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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J Med Hist > Volume 31(1); 2022 > Article
제임스 스미스(James Smith, 1771-1841)의 두창 박멸의 꿈과 국가백신기구†

Abstract

This article re-examines from a new perspective the efforts of James Smith (1771–1841), a Maryland doctor, to eradicate smallpox in the United States. As one of the few successful cowpox inoculators at the turn of the nineteenth century, Smith recognized the necessity for a public vaccine institution that could ensure the safe production and continuous preservation and circulation of vaccine matter. Thus, he devoted himself to creating statewide and national vaccine institutions funded by the state and federal governments. He established the National Vaccine Institution (NVI), but despite his efforts, the NVI existed only a short time from 1813 to 1822. Previous studies on Smith have focused on the 1813 Vaccination Act (An Act to Encourage Vaccination) and the NVI, and have evaluated them as failed projects or historically missed opportunities. However, this kind of approach does not justly place the act and institutions within Smith’s larger plan and do not fully discuss the role of the NVI in his system of promoting vaccination in the United States. This article analyzes how he responded to the problems hindering cowpox vaccination, including spurious vaccine, failed vaccination, and low public acceptance of cowpox vaccine. In doing so, this study shows that Smith attempted to establish a universal and systematic vaccination system connecting citizens, government, and medical personnel through the NVI, as well as ensuring a safe and regular supply of vaccine.

1. 또 다른 ‘미국의 제너(The American Jenner)’ 제임스 스미스

두창(smallpox)의 예방에 효과가 있는 우두 백신(cowpox vaccine)은 인류 역사상 첫 백신이다. 영국의 의사 에드워드 제너(Edward Jenner, 1749-1823)는 우두 백신의 역사의 첫 장을 열었던 인물로 기록되고 기념되고 있다. 제너는 우두를 처음으로 발견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1798년에 우두 백신의 두창에 대한 예방 효과를 증명해 세상에 공표했다. 그러나 제너에 대한 역사적 기억은 오로지 그가 이룩한 과학적 발견에만 바탕을 두고 형성된 것은 아니었다. 제너는 왕립제너협회(the Royal Jennerian Society), 국가백신기관(the National Vaccine Establishment, NVE), 그리고 개인적인 네트워크를 통해 영국 및 다른 지역으로 백신이 확산되는데 지대한 역할을 했고, 그 공로가 제너에 대한 영웅적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데 크게 기여했기 때문이다.
우두 백신을 처음으로 미국에 도입한 것으로 알려진 인물은 하버드 의대 교수를 역임했던 로드아일랜드 출신 의사 벤자민 워터하우스(Benjamin Waterhouse, 1754-1846)이다. 워터하우스는 1799년 3월 16일 보스턴 지역신문 《컬럼비아 센티넬(Columbian Centinel)》에 “의학에 있어 궁금한 것”이라는 글을 통해 제너의 우두 백신에 대해 알렸다.1) 1800년 7월 워터하우스는 존 헤이가스(John Haygarth, 1740-1827)2)를 통해 받은 제너의 우두 백신을 자신의 다섯 살짜리 아들 다니엘 올리버 워터하우스(Daniel Oliver Waterhouse)에게 접종 했고, 지역 신문은 그가 미국에서 처음으로 백신 접종에 성공했다고 보도했다.3) 워터하우스는 실험 성공 이후 백신을 통한 두창 근절이 가능하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4) 그는 뉴잉글랜드 지역5)에 백신이 보급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고, 1802년에는 백신의 효능을 대중적으로 알리기 위해 보스턴 보건국(the Board of Health)에 백신의 효능을 증명하는 공개실험을 제안했다.
더 나아가 워터하우스는 미국의 세 번째 대통령이었던 토마스 제퍼슨(Thomas Jefferson, 1743-1826, 재임: 1801-1809)에게 백신의 유용성을 알렸다. 제퍼슨은 에드워드 제너의 발견을 윌리엄 하비(William Harvey, 1578-1657)의 발견을 넘어서는 인류사에 공헌한 위대한 발견으로 칭송했다. 제퍼슨은 “미래의 국가는 이 혐오스러운(loathsome) 질병을 단지 역사를 통해 기억할 것”이라며 백신을 이용한 두창 박멸을 확신했고, 미국에 우두 백신을 확산 시키는데 기여했다.6) 워터하우스에 대해 초기 백신 독점 시도, 지역 의사협회와 불화, 엘리트주의적 성향 등에 대한 논란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7) 그는 ‘미국의 제너(the American Jenner)’로 미국인의 기억에 각인되었다.
그러나 19세기 초 ‘미국의 제너’로 불린 또 다른 인물이 있었다(Brooke, 1935: 90). 그는 국가백신기구(the National Vaccine Institution)의 설립에 기여하고 국가백신기구의 대표자로 임명되었던 메릴랜드 엘크톤(Elkton) 출신의 의사 제임스 스미스(James Smith, 1771-1841)였다. 스미스는 1792년 펜실베이니아 칼라일(Carlisle)의 디킨슨 대학(Dickinson College)을 졸업한 후, 동대학에서 1795년에 M. A.를 받았다(Brooke, 1935: 88-89; Bell, 1940: 500). 재학 시절 디킨슨 대학의 창립자이자 18세기 말 의사와 정치가로 명성을 떨쳤던 벤자민 러시(Benjamin Rush, 1746-1813)와 인연을 맺었다. 이후 스미스는 펜실베이니아 대학(University of Pennsylvania)8)에서 의학 강의를 들으며 도제식 의학교육을 받았다.9) 스미스는 펜실베이니아를 떠난 뒤에도 서신 교환을 통해 러시에게서 의학적 조언을 듣는 등 그와 지적 네트워크를 유지했다. 스미스는 볼티모어(Baltimore)에 정착한 후 1800년에 볼티모어 시와 카운티 구빈원(County Almshouse)의 의사(resident physician)가 되었다(Bell, 1940: 500).
이듬해 봄인 1801년 5월 초에 스미스는 영국으로부터 받은 우두10)를 볼티모어 카운티 구빈원에서 7세의 낸시 말쿰(Nancy Malcum)이라는 소녀에게 접종했다. 스미스는 볼티모어 지역에서 처음으로 우두 접종을 시도한 인물은 아니었지만 성공한 인물이 되었다(Bell, 1940: 502).11) 이 시기 우두의 안정적인 생산과 보관의 중요성을 인식한 스미스는 자신의 진료소에 백신기관을 차렸다. 이후 스미스는 두창의 박멸을 위해 백신의 생산과 보관의 업무를 지역사회를 넘어 주(state), 주간(interstate), 그리고 국가(national)의 차원으로 확장 시키려는 시도를 했다. 1809년 제임스 스미스는 메릴랜드 주의 공식 백신 공급자(state agent)가 되었고, 펜실베이니아와 버지니아 의회에도 대표백신 공급자로 임명해 줄 것을 요청했다. 스미스는 또한 1811년에는 콜럼비아 지구(District of Columbia)에 백신을 공급하기 위해 연방의회에 청원서를 제출했다. 1813년에는 연방 의회가 스미스의 청원서를 수락하면서 제임스 매디슨 대통령(1751~1836, 재임 1809~1817)이 그를 국가를 대표하는 백신 공급자(national vaccine agent)로 임명해 국가백신기구(the National Vaccine Institution, NVI)12)가 설립되었다. 그러나 이 국가백신기구는 불과 9년 뒤인 1822년에 의회에서 국가백신기구 설립의 기초를 세운 1813년 법의 폐지가 논의되면서 존폐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 결국 스미스는 제임스 먼로 대통령(1758-1831, 재임 1817~1825)에 의해 대표공급자의 자리에서 해임되었고, 법안 폐지가 결정되면서 국가백신기구 또한 영원히 문을 닫게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미국의 역사가들은 미국 최초의 국가백신기구의 탄생과 운영체계 보다는 그 짧은 존속 기간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 왔다. 따라서 제임스 스미스에 대한 논의도 “놓친 기회,”13) ‘역사적 한계,’ ‘역사적 실패’에 초점을 두고 이루어졌다. 일부 역사가들의 경우 제임스 스미스가 우두 백신의 생산, 보관, 그리고 보급에 기울인 개인적 헌신을 인정하기도 했지만 지금까지 스미스는 유연성과 협력의 의지가 부족한 실패한 행정가, 새로운 의학 기술에 대해 정밀한 안전성 분석을 지양한 경솔한 낙관주의자, 자신의 동료 의료인들이 인식한 우두 백신의 경제적 가치와 이를 둘러싼 경쟁을 인식하지 못하고 백신 접종의 주체를 의료인에서 대중으로까지 확대하려고 했던 평등 주의적 이상주의자, 그리고 일생의 헌신에도 대중적 지지를 받지 못했던 불운한 인물로 평가되어 왔다(Brook, 1935; Bell, 1940; Brown, 1951; Singla, 1998; Green, 2014; Lanzarotta and Ramos, 2018). 1813년 백신법 폐지의 원인을 노스캐롤라이나의 타보로(Tharborough)사건14)이나 1820년대의 변화하는 미국의 정치문화15)에서 찾는 연구도 있지만, 국가백신기구가 채 10년의 시간을 채우지 못하고 사라지게 된 이유에 집중한 이러한 연구들에서 묘사된 제임스 스미스의 이미지는 그와 연관된 미국인의 기억에서 ‘미국의 제너’라는 수식어를 희미하게 만들었다.
따라서 국가백신기구의 짧은 존속 기간과 실패라는 프레임 속에서 그 행적이 논의되는 가운데 제임스 스미스의 우두백신과 관련된 이상과 계획에 대한 정당한 평가가 이루어지지 못했다. 제임스 스미스가 시, 주, 연방 정부에 여러 차례 기획안을 제출했음에도 불구하고, 백신기구와 관련된 그의 이상과 계획 자체를 상세하게 분석한 연구는 지금까지 없었다. 제임스 스미스는 지금까지 역사가들이 평가해 왔던 것보다 훨씬 더 정교한 계획을 가지고 백신의 국가적 확산이라는 문제에 접근했었다. 그는 사적 네트워크와 펀드에 의존했던 초기 백신 생산과 운송, 그에 따른 재정의 문제를 공적 영역으로 편입시키기 위해 노력했던 인물이었고, 종국적으로 한시적이기는 했지만 최초로 연방정부의 개입을 실현시킨 인물이었다. 스미스는 두창의 국가적 박멸이라는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의 달성을 위해 체계화된 프로그램을 구상한 인물이었다. 또한 그는 이 프로그램의 실현에 있어 단순히 국가로부터 재정 지원을 받는 것을 넘어서 연방이 구축해온 사회적 인프라를 효율적으로 이용해 질병의 확산을 통제하는 새로운 백신 공급과 접종 및 기록 관리 시스템을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인물이었다. 스미스의 국가백신기구 플랜에 대한 세부적인 논의 없이 1813년 백신법 폐지의 진정한 원인과 스미스의 책임을 명확하게 논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에 본 논문에서는 후속 연구에서 다룰 1813년 백신법과 스미스의 국가백신기구 폐지에 대한 논의에 앞서 스미스의 백신기구 관련 프로그램의 세부 내용을 분석하려고 한다.16) 이를 위해 그의 백신기구 운영 방안이 시 단위의 임시 기관 운영에서 연방차원의 상설 기구의 설립까지 진화해 가는 모습을 살펴볼 것이다. 더불어 이러한 변화 속에서 스미스가 두창에 대항한 우두 백신 접종의 확산, 그리고 궁극적으로 전국적인 두창의 박멸이라는 목표에 다가가기 위해 이와 관련된 다양한 주체인 국민, 정부, 의료인 간의 관계를 어떻게 국가백신기구를 중심으로 재정립하려고 했는지를 분석한다.

