』의 치료 사례는 소위 ‘경험칙’을 제시해주었고 『본초강목』에서는 호도가 담천에 효과가 있는 사실에 대한 이해를 더욱 심화시켜 이론적 검토까지 진행했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호도에 대한 의학 지식의 보완과 전승에서 그 결정적 계기로 회자되는 것이 의서의 기록이나 의학자들의 논쟁이 아닌 『이견지』에 실린 민중의 괴이 경험이 담긴 지괴의안이었다는 점은 중국 전통 의학 지식 의 확장과 전승의 경로가 매우 다양했음을 보여준다.
19번 의안은 토혈(吐血) 치료와 관련한 의방이 등장한다. 수주(秀州)의 진사(進士) 육영(陸迎)은 어느 날 토혈이 멈추지 않고(吐血不止), 기가 치밀어 올라 놀라 떨다가(氣蹶驚顫), 미친 듯 날뛰며 펄쩍 뛰다가(狂躁跳躍), 한 곳을 직시하며 밤이 되면 문을 열고 뛰어나가려고 하였다. 여러 의자(醫者)들이 고방과 초택 단방을 사용했지만 낫지 않았는데, 어느 날 밤 꿈에 관음이 나타나 의방을 하나 전해주며 말하길, “익지(益智) 한 량, 생주(生珠) 두 돈, 청피(青皮) 반 량, 사향(麝) 한 돈을 갈아서 고운 가루로 만들어 등심탕(燈心湯)과 함께 복용하라”고 하였다. 다음 날 그대로 지어 먹으니 병이 곧 나았다.27)
이 의안에서 주목할 것은 바로 ‘익지’이다. 『증류본초』는 익지에 대해 ‘유정허루(遺精虛漏)’, ‘소변여력(小便余瀝)’, ‘익기안신(益氣安神)’, ‘삼초의 안정(安三焦)’, ‘기의 조절(調諸氣)’ 등을 언급하였다.28) 정신의 안정과 기의 조절 등에 효능이 있음을 설명했으며, 수주 진사 육영이 받은 의방에서 익지를 활용한 것 역시 이러한 효능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증류본초』에서는 ‘토혈’과 관련된 설명이나 언급은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흥미로운 부분은 그 이후 의자(醫者)들은 이 의안을 토혈 치료의 맥락에서 이해하였고,29) 같은 맥락에서 명대 이시진은 『본초강목』에서 익지를 다룰 때 “주치(主治)”에서 『증류본초』의 위 설명과 동일한 내용을 열거한 후 끝에 “시진(時珍)”을 출처로 명기하면서 냉기복통(冷氣腹痛), 심기부족(心氣不足) 등을 제시하고 마지막에 ‘토혈혈붕(吐血血崩)의 제증상’에 좋다고 하였다.30) 또 그 아래 “발명(發明)”에서 “시진왈(時珍曰)” 후 홍매 『이견지』를 인용하며 수주 진사 육영의 사례를 소개하였다.31) 이시진이 익지가 토혈에 좋다는 내용을 추가하는데 육영의 이 의방은 상당한 근거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의 의미는 『이견지』가 이 의안을 실은 남송 당시 유통된 주요 의방서에서 토혈의 치료에 익지를 활용한 사례가 없었다는 점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외대비요』의 경우 토혈 증상에 익지를 활용한 용례를 찾기 어려웠고,32) 토혈 치료와 관련하여 『태평성혜방』에서도 익지를 사용한 사례를 찾지 못하였다.33) 『정화성제총록』의 경우에도 토혈 치료에 익지를 언급한 내용은 보이지 않았다.34) 『태평혜민화제국방』에 실린 의방 중 토혈을 치료하는 내용에서 익지를 활용한 사례는 찾기 어려웠다.35)
명대 익지에 대한 본초 지식의 확장과 임상 활용에, 즉 토혈 증상에 익지를 활용할 수 있다는 설명을 가하는 데 수주 진사 육영의 괴이한 치료 경험 사례는 매우 유용하게 활용되었다. 남송 당시 대표적 의방서에서 토혈 치료에 익지를 활용한 예를 찾기 어려웠던 점을 고려한다면 육영의 의방은 더욱 의미 있게 다가온다.
이 외에 아래 2절에서 설명할 안질에 야명사(夜明砂)를 활용한 10번 의안 역시 본초의 활용에 의미가 있는 사례이다(아래 2절의 설명 참조). 또, 상술한 서독(暑毒)으로 인한 설사에 웅황을 사용한 우윤문의 2번 의안의 경우 이시진이 『본초강목』에서 ‘웅황’의 효능을 설명하며 “복서설리(伏暑泄痢)”를 추가할 때 근거로 제시되었고,36) 또 고기뼈가 목에 걸린 데 남붕사(南硼砂)를 활용한 15번 의안 역시 이시진이 『본초강목』에서 붕사의 ‘골경결핵(骨哽結核)’의 효능을 설명할 때 근거로 제시되었다.37) 옹저 치료에 향부자(香附子)를 활용한 16번 의안 역시 이시진이 『본초강목』에서 향부자의 “옹저창양(癰疽瘡瘍)” 효능을 추가할 때 이와 유사한 의방을 제시하였다(부록의 [표 4] 참조).38) 이들 의방을 포함한 지괴의안들은 본초의 활용이라는 측면에서 의학 지식의 확장과 전승에 상당한 의미를 가진다.

2. 방제의 소개

송대 지괴의안 속의 의방을 보면 활용하는 약재는 기존 의학 지식에 어느 정도 바탕을 두지만 기존에 잘 쓰이지 않는 약재를 쓰거나 그 배합 및 용법 등에서 기존에 용례가 잘 보이지 않는 비교적 새로운 방제를 소개하는 의방도 있다. 〈표 1〉에서 볼 때, 3번, 9번, 10번, 17번 의안이 대체로 이에 해당한다.
먼저, 3번 의안에는 요주(饒州) 사람 곽단우(郭端友)가 꿈에서 받은 ‘관음치안웅담원방(觀音治眼熊膽圓方)’이 등장한다. 부처를 잘 모시던 곽단우는 융흥 1년(1163) 5월 시질(時疾)에 걸렸고 갑자기 두 눈이 어두워지다 검은 눈동자가 흐려지고 막이 생겼다(兩目失光, 翳膜障蔽). 의사나 무당을 불러 치료하려고 했으나 소용이 없었고, 관세음보살께 약이나 비방을 내려주길 기도했다. 어느 날 꿈에 한 사람이 나타나 웅담원을 복용하라고 일러주었다. 얼마 후 다시 꿈속에서 천경관을 지났고 거기서 어떤 깨달음을 느끼며 깨어났는데 마침 그때 조카가 찾아와 지난 밤 천경관에서 우연히 ‘관음치안웅담원방’을 얻었다고 하기에 그 의방대로 복용하니 병이 나았다. 사용된 약재는 모두 17가지인데, 웅담(熊膽), 황련(黃連), 밀몽화(密蒙花), 강활(羌活), 방기(防己), 용담초(龍膽草), 사태(蛇蛻), 지골피(地骨皮), 대목적(大木賊), 선영지(仙靈脂), 구맥(瞿麥), 선복화(旋覆花), 감국화(甘菊花), 유인(蕤仁), 기린갈(麒麟竭), 만청자(蔓菁子), 갈양간(羯羊肝) 등이다.39)
먼저, 여기에서 활용된 ‘웅담’을 주목할 수 있다. 『증류본초』의 웅담에 대한 설명을 보면 안질을 치료하는 데 유용하다는 설명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웅지(熊脂)로 불 피운 연기가 눈에 들어가면 눈의 빛을 잃게 된다는 설명을 찾을 수 있었다.40) 그런데 『본초강목』을 보면 “주치”에서 위의 『증류본초』에서 기록한 설명을 열거한 후 마지막에 “시진”이라 출처를 밝히며 “평간명목거예(平肝明目去翳)”라 설명하고 있고, “부방”에서는 “적목장예(赤目障翳)” 아래 “웅담환(熊膽丸)”을 바로 인용하고 있다. 이 웅담환은 웅담과 생강 등을 사용한 의방으로 곽단우가 받은 웅담원과는 다르지만 웅담을 주 약재로 하고 있다. 그리고 그 출처를 주밀(周密, 1232-1298)의 『제동야어(齊東野語)』로 명시한 것이 특이하다.41) 웅담을 안질 치료에 쓴 의방으로 남송 말의 『제동야어』에 수록된 ‘경험방’을 싣고 있는 것이다.42) 그렇다면 웅담을 안질 치료에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한 시기가 남송 후기이며, 곽단우의 사례도 웅담을 안질 치료에 쓴 비교적 이른 의방이라 추정할 수 있을까?
이러한 추정이 가능한지 살펴보기 위해 당송 의방서에서 언급된 안질 관련 의방에서 웅담의 용례 및 웅담원과 유사한 의방이 있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 우선 『외대비요』의 안질 관련 의방에서는 웅담의 용례를 찾기 어려웠고 ‘웅담원’ 관련 유사 의방도 찾기 어려웠다.43) 『태평성혜방』의 안질 관련 의방에서는 웅담을 활용한 의방은 수 건 확인할 수 있었다. 그렇더라도 곽단우의 웅담원과 유사한 의방은 보이지 않았다.44) 『정화성제총록』의 「안목문(眼目門)」에서는 웅담을 활용한 사례가 역시 수 건 확인되지만 웅담원과 유사한 의방을 찾기는 어려웠다.45) 『태평혜민화제국방』의 「치안목질(治眼目疾)」에서는 웅담 용례 찾지 못했지만,46) 「치소아제질(治小兒諸疾)」에서 안질 치료에 웅담을 활용한 사례를 두 건 찾을 수 있었다.47)
『증류본초』에서는 안질 치료에 효능이 있다는 언급이 보이지 않으나 『본초강목』에서 이시진은 웅담의 안질 치료 효과를 추가했고 그 “부방”으로 남송 말 주밀의 경험방을 제시한 것으로 볼 때, 그리고 송대 유통된 관방 의방서의 안질 관련 의방에서 웅담의 용례가 다수 보이지만 무엇보다도 곽단우가 꿈에서 받은 ‘웅담원’과 관련해 동일한 방제가 『이견지』 이전 더 이른 문헌에서 찾기 어려웠던 점을 고려하면, 『이견지』에 수록된 곽단우의 일화는 ‘웅담원방’을 소개한 비교적 이른 기록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일화 안에서는 이 의방이 『도장』에 수록되어 있다고 언급하였지만 현재 그 구체적인 출처를 확인하기는 어려웠으며, 이후 의서에서 웅담원을 언급할 때 모두 곽단우의 의안을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보면,48) 확실히 웅담 등 17가지 약재로 된 ‘웅담원’은 곽단우의 의안에서부터 널리 확산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음은 10번 의안에서 등장하는 ‘불수양간원(佛授羊肝圓)’이다. 명주(明州) 정해현(定海縣) 사람 서도형(徐道亨)은 순희(1175-1189) 초, 적안(赤眼)으로 고생하고 있었고 마침내 내장(內障)으로 발전돼 앞을 볼 수가 없었다. 어느 날 밤 꿈속에 한 승려가 나타나 양간원(羊肝圓)을 백일 동안 복용하라고 하였다. 그 승려는 서도형에게 야명사(夜明沙), 당귀(當歸), 선각(蟬殼), 목적(木賊), 양간(羊肝)을 사용한 방제를 가르쳐 주었고, 그는 곧바로 가르쳐준 약을 먹으니 과연 백일이 되었을 때 회복되었다.49)
먼저 양간원에서 주목할 약재는 다름 아닌 ‘야명사’이다. 『증류본초』에서의 관련 설명을 보면 ‘면옹종(面癰腫)’등 피부 질환, ‘복중혈기(腹中血氣)’, ‘파한열적취(破寒熱積聚)’, ‘제경계(除驚悸)’ 등에 유효하다고 하였으나 안질 치료에 관한 언급은 찾기 어려웠다.50) 그렇다면 당시 통용된 대표적 의방서에서는 안질 치료에 야명사가 사용되고 있었는지 또 서도형이 받은 ‘양간원’과 동일한 방제가 나와 있는지 궁금해진다.
먼저, 『외대비요』의 ‘안질’ 관련 부분을 보면 양간을 사용한 의방은 보이지만 야명사의 용례는 보이지 않으며 양간원과 유사한 방제 역시 찾기 어려웠다.51) 그다음 『태평성혜방』의 안질 관련 의방을 보면, 당귀가 사용된 용례나 선각이나 양간이 사용된 용례가 간혹 보이며, 야명사가 사용된 것은 한 건 찾을 수 있었다.52) 그러나 양간원과 유사한 의방은 보이지 않았다. 『정화성제총록』의 「안목문(眼目門)」을 살펴보면, 당귀, 선각, 목적, 양간 등이 각각 쓰인 용례가 곧잘 보이며,53) 이외 양간, 목적, 선각이 함께 사용된 의방이 한 건 보인다.54) 그러나 야명사가 사용된 용례나 양간원과 일치하는 용례는 찾기 어려웠다. 『태평혜민화제국방』의 「치안목질(治眼目疾)」을 보면, 목적, 선각, 당귀의 각각의 용례나 또 목적과 선각을 함께 사용한 용례는 보이지만 야명사의 용례는 보이지 않으며 양간원과 동일한 의방 역시 찾기 어려웠다.55)
주목할 점은 명대 이시진은 『본초강목』의 야명사 관련 설명 중 “주치”에서 얼굴의 옹종, 피부 질병 등 여러 효능을 설명한 연후 마지막에 “시진”이라 출처를 밝히며 ‘목망장예(目盲障翳)’를 치료하고 ‘명목제학(明目除瘧)’에 좋다는 설명을 덧붙이고 있다. 그리고 이어진 “발명”에서 “시진왈”이라 칭하며“목망장예(目盲障翳)”치료할 수 있다고 재차 언급하며 서도형 의안을 소개하였다.56)
당송 시기 본초서나 의방서에서는 야명사의 안질 치료에 관한 쓰임이 크게 두드러지지 않았다. 특히 대표적 의방서에서 안질에 야명사를 사용한 경우가 매우 적은 것으로 보아 야명사는 안질 치료에 사용되는 보편적인 약재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남송 순희(1175-1189) 초 이를 사용한 서도형의 ‘양간원’은 안질에 야명사를 활용한 비교적 드물고 이른 경우이며, 서도형의 의안은 이시진이 『본초강목』을 편찬하면서 야명사에 대한 지식을 확대하는 데 주요 근거가 되었다. 야명사, 당귀, 목적, 선각, 양간으로 이루어진 ‘양간원’은 서도형의 사례가 현재 찾을 수 있는 가장 이른 기록이며, 이 의방은 이후 다양한 의서 속에 지속적으로 전승된다.
다음으로, 9번 의안에서는 소변불통(小便不通)을 치료하는 의방이 등장한다. 쉰다섯의 요주(饒州)의 의자 웅언성(熊彥誠)은 병이 나서 전후로 오줌을 누는 것이 편하지 않았는데, 닷새가 지나자 복부가 북처럼 부어올랐다. 주변 의사들도 속수무책이라 웅언성은 평소 알고 지내던 혜월(慧月) 스님에게 편지를 보내 이를 알리고 죽음을 준비하였다. 소식을 듣고 웅언성을 만나기 위해 출발한 혜월이 길에서 한 이인(異人)을 만났고, 이인은 사정을 듣고 냇가로 가 소라(大螺)를 잡더니 소금과 함께 다져 병자의 배꼽 아래 삼촌 삼분 되는 곳에 두고 비단으로 싸서 기다리면 오줌이 나올 것이라 하였다. 시키는 대로 하였더니 오줌이 나와 병이 나았다.57)
소변불통에 소라를 활용한 이 의방은 당시 본초학의 기본 지식과 일맥상통한다. 『증류본초』의 소라에 대한 설명에는 “대소변에 이롭다”는 설명이 있다.58) 그러나 당시 통용된 대표적 의방서를 보면 대소변 관련 증상에 소라를 활용한 사례가 쉽게 찾아지지 않는다. 다만 ‘소갈’의 치료에서 소변의 횟수가 잦을 때 죽으로 끓여 먹는 등 내복약의 형태로 소라를 활용한 사례가 보인다.59) 명대 이시진은 『본초강목』에서 소라의 효능을 설명할 때 “주치”부분에서 “이대소변(利大小便)을 강조하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부방”에서 “소변불통(小便不通)” 아래 웅언성의 사례를 소개하고 있다는 것이다.60)
당송 본초학의 지식에서는 소라가 대소변에 이롭다고 언급하였지만, 송대 유통된 대표적인 의방서에서 소변 관련 증상에 소라를 사용한 용례는 대체로 내복약으로서 조제하는 사례가 전부였다. 웅언성의 사례와 같이 외용으로 복부에 다진 소라를 부치는 형태의 방제는 찾기 어려웠다. 명대 『본초강목』에서 소변이 통하지 않은 증상에 웅언성의 의안과 의방을 소개하고 있는 것은 상당히 의미가 있어 보인다. 이로써 보건대 웅언성의 이 의방은 당시 소라를 외용으로 소변불통을 치료하는 비교적 새로운 방제라 할 수 있고, 이는 이후 의서에서 이 의방이 언급될 때마다 모두 웅언성의 치료 사례를 제시하고 있는 것을 보면 더욱 잘 드러난다.
이외에 사다리에서 떨어져 허리를 다친 오대석(吳大昔)이 꿈에서 신에게 받은 유향음(乳香飮)도 비교적 새로운 방제를 소개하는 사례라 할 수 있다([표 4]의 설명 참조).
위의 의방들은 어느 정도 당시의 의학 지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지만 동일한 방제가 그 이전 문헌 기록에서 찾아지지 않으며 이후 전승에서도 모두 제시된 지괴 의안을 출처로 명시하고 있기에 방제의 소개와 확산에 지괴 의안이 가지는 역할과 의미를 확인할 수 있다. 새로운 방제의 소개와 확산에 권위 있는 의서나 의학 이론 등 학술적 전통이 거론되는 것이 아닌 한 개인이 경험한 괴이한 치료 사례가 결정적 역할을 한다는 것은 매우 흥미로우며, 지괴 의안은 중국 의학지식 전승의 또 하나의 방식임을 여실히 보여준다.