II. 1802, 그 시작-볼티모어 시 백신기구

1801년 백신 실험 성공 이후 제임스 스미스는 자신의 진료소가 있는 볼티모어 카운티 구빈원에서 백신 접종을 계속했다. 그는 이 기간 동안 백신 물질의 공급과 보관에 있어 장애와 백신에 대한 대중의 불신으로 인한 접종환자 확보의 어려움을 경험했다. 1802년 스미스는 이러한 문제점을 개선할 목적으로 지역 공동체와 정부에 도움을 요청하기로 했고, 3월 24일 “백신 접종의 혜택을 어려운 환경에 있는 빈민과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확대하기 위한 계획(A plan to extend the benefits of the Vaccine Inoculation to the poor, and to all others, placed in life, under the pressure of difficult circumstances)”이라는 청원서를 볼티모어 시에 제출했다.
이 청원서에서 스미스는 우두 백신의 두창 예방 효과를 주장하며 백신의 지속적이고 확실한 확보와 백신 접종의 확대를 위해 다음과 같은 계획을 제시했다. 우선, 스미스는 자신이 볼티모어 시 중앙에 접근성이 좋은 장소를 골라 백신 접종소를 설립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장소에서 그는 매일 오전 8시에서 9시 사이에 근무를 하며 우두 백신을 접종하고 우두 백신의 접종을 후원하는 프로그램에 대해 알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정보를 제공할 예정이었다. 이 장소에 방문이 어려운 시민을 위해서는 펠스 스트리트(Fell’s-Street)에 그의 형제인 존 스미스(Dr. John D. Smith)의사가 진료소를 하나 더 운영할 계획이었다.17) 백신을 접종 받은 환자는 2주 동안 매일 아침 또는 약속된 날짜에 스미스를 찾아와야 했는데, 이는 백신이 잘 접종 되었는지 확인하고, 스미스가 다른 환자를 위해 신선한 백신물질을 확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스미스는 우두접종 후에도 여전히 두창 감염에 대해 걱정하는 환자가 있을 경우에는 무료로 인두접종을 해 줄 것이라고 약속했다. 더불어 백신 접종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불행한 사고(unfortunate accident)”를 미연에 예방하기 위해서 스미스는 환자의 나이, 접종 시간, 기타 접종 케이스와 관련된 특기 사항, 후원자 등에 대한 정보를 정기적으로 기록할 것을 공약했다. 더불어 스미스는 모든 후원자 및 의사들에게 백신 물질을 무료로 제공한다는 점, 그리고 후원에 관련된 규정을 추가했다.18)
이와 함께 스미스는 자신의 계획서에 “볼티모어 시와 인근의 시민들에게(To the Citizens of Baltimore and Vicinity)”라는 호소문을 덧붙여 백신기관의 필요성과 정당성을 설명했다. 그는 크게 두 가지, 도덕적 당위성과 의학적 필요성에 기반을 두고 자신의 계획을 피력했다. 우선 인도주의적 측면에서 스미스는 “18세기의 가장 행복한 발견(the most happy discovery of the eighteenth century)”이라고 칭한 우두의 혜택이 인류에게 매우 제한적으로 제공되고 있다고 안타까움을 표현했다.19) 스미스는 후원제도를 통해 빈민의 우두 접종을 늘릴 계획을 제안했는데, 후원자(patron)는 1년에 $1(2021년 가치로 $25.85)당 5명의 사람을 추천할 수 있었고, $2 이상을 후원하는 사람이 추천할 수 있는 빈민의 수에는 제한이 없었다. 그러나 후원자가 자기 자신이나 자신의 가족을 추천할 경우 연간 $1 당 단지 1명의 사람만 추천할 수 있었다.20) 스미스는 이러한 차등가격제와 후원제도를 통해 “빈민과 신의 시혜를 덜 받아 온 다른 이들”에게 백신 접종을 확대하려 했다.21)
의학적 측면에서 스미스는 자신의 계획을 통해 우두 백신의 공급이 단절되는 문제를 해소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청원서에서 스미스는 현재 백신 물질을 중단 없이 보관하는 것은 매우 어렵고 이는 백신을 접종받고자 하는 환자에게도 많은 불편을 초래한다고 설명했다. 일단 의사들이 이따금 개인적으로 백신 접종을 할 때 백신을 확보하는데 어려움이 있었는데 이는 종종 다음에 백신을 받을 환자가 없는 상황에서 백신 접종이 이루어져 보존된 백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22)
우두 백신의 초기 역사에 해당하는 이 시기 동안에 백신의 확보와 저장은 의사들에게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우선 우두에 걸린 소는 제너의 실험이 이루어진 영국의 특정 지역과 유럽의 아주 일부 지역에서만 산발적으로 매우 드물게 발견되었다(Rusnock, 2009: 21-22). 따라서 백신 접종을 하기 위해서는 우두가 있는 곳 또는 미국 내에서 백신 접종에 성공한 의사에게 백신의 우송을 요청해야 했다. 19세기 초 이러한 대서양을 가로지르는 운항은 한 달 정도가 소요되었고, 국내에서의 이동도 오래 걸려 종종 애써 접종한 백신의 효과를 보지 못하는 일도 있었다. 백신을 체외에서 보관하는 과학 기술이 이후 시기와 같이 발달하지 못한 초기 백신 시기에 신선하게 백신을 보관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일단 백신 접종이 성공한 이후에 사람과 사람 사이에 접종(armto-arm)을 통해 백신을 보관 하는 것이었다. 이 외에 좀 더 장기적인 보관이 필요한 경우 유리판 사이에 우두 물질을 보관하거나 실린더, 의료기구나 실에 적셔서 보관하는 방법 등이 이용되었다(Rusnock, 2009: 24-27).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의사와 환자 모두에게 너무 나도 많은 불확실성을 야기했다. 스미스에 의하면 의사들이 서로 백신 물질을 빌려 주기도 했지만 이러한 방식이 언제나 가능하거나 확실한 것은 아니었다. 한편 이러한 우두 백신 공급과 보관에 있어서 어려움은 환자들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일부 환자들의 경우 성공적으로 백신을 접종 받기까지 여러 번에 걸친 불필요한 접종을 감수해야 했기 때문이다.23) 이에 스미스는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상설 백신 접종소를 마련하고, 의사와 환자가 정기적으로 접종소에 방문하는 시스템을 만들어 백신의 공급에 있어 불안전성과 불확실성을 극복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청원서에서 언뜻 분리되어 있는 것 같은 위의 두 요소-인도주의와 의학적 필요성-간의 관계는 그리 단순하지 않다. 공동체 중심의 산업화 이전 미국 사회에서 빈민구호(poor relief)는 사적영역과 공적영역에서 함께 진행되었다. 이 시기에는 빈민 지원을 위한 사적 구호 활동과 함께 카운티와 시 등의 지역 행정기관의 후원을 받는 구빈원, 빈민원 등의 시설이 존재했다. 이러한 시설들은 종종 진료소와 작업장과 같은 부대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미국에서 이러한 빈민구호 시스템과 연계된 공공의료 제도에 두창 예방 의료서비스가 통합된 것은 18세기 중반이었다. 18세기 내내 인두접종 비용의 문제는 지역사회 내 유산자와 무산자 간의 갈등의 원인이 되었고 매사추세츠 식민지의 보스턴이 1764년 두창 유행이 있던 해 처음으로 타운 및 인근 지역 주민을 위한 인두접종을 실시했다. 보통 빈민에게 무료로 인두를 접종해 준 의사들은 나중에 타운에 비용을 청구했다(Lee, 2016: 19-20).
그러나 19세기 전반 우두 백신의 시대에 이러한 무료접종(gratis inoculation)은 다른 의미를 포괄하고 있었다. 초기 백신 시대에 암-투-암 방식으로 백신을 지속적으로 생산하기 위해서는 비면역인구가 계속적으로 공급되어야 했었다. 그러나 백신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이 아직 대중화되지 않았던 이 시기에 두창이 유행하지 않는 한 우두 백신을 접종 받고자 하는 사람의 수는 적었고, 빈민의 경우는 백신 접종에 드는 비용을 감당할 수도 없었다. 17세기에서 19세기 초 보스턴의 공중보건제도의 발달에 대해 연구한 역사학자 존 블레이크(John Blake)에 의하면 이러한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1802년 9월에 제임스 스미스 보다 조금 늦게 보스턴의 젊은 의사들도 스미스와 유사한 백신 접종소를 운영하고자 했었다. 12인의 보스턴 의사들은 ‘빈민 무료 접종’을 통해 백신 접종의 비용을 감당할 수 없는 빈민을 돕는 것과 동시에 우두의 지속적인 공급을 유지하고 우두 접종에 대한 경험을 축적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보스턴 지역의 보건국(the Board of Health)에 접종소 운영을 허가해 줄 것을 청원했다(Blake, 1959: 181-182). 이들의 청원 내용과 비교해 볼 때 볼티모어 카운티 구빈원의 의사였던 제임스 스미스가 ‘인도주의’ 또는 ‘의학적 필요성’ 그 어느 쪽에 더 무게를 두고 이 계획서를 제출했는지는 남겨진 사료로 파악하기 어렵지만 동물백신이 등장하기 이전인 초기 백신 시대에 존재했던 지속적인 백신 물질 확보에 있어서의 어려움이 빈민에 대한 사회적 구호와 백신 접종 간의 관계에 새로운 뉘앙스를 부여한 것은 무시할 수 없는 사실이다(Green, 2014: 318-319).
제임스 스미스의 청원 내용에 대해 1802년 3월 25일 볼티모어 시장 제임스 칼훈(James Calhoun)을 비롯한 7인의 볼티모어 카운티 빈민관리위원(Trustees of the Poor of Baltimore County)이 허가를 했다. 30일에는 28인의 볼티모어 의사들이 백신접종을 허가했고, 우두 백신이 두창에 대한 예방 효과가 있음을 확인해 스미스의 백신 접종 기관 설립이 승인되었다. 제임스의 청원서, 그리고 시장, 빈민관리위원, 지역의사들의 승인 내용은 모두 함께 인쇄되어, 4월 2일 지역신문 «공화주의자 또는 반 민주당주의자(Republican, or Anti-Democrat)»를 통해 볼티모어 시민에게 공개되었다.24) 보스턴의 백신 접종소는 사람들이 찾아오지 않아 결국 1년 뒤에 문을 닫게 되지만, 볼티모어의 제임스 스미스는 접종소를 운영했던 경험을 토대로 더 큰 꿈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Blake, 1959: 182).