3. 기존 의학 지식의 확산

송대 지괴 의안 속 의방 중에는 기존 본초서나 의방서 및 다른 의서에서 확인되는 방제나 의학 지식을 포함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런데 그 각각은 대체로 특정한 의학 지식을 알리고 확산하는 데 의미가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표 1〉에서 볼 때, 1번, 4번, 5번, 6번, 7번, 8번, 12번, 13번, 14번, 18번 등 의안이 여기에 해당한다.
먼저, 1번 의안은 ‘신’이 전수해 준 의방인데, 꿈을 통한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기존 ‘신수방’과는 조금 다른 양상을 보인다. 이 일화는 건창(建昌) 사람 황습(黃襲)이 전한 것인데, 장고는 『의설』에 이 의안을 수록하면서 황습을 ‘자가 소도(昭度)인 사인(士人)’으로 소개했다.61) 사인 황습이 같은 마을 사람인 어느 상인의 경험담을 전하는 이야기다. 상인은 달빛 아래에서 우연히 두 사람이 대화하는 것을 엿듣게 되었는데, 한 사람이 금산사(金山寺)의 제사음식이 아주 푸짐하다고 해서 갔더니 음식마다 모두 피비린내가 나기에 화가 나 요리사의 손을 끌어다 끓는 솥 안에 밀어 넣었고 다 짓물렀을 거라고 하였다. 그러자 다른 한 사람이 치료할 방법을 알고 있다며, “대황을 찧은 다음 좋은 식초를 부어 상처 위에 바르면 통증이 줄어들 뿐 아니라 흉터도 없앨 수 있다”고 하면서 가르쳐 줄 방법이 없음을 한탄했다. 이를 듣고 있던 상인은 마침 금산사에 가려던 참이었고 신이 은밀하게 자기에게 치료법을 알려주는 것이라 생각했다. 금산사에 도착하니 과연 수륙재에 올릴 음식을 준비하는 요리사가 요리를 하던 중 칼질을 잘못하여 손가락의 피가 음식에 흘렀고, 음식에서 사람의 피 맛을 느낀 ‘신’이 화가 나서 요리사의 손을 화상 입게 만들었다고 했다. 금산사에 도착한 상인은 ‘신이 은밀하게 알려준’ 대황 가루와 식초를 활용한 처방으로 요리사의 화상을 치료해 주었고 빠른 효과를 보았다.62)
화상에 대황이나 식초 등을 사용하는 의방 지식은 당시 유통된 관찬 의방서에도 일찍이 소개되고 있다. 먼저, 『외대비요』를 보면, 화상 치료에 대황을 사용한 사례가 보인다.63) 또 북송 초 『태평성혜방』의 화상 관련 처방을 보면, “천대황(川大黃), 백백피(柏白皮) 등을 갈아서 가루로 만든 다음 생지황(生地黃) 즙을 넣고 개어 바른다”라든가 “대황을 곱게 갈아서 꿀과 함께 버무려 진흙 같이 만들어 바르면 통증이 곧 멈춘다” 등의 기록이 보인다.64) 또, 『정화성제총록』 의 「탕화창(湯火瘡)」에서는 “대황 가루 조금을 냉수에 개어 바른다”라든가, “식초를 깨끗한 흙바닥에 부은 후 흙에 개어 식초 진흙을 상처에 바른다” 등의 내용이 적혀 있다. 식초를 활용한 의방에서는 “아프지도 않고 또 흉터도 없다”고 기록하고 있다.65)
위의 ‘신고방’은 대황과 식초를 동시에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며, 그 외에 “통증이 점점 줄어들 뿐 아니라 흉터도 없앨 수 있다”는 의학 지식을 갖추어 설명하고 있다는 점도 흥미롭다. 이는 『정화성제총록』 수록 의방 중 식초를 활용한 방제에서 명시된 설명과 동일하며, 화상 치료에 중요한 두 가지 효능, 통증을 멈추고 흉터를 없애는 효과를 알리고 있다는 데에 의의가 있다. 이후 의서에서 이 의안을 인용할 때 모두 이 문구를 빼놓지 않았다.66)
6번 의안은 사람들이 잘 모르는 기존 본초학의 유용한 지식을 알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사례인데, 창출(蒼朮)에 관한 것이다. 효종 건도(乾道) 연간(1165-1173), 강서(江西)의 모 관원이 부임을 받아 서호(西湖) 근처 민가에서 쉬고 있을 때 우연히 한 여자와 만나 서로 사랑했다. 그들은 헤어졌다가 5년 후 다시 만났는데 그때는 이미 여자가 인간 세상의 사람이 아니었고, 함께 시간을 보낸 후 헤어질 무렵 여자는 음기(陰氣)의 침습을 우려하며 설사를 할 경우 평위산(平胃散)을 먹으라고 당부하였다. 관원은 이 말을 듣고 놀라며 평위산이 효과가 좋은 이유를 물으니 그 여자는 “평위산은 창출(蒼朮)을 사용하는 데 이는 사기(邪氣)를 제거하는 데 특효”라고 대답해주었다.67) 여자와 헤어진 후 그 관원은 과연 설사가 나서 평위산을 먹었고 나았다. 이 일화는 홍매의 집안 조카가 알게 되어 홍매에게 전해준 것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본초강목』의 ‘출(朮)’조의 기록에 의하면 출의 쓰임이 송대 이르러 백출과 창출을 구분해서 쓰기 시작했다고 언급하고 있다.
  • 옛날 사람들은 출을 쓸 때 적출과 백출을 구분하지 않았다. 송 이래로 비로소 창출은 맛이 쓰고 매우며 기운이 강렬하고, 백출은 맛이 쓰고 달며 기운이 온화하여 각각 달리 쓰였다고 하는 것이 자못 이치에 맞을 것이다.68)

이시진이 이렇게 말한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그는 창출에 대한 “발명” 부분에서, 구종석이 정화 6년(政和, 1116)에 쓴 『본초연의(本草衍義)』를 인용하면서, “고방(古方)과 본경(本經)에서는 창과 백을 구분하지 않았고 도홍경의 주에서 출은 두 종류가 있다고 지적한 바 있으며, 이후로 사람들은 백출을 귀하게 여겼는데 실은 평위산 등 고방에서는 창출이 가장 중요한 약재”라고 설명하였다. 이어 이시진은 이고(李杲, 1180-1251)의 말을 인용하며 창출은 “사기로 하여금 비로 들어가지 않게 한다”고 지적하였고 이어지는 “시진왈”에서 창출의 사기 제거 효능을 설명하면서 『이견지』를 인용하며 강서 사인의 위 일화를 그대로 수록하였다.69)
이시진의 설명에 따르면 출은 송대 이르러 본격적으로 백출과 창출이 구분되어 사용하기 시작하였고 창출의 효능은 사기 제거에 뛰어나다는 것인데 『이견지』의 강서 관원의 일화는 예부터 내려오는 평위산의 본초 활용과 그 중 창출의 효능을 알리고 있기에 의미를 가진다. 실제로 이후 의서에서 평위산이 사기 제거에 좋다는 사실을 언급할 때 이 일화는 빠지지 않고 거론된다.70)
이외에 지방관 호권(胡權)이 이인(異人)으로부터 받은 의방이라며 전승된 ‘이인옹저방’의 4번 의안은 이미 동일한 방제가 관방 의방서에서도 보이지만,71) 호권 이후로 홍괄, 홍준, 홍매 등 홍씨 집안의 활약으로 널리 확산된 사례라 할 수 있다(최해별, 2018: 101-121). ‘몽귀고방’의 5번 의안은 낙마하여 손발이 부러진 기주(冀州) 사인 서반(徐蟠)이 겪은 일로 꿈에 거북이가 가르쳐준 것이다.72) 동일한 의방이 『태평성혜방』,73) 그리고 남송 초 소흥(紹興) 2년(1132) 허숙미(許叔微)가 편찬한 『보제본사방(普濟本事方)』에서 확인된다.74) 이 의안은 『이견지』에 수록된 이후 더욱 널리 확산된 것으로 보이며 『영락대전』 등 대형 유서에도 실리게 된다.75) 감한(感寒)으로 인한 기침에 생강을 활용한 14번 의안,76) 역병으로 인한 종기에 흑두와 감초를 활용한 13번 의안,77) 안질에 지황(地黃)과 초(椒)를 활용한 ‘치목질방(治目疾方)’의 18번 의안,78) 상한론에서 중시한 ‘계지탕’과 ‘죽엽석고탕’의 활용에서 주의할 부분을 설명하고 있는 12번과 7번 의안79) 등 모두 관련 의학 지식의 확산을 독려한 의미를 가진다([표 4]의 설명 참조).
위 의방들의 이후 전승을 보면 당시 통용된 관방의 의방서 등에 관련 기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의방의 출처를 설명할 때 지괴의안이 거론되는데, 이는 지괴의안이 관련 의학 지식의 확산과 전승에 동력이 되었음을 말해주며 의학 지식 전승의 주요 통로 중 하나였음을 보여준다.

Ⅳ. 지괴 서사의 의의: 이후 전승의 결정적 계기

송대 비교적 다량 출현한 지괴의안 속 의방은 이후 의방서 및 본초서 등 각종 의서에 지속적으로 전승된다([표 1] 참조). 그리고 관련 치료 경험을 담은 지괴 서사는 해당 의방이 이후 지속적으로 활용되고 전승되는 데 상당한 역할을 한다. 해당 의방이 인용되고 수록될 때 지괴 서사는 여지없이 함께 언급되거나 또는 의방의 명칭 등에 흔적을 남긴다. 지괴 서사는 의방을 따라 계속 기억된다.
다수의 지괴 의방은 『이견지』를 매개로 이후 의서에 전승되면서 명청 시기 대중 의방으로 자리를 잡는다. 전승의 대략적 경향을 살펴보면 다음의 몇 가지 의서가 주로 거론될 수 있겠다. 송대 대대로 명의를 배출했던 집안 출신 의사 장고(張杲, 1149?-1227)가 역대 명의(名醫)와 의서의 소개 및 각종 질병의 의방 등을 담은, 장고 생전에 완성하지 못했다가 그의 사후 제갈흥(諸葛興)이 소정(紹定) 원년(1228) 경 완성한 『의설(醫說)』은 「신방(神方)」과 그 외 여러 부분에서 『이견지』 의 지괴의안을 수록했다. 이후 남송의 사찬 의방서들이 산발적으로 관련 의안을 수록했다.80) 명대 이르면, 강관(江瓘, 1503-1565)이 편집한 책으로 가정(嘉靖) 28년(1549) 완성하고 판각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그의 아들이 수정 보충하여 융경(隆慶) 2년(1568) 비로소 완성된, 대략 2300여 개의 의안을 모은 『명의유안(名醫類案)』에 대거 수록되고, 그리고 이시진의 『본초강목』 등에 실리며 이후 청대 본초서 및 종합 의서나 의방서에 수록되어 근대로까지 전승된다.
상술한 남송 효종 시기 재상 우윤문이 직접 경험에서 얻게 된 ‘몽약방’은 더위 먹은 후 서독(暑毒)으로 인한 설사 치료에 웅황(雄黃)을 사용한 의방인데, 당시 본초의 활용에서나 의방의 용례를 보았을 때 유사한 사례를 찾기 어려웠다. 웅황의 활용에서 비교적 이례적이었던 이 의방의 이후 전승은 매우 흥미롭다. 소흥 28년(1158) 우윤문이 겪은 치료 경험담을 홍매가 직접 듣고 『이견지』에 수록한 이후 다양한 의서는 이 일화를 수록한다. 경원(慶元) 2년(1196) 완성된 왕목의 『시재백일선방』은 『이견지』를 출처로 밝히며 우윤문의 일화를 수록하였고,81) 장고의 『의설』 역시 『이견지』를 그 출처로 밝히며 우윤문의 일화를 싣고 있다.82)
명 홍무(洪武) 23년(1390) 편찬된 대형 방서인 『보제방(普濟方)』에도 이 기록은 수록되었다.83) 이후 『명의유안』84)과 『본초강목』에 이 의방은 수록된다. 이시진은 웅황의 주요 효능을 설명할 때 “복서설리(伏暑泄痢)”를 추가하면서 『이견지』의 우윤문 일화를 소개했다.85) 이후 명 왕긍당(王肯堂)이 만력 30년(1602)에 편찬한 『증치준승(證治准繩)』에 이 일화는 실렸다.86) 천계(天啓) 4년(1624) 장개빈(張介賓)이 편찬한 『경악전서(景岳全書)』에는 역시 『이견갑지』를 인용하며 동일한 내용을 기록하면서 “이 이야기는 자못 기이한 것으로 비록 미처 사용해 보지는 못했으나 잠시 그것을 기록하여 그 처방을 보존한다”고 하였다.87) 청대에 이르면 여러 본초서에서 이 일화를 수록하고 있는데, 강희 33년(1694) 왕앙(汪昂)의 『본초비요(本草備要)』 중 웅황을 설명하는 부분에서 역시 『이견지』를 인용하며 우윤문의 일화를 소개하고 있고, 건륭 22년(1757) 오의락(吳儀洛)이 편찬한 『본초종신(本草從新)』의 웅황 부분에서 역시 『이견지』를 인용하며 우윤문의 일화를 언급하고 있다.88) 끝으로 청 건륭 29년(1764)에 서대춘(徐大椿)이 편찬한 종합 의서라 할 수 있는 『난대궤범(蘭臺軌範)』에서 이 일화를 수록하고 있는데 여기에서도 『이견지』를 인용하고 있으며 이 의방을 ‘웅황환(雄黄丸)’ 이라 명명하여 우윤문의 의안과 의방을 그대로 소개하고 있다.89)
이를 통해 보건대, ‘몽약방’ 일화는 12세기 말 우윤문이 직접 자신의 경험을 홍매에게 이야기하여 『이견지』에 실린 이후로 13-16세기 남송 말부터 명대 이르기까지 사찬 의서와 의방서 및 의안서에 전승되다가 이시진이 『본초강목』에서 웅황의 효능을 설명할 때 ‘복서설리(伏暑泄痢)’를 추가하면서 우윤문의 일화를 소개했고 이후 17-18세기 명청대 다양한 의서 및 본초서에 실리다가 18세기 간행된 한 종합 의서에서는 ‘웅황환’으로 명명되어 활용되었다. 흥미로운 점은 웅황을 활용한 의방만 전승되었던 것이 아니라 우윤문의 괴이한 치료 경험의 서사까지 지속적으로 전승되고 있다는 것이다. 치료 효험에 대한 지괴 서사가 의방 전승의 동력이 되었음을 반영한다.
홍집이 아들의 담천 치료에 효과를 보았던 ‘인삼호도탕’은 호도에 대한 변화된 활용을 보여준 비교적 이른 의안인데 이 의방은 이후 지속적으로 전승된다. 물론 의방이 전승될 때 지괴 서사 역시 함께 전승된다. 이 의안은 경원 2년(1196) 출간된 『시재백일선방』에서는 “관음인삼호도탕”으로 소개되며 『이견기지(夷堅己志)』로 출처를 밝히고 있다.90) 또 장고의 『의설』에 수록되며 장고는 『이견지』에서 이 의방을 가져왔다.91) 이 의방은 이후 『인재직지방』에 ‘인삼호도탕’으로,92) 『유편주씨집험의방』에는 ‘호도산’으로93) 수록되었고 각각 ‘『이견지』방(方)’ 또는 ‘출(出)『이견지』’라고 쓰고 있다. 이후 명대 『명의유안』과94) 『본초강목』의 ‘호도’조에서 이 일화는 소개되고,95) 이후 초횡(焦竑, 1540-1620)의 『초씨필승(焦氏筆乘)』에도 보인다.96) 또, 왕긍당의 『증치준승』에서는 출처를 『이견지』로 밝히며 이 의방을 ‘관음응몽산(觀音應夢散)’이라 명명하며 수록하고 있다.97) 『난대궤범』에서 역시 ‘관음응몽산’으로,98) 『의방총화』에서는 ‘삼도탕(參桃湯)’으로 소개하고 있다.99)
그 다음으로 안질 치료에 쓰인 곽단우의 ‘웅담원’이나 서도형의 ‘양간원’ 등 지괴의안을 통해 소개된 안질 관련 방제의 전승 역시 주목할 만하다. 먼저 웅담원은 『의설』과 명대 『명의유안』 등에 출처를 『이견지』로 밝히며 수록되었다.100) 서도형이 얻은 ‘불수양간원’은 역시 『의설』과 『명의유안』 및 『본초강목』 등에 실리었고, 그 출처는 모두 『유설(類說)』로 명시하고 있지만 서도형의 치료 경험을 그대로 소개하고 있다.101) 현전 기록을 근거로 할 때 웅담원은 곽단우의 사례에서 또 양간원은 서도형의 사례에서 처음 보이고 그 이전 문헌에서는 찾지 못했으며 이후 전승에서도 곽단우의 사례나 서도형의 사례를 소개하며 이 방제가 제시되는 것으로 볼 때, 해당 방제의 전승에서 곽단우나 서도형의 의안은 매우 결정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웅담원의 경우 곽단우 스스로 이는 『도장』에 있는 것이라는 설명이 보이지만, 이후 전승에서 이 방제의 출처를 『도장』으로 제시하고 있는 경우는 찾기 어려웠다. 설사 『도장』에 수록된 의방을 곽단우가 활용한 것이라 가정하더라도 이 방제의 전승에서 곽단우의 지괴 서사는 웅담원의 전승에 결정적 계기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안질 관련 의방으로 강릉 사람 부씨가 여진인(呂眞人)으로부터 받은 ‘치목질방’ 역시 『의설』과 『명의유안』 등에 실리며 『이견지』를 출처로 밝히고 있다.102) 흥미로운 점은, 『명의유안』 권7의 「목(目)」에는 40여 건의 안질 관련 의방이 수록되어 있는데 곽단우의 웅담원, 서도형의 양간원, 강릉 부씨의 치목질방이 모두 수록되어 있다. 또 오곤(吳崐)이 편찬하여 만력 14년(1586) 간행된 『의방고(醫方考)』의 「안질문」에는 서도형의 ‘양간원’과 ‘여진인치목질방’이 모두 수록되어 있다.103) 이들 의방은 이후 안과 전문 의방서에도 실리는데 명말 부인우(傅仁宇)가 편한 『심시요함(審視瑤函)』에서는 곽단우의 의안과 함께 ‘웅담환’이 실려 있다.104)
기존 의학 지식을 바탕으로 한 지괴 의방의 이후 전승 과정은 지괴 서사가 갖는 영향력을 더욱 잘 보여준다. 전형적인 사례는 화상 치료에 대황과 식초를 함께 쓰는 것이 좋다고 신이 은밀하게 말해주었던 ‘신고방’이다. 이 의방은 이후 장고의 『의설』에 실리고, 홍매의 형인 홍준(洪遵, 1120-1174)이 건도 6년(乾道, 1170) 편찬한 『홍씨집험방』에도 수록된다. 이후 이시진의 『본초강목』에서는 “금산사신인소전방(金山寺神人所傳方)”으로 소개된다. 모두 그 출처를 『이견지』로 명시했다. 재미있는 점은, 『본초강목』에서는 대황과 식초가 아닌 대황과 꿀로 소개를 하고 있는데, 그 경위는 파악하기 어렵지만 대황과 꿀을 활용한 용례는 『태평성혜방』에도 이미 제시된 의방이다.105)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시진은 이 의방을 ‘금산사신인소전방’이라 명시하고 『이견지』를 출처로 밝히며 소개하고 있는 것이다. 지괴 서사가 이후 전승에 미친 영향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인이 전해준 ‘치역방’의 전승 과정도 매우 흥미롭다. 이 일화와 관련된 가장 이른 기록은 양송 교체기를 살았던 태학생 정특기(丁特起)가 편찬한 『정강기문靖康紀聞』에서이다. 정강 2년(1127) 봄 도성에서 돌았던 역병과 관련해 그는,
  • [3月 20일] 태학은 역병이 더욱 극심했는데, … 就正齋의 학생 蔡延世가 꿈에 … 머리를 산발하고 붉은 눈을 가진 자가 나아가 북쪽을 향하더 주문을 외더니 “나의 물을 마신 자는 죽음을 면할 수 있다”고 했다. 꿈에서 깨어보니 땀이 흘러 등이 다 젖었다. … 이후 역병에 걸려 부스럼이 나는 자들은 이 豆湯을 마시기만 해도 효과를 보았다. … 모두 그 신인이 주문을 왼 물의 기이함으로 생각했다. 이에 黑豆方이 세상에 널리 전해질 수 있게 되었으니 이에 방을 여기에 적어둔다. 흑두 두 돈(볶아서 향이 나게 하고 익힌), 감초 두 촌(황색이 되도록 볶은 것) 두 재료를 물에 끓이는데 두 잔이 한 잔 될 때까지 끓인 후 수시로 마신다.106)