III. 1809~1813, 국가백신기구의 탄생

1809년 제임스 스미스는 백신기관 운영을 지원하는 공적 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노력을 본격화했다. 이 즈음 스미스의 전환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스미스 자신의 기록이나 동기를 논의하는 2차 사료는 지금까지 없다. 하지만 1809년 여름 스미스는 제임스 매디슨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에서 공적지원 없이 자신이 원하는 만큼 백신을 확산 시키는 것이 어려웠다는 고백을 하고 있는데, 1년 전인 1808년 7월 9일에 영국에 국가백신기관(The National Vaccine Establishment)이 설립되었고, 이 소식이 제임스 스미스로 하여금 볼티모어 시를 넘어서는 더 큰 규모의 공공 기관이 백신 문제에 대한 지원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자극제가 되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25)
스미스가 백신기관 운영을 위해 가장 먼저 지원을 요청한 곳은 메릴랜드 주(state)정부였다. 1809년 5월 그는 메릴랜드 입법부에 관련 내용을 담은 청원서를 제출했다. 제임스 스미스는 백신을 지속적으로 생산하고, 백신 접종 의사와 메릴랜드 주의 시민에게 무료로 백신을 공급하는 조건으로 메릴랜드 주의회에 1년에 $1,000(2021년 현재 가치로 $22,490.00달러)를 지원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러한 청원 내용에 응답해 메릴랜드 주의회는 스미스를 메릴랜드 주의 대표백신공급자로 지정했고, 스미스는 6년 동안 메릴랜드 시민에게 무료로 백신을 제공하게 되었다. 그러나 메릴랜드 주의회는 스미스의 노력에 대한 보상으로 직접 재원을 제공하는 것은 거부했다. 대신 복권(lottery)을 허용했는데, 스미스는 복권 티켓을 판매해 $30,000(2021년도 기준 $674,670.32)까지 재원을 마련할 수 있는 권리를 허가 받았다.26) 18세기 미국에서 복권은 대중적 게임이면서, 종종 공공재 마련에 이용된 모금활동 방법이었다(Martin, Wilkins, Johnston, and Porter, 1924: 66-93). 스미스의 복권은 2회에 걸쳐 추첨이 진행 되었고, $12,497.20(2021년도 기준 $281.023.42)의 순 합계(nett sum)를 기록했다(Singla, 1998: 41-42).27)
메릴랜드 하원이 스미스의 기획안을 거의 만장일치로 통과 시켰지만, 상원이 비용문제로 고민하고 있는 기간 동안 스미스는 미국의 최고 통수권자에게 백신기구 설립에 관련된 편지를 썼다. 그는 매디슨 대통령에게 보낸 1809년 6월 18일자 편지에서 “...현재 두창 유행을 저지하기 위해, 그리고 궁극적으로 이것[두창]을 우리의 행복한 국가로부터 근절(extirpate)하기 위해” 필요한 백신 관리와 백신 접종 확산을 위한 계획에 대해 대통령이 관심을 가져줄 것을 부탁했다.28) 스미스는 인구가 많은 도시에서, 그리고 그 보다 시골이나 작은 도시에서는 더 쉽게, 계절에 상관없이 백신 접종을 통해 “두창의 진행을 차단”하고 미국에서 두창의 존재가 완전히 사라지게 할 수 있다고 두창의 박멸을 확신했다.29)
또한 스미스는 우두 백신의 효능을 확신하며 대통령에게 백신 접종의 편의성에 대해 설명했다. 접종을 도울 의사를 구할 수 없는 신사(Gentlemen)의 경우 자신과 가족을 스스로 두창으로부터 지킬 수 있는데, 이는 “적절한 안내(proper direction)”가 있으면 “어떤 지식인(any intelligent Person)”도 우두를 접종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라고 적었다. 따라서 물질의 공급이 중요한데, “단지 인구가 많은 도시에서만 신선한 백신 물질(fresh vaccine Matter)이 중단 없이 공급될 수 있고, 상당한 양의 백신 생산이 가능하다”고 설명했다.30) 그는 “나의 계획은 정부에 좋은 백신을 공급하는 것을 그 주요 목적으로 하지만, 공동체에게 더 많은 이익을 제공하기 위해 모든 시민과 콜럼비아 지구에 일시적으로 거주하는 사람들의 요청도 포괄하고자 한다”는 의지를 밝혔다.31) 그리고 자신의 백신기관이 위치한 볼티모어시가 워싱턴과 충분히 근접해 백신 공급처로서 매우 좋은 입지 조건을 갖추고 있음을 피력했다. 더 나아가 백신 운송을 위해 연방의 우편 시스템을 활용할 수 있도록 해 줄 것을 제안했다.32)
이어서 스미스는 백신기구의 성격과 구체적인 서비스 내용, 그리고 희망 지원금에 대한 자신의 계획을 설명했다. 첫째, 그는 백신의 공급 대상이 미국 군대에서 복무하고 있는 모든 외과의 또는 외과의 보조(Surgeon or Surgeon Mate)와 콜럼비아 지구에 한정되지만 현재 볼티모어에서 자신이 운영하고 있는 백신기관을 중심으로 공공서비스를 제공할 것이고 향후 이 기관이 미국정부의 후원과 지휘 하에 운영될 것이라고 설명하며, 국가백신기구 설립을 제안했다. 둘째, 스미스는 볼티모어 백신기관으로부터 “진짜 백신 물질(genuine Vaccine Matter)”을 공급하고 백신 접종이 안전하게 수행될 수 있도록 요청이 있을 경우 접종안내서를 첨부할 것을 약속했다.33) 이 시기는 우두 백신의 효능에 대한 논쟁이 존재했던 때이다. 지속적인 접종을 통해 신선한 우두 백신의 공급을 유지하는데 어려움이 있었던 것과 더불어 많은 의사들이 우두에 대한 경험이 적었고, 우두 접종 후 정상적인 반응과 비정상적인 반응을 정확하게 구분하고 ‘진짜’ 우두 물질을 확보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종종 오염 또는 오인된 우두 백신 접종으로 접종 대상자가 백신의 효과를 보지 못하거나 두창에 걸리거나, 또는 정체를 알기 어려운 다른 질병과 후유증으로 고통 받게 되는 경우가 있었다. 따라서 스미스는 백신의 진위를 확신할 수 있는 공급책 마련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 본 편지에서 재차 강조하듯이 그는 우두는 접종 과정이 단순해서 안내문만 제공 된다면 그 어떤 지식인도 의료인의 관여 없이 시행할 수 있는 간단한 의료기술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스미스는 지속적이고 안전한 백신 공급을 위해 대표 공급자를 지정한다면, 의학적 문제없이 백신의 빠른 확산이 가능할 것이라고 믿었다(Green, 2014: 326-328).34)그러나 스미스의 우두기술에 대한 위와 같은 이해는 후일 의료인들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일부는 우두 백신 접종을 의료인의 주의를 요하는 보다 어려운 기술로 인식해 안전 문제를 염려했고, 이러한 과정에서 잘못된 접종 케이스가 축적되어 우두 자체의 효능에 대한 신뢰가 떨어질 수 있는 가능성, 그리고 의료인의 경제적 이권에 대한 고려 등이 우두접종 주체의 대중화에 대한 비판의 원인을 제공했다(Green, 2014: 332-333).