태학생의 꿈에서 전해진 ‘흑두방’은 진동(陳東, 1086-1127)의 『정염양조견문록(靖炎兩朝見聞錄)』에도 실리고,107) 후에 서몽신(徐夢莘, 1126-1207)의 『삼조북맹회편(三朝北盟會編)』에도 실리게 된다.108) 한 태학생의 관찰과 기록으로 남게 된 이 의안은 이후 홍매에 의해 『이견지』에 수록된다. 『이견지』에서는 “정강 2년(1127) 봄 도성에 큰 역병이 돌았는데, 이인(異人)이 한 처방을 재사(齋舍)에 썼다. 모든 역병으로 종기가 난 자들 중 낫지 않은 이가 없었다”라고 기록하며 위의 흑두방(黑豆方)을 수록했다.109) 이후 이 의방은 남송 시기 『시재백일선방』과110) 장고의 『의설』에 『이견경지』로 출처가 명시되며 수록된다. 이후 명대 강관의 『명의유안』에서도 이 일화를 소개하며 출처는 『이견지』 ‘경지’로 명시하였다.111) 그리고 이시진은 『본초강목』의 ‘흑두’조에서 역시 『이견지』를 인용하며 이 의방을 소개하였는데, 흑두의 약효를 설명하면서 ‘역려발종(疫癘發腫)’에 효과가 있다고 하였다.112) 이후 청대에 이르면, 『의방총화』에서 ‘송인선전치역방(宋人仙傳治疫方)’으로 이를 기록하고 있다.113)
흑두와 감초가 종독을 해소하는 데 좋다고 한 지식은 이미 당대 및 북송 시기 본초서에 나타나지만,114) 이런 지식을 활용하고 전승시키는 데 정간 연간의 태학생들의 경험과 기록은 상당한 영향을 주었음을 알 수 있다. 아울러 이 의안이 홍매 『이견지』에 수록된 것을 계기로 남송 말 여러 의자들에게 전해지고 또 이후 의자들 사이에 전해지며 각종 의서에 수록된 것이다. 역병 치료에 유용했던 경험에 관한 서사가 의학 지식의 전승에 미친 영향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사서에 기록된 의안이 『이견지』를 통해 이후 의서에 수록되고 있기에 경험 지식이 의학 지식으로 수렴되는 데 『이견지』의 영향이 컸음을 보여준다.
결론적으로, 『이견지』 수록 19건의 지괴 의방은 대부분 그 이후 의방서와 본초서 등에 수록되어 청대까지 이어지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이후 의서에서 의방을 수록할 때 관련 지괴 서사를 함께 소개했던 것을 보면 지괴 서사는 해당 의방이 전승되는 데 상당한 동력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무엇보다도 몇몇 의방, 예를 들면 우윤문의 ‘몽약방’, 홍집의 ‘인삼호도탕’, 곽단우의 ‘웅담원’, 서도형의 ‘양간원’ 등 다수의 의방은 현재 확인 가능한 문헌 자료로 볼 때 『이견지』 등 남송 필기 자료 속 지괴의안이 해당 의방이 보이는 가장 이른 기록이었다. 이들 의방은 분명 어떤 식으로든 당시의 의학 지식을 반영하는 것일 터임에도 그 이전 기록에서는 확인하기 어려웠고 이후 전승에서는 관련 지괴 의안만이 회자되는 것을 보면 해당 의방의 전승과 확산에 지괴의안은 결정적 계기가 되었음을 볼 수 있다. 또한 지괴 서사의 영향은 기존 의방서나 본초서에 기록되어 있는 의방이더라도 이후 전승에서 출처를 그 의서로 하기보다는 관련 지괴의안을 인용했던 것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지괴의안은 의방 지식 전승의 동력이자 계기로서 하나의 전통을 형성하고 있었다.

Ⅴ. 맺음말

‘지괴의안’은 송 이전에 산발적으로 보이지만 남송 시기 사대부들의 활약으로 비교적 많은 수의 사례가 집중적으로 나타났다. 지괴의안 속 제시된 의방은 당시 의학 지식에 기반한 것일 뿐만 아니라 기존 의학 지식을 보완하고 확산하는 데 큰 의미를 가지는 것이었다. 이들은 이후 의방서나 본초서 등에 수록되어 명청 시기까지 지속적으로 전해진다. 남송 시기 지괴의안의 다량 출현과 그 전승은 중국 의학사에서 의학 지식의 축적과 전승이 ‘다양한’ 방식으로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송대 형성된 이른바 ‘학술적’ 의학 전통과는 또 다른 괴이(怪異)한 치료 경험 및 그 서사에 기댄, 의학지식 전승의 ‘또 하나의’ 방식을 보여준다.
송대 특히 남송 시기 많은 수의 지괴의안이 출현한 것은 분명 사대부의 활약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 송대 사대부들은 일상에서 괴이 현상을 자주 목격했으며 때론 여기에 의지하여 현실에서의 그들의 무기력을 달래었고 이를 기록에 남겼다. 이전 시대 지괴류 자료와 비교해보면 그들은 지괴 기록을 남길 때 특히 사실성에 충실한 태도를 유지하였다. 괴이한 경험에 대한 중시와 그에 대한 서사는 일상에서 겪은 질병의 치료 현장에서도 나타났다. 그들은 직접 경험한, 또는 목격하거나 전해 들은 괴이한 치료 경험을 기록으로 남겼다. 그들은 평소 의학 지식에 관심이 많았고 또 의학 지식의 확산에 대한 의지도 강했기에 지괴의안을 기록할 때 구체적 의학 정보를 담는 데 충실했다. 송대 지괴 의안의 대량 출현은 분명 의학을 중시하고 의학지식을 구비했던 사대부들의 의학 지식 확산에 대한 뜻과 그들의 괴이 현상에 대한 인식과 의탁 그리고 사실적 서사를 중시한 지괴(志怪) 태도가 맞물려 나타난 결과로 보인다.
송대 지괴의안 속 의방은 당시 의학 지식에 기반한 것일 뿐만 아니라 기존 의학 지식에 대한 보완과 확산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기존 연구에서는 이들을 ‘민간 경험방’으로 뭉뚱그려 설명하였으나 구체적으로 분석을 시도해보니 기존 의학 지식의 맥락 속에서 여러 가지 의미를 찾을 수 있었다. 특정 병증에 대한 본초의 활용에서 이례적이거나 의미 있는 사례가 보이기도 하였고 이런 경우 이 의안은 이후 시기 본초 지식의 확장에 영향을 미쳤다. 송대 지괴의안에서 제시된 경험칙이 명대 본초학에서는 이론적 검토로까지 이어지는 현상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 현전하는 기존의 의서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새로운 방제를 소개하기도 하였으며, 기존 본초서나 의방서에 전해지는 것이지만 알려지지 않았거나 꼭 알아야 할 의학 지식을 알리는 데 치중한 사례도 있었다. 지괴의안은 분명 기존 의학 지식을 보완하고 알리는 데 의미가 있었다. 무엇보다도 의학지식의 보완과 전승이 권위 있는 의서에 근거하거나 의자들의 이론적 논의가 아닌 한 개인의 괴이한 치료 경험과 그에 대한 서사의 전승을 통해 이루어졌다는 것이 흥미롭다.
송대 지괴의안 속 의방은 이후 나타난 다양한 사찬 의방서나 본초서 등에 지속적으로 수록되어 명청 시기까지 전승된다. 이후 의서에 지괴의방이 수록될 때 치료 경험과 관련된 지괴 서사는 빠지지 않고 거론되거나 또는 의방의 명칭 등에 그 흔적을 남겼다. 기존 의학 지식을 보완하는 사례는 물론 기존 의서에 이미 용례가 보이는 의방이더라도 『이견지』 등에 수록된 관련 지괴의안이 출처로 거론되었던 것을 보면, 지괴 서사는 해당 의방이 이후 전승되는 데 결정적 계기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명청 시기 여러 의서에 소개되는 지괴 의방이 그 출처를 『이견지』로 명시하는 경우가 많은 것에서 우리는 이들 의방의 전승 과정에서 『이견지』의 영향력을 확인할 수 있었다.
중국 의학의 발전 과정에서 송대가 가지는 의의는 단연 의학 지식의 확산일 것이며 여기에는 송 조정의 노력도 있었지만 개별 사대부의 활약을 빼놓을 수 없다. 많은 연구에서 이미 송대 인쇄술의 발전과 사대부의 의학에 대한 관심 그리고 다양한 사찬 의서의 편찬 등을 거론했다. 더불어 이의 결과로 나타난 송대의 의학 전통은 진맥 중심의, 내과학 중심의, 학술적 의학 경향이 강세를 보인다고도 했다. 송대 특히 남송 시대 적지 않은 수의 지괴의안의 출현은 송대 의학 지식의 축적과 확산에 대한 사대부의 활약과 참여의 양상을 더욱 다각적으로 조명할 수 있게 해준다. 즉 사대부들의 괴이 현상에 대한 남다른 관심과 이를 사실적으로 기록하려 했던 그들의 지괴 태도, 이를 배경으로 나타난 남송 지괴의안의 다량 출현은 송대 학술적 의학의 발전 경향과는 또 다른 결의 전통을 확인시켜주었다. 병자가 일상에서 겪은 괴이한 치료 경험과 그 서사에 기댄 의학지식 전승의 ‘또 하나의’ 전통을 확인하게 해주었다. 그리고 그것의 명청 시대로의 전승은 이러한 전통이 이후 시기까지 영향을 미쳤음을 말해준다.
지식의 축적과 전승에서 ‘안’이 가지는 역할은 상당하다. ‘경전’과 ‘실천’의 중간 위치로서 ‘안’의 의미를 생각할 때, 송대 지괴의안은 당시 의학의 ‘경전’ 지식을 보완하고 확산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지괴의안의 이후 명청 시대 의서로의 수록은 ‘안’의 지식이 의학 지식의 확장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그 역동성을 여실히 보여주며 괴이한 치료 경험의 서사라는 ‘또 하나의’ 전통의 힘을 보여준다.

Notes

1) 梁其姿의 연구에 따르면, 송대 인쇄술의 발전, 과거제도와 관련된 士族의 등장, 신유학의 발전 등을 배경으로 송대 의학 지식의 전승이 문헌 중심의 또는 진맥이나 처방 중심의 ‘학술적’ 의학 중심으로 발전하여 저서의 편찬을 통한 학설의 논증과 전파에 주목하는 ‘학술성’ 의학이 발전하였고, 이와 동시에 외과나 안과 및 침술 등 기술적 지식으로 여겨지는 부분은 ‘俗醫’의 영역으로 넘어가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분리는 청대까지 지속되었다고 하였다(Leung, 2003; 梁其姿, 2012: 3-28).

2) 〈표 1〉과 〈표 2〉는 송대 지괴의안이 집중적으로 수록된 『이견지』와 『의설』의 것을 정리한 것이며, 〈표 3〉은 그 외 송대 의서에 소개된 지괴의방을 정리한 것이다.

3) 周云逸은 이야기 속 꿈을 통해 신으로부터 의방을 직접 받은 자는 의학 지식을 장악하지 못했고, 꿈에서 얻은 의방의 구체적 내용은 서사자(사대부)의 의학 지식에 기원한다고 하였다(周云逸, 2019: 274).

4) 『夷堅志·乙志』 권1, 「夷堅乙志序」, 中華書局, 2005, 185쪽.

5) 『夷堅志·支庚』 권1, 「夷堅支庚序」, 1135쪽.

6) 『夷堅志·甲志』 권17, 「夢藥方」, 150쪽.

7) 『夷堅志·甲志』 권17, 「土偶胎」, 「永康倡女」, 「人死爲牛」, 「倪輝方技」, 「解三娘」, 「夢藥方」, 「孟蜀宮人」, 「魚腹佛頭」, 146-151쪽.

8) 『夷堅志·을지』 권1, 「更生佛」, 186쪽. 『夷堅志·을지』 권7, 「虞并甫奏章」, 244쪽.

9) 吐血로 고생하고 있던 秀州 進士 陸迎은 꿈에 관음에게서 의방을 받았고, “꿈에서 깬 후 붓을 들고 그것을 썼다.” 『의설』 권3, 「治吐血」, 中國中醫藥出版社, 76쪽. 장고는 이 일화를 『이견지·庚志』에서 인용했다고 명시하였다.

10) 〈표 1〉의 2번, 5번, 6번, 8번, 13번, 16번, 19번이다.

11) 〈표 1〉의 4번이다.

12) 『이견지·삼지신』 권5, 「螺治閉結」, 1424쪽; 『이견지·병지』 권16, 「異人癰疽方」, 505쪽.

13) 『이견지·정지』 권15, 「夢龜告方」, 661쪽.

14) 『의설』 권3, 「治吐血」, 76쪽. 장고는 이 일화를 『이견지·庚志』에서 인용했다고 명시하였다.

15) 『이견지재보』 「治痰喘方」, 1789쪽.

16) 唐愼微는 『嘉祐本草』와 『本草圖經』을 저본으로 삼아 전대 각 의서, 경사, 불전, 도장의 본초 지식을 참고하고 민간의 험방 등을 더하여 『證類本草』를 편찬하였다. 송 철종 원풍 년 간(1078-1085) 처음 완성된 후, 원우 소성 연간(1086-1098) 증보되었다. 송 휘종 대관 2년(1108), 艾晟이 陳承의 『本草別說』을 삽입하고, 이름을 고쳐 『大觀經史證類備急本草』 라고 하였다. 휘종 정화 6년(1116) 조효충이 교정 간행하여 『政和新修經史證類備用本草』라고 하였다. 장존혜는 남송 이종 순우 9년(1249) 『정화본초』를 중수하면서, 순서대로 구종석의 『본초연의』 내용을 삽입하여 이름을 『重修政和經史證類備用本草』라고 하였다. 본고에서 ‘『증류본초』’는 『重修政和經史證類備用本草』를 가리킨다.