마지막으로, 스미스는 14년의 계약 기간을 제안하면서 자신이 정부에 청구하는 비용이 연간 가옥 대여와 인쇄, 문구 구매를 포함해 $4,000 이하일 것이라고 설명했다. 1802년 영국의 왕은 제너에게 우두백신의 공급과 확산을 위해 하사금을 내렸는데, 그 금액이 £10,000였다. 2017년을 기준으로 $4,000는 $77,815.87이고, £10,000는 $599,709.828이다. 영국 왕실의 하사금과 비교했을 때 스미스가 요청한 금액은 매우 적었으나, 이때 신청한 금액이 스미스가 연방과 주정부에 제안했던 금액의 최대치였다. 스미스는 매디슨 대통령에게 메릴랜드 주의회에 자신이 유사한 청원서를 제출했다고 설명하고, 매디슨 대통령에게 메릴랜드 청원서를 동봉했다. 스미스는 검토 후 민주-공화당원(Democratic-Republican)으로 당시 메릴랜드 상원의원이었던 알렉산더 맥킴(Alexander McKim, 1748-1832)) 편에 이 청원서를 자신에게 돌려줄 것을 요청했다.35)
1811년 스미스는 연방의회에 청원서를 제출한 것으로 전해지는데 그 내용은 1809년 그가 매디슨 대통령에게 보낸 위의 계획에 기초해 백신 공급 지역을 콜럼비아 지구를 넘어 전국토로 확대한 것으로 보인다. 스미스는 이 청원에 대한 답변을 긴 시간 동안 듣지 못했는데, 19세기 두 번째 10년에 들어서기 전 미국은 무역 분쟁, 선원징발, 영토팽창, 인디언 문제 등으로 영국과의 관계가 악화일로로 치닫고 있었기 때문이다. 급기야 1812년 6월 18일 매디슨 대통령의 선전포고를 시작으로 1815년 2월까지 미국은 영국과의 전쟁에 돌입했다. 국가적 위기 상황으로 스미스의 청원서에 대한 논의는 지연되었고, 1813년 초가 되어서야 의회에서 다시 청원 내용을 논의할 수 있게 되었다. 1812년 전쟁 동안 미국 군대는 두창 유행으로 고통 받았고, 두창 유행의 통제를 위해 연방정부가 제임스 스미스의 청원서를 긍정적으로 고려하게 되었을 가능성은 매우 크다(Rusnock, 2018: 716). 1813년 2월 26일 제임스 스미스는 매디슨에게 짧은 편지를 보냈는데, 연방의회의 하원과 상원이 자신의 안을 통과시키려고 하고 있다고 언급하면서, 자신은 모든 준비를 마치고 백신기구를 가동할 수 있길 기다리고 있다고 전했다. 양원에서의 통과를 거의 확신하면서, 스미스는 매디슨 대통령의 임명을 받기 위해 다시 한번 자신의 백신기구가 전쟁 상황에서 어떻게 국가에 기여할 수 있을지를 피력했다.
유명한 현역 장교에게서 육군의 많은 군인들이 현재 두창에 취약하다고 들었습니다. 두창으로부터 안전하지 않은 모든 사람들에게 백신을 접종하기 위해 지난 전쟁부 장관이 명령을 내렸다 들었습니다. 그 명령은 많은 곳에서 제대로 실행되었지만, 어떤 곳에서는 진짜 [백신] 물질을 구할 수 없었고 장관의 지시가 잘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만일 저의 견해가 승인된다면, 저는 현재 임무를 수행중인 몇몇의 군의관들에게 진짜 백신물질을 공급하는 것에 대한 허가를 요청하고자 합니다. 그래서,..그들이 두창 감염에 노출될 경우 그들이 처할 수 있는 위험으로부터 즉시 그들이 돌보는 부대의 안전을 확보할 수 있을 겁니다...6)
다음 날 2월 27일, 12대 의회는 1813년 2월 27일 “백신 접종을 독려하기 위한 법(An Act to Encourage Vaccination)”을 통과시켜 대통령이 백신 물질을 보존하고 우편시스템을 이용해 미국의 모든 시민에게 백신을 공급할 대표를 임명할 것을 허가했다.37) 스미스는 국가백신기구의 대표 공급자로 임명되었고, “진짜 백신 물질(genuine vaccine matter)”을 보존하고 미국 시민에게 공급할 의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그러나 전쟁 중인 상황을 고려해 스미스도 보조금을 강력하게 주장하지 않았지만38) 연방정부 역시 스미스에게 직접적인 재정 지원은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2개의 조항으로 이루어진 1813년 법은 대신 스미스에게 연방의 “무료 우편 서비스(the privilege of franking any letter or package)”를 이용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39)
지금까지 로히트 싱글라(Rohit K. Singla)를 제외한 국가백신기구를 연구한 연구자들은 연방이 허가한 “무료 우편 서비스”를 매우 ‘소박한’ 지원으로 과소평가했다. 그러나 싱글라에 의하면 19세기 초 연방 우편 요금은 거리에 따라 $0.24에서 $1(2021년 기준으로 $4.32~$17.29)였고, 이는 “상당한 보조금(a significant subsidy)”이었다고 한다(Singla, 1998: 52). 19세기 미국의 우편 시스템을 연구한 데이비드 헨킨(David M. Henkin)의 분석에 의하면 1816년에서 1845년 사이에 한 장의 편지를 400마일 떨어진 곳으로 배달시킬 경우 $0.25 정도 비용이 들었는데 이는 비농업 노동자(nonfarm laborer)의 하루 임금의 1/4~1/3에 해당되는 액수였다. 헨킨은 이렇게 가격이 비싼 이유가 교통 미발달 등의 기술적 측면 보다는 체신부 재정의 원천이 우편 요금에 집중되어 있는 구조적 문제에서 기인한 것으로 평가했다(Henkin, 2006).
그러나 금액을 차치하더라도 무료우편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는 권한은 상당한 특혜였다. 미국의 우편 시스템이 1775년 제2차 대륙회의 때 만들어진 이래로 1845년과 1851년에 우편법 개정을 통해 가격에 혁명적인 변화가 일어나기 전까지 편지는 미국에서 “대중적 교환과 사교의 네트워크(a network of popular exchange and sociability)”로 이용되지 못 했었다 (Henkin, 2006). 연방 우편 제도는 주로 신문 배달과 국가에 관련된 정보를 전달하는 역할을 했고, 무료 우편 서비스는 우체국장(postmaster) 또는 연방의회의 의원들에게만 주어지는 특별한 권리였다(Henkin, 2006). 더구나 19세기 초 미국은 유럽에 비해 광대한 국토에 인구가 매우 산발적으로 거주하고 있는 국가였다. 1810년을 기준으로 미국의 전체 인구는 대략 7,264,000 정도였는데, 이 중 다만 2.5%만이 인구 2만 5천 이상의 도시에 거주했고, 나머지는 중소 도시와 시골에 거주했었다(Singla, 1998: 47). 따라서 연방 우편 제도는 넓은 지역에 분포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백신을 가장 효율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1813년 백신법은 전체 내용의 거의 반 정도를 할애해 백신에 관련된 우편 서비스의 이용에 대해 매우 상세하게 규정했다. 백신 물질 또는 백신과 관련된 모든 편지와 소포는 1/2온스 이하로 제작되어야 하고, 백신기구의 대표는 친필로 우편물의 겉면에 “백신접종(Vaccination)”이라는 단어를 적고, 자신의 이름을 서명해야 했다. 또한 대표는 치안판사(magistrate) 앞에서 “나는 신념을 가지고 진짜 백신 물질을 보존하는데 최선을 다할 것과 미국의 시민에게 동일한 것을 제공할 것 그리고 미국 우편 시설에서 금하는 모든 것을 자제할 것”을 맹세(oath or affirmation) 해야 했다. 백신과 관련 없는 것을 우송하는 등 무료우편서비스를 유용할 경우 $50(2021년 가치로 $864.34)의 벌금과 보상금을 지불해야 했다.40)
연방의회의 청원서를 준비하는 기간 동안 스미스는 펜실베이니아와 버지니아 주의회에도 백신기관과 관련된 청원을 넣었다. 펜실베이니아의 경우 두 차례 청원서를 제출했는데, 1년에 $1,000의 금액을 지원할 것을 요청했다. 타주 사람인 스미스가 아니라 펜실베이니아 지역 사람을 공급자로 지정해야 한다는 논란에도 불구하고 하원에서 법안이 통과 되었지만, 상원에서 12대 14로 2표 차이로 안타깝게도 펜실베이니아 주 백신기관 설립은 좌절되었다(Bell, 1940: 504-505; Singla, 1998: 36-37).41) 버지니아 의회의 경우 연방의회가 1813년 백신법을 만들고 1년이 지난 1814년 2월 4일에 스미스의 백신기관의 설립을 승인하는 법을 통과시켰고, 스미스를 버지니아 주 대표 백신 공급자로 임명했다. 버지니아는 1년에 $600를 스미스에게 지불하도록 되어 있었는데, 매년 계약을 갱신할 것을 요구했다. 스미스는 1818년까지 버지니아와의 계약을 유지했지만 결국 버지니아 주가 약속했던 $2,400 달러 상당의 대금 중 $1200.95 정도 밖에는 수령하지 못했다.42)
IV. 1816~1822, 국가백신기구의 상설화를 향해...
1815년 2월 영국과의 전쟁은 마무리 되었지만, 전후 미국의 경제는 쉽게 회복되지 못했다. 1816년 메릴랜드 주는 백신기관의 계약 기간이 종료되자, 백신기관 연장을 거부했고, 백신기관을 위한 공공건물에 투자하거나 백신기관을 영구적인 시설로 만들려는 그 어떠한 노력도 하지 않았다.43) 유일하게 백신 기관을 지원하던 버지니아 주는 6개월에 한 번 리치몬드에 와서 직접 대금을 수령하게 했기 때문에 스미스는 여러 번 그 기회를 놓쳤다 (Bell, 1940: 505; Singla, 1998: 42).
1816년 제임스 스미스는 미국의 국민에게 백신 접종을 확대하기에는 1813년의 법이 부족하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백신 기구를 영구적인 기관으로 만들기 위해 더욱 정교한 국가백신기구 계획을 고안했다.44) 1816년 기획안에서 스미스는 미국이 영국과 유럽의 국가들에 비해 백신에 관련된 분야에서 얼마나 뒤떨어져 있는지를 강조했다. 그는 영국의 의회뿐만 아니라 “유럽의 가장 위대하고 강한 지배자들(the greatest Potentates of Europe)”과 “문명화된 현명한 정부”는 모두 백신을 후원해왔다고 주장했다.45) 그는 “우리는 자신의 시민들이 제물로 희생되는 것을 태연하게 지켜보거나 주민들이 우리가 충분히 없애거나 파괴할 수 있는 ‘자연의 적,’ 감염의 독에 의해 수없이 낭비되는 것을 지켜보는 유일한 국가가 되려 하는가?”라고 반문했다.46) 더 나아가 뉴욕을 예로 들어 한 지역에서 발생한 두창이 다른 지역으로 어떻게 확산되는지 설명했다.47) 또한 아직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두창이 유행할 때까지 백신 접종을 고려하지 않고 미루고 있으며, 두창에 감염될 수 있는 사람의 수가 너무 많아 큰 도시들의 경우 두창이 삽시간에 번지게 되어 두창을 통제하기 위해 백신 접종을 실시하기에는 너무 늦게 되는 안타까운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고 보고했다. 더 나아가 스미스는 이럴 경우 빈민들과 그들의 자녀들이 가장 큰 희생을 치르게 된다고 설명하며, 백신 공급과 접종에서 많은 문제들이 지속되고 있는 현재 미국의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정부의 관심과 개입이 꼭 필요하다고 역설했다.48)
제임스 스미스는 특히 우두 백신 접종의 확대를 위해 다음의 세 가지 문제점을 개선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첫째, 가짜(spurious) 우두의 접종으로 사고가 많고 우두 백신에 대한 편견이 형성된다. 둘째, 부주의한 우두접종자로 인해 우두 접종 후에도 여전히 두창에 취약한 환자들이 있다. 셋째, 우두의 필요성에 대한 일반적인 무지로 인해 두창의 유행이 없는 한 전반적인 접종률이 매우 낮다.49) 위와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스미스는 우두의 박멸을 위해 접종에 있어서 필요한 형식을 강제하는 동시에 자신이 고안한 백신 접종을 더 보편적(universally)이고 체계적(systematically)으로 운영할 수 있도록 보안한 새로운 프로그램을 소개했다.50)
스미스의 1816년 국가백신기구 운영 방안은 이전 계획과는 확연하게 다른 매우 중앙화된 관리 방식을 추구했다. 우선, 백신기구가 진짜 백신을 보관하고 공급하고 필요할 경우에는 접종 안내서를 함께 미국의 모든 시민에게 무료로 우편서비스를 통해 우송한다는 점은 동일하다.51) 그러나 스미스는 앞서 언급한 문제점들을 해결하기 위해 백신 접종을 하는 의료인에게 기존에 존재하지 않았던 기록 보관의 의무를 강제했다. 2장에서 소개한 바와 같이 스미스는 볼티모어 시의 대표 우두 공급자로 활동할 때도 우두 백신 접종 환자를 위한 일지를 기록했었는데, 1816년에 와서는 미국에서 우두 접종을 시행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기록부(register)나 일지(diary)를 쓰는 것을 의무화시키길 원했다. 이러한 일지에는 백신을 접종받은 사람의 이름, 나이, 거주지, 접종의 성공이나 실패 여부를 판단할 수 있는 내용을 기록해야 했다. 이뿐만 아니라 스미스는 모든 백신 접종자가 상기 기록 중 성공한 케이스에 대해 매년 정해진 날짜에 소액의 비용(빈민 무료 접종, 육군 및 해군 소속은 제외)과 함께 대표 백신 접종자(the Agent of Vaccination)에게 제출하게 하고, 누락 사항이 있을 경우에는 벌금이 부과되는 운영 방안을 제안했다.52) 대표 백신 접종자는 이 기록을 바탕으로 매년 주별, 그리고 카운티별 백신 접종자의 수를 계산하고, 해당 기록 보관소에 보관해 누구나 열람할 수 있도록 해야 했다. 또한 대표 백신 접종자는 상하원 대표에게 접종자 수에 대해 연차 보고를 해야 했고, 스미스가 제안한 시스템 하에서 이 기록은 정부에서 보관하도록 되어 있었다.53)
스미스에 의하면 접종자, 대표 백신 접종자, 정부를 연결하는 우두 백신 접종 완료자에 대한 기록 작성과 보관을 통해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이점을 기대할 수 있었다. 첫째, 환자는 자신이 두창 감염으로부터 안전한지 더 명확한 정보를 알 수 있는 이점이 있었다. 이 시스템 하에서는 우두 백신 접종 경력에 대해 알기 원하는 사람은 해당 지역의 기록 보관소를 방문해 언제, 어디서, 누구에 의해 접종을 받았는지 자신의 기록을 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 접종 이력에 대해서 부모로부터 어떠한 정보도 듣지 못한 아동기 접종자의 경우 기록 작성과 보관을 통해 환자가 불필요한 접종을 반복할 필요가 없을 것으로 스미스는 전망했다.54) 이 부분에서 스미스는 의학적 부분에서는 틀리고 행정적 부분에서는 옳았다. 결론부터 언급하자면 평생 면역이 가능한 인두 접종과는 달리 우두 백신은 그 효과가 한시적이었고, 아동기 접종자에게 재접종의 필요성을 배제했던 스미스의 판단은 의학적으로 오류가 있었다. 스미스가 활동했던 시기는 우두 백신의 효능이 얼마나 지속되는지에 대한 의학적 논쟁이 아직 완전한 결론에 다다르지 못한 시대였는데, 스미스는 우두 백신을 통해 평생면역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이에 근거해 백신 접종 시스템을 구상했던 것으로 보인다. 