17) 이 일화는 후에 산일되었으나 동일한 일화가 장고의 『의설』에서 보이며 장고 역시 『이견지』를 그 출처로 명시하고 있기에 『의설』의 기록을 통해 그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의설』 권3, 「人參胡桃湯」, 73쪽. 현 중화서국본 『이견지』는 명대 焦竑의 『焦氏筆乘』 권5를 출처로 밝히며 이 일화를 「재보」에 수록하였다. 『이견지재보』 「治痰喘方」, 1789쪽.

18) 『외대비요』 권9, 「欬嗽」, 권10 「肺痿肺氣上氣欬嗽」, 人民衛生出版社, 1996, 253-301쪽.

19) 『태평성혜방』 권6, 「治肺氣喘急諸方」, 人民衛生出版社, 2020, 110-111쪽; 권17 「治熱病喘急諸方」, 330-331쪽; 권18, 「治熱病咳嗽諸方」, 338-339쪽. 이외 권46은 각종 “咳嗽”에 대한 의방을 싣고 있는데(961-982쪽), 역시 호도의 용례는 없었으며, 특히 「咳嗽喘急諸方」에서도 찾기 어려웠다.

20) 『정화성제총록』 권48, 「肺藏門·肺氣喘急」, 人民衛生出版社, 2019, 612-613쪽; 권63, 「痰飮門」; 권64, 「痰飮門」, 770-788쪽; 권65, 「咳嗽門」; 권66, 「咳嗽門」, 789-813쪽.

21) 『태평혜민화제국방』 권4, 「治痰飮(附咳嗽)」, 人民衛生出版社, 2007, 103-116쪽.

22) 『천금요방』 권26, 「食治·果實第二·胡桃」: “胡桃: 味甘·冷·滑, 無毒. 不可多食, 動痰飮, 令人惡心·吐水·吐食”, 山西出版集團·山西科學技術出版社, 2010, 763쪽.

23) 『식료본초』 권上, 「호도」, 人民卫生出版社, 1984, 53쪽.

24) 『증류본초』 권23, 「호도」, 華夏出版社, 1993, 574쪽.

25) 『본초강목』 권30, 「호도」, 人民衛生出版社, 1977, 1803-1804쪽.

26) 『본초강목』 권30, 「호도」, 1804-1805쪽.

27) 『의설』 권3, 「治吐血」, 76쪽. 『의설』은 『이견지』를 출처로 명시.

28) 『증류본초』 권14, 「益智子」, 419쪽.

29) 장고 『의설』에서는 이 의안의 제목을 “治吐血”로 하였고(76쪽), 명대 『명의유안』 에서는 “血症”에 수록하였다(310쪽).

30) 『본초강목』 권14, 「益智子」 “主治”; “遺精虛漏, 小便余瀝, 益氣安神, 補不足, 安三焦, 調諸氣. 夜多小便者, 取二十四枚碎, 入鹽同煎服, 有奇驗.(志) 治客寒犯胃, 和中益氣, 及人多唾.(李杲) 益脾胃, 理元氣, 補腎虛滑瀝.(好古) 冷氣腹痛, 及心氣不足, 夢泄赤濁, 熱傷心系, 吐血血崩諸證.(時珍)”, 871쪽.

31) 『본초강목』 권14, 「益智子」, 872쪽.

32) 『외대비요』 권2, 「伤寒吐唾血及下血方三首」, 85-86쪽; 『외대비요』 권28, 「蛊吐血方一十首」, 764-765쪽; 『외대비요』 권29, 许仁则疗吐血及堕损方三首」, 784-785쪽; 『외대비요』 권38, 石发吐血衄血方七首」, 1060-1061쪽. 여기에 수록된 의방에서 익지의 활용 사례를 찾기 어려웠다.

33) 『태평성혜방』 권37에서는 “吐血”과 관련한 여러 의방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데 이중 익지를 사용한 사례를 찾지 못하였다. 『태평성혜방』 권37, 767-778쪽.

34) 『정화성제총록』 권68, 「토혈문」, 829-836쪽; 『정화성제총록』 권69, 「토혈문」, 837-842쪽. 여기에 수록된 의방에서 익지를 사용한 사례는 찾지 못하였다. 『정화성제총록』 권188, 「식치토혈」(2133-2134쪽)에서도 익지의 용례를 찾지 못하였다.

35) 『태평혜민화제국방』 권4, 「大阿膠圓」, 106쪽; 권6, 「龍腦鷄蘇圓」, 160쪽; 권8, 「必胜散」, 218쪽; 권8, 「導滯散」, 218쪽 등이 토혈과 嘔血 치료 의방이나 익지를 찾기 어려웠다.

36) 『본초강목』 권9, 「웅황」, 537쪽.

37) 『본초강목』 권11, 「蓬砂」, 660쪽.

38) 『본초강목』 권14. 「莎草·香附子」, 889쪽; 894쪽. 이시진은 陳自明의 『外科精要』를 출처로 밝히며, ‘獨勝散’을 소개하였는데, 16번 의안의 의방과 동일하며 16번 의안이 시기적으로 더 이르다.

39) 『이견지·병지』 권13, 「곽단우」, 475-476쪽.

40) 『증류본초』 권16, 「熊脂」, 440쪽.

41) 『본초강목』 권51, 「熊」, “膽”, 2840쪽.

42) 실제로 이 의방은 주밀, 『제동야어』 “경험방”에 보인다. 주밀, 『제동야어』 권4 「경험방」, 『송원필기소설대관』, 5478쪽.

43) 『외대비요』 권21, 「眼疾」, 561-583쪽.

44) 『태평성혜방』 권32; 권33, 안질 관련 의방, 611-672쪽.

45) 『성제총록』 권102-113, 「眼目門」 1206-1320쪽. 그 가운데 “점안웅담고방”(1257쪽) “웅담환방”(1270쪽) 등이 있지만 웅담원과 유사한 의방은 보이지 않았다.

46) 『태평혜민화제국방』 권7, 「治眼目疾」, 184-192쪽.

47) 『태평혜민화제국방』 권10, 「治小兒諸疾」, “至聖丹”, 267쪽; 권10 「治小兒諸疾」, “熊膽圓”, 270쪽. 물론 곽단우의 웅담원과는 다른 방제이다.

48) 본문의 Ⅳ장 설명 참조.

49) 『이견지·三志壬』 권8, 「佛授羊肝圓」, 1527-1528쪽.

50) 『증류본초』 권19, 「天鼠屎」, 482쪽. 야명사는 당시 ‘夜明砂’, ‘夜明沙’, ‘天鼠屎’, ‘鼠法’, ‘石肝’, ‘黑砂星’ 등으로 불리었다.

51) 『외대비요』 권21, 「眼疾」, 561-583쪽. 『외대비요』 에서는 야명사를 ‘鼠屎’로 표기하였다.

52) 『태평성혜방』 권32; 권33, 611-672쪽. 이 중 야명사가 보이는 것은 『태평성혜방』 권33, “治靑盲, 明目, 柏葉圓”(648쪽)에서 백엽과 야명사를 죽엽탕 또는 죽과 함께 복용하라고 되어 있다.

53) 『정화성제총록』 권102-113, 「眼目門」, 1206-1320쪽.

54) 『정화성제총록』 권109, 「眼目門」, “治肝腎氣虛, 眼生翳晕, 及見黑花, 宿鳩丸方”(1277쪽)에서 양간, 목적, 선각을 함께 사용하고 있다.

55) 『태평혜민화제국방』 권7, 「治眼目疾」, 184-192쪽.

56) 『본초강목』 권48, 「天鼠屎」, 2639쪽.

57) 『이견지·三志辛』 권5, 「螺治閉結」, 1424쪽.

58) 『증류본초』 권22, 「田中螺汁」, “今按陳藏器本草云: 田中螺, 煮食之, 利大小便”, 537쪽.

59) 먼저, 『외대비요』 권27, 「淋幷大小便難病」(725-750쪽)에서는 소라의 용례가 보이지 않는다. 『태평성혜방』 권58(1224-1248쪽) 중 소변(대변)불통 관련 의방에서도 소라의 용례가 보이지 않는다. 다만, 『태평성혜방』 권96 “治痟渴饮水日夜不止, 口干小便数方”(2145쪽)에서 田中螺를 활용하고 있는데 내복약으로 복용하는 것이다. 『정화성제총록』 「대소변문」에서도 소라 용례가 보이지 않는다. 『정화성제총록』 권95~97 「대소변문」, 1131-1155쪽. 다만, 『정화성제총록』 권188 「식치문」 “食治消渴”(2134쪽) 중 “治卒患消渴, 小便利數, 田螺飮方”에서 田螺를 내복약의 형식으로 사용하고 있다.

60) 『본초강목』 권46, 「田螺」, 2548쪽.

61) 장고가 『의설』에 이 일화를 수록할 때 출처를 『이견지』로 밝히고 있다. 『의설』 권7, 「湯火金瘡·大黃療湯火瘡」, 268쪽.