재접종의 필요성에 대해 인식하지 못한 책임이 스미스에게 있지만, 이 부분에서 스미스가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불필요한 반복 접종을 통해 환자가 감수해야 하는 불편함과 고통을 기록 작성과 보관을 통해 감소할 수 있고, 이를 통해 백신 접종에 대한 환자의 부담과 거부감을 경감시킬 수 있다는 부분이다. 이는 당시 백신 접종 시스템의 문제점을 환자의 입장에서 진단하고 개선해 보려는 스미스의 노력과 임상에서 직접 백신 접종을 오랜 시간 경험하면서 알게 된 현실 문제에 대한 그의 이해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둘째, 기록의 보관과 제출의 의무를 접종자에게 부과하는 것을 통해 경제적 이익만을 추구하고 접종 결과에 대해 책임을 회피하는 접종자를 단속하고 그들이 자신의 의료 행위의 궁극적인 결과에 대해 더 책임을 질 수 있도록 할 수 있을 것으로 스미스는 전망했다.55) 마지막으로 스미스는 인구학적인 층위에서 위의 기록이 두창 통제에 유용하다고 설명했다. 그에 의하면 일정 지역의 인구의 자연 증가와 접종자 수를 비교해 국가의 어느 지역이 두창 유행에 취약한지 알 수 있으며, 피해의 규모를 예측하고 더욱 신속한 대처를 할 수 있는 이점이 있었다.56) 스미스는 1816년 계획을 통해 우두의 생산과 보관뿐만 아니라 접종 과정을 규율화하고 통제하기를 원했다. 이를 통해 그는 백신 접종 과정 전반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얻고, 이렇게 축적된 인구학적 데이터를 국가적 차원의 두창 통제에 이용하려고 했던 것이다. 실제로 스미스는 두창 감염의 확산 경로를 역학적으로 계산해 두창이 아직 유행하지 않은 지역에 백신을 미리 우송하는 등 선제적인 대응을 하기도 했다.
1816년도 1월에 작성된 위의 새로운 계획이 어느 정도까지 반영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같은 해 말 12월 9일에 뉴저지의 하원의원 루이스 컨딕트(Lewis Condict, 1772-1862)가 제임스 스미스의 새로운 청원서를 의회에 제출했다.57) 컨딕트는 뉴저지 출생으로 1794년 펜실베이니아 대학의 의학부를 졸업한 민주-공화당원이었고, 1816년에서 1819년까지 뉴저지 주 의사협회의 회장을 역임했다.58) 그는 1816년 4월에 육군과 해군에서 백신 접종을 의무화하는 법안을 발의하기도 했는데, 국가백신기구의 필요성을 의회에서 역설하고 연방재원을 조달해 주기 위해 노력했던 인물이었다(Singla, 1998: 38).59) 1816년 하원기록은 개정 법안이 국가백신기구가 매해 육군과 해군, 우체국에 백신과 백신 접종 안내서를 제공하고 연방정부는 대표 백신 접종자에게 급여를 제공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고 간략하게 요약하고 있다. 국가백신기구 운영을 위해 가장 높은 금액을 제시한 사람은 청원서를 소개한 컨딕트로 그는 매해 $2,000의 지원을 제안했다. 펜실베이니아의 대표 존 한(John Hann)은 $1,500, 같은 주의 대표 로스(Ross)는 $1000를 제시했는데, 뉴욕, 사우스캐롤라이나, 뉴저지 대표 등 대다수가 $1,500 안을 지지해 이 안이 채택되어 표결을 기다리게 되었다.60)
국가백신기구에 직접 재정 지원을 할 것을 포함하는 개정안은 1817년도 1월에 본격적인 논의에 들어갔다. 우선 군이 외부로부터 백신 공급을 받을 필요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다. 추가비용 지출 보다는 현재 군의 의료 인력을 이용해 자체 조달을 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비판이 나왔다. 이 외에도 과연 연방의회가 백신 문제에 공적 자금을 이용할 권리가 있는가, 백신 관련 문제는 주 차원에서 더 적합하게 운영 가능하다는 의문제기와 함께 개정안의 합헌성에 대한 논의가 제기되었다. 더불어 ‘미국의 제너’로 알려진 벤자민 워터하우스의 예를 들어 스미스의 주장과는 달리 두창 백신 접종 과정은 의료전문가의 진단과 케어가 필수적인 의료 행위로서 접종 과정을 비의료인에게도 개방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스미스의 견해에 대한 반대 의견이 제기되기도 했다. 결국 1817년 1월 연방의 직접적인 지원을 약속한 법안은 결국 57 대 88로 통과되지 못했다.61)
1817년 연방지원금을 받는 계획이 좌초되었으나 제임스 스미스는 영구적인 백신 기구를 건립하는 꿈을 접지 않았다. 1818년 2월 스미스는 미국 국민에게 재정 지원을 요청하기로 했다. 26일 스미스는 “미국 국민에게 보내는 연설”을 통해 국민의 자선 기부로 재정을 모금하고 워싱턴 시에 “영구적인 국가백신기구(a permanent national Vaccine Institution)를 세우기 위한 프로포잘을 공표했다. 이 기획안에서 그는 미국 국민은 누구나 $10를 내고 국가백신기구에 참여할 수 있고 가입자에게는 1823년 1월 1일까지 무료로 백신이 공급된다고 밝혔다. 가입자가 500명 이하일 경우 환불 조치가 이루어지지만, 1818년에 가입하는 사람은 종신회원으로 백신을 무료로 제공 받을 수 있었다. 스미스는 모금액으로 워싱턴에 토지와 건물을 매입하고 나머지는 국채에 투자해 국가백신기구의 운영기금으로 이용할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이 기관의 대표는 대통령에 의해 임명되고, 1813년 법에 따른 백신에 관련된 임무를 수행하지만 가입자들은 자신들을 대표하는 이사회를 조직할 수 있었다.62) 제임스 스미스는 1818년 3월 28일 매디슨 대통령과 미국에서의 백신 보급을 지지했던 토마스 제퍼슨 전직 대통령에게 서한을 보내 상설 국가백신기구 설립을 지지를 해줄 것을 부탁했다.63) 1820년 11월 국가백신기구 법인화 신청건은 51대 44로 하원을 통과했다.64)
그러나 1821년 노스캐롤라이나 타보로에서 제임스 스미스의 백신 기구로부터 우송된 백신을 접종한 후 타운에 두창이 유행하는 사건이 생겼다. 10여 명의 주민들이 두창으로 사망하고 백신 기구는 큰 타격을 받게 되었다. 스미스는 자신이 백신 물질이 아닌 두창 환자의 딱지를 사고로 타보로에 보낸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봉투의 겉면에 백신이 아닌 두창을 의미하는 ‘바리올라(variola)’라고 적혀 있었는데, 이 우편물을 받은 의사가 표기를 무시하고 접종을 진행해 마을에 두창이 번진 것이라고 경위를 밝혔다.65) 그러나 타보로 사건은 의회에서 1813년 법안의 폐지를 논의하는 계기가 되었다.
1822년 1월 노스캐롤라이나의 대표 허친스 C. 버톤(Hutchins G. Burton, 1774~1832)은 1813년 법의 폐해와 제임스 스미스의 운영상의 문제, 국가백신기구의 위헌 가능성 등을 들어 강력하게 법의 폐지를 주장했다. 그러나 스미스의 노고와 1813년도 법의 유용성을 옹호하는 사람들과 9년을 계속해오던 법을 급히 폐기하는 것에 대한 신중론을 펼치는 의원들도 많았다. 타보로 조사위원회도 결성되었는데, 1차 위원회가 스미스가 책임이 없음을 결정하자 버톤은 자신이 직접 2차 위원회의 조사에 참여했다. 1822년 4월 까지만해도 유예를 원하는 사람이 102표 반대가 57표로 법안의 폐지를 미뤘으나, 5월 4일 미국 최초의 국가백신기구를 설립한 1813년 법은 결국 폐지되었다.66)