62) 『夷堅志·갑지』 권2, 「神告方」, 17-18쪽.

63) 『외대비요』 권29, 「火燒瘡及火油天火瘡方三首」, 792-793쪽.

64) 『태평성혜방』 권68, 「治湯火瘡諸方」, “治湯破瘡方”, “川大黃, 柏白皮(等分), 右件藥搗羅爲末, 以生地皇汁調涂之”, 2135쪽. 『태평성혜방』 권68, 「治湯火瘡諸方」, “治火燒湯潑爛, 熱毒疼悶神效方”, “右取大黃末細硏, 以蜜和如泥, 塗之, 疼痛立止”, 2135쪽.

65) 『정화성제총록』 권135, 「湯火瘡」, “治火燒瘡方. 大黃末. 右一味, 以冷水調塗之. … 治火燒瘡, 止痛令無瘢痕方. 右以釅醋傾淨地上, 磨取醋泥傅之. 昔有人抱孩子擁爐, 不覺落火上, 遽以醋泥傅之, 至曉不痛, 亦無瘢痕”, 2248쪽.

66) 이 의방은 명대 이시진이 『본초강목』 권17 「大黃」에서, 대황의 효능을 설명할 때 ‘湯火傷灼’에 좋다고 지적하며 “莊浪大黃生硏, 蜜調涂之. 不惟止痛, 又且滅瘢. 此乃金山寺神人所傳方. 洪邁夷堅志”(1121쪽)라고 언급하였다. 이시진은 이 의방을 ‘金山寺神人所傳方’이라고 명명하고 그 출처를 『이견지』로 밝히고 있다. 그러나 식초가 아니라 꿀이라고 적고 있다.

67) 『이견지·支甲』 권6, 「서호여자」, 754-755쪽.

68) 『본초강목』 권12, 「출」, 734쪽.

69) 『본초강목』 권12, 「출」, 738-739쪽.

70) 예를 들면, 『의방총화』 권2, 「平胃散能去邪」(51쪽) 등. 이와 관련하여 본문의 Ⅳ장 설명 참조.

71) 『이견지·병지』 권16, 「이인옹저방」, 505쪽.

72) 『이견지·정지』 권15, 「夢龜告方」, 661쪽.

73) 『태평성혜방』 권67, “治踠折破骨傷筋諸方”, “曾有人傷折, 宜用生龜, 尋捕得一龜, 未用之間, 患人忽然睡. 夢見龜告言曰, 勿相害, 吾有奇方可療. 於夢中龜授借方. 生地黃, 藏瓜薑糟(一斤), 生薑(四兩, 切), 右件藥, 上都炒令勻熱, 以布裹罨傷折處, 冷則易之. 極妙也.”, 2083쪽.

74) 『普濟本事方』 권6, 「金瘡癰疽打撲諸瘡破傷風·夢龜散」, “曾有人傷折, 宜用生龜, 尋捕一龜將殺之. 患人忽夢見龜告言曰: “勿相害, 吾有奇方可療. 於夢中遂授此方”, 中國中醫藥出版社, 97쪽.

75) 이와 관련하여 본문의 Ⅳ장 설명 참조.

76) 『이견지재보』 「生薑治嗽」, 1791쪽.

77) 『이견지재보』 「仙傳治疫方」, 1790쪽.

78) 『이견지』 「治目疾方」, 1792쪽; 『의설』 권3, 「呂眞人治目疾」, 76-77쪽.

79) 『이견지재보』 「神告傷寒方」, 1789-1790쪽; 『이견지·支景』 권9, 「이삼처」, 952-953쪽.

80) 장고의 『의설』 이전은 지방관을 역임한 바 있는 王璆이 慶元 2년(1196) 편찬한 『是齋百日選方』이 대표적이고, 장고의 『의설』 이후로는 楊士瀛이 景定 5년(至元元年, 1264)에 편찬한 여러 의자들의 험방을 수록한 『仁齋直指方』, 남송 朱佐가 咸淳 2년(至元 3年, 1266)에 편찬한 방서로서 역대 의서 속의 의방뿐만 아니라 사대부 집안에서 내려오는 秘方과 필기 소설 등의 의방을 수록한 『類編朱氏集驗醫方』 등이 대표적이다.

81) 『是齋百一選方』 권6, 「泄痢」, 上海科學技術出版社, 2003년, 122쪽.

82) 『의설』 권3, 「신방·夢獲神方」, 71쪽.

83) 『普濟方』 권207, 「泄痢门·總論」 “治泄痢方 (『百一選方』)”: 『夷堅甲志』云, 昔虞丞相, 自渠州被召, 途中冒暑得疾, 泄瀉連月, 夢壁間有韻語藥方一紙…”, 人民衛生出版社, 1983, 3013쪽.

84) 『명의유안』 권4, 「瀉」, 150쪽.

85) 『본초강목』 권9, 「웅황」, 536-537쪽.

86) 『證治准繩·類方』第六册 「泄瀉·玉龍丸」, 中國中醫藥出版社, 1997, 542-543쪽.

87) 『景岳全書』 권24, 「心集·痢疾·附案」, 浙江古籍出版社, 2013, 737쪽.

88) 『本草備要』 권4, 「金石水土部·雄黃」, 人民衛生出版社, 2005, 209쪽; 『本草從新』 권5상 「金石部·雄黃」, 天津科學技術出版社, 2003, 155쪽.

89) 『蘭臺軌範』 권4, 「痢」, “雄黄丸”, 中國中醫藥出版社, 2008, 101쪽.

90) 『시재백일선방』 권5, 「관음인삼호도탕」, 97쪽.

91) 『의설』 권3, 「人參胡桃湯」, 73쪽.

92) 『仁齋直指方』 권8, 「喘嗽」, 259쪽.

93) 『類編朱氏集驗醫方』 권5, 「咳嗽」, 109쪽.

94) 『명의유안』 권3, 「喘」, 123쪽.

95) 『본초강목』 권30, 「호도」, 1804-1805쪽.

96) 『焦氏筆乘』 권5, 「醫方」, 中華書局, 2008, 207쪽.

97) 『證治准繩·類方』 第二册 「咳嗽」, “觀音應夢散 《夷堅志》”, 410쪽.

98) 『蘭臺軌範』 권4, 「咳嗽」, “觀音應夢散 《夷堅志》”, 116쪽.

99) 『의방총화』 권4, 中國中醫藥出版社, 2015, 101쪽.

100) 『의설』 권3, 「夢藥愈眼疾」, 72쪽; 『명의유안』 권7, 「目」, 283쪽.

101) 『의설』 권4, 「治內障眼」, 137쪽; 『명의유안』 권7, 「目」, 285쪽; 『본초강목』 권48 「天鼠屎」, 2639쪽.

102) 『의설』 권3, 「吕眞人治目疾」, 76쪽; 『명의유안』 권7, 「目」, 283쪽.

103) 『의방고』 권5, 「안질문」, 中國中醫藥出版社, 2007, 240쪽, 241쪽.

104) 『심시요함』 권5, 「內障」, “熊膽丸”, 上海人民出版社, 1977, 210-211쪽.

105) 『태평성혜방』 권68, 2135쪽.

106) 『靖康紀聞』 권下, 『全宋筆記』 第4編 第4冊, 大象出版社, 140-141쪽.

107) 『靖炎兩朝見聞錄』, 『全宋筆記』 第3編 第5冊, 大象出版社, 192쪽.

108) 『三朝北盟會編』 권86, 上海古籍出版社, 1999, 641쪽.

109) 『이견지재보』 「仙傳治疫方」, 1790쪽.

110) 『시재백일선방』 권7, 「救疫神方」, 137쪽.

111) 『명의유안』 권1, 「溫疫」, 46쪽.

112) 『본초강목』 권24, 「大豆」, 1504쪽.

113) 『의방총화』 권3, 「又宋人仙傳治疫方」, 中國中醫藥出版社, 2015, 82쪽.

114) 『식료본초』 권하, 「大豆」, “若和甘草煮湯飮之, 去一切熱毒氣”, 111쪽; 『증류본초』 권25, 「生大豆」, “涂癰腫”, 58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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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ENDICES

부록

표 1.

『이견지』 수록 지괴의안
Table 1. Zhiguai(志怪) Medical Cases in Yijianzhi
kjmh-31-1-35-app1.pdf

표 2.

『의설』 「神方」 수록 의안
Table 2. Zhiguai(志怪) Medical Cases in Yishuo Shenfang
kjmh-31-1-35-app2.pdf

표 3.

『이견지』와 『의설』 외 송대 의서에 수록된 지괴의방
Table 3. Zhiguai(志怪) Prescriptions in Medical Books of the Song Period excluding Yijianzhi and Yishuo
kjmh-31-1-35-app3.pdf

표 4.

『이견지』 수록 지괴의방 분석
Table 4. An Analysis of Zhiguai(志怪) Prescriptions in Yijianzhi
kjmh-31-1-35-app4.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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