V. 미완의 꿈을 다시 바라보며...

우두 백신에 대한 논란이 존재한 19세기 초 초기 백신 시대 동안에는 두창의 유행이 없는 상황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질병의 위험이 매우 근접할 때까지 백신 접종을 미루는 경우가 많았다. 이로 인해 의사 개인이 우두를 지속적으로 생산하거나 질병 유행 시기와 유행하지 않는 시기 동안 우두 백신에 대한 수요와 공급의 균형을 맞추는 것은 쉽지가 않았다. 현장에서 오랜 시간 우두를 접종했던 메릴랜드의 의사 제임스 스미스는 자신이 살아가는 시대의 위와 같은 문제점에 대해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스미스는 공적 지원을 받는 기관의 설립과 운영을 통해 의사 개인이 해결하기 어려운 백신의 생산과 공급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그는 또한 지역사회에 제한된 두창에 대한 통제를 넘어 백신의 광대한 보급을 통해 궁극적으로 미국의 영토에서 두창을 박멸하는 것을 꿈꿨다. 스미스는 이러한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시, 주, 더 나아가 연방 정부 차원의 백신에 대한 관리와 보조가 필수적임을 인지했다. 그는 국가백신기구를 운영하면서 서부주와 미국 영토(territories)를 포함한 전국에 백신을 우송했고, 더 나아가 미국 지방의 곳곳에 백신을 보급하기 위해 요원(deputy)을 파견해 100,000명의 사람들에게 백신을 접종했다(Bell,1940: 506).67) 또한 두창의 확산을 역학적으로 추적하고 선제적 백신 접종을 실시하는 것과 함께 백신 접종 인구에 대한 데이터를 이용해 국가적 차원의 안전한 백신 접종 시스템을 수립하는 것을 꿈꾸기도 했다.
하지만 스미스에 의해 시작된 국가백신기구의 역사는 결국 폐지라는 결론으로 종결되었다. 역사가들은 1822년의 반연방주의적 정서, 국가우편제도와 같은 ‘특혜’에 대항하는 잭슨 민주주의 시대를 예고하는 대중정서의 유행, 비의료인에게도 우두를 제공하고 접종할 수 있게 했던 스미스의 접종 확대 방안에 대한 의료인 엘리트 집단의 반발, 그리고 노스캐롤리아나 타보로 사건과 같은 불행한 사건으로 인한 우연한 불운 등이 1813년 백신법과 국가백신기구의 폐지에 기여했다고 지적해 왔다. 그러나 국가백신기구가 연방기관이라는 사실 또는 무료우편제도와 같은 연방의 지원을 받았다는 점은 국가백신기구를 중심으로 한 스미스의 백신 및 백신 접종 관리 시스템의 일부분만을 설명해 줄 뿐이다.
오히려 스미스가 설립하고자 했던 것은 백신의 공급과 보관을 담당하는 국가 기관을 넘어서는 백신접종을 매개로하는 거대한 두창 관리 시스템이었다. 점진적으로 수정되고 확장된 스미스의 백신기구 기획안들에는 19세기 초 우두 백신이라는 의료기술이 제도화되는 과정에서 극복해야 했던 의료현장 및 의료행정의 문제, 그리고 19세기 미국인들의 이 기술에 대한 기대와 두려움에 대한 문제의식과 스미스 나름의 해결 방안이 담겨 있었다. 많은 현장 경험과 오랜 접종 경험을 가지고 있었던 스미스는 백신을 이용해 두창에 대해 선제적 대응을 하는데 대중과 의료인, 그리고 정부의 참여가 체계적으로 연결되어야 함을 인식하고 있었고, 국가백신기구를 중심으로 이들 각각의 역할이 효율적으로 연결되고 체계화되는 국가 두창 관리 시스템을 구상했었다.
이 시스템에는 우두 백신의 공급과 보관뿐만 아니라 백신 접종 관리, 면역 인구에 대한 기록 관리, 그리고 역학적 질병 통제가 함께 구상되어 있었다. 백신 접종의 확대를 위해 일부 비의료인이 우두 백신 접종을 하는 것을 권장해 엘리트 의료인 집단과 충돌과 마찰을 일으킨 것도 사실이지만 다른 한편 스미스는 또한 백신을 접종하는 사람이 백신 접종 기록을 제출하도록 하는 방법을 통해 백신 접종 과정에서 접종 주체에 의한 비윤리적인 행위가 발생하는 것을 방지하려고 하기도 했다. 더불어 타보로 사건의 충격과 스미스의 미온적 대응이 국가백신기구에 대한 반대에 힘을 실어준 것도 사실이지만 9년의 기간을 지속해 온 기관의 폐지가 1822년이라는 시점에서 결정된 부분에 대해서는 다른 요인에 대한 분석이 함께 이루어지는 것이 더 타당하다고 보인다.
지금까지 1822년의 백신법 폐지의 원인에 대해 역사가들이 다양한 분석을 해왔음에도 스미스의 기획 그 자체에 대해서는 진지한 평가가 이루어지지 못 했었다. 국가백신기구의 마지막 운명에 초점이 맞추어진 연구에서 ‘좌절’과 ‘미완’이라는 렌즈를 통해 역추적된 스미스의 국가백신기구에 대한 설명은 스미스가 국가백신기구를 통해 완성 시키고자 했던 그 꿈의 내용과 규모, 백신을 중심으로 한 질병통제 시스템이라는 전체적 모습을 보기 어렵게 했다. 그러나 1822년 미국의 정치인, 사회, 의료계가 왜 국가백신기구에 반대했는지, 1822년 미국 백신의 역사에서 미국 사회가 놓치거나 선택한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좀 더 명확하게 평가하기 위해서라도 국가백신기구의 이야기는 또 다른 ‘미국의 제너’의 국가백신기구 시스템에 대한 깊이 있는 새로운 이해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1822년 백신법의 폐지로 인해 사라진 것은 국가백신기구 만이 아니었으며, 국가적 차원에서 시민과 의료인, 그리고 정부를 연결하는 두창 통제 시스템의 청사진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획은 이후 19세기 미국의 역사에서 다시 거론된 바가 없으며, 1902년 생물학제제관리법(the Biologics Control Act)을 통해 연방이 백신과 항독소 안전성 관리에 개입하기까지 매우 오랜 시간 동안 연방 차원의 백신 관리는 논의되지 못 했다.

Notes

1) “Something Curious in the Medical Line,” Columbian Centinel, March 16, 1799, 1.

2) 영국인 의사로 인두법(smallpox inoculation)의 보급에 힘썼고, 1793년에는 Sketch of A Plan to Exterminate the Casual Small Pox from Great Britain and to Introduce General Inoculation (London: J. Johnson, 1793)에서 인두법의 확산을 통해 두창을 박멸하는 방안을 구체화했다.

3) Newburyport Herald, July 22, 1800, 3; Political Repository, July 22, 1800, 3.

4) 벤자민 워터하우스의 저작 Benjamin Waterhouse, A Prospect of Exterminating the Small-pox (Cambridge: printed for the author at the Cambridge press, 1800) 참고.

5) 매사추세츠, 코네티컷, 메인, 뉴햄프셔, 로드아일랜드, 버몬트 등을 포괄하는 미국북동부 지역.

6) From Thomas Jefferson to Rev. Dr. G. C. Jenner, May 14, 1806. The History of Vaccines: An Educational Resources by the College of Physicians of Philadelphia, accessed 1 October 2021, https://www.historyofvaccines.org/content/us-presidentstands-vaccination.

7) 19세기 동안 벤자민 워터하우스에 대한 인식의 변화에 대해서는 보스턴의 공중보건 시스템 발달에 대한 연구로 유명한 존 블레이크의 다음 문헌을 참고. John B. Blake, Benjamin Waterhouse and the Introduction of Vaccination (Philadelphia: University of Pennsylvania Press, 1957), pp.11-12. 이 글에서 블레이크는 워터하우스의 독점 의도를 밝히고 있다. 더불어 이 시기 우두 백신을 도입한 사람이 워터하우스 한 명이 아니었음을 분명히 하면서 그가 “진지하게(studiously)” 다른 의사들의 공헌과 성취를 무시했고, 우두 백신과 관련된 명예를 독차지 하려고 했다는 평가를 내렸다. 매사추세츠 지역 의학사를 주로 다루며, 워터하우스의 전기 작가인 필립 캐쉬(Philip Cash) 또한 두창 백신 도입 당시 백신뿐만 아니라 두창 및 인두 접종에 대한 지식이 전무했던 초심자였던 워터하우스가 관련 질병과 기술에 대해 오랜 경험과 지식을 가진 지역 의사들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과 지역 의사 협회와의 불화에 대해 자세하게 다뤄 ‘미국의 제너’라는 대중적 신화에 대해 균형 있는 평가를 제공하려 했다. Philip Cash, Dr. Benjamin Waterhouse: A Life in Medicine and Public Service (1754-1846) (Boston: Boston Medical library, 2006).

8) 당시 펜실베이니아 의학부는 미국에서 몇 안 되는 의과대학 중 가장 역사가 오래된 곳으로 초기 공화국 역사에서 의학 발전을 선도하고 있었다. 18세기에 설립된 미국의 의과대학명과 설립연도는 다음과 같다. School of Medicine at the University of Pennsylvania (1765), College of Physicians and Surgeons at Columbia University (1767), Harvard Medical School (1782), School of Medicine at Dartmouth College (1797).

9) 화이트필드 벨 주니어(Whitefield J. Bell Jr)에 의하면 스미스의 이름은 펜실베이니아 대학 의학부 졸업자 명단(the Catalogue of the Medical Graduates of the University of Pennsylvania)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화이트필드 벨 주니어와 헬렌 C. 브룩 모두 20세기 초 제작된 미국인 의사 인명기록에 기반 해 제임스 스미스가 펜실베이니아 대학 의학부에서 강의를 들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18세기 말 의학 강의는 교외에 개방되어 있었고, 티켓 구매를 통해 수강이 가능했다. 따라서 브룩은 스미스가 도제식 교육을 받으며 필요한 강의를 대학에서 개인적으로 수강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벨과 브룩이 이용한 의사인명 기록은 다음과 같다. Eugene F. Cordell, The Medical Annals of Maryland, 1799-1899 (Baltimore, 1902), 669, 172-674; Howard A. Kelly, ed., A Cyclopaedia of Medical Biography, Comprising the Lives of Eminent Deceased Physicians and Surgeons From 1610 to 1910, Vol.2 (Philadelphia and London, 1912), 385; Howard A. Kelly and Walter L. Burrage, Dictionary of American Medical Biography (New York, 1928), 1127.

10) 스미스가 이용한 백신은 제너와 함께 초기 우두 백신의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윌리엄 우드빌(Dr. William Woodville,1752-1805)이 근무한 영국 런던의 두창 및 인두접종 병원(Smallpox and Inoculation Hospital)인 세인트 팽크라스 병원(St. Pancras Hospital London)에서 확보한 백신이었다. 이 백신은 존 테일러(John Taylor)라는 인물을 통해 볼티모어에 있는 그의 형제 윌리엄 테일러(William Taylor)의 손을 거쳐 그의 주치의(family physician)였던 의사 마일스 리틀존(Dr. Miles Littlejohn)에게 전해졌고, 리틀존이 스미스에게 우두 백신을 전달했다. John R. Quinan, Medical Annals of Baltimore from 1608 to 1880, Including Events, Men and literature, to Which Is Added a Subject Index and Record of Public Service (Baltimore: Press of Isaac Friedenwald, 1884), 23.

11) 화이트필드 벨 주니어에 의하면 볼티모어에서 처음으로 우두 접종을 시도한 사람은 이 지역에 거주하던 아일랜드 출신 의사 존 크로우포드(John Crawford, 1746~1813)였다. 이후 크로우포드는 현재 메릴랜드 대학이 된 학교에 자연사(natural history) 강사로 재직한 바 있다. 그러나 벨 주니어에 앞서 1884년 볼티모어의 의학연대기를 기술한 의사 존 퀴난의 경우 크로우포드가 백신 접종에 성공했지만, 그가 사용한 우두 백신이 보존되지 못했다고 설명하고 있어서 벨 주니어와는 엇갈리는 평가를 하고 있다. 퀴난은 “누구에게 미국에서 백신 접종을 자리 잡게 한 영광이 돌아가야 하는가? 이 주장에 있어 볼티모어와 보스턴이 만만치 않은 경쟁을 하고 있다”라고 언급하며 벤자민 워터하우스와 크로우포드가 “동시에(contemporaneously)” 성공했다고 주장해, 보스턴뿐만 아니라 볼티모어가 미국에서 백신의 역사를 함께 열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벨 주니어와 퀴난 중 누가 옳은지는 판단하기 쉽지 않으나 크로우포드에 대한 언급은 미국 의학사에서 거의 찾아보기 어렵고, 보편적으로 보스턴의 워터하우스가 미국에서 처음 우두 백신 접종을 성공한 인물로 회자되고 있다. “John Crawford,” The Grand Lodge of A. F. & A. M. of Maryland, http://mdmasons.org/past-gm/john-crawford/, accessed 17 November 2021; Quinan, Medical Annals of Baltimore from 1609 to 1880, 156.

12) 레베카 필즈 그린(Rebecca Fields Green), 안드레아 로즈낙(Andrea Rusnock), 그리고 테스 라자로타(Tess Lanzarotta)와 마르코 A. 라모스(Marco A. Ramos) 등의 학자들이 ‘vaccine institute’로 표기하고 있지만 본고에서는 제임스 스미스의 표현을 따라 ‘vaccine institution’으로 표기한다.

13) 로히트 싱글라(Rohit K. Singla)의 표현 “Missed Opportunities: The Vaccine Act of 1813 (1998 Third Year Paper),” Digital Access to Scholarship at Harvard, https://dash.harvard.edu/handle/1/10015266, accessed 15 October 2021.

14) 스미스의 국가백신기구로부터 공급 받은 물질로 인해 1821에서 1822년 사이에 타보로에서 두창이 유행한 사건으로 의회에서 이 사건의 전말에 대한 조사 위원회가 결성되었었다. 특히 로히트 싱글라는 이 사건이 백신법 폐지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분석했고, 타보로 사태가 없었다면 국가백신기구가 유지되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

15) 대표적으로 레베카 필즈 그린의 경우 공화주의적 정치 이데올로기의 유산 속에 잭슨 민주주의 시대의 도래를 앞둔 시기 백신 기구의 중앙화 시스템을 둘러싼 갈등에 초점을 맞추어 백신법 폐지 원인을 논의 했다.

16) 연방주의와 반연방주의, 공화주의와 잭슨 시대 민주주의 등 변화하는 정치문화와 1813년 백신법 폐지에 대한 선행연구와 재해석은 후속 연구에서 다룰 예정이다.

17) “A plan to extend the benefits of the Vaccine Inoculation to the poor, and to all others, placed in life, under the pressure of difficult circumstances”는 H. C. Brook, “A Proposal for a Free Vaccine Clinic in Baltimore in 1802,” Bulletin of the Institute of the History of Medicine 3(1) (January 1935)에 전문이 실려 있음. 해당 페이지는 85-87.

18) Ibid., 85-87.

19) Ibid., 85.

20) Ibid., 86.

21) Ibid., 83.

22) Ibid., 86.

23) Ibid.

24) Ibid., 87-88.

25) From James Smith to James Madison, June 18th, 1809, in The Papers of James Madison Digital Edition, ed. J. C. A. Stagg (Charlottesville: University of Virginia Press, Rotunda, 2010), accessed 18 November 2021. https://rotunda.upress.virginia.edu/founders/JSMN-03-01-02-0281.

26) James Smith, “Proceedings of the Legislature of Maryland,” in Prospectus of A Permanent National Vaccine Institution, Baltimore, 1818, 17; Bell, “Dr. James Smith and the Public Encouragement for Vaccination for Smallpox,” 504.

27) Smith, Prospectus of A Permanent National Vaccine Institution, 17.

28) From James Smith to James Madison, June 18th, 1809.

29) Ibid.

30) Ibid.

31) Ibid.

32) Ibid.

33) Ibid.

34) Ibid.

35) Ibid.

36) From James Smith to James Madison, February 26th, 1813, in The Papers of James Madison Digital Edition, ed. J. C. A. Stagg (Charlottesville: University of Virginia Press, Rotunda, 2010), accessed 18 November 2021. https://rotunda.upress.virginia.edu/founders/JSMN-03-06-02-0068.

37) Richard Peters, Esq.,“An Act to Encourage Vaccination,” in The Public Statues at Large of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from the Organization of the Government in 1789, to March 3, 1845, Vol.II (Boston: Charles C. Little and James Brown, 1845), 806-807; James Smith, “An Act,” in To the Honble. The Senate and House of Representatives of the United States, the Memorial of James Smith, Agent of Vaccination (Georgetown: W.A. Rind and Co, 1816), 15-16.

38) From James Smith to [unnotified person in Washington] 상하의원으로 추정, in (Georgetown: W.A. Rind and Co, 1816), 15(appendix).

39) Ibid., 16.

40) Ibid.

41) “Proceedings of the Legislature of Pennsysvania[typo in the original document],” in Prospectus of a Permanent National Vaccine Institution, 18.

42) “Proceedings of the Legislature of Virginia,” in Ibid., 20.

43) Smith, “Proceedings of the Legislature of Maryland,” in Prospectus of A Permanent National Vaccine Institution, 17.

44) Smith, To the Honble. The Senate and House of Representatives of the United States, 4.

45) Ibid., 5.

46) Ibid.

47) Ibid., 6-7.

48) Ibid., 7-9

49) Ibid., 8-9.

50) Ibid., 9.

51) Ibid., 9-10.

52) Ibid.,10-11.

53) Ibid., 12.

54) Ibid.

55) Ibid., 11.

56) Ibid., 13.

57) “VACCINATION,” Annals of the Congress of the United States, Fourteenth Congress, Second Session, Vol.30, 362, accessed 20 October 2021, https://memory.loc.gov/cgi-bin/ampage?collId=llac&fileName=030/.

58) “Condict, Lewis, 1772-1862,” Biographical Directory of the United States Congress, accessed 1 September 2021, https://bioguide.congress.gov/search/bio/C000668.

59) Annals of the Congress of the United States, Fourteenth Congress, First Session, Vol.29, 1455, accessed 20 October 2021, https://memory.loc.gov/cgi-bin/ampage?collId=llac&fileName=029/llac029.db&recNum=0. 육군은 후일 1818년도에 의무백신접종(compulsory vaccination)을 도입했다. 해군의 경우 1816년에 군의관(surgeon)을 모든 항구에 파견해 해군과 선원에게 백신을 접종하도록 했는데, 이후 1820년에 선상에서는 두창 발생이 드물다고 판단해 육군과 같이 백신 접종을 독려하지는 않았다.

60) Annals of the Congress of the United States, Vol.30. December 16, 361.

61) Ibid., 470.

62) Smith, Prospectus of A Permanent National Vaccine Institution, 5-8.

63) From James Smith to James Madison, March 28th, 1818 and From James Smith to Thomas Jefferson, March 28, 1818 in The Papers of James Madison Digital Edition, ed. J. C. A. Stagg (Charlottesville: University of Virginia Press, Rotunda, 2010), http://rotunda.upress.virginia.edu/founders/JSMN-03-01-02-0281, accessed 18 November 2021

64) Annals of the Congress of the United States, Sixteenth Congress, Second Session, Vol. 33, 462, accessed 20 October 2021, https://memory.loc.gov/cgi-bin/ampage?collId=llac&fileName=033/llac033.db&recNum=0.

65) James Smith & United States. Congress. House, Letter from the Vaccine Agent, to the Speaker of the House of Representatives (Washington: Gales & Seaton, 1822), 109-112.

66) Annals of the Congress of the United States, Seventeenth Congress, First Session, Vol. 38, 851-854, accessed 20 October 2021, https://memory.loc.gov/cgi-bin/ampage?collId=llac&fileName=038/llac038.db&recNum=0; Annals of the Congress of the United States, Seventeenth Congress, First Session, Vol. 39, 1634-1640, accessed 20 October 2021, https://memory.loc.gov/cgi-bin/ampage?collId=llac&fileName=039/llac039.db&recNum=0.

67) 앞서 언급한 바 있는 볼티모어 의학 연대기의 저자 퀴난은 1821년 한 해 동안 볼티모어시에서 백신을 접종 받은 사람의 총수가 1268명이었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Refer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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